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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회고록 ‘고백’ 출간 원로배우 최은희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회고록 ‘고백’ 출간 원로배우 최은희

    문득 ‘여자의 일생’이 떠오른다. 이미자가 불렀다.‘참을 수가 없도록 이 가슴이 아파도, 헤아릴 수 없는 설움 혼자 지닌 채, 고달픈 인생길을 허덕이면서, 아∼ 참아야 한다기에 눈물로 보냅니다 여자의 일생’ 산전수전을 다 겪은 70대 어머니들이 좋아하는 노래다. 그랬다. 슬퍼도 여자이기 때문에 스스로 달래어가며 살아왔다.1950년대 간통죄 1호라는 비난 속에 이혼과 재혼을 거듭하면서 두 아이의 입양과 남편 외도로 낳은 자식 둘을 키웠다. 그리고 목숨을 건 두번의 납북과 탈출, 망명생활…. 정말이지 영화보다 더 영화같은, 소설보다 더 소설같은 삶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불멸의 영화배우라고 한다. 영원한 은막의 스타 최은희씨. # 장면1 1978년 1월 어느날, 최은희가 홍콩 여행 중 바닷가를 구경하려고 항구에 정박 중인 보트에 탔다. 이때였다. 보트의 주인이라는 건장한 남자가 시동을 걸더니 “최선생, 지금 우리는 김일성 장군님의 품으로 갑니다.”고 했다. 몸부림치는 최은희를 밧줄로 묶고 항구밖에 정박 중인 화물선에 강제로 옮겨졌다. 8일 후, 최은희를 실은 배가 남포항에 도착했다. 안경을 낀 한 남자가 마중을 나왔다. 그는 “오시느라 수고했습네다, 내레 김정일입네다.”고 했다. 이어 김정일과 최은희는 리무진에 나란히 동승했다. # 장면2 1983년 3월 어느날. 최은희는 김정일이 베푸는 연회에 초대를 받았다. 이때였다. 회색양복을 입고 머리를 짧게 깎은, 아! 전 남편인 신상옥 감독이었다. 꿈인가 생시인가 망설이는 순간,“포옹 좀 하지, 왜 그러고만 서 있소.” 김정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어 “동무들, 신 선생은 이제부터 내 영화 고문이오. 최 선생은 조선의 어머니요. 이번 4·15 위대한 수령님의 생신을 기해서 두분의 결혼식을 여기서 올립시다.”라고 했다. # 장면3 1986년 3월13일. 베를린 영화제에 참석했던 신상옥·최은희 부부는 오스트리아 빈에서 외신기자들과 기자회견을 앞두고 일본 교도통신의 에노키 기자에게 ‘미국대사관으로 망명을 하려 하니 협조바람´이라는 쪽지를 슬쩍 건넸다. 다음날 이들 부부는 에노키와 함께 호텔에서 택시를 타고 미 대사관으로 향했다.3명의 남자가 탄 또다른 택시가 뒤를 쫓았지만 따돌리고 미국 대사관으로 진입했다. 이때 대사관 직원은 연분홍 장미 한송이를 불쑥 내밀며 “Welcom to the west”라고 했다. 이 밖에도 영화같은 장면은 수없이 많다. 최씨는 ‘고백’이라는 제목으로 최근 자서전을 펴냈다. 화려한 인기여배우로서뿐 아니라 한 여자로서의 치부와 평탄치 않았던 인생길 등을 솔직하게 털어놔 눈길을 끌고 있다.6·25때 헌병대장에게 겁탈당했던 아픔 등을 비롯해 광복과 전쟁, 분단, 군사정권 등 격동의 세월속에 온몸이 던져졌던 생활을 담담하게 고백했다. 파란만장한 현대사를 집약한 한편의 다큐멘터리 그 자체였다.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서강대교 인근의 한 오피스텔에서 최씨를 만났다.“노년이 된다는 것은 많은 굴레로부터 자유를 얻었다는 걸 의미하는지도 모른다.”면서 “여자의 치부까지 드러내기에는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 고해성사하는 마음으로 글을 썼다.”고 자서전 발간소감을 피력했다. 직접 쓴 육필원고냐고 했더니 “글쓰는 전문가에게 일부 도움을 받기는 했지만 대부분 내가 직접 썼다.”고 대답했다. 아울러 “글쓰는 사람들은 겨울에는 따뜻한 온돌에서, 여름에는 시원한 수박을 먹으며 편하게 쓰는 줄 알았는데 직접 써보니까 정말 힘든 작업이었다.”며 웃는다. ●고해성사 하는 마음으로 자서전 집필 “북한에는 9년 동안 있었는데 5년 동안 연금상태에서 혼자 지내다가 신 감독과 재결합하면서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지요. 탈출하기 직전까지 2년 3개월 동안 모두 17편의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북한영화에 출연자와 해설자막을 넣은 것이 우리가 처음이었지요.‘불가사리’나 ‘임꺽정’은 최근에도 TV에 나온다고 전해들었어요.” 최씨는 이어 납북됐을 당시에는 겁이 나고 북한당국이 미웠지만 나중에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침체된 북한의 영화산업을 잘 부흥시켜달라는 진심어린 주문을 받았을 땐 기분 나쁘지마는 않았다고 술회했다. 또한 연회에 초대될 때마다 자신이 기쁨조에 동원되는 것이 아닌가 두려웠지만 김 위원장은 그런 기색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건강을 묻는 등 예우에 신경을 써줬다고 부연했다. 하루는 김 위원장 생일에 초대를 받았을 때 아들 김정남과 부인을 직접 소개했다는 일화도 소개했다. 매주 금요일에 연회가 자주 열리는데 여러번 참석하면서 김 위원장 여동생 김경희·장성택 부부, 당시 김영남 외교부장 등과도 합석했다. 연회 참석때에는 입구에 코냑잔을 쭉 늘어놓는데 빈속에 두어잔씩 들이키도록 해 취기가 오른 상태에서 시작됐다고 회고했다. “신 감독은 매사에 치밀하고 형식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북한에 있는 동안 하루 2∼3시간 자면서 영화제작에 몰두했지요. 탈출 시나리오도 전적으로 신 감독이 짰지요.” 이래저래 최씨의 삶은 굴곡의 현대사를 고스란히 반영한다. 그는 경기도 광주에서 5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전화국에 다니는 공무원이었다. 고달픈 그의 인생길은 1947년 ‘새로운 맹세’로 영화계에 데뷔하면서 시작됐다. 미모와 연기력으로 이름이 점차 알려지면서 구애하는 남자가 많았다. 결국 18세때 영화촬영기사와 결혼했다. 하지만 가난과 성격차이 등으로 결혼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그러던 6·25때 최씨는 정훈공작단원으로 전장에 참가했으며, 인민군에 의해 강제 납북됐다가 가까스로 탈출했다. 최씨는 이같은 일로 부역혐의를 받았고 헌병대장에게 조사받던 중 권총협박으로 겁탈까지 당하는 일생일대의 수모를 겪는다. 악몽같았던 전쟁은 끝났지만 평화는 오지 않았다. 남편의 잦은 폭력 등으로 별거생활에 들어갔다. 그러던 1954년 3월, 신상옥 감독한테 “우리 평생, 영화를 같이 합시다.”는 거듭된 프러포즈를 받고 서울시내의 허름한 여인숙에서 둘만의 결혼식을 올렸다. 이때 전 남편이 간통혐의로 고소하게 되자 언론매체에서는 ‘간통죄 1호’라는 기사를 대문짝만하게 다뤘다. 최씨는 신 감독과의 결혼생활에서 아이가 생기지 않자 아이 둘을 입양해 키운다. 그러던 1977년 어느날, 신 감독이 후배 영화배우 오수미와 사이에 아이 둘을 낳았다는 청천벽력같은 사실을 확인하고는 결혼 23년 만에 이혼도장을 찍었다. 최씨 부부는 미국 망명생활 때 이들 네 아이들과 함께 지내다가 1992년 오수미씨가 교통사고로 사망하자 마지막 가는 길까지 지켜주었다. 이들 부부는 1999년 영구귀국하면서 국내에서 재기를 하는 듯 했으나 C형 간염을 앓아오던 신 감독이 병석에 드러눕자 최씨는 병간호에만 전념했다. 안타깝게도 신 감독은 2006년 4월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여생 신감독이 못 다한 일에 바칠 것” 최씨는 요즘 신 감독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더욱 절절하다. 재혼때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서로 교환한 18K금반지를 자꾸 만지작거린다. 그의 가운데 손가락에는 신 감독의 반지까지 나란히 끼워져 있다. 현재 최씨에게는 비록 배아파 낳지는 않았지만 자식 넷이 있다. 큰아들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영화계에서 일하고 있고 둘째아들은 미국에서 경찰이 됐다. 큰딸은 네 아이의 엄마로, 둘째딸은 연극활동을 하다가 지금은 평범한 주부가 됐다. “여생을 신 감독이 못다한 것에 바쳐야죠. 기념사업회도 만들고, 또 신 감독이 오랜 세월 간직해 왔던 대본이 있으니 누군가 영화제작을 해줬으면 좋겠고요….” 인물전문기자 km@seoul.co.kr 사진 류재림기자 jawoolim@seoul.co.kr ■ 그가 걸어온 길 ▲1930년 경기도 광주 출생 ▲43년 경성기예학교 다니던 중 극단 ‘아랑’입단 ▲47년 ‘새로운 맹세’로 영화계 데뷔 ▲51∼53년 극단 ‘신협’ 배우로 ‘마의태자’‘햄릿’ 등 다수 출연 ▲53∼76년 신상옥 감독과 ‘신필름’설립, 영화 ‘무영탑’‘여자의 일생’ 등 130여편 출연 ▲64∼66년 영화 ‘민며느리’ 등 다수 감독 ▲69년 안양예술학교 교장 ▲78년 납북 ▲83∼86년 북한에서 영화 ‘돌아오지 않는 밀사’‘소금’ 등 17편의 영화제작에 참여 ▲86년 북한탈출 및 미국망명 ▲2001년 극단 신협대표 취임 ▲02년 뮤지컬 ‘크레이지 포유’ 제작
  • “나주·함평 학살 국가 잘못”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29일 한국전쟁 중 민간인 집단희생사건인 ‘나주경찰부대사건’과 ‘함평양림사건’의 조사결과를 발표, 국가의 공식사과와 명예회복 조치를 권고했다. 진실화해위가 진실규명 결정을 내린 ‘나주경찰부대사건’은 1950년 7월25일 전남 해남과 완도 일대 주민들이 모표(帽標)나 경찰버클 등을 가린 나주경찰부대를 인민군으로 잘못 알고 환영하자, 좌익척결 등을 이유로 경찰부대가 주민 97명을 사살한 사건이다. `함평양림사건’은 1949년 9월21일에 발생했다. 전남 함평군 불갑산 공비토벌작전을 마치고 귀대하던 경찰유격대가 야간경비를 준비하던 양림마을 주민을 공비로 오인해 민간인 28명을 사살했다.이문영기자 2moon0@seoul.co.kr
  • ‘국군 형·인민군 동생’ 57년만에 금강산 재회

    ‘국군 형·인민군 동생’ 57년만에 금강산 재회

    6·25 전쟁 당시 국군이던 형 김원수(80)씨가 북한 인민군이던 동생 형수(77)씨를 17일 제16차 남북이산가족 상봉 행사가 열린 금강산 외금강 호텔에서 57년 만에 만났다. 동생 형수씨는 북한 인민군에 징집, 가족과 헤어질 당시 스무살의 앳된 청년이었으나 이젠 고희를 넘긴 할아버지가 됐다. 형 원수씨는 동생을 만나자마자 덥석 끌어안고 “형수야, 형수야”하며 울음을 터트렸다. 동생 형수씨는 그런 형의 눈물을 닦아주며 “형님은 아직도 정정하네요.”라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 누나 귀례(85)씨는 눈시울을 붉힌 채 형수씨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그동안 뭐 하고 살다 이제야 나타났어.”라고 말하다 참았던 눈물을 터뜨렸다. 여동생 남림(75)씨도 죽은 줄로만 알았던 오빠를 만나자 “제 얼굴 기억하겠어요.”라며 다가섰으나 끝내 말을 잇지 못했다. 형수씨는 “북에서 딸만 넷을 뒀다.”고 말한 뒤 남쪽의 어머니 소식을 물었다. 형 원수씨가 “살아 생전 음력 7월6일이면 둘째 아들 생일을 잊지 않고 매년 생일상을 차려주시다 87년 그리움을 안고 돌아가셨다.”고 말하자 동생은 “어머니, 어머니.”하며 울먹였다. 1950년 6·25 당시 이들 형제는 경남 사천시(현 삼천포시)에서 홀어머니와 큰누나, 여동생과 함께 살았다. 인민군이 두 형제를 모두 징집하려는 것을 홀어머니가 통사정, 부인과 자식을 둔 형 원수씨가 집에 남게 됐다. 원수씨는 인민군 징집은 면했지만 결국 그해 12월 국군으로 참전,1955년 2월 제대했다. 원수씨는 동생을 만나고 싶어 7년전 이산가족 상봉을 신청했으나 성사되지 못하다 이번에 북측의 동생이 신청함에 따라 상봉할 수 있게 됐다. 형은 동생을 주려고 우산, 치약, 바늘과 실, 두통약, 속옷 등의 선물을 큰 상자 2개에 가득 담아 가져왔다.50년 넘게 헤어져 살아온 얘기를 나누는 동안 이들 네 남매는 연방 손을 잡았다. 금강산 공동취재단 최광숙기자 bori@seoul.co.kr
  • 덕수궁미술관서 ‘화업 60년전’ 여는 김보현 화백

    덕수궁미술관서 ‘화업 60년전’ 여는 김보현 화백

    “옛날에 나의 인생이 별로 순조롭지 않았거든요. 환상의 세계를 그림으로써 현실로부터 도피하는 것과 같았죠.” 전혁림, 권옥연 등 원로작가를 발굴하는 전시를 꾸준히 열어 온 덕수궁미술관이 작가 김보현(90)의 작품세계를 조명하는 ‘고통과 환희의 변주:김보현의 화업 60년전’을 열고 있다. 내년 1월6일까지. 일제시대에 경남 창녕에서 태어나 분단상황을 몸소 체험하다 1955년 미국으로 이주한 작가는 지금까지도 왕성한 창작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일본 태평양미술학교에서 그림 공부를 한 뒤 9년여간 조선대 미술학과 교수로 재직한 그가 도망치듯 한국을 떠난 것은 좌익으로 몰렸기 때문이다. 여수·순천사건 발발 이후 강제 연행돼 모진 고문을 당한 상처는 그의 작품 ‘무제’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6·25전쟁이 일어나자 또다시 인민군에게 우익으로 잡혀 고초를 당한 그는 더이상 숨 쉬기 힘든 조국의 현실을 뒤로 하고 미국으로 떠난다. 달랑 300달러를 들고 뉴욕에 정착한 그는 시간당 1달러의 최저임금을 받으며 소호의 넥타이공장에서 넥타이에 그림을 그리는 등 어려운 생활을 한다.2000년에는 오지호, 천경자 등과 함께 강의를 한 조선대학교에 340점의 작품을 기증하기도 했다. 독일에서 활동 중인 세오 등 뛰어난 작가들을 꾸준히 배출하고 있는 조선대 미대의 뿌리에는 바로 작가 김보현이 있었다. 덕수궁미술관에 전시된 그의 작품 220점은 신산했던 작가의 삶과 달리 화려하기 그지없다.50∼60년대 당시 미국 화단을 주도하던 추상 표현주의의 영향을 받은 그는 80년대를 지나면서 고난을 승화시킨 듯 밝은 색채로 낙원의 경지를 묘사한 그림을 선보여 왔다. 작가는 “대규모 전시로는 이것이 생의 마지막 같다.”면서도 “오늘부터 지금까지 하지 않았던 새로운 그림을 그릴 생각이 있다.”며 창작에 대한 의욕을 드러냈다. 관람료 2500∼4000원.(02)2022-0600. 윤창수기자 geo@seoul.co.kr
  • [2007 남북정상회담] 盧, 우여곡절 속 아리랑 관람

    [2007 남북정상회담] 盧, 우여곡절 속 아리랑 관람

    정상회담 전부터 논란을 빚었고 비로 인해 취소될 뻔했던 노무현 대통령의 아리랑 공연 관람이 우여곡절 끝에 이뤄졌다. 그러나 관심을 모았던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깜짝 등장’은 연출되지 않았다. 노 대통령은 3일 저녁 부인 권양숙 여사와 함께 대동강 능라도 5·1경기장에서 아리랑 공연을 봤다. 비가 내려 다소 쌀쌀해진 날씨 속에 각각 베이지색과 감색 트렌치 코트 차림으로 나온 노 대통령 내외는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과 나란히 주석단에 앉아 관람했다. 김장수 국방장관, 김만복 국정원장, 천호선 청와대 대변인 등 공식 수행원도 함께 했다. 노 대통령 내외와 김 상임위원장이 경기장에 들어서자 경기장을 가득 채우운 평양 시민들은 우뢰와 같은 박수와 ‘와∼’하는 함성으로 환영했다. 노 대통령은 꽃다발을 받은 뒤 환호하는 관중석을 향해 손을 흔들어 답례했다. 오후 8시반쯤 시작돼 1시간30분간 진행된 공연은 6만여명이 일사분란하게 펼치는 초대형 군무와 형형색색의 카드섹션으로 장관을 연출했다. 노 대통령 내외는 공연 내내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노 대통령은 관람 도중 두 차례나 일어나 기립 박수를 쳤다. 공연 도중 무용복 차림의 아동들이 줄넘기 등 놀이를 마친 뒤 “아버지 장군님 고맙습니다.”라는 구호를 외치며 주석단으로 달려오자 김 상임위원장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또 공연이 끝나갈 즈음 관중들이 함성을 지르며 노 대통령을 향해 환호하자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치며 출연자들과 관중석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공연에서는 노란 옷을 입은 무희들이 현란한 부채춤을 선보였고, 초대형 지구본이 등장하는가 하면 관중석에선 고 김일성 주석의 얼굴도 형상화했다. 카드섹션으로 ‘핏줄도 하나’,‘통일의 문을 우리민족의 손으로’,‘자주·평화·친선’ 등 문구를 만들었다.‘21세기 태양은 누리를 밝힌다. 아, 김일성 장군’,‘무궁번영하라 김일성 조선이여’라는 체제 선동적인 글자도 선보였다. 특히 남측의 태권도 시범이 처음으로 추가돼 눈길을 끌었다.‘민족의 자랑’이라는 글자와 태권도 이단옆차기 그림을 배경으로 수백명의 젊은이가 태권도 시범을 선보여 박수 갈채를 받았다. 노 대통령이 공연을 관람하기까지는 난관이 적지 않았다. 먼저 방북 전 국내 비난 여론을 무마하느라 애를 먹었다. 공연 내용이 북한 체제를 일방적으로 찬양하는 등 ‘정치색’이 강하기 때문이다. 결국 북측은 정부의 요청에 따라 인민군이 총검술로 국군과 미군을 제압하는 장면을 태권도 시범으로 바꾸는 등 문제의 소지가 될 부분을 수정해야 했다. 게다가 공연 당일 비가 내리면서 취소 일보직전까지 가기도 했다. 야외 카드섹션이 주류를 이루는 공연의 특성상 많은 비가 내리면 공연의 진행이 어렵다. 노 대통령으로서는 김 국방위원장과의 ‘동반 관람’이 불발로 끝난 것이 아쉬움으로 남았다. 지난 2000년 매들린 올브라이트 당시 미국 국무장관과 공연을 보던 김 국방위원장이 대포동 미사일 카드 섹션 장면에서 “이것이 첫 번째 위성발사이자 마지막”이라고 말한 뒤 북·미간 미사일 협상이 반전된바 있어 이번에도 ‘깜짝 쇼’가 기대됐었다. 아리랑 공연은 북한의 외화획득에 일조하고 있지만, 어린 학생들이 혹독한 연습에 시달리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인권 침해 논란도 일고 있다. 평양 남북정상회담 공동취재단·이영표 강주리기자tomcat@seoul.co.kr
  • [2007 남북정상회담] 北 군부도 온건파 3인방 득세 ?

    [2007 남북정상회담] 北 군부도 온건파 3인방 득세 ?

    지난 2일 평양 4·25문화광장에 노무현 대통령을 영접하러 나온 북한 권력실세 23명 가운데 눈길을 끈 인물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보좌해 선군정치를 이끌어가는 군부 인사 3명이다. 우리의 국방장관과 차관에 해당하는 김일철(71·차수) 인민무력부장과 김정각(61·대장) 인민무력부 부부장, 최고 권력기구인 국방위원회의 리명수(70·대장) 상임위원이다. 탈북 외교관 출신으로 국가안보전략연구소 책임연구위원으로 있는 현성일씨는 지난달 펴낸 ‘북한의 국가전략과 파워엘리트’라는 책에서 이들을 “김정일 위원장의 측근 구성이 당 중심에서 군 중심으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발탁된 신흥 엘리트”로 분류했다. 김 위원장의 유일 지도체제 확립과정에서 충성심과 업무능력을 검증받아 최측근 대열에 발탁된 경우라는 것이다. 우리측 김장수 국방장관의 상대역으로 지난 1998년부터 인민무력부를 이끌어온 김일철 부장은 해군 출신으로 2000년 9월 제주도에서 열린 1차 국방장관회담에도 참석했다. 최고 권력기구인 국방위에선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조명록 제1부위원장에 이어 서열 3위다. 김 부장은 당초 노 대통령과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의 면담에 참석하지 않는 것으로 돼 있었지만 막판에 포함돼 더욱 눈길을 끌었다. 김정각 부부장은 지난해 10월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열린 핵실험 성공 환영대회에 군부 대표로 참석,“인민군대의 핵 억제력은 조선반도와 주변 지역의 안정을 수호하는 강력한 방어수단으로, 미제가 무모한 도발의 길로 계속 나온다면 비참한 자멸행위가 될 것”이라고 열변을 토하기도 했다. 당 중앙위원과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겸직하고 있는 군부의 젊은 실세로 지난 3월 김정일 위원장이 북한주재 중국대사관을 방문, 류샤오밍 중국대사와 환담할 때 배석하기도 했다. 리명수 상임위원은 군부 핵심요직인 총참무부 작전국장을 거쳐 국방위에 진출한 파워 엘리트. 올해 상반기에만 김정일 위원장을 일곱 차례나 수행했다. 같은 기간 김 위원장을 수행했던 40명 가운데 수행 횟수로는 김기남 당 중앙위 비서와 현철해 총정치국 상무 부국장에 이어 3위를 기록했다. 국방연구원 관계자는 “김일철과 김정각, 리명수는 군부 인사 중에서도 비교적 온건파로 분류된다.”면서 “이들을 노 대통령 환영행사에 내보낸 것은 2·13합의 이후 북한이 취하고 있는 협상노선과도 무관치 않다.”고 진단했다. 이세영기자 sylee@seoul.co.kr
  • [2007 남북정상회담] 환영식 열린 4·25문화회관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깜짝 출현해 노무현 대통령을 맞은 공식 환영식장 4·25문화회관은 북한이 국가적인 중요행사를 치르는 최대의 공연시설이다. 지난 8일 정권창건 59돌 행사도 이곳에서 열렸다. 이 건물에 붙여진 4·25는 북한 인민군 창건일이다. 평양시 모란봉구역 장산재 마루에 세워진 4·25문화회관은 연면적 8만 170㎡에 길이 176m, 높이 50m의 대형 건물이다. 한번에 6000명이 들어가는 대극장과 1100석 규모의 소극장,600석의 영화관 등을 갖추고 있다. 지난 1975년 세워져 2·8(조선인민군 창설)문회회관으로 불리다 1995년 4·25(조선인민혁명군 창설)문화회관으로 바뀌었다.2년 전 김 위원장의 지시로 현대식 새 건물로 단장했다. 당초 노 대통령에 대한 공식 환영행사장은 ‘조국통일 3대헌장 기념탑’인 것으로 남측에 알려졌으나 뒤늦게 바뀌었다. 경호상의 이유에 더해 김 위원장이 ‘깜짝 영접’을 하기 위해 우리 당국과 사전 조율했을 것으로 관측된다. 강주리기자 jurik@seoul.co.kr
  • [2007 남북정상회담] 평양 도착 盧대통령 “평화의 새역사 정착시키자”

    [2007 남북정상회담] 평양 도착 盧대통령 “평화의 새역사 정착시키자”

    사상 처음으로 남한 대통령이 군사분계선을 한 걸음으로 훌쩍 넘었다. 평양까지 승용차로 3시간이 채 안 걸렸다. 반세기 넘게 대치해온 남과 북은 지척에 있었던 것이다.2일 평양 시내 한복판에서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굳게 맞잡은 손엔 7000만 겨레의 통일 염원이 응축돼 있었다. ●군사 분계선 넘자 최승철 부부장이 영접 역사는 2007년 10월2일 오전 9시5분을 특별한 순간으로 기억하게 될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남북 정상회담을 위해 건너는 것 자체가 특별했던 금단의 선인 군사분계선을 걸어서 넘었다. 군사분계선을 넘기 직전 노 대통령은 감회에 젖은 표정으로 “한마디 하고 넘겠다.”며 짤막한 대국민 메시지를 남겼다.“눈에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여기 있는 이 선이 지난 반세기 우리 민족을 갈라놓고 있는 장벽이며, 이 장벽 때문에 우리 민족은 너무 많은 고통을 받아왔다.”고 했다. 이어 “이제 제가 대통령으로서 이 금단의 선을 넘어 다녀오면 더 많은 사람들이 다녀오게 될 것이고, 그러면 마침내 이 금단의 선도 점차 지워지고 장벽도 무너질 것”이라고 말했다. 노 대통령과 부인 권양숙 여사가 군사 분계선을 넘어 북측으로 걸어가자 최승철 통일전선부 부부장, 최룡해 황해북도 당 책임비서 등이 노 대통령 일행을 맞았다. 최 부부장은 노 대통령에게 “통일전선부 부부장입니다. 모셔가기 위해 나왔습니다.”라며 인사를 했다. 노 대통령은 밝은 얼굴로 북측 인사들과 악수를 나눴고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북측 여성들한테서 꽃다발을 받았다. 노 대통령 일행은 북측 CIQ를 그대로 통과해 ‘교류협력의 땅’ 개성공단 부근으로 진입했다. 한반도기를 흔들며 환영하는 개성공단 근로자들을 뒤로한 채 노 대통령은 안암굴 터널을 통과해 왕복 4차선 160㎞에 달하는 평양~개성 고속도로를 북녘 산하를 보면서 내달렸다. 노 대통령은 오전 11시30분쯤 평양에 도착했다. 노 대통령은 인민문화궁전 앞에서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의 영접을 받은 후 11시42분쯤 무개차에 함께 올라 20분 동안 4·25문화회관까지 6㎞ 정도 카퍼레이드를 펼쳤다. 연도에 늘어선 수십만 평양 시민들은 저마다 붉은색, 분홍색, 자주색 꽃다발을 흔들며 “만세”와 “조국통일” “환영”이라는 함성으로 노 대통령을 맞았다. 노 대통령과 김 상임위원장은 카퍼레이드를 하는 동안 평양 시내의 건물과 지리, 최근 날씨 등을 화제로 담소를 나눴다고 천호선 청와대 대변인이 전했다. 노 대통령의 전용차량인 벤츠 S600은 차량 우측에 소형 태극기를, 좌측에는 대통령의 상징인 ‘봉황기’를 함께 매달고 달렸다. 이는 노 대통령의 전용차량 방북에 이어 또 다른 파격으로 받아들여진다. ●또다시 파격적 영접 2일 오전 11시57분 평양 4·25문화회관에 운집한 평양 시민들이 큰 환호성을 올리자 남북정상회담 생중계 방송을 보던 국민들은 잠시 노무현 대통령이 도착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내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었다.2000년 정상회담 때처럼 김 위원장은 자신이 직접 영접을 나옴으로써 최고 수준의 손님맞이를 보여줬다. 김 위원장이 도착한 지 5분 뒤 노 대통령이 김영남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과 함께 무개차를 타고 환영식장에 도착했다. 노 대통령과 김 위원장은 서로 “반갑습니다.”라고 인사하며 악수를 나눴다. 두 정상은 붉은 색 카펫을 함께 걸으며 북한 육·해·공군으로 구성된 명예위병대를 사열했다. 노 대통령은 환영식에 참석한 김영일 내각 총리를 비롯한 북한 당·정·군 고위층 인사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며 인사를 했다. 두 정상은 4·25 문화회관 앞 중앙단상에 나란히 올라 인민군의 분열을 받았다. 이날 환영식은 정오부터 12분가량 진행됐고, 두 정상은 환영식이 끝난 뒤 각각 자신의 차를 타고 식장을 떠났다. ●환영식장 철통 보안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등장은 1차 정상회담 때와 마찬가지로 막판까지 철통 보안이 지켜졌다. 공식환영식 예정 시간을 불과 한 시간여 앞두고 환영식 장소가 두 차례나 바뀌어 선발 취재진에 통보됐다. 당초 남북 실무 접촉에서 합의된 공식환영식 장소는 평양 입구의 조국통일 3대 헌장 기념탑이었다. 그러나 오전 10시20분쯤 공식환영식 일정에 변화가 생길 조짐이 포착되기 시작했다. 이 무렵 공식환영식 취재를 위해 3대헌장 기념탑으로 이동하려던 남측 취재단 11명에게 환영식 장소가 인민문화궁전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이 전달됐다. 북측은 남측에서 2차 선발대로 파견된 청와대 의전팀에 이 소식을 통보했고, 취재단에도 이같은 사실을 전했다. 그러나 이것도 잠시.5분쯤 지나 찾아온 북측 관계자는 환영식장이 다시 4·25 문화회관 앞 광장으로 바뀌었다고 취재진에 통보했다. 이때도 북측은 김 위원장의 참석 여부를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다만 남측 청와대 선발팀에만 오전 10시를 조금 넘긴 시각 김 위원장의 영접 사실을 통보했다고 한다. ●점심 메뉴는 신선로와 쏘가리 간장조림 공식 환영식을 마친 노 대통령은 전용차를 타고 낮 12시21분쯤 숙소인 백화원 영빈관에 도착했다. 노 대통령은 낮 12시50분에 부인 권양숙 여사와 공식 수행원들과 함께 평양∼개성 고속도로를 지나오며 본 북한의 풍광과 농업, 지하자원 개발, 경공업 등을 주제로 환담을 나누며 점심을 함께했다. 점심 메뉴는 신선로, 쏘가리 간장즙(간장조림), 냉채, 송편 등 한식이었다. 김영남 상임위원장의 공식 환영만찬은 만수대의사당에서 진행됐다. 한때 김 국방위원장이 만찬장에 나타나지 않겠느냐는 전망도 나왔으나 김 위원장은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특별수행원 김책공대 시찰 정계·재계 인사 등 특별수행원 40명은 오후 4시 김책공대 전자도서관을 참관했다. 지난해 완공된 전자도서관은 지하 1층, 지상 5층에 1만 6500㎡ 규모로 컴퓨터 420대, 일반도서 200만권, 전자도서 1150만건이 비치돼 있어 랜선이 연결된 다른 기관에서도 컴퓨터 접속이 가능하다. 평양 남북정상회담 공동취재단 강국진기자 betulo@seoul.co.kr
  • [2007 남북정상회담] 北,남측손님 맞이 준비는

    1일 평양 중앙통신이 보내온 평양 사진은 올 여름 수해를 완전히 극복한 모습이었다. 남북 정상회담을 앞두고 나름대로 성의를 갖고 준비한 듯한 인상이다. 북측이 어떻게 남측 손님을 맞을지 궁금하다. 1.파격 영접 있을까 7년 전 예상을 깨고 평양 순안공항에서 나타나 김대중 당시 대통령을 깍듯이 맞았던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이번에도 파격적인 ‘영접 이벤트’를 펼쳐 보일지 주목된다. 항공기로 방북한 7년 전과 달리 노무현 대통령은 육로를 이용해 방북한다. 이 때문에 김 위원장의 영접 장소가 어디가 될지 쉽게 예측하기 어렵다. 노 대통령이 걸어서 통과하는 군사분계선(MDL) 현장이나 북측 출입사무소(CIQ) 등도 가능한 후보지로 꼽히지만 경호 문제에 극도로 민감한 북측 사정으로 쉽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개성∼평양 고속도로의 평양쪽 관문인 ‘조국통일3대헌장기념탑’이나 숙소인 백화원 영빈관 등이 유력한 후보지로 꼽힌다. 2.조국통일기념광장서 환영식 2일 평양 공식환영식에선 북한 인민군 의장대 사열이 있을 예정이다. 노 대통령은 1일 오전 계룡대에서 김장수 국방장관, 제병지휘관인 최북진 소장과 함께 무개차에 올라 8분 가량 육·해·공군 각 부대 사열을 받았다. 노 대통령은 하루 시차를 두고 남북의 군 사열을 받는 진풍경을 연출하는 셈이다. 인민군 의장대의 사열을 받는 곳은 평양 초입에 있는 조국통일3대기념탑광장. 남북관계의 특수성을 감안해 일반적인 정상 방문과 달리 예포나 양국의 국기 게양은 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3.김정일 아리랑공연 합석? ‘체제 선전’ 논란에도 불구하고 북측의 요청으로 노 대통령과 방북 대표단이 관람하기로 한 북한 예술공연 아리랑 공연 현장에 김 위원장이 자리를 함께 할 것인지도 관심거리. 북측이 정치적으로 문제가 될 만한 부분을 태권도 공연 등으로 대체하는 등 내용을 ‘순화’시켰다고는 하지만 항일 무장투쟁이나 북한의 국가건설 과정이 다뤄지는 대목 등에서 노 대통령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주목된다. 4.만찬장 메뉴는 두 정상이 함께 할 두 차례의 만찬과 한 차례의 오찬 테이블에 북측이 어떤 음식을 내놓을지도 궁금증을 자아낸다.2000년 정상회담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 위원장은 3차례 식사를 함께 했는데 주로 상류층이 즐겨먹는 고급 요리를 선보였다. 당시 첫날 환영 만찬에서 북측은 김 위원장이 정상회담을 기념하기 위해 직접 이름을 지었다는 메추리 완자탕인 ‘륙륙 날개탕’을 비롯, 칠면조 향구이, 생선수정묵 등 15가지를 식탁에 올렸다. 이세영기자 sylee@seoul.co.kr
  • ‘공영·평화·화해’ 3대 의제 논의

    ‘공영·평화·화해’ 3대 의제 논의

    노무현 대통령은 방북 이틀째인 오는 3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 오전·오후 모두 두 차례에 걸쳐 정상회담을 가질 것으로 알려졌다. 정상회담 형식은 남북에서 각각 5명 정도씩 배석하는 회담이 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전해졌다.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주최로 2일 백화원 영빈관에서 열리는 공식 환영 행사에 김 국방위원장이 전격적으로 나타나면 노 대통령과 환담 형식으로 만남을 가질 가능성도 있다. 두 정상은 공식 회담에서 남북공동번영, 한반도 평화, 화해와 통일 등 3대 분야의 의제를 놓고 의견을 교환할 예정이다. 회담 결과에 따라 2000년 6·15 공동선언과 같은 선언 형태의 합의문을 채택할 가능성이 높다. 남북공동번영 부문의 세부의제로는 경제특구, 북한 인프라 구축, 농업·보건의료 지원 등 남북경제공동체를 지향하는 경제협력 방안이 포함될 것으로 보인다. 한반도 평화 부문에서는 북핵문제,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군사적 신뢰조치 등이 다뤄질 것으로 전해졌다. 화해와 통일 의제에서는 남북정상회담 정례화 방안과 이산가족, 국군포로, 납북자 문제 등이 다뤄질 전망이다. 노 대통령은 앞서 방북 첫날인 2일 군사분계선(MDL)을 걸어서 건넌다. 이재정 통일부장관은 30일 정상회담 총괄점검회의를 주재한 자리에서 “노 대통령 내외분이 군사분계선을 도보로 통과하고, 공식수행원 13명도 동행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 군 당국은 정전협정 규정에 따라 이날 방북단의 비무장지대(DMZ) 통과 방안에 대해 유엔군사령부와 협의했다. 한편 북한의 웹사이트 ‘우리민족끼리’에 따르면 북한은 3일 관람하기로 예정된 ‘아리랑’공연 가운데 북한 인민군의 위력을 과시하는 장면을 빼고 태권도 시범 장면을 새로 집어넣는 등 공연 내용을 수정했다. 이와 관련, 이 장관은 “방북한 선발대가 어제 ‘5월1일 경기장’에서 아리랑 공연 가운데 서장을 제외한 본장과 종장을 관람했다.”면서 “(북한의)미사일 발사나 핵실험 같은 민감한 내용은 없고 서정적이고 장엄한 내용이라는 보고를 받았다.”고 전했다. 박찬구 최광숙기자 ckpark@seoul.co.kr
  • [서울대공원 동물원에 가보았지] (39) 동물원의 을지훈련(下)

    [서울대공원 동물원에 가보았지] (39) 동물원의 을지훈련(下)

    내년이면 국내에 동물원이 생긴 지 한세기를 맞는다. 돌아보면 사연없는 곳이 어디 있겠냐만은 우리나라 동물원 동물들에게는 두 차례의 큰 수난이 있었다. 안타깝게도 요즘 진행중인 ‘을지훈련(8월20∼24일)’이 현실화됐던 때다. ●광복 못 본 맹수 21종 38마리… 독약 먹여 패전의 기운이 일본에 짙게 드리운 1945년 7월25일. 당시 창경원 동물원 회계과장 사토(佐藤明道)는 전 직원을 모아 놓고 “오늘밤 사람을 해칠 만한 동물은 모두 죽여야 한다.”고 명령을 내린다. 그는 “미군 폭격으로 동물들이 우리를 뛰쳐나와 사람을 해치지 못하게 하기 위한 조치”라며 “지령이 도쿄로부터 떨어졌다.”는 말도 덧붙였다. 기사(당시 사육사)들에겐 ‘동물들의 먹이에 몰래 넣어두라.’며 이름모를 극약이 배부됐다. 그날 코끼리, 사자, 호랑이, 뱀, 악어 등은 그렇게 최후를 맞았다. 이날 밤 창경원 일대에서는 비명을 토해내는 맹수들의 울부짖음이 하늘을 찔렀다고 한다. 직원들도 땅을 치며 울었다고 회고한다. 1993년에 발간된 ‘한국동물원 80년사’에 따르면 이날 하루 독살을 당한 동물은 21종 38마리. 하지만 태평양 전쟁 초기부터 일제는 동물 수를 줄여 나갔다. 심지어 전시 동물을 다른 동물의 먹잇감으로 쓰도록 했다.80년사를 정리한 오창영(80·전 서울대공원 동물부장)씨는 “태평양전쟁 후 일제가 인위적으로 줄인 동물 수는 모두 150여마리 정도”라면서 “당시 일본은 사육사보다는 징용군이, 우리 쇠창살보다는 무기로 쓸 쇠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대학살 이후 정확히 20일후 광복을 맞았다. 며칠만 버텼더라도 무고한 생명들이 죽어나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몰살 불러온 1·4후퇴 광복을 맞은 동물 수는 281마리다. 대부분 사슴, 원숭이, 조류 등으로 이미 동물원이라 이름 붙이기도 민망한 정도다. 그럭저럭 동물원이 안정을 찾았지만 다시 한국전쟁이 찾아왔다. 전쟁이 터진 후 사흘만인 1950년 6월28일 인민군은 미아리고개를 넘어 창경원 앞을 통해 서울로 들어왔다. 경황이 없던 탓에 사육사들이 남아준 것은 동물들의 입장에서 보면 다행이었다. 돌봐줄 사육사도 있었고, 적어도 동물은 이데올로기 문제에 있어 자유로웠다. 그 후 9월 서울이 수복됐고 인민군은 북으로 올라갔다. 하지만 이듬해 1·4후퇴 때는 상황은 딴판이었다. 중공군까지 물밀듯이 내려온다는 소식에 남았던 사육사들도 모두 짐을 쌌다. 재수복후 창경원 동물원은 참담했다. 당시 사육사 박영달씨는 이렇게 회고했다.“동물사는 모두 열려있었지만 살아 움직이는 동물들은 새 한마리 보이지 않았다. 낙타, 사슴, 얼룩말은 도살이 된 듯 머리통만 남아있었고, 여우나 너구리, 오소리, 삵 등은 굴과 돌 틈에 끼어 죽어있었다.…(중략)모두 그렇게 굶어죽고 얼어 죽었다.” 유영규기자 whoami@seoul.co.kr
  • [2차 남북정상회담] NLL은 어떤 선

    [2차 남북정상회담] NLL은 어떤 선

    ‘NLL(northern limit line)’이란 약칭으로 불리는 서해 북방한계선은 1953년 정전 직후 마크 웨인 클라크 유엔군 사령관이 선포한 해상경계선으로 서해 백령도·대청도·소청도·연평도·우도의 5개 섬 북단과 북한이 관할하는 옹진반도 사이의 중간선을 말한다. 자신들과 협의 없이 일방적으로 선포됐다는 이유로 북한은 아직까지 ‘비법적(非法的)’인 선이라며 남과 북의 해상경계선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NLL의 ‘태생적 한계’는 1953년 7월27일 정전협정을 맺을 당시 육상 군사분계선(MDL)만 합의하고 해상경계선은 확정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다. 당시 북한은 경기도와 황해도 경계의 연장선을, 유엔군은 서해 5도가 모두 포함된 경계선을 고집해 접점을 찾는 데 실패했다. 결국 유엔사는 남북간 해상충돌을 막고 정전상태의 안정적 관리를 위해 NLL을 선포한다. 하지만 군사분계선(MDL)과 달리 해·공군의 초계활동 범위를 규정하는 ‘작전 한계선’ 성격을 띠었던 까닭에 북한에는 정식으로 통고하지 않았다. 북한이 NLL을 문제삼기 시작한 것은 해군력 증강에 자신감을 갖게 된 1970년대부터다.73년 12월 군사정전위원회 346차 회의에서 서해 5도의 접속수역은 자신들의 영해이며, 이곳을 통과하는 선박들은 사전 허가를 받아야만 한다고 주장했던 것. 이어 1977년 8월 인민군최고사령부 이름으로 ‘해상경계선’을 선포하고,1999년 ‘조선서해 해상경계선’과 2000년의 ‘5개섬 통항질서’를 발표하면서 NLL의 ‘무실화’를 시도하기에 이른다. 우리 정부도 1992년 맺은 남북기본합의서 부속 불가침합의서를 통해 “해상 불가침 구역은 해상 불가침경계선이 확정될 때까지 쌍방이 지금까지 관할하여 온 구역으로 한다.”며 NLL의 ‘잠정적’ 성격을 인정했다. 이양호 전 국방장관도 1996년 7월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 “NLL은 우리 어선이 실수로 월북할 것을 우려해 임의로 설정한 경계선인 만큼 북에서 넘어와도 정전협정 위반과는 무관한 것”이라고 답변하기도 했다. 다만 새로운 해상경계선이 확정될 때까지는 NLL이 ‘실질적인 분계선’으로서 준수돼야 한다는 게 정부의 공식입장이다.NLL을 둘러싼 남북의 대립은 결국 1999년 연평해전과 2002년 서해교전으로 이어져 양측 모두 수십명의 사망자를 내는 참극을 빚었다. 이세영기자 sylee@seoul.co.kr
  • [2차 남북정상회담] 北실무진 준비부족?협상전술?

    북한이 구체적인 설명도 없이 남측이 제안한 13일 남북정상회담 준비 접촉에 응하지 않고 있어 배경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실무적인 차질’이라는 의견과 ‘북한 특유의 협상전술’이라는 등 해석이 분분하다. 북한은 지난 9일 개성에서 정상회담을 위한 준비 접촉을 갖자고 우리측이 제의한 지 닷새가 된 12일 오전까지도 가타부타 의견을 내놓지 않다가 오후에야 판문점 직통전화를 통해 “내일 준비접촉 개최 일자를 알려주겠다.”고 통보해 왔다. 남측 계획대로라면 준비 접촉이 열려야 할 13일에 개최 여부를 알려주겠다는 것이다. 의전으로보면 상식 밖의 행동으로, 정상회담을 위한 남북 당국 간 협의가 시작부터 매끄럽지 못한 셈이다. ●2000년에는 우리 제안 바로 수용… 정부 내심 당혹 북측은 2000년 1차 정상회담 당시 남측이 준비접촉을 제안한 다음날 곧바로 수용 의사를 밝힌 바 있어 이 같은 북한의 행보에 정부는 내심 당혹해 하는 분위기다. 통일부 당국자는 “준비 접촉을 안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실무적인 차원에서 준비가 부족한 것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북측이 현재 호우로 다리 유실 등 어려운 상황이라는 것이다. 특별한 의미를 두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구체적인 합의를 이끌어 내는 것이 아닌 ‘만남’에 의미를 두고 서로의 의제를 확인하는 수준의 실무접촉에 북한이 응하지 않는 것에는 다른 이유가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을지훈련·육로 방북 관련 불만설도 특히 북측이 지난 10일 인민군 판문점대표부 명의의 성명을 통해 오는 20일 시작되는 을지포커스렌즈(UFL) 한·미 합동군사연습 계획에 강력 반발한 터라 이와 관련이 있는 게 아니냐는 분석이 나온다. 또 정상회담과 관련,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해 최대한 남측의 애를 태우자는 북한식 협상전술이라는 견해도 있다. 일각에서는 북한이 이재정 통일부 장관의 ‘노무현 대통령의 육로 방북’과 같은 제안에 불만을 표시한 것일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의전과 경호 등에 상당한 부담을 주는 ‘이상적인 경의선 열차 방북’과 같은 이야기가 남북 간 접촉 이전에 흘러나오는 것에 불쾌해 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최광숙기자 bori@seoul.co.kr
  • [2차 남북정상회담] 정상회담중 을지훈련 ‘엇박자’

    북한 군부가 남북정상회담 기간 중에 열리는 을지포커스렌즈(UFL) 연습에 대해 “2·13 합의와 6자회담에 파국적 결과를 가져올 대규모 전쟁연습”이라며 맹비난하고 나선 가운데 통일부와 외교부 등 외교안보 부처들이 미묘한 입장차를 드러내 주목된다. 송민순 외교통상부 장관은 10일 ‘정상회담 일정을 고려해 UFL을 축소할 계획이 있느냐.’는 기자들 질문에 “한·미훈련이 남북관계에 문제가 안 되는 시대로 가야 하는 것 아니냐.”고 반문한 뒤 “이미 계획된 일정이기 때문에 예정대로 실시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재정 통일부 장관은 이날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회에 출석,“(UFL에 대해) 북측에서 정확한 의사표시나 요구가 아직 없었다.”면서 “의제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북측이 제의한다면 적절한 대책을 논의하겠다.”고 다른 입장을 나타냈다. 일부 전문가들은 1994년 제네바 북·미합의 당시 팀스피리트훈련을 취소했던 전례를 들어 일정 변경이나 축소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점친다. 하지만 한·미간 합의가 필요한 사안인데다 자칫 안보 논란으로 비화될 수 있어 정부로선 쉽지 않은 선택일 것이란 관측이 지배적이다. 북측은 이날 판문점에서 가진 북·미 대령급 군사접촉에서 UFL에 강력 대응할 것이라는 조선인민군 판문점 대표부 성명을 미군측에 전달했다. 이들은 성명에서 “우리를 반대하는 대규모 전쟁연습이 강행되는 조건에서 이에 대응한 위력한 타격 수단을 완비하는 데 모든 힘을 다할 것이라고 한 언약을 실지 행동으로 적극 추진시켜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성명은 그러나 정상회담에 대해서는 “오늘 조선에서 6·15 공동선언과 우리민족끼리의 정신에 기초해 북남관계를 보다 높은 단계로 확대 발전시키기 위한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며 직접적 언급을 피했다. 정상회담이 차질을 빚는 것을 원치 않지만 UFL 문제를 회담에서 반드시 거론하고 넘어가겠다는 뜻을 내비친 것으로 풀이된다. 북한은 지금까지 UFL 등 한·미합동군사훈련 중단 문제를 ▲혁명열사릉 등 참관지 제한 철폐 ▲북방한계선(NLL) 재조정 ▲국가보안법 폐지 문제와 함께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 선결돼야 할 ‘4대 근본문제’라고 주장해 왔다.이세영기자 sylee@seoul.co.kr
  • 초기 인민군마크에 태극문양

    행정자치부 국가기록원은 9일 오후 2시부터 서울 세종로 정부중앙청사 별관에서 ‘1945∼1961년, 평양으로의 시간여행’이라는 주제로 북한 영상자료에 대한 시사회를 가졌다. 국가기록원은 그동안 해외에서 수집된 1945∼1961년 사이의 영상기록 가운데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은 희귀본을 중심으로 공개했다. 자료 가운데 조선인민군 창건당시 ‘상징마크’도 처음 공개됐다.1948년 7월 이후의 인민군 상징마크에는 태극마크가 빠져 있지만 최초의 마크에는 태극문양이 왕별 중간에 들어간 색다른 모습이었다. 북한은 1948년 7월 이후 인공기를 사용했다.1949년 11월 열린 김일성 주석의 동상제막식도 처음으로 공개됐고,1948년 12월에 있었던 북·소 국경 확정 기념식도 이채롭다. 조덕현기자 hyoun@seoul.co.kr
  • [열린세상] 남북정상회담을 철저히 지켜보자/이준한 인천대 비교정치 교수

    [열린세상] 남북정상회담을 철저히 지켜보자/이준한 인천대 비교정치 교수

    8월8일 오전8시쯤. 언론사마다 엠바고가 걸렸다. 반가운 소식 때문이다.28일부터 30일 사이에 평양에서 남북정상회담을 갖는단다. 운 좋은 숫자와 관련된 만큼 좋은 결과가 만발하길 기원한다. 물론 이 소식이 모든 이에게 반가운 것은 아니다. 넉달 앞으로 다가온 대선에 영향을 줄까봐 걱정하는 사람이 많다. 남북정상회담이 정략적으로 이용되면 오히려 시빗거리로 변질될 수 있다. 그러나 초당적으로, 전국민적으로 환영해 주자. 사실 어느 대통령이 어느 시점에 성사시켜도 의심을 살 수 있는 남북정상회담이 아닌가. 그리고 따지고 보면 남북을 포함한 관련국가들 사이에 우호적인 환경이 조성되지 않고선 남북정상회담이 가능하기나 한가. 2000년 6월 역사적인 첫 남북정상회담 이후 지금까지 후속 회담이 미뤄진 것은 남북간 관계도 관계려니와 미국·중국·일본·러시아 등의 입장차도 작용했다. 그러나 최근 미국의 부시 대통령도 임기를 마치기 전에 북한체제를 인정하고 평화협정을 체결할 것을 추진하고 있다고 알려졌다. 이러한 국제환경 속에서 한국이 챙길 것은 최대한 챙겨야 하지 않는가. 역사적인 제1차 남북정상회담은 2000년 4월 총선을 사흘 앞두고 발표됐다. 그래도 한나라당이 133석(48.7%)을 획득해 115석(42.1%)에 그친 여당을 이기고도 남았다. 평양에서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획기적인 6·15선언을 했어도 임기 말이던 김대중 대통령의 인기를 유지하는 데 큰 도움이 안 됐다. 퇴임 후에는 또 어땠나. 정상회담과 관련된 뒷거래 의혹으로 여진도 오래갔고 역사적 성과가 얼룩지지 않았나. 일단 이 기회에 일이 잘 풀리길 기대하면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철저히 감시해 보자.2000년에는 남북관계 물꼬를 열었다면 2007년에는 실질적인 성과를 내어야 한다. 이제는 남북 간에 인적 교류도 실질적으로 이루어져 기차를 타고 북한을 지나 유럽까지 진출할 준비를 해야 한다. 북핵문제도 평화적으로 해결하여 불안전한 정전협정도 폐기하고 평화협정을 체결하는 동시에 북·미관계를 정상화해 항구적으로 전쟁 걱정 없는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 야당과 국회도 딴 데 정신팔지 말고 철저히 검증해 나가자. 이 마당에 정상회담을 반대만 한다면 득표전략에 좋은 영향을 주지 못할 것이다. 오히려 구체적인 준비사항을 주문도 하고 대선공약으로 개발한 정책을 생산적으로 제안하는 모습이 도움이 될 것이다. 남북문제·평화문제에 준비된 후보, 포용력 있는 후보로 감동을 줄 것이란 말이다. 그리고 정부도 국민의 걱정을 새겨야 한다. 야당의 우려도 씻어줘야 한다. 왜 하필 이 시점에 전격적으로 이루어졌는지 최대한의 설명을 제공하는 것이 예를 갖추는 첫 걸음이라고 본다. 임기 말에 추진한 정상회담의 결과물이 선거 뒤에 영향을 받는다면 이 또한 얼마나 비생산적인가. 이에 대한 대책도 없어 보인다. 백보 양보해도 아쉬운 것은 이번에도 평양에서 정상회담을 한다는 사실이다. 형식이 뭐 중요하겠나만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서울이나 제주에 왔다면 더 큰 통일의 전기가 되었을 것 같다. 2000년 6·15 정상회담 후 더 큰 성과를 볼 수 있었다. 조명록 북한 인민군 차수가 미국을 방문하고 올브라이트 미국 국무장관이 북한을 방문했다. 서로 북·미간 평화체제를 준비했다. 그러다 임기를 3개월 남긴 클린턴 대통령이 중동문제에 발목 잡혀 희망과 달리 북한 땅을 밟지 못하고 말았다. 이제 임기를 1년 넘게 남긴 부시 대통령이 얼마나 큰 전기를 마련할지 자못 궁금하다. 테러와의 전쟁에서 치이는 현실에 네오콘 전략을 수정해 북·미관계에 큰 수확이 있으면 부시 대통령에게도 이만한 업적이 따로 없을 것이다. 이준한 인천대 비교정치 교수
  • ‘한국전쟁 본질’ 동화로 풀다

    ‘한국전쟁 본질’ 동화로 풀다

    늙은 종지기는 새벽 4시면 종을 쳤다. 꼬물거리는 벌레와 길가에 구르는 돌멩이, 새벽잠 설치며 노동하는 가난한 이웃에게 들려주려, 그는 날마다 낡은 쇠를 두드렸다. 종지기의 삶과 글은 아름다웠으나, 종지기의 병든 몸이 견디며 산 세월은 고통스러웠다. 어려서 얻은 전신결핵으로 평생 아팠다. 굶주리고 상처난 이를 바라보며 평생 슬펐다. 가족 없이 홀로 평생 외로웠다.“죽으면 아픈 것도, 슬픈 것도, 외로운 것도 끝이니 용감하게 죽겠다.”던 종지기는 죽기 직전 콩팥에서 피를 쏟았다.1초도 참기 힘들어 목숨을 놓고 싶을 때, 신부인 친구에게 편지로 기도를 부탁했다.“제발 이 세상, 너무도 아름다운 세상에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일은 없게 해 달라”고. 제발 그만 싸우라고. 그만 미워하고 따뜻하게 함께 살라고. 인세를 북녘 굶주린 아이들에게 보내달라고. 권·정·생. 떠난 지 두 달, 이름 석 자가 먹먹하다. ●80년대 초반 인민군 주인공 삼아 집필 떠난 이의 마음이 오롯이 담긴 동화 ‘곰이와 오푼돌이 아저씨’(보리 펴냄)가 나왔다. 그의 여느 글처럼 아름다우면서, 고통스럽다. 생전 작가가 출간을 준비하던 마지막 책이다. 반공 이데올로기가 극에 달했던 1980년대 초반, 작가는 ‘감히’ 인민군 병사를 주인공으로 전쟁의 실체를 고발했다. 출판사는 옛 간행물 속에 묻혀 있던 작품을 사실적 그림과 함께 되살려냈고, 작가는 책 출간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북한·중동·아프리카·티베트 아이들이 맘에 가시처럼 걸려, 숨을 놓는 순간까지 뒤채었던 작가는 이 책을 남기며 안도했다. 자신의 글을 세상에 내놓을 때마다 주저했던 그였지만, 이 책 출간은 유독 반겼다고 편집자는 전한다. ●“인민을 위한 전쟁서 죽은 건 가엾은 인민뿐” ‘곰이’는 동화지만 사회과학 논문 이상으로 날카롭다. 전쟁과 분단의 본질을 어떤 전문서적보다 예리하게 통찰한다.6·25전쟁으로 죽은 인민군 오푼돌이 아저씨와 피란민 아이 곰이는 1951년 강원도 치악산에 묻혔다.30년이 지난 시점 둘은 영혼으로 만나 지난 일을 회고한다. 곰이가 묻는다.“아저씬 누구랑 전쟁을 하셨어요?” 오푼돌이 아저씨가 대답한다.“나하고 똑같은 사람이야. 나는 북쪽에 살았고, 그들은 남쪽에 살았다는 것밖에 다른 게 없었어.” 곰이의 눈가가 젖는다.“아저씨, 전쟁을 피해 달아나려 했는데도 전쟁은 우리 뒤를 금방 따라온 거예요. 살려고 갔는데도 난 죽은 거예요.” 아저씨도 소나무 둥치에 얼굴을 묻고 운다.“인민을 위해 싸운 건데, 죽은 건 모두가 가엾은 인민들 뿐이었어.” 호랑이 예화는 분단의 감춰진 속살을 드러낸다. 어머니를 잡아먹은 두 호랑이(미국과 소련)가 남매의 집에 도착해 앞문과 뒷문에서 서로 진짜 엄마라고 주장한다. 누나와 동생(남과 북)은 다투다 각기 다른 문을 열고, 결국 둘 다 호랑이에게 잡혀 먹히고 만다. 군부정권은 이성적 사고를 망각시켰으나, 짧은 동화는 분단의 핵심을 꿰뚫었다. 그을린 양은냄비와 석유풍로가 가진 재산 전부였던 늙고 병든 종지기. 많은 인세를 자신을 위해 쓴 적 없는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스테디셀러 작가.2년전 쓴 유언장에서 그는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건강한 남자로 태어나고 싶다고 썼다.25살이 되면 22살이나 23살 쯤 되는 아가씨와 연애를 하고 싶다고 했고, 벌벌 떨지 않고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지금 그는 먼저 간 이오덕 선생과 감자를 구워먹으며 선생의 연애 노하우를 전수받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유언장을 보면 환생은 영영 어려울 것만 같다. “다시 환생했을 때도 세상엔 얼간이 같은 폭군 지도자가 있을 테고, 여전히 전쟁을 할지 모른다. 그렇다면 환생은 생각해 봐서 그만 둘 수도 있다.” 이문영기자 2moon0@seoul.co.kr
  • “6·25 전후 좌익 등 민간인 학살도 규명”

    북한군과 좌익세력 등 6·25전쟁 전후 적대세력에 의한 집단희생사건에 대해 첫 진실규명 결정이 내려졌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양평적대세력사건’과 ‘주문진지역 양봉열 외 4인의 적대세력에 의한 희생사건’에 대해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다고 20일 밝혔다.‘양평적대세력사건’은 1950년 9월26일에서 30일 사이 후퇴하던 인민군과 정치보위부 내무서원에 의해 양평군 주민 600여명이 집단희생된 사건이다. 진실화해위는 “희생자들은 주로 우익단체원이나 공무원 및 부농 등으로, 국군과 유엔군에 협조했다고 판단한 적대세력이 이들을 양평면 한강변 백사장으로 끌고 가 집단총살한 것으로 확인됐다.”고 설명했다. 희생자들 중 대한청년단원이 31명, 공무원 12명, 국민회와 대한국민당원이 7명인 것으로 확인됐다. 진실화해위는 또 50년 4월5일 양봉열씨 등 대한청년단원 4명이 인민군에게 의해 산채로 매장당한 ‘주문진 지역 양봉열 외 4인의 희생사건’에 대해서도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다.이문영기자 2moon0@seoul.co.kr
  • ‘월북 대대장’ 강태무 사망

    ‘월북 국군 대대장’ 강태무(82)씨가 사망했다. 조선중앙통신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17일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인 조선인민군 중장 강태무의 서거에 깊은 애도의 뜻을 표해 고인의 영전에 화환을 보냈다.”고 18일 보도했다. 경남 고성 출신으로 육사 2기생인 강씨는 1949년 5월 육군 8연대 2대대장(소령)으로 복무하던 중 대대병력을 이끌고 강원도 현리 부근에서 월북했다. 월북 후 그는 인민군 대대장, 연대장, 부사단장으로 6·25전쟁에 참전했으며 종전 직후에는 28세의 나이에 소장(우리의 준장)으로 전격 승진했으며 군단급에서 부사령관을 지내기도 했다. 김상연기자 carlos@seoul.co.kr
  • [부고] 북송 장기수 이인모씨 사망

    최초로 북송된 비전향장기수인 이인모(89)씨가 지난 16일 사망했다. 북한방송은 17일 “전 조선인민군 종군기자이고 비전향장기수인 이인모 동지가 남조선 감옥에서 당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16일 오전 7시에 89살을 일기로 애석하게 서거했다.”고 전했다. 이씨의 시신은 인민문화궁전에 안치됐다.17일 조문객을 받고 18일 오전 발인한다. 북한은 이씨의 장례를 ‘인민장’으로 치르기로 결정하고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을 위원장으로 하는 등 고위 당·정간부 57명이 참여하는 장의위원회를 구성했다. 특히 장의위원회에는 6·15공동선언 7주년 기념 민족통일대축전 북측 위원장인 안경호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서기국장이 포함돼 있다. 6·25전쟁때 종군기자로 활동하다 체포됐던 이씨는 출소이후 부산에서 지하당 활동혐의로 또 다시 붙잡히는 등 34년간 복역,1988년 출소했다.1993년 문민정부시절 인도적 차원에서 ‘장기 방북’형식으로 북한으로 송환됐다. 고 김일성 주석이 송환된 지 한 달도 안된 이씨를 병문안하고, 미국에서 진료받도록 하는 등 북한은 그를 ‘통일의 영웅’으로 찬양해 왔다. 이씨의 사망으로 북에서 지내다 숨진 비전향 장기수는 이종환(2001)윤용기(2001)신인영(2002)김종호(2003)강동근(2004)김석형(2006)오형식(2006)씨 등 8명으로 늘어났다. 이들은 남측 정부가 2000년 6·15공동선언에 따라 그 해 9월2일 북송한 비전향 장기수 63명 가운데 일부다. 한편 평양에서 열린 6·15행사 남측 대표단 가운데 이씨를 후원했던 권오헌 양심수후원회 회장 등이 북측에 이씨의 조문을 요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최광숙기자 bori@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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