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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습·체제 비판 말라”

    북한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의 후견인인 장성택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이 고(故)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장남인 김정남에게 체제 비판을 자제하라고 충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15일 요미우리신문에 따르면 장 부위원장이 2개월 전 일시 귀국한 김정남에게 외국 매체에 세습 비판 등의 발언을 삼가도록 충고했다고 전했다. 장 부위원장은 김정남에게 특히 권력 세습과 조선인민군 등 체제의 근간과 관련된 문제에 대해서는 발언하지 말도록 요구한 것으로 전해졌다. 북한 소식통은 장 부위원장이 김정남에게 이런 충고를 한 것은 김정남에 대한 비판의 화살이 자신에게 향하는 것을 경계하고 있기 때문으로 분석했다. 김정은 제1위원장이 권력을 승계하면서 권력의 중심에서 밀려난 뒤 행방이 묘연했던 김정남은 지난 4월 싱가포르의 한 호텔에서 한국의 한 사업가에 의해 포착됐지만 주로 마카오에서 거주하고 있다. 현재는 중국 본토에 체재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도쿄 이종락특파원 jrlee@seoul.co.kr
  • [주말 영화]

    [주말 영화]

    ●렌의 애가(EBS 일요일 밤 11시) 가난한 화가 이 선생(김진규·오른쪽)은 우연히 예전에 알던 렌(김명진)을 만난다. 이 선생의 동료 교사였던 그녀의 아버지는 해방 전 형무소에서 죽었고, 이 선생 역시 고문의 후유증으로 인한 손의 경련 때문에 붓을 들지 못하고 있다. 그의 그림 모델인 렌은 그를 시몬이라 불렀다. 그녀는 그림을 그리지 못하는 이 선생의 상태를 가슴 아파하며, 여인의 육체에서 영감을 받아 왔던 그가 다시 붓을 들 수 있도록 돕기를 원한다. 한편 그림을 그리지 못하는 자신의 상태와 생활고에 절망한 이 선생은 극약을 사들고 술에 취해 거리를 방황하던 중 렌을 닮은 밤의 여인과 관계를 갖게 된다. 그 일을 계기로 다시 영감을 얻어 그림을 그리게 된 이 선생. 렌을 모델로 한 그 그림은 국전에서 수상하지만 렌과 남편의 관계를 바라보며 이 선생의 아내(김지미)는 괴로워하고, 자신의 역할을 마쳤다고 생각한 렌은 이 선생을 떠난다. 얼마 뒤 한국전쟁이 터지고 대통령상 수상의 전력으로 인해 인민군에게 쫓기게 된 이 선생은 다시 렌을 찾아간다. ●투혼(OBS 토요일 밤 11시 25분) 통산 149승, 최고구속 161㎞, 3년 연속 MVP에 빛나는 롯데 자이언츠의 간판스타 윤도훈(김주혁). 하지만 오만방자하고 안하무인의 그는 1년 365일 신문 1면을 장식하는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는다. 이 일로 결국 도훈은 마운드에서는 패전처리 2군투수로 전락하고, 급기야 집에서도 쫓겨나 후배 집에 얹혀 사는 신세가 된다. 한편 인내심 하나로 윤도훈 전담 뒷수습을 도맡아 해온 내조의 여왕 아내 유란(김선아)에게 뜻하지 않은 사건이 발생한다. 그녀는 더 이상 남편 도훈의 막장 내리막길 인생을 눈 뜨고 볼 수 없어 숨겨둔 비장의 카드를 꺼내어 마지막 경고를 한다. 그렇게 해서 사건사고의 달인 윤도훈 대 뒷수습 달인 오유란의 본격 개과천선 프로젝트가 시작된다. ●프린세스 다이어리(OBS 일요일 밤 11시 25분) 미아는 샌프란시스코의 고등학생이다. 영리하지만 수줍음을 많이 타는 미아는 미술가인 어머니 헬렌과 단둘이 산다. 남들처럼 미아도 로맨틱한 사랑을 꿈꾸지만 부스스한 외모와 수줍음 때문에 친구들로부터 항상 따돌림을 받는다. 그런 그녀에게 뜻밖의 소식이 날아든다. 평생 연락을 끊고 살 줄 알았던 할머니가 온다는 소식이었다. 게다가 할머니는 제노비아라는 나라의 여왕이라고 하지 않는가. 남학생들로부터 눈길 한 번 받아 보지 못했던 미아는 제노비아의 왕위를 이어갈 공주였던 것이다. 알고 보니 제노비아의 왕자였던 미아의 아버지는 오래전 어머니와 이혼했고, 미아의 장래를 위해서 성인이 되기 전까지는 그녀에게 신분을 알려주지 않기로 했던 것인데….
  • 北김정은, 다른남자와 결혼한 옛여인 찾아낸뒤

    北김정은, 다른남자와 결혼한 옛여인 찾아낸뒤

    지난 주말 북한 조선중앙TV가 김정은 노동당 제1비서의 모란봉악단 공연관람 장면을 공개한 가운데 김정은 옆에 앉은 젊은 여성의 정체를 놓고 각종 추측이 등장하고 있다. 조선중앙TV는 7일 김정은이 하루 전 모란봉악단 시범공연을 관람하는 모습을 담은 사진을 공개했다. 눈길을 끈 것은 20대로 추정되는 미모의 여성이 김정은의 오른쪽 옆자리에 앉아있는 모습이었다. 단발머리에 검은 정장을 입은 이 여성은 김정은 쪽으로 몸을 기울인 채 공연을 지켜봤다. 당시 김정은의 왼쪽에는 군부 최고 실세로 알려진 최용해 인민군 총정치국장이 앉아있었다. 조선중앙TV는 최 국장 등 공연을 관람한 고위간부의 명단을 밝혔지만 이 여성의 이름은 포함되지 않았다. 하루 뒤 김정은이 할아버지인 고(故) 김일성 주석 사망 18주기를 맞아 금수산태양궁전을 참배할 때도 이 여성은 김정일 옆에 함께 있었다. 김정은과 이 여성은 다른 당·군 간부보다 한 걸음 앞에 나와 절을 하기도 했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이 여성이 김정은의 여동생 김여정일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김여정이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오빠의 옆을 수행하면서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하고 있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지난해 12월 고(故) 김정일 국방위원장 장례행사 때 김정은의 옆에서 상복 차림의 젊은 여성이 문상객을 맞는 장면이 나오자 우리 정보당국이 김여정으로 추정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하지만 탈북자 인터넷 매체 뉴포커스(www.newfocus.co.kr)는 이 여성이 김여정으로 추정되는 여성과 생김새가 다르고 나이도 많아보인다고 주장했다. 김정은의 부인이라는 분석도 있다. 국가정보원 등 정보당국은 “김정은의 결혼은 확인되지 않았다.”는 입장이지만 일부 탈북자 단체를 중심으로 김정은이 이미 결혼을 했다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다. 북한 뉴스 전문매체인 데일리NK는 지난해 10월 ‘청진 소식통’을 인용해 “김정은이 지난해 9월 노동당 대표자회를 통해 후계자로 공식 등장하기 직전 김일성대 박사과정 여성과 결혼했다는 소문이 당과 군 간부 사이에 나돌고 있다.”고 전했다. 일각에서는 한때 김정은과 염문설이 나돈 보천보전자악단 출신 가수 현송월일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현송월은 2005년 ‘준마처녀’(잘 달리는 말처럼 일 잘하는 여성을 의미)란 노래로 최고의 인기를 누렸지만 김정은이 후계자로 부상하던 2006년 갑자기 모습을 감췄다. 북한 예술단원 소속이던 한 탈북 여성은 “장군님(김정일)이 김정은에게서 떼어내기 위해 활동 중단 지시를 내렸다.”면서 ”현송월은 김정일의 지시로 다른 남자와 결혼을 했지만 김정은의 요구로 관계를 지속한 것으로 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내연녀를 할아버지 추모행사장에 동행한다는 건 상식에 어긋난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손광주 경기개발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공산권 국가에서 최고지도자 부인이 사회적 지위 없이 공식 석상에 등장하지 않는다.”면서 “(그 여성이) 김정은의 부인, 혹은 내연녀일 가능성은 낮아보인다.”고 말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노수희 “김정일 서거는 민족 최대 슬픔”

    노수희 “김정일 서거는 민족 최대 슬픔”

    지난 3월 24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 사망 100일 추모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중국 베이징을 거쳐 무단 방북한 노수희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 남측본부 부의장이 5일 오후 판문점으로 귀환한다. 박수진 통일부 부대변인은 4일 브리핑에서 “노씨가 밀입북해 우리 정부를 비방하고 북한을 찬양한 행위는 법 위반 사항”이라면서 “방북 경위와 북한 내에서의 행적 등을 조사한 후 관련 법에 따라 엄정히 조치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에 대해 북한의 대남 선전용 웹사이트 ‘우리민족끼리’는 이날 “노수희 부의장의 평양 방문은 어느 모로 보나 정당하고 정의로운 애국적 장거”라며 “반통일 폭압 책동에 더욱 매달리고 있는 보수 당국의 처사를 절대로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북한 조선중앙통신은 이날 노 부의장이 평양 만수대의사당에서 김영남 북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을 만났다고 밝혔다. 통신은 김 위원장과 노씨가 “동포애의 정 넘치는 분위기 속에서 담화를 했다.”고 전했다. 조선중앙방송은 “노 부의장이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의 서거는 우리 민족의 가장 큰 상실이며 최대의 슬픔이었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노씨는 지난 3일 평양 고려호텔에서 중앙통신과 가진 회견에서 김정일 위원장에 대해 “한반도 분열 사상 처음으로 남북 수뇌 상봉을 실현해 6·15공동선언과 10·4선언을 마련해 주신 민족의 어버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에 대해서는 “북녘 겨레는 인민을 하늘처럼 떠받들며 인민 사랑과 후대 사랑의 정치를 펴 나가시는 최고사령관님을 어버이로 믿고 따르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북녘은 정치적 안정과 막강한 경제적 잠재력에 의거해 강성국가를 반드시 건설하리라는 것을 느꼈다.”고 방북 소감을 밝히기도 했다. 앞서 노씨는 김정일 사망 중앙추모대회(3월 25일)에 참석하고 만경대 김일성 생가(3월 26일)와 금수산기념궁전(2월 27일) 방문, 김일성 부자 동상 제막식(4월 13일), 김일성 100회 생일 중앙보고대회(4월 13일) 참석 등 60여개의 공식 일정을 소화하며 북한 김씨 일가를 찬양하고 우리 정부를 비난하는 행보를 이어 갔다. 그는 방북 다음 날인 3월 25일 김정일 초상화 앞에서 ‘위대한 영도자 김정일 동지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라고 적힌 화환을 바쳤다. 3월 26일에는 만경대를 방문해 방명록에 “국상 중에도 반인륜적 만행을 자행한 이명박 정권을 대신해 조국 인민의 사과를 만경대에 정중히 사죄드립니다.”라고 기록하기도 했다. 노씨의 친북 발언은 김일성 탄생 100주년과 인민군 창건 80주년 등 주요 행사가 몰린 4월부터 노골화됐다. 지난 4월 4일 범민련 북측본부 의장 최진수와 만난 자리에서는 “남과 북, 해외의 3자 연대를 강화해 자주 통일의 새로운 국면을 여는 데 이바지하겠다.”고 북한 정권에 대한 충성 맹세를 했다. 하종훈기자 artg@seoul.co.kr
  • “이승만 집권 때도 독립운동가 수감했다”

    “이승만 집권 때도 독립운동가 수감했다”

    서울 통일로 ‘서대문형무소’는 1905년 을사늑약 때일제가 만든 경성감옥이었고 1912년 서대문형무소로 이름이 바뀌었다.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은 이 형무소의 신세를 졌다. 해방 이후 독립운동가들이 다 떠난 서대문형무소에는 누가 수감됐을까? 왜 곧바로 일제의 악행을 고발하는 역사박물관으로 직행하지 못했을까? 김삼웅(69) 전 독립기념관장은 4일 오후 2시 서대문형무소역사관 독립관 무궁화홀에서 열리는 ‘이승만 집권기의 서대문형무소’란 학술대회에서 ‘1948~1959년 서대문형무소’란 제1주제 논문을 통해 서대문형무소 수감자들의 변천사를 밝혔다. 김 전 관장은 “1948~1959년 12년은 이승만의 1인 통치와 자유당의 전횡기였다.”면서 “1949년 1월 반민특위의 검거활동으로 서대문형무소가 악질적 친일파인 소설가 이광수, 일제경찰관 노덕술 등 친일파로 가득했지만, 겨우 1개월 만인 그해 2월 15일 이승만이 반민특위 활동을 비난하고 반민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하는 등으로 서대문형무소가 다시 독립운동가들로 가득 차게 됐다.”고 탄식했다. 소설가 이광수는 수감 20일 만에 보석으로 풀려났고, 노덕술은 이승만 대통령이 “경찰의 기술자이며 경험자이므로 그를 제거하고는 국가의 치안을 유지하기 어렵다.”면서 석방을 요청하던 중 그해 6월 6일 반민특위가 와해되자 풀려났다. 1949년 6월 ‘국회프락치사건’이 발생했다. 신의주 등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김약수 의원과 반민법 제정에 남다른 열정을 보인 노일환·서용길 의원 등 13명의 의원이 체포됐다. 김 전 관장은 “헌병사령부 산하에 특별수사본부를 설치하고 이들을 심하게 고문해 ‘자백’을 받아 냈다.”면서 “당시 헌병대에는 친일경찰 김정채, 윤우경, 최운하, 김호익 등이 핵심이었다.”고 말했다. 노일환은 재판 과정에서 “남로당 가입 사실과 남로당 지시에 따라 움직였다는 자백이 고문을 못 이긴 허위 자백”이었다고 진술했다. 즉 반민특위 활동이 와해된 후 서대문형무소에는 일제강점기와 비슷하게 독립운동가들이 가득해졌다는 것이다. 1947~1954년 제주 4·3사건으로 2530여명이 일반재판 및 군정재판, 군법회의 등을 통해 실형을 선고받았다. 이 중 16~30세 여자 수감자 70여명이 서대문형무소로 이송됐다. 제주도에는 형무소가 없어서 전국 각지 형무소에 분산·수감된 탓이다. 김 전 관장은 “일제강점기에 총독부가 여성 독립운동가들을 수감하기 위해 특별히 여사(女舍)를 지어서 관리했기 때문”이라면서 “6·25전쟁으로 이 중 일부는 인민군에 편입되거나 여맹에 들어갔고, 또 일부는 잡혀서 총살됐다.”고 설명했다. 6·25전쟁 직후부터 3개월 동안 서대문형무소는 북한군이 사용했다. 반공·친미 인사라고 추정되는 사람들을 투옥하고, 후퇴할 때는 대량 학살하거나, 북으로 끌고 갔다. 1950년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한 이승만 정부는 서울시민 중 북한군에게 협조한 부역자들을 색출해 서대문형무소에 가두기 시작했다. 당시 서울시민은 대략 145만명이었고, 이 중 40만명만이 피란을 떠났다. 김 전 관장은 “서울시민은 안심하라는 라디오방송을 거듭하다가 한강다리를 폭파시켜 피난도 못하게 해 놓고는 잔류한 서울시민을 부역자로 모는 것은, 임진왜란 때 한성을 떠난 선조나 병자호란 때 인질로 잡혀 갔던 처자를 ‘환향녀’라며 비난했던 인조와 다를 바가 없다.”고 비판했다. 실제 사형에 처해진 사람은 다소 줄었지만, 당시 부역자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자는 867명에 이르렀다. ‘종로의 협객’ 김두한은 1947년 4월을 시작으로 1954년 5월, 1965년, 1966년 ‘국회오물투척사건’ 등으로 4차례 수감됐다.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 [길을 품은 우리 동네] (7) 광주 남구 정율성로

    [길을 품은 우리 동네] (7) 광주 남구 정율성로

    중국대륙에 한류(韓流)가 한창이다. 한류의 원조는 누구일까? 드라마 대장금의 이영애? 동방신기? 소녀시대? 너무 약하거나 최근 일이다. 이미 1970~1980년 전부터 지금까지 중국 13억 인민들이 열광하고 있는 인물은 따로 있다. 한국보다 중국에서 더 유명한 정율성(鄭律成·본명 정부은·1914~1976)이다. 한국인에게는 낯선 인물이거나 이념 다툼의 당사자쯤으로 치부되는 인물이다. 그러나 중국의 3대 음악가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중국사회과학경제연구소 조사에 따르면 3억명 이상이 그에 대해 알고 있으며, 10억명 이상이 그가 작곡한 노래를 최소 한 곡 이상 알고 있다. 1992년 베이징아시안게임 개막식의 첫머리에 그의 노래가 불려졌다는 사실만으로도 정율성이 중국에서 차지하는 무게감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광주광역시 남구 양림동, 백운동에는 광주천을 가로지르는 대남대로 곁을 따라 푸른길공원이 꾸며져 있다. 폐철로의 변신이다. 2㎞ 남짓 길게 이어진 푸른길공원에서 가볍게 걷거나 운동기구에 매달려 있는 시민들이 드문드문 눈에 띈다. 그 푸른길공원이 시작하는 지점, 사람들이 무심코 지나는 곳에 약간 낯선 흉상이 세워져 있다. 둘레에는 대나무가 성기게 심어져 있다. 펜을 든 오른손과 허공을 움켜쥘 듯한 왼손, 뭔가를 부르짖는 입모양이 국내에서 쉬 보는 조각풍과는 다르게 힘차고 역동적이다. 바로 광주 남구 양림동이 고향인 정율성의 흉상이다. 중국 광저우에서 제작해 광주 남구에 기증한 작품이다. 이 흉상에서부터 정율성로가 시작된다. 233m의 짧은 길이다. 하지만 한국과 동아시아 현대 역사의 중요한 인물에 대한 흔적이 굵게 새겨져 있는 곳이다. 정율성거리전시관이 길 왼쪽 벽면에 꾸며져 있다. 그의 사진과 함께 그가 작곡한 ‘옌안송’(延安頌)의 악보 동판이 있고 관련 기록물, 사진, 이력 등이 벽면을 따라 이어졌다. ‘옌안송’과 더불어 ‘팔로군 행진곡’(八路軍行進曲) 등의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영상물도 준비돼 있지만 아쉽게도 내년 초로 예정된 거리전시관 리모델링 작업과 맞물려 꺼져 있었다. 양림동, 항일독립운동, 한·중관계, 음악예술 등 네 개의 테마로 마련돼 있다. 길 중간 오른쪽 골목길로 들어가면 정율성 생가가 있다.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는 허름한 골목길 20~30m 안쪽에 ‘정율성로 16-7’의 생가가 있다. 입간판이 하나 세워져 있을 뿐, 지금은 다른 이가 살고 있어 집안을 빼꼼히 들여다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일부러 광주까지 들르는 중국 관광객들의 필수 방문 코스다. 거리전시관 방명록에 빼곡한 이름의 상당 숫자가 중국사람이다. 하지만 사실 정율성 생가와 관련해서는 일부 논란이 있다. 정율성이 1960년대 직접 쓴 ‘나는 전남 광주 양림정 빈농에서 태어났다.’로 시작하는 이력서(我的政歷)가 제시됐음에도 논란은 쉬 그치지 않았다. ‘광주 동구 불로동’이라는 주장을 일부 학계 등에서 여전히 제기한다. 정율성의 부인과 딸, 중국 정부까지 나서서 개입했을 정도다. 논란이 거듭되자 2007년 중국 정부는 아예 부산에 이은 지역 총영사관을 광주 남구 월산동 대남대로 413에 세우기도 했다. 사실상 ‘양림동 설’의 손을 들어준 셈이다. 그의 부친 정해업은 일본의 병탄에 항의하며 낙향한 뒤 일제의 교육을 받지 않기 위해 가난한 살림살이에도 불구하고 4남 1녀의 자식들을 모두 사립학교에 보냈다. 정율성의 큰형 정효룡과 둘째 형 정인제는 모두 3·1운동에 참가했다가 불령선인으로 몰리자 중국으로 피해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셋째 형 정의은도 김원봉이 단장으로 있는 의열단원으로 활동했다. 정율성의 매형 박건웅은 황푸군관학교를 졸업한 뒤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교육주임으로 일했다. 이러한 민족적 기개와 혈통을 가진 집안에서 자랐기에 정율성 또한 남달랐다. 전주 신흥중학교를 다니던 정율성은 셋째 형을 따라 중국으로 가 1933년 5월 8일 난징(南京)의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 들어갔다. 음악을 좋아하는 정율성을 이해한 김원봉은 난징군사학교에서 일본인의 전화를 도청하는 비밀공작을 맡기는 한편, 주말에는 상하이(上海)에서 음악을 공부할 수 있도록 배려해 줬다. 그에게 성악을 가르친 러시아인 교수는 정율성의 천부적 재능을 칭찬하며 “이탈리아로 가 음악공부를 하면 동양의 대음악가가 될 것”이라고 유학을 적극 권유하기도 했다. 하지만 조국의 독립에 복무해야 한다고 생각한 정율성은 이때부터 정율성은 상하이, 난징의 중국공산당원들과 어울리기 시작하고, 김원봉은 이에 실망해서 지원을 끊고 만다. 정율성은 1937년 옌안(延安)으로 건너가 루쉰예술학원 음악학부에 입학한다. 여기에서 저우언라이(周恩來)의 양녀인 딩쉐쑹(丁雪松)을 만나 평생의 반려로 삼았다. 그리고 1938년 봄에 ‘옌안송’을 발표했다. 서정적이면서도 웅장함을 잃지 않는 교향곡 풍의 노래다. 그는 내쳐 1939년 ‘팔로군 행진곡’을 만들었다. ‘복잡한 사상’으로 의심받기 일쑤였던 조선인 청년 정율성은 일거에 중국 최고의 유명인 중 한 사람으로 발돋움하게 된다. ‘팔로군 행진곡’은 ‘중국인민해방군가’로 바뀌어 지금까지도 애창되고 있다. 아시안게임 개막식에서도 이 노래가 울려 퍼졌다. 1945년 해방 이후 조국으로 들어가기를 원했으나 미 군정 치하에 들어간 남한은 위험하다고 판단한 중국공산당은 그에게 평양행을 지시했다. 뜻하지 않게 1946~1949년 북한에서 머물며 ‘조선인민군 행진곡’을 작곡하는 등 음악활동을 이어간 정율성은 1952년 중국으로 돌아와 1966년까지 중국가무단, 중국음악가협회, 중앙악단 등에서 활동했다. 1966년 문화대혁명을 거치며 창작활동을 제한받는 고초를 겪은 뒤 1976년 문화대혁명이 종결되자마자 명예회복을 이뤘으나 곧 고혈압으로 숨지고 말았다. 중국 건국의 100대 영웅으로 꼽힌다. 최영호 남구청장은 “최근 우리 사회 안팎에 시대착오적인 이념 몰이 흐름이 있다고 해서 세계적 수준의 예술가이자 항일 독립운동가인 인물까지 함께 잃어버리는 것은 역사적인 손실”이라면서 “정율성거리전시관에 더욱 입체적이면서도 알찬 내용을 담아 정비해서 한·중 관계를 더욱 공고히 하는 매개로 삼을 것”이라고 말했다. 글 사진 광주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8회는 부산 중구 ‘40계단길’을 소개합니다.
  • [주말 영화]

    ●킹스 스피치(KBS2 토요일 밤 1시 25분) 조지 5세의 차남 버티(콜린 퍼스)는 말을 심하게 더듬는 콤플렉스가 있어 여러 의사에게 치료를 받지만 증세가 나아지지 않는다. 말을 더듬는 증세 때문에 대중 연설조차 번번이 해내지 못하자 아내 엘리자베스 왕자빈은 수소문 끝에 라이오넬 로그라는 언어 치료사를 찾아낸다. 처음부터 왕자에게 신뢰와 평등을 요구하며 파격적인 태도를 보이던 라이오넬은 버티와 심한 갈등을 겪는다. 하지만 독특한 치료법으로 효과를 얻자 결국 버티는 그를 신뢰한다. 그러던 중 1939년 세기의 스캔들을 일으키며 버티의 형 에드워드 8세가 유부녀 심슨 부인과 결혼하기 위해 왕위를 버리고 만다. 그렇게 왕위를 포기한 형 때문에 본의 아니게 버티가 왕위에 오른다. 권력과 명예, 모든 것을 다 가진 그는 대중 연설을 두려워해 왕위에 오르는 걸 누구보다도 꺼렸다. 게다가 세계는 2차 세계대전 중으로, 불안한 정세 속에 새로운 지도자를 간절히 원하는 국민들 앞에 서야만 했는데…. ●군번없는 용사(EBS 일요일 밤 11시) 영훈(신성일)은 6·25전쟁 중 인민군 보위부 부관으로 훈장까지 달고 고향에 돌아온다. 가족들은 그를 반가워하긴 하지만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형 영호(신영균)는 마식령 산맥 일대에서 반공 유격대 대장으로 활동하고 있고 아버지(최남현)는 이들을 지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보위부 마부장(허장강)이 이들의 활동을 눈치채고 의심하던 중 수송물자가 반공유격대에 의해 거듭 습격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한편 영훈의 생일날, 영호가 찾아오지만 마부장이 그를 의심하자 영호는 마부장의 아내 유리(문정숙)를 인질로 삼아 도망친다. 그들은 오래전에 사랑하다 헤어진 사이로, 영호는 그녀를 놓아준다. 영훈의 부모를 체포한 마부장은 영호가 어디 있는지 알아내기 위해 그들을 고문하고 결국 영훈의 손으로 부모를 죽이게 만든다. ●베스트셀러(OBS 토요일 밤 11시 25분) 10여년간 대한민국 최고의 베스트셀러 작가로 군림해 온 백희수. 하지만 발표한 신작 소설이 한 공모전에서 자신이 심사를 맡았던 작품을 표절한 것이라는 혐의를 받게 된다. 그로 인해 하루아침에 사회적 명성을 잃고 결혼 생활마저 순탄치 못하게 된다. 이 일로 2년 동안 창작할 수 없는 지경에 빠져 있던 희수는 오랜 친구인 출판사 편집장의 권유로 화려한 재기를 꿈꾸며 딸 연희와 함께 시골의 외딴 별장으로 내려간다. 그들이 찾아간 별장의 굳게 잠겨 있는 2층 구석방에서는 간헐적으로 집 안 전체를 울리는 기괴한 진동소리가 들려 온다. 게다가 딸 연희는 ‘언니’라고 불리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누군가와 대화를 하기 시작한다. 한편 창작에 목말라 있던 희수는 점차 연희가 들려주는 별장에서 벌어지는 섬뜩한 이야기에 집착하게 된다.
  • “南전투함 화력 세 시간 끌면 밀려…방탄조끼 부럽다”

    지난 2002년 6월 29일 제2연평해전 당시 참전한 북한 해군 수병들의 생생한 증언들이 공개됐다. 북한 전문 인터넷 매체 뉴포커스는 19일 제2연평해전 10주기를 앞두고 당시 북한의 대남선전기관인 통일전선부 소속이던 탈북자 장진성(41) 뉴포커스 대표가 교전 직후 이들을 취재했던 내용을 보도했다. 이 매체에 따르면 북한 해군 병사들이 당시 우리 해군 전력을 두려워했음이 여실히 드러난다. 이 매체에 따르면 장 대표는 자신을 비롯한 3명의 요원이 부상병들을 만난 사실을 발설하지 말라는 서약을 한 뒤 평양시 조선인민군 11호병원에서 참전 수병들을 만날 수 있었다. 몸에 파편 230개를 맞았다는 북한 수병에게 교전 소감을 묻자 “전투준비를 외치면 우리는 갑판 위로 올라가지만 남한 해군들은 갑판 밑으로 사라진다.”며 “그런 상황에서 파열탄이 터지면 전투능력이 상실된다.”고 증언했다. 자신을 상사라고 소개한 수병은 기자들에게 “남조선군의 방탄조끼가 가장 부럽다.”며 “목화솜옷이라도 주면 파편이 덜 들어가겠는데 아무것도 없어서 부하들의 피해가 컸다.”고 증언했다. 북한 수병들은 남한 전투함에 대한 열세를 시인하기도 했다. 한 수병은 “우리가 작심하고 나갔으니 놈들 손실이 더 컸다.”면서도 “작전이 길어지면 화력이나 함선에서 밀리는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빠르게 귀환해야 했다.”고 말했다. 하종훈기자 artg@seoul.co.kr
  • 北 해병, 방탄조끼 안바란다며 원했던 장비가…

    北 해병, 방탄조끼 안바란다며 원했던 장비가…

    탈북자 인터넷 매체 뉴포커스(www.newfocus.co.kr)가 19일 ‘연평해전 10년’을 앞두고 당시 해전에 참전했던 북한 해병의 증언을 소개했다. 장진성 뉴포커스 대표가 2002년 6월 29일 해전 직후 취재했던 내용을 옮긴 것이다. 평양음대와 김일성종합대학을 나온 장 대표는 2004년 탈북할 때까지 5년 넘게 북한 통일전선부 간부로 일했다. 2002년 교전 보도가 나온 후 직장에 출근했는데 당비서가 나 외 3명을 급히 찾았다. 그는 이제 곧 조선인민군11호병원으로 가야 한다면서 서약서를 내밀었다. 취재 대상들의 발언을 외부로 절대 발설하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평양시 대동강구역 문수동에 위치한 조선인민군 11호 병원에 도착하니 외과병동 중 건물 하나를 해군사령부 8전대 부상병들을 위한 특별 병동으로 봉쇄하고 무력부 보위사령부 군인들이 지키고 있었다. 그 이유는 아군의 승리만을 선전하는 북한에서 처참한 상처를 가진 부상병들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일단 교전 참전자들을 회의실에 모두 모이게 했다. 12명 정도였는데 18세~19세 군인들이 그 중 5명이나 되었다. 함께 갔던 국장이 통전부에서 나왔고 교전 경험을 위에 보고하기 위해서라고 간단히 설명했다. 그러면서 영웅담을 듣기 위해 나온 것이 아니니 교전 소감을 솔직하게 말하라고 덧붙였다. 이 때 문이 열리며 온 몸에 붕대를 감은 한 해병이 휠체어에 실려 왔다. 그러자 그를 가리키며 모두가 합창하듯 말했다. “저 애는 온 몸에 맞은 파편이 230개예요” “???” 경악하는 우리에게 군의관이 뢴트겐 필름을 한 장 보여줬다. 파편 흔적으로 보이는 점들이 가득했다. 교전 참전자들 중 군관이 말했다. “파열탄에 맞았습니다. 위에서 터지는데 파편 수백 개가 우박 떨어지듯 합니다.” 가장 나이 어린 해병이 끼어들었다. “정말 솔직하게 말해도 됩니까?” “그래 그래 그냥 너희들 생각을 편하게 말하면 돼.” “사실 다 무섭지 않은데 그 파열탄이 제일 무섭습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한 마디씩 했다. “놈들은 ‘전투 준비!’하면 모두 갑판 밑으로 사라지는데 우리는 ‘전투 준비!’하면 모두 갑판 위로 올라가요. 그런 상황에서 저 파열탄만 터지면 전투 능력이 우선 1차적으로 상실돼요.” “영화에서 보면 전투 중 이름들을 서로 부르는데 당해보니깐 그건 완전한 거짓말이예요. 일단 포소리만 한번 울리면 귀에서 ‘쨍’하는 울림밖에 더 없어요. 그래서 우린 서로 찾을 때 포탄깍지로 철갑모를 때리며 소통했어요.” 자기를 상사로 소개한 해병이 말했다. “한 가지 제기해도 좋습니까? 놈들 배는 부럽지 않은데 제일 부러운 게 방탄 조끼입니다. 방탄 조끼는 비싸니깐 우리에게 목화 솜옷이라도 주면 파편이 덜 들어가겠는데….” 내 옆에 서있던 국장은 그의 말을 특별히 줄까지 쳐가며 메모했다. 전투 전반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해보라는 국장의 말에 군관이 입을 열었다. “그 날 함장이 평양에 갔다 온 날이어서 우리는 느슨하게 출항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함장이 그날 따라 배에 기름을 가득 채우라고 지시하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물었다. “평일엔 기름을 가득 안 채웁니까?” “사실 채울 기름이 없습니다. 그나마 기름이 정상적으로 보장되는 함선이란 것이 구축함뿐입니다. 현재 우리 해군에 소련 50년대 구축함이 두 대 있는데 한 대는 동해에, 한 대는 서해에 있습니다. 그런데 기름이 없어서 순찰을 못하고 작전 지역에 진입하면 정박한 채 레이더 감시만 하다 돌아오곤 합니다. 우리 경비함 같은 경우엔 기름 공급이 더 부족한 형편입니다. 순찰이 아니라 근처에 나갔다 오는 정도입니다. 그리고 항에 도착하면 남은 기름을 군관들이 몰래 빼서 난방용으로 집에 가져가기 때문에 처음부터 연유부에서 절반씩 밖에 안 준지 오래됐습니다.” 상사 해병이 불만조로 보탰다. “우린 도색감도 받아본지 오래됐습니다.” “그건 뭔데요?” “배는 물 위에 항상 떠 있기 때문에 선체에 골뱅이와 같은 해류들이 가득 달라붙습니다. 그럼 속도가 느려지죠. 도색감을 정기적으로 발라주어야 해류 방지도 되고 속도에도 제한이 없겠는데 그것도 없다니깐요.” 그 말이 끝나기를 기다리던 군관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날 함장이 기름뿐 아니라 포탄과 탄약들도 만장탄하라고 지시하였습니다. 그리고 배 앞에 붙인 레루(레일)도 확인하더니 다시 더 단단하게 용접하라고 하였습니다.” “배 앞에 웬 레루요?” “전번 1차 때 충돌 싸움부터 시작했었는데 그 애들 철갑이 굉장히 단단해서 우리 배가 찢어지더라구요. 그래서 고심하던 함장이 창안한 겁니다. 레루를 붙이면 승산 있을거라면서요.” “그럼 그 철의 강도 문제는 전번 1차 때 제기 안했었습니까?” “했죠. 장군님께도 보고돼서 장군님께서 세상에서 가장 강한 철갑으로 무장해주라고 지시하여 연형묵 자강도당책임비서를 비롯해서 자강도 군수공장 기술자들이 몇 번이나 우리 배에 다녀왔습니다.” “그런데 해결 안됐는가요?” “장갑을 두텁게 하면 함선이 기울기 때문에 대신 탱크포를 내려야 하는 문제가 제기됐습니다. 사실 우리 함선의 위력은 탱크포입니다. 아무리 파도가 심해도 정조준을 유지할 수 있고 또 포탄의 위력이 쎄서 놈들 함선에 구멍이 펑펑 납니다. 그런데 그런 위력을 없애면 속도도 상대적으로 느린데 싸움이 됩니까? 그래서 고심 끝에 철의 강도대신 화력을 더 보강하는 쪽으로 채택됐습니다. 놈들 자동포는 분당 3000발씩 나오는데 우리는 600발 정도거든요. 그래서 1차 교전 후 소련 4구경 발칸포를 올려놨습니다. 그거면 우리도 분당 1500발을 쏠 수 있거든요.” 이 때 나이 어린 해병이 재잘거렸다. “그것도요, 우린 다 갑판 위로 올라가서 쏘는데 그 놈들은 어디서 쏘는지 보이지도 않아요. 그 놈들 함선 무섭게 발전했어요.” “조용 못해 이 xx야!” 상사가 침대에 있던 베개를 집어던졌다. “야, 너도 찍소리 마!” 군관이 상사의 과격한 행동에 이렇게 일침을 가하고 나서 다시 이어갔다. “기름과 탄약들을 가득 채우고 쉬고 있는데 이상하게 배를 꼼꼼히 점검하던 함장이 이번엔 격분해서 기관장을 소리치며 불렀습니다. 보조 조타가 고장났는데 당장 수리하라면서요, 보조 조타란 기본 조타가 고장 났을 때 수동적으로 배를 움직일 수 있는 장치입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때 만약 함장이 그 보조 조타 수리를 지시하지 않았으면 우린 살아오지 못했을 겁니다.” “왜요? 그 보조 조타 덕이란 게 무엇인데?” “놈들 폭탄에 기관실이 맞았는데 기본 조타가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 함선은 한동안 한 자리에서 빙빙 돌기만 했습니다. 아마 놈들도 이상하게 생각했을 겁니다.” 막내 해병은 이번에도 못 참고 끼어들었다. “그때 봤어요,? 놈들이 갑판에 나와 쭉 서서 구경하더라구. 아, 그 때 쏴야 하는건데....” 그러나 나이 든 해병들만은 침통한 얼굴이었다. “전투상황을 좀 설명해보게” 국장의 질문에 군관이 먼저 입을 열었다. “우린 놈들 배에 접근해서 충돌을 시도했어요. 함장이 지시해서 발포도 우리가 먼저 시작했구요, 근데 놈들 첫 포탄에 함장이 먼저 죽었어요. 우리 함선 규정엔 싸움을 시작할 땐 함보위 지도원의 동의가 있어야 합니다. 함보위 지도원이 정치 지도원을 겸하거든요. 그래서 함장 대신 그 때부터 보위 지도원이 지휘했습니다. 그날은 우리가 작심하고 나갔으니 놈들 배가 손실이 컸습니다. 작전이 더 길어지면 화력 우세나 함선 우세에서 우리가 밀리기 때문에 손실은 불가피했습니다. 마침 전대 사령부와 실시간으로 통신하던 조타수가 달려와 전대의 철수명령을 전했고 우린 보조 조타로 조종하며 돌아왔습니다. 이상한 것은 함장 딸이 세 명이거든요, 근데 죽은 함장 몸에서 세 개의 파편이 나왔습니다.” 국장이 의미심장하게 물었다. “이제 다시 싸우라면 싸울 용기가 있어? 어때? 할 수 있지?” 해병들은 군인식으로 일제히 “예!”하고 합창했다. 그러나 그 날 해병들의 용기에서 나는 다른 점도 엿볼 수 있었다. 나이 어린 해병들은 영웅 심리에 들떠 있었지만 나이 든 해병들일수록 한국군의 선진화에 당황하고 겁을 먹은 눈치였다. 우리가 나올 때 군관은 따라 나오면서까지 애원하다시피 말했다. “정말 방탄 조끼는 아니라도 좋으니 목화 솜옷을 좀 해결해주십시오. 그것만 입어도 애들 저렇게까지 심하게 부상당하지 않습니다.” 2차 교전 결과를 보고받은 김정일은 ‘1차 교전은 진 전투였다면 2차는 이긴 전쟁’이었다며 8전대 해병들에게 감사와 선물을 보냈다. 함장은 공화국 영웅 칭호를 받았고 보위 지도원은 국기 훈장 1급을 수여받았다. 다른 해병들에게도 국기 훈장 2~3급과 함께 김정일 이름이 박힌 컬러 TV가 선물로 하달됐다. 그 후 함장은 세 딸에게 아버지가 남긴 복수의 유산이란 내용을 담은 연극 ‘세 파편’의 주인공으로 부활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北 해병, 방탄조끼 안바란다며 원했던 장비가

    北 해병, 방탄조끼 안바란다며 원했던 장비가

    탈북자 인터넷 매체 뉴포커스(www.newfocus.co.kr)가 19일 ‘연평해전 10년’을 앞두고 당시 해전에 참전했던 북한 해병의 증언을 소개했다. 장진성 뉴포커스 대표가 2002년 6월 29일 해전 직후 취재했던 내용을 옮긴 것이다. 평양음대와 김일성종합대학을 나온 장 대표는 2004년 탈북할 때까지 5년 넘게 북한 통일전선부 간부로 일했다. 2002년 교전 보도가 나온 후 직장에 출근했는데 당비서가 나 외 3명을 급히 찾았다. 그는 이제 곧 조선인민군11호병원으로 가야 한다면서 서약서를 내밀었다. 취재 대상들의 발언을 외부로 절대 발설하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평양시 대동강구역 문수동에 위치한 조선인민군 11호 병원에 도착하니 외과병동 중 건물 하나를 해군사령부 8전대 부상병들을 위한 특별 병동으로 봉쇄하고 무력부 보위사령부 군인들이 지키고 있었다. 그 이유는 아군의 승리만을 선전하는 북한에서 처참한 상처를 가진 부상병들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일단 교전 참전자들을 회의실에 모두 모이게 했다. 12명 정도였는데 18세~19세 군인들이 그 중 5명이나 되었다. 함께 갔던 국장이 통전부에서 나왔고 교전 경험을 위에 보고하기 위해서라고 간단히 설명했다. 그러면서 영웅담을 듣기 위해 나온 것이 아니니 교전 소감을 솔직하게 말하라고 덧붙였다. 이 때 문이 열리며 온 몸에 붕대를 감은 한 해병이 휠체어에 실려 왔다. 그러자 그를 가리키며 모두가 합창하듯 말했다. “저 애는 온 몸에 맞은 파편이 230개예요” “???” 경악하는 우리에게 군의관이 뢴트겐 필름을 한 장 보여줬다. 파편 흔적으로 보이는 점들이 가득했다. 교전 참전자들 중 군관이 말했다. “파열탄에 맞았습니다. 위에서 터지는데 파편 수백 개가 우박 떨어지듯 합니다.” 가장 나이 어린 해병이 끼어들었다. “정말 솔직하게 말해도 됩니까?” “그래 그래 그냥 너희들 생각을 편하게 말하면 돼.” “사실 다 무섭지 않은데 그 파열탄이 제일 무섭습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한 마디씩 했다. “놈들은 ‘전투 준비!’하면 모두 갑판 밑으로 사라지는데 우리는 ‘전투 준비!’하면 모두 갑판 위로 올라가요. 그런 상황에서 저 파열탄만 터지면 전투 능력이 우선 1차적으로 상실돼요.” “영화에서 보면 전투 중 이름들을 서로 부르는데 당해보니깐 그건 완전한 거짓말이예요. 일단 포소리만 한번 울리면 귀에서 ‘쨍’하는 울림밖에 더 없어요. 그래서 우린 서로 찾을 때 포탄깍지로 철갑모를 때리며 소통했어요.” 자기를 상사로 소개한 해병이 말했다. “한 가지 제기해도 좋습니까? 놈들 배는 부럽지 않은데 제일 부러운 게 방탄 조끼입니다. 방탄 조끼는 비싸니깐 우리에게 목화 솜옷이라도 주면 파편이 덜 들어가겠는데….” 내 옆에 서있던 국장은 그의 말을 특별히 줄까지 쳐가며 메모했다. 전투 전반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해보라는 국장의 말에 군관이 입을 열었다. “그 날 함장이 평양에 갔다 온 날이어서 우리는 느슨하게 출항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함장이 그날 따라 배에 기름을 가득 채우라고 지시하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물었다. “평일엔 기름을 가득 안 채웁니까?” “사실 채울 기름이 없습니다. 그나마 기름이 정상적으로 보장되는 함선이란 것이 구축함뿐입니다. 현재 우리 해군에 소련 50년대 구축함이 두 대 있는데 한 대는 동해에, 한 대는 서해에 있습니다. 그런데 기름이 없어서 순찰을 못하고 작전 지역에 진입하면 정박한 채 레이더 감시만 하다 돌아오곤 합니다. 우리 경비함 같은 경우엔 기름 공급이 더 부족한 형편입니다. 순찰이 아니라 근처에 나갔다 오는 정도입니다. 그리고 항에 도착하면 남은 기름을 군관들이 몰래 빼서 난방용으로 집에 가져가기 때문에 처음부터 연유부에서 절반씩 밖에 안 준지 오래됐습니다.” 상사 해병이 불만조로 보탰다. “우린 도색감도 받아본지 오래됐습니다.” “그건 뭔데요?” “배는 물 위에 항상 떠 있기 때문에 선체에 골뱅이와 같은 해류들이 가득 달라붙습니다. 그럼 속도가 느려지죠. 도색감을 정기적으로 발라주어야 해류 방지도 되고 속도에도 제한이 없겠는데 그것도 없다니깐요.” 그 말이 끝나기를 기다리던 군관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날 함장이 기름뿐 아니라 포탄과 탄약들도 만장탄하라고 지시하였습니다. 그리고 배 앞에 붙인 레루(레일)도 확인하더니 다시 더 단단하게 용접하라고 하였습니다.” “배 앞에 웬 레루요?” “전번 1차 때 충돌 싸움부터 시작했었는데 그 애들 철갑이 굉장히 단단해서 우리 배가 찢어지더라구요. 그래서 고심하던 함장이 창안한 겁니다. 레루를 붙이면 승산 있을거라면서요.” “그럼 그 철의 강도 문제는 전번 1차 때 제기 안했었습니까?” “했죠. 장군님께도 보고돼서 장군님께서 세상에서 가장 강한 철갑으로 무장해주라고 지시하여 연형묵 자강도당책임비서를 비롯해서 자강도 군수공장 기술자들이 몇 번이나 우리 배에 다녀왔습니다.” “그런데 해결 안됐는가요?” “장갑을 두텁게 하면 함선이 기울기 때문에 대신 탱크포를 내려야 하는 문제가 제기됐습니다. 사실 우리 함선의 위력은 탱크포입니다. 아무리 파도가 심해도 정조준을 유지할 수 있고 또 포탄의 위력이 쎄서 놈들 함선에 구멍이 펑펑 납니다. 그런데 그런 위력을 없애면 속도도 상대적으로 느린데 싸움이 됩니까? 그래서 고심 끝에 철의 강도대신 화력을 더 보강하는 쪽으로 채택됐습니다. 놈들 자동포는 분당 3000발씩 나오는데 우리는 600발 정도거든요. 그래서 1차 교전 후 소련 4구경 발칸포를 올려놨습니다. 그거면 우리도 분당 1500발을 쏠 수 있거든요.” 이 때 나이 어린 해병이 재잘거렸다. “그것도요, 우린 다 갑판 위로 올라가서 쏘는데 그 놈들은 어디서 쏘는지 보이지도 않아요. 그 놈들 함선 무섭게 발전했어요.” “조용 못해 이 xx야!” 상사가 침대에 있던 베개를 집어던졌다. “야, 너도 찍소리 마!” 군관이 상사의 과격한 행동에 이렇게 일침을 가하고 나서 다시 이어갔다. “기름과 탄약들을 가득 채우고 쉬고 있는데 이상하게 배를 꼼꼼히 점검하던 함장이 이번엔 격분해서 기관장을 소리치며 불렀습니다. 보조 조타가 고장났는데 당장 수리하라면서요, 보조 조타란 기본 조타가 고장 났을 때 수동적으로 배를 움직일 수 있는 장치입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때 만약 함장이 그 보조 조타 수리를 지시하지 않았으면 우린 살아오지 못했을 겁니다.” “왜요? 그 보조 조타 덕이란 게 무엇인데?” “놈들 폭탄에 기관실이 맞았는데 기본 조타가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 함선은 한동안 한 자리에서 빙빙 돌기만 했습니다. 아마 놈들도 이상하게 생각했을 겁니다.” 막내 해병은 이번에도 못 참고 끼어들었다. “그때 봤어요,? 놈들이 갑판에 나와 쭉 서서 구경하더라구. 아, 그 때 쏴야 하는건데....” 그러나 나이 든 해병들만은 침통한 얼굴이었다. “전투상황을 좀 설명해보게” 국장의 질문에 군관이 먼저 입을 열었다. “우린 놈들 배에 접근해서 충돌을 시도했어요. 함장이 지시해서 발포도 우리가 먼저 시작했구요, 근데 놈들 첫 포탄에 함장이 먼저 죽었어요. 우리 함선 규정엔 싸움을 시작할 땐 함보위 지도원의 동의가 있어야 합니다. 함보위 지도원이 정치 지도원을 겸하거든요. 그래서 함장 대신 그 때부터 보위 지도원이 지휘했습니다. 그날은 우리가 작심하고 나갔으니 놈들 배가 손실이 컸습니다. 작전이 더 길어지면 화력 우세나 함선 우세에서 우리가 밀리기 때문에 손실은 불가피했습니다. 마침 전대 사령부와 실시간으로 통신하던 조타수가 달려와 전대의 철수명령을 전했고 우린 보조 조타로 조종하며 돌아왔습니다. 이상한 것은 함장 딸이 세 명이거든요, 근데 죽은 함장 몸에서 세 개의 파편이 나왔습니다.” 국장이 의미심장하게 물었다. “이제 다시 싸우라면 싸울 용기가 있어? 어때? 할 수 있지?” 해병들은 군인식으로 일제히 “예!”하고 합창했다. 그러나 그 날 해병들의 용기에서 나는 다른 점도 엿볼 수 있었다. 나이 어린 해병들은 영웅 심리에 들떠 있었지만 나이 든 해병들일수록 한국군의 선진화에 당황하고 겁을 먹은 눈치였다. 우리가 나올 때 군관은 따라 나오면서까지 애원하다시피 말했다. “정말 방탄 조끼는 아니라도 좋으니 목화 솜옷을 좀 해결해주십시오. 그것만 입어도 애들 저렇게까지 심하게 부상당하지 않습니다.” 2차 교전 결과를 보고받은 김정일은 ‘1차 교전은 진 전투였다면 2차는 이긴 전쟁’이었다며 8전대 해병들에게 감사와 선물을 보냈다. 함장은 공화국 영웅 칭호를 받았고 보위 지도원은 국기 훈장 1급을 수여받았다. 다른 해병들에게도 국기 훈장 2~3급과 함께 김정일 이름이 박힌 컬러 TV가 선물로 하달됐다. 그 후 함장은 세 딸에게 아버지가 남긴 복수의 유산이란 내용을 담은 연극 ‘세 파편’의 주인공으로 부활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北 김정은 생모 ‘고영희 신격화’ 동영상 첫 공개

    北 김정은 생모 ‘고영희 신격화’ 동영상 첫 공개

    북한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의 생모인 고영희에 대한 신격화 영상자료가 공개됐다. 마이니치신문은 10일 고영희(2004년 6월 사망)가 김정은 제1위원장, 남편인 김정일 국방위원장 등과 활동하는 모습을 담은 내부 영상 자료를 입수했다며 사진과 함께 보도했다. 고영희의 활동 모습이 드러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고영희는 1960년대 초반 귀환 사업으로 북한에 들어간 재일 조선인 출신으로 지금까지 북한의 공식 보도에 등장한 적이 없다. 일본 출신이라는 경력이 최고 지도자의 어머니로 ‘부적격’하다는 북한 지도부의 판단 때문이다. 마이니치신문이 입수한 약 1시간 30분짜리 영상의 제목은 ‘위대한 선군(先軍) 조선의 어머님’으로 1980∼90년대를 중심으로 촬영된 고영희의 활동 모습이 수록됐다. 영상은 김 제1위원장이 어린 시절 그림 그리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는 모습, 김 위원장의 신변 보호를 위해 권총 사격 훈련을 하는 모습, 김 위원장의 야전 점퍼를 손질하는 모습 등이 담겨 있다. 기록 영상에서 내레이션은 고영희를 “불세출의 선군 영장(靈將)인 경애하는 김정일 장군님의 가장 귀중한 혁명 동지”라고 소개했으며 “선군의 우리 조국과 김일성 민족을 위해 하늘이 보낸 분” 등으로 거듭 신격화했다. 또 고영희를 김일성 주석의 어머니인 강반석, 김정일 위원장의 어머니인 김정숙에 이어 최고 지도자의 ‘위대한 어머니’ 계보에 올렸다. 이번 영상은 지난달 이후 조선인민군의 중견 간부 등에게 공개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도쿄 이종락특파원 jrlee@seoul.co.kr
  • 北 틀린 좌표 들먹이며 “조중동 조준타격” 위협

    北 틀린 좌표 들먹이며 “조중동 조준타격” 위협

    북한 인민군 총참모부가 4일 이명박 대통령과 일부 언론사가 소년단 창립 행사를 모독했다며 “뒤늦게라도 사죄하고 사태를 수습하지 않으면 무자비한 성전으로 대답할 것”이라고 위협했다. 조선중앙통신에 따르면 총참모부는 이날 공개 통첩장에서 “지금 평양에서는 조선소년단 창립 66돌 경축행사가 성대히 진행되고 있으며 이명박 역적 패당은 아이들을 위한 경사스러운 경축행사에도 심술 사납게 찬물을 끼얹는 망동을 부리고 있다.”며 “역적 패당에게 최후 통첩을 보낸다. 우리 군대의 타격에 모든 것을 그대로 내맡기겠는가, 아니면 뒤늦게라도 사죄하고 사태를 수습하는 길로 나가겠는가.”라고 압박했다. ●인민군 총참모부 “소년단 창립행사 모독” 총참모부는 특히 “(남측은) 5월 29일부터 조선일보사, 중앙일보사, 동아일보사의 채널A방송과 KBS, CBS, MBC, SBS 방송을 비롯한 언론매체를 동원해 비난 공세를 펴고 있으며, 우리의 최고 존엄을 헐뜯는 새로운 악행에 매달리고 있다.”고 비난하고 이들 언론사의 좌표를 열거하며 위협했다. 총참모부는 “조선일보사는 서울시 중구 북위 37°56′83″ 동경 126°97′65″위치에, 중앙일보사는 서울시 중구 북위 37°33′45″ 동경 126°58′14″ 위치에, 동아일보는 서울시 종로구 북위 37°57′10″ 동경 126°97′81″ 위치에 자리 잡고 있다.”면서 미사일 등에 의한 조준타격 가능성을 시사했다. ●국토지리정보원 “있을 수 없는 수치” 그러나 북한이 밝힌 좌표가 틀린 좌표라는 의혹이 제기됐다. 국토지리정보원 관계자는 이날 “60진법을 사용하는 세계적 지리정보 기준에 의하면 위도와 경도의 분과 초 단위 숫자가 60을 넘어갈 수 없다.”며 “북위 37°56′83″은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수치”라고 말했다. 통일부 관계자는 “북한이 자체로 활용하고 있는 나름의 경·위도 표기방법일 수도 있으며 백분위 표기를 60진법식으로 환산했을 때 우리가 추정하는 지리 정보와는 실제로 120m정도의 오차가 있다.”고 설명했다. 국방부는 북한의 행태에 대해 “언론의 자유는 세계 모든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보장된 기본권으로 이를 문제삼아 해당 언론사를 지칭하며 위협하는 것은 북한이 그동안 반복해 온 구태를 다시 보여 주는 것”이라며 “정부는 북한의 어떠한 도발에도 즉각 대응할 수 있는 태세를 유지해 나갈 것”이라고 입장을 밝혔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는 “김정은 체제 최후의 보루인 군부의 입장을 밝힌 것은 체제 모독을 좌시하지 않겠다는 기존 입장의 연장선상에 있는것”이라고 분석했다. 하종훈기자 artg@seoul.co.kr
  • 김정일 장병 기념사진 약속 김정은 1년 만에 대신 촬영

    북한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부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생전에 한 군부대의 군인들과 기념 사진을 찍겠다고 한 약속을 1년여 만에 대신 지켰다. 조선중앙통신은 24일 “김정은 동지께서 조선인민군 제6556부대 장병들과 함께 기념 사진을 찍으셨다.”며 “기념 사진을 찍은 군인들은 장군님의 약속을 대신 지킨 김정은 동지께 만세의 환호를 올리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고 전했다. 장용석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선임위원은 “아버지의 위업을 계승하고 약속을 지킴으로써 주민과 장병을 사랑하는 지도자임을 과시하려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하종훈기자 artg@seoul.co.kr
  • [기고] ‘북한발 사이버테러’ 선제 대응이 답/임종인 고려대학교 정보보호대학원 원장

    [기고] ‘북한발 사이버테러’ 선제 대응이 답/임종인 고려대학교 정보보호대학원 원장

    지난 4월 23일 북한은 인민군 최고사령부 특별작전행동 소조 이름으로 남한의 정권과 보수언론 등을 3~4분 내에 초토화하는 특별행동을 자행하겠다고 위협했다. 많은 안보전문가는 북한이 쓸 위협수단으로 대남심리전, 주요인사 및 기관에 대한 테러, 기습적 무력도발, 전자기파(EMP) 폭탄 투하,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 교란, 사이버테러 등을 이용할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하고 있다. 이미 북한은 지난달 28일부터 10일 이상 GPS 교란 공격을 자행해 서해 5도 지역을 운항하는 선박 및 한·미·중·일 항공기 650여대의 안전운항을 위협하는 등 일련의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많은 전문가는 적은 비용으로 단기간에 특정 대상에 큰 피해를 유발할 수 있는 사이버테러를 가장 가능성이 큰 도발수단 중 하나로 전망하고 있다. 사이버테러는 실제 공격주체를 파악하기 어렵고 책임과 벌칙을 부과할 국제법이나 국제기구도 존재하지 않는 상황이어서 북한에는 더없는 매력적인 선택이 될 수 있다. 2010년 7월 ‘스턱스넷’이라는 악성코드는 독일 지멘스의 특정 제어시스템을 감염시켜 이란 원자력발전시스템 오작동 등 전 세계적으로 큰 피해를 준 바 있다. 북한이 ‘스턱스넷’과 같은 사이버무기로 국내 주요기반시설을 마비시키고 나서 혼란을 틈타 본격적인 군사공격을 하는 방식의 하이브리드 전쟁을 수행한다면 국내 주요 기반시설에 심각한 피해를 주는 것은 물론 사회 전반에 큰 혼란을 일으켜 국가의 존립기반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게 된다. 물론 이러한 북한의 위협에 대한 우리 정부의 대응노력도 숨 가쁘게 전개되고 있다. 전력·가스·교통·금융 등 주요기반시설의 제어망을 외부와 분리·운영하는 한편, 정부합동 점검반이 주요기반시설을 포함한 국가 핵심전산망의 보안취약점을 지속적으로 점검·보완하는 등 예방활동에 주력하고 있다. 또한 국가 사이버안전센터 내에 있는 ‘국가 사이버위협 합동 대응팀’에는 민·관·군 전문가가 근무하며 국가전산망을 대상으로 하는 작은 공격 징후라도 발견되면 이를 신속히 차단할 수 있는 체계를 갖추고 있다. 따라서 사이버테러에 의해 국가 기반시설 운영이 마비되는 최악의 피해가 발생할 확률은 희박하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그러나 최악의 상황이 발생했을 경우에 대비해 지금까지 우리의 대응에 부족한 점은 없는지 돌아볼 필요는 분명히 있다. 점점 지능화되고 있는 사이버테러에 대비해 정부는 위협탐지·정보분석·사고대응·정보공유 역량을 계속 강화해야 하며 사이버공격자에게 강력한 책임과 벌칙을 부여하는 등 국가 간 무한출혈을 막기 위한 국제적인 협력도 긴밀하게 유지해야 한다. 무엇보다 사이버위기관리법, 좀비 PC방지법 등 효과적인 사이버보안 활동과 정보공유를 가능케 할 법안이 통과되지 못하고 있어 19대 국회에서는 이러한 관련법들이 통과될 수 있도록 우선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미국이 다양한 수준의 사이버위협 시나리오를 개발해 대응책을 마련하고 민·관이 신속하고 효과적으로 협력하도록 관련 법제와 표준들을 정비하는 등 발 빠르게 대처하는 이유를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 “北 軍강경파·민간당료 치열한 권력다툼”

    북한 권력 엘리트들이 내부적으로는 군부 강경파와 민간 당료파 사이에서 치열한 권력 다툼을 벌이고 있으며 이명박 정부 들어서 남북관계가 악화된 주요 이유가 이들 사이의 갈등을 관리할 주도권을 쥔 세력이 북한 내부에 없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통일연구원의 박형중 선임연구위원은 9일 통일연구원 출입기자단 초청 간담회를 통해 “북한이 지난달 11일 당대표자회를 통해 새로운 권력 진용을 구성했으며 최룡해가 인민군 총정치국장으로 취임한 것은 중요한 변화”라며 “이는 장성택 중심의 민간 당료파가 군인들을 정치적으로 통제하기 위한 것으로 북한 권부 내에서 지속된 군부 강경파와 민간 당료파 간 권력 다툼의 일환”이라고 밝혔다. 박 선임연구위원에 따르면 남북관계가 좋아지려는 시점에 북한은 끊임없이 도발하는 등 새로운 변수를 만들어냈다. 그는 “이 정부가 온건 정책을 펼 때 금강산 관광객 피살 사건이 터졌으며 천안함 사건은 북·미 협상 진행 중 6자회담의 낙관적 재개가 전망되던 시점이었다.”면서 “지난달 장거리 로켓 발사 역시 북·미 간 2·29합의가 이뤄진 다음에 진행됐다.”고 설명했다. 북한의 대외 정책에서 일정한 규칙성이 발견되고 이 틀 안에서 군부와 민간 당료의 갈등을 유추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북한의 민간 당료와 군부의 갈등 구조는 시대에 따라 변화를 달리했다. 김일성 주석 사망 이듬해인 1995년 당시는 조명록, 김일철 같은 선군정치를 강조하는 군부 강경파가 득세했고 장성택 같은 민간 당료 출신은 배제된 측면이 컸다. 박 선임연구위원은 “북한 내부에서 교류 확대에 관심 있는 민간 당료와 군부 간의 끊임없는 갈등을 관리하기 어려웠던 점이 남북관계가 악화된 요인”이라며 “이 두 계열 간의 권력 투쟁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가 올 하반기 이후 북한 정세를 결정할 것으로 본다.”고 주장했다. 한편 김정은 시대를 맞아 북한 내부 주민에 대한 통제가 강화되고 있으나 식량난과 부정부패가 만연하다는 분석도 나왔다. 조정현 통일연구원 북한인권연구센터 부연구위원은 “정부 당국이 탈북자들로부터 얻은 정보에 따르면 최근 경제난 심화로 북한 주민들 사이에서 가축 밀수나 죽은 사람의 시체를 먹은 이유로 공개 처형 당하는 사례가 발생했다.”면서 “이 같은 사례는 2009년 화폐개혁 실패 이후로 경제난이 악화되고 있다는 증거”라고 분석했다. 하종훈기자 artg@seoul.co.kr
  • [씨줄날줄] GPS의 명암/구본영 논설위원

    언젠가 수안보 부근 월악산 자락에서 밤길 운전 중 진땀을 흘려야 했다. 길눈도 어두운 편인데, 비는 추적추적 내리고 휘발유가 모자란다는 경고등까지 켜졌다. 하지만 내비게이션이 효자였다. 가까운 주유소를 정확히 안내해줘 가까스로 낭패는 면했다. 이처럼 요긴한 내비게이션은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이란 우주기술을 기반으로 삼고 있다. GPS는 본래 군사용이었다. 미국 국방부가 적국의 미사일을 요격하기 위한 목적으로 개발했기 때문이다. 1983년 KAL(대한항공)기가 항로를 잃고 사할린 상공으로 들어갔다가 구소련 미사일에 의해 격추되면서 민수용 전환의 계기를 맞았다. 레이건 당시 미국 대통령이 민간에도 GPS 신호 수신을 허용하는 결단을 내리면서다. 승용차 내비게이션이나 항공기 위성항법장치로 원용되는 GPS는 미 공군이 쏘아올린 24개 측위위성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6개 우주궤도에 4개씩 배치된 이 위성들은 하루에 지구를 두번 공전한다. 그동안 GPS 수신기는 지구상의 어느 위치에 있든 최소한 4개 이상의 위성으로부터 신호를 받아 10m 오차범위에서 고도값과 위치를 파악하는 원리다. 미국이 GPS 신호를 부분적으로 무료 공개한 이후 쓰임새가 점점 커지는 추세다. 대형구조물의 안전진단에서부터 위치확인 기능을 이용해 노인복지나 레저용으로까지 활용범위를 넓혀가고 있다. 이는 지난 2008년부터 유럽국가들이 ‘갈릴레오 프로젝트’란 이름으로 유럽식 GPS 시스템을 추진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만큼 21세기 핵심산업으로서의 잠재력을 인정받는 방증인 셈이다. 한반도 상공의 민항기를 겨냥한 GPS 교란이 며칠째 이어지고 있다. 교란 전파의 진원지를 추적한 결과 북한의 소행이 의심된다고 한다. 그러잖아도 얼마 전 북한은 인민군 특별작전행동소조 명의로 “혁명무력의 특별행동이 곧 개시된다.”고 대남 도발을 예고했다. “지금까지 있어 본 적이 없는 특이한 수단으로 초토화하겠다.”고 호언할 때부터 GPS 교란을 염두에 두었던 게 아닌지 섬뜩한 느낌이다. 관성항법장비나 전방향표지시설 등 이중삼중의 다른 항법시설이 있기에 망정이지 자칫 대형참사를 부를 뻔하지 않았는가. GPS 교란은 문명사의 흐름을 거스르는 야만적 행태다. 전세계가 GPS를 이제 ‘활인’(活人)을 위해 쓰려는 추세가 아닌가. 우리가 북한의 전자테러에 대비해야 한다는 새로운 숙제만 안게 된 것 같아 여간 씁쓸하지 않다. 구본영 논설위원 kby7@seoul.co.kr
  • 北, 새 GPS 교란시스템 가동한 듯… 수도권 항공기가 타깃

    北, 새 GPS 교란시스템 가동한 듯… 수도권 항공기가 타깃

    국토해양부가 지난달 28일부터 수도권 지역의 민간항공기를 대상으로 위성위치정보시스템(GPS) 전파 교란이 발생했다고 2일 밝힘에 따라 북한의 소행일 가능성에 대한 의혹이 짙어지고 있다. 특히 군 당국은 북한의 3차 핵실험이 임박하고 조선인민군 최고사령부가 ‘혁명 무력을 통한 특별행동’을 선언한 현 정세를 감안해 촉각을 기울이고 있다. 군 관계자는 2일 “구체적 물증이 파악되지 않아 면밀하게 확인돼야 할 사항이나 이는 특정 집단에서 시도했을 가능성이 크다.”며 “수도권에서 빈발하는 것을 감안하면 북한의 소행일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정부가 이를 북한의 소행으로 의심하는 배경은 2010년과 2011년 북한이 우리 군의 훈련 기간을 틈타 GPS 교란 전파를 발사한 데 있다. 실제로 2010년 을지프리덤가디언 훈련 직후인 8월 23일부터 25일까지 전국 GPS 수신 및 감시국 29곳 가운데 서해안 일부 지역에서 전파 수신이 간헐적으로 중단됐다. 김태영 당시 국방장관은 이에 대해 국회 국방위 국정감사를 통해 “북한은 50~100㎞ 거리 내에서 GPS 수신 방해가 가능한 능력을 갖췄다.”고 밝혔다. 아울러 지난해 3월 4일 한·미 연합 ‘키리졸브’ 연습 당시에도 해주와 개성 지역 군부대에서 교란 전파를 발사해 서울과 인천·파주 등 수도권의 일부 휴대전화가 수신장애 현상을 일으킨 바 있다. 북한의 GPS 전파 교란 공격은 우리 군이 지난달 공개한 ‘현무3’ 순항미사일 등 첨단정밀무기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새로 개발한 GPS 교란 시스템을 실험하거나 항공기 운항 등에 피해를 줌으로써 사회적 혼란을 유발하기 위함으로 보인다. 신인균 자주국방네트워크 대표는 “북한에 있어 GPS 전파 교란능력은 안보적 사활이 걸린 문제”라며 “우리 군이 북한 전역을 타격할 수 있는 현무3 미사일을 공개하자 이에 대한 대응차원에서 시험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군 관계자는 “현재로서는 군의 피해가 밝혀진 바 없다.”고 말했다. 국토해양부 관계자도 “GPS 일부 이상에도 불구하고 우리 민항기가 닷새째 연착되거나 지연된 사례는 없다.”고 밝혔다. 강자영 한국항공대학교 교수는 “항공기에 대한 GPS 전파 교란은 항공기에 달린 수신기에 고유 주파수와 유사한 주파수를 발사해 혼란을 일으키는 방식”이라며 “민간용 신호를 사용하는 GPS 수신기는 교란에 약하나 군용 항공기가 사용하는 M코드 GPS 수신기는 안전하다.”고 밝혔다. 우리 군이 보유한 장비 중 F15, F16 전투기와 구축함급 이상의 함정들은 신형인 M코드 GPS수신기를 사용함으로써 전파교란 위협으로부터 비교적 안전한 편이다. 그러나 구형인 P코드 GPS 수신기를 사용하는 초등훈련기, 헬기 등은 여전히 취약한 것으로 알려져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 하종훈기자 artg@seoul.co.kr
  • 종교계 남북교류 ‘공든탑’ 흔들리나

    종교계 남북교류 ‘공든탑’ 흔들리나

    오는 28일 불기 2556년 ‘부처님오신날’ 남한에서 있을 것으로 기대를 모았던 남북 불교계의 공동 봉축법회가 무산됐다. 사상 첫 남한 내 남북 공동법회가 수포로 돌아간 것이다. 이에 따라 종교계의 남북교류가 급속히 경색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확산되고 있다. 1일 조계종 총무원과 불교계에 따르면 북한 조선불교도련맹(조불련)은 최근 조계종 민족공동체추진본부(민추본)에 팩스 전문을 보내 “현 정세하에서는 봉축행사 남측 방문과 금강산 신계사 봉축법회는 실현 불가능하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조불련은 “부처님오신날 봉축 남북공동발원문은 그대로 채택하기로 했다.”고 전해 남측 불교계와의 교류 여지는 남겨뒀다. ●조불련 “공동발원문은 그대로 채택” 이는 민추본이 지난 3월 19~20일 중국 선양의 남북 불교교류 실무회담에 이어 지난달 9일 팩스 전문을 통해 제안한 내용에 대한 조불련의 최종 답변인 셈. 최근 광명성 3호 발사와 북한 조선인민군 최고사령부 특별작전행동소조 성명 발표 등으로 남북관계가 악화된 데 따른 북측의 입장 전달이란 관측이 지배적이다. 불교계는 이를 놓고 그동안 잇따른 실무회담에서 남북 불교계가 동질성 회복을 위한 불교의례 통합사업에 공감했고 특히 조불련이 한글 반야심경 등 의례통합 부분에 적극적인 반응을 보였다며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로켓 발사로 남북관계 악화 방증 민추본은 이에 대해 “봉축행사를 계기로 남북 불교교류 활성화뿐만 아니라 민족의 화해와 남북관계 경색 해소에 적극 기여하고자 했다.”며 “이번 봉축행사에 조불련 대표단의 남측 방문이 실현되지 못해 아쉬움이 크지만 남북 불교교류 활성화와 민족 간의 화해와 평화를 위한 노력을 끊임없이 전개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 같은 북측의 입장이 알려지자 내년 세계교회협의회(WCC) 제10차 부산총회에 앞서 오는 28일∼6월 12일 ‘평화열차’ 시연행사를 가질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도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다. ‘평화열차’ 시연 행사는 WCC 부산총회에 참여하는 세계교회 지도자들과 젊은 청년들이 타고 올 평화열차의 구간을 사전 답사 형식으로 둘러보는 프로그램. 스위스 제네바를 출발해 독일 베를린, 러시아 모스크바, 이르쿠츠크, 중국 베이징까지 15일간 이동하는 이 행사를 위해 NCCK는 최근 북한 조선그리스도교연맹(조그련) 측에 평화열차의 평양 경유를 적극 검토해줄 것과 여의치 않을 경우 베이징 행사에 참여해 줄 것을 요청한 바 있다.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이례적으로 중앙보고대회만… 北 숨고르기?

    이례적으로 중앙보고대회만… 北 숨고르기?

    북한이 조선인민군 80주년 창건일인 25일, 예년보다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중앙보고대회만 치렀다. 최근 미사일 발사에 이어 대남 도발을 예고했던 북한이 한 박자 쉬어가는 모습을 보이면서 향후 움직임이 주목된다. 북 조선중앙통신은 이날 “김일성 동지께서 조선인민군을 창건하신 80돌이 되는 날을 경축하는 중앙보고대회가 평양 4·25문화회관에서 성대히 진행됐다.”고 전했다. 김정은 조선노동당 제1비서 겸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참석한 가운데 리영호 군 총참모장은 보고에서 ‘인민군대 강화’를 강조한 뒤 “우리 군대와 인민은 또 다시 우리 체제와 최고존엄을 중상모독하는 특대형 범죄행위를 감행하는 이명박 역적패당에 대한 치솟는 분노로 복수의 피를 끓이고 있다.”며 “역적패당의 아성을 짓뭉개버리는 우리 식의 보복성전을 벌여나감으로써 극악무도한 도발자들의 숨통을 끊어버리고 도발원점들을 흔적도 없이 죽탕쳐 버릴 것”이라고 밝혔다. 리 총참모장의 이 같은 발언은 최근 대남 비난·협박의 연장선상으로 보이지만 물리적 도발 징후는 나타나지 않았다. 조선중앙TV·방송, 평양방송 등은 오후 중앙보고대회를 1시간 동안 녹화방송했다. 80주년 창건일인 이른바 ‘꺾어지는 해’에 북한이 다른 행사 없이 보고대회만 치른 것은 이례적이다. 지난 15일 김일성 100회 생일에 맞춰 열병식을 앞당겨 치렀기 때문에, 다른 대규모 행사 없이 보고대회로 대신한 것으로 보인다. 정부 당국자는 “북한이 최근 대남 도발 등 협박 수위를 높인 뒤 움직임을 예의주시하고 있으나, 오늘 인민군 80주년 창건일에는 별다른 특이사항이 보이지 않았다.”며 “북한도 내부 정비를 하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미경기자 chaplin7@seoul.co.kr
  • 김정은, 군부 장악력 얼마나 되나

    김정은, 군부 장악력 얼마나 되나

    북한의 대남 비난 수위가 최고조로 치달으면서 이 같은 북한 군부의 호전성이 김정은의 군부 장악력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관심이 쏠린다. 전문가들은 대체로 김정은의 군 장악력이 취약하다는 방증이라는 데 무게를 두고 있다. 형식적인 권력 승계 작업은 모두 마무리했으나 부친 김정일만큼 실질적인 권력을 장악한 상태는 아님을 보여 주는 것으로, 북한 군부의 입김이 센 만큼 무력도발 가능성도 상대적으로 높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익명을 요구한 국책연구기관의 한 관계자는 24일 “북한의 이번 대남성명 발표는 은하 3호 발사 실패로 위상이 흔들리는 김정은이 우리 정부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취함으로써 군부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려는 측면이 크다.”면서 “이는 김정은의 군부 장악력이 떨어진다는 방증”이라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로켓 발사 실패에 책임이 있는 박도춘, 주규창, 백세봉 등 군수 부문 담당자들에 대한 책임을 묻지 못하는 것도 결국 김정은의 군사적 구심력이 취약하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강조했다. 유호열 고려대 북한학과 교수는 “북한의 도발 성명은 과도기적 권력 승계 체제에 접어든 불안정한 북한 지도부가 최고지도자의 개인신상에 대해 과잉보호를 한 것”이라며 “김정은이 아직 군부를 확고히 장악했다고 할 수 없다.”고 말했다. 장용석 서울대 평화통일연구원 선임연구원도 “북한 군부는 장군 한두 명을 바꾸는 문제가 아닌 집단적 이해관계로 봐야 한다.”며 “김정은이 측근인 최룡해를 인민군 총정치국장에 앉힌 것은 여전히 군 장악이 과제임을 보여 준다.” 고 말했다. 반면 류길재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는 “북한의 대남 강경 발언은 지난 2009년부터 꾸준히 나왔던 것”이라며 지금은 북한의 권력승계 과도기로 군부 등이 충성 경쟁 차원에서 강경일변도로 나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류 교수는 “군 경력이 일천한 최룡해가 인민군 총정치국장이 된 것은 장성택의 사람들로 김정은의 군 장악을 완성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하종훈기자 artg@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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