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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제의 거장… 태동의 감격

    어제의 거장… 태동의 감격

    올 한 해 국내 주요미술관과 주요 갤러리에서는 근대부터 동시대 전위예술까지, 회화부터 미디어 아트까지 각 장르와 시대를 대표하는 거장들의 전시회가 마련된다. 특히 광복·분단 70년을 맞아 그 역사적 의미를 예술적 시각으로 풀어 보는 특별기획전도 다양하게 펼쳐질 예정이다. 올해의 첫 번째 화두는 미디어·비디오 아트다. 우선 세계적인 미디어 아티스트 백남준을 새롭게 조명하는 전시 ‘W3-백남준’전이 소격동 학고재 갤러리에서 21일부터 시작된다. 백남준의 ‘금붕어를 위한 소나티네’를 비롯해 10점 내외의 작품이 전시된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는 오는 27일부터 5월 25일까지 2000년 위암으로 타계한 비디오 아티스트 박현기를 재조명하는 회고전이 열린다. 한국을 기반으로 활동한 1세대 비디오아티스트스로 최근 재평가받고 있는 그가 비디오라는 기술로 표현한 동양적 정신문화를 감상할 수 있다. 국립현대미술관은 3300㎡에 달하는 원형전시실을 ‘만다라 시리즈’ 등 그의 대표 작품으로 채울 계획이다. 2012년 기증된 그의 아카이브 2만 점을 정리해 최초로 공개하는 자리다. 백남준의 제자로 지난해 파리 그랑팔레에서 대규모 회고전이 열린 비디오 아트의 거장 빌 비올라(1951~)의 개인전도 3월 소격동 국제갤러리에서 열린다. 광복·분단 70년 기획전시도 풍성하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선 한때 월북화가라는 낙인이 찍혀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던 근대 회화의 거장 이쾌대(1913~1965)의 대규모 회고전이 열린다. 휘문고보 시절인 1932년 조선미술전람회전에 입선했고 이중섭 등과 조선신미술가협회를 결성해 활동했던 이쾌대는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 종군화가로 참여했다가 포로가 됐고 포로교환 때 월북했다. 이번 전시에서는 88서울올림픽을 앞두고 해금될 때까지 그의 가족들이 간직해 온 초기 습작과 드로잉, 스케치부터 한국전쟁 포로수용소 시절까지 대표작과 유품, 사신, 제국미술학교 시절의 자료 등을 감상할 수 있다. 유화 60여점, 스케치 및 드로잉 350점 등 이쾌대의 작품을 망라한다. 서울시립미술관에서 7월 21일부터 9월 27일까지 열리는 ‘분단 70년 주제전:북한 프로젝트’는 국내외 작가들의 북한에 대한 예술적 상상력을 집대성한 대규모 전시로 기대를 모은다. 분단의 상징인 비무장지대(DMZ) 접경지역에 대한 연구를 바탕으로 진행하는 아트선재센터의 ‘리얼 디엠지 프로젝트’도 8월 29일부터 10월 4일까지 열린다. 국립현대미술관은 광복 70주년을 맞아 야심 차게 준비한 ‘한국 포스트모던 미술전’을 7~9월 서울관에서 갖는다. 1990년 이후 휘트니비엔날레 서울전, 젊은 모색전 등을 통해 유입된 포스트 모던 경향이 한국 동시대 미술의 다양성과 실험성, 탈장르와 융합 등의 흐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살펴보는 자리다. 삼성미술관 리움은 전통과 현대를 아우르는 전시를 마련한다.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는 설치작가 양혜규의 대규모 개인전(3월)에 이어 7∼9월 한국 미술의 정수 가운데 세밀한 특징이 있는 작품으로 ‘세밀가귀(細密可貴) 한국미술의 품격’전을 준비해 아미타삼존도, 청동은입사 보상당초봉황문합 등을 전시한다. 11월에는 한국의 대표적 문화유산인 전통건축을 사진, 영상, 모형 등으로 재해석하는 ‘한국전통건축예찬’전을 연다. 젊은이들의 감각과 취향에 맞는 전시를 이어 온 대림미술관은 7월 패션과 예술의 영역을 넘나드는 덴마크 출신의 괴짜 디자이너 헨릭 빕스코브의 한국 첫 전시회를 연다.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는 비서구권 작가들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전시회도 여럿 마련된다. 멕시코 출신의 개념미술가 아브라함 크루즈비예가스의 개인전이 4월 18일부터 8월 2일까지 소격동 아트선재센터에서 펼쳐진다. 인도 출신 탈루, 필리핀 민중화가 레슬리 드 차베스의 전시도 소격동 아라리오갤러리 서울에서 상반기에 마련된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으로 철학·문학·영화·연극·오페라 분야에서 조형적 실험을 펼쳐온 윌리엄 켄트리지 회고전이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린다. 청담동 송은아트스페이스에서는 4~6월 국제적으로 주목받는 인도네시아 여성작가 크리스틴아이추의 국내 첫 개인전을 연다. 한편 5월 9일 개막하는 베니스 비엔날레에서는 영국 테이트미술관에서 큐레이터로 일하는 이숙경씨가 한국관 커미셔너를 맡아 대표작가로 선정된 전준호·문경원의 작품을 선보인다. 함혜리 선임기자 lotus@seoul.co.kr
  • [이일우의 밀리터리 talk] 독재자 암살 가능할까... ‘인터뷰’ 계기로 본 역사속 작전들

    [이일우의 밀리터리 talk] 독재자 암살 가능할까... ‘인터뷰’ 계기로 본 역사속 작전들

    미국과 북한의 치열한 사이버 공방까지 낳게 만들었던 미국 소니 픽처스의 코미디 영화 '인터뷰'가 미국 전역의 320개 독립 영화관에서 개봉과 동시에 매진 사례를 이어가면서 돌풍을 예고하고 있다. 김정은 암살을 소재로 한 이 영화는 북한의 강력 반발과 해킹 사건 등으로 인해 영화 제작사가 상영을 포기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개봉과 함께 관객들의 뜨거운 호응을 받으면서 흥행에 성공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사실 독재국가의 지도자를 암살한다는 주제는 B급 코미디 영화의 소재로 쓰기에는 너무 무거운 주제이고, 과거 개봉되었던 암살 영화들을 보면 당대의 정치 상황을 반영한 역사극이거나 특수부대와 같은 히어로가 등장하는 액션 영화였던 경우가 많았지만, '인터뷰'는 세계 최악의 독재국가의 어린 지도자를 암살하는 스토리를 코미디로 풀어냈다. 이 영화는 코미디 영화답게 관객들이 시종일관 폭소를 터트릴만한 장면들이 자주 나오고, 결말 역시 김정은이 헬기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다 우스꽝스럽게 죽는 장면이 연출되었지만, 영화 속에서나 실제 역사에서나 ‘독재자 암살’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카스트로를 죽이는 638가지 방법 역사상 가장 오랜 기간, 가장 많은 방법으로 시도되었던 암살 시도는 미국 CIA(Central Intelligence Agency)가 195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무려 4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알려진 것만 638가지 방법으로 시도했던 쿠바의 독재자 피델 카스트로(Fidel Castro) 암살 작전이었다. 1958년 플로리다 해안에서 불과 180km 떨어진 곳에 들어선 공산국가는 미국 입장에서는 눈엣가시와 같은 존재였고, 1962년에 있었던 쿠바 핵미사일 위기는 미국으로 하여금 쿠바의 공산 독재 지도자 카스트로를 어떻게 해서든 제거해야 한다는 신념을 갖게 만들었다. 미국은 1958년 쿠바 공산혁명 직후 쿠바를 탈출한 1,500여 명의 망명자들을 모아 ‘제2506여단’이라는 부대를 창설, 이 부대를 동원해 쿠바 침공을 감행했지만, 부대원들이 몇 달 전부터 작전 내용을 떠벌리고 다니는 등 형편없는 보안 유지로 인해 상륙과 동시에 대부분 전멸하고 상당수가 포로로 잡히는 참담한 실패를 맛보아야 했다. 쿠바 배후의 소련, 그리고 국제사회의 비난 때문에 군사력 동원을 통한 카스트로 공산정권 축출이 어렵다는 결론을 내린 미국은 카스트로를 암살해 버리기로 결심하고 여러 방법을 동원했는데 그 방법은 참신하다 못해 기상천외했다. 20년 넘게 쿠바 정보기관의 수장으로 활약했던 파비안 에스칼란테(Fabian Escalante)는 지난 2006년 펴낸 '카스트로를 죽이는 638가지 방법'이라는 저서에서 미국 CIA에 의해 자행된 카스트로 암살 시도는 무려 638회에 달했고, 여기에는 단순한 방법부터 최첨단 장비를 이용한 시도까지 그 종류도 다양했다고 전했다. 애연가였던 카스트로의 시가(Cigar) 담배에 미량의 폭약을 넣는 방법은 애교에 불과했다. 스쿠버 다이빙 애호가였던 카스트로의 취미 생활을 이용해 해파리 등 수중 연체동물의 촉수에 독을 발라 카리브 해에 풀어놓는가 하면, 카스트로가 자주 다이빙을 즐기는 지역에 알록달록한 조개 모양의 폭발물을 설치하기도 했다. 카스트로가 해외 순방에 나서면 호텔 직원을 포섭하거나 직접 암살요원을 보내 음료에 독을 타거나 소파에 폭발물을 숨겨 놓기도 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CIA가 벌였던 카스트로 암살작전 가운데 가장 드라마틱한 작전은 바로 카스트로의 옛 애인이 동원되었던 작전이었다. 19세의 나이에 카스트로를 처음 만나 9개월 간 동거하며 카스트로의 아이까지 임신했던 마리타 로렌츠(Marita Lorenz)는 누군가에 의해 납치되어 강제로 낙태를 당했고, 카스트로와 강제로 이별해야 했다. CIA는 카스트로에게 상처 받고 버림받아 복수심에 불타 있을 로렌츠가 암살 작전에 더할나위없이 제격이라고 판단하고, 암살 작전에 성공하면 안전 보장과 함께 200만 달러를 현찰로 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로렌츠는 카스트로가 머물던 아바나 호텔방에 들어서자마자 CIA가 준 독약캡슐을 버리고 카스트로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 놓았다. 카스트로는 로렌츠에게 권총을 쥐어주며 자신을 쏘라고 했지만, 로렌츠는 카스트로를 차마 쏘지 못했고, 결국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카스트로는 로렌츠를 처벌하지 않고 미국으로 돌려보냈는데, 아이러니한 것은 미국으로 돌아간 로렌츠가 그 이후에도 반(反) 카스트로 활동을 이어갔다는 것이다. 결국 40년에 걸친 미국의 카스트로 암살 시도는 모두 실패했고, 피델 카스트로는 동생인 라울 카스트로에게 권좌를 이양하고 물러나 편안한 여생을 살고 있다.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작전명 : 발키리 성공했다면 세계사를 바꿀 뻔 했지만, 나무 테이블 하나 때문에 실패해 5,000여 명이 반역자로 몰려 처형당한 ‘발키리 작전’ 역시 유명한 암살 시도 가운데 하나였다. 오래 전부터 나치의 군 장악에 강한 불만을 품고 있던 독일 국방군의 프로이센 귀족 출신 장교들은 1944년 6월 연합군이 노르망디에 상륙하면서 패색이 짙어지자 히틀러 암살과 나치 체제 전복을 위한 쿠데타 계획을 수립했다. 독일군은 물론 국민들에게도 깊은 신망을 받고 있던 루트비히 베크(Ludwig Beck) 대장 등 고위 장교들이 가담한 이 암살 및 쿠데타 계획의 내용은 단순했다. 폭탄을 이용해 히틀러를 제거하면, 국방군이 장악하고 있던 예비군조직을 이용해 베를린과 독일 각지의 주요 시설을 점거하고, 나치에 충성하는 경찰과 친위대 조직을 제압한 뒤 베크 대장을 임시 수반으로 추대하고 연합군과 항복 협상에 나선다는 것이었다. 가장 위험한 암살 임무는 국방군본부 예비군 참모였던 슈타우펜베르크(Stauffenberg) 대령이 맡았다.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은 라슈텐부르크에 있는 히틀러의 비밀 지휘소였던 ‘늑대굴(Wolfschanze)'에서 히틀러가 주재한 전시 작전회의에 예비군 동원 계획을 보고하기 위해 참석했는데, 이 늑대굴에는 아무리 고위장교라도 무기 등 금속을 휴대하고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에 그는 액체와 플라스틱을 이용한 폭탄을 휴대하고 회의장에 들어갔다. 이 폭탄은 연합군이 프랑스에 있는 레지스탕스에 공급하기 위해 제작한 특수 폭탄이었다. 플라스틱 시험관 안에 들어있는 캡슐을 깨뜨리면 시한신관이 작동하면서 정확히 10분 후에 폭발하는 구조였다. 슈타우펜베르크는 회의장에 다소 늦게 들어가 작전 테이블 아래에 폭탄가방을 내려놓았고, 발을 뻗어 다른 참석자들 몰래 그 가방을 히틀러 발 앞에까지 밀어 넣고 회의장을 빠져나오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히틀러의 전속부관인 하인츠 브란트(Heinz Brandt) 대령이 그 가방을 발견하고 거추장스러운 가방을 히틀러가 발견하면 싫어할 것이라고 판단하고 그 가방을 옆으로 치우면서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잠시 뒤 폭탄이 터지면서 지붕이 날아가고 창문이 깨지는 등 회의장은 아수라장이 됐다. 폭탄을 자기 쪽으로 치웠던 브란트 대령 등 3명이 즉사하고 참석자들 상당수가 중상을 입었으며, 히틀러 역시 고막이 터지고 팔과 다리에 나무 파편이 박히는 등 상당한 부상을 입었지만, 죽지는 않았던 것이다. 마침 폭탄이 터질 때 히틀러가 작전지도를 자세히 보기 위해 테이블 깊숙이 몸을 숙인 상태였고, 두꺼운 참나무 테이블이 폭발의 충격을 상당부분 막아주면서 히틀러는 크게 다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다. 반나치 조직은 사건 직후 병력을 동원해 친위대 사령부를 포위하고, 예비군 사령관이었던 프롬 대장에게 병력을 출동시켜 쿠데타에 가담할 것을 요구했으나, 그날 오후 히틀러가 자신의 건재함을 발표하자마자 반란군에 대규모 이탈자가 생기기 시작했고, 결국 반란은 실패로 돌아갔다. 사건 직후 히틀러는 친위대와 게슈타포를 총동원해 가담자 색출에 나섰고, 약 7,000여 명이 체포되고 그 중 5,000여 명이 처형당했는데, 이 가운데는 반란에 가담하지 않았음에도 반란 세력으로 몰려 강제 자살로 내몰린 에르빈 롬멜(Erwin J.E. Rommel) 장군도 있었다. 실제로 있었던 김정일 암살 미수 사건 최근 김정은이 주관한 행사장에서 몰래 숨겨 놓은 기관총이 발견되어 관계자가 숙청당했다는 소식처럼 김정은 일가에 대한 위해 시도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 같은 시도는 정보기관과 대규모 경호부대를 통해 자신의 주변에 수십 겹의 안전장치를 깔아 놓은 김씨 일가의 조심성 때문에 그동안 단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었을 뿐이었다. 김씨 일가에 대한 암살 모의 사건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사건은 1992년에 있었던 ‘프룬제 아카데미아 사건’이다. ‘프룬제 아카데미아’란 우리나라의 합동군사대학교와 비슷한 개념의 고급장교 보수교육 기관으로 냉전 시절 소련의 위성국이나 공산국가들의 고급 장교들이 가장 많이 유학했던 교육기관이다. 북한은 현대전에 대비하기 위한 정예 장교를 육성을 목적으로 1980년대 초부터 소련 각 학교기관에 대규모 유학생을 파견했는데, 이들 유학생들은 소련 정보기관 KGB의 최우선 포섭대상이 됐다. 당시만 하더라도 북한이 중국과 소련 사이에서 적당히 ‘밀고 당기기’를 하면서 최대한의 실리를 챙겨는 노선을 취하고 있었기 때문에 소련 입장에서는 북한을 확실히 옭아매기 위한 조치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유학 장교들은 유학 장교들 나름대로 유학 생활을 통해 큰 충격에 빠져 있었다. 그들은 흐루시초프 이후 자유로운 상호 비판과 권력 이동이 이루어지는 소련 체제에 큰 충격을 받았고, 무엇보다 세습적 봉건왕조화 되어가던 북한을 이대로 두면 동구권 국가들처럼 붕괴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다. 이들은 총참모부 부총참모장 안종호 상장을 중심으로 결집했다. 혁명유자녀만 들어갈 수 있다는 만경봉대학원과 남산학교를 거쳐 프룬제 아카데미아에서 수학한 안 상장(한국군 중장 계급에 해당)을 중심으로 결집한 프룬제 출신 장교들은 1992년 4월 25일 조선인민군 창건 60주년 기념 행사에서 김일성과 김정일을 암살하고 쿠데타를 일으키기로 모의하고 준비 작업에 착수했다. 거사는 평양방어사령부 예하 전차부대 지휘관을 맡고 있었던 김일훈 소장(한국군 준장 계급에 해당)이 맡기로 했다. 인민군 창건 기념 열병식에서 김일성 광장을 가로지르는 전차부대가 김일성 부자가 위치한 인민대학습당 주석단 정면을 통과할 때 포탑을 돌려 전차포로 주석단을 날려버리겠다는 것이 이들의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계획은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빗나갔다. 열병식에 자신의 부대인 제820기계화군단을 내보내 김정일에게 눈도장을 찍겠다는 박기서 상장이 인민무력부에 압력을 넣어 열병식 참가 전차를 평양방어사령부가 아닌 820군단 전차로 바꿔버렸기 때문이었다. 거사 직후 뒤를 봐주기로 약속했던 KGB의 배신 역시 치명적이었다. 김일성과 치열한 권력 암투를 벌이던 김정일에게 접근한 KGB는 “1,000만 달러를 주면 프룬제 아카데미아 유학파 가운데 소련에 포섭된 자와 반란 모의에 가담한 자의 명단을 넘겨주겠다”고 제안했고, 김정일이 이를 수용하면서 암살 계획 전모가 드러났던 것이다. 이후 소련 유학파, 특히 프룬제 아카데미아 출신 고위 장교들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이 이어졌고, 노동당과 내각, 군부 내에서 소련 유학파들은 자취를 감추었고, 국내파들이 득세하면서 김정일 시대는 ‘철저한 자주노선’의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 철썩 같이 믿고 있었던 엘리트 장교들이 가담한 암살 모의 사건에 경악한 김정일은 이후 보위사령부와 호위사령부를 확대 개편해 친정 체제를 강화하고, 평양을 철통같은 보안이 유지되는 철옹성으로 바꾸어 놓았다. 김정은 역시 아버지를 이어 자신의 최측근으로 보위사령부와 호위사령부를 장악하고 세계 최대 수준의 경호 부대를 만들어 자신의 주변을 24시간 지키게 하고 있다. 그러나 김정은은 무작정 경호원을 늘리는 것보다 자신의 곁을 지키는 그 군인들도 본질적으로는 북한의 인민이며, 폭정(暴政)이 계속되어 인민들의 한(恨)이 쌓이면 자신의 경호원들의 총구가 자신을 향할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하지 않을까? 이일우 군사 통신원(자주국방네트워크 사무국장)
  • [기획] 영화 ‘인터뷰’를 통해 본 김정일·카스트로·히틀러 암살 사건

    [기획] 영화 ‘인터뷰’를 통해 본 김정일·카스트로·히틀러 암살 사건

    미국과 북한의 치열한 사이버 공방까지 낳게 만들었던 미국 소니 픽처스의 코미디 영화 '인터뷰'가 미국 전역의 320개 독립 영화관에서 개봉과 동시에 매진 사례를 이어가면서 돌풍을 예고하고 있다. 김정은 암살을 소재로 한 이 영화는 북한의 강력 반발과 해킹 사건 등으로 인해 영화 제작사가 상영을 포기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개봉과 함께 관객들의 뜨거운 호응을 받으면서 흥행에 성공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사실 독재국가의 지도자를 암살한다는 주제는 B급 코미디 영화의 소재로 쓰기에는 너무 무거운 주제이고, 과거 개봉되었던 암살 영화들을 보면 당대의 정치 상황을 반영한 역사극이거나 특수부대와 같은 히어로가 등장하는 액션 영화였던 경우가 많았지만, '인터뷰'는 세계 최악의 독재국가의 어린 지도자를 암살하는 스토리를 코미디로 풀어냈다. 이 영화는 코미디 영화답게 관객들이 시종일관 폭소를 터트릴만한 장면들이 자주 나오고, 결말 역시 김정은이 헬기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다 우스꽝스럽게 죽는 장면이 연출되었지만, 영화 속에서나 실제 역사에서나 ‘독재자 암살’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카스트로를 죽이는 638가지 방법 역사상 가장 오랜 기간, 가장 많은 방법으로 시도되었던 암살 시도는 미국 CIA(Central Intelligence Agency)가 195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무려 4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알려진 것만 638가지 방법으로 시도했던 쿠바의 독재자 피델 카스트로(Fidel Castro) 암살 작전이었다. 1958년 플로리다 해안에서 불과 180km 떨어진 곳에 들어선 공산국가는 미국 입장에서는 눈엣가시와 같은 존재였고, 1962년에 있었던 쿠바 핵미사일 위기는 미국으로 하여금 쿠바의 공산 독재 지도자 카스트로를 어떻게 해서든 제거해야 한다는 신념을 갖게 만들었다. 미국은 1958년 쿠바 공산혁명 직후 쿠바를 탈출한 1,500여 명의 망명자들을 모아 ‘제2506여단’이라는 부대를 창설, 이 부대를 동원해 쿠바 침공을 감행했지만, 부대원들이 몇 달 전부터 작전 내용을 떠벌리고 다니는 등 형편없는 보안 유지로 인해 상륙과 동시에 대부분 전멸하고 상당수가 포로로 잡히는 참담한 실패를 맛보아야 했다. 쿠바 배후의 소련, 그리고 국제사회의 비난 때문에 군사력 동원을 통한 카스트로 공산정권 축출이 어렵다는 결론을 내린 미국은 카스트로를 암살해 버리기로 결심하고 여러 방법을 동원했는데 그 방법은 참신하다 못해 기상천외했다. 20년 넘게 쿠바 정보기관의 수장으로 활약했던 파비안 에스칼란테(Fabian Escalante)는 지난 2006년 펴낸 '카스트로를 죽이는 638가지 방법'이라는 저서에서 미국 CIA에 의해 자행된 카스트로 암살 시도는 무려 638회에 달했고, 여기에는 단순한 방법부터 최첨단 장비를 이용한 시도까지 그 종류도 다양했다고 전했다. 애연가였던 카스트로의 시가(Cigar) 담배에 미량의 폭약을 넣는 방법은 애교에 불과했다. 스쿠버 다이빙 애호가였던 카스트로의 취미 생활을 이용해 해파리 등 수중 연체동물의 촉수에 독을 발라 카리브 해에 풀어놓는가 하면, 카스트로가 자주 다이빙을 즐기는 지역에 알록달록한 조개 모양의 폭발물을 설치하기도 했다. 카스트로가 해외 순방에 나서면 호텔 직원을 포섭하거나 직접 암살요원을 보내 음료에 독을 타거나 소파에 폭발물을 숨겨 놓기도 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CIA가 벌였던 카스트로 암살작전 가운데 가장 드라마틱한 작전은 바로 카스트로의 옛 애인이 동원되었던 작전이었다. 19세의 나이에 카스트로를 처음 만나 9개월 간 동거하며 카스트로의 아이까지 임신했던 마리타 로렌츠(Marita Lorenz)는 누군가에 의해 납치되어 강제로 낙태를 당했고, 카스트로와 강제로 이별해야 했다. CIA는 카스트로에게 상처 받고 버림받아 복수심에 불타 있을 로렌츠가 암살 작전에 더할나위없이 제격이라고 판단하고, 암살 작전에 성공하면 안전 보장과 함께 200만 달러를 현찰로 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로렌츠는 카스트로가 머물던 아바나 호텔방에 들어서자마자 CIA가 준 독약캡슐을 버리고 카스트로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 놓았다. 카스트로는 로렌츠에게 권총을 쥐어주며 자신을 쏘라고 했지만, 로렌츠는 카스트로를 차마 쏘지 못했고, 결국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카스트로는 로렌츠를 처벌하지 않고 미국으로 돌려보냈는데, 아이러니한 것은 미국으로 돌아간 로렌츠가 그 이후에도 반(反) 카스트로 활동을 이어갔다는 것이다. 결국 40년에 걸친 미국의 카스트로 암살 시도는 모두 실패했고, 피델 카스트로는 동생인 라울 카스트로에게 권좌를 이양하고 물러나 편안한 여생을 살고 있다.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작전명 : 발키리 성공했다면 세계사를 바꿀 뻔 했지만, 나무 테이블 하나 때문에 실패해 5,000여 명이 반역자로 몰려 처형당한 ‘발키리 작전’ 역시 유명한 암살 시도 가운데 하나였다. 오래 전부터 나치의 군 장악에 강한 불만을 품고 있던 독일 국방군의 프로이센 귀족 출신 장교들은 1944년 6월 연합군이 노르망디에 상륙하면서 패색이 짙어지자 히틀러 암살과 나치 체제 전복을 위한 쿠데타 계획을 수립했다. 독일군은 물론 국민들에게도 깊은 신망을 받고 있던 루트비히 베크(Ludwig Beck) 대장 등 고위 장교들이 가담한 이 암살 및 쿠데타 계획의 내용은 단순했다. 폭탄을 이용해 히틀러를 제거하면, 국방군이 장악하고 있던 예비군조직을 이용해 베를린과 독일 각지의 주요 시설을 점거하고, 나치에 충성하는 경찰과 친위대 조직을 제압한 뒤 베크 대장을 임시 수반으로 추대하고 연합군과 항복 협상에 나선다는 것이었다. 가장 위험한 암살 임무는 국방군본부 예비군 참모였던 슈타우펜베르크(Stauffenberg) 대령이 맡았다.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은 라슈텐부르크에 있는 히틀러의 비밀 지휘소였던 ‘늑대굴(Wolfschanze)'에서 히틀러가 주재한 전시 작전회의에 예비군 동원 계획을 보고하기 위해 참석했는데, 이 늑대굴에는 아무리 고위장교라도 무기 등 금속을 휴대하고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에 그는 액체와 플라스틱을 이용한 폭탄을 휴대하고 회의장에 들어갔다. 이 폭탄은 연합군이 프랑스에 있는 레지스탕스에 공급하기 위해 제작한 특수 폭탄이었다. 플라스틱 시험관 안에 들어있는 캡슐을 깨뜨리면 시한신관이 작동하면서 정확히 10분 후에 폭발하는 구조였다. 슈타우펜베르크는 회의장에 다소 늦게 들어가 작전 테이블 아래에 폭탄가방을 내려놓았고, 발을 뻗어 다른 참석자들 몰래 그 가방을 히틀러 발 앞에까지 밀어 넣고 회의장을 빠져나오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히틀러의 전속부관인 하인츠 브란트(Heinz Brandt) 대령이 그 가방을 발견하고 거추장스러운 가방을 히틀러가 발견하면 싫어할 것이라고 판단하고 그 가방을 옆으로 치우면서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잠시 뒤 폭탄이 터지면서 지붕이 날아가고 창문이 깨지는 등 회의장은 아수라장이 됐다. 폭탄을 자기 쪽으로 치웠던 브란트 대령 등 3명이 즉사하고 참석자들 상당수가 중상을 입었으며, 히틀러 역시 고막이 터지고 팔과 다리에 나무 파편이 박히는 등 상당한 부상을 입었지만, 죽지는 않았던 것이다. 마침 폭탄이 터질 때 히틀러가 작전지도를 자세히 보기 위해 테이블 깊숙이 몸을 숙인 상태였고, 두꺼운 참나무 테이블이 폭발의 충격을 상당부분 막아주면서 히틀러는 크게 다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다. 반나치 조직은 사건 직후 병력을 동원해 친위대 사령부를 포위하고, 예비군 사령관이었던 프롬 대장에게 병력을 출동시켜 쿠데타에 가담할 것을 요구했으나, 그날 오후 히틀러가 자신의 건재함을 발표하자마자 반란군에 대규모 이탈자가 생기기 시작했고, 결국 반란은 실패로 돌아갔다. 사건 직후 히틀러는 친위대와 게슈타포를 총동원해 가담자 색출에 나섰고, 약 7,000여 명이 체포되고 그 중 5,000여 명이 처형당했는데, 이 가운데는 반란에 가담하지 않았음에도 반란 세력으로 몰려 강제 자살로 내몰린 에르빈 롬멜(Erwin J.E. Rommel) 장군도 있었다. 실제로 있었던 김정일 암살 미수 사건 최근 김정은이 주관한 행사장에서 몰래 숨겨 놓은 기관총이 발견되어 관계자가 숙청당했다는 소식처럼 김정은 일가에 대한 위해 시도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 같은 시도는 정보기관과 대규모 경호부대를 통해 자신의 주변에 수십 겹의 안전장치를 깔아 놓은 김씨 일가의 조심성 때문에 그동안 단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었을 뿐이었다. 김씨 일가에 대한 암살 모의 사건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사건은 1992년에 있었던 ‘프룬제 아카데미아 사건’이다. ‘프룬제 아카데미아’란 우리나라의 합동군사대학교와 비슷한 개념의 고급장교 보수교육 기관으로 냉전 시절 소련의 위성국이나 공산국가들의 고급 장교들이 가장 많이 유학했던 교육기관이다. 북한은 현대전에 대비하기 위한 정예 장교를 육성을 목적으로 1980년대 초부터 소련 각 학교기관에 대규모 유학생을 파견했는데, 이들 유학생들은 소련 정보기관 KGB의 최우선 포섭대상이 됐다. 당시만 하더라도 북한이 중국과 소련 사이에서 적당히 ‘밀고 당기기’를 하면서 최대한의 실리를 챙겨는 노선을 취하고 있었기 때문에 소련 입장에서는 북한을 확실히 옭아매기 위한 조치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유학 장교들은 유학 장교들 나름대로 유학 생활을 통해 큰 충격에 빠져 있었다. 그들은 흐루시초프 이후 자유로운 상호 비판과 권력 이동이 이루어지는 소련 체제에 큰 충격을 받았고, 무엇보다 세습적 봉건왕조화 되어가던 북한을 이대로 두면 동구권 국가들처럼 붕괴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다. 이들은 총참모부 부총참모장 안종호 상장을 중심으로 결집했다. 혁명유자녀만 들어갈 수 있다는 만경봉대학원과 남산학교를 거쳐 프룬제 아카데미아에서 수학한 안 상장(한국군 중장 계급에 해당)을 중심으로 결집한 프룬제 출신 장교들은 1992년 4월 25일 조선인민군 창건 60주년 기념 행사에서 김일성과 김정일을 암살하고 쿠데타를 일으키기로 모의하고 준비 작업에 착수했다. 거사는 평양방어사령부 예하 전차부대 지휘관을 맡고 있었던 김일훈 소장(한국군 준장 계급에 해당)이 맡기로 했다. 인민군 창건 기념 열병식에서 김일성 광장을 가로지르는 전차부대가 김일성 부자가 위치한 인민대학습당 주석단 정면을 통과할 때 포탑을 돌려 전차포로 주석단을 날려버리겠다는 것이 이들의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계획은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빗나갔다. 열병식에 자신의 부대인 제820기계화군단을 내보내 김정일에게 눈도장을 찍겠다는 박기서 상장이 인민무력부에 압력을 넣어 열병식 참가 전차를 평양방어사령부가 아닌 820군단 전차로 바꿔버렸기 때문이었다. 거사 직후 뒤를 봐주기로 약속했던 KGB의 배신 역시 치명적이었다. 김일성과 치열한 권력 암투를 벌이던 김정일에게 접근한 KGB는 “1,000만 달러를 주면 프룬제 아카데미아 유학파 가운데 소련에 포섭된 자와 반란 모의에 가담한 자의 명단을 넘겨주겠다”고 제안했고, 김정일이 이를 수용하면서 암살 계획 전모가 드러났던 것이다. 이후 소련 유학파, 특히 프룬제 아카데미아 출신 고위 장교들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이 이어졌고, 노동당과 내각, 군부 내에서 소련 유학파들은 자취를 감추었고, 국내파들이 득세하면서 김정일 시대는 ‘철저한 자주노선’의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 철썩 같이 믿고 있었던 엘리트 장교들이 가담한 암살 모의 사건에 경악한 김정일은 이후 보위사령부와 호위사령부를 확대 개편해 친정 체제를 강화하고, 평양을 철통같은 보안이 유지되는 철옹성으로 바꾸어 놓았다. 김정은 역시 아버지를 이어 자신의 최측근으로 보위사령부와 호위사령부를 장악하고 세계 최대 수준의 경호 부대를 만들어 자신의 주변을 24시간 지키게 하고 있다. 그러나 김정은은 무작정 경호원을 늘리는 것보다 자신의 곁을 지키는 그 군인들도 본질적으로는 북한의 인민이며, 폭정(暴政)이 계속되어 인민들의 한(恨)이 쌓이면 자신의 경호원들의 총구가 자신을 향할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하지 않을까? 이일우 군사 통신원(자주국방네트워크 사무국장)
  • [사설] 김정은의 북한 3년… 핵포기·개방이 살 길

    오늘로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3주기를 맞았다. 북한 당국이 연일 추모 분위기를 고조시켜 온 것은 김정은 노동당 제1비서 중심으로 체제 결속을 다지려는 수순일 게다. 그러나 사회주의권에서도 유례없는 3대 권력세습은 겉보기엔 공고한 듯하지만 장기적으로 불안 요인을 잉태하고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시각이다. 우리는 북한의 이런 불확실성은 국제적 고립을 자초한 핵개발 등 퇴행적 노선을 포기할 때만 해소될 수 있다고 본다. 조선중앙통신은 엊그제 김정은 집권 이후 주요 업적으로 그의 고모부인 장성택 전 노동당 행정부장 처형을 꼽았다. 이는 상식 선에서 보면 블랙 코미디일 게다. 하지만 김정은이 세습 3년 만에 무소불위의 1인 체제를 굳혀 가고 있는 징표로도 해석된다. 리영호 인민군 총참모장 등 아버지 시절 실세들을 숙청하고 고위 군간부들의 계급을 뗐다 붙였다 하며 길들이기에 골몰하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 징후다. 그럼에도 김정은 체제가 이제 확고한 반석 위에 자리 잡았다고 보기도 어렵다. 공포정치로 마취된 권력 안정은 이른바 ‘묘지 위의 평화’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북을 상대하는 우리가 선군(先軍)주의와 선당(先黨)주의를 오가며 곡예를 벌이고 있는 김정은의 행보를 주시해야 할 이유다. 무엇보다 북 주민들의 삶은 여전히 피폐하기 짝이 없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어제 통계청이 발표한 ‘북한 주요 통계지표’를 보라. 지난해 남북 경제력 격차는 국민총소득(GNI) 기준으로 42.6배차, 무역액으로는 146배차였다. 1인당 GNI 역시 한국이 2870만원인데 비해 북한은 138만원에 불과했다. 북한 정권은 북한 주민이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는 데 필요한 기본적 수요도 충족시키지 못한다는 얘기다. 다만 김정은 체제에서 북한 경제가 미미하나마 성장하고 있다는 관측도 있다. 한국은행은 2010년 마이너스 성장이던 북한이 2013년에는 1.3% 성장률을 기록한 것으로 추계했다. 그러나 이는 김정은의 치적이라기보다 북한식 사회주의경제의 파탄이 부른 역설일 뿐이다. 북의 배급체계가 마비됐을 때 ‘북한판 시장경제’인 장마당이 번성하면서 주민생활은 외려 호전된 사례라는 것이다. 북한이 살 길은 대내적으로는 인센티브제와 경제의 자유를 확대하는 등 체제를 개혁하는 일이다. 그 연장선상에서 마식령 스키장, 문수 물놀이장 등 그간 추진해 온 전시성 사업들 대신 주민생활 개선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대외적으로는 문호를 더 열어야 한다. 김정은의 핵·경제 병진 노선은 그래서 어불성설이다. 압록강 하구의 북한 황금평 경제특구에 중국 자본 유치 실적이 ‘제로’라는 사실은 뭘 말하나. 북이 몇 차례 핵실험과 장거리 미사일 발사를 감행하자 ‘혈맹’이었던 중국마저 고개를 돌린 결과가 아닌가. 우리 또한 북의 불가측성에 합리적으로 대비해야 한다. 만일의 북의 급변 사태에도 기민하게 대처해야겠지만, 그 이전에 북한 정권을 연착륙시키는 게 더 바람직할 게다. 그러려면 체제 유지를 위해 몸을 사리며 개혁·개방에 소극적인 세습정권의 한계를 직시해야 한다. 인내심을 갖고 점진적 개혁·개방을 유도해야 한다는 뜻이다. 북이 핵개발 포기를 명시적으로 선언하기 전에라도 내년엔 남북 간 이견이 적고 윈·윈이 될 수 있는 교류협력사업부터 단계적으로 실시하는 방안을 제안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 北, 리병철 공군사령관 黨요직 발탁

    北, 리병철 공군사령관 黨요직 발탁

    북한 인민군 공군사령관인 리병철 대장이 노동당의 요직으로 자리를 옮긴 것으로 8일 확인됐다. 북한이 김정은 시대 들어와 공군을 중시하는 가운데 군에 대한 당의 장악력을 높이기 위한 것으로 풀이된다. 조선중앙통신은 이날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조선인민군 항공 및 반항공군 제458군부대를 시찰했다”고 보도하면서 수행자 중 리병철을 ‘노동당 중앙위원회 책임일꾼’으로 호명했다. 통신은 리병철 대신 김 제1위원장을 영접한 신임 ‘항공 및 반항공군 사령관’은 최영호 중장(한국의 소장에 해당)이라고 밝혔다. 리병철의 정확한 직책은 언급되지 않았지만 그가 2008년부터 공군사령관을 맡아왔고 오일정, 한광상 당 부장 뒤에 호명된 점 등을 고려하면 최소한 당 군사부 부부장직 이상을 맡았을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김 제1위원장은 올해 공군 관련 행사를 참관하고 공군부대를 잇달아 시찰하는 등 남다른 공군 사랑을 드러냈다. 정성장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공군 사령관이 대장보다 두 계급 낮은 중장 계급의 인사로 바뀜으로써 군대에 대한 노동당의 영향력이 더욱 커지게 됐다”고 분석했다. 하종훈 기자 artg@seoul.co.kr
  • [서울&평양 리포트] 北·러 新밀월시대 계기로 본 ‘백두혈통’과 러시아

    [서울&평양 리포트] 北·러 新밀월시대 계기로 본 ‘백두혈통’과 러시아

    1991년의 어느 날. 김일성 북한 주석은 아들 김정일 노동당 조직비서부터 문건 하나를 받아 보고 경악했다. 이는 당시 붕괴 수순을 밟고 있던 사회주의 종주국 소련과 결탁된 세력이 군부 내에서 반정부 쿠데타를 모의한다는 내용이다. 김정일은 같은 해 12월 24일 김 주석으로부터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직위를 넘겨받았다. 김정일은 소련이 붕괴한 이듬해인 1992년 ‘프룬제 사건’으로 알려진 소련 유학파 출신 군 간부 숙청을 대대적으로 실시한다. 북한은 1985년부터 프룬제 아카데미아 등 20개가 넘는 소련 군사대학에 700명 가까운 군 간부들을 유학 보냈다. 북한 내부에 친소련파가 득세하길 원하는 소련으로서도 이들을 포섭하려 했을 가능성이 컸지만 실제 포섭된 인원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하지만 김정일은 이를 부풀려 군권을 장악하는 계기로 활용한다. 소련의 몰락을 지켜본 국가와 군의 동요를 막기 위해 유학파 출신들을 제물로 ‘충격요법’을 쓴 셈이다. 이는 냉전 종식 당시 중국밖에 우방이 남지 않은 북한 ‘백두혈통’ 김씨 일가와 러시아의 애증관계를 여실히 보여 준다. ●‘프룬제 사건’으로 소련 유학파 대대적 숙청한 김정일 “정치는 입이 아닌 발을 보라”라는 말이 있다. 2014년 11월 18일 최룡해 노동당 비서가 김정일의 아들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의 특사 자격으로 대규모 대표단을 이끌고 러시아를 방문했고 러시아는 20일 푸틴 대통령이 김 제1위원장과 정상회담을 할 준비가 됐다고 밝혔다. 양국 간 군사교류 확대와 공동 군사훈련을 실시할 가능성도 점쳐지고 있다. 지난 2월 러시아가 100억 달러 상당의 채무를 탕감해 주며 시작된 양국 간 우호 분위기는 경제, 사회, 군사 분야 등에서 활발하게 추진되고 있다.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경제협력으로 지난해 러시아와 북한의 교역량은 전년 대비 37.3%% 늘어난 1억 400만 달러로 나타났다. 양국은 2020년까지 교역량을 10억 달러까지 늘린다는 목표를 세웠다. 이는 최근 핵과 인권 문제로 국제사회의 압박을 받는 북한이 ‘혈맹’인 중국과의 관계가 최악인 점과 대조적이다. 전통적인 자원부국 러시아도 우크라이나 사태이후 국제사회로부터 ‘왕따’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지만 옛 우방 북한과 손을 잡는 모양새다. 조한범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북한이 국제사회의 고립을 탈피하기 위한 ‘생존’에 기반을 둔 대러 접근을 한다고 보면 러시아는 안보 재편과 세계경제 불황이라는 상황에 직면해 있다”면서 “러시아는 극동 시베리아 지역에서 대규모 국책사업이 필요한 상황이고 북한은 이를 수행하기에 매우 중요한 대상”이라고 분석했다. 북·러 밀착은 과거로부터 이어진 오랜 인연을 돌아보면 이해가 빠르다. 북한 정권의 중국, 러시아와의 우호관계는 각각 ‘동북항일연군’과 ‘88국제여단’에서 비롯된다. 1930년대 만주 일대의 항일 빨치산 조직들은 중국 공산당에 합류해 동북항일연군으로 편성돼 중국 공산당과 공동 항일전선을 펼쳤다. 김일성도 그 일원으로 만주에서 활약했다. 하지만 1940년 일제의 빨치산 토벌이 가혹해지자 김일성과 최현(최룡해의 아버지)은 소련의 하바롭스크로 이동해 특무공작요원 훈련을 받고 소련 극동군 88국제여단에 배속돼 5년 동안 복무한다. 김일성은 이곳에서 최용건·김책 등 다른 항일유격대 지도자과 우의를 다졌고 이들 항일 빨치산 1세대는 해방 후 북한 정권 수립에서 핵심적 역할을 하게 된다. ●소련군 등에 업고 출발한 北… 中·러 사이 ‘줄타기 외교’ 1945년 9월 소련군 대위 군복을 입고 평양에 입성한 김일성은 당시 38도선 이북을 통치한 소련 군정의 도움으로 1946년 2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이 됐다. 이는 권력 장악의 시발점으로 평가된다. 1948년 소련을 등에 업고 출발한 북한 정권은 같은 해 10월 12일 소련과 국교를 맺었다. 하지만 북한의 외교는 북·중 관계와 중·소 관계의 직접적 영향을 받으며 가까워졌다가 멀어지는 과정을 반복해 왔다. 1960년대 중국과 소련의 사상 논쟁이 격화되고 1969년 양국 간 국경 충돌이 발생하자 북한은 자구책으로 ‘자주 외교’를 선언하며 양 대국(大國) 사이에서 ‘줄타기 외교’를 했다. 북한은 미국과의 평화공존을 내세운 흐루쇼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실각한 1964년까지는 소련 지도부의 노선을 ‘수정주의’라고 비판하며 마오쩌둥(毛澤東)의 중국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하지만 1966년부터 문화대혁명을 전개한 중국이 북한 지도부를 ‘기회주의’로 몰아붙이자 북한도 중국 공산당을 ‘교조주의’라고 비판하면서 다시 소련에 밀착해 군사원조와 경제지원을 받는 데 주력한다. 이후 1976년 마오쩌둥의 사망으로 문화대혁명이 종료됨에 따라 북·중 관계가 풀리면서 북한은 중국과 소련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는 전략을 폈다. 1991년 소련이 해체됨과 함께 이를 계승한 러시아는 1995년 9월 ‘조·러 우호협조 및 호상원조 조약’을 더는 연장하지 않겠다고 공식 발표하면서 북·러 관계는 과거의 군사동맹 관계에서 일반적인 국가관계로 전환됐다. 이때부터 북한과 러시아는 경제협력 파트너로서의 새로운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북·러 양국은 결국 1999년 3월 평양에서 ‘조·러 우호선린 협조조약’에 가서명하고 2000년 2월 정식 서명한다. 이로써 소련 붕괴 이후 한동안 냉각됐던 관계는 2000년 7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하고 다음해 7∼8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러시아를 방문하면서 정상적인 관계로 복원됐다는 평가다. 북·러 관계에서 북한이 전통적으로 가장 관심을 둔 분야는 군사협력이다. 김일성 시대부터 김정일에 이어 김정은 집권 시기까지 중국의 국력이 러시아를 앞섰음에도 북한군 내에는 기술 수준이 떨어진다고 무시해 왔던 중국보다 러시아의 전차와 항공기 등 무기체계에 대한 경이로움이 남아 있다. 북한 공군 조종사 출신의 귀순자 이웅평 대령은 생전 “김일성은 1970년 소련으로 갈 때 공군 조종사들을 데려가 미그기 등 전투기들을 몰고 왔다”고 증언했다. ●“북·러 밀월은 中 자극하려는 의도” 회의적 반응도 북한은 1991년 소련 해체 때 러시아 ‘극동군관구’에서 탱크와 비행기 등 전술무기들을 싼값에 구매한 것으로 전해진다. 북한군 산하 ‘새별’ 무역회사에서 근무하다 1998년 탈북한 한 인사는 “소련 붕괴 직전 부패한 소련군 장성들을 설득해 탱크와 비행기 등을 폐기 처리하는 방식으로 원산항과 흥남항을 통해 들여왔다”면서 “구입 대금은 대부분 위조 화폐인 ‘슈퍼 달러’와 위조 양주 및 위조 담배 등으로 처리했다”고 전했다. 당시 북한은 음성적인 거래에서 대부분 ‘슈퍼 달러’를 사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은 또한 소련이 해체되는 과정을 지켜보며 한 가지 중요한 교훈도 얻게된다. 혁명의 전위군이자 최후 보루인 군이 당의 지시에 반기를 드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다. 이는 1993년 국방위원장으로 취임한 김정일이 선군정치를 강화하고 ‘프룬제 사건’을 급조한 이유로 평가된다. 일각에서는 최근 북·러 밀월에 대해 김정은 국방위 제1위원장이 할아버지 김일성 주석의 ‘줄타기 외교’를 본받아 중국을 자극하려는 의지가 반영된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하지만 김정은식 줄타기 외교의 성공 가능성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반응이 많다. 1960∼1970년대와 달리 최근 중국과 러시아가 경제 분야에서 적극 협력하고 있으며 반(反)서방 정서를 바탕으로 정치적으로도 가까운 만큼 북한이 양측 모두로부터 이득을 얻어 내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문경근 기자 mk5227@seoul.co.kr 하종훈 기자 artg@seoul.co.kr
  • 구글 첫 화면에 나비가 내려앉았다…석주명 박사 탄생 106주년 기념 구글 두들

    구글 첫 화면에 나비가 내려앉았다…석주명 박사 탄생 106주년 기념 구글 두들

    구글 첫 화면에 나비가 살포시 내려앉았다. 구글이 13일 석주명 박사 탄생 106주년 기념 구글 두들(구글 첫 화면 로고 디자인)을 선보였다. 석주명 박사는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곤충학자다. 1908년 평양에서 태어나 1931년대 초반부터 나비 연구를 시작했다. 석주명 박사의 큰 업적 중 하나는 외국학자들의 잘못된 나비 분류를 바로 잡은 것이다. 당시 외국학자들은 조금만 다른 특징이 있으면 새로운 종의 나비라고 주장하고 한국의 나비가 총 844종이라고 과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많은 나비가 동종이명에 불과하다는 것을 밝혀내고 ‘조선산 나비 총목록(1940년)’을 통해 모두 248종이라고 바로 잡았다. 석주명 박사의 이 목록은 한국인 저서로는 처음으로 영국왕립도서관에 소장됐고 이로써 석주명 박사는 세계적인 학자의 반열에 올라섰다. 나비로 가장 널리 알려졌지만 석주명 박사는 곤충뿐만 아니라 독도 학술 조사에 참가한 박물학자였으며 제주도 방언을 연구한 언어학자이기도 했다. 한국전쟁 도중 1950년 9월 서울의 국립과학관이 폭격을 맞으면서 그가 20여년간 모은 75만 마리의 나비 표본이 모두 불타고 말았다. 당시 석주명 박사는 너무 상심이 커서 식음을 전폐하다시피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위대한 학자의 생애는 비극적인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 어이없이 스러지고 말았다. 같은 해 10월 조선인민군으로 오인받아 총에 맞아 사망한 것. 그렇지만 석주명 박사의 업적과 학문에 대한 열정은 오늘날까지 영원히 남아 구글 첫 화면에 살아 숨쉬고 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김정은 지팡이 없이 등장, 83년생이 지팡이는 왜? ‘훈련 중요성 강조’

    김정은 지팡이 없이 등장, 83년생이 지팡이는 왜? ‘훈련 중요성 강조’

    ‘김정은 지팡이 없이 등장’ 김정은이 지팡이 없이 공개석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노동신문은 5일 북한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지난 3~4일 평양에서 열린 ‘인민군 제3차 대대장·대대정치지도원 대회’에 지팡이 없이 걷는 장면을 공개했다. 대회 참가자들과 기념사진을 찍으려 이동하는 과정에 지팡이 없이 걸음을 옮긴 것. 앞서 김정은은 지난달 13일, 40일의 잠행을 깨고 복귀한 이후 지팡이에 의지한 활동을 이어왔다. 지난 번 왼쪽 발목 물혹 수술 이후 완벽하게 회복하지 못한 것. 그러나 이번 공개석상에 지팡이 없이 모습을 드러내 건강이 완벽하게 회복됐을 가능성을 시사했다. 8년 만에 일선 군부대 대대 지휘관회의를 소집한 자리에서 김 제1위원장은 강도 높은 어조로 훈련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나섰다. 김 제1위원장은 대회 연설에서 “인민군대에 있어서 싸움 준비, 훈련보다 더 중요하고 더 절박한 과업은 없다”며 “싸움 준비에서 내일이란 있을 수 없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유사시에 피를 물고 덤벼드는 적들에게 군인들이 훈련되지 않았으니 기다려달라고 할 수 없다”며 “이 세상에서 전쟁처럼 냉혹하고 엄정한 판정관은 없다. 전쟁은 훈련을 하지 못했다고 사정을 봐주지 않는다”고 말했다. ‘김정은 지팡이 없이 등장’ 소식을 접한 네티즌은 “김정은 지팡이 없이 등장, 왜 저렇게 군사 훈련에 목숨을 걸까” “김정은 지팡이 없이 등장, 건강 많이 회복했나보네” “김정은 지팡이 없이 등장, 83년생이 지팡이 든 것도 놀라운데 지팡이 사라진 게 화제라니” 등의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사진 = 방송캡처 (김정은 지팡이 없이 등장) 뉴스팀 chkim@seoul.co.kr
  • 김정은 지팡이 없이 등장 “발목 복사뼈 물혹, 수술 뒤 치유?”

    김정은 지팡이 없이 등장 “발목 복사뼈 물혹, 수술 뒤 치유?”

    김정은 지팡이 없이 등장 “발목 복사뼈 물혹, 수술 뒤 치유?” 40일간의 칩거 이후 공개활동을 재개한 북한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의 손에서 지팡이가 사라졌다. 조선중앙TV가 5일 오후 3시쯤 김 제1위원장이 ‘인민군 제3차 대대장·대대정치지도원대회’에 참석한 소식을 전하며 내보낸 사진에서 김 제1위원장이 지팡이 없이 군 수뇌부와 대회장으로 걸어나오는 모습이 확인됐다. 이날 노동신문에 실린 사진에서도 김정은 제1위원장이 대회 참가자들과 기념사진을 찍으려고 이동하면서 지팡이 없이 걷는 모습이 포착됐다. 김 제1위원장이 지난달 14일(보도날짜) 장기간의 칩거를 깨고 등장한 이후 지팡이 없이 공개활동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는 왼쪽 발목 복사뼈에 낭종(물혹)이 생겨 수술을 받았고 이 때문에 장기간 칩거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조선중앙통신은 이날 “조선인민군 제3차 대대장·대대정치지도원대회가 3일과 4일 평양에서 성대히 진행됐다”면서 김 제1위원장이 대회에서 연설하고 대회 참가자들과 기념사진을 찍었다고 전했다. 북한군 대대장의 계급은 보통 대위 또는 소좌(우리의 소령)이며 대대 정치지도원은 대대 군인들의 사상교육을 책임진 정치장교다. 이번 대대장·대대정치지도원대회는 2006년 10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제2차 대회 이후 8년 만이며, 1차 대회는 1953년 10월 김일성 주석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김 제1위원장은 대회 연설에서 “인민군대에 있어서 싸움준비, 훈련보다 더 중요하고 더 절박한 과업은 없다”며 “싸움준비에서 내일이란 있을 수 없다”고 강조했다. 이어 “대대들에서는 부업을 강하게 내밀어 중대들을 다 부자중대로 만들고 군인들에게 언제나 푸짐한 식탁과 포근한 잠자리를 만들어줘야 한다”고 말했다. 대회 연설 후 김 제1위원장은 지난 10여 년간 대대장 또는 대대정치지도원으로 일하면서 공로를 세운 방경철 등 5명에게 ‘노력영웅’ 칭호와 함께 국기훈장 제1급을 직접 수여했다. 김 제1위원장의 연설로 미뤄 이번 대회는 군인들에 대한 사상교육을 강화하고 훈련 강도를 높여 군 기강을 확립하며 군인복지에 힘을 넣어 ‘군심’을 결집하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북한은 지난해 10월에는 김 제1위원장이 참석한 가운데 13년 만에 중대장·중대정치지도원대회를 열고 군 기강 확립을 독려했다. 대회와 기념촬영에는 황병서 군 총정치국장, 현영철 인민무력부장, 리영길 군 총참모장, 김원홍 국가안전보위부장, 변인선 총참모부 제1부총참모장 겸 작전국장, 서홍찬 인민무력부 제1부부장, 박영식 총정치국 조직부국장, 렴철성 총정치국 선전부국장, 조경철 보위사령관 등이 함께했다. 네티즌들은 “김정은 지팡이 없이 등장, 제발 건강이 나빠져야 할 텐데”, “김정은 지팡이 없이 등장, 이제 치료가 다됐나”, “김정은 지팡이 없이 등장, 저 몸으로 잘 걸어다니지도 못 할텐데” 등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서울&평양 리포트] 말과 인물로 풀어 보는 北 회담 전략

    [서울&평양 리포트] 말과 인물로 풀어 보는 北 회담 전략

    “여기서 서울이 멀지 않습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불바다가 되고 말아요.”(박영수) “아니 지금….”(송영대) “송 선생도 아마 살아나기 어려울 거요.”(박영수) “그걸 말이라고 합니까? 우리가 가만히 있을 것 같아요?”(송영대) 북한 핵개발 의혹이 증폭되던 1994년 3월 19일, 판문점에서 열린 남북 특사 교환을 위한 실무접촉에서 북측 박영수 대표가 남측 송영대 대표(당시 통일원 차관)에게 한 ‘서울 불바다 발언’은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막가파식 협상 태도의 전형으로 회자된다. 남북회담 개막 때는 북한이 온유한 태도에서 시작하지만 본격적으로 협상에 돌입하면 ‘타협’이 아닌 ‘싸움’으로 번지는 경우다. ●술잔 주고받다 심사 뒤틀리면 박차고 나가 남북한은 서로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회담테이블 밑에서 ‘패’를 만지작거리다가 돌아서곤 했다. 지난 4일 황병서 북한군 총정치국장 등 고위급 3인방의 방한을 계기로 “대통로를 열자”며 술잔을 주고받았지만 결국 한 달도 안 돼 사실상 결렬되다시피 한 2차 고위급 접촉도 크게 다르지 않다. 남북은 1971년부터 현재까지 638회의 크고 작은 회담과 접촉을 실시했지만 북한은 여전히 심사가 뒤틀릴 때마다 회담장을 박차고 나가고 남한은 그 뒷모습만 바라보는 형국이다. “북한과 회담을 가장 잘하는 분들이 국회의원들이었다. 의원들이 회담장에서 그냥 자기 얘기만 하니까 북한이 아예 대화를 포기하더라.” 1985년 7월에 열린 남북 의원회담에 배석했던 한 정부 당국자의 말이다. 정부 관료들은 회담장에서 북한에 말꼬투리를 잡히는 경우가 많은데, 자기 할 말만 하는 의원들은 그렇지 않더라는 우스갯소리다. 그만큼 북한을 상대로 협상하는 건 어느 국가를 상대하는 것보다 어렵다.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말 한마디가 나오면 기다렸다는 듯이 물고 늘어지는 게 북한의 협상 태도이기도 하다. 한 통일부 당국자는 “인권 얘기를 하니까 기다렸다는 듯 국가보안법 자료를 한 무더기 꺼내더니 ‘자, 그럼 보안법 얘기를 해 봅시다’고 하는데 어안이 벙벙했다”고 말했다. ‘벼랑 끝 전술’은 북한이 협상에서 전가의 보도로 사용하는 대표적 수법이다. 결론이 삽입된 의제를 제시하고 이를 관철시키기 위해 위기 조성과 위협을 병행한다. 남북회담에 오랫동안 관여했던 전직 관료는 “북한이 회담장에 나와 회담 주제와 상관없는 ‘주한미군 철수’와 ‘국가보안법 폐지’를 선결조건으로 내세운다”며 “우리 측의 설명을 들으려 하지 않고 자신들의 주장을 되풀이하기만 한다”고 말했다. 최근 북한의 전단 살포 중지 요구와 관련, 정부가 “민간의 자율적인 행위에 대해 정부가 제지할 근거가 없다”고 거듭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측이 제안한 고위급 접촉을 전단 살포를 방임했다는 빌미로 무산시킨 것도 북한 특유의 협상 방식으로 풀이된다. 1970~1980년대 남북회담에서는 남북한이 서로에게 재떨이를 던질 만큼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연출되곤 했다. 최근 회담에서 북한이 실제 위력을 행사하는 경우는 없지만 일방적으로 결렬을 선언하고 회담장을 나가는 등 분위기가 험악하기는 마찬가지다. 북한은 지난 7월 인천아시안게임 관련 실무회담에서 우리 측이 대형 인공기 사용 등에 대해 자제를 요구하자 아예 결렬을 선언한 뒤 나갔다. 북한 협상 태도의 특징으로 문화적 측면을 강조하는 시각도 있다. 상대의 예의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특유의 자존심과 체면을 건드리면 신경질적으로 반응한다는 것이다. 한 정부 당국자는 “북한과 회담할 때는 기본적으로 호흡이 필요하고 북측에서 치고 나오려고 할 때 남측도 융통성 있게 비켜 줘야 한다”며 “무조건 훈령에만 기대 회담을 진행하다 보면 어긋날 때가 많다”고 말했다. 이 당국자는 “남북이 마주 앉은 회담테이블 뒤에서 어떤 문제에 대한 정부 입장이 나와야 할 때 훈령이 늦게 도착하면 난감해진다”고 토로했다. ●대남 협상가 대부분 남북 관계만 수십년씩 북한의 또 다른 특징은 대남 협상가 대부분이 베테랑으로 10~20년 이상 남북 관계만 전담한 사람들로 구성돼 전문성이 높다는 점이다. 반면 우리는 매번 협상 대표가 바뀐다. 대표적인 인물이 대남정책을 총괄하는 노동당 통일전선부의 ‘총책’ 김양건 부장이다. 그는 지난해 12월 처형된 장성택과 가까웠던 것으로 알려졌지만 앞으로 김정은 체제의 대남사업을 지휘하는 중책을 계속 맡을 것으로 보인다. 베테랑 ‘대남 일꾼’인 원동연 통일전선부 부부장은 박근혜 정부가 들어서고 나서 남북대화의 전면에 등장해 실세임을 과시하고 있다. 원 부부장은 지난 2월 국방위원회 대표단의 단장 자격으로 우리 측 김규현 국가안보실 1차장과 남북 고위급 접촉에서 이산가족 상봉 행사에 합의하기도 했다. 강지영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 서기국장 겸 통일전선부 부부장도 여전히 건재하다. 그는 지난해 6월 남북 당국회담이 이른바 ‘격’ 논란으로 무산됐을 때 북한이 수석대표로 내세웠던 인물이다. 2011년 10월 조평통 서기국장에 오른 강지영은 김정은 체제 들어서 주목받는 대표적인 대남 인사로 평가된다. ●장성택과 가까웠던 대남 총괄 김양건 ‘건재’ 남북경협 분야에서는 방강수 민족경제협력연합회(민경련) 회장도 있다. 1998년 실체가 외부에 드러난 민경련은 삼천리총회사, 개선총회사 등을 거느린 북한의 대표적인 남북경협 단체다. 방 회장은 노무현 정부 때인 2005~2007년 남북경제협력위원회에 민경협 정책국장 자격으로 수차례 참석했고 서울, 제주도 등을 방문하기도 했다. 그는 현재 당국 간 경제회담, 민간 경제협력의 방향 등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배후 실력자로 전해진다. 2000년대 초반까지 남북 간 인도적 사안과 관련된 회담은 한국적십자사와 북한의 조선적십자위원회 창구를 통했다. 최근 들어 인도적 교류가 줄어들었지만 남한과 인도적 사업 문제를 논의할 강수린 조선적십자위원장 역시 대남 라인의 주요 대표선수다. 그는 2013년 초반 장재언 전 조선적십자위원장의 후임으로 적십자회 수장이 됐다. 강수린은 그동안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대남사업에서 고참급 인물로 1990년 9월 남북 고위급 회담에 수행원으로 참가했고 2007년 11월에는 김양건 통일전선부장이 서울을 방문했을 때 수행한 인물이다. 지난해 6월 남북 장관급 회담을 위한 판문점 실무접촉에서 우리 측 수석대표인 천해성 당시 통일정책실장의 파트너로 등장한 인물은 김성혜 조평통 부장이었다. 그는 남자들의 전유물처럼 보이는 대남 협상 파트에서 ‘홍일점’으로 존재감을 과시했다. 또 박근혜 대통령이 미래한국 대표 시절인 2002년 5월 11일 3박 4일 일정으로 북한을 방문했을 당시 밀착 수행한 것으로 밝혀져 더 주목을 받았다. 지난 15일 남북 군사회담에 북측 수석대표로 나왔던 김영철 인민군 총참모부 정찰총국장도 2007년 12월 7차 남북 장성급 군사회담에 모습을 드러냈던 인물로서 북한 내 대표적인 강경파로 분류된다. 대남 공작의 ‘총책’인 그는 2010년 천안함 폭침의 배후로 지목돼 왔다. 안석 기자 ccto@seoul.co.kr 하종훈 기자 artg@seoul.co.kr 문경근 기자 mk5227@seoul.co.kr
  • [서울&평양 리포트] 북한 여군의 세계…고사포·폭격기 조종 척척 17세 입대 7년 의무 복무

    [서울&평양 리포트] 북한 여군의 세계…고사포·폭격기 조종 척척 17세 입대 7년 의무 복무

    지난 10일 민간단체가 경기 연천 접경지역에서 대북 전단 풍선을 날리자 북한군이 대공무기의 일종인 14.5㎜ 고사총 사격을 했다. 남북 화해 분위기를 일순간 얼어붙게 만든 도발의 당사자들이 의외로 꽃다운 나이의 여군 고사총 중대원들이라는 설(說)이 탈북자들을 중심으로 힘을 얻고 있다. 지난 3월 노동신문이 공개한 북한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의 인민군 2620군부대의 시찰 사진은 의미심장하다. 환하게 웃고 있는 김 제1위원장의 모습과 그의 양팔을 부여잡은 여군 조종사들이 마치 남성 아이돌 스타에 열광하는 ‘오빠 부대’를 연상시키듯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리고 있다. 신문은 김 제1위원장이 “여성 조종사들이 불리한 기상 조건 속에서도 전투 동작들을 훌륭히 수행했다”고 보도했다. 이들 여군은 대부분 지상 100m 이내의 저고도를 날아 특수부대를 실어 나르는 침투용 비행기 AN2기 조종사로 알려졌다. 이는 북한 여성들이 군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보여 준다. 우리 군 당국이 올해부터 여군에게도 포병·방공 병과 진입을 허용하고 2002년부터 여성 공군 조종사를 배출해 왔지만 북한 여군보다는 늦어도 한참 늦다는 평가다. 오늘날 북한 여군은 군관(장교)과 부사관, 병사 등을 합해 18만여명으로 북한군 전체 병력의 15% 이상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장교와 부사관으로만 구성된 한국군 여군 9228명(올해 6월 기준)에 비해 20배 가까이 많은 수치로 대표적인 ‘비대칭 전력’으로 불릴 만하다. ●대북전단 풍선 사격 여군 고사총 중대원說 전통적으로 김일성-김정일-김정은으로 이어지는 북한 수령 3대는 여군의 전략적 중요성을 강조해 왔다. 북한은 항일무장 투쟁 시기인 1936년 4월 중국 두만강 부근에서 조직한 여군 중대가 북한 여군의 효시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1947년 10월 평양학원 제1기 졸업생 800명 가운데 여성 중대 300명이 여군 간부로 배출된 데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졌다. 남성 군인 대체 인력으로서의 역할이 강했던 여군이 전투병으로 본격 활약한 것은 1970년대 들어서다. 북한은 1962년 ‘전인민의 무장화’, ‘전국의 요새화’, ‘전군의 간부화’, ‘전군의 현대화’라는 4대 군사노선을 주창한 뒤 최고사령관 김일성의 명령에 따라 평양시 대공방어를 위해 여군만으로 편성된 최초의 여군고사총 여단을 창설했다. 1964년부터는 여군 간호사를 양성해 각 군단 병원에 배치했고, 1971년 이후 전투부대까지 여군을 확대하면서 지상군 사단과 연대의 고사총 중대를 대부분 여군으로 교체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여군 사랑은 각별했다. 김 위원장이 사망하기 몇 년 전 방문했던 군 부대 중 최소 3분의1이 여군부대라는 증언도 있다. 그는 방문했던 여군부대에 선물과 함께 ‘감나무 중대’, ‘들꽃중대’라는 칭호를 부여해 사기를 진작시키고자 했다. 1995년 1월 1일에 평양 고사포사령부 예하 부대인 다박솔 중대를 찾은 김정일 위원장과 부인 고영희(2004년 사망)의 일화는 지금도 여군부대의 선전용으로 쓰이고 있다. 고영희가 여군들의 터진 손등을 보고 자기가 가져 갔던 크림을 선물하자 이를 본 김 위원장이 전체 여군에게 핸드 크림을 포함한 화장품을 선물했다는 내용이다. 북한이 최고지도자의 여군에 대한 현지지도를 부각시키는 이유는 여군들이 군내 대체 인력이 아닌 정규군으로서 제 몫을 다하고 있다는 모습을 과시하고 사회적으로 만연한 군 복무 기피 현상을 타개하겠다는 목적이 강하다. 이 밖에 인민들에 대한 사랑과 긍휼, 자기 희생을 표현해 최고지도자의 자애롭고 보듬어 주는 이미지를 형상화하려는 목적도 있다는 분석이다. ●예전엔 선망… 복무 길어 지금은 ‘군대 바보’ 북한에서는 여성 병사도 남성과 똑같이 고등중학교 졸업 시기인 만 17세에 입대한다. 지원제로 운영하나 실제 운영은 본인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반강제적으로 입대하게 된다. 북한은 2003년 3월 여군의 의무복무 기간을 7년으로 법제화했다. 모집 연령이 만 17세임에 따라 23세에 만기 전역하고 군관으로 선발되면 19세에 군관교육을 받고 25세 이상까지 복무할 수 있다. 이 복무 기간은 최근 김 제1위원장의 복무 기간 연장 지시에 따라 1년 이상 늘어난 것으로 관측된다. 여군은 대체로 통신, 대공포, 해안포 부대, 군의소 등에 배치되는데 소수의 여군에 한해 일부 특수부대에 배치되기도 한다. 여군들은 첨단 전투기를 조종하지는 않지만 AN2 항공기, YAK18 항공기 조종사와 항공탐지수 등은 대부분 여군들이 맡고 있다. 이 밖에 저공 폭격기인 러시아제 일류신(IL)28 항공기 조종사의 경우 전원이 여군이라는 증언도 있다. ●복무 중 남녀교제 금지… 발각 땐 ‘불명예제대’ 황해도의 북한군 4군단 통신부대에서 10년간 복무했던 이소연(41·여) 뉴코리아여성연합 대표는 “1990년대만 해도 월급은 적었지만 ‘군에 가면 굶어 죽지는 않겠지’라는 생각과 6년 정도 복무하면 노동당에 입당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기 때문에 여군 입대에 대해 선망하는 분위기가 있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2003년부터 2010년까지 평안남도에서 3군단 병사로 복무했던 김모(29·여)씨는 “먹고살기 어려워지자 군인의 위상이 예전 같지 않다”며 “시집을 가려면 장사를 할 수 있는 등 가족을 부양할 능력이 있어야 하는데 군에만 있다 보니 무능하다고 해서 요즘에는 여군들을 ‘군대 바보’로 부르기도 한다”고 말했다. 여군들은 대체로 자대에서 남성 군인들과 같이 생활하지 않고 여군들끼리 제대를 편성해 생활한다. 대공 방어 임무를 맡은 14.5㎜ 고사총 중대는 90~100명 규모로 5~6명이 한 개 조로 고사총 한 대를 맡는다. 규모가 큰 포병무기에 비해 고사총은 체구가 작은 여성들도 옮길 수 있고 다루기 쉽다. 하지만 탈북자들에 따르면 간부집 딸이나 예쁘고 똑똑한 여자들은 사단 참모중대, 사단 군의소나 연대 군의소에 배치되고, 여성 고사총 중대에 배치된 여군들은 일종의 막노동 비슷한 일을 하게 된다. 이 대표는 “북한에서는 여군들도 7년 이상 복무하기 때문에 21개월의 짧은 군 생활을 하는 남한의 남자 병사들보다 숙련도가 높을 것”이라고 말했다. 북한 군부도 여군의 숫자가 많아 골머리를 앓을 때가 많다. 남자는 30세, 여자는 26세까지 장기간 군복무를 해야 하는 폐쇄된 사회에서 장병들의 성(性)군기 문란을 방지하기가 쉽지 않다. 드물기는 하지만 여군과 남군이 눈이 맞아 제대할 때 결혼까지 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군 복무 중 남녀 간 공식적인 교제는 금지되고 몰래 관계를 갖다 발각되면 생활제대(불명예제대) 조치를 당한다. 여군의 결혼은 하전사(부사관) 이하는 금지하고, 군관의 경우 만 26세 이상은 허용하고 있다. ●장성급 4~5명… ‘유리천장’ 여전히 높아 우리 군 병영에서 여군에 대한 성폭력 문제가 부각된 가운데 북한 내 병영 성폭력 문제도 관심거리다. 탈북자들은 북한군 내 여군 인권이 더 심각하다고 지적한다. 여군의 숫자가 많아도 장령(장성)급 장교는 전체 1100~1200명 가운데 4~5명 정도인 것으로 추정돼 위로 올라갈수록 여성에 대한 ‘유리천장’은 여전히 높다. 한 여군 출신 탈북자는 “부대원이 중대 정치지도원(정치장교)에게 성폭행당한 사실을 상부에 보고하면 그 간부는 구두 경고하는 선에서만 그치고 피해자는 다른 부대로 전출시킨다”고 말했다. 이 대표도 “1999년에는 통신부대 남성 중대장이 당시 중대원인 여군 120명 가운데 30명을 매일 밤 불러 성폭행한 사건으로 떠들썩했다”면서 “이처럼 큰 사건이 아니면 대부분 가해자인 남성 간부들은 처벌받지 않고 넘어가는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하종훈 기자 artg@seoul.co.kr 문경근 기자 mk5227@seoul.co.kr
  • [커버스토리] 남북 70년 ‘삐라 전쟁’

    [커버스토리] 남북 70년 ‘삐라 전쟁’

    “인민군 동지 여러분! 평양, 원산 등은 이미 B29의 폭격으로 폐허가 됐고, 그대들을 사선으로 몰아낸 김일성 등은 만주 봉천으로 도피했다. 머지않아 전 세계 각국은 보조를 같이하여….” 1950년 7월 국방부가 북한군에 뿌린 대북전단(삐라)의 내용이다. 물론 이미 낙동강까지 밀고 들어온 북한군이 이를 믿을 리는 만무했다. 대북 전단은 1945년 해방 이후 분단이 고착화되면서 간헐적으로 살포됐지만 6·25 전쟁 때부터 본격화됐다. 일부 전단 살포 단체들은 성경에 나온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에 비유해 자신들이 보내는 대북 전단을 ‘다윗의 물맷돌’이라고 부른다. 이들이 기대하듯이 실제로 북한이라는 ‘골리앗’이 대북 전단으로 전복될 수 있을까. 대북 전단을 둘러싼 남북·남남 갈등의 한편으로 정말 북한 체제가 흔들릴 정도로 이들 전단의 효과가 있는지에 대해 근본적으로 따져 보자는 주장도 있다. 효과 논란은 6·25 전쟁 때도 있었다. 당시 미군은 포로들에게 전단을 읽었는지, 전단의 내용을 믿었는지 등을 물어 효과를 검증하기도 했다. 1950년 존스홉킨스대학의 연구에 따르면 그해 9~11월 전쟁 포로를 신문한 결과 33.1%가 항복 이유로 심리전을 들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다른 보고서는 이를 반박하기도 했다. 적의 발목까지 쌓일 정도로 전단이 뿌려졌는데, 적군의 사기가 저하됐거나 분열된 증거가 있느냐는 반론이었다. ‘삐라’가 효과가 있다는 주장은 언론학의 ‘탄환이론’을 연상하게 한다. “나도 삐라를 보고 탈북을 결심했다”는 탈북자들의 증언이 대북 전단의 선전 메시지가 북한 대중에게 강력한 영향을 줬다는 증거라는 것이다. 자유북한방송 김성민 대표는 “북한 주민의 의식을 계몽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내가 일단 그 수혜자”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삐라 한 장’ 자체만으로 북한 사회가 흔들리는 것은 아니라는 반론도 있다. 북한 엘리트들의 반발도 체제 비판에 대한 불쾌감 때문이지 주민 동요 때문은 아니라는 주장이다. 실제 북쪽을 향해 살포된 전단 가운데 북한 땅에 떨어지는 비율은 5% 수준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창수 코리아연구원 연구실장은 “북한이 반발하니까 효과가 있다고 말하지만, 대북 전단의 내용 자체가 너무 말초적이고 저급하기 때문에 반발하는 것”이라며 “최고지도자의 사진이 나온 노동신문을 깔고 앉아도 처벌되는 통제 국가에서 공안 당국의 단속과 충성심 경쟁만 유도해 북한 주민에 대한 효과보다는 내부의 공안 통치만 강화할 것”이라고 말했다. 안석 기자 ccto@seoul.co.kr 하종훈 기자 artg@seoul.co.kr 그래픽 강미란 기자 mrkang@seoul.co.kr
  • [남북 판문점 군사접촉] 개성공단 분과위 활동 리선권 등 총출동

    15일 남북 군사당국자 접촉에는 천안함 폭침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진 김영철 북한 정찰총국장이 수석대표로 참석했다. 대남 강경파 인사인 김영철이 ‘카운터파트’로 나섰다는 것은 이번 회담의 분위기가 우호적이지만은 않았음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김영철은 천안함 폭침 사건 당시 북한군의 대남공작을 총괄하는 역할을 한 것으로 전해졌으며 김정은 체제의 핵심 군부 실세로 분류된다. 그는 2010년 천안함 사건 때 우리 군 당국이 ‘북한에 의한 폭침’이라고 밝히며 당시 김격식 4군단장과 함께 배후로 지목한 인물이다. 지난해 3월 ‘정전협정 백지화’ 선언 때 조선인민군 최고사령부 대변인으로 나와 눈길을 끌었다. 그가 2012년 11월 중순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을 수행하면서 대장보다 한 계급 낮은 상장(중장)계급장을 단 모습이 노출돼 한때 강등설이 제기됐지만 박근혜 정부 출범과 함께 다시 대장으로 공식석상에 나타나 주목받았다. 김영철이 수석대표로 남북 회담에 모습을 드러낸 건 천안함 사건 이후 처음이며 2007년 12월 7차 남북 장성급 군사회담 이후 7년여 만이다. 그가 지휘하는 정찰총국은 우리의 합동참모본부 격인 북한군 총참모부에 소속된 기구다. 북한의 소행으로 추정되는 우리 금융기관과 언론사, 청와대 해킹 등 사이버 공격의 배후로도 지목된다. 국방부는 북한이 6000명 정도의 사이버 전력을 보유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날 회담에는 김영철과 함께 리선권 국방위 정책국장과 곽철희 국방위 정책부국장이 대표로 참석했다. 리선권은 지난 2월 1차 고위급 접촉에 북측 수석대표인 원동연 통일전선부 제1부부장과 함께 나왔고, 2007년 5~7차 남북 장성급 군사회담에서 김영철과 함께 참석하기도 했다. 최근 개성공단 3통분과위 등에서도 모습을 드러낸 인물이란 점에서 북한이 이번 회담에서 비(非)군사 분야에 대한 문제도 함께 논의하려 했던 게 아니냐는 해석이 나온다. 군인은 아니지만 이날 접촉에 우리 측 대표로 나온 김기웅 통일부 통일정책실장의 상대역으로 나왔을 수도 있다. 천안함 사건 당시 우리 측이 폭침의 증거로 제시한 어뢰에 쓰인 ‘1번’ 글자에 대해 “우리는 ‘번’이라는 표현은 무장장비에 사용하지 않는다”고 주장해 김영철과 마찬가지로 천안함 폭침과 연관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문경근 기자 mk5227@seoul.co.kr
  • [이일우의 밀리터리 talk] 김정은을 지키는 ‘사상 최대’ 의 경호부대...쿠데타 사실상 불가능

    [이일우의 밀리터리 talk] 김정은을 지키는 ‘사상 최대’ 의 경호부대...쿠데타 사실상 불가능

    김정은이 40일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동안 김정은에 대해서는 온갖 설(說)들이 쏟아졌다. 스위스 유학 시절부터 입맛을 들인 에멘탈 치즈 과다 섭취 후유증 설부터 지방 별장에서 요양하고 있다는 설, 심지어 군부 원로 세력이 쿠데타를 일으켜 도피했다는 설 등 확인되지 않은 정보들이 인터넷을 덮어 왔었다. 김일성이 사망하고 1995년 함경도 지역에 배치되어 있던 6군단이 반란을 모의하다 적발된 사건 이후 김정은 일가에 대한 쿠데타 설은 꾸준히 제기되어 왔었다. 김정일이 두문불출했을 때도 그러했고, 김정은이 이립(而立)도 채 되지 않은 나이에 최고 지도자로 추대된 이후에도 리영호나 장성택에 의한 쿠데타 가능성이 수 차례 나왔으니 말이다. 하지만 쿠데타는 없었고 김일성과 김정일은 천수(天壽)를 누리다가 병으로 죽었고, 지금은 금수산기념궁전에 방부제 처리까지 되어 '곱게' 안치되어 있다. 김정은은 김정일과 달리 장기간 후계자 수업을 받은 것도 아니고, 경력이 일천하고 나이도 어려 집권 초기부터 얼마 가지 못해 실각할 것이라는 분석이 많았다. 하지만 다른 이유로 인해 실각할 수 있다 하더라도 군부 반란에 의해 권좌에서 끌어내려질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아 보인다. 북한에는 사상 유례가 없는 규모의 대규모 경호 부대가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 북한판 수방사! ‘평양방어사령부’ 우리나라도 수도 서울을 지키기 위해 군단급 부대인 수도방위사령부를 두고 있지만, 북한의 평양방어사령부는 우리 수방사와 적지 않은 차이를 보인다. 우리 수방사는 부대를 구성하는 예하 4개 사단이 현역사단이 아닌 향토사단과 동원사단이며, 현역 전투병력은 대부분 헌병과 경비 병력 위주로 구성된 반면, 북한의 평방사는 북한군 내에서도 상당한 정예로 꼽히는 부대이기 때문이다. 평양방어사령부는 평양 외곽 지역을 지키는 군단급 부대이다. 국내 일부 언론에는 북한 최정예 기갑부대로 손꼽히는 ‘근위서울류경수 제105땅크사단’이 평방사 예하 부대로 알려져 있으나, 이 부대는 평양 남부 사리원에 배치된 820훈련소 예하 부대이며, 평방사는 보병과 장갑차 위주의 부대로 편성되어 있는 감편(減制) 군단급 부대이다. 예하에 장갑차로 무장한 4개의 차량화 보병여단과 1개 전차연대를 주축으로 2개 포병여단과 1개 경보병연대 등의 전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북한에서는 위장명칭으로 ‘91훈련소’ 또는 ‘제966대연합부대‘로 불린다. 전시가 되면 남포의 제3군단과 연계해 평양에 대한 방어임무를 수행하며, 남침에 실패해 방어전을 수행해야 할 경우 425훈련소와 820훈련소 등 기계화부대 잔존 전력과 함께 평양 방어 임무를 수행한다. 신형 전투장비를 가장 먼저 지급받는 부대이기 때문에 장비의 질적 수준은 북한군 가운데서 가장 높은 편이다. 4개의 차량화 보병여단은 러시아의 BTR-80 등 비교적 신형 장갑차를 모방해 개발한 신형 차륜형 장갑차들을 보유하고 있으며, 전차연대에는 북한 육군이 보유한 전차 가운데 가장 신형인 폭풍호 후기형과 선군호 전차가 배치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러한 정예부대인 평양방어사령부 지휘관은 상장(우리 군의 중장급)급 장령이 보직되며, 지금은 숙청된 리영호 전 총참모장이 평양방어사령관을 지낸 바 있었다. ▲ 무소불위의 권력, 호위사령부 평양방어사령부가 기계화 장비를 운용하며 평양 외곽 지역을 방어하는 임무를 수행한다면, 평양 시가지와 김정은 일가에 대한 경호 책임은 호위사령부가 맡고 있다. 인기리에 상영된 국내 드라마 ‘아이리스’에서 ‘호위총국’으로 묘사된 호위사령부는 명목상 군단급 부대이지만, 예하 병력만 6만 명에 달하는 거대한 부대이다. 원래 이 부대는 이렇게 거대한 부대가 아니었다. 광복 직후 북한에 들어와 권력을 잡기 시작한 김일성의 개인 경호부대인 100여 명 규모의 ‘경위중대’로 출발해 6.25 전쟁 중 ‘경위연대’로 커졌으며, 전후 우리의 경호실 격인 ‘정부호위처’로 확대개편 되었다가 1965년에 상장급 장령이 지휘하는 ‘정부호위총국’이 되었다. 이후 정부호위총국은 호위사령부와 호위총국이라는 이름을 번갈아 사용하다가 2000년대 이후 호위사령부라는 명칭으로 굳어졌다. 과거에는 1~7국으로 나뉘어져 김일성과 김정일 일가는 물론 지방의 김씨 일가 전용 휴양소와 초대소, 목장 등을 관리하는 방대한 조직이었으나, 현재는 개편을 통해 그 규모가 다소 축소된 것으로 알려졌다. 6개 부로 구성된 제1국은 김정은 일가와 금수산태양궁전, 당과 정부 주요 인사에 대한 직접적인 경호 및 감시 임무를 맡고 있으며, 김정은 일가의 생활 전반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는 제2국, 사령부 전투근무지원 임무를 수행하는 제3국과 독립전투여단 등으로 구성된다. 최근 화제가 되었던 황병서 총참모장의 경호원들 역시 제1국 소속이다. 이들은 황 총참모장의 경호 임무를 수행하면서, 동시에 감시 임무도 맡고 있다. 호위사령부는 총참모부가 아닌 국방위원장 직속이기 때문에 당시 인천을 찾았던 황 총참모장이나 최룡해 비서, 김양건 비서를 수행하면서 변심 또는 반역의 조짐이 보이면 이들을 사살하는 임무도 맡고 있다. 이러한 임무는 과거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 등 고위층 탈북이 이어지면서 추가된 것으로 알려졌다. 호위사령부 요원들은 출신성분과 충성심을 엄격히 평가해 선발하는데, 보안을 위해 외부와 단절된 생활을 하며, 결혼 시에도 배우자의 출신성분과 당성을 보아야 하며, 결혼 후 지정된 숙소에서 생활하는 등 철저하게 통제된 생활을 해야 한다. 그러나 최고 수준의 공급규정을 적용받아 풍족한 생활을 영위하며, 김일성고급당학교 등 교육 여건을 제공 받아 당 간부로 진출할 수 있는 등 최고의 혜택을 누리고 있다. 즉, 호위사령부는 말단 전사부터 고위 군관에 이르기까지 처음부터 호위사령부 요원으로 선발된 인원들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온갖 특혜를 누리면서 이러한 특혜에 대해 김씨 일가에 대한 절대적 충성으로 보답한다. 김씨 일가에 대한 경호는 물론, 생활 전반에 걸친 밀착 수행을 담당하기 때문에 지휘관 역시 절대적인 신뢰를 받는 믿을 수 있는 인물이 맡고 있다. 1985년부터 약 30년간 호위사령관 직을 수행했던 리을설은 이례적으로 조선인민군 원수까지 진급했고, 퇴임한 이후에도 원수 계급을 유지하며 예우를 받고 있다. 후임으로 사령관에 임명된 윤정린 상장 역시 1984년부터 호위사령부 참모장으로 일하며 김정일에게 전폭적인 신임을 받아왔고, 최근 상장으로 강등당하기 전까지 대장 계급을 유지해 왔다. 호위사령관은 김씨 일가를 최일선에서 경호하는 ‘문고리 권력’으로 막강한 권한을 가진다. 전시가 되거나 쿠데타 등 비상상황이 발생하면 인접한 평양방어사령부와 3군단 등 총참모부 통제를 받는 전투부대를 끌어와 휘하에 두고 지휘할 수 있다. 자체 보유한 전투여단 강화된 3개 대대 편성을 갖추고 있으며, 쿠데타 또는 ‘최고 존엄’에 대한 위해 시도가 발생할 경우 즉각 출동하여 기동타격대 역할을 수행한다. ▲ 10만여 친위대... '호위사령부' 건재한 이상 쿠데타 불가능 최근 중국 SNS에서는 ‘김정은 실각설’이 사실처럼 확산되고 있었다. 김정은이 40일 가까이 잠적했고, 최근 황병서 일행이 인천을 찾은 것도 김정은을 축출한 뒤 삼두체제를 인정받기 위해 내려온 것이라는 분석도 제기되면서 이러한 소문이 돌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가설은 평양에 오직 김정은의 명령만 듣는 10만여 명의 최정예 친위부대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쿠데타가 발생한다면 어떤 형태로든지 간에 호위사령부와 쿠데타 병력 간에 교전이 발발할 것이지만, 아직까지 평양 일대에서 이러한 특이 동향은 감지되지 않고 있고, 김정은은 다시 전면에 등장하여 건재를 과시하고 있다. 황병서가 제아무리 2인자, 심지어 1.5인자라는 평가를 받고 있어도 총정치국은 호위사령부에 대한 지휘권을 가질 수 없다. 2인자조차 인정되지 않는 유일 독재체제 북한에 대한 기본적인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2인자나 1.5인자라는 단어에 박장대소할 것이지만, 막강한 권력을 휘어잡으며 2인자 행세를 했던 장성택조차도 건드리지 못한 것이 호위사령부였다. 김일성과 김정일은 자신들의 권력과 생명을 지키기 위한 최후의 안전장치로 반세기에 걸쳐 호위사령부를 철저한 사병 집단으로 만들어 놓았고, 이를 김정은에게 물려주었다. 김정은은 이 호위사령부 안에서도 사령관인 윤정린과 부사령관인 김성덕이 서로 견제하고 충성 경쟁을 하도록 만들어 놓았다. 대장이었던 윤정린을 김성덕과 같은 상장으로 강등시킨 것도 이 때문으로 풀이된다. 현재 김정은은 건강상의 문제로 약 2~3개월 가량의 치료가 필요한 상황으로 알려져 있다. 치료가 어느정도 마무리될 때까지는 안정을 취해야하겠지만, 김정은이 통치 일선에서 물러난 것은 아니며, 빈도는 낮아지겠지만 앞으로도 대외 활동은 계속 이어나갈 것이다. 27세에 불과하지만 ‘백두혈통’ 덕분에 우리나라의 청와대 비서실장 격인 서기실장을 맡고 있는 김여정이 오빠인 김정은의 신임을 받으며 권력을 틀어쥐면서 오빠의 빈자리를 채우고 있고, 여기에 ‘총폭탄 정신’으로 무장하고 김정은을 결사 옹위하는 10만여 명의 친위대까지 버티고 있다. 김정일은 생전에 호위사령부 요원들에게 니콜라이 차우셰스쿠(Nicolae Ceausescu)의 경호원들에 대한 영상을 자주 보여주었다고 한다. 루마니아 혁명 당시 차우셰스쿠에게 충성하던 보안군 소속 경호원들은 최후의 1인까지 혁명군에 저항하다 사살됐고, 김정일은 호위사령부 요원들에게 최고의 혜택을 제공하면서 이들과 같은 충성심을 요구해왔고, 호위사령부는 이 같은 독재자의 요구에 충실히 길들여져 왔다. 이들의 충성 대상은 이제 ‘백두혈통’인 김정은에게 이어지고 있고, 김정은은 매년 각종 사치품 수입 최고치 기록을 경신하며 이들에게 막대한 특혜를 베풀고 있다. 김정은 체제 붕괴 또는 권력 약화는 독재자로부터 제공받는 호위사령부 요원들의 부귀와 영화가 끝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호위사령부는 대단히 강력하고 김정은과의 밀착 관계는 쉽게 끊어질 수 없는 관계다. 이 때문에 이립(而立)을 갓 넘긴 철부지 독재자가 권좌에서 끌어내려질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아 보이고, 이로 인한 한반도 정세의 불확실성과 위험은 당분간 계속될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이일우 군사 통신원(자주국방네트워크 사무국장)
  • [北 대북전단 총격 이후] 北, ‘미군 유해’ 카드로 美와 접촉 안간힘

    북한이 ‘인질외교’에 이어 미군 ‘유해’를 카드로 미국에 대화를 촉구하는 모양새다. 북한은 그동안 자국을 방문한 미국 관광객을 ‘적대행위’ 등 죄목으로 억류해 미 정부와 관련 사안에 대한 논의를 촉구하는 일종의 ‘인질외교’를 구사했다. 하지만 미국은 북한이 원하는 ‘고위급’의 외교사절 파견은 없다는 입장을 유지하며 대화에 나서지 않고 있자 이번엔 ‘유해발굴 사업’ 재개를 고리로 북·미 접촉을 시도하는 것으로 분석된다. 북한 조선중앙통신은 13일 6·25전쟁 참전 미군 유해들이 유실될 위기에 놓였다며 이것은 미국의 ‘적대시정책’ 탓이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북한은 이날 ‘조선인민군 판문점 대표부 대변인 담화’에서 척 헤이글 미국 국방장관이 지난달 19일 미군 유해 발굴이 중단된 책임을 북한에 돌리는 발언을 했다며 “역사는 날강도적인 대조선 적대시정책으로 하여 조·미(북·미) 쌍방이 합의한 미군 유해 발굴 문제와 같은 인도주의 사업조차 파탄시킨 미 행정부의 반인륜적 범죄를 저주하며 단죄하게 될 것”이라고 미국의 책임을 강조했다. 북한이 미국과의 대화를 통한 해법 모색에 안간힘을 쓰는 것은 사실상 유엔을 비롯한 국제무대에서 미국의 주도로 대북 압박이 진행되고 있다는 현실적 고민을 반영한 것으로 풀이된다. 북한은 핵과 인권문제 등 국제사회의 대북 압박이 강화되는 시점에서 북·미 대화를 통한 ‘일괄타결’식 해법을 원하는 듯 보이지만, 미국은 여전히 ‘복지부동’이다. 미국은 1996년부터 북한에서 미군 유해 발굴 작업을 진행하다가 2005년 미국 발굴팀의 안전 우려를 이유로 중단했으며 2011년 북한과의 합의로 재개했으나 이듬해 3월 북한의 장거리 로켓 발사 계획 발표로 또다시 중단했다. 문경근 기자 mk5227@seoul.co.kr
  • [뉴스 분석] 남북 ‘2차 고위급 접촉’ 치열한 눈치작전

    지난 10일 대북 전단 살포를 둘러싼 남북 간 사격전으로 남북이 기존에 합의한 2차 고위급 접촉이 제대로 개최될지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지난 4일 북한 황병서 인민군 총정치국장 등 고위급 3인방의 방한으로 달아올랐던 화해 무드는 돌연한 남북 간 사격전으로 급속히 냉각된 상태다. 북한은 12일 2차 고위급 접촉은 무산된 것이나 다름없다고 경고하고 나섰다. 노동신문은 “(전단 살포의) 주모자는 다름 아닌 남조선 당국”이라며 “괴뢰패당의 처사로 북남 관계가 파국에 빠지게 된 것은 물론 예정된 제2차 북남 고위급 접촉도 물거품이 된 것이나 다름없게 됐다”고 비난했다. 북한은 또 이날 발표한 ‘남북고위급접촉 북측대표단 대변인 담화’에서 대북 전단을 계속 살포할 경우 “보다 강도 높은 섬멸적인 물리적 타격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위협했다. 이에 대해 우리 정부는 “2차 고위급 접촉은 이미 합의한 사안이기 때문에 지켜져야 한다는 것이 정부의 기본 입장”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향후 돌발변수에 주목하는 모습이다. 대북 민간단체들이 여전히 전단 살포 강행을 주장하고 있어 남북 간 무력 충돌 수위가 더 높아질 수 있기 때문이다. 통일부 당국자는 “과거 우리 국민의 신변 안전 문제가 있으면 필요시 안전 조치를 해 왔고 앞으로도 그런 입장이 적용되리라 생각한다”고 밝혀 향후 정부가 전단 살포를 제한할 가능성도 내비쳤다. 이런 가운데 국방부는 이날 “북한의 사격 직후 북한에 전화통지문을 보내 추가 도발 시 강력하게 대응할 것을 엄중하게 경고했다”고 뒤늦게 밝혔다. 당초 정부가 염두에 둔 고위급 접촉 의제는 이산가족 상봉 행사와 대화 정례화 등으로 요약됐다. 이와 함께 5·24 조치 해제 등도 폭넓게 논의할 수 있다는 게 정부의 전략으로 관측됐다. 하지만 지금 분위기로는 양측이 ‘입씨름’만 하다 돌아설 가능성도 있다. 물론 판 자체가 깨진 것은 아니라는 관측도 많다. 북 매체들은 이날 “고위급 접촉이 성사되기를 소원한다면 상대를 존중하는 예의부터 갖춰야 한다. 아직 선택의 기회는 있다”고 밝혀 대화 가능성을 열어 뒀다. 정성장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노동신문에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인신공격성 기사가 보이지 않는 점, 다른 대남 비방 기사가 없는 점으로 미뤄 아직은 고위급 접촉 가능성을 열어 두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고 했다. 우리 정부의 방향은 13일 통일준비위원회 전체회의에서 나올 박 대통령의 대북 메시지 등을 통해 나타날 것으로 보인다. 안석 기자 ccto@seoul.co.kr
  • [서울&평양 리포트] 군복 입은 2인자, 北 총정치국장은 어떤 자리

    [서울&평양 리포트] 군복 입은 2인자, 北 총정치국장은 어떤 자리

    저화질의 북한 텔레비전을 통해서만 보던 황병서 북한 총정치국장이 지난 4일 오전 인천공항에 나타났다. HD화면으로 보니 군복을 입은 옷매무새와 왼쪽 가슴의 ‘약장(군복의 훈장표시)’이 더욱 뚜렷하게 보였다. 과묵하게 속을 알듯 모를 듯한 표정의 ‘군복을 입은 북한의 2인자’가 머리를 바싹 밀고, 선글라스를 낀 건장한 경호원을 대동하고 우리 국민 앞에 처음으로 실물을 드러낸 순간이었다. 당시 오찬 회담 장소인 인천 영빈관에서 황병서를 본 한 정부 관계자는 “옅은 미소를 짓고 있는데, 시종일관 그 표정이 변하지 않아서 속을 알 수 없더라”며 “총체적으로 만만하게 볼 수 없는 고단수의 인사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고 밝혔다. 총정치국장이란 자리는 북한 전체 권력에서는 ‘2인자’, 군 서열에서는 ‘1인자’다. 하지만 정부 관계자나 북한 전문가들에게 총정치국장이 우리로 치면 어떤 위치라면 물어도 딱 부러진 대답을 듣기 어렵다. 하지만 이들의 분석을 종합해 보면 국방부 장관과 대통령 비서실장, 총리의 역할을 모두 합쳐 놓은 막강한 권한을 가졌다는 결론이 나온다. ●황병서, 김정은 후계체제 구축하며 초고속 승진 황병서는 2005년 북한에서도 무소불위의 권한을 가진 것으로 알려진 당 조직지도부에 부부장으로 승진한 후 군을 담당하는 당내 1인자인 조직지도부 1부부장 그리고 조선인민군 대장, 차수, 군내 서열 1인자인 군 총정치국장까지 거칠 것 없는 출세길을 달렸다. 그가 이처럼 군부를 장악하고 실세로 부상할 수 있었던 것은 김정은 제1위원장의 생모 고영희의 신임을 받아 일찍부터 김정은 후계 체제 구축에 앞장선 것이 주효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2009년 김정은이 후계자로 낙점되기 이전부터 조직지도부에서 김정은 후견인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전해졌다. 또 김정은이 장성택 처형을 결심했을 때도 이를 막후에서 실행한 인물로 알려진다. 그의 방한 당시 전임 총정치국장인 최룡해마저도 그에게 깍듯한 예의를 갖췄던 것을 보면 그의 위상은 단순히 2인자로 표현할 수 없다는 분석도 나온다. ●당 중앙위원회의 집행부… 총참모부보다 우위 총정치국이 북한군 창설 초기부터 만들어진 조직은 아니다. 북한은 1948년 2월 인민군을 창설하고, 같은 해 9월 정권을 수립하면서 ‘민족보위성(인민무력부 전신) 문화훈련국’으로 군대에 대한 당의 정치적 지도를 보장하는 기구를 설치했다. 이어 1950년 군인들의 사상무장을 담당하기 위해 ‘민족보위성 문화훈련국’을 ‘조선인민군 총정치국’으로 개편했다. 이는 군대에서의 정치사업을 민족보위성으로부터 분리해 당의 직접적인 지도하에 놓았음을 의미했다. 북한은 군을 ‘당의 군대’로 치켜세우며 당 중앙을 중심으로 군대의 당적 지도를 총정치국에서 담당하는 정치기구로 승격시켰다. 총정치국의 위상은 당 규약에서도 찾을 수 있다. 노동당 규약 49조는 “조선인민군 총정치국은 인민군 당위원회의 집행부서로서 당중앙위원회 부서와 같은 권능을 가지고 사업을 한다”고 규정하고, “조선인민군 총정치국 아래 각급 정치부들은 해당 당위원회의 집행부로서 당정치사업을 조직집행한다”라고 밝히고 있다. 이에 따라 총정치국은 당 중앙위원회의 집행부서로 군의 최상층부에서 하부단위까지 당이 총정치국을 통해 군대에 대한 정치사업을 진행, 군부에 대한 당적 지도를 강화하고, 당의 군대로 유지될 수 있게 한다. 결국 총정치국은 총참모부, 인민무력부와 형식적으로 수평적 역할분담 체계를 갖추고 있지만, 실제로 총참모부와 인민무력부보다 우위에 있다. ●‘15년 군림’ 조명록 시절부터 ‘넘버2’ 본격 행보 하지만 총정치국장이 처음부터 북한 권력의 전면에 나섰던 것은 아니다. 총정치국장이 본격적으로 2인자 역할을 한 것은 조명록 전 총정치국장 때부터다. 조명록은 1995년 10월부터 2010년 11월까지 무려 15년 동안 총정치국장을 지냈다. 조명록이 총정치국장을 처음 맡았을 때는 공군사령관 신분이었다는 점에서 그때까지는 ‘총정치국장=2인자’ 공식이 통용되던 때는 아니었다는 것이 대체적인 분석이다. 조명록은 두 번이나 김정일 특사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미국과 중국을 방문했다. 2000년 10월 한반도 분단 이후 북한의 인사로는 최고위급 특사로 미국을 방문해 당시 빌 클린턴 대통령과 군복 차림으로 회담하면서 북·미관계에서 최고 수준인 ‘북미 코뮈니케’에 합의했다. 그는 2003년 3월에도 신병치료를 핑계로 베이징에 체류하면서 차오강촨(曺剛川) 국무위원 겸 국방부장을 비롯한 중국 군부지도자들과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다자간 협상 등을 논의했다. 이 과정에서 6자회담 내 북한·미국·중국 3자회담의 참석 여부를 논의하며 실질적인 특사 역할을 수행해 김정일의 절대적 신임을 받는 북한 실세의 면모를 과시하기도 했다. 최룡해도 황병서 이전에 총정치국장에 올랐던 인물이다. 그는 김정일의 총애를 받으며 이른 나이인 36세에 김일성·김정일의 800만 전위조직인 ‘조선사회주의로동청년동맹’(사로청) 중앙위원회 위원장의 중책을 맡았던 인물이다. 승승장구하던 그는 1991년 말쯤에 반사회적 행위라는 과오로 실각된다. 그의 ‘반사회적 행위’ 혐의는 북한 당국이 공식적으로 밝힌 바는 없지만, 사로청 산하 외화벌이 회사를 통해 벌어들인 자금으로 방탕한 생활을 하고, 산하 선전·선동 및 예술공연단체인 ‘사로청 협주단’ 소속 가수들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은 것으로 알려진다. 실각 후 5년간 ‘혁명화’를 거쳐 1996년 사로청 후신인 ‘김일성사회주의 청년동맹’ 중앙위원회 1비서로 복귀한 후 김정은 체제가 들어선 지금까지도 순항 중에 있다. ●‘패션코드’는 선군정치와 핵·경제 병진노선 유지 총정치국장들은 대외 행보 때마다 군복을 입었던 것이 특징이다. 조명록이 2000년 10월 특사 자격으로 미국을 찾아 빌 클린턴 당시 미 대통령을 만났을 때도 군복 차림이었다. 군복은 결국 북한으로서는 자존심을 상징하는 것으로 분석된다. 선군사상에 입각한 선군정치를 드러내고 핵·경제 병진노선을 계속 유지하겠다는 메시지이자, 자신들의 군사력을 강조하기 위한 ‘패션코드’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황병서가 이번에 군복을 입고 온 것을 북한 군부의 메시지로 해석하는 시각도 있다. 영빈관 오찬에서 친근하게 미소는 짓고 있었지만, 결국 황병서는 우리에게는 주적이자 ‘적장’인 것이 사실이기도 했다. 최룡해가 총정치국장이었던 때에도 군복을 입고 특사 자격으로 중국에 간 적이 있었다. 지난해 2월 3차 핵실험 이후 최룡해는 마지막까지 북핵실험을 반대한 중국을 달래기 위해 김정은의 특사자격으로 중국을 방문해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과 류윈산(劉雲山) 정치국 상무위원과 회담했다. 당시 중국은 북한에 대한 불편한 심기를 드러낸 것으로 알려졌는데, 특히 류원산과의 회담 때 군복을 입었던 최룡해는 중국 측의 항의를 받고 다음날 시진핑과 만날 때는 군복을 벗고 만나야 했다. 그는 당시 중국의 달라진 분위기를 경험하고 빈손으로 북한에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문경근 기자 mk5227@seoul.co.kr
  • [시론] 북한의 출구전략 시작됐다/조민 통일연구원 연구본부장

    [시론] 북한의 출구전략 시작됐다/조민 통일연구원 연구본부장

    평양은 지금 출구를 찾고 있다. 북한은 지난해 2월 제3차 핵실험으로 자초한 국제사회의 대북제재 포위망을 뚫어야 하는 절박한 국면에 처해 있다. 아시안게임 피날레를 정치 무대로 뒤바꾼 북한 권력 실세 3인의 방남(訪南)은 북한의 출구전략의 일환으로 기획된 이벤트였다. 국방위원회 부위원장 겸 인민군 총정치국장인 황병서를 앞세운 3인의 전격 방남으로 7년간 굳게 닫혔던 남북관계의 빗장이 풀리는 순간이다. 과연 깜짝 방남으로 남북관계가 풀리면서 동아시아 정치 지형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까. 이는 북한의 진정성과 선택적 결단에 달린 문제다. ●병진노선의 딜레마 북한은 핵무력과 경제발전을 함께 가져간다는 ‘병진노선’을 선언했다. 그러나 경제발전은 외부의 지원과 투자 없이는 불가능하며, 핵문제에 대한 북한의 태도 변화 없이는 대북 경제 제재가 풀리기는 어렵다. 미국은 ‘전략적 인내’ 입장을 견지하고 있으며 중국은 김정은 정권에 대해 냉랭한 태도를 감추지 않고 있다. 지난 5월 말 북·일 교섭은 기대만큼 진전되지 못했으며, 러시아는 대북 지원에도 불구하고 동북아 지역에서 전략적 위상의 한계를 안고 있다. 북한은 지난 9월 한 달 내내 미국과 유럽을 누비며 대서방 외교에 주력했다. 강석주 국제담당 비서의 유럽 4개국 순방과 리수용 외무상의 유엔 외교 활동에도 불구하고 성적표는 초라하기 이를 데 없었다. 북한은 대외전략을 조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며, 이에 서울을 출구로 삼아 포위 국면을 빠져나와야 한다. 아시안게임 무대를 활용한 ‘깜짝 쇼’는 이처럼 수세적 국면 속의 공세적 기회 포착으로 이해된다. ●‘작은 통로’와 ‘오솔길’ 남북 간 신뢰의 수준은 대단히 낮다. 박근혜 대통령의 ‘작은 통로’론은 작은 것에서부터 신뢰를 쌓아 관계를 개선해 나가자는 입장이다. 이에 대해 황병서 총정치국장은 ‘오솔길’론으로 화답했다. 우리는 북한이 내민 손을 잡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 측의 청와대 예방 의사 타진에 북측이 거부함으로써 마치 남북대화의 갑을 관계가 뒤바뀌는 듯한 모습이 연출됐다. 북측의 노회한 태도에 한 방 먹은 셈이다. 남북대화에서 청와대가 맞상대로 전면에 나선다면 북측의 노림수에 빠져드는 게임구도가 형성될 수 있다는 점에서 대화 틀 마련에 보다 신중한 접근이 요구된다. ‘5·24 조치’의 해제냐, 유지냐 하는 이분법적 사고에서 탈피해야 한다. ‘5·24 조치’ 프레임에 우리 스스로 갇혀 남남갈등을 유발하고, 과거 정부의 조치가 현 정부를 얽매는 올가미가 돼서는 곤란하다. ‘5·24 조치’는 더 이상 언급할 필요가 없다. 박근혜 정부는 대북정책의 원칙 위에서 상황 변화에 부응하는 새로운 정책을 추진하면 그만이다. 환경협력의 통로, 민생의 통로를 열기 위해 인도적 지원을 활발하게 펼쳐야 한다. 북한이 서울을 교두보로 삼아 피(被)포위 국면을 벗어나고자 하지만 핵문제에 대한 전향적 태도 없이 소기의 목적 달성을 노린다면, 이는 어리석은 작태일 뿐이다. 물론 우리는 우방국과 굳건한 공조 위에서 북한 비핵화 전략을 추진해야 하지만, 북한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붙일 필요는 없다. 남북관계 개선을 통해 한반도 긴장 국면을 해소하면서 ‘작은 통일’의 첫걸음을 떼야 할 때다. 제2차 고위급 회담에서는 당장 이산가족 문제부터 풀면서, 작지만 지속 가능한 교류협력 사안을 찾아 남북관계의 다변화, 다양화를 모색해야 한다. 오솔길을 지나 대통로로 나아가는 북한의 활로는 남북관계 개선에 달려 있다. 우리의 입장도 크게 다르지 않다. 남북관계 개선의 모멘텀을 놓쳐서는 안 된다. 남북대화 정례화로 가는 길은 쉬운 일부터 시작하는 데에 있다. 북한 최고위층의 건강과 관련, 평양분위기가 예사롭지 않다. 북한 내부사정이 한반도 긴장국면으로 치닫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도 남북관계 개선이 절실하다.
  • [北 고위급 대표단 전격 방한] 北 중요 고비 때마다 ‘해결사’ 파견… 남북정상회담 등 성과

    황병서, 최룡해, 김양건의 방한은 과거 북한의 대남 특사 외교를 떠올리게 한다. 북한이 중요한 고비 때마다 특사를 내보내 문제 해결의 돌파구를 찾았던 전례가 이번에도 나타난 것으로 분석된다. 최근 북한이 한국에 보낸 특사는 이명박 정부 때인 2009년 8월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당시 북한의 조문사절단이 대표적으로 꼽힌다. 당시 조문사절단은 김기남 노동당 비서와 김양건 대남담당 비서를 주축으로 원동연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아태위) 실장, 맹경일 아태위 참사, 리현 아태위 참사 등 6명으로 구성됐다. 당시 조문사절단은 “남북 관계 개선의 임무를 부여받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특사로 왔다”고 강조하며 국회를 방문하고 이명박 당시 대통령을 예방하는 등 특사 임무를 수행하고 돌아갔다. 이 때문에 당시 경색됐던 남북 관계의 국면 전환이 기대되기도 했다. 과거 남북 관계에서 대남 특사들은 주로 비밀리에 움직인 것이 특징이다. 2007년 9월 김 대남담당 비서가 극비리에 서울을 방문해 한 달 뒤 열린 제2차 남북 정상회담 의제를 합의한 데 이어 노무현 전 대통령을 예방하는 등 정상회담 성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 김 비서는 그해 11월 남측 초청으로 서울을 방문해 경남 거제시 대우조선소 등 산업 현장을 둘러보기도 했다. 북한은 2000년 6월 제1차 남북 정상회담이 끝난 뒤 같은 해 9월 김용순 당 비서를 서울로 보내 6·15 남북공동선언 이행의 중요성을 재차 확인하기도 했다. 김대중 정부 당시 박지원 문화관광부 장관은 북측과의 비밀 협상을 통해 반세기 만의 남북 정상회담을 성사시켰고 노무현 정부에선 김만복 당시 국가정보원장이 특사로 비밀 방북해 제2차 남북 정상회담을 이끈 바 있다. 하지만 이번에 방한한 북한 고위급 대표단의 경우 인사 면면의 ‘중량감’에도 불구하고 특사로 보기는 어렵다는 분석도 나온다. 북한이 이번 방한의 목적을 북한 선수단 격려와 인천아시안게임 폐막식 참여라고 밝혔다는 점에서 북한 선수단의 ‘스포츠 성과’에 대한 격려 차원이 더 강하다는 것이다. 2000년 9월 북한 군부의 고위급 인사로 꼽히는 박재경 조선인민군 총정치국 부총국장(대장)의 경우 그가 북한의 특사로 왔다는 관측이 나왔지만 김대중 당시 대통령에게 송이를 전달한다는 본래 방문 목적만을 수행하고 수시간 만에 평양으로 귀환하기도 했다. 안석 기자 ccto@seoul.co.kr
  • 김정은 전용기 타고 온 北황병서 최룡해 김양건, 인천 아시안게임 폐막식 참석 외 목적은?

    김정은 전용기 타고 온 北황병서 최룡해 김양건, 인천 아시안게임 폐막식 참석 외 목적은?

    ‘김정은 전용기’ 김정은 전용기를 타고 북한 고위급 인사들이 전격 방한해 관심을 모으고 있다. 북한 황병서 인민군 총정치국장을 비롯해 최고위급 인사들 3명이 4일 인천아시안게임 폐막식 참석을 위해 김정은 전용기를 타고 온 것으로 확인됐다. 북한의 최고위급 인사 3명이 동시에 방문한 것도 처음이지만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의 전용기를 이용했다는 점도 매우 이례적이다. 북한은 표면적으로는 인천아시안게임 폐막식 행사 참석을 위해 방문했지만 남북간의 중요한 대화가 진행될 가능성이 있다. 이번에 방문한 인사는 황병서 군총정치국장과 최룡해 노동당 비서, 김양건 대남 당당 비서 겸 통일전선부장이다. 황병서는 군부의 최고직으로 북한 서열 2위다. 최룡해는 노동당 비서는 국가체육지도위원장을 맡고 있다. 또한 김양건 대남 담당 비서 겸 통일전선부장으로 북한의 대남 정책을 담당하고 있다. 北황병서 최룡해 김양건, 인천 아시안게임 폐막식 참석 소식에 네티즌들은 “北황병서 최룡해 김양건, 인천 아시안게임 폐막식 참석, 대화가 잘 이루어지길 바란다”, “北황병서 최룡해 김양건, 인천 아시안게임 폐막식 참석, 좋은 소식 전해지기를”, “北황병서 최룡해 김양건, 인천 아시안게임 폐막식 참석, 갑자기 고위급 인사라니 무슨 일일까” 등의 반응을 보였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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