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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한 김정은, 서열2위 현영철 고사포 공개 처형 ‘경악’ 군행사에서 졸다가..

    북한 김정은, 서열2위 현영철 고사포 공개 처형 ‘경악’ 군행사에서 졸다가..

    북한 김정은이 인민군 서열 2위 현영철을 고사포를 사용해 공개 처형한 사실이 알려졌다. 현영철은 재판도 없이 구속된 지 3일 만에 처형됐다. 숙청된 이유는 군 행사에서 졸고 김정은 지시에 말대꾸를 하는 등 불경죄를 저질렀다는 것. 국가정보원 한기범 1차장은 13일 오전 국회 정보위원들에 대한 긴급 브리핑에서 북한의 현영철 인민무력부장이 최근 숙청당한 것으로 확인됐다고 보고했다. 국정원은 “지난달 30일 현영철은 불경죄로 수백 명이 보는 앞에서 고사포로 처형됐다. 그러나 군 서열 1위인 황병서 인민군 총 정치국장 겸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의 총살설은 사실무근”이라고 전했다. 사진=방송캡처 뉴스팀 seoulen@seoul.co.kr
  • 현영철 인민무력부장 숙청, 김정은 군행사서 졸았다고 ‘불경죄’ 고사포 처형 ‘경악’

    현영철 인민무력부장 숙청, 김정은 군행사서 졸았다고 ‘불경죄’ 고사포 처형 ‘경악’

    현영철 인민무력부장 숙청, 김정은 군행사서 졸았다고 ‘불경죄’ 고사포 처형 ‘공포’ ‘김정은 서열 2위 현영철 인민무력부장 고사포 처형’ 현영철 인민무력부장 숙청 소식이 전해져 충격을 주고 있다. 북한 김정은이 인민군 서열 2위 현영철 인민무력부장을 고사포를 사용해 공개 처형한 사실이 알려졌다. 현영철 인민무력부장은 재판도 없이 구속된 지 3일 만에 처형됐다. 숙청된 이유는 군 행사에서 졸고 김정은 지시에 말대꾸를 하는 등 불경죄를 저질렀다는 것. 국가정보원 한기범 1차장은 13일 오전 국회 정보위원들에 대한 긴급 브리핑에서 북한의 현영철 인민무력부장이 최근 숙청당한 것으로 확인됐다고 보고했다. 국정원은 “지난달 30일 현영철 인민무력부장은 불경죄로 수백 명이 보는 앞에서 고사포로 처형됐다. 그러나 군 서열 1위인 황병서 인민군 총 정치국장 겸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의 총살설은 사실무근”이라고 전했다. 다음은 국회 정보위원장인 새누리당 김광림 의원이 전한 브리핑 주요 내용. 국정원은 오늘 아침에 국회 정보위원회에서 북한 현영철 인민무력부장(군부 서열 2위)이 비밀리에 숙청됐다고 보고했다. 국정원은 북한이 지난 4월말 현영철 인민무력부장을 평양 강건종합군관학교 사격장에서 고사총으로 총살했다는 첩보도 입수됐다고 밝혔다. 현영철 인민무력부장은 4월27~28일간 진행된 모란봉 악단공연을 관람했으나 4월30일 김정은의 군 훈련일꾼대회 참가자들과의 기념촬영에는 불참했고 이후 공개석상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국정원은 현영철 인민무력부장 숙청사유에 대해 첫째 김정은에 대한 불만표출, 둘째 김정은 지시 수 차례 불이행, 태만과 함께 세 번째로 김정은이 주재한 훈련일꾼대회에서 조는 모습의 불충스러운 모습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고 보고했다. 반역죄로 처형됐다는 첩보도 입수되고 있다고 밝혔다. 현영철 인민무력부장 숙청은 과거 장성택 처형 때와는 달리 당 정치국 결정 또는 재판절차 진행여부 발표 없이 체포 2~3일 만에 전격적으로 이뤄진 것이 특징이라고 설명했다. 한편 고사포는 과거 소련에서 개발한 14.5㎜ ZPU 중기관총 여러 정을 묶어 만든 대공화기다. 고사총은 수직으로 발사했을 때 1.4㎞ 상공에 있는 목표물까지 맞힐 수 있고, 일반적인 대공 사격을 할 때도 사정거리가 2㎞에 달한다. 사진=방송캡처(현영철 인민무력부장 고사포 처형) 뉴스팀 seoulen@seoul.co.kr
  • 북한 김정은, 현영철 인민무력부장 불경죄로 고사포 처형 ‘대체 왜?’ 이유 들어보니

    북한 김정은, 현영철 인민무력부장 불경죄로 고사포 처형 ‘대체 왜?’ 이유 들어보니

    북한 김정은이 인민군 서열 2위 현영철 인민무력부장을 고사포를 사용해 공개 처형한 사실이 알려져 충격을 주고 있다. 현영철 인민무력부장은 재판도 없이 구속된 지 3일 만에 처형됐다. 군 행사에서 졸고 김정은 지시에 말대꾸를 하는 등 불경죄를 저질렀다는 것이 숙청 이유로 전해졌다. 뉴스팀 seoulen@seoul.co.kr
  • 북한 김정은, 현영철 인민무력부장 불경죄로 고사포 처형 ‘이유가 더 충격’

    북한 김정은, 현영철 인민무력부장 불경죄로 고사포 처형 ‘이유가 더 충격’

    북한 김정은이 인민군 서열 2위 현영철 인민무력부장을 고사포를 사용해 공개 처형한 사실이 알려져 충격을 주고 있다. 현영철 인민무력부장은 재판도 없이 구속된 지 3일 만에 처형됐다. 군 행사에서 졸고 김정은 지시에 말대꾸를 하는 등 불경죄를 저질렀다는 것이 숙청 이유로 전해졌다. 국가정보원 한기범 1차장은 13일 오전 국회 정보위원들에 대한 긴급 브리핑에서 북한의 현영철 인민무력부장이 최근 숙청당한 것으로 확인됐다고 보고했다. 국정원은 “지난달 30일 현영철 인민무력부장은 불경죄로 수백 명이 보는 앞에서 고사포로 처형됐다. 그러나 군 서열 1위인 황병서 인민군 총 정치국장 겸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의 총살설은 사실무근”이라고 전했다. 뉴스팀 seoulen@seoul.co.kr
  • 북한 김정은, 서열2위 현영철 수백명 앞에서 고사포 처형 ‘졸다가..’ 불경죄

    북한 김정은, 서열2위 현영철 수백명 앞에서 고사포 처형 ‘졸다가..’ 불경죄

    북한 김정은, 서열2위 현영철 수백명 보는 앞에서 고사포 처형 ‘졸다가..’ 불경죄 ‘김정은 서열 2위 현영철 고사포 처형’ 북한 김정은이 인민군 서열 2위 현영철을 고사포를 사용해 공개 처형한 사실이 알려져 충격을 주고 있다. 현영철은 재판도 없이 구속된 지 3일 만에 처형됐다. 군 행사에서 졸고 김정은 지시에 말대꾸를 하는 등 불경죄를 저질렀다는 것이 숙청 이유로 전해졌다. 국가정보원 한기범 1차장은 13일 오전 국회 정보위원들에 대한 긴급 브리핑에서 북한의 현영철 인민무력부장이 최근 숙청당한 것으로 확인됐다고 보고했다. 국정원은 “지난달 30일 현영철은 불경죄로 수백 명이 보는 앞에서 고사포로 처형됐다. 그러나 군 서열 1위인 황병서 인민군 총 정치국장 겸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의 총살설은 사실무근”이라고 전했다. 다음은 국회 정보위원장인 새누리당 김광림 의원이 전한 브리핑 주요 내용이다. 국정원은 오늘 아침에 국회 정보위원회에서 북한 현영철 인민무력부장(군부 서열 2위)이 비밀리에 숙청됐다고 보고했다. 국정원은 북한이 지난 4월말 현영철을 평양 강건종합군관학교 사격장에서 고사총으로 총살했다는 첩보도 입수됐다고 밝혔다. 현영철은 4월27~28일간 진행된 모란봉 악단공연을 관람했으나 4월30일 김정은의 군 훈련일꾼대회 참가자들과의 기념촬영에는 불참했고 이후 공개석상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국정원은 숙청사유에 대해 첫째 김정은에 대한 불만표출, 둘째 김정은 지시 수 차례 불이행, 태만과 함께 세 번째로 김정은이 주재한 훈련일꾼대회에서 조는 모습의 불충스러운 모습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고 보고했다. 반역죄로 처형됐다는 첩보도 입수되고 있다고 밝혔다. 현영철 숙청은 과거 장성택 처형 때와는 달리 당 정치국 결정 또는 재판절차 진행여부 발표 없이 체포 2~3일 만에 전격적으로 이뤄진 것이 특징이라고 설명했다. 한편 고사포는 과거 소련에서 개발한 14.5㎜ ZPU 중기관총 여러 정을 묶어 만든 대공화기다. 고사총은 수직으로 발사했을 때 1.4㎞ 상공에 있는 목표물까지 맞힐 수 있고, 일반적인 대공 사격을 할 때도 사정거리가 2㎞에 달한다. 사진=방송캡처 (김정은 서열 2위 현영철 고사포 처형) 뉴스팀 seoulen@seoul.co.kr
  • 북한 김정은, 현영철 인민무력부장 수백명 앞에서 고사포 처형 ‘졸았다고..’

    북한 김정은, 현영철 인민무력부장 수백명 앞에서 고사포 처형 ‘졸았다고..’

    북한 김정은, 현영철 인민무력부장 수백명 앞에서 고사포 처형 ‘졸았다고..’ ‘김정은 서열 2위 현영철 인민무력부장 고사포 처형’ 북한 김정은이 인민군 서열 2위 현영철 인민무력부장을 고사포를 사용해 공개 처형한 사실이 알려져 충격을 주고 있다. 현영철 인민무력부장은 재판도 없이 구속된 지 3일 만에 처형됐다. 군 행사에서 졸고 김정은 지시에 말대꾸를 하는 등 불경죄를 저질렀다는 것이 숙청 이유로 전해졌다. 국가정보원 한기범 1차장은 13일 오전 국회 정보위원들에 대한 긴급 브리핑에서 북한의 현영철 인민무력부장이 최근 숙청당한 것으로 확인됐다고 보고했다. 국정원은 “지난달 30일 현영철 인민무력부장은 불경죄로 수백 명이 보는 앞에서 고사포로 처형됐다. 그러나 군 서열 1위인 황병서 인민군 총 정치국장 겸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의 총살설은 사실무근”이라고 전했다. 뉴스팀 seoulen@seoul.co.kr
  • [단독] 北, 러시아에 핵보유국 인정 요구했다

    [단독] 北, 러시아에 핵보유국 인정 요구했다

    북한이 중국에 이어 러시아에도 자신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해 달라고 요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러시아에서 9일 (현지시간) 열린 제2차 세계대전 전승기념식에 당초 참석이 유력했던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불참하게 된 것도 러시아가 북한의 요구를 거절한 것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정부 고위관계자는 10일 “김 제1위원장의 방러 가능성이 높다고 봤는데 막판 틀어지게 된 요인 중 하나가 러시아가 북한의 핵보유국 지위 인정을 거부했기 때문인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김 제1위원장의 방러를 앞두고 북한이 많은 요구를 내걸었는데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으로서 핵 비확산을 강조하는 러시아로서는 핵보유국 인정을 해달라는 북한의 요구를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 같다”고 덧붙였다. 북한은 앞서 2013년 5월 김 제1위원장의 특사 자격으로 중국을 방문한 최룡해 인민군 총정치국장이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과의 면담에서도 직접 김 제1위원장의 친서를 보이며 핵보유국 인정을 요구했었다. 당시 중국은 북한의 요구를 거절했으며 한 달 뒤 열린 미·중 정상회담에서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할 수 없음을 분명히 했다. 북한은 2012년 4월 헌법에 핵보유국임을 명기하고 2013년은 경제와 핵 무력 병진노선 정책을 채택한 바 있다. 이 때문에 북한이 중국에 이어 러시아에도 핵보유국 지위를 인정해달라고 요구한 것은 핵·경제 병진 노선을 정당화하고 대미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와 관련, 조선중앙통신이 9일 김 제1위원장이 참관한 가운데 전략잠수함 탄도탄 수중시험 발사에 성공했다고 주장한 것도 핵보유국 지위 인정 요구 거절에 대한 무력시위 성격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잠수함 발사 탄도미사일(SLBM)을 개발하고 핵탄두 소형화를 자체적으로 실현해 중·러의 핵보유국 인정 여부에 관계없이 핵탄두를 탄도미사일에 탑재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주겠다는 것이다. 북한의 안보 위협이 현실화되면서 탐색적 대화를 통한 6자 회담을 조속히 재개해 이 문제를 적극적으로 풀어나가야 한다는 우려도 증폭되고 있다. 한편 청와대는 북한이 9일 함대함 미사일 3발을 발사한 데 이어 잠수함 발사 미사일 시험까지 공개하면서 핵과 미사일 능력을 발전시키자 긴급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원회를 소집해 북한의 도발 위협 대응 방안을 논의했다. 이제훈 기자 parti98@seoul.co.kr 하종훈 기자 artg@seoul.co.kr
  • [재계 인맥 대해부 (4부)뜨고 지는 기업&기업인 태영그룹] 13세에 월남… 의원 보좌관 시절 인맥이 큰 자산으로

    [재계 인맥 대해부 (4부)뜨고 지는 기업&기업인 태영그룹] 13세에 월남… 의원 보좌관 시절 인맥이 큰 자산으로

    태영그룹을 설립한 윤세영(82) 회장은 해방 전인 1933년 강원 철원군 동송면 오지리에서 고 윤현구씨와 고 임복희씨의 2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오지리는 10대째를 이어 오며 해평(海平) 윤씨 집안이 옹기종기 모여 살던 작은 동네였다. 선대로 올라가면 참판과 부사, 현감이 흔할 정도로 뼈대 있는 가문이었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벼슬길에서 멀어지면서 오지리 사람들은 한학과 농사일에만 전념했다. 윤 회장이 관인초등학교를 졸업하던 1946년 38선 이북에 위치한 오지리는 조선인민공화국이 장악하고 있었다. 그해 윤씨 가족은 정든 고향을 빠져나와 월남했고 경기 포천 등을 거쳐 1948년 서울 종로구 명륜동에 터를 잡았다. 새 터전에 정착하기도 전에 터져 버린 전쟁은 윤씨 가족에게 평안한 삶을 허락하지 않았다. 서울이 인민군에게 점령되자 당시 경기 상업중학교를 다니던 윤 회장은 의용군으로 끌려갈 위기에 처했다가 다행히 남보다 작은 체구로 강제징집을 면할 수 있었다. 윤씨 가족은 1951년 1·4 후퇴를 맞아 남쪽으로 피란을 결정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가족이 뿔뿔이 흩어졌다. 전쟁이 끝나 후 윤 회장은 아버지가 전쟁통에 돌아가셨다는 비보를 접했다. 어떤 과정으로 유명을 달리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어머니를 비롯한 나머지 가족과 다시 상봉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넉넉지 않은 살림이었지만 어머니 임씨의 교육열은 대단했다. 다시 서울로 올라온 윤 회장은 서울고를 거쳐 1년간의 재수 생활을 통해 1956년 서울대 법과대학에 입학했다. 대학교 2학년 때 논산훈련소에 입소한 그는 어려운 집안 형편 등을 고려해 통역장교에 지원했다. 지금은 상상도 못할 일이지만 그는 춘천에서 군 복무를 하면서 서울대생으로 학업을 이어 갔다. 꿈에 그리던 학교였지만 출석은 불가능했다. 당시는 교실에 비치된 출석부에 학생이 직접 도장을 찍는 식이어서 친구들에게 아예 도장을 맡겼다. 직접 이름을 불러 확인하는 수업은 친구들이 대신 대답을 해 주는 식이었다. 이수성(전 국무총리), 정해창(전 대통령 비서실장), 고 최동규(전 서울산업대 총장) 등 쟁쟁한 인물들이 어렵게 학업을 이어 가는 친구를 도와줬다. 하지만 시험은 봐야 했다. 특별 휴가를 내고 서울에 올라와 친구들의 노트를 빌려 벼락치기를 했다. 나름 최선을 다했지만 전국에서도 수재들만 모인 학교에서 수업도 듣지 못한 그가 벼락치기만으로 좋은 성적을 낼 수는 없었다. 그렇게 윤 회장은 남들보다 1년 6개월 늦은 1961년 9월 서울대 법학과를 졸업했다. 5·16 군사혁명이 일어난 1961년에 아내 변금옥(80)씨를 만났다. 아내와 서울대 치과대 동기 동창인 외사촌 형수가 “좋은 처자가 있다”며 종로5가에 치과를 개업한 변씨의 병원 주소 등을 일러 줬다. 몰래 병원을 찾은 윤 회장은 곱게 한복을 입고 진료를 보는 변씨에게 푹 빠졌다. 결국 두 사람은 1년여간 사귀다 결혼했다. 변씨의 집안도 고향을 떠나 월남한 아픈 기억이 있었다. 금옥씨의 아버지 고 변원규씨는 일본에서 익힌 날염 기술로 평양에 원일방직을 세운 사업가였지만 분단으로 모든 것을 버리고 남한으로 내려왔다. 그녀가 대학을 졸업하기전 사망한 아버지를 대신해 변씨는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훗날 처남들 중 일부는 태영그룹에서 매형의 사업을 도왔다. 전 대한스키협회 회장을 지낸 변탁씨는 전 태영건설 대표이사, 변건씨는 전 SBS 임원, 변용씨는 원도시건축 대표, 변철씨는 태영엔터테인먼트 대표이사로 근무했다. 모두가 힘든 시기였지만 가정은 단란했다. 윤 회장과 변씨는 1남 2녀(수연, 석민, 재연)를 뒀다. 윤 회장은 봉명그룹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공화당 3선 의원이자 사업가인 고 이동녕 봉명그룹 회장을 8년간 모셨다. 몸은 봉명 소속이었지만 업무는 의원 보좌관이 주였다. 4대 민의원을 거쳐 6대 국회에 진출해 국방위원을 하던 이 의원은 자신을 보좌할 사람을 물색하던 중이었다. 이 의원의 부인과 윤 회장의 장모가 막역한 사이였고, 양가가 동향이었다는 점도 두 사람을 이어 준 계기가 됐다. 윤 회장은 지금까지 이 의원을 ‘어르신’이라고 부르며 마음으로 존경한다. 사실 의원 보좌관은 사업가로 알려진 윤 회장에게는 다소 엉뚱한 경력이다. 하지만 윤 회장은 의원 보좌관으로서 8년간 쌓은 정계와 재계의 인연이 훗날 자신에게 큰 자산으로 남았다고 회고한다. 유영규 기자 whoami@seoul.co.kr
  • [뉴스 플러스] 황병서, 다시 北 권력서열 2위에

    [뉴스 플러스] 황병서, 다시 北 권력서열 2위에

    황병서 북한군 총정치국장이 권력 서열 2위로 자리매김했다. 북한 조선중앙TV는 8일 김정일 국방위원장 추대 22주년 중앙보고대회 소식을 전하면서 황 국장을 ‘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상무위원회 위원이며 조선인민군 총정치국장인 조선인민군 차수’로 호칭했다. 북한의 권력 서열 2위는 지난해 5월 황 국장, 지난해 10월 최룡해 당비서, 올해 4월 다시 황 국장으로 엎치락뒤치락하는 양상을 보이게 됐다.
  • 與서도 ‘5·24 해제’ 논란… 정치적 해법 부상

    與서도 ‘5·24 해제’ 논란… 정치적 해법 부상

    천안함 폭침 5주기를 맞아 안보 분위기가 고조되는 가운데 5·24조치 해제와 관련해 여당인 새누리당 내에서 온도 차를 보이는 등 논쟁이 뜨거워지고 있다. 여기에 북한이 가세하고 정부가 반박하는 모양새다. 논란이 불거진 것은 지난 23일 이인제 새누리당 최고위원과 유승민 원내대표가 5·24조치 해제를 두고 찬반으로 나뉘어 격론을 펼치고 이에 북한이 작정하고 남측을 비난하면서부터다. 북한은 지난 24일 국방위원회 담화를 통해 “천안함 폭침주장은 날조다”라면서 “5·24조치는 즉각 해제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정부는 당일 통일부 당국자와 국방부 대변인이 나서 “천안함 폭침은 이미 국제 공동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북한의 소행임이 명백히 밝혀진 사안”이라며 “북한의 소행이기 때문에 그런 북한의 변명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게 우리의 기본 입장”이라며 북한의 일방적 주장을 일축했다. 정부의 주장에 북한은 25일 조선인민군 판문점대표부 ‘고발장’을 통해 “(5·24조치의 원인이 된) 천안함 침몰 사건은 미국에 의해 실행된 날조극”이라며 음모론을 제기하는 등 양측 간 비방전으로 전개되는 양상이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5·24조치 해제는 그동안 야당을 비롯한 진보진영에서 꾸준히 제기된 것이어서 새로울 것은 없지만 여당인 새누리당 내에서 이 문제를 공론화하면서 정치적 타결을 통한 해법이 부상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북한이 사과 의지가 없는 상태에서 거듭된 사과 요구는 남북 관계를 가로막는 장애물이란 지적과 함께 선제적인 5·24조치 해제를 촉구하고 있다. 하지만 승조원 46명의 생명을 앗아 간 북한의 특·대형 도발 사건에 대해 재발 방지나 진실된 사과 없이 정치적 타협만으로 결단하라고 압박하는 것은 국민의 생명과 재산 보호가 국가의 책무라는 본질과 대립되는 사안이라는 우려의 목소리도 높다. 이와 관련해 정부 관계자는 “정치권이 나서서 해결될 사안이 아니다”라면서 “이런 메시지가 북한으로 하여금 남측이 5·24조치 해제에 목매는 듯한 인상을 줄 수 있다”고 우려를 나타냈다. 조영기 고려대 북한학과 교수도 “(북한이 사과 의지가 없다는 지적에 대해) 북한이 일본에 일본인 납치 문제도 사과하고 재발 방지도 약속한 바 있다”면서 “천안함 폭침에 대한 북측의 진솔된 사과가 없는 상태에서 우리가 ‘자진납세’하는 식의 저자세를 보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평가했다 문경근 기자 mk5227@seoul.co.kr
  • 北 “대북 전단 무력 대응”… 합참 “단호 대처”

    北 “대북 전단 무력 대응”… 합참 “단호 대처”

    북한은 22일 탈북자단체가 천안함 사건 5주년을 전후로 예고한 대북 전단 살포에 대해 무력으로 대응하겠다고 천명했다. 북한은 이날 ‘조선인민군 전선부대들의 공개통고’를 내고 탈북자단체의 대북 전단 살포계획을 비난하며 “모든 타격수단들은 사전 경고 없이 무차별적인 기구소멸작전에 진입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고 조선중앙통신이 전했다. 북한은 이어 “반공화국 삐라 살포 수단이 풍선이든 무인기이든, 공개적이든 비공개적이든 화력타격수단의 과녁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될 것”이라며 영공·영토·영해에 대한 그 어떤 ‘침범’도 허용하지 않겠다고 강조했다. 이와 관련, 합동참모본부는 이날 입장자료를 통해 “만약 북측이 민간단체의 전단 살포를 빌미로 군사분계선(MDL) 이남으로 도발적 행동을 감행할 경우 우리 군은 강력하고 단호하게 대처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앞서 한 탈북자단체는 북한의 천안함 폭침 5주년인 26일을 맞아 대북 전단과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을 비하한 미국 영화 ‘인터뷰’를 살포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북한은 지난해 10월 10일 탈북자단체가 경기도 연천에서 날린 대북 전단 풍선을 향해 고사총 10여발을 발사했으며, 우리 군도 이에 응사하면서 한때 군사적 긴장감이 고조되기도 했다. 문경근 기자 mk5227@seoul.co.kr
  • 조선일보 호외 논란 “인민군 서울 입성” 진위 논쟁 벌어질 듯

    조선일보 호외 논란 “인민군 서울 입성” 진위 논쟁 벌어질 듯

    조선일보 호외 논란 조선일보 호외 논란 “인민군 서울 입성” 진위 논쟁 벌어질 듯 6·25전쟁 당시 북한군의 서울 입성을 보도한 1950년 6월 28일자 ‘조선일보 호외’ 원본이 공개됐다는 주장이 제기돼 논란이 일고 있다. 미디어오늘은 4일 조선일보 호외 ‘人民軍(인민군) 서울 入城(입성)’을 보도했다. 호외는 “28일 오전 3시 30분부터 조선 인민군은 제 105군 부대를 선두로 하여 서울시에 입성하여 공화국 수도인 서울을 해방시켰다”고 보도했다. 이날은 북한군이 서울을 함락한 날이다. 이 호외는 “입성한 부대들은 서대문 마포 양 형무소에 구금된 애국자들을 석방하고 괴뢰집단의 소위 대한민국 중앙청 서울시청 검찰청 미국대사관 은행 소위 유·엔 위원단 및 중요한 도로 교량 체신 철도 및 각 신문사를 완전히 해방시켰다”고 보도했다. 또 “오래 갈망하여 맞이하던 조선인민군대를 서울시민들은 열열한 환호로서 환영하였다”면서 “서울에 있던 만고역적 리승만 도당들과 미국대사관 및 유·엔위원단들은 이미 27일 오전 중에 서울에서 도망하였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미디어오늘’은 해당 ‘조선일보’ 호외는 조선일보 공식기록에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미디어오늘에 따르면 조선일보는 1950년 6월 26일 북한군의 ‘불법 남침’을 보도한 뒤 6월 27일 오후 6월 28일자 신문을 만들고 서울 본사의 신문 제작을 중단한 것으로 알려졌다. 조선일보는 10월 23일에서야 서울 본사에서 1차 전시판을 낸 것으로 전해졌다. 미디어오늘과의 인터뷰에서 조선일보 경영기획실은 “조선일보가 발행한 신문이 아니다. 28일에 발행한 신문은 따로 보관돼 있다. (호외가) 발행됐다는 기록도 없다”고 밝혔다. 미디어오늘은 “북한군이 서울을 함락한 첫날 북한 기자들이 내려와 윤전기를 장악해 그날 오후 바로 호외를 찍어냈을 가능성도 있다. 또 북한을 지지했던 일부 조선일보 기자들이 호외 제작을 주도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보도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조선일보 호외 논란 “김일성 장군 만세!” 진위 논쟁 벌어질 듯

    조선일보 호외 논란 “김일성 장군 만세!” 진위 논쟁 벌어질 듯

    조선일보 호외 논란 조선일보 호외 논란 “김일성 장군 만세!” 진위 논쟁 벌어질 듯 6·25전쟁 당시 북한군의 서울 입성을 보도한 1950년 6월 28일자 ‘조선일보 호외’ 원본이 공개됐다는 주장이 제기돼 논란이 일고 있다. 미디어오늘은 4일 조선일보 호외 ‘人民軍(인민군) 서울 入城(입성)’을 보도했다. 호외는 “28일 오전 3시 30분부터 조선 인민군은 제 105군 부대를 선두로 하여 서울시에 입성하여 공화국 수도인 서울을 해방시켰다”고 보도했다. 이날은 북한군이 서울을 함락한 날이다. 이 호외는 “입성한 부대들은 서대문 마포 양 형무소에 구금된 애국자들을 석방하고 괴뢰집단의 소위 대한민국 중앙청 서울시청 검찰청 미국대사관 은행 소위 유·엔 위원단 및 중요한 도로 교량 체신 철도 및 각 신문사를 완전히 해방시켰다”고 보도했다. 또 “오래 갈망하여 맞이하던 조선인민군대를 서울시민들은 열열한 환호로서 환영하였다”면서 “서울에 있던 만고역적 리승만 도당들과 미국대사관 및 유·엔위원단들은 이미 27일 오전 중에 서울에서 도망하였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미디어오늘’은 해당 ‘조선일보’ 호외는 조선일보 공식기록에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미디어오늘에 따르면 조선일보는 1950년 6월 26일 북한군의 ‘불법 남침’을 보도한 뒤 6월 27일 오후 6월 28일자 신문을 만들고 서울 본사의 신문 제작을 중단한 것으로 알려졌다. 조선일보는 10월 23일에서야 서울 본사에서 1차 전시판을 낸 것으로 전해졌다. 미디어오늘과의 인터뷰에서 조선일보 경영기획실은 “조선일보가 발행한 신문이 아니다. 28일에 발행한 신문은 따로 보관돼 있다. (호외가) 발행됐다는 기록도 없다”고 밝혔다. 미디어오늘은 “북한군이 서울을 함락한 첫날 북한 기자들이 내려와 윤전기를 장악해 그날 오후 바로 호외를 찍어냈을 가능성도 있다. 또 북한을 지지했던 일부 조선일보 기자들이 호외 제작을 주도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보도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김정은 “10월까지 전쟁 준비하라” 인민군·주민 분위기는 ‘황당·비판’

    김정은 “10월까지 전쟁 준비하라” 인민군·주민 분위기는 ‘황당·비판’

    자유아시아방송(RFA)은 17일 김정은(얼굴)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군부대를 시찰하면서 올해 10월까지 모든 전쟁 준비를 완성하라고 지시했다고 북한 내부 소식통의 말을 인용해 보도했다. 한·미연합 군사연습에 대응해 체제 내부 결속을 위한 조치로 풀이되나 일선 병사와 주민을 중심으로 이에 대한 반발이 심한 것으로 알려졌다. 방송은 “김 제1위원장이 당 창건 70돌이 되는 올해 10월까지 전쟁 준비를 완성하라는 지시를 문건으로 내렸다”면서 “지휘관이 지시문의 내용을 요약해 병사에게 알려주는 식으로 전 군에 전달됐다”고 밝혔다. 하지만 김 제1위원장의 지시에 인민군 장병은 물론 주민들도 황당해하는 분위기다. 소식통은 “장병들을 중심으로 ‘올해 조국 통일을 완성한다고 했는데 그 정도면 이제 전쟁 준비를 완성하고도 남았어야 하지 않는가’라고 비판하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김 제1위원장이 전쟁 준비를 직접 독려하고 있는 것은 여러 경로를 통해 드러났다. 국방부는 지난 11일 국회 국방위원회 전체회의에서 김 제1위원장이 지난해 11월부터 시작된 동계훈련 기간 30회의 공개활동 중 군 부대를 10회 방문했다고 보고했다. 북한은 올해 들어 특수전 침투훈련과 도하 훈련, 포병 실사격 훈련 등 훈련 강도를 높이고 있다. 군 관계자는 “북한이 대외적으로 활로를 모색하면서 싸움준비를 독려하며 체제 결속을 꾀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장용석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선임연구원은 “북한이 올해 대남관계 개선 움직임 속에서 실제로 전쟁을 감행하겠다기보다 재래식 전력을 강화하고 단기적인 위협을 강화해 주민들의 결속을 유도하는 측면이 강하다”고 분석했다. 하종훈 기자 artg@seoul.co.kr
  • 北 장성택 숙청 1년…잠잠하다 했더니 ‘충격’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 집권 후 북한 간부들 사이에 잦은 교체와 파면, 해임 등이 이어지면서 “우리는 하루살이 신세”라는 한탄이 나오는 것으로 12일 알려졌다. 복수의 대북 소식통에 따르면 북한 내부에서 고위 간부에 대한 숙청 사건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면서 일부 간부는 공포와 비관에 빠진 것으로 전해졌다. 한 대북 소식통은 “일년 전 장성택 숙청을 시작으로 북한에서 무시무시한 공포정치가 벌어지고 있다”면서 “노동당 부부장들이 숙청 당하는 것을 보고 간부들은 두려움에 떨고 눈치 보기에 여념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김정일 시대에는 승진시킨 후 불과 몇달 내 강등시키는 인격적인 모욕은 없었다”면서 “간부 사이에서는 김정일 정권 때와 현재를 비교해 불만을 드러내는 경우가 빈번하다”고 내부 분위기를 전했다. 정보 당국은 북한의 건설사업을 담당한 마원춘 국방위원회 설계국장과 변인선 인민군 총참모부 작전국장 등이 최근 김 제1위원장의 ‘지시 불이행’으로 경질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최휘 노동당 제1부부장도 지난해 8월 이후 공개석상에 등장하지 않아 그 배경을 주목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 밖에도 김 제1위원장의 결정에 따라 주요 고위 간부가 강등되고 이로 인해 서열 역전 현상이 발생하면서 조직 내 권위와 위상 문제도 불거지는 상황이다. 이와 관련해 안찬일 세계북한연구센터 소장은 “김정은의 변덕이 심해지면서 현재 북한 고위층의 분위기가 상당히 경직돼 있을 것”이라면서 “이런 가운데 고위 간부 자리를 두고 권력투쟁 양상까지 전개되면서 한동안 숙청의 ‘피바람’이 불 것”이라고 전망했다. 문경근 기자 mk5227@seoul.co.kr
  • 北 고위 간부들 “김정은 집권 후 하루살이 신세”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 집권 후 북한 간부들 사이에 잦은 교체와 파면, 해임 등이 이어지면서 “우리는 하루살이 신세”라는 한탄이 나오는 것으로 12일 알려졌다. 복수의 대북 소식통에 따르면 북한 내부에서 고위 간부에 대한 숙청 사건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면서 일부 간부는 공포와 비관에 빠진 것으로 전해졌다. 한 대북 소식통은 “장성택 숙청을 시작으로 북한에서 무시무시한 공포정치가 벌어지고 있다”면서 “노동당 부부장들이 숙청 당하는 것을 보고 간부들은 두려움에 떨고 눈치 보기에 여념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김정일 시대에는 승진시킨 후 불과 몇달 내 강등시키는 인격적인 모욕은 없었다”면서 “간부 사이에서는 김정일 정권 때와 현재를 비교해 불만을 드러내는 경우가 빈번하다”고 내부 분위기를 전했다. 정보 당국은 북한의 건설사업을 담당한 마원춘 국방위원회 설계국장과 변인선 인민군 총참모부 작전국장 등이 최근 김 제1위원장의 ‘지시 불이행’으로 경질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최휘 노동당 제1부부장도 지난해 8월 이후 공개석상에 등장하지 않아 그 배경을 주목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 밖에도 김 제1위원장의 결정에 따라 주요 고위 간부가 강등되고 이로 인해 서열 역전 현상이 발생하면서 조직 내 권위와 위상 문제도 불거지는 상황이다. 이와 관련해 안찬일 세계북한연구센터 소장은 “김정은의 변덕이 심해지면서 현재 북한 고위층의 분위기가 상당히 경직돼 있을 것”이라면서 “이런 가운데 고위 간부 자리를 두고 권력투쟁 양상까지 전개되면서 한동안 숙청의 ‘피바람’이 불 것”이라고 전망했다. 문경근 기자 mk5227@seoul.co.kr
  • 부산교육청 ‘이달의 책’ 선정도서 논란

    부산시교육청이 반미·반이승만 내용의 좌편향적인 역사책을 ‘이달의 책’으로 선정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면서 논란이 일고 있다. 10일 부산시교육청에 따르면 지난해 6월 이달의 책 선정위원회는 이임하 방송통신대 통합인문학연구소 학술연구교수가 쓴 ‘10대와 통하는 한국전쟁 이야기’를 이달의 책으로 선정, 11개 공공도서관에 배포했다. 이임하 교수는 머리말에 ‘초등학교 교과서 등에 한국전쟁에 대한 기술이 잘못돼 청소년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집필했다’고 집필 동기를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6·25전쟁 당시 미국과 이승만 정부의 민간인 피해에 대해 집중적으로 서술하면서 북한 인민군이 민간인을 대상으로 자행한 피해에 대한 언급은 찾아보기 어렵다. 또 6·25전쟁 당시 미국 및 한국군과 북한 인민군이 살포한 ‘삐라’(전단)에 나온 내용을 중심으로 기술해 객관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다. 작가는 이미 공개된 삐라를 분석하는 게 객관적이라고 주장하지만, 역사학계는 삐라엔 극도로 공격·선동적인 문구를 사용할 수밖에 없어 사건 전개와 이해에 한계가 있다는 입장이다. 이 책이 논란이 된 것은 지난 4일 한 민원인이 국민신문고에 ‘6·25전쟁을 민족해방전쟁으로 묘사했다’며 민원을 제기하면서부터다. 이에 시교육청은 이날 부랴부랴 이달의 책 선정위원회를 열고 재심의, 해당 도서를 ‘이달의 책’ 목록에서 삭제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시교육청이 ‘이달의 책’을 선정, 배포하는 과정에서 북한의 시각에서 6·25전쟁을 기술한 역사책에 대해 아무런 검증이 없었다는 비난을 면하기 어려워 보인다. 시교육청 관계자는 “가치관이 형성되지 않은 청소년들이 읽으면 편향된 역사의식을 가질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돼 이달의 책 목록에서 삭제하게 됐다”고 말했다. 부산 오성택 기자 fivestar@seoul.co.kr
  • [부고] 꽃동네서 눈감은 ‘76인의 포로’ 김남수씨

    [부고] 꽃동네서 눈감은 ‘76인의 포로’ 김남수씨

    6·25전쟁 반공포로로 41년간 타국을 떠돌다 음성 꽃동네에서 거주하던 김남수씨가 지난 2일 충북 음성 꽃동네 인곡자애병원에서 노환으로 숨졌다. 83세. 그의 인생에는 한국의 아픈 현대사가 투영돼 있어 주위 사람들을 더욱 아프게 하고 있다. 강원도 고성에서 태어난 그는 중학교 3학년(당시 17세) 때 6·25가 터지자 인민군 징집을 피해 피신했다. 그러나 함경남도 원산에서 인민군으로 몰려 국군 포로 신분이 돼 거제도 포로수용소로 이송됐다. 1953년 반공포로 석방이 이뤄지자 그를 포함한 ‘76인의 포로’는 전쟁이 싫다며 제3국행을 택했다. 그는 인도 등을 거쳐 브라질에 정착했다. 그러나 빈손으로 시작한 타국 생활은 고통의 연속이었다. 자신을 ‘조센진’이라고 비하하는 일본인을 살해해 27년간 감옥과 정신감호소 등을 전전했다. 1993년 MBC가 ‘76인의 포로’를 특집방송으로 다루면서 그의 소식이 국내에 알려지자 귀환운동으로 이어졌고, 음성 꽃동네가 그를 받아 줬다. 이후 20여년간 꽃동네 부랑인 요양원 등에서 생활하다 지난 2일 생을 마감했다. 꽃동네 관계자는 “최근 1∼2년간 노환과 치매 등으로 고생했다”면서 “한국전쟁의 피해자인 김씨가 하늘나라에서는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음성 남인우 기자 niw7263@seoul.co.kr
  • [이일우의 밀리터리 talk] “美 항모 수장”...김정은의 ‘계란으로 바위치기’?

    [이일우의 밀리터리 talk] “美 항모 수장”...김정은의 ‘계란으로 바위치기’?

    최근 북한이 서해와 동해에서 잇따라 미국 항공모함에 대한 대규모 타격 훈련을 실시하고 김정은이 “미국 항공모함을 얼마든지 수장해버릴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면서 도대체 어떤 전력과 전술을 가지고 세계 최강이라는 미국 항공모함에 맞서 싸울 생각을 하는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김정은은 지난달 말 동해 원산 앞바다에서 실시된 훈련에서 “빨치산식 전법으로 적의 중추를 호되게 공격하기 위한 전법을 부단히 연구·완성한다면 항공모함도 얼마든지 수장해버릴 수 있다”면서 “미 해군역사에 수치스러운 한 페이지를 우리 세대가 또 한 번 써주자”며 목소리를 높였다. 객관적인 전력을 보자면 북한이 미국 항공모함을 공격해 격침시킬 수 있는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유사시에도 미국 항공모함이 북한 연안에 바짝 붙을 일도 없을뿐더러 미 항모 주변에는 최첨단 이지스 구축함과 핵잠수함들이 철통같은 방어선을 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북한이 내놓을 수 있는 전력이라고는 30년 넘은 구형 잠수함과 제대로 비행할 수 있을지조차 의심스러운 전투기들뿐이니 이러한 전력으로 미 항모전단을 향해 돌격하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치기’ 수준을 넘어 ‘메추리알로 바위치기’에 가깝다. 하지만 아무리 전력 격차가 크게 나더라도 북한에서 ‘최고 존엄’이 지시하면 불가능한 것은 없다. 북한은 이미 반세기 전에 미국의 대형 순양함을 입으로 격침시켰던 화력한 경력이 있기 때문이다. ▲발찌모르 격침사건 평양에 있는 ‘조국해방전쟁기념관’에 가면 실내에 검은색 어뢰정 한 척이 전시되어 있다. 1950년 7월 2일 주문진 앞바다 해전에서 미 해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는 제2어뢰정대의 소형 어뢰정 가운데 1척이다. 북한의 주장에 따르면 4척의 소형 어뢰정으로 편성된 제2어뢰정대는 1950년 7월 2일 새벽 주문진 앞바다에서 미 해군 중순양함 1척과 경순양함 1척, 구축함 1척으로 구성된 함대와 조우했다. 미 군함들은 북한 어뢰정대를 발견하고 치열한 함포 사격을 퍼부었으나, 북한 어뢰정들은 미 해군의 탄막을 뚫고 근거리까지 돌격했다. 4척 가운데 2척은 중순양함을 향해 돌격했고, 1척은 연막탄을 치며 구축함을 유인하는 역할을, 다른 1척은 경순양함에 어뢰 공격을 퍼부었다. 전투 결과는 북한군의 압승이었다. 북한 어뢰정들은 자신보다 100배 이상 큰 1만3,600톤급 중순양함 ‘발찌모르'(USS Baltimore)를 격침시키고, 같이 있던 경순양함을 대파시켰으며, 구축함을 퇴각시켰다. 17톤짜리 어뢰정이 1만 톤이 넘는 순양함 함대를 상대로 이러한 승리를 거둔 것은 세계 해전사에 길이 남을 대첩이었고, 어뢰정대 지휘관 김군옥은 공화국영웅칭호를 받고 부대는 최정예 부대에만 부여되는 ’근위칭호‘가 주어졌다. 북한은 이 ‘발찌모르 격침사건’을 투철한 사상으로 무장한 인민군 전사들이 빨치산식 게릴라 전술을 활용해 미국의 대형 전투함을 수장시킨 사례이며, 사상 무장만 잘 되어 있다면 미국의 대형 전투함들을 얼마든지 상대할 수 있다고 선전하는 수단으로 활용해 왔다. 하지만 1950년 7월 2일 새벽 북한이 격침시켰다는 ‘발찌모르’ 순양함은 지구 반대편에 있었다. 이 순양함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1946년 퇴역했다가 1952년에 미사일 순양함으로 개조하는 공사를 받고 1955년 재취역했기 때문에 1950년 7월 2일에는 미국 서부 워싱턴주에 있는 브레머톤(Bremerton) 해군기지에 정박해 있었다. 7월 2일 새벽 주문진 앞바다에서 전투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당시 이 해역에는 미 해군 경순양함 주노(USS Juneau), 영국해군 순양함 자메이카(HMS Jamaica), 호위함 블랙 스완(HMS Black Swan) 등 3척의 전투함이 있었다. 미 해군과 영국해군이 남긴 교전 기록에 따르면 북한 해군 어뢰정 4척과 기관포 탑재 경비정 2척이 출현해 함포 사격을 실시했고, 이 가운데 1척이 격침, 1척 대파, 1척 파손 피해를 입고 해안으로 도주했으며, 살아남은 1척 역시 바다로 도주한 것으로 되어 있다. 당시 교전에 참가했던 3척의 UN군 함정 가운데 2척은 북한 해역에서 계속 작전했고, 영국 순양함 자메이카만 보급을 위해 사세보 항에 기항했는데, 기항 당시 자메이카는 생채기 하나 입지 않은 상태였고, 이후 1957년까지 세계 각지를 누비다가 정상 퇴역했다. 북한이 격침시켰다는 배가 교전 시간대에 지구 반대편에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북한은 “미국이 날조한 것이며, 실제로 격침된 배는 발찌모르 순양함과 동형인 보스턴함”이라고 주장했지만, 이 역시 허위사실임을 증명하는 사진들이 여러 장 공개되면서 전 세계적인 조롱거리로 전락한 바 있었다. 더 우스운 것은 북한이 격침시켰다는 순양함은 건재하고, 4척이 무사 귀환했다는 북한 어뢰정은 1척만 남아 육상에 전시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살아남은 어뢰정은 당시 도주했던 1척일 것이며 생환 후 패배를 숨기고 처벌을 모면하기 위해 거짓 보고를 한 것이 ‘발찌모르 격침사건’ 조작의 시작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빨치산식 타격 전법, 항모 격침 가능할까? 이번에 두 차례나 김정은이 현지 지도했던 항공모함 타격훈련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무모하다 못해 우습기까지 하다. 현대적인 해상 전투와는 거리가 대단히 먼 무기와 전술이 동원되었기 때문이다. 북한은 서해와 동해 해안과 가까운 작은 무인도를 미국 항공모함으로 가정해 훈련을 시작했다. 가상의 미군 항공모함이 나타나면 항공 및 반항공군의 전파탐지기구분대(레이더 부대)가 이를 포착해 경보를 전파하고, 전투기가 출격해 공습을 하면서 수중에서 매복해 있던 잠수함들이 어뢰 공격을 퍼붓는 방식이다. 훈련에 동원된 전투기는 북한 공군이 56대 가량 보유하고 있는 MIG-23 전투기였다. 애초에 공대공 요격기로 개발된 이 전투기는 대함 미사일 등 정밀 유도무기를 운용할 수 없어 대함 공격능력이 없다. 북한군은 이 전투기에 유도가 되지 않는 ‘멍텅구리 폭탄’과 로켓포드, 기관포 등을 탑재해 공격하는 원시적인 전술을 구사할 수밖에 없었다. 항공기가 적함 상공까지 날아가 폭탄을 투하하고 로켓탄으로 공격하는 전술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나 있었던 전술이며, 장거리 함대공 미사일이 크게 발달하기 시작한 근래에는 구사하기 어려운 전술이다. 미 해군 항공모함 타격전단은 이지스 순양함 1척과 이지스 구축함 4~6척, 공격용 원자력 잠수함 2척 등으로 구성된다. 항모 전단의 상공에는 E-2D 조기경보기와 F/A-18E/F 전투기 4~6대가 공중 초계를 하고 있기 때문에 북한 공군 전투기가 이륙하면 이륙 단계에서부터 즉각 포착이 가능하다. F/A-18E/F 전투기는 사거리 70km 이상의 AIM-120C 공대공 미사일을 최대 8발 탑재할 수 있기 때문에 북한 공군이 보유한 모든 MIG-23 전투기가 동시에 공격해 오더라도 MIG-23의 레이더 탐지거리 밖에서 이들을 모두 격추시킬 수 있다. 굳이 전투기가 동원되지 않더라도 항모 전단에 배속된 이지스 구축함들만 요격에 나서더라도 북한의 공격을 충분히 방어할 수 있다. 각각의 이지스함은 18개 안팎의 표적을 동시에 공격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7척의 이지스함은 아무리 그 능력을 낮게 평가하더라도 126개의 표적을 동시에 공격할 수 있다. 즉, 미 항모를 노리는 모든 북한 전투기는 항모 반경 100km 이내 접근이 불가능하다. 북한에게는 MIG-23 이외에도 구식인 H-5 폭격기를 개조해 공대함 미사일 발사용으로 운용 중인 기체가 있지만, 그 수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이들 전력으로도 미 해군 항모전단에 생채기 하나 낼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다면 잠수함은 어떨까? 북한이 이번 훈련에 동원한 잠수함은 북한 해군의 주력 잠수함인 1,800톤급 ‘무한(武漢)’급으로 1960년대 개발된 구소련제 로미오(Romeo)급 디젤 잠수함의 중국제 복제 생산형의 부품을 가져다가 북한이 건조한 구형 잠수함이다. 이러한 구형 잠수함들이 미 해군 항모를 격침시키는 것은 미 항모가 호위 전력 없이 혼자서 북한 영해 깊숙이 들어갈 때나 가능하다. 하지만 주력 함재 전투기의 전투행동반경이 1,000km에 육박하는 마당에 미 해군 항모가 북한 영해에 접근할 이유가 없다. ▲‘메추리 알로 바위 치기’ 미 해군은 대잠수함 작전 시 항공모함 주변을 다수의 구축함들이 둘러싸고 구축함의 소나와 대잠헬기를 이용해 여러 겹의 대잠 저지선을 편다. 미 해군은 십 수 년간 환태평양군사훈련(RIMPAC) 기간 중 여러 나라의 디젤 잠수함을 대상으로 재래식 잠수함에 대응하기 위한 다양한 전술과 무기체계를 개발해 왔고, 잠수함이 내는 미세한 소음이나 자기 변동, 통신 추적 등을 통해 잠수함을 잡아내는데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과 장비, 노하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구형 디젤 잠수함 몇 척이 항모 전단의 방어선을 뚫는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설령 북한 잠수함이 미 해군의 대잠 저지선을 뚫고 항공모함에 어뢰를 발사해 명중한다 하더라도 철저한 수밀 설계가 되어 있는 대형 항공모함을 어뢰 1~2발로 격침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며, 미 해군은 접근하는 어뢰를 교란 및 회피하기 위한 다양한 수단을 준비해 놓고 있기 때문에 김정은이 호언장담한 것처럼 북한 잠수함이 미 해군 항모를 수장시키는 것은 김정은의 상상 속에서나 가능하다. 이러한 사실을 김정은 역시 모를 리가 없다. 하지만 군인들의 사기 진작과 내부 결속을 위해 그는 “빨치산식 전법으로 항공모함도 수장시키지 못할 것이 없다”는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고, ‘최고 존엄’의 독려가 거짓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북한군 조종사들과 잠수함 승조원들은 미 해군 항모를 향해 자살돌격도 마다하지 않는 ‘수령 결사옹위를 위한 총폭탄’을 기꺼이 자처할 것이다. 손으로 계란을 들고 바위에 내리친다면 깨지는 것은 계란이지 손이 아닌 것처럼 죽어 나가는 것은 북한 군인들이지 김정은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개인의 일신 안위를 위해 군인과 백성들을 사지로 내모는 지도자의 말로(末路)는 언제나 비참하다는 것은 오늘도 계란으로 바위 치는 연습을 하고 있는 김정은도 알아야 하지 않을까? 이일우 군사 통신원(자주국방네트워크 사무국장)
  • 기일에 맞춰… 가족 품에 안기는 6·25 참전용사

    6·25전쟁 때 전사한 국군 참전용사의 유해가 본인 기일(忌日)에 64년 동안 애타게 기다린 가족의 품에 안긴다.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은 북한군과의 교전 중 전사한 고(故) 김영탁 하사(당시 23세)의 전사자 신원확인 통지서와 국방부 장관 명의의 위로패, 유품 등을 28일 고향인 경북 청도에서 여동생 김경남(84)씨에게 전달한다고 27일 밝혔다. 육군 9사단 29연대 소속이던 김 하사는 1950년 9월 입대했고 1951년 1월 15일 강원도 정선·강릉 일대에서 인민군 침투부대 격멸작전에 참여했다 전사했다. 군 당국은 1954년 김 하사에게 화랑무공훈장을 추서했다. 하지만 전투가 끝나도 김 하사 유해의 행방을 찾을 수 없었다. 유족들은 다만 1951년 1월 16일(음력 1950년 12월 9일)부터 김 하사가 보이지 않았다는 주변의 증언을 토대로 음력 12월 9일을 기일로 정해 매년 제사를 지내왔다. 유해가 전달되는 28일은 음력으로 12월 9일이다. 하지만 60여년이 지난 2013년 9월 유해발굴감식단은 강원 동해시에 사는 김기준(76)씨로부터 “아버님이 동해 망상동 선산 인근에 국군 전사자 일부를 매장했다고 말씀하셨다”는 제보를 받았다. 이후 감식단은 제보지역에서 7구의 유해와 함께 현장에서 군번 ‘1136180’이 선명하게 새겨진 스테인리스 재질의 인식표와 버클, 단추 등을 함께 발견했다. 이후 유전자 감식 등 15개월 동안 확인 작업을 벌인 결과 유해 1구와 유품의 주인공이 김 하사로 확인됐다. 여동생 경남씨는 “살아생전 오빠를 현충원에 모시는 게 소원이었는데 이제야 가슴에 묻었던 한을 풀었다”고 말했다. 한편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은 2000년부터 국군전사자 8477구를 발굴했고 이번에 김 하사의 신원을 포함해 모두 100명의 신원을 확인해 유족에게 통보했다. 하종훈 기자 artg@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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