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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北 미사일 발사] 美 “北, 이동형 ICBM 배치 착수”

    [北 미사일 발사] 美 “北, 이동형 ICBM 배치 착수”

    국가정보국장 “플루토늄 원자로 재개” 北 중·단거리 미사일-국지도발 가능성 정부와 국제사회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지난 7일 ‘위성’(장거리 미사일)을 발사한 북한이 향후 추가 도발을 감행할지에 관심이 집중된다. 북한이 앞서 기습적으로 제4차 핵실험을 하고 국제사회의 우려에도 32일 만에 장거리 미사일 발사를 강행했다는 점에서 북한의 추가 도발에 대비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우선 다음달로 예정된 한·미 합동군사훈련이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제재에 반발해 중·단거리 미사일 발사나 국지 도발로 나올 가능성이 있다. 또 오는 4월15일 김일성 주석 생일(태양절)이나 5월 열리는 노동당 제7차 대회에 맞춰 ‘축포’ 개념의 도발을 이어 갈 가능성도 적지 않다. 북한은 지난해 3월 키리졸브 연습 시작일에 스커드 계열의 단거리 탄도미사일 2발을 동해로 발사하고 종료 직전에는 지대공 미사일 7발을 동해로 발사하는 등 한·미 연합훈련에 미사일 발사로 대응해 왔다. 북방한계선(NLL) 침범이나 지난해 8월 비무장지대(DMZ) 도발처럼 국지적인 대남 도발을 감행할 가능성도 있다. 실제 북한은 장거리 미사일 발사 하루 만인 8일 인민군 경비정이 서해 북방한계선(NLL)을 침범했다. 이와 관련, 제임스 클래퍼 미국 국가정보국(DNI) 국장은 9일(현지시간) 북한이 플루토늄 생산 원자로 가동을 재개하고 이동형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배치단계 실행에 들어갔다고 밝혔다. 클래퍼 국장은 이날 상원 정보위원회 출석에 앞서 서면증언을 통해 이같이 진술했다. 그는 북한이 수주 또는 수개월 안에 핵무기 원료인 플로토늄도 추출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문경근 기자 mk5227@seoul.co.kr
  • 천안함 폭침 배후 김영철 실세 부상

    천안함 폭침 배후 김영철 실세 부상

    최근 북한의 대남 업무를 총괄하는 ‘노동당 통일전선부장’ 내정설이 돌았던 김영철 인민군 정찰총국장이 군복 대신 인민복 차림으로 공식행사에 참석한 것으로 4일 확인되면서 통전부장설이 사실로 굳어지는 양상이다. 이날 노동신문은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 주재로 지난 2~3일 평양에서 열린 노동당 중앙위원회와 노동당 인민군위원회 연합·확대회의 소식을 전하면서 주석단 사진을 공개했다. 사진에는 김 제1위원장 왼쪽 첫 번째 자리에 황병서 인민군 총정치국장, 두 번째 자리에는 최태복 노동당 비서, 오른쪽 첫 번째에는 최룡해 노동당 비서, 두 번째에는 김영철이 앉아 있다. 북한 권력 서열 2위인 황병서는 차수 계급 군복 차림인 데 비해 김영철은 검은색 인민복을 입고 있다. 천안함 폭침사건의 배후로 지목되는 김영철이 군복이 아닌 인민복 차림으로 나타난 것은 처음이다. 따라서 김영철이 이제는 민간인 신분으로 지난해 12월 사망한 김양건에 이어 통전부장에 올랐다는 관측이 매우 유력해졌다. 특히 김양건 장의위원회 명단에서 최룡해가 서열 6위, 김영철이 52위였던 점에 비춰 보면 이번 사진은 김영철의 위상이 크게 올라가 실세로 부상했음을 시사한다. 문경근 기자 mk5227@seoul.co.kr
  • [한길 큰길 그가 말하다] 만화가 이현세

    [한길 큰길 그가 말하다] 만화가 이현세

    갓 태어나서 큰집에 양자로 갔다 10대의 나는 연좌제에 떨었다 20대의 나는 까치였다 30대의 나는 최고 작가였다 40대의 나는 영화를 말아먹고 심의·검열과 싸웠다 50대의 나는 내 시대는 갔다고 생각했다 60대의 나는 웹툰을 배웠고 처음 신인상도 받았다 70대의 나는 동화를 쓰고 싶다 20년 동안 ‘삼촌’과 ‘숙모’로 알아 왔던 분들이 실제로는 나를 낳아 준 사람들이었다. 나 자신의 우둔함에 질식할 것 같았고, 아무 말도 안해준 식구들이 야속했다. 방황하기를 한 달여, 그 숙모가 조용히 말했다. “친자식에게 더운 밥 한 그릇 제대로 못 먹인 나만큼이나 아프겠니. 나를 봐서라도 이래선 안 된다.” 어머니는 눈빛으로 아들의 마음을 읽으셨던 것이다. 내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박찬호가 어떤 사람인지 아세요? 자기가 이긴 게임에서 던진 공들, 경기장 입장권을 다 갖고 있는 친구예요. 미국 생활에서 여러 번 위기가 왔는데, 그때마다 자기 자신이 너무 소중하고 아까워서 포기를 못했다더군요.” 화실 창가에 놓인 박찬호 투구 모습 모형(피규어)을 유심히 들여다보자 그가 말했다. 그는 박찬호를 매우 좋아하고, 또 친하다고 했다. 그의 등번과 이름이 적힌 유니폼을 사러 미국 LA 다저스 구장까지 갔다 오기도 했다. “자기를 정말 사랑합니다. 자유, 독립, 자존이라는, 제가 중요하게 여기는 3가지 가치를 가장 확실히 실현한 친구죠.” 그건 어떻게 보면 자신과 닮았다는 말이기도 했다. 지난달 28일 서울 강남구 개포동 화실. 이현세(60) 만화가는 아무런 준비 없이 평소처럼 앉아 있었다. 눈가의 주름과 희끗희끗한 머리만 빼면 영락없는 ‘까치’였다. -‘현세는 자기 아버지가 누군지 아직 모르나 봐요.’ 친척들이 하는 나직한 수군거림이 대형 스피커 음량으로 내 귀에 꽂혔다. 경주 시내로 나가 재수를 하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20년 동안 ‘삼촌’과 ‘숙모’로 알아 왔던 분들이 실제로는 나를 낳아 준 사람들이란 걸 알게 된 것은. 성인이 되고 나서 처음으로 참석한 문중 시제(時祭). 엄마와 숙모, 누나들 모두 나에게 비밀로 해 왔던 ‘천기’를 집안 어른들이 누설하고 말았다. 내가 갓난아기 때 큰집에 양자로 들어갔고, 생부는 내가 아홉살 때 돌아가신 삼촌이었다는 사실. 나 자신의 우둔함에 질식할 것 같았고, 아무 말도 안 해준 식구들이 야속했다. -수험서를 덮고 매일 술만 마셨다. 왜 그렇게 20년을 꽁꽁 숨겼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혼자서 끙끙 앓으며 방황하기를 한 달여. 어느날 밤 술에 취해 ‘숙모’의 품에 안겨 잠을 잤다. 다음날 아침, 그 숙모가 조용히 말했다. “친자식에게 더운 밥 한 그릇 제대로 못 먹인 나만큼이나 아프겠니. 나를 봐서라도 이래선 안 된다.” 어머니는 눈빛으로 아들의 마음을 읽으셨던 것이다. -그 일은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 대학을 포기하고, 만화의 길을 걷기로 했다. 혼자서 서울로 왔다. 경주가 세상의 전부인 줄 알았는데 서울은 또 달랐다. 생활은 만만치 않았고 정착할 곳도 찾아지지 않았다. 문하생으로 받아 달라고 무수한 만화작가 화실의 문을 두드렸지만, 번번이 퇴짜를 맞았다. 내가 제법 ‘성공’을 한 뒤 그분들 중 한 분을 뵀는데 “눈빛에 반항기가 줄줄 흘러 부담스러웠다”고 당시 얘기를 하셨다. 처음 자리잡은 곳은 순정만화로 유명한 나하나 선생님 화실이었다. 그다음은 개그만화의 하영조 선생님 화실. 액션만화를 추구했던 나에게 두 분 선생님과의 작업은 오히려 큰 도움이 됐다. 순정만화의 섬세하고 부드러운 미학과 개그만화의 익살맞은 표정 연기 등이 합쳐져 까치를 비롯한 내 만화의 등장인물 라인업이 구축될 수 있었다. -분단의 비극을 오롯이 간직한 우리 집의 가족사를 떼어 놓고는 나와 만화를 말할 수 없다. 일제 때 만주에서 살던 할머니는 해방 직후 서른 언저리에 아들 셋을 데리고 경북 울진 고향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고향이라고 해도 먹고살 게 없었다. 얼마 후 둘째 아들은 “내가 돈 벌어 오겠다”며 다시 만주로 나갔다. 그러다 38선이 그어지면서 둘째는 졸지에 가족과 생이별을 하게 됐다. 가족이 다시 만나게 된 것은 6·25가 터지고 북한 인민군이 남쪽까지 밀고 내려오면서였다. 둘째는 인민군이 돼 나타났다. 형제가 어울리는 모습이 마을 사람들 눈에 띌 수밖에 없었는데, 그게 화근이 됐다. 인민군이 퇴각한 후 첫째 아들이 괴뢰군 부역자로 몰려 헌병대에 끌려갔다가 죽임을 당했다. 큰아들은 처형되고 둘째 아들은 월북. 할머니는 차라리 만주에 계속 있는 게 나았다고 생각하시지 않았을까. 1956년 셋째 아들의 장남으로 내가 태어났다. 할머니는 나를 큰며느리에게 양자로 보냈다. 종가의 대를 잇기 위해서였다. -우리 일가는 내가 태어나기 전 전쟁 직후에 흥해(현재 포항시 북구 흥해읍)로 터전을 옮겼다. 부역자 가족이란 딱지를 달고서 울진에 계속 머물 수는 없었다. 길러 준 어머니는 잡화점을 냈고, 낳아 준 아버지는 자갈땅을 사서 밭을 일궜다. 그 덕에 끼니를 거르지는 않았다. 초등학교 2학년쯤 됐을 때 ‘삼촌’이 경주역의 기차 수리 공장에 취직했다. 어느 날 삼촌에게 “크레파스를 사 달라”고 졸랐다. 선뜻 돈을 주셨다. 하지만 나는 극장에서 서부영화를 보고 만화책을 빌려 보느라 그 돈을 다 써 버렸다. 다음날 저녁 삼촌이 집에 들러 새로 산 크레파스로 그림 한번 그려 보라고 하셨다. 엉겁결에 나는 “저한테 돈 주겠다고만 하시고 그냥 가셨잖아요”라고 둘러댔다. 삼촌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내가 착각했다”며 다시 돈을 주셨다. 아들이 거짓말하는 걸 다른 가족들이 알게 되는 게 싫으셨던 것이다. -그게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다음날 수업을 받는데 작은누나가 파랗게 질린 얼굴로 교실로 왔다. 아버지가 일하던 공장으로 뛰어갔는데 할머니와 큰어머니, 숙모가 통곡을 하고 있었다. 앞에는 아버지가 하얀 무명천에 덮여 누워 있었다. 전기 감전이라고 했다. 삼일장 내내 나는 학교에 있었다. ‘삼촌은 나를 거짓말하는 아이로 알고 돌아가셨겠구나’ 생각하니 죄스럽기도 했지만, 억울하기도 했다. 10여년 후 그가 나의 진짜 아버지라는 사실을 알게 된 직후 가장 먼저 떠올랐던 게 그 일이었다. -학교 생활은 평탄치 않았다. 그럭저럭 공부를 잘해서 지역 명문인 경주중에 입학했지만 줄곧 형사들의 감시 속에 살았다. 연좌제에 걸려 인생이 막혀 있다는 생각이 점차 커져 갔다. 경주고에 들어가면서 원래 좋아했던 술이 더 잦아졌다. 방과 후에 당시 경주오거리에 있던 막걸리집에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고등학교 때 가장 열성이었던 건 미술부 활동이었다. 고1 때 유도에 빠져 2학년 때는 경북 대표로 전국체전까지 나가기도 했지만, 미술만큼은 아니었다. 특히 스케치는 어렸을 때부터 꽤 소질이 있었다. 미대 진학을 유일한 길로 생각했다. 연좌제의 공포가 나를 더욱 미술로 몰아갔다. 그러나 미대 입학원서를 쓰기 위해 안과에 가서 색맹검사를 했더니 색약 판정이 나왔다. 그때는 왜 그렇게 색약에 대해 엄격했는지. 당시 입시제도하에서 나는 미대 지원을 아예 할 수가 없었다. -유신과 군사정부 치하에서는 노래나 영화가 그렇듯 만화에 대해서도 검열이 심했다. 이를테면 갈등이 증폭되는 스토리나 격투 장면 같은 게 들어가는 그림은 허용되지 않았다. ‘아이들이 액션만화를 보면 커서 데모를 하기 쉽다’는 게 주된 이유였다. 스포츠 만화로 방향을 돌리고 ‘공포의 외인구단’을 처음 내놓은 것이 1982년. 26세 때였다. -내가 만화를 그리는 데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캐릭터다. 날 대신해 움직여 줄 수 있는 아바타만 구현하면 그다음부터 소재나 스토리는 부차적인 일이라고 생각했다. 스스로 스토리 궁핍을 느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 생각으로 만들어 낸 게 필생의 캐릭터인 ‘까치 오혜성’이다. 한(恨)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운명에 순응하지 않고 의지로 부딪쳐 결국 파괴되는 인간이랄까. 가족사 때문에 트라우마와 핸디캡에 시달려야 했던 성장기의 아픔이 고스란히 투영돼 있기도 하다. -‘공포의 외인구단’ 이전에도 나는 대본소(만화방) 시장에서 꽤 인지도 있는 작가였다. 하지만 외인구단은 기존 작품과 차원이 달랐다. 어린이 만화만 있던 시절, 극단적이고 상처투성이인 주인공 영웅이 다른 캐릭터들과 함께 고난에 시달리다 결국 이를 극복하지만 최후에는 처절히 파멸하는 이야기의 만화는 이전까지 존재하지 않았다. 대략 한 달에 한 권씩 2년간 30권을 내놨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대본소의 맨 앞칸에는 언제나 외인구단이 자리잡았다. ‘까치’를 이름으로 내건 만화방들이 속속 생겨났다. -나이 서른 전에 최고액을 받는 작가가 됐는데, 권투(‘지옥의 링’)든 시대극(‘사자여 새벽을 노래하라’)이든, 페미니즘(‘며느리 밥풀꽃에 대한 보고서’)이든 뭘 그려도 잘 팔렸다. ‘남벌’은 서울대 신입생들이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책 중 하나로 선정됐다. 만화가 뜨니 나도 스타가 됐다. 맥주 등 광고 CF에까지 나올 정도였다. 돈도 정말 많이 벌었다. 돈이 나를 거쳐 밖으로 흘러나가는 게 문제였지만. 마흔을 갓 넘긴 1997년부터는 세종대에서 교편을 잡았다. -나의 40대는 ‘전쟁’의 시기였다. 첫 번째 난관은 1996년 만화를 애니메이션으로 옮긴 ‘아마게돈’의 대실패였다. 한동안 영화계에서 최고의 손실액 기록을 보유했을 정도다. 총감독으로서 투자를 담당했던 나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도 손해를 많이 봤다. 돌이켜보면 그건 영화도 아니었다. 영화 문법도 모르는 총감독의 오만과 무지 탓이다. -두 번째 난관은 ‘천국의 신화’ 필화 사건이다. 대하 역사물을 쓰겠다고 마음먹은 건 서른 살 때였다. 미국에 가서 광활한 그랜드캐니언을 마주하고 나니 ‘내가 왜 스포츠 만화나 그리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10여년간 ‘환단고기’ 등 역사서들을 공부하고 ‘100권’을 목표로 1996년 1부 3권을 내놨다. 그러나 2년 뒤 청소년 음란물 시비로 검찰에서 기소하고, 법원이 300만원의 벌금형을 내렸다. ‘터무니없는 심의와 검열에 내가 고개를 숙이면 어느 작가가 이겨 낼 수 있겠나’ 하는 생각에 정식 재판을 청구했다. 최종 무죄 선고를 받은 것은 6년이 흐른 뒤였다. 당시 중학교와 초등학교에 다니던 아이들(1남 2녀)이 끝까지 아버지를 믿어 준 데 대해 지금도 고마움이 크다. -50대가 되니 세상이 많이 변해 있었다. 더 이상 예전의 인기 만화 작가 ‘이현세’는 존재하지 않았다. 처음엔 ‘내 시대는 갔구나’ 하는 생각에 씁쓸하기도 했지만 이게 당연한 세상의 섭리 아닌가. 지금까지 많은 작품을 그려 큰 인기를 얻었지만 개인적으로는 모두 ‘쓰레기’라고 생각한다. 표현이 좀 과한가?(웃음) 완벽하다고 여긴 작품은 없다. 그리고 원래 나는 ‘옥에 티’가 많은 작가다. ‘공포의 외인구단’에도 같은 사람인데 야구 글러브가 왼손, 오른손 바뀌어 그려진 장면들이 있다. 나는 쓰레기통 속에서 수많은 ‘가짜 꽃’을 피우다가 언젠가는 한 송이 진짜 꽃을 피우는 게 작가라고 여긴다. 내 작품은 아직도 쓰고 구겨서 쓰레기통에 집어던질 습작의 연장선상이다. 난 천재형과는 거리가 멀다. 대신 부모님께 극단적인 집중력과 낙관주의를 물려받았다. 한창때는 한번 그리기 시작하면 하루이틀 꼬박 밤을 새우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 덕분에 마감은 종종 늦었지만 펑크를 낸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남들은 그림을 그리면서 어떻게 배가 고프고 화장실에 갈 수 있을까’ 생각했을 정도다. -얼마 전부터 인터넷 포털 ‘네이버’에서 ‘천국의 신화’ 6부를 시작했다. 남녀노소 다 볼 수 있도록 수위를 조절했지만, 나로서는 무척 감사한 일이다. 작년 말에는 네이버에서 ‘웹툰 신인상’까지 받았다. “60 평생에 처음으로 신인상을 받았다”고 하니 후배 작가들이 다들 자지러졌다. -지금 연재 중인 천국의 신화는 10년 정도 더 해야 한다. 6부는 고조선 멸망으로 끝난다. 이후 여러 민족들이 군웅할거했던 시기를 지나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예정이다. 그 뒤에는 나도 70대가 된다. 그때는 동년배를 위한 동화를 그리고 싶다. 아니면 손주를 위한 동화를 쓰고 있을지 모르겠다. 문제는 큰아이가 30대 후반인데, 이 녀석들이 셋 다 결혼을 안 했다는 거다. 김태균 사회부장 windsea@seoul.co.kr 이두걸 기자 douzirl@seoul.co.kr 만화가 이현세(60)씨는 한국 만화의 ‘오늘’을 있게 한 대표적인 작가다. 1979년 ‘저 강은 알고 있다’로 데뷔한 그는 1982년 ‘공포의 외인구단’을 통해 운명에 맞서는 열정과 지고지순한 사랑을 역동적인 그림체로 선보여 만화계에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나이 불과 26세였다. 이후 ‘지옥의 링’(1985), ‘야수의 전설’(1985), ‘며느리 밥풀꽃에 대한 보고서’(1988), ‘아마게돈’(1988), ‘블루엔젤’(1989), ‘폴리스’(1992), ‘남벌’(1994), ‘천국의 신화’(1997) 등 히트작과 문제작을 내놓으면서 ‘불온’과 ‘미숙’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니던 만화를 대중문화의 중심부로 격상시켰다는 평을 받는다. 초로(初老)의 나이에도 ‘천국의 신화’ 6부를 웹툰에 연재하는 여전한 ‘현역’이다. ▲경주중·경주고 ▲세종대 만화애니메이션학과 교수(1997~) ▲한국만화가협회 회장(2005~2007년) ▲한국만화영상진흥원 이사장(2009~2012년)
  • 北 김양건 후임에 ‘강경’ 김영철 내정설

    北 김양건 후임에 ‘강경’ 김영철 내정설

    북한군의 대남공작 총책인 김영철 정찰총국장이 공석인 통일전선부장에 내정됐다는 관측이 18일 정치권에서 제기됐다. 새누리당의 싱크탱크인 여의도연구원은 이날 김무성 대표 주재로 열린 당 최고위원회의에서 ‘북 김양건 후임 통전부장 김영철 정찰총국장 내정 - 정책연구실 대외비’ 제하의 보고서를 전달했다. 이 보고서는 지난달 30일 김양건 전 통전부장이 교통사고로 사망한 이후 비어 있던 자리에 김 정찰총국장이 내정됐다는 내용이다. 이와 관련, 정보당국의 한 관계자는 “관련 사항을 예의주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북한 사정에 정통한 한 대북소식통도 “김 정찰총국장이 김양건 후임으로 통전부장이 됐다는 얘기가 흘러나오고 있다”며 ‘김영철 통전부장설’ 가능성을 열어뒀다. 신임 통전부장으로 거론되는 김 정찰총국장은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도발, 미국 소니사 해킹사건, 비무장지대(DMZ) 지뢰도발의 배후로 알려진 군 주도 대남공작의 핵심 인물이다. 또 그는 2008년 남측의 육로출입 제한 등의 내용이 담긴 북한의 ‘12·1’ 조치를 주도하고, 2009년 남파 공작원에게 고(故)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의 암살 지령을 내린 인물로 알려졌다. 이와 함께 1980년대 후반부터 남북대화에 관여한 북한 군부 내 대표적인 대남통이기도 하다. 현재 노동당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이자 인민군 대장인 그는 1989년 남북 고위당국자회담 예비접촉 때 북측 대표를 맡았고, 1990년 남북 고위급회담 때 북측 대표로 참여한 바 있다. 일각에서는 대화파로 알려진 김양건의 후임으로 군부 강경파로 분류되는 김 정찰총국장이 대남총책인 노동당 통전부장으로 임명됐을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북한의 제4차 핵실험 이후 가뜩이나 경색된 남북관계 파행이 더 길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문경근 기자 mk5227@seoul.co.kr
  • 2개월 만에 복귀한 최룡해… 앙상한 오른쪽 다리는 의족?

    2개월 만에 복귀한 최룡해… 앙상한 오른쪽 다리는 의족?

    최근 2개월여 만에 혁명화 교육(좌천)에서 복귀한 북한 최룡해 노동당 비서의 오른쪽 다리가 비정상적일 정도로 가늘어진 것으로 보여 여러 추측이 나오고 있다. 북한 조선중앙TV는 최 비서가 지난 15일 청년중앙회관에서 열린 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 창립 70돌 기념 청년중앙예술선전대 공연을 관람하는 모습을 16일 방영했다. 영상을 보면 양복 바지 속에 가려진 오른쪽 다리는 왼쪽 다리 굵기의 2분의1 정도밖에 안 돼 보여 뼈만 앙상하거나 의족을 한 듯한 모습이다. 지난해 11월 북한 리을설 인민군 원수의 장례식 명단에 이름이 빠지며 숙청설이 돌았던 최 비서는 지난 14일 청년동맹 창립 70돌 경축행사 대표증 수여행사에서의 연설을 시작으로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이어 16일 청년동맹 70주년 보고대회를 비롯해 모두 3차례나 공개활동에 나섰지만 걷는 모습은 아직 공개되지 않고 있다. 2014년 초에 방영된 기록영화에서는 그가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을 수행하면서 오른쪽 다리를 심하게 저는 모습이 포착되기도 했다. 당시에도 공개활동이 줄어 그가 체포돼 감금됐다는 주장이 나왔었다. 이에 따라 최 비서가 당뇨 등 지병으로 다리 절단 수술을 받았거나 고문 등으로 다리가 심각하게 훼손돼 의족을 착용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한 대북전문가는 “최 비서가 혁명화 기간 중 조사를 받았다면 북한 국가보위부나 군 보위사령부 중 하나일 것”이라며 “그곳은 비인간적 고문이 수반되는 곳으로 최 비서가 그 후유증을 앓고 있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문경근 기자 mk5227@seoul.co.kr
  • 돌아온 최룡해, 김양건 빈자리 메우나

    공개 자리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숙청설 내지 지방 좌천설이 돌았던 북한 최룡해가 ‘당 비서’ 직함으로 석 달 만에 활동을 재개했다. 북한 조선중앙통신은 14일 인민문화궁전에서 진행된 ‘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 창립 70돌 경축행사 대표증 수여’ 행사 소식을 전하며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비서 최룡해 동지가 연설하였다”고 15일 밝혔다. 통신은 최 비서가 연설에서 “언제나 청년사업에 깊은 관심을 돌리고 계시는 경애하는 김정은 원수님께서 경축행사 대표들에게 베풀어 주신 크나큰 은정에 대하여 언급하였다”고 전했다. 장성택 숙청 이후 북한의 ‘2인자’로 군림했던 최 비서는 지난해 10월 전국도대항군중체육대회에 참석한 이후 11월 8일 발표된 리을설 인민군 원수 장의위원 명단에서 빠지면서 신변 이상설이 제기됐다. 국가정보원은 같은 달 24일 그가 백두산영웅청년발전소 토사 붕괴 사고의 책임을 지고 11월 초 지방의 한 협동농장으로 추방돼 혁명화 교육을 받는 것으로 보인다고 국회 정보위원회에 보고한 바 있다. 최룡해가 최근 사망한 김양건 통일전선부장 겸 대남 담당 당 비서의 공백을 메우게 될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북한의 4차 핵실험으로 어느 때보다 북·중 관계와 남북 관계가 악화된 이 위기 상황에서 이를 맡아 대처할 수 있고, 또 김정은 제1위원장에게 허심탄회하게 조언할 수 있는 인물으로 최 비서가 우선 거론된다는 점에서 가능성에 무게가 실린다. 문경근 기자 mk5227@seoul.co.kr
  • ‘숙청설’ 北 최룡해, 3개원 만에 공개 활동… “‘당 비서’ 복권됐나?”

    ‘숙청설’ 北 최룡해, 3개원 만에 공개 활동… “‘당 비서’ 복권됐나?”

    한동안 공개석상에 나타나지 않아 ‘숙청설’에 휩싸였던 북한 최룡해가 ‘당 비서’ 직함으로 석 달 만에 활동을 재개했다. 북한 조선중앙통신은 14일 인민문화궁전에서 진행된 ‘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 창립 70돌 경축행사 대표증 수여’ 행사 소식을 전하며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비서 최룡해 동지가 연설하였다”고 15일 보도했다. 통신은 최 당비서가 연설에서 “언제나 청년사업에 깊은 관심을 돌리고 계시는 경애하는 김정은 원수님께서 경축행사 대표들에게 베풀어 주신 크나큰 은정에 대하여 언급하였다”고 전했다. 이어 그가 “경축행사 대표들이 수소탄 시험의 대성공으로 반만년 민족사에 특기할 역사적 사변을 안아온 끝없는 민족적 긍지와 자부심을 안고 노동당 제7차 대회가 열리는 올해 강성국가 건설의 최전성기를 열어나가기 위한 투쟁에서 영웅조선청년들의 불굴의 기개와 혁명적 의지를 남김없이 과시할 데 대해 강조했다”고 설명했다. 북한의 2인자로 군림했던 최룡해 비서는 지난해 10월 전국도대항군중체육대회에 참석하고 노동신문에 기고한 뒤 11월 8일 발표된 리을설 인민군 원수 장의위원 명단에서 제외되면서 ‘신변이상설’이 제기됐다. 이와 관련 국가정보원은 같은 달 24일 최 비서가 백두산영웅청년발전소의 토사 붕괴 사고에 책임을 지고 11월 초 지방의 한 협동농장으로 추방돼 혁명화 교육을 받는 것으로 보인다고 국회에 보고한 바 있다. 이어 지난해 12월 김양건 노동당 비서의 국가장의위원회 명단에 다시 포함되면서 복권된 것으로 관측됐다. 그러나 김 비서의 장례식과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의 새해 금수산태양궁전 참배 등에 연이어 불참해 신변에 대한 상황을 놓고 여전히 의문이 제기됐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구본영 칼럼] 북한이 ‘핵 인질극’을 멈추게 하려면

    [구본영 칼럼] 북한이 ‘핵 인질극’을 멈추게 하려면

    경제학자 케네스 볼딩은 “예전엔 대도시가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안전판이었지만, 현대에는 공중전과 핵무기로 인해 시민이 인질이 됐다”고 했다. 북한의 4차 핵실험을 보고 그의 혜안에 새삼 경탄했다. 수소폭탄 실전 배치가 김정은 노동당 제1비서의 최종 목표라면 이 좁은 한반도에 사는 우리가 모두 그의 인질이니…. 김정은은 “수소탄 실험은 자위적 조치”라고 했다. 하지만 결국 세습체제를 지키기 위해 남북한 구성원 전체를 인질로 삼겠다는 얘기라면? 상상만 해도 끔찍한 시나리오다. 이를 막기 위한 우리와 국제사회의 여하한 시도도 무위에 그쳤다. 김대중·노무현 정부가 대북 지원을 쏟아부었지만, 북한이 몰래 핵·미사일을 개발했다면 그 종잣돈을 대준 형국이 아닌가. 국제사회와 힘을 합쳐 5차례 유엔 결의안으로 압박했지만 역시 별무소용이었다. 문제는 앞으로도 북의 핵무장을 막는 데 햇볕도, 채찍도 통한다는 보장이 없다는 것이다. 일부 햇볕론자들은 우리가 지원만 하면 북이 핵을 포기하고 주민들을 살리는 선택을 할 것으로 기대한다. 하지만 오지 않을 고도(Godot)를 기다리는 것처럼 무망한 일이다. 김정은이 개혁·개방으로 유일 체제의 허구성이 주민들에게 알려질 걸 두려워하는 딜레마에서 헤어났다는 징후는 어디에도 없다. 남북 간 국력 차와 재래식 무기의 열세를 뒤집기 위해 핵무장에 집착하고 있는 그다. 국제 제재도 안 먹힐 조짐이 벌써 나타났다. 북의 4차 핵실험 직후 중국은 “‘조선’이 비핵화 약속을 지켜야 한다”며 강경한 자세였다. 그러나 박근혜 대통령이 공들인 ‘톈안먼 성루 외교’의 효과도 거기까지인가. 윤병세 외교장관이 대북 제재를 행동으로 보여 달라고 하자 왕이 외교부장은 “대화를 통한 해결”을 강조하며 발을 뺐다. 결정적 국면에서 북에 뒷문을 열어 주던 관성을 못 버리는 꼴이다. 북한 정권의 붕괴가 동북 3성을 넘어 ‘도미노 불안정’으로 번지는 걸 저어하는 중국도 반쯤 북핵의 인질이 됐다는 뜻이다. 북한의 핵 포기를 이끌어 낼 방책은 대체 뭘까. 김정은이 더 유연한 지도자로 탈바꿈하리란 희망은 거의 접어야 할 것 같다. 2인자 황병서 인민군 총정치국장이 무릎걸음으로 설설 기는 사진을 보라. 북한 내 누가 그의 면전에서 핵 포기를 진언하겠나. 그는 이번 ‘수소탄 실험’을 회심의 ‘게임 체인저’로 볼 게다. 단숨에 재래식 전력의 열세를 만회하고, 미국으로부터 체제 안전을 보장받는 발판을 마련했다는 착각이다. 무릇 인질극을 수습하는 데는 대화가 기본이다. 필요하면 식음료를 반입하면서 달래야 한다는 말이다. 전기와 수도를 끊어 인질범을 압박해 무기를 내려놓게 하는 것도 필수다. 그래도 안 통할 때 최후 수단이 뭐겠나. 인질들의 안위를 살피면서 인질범을 조용히 제거하는 것이다. 북한의 ‘핵 인질극’을 한 방에 끝낼 묘책이 있을 리는 없다. 세습 정권이 바뀌기 전엔 북한이 핵을 포기할 가능성이 희박해 보이는 새해 벽두다. 압박과 대화를 포함한 가용한 모든 수단을 동원, 한민족의 공멸을 부를 북의 핵무장을 입체적으로 저지해야 할 때다. 그렇다면 북한 정권을 보다 합리적 지도부로 교체하는 레짐 체인지(regime change)도 국제사회가 배제할 수 없는 옵션이다. 물론 이 카드가 주효하려면 전제가 있다. 첫째, 중국의 태도 변화다. 이를 위해 ‘김정은 이후’에도 친중 정권이 상당 기간 존속할 수 있음을 설득해야 한다. 둘째, 어디까지나 테이블 밑 ‘히든카드’라야 한다. 너무나 현실적인 정치사상가 마키아벨리가 그랬다. “무슨 일이든 상대를 절망에 몰아넣는 일은 사려 깊은 사람이 할 일은 아니다”라고. 미리 패를 보여 주지 않아야 북핵 인질의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다. 레짐 체인지 드라마의 궁극적 주역은 북한 주민들임을 유념할 필요도 있다. 통독의 실제 주역도 동독 사회주의 체제를 버리고 서독으로의 편입안에 투표한 동독 주민들이었다. 북 주민들이 북핵의 진실을 알게 하기 위해서라도 대화와 협력을 마지막까지 중단해서도 안 된다. 다만 인질범에게 흉기를 쥐여 줄 ‘벌크 캐시’, 즉 대규모 현금 지원은 극히 조심해야만 할 것이다. 논설고문
  • 2인자 황병서도 무릎 꿇고 대화… 김정은 ‘공포통치’

    2인자 황병서도 무릎 꿇고 대화… 김정은 ‘공포통치’

    북한 내 2인자이자 군(軍) 서열 1위 황병서 총정치국장이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 옆에서 바닥에 무릎을 꿇고 대화하는 장면이 지난 9일 조선중앙TV를 통해 공개됐다. 이 장면은 북한 조선중앙TV가 8일부터 방영하기 시작한 ‘최고사령관 김정은 동지가 인민군대 사업을 현지지도’라는 제목의 기록영화에서 나왔다. 영화는 지난달 평양에서 열린 제4차 포병대회에 참석한 김 제1위원장이 주석단에 앉아 황병서 총정치국장과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을 담았다. 황병서는 무릎을 꿇고 김 제1위원장의 눈높이에 맞게 자세를 낮추었으며 말을 할 때엔 왼손으로 입을 공손히 가리는 모습이었다. 한 대북전문가는 “김정은의 공포 통치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라며 “군 서열 1인자마저 고양이 앞에 쥐 모습처럼 보이니, 일반 간부들이 느끼는 공포감은 어떻겠느냐”고 했다. 군 최고 간부가 김 제1위원장 앞에서 극도로 행동을 조심하는 모습을 보인 것은 처음은 아니다. 지난달 조선중앙TV 기록 영화에는 김 제1위원장이 인민군 제7차 군사교육일꾼대회에 참석한 모습이 보였다. 이때 박영식 인민무력부장(군 서열 2위)은 김 제1위원장이 앉으라고 손짓을 한 뒤에도 바로 앉지 못하고 황병서의 눈치를 살폈다. 황병서 역시 김 제1위원장의 손짓에도 머뭇거리다가 김 제1위원장에게 경례하고 나서야 엉거주춤 자리에 앉았다. 이후 박영식도 김 제1위원장에게 경례한 뒤 착석했다. 일각에서는 군 고위간부들의 이런 몸사림이 지난해 4월 현영철 인민무력부장이 김 제1위원장 앞에서 졸았다는 이유로 ‘반역죄’, ‘불경죄’로 처형된 이후 심화됐다는 지적이 나온다. 문경근 기자 mk5227@seoul.co.kr
  • ‘北 2인자’ 황병서, 김정은 앞에서 무릎 꿇고 대화 ‘포착’

    ‘北 2인자’ 황병서, 김정은 앞에서 무릎 꿇고 대화 ‘포착’

    북한 군 서열 2인자인 황병서 군 총정치국장이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 앞에서 공손하게 무릎을 꿇고 대화하는 모습이 포착됐다. 9일 북한 조선중앙TV가 전날 방영을 시작한 기록영화 ‘최고사령관 김정은 동지가 인민군대 사업을 현지지도’에서는 지난달 평양에서 열린 제4차 포병대회에 참석한 김 제1위원장이 주석단에 앉아 황 총정치국장과 대화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화면에서 황 총정치국장은 김 제1위원장의 오른편에 마련된 의자에 앉지 않고 김 제1위원장의 눈높이에 맞춰 무릎을 꿇고 자세를 한껏 낮추고 있다. 말을 할 때도 왼손으로 입 전체를 가리고 공손하게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인다. 황 총정치국장은 지난해 11월에 열린 인민군 제7차 군사교육일꾼대회에서도 주석단 중앙에 앉은 김 제1위원장이 자리에 앉으라는 신호를 수차례 보내고 나서야 김 제1위원장에게 경례를 한 뒤 자리에 앉기도 했다. 지난해 6월에는 김 제1위원장을 수행하다 자신이 김 제1위원장보다 한 걸음가량 앞서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는 화들짝 놀라는 모습이 보여지기도 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김정은 인민무력부 방문, “주권국가의 합법적 권리…정정당당한 것”

    김정은 인민무력부 방문, “주권국가의 합법적 권리…정정당당한 것”

    김정은 인민무력부 방문, “주권국가의 합법적 권리…정정당당한 것”김정은 인민무력부 방문 북한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4차 핵실험 이후 인민무력부를 방문해 수소탄 실험이 “자위적 조치”였다고 주장했다. 북한 조선중앙통신은 10일 “(김 제1위원장이) 주체조선의 첫 수소탄 시험의 장쾌한 뢰성이 천지를 진감시킨 주체150(2016)년 새해에 즈음하여 인민무력부를 축하방문하시였다”고 밝혔다. 통신에 따르면 김 제1위원장은 인민무력부를 방문한 자리에서 연설을 통해 “노동당 제7차 대회가 열리는 새해 벽두에 우리가 단행한 수소탄 시험은 미제와 제국주의자들의 핵전쟁 위험으로부터 나라의 자주권과 민족의 생존권을 철저히 수호하며 조선 반도의 평화와 지역의 안전을 믿음직하게 담보하기 위한 자위적 조치”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이것은 주권국가의 합법적 권리이며, 그 누구도 시비할 수 없는 정정당당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북한이 지난 6일 4차 핵실험을 강행한 이후 김 제1위원장의 관련 언급을 보도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김 제1위원장은 인민군대의 중점 사업에 대해서도 언급하면서 “‘인민군대의 정치군사적 위력을 백방으로 강화하여 조선노동당 제7차 대회를 보위하자!’, 이것이 올해 인민군대가 들고나가야 할 전투적 구호”라고 말했다.또 “인민군대는 올해 포병훈련에서 새로운 전변을 일으켜 포병무력의 질적강화를 이룩해야 한다”면서 “당 중앙은 조선인민군 제4차 포병대회에서 시사 없이 단발에 명중하는 것을 포병훈련에서 도달하여야 할 기본 목표로 내세웠다”고 말했다. 이어 “인민군대에서 칼날 같은 군기를 세우고 정규화적 면모를 철저히 갖추어야 한다”면서 “항일유격대식 부대지휘 관리방법을 철저히 구현하여 모든 사업과 생활을 군사규정과 교범의 요구대로 조직진행하여야 한다”고 덧붙였다.한편 이날 김 제1위원장의 인민무력부 방문에는 황병서 총정치국장과 박영식 인민무력부장, 리영길 총참모장이 축하 꽃다발을 전달했다고 통신은 설명했다. 그러나 김 제 1위원장의 방문이 언제였는지 정확한 시점은 밝히지 않았다.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김정은 인민무력부 방문, “수소탄 시험은 주권국가의 합법적 권리”

    김정은 인민무력부 방문, “수소탄 시험은 주권국가의 합법적 권리”

    북한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4차 핵실험 이후 인민무력부를 방문해 수소탄 실험이 “자위적 조치”였다고 주장했다. 북한 조선중앙통신은 10일 “(김 제1위원장이) 주체조선의 첫 수소탄 시험의 장쾌한 뢰성이 천지를 진감시킨 주체150(2016)년 새해에 즈음하여 인민무력부를 축하방문하시였다”고 밝혔다. 통신에 따르면 김 제1위원장은 인민무력부를 방문한 자리에서 연설을 통해 “노동당 제7차 대회가 열리는 새해 벽두에 우리가 단행한 수소탄 시험은 미제와 제국주의자들의 핵전쟁 위험으로부터 나라의 자주권과 민족의 생존권을 철저히 수호하며 조선 반도의 평화와 지역의 안전을 믿음직하게 담보하기 위한 자위적 조치”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이것은 주권국가의 합법적 권리이며, 그 누구도 시비할 수 없는 정정당당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북한이 지난 6일 4차 핵실험을 강행한 이후 김 제1위원장의 관련 언급을 보도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김 제1위원장은 인민군대의 중점 사업에 대해서도 언급하면서 “‘인민군대의 정치군사적 위력을 백방으로 강화하여 조선노동당 제7차 대회를 보위하자!’, 이것이 올해 인민군대가 들고나가야 할 전투적 구호”라고 말했다.또 “인민군대는 올해 포병훈련에서 새로운 전변을 일으켜 포병무력의 질적강화를 이룩해야 한다”면서 “당 중앙은 조선인민군 제4차 포병대회에서 시사 없이 단발에 명중하는 것을 포병훈련에서 도달하여야 할 기본 목표로 내세웠다”고 말했다. 이어 “인민군대에서 칼날 같은 군기를 세우고 정규화적 면모를 철저히 갖추어야 한다”면서 “항일유격대식 부대지휘 관리방법을 철저히 구현하여 모든 사업과 생활을 군사규정과 교범의 요구대로 조직진행하여야 한다”고 덧붙였다.한편 이날 김 제1위원장의 인민무력부 방문에는 황병서 총정치국장과 박영식 인민무력부장, 리영길 총참모장이 축하 꽃다발을 전달했다고 통신은 설명했다. 그러나 김 제 1위원장의 방문이 언제였는지 정확한 시점은 밝히지 않았다.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커버스토리] 탈북자들이 말하는 ‘대북 확성기’의 위력

    [커버스토리] 탈북자들이 말하는 ‘대북 확성기’의 위력

    “남측 철원군에서 들려오던 대중가요 노사연의 ‘만남’과 혜은이의 ‘당신은 모르실 거야’를 잊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두 노래를 지금도 좋아합니다. 조금이라도 크게 들으려고 장교 여러 명이 산에 올라가 귀를 쫑긋 세우기도 했어요. 대놓고 말하진 못했지만 다들 ‘남측(남한)에 가고 싶다’는 생각 많이 하고 있었을 거예요.” 인민군 대위 출신인 김성민(54) 자유북한방송 대표는 대북 확성기 방송의 ‘애청자’였다. 1999년 탈북한 그는 강원 창도군의 임남댐 건설에 동원된 병사들의 ‘충성심 고취’ 교육을 담당하는 예술선전대에서 복무했다. 김 대표는 8일 “아이로니컬하게도 한국 정부를 비판하는 대학생들에 대한 뉴스 때문에 탈북을 고민했다”고 회상했다. “대학생들이 정부에 대항해 데모를 했다는 뉴스를 들었는데, 그건 새로운 충격이었습니다. 남측이 자유롭게 의견을 표출하는 자유국가임을 깨닫게 된 거죠. 몇 년 후 북한 정권이 정말 싫어졌을 때, 그때 들은 확성기 방송이 떠올랐고 남측행을 결심했어요. 2년간 들은 확성기 방송 내용이 잠재의식 속에 박혔던 거죠.” 1980년대만 해도 출신성분이 좋지 않은 고달픈 병사들만 확성기 방송에 관심을 보였다는 게 탈북자들의 대체적인 전언이다. 자기들 체제를 비난하는 남측에 대해 저항감이 상당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1990년대에 남측의 경제 발전에 대한 내용과 대중가요 방송이 대폭 늘어나자 출신성분이 좋은 장교들도 귀담아듣기 시작했다고 한다. 1998년 탈북한 김용화(63) 탈북난민인권연합 회장은 황해도 해주에서 중위로 복무했다. 그는 “남측에 대해 미제 식민지, 괴뢰군이라고 철저하게 세뇌 교육을 받았는데도 대중가요를 듣고 있으면 마음이 약해졌다”고 말했다. “그 당시 ‘찔레꽃’, ‘울고 넘는 박달재’ 같은 노래를 군인들이 흥얼거리곤 했다”고도 덧붙였다. 그는 “남측 문화가 들어와 있지 않던 그 당시에도 확성기 방송만 듣고 탈북을 시도한 병사들이 있었는데, 이미 남측 문화를 맛본 장마당 세대에게 확성기 방송의 위력은 그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고 설명했다. 대북 확성기 외에 대북 라디오방송에 영향을 받는 탈북자도 많다. 경기와 황해 접경 지역에서 7년간 군 복무를 하다 2011년 탈북한 윤모(28)씨가 그런 경우다. 그는 “얇은 군복을 입은 채 기껏해야 강냉이밥 한두 번, 어떤 날은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버티는데 남측에서는 따뜻한 물과 전기도 맘대로 쓸 수 있고 배불리 먹을 수 있다는 방송을 듣고 많은 병사가 탈북을 결심했다”고 전했다. “고향이 함경북도인데 어릴 때부터 한국 예능 프로그램 ‘천생연분’과 ‘엑스맨’을 봤습니다. 하지만 방송국 세트일 뿐 실상은 남측 사람들도 헐벗는다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그는 대북 라디오방송을 6개월쯤 듣자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대중가요가 흘러나왔어요. 그런데 사랑을 다룬 노랫말에서 이상하게 탈북에 대한 열망이 생기더군요.” 윤씨는 “대북방송은 북한 병사들에게 마치 ‘금단의 열매’와 같은 것”이라고 정의했다. 힘들고 굶주린 상황에서 환장할 만큼 당기기는 하는데, 자기들 입장에서 절대로 먹어서는 안 될 음식과 같은 것이란 얘기다. 이민영 기자 min@seoul.co.kr 홍인기 기자 ikik@seoul.co.kr 조용철 기자 cyc0305@seoul.co.kr
  • [북한 “수소탄 핵실험”] 시민·외국 관광객, 동요 없이 北동향 주시

    6일 북한의 수소탄 핵실험 발표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는 대체로 차분한 분위기를 유지했다. 내국인은 물론 외국인 관광객도 큰 동요가 없었다. 다만 북한의 추가 도발 가능성과 한반도 정세 악화에 대해선 불안감을 나타냈다. 시민단체들은 한목소리로 북한을 비판했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김삼수 정치사법팀장은 “핵실험은 어떤 이유에서건 용납할 수 없다”며 “북한이 한반도 평화 체제 전환을 주장하면서 그 전제가 되는 비핵화 노력을 무시하고 오히려 4차 핵실험을 강행한 데 대해 심각하게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고 밝혔다. 참여연대 이미현 평화군축센터 팀장도 북한의 핵실험을 강력히 규탄하면서 “반인도주의적 살상무기인 핵무기 개발을 위한 핵실험은 국제법 위반”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북한의 3차 핵실험 이후 한국과 미국이 북한의 추가 핵실험을 좌절시키기 위해 ‘6자 회담’ 재개 등의 노력을 하지 못한 부분은 아쉽다고 지적하며 “한반도를 넘어 동북아 전체를 비핵화 지대로 만들기 위한 논의가 필요한 때”라고 말했다. 서울 압구정동 강남관광정보센터 관계자는 “외국인 관광객의 방문 수도 차이가 없고 특별히 북한의 핵실험에 관련해 묻는 사람도 없었다”고 말했다. 서울 명동 역시 중국인 관광객으로 평소와 비슷하게 붐볐다. 직장인 한기현(37)씨는 “북한이 핵실험을 자주 하기 때문에 크게 동요하거나 걱정하는 건 없다”며 “다만 북한이 남한을 상대로 또 다른 군사적 도발을 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은 든다”고 말했다. 공인중개업자 구제근(67)씨는 “북한이 실제로 수소탄 실험을 했다기보단 주변국들과의 협상에서 우위를 점하려는 과장된 행동일 가능성이 있다”며 “이런 도발이 젊은이들의 통일에 대한 인식을 악화시킬 수 있어 우려스럽다”고 했다. 북한군 장교 출신 탈북자 김모(63)씨는 “오래전부터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수소폭탄을 만들겠다고 꾸준히 말해 왔고, 이에 대한 모형 훈련도 많이 했다”며 “50대 이상 인민군 장교 출신들에게는 수소폭탄 실험이 낯설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중국과 멀어지자 독자적인 전쟁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게 아닐까 싶다”고 평가했다. 2009년 탈북한 이모(47·여)씨는 “고립된 북한의 카드는 핵실험뿐이어서 동요하는 탈북자는 거의 없다”며 “북한 내부도 사용하기보다 갖고 있다는 것에 의미를 두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이성원 기자 lsw1469@seoul.co.kr 조용철 기자 cyc0305@seoul.co.kr
  • 김정은 포 사격 참관… 새해 첫 군 공개일정

    김정은 포 사격 참관… 새해 첫 군 공개일정

    북한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새해 첫 군 공개일정으로 인민군부대의 포사격 경기를 시찰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5일 밝혔다. 통신은 “노동당 제7차 대회가 열리는 뜻깊은 올해에 조선인민군 대연합부대들 사이의 포사격 경기가 진행됐다”며 “김정은 동지께서 포사격 경기를 보시었다”고 했다. 북한군 편제에서 ‘대연합부대’는 우리의 ‘군단’과 비슷하다. 통신은 경기가 열린 구체적인 장소와 시점은 공개하지 않았다. 김 제1위원장은 지난해 1월7일에도 군 비반충포(우리의 대전차화기) 사격대회 현지지도로 군 관련 일정을 시작한 바 있어 2년 연속 포병 부대를 방문한 셈이다. 이를 두고 공중·해상 전력의 상대적인 취약점을 포병 전력 강화를 통해 보완하려는 것이 아니냐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로 북한은 김정은 시대 들어 지속적으로 포병 무력 강화에 주력하고 있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 교수는 “김 제1위원장은 기본적으로 포병 무력에 대한 관심이 많다”면서 “공군 전력이나 미사일 개발에는 여러 한계가 있는 상황인 데다 지형상으로도 가장 적합한 재래식 무기가 포라는 판단을 고려한 일정으로 보인다”고 했다. 문경근 기자 mk5227@seoul.co.kr
  • 양날개 잃은 김정은, 새 인물 찾기 고심

    양날개 잃은 김정은, 새 인물 찾기 고심

    북한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지난 30일 전날 교통사고로 사망한 김양건 노동당 비서 겸 통일전선부장의 빈소를 찾아 조의를 표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31일 보도했다. 통신에 따르면 김 제1위원장은 김 비서의 빈소를 찾아 “김양건 동지는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충실한 방조자, 친근한 전우였다”고 말했다. 이어 “금시라도 이름을 부르면 눈을 뜨고 일어날 것만 같다”며 “김양건 동지의 빛나는 한생을 우리 당과 조국은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김 제1위원장은 김 비서의 유가족도 만나 위로의 말을 전했다. 김 비서는 2015년 한 해 동안 김 제1위원장의 현지 시찰 활동을 30차례나 수행했다. 북한 고위급 중 세 번째로 많다. 이날 김 제1위원장의 조문에는 황병서 인민군 총정치국장 등이 수행했다. 국가장의위원회 명단에 올라 관심을 모은 최룡해 노동당 비서는 이날 동행자 명단에 포함되지 않았다. 김 제1위원장 입장에서는 김 비서가 사망하면서 대남·대외업무를 맡은 두 축이 모두 무너진 상황이 됐다. 김 비서 외에 대외 정책을 총괄하던 강석주 국제비서도 지병으로 오랜 기간 자리를 비우고 있기 때문이다. 북한 소식통은 “지금 북한은 대외 정책을 위한 하부 조직은 존재하지만 최고 컨트롤타워가 사라진 셈”이라고 했다. 이에 북한은 우선 대체 인물 찾기에 고심할 것으로 보인다. 국제비서로는 외교부 장차관에 해당하는 리수용 외무상과 김계관 외무성 제1부상이, 통일전선부장으로는 원동연·맹경일 통일전선부 부부장 등이 후보군으로 거론된다. 최근 복권된 것으로 알려진 최 비서가 남북 관계 및 북·중 관계에서 일정한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일각에서는 인물뿐 아니라 당 기관 및 정부기구 개편을 통한 분위기 쇄신을 모색할 것이란 관측도 제기된다. 당장 오는 5월에 김정은 집권 5년차를 맞아 35년 만에 개최되는 제7차 노동당대회를 앞두고 대남·대외 분야를 포함해 대대적인 조직 개편이 단행될 수 있다. 정부 당국자는 “대안 마련이 완료되기 전에는 김 제1위원장도 대외정책 이슈에 관해 섣불리 행동하기 힘들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런 측면에서 김 제1위원장이 올해 신년사에 대남·대외 정책과 관련해 어떤 메시지를 던질지도 관심을 모은다. 지난해 신년사에서는 남북 간 ‘대화와 협상, 교류와 접촉’을 강조했다. 올해는 대남·대외 컨트롤타워가 부재하는 만큼 커다란 방향 변화는 없을 것이란 게 대체적인 관측이다. 강병철 기자 bckang@seoul.co.kr
  • ‘김양건 떠난 날’ 돌아온 최룡해

    지방 협동농장에서 ‘혁명화 교육’ 중인 것으로 알려졌던 최룡해 전 당 비서가 30일 북한이 발표한 김양건 노동당 비서 국가장의위원회 명단에 포함돼 두 달 만에 복권된 것으로 관측된다. 앞서 장성택 숙청 이후 북한의 ‘2인자’로 여겨졌던 최룡해는 지난달 8일 공개된 리을설 인민군 원수 장의위원 명단에서 빠져 신변 이상 가능성이 제기됐다. 같은 달 24일 국가정보원은 최룡해가 백두산발전소 토사 붕괴 사고의 책임을 지고 11월 초 지방의 한 협동농장으로 추방돼 혁명화 교육을 받는 것으로 보인다고 국회 정보위원회에 보고했다. 당시에는 최룡해가 평양에서 멀리 떨어진 함경도 소재 농장으로 추방돼 농장원들과 일하는 것으로 알려져 복권 가능성이 낮은 게 아니냐는 관측도 제기됐다. 하지만 이번 김양건 장의위원 명단에 포함된 것은 물론이고, 김기남 당 비서와 최태복 비서 사이인 다섯 번째(김정은 장의위원장 제외)에 이름을 올려 복권된 것이 유력하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와 관련해 우리 정보 당국도 최룡해가 당 비서로 복권됐을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일각에서는 최룡해가 지방의 협동농장으로 추방됐던 것이 아니라 평양에 머물며 자숙의 시간을 가졌을 가능성도 제기하고 있다. 문경근 기자 mk5227@seoul.co.kr
  • [사설] 남북 당국회담 첫 단추 실사구시에 맞춰라

    오늘 마침내 개성공단에서 제1차 차관급 남북 당국회담이 열린다. 당국회담 개최는 지난 8월 우리 측 김관진 청와대 국가안보실장과 홍용표 통일부장관, 북측 황병서 인민군 총정치국장과 김양건 노동당 통일전선부장이 마라톤협상을 통해 ‘8·25 합의’에 이른 지 108일 만이다. 이번 회담에 우리 측은 황부기 통일부 차관을 수석대표로 김의도 통일부 국장, 손재락 총리실 국장이 나선다. 북측은 전종수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 서기국 부국장을 단장으로 황철 조평통 서기국 부장, 황충성 민족경제협력연합회(민경련) 참사가 대화 테이블에 앉는다. 이번 당국회담은 그 의미가 결코 작지 않다고 본다. 무엇보다도 남북이 박근혜 정부 출범 이전 이명박 정부 때부터 지속돼 온 대결 일색의 긴장관계를 접고 당국자 간 대화의 장을 마련했다는 게 중요하다. 대화의 모멘텀이 계속 이어진다면 국회회담, 군사회담 등 다양한 대화 채널을 구축하는 것도 불가능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남북 간 합의의 이행이라는 측면에서 봐도 상호 신뢰의 첫발을 뗐다는 의미가 있다. 당국회담 개최로 일단 ‘8·25 합의’는 대부분 이행된 셈이다. 앞서 추석 이산가족 상봉이 이뤄졌고, 민간 분야의 교류도 훨씬 활발해졌다. 물론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현안을 포괄적으로 논의키로 한 만큼 이견과 충돌이 속출할 가능성이 크다. 우리 측은 우선적으로 이산가족 문제의 근본적 해결을 원하고, 북측은 5·24조치 해제와 금강산관광 재개에 목말라 하고 있어 접점을 찾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남북 모두 관계개선의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 이번 당국회담 개최에 합의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일단 대화의 정례화에만 합의해도 충분하다. 합의에 도달하기 어려운 비현실적인 주장을 펴기보다는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자세로 임하면 의외의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남북 모두 대화의 모멘텀을 해칠 수 있는 경거망동은 자제해야만 한다. 서해 로켓발사장 증축공사를 사실상 마무리한 것으로 관측되는 북한이 추가적인 로켓 시험발사에 나선다면 남북관계는 또다시 얼어붙을 수밖에 없다.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최근 “수소탄(수소폭탄) 폭음을 울릴 수 있는 강대한 핵 보유국이 됐다”고 언급한 점도 우려스럽긴 마찬가지다. 도발은 금물이다. 우리 측 민간단체 역시 북한을 자극할 수 있는 대북전단 살포 등을 자제하길 바란다. 이제 막 대화를 시작한 지금 시점에서는 남북 간의 신뢰를 쌓는 것만큼 중요한 일은 없다. 지난 8년여간 남북관계는 비정상적으로 뒤틀렸던 것이 사실이다. 금강산 관광객 피살, 천안함 폭침, 연평도 포격, 비무장지대(DMZ) 지뢰매설 등 북한의 잇따른 도발로 인해 남북관계는 개선의 계기를 마련할 틈조차 갖지 못했다. 이번에야말로 남북관계 개선이 공허한 외침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소중하게 마련된 당국회담을 남북관계 개선의 전기로 삼아야만 한다. 남북은 이번 당국회담에서 모든 것을 꺼내놓기보다는 선이후난(先易後難·쉬운 것부터 처리하고, 어려운 것은 나중에 처리한다)의 자세로 쉬운 것부터 시작해 서서히 신뢰를 쌓아 나가야 할 것이다.
  • 대북 방송 끈 황병서 뜨고… No.2 최룡해는 추락

    대북 방송 끈 황병서 뜨고… No.2 최룡해는 추락

    한때 북한 권력 2인자로 꼽혔던 최룡해 노동당 비서가 백두산 발전소 붕괴로 지방 협동농장으로 추방된 반면 지난 8월 남북 고위급 회담에 나섰던 황병서 조선인민군 총정치국장은 대북 방송 확성기를 끄게 한 공로로 영웅 대접을 받고 있어 대조적이다. 대북 소식통은 25일 “최 비서는 협동농장에서 혁명화 교육을 받는 것이 확실시된다”며 “이달 초부터 함경도 소재 농장에서 생활하고 있다고 한다”고 밝혔다. 최 비서는 과거 혁명화 교육을 받았던 북한의 다른 간부들과 마찬가지로 협동농장에서 매일 농장원들과 함께 일하면서 자아비판서도 쓰고 있을 것으로 관측된다. 국가정보원은 지난 24일 최 비서가 ‘혁명화 교육’을 받고 있다고 했고 일본의 니혼게이자이신문은 북·중 소식통을 인용해 최 비서가 평양에서 정치 학습을 받고 있다고 25일 보도했다. 앞서 지난해 4월 최 비서는 황 총정치국장에게 군 서열 ‘1위’인 인민군 총정치국장 자리를 내줬다. 최 비서는 북한 빨치산 2세대의 대표 주자로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측근으로 활동하며 북한 권력의 정점에 서 있던 사람이다. 비록 1998년과 2004년 비리 혐의로 인해 혁명화 교육을 받은 바 있지만 늘 권력의 주변에 머물렀던 북한판 ‘로열패밀리’다. 일각에서는 그의 실각이 세 번째란 점과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의 정책에 이견을 냈던 점을 들어 단시간에 복귀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평가한다. 최 비서가 추락하는 사이 황 총정치국장은 김 제1위원장의 최측근으로 확실히 자리매김하며 북한 내 2인자로 위치를 굳혀 가고 있는 모습이다. 국정원이 밝힌 것처럼 북한은 지난 8·25 남북 고위급 당국회담을 두고 충돌 없이 남측의 확성기를 중단시킨 것이 ‘무혈부전(無血不戰)의 승리’라며 황 총정치국장을 ‘공화국 영웅’이라 치켜세우고 있다. 특히 김정은 집권 이후 군 장성들의 강등과 승진이 반복되는 가운데 황 총정치국장만이 계속 승진했다. 이를 두고 2000년대 초 김 제1위원장의 친어머니인 고영희와 협력해 김정은의 권력 세습을 주도했던 인연이 지속되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문경근 기자 mk5227@seoul.co.kr
  • 연평도 포격 5주년 날… 판문점은 해빙무드, 서해는 살얼음판

    연평도 포격 5주년 날… 판문점은 해빙무드, 서해는 살얼음판

    북한이 2010년 11월 23일 발생한 연평도 포격 도발 사건 5주년을 앞두고 우리 군이 북한 수역을 목표로 해상사격을 강행하면 응징 보복할 것이라고 위협했다. 남북한이 8·25 합의를 바탕으로 오는 26일 당국회담 실무접촉을 준비하는 등 관계 개선 분위기로 접어들었지만 서해 북방한계선(NLL) 일대 서북도서 지역은 여전히 ‘한반도의 화약고’로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긴장이 지속되고 있다. 북한 인민군 서남전선사령부 대변인은 22일 담화를 통해 “남조선 호전광들이 5년 전 연평도 불바다의 교훈을 망각하고 또다시 우리 측 수역을 향해 도발적 해상사격을 감행하려 획책하고 있다”면서 “8·25 합의가 진실로 소중하다면 그에 맞게 처신해야 한다”고 보도했다. 군 관계자는 이에 대해 “해병대가 매년 연평도 포격 도발일에 맞춰 NLL 이남에서 실시해 온 정례적 사격훈련에 대해 트집을 잡는 것”이라며 “23일 훈련은 중단될 수 없다”고 반박했다. 북한군은 연평도 포격 도발 이후에도 NLL 이남 해역으로 경비정을 침투시키는 등 끊임없이 군사적 긴장을 고조시켜 왔다. 군 당국은 지난 5년간 북한의 도발 의지를 꺾고자 지속적으로 서북도서의 전력을 증강해 왔다. 2011년 6월 서북도서방위사령부를 창설해 연평도, 백령도 등에 해병대 병력 1200여명을 추가 배치했다. 이로써 서북도서 지역 주둔 병력도 5000여명으로 늘었다. 군은 연평도 포격 도발 당시 유일한 대응 수단으로 6문밖에 없던 K9 자주포를 3배 이상 늘렸다. 이 밖에 130㎜ 다연장 로켓포인 ‘구룡’도 고정 배치했다. 2013년에는 백령도와 연평도 등에 이스라엘제 스파이크 미사일을 실전배치했다. 사거리 20㎞의 스파이크 미사일은 북한군이 해안포를 숨겨둔 갱도 속으로 파고들어 정밀 타격할 수 있는 무기다. 북한군도 2013년 서해 최전방 부대를 중심으로 포신이 길고 사거리가 65㎞가 넘는 240㎜ 방사포(다연장로켓)를 추가 배치하는 등 대응에 나섰다. 백령도 맞은편 고암포에는 해군기지를 건설해 특수부대 병력을 수송할 공기부양정 60~70척을 수용하고 있다. 특히 북한은 올해 들어 서북도서 인근 NLL 북방의 갈도와 아리도에 포병 진지와 관측시설을 신축해 왔다. 신인균 자주국방네트워크 대표는 “최근 북한이 비무장지대(DMZ)에서 목함 지뢰 사건이나 포격 도발을 일으켰듯 도서 지역뿐 아니라 육지에서도 과감한 도발을 일으켰다”면서 “군의 타격 능력은 강화됐지만 북한도 반격 능력을 강화해 승리를 보장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하종훈 기자 artg@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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