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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만식선생,50년 평양서 총살당했다”

    ◎소 거주 전 북한 고위인사들 증언/유엔군 입성 하루전 5백여명과 함께/북한군,대동강변에 집단 매장후 도주 6·25이후 생사를 알길없던 민족주의자 고당 조만식선생은 전쟁중 북한당국에 의해 총살당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같은 사실은 중앙일보가 당시 북한에서 당·정고위직을 지내다 그후 숙청돼 소련 등 해외로 탈출·망명한 인사들의 증언을 인용,19일 보도함에 따라 40여년만에 드러났다. 조만식선생은 6·25전쟁중 북한인민군이 유엔군에 밀려 평양에서 후퇴하기 전날인 50년 10월18일 공산정권에 반대하던 미족계열인사및 치안사범등 5백여명과함께 총살당해 대동강변에 가매장됐었다고 이들은 증언했다.이제까지는 조만식선생이 신탁통치 반대 등을 이유로 46년 1월부터 연금생활에 들어간 뒤 행방이 묘연해져 고령으로 자연사했거나 6·25전쟁을 전후해 북한정권에 의해 처형됐을 것으로 막연히 추측돼왔을 뿐 그의 사망시기 및 방법,동기와 배경 등이 명확히 밝혀지지않고 있었다. 북한에서 조소문화협회부위원장,주동독·체코 초대대사 외무성부상 등을 지내다 지난 59년 소련으로 망명한 박길용박사(71·소련과학아카데미 동방학연구소 선임연구위원)등에 따르면 북한은 50년 6·25전쟁을 일으킨 뒤 남진을 계속하다가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되고 한국군과 유엔군의 평양입성이 임박하자 50년 10월 중순쯤 주요 정부기관을 평북(현재 자강도)강계로 이동시키기로 최종결정한 직후 형무소 등에 수감한 정치범 및 치안사범들을 그곳까지 끌고갈 수 없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이에 따라 유엔군이 평양에 입성하기 하루전인 10월18일 「특수가옥」에 연금시켜온 조만식선생(당시 68세)을 비롯,내무성 구치소(형무소)등에 가뒀던 지식인 기독교인 등 민족주의 계열인사와 치안사범 등 5백여명을 집단총살시킨 뒤 시체를 가매장하거나 일부는 그대로 둔채 후퇴했었다. 북한은 중국군의 참전으로 50년 12월초 다시 평양을 탈환하자마자 조만식선생 등의 시체를 파내 『전쟁을 도발한 이승만괴뢰군이 평양을 쳐들어오면서 조만식선생 등 수많은 민족지도자급 인사들을 죽여 구덩이에 파묻고 퇴각했다』고 선전했고 그후 북한주민들은 조만식선생 등이 한국군과 유엔군에 의해 처형된 것처럼 알고 있다고 박씨 등은 전했다. 북한 내무성부상까지 지내다 숙청돼 현재 레닌그라드에 사는 당시 북한노동당 강원도당 부위원장이었던 강상호씨(82)는『평양이북지역으로 후퇴하던 날밤 조만식 등 반동분자들이 총살됐다는 말을 들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고당의 3남인 조연흥씨(51·조선일보 총무국장)는 『60년대 중반 한 귀순자가 자료를 통해 자신의 부하로부터 45년 10월15일쯤 아버지를 총살했었다는 말을 들었다고 전했으나 명확치 않아 그동안 아버지의 기일을 정하지못한 채 해마다 아버지의 생신일(2월1일)을 맞아 추모하고 있다』면서 『이번처럼 아버지를 비롯한 민족계열인사 등 5백여명이 북한당국에 의해 학살된 시기 방법 동기와 배경 등이 당시 북한의 고위관리에 의해 명확히 밝혀지기는 처음으로 매우 신뢰가 간다』고 말했다. 북한문제전문가인 이정식교수(미 펜실베니아대)는 『고당은 소련군정의 엄정한 감시하에 평양의 고려호텔에 연금된 이후 행방불명돼 한국전쟁중에 공산정권에 의해 살해됐다는 소문이 있으나 확실한 증거가 없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1882년 평남 강서군 반석면에서 출생한 고당 조만식선생은 3·1운동과 물산장려운동에 앞장서는 등 일제때부터 해방정국에 이르기까지 민족주의자로 일관해왔으며 6·25전쟁이 나고 부터는 생사를 알길이 없었다.
  • 비사 중국의 한국전개입:5·끝

    ◎북경자료 분석통한 진겸교수의 추적/“장기전에 대비하라”…모,인해전술 지시/80만 병력 3조로 나눠 교대 투입/유엔 총공세에 12개군 지리멸멸/미의 휴전안 소 통해 전달받고 무력적화 포기 모택동은 중국지원군을 3개조로 나누어 교대로 한국전에 투입하겠다는 계획을 스탈린에게 전달했다. 유엔군을 상대로 조기승리를 거두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장기전에 대비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모는 승리에 대한 확신을 버리지는 않았다. 스탈린 앞으로 보낸 전문에서 모는 『앞으로 몇년이 걸리더라도 미군수십만명의 목숨을 빼앗아 승리를 거두겠다』고 다짐했다. 51년 3월중순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팽덕회는 4월6일 중국지원군 당위원회확대회의를 소집,『단기전을 수행하되 장기전에도 대비하라』는 모의 교시를 전달했다. 팽은 이 자리에서 51년중 60만의 병력이 추가징발될 것이며 군사문제가 국가의 최우선과제가 될 것이라고 역설했다. 유엔군은 중국군의 추가병력이 도착한 4월중순까지 반격을 계속,3월중순 서울을 재탈환하고 전선을 38도선으로 옮겨갔다.맥아더장군은 전쟁을 승리로 마무리짓기 위해 중국본토를 공격할 것을 워싱턴에 건의했다. 그러나 트루먼대통령은 유엔군이 38도선으로 진격하자 전쟁을 그쯤에서 끝낼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의견차 때문에 트루먼대통령은 4월11일 맥아더장군을 유엔군사령관직에서 해임하고 후임에 리지웨이장군을 임명했다. 미국이 전전 영토를 회복하는 것으로 전쟁의 목표를 줄여잡은 것과는 달리 중국은 완전한 승리의 욕심을 여전히 버리지 않고 있었다. 51년3월 중국군 제3,9,19군단이 지원군으로 도착하자 팽덕회는 제5차공세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4월6일 중국군당위원회에서 팽덕회는 총반격작전 개시일을 4월20일경으로 잡았다. 팽은 이때 미군이 북한지역의 동서해안에서 상륙작전을 개시할지 모른다는 우려를 가졌으나 기선을 잡기 위해서 공격날짜를 서둘렀다. 중국군 사령부는 이 5차공세를 공격의 주도권을 회복하고 전쟁을 완결짓는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다. 5차공세는 4월22일밤 시작됐다. 유엔군 주방어군인 미제24,25사단을 일시에 포위,섬멸하고 서울을 재점령한다는 목표하에 북한인민군 제1군을 포함,총12개군의 대규모 병력이 작전에 투입됐다. 그러나 작전은 예상보다 어렵게 진행됐고 서울공격에 나섰던 제64,65군은 유엔군의 공습·포공격에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모택동은 그러나 5차공세의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이번에는 서울을 공격하는 척하다가 병력을 돌려 동부전선을 칠 계획을 세웠다. 5월16일 재차공격이 시작됐다. 이번에는 한국군을 상대로 전투를 벌였으나 역시 대대단위 이상의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 조금씩 남하하다가 5월21일 공격을 멈추고 말았다. 이틀 후인 5월23일 새벽 유엔군이 총반격에 나서자 중공군은 허겁지겁 퇴각하다 제60군 예하 1백80사단이 전멸하는등 「한국전 기간중 최대의 피해」를 입은채 5차공세를 실패로 끝냈다. 모택동도 마침내 완전한 승리 대신 휴전을 수락할 뜻을 비추기 시작했고 동시에 미국도 종전방안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미국무부는 당시 프린스턴대 교수로 국무부 고문이던 조지 캐넌을 유엔 주재 소연대사 야코프 말리크와 만나도록 주선,두사람은 5월31일 롱아일랜드에 있는 말리크의 관저에서 만났다. 캐넌은 전전경계선을 유지하는 선에서 협상을 통해 한국전을 끝내고 싶다는 미국정부의 뜻을 밝혔고 소연정부는 이를 즉시 중국측에 전달했다. 이 메시지를 받은 모택동은 6월초 북경으로 김일성을 불러 대응방안을 협의했다. 양자는 전전영토보장과 한반도 주둔 외국군대의 점진적인 철수를 약속한 이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합의했다. 51년6월23일 말리크소대사는 공식적으로 휴전을 제의했고 중국이 이에 동의했다. 이어 7월10일 중국·북한대표와 유엔군측 대표가 개성에서 첫대좌를 했다. 하지만 정식으로 휴전협정조인이 이루어지기까지 다시 2년의 세월이 걸렸다. 중국이 무력승리 정책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많은 학자들은 중국의 한국전참전 배경을 설명하면서 유엔군이 압록강을 넘어 중국땅으로 진격해 들어올 것에 대한 안보적 불안감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필자는 모택동과 중국지도부가 갖고 있던 공산혁명 이데올로기가 보다 중요한 동기였음을 지적하고 싶다. 모는 한국전을 아시아공산혁명의 한 단계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모는 중국이 한국에서 미제국주의자들을 몰아내는 것을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국제적 의무」로 생각했다. 이러한 혁명논리가 동원될 때 비로소 모가 왜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이 감행되기 전부터 한국전참전준비를 했고,왜 그렇게 무모하게 뛰어들었는가가 보다 분명하게 해명된다. 한국전참전을 통해 중국은 군사전략과 외교면 등에서 몇가지 중요한 교훈을 얻게 된다. 첫째 현대전에서 무기·병참 등의 열세 속에서는 절대로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모가 원자탄 개발에 착수하게 된 것도 이와 관계가 있다.둘째 소연이 공군지원을 하겠다던 당초약속을 어긴 것은 그뒤로 모가 소연을 불신케 된 큰 요인으로 작용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국은 한국전에서의 패배로 그때까지 추구해온 아시아혁명전략을 전면 재조정하지 않을수 없게 됐다.
  • 80일만에 37도선돌파…병참선 재정비(비사 중국의 한국전개입:4)

    ◎북경자료 분석 통한 진겸 교수의 추적/보급난 간파한 유엔군,대대적 기습 반격전/“한강이남 포기… 휴전 모색” 건의에 모가 반대 대규모 공세가 시작되기 앞서 김일성은 12월초 비밀리에 북경으로 가 모택동을 만났다.두 사람은 이자리에서 중국·북한군 통합사령부를 창설키로 합의했고 팽덕회가 총사령관겸 정치장교로 임명됐다. 팽덕회는 공세작전의 성패는 병참에 달렸다고 판단,즉시 수송 및 보급망 개선에 주력했다.이와함께 중공당중앙군사위는 국공내전참전 용사 8만4천명을 추가동원하고 인민해방군 제19군단에 대해서도 51년3월까지 춘계대공세에 합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중공군의 3차공세는 50년12월31일 시작됐다.초기작전은 순조롭게 진행돼 이듬해 정월 2일까지 중·북한합동군은 유엔군 방어선을 15∼20㎞정도 밀고 내려갔다.중국지원군 38군과 조선인민군 1군은 서울과 인천을 향해 진격했고 중국군 42군은 인민군 제2,제5군의 지원을 받아 홍천,횡성으로 밀고들어갔다. 이들은 1월4일 서울을 함락하고 1월8일에는 37도선까지 밀고내려갔다.그쯤에서 팽덕회는 전황을 재평가하기 시작했다.보급선이 너무 길어져 중공군들이 엄청난 곤경을 겪고있었기 때문이다.팽은 유엔군이 비록 후퇴를 거듭하고 있지만 전력의 우위와 반격능력을 갖고 있다고 판단,공격작전을 중지하고 현위치를 사수하라는 명령을 전전선에 시달했다. 1월8일 중공군사령부는 「조정기 중 우리의 할일」이라는 지침을 각급부대에 하달,차기 공세에 대비할 것을 명령했다.팽은 공격중지로 유엔군이 반격할 여유를 얻게 될 것이라는 점을 알았지만 단시일내에 반격해오기는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모택동은 팽의 건의대로 공격중지를 허락했지만 미군에게 반격능력이 있다고는 보지 않았다.51년1월14일 모는 팽앞으로 보낸 전문에서 미군은 최악의 경우 부산·대구지역에서 대규모 저항을 할수도 있겠지만 결국은 한국에서 쫓겨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1월25일 중·북한군지도부는 춘계대공세를 위한 합동작전회의를 개최했다.같은날 유엔군은 김포,인천지역에서 대규모 반격작전에 나섰다.미8군사령관 월튼 워커장군이 불의의 자동차사고로 사망함에 따라 매튜 리지웨이장군이 대신 작전지휘를 맡았다.리지웨이장군은 중공군의 작전수행능력이 물자,전투장비의 보급난 때문에 1주일 단위로 제한돼 있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리지웨이장군은 유엔군이 화력·기동성·보급면에서 앞서기 때문에 최단시간내 공세로 국면전환이 가능하다고 보고 반격작전에 나섰다.갑작스런 반격에 당황한 중·북한 합동군사령부는 춘계공세계획을 일단 중지하고 유엔군 저지에 나섰다. 1월27일 팽덕회는 모택동에게 전문을 보내 미군의 작전목표가 『중국군을 한강 이북으로 밀어내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탄약,식량의 부족 때문에 3월말까지는 이들의 공격을 저지하기가 힘들다고 보고했다.이와함께 팽은 『정치적으로 가능하다면』한강 이남지역을 포기하고 적당한 시점에서 휴전을 생각해 보는 것이 좋겠다는 건의를 했다. 그러나 모는 1월28일 저녁 팽에게 전문을 보내 반격할 것을 명했다.모는 이 전문에서 ▲4차공세의 목표는 미군과 이승만정권을 몰아내고 대전과 안동 이북을 점령하는 것▲중국군이 보급에 어려움을 겪고 있으나 주공격을 원주·홍천방면에 집중시킬 경우 충분히 승산이 있고▲대전·안동이북을 차지하면 일단 2∼3개월 힘을 모은 뒤 마지막 5차공세로 전쟁을 끝낸다는 것을 재차 강조했다. 팽은 다음날 중·북한군 합동작전회의에서 모의 뜻을 전달하고 반격작전을 개시하기 위한 작전계획을 수립했다.전세로 보아 전면반격을 하기 힘든 상황이었기 때문에 동부전선에선 현위치를 고수하고 서부전선에서만 공세를 취하기로 결정이 내려졌다. 서부의 중국지원군 제50군과 38군예하 1백12사단은 현위치를 지키고 제39·40·42·66군은 횡성과 지평리에서 진격해오는 유엔군을 공격하도록 했다.동시에 북한인민군 제2군과 제5군은 평창에서 한국군 제7사단을 공격,남진활로를 뚫도록 했다. 전면공격을 요구한 모의 지시에 크게 미흡한 작전계획이었지만 팽은 사실 이 정도도 무리라고 생각했다.1월31일 팽은 모에게 전문을 보내 현시점에서 반격을 개시하기는 어렵다는 점을 강조했다.팽은 중국병사들이 식량·탄약·신발보급을 제대로 못받아 『눈길을 맨발로 걸어야 할』형편이라고 밝혔다.팽은 2월12일을 공격개시일로 잡았음을 알리고 이번 작전이 실패하면 한국전 전반에서 상황이 불리하게 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중공군의 반격은 2월 11일 횡성·원주지역에서 시작됐다.작전초기 한국군 제8사단을 상대로 잠시 승리를 거둔 중공군은 미제2사단의 우세한 탱크·포 화력앞에 많은 전사자를 내고 결국 지평리에서 공격을 멈추고 말았다.중·북한 합동군사령부는 37도선북쪽과 38도선 이남의 두곳에 방어선을 치고 둘 중 한곳에서만이라도 유엔군의 북상을 막아보려고 했다.그리고 팽덕회는 북경으로 가 3월말까지 머물며 모와 향후전략을 숙의했다. 팽의 보고를 받고 한국전에 대한 모의 생각은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모는 3월1일 스탈린에게 보낸 전문에서 1년안에 전쟁이 끝날 것이라는 당초의 생각을 바꿔 전쟁이 2년 정도 더 끌 것같다고 밝혔다. 모는 중국군이 심각한 병참문제에 시달리고 있고 단위부대 병력충원에 1개월 이상씩 걸린다고 말하고 『38도선 이북을 다시 적에게 내줄 가능성이높다』고 실토했다.이러한 난국을 벗어나기 위해 모는 마침내 전략상의 일대 수정을 가할 것을 결심했다. 그것은 바로 장기전에 대비,총병력을 3개조로 나눠 교대로 전선에 투입한다는 전략이었다.
  • 새 「남침계획자료」 발견

    ◎“서울 해방” 김일성 연설문 6월15일 인쇄/공보처,북의 「문화사업실시 통계부」 공개 6·25전쟁이 북한측의 철저한 사전준비에 의한 계획적 남침이었음을 입증하는 국내외자료가 새로 발견돼 관심을 모으고 있다. 공보처는 22일 6·25 41주년을 맞아 펴낸 「증언과 자료로 본 한국전쟁」이란 책자를 통해 올 들어 새로 발굴해낸 북한측의 남침을 입증할 수 있는 각종 자료들을 공개했다. 이 가운데 가장 관심을 끄는 자료는 조선인민군 249군부대 5대대 문화부에서 전쟁발발 당일인 50년 6월25일에 작성한 「문화사업실시통계부」로 6월28일에는 대대전원이 「김일성 수상의 력사적인 서울해방 축하방송연설」을 청취하고 6월30일에는 대대적인 「서울해방기념오락」을 개최하는 것으로 기록돼 있어 사전에 치밀하게 남침계획이 수립됐음을 보여주고 있다. 또 50년 6월30일자로 발행된 북한노동당 기관지 「근로자」의 권두에는 『매국 역도 이승만 괴뢰정부의 군대는 6월25일 38도선 이북지역에 대한 전면적 진공을 개시했다』는 김일성의 6월26일 방송연설이게재돼 있는데 「근로자」는 6월15일 인쇄된 것으로서 원고는 적어도 2∼3일 전에 작성됐다고 볼 때 6월25일 남침이 이미 6월초 이전에 결정됐음을 입증하고 있다. 특히 50년 6월에 소련작전고문단이 작성한 「공격을 위한 조선인민군정보계획」 중 목적 제3항에는 『우리의 남침에 대한 적군의 방어계획을 적시에 탐지하고…』라고 기록돼 있다.
  • 당시 중대장 이대용씨의 회고:상/「내가 겪은 6.25」

    ◎“적 대규모 남침”… 휴일 아침 전령이 보고/도서관 가다 귀대… 한여름 방한화 신고 출전/빗속의 춘천방어전서 적 자주포 5문 노획/첫날 동기생 8명 전사… “무비유환” 한탄하며 퇴각 6·25전쟁이 일어난지 41년 37개월 동안 계속되었던 동족상잔의 전쟁은 민족의 가슴에 지울 수 없는 깊은 상처를 남겼다. 국토는 아직도 두 동강이 나 있고 민족은 남북으로 갈라져 분단생활이 계속되고 있다. 국군 제7보병연대 1중대장으로 참전했던 이대용 예비역 준장(66·육사 7기·현 한국해음주식회사 사장)이 말하는 당시의 처절했던 전황을 몇차례 나누어 싣는다. 이 장군은 월남전 당시 주월 공사로 근무중 끝까지 대사관을 지키다 월맹에 의해 5년간 억류됐다가 우리 정부의 끈질긴 교섭으로 1980년 석방,귀국했다. 1950년 6월25일. 새벽 4시경 야음을 틈타 남침한 인민군의 총격으로 이내흥 중위는 춘천 북방 모진교 부근에서 전사했다. 이날 하룻동안 이 중위를 비롯,일선 중대장인 육사7기생 8명이 전사했고 다음날인 26일엔 10명이,27일엔 5명이 목숨을 잃어 불과 3일 동안에 23명의 장교가 적탄에 맞아 전사했고 약 70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렇게 시작된 육사7기생 전사자수는 한국전쟁 3년1개월 동안 모두 1백27명이나 됐고 행방불명자(적군의 포위 속에서 전사한 것으로 간주됨) 수는 19명,부상자는 약 4백명에 달했다. 이는 동기생 5백64명에 비해 적은 숫자가 아니었다. 한국전쟁이 일어난 그 날은 일요일이었고 아침부터 비가 내리고 있었다. 이때의 내 나이는 25살이었다. 직책은 육군 제7보병연대 제1중대장이었다. 그날은 휴일이어서 나는 춘천시 죽림동에 있는 하숙집에서 조반을 들고는 춘천도서관에 가서 책이나 읽을 참이었다. 카키색 군복 상하에,긴 고무장화를 신고 정모에 비닐 커버를 씌운 뒤 거울 보고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하숙집 대문을 나설 때 비가 내리기에 우비를 꺼내 입고 봉의산 기슭에 있는 도서관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어디선지 「쿠쿠쿵 쿠쿠쿠쿵」하는 포사격소리가 들리더니 「따따따」하는 기관총 사격소리가 잇따라 들려왔다. 일요일에도 가끔 사격훈련을 하는 부대가 있기에 나는 이를 무심히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려 보냈다. 그래서 나는 앙드레 모로아가 쓴 책 내용을 머리에 되새기며 가던 길을 재촉해 걸었다. 내가 춘천시내 공회당 앞까지 걸어갔을 때 맞은 편에서 철모에 전투복 차림의 한 군인이 내 쪽을 향하여 뛰어오고 있었다. 제1중대 전령 안기수 하사였다. 그는 거수경례를 하고는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인민군(북한공산군)이 38선을 넘어 남침했다』고 보고했다. 그는 나에게 『비상이 걸렸으니 속히 연대본부로 집합하라』는 제1대대장의 명령을 구두로 전달했다. 그때만 해도 우리나라 지방도시에선 전화를 걸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춘천시민들의 가정에는 전화기가 한대도 없었다. 심지어 38선에서 무력충돌이 일어나면 즉각 출동명령을 받고 부대 복귀를 해야 할 중대장들의 영외숙소에 조차도 군용전화가 한대도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태고시대의 통신이랄 수 있는 연락병에 의한 연락 방법에 의존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대대장급 이상이 돼야만 그 집에 군용전화기 한대가 가설되는 실정이었다. 따라서 중대장이나 소대장에게 연락을 하려면 많은 시간이 걸렸으며,특히 장병들이 고이 잠자고 있는 새벽,그리고 사병들 대부분이 외박을 나가 있는 휴일의 연락은 더욱 그만큼 더디게 마련이었다. 6월25일. 북한공산군 이청송 소장이 지휘하는 제2보병사단은 새벽 4시 조금전에 38선을 돌파,춘천을 향하여 남침을 감행했다. 이로부터 4시간반이 경과한 뒤에야 1중대장인 나에게 연락이 닿은 것이다. 이날은 특히 일요일이라 많은 사병들이 외박을 나갔으며,연대본부 영내에 남아있는 몇명 안 되는 사병들도 잠이나 실컷 자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러니 그들의 정신상태는 이완될대로 이완될 수밖에 없었다. 그 뿐만이 아니다. 비상연락을 받는 장교들마저도 과거에도 이와 비슷한 비상소집이 여러번 있었기 때문에 이번에도 또 맥빠지는 일이겠거니 하고 생각하는 일이 많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거의 매번 연대의 비상소집명령에 따라 집합해 출동하려 하면 38선 가까이에 있는 부대로부터 「북한공산군이 다시 38선을 넘어 북쪽으로 후퇴해 버렸다」는 연락이 오는 것이 통례였다. 그럴 때마다 비상소집된 장교들의 맥은 빠지게 마련이었다. 나는 이날도 또 싱겁게 끝나겠지 하는 생각을 갖고 연대본부로 향했다. 연대본부 영문 앞에 다다랐을 때,소양로 쪽에서 확성기를 단 군용스리쿼터 한대가 달려오면서 『외출이나 외박을 나온 사병들은 비상이 걸렸으니 속히 소속부대로 돌아가라』는 가두방송을 했다. 그때 『이번엔 심상치 않구나』 하는 생각이 내머리를 스쳤다. 급히 연대 정문으로 들어서서는 제1대대장 방으로 달려갔다. 나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늘 새벽 4시 조금전에 38선을 기습 돌파한 1개 사단 이상으로 추산되는 북한공산군 대병력이 38선 남쪽에 배치된 우리 제7중대와 제9중대를 격파하고 남진을 계속,현재 춘천 북방에 있는 옥산포에 육박하고 있으며,제9중대장은 이미 전사하고 내평방면에 있는 제7중대는 통신이 끊겼다』는 상황설명이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1대대장 김용배 소령은 이어 긴장된 목소리로 『얼마 안 있으면 우리 연대본부에도 북한공산군의 포탄이 쏟아질 것 같다』고설명했다. 나는 하숙방에 전투복 군화 철모 등을 두고 왔지만 이미 나에겐 그런 것들을 가지러 다시 하숙집까지 갔다올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중대 보급계 박 중사를 불러 중대보급창고에 가서 재고품 중에서 내 몸에 맞는 전투복과 철모와 군화 등을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그가 가져온 것 중에 다른 것들은 모두 내몸에 맞았으나 군화는 너무 작아서 신을 수가 없었다. 궁여지책으로 그가 다시 가지고 온 것은 겨울에 신는 방한화였다. 다행히 내 발에 맞아 한여름에 엄동설한용 방한화였지만 나는 어쩔 수 없이 신었다. 외박이나 외출을 나갔던 사병들이 속속 중대로 복귀하고 있었다. 황급히 출동준비를 하고 제1중대 인원을 점검하니 상오 9시20분 현재 40여 명이 미귀상태였다. 나는 중대 선임하사관에게 외박으로부터 돌아오는 사병들을 계속 전방으로 내보내라고 지시하고 중대병력을 지휘하여 춘천 북방에 있는 우두산 북단에 구축해 놓은 방어지지로 달렸다. 제1중대를 포함해 제1대대 병력이 우둔산 일대의 방어진지에 배치,완료된 것은 상오 11시경이었다. 정오가 좀 지나자 북한공산군의 선두부대는 자주포를 앞세우고 옥산포에 들어오고 있었다. 봉의산 뒤에 배치된 우리 사단초병은 아주 효과적으로 옥산포의 적을 두드리고 있었다. 그들은 좀 당황한듯 전진을 멈추고 잔뜩 웅크리고 있었다. 나의 제1중대 병력은 산발적으로 적과 교전했다. 어느새 어둠이 깔리더니 금방 날이 샌다. 6월26일 아침이 됐다. 내리던 비는 멎었다. 구름 속의 햇볕이 수라장의 싸움터를 비춰 주었다. 상오 8시경,제1대대는 우두산에서 일제히 뛰어내려 서쪽에 있는 옥산포로 달려들었다. 우리 사단포병은 정말로 절묘하고 무섭게 옥산포에 포탄을 퍼부어 우리 보병부대의 공격을 지원했다. 의외의 기습을 받은 옥산포의 북한공산군 자주포 부대와 보병부대는 북쪽으로 후퇴해버렸다. 우리 부대는 적군 자주포 5대를 노획했다. 이중 한대는 후퇴하는 북한공산군 스스로가 파괴한 것이고,다른 한대는 아군이 2.36인치 로켓포탄 위력을 시험해 보기 위해 가까운 거리에서 뒤쪽을 보고 사격,일부를 파괴시켰다. 그리고 나는 소제 권총한정을 노획하여 허리에 찼다. 옥산포는 지형이 평탄했다. 그래서 우세한 병력과 화력,기갑부대까지 있는 북한공산군을 저지하기 위해 오래 머물러 있을 곳은 못되었다. 약 2시간쯤 뒤에 북한공산군 대병력이 자주포 부대와 함께 옥산포로 밀려왔다. 우리 제1대대는 우두산 방어진지로 되돌아가야 했다. 다시 날이 저물자 제1대대 병력은 우두산 방어진지를 나와 소양강을 건너 봉의산 방어진지로 이동했다. 여기서 적을 저지하며 치열한 전투를 하다가 다음날인 6월27일 해질 무렵에,원창고개 방면으로 이동,원창고개에서 적과 교전했다. 6월28일 하오 4시경 결국 원창고개 방어진지를 떠나 홍천 북방에 있는 동산리로 향했다. 서울이 북한공산군 수중에 함락되고 인제 방면에서 홍천으로 진격중인 북한공산군 제7사단이 우리 제7연대의 후방을 차단할 위험이 있다고 본 상부의 명령에 따른 것이었다. 북한공산군의 1개 사단 병력은 약 1만1천명이며 그들 사단이 갖고 있는 1백22㎜ 곡사포의 최대사거리는 1만2천야드인 데 비해,우리측 사단의 1백5㎜ 곡사포는 최대사거리가 8천야드에 불과했다. 병력은 물론,화력이나 기동력·기갑력에 있어 적군은 아군보다 아주 월등하게 우세했다. 우리는 이를 사전에 모르고 대비를 하지 못했었다. 무비가 유환을 가져온 셈이었다. 어쨌거나 나의 6·25 첫 전투였던 춘천지구 방어전투는,우리들에게 상당한 피를 흘리게 한 뒤 끝나 버렸다. □약력 □1925.11 황해도 김천 생 □1948.11 육군사관학교 제7기 졸업 □1950.6 제7보병연대 제1중대장 □1951.10 제32보병연대 제3대대장 □1953.3 미 육군보병학교 졸업 □1960.12 미 육군참모대학 졸업 □1961.8 제23보병연대장 □1963.9 주월남 한국대사관 무관 □1968.1 육군 준장 진급 □1968.1 주월남 한국대사관 공사 □1975.4 월남 공산정부에 의해 억류 □1980.4 석방 귀국 □현재 한국해음주식회사 대표이사 회장
  • “탈고립”… 평양의 「워싱턴승부수」/잇단 유화제스처…양국관계 전망

    ◎“큰 매듭 풀려야 대일수교 실현” 인식/핵사찰 수락·유해 송환… 돌파구 마련 안간힘/미선 남북대화 진전과 연계… 본격 협상 회피 북한의 대미 접근공세가 가열되고 있다. 북한은 20일 리처드 스틸웰 전 유엔군 사령관이 이끄는 미국의 고위민간 군사사절단의 평양방문을 받아들이는 데 이어 24일엔 판문점에서 정전 이후 두 번째로 미군유해 11구를 송환할 예정이다. 북한의 외교통인 한시해는 지금 미국을 누비며 평양이 위험한 존재가 아니라는 인식을 확산시키기 위한 접촉과 대화에 여념이 없다. 그는 특히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의 평양방문을 초청,주목을 끌었다. 이 밖에도 2,3건의 미국 학자 초청이 평양에 의해 추진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북한이 밝힌 유엔가입 결정이나 IAEA(국제원자력기구) 핵안전협정 체결방침도 따지고 보면 대미 관계개선을 겨냥한 측면이 강하다는 점에서 북한의 이 같은 대미 공세와 맥락을 같이하는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북한이 이번에 미군 유해 11구를 판문점을 통해 송환키로 한 것은 한마디로말해 북한측의 후퇴다. 지난해 5월 미군 유해 5구를 휴전협정 후 최초로 미국에 인도한 북한은 이해 9월 제12차 미·북한 북경접촉에서 두 번째 유해송환 용의를 표명하다 이를 대미접촉 다각화의 미끼로 삼기 위해 정부간 협상을 제의하는 한편,미 정치인들로 구성된 유해인수단을 평양에 파견해 줄 것을 요청했다. 미국은 북한이 인도적 문제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든다고 비난하며 유해소환은 판문점의 군사정전위를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북한의 유엔주재 차석대사 허종은 지난 2월 뉴욕에서 미 상원 원호위 소속 로버트 스미스 의원과 접촉,유해 인수를 위한 그의 방북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결국 1차 송환 때처럼 미측이 주장한 절차를 따른 것이 북한의 이번 미군 유해 송환이다. 1976년 북한의 도끼만행 사건 당시 한국에서 유엔군 사령관을 지낸 스틸웰 장군은 이번 평양 방문에 앞서 북한측에 대해 고위 군사지도자 면담과 군사문제의 협의를 요구했다. 그는 특히 면담 희망대상자로 오진우 인민무력부장 최광 인민군 총참모장 등을 거명하면서 이들과의 면담이 보장되지 않을 경우 방북하지 않겠다고 버틴 것으로 알려졌다. 스틸웰 장군이 18일 평양으로 향발한 것은 그의 주장이 관철됐음을 뜻하는 것이라고 한 소식통은 전했다. 워싱턴의 한반도문제 전문가들은 『북한이 미국과 무언가 대화를 트려고 노력하는 것 같다』고 분석하고 있다. 북한은 그 동안 일본과의 수교협상을 통해 무엇보다도 대미관계의 선결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통절하게 느꼈을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했다. 왜냐하면 일본이 북한에 대해 내세우고 있는 수교의 전제조건이란 미국의 주장을 사실상 되풀이한 것이나 다름 없기 때문이다. 북한은 워싱턴을 상대로 「큰 매듭」을 먼저 풀지 않고서는 일본과의 수교나 서구제국과의 관계개선을 원만하게 진행시키기 어렵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 같다. 북한이 미·북한 관계개선의 선행조건으로 워싱턴이 가장 중시해온 국제 핵사찰 수용을 천명하고 북한 이미지를 개선하기 위한 대미교류에 적극성을 나타내고 있는 것은 바로 「큰 매듭」을 풀려는 노력의 일환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했다. 이런 점에서 북한의 핵사찰 수용은 교착상태에 빠져 있는 미·북한 관계의 급속한 진전 가능성을 뜻할 수 있다. 미·북한 관계는 오는 9월이 국면 전환의 중요한 고비가 될 것으로 보인다. 최근 IAEA이사회에서 북한은 9월까지 핵안전협정에 서명하겠다고 공언했다. 또 9월엔 남북한의 역사적인 유엔 동시가입이 실현될 예정이다. 이때 북한은 연형묵 총리를 유엔에 보내 대미 평화공세를 펼 가능성이 크다. 이런 일들이 가시화되면 그땐 워싱턴이 지금까지 공언한 대로 평양에 「화답」할 차례다. 워싱턴의 화답으로는 우선 ▲북한에 대한 통신개방을 비롯해 ▲무역규제 완화 ▲미·북한 접촉수준 격상과 접촉장소 확대 ▲고위 인사교류 허용 등을 예상할 수 있다. 그러나 미·북한간 수교협상의 개시나 대표부 교환 같은 조치는 아직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 많은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다. 일부 전문가들은 미국이 평양의 후속조치까지 지켜본 뒤 화답을 보낼 것이라고 전망했다. 예컨대,핵문제만 하더라도 미국은 북한의 IAEA 안전협정 서명만으로는 미흡하다고 보고 있기 때문에 북한내 협정발효 조치의 완료와 핵무기 개발포기에 대한 확인 절차까지 마친 뒤 관계개선 조치를 취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워싱턴은 북한의 남북대화 호응 여부와 유엔가입 후 북한이 취할 태도도 중요한 척도로 간주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앞으로 나타날 평양의 정책이 서울과 워싱턴에 대해 과거처럼 적대적이냐,아니면 현실 인정 쪽이냐에 따라 관계개선의 폭과 강도가 좌우될 공산이 크다는 분석이다. 워싱턴이 평양과의 관계개선에서 가장 크게 고려할 요소의 하나는 서울의 반응과 입장이다. 미국은 미·북한 협상이 한국을 훼손시켜서는 안 되며,남북대화가 획기적 성과를 거두기 이전엔 북한과 본격 협상을 하지 않겠다는 정책을 견지하고 있다. 작년 6월 한미정상회담 때 조지 부시 미 대통령은 노태우 대통령에게 미·북한 관계개선에 대한 한국정부의 견해를 물었다. 이 질문은 오는 7월2일의 한미정상회담에서도 되풀이될 것이다. 워싱턴이 정치적 경제적으로 별 실익이 없는 평양과의 관계개선 문제를 위해 맹방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드는 것은 피하고 싶은 일이기 때문이다.
  • “김일성,소와 한달간 6·25남침 계획”

    ◎전 북한군 작전국장 유성철 증언/대독 전쟁경험 풍부한 소 장성들 고문단에 참여/“서울 전격 점령하면 상황 끝”… 예비병력 안갖춰 북한의 김일성은 지난 50년 3월 모스크바를 비밀리에 방문,스탈린으로부터 남침에 대한 동의를 받아낸 후 약 한달간의 구체적인 작전계획작성에 들어갔으며 이 작업에 전쟁경험이 풍부한 소련 장군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밝혀졌다. 전쟁 전후 북한군 작전국장이었던 유성철씨는 지난 5일까지 재소 교민신문 고려일보에 연재한 자신의 회상록 「피바다의 비화」에서 김일성의 소련 방문 직후 민족보위성 작전국의 한 방에서 약 1개월간 극비리에 작전계획이 작성됐으며 소련군의 많은 군사전문가들이 이 작업에 적극 참여했다고 증언했다. 한편 전쟁 발발 직전까지 모두 3천여 명의 공작대를 남파시킨 전 강동학원 원장 박병률씨(86)는 16일 유씨의 6·25증언이 가장 정확한 진실이라고 확인했다. 다음은 6·25전쟁에 관한 유씨 회상록의 요약이다. 『6·25 전쟁 작전계획은 민족보위성 작전국의 한 방에서 약 1개월에걸쳐 극비밀리에 진행됐다. 이 작전계획에는 총참모장 강건,포병사령관 김봉률,포병참모장 정학준,공병국장 박길남,동신국장 이용인,공군사령관 한일무,해군 참모장 김원무,병기국장 서용선,후방국장 정목,정찰국장 최원,작전국장 유성철(필자),작전부국장 유상렬 등이 참여했다. 소련 고문단에서는 바실리예프 중장,포스트니코프 소장 및 기타 장군들과 영관급이 작전계획 작성에 주동 역할을 했다. 이 작전계획 작성을 위해 독소전쟁 등 경험이 풍부한 소련 고문단이 필요했기 때문에 바실리예프 중장 등이 구 고문단과 신속히 교체된 것이다. 작전계획의 실천을 앞두고 비밀을 보장할 목적으로 훈련형식을 취하면서 병력을 38선에 집결시켰다. 집결이 완료된 후 기동연습에 관한 명령서를 무전으로 공개적으로 전파했는데 국방군 참모본부는 아마도 이 같은 북의 기만에 떨어졌으리라고 믿어진다. 이 작전계획의 기본 약점은 미국이 손쓸 사이없이 불의의 공격으로 서울을 점령하면 전쟁이 끝날 것으로 예상하고 예비 병력을 준비하지 않은 데 있다. 또한 서울함락 후 박헌영의 지도하에 있는 남로당원 10만명이 무장봉기를 일으키고 지리산 후격대들이 후방에서 세찬 공격작전을 펼 것을 기초로 해 작성된 것이다. 서울은 전쟁개시 3일 만에 함락됐으나 기대했던 인민봉기는 일어나지 않았으며 지리산 유격대의 활동도 없었다. 인민군은 한 달 동안에 남한의 90%를 점령하고 남한인구의 92%를 장악했으나 미군을 위시한 유엔군의 참전으로 후퇴를 거듭하게 됐다. 전황이 극도로 불리해지자 김일성의 지시로 박헌영과 함께 북경을 방문,원조를 요청하게 됐다. 우리 일행을 접견한 모택동은 조선에 지원군을 파견키로 결정했음을 알리고 팽덕희 장군이 전선을 지휘하고 후방은 중국 동북정부 주석 고강이 책임지게 됐다는 것과 이들 두 동지가 손을 잡으면 조선문제는 해결될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모는 최종발언에서 전쟁은 지금처럼 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고 다섯 손가락을 앞으로 펼쳐 보이면서 미군과 괴뢰군(국군을 지칭)을 각각 분리하여 격멸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모는 이때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한 다리를미군이라고 가정하고 다른 다리를 괴뢰군이라고 하자. 먼저 괴뢰군을 포위 섬멸하고 다음에 미군을 포위 섬멸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 미군이 맥을 추지 못할 것』이라면서 한 다리를 들고 다른 다리로 툭툭 뛰면서 설명했다. 모의 이러한 말에는 김일성을 지칭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직감적으로 모가 김을 비판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50년 10월19일 저녁 8시쯤 중국 지원군이 압록강을 건너 여러 지점을 통과,조선 전쟁에 참전하기 시작했다. 피아간에 일진일퇴를 거듭한 끝에 어느 쪽에서도 승리자도 패배자도 없이 전쟁은 끝이 나 1953년 7월27일 비로소 남북 인민들이 그처럼 고대하던 휴전을 맞게 됐다. 전쟁이 끝난 후 김일성은 악명높은 소위 「사상검토」를 통해 민간인을 휩쓸고 뒤어어 군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작업에 착수했다. 나중에 알려진 사실이지만 김일성에게는 세 가지 「흑색」 명단이 작성되어 있었다. 첫 명단에 든 사람은 죽어도 좋다는 부류였고 제2명단에는 무기징역을 받을 사람들이 들어 있었으며 제3 명단에는 소련으로 가기를 원하면 보내도 좋다는 사람들이 포함돼 있었는데 필자는 제3명단에 들어 있어서 소련으로 나올 수 있었다. 김일성은 6·25전쟁에 참가한 장군들 중 남일·이권무·김창봉·김광협 대장,무정 중장 등 모두 44명을 처형하거나 숙청했으며 이 가운데 필자를 비롯한 이상조·강상호 중장 등 16명의 장군이 탄압을 받고 소련을 위시한 외국으로 망명했다』
  • 한국전에 소 지상군도 투입/전 북한 외교부부부장 첫 확인

    ◎“2개 포병연대 파병,야전병원도 지원” 소련은 한국전 당시 후퇴를 거듭하던 북한군을 지원하기 위해 2개 포병연대와 대규모 야전병원을 파병했었다고 북한의 전 고위관리가 13일 밝혔다. 박길용 전 북한 외교부 부부장(71·소련과학아카데미 동방학연구소 선임연구원·모스크바 거주)은 북한군이 유엔군과 국군에 밀리기 시작한 50년 10월께 미군기의 폭격을 받고 있던 수풍댐 보호를 위해 소련은 압록강 건너편에 1개 포병연대(약 4백명)를 긴급배치한 데 이어 유엔군이 밀리자 청천강다리 근처에 1개 포병연대를 배치했으며 평양근교 산속에 위치한 북한인민군 최고사령부 주위에 또다른 1개 고사포연대를 배치했다고 말했다. 소련군의 포병이 북한에 실전투입된 사실이 확인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박씨는 당시 소련포병이 모두 중국지원군 복장으로 위장했으며 주로 미군기의 폭격에 응전하는 임무를 맡았는데 포로가 될 것을 우려,후방에 주둔했었다고 밝혔다. 또한 소련의 미그15공군기들이 신의주에서 압록강 건너편 안동(지금의 단동),장춘,심양 등3곳에서 발진,북한상공에서 미군기와 치열한 공중전을 벌였는데 역시 중국지원군 복장을 한 이들 소련 조종사는 평양에서 이남으로 넘지 말 것과 비행중 절대 대화하지 말도록 하는 엄중한 명령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는 조종사가 포로가 되거나 무심코 러시아어로 교신한 것이 미군에 감청될 경우 소련의 참전이 국제여론화할 것을 우려한 때문이었다. 박씨는 소련 조종사들이 참전초기 많이 희생됐으며 이들의 묘지가 하얼빈과 장춘에 있다고 말했다. 소련은 이밖에 평양 동북방 1백㎞ 지점 양덕부근에 군의관과 간호원 등 1백여 명으로 구성된 대규모 야전병원도 설치,운영했는데 한번에 8백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는 시설이어서 전쟁기간중 북한의 가장 중요한 야전병원 역할을 했다고 한다. 소련군의 의무지원 외에도 헝가리,폴란드,불가리아 역시 소규모 야전병원을 차렸다. 박씨는 북한이 신의주 쪽으로 밀리게 됐을 때 소련은 미군이 압록강을 건널 것에 대비,5개 기갑사단을 배치했으며 원동과 시베리아 일대의 군에 대해서도 비상동원령을 내렸다고 말했다.
  • 비,북한과 수교 검토/북한선 비 반군 지원중단 약속

    ◎아키노,북 김달현 부총리 접견 【마닐라 AFP 로이터 연합】 코라손아키노 필리핀 대통령은 11일 김달현 부총리 겸 대외경제위원장을 단장으로 하는 북한사절단을 접견했다고 국회 외교위원회의 호세 데 베네치아 위원장이 밝혔다. 베네치아 위원장은 6명의 북한 사절단이 양국관계 사상 최초로 필리핀 대통령궁을 방문했으며 이 자리에서 김달현은 북한이 필리핀 신인민군(NPA)을 지원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고 전했다. 북한사절단 일행은 13일 라울 망글라푸스 외무장관을 방문하고 양국의 관계정상화 문제를 타진할 예정으로 있으며 페테르 가루초 상공장관과도 교역문제를 논의할 예정이라고 베네치아 위원장은 밝혔다. 베네치아 위원장은 필리핀의 이같은 대북한 관계가 한국정부와의 관계에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한편 망글라푸스 필리핀 외무장관은 이날 기자회견을 통해 『필리핀은 북한과의 외교관계 수립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고 밝혔다.
  • 연형묵총리 당서열 4위로/이종옥·박성철부주석 제쳐

    북한의 연형묵 정무원총리가 최근 서열 6위에서 김일성 김정일 부자와 오진우 인민무력부장 다음인 4위로 부상한 것으로 알려졌다. 3일 정부소식통에 따르면 연 총리는 지난해 5월 최고인민회의 제9기 1차회의에서는 주석단 호명순서에 따른 서열이 이종옥·박성철 부주석 다음인 6이였으나 지난 4월24일 인민군 창건 59주년 기념식에서는 김 부자와 오진우 다음인 4번째로 호명됐다는 것이다. 연 총리는 이후 김일성 부자의 현지지도 수행원 명단이나 지난달 허담의 장례위원명단에서도 4위로 불려져 이종옥·박성철 등 부주석들을 제치고 당서열 4위의 자리를 굳힌 것으로 보인다고 이 소식통은 전했다. 또한 지난해 당서열 12위였던 전병호가 10위로 부상한 대신 10위였던 한성룡은 11위로,17위였던 김철만은 18위로 각각 밀려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4월 이후의 당서열은 다음과 같다. ▲91년 4월24일 이후=(정치국원) 1.김일성 2.김정일 3.오진우 4.연형묵 5.이종옥 6.박성철 7.김영남 8.최광 9.계응태 10.전병호 11.한성룡 12강성산 13.서윤석(정치국 후보위원) 14.현무광 15.계응태 16.최영림 17.홍성남 18.김철만 19.김복신 20.강희원 21.조세웅 22.홍시학 23.이선실
  • 유고,다시 긴장 고조/시위대 1명 장갑차에 숨져

    【베오그라드 AP UPI 연합】 공산당이 이끌고 있는 유고슬라비아 인민군(연방군) 소속 장갑차가 24일 분리독립을 추구하고 있는 슬로베니아공화국에서 반군부 시위가담자 1명을 깔아뭉개 숨지게 함으로써 연방군과 슬로베니아인들 사이에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다. 이 시위 가담자는 이날 연방군이 슬로베니아 북부 마리보시에서 슬로베니아 방위군 소속 지휘관 1명을 포함,군인 4명을 체포한 뒤 곧 석방한 사건에 대해 항의하기 위해 한 연방군 막사 앞에서 시위를 벌이던 도중 숨졌다.
  • 한반도전쟁 위험 상존/인민군 부사령관 경고

    【도쿄 AFP 연합】 북한 인민군의 전재선 부사령관은 16일 한국과 미국 군지도자들의 최근 발언을 비난하면서 한반도에는 전쟁 발발가능성이 상존하고 있다고 경고한 것으로 중앙통신이 보도했다. 전재선은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할 수 있는 매우 심각한 상황들이 현재 전개되고 있다』고 지적하고 『이 같은 상황은 미 제국주의자들과 남한의 괴뢰들이 도발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 「권력세습」 기정사실화 속셈/김정일,왜 비밀리에 중국 가나

    ◎국제고립 탈피 노린 외교조정 행보/대일 수교회담·유엔정책 협조 모색 북한 김일성 주석의 후계자인 김정일 노동당비서의 돌연한 중국방문은 내정면에서 뿐만 아니라 외교면에서도 김정일의 세습체제를 굳히기 위한 것이라고 일본의 전문가들은 분석하고 있다. 일본의 전문가들은 그가 특히 이 시기에 국제외교무대에 데뷔하는 이유를 이렇게 진단한다. 첫째,3일은 소련의 베스메르트니흐 외무장관이 중국을 방문하고 귀국한 직후가 된다. 따라서 한국의 유엔단독가입에 이해를 보이고 있는 소련의 뱃심과 이에 대한 중국의 반응을 살펴 북한의 외교전략을 재정비할 수 있다. 둘째,난항인 일본·북한간의 국교정상화 교섭과 관련,5일부터 중국을 방문할 예정인 나카야마 다로(중산태랑) 일본 외상에 대해 중국측에서 「압력」을 넣도록 작용하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북한이 특히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유엔가입문제에 대한 소련과 중국의 자세이다. 올 가을 유엔총회에서 한국이 단독가입을 신청할 경우,중국이 거부권을 행사할 것인지의 여부가 초점이되고 있으며 이때 소련이 중국에 대해 거부권행사가 아닌 기권을 종용하는 것이 아닌가를 경계하고 있다. 유엔가입문제는 북한이 당면하고 있는 최대의 외교적 난관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 북한은 김정일 당비서를 외교면의 뉴 리더로 내세워 국제적 고립탈피를 위한 「신외교」를 모색하려는 것으로 도쿄의 전문가들은 분석하고 있다. 더욱이 오는 29일부터는 평양에서 국제의회연맹(IPU) 총회가 개최되기 때문에 김 당비서의 중국방문은 이와 관련해 국제사회에의 복귀를 위한 「지침」을 받으려는 것이 틀림없는 것으로 보고 있다. 한편 일·북한 국교정상화 교섭에서도 그의 의향이 보다 강력히 반영될 것으로 전문가들은 예상한다. 그것은 교섭의 실질적 책임자인 조선노동당 국제부장 김용순 비서가 김정일의 직계라는 점에서 이다. 김정일은 이 교섭을 개시하는 데 있어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김정일 당비서의 외교적 데뷔는 북한의 내부정세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국제적 고립과 석유 등 에너지자원의 결핍으로 경제위기가 심각화하고 있다. 게다가 3년 연속 흉년으로 극심한 식량난을 겪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처럼 악화일로를 걷고 있는 생활사정은 일반 민중뿐만 아니라 권력층 일부에 있어서조차 김정일 당비서의 지도력을 의문시하게 하는 요인으로 발전하고 있다. 따라서 최근 북한내부에서는 느닷없는 김정일 예찬캠페인이 벌어지고 있다. 「군사의 영재」 「인민의 생활향상에 아무것도 부족함이 없는 친애하는 지도자」 등의 찬사를 구사한다. 최근의 평양방송은 수도권 건설계획에 따른 주택관련공장 조업식 뉴스를 이렇게 전달했다. 『친애하는 지도자동지(김정일)는 「당과 국가의 사업전반」에 신경을 쓰는 분주한 가운데도 몸소 공장건설문제에 무엇보다도 이해를 보여 제기된 설비·자재문제를 모두 해결했다』는 보도이다. 78세라는 고령의 김일성 주석을 대신하여 김정일 당비서가 실무면에서의 최고 책임자로서 이미 수년 전부터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은 비공식적으로 전해지고 있었으나 권력의 장악상황을 이처럼 솔직히 표현한 것은 이례적인일로 일본에서는 보고 있다. 한편 조선 중앙방송은 지난달 20일 『노동자계급의 당이 자신의 계급적 성격을 고수하지 못한다면 당내에 반당분자가 끼어들어 결국 당은 그들의 농락물로 전락하지 않을 수 없다』고 경고하고 있다. 또 조선인민군 525부대의 충성을 서약하는 글 가운데서는 『오늘날 현대수정주의자들이 「영수」(김일성 주석)의 지위와 당의 지도적 역할을 부인,책동하고 있는 현 정세하에서 우리는 오로지 「친애하는 지도자동지」(김정일)만을 믿고 있다』는 구절이 있다. 이 같은 표현은 북한내부에서 김일성·김정일 부자에 대한 반대세력이 대두되고 있다는 사실을 엿보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최근의 김정일 예찬운동의 전개를 이러한 반김 부자세력의 움직임에 제동을 걸기 위한 것이 아닌가고 분석한다. 그러나 관계전문가들은 내년 상반기로 예측되는 국가권력 이양을 앞두고 국내적으로는 권력기반을 굳혀 세습반대세력의 대두를 미연에 방지하고 대외적으로는 활동무대를 넓힘으로써 세습체제를 기정사실화하려는 속셈인 것으로 풀이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당기관지 등에서 언급하고 있는 「반당운운」은 과거의 일,또는 국외의 움직임에 관해서 일 것이다. 그것을 강조함에 의해 국내적으로 사상적 단속을 강화하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풀이다. 그 이유로서 전문가들은 『반당조직이 적발되었다면 어떤 반응이 있을 법한데 그런 움직임은 없다. 적어도 권력층안의 좌천 등 변화의 조짐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들고 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이뤄지는 김정일의 중국방문은 내부단속을 끝낸 상태에서의 「국제무대진출」인 것으로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김은 80년대초 김일성의 후계자로 지목되어 국내지도를 담당했으며 83년 그 인사를 위해 중국을 방문,등소평 중앙군사위 주석 등과 회담한 바 있다.
  • 6·25때 송신소 지키다 납북/아들이 국가에 9조 손배소(조약돌)

    ○…6·25 당시 한국방송공사(KBS)의 전신인 서울중앙방송국송신과장이었던 김도현씨(당시 38세)의 맏아들 김 모씨(49·전북 장흥군 장흥읍)가 『부친이 서울을 사수하라는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방송국에 남아 있다가 북한 인민군에 의해 납북돼 아직까지 생사를 확인할 수 없다』며 국가를 상대로 9조99억원의 손해배상 및 위자료를 지급하라는 소송을 서울고법에 냈다. 김씨는 소장에게 『50년 당시 중앙방송국 송신과장으로 재직하던 부친이 전쟁이 나자 서울을 사수하라는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직원들을 부산으로 모두 피신시킨 뒤 혼자 남아 연희송신소를 사수하다 북한 인민군에 의해 간첩 혐의 등을 받고 납북됐다』고 주장했다. 김씨가 이날 우편으로 접수한 소장은 소가가 거의 10조원에 가까운 천문학적인 금액인 데다 김씨가 소장에 첨부해야 할 인지대금이 4백50여 억 원이나 돼 정상적인 소송절차는 밟지 못할 것으로 법원관계자들은 전망.
  • 바 기구 군사조직 해체/소­동구동맹 36년 만에 막 내려

    【모스크바·빈 AP AFP 연합】 바르샤바조약기구의 연합군 사령부가 31일을 기해 공식해체,지난 36년간 소련과 동구진영을 묶어온 정치·군사동맹체인 이 기구가 4월1일부터는 정치기구로서만 잔존케 되는 한편 동구권 지역안보체제가 2차대전 이래 최초로 공백상태에 들어갔다. 소련관영 타스통신은 31일 바르샤바조약기구 연합군 총사령관 피요트르 루셰프 장군과 블라디미르 로보프 합참의장 등이 이 날자로 그들의 권한을 잃게 되며 이로써 바르샤바조약기구의 군사조직 해체가 완료된다고 보도했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대응키 위해 지난 55년 창설된 바르샤바조약기구의 군사조직 해체는 올해초 부다페스트에서 체결된 소련과 동구제국간의 협약에 따른 것으로 4월1일부터는 이 기구의 군사적 기능은 공식종료되며 정치동맹체로만 기능하게 된다. 이에 앞서 모스크바에 파견됐던 불가리아 인민군 페니우 코스타디노프 소장이 동구권에서 파견됐던 군관계자로서는 마지막으로 귀국했다.
  • 외언내언

    김일성의 공식직함은 국가주석·노동당총비서·인민군총사령관·국방위원회 위원장 등등. 그러나 북한사회에서 널리 쓰이는 일반인 호칭은 「어버이 수령님」이다. 그의 호칭에 「어버이」를 앞세운 것은 동양사회의 전통윤리인 유교의 효사상을 정략적으로 이용한 것. 부모에 대한 우리민족의 지극한 효심을 도용한 셈인데 이 호칭이야 말로 김일성우상화의 핵심. 학술논문에서도 그 첫머리는 반드시 「어버이 수령님께서는 이렇게 교시 하시었다」로 시작된다. ◆김일성우상화 놀음을 다시 들추어낸다는 것이 몹시 민망스럽기는 하지만 몇가지만 예를 들어보자. 이른바 그의 항일투쟁업적을 기리기 위한 혁명사적지는 백두산밀영을 비롯,22개소. 엄청난 규모의 전신동상은 70여개,얼굴석고상은 5만개가 넘는다. 초상화나 사진은 학교·기업소·식당·병원 등은 물론이고 각 가정의 방마다 어김없이 모셔져 있다. 김일성배지는 한사람만 빼고는 모두 달아야 하고. ◆평양혁명 박물관앞에 세워진 김일성동상은 높이 20m로 세계최고 최대의 동상. 38㎏의 황금가루가 입혀져 있다. 이밖에도 주체사상탑·만경대 성지·김일성화·구호나무 등등이 우상화의 도구들. 북한전역이 김일성의 개인박물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와 그의 가계를 우상화하기 위해 엄연한 역사적 현실을 왜곡·날조·변조해 놓은 황당한 짓은 늘어놓기 조차 쑥스러울 정도. ◆그런데 김일성이 자신의 동상을 그만 세우라고 지시했다는 희한한 뉴스가 날아들었다. 외신에 따르면 그의 충직한 동무들이 「어버이 수령님」의 80번째 생일(92년 4월15일)을 기리기 위해 어마어마한 규모의 동상을 새로 만들어 진상하려고 했는데 이를 막았다는 것. ◆나이도 나인만큼 늦게나마 철이 든것일까. 아니면 체면 치레를 위해서 한번 해본 소리일까. 그도 아니면 북한의 경제위기를 고려한 정치적인 배려 때문일까. 어쨌든 반가운 소식. 자신의 동상을 그만 세우라고 지시하는데 그칠것이 아니라 이미 세워진 동상을 하나씩 없애라고 명령하는 것은 어떨까. 언감생심이겠지만 기대나 해보자.
  • 북한,대남 군사전략 대폭 수정

    ◎걸프전서 소 무기체계 무너져 실망/공습대비,정규군 후방에 분산배치/영 파이낸셜 타임스지에 보도 【브뤼셀 연합】 북한은 현재 미국이 이끄는 다국적군의 일방적인 걸프전 승리에 뒤이어 그들의 대남군사 전략을 재검토,특히 휴전선 부근 일대에 집중 배치되어 있는 그들 군대의 일부를 보다 북쪽의 후방으로 철수,분산재배치할 것으로 평양과 북경주재 서방 및 아시아 외교관들이 내다보고 있다고 영국 일간 파이낸셜 타임스지가 13일 보도했다. 이 신문은 이날 최근 평양을 방문한 동지 기자의 「걸프전 결과 뒤흔들리고 있는 북한측 사고」제하의 기사에서 북경주재 한 외교관의 말을 인용,걸프전은 평양지도층에 「불쾌한」 충격을 던져 줬으며 이라크가 사용한 것과 유사한 중무기에 의존하고 있는 북한 인민군은 현재 그들이 이미 한국군과 주한미군에 맞서 계획해 놓았던 유형의 전쟁은 이제 선택의 대상에서 제외된 것으로 결론을 내리고 있는지 모른다고 전했다. 신문은 또 이들 외교관은 휴전선 부근 일대에의 북한인민군의 대거 집중배치는 북한 인민군으로 하여금 다국적군이 이라크와 쿠웨이트에서 가한 것과 같은 대규모 공습전략에 취약하게 만들 것이라고 지적,이것이 북한 김일성으로 하여금 전방배치 북한 인민군의 일부를 보다 북쪽으로 재배치하는 문제를 고려하도록 부추기게 될 것으로 보인다고 전망했다. 신문은 심지어 북한 인민군의 재배치가 이뤄지지 않더라도 한반도 정세가 걸프전 결과로 이득을 보게될 것으로 군사방위문제 분석가들은 전망하고 있다면서 「걸프전이 가져온 최대의 배당금」은 이라크군의 쿠웨이트 침공,합병과 같은 침략이 앞으로 국제사회에 의해 허용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의 과시라고 강조했다. 신문은 이어 북경주재 한 아시아 외교관의 말을 인용,걸프전 결과 한국 등 아시아지역 주둔 미군의 위치가 강화될 것이며 『아시아인들은 미군의 베트남전 패배로 미국을 종이 호랑이로 간주해왔으나 걸프전이 이같은 시각을 완전 뒤바꾸어 놓았다』면서 평양은 걸프전중 소제무기류가 보인 성능에 대해 우려하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 시아파­쿠르드반군,공동전선 합의

    ◎후세인 축출뒤 연립정부 구성키로/“반정소요 이라크전역 확산”/시리아지/정부군 5만 투항… 카르발라시서 격전 【베이루트 로이터 AFP 연합 특약】 이라크의 반후세인단체 합동회의가 11일 베이루트의 브리스톨호텔에서 3일간의 일정으로 개막됐다. 이 회의에 참석한 23개 단체 3백25명의 대표들은 후세인 정권을 전복시킨 뒤의 내각구성 문제 등을 포함,광범위한 문제들을 협의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쿠르드민족연합(NKU)의 잘랄 탈라바니 의장은 11일 로이터통신과의 회견을 통해 『우리들은 후세인을 축출한 뒤 모든 재야단체가 내각에 참여하는 문제에 대해 합의했다』고 밝혔다. 이들은 이라크내의 반후세인 운동에 대한 협력문제에 대해 합의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공산당의 한 지도자는 『이날 회의의 목적은 이라크반군 지원과 야당들의 협력문제에 초점을 두었다』고 밝혔다. 망명정부 구성에 대해서는 아직 「시기상조」라는 의견이 많았던 것으로 소식통들은 말했다. 【니코시아 AP 연합】 후세인 정권에 반기를 든 이라크의 시아파 이슬람교도 반군들은 11일 그들의 성도 카르발라시에서 정부군과 치열한 교전이 있었으며 이 과정에서 공화국 수비대 탱크들의 포격으로 5백여명이 숨지거나 부상했다고 주장했다. 또 이라크 북부 산악지역에서 정부군에 맞서 싸우고 있는 이라크내 쿠르드족 게릴라들도 지난 10일 동안의 전투로 보다 많은 지역을 장악했으며 이곳의 유전도시 키르쿠크시가 곧 그들의 수중에 떨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시리아에 있는 17개 반정부 단체들 가운데 하나인 시아파 이슬람교 노동당의 한 관계자는 지난 24시간 동안 2개의 이라크 정부군 여단이 「인민봉기」에 합세했다고 말했으며 다른 소식통들은 2명의 정부군 장성이 병력을 이끌고 이탈했다고 주장했다. 쿠르드족 반정부 단체인 쿠르디스탄 애국전선(PUK)도 또다른 무장활동 단체 인쿠르드 민주당과 하나의 세력으로 『모든 쿠르드족 분파의 우산인 이라크 쿠르디전선의 깃발아래 싸울 것』을 다짐한 것으로 알려졌다. PUK의 고위 관리인 바람 살레는 동북부 지역의 『하조마란에서 할리판에 이르는 여러지역에서 최고 5만명의 이라크군 병사들이 쿠르드족 반군측으로 넘어왔다』면서 『후세인 정권은 사실상 무너지고 있는 중』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라크 북부의 많은 지역에서 여러 읍들이 별다른 저항없이 반군에 투항했으며 민병대인 바트당 인민군 소속의 29개 대대가 반군에 합세한 것으로 전했다. 이라크 관영 INA통신은 지난 10일 알리 하산 알 마지드 신임내무장관이 북부지역을 시찰하면서 이곳 관리들과 시민들에게 『적과 반역자에 맞서싸우고 미국과 사악한 시온주의자 동맹국들의 음모를 분쇄하기 위해 단결할 것으로 호소했다』고 전함으로써 간접적으로 정부군 일각에서 반란이 있었음을 시인한 바 있다. 한편 시리아의 관영 알바르지는 11일 난민들의 말을 인용,『반후세인투쟁이 모든 도시로 확대됐다』고 보도했다.
  • 유권자 1백47명… 전국 최소선거구

    ◎강원도 철원군 근북면 유곡리 부락/60표 얻으면 당선가능/민통선 북쪽에 위치… 3파전 예상 3·26 시군구 기초의회 의원선거에서 전국 최소선거구는 민통선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60가구 주민 2백41명에 유권자수 1백47명(남 66 여 81)의 강원도 철원군 근북면으로 밝혀져 화제. 이곳은 후보등록 첫날인 지난 8일 장진혁씨(34·철원군 농민후계자협의회 부회장)가 등록을 마쳤는데 장씨 이외에 이모씨(50·농업·전직 이장)·장모씨(45·농업) 등이 금명간 등록을 할 것으로 알려져 3파전의 양상을 띠고 있다고. 이에따라 철원군 관계자는 60표 이상만 득표하면 일단 당선권에 들어갈 것으로 관측하고 있어 전국 최소득표 당선자도 이곳에서 탄생될 것으로 예상된다. 현행 기초의회 의원선거관계법은 1인의 의원을 뽑을 수 있는 인구상한선이 2만명으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인구 2백41명의 근북면과 비교하면 선거구간 인구편차는 무려 83대 1의 비율을 기록하게 되는 셈. 북한 인민군 초소에서 빤히 내려다 볼수있는 접적지역인 근북면은 본래 유곡·송암·백덕리 등 9개 법정리로 되어 있는데 유곡리만 6·25때 수복됐던 것. 유곡부락에는 지난 73년 7월1일부터 민간인이 들어가 거주하게 되었는데 한때 거주민이 3백명을 넘었으나 지난 89년에 63가구 2백70명으로 줄었고 2년새 다시 3가구 29명이 줄어들었다. 이곳이 민통선 이북이기 때문에 행정사무는 김화읍 사무소에서 관장하고 있다. 주민의 절반은 현역에서 제대후 정착한 군출신이고 10여가구는 토착민이며 나머지 20여가구는 강원도내에서 이주한 농민들이다. 이곳 주민들은 접적지역 통금해제 시간인 상오6시∼하오5시 사이에 군부대의 허가를 받아 논 71㏊,밭 32.1㏊ 등 모두 1백3㏊의 농경지를 경작하는 입주영농민이 대부분이며 3가구만이 상업을 하고 있다. 이들 주민들은 벼농사에서 주소득을 올리고 있는데 전국농민 평균생활수준과 비교하면 중류정도. 김화읍사무소 직원 조대현씨(50)는 『선거인수도 적고 반공의식이 투철한 지역이라 비록 「미니 3파전」이 예상되지만 전국 최고의 공명선거 지역으로 꼽힐것 같다』고 말했다.
  • 89년 비 자치장관 살해범/“북한서 테러교육” 자백

    ◎필리핀경찰 발표 【마닐라 로이터 연합】 필리핀 당국에 체포된 공산게릴라 1명이 북한에서 특수공작훈련을 받은뒤 필리핀 정부 각료 1명을 암살했음을 자백했다고 필리핀경찰이 최근 밝혔다. 필리핀경찰은 지난 1월28일 체포된 비르힐리오 델핀이라는 신인민군(NPA)소속 게릴라부대의 암살담당이며 지난 89년 살해된 하이메 페레르 자치장관 사건의 범인임을 자백했다고 밝혔다. 경찰은 또 이 게릴라가 89년 필리핀 북부 미해군 통신중계 시설에 대한 폭탄공격에도 참여했다고 확인했다. 경찰은 델핀이 지난 87년 8월부터 5개월간 평양에서 도시게릴라훈련 등 특수공작훈련을 받은 NPA게릴라 10명중 한사람이라고 밝히고,이들의 평양훈련은 일본 적군파들의 알선으로 이루어졌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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