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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인민군 60% 특수장비 중무장

    【홍콩=최두삼특파원】 중국군의 현대화는 현재 상당한 수준까지 이뤄졌다고 홍콩의 사우스 차이나 모닝포스트지가 8일 보도했다. 포스트지는 중국관영 영자주간 베이징 리뷰지 보도를 인용,특수장비로 무장된 중국인민해방군의 비율이 전군의 60%를 차지하고 있다고 밝히고 이같은 특수장비부대는 포병·공병·기갑·화생방·대전자전및 전략미사일등 각 병종과 병과에 걸쳐 두루 발견될 수 있다고 말한 것으로 전했다. 이 시사주간은 또한 「군당국」의 말을 인용,중국잠수함 함대가 「선진수준」을 이룩했으며 공군의 63%가 전천후 전투를 수행할 능력을 갖추었다고 말했다. 베이징 리뷰지는 또 중국의 전략미사일군은 미사일공격에 있어 1백%의 정확한 명중률을 유지하고 있으며 미사일군이 수행한 연구 프로젝트만도 1천개에 달한다고 밝혔다.
  • 독,유럽군축의 첫발 내딛다/재래무기 폐기조치의 의미

    ◎탱크 1천4백대등 모두 1만여점/냉전유물 청산 “수범”… 평화정착 전기/나토 보유분의 4분의 1선… 해체비용만 2억마르크 독일이 재래식무기 감축협정(CFE)국으로는 처음으로 4일 구동독 튀링겐주의 로켄주스라 무기폐기장에서 탱크·대포·장갑차·항공기·헬기등의 분해폐기에 착수,냉전해소후 군축이 실질적인 진전을 보게 됐다. 독일은 앞으로 40개월동안 1천4백81대의 탱크를 비롯,1만1천여점의 공격 및 방어용 재래식 무기들을 해체한다.러시아는 9월부터 폐기작업에 착수하며 이 협정조인 유럽각국들도 뒤를 이어 협정이행에 들어간다. 재래식무기 감축협정은 세계대전이후 맺어진 군축협상가운데 가장 광범위하고 실질적인 것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유럽지역에서 각국의 무기보유 상한선을 설정,초과 보유 무기들을 폐기함으로써 전쟁발발 위험성을 줄인다는데 의미가 있다. CFE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바르샤바조약회원국 22개국이 90년11월 파리서 탈냉전후 실질적 신뢰와 협력 관계를 발전시켜 나가기 위해 화해협정을 체결,동구와 서구국 쌍방간에 총 무기보유 상한선을 전차와 대포 각각 2만대,장갑차 3만대,항공기 6천8백대,헬기 2천대로 제한하기로 했으며 이번에 협정체결 2년만에 초과보유무기 해체작업이 실행에 옮겨지게 됐다. 이날 해체작업 시무행사에는 킨켈독일 외무·뤼헤국방장관을 비롯,러시아와 체코슬로바키아 사찰관들이 참석했다.뤼헤국방장관은 『유럽은 이제 하나의 다원적 민주사회가 된만큼 과거와 같이 과다한 무기로 병영화된 적대관계는 끝났다』고 선언했다.독일이 폐기하는 재래식 무기는 NATO측이 폐기해야하는 4만여점 가운데 4분의1을 넘으며 폐기하는데 드는 비용은 모두 2억마르크(약 1천억원).이는 통일독일이 구동독군 무기를 인수해 폐기,할당량이 많아졌기 때문이며 폐기되는 탱크중에는 동독인민군이 사용하던 소련제 T55형 54대도 포함돼 있다.장갑차 1대 해체하는데 드는 비용이 5천마르크,탱크는 1만2천5백마르크라고 군축관계자가 밝혔다.이때문에 독일은 경비절감을 위해 폐기 대상 탱크중 1천대를 나토회원국중 보유상한선미달 국가들에 넘겨 주기로 했으며 이중에는 비나토국인 핀란드가 포함돼 있다. 분해하기 위해 길게 일렬로 세워논 탱크들은 포탑과 무한궤도등 핵심부분에 노란색 표시가 돼 있어 용접공들이 이 부분을 떼어내 해체,재활용 할 수 없도록 하고있다.또 협정국들이 교차로 사찰단을 무기해쳬 현장에 보내 확인하며 독일의 경우 올해 폐기확인사찰을 2백회 받는다.
  • 비 의회,공산당 합법화 승인/신 인민군·분리주의자 4천여명 사면도

    【마닐라 AFP 연합】 필리핀 의회는 31일 4천4백85명에 달하는 공산게릴라및 회교도 분리주의자들의 사면과 불법화된 필리핀 공산당(CPP)의 합법화 조치를 승인했다. 이날 의회에서 만장일치로 승인된 법안은 『필리핀 국민들의 전반적인 이익을 위해 피델 라모스 대통령이 제안한 것과 같은 사면령이 필요하다는데 상·하 양원은 공감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 법안은 사면령의 대상자가 법질서에 복귀하고 사면을 신청한 신인민군(NPA)과 모로 국민해방전선(MNLF) 분리주의자들이라고 규정했다. 법안은 사면을 받은 사람은 과거의 범죄행위와 형사책임이 완전히 면제되며 공민권과 참정권이 완전히 회복된다고 밝혔다. 앞서 필리핀 의회는 지난 30일 역시 만장일치로 국가전복금지법을 폐지하고 공산당을 합법화한 라모스 대통령의 제안을 승인했다.
  • 북한 김평일 “신상이변”/일 산케이신문 보도/5개월째 모습 감춰

    ◎이복형 김정일과 관계악화 가능성 북한을 실질적으로 통솔하고 있는 김정일의 배다른 동생 김평일 주불가리아대사가 5개월째 공식 행사에서 모습을 감추고 있다고 산케이(산경)신문이 28일 도쿄의 북한 소식통을 인용,보도했다. 김평일은 군부출신으로 영향력을 지닌 지도자이지만 전부터 김정일과의 사이에 불화가 전해지고 있는 만큼 신변에 모종의 변화가 일어났을 가능성이 있다고 산케이신문은 말했다. 관계 소식통에 따르면 주 불가리아대사로 부임한 김평일은 지난 2월에 일시 귀국,3월에 소피아에 귀임할 예정이었으나 여전히 북한에 머물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동안 4월15일 김일성주석의 80세 생일축하행사,그 10일후 북한인민군 창설 60주년 기념 군사 퍼레이드라는 국가적인 행사가 있었으나 김평일이 참석했다는 정보는 없으며 현재 그의 동향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김평일은 1954년 김일성의 현부인인 김성애와의 사이에 태어났다. 77년 김일성종합대학을 졸업하고 조선인민군에 들어가 대좌로 승진했다.그후 외교분야로 옮겨 주 헝가리 대사를 거쳐 88년12월부터 주 불가리아 대사로 재직하고 있다.원만한 성격으로 군부 장교층을 중심으로 지지를 모으고 있다. 소식통에 의하면 김정일은 김평일을 잠재적인 라이벌로 보고 경계하고 있으며 양자의 관계는 썩 좋지 않다.불가리아의 북한대사관에는 특별임무를 띤 관원이 상주,김평일의 동향을 일일이 김정일 직속의 당조직 지도부에 보고해온 것으로 알려지고있다.
  • 라모스,비공산당 합법화 추진/의회에 승인요청

    ◎투옥 3대반군세력 사면도 【마닐라 UPI AFP 로이터 연합】 피델 라모스 필리핀 대통령은 27일 공산당의 20여년간에 걸친 무장봉기를 종식시키기 위해 현재 불법단체로 규정돼있는 필리핀공산당(CPP)을 합법화하고 투옥돼있는 신인민군과 우익반군,회교분리주의반군등 3대무장 반군세력의 전소속원들에 사면을 단행할 것을 의회에 요청했다. 라모스 대통령은 이날 의회에서 행한 첫 국정연설을 통해 『평화와 안보는 가장 우선적이고 절박한 문제』라고 전제,『불안정과 불확실성이 우리 일상생활을 채운다면 아무런 진보도 이룩할 수 없다』면서 이같이 밝혔다. 그는 의회에 대해 공산당을 불법화한 법률의 폐지를 촉구하고 그같은 법률을 폐지할 경우,공산당은 무장 투쟁이라는 방법 대신 정치·경제·사회분야에서 자유롭고 공개적이며 평화롭게 경쟁할수 있게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이들 3대 무장 반군 세력들과 평화 협정을 맺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다짐하면서 협상을 위한 위원회를 구성할 것이라고 말했다.
  • “자애로운 어버이” 김정일 우상화 박차(오늘의 북한)

    ◎찬양·노래·시 보급… 「잔치상내리기」도/언론 연일 대대적 보도… 이미지 부각/열성파 480여명에 생일·결혼선물도/개방바람속 「신 체제」 모습 관심 북한사회 이곳저곳에서는 요즘 김정일비서가 친히 내려준 음식으로 차리는 결혼·생일잔치가 요란하게 벌어지고 있다. 이와함께 김정일을 북한주민들의 「자애로운 어버이」로, 북한인민군을 김정일의 「사병」으로 묘사한 군가와 가요,시 보급사업이 「뜨겁게」 전개되고 있다. 이런 모습들은 지난해 12월의 인민군 최고사령관 취임, 지난 4월의 원수직 추대로 당·정·군의 실권을 장악한 김정일이 새롭게 구사하고 있는 「신체제」구축용 통치방식에서 비롯된 것들이다. 즉 김일성에 이어 바야흐로 「어버이」로 등장한 김정일의 이미지를 보다 「어버이」답게 형상화하고 김정일의 군부장악을 주민들이 자발적 나서서 칭송한다는 분위기를 「연출」,김정일과 주민 사이를 더욱 밀착시키려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다. 이른바 「어버이 이미지 심기작전」은 김정일의 전권장악이 가시화된 지난해부터 불이 붙기 시작, 91년 한햇동안 김정일로부터 생일 및 결혼상을 받은 북한 주민의 수가 4백80명을 넘어선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또 수많은 공장과 기업소,문화기관등에 내려진 김정일 명의의 감사문도 같은 맥락의「정책적 사업」의 하나라는게 북한전문가들의 분석이다. 김정일의 감사문 전달은 4월15일의 김일성생일잔치가 끝나고 5월에 접어들면서 본격화, 5월 한달에만도 17개 사업단체에 감사문이 전달됐으며 이에 답하는 해당기관 일꾼들의 충성다짐 집회 역시 연달아 열렸다. 이는 지난날 김일성이 행했던 것보다 수적으로도 훨씬 앞서는 것이며 그 방식 또한 새로운 것이라는게 북한관측통들의 지적이다. 북한 언론들도 「김정일어버이만들기」에 맞장구를 치고 나서 로동신문,민주조선 등은 이와 관련된 사례들을 보도하는데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북한 언론매체들의 대대적인 보도 실상은 북한방송이 전한 「친어버이같은 김정일지도자」란 제목의 다음과 같은 일화방송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지난 6월5일 평남 순천지구 청년탄광으로 지원,이미 이곳에서 광부로 일하고 있는 제대군인들과 합동결혼식을 치르기로 한 26명의 제대여군들이 이를 사전에 김정일에게 보고하고 택일까지 부탁했다.김정일은 결혼하는 제대여군들에게 이들의 부탁을 들어줌은 물론 이에 더해 선물까지 주었다. 김정일이 친히 내리는 잔칫상이나 선물,감사문을 받는 대상은 주로 ▲당세포의 비서장이나 기업소의 작업반장등 북한의 기본조직단위에서 열성적으로 과업을 달성하고 있거나 ▲국가에 공훈을 세운 사람 ▲「사회주의적 품성」이 다른 주민의 본보기가 된다고 당에 의해 인정을 받은 사람등이다. 『오늘은 오실까 우리 어버이/내일은 오실까 김정일동지/우리를 키워준 어버이 모습/한해가 다르게 그립습니다』. 지난 5일 부터 보급돼 불리고 있는 「기다렸습니다」라는 제목의 이 가요는 북한 주민들이 김정일의 등장을 간절히 희구해왔음을 묘사하는 것으로 역시 「어버이」로서의 김정일의 이미지 제고를 위해 만든 것이다. 『총칼을 번쩍 발구름 쩡쩡/우리들은 위대한 장군의 병사/보라 우리는 무적의 지도자동지군대 …』 이 또한 인민군을 김정일의 사병으로 묘사하는「우리를 보라」라는 제목의 최신 군가의 한 부분이다. 이밖에도 북한은 최고사령관 추대를 축하하는 시 「축원의 꽃보라」와 「우리의 최고사령관 김정일동지」,김정일의 원솔추대를 축하하는 내용의 「로동당의 영도자 김정일 원수이시여 경례를 받으시라」등 김정일과 군의 관계를 나타내는 작품을 집중적으로 보급,김정일의 군최고사령관과 원수추대 이후의 더욱 확고한 군부 장악을 거들고 있다. 그러나 이같은 상징조작을 통한 김정일의 체제관리 노력은 개방·개혁외에는 달리 활로가 없는 북한의 경제사정 때문에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 일반적 시각이다. 더욱이 실용을 추구하는 국제사회의 탈이데올로기화,화해 협력시대로 접어든 남북관계의 새로운 전개, 북한과 미국·일본의 빈번한 접촉 등은 북한의 변화를 촉구하는 동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사회주의체제고수와 경제발전이라는 두개의 떡을 한꺼번에 쥐려하는 북한. 이같은 2중의 딜레마에 빠져있는 북한이 향후 어떤 몸짓과 행보로 빈곤과 국제적 고립에서 벗어나려할지,그리고 이를 위해 김정일이 어떤 새로운 관리방식을 채택하고 나설지가 궁금하다. ◎김일성대에 「김정일 사적관」도 건립/2백만명 관람 ○…김정일 우상화작업에 주력하고 있는 북한이 김의 대학생활까지 이른바 「혁명활동」이라고 대대적으로 선전하고 있어 가관. 김정일은 지난 60년 9월 김일성대학 경제학부 경제학과에 입학,4년후인 64년 3월 졸업했는데 북한은 이 기간에 김이 『혁명활동을 정력적으로 벌였다』고 주장하는 한편 김의 이같은 「불멸의 혁명업적」을 대를 두고 전하기 위해 「혁명사적관」까지 조성해 놓았다는 것. 11개 방으로 이루어진 이 사적관에는 김정일의 대학생활 모습은 물론 졸업 당시 같은 과 동급생들과 나눈 대화내용(북한은 이를 「역사적인 연설문헌」으로 선전)과 61년 김이 평양방직기계공장 견학시 수리했다는 26호선반의 모형(이로 인해 「26호선반을 따라 배우는 충성의 모범기대 창조운동」이라는 노력경쟁운동이 생겨남)등을 전시. 북한은 김정일이 김일성대를졸업한 이후 이 대학을 「유서깊은 배움의 성지」로 선전하면서 이 대학 졸업생은 물론 주민과 외국인까지 김의 「혁명사적관」을 참관케 해왔는데 그 인원이 지난 2월까지 약 2백만명에 달했다고.
  • 이인모는 누구/38년동안 전향 거부한 빨치산출신 고정간첩

    이인모씨(75)는 34년간의 영어생활 끝에 지난 88년 풀려난 「미전향 좌익수」출신.함경남도 풍산군 안산면산. 최근 공개된 52년 4월28일자 광주고등군법회의 「피의자 신문조서」등 당시의 재판기록에 따르면 이씨는 50년 8월 인민군소위의 계급을 달고 조국보위위원회 군사지도원의 자격으로 남파된 것으로 나타나 있다. 41년 일본 도쿄공고 1년을 중퇴한 이씨는 50년 8월 경남군사위원회 지도원으로 진주에서 의용군모집등 인민군의 작전을 지원하다 그해 9월 인민군 후퇴시 경남 거창 덕유산에 들어가 빨치산 활동을 전개,12월 대공세때 한쪽다리에 총탄을 맞고 체포됐다. 이씨는 7년복역후 59년 만기출소했으나 61년 고정간첩혐의로 다시 15년형을 선고받고 복역,끝까지 전향을 거부하다 76년 만기출소.그러나 사회안전법에 의거,88년 동법이 폐지될때까지 청주보안감호소에서 다시 감호생활을 했다. 국내 연고자가 전혀 없는 이씨는 서준식씨(민가협의장)의 주선으로 현재 경남 김해에서 김상원씨(51)의 보호를 받고 있다.지난해 7월 뇌졸중이 발병,거동이 불편한 상태인데 북한에는 부인 김순임씨(64)와 딸 이현옥씨(42)부부및 외손자 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 귀순한 김영성씨가 밝히는 생활상(오늘의 북한)

    ◎지방주택난 심각… 곳곳에 「블록집」/한집에 3∼4가구씩 동거 예사/고급 「광복아파트」도 제한급수/연형묵·강성산등 동구유학그룹이 재건 주도 북한은 6·25동란이 종결될 기미가 보이기 시작한 지난 52년부터 20대 초반의 젊은 엘리트들을 대거 동구에 유학시켜 전후재건을 위한 혁명2세대 양성에 착수한 것으로 밝혀졌다. 북한 국가건설위원회소속 건축설계사로 독일에 파견근무중 지난달 7일 망명,30일 한국 프레스센터에서 첫 기자회견을 가진 김영성씨(58)는 『연형묵 정무원총리와 강성산 함북도당책임비서,김시학 로동당행정부장,김유순 북한IOC위원 등 현재 북한을 이끌어가고 있는 테크너크랫(전문관료)의 상당수가 이들 유학생그룹에 속한다』고 밝히고 이들이 김정일 후계체제확립에 공헌하고 있는 충성파들이라고 증언했다. 지난 52∼59년 체코 프라하공대에서 이들과 함께 유학한 김씨는 연형묵 강성산의 나이가 자신보다 다섯살이 많은 63살이며 이들이 6·25동란중 김일성의 직속 호위부관으로 일했었다는 새로운 사실을 공개,관심을 모았다.이제까지 두 사람의 나이는 각각 67,61세로 소개돼 왔으며 출신학교등 인적 사항과 50년대의 활동상에 대해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김씨에 따르면 연형묵과 강성산은 유학시절 학생지도부 모임을 주도,향후 방향에 대한 논의를 갖는등 남다른 지도력과 충성심을 보였다는것이다. 귀국후 강성산은 69년 자강도당책임비서,70년 평양시인민위원장을 거쳐 84년 정무원총리에 취임,합영법을 추진하는등 만3년동안 경제개혁을 이끌며 권력의 중심부에 있다 88년부터는 함북도당책임비서로 자리를 옮겨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강성산의 총리직 사임 이유와 관련,김씨는 『총리재임시 「주석예비펀드」(김일성이 임의로 사용할 수 있게 비축해 놓는 기금·이밖에 김정일펀드와 장성택펀드가 있다)를 김일성의 재가없이 제멋대로 사용했기 때문이라고 들었다』고 전했다.김씨는 『그러나 강은 학식은 좀 떨어지지만 사람됨이 좋아 그 돈을 개인적으로 유용하지 않고 북한경제를 위해 쓴 것으로 다들 생각했다』고 덧붙였다.강성산은 현재 표면적으로는 좌천돼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북한경제개방의 상징인 두만강경제특구 개발과 관련,중국과 러시아의 접경지역인 함북에서 그 실무총책을 맡고 있는 등 여전히 김부자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한편 연형묵은 귀국후 경제 및 조직분야의 요직을 두루 거치며 급성장,74년 김정일의 친위대인 「3대혁명소조」의 중앙지도부 책임자역을 맡았으며 88년 총리에 기용된 이래 7차에 이르는 남북고위급회담을 이끌어오는 등 혁명2세대의 선두주자로 자리를 굳혔다. 김영성씨는 이밖에 평양과 지방의 생활차이등 북한의 여러 분야에 대해서도 많은 증언을 했다. ▲평양과 지방주민의 생활차이=평양시민들에게 지급되는 쌀은 입쌀비율이 50%는 되고 가을에는 70%까지도 된다.또 행사때 배급되는 외출복이 많아 당에서 잘들 입고 나오라면 차려입고 나올 수 있다.치약·칫솔·세면비누등이 별부족함이 없이 공급되는 등 특별시 인민다운 대접을 받고있다. 그러나 함북 청진·무산등 지방의 주민들은 생필품 부족에 시달리고 있으며 공중목욕탕의 경우 월중 15일만 가동돼 대부분 한달에 한번 집에서 목욕한다.배급되는 팬티와 수건도 면제품이 아니라 인조화학섬유로 만들어져 햇볕에 잘못 널었다가 쪼그라들어 낭패를 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20년전 건설된후 그대로인 주택문제 역시 심각한 실정이어서 일제시대 중심가였던 청진시 해방동과 언곡동의 경우 기존의 집에서 서까래를 2m나 내뽑아 집을 넓히는바람에 보도는 아예 없어지고 차도만 남았다. 인구 9만명의 무산군은 주택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여유공간 하나없이 빽빽이 지은 「하모니카주택」을 보급했으나 그것으로도 모자라 인민학교 운동장에까지 블록집이 들어섰다. 기타 지방도 마찬가지로 전후 복구부터 60년대까지 지은 한칸짜리 「콩알만한 집」에 3∼4가구가 동거,그 결과로 노인을 천대하는 악습이 전국적으로 생겨나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특히 자녀가 결혼하게 되면 노인들은 잘곳이 없어지게돼 『며느리 맞는 날은 벼락맞는 날이다』는 말이 생겼다. ▲공장가동률=외화벌이를 위한 군수공장이나 수출전략상품인 시멘트·금·동·아연 등비철금속공장은 비교적 활발히 돌아가고 있다.그러나 생필품 생산을 담당하는 지방공장은 전력과 원료의 부족으로 90%이상 조업을 중단하고 있다.김책제철소 같은 특급공장도 대형용광로 4기중 1기만 가동되고 있으며 청진제강소는 이미 5∼6년전부터 굴뚝의 연기가 멎었다. 따라서 일할 공장이 없는 노동자들은 소속 공장·기업소에서 양권과 월 20원 정도의 보조금을 받으면서 농촌이나 도로보수공사에 동원되고 있고 그나마 일이 없을 때에는 출근부에 도장만 찍고 각자 일거리를 찾아 나선다. ▲광복거리 아파트=광복거리건설(김영성씨가 직접 설계)은 김정일의 매부 장성택의 지휘하에 북한전역의 각 기관과 기업소 노동자·군인 등 총 18만명이 돌격대원으로 「조직동원」돼 지난 86년 착공,6년만인 올 4월에 완공됐다. 공사에 동원된 노동자들의 생활은 상상도 못할만큼 비참했다.천막이나 임시 토담집을 숙소로 사용했으며 강냉이밥과 시래기가 식사로 제공됐다.공사기간중 강냉이농장이 습격당한 사건이 자주 일어났는데 범인을 잡고 보면 공사에 동원된사회안전부나 인민군대의 나이어린 돌격대원들이었다. 건설장비도 불도저 30여대,굴착기와 기중기가 각각 40·50여대에 불과,거의 모든 공사를 인력에 의존했다. 아파트내부에는 조리대·붙박이찬장·이불장등이 공통적으로 설치돼 있으나 프로판가스와 전화기는 고위간부용 집에만 갖추어져 있으며 일반주민들은 석유곤로를 쓰고 있다.수돗물은 상오4∼7시,하오3∼7시 두차례 제한급수되며 온수는 일주일에 하루만 공급된다.승강기는 6층 이상만 가동하며 고장이 잦아 할머니들을 승강기운전공으로 배치,운영하고 있다. ▲김영성씨의 설계기술수준=김씨는 북한 조립식 건축공법의 제1인자로 평양시 광복거리를 비롯,평양체육관 평양인민대학습당 조선예술영화촬영소 건설에 직접 참여한 바 있다.김책제철소 영빈관,무산학생소년궁전등도 그의 작품.특히 83년부터 1년6개월동안 함북 경성군 주을역에서 북쪽으로 16㎞ 떨어진 산골 소재 김부자 전용 초호화판 1호 특각(별장)을 설계,국기훈장 3급을 받기도 했다.
  • 외언내언

    1918년10월 혁명의 무장봉기 다음날 레닌은 그때까지 자기들 볼셰비키의 공격대상이었던 러시아 정규군장교들에게 협력을 요구했다.정권을 창출하여 사회주의독재를 확립하기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군사전문가들이 필요했다.◆레닌의 동반자 트로츠키도 같은 인식이었다.트로츠키는 소비에트 정부군사인민위원에 취임한 바로그날 『공업이 숙련된 기사를 필요로 하고 농업이 적격한 농학자를 필요로 하는것처럼 군사전문가는 국방의 불가결한 존재』라고 말했다.볼셰비키가 구군(러시아정규군)의 지휘관을 대담하게 기용한 정책배경이다.◆그러나 독재자들은 정규관료나 군지휘관들의 전문지식과 두뇌를 빌려 전쟁을 벌이고는 그들이 쓸모가 없어지면 미련없이 소탕해버린다.자신과의 구연은 물론이고 동료 전우관계도 거추장스럽다.그들의 전공이나 전공도 소용없다.오히려 혁혁한 전공은 엉뚱하게도 독재자자신의 지위를 넘보는 「반역」의 요인이되어 무자비한 숙청의 빌미가 된다.◆고금의 그러한 사실들은 우리 한반도 현대사의 북쪽대목에서도 재연되었다.대남한「반타격 전투명령」으로서 기습남침공격을 감행할때 김일성의 수하장령들 대부분은 빨치산계열,조선의용군 계열,소련군출신계열의 군사전문가들이었다.그들은 김일성의 명령일하 충실하게 이른바 대남적화혁명전쟁을 수행했다.그 전공으로 훈장도 받고 승진도 했다.◆전중,전후 그들에게 돌아온것은 전쟁실패의 책임과 핍박과 숙청이었다.작전을 잘못해 동족들을 덜죽였다고해서 책임추궁을 받았다.급기야는 독재 철권을 피해 러시아로,중국으로 뿔뿔이 흩어져 망명살이를 했다.그 인민군작전국장 유성철등이 42년후 매우 뒤늦게나마,전쟁범죄자로부터 받은 훈장과 계급장을 반환했다.김일성의 야욕이 빚은 동족상잔의 전쟁에 앞장섰음을 부끄러워한다며….사실은 사실임을 다시한번 확인해주고 있다.
  • 6·25참전 전인민군 간부 5명/북한서 받은 훈장 반환

    ◎구소 알마아타서 회견 【모스크바 연합】 한국전쟁당시 북한 인민군의 고위 간부였던 강상호(84·중장·내무성부상),유성철(76·중장·작전국장),박병율(86·소장·강동정치학원원장·군수국장),정상진(73·대좌·문화성부상),장학봉씨(73·대좌·정치군관학교교장)등 5명은 전쟁발발 42주년인 25일 카자흐스탄공화국의 수도 알마아타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북한으로부터 참전공훈으로 수여받은 훈장과 계급장을 모두 반환한다고 발표했다. 이들은 이날 발표한 성명을 통해 한국전쟁은 김일성의 야욕이 빚은 동족상잔의 비극이며 따라서 이 전쟁에 참여한데 부끄러움을 느낀다고 말하고 모든 훈장 등을 이날 자로 모스크바주재 북한대사관에 우송하겠다고 밝혔다.
  • 내가 겪은 「1950년여름」/윤남경 작가

    ◎인공기 보면 아직도 떨리는 이가슴… 『아직도 옛말 삼기는 멀다』 몇해전까지만 하더라도 6·25가 돌아오면 나는 이 말을 되뇌이곤 했었다. 6·25 당시 부산으로 피란을 간 뒤에도 『언제쯤 이런 생활을 옛날얘기삼아 우리 후손들에게 들려줄 수 있을까.마치 우리가 3·1운동 얘기나 임진왜란때 이야기들을 할머니에게 듣듯이 말이다』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우리 후배들은 공산당 얘기를 해달라는 것이 아니라 숫제 인민공화국 깃발을 흔들며 거리로 뛰쳐나가는 것을 볼때 나는 꺄악하고 소리라도 지르며 그 자리에 주저앉을뻔 했던 것이다. 우리는 그런 극단으로밖에 사물을 판단못하는 것일까. 지금으로부터 40여년전 대학기숙사에서 한가롭게 노래를 하고 있는데 우리 귀에 난데없는 대포소리가 쿵쿵하고 울릴 때 우리는 그저 국군의 훈련소리라고만 믿고 있었다.그러나 며칠뒤 사감선생님이 속히 집으로 돌아가거나 지방 학생들은 연고자를 찾아가라고 다급하게 말할때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고 부산이 집이었던 J는 이미 길이 막혀 이리저리 걸식하다시피 살면서 그 시절을 지냈다.영문도 모르고 집에 가 있는 내 귀에 모교인 K여고에서 인민재판을 연 결과 사형선고가 내려진 몇사람 속에 내가 끼었다는 소문을 듣고는 즉시 이모님댁으로 몸을 피했다.그때 기독학생회장과 훈육부장을 겸하고 있었으니까 그런 모양이다. 그러나 이모님댁에도 밤마다 내무서(경찰서)원들이 집을 뒤지며 젊은 남자는 인민군으로,젊은 여자는 의용군이나 간호원으로 끌고가는 바람에 거기도 못 있고는 땀띠의 투성이 얼굴로 골방에서 뛰쳐나와 집에 가서 식구들 얼굴을 한번만 보고 어디론가 가리라 하고 집에 가보니 모두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인민군이 후퇴하기 직전에 몇몇집식구들은 다 죽이고 가는데 우리집도 그중의 하나라는 것이다.그러니까 빨리 피하라고 누군가가 귀띔을 해주었다.그들은 종적인 명령계통은 잘 서 있지만 횡적인 연락에는 둔하니 장소만 바꾸면 된다는 것이다. 결국 큰고모님네와 작은아버지 식구들하고 한 20여명이 성북동에 있는 작은 고모님댁으로 갔으나 가자마자 누군가가 찔렀다면서 내무서원들이 들이닥쳐 아버지 머리에 권총을 들이대며 『네가 상공장관인 아무개지?』하고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할머니가 질겁을 하며 권총을 부여잡고 그애는 장관의 동생이라고 소리치시는 바람에 위기를 모면한 일도 있었다. 결국 노인과 어린이만 빼놓고는 우리를 굴비엮듯이 엮어 끌고가니 그것을 본 동네사람들이 혀를 차며 『어제도 몇십명을 잡아다 뒷동산에서 죽이더니 오늘도 또 저렇게 죽이는구나』하는 말이 들렸다.어머니 친구분중 한사람은 잡혀 갈때 검정고무신과 흰고무신을 한짝씩 신고가면서 내가 죽거든 이 고무신을 보고 찾으라고 하며 끌려갔는데 정말 그들이 도망간 뒤 삼청동 산 웅덩이속에서 얼굴은 썩어 분간할 수가 없었으나 고무신때문에 찾은 일도 있었다. 우리를 끌고간 그들은 한사람 한사람씩 밤새도록 심문을 했으며 새총인지 무슨 총인지를 들고 공연히 사람들 얼굴에 겨냥하며 쏘는 시늉도 해보고 어디서 훔쳤는지 길다란 일본 사무라이 칼을 빼서 사람을 후려치는 흉내도 내보고 갖은 악독한 짓을 다하며 사람을 밤중까지 묶어 두었다.내게는 어디 다니느냐고 하기에 정직히 대학생이라고 말하니까 갑자기 표정이 잔인해지더니 『흥! 난 인민학교도 못나왔소.당신 나를 업신여기기요?』하고 대드는게 아닌가.업신여기다니 내 목숨을 쥐고있는 사람인데라고 생각했으며 『이승만이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는등 몇가지 이상한 질문을 던지더니 자기들도 사람 죽이는데 진력이 났는지 다음날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다.그때 풀어주는 것은 정말 기적중의 기적이라고 모두 말했다.그대신 자기들을 욕하면 또다시 잡아들인다고 협박도 했다. 인민군이 내려오자 멋도 모르고 환영하며 협력했던 사람들도 뒤에 알고보니 대부분 쫓겨났거나 숙청당했다는 것이다.이유는 서울에서 이북으로 도망가지 않고 그대로 살고 있었으니 반동분자라는 것이다.결국 이용할대로 이용해먹은 뒤에는 발길로 걷어차버리는 것이 그들의 속성인 줄 알기 때문에 그들이 무슨 달콤한 말을 하더라도 속지 않으리라는 것이 그당시 우리들의 심정이었다. 그 더운 복중에도 솜이불을 뒤집어 쓰고 라디오를 들으면(들키면 사형이니까 목숨걸고 듣는 단파 라디오였다)미국의 소리방송에서 『여러분 오늘도 얼마나 수고하셨습니까?』하고 나올때 정말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오늘 하루도 죽지않고 살았구나하는 실감때문이었다. 쌀을 구경못하는 배고픔에다가 전쟁전에 먹었던 군것질거리 생각이 나서 참기 어려웠지만 그보다도 사람을 믿을 수 없었던 것이 가장 괴로운 일이었다.그들은 자식이 부모를,이웃이 이웃을 모두 못믿고 감시하고 서로 내무서에 일러바치는 자들만이 영웅이라고 가르친 까닭에 정말 누구하고 마음놓고 이야기할수 없었다. 그러나 북쪽사람도 우리 부모요 형제들이다.우리는 하루속히 통일이 되어 사람을 속삭이는 날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그러나 공산주의,김일성주의에 물들은 사람들하고는 아직도 마음놓고 흉금을 털어놓지 못한다는게 솔직한 내 심정인 것이다.
  • 남침에서 「합의서」 채택까지… 그 교훈과 통일 전망 대담

    ◎현실 무시한 감상적 통일론 경계할때/평양,체제유지 하려 대화채널 이용/상호사찰수용등 「합의서」 이행 급선무/남북신뢰 구축의 지름길은 북의 적화야욕 포기/마찰작은 문화­경제교류 힘써 북의 변화 유도해야 「과거는 지나간 현재이며 미래는 다가올 현재」라는 말이 있다.역사는 항상 연속선상에서 진행된다는 말인 것같다.민족의 비극인 6·25전쟁이 발발한지 어언 42년이 흘렀다.최근의 남북관계진전은 우리 민족 모두에게 통일에의 꿈을 부풀게 하고 있다.하지만 핵사찰문제에서 알수 있듯이 남북관계는 현실을 무시한채 성급한 결론을 유도하기 힘든 난제가 아닐 수 없다.국군사의 산 증인 채명신 전주월한국군사령관과 북한문제전문가 유석렬외교안보연구원교수의 대담을 통해 「6·25에서 남북합의서 채택」까지의 역사적 교훈과 통일의 전망등을 들어 본다. ▷채명신◁ ▲육본 작전참모부장 ▲주월한국군 총사령관 ▲주 스웨덴·그리스·브라질 대사 ▷유석열◁ ▲미 미주리주립대 정치학박사 ▲미 북 아이오와대 조교수▲현 외교안보연구원 교수 ▲유석렬외교안보연구원교수=올해로 6·25전쟁 42주년을 맞았습니다. 이 시점에서 6·25전쟁이 우리에게 남긴 교훈을 최근의 남북관계와 연결시켜 조망해보는 것이 올바른 남북관계를 펼쳐나가고 이해할 수 있는 기틀이 된다고 봅니다. 6·25는 북한이 남한을 침략한 것이지만 어찌보면 남한이 너무 무방비상태였다는 시각도 있습니다. 군사적인 면에서 뿐만 아니라 정치·경제적으로 혼란한 상황이어서 우리에게도 책임은 있다고 볼수 있는 것입니다. ▲채명신 전주월한국군사령관=저는 6·25가 발발하기 전에 북한에 거주하다 47년에 월남했습니다.그렇기 때문에 해방직후 북한사정은 잘 알고 있지요.좌경화된 일부 세력은 6·25가 남침이 아니라 북침이라고 주장하는데 터무니없는 얘기입니다.6·25는 소련군부가 북한 공산군을 육성,치밀한 계획아래 준비한 끝에 일으킨 것입니다.시초단계에서는 소련군이 주도했고 김일성은 자신의 권력기반을 다진후 남침계획에 참여했다고 보여집니다.46년 2월 본인이 진남포근처 보통학교에서교편을 잡고 있을때 공산당간부훈련기관인 평양학원설립식에 참석한 적이 있습니다.그 설립식에서 축사를 한 소련군 사령관과 북한주재대사가 「내년에는 여기에 탱크·공군기가 참여할 것」이라고 수차례 강조했지요.이것은 6·25를 스탈린이 주도했고 김일성이 그 꼭두각시 노릇을 했음을 분명히 보여주는 사실입니다. ▲유교수=말씀 중에 북침얘기가 나왔는데 요즘은 많이 들어갔지만 한때 일부 좌경운동권 학생들에 의해 많이 주장됐었죠. 분명한 것은 3일만에 서울이 함락당한 것이나 전쟁 발발당시 전군의 3분의 1만이 근무중이었던 점만을 봐도 북침은 전혀 근거없는 주장으로 생각되는데 채선생님께서 좀더 설득력있게 설명해주시죠. ○수차례 예비도발 ▲채전사령관=소련과 김일성은 6·25 남침을 치밀하게 준비했습니다.저는 장교임관 후 48년 송악산전투 등 인민군과 치열한 정기전을 여러차례 치렀는데 우리쪽 전투능력을 테스트하기 위한 예비도발이었어요.또 2천5백명에서 3천명에 달하는 게릴라부대를 태백산 등지에 남파시켜 후방을 괴롭혔는데 이것도 우리의 군전투능력을 분산시키려는 의도였습니다.게다가 50년 6월25일은 일요일이었으며 3분의 1 이상의 병력이 외출을 나간 상태였지요.농촌출신 군인들은 농번기휴가를 내보냈었습니다.그것도 새벽 4시의 기습남침이었으니 첫날부터 우리의 군전력이 궤멸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지요.이때 두가지 미스터리가 아직 풀리지 않고 있습니다.첫째는 군비상경계가 6·25전쟁발발 하루전에 해제된 이유와 둘째는 그해 6월10일 전후 대대적 군인사가 단행돼 6·25당시에는 자기 부대순시도 채 못한 전방 연대장·사단장이 많았었다는 점이지요. ○두가지 미스터리 ▲유교수=이제 최근의 남북관계를 살펴보겠습니다. 90년대 들어 남북한 관계가 어쨌든 호전된 양상을 보여 7차에 걸친 고위급회담이 열렸습니다. 3차회담까지는 기본관계합의서를 먼저 체결하자는 남측과 불가침선언을 먼저 해야한다는 북측의 입장차이를 좁히지 못해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4차회담에 이르러서 남북 쌍방은 단일안건을 채택하기로 의견을 모았고 5차회담에서 화해불가침교류협력이라는 단일안건을 채택,처음으로 합의를 도출했습니다. 7차회담에서는 북측이 놀랄 정도로 적극적으로 나와 평양에서 모종의 특명을 받은 것이 아니냐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북한이 이처럼 남북대화에 적극성을 띠게 된 것은 대충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는 것으로 분석됩니다. 먼저 체제의 위협을 느낀 것 같습니다. 남한에 의한 흡수통일을 막기 위해 제도적 장치로 합의서를 만들자는 의도가 숨어있는 것이죠. 또 미국 일본과의 관계개선 및 수교문제가 있습니다. 북한이 당면하고 있는 경제침체와 국제적인 고립을 탈피하기 위해서는 미·일과의 관계개선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셋째,김정일에게 권력을 승계하기 위한 사전조정작업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북한은 남북합의서 채택을 「역사적 사변」으로 선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김일성도 공개적으로 크게 만족을 표시했습니다. 이와 함께 합의서채택이 김정일의 주도로 이루어진 업적임을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있죠. 또다른 측면에서 김일성의 80회 생일을 축제분위기 속에서 맞자는 뜻도 포함돼 있습니다. 축제분위기를 만드는데는 남북합의서가 최상의 선물이고 이를 이용,김일성의 생일을 민족 최대의 명절로 부각시키자는 것이죠. 이밖에 남한 주민들의 대북 경계심을 이완시켜 친북세력을 조성하려는 숨은 뜻도 보입니다. 북한은 남한사회를 불안하고 불투명한 사회로 규정하고 대남혁명의 기대를 결코 버리지 않은 상태입니다. 올해 대통령선거와 총선등 2차례의 큰 선거를 치르고 경제가 침체되는 틈을 비집고 들어가 국민과 정부간의 불신을 조장하고 혼란을 일으켜 보자는 거죠. ▲채전사령관=이북 공산주의의 실체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북한측 주장이 그럴듯하게 들릴수도 있습니다.하지만 그들이 통일을 외치고 있는 것은 미·일의 경제적 지원을 바라는 절박한 필요성에서 나오는 것이지 진심으로 평화구축을 바라기 때문이 아닙니다.7·4공동성명에 서명하면서 땅굴을 팠다든지 얼마전 3인조 무장간첩침투사건등 그들이 진정으로 평화를 바라지않는 예는 많습니다.KAL기 폭파범인 김현희씨가 엄연히 서울에 살고 있는데도 아직 우리측 조작이라고 우기고 있지 않습니까.그들은 거짓말도 공산혁명을 달성하기 위한 유효한 수단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유교수=현재 남북관계에서는 핵문제의 해결이 선결과제로 등장했습니다. 6·25전쟁으로 얻은 교훈 하나가 북한을 실뢰할 수 없다는 것인데 북한의 핵개발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임시사찰 결과를 검토해보면 영변에 위치한 의문의 건물은 핵재처리시설일 수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이는 핵재처리시설과 우라늄농축시설을 보유하지 않는다는 남북간의 비핵화공동선언을 정면으로 위배한 것입니다. 북한은 IAEA의 사찰만으로 핵의혹을 해소하려 하지만 우리로서는 상호사찰을 반드시 해야 합니다. 핵문제가 빨리 해결되지 않으면 정치군사·교류협력분과위원회가 제대로 활동할 수 없게됩니다. 북한이 진실로 남북간에 당면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원한다면 상호사찰에 응해 핵의혹을 깨끗이 풀어야 합니다. ▲채 전사령관=유교수님 말씀이 전적으로 옳습니다.상호주의 원칙에 의해 의심스러운 곳은 어디든지 개방되어야 합니다.우리가 이제까지 얼마나 북한에 속았습니까.국제적 압력을 총동원,핵문제 만큼은 털끝만한 의심도 남겨서는 안됩니다.작은 땅덩어리,높은 인구밀도의 상황에서 핵무기를 쓰려하는 것은 말이 안된다고 봅니다.북한은 또 핵운반수단을 완벽하게 개발해놓았습니다.핵폭탄만 만들면 일본 일부까지 목표물이 됩니다.따라서 사찰대상에는 핵운반수단과 핵폭탄 못지않은 피해를 줄수 있는 화학무기까지 넣어야 된다는게 저의 생각입니다. ▲유교수=이러한 상황인식 아래 앞으로의 통일정책 방향과 추진과정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남북이 불신을 어떻게 해소하느냐가 가장 중요합니다. 우리의 통일정책은 쉬운 것부터,상호마찰이 적은 것부터 해결해나가자는 것입니다. 정치·군사문제부터 우선적으로 해결하자는 북한의 주장은 이상적이기는 하지만 현실적으로 이루어지기 어렵지 않습니까. 남북이 먹고 먹히는 통일이 아니고 한민족이 함께 사는 통일을 이뤄야 합니다. 점진적인 노력을 통해 남북의 합의 사항을 성실히 수행해 나간다면 통일은 반드시 이끌어낼 수 있지 않겠는가 생각합니다. ▲채전사령관=현실을 무시한 이상론추구에는 위험이 많습니다.북한이 도저히 들어줄수 없는 주장을 할때는 받아들이지 않는 원칙론적 자세가 필요합니다.실천가능한 교류문제는 덮어둔채 정치·군사문제부터 해결하자는 것은 억지입니다.특히 남북한이 당장 몇십만명을 감군하자는 주장같은 것은 합의가 무척 어려운 난제인데 이런 주장을 전제로 내세운 대화는 무의미합니다.그것에 대해 지나치게 낙관하거나 비관할 필요는 없습니다.과거 감정을 들추어내어 앞으로의 대화분위기를 깨서도 안되지요.말장난으로 시간을 끌때는 단호조치를 취해야겠지만 대화의 문은 항상 열어놓아야 합니다.이번 여름 남북이산가족 상호방문도 인원이 너무 적어 답답하긴 하지만 한 사람이라도 더 남북왕래를 해서 서로를 알겠다는 끈기있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공존노력 중요해 ▲유교수=그러한 바탕에서 앞으로의 남북관계를 전망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현재 남북간에는 핵통제공동위를 포함 모두 4개의분과위원회가 설치됐는데 남북합의서에 따른 부속합의서의 채택이 당면과제가 될 것입니다. 정치·군사분과위원회는 국가보안법 폐지 미군철수등을 주장하는 북한의 태도에 변화가 없을 것으로 전망됩니다. 다만 교류분과위는 북한이 경제교류를 원하고 있어 낙관되지만 결국 핵문제의 해결이 선행돼야만 본격적인 교류가 성사되겠죠. 통일의 시기를 말하기는 매우 조심스럽지만 김일성은 최근 한 연설에서 『95년을 통일의 해로 하자』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물론 완벽한 통일이 아니고 연방제 등 공존적인 의미죠. 우리도 최근 여론조사를 보면 69%의 국민이 10년 안에 통일이 가능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2천년까지 통일의 분위기가 무르익어 결정적인 기회가 올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이에 대한 철저한 준비를 해야겠죠. ▲채 전사령관=통일의 기본개념에 있어 우리와 북한이 다릅니다.북한은 공존·공영에 바탕한 평화통일이라기보다는 아직도 적화통일이 우선입니다.국제적 압력이 너무 거세니까 할 수 없이 시늉만 내는 것이지 속마음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같습니다.그러니까 큰 줄거리는 합의해놓고 세부실천과정에서 계속 트집을 잡아 남북관계진전을 가로막고 있는 것 아닙니까.저들이 95년 통일을 얘기하고 있는 것도 그때가서는 적화 통일준비가 완성될 수 있다는 생각아래 나온 발언일 가능성도 있지요.핵무기개발뿐 아니라 김일성나이도 생각할때 그때쯤을 적화통일의 호기로 여길 수 있습니다.특히 북한은 남쪽의 혼란을 기대하는 눈치입니다.최근 주체사상·인공기 등이 우리 사회에 나타나는 현상을 보고 쾌재를 부르고 있을 겁니다.자기들은 무력강화를 늦추지 않으면서 남쪽의 변화를 주목하고 있는 것이지요.김일성이 사망하고 김정일이 실각하는 북한내부변란이 없는한 통일에 대한 북한의 자세는 크게 달라지지 않으리라 봅니다.일본도 통일한국등장을 바라지 않기 때문에 북한에 대한 경제지원에 나설 수도 있어 통일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쉬운 것은 아닙니다.독일의 경우도 엄청난 통일비용을 치르지 않았습니까.우리도 공산당의 실체를 직시하면서 초연한 자세로 통일의 기회가 성숙될때까지 실력을 쌓아야겠습니다. ○국민합의에 최선 ▲유교수=42년이 지난 뒤에도 6·25는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북한의 행태로 볼 때 적대감과 불신이 없을 수 없지만 우선 점진적인 신뢰회복이 가장 중요합니다. 독일이나 예멘에서와 같이 금방 통일을 이룰 수 있다는 감상적인 생각은 한반도의 상황여건을 도외시한 것입니다. 대내적으로는 정치의 안정이 가장 중요하다고 봅니다. 북은 우리사회가 어지러울 때마다 갖가지 제안을 내 혼란을 일으키려 합니다. 국민의 합의와 노력을 통해 정치·경제·사회 모든 분야에서 북한이 동경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그것이 최선의 방책입니다.
  • 6·25남침… 새 증언·새 진상

    ◎구소 국방부 군사연구소 코로트코프박사등 증언/대남 「선제타격작전」 소군고문단장이 수립/“북 「강건위」부실”… 스미르노프가 작성/북한군,49년초부터 “공격훈련 위주로”소군사 고문단,한때 직지사에 주둔/스탈린,극동군 50만 국경배치 추진… 주은래와 회담뒤 철수 김일성이 무모한 한반도공산화전략실현을 목적으로 저지른 「반민족·반평화적 침략전쟁」인 6·25동란에 대한 증언과 사료가 잇따라 공개되고 있다.이 나라 4천만 겨레에게 참담한 고통을 안겨주었던 6·25.그 6·25가 북한에 의한 남침이었음을 밝혀주는 구소련군 고위장성들의 「살아있는 증언」을 중심으로 당시 「전쟁주체」였던 김일성의 흉계와 북한선제공격의 진상을 밝힌다. 오는 25일로 6·25동란 발발 42주년을 맞는다.「민족상잔의 비극」 6·25가 한반도 공산화 통일을 목적으로 김일성이 주도한 반민족,반평화적 침략전쟁이었다는 것은 부동의 정설.특히 이같은 시각은 구소련 붕괴후 지금까지 극비문서로 분류되어 대외공개가 금지됐던 관련자료들이 속속 드러나면서 더욱 분명한 사실로 굳어지고 있다. 최근 옐친 러시아대통령의 군사보좌관으로 구소련 국방부의 군사연구소장을 역임한 드미트리 볼코고노프대장과 또 같은 군사연구소의 책임연구원 가브릴 코로트코프박사(77)는 6·25가 김일성의 적극적인 남침주장과 이에 동조한 스탈린의 지원으로 일어났다면서 그 근거로 국방부의 비밀문서들을 제시했다. 볼코고노프에 따르면 김일성은 50년 2월4일 평양주재 소련대사 스티코프를 통해 스탈린에게 보낸 암호전문에서 『남한해방을 위한 3개사단 증강용 탄약과 무기등 군수물자공급을 요청』했다고 한다.이에 대해 스탈린은 스티코프를 통해 2월9일 『아무런 위험성이 없고 성공이 전면적으로 보장되는 조건에서 귀하의 남침제의에 동의할 수 있다』면서 북한이 요청한 군수물자 공급지시가 이미 내려졌음을 통보했다는 것. ○스탈린,전쟁 승인 볼코고노프는 스탈린의 이같은 회답은 전쟁개시를 사실상 승인한 것이며 이에따라 김일성은 남침준비에 박차를 가하게 됐다고 밝혔다. 코로트코프의 증언 역시 볼코고노프와맥을 같이하고 있다.『한국전쟁이 어느 편에 의해 발발됐는가는 분명하다.모스크바와 평양이 「해방전쟁」을 일으키기로 결정을 내렸으며 다만 시기에 관해서는 김일성이 단추를 눌렀을 뿐이다』. 요컨대 이같은 사실과 주장은 6·25동란이 일부의 견해처럼 남한의 선제공격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북한의 김일성이 소련및 중공의 지원하에 저지른 남침전쟁이었음을 강력하게 뒷받침하는 것들이다. 그러면 과거 소련은 얼마나 깊이 한국전에 개입했을까?이와 관련,경희대학교의 나종일교수는 지난 20일 「현 상황에서 한국전쟁의 재조명」이란 주제하에 열린 국제학술세미나에서 한국전에서의 소련의 역할 규명에 나서 관심을 끌었다. ○소련,광범위 개입 이 세미나에서 「소련과 한국전쟁」이란 주제논문을 발표한 나종일교수는 러시아를 비롯한 공산권측에서 새롭게 공개된 자료들을 인용,한국전에서의 소련의 개입정도가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던 것보다 훨씬 깊고 광범위했다고 주장했다. 나교수는 1950년11월부터 1953년 휴전때까지 소련은 연인원 6만∼7만명의 공군을 참전시켰으며 조종사 외에 레이다,통신,방공,방역 등의 병과에서도 파병을 했다고 밝혔다. 개전 초기 1개 항공사단으로 작전에 나섰던 소련의 항공부대는 중공군의 요구로 확충되기 시작,50년 11월부터는 3개 항공사단,1개 고사포사단,1개 독립연대로 편성된 제64독립항공군단으로 증강됐다고 한다.또한 같은 세미나에 참석했던 러시아의 이고르 셀레바노프장군(78)은 자신이 51년 스탈린의 특명으로 북한에 급파돼 유엔군의 세균살포 여부에 대한 역학조사를 실시한 바 있다고 밝혀 상당수의 의무관련 요원들도 한국전에 참가했었음을 분명히 했다. ○세균전 “사실무근” 그러나 지난 50년4월부터 52년말까지 소련군준장으로 북한 인민군의무감실 수석고문으로 근무했던 셀레바노프장군은 전문요원들의 조사결과 유엔군이 세균을 살포했다고 한 북한의 주장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고 증언,한국전전문가인 브루스 커밍스교수(미시카고대)의 세균탄사용 주장에 찬물을 끼얹었다. 한편 가브릴 코로트코프박사도 같은 날 경희대 주최 세미나에참석,「한국전쟁에 관한 새로운 시각」이란 주제발표를 통해 『지난 50년9월 유엔군이 인천에 상륙한 직후 스탈린의 지시로 소극동군 50만명이 한국전 투입에 대비,북한­소련국경에 배치됐으나 며칠뒤 스탈린이 다시 내린 명령에 따라 철수했다』는 새로운 사실을 밝혀 주목을 받았다. 코로트코프박사는 『당시 국경으로부터의 소극동군 철수는 휴가중이던 스탈린과 중공의 모택동이 급파한 주은래의 논의결과에 따른 것』이라면서 『스타린은 당시 미국과 전쟁을 할 준비가 돼있지 않은 상황에서 극동군을 한국전에 투입,미국과 전쟁하는 것을 원치 않았었다』고 밝혔다.그러면서 코로트코프박사는 『한국전쟁은 스탈린의 주도하에 김일성이 대리전을 치른 것』이라고 단언했다. ○“김일성이 대리전” 특히 나교수는 6·25와 관련,「선제타격작전계획」이라는 남침계획이 북한에 와있던 소련군사고문단에 의해 작성됐음이 이 계획의 번역작업에 참여했던 주영복씨(인민군 2군단 공병부부장)등 전인민군 간부들의 증언으로 밝혀졌다고 말했다. 이들에 의하면 당초「선제타격작전계획」은 김일성과 스탈린간에 남침공격에 대한 합의가 이뤄진 뒤 김일성의 지시에 따라 총참모장 강건이 작성했다고 한다.그러나 이를 검토한 소련군고문관들이 그 내용의 부실함을 지적,초대 군사고문단장인 스미르노프소장이 직접 작성했으며 이를 소련출신 인민군 간부들이 번역했다는 것이다. 「선제타격작전계획」이란 38선 전 전선을 따라 탱크를 배치,일거에 집중화력을 퍼붓는다는데서 붙은 이름. 소련군사고문들이 「선제타격작전계획」을 언제 작성했는가 하는 시점에 대해선 이견이 없지 않으나 소련공식문서에 따를 경우 대략 1950년 2∼3월초였던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자료에 의하면 1950년5월5일 북한주재 최고군사고문 바실리예프 중장은 그해 6월∼7월 사이에 고문관들이 수행할 세부활동계획을 수립한 것으로 돼있다.이 계획에는 ▲38선으로 이동하는 동안에 실시할 군사훈련에 관해 인민군총참모장에게 내릴 훈련지침과 ▲적 해안에 대한 상륙작전준비계획과 적해안 점령계획 등이 들어 있는데 이는 근대적 군부대가 대규모의침략공격작전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활동지침을 총망라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러시아의 역사학자 유리 키르신도 소련과 북한이 남침계획을 수립한 시점이 일반적으로 알려진 1950년6월초보다 조금 앞선다고 주장하고 있다. ○참호구축에 주력 그는 그 근거로 다음 몇가지를 들고 있다. 첫째는 북한군이 1949년초부터 공격위주의 훈련을 한 점이다.키르신은 1949년1월2일∼16일 사이에 있었던 총참모부 훈련은 주로 참호구축에 관한 것이었다고 지적했다.둘째는 소련군의 대북한 무기원조가 1949년 들어 크게 증가한 것이며 셋째는 공병들의 훈련이 공격 위주로 실시된 사실이다. 소련 국방성 중앙문서부의 자료에 따르면 1948년 인민군 창설 당시 북한에 파견된 소련군사고문은 모두 4백70명이었다고 한다.이 숫자는 1948년 2백17명,1949년에는 1백88명,1950년엔 1백48명으로 다시 축소됐다. ○“남 전쟁능력 미흡” 그러나 나교수는 1950년4월 이후에도 소련군사고문들이 계속 북한으로 파견됐다고 주장했다. 증언들에 따르면 소련군사고문들은 전선에서 전황을보고받았을 뿐 아니라 전선 사령부를 쫓아서 남하,경북 김천소재 직지사에 일시 주둔하기도 했으며 전쟁확대에 따라 후방의 고위사령부로 집결하는 식으로 이동했다고 한다. 이들 소련군사고문들은 50년9월28일 유엔군이 38선 이북으로 진격하자 일절 예하 전선에 출동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다.이같은 조치는 소련군이 포로가 될 경우 야기될 미·소간의 군사적 충돌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앞서의 키르신이 찾아낸 문서들 가운데는 국군과 미군고문관에 대한 소련정보기관의 평가도 들어있는데 이것은 스탈린이 한국에서 전쟁을 시작하려는 생각을 갖게 된 원인의 하나가 남한의 전쟁수행능력이 매우 미약하다는 정보 때문이었다는 주장을 뒷받침해주는 것이다. 1948년 소련정보에 의하면 국군은 훈련부족과 탱크·포병·조종사 등 전문 요원의 부족,전투경험의 부재,저하된 사기로 근대 군대의 요건을 갖추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나교수는 현직 소련외무성 관리 아닌(혹은 발레노프·둘다 가명)의 말을 인용,스탈린이 오히려 한국전에 더 열광적이었다고 주장했다.아닌에 의하면 스탈린은 중국에서의 내란의 진전과 동구권에서의 사회주의 국가군 건설, 소련경제의 호전에 따라 한반도로 관심을 돌렸다는 것. ○“스탈린이 더 열성” 이같은 아닌의 주장은 지금까지의 일반론, 즉 한국전을 시작하는데 있어 김일성이 열성적이었으며 스탈린은 마지못해 미군개입이나 빠른 성공여부에 관헤 여러차례 다짐을 받고 승인했다는 것과는 상당히 거리가 먼 것이다. 한편 1950년초 김일성이 스탈린을 만나고 귀국한 직후 보병 3개사단,1개 항공사단,1개 탱크여단이 즉각 증강될 수 있었던 것은 스탈린이 그 이전에 한반도를 적화통일시키겠다는 야망을 갖고 있었음을 방증한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전후 42년이 지난 지금까지 6·25와 관련한 소련정부의 공식문서는 공개되지 않고 있다.동시에 1백만명에 달하는 병력이 직·간접으로 한국전과 관련을 맺었음에도 불구,소련정부는 지금까지 참전사실 조차 인정하지 않고 있다.다만 소련군 기관지 「적성」이 지난 89년 소련공군의 한국전 참전사실을 보도한 바 있지만 공식발표는 아니었다.따라서 김일성의 전쟁계획 승인이유와 한국전 참전동기 역시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정의의 전쟁」 강변 북한은 아직도 6·25를 「정의의 전쟁」,「민족해방전쟁」이라고 강변하고 있다. 남침전쟁 도발 42년이 지난 오늘에도 북한은 6·25를 대미 「조국해방전쟁」이라고 호도,이를 통해 김일성독재정권의 영구유지를 획책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달 6·25동란을 일으켰고 그 연장선상에서 무력에 의한 혁명전략을 고수하고 있는 북한.그 북한이 오늘에 이르러서는 다시 이 강토를 핵공포로 몰아넣고 있음을 볼 때 「남북합의서」의 발효에도 불구,우리의 대북 경계심을 풀기엔 아직 이른 것 같다.
  • 6·25관련 구소 극비문건 공개/러시아 군사연 코로트코프박사

    ◎「남침 D­데이」 김일성이 선택했다/“인민군 서울 진격” 소대사 본국 급전/미군 인천상륙하자 김일성 “나는 실패했다” 당황/스탈린 수습책임 중국에 떠넘기며 김에 등돌려 다음은 러시아 국방부직속 군사연구소 책임연구원 가브릴 코로트코프박사가 비밀문건을 중심으로 밝혀낸 한국전쟁과 북한 김일성의 항일빨치산투쟁,집권과정등에 관한 내용의 요약이다. ▷한국전쟁 관련◁ 한국전쟁이 어느 편에 의해 발발됐는가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모스크바와 평양이 「해방전쟁」을 일으키기로 결정을 내렸으며 다만 시기에 관해서는 김일성이 6월25일 단추를 눌렀을 뿐이다.당시 평양주재 대사 스티코프가 개전 당일 스탈린에게 보낸 긴급 전문에는『조선인민군이 강을 습격하고 아주 빠른 속도로 서울로 진격하고 있다.평양은 아주 조용한 분위기이며 사람들은 누구도 전쟁개시 사실을 모르고 있다』고 씌어 있다. ○평양시민도 몰라 또 국방부 문서보관소에 있는 「작전계획 초안」에는 『6월25일,○○탱크연대는 ○○도시로 향한다.○○보병사단은 ○○방향으로 진출한다』는 식으로 연대급 이상 부대의 목표가 구체적으로 명시돼 있으며 이밖에 「서울점령 초안」도 포함돼 있다. 전쟁이 초기 승세에서 미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패색이 짙어지자 김일성은 크게 당황했다.당시 스티코프가 스탈린에 보낸 전문에는 『김일성이 쇼크를 받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그의 군대지휘와 국가지도는 엉망이 되고 있다.김은 지하사령부에서 본인에게 「나는 실패했다.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나는 또다시 빨치산투쟁을 하는 것외에는 다른 길이 없을 것같다.(미군의 진격이 너무 빨라서)상황이 긴박하기 때문에 스탈린에게 부탁해 나의 생명을 보호해 달라」고 부탁했다』고 돼있다. ○“김일성 무능” 불만 스탈린은 10월 전쟁이 실패했음을 느끼자 수습책임을 중국에 떠넘기기 시작함과 동시에 초기에는 매우 빈번히 김과 전문을 주고 받았으나 이때부터는 김에게 아무런 답신도 보내주지 않음으로써 실망감을 표시했다. 당시 스탈린측근으로 총참모부 작전부장이었던 스테멘코 장군은 후일 본인과의 인터뷰에서 스탈린이 『김은 아주 무능한 장군이다.그가 어려운 시기에 처해 의지를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그러나 대체인물이 없으니 살리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고 털어놓았다.또한 본인이 극동군총사령관 말리노프스키원수 휘하에서 한국전 정보담당 장교로 재직시 그는 김일성을 한번도 이름으로 호칭하는 법이 없이 오직 「모자를 쓴 대위」라는 별칭으로 부르면서 『그는 진짜 군인이 아니다.군대지식도 적고 전쟁도 제대로 지도하지 못한다』고 불평했다. ▷한국과 관련된 소련군◁ 45년 8월 소련군의 북한 진주부터 53년 종전까지 한반도와 직·간접적으로 관련을 맺은 군인은 모두 약 1백만명으로 추산되고 있다.특히 한국전쟁과 관련,훈장을 받았거나 전사자·부상자 및 유가족들은 2차대전 심지어는 최근의 아프간전쟁의 경우와는 판이하게 아무런 혜택도 누리지 못하고 있다.이러한 상황은 소련당국(지금은 러시아정부)이 한국전 개입사실을 아직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본인 역시 한국전쟁과 관련해 적성훈장을 받았다.그러나 훈장증서에는이상하게도 「조선전쟁에서 주어진 과업을 수행했으므로 이 훈장을 수여함」으로만 돼 있고 구체적인 공적사항은 전혀 없다.이는 극히 이례적인 것이다. ▷항일빨치산투쟁◁ 김일성이 붉은 군대에 정식 입대한 것은 1942년 7월17일이었다.이같은 사실은 45년 8월30일 그가 적기훈장을 수여받은 훈장증서에서 명백히 나타나 있다.김이 훈장을 받게 된 공적사항으로는 항일빨치산투쟁을 훌륭히 수행했다고 돼 있다.그러나 이에 앞서 김이 소련군 대위로 진급시 승진 상신서에는 「진지첸(김일성)을 만주에서 빨치산대장으로 활동하도록 파견했다」는 내용이 들어있다.이는 김일성이 북한당국의 공식 선전에서 처럼 스스로 빨치산부대를 편성,지휘한 것이 아니라 당시 소련극동군의 명령에 의해 이루어졌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소군이 항일 명령 특히 김일성이 45년 9월 중순 북한지도자로 선발되기 위한 면접을 하기 직전 심사위원격인 극동군 전선사령관 푸르가예프상급대장과 동 군사위원 슈킨대장 앞으로 제출된 김의 인물평가서에는 ▲동만주에서 빨치산활동 참가 ▲하바로프스크 군사학교에서 특수과정 수료 ▲수차 걸쳐 사령부로 부터 표창 ▲42년 입대,현재 대대장등 연대순으로 기록돼 있는데 입대 전에 이미 소련군 당국으로 부터 표창을 수차 받은 사실을 특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김이지도자로선택된과정◁ 45년 9월 모스크바는 승전의 축제분위기속에서 병력을 대폭 축소키로 함에따라 김일성은 아주 곤란한 입장에 빠졌다. 그가 소속된 88특수저격여단이 해체될 운명에 놓여 있는데다 고등교육도 받지 못한 그로서는 다른 부대로의 전출이나 진급을 바라보지 못할 상황이었기 때문이다.이때 김은 『특별인터뷰를 위해 즉각 하바로프스크로 돌아가라』는 돌연한 명령을 받았다. 하바로프스크에서 당시 극동군 전선사령관 푸르가예프와 군사위원 슈킨을 면접했다. 두 장군은 몇가지 경력을 물은 후 김에게 『소련정부의 결정에 따라 한국국적을 가진 전문가들이 북한에 보내지고 있다.현재 북한은 새 조국을 건설할 전사들이 필요하다.귀관은 가장 빠른 시일내에 특별임무를 받게 될 것이다』고 말했다. 이들의 이같은 발언은 김일성이 이미 북한의 지도자로 결정돼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지도자후보 분석 이에앞서 모스크바에서는 북한의 새 지도자감으로 많은 후보들이 심도있게 분석,평가되었다. 주로 장시우,박동홍 등 코민테른그룹과 박헌영,김두봉 등 자생적 공산주의자,김일성등 만주그룹,그리고 조만식선생등 비공산 민족주의자들이 대상이었다.그러나 스탈린은 이들이 군대지식이 없다는 이유로 모두 거부했다. 스탈린은 결국 그의 구미에 딱맞는 인물을 물색한 결과 김일성이 돌연 등장하는 계기가 됐다. 이렇게 하여 지도자로 선택을 받은 김은 45년 10월2일 부터 「진지첸」이란 이름을 버렸으며 8일에는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소련함정 푸가초프호를 타고 원산에 도착했다. 당시 원산시 소련 군정책임자인 크루지코프 대좌가 영접했는데 그는 후일 본인과의 면담에서 김일성 영접은 평양의 스티코프 대장의 긴급명령으로 행해졌다고 말했다.
  • 6·25「남침」 입증 소문서 첫 공개/러연 군사연구원

    ◎“평양시민 개전사실 전혀 몰라/김일성항일투쟁 소군이 지시” 【모스크바 연합】 북한주석 김일성이 자신의 위업으로 내세우고 있는 항일 빨치산투쟁의 진상과 스탈린에 의해 지도자로 선택된 과정,그리고 한국전쟁 기원 등에 관해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진상들이 담긴 구소련의 비밀문건들이 처음으로 공개됐다. 러시아 국방부직속 군사연구소 책임연구원 가브릴 코로트코프 박사(역사학·아카데미준회원)는 16일 연합통신과 가진 단독회견에서 김일성의 항일 빨치산투쟁은 자발적인것이 아니라 소련군의 명령에 의해 수행된 것이며 한국전쟁이 북한에 의한 남침임을 여실히 증명하는 비밀문건들을 제시했다. 특히 한국전쟁과 관련,당시 평양주재 소련대사 스티코프가 개전 첫날인 6월25일 스탈린에게 긴급히 보낸 암호전문에 따르면 『조선인민군이 강을 습격,서울을 향해 매우 빠른 속도로 진격하고 있다.평양은 평온한 분위기이며 시민들은 전쟁이 일어난 사실을 모르고 있다』고 돼있어 어느 쪽이 전쟁을 일으켰는지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코로트코프박사는 소련 쿠데타가 실패로 돌아간 후인 지난해 10월 당시 국방장관 샤포슈니코프 원수(현재 독립국가연합 통합군 총사령관)로 부터 『한국전쟁에 관한 진실을 규명,공식적인 입장을 정립하라』는 특별지시를 받고 93년7월까지 작업완료를 목표로 자신을 팀장으로 한 5명의 연구원이 현재 비밀문건들을 중심으로 연구중이라고 밝혔다.
  • 외언내언

    우상과 기념비의 왕국,북한에 또하나의 초대형 조형물이 세워질 모양이다.내외통신에 따르면 북한은 지난달 30일 평양 보통강변에서 총리 연형묵,군총참모장 최광등이 참석한 가운데 「조국해방전쟁(6·25)승리기념비」건설 착공식을 가졌다.정전 40돌인 내년도 제막을 목표로 건립되고 있는 이 비가 완공되면 북한에서 가장 큰 기념비가 될것으로 알려졌다.◆보통강변의 4만5천평 부지에 세워질 이 전승비는 1만6천여평에 달하는 기념비 건립구역에 높이 15∼20m의 동상들로 중심주제 군상을 세우고 도로 양옆엔 「대전해방전투」「낙동강도하전투」「해방된 남녘땅에서」「1211고지 방위자」「월미도영웅들」등의 이름이 붙은 부주제군상을 수십쌍 건립한다는 것이다.또 인민군의 기상을 형상화한 높이 27m의 기본주제군상과 무게 4백t,길이 15m의 헌시비와 2중처마를 갖춘 대문 등도 들어선다고 북한방송은 전했다.◆북한의 6·25전승비 착공은 남침 즉,이땅에 수백만명의 사상자와 1천만 이산가족을 남긴 김일성의 반민족적 행위를 정당화하는 역사 왜곡이라는 점을 우선 지적하고 싶다.또 자기들이 쳐내려왔다가 유엔군에게 밀려서 쫓겨난 전쟁을 이겼다고 주장하며 전승비 운운하는 것도 어불성설이다.▲최근 북한을 다녀온 서방언론들은 식량난으로 산에서 풀을 캐먹는 북한주민들의 참상을 온 세계에 적나라하게 폭로하고 있다.북한주민의 민생고를 가중시킬 이 초대형 기념물 건립이 외부세계에 어떻게 비칠 것인가도 평양은 한번쯤 생각해 볼 일이다.◆김정일의 『직접적인 발기』에 의해 건립된다는 이 기념비는 바로 김의 현실인식과 통치방식 그리고 남북관계 전개방향을 예시해 주는듯 싶어 암울한 생각이 든다.김의 의식은 아직 6·25동란때의 분단,적대 전쟁의식에서 정지된 상태의 인물임을 새삼 확인해 주고 있다.지금 굳이 무언가 세워야 겠다면 통일을 위한 화해의 기념비가 아닐까.
  • 「보훈의 달」의미 되새기는 「호국 할머니」오금손여사(이사람)

    ◎「반공강연」 22년간 4천61차례/독립군 유복녀… 「군번없는 간호장교」로 6·25 참전/“「무조건 통일」 주장하는 젊은이들 안타까워요” 『북한공산집단의 남침으로 동족상잔의 처절한 전쟁을 치러야했던 우리들입니다.더욱이 북한의 집요한 남침위협속에 처해 있는 오늘날에도 대부분의 국민들은 당시의 비참함과 참혹상을 잊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중국에서 독립군 유복녀로 태어나 광복군생활을 거쳐 6·25전쟁에 참전해 꽃다운 젊음을 바쳤던 오금손여사(62·대전시 중구 산성동 우성아파트 107동 910호)가 바라보는 우리의 현실은 안타깝기만 하다. 『대학가에서 인공기가 거리낌 없이 나부끼고 있습니다.젊은 학생들이 무조건 「통일」「통일」하는데 저들을 잘 모르고 하는 짓들입니다.하기야 국민의 70%가 6·25전쟁을 경험하지 못했으니 북한공산당의 잔학상이나 기만성을 알 리가 없겠죠』 그래서 그런지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1일 아침 일찍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대전 국립묘지를 찾아 집을 나서는 오여사의 발걸음은 왠지 무겁게만 보인다.오여사가 젊은 가슴을 향해 자신의 파란만장한 삶을 증언하기 시작한 것은 지난 70년3월 대한상이군경회로부터 호국의식계도 강사로 임명되면서부터였다.오여사는 호국강연을 그때부터 22년동안 모두 4천61회나 했다. 『저는 1930년 2월20일 독립군 유복녀로 중국 북경에서 태어났습니다.아버지(오흥삼)는 제가 태어나던 해 왜놈들에게 체포돼 행방불명 되셨고 어머니(이봉녀)는 저를 낳은지 1주일만에 왜경들에게 끌려간뒤 소식이 끊겼습니다』 『갑자기 고아가 된 저는 14살때까지 중국군 장군의 수양딸로 자라다 15살때인 1944년3월 아버지와 함께 독립운동을 하던 오세덕씨를 따라 독립군본부에 들어가 광복군 일원으로 활동하다 해방을 맞았습니다』 오여사가 꿈에도 그리던 조국의 품에 안긴 것은 해방 이듬해였다.그러나 서울엔 일가친척이 하나도 없었다. 『하느님이 도우셨던가 봅니다.당시 청진동에서 순천병원을 개업한 양근섭씨가 오갈데 없는 저를 양녀로 삼아 1년후에 개성간호전문학교에까지 보내주셨습니다』 스무살이 되던 1949년3월 간호전문학교를 나온 오여사는 개성도립병원에 취직해 보람과 긍지를 갖고 나이팅게일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그러나 얼마안가서 하늘과 땅이 통곡한 6·25가 터졌다. 『그때 저를 비롯해 개성도립병원에 근무하던 간호원 24명이 모두 간호장교(소위)로 자원입대했습니다.군번은 없었습니다.그래서 저희들은 지금도 남아 있지만 팔뚝에 배치부대이름인 「백골부대」란 문신을 새겼습니다』 야전병원엔 연일 부상자들이 쏟아져 들어왔다.의약품이라곤 다이아진과 압박대 뿐이었다. 휴전무렵 금화지구전투에서 오여사와 친구 한명은 인민군의 포로가 됐다.인민군부대에는 1백50여명의 양민들이 불잡혀 있었다.인민군들은 한 여학교 교사를 국방군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면도칼로 가죽을 벗겨 살해했다.오여사의 친구는 국방군의 위치를 대지 않는다고 젖무덤을 도려내 살해했다.붙잡힌 양민 대부분이 그렇게 죽어갔다.오여사도 손톱과 발톱 이빨을 모두 뽑혔다. 오여사는 54년봄에 서울로 왔다.냉차장사·화장품장사등 닥치는대로 일을 했다.돈이 조금 모이길래 윤락여성과 탈선청소년들의 선도일에도 간여했다. 오여사는 건강이 좋지않아 지난 82년 강원도 화천군 간동면 구만리로 내려갔다.그곳에 「독립군 정양원」을 건립,상이군경과 독립유공자들이 마음놓고 쉴 수 있게 했다. 지난 90년 11월 호국영령들이 묻힌 곳에 가까이 있기 위해 대전으로 내려온 오여사는 지난해 7월엔 중국을 방문,그곳에 살고 있는 동포들에게 3개월간 호국강연을 하기도 했다. 『이달에는 거의 매일 강연을 해야될 것 같습니다.영령들이어 고이 잠드소서』 호국강연을 하기위해 발길을 돌리는 오여사의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 최근 잇단 「모습공개」에 숨은 뜻(오늘의 북한)

    ◎김정일,「지도자이미지」 심기 안간힘/「4·15행사」전후해 서방인사들 이례적 접견/권력승계 「자연스런 분위기」조성 초점/대인접촉 기피증 불구,정권차원 연출 『영웅적 조선인민군 장병들에게 영광있으라』 지난 4월 25일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거행된 조선인민군 창설 60주년 기념식에서 김정일이 전인민군에 내린 격려사다. 오진우 인민무력부장(원솔)의 「열병준비완료」보고에 이은 이 짧은 격려사는 김정일의 육성이 대외에 처음으로 공개됐다는 점에서 의미를 갖는다. 공식석상에서의 이같은 김정일의 스피치는 지난 80년 제6차 당대회에서 후계자로 위상이 잡힌 후 신비스런 이미지 조작에만 전념,대중앞에 거의 모습을 나타내지 않던 그가 본격적으로 지도자로서의 「자기모습 드러내기」에 나섰음을 알리는 신호라는게 북한 전문가들의 풀이다. 김정일의 발언은 이제까지 언론매체에 의해 보도만 돼와 서방언론은 그를 「수수께끼의 인물」이라고 묘사하고 있을 정도다. 김정일의 이같은 신비스런 「이미지 만들기」는 아버지 김일성에 미치지 못하는 능력,외모,카리스마등을 극복하기 위한 정권차원의 「연출」인 동시에 대인접촉을 기피하는 개인적 성격에서 비롯됐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북한 고위외교관으로 있다 지난해 8월 망명한 고영환씨는 『김정일비서는 사람들과 만나는 것을 극도로 기피, 「실무지도」를 나설 때는 해당공장을 다 비우게할 정도』라고 밝힌 바 있다. 서방언론들이 일찍이 이같은 김정일의 정치스타일을 두고 「아방궁 정치」라고 꼬집은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 김정일의 「모습드러내기」는 지난 4월 김일성의 80회 생일 경축행사를 전후해 두드러지고 있다. 로이터·AFP등 김일성80회 생일행사 취재차 평양을 방문했던 외신들은 김정일이 경축연회에서 비공산권 사절단을 접견함으로써 서방측에 처음으로 자신을 「소개」했다고 보도했다. 김정일은 생일행사 기간중 일본 자민당 대표들과 만나 환담을 나누었으며 에드워드 슈라이어 전 캐나다총독,로드리고 카리소 전 코스타리카대통령등 세계평화정상회의(총재 문선명 통일교교주)대표들과 주석궁인 금수산의사당에서 기념촬영을 하기도 했다. 김정일의 지도자로서의 「모습드러내기」는 지난 89년말 김정일이 쿠바 공산당기관지「그란마」와 가진 서면인터뷰와 이 회견사실을 중앙방송이 두달 뒤 이례적으로 공개한데서 시작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당시 북한에서 해외언론과 기자회견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김일성주석 뿐이었다. 설사 해외언론과 기자회견을 했다하더라도 북한에서 그 내용을 관변 매체를 통해 선전한다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일일뿐더러 어느 누구도 한 적이 없다. 따라서 서면 인터뷰였다 할지라도 김정일이 해외언론과 접촉한 것은 그 사실 자체만으로도 내외의 주목을 받기에 충분한 일이었으며 언론매체를 통한 회견사실의 보도·선전은 김정일이 김일성과 동일선상에 올라섰음을 시사한 것이었다. 한편 지난 90년 말부터 전개되고 있는 김정일의「친필서한」공개도 같은 맥락으로 분석된다. 즉 「자상한 지도자 김정일」이 인민의 곁에 존재하고 있는「실체」임을 부각시킴과 동시에 권력승계의 자연스런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한 의도된 「연출」이란 풀이다. 김정일의 업무 지시나 독려는 「지시」나 「친필지시」,「친필서한」으로 구분돼 이루어진다는게 고영환씨의 말이다. 「지시」는 「근무기강을 확립할데 대하여」와 같은 제목으로 내려오는 포괄적 지시사항을,「친필지시」는 해당사업담당자가 기안한 내용에 김정일이 직접 수표(서명)한 지시서를 말한다. 「친필서한」은 모든 내용을 김정일이 직접 써 공개적으로 내리는 것으로 지시사항인 경우 반드시 집행해야하는 강력한 힘을 갖고 있다.그러나 이제까지 김정일의 친필서한이 공개된 적은 한번도 없다. 김정일의 친필서한과 관련한 북한 언론매체들의 보도특징은 각 단체 기관들이 김정일 앞으로 보낸 충성의 편지와 김정일의 친필회답서한내용을 공개하고 이를 주제로 한 인민들의 「반향」을 내보내는 것이다. 지난 90년말 북한 언론들은 관영 중앙통신사의 5국 2세포 당원들과 조선문학창작사 문인들이 김정일에 보낸 충성의 편지와 회답서한 사실을 공개,『혁명의 한길에서 동지적 의리와 사랑으로 굳게 맺어진 당중앙(김정일을 지칭)과 인민대중 사이의 혈연적 관계를 뚜렷이 보여주는 것』이라고 선전했다. 특히 지난해 김정일의 49회 생일에 즈음,북한군 제525군부대원들이 「군사의 영재」「탁월한 군사전략가」「최고사령관」등 찬양수사를 붙여 보낸 「맹세문」과 『우리당에 충실한 혁명무장력에 영광이 있으라』고 한 김정일의 친필회답서한 주제의 보도 역시 김정일의 군부장악과 관련한 최초의 「모습드러내기」로 파악된다. 김정일의 권력승계가 막바지에 접어든 것으로 보이는 북한은 올해 들어서도 평양방송등을 통해 김정일이 지난 1월1일 정무원 외교부 일꾼들에게 「새로운 사업성과에로 고무하는」친필서한을 보냈다고 전한 바 있다. 김정일은 또 같은 달 8일에도 평양시 창천국민학교 당1·2세포 14명의 노당원들에게 『40여년간 당을 따라 힘차게 전진하여온 노당원 동지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는 내용의 회답친필서한을 보낸 것으로 전해졌다. 김일성의 80회생일과 북한 인민군 창군60주년 기념행사등에서 대외에 내비친 김정일의 행보,그리고 최근 3년동안 그가 내린 친필서한의 공개·교양집회 등은 김정일이 이제 바야흐로 지도자로서의 「모습드러내기」를 본격화한 것이란 점에서 김일성으로부터의 권력승계 시기와 관련,주목을 받고 있다.
  • 국무회의

    ◎김포등 「지하기계소리」 의구심 제거지시/정 총리/투신사 특융구체안 새달중순까지 마련/이 재무 제23회 국무회의는 대통령령안 4건과 일반안건 7건 보고안건 1건등 모두 12개안건 심의와 신임 김용채정무1장관의 신임인사등으로 약1시간50분동안 진행됐다. 김정무장관은 인사에서 『중요한 시점에 정무장관에 임명됐다』면서 『앞으로 당정간의 가교역할을 충실히 해 원만한 협조를 이루어나갈 것』이라고 강조. 김장관은 이어 『오는 30일 14대국회회기가 시작되며 6월 개원협상과 지자제법 개정안등 중요 법안처리를 앞두고 있으므로 관련부처는 적기에 필요법안을 제출,법시행이 지체되지 않도록 만반의 준비를 해달라』고 당부. ◎김기춘법무부장관은 이날 안건외에 전시특례법과 대통령긴급명령권의 정례보완개정안을 제출하면서 한국의 남북대치상황하에서의 특수상황을 다시한번 상기. 김장관은 『세계적으로 냉전이 종식된 것으로 인식하고 있으나 한반도에서는 최근 인민군 비무장지대 침투에서 볼수있듯 냉전이 계속되는 상황』이라면서 『이번 전시법령 개정안 통과를 계기로 국민들의 안보의식이 해이되지 않고 다시한번 정신무장을 해야할 필요성이 강조된다』고 언급. ◎이동호내무부장관은 새질서 새생활운동 추진현황에 대해 보고한뒤 교통사고줄이기 운동과 에너지절약운동등에 대한 세부계획을 보고. 정원식총리는 이에대해 『지난해 교통사고로 숨진 사람은 모두 1만2천8백명에 이르고 있다』면서 『올해에는 사망자 수를 8백명쯤 줄이는 것이 목표이며 5년이내에 1만명이하로 낮추는 것이 과제이므로 앞으로 내각은 범정부·범국민적 차원에서 이 운동을 적극 벌여 나가달라』고 당부. 정총리는 『지난1∼3월 기간동안의 교통사고 사망자가 전년도와 비슷했으나 4월들면서 조금씩이나마 줄어들어 다행』이라면서 『이는 여러 사회단체와 기관이 노력한 결과이지만 이같은 일시적 효과보다 지속적인 노력으로 소기의 성과가 있도록 하라』고 지시. ◎최병렬노동부장관은 최근 몇몇 언론에 보도된 김포·동두천지역 지하기계음논란문제를 제기하고 『본인이 여러 기사내용을 읽어 보았는데 국방부 등군관계기관에서 이에대한 명확한 설명을 해주어야할 것으로 본다』고 언급. 이에대해 정총리도 『본인도 관심을 갖고 있으나 국방부에서 그동안의 자료와 정보등을 종합적으로 재검토하고 장비·인력을 동원,국민들의 의구심과 불안요인을 조속히 제거하라』고 지시. ◎이용만재무부장관은 투자신탁회사의 경영정상화에 대해 보고한뒤 『차차기 국무회의에서 특별융자계획안을 의결,국민공감대형성을 위해 국회동의를 전제로 한국은행에서 지원금을 지출,투자신탁회사의 결손을 막고 거시적으로 증시회복에 기여할 것』이라고 보고. ▷의결안건◁ ◇무역업무자동화 촉진에 관한 법률시행령(안)◇화물유통촉진법시행령(안)◇자동차정류장법시행령(개)◇별정우체국법시행령(개) ◇「난민의 지위에 관한 협약」및 「난민의 지위에 관한 의정서」가입(안)◇1991년도 정부결산제출(안)◇1991년도 예비비 사용총괄서제출(안)◇1991년도 국유재산증감및 현재액 총계산서제출(안)◇1991년도 물품증감및 현재액 총계산서제출(안)◇개발제한구역내 행위허가(안) ▷보고안건◁ ◇「환경과 개발에 관한 리우데자네이루 선언」및 「의제21」에 대한 서명계획(안)
  • 통일이후 한반도는 어떤 모습일까/영 이코노미스트부설연 예진

    ◎「통일한국」 아시아의 강국 된다/남한여당이 정치주도… 지역감정 사라져/북 노동력 남쪽 몰려 노동시장 혼란 초래/경공업분야 대북투자 확대… 중국·러시아 국경인접지역 크게 발전 『한반도의 통일은 남북한당사자들이 머릿속에 그리고 있는 것보다 훨씬 가까운 장래에 돌발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며 통일한국은 동북아에서 일본에 이어 2인자로 부상할 것이다』 전세계적으로 권위있는 경제·시사문제 전문지인 영국의 「디 이코노미스트」지부설 정보분석기관인 EIU(이코노미스트 인텔리전스 유니트)가 최근 이같은 전망과 통일후 한국의 모습을 그린 「남북한관계 보고서」를 내 놓았다.이 보고서는 EIU가 남북한은 물론,중·소·미·일등 주변 강대국의 광범위한 관련자료를 토대로 작성한 1백17쪽 분량으로 여러 면에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중요한 내용들을 포함하고 있다.보고서 내용을 부문별로 정리,소개한다. ○제반희생 감내해야 ▷통일감당능력◁ 남한사람들은 통일이 가능한한 늦게 점진적으로 이루어지기를 희망할 것이다.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차기정권을 맡는 남한정부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북한경제를 떠맡아야 하는 상황이 올 것이다.EIU는 그 상황이 오더라도 다음 이유로 낙관론을 갖고 있다. 첫째,한국은 동서독선례를 통해 값비싼 시행착오를 거치지 않아도 된다.둘째,동서독의 경우 통일에 따른 제반문제가 무계획적으로 처리됐지만 남한은 정부의 리더십하에 계획에 의한 통일 처리가 가능하다.셋째,북한주민은 현상태가 최악이기 때문에 통일후 이보다 더 나빠지지 않을 것이다.넷째,민간부문에 대한 정부의 영향력과 1천만이산가족의 강한 가족적 유대는 동·서독간에 볼수 없었던 많은 투자가 북한에서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다섯째,대부분의 한국인에게 통일은 그들의 일생에서 가장 중요하고 감격스러운 일이 될 것이기 때문에 수년간의 남북통합에 따른 제반희생을 감내할 뚜렷한 목적의식을 갖게할 것이다. ○광업분야 투자 확대 ▷좋아지는 분야◁ 북한은 풍부한 철·석탄·아연·금을 가지고 있으며 통일후 이 부문에 종사하는 노동자는 직업이 보장될 것이다.금강산·백두산 개발과 일본시장을 겨냥한 스키장등 휴양시설은 개발전망이 밝다.남한의 노동 집약적인 경공업분야 기업들은 북한에 투자를 확대할 것이다.러시아·중국·남북한 국경인접지역이 크게 발전할 것이다. ○농업인력 실업자로 ▷나빠지는 분야◁ 북한은 산악지역이 많아 농사에는 적합하지 않으나 분단후 어쩔 수 없이 무리하게 경작지를 확대해 농토가 황폐화 되고 있다.북한인구의 40%가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나 통일후 이중 많은 인력이 실업자로 전락할 것이다.북한은 화학분야에 집중적으로 투자를 해왔으나 기술이 국제수준에서 크게 미달하고 저임금에 강제징집된 인민병사에 의해 마구잡이 식으로 건설됐다.북한의 화학분야를 살리려면 남북경제를 단절시켜 놓고 남한의 재벌이 북한기업을 인수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수밖에 없다. 현재 평양에는 정부관료를 포함,2백만 주민이 살고 있는데 통일후 이들의 지위는 약화될 것이다. 북한의 경우 노동인력중 여성이 반수이상을 차지하고 있다.통일후 실업문제 해결 방안으로 여성은 가정으로 돌아가는 현상이 나타날 것이다.○국제교통 요충지로 ▷국제적 위상◁ 풍부한 자원,노동력,국내시장의 확대,국제교통요충지로서의 지리적 이점등으로 통일한국은 분명히 강대국이 될 것이다.그러나 경제적으로 일본을 능가하지는 못할 것이다.아시아의 대륙국가중에서 인구,총GNP,1인당GNP,경제구조,지역적 역할,군사력등의 변수를 항목별로 보면 통일한국보다 더큰 나라가 있을수 있지만 종합적으로 평가할때 통일한국은 아시아대륙국가의 최강자가 될 것이다. 중국·러시아등 주변국은 통상파트너로서,투자및 기술의 공급원으로서 통일한국을 필요로 할 것이다.한국은 과거와 같이 이 지역의 종속변수가 아니라 독립변수의 역할을 하게돼 한국역사의 패턴이 뒤바뀌게 될 것이다. ○정치세력 달라질듯 ▷통일한국의 정치◁ 북한은 동독에서와 마찬가지로 통일을 이룩한 남한의 여당을 지지할 것이다.이 경우 여당은 일본 자민당 같은 양상을 보일 것이다.정치세력 판도와 정치이슈도 크게 달라질 것이다. 남한에서의 야당지도자에 대한 지지가 줄어들고 지역감정문제도 통일에 따른 새로운 이슈에 밀려 뒷전으로 물러날 것이다.장기적으로 현대정치의 특징인 이데올로기·계층에 기초한 정당이 출현할 것이다. 북한을 지역기반으로 한 정당이 나오지 않을 것이다.북한사람들은 남한의 번영과 통일을 가져온 정당을 높이 평가하고 그 정당과 동질감을 획득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설사 북한 지역당이 나온다 해도 북한 전역의 통일정당이 나오기는 힘들다.전통적인 지역 라이벌인 평안도와 함경도가 새로운 투자유치를 위해 싸우는 양상을 보일 것이다. ○통화가치 보장 필요 ▷통화동맹◁ 북한1원은 명목상으로 1달러가 조금 안되거나 남한 7백원이 조금 넘는 수준으로 돼있다.그러나 진실된 환율은 어느 누구도 알수 없다. 북한주민의 평균월급이 월 1백원인 점을 감안할때 적정환율은 주요 정책목표를 균형시키는 환율이 될 것이다.즉 북한의 임금을 투자유인이 발생할 정도로 낮게 유지하면서 동시에 남한으로 넘어올 유인이 생기지 않도록 적정수준의 소득을 보장해줄수 있는 환율이어야 한다.특히 남북통합에 따라 필연적으로 발생할 물가상승을 보전할수 있는 소득을 보장해 주어야 한다. ○인구이동 통제 중요 ▷노동력 이동◁ 남한 노동시장은 점점 고갈돼가고 있으므로 북한에서 노동력이 유입될 경우 성장의 걸림돌이 되고 있는 노동력 문제를 완화시킬수 있을 것이다.남한의 기업인은 북한노동자의 유입으로 인한 임금하락 추세를 환영할 것이다.그러나 남한의 노조는 이를 저지할 것이므로 노·사간의 갈등이 표면화되어 통일의 축제분위기는 오래 가지 못할 것이다. 남한경제가 다시 저임금 경제로 되돌아갈 필요가 있는가 하는 의문이 제기될수 있다.결론적으로 북한 저임금 노동자의 과도한 남한유입은 오히려 나쁜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남한이 필요로 하고 수용할수 있는 정도보다 많은 인력이 실업자로 쏟아져 들어와 경제·사회·정치적인 대혼란이 초래될 것이다. 이를 막기 위해 북한인구의 남한유입을 어느 정도 통제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즉 유토피아적인 환상에 젖어 DMZ(비무장지대)장벽을 허물어 내리는 것은 피해야 한다.이는 노동력 이동뿐 아니라 수백만 이산가족 재회를 위한 인구이동에 따른 혼란을 막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통일시기와 비용/통일 생각보다 빨리 95년쯤 올지도/한국은 향후 10년간 6천억불 부담 한국은 2000년까지는 확실히(Certainly)통일될 것이며,95년까지 통일될 가능성도 상당히 있고(Probably),더 빨리 통일될 수도 있다(Possibly).통일은 독일처럼 한 체제가 다른 체제를 흡수·통합하는 형식이 될 것이다. 본기관의 견해로는 KDI(한국개발연구원)가 「통일보고서」에서 제시한 평양이 현노선을 고수하고 북한경제가 장기침체를 겪은후 2000년에 경제통합이 급속히 이루어지는 경우와 같은 상황을 맞이할 것으로 본다.이경우 한국정부는 10년간 투자자금으로 매년 90억∼1백억달러,보조금으로 매년 60억∼1백60억달러를,민간부문은 매년 3백50억달러 정도를 각각 부담해야 할 것이다. 남한은 통일비용 조달을 위해 통일세 신설,통일채권 발행 이외에 해외차입이 필요할 것이며 한국정부는 해외차입을 재벌에 분배하는 방식으로 통일과 관련한 경제운영에서 주도권을 쥘수 있을 것이다. 엄청난 규모의 실업보험금 지급을 막기 위해 북한의 경쟁력 없는 기업들을 가능한한 조속히 재건시켜야 한다.이를 위해 필요한 자금을 해외에서 차입하는 것만으로는 충족시킬 수 없고 한국정부가 원하지 않더라도 외국인 직접투자의 유입은 불가피할 것이다.이 경우 역사적·지리적 여건상 일본이 가장 큰 역할을 하게될 것이며 한국은 이를 피하기 위해 외국인투자 도입선 다변화를 보다 희망하게 될 것이다. 남북이 통일되면 군사비절감이 가능하겠지만 여기에도 한계가 있다.즉 통일후에도 한국은 정예화된 군사력을 유지하고자 할 것이며 이는 여전히 많은 비용을 요구할 것이기 때문이다.다만 남북한 모두 군사인력의 감축은 가능할 것이다.아마도 북한 인민군(1백만명 이상으로 추정됨)이 대부분 해체되고 남한군이 주력이 될 것이다. 경제적인 면에서 북한인민군의 실업문제는 커다란 사회문제로 등장할 것이다.일부는 남한의 고갈된 노동시장에 인력공급원이 될수 있겠지만 남한기업은 광산업 같은 일부분야를 제외하고는 훈련되고 교육이 잘된 남한 노동력을 선호할 것이다. ◎북한의 개혁전망/김일성체제 고수싸고 내부진통 예상/중국처럼 점진적 개방정책 택할것 김일성체제는 이제 개혁을 하느냐 현 노선을 고수할 것이냐 하는 선택에 직면해 있다.어느쪽을 선택해도 위험은 따를 것이다. 북한경제는 루미나아와 같은 민중봉기나 북한내부의 쿠데타를 유발할 정도로 악화될 가능성이 크다.대부분의 북한주민들은 바깥 세상에 대해 알지 못하지만 자신들의 생활이 비참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김일성집권 초기의 민족주의적 자존심,경제적 성공은 희미한 옛 기억이 되고 있다.상대적으로 혜택을 받고 있는 중간관리층은 외부세계에 대해 상당히 알고 있으며 날마다 상부의 모순된 지시를 이행하는데 넌더리가 나 있다.특권 계층인 수천명의 고위 당정 간부와 외교관들은 정책 노선이 강·온파로 나뉘어져 있을뿐 아니라 세대간 격차문제도 안고 있다.젊은 관료집단에게서는 김일성의 게릴라시절 동료들이 가졌던 충성심을 찾을 수 없다. 외관상 북한은 안정되고 통일되어 있는것 같지만 내막은 놀랄 정도로 균열돼 있다.때만 오면 급속히,그리고 완벽하게 무너져 내리기 쉬운 사회이다. 김일성의 후계자가 취할 수 있는 선택은 북한주민의 생활수준을 높이고 경제소생에 필요한 자본 도입처로서 남한과 일본이 있다.남한보다는 일본에 매달릴 가능성이 크지만 일본과는 정치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가까이 하기엔 한계가 있다.김일성 이후의 북한은 중국처럼 점진적 개혀과 개방을 선언할 것이며 이 과정에서 일본이 중간에 낄 수도 있으나 결국 남한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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