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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일성사망 북한방송발표 요지

    전체 당원들과 인민들에게 고함.우리의 전체 노동계급과 협동농민들,인민군 장병들,지식인들과 청년학생들,조선노동당중앙위원회와 조선노동당중앙군사위원회,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와 중앙인민위원회,정무원은 조선노동당중앙위원회 총비서이시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석이신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1994년 7월8일 2시에 급병으로 서거하셨다는 것을 가장 비통한 심정으로 온 나라 전체 인민들에게 알린다. 인민대중의 자주위업을 위하여 한평생을 바쳐우시었으며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조국의 융성번영과 인민의 행복을 위하여,나라의 통일과 세계의 자주화를 위하여 쉼없이 정력적으로 활동하시던 우리의 경애하는 어버이 수령님께서 너무도 애석하게 우리곁을 떠나시었다. 경애하는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일찍이 어리신 나이에 혁명의 길에 나서시어 80고령에 이르는 장구한 기간 우리 당과 우리 인민을 현명하게 영도하시어 우리 민족사와 인류역사에 영원히 빛날 위대한 업적을 쌓아올리시었다. 경애하는 김일성동지는 영생불멸의 주체사상을 창시하시고 빛나게 구현하시어 혁명과 건설을 승리의 한길로 이끌어오신 걸출한 사상이론가이시고 영도의 천재이시었으며,인민을 끝없이 사랑하시고 인민을 위하여 모든 것을 다 바쳐 오신 위대한 인민의 수령이시었다. 경애하는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오로지 그것을 위하여 한평생을 받쳐오신 조국의 통일과 주체의 혁명위업의 완성을 보시지 못하고 애석하게도 서거하시었으나 우리 혁명의 계속 승리한 길을 따라 힘차게 전진할 수 있는 가장 위력한 무기와 반석같은 토대를 마련해 주시었다. 오늘 우리 혁명의 진두에는 주체혁명 위업의 위대한 계승자이시며 우리당과 인민의 탁월한 영도자이시며,우리 혁명무력의 최고사령관이신 김정일동지께서 서 계십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심장은 비록 고동을 멈추었으나 어버이 수령님의 거룩한 존엄과 인자하신 영상은 우리 인민의 마음속에 영원히 간직되어 있을 것이며 수령님께서 쌓아올리신 위대한 혁명업적은 역사와 더불어 천년만년 길이 빛날 것이다. 조선노동당중앙위원회,조선노동당 중앙군사위원회,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중앙인민위원회,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무원. 1994년 7월8일
  • 비정한 권력투쟁가… 유례없는 반세기 독재/김일성 82년의 인생역정

    ◎유년 평양·만주 전전… 20세에 빨치산 활동/해방후 구소점령군 배경업고 권력장악/도전세력 가치없이 제거… 1인체제 구축/민족통일 빙자 6·25남침… 「전범」 낙인/67년 주체사상 만들어 사회주의 통치도구로 활용하기도 김일성.현대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장기집권을 누린 독재자이다. 우리 민족이 일제로부터 해방된 지난 45년 소련군을 등에 업고 한반도의 절반인 북한땅의 통치자가 된 뒤 거의 반세기동안 무소불위의 절대권력을 휘둘러왔다.그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가주석과 당총비서라는 사회주의 체제 특유의 어마어마한 권력집중적 직책도 모자라 북한주민들에게 「위대한 수령」,「민족의 태양」으로 부르기를 강요한 전제군주적 독재자였다. 김은 어찌보면 사이비 종교집단의 교주처럼 전지전능하고 무오류의 존재로 인식되도록 주민들을 세뇌시켜왔다고 할 수 있다.먹을 것이 모자라 하루 두끼 먹기운동을 벌이면서도 철저한 사상무장과 외부 정보통제로 주민들로 하여금 지상낙원에서 살고 있는 것으로 믿도록 만드는능력을 갖춘 인물이 바로 김일성이기 때문이다. 김은 1912년 4월15일 평양의 한 농가에서 아버지 김형직과 어머니 강반석을 부모로 하여 철주와 영주를 동생으로 둔 삼형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본명은 성주였으나 만주에서 빨치산활동을 할 때 일성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그에 대한 기록은 우상화과정에서 지나치게 미화되거나 엄청나게 날조되어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인지 분간하기가 어렵다.그의 출생지가 평남 대동군 룡산면 하리 칠골에 있는 외가라는 설이 있는가 하면 이름도 성주에서 일성을 거쳐 다시 일성으로 바뀌었다는 얘기도 있다. 어쨌든 김일성의 「공식」생가는 평양 대동강변 언덕에 자리잡은 지금의 만경대이며 이른바 「혁명의 요람」으로 북한의 모든 주민들에게는 참배의 대상이 되어왔다. 김은 어린 시절 한때 외할아버지가 개신교 장로를 지내는 등 독실한 기독교 집안인 외가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 강반석의 손에 이끌려 교회에 다니기도 했다. 그는 만경대에서 짧은 유년시절을 보낸 뒤 가족과 함께 만주로 이주했다.그후 김은 만주의 중국계 소학교인 모예산소학교,팔도구소학교와 평양근교 외가인 칠골에 있는 외조부 강돈욱이 교감으로 있던 창덕학교 등을 전전하며 파란많은 소년기를 보내다 26년 역시 중국계인 무송소학교를 졸업한다. 이후 32년 유격대활동에 적극 가담하기까지의 기간은 뚜렷한 활동이 확인되지 않고 있다.다만 북한에서 나온 그의 전기들은 이 기간중 장춘과 길림 사이에 있는 가륜에서 한인농민들에게 사상교화작업을 했다고 쓰고 있다. 그는 31년 중국 공산당에 입당,32년 중순부터 중국 공산당 산하의 항일 빨치산집단에 참여한다.이때 이름도 성주에서 일성으로 바꾼 것으로 보인다. 김의 항일투쟁경력은 그가 북한정권을 장악한뒤 유일체제를 강화하면서 그에 대한 우상화를 합리화하기 위해 터무니없이 과장·미화되었다.북한의 선전용 김일성 전기들은 만주사변이 일어난 32년 그가 조선공산당을 창설했다고 하지만 당시 불과 19세였던 그는 당시 그럴만한 힘이 없었다. 그는 20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양세봉이라는 한인이 이끄는 유격조직에 들어감으로써 항일빨치산 생활을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이후 그는 중국공산당 산하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에 사병으로 들어가 활동하다 우수한 중국어 실력을 인정받아 나중에 대대장급으로 승진했다. 백두산을 중심으로 한 만주 일대에서 소규모 유격활동을 벌이던 김은 37년 유격대원 2백명을 이끌고 국경 마을인 함남 보천보를 습격했다.일본경찰지서와 우체국 등을 방화하고 추격해오는 경찰서장을 비롯한 일경 7명을 살해한 이른바 「보천보전투」를 벌여 순식간에 유명해졌다. 김은 이 전투가 자신이 참여한 빨치산 전투중 가장 성공적인 전투였다고 자랑하며 보천보에 자신의 동상과 혁명박물관까지 세우고 북한 주민들에개 참관을 강요했다.하지만 보천보사건을 일으킨 사람이 김일성이 아니라는 소수 의견을 내는 학자들도 있다.즉 보천보사건의 김일성은 그해 11월 죽었으며 그의 부하였던 사람이 소련으로 도피한 뒤 그의 이름을 도용했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보천보사건 이후 일본이 중국 본토 침략의 전초전으로 만주의 빨친산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전에나서는 바람에 동북항일연군은 급속히 와해되기 시작했다.때문에 김도 41년 8월 소련의 블라디보스토크 서쪽으로 피신해야 했다. 소련은 이 무렵 만주에서 일본과의 전쟁에 대비,중국인과 한인유격대원들을 모아 블라디보스토크 근교 등지에 「88독립저격여단」이라는 부대를 창설했다.김도 김책,최용건,이동화 등 빨치산 동료들과 함께 이 부대에 들어가 43년에는 대위급으로 진급한다. 김은 여기서 만주에서 함께 빨치산으로 활동했던 김정숙과 결혼했다.그녀는 16세 때인 35년에 김일성의 빨치산부대에 가담해 주방일 등 잡일을 보았던 여자였다. 김은 42년 그녀와의 사이에 첫아들인 정일(소련명 유라)을 낳았다.하지만 그녀는 49년 평양에서 사산아를 낳다가 사망했다. 해방과 함께 무명의 소련군 장교로 평양에 입성한 그는 이후 소련의 절대적 후원과 타고난 권모술수로 재빨리 권력을 장악한다.소련 점령군은 친소세력에 의한 공산정권 수립의 필요성에 따라 자신들의 협조자들 가운데 하나를 북한지도자로 만들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고 김이 바로 그같은소련의 의도를 기민하게 포착한 것이다. 소련점령군이 46년 2월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를 만들어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지명하면서 정치지도자로서의 그의 기반이 강화되기 시작했다. 김일성은 1949년 3월에서 4월까지 한달동안 자신을 도와준 소련에 감사를 표시하기위해 모스크바를 방문하고 돌아온 뒤인 6월 24일 북로당과 남로당 중앙위원회연석회의를 열어 당 위원장자리를 차지했다.이 회의에서 당의 명칭도 북조선노동당에서 조선노동당으로 바꾸었다. 당과 정부기관을 장악하는데 성공한 김일성은 자신에게 도전하는 세력을 가차없이 제거함으로써 자신의 권력을 아무도 넘볼 수 없는 것으로 만들었다.그는 자신에게 협력했던 인사도 자신에 도전할 정도로 위험하다고 생각되면 언제든지 숙청 또는 암살이라는 수단을 동원하는 일을 서슴지 않았는데 심지어 자신과 유격대활동을 함께했던 빨치산대원들까지 가차없이 제거하기도 했다. 그는 조만식과 같은 민족주의자뿐 아니라 박헌영,김두봉등과 같이 자신에게 협력했던 수많은 인물들을 한국전쟁에 대한패전책임을 덮어씌우거나 종파주의를 부추키고 있다는등의 갖가지 죄목을 걸어 제거함으로써 결국 북한정권을 족벌체제로 만들어버렸다. 그는 소련의 힘을 빌려 48년 북한정권의 초대수상에,49년 조선노동당 초대위원장에 오른뒤 도전세력들을 가차없이 제거하기 시작했다.그는 조만식 등 민족주의자는 물론 현준혁 등 국내파,박헌영 등 남로당계,김두봉을 위시한 연안파,허가이 등 소련파를 차례로 숙청해 결국 아무도 넘볼 수 없는 독재체제를 구축했다. 김은 자신의 권좌가 어느 정도 다져진 50년 6월25일 한반도의 적화통일이라는 자신의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 마침내 무력 남침을 감행한다. 그 자신이 식은죽먹기라고 여겼던 적화통일이 유엔의 개입으로 실패로 끝났음에도 그는 전혀 책임을 느끼지 않았다. 김일성이 무력 적화통일이라는 야욕을 공공연히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1947년부터였다.그는 신년사를 통해 『단합된 민주조선의 건설은 남한에 있는 반동적인 매국노들에 대한 궁극적인 승리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며 『그러기 위해서는 인민군과 보안대를 강화시켜야한다』고 역설했다. 김일성은 모든 상황이 유리하다고 판단,밤도둑처럼 새벽야음을 틈타 남침을 했으나 유엔군이 참전하고 중국의용군이 자신을 도와주러 왔을때는 이미 전쟁이 자신의 관리능력 밖에 있다는 것을 깨닫지 않으면 안되었다.국제정세를 너무 단순하게 보았던 판단착오의 결과였다. 김일성은 자신의 실수로 엄청난 결과가 빚어지자 동료들을 숙청했다.그는 1950년 12월 21일 강계에서 열린 중앙위원회 제3차 전원회의에서 그의 빨치산 동료들을 비롯한 거의 모든 사람들을 공격했으며 그 가운데서 김일,최광,임춘추,김열,무정등은 당에서 축출해버렸다. 김일성은 뒤이어 당의 재조직문제를 놓고 자신과 이견을 보인 소련파의 거두 허가이를 숙청했으며 박헌영을 비롯한 국내파들도 정부전복을 기도하고 미국을 위해 스파이활동을 했다는등의 죄목으로 체포해 사형에 처하는등 자신에게 도전하거나 더이상 쓸모가 없다고 생각되는 세력은 여지없이 제거하는 비정함을 보였다. 김일성은 50년대 중반 자신에게 정치적으로 도전하는 세력들을 숙청하기 위한 수단으로 「주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이래 67년에 「주체사상」을 만들어 냈으며 72년에 와서 북한의 사회주의헌법에 통치이념으로 명문화시켜 통치의 도구로 사용했다. 그러나 이같은 주체사상과 김일성에 대한 극단적인 우상화가 맞물리면서 북한정권이 안에서부터 서서히 허물어지는 요인이 됐다. 북한의 선전매체들이 김일성에 대해 『가랑잎을 띄우고 대하를 건너가는 만고의 영웅이며 그가 한번 노려보기만 하면 원쑤도 가을 풀같이 쓰러진다』고 보도할 정도로 북한은 이후 유사종교집단적 사회구조를 띠면서 경직적인 김일성 1인체제가 굳어지기 시작했다. 70년대 이후 김일성은 남한과의 체제경쟁에서 완전히 밀리면서 철저한 폐쇄체제로 주민들을 통제하면서 다른 한편 아들인 김정일에게로 후계세습작업을 가시화하기 시작했다. 김일성은 나름대로의 준비과정을 거쳐 지난 72년 12월 비공개리에 당중앙위 전원회의를 거쳐 김정일을 자신의 후계자로 내부적으로 결정했다.그도 소련의 스탈린 등의 전례를 보고 자신의 사후에 대해 대비를 시작한 것이다.다시 말해 스탈린 사망후 대대적인 격하운동에 충격을 받은 김이 사후 안전판으로 세계사에 유례없는 부자간 권력승계라는 희화적 구도를 상정하게 된 것이다. 어쨌든 그는 자신에 대한 우상화 이상으로 김정일에 대한 상징조작을 단계적으로 확대해나가면서 권력을 하나씩 아들에게 이양하기 시작했다.김정일에 대한 호칭을 「당중앙」에서부터 「경애하는 지도자 동지」,「향도의 별」 등으로 격상시켜나가면서 노동당 조직비서(73년),노동당 정치 상무위원회 위원(80년),인민군 최고사령관(91년),국방위원장(93년) 등 핵심요직을 하나하나 물려주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북한주민들에게 「살아있는 신」으로 우상화작업을 펴온 김일성도 끝내 죽음을 거부할 수 없는,한 평범한 인간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그 자신도 70년대 이후 각종 질병에 시달리면서 건강유지에 발버둥쳐온 사실이 이를 말해준다. 김일성의 질환은 지난 73년께부터 확인된 뒷머리의 혹에서부터 고혈압·당뇨·난청·신경통·뇌일혈을 비롯해 그를 8일 새벽 마침내 죽음으로 몰고간 심근경색 등 10여가지에 이르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어쨌든 그는 분단 반세기만에 초유의 역사적 사건인 남북 정상회담을 앞두고 급사했다.그를 갑작스런 죽음으로 몰고간 원인이 그의 일생일대의 도박이라고 할 수 있는 정상회담에 대한 준비과정에서의 과로 때문인지,아니면 경제난과 대외적 고립에 따른 누적된 스트레스 탓인지는 아무도 모른다.죽은 자는 말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분명한 것은 북한주민들에게 영생불사의 존재로 신격화된 그도 죽음 앞에 아무도 예외일 수가 없다는 철리를 그의 맹목적인 추종세력들에게 마침내 일께워 준것이다. 그의 공과는 후세의 사가가 엄정하게 평가해줄 것이다.그가 역사의 장에 어떻게 기록되든 과대망상에 빠진 권력의 화신이었다는 사실은 동시대를 사는 우리 모두에게 이미 뚜렷이 각인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김일성 연표◁ △1912.4.15 평남 대동군 고평면 남리 만경대출생(본명은 김성주) △1923 만주 장백현 팔도구 소학교 졸업 △1926 만주 길림 육문중학 중퇴,재학중 공청 가입 △1930 김성주를 김일성으로 개명 △1931 중국공산당 입당 △1932 중국공산당 조선인부대 지대장 △1935 김일성으로 재개명 △1936 조국광복회 조직 △1937.6 함남 보천보 습격 △1937.9 함남 증평리 습격 △1940말 소련으로 망명 △1945.8 소련군 소좌 △1945.9 소련점령군 비호하 입북 △1945.10 조선공산당 서북5도당책임자 및 열성자대회 참석 △1945.10 「김일성장군」환영 평양시군중대회에 등장 △1945.12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책임비서 △1946.2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 △1946.7 북조선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의장단 의장 △1946.8 북조선노동당 부위원장 △1947.2 북조선 인민위원회 위원장 △1948.8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 △1948.9 수상(제1차 내각) △1949.3 경제문화 협정체결차 소련방문 △1949.6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1950.6 군사위원회 위원장 △1950.7 인민군 최고사령관 △1953.2 원솔칭호 △1953.7 영웅칭호 △1956.4 노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1957.9 수상(제2차 내각) △1957.11 당 및 정부 대표단장으로 소련 10월혁명 40주년 기념식 참석 △1959.1 소련 제21차 공산당대회 참석 △1959.9 중국 정권창건 10주년 기념식 참석 △1961.7 우호협조 및 상호 원조조약 체결차 소련 중국 방문 △1961.9 노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및 정치위원회 위원장 △1961.10 소련공산당 제22차대회 참석 △1962.10 수상(제3차 내각) △1966.10 노동당 중앙위원회 총비서 △1967.1 소련방문 △1967.12 수상(제4차 내각) △1970.11 노동당 총비서 겸 정치위원 △1972.12국가주석 △1972.12중앙인민위원회 위원겸 국방위원회 위원장 △1975.4중국방문 △1975.5루마니아·알제리·모리타니·불가리아·유고 순방 △1977.11국방위원회 위원장 △1977.11인민군 최고사령관(원수) △1977.12 국가주석 △1980.5 유고 티토대통령 장례식 참석 및 루마니아 방문 △1980.10 노동당 중앙위원회 위원 △1980.10 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상무위원·총비서·군사위원장 △1982.4 국가주석 △1982.9 중국 방문 △1984.5 소련등 동구권 8개국(소련·폴란드·동독·체코·헝가리·유고·불가리아·루마니아)순방 △1986.10 소련 방문 △1986.12 국가주석 △1988.6 몽골 방문(중국·소련 경유) △1989.11 중국 방문 △1990.5 국가주석 △1991.10 중국 방문 △1992.4 대원솔 칭호 △1993.4 「전민족 대단결 10대강령」발표 △1994.4.8 사망
  • 83년 이후 「서열 2위」… 당·정·군 장악

    ◎73년 김영주축출… 공적활동 전면등장/반대세력 반발불구 통치권확보 성공/성격 독선적·일부선 “통 크다”… 영화·연극에 큰 관심,직접 제작도 김정일이 사망한 북한주석 김일성에 대한 장례위원 가운데 서열 1위로 발표됨으로써 차기 권력승계작업이 일단은 순조롭게 이뤄지고 있는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공산정권의 전례로 비추어 볼 때 숨진 최고지도자의 장례위원장을 맡은 인사가 예외 없이 차기 통치권을 맡아 왔기 때문이다. 이날 그에 대해 북한중앙방송과 평양방송이 혁명의 계승을 강조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김정일은 20여년동안 끈질기게 권력승계 작업을 해온 결과 지난 83년 공식서열 2위에 오른 뒤부터 김일성 사망 직전까지 김일성에 이어 2인자의 위치를 굳혀왔다.군최고 사령관,원수,국방위원장,노동당 정치국 상무위원,중앙군사위원등 그의 맡아온 직책이 이를 입증한다.이복동생 김평일과의 불화설등 반대세력과의 권력투쟁설이 끊임없이 나돌기도 했지만 통치권 장악에 거의 성공한 것으로 관측돼 왔다. ○92년부터 승계완료그는 당·정·군등 북한내 3대 기본권력구조 가운데 형식적인 통수권은 국방위원장직으로 군에 대해서만 갖고 있다.그러나 김일성이 국가주석으로 정을,당 총비서로 당을 이끌어 오면서 형식적인 통수권자였지만 김정일은 사실상 이들 기관도 통치해 왔다는 것이 북한전문가의 대체적인 의견이다.이들 전문가들은 이미 권력승계작업은 지난 92년 김일성의 80회 생일부터 이 문제가 거론되지 않음으로써 사실상 완료됐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이와 관련해 김영남외교부장은 같은해 9월 제47차 유엔총회 참석차 뉴욕에 들렀다가 우리 기자들과의 회견에서 김정일이 사실상 북한의 통치자라고 밝혔었다.앞서 같은해 4월1일 김일성생일행사의 하나로 개최됐던 주체사상토론회에서 김정일이 「당·국가·군대의 수위」로 지칭되고,김부자의 생일을 전후해 오진우인민무력부장,이종옥부주석,연형묵정무원총리등 당시의 당·정·군 간부들이 김정일에 대한 대를 이은 충성을 다짐하기도 했다.이때부터 김일성은 점차 일선에서 물러나는 듯한 움직임을 보여 이같은 관측을 뒷받침했다.김정일은 지난 92년 인민무력부장 오진우원수와 8명의 차솔진급자에게 계급장을 달아 줘 군통수권에 대한 첫 공식행사를 가짐으로써 이를 대내외에 천명했다.이어 지난해 4월에는 군 최고통수권자인 국방위원회 위원장으로 추대됐으며 3개월뒤 장성 99명에 대한 승진인사를 단행,혁명1세대를 퇴진시킴으로써 군을 완전 장악했다. 김정일이 후계자로 부각된 것은 지난 73년.사상·기술·문화 3대혁명소조운동과 3대혁명 붉은기쟁취운동의 실무지도자로 공적활동의 전면에 등장하기 시작했다.같은해 9월 삼촌 김영주를 밀어내고 조직·사상담당 비서로,74년 2월 노동당 정치국 정치위원으로 추대됐다.그는 74년 2월 노동당 제5기 8차 전원대회에서 후계자로 결정됐으나 70년대까지만 해도 「당중앙」으로 모호하게 불려졌다.그러나 80년대부터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로 표현되기 시작했다.83년 4월이후 오진우인민무력부장을 제치고 당서열 제2위로 부상하면서 명실상부한 후계자의 위치를 굳혔다. 85년 4월에는 「당·국가수위」로 지칭됐다.85년 7월 북한언론으로부터 「김정일시대」라는 용어가 등장하고,91년에는 인민경제대학총장 김국훈이 김정일을 「미래의 위대한 수령」으로 후계구도를 공식적으로 가시화했다.이어 91년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에 추대된뒤 92년 4월20일 원수칭호,93년 4월 최고인민회의 9기5차회의에서 국방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됨으로써 군을 장악한 명실상부한 실권자로 등장했다. ○원래 이름은 「정일」 김정일은 김일성과 그의 첫부인인 김정숙 사이에서 태어난 2남1녀중 장남으로 지난 41년 2월16일생이고,원래 이름도 정일이라고 한다.그러나 뒤늦게 그를 우상화하는 편법으로 정일로 바꿨고 2년뒤 그의 출생연도도 1년 낮췄다는 설도 있다.82년은 이른바 「조선의 어머니」인 김일성의 어머니 강반석의 출생 90돌이자 김일성의 70돌이며,김일성이 창건했다는 조선인민혁명군의 50돌이었는데 그의 이름도 이에 맞춰 변조했다는 것이다.그의 이복동생 평일,성일에서 보듯 원래 항렬이 일자였다는 것이다. 어릴때 이름이 「슈라」인 것으로 미루어 출생지는 옛 소련이었음을 알 수 있으나 구체적인 지명은 사마르칸트,오케얀 스카야,하바로프스크등으로 엇갈린다.그러나 그를 우상화하는 과정에서 「백두미령」에서 출생해 『혁명의 준엄한 시련을 체험하면서 성장했다』고 미화됐다.북한은 이를 위해 김일성이 빨치산 활동을 할 때 백두산의 한 귀틀집에서 『백두산의 정기를 한몸에 받고 태어났다』는 이른바 「백두산정기설」을 뒷받침하는 각종 흔적들을 조작하기 시작했다.백두산의 「정일봉」,김정일의 탄생을 칭송하는 이른바 「구호나무」등이 그 흔적이다. ○3세대 평양 들어와 김정일은 세살때 광복과 함께 부모를 따라 소련함정을 타고 평양에 처음 들어왔다.43년 소련에서 태어난 남동생 「유라」(소련명)가 있었으나 2년뒤 김일성 관저 연못에 빠져 죽었다.7살때인 49년 9월 생모 김정숙이 출산중 사망하면서 여동생 김경희(46년생)와 함께 김일성의 외6촌동생 강연실에 의해 키워졌다.그의 성격은 생모와 사별후 난폭해지기 시작한 것으로 전해진다.성격은 괄괄하고 과격하며 독선적이나 통이 큰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김일성앞에서도호주머니에 손을 넣는 유일한 사람이기도 하다.그는 아버지가 너무 바빠 홀로 어린시절을 보내온 것을 자주 불평했다고 한다.66년 홍일천과 연애결혼해 딸 하나를 낳고 69년 이혼한 뒤 73년 김혜숙과 재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정일은 평양의 남산유치원을 나와 49년 간부 자녀들이 다니던 남산 제 4인민학교를 다녔으며 57년 8월 평양제1중학교,60년 8월 평양 제1고급중학교,64년 김일성대학 정치경제학과를 각각 졸업한뒤 노동당에 입당했다.70년 당 문화예술부장,71년 선전선동부 부장으로 진출하면서 영화촬영및 연극공연작업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여온 것으로 전해진다.「피바다」「한 자위대원의 운명」「꽃파는 처녀」등 주요 영화와 가극을 직접 제작하는등 일년에 1백50∼2백편의 영화를 만들어 올만큼 북한영화계의 최고권위자로 꼽힌다.이같은 영화에 대한 애정때문에 신상옥씨 부부를 납치한 것이 깊숙이 베일에 가려져 있던 정체가 상세히 알려지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연표◁ △1941.2.16 소련 사마르칸트 출생(북한측,백두산 출생주장) △1953.2 만경대혁명학원(인민반)수학 △1960.8 남산고급중학교 졸업 △1964.3 김일성대학교 졸업(정치경제학과) △1964 노동당 조직지도부 지도원 △1971 노동당 선전선동부 부부장 △1973.11 노동당 정치위원회 후보위원 △1974.2 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위원 △1974.2 「후계자」로 결정(노동당 제5기 8차전원회의) △1980.10 노동당 정치국 상무위원회 위원(6차 당대회) △1980.10 노동당 비서국 비서 △1980.10 노동당 중앙군사위원회 위원,노동당 중앙위원회 위원 △1990.5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 △1991.12.24 인민군 최고사령관(노동당 제6기 19차 전원 회의) △1992.4.20 원솔 칭호 △1993.4 국방위원회 위원장(최고인민회의 9기 5차회의)
  • 김일성 서울에 와야 한다/유은걸(데스크시각)

    북한의 김일성주석은 과연 서울에 올 것인가. 28일에 있은 남북예비접촉에서 김영삼대통령의 평양방문일정은 확정됐으나 북한 김주석의 서울방문문제는 어물쩍 넘어가고 말았다. 왜 그랬을까. 상호주의 원칙에 따라 분명하게 매듭지어야했을 일이 이렇게 된 데에는 이번 정상회담을 꼭 성사시키겠다는 우리 정부의 강한 의지가 반영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여간 찜찜한 게 아니다.그리고 이번회의가 김주석이 직접 TV로 진행상황을 지켜보며 지시하는 가운데 이뤄졌음을 감안하면 북측에 어떤 사연이 있음이 분명하다. 분단 49년만에 이루어지는 이번 정상회담은 만나는 것 자체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지만 정상들이 상대방 수도를 방문하는 것 역시 이에 못지않게 의의가 있는 것이다.그럼에도 북측은 2차서울회담 합의를 끝내 거부하고 나왔다.신뢰를 잃어버린 북한이기 때문에 항상 의심이 가는 바이지만 이번의 경우는 그 저의가 더욱 궁금해진다. 저간의 사정으로 미루어보아 김주석은 아예 서울에 올 생각이 없는데다 설령 오고 싶어도 올 수 없을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관측이다. 그가 서울방문을 기피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 자체가 우리체제를 인정하는 것이 되고 이렇게 될 경우 「하나의 조선,하나의 국가」를 겨냥한 그의 적화통일정책을 포기해야하기 때문이다.게다가 미국과 짜고 북침했다고 몰아세우던 남조선을 찾아가는데 대해 북한 주민들을 어떻게 설득하는가 하는 문제도 상당한 부담을 주고있는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둘째 미국과의 수교와 경제지원을 노리고 대미협상에 매달린 나머지 우리와의 정상회담은 부수적으로 여겨 서울방문엔 별 뜻이 없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또 설사 그럴 의사가 있다 하더라도 차기 대남협상카드로 써먹기 위해 쉽게 응해오지 않을 것으로 보는 사람들도 많다.이밖에 김대통령의 평양방문을 정치선전거리로 최대한 활용할 속셈이어서 서울방문은 생각조차 않고있다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또 서울에 올 수 없은 것은 그가 TV를 통해 보았거나 말로만 듣던 서울의 발전상을 보고 너무 큰 충격을 받을 것을 우려,측근들이 이를 적극 만류하고 있다는 설이 가장 설득력있게 제기되고 있다.그는 6·25때 인민군이 낙동강까지 진격한 틈을 이용,수안보까지 내려왔다가 서울을 처음으로 거쳐간 일이 있다.그가 다시 서울을 찾는다면 적화통일야욕이 얼마나 과대망상이었는가를 실감할 것이다. 그 다음으로는 그가 수백만동포를 희생시킨 전범이기 때문에 서울을 감히 방문할 처지가 못된다는 지적이다. 그는 자기의 이러한 전력을 의식,서울방문시 신변에 상당한 위협을 느끼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김주석은 사정이 어떻든 반드시 서울을 방문해야 한다.이는 김대통령의 평양방문에 대한 답방으로 당연한 도리이다.지난 70년 첫 동서독정상회담때 상호교환방문이 있었음을 김주석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의 서울방문 성사는 또 남북한이 앞으로 화해시대에 진입하느냐 못하느냐는 중요한 관건이 되는 것이며 4천만 한국민들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이다.김주석은 김대통령과 「언제,어디서든 만나겠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김주석은 서울에 와서 6·25에 대해 어떤 형태로든 사죄를 해야한다.아직 그럴 수 없다면 최소한 1천만 이산가족들에게 이제 더이상의 고통을 주지않기 위해 헤어진 혈육과 재회할 수 있도록 인도적인 조치를 취해야한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노회한 그가 서울에 와서 조금도 뉘우침없이 갖은 쇼맨십을 발휘하며 위세를 부릴 경우 국민들한테 주게될 실망을 감안하면 차라리 안와주었으면 하는 마음도 없지않다. 더욱이 그의 서울방문을 김주석이 남조선을 해방시키기 위해 「현지지도」한 것처럼 북한 선전매체들이 떠들어댈 가능성도 많아 더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 「6·25」 44돌… 중부전선 초산진부대를 가다

    ◎“압록강 진격했던 선배영광 잇겠다”/초병들,철통 경계… “국민은 우릴믿길”/정적깨는 대남비방확성기 소리 여전 6·25사변 44주년을 맞는 중부전선 최전방 초산진 부대 남방한계선 경계초소. 서울에서 1백10㎞ 떨어진 이곳은 남북정상회담 실무접촉을 앞두고 있건만 1.2㎞거리의 맞은편 북녘 능선에 설치된 대남 비방방송 확성기에서 흘러나오는 「제2의 조선전쟁」,「필승불패」,「민족대단결아래 통일된 조선민족 만세」등 상투적인 대남비방 방송은 아직도 남·북이 대치하고 있음을 깨우쳐 주고 있다. 최전방 초소에서 관측용 대형망원경을 잡고 적의 동태를 관측하고 있는 초병들의 눈매는 상황의 변화에 아랑곳 없이 경계근무에 한치의 틈도 보이지 않는다. ○부대이동은 없어 초병들은 『최근 머리깎은 인민군들의 모습이 다시 보일 뿐 부대이동등 도발징후는 보이지 않고 있다』면서 『만일 적의 도발이 있다면 선배 전우들처럼 즉시 격퇴할 만반의 태세가 갖추어져 있다』고 힘있게 말했다. 초산진 부대는 50년 10월 26일 하오 2시15분 최초로 압록강까지 진격,초산땅에 태극기를 꽂고 압록강물을 수통에 담아 그날의 감격을 이승만대통령에게 보냈으며 73년 11월 20일에는 북한의 제2땅굴을 발견,그들의 흉계를 전세계에 고발했던 부대다. 특히 이 부대는 소련제 탱크를 앞세운 적의 공격을 육탄으로 돌격,전차를 파괴하는등 전장병이 혼연일체가 되어 38선을 3일동안이나 방어한 유일한 부대였으며 개전이후 처음으로 충북 음성 무극리 지역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패전을 거듭하던 국군과 국민에게 큰 위안을 주었다.당시 전 장병이 일계급 특진의 영광을 안기도 했다. ○한국전때 첫승리 이 부대원들은 이러한 선배 전우들의 필승무패의 초산투혼을 이어받아 오늘도 필승의 경계근무에 만전을 기하고 있었다. 이 부대 중대장 정봉용대위(29)는 『적정은 평소와 다른 점이 조금도 없으나 최근 북핵개발 의혹과 관련해 유사시 적의 침투나 도발에도 즉각 대처할 수 있는 완벽한 전투태세를 갖추고 있다』고 자신감있게 말했다. 11년째 이 부대에 근무하는 주유동주임원사(48)는 『밖에서 사재기를 하는등 북한핵문제로 소란을 피우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서 『늘 임전무퇴의 정신으로 경계근무를 하고 있는데다 무슨 일이든지 강한 정신력만 있으면 이룰 수 있는만큼 달라진게 하나도 없다』고 강조했다. ○사재기 이해안돼 경계근무중인 심인용상병(22)은 『내평생에 단 한번 국민들의 안전을 위해 일한다고 생각하니 전혀 힘들게 느껴지지 않는다』면서 『만약 전쟁이 발발한다면 선배들의 뒤를 이어 압록강으로 진격,강물을 떠마시겠다는 각오로 경계근무에 임하고 있다』고 말했다. 초병들의 믿음직한 경계근무 모습에서 제2의 한국전쟁은 일어날 수 없으며 남·북을 가로지르는 철책 경계선도 언젠가는 허물어 질 것이라는 확신이 섰다.
  • 6·25 44돌… 학도병 참전 용사들의 회고 특별대담

    6·25때 홍안의 미소년으로 전장을 누볐던 학도병들은 몇차례 강산이 바뀌는 세월속에서 이제 이순을 넘긴 노년의 옛전사로 변했다.하지만 이들의 가슴속에는 동족상잔의 아픔이 지금도 어제일처럼 살아있다.포연의 전장에서 불퇴전의 용기로 살아남은 유성덕 서울대광고교장(63)과 정년탁대한학도의용군회 총본부 전회장(63)의 대담을 통해 그날을 되새기고 오늘날 젊은이들이 가져야할 자세등을 되짚어본다. ◎“펜대신 총으로…” 5만여명 구국전선에/조국사수 일념에 사격훈련만 받고 전투/곳곳서 맹활약… 포항선 71명 장렬한 산화/“자유만끽” 요즘 젊은이들,기성세대의 체험 곱씹어 보아야 ▲유교장=사실 저는 의식적으로 6·25를 기억하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하지만 또 한시도 기억에서 떨쳐버리지 못하는게 바로 6·25지요.중학6년(18세)때 학도병으로 자원해 나갔다가 온 몸을 크게 다쳐(왼쪽 손가락 4개와 오른 손가락 2개,양쪽 발가락절단,발뒤꿈치 골수염) 지금도 정기적으로 치료를 받아야하는 불편한 상태입니다.하지만 해방이후 북쪽의공산당이 싫어 평양에서 단신으로 내려와 학도의용병으로 참전해 죽을 고비를 넘긴끝에 이렇게 자유로운 세상에서 교육자로 평생을 지내고 있으니 그래도 행복한 편이라 생각합니다. 6·25발발 직후 학도의용군으로 참전할 당시를 생각하면 우리 남쪽은 정말 풍전등화와 같은 상황이었지요.북한군에 밀려 대구와 부산만 겨우 남아 있었으니까요.피란지인 부산에서 중학교 영어 실력이지만 미군부대에서 일하다 학도의용군을 모집한다는 얘기를 들었어요.50년 8월 초쯤으로 기억됩니다.어린 나이였지만 「펜대신 총을 들어 위기에 빠진 조국을 구하자」고 모두들 나서는 분위기였습니다.전투에 나가 더이상의 북한의 공세를 막아야한다는 생각에 미군부대에 보고도 않고 곧바로 의용병모집 장소로 달려갔습니다.함께 지원한 2백여명의 학생들과 함께 경주에서 3일동안 사격훈련을 받고 안강전투에 참가했지요.갑자기 모집한 학도병이고 보니 복장도 교복차림에 군복,미군작업복등 각양각색이었어요.우리가 배속된 부대가 김석원준장(작고)이 이끄는 수도사단이라는 것도 나중에야 알았습니다.당시 학도병들은 일정지역에 모아 부대로 보내는 것이 아니라 지역별로 모이는대로 그때 그때 전투지역으로 보냈지요.그만큼 병력은 부족하고 전황은 다급했다는 이야기지요.정회장도 학도병에 자원할 당시 중학생이셨지요. ▲정전회장=저는 중3때 광주지역에서 학도병으로 참가했어요.사실 호남지역에는 6·25이전에 이미 빨치산등 좌익세력이 적지않았어요.학교에도 좌익에 물든 사람이 꽤 있었던걸로 기억합니다.학생은 물론 선생까지 좌우로 갈라져 있었어요.어린 눈에 좌익분자들이 사람을 백주에 죽이는것을 보고 까무러쳤습니다.좌익학생들의 연대파업등을 수없이 보았습니다.그래서 전쟁이 발발하고 학도병을 모집한다고 하니까 공산당의 폐해를 피부로 경험한 학생들이 너나없이 몰려나갔지요.4일동안 간단한 사격훈련등을 받고 12사단에서 배속돼 주로 태백산과 노령산 일대에서 전투를 했었죠.훈련받을 때 총이 모자라 인민군의 딱총도 함께 사용했던 기억이 납니다.어릴때 공산당의 잔학상을 보아왔던 때문인지 사람이 죽는다는걸 별로 무섭게 느끼지도 않았던것 같아요.안강전투는 대단했다면서요. ▲유교장=지금생각해도 정말 대단했습니다.우리로서는 더이상 밀리면 부산·대구까지 내주어야 하니까 몸으로라도 끝까지 사수해야하는 마지노선이었어요.죽거나 부상당해 후송되는 학생들 말고는 뒤로 물러서는 법이 없었습니다.당시 상황도 상황이었지만 학도의용병의 사기는 하늘 높은 줄 몰랐지요.학도병들의 용기는 현역병을 훨씬 능가했습니다.살아남겠다는 생각없이 그야말로 물불을 가라지 않고 싸웠다는 표현이 꼭 들어맞을 겁니다.지금생각해도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나 싶어요.형산강을 피로 물들이고 일주일여 사투를 벌이니까 북한군이 물러서기 시작하더군요.이후 포항탈환작전에 참가,시가전을 벌였고 고성,함흥등 북으로 북으로 올라갔습니다.포항 시가전에 참가했을때 어느 중학교에는 인민군과 우리 군과 학도병의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이기도 했습니다.결국 그들을 포항에서 물리친 것이지요.북진이 계속되고 김일성이 다급해지니까 중공군에 도움을 요청,이른바 중공군의인해전술이 시작돼 우리는 다시 남으로 밀리게 됐지요. ▲정전회장=교장선생님도 지적하셨지만 당시 학생들의 전의는 대단했습니다.군대 안가려고 일부러 손가락까지 자르던 일부 징집대상 젊은이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피끓는 울분을 토로했던 기억이 납니다.포탄이 쏟아지는 전장에서 언제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한마디로 애국심으로 똘똘 뭉쳤지요.죽음을 초월했다해도 과언이 아닙니다.이런일도 있었어요.태백산자락 어느 전투에서 북한군과 밀고 밀리는 전투를 벌였어요.어느 지점을 며칠만에 지나는데 태극기로 자신의 얼굴을 덮고 반듯이 누운 한 젊은이를 발견했어요.죽은 줄알고 다다가 보니 목숨이 붙어있더군요.전투중에 실종된 학도병이었습니다.이 친구는 부상을 당해 낙오가 되고 기력이 떨어져 움직일 수 없게되자 가지고 있던 총을 인민군이 사용할 수 없도록 완전히 분해해 버리고 태극기로 얼굴을 가리고 죽음을 기다린 것이지요. ▲유교장=당시 학병들의 참전은 아군의 전투력증강에 상당한 보탬이 된것으로 압니다.정회장은학병모임일도 보신걸로 알고 있는데요. ▲정전회장=대한 학도의용군회 회장을 여러해 맡았습니다.학도의용군은 50년 6월 전쟁발발때부터 51년 4월 이승만대통령이 복교령을 내리기 직전까지 전쟁에 참여했던 학생들로 중학생과 대학생들로 구성됐었습니다.50년 6월28일에 피란가던 서울시내 각대학 학도호국단 간부 2백여명이 수원에서 합동비상학도대를 조직한 것이 시발이었습니다.이후 각 군소재지 학교에서까지 이들이 결성돼 눈부신 활약을 벌였어요.군번도 없고 계급도 없이 말입니다.5만여명 정도가 참전했고 7천여명이 전사했습니다.당시 정규군병력이 15만에도 못미치는 상황이었으니 규모면에서도 대단한 것이지요.그중에서도 중학생이 가장 많았습니다.1·4후퇴때는 북한에서 2천여명의 학생들이 넘어와 참전했었고 부산지역의 학생 7백여명은 유엔군에 편입돼 일본에서 훈련을 받은뒤 다시 돌아와 전투에 참여하기도 했었죠.가장 비참했던 전투는 포항전투로 1기로 참전했던 3사단 학도의용군 71명 전원이 이름없는 고지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역사적으로 학생들의 애국심이 이처럼 높았던 나라는 이스라엘과 우리나라외에는 없다고 외국전문가들도 이야기합디다. ▲유교장=학병들의 정신은 지금도 면면이 내려온다고 생각됩니다. ▲정전회장=그렇습니다.지금도 국립묘지에 가보면 6·25당시 어린 나이에 나라를 지키겠다고 참전했다가 목숨을 잃은 학도의용군들의 묘역이 있습니다.지금도 당시 같이 전투에 참가했던 동료들을 만나면 그때의 이야기들을 하곤 합니다.당시 장성들을 만나도 학도병들의 애국심과 용기를 잊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제가 보기에 학생운동의 맥은 일제시대의 광주학생운동과 해방직후 반탁반공운동,4·19의거,그리고 6·25때의 바로 이 학도의용군으로 이어지지않았나 생각합니다.역사속에 면면이 흐르고 있는 피끓는 젊은이들의 애국심을 뚜렷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이죠.3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지만 요즘 젊은 사람들은 당시 절박했던 상황이나 목숨을 초개같이 던진 선배들의 정신을 너무 모르는 것같아 안타깝습니다.세계적인 변화속에서 반공의 목소리가 상대적으로 위축되는 것도 어딘지 모르게 안쓰럽고요. ▲유교장=독사에게 물려본 사람만이 독사가 무서운 줄 알듯 전쟁을 겪은 사람만이 전쟁의 고통과 공포를 알 수 있지요.자유역시 마찬가집니다.자유를 빼앗겨본 사람만이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지 알 수 있습니다.요즘 젊은이들은 민주화 민주화하면서 자유를 만끽하고 있지만 진정 자유가 박탈된 상태,전쟁이 주는 공포는 체험해 보지 못했습니다.기성세대의 뼈아픈 체험을 한번쯤은 곱씹어 보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봅니다.기성세대를 무조건 이해해 달라는 것이 아니라 당시 상황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가슴에 담고 올바른 생각을 갖고 자신들의 포부를 펴나가라는 것이지요.일제와 6·25를 겪으며 고난의 역정을 걸어온 기성세대는 젊은이들에게 부인의 대상이 아니라 앞으로의 삶을 열어나가는 좌표로 인식돼야합니다. 학생들이 사회의 모든 일에대해 지나치게 간여하거나 간섭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봅니다.정치는 정치인에게 국방은 군에 맡기고 학생은 학생으로서의 본분을 다해주길 바랍니다.또 국민역시 각성해야 할 부분이 적지않다고 봅니다.지난 현충일 연휴때 나들이 인파로 주요도로가 모두 만원을 이뤘다는 소식을 듣고 지난날의 어려움을 모두 잊지않았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전회장=지금 북한의 변화는 김일성의 마음이 변한 것이 아니라 주변국들의 정세에 맞춰 겉모습만을 바꾼 것뿐입니다.그런데도 학생들이 북한의 주장에 동조하고 폭력시위를 벌이는 것을 보면 답답하고 안타깝습니다.나름대로 애국심을 가진 행동이라고 주장할지 몰라도 북한과 김일성을 찬양하는 학생운동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시대에 맞게 어른들과 선배들의 충고에도 귀기울일줄 알아야죠.통일에 대한 문제는 각계각층의 의견을 고루 반영해 신중하게 결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6·25전 좌익활동 학계의견 정리

    ◎“대구폭동­제주 4·3사건 항쟁일수 없다”/박헌영의 「미군정 타도」 폭력 노선이 원인/민중사관 주장 극복… “분명한 폭동” 결론 「대구폭동」인가 「10월항쟁」인가,「제주도 4·3사건」인가 「제주도 4·3항쟁」인가.지난 봄 교과서의 역사용어 변경을 위한 시안을 놓고 벌어졌던 이같은 논란은 과거와 같은 권위주의 정부 아래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비록 논의 차원이기는 했지만 새 정부가 그처럼 진보적인 사관을 교과서개편 문제에까지 개방했기에 일어난 일이었기 때문이다.그만큼 정부의 자신감이 바탕이 되었다는 평가였다. 그러나 나라 전체가 들썩거렸을 만큼 파문이 길었던 것은 이 시비가 대한민국의 정통성 시비와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6·25 44주년을 앞두고 이 문제가 다시 기억되어야 하는 것도 「10월 항쟁」「4·3항쟁」이라는 시각이 수용된다면 6·25 또한 「민족해방전쟁」이라고 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박성수한국정신문화연구원교수는 『「10월항쟁」이나 「4·3항쟁」이라는 표기는 첫째 국내의 민중사관,둘째 북한의조선전사,셋째 중국의 혁명사관에서 영향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한다』고 단언했다.그들의 시각에 따르면 일제하의 독립운동은 이른바 「민족해방투쟁」인 만큼 8·15는 광복이 아닌 「민족해방」이다.또 일제하 「민족해방투쟁」은 8·15이후 미군정 치하 남한에서 「민중항쟁」이라는 형태로 계속 진행된다는 것이다. 박교수는 『이같은 논리에 따라 그들은 「민족의 통일염원을 저버린 대한민국의 건국은 1950년 한국전쟁으로 징벌을 받게되며 6·25는 북침이었을지도 모르는 단지 한국전쟁일 뿐」이라고 해석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하현강연세대교수는 『그같은 민중사관을 그동안 적지않은 학자들이 편향적이 아닌가 우려하면서도 용인해 온 것은 학문의 자유를 존중했기 때문』이라면서 『학계를 벗어나면 용인되기 어렵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라는 입장을 보였다. 학자들은 「폭동」과 「사건」이라는 단어의 차이만큼 현재 국사 교과서의 표기대로 「대구폭동」과 「4·3사건」을 차별화한다. 이현희성신여대교수는 먼저 『「대구폭동」은 폭동일 뿐』이라고 말했다.아무리 진보적인 연구성과가 나와 있다고 해도 그 때를 체험·목격한 격앙의 세대가 악의적의 공산 파괴공작의 맥락에서 비롯된 당시 상황을 증언·열변하고 있는 한 달리 평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진덕규이화여대교수는 『1948년 대구에서 일어난 사건을 폭동으로 보느냐 항쟁으로 보느냐는 문제는 타협의 여지가 없다』면서 『이는 우리 국가의 이념까지 연결되는 사안』이라고 말했다. 이현희교수는 그러나 『과거 일반화된 표기였던 「4·3제주폭동」은 그 간의 연구와 지역적 특수성으로 볼 때 「폭동」이라 표기하기에는 사실과 거리가 있다는 것이 학계 대다수의 시각』이라고 전하고 『이같은 시각은 교과서에 「4·3사건」이라고 표기됨으로써 이미 수용된 상황』이라고 말했다. 한승조고려대교수는 이 두 사건을 남로당 총책 박헌영과 직접적으로 연결시켰다.남로당은 미소공동위원회가 실패하자 1946년 가을부터 폭력투쟁 노선으로 전술을 바꿨으며 이는 좌익세력에 대한 과신과 우익 세력에 대한 과소평가에서 비롯된 과오로「대구폭동」과 「4·3사건」이 대표적이라는 것이다.한교수에 따르면 박헌영이 보기에는 미군정이 국민적 지지기반을 갖지 못했고 보수세력도 한줌 밖에 안되므로 밀어붙이면 된다고 계산했다.한편으로는 북한 인민군이 도와줄 것이라고 생각해 3만명의 경찰과 5만명의 국방경비대를 상대로 폭력과 무장투쟁을 하다 좌익세력은 모두 소진됐다.또 박헌영은 남로당 조직에게 모두 총탄이 되어서 「5·10총선거」를 저지할 것을 명했으나 많은 인명의 살상과 대량 구속을 초래했을 뿐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저지하지 못했다.결론적으로 상대방의 전력을 정확하게 평가하지 못하고 극한투쟁을 벌이다 좌익세력의 총 붕괴를 재촉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동안 정통주의적 입장에 서는 학자들 사이에는 자성의 목소리도 있었다.사람에 따라 다르기는 하나 좌익·혁신적인 학자들에 비해 무기력하고 나약하며 기회주의적인 경향이 없지 않았다는 것이다.좌파학자들에게 보수·반동·어용으로 낙인찍히며 공격당할까 두려워 사실과 다른 억지주장을 하고 있음에도 이의나 반론을 제기하기를 꺼려온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우려 속에서도 이제 폭동을 폭동이라고 제목소리를 내는 학자가 많아졌다는 것은 폭동이냐 항쟁이냐의 논쟁을 계기로 우리 학계가 한부분의 건강은 되찾았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평가이다. ◎46년10월 대구폭동/경찰서 등 방화·군수 살해/식량요구 시위가 발단… 경남북 등 확산 「대구폭동」은 1946년10월1일 상오 쌀을 나누어준다는 풍문을 듣고 대구시청 앞에 모인 1천여명의 시위가 발단이 됐다.당시는 미군정 아래 좌우대립으로 정국불안이 계속되고 물자부족과 군정당국의 식량공출로 생활고가 극심한 가운데 좌익계열의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가 주도한 이른바 「9월총파업」이 전국을 휩쓸고 있는 상황이었다. 사태는 하오 들어 시위군중이 1만여명으로 늘어난 가운데 하오7시쯤 대구역 앞에서 경찰의 사격으로 한 시민이 숨지면서 걷잡을 수 없이 번져나갔다.흥분한 시민들은 이튿날인 2일 아침부터 경찰서·역·시청 앞 등에서 대규모시위를 벌였고 당초 식량배급을 요구하던 구호도 애국자석방,조선인에게 행정권이양 등 정치적 문제로 발전되어갔다.경찰서를 점거해 무기를 탈취하고 대구시청 간부의 집을 습격하기에 이르렀다.이에 군정당국은 하오7시 대구일원에 계엄령을 선포했고 미군의 출동으로 대구의 소요사태는 진정국면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시위는 다음 날인 3일 저녁부터 영천·달성 등 주변지역으로 번져나가 11월 중순까지 경북전역과 경남·전남·강원지역에서 계속됐다.시위가 일어난 대부부의 지역은 경찰서가 습격당하고 교량·철도가 파괴됐다.특히 시위가 극심한 영천의 경우 경찰서·군청·재판소가 불타고 군수가 살해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48년4월 4·3사건/좌익의 지서습격이 원인/9년간 희생자 3만∼8만명 추정 「4·3사건」은 제주도에서 1948년4월부터 만9년동안 최소 3만명에서 최대 8만명으로 추정되는 희생자를 낸 해방후 최대의 유혈사태였다. 사건은 단독정부수립을 위한 5·10총선을 한달남짓 앞둔 4월3일 상오2시,산중에 집결해 있던 제주도민 2천여명이 도내 15개 경찰지서 가운데 14개를 일제히 습격하면서 시작됐다.이들은 「미군철수」와 「단독선거반대」 「이승만매국도당타도」 등 구호를 외치며 일부는 일본군이 남기고 간 99식소총으로 무장한 상태에서 좌익세력의 지도를 받고 있었다. 미군정은 즉각 1천7백여명의 경찰을 비롯,국방경비대와 우익인사들인 서북청년단으로 구성된 대규모 진압군을 파견했다.이에 봉기대와 이에 동조한 도민들은 한라산으로 들어가 장기적인 유격전의 성격으로 전환됐다. 이후 봉기대를 주민으로부터 분리시키기 위해 근거지가 되는 마을전체를 불살라버리고 주민들을 집단이주시키는 군·경의 소개작전과 이에 맞선 봉기대의 격렬한 저항이 이어졌다.이 과정에서 양민을 포함해 수많은 인명피해가 났다. 이 사건은 또 진압을 명령받은 군대가 이를 거부하고 소요를 일으킨 48년10월 「여순반란사건」을 촉발시키기도 했다.「4·3사건」은 1957년4월2일 마지막 「빨치산」 오완권이 생포되어서야 비로소 막을 내렸다.
  • 인 국방부 「한국전포로 감시」 비록 입수 공개

    ◎“중공군 포로 송환 막아라”/대만공작팀 극비리 침투/반공교육후 “말 안들으면 처형” 위협/포로들 난동 잦아… 인 사령관 납치도 한국전쟁은 1953년7월27일 휴전협정조인으로 막을 내렸다.그러나 실제로 전쟁은 송환을 거부한 2만3천명 포로의 처리문제를 놓고 이른바 「총성없는 전쟁」으로 6개월간 처절하게 계속됐다.판문점일대 비무장지대에서 벌어진 유엔군진영과 북부군(북한인민군·중공의용군)진영의 치열한 설득전과 이들의 심판을 맡은 인도의 철저한 중간입장고수는 2차대전후 네루중립주의 첫실험의 성공이라는 현대사적 의미를 부여받기도 했다.서울신문은 한국전쟁발발 44주년을 맞아 당시 송환거부포로 설득작전에 관한 내용을 담은 책인 「주한인도관리군활동사」(History of the Custodian Force of Indiain Korea:1953∼54)를 최근 인도현지에서 입수,발췌소개한다. ▷인도군첫해외파병◁ 휴전협상이 한창 진행중이던 53년5월8일 미국이 인도측에 송환거부포로 관리를 위한 인도군 파병가능성을 타진해왔다.이미 인도는 이들을 지휘감독할 5개 중립국송환위(NNRC)의 의장국을 맡기로 돼 있었기 때문에 네루총리는 파병을 수락했다.8월5일 R K 네루외무차관,관리군사령관 토라트소장,사르다르 싱 인도적십자사무총장등 3명으로 구성된 선발대를 파견,도쿄의 유엔군사령부와 개성의 북부군사령부를 거쳐 구체적인 임무와 병력규모등을 협의했다. 인도군의 총규모는 6개 보병대대와 각종 부속대로 6천명.9월28일 제5진의 인천항 도착으로 이동을 모두 끝냈다.그러나 당시 이승만대통령은 인도군의 한반도상륙을 금지시켰기 때문에 유엔군측은 인천에서 판문점까지 헬기로 이동할 것을 제의했다.동아시아의 모든 미군헬기를 동원,5명씩 수송했는데 모두 1천3백회의 출격을 기록한 사상최대의 헬기작전에서 다행히 사고는 단 한건도 없었다. ○통정리에 텐트촌 ▷새 포로수용소◁ 통정리일대에 유엔군이 건설한 막사는 5백명을 수용할 수 있는 캠프 7∼10개씩을 1개구역으로 하는 7개의 구역으로 나눠져 중공군 3개,북한군 2개,송환희망자격리수용소 1개,병원용 1개소씩으로 할당됐다.캠프는 17개의 막사와 식당·목욕탕·화장실텐트등 모두 20개의 텐트로 구성됐다.냉난방은 물론 전깃불과 온수공급이 완벽했다. 미군측은 이곳에 3만명의 식수및 생활용수공급을 위해 50만갤런상당의 물탱크를 설치했고 임진강으로부터 모두 31㎞의 대형송수관을 매설했다.전기공급을 위해 발전소 12개를 건설했으며 전체 생필품공급을 위한 대형보급창고도 세웠다.또한 설득장및 설득자대기소,송환표명포로수용을 위한 막사등 설득관련막사 10여동이 별도로 건설되었다.이들 전체지역은 하나의 거대한 도시를 이루고 있었다. ▷포로수에의 의문◁ 포로의 숫자는 포로교환협정에 따른 것으로 인도군의 입장에서 관여할 바는 아니었다.그러나 양측의 휴전협상이 처음 시작된 51년7월26일당시까지 유엔군측은 12만1천명의 북한군과 중공군포로를 억류하고 있었으며 이 가운데 4만1천명이 송환을 거부하고 있다고 밝혔다. 한편 북부군측은 6만5천명의 유엔군 생포를 주장했으며 그 가운데 5만명이 자발적으로 북한인민군과 중공의용군에 합류했다고 밝혔다.이같은 주장은 유엔군측이나 공산군측모두 자신들의 이데올로기의 우월성에 손상을 입는 것이기 때문에 용납할 수가 없었다. 휴전협정조인후 33일간 양측은 포로교환을 실시,유엔군측은 7만5천8백명을,북부군측은 1만2천7백60명을 상대방측에 넘겨주었다.그리고 9월25일까지 인도군이 넘겨받은 포로는 유엔군으로부터 북한군 7천9백명과 중공군 1만4천7백4명,북부군으로부터 한국군 3백35명(여군5명 포함),미군 23명,영국군 1명등 모두 2만2천9백63명이었다. 유엔군으로부터 인도받은 숫자는 남한정부의 6·18 반공포로석방으로 1만7천여명이 도망간 상태여서 어느정도 타당성 있는 숫자로 받아들여졌다.그러나 북부군으로부터 인도받은 숫자는 터무니없는 것이었다.자발적으로 귀순해왔다는 5만명을 제외하고도 나머지 1만5천명중 유엔군측으로 송환되지 않은 수가 2천3백여명에 달하는데도 아무 설명이나 명단제시조차 없이 3백여명만 인계했던 것이다. ○총격사건 두차례 ▷포로들의 저항◁ 양측 사령부로부터 포로의 인계는 9월10일 시작돼 25일에 모두 끝났다.그들은 막사마다 리더를 선출,자치적으로 움직였으며 자체 취사를 했다.일과는 상오6시 기상하여 하오9시30분 취침에 들 때까지 대부분 운동과 오락으로 진행됐다. 첫날 중공군포로 가운데 7명이 대열을 이탈하여 송환을 요청해온 것을 비롯하여 밤에 철조망을 뚫고 번의를 요청해오는 포로들이 많았다.이같은 자발적 이탈자들의 증가로 포로측과 인도군측은 점점 사이가 벌어지게 되었다. 본격적인 설득작전은 포로 인계인수가 끝난 뒤 26일부터 시작될 계획이었다.그러나 문제는 마지막날인 25일 발생했다. 날이 밝자 각 캠프의 포로들은 인도군에게 「납치」해간 원추를 즉각 돌려보내줄 것을 요구하며 대규모시위를 벌였다.그들은 반인플래카드를 내걸고 돌을 집어던지며 강력히 저항했다.이 와중에서 토라트사령관이 포로들에게 억류되는 사태가 발생했다.먼저 억류된 그류왈소령의 구출협상을 벌이기 위해 캠프를 찾은 토라트사령관과 브두와르중령·싱소령등 12명이 순식간에 5백명에게 포위된 것이다. 부사령관 싱준장은 즉시 무장병력을 출동시켜 캠프전체를 에워싸고 사령관일행의 즉각석방을 요구했다.그리고 유엔군사령부에 협조를 요청하는등 순식간에 긴장이 감돌았다.그 사이 페인탈여단장은 특공대를 동원,극비의 구출계획도 세워놓고 있었다. 지루한 시간이 흘렀고 대화의 진전이 없는 가운데 마침내 토라트사령관의 기지로 포로대표를 설득,상황은 끝나게 되었다.그러나 그후에도 10월1일과 2일 두차례 총격사건이 발생,수십명의 사상자발생등 긴장상태지속으로 첫설득회는 10월15일에 가서야 가능했다.반면에 북부군측에 억류돼 있던 포로들은 규율이 잡혀 있었으며 공산주의에 몰입해 있는 듯했다. ▷대만의 선전전◁ 탈출해온 원추는 대만정부가 단 한명의 중공군포로도 대륙으로 송환시킬 수 없다는 장개석총통의 신념에 따라 조직적으로 포로설득에 개입했음을 폭로했다. 휴전협상이 진행중인 동안 중공군포로들이 수용돼 있던 제주도수용소로 대만정부는 포로들의 교육을 위한 두개의 공작팀을 침투시켰다.각각 12명과 6명으로 조직된 공작팀은 대만의 외교부·정보부·국민당등 각처에서 엄선된 심리전전문가들이었다. 이들은 포로막사로침투해 반공강연을 했고 누구든지 대륙으로 돌아간다면 공산당이 그를 죽여 사지를 절단한 뒤 반공에 대한 본보기로 삼을 것이라고 겁을 주었다.그들은 어떻게 공산당의 설득을 피할 것인가를 가르쳤다.한사람의 이탈도 막기 위해 8∼9명으로 소그룹을 조직,송환의사를 나타내는 포로들을 목졸라 처치해버리는 방법까지 가르쳤다. 송환위대표들로부터 질문을 받을 때는 오직 『대만으로 가고 싶다』는 말만 할 것을 강조했고 포로개개인들에게 「TAIWAN」이라는 영문글자도 가르쳤다. ○88명 제3국 선택 ▷설득완료◁ 12월23일까지 90일간 주어진 설득기간중 실제설득이 이뤄진 날은 10일에 불과했다.설득받은 포로는 전체의 15%에 불과한 3천4백69명이었으며 설득후 송환을 요청한 자는 모두 1백37명,그나마 공산군측 억류포로중에는 한명도 없었다.여기에 설득을 기다리지 않고 막사탈출등으로 송환을 희망한 2백38명(공산군측 포로 8명 포함)을 더해 최종적인 송환희망자는 모두 3백75명.결국 설득작전은 양측사령부와 송환위·인도군등이 엄청난 인원과 물량을투입한 작전치고는 별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90일간의 설득기간이 끝난 후에도 양측은 포로들의 추가설득을 위해 설득기간을 늘려줄 것을 요청했다.그러나 송환위측은 협정에 규정된대로 이 포로들은 30일간의 정리기간을 가진 뒤 54년1월22일자로 포로의 신분이 아닌 자유인의 신분으로 되돌아감을 다시한번 강조했다. 마침내 1월20일 상오8시부터 인도군은 포로들의 인계를 시작했다.다음날 새벽3시까지 모두 19시간 2만1천8백39명이 유엔군측으로,3백47명이 북부군측으로 인계됐다.이 가운데 북한군 74명,중공군 12명,남한군 2명등 88명은 제3국을 택했다.
  • 중국 군대표단 방북

    【북경 AFP 연합】 8명으로 구성된 중국인민해방군(PLA)대표단이 북한인민군 초정으로 북한을 방문하기 위해 21일 북경을 출발했다고 중국관영 신화통신이 보도했다. 이 통신은 이번에 북한을 방문하는 중국군사대표단의 단장은 최근 승진한 왕극 심양군구사령관(원)이라고 밝혔으나 체류일정등에 대해서는 언급을 회피했다.
  • 북,정전위개최 거부

    【내외】 북한은 10일 미국측이 지난 6일 북한에 대해 군사정전위원회 회의소집을 제의한데 대해 『정전협정과 정전기구를 체계적으로 말살해 온 저들의 책임을 가리기 위한 가소로운 연극에 불과하다』면서 거부입장을 분명히 했다. 북한은 이날 정전위를 대신해 최근 개설한 「판문점대표부」대변인 명의의 담화를 발표,『판문점에 조선인민군 대표부를 신설한 조치는 군사정전위가 유명무실해진 현 실태를 타개하기 위한 현실적이고 시기적절한 조치』라면서 그같이 주장한 것으로 중앙통신이 보도했다.
  • 북 일방편들기 중국입장 변화 조짐

    ◎강주석 “북핵해결에 적극 역할” 시사/언론서도 “안보리제재 동참할것” 보도 북한의 핵사찰 거부에 따른 국제사회의 대북경제제재가 임박해지면서 이 문제 해결의 열쇠를 쥐고 있는 중국의 태도에 다시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아직까지 국제사회에서 북한의 입장을 이해하고 두둔해주는 나라는 중국밖에 없는데다 중국이 유엔 안보이의 거부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은 안보리를 중심으로 한 국제사회가 대북경제제재를 가하려 할때 과연 북한의 편을 들것인가,아니면 전반적인 국제여론의 편에 설 것인가. 아직까지 중국은 대화를 통한 문제해결을 되풀이 강조함으로써 중립적인 위치에서 양다리를 걸쳐놓고 있는 상황이다.그들은 지금도 북한핵문제 해결을 위한 기본방침으로 ▲한반도 비핵화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 ▲4방3변 대화(북한과 한국,미국,IAEA간의 대화)와 협상을 통한 문제해결을 되풀이 강조하고 있다.그러면서 미국이 최근 유엔안보리에서 대북제재결의안 초안을 마련,상임이사국들을 상대로 벌이고 있는 협의에도 소극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대화와 협상을 통한 해결을 아직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따라 한승주외무장관이 급거 중국을 방문,설득작업에 나서고 있다.한장관은 이미 지난해 5월의 안보리 결의안과 두차례에 걸친 안보리 의장성명을 채택했는데도 아직까지 국제사회의 염원을 저버리고 있다는 점을 강조,더 이상 북한의 지연전술에 끌려다닐수 없다는 안보이이사국들의 분위기를 전달하며 중국의 협조를 당부할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뿐만아니라 중국이 제재에 동참하지 않는다해도 한·미·일등만으로도 제재를 하지 않을수 없는 입장임을 강조,이에대한 이해와 더불어 중국의 적극적인 중재역할을 요청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한장관의 이같은 요청에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알수 없으나 중국이 최근들어 전과는 다소 달라지고 있다는 점도 간과할수 없는 상황이다. 우선 강택민국가주석은 7일 동남아국가연합(아세안)대표단들과 만난 자리에서 북한핵문제가 더이상 악화되는 것을 방지하고 한반도 긴장완화를 위해 『한층 창조적이며 인내력 있는 외교를 펼칠 시기가 왔다』면서 중국이 북핵해결에 적극적인 역할을 할 생각임을 밝혔다. 이와함께 사실상의 중국정부 신문인 홍콩의 대공보가 만약 유엔에서 북한에 대한 경제제재를 실시하면 중국도 북한에 대한 식량과 원유공급,국경무역 등을 중단할 것이라고 보도한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수 있다.이는 특히 지난 주말 주창순중국주재북한대사가 기자회견을 통해 『유엔안보리에서의 경제제재는 중국의 거부권 행사로 이뤄지지 못할 것』이라고 밝힌데 대한 반론 같아서 주목되고 있다.중국 당국은 종종 자기들이 직접 말하기 곤란한 내용을 홍콩의 중국계신문인 대공보나 문회보를 통해 흘려오곤 했다. 강주석은 북경을 방문중인 북한인민군총사령관 최광을 접견한 자리에서도 북한핵과 관련해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했을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그러나 그의 방중은 지난 3월에 이미 결정된데다 일정 역시 오는 14일까지 대부분 유명 관광지역 순회로 짜여진 점등으로 보아 심각한 정치얘기를 주고 받기에는 적절치 않다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이상과 같은 점을 종합해보면 중국은 한국이나 안보리 상임이사국들에 시간을 얻어내 북한을 마지막으로 설득해보려 한것 같다.그런데도 북한이 말을 듣지 않는다면 이젠 중대 결단을 내려야할 시점인 셈이다.그것이 안보리제재에 대한 거부권 행사의 포기가 될지는 좀더 두고 볼 일이다.
  • 등소평에 군수지원 호소/최광 중국에 왜 갔나

    ◎북­중 돈독한 유대관계 과시 목적도 최근 북한핵문제와 관련,한·미 양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대북제재움직임이 가속화되고 있는 가운데 북한이 군사대표단을 북경으로 급파하는등 이상기류를 조성하고 있어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인민군총참모장겸 조선국방위원회부위원장 최광등 북한군 차솔(대장위 계급) 3명과 대장 1명으로 구성된 군사대표단이 중국을 방문한 것은 89년 오진우인민무력부장의 방중이후 5년만에 처음 있는 일이다. 최광은 오진우에 이어 북한군 서열 2위지만 오진우가 활동이 힘들만큼 노쇠해 있는 점을 고려할 때 북한군 최고사령관 김정일 아래에서 북한군을 총괄지휘하고 있는 주요인물로 파악되고 있다. 국방부 관계자들은 최광의 방중은 식량·원유와 무기부품지원등 유사시에 대비한 군수지원을 호소하는 데 첫째 목적이 있는 것으로 풀이하고 있다. 북한무기는 일부 자체개발한 것을 제외하면 대부분 러시아제이며 러시아가 2∼3년전부터 무기나 부품판매대금으로 경화결제를 요구한 이후 부품교체등에 어려움을 겪는 것으로알려졌다. 따라서 북한은 중국으로부터 무기부품등을 공급받음으로써 북한·중국이 여전히 돈독한 군사협력·유대관계를 유지하고 있음을 시위하려는 뜻이 큰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북한 군사대표단의 이번 방중은 외형상 중국 장만년총참모장의 초청형식이지만 실제는 북한의 일방적 필요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풀이된다. 북한은 이처럼 군사대표단을 급거 중국에 파견하는등 군사적으로 바쁜 행보를 하고는 있으나 실제 북한내 군사동향은 종전과 크게 달라진 점은 없다는게 우리 군관계자의 공통된 견해다. 북한군 지상병력이 이동하는 모습은 그다지 눈에 띄지 않고 있으며 해군도 하루 20여척이 기동훈련을 실시하는등 일상수준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다.공군의 경우 지난 4월말 IL28기를 표적기로 삼아 전투기 10여대가 일시 남진,휴전선부근까지 접근한 것을 비롯해 최근 2∼3개월 사이 비행훈련을 활발하게 펼치고 있지만 이 또한 평소수준에 지나지 않고 있다. 한 군사정보관계자는 『현대전은 공군의 움직임이 가장 중요하며 항공기의 훈련이 활발할때보다 활동이 없을 때가 더 위험한 것』이라면서 『한·미 양국이 지금보다 정보수집활동을 강화해야 할 이상징후는 없다』고 말했다. 이런 북한 군사동향분석에 근거,군사관계자들은 현재 북한이 각종 대내외매체를 통해 『제재는 바로 선전포고』라는등의 강경발언을 되풀이하는 것은 한마디로 「엄포」성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북한이 지난해 7월27일 3단계 전쟁준비태세를 완료했으며 내년까지 통일을 완수할 것을 다짐하고 있다는 점과 북한의 의외성을 감안,철저한 대북경계태세의 유지가 필수적임은 빼놓지 않고 있다.
  • 중,“북핵해결 막후 역할”/강택민 밝혀

    【북경 AFP 연합】 강택민 중국국가주석은 7일 중국이 북한핵문제로 인한 위기를 해결하는데 적극적인 역할을 할 것이라고 밝혔다. 강국가주석은 방중중인 아세안(동남아국가연합)대표단을 만나는 자리에서 북한핵문제가 더욱 악화되는 것을 방지하고 한반도 긴장완화를 위해 한층 창조적이며 인내력있는 외교를 펼칠 시기가 왔다며 이같이 밝혔다고 북경주재 필리핀대사관 공보실이 전했다. 강주석은 아세안방문단대표인 필리핀의 조세 데 베네시아 의회의장이 북한핵위기해소를 위해 중국과 아세안이 적극적인 중재에 나설 것을 제의한 데 대해 이같은 입장을 밝혔는데 그의 발언은 유엔이 대북제재방안에 대해 공식논의에 착수한 가운데 나왔다. ◎“중­북 우호지속”/강택민,방중 최광 접견 【북경=최두삼특파원】 강택민중국국가주석은 7일 북경을 방문중인 북한군 총참모장 최광을 접견,중국·북한관계가 『이와 입술(순치)처럼 서로 의존하는 우방으로,양당·양국·양군간의 전통적인 우호관계를 앞으로 더욱 발전시켜 나갈 것』이라고 다짐했다고 중국중앙TV방송이 이날 보도했다. ◎양국 “혈맹” 재확인 【도쿄 연합】 장만년 중국인민해방군 총참모장은 6일 중국을 방문중인 최광 북한인민군 총참모장이 이끄는 군사대표단과 회담을 갖고 양국과 양국군대의 「피로 굳어진 우호관계」를 재확인했다고 일본의 교도통신이 7일 북경발로 보도했다. 교도통신은 중국의 화교상대 통신사인 「중국신문사」를 인용,이같이 전하고 북한의 핵문제로 한반도 정세가 긴박해지고 있는 가운데 중·북한 양국의 군최고간부가 「혈맹관계」를 내외에 과시한 것은 북한에 경제제재를 가하려는 국제사회의 움직임을 견제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 「6·25남침」입증 결정적 자료/러 반환예정 한국전 문서는 어떤것

    ◎49년1월∼50년10월 북­중·소 교신내용/전쟁도발 배경·소군 참전자료 등 포함 김영삼대통령의 러시아방문을 계기로 6·25사변의 전개과정이 보다 분명히 밝혀질 전망이다. 김대통령이 보리스 옐친대통령으로부터 러시아가 지니고 있는 6·25 관련 문서를 선물받아 가져오게 돼있기 때문이다. 옐친대통령은 지난해 이들 문서를 김대통령의 러시아방문 때 꼭 전달하겠다고 약속했으며 2일 이를 실행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이들 문서는 지난 49년 1월부터 중공군이 개입을 시작한 50년 10월까지 1년10개월동안 북한이 옛소련및 중국과 교신한 내용인 것으로 알려진다.문서에 대한 목록은 이미 외무부에 전달되어 있는 상태다.한승주외무부장관이 지난해 6월 러시아를 방문,옐친대통령을 예방한 자리에서 받아온 것이다. ○일반공개 검토 외무부는 그러나 문서의 해당기간만을 얘기할 뿐 아직까지 자세한 내용은 밝히지 않고 있다.러시아가 북한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김대통령에게 문서가 전달될 때까지는 비밀에 부쳐주기를 요청했기 때문이다. 관계자들도김대통령이 문서를 가져오면 자세한 검토를 한 뒤 그때가서 일반에게도 공개하겠다고 말하고 있다. 이들 문서의 구체적인 내용이 공개되지 않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 문서를 통해 김일성의 전쟁도발을 공식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는게 일반적인 관측이다. 그 내용의 상당 부분은 이미 흘러나왔지만 북한의 전쟁도발 배경등이 낱낱이 드러날 것이라고 관계자들은 조심스럽게 예상하고 있다.옐친대통령도 지난해 한장관을 만났을 때 『자료가 전부 전달되면 누가 도발했는지가 밝혀질 것』이라고 분명히 밝혔었다. 이 문서들은 옐친대통령의 지시로 군사보좌관인 드미트리 볼코고노프대장이 모은 것들이다.이렇게 볼때 김일성이 모스크바를 방문,스탈린을 만난 자리에서 전쟁을 승리로 이끌수 있다고 장담하면서 남한에 수많은 공작조를 심어놓았음을 자랑한 사실,또 귀로에 모택동을 만나 역시 전쟁 승리를 장담하며 지원을 요청한 사실등이 포함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한·러 과거 청산 문서에는 이같은 내용 말고도 ▲김일성이 50년 1월 북한주재소련대사였던 슈티코프장군에게 전쟁동의를 요청하고 2월 스탈린이 이에 동의한 전문 ▲50년 5월초 바실리예프중장등 소련군사고문단이 작성해 김일성에게 전달한 「선제타격 작전계획」 ▲6·25발발 직전인 18일 북한인민군 7개 사단에 하달된 정찰명령 ▲49년 9월부터 50년 4월까지 소련이 북한에 지원한 무기의 내용등도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특히 이들 문서에는 소련군이 6·25의 개전에서부터 참여했다고 인정되는 자료도 있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런 점에서 문서 전달을 외교적으로 보면 우리와 러시아 두나라의 「과거 확인및 청산」이라는 의미가 담겨있다고도 볼수 있다. ◎김 대통령 출국인사 요지/“한반도 안정·4각외교 완결” 나는 오늘 러시아와 우즈베키스탄을 공식방문하기 위하여 출국합니다. 나의 이번 여정은 지난 1년동안 미국과 일본,그리고 중국을 공식방문한 연장선 위에서 마련된 것입니다.이들 나라는 한반도의 안정과 평화에 매우 중요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나는 방문국의 정부지도자들과 국민들에게한반도의 평화를 위한 협력을 역설했고 또 지지를 받았습니다. 이제 나는 마지막으로 러시아를 방문하여 취임이래 추구해온 한반도의 안정과 평화를 위한 4각외교를 완결하고자 합니다.나는 옐친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통하여 동아시아의 평화와 한국의 안보,그리고 두 나라가 필요로 하고 있는 경제협력문제를 진지하게 논의하겠습니다.특히 북한핵문제의 해결이 절실하게 요청되는 시점에서 러시아와의 관계를 더욱 긴밀히 발전시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나의 이번 방문은 한국과 러시아 사이에 냉전시대가 확실히 종식되었다는 것을 확인하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나는 방문기간중 러시아 상원과 모스크바대학에서 과도기적 어려움에 처한 러시아의 정치인들과 젊은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잃지 말고 위대한 러시아의 건설을 위해 정진할 것을 호소할 것입니다. 우즈베키스탄은 정세가 안정되고 자원이 풍부하여 우리와 경제협력가능성이 매우 큰 나라입니다.나는 카리모프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우리 기업의 진출문제를 심도있게 협의할 예정입니다. 우즈베키스탄에는 연해주일대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된 분들과 그들의 자손들이 20만명이나 살고 있습니다.나는 동포들을 만나 그들을 위로하고 그들의 권익을 향상시키는 문제에 대해서도 협의하고자 합니다. 나는 귀로에 블라디보스토크의 러시아 태평양함대를 방문하여 한·러시아의 관계변화를 국민 여러분과 더불어 실감하고자 합니다.나는 이번 방문을 통하여 21세기를 향해 러시아와 건설적이고 상호보완적인 동반자관계를 기약하고 돌아올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나라는 한반도를 둘러싸고 있는 미국·일본·중국·러시아등 주변의 주요국가들과 안보면에서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 공고한 협력관계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국민내부의 일치와 합의입니다.하나되어 국운을 개척하는 일입니다.있는 힘을 다 합쳐 국가경쟁력을 강화하는 일입니다.우리에게는 소모적인 갈등으로 주춤거릴 시간이 없습니다.나는 대통령으로서 이 나라의 안보와,그리고 국가이익을 위해서라면 지구의 끝까지라도 가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 북,「판문점 대표부」 개설 유엔사 통보

    ◎정부,“정전체제 변질 차단”/북에 비서장회의 개최 곧 요구 정부는 25일 북측의 「조선인민군 판문점대표부」설치 기도가 군정위를 무력화시키면서 미국과 직접협상을 통해 평화협정 등을 체결하려는 의도로 보고 미국및 유엔사령부 등과 긴밀히 협의,단호히 대처하기로 했다. 유엔사측은 이날 이와 관련,북한측이 통보해온 판문점대표부 설치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군정위 비서장회의를 빠른 시일내에 개최할 것을 북측에 요청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정부는 특히 북한의 군정위 무력화를 위한 최근 일련의 기도에는 이를 통해 핵문제를 희석시키기 위한 속셈이 깃들어 있다고 보고 정부차원의 공식대응보다는 우선 유엔사측을 통해 정부의 입장을 북측에 전달키로 했다. 정부의 한 당국자는 이와 관련,『정전협정의 대체를 포함한 현정전체제의 전환문제는 남북이 당사자가 되어 자주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 남북기본합의서 정신에 부합된다』면서 『북측은 정전협정을 성실히 준수하고 군정위를 조속히 정상화해야 할 것』이라고 촉구했다.
  • 한국 배제 “대미직접대화” 포석/북 「판문점대표부 설치」 속셈

    ◎정부 “남북기본합의서 준수” 강력 촉구 북한이 24일 「조선인민군 판문점대표부」를 설치했다고 유엔군사령부에 일방적으로 통보해온 것은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기 위한 그들의 집요한 전술의 일환이다.그 이면에는 우리측을 배제한 채 미국과 직접협상을 통해 그들이 노리는 목적을 달성하려는 장기적 전략이 깔려 있다.정전협정을 북한과 미국과의 평화협정으로 대체하면서 그 과정을 통해 주한미군철수나 한미상호방위조약 폐기 등을 이끌어내려는 속셈인 것이다. 북한은 올들어 이같은 목적을 관철시키기 위해 일차적으로 군사정전위를 기능상실 상태로 몰고가기 위한 분위기 조성에 주력해 왔다.지난 92년 한국군 황원탁소장이 미국측을 대신해 유엔측 수석대표로 임명된 직후부터 군정위 본회의 참석을 거부해온 데 이어 중립국감독위의 폴란드 대표 철수를 통보해왔다.또 지난 4월28일부터는 군정위 비서장을 아예 철수시켰다.이밖에 지난달말 판문점에서 정전협정을 무시한 채 철모·개인화기로 무장한 1개소대가 무력시위를 벌인 것이라든가 북한 공군기들이 휴전선 인근까지 남하하는 이례적인 비행훈련을 실시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북한의 이번 판문점 대표부 설치통보는 정전위 무력화 기도의 결정판이라고 볼 수 있다.이는 6월초 열릴 가능성이 높은 미·북 3단계회담에서 미국과 평화협정 체결 및 평화보장 수립체계를 논의하자고 주장하기 위한 그들 나름의 정지작업인 셈이다. 정부는 북한의 군정위 무력화 저의가 뻔한 만큼 이에 단호히 대처한다는 입장이다.정부는 특히 남북기본합의서가 남과 북이 현정전상태를 평화상태로 전환시키기 위해 공동노력하되 평화상태가 이룩될 때까지 현군사정전협정이 준수되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는데 주목하고 있다.때문에 우선 남북간 기존합의를 존중해야 한다는 차원에서도 현 정전기구를 대체하는 새기구가 마련될 때까지 정전협정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북측에 강력히 촉구하기로 했다. 정부는 또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하는 문제는 남북당사자간 직접협상으로 해결해나간다는 방침아래 대미 외교채널을 통해 우리측의 분명한 입장을 미국측에 전달,3단계회담에서 이 문제를 쟁점화하려는 북측의 기도를 봉쇄하기로 했다. 다만 북측의 주장에 일일이 반박하는 것은 핵문제의 초점을 분산시키려는 북측의 전술에 말려들 우려가 있다고 보고 정전위 비서장회의를 빠른 시일안에 개최할 것을 북측에 요구,북측 주장의 부당성을 지적할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다.
  • 북핵 심각한 상황 우려/오자와 일 대비를 촉구

    【도쿄 연합】 일본 하타 쓰토무(우전자)연립정권의 배후실력자인 오자와 이치로(소택일낭) 신생당대표간사는 21일 북한의 핵무기 개발의혹과 관련해 『심각한 상황으로 발전될지 모른다』고 우려를 표시했다. 오자와 대표간사는 이날 이와테(암수)현 오후나토(대선도)시에서 가진 한 강연에서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유엔에 의한 (제재) 조치가 있을 것』이라며 『일본으로부터의 송금이 북한의 국가예산과 비슷한 수준이라거나 북한 인민군의 고도무기가 일본제라고 전해지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런 상황에서 일본이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되면 일본은 충분한 사전태세정비를 촉구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 러 비밀문서로 본 1950년 4∼6월 상황

    ◎모,“중·북 국경에 병력 추가배치”/5월15일/38선종심 10∼15㎞ 인민군배치 개시/6월12일/김일성,소에 “25일 전면전 불가피”/6월22일 한국전쟁 발발과 관련한 구소련의 비밀외교문서 요지는 다음과 같다. ◇1950년4월10일=평양발.평양주재 이그나체프 소련임시대리대사가 본부에 보고한 내용.북경주재 북한대사 이주은이 모택동을 면담,김일성의 북경방문 요청을 전달했음.모는 이주은에게 『김일성이 만약 한국통일에 관한 구체적인 계획을 갖고 있다면 이 회담은 비밀회담이 돼야한다.계획이 없다면 공식회담으로 하자』고 언급.모는 이어 『만약 제3차대전이 시작된다면 조선도 참여를 피할수 없을 것이다.북조선도 그에 대비한 병력준비에 나서야한다』고 말했다. ○스탈린면담 후속 ◇50년4월25일=모스크바발 전문.김일성과 박헌영이 모스크바방문을 마치고 평양으로 돌아갔다.모스크바회담에서 스탈린은 49년 3월 김일성과 회담시 남한에 대해 방어적인 무력대응만 하라고 했던 입장을 바꿔 『국제상황이 바뀌었기 때문에 한국통일을 시작하겠다는 제의에 동의한다』고 밝혔다.그러나 만약 중국지도자들의 의견이 부정적이면 이 문제는 다시 토의한다고 첨언했다. ○미 두려울것 없다 ◇50년5월12일=평양발.슈티코프 평양주재 소련대사 김일성·박헌영과의 면담내용 보고.김일성은 면담에서 북경주재 북한대사의 발언을 인용,『모택동이 「한국통일은 오직 무력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말했다』고 설명.김일성은 이어서 『모택동이 「미국이 한국과 같은 작은 영토 때문에 3차세계대전을 시작하지는 않을 것이며 따라서 미국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고 전했다.김은 또 5월 13일 모택동을 만나기 위해 북경을 방문할 계획임을 밝히고 ①남한 무력통일의사 전달 ②북조선과 중국간 조속한 시일내 무역협정체결문제 ③모스크바에서 있었던 스탈린과의 회담내용 보고등 방문목적을 구체적으로 설명했다.김일성은 또 인민군총사령관에게 6월 남한공격작전계획 수립을 지시했다고 슈티코프대사에게 설명. ◇50년5월13일=김일성과 박헌영 북경에 도착.14일 모택동은 노신 주중국 소련대사를 면담,스탈린과 김일성간 모스크바회담내용을 보고받음.모는 이 자리에서 자신이 남북한 상황에 대한 북한지도자들의 인식에 동의한다고 말하고 『그러나 최종결정은 필리포프동지(스탈린)의 의견을 들은 후에 내릴 것』이라고 말했다. ○일개입 여부 질문 ◇50년5월15일=모택동은 김일성,박헌영과 상세한 의견교환.김일성은 이 자리에서 ①병력준비 및 집중 ②대남 평화통일 제의 ③남한이 이 평화통일제안 거부시 군사행동 시작등 3단계 통일추진계획을 설명.모택동은 이 계획을 승인한 뒤 몇가지 질문을 했다.우선 일본의 개입가능성을 물었다.김은 일본개입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말하고 대신 미국이 2만∼3만명의 군대를 파병할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모는 미군이 참전한다면 중국이 병력을 동원,북한을 지원할 것을 약속했다.모택동은 소련은 미국과 38도선 분계선 협정을 체결했기 때문에 소련군이 직접 군사행동에 참여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강조.하지만 중국은 그런 협정에 얽매이지 않기 때문에 북한을 지원할수 있다고 말했다. 모는 북한이 무기·탄약지원을 필요로하는지 묻고 중국·북한국경지역으로 병력을 추가배치하겠다고 말했다.그러나 김일성은 소련의 무기·탄약지원약속을 이미 받은 상태이기 때문에 모의 제의를 거절. ○“공격시기 6월말” ◇50년5월16일=김일성,박헌영 평양으로 귀환.김은 슈티코프 소련대사와 만나 4월 모스크바회담에서 합의한 무기·기술지원 대부분이 평양에 도착했다고 말함.김은 새로 창설한 사단을 방문하고 창설작업이 6월말까지 완료될 것이라고 슈티코프대사에게 설명.소련군사고문단 바실리예프장군이 인민군총사령관과 함께 김일성에게 공격최종계획 보고.김이 이를 승인.김은 공격시기를 6월말로 잡고 이를 미루는 게 무의미하다고 말했다.그는 더이상 미루면 전쟁준비에 관한 정보가 남한에 흘러들어갈 가능성이 있고 둘째로 7월부터 우기가 시작되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설명.슈티코프대사는 김일성을 면담한 뒤 바실리예프장군,포스트니코프장군과 잇따라 만나 6월공격이 좋다고 동의했다. ○3단계 작전수립 ◇50년6월16일=평양발.슈티코프대사는 인민군총사령관이 준비한 최종공격작전계획 본부에 보고.이 작전계획은 3단계로 나뉘어 있고 작전기간은 1개월.6월 12일 38도선을 따라 10∼15㎞지역에 걸쳐 인민군의 배치가 시작됨.각급지휘관 회의가 열리고 작전명령이 하달됨. ◇50년6월16일=북조선인민대의원회의 최고회의 남한의회에 평화통일 제의. ○국지전계획 폐기 ◇50년6월22일=슈티코프대사는 김일성과의 면담내용을 본부에 보고.김은 면담에서 남한이 인민군의 공격계획을 사전 입수,준비태세에 들어갔다고 주장.김은 그렇기 때문에 6월 25일 전전선에 걸쳐 군사행동을 개시하는 게 좋겠다고 설명.김은 옹진반도를 목표로 한 「국지전 계획」은 폐기한다고 말함. ◇50년6월22일=모스크바발.『통신보안을 믿을 수 없기 때문에』 평양주재 소련대사관 코드를 사용한 서신,전문교환을 일체 중단하라는 명령이 하달됨.
  • 식량 증산위해 경지확대 안간힘

    ◎14만 정보 간척사업에 매일 5만명 동원/공터에 콩심기 등 「새땅찾기 운동」도 등장 최근 식량난으로 국경탈출자들이 속출하는 등 곤경을 겪고 있는 가운데 북한이 곡물 증산을 위한 경지 확대에 총력을 경주하고 있다. 서해의 간척지를 개간하고 산기슭에 다랑밭을 만드는등 갖가지 자구책 마련에 안간힘을 쏟고 있는 것이다. 북한은 지난달 27일 이른바 「자연개조 사업」의 일환으로 평남 온천군 광량만 일대에서 추진해 왔던 금성간척지 개간공사를 완공하고 당정 고위간부들이 참가한 가운데 준공식을 가졌다.이는 광량만과 금성리구간(약16㎞)의 바다를 제방으로 쌓아 3천3백정보의 농경지를 확보한 대공사로 알려지고 있다. 북한측은 이 간척지를 통해 연간 2만여t의 곡물을 수확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정부 관계당국에 따르면 북한은 이외에도 최근 총 14개 지역에 걸쳐 총 14만정보의 간척지를 개간중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이 공사를 위해 인민군·청년돌격대 등이 매일 5만여명 이상 동원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뿐만 아니라 북한은 지난해 대동강 하구둑을 막는 8㎞의 서해갑문에 이어 올들어 서부지구의 2천리 물길건설을 완료하는 등 농촌 관개작업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이는 지난 2월 김일성이 전국농업대회에 보낸 서한에서 확인됐다. 이는 경지면적을 늘림으로써 식량증산을 꾀한다는 북한의 「자연개조 5대 방침」의 일환이다.북한은 70년대 중반부터 ▲밭 관개시설 설치 ▲다랑밭 개간 ▲토지정리 및 개량사업 ▲치산치수 사업 ▲간척지 개간 등을 5대 자연개조사업으로 실시 해 왔다. 자연개조 5대방침이 경지면적 확대 등 일부 업적을 남겼으나 이들 중 다랑밭 개간작업은 북한 농업정책중 대표적 실패작으로 꼽히고 있다. 즉 식량증산에 대한 과도한 욕심이 다랑밭을 전국토의 완만한 경사지 임야로 확대시키는 바람에 이들 지역의 토양유실과 하천범람을 촉발시켰다는 지적이다. 북한이 올들어 간척지 개간에 열을 올리고 있는 것은 다랑밭 조성작업의 불합리함을 뒤늦게나마 인식했기 때문인 것으로 여겨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당국은 숙련된 인력과장비 및 기술의 부족으로 지난 80년대초에 수립했던 「30만정보 간척지 개간」목표에 훨씬 못미치는 9개 간척지 2만8천정보를 개간,완료한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더욱이 간척지의 담수 확보,경지정리,제염작업 등 농지기반 조성작업이라는 후속조치가 남아 있어 향후 2∼3년간은 정상적인 곡물 증산이 어려울 것으로 전망된다. 때문에 북한은 간척지 개간과는 별도로 집 주변의 공터나 도로변의 자투리땅에 옥수수나 콩을 심어 식량증산을 꾀하는 이른바 「새땅찾기 운동」도 전개하고 있다.
  • “북 방사능노출 환자 많아”/귀순자 3명 일문일답

    ◎어린이들 제대로 못먹어 키 안자라/주민 10%정도 남한방송 몰래 청취 북한을 탈출한 김대호씨등 3명은 9일 하오 2시 서울 한국프레스센터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북한에서는 가정환경이 불순한 사람에 대한 차별대우가 심한데다 극심한 식량난을 겪고 있어 탈출을 결심하게 됐다』고 말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내용. ­탈출동기와 경로는. ▲(김씨)장인이 6·25때 치안대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차별대우를 받고 사회적 발전을 기대하지 못해 새로운 길을 모색하게 됐다.그러던 차에 남포 수산기지의 책임자로 있을 때 차용한 거액의 외화를 사기당해 탈출을 결심했다.지난해 2월2일 두만강을 넘어 연변의 친척집에 숨어 있다 인민군 군관이 남한에 귀순해 후한 대접을 받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귀순하게 됐다. (황군 형제)87년에 어머니가 협동농장에서 강냉이를 훔쳤다는 이유로 15년형을 선고받고 교화소에 복역하게 됐다.이 일로 사회적 냉대를 받게돼 탈출하기로 했다.작년 6월 5일 우리 형제는 두만강을 도강,친척을 찾아 헤맸으나 결국 찾지 못하고 어느농촌집에서 일하며 숨어 있다가 남한 사회교육방송을 듣고 남한 배를 몰래 탔다. 중국에 있는 동안 탈북자를 북한 공안원이 코를 꿰어 체포해 갔다는 말을 들었다. ­북한의 핵시설은. ▲우라늄 광산이 평남 순천등 3곳에 있고 채광된 원석은 남천화학등 2곳의 정련공장에 보내진다.여기서는 순도 40%정도의 우라늄을 생산하는데 최근에는 원석 운반차를 움직일 휘발유가 없을 정도로 경제난에 시달려 생산량이 떨어지고 있다. ­직업병을 가진 노동자는 없나. ▲많은 노동자들이 방사능에 노출돼 간염·백혈구·감소증·탈모증·결핵등에 시달리고 있으나 변변한 치료시설도 없다. ­북한 주민들의 동향과 남한방송 청취정도는. ▲10%정도 된다.주민들의 남한 방송청취는 주파수를 고정시켜 버리기 때문에 어려운 점이 많다.북한주민들은 강냉이도 못 먹는 현실을 한탄하며 속아 살았다고 불평하고 있다.어떤 사람들은 이씨왕조가 5백년을 갔는데 김부자도 5백년을 갈까 걱정이라고 숨어서 말한다. ­북한의 식량사정은. ▲(황군 형제)북한에 있을 때는 키가못 먹어서 1백57㎝밖에 되지 않았고 갈비뼈가 드러날 정도였다.중국으로 탈출해서 몸이 많이 좋아졌다.아이들은 두달이 지나도 걷지 못하고 구루병에 걸린 아이들도 40∼50%나 된다.2∼3개월이나 식량을 배급받지 못해 들쥐굴을 파 강냉이를 구하기도 한다.군인들이 보초를 서는동안 닭이나 돼지등을 도둑질하는 일도 흔히 있다.먹을 것은 물론이고 간장이나 된장,치약 칫솔 빨래비누도 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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