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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만기출소한 포로/북 주민접촉 승인

    【청주=김동진기자】 한국전쟁때 인민군으로 참전했다가 국군에게 붙잡혀 33년간의 옥살이를 했던 김영태씨(62·목수·청주시 내덕동 740의 11)가 최근 통일원으로부터 「북한주민 접촉승인」을 받아 북한의 가족들과 상봉할 수 있게 됐다. 평북 정주군 옥천면 장경리가 고향인 김씨는 지난 50년 인민군에 입대,남하하여 전투중 국군이 반격할때 미처 후퇴하지 못하고 빨치산으로 활동하다 54년 2월 지리산 함양지역에서 체포된뒤 비전향 장기수로 대구와 대전교도소등지에서 감옥생활을 했고 한때 출옥했다가 다시 투옥되기도 했다.
  • 서상목 보사(신임각료 면모)

    ◎스탠퍼드대 출신의 「1급경제통」 스탠퍼드대 경제학박사 출신의 민자당내 「1급 경제통」.아웅산에서 순직한 서상철전동자부장관의 실제. 세계은행 경제조사역과 한국개발연구원 부원장 시절 세계의 빈국문제에 관심을 보여 진보적 학풍의 소유자라는 평을 들었으나 사상적으로는 6·25때 인민군에게 가족이 살해당한 상처를 가진 반공주의자. 13대에 민정당 전국구로 원내에 입문한뒤 지난 14대 대선때는 각종 토론회에서 민자당의 경제정책을 해박한 식견으로 홍보하는등 두각을 나타냈다.꼼꼼하고 성실한 정책브레인으로 당 안팎의 신임이 두터운 편. 부인 황현숙씨(46)와의 사이에 1남.등록재산 19억7백35민3천원.
  • 핵정책·권력승계 내부조율 주목/내일 개막 북한최고 인민회의

    ◎김정일 당총비서 승계 내년으로 넘길듯/경제정책 실책에 대한 문책성 인사 가능 9일 열리는 북한 최고인민회의는 핵문제와 관련해 사찰수용이냐,국제제재감수냐의 갈림길에서 개최된다는 점에서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우선 지난 3월 핵확산금지조약(NPT)탈퇴선언 이후 계속되어온 핵정책을 둘러싼 내부진통이 어떤 형태로 가닥이 잡힐것인지 귀추가 주목된다. 북한 내부에서는 그 동안 핵문제 등 주요 대외정책을 둘러싸고 경제 및 외교 관료그룹과 군부가 외부에 알려진 것 이상으로 팽팽히 맞서 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핵문제와 관련한 내부조율로 중대한 방향전환이 이뤄진다 하더라도 북한정권의 속성상 금방 외부로 표출되지는 않으리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때문에 이번 최고인민회의에서 김일성·김정일 등 북한정권 핵심부의 핵문제와 관련한 최종 의사결정은 당·정 개편 등 대규모 인사로 가시화될 공산이 크다. 물론 이번에 단행될 인사개편의 핵심은 김일성의 후계구도와 관련,과연 어떤 조치가 취해질 것이냐 하는 점이다. 김정일은 지난 4월 최고인민회의에서 군을 포함한 전반적인 무력을 총괄하는 국방위원장에 선출된 바 있다.김은 당에서도 정치국 상무위원·중앙위 비서·군사위원회 위원이라는 핵심요직을 맡고 있으며 군에서는 인민군 총사령관과 원수 등 막강한 직책을 맡아 당정군에 걸쳐 거의 전권을 행사하고 있다. 북한당국이 최근 몇개월동안 각종 선전기관과 당내외 조직을 총동원하다시피 하여 김정일의 우상화에 박차를 가해온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특히 그에 대한 호칭을 「어버이수령」이라는 등 김일성과 동급으로 격상시킨다거나 정당·사회단체 모임을 잇따라 개최,김정일에 대한 충성을 결의한 것 등이 그것이다. 때문에 일부 북한 관측통들은 김정일이 이번 최고인민회의를 통해 당총비서나 국가주석직중 하나를 승계할 가능성도 있다고 점치고 있다.이는 김일성·김정일 부자 세습체제의 사실상 완성을 뜻한다. 그러나 현재로선 이들 직책이 이번 회의를 통해서 이양되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이 우세한 편이다.왜냐하면 북한이 핵문제로 국제적 압력을 받고 있을뿐만아니라 식량난과 생필품 부족 등 극심한 경제적 곤경으로 인해 「축제 분위기」속에 후계체제를 마무리지을 형편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같은 상황을 고려하면 북한 당국은 이번 최고인민회의에서 김정일에 대한 충성서약을 이끌어 낸뒤 후계체제의 마무리는 김정일이 공식 후계지위를 획득한지 20주년이 되는 내년으로 넘길 공산이 크다. 이번 회의에서는 또 경제정책 실책에 대한 문책성인사가 있을 가능성이 많다. 올해로 끝나는 북한의 제3차 7개년계획이 금년까지 연4년째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해 완전한 실패로 끝났기 때문이다. 따라서 강성산정무원총리·김달현부총리 등이 어떻게 될 지 주목된다. 북한 경제의 실패는 핵문제와 관련한 대외개방의 지연과 무관치 않다.따라서 김영남부총리겸 외교부장·김용순노동당 대남비서 등 이른바 온건개방파들의 재신임여부도 북한의 향후 핵정책의 방향을 가늠할 수 있는 주요한 잣대가 될 것으로 보인다.
  • 서울­워싱턴 북핵 시각차/이경형 워싱턴 특파원(오늘의 눈)

    요즘 워싱턴의 백악관 정오브리핑은 물론,국무부·국방부의 정례브리핑에선 연일 북한핵문제에 대한 질문들이 숨가쁘게 쏟아지고있다.24시간 뉴스를 방송하는 CNN­TV도 수시로 남북한 병력이 대치하고 있는 한반도의 지도와 함께 북한 영변의 핵시설과 인민군의 김일성광장사열장면을 방영하면서 핵사찰을 둘러싼 뉴스를 계속 내보내고 있다. 3일엔 클린턴대통령이 NBC­TV와의 인터뷰를 통해 『한국에 병력증파가능성을 배제하지않는다』고 말하기도 했다.물론 외교적 해결을 기대하는 메시지도 함께 곁들이긴 했다. 미국의 매스컴들은 4일 상오 뉴욕에서 있은 미·북한간의 비공식실무접촉기사를 중요기사로 다루고있다. 북한핵사찰수락문제가 외교적 방법으로 해결이 되느냐 아니면 유엔안보리를 통한 제재로 가느냐하는 갈림길에서 미국의 당국자나 언론들은 숨을 죽이며 한반도를 주시하고 있는 것이다.미국사람들이 이같이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국제정치학계의 석학인 브레진스키 전백악관안보보좌관이 분석한것처럼 이 문제가 동북아의 안정파괴차원뿐만아니라 미국의 이해와 직결되기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는 지난 3일 미법조협회의 한 위원회에 초청연사로 나와 북한이 핵무기와 함께 운반체제를 보유하게되면 일본의 즉각적인 핵보유를 초래하고 일본이 핵을 가지면 그동안 안보관계를 축으로 해온 기존의 미일관계를 근본적으로 뒤흔들게되어 미국의 이익을 크게 해친다고 지적했다. 같은 시기에 서울에서 전해진 뉴스는 새해 예산안처리를 둘러싸고 여야의 대결,쌀시장개방에 대한 대응등이 대종을 이뤘다.또 대북협상 훈령조작사건을 둘러싸고 통일·남북문제에 대한 정부관계부처간의 의사결정권 장악,힘겨루기 싸움으로 비쳐지는 기사도 여운을 남기고 있었다. 북한핵문제의 심각성에 대한 인식도에 있어 한국정부나 미국행정부간에 특별히 차이가 있다거나 견해를 달리할것이라고는 생각되지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워싱턴과 서울간에는 「심각성」에 대한 체감의 편차가 있는 것으로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미국언론의 시각에 빠져있는 특파원의 직업적 「편파성」때문일까.아니면 북한이 핵을 가진들 설마 동족한테야 사용하겠느냐는 생각이나 북한의 핵개발은 결국 통일한국의 핵보유가 아니냐는 등의 사회분위기는 없는 것일까.
  • 적십자회담 재개 촉구/강 한적총재,북에 전화통지문

    강영훈 대한적십자사총재는 3일 북한적십자중앙위원회 이성호 위원장대리에게 전화통지문을 보내 남북이산가족 문제 해결을 위한 적십자회담의 조속한 재개를 촉구했다. 강총재는 이날 전통문에서 『귀하가 요청하고 있는 거제도 인민군포로들의 자료 인도는 적십자사가 관여할 입장에 있지 않다』면서 『적십자 본연의 인도적 입장에서 북측이 이산가족 상봉을 위한 적십자회담 재개에 호응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 김정일 최고사령관 취임후 북,장성 6백64명 숙청/미 재단보고

    【도쿄 연합】 미국의 영향력있는 두뇌집단인 「안전보장회의재단」은 최근 북한 김정일 노동당 비서와 군과의 관계,군내부의 동향,주체사상의 재평가 등을 분석한 「평양에 있어서의 권력이행」이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작성했다고 일본의 산케이(산경)신문이 22일 워싱턴발로 보도했다. 이 신문에 따르면 안전보장회의재단은 보고서에서 『김정일비서는 지난 91년 12월 인민군 최고사령관에 취임한 후 총6백64명의 장성급 인사를 갈아 치움으로써 군주도권의 강화를 시도했다』고 전하고 『그러나 김정일은 김일성의 열렬한 충신이면서 매우 강력한 위치에 있는 인민무력부장(국방장관)과 총참모장은 유임시킬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보고서는 또 『북한 지도부내에서는 김일성 자신을 포함해 누구도 김정일이 세계전쟁 등의 위기에 견디며 현실적으로 국가를 지도할 수 있으리라고 믿고 있지 않는 것 같다』고 말하고 『평양정권이 자신을 갖지 못하고 있는 주된 이유는 군고관들이 앞으로 예상되는 군사적 모험에 말려들어 가는 것을 싫어하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고 강조했다.
  • 평양 교예단/52년 창립 서커스·요술등 2만회 공연(북한백과)

    ◎전용극장 2곳… 평양에 단원 양성학교 서커스와 요술 등 이른바 교예를 전문적으로 공연하는 단체로 지난 52년 6월 창립됐다. 북한은 교예를 『육체노동을 형상수단으로 하여 인간의 체험과 정서,지향 등을 반영함으로써 시회교양적 기능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라고 높이 평가하고 있으며 이것이 교예단 창립의 배경이 되었다. 소속된 교예배우의 수는 3백여명이며 창단 이래 2천회가 넘는 해외공연을 포함해 2만여회의 공연을 가진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공연종목으로는 중심교예,조형교예,공중교예,체럭교예,빙상교예,수중교예 및 사자나 코기리 등을 이용한 동물교예 등이 있으며 대부분 세계적 수준에 올라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또 교예공연 막간에 진행하는 「막간교예」는 주로 남한이나 미국의 사회상을 과장,왜곡 비판하는 내용이 대종을 이룬다.「불에 탄 경찰」,「구두닦이」,「뇌물바람」,「자리다툼」 등의 프로그램이 그것이다. 전용극장으로는 지난 89년 평양축전을 위해 건립된 평양교예극장과 64년 건립된 인민군교예극장 등이 있다.단원양성은 김정일의 지시로 72년 설립된 6년제 평양교예학교가 맡고 있다.
  • 더 이상 끌려가선 안된다/장정행 북한부장(데스크시각)

    북한핵문제로 뒤엉켜버린 남북관계가 좀체 제대로 풀릴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남북 총리가 수십명의 대표단과 함께 남북을 오가며 남북화해를 위한 기본합의서에 서명하고 축배를 나눌 때만 하더라도 통일이 눈앞에 다가오는가 싶었다.그러더니 불과 몇개월 만에 이제는 판문점에서의 접촉마저 끊겨버린채 북쪽에서는 「전쟁도 불사한다」는 말이 마구 나오고 있을 정도로 분위기가 살벌해졌다. ○한반도 긴장 고조 인민군의 전진배치,삭발령등 여차직하면 한반도에 무슨 일이 터질 것같은 긴장감까지 감돌고 있다.어떻게 하든 북한을 대화로 설득,합리적인 해결책을 끌어내 보려는 우리정부와 미국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더욱 더 기고만장해 지고 있는듯 하다. 지난 3월 영변의 미신고 핵시설에 대한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특별사찰을 거부하며 돌연 핵확산금지조약(NPT)탈퇴를 선언하면서 북한은 핵무기개발을 미끼로 미국과 IAEA,그리고 우리정부를 상대로 위험한 도박을 시작했다.그로부터 8개월,그동안 두차례의 미·북한 고위급회담과 3차에 걸친특사교환을 위한 남북 실무접촉,그리고 IAEA총회와 유엔결의에도 불구하고 북한 핵문제는 아무런 진전없이 사찰을 받느냐 않느냐는 원점에서 맴돌고 있다.결국 북한에게 핵개발을 위해 귀중한 시간만 벌게 해주고 한반도의 긴장만 더한 셈이 돼버렸다.북한으로서는 그동안 미국과 한국,IAEA를 교묘히 오가며 벌인 「핵도박」이 국제적 관심을 끌고 한반도의 긴장감 조성으로 내부적인 체제결속을 다지는 등 충분히 성공했다고 판단할 수도 있을 것이다. 북한 핵시설에 대한 사찰의 기본적인 요소인 감시카메라의 필름이 떨어지고 배터리의 수명이 다할 지경에 이르자 이제사 북한에 대한 제재쪽으로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인내의 한계를 강조하며 시한을 못 박겠다고 한다.때맞추어 북한은 핵사찰 수용과 미·북 수교,경수로 지원문제등을 일괄타결할 용의를 밝히고 미국이 이를 긍정적으로 검토키로함에 따라 약간의 기대를 갖게 해주곤 있다.그러나 무엇과 무엇을 어떻게 일괄타결할 것이냐에 대해 미국과 북한의 생각에 차이가 많고 지금까지도 그래 왔듯이 북한이협상을 빙자하여 또다시 시간만 끌 가능성이 크다. 북한이 NPT탈퇴를 선언한 이후 이제까지의 과정을 보면 북한의 속셈은 처음부터 뻔했다. ○북한의 속셈 분명 구소련과 동구공산권의 몰락이후 점차 더해가는 국제적 고립을 벗어나고 미국과의 수교를 통해 경제적 위기를 해결하여 현 체제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 핵무기개발을 카드로 사용한 것이다.시종일관 미국과의 해결을 주장함으로써 한국의 위상을 깎아 내리려는 효과를 노렸음도 분명하다. 미국은 원칙과 합리성을 중시하는 나라다.외교협상에서는 철저히 「주고 받기」(Give and Take)를 한다.북한과의 협상경험은 적다.이에비해 북한은 필요에따라 수시로 태도를 바꾸고 약속도 뒤집는 제멋대로다.한쪽으론 유화적인 태도를 보이며 다른 한쪽에서는 온갖 비방과 적대행위를 태연히 하는 집단이다.그런 북한의 행태를 가장 잘 아는 것은 우리다.그리고 북한을 다룬 경험도 많다. ○「중간적 입장」 곤란 북한이 핵무기를 갖는다면 우리 안보에 결정적인 위협이 되는데도 그 해결에 직접 나서지 못하고있는 이제까지의 어정쩡한 입장은 곤란하다.미국의 결정에 그저 따라만 가서도 안된다.만에 하나 일이 잘못되면 그 피해는 일차적으로 우리가 입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제 더 이상 북한의 의도에 끌려가서는 안된다.
  • 국방인식 안보의식 허점없는가(사설)

    요즘 주변의 안보정세가 긴박하고 유동적이다.북한핵문제를 대화로 해결하려는 남·북한,북·국제원자력기구(IAEA),미·북한간 3각대화 등이 중단되면서 북한핵에 대한 국제적 압력이 가중되고 이에 따른 북한의 동향이 심상찮은 것이다. 북한의 IAEA 사찰거부가 계속되자 유엔은 북한에 대해 핵사찰수용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하기에 이르렀고 이어 클린턴 미대통령은 북한이 오판에 의한 무력도발을 할 것에 대비해 강력한 대북한 경고를 했다.이와 함께 유엔차원의 단계적 제재가 임박했음을 시사하는 보도도 잇따르고 있다. 이에 대한 북한의 태도는 강성일변도로 흐르고 있다.북한은 최근 4차 남북실무접촉을 거부한 이후 연일 신문·방송을 통해 「전쟁에는 전쟁으로 대할 것」이라고 위협하고 있다.뿐만아니라 군병력의 70%를 전방에 전진배치했고 인민군에게 삭발령이 내려지는등의 사실을 근거로 한 「한반도 위기설」외신보도도 계속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김영삼대통령이 어제 안보장관회의를 소집,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만반의 대비책을 철저히강구토록 관계장관에게 지시한 것도 북한정세및 한반도 주변정세가 심상치 않다는 분석에 따른 것이다.특히 북한핵문제가 필요이상으로 부풀려져 국민불안을 가져오는 일이 있어서도 안되겠지만 그렇다고 안보현실을 외면하는 일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는 점도 작용한 것 같다. 북한의 핵고집과 「심상찮은 동향」이 어떤 방향으로 전개될지 현재로선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그러나 엄연한 사실은 북한이 IAEA사찰을 거부하고 모든 대화를 단절했다는 점이다.또한 그들의 호전성은 과거나 지금이나 여전하다는 점이다.특히 그들의 대남책동은 언제나 예측불허다. 그런데 지금 우리 주변 안보정세의 심각한 변화에 대한 국민 일반의 인식은 어떠한가.과거 철통같던 남북대치인식과 국방안보의식에 허점은 없는가 깊이 되짚어볼 일이다.일부 전문가를 포함해서 대다수 국민들이 전세계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한반도정세를 낙관하고 있다.북한이 전후방에서 전투태세를 강화하고 있는데도 「설마 그럴리야」,「별것이 아니다」라는 말을 서슴없이 하고 있다.그것을 두고안보불감증이라 한다. 정부가 작금의 한반도상황을 심각한 사태로 보고 대응책을 강구한 것은 매우 적절한 조치이다. 안보현실을 국민에게 있는 그대로 알려 대북경각심을 갖도록 한 일 또한 매우 필요한 것이라 생각한다.어제나 오늘이나 국가안보는 유비무환이 최고선인 것이다.
  • 북핵제재 “미묘한 모색기”/IAEA 감시의 연속성 종료 임박

    ◎한·미정부,“당근요법 포기” 신중한 교감/“공은 북측에” 국제제재수순 이행 암시 북핵을 둘러싸고 지금은 매우 미묘한 시점이다.정치·물리적 시한,즉 유엔 총회에서 대북결의안이 채택되고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북핵시설에 설치한 감시용카메라의 작동이 크게 손상을 입기 시작한지 벌써 10여일이 지났는 데도 남·북,미·북,IAEA·북한간 이렇다할 움직임이 전혀 없다. ○남북대화 되레 중단 특사교환을 위한 남북대화는 오히려 그 기간동안 중단됐다. 그런데도 현 상황이 어떤 시점인지를 명확히 규정하는 정부 관계자는 아무도 없다.유엔 제재로 가는 준비 시점인지,아니면 대화 모색기인지 정확한 성격 규정을 못하고 있는 것이다. 정부 관계자들은 이에 대해 『현재 우리가 할수 있는 일이 거의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당분간 북한과 IAEA의 태도를 지켜볼수 밖에 없다는 얘기이다.한스 블릭스 IAEA사무총장이 북한핵 시설에 대한 IAEA의 핵안전 계속성이 깨졌다고 선언하든지,북한이 IAEA의 사찰을 수용하겠다고 밝히든지 둘 중에 하나는 천명이 되어야 그때 행동에 나설수 있다는 입장이다.전문가들은 IAEA의 연속성이 깨질 때가 이제 임박했다고 말한다. 이러한 시기에 눈길을 끄는 것은 최근 김영삼대통령이 행한 『북한핵 사찰의 최종시한을 정할 시점』이라는 언급이다.여기에 클린턴 미대통령은 8일 NBC­TV와의 대담에서 『북한은 한국에 대한 어떠한 공격도 곧 미국에 대한 공격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고 경고했다.두 정상이 특별히 달라진 해결 방침을 천명한 것은 아니지만 시점의 미묘함 때문에 국제사회를 향한 반향은 상당히 클 것으로 관측된다. 이것은 또 한·미 양국이 그동안 북한과의 대화에서 사용해온 「당근과 채찍」중 해결의 실마리를 서서히 「채찍」 쪽에서 모색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특히 김대통령의 언급은 더 이상 북측이 마련한 타임 스케줄에 끌려다니지 않겠다는 우리의 강경한 의지의 표명이기 때문이다.김대통령의 상황 인식은 이를 더 명료하게 뒷받침하고 있다. 김대통령은 북한이 「핵카드」로 노리는 궁극적인 목표는 미국과 수교를 달성하면서 한·미두나라를 이간 시키고,나아가 주한미군의 철수에 있다고 분석하고 있다.그리고 미사일 노동 1,2호의 개발은 아직도 북한이 남한에 대한 군사력 사용의 미련을 떨쳐버리지 못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일과도 논의 가능성 따라서 김대통령의 언급은 이렇게 북한의 의도가 분명하고,북한이 최근 휴전선 부근에 인민군의 70%를 전진 배치한 것으로 알려지는등 북핵을 둘러싼 주변 상황이 상당히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는데 언제까지 대화에 매달릴수는 없는 것 아니냐는 미국측에 대한 우리의 주문이며 클린턴 대통령의 대담 내용은 이에 대한 「화답」이라고 볼수 있다. 일부 관측통들은 이번 경주 한·일 정상회담에서도 양국 정상간에 북핵제재에 대한 방안이 심도있게 논의됐을 것으로 보고 있다.이들은 북핵의 핵안전 계속성이 단절될 시점에 가장 가까운 당사자인 한·일 두나라 정상이 이 문제를 깊이 논의하지 않을리 없다고 지적한다. 이처럼 한·미·일 3국은 물밑으로 국제사회의 제재에 대비한 수순을 착실히 밟고있는 것으로 보인다.현 시점은 북측이 먼저 태도변화를 보이지 않는한 강경하게 나갈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주지시키는 과정이라 볼수 있다. 북핵 관련 미국관계자들은 『이제 공은 북측으로 넘어갔다.우리는 모든 것을 얘기했다』고 말하고 있다.IAEA도 『우리는 북측에 대한 우리의 입장을 모두 전했다.이제 북측이 대답할 차례』라는 입장이다. ○한반도 긴장 우려 문제는 이것이 최상의 해결방안인지와 북한의 의도가 어디에 있는가의 여부이다.관계자들은 『북한은 한스 블릭스 IAEA 사무총장이 언제 사찰의 계속성이 단절됐다고 선언할지를 이미 알고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그만큼 북한은 IAEA에 대해 일방적으로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또 유엔 안보리제재도 실효성은 차치하고라도 넘어야 할 절차가 많다는 점이다.중국의 태도인데,현재 중국은 미·북간 대화를 좀더 해야한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예측불가능한 북측의 태도로 미루어 자칫 한반도를 포함한 주변이 긴장국면에 빠질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미국과 우리 정부내 일부 관계자들도 같은 상황판단을 하고있다.
  • 영화/체제유지 수단 못벗어(오늘의 북한)

    ◎상해영화제 출품작 수준을 보면/산골목장 책임자 딸 통해 혁명정신 일깨워/자신에게 물어보라/댐건설 중 실명한 인민군의 결혼과정 그려/고향마을의 처녀들/인간의 보편적 정서 결핍… 중국작품과도 큰 격차 북한의 영화는 어디쯤 와있는걸까.한마디로 아직 체제유지 또는 사회통합의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다는 것이 제1회 상해 국제영화제에 참석한 우리측 영화계 인사들의 평가다. 이는 북한이 이번 영화제에 출품한 3개의 작품내용에서도 확연하게 드러난다. 우리측의 「서편제」와 함께 본선에 오른 북한영화 「자신에게 물어보라」는 깊은 산속의 소목장에 파견된 소조책임자와 젊은 처녀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혁명정신을 일깨우는 내용이다.우리식대로 얘기하면 스스로 소목장일과 같은 힘들고 궂은 일도 마다하지 않는 고통의 분담과 살신성인의 정신을 요구하고 있다. 이 영화의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에서 강조되는 다음과 같은 대사는 그 성격을 분명히 하고 있다.『당신은 후세대들에게 무엇을 남겼는가,먼훗날 당신은 조국을 위해 무엇을 바쳤는가,자신에게 물어보라』 비경쟁부문에 출품한 「고향마을의 처녀들」에서는 댐 건설에 투입된 인민군 반장이 부하들의 폭파작업 잘못으로 두눈을 실명하고 약혼녀로부터 파혼당한다.그러자 또 다른 고향마을의 처녀가 자청해서 눈이 먼 반장과 결혼한다는 줄거리다. 또 비경쟁부문의 「어머니」 역시 생계가 막연해 남의 집 앞에 버려졌던 딸이 당의 도움으로 훌륭하게 성장한뒤 협동농장의 대표직에 올라 어머니와 극적으로 상봉한다는 내용이다. 이처럼 북한의 영화들이 체제유지의 차원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북한측 대표단들도 대체로 인정하고 있다.「자신에게 물어보라」에서 소조책임자로 출연한 인민배우 서경섭은 영화를 소개하는 자리에서 『이 영화가 여러분들의 정서에 맞을지 모르겠지만 인간의 감정은 다 비슷하니까 좋게 봐주시리라 믿는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북한의 영화 또한 상당히 변모하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북한의 영화를 본 우리측 관계자들은 『「꽃파는 처녀」와 같은 영화는 흑백논리,또는 이분법적으로 혁명아니면 반동,적 아니면 동지와 같은 개념으로 풀어나간데 비해 이번 영화들은 인간적 또는 감정적으로 호소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라고 평했다. 실제로 「자신에게 물어보라」에서는 젊은 이들이 어렵고 궂은 일을 기피하는 마음과 고통의 분담 또는 혁명정신 사이에서 고뇌하는 것을 잘 그리고 있다.특히 소조책임자의 막내딸이 아버지의 마음을 읽고 소목장일을 하기위해 스스로 찾아가 상봉하는 마지막 장면은 북한의 관객들에게 눈시울을 붉히게 할 만 했다. 북한의 대표단 단장인 최정삼문화예술부 영화부 부국장은 『2년전에 이 영화를 만들어 TV로도 2∼3차례 방영,북한 사람들이라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다 본 성공작』이라고 분위기를 전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유의 영화들이 국제영화제에서 입상하기는 다소 어려울 것이라는 점 또한 부인하기 힘들 것 같다.북한의 영화는 최근 우리나라 TV에서도 방영돼 잘 알려져 있듯이 이데올로기문제를 떠나 인간의 보편적인 정서,또는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는 동구권이나 중국의 영화와도 상당한차이가 있는 때문이다. 이들 영화는 영화제 기간동안 2∼3차례씩 상영됐지만 관객들 숫자는 대부분 1백명 미만이었다.입상가능성이 그만큼 희박하다고 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이번 영화제에 참석한 것은 내년 9월중순에 평양에서 열린 「제4회 평양 국제영화제」에 중국측의 참석을 요청하기 위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북한측은 지난 88년부터 개발도상국들의 영화축제(격년제)를 갖고있다.
  • 김부자 경호부대 5만명/탱크·미사일 갖춰 반란도 대비

    ◎귀순특수부대원 밝혀 【도쿄=이창순특파원】 북한은 김일성 부자의 경호를 위해 5만명을 배치하고 있으며 미사일과 탱크등 최신 무기까지도 갖추어 군의 반란까지도 대비하고 있다고 지난 7월 한국에 망명한 특수부대원 김명철씨(33)가 일본 요미우리(독매)신문과의 회견에서 22일 밝혔다. 김일성 부자를 위한 경호부대 「호위총국」에 근무한 뒤 군수품공장에서 일하다 망명한 김씨는 서울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호위총국은 북한의 정규군인 조선인민군과는 별도의 편제로 김주석의 직할부대라고 말했다. 이 부대는 수도방위사령관인 이을설 부원수가 국장을 겸임하고 있으며 1호위부(김주석),2호위부(김정일비서),3호위부(노동당등 중요기관)로 구성되어 있다. 김씨는 평안남도 평성시 외곽에 있는 김주석의 별장 경호를 담당하는 81경호여단에 근무했는데 이곳에는 김주석이 가장 좋아하는 별장이 자모산정상에 있으며 7천명의 장병이 배치되어 있다고 설명했다. 김주석은 이 별장을 연간 평균 5차례 정도 이용하고 있으며 주로 수렵을 즐겼다고 밝혔다.
  • 사라진 “남한 꼭두각시” 표현/러 신­구 교과서 내용 비교

    ◎“미제 지원받아 북침전쟁 일으켜”/구/“안보리서 북한을 침략자로 규정”/신 구소련 교과서는 북한을 정식국명으로 표기한 반면 남한에 대해서는 「꼭두각시」(혹은 괴뢰)로 표현했으며 한국전쟁도 북한식인 「조국해방전쟁」으로 하는 등 철두철미 친북한 일색으로 표기해왔다.그러나 신편 교과서는 남북한을 각각 정식국명으로 표기하고 한국전쟁에 대해서는 국제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KOREAN WAR」로 하지 않고 단순히 「전쟁 1950∼53년」으로 표현,주목을 끌고 있다. 다음은 한국전쟁 발발에 관한 신구교과서의 상이한 기술내용과 신교과서에 나타난 남북한의 체제와 정세에 관한 대비를 요약한 것이다. ▲한국전쟁의 기원 ▷구교과서◁ 남한의 꼭두각시들이 북한지역의 사회주의 건설을 저지하기 위해 1950년 6월 미제국주의자들의 지원을 받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대한 전쟁을 일으켰다.남한군은 즉각 패배했다.인민군은 1950년 9월 중순경 조선인구의 97%가 살고있는 영토 95%를 해방시켰다.(중략) ▷신교과서◁ 당시 북한지도부는 「조국의통일과 완전독립」의 불가피성에 대해 성명을 냈으며 이승만은 「북진」을 얘기했다.38선에서 수차례 군사적 충돌이 일어났고 이어 1950년 6월25일 군사행동이 시작됐다. 북한군은 3일후에 서울을 점령하고 남쪽 멀리 진격했다.유엔안보리는 북한의 침략임을 규정하고 (소련대표는 회의에 불참)유엔군을 한국에 파병하기로 결정했다.(중략) 1950년 10월 중국의 「인민지원군」이 북한국경을 넘었으며 이 당시 소련 공군이 전투행위에 참가했다. 소련은 북한국과 「인민지원군」에 무기와 탄약을 공급했다.(중략)이 전쟁으로 대부분의 도시가 피괴되고 약 9백만명이 사망하는등 남북한에 엄청난 피해를 주었다. ▲신교과서에서 묘사된 남북한 체제와 정세비교 ▷북한◁ 50년대말 북한은 소련 중국및 기타 우호국들의 도움으로 인민경제를 기본적으로 복구했다.동시에 김일성이 주창한 주체사상이 나오기 시작했다.주체사상의 요체는 인간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주인이라는 것이다.주인의 역할을 자립적으로 완수하려면 「위대한 수령」이며 「천재적 사상가이자 이론가」인 김일성의 교시를 습득해야만 가능하다고 한다.(중략)중공업분야의 급속한 발전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현재 전력,원료,각종 소비제품의 만성적인 부족난을 겪고 있다. 극단적인 중앙통제식 경제의 비효율성으로 인해 공업제품과 식료품에 대한 배급제도를 실시하지 않을 수 없다. 북한의 대중매체들은 「위대한 수령」의 지혜로움 덕택에 모든 인민이 행복하다고 끊임없이 인민들을 설득하면서 어려움은 외부의 적,즉 미국의 위협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북한은 국가주석이자 총비서인 김일성 1인에게 모든 권력이 집중된 권위주의적이고 획일적인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체제계승을 보장하기 위해 그의 아들이자 「친애하는 지도자」 「위대한 사상가이며 이론가」인 김정일에게 점진적으로 권력을 이양할 것으로 보인다. ▷남한◁ 이승만이 하야,해외로 망명한후 신정권은 언론과 집회의 자유등을 보장했으나 1961년 5월 쿠데타 결과 군사통치체제가 수립됐다.군사정부는 국가경제발전에 눈부신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중략)70년대부터 수출주도형 경제가 급속도로 발전했으며 기간산업의 일부는 국유로,또다른 일부는 삼성 현대등 대기업들의 전자 자동차 정보통신 컬러TV등 분야에서 독점화 되었다.한국상품의 경쟁력은 품질의 우수성뿐만 아니라 높은 노동생산성에 대한 저임금에도 기인한다. 눈부신 경제발전의 결과 국민생활수준이 눈에 띄게 높아져 1가구당 컬러TV 1대,4가구당 3가구가 냉장고를 갖게 됐으며 초중등 무료교육외에 수십만명의 학생이 미국 일본등 해외에서 공부하고 있다. 30년간의 군사통치가 종식된 1993년 2월 민자당을 지도하던 문민 정치가인 김영삼씨가 대통령에 취임했다.얼마전 민주야당의 지도자로 권위주의 체제에 대항했던 김대통령은 광범위한 개혁정책을 선포했다.
  • 여맹에 군지원사업 강화 촉구/“유사시 김정일을 결사옹위” 강조도

    【내외】 북한은 최근 각 도별 여맹위원회 집회를 열고 군지원사업을 강화하는 한편 전쟁발발시 군대와 함께 싸울 수 있는 만반의 준비를 갖출 것을 강조하고 있다. 최근 북한방송에 따르면 김정일이 군지원사업에서 모범을 보인 각지 여맹조직에 보낸 「감사」에 대해 보답하기 위한 해당지역 여맹원들의 궐기모임 형태로 열리고 있는 이 집회에서 북한은 『과거와 마찬가지로 앞으로도 인민군대를 친혈육처럼 아끼고 사랑하며 적극 원호함으로써 군민일치의 미품을 꽃피워 나갈 것』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북한은 또한 김정일이 『전체 인민이 인민군을 적극 원호하며 일단 유사시에는 인민군대와 함께 침략자들을 반대해 싸울 수 있는 만반의 준비를 하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한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전체 여성들에게 전쟁대비책 강구에 만전을 기할 것을 촉구했다. 이와함께 북한은 여맹원들에 대해서는 『군대가 강해야 나라가 튼튼하고 행복한 생활도 보장된다』는 점을 부각시키면서 모두가 최고사령관 김정일을 결사옹위하는 총폭탄이 될 것을 강조했다.
  • 주택/좁고 모자라고 건설도 부진(오늘의 북한)

    ◎대외 전시효과 노려 평양에 아파트 편중/’87∼’93년 매년 20만호 건립 목표… 실적은 10%/보통 1가구 2칸집… 계급따라 5등급 배당 북한이 최근 전에 없이 주택건설분야에 많은 투자를 하고 있어 눈길을 끌고 있다. 북한은 지난 86년부터 종래의 「의·식·주」라는 용어를 「식·의·주」로바꿔 사용할 정도로 식량부족 문제를 해결하는데 매달려왔다.그러나 최근 들어 주택문제도 한계상황에 도달한 듯 인민군과 학생들까지 동원해 대규모 고층아파트등 주택건설에 골몰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북한 중앙방송은 지난 7월말 평양시 광복거리와 통일거리를 비롯한 여러 곳에 3만가구의 주택건설을 14개월만에 완공했다고 보도했다.이 방송에 따르면 총 건설영역 면적 1천3백만㎡,연건축 면적 2백79만2천㎡에 달하는 광대한 부지에 2백여동 규모의 고층 살림집들을 건설했다는 것이다. 북한의 모든 주택은 국가 소유로 되어있기 때문에 주택에 대한 개인 소유는 물론 개인의 주택 건축도 일체 허용되지 않고있다.따라서 계층과 직위에 따라 규격화되어있는 각 등급의 독립가옥이나 「살림집」(아파트)등을 임대형식으로 할당받아 사용한다. 공급되는 주택형은 대개 정무원의 부부장급(차관급)이상 고급간부들이 거주하는 특호로부터 말단 노동자와 협동농장원에게 배정되는 1호주택에 이르기까지 5단계로 구분된다. 이러한 주택배정제도 때문에 주민의 자유로운 주거이동이 사실상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계급과 성분이 떨어지는 주민일수록 주택사정이 나쁠 수 밖에 없다.일반주민들의 경우 방 1개에 부엌 1개의 2칸 주택이 보통이고 심한 경우 방 2개,부엌 1개의 3칸 주택에 2가구가 동거해야하는 경우도 많다고 귀순자들이 증언하고 있다. 더욱이 주택물량의 절대부족으로 대도시의 경우 신혼부부가 주택을 배정받지 못해 2∼3년간 떨어져 사는 사례도 있다고 한다. 이같은 주택난을 타개하기 위해 북한은 제3차 7개년 계획기간중(87∼93년) 매년 15∼20만호의 주택건설을 목표로 잡는등 우리의 2백만호 주택건설 계획에 버금갈 만큼 방대한 주택건설계획을 수립했었다.그러나 그 실적은 목표의 10분의 1 수준에머무르는 극히 부진한 실정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 까닭은 현재 북한의 경제여건이 식량문제나 전력문제등 보다 시급한 현안 때문에 주택문제에만 매달릴 형편이 못될 뿐 아니라 건설자재난에다 건축기술의 낙후라는 악재가 겹치고 있기 때문이다.최근 귀순한 북한군 중위 임영선씨(30)는 올초 평양의 아파트 건설현장에 투입된 북한군 병사 5백여명이 붕괴사고로 숨진 비화를 증언해 북한의 건축및 토목기술 수준을 짐작케 해주고 있다. 통일원등 우리 정부 유관기관에 따르면 북한의 주택보급률은 일반노동자의 경우 57%,기업소 간부급의 경우 68% 수준에 이르는 등 대체로 65% 안팎인 것으로 추정된다. 평양과 지방과의 주거생활 격차가 해마다 심화되고 있는 것도 주목할 만한 현상이다.북한당국은 대외적 전시효과를 겨냥한 듯 최근 수년간 김정일의 「웅대한 평양건설구상」을 실천한다는 기치아래 평양시 통일거리와 광복거리 및 문수거리등에 대규모 아파트단지 조성및 시가지정비를 최우선적으로 추진해 오고 있다.
  • 전 전대통령 대 국민 발표 전문

    친애하는 국민여러분. 새정부 출범과 함께 국민 모두가 심기일전해서 열심히 땀흘려 일하고 계신 이때,제가 새삼 재임중의 일에 관해 번거롭게 말씀을 드리게 된것을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요즘 일기가 불순하여 농사마저 어려워져서 농민 뿐만아니라 많은 국민의 걱정이 더해가고 있는 터에,그동안 정부가 두번이나 바뀐 6∼7년전의 일이 또 다시 시비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데 대해 그저 민망할 따름입니다. 평화의 댐 건설은 제가 현직에 있을때 대통령으로서 정책판단을 하고 결정했던 일입니다. 평화의 댐과 관련한 문제들에 대해서는 지난 수년간 국회의 본회의와 관련 상임위원회,특히 1988∼89년의 국회특별위원회 등에서 되풀이 다루어졌고 더러는 일부 정당차원에서의 조사도 있었던 것으로 듣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당시 평화의 댐 축조에 관계했던 공무원을 비롯한 관련자들이 필요한 자료와 함께 상세한 설명과 답변을 했던 것으로 알고있으며,저 자신도 1989년 12월의 국회증언에서 말슴드린바 있습니다. 그러나 근자에 이르러 정치권과 언론등에 의해 다시 평화의 댐에 관한 의혹들이 잇따라 제기되었고,저 스스로는 침묵으로 일관한 결과 많은 사실들이 왜곡인식되고 있으며,이것이 정부의 안보정책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질 우려도 없지 않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안보와 관련된 문제로 논란이 계속되고 있는 현상을 전직 대통령으로서 모른척 할 수 만은 없고,또 그것이 저와 관계된 사안인 만큼,이 기회에 평화의 댐 축조를 결정하게 된 경위와 배경에 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국민 여러분. 우리 역사를 돌아볼때,조선왕조 선조임금때 일본에 갔던 통신사가 『일본이 침공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했고,율곡 이이선생이 10만양병을 제창했다는 사실은 우리 모두 다 아는 일입니다. 그때 이 주장이 받아들여졌다면,비록 국고가 다소 축이 나고 민생이 어려워졌을는지는 몰라도 왜적의 침입을 받아 수년간 전국토와 백성이 유린되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당파적 입장때문에 『침공할 가능성이 없다』고 잘못 보고한 통신부사의 말을 따른 결과 엄청난 국난을 자초한 셈이 된 것입니다. 만일 그때 10만의 군사를 길러 대비했으면 임진왜란이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일이고,침략을 당했더라도 피해를 줄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후세의 우리들은 어떤 선택이 옳았다고 해야 하겠습니까. 영세중립국도 군대는 갖고 있고,수 백년간 전쟁을 모르고 살아온 나라들도 만일의 외침 가능성에는 철저히 대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1953년 휴전이래 북한의 전면남침이 없었다고 해서 40년동안 매년 국가예산의 3분의1을 방위비에 투입하여,북한의 전면전도발에 대비하도록 한 역대 대통령들의 정책판단이 단순히 「세금의 낭비」를 가져왔다고 비난할 수가 있겠습니까. 옛말에 『한나절 싸움에 이기기 위해 1천일에 걸쳐 군사를 기른다』(양병천일 용어일일)고 했는데,9백99일동안은 전투가 없었다고 해서 공연한 정성과 시간을 투입했다고 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국방문제는 본질상 그러한 측면이 있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국민 여러분. 북한이 금강산주변의 산악지대에 길을 닦고 도수터널 공사를 하는 등 수상쩍은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는 정보를 국내외 관계기관으로부터 처음 입수한 것은 1986년 초였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어 같은해 4월에는 북한의 방송이 금강산 발전소계획을 확정했다고 발표했습니다. 그뒤 저들이 댐 공사의 착수를 공식 발표한 10월까지 수개월동안 북한의 동향과 의도를 면밀히 주시,분석한 결과 금강산댐이 군사적 목적으로 만드는 것일 가능성이 크다는 판단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한 판단의 근거는 첫째 그들이 전력과 산업용수 확보를 위해 댐을 만드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화력발전소를 만들거나 다른 지역에 수력발전소를 건설하는 경우와 비교해서 전력생산단위가 3∼4배 높다는 계산이 나온 것입니다. 다음으로 댐이 완공되면 그들 주장대로 산업용수 확보에는 도움이 되겠지만 댐 건설로 인해 금강군등의 농경지가 수몰되어 22만t 정도의 미곡감산이 예상되는 바,이것은 채산성이 안맞는 얘기가 되는 것입니다. 또한 이처럼 경제성도 채산성도 없는 댐을 만들기 위해 그 험준한 지역에 인민무력부 주도 아래 수만명의 군병력을 동원해서 난공사를 강행하는 뜻은 분명히 군사적 목적 때문이며,그것은 우리에게 곧 수공의 위협이 될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당시 북한은 10만 병력의 상호감축을 제의했는데,이것도 감축된 병력을 댐공사에 투입하려는 의도가 아닌가 하는 추측을 낳게 했으며,실제 그들은 5만명을 초기공사에 투입했던 것입니다. 국민 여러분. 북한공산주의자들이 얼마나 비상식적인 집단인가 하는 사실과,또 그들이 우리에게 기상천외 하고 악랄한 도발과 위협을 얼마나 많이 되풀이 해 왔는가 하는 점은 전 세계가 다 아는 일입니다. 6·25는 물론 1·21사태,남침용땅굴,아웅산 암살 폭파사건,KAL기 폭파사건 등 전쟁광이나 할 수 있는 만행을 저지른 것이 바로 저들인 것입니다. 이처럼 수많은 전과가 있는 북한이 우리 상식으로는 납득하기 어려운 움직임을 보인다면,그들의 숨겨진 의도가 무엇인가 따져보고 대비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더욱이 그들은 위에 열거한 사건 가운데 그 어느 것 하나도 자신들의 소행임을 인정하기는 커녕,모두가 우리의 자작극이라고 덮어 씌워왔다는 사실은 우리 모두 다 아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북한이 서둘러 착공한 금강산댐이 인위적으로 폭파되거나 사고로 무너질 경우 한강수계에 큰 피해가 예상되는 상황에서,그들의 선의를 믿고 팔짱을 끼고 있을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설혹 「수공의도가 전혀 없다」는 그들의 말을 믿어 주고 싶다고 하더라도 그 믿음이 1백% 확실한 것이 아니고,다만 1%의 의심이라도 남는다면,그리고 그 1%가 우리의 생존권에 위협이 된다면 국가안보를 책임진 대통령으로서는 대응책을 찾아 보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더욱이 그 시기는 북한공산집단이 방송등 그들의 선전매체를 통해 『서울올림픽을 결코 수수방관하지 않겠다』고 되풀이 위협하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북한의 고위당국자들이 「금강산댐을 만들어서 비상시에 문을 열어 놓으면 서울 시내에서 물에 잠기지 않는 아파트는 하나도 없다」「남조선 것들이 올림픽한다고 우쭐대지만 금강산댐만 만들어 놓는 날에는 서울이 물바다가 될것」이라고 공언했다는 사실을 귀순한 북한관리들이 증언한 바 있습니다. 10여일 전에 귀순했다는 북한군 장교도 엊그제 기자회견에서 「김정일이 인민무력부에 대해 인민군의 전투 준비완성에 큰 몫을 할 금강산댐의 건설을 지시했다」고 폭로했습니다. 그들이 귀순한 것은 제가 이미 퇴임하고 서울올림픽이 끝난 뒤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정권안보를 위해 금강산댐의 수공가능성을 조작했다」고 비난 받는 저를 변명해주기 위해 없는 말을 만들어 하지는 않았을 것 아니겠습니까. 국민 여러분. 오늘에 와서는 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로 우리가 얻을 수 있었던 여러 이점들을 지난 몇년간 헛되이 흘려 보냈다는 반성이 있지만,어쨌든 서울올림픽이 우리의 국가발전과정에서 선진국 도약의 결정적 계기가 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저는 지금도 확신하고 있습니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서울올림픽을 반드시 성공으로 이끌어야 한다는 것은 분명히 당시 우리의 시대적 과제요 국민적 합의였습니다. 아시아 경기대회를 성공적으로 치른 1986년에서 올림픽 때까지의 그 엄청났던 민족적 열의와 고조된분위기가 너무도 허무하게 사그라져 버린 오늘의 시점에서는 실감하기 어렵지만,그때 우리는 올림픽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는 자세였습니다. 1980년 모스크바 대회와 1984년 로스앤젤레스 대회를 연달아 반쪽 올림픽으로 치른 국제올림픽 관계자들도 혹시나 서울올림픽마저 북한의 방해때문에 실패하지 않을까 크게 걱정하고 불안해 했습니다. 냉전체제가 해체되고 소련을 비롯한 동구가 붕괴된 오늘의 상황에서도 북한의 호전적이고 경직된 자세는 변함이 없지만,1986∼87년 당시 북한은 국제사회에서 「승천하는 용」이라는 찬사와 선망의 대상이 되고 있던 우리와의 체제경쟁에서 결정적 열세에 몰린 나머지 극도의 초조감에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국운이 뻗어 오르던 그 소중한 시기에,만에 하나라도 북한의 침략기도를 사전에 봉쇄하지 못해서 전쟁이 일어날까봐 애를 태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국가안보를 확고히 해야 할 대통령으로서 최악의 상황,있을 수 있는 모든 위협의 가능성까지 철저히 점검해야 했습니다. 국민 여러분. 정부가금강산댐에 관해 처음 발표할때 2백억t이라고 한 것은 정보입수 초기에 댐건설 현장으로 추정되는 위치의 지형자료등을 토대로 계측한 그 지역의 용적의 최대치라고 이해했으며,나중에 외국전문기관에 분석을 의뢰한 결과와도 일치한 것으로 보고 받았습니다. 북한이 겉으로 내세우는 건설목적과 규모야 어쨌든 일방적 댐건설이 공유하천이용에 관한 국제관례에도 어긋나는 일인 만큼 정부로서는 공사를 중단하라고 여러차례 촉구하였습니다. 금강산댐이 그들 주장대로 전력과 산업용수를 얻기 위한 것이라면,우리 쪽에서 전력을 공급하는등 충분한 보상을 해 주겠다는 대안도 제시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정부는 우방 여러나라는 물론 국제연합과 세계 대댐 학회등 국제기구를 통해 북한의 일방적이고 무모한 댐건설을 중지시키기 위한 노력을 경주하였습니다. 그러나 북한은 우리의 이러한 모든 제의를 묵살한 채 공사를 강행하였습니다.그러한 상황에서 정부가 취할 수 있는 선택이 무엇이 있을 수 있었겠습니까. 전쟁을 각오하고 금강산댐 공사현장을 폭격할수는 없었던 것 아니겠습니까. 불가피하게 정부는 대응댐의 축조를 결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북한측이 공사에 관한 사항을 극비에 부치고 있어서 그 시점에서는 댐의 정확한 위치나 규모등을 모두 추정밖에 할 수 없는 형편이었고,따라서 우리측도 대응댐에 관해 실무자사이에 여러가지 다른 의견들이 나왔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대응댐 공사를 2단계로 나누어 추진하자는 데는 쉽게 합의를 보았습니다. 다시 말해 1단계로는 우선 북한이 3억t 정도 가물막이 공사를 끝냈을때의 위력에 대비하는 규모로 댐을 만들기로 한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1984년 홍수때의 수량 9.4억t과 북한의 가물막이댐 3억t을 합쳐 12.4억t 정도의 수량이 될 것인바,이에 대응하는데에는 평화의 댐 5.9억t과 화천댐등 기존댐의 수위조절 저수량 7억t을 합친 12.9억t으로서 최소한의 응급책은 된다고 계산한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2단계공사는 금강산댐의 최종적인 규모를 확인해가면서 그들의 공사 진도에 맞추어 추가하여 순차적으로 추진할계획이었던 것입니다. 현재 1단계 공사가 끝난 상태로 있는 평화의 댐이 물을 담고있지 않은 모습으로 있어서,일부에서는 「막대한 국민성금을 삼긴채 쓸모없이 서 있는 거대한 시멘트 구조물」이라고 비판적으로 얘기하고 있습니다만,덩그렇게 그런 모습으로 서 있는것 자체가 평화의 댐의 본래의 「쓸모」인 것입니다. 발전을 하거나 산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해 만들어진 댐이 아니라 유사시 북으로부터의 수공을 막는 일종의 「방벽」의 성격이 그 1차적 기능인 만큼 일반적인 댐의 모습과 같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최근 대전 엑스포 현장에서도 몇시간의 호우로 인해 적잖은 지장을 초래했었고,서울의 한강변은 몇년에 한번씩 홍수가 져 큰 물난리를 겪는것이 우리 실정인 것입니다. 1984년 홍수때에는 서울을 보호하기 위해 소양댐이 범람하고 파괴되더라도 수문을 열지않고 버텨야 하느냐,아니면 서울이 물바다가 되더라도 수문을 열어야 하느냐하는 심각한 기로에 섰던 일도 있었습니다. 그 당시와 비슷한 상황에서는 2백억t이 아니라 수억t만 더 쏟아져내려와도 큰 피해를 입게 될 것이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금강산댐으로부터 2백억t의 물이 쏟아져 내려오거나 70억t의 물이 쏟아져 내려오거나 서울이 마비될 정도의 피해를 입게되는 것은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1단계 공사를 조기에 착공한 것은 북한이 초기에는 5만 병력을 투입했으나 1986년 가을에는 15만명의 투입을 결정하는등 공사를 급히 서두르는 징후가 나타났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저들의 이러한 동향은 단기적 군사목적에 따라 움직이는 것으로 보았고 그것은 곧 서울 올림픽을 겨냥한 것이 아니냐하는 우려를 갖게 한 것입니다. 당국의 분석으로는 3억t 정도의 저수량인 가물막이 댐은 북한이 5개월 안에 만들수 있다는 계산이었고 따라서 정부로서는 올림픽이 열리는 1988년 우기이전에 최소한 10억t 안팎의 수공만이라도 막을 수 있는 5.9억t 규모의 1단계 댐을 조기착공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일부 잘못 알려져 있듯이 공사를 하다가 흐지부지 중단된 것이 아니고,예정했던 1단계 공사는 당초 계획대로 1988년 6월에 완공된 것이며,현재도 공사가 계속되고 있는 북한쪽의 공사진도에 따라서는 2단계 공사를 계속할 수 있도록 계획이 서 있는 것입니다. 초기 단계에서는 화천댐등 우리의 기존댐만으로도 대응할 수 있기 때문에 평화의 댐은 불필요하다는 주장도 있었으나,그것은 비현실적인 얘기라는 반론이 제기되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다시 말하면 북한의 수공에 대비해서 우리의 댐들을 모두 비워놓고 있어야 하는데,그로인한 경제적 손실은 평화의 댐을 만드는 비용보다 더 많을 뿐 아니라 화천댐은 수공을 받으면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지질학적 분석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국민 여러분. 제가 듣기로는 지난해에만 해도 김일성과 김정일이 금강산댐에 관한 교시를 발표하고 건설사령관인 인민무력부장에게 군병력의 집중투입을 지시하는등 직접 공사를 독려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금강산댐과 수공위협의 가능성은 분명히 실체가 있는 것입니다. 평화의 댐이 지금은 우리의 시급한 관심사가 아니라고 해서,또 평화의 댐을 건설할 수 밖에 없었던 당시의 상황을 지금에 와서는 실감할 수 없다고 해서 그때의 일들을 부정적으로만 볼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시대의 흐름속에 지난 일을 오늘의 상황과 기준에 서서 따질 수는 없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저는 단임의 실현으로 우리 헌정사상 초유의 평화적 정부이양을 이룩하는 것이 저에게 부하된 최대의 역사적 사명이라는 신념을 시종일관에서 지켜왔고 또 실천하였습니다. 평화의 댐 건설을 착공할 당시 저로서는 잔여 임기를 불과 1년 남짓 앞둔 시기였습니다. 당시의 시국이 다소 어려웠다고 하더라도,있지도 않은 북한의 위협을 날조해가면서까지 1년 남은 정권을 유지해야 할 만큼 그렇게 허약하고 부도덕한 정부는 아니었다고 저는 믿고 있고 또 주장하고 싶은 것입니다. 6·25때 「맥아더」원수가 막료들이 모두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인천상륙작전을 결행해서 전세를 일거에 역전시킨 일도 있듯이,최고결정권자는 국가의 이익과 백년대계등을 종합적으로 생각해야하기 때문에 부분적 진실에만 집착하기 쉬운 특정기관이나 특정인의 판단에 구애받아서는 안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평화의 댐과 관련한 사항도,모든 정보보고와 판단자료를 제가 검토하고 심사숙고해서 최종적으로 결정하고 지시한 것임을 다시 한번 분명히 밝혀 두고자 합니다. 끝으로 한가지 간절히 당부드리고 싶은 것은,1988년과 1989년 국민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는 기회에도 호소한 바 있습니다만,지난 날의 허물과 잘못은 모두 저에게 물어 주시고,이제는 밖의 세계로 눈을 돌리고 미래를 지향하면서,보다 살기 좋고 훌륭한 나라를 만드는데 매진해 주십사 하는 것입니다. 비록 재임중 과오도 많았고 부덕하고 불민한 이 사람이지만 그 점만은 국민 여러분께서 믿어주시기 바랍니다. 경제성도 없는 금강산댐을 빨리 만들라고 오늘도 인민무력부장을 다그치고 있는 김일성 부자가 그 대응댐을 만든 전직 대통령의 「저의」를 거듭거듭 따지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에 생각이 미치면 안타깝고 답답해서 몸둘바를 모르겠습니다. 덧붙여거듭 강조해서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제가 재임중에 정부와 공직자가 한 모든 일은 그것이 어떤 경로로 입안되어 어떻게 실행되었든,그것은 최종보고받고 결정하고 지시한 것은 대통령이었던 저였습니다. 따라서 그 책임은 비록 퇴임한 후인 지금에 와서도 모두 저에게 귀착된다는 사실입니다. 일부 실무자나 전문가들의 보고,건의와는 다른 내용의 결정을 내린 경우도 없지 않을 것입니다. □전두환씨 감사원 회신(전문) 1,본인은 1993년 8월16일자 귀원의 「평화의 댐 감사관련 질문서를」를 받고 본인이 취할 수 있는 합당한 대응방법에 대하여 원로들과도 의견을 교환한 바 있습니다.그런데 법률적 문제에 대하여 조언을 해준 분들은 대통령 소속하에 있는 감사원이 대통령의 정책결정의 배경·경위와 타당성에 대하여 직무감찰을 하는 것은 헌법 제97조와 감사원법 제24조의 규정내용에 비추어 볼때 문제가 있다는 견해를 밝혀 주셨습니다. 뿐만아니라 헌정사의 발전을 위해서 바람직스럽지 못한 선례가 된다는 점을 우려하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귀하도주지하고 계시겠지만 대통령의 국법상의 행위는 문서로써 행하여 지는 것이 원칙이며 평화의 댐에 관련된 정책결정 역시 관련 부처에서 작성된 문서로써 행하여 졌습니다. 따라서 귀원의 감찰활동상 필요한 자료와 사실에 대해서는 정부에서 보관중인 관련문서를 통하여 확인하는 것이 순리였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2,평화의 댐과 관련한 문제에 대하여는 지난 수년간 국회차원에서도 다루어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자에 이르러 또다시 세간에서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이로 인해 자칫 정부의 안보정책에 대한 불신이 초래될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에 본인은 대통령으로서 평화의 댐 축조를 결정한 배경과 경위에 대하여 모든 국민에게 아는대로 설명드려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별첨한 「평화의 댐에 관하여」는 이러한 목적으로 작성된 것입니다.참고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 국내변호사1호 고 홍재기씨 유품 기증/손자 순길씨,서울법대에

    ◎판사임명장 등 구한말 당시 자료 50점/1906년 개업… 서민위해 무료변론 우리나라 최초의 변호사로 활동했던 고 홍재기변호사의 손자인 순길씨(45·대우캐리어 인사부장)가 선친 홍종민변호사(지난91년 작고)의 2주기를 맞은 25일 한국 초기 법제사 연구에 도움이 될 구한말 당시의 귀중한 자료 50여점을 서울대 법대에 기증했다. 표구로 된 기증 자료집에는 홍변호사의 판사 임명장·변호사시험감독관 임명장을 비롯,동경법학원의 졸업장이 있으며 여기에는 당시 이 학교의 강사진 34명의 자필 서명이 모두 들어 있는등 법학사 정리에 귀중한 참고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홍변호사는 1906년 당시 변호사 등록에 필수적인 조선총독부의 법부대신이 발급하는 변호사 인가증을 처음으로 발급받은 인가 제1호 변호사였다. 대한변협이 지난 1909년 11월 25일 제1호 등록 변호사로 밝히고 있는 유문환씨보다 2년 앞서 변호사 활동을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873년 서울 종로구 관철동에서 출생한 홍변호사는 1896년 관비유학생으로 일본에 유학, 동경법학원에서3년간 법률 공부를 한 뒤 다시 미국에서 법학공부를 한 최초의 법학도이기도 했다. 보성전문학교(고려대 전신)교수,법관양성소 소장,법학협회 회장,변호사시험위원등을 지낸 홍변호사는 1906년 부당하게 구속당한 이준열사를 구하려고 서대문밖 독립관에서 이면우변호사등 11명의 지식인들과 함께 이준열사 구속사건에 대한 성토대회를 벌인 자리에서 「민불지법의 폐해」라는 제목으로 열변을 토해 결국 이열사가 70대의 태형을 맞는 것만으로 풀려나게 하는등 고난의 시대에 민족을 위한 일에 앞장선 선각자였다. 또 해방후에는 3등열차를 타고 다니며 동포들을 위한 무료변론을 하는 열성을 보였으며 살인죄로 잡혀온 한 농부의 무죄주장을 확인하려고 빨치산들의 총격을 무릅쓰고 농부의 무죄를 밝혀내 투철한 직업의식을 발휘,녹조소성훈장을 받기도 했다. 홍변호사는 전주지방법원 정읍지원장으로 재직하던 50년 9월29일 마을 주민들과 함께 인민군에 체포되어 총살당해 77세의 나이에 숨졌다.
  • 「민족적 명절」지정… 연초부터 대규모 행사준비(오늘의 북한)

    ◎전승 40주 경축 전례없이 요란/각지서 군중집회… 2백여가지 구호 채택/기념탑 건립·참전노병 무더기 훈장 수여/부자세급 굳히기 내부결속용으로 활용한듯 북한은 올해 휴전협정체결 40주년을 맞아 예년에 볼 수 없었던 요란한 경축행사들을 열었다.그들 스스로 「조국해방전쟁승리의 날」이라고 부르며 해마다 경축행사를 치러오긴했지만 올해는 「민족적 명절」로 지정,경축준비위원회까지 조직하여 외국의 축하사절을 초청하는등 떠들썩한 경축행사들을 했다. 북한이 올해 휴전협정일을 이처럼 요란하게 경축한 것은 올해가 5년 10년등 이른바 「꺾어지는 해」인데다 국제적 핵사찰 압력과 당면한 경제난 등 대내외적인 곤경을 이겨내고 대내적 결속을 강화하기 위한 것으로 풀이되고있다. 북한은 올해초 김정일의 지시에 따라 휴전협정체결일을 「민족적 명절」로 지정하는 한편 「전승40주 경축준비위원회」까지 조직해 대대적인 기념행사를 추진해 왔다.지난 5월11일 노동당중앙위 명의로 사회주의체제 고수와 통일투쟁등을 선동하는 2백여가지의 구호를채택하는 것으로 분위기를 잡은 뒤 6월중순부터 김일성부자에게 보내는 「충성의 편지」를 채택하는 군중집회를 전국 각지에서 잇따라 가졌다.이 편지들은 「충성의 편지 이어달리기」행사로 연결되어 북한각지를 거쳐 27일 평양에서 열리는 「전승」기념행사장에서 김부자에게 전달됐다. 또 평양 보통강변의 5만㎡에 인민군 병사들이 인공기를 휘날리며 돌진하는 모습을 조각한 거대한 전승기념탑을 건립,27일 준공식을 가졌다.지난 23일부터 25일까지는 휴전후 처음으로 전국 각지에서 6·25참전용사들을 초청한 「전국 노병대회」를 갖고 훈장등을 무더기로 주었다.23일 평양 2·8문화회관에서 열린 노병대회에는 김부자와 당정군 고위간부들이 모두 참석했다. 이같은 기념행사와 아울러 김일성 회고록 제4권을 출간하고 이른바 「군민일치」운동과 「총진군 속도창조운동」등도 대대적으로 벌이고 있다.군민일치운동은 현역및 건설현장에 동원된 인민군들의 사기를 앙양하기 위해 인접 마을이나 행정구역에서 병영생활에 필요한 소품과 부식을 지원하는 것이다.속도창조운동은 인민들의 노동을 배로 늘리는 것으로 이운동을 통해 『올해의 경제과업을 7월27일까지 조기완수하자』고 독려하고 있다.북한은 올해 주요건설과업인 평양시 3만가구 주택건설을 비롯해 ▲통일거리 2단계공사 ▲궤도전차 3단계공사 ▲남포시의 화력발전소 건설공사등은 물론 안주·덕천탄광등 주요 탄광에도 이 운동을 적용하고있다. 올해 기념식에는 외국의 축하사절들도 대규모로 초청됐다.중국공산당 호금도상무위원을 단장으로하는 중국축하사절단을 비롯,야세르 아라파트 PLO의장등이 평양에 왔다. 북한은 올해의 휴전협정일을 이처럼 대대적으로 경축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해마다 기념해왔던 6·25기념행사와 6월25일부터 7월27일까지 「반미공동투쟁월간」으로 설정,연례적으로 벌여왔던 반미투쟁행사를 하지않았다.이는 북한이 이번 대대적인 휴전기념행사들을 당면한 체제위기상황을 극복하고 김일성부자의 세습구도를 확고히 하기위한 대내결속용으로 활용했다는 사실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 중국,홍콩반환후 중심가에 군주둔

    【홍콩 로이터 연합】 오는 97년 반환될 예정인 홍콩 한복판에 중국인민군이 주둔하게 될 것이라고 홍콩주둔 영국군사령관 존 폴리중장이 26일 밝혔다. 폴리사령관은 이날 홍콩의 한 TV와의 인터뷰에서 중국군대의 주둔문제는 신중하게 처리돼야 한다는 그동안의 지적에도 불구,홍콩중심에 위치한 영국군사령부건물을 인민군이 사용할 것으로 보인다면서 이같이 확인했다.
  • 김일성 사망후 권력변화/미 하원 보고서·김판석교수 전망

    ◎보수좌파/기술관료/김정일체제 흔든다/개혁노선 싸고 양대세력 대립 심화/통치력 부족·경제낙후로 불안 증폭 북한은 김일성주석의 건강이 지난봄 다시 악화돼 김정일의 후계체제구축을 더욱 서두르고 있으며 김일성 사후의 김정일체제는 어떤 노선을 취하든 보수좌파 세력과 기술관료 세력 사이에서 딜레마에 빠질 가능성이 큰 것으로 전망된다. 이같은 분석은 14일 발표된 미하원 공화당조사위 산하 테러및 비재래식 전쟁특별연구반의 조사보고서중 「평양의 권력이양」과 16일 워싱턴에서 열린 제9차 한반도문제에 관한 미국포럼에 제출된 「북한의 권력구조 변화전망」(김판석교수·올드도미니언대)논문에서 제시되고 있다. 공화당보고서에 의하면 지난 1월말쯤 중국의 의료진이 평양을 급히 방문,김일성을 치료했으며 이 의료진은 별달리 치료할 방도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2월에는 평양시내에 김일성이 사경을 헤맨다는 소문이 퍼졌고 북한당국은 이같은 소문의 전파를 막기 위해 김일성이 평양을 방문중인 스페인관리를 접견토록함으로써 그가 생존해있음을 입증시키는 소동을 벌이기도 했다. 김일성은 지난해 여름 건강이 계속 악화돼 밥을 제대로 씹지 못하고 음식이 입가로 흘러 자주 냅킨을 사용하지 않으면 안될 정도였다.그는 쉬 피로를 느끼고 목뒤의 혹이 커져 일부 신경을 압박,많은 고통을 받고 있다.김일성이 사소한 일에 성을 잘내는 것도 이같은 통증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 지난해 10월에는 김정일이 북경측에 중국공산당 추천의사가 이끄는 고위 의료진을 파견,김일성을 치료해주도록 요청했고 그를 진찰한 중국의사들은 그의 건강상태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나쁘다며 안정을 요하므로 입원해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특히 중국의료진은 김일성에게 신경장애 징후가 나타나고 있어 그가 편안하게 일과를 보낼 수 있도록 하고 좋은 소식과 재미있는 활동만을 제공해야 하며 일찍 잠자리에 들어 오랜시간 잠을 자도록 지시했다. 이에 따라 김정일은 중국의사들의 권유를 즉각 이행토록 명령했으며 이때부터 김정일의 권력승계작업이 가속화됐다.지난해 봄이후 6백64명의 인민군장성들이 교체됐는데 이들 대부분이 김정일충성파였으며 김정일 자신이 원수승진에 이어 최고사령관겸 국방위위원장을 맡음으로써 군부를 실질적으로 장악할 수 있게 한 것도 모두 이같은 맥락에서 이뤄진 것이다.또 강성산이 다시 총리에 임명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김교수의 논문은 김정일이 김일성의 사후에 여러가지 도전을 받게될 것이며 만약 경제적 실패나 이념적 오염으로 인한 정치경제적 위기가 닥치면 혁명1세대들이나 혹은 극좌파들을 희생양으로 삼아 위기탈출을 시도할 것으로 분석했다. 그러나 김정일이 갖고있는 근본적 취약점 즉 카리스마의 부족,통치력 미약,경제낙후,핵문제및 한·미·일·중의 외교문제 등 때문에 김정일체제는 불안정할 것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라고 밝혔다. 김정일이 어떤 개혁노선을 취하든 통치권력의 차원에서 볼때 딜레마에 빠질수 밖에 없다.대담한 개혁을 추진하면 보수좌파 세력들로부터 반발을 받고 최소한의 변화만 추구하면 기술관료나 지식인들로부터 경제발전과 기술축적이 국가의 최우선 과제라는 비판을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김정일은 체제유지가 최우선이므로 피값을 지불하더라도 주체사상을 지키려 할 것이며 일시적 개방보다는 원거리 격리식 개방을 시도,아래로부터의 저항과 이념적 오염을 줄이는 차원에서 균형을 유지하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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