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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월북자/이용가치 없을땐 “헌신짝”

    ◎저학력·전과자·곧장 산간오지 탄광으로/체제환멸 못이겨 탈출… 자실기도 “방랑” 국제사면위의 폭로로 납북자들이 북한에서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음이 밝혀진 이후 자기발로 걸어들어간 월북자들은 과연 어떤 생활을 하고있을까에 대해서도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월북자들은 표면적으로는 어느 정도 대우를 받고있는 것 같지만 내면적으론 체제선전에 이용 당할대로 이용 당하면서 북한당국의 철저한 감시,통제와 북한체제에 대한 회의에 시달리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런 경우는 이용가치가 있고 북한체제에 협조적인 경우이고 그렇지않고 월북자가 저학력자 및 전과자이거나 이용가치가 없을 땐 산간오지의 탄광촌등에 배치되기 일쑤이며 심한 경우 숙청되기도 한다. 또 사소한 불평,불만이라도 털어놓다가 적발되면 그냥 놓아두지 않는 것으로 전해진다. 북한은 이용가치가 있는 사람이 월북하게 되면 평양 등지에서 환영집회를 열어주고 직장 및 결혼을 알선하거나 대학 또는 대학원 입학을 주선하는등 처음엔 상당한 대우를 해주고 있다.또그들이 한국에서 가지고 있던 학력,경력,사회적 지위에 따라 이에 상응한 대우를 배려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은 지난 92년에 발행한 화보 「조선」에서 80년대 사병으로 근무하다 월북했다는 6명이 모두 결혼해 잘 살고 있으며 대학생이나 대학원생이라고 선전한 바 있다.또 지난 91년2월 월북한 호텔종업원 지영준도 「장철구대학」에 입학했다고 전하고 있다. 군장교출신의 월북자들은 일단 1계급 승진시켜 인민군에 편입시키고 있다.그러나 이들은 대부분 북한사회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이 환상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심한 심리적 갈등을 느껴 군생활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이에 따라 일부 월북자들은 북한에서 다시 탈출을 기도하거나 자살하는 경우도 발생하는데 고상문씨와 함께 승호리 수용소에 수감된 이준광(전육군소령) 등이 이 경우에 해당된다. 월북자들에 대해서는 북한 관계당국이 철저하게 「일일동향」을 파악,감시하고 있다.이 작업은 국가안전보위부와 사회안전부 등 정권보위기관을 통해 2중3중으로 수행된다. 80년 월북한 염규환 등 4명이 「남한간첩」으로 몰려 자취를 감춘 것도 불평·불만 등을 늘어놓다 이같은 감시망에 걸린 대표적 사례이다. 한편 북한당국은 저학력자나 전과자 등 이용가치가 별로 없는 인물이 북으로 넘어올 경우 일체의 환영행사없이 곧바로 산간오지의 탄광으로 보내버리는 것이 상례다.89년과 90년 월북한 전과 5범 전권수와 국민학교 중퇴학력의 표병호가 바로 이 경우에 해당된다.
  • 국내외학자연구로 본 남북단정수립 과정

    ◎“평양 45년말 실질적 공산정권 수립”/「5도인민위」 조직 등 남측보다 3년 더 빨라/“「서울단정」 출발로 분단고착 ” 주장 허구 입증 대한민국 정부는 민족과 국토가 일제의 사슬에서 벗어난지 만 3년째 되는 날인 1948년 8월15일 출범했다.비록 해방된 민족의 염원인 「통일 조국」을 실현하지는 못했지만,대한민국의 수립은 민주사의 정통성을 이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자못 심대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사회 일각에는 「대한민국이 38선 이남에 세워진 단독정부」라는 이유로 그 의의를 평가절하하는 시각이 남아 있는데다 급진세력은 『남한에서 단정이 출범함으로써 분단이 고착됐다』는 주장도 펴고 있다. 분단의 책임을 대한민국의 출범에 떠넘기는 이같은 주장이 어느정도 타당성을 갖는지 학계의 연구성과를 통해 알아본다. 대한민국 정부수립에 관한 역사적 평가를 위해서는 당시 남한지역을 통치하던 미 군정과 정치주도 세력이 통일정부를 이룩할 기회가 충분히 있었는데도 이를 무시하고 단정을 강행했는지 여부를 따져봐야 한다. 신용하·김학준·진덕규교수등 국내 학자와 미국의 스칼라피노(캘리포니아대 명예교수)·이정식씨(펜실베이니아대 교수)등 국내외 학자 대부분이 한반도 남쪽에서의 단독정부 수립이 불가피했음을 인정하고 있다. 이들 학자의 입장은 ▲광복이후의 정국이 남쪽과 북쪽간에 크게 달랐고 ▲남쪽에서는 새로 탄생할 국가의 주도권을 놓고 좌·우의 정파가 극한대립하고 있었던 반면 ▲이북에서는 소련주둔군의 지원아래 공산세력이 「실질적인」정부를 구성하고 있었음을 지적한다.특히 북한지역에서의 공산통치는 현실적으로 통일정부 수립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고 보고 있다. 당시 남한지역은 미군이 군정을 실시하면서 나름대로의 일정표에 따라 민의를 수렴한 정치단체가 등장하기를 기다리는 실정이었다.그러나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으로 남북을 통괄할 임시정부 수립문제를 논의하는 회의에 참가신청한 정당·단체가 4백25개에 이른 예에서 보듯 당시의 남한 정국은 지리멸렬한 상태였다.이에는 46년 9월의 「9월총파업」,10월의 「대구폭동」등 광복이후 잇따라 발생한 좌익의 준동이 큰 영향을 미쳤다. 이에 반해 이북에서는 45년 8월16일 「함경남도 인민위원회」결성을 시작으로 연내에 황해도·평안남북도·함경남북도등 5개 도의 인민위원회 조직을 완료했다.또 46년 2월에는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한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를 수립하는등 급속히 통치조직을 확립해 나갔다.이 과정에서 소련식 소비에트정권 수립에 반대하는 기독교·지주·지식계층등의 반대파를 일사불란하게 숙청했음은 물론이다. 「한국전쟁의 기원」이란 저서로 유명한 미국학자 브루스 커밍스마저도 자신의 책에서 『북한에서는 45년 말에 이미 실질적인 정권이 들어섰다』고 인정하는 정도이다.그는 「단정 수립은 한반도 남부를 장악하려는 미국의 의도」에서 비롯됐다고 주장하는 학파의 대표격 학자이다. 따라서 당시 남북 제 정당·사회단체의 논의에 따른 통일정부 수립은 불가능했으며 이에 따라 미국은 한반도 문제의 해결을 유엔에 넘길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이다.유엔총회는 「남북한 전지역에서 자유총선거를 실시해 정부를 구성」할 것을 결의했지만 당초 한반도문제의 유엔상정 자체를 거부했던 소련은 유엔감시단의 입북을 거절함으로써 결국 남한의 단독선거를 가져왔다. 대한민국은 48년 5월10일의 총선거,7월17일의 헌법 공포를 거쳐 8월15일 출범했다. 이에 북한은 기다렸다는듯 8월25일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선거를 치르고 9월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성립시켰다. 이로써 45년 미·소 양군의 진주로 시작된 영토분단은 48년 체제분단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북한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에 앞서 ▲47년 2월의 「조선인민군 창설」 ▲48년 4월의 「헌법 채택」등 발빠르게 정부수립을 위한 준비를 다져왔다.막상 정부수립 일자만 한달여 늦었을 뿐 단독정부를 준비하고 이룩한 과정은 남쪽보다 북쪽이 훨씬 빨랐으며 그들이 주장하는 「단정의 분단책임론」이 허구에 불과하다는 것을 결정적으로 입증하는 대목이다.
  • 김정일·김영주 “권력 암투”/북경 서방소식통

    ◎김영주측,주석직 할애 요구 【북경 연합】 북한은 현재 당총비서와 주석선출을 둘러싸고 김정일과 김일성의 실제인 김영주부주석겸 당정치국위원간에 심각한 권력투쟁을 빚고 있으며 이 때문에 지난 20일 김일성추도대회가 열린 직후 소집될 예정이던 노동당중앙위 전원회의와 최고인민회의 개최가 늦어지고 있는 것으로 29일 알려졌다. 북한 최고지도부내의 이같은 권력암투는 핵심지도부는 물론 중간엘리트층과 하부구조에서도 김정일지지와 김영주지지로 양분되는 등 심각한 양상을 보이고 있어 그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북한사정에 밝은 이곳의 한 서방소식통은 『당초 김일성의 장례식이 끝난뒤 당사업총괄담당비서,인민군최고사령관,당중앙군사위원,국방위원장을 겸하고 있는 김정일의 당·정·군 3권 장악이 순조롭게 이루어질 것으로 예상됐으나 주석직 할애를 요구하는 김영주 지지세력의 부상으로 권력승계에 중대한 차질이 빚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 소식통은 중국에 주재하는 북한정부인사들의 말을 인용,이같이 말하고 『중국에서 활동중인 북한외교관 등 관변인사들도 겉으로는 김정일의 권력장악이 기정사실인 것처럼 가장하고 있으나 내심으로는 북한권부의 복잡한 속사정 때문에 초조해하고 있다』고 전했다. 소식통은 특히 권력투쟁 양상과 관련,『김정일이 핵심지도부내에서는 김일성의 사망으로 당서열 2위로 올라선 오진우인민무력부장과 강성산정무원총리의 지지를 받는 등 유리한 위치에 있으나 일부 원로세대와 당·정·군내의 중간엘리트계층,많은 인민들사이에서는 김정일당총비서­김영주주석으로 하는 권력분담체제로 가야 한다는 의견이 강력히 대두되고 있는 실정』이라고 밝혔다. 이 소식통은 이어 『김정일과 김영주간의 힘겨루기 양상은 내주가 고비가 될 것으로 보이지만 쌍방간 갈등과 대립이 더욱 심화될 경우,다음달초로 예정된 미·북한간 고위급회담 성과와 남북한정상회담 개최를 기대하기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최악의 경우,북한내부에서 중대한 정변이 돌발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 「김정일승계」 발표 왜 늦어지나/북 「전승기념일」 행사와 권력향배

    ◎“권력서열 조정작업 진행” 추측/화려한 「대관식」 앞둔 준비설도 27일 열린 북한의 이른바 「전승기념일」 행사에서도 김정일의 권력승계 발표가 나오지 않아 김일성 사후 북한권력의 향배에 대한 궁금증을 더해주고 있다. 북한이 해마다 휴전협정 체결일을 맞아 치르는 연례행사이긴 하나 이번에는 김정일체제 출범을 알리는 모종의 조치가 있을 것이라는 일부 관측이 빗나간 것이다. 물론 이번 행사가 조용히 끝난 게 반드시 김정일 후계체제의 이상기류를 뜻하지는 않는다는 것이 일반적 해석이다.김일성부자가 이례적으로 참석해 요란하게 치렀던 지난해와 달리 소규모 실내행사로 진행되었지만 김정일에 대한 충성다짐이 계속 이어졌기 때문이다.당정치국위원이자 공안담당비서인 계응태가 보고를 통해 『전체인민과 인민군 장병들은 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 동지를 우리 혁명의 수호자로 높이 모시고 당의 사상과 혁명에 끝없이 충실하자』고 충성을 유도한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날 행사에서 김정일체제의 조기구축 가능성에 의문점을 던지는 몇가지 특이사항이 노정됐다는 분석도 있다.그가 참석하지 않는 가운데 그에 대한 호칭도 여전히 국방위원장과 최고사령관에 그친 것이 그 하나이다.또 군의 최고실력자중 한사람인 최광 인민군총참모장이 군행사에 참석지 않은 사실도 퍽 이례적인 대목이다.더욱이 지난 대회에서 보고서를 낭독했던 권력서열 3위 강성산 총리가 그의 사위의 한국 귀순사실이 밝혀진 이날 불참한 것도 묘한 여운을 자아낸다. 이같은 특이점들은 이날 행사에서 오진우·이종옥·박성철·김영주 등을 제외하고 나머지 참석자들이 한명씩 호명되지 않고 「정치국 후보위원들」이라는 식으로 일괄소개한 것과 함께 권력핵심부간 내분 가능성을 시사하는 대목이라는 분석도 대두되고 있다.즉 김정일의 권력승계 그 자체에 결정적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권력서열 재조정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론 이미 김정일의 권력장악이 기정사실화된 만큼 사회저변의 충성서약을 좀더 이끌어낸뒤 화려한 대관식을 치르기 위한 준비단계가 아닌가 하는 추측도 있다.즉 핵문제 등을 일괄타결한 뒤 이같은 업적을 이용해 오는 10월 전당대회에서 축제분위기 속에 추대식을 치르려는 시나리오라는 것이다.
  • 북지역서 총성 30여발/인민군 1명 부상 관측

    국방부는 지난 25일 상오 10시40분부터 10여분동안 북한측 군사분계선 북쪽 지역에서 30여발의 총성이 난뒤 북한군 병사 3명이 부상을 입은 1명을 부축해 북한측 초소로 돌아가는 모습을 관측했다고 26일 밝혔다. 북한군은 이날 병사 5명이 북측 지역인 동해안 남강을 따라 초소로 돌아가던중 갑자기 총성이 울려퍼지면서 이중 1명이 쓰러졌다는 것이다.
  • 일 방위계획 수정착수/김일성사후 인민군 망명 등 대비

    【도쿄 연합】 일본정부는 북한 김일성주석의 사망으로 북한정세가 유동적이라고 판단,올해 방위정비계획 수정작업에 착수했다고 마이니치신문이 25일 보도했다. 마이니치신문은 금년도 방위계획은 지난 4월 세워졌으나 김일성의 사망으로 북한정세가 크게 변화함에 따라 육·해·공 자위대가 각각 이 계획을 수정하는 작업에 착수했다고 전했다. 방위청간부에 따르면 북한의 경우 가장 경계가 필요한 부문은 군사경계선 주변의 분쟁상태보다는 군내부의 대립과 반란으로 그 결과 다수의 북한인민군이 일본에 망명해 올 가능성이 높아진 것으로 보고 있다.
  • 떨어진 꽃은 줍지 않는다 1·2·3·4/김정섭 지음(화제의 소설)

    ◎전인민군 간호장교 증언 토대 실화소설 현재 중국 연길시에 살고 있는 북한 인민군 간호장교 출신의 증언을 토대로 한국전쟁을 묘사한 장편 실화소설. 17세로 인민군 육군 소위로 임관,간호군관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한 주인공 리복순의 일생을 통해 북한의 시각에서 본 한국전쟁을 그려 나간다. 전쟁중 참담한 생활을 이어가는 북조선인민들의 삶,전쟁후 북한 권력층의 부침하는 모습,인민군의 승리와 패배가 체험담으로 생생히 드러나고 있고,전쟁후 권력다툼에 얽힌 비화와 인민들의 힘겨운 재건활동등 한국전쟁의 감춰진 반쪽 모습이 그려진다. 중앙일보사 각권 5천원.
  • 정오 북전역서 3분 묵념/김일성 추도대회 이모저모

    ◎김정일 「교시」없이 참관만 북한 김일성의 추도대회는 20일 상오 10시부터 약 1시간 18분동안 평양 시내 중심부 김일성광장에서 김정일을 비롯한 당정군핵심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 북한방송은 이날 추도식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행사진행상황을 생방송으로 북한전역에 중계했고 이를 수신한 미CNN이 세계로 송출. ○…추도식이 진행되는 동안 김일성광장과 연결된 모든 대로와 주체사상탑앞 광장,전승광장등 평양시내 곳곳에는 대형스피커가 설치돼 수백만명의 주민들이 이를 청취했다고 북한관영 중앙통신이 보도.또한 평양시내 모든 경기장과 체육관,학교운동장에는 수많은 시민들과 북한군 장병들이 운집해 인산인해. ○…추도대회 참석 규모는 김일성광장에 20만명,대동강 건너편의 주체탑 아래 10만명등 약 30만명에 이른다고 평양주재 한 외교관이 추산.이들 북한주민은 김정일이 모습을 드러냈을 때도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고 이 외교관은 덧붙였다. ○…추도대회에서는 김영남 부총리겸 외교부장이 김정일의 위임으로 대표추도사를 낭독했으며 이어 근로자대표,농민대표,군대표 김광진인민군차수,해외동포대표등의 순으로 추도사를 낭독. 이들의 추도사는 하나같이 반제혁명투쟁을 위해 평생을 바쳤다는 김일성의 혁명투쟁을 열거,추앙한 데 이어 김정일을 「새로운 지도자」로 추대하자는 내용.특히 추도사 내용가운데는 과거 「미제국주의」를 극렬히 비방하던 내용이 없어 북·미3단계 회담 등 향후 북한의 대미외교 노선을 염두에 둔 것 같은 모습. ○…김정일은 김일성 광장 앞면에 마련된 주석단 단상 중앙에서 검은색 상하의에 왼쪽 팔에 검은색 완장을 차고 선 채로 추도대회에 참석.그는 전날 장례식때와 마찬가지로 시종일관 무표정한 얼굴로 상체를 약간 오른쪽으로 기울인 채 서 있었는데 무척 초췌한 모습.당초 추도대회장에서 김정일이 새 지도자로서 북한 인민들을 향해 추도사를 겸해 「교시」를 내릴 것으로 예상됐으나 한 마디 말 없이 묵묵히 참관. ○…북한 주민들은 이날 김일성참배나 장례식때처럼 광적으로 울부짖는 모습과 달리 비교적 엄숙한 표정으로 대오를 지키며 질서있게 참석.그러나 추도대회가 1시간이 넘도록 진행된데다 날씨가 무척 더운탓인지 시간이 지날수록 몸을 비틀고 자리를 벗어나거나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는 주민들의 모습이 보이기도.이들은 남자의 경우 검은색 상하의,여자들은 검은색 치마에 흰색 저고리로 동일한 복장이며 군인들은 인민군 제복 차림. 이어 낮 12시에는 북한 전역에서 추모경적이 울려퍼지는 가운데 북한주민들은 3분간 묵념을 올렸다. ○…김일성 추도대회는 예정보다 40분 일찍 끝나 참가자들은 11시30분부터 해산하기 시작. 평양 주재 외교관들은 이처럼 추도대회가 예정보다 빨리 끝난 것은 무더운 날씨로 인해 대회장 곳곳에서 여성들이 쓰러지고 대형 스탠드에 있던 일부 초청 손님들도 견디지 못해 부축을 받아 밖으로 나갔기 때문이라고 추측.
  • 북한 군부쿠데타 가능성 희박/일지,한국군 시뮬레이션 보도

    ◎부대마다 정치장교 배치… 동향 감시/대대급 이동땐 보고 필수… 꼼짝 못해 김일성이 죽은 북한에는 그의 아들 「김정일시대」가 열리고 있다.김정일체제의 최대의 관건은 군부와의 관계라 할 수 있다.군은 과연 김정일에 대한 충성을 계속할 것인가.아니면 반기를 들 것인가.그러나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킬 가능성은 현실적으로 거의 없다는 분석이 나왔다. 한국군의 심리작전담당부서가 최근 북한에 군사쿠데타 가능성에 대한 시뮬레이션(도상연습)을 실시한 결과 실질적으로 거의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왔다고 산케이(산경)신문이 20일 서울발로 보도했다. 쿠데타의 최대 걸림돌은 각부대에 배치된 정치장교.권력중추와 연결되어 있는 정치장교들은 각부대내 감시망을 구축하고 있기 때문에 그 감시망을 피해 쿠데타를 일으킨다는 것은 매우 어렵다. 감시망의 눈을 피해 전술적으로 최대한 순조롭게 세력을 모았다고 가정해도 쿠데타 성공의 최소단위라 할 수 있는 연대규모(약1천여명)로 쿠데타를 시도할 경우 그 성공률은 20%에 지나지 않는다. 쿠데타 부대가 사단규모(약1만명) 정도면 성공률은 거의 1백%.그러나 군출신 망명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북한에서는 1개대대(약3백명)를 이동하는데도 인민최고사령관(김정일서기)의 결재가 필요하기 때문에 권력핵심부가 모르게 부대를 이동시키는 것은 매우 어렵다. 부대에서는 권력에 충성심이 강하고 병을 지휘하는 장교를 어떻게 장악하는가가 최대의 과제다.그러나 1개 연대에는 40∼50명의 장교가 배치되어 있으며 사단에는 장교수가 더욱 많기 때문에 그들 모두를 「배반」못하게 하며 쿠데타에 가담시키거나 속이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 장교와 일반병 사이에는 더욱이 충성도가 높은 스파이가 비밀리에 배치되어 있는등 부대 전체가 상호 감시체제아래 놓여 있다.특히 장교에 대해서는 출신지역을 고려,지역적 반발심을 이용한 상호견제의 교묘한 감시망이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돌출행동은 극도의 심리적 규제를 받는 시스템이다. 김정일은 군부 장악을 위해 인민군의 「참모부」「정치부」「정치안전부」등 3개의 감시루트를 통해 「1일3전」이라고 불리는 보고체제를 만들어놓고 있다.사단장등 지휘관 장군들의 동향은 인민무력부의 「총정치국」에서 파악되며 총정치국은 당조직지도부의 감시를 받고 있다. 북한의 군은 정치 우선의 당지배이며 특히 김일성과 김정일에 대한 개인숭배를 강조하는 사상교육에 의한 이데올로기 통제가 강하기 때문에 쿠데타등 군부에 의한 정치적 반란이 일어나기 어려운 체제이다. 최근 망명자가 제공한 정보에 따르면 북한은 루마니아 사태를 거울 삼아 일반부대와는 별개로 김일성·김정일 직속의 친위대로 있는 「호위총국」의 병력을 1개군단(3개사단규모)에서 2개군단으로 증강했다.호위총국은 본래 김부자의 신변·관저·별장등을 경비하는 부대이다.하지만 최근에는 미사일·방공전투기·전차등으로 중무장,군의 반란에 대비한 대규모 진압부대로 바뀌었다.그러한 친위부대의 전력증강도 쿠데타를 어렵게 하는 요소라 할 수 있다.
  • 김일성이 스탈린에 보낸 친서(50.9.29)

    ◎“미의 인천상륙으로 인민군 고전”/무기·식량 공급 못받아 소련지원 필요 존경하는 이·브·쓰딸린 동지에게 조선해방의 은인이시며 전세계 근노인민의 수령이신 당신께서는 자기조국의 독립과 해방을 위하야 싸우는 우리조선인민을 항상고무격려하여주시며 우리의게 배려를 베푸러주시며 각방면으로 원조를 주시는데 대하야 조선로동당을 대표하야 우리는 충심으로부터의 감사를 드리는 바입니다. 미국침략자들을 반대하는 우리인민의 해방전쟁의 금일정황에 대하야 당신에게 간단히 말슴드리려고 합니다.미침략군이 인천에 상육하기 전에는 우리의 형편이 좋지않었다고 볼수없었슴니다.적들은 패전에 패전을 거듭하야 남조선의 최남부의 협소한 지역에 몰리어드러가게되어 최후결전에서 우리가 승리할 가능성이 많었고 미군의 위신은 여지없이 추락되였던것임니다. 이에 미국군은 자기의 위신을 만회하며 조선을 자기의 군사기지화하려는 본래목적을 기어히 달성하기위한 대책으로 태평양방면의 미국 육해공군의 거위 전부를 동원하야 구월십육일에 대병력을인천에 상육시켜 서울시에 침입하야 시가전을 진행하고 있읍니다.전황은 참으로 엄중하게 되었읍니다.우리인민군부대들은 상육침입한 미국군진공에 대항하야 용감히 싸우고 있읍니다. 그러나 전선에는 참으로 우리의게 불리한 조건이 있다는것을 말슴드립니다.적들은 약천대의 각종항공기를 매일주야를 구분하지않고 출동하야 전선과 후방할것없이 마음대로 폭격을 불절히 감행하고있읍니다.그러나 우리편으로부터는 대항할 항공기가 없는 조건하에서 적들은 참으로 공군의 위력을 충분히 발휘하고있는것입니다.각전선에서는 백여대편성의 항공부대의 엄호하에서 적의 기계화부대들은 활동하며 또한 특히 우리부대들을 저공비행으로서 다수살상합니다.후방에서 적의 항공기들은 교통·운수·통신기대들과 기타 시설들을 마음대로 파괴하며 적군들의 기동력이 최대한도로 발휘되는 반면에 우리인민군부대들의 기동력은 약화마비되고 있읍니다 는것은 각전선에서 우리가 체험한바입니다. 적들은 우리군부대들의 교통·운수·연락망을 차단하고 진격하야 인천방면으로서 상육한 부대들과 남부전선에서 진공하던 부대들이 연결함으로서 서울을 점령할수있는 현실적가능성을 가지게되고 남반부에 있는 우리인민군부대들은 북반부로부터 차단되고 남부전선에 있는 부대들도 여러토막으로 차단되였읍니다.그리하야 우리 군부대들은 무기·탄약과 식양등공급을 받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몃개부대들은 상호분산되어 있으며 그중일부는 적의게 포위되어있는 형편에 처하였읍니다. 서울시가 완전점령된다면 적은 삼팔도선을 넘어 북조선을 침공할겄입니다.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금일과 같은 불리한 조건을 계속하야가지고 있게되면 적의 침입은 결국성공할겄이라고 우리는 봄니다. 우리의 운수공급문제를 해결하고 기동력을 보장하자면 무었보다도 이에 해당한 공군력을 가저야 하겠읍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미 준비된 비행사들이없읍니다. 친애하는 이요시프 비싸리요노비치 시여! 우리는 여하한 난관에 봉착하더라도 그것을 극복하면서 조선을 미제국주의자들의 식민지와 군사기지로 내놓지않을겄입니다.우리의 독립·민주와인민의 행복을 위해서는 최후의 피한방울까지도 아끼지않고 싸울겄을 우리는 굳게 결심하고 있읍니다. 우리는 전력을 다하야 새 사단들을 많이 조직훈연하며 남반부에 있는 십여만의 인민군부대들을 작전상유리한 일정한 지역에로 수습집결하며 또한 전인민을 총무장하여서까지 장기전을 계속할 모든 대책들을 강구실시합니다. 그러나 적들이 금일 우리가 처하고 있는 엄중하고 위급한 형편을 이용하야 우리의게 시간여유를 주지않고 게속 진공하야 삼팔도이북을 침공하게 되는 때에는 우리 자체의 힘으로서는 이위기를 극복할 가능성이 없읍니다.그러므로 우리는 당신의 특별한 원조를 요구하지 않을수 없게 됩니다.즉 적군이 삼팔도선이북을 침공할 때에는 쏘련군대의 직접적출동이 절대로 필요하게 됩니다.만일 그것이 여하한 이유로써 불가능하게되는 때에는 우리의 투쟁을 원조하기 위하야 중국과 기타 민주주의국가들의 국제의용군을 조직하야 출동하도록 원조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이상과 같은 우리의 의견을 당신에게 감히 제의하오니 이에 대한 당신의 지시가 있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조선로동당중앙위원회 김일성 박헌영 일구오○·구·이구일
  • 평양시내 40㎞ 운구… 2백만 광적 애도/김일성 장례식 이모저모

    ◎곳곳 전군 수십대 배치… 경비 대폭 강화/김성애·평일모자 TV서 모습 안보여 김일성의 장례식은2백여만명에 이르는 평양주민들의 광적인 애도 속에 치러졌다고 북한 방송들이 보도. 이날 상오 10시께 김일성의 시신이 안치된 금수산의사당(주석궁)을 출발한 운구행렬은 금성거리∼영웅거리∼보통문∼천리마거리∼통일거리∼옥류교∼김일성광장 등 평양시 일원의 40㎞의 시가지를 지나 주석궁으로 되돌아가 영구는 다시 이곳에 안치됐다. 중앙방송과 평양방송은 이날 릴레이식 녹음중계로 사이사이 조곡을 내보내면서 운구행렬이 지나는 연도의 근로자와 군인 및 학생들의 울부짖는 모습을 생생하게 보도. 남녀 아나운서들은 『하늘과도 같고 태양과도 같은 수령님,우리들의 효도를 받지 못하고 그렇게 간단 말입니까』라며 울음을 터뜨려 말끝을 제대로 잇지 못하기도. 이날 영결식에는 오진우인민무력부장,강성산정무원총리,이종옥·박성철·김영주·김병식부주석,김영남부총리겸 외교부장 등 장의위원 전원이 참석,김정일의 건재를 과시. 김일성의 시신이우리의 장례풍속과는 달리 다시 주석궁에 되돌아옴으로써 특수처리된 그의 시신은 영구보존될 것으로 관측됐다. ○…북한은 이날 장례식 식순과 운구행렬의 코스는 물론 장지까지 철저히 보안을 유지했으며 해외홍보 TV용 장례장면도 검열을 거쳐 하오 3시가 넘어서야 첫송출. 이와 관련,정부의 한 고위당국자는 이날 『운구행렬에 사용된 관이 주석궁에서 김일성 시신을 담고 있던 수정관이 아닌 것 같다』는 의혹을 제기. ○…운구되기에 앞서 수정관 속에 안치된 김일성의 시신앞에는 공화국영웅메달과 노력영웅메달등 생전에 그가 받은 각종 훈장과 메달들이 놓여있었고 시신옆에는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김정일」 명의의 화환이 배치. 김정일은 당정군간부들을 대동한채 식장에 들어서 곧바로 김일성시신앞으로 가 조곡이 연주되는 가운데 참배.이 순간 엄숙히 서있던 참석자들은 큰 슬픔과 비애에 젖어 가슴을 저미며 흐느꼈다고 북한TV가 보도했으나 김성애·김평일 모자의 얼굴은 끝내 비치지 않아 주목. ○…김일성 영구가 평양시내 주요 시가지를 지나는 동안 연도에는 주민들이 몰려나와 『수령님 못 가십니다』를 외치며 길바닥에 주저앉아 땅을 치며 대성통곡했다고 북한방송들이 보도. “인민의 심장속 영생” ○…북한방송들은 이날 중계방송을 마치며 『김일성 수령의 심장은 비록 고동을 멈추었으나 수령은 인민들의 심장속에 영생할 것』이라며 앞으로 김정일을 혁명무력의 최고지도자로 받들어 혁명위업을 끝까지 완수할 것이라고 강조. 또 「당신이 없으면 조국도 없다」 「당신만 있으면 우리는 이긴다」를 비롯한 김정일 찬양가요를 집중적으로 방송해 영결식 시작전 조곡 일변도의 애도분위기에서 변화된 모습을 보여 주목. ○…미국 CCN방송은 이날 하오 북한방송국이 그들의 의도대로 촬영,편집한 녹화실황을 장시간에 걸쳐 방송. CNN방송에 따르면 영결식을 마친 뒤 김주석의 시신이 들어있는 검은 관은 붉은 천으로 절반이 덮인 채 흰꽃으로 지붕을 단장한 검은 리무진 위에 놓여 출발. 운구행렬이 김정일의 배웅과 의장대의 사열을 받으며 주석궁 정문을 빠져나가자 국가장의위원 등 상당수의 북한 당정군 고위 간부들은 손으로 눈물을 닦기도. ○…북한은 김일성의 장례식을 앞두고 경비강화를 위해 지난 17일까지 평양시내 요소요소에 전차를 배치했다고 일본 요미우리(독매)신문이 한국 정부소식통을 인용해 19일 보도. ○…운구행렬의 길 양쪽으로는 평양교외및 지방에서 올라온 시민들이 늘어서 통곡하면서 애도하는 모습들. 한 외교관은 광장곳곳에 종이조각들이 너저분하게 흩어져있는 것으로 보아 이들이 운구행렬을 구경하기 위해 이곳에서 밤을 지샌 것같다고 전언. ○…김일성의 장례식은 거창하게 치러질 것이라는 일반의 예상을 뒤엎었다. 평양에서 취재활동을 하고 있는 한 중국기자는 서울신문 북경지국과의 전화통화에서 『오늘 영결식은 주석궁을 출발한 운구차량이 천리마거리와 창광거리를 거쳐 김일성광장까지 간 후 다시 주석궁으로 되돌아오는게 전부였다고 전언. ◎단동·연길·도문서 본 북표정/북상사원 「조문귀국」 차량 이어져/“TV속 김정일 다리 절고 있었다” 김일성주석의 영결식인 19일 요란한 평양의 추도분위기와는 달리 단동·연길·도문등에 머무르고 있는 상사원등 북한의 요원등은 조용한 가운데 북한직영 음식점 등에 모여 자체 추도식을 갖고 업무를 준비하는등 정상을 되찾아가는 모습. 또 평양·회령 등에 있는 북한의 국영상사들도 전화나 팩시밀리를 통해 중국측 무역담당자들과 중단된 무역업무를 논의하는등 사실상 업무를 재개. 단동에서 북한과 무역업무를 해온 김모씨(42·단동시 신안가)는 『22일 북에서 사람이 나와 철강재 등을 인도해 주겠다고 전화로 통보해 왔다』고 전언. 단동시와 연길시에 남아있는 국가상업부소속 협동무역회사·고려무역회사 직원들도 19일 『그간 무역이 이뤄지지 못해 안됐다.내일부터 사업을 다시 논의하자』고 정상적인 무역활동 재개를 중국측 상대방에 통보.도문에 무역사무실을 두고 있는 한 조선족 무역업자도 북한의 거래업체(국가직영)에서 21일부터 정상업무를 재개하며 사업논의를 위해 22일쯤 상담원들을 파견하겠다고 전해왔다고 설명. 단동시 중국국제여행사 양기선 부경이도 『북한측이 김주석사망 이후 단절됐던 단동∼평양간 단체여행코스의 재개를 통보해 왔으며 여행단의 입북도 이미 허가했다』며 『오는 24∼25일쯤부터 2백∼5백명에 이르는 대규모 관광단의 입북이 순차적으로 이뤄지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썰렁한 신의주쪽 모습과는 달리 신의주가 내려다보이는 단동시의 압록강공원과 철교에는 쌍안경을 이용해 북한쪽을 살피는 여행객들로 만원.또 압록강을 오르내리는 중국측 유람선도 관광객들의 요구에 따라 신의주쪽에 다가서서 항해하는 모습. 한편 단동과 도문등 북한과의 접경지대에서는 북한의 중앙TV를 시청한 조선족들이 이날 영결식장에 나타난 김정일이 약간 저는등 거동이 불편한 모습이었다며 김정일의 와병설에 관심을 기울이는 표정.
  • 그의 잔영은 여전히 잔인하다/몽상적 독재자 김일성의 저승길을 보며

    ◎광신적 오열행렬에 피란짐보다 더 무거운 슬픔이…/“미망이 저런건가”… 통일로 가는길 먹구름 보는듯 불과 열흘전 한반도에서는 82세로 그 인생을 마감한 헛된 몽상가의 죽음이 있었다.필자는 그 죽음의 소식을 남쪽으로가는 여행길의 휴게소에서 들었다.그리고 두가지의 충격을 받았다.그 첫째는 물론 김일성의 물리적인 죽음이었고,다른 한가지는 백여명을 헤아리는 그 휴게소 여행객들이 보여준 의연한 침묵이었다.그러나 그 무표정에 묻어 흐르고 있는 일말의 아쉬움 또한 필자는 읽을 수 있었다.죽기 전에 남북정상이 서로 만나 허심탄회하게 회담을 갖자 하던 그의 결심이 진정한 조국애에서 비롯되었기를 바란 것이었기에 그 죽음의 아쉬움은 우리 가슴에 진한 구두점을 찍어준다.분단 50년의 포한을 풀려 한 것이 진정이었다면,하필이면 이 찰나에 불귀의 객이 되었는가에 대한 아쉬움이고 미련이다. 그러나 그 몽상가는 그 유례를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정치문맹이었다.그는 이 지구상에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스탈린의 추종자였다.스탈린이 그러했듯인민을 그의 수하에 두었고 인민을 그의 이념구현의 도구로 삼았다.그는 2천5백만 인민을 울타리속에 가둬두고 필요에 따라 동원하고 배급으로 울게 만들었다.그가 일으킨 전쟁으로 말미암아 이 좁은 땅위에 살던 군인과 민간인 2백58만명이 초개와 같이 죽거나 실종되었고,무려 5백50만여명이 미망인·불구자·고아등으로 비참한 전쟁후유증을 겪었다.그 전쟁은 게르만민족의 대이동보다 더 많은 민족의 이동을 불러 북한에서 남한으로 피란한 남북이산가족이 1천만명에 이르러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 전쟁의 깊고 깊은 상흔은 가시지 않고 민족적인 비극으로 남아 있다.그와 그의 추종자들이 말끝마다 나가라고 외치고 있는 미군은 그가 일으킨 전쟁으로 이 나라에 들어왔고,소련군대와 중공군까지 불러들여 동족을 살상하고 국토를 초토화시키는 일에 이용했다.설혹 물리적인 피해는 당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그가 일으킨 전쟁으로 말미암아 우리 겨레의 가슴에는 피맺힌 슬픔이 자리잡고 말았다.그 폐단의 상흔 역시 우리의 진솔한 삶의 그롯속에 아직도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가 전쟁을 일으켰을 때 필자는 11살,산골국민학교 5학년 시절이었다.먼 산자락을 뒤흔들던 포성소리가 가까워지자 어머니는 새우잠을 자고 있던 우리 어린 두 형제를 깨웠다.문 바깥은 한치 앞을 분별할 수 없을 정도의 칠흑같은 어둠,동생을 들쳐업은 어머니는 포성을 등뒤로 하고 허둥지둥 발걸음을 떼어놓았다.11살의 나이로는 엄두조차 못낼 무거운 피란봇짐을 등에 진 필자 역시 경황없이 어머니의 뒤를 무작정 따라야했다.동이 트기 시작하는 어느 산기슭에선가 우리는 벌써 쇠파리가 들믿는 국군의 시체를 보았고,그 곁에 인민군에 포위된 채 매복하고 있는 국군을 보았다.남하의 피란길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우리는 산협의 낯선 농가의 추녀 아래서,그리고 빗물이 새어드는 움집에서 병고와 굶주림에 시달리며 살아남아 그 모욕적인 전쟁이 먼발치로 떠나가주기를 하염없이 기다려야 했다. 그로부터 40여년이 흘러간 작년 여름,필자는 중국의 집안에 있는 선착장에서 작은 배를 타고 그 맞은편에 있는 만포의 강안을 스쳐간 적이 있었다.우리가 탄 배가 북한의 만포연안을 서행으로 거슬러 올라갈제 40여년전 필자 나이 또래였던 헐벗은 아이들이 몰려와서 담배를 달라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필자 곁에 있던 일행중 한사람이 담뱃갑을 던질듯 포즈를 취하다가 그만두자 그 천진난만해야 할 아이들은 배를 향해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돌팔매질을 사양 않던 그 철부지들의 단도직입적인 호전성을 목격하면서 자리잡은 충격적인 슬픔은 11살의 나이가 감당하기엔 무거웠던 40여년전의 피란짐보다 훨씬 무거웠다.집권 49년을 그는 북한 인민을 일사불란하게 동원하였고,그 인민은 동원의 미망속에 살고 있다.그 인민은 미망속에 살면서 언제 어디서든 수령의 명령만 떨어지기를 기다려왔다.그들은 스스로 창조하려는 몸부림보다 식량배급표를 쥐고 있는 수령의 명령과 교시만을 따르려 하였다.그런 바탕위에서만 우리는 북한의 그 엄청난 오열의 행렬을 이해한다.울먹이는 목소리로 독재자의 죽음을 알리고 있는 북한 아나운서의 슬픈 가슴을 이해한다.냉정한 검증을 거쳐가는 역사에 참여되고 있는 민족이 아닌한 독재자의 신격화에 동원되었던 인민의 미망을 슬픈 시선으로 바라보면서,우리는 또 다른 무게로 등을 덮치는 인내와 기다림의 시간과 마주서야 한다.우리는 통일의 열쇠가 이제 우리와 유명을 달리한 독재자 김일성의 손에 달려 있었다는 미망과 착각에서 벗어나야 한다.우리가,그리고 우리겨레가 한마음으로 바라고 있는 그 통일의 열쇠는 공교롭게도 바로 백성으로 이름되는 우리 모두의 이해와 용서와 화합에 달려 있다.그렇기에 그에 대한 냉정한 검증없이는 국민의 이해와 용서는 구걸조차 어려울 것이다. 고달픈 인생살이에는 필경 눈물이 많은 법이고 가슴을 에는 듯이 통렬한 예배의 대상을 둠으로써 심정적 위안을 획득한다.우리가 북쪽에 있는 동포에게 보내고 있는 슬픔이 바로 그런 모습들에 있다면 그들이 겪고 있는 비참한 궁핍에서 벗어나고 자기개발과 창조의 길이 무엇이라는 것을 터득시켜 그들이 겪고 있는 미망에서 하루빨리 벗어나도록 주선하는 아량과 노력이 통일을 위한 정치적 담판과 병행되어야 할 줄 안다. 2년전 겨울 필자는 중국의변경에 있는 어느 해관(세관) 식당에서 중국의 친지방문을 위해 방금 북한땅에서 건너온 어떤 모녀의 점심식탁을 목격한 적이 있었다.그 두사람의 식탁은 너무나 빈약해서 오랫동안 뇌리를 떠나지 않고 있다.애옥살이를 견디고 있는 그들에게 희망을 주고 삶의 기쁨을 줄 수 있는 것은,죽은 자의 망령이 되살아나는 것도 아닐 것이고,전쟁도 아니고 핵을 개발하는 데도 있지 않다는 것은 정신적으로 미숙한 아이들도 알고 있는 일이다.그것은 바로 남북한간의 화합과 용서,그리고 그 다음에 오는 통일일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든 이제 한시대는 물러났다.더 구체적으로 얘기하면 한반도의 북쪽에서 가장 야만적인 모습으로 군림하던 독재자는 사라졌다.그러나 그 잔영은 너무나 진하게 우리앞에 남아 있음을 또다시 목격하게 된다.그가 살아 있을 때와 조금도 다름아닌 비방과 이간질의 현실이 북한땅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오늘 아침 신문에서도 우리는 읽고 있다.아연한 시선으로 허공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통일로 가는 길위에 놓인 고통과 갈등을 예견하지 않으면 안되겠다.
  • 오진우­최광/「김정일체제」 군부의 양대 버팀목

    ◎혁명1세대… 김일성 권력투쟁 1등공신/김 생전 한번씩 「딴마음」… 계속 충성 주목 오진우와 최광.김정일이 북한의 새로운 지도자로 위치를 굳혀가는 과정에서 우선적으로 주목해야 할 두 사람이다. 오진우와 최광은 모두 김일성과 함께 만주에서 항일 빨치산으로 활동했던 「혁명 1세대」이다.이들은 해방후 국내기반이 취약했던 김일성이 박헌영의 국내파나 김두봉의 연안파,허가이의 소련파를 꺾고 권력투쟁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뒷받침했던 버팀목이었다. 둘 가운데서도 인민무력부장 오진우는 김일성이 생전에 김정일 후계체제를 위탁한 핵심인물로 알려져 있다.함경남도 북청출신으로 올해 77세인 오는 김정일과 함께 둘밖에 없는 노동당 정치국 상무위원이며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을 겸임하고 있는 군부의 제1인자이다. 오보다 한살 아래인 군부의 2인자 최광 군총참모장은 함경북도 출신으로 권력서열 8위이다.6·25때 제13사단장을 맡을 만큼 김일성의 신임이 두터웠다.최광의 처인 전여맹위원장 김옥순은 김일성의 전처 김정숙이 죽은뒤 김정일·경희 남매의 유모 역할을 맡아 두 사람과 각별한 관계인 것으로 전해진다. 김일성 생전에 김씨 부자에 대한 두사람의 충성심은 우열을 가리기 힘들었다.그러나 김일성이 사망한뒤 김정일에 대한 충성심이 그대로 이어질지는 단언할 수 없다.일부에서는 군의 두 원로가 군복무경험도 없는 김정일을 마음으로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고도 분석한다. 또 하나의 문제는 두 사람 사이의 관계이다.오진우와 최광 사이에는 잊을 수 없는 기억이 있다.오가 김일성의 결정적 신임을 받게 된 것은 69년 1월 6일부터 14일까지 열린 인민군당 제4기 4회 총회에서 부터다.당시 인민군 총정치국장이었던 오는 김일성의 「유일사상체계」에 불만을 품은 민족보위상(국방상) 김창봉과 7군단사령관 정병갑,해군사령관 유창권,함흥주둔군사령관 김양춘등 「항일연군」 출신의 군수뇌부를 반혁명 음모로 몰아 숙청하는 작업을 지휘했다.그리고 이때 숙청된 인물들 가운데 최광이 포함됐던 것이다.최는 그러나 탄광노동자로 좌천된 뒤에도 변함없는 충성심으로 김일성부자를 감격시켜 김정일후계를 공식지명한 80년 6차 당대회에서 복권됐다.오는 80년대초까지는 김정일을 후계자로 지목하는데 반대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그러던 오는 84년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해 사경을 헤매는 상태에 빠졌다.그때 김정일은 특별기로 오를 소련으로 수송,치료를 받도록 조치했다고 한다.오는 그뒤 김정일에게 충성을 맹세한 것으로 알려졌다.
  • 김정일,첫 공식활동/당·정·군간부 배석 해외동포 접견

    【도쿄 연합】 평양방송은 15일 김정일인민군최고사령관이 14일 김일성주석을 추도하기 위해 평양에 온 해외동포조문단을 만나 의견을 교환했다고 보도했다. 도쿄에서 수신된 평양방송에 따르면 조문단은 한덕수의장을 단장으로 하는 조총련대표단과 재미한국인 등이며 이날 만남에는 이종옥부주석과 김영남부총리겸 외교부장,최광군총참모장,양형섭최고인민회의의장등이 배석했다. 이와 관련,교도통신은 김일성이 죽은 뒤 김정일이 외부인사를 만나 대화를 나눈 것은 처음이라고 전했다. 평양방송은 이날 김정일을 인민군최고사령관으로 호칭함으로써 비공식회견임을 비췄으나 주요군간부가 배석한 것으로 보도함으로써 이미 권력승계가 사실상 완료됐음을 내외에 과시하기 위한 목적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통신은 덧붙였다.
  • “김정일의 최대적은 경제난”/불 르몽드·영 파이낸셜지 보도

    ◎후계자로 중·러 지지 못받아/남북통일 “끝없는 안내” 필요 남북한은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 끝없는 인내를 필요로 하고 있다고 프랑스의 일간 르 몽드지가 15일 보도했다. 르 몽드지는 이날 남북한을 세계에서 통일이 돼야할 마지막 국가라고 전제,남북한이 서로 다른 국가로 살아간다고 할지라도 평양의 고립은 영원히 지속될 수 없다고 밝혔다. 이 신문은 김일성주석의 후계자는 김주석을 대체할 만한 영향력을 갖고 있지 못하고 중국과 러시아는 더이상 그후계자를 지지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북한의 경제난은 후계자에게 외국의 원조를 강요하고 있으며 시간표상으로 오늘날의 국제사회에서 더이상 가치를 갖지 못하는 체제를 눌러 이기는 것으로 끝날 것이다. 남북 예멘도 통일을 이뤘고 두개의 중국도 타협을 모색하고 있는 상황에서 남북한이 냉전이 이미 끝난 마당에 냉전의 찌꺼기로 분단된 채로 남아 있다면 놀랄 일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한국은 통일을 서두르지 않고 있고 이는 북한이 동독에 비해 경제력이 열악하고 한국도 서독에 비해부유하지 못하다는 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북한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라디오와 텔레비전의 채널이 고정돼 있는 국가임에 틀림없다.텔레비전이 동서독 주민의 정신적인 일체감을 심어주는데 일조를 했고 남북한은 두개의 서로 다른 국가로 살아야 할 것이다. 한편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스지는 14일 북한의 새 지도자로 떠오른 김정일이 직면한 최대의 도전은 쇠퇴한 북한경제를 반전,붕괴되기 전에 구출할 수 있을 것인지에 달려 있다고 보도했다. 이 신문은 이날 북한의 김정일이 노동당,정부및 인민군의 최고위직에 오름으로써 권력을 완전히 장악했다고 전하고 그에게 가장 중요한 도전은 지난 4년 동안 국민총생산(GNP)이 연평균 4·2% 하락하는 등 끝없는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는 경제를 붕괴로부터 구해내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 한반도 새상황 수주일내 첫 신호/미 스칼라피노의 「김일성사후」진단

    ◎핵문제 ·대미화해 등 유산 김정일에 부담/지도자 자질의 불확실성 불식도 과제로/미 ·중·일 등 주변국,국익따라 「두개의 한국」 유지 희망 정치,특히 전제정치에서는 언제 태어나고 언제 죽느냐는 문제가 매우 중요하다.김일성의 경우 적절한 시기를 택했는가.우선 그가 19 12년에 태어난 것은 시기적으로 매우 적절한 것이었다.그가 항일투쟁에 한 몫을 할 수 있게 하는 시기였기 때문이다.그나마 그의 항일활동은 훗날 북한관변사가들에 의해 과장기록되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의 사망시기에는 문제가 많다.따라서 역사의 평결을 기다려야만 할 것같다. 김일성이 남북한,그리고 미·북한간 새로운 관계를 모색하고 착수하는 단계까지 생존했다는 것은 일단 긍정적으로 볼 수 있다.카터를 통로로 그는 새로운 관계를 이끌 수도 있는 남북한정상회담을 추진했고 심각한 핵문제해결과 미·북한화해를 위한 새로운 시도를 했다.그러나 그는 새길이 열리기 전에 죽었다. 그의 아들 김정일이 이 새로운 시도를 이어받아 성공으로 이끌어갈 능력이 있는가.상당한어려움에 빠져있는 북한사회를 효과적으로 통치할 수 있는 자질이 있으며 또한 충분한 지지를 받고 있는가.김정일에 대해서는 루머인지 분명한 사실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많은 얘기들이 전해진다. 김정일에 대한 평판은 그가 서구영화와 경주용차,그리고 예쁜 여자들에 깊이 빠져있다는 것이다.이러한 평판들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이때문에 반드시 성공적 지도자가 될 수 없는 것은 아니다.진실로 우려되는 것은 그가 과거 북한이 추구했던 테러정책노선의 핵심이었다는 일부의 지적이다.다만 북한의 국제적 테러들이 그의 아버지 김일성과 무관하게 실행될 수는 없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김정일이 극도의 은둔생활을 해왔다는 것이다.그는 외국인들과 거의 만나지 않았으며 실질적 대화에도 거의 참여하지 않았다.따라서 다른나라 지도자들을 상대하는 그의 능력과 보다 큰 세계에 대한 그의 지식,심지어는 그의 전반적 지도자자질과 능력은 북한국민들에게조차 불확실한 점으로 남아있다. 북한의 권력구조,정책결정과정과 관련하여 다양한견해들이 제시되고 있다.왕조정치적 특성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김일성일가 내부에서 벌어지는 상호작용을 중시한다.20년 가까이 연금상태에 있다가 얼마전 갑자기 정치국에 복귀한 김일성의 동생(김영주)의 역할,또한 점점 더 정치적 활동이 늘고 있는 김일성의 처 김성애,김정일의 이복동생으로 최근 핀란드대사직을 마치고 평양으로 귀환한 김평일 등이 이들이다. 북한정권의 엘리트는 아버지(김일성)와 장남(김정일)이라는 두개의 권력라인에 따라 배치돼 있다.이들이 합병될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가족라인을 형성,마찰과 적대관계에 놓이게 될 것인가. 또하나의 심각한 문제는 군부와 관련된 것인데 극도로 군사화된 북한사회에서 최상의 권력은 이들에게 있기 때문이다.김정일은 군부의 핵심인사들로부터 필요한 신임을 받고있는가 아니면 앞으로 받게될 것인가.김정일이 지지획득노력을 계속해왔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2년전 인민군총사령관 지위에 오른뒤 김정일은 많은 장교들을 장군으로 진급시켰었다. 그러나 새 정권,더 나아가 북한이란 체제의장래와 관련해 최대로 중요한 이슈는 거의 틀림없이 정책관련일 것이다.김정일은 심각한 난국에 빠진 경제,보다 젊은 인물들을 중요직책에 포진시겨야 하는 정치적 세대교체,북한에 별로 유리하지 않은 국제위치 등을 물려받게 된다.북한당국은 경제상황의 심각성을 인정,수년동안 중국을 부분적 모델로 한 개혁프로그램의 윤곽을 그려왔다.특별경제구역설정,해외자본유치법제정,유럽및 아시아기업가들을 초청하여 북한투자에 대한 흥미끌기 노력 등등. 하지만 현재까지 이 프로그램은 별 성과를 올리지 못한 도상계획일 따름이다.경제협력논의에 있어 나쁜 전력이 꼬리표로 따라다니는데다 북한이 스탈린식 경제체제의 골격을 지키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이와 함께 정치·군사분야에 있어서의 정책들 특히 핵시설사찰을 둘러싼 북한과 국제사회의 대립,북한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집착 등이 경제프로그램을 무력화해 버렸다.이같은 모순들이 제거될 수 있을 것인가. 북한으로선 최대의 도전이라 할 이같은 문제들은 김일성이 생전에 해결할 수도 있었으나 이제 그의아들 김정일에게 이 과업이 넘겨졌다.물론 많은 사람들은 김일성의 마지막 대화제스처가 제재를 피하면서 핵무기개발프로그램을 계속하려는 벼랑끝 외교전술,지연작전이었다고 믿고 있다.한국과 미국은 북한이 만족할만한 사찰을 받아들이고 가능한한 빠른 시일내 경수로원자로로 전환하는지 여부로 북한의 성실성을 시험하기로 했다.또 그같은 한·미양국의 입장은 계속 견지될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의 몇달은 북한체제가 안정될 것인지 혼란에 빠질 것인지,또 북한이 여전히 국제적 고립상태에 놓일 것인지 국제사회와의 관계를 개선할 수 있을 것인지를 가늠하는데 매우 중요한 시기가 될 것이다.이에 관련된 이해관계 역시 모든 당사자들에게 매우 중요하다.한국으로선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하는 것은 물론 북한이 급격히 붕괴하는 것도 원치 않고 있다.한국으로서 가장 바람직한 일은 경제·문화분야의 남북한간 상호교류가 점진적으로 확대돼 결국 한반도평화통일을 가능케 하는 북한내부의 경제·정치적 변화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다.북한이 붕괴,이를 한국이흡수하게 되는 경우 그에 따른 정치·경제적 부담은 엄청날 것이다.또한 북한의 정치적 위기가 계속돼 동북아지역에서 분쟁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느냐 여부도 큰 관심을 갖고 지켜봐야 할 문제다. 마찬가지로 미국도 북한에서 합리적 시나리오가 전개되기를 기대하고 있다.이같은 시나리오중 하나는 북한지도부내에서 새로운 군사·기술분야 엘리트들의 영향력이 커져 시장경제로의 점진적인 개방과 탈이데올로기정치노선을 추구하게 되는 것이다. 중국·일본을 비롯한 다른 나라들도 이같은 상황전개에 지대한 관심을 가질 것이다.중국은 북한의 핵무기보유를 원치 않을뿐 아니라 북한이 붕괴,한국의 지배아래 들어가는 것도 바라지 않는다.중국은 완충국가로서의 북한을 유지하기 위해 이미 많은 희생을 치렀다.일본은 친북한성향의 조총련과 마찰을 최소화하기를 원하고 있으며 가능하면 「2개의 한국」정책을 유지할 수 있기를 희망하고 있다.그러나 김일성사후 한반도상황전개는 결국 북한의 사태진전에 달려 있다.한반도 상황을 예측게 할 첫번째 신호는 수주내,길게 잡아야 수개월내에 나올 것이다. ▷약력◁ ▲1919년생,하버드대 졸업 ▲48년 하버드대 강사 ▲49년 캘리포니아 버클리대 교수 ▲동 동아시아문제연구소장 ▲「현대 일본의 정당정치」등 아시아관계저서 다수
  • “북주민밖의 참모습알면 유혈사태”/DPA,서방언론중 평양서 첫보도

    ◎수십년간 외부세계와 접할기회 철저 봉쇄/전문가들,「자리」 장기간 지켜낼까 회의적 북한주민들은 김일성 사망에도 불구,사회주의의 깃발을 계속 높이 쳐들 것을 다짐하고 있으나 수십년간 가려져온 외부세계의 참모습을 알게 된다면 북한내에는 유혈극이 벌어지게 될 것이라고 독일의 DPA통신이 13일 보도했다.다음은 DPA통신의 페터 레스만기자가 김일성주석 사망이후 서방언론으로는 처음으로 평양 현지발로 보도한 기사요지. 『전세계가 우리와 대적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안다.그렇지만 어떤 일이 있더라도 우리는 계속 사회주의의 기치를 높이 치켜들 것이다』 한 인민군소령은 이렇게 다짐했다. 지금 북한을 휘어감고 있는 것은 정치적 고립감과 마비감이다.북한은 과거 일제강점이나 한국전쟁,혹은 한반도 분단과정에서 그랬던 것처럼 역사적 사건의 희생양처럼 느끼는 듯한 분위기다.이같은 분위기는 사망한 김일성이 50년간의 독재중 주민들에게 「제국주의의 적」들에 대항토록 끊임없이 주입시키면서 서방과 단절시켜온 결과로 봐야할 것이다. 정부정책에 대한 저항이나 반대는 북한에는 존재하지 않는다.최소한 공개적으로는.수도인 평양은 회색빛 콘크리트로 이뤄진 삭막한 모습에다 수많은 기념물과 동상,텅빈 호텔로 이뤄진 도시다.주민들은 외부세계의 전모에 한번도 접할 기회가 없었다.라디오와 신문들도 이런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이들은 언제나 공식적 정부정책에 부합되는 기사만 다룬다. 그러나 이러한 일반적인 모습과 빈곤상에도 불구하고 식량공급만은 충분한듯 비쳐진다.평양의 한 외교관은 배고픔의 징후를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당 지도자 양성소인 평양국립경제연구소의 한인호 교수는 『우리는 우리식 사회주의를 발전시키고 있고 경제는 번창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동구권 붕괴이래 북한이 사실상 경제파탄과 정치적 고립상황에 처해 있다는 것은 불문의 사실이다.북한이 외교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나라는 38개국에 불과하다.그나마 어느때보다 서방의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는 경제실정에도 불구하고 국교를 가진 나라중 서방국은 하나도 없다. 그렇지만 한교수는 다른사회주의 국가들이 무너진 것은 『당의 지침을 무시하고 돈에만 탐닉했기 때문』이라고 비판하면서 북한은 이와 전적으로 다른 길을 걷고 있으며 정치적 이념도 아직 살아 있다고 주장한다.그는 또한 북한이 중국의 경제 자유화노선을 도입할 가능성도 부인한다. 이제 북한의 지도자로 등장하고 있는 김정일이 경제를 되살리고 북한을 회생시키는 목표를 달성할수 있을지는 지켜봐야 알 수 있다.그러나 일부 전문가들은 그가 자신의 자리마저도 오래 지켜낼수 있을지조차 회의적이다. 한 전문가는 『주민들이 지난 수십년간 자신들에게 얼마나 많은 것들이 금지되어 왔는지를 깨닫게 된다면 필연코 유혈극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고 단언하고 있다.
  • “자유체제로 이행” 요구하라/최평길(대북정책 새 접근)

    ◎상호사찰 강조… 불응땐 핵보유카드 써야 집권 50년­역대의 군왕 가운데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장기집권이다.김일성의 죽음은 그만큼 북한은 물론 남한에도 6·25이래 최대의 역사적 사건으로 여겨지고 동북아시아에 준 충격도 크다. 조카 김정일의 20년 견제를 받아온 김영주는 김일성왕조를 공멸의 위기에서 구하기 위해 김일성 생전의 간곡한 요청으로 수양대군이 단종을 보호하듯 가족단결의 대부로 앞장서고 있다. 김일성은 50년 장기집권동안 사돈·겹사돈·사촌·재종·조카·9촌까지 연계시켜 장관급인 노동당중앙위원회의 정위원·후보위원 2백41명 가운데 물경 20%에 달하는 50명 가까이를 친인척으로 앉혔다. 그들은 헤어지면 죽는다는 가족적 공포감,남한에 의한 흡수통합,체제붕괴,핵무기개발로 인한 전쟁공포등 삼중사중의 기득권위협에 직면하고 있다. 그러나 김일성이 살아 생전에 치밀하게 조직하고 간곡히 부탁한 김정일을 8순의 게릴라출신이 볼 때는 못가에서 노는 아이처럼 보이고,60∼70대의 전쟁복구세대는 온실에서 자란 김정일화로,50대이하는 아비의 업적에 무임승차하는 그저 물려받은 창업 2세대로 볼 것이다. 때문에 김정일이 김일성 뒤를 이어 창업을 이루어갈 것인가는 그가 2백여명의 핵심간부와 2백만의 기득권세력의 이합집산을 막으면서 하루 두끼의 강냉이죽과 밀가루국수라도 배불리 먹일 것인지,장기집권한 빨치산 원로군부,젊은 장성,영관장교등 신세대군부를 조직계통으로나 덕으로 얼마나 장악하느냐에 달렸다. 지난 90년 비내리는 7월 여름날 모스크바 국방부 신청사 앞에서 모스크바군사대학에서 5년 동안 장기유학중인 3백명 대위·소좌그룹중 한명인 현준민소좌를 만났다.그는 평양을 떠나올 때 전인민군중에서 부대통솔력에서 제일이고 김일성주석을 하느님으로 모시는 충성심으로 선발,파견된 군인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곳에서 지내는 동안 루마니아 차우셰스쿠가 처형되고 고르바초프·옐친이 직선제대통령이 되는 것을 보고 북한의 노동당이 유일집권당이려면 국민투표를 해야 하고 김정일이 주석이 되려면 공개적으로 많은 후보를 내세운 직선제로 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웠다.그 이후 3백명의 유학군인은 모조리 평양에 소환되고 말았다. 유학생,유학파군인,해외근무 경험이 있는 외교관,연합기업소관리장,노동신문·민주조선의 지성있는 언론인등도 잠재적 개혁세력이다. 이들은 현저히 약해져가는 북한통치관료조직에서 서서히 자기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하고 군부개혁신진세력은 명분만 생기고,허점이 보일 때 독자적으로 연합전선을 펼치려 할 것이다. 그러한 모의는 김정일이 노동당 중앙위원 2백46명을 평양 만수산의사당에 집합시켜 놓고 만장일치로 총비서에 오르기 위해 물밑설득을 하는 이 순간에도 동시다발로 일어날 것이다.오히려 이들보다 먼저 김영주·강성산·연형묵·김환·김달현등 친인척 측근그룹이 김정일은 안되겠다고 정변을 일으킬 가능성도 있다. 김일성주석의 사망으로 북한의 1인집권체제의 붕괴작용이 시작되었다고 보아야 할 이 시기에 한국의 김영삼대통령은 확실하고도 자신있는 대북정책을 정력적으로 밀고나가야 할 것이다. 장기적으로는 사유재산 인정,다당제에 의한 의회민주주의를포함한 진보적 문화복지와 자유민주가 통일코리아의 기본이념이며 그 방향으로 북한도 발전되고 궁극적으로 통일되어야 할 것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중기적으로는 임가공과 경제특구건설등 경제원조를 하고 경제협력의 물꼬를 트는 현실정책을 집행해야 한다. 단기적으로는 김정일과 정상회담을 할 때 과거의 핵투명성보장과 함께 핵무기개발을 중지할 것을 증명하는 남북핵상호사찰을 반드시 실천해야 된다.만약 북한이 고의로 이를 회피하고 핵개발을 계속할 경우 한국은 북한에 앞서 핵무기제조를 한다는 단호한 입장을 보여주어야 한다.그리고 이 점에 있어서는 미국과 확실한 공조체제를 유지하여 현수준에서의 핵동결에 만족하지 말고 한국과 미국이 핵무기개발에 한자·한획도 떨림이 없는 공동보조를 취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계속될 정변에서 새롭게 북한최고지도자가 부상할 때마다 김영삼대통령을 만나 정상회담을 요청할 것이다.북한최고지도자의 정통성을 부여하는 이니셔티브를 김대통령이 갖게 되었으니 이제는민주주의를 가르쳐주는 한반도의 문민대통령위상을 보여줄 때다.
  • “김정일,당·정·군 완전장악/총서기·주석직 모두 맡을것”

    ◎정부관계자/당정치국 비밀회의서 추대 결의했을지도 북한의 김정일은 김일성사망 4일째인 11일까지 권력승계작업을 사실상 완료하고 김일성이 갖고있던 당총서기직과 주석직을 모두 이어받을 요식절차를 곧 밟을 것으로 12일 관측됐다. 정부 고위당국자는 김정일이 11일밤 당정군 핵심인사들과 함께 김일성을 공개참배하는등 북측의 여러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이미 김정일이 권력을 완전히 장악한 것으로 판단된다고 말했다. 이 당국자는 『현재 북한 내부는 안정돼있으며 어느 부문에도 불안정한 조짐이 발견되지않고 있다』고 전하고 『북한이 지난 20년간 김정일후계체제 구축을 위해 노력해온 점과 김정일의 건재등 여러가지 상황을 종합분석해볼 때 김정일이 당총비서직과 국가주석직을 모두 맡아 단일지도체제를 구축할 것이 확실시된다』고 분석했다. 현재 북한은 김정일을 총서기나 주석으로 선출하기 위해 당중앙위 전원회의나 최고인민회의 소집에 앞서 당정치국 위원등 권력핵심멤버들이 비밀회동을 갖고 김정일을 총서기와 주석으로 추대하기로 결정한 것으로 정부당국은 분석하고 있다. 한편 김정일은 11일 하오 9시 평양 주석궁에서 권력핵심요인인 오진우인민무력부장,강성산정무원총리,이종옥·박성철·김영주부주석,김영남외교부장,최광인민군총참모장등 당정군 고위간부들을 대동하고 김일성 시신을 공개참배함으로써 자신의 지위가 확고하게 구축됐음을 내외에 과시했다. 통일원의 한 관계자는 이와관련,『당정군 고위간부들의 김일성 집단참배에 오진우·최광및 이을설호위총국장등 주요 군간부들이 대거 참석한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면서 『이는 김정일이 권력향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군부를 완전히 장악하고 있음을 보여준 것』이라고 분석했다.
  • 김성애 “담담” 김경희 “오열” 대조적/상중의 북한 이모저모

    ◎“김정일과 불화설” 김영주 공개참배/북방송,“김사망에 백두산천지 요동” 북한이 11일밤 TV방송을 통해 공개한 김일성 시신과 김정일의 공개참배 광경은 남측을 비롯한 외부세계의 촉각을 모으기에 충분했다.그동안 김일성의 사인이 베일에 가려졌던데다 김정일이 모습을 전혀 나타내지 않은 가운데 권력의 향배가 어떻게 될지 많은 궁금증을 불러왔기 때문이다. ○…김일성이 사망(8일)한지 93시간만인 이날 하오 9시 평양 금수산 의사당(주석궁)지하에서 진행된 이 행사는 조곡이 은은히 울려퍼지고 실내조명이 어둑하게 비치는 가운데 김일성의 시신이 안치된 수정관에만 밝은 조명을 집중적으로 비쳐 자못 장엄한 분위기를 연출. ○…「김일성화」로 보이는 조화로 둘러싸인 수정관속의 김일성은 얼굴에 특별한 상처가 없이 머리를 짧게 깎은 모습.인민복 차림으로 붉은 자주색 모포를 가슴까지 덮고 있었으며 잠을 자듯 둥근 베개가 베어져 있기도. 김일성의 얼굴은 사망 나흘째임에도 변색흔적등이 없는 것으로 보아 사망 즉시 영구보존 처리에 들어간것으로 추측되기도. 또 수정관앞에는 공화국영웅및 노력영웅 메달과 각종 훈장들이 가지런히 놓여져 있으며 국방위원회 위원장 군최고사령관 명의의 김정일 화환과 노동당·당중앙군사위원회·국방위원회·중앙인민위원회·정무원 명의의 화환이 시신 주위를 장식. ○…고위 당정간부 1백여명을 대동한 채 인민복 차림으로 참배장소에 도착한 김정일은 평소 알려진 모습과는 달리 초췌한 모습. 입장직후 무엇인가를 묻는듯 손가락으로 김일성의 시신쪽을 가리킨 김정일은 옆사람에게 잠시 말을 건네는듯 했으나 시종 굳게 입을 다문채 침통한 표정. 시신을 향해 머리 숙여 참배한 뒤 수정관 주위를 둘러보던 김정일은 간간이 손수건을 꺼내 안경을 벗어 눈물을 훔치기도. ○…이날 첫 공식참배행사에서 가장 주목을 끈것은 참배 서열이 어떻게 되는가와 이른바 김정일과 반목관계에 있다는 가족들의 참석 여부가 주목. 김정일 좌측에는 각각 서열 2·3위인 오진우 인민무력부장,강성산 정무원총리,우측에는 조선인민군 총참모장 최광이 서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고 이을설 호위총국장이 김정일 주변을 분주히 오가는 것이 목격됐다. 오진우등은 김일성과 함께 북한 정권 40여년을 이끌어온 「혁명1세대」로 김정일을 「업어키웠다」는 말이 있는 원로들.이들 역시 시신앞에 머리를 숙인채 눈물. ○…김정일은 자신의 참배가 끝난 뒤 군장성및 북한 주재 외교관의 조문을 받는 순서를 마련. 김정일은 조문객들의 인사말에 꼿꼿히 선채 한손으로 악수만하며 묵묵부답. 평양에 요양차 체류중이던 올해 87세의 한덕수 조총련의장은 지팡이를 짚은채 특히 울먹이며 김정일을 위로.김정일은 다른 조문객들에 대한 태도와 달리 이례적으로 두손으로 한덕수의 위로에 응답,대조를 보였다. ○…가족중 입장때부터 김정일의 바로 뒤 오른쪽에 따라 나온 친 여동생 김경희(48·노동당 경공업위원장)는 참배행사중 내내 오열.김일성과 김의 전처 김정숙의 소생으로 김정일이 가장 신임하는 것으로 알려진 그녀는 검은 상복차림으로 자그마한 체구.이와함께 실력자로 부각되고 있는 남편 장성택도 처남인 김정일과 가까운 거리에 위치해주목을 받기도. ○…한편 김일성의 후처인 김성애와 친동생이자 김정일의 숙부인 김영주부주석등 유가족들이 김정일의 뒤쪽에 위치.확실치는 않으나 지난 3월 핀란드 대사에서 소환된뒤 행적에 관심이 모아졌던 이복동생 김평일도 일단 참석한 것으로 보이나 확인되지는 않았다.경희의 오열하는 모습과 달리 김성애는 비교적 담담한 표정. ○…북한은 12일 김일성의 사망직후 백두산에서 격렬한 기상변화가 있었다고 전하면서 『백두산과 천지도 비분을 삭이지 못해 몸부림치고 있다』고 주장,눈길을 끌었다. 북한의 중앙방송은 이날 상오 뉴스를 통해 김일성이 사망한 8일 새벽 백두산에서는 『짙은 안개의 장막속에서 깊이 잠든 듯 조용하던 천지가 갑자기 격랑을 일으키며 몸부림치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또한 이와 때를 같이하여 초속 50m이상의 회오리바람이 불면서 대줄기같은 비가 쏟아져 내렸는데 이날 시작된 비는 잠시도 그치지 않고 3일동안 3백㎜나 내렸다고 이 방송은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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