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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죽음의 향연”… 6·25(두만강 7백리:8)

    ◎“조국위해 몸바쳐라” 조선족 징집/인민군에 편입… 2달 훈련받고 출전/연합군 폭격에 화룡시 일대 “쑥대밭”/돌아온 포로들 “차라리 남쪽에 남았더라면” 중국에 사는 전 북한의 인민군 부소대장이상 퇴역 군인들이 불합리한 대우에 항의하여 서명운동을 일으킨 적이 있다.오늘 중국에 자리잡은 인민군 퇴역 군인들은 거의 모두 중국 인민 해방군 출신이다.이들은 본래 중국 내전의 공로자들인데 1949년 모택동과 주덕의 명령에 좇아 조선으로 건너가 조선인민군에 편입되였다.이들은 6·25전쟁에서 주역 노릇을 했지만 퇴역하여 중국으로 돌아온 후 농민이 아니면 공장 노동자가 될 수 밖에 없었다.이에 비해 중국 지원군에 소속되었던 군인들은 간부대우를 받고 있는 상황이었으니 자연 분통이 터질 일이기도 했다. ○두달간 훈련받다 출전 이들은 연변 자치주 정부의 지지를 받아 대표를 파견하여 중앙에 신소,끝내 승소하였다.모든 조선인민군 부소대장이상 퇴역 군인들은 현재 간부대우를 받고 있고 자식들도 취직시켰다. 화룡시 승선진 고성리촌의 김성묵(70)은 1947년 중국 내전에 참전,1950년 4월 조선으로 나가 인민군 7사단에 편입되었던 사람이다.중국군의 군사민주에 젖어 있던 그들은 인민군 명령제에 잘 습관이 되지 않았다.소련군인식으로 다리를 꼿꼿이 펴고 행군하고 총도 왼쪽에 메야 했다.돌격시에는 꼿꼿이 서서 달렸다.두달동안 훈련을 받다가 전쟁에 휘말려 들었다고 한다. 『6월25일 새벽 맹렬한 포사격을 끝내고 국군진지로 돌격해보니 여자 방송원 한사람만 남았습데다.참말로 포탄 값도 못한 셈이디요.인민군들이 물밀듯 탕크를 몰고 서울에 들어가니끼리 우리를 소련군인줄로 알았다고 기래요.인민군이 탕크에서 나오자 깜작 놀라는 눈치였읍네다.내가 소속된 사단은 이천에서 국군의 반격을 받아 쌍방이 숱한 사망자를 냈수다.국군 포탄이 대피호에 떨어지면서 부상을 당했는데 팔이 끊어지고 다리를 상했디요.평양 웽그리아 병원으로 후송되어 치료를 받다가 매일 20리씩을 걸어서리 평양에서 신의주를 거쳐 압록강을 건넜지 뭡네까.유수현에서 치료를 받고 다시 이듬해 3월에 전쟁에 참가했디요.그 전쟁 말도 말라우요』 연합군의 인천상륙으로 후퇴한 북한 인민군은 중국경내로 전이했다.겨울에 두만강을 건너 온 인민군은 연변의 화룡·용정 등에 집중하여 사민들 집에 10여명씩 거주했다.중국에 친척이 있는 백성들도 강을 건너 피란을 했고 그외는 산속에 땅굴을 파고 살았다.그해 음력 10월1일(상사날)미군 비행기가 무산을 처음으로 폭격했고 이틀 후에 두번째로 폭탄을 내리부었다.화룡시 덕화진 천증백노인의 말을 들어보면 당시 상황이 잘 떠오른다. 『첫 폭격을 당한 무산에서는 17살 최호림학생이 죽었디요.비행기는 중국쪽에서 선회하여 조선쪽으로 꽂히면서 대두병같은 폭탄을 투하하고 기관포를 갈겨댔지 뭡네까.비행기가 어찌도 낮게 떴던지 자루 긴 올개미로 잡아댕기면 떨어질것 같습데다.조선쪽에서 폭파하는 진동에 중국쪽 마을 유리며 문짝이 떨어져 나갔디요.공습 사이렝이 울리면 조선 사람들이 새까맣게 두만강을 건너 중국으로 넘어왔는데 그러면 중국 쪽에서는 못오게 막더라 이 말입네다.사람들은 울면서 같이 삽시다고 손이 발이되게 빌어댔디요』 ○온마을 온통 울음바다 화룡시 승선진 고성리와 조선의 삼장은 한 마을이나 다름없어 폭탄세례를 당했다.한족 한사람이 수레를 몰고 가다가 폭탄에 맞아 죽었는데 유일하게 재수 없는 사람이었다.승선진 소학교 운동장에는 땅에 박힌 불발탄이 70년대에까지 있었다.그것은 반미 교육의 증거로 오래오래 써먹었다.천증백노인의 회고담을 계속 들어보면 연변의 조선족들도 6·25전쟁에 많이 시달렸다. 당시 민심은 황황하기 짝이 없었다.생사를 가늠할 수 없는 처지에 놓인 사람들은 식구들이 살아 있을 때 먹는다고 가축들을 잡아 얼려두고 먹어댔다.군인 모집이 나오면 적령 청년들은 물론 온집안이 숨이 후줄근했다.참전하면 영광이라고 온마을이 나서서 환송했지만 참전당사자와 가족들은 상사가 난 집 모양으로 울음바다였다.용정시 백금향의 박창묵(67)은 당시 6·25전쟁에 참전한 조선족의 한 사람이다.『나는 국민당군과 싸우다 47년에 부상을 입고 대퇴했수다.그후에 연변 통역학교를 다닐 때에 조선전쟁이 터졌디요.하루는 주장이자 우리 학교 교장인 주덕해동지가 와서 조선전쟁의 준엄한 형세를 이야기하면서 청년들은 국가를 위해 몸바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동원을 하데요.총알에 죽을 팔자거니 생각하니 눈앞에 아뜩합데다.우리 학급은 33명인데 여성 6명을 빼고 몽땅 잡혀갔디요.결국 절반이 죽었디만….다행이 지원군에 편입되어 통역을 맡는 통에 살아왔디요.물론 싸움판이었습네다만,안전지대에서는 남한 구경을 하고다녔디요. 마을에 열사증이 내려오면 군인가속들은 잔뜩 긴장해서 촌장과 말다툼하기 일쑤였다.국가를 위해 죽는 것은 영광이요 뭐요 하고 말꼭지를 떼면 개나발을 불지 말고 이름부터 대라고 소리를 질러댔다.일단 희생자를 알게 되면 가속들은 기절해 버리고 다른 가속들도 자기의 불행처럼 여겨 통곡을 했다.화룡시 용화향 상화촌에서만도 한국전쟁에 나갔다가 12명이 목숨을 잃었다.이번에 찾아온 화룡시 노과진 노과촌의 김진수(65)는 동해바다 함포사격에 부상을 입고 1952년 9월23일에 붙잡혀 거제도에서 포로로 있다가 정전후 1954년 8월5일 포로 교환에 넘어왔다.포로병을 반역자처럼 대했던만큼 문화대혁명시기까지 인간이하의 대우를 받고 살아왔다.지금은 매달 소대장급으로 3백50원의 연금을 받고있지만 알코올중독으로 흐리멍텅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차라리 남에 떨어져 살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괜히 돌아와서 고생을 했수다.부암에서 나와 같이 참전했다가 포로되었던 남원준과 이동준은 한국에 남았었는데 지금 꽤 잘 사는가 봅데다.나한테 편지가 왔댔소.보고 싶다면 보여주갔수다』 ○약혼녀… 다른데 시집가 화룡시 노과진 노과촌의 조창렬(84)노인의 둘째 동생 봉룡(1926년생)은 1945년 중국내전에 참군했다가 용케 살아났으나 한국전쟁에 나가 경상남도 창원군에서 전사했다.그는 결혼날까지 받아놓고 미처 성례를 이루지 못하고 군에 갔었다.매년 두번씩 오던 편지가 한 이년 끊기더니만 하루는 문득 열사증이 왔다.약혼자가 돌아와 머리를 얹어주기를 오매불망 기다리던 미혼녀는 다른 데로 자리를 옮길 수밖에 없었다. 『열사증과 함께 무흘금 2백80원을 줍데다.지금은 매달 45원씩의 돈을 부모 대신내가 받고 있디요.동생 목숨 값이라 생각하니 돈을 받아 쥘 때마다 가슴이 미여집네다』 벌써 미수를 바라보는 조창렬노인은 벽에 가지런히 걸려 있는 동생의 열사증 앞에서 한숨을 지었다.
  • “강원도 의회 의원3명/“김일성사망 애도” 편지

    ◎중 주재 북대사관에 전달/통일원,경위서 제출 요구 【춘천=정호성 기자】 강원도의회 의원 3명이 북한 북강원도 인민위원회와의 교류를 추진하면서 북한측에 김일성 사망을 애도하는 내용의 편지를 전달,통일원측으로부터 해명요구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9일 강원도의회에 따르면 정인수(양양),정상철(원주),김덕룡(영월) 의원 등 3명은 지난해 11월 통일원으로부터 남·북 강원도의회 교류를 위한 북한주민 접촉승인을 받아 지난달 16일부터 21일까지 중국 북경과 심양 등지에서 북한대사관 직원과 접촉한뒤 귀국,통일원에 접촉결과를 보고했다. 그러나 통일원은 정의원등이 북한대사관 직원을 통해 김정일에게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김정일 인민군총사령관 귀하』라는 서신을 보낸 사실을 보고받고 그 내용중 『김일성주석께서 서거 이후 애통한 마음으로 나날을 보내셨을 총사령관께 삼가 위로와 격려 말씀을 드린다』는 대목에 문제를 제기,정확한 경위서를 제출하도록 요구했다.
  • 항일투사들의 유택(두만강 7백리:7)

    ◎나철·김교헌·서일 선생 묘 새 단장/강양안 마을마다 혁명열사비 우뚝 솟아/한·중수교후 관심 높아져… 모국이장 한창 연길시 사수에서 북쪽 골짜기로 20리가량 올라가노라면 금불동이라는 마을이 있다.이 마을이 등지고 있는 산기슭을 따라 올라가면 자그마한 소나무숲이 나오는데 그안에 유달리 깨끗이 가꾼 묘소 하나를 만나게 된다. 이 묘지속에 누워 있는 사람의 이름을 모른다.누구도 그가 어디서 태어났으며 어디서 왔으며 부모가 누구인지도 알길이 없다.다만 숨을 거둘 당시 19살이라는 것과 조선족 항일독립군 젊은 전사라는 사실만을 알고 있을 뿐이다. 마을에서 연세가 높은 이상헌(79)노인은 그 무명의 젊은 전사가 꽃다운 나이에 죽어간 정황을 소상히 기억했다. 『꼭 쉰 일곱해전 일입네다.뒷산에서 드문이 총소리가 들려오더니만 일본놈들과 자위단들이 어린애 같이 앳된 새파란 청년을 끌고 마을로 들어왔디요.그 놈들은 마을 사람들을 불러내다 보는 앞에서 청년을 신문합데다.이름을 물으니까 「항일독립군」이라고만 기래요.그 날 왜놈 장교의 군도에 목이 잘려 죽고 말았디요.하도 기막히고 딱해서 유체를 마을 사람들이 묻어주었댔습네다』 ○무명열사 묘지는 쓸쓸 두만강 양안 마을마다 양지 바른 언덕위에는 혁명열사비가 세워졌지만 산 언덕 공동묘지에 임자 없이 쓸쓸히 있는 독립투사들의 묘지는 풍우의 시달림에 자취를 잃었거나 훼손되어 가고 있다.용정시 삼합진 안미대골로 얼마간 들어 가다가 화선 누비골에 있는 묘지앞에는 돌비석 하나가 쓸쓸히 서 있었다고 한다.비석에는 김병덕 지묘라고 씌어있었다.부근 마을 사람들은 독립군 대장의 묘라고 했다.똑같은 항일투사의 묘지이다.하지만 계급투쟁 세월에 그 누군들 감히 돌볼 수가 있었으랴.몇해전 김병덕의 묘지는 파엎어졌고 대리석 비석도 도난을 당했다.오소리가 묘지에 굴을 뚫고 보금자리를 꾸민 것을 발견한 부근의 사람이 묘를 헤치고 오소리를 잡아냈다. 그러나 사회주의 계열 항일열사들의 시신은 일찍 북한으로 이장되었다.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한때 친선을 다졌던 터이라 이장이 쉬워 1950년대말에서 60년대 사이에 시신이라도 두만강을 건넜다.이에 비해 한국에 가까운 연고를 둔 항일열사들은 상대적으로 대접이 소홀했다.특히 문화대혁명 당시 항일유적이나 열사들의 묘소가 큰 수모를 겪었다.한중수교가 이루어지고 광복 50주년을 맞는 오늘날은 사정이 달라져 항일열사들에게 관심을 쏟고 있다. 그 넋이라도 살아서 가장 슬퍼하다가 다시 기뻐했을 열사가 있다면 나철,김교헌,서일 선생일 것이다.한국 대종교의 3종사로,또 항일독립운동가로 추앙받는 이들의 묘소는 화룡시 삼도구 청호촌에 있다.지금은 연변조선족자치주 정부가 항일역사유적지로 지정한데다 한국의 대종교가 묘역을 정화했기 때문에 제법 볼품이 나지만 얼마전까지만 해도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청산리전투를 총지휘 이 묘역은 문화혁명 당시 홍위병 패거리와 추종자들에 의해 쑥대밭이 되는 수난을 겪었다.비석을 모두 내동댕이 쳐서 청호촌 마을 사람들이 가져다 댓돌로 쓸 정도였다.문화혁명이 가시고 뜻있는 사람들이 묘비석을 찾아내 세웠지만 김교헌선생의 묘비는 끝내 못찾았다.그래서 몇해전에 묘비를 새로 만들어 세웠다.대종교는 독립군조직 서로군정서를 만드는데 주역을 담당했고 서안선생은 그 총재로 1920년 청산리전투를 승리로 이끈 지도자였다. 지금은 일본인들까지 유골을 찾으려 두만강변의 연변땅을 방문하고 있다.물론 침략자로 두만강을 건넜다가 목숨을 잃은 사람들이다.얼마전에 한 일본 여인이 용정시 백금향으로 와서 자기의 오빠 묘를 찾았다.묘지 자리를 상세히 그린 지도까지 들고 온 일본 여인을 마을 노인들이 안내했다.묘가 있었다는 장소는 본래 일본 삼림경찰의 묘역이었다.1940년 홍기하 전투에서 겨우 살아남은 일본경찰은 둘 뿐이었다는데 목숨을 살려 평정대 마을까지 이르렀다가 그중 하나가 병으로 죽어 그곳에 묘를 썼던 것이다.그런데 봉분이 사라져서 어방으로 묘자리가 짐작은 가도 딱 짚을 수는 없었다. 독립군 김덕형의사는 웅진,나진 등 두만강 연안의 조선을 다니며 군자금을 모았던 사람이다.1921년 경술년 토벌 때 어느날 저녁 군자금을 가지고 두만강을 건너 북흥에 있는 집으로 들어 왔다가 일본군 토벌대의 포위에 걸려희생되었다.그가 죽은 후 식구들은 군자금을 독립군에 전달할 수 없었다.많은 액수의 군자금은 그 집의 생활을 윤택하게 만들었다.김덕형의 아들 두 형제는 시름없이 공부를 하였다.광복이 나고 1947년 토지개혁을 하게 되자 생활이 유족했던 그 일가는 청산을 당해 러시아제 금장표 재봉틀마저 빼앗겼다.다른 사람의 소유가 되었던 재봉틀은 얼마전에 고장이 나서 고철로 팔아버렸다.그집 큰 아들은 북한에 들어가 죽고 작은 아들 김성록은 지금 한국에 산다.6·26전쟁 때 인민군에게 포로로 잡혀 북한에 온 김성록은 중국의용군으로 참전했던 북흥의 조선족 친구가 만난 일도 있다.그는 한국군 대좌(대령)군함(계급장)을 달고있었다는 것이다. 한국정부 보훈처에서는 연변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 안화춘 선생의 도움으로 중국내 애국선열들의 묘소를 이장하고 있다.안화춘 선생은 갖은 노고를 아끼지 않고 이 땅을 메주 밟듯 하고 다닌다.이번 두만강 답사길에서 연변 도처에서 희생된 선열들의 자취를 잡을 수 있었다.조창렬노인이 들려준 경신년 대토벌 당시 상황도 그 한토막이다. ○선열들 발자취 곳곳에 부암동에서 독립군 한창준과 이씨가 체포되어 불에 타 죽었댔습니다.시체를 감장하려니 누가 누구인지 가릴 수가 없었디요.일제 놈들은 의병대장 최덕균과 남상윤(남풍수로 불림)선생도 모진 고문을 했다고 기래요.눈에다가 고춧물을 부어 넣고 신문을 했으니끼리 죽을 수 밖에….』 선열들의 비장한 최후는 눈물 없이는 들을수 없었고 일제와 주구들의 만행은 의분을 불러 일으켰다. 우리가 흔히 북간도라고 부르는 독립운동의 무대 연변은 이렇듯 많은 항일투쟁의 사연을 안고 있다.나는 옛 용정 대성중학교(현재 용정시 제2중학교)앞에 세워진 윤동주 시비에 새겨진 시 한구절을 머리에 떠올려 보았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무수한 선열들처럼 죽는 그 순간까지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산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시련이 아닐 수 없다.
  • 혈육의 정/연변은 남북이산가족 “만남의 장소”(두만강 7백리:6)

    ◎거의 조선족이 알선… 70년대부터 재회 급증/한달간 머물며 “못다한 정”나누고 여행도 중국에 사는 조선족들은 허리가 잘려 두 동강이 난 고국 어느쪽의 혈육이든 마음만 먹으면 만날 수 있다.남북의 혈육들이 이념적 갈등 때문에 고국땅에서 서로 만날 수 없는 현실과 대조를 이룬다고나 할까.조선족들의 이런 처지는 남북으로 갈라진 혈연들의 상봉을 주선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속된 말로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에 조선족들이 끼어들게 마련인 것이다. ○문혁이전엔 엄두 못내 그러나 남북 혈연들의 상봉을 주선하기 시작한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문화혁명 이전에는 상봉을 주선하기는 커녕 조선족 자신들조차도 남한에 혈연,특히 이름깨나 난 혈연이 있다는 사실을 감추었다.문화혁명 당시에는 이런 꼬투리만 잡혀도 호된 투쟁을 받았다.남한에 혈연을 둔 것도 죄가되어 실제 곤욕을 치른 조선족들도 많다. 용정시 백금향에 들렀을 때 백금발전소 최몽필 문화잠장으로부터 생소한 이야기를 들었다.지금은 고인이 된 박정희 대통령의 6촌 계수가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발전소에 살면서 좀 떨어진 향 소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의 밥을 지어준다는 그 여인의 이름은 윤순옥(64).막상 만났더니 오랜 고생 탓인지는 몰라도 노쇠한 그늘이 역역했다. 그녀는 24살이 되던 해에 12살이나 더 먹은 박용태(함북 길주군 태생으로 72년 작고)의 후실로 들어왔다.후취 장가를 들 무렵 3살난 아들이 있었다.박용태의 부친은 박관일,박관세,박관선 3형제였는데 그녀의 주장대로라면 박정희 대통령과 5촌이 되는 사람들이다.보학도 배우지 않았거니와 족보도 확인하지도 못한 나로서 그렇다 아니다를 논할 처지는 못 되지만,일단 믿어보기로 했다. ○방송국에 편지 부탁 그녀의 말에 따르면 박용태는 박정희 대통령과 군관학교 정문 앞에서 찍은 사진을 보관하고 있었다.신사복 차림에 중절모를 쓰고 형제분이 찍은 사진이었다.밤이면 이불 속에서 사진을 보이면서 박정희라고 이야기 할 때 그녀는 모골이 송연했다.그때만 해도 적국의 대통령과 인척관계가 된다는 사실만이라도 감옥 밥을 무던히 먹을 죄였던 것이다.벽에 걸어둔사진틀 뒤에 몰래 보관하고 집식구들끼리만 돌려 보곤 했다. 그러다가 문화혁명 시기에 우연히 사진이 치보주임 최홍운씨의 눈에 띄었다.최 주임은 박정희라는 것은 몰랐지만 해방전 박용태의 신사복차림을 보고는 소각해버리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귀띔해 주었다.그러나 박씨는 사진을 농속에 깊숙히 감추어 두었다.만약 당시 최주임이 고자질을 했더라면 박정희와의 관계는 뒤로 제쳐놓고도 투쟁을 받았을 것이다.1972년 박씨가 세상을 뜨자 사진을 불살라버렸다. 한중수교가 이루어 진 후 일가 친척 없이 고독하게 살아온 그녀는 한국 KBS사회교육방송국에 친척을 찾아달라는 부탁의 편지를 냈다.그런데 박정희 대통령과 친척이라고 선을 달아 줄 것을 요구한 편지가 꽤나 된다면서 그녀의 혈육을 찾는 간절한 소원을 이루어 주지는 못했다.사회교육방송국에서 종종 보내온 책자와 편지를 지금도 보배처럼 보관중인 그녀의 마음 속에는 아직도 아쉬움이 많다. 『령감은 고생만 하다 너무 일찍 가셨디요.기런 북새통을 살다보니 박대통령 사진도 못 남겼수다.다가저의 불찰이디요.저는 박씨 가문에 들어온 사람이라 남이라면 남일테지만….자식들한테 혈육도 모르고 지내게 하는 거이 가슴 아픕네다』 그러나 두만강을 사이 두고 한동안 친선을 유지해온 중국과 북한은 사정이 달라 혈육간의 왕래가 비교적 잦았다.용정시 대소과수농장의 방승섭(68)은 여기서 김일성주석으로 호칭하는 그의 처형 아들이었다.다시 말하면 김일성주석의 본처 김정숙의 언니가 바로 방승섭의 모친이다.70년대 초 두 나라 정부에서 교섭하여 방승섭부부,어머니,두 아들과 딸하나를 데려갔다.1986년 대소과수농장의 관치성농장장은 조선을 방문하는 기회에 청진시 칠세대에 사는 방씨 댁을 찾아갔다.고향 사람을 만났다고 후한 접대를 해주었다.방씨 부인은 3년 전에 대소과수농장을 찾아온 적도 있다. 용정시 지신(일제시기 화룡현 다라즈)의 출신이고 항일투쟁에 차가했다가 현재 조선인민군에서 장군이 된 김광협의 친척들은 50년대와 60년대에 북한으로 이주했다.김광협의 7촌 조카 김상호는 1946년 참군하여 조선으로 나간 후 소련 유학을 하고돌아와 조선인민군 공군 부사령이 되었다고 한다.김상호는 어머니와 일가친척을 모두 모셔갔다. 연변에 살던 김광협의 친척들은 소작농으로 가정 살림이 째지게 가난했다.세발의 막대를 휘둘러도 거칠 것 없는 살림인지라 김광협의 동생은 한쪽 눈이 먼 여성을 아내로 맞았다.동생 일가가 평양에 도착하던 날 김광협은 처 유명옥과 함께 역으로 마중을 나왔다.제수를 보는 그의 마음은 참 딱했을 것이다.그런만큼 그는 제수를 끔찍히도 아꼈다고 한다.순 농군으로부터 국가 간부가 된 동생은 처하고 불화했는데 그 일 때문에 형님한테서 모진 꾸지람을 들은 다음부터 가정화목을 지켰다는 것이 용정시 삼합진 북흥촌 노인들의 이야기다. 김광협의 6촌 형님 김병협은 북흥촌 이기희씨의 고모부이다.그 이씨가 회령 사탕공장에 있을때 들었다는 이야기는 김광협 일가의 생활상을 짐작케 한다. 『그러네까 64년도 일입네다.김광협 6촌형의 딸,내게는 고종사촌 되는 누이가 두만강을 건너 평양 갔다 오는 걸음에 우리집에 들렸댔습네다.그 고종4촌 말이 김광협 집 앞대문엔 보초가 다섯이나 서 있더라고 기래요.삼촌을 집에 모신 김광협은 아침 문안을 꼭 드리고 식사도 독상을 대접하더랍데다.김광협은 식구들과 식당칸에서 밥을 먹으면서 요리가 나오면 모처럼 온 조카딸에게 연신 넘겨주었다는 거디요.조카딸도 화룡영화관 해설질을 하던 남편과 함께 나중에 평양으로 불러들였디요』 ○남북 오누이 극적 상봉 그러한 북한과의 일변도 왕래가 변화를 일으켜 딴판을 맞고있다.중국의 조선족은 이념의 벽을 뛰어넘어 남쪽의 혈육과도 정을 통하게 되었다.두만강을 훌쩍 건너는 것보다 비행기나 배를 타고 우회하는 먼거리에 남한이 있을지라도 무척 가까워졌다. 지금으로부터 3,4년 전의 일이다.중국 조선족 한 분은 북과 남에 사촌형제들이 있다.그해 북에 건너가 4촌 여동생한테 남에 사는 형한테서 온 편지를 전했다.편지를 받아쥔 여동생은 흐느껴 울었다.얼마나 그립던 오빠였던가!여동생의 남편은 6·25전쟁 당시 조선인민군이 되어 남으로 밀고 내려갔다. 그분은 얼마있다가 남한의 사촌형님 집으로 갔다.형을 만난 그는 깜짝 놀랐다.형님이 앞을 못보는 장님이 되었던 것이다.6·25전쟁 당시 국군에 있었던 형은 어느 한 전투에서 인민군의 총에 맞아 소경이 되었다는 것이다.어찌 보면 매부의 총에 부상을 입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타의에 의해 혈육간에 살생을 해온 우리 민족처럼 뼈에 사무치는 한을 가진 민족은 세상에 없을 것이다. 그분은 여동생과 형님이 중국에서 만나는 것이 어떠냐고 말했다.그러자 형님은 『소경인 내가 볼수도 없는 신세이고 만나면 여동생한테 서러움만 더 줄것이니 친척 동생더러 대신 가서 만나라』고 했다.결국 친 오누이의 만남은 무산되었지만 다른 혈육이 중국에서 뜻깊은 눈물의 상봉을 가졌다.그들은 만 한달간 한 집에 머물면서 한 많은 회포를 풀었다.그래서 두만강가는 이래저래 눈물 마를 날이 없는 모양이다.
  • 「축산부문 열성자대회」개최…김정일 무더기 상훈 수여

    ◎“식량난 덜고 인민군에 육류 더 보내자”/축산업 진흥 안간힘/돼지 2·토끼 30·닭 10마리 사육 의무화/빈터에 비름 등 재배… 사료난 해결 독려 북한당국이 올들어 축산업의 생산기반 확대에 안간힘을 쏟고 있어 귀추가 주목된다. 이같은 사실은 북측이 이달초 평양 인민문화궁전에서 「전국축산부문 열성자대회」를 연데서도 확인된다.북한방송들에 따르면 이 대회에는 강성산정무원총리,박성철부주석,최광인민군총참모장등 당정 고위간부들이 참석했다.특히 축산 관련인사들에게 김정일 명의의 표창장과 국기훈장등 각종 상훈을 무더기로 수여한데서도 축산진흥에 부심하고 있는 강도가 감지된다. 이처럼 북한당국이 축산분야에 엄청난 관심을 쏟고 있는 것은 일차적으로 당면한 식량난 해소에 목적이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북측이 축산진흥에 열을 올리고 있는데는 보다 시급한 또 다른 이유가 있다.인민군 병사들중 영양실조 환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바람에 군부대에 육류 보급을 확대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조성되고 있는 사실이그것이다. 이는 김정일이 축산부문 열성자회의 이후 각 협동농장에 감사를 전달하는 형식으로 당 축산정책 관철과 인민군 「원호사업」을 독려하고 있는데서도 알 수 있다. 실제로 귀순자들을 통해 북한 병사들중 약 6%가 영양실조 상태에 있다는 첩보가 입수되고 있다.특히 심각한 주·부식 사정으로 인해 근래에 들어 인민군이 민가와 협동농장에서 사육하고 있는 돼지·오리 등 가축을 「원호사업」,「군민일치」등의 명목으로 강탈하는 사례가 빈발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북한의 축산업은 중앙의 농업위원회가 직접 관장하는 국영축산과 협동농장의 공동축산,농장원 개개인의 부업축산으로 구분된다.북한당국은 국영·협동농장을 통한 축산진흥이 벽에 부딪히자 최근 부업축산을 강조해 왔다.예컨대 산간지대 농장원의 경우 부업축산이란 명목으로 매 호당 돼지 2마리,토끼 30마리,닭 10마리 이상을 의무적으로 사육토록 강요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축산업은 침체일로에 있다.사료난으로 인해 북한주민이 돼지·오리·게사니 등 북한당국이 권장하는 가축 또는 가금의 사육을 회피하고 있는 탓이다. 물론 북한당국도 이에 대해 몇가지 대응책을 강구하고 있다.야산과 공한지를 이용,호박·동과·비름 등 소위 비알곡 먹이를 재배토록 독려하고 있는 것이 대표적 사례다.칡·싸리 등을 비롯한 자연사료를 적극 채취하는 한편 볏짚·옥수숫대 등을 분쇄가공해 사료로 이용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같은 편법들도 결국 수요에는 턱없이 못미친다는 점에서 미봉책에 불과하다.북한의 축산진흥정책도 경제개방을 통해 총체적인 경제난을 해결하지 않고는 성공을 거둘 수 없다는 게 대다수 북한전문가들의 진단이다.
  • 「제2 한국전쟁」 가상소설 등장

    ◎미 테크노 스릴러작가 톰 클랜시 「옵센터」 발표/미 정보기관 맹활약… 전쟁음모 파헤쳐 테크노 스릴러의 제일인자인 미국 작가 톰 클랜시가 최신작 소설 「옵센터」(Op­Center,미국 버클리사)의 무대로 잡은 곳은 바로 한국이다.지난해 위기의 벼랑끝까지 갔던 북한핵문제와 한반도 전쟁가능성이 그의 구미를 당겼던 것 같다.「옵센터」는 출간되자마자 베스트셀러리스트에 올라 두달동안 1위였다. Op는 Operation(작전 또는 공작)의 준말이다.소설 「옵센터」는 한국을 제2의 한국전쟁 발발 직전까지 몰고간다.그러나 단 이틀동안 숨가쁘게 벌어지는 이야기.할리우드 영화처럼 빠른 장면전환에 갖가지 첨단무기와 컴퓨터 시뮬레이션이 동원된다.카터와 김일성의 회담,북한내 미군헬기추락등 최근의 실제사건까지 배경으로 넣어 현실감을 돋운다.우리 민족의 사활 문제가 스릴 만점의 흥미거리가 되고 있다는 느낌이다.한국인인 우리가 볼 때는 엉성한 구석도 있고 수긍이 안 되는 데도 없지 않다. 2000년대 중반,한반도는 아직 분단상태이나 통일을 위한 협상이 한창 진행중이다.미국에서는 새로운 정보기구 옵센터가 창설된지 6개월 됐다.어느날 한국의 국가적 기념식이 열리던 경복궁 식장에서 폭발사고가 일어나 미국과 한국의 정보기구들은 바짝 긴장한다.범죄의 배후로는 자연스레 북한이 지목된다. 이 사고로 한국인 아내를 잃은 옵센터 한국관계 고문 그레고리 도널드(80년대 중반 주한대사 역임)는 더이상의 테러를 막기 위해 홍구라는 인민군 장군을 만나러 비무장지대로 가다 누군가의 총격으로 숨진다.한국 정보기관(KCIA)의 고위간부 김환도 체포된 북한간첩으로부터 정보를 얻기 위해 그 간첩의 집으로 가다 테러를 당한다. 옵센터는 금강산으로 특수대원을 잠입시켜 북한의 노동호 미사일 3기의 탄두가 남한과 일본으로 향해 있고 발사준비중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북한이 아닌 제3자가 전쟁음모를 꾸미고 있음을 알아차린다(북한이 일본을 공격할 가능성은 희박하기 때문에). 가공할 만한 이 사건의 배후에는 한국의 맹목적 국수주의자 김리 소령이 있었다.정세를 악화시켜 전쟁이 일어나게 하려는 음모였다.먼저,전쟁을 북한이 일으킨 것처럼 꾸며 미국이 북한을 공습해 초토화하도록 유도한다.다음 단계는 한국군의 점령에 의한 통일이다.김리의 정체가 드러나면서부터 옵센터의 눈부신 활약이 시작된다.첨단기기와 기민한 인재들을 가진 옵센터는 한국 정보기관및 북한과 협력해 노동호가 발사되기 직전 아슬아슬하게 폭파시키고 전쟁 발발을 막는다.옵센터 공작의 완벽한 승리다. 84년 첫소설을 발표한 클랜시는 미·일 가상전쟁,콜롬비아의 마약카르텔,베트남전 등에서 미 정보기관이 펼치는 하이테크 무용담으로 보험대리점 경영인에서 순식간에 베스트셀러작가로 변신했다.
  • 군부/김정일 버팀목은 혁명 3세대/북장성 60여명 인맥분석

    ◎92년 이후 대거발탁… 현재 준장­대장급 포진/거의 당중앙위원 겸임… 실세중 실세로 부상/혁명1세대 원로 예우 오진우 후임에 최광유력 북한군 실세 장령(장성) 60여명의 면면을 보면 한결같이 김정일의 충복이거나 직계들로 대부분 당의 요직을 겸하면서 군의 주요 위치에 포진하고 있다.현재 북한군 장성의 수는 약1천2백명으로 이중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상장급 이상 핵심 장성들은 거의가 군부 엘리트코스인 만경대 혁명학원과 김일성군사종합대학·강건종합군관학교 출신들이며 김정일친위 군맥을 형성하고 있다. ○떠오르는 세대 혁명 1세대부터 3세대까지 걸쳐 있는 북한군 기축세력 가운데서도 앞으로 김정일체제의 버팀목 역할을 할것으로 예상되는 실세로는 단연 3세대가 꼽혔다.현재 소장(우리의 준장)∼대장급인 이들 제3세대는 대부분이 김정일이 원수진급(92.4.23)과 동시에 북한군 최고사령관으로서 6백64명의 장령들을 승진시켰을 때와 휴전 40주를 계기로 「군최고사령관 명령 제40호」로 99명(중장14명,소장85명)을 승진시킬 때 포함된 장령들이다.특히 이들 「떠오르는 별」 가운데 당중앙위원회 위원과 후보위원을 겸하고 있는 장령들을 눈여겨 봐야 할 것으로 관측 됐다. 당중앙위원회는 당대회와 당대회 사이의 모든 당사업을 관장하는 당조직의 최고지도기관.당중앙위원들은 정치국과 정치국 상무위원회,총비서와 비서를 선출하고 비서국과 군사위원회 조직결정권을 가짐으로써 그 힘은 실로 막강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따라서 인민군 장령으로 중앙위원회 위원이나 후보위원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면 일단 그는 향후 북한 사회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할 가능성이 있는 인물이라는 얘기가 된다.이같은 관측은 이들이 김일성·오진우의 국가장의위원회 위원이었다는 점에 의해서도 뒷받침되고 있다.특히 인민군장령으로 중앙위위원이나 후보위원을 겸하고 있는 인물들은 대부분 김정일의 후계승계가 김일성에 의해 공표된 이후 보충된 인물들이다.이는 곧 김정일이 집권에 대비,앞날을 내다보고 중앙위원회에 자기 사람을 심었음을 의미하는 것이 된다.특히 이들 장령들 가운데서도 최근의 김정일군부대시찰이나 행사참석시 수행 내지 동석한 김광진 김봉율 이하일 조명록 김일철 김명국 이봉원 박재경 김정각 정호균 김하규등이 실세중의 실세인 것으로 평가됐다. 이밖에 지난해 김일성의 국가장의위원회 명단에 23위,지난달 25일에 발표된 오진우의 국가장의위원회명단에 서열 20위로 발표된 김철수도 눈길을 끄는 인물이다.이 정도의 서열이면 당정치국후보위원 수준의 거물급이나 그의 신상에 관한 것이 일체 알려지지 않고 있다.현재 그의 나이는 50대초에 계급은 상장(우리의 중장)급이며 호위총국 등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전면 물갈이 없을듯 북한군의 세대교체는 외부에서 생각하는 것처럼 대폭적인 물갈이 형태로는 이뤄지지 않을 것으로 전망됐다.김정일이 전권을 장악했다고 해서 하루 아침에 김일성과 항일 빨치산활동을 같이 했던 혁명1세대들을 갈아치우기는 어렵기 때문이다.외부 세계에서는 혁명 1세대들이 군부 엘리트들로부터 퇴진압력을 받고 있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으나 설령 그렇다고 해도김정일로선 혁명 1세대를 홀대하기가 그리 쉽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그 까닭은 북한정권이 김일성의 항일 빨치산투쟁이라는 군사적 권위에 통치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최광 외에도 북한군에는 백학림 이을설 이두익 최인덕 전문섭 김철만 태병렬 이종산 등의 혁명 1세대가 버티고 있다.그러나 이들중 2∼3명을 제외한 나머지는 원로의 예우를 받고는 있지만 속을 들여다 보면 실권은 제2세대와 제3세대들이 행사하고 있어 사실상 일선에서 물러난 상태나 다름없다.이와 관련,전문가들은 지난 73년부터 시작된 김정일후계체제 구축과정에서 이른바 그 조직기반으로서의 「3대혁명소조」가 군부에도 침투,기반을 형성해왔음을 눈여겨 봐야 한다고 지적한다.이는 달리 표현하면 형식상·제도상으로는 북한군부의 핵심세력이 고령의 항일 빨치산그룹으로 돼 있지만 김정일을 떠받들고 있는 신진 엘리트가 실세로 군내부에 포진하고 있음을 의미하는게 된다.따라서 북한군의 세대교체는 몽땅 물갈이하는 식이 아니라 이들 혁명 1세대의 자연수명이 다할 때까지 기다리면서 자연스럽게 빨치산 1세대들을 권력의 무대에서 퇴장시키거나 이들이 김정일에 대한 충성맹세를 하며 사의를 표하고 이를 김정일이 받아들여 빈 자리를 제2,3세대로 메우는 수순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최광이 인민무력부장이 될 경우 총참모장은 김광진이나 오극렬 이봉원 김두남 오용방 장성우 같은 2세대중 한사람에게 돌아갈 것으로 관측됐다.즉 김정일이 혁명 1세대이자 인간적인 인연을 갖고 있는 최광을 인민무력부장으로 예우하면서 내용적으로는 실세인 제2세대로 하여금 북한 군부를 이끌어 가게 할 가능성이 가장 많다. ○개혁주장 못한다 북한군이 북한의 개혁주도세력으로서 힘을 모을 가능성은 매우 적은 것으로 진단됐다.북한군 장교들은 일단 「선택된 사람들」로 일반주민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은 봉급외에 각종 혜택을 누리고 있다.그런 만큼 자신들의 기득권이나 프리미엄을 포기하려 들지 않을 것이고 체제붕괴나 변혁을 초래하게될 개방이나 개혁은 더더욱 주창하고 나서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또한 북한군이 노동당의 지휘를 받고 있기때문에 당방침으로 결정되기 전에는 군부가 앞장서 개방이나 개혁을 주장하고 나서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관측됐다. ○국부적 도발 가능성 북한경제형편이 지금보다 훨씬 나빠지고 핵문제가 제대로 풀리지 않아 국제적 고립이 심화되는 등의 국면이 전개되지 않는 한 북한군의 대남도발 가능성은 희박한 것으로 관측됐다.전문가들도 막강한 한미연합전력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승리를 확신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북한군부의 군사적 모험은 쉽지 않을 것으로 전망했다.다만 내부적 불안요인 소진을 위한 정치적 목적에서 긴장조성의 필요성을 느낄 경우 국부적 도발은 가능할 것으로 예상됐다.북한이 당면하고 있는 경제적 어려움의 이유를 한국과 미국의 도발에 대비한 군비충당 쪽으로 전가하고 있는 만큼 일부 소장 지휘관들이 이판사판의 심정에서 대남군사도발을 주장할 가능성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결론적으로 「의도하지 않은 전쟁」발발 가능성은 배제하기 어려우나 전면적이고도 계획적인 대남군사도발은 여려울 것으로 분석됐다.
  • 북한군 6% 영양실조상태/귀순인사들 증언/부대별「보양소」에 배치

    ◎사단급엔 5백여명 수용 북한 인민군 병사의 약 6%가 영양실조상태에 이를 정도로 북한군의 식량보급이 악화일로에 있는 것으로 8일 알려졌다. 최근 귀순한 북한군 출신 인사들의 증언을 토대로 정부가 파악한 실태현황에 따르면 인민군 하전사의 약 6%가 영양실조에 걸려 각급부대별로 설치된 「보양소」(일명 영양회복중대)에 수용되어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들 「보양소」는 대대·연대·사단·군단마다 설치되어 있으며 수용자는 대대급 5∼6명,연대급 30명,사단급 5백명정도인 것으로 밝혀졌다. 북한의 군병원에서 운영하는 「보양소」에서는 수용환자의 영양보충을 위해 자체조달한 콩·찹쌀·돼지고기 등을 제공하고 있으나 이들이 취식후 심한 배탈·설사를 일으킬 정도로 허약한 상태라고 귀순자들은 증언하고 있다. 북한당국은 또 인민군 복무중 노동당 입당비율이 최근 90%에서 40%로 떨어지면서 군내 당원과 비당원(사로청원)의 알력이 극심해짐에 따라 이를 해소키 위해 「당사(당원과 사로청원)일치」운동을 집중적으로 벌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 북­미 전화·팩스 연내개통/미 MCI·델타소스사/통신분야 진출합의

    ◎북,GM에 자동차 조립공장 설립 희망 【뉴욕=나윤도 특파원】 미국 전화회사인 MCI사와 통신설비회사인 델타 소스사가 북한의 전화가설을 맡기로 했으며 앞으로 자동차및 통신분야에서 미국업체들의 북한 진출이 활발해질 것으로 보인다. 지난달 미 대기업 방북단의 일원으로 평양을 방문하고 돌아온 재미교포 백영중씨(65·파코 스틸대표)는 『김정일의 친척이며 해외경협의 실질적 책임자인 김정우 해외무역추진위원장 등 고위당국자들과 일련의 회담을 갖고 통신문제를 집중 협의,MCI사가 전화사업관리 부문을,델타 소스사는 통신장비및 시설 등 기간설비 부문을 담당,올해내로 양국간 전화통화및 팩스 송수신을 개통키로 했다』고 밝혔다. 백씨는 또 『북한측은 미국 자동차메이커 GM사가 북한에 자동차조립공장을 세워줄 것을 희망했으며 항만과 비행장 등 기간시설 건설에 인민군 10만명을 공사인력으로 투입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고 말했다. 『북한측은 영공과 영해도 개방할 뜻이 있음을 보이기 위해 이번 방북때 MCI부사장의 자가용비행기를 뉴욕에서 평양으로 직항하도록 허용했다』고 전한 백씨는 『북한은 면세특혜조치 등을 통해 미국기업의 유치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고 덧붙였다. 백씨는 이어 『이번 대표단은 제임스 줌월드 전국무부 인권보좌관이 인솔했으며 오는 4월 연락사무소 설치를 전후해 북한의 해외경제추진위 간부들이 미국에 초청될 것』이라며 『지난 1월20일 미국의 대북한 경제제재 부분완화조치로 양국간 경제교류가 급진전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 「고아돕기」아바이순대 장터 큰인기

    ◎귀순 북한출신 11명이 손수 만들어 판매/실향민 등 1천명 몰려 2시간만에 매진 80년대 후반이후 귀순한 북한 출신 11명으로 구성된 「나라사랑회」(회장 김남준·32·기아자동차 근무)가 4일 하오 서울 보라매공원 자유회관에서 고아돕기 성금 마련을 위해 자신들이 손수 만든 순수 북한식 「아바이 순대」를 판매,시민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 이날 행사에는 1천여명의 시민들이 몰려와 7천원씩에 판매하는 3백50명분의 순대가 행사시작 2시간여만에 동이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아이들에게 귀순용사를 만나볼 기회도 마련해주고 진짜 북한식 순대도 맛보기 위해 왔다는 허종실(42·동작구 대방동)씨는 순대가 동이나자 『너무 적게 만든 것 아니냐』며 아쉬워했다.하오 3시에는 국밥 등 나머지 음식마저도 떨어져 예정보다 2시간이나 앞당겨 문을 닫아야했다. 이날 행사에는 89년 인민군 소위로 복무중 귀순한 김 회장 이외에 유천수(32·사업),장기홍(33·연세대 노문과 2년),윤웅(28·고대경영학과 1년),유정훈(32·농협근무),임영선(28·현대건설),김광욱씨(26·농협) 등 7명이 참여했다. 김씨를 비롯한 회원들의 얼굴은 그지없이 밝았다.50명의 고아들에게 푸짐한 선물보따리를 안겨줄 수 있다는 생각에 음식준비로 밤을 꼬박 세운 피곤함도 잊은채 분주히 뛰어다녔다. 이들이 순대를 직접 만들어 팔게 된 계기는 90년 러시아 유학중 귀순한 회원 한진우씨(27)가 외국어대에 편입해 다니면서 학우들과 함께 서울 노원구 상계동 「양지동산」을 방문한 뒤 귀순자들 사이에 고아들의 딱한 사정이 알려졌기 때문. 이들은 회비 3만원씩을 거둬 틈틈이 양지동산을 도왔으나 더 적극적으로 돕기위해 수익사업을 계획했다.궁리끝에 북한군 복무시절 손에 익힌 순대요리를 만들어 팔기로 한 것. 순대국 한그릇을 깨끗이 비운 철원출신 실향민 박상희(61)씨는 『북한식 아바이순대의 구수한 맛이 일품』이라며 『어렵게 귀순해온 젊은이들이 손수 만든 것이라는 생각에 더욱 맛있게 먹었다』고 말했다. 「아바이 순대」는 찹쌀에 「멍청이 배추」(우거지 배추)를 썰어넣고 「도래창」(돼지창자에 붙은 기름)과 선지피를 적절히 배합해 만드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청진이 고향인 대표 김씨는 요리법에 관해서는 「비법」이라며 끝내 입을 다물었다.
  • 북 권부의 떠오르는 실력자/「김철수」는 누구냐

    ◎김일성·오진우 장레식 서열23·20위 랭크/“50세 전후의 호위총국 대장” 추정 「김철수는 어떤 인물인가」오진우 인민무력부장의 사망을 계기로 북한의 김철수라는 베일속의 인물에 대해 북한 관측통들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25일 죽은 오진우의 장례위원 명단에 나타난 북한의 권력서열에서 이 미지의 인물이 20위라는 상위서열을 차지한 탓이다.그는 김일성 생전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현재도 관계당국에서는 김정일 경호책임을 맡고 있는 호위총국 소속의 고위 군관계자가 아닌가 추정하고 있을 뿐이다. 그는 김일성 사후 구성된 국가장의위원회에서 일약 서열 23위로 등재되어 일차 관심을 모은 바 있다.그러다가 한동안 막후로 사라졌는데 이번에 3단계나 서열이 상향조정되어 재등장했다. 이는 한때 7위까지 올라갔던 김병식부주석이 이번에 21위로 밀린 사실과 극명하게 대비된다.때문에 그가 북한의 떠오르는 실력자임을 누구도 부인하기 어렵게 됐다. 철저한 당우위의 피라미드식 권력계층구조를 갖고 있는 북한에서 권력서열 20위는 당정치국 후보위원이나 당비서급에 해당하는 실세가 차지할 수 있는 자리다.당비서들로 김정일의 핵심측근으로 알려진 김기남(23위),김국태(24위),김용순(28위) 등의 서열을 참작한다면 북한권부내에서 차지하는 막강한 그의 위상이 짐작된다. 하지만 관계당국은 지금까지 공개된 북한자료에 나타난 5∼6명의 김철수란 이름의 소유자와는 다른 인물로 보고 있다.다만 몇가지 첩보를 바탕으로 그가 50대 전후의 연령에 상장(중장) 또는 대장계급으로 김정일을 지근거리에서 경호하는 호위총국 소속의 군실세일 것이라는 관측이 제기되고 있다. 때문에 그는 오진우 사망으로 예상되는 인민군의 세대교체 과정에서 급부상할 것으로 점쳐지고 있다.이는 이번에 권력서열에서 북한군관계자로서 그보다 앞선 인물은 최광 총참모장(7위) 김철만 국방위원(12위)등 극소수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근거로 하고 있다.더욱이 그는 지금까지 김정일의 인민군내 측근 중의 측근으로 알려진 오극렬 전총참모장(43위)보다 서열이 훨씬 높았다.
  • 오진우는 누구/항일유격대 출신 혁명 1세대

    ◎세습체제 구축 「절대적 후원자」 25일 새벽 사망한 오진우 인민무력부장은 북한 군부를 장악해 온 권력서열 2위의 핵심인물이다.그는 김일성의 항일유격대원 출신 혁명 1세대로 김정일 후계체제를 확립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담당한 「절대적 후원자」였다. 오진우는 1917년 함경남도 북청에서 태어났다.어린 시절을 만주 간도에서 보낸 그는 33년부터 김일성을 따라 항일 빨치산 투쟁에 나섰으며 옛 소련 보병학교와 육군대학에서 군사학을 배우기도 했다.6·25전쟁 때는 특수부대인 766유격부대장으로 참전했고 61년 당 중앙위원,62년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올랐다.67년 3월에는 김정일이 박금철 등 갑산파를 숙청하는데 돌격대로 나서 대장승진과 함께 인민군 총정치국장으로 영전했다.오는 이때부터 책략가로서 김정일의 반대파 숙청에 앞장서면서 출세가도를 달렸다.67년1월 군당 제4기4차 확대회의에서 민족보위상인 김창봉과 대남사업총책 허봉학·총참모장 최광 등 군수뇌부 대숙청을 진두지휘한 뒤 군참모장으로 승진했고 76년5월 인민무력부장 최현을국방위원회 부위원장으로 격상시키면서 인민무력부장을 맡았다.이후 오는 김일성과 김정일로 이어지는 북한 권력 구조에서 20년이 넘게 자리를 유지했다.92년 4월에는 원수에,93년 4월에는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에 올라 실질적인 3인자 지위에 있던 그는 김일성 사망후 권력서열 2위로 뛰어올랐다.특히 김일성 장례식에 김정일과 함께 나타남으로써 북한의 권력 승계작업이 그의 전폭적인 지지속에 진행되고 있음을 과시했다.그러나 그는 지난해 7월 16일 평양 금수산의사당에서 거행된 김일성사망 1백일 중앙추모회에 참석했을 때 한쪽 다리를 저는등 부쩍 건강이 악화된 모습을 보였다.
  • 김정일체제 「단기변화」 없을듯/군부·권력층 세대교체 가속화 예고

    북한 권력서열 2위인 오진우 인민무력부장이 25일 사망함으로써 인민군 내부동향과 맞물려 북한 권력의 앞날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그의 사망은 지난해 10월 은밀히 프랑스를 방문,폐암치료 가능성을 타진했으나 불가능하다는 판정을 받고 평양으로 귀환한 시점에 이미 예견됐던 일이다.하지만 북한권력의 상층부를 차지하는 이른바 「혁명1세대」의 선두주자로 북한군부의 상징적 인물이었다는 점에서 오의 사망은 북한체제내 권력이동에 상당한 파급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일제때 김일성과 빨치산활동을 함께 한 이래 북한체제를 지탱해 온 버팀목의 일원이었다.김일성 사후에도 김정일의 군장악을 위한 후견인역을 맡아왔다. 오진우 이외에도 지난해 김일성 사망을 전후해 강희원(72·부총리),주도일(75·평양방어사령관),조명선(72·인민군대장)등 「혁명1세대」가 잇따라 세상을 떠났다.따라서 오의 사망은 일단 북한군부 및 권부의 세대교체를 부채질할 것으로 보인다. 핵심 기득권세력이지만 70대의 고령인 「혁명1세대」를 억지로 제거하지는않더라도 자연적 물갈이가 촉진되지 않겠느냐는 얘기다.이 과정에서 군총참모장 최광,국방위원 김철만 등 혁명1세대와 김정일의 핵심측근으로 알려진 오극렬 당 작전부장,이봉원 군 총정치국부국장등 혁명2세대간의 갈등 가능성도 점쳐진다. 김정일의 군경력은 김일성대학 시절 1개월간 군사훈련을 받은 것이 전부로 알려져 있다.그러나 그에 대한 북한군내의 불만은 치밀한 사람관리와 세뇌교육 등으로 사전봉쇄돼 왔다.더욱이 80년 당 중앙군사위원,90년 국방위 제1부위원장,91년 인민군 최고사령관을 맡는등 김정일의 군부장악은 김일성 생전에 치밀한 준비과정을 거쳐왔다. 또한 인민무력부·사회안전부·국가안전보위부·호위총국 등 4개 무력기구들이 상호 견제토록 하는 안전장치도 마련돼 있다.각 군사권력기구의 상하부 조직에 당조직을 배치해 감시·지도토록 한 것도 안전장치의 하나다. 때문에 군내 김의 후견인격인 오의 퇴장이 적어도 단기적으로는 김정일체제의 행로에 결정적인 변화를 야기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다만 김이 권력승계를마무리짓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오진우 등 혁명1세대그룹의 잇단 퇴조는 중장기적으로 북한권력의 불안정성을 더욱 증폭시킬 것이라는 관측도 대두되고 있다.
  • “「오진우사망」북군부 대변화 신호탄”/「김정일버팀목」붕괴이후 분석

    ◎「차기 총참모장 성향」 북향방 좌우할것/러 유학 신세대장교 개혁주도 가능성/최평길 연세대교수 함북 북청의 물장수아들,국민학교 중퇴의 북한혁명 1세대 군최고지도자인 78세의 오진우가 김일성의 뒤를 이어 사라져 갔다. 김일성이 모택동군 휘하 동북항일연군 게릴라부대를 이끌 때부터 참가한 오진우는 1937년 일본 관동군의 토벌에 밀려 50명 안팎의 김일성 게릴라 부대가 러시아땅 하바로프스크에 밀려갈 때도 충실한 김의 전사로 행동을 같이한다. 장차 한반도에 공산정권이 들어서면 전위무력부대로 사용할 수 있겠다하여 당시 소련극동군사령부는 아무르강 언덕에 88독립저격여단을 만들어 중국게릴라 지도자 주보중을 정점으로 한인 김일성을 1대대장으로 한 정보정탐 훈련팀을 키우고 있었다. 1대대장 김일성 대위밑에는 3개 중대와 1개 경비소대가 있고,1중대에는 3개소대가 있었는데 1중대장은 후일 인민군 3군단장과 부총리를 역임한 최용진,1중대 1소대장은 6·25당시 탱크사단장을 지내고 전사한 유경수,부소대장이 바로 오진우였다. 북한인민무력부는 행정부의 국방부같이 정상적 정부기관에 소속되지 않고 북한최고 정부지도 기관인 중앙인민위원회 국방위원회 직속 별동대로 존재하고 있다. 1백52개 여단과 사단으로 구성된 지상군 65%가 휴전선에 전진배치되어 있다.해·공군사령관,전차·기계화군단사령부,평양방위사령부,해·공군사령부를 직접 관장하는 인민군 총참모장을 지휘하는 인민무력부장은 김일성이 죽은 권력공백기간에 가장 위협적이며 권력승계자인 김정일로서는 가장 두려운 존재였다.서서히 수면위로 부상하는 개혁파·우파,또는 반김정일파 등 어느 정파도 인민군을 끼지 않고는 북한정권을 장악할 수가 없다.북한군은 어떤 의미에서 김일성 이후 시대의 「사회안정자」또는 북한정권 정파에 대한 캐스팅 보트의 역할을 하고 있다. 국내정치의 키를 쥐고 주변 국가에 위협적으로 등장하는 북한이 내놓을수 있는 유일한 세계화의 상품인 군사력의 실질 관리자가 사라진 이 시점에 차기 인민무력부장,인민군총참모장,그에 따른 군수뇌부 이동과 권력승계,정치향방,핵무기 개발 여부등은남북관계 변화에 매우 큰 바로미터가 될 수 있다. 아마도 같은 혁명1세대인 현 총참모장 최광이 인민무력부장이 되고,총참모장으로는 같은 혁명1세대인 이을설·김봉율 아니면 2세대에 해당하는 김광진이 기용될 수도 있다.이 경우는 현재 인민군 지휘체계의 골간을 크게 바꾸지 않고 김정일의 정권장악을 위해 김일성이 미리 마련해놓은 군지휘부가 유지되는 것이며 현체제가 안정돼 있다는 지표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또하나의 가능성은 설사 최광·김광진 등이 인민무력부장이 되더라도 인민군 총참모장이 혁명 2∼3세대에서 나오는 경우,그리고 그들 성향이 개혁지향일 경우 북한 정국의 향방이 크게 변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오진우의 사망은 김일성 시대의 사병화된 김일성군의 개념이 서서히 사라지고 전문직업군,변화의 촉진제가 될 효율화된 군이 정치에 개입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줄잡아 1만5천명 정도의 북한장교는 러시아에서 군사훈련을 받은 경험이 있고,3백명의 젊은 대위·소령급장교(나이는 28∼30살)들이김일성에의 맹목적 충성심과 탁월한 부대지휘능력을 인정받아 엄선되어 모스크바 고급군관학교에 5년장기 유학훈련을 받은 바 있다. 최근에 보내진 장기유학장교단은 1년은 러시아어를 배운후 4년간 소속병과훈련을 받았다.그런데 이 시기가 고르바초프가 등장하고 또 옐친이 직선제 러시아대통령으로 당선되며 동구의 김일성인 루마니아 차우셰스쿠가 처형되고,체코의 무명 지하극작가 하벨이 대통령에 당선되는 때였다.공산체제 붕괴와 자유시장체제로의 전환을 현장에서 경험하고,한국무역진흥공사의 전시장과 한국기업들의 러시아 진출을 직접 체험한 이들은 훈련이 끝날 무렵인 1991년경에는 크나큰 심경의 동요를 겪었다. 그들은 주석직은 직선제로,조선노동당이 유일합법당이라면 국민투표로 인민들의 신임에 맡기자는 논의를 한 끝에 훈련종료 직전에 모두 평양으로 송환되었다. 이들은 지금 북한군을 실병지휘하는 대대장·연대장으로 있으며 만만찮은 개혁세력으로 잠재해 있다.이들 유학장교단은 혁명1세대가 계속 자리를 차지하든,2∼3세대가 계승하든군의 중요 간부로 활약하게 마련이이여서 김정일 권력승계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다.앞으로 이들은 식량난 가중으로 주민봉기가 일어날 경우 정보사찰안전조직의 장악,개혁파 지도계층과의 연계 등으로 개혁의 핵심역할을 할 것이며 그들의 운신폭은 계속 넓어질 것이다. 오진우의 죽음은 이같은 북한 인민군의 군사·정치적 변화의 중요한 신호탄으로 볼 수 있다.
  • 파 대표단 철수압력… 한·미의 강경대응 안팎

    ◎북의 정전체제 무력화 기도쐐기/“평화협정 논의 않겠다” 입장단호/6·25참전 16국과 대북압력 공조 한반도의 정전체제를 유지하려는 한국과 미국, 이를 무력화시키려는 북한 사이의 힘겨루기가 폴란드의 중립국감독위원회 철수문제를 둘러싸고 표면화되고 있다. 북한은 23일 『오는 28일까지 중감위 대표단 6명을 철수하지 않으면 불법체류자로 간주하겠다』는 최후통첩을 폴란드측에 전달했다.폴란드를 중감위에서 축출함으로써 정전체제를 허수아비로 만들고,제네바 합의로 관계정상화의 물꼬를 튼 미국과 정전협정을 대체할 평화협정을 협의하겠다는 것이 북한의 의도다. 이에 대해 한·미 양국 정부는 24일 각각 외무부대변인 명의의 논평과 유엔사측 성명을 통해 『북한의 정전체제 와해 책동에 강경 대응하겠다』고 경고했다.미국측은 아예 『절대 북한측과 평화협정을 논의하지 않겠다』고 쐐기를 박아버렸다.또 한·미 양국은 폴란드외에 스웨덴,스위스등 중감위 3국,중국,유럽연합(EU),그리고 한국전 참전 16개국을 통해 북한에 국제적 압력을 행사할태세다.경우에 따라서는 이 문제가 유엔차원으로 넘어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물론 폴란드도 『유엔으로부터 부여받은 임무를 충실히 이행하겠다』며 중감위 대표단 고수의 뜻을 거듭 천명했다.이는 김영삼 대통령과 레흐 바웬사 폴란드대통령간의 합의사항이기도 하다. 정부는 북한이 국제적인 압력과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 폴란드 대표단을 강제로 축출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판단한다.이는 북한이 바라고 있는 미국,서유럽 국가들과의 관계개선에도 걸림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그러나 북한이 물리력을 동원하면 폴란드 대표단으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기는 하다. 어떤 형식이든 폴란드가 판문점에서 철수케 된다면 체코에 이어 북한측이 지명한 중감위 대표가 모두 철수하는 결과가 돼 이미 상당부분 기능이 축소된 정전체제는 어쩔 수 없이 다시 한번 타격을 입게된다.따라서 북한이 폴란드 대표단 축출을 감행한다면 제네바 북미합의를 이행하는 과정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 한·미 양측의 공통된 입장이다.정부의 한 고위관계자는 『제네바 합의의 기본 목적은 한반도에 평화와 안정을 확보하자는 것』이라면서 『북한이 정전체제를 무력화하려 한다면 미북합의의 성실한 이행 의지를 의심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중감위는 군사정전위원회와 함께 지난 53년 7월 유엔사·중국군·북한군 사이에 체결된 휴전협정을 이행하는 기구이다.그러나 지난 92년 유엔사측이 군사정전위원회 수석대표를 미군에서 한국군측의 황원탁소장으로 바꾼뒤부터 북한측은 정전체제 무력화공작에 나섰다.93년 체코를 중감위에서 철수케 하고 자신들의 「군사정전위 조선인민공화국대표」를 「조선인민군대표부」로 바꿨다.또 군사정전위의 중국대표를 철수토록 요청,이를 관철시켰다.이들의 공세는 대미 평화협정체결 그리고 종국적으로는 주한미군철수가 이뤄질때까지 계속될 것임은 불을 보듯 분명한 상황이다.
  • 김정일/3년상 치른뒤 승계 가능성/평양 다녀온 릴리전주한대사 밝혀

    ◎김용순이 김의 최측근 실세/김일성,사망 하루전 나진·선봉개발 보고받아/서울신문 이경형 워싱턴특파원 단독인터뷰 【워싱턴=이경형특파원】 북한의 김정일은 김일성사망의 애도기간을 3년까지로 할 가능성도 있다고 북한의 고위관리가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 현재 북한인민군의 최고사령관직만 맡고 있는 김정일의 3년상 가능성은 향후 2년동안 김일성의 사망 이후 공석인 국가주석직과 당총비서직을 김정일이 승계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의미로 해석되어 매우 주목된다. 이같은 3년상 가능성은 지난 14일부터 21일까지 평양을 방문하고 워싱턴에 돌아온 제임스 릴리 전주한대사가 25일 하오(한국시간 26일 상오)서울신문과의 단독회견에서 전했다. 릴리 대사는 북한의 고위관리들이 김정일이 아직도 김일성의 직함을 승계하지 않는 이유를 묻자 『애도기간중에 있기 때문이며 애도기간은 3년까지 갈 수도 있다』고 말했다고 밝혔다. 릴리대사가 이에 『그렇다면 앞으로 2년반 이상 공석에 김정일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뜻인가』고 캐묻자 이 관리는 구체적 답변은 할 수 없다면서 『금년중에 중대한 정치적 발표가 있을 것』이라며 『여러분들이 잘 주시해야할 것』이라고 강조했다고 말했다. 릴리 대사는 이들의 이같은 언급에 대해 해석을 자제하면서 그들은 『애도기간중에 급히 다른 자리로 옮기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말을 덧붙였다고 전했다. 릴리 대사는 자신이 만났던 인사들중 김영남외교부장,김용순노동당비서,김정우대외경제협력위부위원장 등 3명은 북한의 정책결정 그룹의 일원인 것이 분명하다고 말하고 특히 남북대화를 담당하고있는 김용순은 김정일의 최측근으로 막강한 지위에 있음을 누구든지 인정했다고 말했다. 조지 워싱턴대와 북한의 평화군축연구소의 세미나및 인적 교류 사업의 일환으로 이 대학의 김영진교수 등 3명의 일행과 함께 북한을 방문한 릴리 대사는 김정우대외경제부위위원장이 김일성주석이 사망하기 하루전날 나진·선봉지구의 종합계획을 설명했다고 말하고 김일성이 무역자유지대인 「사회주의 시장경제지역」의 개방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브리핑을 듣는 장면을텔레비전 화면을 통해 보았다고 말했다. 릴리대사는 작년말 미군헬기조종사 송환 과정에서 북한의 군부와 외교부간에 심각한 분쟁이 있었다는 주장에 대해 아무런 입증 자료가 없었으며 그같은 이견은 없었고 오히려 대외적인 선전상의 효과를 노린 기교로 본다고 말했다. 북한측은 남북대화 재개와 관련, ▲김일성 조문 불허에 대한 사과 ▲국가보안법 철폐 ▲장기수석방 등 3개항을 요구하고 있으나 릴리 대사는 이것이 협상 카드의 측면도 없지 않은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릴리대사는 이어 북한은 한국의 삼성이 나진·선봉지구에 통신정보센터의 설립을 추진하고 있는데 대해 기대를 나타냈다고 말하고 이 지역에 있는 2백메가와트 화력발전소는 유류난으로 지난 18개월 동안 가동을 중단했다가 이번에 미측이 공급한 중유 1차분 5만t으로 이의 가동을 준비중에 있다고 아울러 전했다.
  • 김정일 신년사 발표없이/3개사 공동사설로 대체/북한

    북한은 1일 95년도 신년사를 김일성 생전에 최고권력자가 발표하던 관례를 깨고 노동당 당보인 노동신문과 「조선인민군」,「노동청년」등 3개 기관지 공동사설을 통해 발표했다. 내외통신에 따르면 북한은 「위대한 당의 영도를 높이 받들고 새해 진군을 힘있게 다그쳐 나가자」라는 제하로 중앙 및 평양방송을 통한 「중대방송」형식으로 33분간 발표된 사설을 통해 지난 한해를 회상하고 각 분야의 새해 과제를 제시했다. 이 공동사설은 『전당·전국·전군에 김정일을 중심으로 하는 당중앙위의 영도를 확고히 보장할 것』이라는 등 김정일에 대한 충성을 촉구했으나 지난해와 뚜렷이 다른 대내외 정책은 제시하지 않았다. 정부당국과 민족통일연구원 등 연구기관들은 특히 북한이 이례적으로 김정일이 직접 신년사를 발표치 않은 사실과 관련,김일성 사후 북한체제의 불투명성을 보여주는 징후로 주목하고 있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이와 관련,『김정일이 공식석상에 등장해 신년사를 발표하지 않는 것은 김일성 사후 완전한 김정일체제가 구축되지 못하고 있거나 김정일의 건강에 이상이 있다는 관측을 뒷받침하고 있다』고 말했다.
  • “김정일 후계체제 유동적”입증/북한「신년사」 신문사설 대체의 배경

    ◎김일성노선 답습… 당분간「유훈통치」계속/대남 적대감 여전… 사회주의 고수 역력 『북한은 김정일이 아니라 여전히 죽은 김일성의 망령에 의해 통치되고 있다』 「당보·군보·청년보」등 북한의 3개 기관지 공동사설로 대체된 95년 북한 신년사를 정밀분석한 한 정부당국자의 잠정적 결론이었다.이번 신년사의 형식과 내용 양면에서 본격적인 김정일시대의 개막을 알릴 만한 아무런 징후도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이 이같은 논평을 가능케 했을 것이다. 사실 1일 상오 「중대방송」으로 발표된 북한의 올 신년사는 형식부터 퍽 이례적이었다.「노동신문」과 「조선인민군」 및 「노동청년」 등 3개 신문의 공동사설로 예년의 김일성 신년사를 가름했다는 것 자체가 선례가 없었던 것이다. 김정일이 신년사를 직접 발표하는 대신 북한체제의 핵심 기득권 집단의 집체적 의사를 공표하는 모양새를 취한 것은 일단 그가 국가주석과 당총비서 등 최고권력직을 승계치 않고 있는 상황을 감안한 것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이를 뒤집어 보면 김일성 사후 김정일 후계체제가 아직도 유동적임을 보여주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김정일이 직접 신년사를 낭독하지 않은 것은 권력장악력의 부족이든,아니면 건강상의 이상 때문이든 전권을 휘두르지 못하고 있음을 반증하는 까닭이다. 과거 김일성은 해방 직후 46년 첫 신년사를 발표한 이래 당시 북한헌법상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국가원수격이었던 66∼71년을 제외하고는 단 한차례도 이를 거르지 않았다.전쟁중이던 지난 52·53년에도 북한 인민군들에게 보내는 「축하문」형식의 신년사를 발표한 바 있다. 이번 신년사의 내용도 지난해 김일성이 신년사를 통해 천명한 대내외 노선에서 한발짝도 벗어나지 않았다.종전의 김일성노선에 대한 아무런 차별성도 제시하지 않고 김일성의 「유훈」를 계승해 나가겠다는 다짐을 기계적으로 반복하는데 그쳤던 것이다. 대내적으로는 김일성 생전에 결정된 농업·경공업·무역 등 3대 제일주의와 「자력갱생·간고분투」의 정신을 동시에 강조했다.이는 일단 중공업 및 군수산업 위주의 산업정책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기조는 유지하되 이른바 「우리식 사회주의」를 결코 버리지 않겠다는 의사표시라고 볼 수 있다. 대외적으로도 「체제보호형 개방」이라는 김일성노선을 고수할 뜻을 분명히 했다.즉 개혁·개방을 지향하는 국제적 조류 속에서도 이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기보다는 당분간 체제안정을 해치지 않기 위해 내정 개혁이 없는 최소한의 개방만을 추구하겠다는 심산인 것이다. 대남 측면에서도 국가보안법 철폐와 김일성이 제시한 바 있는 「전민족 대단결 10대강령」수용 등 진부한 주장을 되풀이했다.특히 예의 연방제통일론을 거듭 들고 나오면서 우리 정부당국에 대한 적대감도 계속 여과없이 드러냈다. 이같은 북측의 대남 자세는 올해 남북관계의 불길한 전도를 예고한다고 할 수 있다.미국과의 관계개선에 주력하면서도 체제유지를 위한 의도적 긴장조성을 위해서 남북대화보다는 대남 비방에 열을 올린 지난해의 타성에서 헤어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우려이다. 결론적으로 이번 신년사는 김정일이 아직 김일성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가리키는 만큼 김정일체제의 정착여부도 좀더 시간을 두고 지켜보아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일치된 견해이다.
  • 죽은 김일성 통치의 북한(사설)

    지난 1일 당기관지인 「노동신문」,군보인 「조선인민군」,청년보인 「노동청년」등 3개 신문의 공동사설로 발표된 북한의 새해 시정방침은 우리를 또한번 실망시켰다. 새해를 맞으며 김정일이 신년사를 직접 발표할 것인지,발표한다면 어떤 내용을 담을 것인지 우리는 깊은 관심을 갖고 주시해왔다.그러나 김정일은 신년사를 발표하지 않았으며 공동사설의 내용은 북한핵문제타결 등으로 고조되고 있는 남북대화재개나 경협문제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을 회피한 채 우리정부에 대한 원색적 비난과 반정부투쟁 선동만 늘어놓고 있다. 김정일은 새해 첫날 군부대를 방문,그의 건재를 과시했지만 그것이 군부를 완전장악한 증거로는 보이지 않는다.그보다는 그의 위상이 아직은 불투명한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갖게 한다.지난해 연말 미국과의 헬리콥터 송환협상에서 보여주었듯이 북한군부와 정무원간에 강온파 갈등이 노출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공동사설에서 나타난 북한의 새해 정책방향은 미래지향적인 비전을 제시하기보다는김일성시대로 되돌아가자는 시대역행적인 메시지들로 가득차 있다.북한이 공동사설을 발표한 직후 김일성의 지난해 신년사전문을 육성으로 녹음방송함으로써 올해의 신년사를 김일성의 지난해 신년사로 사실상 대체한 것으로 볼 수도 있게 만들었다. 김일성은 지난해 『남조선의 문민정권이란 허울뿐이고 실지로는 역대군부독재정권과 다를 바 없다』고 비난했었다.올해의 공동사설도 4천만 한국인이 뽑은 민선의 김영삼대통령을 「역도」라고까지 지칭하면서 『사대매국적이고 반민족적이며 반통일적인 증오의 대상』이라고 매도했다.정치·경제부문에서도 지난해 김일성신년사를 되풀이하고 있다.다른 것이 있다면 미국과 북한의 관계개선이 언급되고 그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는 것뿐인데 이것은 우리정부를 배제한 채 핵문제를 포함한 모든 현안을 미국만을 상대로 협상하고 대화하려는 그들의 집요한 정책을 올해도 답습할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김정일은 자의든 타의든 상당기간 「김일성시대」를 연장해 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있는 셈이다.말하자면 죽은 김일성이 북한을 다스리는 이른바 「김일성유훈 체제」를 유지하면서 그 기간동안 김정일체제의 안정기반을 구축해보겠다는 속셈을 드러내고 있다. 남북관계는 냉각될 수밖에 없고 실질적인 대화도 기대하기 어려울 전망이다.남북대화와 남북관계의 개선은 북한의 대외정책과 표리관계에 있는 만큼 형식적으로나마 대화에 응할 수는 있을 것이다.그러나 생산적인 결과는 기대할 수 없다는 점을 직시해야 한다.남북간의 안정과 평화는 우리만이 기대하고 노력한다고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정부는 북한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단호하고도 확고한 대응책을 강구해나가야 할 것이다.
  • 김정일,두달만에 공석에/북 중앙방송,“1일 군부대 방문” 보도

    ◎시찰화면 공표… 일부선 “합성했을지도” 북한 김정일이 새해 첫날인 1일 돌연 인민군부대를 방문,그의 건강상태와 관련해 귀추가 주목된다. 내외통신에 따르면 북한 중앙방송은 김정일이 1일 상오 9시30분 제214군 부대를 방문해 북한 군사력 강화를 위한 「중요한 과업」을 하달하고 이어 부대내의 교양실과 병실(내무반)을 참관했다고 전했다. 김정일이 지난해 11월1일 청류다리 건설현장에 모습을 나타낸 뒤 꼭 두달만인 새해 첫날 군부대를 시찰하고 중국의 최고지도자 등소평,중국공산당 총서기겸 국가주석 강택민,쿠바 국가평의회 의장 피델 카스트로,캄보디아 국왕 노로돔시아누크 등 30여개 국가 지도자들과 신년 연하장을 교환함으로써 그의 건강이 중병상태가 아님을 내외에 과시했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그러나 『김의 이번 군부대 방문 장면은 기술적으로 합성된 것일 수도 있다』며 일본 TV에 방영된 군부대 방문 장면 일부에 의혹을 표시하며 그의 건재여부에 유보적인 입장을 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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