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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완서씨 자전소설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출간

    ◎20대에 겪은 6·25체험기/젊은시절 특유의 호기심으로 전쟁 묘사 소설가 박완서씨가 스무살 무렵의 6·25 체험을 담은 자전적 장편소설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를 웅진출판에서 펴냈다. 민족공동체정서 심층에 아물지 않은 상처를 남긴 이 전쟁은 두고두고 소설의 재료가 되어왔지만 이 작품이 비추는 전쟁의 공간은 어느것보다 독특하다.살상과 이데올로기대립에서 비롯된 비참과 곤궁을 얘기하면서도 지은이의 목소리가 시종 생명에 대한 경탄과 탄력을 잃지 않기 때문이다. 인민군한테 밥 한끼 지어줬다고 작은아버지가 사형당하고,다리에 관통상을 입은 오빠가 이렇다 할 치료 한번 못받아 어머니 곁에서 죽어나가는 가족사의 비극을 그리면서도 지은이는 전쟁이나 이념에 대해 거창하게 비판하지 않는다.대신 웃음이 터질 정도로 능청스럽게 시치미를 떼며 치사할 수밖에 없던 당시 가족의 절박한 사정을 툭툭 털어놓는다.그러면서 정신적 충격과 외상을 수습한다. 이것은 소설의 화자가 스무살을 갓 넘긴 대학물 먹은 처녀라는 사정과도 관련이있다.세상 돌아가는 꼴이 아무리 험악해도 젊은이 특유의 호기심과 삶에 대한 사랑은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었던 것.하루는 국군에게 버림받아 인민위원회 일을 보고 또 하루는 인민군에 쫓겨 향토방위대에 출근한다.전쟁통에 썩어가는 오빠 시체를 암매장하듯 치워버린 한밤,둘러앉은 식구는 「단지 쉬어버릴까 봐」 팥죽 한솥을 해치우곤 서로에 대한 증오심으로 속을 앓는다.그런 와중에도 철딱서니 없는 지은이는 빌로도치마가 입고 싶고,달콤한 초콜릿이 넘친다는 피엑스를 구경하고 싶다. 싱싱하게 살아 숨쉬는 젊음의 목소리로 이 책은 험담한 상황을 오히려 익살맞게 만들지만 이같은 발랄한 젊음과의 대비 속에 전쟁의 비극은 오히려 더 뚜렷하고 사실적으로 떠오른다. 유년시절을 다룬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의 후속편 격인 이 소설에 이어 작가는 장년까지의 이야기를 담은 또 다른 책으로 자전 3부작을 완결할 계획이다.
  • 육군 특무부대장 김창룡 비밀일지 내용

    ◎“숙군 방해 송호성 사령관 공산당과 내통”/서대문형무소에 사무실마련… 군적색분자 색출작업/남로당 조직책 이중업 사형집행전날 비서가 탈옥시켜/빨갱이 고희두 심문중 변사… “고문치사” 누명받고 좌천 대한민국 군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 부분의 하나가 숙군이다. 군에 침투한 공산주의자들을 색출하는 숙군의 주역이었던 김창룡(1920∼56년). 1956년 1월30일 육군특무부대장으로 재직시 저격을 받아 숨지기까지 타공실상을 기록한 그의 비밀일지가 워싱턴에서 발견되었다. 미국립공문서보존기록국이 소장한 이 일지는 한글로 쓴 원본을 미 당국이 영문으로 번역한 것이다. 서울신문은 이를 긴급입수,우리말로 다시 옮겼다. 단순한 개인기록물의 성격을 떠나 격동의 현대사를 입증할 수 있는 자료라는 점에서 주목을 끌고 있다. 숙군(Purge)은 제주도반란을 전후하여 3차에 걸쳐 있었다.레드파지는 군내부에서 진행되었기에 외부에서는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1947년 1월 육사3기생으로 입대했는데,동기생 가운데 약 8할이 공산주의자였다. 대구폭동이 일어나고 공산당 간부에 대한 체포령과 동시에 공산당이 불법화되자,공산당에서는 이중업에게 조선경비대에 공산주의자들을 침투시킬 것을 명령했다.이중업은 이재복을 군사책임자로,김영식을 군사레포(Militaryrepo)로 임명하였다.조선경비대와 육군사관학교 간부의 다수가 공산주의에 감염되었다.당시의 육사 생도대장 오일균 소령,교수부장 조병건 소령,중대장 김학림 소령 등이 공산당의 지령에 움직였다. 반면에 초대 군감 이병주 소령은 남로당 특수부의 지령에 따라 조선경비대 내부에 세포를 확대하여 비상시에 반란을 획책하고자 준비하였다.그는 노재길·정국환·김민배 등을 인천의 모 부대에 공산당 세포로 침투시켰으며,문산과 기타 지역에 무기를 숨겨두었다. ○생도 80% 공산주의자 후보생으로서 나는 밤 10시경에 경비근무를 하였다.룸메이트인 김진태를 혼자 남겨둔채,내무반을 순찰하고 돌아오니 김후보생이 보이지 않았다.멀리 바라다보니 생도대장 방에서 불빛이 비쳤다.나는 그 앞으로 걸어갔다.이때 김후보생이 놀란 표정으로 그 방을 뛰어나왔다.생도대장 오소령도 뛰어 내왔다.나는 아무 말없이 오소령 앞에 섰다.오소령은 나에게 이상한 사람이 있으면 자기에게 보고해 달라고 말했다.나는 동지를 얻은 것 같이 반가웠다.오소령도 역시 우리 동지로구나.나는 기뻤다.그리하여 나는 내가 보고 느낀 것을 모조리 이야기했다.김지회·홍순석·박호산 등은 모두가 공산계열에 속하는 인물에 틀림없다고 이야기했다.그후 상당한 시일을 기다려도 생도대장은 아무 말이 없었다. ○제1연대 정보부 근무 1947년 6월에 육사를 졸업하고 소위에 임관되었다.하늘이 도와 나를 제1연대 정보부에 근무하게 하였다.나는 이제 경비대에 침투한 공산계열부터 색출해야 하겠다.경비대는 장래 우리나라 국군의 모체이다.제1연대는 조선경비대의 모체였던 것이다.임관되자마자 육사는 물론 조선경비대의 주요 간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공산주의자들을 폭로 적발하는데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이것이 제1차 숙군이었다.우선 제1차로 군감사령관 이병주 소령 및 그 선을 검거하였다.이소령 이하 수십명과 문산 부근에 은닉하고 있던 무기까지도 압수하였다.소령이라면 당시의 군인으로서는 최고의 계급이었다.일개 소위가 어찌 최고 계급인 소령급과 그 일파를 검거할 수 있었으랴! 이것은 오로지 나의 신념인 타공정신의 소치였다.동시에 당시 통위부 고문관 가소(Kasso)소령의 후원이 컸기 때문이었다. ○문산부근 무기 압수 일당 9명 가운데 군정재판에서 8명은 5년,1명은 3년의 징역 언도를 받았다.나는 당시의 총사령관 송호성 장군에게 전말을 이야기한 바 있다.그랬더니 송장군은 공산당도 우리 민족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군정재판에서 언도가 내렸을 때 송장군은 나에게 적지않은 노여움을 표명하였다.그후 나는 전후 6회에 걸쳐 전속명령을 받았던 것이다.나는 괴로웠다.그들은 분명히 공산당인데,송장군은 왜 그것을 모르고 있는 것일까? 나는 한편 노엽기도 하고 한편 괴롭기도 했다. 나는 후에 알 수 있었다.알고 놀랐다.당시의 사령관 송호성장군이 적색계열과 연락이 있다는 것을. (편집자주:당시 경비대 총사령관이었던 송호성 장군은 적색계열과 내통한 공산주의자였다.그는 뒷날 월북해 1956년 「재북 평화통일협의회」에서 활동했다. 남로당 군사책 이재복의 체포로 이것이 판명되었을 때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소령 이병주가 5년 징역의 언도를 받았을 때 송사령관 방으로 뛰어들어갔다.수사관의 입장으로서는 자기가 검거한 피의자들이 언도를 많이 받는 것을 바라는 심정이었다.하물며 그들은 공산당이며 국군의 모체가 될 경비대에 침투하여 멀지않아 수립된 대한민국의 기반을 완전 파괴하기 위하여 유사시에 봉기할 계획을 암암리에 세우고 있던 것이 아니었던가.그들 일당에게 5년 징역이라는 언도가 내렸다는 것은 기쁜 일이었다.그리하여 송사령관 방에 뛰어들어갔더니,송사령관은 칭찬은 고사하고 화를 내면서 나에게 욕설을 퍼붓는 것이었다.너는 어디 놈이냐.조선놈이 조선놈을 잡아서 징역시키는 법이 있느냐.공산당도 잘 설교를 시켜서 쓰면 된다.송사령관은 커다란 목소리로 이렇게 나에게 욕설을 퍼부었다.나는 그냥 그 방에서 나왔다.나는 송사령관을 이상하게 생각했다.그리고 구속영장의 사인을받으려고 갔을 때 몇번이고 거부당한 선례를 생각했다.사실 최고사령관인 송준장을 의심하고 싶지는 않았다.그가 공산당 통정자라고는 정말 생각되지가 않았었다.그러나 아무래도 이상한 것이다.만약 그가 공산당 통정자라면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인가. ○총사령관에게 미움 사 여순반란 후 숙군은 가일층 강화되었다.「인민해방군사건」의 오동기 소령과 그 일당 8명,그리고 소령 오일균,소령 조병건,중령 김종석,소령 김학림,중령 박근서,소령 황택림,소령 김호량을 비롯한 일당의 체포와 검거가 있었다.당시에 소령이면 군에 있어서 최고의 계급이었고 중령이라고는 불과 몇사람 밖에는 없었다.이자들은 모두가 남로당의 지령에 따라 움직여 각자 세포부식과 연락 또는 「빨치산」전술을 연구하여 유사시에 봉기할 계획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만약에 그때 숙군을 하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그후에 하지 않았더라면 오늘날과 같은 우리 국군이 있으리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숙군을 위하여 서대문 형무소에 한방을 얻어 부하들과 그곳에서 기거하면서숙군을 착착 단행했다. ○여간첩 김수임 진상 밝혀 이중업은 체포되는 순간 자기는 이중업이 아니라고 했다.그리고 자기 이름은 이명근이라고 말하였다.그는 도주하려고 했다.그리고는 가소롭게도 돈을 줄터이니 용서해 달라고 했다.그는 체포당시 83만원이라는 대금을 가지고 있었으며 입속에는 연락문을 넣고 있었다.돈이라면 무엇이든지 될줄 아는 그들.가소롭기 짝이 없는 일이다. 그가 도주하다니,나는 전화를 받고 뒹굴어 일어났다.실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사형수 이중업을 사형 집행 전날 새벽에 육군형무소에서 탈출시킨 것은 그의 단 하나의 비서였던 김형륙이라는 청년이었다.그가 체포되고 48시간만에 대한민국에 충성을 다하겠다고 전향하자,사건의 전모가 드러났다.이중업이 월북하던 경위와 이중업이 머물고 있던 여간첩 김수임의 진상,그리고 실로 지금까지 우익으로 열렬히 행세하던 인물들이 좌익분자였다니.상상외의 인물들이 드러났을 때 나는 몇번이고 나의 눈을 의심했다.김형륙은 남로당 잔당을 색출하는데 큰 힘이 되었다.나는 그를 찾으려고 무척 애를 썼다.그는 전쟁시기,놈들에게 붙잡혀 끌려갔다고 한다. ○수사관에 3년 징역형 소위 「고희두 사건」만큼 세상에 화제를 던진 사건이 당시에는 없었다.그는 틀림없는 빨갱이었다.그는 표면으로는 대한민국에 가장 충성을 다하는 사람이었으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그들 공산당들이 하는 전술이요,전법이었으며 그는 이면으로는 철저한 당원으로서 갖은 흉모를 다하였던 것이다.빨갱이 중에서도 이와같이 무서운 빨갱이는 없다.표면으로는 충실한 백성이요,이면에서는 공산당원인 자들과 같다. 고희두 구속에 대하여 각계각층에서는 방첩대를 비난하였다.그러나 확고한 증거가 있다.오랫동안의 내사에서 이 증거는 더욱 굳어졌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비난하다니.이와같은 썩은 뿌리들까지 모조리 뽑아 버려야 한다.나와 나의 대원들은 일체의 방해를 물리치고 민국을 위하여 소신에 매진하겠다. 고희두가 1949년 9월29일 변사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각계각층에서는 고문치사라고 들고 일어났다.그를 취조한 사람은 방첩대 2등상사인 도진회였다.사건은 고문치사로 판명되어 도상사는 3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고문치사가 아니다.그는 원래 몸이 뚱뚱하였으며 혈압이 높은 사람이다.그는 체포 연행되었을 때 어느 누구보다도 당황했었다.1949년 9월27일 상오8시 그를 연행했을 때 그는 펄펄 뛰면서 발악을 했다.그는 자기의 죄상을 하는 수 없이 자백하기 시작했다.그리고 조서도 꾸몄다.그는 연행되었을 때에는 퍽이나 쇠약해 있었다.증거의 제시로 자백하기 시작한 그는 숨가뿐 소리를 내면서 몹시 괴로워하였다.그 다음날 저녁7시 그는 취조 도중에 의자에서 쓰러지며서 절명한 것이다.의사들을 불러 응급치료를 가하였으나 그는 소생하지 못하였다.그는 자기의 죄상이 보통짓이 아니라는 것이 드러남에 괴로워하고 몹시 당황한 것이다.고문치사가 아니었다.그는 심장마비로 죽은 것이다.서울대학의 김모 교수는 5백여 명의 시체를 해부한 권위자이다.김교수는 고의 시체를 해부하고 급성심장마비로 진단을 내렸던 것이다.고문치사라니? 우리들에 대한 압력중의 하나라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급성 심장마비로 진단 이 사건으로 좌천되어 전속명령을 받았다.모든 슬픔,모든 괴로움,모든 고난,우리들은 참고 견디어 나가야 한다.설사 기쁨이 있다고 해도 남북통일이라는 민족의 과업이 이루어지지 않는 판에는 그것이 우리들에게 무슨 기쁨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 상부의 명령이니 가야만 한다.그러나 방첩대에서 내가 할 일,내가 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아 있는데 어느 때인가 내가 할 일 내가 해야 할 일이 나에게 돌아오고야 말겠지. ○9·28 수복전 서울 잠입 9·28수복 며칠전 단신 서울에 잠입하여 정보활동을 전개하였다.이때 고희두 가족에 대하여 확증을 얻었다.6월28일 그들이 서울을 침범하자 새벽에 고의 집에 찾아와서 패퇴할 때까지 평양정치보위부 제1과 직원들이 가족과 재산을 보호하였다.고의 부인은 3개월간 붉은 서울에서 여맹 위원장으로 뻔뻔한 활동을 전개하였다.고의 아들 흥천은 자진하여 의용군을 동네에서 색출하여 출동시켰다.그후 그는 정치보위부 명령에 의하여 잠복근무를 하다가 체포되었던 것이다.고흥천은 이것만이 아니다.종로4가에 있는 전매국에서 물자를 훔쳐 인민군에게 제공하였던 것이다.잠복 근무하다가 체포된 그는 일체의 죄상을 자백하였다.그는 자기 아버지 고희두는 당원이었다고 진술하였다. 고희두가 빨갱이가 아니라는 말인가.이와같은 확고부동한 증거물을 파악했다.사실 그가 너무나 표면에서는 민국에 협력하는 인물이기에 이와같은 증거가 속속 나타났을 때에는 우리들은 적지않이 놀라지 않을수 없었던 것이다.그러나 그는 종로구책이라는 가장 중요한 자리에 숨어있던 인물이다.그러기에 우리들은 그를 구속하였던 것이다.적색분자는 대한민국의 땅위에서 그리고 전지구상에서 말살해야 하는 것이다.
  • 국가안보 태세에 허술함은 없는가(사설)

    ◎정부의 북한동향 분석과 대비 전직대통령 비자금 수사 및 5·18특별법 제정등 국내 정치정세의 격동에도 불구하고 대북한 경계심엔 한치의 해이도 있어선 안된다.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욱 강화해야 할 것이다.더욱이 북한의 심각한 경제난으로 한반도의 안보상황은 대단히 불안정하고 유동적이라는 것이 일반적 평가다.대통령의 경고도 여러차례 있었지만 28일 통일관계장관회의의 북한동향분석과 국방장관의 군사대비태세확립 지휘서신 하달등은 정부의 당연하고도 시의적절한 조치라 생각한다. ○한반도 안보 심각한 위기상황 오늘의 한반도안보는 작년의 미·북 제네바합의 이후 가장 심각한 위협에 직면해있다고 할 수 있다.김정일의 공식 권력승계지연과 관련된 정치적 불확실성과 심각한 경제난에서 주로 비롯된다.우리의 국내정치적 격동도 그러한 안보위협의 분위기를 가중시키는 부작용을 낳고 있는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이같은 위기의식을 가장 단적으로 보여준 것은 지난 16일의 한미전화정상회담을 통한 양국 정상의 대북한 경고 메시지였다.「한미 양국은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는 동맹관계를 바탕으로 북한에 대해 강력한 메시지를 보낼 필요가 있다」는데 합의함으로써 북한의 엉뚱한 도발 가능성에 대한 심각한 우려와 경고를 발한 바 있다.시사주간지 타임은 북한의 오판에 의한 무력도발 가능성을 점치기도 했다. ○한·미정상 강력한 억제 메시지 이러한 안보위기의식의 가장 중요한 판단근거는 북한이 처해있는 회복불능의 경제난에 있다.가장 심각한 것은 식량난이다.통일장관회의 평가에 따르면 지난 여름의 수재로 북한의 금년 식량생산은 절대소요량에 2백60여만t 정도가 부족하며 이로 인한 극심한 식량난이 예상된다는 것이다.최근 6주간 북한을 방문한 국제적십자사 실태조사단장은 이미 많은 북한주민들이 대규모의 식량부족사태로 죽음의 위협을 받고있다고 전했다.내년3∼4월의 보릿고개가 중대고비가 될것이란 예상도 나오고 있다.이 절망적인 상황 탈출을 위해 북한은 도발을 선택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 많은 전문가들의 평가다. 그런가 하면 김정일의 공식적인 권력승계가마무리되지 않고 있어 체제불안 요인도 내연하고 있는 것으로 지적되고 있으며 북한지도부는 대남도발에서 해결책을 찾으려 할지 모른다는 분석이 유력하다.또 당 우위로 일관돼온 북한에서 그 어느때보다 군부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는 점도 북한의 무력도발이나 군사적인 긴장관계 조성 가능성을 뒷받침하고 있다. ○북한군사력 대규모 전진배치 우성호 송환거부라든가 안목사 납치,요인암살용 독총소지 무장간첩 남파등이 그 증거로 지적되고 있다.북한은 대공포등 무기를 사들이다 적발당하기도 했으며 올들어 인민군 1백20만명이 대규모 군사훈련을 가졌을 뿐 아니라 서울서 1백마일도 안되는 비무장지대 근처의 포대배치도 강화한 것으로 전해졌다.1백70㎜ 곡사포와 2백40㎜ 방사포 70여문도 전진배치되어 서울을 겨냥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항공기를 전후방기지로 산개하는 대규모 군사훈련도 실시,이중 미그 19및 폭격기등 80여대는 휴전선 인근에 전진배치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런 북한의 위협상황 속에서도 우리의 국력과 국민의식은 비자금수사와 5·18특별법 제정등과 같은 격동을 수용하고 소화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하고 성숙했다고 본다.그러나 군과 관련된 일련의 정치·사회적 논란이 북한으로 하여금 우리 군의 지휘체제와 군기및 사기를 비롯한 경계태세에 문제가 있을것으로 오판하게 할 가능성에 유의할 필요는 있을 것이다. ○안보에는 연습이 있을수 없다 안보에는 연습이 있을수 없으며 1%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다.절대로 유비무환이며 방심은 금물이다.도발은 언제나 예기치못한 시기,장소,방법등으로 우리의 허를 찌르게 마련임을 명심해야 한다.한치의 빈틈도 없는 경계태세의 지속이 중요하며 자유민주화 통일의 그날까지는 국민의 안보의식도 철저히 다잡아 나가야 할것이다.그런 속에서 비자금수사,5·18 특별법 제정의 개혁도 진행돼야 할것이다.
  • 김정일 군 간부 환심사려 벤츠 선물/귀순 최주활 상좌 일문일답

    ◎병력 70% 전진 배치… 93년 미그21기 생산/군 간부 「외화벌이 밀수」 성행… 50%는 착복/인민군서 25개사 운영… 남한쌀 군량미 비축 가능성 귀순한 북한 인민무력부 후방총국 소속 최주활상좌는 이날 기자회견에서 내외신 기자와 자유총연맹,함북도민회 회원 등 3백여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시종 또박또박하고 침착한 말투로 김일성 사후 북한내부의 권력상황,첨단무기실태와 전쟁준비 실상 등을 1시간 40여분동안 낱낱이 폭로했다.최상좌의 일문일답 내용을 간추린다. ◇귀순동기와 과정 ­귀순동기는. ▲해외공관 무관으로 오랫동안 근무하면서 반인민적,1인 독재의 북한 체제에 반감을 가지게 됐다.지난 5월 27일 중국에 무역실무대표단으로 파견돼 연길등지에서 남한 실업가들과 자연스럽게 접촉하면서 남한의 실상을 알게 됐고 지난 6월19일 잦은 접촉을 이유로 북한 당국으로부터 『승인없이 남한인과 접촉한다』는 이유로 소환명령을 받고 귀순을 결심했다.북한에 소환되면 정치적으로 매장될 것이 뻔하고 게다가 김정일 체제가 몇년 가지 않을 것으로 판단해 차라리 남한으로 가기로 마음먹었다.지난 82년 7월 체코주재 북한대사관 부무관으로 근무하면서 본국의 긴급 명령으로 화염방사기 등 군사과학비밀자료를 수집하다가 추방당했는데 이후 3∼4달동안 제대로 인사조치도 안해주는등 조국이 「쓴 웃음」으로 대해 불만과 회의를 품었다. ○망명자는 3대를 멸족 ­귀순경로는. ▲혼자 무역실무 대표단을 이탈해 중국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조선동포의 도움으로 동남아로 탈출,귀순하게 됐다. ­귀순하기전 가족과 상의했나. ▲북한에 2남1녀를 두고 있어 귀순을 결심하는데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북한에서는 귀순자나 망명자 가족들에게 「3대를 멸족한다」는 원칙을 세우고 가족들을 「관리소」라고 부르는 정치범수용소에 뿔뿔이 흩어지게 한뒤 굶어 죽게 만든다.북한에 남은 가족도 기자회견 사실이 알려지면 곧바로 처리될 것이다. ­군인 신분으로 연변에서 남한의 기업인들과 접촉하는 것이 가능한가.최근 자진월북한 것으로 북한에서 보도한 안승훈목사에 대해 아는 바는. ▲군인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연변에서 무역실무대표단 활동을 벌였다.북한에서 군인출신이 남한인을 만나는 것은 엄격히 금지돼있다.내가 접촉했던 남한 기업인들은 나를 북한 축산총국 융성회사 직원으로만 알고 있다.안승훈목사에 대한 것은 내가 북한을 떠난 뒤에 일어난 일이라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지만 납치됐을 가능성이 높다.연변에서 나를 감시한 조선인민정찰국 요원 리봉식의 기본 공작임무가 남한사람을 만나 월북하도록 포섭하는 것이다.남한의 장교급이상 군인을 월북시키라는 지시를 받은 리봉식이 이를 실행하는 것이 어렵자 대신 안승훈목사를 납치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김일성 사후 변화 ­김일성 주석이 사망한지 1년3개월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김정일의 권력승계가 이뤄지지 않고 있는 이유는. ▲김정일은 국가지도자로서 반드시 갖춰야할 자질인 군사및 경제분야의 분석능력을 전혀 갖고 있지 않다.군사전문가들이 쓴 책을 보고 자신의 머리에서 나온 것처럼 군사지침을 발표하는 실정에서 알력이 심한 군부내의 세력들을 장악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것같다.국가경제적으로도 최악의 상태에 몰린 현 상황에서 주석직을 승계하는 것은 자신에게 불리하다는 정치적 계산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또한 성격이 조급하고 변덕스러우며 사생활이 문란한 점도 지도자로서의 자질과는 거리가 멀다. ○군 요직에 자파 속속 배치 ­김일성 사후 김정일 지도체제 구축정도와 군부내 최근 동향은. ▲김정일이 권력을 승계하려해도 군에서 받쳐줄 사람이 없다.김정일은 군부를 장악하기 위해 인민군 작전국장 김명국대장,보위국장 원응희대장,3군단장 장성우대장 등 군부내에서 총애하는 인물들을 요직에 배치했다.그러나 상당수 군간부들이 속으로 김정일에 반대하고 있다.김정일은 이들의 환심을 사기위해 최근 평양시 대동강구역에 호화주택을 건설해 자기 이름으로 군고위간부들에게 선물하고 올들어서는 20여명의 군단장급들에게 3∼4년밖에 되지 않은 고급 벤츠 승용차를 최신형 벤츠로 바꿔주기도 했다. ­최근 남한측에서 북한에 지원한 15만t 규모의 쌀이 군량미로 쓰이지는 않나. ▲구체적인 내용은 잘 모른다.일부는 인민들에게 배포가 되었겠지만 군량미나 비상시 예비용으로 비축됐을 가능성이 크다.최근 강원도,양강도,함경도 등에서는 지난 93년 12월부터 쌀배급이 아예 없어 14∼15세 아이들이 당이나 군 간부 집을 전전하며 동냥을 하는 것이 예사로운 일이다.얼굴이 붓고 굶어죽는 노인들도 많았다.북한 당국은 오래도록 「자력갱생」을 외쳐왔기 때문에 남한에서 쌀을 지원받은 사실을 극비로 하고 있다.당국의 감시가 심하지만 당시 쌀 수송에 관여했던 노동자 등을 통해 결국 남한에서 쌀이 온 사실을 입에서 입을 통해 알게 될 것이고 북한주민들은 고마움도 느끼고 적대감도 해소될 것이다. ­현재 인민군의 외화벌이 상황은. ▲지난 80년대 중반부터 인민군은 경제난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식량과 피복 등을 자체적으로 충족시키려고 외화벌이에 나서 현재 인민군 산하에는 25개 회사가 운영되고 있다.특히 융성무역회사는 종업원 수만 2천명이 넘고 신진합작회사·수산기지·일본수출공사 등을 갖고 있다.그러나 외화벌이 과정에서 상당수의 군고위간부들이 돈을 가로채며 비리를 일삼고 있다.7백만원을 벌어들이면 3백만원쯤은 간부들의 주머니로 들어간다.실제로 올해초 함경북도 6군단이 아편밀수로 외화를 벌어들이는 과정에서 수익의 50%를 관련자 40여명이 5만∼10만달러씩 착복했다가 적발된 적이 있다. ○김일성배지 아직 착용 ­아직 김일성배지를 착용하는가. ▲공식적으로 김일성배지를 착용하도록 하고 있다.그러나 지난해 말부터 국가안전보위부 직원들에게는 김정일배지를 비공식적으로 지급했으며 이 배지들이 외부로 유출돼 일부는 김정일배지를 달고 다니기도 한다. ­군내부의 세대교체를 둘러싼 원로·신진 세대간 갈등은. ▲김정일은 군내부 원로들을 잘 우대해주는 한편 신진세력들에 대해서도 군사칭호등을 격상시키는등 양쪽으로부터 환심을 사려고 노력하고 있다. ◇최근의 군사동향 ­북한의 전쟁준비 상황은. ▲김정일은 현재 국방공업건설에 주력한다는 방침아래 러시아제 탱크와 각종 신형무기를 모방,생산하고 사정거리가 다양한 로켓을 양산하는데 열을 올리고 있다.로켓 개발은 평양시 부근 「돼지공장」이라 불리는곳에서 비밀리에 추진되고 있다.또 사정거리 50㎞로서 서울에 직접 사격할수 있는 1백75㎜ 주체포와 함께 93년부터는 사정거리 1천㎞의 로켓도 생산하고 있다.80년대 후반에는 각종 러시아제 전투용 경비행기를 자체 생산했고 93년에는 비밀리에 미그21기의 시험생산을 하는등 전쟁준비에 필요한 무기를 자체 생산하고 있다.현재 2천만 인구 가운데 정규군만 1백20만에 이르고 교도대·노농적위대 등 전체 인민을 전투병력화하는데 혈안이 돼 있다.이와 함께 80년대 중반부터 「훈련소」라는 이름으로 위장한 기계화군단을 7개나 증강했고 93년에는 남한의 특공대에 대비해 양강도·황해도 등지에 3개의 군단을 새로 편성했다. 북한군은 현재 각 10만명씩으로 이뤄진 4개 군단을 휴전선 부근에 두고 서해와 동해에 각 1개 군단씩 두고 황해도와 개성주변에 기계화군단을 배치하는등 무력의 70%를 평양 이남지역에 전진 배치하고 있으며 전시에 대비,훈련의 60∼70%를 야간에 실시하고 있다. ­북한의 전쟁 시나리오는. ▲첫째,북한의 현 정세가 극도로 불안하고 경제적으로도 혼란을 겪고 있어 북한 주민들사이에는 『차라리 한번 싸워보고 죽자』는 생각이 팽배해 있다.김정일이 이같은 혼란한 민심을 이용,전쟁을 도발할 가능성이 크다. 둘째,한미정전 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하고 미군이 철수한 뒤 전면 도발할 가능성도 있다.일부 장성들은 우선 한국에 주둔하는 미군을 주타격대상으로 삼아 수천명을 사살,미국내 반전 시위가 거세게 일도록해 한미간 군사동맹체제를 깬다는 전략을 구상하고 있다. 셋째,미국을 중심으로한 서방이 북한의 핵무기 개발을 막기 위해 북한 특정지역을 타격하면 이를 계기로 핵무기를 동원,전면전을 일으키겠다는 전략도 갖고 있다.인민군 병사들은 일단 전쟁이 나면 남한 사회의 지도급 인사들이 해외로 도피할 것이기 때문에 손쉽게 무력적화통일을 이룰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색무기개발 상당히 진척 ­북에서 느끼는 한국군에 대한 생각은. ▲장성급 등 군 고위간부들은 남한군이 현대 과학기술을 도입,최첨단 무기를 갖추는등 발전상을 잘 알고 있지만 상대적으로 정보가 차단된 병사들은 한국군이 미군의 괴뢰군이며 전투력도 보잘 것 없어 손쉽게 물리칠 수 있다는 막연한 생각을 갖고 있다. ­북한의 핵무기개발 상황은. ▲핵무기개발 상황은 북한내 최대 극비사안의 하나이기 때문에 나도 알 수 없다.그러나 평북 영변군 원자력연구소 감찰과에 근무하는 처남에게서 지난 88년 김정일이 연구소를 방문해 연구 결과를 둘러보고 상당히 만족,1대에 30만달러짜리 최고급 버스 2대와 모피코트를 선물한 사실을 알았다.이같은 사실로 미뤄 김정일의 관심속에 핵무기 개발사업이 상당히 진척한 것으로 보이지만 핵무기가 『있다』,『없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북한의 화학무기 보유현황은. ▲독가스를 비롯한 북한의 화학무기 보유여부에 대해서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여러 정황으로 봐서 개발에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지난 74년 러시아 부무관으로 활동했던 김종찬씨가 화학무기에 대한 정보를 입수했다는 소문을 들었으며 그후 김씨가 훈장을 받는등 초고속 진급을 한 적이 있다. ◇체제몰락 가능성 ­4∼5년뒤에 북한체제가 몰락할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어떤 형태가 될 것으로 보는가. ▲현재 북한의 경제는 더이상의 후퇴가 불가능할 정도로 망가진 상태이다.이런 상황에서 경제적 개방은 불가피하며 남한과의 경제교류도 점점 더 활발해질 것이다.이런 개방움직임을 통해 자연히 북한 인민들사이에 자유민주주의 사상이 널리 파급될 것이고 군부내 불만세력들이 이를 틈타 개혁 쿠데타를 일으킬 것으로 예상된다. ○개혁쿠데타 일으킬것 ­기존 대미자주화노선에서 최근 대미·일 실용외교노선으로 방향을 선회한 것에 대한 군부내 강경파의 반응은. ▲미국과 관계를 개선하려는 의도는 미국이 남·북한 등거리정책을 펴 남한내에 주둔하는 주한미군을 철수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미군이 철수한뒤 쌍방이 군대를 일정수준으로 감소하고 동시투표를 실시하면 사상교육이 잘된 2백50만 북한당원을 동원해 북한 대통령을 당선시킨다는 것이 북한이 주장하고 있는 고려민주연방공화제의 기본 구도다. ­군수산업이 침체되고 대외교역이 약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나진·선봉지역을 특수구역으로 개방한의미는. ▲군수산업과 민간산업은 전혀 별개로 운영되며 군수산업에 많은 투자가 이뤄지고 있다.군수산업의 침체는 사회주의경제이론 자체의 모순에서 기인한다.개인의 이익이 없는 상태에서 생산의욕이 떨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또 그동안 질적 개선없이 양적 팽창에만 치우쳐 외국에 진출하지 못한 것도 대외교역 약화의 원인이다. ◎「김정일의 군 장악 여부」 정부측 평가/“군 간부들 겉으론 충성­속으론 불만”/올 시찰 13차례… 반대세력 조직화 시기상조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최고 권력자가 그 권좌를 움켜쥐기 위해서 유념해야 할 모택동의 어록으로 병영사회인 북한체제에 꼭 어울리는 경구가 아닐 수 없다. 이같은 맥락에서 13일 귀순,기자회견을 가진 북한군 상좌 최주활씨가 김정일의 북한군 장악력에 의문을 제기해 비상한 관심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귀순자중 최고위계급 상좌(중령과 대령사이)인 그는 『김이 북한군부를 제대로 장악치 못하고 있다』면서 『이 때문에 당총비서·국가주석 취임등 권력승계가 늦어지고 있다』고 밝혔다. 그의 이같은 증언을 계기로 북한전문가 집단에서 소수설에 그쳤던 김정일의 「권력기반 이상설」이 다시 대두되고 있다.지금까지는 경제난등 총체적 난국에도 불구,김정일이 당·정·군을 대체로 원활하게 통제하고 있다는게 중론이었다. 최씨의 회견을 지켜본 정부의 한 북한전문가는 『김이 북한군을 외형적으로 통제하고 있지만 「군심」은 장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같다』고 잠정 결론을 내렸다. 우선 김일성과 같은 세대인 「빨치산 1세대」와 당시 「소년병」이었던 「혁명 1.5세대」가 김정일을 마음 속에서 애숭이로 여기고 있다는 것이다.그의 군경력이 전무하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동구 유학을 다녀와 해외사정에 밝은 상당수 고급장교들도 내심 김정일의 권력승계에 불만을 품고 있다는게 다수 귀순자들의 증언이었다.실제로 고급장교 일부가 지난 92년 4월25일 인민군창설 기념식때 김일성부자를 제거하는 쿠데타를 음모했다가 발각돼 처형당한 기록도 있다.소련판 웨스트포인트격인 「푸른제 종합군사대학」 유학파인 안종호상장등 소장파 군관들이 그 비극의 주인공이었다. 김정일이 군부의 환심을 사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는 것도 역설적으로 그가 군통제에 불안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입증한다.금년들어 김의 23차례 「현지지도」 가운데 군부대 시찰이 13번이나 된다는 사실이 이를 말해 준다.김이 최근 각종 행사에서 당정치국 상무위원,당비서등 당직은 제쳐두고 국방위원장겸 최고사령관이라는 군직함만을 사용한 점도 같은 맥락이다. 그렇지만 북한군부내 반대세력이 아직 조직화되지는 않았다는 게 일반적 관측이다.김정일이 당 지도부와 공안기관을 통해 군을 감시하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생전의 김일성이 북한의 군사력을 인민무력부·호위총국·사회안전부·국가안전보위부 4각 편제로 상호견제토록 교묘한 장치를 해놓은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 최주활씨는 누구/해외근무 경험 풍부한 통역 출신

    ◎부친은 6·25때 전사… 부인과 2남1녀/82년 체코서 군사기밀 수집하다 추방 이번에 귀순한 최주활씨(46)는 상좌계급의 북한 현역군인으로 우리나라의 중령과 대령사이에 해당하는 고위 군간부다.지금까지 귀순한 북한 현역군인 28명 가운데 최고위급이다. 49년 함경북도 청진시 신암구역 명성동에서 태어난 최씨는 평양 외국어 유자녀학원에서 10년간 공부한뒤 19세때인 68년 7월 인민군에 입대,정찰국 소속 항공육전여단에 배치돼 하사로 복무했다.70년부터 2년동안 정찰국 산하 외국어강습소(현 압록강대학)에서 러시아어를 배워 75년까지 인민무력부 외사부 양성(수습)통역원으로 근무했다.그뒤 3년동안 평양외국어대학 노어과에 편입해 공부한뒤 인민무력부 대외사업국 지도원으로 일하다 79년에 체코슬로바키아 주재 북한대사관 부무관으로 부임,해외파견업무를 담당했다. 최씨는 그러나 체코슬로바키아에서 활동하던중 신형방독면과 화염방사기 등 군사과학 비밀자료를 수집한 혐의로 82년 북한으로 추방돼 인민무력부 대외사업국 부부장에 임명됐으며 91년상좌 계급으로 진급했다. 특히 최씨는 80년이후 대외사업국에 근무하면서 북한 군사대표단 통역원으로 러시아·헝가리 등지를 10여 차례 방문하는 등 비교적 많은 해외 나들이 경험을 갖고 있다. 지난 1월 우리나라의 군수기지사령부에 해당하는 병참·보급담당부서인 인민무력부 후방총국 융성무역회사 합영부장에 임명된 최씨는 중국 연변등지에서 무역실무 대표단으로 활동하다 지난 6월19일 대표단에서 이탈,동남아 제3국을 거쳐 지난달 말 귀순했다. 가족으로는 모친 이순음씨(67)와 평양시 평천구역 의약품 관리소 판매원인 부인 조현실씨(42),딸 애화양(17),아들 철준(12)·철민군(10)이 북에 남아 있고 부친 최석보씨는 6·25당시 전사했다. 형 금활씨(51)는 사회안전부 병기국 「11·24관리소」 소장으로 최씨와 같은 상좌계급이다. ◇약력 △49년 4월19일 함북 청진시 신암구역 명성동 출생(46세) △59년9월∼68년3월 평양 외국어 유자녀학원(11년제)10년재학중 군입대 △68년3월∼70년11월 정찰국소속 항공육전여단(하사) △70년11월∼72년10월 정찰국 외국어강습소(현 압록강대학)노어과 졸 △72년10월∼75년8월 인민무력부 외사부 양성(수습)통역원 △75년8월∼78년9월 평양외국어대학 노어과 3년편입(상위) △78년9월∼79년5월 인민무력부 대외사업국 지도원 △79년5월∼82년7월 체코주재 북한대사관 부무관 △82년7월∼94년12월 인민무력부 대외사업국 부부장(91년 상좌 진급) △95년1월∼95년6월 인민무력부 후방총국 융성무역회사 합영부장 △북한내 주소 평양시 동대원구역 문신1동 70반 아파트 12층2호 회
  • 곽재구씨 시집 「참 맑은 물살」 펴내

    ◎최근 3∼4년 작업모아 책으로/소리꾼 할머니의 서글픈 삶 아름답게 묘사 곽재구 시인(41)의 새 시집 「참 맑은 물살」이 창작과 비평사에서 출간된다.지난 81년 신춘문예를 통해 「사평역에서」로 등단한 시인이 최근 3∼4년간의 작품들을 모아 펴내는 다섯번째 시집이다. 15년간의 시작생활을 통해 그는 우리 문단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정시를 쓰는 한사람으로 꼽혀왔다.누더기같은 삶의 쓸쓸함에서 결곡한 아름다움을 길어올리는 그의 한결같은 시구들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희망을 놓지않는 시인의 내면풍경을 엿보게 한다. 이번 시집은 시인의 서정성이 남도소리,설화 등 삶에 아직도 얼비치고 있는 우리것에 대한 천착과 맞물리는 모습을 보여준다.태어나면서 한번 들은 강강수월래로 그만 소리의 길에 접어들어버린 진도 할머니나 갈대꽃을 흔드는 진양조의 처연한 만가가락 등에 얽힌 한맺힌 사연이 펼쳐지는가 하면 성수대교와 백화점 붕괴의 현실이 판소리 사설 형식에 담겨 꼬집힌다. (「조공례 할머니의 찢긴 윗입술」중) (「팍큐소전」중) 구겨진 민족의 삶을 찾아 캘리포니아와 용정까지 넘나드는가 하면 시인은 동학의 현장인 전남 고부 메밀꽃밭에선 동족상잔에 순결을 앗기고에 스민을 떠올리기도 했다(「은선리 오층석탑 이야기」) 곡성땅으로 접어들어 인민군으로,국군으로약수물 받으러 온 외지 차량에 사라져버린 한 친구를 통해 우리 현대사의 그늘을 비춰본다(「물봉선 전」). 보잘것 없는 사람들의 흔한 사연을 바라보면서도 시인의 눈은 그러나 시종 따스함을 잃지 않는다. 구차한 삶의 세목에서 향기와 그리움을 읽어내는 이같은 시에는 삶을 보다 아름답게 만들고 싶어하는 시인의 소망이 깔려있다.
  • 북한 노동당 창당 기념행사 이모저모

    ◎「권력승계」 어떤 징후도 없었다/“충성” 구호만 요란… 새 노선 천명 없어/식량난·수해 불구 군중 1백만 동원 북한이 김일성 사후 처음으로 대대적인 노동당 창당기념식을 가졌다.북한당국이 중시하는 이른바 「꺾어지는 해」인 50주년이기 때문이었다. 북한당국은 1년전부터 초대형 기념탑건설에 착공하는등 이번 행사에 대비해왔다.수주 전부터는 각종 학술·문화·체육행사를 통해 김일성부자의 우상화에 열을 올리는등 북한전역에 걸쳐 떠들썩한 경축분위기를 조성해왔다. 그러나 이번 행사는 또 하나의 「소문난 잔치」에 그친 인상이었다.국외자의 관심의 초점이던 권력승계와 관련한 「의식」도,대내외적으로 김일성 「이후」시대를 알릴 만한 새로운 노선의 천명도 없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식량난과 수해라는 이중고에 시달려온 북한주민에게 희망을 갖게 하는 청사진제시도 없었다.각종 행사에서 김정일에 대한 맹목적 충성다짐등 요란한 수사는 난무했으나 북한이 당면한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제시가 눈에 띄지 않은 것이다. 이번당창건 기념행사의 하이라이트는 김정일을 비롯한 당고위간부가 참석한 가운데 평양에서 열린 대규모 군사퍼레이드와 1백만명이 동원된 군중집회.이날 김일성 광장에서 진행된 열병식에서 주석단에 나온 김정일이 신임 인민무력부장인 최광의 보고를 받고 전체 열병부대에게 손으로 답례를 보낼 때 이번 행사가 절정에 이른 느낌이었다. 김정일은 이에 앞서 전날 당창건 50주년 기념에 맞춰 완공한 평양의 청류다리 및 금릉2동굴 개통식에도 참석했다.하지만 이날 열병식행사와 전날 개통식행사에서 그에 대한 호칭은 모두 국방위원장겸 군최고사령관이었다.그의 당총비서와 국가주석등 최고위직 공식승계가 일단 당창건기념일 이후로 이월될 것임을 예고한 것이다. 그러나 김의 권력승계 공식화가 가시화되지 않았음에도 그의 권력장악실패설을 거론하는 전문가는 정부내에서도 여전히 소수다.김이 김일성 생전에 그의 비호하에 20여년이상 후계수업을 받는 과정에서 반대파에 대한 철저한 「가지치기」를 해왔기 때문에 아직 다른 대안이 나타날 수 없는 분위기라는 지적인 셈이다. 10일 북한은 당기관지 「노동신문」,군기관지 「조선인민군」,사로청기관지 「노동청년」등 3개 매체 공동사설을 통해 김일성이 업적을 계승해나갈 유일한 후계자가 김정일이라고 강조,이를 뒷받침했다.
  • 혁명 1세대 기용,정치안정 모색/북 최광 무력부장 발탁 배경

    ◎김정일,군 장악 자신감 과시 북한이 오진우 사망으로 공석중이던 군부 요직인 인민무력부장에 최광 총참모장(77)을 8일 임명,북한체제의 행로와 관련해 많은 시사점을 던지고 있다. 그의 새 인민무력부장 보임에 특히 관심이 모아지는 것은 우선 당창건 50주년 기념일(10일)을 앞둔 시점이기 때문이다.또 김정일의 군내 핵심측근인 오극렬 당 작전부장 등이 아닌 이른바 「혁명1세대」에서 김 다음가는 군부 2인자가 발탁된 것도 주목의 대상이다. 이번에 이을설과 함께 원수 칭호를 받은 최는 그동안 인민군내 8명의 차수중의 최선임자였다.인민군내에는 그외에도 인민무력부 부부장 김광진·김봉률,호위총국장 이을설,당중앙군사위원 이두익,당민방위부장 김익현,김일성 군사종합대학 총장 최인덕,당중앙군사위원 겸 사회안전부장 백학림등 7명의 차수가 있다. 그는 또 북한체제에서 극과 극의 부침을 겪은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69년까지 총참모장으로 있다가 당시 민족보위상(현인민무력부장)김창봉 사건에 연루돼 돌연 숙청당했다가 80년에야 당중앙위원 겸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재기용된후 88년 다시 총참모장으로 복귀했다. 김일성가와의 오랜 인연이 그의 재등용 배경으로 알려져 있다.그는 김일성의 항일 빨치산 1세대 동료로 처 김옥순이 김정일의 생모인 김정숙이 사망하자 어린 김정일을 지성으로 돌보기도 했다는 것이다.또 하루 아침에 광산노동자로 전락했음에도 김일성부자의 노선을 찬양하는등 모범적인 「혁명화 교육」을 받았다는 후문이다. 따라서 근본적으로 「김일성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최광이 인민무력부장에 등용된 것은 권력장악에 어느 정도 자신을 가진 김정일이 혁명1세대를 중용함으로써 정치적 안정을 꾀하겠다는 계산으로 풀이된다. 이같은 맥락에서 본다면 이번에 최등에 대한 원수 칭호 부여는 김정일의 대원수 추대를 예고한다고도 볼 수 있다.당총비서,국가주석등 공식 1인자 등극을 앞두고 그의 군장악을 공고히 하기 위해 이번 당창건기념일이나 그 이후에 이같은 시나리오를 밟을 가능성이 있다는 관측이다.
  • “김정일 카리스마 보완” 시간벌기/권력승계 왜 자꾸 늦어지나

    ◎지난달 전방 시찰… 건강이상설 일축/이미 당정군 장악,충성운동 추진중 북한 김정일이 오는 10월10일 당창건 50주년 기념식에서도 권력승계를 하지 않을 것이라는 최근 북한 관련당국의 판단은 북한 내부사정을 모두 종합검토한 끝에 내려진 것이다. 1일 당국에 따르면 김정일이 국가주석에 취임하기 위해서는 몇가지 절차를 밟아야 한다. 김일성 이후 북한을 이끌어가기 위한 새로운 정책방향을 제시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당대회를 개최,북한 권력핵심인 당중앙위원을 선출하는 과정을 필수적으로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북한은 당규약 21조에서 당대회를 열기 직전 3개월 전에 대회개최공고를 내도록 돼 있다.김일성을 다시 국가주석으로 선출하기 위해 지난 80년10월10일 열린 제6차당대회의 경우 대회개최에 적어도 6개월이상 시일이 소요됐다.김정일을 국가주석에 선출하는 7차당대회도 같은 기간이 걸릴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올 10월10일 김정일이 국가주석에 「등극」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7월이전부터 어떤 움직임이 있어야 하는데 현재까지 아무 움직임이 없다는 점은 북한 내부변화가 없을 것이라는 것을 자연스레 나타내고 있다는 해석이다. 또 김정일의 권력승계가 늦어질 것이라는 전망은 북한으로서 김정일의 권력승계를 별로 서두를 이유가 없다는 분석에서 비롯된다. 김정일은 이미 당·정·군의 모든 권력을 장악,실질적인 통치를 수행하고 있다.김정일은 북한권력의 중추인 조선노동당 서열 1위이자 의사결정기구인 정치국의 유일한 상무위원이며 정책입안을 담당하는 비서국 서열 1위이며 군통수기관인 당중앙군사위원회 서열 1위및 국방위원회위원장으로 국가안전보위부를 직접 관장,최광이 대리근무하고 있는 인민무력부를 장악하고 있다.김정일이 차지하고 있는 이 자리는 모두 김일성이 갖고 있던 것이다. 따라서 당국은 김정일은 자신이 전면에 등장했을 때 부족한 카리스마를 보완하기 위한 작업을 추진하면서 시간을 끌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처럼 보는 중요한 이유는 김정일의 건강악화 내지는 공중기피증등이 근거가 없고 최근에 이를 일축하는 증거가 속속 드러나고 있다는 데 근거하고 있다. 김정일은 지난 9월13일 장시간 지프를 타고 조선인민군 31사단 전방초소를 시찰,아군 초소를 살펴보는등 건강을 과시한 것으로 전해졌다. 특히 30∼40여명으로 구성된 서기부라는 조직을 신설,당·정·군의 충성서약운동등 김정일 카리스마강화작업을 추진중이라는 사실이 최근 확인됐다. 북한의 경제난이 김정일의 권력승계에 지장을 주고 있다는 분석 역시 그다지 설득력이 없다는 게 관련당국의 생각이다. 즉 북한의 현 1인당 국민소득이 9백32달러지만 세계에는 이보다 훨씬 낮은 국민소득을 보이는 국가가 많다는 점에서 경제력으로 김정일의 위치 이상여부를 점칠 수 없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김정일의 국가주석 취임여부는 북한 내부에서 아무 의미를 갖지 못하며 권력승계가 늦어지는 것은 김정일의 카리스마를 보완하기 위한 것이라는 게 당국의 잠정적인 결론이다.
  • 서울신문 발굴 「이사민 보고서」를 보고/김광운 국사편찬위 연구원

    ◎「박헌영 숙청」 본질 파악 단서 제공/「이사민 부부와 연계」 일부 밝혀/해방후 미 교포사회 친북인사 활동 처음 알려져 한국전쟁의 와중에서 발생한 「박헌영 사건」은 한국 현대사에서 최대쟁점중의 하나다.지금까지 이 사건에 대한 증언이나 연구는 선입견이나 불확실한 사실에 의존한 경우가 많았다.오늘날 북한에서는 박헌영이 「미제의 간첩」이었다는 믿음만이 존재한다.반면에 대한민국에서는 김일성이 6·25 패전의 책임을 물어 박헌영을 간첩으로 몰아 처형했으며,이로써 김일성 정권은 더욱 공고화됐다고 대체로 이해하고 있다. 서울신문이 이번에 공개한 「이사민의 보고서」를 통해 우리는 박헌영사건의 본질을 파악하기 위한 실마리를 제공받을 것으로 기대한다.정치적 성격이 강한 역사적 사건일수록 무엇보다 먼저 구체적 사실에 근거한 객관적 평가가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박헌영사건의 실체를 파헤치기 위해서는 사건의 기원까지 거슬러올라갈 필요가 있다.조선노동당은 1953년1월부터 「문헌토의사업」이라는 것을 전개했다.토의는 문헌에 기초해 당사업을 총화하는 것이었다.그런데 두 차례에 걸친 사업이 진행되는 동안 박헌영과 그 주변인물의 과거비리와 문제점이 하나둘 폭로되었다.이 과정에서 전쟁전에 미국의 정보공작선이 여럿 침투해 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들추어냈다. 여기서 무엇보다 관심을 집중시킨 것은 이미 간첩혐의로 체포된 이사민·현 앨리스와 이들이 맺은 관계였다.북한당국의 공판기록에는 『박헌영이 이들의 간첩활동을 백방으로 보장해주었다』고 기술되어 있다.이번에 공개된 「이사민의 보고서」를 통해 우리는 공판과정에서 쟁점이 된 사안의 일부를 확인할 수 있었다.이사민과 현앨리스가 체코 프라하로 가 북한으로의 정치망명을 요구한 사실이 「이사민의 보고서」에는 예고돼 있다. 최근 미국의 한국현대사 연구가인 브루스 커밍스는 「한국전쟁의 기원」 제2권에서 미국 CIA가 박헌영사건으로 체포당한 설정식을 통해 북한의 여러가지 정보를 입수했음을 자료를 통해 새롭게 입증한 바 있다.설정식은 함남 단천 출신으로 미국 마운트유니언대학을 나왔으며 해방후 미군정청 공보처 여론국장을 지낸 인물이다.46년9월 공산당에 입당해 51년7월 개성휴전회담에서는 인민군대표단 통역을 맡았다.그는 53년8월 이승엽등과 함께 「미제간첩」혐의로 재판받아 사형을 당했다. 이사민·현앨리스의 경우도 이와 같은 부류에 해당될 것으로 판단된다.아울러 「이사민의 보고서」는 지금까지 전혀 알려지지 않은 해방후 미국에서 전개된 친북인사의 활동을 생생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충격적이다.
  • 중국 정권수립 46주년/김정일,강택민에 축전

    【도쿄 연합】 북한 김정일은 30일 중국 공산정권 수립 46주년(10월1일)을 맞아 강택민 국가주석겸 공산당 총서기에게 축전을 보냈다고 북한중앙통신이 보도했다. 교도(공동)통신이 수신한 중앙통신 보도에 따르면 김은 「국방위원회위원장,인민군최고사령관」명의의 이 축전에서 『중국인은 귀하를 핵심으로 하는 중국 공산당을 중심으로 단결,스스로 선택한 사회주의의 길을 따라 힘차게 전진하고 있다』면서 『조선인민은 중국인민이 사회주의 건설로 거두고 있는 성과를 진심으로 반기고 있다』고 밝혔다.
  • 북,인민군 선무활동 강화/최근 군부대 위문공연 부쩍 늘어

    ◎군기강 해이… 농가 식량절취 사고 급증/토기 저하 막게 김정일 「현지지도」 늘려 북한당국이 최근 인민군에 대한 각종 선무활동에 부심하고 있어 눈길을 끌고 있다.우선 각급 군부대에 대한 위문공연의 횟수가 잦아지고 있는 것이 확인된다.이같은 위문공연은 인민무력부 직속의 군협주단,군단 및 훈련소의 기동예술 선전대 등이 담당하고 있다. 이들 공연에서는 김일성에 대한 추모공연과 함께 김정일에 대한 충성을 다짐하는 가요,춤,연극 등이 주레퍼토리로 등장하고 있다.따라서 최근 부쩍 활발해진 군부대 위문공연은 김일성 사망 이후 김정일의 군부 선무작업의 일환임을 짐작케 한다. 그러나 김정일의 군장악력 제고 목적 이외에도 북한당국으로 하여금 군에 대한 선무활동 강화를 불가피하게 하는 요인은 또 있다.즉 해를 거듭할수록 심화되고 있는 경제난으로 인민군의 사기가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는데 따른 고육책의 성격도 있는 것이다. 올들어 북한을 방문한 해외동포들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인민군의 기강 해이로 인한 각종 사고가 급증하고 있다는 소식이다.예컨대 인민군이 농가나 협동농장 창고 등에 몰래 들어가 가축이나 식량을 절취하는 따위의 일탈행위가 두드러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주·부식은 물론 피복·기초의약품 등 인민군을 위한 각종 보급이 최악의 상황으로 나빠진데 일차적으로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군간부들에 의해 저질러지는 각종 군내부 비리가 인민군 병사들의 일탈행위를 증가시키는 간접적 요인이라는 지적이다.최근 인민군 내에서 유행하는 각종 은어들이 이를 적나라하게 반영하고 있다.이를테면 『인민무력부에서는 무조건 떼어먹고,군단에서는 군말없이 떼어먹고,사단에선 사정없이 떼어먹고…,소대에서는 소리없이 떼어먹는다』라는 유행어가 이를 말해준다.군대내 정치지도원이나 중대장급들이 사병급식중 일부를 가로채는 일을 풍자한 「먹세중위」나 군관들이 장가갈 준비를 위해 군수물자를 빼돌리는 것을 비꼰 「보따리장사」라는 신조어도 마찬가지 맥락이다. 올들어 김정일의 군부대에 대한 이른바 「현지지도」 횟수가 늘어나고 있는 것도 인민군 내부의 이같은 속사정과 무관치 않다는 관측이다.김정일은 금년 들어 불과 21차례 공개석상에 등장했으나 그중 군관련 행사가 13차례를 차지했다.김정일은 사상최대의 수해로 겪고 있는 와중에도 지난 13일 최전방인 인민군 제839군부대 민경초소를 시찰,군오락회 공연을 관람하는 등 인민군에 대한 위무작업에 총력을 경주하고 있는 듯한 인상이다.
  • 전쟁포로(새로 쓰는 한국 현대사:36)

    ◎미­북한,송환방법 싸고 2년간 첨예 대립/이 대통령,반핵포로 2만여명 전격 석방 1951년 7월 8일 개성회담을 시작으로 2년간 지속된 휴전협상에서 가장 큰 쟁점은 포로문제였다.한국전쟁에서 독특한 양상을 표출한 포로문제는 이데올로기적 관점으로까지 비화됐다.그래서 휴전협상에서 가장 큰 이슈가 됐던 이 포로문제는 회담이 진행되는 동안 줄곧 난항을 거듭했다. 북한은 포로문제를 불리해진 전황정비의 수단으로 이용하려는 의도를 드러냈다.또 전쟁 조기 종료를 바란 미국 주축의 유엔은 휴전회담에서 북한측에 끌려다니는 인상을 지우지 못했다.전세가 아군에 유리하게 전개되면서 한국전쟁을 통일의 기회로 여겼던 이승만 대통령은 처음부터 휴전을 반대하는 입장이었다.특히 포로문제에 있어서 유엔 협상대표들이 북한측의 요구를 수용하자 마침내 독단적인 결정을 내려 반공포로들을 석방해 버렸다. 그렇다면 한국전에서 포로문제가 복잡하게 꼬였던 이유는 무엇일까.여기에 대한 대답은 유엔군에 생포된 포로의 성분이다.생포된 공산측 포로중에는 북한에 의해 강제 징집된 수많은 남한출신과 함께 장개석의 국부군 출신 중공군이 끼어 있었다.이에따라 휴전회담에서 포로송환문제가 거론되자 이들이 북한과 중공으로 돌아가길 거부하면서부터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했다. ○북·중 송환거부자 급증 미국은 휴전회담이 개막되기 전인 7월에 접어들어 이 문제에 대한 입장을 정리하기 시작했다.당시 미 육군 심리전감 매클루어 준장은 콜린스 참모총장에게 정전이 될 경우 국부군 출신 포로들을 대만으로 보낼 것을 건의해놓고 있는 상태였다.워싱턴에서는 51년 가을내내 포로문제에 대한 논의가 계속됐다.그러나 자원송환과 강제송환,1대1교환과 전체대 전체 교환,인도주의적인 입장과 제네바협정 준수가 엇갈려 확실한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그해 10월 판문점에서 협상이 재개됐으나 협상 벽두부터 북한측은 휴전협정 조인즉시 양측의 모든 포로들을 석방하자는 의견을 강력하게 들고 나왔다.그러면서도 북한측이 제시한 포로 숫자도 터무니 없게 축소돼 의혹을 불러일으켰다.유엔군은 공산군 포로 13만2천4백74명(중공군 2만7백명)의 명단을 제출하면서 민간인 수용자로 별도 격리 수용한 3만7천명이 더 있다고 미리 밝혀두었다. 반면 공산측은 한국군 7천1백42명과 유엔군 4천4백17명을 합쳐 고작 1만1천5백59명의 포로숫자를 제시했다.북한측이 한달전 평양방송을 통해 주장한 포로수가 6만5천명이었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너무나 큰 차이가 났다.유엔군측은 그 때까지 실종인원을 한국군 8만8천명,미군 1만1천5백명 이상으로 파악해 놓고 있었다. 휴전회담은 이렇다할 진전을 보지 못한채 51년을 마감했다.그러나 해가 바뀌면서 양상이 달라져 양측이 좀더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자세로 나왔다.19 52년 1월2일 회담에서 유엔군측 대표 R E 리비 미 해군 소장은 자원송환 원칙을 강력히 담은 포로교환을 제안하고 나섰다.공산군측은 이를 즉각 거절했다.이무렵 워싱턴에서는 자원송환의 원칙을 포기할 수도 있다는 종전의 입장을 바꾸었다.반드시 고수해야 한다는 강경론으로 선회했던 것이다. 송환원칙으로 인해 협상이 교착되자 쌍방은 세부적인 사항의 타결을 시도해 어느 정도 성과가 보이는 듯 했다.3월5일 공산측은 전년도 12월18일 교환된 명단에 입각한 송환을 제의하면서 꼬리를 달았다.전선에서 석방했다는 유엔군측 포로 5만여명의 행방을 유엔군이 묻지 않는다면 유엔군이 억류하고 있는 3만7천명은 불문에 붙이겠다는 것이었다.유엔군측은 이미 명단을 제출한 공산군 포로 13만2천여명에 대한 조사결과 겨우 7만명이 송환을 원한다는 사실을 통고했다. 공산측은 이를 유엔군의 강압에 의한 것이라고 맞서 회담은 또 교착상태에 빠졌다.4월28일 유엔군측은 일괄타결안을 제시하고 리지웨이 유엔군사령관과 미 트루먼 대통령은 각각 성명을 내놓았다.유엔군측이 제시한 일괄 타결안에는 공산측이 통고한 송환가능 유엔군 포로 1만2천여명을 인정하고 송환을 희망하는 유엔군 억류 공산군 포로 3만여명과 교환한다는 조건이 포함됐다.당시의 분위기를 볼때 상당히 완화된 이 조건은 공산군측에 실리를 넘겨준 것이었다. ○공산포로,소장 인질로 이같은 분위기속에서 5월7일 거제도 제76포로수용소장 F T 도드 준장이 공산포로들에 의해 피랍되면서 공산측의 입지는 더욱 강화되었다.도드 준장을 인질로 잡은 공산포로들은 포로수용소측에 ▲독가스 및 세균무기 사용,원자탄 실험중지 ▲불법 부당한 인민군과 중공지원군의 자원송환 즉각 중지 ▲수천명의 포로를 재무장시키려는 강제조사 중지▲포로대표단 구성 승인등을 요구했다.도드준장 후임인 새 포로수용소장 C F 콜슨 준장은 포로들의 요구를 대부분 받아들였다.공산측은 콜슨 준장의 회신내용을 들어 유엔군측이 지금까지 포로수용소에서 포로를 학대하고 세균전까지 서슴지 않은 것으로 선전하는 빌미를 제공했다. 유엔군측은 10월8일 마침내 최종안을 제출했으나 공산군측이 거부함으로써 협상은 끝이났다.이후 10월14일 뉴욕에서 열린 유엔총회에서 교착상태에 빠진 포로문제를 다시 다루어 휴전문제가 유엔으로 옮겨갔다.유엔에서는 체코슬로바키아,폴란드,스위스,스웨덴등 4개국으로 포로송환위원회를 구성해 본국송환을 원하는 포로는 본국으로 송환한다는 원칙을 세웠다.그리고 모든 포로가 선택의 권리를 갖고 90일의 시한을 넘기고도 결정하지 못한 비송환자들은 휴전회담에서 위임한 정치회담에 이양하자는 인도의 절충안이 채택됐다.그러나 공산군측은 기본적으로 자원송환을 지지하는 유엔결의안을 수락할 수 없다며 거부했다. 이런 와중에 1953년 1월 미국에서는 아이젠하워 대통령 행정부가 들어서고 3월에는 소련수상 스탈린의 죽음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됐다.판문점 연락장교회의를 통해 병상포로교환에 우선 합의했다.이에따라 4월26일 판문점에서 양측의 대표단 전원이 만났으나 회담은 다시 교착상태에 빠졌다.미국정부는 5월25일 회담대표자회의를 통해 최종안을 전달했다. 이 최종안은 6월4일 회의에서 약간 수정됐지만 송환을 원하는 포로는 휴전조인후 2개월내에 송환완료하고 잔여포로에 대해서는 그후 90일간의 설득기간을 갖도록 한다는 내용을 일단 도출해냈다.또 30일이내에 송환거부 포로문제를 정치회담에서 처리하되 합의를 보지못한 해당포로는 민간인 신분으로 변경키로 합의했다.민간인이 된 포로들은 뒷날 중립국 송환위원회에 의해 한국도 북한도 아닌 제3국으로향하는 운명이 결정되었다. ○첫 석방계획은 실패 그로부터 14일후인 6월18일 자정 남한에 수용됐던 반공포로 2만6천4백24명이 국군의 도움으로 수용소를 탈출했다.이른바 반공포로 석방으로 불리는 이 한국판 엑서도스는 이승만 대통령이 결정했다.유엔군과 공산군간에 휴전회담이 본격 진행되자 휴전반대의 입장을 굽히지 않았던 이승만 대통령은 10일 헌병총사령관 원용덕 중장등 군 수뇌들을 불러들였다.이 자리에서 반공포로 석방문제를 검토하고 다음날 정오 이를 시행토록 명령했다.그러나 한국군 병력배치등 준비미흡으로 첫 계획은 실패하고 1주일뒤인 18일 북한행을 거부한 포로들이 미군 경비 수용소를 빠져나와 자유의 품에 안겼던 것이다. ◎미 힉컬슨 작성 문서/미,공산군포로 난동에 시종 곤욕/북·중서 강력 항의… 정전협상 불리/도드 수용소장 피랍사건 상세 기록 미군은 한국전쟁 기간내내 공산군 포로문제로 시달렸다.서울신문 특별취재반이 미 국립공문서보존관리국(MARA)에서 입수한 문서더미 가운데 국제정치관계철 북한 전쟁포로 관련 시리즈는 이같은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 문서시리즈는 미 국무성 차관보 힉컬슨이 1952년 2월18일 「한국의 전쟁포로」라는 제목으로 작성해 극동과 간부 엘리손과 존슨에게 발송한 문서로 국내에 처음 공개되는 것이다.이 문서시리즈에 따르면 미군측은 공산포로로 인해 지휘체계 상부의 갈등을 불러 일으키는 등 심한 타격을 받았다. 이 문서가 작성된 당일만 해도 한국인 포로를 조사하기 위해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제62동에 진입한 미군병력과 포로들의 충돌로 미군1명과 포로 77명이 사망한 것으로 기록했다.이밖에 미군 38명,포로 1백40명이 부상당하는 유혈사태를 빚었다.공산군측은 이사건에 대해 강력히 항의하고 유엔군측은 「민간인이 관련된 내부사건」으로 일축했지만 결국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유엔군과 미군측은 협상에서 불리한 입장에 놓이게 됐다고 분석했다. 리지웨이 장군이 이 시리즈 4월29일자 전문에서 수용소 상황에 대해 기술한 내용도 이같은 내용을 뒷받침하고 있다.장군은 전문을 통해 『이들 수용소는 잘 조직돼 수용자들을 죽이거나 부상을 입힐 정도의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는 다스릴 수가 없다.하지만 위험한 폭동이나 유혈사태등의 모험은 정당하지 못하다』고 기술하는 등 포로문제로 고심한 흔적을 나타내고 있다. 이 문서 시리즈는 또 52년 5월7일 도드 거제도 제76포로 수용소장의 납치사건도 기록하고 있다.콜슨장군은 도드의 석방을 위해 포로들의 요구를 받아들였고 이 사건으로 5월20일 도드와 콜슨장군이 모두 대령으로 강등하는 과정도 잘 드러내 보였다.
  • 북한 수해/145군 물난리… 재민 520만

    ◎재산피해 150억달러… 자력복구 불가능/식량난 가중… 병충해·전염병 창궐 가능성 압록강 및 대동강,청천강유역등 북한의 중서부지역을 할퀴고 간 수마의 후유증이 예상 이상으로 심각한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기왕의 식량난에다 농경작지의 병충해와 북한주민들 사이에 수인성 전염병 만연이라는 최악의 상황을 겪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북한은 최근 홍수로 황해북도에서만 최소한 15만명이 집을 잃고 15만㏊의 농경지가 유실돼 30만t의 농작물 손실을 입었다고 최근 북한을 방문했던 유엔조사단이 보고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유엔대표단은 이 보고서에서 이번 홍수로 손실을 입은 농작물은 이 지역 주민들의 반년치 식량에 해당하는 양이라고 보고한 것으로 전해졌다. 심각한 북한의 피해는 북한이 유엔인도적지원국(DHA)과 세계보건기구에 식량과 의약품등을 지원해 주도록 긴급 구호를 요청했다는 점에서도 심각한 상황으로 받아들여 지고 있다.북한 스스로 5백20만명의 수재민이 발생,1백50억달러 상당의 피해를 냈다고 보고했기 때문이다.보고내용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경우 피해주민이 전인구의 25%에 달하고 피해액수가 GNP(93년 2백5억달러 추정)의 75%에 해당하는 엄청난 규모이다. 물론 이 보고는 실상보다 상당히 과장됐을 공산이 크다는 지적이다.대내적으로 불리한 정보의 차단이 가능한 북한으로선 어차피 대외적으로 스타일을 구기는 「구걸외교」에 나설 바에야 구호물자를 조금이라도 더 얻어내기 위해 피해상황을 가능한한 부풀리는 게 유리한 탓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번 홍수로 북한당국이 스스로 극복하기 어려울 정도로 심대한 타격을 받은 것은 분명하다는 게 정부당국의 분석이다.정부는 신의주 지역에서만도 최소 5만명 이상의 이재민이 발생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북한 외교부측이 유엔인도적지원국에 의해 파견된 유엔구호평가조정팀(UNDAC)에 전한 피해상황에 따르면 지난 7월부터 3차에 걸쳐 한꺼번에 최고 6백㎜에 이르는 집중호우로 평양 남부지역 및 2백여 군지역중 1백45개군이 피해를 입었다는 후문이다.그런데도 북한은 인명피해 만큼은 극구 감추려고 하고 있다. 하지만 김정일의 지휘로 인민군을 동원한 현명한 구조작업의 결과 단한명의 실종자나 사망자가 없었다는 북한당국의 주장은 허구로 드러나고 있다.최근 임진강 우리측 지역에 수해 피해자로 추정되는 북한주민 및 군인 시체 7구가 떠내려 왔기 때문이다. 더욱이 수재 실태 조사차 방북중인 WHO(세계보건기구)전문가는 설사,호흡기 질환등 각종 수해 후유증이 발견돼 전염병이 창궐할 가능성이 크다고 진단하고 있다는 소식이다.더욱이 이 전문가는 의료장비 및 의약품의 부족으로 수인성 전염병이 일단 발생하면 걷잡을 수 없이 번질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북한이 유엔과 스위스 독일정부에 지원을 요청한데 대해 미국정부는 인도적 차원의 지원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전세계에 “수재구호” 구걸외교/WHO·FAO 등 모든 국제기구에 요청/민심 이반 심각… 체면 내팽개치고 달래기 북한이 전방위 「구호외교」에 총력을 경주하고 있는 인상이다.그동안 내세워온 「주체」라는 슬로건에 걸맞지 않게 전세계를 대상으로 수재구호 요청 「공세」를 벌이고 있는 탓이다. 사실 북한당국은 이번 수재를 계기로 거의 모든 국제기구에 긴급 구호요청을 해놓고 있다.즉 지난달 29일 유엔인도적지원국(DHA)에 식량과 의약품 지원을 요청한 것을 첫머리로 WHO(세계보건기구),FAO(유엔식량농업기구),WFP(세계식량계획),UNICEF(유엔아동기금)등 국제기관에 SOS를 쳐놓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더욱이 북한은 이들 유엔 관련기구 이외에도 국제적십자연맹(IFRC)측에도 긴급지원을 요청,조사단이 곧 파견될 예정이라는 소식이다.뿐만 아니라 독일·스위스 등 서방국가와 미국의 민간단체에까지 원조를 요청하고 있는 형편이다. 이처럼 북한당국이 체면을 팽개치다시피 외부에 손을 벌리고 있는 것은 1차적으로 그 만큼 이번 집중호우로 인한 피해가 심대함을 반영한다는 분석이다. 그러나 이같은 일종의 「구걸외교」는 김일성 생전에는 상상하기 힘든 일일 것이다.때문에 김정일의 공식 권력승계를 앞두고 북한주민들의 민심이반이 심각한 상황임을 뒷받침하다는 추론도 나오고 있다. 말하자면 지난 수년간 누적된경제난에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엄청난 수재를 당하자 북한당국도 대외적인 위상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는 해석이다.즉 더 이상 허리띠를 졸라맬 수 없을 만큼 배를 곯고 있는 주민들에게 최소한의 떡이라도 쥐어주지 않고선 김정일의 등극 자체가 어렵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는 얘기다. 이와 함께 인도적 문제를 고리로 차제에 서방각국과의 관계개선을 촉진하려는 일석이조의 계산도 개재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관측이다. 즉 독일등 서방국과의 구호물자 교섭과정에서 대화와 교류의 물꼬를 트려는 실리적 목적이 숨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북한의 이같은 다목적 포석이 얼마나 주효할지는 미지수다.우선 DHA등 유엔산하 국제기구들은 어차피 재정능력이 취약해 독자적 대북 지원이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독일·프랑스·스위스등 서방국들도 어차피 국내사정 등으로 상징적인 지원 이상의 대대적인 대북 원조에 나서기는 어렵다는 지적이다. 결국 국제기구를 통한 대규모 지원에 스폰서로 나설 수 있는 국가는 한·미·일 3국으로 압축될 수밖에없다는 게 일반적 예상이다.나아가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역학을 감안할 때 대규모 대북 구호의 실현은 궁극적으로 남북관계에 있어서 북한의 진지한 자세 전환이 선행되어야 가능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국제선명회 대북지원 결정/50만달러·식량 등 곧 전달 국제 구호단체인 국제선명회(총재 딘 허시)는 빠른 시일 안에 북한에 50만달러와 식량 등 구호품을 보내기로 결정한 것으로 2일 알려졌다. 한국선명회측의 한 관계자에 따르면 북한이 지난달 31일 미국의 「국제기업 경영자문회사」와 제네바 주재 국제선명회 사무소를 통해 각각 다른 경로로 긴급지원 요청을 해 왔으며,이 요청을 받은 국제선명회 본부는 한국선명회(회장 이윤구) 등과의 협의를 거쳐 대북 지원사업을 벌일 것으로 전해졌다. 선명회는 북한의 요청에 따라 현금 50만달러와 가공식품 등 식량,중국 의류,콜레라 예방백신,설사약 등 의약품 등을 지원키로 한 것으로 확인됐다.이 관계자는 『북한이 미국내 수십개 민간단체에 똑같은 지원요청을 한 것으로 전해 들었다』고 말했다. 한편 한국선명회는 이번 지원사업에 「상당부분을 지원」키로 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정확한 액수는 밝혀지지 않았다.
  • 정전위 수석대표 한국군장성 재지명의 뜻

    ◎북의 정전체제 교란기도에 쐐기/대미 직접대화채녈 확보 요구도 거절/“대남 노선 불변땐 한·미입장 고수” 의지 한미양국이 25일 군사정전위 유엔측 수석대표로 다시 한국군 이석복소장을 지명한 것은 북한의 정전체제 와해 기도에 휘말려 들지 않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북한은 지난 91년3월 유엔측 정전위 수석대표가 미군장성에서 처음으로 한국군 장성인 황원탁소장으로 임명된 이후 지금까지 정전위 수석대표 회담을 거부하는 등 단계적으로 정전체제 와해조치를 취하고 있다.북한은 ▲지난해 4월 3일 북측 중립국감독위 체코대표 철수 ▲4월28일 북측 정전위 일방 철수 ▲5월24일 판문점인민군대표부 설치 ▲10월28일 정전위 중국대표 철수 ▲올 2월28일 북측 폴란드 대표의 강제철수 등을 단행해왔다. 북한은 이와 별도로 미측과 지난연말 헬기 조종사 송환문제 해결을 위해 임시로 열린 북·미 장성급 접촉을 정례화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지난 4월 이후 비무장지대(DMZ)안에서 월경 행위 등 각종 도발행위를 저지르고 나서 미측과 대화를 요구한 것 등이 모두 이런 맥락에서 비롯된 것이다.한미양국은 그러나 『모든 문제는 정전협정에 따라 정전위에서 논의돼야 한다』는 확고한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따라서 이번 한국군 장성의 수석대표 지명은 북한의 정전체제 교란 및 북·미간 직접대화채널 확보 요구에 대한 거절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한미양국은 그렇다고 북한과의 대화를 막무가내로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정부의 한관계자는 『지난4월 수석대표를 제외하고 미군 및 한국군장성을 포함한 4명이 함께 대화에 나서겠다고 북측에 제의한 것은 여전히 유효하다』면서 북한이 대화에 나설 것을 촉구하고 있다. 또한 북한이 지난 92년 남북기본합의서에 따라 군사공동위 등 대화를 재개한다면 이 자리에서 정전협정의 평화협정 전환문제도 논의할 수 있다고 공간을 마련해 놓고 있다. 결국 한미양국은 이번 정전위 수석대표의 한국군 장성 지명을 통해 북한이 대남적화노선에 따른 술책을 중단하지 않는 한,한미양측의 입장도 전혀 달라지지 않을 것임을 과시한 것이다.
  • 「한국전쟁 기원」 논쟁(새로 쓰는 한국현대사:32)

    ◎「이데올로기 잣대」 따라 남침­북침설 대립/본지연재 「모스크바 새증언」이 남침 입증 한국전쟁의 진행 상황은 본지 연재물 「6·25 내막 모스크바 새 증언」에서 이미 자세히 소개했습니다.따라서 「새로 쓰는 한국현대사」시리즈에서는 전황을 직접 다루지 않는 대신 한국전쟁 기간중 있었던 주요 사건·사고와 정치·경제·사회적 흐름을 주로 소개하겠습니다.독자 여러분께 배전의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1950년 6월25일 상오 4시 38선 일대에는 가랑비가 내리고 짙은 안개가 드리워 있었다.일요일을 맞아 새벽 단잠에 빠진 한국군부대 막사 위로 한순간 포탄이 우박처럼 쏟아지더니 이어 탱크를 앞세운 북한군 주력부대가 38선을 넘었다.이에 앞서 상오 3시30분쯤에는 북한 게릴라 3천1백여명이 해군 상륙선단편으로 동해안 옥계·삼척·임원 등 3곳에 상륙했다.동족상잔의 비극 「6·25」가 터진 것이다. ○북 군사력 한국 압도 북한군은 개전 3일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7월 말에는 경상도·제주도를 제외한 국토 전역을 수중에 넣는 등 파죽지세로 대한민국을 유린했다.북한군이 전쟁 초기 일방적으로 공세를 벌인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북한은 일찌감치 전쟁준비에 나서 개전 당시 군사력에서 한국을 압도했다. 개전 초기 양쪽의 전력을 볼 때 북한이 침략의도를 갖고 대한민국을 먼저 공격한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일으킨 쪽이 어디냐는,곧 「한국전쟁의 기원」을 따지는 논쟁이 오랫동안 끊이질 않았다.이는 한국전쟁이 단순히 한민족간에 벌어진 내전이나 국지전 이상의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한국전쟁은 세계가 미국·소련을 중심으로 한 동서 양블록으로 갈라져 냉전체제로 돌입한 다음 벌어진 첫 대결의 장이었다.따라서 한국전쟁 기원에 관한 학설에는 전쟁 자체의 성격 분석을 전제한 이데올로기적 잣대가 작용하게 마련이었다. 한국전쟁을 해석하는 시각은 냉전 발생의 책임을 미·소 중 어느쪽에 두느냐에 따라 두갈래로 나뉜다.하나는 「소련의 공격주의적이고 팽창주의적인 대외정책이 미국의 단호한 반응을 불러일으켰다」고 보는 전통주의 학파다.거꾸로 「미국이 월등한 군사·경제력으로 세계를 지배하려 하므로 소련이 불가피하게 대응했다」는 주장을 내세우는 쪽은 수정주의 학파라고 부른다.기본적으로 전통주의자들은 「남침설」을,수정주의자들은 「북침설」을 지지한다. 전통주의자들은 한국전쟁을 일으킨 주범으로 소련공산당 서기장이자 수상인 스탈린을 대개 지목하며 그 동기는 다음 몇가지로 분석한다.첫째 미국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를 창설,유럽에서 압박을 가하자 이를 분산시키려고 극동에서 전쟁을 일으켰다는 「압력분산설」이 있다.또 ▲세계 적화를 노리는 스탈린이 미국의 대응 의지를 떠보려고 도발했다는 「저항력 실험설」 ▲주한미군 철수,애치슨라인 설정으로 미국이 한국방위를 허술히 한데다 한국에서도 「5·30선거」에서 우익세력이 패하자 그 틈을 노렸다는 「허점공격설」 등이 있다. ○냉전발생책임에 무게 반면 수정주의 학설은 「맥아더와 이승만이 공모해 전쟁을 일으켰다」는 가설에서 출발했다.미국의 좌파 언론인 스톤이 제기한 이 주장은 「이승만은 국내 정치위기를해소하려고,맥아더는 미 정부의 관심을 아시아로 돌리기 위해」전쟁을 획책했다는 논지로 구성됐다.정확한 근거없이 단순한 추측에서 시작된 이 가설은 점차 미국·일본 등 서방국가 좌파 지식인사이에 널리 퍼져 수정주의라는 한 갈래를 이뤘다. 「6·25」를 겪은 한국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어처구니없어 할 「북침설」이 나름대로 세력을 이룬데는 몇가지 이유가 있다.먼저 전통주의자건,수정주의자건 한국전쟁을 지나치게 냉전논리로만 파악했다는 점이다.이들은 당시 남북한의 정세나 군사력 비교 등에 큰 의미를 두지 않고 다만 소련 또는 미국이 왜 전쟁을 일으켰을까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분석했다.또 한국전쟁 발발에 관한 북한·소련측 자료가 거의 공개되지 않은 점도 학자들의 연구를 제약한 큰 요인이었다.예컨대 북한군의 남침을 밝히는 한글 문헌은 1986년까지 한건밖에 공표되지 않았다. 이같은 학계 분위기는 80년대 후반 들어 반전한다.미 국립공문서보존관리국에 보관중인 「북한 노획문서」가 공개되면서 북한이 「6·25」를 철저히 준비했고,치밀한 계획에 따라 전쟁을 수행했음이 속속 밝혀졌다.「북한 노획문서」란 인천상륙작전으로 북진에 나선 미군이 평양 등 북한 각지에서 압수한 각종 문서를 총칭하며 그 분량이 1백60만쪽에 이르는 방대한 규모다.이 북한측 자료는,인민군 5개 사단이 6월23일부터 24일 밤사이 38선이북 수㎞ 안에 집결해 25일 새벽 선제공격을 가했음을 생생하게 보여준다.가령 6사단 문화부가 6월13일 예하부대에 내려보낸 「전시 정치·문화사업」명령서를 보면 38선으로의 이동­공격 개시­점령지에서의 정치선전 활동에 이르기까지를 5단계로 구분해 구체적으로 지시하고 있다. 「북한 노획문서」의 공개와 이에 근거한 연구성과 발표는 어느쪽이 먼저 전쟁을 일으켰느냐는 논쟁에 종지부를 찍는다.그러나 이 단계에서도 전쟁을 계획하고 주도한 인물이 누구인지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이를 결정적으로 확인시켜 준 자료가 서울신문이 올해 발굴해 「6·25 내막 모스크바 새 증언」이란 제목으로 연재한 러시아 소장 비밀문서 9백50여건이다.러시아 외무부·대통령궁·옛소련공산당 중앙위·국방부에서 각각 입수,이번에 처음 공개한 이 자료더미는 한국전쟁 준비에서 휴전에 이르기까지 풀리지 않던 많은 의혹들을 해명해 주었다. ○“3인 공동정범” 밝혀 이에 따르면 김일성·스탈린·모택동은 한국전쟁에 있어 각각 주요 역할을 했고 그에 따른 책임이 있다.김일성은 1949년 3월 스탈린을 만나 먼저 전쟁을 제의한다.이를 거부하던 스탈린은 50년 3∼4월 회담에서 남침을 허락했고,이후 53년 3월 사망할 때까지 전쟁을 주도한다.전쟁 계획을 확정하고,중공군을 끌어들였으며,전쟁이 소강상태에 빠진 뒤에도 휴전을 거부하는 등 주요 결정은 모두 스탈린이 내렸다.한편 모택동은 초기에 참전을 주저하긴 했지만 막상 중공군을 투입하고 부터는 전쟁터를 책임진다. 러시아 비밀문서 발굴로 한국전쟁의 기원에 관한 해묵은 논쟁은 사실상 끝난 셈이다.한민족에게 최악의 상처를 남긴 「6·25」에서 김일성·스탈린·모택동이 공동정범이라는 사실은 이제 부인할 수 없는 역사의 진실로 증명됐다. ◎「당 7∼8월 사업계획서」/북,108군·1168면에 「인민위」 설치/도·시·군·면 행정단위 남노당위 “재건”/「평화옹호 서울위」,지지 서명 받아내 전쟁 개시 3일만인 6월28일 서울을 점령하고 7월 말에는 낙동강 동쪽을 제외한 국토 대부분을 점령한 북한은 점령지에서 당·정 기관의 건립,토지개혁,군지원을 보장하는 활동에 즉시 돌입했다. 서울신문 특별취재반은 당시 상황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비밀문건을 미 국립공문서보존관리국에서 입수,국내 처음으로 공개한다.「당 중앙본부 7월∼8월 사업계획서」라고 이름붙은 이 문서는 「절대비밀」로 분류돼 있으며 등사본으로 50부만 찍은 귀한 자료다.이 문건은 전쟁 초기 승승장구하던 북한이 세운 전략을 알려준다. 사업계획서는 점령지 행정 중심방향으로 ▲옛 남로당조직 복구등 당세 강화 ▲군수품 생산 증대 ▲군·면·이 단위 인민위원선거 및 토지개혁 실시 ▲사회단체 활동 강화 ▲농촌에서의 증산 장려와 현물세 징수 등 5개항을 제시했다.또 10일마다 회의를 열어 이같은 지시사항을 점검하도록 했다. 이 문서에서 나타나듯 북한은 행정구역에 따라 중앙(서울)·도·시·군·면 단위로 각급 당 위원회를 재건하는 동시에 임시인민위원회와 사회단체들을 복구했다.당 위원회 재건작업은 북로당원으로서 파견된 공작대원,남로당 출신 월북자,형무소에서 출감한 남로당 간부 출신,빨치산 간부들이 맡았다.이어 두단계에 걸쳐 「인민정권기관」을 지체없이 세웠다.먼저 점령지에 지역 정권기관으로서 임시인민위원회를 구성한 다음 곧바로 선거를 거쳐 인민위원회를 정식 설치했다.남한에서 인민위원회가 들어선 곳은 1백8개 군,1천1백68개 면이었다. 인민위원회는 북한에서 실시한 예에 따라 토지개혁을 실시했다.「무상 몰수,무상 배분」을 원칙삼아 일제와 한국 정부,지주 소유 토지는 모두 몰수해 가난한 농민들에게 나눠주었다.자작농은 5∼20정보만 인정했다. 북한은 정치 선전·선동에도 힘을 기울여 7월14일 「평화옹호 서울시위원회」를 조직,북한을 지지하는 서명을 억지로 받아냈다.그 내용은 ▲유엔에 미국의 참전 중지를 요구하고 ▲이승만 대통령 등 대한민국 요인을 반역자로 지목,처형을촉구한 것이었다.
  • 한국­격동의 반세기 발자취/1945∼95:1

    ◎분단대결 구도속 민주주의 꽃피우다/동족상잔의 전쟁 발발… 전국토 초토화­1950년/5·16 쿠데타… 본격 개발독재시대 돌입­1961년/유신 선포… 장기집권의 「정치암흑기」로­1972년 95년 8월15일.우리나라가 일제의 식민지 통치에서 벗어나 자주독립을 되찾은지 쉰번째 맞는 광복절이다.그러나 해방의 기쁨도 잠시,민족상잔의 비극과 국토의 허리가 꺾이는 분단의 아픔을 겪어야 했다.분단을 원죄 삼아 정치·사회등 각부문에서 여러가지 사건들이 꼬리를 물었으며 최근들어서는 고속성장의 후유증으로 붕괴·폭발등 인재가 속출,광복 반세기사에 깊은 골이 패이게 했다.그러나 한민족은 이같은 역사의 도전을 끈질김과 슬기를 갖고 성공적으로 극복,전쟁의 폐허속에서 경제성장과 민주화의 눈부신 꽃봉오리를 피워냈다.광복 및 분단 반세기동안 빚어진 영욕의 역사를 연도별로 간단히 정리해본다. ▷1945년◁ 8월15일 한민족은 36년간의 일제강점에서 벗어났다.그러나 얼마뒤 9월2일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미소양군의 한반도 분할점령이 발표돼 분단의 씨앗이 심어졌다.김일성은 9월19일 원산항을 통해 북한에 들어왔다.이 가운데 10월25일 미국에서 돌아온 이승만을 중심으로 2백여 정당대표가 회합해 조선독립 촉성중앙협의회를 발족시켰다.김구등 임정요인들은 11월23일 개인자격으로 뒤늦게 환국했다.연합국은 12월28일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조선 신탁통치를 결정,12월31일 반탁운동이 대대적으로 전개됐다. ▷1946년◁ 조선공산당은 1월2일 입장을 급선회,신탁통치 지지에 나섰다.5월23일에는 군정장관의 허락없이 38선을 무단 월경하는 것이 금지돼 분단이 사실화됐다.이에 따라 이승만은 6월3일 남한단독정부 수립을 천명했으며 소련은 7월2일 서울영사관을 철수했다.대구에서 쌀배급요구를 내세운 10·1폭동이 일어나 3천7백명이 체포돼고 16명이 숨졌다. ▷1948년◁ 2월26일 유엔은 남한단독 총선거 실시를 결의했다.김구등 한독당 대표들은 이에 반발해 4월19일 38선을 넘어 김일성과 남북연석회의를 갖고 통일방안을 논의했다.또한 제주도에서 4월3일 남한단정에 반대하는 대규모 폭동이 일어났다.그러나 결국 5월10일 유엔 한국위원회의 감시 아래 남한단독 첫 국회의원 총선거가 실시됐다.총선 이후 첫 소집된 국회는 7월1일 대한민국을 국호로 결정했으며 원내 선거로 초대대통령에 이승만을 선출했다. ▷1949년◁ 5월20일 남로당 국회프락치사건이 일어나 국회의원들이 체포됐다.미국은 같은날 미군철수를 발표했으며 6월29일 철수를 완료했다.이에 앞서 6월26일 민족지도자 김구선생이 안두희에 의해 피살,국민의 깊은 슬픔을 자아냈다. ▷1950년◁ 미 애치슨 국무장관은 1월12일 미방위선에서 한국이 제외된다고 말했다.반면 1월26일에는 외침시 미군의 개입을 보장하는 한미상호방위원조협정이 체결됐다.마침내 6월25일 한국전쟁이 발발,53년7월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되기까지 3년여간 전국토가 전화에 휘말려 폐허화됐다.3일만인 6월28일 서울이 인민군에 함락됐으며 같은날 새벽 3시 한강인도교가 폭파됐다.미국은 6월27일 참전을 결정하고 유엔 안보리에 연합군 결성을 제안,7월7일 안보리에서 유엔군 최고사령부 설치를 채택됐다.부산까지 계속 밀리던유엔군은 9월15일 새벽 인천상륙작전을 감행,9월26일 서울을 수복한데 이어 38선을 돌파하고 북진에 들어갔다. ▷1951년◁ 중국군은 1월1일 6개군단으로 38선을 넘어 남하했고 정부는 다시 1월4일 부산으로 후퇴했다.이 가운데 공비토벌을 이유로 거창양민 6백63명을 국군이 학살한 사건이 벌어졌다. ▷1953년◁ 이승만은 미측의 조기 휴전 추진에 반발해 6월18일 반공포로 2만7천여명을 석방하는등 미측에 압력을 가했다.그러나 7월27일 유엔과 북한·중국이 당사자로 서명한 가운데 휴전협정이 조인됐다.북한에서는 8월7일 박헌영등 남로당 계열을 간첩혐의로 사형을 집행했다고 밝혔다. ▷1960년◁ 전년의 사라호 태풍으로 극심한 피해를 입은 것을 간신히 수습하고 3월15일 정부통령 선거가 실시돼 4대 대통령에 이승만대통령이 당선됐다.그러나 부정선거였음이 밝혀져 거센 항의시위가 빚어졌다.4월11일 마산에서 최루탄에 맞아 숨진 김주렬군의 사체가 발견되면서 시위는 전국적으로 확대됐다.4월19일 서울에서 2만명의 학생들이 대대적인 도심시위를 벌여 4·19혁명의 불길이 당겨졌다.4월26일 이승만대통령은 마침내 하야성명을 발표했다.이에 따라 4월28일 과도내각이 구성됐으며 이승만은 5월29일 하와이로 망명길을 떠났다. ▷1961년◁ 5월16일 박정희소장의 주도로 군사쿠데타가 일어났다.전두환대위가 이끄는 육사생도들은 18일 쿠테타지지 시위를 벌였다.박정희는 20일 국가재건 최고회의를 결성하고 의장에 취임했다.이어 용공분자와 깡패 6천2백여명을 검거했다고 발표했다.7월27일 미측은 한국군사정부를 지지하는 성명을 냈다. ▷1962년◁ 한일양국은 3월12일 외무장관 회담을 개최했다.또 3월19일 최고회의는 63년 민정이양을 발표했으며 정치활동정화법을 공포했다.이에 따라 윤보선대통령이 사의를 표명하자 박의장은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취임했다.또 6월10일에는 10환을 1원으로 평가절하하는 화폐개혁이 단행됐다.10월15일에는 한미행정 협정실무자회담이 학생들의 반대속에 18개월만에 재개됐으며 11월12일 김종필은 일본 오오히라와의 비밀메모를 작성했다. ▷1963년◁ 1월18일 민주공화당이 발기선언을 가졌으며 박정희는 민정불참을 발표했다.25일 김종필은 순회대사 자격으로 자의반 타의반 외유길에 올랐다.11월26일 실시된 6대 국회의원선거에서 공화당은 압승을 거두고 이어 박정희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됐다. ▷1964년◁ 4월1일 국회에서 김종필과 오히라간의 비밀메모가 공개되면서 학생시위가 격렬해지자 정부는 6월3일 각급학교에 휴교령을 내렸다. ▷1965년◁ 국회는 1월26일 베트남에 대한 국군공병단의 파견동의안을 통과시켰다.또 2월20일에는 한일기본조약이 가조인됐다.군은 한일조약에 대해 반대하는 시위가 날로 거세지자 4월19일 위수령을 발동했으며 정부는 6월22일 한일협정을 정식조인했다. ▷1966년◁ 6월18일 장창선이 세계아마레슬링 플라이급 자유형에서 금메달을 땄다.1주일 뒤인 6월25일에는 김기수가 국내 처음으로 주니어미들급으로 세계챔피언에 올랐다. ▷1967년◁ 3월22일 북한 중앙통신부사장 이수근이 위장 귀순했다.5월3일 제6대 대통령선거가 실시돼 박정희후보가 당선됐다.7월8일 중앙정보부는 동베를린 간첩단사건 관련자1백94명 가운데 1백4명을 구속했다. ▷1968년◁ 1월21일 김신조를 비롯한 무장공비31명이 청와대기습을 위해 서울에 잡입했다.1월23일에는 푸에블로호가 납북됐다.4월 파라과이와의 이민협정에 체결됨으로써 남미 이민의 막이 올랐다. ▷1969년◁ 2월5일 서울시 중학교 무시험 전형이 실시됐다.3월22일에는 3·1고가도로가 개통됐다.3월28일 김수환대주교가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추기경에 선임됐다.10월17일 3선 개헌안이 국민투표에서 가결됐다. ▷1970년◁ 3월17일 서울 마포구 합정동 강변로에서 정인숙이 피살,배후를 놓고 전국이 들끓었다.4월8일 와우아파트가 무너져 33명이 사망했다. 11월13일 평화시장 재단사 전태일이 근로조건 개선을 요구하며 분신 자살해 노동운동의 험난한 앞길을 예고했다.
  • 분단이후 북한인맥 총정리/본사 통일안보연 발간 「북한인명사전」

    ◎전·현직요인 등 1만5천명/주요사건은 원색화보로 북한을 움직이는 주요 인물들의 인적사항을 망라한 「북한 인명사전」95년 개정·증보판이 최근 간행됐다.서울신문사 통일안보연구소가 펴낸 이 책은 북한 인사들을 다룬 유일한 인명사전인데다 인물 정보가 신속·정확해 권위를 높게 인정받고 있다. 올 개정판은 95년 4월말을 기준으로 전·현직 요인과 새롭게 부상한 엘리트,당성이 투철한 열혈학생·청년 등 무려 1만5천여명을 수록했다.사망했거나 생사가 명확하지 않은 경우라도 역사성을 가진 인물은 함께 실어 분단이후 북한의 인맥을 총정리했다. 각 인물마다 생몰 연대,경력들을 가능한 한 모두 실었으며 이름을 한자로 기록하는 우리 사회 관행에 맞춰 중국·일본의 자료를 통해 한자이름을 확인해 넣었다.요인사진 4백장을 실은 점도 돋보인다. 특히 올 개정판에는 김일성 사망이후 노동당·행정부·군의 핵심인물들이 벌인 주요 활동사항을 자세히 분석함으로써 북한정세를 판단,전망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했다.예컨대 인민군 대장 이봉원(70)의경우 그가 95년부터 김정일의 군부대 시찰에 여러차례 동행한 사실을 한쪽에 걸쳐 설명,새로운 김정일체제에서 중용되고 있음을 시사했다. 또 김일성 장례식,단군릉 복원,평양축전 등 지난 1년동안 북한에서 있었던 주요 사건의 원색화보를 실어 뉴스성을 살렸다. 이밖에 ▲외국인투자법,자유경제무역지대 외국인체류 및 거주규정 등 개방관련 15개 법률 ▲노동당 22개 전문부서 및 정무원 산하 43개 부·위원회의 간부 명단 ▲노동당 외곽조직·사회단체의 기구표▲재일 조총련 중앙상임위원회와 지방본부·산하단체·산업체 임원 명단을 덧붙였다. 서울신문사는 지난 90년 「북한 인명사전」을 첫 출간한 이래 해마다 개정·증보판을 발간해 왔다. 올 개정판은 4×6배판 고급양장에 모두 1천1백82쪽 분량이며 값은 10만원이다.문의 (02)721­5641∼4.
  • 한국전쟁 전야(새로 쓰는 한국 현대사:31)

    ◎비전투요원 472명 남고 미군 전원철수/6월17일 내한 덜레스 국무 “38선 이상무” 우리 민족이 가장 불행하게 맞은 20세기가 꼭 절반이 저문 19 50년 1월12일 워싱턴으로부터 달갑지 않은 소식이 날아들었다.한국은 미태평양방위선밖에 있다는 애치슨의 발언이었다.그토록 머물러 주길 희망했던 미군마저 철수한 위기상황 속에 날아든 애치슨의 발언은 한국민들에게 불길한 예감을 안겨주었다. ○“한국은 미 방위선 바깥” 한국에 남아있던 당시 미군의 병력은 4백72명에 지나지 않았다.전투병력이 아닌 미군사고문단(KMAG)자격의 비전투 요원들이었다.미군은 성급하게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지 20일뒤인 19 48년 9월15일부터 한국을 빠져나갔다.미안전보장회의가 대통령 H S 트루먼에게 보낸 보고서에 따르면 이날부터 미군들이 극비에 철수하기 시작한 것으로 되어있다.그리고 48년 12월말까지 완전 철수할 계획이었으나,중대한 모험이라는 여론에 따라 몇개월 연장되었다.미군은 결국 1949년 6월29일 군사고문단만을 남기고 철수를 끝냈던 것이다. 미국은처음부터 남한에 병력과 기지를 유지하는데 전략적 이익이 없다고 판단했다.이는 미 합동참모본부의 판단이었는데,극동에서 전쟁이 일어날 경우 한국 주둔 미군은 오히려 장애가 된다는 것이었다.미국의 입장에서는 만약 전쟁이 일어나면 지상작전보다 쉽고 돈이 덜드는 미 공군의 활동에 더 기대를 걸었다.또 심각한 병력 부족현상을 겪고있던 미국은 남한에 유지하고 있는 병력 2개사단 약 4만5천명의 병력을 다른 지역에서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1949년 3월22일 미국가안전보장회의는 그 전해에 만든 「한반도에 관한 미국의 입장」을 재검토하고 철군 건의안을 대통령 트루먼에게 제출했다.미군의 철수에 뒤따를지도 모를 공산주의 지배의 가능성을 최대한 줄이는 동시에 한국정부를 실행 가능한 한도에서 지원한다는 것이 골자였다.이는 한국에서 미국이 병력과 비용부담 의무를 줄일 수 있다는 국익과 맞물려 트루먼의 승인이 곧바로 떨어졌다. 어떻든 트루먼의 미 행정부는 철군 보상으로 한국에 미군 장비와 6개월분의 비축물자를 이양키로 했다.이와 더불어 미국 경제협조처(ECA)로 하여금 19 50년 회계연도에 1억9천2백만달러의 경제원조를 주는 방안이 고려되었다.그러나 중국 국민당 정부에 더 많은 원조를 주려는 하원에 의해 제동이 걸렸다.결국 한국정부는 50년 2월15일 이전에 사용할 수 있는 6천만달러의 원조금을 겨우 받아냈다. 한국군의 군비는 실로 말이 아니었다.이승만 대통령이 자신의 미국인 친지 R T 올리버(당시 펜실베이니아대 교수)에게 보낸 서신에 따르면 한국 육군의 탄약 비축량은 5일분에 불과했다.북한의 공격에 대응하지 않으면 5개월을 버틸 수 있다는 분량이라고 예측한 미국의 여론에 대해서도 이승만 대통령은 불만을 품었다. 1949년 9월 한달 동안에 북한의 공격이 1천1백84회나 되었으니 그럴 수 밖에 없었다.육지와 연결된 통로가 없는 옹진반도에서는 한국군이 매일 공격을 받은만큼 사실상의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미군사고문단은 명목상 한국군을 위한 것일 뿐 실제 임무는 한국군을 통제하는 일이었다.항공기는 대공포화가 없는 지역에서 사용할 수있는 6대 이외는 허용하지 않았다.탱크나 장갑차 보유는 엄두도 못냈다.포병은 탱크를 격파하기에는 너무도 가벼운 바주카포와 화포에 국한시켰다. 그렇다고 영토보전을 위한 어떤 보장도,외부공격에 대한 지원약속도 없는 상태였다. ○탄약 비축량 5일분 불과 이러한 상황에서 1950년 1월 한국이 미태평양방위선 밖으로 밀렸다는 미 국무장관 애치슨의 발언이 전파를 탔던 것이다.정부수립 만 3년이 안되는 신생 대한민국으로서는 큰 놀라움이었다.한국은 참으로 고독했다.이승만 대통령이 19 49년부터 힘을 기울인 태평양 반공방위조약이 실현되었더라면 한국은 덜 외로웠을 것이다.자유중국·필리핀·인도·호주·캐나다·뉴질랜드 등이 참가하는 방향으로 구상한 이 조약은 한국전쟁이 일어날 때까지도 매듭을 짓지 못했다. 그러나 북한 김일성 정권의 1950년은 의기양양했다.김일성은 1월1일 신년사에서 강력한 민주기지의 축성과 신속한 국토완정을 외쳤다.여기 나오는 국토완정은 얼핏 애매모호한 용어로 들리지만,실로 가공스러운 의미를 함축했다.국토의완전한 정리,다시 말하면 무력통일을 선언했던 것이다.그러면서 인민군대·경비대·보안대는 능숙한 전투원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또 남한의 유격투쟁을 부추기는 내용의 발언을 덧붙인 김일성은 1949년에 이어 그해 3월에도 훈련된 빨치산 요원 1천50명을 남으로 보냈다. 김일성은 특히 미 국무장관 애치슨의 발언에 고무되었다.북한은 한국과 대만을 미태평양방위선 밖에 둘 것이라는 애치슨의 내셔널 프레스클럽의 연설이 있기 그 이전에 이미 병력과 장비를 증강해놓은 상태였다.북한이 전쟁을 일으킬 수 있을만큼 전력을 증강한 것은 1949년 여름 이후였다.먼저 5만명에 이르는 중공군 출신 한인의용군을 중국으로부터 불러들였다.이로써 북한 정규군의 약 3분의 1이 실전경험을 갖추게 되었다.그리고 나서 1950년 봄 블라디보스토크를 통해 소련제 중화기와 T34형 탱크가 청진항으로 속속 입항했다. 미군의 철수와 소련에 의한 북한의 군사력 강화는 한반도에 대한 미·소의 정책차이를 그대로 드러낸 것이다.한국에 대한 미국의 정책에는 북한군 능력의과소평가와 동아시아 전략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일본에 기지를 둔 미공군의 활동반경은 한반도 전역을 커버할 수 있다는 미국의 판단은 한국군 무장의 불필요성과 한국포기를 정당화하는 이유가 되었다.이 시기에 미국은 직전의 적국 일본을 보호하기 위한 일본의 제한적 재무장을 심도있게 들고나왔다.국제정치는 그토록 냉혹한 것이었다. ○“5년 이내에 전쟁 없다” 한국의 위치는 계속 흔들렸다.1950년 5월5일 미국 상원 외교위원장 T 코널리는 미국의 전략에서 볼때 한국은 그다지 중요한 지역이 아니라는 발언을 했다.그의 발언은 파문을 일으켰지만,국내에서는 제2대국회를 뽑는 5·30선거가 예정대로 진행되었다.코널리 발언에 앞서 5월4일 미 대통령 트루먼은 전쟁이 일어날 위험은 없다고 잘라 말했다.그러나 한국의 판단은 사뭇 달라 5월12일 신성모 국방장관이 북한군이 38선에 집결하고 있다는 사실을 외국기자들에게 밝혔다. 그리고 6월이 다가왔다.그 6월의 첫날 트루먼은 또 『5년 이내에 전쟁이 없다』는 말로 5월4일의 발언을 더 구체적으로 확신했다.이어 6월17일에는 신임 미 국무장관 덜레스가 서울로 날아들었다.38선을 시찰한 덜레스는 국회연설에서 한국을 물심 양면으로 돕겠다는 말을 남기고 19일 서울을 떠났다. 세계전사를 통해 가장 지루하고 긴 대규모의 국지전으로 치러야 했던 며칠후의 한국전쟁을 예측하지 못한채 극동의 화약고를 멀리했던 것이다 ◎미 CIA 정보평가 보고서/미 “북한은 전면전 펼 능력 없다”/“중·소의 적극지원 전제돼야 가능/대남투쟁 선동·유격전에 그칠것 미국의 중앙정보국(CIA)은 19 50년 북한이 전쟁 수행능력 어느 정도 지녔던 것으로 평가했다.그러나 전면 남침이 가까운 시기에 이루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예측하지 못한 것으로 밝혀졌다.이는 서울신문 특별취재팀이 미 국립공문서보존관리국(NARA)에서 최근 발굴한 미 CIA 정보평가보고서(NIE)를 통해 처음으로 확인되었다. 이를 입증하는 문서는 CIA가 1950년 6월19일에 작성한 「NIE리포트­3」등으로 되어있다.이 문서에 따르면 북한은 탱크와 야포 등의 장비를 갖추었기 때문에 제한적인 목표를 달성할 수있는 능력을 지닌 것으로 평가했다.그 능력이란 단시일 내에 서울을 손아귀에 넣은뒤 이승만 대통령이 이끄는 한국정부를 무너뜨리는 것이라고 덧붙였다.북한의 군사적 우위성에 근거하여 이같이 판단한 NIE문서는 소련과 중공이 적극 지원하면 한국에서 전면전을 치를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남한에 대한 미국의 경제·군사원조가 대폭 삭감되거나 낭비되지 않는다면 남한 전체의 공산화는 불가능할 것으로 판단했다.다만 이 문서의 한계성이 있다면 미구에 닥칠 전면전을 예측하지 못했다는 점이다.그래서 북한정권이 남한을 겨냥한 목표를 단순한 선동선전및 침투·사보타지·파괴공작·유격투쟁 등으로 예견했다.또 북한은 전적으로 소련에 의지하여 정권을 지탱하고 있으나 정권을 위태롭게 할 내부의 위협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서울신문 특별취재팀은 이밖에 1950년 북한 상황을 들여다 볼 수 있는 북조선노동당 문서도 NARA에서 입수했다.6·25가 일어난 19 50년 5∼6월까지의 사업계획을 명시한 이 문서는 군사적 측면을 가장 밀도있게 강조했다.10부만을 등사물로 간행,극비문서로 분류한 조선노동당 문건은 미군이 평양에서 가져온 노획문서.이 문서 역시 서울신문이 국내에 처음 공개한 것이다.
  • 중·러/「한반도 평화체제」 왜 관심 높을까

    ◎최근 적극적 입장표명의 저변/“새 체제때까진 정전협정 준수” 강조/「북 모험」 경계하며 영향력 유지 포석 중국과 러시아가 최근 한반도평화체제 전환문제에 대해 적극적인 입장표명을 하고 나와 비상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중국의 전기침 외교부장은 1일 크리스토퍼 미국무장관과의 회담에서 한반도 평화체제가 마련될 때까지 현정전협정이 유지돼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러시아측도 최근 국영방송을 통해 북한의 정전체제 무력화시도를 강도 높게 비판한 바 있다. 두 나라의 이같은 「훈수」는 현정전협정을 대체할 새로운 평화체제방식을 놓고 바야흐로 남북간 주도권경쟁이 벌어지려는 시점에 나왔다는 점에서 더욱 귀추가 주목된다. 북측이 최근 수년간 미국과의 평화협정체결을 겨냥,집요하게 정전협정 무실화작전을 펴온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에 맞서 우리측도 최근 정전협정 유지라는 수세적 입장에서 벗어나 새로운 평화체제를 마련하는 쪽으로 「공세적 방어」 채비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즉 오는 8·15를 계기로 남북당사자 해결원칙을 대전제로 한반도평화체제 보장국으로 미·중·러·일등 주변 4강의 일부 또는 전부를 참여시키는 획기적인 대북 제의를 준비중이라는 관측이다.이른바 「2+2」방식(남북이 평화협정체결후 미·중이 참여)과 「2+4」방식(남북과 미·중·일·러가 참여)등이 그것이다. 바로 이같은 시점에서 이 두 나라가 평화체제문제를 거론했다는 사실은 한반도내에서 계속 일정한 영향력을 유지하겠다는 의사로 받아들여진다.특히 새 평화협정체결 때까지 현정전협정 준수를 이구동성으로 강조한 대목은 이들이 남북 등거리외교를 통한 실리추구차원에서 북한의 모험주의를 경계하고 있음을 반증한다는 지적이다. 요컨대 양국은 북측이 정전위대표단 철수→중감위 기능정지→판문점 인민군대표부 설치 등 일련의 공세를 통해 기도하고 있는 미국과의 평화협정체결구도 자체를 반대하고 있다는 얘기다.북측은 한국을 배제한 채 미국과의 직접협상을 통해 유엔사 해체,주한미군 철수 등을 노리고 있다.하지만 중·러는 이를 통한 미국의 한반도내 영향력확대를 원치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두 나라는 새 평화체제구축방식과 시기문제에는 미묘한 입장차를 드러내고 있다. 중국측은 정전협정 준수를 주장하면서도 지난해 판문점 정전위대표단을 철수시키는등 정전체제의 평화체제로의 조기전환을 유도하려는 자세다. 중국의 이같은 이율배반적 자세의 이면에는 유사시 자동군사개입조항이 포함된 「중·조동맹조약」이라는 특수관계를 일반관계로 바꾸려는 계산도 개재되어 있다는 분석이다.그러나 중국은 기본적으로 남북당사자원칙을 전제로 하는 「2+2」방식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반면 상대적으로 북한과 소원한 관계인 러시아는 남북한과 러·미·중·일 및 기타 유관국이 참여하는 다자회의를 통해 시간을 두고 새 평화체제를 마련하자는 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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