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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음은 북녘 고향에](3)함흥 서상리 출신 김형권 할아버지

    “형님 조금만 기다리시라요,부모님 제사를 함께 모실 날도 멀지 않았구만요” 함경남도 함흥시 서상리가 고향인 김형권(金亨權·70·서울 노원구 상계동) 할아버지는 명절만 되면 울적해진다.1951년 1·4후퇴 때 국군을 따라 혈혈단신으로 남쪽에 내려온터라 찾아볼 가족이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절절한 아픔을 안고 살아온 김 할아버지는 올해 8·15를 전후해 이산가족상봉을 추진키로 했다는 남북 정상의 공동합의문 발표를 듣자 마자 대한적십자로 달려가 가족찾기 신청을 했다. 그동안 셀 수 없이 추진됐던 남북 이산가족 상봉이 매번 실패로 돌아가는것을 한숨지으며 지켜봤던 김 할아버지는 “남북 정상이 직접 만나 결정했으니 다른 때와는 다를 것”이라면서 “만약 이번에도 아무 성과없이 끝난다면더이상 살아갈 기력도 남지 않을 것 같다”고 말했다. 김 할아버지는 부모님이 살아계시리라고 기대하지 않지만 형님 두분과 남동생은 반드시 고향에 남아 있을 것으로 확신하고 있다. 1950년 3월 인민군에 징집됐다가 1개월만에 탈출한 김 할아버지는 인천상륙작전 직후 함흥으로 진군한 국군의 수송차량을 수리해주다 정비병으로 입대했다. 김 할아버지는 1·4후퇴 때 부모님께 “며칠 지나면 다시 밀고 올라올테니그때까지 기다리십시요”라는 말을 남기고 고향땅을 떠난 뒤 다시는 돌아갈수 없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1955년 육군 상사로 제대한 김 할아버지는 다음해 함경북도 청진이 고향인 최춘희(崔春熙·66)씨와 결혼했다.해방전 함께월남한 아내의 가족들이 부럽기만 하다는 김 할아버지는 울적할 때면 북녘고향 얘기로 망향의 설움을 달래곤 한다. 그는 “가만히 눈을 감고 있으면 어릴적 뛰어놀던 발롱산이 눈앞에 펼쳐진다”며 연신 울먹였다. “새벽이면 옆집 양조장에서 술빚는 냄새가 은은했고,어머니는 아침 밥상에 그 유명한 함흥 가자미식혜를 반찬으로 올리셨지.아버지를 따라 갔던 우시장에서 먹던 함흥냉면 맛은 또 어떻고…” 15살 때 함흥에서 배운 운전과 정비기술 덕택에 김 할아버지는 제대 후에도유조차와 화물차를 운전하며 딸 셋과 아들 하나를 남부럽지 않게 키웠다. 김 할아버지는 “자식들을 데리고 고향에 가서 형·아우와 둘러 앉아 함흥냉면을 먹으며 살아온 얘기를 두런두런 나누는 것이 마지막 소원”이라고 말했다. 이창구기자 window2@
  • 이산가족찾기 접수창구 직원 강은희씨

    “할아버지 여기다 이름을 쓰셔야 해요.할머니는 주소를 정확히 써 주세요. (전화벨 소리에)예,이산가족정보통합센터입니다” 서울 종로구 구기동 이북5도청 이산가족정보통합센터의 이산가족찾기 신청접수창구에서 일하는 강은희(康銀熙·27·여·서울 종로구 신문로)씨는 요즘 눈코 뜰새 없이 바쁘다.남북 정상회담에서 올 광복절을 즈음해 이산가족들이 상봉하기로 합의했다는 소식을 듣고 몰려드는 실향민들과 폭주하는 문의전화에 입에서 단내가 날 정도다. 강씨는 17일은 격주로 쉬는 토요일이었지만 휴무를 자진 반납하고 출근했다.그렇지만 실향민 2세인 강씨는 오히려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보내고 있다. 강씨의 아버지는 황해도 연백이 고향으로,1·4 후퇴때 국군과 인민군이 번갈아 고향땅을 점령하는 혼란을 피해 누님 두명과 잠시 남쪽으로 피신했다가 이산가족 신세가 됐다.북한에는 할아버지·할머니,남동생 3명,여동생 1명이 있지만 생사조차 확인되지 않고 있다.지난해 5월 이북5도청에 취직한 강씨는 가장 먼저 아버지의 이산가족 찾기 신청서를 작성해 제출했다. 아버지의 심정을 잘 알고 있는 강씨는 신청서에 적힌 실향민들의 가슴 아픈 사연을 보다가 눈시울을 붉힌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그래서 ‘이번에는 북에 두고온 가족을 만날 수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를 갖고 몰려드는 실향민할아버지,할머니들이 오히려 반갑기만 하다. 강씨는 “이산가족 상봉은 단순히 남북문제가 아니라 천륜·인륜의 문제”라면서 “요즘 젊은이들이 통일에 무관심하다는 말을 들으면 화가 난다”고말했다.또 “남북 정상회담이 성사되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면서“이산가족 상봉이 이번 정상회담의 가장 큰 성과가 될 것”이라고 단언했다. 전영우기자 ywchun@
  • 집중취재/ 남북화해시대- 국가보안법 어떻게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북한을 ‘반국가단체’로 규정한 국가보안법의 개정·폐기에 대해 다시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폐지론자들은 현행 국가보안법을 그대로 유지하겠다는 것은 시대착오적 생각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김대중(金大中) 대통령과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이 ‘6·15 공동선언문’을 통해 합의한 통일,이산가족과 장기수 문제,경제협력 원칙 등을 이행하는데 국보법이 장애가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인권실천시민연대 오창익(吳昌翼·34) 사무국장은 “국보법이 반국가단체의수괴로 규정한 김정일이 국민들에게 감동을 주고,태극기와 인공기가 어우러진 모습이 언론에 연일 보도되는 상황에서 냉전시대의 산물을 유지하는 것은무의미하다”면서 “유엔인권위원회와 미국 등이 악법으로 규정한 국보법은남북 화해·협력 국면이라는 시대 상황에 맞춰 폐지해야 한다”고 말했다. 반면 반대론자들은 국보법이 국가안보를 위한 마지막 보루임을 강조하며 그대로 유지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법조계의 한 관계자는 “북한이 대남 적화통일 전략을 고수하고 있는 상황에서 국보법을 폐지하는 것은 그들의 전략·전술에 휘말리는 것”이라면서“일부 독소조항을 보완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전면 개폐는 옳지 않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국보법 개정은 시대적 추세라는 것이 일반적인 관측이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회원위원장 임영화(林榮和) 변호사는 “대결구도의 이념적 체제를 전제로 한 국보법의 찬양고무죄,불고지죄 등 독소 조항부터 단계적으로 고쳐나가야 한다”면서 “그러나 국보법의 폐지는 최종적인상호 신뢰 완결에 필수적인 만큼 남북교류가 확대됨에 따라 결국 폐지돼야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상록기자 myzodan@. *국보법 무엇이 문제인가. 인권단체들은 98년 12월1일 ‘국가보안법 장례식’을 대대적으로 거행했다. 당시 내세운 슬로건은 ‘국보법 50년이면 충분하다’였다.인권단체들은 당시“법제정 50주년을 맞은 국보법이 이제 더 이상 인권침해의 도구로 악용돼서는 안된다”며 개·폐를 강력히 주장했다. 인권단체들은 국보법 조항의 표현 양식이 추상적이고 애매하기때문에 죄형법정주의에 위배되고 법집행기관이 자의적으로 해석해 오·남용을 불러왔다고 주장하고 있다.인권침해도 여기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이들이 꼽는 대표적인 독소조항은 7조(찬양·고무)와 10조(불고지).특히 반국가단체를 찬양·동조하는 행위를 처벌토록 한 7조는 98년 12월 유엔인권위로부터도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조항으로 지적받았다. 인권침해 논란도 7조에 집중됐다.반국가단체를 찬양·고무·동조하는 행위(1항)나 그런 혐의가 있는 표현물을 만들거나 배포하거나 갖고 있는 행위(5항) 등을 처벌토록 하고 있지만 이들 조항으로 기소된 공안사범의 실형선고율(10%)은 일반 형사범(30%)의 3분의 1 수준에 불과해 무리한 법적용이라는 지적을 받아왔다. 간첩임을 알면서도 수사기관에 알리지 않은 자를 처벌하도록 한 10조도 문제다.친족일 때에는 경감하도록 하고 있지만 단지 신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처벌하는 것은 무리라는 지적이 많다. 특히 2조에 규정된 ‘반국가단체’의 개념에 대해 반론이 많다.‘정부를 참칭(僭稱)하거나 국가의변란을 목적으로 하는 국내외의 결사 또는 단체’는북한을 ‘교류와 협력의 대상’으로 본 남북교류협력에 관한 법률과 모순되고 법적 통일성도 없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인권단체들은 역시 법적 통일성이 없는 8조(회합·통신),국보법위반사범의 구속기간을 일반 형사사범보다 연장할 수 있도록 한 19조(구속기간의 연장),보안사범 수사를 독려하는 21조(포상금 지급)도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박홍환기자 stinger@. *개정작업 어디까지. 국가보안법 개·폐 논란은 80년대 중반 이후 시작됐다.‘통일운동’을 주도해온 재야·학생운동권은 국보법 철폐를 이슈로 삼았다. 하지만 북한의 ‘변화’가 담보되지 않은 상황에서 국보법 철폐 주장은 ‘외로운 메아리’일 뿐이었다. 그러다가 98년 국민의 정부 출범 이후 상황이 급변했다.야당 시절부터 국보법의 대체 입법을 주장해온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의 등장으로 새로운 전기를 맞은 것이다. 해외의 ‘지원’도 잇따랐다.유엔인권위는 98년 12월 ‘국보법 7조(찬양·고무 등)가 표현의 자유를 제한한다’며 적절한 조치를 취하도록 우리 정부에 권고했다. 정부 차원의 국보법 개정 움직임이 본격화된 것은 지난해 7월부터다. 당시 미국을 순방 중이던 김대통령은 “현행법에 독소조항이 있는 만큼 대폭 개정하거나 독소조항이 없는 다른 법으로 대체하는 준비 작업을 추진하고있다”고 말했다. 김대통령의 언급으로 힘을 얻은 여당은 곧바로 국보법 개·폐 논의에 들어가 당론을 확정했다. 반국가단체의 개념(2조)에서 ‘정부 참칭’문구를 삭제하고 7조를 개정하는한편 10조(불고지죄)는 폐지하는 것 등이 주요 내용이었다. 하지만 한나라당과 자민련이 국민회의의 개정안에 소극적이어서 15대 국회에서는 처리되지 못했다. 박홍환기자. *시민단체들 시각. 보수 성향의 단체들은 국보법 철폐는 시기상조라는 입장이다. 한국자유총연맹 배성문(輩成文·42)교육부장은 “아직 자유로이 왕래가 되고 있는 것도 아니고 현실적으로 국군과 인민군이 적대관계를 유지하고 있는상황에서 국보법을 철폐해서는 안된다”고 ‘상황논리’를 폈다. 하지만 북한을 반국가단체로 규정하고 있는 국보법의 논리대로라면 김대중대통령은 반국가단체의 수괴와 회담을 하고 합의서에 서명했다는 모순에 빠진다는 지적이 점점 힘을 얻고 있다. 참여연대,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등 상대적으로 진보적 성향의 단체들은 ‘남북 공동선언과 모순 관계에 있는 국보법을 철폐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한다. 대한변호사협회 인권이사 이석태(李錫兌·47) 변호사는 “국가보안법이 남북 화해와 협력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면서 최소한 북한을 반국가단체의 지위가 아닌 별개의 특수한 존재로 인정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이 변호사는 “국보법은 독재체제에서 민주 인사를 정치적으로 탄압하는 권력의 도구로 쓰여왔다”면서 “고무·찬양,잠입·탈출 등의 규정은 모호하고 추상적이어서 법이론적으로도 문제점이 많다”고 지적했다. 경실련 통일협회 차승렬(車承烈·31) 부장은 “북한을 국보법에서는 반국가단체로 규정하고 있지만 남북교류협력법에서는 공존의 대상으로 보고 있다”면서 “특히 똑같은 말과 행동을 해도 대통령이 하면 남북교류와 평화통일을위한 통치행위가 되고 대학생이 하면 이적행위가 되는 것은 모순”이라고꼬집었다.그는 “국보법은 객관적인 행위에 대해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행위자의 신분에 따라 처벌 여부를 결정하는 셈”이라면서 “합리적이지 못한 전근대적인 법률”이라고 비판했다. 참여연대 박원순(朴元順·45) 상임고문은 “국보법은 남북관계가 진전될수록 점점 사문화될 것”이라면서 “당연히 폐지돼야 한다”고 말했다. 전영우기자 ywchun@
  • 남북 화해시대/ 趙차수 “趙국방 왔으면 좋았을텐데”

    “조성태(趙成台)국방장관은 왜 안오셨습니까” 북한 국방위원회의 제1부위원장 겸 인민군 총정치국장 조명록(趙明祿) 차수가 남북정상회담 기간 중 우리 대표단에게 한 말이다. 정상회담 공식 수행원이었던 한 정부 당국자는 18일 조 국방부장관이 정상회담 대표단에 포함되지 않은데 대해 조차수가 “조장관을 데려왔으면 좋았을 것을…”이라며 아쉬움을 토로했다고 전했다. 북한 군을 사실상 총괄하는 조차수가 우리 국방장관이 오지 않은 것을 아쉬워한 대목은 눈길을 끌기에 충분하다.한편에서는 정상회담을 기점으로 북한군부의 대남관(觀)이 크게 변하는 것 아니냐는 관측까지 나오고 있다. 북한 권력서열 3위인 조차수는 지난 15일 김대중(金大中)대통령 등 남측 대표단 환송 오찬에 양복 차림으로 참석,“국방위는 김 대통령의 평양방문과더불어 마련된 통일건설에 대해 만족한 생각을 갖고 있다”는 인사말을 낭독하기도 했다.14일 만찬에서는 김대통령의 술잔에 술을 따르고 건배를 제의했었다. 북한 해군이 15일 오후 백령도 부근에서 표류하다 서해북방한계선을 넘은우리 어부들을 신속하게 풀어준 사건이나 휴전선의 대남 확성기에서의 대남비난 방송이 사라진 데서도 북한군의 변화가 감지된다. 이같은 변화에 대해 전문가들은 북한 군이 남북공동선언을 전폭적으로 지지하는 모습을 과시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한 통일문제 전문가는 “김 국방위원장의 지시에 따라 군부가 앞장서서 우호적인 변화를 보여주는 것은 김 국방위원장의 자세가 그만큼 적극적이라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김상연기자 carlos@
  • 남북 화해시대/ 양승현기자 訪北記

    벅차오르는 설레임과 흥분,약간의 긴장감으로 뒤범벅이 된 첫 방북.특별수행원과 기자들을 태운 아시아나 항공기가 평양 순안공항에 안착한 것은 정확히 13일 오전 10시20분.김대중(金大中) 대통령 내외와 공식수행원 일행보다남과 북을 잇는 ‘하늘길’을 9분 먼저 열었다. ◆순안공항 첫 취재의 행운/ 공항에 도착하자 수행원과 기자들이 항공기에서내릴 순서가 미리 정해져 있었다.‘취재가 빡빡하겠구나’는 생각이 언뜻 머리를 스쳤다. 가까스로 10인승인 작은 버스를 타고 환영행사장에 도착하니 김대통령의 전용기도 이미 안착해 있었다.그때서야 공항의 전경이 한 눈에 들어왔다.조화(꽃술)를 손에 든 한복 차림의 수만 환영 인파들,인민군 육·해·공군 의장대…. 바로 그 때였다.평양시민들의 떠나갈 듯한 함성과 함께 손에 든 조화가 세차게 흔들리면서 공항은 갑자기 흥분의 도가니로 변했다.아주 순식간이었다. 아직 김대통령이 탑승해 있던 전용기 앞문은 채 열리지 않은 상태였다.‘어,뭐지?’ 공항 입구 저편에서,한 150m 정도 됐을까,갈색 인민복차림에 퍼머머리를한 낯익은 사람의 뒷짐을 지고 카펫 위를 걸어오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이었다.환영인파의 ‘결사옹위,김정일’ ‘만세’ 소리에 느릿한 박수로 화답하는 여유를 보였다.이를 보자 평양 시민들은 발을동동 구르며 열광하기 시작했다. ◆예상깬 파격 의전/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이 순간을 놓쳐서는 안된다는생각으로 수첩에 적기 바빴다.혹시나 했지만,정부관계자 누구도 확인해 주지않았기 때문에 솔직히 그 때까지 출영 사실을 알지 못했다.‘기자로서 정말행운이구나’는 벅찬 감회도 스치고 지나갔다. 그가 카펫 중앙에 서서 주위를 두리번거렸으나 누구도 곁에 다가가지 않았다.통상적인 공항 환영행사 때에 흔히 볼 수 있는 의전에 관해 조언하는 이조차 없었다.그는 유일한 중심이었고,그가 결심하고,판단하고,행동하는 그모든 것이 곧 의전이고 격식이며,관행이 되는 듯 했다.김위원장 스스로 표현했듯이 그는 ‘오랜 은둔생활’을 파격(破格)의 방식으로 청산하고 한국기자에게 처음으로 불과 1m50㎝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김대중’ 연호는 없어/ 일부 언론에서 환영인파들이 ‘김대중’을 연호했던 것처럼 보도했으나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좀처럼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응시했다.그는 조금의 거침도,약간의 막힘도 없이 행동했다.시민들이 외쳐댄 ‘결사옹위’가 독특한 억양으로 ‘김대중’을 연호하는 것으로 착각을 일으켰을 뿐이다. 2박3일 평양 체류기간 내내 기자를 안내한 리윤철씨(38)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제가 담당하는 기자선생이 장군님을 처음 취재하고,악수까지 나눴다고 전해지면서 제가 우리 안내원들 사이에 으뜸이 됐습니다”고 했다.김위원장은 북측에 이러한 카리스마의 지도자다. 김위원장은 뒤에 우리측 인사에게 “내가 공항환영 행사에 나가는 것을 김용순비서가 말렸는데 나갔다.내가 하고자 하는 일을 주변에서 ‘빨간불’을켠다.내가 새 총으로 이 빨간불을 모두 깨트리면서 나갔다”고 말했다.기자의 첫 느낌은 ‘어릴 때부터 받은 지도자 수업이라는 게 정말로 무섭구나’였다. ◆초조한 기다림/ 14일 오후 목란관 만찬은 서울에서 궁중음식 재료를 공수,요리사 20명과 그릇만을 북측의 도움을 받아 김대통령이 초청한 자리였다.공식,특별 수행원들이 모두 와 있었다.이 때에도 오후 3시에 시작된 단독정상회담이 무려 3시간50분 동안 계속됐기 때문에 김위원장이 나올지 반신반의했다. 그런데 대기실에서 기다린 지 10여분이 지난 오후 7시 외교부 의전담당자가 “김위원장이 오실 것같다”면서 “두 분이 나란히 여러분을 앞을 지나가시면 박수로 환영해달라”고 요청했다.7시5분 입구가 떠들썩해지면서 김대통령과 김위원장이 나란히 걸어 들어왔다.예상을 깨고 김위원장은 일렬로 기다리던 우리측 수행원들을 보자 차례로 악수를 청했다.“회담이 잘됐구나”는 느낌이 절로 들었다. ◆김정일위원장과 처음으로 악수/ 재빨리 특별수행원 사이로 끼어들었다.“대한매일 양승현기잡니다”라고 인사를 했더니 얼굴을 빤히 쳐다보면서 힘찬목소리로 “반갑습네다”며 악수했다.기자가 서있는 것에 대해 조금도 의아해하지 않았다.취재현장에서 기자로는 처음으로 그와 악수를 나누는 행운을얻은 것이다. 그의 손은 작은 편이었으나 손마디가 굵고 탄력이 느껴졌다.그는 만찬장도압도했다.‘동방예의지국’이라는 한계를 설정해 놓고서는 자기식의 자유로움과 격의없음을 거침없이 표현했다.앞테이블에 앉은 양복 차림의 박재경장군 등 군장성들을 헤드테이블로 불러내 김대통령에게 직접 술을 따르게 하고,남측 특별수행원들이 권하는 술잔을 “여러 차례 마셨습니다”면서도 ‘원샷’이었다.옆자리의 박재규(朴在圭)통일부장관에게 심부름을 시키고 고은(高銀) 시인의 ‘대동강 앞에서’라는 즉석 시낭송도 그가 빚어낸 작품이었다. [양승현 정치팀
  • [新 김정일 연구](2)’먹는 문제’ 해결사

    찬바람이 밖에서 매섭게 몰아치던 지난 96년12월27일.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김정일 인민군 최고사령관은 집회 비밀연설을 통해 당간부들을 호되게 꾸짖고 있었다.식량난으로 굶주림사태가 벌어지고 있는데 당 일꾼들이 앉아서 회의만 하고 있고 뭣들하고 있느냐는 것이었다.그러면서 “지금처럼 정세가 복잡한 때에 내가 경제실무사업까지 맡아보면서 걸린 문제들을 풀어줄 수 없다.수령님은 생전에 나에게 절대로 경제사업에 말려들어가서는 안된다고 말했다”고 전하며 질책의 강도를 높여갔다. 그로부터 약 1년1개월이 지난 98년1월16일.김정일은 두꺼운 방한복을 입고연형묵 전 총리가 당 책임비서로 있는 자강도의 인민경제 여러 부문의 현지지도에 나섰다.김일성 사망이후 위기타개와 권력기반 구축을 위해 군부 다스리기에만 매달려오던 그가 이례적으로 직접 민생과 경제 챙기기에 나선 것이다. 이를 시발점으로 김정일은 종전처럼 군부대를 잇따라 방문,군부 추스리기에 나서는 한편 그해 3월9일 성진제강기업소를 시찰하는 등 경제부문에 대한현지지도의횟수를 점차 늘려갔다.과학기술발전을 독려하기 위해 지난해 1월11일엔 연초 첫 나들이로 평성에 있는 과학원을 시찰했다. 다시 1년이 지난 올해 1월24일.두툼한 방한복에 털모자를 쓴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찬바람이 쌩쌩 몰아치는 평북 태천군 들판에 나타났다.그가 엄명을내려 추진하고 있는 토지정리사업이 제대로 진행되고 있는지 점검하기 위해서였다. 올들어 김정일은 무려 8차례에 걸쳐 토지정리사업장을 비롯해 발전소,양어장,기계공장 등을 시찰하면서 독려의 고삐를 죄어가고 있다.이처럼 그가 경제살리기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것은 식량난 해결과 경제를 살리지 않고는 체제안정을 이룩할 수 없음을 절감한데다 당과 군부를 완전히 장악해 권력기반을 구축했기 때문에 이젠 경제부문에 눈을 돌릴 수 있는 여력이 생긴 데 따른 것이다. 이같은 김정일의 독려로 지난해 북한의 경제성장률은 9년만에 플러스로 돌아서면서 식량사정 역시 눈에 띄게 나아졌다.이에 힘입어 북한측은 경제회복에 상당한 자신감을 갖기 시작했다.또 김정일이 이번 김대중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시종 여유를 보인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그러나 아직도 북한에서 식량은 크게 부족한 상태이다.더욱 공장을 돌리려 해도 전기가 부족해 산업면에서 큰 타격을 받고 있다. 북한은 올해 신년공동사설을 통해 ‘먹는 문제’의 해결을 강조하면서 종자혁명,감자농사혁명,두벌농사(이모작)및 양어사업의 전군중적 운동을 다그치고 있다.이와함께 증산과 농사의 기계화작업을 촉진하기 위해 토지정리사업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다.특히 김정일은 ‘토지정리는 나라의 부강발전을 위한 대자연개조사업이며 만년대계의 애국위업’이라며 토지정리사업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감자농사혁명에 쏟고 있는 그의 관심과 독려도 대단하다. 김성진.그는 감자가 많이 나는 백두산 인근 산골짜기인 양강도 대홍단군 당 책임비서에 지나지 않는다.그렇지만 북한에서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거의 없다.지난 98년 10월 그곳을 현지지도한 김정일이 ‘동무야말로 진짜배기 혁명가,참된 당일꾼’이라고 극찬하고 그를 따라 배울 것을 촉구했기 때문이다.이 때 김정일은 ‘감자는 흰 쌀과 같다’며 감자증산을 독려하고 나섰다.이처럼 김정일은 토지정리사업과 감자농사를 통해 식량난 타개를 추구하면서 정보산업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또 지난해 하반기부터 계획경제의근간인 연합기업소제도를 대폭 손질하는 등 구조조정에도 힘쓰고 있다. 이제 김정일은 경제사령관으로 전환기 북한경제의 한 중심에 서 있다.그러나 농업구조와 군수중심의 산업구조의 과감한 개혁과 개방,시장경제의 도입없이는 곧바로 한계에 부닥치고 말 것이다. 유은걸기자 eky73002@
  • 金위원장 공항 배웅…3차례 포옹

    김대중(金大中)대통령 내외는 2박3일간의 역사적인 평양 방문을 마치고 15일 오후 5시25분 성남 서울공항을 통해 무사히 돌아왔다.앞서 평양 순안공항에서 열린 환송행사에서는 남북 두 정상이 뜨거운 포옹을 나눠 더욱 가까워진 모습을 다시 과시했다. □공항 환송 김 대통령과 김정일(金正日)국방위원장은 지난 13일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군악대의 연주 속에 인민군 의장대를 사열했다. 이들은 환송나온 평양 시민들의 환호에 간간이 손을 들거나 박수로 답례했다.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평양시민 들은 빨간 꽃술을 흔들며 ‘만세’를 외쳤다.공항 환영행사에서는 ‘만세’와 ‘김정일’을 번갈아 외쳤었다. 공항에는 김영남(金永南)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김용순(金容淳)아태평화위원회 위원장,연형묵(延亨默)자강도당 책임비서,조명록(趙明祿)조선인민군총정치국장 등 북측의 핵심 실세들이 총출동해 눈길을 끌었다.연형묵 비서는이날 공항에 처음 모습을 보였다. 공항에서 백화원 영빈관으로 출발할 때처럼 승용차를 함께 타고 공항에나온 두 정상은 헤어지기 아쉬운 듯 세 번에 걸쳐 뜨거운 포옹을 했다.김 국방위원장은 “또 만납시다”라고 다음을 약속했다.김 국방위원장은 또 이희호(李姬鎬)여사와 오랫동안 손을 잡고 있는 등 2박3일 동안 ‘짧은 정’을 나누었다.이 여사도 북한측 대표단과 일일이 인사를 나눴다. 김 대통령 내외가 비행기 트랩 위로 올라가 기내 안으로 들어갔는데도 김국방위원장은 자리를 뜨지 않고 트랩 밑에서 손을 흔들고 손뼉을 치며 배웅을했다.김 국방위원장 옆에 도열해 있던 김영남 상임위원장 등도 비행기가 이륙할 때까지 서서 손을 흔들었다. □송별 오찬 김 대통령과 김 국방위원장을 비롯한 남한측 수행원과 북한측대표단들은 이날 백화원 영빈관에서 김 국방위원장이 주최한 오찬을 함께하며 석별의 정을 나눴다.특히 두 정상간에 남북공동선언문 합의라는 ‘큰 작품’을 만들어낸 때문인지 감격에 찬 분위기가 계속됐다. 김 대통령과 이 여사를 뒤따라 만찬장에 들어선 김 국방위원장은 헤드테이블에 착석하면서 김 대통령의 의자가 자신과 똑같은 팔걸이없는 의자로 놓여 있자 바로 뒤에 서 있던 군복 차림의 의전장을 불러,“김 대통령께 팔걸이 있는 의자를 갖다주시오”라고 지시했다.그는 특히 “애초부터 준비하지않고”라고 세 차례나 관계자를 질책했다.끝까지 김 대통령에 대한 깍듯한예우를 다하는 모습이었다. 조명록 총정치국장은 오찬사에서 “두 분이 천리혜안으로 민족 이익을 첫째로 해 민족 앞에 역사적 결단을 내려주었다”고 말해 두 정상과 참석자들의박수를 받았다. 이어 우리측 임동원(林東源)대통령특보가 일어서 “7,000만 민족의 염원에평양도 울고 서울도 울었다”면서 “특히 공항에서 김 대통령이 (인민)군 의장대를 사열한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고 새삼 감회에 젖은 표정을지었다. 김 대통령은 임 특보의 답사가 진행되는 동안 감격에 겨운듯 시종 눈을 지그시 감고 생각에 잠기는 모습이었다.답사가 끝난 뒤 두 정상은 서로 잔을마주치며 건배를 했다. 전날 서명서에 사인한 뒤 ‘원샷’으로 축배의 잔을 들었던 김 국방위원장은 “모두들 김정일 위원장이 술 실력이 날카롭다고 하더구먼”하며 “어제10잔이나 마셨다”고 전날의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김 대통령이 “네 차례에걸쳐 먹었다”고 하자 김 국방위원장은 “내가 나이가 젊으니까”라고 겸손해 하며 김 대통령에게 독주 대신 포도주를 권했다. 그는 또 헤드테이블의 이기호(李起浩)청와대경제수석을 향해 “아침에 닭공장 시설을 보라고 했는데 잘 보았느냐”면서 “외국에 많이 다녀봤을 테니까다른 곳과 대비해 어떻더냐”고 물었다.이에 이 수석은 “연간 100만마리를생산하는 규모의 대규모 시설로 자동화됐더라”라고 하자 김 위원장은 “그렇더냐”며 흡족해 했다. 이날 오찬에서 남한측 기업인들은 김 국방위원장에게 “앞으로 협력을 기원하는 뜻에서 술을 한잔씩 권해 주십시오”라고 요청했다.이에 김 국방위원장은 남측 기업인들에게 술을 한 잔씩 돌렸다.참석자들은 박지원(朴智元)문광부장관의 제의로 함께 일어나 손을 잡고 ‘우리의 소원’을 합창했다. □오전 일정 김 대통령은 아침 7시 잠자리에서 일어나 KBS 위성채널을 통해남북 정상회담 관련 보도를 시청한 뒤 핵심 참모들로부터 일정을 보고받고전날의 남북 정상회담 합의서 서명 등에 대한 얘기를 나눴다 김 대통령은 기분을 묻는 박준영(朴晙瑩)대변인에게“전날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의 협상 과정에서 혼혈의 힘을 쏟은 데다 김 위원장의 초청만찬에서 포도주 서너잔을 마셔 숙면을 취할 수 있었고,기분이 아주 좋다”고 말했다. 이어 김 대통령은 이 여사와 함께 닭고기를 고운 국물과 된장찌개,흰밥으로아침식사를 한 뒤 숙소인 백화원 영빈관 정원을 산책했다. 평양 남북정상회담공동취재단
  • [新 김정일 연구](1)총론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으로 한사람의 세계적인 평화통일지도자와 또 한사람의“스타”가 탄생했다.평화통일지도자는 우리의 김대중대통령이고 어느날갑자기 스타가 된 사람은 바로 북한의 국방위원장인 김정일이다.그동안 신비의 인물로 치부돼온 김정일이 베일을 벗고 세상 밖으로 나온 것이다. 김정일도 이번 회담을 통해 통일지도자로 변신해 우리 앞으로 다가왔다.김일성종합대학에 입학,통치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이후 약 33년간의 통치수업,국방위원장에 취임한 93년부터 아버지인 김일성과 함께 해온 분담통치, 94년7월8일 김일성의 타계 이후 3년간 유훈통치,97년 10월 당총비서 추대에이어 98년 9월 국방위원장에 재추대된 이후 40년만의 대변신인 것이다. 우리의 김대중대통령이 61년 강원 인제지구에서 제5대 민의원에 당선됐음을감안할 때 정치적으로는 김대통령이 훨씬 선배라고 할 수 있다.그러나 김정일도 60년대부터 아버지를 따라다니면서 후계수업을 받은 만큼 통치술에서는대단한 노하우를 축적했다고 할 수 있다. 그동안 광폭정치,인덕정치를 내세우며 북한을 다스려온 김정일이 이번 역사적인 평양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통일지도자로서의 면모를 과시하기 시작했다.김대통령이 평양공항에 도착한 13일부터 귀환한 15일까지 김정일은 온 세계 뉴스의 각광을 받았다.텔레비전을 통해 비친 그의 여유있는 웃음,파격적이고 거침없는 언행과 제스처는 우리 국민들을 혼란스럽게 만들고있을 정도이다.실체적 진실과는 관계없이 이제까지 우리 국민들사이에 각인돼온 김정일의 이미지하고는 사뭇 다르기 때문이다.올해초 김대중대통령은외신과의 회견에서 김정일에 대해 지도자로서 판단력과 상당한 식견을 갖춘지도자로 평가한 바 있는 데 이번 정상회담을 통해 김대통령의 평가가 옳았음을 입증한 셈이다. 김정일은 이번에 협상에서 통큰 지도자임을 과시하며 유연함과 치밀한 계산,그리고 상황에 따라 실리를 챙기는 변신을 유감없이 발휘했다.김정일은 지난 14일 김대통령과의 2차 정상회담에 앞선 환담과정에서 실향민,탈북자,한국식 김치등 북에서 금기시하고 있는 표현들을 거침없이 사용해 눈길을 끌었다.특히 탈북자라는 단어를 그가 사용한 것에 대해서는 그의 솔직함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면서도 나름대로 치밀한 계산에서 했을 것이라는 것이 북한전문가들의 공통된 분석이다. 김정일이 이번 정상회담을 통해 획기적인 변신을 보인 것은 남북통일방안에대한 공통성을 인정한 것이다.북한은 회담 하루 전인 지난 12일자 노동신문정론을 통해 김정일의 정치철학이자 통일철학은 “자주”라고 못박았으며 통일지도자라며 대대적인 선전을 폈다.김정일은 그동안 조국통일 3대원칙,전민족대단결 10대강령,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방안등 3가지를 조국통일3대헌장으로 규정하고 김일성주석의 유훈을 받들어 반드시 우리대에 통일위업을 이룩하자고 강조해왔다.북한은 남북정상회담 개최를 위한 4·8합의문에 김일성주석이 제시했다는 조국통일 3대원칙의 재확인을 명기함으로써 이번 정상회담 의제에 3대원칙을 포함시킨데서 김정일이 이를 중시하고 있음을 보여줬다.그러나 김정일이 지난달 29일 중국을 방문했을 때 1국2체제의 통일방안에대해 관심을 표명한것을 눈여겨 볼 대목이다.특히 이번 회담에서 양측이 남북통일을 지향하는 단계로 외교와 군사에 관한 권한을 연합[연방]정부가 아니라 지금처럼 남북이 별도로 갖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합의한 것은 획기적인일이다. 역사적인 이번 회담을 통해 김정일에 대한 재평가가 폭넓게 이뤄지고 있다. 그러나 김정일에 대한 평가는 시간을 두고 냉정하게 이뤄져야 한다.김정일이김대통령과의 환담에서 자기를 낮추고 예의를 지킨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하는 말 가운데 공산주의자라는 말을 사용한 점과 모든 것이 계산에 의해 이뤄지고 있음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조선노동당 총비서이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위원장이며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인 당과 인민의 위대한 영도자”라는 이 세상에서 가장 긴 직함보다는 “장군님”이라는 호칭 사용을 선호하는 김정일이 앞으로이번 합의사항을 얼마나 충실이 이행하느냐에 따라 그의 평가도 달라질 것이다. 유은걸기자 eky73002@
  • 남북 화해시대/ 金新朝목사의 벅찬 감회

    “이제야 통일의 새 아침을 맞게 됐습니다.” 지난 32년 동안 남모를 한을 가슴에 품고 살아온 충남 예산 성락교회 김신조(金新朝·58)목사가 남북정상회담에 대해 느끼는 감회는 남다르다.그는 지난 13일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평양 순안공항에서 두손을 맞잡고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보고 가슴이 터질 듯한 감격에 부인 최정화(崔正化·55)씨를 얼싸안고 목놓아 울었다. “박정희 목아지 따러 왔쉐다.” 삭풍이 살을 에이던 지난 68년 1월21일 북한의 특수부대 124군단 소속으로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기 위해 청와대를 습격했던 ‘냉전시대의 전사(戰士)’.그는 이제 고향인 함북 청진에서 복음을 전하는 ‘통일시대의 목자’를꿈꾸고 있다. 68년 당시 김씨의 투항으로 청진에서 직업동맹위원장을 지낼 정도로 ‘독실한 공산주의자’였던 아버지와 어머니는 처형당했다.인민군 소좌였던 매형을 비롯,6남매 가족과 공군 장성을 지낸 작은아버지 등 친척도 모두 숙청당해소식이 끊겼다. 70년 4월 삼부토건에 취직한 뒤 반공강연 등으로 살았지만 가시밭길의 연속이었다.부모님을 돌아가시게 했다는 죄책감이 엄습할 때면 자녀들이 학교에서 ‘공비 자식’이라고 놀림받을 때면 술에 빠져들었다.그러다가 81년 아내의 손에 이끌려 교회에 나가면서 마음의 평화를 얻었다.97년 1월에는 서울영등포구 신길동 성락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목회자의 길로 접어들었다. 김씨는 “나는 전쟁의 불씨를 지고 남쪽에 왔던 사람”이라면서 “김정일위원장이 서울을 방문한다면 전쟁의 불씨는 완전히 사라질 것”이라고 단언했다.또 김위원장이 서울에 온다면 북한의 변화도 훨씬 빨라질 것으로 내다봤다. 오랜만에 고향 말투를 들으니 반가웠다는 김씨는 “북한 사람들은 배가 고파도 내색을 하지 않을 만큼 자존심이 몹시 강하다”면서 “김위원장이 김대통령을 공항에서 직접 영접하는 것을 보고 진심으로 환영하는 것 같아 가슴이 뭉클했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와서 과거를 따지는 것은 상처를 덧나게 할 뿐”이라면서 “서로를 이해하려면 지금까지보다 더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충고했다. 친구들이 금강산 관광을 같이 가자고 했지만 행여 북측을 자극할까봐 사양했다는 김씨는 “이제 때가 된 것 같다”면서 “고향에 가서 나 때문에 고통받은 형제들에게 용서를 구하고 부모님 묘소라도 찾아보고 싶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전영우기자 ywchun@
  • 홍성원 6·25대하장편「남과북」전6권으로 改作

    작가 홍성원이 23년전에 완간했던 ‘남과 북’(전 6권·문학과지성사)을 개작해 다시 내놓았다. 지난 77년초까지 월간 ‘세대’에 5년2개월동안 ‘6·25’란 제목으로 장기연재됐던 이 소설은 한국전쟁 발발 직전인 1950년 4월부터 휴전이 성립된 직후의 1953년 9월까지 3년 반 기간을 다룬 6·25 대하드라마다.작가는 1만 장이 넘는 원고의 보완과 개작을 위해 꼬박 1 년 간의 시간을 투자했다고 개정판 서문에서 밝힌다.묵은 문장을 손질하고 냉전 시대의 ‘사나운 표현’들을 교체하고(북괴를 북한,괴뢰군을 인민군 등으로),새로운 주인공을 등장시키고,중복된 일부 내용은 과감히 삭제했다는 것이다. 작가 말대로 ‘남과 북’은 냉전 체제의 이데올로기가 서슬 푸르게 살아 있던 1970년대에 씌어진 작품이다.이미 77년 2월의 초판 후기를 통해 작가는북한에 대한 표현의 상한선이 ‘감상적인 민족주의 언저리거나 당국에 의해철저히 도식화된 반공 가이드라인 내’로 제한된 사실을 적시했었다.그후 20여년이 지나 “‘한국 전쟁’을 소재로 다룬 작품에서 전쟁의 절반을 담당한 북한 쪽 이야기를 빼버린다는 것은,표현상의 불평등 못지않게 공평하지 못한 일” 이며, “작품 ‘남과 북’이 한국 전쟁을 제대로 그리는 데 한계가있었다” 고 고백하면서 개작에 나선 것이다.작가는 북한 쪽 주인공을 작품에 새롭게 등장시킨 점을 이번 개작의 가장 큰 자랑으로 여기고 있다.새로운 등장인물은 ‘자본주의 압제로부터 인민을 해방하여 사회주의 조국 통일을완수한다’는 북한측 전쟁 목표와 관련해 원래의 꿈을 잃지 않으려고 혼신의노력을 다하는 ‘건강하고 아름다운’ 사회주의자다. 그러나 이번 개정판의 이같은 보완은 말 그대로 보완일 따름이다.작가가 초판부터 언급한 ‘남과 북’의 본질적인 한계가 이 보완으로 극복되는 것은아니다.마찬가지로 이 작품의 장점과 매력은 이로 해서 훼손되지 않는다.변화의 급류가 굽이친 20여년이 흘렀지만 이 소설은 아직도 읽고 주목할 가치가 있다.비록 제목과는 달리 남한 쪽에 꽉 붙잡혀 있긴 하지만 홍성원은 6·25의 ‘전모’를 드러내고자 한다.작가라면 누구나 가질 것같은이같은 목적의식은 그러나 20년 전에도 드물었고 지금도 흔하지 않다. 6·25는 수많은 한국의 소설가에게 심연의 대광맥이지만 그 채광의 결과물을 보면 가치 이전에 너무 개인적이거나 이데올로기적인 편향성을 어쩌지 못한다.품위를 잃지 않아 온 최초의 전업작가라고 할 수 있는 작가 홍성원은이와 달리 요컨대 6·25를 휼륭한 이야기 소재로서 접근한다.물론 작가는 ‘남과 북’이 6·25를 졸업하기 위한 졸업 논문과 같다고 말하고 6·25는 하루속히 졸업해야 될 우리 모두의 고통스런 과제라고 덧붙이고 있다.그러나작가는 6·25를 우리의 역사적인 개별 사건으로서보다 폭력과 자기 파괴의극단적인 현장인 인간의 전쟁으로 보려고 노력한다.역사·이데올로기 우선시대에는 역사성이 부족하고 경박·통속적이라는 평을 면치 못해 왔지만 그런과잉시대가 지나간 지금 ‘전방위적 이야기꾼’이 하는 ‘남과 북’의 스토링텔링은 이번 개작을 맞아 다시 주목할 가치가 있다. 6·25에 대한 이 작품의 ‘총체적 조망’을 확신하는 작가는 “30여 명의주인공들이 등장하는데 국군·미군·중공군 등 각기 다른 국적의 여러 군인들을 비롯하여,한국 기자와 미국 기자·학자·상인·지주·의사·브로커·양공주·전쟁 고아·건달 등 온갖 계층의 사람들이 저마다 전쟁에서 살아남기위해 자기의 최선을 다한다”면서 “영웅도 없고 승자도 없이 오직 패자만을 다량으로 생산한 이 전쟁은,바로 그 패자들의 눈을 통해서만 황량한 전체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전자책(e-book) 동시출간. 김재영기자 kjykjy@
  • 남북 정상회담/ 在日 민단·조총련 표정

    13일 일본 전역에 NHK TV 등을 통해 김대중(金大中) 대통령과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의 평양 첫 대면이 생중계되자 60만 재일동포들은 국적의 남북에 관계없이 두 정상의 만남에 흥분하고 탄성을 질렀다. [민단] 도쿄의 민단 본부에서는 60명의 직원들이 TV 앞에서 ‘세기의 순간’을 지켜봤다. 정진일(鄭眞一) 선전국 부국장은 “믿을 수 없는 광경”이라면서 “김국방위원장이 김대통령 영접을 나와 박수를 치는 모습에 소름이 끼쳤다”고 흥분하는 모습이었다.‘민단신문’의 이청건(李淸鍵) 편집차장은 “21세기의 역사적 영상”이라면서 “이산가족의 문제가 잘 진행되기를 모두가 바라고 있다”고 말했다. 오사카(大阪)에서 상점을 경영하고 있는 한 재일 한국인은 “과거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남북 통일이 실현가능한 것으로 보이기 시작해 매우 기쁘다”고 말했다. [조총련] 조총련 본부에서도 이날 150여명의 본부 직원들이 일손이 잡히지않는 듯 TV가 있는 사무실에 삼삼오오 모여 남북 정상의 첫 대면 모습을 생중계로 지켜봤다.직원들은 두 정상이 악수하는 모습에 ‘만세’를 외치기도하고 박수로 치기도 했다.조일남(趙一南) 국제국 부국장은 김위원장의 공항영접에 대해 “예상하지 못했던 것도 아니었지만 새삼 감동을 느꼈으며 두정상의 열의도 느껴졌다”고 말했다. 조총련 기관지 조선신보의 한 기자는 “인민군 의장대의 사열과 분열은 최대의 환영표시”라며 “김국방위원장이 이처럼 손님을 영접한 일은 전례가없다”고 말했다. 황성기기자 marry01@
  • 남북 정상회담/ 북한측 최상급 의전

    북한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과 의전은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의 평양방문 첫날인 13일부터 파격(破格) 그 자체였다. [김정일 위원장 공항영접] 이날 오전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한 김대통령 내외의 영접에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이 나간 것은 처음있는 일이다.김 위원장은 김일성(金日成) 주석의 초청으로 84년 5월4일 북한을 특별열차편으로방문한 후야오방(胡耀邦) 중국 공산당 총서기를 평양역에서 김 주석과 함께영접했을 뿐이다. 김 주석은 80년초 몽골 대통령의 북한 방문 때 공항에 영접나간 적이 있다. 김 위원장의 공항영접은 북한이 김 대통령을 국가원수로서 최고의 예우를 했다는 뜻으로 풀이된다.94년 지미 카터 전 미대통령이 판문점을 통해 평양을방문했을 때도 평양에서 김영남(金永南) 부총리 겸 외교부장이 영접했었다. [숙소까지 동승] 영접에 이어 김 대통령의 숙소인 백화원 영빈관까지 김 위원장이 동승한 것도 파격이다.두 정상은 동승한 리무진에서 첫 대면의 어색함을 털고 자연스럽게 친밀감을 쌓았을 것으로 보인다.이 자리에서 김위원장은 격의없는 대화를 주문했다.특히 김 위원장은 김 대통령에게 상석인 뒷자리 오른쪽을 안내하면서 김 대통령이 먼저 차에 오르자 옆자리에 앉았다. 김 위원장의 동승으로 이희호(李姬鎬) 여사는 두번째 차량을 이용했다.외교대국인 프랑스는 국빈방문 때 대통령이 공항에 영접을 나가 영빈관까지 동승하는 최고의 의전을 해왔으나 시라크 대통령 때부터는 의전간소화 지침에 따라 이런 극진한 예우가 사라졌다. [의장대 사열 및 분열] 북한 인민군 육·해·공군으로 구성된 의장대가 이날순안공항에 도착한 김 대통령에 대해 사열과 분열 등 의장행사를 한 점도 특이하다.북측의 군 의장행사는 정상회담을 준비해온 통일·외교통상부 관계자도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의장행사는 북측이 남북관계를 국가 대국가 관계로 새롭게 규정되는 사례라는 해석이다. [두 정상 환담] 김 위원장은 남측 공동취재단 기자 2명이 접견실에 있는데도김 대통령, 공식수행원들과 격식을 차리지 않고 거침없이 말을 이어갔다.박지원(朴智元) 문화관광부 장관을 보고는 “남북 정상회담 합의때 TV에서 많이 봤습니다”라고 큰소리로 말해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다. 김 위원장이 94년 김영삼(金泳三)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과의 정상회담 합의때 김 주석의 심정을 털어놓은 것도 보통의 일은 아니다. 황성기기자 marry01@
  • 순창 회문산 일대 ‘비목 공원’ 조성

    6.25전쟁 당시 빨치산의 본거지였던 전북 순창군 구림면 안정리 회문산에평화와 화합을 기원하는 비목(碑木)공원이 세워졌다. 산림청과 순창군은 최근 회문산 일대에 총 5억4,000만원을 들여 평화와 화합을 상징하는 조형물과 양민희생자 위령탑,남부군 총사령부,테마공원 등을조성했다고 13일 밝혔다. 공원에는 평화가 가득한 21세기가 되기를 기원하는 뜻에서 하늘·땅·인간(天·地·人)을 상징하는 태극모양의 평화 탑과 하늘에 간절한 소망을 빌때쓰였던 솟대 21개가 들어섰다. 또 전사한 전우의 신원을 파악할 때 사용됐던 비목과 양민·국군영령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한 시비, 시련과 해원, 소망과 사색을 상징하는 숲, 40m의 거리 양쪽에 찔레꽃을 심은 시련터널 등이 만들어졌다. 특히 회문산 중턱에는 빨치산 총지휘부로 사용됐던 남부군 총사령부가 복원됐다.건물 주변에는 인민군의 숙소인 움막과 통신기기를 사용하기 위해 사용됐던 물레방아 발전시설(수차시설) 등이 설치돼 전쟁 당시 인민군의 생활상과 전투상황 등을 한 눈에 살펴볼 수 있도록했다. 순창군은 6.25전쟁 50주년을 맞는 오는 25일 공원에서 해원과 화합,통일을기원하고 양민 및 국군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한 제1회 비목문화제를 개최하기로 했다. 순창 임송학기자 shlim@
  • 남북정상회담/ 북한 관련 사이트 클릭 ‘봇물’

    남북 정상회담을 앞두고 회담 성사를 기원하는 인터넷 행사가 인기를 모으고 있다. 북한 관련 사이트도 속속 문을 열고 있다.평양학생소년예술단의 서울공연을동영상으로 보여주는가 하면 북한 법률을 소개하는 사이트도 등장했다. 대화방 전문검색사이트인 챗파인드(www.chatfind.co.kr)가 지난 열흘 동안인터넷에서 실시한 정상회담 기념행사에는 500여명의 네티즌이 몰렸다.‘남북 정상회담에 바란다’는 주제로 남북 정상에게 바라는 네티즌들의 마음을전하는 이번 행사에서 네티즌들은 정치와 교육,환경,청소년 등 다양한 주제의 글을 올렸다.챗파인드는 네넷티즌들이 올린 글을 모아 통일부 등 관련 부처에 전달할 예정이다. ㈜평화자동차는 최근 ‘남북 정상회담 경축 평양학생소년예술단 서울공연’사이트(www.dprk.co.kr)를 열었다.평양학생소년예술단의 최근 서울 공연을동영상으로 제공하는 이 사이트에는 7만명 이상이 다녀갔다. 엔타임닷컴(www.ntime.com)도 14일까지 남북 정상회담 기념 ‘북한 바로알기’캠페인을 하고 있다.행사기간 중 사이트를방문,북한 관련 문제 8개를차례로 맞추면 추첨을 통해 선물을 준다. 국가정보원 홈페이지(www.nis.go.kr)는 지난 3일 남북 정상회담 코너가 개설된 이후 이 분야 조회건수가 3,000여건을 넘어섰다.국정원은 청와대와 통일부 등 남북 정상회담 관련 정부자료를 재분류,정리해 놓고 있다. 인터넷 자동차 토털 서비스업체인 ㈜카마스는 남북 정상회담의 성공적 개최를 기원하는 특별행사의 일환으로 13∼17일 전국적으로 ‘실향민을 위한 자동차 무료 점검 및 엔진오일 보충·교환서비스’를 갖는다.카마스는 남북 정상회담 기간인 13∼15일 임진각 주차장에서 무료 점검을 해주고 행사기간 중본사(02-858-5611)나 인터넷(www.camas.co.kr)으로 신청받아 전국 300여개지점을 통해 무상 점검해줄 계획이다. 북한 영화와 북한 법률을 전문으로 하는 사이트도 생겼다.㈜무비랜드가 11일 문을 연 북한 영화 사이트(www.dprkfilm.com)는 해방 이후 현재까지 북한영화의 흐름을 시원기와 보존기,화력집중기,전성기 등 시기별로 정리한 ‘북한 영화사’를 비롯,북한의 영화 제작시스템과 장르별 영화를 소개하고 있다.또 북한에서 활동하고 있는 배우와 감독,작가 등 영화인에 관한 자료도찾아볼 수 있다. 법률 포털사이트 나라아이넷㈜(www.yeslaw.com)은 남북 정상회담이 열리는이번주(12∼17일) 동안 북한법과 북한 관련 법(대한민국 현행 법령 내)을 담고 있는‘북한법과 북한 관련 법’코너를 신설,서비스에 들어간다.북한법은기본적인 사회주의 헌법과 북한에서 사업을 할 때 꼭 알아두어야 할 개방 관련 법률로 구성됐다. 김재천기자 patrick@. *실향민 김인덕할머니의 애특한 '대동강 편지'. “남북 언니와 오빠를 찾아 주세요.” 남북 정상회담을 하루 앞둔 12일은 김인덕 할머니(64·경기도 시흥시 신천동)에게는 어느 때보다도 기나긴 하루였다.눈 앞에는 고향 마을 풍경이 아른거렸다. 북녘에 있을 때 시집간 넷째 남북 언니(72)가 쪽찐 머리로 고향집을 찾은것이 마지막이 될 줄은 몰랐다.1·4후퇴때 함께 피란나온 부모님과 첫째,둘째,셋째 언니는 모두 돌아가시고 연평도에 사는 여동생(65)만 남았다. 이제 마지막 소원은 40여년간 소식을 알 길이 없는 남북 언니와 바로 위 오빠 홍진씨(68)를 한번이라도 만나는 것뿐이다. 김 할머니가 14세때까지 어린 시절을 보낸 고향은 서해의 조그마한 섬 초도의 장골.지금 살고 있는 경기도 시흥과는 불과 200여㎞ 밖에 떨어지지 않은황해도 송화군 풍해면 어촌이다.그 시절 아버지는 넷째가 딸로 태어나자 ‘남북이 통하듯 일이 풀려 다섯째는 사내 아이가 태어나기를 기대한다’는 뜻으로 이름을 남북으로 지었다. 50년 18세의 나이로 송화군과 이웃한 육지의 신천으로 출가한 남북 언니는친정에 첫아들을 맡겨 김 할머니가 조카를 업고 1시간을 넘게 근처 초등학교를 돌아다니기도 했다.시집 가기 전에 언니는 1949년 어느날 아버지가 생선을 잡아 진남포 부두에 내다 팔러 간 사이 오빠가 인민군으로 징용나간 일을되풀이해서 얘기해주곤 했다.당시 오빠는 아버지를 기다리다 저녁밥을 먹고는 훌쩍 떠나버렸다. 1·4후퇴때 황망하게 쪽배에 몸을 실어 경남 진도에 안착한 김 할머니 가족은 그동안 백방으로 언니,오빠의 행방을 수소문했으나 찾지 못했다.김 할머니는 11일 이북 5도민 홈페이지(www.ibuk5do.go.kr) ‘대동강 편지’에 “북에 계신 남북 언니와 오빠를 찾는다”는 글을 올렸다. 송한수기자 onekor@
  • 북한을 움직이는 사람들/(중)軍部

    북한의 군(軍)은 김정일(金正日)체제 수호의 보루.김 국방위원장이 김일성(金日成)주석의 후계자로 자리잡을 수 있었던 것도 군의 힘이 컸다.친위세력들이 포진해 있음은 물론이다. 핵심인물은 조명록(趙明祿·70)총정치국국장.군대의 정치적 통제를 총괄하면서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김영남(金永南)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에 이어 당 서열 3위로 군부인사 중 가장 높다.해방전 만주비행학교를나온 북한공군의 1세대.공군사령관 등을 거쳤다. 조명록을 북한군의 축이라고 한다면 김영춘(金英春·68)총참모장·김일철(金鎰喆·72)인민무력상은 양 날개.조명록과 김영춘은 혁명열사자녀들만 다닐 수 있는 만경대혁명학원출신.김 무력상은 해군대학·소련해군대학·해군사령관을 지낸 해군통이다. 지난 5월말 중국 비공식방문때에도 조명록과 김영춘은 김 국방위원장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면서 핵심 측근임을 확인시켰다.이들이 실제적으로 군부를 운영하고 있다면 이을설(李乙雪·80)호위총사령관,백학림(白鶴林·79) 인민보안상은 항일유격대 출신의원로그룹으로 군부내 김정일 후견세력이다. 백학림은 김일성주석이 이끌던 유격대 전령출신으로 알려져 있다.김주석 생전 개인경호를 담당하는 호위처장 겸 수석부관으로 그림자처럼 보좌했다.당중앙위원,인민군 차수,최고인민회의 법제위원장을 겸하면서 사회안전분야에도 깊이 관여하고 있다. 인민군 총정치국의 현철해(玄哲海·66)조직담당 부국장,박재경(67)선전담당 부국장 등도 김위원장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하는 최측근인사.현 부국장은 김위원장의 죽마고우로 만경대혁명학원출신. 당 군사위원회와 국가 국방위원회는 군부 통제는 물론 국가운영의 핵심 축. 지난 94년 김 주석의 사망후 위상이 계속 강화되고 있다.경제난속에 사회 안정의 확보를 위해 군에 대한 의존도를 높이기 때문이다.김위원장은 중앙군사위 위원도 겸하고 있다.중앙군사위 위원장은 공석.조명록이 군사위 제1부위원장을 맡고 있다.이용무(李勇武·78)국방위 부위원장,김익현(金益鉉·80)당 인민보위부장,이하일(李河一·64)당군사위위원 등도 서열 30위안에 드는 주요 지도자. 오극렬(吳克列·70)당 작전부 부장,장성우(張成宇·65)전 호위총국장 등도군부내 핵심세력.현 3군단장인 장성우는 김위원장의 처남인 장성택(張成澤)의 친동생.전문가들은 군부에 대한 김위원장의 장악력은 반석위에 서 있다고 평한다. 이석우기자 swlee@
  • 북한을 움직이는 사람들/ (상)노동당

    오늘의 북한은 누가 움직이고 있나.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을 보좌하며당과 군,정부에서 핵심역할을 하고 있는 실세들을 세차례에 걸쳐 살펴본다. 북한을 이끌고 있는 권력의 핵심기관인 조선노동당의 비서국.김정일위원장의 최측근들이 포진,매일 정부부처와 사회 각 조직에서 올라온 보고를 챙기고 지시하며 북한을 이끌고있다.정점인 총비서에는 김위원장이 있다. 체제유지의 보루인 정부와 군의 각종 정보·사찰기관을 총괄하는 공안비서는 계응태(桂應泰·75).대내외의 각종 정보를 김위원장에게 직보하며 체제수호의 첨병역할을 하고 있다.당 국제부 부장,무역성 부상·부장을 역임했다. 남북문제를 책임지고 있는 김용순(金容淳·66)대남비서는 실세그룹 중 한사람.김위원장과 함께 술자리를 함께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최고지도자의 ‘이너 서클’사람 중 하나.김위원장이 광범위한 현안을 편안하게 협의하고 있는대상자란 평.아태평화위 위원장·조평통 부위원장 등을 함께 맡으며 대외관계에도 깊이 관여한다. 북한 내 각종 공직의 인사를 좌지우지하는 김국태(金國泰·76)간부비서도핵심 실세.김일성주석의 혁명동지인 김책의 장남.인민군 총정치국 부총국장과 사회안전부 정치국장 등을 거치며 김일성-김정일 체제구축에 역할을 한것으로 알려져 있다.당내 대표적인 이론가.김위원장의 공식시찰을 그림자처럼 수행하고 있다.혁명가 가족들만이 나올 수 있는 만경대혁명학원 1기생이며 김일성대학을 거쳐 소련군사대학 정치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한 수재. 김기남(金己男·74)선전비서는 김위원장의 입.김정일사상을 선전하고 그의이름으로 발표되는 문서나 축하문 등을 관리·대필한다.후계체제와 관련,일찍부터 김위원장의 편에 서서 측근 중 측근으로 자리잡았다.‘우리식대로 살자’ 등의 구호를 만들어내기도 했다.김일성종합대학과 옛 소련의 고급당학교를 졸업했고 노동신문 책임주필 등을 역임했다.‘구호제조기’란 평. 군수담당 비서인 전병호(全炳浩·74)와 한성룡(韓成龍·73)도 북한경제를주무르는 양 축.전비서는 지난 71년부터 10년 동안 기계공업부장으로 일했고82년부터 북한경제의 주축인 군수공업을 총괄해 왔다. 민간인이면서 국가군사위원회 위원이다. 장성택(張成澤·54)조직지도부 제 1부부장은 비서 반열에는 들지 못하지만김위원장을 대신,비서국 일을 총괄하고 있는 ‘2인자’다.김위원장의 친여동생 김경희(金敬姬)의 남편.김일성대출신으로 89년 평양축전과 광복거리 ,5·1경기장 등 주요 건설을 총괄해 호평을 얻었다. 이들 핵심 비서들은 대부분 북한의 ‘명문 혁명가족’출신으로 김일성대학이나 만경대혁명학원을 졸업하고 모스크바 유학 등을 마친 엘리트들.80년대김정일체제확립 이후 연속적으로 북한 권력의 주류로서 행사하고 있다.대부분의 비서들이 고령화되면서 김위원장과 같은 연배의 제1부부장들이 급부상하고 있다. 이석우기자 swlee@
  • [외언내언] 평양교예단

    어린 시절 서커스는 동경과 공포의 대상이었다.어느날 문득 나타난 서커스단이 천막을 치고 울긋불긋한 만국기를 내걸면 읍내 전체가 흡사 마술에라도걸린듯 들뜬 분위기가 됐다.그러나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묘기가 모진 학대와 혹독한 훈련의 결과이며 신참 단원의 유연성을 유지하기 위해 식초만 먹인다는 소문은 막연한 두려움을 안겨주었다.그 공포는 나중 찰리 채플린의‘서커스’에서처럼 “착취계급의 돈벌이 수단”이 된 이들에 대한 연민으로 바뀌고,다시 자생력을 잃고 사라져가는 서커스 그 자체에 대한 형언할 수없는 비애감으로 바뀌었다. 서커스에 대한 이 복잡한 상념은 베이징 아시안 게임 당시 중국 교예단 공연을 관람하면서도 다시 떠올랐다.중국의 교예는 우리 서커스처럼 낡고 촌스러운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떠나는 자의 쓸쓸한 뒷모습을 얼핏 본 듯했고,도저히 사람의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기기묘묘한 포즈들은 저 어린 시절의 공포를 다시 일깨웠다.식초만 먹는 어린 단원들의 안쓰러운 모습과 함께…. 그러나 지난달 금강산 관광길에온정리에서 관람한 평양 모란봉 교예단 공연은 무언가 달랐다.물론 처음엔,단원들이 고난도 기술을 익히기 위해 얼마나 고되고 오랜 훈련을 받았을까 생각하느라 환호하는 다른 관객들처럼 공연에 몰입할 수 없었다.공연이 시작되기 전 생음악 반주를 맡은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꾸역꾸역 밀려드는 관광객들을 바라보는 눈길에 가슴이 아려 온 탓도있었다. 그러다가 “선입견이나 복잡한 생각을 버리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자”는 쪽으로 마음을 정리했다.사라져 가는 것의 쓸쓸함도,공포의 그로테스크함도 없이 다가오는 압도적인 어떤 힘 때문이었다.그 힘은,북한의 교예가전용 극장과 전문인력 양성기관까지 지니고 단원들이 최고의 예술가로 대우받는 데서도 기인하겠지만 단순한 묘기나 오락을 넘어선 치열함과 건강함에서 비롯되지 않았나 싶다. 첫 남북정상회담을 축하하는 평양교예단의 서울 공연이 4일 잠실 실내체육관에서 열려 1만2,000여 객석을 가득 메운 남측 관객들로부터 열렬한 환호와기립박수를 받았다. 모란봉 교예단보다 한수 위로 알려진 평양교예단의 이날공연에 대해 한 기자는 “강인한 의지와 순결하면서도 소박한 정신이 뭉쳐만들어 낸 어떤 ‘기’로 남한 사람들 마음을 사로잡았다”고 보도하고 있다.80∼90년대 이루어진 남북적십자회담이나 남북고위급회담 당시에는 남측 대표단이 평양교예극장과 인민군교예극장 등에서 북한 교예공연을 관람했다.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대표단보다 먼저 장애인과 소년소녀가장,군위안부 출신할머니들을 포함한 남쪽의 일반시민들이 북한 교예단 공연을 관람한다는 것또한 뜻깊은 일이다. 임영숙 논설위원. @
  • 남북정상회담 D-10/ 金正日국방위원장 訪中파장

    김정일(金正日) 북한 국방위원장의 방중은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여러 면에서 한반도와 동북아 정세에 적지않은 파장을 몰고올 것으로 예상된다. 10년만의 북·중 정상회담을 계기로 양국 공조가 복원됨에 따라 남북정상회담 이후 한반도에서의 새로운 변화가 펼쳐질 것이란 전망이다. 이번 북·중 정상회담에서 양국은 ▲북·중 양자관계 ▲북·중 양국의 국내정세와 중국의 개혁개방 문제 ▲남북정상회담 등 세가지 의제를 집중 협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가장 관심을 끈 대목은 중국 개혁개방 정책에 대한 김 국방위원장의 ‘성공적’ 평가다.그동안 ‘주체적 경제발전’ 때문에 의도적으로 중국의경제발전을 평가절하해온 터라 향후 대외개방에 있어서 중국식 모델의 적극도입을 강력히 시사한다. 하지만 급속한 대외개방에 따른 북한 체제유지의 어려움 때문에 ‘점진적개방’을 염두에 둘 것이란 분석이 유력하다.남북경협에 있어서도 나진·선봉 지구처럼 외부와 단절된 ‘경제 공단건설’ 등에 주력할 것으로 보인다. 김 국방위원장은 중국의 경제발전 현황을 직접 시찰했다.30일 중국의 ‘실리콘 밸리’로 불리는 중관춘(中關村)과 중국 최대의 개인용 컴퓨터(PC) 제조업체인 렌샹(聯想) 그룹을 방문한 것으로 확인됐다.중국 경제발전의 상징을 시찰함으로써 향후 북한의 대외개방과 경제발전의 방향을 상징적으로 암시했다는 분석도 나온다. 이번 북·중 정상회담에서 한반도 평화정착 방안에 대해서도 심도있는 협의가 있었다는 후문이다.하지만 미국의 동북아 영향력 확대를 경계하는 중국과 북한으로선 한·미·일 3국 공조에 맞서는 방향으로 논의가 진행됐을 가능성이 높다. 수행 인사들도 조명록(趙明祿) 인민군 총정치국장 등 당과 군의 핵심 측근들이 대거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외교부의 한 관계자는 “김 위원장의 방중 자체가 북·중 공조를 복원시켜 향후 한반도와 동북아 정세변화에 주도권을 쥐자는 취지”라고 밝힌 것도 이런 맥락이다. 하지만 정부 당국은 북·중 정상회담이 남북정상회담 성공적 개최와 향후한반도 평화정착에 순(順)기능으로 작용할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정부 당국자는“김 위원장의 방중은 최근 북한의 대외관계 협력 증진 노력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라며 “향후 남북대화와 협력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북·중 관계복원이 한·미·일 3국 공조를 견제하는 의미도 적지않아향후
  • 金正日 국방위원장의 어제

    남북 정상회담을 앞두고 김정일(金正日)국방위원장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일본 시사 주간지 ‘사피오’(SAPIO)가 최근 ‘김정일 대도감(大圖鑑)’이란 특별편집판을 발간,이목을 끌고 있다.‘거짓말의 독재자,일본을 아직도 위협하는 무법국가 북조선을 철저 해부’라는 부제가 붙은 213쪽짜리 대도감은 북한과 김 국방위원장에 대한 그릇된 선입견에서 출발하고 있는데다 이미 알려진 얘기들이 대부분이어서 궁금증을 푸는 데 큰 도움은 되지 못한다.그러나 지금까지 공개되지 않았던 어릴 때 사진을 발굴해 싣는 등 몇가지 점에서 흥미를 끄는 대목도 있다.총 3부로 구성돼 있는 이 책자는 1부 ‘스파이·핵 개발의 진상’,2부 ‘인간 김정일 철저 해부’,3부 ‘조선인민군 대연구’로 나누어 북한과 김 국방위원장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75년 7월 한 광산을 방문해 관계자들과 악수를 나누고 있는 김정일.33세의 젊음이 엿보인다. ◆사시사철 인민복 차림인 김정일이 지난 92년 모처럼 양복을 입고 시찰에나섰다.왼쪽에 연형묵 전총리의모습도 보인다. ◆김정일의 친어머니 김정숙이 사망한 직후인 53∼54년 동생 김경희와 함께 찍은 것으로 추정되는 사진으로 장소는 불명이다.김정일이 마음을 터놓는 유일한 혈육인 김경희는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에게 “알랑거리는 사람은 많지만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없어 오빠는 고독하다”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해군 함정에 승선해 시찰하고 있는 김정일.촬영연도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70년대 후반으로 추정된다. 뒤쪽에서 김정일의 일거수일투족을 촬영하고 있는 ‘영화반’이 보인다.
  • 한국전쟁 유해발굴 동참 재미교포 유용수씨

    [로스앤젤레스 연합] 재미교포 유용수씨(67·로스앤젤레스 거주)가 49년전자신의 손으로 묻었던 미군포로 유해를 찾기 위해 29일 한국을 방문한다. 유씨는 1951년 4월 강원도 철원고급중·고교 3학년 때 북한인민군 학도병으로 징집돼 평양으로 가다 기차역에서 탈출,총살령을 받았으나 담임선생 등의호소로 총살을 면하고 포로수용소에 갇히는 신세가 됐다. 유씨는 인민군 고사포를 맞고 추락한 미 공군 대위(조종사)와 함께 같은 방에 수용됐으나 이 미군 포로는 다른 수감자가 면회후 가져온 미숫가루를 손바닥에 놓고 들이키다 질식사했으며 간수와 함께 그의 시신을 수용수 인근‘새우젓 고개’에 파묻었다. 유씨는 “당시 이름을 들었으나 기억이 나지 않는다”며 “그러나 미군포로는 군번표를 목에 걸고 있었으며 내 옆에서 쪼그리고 앉아 죽었고 내 삽으로땅을 파 묻었다”고 술회했다. 유씨는 “미국에 와 10년동안 사회보장혜택 등을 받으면서 나 혼자 편안히살고 있음을 생각할 때 어떻게 해서라도 미군의 시신을 찾아 유족들에게 돌려줘야 한다고 생각해왔다”고 말했다. 유씨는 98년 5월 남가주 미수복 강원도민회장으로 한국을 방문했을 때 주한미군 당국에 시신을 묻었던 사실을 알리고 발굴에 도움을 줄 것을 요청했으나 미군당국은 신빙성이 없다는 이유로 유씨의 말에 귀기울지 않았다. 그러던중 유씨는 지난 19일 미 국방부로부터 하와이 유해발굴부대(CILHI)와함께 29일부터 6월2일까지 미군유해 발굴작업에 참여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시작(詩作)으로 소일하고 있는 유씨는 “마치 과거시험을 보러 가는 것처럼가슴이 떨린다”며 “이번 발굴작업으로 미군포로 유해를 꼭 찾을 수 있길기대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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