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화해시대/ 양승현기자 訪北記
벅차오르는 설레임과 흥분,약간의 긴장감으로 뒤범벅이 된 첫 방북.특별수행원과 기자들을 태운 아시아나 항공기가 평양 순안공항에 안착한 것은 정확히 13일 오전 10시20분.김대중(金大中) 대통령 내외와 공식수행원 일행보다남과 북을 잇는 ‘하늘길’을 9분 먼저 열었다.
◆순안공항 첫 취재의 행운/ 공항에 도착하자 수행원과 기자들이 항공기에서내릴 순서가 미리 정해져 있었다.‘취재가 빡빡하겠구나’는 생각이 언뜻 머리를 스쳤다.
가까스로 10인승인 작은 버스를 타고 환영행사장에 도착하니 김대통령의 전용기도 이미 안착해 있었다.그때서야 공항의 전경이 한 눈에 들어왔다.조화(꽃술)를 손에 든 한복 차림의 수만 환영 인파들,인민군 육·해·공군 의장대….
바로 그 때였다.평양시민들의 떠나갈 듯한 함성과 함께 손에 든 조화가 세차게 흔들리면서 공항은 갑자기 흥분의 도가니로 변했다.아주 순식간이었다.
아직 김대통령이 탑승해 있던 전용기 앞문은 채 열리지 않은 상태였다.‘어,뭐지?’ 공항 입구 저편에서,한 150m 정도 됐을까,갈색 인민복차림에 퍼머머리를한 낯익은 사람의 뒷짐을 지고 카펫 위를 걸어오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이었다.환영인파의 ‘결사옹위,김정일’ ‘만세’ 소리에 느릿한 박수로 화답하는 여유를 보였다.이를 보자 평양 시민들은 발을동동 구르며 열광하기 시작했다.
◆예상깬 파격 의전/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이 순간을 놓쳐서는 안된다는생각으로 수첩에 적기 바빴다.혹시나 했지만,정부관계자 누구도 확인해 주지않았기 때문에 솔직히 그 때까지 출영 사실을 알지 못했다.‘기자로서 정말행운이구나’는 벅찬 감회도 스치고 지나갔다.
그가 카펫 중앙에 서서 주위를 두리번거렸으나 누구도 곁에 다가가지 않았다.통상적인 공항 환영행사 때에 흔히 볼 수 있는 의전에 관해 조언하는 이조차 없었다.그는 유일한 중심이었고,그가 결심하고,판단하고,행동하는 그모든 것이 곧 의전이고 격식이며,관행이 되는 듯 했다.김위원장 스스로 표현했듯이 그는 ‘오랜 은둔생활’을 파격(破格)의 방식으로 청산하고 한국기자에게 처음으로 불과 1m50㎝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김대중’ 연호는 없어/ 일부 언론에서 환영인파들이 ‘김대중’을 연호했던 것처럼 보도했으나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좀처럼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응시했다.그는 조금의 거침도,약간의 막힘도 없이 행동했다.시민들이 외쳐댄 ‘결사옹위’가 독특한 억양으로 ‘김대중’을 연호하는 것으로 착각을 일으켰을 뿐이다.
2박3일 평양 체류기간 내내 기자를 안내한 리윤철씨(38)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제가 담당하는 기자선생이 장군님을 처음 취재하고,악수까지 나눴다고 전해지면서 제가 우리 안내원들 사이에 으뜸이 됐습니다”고 했다.김위원장은 북측에 이러한 카리스마의 지도자다.
김위원장은 뒤에 우리측 인사에게 “내가 공항환영 행사에 나가는 것을 김용순비서가 말렸는데 나갔다.내가 하고자 하는 일을 주변에서 ‘빨간불’을켠다.내가 새 총으로 이 빨간불을 모두 깨트리면서 나갔다”고 말했다.기자의 첫 느낌은 ‘어릴 때부터 받은 지도자 수업이라는 게 정말로 무섭구나’였다.
◆초조한 기다림/ 14일 오후 목란관 만찬은 서울에서 궁중음식 재료를 공수,요리사 20명과 그릇만을 북측의 도움을 받아 김대통령이 초청한 자리였다.공식,특별 수행원들이 모두 와 있었다.이 때에도 오후 3시에 시작된 단독정상회담이 무려 3시간50분 동안 계속됐기 때문에 김위원장이 나올지 반신반의했다.
그런데 대기실에서 기다린 지 10여분이 지난 오후 7시 외교부 의전담당자가 “김위원장이 오실 것같다”면서 “두 분이 나란히 여러분을 앞을 지나가시면 박수로 환영해달라”고 요청했다.7시5분 입구가 떠들썩해지면서 김대통령과 김위원장이 나란히 걸어 들어왔다.예상을 깨고 김위원장은 일렬로 기다리던 우리측 수행원들을 보자 차례로 악수를 청했다.“회담이 잘됐구나”는 느낌이 절로 들었다.
◆김정일위원장과 처음으로 악수/ 재빨리 특별수행원 사이로 끼어들었다.“대한매일 양승현기잡니다”라고 인사를 했더니 얼굴을 빤히 쳐다보면서 힘찬목소리로 “반갑습네다”며 악수했다.기자가 서있는 것에 대해 조금도 의아해하지 않았다.취재현장에서 기자로는 처음으로 그와 악수를 나누는 행운을얻은 것이다.
그의 손은 작은 편이었으나 손마디가 굵고 탄력이 느껴졌다.그는 만찬장도압도했다.‘동방예의지국’이라는 한계를 설정해 놓고서는 자기식의 자유로움과 격의없음을 거침없이 표현했다.앞테이블에 앉은 양복 차림의 박재경장군 등 군장성들을 헤드테이블로 불러내 김대통령에게 직접 술을 따르게 하고,남측 특별수행원들이 권하는 술잔을 “여러 차례 마셨습니다”면서도 ‘원샷’이었다.옆자리의 박재규(朴在圭)통일부장관에게 심부름을 시키고 고은(高銀) 시인의 ‘대동강 앞에서’라는 즉석 시낭송도 그가 빚어낸 작품이었다.
[양승현 정치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