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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반세기만에 띄우는 편지/ 김정일위원장께

    ‘김정일 국방위원장 보시오.’ “지난 50년 세월을 가족 만나는 날만 학수고대하고 살아 온 늙은이 입니다.김 국방위원장의 배려로 꿈인지 생시인지 가족 상봉을 기다렸는데,생사확인 불명이라니 하늘이 무너지는 심정입니다.…부디 하늘아래 어디엔가 있을 내 가족들을 다시 한번 찾아 주시길 바랍니다.” 8·15 이산가족 상봉을 신청해 200명 명단에는 들었으나 최종 100명을 선발하는 과정에서 북측으로부터 가족들이 ‘생사불명’이라는 통보를 받은 백경은(白景殷·71·서울 영등포구 신길동)씨는 10일 ‘마지막 희망’이라는 심경으로 썼다.겉 봉투에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드리는 글’이라고 적었다. 백씨는 가족 상봉에 대한 기대가 무너지자 며칠을 시름시름 앓다가 8일 밤‘이번 기회가 아니면 평생 쌓인 한을 풀지 못한다’는 절박한 심정에서 북한의 최고지도자에게 ‘눈물의 호소’를 했다. 여러번 고쳐 쓰느라 밤을 꼬박 새웠다는 백씨는 “고향 마을과 부모님,아내,동생들의 얼굴이 눈 앞에 어른거려 몇번이나 눈물을 흘렸다”고 말했다. 백씨가 고향인 평안남도 맹산군 맹산면 수정리를 떠난 것은 21세 때인 1950년 12월.인민군 징집을 피해 며칠간 이웃 마을에 숨어 있기 위해 집을 나섰다.그러나 이웃 마을로 피해 있어도 불안감을 떨칠 수 없어 천리길을 걸어남쪽으로 내려왔다. 어머니와 한살배기 딸을 안은 아내가 마을 어귀까지 나와 ‘끼니 거르지 말고 몸조심 하라’고 당부했던 말이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백씨는 북에 두고온 가족들 생각에 그동안 임진각에 수십번 다녀왔고,집을나설 때 아내가 손에 쥐어준 딸의 빛 바랜 사진도 수천번도 더 보았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제 나이 벌써 일흔이 넘었는데 단 한번만이라 고향 땅을 밟고 싶은 마음 간절합니다.어찌 조선반도가 이렇게 갈라져 살아야 합니까.세계 만방에 우리가 한나라인 것을 이번 기회에 꼭 보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백씨는 “일가 친척 중 한명이라도 생사가 확인되면 가족들의 생사도 알 수 있을 것 같아 지난달 다시 친척 상봉을 신청했다”면서 “이 편지가 오는 15일 북에서 오는 이산가족들을 통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전달되기를 빈다”고 말했다. 김경운기자 kkwoon@
  • [외언내언] 경의선과 지뢰

    전역을 앞둔 대대장과 후임자가 수색정찰 임무를 인수인계하는 도중 지뢰를 밟아 각기 두 무릎 아래와 발목을 잃었다.지난 6월 서부전선에서 일어난 사고다.사고 과정에서 보여준 두 장교의 뜨거운 전우애와 희생정신은 우리 사회의 귀감이 될 것으로 당시 화제가 됐다.하지만 피해 당사자들의 고통과 절망감,그리고 졸지에 가장(家長)의 사고 소식을 접한 가족들의 황망함이란 어떠했을까. [내가 내 스스로를/장악하지 못하고/내가 내 스스로에게/삼엄하지 못할 때/나는 내 발목을 자른다] 이산하 시인의 시 ‘지뢰밭’의 일부다.시인의 치열한 시심을 어떻게 느끼느냐는 읽는 이의 마음에 달려 있을 것이다.다만 필자는 시를 통해 이 땅에서 남북간 반목이 이어지는 한 두 중령의 경우와 같은 비극은 계속될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을 읽는다.민족 스스로 평화를 가꾸지 못하고,외세에 휘둘릴때 애꿎은 희생양은 생기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남북이 끊어진 경의선 연결에 합의했다는 소식은 가슴을 탁 트이게 하는 청량제였다.더욱이 그 합의를 실천하려면 총칼을 겨누고 있는 남북의 군대가 불가피하게 힘을 합쳐야 한다는 점에서 보이지 않은 ‘섭리’마저 느껴진다.정부는 경의선 복구 지역의 지뢰 제거작업을 특수야전 공병부대에 맡길 것으로 알려졌다.북한도 업무 자체의 특성상 이 일을 인민군에 맡길 수밖에 없을 것이다. 2억9,000여만평에 이른다는 비무장지대에는 남북에 걸쳐 100만∼200만개로추정되는 엄청난 수의 대인·대전차지뢰가 매설돼 있다고 한다.그중 경의선복구로 당장 지뢰를 제거해야 할 지역은 7만3,000여평이라고 한다.토목공학적으로 보면 남한이 문산∼장단 12㎞ 구간을,북한이 장단∼봉동간 8㎞ 구간을 맡으면 된다. 그러나 지뢰 제거는 고도의 기술적인 어려움과 예기치 않는 불상사가 뒤따를 개연성이 큰 작업이다.이처럼 ‘인화성’ 강한 작업을 위해서는 양쪽 군관계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허심탄회하게 그 방법을 논의해야 할 것이다. 양측이 경의선 복원을 위해 군사 협의 채널을 통해 질서 있게 지뢰를 제거해 나간다면 상호 신뢰도 또한 크게 축적될 것이다.따라서 경의선 철로변지뢰가 분단의 상징에서 남북 군축 협상을 앞당기는 기폭제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져본다.남북이 휴전선에 집중시킨 화력을 후방으로 물러앉히는 일이 셀리그 해리슨(미 우드로 윌슨연구소 수석연구원)과 같은 학자들의논문에서가 아니라 ‘실제상황’이 될 수도 있지 않겠는가. 구본영 논설위원.
  • 北에서 오는 이산가족 맞을 남쪽가족들

    북측이 이산가족 100명의 명단을 통보하기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는 남쪽의이산가족들은 선물을 준비하는 등 상봉의 기대에 밤잠을 설치고 있다.미수(米壽;88세)의 어머니는 날마다 집안 청소를 하며 환갑을 넘긴 딸과의 만남을 머리 속에 그리고 있다. 지난 50년 고향 충남 청양에서 인민군에 징집돼 헤어진 형님 리상두씨(68)를 기다리는 이상기(李相起·60·서울 동대문구 답십리동)씨의 2남1녀 형제들은 요즘 매일 전화를 주고 받는다.이씨는 “지난 일요일에는 형제들이 모여 의논한 끝에 형님과 형수님께 한복을 마련해 드리기로 했다”면서 “충남 천안에 사는 누님은 ‘마을 사람들을 모두 불러 잔치를 열겠다’며 즐거워하고 있다”고 전했다.이씨는 “자식과 조카,손자손녀를 합해 80명이 넘는식구들이 일사불란하게 형님을 맞을 준비에 여념이 없다”고 흐뭇해 했다. ‘북한의 여성 예술인 제1호’인 현대무용가 김옥배씨(68·여)와의 상봉을기다리는 여동생 숙배(金淑培·64·여·경기도 분당 서현동)씨는 “어머니도 살아 계시고 형제들도 있으니까 100명 안에 꼭 들 것으로 확신한다”면서“동네 최고 미인이었던 언니에게 줄 금목걸이를 마련했다”고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김씨는 “88세 되신 어머니는 언니를 집으로 데려와 당신 손으로따뜻한 밥 한술 지어주시는 것이 소원”이라면서 “어머니가 날마다 집안을손수 청소하며 언니를 기다리신다”고 말했다. 전영찬(全永燦·55·서울 성북구 장위1동)씨도 가족과 함께 영화배우 형님전덕찬씨(72)를 맞을 준비에 바쁘기는 마찬가지다.전씨는 “얼마 전 4남매와 가족들이 모였을 때 큰 형수가 북에 계시는 형님이 꿈에 나타나 ‘이번에는 만나러 가겠수다’라고 했다고 말해 온 식구가 웃음꽃을 터뜨렸다”면서 “미술을 전공하는 막내딸은 큰아버지 초상화를 그려드리겠다고 단단히 벼르고 있다”고 즐거워했다. 4남2녀 가운데 둘째 오빠 리종필씨(69)를 맞을 누이동생 이종완(李種婉·66·여·충남 아산시 건곡동)씨는 “신문과 TV 뉴스를 보면서 초조하게 발표만 기다리고 있다”면서 “100살 드신 어머니는 ‘북에 살아있는 둘째 아들이내려온다’고 종이에 써서 보여드려도 이해하지 못하시는 것같아 마음이 아프다”고 눈시울을 붉혔다.이씨는 “어머님을 모시고 4남매가 모두 고향 충남 아산에서 잔치도 벌이고 고향땅에 모신 아버님 묘소에도 찾아가겠다”고말했다. 전영우기자 ywchun@
  • 南北 軍특수인력 동원 ‘해체’

    서울과 신의주를 연결하는 경의선을 복구할 경우 철도가 통과하는 지역에매설된 지뢰제거가 복구공사의 최대 관건으로 떠오르고 있다. 경의선 구간 20km중 남측 미연결구간은 문산∼장단간 12km이며 북측은 장단∼봉동간 8km이다. ■어디에 얼마나 매설됐나 경의선은 남·북한간 군사분계선을 관통한다.이지역에는 대인지뢰,대전차지뢰 등 모두 100만발이상의 지뢰가 묻혀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국방부가 지난해 국회 국방위원회에 제출한 국감자료 등에 따르면 한국전쟁이후 민간인통제선 북방에서 비무장지대에 걸쳐 매설된 지뢰는 모두 105만발.후방지역의 경우 주요기지 경계용으로 대인지뢰 7만5,000발이 매설된 것으로 알려졌다. 비무장지대의 지뢰매설지역은 2억9,760만평으로 여의도면적의 334배에 이른다.이를 제거하는 데 드는 비용만 10억달러가 소요된다. 합참관계자는 “전방지역 매설지뢰의 90%이상이 한국전쟁 당시 매설된 것으로 알고있다”면서 “6.25전쟁중 공중투하된 불발탄 및 미확인지뢰지대에 묻힌 지뢰는 제외된 것”이라고 말했다. 휴전후 우리 군이 북한군의 남침이나 공작원의 남파 등을 막기 위해 매설한 지뢰의 경우 ‘매설지뢰보고서’ 등에 기록돼 있기 때문에 매설지점과 매설규모 등을 파악하는 것은 가능하다.매설때 철거를 염두에 두고 기록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매설지뢰 어떻게 제거하나 경의선 복구는 ‘선 지뢰제거,후 공사착공’의수순을 밟을 것으로 보인다.북한측이 경의선 북측구간 공사에 인민군을 대거 동원할 것으로 알려진만큼 우리도 군 특수인력을 동원한다는 복안이다.이는 비무장지대의 경우 지뢰제거작업때 군사분계선을 월선할 수 밖에 없는 특수한 사항을 고려한 조치로 보인다. 합참은 오는 8일 문산지역 주둔부대와 합동으로 경의선구간이 지나는 지역에 묻혀있는 지뢰제거 및 지원문제 등을 논의할 계획이다. 군 고위관계자는 “1차 장관급회담에서 경의선복구에 합의한 만큼 향후 2차 장관급회담에서는 구체적인 협력방안 등이 논의될 것”이라면서 “남북한군이 지뢰제거작업을 시발로 군사적 신뢰를 구축할 수 있게 되길 바란다”고말했다. 노주석기자 joo@
  • 8월의 호국인물 이성가 육군소장

    전쟁기념관은 28일 6·25 전쟁 당시 경북 영천전투와 크리스마스 고지 전투를 승리로 이끈 고 이성가(李成佳·1922∼1975) 육군소장을 ‘8월의 호국인물’로 선정했다. 만주에서 태어난 이 소장은 중국 난징(南京) 군관학교를 졸업한 뒤 소령때까지 중국군에 복무하다 해방후 귀국해 창군 작업에 참여했다. 1948년 10월 제4연대장으로 여수·순천반란사건을 진압했으며 1949년 9월에는 태백산지구 공비를 토벌하는 등 6·25전쟁 전까지 태백산지구 전투사령관을 지냈다. 전쟁이 일어나자 국군 8사단을 지휘,충북 단양지역에서 북한 인민군의 공격을 6일동안 지연시켜 소백산맥 방어선을 구축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영천지역에서 혈전 끝에 북한군의 공격을 격퇴,전세를 반전시키는 공을 세웠다. 반격작전 때는 북진의 선봉을 맡았고 1951년 9월 이후에는 7사단장으로서중공군과 혈전을 벌여 전술적 요충지인 백선산과 크리스마스 고지를 확보하기도 했다. 휴전후 5군단장,육본 정보참모부장,육군대학총장을 지낸 뒤 소장으로 예편했다.멕시코·터키·오스트리아대사를 역임했다.생전에 태극무공훈장과 을지·충무·화랑 무공훈장을 받았다. 노주석기자 joo@
  • [외언내언] 連坐制의 어제 오늘

    북한이 보내온 8·15 이산가족 방문단 신청자 200명이 찾고 있는 친족들은대부분 월북자 가족으로 드러났다.그들은 냉전시대 남한에서 월북자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유형무형의 고통을 겪어야 했던 연좌제(連坐制) 피해자들이다.지난 반세기 동안 연좌제라는 족쇄에 묶여 우리 사회에서 남모르게 인고의 세월을 보냈던 계층이다.연좌제는 한 사람의 죄에 대하여 특정범위의 사람이 연대책임을 지고 처벌을 받는 제도로서 일찍이 조선시대에도 대명률(大明律)에 의거한 연좌형이 존재했었다.그러다가 1894년 형사책임개별화원칙이선언되면서 폐지되었고, 1905년(광무 9년) 제정·공포된 형법대전(刑法大典)에도 연좌제는 규정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북분단과 6·25전쟁이라는 특수한 시대적 배경에서 사상범,부역자,월북인사 친족에게 사실상 불이익처우를 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행이었다.예컨대 ‘인민군' 얼굴 한번 못본 친척들까지 해외여행이나 공무원임용에서의 불이익은 물론,사회 진출에서 결정적 제약을 받은 것이다.1970년대 후반까지 이어진 연좌제에 의해 피해를 본 국민의 숫자가 무려 전체 국민의 5%나 됐던 점을 감안하면 사회적 갈등이 얼마나 심각했는가를 짐작할 수있다. 연좌제 피해 당사자들은 국가가 교육·납세·국방의 의무는 강요하면서 연좌를 빌미로 개인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것은 형법상 자기책임의 원칙에도 반한다면서 연좌제 폐지를 강하게 요구했다.만약 정부가 연좌제를 지속할 경우그 피해자들을 모두 대한민국 국민에서 제외시켜 달라는 주장까지 하며 인권유린에 대한 강력한 반발을 보였다.이러한 문제점이 인식되어 1980년 개정헌법은 제12조 3항에서 ‘모든 국민은 자기의 행위가 아닌 친족의 행위로 인하여 불이익한 처우를 받지 아니한다’는 연좌제 폐지를 명문으로 규정했다. 물론 그 후에도 월북자 가족들은 알게 모르게 사회로부터 소외를 당했으며사회적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또 이같은 사회적 연좌의식때문에 북한에 있는 가족들을 걱정해서 이번에 가족상봉 신청을 포기한 사람도 있다고 한다.그런 면에서 북측이 보내 온 월북자들의 이산가족 상봉 신청명단이 남한내 가족들에게 큰 위안이 되고 오랜 멍에를 푸는 계기가 되기를바란다.또 남북정상회담의 첫 가시적 성과가 사회적 연좌제를 푸는 실질적인 계기가 된 것은 퍽 다행한 일이다. 앞으로는 어떤 경우에도 개인의 기본권이 국가권력에 침해당하는 굴절된 역사가 되풀이돼서는 안되겠다. △ 張淸洙 논설위원 csj@
  • 北·러 정상 공동성명 ‘국제사회 입지 확대’

    북한이 19일 평양을 공식방문중인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게 조건을 달기는 했지만 장거리미사일 개발을 중단할 준비가 돼 있다고 밝힌 것은미사일 개발은 주권이라며 협상 자체에 반대해왔던 기존 입장과는 분명히 차이가 있는 것으로 진의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북한은 최근 콸라룸푸르 북-미 미사일회담에서 미사일 기술 및 부품 수출을중단하는 대가로 미국에 연간 10억달러씩 3년간 총 30억달러를 보상할 것을요구,회담이 결렬됐다. 이처럼 현금보상을 요구했던 북한이 어찌됐든 외국에서 로켓 발사체를 제공한다면 미사일 개발도 중단할 의사가 있다고 밝힌 것은 중대한 입장 변화로 보인다.하지만 ‘평화적인 우주탐사’를 위한 로켓발사체의 제공이라는 전제조건을 달고 있어 북한이 정말 미사일 개발을 포기할 것인지 여부는 지켜봐야 할 것같다. 한편 푸틴 대통령은 북한으로부터 미사일 개발 중단의사를 끌어냄으로써 북한에 대한 영향력을 높이는 계기를 마련했다.또 미국의 국가미사일방어(NMD) 체제 구상의 근거를 크게 약화시켜 오키나와주요 8개국(G-8) 회담에서 발언권도 한층 강화될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 지도자로는 처음으로 이뤄진 푸틴의 이번 방문으로 북-러는 10여년간의 냉기류를 씻어내고 명실상부한 선린관계로의 복귀를 대내외에 선포한셈.그 배경으로는 남북정상회담 등으로 급박하게 돌아가는 동북아 정세를 국제사회 입지 선점의 계기로 삼으려는 양국의 욕구가 깔려있다.북한에게 러시아는 고립탈피를 위한 ‘전방위외교’의 놓칠 수 없는 매개고리이자 앞으로각종 대미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확보하기 위한 뒷배경이 되어줄 것이 분명하다.미국의 독주앞에서 ‘강한 러시아’ 재건의지를 불태워온 러시아 역시옛 우방들과의 관계회복은 필수수순이 아닐 수 없으며 이를 위해 수교이후한국에만 전념해온 그간의 편향외교를 수정할 필요를 절감해왔다. 또한 북-러간 각종 경제협력강화 방침이 합의됨에 따라 남북 경협의 상당부분에 러시아가 참여할 길이 열릴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러시아는 그간 자국의 낙후경제에 한국 자본의 수혈을 강력히 희망해 왔다.때문에 북한 기간산업에기술을 지원한다는 카드로 북측을 루트로 한 남측자본에 대한 접촉을꾸준히 시도할 것으로 보인다. 북-러 정상의 악수는 동북아정세에서 새로운 입지를 노리는 양국 대외노선의 출발선에 불과하다.북한은 이후에도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을 통한 대미,대일 외무장관 회담,남북외무회담,북·일수교협상 등 초유의 외교일정을앞두고 있다. 푸틴의 평양방문도 G-8 정상회담에서의 모리 요시로(森喜朗) 일본총리와의만남,연내 한국방문 등으로 이어진다.한반도를 진앙으로 한 국제관계 지각변동 과정에서 기존 영역을 지키기 위한 열강들간의 치열한 외교전이 당분간불가피할 전망이다. 손정숙기자 jssohn@. *남·북-북·러 정상 의전 차이. 6월의 김대중(金大中) 대통령과 7월19일의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평양 방문은 무엇이 비슷하고 다를까. [같은 점] 평양 순안공항에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이 북측 주요인사를대동하고 직접 영접나왔다.러시아 언론보도에 따르면 김 국방위원장의 영접은 사전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것으로 6월 김대통령 방북 때와 닮았다.극진한 예를 갖춘 3군 의장대 사열행사도 똑같았다. 숙소도 김 대통령 내외가 묵었던 백화원 영빈관이었다. 북한 노동신문과 조선중앙방송등 언론매체의 전례없는 열렬한 보도도 비슷했다. [다른 점] 공항영접에 나온 주요인사는 조금씩 틀렸다.김 대통령 때 나오지않았던 홍성남 총리,김영춘 군총참모장,김일철 인민무력상,백남순 외무상이푸틴 영접에 나왔다. 남북관계의 특수한 관계를 의전용 연주가인 용진가(勇進歌)만 연주했으나푸틴 영접행사에는 양국 국가를 연주했으며 21발의 예포도 발사했다. 연도에 나온 환영인파는 6월에는 60만명이라고 보도했으나 이날은 수십만명으로 보도,6월보다 인파가 적었던 것으로 추정된다.6월 때와는 달리 공항에서 숙소까지 김 위원장 대신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푸틴 대통령과 동승했고 양국 국기도 길거리에 내걸렸다.또 숙소로 이동 중 김 대통령은경호문제상 차도에 내려 환영인파에 답하지 않았으나 푸틴은 평양시 연못동입구에 내려 환호하는 인파에 답례했다. 김일성(金日成) 주석 시신이 안치된 금수산궁전에 김 대통령과는 달리 푸틴은 참배했다. 황성기기자 marry01@. *방북 이모저모. 북한은 러시아 최고지도자로는 처음으로 19일 평양 땅을 밟은 블라디미르푸틴 대통령을 열렬히 환영했다. [푸틴의 발걸음] 베이징(北京)을 떠나 이날 오후 3시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했다.공항에서 러시아 국가와 북한 국가가 연주된 뒤 두 정상은 21발의 예포가 울리는 가운데 인민군 육·해·공군 의장대를 사열했다. 푸틴은 백화원 영빈관에 가기 앞서 김일성(金日成) 주석 시신이 안치된 금수산궁전에 들러 참배했다.이어 숙소인 백화원 영빈관에서 김위원장과 단독회담,이고르 이바노프 외무·이고르 세르게예프 국방·블라디미르 필리포프교육장관 등이 참석한 확대정상회담을 잇따라 가졌다. 양국 정상은 회담 후 공동합의문에 서명하고 공식만찬을 함께 했다.푸틴 대통령은 20일 아침 일찍 소련군 조선해방기념비에 헌화한 뒤 오전 10시 평양을 떠난다. [북한 및 러시아 언론반응] 북한 언론은 푸틴 대통령의 평양 방문을 ‘중요한 사변’이라고 평가했다. 북한 중앙텔레비전은 저녁 8시 정규보도시간에 김위원장이 순안공항에서 푸틴 대통령을 영접한 소식과 푸틴의 금수산기념궁전 참배 등을 화면과 함께 25분간 소개했다.러시아 관영 ORT-TV는 푸틴 대통령 방북은 김위원장의 개인적인 초청에 따라 이뤄진 최초의 외국수반의 방문이란 점에서 역사적 의미를갖는다고 보도했다. 황성기기자
  • “50년 기다린 아들이 날 찾다니…”

    “마침내 내 아들을 50년만에 다시 볼 수 있게 됐구나” 맏아들 민창근(閔昌根·67)씨가 북한에서 자신을 찾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이영희(李英憙·87·인천시 동구 화수1동)씨는 놀란 가슴이 가라앉지 않는다고 감격해 했다. 건강이 좋지않은 이씨는 17일 “장성한 창근이를 만나려면 건강해야 하는데…”라며 억지로 밥술을 입에 넣었다.막내 아들 흥근(興根·50)씨는 얼굴도모르는 형을 만날 수 있다는 소식이 그저 기쁘다.이씨가 창근씨와 헤질 때흥근씨는 뱃속의 아이였다. 6·25전쟁이 발발한 1950년은 이씨가 20살 앳된 새댁의 몸으로 창근씨를 낳아 18살이 되던 해였다.당시 행상을 하던 이씨와 가게일을 돌보던 남편 민억석(閔億石·79년 작고)씨는 창근씨를 집안 광속에 숨기고 지냈다.창근씨는건장한 체격의 인천 대건고 졸업반 학생으로 언제 의용군으로 끌려갈지 모를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그해 9월 유엔군이 입성할 것이라는 소문이 무성해지자 창근씨는 인천상륙작전이 시작되기 5일 전쯤 “돌아가는 상황을 보고 오겠다”며 어머니의 만류를 뿌리치고 집을 나섰다.그것이 창근씨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아버지 민씨는 창근씨의 소식을 수소문하고 다녔으나 누군가로부터 “인민군에게 총살당한 것 같다”는 말만 들었다.하지만 이씨는 50년이 되도록 창근씨가 죽었다는 말을 믿지 않았다. 이씨는 “창근이는 말 잘 듣고 인정이 많은 아이였다”면서 “학교를 졸업하면 미술공부를 하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는데…”라며 눈물을 훔쳤다. 동생 흥근씨는 “어머니는 이날까지 형의 제사를 지내지 않으셨고 내가 18살이 될 때까지 형의 밥사발에 흰밥을 꾹꾹 담아 부뚜막에 올려 놓으셨다”고 말했다.지금 사는 인천 집도 50년 동안 내부만 뜯어 고쳤을 뿐 이사를 가는 얘기는 꺼내지도 못했다고 덧붙였다.잠을 자고 일어나면 창근씨가 돌아올것만 같은 생각을 한시도 잊지 않고 살아왔기 때문이다. 집안에는 창근씨의 사진이나 물건은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아버지 민씨가작고 하기 직전인 1979년 ‘아들 창근을 그리며 수십년을 울음으로 지새우는아내 때문에 화가 난다’며 모두 불태워버렸다. 이씨는 “죽은 남편을 가끔 원망했는데 이제 아들의 얼굴을 보게됐으니 죽어도 한이 없게 됐다”며 기쁨의 눈물을 한없이 흘렸다. 김경운기자 kkwoon@
  • 이산가족들 눈물겨운 사연

    북한적십자사가 16일 우리측 판문점 연락관을 통해 전달해온 8·15 이산가족 상봉 후보자 명단이 공개되자 6·25 때 의용군으로 끌려간 형제와 조카의이름을 발견한 남한의 형과 동생,그리고 삼촌 등 가족들은 감격에 겨워 만날날을 기다리며 밤새 눈물을 그치지 못했다. 대한적십자사 당직실로 전화를 걸어 맏형 전덕찬(全悳燦·72)씨의 이름을확인한 영찬(永燦·55·서울 성북구 장위1동·동양고속 전무)씨는 50년 전코흘리개 시절에 봤던 큰 형님의 어렴풋한 얼굴을 떠올리며 흥분을 감추지못했다. 영찬씨는 7남매 중 유독 큰 형님만 소식이 끊긴 것에 애를 태우다 돌아가신부모님이 평소에 “맏이 얼굴을 봐야만 두 눈을 고이 감을 수 있다”며 눈시울을 적셨다. 6·25 발발 직후인 50년 7월 의용군으로 끌려간 동생 주영훈씨(69)가 명단에 포함된 사실을 확인한 주영관씨(71·전 대한매일 논설워원·서울 마포구도화동)는 “죽기 전에 만나고 싶었는데 감개무량하다”면서 눈물을 글썽였다. 영관씨는 “아버지는 한국전쟁 발발 다음해인 51년 지병으로 돌아가셨지만,어머니는 하루도 빼놓지 않고 동생을 그리다 93년 93세의 나이로 돌아가셨다”면서 “다행히 형제 4명은 모두 서울에 살고 있어 동생이 서울에 오기만학수고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중학생 때 의용군으로 징집됐던 동생 임재혁씨(66)의 이름을 발견한 형 창혁씨(71·서울 양천구 목동)도 “동생이 죽은 줄만 알았는데 다시 만나게 되다니 꿈만 같다”면서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창혁씨는 “인민군이 서울에 진입한 바로 그날 이웃들로부터 ‘중학생이던 재혁이가 의용군으로 끌려갔다’는 말을 듣고 의용군이 모여 있다는 회화국민학교로 찾아갔지만 끝내 동생을찾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왔다”면서 7남매 중 셋째였던 동생과 생이별한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창혁씨는 “전쟁이 끝난 뒤 동생의 생사가 확인되지 않아 정부의 호적 정리방침에 따라 아버지께서 동사무소에 사망신고를 냈다”면서 “병상에 계신 91세의 노부(老父)께서도 죽은 줄 알고 있던 아들이 살아 돌아온다는 사실을아신다면 당장에라도 자리에서 일어나실 것”이라고 덧붙였다. 동생 구재협씨(70)를 8·15 때 만날 수 있다는 소식을 접한 형 재락씨(충남서천군 시초면 초현리)는 “6·25 이듬해 여름 20살이었던 재협이가 동네에들어온 인민군으로부터 의용군 입대를 강요받아 전쟁터에 나간 뒤 소식이 끊겼다”면서 “10여년 전 사망신고를 했으며, 이번에도 동생이 죽은 줄 알고상봉 신청을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재락씨는 “재협이와 헤어질 당시 부모님과 5남2녀가 모두 생존해 있었으나,지금은 차남인 나와 큰누나(85),막내(58)만 서울에 살고 있다”고 밝혔다. 의용군으로 징집됐던 박종섭씨(68)의 동생 종열씨(충북 청원군 강외면 서평리)는 “전쟁이 터지던 해 인민군들이 들이닥쳐 형님을 포함한 동네 청년 7명을 끌고 갔다”면서 “꿈을 꾸는 것만 같다”고 말했다. 종열씨는 “2년 전 돌아가신 어머니는 ‘전쟁터로 끌려가는 아들에게 저녁도지어 주지 못했다’며 평생 한을 품고 사셨다”면서 “어머니가 조금만 더사셨으면…”하며 눈물을 쏟았다. 김경운 송한수기자 kkwoon@. *북녘남편 5명의 애타는‘望婦歌’. 50여년 전헤어진 남쪽의 아내를 찾는 북쪽의 남편도 5명이나 됐다. 경기도 안양공업학교에서 음악교사를 지낸 신용대씨(81)는 서울 종로거리의여자옷 상점에서 일했던 아내 리숙인씨(79)와 아들 문제씨(50)를 찾고 있다. 전북 고창군 흥덕면 사천리 출신의 신씨는 헤어질 당시의 주소를 경기도 안양으로 써냈다.옛 지명으로 강원 울진군 원남면 매화리 661번지가 출생지이자 본적지인 최필순씨(77)는 아내 주정연씨(76)와 이름을 모르는 53세의 맏아들을 찾고 있다.아내와 헤어질 당시 최씨는 동국대에 다녔다. 전북 장수군 변암면 국포리 출생으로 전북 전주시 완산동이 본적지인 조용관씨(78)도 전주시 병원 간호사였던 아내 김부선씨(74)와 52살된 맏아들 경제씨를 찾고 있다.조씨는 헤어질 당시 전북 임실군 섬진강발전소 건설사업소노동자였다. 경북 안동군 풍산면 매곡동 미길리 출신의 리복연씨(일명 리승철·73)도 인천시 부평동에서 헤어진 아내 리춘자씨(72)와 장남 지걸(53)·차남 호걸씨(50)를 찾고 있다. 충북 중원군 양성면 능암리 출신 김희영(72)씨는 서울동대문구 이천상사에서 일하다 헤어진 아내 정춘자씨(72)와 아들 상교씨(53)를 애타게 찾고 있다. 김상연기자 carlos@
  • “형님이 살아있답니다”

    “형님이 살아서 나를 찾다니,이게 꿈이오 생시요…” 16일 오후 북한에 있는 형님 김봉회(金鳳會·68·한덕수평양공업대 강좌장)씨가 자신을 찾고 있음을 확인한 규회(奎會·66·서울 서대문구 남가좌2동)씨는 소식을 듣고 달려온 여동생 영숙(英淑·59)씨의 손을 잡고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규회씨는 “형님은 50년 고려대에 합격,입학을 기다리다가 6월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한 뒤 아현직업학교에서 인민군으로 징집돼 갔다”면서 “당시 미군의 폭격이 하도 심해 살아 있으리라고는 생각을 못 했는데…”라며 감격에겨워 말을 잇지 못했다.여동생 영숙씨는 “내가 울기라도 하면 큰 오빠는 무릎에 나를 누이고 책을 읽곤 하셨다”고 50년 만에 큰 오빠를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규회씨와 영숙씨는 “지난 93년 88세로 돌아가신 어머니가 조금만 더 사셨으면 형님을 보실 수 있었을 텐데…”라고 아쉬워하며 “어머니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새벽 4시에 일어나 형님을 위해 불공을 드리셨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보경씨는 “할머니는 내가 큰아버지와 많이 닮았다고 특히 귀여워해 주셨다”면서 “꿈에서라도 큰 아들을 만나시기를 소원하셨다”고 말했다. 규회씨 형제의 외삼촌은 일제시대 연희전문학교 교수를 하다가 월북, 북한에서 최고인민회의 의장(남한의 국회의장)과 초대 교육상을 지낸 백남운(白南雲·79년 작고)씨. 달력에서 형님을 만날 8월15일이 얼마나 남았는지 손꼽아 보던 규회씨는 “형님과 고향 전북 고창 임내강에서 잡은 민물새우로 매운탕을 끓여 먹던 때가 엊그제 같다”면서 빛바랜 형님의 사진을 가슴에 쓸어안았다. 전영우기자 ywchun@
  • “6·15 공동선언 실천에 최선”

    북한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은 김대중(金大中) 대통령과의 지난 6월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의 성과에 대해 “우리 민족의 힘으로 민족의 염원인 통일을 향해 첫 발을 내디뎠다는 데 가장 큰 의의를 두고 싶다”고 평가하고 “우리 속담에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는 만큼 이제 하루빨리 통일을 이룩할 수 있도록 노력할 때가 됐다”고 강조했다. 김위원장은 지난달 30일 원산 초대소에서 재미 언론인 문명자(文明子·71)씨와 남북 정상회담 이후 처음으로 단독 인터뷰를 갖고 6·15 남북정상의 공동선언과 관련,“(남북) 수뇌급 회담에서 합의한 5대 공동선언은 민족의 통일 대헌장이라 할 정도의 의의를 가진다”면서 “이 선언은 반드시 실천돼야하며 우리는 5대 선언의 실천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적극적인 자세를 표명했다. 이어 김대통령에 대한 인상을 질문받고 “(남북 공동선언을) 한꺼번에 다할 수는 없지만 시간이 걸리더라도 반드시 실천돼야 한다”면서 “김대중 대통령께서 차근차근 실천해 나가려는 의지와 성의를 가진 분이라고 믿는다”고 답변했다. 서울 답방시기에 대해 김위원장은 “(남북정상회담에서 합의한) 5대 공동선언의 실천과정을 보면서 결정하겠다”고 밝혔다.이에 따라 9월 비전향 장기수 북송이 실현되고 노동당 창건 55주년 기념일이 들어있는 10월 이후 서울답방이 실현될 것으로 보인다.그는 주한 미군 철수문제와 관련,“그동안 미군더러 나가라고 했지만 그들이 당장 나가겠느냐”고 ‘현실론’을 인정하면서도 “그들(미국)은 (남북)분단에 책임있는 만큼 통일에도 책임이 있으며우리 민족의 통일을 적극적으로 돕는 방향에서 알아서 결정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북·미 고위급 회담과 관련,“미국에서 윌리엄 페리(대북 조정관)가 특사로왔었으니까 우리도 곧 고위급에서 대표를 파견할 것”이라고 밝혔다.대표로는 김용순(金容淳) 아·태평화위원회 위원장과 인민군 고위관계자들이 파견될 것으로 관측된다. 지난 4월 이후 중단된 북·일 수교협상에 대해서는 “일본과 ‘가깝고도 가까운 나라’가 될 준비가 돼 있으나 (국교정상화는) 일본의 결정에 달려있다”면서“일본은 납치니 뭐니 하는 얘기를 치우고 과거청산 등 근본문제를푸는 데 노력해야 한다”고 일본측의 성의있는 자세를 촉구했다. 한편 남북 정상회담 후 남측의 ‘김정일 쇼크 및 신드롬’을 알고 있느냐는질문에 “그동안 왜곡보도가 많아 인상이 매우 나빴는데 (TV)화면에 많이 나타나니까 (내가) 뿔 달린 인간이 아닌 것을 알았나 보다”고 답변했다. 베이징 신준영기자 junyoung@
  • [대한광장] 통일시대 역사인식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을 보면서 11년 전 1989년 3월의 문익환 목사를 생각해 본다.당시 언론에 나타난 문익환 목사의 방북에 대한 기사제목을 보자.“실정법을 어겼다,” “밀행에 충격과 경악,” “성급한 행동,” “혼란이 우려된다,” “통일창구를 깬 무분별한 행동,” “그는 대한민국을 무시했다”등으로 비판 일색의 기사였다. 그러나 바로 전 1월에 있었던 정주영 회장의방북에 대해서는 “민족경제공동체건설을 위한 첫걸음”,“남북화해 교류의큰 이정표요 크나큰 노력”이라고 긍정적인 보도를 했다.기업인이 정부에 미리 알리고 간 경우와 민간단체의 통일운동가가 알리지 않고 간 차이는 있지만,문목사를 밀행의 입북으로,정회장은 방북으로 표현하였다.한쪽은 실정법위반이며,한쪽은 남북 경제교류의 물꼬를 튼 민족역량 과시로 그 성과를 강조했다.이러한 기사는 북한을 우리의 적이며,체제 경쟁에서 이겨야 할 대상으로 보는 냉전적 시각에서 비롯됨이다. 또 한가지 예를 들어보자.1995년 국방부는 한 6·25포스터를 시중에 배포했다.당시 냉전시대보수언론의 대표격인 한 신문은 그 포스터에 대해서 6·25를 도발한 북한의 침략성과 불법성을 외면한 것이라고 비판하면서 국방부에반공적 색깔논쟁을 제기했다. 이 포스터는 6·25를 맞아 국방부가 공모한 작품 중 당선작이었는데,태극기를 바탕에 깔고 국군 장병과 인민군 사병이 서로 껴안고 있는 도안이었다.그림 밑에는 “형제의 가슴에 총부리를 겨누어야만 했던 아픈 기억 6·25”라는 문구가 쓰여 있었다.그 신문은 이 문제의 포스터가 6·25를 왜곡하고 북의 전쟁도발 사실을 은폐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이에 대해 국방부는 국군으로 참전한 형과 인민군으로 징집된 동생이 전장에서 총부리를 겨누고 만나야했던 비극적 실화를 형상화 한 것으로 민족의 비극을 극복하고 통일을 지향한다는 뜻에서 이 작품을 당선작으로 선정하였다고 해명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냉전적 사고방식을 가진 언론은 남북이 같은 동포이고 형제라도 이념을 달리하기 때문에 보듬고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는 것조차 수용해서는 안된다는 관점이었다. 문익환 목사는 남북의 동족이 피로써 피를 씻는 참담한 비극을 방지해 보고자 백범 김구 선생이 북행을 나섰듯이 자신도 그로부터 41년 후 “통일에 대한 온 겨레의 염원을 이 이상 방치해 둘 수 없는 상황이 방북을 결행하게 했다”고 말했다.남북의 통일이 이루어지지 않고서는 반세기에 걸친 분단의 치욕을 씻을 수 없고,인권·민주화·경제발전의 궁극적 해결이 있을 수 없다는확고부동한 신념을 갖고 있었다.그는 다섯 번째 수감되는 고통을 당하면서도 민족사적 최대의 과제인 통일운동에 매진했던 것이다. 그로부터 11년이 지나 남북정상의 만남으로 통일민족주의의 새 역사가 열린것이다. 7,000만 민족과 500만 해외동포가 지켜보는 가운데 일어난 기적이다.두 남북 정상의 만남은 민족적 자주성의 상징이요,우리의 불행의 역사를 청산하는 민족사적 쾌거이다. 이제 적대의식에서 동족의식으로,국민들의 대북한인식을 바꾸는 통일환경을조성해야 한다. 분단시대의 모든 제도적 유제,극우적 보수의식은 청산되어야한다. 북한을 돕는 일은 인도주의적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동포애적 시각에서통일시대의 관건이 된다. 북한을 더 이상 적국이 아니라 동족의 나라로 보는 새로운 민족관이 요청되는 시기이다.역사적 변화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대립에서 화해로의 바뀜이다.대북 동족의식이 자리잡게 되는 날 남북 평화통일론,남북 대등 통일론이 확실히 정착되리라 믿는다. 徐紘一 한신대교수·국사학
  • 국군포로및 비전향장기수 실태

    금강산 남북적십자회담에서 본격 논의되고 있는 국군 포로 및 비전향 장기수 실태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국군포로] 조성태(趙成台) 국방장관은 지난 22일 국회 국방위에 출석,“북한내 국군포로 숫자를 1만9,000여명으로 추정하고 있으며,명단을 확보하고있는 국군 포로는 312명”이라고 밝혔다.그러나 이는 추정치이며 정확한 규모를 추산하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53년 유엔군과 공산군간 포로교환 때 국군 8,333명이 남으로 넘어와 최소 5만명 이상이 북한에 억류됐다는 게 군사연구가들의 판단.군은 국군포로 생존율을 10% 정도로 보고 1,900여명의 포로가 북한에 생존해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비전향 장기수] 박재규(朴在圭) 통일부장관은 29일 “생존 비전향 장기수는83명이며 이중 50여명이 송환을 바라고 있다”고 말했다. 민간 인권단체 ‘비전향장기수 송환추진위원회’는 88명중 59명이 북송을 희망하고 있다고 밝혔다. 북송 희망자들은 북한 출신이거나 가족이 북한에 살고 있는 경우,정치적 신념에 따라 북한에 가겠다는 사람들이다.주로 전쟁포로,남파 간첩,빨치산 활동자들이다. 이들 가운데 함세환(69·대전 거주)·김인서(75·입원중)·김영태(71·광주거주)씨 3명은 인민군 출신으로 전쟁포로가 됐던 경우로 북한에 가족이 살아있는 것으로 확인된 상태.북송을 바라지 않는 29명은 고향이 남한이거나 가족들이 남한에 살고 있는 사람들. 황성기기자 marry01@
  • 색다른 맛… 화제의 평론집 2題

    그동안 수많은 저서를 펴냈던 문화및 문예비평가 이어령이 처음으로 문학이론서인 ‘공간의 기호학’(민음사)을 내놓았다. 청마 유치환의 시 총 599편을 대상으로 ‘문학 공간의 기호론적 분석’을시도한 그는 현재의 문학비평연구가 작가의 전기나 역사적 사회 상황 같은것에 초점을 맞추는 외재적 연구 중심으로 이루어 졌다고 지적하면서 내재적연구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저자는 예컨대 청마의 시 ‘깃발’과 관련, 대부분의 비평가들이 시에서‘기(旗)’를 전기적으로 풀이하거나 시대에 얽힌 역사적인 의미로서 파악하려고 하지만 이는 피상적이라고 비판하고 있다.공간 기호론으로 깃발을 분석했을 때 ‘기’는 하늘과 땅의 중간부분에 위치하는 사물이 되며 어떤 사물이나 이미지가 하늘과 땅의 수직구조에서 그 중간에 배치되어 있는 것이면청마의 ‘깃발’과 동일한 의미를 갖게 된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이론은 시만이 아니라 소설,희곡 등 모든 문학 장르와 회화,건축,그리고 무용 같은 비언어적 예술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적용할수 있다고 전망하고 있다. 한편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을 따라 남하해서 ‘지리산 유격 지대를 가다’‘바다가 보인다’ ‘우리는 이렇게 이겼다’ 등의 종군르포를 남긴 작가 김사량(1914∼1950)의 평전이 나왔다. ‘김사량 평전’(문학과지성사)은 재일동포 문학평론가 안우식(68)씨의 1972년작(이와나미 문고)을 번역(심원섭 옮김)한 것이다. 평양의 부르주아 집안 출신으로 도쿄제국대학 독문과를 나온 김사량은 1939년 일본어로 쓴 단편 ‘빛 속으로’가 아쿠타가와상 후보작에 올랐다.1945년2월 친일적인 학도병 위문단으로 중국에 파견된 길에 탈출했으며 해방후 재북 작가로 활동했으나 남한은 물론 북한에서도 충분한 평가를 받지 못했다. 평전 작가는 김사량의 ‘낭만적 정신’을 주목하면서 ‘성실한 한 명의 민족작가의 모습’을 꼼꼼한 자료를 바탕으로 그려내고 있다. 김재영기자
  • 성공회대 김동춘교수 ‘전쟁과 사회’ 펴내

    한국전쟁 발발 50년을 맞은 올해 학계가 새로 마련한 담론이 ‘민간인 학살’이다.전쟁의 원인과 책임,국제 역학관계 등 이데올로기적 시각에서 벗어나 비로소 인간에게 초점을 맞춘 것이다. 그리고 ‘민간인 학살’담론화의 중심에는 늘 김동춘 성공회대 사회과학부교수가 있었다.그는 이를 주제로 내건 최초의 심포지엄 ‘전쟁과 인권-학살의 세기를 넘어서’(6월21일)에서 주제발표한 것을 비롯해 계간 ‘역사비평’과 ‘통일시론’여름호 등에 관련 원고를 실었다. 하지만 그의 연구성과가 집약된 논문은 역시 최근 나온 책 ‘전쟁과 사회’이다(돌베개,1만3,000원). 김교수는 책 첫머리부터 “왜 남한에서만 6·25라고 부르는가”라고 문제 제기에 나선다.‘6·25’라는 명칭에는 전쟁의 책임이 북한에 있고,그러므로북은 우리에게 철저히 응징의 대상이라는 ‘광신적인 반공주의’가 깔려 있다는 주장이다. “지난해 서해교전 당시 확인된 것처럼 남북한 사이에 긴장이 발생하면 한국의 언론과 지식인사회는 이성을 상실한다”고 꼬집은 김교수는,“그런 대결이상호 파멸을 가져올지라도 일단 응징해야 한다는 호전적인 주장이 압도하는 현실이 정말 무서운 것”이라고 강조한다. 본격적으로 전쟁을 해부하면서 김교수는 그 진행과정을 피난-점령-학살이라는 새로운 관점으로 구분한다. ‘피난’에서는 국가와 이승만 당시 대통령,지배층,민중이 각각 전쟁을 어떻게 맞이하고 대처했는지를 살핌으로써 전쟁의 성격을 분석한다.‘점령’에서는 인민군의 남한 점령과 민중동원 과정을 통해 해방이후 국가건설을 둘러싼 남북한의 정치적 갈등과 전쟁의 연관성을 해석한다. 이어 ‘학살’에서는 국가가 전투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적’으로 돌변하거나 ‘적’의 잠재적 지지세력이 될 수 있는 주민들을 어떻게 취급했는지를따진다.특히 학살의 개념과 유형을 비교고찰해 사실 발굴 차원이 아닌,학살에 대한 정치사회학적 접근을 시도한다. 김교수는 “한국전쟁 과정에서 민중이 당한 비참함과 인간 존엄성의 훼손은오늘날 사회에 잔존한 야만의 흔적들,즉 극우 반공주의의 광기,소외계층의궁핍과 사회적 배제 등의 현상과 같은 뿌리를 갖고 있다”고 결론짓는다.따라서 한국전쟁을 해석할 때 국가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 민족중심적 시각을회복해야 하며,더 나아가 민족문제를 사회구성원의 차별,고통과 희생의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 책은 한국전쟁이 민중에게 무엇을 남기고 오늘날까지 한국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초점을 맞춘 정치사회학적 연구서이다.기존의 연구 틀과 전혀 다른 시각과 방법론으로 쓴 이 논문은 대결의 시대를 넘어 화해와 상생의 장으로 막 접어든 분단의 역사에 새로운 자양으로써 작용하리라 기대된다. 이용원기자 ywyi@
  • [50돌에 되돌아 본 6.25](4)실향민의 밝아지는 북한觀

    “여보,왜 그래”“배가 너무 아파서…” 1950년 12월5일 1·4후퇴 당시 가족들과 정신없이 피란 길에 올랐던 당시 28세의 배준양(裵俊陽)은 만삭의 아내가 산기(産氣)에 고통스러워하자 하는수 없이 황해도 운율군 집으로 발걸음을 되돌렸다. 아내는 다행히 건강한 사내아이를 낳았다.하지만 갓난아기를 안고 3·8선을 넘는 건 무리였다.눈물을 머금고 낳은 지 사흘된 아들과 아내를 남겨둔 채혼자서라도 남행길에 올라야 했다.공산당이 너무 싫어 구월산 유격대에 들어가 인민군과 싸운 전력이 있기 때문이다. 어느덧 50년 세월.이렇게 오랫동안 만나지 못할 줄은 몰랐다.그때는 금세라도 돌아올 수 있을 줄 알았다.올해로 78세인 배준양 할아버지는 요즘 잠을제대로 못이룬다.북에 두고 온 아내와 아들을 죽기 전에 볼지도 모른다는 설렘과 흥분 때문이다. 배할아버지의 매년 6월은 사실 그리움과 회한,그런가 하면 분노의 계절이었다.북한 공산당의 전쟁 도발로 사랑하는 가족과 생이별했다는 생각에 6·25기념일이 가까이 오면 화병까지 도질 정도였다. 그러나 6·15남북공동선언으로 이산가족 상봉의 길이 열린 올 6월은 월남이후 가장 꿈에 부푼 시간인 것 같다.광복절 1차 상봉자가 100여명밖에 안돼 대상자에 포함될 확률은 크지 않지만,그래도 한가닥 기대를 걸고 있다.배할아버지는 지난 22일 서울 남산동 대한적십자사 본사에 ‘이산가족 찾기 신청서’를 접수했다. 골수 반공주의자였던 배할아버지의 최근 대북관이 궁금했다.“솔직히 나쁜감정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닙니다.그렇지만 통일을 위해선 참아야죠.북한이 이산가족을 만나게 해준다는데 이젠 마음을 열어야죠” 북한의 약속이 미덥느냐는 질문을 던졌더니 “이번엔 예전에 비해 신뢰가간다”고 말한다. 6·25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 가운데 한명이자 반공주의자인 배할아버지의이같은 시각 전환은 남북 화해에 밝은 햇살을 드리우기에 충분하다.실제 이날 적십자사를 찾은 실향민들 대부분이 북한의 태도변화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실향민들은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이 “TV를 통해 남한 실향민들이 우는 것을 봤다”고 말한 게 가장 인상적이었다고 입을 모았다. 함경남도 흥남이 고향인 원충택(元忠澤·69) 할아버지는 김국방위원장의 말을 듣고 ‘아 저 사람이 나름대로 이산가족 문제에 신경을 많이 쓰고 있구나.남북 관계를 연구 분석하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남북정상회담 특별수행원으로 방북했던 김민하(金玟河) 민주평통 수석부의장이 최근 한 토론회에서 말한 내용도 실향민들의 우호적인 정서를 반영한다.“두 사람이 싸웠다고 합시다.화해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과거의일은 다 잊고 서로 이해하고 새 출발하자고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옛날에 누가 잘했느니,못했느니를 따지고 들면 화해가 되겠습니까” 물론 실향민들이 무작정 과거를 덮어버리자는 것은 아니다.그러기엔 상처가 너무 크다.실향민들은 용서하고 화해하되 잊지는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또언젠가는 과거사를 정리해야 한다고 강조한다.한 60대 실향민은 정부와 정치권에 이렇게 뼈 있는 소리를 했다. “정치하는 사람들이 장기적인 비전을 갖고 남북관계를 끌고 가는지 궁금합니다.우선 화해하고교류하는 게 중요하지만 한편으로는 훗날을 대비해야 한다는 얘기입니다.언젠가 서로의 신뢰가 쌓이고 통일 분위기가 높아지면 과거 6·25전쟁으로 육체적·정신적 피해를 입은 국민들에 대한 배상 문제를 거론해야 합니다.그래야 실향민들의 응어리가 풀릴 것입니다.국민들의 피해사실을 조사하고 자료를 수집하는 작업이 지속적으로 병행돼야 합니다.정부가든든하고 책임지는 자세를 보여줘야 실향민들은 정부를 전폭적으로 믿고 따를 것입니다”김상연기자 carlos@
  • 초점/ 첫 여성 국방위원 이연숙의원

    한나라당 이연숙의원이 22일 16대 국회 국방위에서 첫 여성국방위원으로 화려하게 ‘데뷔’했다. 관행처럼 굳어온 ‘남자들만의 세계’에 첫발을 내딛은 이의원은 군 내의 ‘여성문제’를 제기,전체 여성의 지위향상을 꾀하겠다는 각오다.이의원은 여성특위 위원장이기도 하다. 이의원은 이날 열린 국방위 전체회의에서도 그동안 ‘사각지대’에 머무른여군(女軍)의 지위향상 문제를 집중 거론했다.국방부가 추진중인 간호사관학교 폐지계획의 전면적인 재검토를 촉구했다.간호장교의 안정적인 수급과 양질의 의무 지원을 위해서는 반드시 간호사관학교가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국방부는 간호사관학교를 폐지하면 1년 운영예산 26억원이 절감되는 것처럼 주장하지만 실상은 순수교육예산인 3억5,000만원이 절감될 뿐”이라고 지적했다.또 “한국전쟁 기념행사에서 북한을 자극하지 않기 위한 조치가 뭐냐”고 끈질기게 물었다.이에 조성태(趙成台) 국방장관은 “북한 김정일(金正日)국방위원장이 지난번 남북정상회담 기간에 조명록(趙明錄) 인민군 총정치국장에게 남북화해협력에 방해되는 7·27 전승기념 행사를 갖지 말라고 지시했다”면서 “우리측도 시가지행진을 취소했다”는 새로운 사실을 밝혔다. 최광숙기자 bori@
  • [50돌에 되돌아 본 6.25](3)北억류 국군포로

    역사 속에 묻힐뻔 했던 국군포로문제가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다시 역사의전면에 등장했다. 통일부는 최근 국군포로문제와 관련,‘법적으로 국군포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법적으로 풀이한 의미일 뿐이다.‘국가를 위해 싸운 사람은 국가가 끝까지 보호해야 한다’는 게 정부의 일관된 입장이다. 6.25 전쟁이 낳은 ‘또하나의 비극’인 국군포로의 정확한 숫자는 아무도모른다.5만여명으로 추정될 뿐이다.전문가들은 이들중 5,000명 정도가 생존해 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국방부가 귀환 국군포로 및 탈북자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명단을 확보한 숫자는 겨우 286명.이중 국내 연고자를 찾은 포로는 50여명에 불과하다. 지난 53년 포로로 끌려가 40여년을 탄광에서 노역하다 98년 귀환한 장무환씨(73)는 “포로로 잡힌 곳에서부터 임시수용소로 향하는 ‘죽음의 행군’도중 수많은 포로들이 생명을 잃었다”고 말했다. 귀환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국군 포로들은 수십, 수백명 단위로 무리지어진뒤 밤을 꼬박 새워가며 하루 80∼90리씩 걸어 후방지역으로 이송됐다.식사라고는 삶은 옥수수 한움큼씩,그것도 운이 좋아야 하루 두번 지급됐다. 행군 대열을 따라 잡을 수 없는 중상(重傷) 포로들은 사살되거나 버려졌다. 평안북도 온정리와 초산 사이에 있는 ‘개고개’에서는 수백명의 포로가 한꺼번에 학살되기도 했다. 포로들은 임시 수용소 등에 수용됐다.51년 11월 평북 벽동 남쪽 10㎞ 지점골짜기에 세워진 ‘계곡 수용소’와 평북 강계에 위치한 ‘평화의 계곡 수용소’ 등이 대표적인 임시 수용소로 꼽힌다. 특히 50년 12월 평북 북천 남방 50㎞ 지점에 세워진 ‘죽음의 계곡 수용소’는 말 그대로 악명이 높았다.이곳에 수용됐던 2,000여명의 포로 중 1,200여명만 살아 남았다는게 귀환 포로들의 증언이다. 50년 7월부터 51년 5월 사이 전체 유엔군 포로 중 42% 정도가 사망한 것으로 집계한 미군 당국의 추정과 엇비슷한 수치다. 국군 포로는 휴전협정이 조인될 때까지 벽동·화풍·천마·우시·외귀·만포진·삭주·북진·강동·황주 등 평안북도 국경지역에 압록강을 따라 80㎞에 걸쳐산재한 10여곳의 수용소에서 고통을 견뎌야 했다. 휴전협정 체결 직후인 53년 8월 겨우 8,343명만 귀환했다.부상을 입은 포로는 471명에 불과했다. 몸이 성한 국군 포로들은 전쟁 초기부터 수용소 대신 인민군에 재징집돼 전선에 투입되거나 복구작업 등 노역에 동원됐다.전쟁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대부분 철도·비행장·광산 등의 노무부대로 편입됐다. 미송환 국군포로들은 휴전 이후에도 한동안 휴전 및 포로교환 사실조차 모른 채 강제노역에 시달렸다.56년 6월 북한 공민으로 편입된 뒤 대부분 결혼,가정을 이뤘으나 최하위층 노동현장인 탄광지역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98년 귀순한 양순용씨는 “국군포로들은 북한사회의 최하위층에 속했기 때문에 80년대 후반부터 북한전역에 엄습한 식량난의 피해를 가장 심하게 겪었다”고 말했다. 94년 귀환한 조창호씨의 경우 휴전직후 아오지 제1특별수용소로 보내져 포로가 아닌 죄수취급을 받았으며 전쟁포로 송환대상에서도 제외됐었다.51년포로가 된 조씨는 이 때문에 중부전선에서 전사한 것으로 처리돼 국립묘지에유해없는 위패로 봉안돼 있었다. 역사적인 6 ·15 남북공동선언으로 국군포로의 귀환 가능성은 어느 때보다높아졌다.국군포로의 송환은 이산가족 상봉과 함께 반드시 해결해야 할 과제다. 송한수기자 onekor@
  • [50돌에 되돌아 본 6.25](2)최대격전 안강·다부동 전투

    “이땅에서 전쟁은 영원히 사라져야 합니다.” 6·25전쟁 50돌을 나흘 앞둔 21일 조선시대 사상가 이언적(李彦滴)선생의사당이 있는 경북 경주시 안강읍 양동리에서 만난 학도병 출신 참전용사 김영재(金泳在·69·경주시 용강동·상이2급)씨의 피맺힌 절규다. 전사(戰史)에 ‘최후결전 안강전투’로 기록돼 있는 이 지역은 본래 경주북쪽에 위치한 평야지대였다.동쪽으로는 포항,서쪽으로는 영천이 이웃한 요충지로 포항∼영천을 잇는 낙동강 방어선의 중심지였다.당시 송요찬(宋堯讚)대령이 지휘한 국군수도사단과 이종찬(李鍾贊)대령의 3사단이 북한군 2군단,12사단의 8∼9월 두 차례에 걸친 공세를 저지하며 반격의 기틀을 다졌던 6·25전쟁 최대 격전지중 한곳이다. 20여일 동안의 안강전투가 끝나갈 무렵인 50년 9월20일 오른쪽 가슴에 관통상을 입고 아직도 투병중이라는 김씨는 “160명이던 중대원이 하루밤 사이에20여명밖에 남지 않았다”고 악몽 같은 그날을 회고했다. 김씨는 경주공업중 5학년이던 50년 8월15일 입대,열흘 동안 기초군사훈련만받고 전투에 투입됐다. 당시 안강은 낮에는 미군 전투기의 지원을 받은 국군이,밤이면 게릴라전에능한 인민군이 점령하는 등 밤낮으로 주인이 바뀌는 숨막히는 전투가 이어졌다.전사에는 남북한 군인 2,500여명이 전사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러나 전쟁이 휩쓸고간 상처는 50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꽃다운 젊음이 무수히 사라진 전장터는 신록만 무성할 뿐이었다. 온통 핏빛으로 물들었던 안강 양동 골짜기는 지난 68년 저수지로 바뀌었다. 동족상잔의 한맺힌 땅이 포항시민들의 식수원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희생자들의 넋을 떠올리며 낙산 1·2교와 동해남부선 철도가 가로지르는 100m 폭의 형산강 옆 야산에 자리잡은 전적기념관쪽으로 발길을 돌렸지만 기념관은 건설회사의 부도로 짓다만 채 흉물처럼 버려져 있었다. ‘잊혀져 가는 전쟁의 아픔’을 되새기며 안강에서 자동차로 2시간여를 달려 낙동강 물결이 굽이치는 경북 칠곡군 왜관에 도착했다. 다부동지역은 50년 8월1일부터 9월24일까지 50여일간 북한군 4개 사단,아군2개 사단이 투입돼 아군 2만5,900명과 북한군 3,500명이 목숨을 잃은 혈전의현장이다. 이곳에서는 경북도와 칠곡군 주최로 23일부터 사흘간 열리는 ‘낙동강 세계평화의 제전’ 준비작업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24일에는 희생자 위령제가,25일에는 ‘낙동강 평화 선언식’이 이어진다. “가신 님의 짧은 인생은 겨레와 함께 영원히 살아가리”.최대의 격전이 치러졌던 가산면 다부리 유학산 왼쪽 봉우리 중턱에는 애절한 글귀가 새겨진호국용사 충혼비가 세워져 있다.기념관 방명록에는 미국 등 참전군인들의 서명이 줄을 이었다. 최근 육군본부가 실시한 6·25전사자 유해발굴 결과 이곳에서 모두 117구의유해와 유류품 1,038건이 발굴됐다.이곳에서 나온 북한군 유골 2구는 경기도파주시 적성면의 적군묘지로 옮겨져 안장됐다. 다부1리에 사는 최사순(崔四順·80)씨는 “피란에서 돌아오니 군인들의 시신이 널부러져 있어 구덩이를 파고 30∼40구씩 끌어묻는 데만 꼬박 닷새가걸렸다”면서 “이렇게 묻은 시신만 해도 족히 300구는 될 것”이라며 어느덧 눈시울을 붉혔다.이곳도 최근 개설된 등산로를 따라 산새 울음소리와 패랭이꽃만 만발할 뿐전쟁의 흔적은 간데 없었다. 낙동강전선 최대 격전지였던 안강과 다부동은 남북 화해의 시대를 맞으면서평화의 중요성을 새삼 일깨워주는 것 같았다. 안강·왜관 송한수기자 onekor@
  • [마음은 북녘 고향에](3)함흥 서상리 출신 김형권 할아버지

    “형님 조금만 기다리시라요,부모님 제사를 함께 모실 날도 멀지 않았구만요” 함경남도 함흥시 서상리가 고향인 김형권(金亨權·70·서울 노원구 상계동) 할아버지는 명절만 되면 울적해진다.1951년 1·4후퇴 때 국군을 따라 혈혈단신으로 남쪽에 내려온터라 찾아볼 가족이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절절한 아픔을 안고 살아온 김 할아버지는 올해 8·15를 전후해 이산가족상봉을 추진키로 했다는 남북 정상의 공동합의문 발표를 듣자 마자 대한적십자로 달려가 가족찾기 신청을 했다. 그동안 셀 수 없이 추진됐던 남북 이산가족 상봉이 매번 실패로 돌아가는것을 한숨지으며 지켜봤던 김 할아버지는 “남북 정상이 직접 만나 결정했으니 다른 때와는 다를 것”이라면서 “만약 이번에도 아무 성과없이 끝난다면더이상 살아갈 기력도 남지 않을 것 같다”고 말했다. 김 할아버지는 부모님이 살아계시리라고 기대하지 않지만 형님 두분과 남동생은 반드시 고향에 남아 있을 것으로 확신하고 있다. 1950년 3월 인민군에 징집됐다가 1개월만에 탈출한 김 할아버지는 인천상륙작전 직후 함흥으로 진군한 국군의 수송차량을 수리해주다 정비병으로 입대했다. 김 할아버지는 1·4후퇴 때 부모님께 “며칠 지나면 다시 밀고 올라올테니그때까지 기다리십시요”라는 말을 남기고 고향땅을 떠난 뒤 다시는 돌아갈수 없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1955년 육군 상사로 제대한 김 할아버지는 다음해 함경북도 청진이 고향인 최춘희(崔春熙·66)씨와 결혼했다.해방전 함께월남한 아내의 가족들이 부럽기만 하다는 김 할아버지는 울적할 때면 북녘고향 얘기로 망향의 설움을 달래곤 한다. 그는 “가만히 눈을 감고 있으면 어릴적 뛰어놀던 발롱산이 눈앞에 펼쳐진다”며 연신 울먹였다. “새벽이면 옆집 양조장에서 술빚는 냄새가 은은했고,어머니는 아침 밥상에 그 유명한 함흥 가자미식혜를 반찬으로 올리셨지.아버지를 따라 갔던 우시장에서 먹던 함흥냉면 맛은 또 어떻고…” 15살 때 함흥에서 배운 운전과 정비기술 덕택에 김 할아버지는 제대 후에도유조차와 화물차를 운전하며 딸 셋과 아들 하나를 남부럽지 않게 키웠다. 김 할아버지는 “자식들을 데리고 고향에 가서 형·아우와 둘러 앉아 함흥냉면을 먹으며 살아온 얘기를 두런두런 나누는 것이 마지막 소원”이라고 말했다. 이창구기자 window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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