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인민군
    2025-12-29
    검색기록 지우기
  • 스페인
    2025-12-29
    검색기록 지우기
  • 오사카
    2025-12-29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2,842
  • 金正日위원장 내년봄 답방

    북한 김정일(金正日)국방위원장의 내년 봄 서울 답방이 추진된다. 남북한은 또 오는 27일부터 나흘간 제주도에서 열리는 3차 장관급회담 이전에 적십자회담,국방장관급 회담,경의선 복원 실무접촉,경협제도적 장치마련을 위한 실무접촉 등을 갖기로 합의했다.이에따라 이르면 이번주부터 경의선 복원실무 접촉 등 주춤하던 남북접촉이 재개될 것으로 보인다. 김용순(金容淳) 북한 노동당 비서 일행은 제주도를 방문중이던 지난12일 밤 임동원(林東源) 대통령특보(국정원장)와 신라호텔에서 만찬회동을 갖고 이같이 합의했다고 정부 고위당국자가 13일 밝혔다. 경의선 복원을 위한 실무접촉은 이르면 이번 주말,적십자회담은 19일쯤 금강산 개최가 유력시된다.국방장관급 회담도 25·26일쯤 홍콩등 제3국에서 개최될 것으로 전망된다. 13일 오전 제주도를 떠나 포항, 경주를 거쳐 서울로 돌아온 김용순비서는 14일 상오 청와대에서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을 예방하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메시지와 친서를 전달할 것으로 알려졌다.청와대측은 김 비서와의 논의 결과를 정리,발표할 예정이다.김용순 비서는 청와대 예방을 끝으로 방문일정을 마치고 고려항공편으로 북한에 돌아간다. 앞서 김 비서는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특사자격으로 일행 7명과함께 11일 오전 10시 고려항공편으로 김포공항에 도착, 3박 4일의 방한일정을 시작했다. 북측 일행에는 박재경 인민군 총정치국 선전담당 부총국장,림동옥당 통일전선부 제1부부장,권호웅 당중앙위 지도원,박성철 당중앙위과장,김광렬 당중앙위 지도원 등 군부와 당의 실세들이 포함됐다.그러나 박 부총국장 등 2명은 김정일 위원장이 남측 인사에게 선물하는송이버섯 전달식 직후 바로 평양으로 돌아갔다. 공동취재단 이석우기자 swlee@
  • [대한광장] 푸른 하늘을 위하여

    9월의 문화인물로 정해진 시인 김수영의 작품 중에 ‘풍뎅이’란 시가 있다.비교적 초기에 씌어진 시인데 거기에는 소시민적 삶의 어려움과 막막함이 잘 표현되어 있다.시는 목이 비틀려진 풍뎅이가 뒤집어진 채 날지 못하고 ‘등판으로 땅을 쓸어가면서’ 우는 모습을 그리고 있는데 시의 화자는 그 풍경을 보면서 ‘네가 부르는 노래가 어디서 오는 것을 너보다는 내가 더 잘 알고 있다’고 말한다.또한 풍뎅이가 그렇게 울고 있어도 ‘소금같은 이 세상은 계속 존속할 것’이라는 절망의 말을 덧붙이고 있다. 누구라도 땅에 누워 통곡하며 울어본 사람은 김수영이 풍뎅이가 등으로 우는 모습에 공감하는 모습에 같이 등이 아프리라.손가락은 잘려 엎어지고 싶어도 엎어질 수도 없고 대신 등을 밀며 그 어딘가로끝까지 밀어붙여야 겨우 살 것 같은 절망감.사는 일이 그렇게 막막하다고 느껴본 일이 있는 사람에게는 그 시가 주는 아득한 슬픔에 눈빛이 닿을 곳이 없는 때가 있다는 것을 실감케 하리라. 아침저녁으로 기온은 내려가지만 낮은 아직 덥다.그러나 오락가락하는 태풍 덕분에 여름으로부터 가을로 성큼 들어선 것처럼 느껴진다. 가지 끝에 매달린 열매들은 온몸으로 빛을 빨아들여 과육에 살을 더하리라.탐스러운 과일을 상에 차려놓고 조상의 음덕을 생각하는 추석도 며칠 남지 않았다.이제 우리는 자신의 고향으로 대이동을 할 것이다.어딘가 갈 데가 있다는 것은 마음에 정처가 있는 것이어서 우리를든든하게 한다. 그러기에 누군가는 명절때 갈 고향이 없는 사람은 구원이 없다고 했던 것이리라. 그러나 이번 추석은 왜 이렇게도 심란한지 모르겠다.분명 50여년간생사조차 몰랐던 혈육들을 만나고 서로의 얼굴을 만지며 오열을 터트렸건만,통일은 미래의 일이 아니라 오늘의 일이라고,이를 위해서 자기가 선 자리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그 길에 이르는 길인가를 숙고해야 한다고 다짐을 했건만 오늘 우리의 주변은 어수선하다. 남북정상의 공동선언 이후 사실 우리사회는 커다란 변혁기에 들어섰다.그 누구도 우회하여 살 수 없는 민족이라는 커다란 길 앞에서 실로 우리는 엄청난 변화를 체감하며 서있는 것이다.비전향 장기수들이북녘으로 가고 인민군으로 간 아들은 교수 박사가 되어 환생(?)하고끊어진 철도는 이어질 것이 확실하며,무조건적인 증오와 적대감으로서로를 보던 냉전시대의 유물들을 걷어내고 같이 살아가야 할 사람이라며 서로를 신뢰하지 않으면 안되는 통일시대의 초입에 우리는 문득와버린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실제적인 모습은 어떠한가.의사들은 생명을 담보로사보타주를 하고 국회의원들은 당리당략에서 한발자국도 못나가고 또어디선가는 은행의 대출비리가 불거지고 한 마디로 난장판같다. 모두들 제 잘난 맛에 아우성들이다.그 난장판 저 안쪽에는 서로의 이익을위한 끊임없는 진흙밭 개싸움이 벌어지고 있으니…. 솔직한 심정을 토로하자면 대통령 혼자서 외롭게 이곳 저곳을 다니면서 그야말로 고군분투하는 것처럼 보인다.큰 매듭을 풀면 작은 매듭은 서로가 역할을 나누어서 풀어야 할텐데 푼 매듭을 일부러 헝클어 더 어지럽게 하고 있는 형국이 아닌가.너무도 안타깝고 답답하다. 드러누워 등으로 땅을 밀면서 우는 풍뎅이가 차라리 편하다는생각도든다. 김수영이 쓴 시 중에 ‘푸른 하늘을’이란 시가 있다.막연하게 푸른하늘을 찬미하는 시인의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고,‘푸른 하늘’(혁명)에는 피의 냄새가 머금어 있다고 씌어진 시이다. 그러고 보면 아직우리는 푸른 하늘을 볼 수 있는 눈이 준비되지 않았다는 생각도 든다. 신작로 어느 한쪽에선 햇빛 앞에서 몸을 말리는 고추도 있고 그때 한가하게 떠가는,그야말로 짙푸른 푸른 하늘이 우리의 도처에 있건만아직 우리는 그 하늘을 만날수 없다는 것인가.조금 멀리 보고 오늘을참아가는,그래서 열릴 푸른 하늘을 진정 볼 수는 없단 말인가. △강형철 숭의여대 교수·시인
  • 장기수 63명 北送

    북송을 희망한 비전향 장기수 63명은 2일 오전 10시 판문점 중립국감독위원회 회의실을 거쳐 북측 지역으로 넘어갔다. 북측은 김용순 노동당 대남담당 비서,김일철 인민무력상 등 500여명의 환영객과 조선소년단 소속 50여명의 화동(花童)을 판문점 북측 지역 통일각에 내보내 이들을 맞았다. 이어 평양에서는 수많은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 비전향 장기수들을맞았고 김일성광장에서는 조명록 조선인민군 총정치국장,홍성남 내각 총리 등 당·군 고위 간부들이 대거 참석한 환영행사가 열렸다.북송 장기수들은 이어 김일성 주석 시신이 안치돼 있는 금수산기념궁전도 참배했다. 한편 납북자가족모임과 전물군경유가족회 등은 이날 임진각과 통일대교 남단 등지에서 납북자와 국군포로의 조속한 송환을 촉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이날 송환된 홍문거씨는 “남행을 희망하는 사람이 남측 지역에 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며 “북측에 올라가면 국군포로와 납북자의송환을 적극 건의할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판문점 공동취재단
  • 비전향 장기수 맞는 북한 이모저모

    2일 오전 비전향 장기수 63명을 맞은 북측은 판문점 북측 지역 통일각에서는 비교적 차분하게,그러나 평양에서는 대대적으로 환영행사를 가졌다.93년 이인모(李仁模)씨 북송 때와는 달리 남측을 자극하지않으려고 고심한 북측의 배려가 엿보였다. ■판문점 통일각 43년 10개월 수감으로 세계 최장기 복역 기록을 가진 김선명씨가 중립국감독위 북쪽 출구를 나서자 대기하고 있던 북측 관계자는 김씨를 껴안고 감격적인 인사를 나누었다.빨치산 출신 김국홍씨는 휠체어를 타고 중감위 회의실을 통과하자 참았던 눈물을 터트렸다. 통일각 건물 벽에는 ‘백절불굴 통일애국 투사들에게 영광 있으라’는 플래카드가 걸렸다. 한편 이들이 북으로 보낸 화물은 세탁기,냉장고,TV 등 가전제품과여행용 가방 등으로 한 관계자는 “한 사람이 많게는 15개 박스,적게는 가방만 2개 보낸 이도 있다”고 설명했다.장기수들은 최고 예우를상징하는 붉은 색 벤츠 승용차에 나눠타고 평양으로 이동했다. ■북측 반응 및 평양 환영행사 평양 거리에는 이들을 환영하기 위한인파가 인산인해를 이뤘다.김일성광장에서는 4,000여명의 예술인들이 화려한 환영행사를 진행하는 가운데 조명록 조선인민군 총정치국장,홍성남 내각 총리,전병호ㆍ계응태 당중앙위원회 비서 등이 이들과 일일이 포옹하며 송환을 축하했다. 이들은 이어 김일철 인민무력상,최태복 당중앙위 비서,양형섭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김용순 노동당 대남담당 비서의 안내로 김일성 주석 시신이 안치돼 있는 금수산기념궁전을 참배했다.조선중앙텔레비전방송은 판문점을 출발,개성과 사리원을 거쳐 평양에 도착한 비전향장기수의 동정을 상세히 실황 중계했다. 판문점 공동취재단 이석우기자 swlee@
  • 93세 노모·北送아들 애끊는 이별

    “꾹 참고 안 울어.내가 눈물 보이면 아들이 맘 편히 못가잖아.아들하고 훈련했어” 먹장구름이 낮게 드리워진 1일 낮 서울 종로구 계동의 한 음식점 앞.북송을 하루 앞둔 신인영(辛仁永·71)씨의 노모 고봉희(高鳳喜·93)씨는 주름진 손으로 연방 눈자위를 부비며 애써 눈물을 참았다. 집을 나오기 전 “골수암으로 투병 중인 아들에게 내 손으로 지은따뜻한 밥을 먹이며 함께 있었던 것만으로도 행복했다”면서 “한번도 못본 며느리와 손주들 얼굴을 보는 게 마지막 소원”이라고 말하며 정갈하게 다린 와이셔츠를 챙기던 고씨였지만 막상 헤어질 때가되자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며느리에게 보내는 한복과 40년 동안 간직한 금브로치 등 선물, 아들의 짐꾸러미를 챙기며 마음을 다잡았지만 허전한 마음을 달랠 수없었다.지난 밤에는 아들과 마지막으로 한 잠자리에 들어 손을 잡고밤을 새다시피 했다. 전북 부안이 고향인 신씨는 서울대 상대 재학 중 6·25때 인민군에징집돼 월북,김일성대를 졸업한 뒤 지난 67년 공작원으로 남파,검거됐다.3남5녀의 장남인신씨가 98년 3월까지 30여년 동안 옥살이를 하는 동안 노모는 옥바라지를 하면서 아들과 함께 살 날만을 기다려 왔다. 다른 장기수들과 함께 식사를 마친 뒤 통일부가 지정한 장소로 떠날 때가 되자 신씨는 “어머니,이렇게 헤어지지만 다시 만날 날이 있을 거예요”라면서 “내년 봄 북으로 초대할 때까지 건강하세요”라고어머니를 위로했다. 고씨는 “그래,그래 나는 서운하지만 네가 좋아하는 곳으로 가니 나는 괜찮아” 하면서도 아들 신씨가 얼마 전 선물한 금반지를 낀 손으로 계속 눈자위를 훔쳤다.신씨가 “제 생각이 나시면 이 반지를 보세요”라면서 ‘만수무강 신인영’이라는 글자를 새겨 선물한 두 돈짜리 금반지다. 신씨는 배웅나온 형제와 친지들에게 “다시 만날 때까지 어머니를잘 모셔달라”고 신신당부한 뒤 뒤돌아섰다.아들의 뒷모습을 힘 없이바라보는 구순 노모의 눈가에는 눈물이 하염없이 내리고 있었다. 안동환 홍원상기자 sunstory@. *비전향장기수 北送 의미. 북송을 희망하는 비전향 장기수 63명이 2일 송환되는 것은 반세기동안 우리 민족을 옥죄고 있던 냉전구조의 해체를 본격 촉진한 ‘사건’으로 역사에 기록될 전망이다. 북송자 63명은 해방 전후 빨치산으로 활동했거나 60년대 남파된 간첩들이 대부분이다.이러한 인물들을 기꺼이 보내주기로 한 것은 우리사회의 자신감이 그만큼 성숙했다는 반증으로 여겨진다. 정부는 체제 선전에 집착하는 북측의 오랜 숙원을 ‘화끈하게’ 풀어줌으로써 앞으로 국군포로,납북자를 포함한 넓은 의미의 이산가족문제가 순조롭게 해결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환영행사 할까 93년 3월 이인모(李仁模·현재 83세)씨 송환때 북측은 판문점에서 대대적인 환영행사를 벌여 우리를 당혹스럽게 했다.정부는 최근의 남북 화해 분위기를 감안,이번엔 자극적인 행사를 자제토록 북측에 당부했다는 후문이다.그러나 평양으로 향하는 연도변이나 평양 시내에서는 대대적인 행사가 상당 기간 잇따를 전망이다.63명이 무더기로 ‘이념의 고향’으로 돌아왔다는 것은 북측으로서는주민들을 사상적으로 결속시킬 최대의 호재랄 수 있다. ■어떤 대우 받을까이인모씨의 전례에 비춰 보면 63명은 북한에서최상의 대우를 받을 것으로 보인다.북한은 이씨에게 ‘김일성훈장’과 ‘국가훈장 1급’을 주고 ‘공화국 영웅’ 칭호를 부여했다.그가다녔던 양강도 파발인민학교를 ‘이인모학교’로 개칭했으며,이 학교에 김정일(金正日)국방위원장의 친필 비석과 이씨의 반신상을 세우기도 했다.병 치료를 위해 96년 그를 미국에 보내기도 했다. 이씨는 현재 부총리급 간부들에게 제공되는 2층짜리 단독주택에서 살고 있다. 김상연기자 carlos@
  • 남북이산상봉/ 평양방문단 개별상봉 백태

    방북 이틀째인 16일 남측 이산가족 방문단은 오전 10시20분부터 각자의 호텔 방에서 비공개로 아무런 방해 없이 북측 가족들과 오붓한시간을 갖고 혈육의 정을 나눴다. ■개별상봉에서 남측 가족들은 나름대로 정성스럽게 준비한 편지와녹음 내용들을 소개해 북측 가족들의 눈시울을 적셨다. 뜻하지 않은 동생까지 만나 상봉의 기쁨이 더한 김준섭씨(67·서울강동구)는 두 딸인 성희씨와 인숙씨가 북에 있는 삼촌과 고모에게 보내는 편지를 소개했다.동생 경숙씨는 ‘태어나 한번도 본적이 없는삼촌과 고모,죽은 줄 알았던 아버지의 친형제가 살아 있다는 게 정말실감나지 않습니다. 부디 통일이 되어 다시 만나는 날까지 몸 건강히잘 계십시오’라는 내용의 조카들의 편지를 떨리는 목소리로 읽다가끝내 목이 메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값진 선물”이라며 흐느꼈다.김씨는 동생 창섭(62),경숙씨(54)를 만나러 왔는데 예정에 없던여동생 영숙씨(41)까지 만났다. 채성신씨(73·경기 하남시 덕풍동)도 9세때 헤어진 여동생 정열씨(62)를 만나 자신의 아내가 ‘아가씨,남편으로부터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고향생각에 슬퍼할 때마다 아가씨 얘기를 많이 했습니다.통일이되면 만날 수 있길 바래요’라는 내용의 육성 녹음과 함께 다른 가족들이 전하는 안부 녹음도 함께 들려주기도 했다. ■개별상봉에서는 뜻밖의 만남도 있었다.경기 개풍군이 고향인 상환식씨(74·경기 부천시 원미구)는 지난번 북측으로부터 사망했다는 통보를 받은 동생 복식씨(60)를 만나 믿어지지 않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척추질환 때문에 의사의 여행금지 권고에도 불구하고 휠체어에 의지한 채 오빠와 사촌동생을 만나러 먼길을 온 김금자씨(69·여·서울 강동구 둔촌동)는 첫날 오빠는 못만나고 사촌언니들만 만난뒤 이날 언니들로부터 “어젯밤 고향 친지들을 수소문해보니 오빠는2년 전 고혈압으로 사망했다더라”라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전해들었다. 김씨는 “오빠가 죽은 줄 진작 알았더라면 이렇게 아픈 몸을 이끌고오지 않았을 걸…”이라며 통곡했다. ■가족 상봉의 충격 때문에 첫날밤 심한 고열과 기침에 시달리는 등폐렴 증세를 보인 이근하씨(71·경기 시흥시 신천동)는 이날 아침 팔에 링거주사를 꽂은 채 식당에 등장,식사를 마치자마자 곧바로 평양친선병원으로 실려가 주위 사람들을 안타깝게 하기도.이씨는 그러나치료를 받은 뒤 오전 10시30분쯤 숙소에 돌아와 가족들을 만난 뒤 대동강을 유람하는 등 건강을 회복했다. ■이번 상봉에서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딸을 한꺼번에 만난 이환일씨(82·경기 안산시 선부3동)는 남한에 있는 현재의 아내가 애지중지하던 자신의 금목걸이를 녹여 만든 금반지 세 개를 북측 가족들에게 일일이 끼워주고 난 뒤 반세기 만에 처음으로 가족사진을 찍어보는 감격의 순간을 맛보았다. 아들 응섭씨는 “반갑기도 하지만 다 늙어서 이렇게 만나게 되니 서럽고 안타까운 점도 많다”면서 “한 조국인 우리가 이제는 통일의염원을 안고 살아야 합니다.저는 농사꾼이므로 이제 나라의 쌀독을채우는 조국 통일의 역군이 되갔습니다”고 말했다. ■평양이 고향인 강성덕씨(72·여·대구 달서구 진천동)는 언니를 만나 남측에서 준비해간 금목걸이 금반지 시계 밍크목도리등과 함께조카사위들에게 줄 와이셔츠 넥타이 속옷 등을 아예 여행가방째 건넸다. 강씨는 “어머니는 1·4후퇴때 9남매 중 유일하게 언니만 평양에 남겨두고 내려와 평생을 죄책감을 안고 살아왔다”며 어머니의 유품인털옷을 전해줘 주위를 숙연하게 만들었다. ■1951년 인민군 입대 통지서를 받고 이별한 아내 박택용씨(71)를 만난 최태헌씨(69)는 “내가 (가족들을) 다 버리고 남으로 갔지만 혼자살며 애들 잘 키웠소. 내가 못한 짓 조금이라도 보답될까 해서 준비했소”라며 서돈짜리 금가락지 2개를 아내 손에 끼워줬지만 박씨는아무 말도 없었다.최씨는 헤어질 때 겨우 네살이던 아들 희영씨(53)와 남동생 태화씨(67)에게도 반지와 시계를 끼워주며 “나를 용서하라”는 말을 계속했다. 아내에게서 스무살의 꽃다운 얼굴을 찾아볼 수 없다는 최씨는 “그때는 밭일도 같이 하고 일하다 새참도 함께 먹고 그랬는데 지금은 말도 잘 못한다”며 아쉬워했다. ■오후 8시30분쯤 고려호텔‘매대’(매점)에 설치된 텔레비전을 통해서울에서 북측 방문단이 남측 가족들을 상봉하는 장면이 방영되자 순식간에 판매 여직원 10여명이 몰려들어 큰 관심을 보였다. 이들은 가족들이 얼싸안고 통곡하는 장면이 이어지자 너나 할 것없이 눈물을 훔쳤다. 평양 공동취재단
  • 남북이산상봉/ 총겨눴던 주영관·영훈 형제

    “50년만에 만났는데 3박4일이라니 너무도 짧습니다” 16일 오전 서울 쉐라톤 워커힐호텔에서 형 주영관(72),동생 영인(54)씨 등 형제들을 다시 만난 영훈씨는 반갑게 이들의 두 손을 꼭 잡았다.6·25전쟁 당시 형 영관씨는 국군 장교로,영훈씨는 인민군으로 총부리를 마주했던 동족상잔 비극의 주인공들이다.그러나 이제 그들은마음껏 부둥켜 안으며 웃음을 터뜨렸다. 영훈씨는 “원래 서울 사람이라 서울 음식이 입에 잘 맞는다”고 말했다.이에 영관씨는 “동생을 만나고 난 뒤 밤새 울다가 웃다가 했다”고 말하며 다시 한번 손을 부여잡았다. 이들 형제는 가족 사진 앨범을 펼쳐 한사람씩 손가락으로 짚어가며끝없이 이야기를 이어갔다. 전영우기자
  • 남북이산상봉/ 서울만남 이모저모

    북에서 온 아들은 “오마니”를 외치며 품에 안겨 눈물을 쏟았고,남쪽의 어머니는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오열했다.기약이 없는 것처럼 보였던 만남은 뜨거운 포옹과 눈물이 되어 분출했다. ◇ 상봉 ■안순환씨(65)는 휠체어에 몸을 의지한 채 상봉 장소인 서울 삼성동코엑스에 나온 어머니 이덕만씨(87·경기도 하남시 초일동)와 동생들을 부둥켜안고 눈물을 쏟아냈다.50년 동안 소식도 없던 아들을 만난 어머니 이씨도 아들의 뺨과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이씨는 “며느리에게 갖다 주라”며 미리 준비한 금목걸이를 아들의목에 걸어 준 뒤 연신 아들의 등을 두드렸다.안씨는 “북쪽에 가족이있느냐”는 동생들의 질문에 북한에 있는 가족사진을 꺼내 아내와 자식들을 소개했고, 어머니 이씨는 “며느리가 예뻐 합격”이라며 대견스러워했다. ■북한에서 축산 및 채소 생산에서 눈부신 성과를 거둬 ‘노력영웅’칭호를 받은 백기택씨(68)는 자신이 알지 못하는 딸 신금옥씨(50)를보고 숨이 멎는 듯했다. 옆에 서 있는 낯선 얼굴이 궁금했던 백씨는 여동생 문옥씨(67)로부터 “오빠,오빠가 의용군에 입대한 뒤 태어난 오빠 딸이야.오빠 딸”이라는 말을 듣고 한동안 그 자리에서 얼어붙은듯 움직이지 못했다. 유복자라는 이유로 외가에 입적돼 호적상으로는 백씨의 조카로 돼있는 딸 금옥씨가 “아버지,저 금옥이에요.아버지 딸”이라며 아버지품으로 달려들자 주변은 울음바다가 됐다. ■만주에서 갖은 고생을 하다 전북 임실로 건너 온 뒤 전쟁 때 전주북중 입학증까지 받았지만 행방불명됐던 정춘모씨(63)는 계모 최순래씨(78)를 붙잡고 눈물을 쏟았다. 최씨는 “교복 입은 사진만 달랑 남겨 놓고 사라져 꿈같이 살아 왔다”며 울먹였고,여동생 정영자씨(54)는 “김대중 대통령이 정상회담을 마치고 북한에서 돌아올 때 하얀 비둘기가 집 안으로 날아든 뒤꼭 한 달 만에 오빠를 만날 수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말했다. ■지난달 19일 북쪽의 형 문병칠씨(68)의 생존 소식을 전해 들은 뒤사흘 만에 치매를 앓던 어머니 황봉순씨(90)를 저세상으로 떠나보낸동생 병호씨(64·강원도 고성군 죽왕면 인정리)는“어머니는 형님이살아서 내려온다는 소식을 듣고 치매 환자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기력을 회복했는데 사흘 뒤 ‘병칠이가 보고 싶다’고 손을 내저은뒤 갑자기 숨을 거두셨다”며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 여동생 정자씨(59)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큰오빠의 손을 꼭 잡고는“오빠가 죽은 줄 알고 절에 위패까지 모셔 놓고 매년 제사를 지내왔다”면서 ”어머니가 한 달만 더 사셨어도 오빠를 만날 수 있었을텐데…”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서울신문 논설위원을 거쳐 국회의원을 지낸 주영관씨(72)는 지난 50년 동국대 정치경제학부에 다니다 의용군에 입대한 동생 영훈씨(69)를 만나자 “어머니는 7년 전 지병으로 돌아가실 때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너를 찾으셨다”면서 눈시울을 붉혔다. 영관씨는 “헤어진 이듬해 나도 바로 국군 연락장교로 입대해 너를만날 수 있을까 찾아 헤맸단다.서로 적군으로 총부리를 맞대더라도혹시 전쟁터에서라도 만나기를 고대했었는데 이제야 이렇게 만나게됐구나”라며 동생의 얼굴을 몇 번이나 쓰다듬었다. ■인민군이 서울에진입한 바로 그날 중학생으로 의용군에 징집됐던임재혁씨(66)는 휠체어와 지팡이에 의지한 채 치매로 듣지도 못하고말도 할 수 없는 아버지 임휘경씨(90·서울 양천구 목동)를 보고 목이 메었다. 재혁씨는 형 창혁씨(71)에게 “어머님,어머님은…”하고 감정을 억누르며 물었지만 “15년전 돌아가셨어.늘 네 얘기만 하시곤 했는데…”는 말을 듣곤 할 말을 잃었다.. ■박노창씨(69)는 조카들로부터 큰형 원길씨(89·서울 은평구 신사동)가 상봉을 이틀 앞두고 세상을 떴다는 소식을 듣고 맥이 풀렸다. 노창씨는 지난달만 해도 6남매 중 유일하게 생존해 있다고 통보된큰형의 운구가 이날 오전 8시30분 장지인 경기 파주시 금촌면으로 향했다는 말에 “믿을 수 없다”며 망연자실했다. ■죽은 줄만 알았던 큰아들 조진용씨(69)를 만나 기쁨의 눈물을 흘리던 어머니 정선화씨(95)는 갑자기 호흡이 가빠지면서 쓰러져 들것에실려 아들을 만났다.정씨는 고령에다 아들을 만난다는 설렘 때문에아침은 물론 며칠 동안 식사를 제대로 못해 기력이 쇠약해진 것으로알려졌다.■상봉 가족수를 제한해 코엑스에 가지 못하고 8남매 중 맏이인 오빠 김용환씨(68)를 만나러 무작정 쉐라톤워커힐 호텔로 찾아온 용순(50)·용란(43)씨 자매는 오빠 용환씨가 코엑스로 가기 위해 버스에 오르기 전 ‘기적’같이 자기 이름이 적힌 피켓을 바라보며 손을 흔들자 “오빠,오빠”를 연호하며 눈물을 글썽였다. 김정태씨(72)를 만나러 온 매부 신현묵(75)씨와 형수 박정우(70),계수 연종술(63)씨도 워커힐호텔 로비에서 ‘환영 김정태’라고 적은종이를 들고 이름을 연호하다 버스에 오르는 이산가족들의 줄이 끝날무렵 김씨를 잠깐 만날 수 있었다. ■남측 이산가족들은 오후 3시쯤 버스 편으로 컨벤션센터 동문에 도착,3시30분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행사장에 들어와 정해진 탁자에앉았으며,4시10분쯤 숙소인 워커힐호텔을 출발한 북측 가족들은 태진아의 ‘어머니’ 노래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4시40분쯤 홀에 들어와눈물의 상봉을 했다. 북측 가족들은 자기에게 주어진 번호표를 들고 홀 입구의 상황판에서 자기 번호와 같은 번호가 적힌 탁자를 확인한 뒤 탁자를 찾아가남측 가족들을 만났다. ◇ 김포공항 ■북측 가족 151명을 태우고 공항에 도착한 북한 고려항공 승무원들은 공개된 자리에서 남측 승무원들과 악수를 나누었다.고려항공 승무원들은 오전 11시30분쯤 북측 가족들이 국제선 2청사 17번 게이트를통해 빠져나간 뒤 게이트 앞에서 10분 간 만남의 시간을 가졌다. 대한항공 김홍정 사무장(52)과 유은아씨(27) 등 스튜어디스 5명은게이트 앞으로 나온 박승남 기장(46) 등 10여명의 고려항공 승무원들에게 꽃다발과 기념시계를 선물했다. ◇ 워커힐호텔 ■밤 10시쯤 숙소인 워커힐호텔에 돌아온 북측 방문단들은 대부분 상봉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듯 상기된 얼굴로 “내일 다시 만나도 울음을 참을 수 없을 것 같다.잠을 이루지 못할 것 같다”고 말했다. 이에 앞서 오전 10시57분 김포공항에 도착한 북측 이산가족들은 숙소인 워커힐호텔로 이동,방 배정을 받은 뒤 여장을 풀고 호텔 식당에서 서울에서의 첫 식사를 했다. 점심은 갈비찜,은행죽,인삼야채무침,민어삼색전 등이 곁들여진 한정식으로,호텔 관계자는 “상봉단이 대부분 노령층이어서 먹기 좋고 소화가 잘되는 음식으로 준비했다”고 밝혔다.대부분의 북측 이산가족들은 “김치가 제일 맛있다”면서 “같은 조선 사람들인데 달리 맛을느끼겠느냐”며 남북 동포들이 한 입맛임을 강조했다. 북측 가족들의 가슴에는 김일성배지와 함께 인공기와 적십자 표시가결합된 새로운 형태의 배지가 달려 있어 눈길을 끌었다. 북측 가족들은 신원을 증명하는 명찰도 휴대하고 있었다. ◇ 올림픽파크텔 ■밤 10시30분쯤 올림픽파크텔에 도착한 남쪽 가족들도 북한 방문단과의 상봉의 순간을 다시 되새기며 16∼17일의 개별 상봉시간은 어떻게 보람있게 보낼까 의논했다. 이날 아침 남측 가족들 중에는 잠을 설친데다 50년 만에 가족들을만난다는 기대 때문에 올림피아홀에 마련된 아침 식사를 제대로 들지못하고 남기는 사람이 많았다. 한편 남쪽 가족들은 기자들이 객실로 몰려와 취재 경쟁을 벌이자 가족간 대화 등에 방해가 된다며 기자들의 객실 출입을 막아달라고 요청했다.호텔측은 송파경찰서의 지원으로 이산가족들이 머무는 각 층마다 의경 2명씩을 투입해 객실 접근을 막았다. ◇ 한국종합전시장■북측 방문단과 남측 이산가족은 이날 저녁 대한적십자사가 강남구삼성동 한국종합전시장(COEX) 그랜드볼룸에서 주최한 환영만찬에 나란히 참석,재회의 기쁨을 함께 했다. 만찬은 상봉 시간이 지연되는 바람에 예정보다 1시간여 늦은 오후 7시40분께 시작됐으며 남북 상봉자 600여명과 한적 관계자 100여명 등이 참석했다. 한적 봉두완(奉斗玩) 부총재는 환영사에서 “만나면 이렇게 좋은 것을 왜 50여년동안이나 미뤄왔는가”라면서 “반세기 동안 간직했던회포를 이 자리에서 맘껏 푸시길 바란다”고 축원했다. 특별취재단
  • 한민족 하나로 남북이산상봉/ 평양서 여동생 만난 呂寅烈씨

    “여동생을 만나면 제일 먼저 눈물로 사죄할 겁니다” 황해도 은율에 두고온 막내여동생 여정숙씨(60)를 만나기 위해 15일방북 버스에 오르는 여인열(呂寅烈·81)씨는 연신 눈물을 훔쳤다. 1·4 후퇴때 “같이 가겠다”며 매달리는 여동생을 떼어놓고 내려와평생을 죄책감으로 살아왔다는 여씨.그는 “내 옆구리를 붙잡고 ‘데려가달라’며 눈물을 쏟던 9살짜리 막내에게 총알 탄피로 만든 연필칼을 쥐어주며 억지로 떼어놓고 왔다”면서 “가족을 대표해 여동생에게 사죄하러 가는 길”이라고 말했다. 당시 여씨 가족은 인민군들이 마을의 남자들을 의용군으로 차출하면서 가족들을 다 죽인다는 소문에 허겁지겁 인근 ‘초도’란 섬으로피했다.하지만 급하게 떠나느라 고령으로 거동이 불편한 할머니와 막내여동생은 그대로 남겨두었다.당시에는 ‘1주일이면 다시 돌아온다’는 생각으로 애써 위로했지만 결국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생이별을 하고 말았다. 이산가족 상봉 신청을 하면서 “2남2녀중 유일하게 북에 떼어놓은여동생이 굶어죽지 않고 살아만 있어도좋겠다”고 생각했다는 여씨는 “내가 최종 방북자 100명 안에 들자 온 집안이 기적이라며 부둥켜안고 울어 눈물바다를 이루었다고 말했다. ‘심봉사가 딸을 만나러 가는 심정’이라는 여씨는 “아직 부친(여석준·100·전북 군산시나운동)이 생존해 계시는데 아버님도 같이 동생을 상봉할 수 있게 된다면 더이상 소원이 없겠다”며 다시 눈시울을 붉혔다. 아버지는 집안의 막내로 ‘이쁜이’라고 불리며 집안의 온갖 귀여움을 독차지했던 여동생이 살아있다는 소식을 전하자 “집안의 보물이니 꼭 데려와야 한다”며 눈물을 쏟아냈다고 여씨는 전했다. 특별취재반
  • 남북이산상봉/ 김일성대학 교수 조주경씨

    “어머니,건강이 어떠세요” “너도 나이먹고 이렇게 늙었구나.아이고 불쌍해라…” 김일성대학 조주경 교수(68·경북 영양군 영양면 출생)와 어머니 신재순씨(88·부산시 서구 서대신동)는 주름살 가득한 서로의 얼굴을비비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신씨는 “죽은 줄 알고 가슴에 묻었던 네가 훌륭히 자라준 것이 너무나 고맙구나”라면서 아들의 품에 안겼고,조씨는 “어머니는 젊어서 아버지를 여읜 뒤 재혼도 않고 오직 나를 공부시키기 위해 혼자사셨는데…,제가 잘못했습니다.죄인이에요”라며 노모의 어깨를 감싸안았다.신씨는 “20여년 전부터 부산의 내원정사에서 예불을 빠뜨리지 않고 간절히 기도를 드렸더니 부처님이 소원을 들어주신 모양”이라며 아들의 얼굴을 다시 한번 어루만지며 눈물을 쏟았다.조씨는 지난 50년 서울대 재학 당시 인민군에 끌려갔다 북한에서 김일성대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특별취재단
  • 남북이산상봉/ 北 국어학자 류렬씨

    “어디보자,내 딸 인자야.돌아가신 네 어머니를 참 많이 닮았구나” “아버지.얼마나 보고 싶었다구요” 북한 국어학자 류렬씨(82)와 딸 인자씨(59·부산시 연제구 연산동)는 부녀를 갈라놓았던 반세기 세월에 대한 원망을 씻어내기라도 하듯서로를 부둥켜 안고 목놓아 울었다. 인자씨는 “아버지 얼굴을 잊지 않으려고 보고 싶을 때면 한장 밖에남지않은 사진을 보고 또 봤어요. TV를 통해 아버지 얼굴을 본 후 제정신이 아니었어요”라며 반세기 동안 불러보지 못한 ‘아버지’를거듭 불렀다. 류씨는 딸에게 “내 일생을 엮은 TV영화가 있는데 봤느냐”면서 북한에서 국어학자로서 유명세를 떨친 자신의 삶에 대해 말했다. 이어 인자씨가 여든을 넘긴 부친의 건강을 걱정하며 “아버지 오래사셔야해요”라고 하자 “병원에서 진단을 받았는데 영양관리하면 아흔살까지는 살 수 있다고 하더라”며 자신감을 보였다.6·25당시 홍익대 교수로 재직했던 류씨가 딸과 헤어지게 된 것은 1·4후퇴때.외삼촌에게 딸려 딸 인자씨를 피란시킨 후 인민군에 입대,월북했다. 특별취재단
  • 남쪽 7남매의 북 큰형맞이

    “누님이 지은 모시적삼 입고 고향서 같이 살면 얼마나 좋을꼬…” 50년만에 서울에서 만날 큰 형 권중국(權重國·70)씨를 맞을 준비를 한 13일 중호(重浩·56·서울 광진구 노유동)씨의 32평짜리 집은 7남매가 모여 선물 보따리를 꾸리느라 마치 잔칫집처럼 북적거렸다.서울에 사는 조카와 일가 친척 등 20여명이 하루 종일 집안을 가득 메웠다. 고향 경북 영주에 사는 순희(順姬·76·여),계희(桂姬·74·여),차희(且姬·66·여),중후(重厚·62),춘례(春禮·59·여)씨도 새벽 3시기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왔다.중호씨 집 근처에 사는 막내 중수(重守·50·광진구 중곡동)씨까지 7남매가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여 50년만에 만날 형 얘기로 꽃을 피웠다. 지난 49년 결혼해 신접 살림을 차리고 있던 중국씨는 이듬해 6·25가 나자 고향에서 인민군으로 징집돼 가족과 헤어지게 됐다.10년동안 수절하던 형수는 형제들의 권유로 개가했다 얼마 전 세상을 떴다. 7남매는 형님이 어떻게 변했을까,시누이는 어떤 여자일까 등 정담을 나누면서 선물 가방에 가족사진첩,목걸이,시계,오리털잠바,내의,양말 등을 정성스레 담았다. 떠들썩하던 분위기는 남동생 중후씨가 “형님 환갑이 지난 10년전부터 형님 제사를 지내왔다”면서 “3년전 돌아가신 어머니께서 조금만 더 사셨으면 꿈에도 못 잊던 큰아들을 만날 수 있으셨을 텐데…”라고 말하자 갑자기 조용해졌다. 둘째 계희씨는 “50년만에 만나는 동생에게 내 손으로 지은 옷을 입히고 싶었다”며 손수 만든 하얀 모시적삼을 어루만졌다.계희씨는 “이 옷을 입고 부모님 산소에 술이라도 한 잔 따라야 할 텐데…”라면서 “형제가 50년 동안 갈라져 산 것도 억울한데 왜 고향에도 못 가느냐”며 눈시울을 붉혔다. 중국씨가 고향에서 손수 베껴 만든 소학(小學)책까지 꼼꼼히 챙기던 7남매는 “조카 부부와 손자들까지 합하면 100여명인데 50년 동안쌓인 이산의 한을 어떻게 선물보따리 하나로 풀 수 있겠느냐”면서도 “뭐 하나라도 더 보낼 것이 없는지 챙겨봐야 하겠다”면서 근처 시장으로 향했다. 한편 평양으로 가족을 만나러 갈 실향민과 서울로 오는 가족을 맞을 남쪽 가족 모두는 선물 보따리를 준비하면서 짧은 여름밤을 하얗게새웠다. 전영우기자 ywchun@. *방북탈락 이산가족-실향민들 추가상봉 소식에 '환호'. “우리도 갈 수 있다니 정말이냐” “정말 고향 방문이 가능하냐” 북한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이 방북 언론사 사장들과 가진 간담회에서 “이산가족상봉이 9,10월에도 계속 이뤄질 것”이라고 밝혔다는 소식이 알려진 13일 밤 ‘8.15 방북단’에서 탈락한 이산가족들은 ‘생각보다 훨씬 이른 시일 안에 북의 가족을 만날 기회가 생긴다’는 희망에 들떠 있었다. ‘8.15 상봉 명단’에 포함됐으나 109세의 노모를 만나는 장이윤(張二允·72)씨에게 순위를 양보했던 우원형(65·서울 강남구 논현동)씨는 “장옹에게 양보할 때 대한적십자사 관계자로부터 ‘다음번 이산가족상봉에는 1명이 가더라도 최우선적으로 포함시키겠다’는 말을들었는데 이처럼 빨리 갈 수 있게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고기뻐했다. 6·25때 고향 충남 청양에서 의용군으로 징집돼 소식이 끊긴 셋째형 이상두씨(68)의 생존사실을 이번 명단 교환 때 확인한 상기(相起·60·서울 동대문구 답십리동)씨는 “탈락 소식을 들었을 때 누이와 남동생과 함께 ‘살아 있다는 것을 확인한 것만 해도 다행’이라며서로 위로했지만 섭섭한 마음을 가누기 힘들었다”면서 “다음번에형을 꼭 만날 수 있도록 마음을 단단히 먹고 기다려야겠다”고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황해도 평산군이 고향인 정순용(鄭順溶·61·여·강원도 춘천시 동면)씨는 “최종 명단에서 탈락해 절망했는데 한가닥 희망을 가지게돼 기쁘기 그지 없다”면서 “북한에서 우리 네자매를 특히 귀여워해 주신 고모와 삼촌에게 남쪽에서 태어난 손아래 여동생 3명을 꼭 소개시키고 싶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아예 처음부터 명단에 들지 못했던 실향민들도 추가적인 이산가족상봉 소식을 반겼다. 부인 장정희(張貞姬·71·서울 양천구 신월동)씨는 이번에 최종명단에 들어 북으로 두 명의 여동생을 만나러 가지만 자신은 명단에서 탈락한 평양 출신 김학구(金學九·82)씨는 “북에 살아 있는 일흔다섯살이 됐을 누이동생을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다시 갖게 돼 정말 기쁘다”면서 “심장이 안 좋지만 꼭 건강을 회복해 고향땅을 밟고 싶다”고 말했다. 이날 고희를 맞은 이종권씨(70·인천시 남동구 구월동)는 “친지끼리 모여 고향 황해도 해주에 관한 이야기꽃을 피웠다”면서 “고향에서 한번 더 고희연을 갖고 싶다”고 설렘을 감추지 못했다. 전영우기자
  • 반세기만에 띄우는 편지/ 서울 오는 北형님께

    ‘북에 계신 현석 형님께’ “이 글을 올리는 저는 형님께서 가족과 헤어진 뒤 태어난 막내 동생 현광이입니다.…형님의 서울 방문을 가장 기뻐하셨을 어머니께서는 꼭 1년 전 세상을 떠나시고 말았습니다…” 김현광(金顯光·47·서울 광진구 중곡동)씨는 15일 얼굴도 모르는큰형 현석(顯碩·65·평안남도 평양시)씨를 만난다.현광씨는 상봉일이 다가오자 자신의 존재를 모르는 큰형이 당황할 것 같아 13일 사진을 동봉한 편지를 썼다. 현광씨는 “환갑이 넘으신 형님이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지만 자꾸돌아가신 어머님 생각이 나서 기쁘기보다는 서글픈 마음이 든다”고말했다. 서울 한성중학교 2학년이던 1950년 인민군 의용군으로 끌려간 큰아들을 애타게 기다리던 어머니는 지난해 8월14일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숨을 거두기 직전 “현석이가 돌아오면 며느리에게 주라”며 자신이 평생 껴 왔던 반지를 큰형 대신 장남 노릇을 해 온 둘째형 현기(顯機·61)씨에게 줬다. 현광씨는 지난 97년 8월16일 아버지 김남식(金南植·85)씨를 모시고 중국을 통해 백두산에올라 천지를 바라보며 큰형이 살아 있기를 빌었다.아버지는 이 때 북에 있는 큰아들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기 위해 천지물을 생수통에 담아왔다. 천지물을 지금껏 보관하고 있는 김남식씨는 서울에 오는 큰아들에게 자신이 가장 아끼던 시계와 카메라를 줄 계획이다. 현광씨는 “한해만 더 살아 계셨어도 큰형님을 보실 수 있었을 텐데…”라고 어머니를 떠올리며 눈물을 글썽였다. 김경운기자
  • 조선족 100년史 사진으로 본다

    ‘조선족 100년사를 사진으로 본다’ 서울 세종문화회관 세종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잊혀진 흔적Ⅱ’전은 중국 옌볜 등지에 살고 있는 조선족의 역사와 생활사를 사진으로 정리한 기획전이다.인물사진작가 류은규(40)가 직접찍거나 수집한 300여점의 사진이 전시돼 있다. 지리산 청학동 사람들 카메라에 담아온 류씨는 지난 93년부터는 옌볜에 거주하며 잊혀진 우리의 얼굴과역사를 찾아왔다. 시각문화기획사인 아트퍼브릭컴 코리아가 주최한 이 전시는 역사,문화,조선족 얼굴 등 세 부문으로 이뤄졌다.핵심은 역사부문.한반도 북부지역의 수재로 조선인들이 중국 동북지역으로 이주한 1860년대부터 문화대혁명이 끝난 1976년까지를 시대 배경으로 한다.새 농사법인 수전 개발에 나선 모습 등 이주 초기의 생활상을 담은 사진들이 나와 있다. 1910년 일제의 조선강점으로 조선인들의 만주지역 이주는 가속화됐다.그곳은 마침내 항일애국지사들의 무장독립운동의 거점이 됐다.옌벤지역에는 북로군정서,대한국민군,대한독립군 등 여러 단체들이 생겨났다.이번 전시에서는홍범도·김좌진 장군의 활약상과 한국전쟁 당시 조선인민군이나 중국인민지원군에 편입됐던 조선족의 얼굴을 찾아볼 수 있다.의열단·팔로군에 뿌리를둔 조선의용군 사진도 의미가 있다. 1966년부터 10년간 중국대륙을 강타한 문화대혁명은 조선족 사회에도 심각한 영향을 끼쳤다.옌볜의 조선족들은 여러 분파로 나뉘어 서로 비판하며 수백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무력충돌을 일으키기도 했다.양측이 돌싸움을 하는 사진은 그런 정황을 말해준다. 조선족 얼굴편은 작가가 직접 찍은 사진들로 구성됐다.독립운동가의 후손과평범한 조선족 후예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전해준다.전시는 21일까지.(02)518-3631. 김종면기자
  • 반세기만에 띄우는 편지/ 상봉단에 못든 北오빠께

    “그리운 오빠께.50년을 기다려 왔는데 500일인들 더 못 기다리겠습니까.저의 남매가 양보해 다른 이산가족이 먼저 재회의 기쁨을 누린 것이라고 여기면 돌아가신 부모님도 마음이 편안하실 것입니다” 안종순(安鍾順·65·여·서울 강남구 청담동)씨는 친오빠인 종국씨(70)가순위에 밀려 이번 8·15서울방문단에 들지 못하자 11일 서운하고 아쉬운 마음을 접고 다음을 기약하며 오빠에게 글로써 이산의 아픔을 달랜다.곁에서동생 종점씨(鍾点·56·송파구 방이동)도 거들었다. 안씨는 “50년만에 오빠의 얼굴을 보게 될 줄 알았던 저와 동생도 크게 실망했지만 나이가 많은 오빠가 혹시 낙심해 쓰러지지나 않을까 매우 걱정된다”고 말했다.안씨는 ‘곧 만나게 될테니 마음을 편히 가지라’라는 위로의말로 오빠를 안심시키기 위해 편지를 쓰기로 한 것이다. 안씨는 지난 달 28일 13살때 헤어진 오빠가 북한에서 자신과 동생을 찾는다는 소식을 듣고 ‘기적이 일어났다’고 여겼다.동생과 함께 대한적십자사로달려가 상봉신청을 한 뒤 설레고 초조한 마음으로 나날을 보냈다.그러나 지난 8일 오빠가 최종 100명의 방문단에 들지 못했다는 통보를 받고 하늘이 꺼지는 듯 했다. 적십자사 직원의 소매를 붙잡고 신청은 제대로 됐는지,생사 여부는 확인됐는지 등을 묻고 또 물었으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안씨는 북측이 내려보낸오빠의 흑백 얼굴사진을 쓰다듬으며 한없이 눈물을 흘렸다. 안씨는 “복사된 사진이라 얼굴이 뚜렷치는 않았지만 윤곽은 영락없는 젊은시절 아버지의 얼굴었다”며 그러나 “혹시 북에서 유명 인사가 아니라 이번방문단에 끼지 못한 것이 아닌가 싶어 가슴이 저린다”고 말했다. 오빠는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여름 부모님과 3남매가 살던 경기도용인까지 인민군이 들이 닥쳤을 때 집을 나간 뒤 소식이 끊겼다. 안씨는 “오는 15일 북한에서 손님들이 오면 그분들을 통해 편지를 전할 수있기를 빌 뿐”이라고 말했다. 안씨의 편지는 “다음 이산가족 상봉때는 반드시 만날수 있으니 그때까지몸 건강하세요.”라는 말로 끝을 맺었다. 김경운기자 kkwoon@
  • 반세기만에 띄우는 편지/ 김정일위원장께

    ‘김정일 국방위원장 보시오.’ “지난 50년 세월을 가족 만나는 날만 학수고대하고 살아 온 늙은이 입니다.김 국방위원장의 배려로 꿈인지 생시인지 가족 상봉을 기다렸는데,생사확인 불명이라니 하늘이 무너지는 심정입니다.…부디 하늘아래 어디엔가 있을 내 가족들을 다시 한번 찾아 주시길 바랍니다.” 8·15 이산가족 상봉을 신청해 200명 명단에는 들었으나 최종 100명을 선발하는 과정에서 북측으로부터 가족들이 ‘생사불명’이라는 통보를 받은 백경은(白景殷·71·서울 영등포구 신길동)씨는 10일 ‘마지막 희망’이라는 심경으로 썼다.겉 봉투에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드리는 글’이라고 적었다. 백씨는 가족 상봉에 대한 기대가 무너지자 며칠을 시름시름 앓다가 8일 밤‘이번 기회가 아니면 평생 쌓인 한을 풀지 못한다’는 절박한 심정에서 북한의 최고지도자에게 ‘눈물의 호소’를 했다. 여러번 고쳐 쓰느라 밤을 꼬박 새웠다는 백씨는 “고향 마을과 부모님,아내,동생들의 얼굴이 눈 앞에 어른거려 몇번이나 눈물을 흘렸다”고 말했다. 백씨가 고향인 평안남도 맹산군 맹산면 수정리를 떠난 것은 21세 때인 1950년 12월.인민군 징집을 피해 며칠간 이웃 마을에 숨어 있기 위해 집을 나섰다.그러나 이웃 마을로 피해 있어도 불안감을 떨칠 수 없어 천리길을 걸어남쪽으로 내려왔다. 어머니와 한살배기 딸을 안은 아내가 마을 어귀까지 나와 ‘끼니 거르지 말고 몸조심 하라’고 당부했던 말이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백씨는 북에 두고온 가족들 생각에 그동안 임진각에 수십번 다녀왔고,집을나설 때 아내가 손에 쥐어준 딸의 빛 바랜 사진도 수천번도 더 보았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제 나이 벌써 일흔이 넘었는데 단 한번만이라 고향 땅을 밟고 싶은 마음 간절합니다.어찌 조선반도가 이렇게 갈라져 살아야 합니까.세계 만방에 우리가 한나라인 것을 이번 기회에 꼭 보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백씨는 “일가 친척 중 한명이라도 생사가 확인되면 가족들의 생사도 알 수 있을 것 같아 지난달 다시 친척 상봉을 신청했다”면서 “이 편지가 오는 15일 북에서 오는 이산가족들을 통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전달되기를 빈다”고 말했다. 김경운기자 kkwoon@
  • [외언내언] 경의선과 지뢰

    전역을 앞둔 대대장과 후임자가 수색정찰 임무를 인수인계하는 도중 지뢰를 밟아 각기 두 무릎 아래와 발목을 잃었다.지난 6월 서부전선에서 일어난 사고다.사고 과정에서 보여준 두 장교의 뜨거운 전우애와 희생정신은 우리 사회의 귀감이 될 것으로 당시 화제가 됐다.하지만 피해 당사자들의 고통과 절망감,그리고 졸지에 가장(家長)의 사고 소식을 접한 가족들의 황망함이란 어떠했을까. [내가 내 스스로를/장악하지 못하고/내가 내 스스로에게/삼엄하지 못할 때/나는 내 발목을 자른다] 이산하 시인의 시 ‘지뢰밭’의 일부다.시인의 치열한 시심을 어떻게 느끼느냐는 읽는 이의 마음에 달려 있을 것이다.다만 필자는 시를 통해 이 땅에서 남북간 반목이 이어지는 한 두 중령의 경우와 같은 비극은 계속될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을 읽는다.민족 스스로 평화를 가꾸지 못하고,외세에 휘둘릴때 애꿎은 희생양은 생기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남북이 끊어진 경의선 연결에 합의했다는 소식은 가슴을 탁 트이게 하는 청량제였다.더욱이 그 합의를 실천하려면 총칼을 겨누고 있는 남북의 군대가 불가피하게 힘을 합쳐야 한다는 점에서 보이지 않은 ‘섭리’마저 느껴진다.정부는 경의선 복구 지역의 지뢰 제거작업을 특수야전 공병부대에 맡길 것으로 알려졌다.북한도 업무 자체의 특성상 이 일을 인민군에 맡길 수밖에 없을 것이다. 2억9,000여만평에 이른다는 비무장지대에는 남북에 걸쳐 100만∼200만개로추정되는 엄청난 수의 대인·대전차지뢰가 매설돼 있다고 한다.그중 경의선복구로 당장 지뢰를 제거해야 할 지역은 7만3,000여평이라고 한다.토목공학적으로 보면 남한이 문산∼장단 12㎞ 구간을,북한이 장단∼봉동간 8㎞ 구간을 맡으면 된다. 그러나 지뢰 제거는 고도의 기술적인 어려움과 예기치 않는 불상사가 뒤따를 개연성이 큰 작업이다.이처럼 ‘인화성’ 강한 작업을 위해서는 양쪽 군관계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허심탄회하게 그 방법을 논의해야 할 것이다. 양측이 경의선 복원을 위해 군사 협의 채널을 통해 질서 있게 지뢰를 제거해 나간다면 상호 신뢰도 또한 크게 축적될 것이다.따라서 경의선 철로변지뢰가 분단의 상징에서 남북 군축 협상을 앞당기는 기폭제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져본다.남북이 휴전선에 집중시킨 화력을 후방으로 물러앉히는 일이 셀리그 해리슨(미 우드로 윌슨연구소 수석연구원)과 같은 학자들의논문에서가 아니라 ‘실제상황’이 될 수도 있지 않겠는가. 구본영 논설위원.
  • 北에서 오는 이산가족 맞을 남쪽가족들

    북측이 이산가족 100명의 명단을 통보하기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는 남쪽의이산가족들은 선물을 준비하는 등 상봉의 기대에 밤잠을 설치고 있다.미수(米壽;88세)의 어머니는 날마다 집안 청소를 하며 환갑을 넘긴 딸과의 만남을 머리 속에 그리고 있다. 지난 50년 고향 충남 청양에서 인민군에 징집돼 헤어진 형님 리상두씨(68)를 기다리는 이상기(李相起·60·서울 동대문구 답십리동)씨의 2남1녀 형제들은 요즘 매일 전화를 주고 받는다.이씨는 “지난 일요일에는 형제들이 모여 의논한 끝에 형님과 형수님께 한복을 마련해 드리기로 했다”면서 “충남 천안에 사는 누님은 ‘마을 사람들을 모두 불러 잔치를 열겠다’며 즐거워하고 있다”고 전했다.이씨는 “자식과 조카,손자손녀를 합해 80명이 넘는식구들이 일사불란하게 형님을 맞을 준비에 여념이 없다”고 흐뭇해 했다. ‘북한의 여성 예술인 제1호’인 현대무용가 김옥배씨(68·여)와의 상봉을기다리는 여동생 숙배(金淑培·64·여·경기도 분당 서현동)씨는 “어머니도 살아 계시고 형제들도 있으니까 100명 안에 꼭 들 것으로 확신한다”면서“동네 최고 미인이었던 언니에게 줄 금목걸이를 마련했다”고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김씨는 “88세 되신 어머니는 언니를 집으로 데려와 당신 손으로따뜻한 밥 한술 지어주시는 것이 소원”이라면서 “어머니가 날마다 집안을손수 청소하며 언니를 기다리신다”고 말했다. 전영찬(全永燦·55·서울 성북구 장위1동)씨도 가족과 함께 영화배우 형님전덕찬씨(72)를 맞을 준비에 바쁘기는 마찬가지다.전씨는 “얼마 전 4남매와 가족들이 모였을 때 큰 형수가 북에 계시는 형님이 꿈에 나타나 ‘이번에는 만나러 가겠수다’라고 했다고 말해 온 식구가 웃음꽃을 터뜨렸다”면서 “미술을 전공하는 막내딸은 큰아버지 초상화를 그려드리겠다고 단단히 벼르고 있다”고 즐거워했다. 4남2녀 가운데 둘째 오빠 리종필씨(69)를 맞을 누이동생 이종완(李種婉·66·여·충남 아산시 건곡동)씨는 “신문과 TV 뉴스를 보면서 초조하게 발표만 기다리고 있다”면서 “100살 드신 어머니는 ‘북에 살아있는 둘째 아들이내려온다’고 종이에 써서 보여드려도 이해하지 못하시는 것같아 마음이 아프다”고 눈시울을 붉혔다.이씨는 “어머님을 모시고 4남매가 모두 고향 충남 아산에서 잔치도 벌이고 고향땅에 모신 아버님 묘소에도 찾아가겠다”고말했다. 전영우기자 ywchun@
  • 南北 軍특수인력 동원 ‘해체’

    서울과 신의주를 연결하는 경의선을 복구할 경우 철도가 통과하는 지역에매설된 지뢰제거가 복구공사의 최대 관건으로 떠오르고 있다. 경의선 구간 20km중 남측 미연결구간은 문산∼장단간 12km이며 북측은 장단∼봉동간 8km이다. ■어디에 얼마나 매설됐나 경의선은 남·북한간 군사분계선을 관통한다.이지역에는 대인지뢰,대전차지뢰 등 모두 100만발이상의 지뢰가 묻혀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국방부가 지난해 국회 국방위원회에 제출한 국감자료 등에 따르면 한국전쟁이후 민간인통제선 북방에서 비무장지대에 걸쳐 매설된 지뢰는 모두 105만발.후방지역의 경우 주요기지 경계용으로 대인지뢰 7만5,000발이 매설된 것으로 알려졌다. 비무장지대의 지뢰매설지역은 2억9,760만평으로 여의도면적의 334배에 이른다.이를 제거하는 데 드는 비용만 10억달러가 소요된다. 합참관계자는 “전방지역 매설지뢰의 90%이상이 한국전쟁 당시 매설된 것으로 알고있다”면서 “6.25전쟁중 공중투하된 불발탄 및 미확인지뢰지대에 묻힌 지뢰는 제외된 것”이라고 말했다. 휴전후 우리 군이 북한군의 남침이나 공작원의 남파 등을 막기 위해 매설한 지뢰의 경우 ‘매설지뢰보고서’ 등에 기록돼 있기 때문에 매설지점과 매설규모 등을 파악하는 것은 가능하다.매설때 철거를 염두에 두고 기록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매설지뢰 어떻게 제거하나 경의선 복구는 ‘선 지뢰제거,후 공사착공’의수순을 밟을 것으로 보인다.북한측이 경의선 북측구간 공사에 인민군을 대거 동원할 것으로 알려진만큼 우리도 군 특수인력을 동원한다는 복안이다.이는 비무장지대의 경우 지뢰제거작업때 군사분계선을 월선할 수 밖에 없는 특수한 사항을 고려한 조치로 보인다. 합참은 오는 8일 문산지역 주둔부대와 합동으로 경의선구간이 지나는 지역에 묻혀있는 지뢰제거 및 지원문제 등을 논의할 계획이다. 군 고위관계자는 “1차 장관급회담에서 경의선복구에 합의한 만큼 향후 2차 장관급회담에서는 구체적인 협력방안 등이 논의될 것”이라면서 “남북한군이 지뢰제거작업을 시발로 군사적 신뢰를 구축할 수 있게 되길 바란다”고말했다. 노주석기자 joo@
  • 8월의 호국인물 이성가 육군소장

    전쟁기념관은 28일 6·25 전쟁 당시 경북 영천전투와 크리스마스 고지 전투를 승리로 이끈 고 이성가(李成佳·1922∼1975) 육군소장을 ‘8월의 호국인물’로 선정했다. 만주에서 태어난 이 소장은 중국 난징(南京) 군관학교를 졸업한 뒤 소령때까지 중국군에 복무하다 해방후 귀국해 창군 작업에 참여했다. 1948년 10월 제4연대장으로 여수·순천반란사건을 진압했으며 1949년 9월에는 태백산지구 공비를 토벌하는 등 6·25전쟁 전까지 태백산지구 전투사령관을 지냈다. 전쟁이 일어나자 국군 8사단을 지휘,충북 단양지역에서 북한 인민군의 공격을 6일동안 지연시켜 소백산맥 방어선을 구축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영천지역에서 혈전 끝에 북한군의 공격을 격퇴,전세를 반전시키는 공을 세웠다. 반격작전 때는 북진의 선봉을 맡았고 1951년 9월 이후에는 7사단장으로서중공군과 혈전을 벌여 전술적 요충지인 백선산과 크리스마스 고지를 확보하기도 했다. 휴전후 5군단장,육본 정보참모부장,육군대학총장을 지낸 뒤 소장으로 예편했다.멕시코·터키·오스트리아대사를 역임했다.생전에 태극무공훈장과 을지·충무·화랑 무공훈장을 받았다. 노주석기자 joo@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