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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군포로와 반공포로가 고려호텔에서 동시에 혈육과 상봉

    분단의 아픔을 온몸으로 체험한 ‘국군포로’와 ‘반공포로’가 고려호텔에서 동시에 혈육과 상봉,50년 동안 참았던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국군포로 손원호(75)씨를 만난 남의 동생 준호(67·경북 경주)씨는 40년간 제사를 지냈다며 수절한형수의 안부를 전했다.원호씨는 영웅훈장 바로 아래인 ‘국기훈장 1급’ 등 8개의 훈장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김재덕(69)씨의 남측 동생인 재조(65·경남 남해군)씨는 가슴에 훈장을 4개나 달고 나타난 형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삐죽히 솟은 어금니를 확인한 뒤 “맞구나,맞아 형이구나”라며 감격어린 포옹을 나눴다.한편 53년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석방된 인민군 출신 반공포로 김한전(70)·장형섭(78)·최인식(71)·최창환(70)씨 등은 북측 혈육들을 만나 모진 ‘한풀이’를 했다. 오일만기자 oilman@
  • “”主敵개념 변경 않으면 국방장관회담 못연다””

    북한이 남북 군사실무회담 석상에서 우리 군의 주적(主敵)개념 변경을 요구하면서 이를 이행하지 않으면 남북 국방장관 회담을 개최할 수 없다고 통보한 것으로 전해졌다. 11일 국방부에 따르면 북한측 수석대표인 류영철 인민무력부 부국장(육군 대좌)은 지난 8일 판문점 북측 통일각에서열린 제5차 남북 군사실무회담에서 낭독한 5쪽 분량의 종결연설문을 통해 “남한이 주적 개념을 바꾸지 않으면 국방장관 회담은 없다”고 일방 통보했다. 류 수석대표는 “남측의 주적 개념 유지에 대해 김일철 인민무력부장(인민군 차수)도 분노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이같이 통보한 것으로 전해졌다.북한이 주적 개념을 남북 공식회담의 개최 여부와 연계시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에따라 당초 이달 말이나 3월 초쯤 열릴 것으로 전망된 제2차남북 국방장관 회담의 개최 여부가 불투명해졌다. 정부는 당초 남북 국방장관 회담을 조기에 열어 군사실무회담에서 합의한 ‘비무장지대(DMZ) 공동규칙안’을 공동서명하고 군사적 신뢰구축 문제를 본격 논의한다는 계획이었다. 노주석기자 joo@
  • 올 칠순 소설가 이호철 ‘이산타령‘펴내

    1955년 등단,46년간 작품활동을 하며 올해로 칠순을 맞는 소설가 이호철의 다섯번째 소설집 ‘이산타령 친족타령’(창작과비평사)이 출간되었다. 이 작가만큼 한국전 및 월남민 이야기와 분단 문제를 일관되게,그리고 다층적으로 이야기한 소설가는 드물다.32년생인 작가는 고향 원산에서 고등학교에 다니던 50년 한국전쟁 때 인민군으로 내려왔다가 국군 포로가 되었고 고향인근서 풀려나 그해 12월 월남하였다.작가는특히 지난해 남북정상회동 직후인 8월 남측 이산가족 방문단의 기록담당 지원요원으로 방북해 50년 만에 북의 누이동생을 만나기도 했다. 이번 소설집은 누이동생을 만나기 전까지의 작품들을 묶은 것이다.지난해와 1999년에 씌어진 단편 세 개,91년부터 97년 사이의 세 작품,그리고 60년대 발표했다가 최근에 개작해 재발표한 작품 등 모두 9편이다.이호철은 “이 소설집을 엮기 위해 지난 십여년간 발표한 단편가운데 쓸만한 것으로 네다섯 편을 골라 보니,하나같이 남북관계에맥이 닿아 있었다”면서 “1955년부터 내가 써왔고,앞으로의 여생 동안혼신으로 써나갈 내 소설의 총량은 ‘탈향에서 귀향에 이르는 도정’으로 압축될 수 있으리라는,내가 그동안 여러번 했던 언설이 이작품집부터 쏙 들어맞아간다는 것이 확인되었다”고 말한다(작가의말). 독자들은 이 작가가 분단이니 남북관계니 하는 말보다 탈향과 귀향이란 말에 마음을 더 바치고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포로에다 혈혈단신으로 월남한 십대(틴에이저) 신세,20여년 후의 간첩 누명 등 작가 자신이 맞은 역사의 유탄을 고집스레 매만지며 끙끙 앓은 모습 대신 비인간적인 역사가 자신에게 준 우여곡절을 역사를 초월하는 인생살이의 보편적 궤적으로 부드럽게 쓰다듬고 있는 모습으로 다가온다. 그런 만큼 소설집 안의 최신작 세 편은 40년전의 이호철의 분신인 ‘판문점’이나 ‘닳아지는 살들’이 자랑하던 팽팽한 절제력과 공격적인 치열함은 찾기 어렵다.대신 자신에게 할당된 고통과 고뇌의 마당을 한번 다 쓸어본 사람의 여유로움이 있다.어떤 독자는 그의 중언부언하고 만연적인 노인성 어투의 늘어짐에 눈살을 찌푸릴 수도 있으나전쟁상황이나 이산 문제를 시사적, 평면적으로만 보고 있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며 깨우쳐 주는 ‘높은 시선과 넓은 마음’이 돋보인다. 단편 ‘비법 불법 합법’에서 독자는 월남한 극우청년단원으로 여러악행을 했다는 원상사의 남성적이며,인간적인 전쟁 중 행태에 매혹되곤 한다.나쁘다거나 좋다고 가볍게 양단할 수 없는 이 인물이 내보이는 역사와 인생 시각에는 생각할 거리가 많다.나머지 두 작품중 ‘사람들 속내 천야만야’가 다소 구태의연하고 정돈이 덜된 작품인 반면표제작 ‘이산타령 친족타령’은 이산 스토리도 가슴아프고 스토리가담고 있는 정치나 역사를 웃도는 인간성과 인간관계의 함의도 가슴깊이 와닿는다. 김재영기자 kjykjy@
  • 국군포로 2명 탈북 귀환

    국가정보원은 31일 국군포로 박기출(70)·이기형(75)씨 2명과 북한이탈주민 7명이 제3국을 경유해 입국,관계기관과 합동으로 탈북·입국 경위를 조사중이라고 밝혔다.박씨는 8사단 소속으로 53년 6월 강원도 김화전투에서 중공군 포로가 된 뒤 탄광노동자로 생활하다 지난해 10월 탈북했다.이씨는 3사단 소속으로 51년 5월 강원도 양구전투에서 인민군에 포로가 된 뒤 노동자로 생활하다 지난해 10월 장남 춘복(47)·손자 대형(16)씨와 함께 탈북,이번에 동반 귀환했다. 전경하기자 lark3@
  • 북측가족 생사확인 할머니들의 안타까운 사연

    *“만나기 전엔 눈 못 감아”. ●“외아들을 만나기 전에는 눈을 감을 수 없다는 어머니의 한이 이제 풀리는 것 같아요” 북측 가족 생존 확인 신청자 가운데 최고령인 허언년(106·경기도화성군 송산면 독지리)할머니의 세 딸은 1·4후퇴 직후 헤어진 오빠(윤창섭·72)가 북한에 홀로 살아 있다는 소식에 기쁨의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50여년 동안 한을 삭여온 허 할머니는 정작 간간이 미소만띨 뿐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외아들에 대한 사무친 그리움이 병이 된탓인지 몇년 전부터 귀가 들리지 않다 지난해부터는 치매 증세로 치료를 받고 있다는 것. 큰딸 정섭씨(69)는 “당초 29일 밤 대한적십자사로부터 오빠는 사망했고 그 아들이 북한에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면서 “30일 아침 다시 오빠가 살아 있다는 통보를 받아 두배로 기쁘다”고 말했다. ●“죽기 전에 큰딸을 볼 수 있다면 여한이 없습니다”서송명(徐松明·101·경기도 의정부시 가능동) 할머니는 평양에 맏딸(현성애·74)이 살아 있다는 소식에 큰 목소리로 또렷하게 “하루 빨리만나게 해달라”고 당부했다. 막내아들 성찬씨(54)의 의정부 집에모인 큰아들 성섭씨(80) 등 가족들은 “어머니는 도라전망대를 자주찾아가 북녘의 딸을 그리며 통곡했었다”며 모녀 상봉을 간절히 기원했다. ●김강녀(101·의정부시 의정부2동) 할머니는 49년 인민군으로 징병돼 헤어진 큰아들(전기식·72)이 지난해 사망했다는 소식에 “아들을만나려 50년을 기다렸는데 먼저 가다니…”라며 통곡했다. ●“저 산만 넘으면 지척거리라는 개성에 광자가 살고 있다는데…” 30일 막내딸 현광희씨(59·본명 현광자)가 판문점 부근인 개성시 판문군 동창리에 살고 있다는 적십자사의 연락을 받은 이갑복(李甲福·88·서울 영등포구 양평동)할머니는 딸의 모습을 그리며 눈시울을 붉혔다. 이 할머니는 6·25 직후 남편(현기호씨)과 둘째딸이 서울 보광동에서 포격으로 사망했을 때에도 광자씨는 살아 남았다며 “살아서 만날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며 말했다. 1950년 9·28 수복 직후 개성의 시어머니에게 광자씨를 맡긴 것이 50년간의 긴 이별 길이 됐다. 이씨는 2차 이산가족 상봉 교환때엔 300명 후보자에 들었다가 추첨에서 탈락,식사를 하지 못할 정도로 상심했었다고 아들 현동욱(玄東旭·54)씨는 귀띔한다. 6·25로 남편과 둘째딸을 잃고 동욱씨,큰딸 해순씨를 키우며 어렵게살아온 이 할머니는 50년 동안 광자씨를 포기하지 않았다. 비록 허리는 굽었어도 철조망을 넘어 개성으로 달려가고 싶다는 이할머니는 상봉 대상자가 아니어서 재회의 날은 기약없지만 “딸을 만나기 전에는 죽지 않겠다”고 북녘 하늘을 올려다봤다. 화성 김병철기자·의정부 한만교기자·이석우기자
  • 2001 길섶에서/ 그들이 그은 금

    휴전선은 6·25동란의 결과다.휴전 협상 현장에는 유엔군,인민군,‘중공’의용군 대표들이 앉고 국군의 자리는 없었다.휴전선의 원형은삼팔선이다.제2차세계대전의 부분인 태평양전쟁의 산물이었다.북위 38도선을 경계로 하여 미국군과 소련군이 진주한다.일본을 내몰고 들어온 또 다른 외세였다. 러일전쟁 때도 조선 분할이 거론됐다.북위 39도선으로 잘라 나눠먹자는 것이었다.그런데,아프리카 남쪽 끝을 돌아 동해까지 오느라고지쳐 빠진 발틱 함대가 일본해군에 박살나는 바람에 일본은 조선을통째로 먹는다. 우리 땅을 놓고 외세가 찧고 까분 일은 훨씬 전에도 있었다.임진왜란 때 전쟁이 길어지자 왜(倭)도 명(明)도 지쳐서 그만 빠지고 싶었다.심유경(沈惟敬)이란 명나라 건달이 강화 교섭을 한답시고 양측을왕래하면서 농간을 부렸는데,왜에 조선 3도(道)를 떼어 주겠다고 사기쳤다가 들통났다. 정신차리지 않으면 외세가 우리 머리를 타고 넘으며 별 짓을 다한다.역사의 가르침이다. 박강문 논설위원
  • 북송 ‘독신 비전향장기수들’ 결혼

    지난해 9월 북송됐던 비전향 장기수 가운데 함세환(69)·김선명(75)씨 등이 지난해 말 북한에서 결혼한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 금강산에서 구랍 11∼14일 열린 남북 노동자 통일대토론회에참석하고 돌아온 민주노총 대표들은 14일 “북측 인사들이 북송 장기수 가운데 함세환·김선명씨와 이름이 확인되지 않은 2명 등 4명이결혼했다고 전해줬다”고 말했다. 또 “북송 장기수들 가운데 일부는 지난해 11월 평양에 새로 지은아파트에 입주했으며 일부는 고려호텔에 묵고 있다는 소식도 들었다”고 전했다. 함세환씨는 6·25 당시 19세의 나이로 의용군에 입대했다 지난 53년체포,89년까지 34년 동안 수감생활을 했다. 김선명씨도 지난 51년 인민군 정찰대원으로 철원지구에서 UN군에게 붙잡혀 지난 95년 출소할때까지 43년 10개월간 수감생활을 하는 등 독신으로 지내왔다. 이석우기자 swlee@
  • [사설] 남북 화해의 세기 열자

    민족사에서 유례가 드문 질곡으로 얼룩졌던 20세기를 마감하고 새세기를 맞았다.분단과 이로 인한 동족상잔과 냉전,분열의 고통을 딛고 남북이 화해의 새 시대를 열어 나가야 할 시점이다.올 한해는 지난해 역사적 남북 정상회담으로 불이 지펴진 남북간 화해·협력 기운이 더욱 무르익고 평화가 제도적으로 정착되기를 기원한다.남북 구성원이 서로 오가며 돕는 ‘사실상의 통일’ 기반이 조성되기를 바란다는 뜻이다.온겨레의 소망인 ‘완전 통일’도 이를 통해 언젠가는 성취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북한이 1일 신년 공동사설을 통해 밝힌 대(對)내외 정책방향을 주목하고자 한다.당보(노동신문),군보(조선인민군),청년보(청년전위) 등 북한의 3개 신문 공동사설은 사회주의 강성대국 건설,국가 경제력 제고,주민생활 향상 노선 등을 천명했다.특히공동사설에서는 북한당국의 6 ·15 남북 공동선언 이행 및 대외 관계개선 의지가 읽혀진다. 선군(先軍)혁명이니,강성대국 건설이니 하는수사는 일단 대내용 구호로 받아들여진다.따라서우리는 북한이 지난해에 이어 대외 개방,특히 대남 협력의 기조를 유지하겠다는 입장을거듭 확인한 것으로 보고자 한다. 돌이켜 보면 남북 정상회담이 이뤄진 지도 반년이나 지났다.그 동안남북관계 개선 속도와 방향에 영향을 미치는 한반도 안팎의 여건이많이 바뀌었다.우선 남북관계 개선의 가장 큰 추동력이었던 한국 경제가 체질개선 과정에서 전환기적 어려움을 겪고 있다.미국 부시 행정부의 등장으로 한반도 주변 강대국간 역학구도가 변화할 조짐도 보인다.자칫 현 클린턴 행정부의 대북 접근 노력이 뒷걸음치기라도 한다면 우리의 대북 포용정책은 얼마간 우여곡절을 겪을지도 모른다.뿐만 아니라 혹시 주변 강대국간 군비경쟁이 재연된다면 한반도 탈냉전의 흐름이 지체될 소지마저 없지 않다. 바로 이런 때일수록 남북은 교류·협력과 긴장완화를 제도적 틀로정착시킴으로써 상생을 도모하지 않으면 안된다.장기적으로 남북간협력을 증진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지렛대는 평화정착과 상호 이익에대한 기대감이다.특히 올해 남북경협은 서로 도와가며 이익을 공유하는 실질적 성과에 초점이 맞춰져야 할 것이다.우리가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의 지난해 평양 방문에 이어 김정일(金正日)국방위원장의 남쪽방문을 바라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김 위원장의 답방을 통해 남북이한반도의 긴장완화와 평화구축을 위한 제도적 방안에 합의한다면 남북간 공존공영의 튼튼한 토대가 될 것이다.
  • 北 올해도 ‘개방·남북화해’

    북한의 올 한해 정책방향을 담은 당보(노동신문)·군보(조선인민군)·청년보(청년전위) 등 3개 신문 공동사설 형식의 신년사는 실용적접근을 통한 경제재건 등 강성대국 건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새로운 이념·정책의 제시보다 현 테두리 안에서의 실질적이고 지속적인 정책 집행을 제시했다. 또 ‘21세기는 김정일(金正日)의 세기’라고 강조하면서 ‘자주·단결·애국애족의 정치’를 김정일(金正日)의 21세기 정치노선이라고강조했다.김정일 체제 강화와 내부 체제 단속도 실용주의 정책과 함께 병행해 나갈 것임을 밝힌 것으로 이해된다. 특히 6·15공동선언의 철저한 이행을 강조한 것은 남북관계 진전 의사의 표시다.예년과 달리 대남비난은 없었고 외세의존 및 공조포기,연방제 통일,통일을 위한 법률적·제도적 장애제거 등을 간단하게 거론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주적(主敵)개념 및 군사훈련을 제기하지 않은 것도 남북관계 진전에 대한 전향적인 태도로 해석된다. 미국,일본에 대한 비난이 사라진 것과 “자주권을 존중하는 나라들과는 어떤 나라와도관계개선을 해 나갈 것”이라고 밝힌 것도 대외관계 개선을 더욱 활발하게 벌여나갈 것임을 천명한 것이다. 정부 당국자는 2일 “북한 신년사가 전과 달리 정치부문에 이어 대외부문을 우선적으로 언급한 것도 이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라면서 북한의 대남·대외관계에 대한 실용적이고 신축적인 대응이예상된다고 설명했다. 정치적으론 ‘선군(先軍)정치’의 정당성을 강조,군부 중시의 통치방식을 계속해 나갈 것임을 밝혔다.‘21세기 사회주의 붉은기 진군’을 슬로건으로 내세웠다.경제적 측면에선 새로운 대규모 신규투자보다 경제토대의 정비를 통한 생산 정상화방안을 제시했다.또 경공업·농업 등 주민생활과 연관성이 높은 부분에 관심을 나타내는 등 실질적인 주민 기대감의 고취를 노력했다는 평이다. 이석우기자 swlee@
  • ‘남북2001’ 전망/ 金正日위원장 방한 가상시나리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역사적인 방한이 이뤄진 2001년 3월.서울의 날씨는 ‘꽃 피고 새 우는’ 전형적인 춘삼월 봄날씨였다. 이날 김 위원장은 경기도 성남 서울공항에 마중나온 김대중 대통령내외의 따뜻한 영접을 받았다.두 정상은 지난해 6월 한반도는 물론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던 것처럼 다시 한번 뜨겁게 포옹했다. 예의 인민복 차림으로 호기있게 트랙에서 내린 김 위원장은 김 대통령과 함께 의장대를 사열했다.북한을 ‘주적(主敵)’으로 규정하고있는 대한민국 국군으로부터의 첫 사열에 김 위원장의 표정은 만감이 교차하는 듯 했다.조명록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 겸 인민군 총정치국장,김일철 인민무력부장,김용순 대남 비서 등 최측근 인사들이 김위원장을 수행했다. 김 위원장의 답방은 전격적으로 발표됐다.국내 일부의 반대여론과만일의 비상사태를 감안,남북한 당국은 김 위원장의 방한일정에 대해 극도의 보안을 지켜왔다.그동안 임동원 국정원장과 김용순 대남비서 등 양측 특사들의 일정조정작업은 은밀하고 치밀하게 진행됐다.남북한 당국은김 위원장의 방한 작전명을 ‘한라산프로젝트’로 정했다. 군사작전을 방불케하는 철통보안속에서 일정조정작업이 이뤄졌다. 작전의 최우선 순위는 김 위원장과 일행의 신변보장을 위한 안전장치였다.이 때문에 회담장소와 숙소를 어디로 할 것인지를 놓고 서울과 평양간 줄다리기가 계속됐다.결국 서울과 제주를 오가는 절충안이 채택됐다. 여기에는 북측의 요구가 대부분 반영됐다는 후문이다.지난해 9월 김일철 인민무력부장이 첫 남북국방장관회담 장소를 제주도로 정해 내려온 것은 김 위원장의 답방을 준비하기 위한 사전답사의 성격일지모른다는 일반의 관측이 맞아 떨어진 셈이다.때문에 코스는 당시와크게 다르지 않았다.의전만 국가원수급으로 격상됐을 뿐이다. 김 위원장은 이번 답방에 앞서 올초 러시아와 중국으로 각각 날아가 푸틴 대통령과 장쩌민 주석을 만나 두번째 남북정상회담에 따르는정치·외교·경제적 득실을 면밀하게 따졌다. 김 위원장의 방한이 이뤄지기 전까지 남북관계는 ‘구름끼고 흐림’의 연속이었다.김 위원장은 이번 김 대통령과의 두번째 정상회담을통해 풀어야할 산적한 과제를 안고 왔다. 이산가족상봉이 횟수를 거듭하면서 상봉대상에 국군포로와 납북자도 포함시켜야 한다는 남측 요청을 북측이 단호하게 거절하면서 상봉이 일시 중단되는 문제가 불거졌다.남북을 오가며 2차례에 걸쳐 진행된 남북국방장관회담도 진전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비무장지대 안에설치된 남북공동관리구역에서 남북 군인들간의 보이지 않는 힘겨루기가 계속됐고 경의선 복원과 개성∼문산간 도로개설을 위한 비무장지대안 지뢰제거작업도 지지부진한 상태였다. 전력지원 등 경협문제도 경제균형발전을 위한 상호 호혜원칙 때문에 벽에 부딪혔다.남측의 경제사정이 다소 호전되고 있긴 했지만 남한내 보수의 목소리가 너무 높았다.부시 미국 행정부와의 북-미 미사일협상도 진전이 없었다. 이 때문에 세계의 언론은 유독 이벤트에 강한 면모를 보일 뿐만 아니라 드라마틱한 성품의 김 위원장이 김대중 대통령과의 이번 회담에서 내놓을 ‘카드’에 대해 궁금해하고 있다.관측통들은 이번 정상회담에서 두 정상이 지난 50년동안 유지돼온 정전협정체제를 평화협정체제로 바꾸는 내용의 ‘서울선언’을 발표할 가능성에 대해 주목하고 있다. 노주석기자 joo@
  • 金正日최고사령관 9돌행사 주석단 발표

    북한의 권력서열이 큰 변동없이 안정된 상태로 나타났다. 북한 당·정·군의 지도부는 지난 23일 김정일(金正日) 노동당 총비서의 인민군 최고사령관 추대 9돌을 맞아 평양 4·25문화회관에서 중앙보고대회를 열었다. 24일 조선중앙방송에 따르면 주요 지도급인사가 대부분 참석한 이날 보고대회의 주석단 서열에선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조명록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홍성남 내각 총리,김영춘 군 총참모장 순으로 나타났다.김용순 대남비서는 16번째,1차 이산가족 상봉대표단장으로 서울에 왔던 류미영 천도교 청우당 중앙위원장은 24번째로 나와있다.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참석하지않아 주석단 명단에는 빠져있다. 김기남 당중앙위 비서는 지난 4월 25일 북한군 창건 68주년 기념식이후 나타나지 않고 있어 실각설이 나돌고 있다. 전문가들은 북한 지도부의 변화가 당분간 예상되지 않으며 정책도올해의 대외관계 개선과 경제교류확대로 지속돼 나갈 것으로 내다봤다.주석단 서열은 지난 10월 10일 노동당 창건일 이후 처음이다.이번 행사에는 박성철ㆍ김영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 명예부위원장,계응태 당중앙위 비서 등이 고령을 이유로 불참했다. 이석우기자
  • 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 평양방문기

    지난 11월28일부터 12월5일까지 7박8일간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 초청으로 두번째로 평양을 다녀 왔다.순안비행장에 다시 내렸을 때 바로 이 곳에서 대한민국 대통령이 총칼을 든 인민군의 사열을 받는 엄청난 현실을 입을 다물지 못한 채 바라보았던 4개월 전의 기억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고려호텔에서 하룻밤 자고 나니 안내하는 사람들이 어려워하면서 호텔을 옮길 수 없겠느냐고 물어왔다.이산가족 북쪽 면회자들이 이 호텔에 모이게 되어 복잡할 테니 조용한 보통강호텔로 옮기자는 것이었다.사정이 그렇다면 협조하지 않을 수 없으려니와 보통강호텔 숙박비가 다소 헐하다는 말을 듣기도 해서 주저없이 옮기기로 했다. 1층 로비로 내려갔더니 과연 말쑥한 신사복으로 차려입은 사람들이웅성거리고 있었다.그 중의 한 사람에게 서울에서 왔음을 말하고 가족면회 때문에 왔느냐고 물었더니 스스럼없이 대해주었다. 내 개인의 이번 여행목적은 북쪽 역사학자들과 만나서 남북간의 역사학 교류 문제를 의논하고 고적을 돌아보는 일이었다.북측에 대해미리 박시형·허종호·전형률 등 역사학자들을 만나고 싶다는 청을했었다.그러나 박시형 선생은 노환으로 기동을 할 수 없다했고,전형률 선생은 4년 전에 작고했다고 했다.그래서 현재 역사학회 회장을맡고 있는 허종호 선생과 전 사회과학원 근대사실장 이종현 선생,현근대사실장인 원종규 선생 등 세분의 학자를 만날 수 있었다.특히 허 선생은 그의 학문적 업적이 남쪽에도 많이 알려진 학자인데,집필을위해 다소 먼 곳에 가 있었음에도 우리를 만나기 위해 일부러 나왔다고 했다. 허종호 선생은 단군릉 발굴경위와 북녘 역사학회가 세계 4대 문명발상지 외에 대동강문명을 넣어 5대 문명발상지로 선포했다는 사실을설명했고,1960년대 남북 역사학계가 정열을 쏟은 자본주의 맹아문제등을 비롯한 북녘 역사학계의 최근 동향을 말해주었다.이에 대해 나도 남녘 학계의 최근 동향과 내 개인의 학문적 관심분야 등을 말해주었다.북녘 학자들과 대화하면서 남북 역사학계가 빨리 서로 가지지못한 자료들을 교환해야 함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난 6월 정상회담에 수행했을 때는 일정이 너무 꽉 짜여서 고적은동명왕릉밖에 못 가봤다.그러나 이번에는 평양시내의 역사기념관과김규식·조소앙 등 독립운동가들이 묻힌 애국열사릉,1948년 김구·김주식 등 남쪽에서 간 정치지도자들이 북쪽 지도자들과 남북협상을 했던 쑥섬에 세운 통일전선탑 등을 가보았고 개성 및 묘향산도 가볼 수 있었다.특히 개성은 서울을 떠나기 전에 미처 방문대상 지역에 넣지 못했고,평양에 가서 추가로 넣었기 때문에 북쪽 식으로 말해서 여행을 ‘조직’하기가 어려울 것 같았지만,흔쾌히 추가시켜 주어 꼭 보고싶었던 선죽교·공민왕릉 등을 볼 수 있었다. 남북 경제협력도 물론 중요하지만 민족적 동질성을 회복하기 위해각 학문 분야의 교류가 빨리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이 절실했다.북녘의 어느 고위층과 만났을 때 좀 이상적인 생각이지만 남북정부가의논해서 비무장지대에 통일연구소 같은 것을 세우고 남과 북,그리고 해외 동포학자들이 함께 통일에 관한 모든 것을 연구하게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더니 그는 ‘통일을 굉장히 멀리 잡는군요’하고 말했다. 이 짧은 글에서는 길게 말할 수 없지만,북녘은 왜 통일을 서두르고남녘은 왜 그것을 비교적 길게 잡는가,그 이유를 알 것 같은 것이 이번 여행에서 얻은 중요한 성과라 생각되기도 한다. 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
  • 比에스트라다 정치범 대거 석방

    [하노이 연합] 탄핵위기를 맞고 있는 조셉 에스트라다 필리핀 대통령이 10일 200여명의 정치범을 석방하고 곧 1,000여명의 사형수를 감형토록 하겠다고 발표했다. 에스트라다는 이날 한 지방도시에서 대중연설을 통해 “나는 200여명의 정치범을 곧 석방하도록 법무부장관에게 지시했다”고 밝혔다. 정치범들은 크리스마스 전에 석방될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그는 이어 1,000여명에 이르는 모든 사형수들에게 무기징역으로 감형토록 곧 조치하겠다고 덧붙였다. 이같은 에스트라다 대통령의 발표는 공산주의단체인 신인민군과의평화협상에 서명한 뒤 몇시간만에 나온 것으로 그가 탄핵위기 속에계속되고 있는 각계각층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신인민군측과 손을잡은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현재 뇌물수수 혐의 등으로 상원에서 탄핵재판이 진행중인 그는 이자리에서도 무죄를 주장하면서 그러나 상원에서 어떠한 결정이 나오더라도 이에 따르겠다고 공언했다.
  • 2차 남북이산상봉/ 동진호 갑판장 상봉 전말

    2차 이산가족 상봉에 납북자 가족이 포함된 것은 지난 6월 남북정상회담 이후 계속된 장관급·적십자 등 공식회담과 비공식 접촉을 통해남북이 절충한 데 따른 것이다. 정부는 지난 9월 열린 대한적십자사의 방문단 대상선정 인선위원회에서 2명의 납북자 가족을 방북 후보자 200명에 포함시켰다. 납북자도 넓은 의미에서 이산가족이라는 정부의 생각을 반영한 정책적 고려였다.이산가족 상봉을 신청한 10여명의 납북자 가족들 가운데 ‘70세 이상·직계 우선’기준을 적용해 선정한 것.이어 북측에 생사확인을 의뢰하는 과정에서 동진호 갑판장으로 지난 87년 납북된 강희근씨의 어머니 김삼례씨가 최종 선정됐다.나머지 한사람의 생사확인은 북측이 알려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납북자 가족상봉이 이루어진 것에 대해 정부 당국자는 “북측에 따로 공식 협조요청은 하지는 않았다”면서 “그러나 각종 회담과 접촉을 통해 이들 문제에 대해 충분히 논의해 왔기 때문에 남북간에 공감대가 형성돼 있어 해결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한편 국내 언론들은 강씨 모자의상봉사실을 지난 9월 2차 방문단인선 때부터 알고 있었으나 보도를 자제해 왔다.“보도되면 만남이깨지고 다른 납북자들의 상봉도 불가능해질 수 있다”는 정부의 우려를 받아들여 인도주의적 입장에서 한시적으로 보도를 자제키로 했던것이다.그러다 2일 아침 북한 평양방송이 이를 먼저 전하면서 이같은걱정이 사라지자 보도를 시작한 것이다. 이석우기자. *어선 동진호 납북사건. 지난 87년 1월15일 발생한 ‘동진27호 납북사건’ 때 승선 인원은갑판장 강희근씨를 포함,12명이다.당시 백령도 근해에서 조업중 납치돼 13년이 지난 지금까지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당시 노동신문은 조선중앙통신을 인용,“조선인민군 해군 경비정이15일 오전 11시43분 경 우리나라 서해 장산곶 서북쪽 영해 깊이 불법침임한 남조선 선박 1척을 단속했다”고 16일 보도했다.북한 적십자회는 동진호가 납북된 지 6일만인 1월21일 “조사후 돌려보내겠다”는 송환의사를 밝혔으나 김만철씨 일가가 탈북,귀순하는 바람에 송환이 취소됐다. 최여경기자 kid@
  • 2차 남북이산상봉/ 서울온 김히락씨 형님 사망소식에 통곡

    “형님,아,형님….왜 닷새를 못기다리셨나요.” 북에서 온 김히락씨(69)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울먹이며 더이상말을 잇지 못했다.히락씨의 형 주락씨(76·미국 뉴욕)는 지난 25일만리타향에서 동생 히락씨를 애타게 찾다 눈을 감았다. “어머니가 지난 95년 돌아가셨다는 소식에 하늘이 무너지는 듯 낙심했지만 형님이 살아 계신다 해서 만날 날을 손꼽아가며 기다렸는데이게 웬 날벼락입니까.” 히락씨는 북받쳐오르는 슬픔에 여동생 귀연씨(67)와 조카 창모씨(47)등 피붙이들을 만난 기쁨은 잠시 뒤로 미뤄야 했다. 김주락씨는 한국전쟁 때 인민군에 입대한 것을 마지막으로 헤어진동생 히락씨(69)를 눈을 감기 전까지도 못잊어했다.전쟁이 끝난 뒤함께 군에 다녀왔던 동생의 친구들로부터 ‘히락이가 죽었다’는 말을 전해들은 김씨는 지난 85년 가족들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미국에서 향수와 동생에 대한 그리움에 시달리던 김씨는 건강도 나빠졌고 지난해부터는 약간의 치매증상까지 보였다.그러던 지난 7월 1차 상봉대상 예비명단에 동생이 포함됐다는 소식을 듣고 김씨의 건강은 급속히 회복됐다.주변 사람들에게 동생의 옛이야기를 하고 선물을마련하며 귀국준비를 하는 등 활기찬 모습을 보였다.하지만 동생이1차상봉자에서 탈락하자 김씨의 건강은 악화일로로 치달았다. 당시 김씨는 “죽은 줄만 알았던 동생을 이제야 만나나 싶었는데,동생을 또 잃어야 해”라면서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김씨는 그뒤 숨지기 전 네달동안 치매와 중풍에 시달리면서도 눈만뜨면 ‘헛소리’로 동생을 찾았다.“동생을 만나야 되는데….짐싸.빨리 한국에 들어가야 돼.” 결국 꿈에도 그리던 동생이 지난 13일 2차 상봉자명단에 포함된 것을 확인했다.그러나 기쁨도 잠시.김씨는 정신을 회복한 듯했으나 결국 50년을 풀지 못한 한(恨)만 품은 채 눈을 감고 말았다. 박록삼기자 youngtan@
  • 2차 남북이산상봉/ 北서 온 남편품에 주름진 얼굴 묻어

    50년 세월의 흔적이 어디 한 곳이라도 아프지 않은 곳이 있으랴…. 어머니와 자식,형제 자매,휠체어에 의지한 채 부둥켜 안은 이산가족들은 야속한 세월을 원망하며 눈물을 흘렸다. 황혼길에 남녘 아내를 만나러 온 4명의 북녘 남편들.남에서는 15명이 북녘 아내를 만나러 평양에 갔다. 남으로 내려 온 김중현(71)·조민기(65)씨는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50년 전 헤어진 아내를 만나 한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아내 유순이씨(70·서울 강서구 신월동)를 만난 김씨는 “혼자 애키우느라 고생이 많았지”라며 아내의 손을 꼭 잡았다.유씨는 “왜이제서야 왔냐…”고 흐느꼈다. 충북 청원군 남일면이 고향인 김씨 부부가 헤어진 것은 51년 5월.결혼한지 6개월만에 논일 나갔던 남편이 인민군에 끌려갔다.신혼의 단꿈에 젖어 있던 유씨는 아들 영우씨(49)를 임신한 상태였다.유씨는얼굴도 가물가물한 남편을 기다리며 반평생을 홀로 살았다. 조민기씨도 남쪽의 아내 김필화씨(69·경북 안동시)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얼마나 고생이 많았느냐”며 회한의 눈물을 흘렸다.경북 안동에서 사범학교를 다니던 조씨가 50년 여름 인민군에 끌려간 뒤 반세기만의 만남이었다. 또 남북에서 각각 재혼한 북녘 황영규씨(76)도 남쪽 부인 성금분씨(75·경기 김포시)를 만났다.성씨는 6·25전쟁 때 남편과 헤어진 후딸 성애씨(54)를 키우며 홀로 살다 주위의 권유로 재혼했다.그러나권태성씨(77)는 끝내 부인을 만나지 못해 주위를 안타깝게 했다. 북에서는 교회장로 양철영씨(81·서울 마포)가 아내 우순애씨(73)를만나 50년의 한을 풀었다.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이들은 45년 소련군진주후 교인에 대한 탄압이 심해지자 함께 월남하다 황해도 장산곶근처에서 헤어졌다. 조현석기자 hyun68@
  • 2차 남북이산상봉/ 北아들 만난 최고령 柳두희 할머니

    “어머니.나여 동길이,동길이…” 남측 방문단 중 최고령인 유두희(柳斗喜·100·강원도 원주시 문막읍) 할머니는 30일 평양 고려호텔에서 6·25 때 인민군에 징용당한뒤 헤어진 아들(신동길·75)을 이렇게 만났다. 아들은 휠체어를 탄 어머니를 끌어안고 놓지 않았다.어머니는 두 눈을 끔뻑거리며 신음소리같은 회한을 뱉어냈다.두 사람이 부둥켜안는바람에 유 할머니의 귀에서 보청기가 떨어졌지만 모자는 부여안은 팔을 풀지 않았다.하염없이 눈물만 흘리는 노령의 어머니가 안타까운듯 동길씨는 “어머니,나 모르겠어”라면서 부르짖었다.어머니의 얼굴을 확인하고 싶은 듯 모자를 벗기고 얼굴을 더듬었다. 동길씨가 “어머니,며느립니다”라고 말하자 할머니는 비로소 정신이 든 듯 아들의 얼굴을 쳐다봤다.눈은 아들에게서 떼지 않은채 며느리 리화순씨(66)의 손을 잡았다. “너를 만나려고 죽지 않고 살아있었다.이젠 죽어도 원이 없다”며속삭였다.살포시 눈을 떠 아들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본 뒤 다시 눈을감았다. 유 할머니가 아들의 귀에 대고 “아들은몇이냐”고 묻자 며느리 리씨가 “아들 하나,딸 둘입니다”라고 큰 소리로 대답했다.유할머니는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아들의 손을 계속 쓰다듬었다. 할머니는 아들의 귀에 지난 50년동안 못다한 얘기를 쏟아붓듯 계속중얼중얼거렸다. 북의 아들과 며느리는 휠체어를 옆으로 밀어놓고 큰절을 올렸다. 유 할머니는 6·25 당시 25세이던 동길씨가 고향인 원주시 문막읍에서 인민군에 강제징집을 당할 때 얼굴도 보지 못하고 헤어졌다.하지만 50여년동안 매일 동길씨의 밥을 따로 떠놓고 기다려왔고 아들의결혼사진을 보면서 아픈 마음을 달래왔다. 동길씨는 최근까지 통조림공장에서 과장을 지내다 얼마 전 은퇴했다. 황해남도 과일군에서 살고 있으며 현재 북한의 고령자 보장책에 따른 지원으로 여생을 보내고 있다고 말했다. 동길씨는 “돌아가신 줄 알았던 어머니가 이렇게 살아계실 줄은 꿈에도 몰랐다”며 손을 놓지 못했다. 평양 공동취재단
  • 서울방문 북측 주요인사 6인 근황·경력

    제2차 이산가족 북측 방문단 100명 중에는 북한언론에 자주 오르내리는 저명 학자를 비롯해 예술가,관리 등이 다수 포함됐다.북측 유명인사 6명의 근황과 경력 등을 살펴본다. ▲김영황 김일성종합대학 교수(70) 어학 계열에서 손꼽히는 권위자.6·25 때 인민군에 입대하기전 동국대학 문학부에 다녔다.김일성종합대학을 나와 40여년간 교단에 섰다.‘조선민족어발전연구’ 등 40여점의 교과서와 참고서뿐 아니라 230건의 논문을 집필,“조선어를 발전시키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지난 8월 70회 생일을 맞아 김정일 국방위원장으로부터 생일상을 받았다.남한에 조카 우현씨(52)가 살고 있다. ▲하재경 평양시 김책공업종합대학 강좌장(65) 서울 중앙중학에 입학했지만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학업을 포기,6·25가 일어나자 의용군에 입대했다.30여년간 교편을 잡았으며 지난 3월 평양에서 열린 전국 과학자·기술자대회에 참석했다.99년 7월4일자 북한 통일신보에소개된 수기에서 “내 나이 어느덧 60고개를 넘어서고 떡돌 같은 손자까지 생기고 보니 때때로 지나온 한생이 돌이켜져 잠못이룰 때가많다”면서 “가장 큰 소원은 조국통일의 그날을 한시바삐 앞당겨 오는 것”이라고 감회를 밝혔었다.서울에 둘째 형 재인씨(73)가 살고있다. ▲김봉회 평양시 한덕수평양경공업대학 강좌장(68)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재직하다가 월북했으며 최고인민회의 의장을 지낸 백남운의 생질이다.전북 고창군 고창면 도산리가 고향으로 고창중학교를 졸업,고려대학교 입학을 기다리던 중 의용군에 소집돼 참전했다.김일성종합대학을 나와 교단에 섰다.3남매를 두고 있으며 서울에 동생 규회씨(67)와 영숙씨(60·여)가 살고 있다. ▲홍응표 평양시 직물도매소 지배인(64) 14세 때 부모를 잃고 북한으로 갔다.서울출신으로 김일성종합대학을 졸업했고 업무에서 인정을받아 ‘국가수훈’을 받았다.같은 서울출신 아내 권순녀씨와 손자들과 함께 평양시 모란봉구역 서흥동에 거주하고 있다.올 1월에 출간된 북한화보 ‘조선’에 기고한 ‘꿈속에서도 그리는 고향’이라는 글에서 50여년간 아버지,어머니 시신 위에 흙 한줌 덮어주지 못한 죄스러움을 안고 할아버지가 된 지금까지 어머니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고말했다.누나 양순씨(69)가 상봉을 기다리고 있다. ▲김기만 평양미술대학 교수(71) 운보(雲甫) 김기창화백의 셋째 동생으로 북한에서 ‘공훈예술가' 칭호를 받았다.서울 시립미술연구소 연구생으로 있다가 51년 월북했다.평양미술대학을 졸업하고 65년 조선미술박물관 부장을 역임했다.대표작으로는 ‘고구려 인민들의 무술경기', ‘구주성전투' , ‘소년선봉대' , ‘금강산풍경' , ‘홍경래 농민폭동' , ‘윷놀이’ 등이 있으며 북한 민족의상을 소재로 한 50여편의작품이 있다.화조화 1,500여점 가운데 20여점은 북한의 조선미술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로승득 자강도 임업연합기업소 자재상사 사장(70) 최근 김정일 국방위원장으로부터 생일상을 받았다.전북 김제에서 출생,6·25 때 인민군에 입대했다.임업부문에서 오랫동안 일한 것으로 알려졌다. 노주석기자 joo@
  • 北귀환 거물남파간첩 이선실씨 8월 사망

    국정원은 3일 북한 권력서열 19위(95년)까지 올랐던 이른바 ‘이선실 간첩단 사건’의 이선실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이 지난 8월 지병인 심장병이 악화돼 사망했다고 밝혔다. 국정원은 정보위 국정감사에서 북한 고위간부들의 최근 신상변동 현황이라는 보도자료를 통해 “(북한이) 신분상 특성을 감안,사망사실을 공개하지 않은 것으로 본다”며 이같이 전했다. 국감원 자료에 따르면 93년 ‘2·8비날론 연합기업소’지배인으로좌천된 김달현 전 부총리(59)는 최근 북한 내부에서 심장병 악화설이 유포되고 있다고 전했다.김기남 당비서(74)는 지난 4·25 인민군 창건 68주년 이후 활동이 없는 점을 감안,지병으로 요양중인 것으로 파악했다. 이밖에 평양시 당 책임비서 강현수(82)는 지난 9월,당 중앙위원 이지찬(84)은 3월,인민무력부 부부장 오룡방(75)은 2월에 각각 고령으로 사망했다. 북한은 90년대 중반까지 대외경제를 이끌던 이성대·임태덕 등을 퇴진시키고 강정모(무역상),김용문(국제무역 촉진위원장),김용술(대외경제추진위원장)을 기용하는 등 대외경제팀을 교체했다.이밖에 최근북한 권력 서열에는 큰 변화가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강동형기자 yunbin@
  • [대한광장] 거창 학살사건의 전국화와 세계화

    얼마 전 거창 민간인 학살 49주기 추모식에 참여했다.신원면 골짜기에서 718명의 억울한 생명이 처참하게 학살되었을 당시를 생각하니가슴이 저미는 아픔을 가눌 수 없었다.그래도 거창 학살사건은 정부의 지원 아래 위령제라도 지낼 수 있었고 명예 회복의 길이나마 열렸으니까 이나마 다행이다. 놀랍게도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은 이곳 남녘 땅에서만 약 100만 이상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더욱 놀라운 사실은 이 엄청난 학살가운데 좌익과 북한 인민군에 의해 저지러진 학살은 12만 9,000명쯤으로 남한 정부에 의해 공식화되고 있다는 점이다.이는 대부분의 민간인 학살이 이승만 정부에 의해 자행되었음을 의미한다. 인류 역사에서 가장 절대적인 보편적 가치는 인간 생명의 존엄성이다.그러나 이곳 한반도에서는 이 생명의 존엄성이 외세와 국가,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킬 의무를 부여받은 바로 그 국가에 의해 여지없이 허물어져버렸다.나라의 주인이라는 국민은 전쟁을 빌미로 헌신짝취급도 받지 못하였다.이로 인해 비참하게 희생된 원혼과 그 유족들의 원한은 이곳 한반도 상공을 배회하고 있다.이제 더 이상 이러한야만의 역사를 묻어 둘 수는 없다.인권과 평화와 통일의 업적으로 노벨평화상까지 받은 나라에서 가장 원초적 인권인 인간 생명을 앗아가는 극악한 인권 침해를 역사의 뒤안길로 밀쳐버릴 수는 없다. 피해자 수준의 실태조사 수준을 넘어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명령구조에 의해 자행된 가해자 수준의 진상조사가 철저히 이루어져야 한다. 이에 따라 개별 가해자에 대한 심판을 비록 늦긴 하였지만 내려야 한다.동시에 이들 피학살자와 그 유족에 대한 명예 회복과 정부의 공식적인 사죄가 늦게나마 뒤따라야 한다.그리고 이 부끄러운 과거에 대한 공식적인 참회의 역사가 후세들에게 길이 역사 교훈으로 전수되어야 한다.이어서 21세기를 맞아 전쟁을 빌미로 한 민간인 학살을 지구촌에서 제거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와 지구촌 시민운동이 전개되어야할 것이다. 이같이 거창사건의 전국화와 세계화를 꾀하면서 짚어볼 게 있다.바로 양민과 민간인을 구분하는 문제이다.굳이 거창 유족들은 거창 학살사건을 양민 학살로 불려지기를 원한다.곧,거창사건의 희생자는 한결같이 아무런 잘못이나 죄가 없이 무고하게 희생된‘양민’이라는점을 강조하자는 것이다.전쟁 당시는‘양민증’이라는 것이 있었다. 이를 소지하지 못한 사람은 언제나 무슨 일만 생기면 혐의부터 먼저받는 위협을 받아 왔다.수없이 무고한 민간인들이 학살되는 상황에서양민증을 소지하지 못한 사람들은 쉽게 학살의 표적으로 몰리고 희생되었을 것이다.거창 유족들이 세계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양민 학살이라는 이름을 굳이 고집하는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들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지만 보편적 인권의 개념에서는 이 구분을 받아들일 수 없다.굳이 구분하는 저변에는 반인권적 해석이 따르기 때문이다.곧,양민은 안 되지만 잘못이 있는 사람이나 빨갱이는 죽여도 좋다는 암묵적인 동조가 깔려 있다는 점이다.잘못이 있거나 지은 죄가 아무리 심하더라도 제대로 된 재판 절차에 의해 엄밀히 다뤄지지 않았을 경우 비록 전쟁의 와중이라 하더라도 이는 국가폭력에의한 인권의 심대한 침해행위이다. 좌익도 마찬가지다.사상과 이념의 자유는 천부적 권리이다.국가보안법으로 이들을 처벌할 수는 없다.이들이 형법상의 범죄행위를 저지르지 않았다면 결코 처벌되어서는 안됨에도 불구하고 한국전쟁 전후로이곳 남한 땅에는‘빨갱이는 죽여도 좋다’는 국가의 원시적 폭력이횡행하였다.모든 민간인은 양민이다.이들이 형법상의 사형에 버금가는 죄를 범하지 않았을 경우 이들에 대한 학살은 비록 국가보안법에의거했다 하더라도 범죄행위이다.21세기 초입에 이러한 범죄행위에대한 과거 청산과 이들 학살에 대하여 사람이 중심이 되는 새로운 접근이 요구된다. 강정구 동국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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