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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北 “장성급회담 갖자”

    북한이 오는 6일 판문점에서 유엔사 장성급회담을 갖자고 2일 유엔사에 제의해 왔다. 북한은 이날 오전 조선인민군 판문점 대표부 이찬복(상장) 대표 명의의 전통문을 판문점 군사정전위를 통해 제임스 솔리건 유엔사 부참모장 앞으로 보내 서해교전과 관련한 논의를 제의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앞서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는 1일 북방한계선(NLL)은 서해 경계선이 아니며 미국과 합의해 새로운 경계선을 확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2일 조선중앙방송에 따르면 조평통은 지난 1일 서기국 백서를 발표,“조선반도는 정전상태며 북남 사이에 해상경계선을 설정하는 것은 매우 첨예하고도 심각한 문제”라면서 “서해 해상경계선을 확정하자면 우리와 미국이 구체적인 토론을 하고 합의를 봐야 한다.”고 밝혔다. 조평통은 2개항의 서기국 ‘백서’에서 “서해 해상경계선 설정문제는 철저히 정전협정에 기초해 해결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북한의 이러한 입장은 지난달 31일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회의에서 콜린 파월 미국무부 장관이 북한 핵문제는 물론 재래식 무기 감축문제까지 논의하겠다는 뜻을 밝힌 뒤에 나온 것이어서 향후 북·미 협상의제로 채택될 것인지 여부가 주목된다. 그러나 국방부는 이날 북한 조평통의 주장에 대해 “일고의 가치조차 없다.”며 현 서해 NLL을 고수하겠다는 입장을 재확인했다. 국방부는 이날 논평을 내고 “전쟁 당사자인 한국을 배제하고 미국과 논의하겠다는 것은 법리상 및 현실상 이치에 맞지 않는 억지 주장”이라고 비판했다. 박록삼 오석영기자 youngtan@
  • 北 서해충돌 유감표명/ 北 과거 유감 표명 사례

    그동안 북측이 군사적 긴장상황과 관련해 ‘유감’을 표명한 사례는 그리 많지 않았다.간접적인 유감 표명까지 포함해 대여섯 차례에 불과하다.특히 이번 김령성 북측 상급(장관급)회담 대표단장은 남측에 직접 공개적으로 유감을 표명해 2000년 남북정상회담 뒤 진전된 남북관계를 반영했다.그동안 북측의 대남 유감 표명 사례는 대부분 간접적 형식 또는 낮은 수준에서 이뤄졌었다. 다음은 그간 북한이 남한에 유감을 표명했던 사례들이다. ◇68년 1월21일 무장공비 침투사건= 72년 5월 김일성 주석이 방북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을 만나 이에 대해 “대단히 미안한 사건이었으며 우리 내부의 좌익맹동분자들이 한 짓으로 결코 나나 당의 의사가 아니었다.”고 유감 표명. 이후 올해 5월13일 김정일 국방위원장도 방북한 한국미래연합 박근혜 대표에게 “극단주의자들이 일을 잘못 저지른 것이다.미안한 마음이다.그때 그일을 저지른 사람들이 응분의 벌을 받았다.”고 말함. ◇76년 8월18일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 사흘 뒤 군사정전위 북한측 수석대표가 북한인민군 최고사령관의 “공동경비구역내에서 사건이 발생한 데 대해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는 메시지를 유엔군 사령관에게 전달. ◇95년 6월27일 시아펙스호 인공기게양 사건= 전금철 북측 수석대표가 7월21일 이석채 남측 수석대표에게 전문을 보내 “아래 일꾼들의 실무적 착오로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난 데 대해 유감을 표한다.앞으로 호상 그런 일이 없도록 하자는 데 대하여 언명하는 바이다.”라고 유감 표명. ◇96년 9월18일 동해안 잠수함침투사건= 12월29일 중앙통신과 평양방송을 통해 “막심한 인명피해를 초래한 잠수함 사건에 대해 깊은 유감을 표시한다.”고 공개 발표. 박록삼기자
  • [2002 길섶에서] 이념의 그늘

    6·25전쟁 참여와 부상,반공포로 그리고 이데올로기 공황.사상도,이념도 껍데기에 다름 아님을 너무 깊게 체득했기 때문일까.반공포로 석방때 그는 ‘남·북 모두가 싫어서’인도로 떠났다.반공포로 출신의 인도한인회장 현동화씨.스물에 인민군 장교복을 입었던 그가 저물어가는 일흔이 돼 우리나라를 다시 찾았다. 최인훈의 소설 ‘광장’(1960년 출간)이 떠오른다.남북분단과 갈등의 아픔을 한 지식인의 방황을 통해 가슴 아리게 전하고 있다.“바다는 숨쉬고 있다.크레파스보다 진한 푸르고 육중한 비늘을 무겁게 뒤채면서.” 남·북을 혐오하며 제3국으로 떠나는 주인공 명준이 갑판에서 느낀 바다풍경이다.바다는 그에게 이념 아닌 인간 중심의 삶을 살고 싶어했던 꿈의 원형이었다. 최인훈은 이념 갈등의 끈을 숙명처럼 달고 다녔다.소설 ‘화두’에서 “사람은 한번밖에 살 수 없어 슬프다.”고 했다.삶의 회한이다.현씨는 그러나 “인생은 운명지어져 있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이념의 그늘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그의 고백이 가슴 찡하다. 최태환 논설위원
  • 北, 고속정 인양 사전통보 요구

    북한 인민군 판문점대표부 대변인은 북방한계선(NLL)의 일방성을 지적하고 서해교전중 침몰한 참수리 357호의 인양에 앞서 작업 날짜 등 인양과 관련된 구체적인 사항을 사전에 통보할 것을 요구했다. 북한은 9일 조선 중앙방송을 통해 “남조선측이 이번에 침몰된 함선을 인양하겠다는 데 대해 조선인민군측은 반대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인민군 판문점대표부 대변인 성명을 보도했다. 대변인은 “인양작업이 진행되는 것이 우리(北)의 군사통제수역이므로 인양과정에서 새로운 충돌을 막자면 작업 날짜와 시간,동원되는 선박과 장비,활동수역 등의 사항을 미리 조선인민군 측에 통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미국과 남조선의 호전세력들이 북방한계선이라는 것을 들고 나와 저들의 죄행을 가리고 오히려 우리를 걸고 드는데 수수방관할 수 없다.”면서 NLL의 일방적 획정과 NLL의 군사정전협정 및 국제법 무시 등을 지적했다. 이에 대해 해군은 이날 ‘북측 주장에 대한 우리의 입장’이라는 제목의 성명을 내고 “침몰된 고속정의 인양작업 위치는 NLL 이남으로 북측이 왈가왈부할 문제가 아니다.”면서 “해군은 북한군의 NLL 침범을 용납하지 않으며,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하면 모든 책임은 전적으로 북측에 있음을 엄중 경고한다.”고 밝혔다. 김경운 박록삼기자 kkwoon@
  • 요절 천재문인 삶 엿보기, ‘문학사상’탄생100주년 맞은 5인 조명

    김소월 정지용 채만식 나도향 김상용.우리나라 근대문학을 이끈 선각적인 문인 가운데 5명이 올해로 탄생 100주년을 맞았다.독보적 문학세계를 일군이들은 약속이라도 한듯 ‘불행한 죽음-요절’을 맞았다.역사는 그들을 절망의 나락으로 내몰았다.문학사상 7월호가 게재한 특집 ‘탄생 100주년 맞은 6인의 문인’중 요절한 5명의 ‘죽음’을 재조명한다. ◆김소월= 절친한 문우 나도향이 타계한 1926년부터 그는 술에 탐닉했다.32년 독립자금을 대줬다며 일본경찰에 붙잡혀 조사를 받은 그는 연이어 소설 ‘함박눈’이 독립운동을 소재로 했다는 혐의로 일경에 다시 붙들려가 고초를 겪었다.두해 뒤인 34년 12월23일,그는 고향 곽산을 찾아 성묘를 마친 뒤 장터에서 산 아편을 먹고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 아침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됐다.33세였다. ◆정지용= 1930년대 들어 시인의 명성은 치솟았으나 항상 가난이 덜미를 잡았다.많은 문인이 경향문학,이른바 카프의 프롤레타리아 문학에 전념할 때 그는 ‘향수’등 순수문학을 고집했으며 해방후 좌·우익으로 문단이 갈릴 때도 그는 자신의 문학세계를 버리지 않았다.6·25가 발발한 해 7월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이 퇴각하면서 당시 49세인 그를 납치해 갔으나 도중에 유명을 달리했다. ◆채만식=‘탁류’의 작가에게 늑간신경통이라는 병이 찾아온 것은 35년 무렵.작품을 쓸 때면 작중 인물의 성격에 휩쓸리는 등 병적인 성벽이 병을 깊게 했다. 결국 늑간신경통이 폐병으로 진행돼 고향인 전북 이리의 한 초가에서 49세를 일기로 쓸쓸한 죽음을 맞았다.‘널 위에 나를 누이고 그 위에 들꽃을 가득덮은 후 활활 태워다오.’라는 유언을 남겼다. ◆나도향= 스물다섯에 ‘낭만’같은 생을 접었다.당시 백조파적 감상주의를 극복하고 ‘벙어리 삼용이’‘물레방아’등 사실주의적 경향의 작품을 쓴 그는 죽을 때 미혼이었다.공부를 위해 두차례 일본에 갔으나 얻은 것은 절망뿐.특히 스물넷 나던 해인 25년 두번째로 관부연락선을 탔으나 문학공부 대신 폐결핵을 얻었을 뿐이었다.다음해 8월26일,의사인 아버지의 노력도 헛되이 짧은 생을 마쳤다. ◆김상용= 39년 대표작인 ‘남으로창을 내겠오’를 실은 첫시집 ‘망향’을 간행했으며 영문학자로서 해외문학 번역소개에 많은 공헌을 했다. 그의 죽음은 의외였다.51년 6월20일 피난지인 부산에서 김활란이 마련한 파티에 참석했다가 게를 먹고 식중독을 일으켰다.치료를 받던 중 의사가 투약을 잘못해 이틀만에 숨졌다.49세였다. 심재억기자
  • 北 “南 군함 2척 영해 침입”해군 “NLL 남쪽에서 작전”

    북한 조선인민군 해군사령부는 7일 조선중앙방송과 평양방송을 통해 “남한 해군이 오늘 오전 10시30분쯤 전투 함선 두 척을 황해남도 강령군 구월봉앞 ‘북측 영해’에 불법 침입시켰다.”며 “이는 이 수역에서의 정세를 더 긴장시키기 위한 고의적인 책동”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우리측 해군 작전사령부는“우리 함정의 활동은 북방한계선(NLL) 남쪽에서 진행된 정상적인 작전 활동이었다.”면서 “만약 북한군이 NLL을 침범한다면 상응한 대가를 치를 것”이라고 반박했다. 김경운기자 kkwoon@
  • 서해교전/北언론 태도는/유화적 보도… 99년과 대조적

    6·29서해교전 사태 이후 북한당국의 대남 언론보도는 지난 99년 서해교전 이후와는 대비될 정도로 유화적인 모습이다.미국에 대해선 여전히 강경입장이다.북측의 유화 제스처는 특히 우리 군을 지칭하는 단어들에서 두드러진다.그러나 김정일(金正日) 위원장이 올들어 군사훈련을 참관한 사례는 예년에 비해 크게 증가했다.서해교전 이후 김위원장의 첫 대외활동은 지난 6일의 군부대 방문이었다. 노동신문과 민주조선,조선중앙방송 등은 지난달 30일과 1일 등의 기사에서 우리 군을 ‘남조선군’,‘남조선군당국’,‘남조선해군’,‘남조선군부’등으로 지칭했다.지난 99년 교전 직후에는 ‘남조선괴뢰’,‘남조선통치배’등의 격한 용어를 썼다. 북한은 또 주민 반응을 내보내지 않고 일상적인 방송위주로 편성하고 있다.99년엔 북한 주민들을 방송에 출연시켜 “남조선 괴뢰들과 원수 미제에 대한 치솟는 분노와 천백배의 복수심에 넘쳐있다.”는 반응을 쏟아냈다. 그러나 김위원장은 지난 6일 인민군 제744부대를 시찰한 것을 비롯,올들어 10여차례 군사훈련을참관했다.군부대 방문만도 16차례로 전체 대외활동의 4분의1을 차지했다.군사훈련 참관은 2000년에 2회,2001년 9회였다. 정부 관계자는 “언론보도가 유화적인 것은 6·15 정상회담 이후 상대를 자극하는 용어를 쓰지 않기로 한 묵시적 합의에 따른 것일 수도 있고,서해교전으로 인한 부정적인 영향을 최소화하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으로도 해석된다.”고 말했다.그는 이와 함께 “김위원장의 군훈련 참관은 군에 대한 신뢰를 안팎에 과시하는 차원에서 이뤄지고 있다.”고 관측했다. 김수정기자 crystal@
  • “대화”“침략 보복”北, 강온 줄타기

    북측이 ‘6·29서해교전’이후 대남 정책에서 강경과 온건을 동시에 구사하는 ‘줄타기’를 하고 있다. 북한의 이같은 이중 행동은 우리 정부의 대북 포용정책에 대해 국내를 비롯,미국내 보수 강경세력들에게 비판의 빌미를 제공한다는 측면에서 정부 관계자들을 곤혹스럽게 만들고 있다. 북측은 특히 7·4남북공동성명 30주년을 맞는 지난 4일 강·온이 대비되는 두 메시지를 한꺼번에 내보였다.4일 대남정책기구인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성명과 ‘공화국 정부 비망록’이라는 형식까지 동원,남북간의 대화와 협력을 강조했다.북한은 “대결과 반목이 아니라 대화와 협력을 위한 모든 노력을 기울일 것”이라며 서해 교전 사태가 더 이상 악화되는 것을 차단하려는 적극적인 의사를 표현하기도 했다. 그러나 같은 날 오후 북한은 평양방송을 통해 대남 경고 메시지를 보냈다.북 최고인민회의 상임위 양형섭 부위원장은 7·4공동성명 발표 30주년 평양시 보고회에서 “내외 호전광들이 조선반도의 평화를 위협하고 우리의 자주권을 침해한다면 인민군대와 인민은 침략자 도발자들에게 무자비한 보복타격을 안길 것”이라고 밝혔다.그는 “남조선 군부 호전계층의 반공화국,반평화,반통일 책동의 연장으로 남조선 군당국은 이에 대한 책임에서 절대로 벗어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민족화해협력범국민추진협의회(민화협) 김창수(金昌洙) 정책실장은 “북한은 미국의 입장 변화가 있거나,자신이 변화를 주도하고 싶을 때 강·온 양면책을 쓴다.”면서 “이는 북측이 남북 관계를 북·미 관계의 종속 변수로 보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라고 말했다.통일부의 한 관계자는 “대남정책에서 온건파와 군부내 강경파의 입장 충돌이 잦은 것 같다.”고 말했다. 박록삼기자 youngtan@
  • [이경형 칼럼] ‘야누스 북한’ 다루기

    북한의 야누스적인 행태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남쪽의 월드컵 경기를 인민들에게 방영해주다가 느닷없이 3,4위전이 있던 날 무력 도발을 했다.그러고는 이틀 뒤 우리의 월드컵 선전을 축하하는 메시지를 보내왔다.그 다음날엔 북의 경수로 핵안전규제훈련요원 25명을 남한에 보냈고,7·4남북공동성명 30주년이 되는 어제는 북의 조국평화통일위원회가 남북간의 대화와 협력을 강조했다. 북한의 이같은 냉온탕식 대남 정책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탈냉전 이후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장악하고 있는 북한 권력체제 아래서는 강경·온건파의 입지에 따라 대결과 화해의 무게가 수시로 달라진다고 한다.북한을 연구하는 국내외 많은 전문가들 사이에서 늘 제기되는 쟁점 가운데 하나는 바로 북한 안에 ‘의미있는’ 대남 강·온 양파가 과연 있는가 하는 문제다. 김 위원장이 아버지 김일성 주석보다는 못하지만 상당한 수준의 카리스마를 발휘하고 있다는 게 정설이다.그래서 아무리 군부 강경파가 득세한다고 해도 김 위원장의 의사에 반해 이번처럼 제멋대로서해 도발을 할 수 있겠느냐는 분석이 나온다.적어도 김 위원장의 묵인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얘기다. 그러나 반론도 만만치 않다.2년전 6·15 남북공동선언이 나온 후에도 북한은 군대가 각 분야에 앞장서는 이른바 ‘선군(先軍)정치’를 강조해왔다.바꿔 말하면 북한내 물적·인적 자원의 동원은 인민군이 나서지 않으면 안된다는 말이다. 이번 교전 사태의 정부 대응조치를 둘러싸고 대립 양상을 보이고 있는 국내 정당간 입장도 따지고 보면 이러한 북한내 강·온파의 실재 여부를 보는 인식과 연결되고 있다.현 정부가 이번 사태를 북한군 일부가 도발한 것으로,혹은 우발적 사건으로 보려는 시각의 바탕에는 강경 군부의 실체를 인정하고있다. 반면 한나라당은 북한내 강·온파란 유명무실하거나 설사 있다 해도 김정일 위원장의 묵인 속에 행동하는 ‘위장된 강경파’라는 인식이다.그래서 이회창 후보는 이번 사태가 결코 우발적이 아니며,안보는 등한히 하고 ‘퍼주기’만 해온 햇볕정책의 필연적인 결과라고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서해 사태 이후 북한이 보여주는 일련의 화해 제스처가 눈길을 끈다.마치 이번 서해 도발엔 김 위원장의 의중이 담겨 있지 않다는 점을 시사하는 것 같기도 하다. 전쟁과 평화,대결과 화해라는 두 얼굴의 북한을 다루는 데는 ‘인내는 하되 때때로 단호함’이 필요할 것 같다.설령 북한내 강경 군부의 존재를 인정한다 해도 김 위원장의 완전한 통제 바깥에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그렇다면 최고지도자로서 서해 사태를 일으킨 해당 군부에 대한 응분의 조치가 있어야한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로서도 압력 수단을 구사할 수 있다고 본다.말로만 촉구하는 것이 아니라 북한의 호응도에 따라 대북 민간 교류에서부터 금강산 관광,인도적 식량 지원 등에 이르기까지 여러가지 선택 가운데 다만 작은 몇가지라도 일정기간 동결하는 방안은 가능하다고 본다. 5개월 앞으로 다가온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현 정부가 아무리 햇볕정책을 일관되게 추진한다고 해도 큰 덩어리의 대북지원을 할 수는 없으며,또 하지 않는 것이 순리다.그런 의미에서 대북포용정책의 기본틀은 유지하되 서해 사태에따른 불쾌감의 표현으로 일부 지원은 내년 2월 정권교체기까지 유보하는 것도 고려해볼 만하다. 북한이 미국과의 협상을 민주당 클린턴 전 행정부 시절 적극적으로 마무리했다면 지금처럼 공화당의 부시 행정부와 피곤한 씨름을 하지 않아도 됐을것이다. 북한은 현 정부가 그래도 햇볕정책의 큰 줄기를 유지하고 있을 때 남한에 성의를 보이는 것이 조금이라도 득이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북한은 고집과 ‘벼랑 끝 버티기’전술이 가져온 득실을 이제는 따져볼 때가 왔다.김 위원장이 정말 ‘통 큰 정치’를 한다면 지금이야말로 그 진면목을 보일 때가 아닌가 한다. 이경형 논설위원실장 khlee@
  • [기고] 서해교전 냉정한 분석과 대처를

    남북한 관계의 이중성이 그 어느 때보다도 실감나는 요즈음이다.‘평화통일’이라는 7000만 민족의 절절한 염원을 이루기 위해 다방면에 걸친 대화와 회담을 진행하면서도 군사적으로는 155마일에 이르는 군사분계선을 사이에 두고 첨예한 대치를 하고 있으니 말이다. 특히 지난달 전 세계적 ‘꿈의 축제’라 일컬어지는 월드컵대회에서 터키와 3-4위를 겨루는,바로 그날(6월29일) 북측은 동족인 우리의 쾌거를 성원하기는커녕 서해 연평도 근해에서 군사적 도발을 감행함으로써 이런 ‘남북관계의 이중성’을 유감없이 재현(?)시키고 있다. 이 사태로 27명의 무고한 대한민국 군인들이 살상되고 고속경비정인 ‘참수리 357호’가 침몰돼 정부의 대북정책의 기조가 크게 흔들리는가 하면,북녘동포들을 돕기 위해 물심양면으로 힘써 온 우리 국민 대다수의 마음을 안타깝고 비통하게 만들고 있다. 북한이 건전한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이상(異常)사회’라고는 하지만,도대체 무슨 연유로 이같은 군사적 살상행위를 했는지 정말 이해하기 힘들다.더욱이 북측은해군사령부 및 외무성 대변인의 조선중앙통신(KCNA) 기자회견 등을 통해 이번 사건이 “남조선 군사당국이 반북대결의식을 고취시키고 공화국의 국제적 권위를 훼손시키기 위해 저지른 조작극”이라고 왜곡하고 있으니,적반하장(賊反荷杖)이 극에 달할 정도다. 이런 가운데 우리사회 일각에서 “우리 군(軍)의 대응태세에 문제가 있어 패전(敗戰)한 것이 아니냐.”는 견해까지 대두돼 함정장병들의 사기를 크게 떨어뜨리고 있다. 그러나 섣부른 예단은 위험하다.자칫 사태의 본말을 전도시킴으로써 국가를 위해 싸운 해군장병은 물론이고 지금 이 순간에도 북한의 ‘제2의 군사적도발’을 막기 위해 불철주야로 나라를 지키고 있는 전체 국군장병들의 사기를 저하시킬 수 있다. 이번 교전은 일각의 판단처럼 우리만이 엄청난 피해를 본 일방적 ‘패전’이 아니라 오히려 북측의 기습도발로 ‘조타실’을 비롯한 함정의 치명적인 부분이 피격받았음에도 자동포 등 모든 화기들을 총동원해 결사항전한 전투로 볼 수 있다.기습공격을 감행한 북측의 경비정 1척이 파손되고 30여명으로 추정되는 인민군들이 사상한 것으로 알려져 ‘일방적 패전’이 아닌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또 일각에서는 우리 군이 선제공격을 하지 않고 안이하게 대응했기 때문에 엄청난 후과(後果)를 자초한 것이 아니냐는 견해,확전을 불사하고라도 북측경비정을 격침시켜야 했었다는 주장과 함께 관련자를 엄중처벌해야 한다고 얘기하는 사람들도 있다.그러나 이런 견해나 주장은 대부분 한반도의 분단현실,다시 말하면 ‘이중적 특수상황’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왜냐하면 정전협정 및 남북기본합의서의 관련규정에서 명시하고 있는 바와 같이 북한군의 의도가 명확하지 않은 상황에서 전면전 위험을 무릅쓰고 선제공격을 하는 것은 ‘국제평화유지’를 기본사명으로 하는 것에 정면으로 배치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군이 경고에서 사격에 이르기까지 5단계에 걸친 교전규칙을 준용한 것은 확전을 방지하기 위한 최선의 조치였으며,이를 두고 왈가왈부하는 것은 온당치 못한 처사라고 본다.관련자에 대한 처벌문제 역시 관련정보를 충분히 분석·평가한 후에 해도 늦지 않다고 본다.그보다 먼저 고귀한 생명을 잃은 유가족들을 위로하고 부상당한 장병들의 쾌유에 힘을 쏟아야 한다.지난해 9·11테러때 미국국민이 정부를 책망하기보다 유가족들의 아픔을 통감하며 여론을 결집,이들을 위한 후속조치 마련에 전력을 기울였던 점을 참고할 수 있을 것이다. 정부는 한반도의 화해와 협력을 위해 함께 노력하기로 합의한 북측이 어떤 의도에서 이런 도발을 저질렀는지 그 저의를 철저히 분석해야 한다.아울러 이를 계기로 국론을 결집하고,북측에 대해 공식사과 및 책임자 처벌,재발방지책 마련 등을 촉구해야 할 것이다. 강석승/ 경기대 정치대학원 교수
  • [사설] 북한, 정전위에 나오라

    북한은 29일 서해 교전 사태와 관련,주한 유엔군사령부가 제의한 군사정전위원회 장성급 회담에 불응했다고 한다.남북 간의 크고 작은 군사적 충돌은 우선 군사정전협정에 따라 처리해야 하기 때문에,양측이 공동조사를 통해 사실을 규명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이치다. 김동신 국방장관은 이번 사건은 북한 경비정 2척이 서해 북방한계선(NLL)을 침범,퇴거를 요구하는 우리 해군 고속정에 선제 기습사격을 가해 발생한 것이라고 밝혔다.뿐만 아니라 북한군의 이러한 행위는 명백한 정전협정 위반이라고 지적했다.이에 대해 북한은 조선중앙방송 등을 통해 “남조선 해군전투함선들이 해상 경계근무를 수행하고 있는 인민군 해군경비함들에 총포사격을 가하는 군사적 도발을 감행했다.”고 주장했다.그러나 교전 사태의 시간별 전개 과정이나 부상 병사들의 증언을 종합해볼 때,북한의 기습적 선제 공격임은 분명하다.그런데도 북한이 적반하장(賊反荷杖)식으로 주장하고 있으니 딱한 노릇이다.북한이 정녕 떳떳하다면 군사정전위에 나와 이번 사태를 공동조사하는데 참여하지 못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북한은 1999년 6월 서해 교전에서 패배한 뒤에도 북방한계선을 무력화하기 위한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북한은 그동안 수시로 미국측에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꿔야 한다는 것을 제기해 왔다.이번 사태도 북방한계선을 명시하지 않은 현 정전협정이 잘못된 것임을 과시하기 위해 북·미대화를 앞두고 의도적으로 야기시킨지도 모른다.그러나 북방한계선은 1953년 유엔군사령관이 아군 함정 및 항공기 초계활동의 북방한계를 정한 선이었다 해도 지난 48년간 실질적인 해상경계선의 구실을 해온 이상 지금 와서 군사력으로 이를무력화시킨다는 것은 국제법에 비추어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북한은 지금이라도 군사정전위 회담에 나와 이번 사태의 진실을 가리고,그 결과 일부 모험주의적 군부에 의한 과오였다면 진솔하게 사과하는 것이 6·15 남북공동선언 정신에도 부합할 것이다.끝내 군사정전위에 나오지 못하겠다면 이미 합의한 바 있는 남북군사당국자 회담 재개를 북측이 먼저 우리측에 요청해서라도 이번 문제의해결점을 남북 긴장완화 차원에서 찾기를 촉구한다.
  • 서해교전 北방송 보도문

    남조선군이 서해 해상에서 우리 인민군 해군 경비함에 총포사격을 가하는 엄중한 군사적 도발을 감행했다. 군사소식통에 의하면 29일 남조선군이 서해 해상에서 정상적인 해상 경계근무를 수행하고 있던 우리 인민군 해군 경비함들에 총포사격을 가하는 엄중한 군사적 도발을 감행했다. 10시10분경 10여척의 어선들과 함께 연평도 서남쪽 우리측 영해 깊이까지 침입한 남조선 해군전투함선들의 행동을 저지시키려고 출동한 우리 해군 경비함에 대하여 적 전투함선들은 수백발의 총포사격을 가했다. 이에 대응하여 아군 함선은 부득불 자위적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결국 쌍방간에 교전이 벌어지고 손실들이 있었다. 이번 사건은 철저히 남조선 군부의 계획적인 군사적 도발행위이다. 최근에만도 남조선군은 거의 매일같이 전투함선들과 어선들을 우리측 영해 깊이 침투시겼으며, 우리 해군 경비함들이 출동하면 일단 물러나는 척하면서 이 수역의 정세를 긴장시켜왔다. 남조선 군당국자들은 서해해상에서 그 어떤 충격적인 사건을 일으킴으로써 완화의 길을 걷고 있는 북남 관계를 긴장·격화시키려고 꾀했다. 남조선 군 당국자들은 이번 무장도발 사건의 책임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으며, 이러한 도발 책임이 가져올 엄중한 후과에 대하여 심사숙고하고 경거망동하지 말아야 한다.
  • 서해교전/ 北 “”南서 선제공격””

    북한의 조선중앙방송과 평양방송은 29일 오전 서해상에서 발생한 남북한 해군의 교전사태와 관련, “”남조선의 선제공격에 따른 자위적 조치였다.””고 주장했다. 북한방송들은 사건 발생 5시간 30분이 지난 이날 오후 군사소식통의 말을 인용, “”남조선군이 서해 해상에서 우리 인민군 해군경비함에 총포사격을 가하는 엄중한 군사적 도발을 감행했다.””고 주장했다. 김수정기자
  • 6·25참전 소년지원병 회고

    ‘어머니 지금 내 곁에는 수많은 학우들이 죽음을 기다리듯 뜨거운 햇볕 아래 엎드려 있습니다….’ 1950년 8월 한국전쟁 중 경북 포항전투에서 숨진 소년지원병의 일기 내용이다.일기장에는 전쟁이 빨리 끝나 어머니의 품에 안기고 싶다고 적혀 있다.그러나 동족끼리 겨눈 총부리는 소년의 간절한 소망을 비정하게 뿌리쳤다.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52년.당시 17세 이하의 어린 나이로 참전했던 노병들이 고희를 바라보면서 다시 모였다.이들은 국군이 인민군에 밀려 내려와 낙동강 전선에서 전투를 벌이던 50년 7월과 8월 징병대상이 아닌데도 자원해 정규군에 입대했다. 내 나라를 붉은 군화로부터 지키겠다는 생각 하나로 펜 대신 총을 들었던 것이다.군복 없이 학생복과 학생모자 차림으로 훈련 한번 제대로 받지 않고 카빈총을 끌면서 전선에 나갔다.지난 96년 결성된 ‘6·25 참전 소년지원병 전우회’(회장 朴泰承·69)가 그동안 각종 전사(戰史)기록 등을 통해 찾아낸 참전 소년지원병은 3000여명. 중학교 2학년인 15세때 입대했던 안봉근(安奉根·67·참전소년지원병 전우회 사무총장)씨는 “나라가 위태롭다는 말을 듣고 곧바로 친구 12명과 함께 전선으로 달려갔다.”고 말했다.일부 소년지원병들은 ‘나이가 어려서 안된다.’는 만류에 나이를 속이기까지 했다고 전했다.이들의 전과도 만만찮았다.임일재(任一宰·67)씨는 특공대 10명과 함께 함경도 청천강변을 수색하다 김일성 차를 노획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인민군 3800여명을 사살하고 309명을 포로로 잡는 등 큰 전과를 올린 50년 9월 초순의 경북 영천전투에도 상당수 소년지원병들이 활약했다. 글·사진 칠곡 한찬규기자 cghan@
  • ‘8강신화’ 만든 태극전사 산실/국군체육부대 상무 축구팀

    국군체육부대 상무 축구팀이 배출한 태극 전사들이 ‘월드컵 8강 신화’를 일구는 대들보 역할을 했다. 지난 18일 우승후보로 꼽히는 이탈리아를 쓰러뜨린 국가대표팀에는 상무팀 출신선수들이 9명이나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노장 홍명보(93년 제대)를 주축으로 최용수·최진철·이민성·이을용·최성용과 함께 3명의 수문장 김병지(94년)·이운재·최은성 등이 그들이다.전 국가대표 서정원·김도훈 선수 등도 상무 출신이다. 19일 오전 10시 경기도 성남시 국군체육부대 축구장.지난 5월 월드컵 경기장과 똑같은 국제 규격의 사계절용 잔디로 바꾼 축구장에서 이강조(李康助·46) 감독의 지시에 따라 상무 소속 축구선수 37명 전원이 부분 전술훈련에 열중하고 있었다. 올림픽 대표팀 출신 서기복(24·연세대 재학) 등 선수들은 밤늦도록 선배격인 대표팀이 분전하는 모습을 TV로 시청하느라 피곤할 법도 할 테지만 몸놀림은 오히려 가벼워 보였다. 76년부터 7년 동안 국가대표팀 수비수로 활약했던 이 감독은 지난 84년 1월 부대창설과 함께 축구팀을 맡았다.이후 20년 가까이 ‘스타 발굴’의 숨은 공로자였다.이 감독은 “히딩크 감독이 경기 초반부터 부진했던 안정환과 설기현 등을 그대로 기용한 것은 탁월한 용병술이었다고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면서 “감독의 신뢰감이 바탕이 된 선수들의 강한 정신력이 돋보였다.”고 이탈리아전을 평가했다.이감독은 또 “잔 기술보다 기본 체력을 중시한 히딩크의 훈련법이 바로 상무팀이 추구하는 방식”이라고 설명했다.이 감독이 대표팀 가운데 특히 아끼는 제자는 이을용과 최은성,이운재 등이다. 이을용(98년 제대)은 이 감독의 강릉상고 후배다.선수로서 근성이 뛰어나지만 고교졸업 때 청소년대표팀에서 탈락하면서 스스로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방황했다.이때 이 감독이 상무 입대를 권유했고,이 감독의 혹독한 훈련을 견딘 이을용은 히딩크 감독을 만나 ‘월드컵 스타’가 되었다.대표팀 수문장 3명이 모두 상무 출신인데에는 “골키퍼도 강한 체력훈련에서 예외일 수 없다.”는 이 감독의 지론이 히딩크 감독의 그것과 맞아 떨어졌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체력을 강조하다보니 이 부대에는 국제적으로 손색없는 전용 체력단련장을 갖추고 있다.360평 규모의 훈련장에 68종 750개의 기구를 보유하고 선수들을 매일 1∼2시간씩 훈련시킨다.특히 단기간 강도 높은 훈련보다는 지속적인 훈련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매일 개인별 측정치를 부여하고 이를 평가한다.이수철(李壽澈·37) 수석코치는 “몸이 상대적으로 약한 선수도 제대할 때쯤에는 체력면에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게 돼 자신감이 생기고 기술도 부쩍 늘게 된다.”고 말했다. 상무축구팀은 올 가을부터 국내 프로축구리그에 시범참가한다.내년 3월에는 1군리그에서 정식 데뷔전을 갖고 45경기를 소화할 예정이다.축구팀도 두개팀으로 늘렸다.해마나 중국 프로리그 중위권팀인 중국 8·1인민해방군팀과 친선경기도 갖고 있다. 상무팀은 매년 연말에 축구선수로서 입대대상자 중에서 소수를 선발한다.당연히 경쟁률이 치열하다.현재 상무팀에는 서기복 선수를 비롯해 올림픽대표 출신 4명,정상욱(인천대) 등 대학선발팀 출신 5명,김동민(한성대) 등 청소년대표팀 출신 4명등이 활약하고 있다. 김경운기자 kkwoon@ ■허연욱 국군체육부대장/ “물러서지 않는 집요함 상무부대의 정신이죠” “한마디로 곰과 진돗개의 싸움이었습니다.진돗개의 모습이 바로 상무부대 정신이기도 합니다.” 국군체육부대장 허연욱(許演旭·육사 29기) 준장은 지난 18일 밤 우리 국가대표팀과 이탈리아와의 월드컵 16강전을 이같이 비유했다. 즉 우리 선수들인 진돗개가 처음에는 이탈리아 선수들인 곰의 힘에 밀려 퍽퍽 나가떨어졌으나,물러서지 않고 집요하게 달려들어 결국 곰을 쓰러뜨렸다는 설명이다.상무부대의 상징인 불사조(不死鳥)의 정신은 진돗개의 투지와 통한다는 것이다. 허 준장은 “대표팀 선수들이 병역혜택을 받게 된다는 소식에 군 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 선수들이 위축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너희도 혜택을 받고 있는 선발된 선수’라고 격려했다.”면서 “월드컵의 뜨거운 열기를 우리 상무가 프로리그에서 이어가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허 준장은 “문제는 강한 체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잘 먹여야 하는데 현재 선수 한 사람당 하루 식사비가 7300원에 불과해 1만 8000원인 태릉선수촌과 비교하면 가슴이 아프다.”면서 “함부로 쓸 수 없는 국방예산이지만 개선책을 찾아보겠다.”고 말했다. 허 준장은 “중국과의 정기전이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 만큼 북한 인민군과 경·평전도 추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경운기자
  • JSA 북한군 모자 달라졌다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을 경비하는 북한군의 모자가 40여년만에 달라진 것으로 관측됐다. 16일 유엔사령부에 따르면 판문점을 경비하는 ‘조선인민군 판문점 대표부’소속병사들의 하절기 모자가 지난달 말쯤부터 장교용 둥근 모자에서 전·후방 병사들이 쓰는 운동모형의 각 진 모자로 바뀐 사실이 확인됐다.영화 ‘JSA’에서 북한군 경비병으로 분한 송강호(宋康昊)씨 등이 쓴 둥근 모자가 사라지고 우리가 흔히 ‘인민군 모자’라고 일컫는 각 진 모자가 등장한 것이다.경비병들이 이런 모자를 쓴것은 50년대말 이후 처음이다. 모자가 바뀐 이유에 대해서는 추측만 무성하다.유엔사 JSA경비대대의 한 장교는 “일반 병사에 비해 특별 대우를 받고 있는 판문점 경비병에 대한 보급품 지급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니겠느냐.”고 풀이했다.반면 군 정보관계자는 “지난해쯤부터 경비병들의 규율 상태가 느슨해진 것으로 미뤄 특별 대접에 대해 군내에서 불만이 제기됐을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아울러 계급장(군사칭호) 모양도 조금 달라진 것으로 추정돼 군 당국이 사실 여부를 확인하고 있다. 김경운기자 kkwoon@
  • 中 ‘한국공관 탈북자’ 인도 요구

    [베이징 김규환특파원] 중국 정부는 지난 23·24일 베이징 주재 한국대사관 영사부에 들어간 탈북자 3명과 관련,이들의 신병을 중국에 인도해 달라고 28일 요구했다. 쿵취안(孔泉) 외교부 대변인은 이날 브리핑을 통해 “중국 국내법과 국제법에 따르면 중국내 외교공관이 제3국 국민을 보호할 권리가 없다.”며 “우리는 한국대사관이 보호하고 있는 탈북자 3명을 넘겨주어 우리가 처리할 수 있도록요구했다.”고 밝혔다. 한편 지난 17일 베이징(北京) 주재 한국대사관 영사부에진입,되돌아가는 바람에 한국 망명요청 여부를 둘러싸고 논란을 빚어오던 탈북자 석모(36)씨가 27일 다시 한국대사관영사부에 들어와 한국 망명을 요청 중이다. 한국대사관은 “탈북자 석씨가 27일 오전 10시35분(한국시간 11시35분)쯤 한국대사관 영사부에 들어와 한국 망명을요청했다.”며 이날 석씨의 진입 사실을 중국 정부에 통보한 뒤 석씨에 대해 조사를 진행하고 있다고 28일 밝혔다. 대사관 관계자는 탈북자 석씨가 당시 영사부 내에서 3차례에 걸쳐 망명요청을 했다고 진술했다고 말했다.이 관계자는 “석씨가 17일 영사부에 진입해 여자 직원에게 두번,남자직원에게 한번 등 모두 3차례 망명요청을 했으나 이들은 못 들었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고 전했다.석씨는 북한 호위총국 산하 인민군 출신으로 1996년 9월 함경북도 종성군에서 두만강을 건너 지린성(吉林省) 카이산툰(開山屯)을 거쳐 베이징에 거처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khkim@
  • 서울 태평로 옛 국회의사당등 건축물 29곳 등록문화재 지정

    문화재청(청장 盧太燮)은 서울 중구 태평로 옛 국회의사당을 비롯한 근대건축물 29건을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거쳐 27일 등록문화재로 지정했다. 지정된 근대건축물들은 개화기 이후 해방 전후까지 우리나라 근대사에서 역사·문화적 상징이 되는 기념비적인 건축물 또는 시설물이다.등록문화재로 지정된 건축물은 외관을 크게 변화시키지 않는 범위 내에서만 내부를 일상생활에 맞게 개조 및 수선할 수 있다.등록문화재 목록은 다음과 같다. ▲태평로 옛 국회의사당 ▲서울 공릉동 옛 서울대 공과대학 ▲서울 대방동 서울공고 본관 ▲이화여대 파이퍼홀 ▲대구 동산병원 구관 ▲전남도청 본관 ▲광주 서석초등학교(본관,체육관) ▲충남도청 ▲옛 산업은행 대전지점 ▲조흥은행 대전지점 ▲태백 철암역 선탄시설 ▲철원 노동당사▲철원 감리교회 ▲철원 얼음창고 ▲철원농산물검사소 ▲철원 승일교 ▲화천 인민군사령부 막사 ▲진안성당 어은공소 ▲구 호남은행 목포지점 ▲구 목포공립심상소학교 ▲여수 옛 청년회관 ▲여수 애양교회 ▲여수 애양병원 ▲옛 나주경찰서 ▲진주 문산성당 ▲옛 통영청년단회관 ▲함양 옛 임업시험장 하동·함양지장 ▲남제주 강병대교회 ▲남제주 비행기격납고.
  • [심층분석 노무현] (3)이념성향 해부

    민주당 노무현(盧武鉉) 대선후보는 당내 경선을 치르면서 라이벌인 이인제(李仁濟) 후보로부터 과격발언에 대한 집중포화를 당했다. 이 후보는 지난 88년 국회 속기록을 비롯해 각종 언론 보도와 기록을 샅샅이 뒤져 노 후보가 “노동자 세상 만들자.”“정당하지 않은 법은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등 문제의발언을 들춰내 노 후보를 몰아세웠다. 실제로 노 후보는 집권당의 대선후보가 아닌,지난 80년대와 90년대 ‘운동권 정치인’ 시절에는 듣기에 따라 정제되지않은 듯한 발언을 쏟아냈다.89년 5공 청문회에서는 전두환(全斗煥) 전 대통령에게 의원 명패를 집어던질 정도로 제도권 정치인으로서는 분명한 한계를 드러냈던 것도 사실이다. 이와 관련,노 후보는 “현장의 논리라는 게 있다.상황에 따라 자극적이고 과장된 표현을 하게 마련이다.”“상징적인정치연설을 한 것”이라며 당시의 암울했던 정치의 현실을들며 이해를 구했다.이런 불안정하고 튀는 노 후보의 행동은 한나라당에 공격 호재로 제공되고 있다. 한나라당은 지난 3월31일 노후보의 ‘말바꾸기 사례’를재벌·사회변혁·준법·노동자·언론탄압·정계개편 등으로나눠 거센 공세를 가하며 대선을 앞두고 ‘오픈 게임’을 치렀다.1일에는 노 후보가 전날 김영삼(金泳三·YS) 전 대통령의 상도동 자택을 방문,‘민주 연합론’에 대한 의견을 나누자 노 후보의 YS 비난 발언록을 공개하며 흠집내기에 열을올렸다. 실제로 노 후보는 지난 90년 YS와 결별한 뒤로 “김영삼은부산시민의 자존심을 팔았다.정계은퇴하고 용서를 빌어라.”“김영삼 정권은 정치를 음주운전하고 있다.”며 맹비난했다. 이에 대해 노 후보는 이날 “제가 YS를 많이 비난했지만,그때대로 비난의 이유가 있었다.”면서 “부부나 형제간에도곧 갈라설 듯 비난하다가도 화합해서 살듯이 당내에서도 비난할 것은 비난하면서 건전한 사회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라며 해명했다.유종필(柳鍾珌) 공보특보는 노 후보의 지난과격발언에 대해 “80년대는 군사독재 아래서 기본권마저 보장되지 않던 때”라면서며 과거의 ‘투사 노무현’ 이미지를 지워줄 것을 주문했다.노 후보는 지금까지 종종 거친 발언으로 정치적 고비를 맞았지만,그때마다 정면 돌파,정서적 호소,특유의 논리개발 등 다양한 대응으로 위기를 돌파하는 저력을 보였다.특히 일부 언론의 집중 포화에도 굴하지 않고 언론개혁의 당위성을 설파해 오히려 30∼40대를 중심으로 폭발적 지지층을 이끌어내는 등 ‘노무현식 뚝심’을 발휘,여당 대선후보를 쟁취했다는 평가도 받는다. 이종락기자 jrlee@ ■장인의 좌익활동 기록 노무현(盧武鉉) 민주당 대통령 후보는 당내 경선과정에서상대 후보측으로부터 장인의 좌익 전력 의혹과 관련해 많은 공격을 받았다. 노 후보는 이에 “선거를 여섯번이나 치르는 동안 야당으로서 보안사,안기부의 검증을 받았고,사병으로 입대해 최전방에서 근무했다.”며 “장인의 전력에 대한 연좌제로 아내와헤어지라는 얘기인가.”라고 감성적인 접근방식으로 반격했다. 지난 73년 대검찰청 공안부가 발행한 ‘좌익사건실록’에 따르면 노 후보의 장인 권씨는 ‘경남 창원군 진전면 치안대활동사건’에 다른 67명과 함께연루된 것으로 기록돼 있다.당시 28세였던 권씨는 67명 가운데 8번째 피의자로 기록돼 있다. 권씨는 조사,석방,수감,가석방,재수감 등으로 이어오다 복역중 71년 생을 마감했다. 실록에 따르면 권씨는 49년 6월 남로당에 가입하고 50년 8월 진전면 치안대를 조직했으며,‘노동당 창원군당 부위원장,반동분자 조사위원회 부위원장,반동분자 조사위원회 위원’ 등을 지낸 것으로 돼 있다. 또 50년 9월10일 이들과 공모,불법 체포·감금·조사한 반동분자 김옥갑 외 수명에 대해 A급,B급,C급 등으로 구분, 학살음모 계획을 감행했다는 등의 기록이 포함돼 있다.권씨는 53년 다른 피의자 20명과 함께 ‘비상사태하의 범죄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령’과 국가보안법 위반 및 살인죄,살인 예비죄 등으로 부산지방검찰청 마산지청에 기소됐으나 구형량은 자료 유실 등의 이유로 기재되어 있지 않다. 마을 주민 가운데 한 인사는 “인민군대가 창원을 점령하고 이어 경찰·공무원 등 20여명을 학살했다.권씨는 맹인인데다 공무원을 그만둬 화를 당하지 않았다.다만인민군대가 이른바 ‘반동분자’를 색출한다고 난리를 칠 때 누가 경찰이고,누가 공무원이었다는 것을 알려줘 화를 면했다.맹인이 할 수 있는 게 무엇이 있었겠나.”라고 반문했다. 김문 김상연기자 km@ ■언론관 민주당 노무현(盧武鉉) 대통령후보의 일부 유력언론에 대한 부정적 시각은 91년부터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당시 초선의원으로 통합민주당의 대변인이었던 노 후보에 대해 한 유력신문사의 주간지가 ‘노무현 의원이 상당한 재산가’라는 식의 기사를 게재하자,“허위사실이다.”며 거대 언론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다. 주위에서 “정치인이 언론과 싸워 좋을 게 없다.”며 만류했지만,그는 ‘전의(戰意)’를 꺾지 않았고 결국 재판에서승소한다.이때부터 이 신문사와 노 후보의 관계는 불편해졌고,지난해 정부의 언론사 세무조사를 계기로 더욱 심화된다. 노 후보는 지난해 6월 언노련초청 강연에서 “언론의 자유는 언론사주의 자유가 아니라기자의자유”라고 밝혔다.또 “그 자유도 취재·보도에 한정지어진 것이지 탈세의 자유나 그 밖의 어떤 초법적 자유가 아닌 만큼,기자는 사주의 특권을 비호하는 하수인으로 전락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이어 “현재 한국언론은 냉전적·국수주의적 시각을 가진 1∼2개 매체가 압도적 독점을 바탕으로 역사 진전을 가로막고 있다.”면서 “기자는 사주의 횡포로부터 독립되고 인사·편집권 독립이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지난해 7월 MBC라디오에 출연해서는 “언론은 국가의 공공적 재산인 만큼 소유지분을 제한하는 제도개혁이 있어햐 한다.”고 소유형태에 대한 견해를 피력했다. 노 후보가 지난해 8월 한 술자리에서 ‘D일보 국유화’ 발언을 했다는 보도로 시작된 유력 신문들의 공격을 무난히 버텨낸 것은 인터넷의 급속한 상장과 보급에 힘입은 바 크다. 주동황 광운대 교수는 “조·중·동이 사상검증이나 색깔론 등으로 노 후보에게 상처를 입히려 했지만 인터넷이나 다른 매체들의 목소리가 커져 이들 메이저 신문의 목소리를 상쇄하는 효과가 있었다.”면서 “특히 네티즌 인구가 엄청나게늘어나 미디어 환경이 과거와 달리 신문·방송 위주가 아니라 인터넷이 가세하는 3자 구도로 정립돼 가는 것이 큰 몫을 했다”고 덧붙였다. 주 교수는 그러나 “무엇보다 노무현이라는 후보가 국민이바라는 정치권의 변화를 추구하지 않겠는가라는 생각들이 조·중·동의 공격을 버텨낸 주요 요인이었고 개인적으로 신중하면서 위험한 부분을 잘 피해나간 것도 한 요인이었다.”고 말했다. 유상덕 김상연기자 youni@ ■의원들이 본 노무현 노무현(盧武鉉) 민주당 대통령 후보의 이념에 대한 정치권의 시각은 의원들의 노선차이에 따라 크게 엇갈렸다.정치권의 이념적 성향이 뚜렷해지고 있다는 방증으로 이해됐다. 같은 부산출신으로 과거 통일민주당에 함께 몸담았던 한나라당 김무성(金武星) 의원은 “당시에도 좌충우돌하는 싸움꾼이었다.”면서 “기존 질서를 파괴하는 급진주의자”라고평했다. 기자출신으로 40대 초반인 자민련 정진석(鄭鎭碩)의원은“의사 표시방식이 인기영합주의적이고 충동적이며 좌파적성향이 있다.”고 말했다.이어 “앞으로 그의 경제 운용기조나 기업·복지·노동·사회정책 등이 검증받게 될 것”이라고 했다. 민주당 의원들도 일단 “‘급진적’으로 비쳐질 수 있다.”는 데까지는 동의하면서도 “큰 맥락에서 바라봐야 한다.”는 반응을 보였다. 역시 기자출신의 김성호(金成鎬) 의원은 “급진적인 측면이 있을 수 있지만,서구적 개념으로는 전형적인 진보·개혁적인 정책과 이념”이라고 설명했다.신기남(辛基南) 의원은 “진보적이지만 극좌와는 다르며 중도좌파적인 우리 당의 정강에도 부합한다.”면서 “특히 분배의 정의를 통한 사회안정을 이룩,성장을 지속시킨다는 복지정책이 마음에 든다.”고했다. 박종우(朴宗雨) 의원은 “거칠게 보이는 것은 표현상의 문제이며 맥을 잇는 정의를 살펴봐야 한다.”면서 “예전의 기준으로라면 극좌라고 얘기할 수도 있겠지만,요즘의 의미로보면 그렇지 않다.”고 잘라 말했다. 한나라당 안영근(安泳根) 의원은 “미국에대한 발언 등을볼 때 기본적으로 할 얘기는 하고 있다.”면서 “그간 편중됐던 인식을 바로잡는 행동”이라고 치켜세웠다. 이지운 홍원상기자 jj@
  • 금강산 2차상봉/ 난생 처음 불러본 “아버지”

    1일 금강산에서 또 한차례의 혈육 상봉이 이뤄졌다. 제4차 이산가족 상봉 두번째 행사에 참가한 남측 가족 466명은 이날 저녁 금강산 온정각 휴게소에서 북측 가족 100명과 만났다.반세기만에 남편과 아내,자식,형제 등을 만난 남북의 가족들은 4시간여 동안 단체상봉과 저녁 식사를 함께하면서 가족·친지의 안부를 물으며 지난 세월 서로가 헤어져 겪어야 했던 이산의 아픔을 위로했다. 남측 가족들은 2일 북측 가족과 개별상봉,공동 중식,삼일포참관상봉 등 세차례 만난 뒤 3일 오후 속초로 귀환한다. ◆아버지와 첫 대면한 4명의 ‘유복자’들 “아버지…” 오후 5시30분 시작된 단체상봉에서 북측 아버지 송수식(宋守植·81)씨를 만난 딸 정하(貞夏·51)씨는 난생 처음 본 아버지의 넓은 어깨에 얼굴을 묻고 흐느끼기만했다.송씨도 처음 만난 딸에게서 큰 절을 받으며 지난해 저세상 사람이 됐다는 아내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려는 듯 연신 딸의 손과 얼굴을 쓰다듬었다. 이날 송씨 부녀 외에도 이연윤(李淵潤·72)씨의 딸 의화(義華·52)씨,김두환(金斗煥·73)씨의 딸 외숙(52)씨,이은주(75)씨의 아들 익주(益周·51)씨 등 3명이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아버지를 만나 애틋한 부녀·부자의 정을 나눴다. ◆아흔 셋 최고령 할머니 남측 가족 가운데 최고령인 안순영(93) 할머니는 둘째아들조경주(71)씨를 부둥켜안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아들 넷,딸 넷 등 모두 8명의 자식 가운데 아들 셋을 먼저 여읜 안할머니는 마지막 남은 아들인 경주씨의 손을 마주 잡았다.안 할머니는 “순하고,말도 잘 듣었던 아들을 만나니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며 경주씨를 꼭 안았다.함께 간 딸 숙희(59)씨는 “어머니는 오빠가 인민군에 끌려간 뒤 50년 동안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밤 촛불을 켜고 돌아오기를 기도했다.”고 말했다. ◆설레는 10대 손자 남측 가족 가운데 가장 어린 박승한(13·휘문중 1년)군은말로만 들었던 할아버지(박문근·75)를 만났다.요즘 청소년답게 MP3 플레이어를 챙겨 설봉호에 오른 박군은 할머니(이덕순·74)와 아버지(박용원·50),어머니(김충희·48)가 할아버지와 나누는 감격의재회 장면을 열심히 비디오 카메라에담았다.박군은 “할아버지가 자랑스럽다.”면서 “나도 커서 할아버지와 같은 의사가 되겠다.”고 말했다.박군의 할아버지 박문근씨는 6·25전쟁 전 서울대 의대 부속병원 의사였으며,할머니·아버지·어머니도 모두 의사다. ◆유명 인사들의 가족상봉 “니들이 내 동생이구나.” 김성하(金成河·77·전 김일성종합대 교수)씨는 상봉장에 들어서는 순간 민하(玟河·68)민주평통 수석부의장을 비롯,윤하(71·전 축구협회장)·옥화(63·여)·옥려(61·여)씨를 감싸 안았다. 헤어질 때 초등학생이던 옥려씨가 오빠를 안고 오열했고,김 부의장은 “둘째아들 보기 전에는 눈을 감을 수 없다던 어머니가 지난해 4월24일 돌아가셨다.”며 50여년간 보관해온형의 대구중 시절 교복입은 사진을 전했다. ●서울대 의대에 다니다 6·25전쟁 중 헤어진 누나 이명분(69)씨를 만난 대희씨(66·순천향병원 검진센터소장)는 누나의 단짝 친구였던 주양자(朱良子·71) 전 보건복지부 장관의 안부를 전했다.경북중·경북여고와 서울대 의대동창인 두사람은 고교시절 한조를 이뤄 정구 복식경기에 출전하기도했다.주 전 장관은 대희씨에게 특별히 안부를 부탁했다.이씨는 “아,그래 양자가 살아 있니.”라고 물으며 함께 사진을찍은 뒤 “양자에게 보여달라.”고 부탁했다. 금강산 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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