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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장부호까지 그대로… 고전 번역의 진화

    문장부호까지 그대로… 고전 번역의 진화

    세대를 불문하고 꾸준히 읽히는 해외 고전들이 새롭게 번역 출간되고 있다. 원작에 최대한 충실하게 번역하는 작업은 번역가들에겐 도전의 영역이자, 높아진 독자의 눈높이를 맞추려는 노력이기도 하다.도서출판 삼인은 최근 프랑스 소설가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①를 고종석 작가의 번역으로 출간했다. 1943년 프랑스 갈리마르사에서 첫 출간한 ‘어린 왕자’는 사막에 불시착한 조종사가 소행성의 주인인 소년을 만나 이야기를 듣는 풍자적 소설이다. 저널리스트이자 언어학자인 고 작가는 “독자들에게 프랑스어의 흐름을 보여 주고 싶었다”고 밝혔다. 고 작가는 원작이 채택한 문장부호를 그대로 살렸다. 예컨대 “-다들 너무 잊고 있는 거지, 여우가 말했다. 그건《관계를 맺는다》는 뜻이야…”(101쪽)에서 보듯 대화와 지문을 한 문장 안에서 분리하지 않고 프랑스식 표기를 존중한 것이다. ‘강들과 바다들’처럼 어색한 복수어도 일부러 프랑스어처럼 번역했다. 주인공 어린 왕자는 ‘그’라고 부르는 기존 번역서와 달리 ‘그 아이’라고 표현했다. 세상의 모든 어린이를 대변한다고 봤기 때문이다.새움 출판사는 영국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② 직역판을 이정서 번역가의 번역으로 내놓았다. 오웰이 1945년 공산주의를 비판하려고 지은 이 책은 동물을 의인화한 풍자 소설이다. 평소 직역의 중요성을 강조해 온 역자는 원작을 최대한 살리고자 했다. 기존 번역본에서 “이럴 생각은 아니었는데”라고 했던 ‘I had no intention of doing that’을 “난 그럴 의도가 없었는데”로, “내가 고의로 죽인 건 아냐”였던 ‘Who will believe that I did not do this on purpose’는 “이게 고의가 아니었다는 걸 누가 믿을까?”(53쪽)로 직역해 등장인물들의 캐릭터를 각색 없이 부각시켰다. “캐릭터의 성격을 잘 보여 주기 위한” 의도다.문학세계사는 최인자·신현철 평론가가 번역한 ‘어른을 위한 이솝 우화 전집’③을 펴냈다. 1998년 미국 로버트 템플 부부가 주해한 책을 원문에 충실하게 완역했다. 기원전 6세기 그리스 노예 이솝이 쓴 것으로 알려진 ‘이솝 우화’는 원래 어른을 위한 처세술이 담긴 책이었다. 어린이들이 읽기에 부적합한 150여편을 삭제하면서 어린이를 위한 교훈집으로 알려졌다. 역자들은 동성연애자의 사랑을 다룬 ‘제우스와 수치심’(32쪽)이나, 교훈보다 삶의 냉혹함만 느낄 수 있는 ‘굶주린 개’(251쪽)와 같은 이야기 등을 엮었다.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는 “번역자가 자신의 이름을 걸고 당대 사회와 문화에 맞게 번역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라며 “원전에 충실한 번역은 당연하게 추구해야 하며 이제는 학문적 깊이와 새로운 연구 경향도 반영하는 번역을 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하종훈 기자 artg@seoul.co.kr
  • 녹슬지 않는 백년 디자인의 탄생

    녹슬지 않는 백년 디자인의 탄생

    베를린에 살면서 가장 좋은 순간은 기대를 뛰어넘는 멋진 작품과 예술을 접할 때이다. 특히 그 예술과 작품이 삶과 동떨어져 있지 않고 일상에서도 쉽게 접할 수 있을 때 진정한 힘을 느낀다. 베를린에서 그렇게 느끼는 예술을 꼽으라면 바우하우스를 빼놓을 수 없다. 1919년 바이마르에서 시작해 1933년까지 운영된 예술 학교인 바우하우스는 건축과 디자인, 사진, 공예 등 많은 예술 분야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하나의 양식이 됐다. 지난 1년간 연재해 온 글은 이번 바우하우스를 마지막으로 마무리를 짓게 됐다. 베를린을 이야기하면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주제였기에 더 늦지 않고 쓰게 된 것을 다행이라 생각한다. 17회에 이르기까지 읽어 주시고 응원해 주신 모든 독자들께도 마지막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내 일상으로 들어온 바우하우스 2019년은 바우하우스 100주년이었다. 바우하우스의 100년 역사가 재조명되면서 많은 사람의 관심을 끌었고 나 역시 단편적으로만 알고 있던 바우하우스의 역사와 이념 등에 대해 좀더 자세히 배울 수 있었다. 그해 바우하우스 역사의 중요한 현장이었던 바이마르와 데사우, 베를린에서는 많은 기념 전시와 행사도 열렸다. 좋은 점은 바우하우스와 관련된 공간과 전시를 지금도 꾸준히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지난 2월까지 한 갤러리에서 열렸던 ‘뉴 바우하우스 우먼’ 사진 전시도 바우하우스 시대의 작품과 당대 익명의 여성들에 대해 경의를 표하는 새로운 작업이었다. 내가 바우하우스를 직접 접하게 된 건 5년 전 베를린에 있는 ‘바우하우스 아카이브 박물관’에서였다. 바우하우스 학교를 설립한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가 설계한 이 박물관은 건축 외관부터 매우 독특하다. 순백색의 건물 지붕 꼭대기는 톱날 모양으로 늘어서 있고 어느 면에서 봐도 시선을 압도한다. 마치 거대한 하나의 조형 작품을 보는 기분이 드는데, 1997년에는 베를린 건축 문화재로도 지정됐다. 내부로 들어가면 아카이브의 공간답게 바우하우스 사조와 관련된 방대한 문서와 자료들이 보관돼 있다. 바우하우스 시대의 마이스터(교수이자 명인)들과 학생들이 만든 대표 작품들도 있다. 모든 자료와 작품은 바우하우스의 교육 방법과 건축, 디자인으로 분야를 나눠 전시되고 있지만 해마다 보관해야 할 자료들이 늘어나면서 현재는 신축 건물을 공사 중이다. 2018년에 공모를 통한 공사가 시작됐고 2022년에 완공 예정이다.(때문에 100주년 때에도 이곳에서는 아무런 행사가 열리지 못했다.) 새로 지어지는 건물은 본래의 건물 앞쪽에 5층짜리 타워형 유리 건물이다. 기존 건물과 강가 쪽을 향한 산책로, 안뜰이 있는 지하 공간 등도 새로 보수하고 확장된다. 내년이면 벌써 공사가 끝나는 해인데, 베를린에서는 신공항도 그렇고 제때 완공된 건물이 거의 없어서 오픈이 가능할지는 좀더 두고 봐야겠다. 아카이브 박물관 내에 있던 아트숍은 현재 베를린 서쪽 크네제베크 거리로 옮겨 한시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바우하우스 시대를 대표하는 제품과 엽서, 디자인 포스터, 그리고 기능적이면서도 단순한 디자인의 아이디어 제품과 공예 작품 등이 다양하게 판매된다. 3년 전 이곳에서 바우하우스 시대를 대표하는 조명을 샀다. 바겐펠트의 테이블 램프(Wagenfeld Table Lamp WG24)다. 서울의 유명 편집숍에서 100만원이 훌쩍 넘게 팔리지만, 베를린에서는 60만원대에 살 수 있다.바겐펠트 조명은 두 가지 버전이 있다. 오팔 유리와 니켈 금속으로 디자인된 제품은 막상 진열장에서 꺼내 보니 검은 전선이 투박하게 램프 기둥에 붙어 있었다. 다른 종류는 전선이 기둥 선반 아래로 숨어 있어 좀더 깔끔해 보이기도 했다. 30분 넘게 망설이다 나이 든 직원을 불렀다. “램프를 사려고 하는데 결정을 못 하겠어요. 오팔 유리의 은은한 초록색이 더 마음에 드는데, 이 검고 두꺼운 전선이 왠지 눈에 거슬려서요. 옆의 은색 원반은 선이 안 보여서 더 깔끔한 것도 같고.” “이 오팔 유리 조명이 먼저 만들어진 제품인 건 아시죠? 바우하우스 시대에는 이 검은 선이 나와 있는 부분까지 예술적인 것으로 봤어요. 기술적인 부분을 감추는 것이 아니라 드러냄으로써 아름다움을 찾으려고 한 것이 바우하우스 시대의 정신입니다. 오리지널리티를 찾는다면 이 오팔 유리 조명을 추천하고 싶네요.” 직원의 설명 덕분에 더이상 고민하지 않고 원래 사려던 오팔 유리 조명을 샀다. 그리고 한국까지 애지중지 들고 왔다. 내 일상에 바우하우스 제품을 들인 첫 순간이었다. 매일 밤 켜는 은은한 조명 빛은 시간이 갈수록 더 근사하고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램프를 산 지 2년도 안 돼서 다시 베를린으로 이사를 했다. 베를린에서 언제든 살 수 있는 조명을 또 갖고 오는 건 무모한 일이었다. 서울 집을 정리하면서 자식 떠나 보내는 심정으로 조명을 팔았다. 가지고 있던 물건에 이런 애착을 느낀 적도 처음이었다. 오리지널이 갖는 힘이 이런 것일까 하고 그때 잠시 생각했다. ●현대 건축과 디자인의 기초 아트숍 직원의 설명처럼, 바우하우스는 ‘예술과 기술의 새로운 통합’을 위해 달려온 시대였다. 하지만 학교가 설립된 초창기부터 바로 시행된 것은 아니었다. 초기의 바우하우스는 “건축가, 조각가, 화가들은 모두 공예로 돌아가야 한다”고 외쳤다. 제각각 흩어져 있던 미술 분야를 통합하고 공예가와 화가, 조각가들이 기술을 결합해 함께 프로젝트를 수행하는데, 이 모든 창조 활동의 궁극적인 목표는 건축을 위한 것이었다. 바우하우스 선언문에서도 분명히 밝히고 있지만, 초창기부터 건축에 대한 교육이 이루어지진 못했다. 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하고 카이저 황제가 퇴임하는 혼돈의 상황에서 교육을 위한 재정 여건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바우하우스는 학생들을 교육할 공간과 재료가 여유롭지 못한 탓에 특별한 시설이 필요 없는 이론 과목과 이념 교육에 집중했다. 그로피우스가 가장 중요시하던 건축 교육은 1927년이 돼서야 시작할 수 있었다. 바이마르 도시에서 문을 연 바우하우스는 1925년 데사우로 이전하면서 전성기를 맞았다. 귀족적이고 고전적인 미술과 공예는 보다 확실하게 산업디자인으로 옮겨왔고, 일상생활 제품과 가구에서 공간까지 디자인이 확대됐다. 데사우에서는 그로피우스가 유리 정면과 철골 구조로 이루어진 새 바우하우스 건물도 완성할 수 있었고, 바우하우스 학생들과 협동해 지은 건축물도 여럿 있었다. 1928년에는 스위스 건축가인 하네스 마이어가 그로피우스의 후임 교장으로 선출됐으나 다른 교수들과 예술 이념의 차이로 2년 만에 해임됐다. 이후 독일 건축가인 미스 반 데어 로에가 마지막 교장이 돼 학교를 다시 베를린으로 옮겼으나 나치의 탄압과 감시 속에 결국 1년도 못 버티고 문을 닫고 말았다. 독일에서 바우하우스가 존재한 건 총 14년뿐이었다. 하지만 미술 교육에 미친 영향은 가히 혁명적인 것이었다. 오늘날 세계 각지의 미술대학들은 바우하우스 교육과정에서 그 기초를 따르고 있으며, 현대 건축과 디자인에도 바우하우스는 획기적인 영향을 주었다. 바우하우스 디자인의 특징은 기능을 위해 꼭 필요한 요소만 남기는 형태미를 추구한 것이다.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는 말처럼 최소한의 장식과 단순화된 디자인, 기능적 형태미를 중요시했으며 이는 전 세계 산업디자인의 시대를 열어 주었다. 때문에 바우하우스는 우리 생활 전반의 모든 공간과 디자인에도 변화를 몰고 왔다. 우리가 지금 앉아 있는 의자부터 책상 위에서 쓰는 독서용 조명, 공동주택에 이르기까지 살고 있는 모든 것의 모양을 바꾸어 놓았으며, 그것은 일상 깊숙이 스며들었다.바우하우스 시대에 발명된 작품은 많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마르셀 브로이어의 바실리 체어와 마리안네 브란트의 MT49찻주전자, 빌헬름 바겐펠트의 조명 등이 대표작으로 꼽힌다. 베를린에서 네 달 넘게 열렸던 ‘오리지널 바우하우스’ 전시에서는 바우하우스가 존재했던 14년 동안 발명된 14개의 핵심 작품을 소개하면서 그 작품의 원형에 대해서도 알 수 있었다. 전시를 통해 개인적으로 흥미를 가졌던 것은 ‘바우하우스와 여성’에 관한 관점이었다.바우하우스는 1900년대 초 독일에서 여성에게도 배움의 기회를 제공한 몇 안 되는 교육기관 중 하나였다. 때문에 교육을 받고 싶어 하는 많은 여학생들이 바우하우스에 지원했고, 1919년 여름학기에는 여학생 수가 87명으로, 79명인 남학생 수보다 많을 정도였다. 그렇다고 여학생들의 바우하우스 생활이 순탄했던 것은 아니었다. 교육의 기회만 주어졌을 뿐 여성에 대한 차별이 여전히 큰 시대였다. 바우하우스의 많은 여학생들은 여자들의 고유 영역으로 여겨지는 직물 공방에 당연스레 배정됐다. 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여학생들도 있었지만 반기지 않는 여학생들도 있었다. 마리안네 브란트가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남학생들이 주로 작업하는 금속 공방으로 가길 원했다. 어렵게 배정받은 그곳에서 브란트에게 주어진 작업은 매우 단순한 것이었다. 투박한 금속 덩어리를 몇 날 며칠 동안 두들겨서 만질만질한 공의 형태로 만드는 것. 하지만 그는 이 단순하고 하찮게 여겨지는 일을 끝까지 그만두지 않았다. 이 단순한 작업으로 어떤 특별한 작업을 할 수 있을까, 브란트 스스로도 회의적인 순간이 많았겠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그는 결국 바우하우스 시대의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 인정받는 MT49찻주전자를 탄생시켰다. 삼각형의 구멍이 나 있는 원형 모양의 재떨이나 전 세계에 8개밖에 없는 이 찻주전자는 모두 그가 매일같이 두들겨 댄 원형의 형태에서 탄생한 것이었다. ●기능주의 고전 을 만든 ‘불멸의 디자인 ’ 바우하우스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교수진 중에서도 여성은 많지 않았다. 바우하우스 시대에 가장 독창적인 직물가로 평가받은 군타 슈츨만이 그나마 이름을 알렸는데, 그마저도 대중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이름이다. 이처럼 바우하우스에는 당시 차별적인 시대 상황 때문에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도 익명으로 남은 여성들이 많았다. 마르셀 브로이어의 바실리 체어에 앉아 가면을 쓰고 있는 여성은 후에 그런 익명의 여성들을 대표하는 이미지가 됐다.전통적인 목재로 가구를 만들던 당시 마르셀 브로이어가 발명한 바실리 체어는 매우 획기적인 디자인이었다. 무겁고 옮기기도 어려운 나무 대신 금속이나 천, 가죽을 이용해 만든 그의 의자는 큰 주목을 받았는데, 강철과 가죽을 이용해 만든 바실레 체어는 기존 의자의 상식을 깨는 혁신으로 훗날 모던 가구의 아이콘으로 꼽혔다.바실리 체어의 명성에 가려진 것 중엔 사진 속 여성이 입고 있는 민소매 원피스도 있었다. 팔다리를 드러내는 모습은 바우하우스 내에서도 이미 급진적이었고, 1920년 당시 상황에서는 혁명적인 것이었다. 패브릭 디자인을 맡았던 리스 바이어가 민소매 원피스를 제작했고,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도 그였지만 당시 이 여성이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누구나 이 여성이 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었다. 바우하우스의 한 축을 이루었으나 드러나지 못하고 익명으로 남은 여성들을 들여다보는 것도 바우하우스 100년 역사에서 매우 흥미로운 주제였다.바우하우스는 전혀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우수한 표준을 만드는 교육 현장이었다. 바우하우스를 통해 기능주의의 고전이라 불리는 불멸의 디자인들이 탄생했다.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생활 속의 디자인’으로 사용되는 것들은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바우하우스 전시에서 들었던 도슨트의 마지막 말은 왜 바우하우스가 지금까지 존재할 수 있는지에 대한 대답이었다. “바우하우스의 오리지널이 발명된 이래 100년 동안 작품들이 재생산되고 복제품도 생겨났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오리지널을 보러 찾아옵니다. 오리지널은 절대 구식이 되지 않죠.” 여행작가 dongmi01@gmail.com
  • 멈추지 않는 독일 예술의 심장

    멈추지 않는 독일 예술의 심장

    베를린에 살면서 가장 좋은 순간은 기대를 뛰어넘는 멋진 작품과 예술을 접할 때이다. 특히 그 예술과 작품이 삶과 동떨어져 있지 않고 일상에서도 쉽게 접할 수 있을 때 진정한 힘을 느낀다. 베를린에서 그렇게 느끼는 예술을 꼽으라면 바우하우스를 빼놓을 수 없다. 1919년 바이마르에서 시작해 1933년까지 운영된 예술 학교인 바우하우스는 건축과 디자인, 사진, 공예 등 많은 예술 분야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하나의 양식이 됐다. 지난 1년간 연재해 온 글은 이번 바우하우스를 마지막으로 마무리를 짓게 됐다. 베를린을 이야기하면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주제였기에 더 늦지 않고 쓰게 된 것을 다행이라 생각한다. 17회에 이르기까지 읽어 주시고 응원해 주신 모든 독자들께도 마지막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내 일상으로 들어온 바우하우스 2019년은 바우하우스 100주년이었다. 바우하우스의 100년 역사가 재조명되면서 많은 사람의 관심을 끌었고 나 역시 단편적으로만 알고 있던 바우하우스의 역사와 이념 등에 대해 좀더 자세히 배울 수 있었다. 그해 바우하우스 역사의 중요한 현장이었던 바이마르와 데사우, 베를린에서는 많은 기념 전시와 행사도 열렸다. 좋은 점은 바우하우스와 관련된 공간과 전시를 지금도 꾸준히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지난 2월까지 한 갤러리에서 열렸던 ‘뉴 바우하우스 우먼’ 사진 전시도 바우하우스 시대의 작품과 당대 익명의 여성들에 대해 경의를 표하는 새로운 작업이었다. 내가 바우하우스를 직접 접하게 된 건 5년 전 베를린에 있는 ‘바우하우스 아카이브 박물관’에서였다. 바우하우스 학교를 설립한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가 설계한 이 박물관은 건축 외관부터 매우 독특하다. 순백색의 건물 지붕 꼭대기는 톱날 모양으로 늘어서 있고 어느 면에서 봐도 시선을 압도한다. 마치 거대한 하나의 조형 작품을 보는 기분이 드는데, 1997년에는 베를린 건축 문화재로도 지정됐다. 내부로 들어가면 아카이브의 공간답게 바우하우스 사조와 관련된 방대한 문서와 자료들이 보관돼 있다. 바우하우스 시대의 마이스터(교수이자 명인)들과 학생들이 만든 대표 작품들도 있다. 모든 자료와 작품은 바우하우스의 교육 방법과 건축, 디자인으로 분야를 나눠 전시되고 있지만 해마다 보관해야 할 자료들이 늘어나면서 현재는 신축 건물을 공사 중이다. 2018년에 공모를 통한 공사가 시작됐고 2022년에 완공 예정이다.(때문에 100주년 때에도 이곳에서는 아무런 행사가 열리지 못했다.) 새로 지어지는 건물은 본래의 건물 앞쪽에 5층짜리 타워형 유리 건물이다. 기존 건물과 강가 쪽을 향한 산책로, 안뜰이 있는 지하 공간 등도 새로 보수하고 확장된다. 내년이면 벌써 공사가 끝나는 해인데, 베를린에서는 신공항도 그렇고 제때 완공된 건물이 거의 없어서 오픈이 가능할지는 좀더 두고 봐야겠다. 아카이브 박물관 내에 있던 아트숍은 현재 베를린 서쪽 크네제베크 거리로 옮겨 한시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바우하우스 시대를 대표하는 제품과 엽서, 디자인 포스터, 그리고 기능적이면서도 단순한 디자인의 아이디어 제품과 공예 작품 등이 다양하게 판매된다. 3년 전 이곳에서 바우하우스 시대를 대표하는 조명을 샀다. 바겐펠트의 테이블 램프(Wagenfeld Table Lamp WG24)다. 서울의 유명 편집숍에서 100만원이 훌쩍 넘게 팔리지만, 베를린에서는 60만원대에 살 수 있다.바겐펠트 조명은 두 가지 버전이 있다. 오팔 유리와 니켈 금속으로 디자인된 제품은 막상 진열장에서 꺼내 보니 검은 전선이 투박하게 램프 기둥에 붙어 있었다. 다른 종류는 전선이 기둥 선반 아래로 숨어 있어 좀더 깔끔해 보이기도 했다. 30분 넘게 망설이다 나이 든 직원을 불렀다. “램프를 사려고 하는데 결정을 못 하겠어요. 오팔 유리의 은은한 초록색이 더 마음에 드는데, 이 검고 두꺼운 전선이 왠지 눈에 거슬려서요. 옆의 은색 원반은 선이 안 보여서 더 깔끔한 것도 같고.” “이 오팔 유리 조명이 먼저 만들어진 제품인 건 아시죠? 바우하우스 시대에는 이 검은 선이 나와 있는 부분까지 예술적인 것으로 봤어요. 기술적인 부분을 감추는 것이 아니라 드러냄으로써 아름다움을 찾으려고 한 것이 바우하우스 시대의 정신입니다. 오리지널리티를 찾는다면 이 오팔 유리 조명을 추천하고 싶네요.” 직원의 설명 덕분에 더이상 고민하지 않고 원래 사려던 오팔 유리 조명을 샀다. 그리고 한국까지 애지중지 들고 왔다. 내 일상에 바우하우스 제품을 들인 첫 순간이었다. 매일 밤 켜는 은은한 조명 빛은 시간이 갈수록 더 근사하고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램프를 산 지 2년도 안 돼서 다시 베를린으로 이사를 했다. 베를린에서 언제든 살 수 있는 조명을 또 갖고 오는 건 무모한 일이었다. 서울 집을 정리하면서 자식 떠나 보내는 심정으로 조명을 팔았다. 가지고 있던 물건에 이런 애착을 느낀 적도 처음이었다. 오리지널이 갖는 힘이 이런 것일까 하고 그때 잠시 생각했다. ●현대 건축과 디자인의 기초 아트숍 직원의 설명처럼, 바우하우스는 ‘예술과 기술의 새로운 통합’을 위해 달려온 시대였다. 하지만 학교가 설립된 초창기부터 바로 시행된 것은 아니었다. 초기의 바우하우스는 “건축가, 조각가, 화가들은 모두 공예로 돌아가야 한다”고 외쳤다. 제각각 흩어져 있던 미술 분야를 통합하고 공예가와 화가, 조각가들이 기술을 결합해 함께 프로젝트를 수행하는데, 이 모든 창조 활동의 궁극적인 목표는 건축을 위한 것이었다. 바우하우스 선언문에서도 분명히 밝히고 있지만, 초창기부터 건축에 대한 교육이 이루어지진 못했다. 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하고 카이저 황제가 퇴임하는 혼돈의 상황에서 교육을 위한 재정 여건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바우하우스는 학생들을 교육할 공간과 재료가 여유롭지 못한 탓에 특별한 시설이 필요 없는 이론 과목과 이념 교육에 집중했다. 그로피우스가 가장 중요시하던 건축 교육은 1927년이 돼서야 시작할 수 있었다. 바이마르 도시에서 문을 연 바우하우스는 1925년 데사우로 이전하면서 전성기를 맞았다. 귀족적이고 고전적인 미술과 공예는 보다 확실하게 산업디자인으로 옮겨왔고, 일상생활 제품과 가구에서 공간까지 디자인이 확대됐다. 데사우에서는 그로피우스가 유리 정면과 철골 구조로 이루어진 새 바우하우스 건물도 완성할 수 있었고, 바우하우스 학생들과 협동해 지은 건축물도 여럿 있었다. 1928년에는 스위스 건축가인 하네스 마이어가 그로피우스의 후임 교장으로 선출됐으나 다른 교수들과 예술 이념의 차이로 2년 만에 해임됐다. 이후 독일 건축가인 미스 반 데어 로에가 마지막 교장이 돼 학교를 다시 베를린으로 옮겼으나 나치의 탄압과 감시 속에 결국 1년도 못 버티고 문을 닫고 말았다. 독일에서 바우하우스가 존재한 건 총 14년뿐이었다. 하지만 미술 교육에 미친 영향은 가히 혁명적인 것이었다. 오늘날 세계 각지의 미술대학들은 바우하우스 교육과정에서 그 기초를 따르고 있으며, 현대 건축과 디자인에도 바우하우스는 획기적인 영향을 주었다. 바우하우스 디자인의 특징은 기능을 위해 꼭 필요한 요소만 남기는 형태미를 추구한 것이다.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는 말처럼 최소한의 장식과 단순화된 디자인, 기능적 형태미를 중요시했으며 이는 전 세계 산업디자인의 시대를 열어 주었다. 때문에 바우하우스는 우리 생활 전반의 모든 공간과 디자인에도 변화를 몰고 왔다. 우리가 지금 앉아 있는 의자부터 책상 위에서 쓰는 독서용 조명, 공동주택에 이르기까지 살고 있는 모든 것의 모양을 바꾸어 놓았으며, 그것은 일상 깊숙이 스며들었다.바우하우스 시대에 발명된 작품은 많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마르셀 브로이어의 바실리 체어와 마리안네 브란트의 MT49찻주전자, 빌헬름 바겐펠트의 조명 등이 대표작으로 꼽힌다. 베를린에서 네 달 넘게 열렸던 ‘오리지널 바우하우스’ 전시에서는 바우하우스가 존재했던 14년 동안 발명된 14개의 핵심 작품을 소개하면서 그 작품의 원형에 대해서도 알 수 있었다. 전시를 통해 개인적으로 흥미를 가졌던 것은 ‘바우하우스와 여성’에 관한 관점이었다.바우하우스는 1900년대 초 독일에서 여성에게도 배움의 기회를 제공한 몇 안 되는 교육기관 중 하나였다. 때문에 교육을 받고 싶어 하는 많은 여학생들이 바우하우스에 지원했고, 1919년 여름학기에는 여학생 수가 87명으로, 79명인 남학생 수보다 많을 정도였다. 그렇다고 여학생들의 바우하우스 생활이 순탄했던 것은 아니었다. 교육의 기회만 주어졌을 뿐 여성에 대한 차별이 여전히 큰 시대였다. 바우하우스의 많은 여학생들은 여자들의 고유 영역으로 여겨지는 직물 공방에 당연스레 배정됐다. 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여학생들도 있었지만 반기지 않는 여학생들도 있었다. 마리안네 브란트가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남학생들이 주로 작업하는 금속 공방으로 가길 원했다. 어렵게 배정받은 그곳에서 브란트에게 주어진 작업은 매우 단순한 것이었다. 투박한 금속 덩어리를 몇 날 며칠 동안 두들겨서 만질만질한 공의 형태로 만드는 것. 하지만 그는 이 단순하고 하찮게 여겨지는 일을 끝까지 그만두지 않았다. 이 단순한 작업으로 어떤 특별한 작업을 할 수 있을까, 브란트 스스로도 회의적인 순간이 많았겠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그는 결국 바우하우스 시대의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 인정받는 MT49찻주전자를 탄생시켰다. 삼각형의 구멍이 나 있는 원형 모양의 재떨이나 전 세계에 8개밖에 없는 이 찻주전자는 모두 그가 매일같이 두들겨 댄 원형의 형태에서 탄생한 것이었다. ●기능주의 고전 을 만든 ‘불멸의 디자인 ’ 바우하우스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교수진 중에서도 여성은 많지 않았다. 바우하우스 시대에 가장 독창적인 직물가로 평가받은 군타 슈츨만이 그나마 이름을 알렸는데, 그마저도 대중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이름이다. 이처럼 바우하우스에는 당시 차별적인 시대 상황 때문에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도 익명으로 남은 여성들이 많았다. 마르셀 브로이어의 바실리 체어에 앉아 가면을 쓰고 있는 여성은 후에 그런 익명의 여성들을 대표하는 이미지가 됐다.전통적인 목재로 가구를 만들던 당시 마르셀 브로이어가 발명한 바실리 체어는 매우 획기적인 디자인이었다. 무겁고 옮기기도 어려운 나무 대신 금속이나 천, 가죽을 이용해 만든 그의 의자는 큰 주목을 받았는데, 강철과 가죽을 이용해 만든 바실레 체어는 기존 의자의 상식을 깨는 혁신으로 훗날 모던 가구의 아이콘으로 꼽혔다.바실리 체어의 명성에 가려진 것 중엔 사진 속 여성이 입고 있는 민소매 원피스도 있었다. 팔다리를 드러내는 모습은 바우하우스 내에서도 이미 급진적이었고, 1920년 당시 상황에서는 혁명적인 것이었다. 패브릭 디자인을 맡았던 리스 바이어가 민소매 원피스를 제작했고,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도 그였지만 당시 이 여성이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누구나 이 여성이 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었다. 바우하우스의 한 축을 이루었으나 드러나지 못하고 익명으로 남은 여성들을 들여다보는 것도 바우하우스 100년 역사에서 매우 흥미로운 주제였다.바우하우스는 전혀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우수한 표준을 만드는 교육 현장이었다. 바우하우스를 통해 기능주의의 고전이라 불리는 불멸의 디자인들이 탄생했다.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생활 속의 디자인’으로 사용되는 것들은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바우하우스 전시에서 들었던 도슨트의 마지막 말은 왜 바우하우스가 지금까지 존재할 수 있는지에 대한 대답이었다. “바우하우스의 오리지널이 발명된 이래 100년 동안 작품들이 재생산되고 복제품도 생겨났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오리지널을 보러 찾아옵니다. 오리지널은 절대 구식이 되지 않죠.” 여행작가 dongmi01@gmail.com
  • 또 집권당? 40세 엄마?… 불붙은 ‘포스트 메르켈’ 경쟁

    또 집권당? 40세 엄마?… 불붙은 ‘포스트 메르켈’ 경쟁

    독일 기독민주당(CDU)·기독사회당(CSU) 연합은 16년 앙겔라 메르켈 집권에 이어 계속 총리직을 차지할 것인가? 아니면 지지율 급상승의 녹색당(Die Gruene)이 역사상 처음으로 총리를 배출할 것인가. 독일 여당연합이 20일(현지시간) 아르민 라셰트(왼쪽) 기민당 대표를 총리 후보로 확정하면서 본격적인 레이스가 속도를 내고 있다. 오는 9월 독일 총선이 특히 주목받는 것은 녹색당이 보이고 있는 의외의 약진 때문이다. 2021년 ‘슈퍼 선거’의 해에 진입하고서도 독일은 기민·기사 연합이 계속 연방 총리 자리를 차지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관측됐다. 지지율이 새해 들어 하락세를 보이긴 했지만 주요 경쟁 상대인 사민당 지지율은 10%대에 머물렀다. 그러던 것이 지난 3월 주 의회 선거에서 녹색당과 사민당(SPD)이 승리를 거두면서 기류상 변화를 드러냈다. 녹색당은 바덴뷔르템베르크주에서 32.6%로 주 의회 선거에서 역대 최대의 지지를 얻었다. 사민당은 전국적으로 당 지지율 하락세는 막지 못하는 가운데서도 라인란트팔츠주에서 35.7%를 얻어 주 총리 자리는 유지했다. 2017년 총선에서 89석을 얻으며 돌풍을 일으켰던 극우정당 독일 대안당(AfD)은 이 선거에서 한 자릿수 지지율에 머물며 부진을 떨쳐 내지 못했다. 결국 녹색당만 돋보인 선거였다. 그간 녹색당은 총선을 이끌 지명도 높은 인물이 없다는 게 가장 큰 약점이었다. 바덴뷔르템베르크 주총리 빈프리트 크레치만은 72세로 고령이었다. 그런 녹색당이 지난 19일 1980년 창당 이래 처음으로 자체 총리 후보를 지명했다. 1980년생 여성 당대표 아날레나 베르보크(오른쪽)였다. 28세에 녹색당 브란덴부르크주 대표가 된 그는 33세에 연방의회 의원에 당선됐고, 37세에 중앙당 대표에 올랐다. 두 딸의 엄마로서 메르켈의 ‘무티(Mutti·어머니를 뜻하는 Mutter의 애칭) 리더십’에 가까운 모습을 보이고 있다. 여론조사기관 포르자가 RTL·ntv방송 의뢰로 실시해 이날 발표한 여론조사에서 28%가 녹색당을 지지했고 이어 기민·기사당 연합 21%, 사민당 13% 등 순이었다. 녹색당 지지율이 기민·기사당 연합을 넘어선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앞서 지난 16∼19일 여론조사기관 인사(INSA)의 조사에서는 기민·기사당 연합 28%, 녹색당 21%, 사민당은 15%였다. 녹색당은 총리를 배출하지 못하더라도 연정에 참여할 가능성이 커졌고, 이렇게 되면 독일 정치에 상당한 변화가 예상된다고 현지 언론들은 내다보고 있다. 이지운 전문기자 jj@seoul.co.kr
  • 오 시장은 들었다… 그러자 부드러워졌다는 소리를 들었다

    오 시장은 들었다… 그러자 부드러워졌다는 소리를 들었다

    “예전보다 훨씬 부드러워지고, 자신의 의견을 내세우지 않는다. 과거보다 공무원들의 전문성을 인정해주고, 진행하고 있는 사업의 설명도 경청한다.”(서울시 공무원 A씨), “나이가 들어서인지 더 진중해지고, 차분해진 느낌이 있다. 인사 폭을 최소화한 것도 서울시를 안정적으로 끌고 가겠다는 사인이 아니겠는가. 아직 허니문 기간이니 더 지켜봐야 할 것 같다.”(시 공무원 B씨) 임기를 시작한 지 2주째를 맞은 21일, 까칠한 오세훈 서울시장의 업무 스타일이 부드럽게 바뀌었다는 평가가 시 안팎에서 나오고 있다. 가장 큰 이유는 ‘인사’다. 애초 서울시 공무원들 사이에선 오 시장이 취임하면 ‘인사 칼바람’이 불 것이라는 관측이 많았다. 지난 10년간 서울시를 운영한 고(故) 박원순 전 시장의 색깔을 지우기 위해선 대규모 인사가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 시장은 ‘변화’보다 ‘안정’을 선택했다. 행정1·2부시장으로 내정된 조인동 기획조정실장과 류훈 도시재생실장은 박 전 시장 당시에도 중용됐던 인물들이다. 여기에 19일 진행된 2급 간부 인사도 3명을 전보하는 수준에서 그쳤다. 당분간 고위직 인사가 없을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시의 한 간부는 “오 시장이 박 전 시장의 색깔 지우기보다 조직의 안정성에 더 무게를 뒀다는 이야기가 나온다”면서 “1년 3개월밖에 시간이 없기 때문에 일을 할 수 있는 시스템을 흐트러뜨리지 않겠다는 것”이라고 평했다. 또 이전 시장들이 당선 이후 대규모 정무직 인사를 통해 점령군처럼 들어온 반면, 오 시장은 최소 인원만 정무직에 배치한 것도 이런 평가를 받는 이유다. 대외 관계와 회의 방식도 ‘대립과 지시’에서 ‘경청’으로 바뀌었다는 평가다. 오 시장은 현재 더불어민주당이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서울시의회와 자치구들과 관계에서도 자신을 낮추고 있다. 10년 전 오 시장을 가까운 거리에 봤던 한 간부는 “40대의 오 시장은 나이가 많은 간부에게 눌리지 않기 위해 더 강하게 지시를 하고, 자신의 의견을 고집하는 측면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라면서 “하지만 50대의 오 시장은 코로나19 방역이나 주택공급 등 주요 정책의 논의 과정에서 자신의 말을 아끼고 간부들의 의견을 듣는 등 한층 성숙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귀띔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오 시장의 스타일 변화를 속단하기 이른다는 평가도 나온다. 또 다른 고위 간부는 “지금은 한마디로 허니문 기간”이라면서 “지금 오 시장을 평가하기 이르다”고 말했다. 김동현 기자 moses@seoul.co.kr
  • “일각 영남당 탈피 주장은 허구의 논리… 윤석열 들어오게 당 혁신하는 게 중요”

    “일각 영남당 탈피 주장은 허구의 논리… 윤석열 들어오게 당 혁신하는 게 중요”

    국민의힘 원내대표 경선에 나선 김기현 후보는 청와대 울산시장 선거 개입 의혹 사건의 당사자인 자신이 현재의 여대야소 국면을 돌파할 ‘유일한 카드’라고 주장했다. 울산 남구을 4선인 김 후보는 외연 확장을 위해 ‘영남당’을 탈피해야 한다는 일각의 주장은 허구의 논리라고 일축했다. 김 후보는 21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진행한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제1야당이 소수야당이 된 상황에서 내년 대선을 준비하고 당에 활력을 불어넣으려면 여당의 핍박에도 굴하지 않는 강인한 원내대표가 필요하다”며 “나는 울산시장 선거 개입 의혹에도 문재인 정권과 싸워 이긴 유일한 사람이다. 대선을 앞둔 지금 현 정권의 가장 큰 아킬레스건이자 대항카드”라고 말했다. 김 후보는 보수정당의 지지 기반인 영남을 ‘베이스캠프’로 규정하며 영남 출신을 배제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국민의힘에 있어 영남은 베이스캠프인데, 베이스캠프를 버리고 어떻게 정상에 오를 수 있나”라며 “외연 확장도, 전국정당화도 베이스캠프를 시작으로 한 발씩 전진해 가면서 만들어야 하고, 특히 부산·울산·경남은 외연 확장을 가를 ‘스윙보터’ 지역”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21대 총선 결과를 보면 영남당 탈피를 통해 지역적 한계를 극복한 것도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국민의당과의 합당, 윤석열 전 검찰총장 영입 등 야권 대통합이 차기 원내대표가 해결해야 할 핵심 과제로 떠오른 가운데 김 후보는 ‘자강’과 ‘혁신’을 통한 빅텐트 구상을 밝혔다. 그는 “진영과 계파를 앞세우는 낡은 정치를 바꾸고 불법과 불공정에 칼을 들이대는 모습을 보이면, 국민의힘을 주축으로 한 빅텐트가 꾸려지고 국민의당과도 국민들이 납득한 시기 내에 통합을 이루게 될 것”이라고 했다. 윤 전 총장 영입에 대해서는 “윤 전 총장 스스로 국민의힘에 들어올 수 있도록 당을 크게 혁신하는 게 중요하다”며 “특정 인물에 치우치기보다는 아직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하고 있지만 충분히 역량이 있는 당내 잠룡들도 지켜봐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근홍 기자 lkh2011@seoul.co.kr이근아 기자 leegeunah@seoul.co.kr
  • 美 중학생들, 말다툼하다 총 쏜다…‘살벌한 도시’

    美 중학생들, 말다툼하다 총 쏜다…‘살벌한 도시’

    생일파티 총격전으로 10대 9명 부상 미국에서 중학생 또래의 어린 아이들이 말다툼을 벌이다 친구들에게 총을 쏴 죽거나 다치게 하는 일이 잇따라 발생하고 있다. 21일 미국 ABC방송과 뉴욕포스트(NYP) 등에 따르면 지난 17일 오후 8시 47분쯤 루이지애나주 세인트존 뱁티스트 패리시에서 12살 중학생의 생일파티에 참석하던 10대들이 말싸움하다 총격전을 벌였다. 경찰은 12∼17살 청소년 9명이 머리, 복부, 갈빗대, 팔, 다리, 발목 등에 총상을 입었다고 밝혔다. 피해자 9명 중 7명은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퇴원하고, 나머지 2명은 아직 입원 중이지만 상태는 안정적인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은 격발된 총기가 두 정인 것으로 조사됐다고 밝혔다. 쇼핑몰서 말다툼 중 격발해 1명 숨져 같은 날 오후 10시 15분쯤 메릴랜드주 프린스조지카운티에서는 역시 중학생인 12살 소년이 다른 13살 소년을 총으로 쏴 숨지게 했다. 경찰은 이들이 캐피톨하이츠에 있는 쇼핑몰 근처에서 두 패거리로 나뉘어 다투다가 총격을 가하게 됐다고 밝혔다. 미국에서는 총격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고 있다. 이날 뉴욕주 롱아일랜드에 있는 한 식료품점에서 총격 사건이 발생해 1명이 숨지고 2명이 다쳤다. 지난 9일 텍사스주 휴스턴에서는 생후 8개월 된 아기가 세 살배기 남자 형제가 쏜 총에 맞아 숨졌다. 또 지난달 16일에는 조지아주 애틀랜타에서 총기 난사 사건으로 한인 4명을 포함한 8명이 숨졌고, 엿새 뒤 콜로라도주 볼더에 있는 한 식료품점에서도 총기 난사 사건이 발생해 10명이 희생됐다.올해 총기 관련 사건·사고로 숨진 미국인, 1만 3006명 비영리단체 총기폭력아카이브에 따르면 올해 총기 관련 사건·사고로 숨진 미국인은 1만 3006명에 달한다. 총기를 둘러싼 논란이 커지자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도 총기 규제 대책을 추진하고 있다.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 8일 최근 연이어 발생한 총격 사건을 전염병으로 규정하고 총기 규제 조치를 발표했다. 총기 규제안에는 부품을 사서 직접 제작하는 ‘유령총’을 엄격하게 단속하고 각 주가 위험인물의 총기 소지를 제한하는 ‘적기법’을 쉽게 제정하도록 하는 등의 내용이 담겼다. 김채현 기자 chkim@seoul.co.kr
  • 오창호 LG디플 부사장, 과학기술훈장 혁신장 수훈

    오창호 LG디플 부사장, 과학기술훈장 혁신장 수훈

    LG디스플레이는 오창호(사진·56) TV사업부장(부사장)이 ‘2021년 과학의 날’을 맞아 과학기술훈장 혁신장을 수훈했다고 21일 밝혔다. 과학기술훈장은 과학기술 발전에 큰 기여를 한 인물에게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수여하는 훈장이다. 오 부사장은 대형 올레드(유기발광다이오드)TV 제품을 주도적으로 개발하고 세계 최초로 롤러블(말리는)TV 상용화에 큰 역할을 하는 등 디스플레이 산업 경쟁력을 높인 공로를 인정받았다. 오 부사장은 “우리나라 과학기술 발전에 기여하게 돼 영광”이라며 “올해 본격적인 OLED 대세화로 대한민국 디스플레이 산업의 위상을 공고히 하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한재희 기자 jh@seoul.co.kr
  • 법무부, ‘윤석열 징계’ 소송 변호인 선임…前 추미애 대리인

    법무부, ‘윤석열 징계’ 소송 변호인 선임…前 추미애 대리인

    윤석열 ‘직무집행 정지’ 소송 제기 4개월 만법원, 소송 관한 입장·증거 제출 명령 압박법원은 추-윤 대결서 두 차례 尹 손 들어줘윤석열 전 검찰총장에게 징계를 내렸다가 소송에 휘말린 법무부가 뒤늦게 이옥형 변호사를 선임해 대응에 나서기로 했다. 이 변호사는 윤 전 총장이 직무집행 정지와 2개월 징계 처분에 반발해 집행정지를 신청했을 때 추미애 당시 장관을 대리한 인물이다. 21일 법조계에 따르면 법무부는 윤 전 총장이 제기한 징계 처분 취소 청구 소송에 이 변호사 등 2명을 선임해 대응하기로 했다. 윤 전 총장이 지난해 12월 소송을 제기한 지 4개월 만이다. 법무부가 이처럼 변호인 선임에 나선 것은 사건을 맡은 서울행정법원 담당 재판부로부터 오는 29일까지 소송에 관한 입장과 필요한 증거를 제출하라는 ‘석명 준비’ 명령을 받았기 때문이다. 법무부는 “내부적으로 사건의 사실관계 정리나 법률적 쟁점을 검토해 왔다”며 소송에 꾸준히 대응해왔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추 전 장관을 대리했던 이 변호사는 법원이 2차례나 윤 전 총장 측 손을 들어 집행정지를 인용하자 본안 소송에는 나서지 않았다. 법무부가 이 변호사를 재선임한 배경을 놓고 법조계에서는 “결과가 예상되는 싸움에 선뜻 나서려는 변호사가 없었을 것”이라는 반응이 나왔다. 강주리 기자 jurik@seoul.co.kr
  • [여기는 중국] 1인 11역으로 7000만원 가로챈 사기꾼 알고보니 남친

    [여기는 중국] 1인 11역으로 7000만원 가로챈 사기꾼 알고보니 남친

    의사, 변호사, 경찰 등 1인 11인 역할을 하며 연인을 속인 남성이 경찰에 붙잡혔다. 이 남성은 여자친구 씨를 속여 총 40만 위안(약 6900만 원)을 가로챈 혐의다. 2년 동안 연인 관계를 유지하며 결혼을 준비 중이었던 피해 여성 샤오팅 씨는 자신을 속인 범인이 남자친구 천 모 씨로 확인되자 현장에서 오랫동안 오열한 것으로 알려졌다. 피해 여성 샤오팅 씨가 천 모 씨를 알게 된 것은 지난 2019년 11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두 사람은 중국 저장성(浙江) 자싱(嘉兴)에 소재한 한 공장에서 근무, 동료에서 연인으로 발전했다. 이후 샤오팅 씨가 수술 직후 다니던 회사를 퇴직하게 되자 천 씨는 샤오팅 씨의 생활비를 모두 책임지려고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 남성은 연인의 생활비를 자신이 홀로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오히려 연인 계좌에 있었던 돈을 갈취해 이 돈으로 연인을 부양하겠다는 황당한 아이디어를 생각하게 됐다. 그의 범죄 행각은 지난해 6월 무렵 지병 치료를 위해 샤오팅 씨가 간단한 수술을 받은 직후 시작됐다. 당시 자싱 소재의 병원에서 수술을 받고 퇴원, 회복 중이었던 샤오팅 씨에게 그는 유능한 의사라면서 한 남성을 소개했다. 자신을 수술 부위 회복 전문가라고 소개한 이 남성은 '위챗'을 통해 샤오팅 씨에게 연락해왔다. 위챗은 중국판 카카오톡으로 불리는 서비스다. 이 남성은 회복 중인 샤오팅 씨에게 수술 부위를 상세히 촬영한 영상을 자신의 위챗에 전송토록 수 차례 요구했다. 당시 연인이었던 천 씨로부터 소개받은 이 남성의 요구에 따라 샤오팅 씨는 해당 영상을 순순히 촬영, 전송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 일이 있은 지 불과 일주일 후 샤오팅 씨는 자신을 공안국 관계자라고 소개하는 또 다른 남성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이번에도 공안국 관계자라는 이 남성은 시종일관 위챗 메세지로만 연락을 주고받았다. 이 공안국 관계자는 샤오팅 씨가 며칠 전 전송한 영상이 온라인 상에 그대로 유출, 해당 영상을 무단 유출한 범인으로 연락을 주고받았던 의사를 지목했다. 자신을 의사라고 소개했던 남성이 샤오팅 씨의 수술부위를 촬영한 영상을 온라인 상에 노출하고, 이를통해 경제적 이득을 취했다는 내용이었다. 이 일이 있은 당일 또 다른 남성 A씨가 피해자 샤오팅 씨에게 접촉했다. 이번에는 자신을 법률 전문가라고 소개한 A씨는 이번 영상 유출 사건과 관련해 피해보상금명목으로 약 700만 위안(약 12억 원)상당의 금액을 요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다만 소송 과정 시 필요한 비용으로 약 40만 위안이 소요된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샤오팅 씨는 곧장 저축했던 전재산을 법률전문가라는 A씨의 가상계좌로 송금했다. 부족한 소송 비용은 가족, 친구들에게 빌렸고, 일부 금액은 대부업체에서 고가의 이자를 지출하는 방법으로 대출해 충당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A씨는 수차례 소송비용 명목으로 추가 입금을 요구했다. 물론 자신을 변호사라고 소개한 이 남성과의 연락도 일체 위챗을 통해서만 진행됐다. 추가 송금액이 눈덩이처럼 불어나자, 샤오팅 씨와 그의 가족은 그제서야 사기 범죄일 것이라는 의심을 하기 시작해 사건을 관할 공안국에 신고했다. 그런데 사건의 반전은 이때부터 드러났다. 변호인이라 주장했던 남성의 단순 사기 횡령으로 짐작했던 샤오팅 씨의 생각과는 다르게 공안 수사 결과를 확인하고 현장 바닥에 쓰러져 한동안 오열하며 일어서지 못했던 것. 샤오팅 씨는 수술 회복을 도왔던 의사와 그의 영상 유출 사실을 알렸던 공안국 소속 직원, 법률전문가 등 이후 수차례 사건에 조언을 줬던 이들까지 모두 동일인이었던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대부업체 직원이라면서 고가의 이자를 요구했던 인물도 모두 샤오팅 씨의 연인 천 씨였다. 천 씨가 총 11명의 역할을 가장해 자신의 여자친구로부터 금품을 횡령했던 셈이다. 샤오팅 씨는 공안국으로부터 해당 사건 수사 결과를 확인한 직후에도 사실을 믿지 못하고 황망해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이와 관련, 천 씨는 “연인이었던 샤오팅 씨가 회사를 그만두고 쉬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나 혼자 생활비를 지원하는 것은 매우 힘든 상태였다”면서 “이 무렵부터 비교적 여유 자금이 있었던 샤오팅 씨를 겨냥한 범죄를 계획했다가 이 지경에 이르렀다. 하지만 모든 계획은 그를 부양하기 위한 목적으로 일어난 일이었다”고 항변했다. 한편 관할 공안국은 가해자 천 씨를 형사 구류, 추가 피해자가 있는지 여부를 수사 중이라고 밝혔다. 임지연 베이징(중국) 통신원 cci2006@naver.com 
  • ‘원작의 맛’ 최대한 살리자…고전 해외 문학 번역 출간 잇따라

    ‘원작의 맛’ 최대한 살리자…고전 해외 문학 번역 출간 잇따라

    세대를 불문하고 꾸준히 읽히는 해외 고전들이 새롭게 번역 출간되고 있다. 원작에 최대한 충실하게 번역하는 작업은 번역가들에겐 도전의 영역이자, 높아진 독자의 눈높이를 맞추려는 노력이기도 하다. 도서출판 삼인은 최근 프랑스 소설가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를 고종석 작가의 번역으로 출간했다. 1943년 프랑스 갈리마르사에서 첫 출간한 ‘어린 왕자’는 사막에 불시착한 조종사가 소행성의 주인인 소년을 만나 이야기를 듣는 풍자적 소설이다. 저널리스트이자 언어학자인 고 작가는 “독자들에게 프랑스어의 흐름을 보여 주고 싶었다”고 밝혔다. 고 작가는 원작이 채택한 문장부호를 그대로 살렸다. 예컨대 “-다들 너무 잊고 있는 거지, 여우가 말했다. 그건《관계를 맺는다》는 뜻이야…”(101쪽)에서 보듯 대화와 지문을 한 문장 안에서 분리하지 않고 프랑스식 표기를 존중한 것이다. ‘강들과 바다들’처럼 어색한 복수어도 일부러 프랑스어처럼 번역했다. 주인공 어린 왕자는 ‘그’라고 부르는 기존 번역서와 달리 ‘그 아이’라고 표현했다. 세상의 모든 어린이를 대변한다고 봤기 때문이다.새움 출판사는 영국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 직역판을 이정서 번역가의 번역으로 내놓았다. 오웰이 1945년 공산주의를 비판하려고 지은 이 책은 동물을 의인화한 풍자 소설이다. 평소 직역의 중요성을 강조해 온 역자는 원작을 최대한 살리고자 했다. 기존 번역본에서 “이럴 생각은 아니었는데”라고 했던 ‘I had no intention of doing that’을 “난 그럴 의도가 없었는데”로, “내가 고의로 죽인 건 아냐”였던 ‘Who will believe that I did not do this on purpose’는 “이게 고의가 아니었다는 걸 누가 믿을까?”(53쪽)로 직역해 등장인물들의 캐릭터를 각색 없이 부각시켰다. “캐릭터의 성격을 잘 보여 주기 위한” 의도다.문학세계사는 최인자·신현철 평론가가 번역한 ‘어른을 위한 이솝 우화 전집’ 무삭제 완역본을 펴냈다. 1998년 미국 로버트 템플 부부가 주해한 책을 원문에 충실하게 완역했다. 기원전 6세기 그리스 노예 이솝이 쓴 것으로 알려진 ‘이솝 우화’는 원래 어른을 위한 처세술이 담긴 책이었다. 어린이들이 읽기에 부적합한 150여편을 삭제하면서 어린이를 위한 교훈집으로 알려졌다. 역자들은 동성연애자의 사랑을 다룬 ‘제우스와 수치심’(32쪽)이나, 교훈보다 삶의 냉혹함만 느낄 수 있는 ‘굶주린 개’(251쪽)와 같은 이야기 등을 포함해 엮었다.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는 “번역자가 자신의 이름을 걸고 당대 사회와 문화에 맞게 번역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라며 “원전에 충실한 번역은 당연하게 추구해야 하며 이제는 학문적 깊이와 새로운 연구 경향도 반영하는 번역을 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하종훈 기자 artg@seoul.co.kr
  • 동심 가득한 화폭에 깃든 묵은지 같은 깊이와 여운

    동심 가득한 화폭에 깃든 묵은지 같은 깊이와 여운

    검은색 화면에 1부터 10까지 숫자 행렬이 빼곡하다. 멀리서 보면 영락없는 교실 칠판이다. 그 위에 꽃송이가 피었다. 누군가 산수 문제를 풀다 장난이라도 친 걸까. 숫자로 가득한 노란색 화면과 파란색 화면에도 낙서 같은 기호들이 눈에 띈다. 단추, 차숟가락, 종이 같은 일상의 오브제들도 화폭에 달렸다.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미소를 짓게 되는 풍경들이다. 오세열 화백은 아이 같은 순수한 마음을 캔버스에 펼쳐 온 예술가다. 1945년 해방둥이로 태어나 올해 76세가 됐지만 여전히 동심을 품고 있다. 서울 삼청동 학고재갤러리에서 열리는 개인전 ‘은유의 섬’에선 아이의 마음과 노인의 마음이 공존하는 노화가의 작품 세계 전반을 아우르는 회화 24점을 만날 수 있다. 붓으로 숫자를 쓰고, 기호를 그린 것처럼 보이지만 물감을 여러 번 덧칠해 단색화 같은 바탕을 만든 뒤 못이나 면도날 같은 뾰족한 도구로 긁어내는 방식을 사용한다. 그는 “붓으로 물감을 찍어 그리면 바탕 색과 뒤엉켜 색의 경계가 모호해진다”면서 “배경과 선을 명확하게 구분 짓는 효과를 위해 택한 방법”이라고 설명했다. 작품의 주요 소재인 숫자에 대해선 “특별한 의미가 없다”면서도 “우리는 살면서 늘 숫자에 파묻혀 있지 않나. 떨쳐 내고 싶어도 떨쳐 낼 수 없기에 계속 반복해서 적는다”고 했다.콜라주 오브제로 활용하는 소품들은 주변에서 발견한 것들이다. 길을 걷다 땅에서 주운 돌멩이, 단추 등이 훌륭한 작업 재료로 변신한다. 그는 “누군가 버린 것들을 주워 역할을 주고, 특별한 존재감을 찾도록 돕는 일이 재미있고, 기쁘다”고 말했다. 전쟁의 폐허와 상흔 한가운데서 보낸 유년기의 기억은 작가의 예술적 원천이다. “어린 시절 하루 중 그림 그리는 시간이 제일 소중했다”는 그는 급격한 산업화의 폐해와 물질주의 세태에 실망해 점점 더 내면의 순수함을 탐색하는 작업에 매진했다. 그가 그린 인물들이 하나같이 평범한 외양이 아닌 것도 전쟁통에 부모를 잃고 방황하는 아이들, 마음이 어두운 아이들을 봐 왔기 때문이다. 그 아이들의 외로움과 쓸쓸함을 담은 인물 그림들은 각박한 현실을 사는 요즘 세대에게 따뜻한 위로와 공감을 전한다.정교하지 못하고, 아이가 그린 듯 서툴러 보이는 회화는 의도한 것이다. “인물이든 추상화면이든 작업을 시작할 때 어떤 걸 그리겠다는 목표를 정하지 않는다”는 그는 “그리다 보면 인물이 되기도 하고, 그냥 선으로 남기도 한다”며 웃었다. 즉흥적인 작업처럼 들리지만 한 작품이 완성되기까지는 오랜 인내의 시간이 필요하다. 바탕 색을 칠할 때도 수없이 붓질을 덧칠한다. 그는 “화가는 기술자가 되면 안 된다. 볼 때마다 작품이 다르게 느껴지는 깊이가 있어야 한다”면서 “묵은지처럼 깊은 맛을 내는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말했다. 전시는 5월 5일까지. 이순녀 선임기자 coral@seoul.co.kr
  • ‘내부정보 활용 땅 투기‘ LH 직원·지인 檢 송치

    ‘내부정보 활용 땅 투기‘ LH 직원·지인 檢 송치

    한국토지주택공사(LH) 광명·시흥 사업본부에서 근무하며 얻은 미공개 개발정보를 이용해 토지를 매입한 혐의를 받는 현직 LH 직원과 그 지인이 21일 검찰에 송치됐다. 경기남부경찰청 부동산 투기사범 특별수사대는 부패방지및 국민권익위원회의 설치와 운영에 관한 법률(부패방지권익위법) 위반 혐의로 구속해 수사한 LH 직원 A씨와 지인 B씨를 이날 기소 의견으로 넘겼다. A씨 등은 A씨가 업무상 취득한 비밀 정보를 이용해 2017년 3월 광명시 노온사동 일대 4개 필지 1만7000여㎡를 매입한 혐의를 받고 있다. A씨는 2017년 초 광명·시흥 사업본부로 발령받아 이 땅을 샀을 당시 광명·시흥 지역의 개발지역 선정 등 도시개발 관련 업무 전반을 담당하던 것으로 파악됐다.그는 이곳에서 3년가량 일한 뒤 지난해 초 다른 본부로 이동했다. 이들이 산 땅이 있는 곳은 2010년 보금자리주택 지구로 지정됐다가 LH의 자금난 등으로 개발이 중단돼 지난 2015년 지구 지정이 해제된 뒤 특별관리지역으로 관리돼오다 올해 2월 3기 신도시 예정지로 선정됐다. 이들은 당시 25억 원을 주고 땅을 샀는데 현재 시세는 102억 원으로 4배 이상 올랐다. 경찰이 이 땅에 대해 기소 전 몰수보전을 신청,법원이 받아들였다. A씨의 지인 B씨는 A씨가 업무처리 중 알게 된 비밀이라는 점을 알면서도 이를 이용해 문제의 땅을 산 것으로 조사돼 지난 12일 A씨와 함께 구속됐다. 경찰 관계자는 “A씨는 구속된 피의자여서 법으로 정해진 구속 시한을 지키기 위해 오늘 송치한 것”이라며 “그에 대한 수사는 이어지고 있고 강 사장으로 알려진 인물을 비롯해 투기 혐의를 받는 다른 직원들과의 연관성 등 혐의가 더 드러나는 대로 추가할 것”이라고 말했다. 신동원 기자 asadal@seoul.co.kr
  • [길섶에서] 나타샤/손성진 논설고문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는 이렇게 시작한다. 백석은 기생 진향(김영한)을 사랑했고 평생 잊지 못했다. 나타샤는 곧 진향일 것이다. 나타샤는 슬라브어식 여성 이름이다. 왠지 긴 금발 머리에 우수에 찬 눈빛이 그려진다. 백석의 나타샤는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등장인물인 나타샤를 말한다고도 한다. 영화 ‘전쟁과 평화’에서 나타샤 역을 맡은 오드리 헵번은 ‘만인의 연인’이라는 닉네임에 어울릴 만큼 소설 속의 나타샤를 잘그려냈다. 영화의 OST인 ‘나타샤 왈츠’는 경쾌한 곡이지만, 춤을 추는 헵번을 보면 아프리카에서 봉사활동을 하던 때만큼 아름다워서 가슴이 뭉클하다. 그보다 더 뭉클하게 다가온 ‘나타샤 댄스’(Natasha Dance)라는 노래를 알게 된 것은 얼마 전이다. 직업 무희(舞姬)로 보이는 나타샤와의 짧은 사랑 이야기다. 나타샤를 사랑하는 남자는 나타샤의 춤을 보고 싶어 하면서 나타샤의 고통스러운 삶을 안타깝게 생각한다. 올해 나이 일흔셋이 된 아일랜드 팝 가수 크리스 디 버그가 불렀다. 감미로우면서도 서글픔이 절제된 버그의 가려진 가성이 가슴을 파고든다. sonsj@seoul.co.kr
  • 서병수 “박근혜 탄핵 잘못”…진중권 “국민의힘 구제불능”

    서병수 “박근혜 탄핵 잘못”…진중권 “국민의힘 구제불능”

    서병수 국민의힘 의원이 20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이 잘못됐다”고 주장하자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가 “국민의힘은 구제불능”이라고 일갈했다. 김종인 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지난해 12월 15일 탄핵 관련 대국민 사과를 한 바 있다. 서 의원은 이날 국회 경제분야 대정부질문에서 야당의 첫 질의자로 나서서 홍남기 국무총리 직무대행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사면을 요구하는 재계 의견을 청와대·정부 측에 전달했던 것을 언급하며 전직 대통령 사면 문제를 꺼냈다. 서 의원은 “저를 포함해서 많은 국민들은 박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이 잘못되었다고 믿고 있다”며 “과연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될만큼 위법한 짓을 저질렀는지, 사법처리되어 징역·벌금에 추징금을 낼 정도의 범죄를 저질렀는지, 전직 대통령을 이렇게까지 괴롭히고 방치해도 되는 것인지 저로서는 이해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22년 징역형을 선고받은 박 전 대통령은 현재 1482일째 수감 중이다. 서 의원의 두 전직 대통령 석방을 문재인 대통령께 건의하겠냐는 질문에 홍 부총리는 “(이재용 부회장 관련은) 경제계 의견을 제가 들어서 전달할 책임이 있기 때문에 건의받은 내용을 경제부총리로서 관계 당국에 전달한 것이고, 사면은 대통령의 고유 권한이어서 제가 판단할 사안이 아니다”라고 답했다.김 전 비대위원장은 지난해 대국민 사과 기자회견에서 “두 전직 대통령의 과오에는 정경유착의 어두운 그림자가 짙게 깔려 있다”며 “특정한 기업과 결탁해 부당한 이익을 취하거나 경영승계 과정의 편의를 봐준 혐의 등이 있다. 또한 공적인 책임을 부여받지 못한 자가 국정에 개입해 법과 질서를 어지럽히고 무엄하게 권력을 농단한 죄상도 있었다”고 사죄했다. 한편 서 의원의 이와 같은 주장해 허현준 전 청와대 국민소통비서관실 행정관은 “김종인이 한 일 중 가장 잘못한 것이 탄핵 관련 대국민 사과를 한 것”이라고 이날 지적했다. 박근혜 정부에서 보수단체를 불법 지원한 ‘화이트리스트’ 사건으로 실형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됐된 허 전 행정관은 “김종인은 자신의 득실에 따라 움직이는 인물이라 탄핵 사과를 정치적 재물로 삼았다”고 비판했다. 서 의원의 발언에 대해서는 “탄핵의 부당성을 정면으로 제기했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빛나 보인다”고 조명했다. 또 “박근혜 탄핵은 박근혜 개인에 대한 탄핵이 아니라 박근혜를 빙자해 체제를 탄핵한 것”이란 노재봉 전 총리의 발언을 인용하며 “문재인 정권이 체제를 계속 파괴하고 있기 때문에 탄핵은 과거의 문제가 아니라 현재 진행형”이라고 강조했다. 윤창수 기자 geo@seoul.co.kr
  • 최대집, 기모란 靑방역관 파면 촉구 “잘못된 방역정책 옹호”

    최대집, 기모란 靑방역관 파면 촉구 “잘못된 방역정책 옹호”

    최대집 대한의사협회(의협) 회장이 청와대 방역기획관으로 임명된 기모란 국립암센터 교수 파면을 촉구했다. 20일 최 회장은 오후 2시 청와대 분수광장 앞 1인시위를 진행하며 “정부는 잘못된 방역정책을 옹호해온 기모란 기획관을 즉각 파면하고 국민에게 사과하라”고 말했다. 최 회장은 “의협이 7차례에 걸쳐 (코로나19 발생 초기) 중국발 입국 금지를 제안했는데, 기 기획관은 이를 무시하고 거부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대부분 전문가가 코로나19 대유행 이후에도 백신을 왜 미리 확보하지 못했는지 강하게 비판할 때 기 교수만 백신을 미리 구매할 필요가 없다고 하는 등 잘못된 정책을 잘하는 것처럼 호도했다”고 비판했다. 최 회장은 “방역 기획관 자리에는 의학 전문가 의견을 무시하는 사람이 아니라 의협 및 의사 회원과 긴밀한 협력관계를 마련해낼 수 있는 인물이 임명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이번 인사는 실질적 방역 정책이 아니라 현 정권 방역 홍보의 연장선에 불과하다”며 “지금은 정부의 코로나19 방역 실패를 바로잡을 전문가가 필요한 때”라고 덧붙였다. 임효진 기자 3a5a7a6a@seoul.co.kr
  • 경북교육청, 오는 26일부터 ‘사이버 독도학교’ 운영

    경북교육청, 오는 26일부터 ‘사이버 독도학교’ 운영

    경북도교육청은 우리 땅 독도에 대한 자긍심 등을 높이기 위해 오는 26일부터 ‘사이버 독도학교’를 운영한다고 20일 밝혔다. 사이버 독도학교는 한글·영문판으로 볼 수 있으며, 독도 이야기·독도 교실·독도 교육 자료실·사이버 독도체험 등 내용으로 구성됐다. 먼저 독도 이야기엔 독도 현황·독도 인물·독도 가치 등 국민이 꼭 알아야 할 독도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다. 독도 교실과 독도놀이터는 학습위계를 고려한 초급·중급 과정의 수준별 독도 수업 활동과 게임을 통해 독도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공간이다. 독도 교육자료실은 독도에 관한 문화 예술자료, 교수·학습자료, 독도 갤러리, 독도체험장, 독도 나눔 마당 등으로 구성돼 누구든지 자료를 활용하고 나누도록 했다. 독도 사이버 체험 공간에선 독도의 현재 모습을 실시간으로 만나볼 수 있으며, 독도와 관련된 다양한 영상을 공유하는 게시판도 운영한다. 학생과 일반인 누구나 컴퓨터,휴대전화 등으로 사이버 독도학교 홈페이지(http://dokdoschool.kr)에 접속할 수 있으며, 단계별 콘텐츠를 수료·이수하면 증명서도 받는다. 임종식 경북교육감은 “사이버 독도학교 뿐만 아니라 다양한 독도 교육 프로그램을 지속해서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안동 김상화 기자 shkim@seoul.co.kr
  • [사설] 황제조사·지각출석 이성윤, 검찰총장 자격 없다

    김학의 전 법무차관 불법출금 사건 수사에 대한 외압행사 혐의를 받는 이성윤 서울중앙지검장이 수원지검의 네 차례 소환 요구에 불응하다가 지난 17일 뒤늦게 자진 출석해 9시간 조사를 받았다고 한다. 앞서 이 지검장은 검찰이 사건을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에 넘기자 지난달 7일 김진욱 공수처장의 고급 관용차를 제공받아 공수처 청사에 출석해 김 처장에게 직접 조사를 받아 ‘황제조사’ 논란을 야기했다. 한 시민단체는 김 처장이 피의자 신분인 이 지검장에게 관용차 등 편의를 제공한 것이 뇌물죄에 해당한다며 고발해 이 지검장과 관련한 사건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다. 이 지검장이 일반 시민이라면 황제조사 논란도 없었을 것이다. 문제는 그가 검찰의 현직 주요 간부인 데다 윤석열 전 검찰총장의 후임으로 유력하게 거론되는 인물이라는 점이다. 검찰 안팎에서는 소환 요구에 불응하던 그가 수사팀의 기소 방침이 알려지자 자진해 조사받은 것은 검찰총장 후보 추천 때까지 기소를 늦춰 보려는 꼼수가 아니냐는 비판이 나온다. 후배 검사들의 수사에 협조하기는커녕 끝까지 훼방을 놓은 셈이다. 무엇보다 피의자인 검찰 핵심 간부도 수사팀 소환 요구를 묵살해 왔는데, 앞으로 어느 일반인 피의자들이 검찰 수사에 협조하겠는가. 이 지검장 스스로 법치주의를 훼손한 선례를 남겼다. 이 지검장은 “불법출금 의혹에 개입하지도, 수사에 외압을 행사하지도 않았다”는 입장문을 냈는데 후배 검사들의 수사를 불신한다는 항변이자 청와대를 향한 ‘무혐의’ 읍소로 들린다. 그는 현 정부에서 ‘친정부 실세 검사’로 불리며 검찰총장 후보 1순위에 오르내렸다. 그러나 후배 검사들은 윤 전 총장 징계 파동 때 이 지검장에 대한 불신을 노골화했다. 수사팀은 기소에 충분한 증언과 증거를 확보했다고 한다. 스스로 법치를 훼손하고, 후배들로부터 불신받는 데다 기소될 위기에까지 처한 그가 검찰 조직의 총수가 될 자격은 있겠나. 그가 검찰총장 후보로 추천된다면 검찰개혁의 명분과 진정성이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 이런 점을 검찰총장 후보추천위원회는 적극적으로 고려해야만 한다.
  • [씨줄날줄] 포스트 카스트로/오일만 논설위원

    [씨줄날줄] 포스트 카스트로/오일만 논설위원

    쿠바의 ‘카스트로 시대’ 가 62년 만에 막을 내렸다. 1959년 쿠바 공산혁명 이후 장기 집권을 했던 형 피델 카스트로(1926∼2016)에 이어 권좌를 물려받았던 동생 라울 카스트로(89)가 최근 사임을 발표했다. 라울은 지난 16일 제8차 공산당 전당대회에서 “나는 임무를 완수했고 조국의 미래에 대한 자신감을 갖고 은퇴하겠다”고 선언했다. 후임 총서기는 발표되지 않았지만 미겔 디아스카넬(60) 대통령 겸 국가평의회 의장이 이어받을 것으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그는 3년 전 라울로부터 국가평의회 의장직을 넘겨받은 상태다. 디아스카넬은 쿠바혁명 다음해인 1960년 태어난 ‘혁명 후 세대’를 대표한다. 로큰롤을 좋아하고 청바지를 즐겨 입으며 비틀스 팬으로 알려져 있다. 대학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한 뒤 비야클라라주, 올긴주 당서기 등 지방에서 성장해 중앙 정계로 진출했다. 관광자원을 개발해 해외투자 유치에 성공한 것을 인정받아 2003년 최연소 공산당 중앙정치국 위원이 됐다. 그는 2009년 고등교육장관, 2012년 국가평의회 부의장으로 승승장구한 인물이다. 라울의 퇴진으로 쿠바는 ‘포스트(Post) 카스트로’ 시대가 열렸지만 쿠바의 상황은 심각하다. 돛대도 부러지고 삿대로 망가진 고물선과 비슷하다. 라울이 쿠바 경제를 되살리려던 계획은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시절에 큰 좌절을 겪었다. 2014년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이 쿠바와 극적으로 관계 정상화를 이뤘지만 뒤를 이은 트럼프가 그 결정을 번복하면서 양국 관계가 다시 깊은 수렁에 빠져 있다. 2015년 경제성장률 4%로 반짝 성장세를 보였던 쿠바는 2016년 마이너스 0.9%로 역성장했고, 2017년 0.5% 성장률을 기록했다. 2020년 코로나19 사태로 주력인 관광업이 직격탄을 맞으면서 지난해 최소 11% 마이너스 성장을 했다. 인구 1100만명의 섬나라 쿠바는 1962년 도입된 배급제를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 경제난 속에 쿠바 시민들은 점점 더 부족해지는 식량, 의약품, 기타 필수품을 받기 위해 매일 수시간씩 줄을 서야 한다는 것이 외신의 전언이다. 포스트 카스트로 시대 중국식 또는 베트남식 개혁·개방을 기대하는 시선이 많다. 하지만 미지수다. 라울은 한 번도 탈사회주의를 선언한 적이 없는 강경보수 사회주의자다. 라울이 낙점하고 키운 후계자 디아스카넬이 라울이 죽기 전에 자본주의를 도입할 가능성은 별로 없다는 관측도 많다. 라울의 외아들인 알레한드로 카스트로(55)는 내무부 산하 정보기관의 수장이다. 라울이 아들에게 권력을 넘기기 전까지 과도기 지도자로 디아스카넬을 활용한다는 관측마저 나온다. 쿠바의 행보를 주목한다.
  • 조선 최고 무신 가문 출신으로 ‘노블레스 오블리주’ 실천한 참군인

    조선 최고 무신 가문 출신으로 ‘노블레스 오블리주’ 실천한 참군인

    김좌진, 홍범도, 지청천, 양세봉, 김경천…. 일제강점기에 만주에서 활약한 독립군 사령관들이다. 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 인물로 동천(東川) 신팔균 선생을 빼놓을 수 없다. 선생은 조선 후기 최고의 무신 가문 출신으로서 편안한 삶을 버리고 만주 벌판에서 싸우다 끝내 스러져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몸소 실천했다. 선생은 1882년 5월 19일(음력) 서울 정동, 지금의 영국 대사관 자리에서 태어났다. 선조가 대대로 살아온 고향은 충북 진천군 이월면 노원리다. 선생의 조부 신헌은 삼도수군통제사, 병조판서를 지낸 무신이었다. 신헌은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미국과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할 때 조선 측 대표를 맡아 개항에 핵심적 역할을 한 외교관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큰아버지 정희는 형조판서와 금위대장을, 아버지 석희는 병마절도사, 포도대장을 거쳐 한성부 판윤을 역임했다. 이런 집안에서 출생한 그가 무관의 길을 걸은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선생은 1900년 10월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보병과에 제2기생으로서 입학, 1903년 9월 졸업했다. 병서(兵書)에 능통하면서 유학(儒學)과 문장에도 비범해 문무를 겸비한 강직한 군인으로 칭송을 받았다고 한다. 1907년 7월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됐다. 그러나 선생은 바로 해임되지 않았다. 황실을 지키는 근위보병대 등에서 근무했고 이렇게 쌓은 경력은 나중에 항일투쟁을 하는 바탕이 됐다. 1909년 7월 보병 정위(正尉)로 승진한 선생은 더이상 울분을 견디지 못하고 군복을 벗어버렸다. 바로 고향 진천으로 낙향해 보명학교(현 이월초등학교)를 세우고 안희제·김동삼·남형우 등과 대동청년단을 설립해 계몽운동과 항일운동을 시작했다. ●조부 신헌, 삼도수군통제사·병조판서 지내 1910년 나라를 일제에 빼앗기자 선생은 중국으로 망명해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망명 시점은 정확히 전해지지 않지만 1914년 이전으로 추정되고 있다. 선생은 조부가 지은 진천 고가를 저당 잡히고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했다. 고향을 떠나기 전 선조의 묘 앞에 엎드리고는 선충후효(先忠後孝·먼저 나라에 충성을 바치고 효도하겠다는 뜻) 하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선생은 베이징과 만주, 연해주를 오가며 동지들을 규합하고 투쟁 방략을 모색했다. 3·1운동이 일어나기 직전에는 동삼성(東三省) 민족지도자 38인 중 1인으로 무오독립선언을 발표했다. 1911년 이상룡, 김동삼, 이회영 등 만주 서간도로 망명한 우국지사들은 유하현 추가가에 터를 잡고 경학사라는 독립운동 단체를 조직하면서 산하에 신흥무관학교의 전신인 교육기관으로 신흥강습소를 설립했다. 이듬해 추가가 동남쪽 통화현 합니하로 옮겨가 신흥무관학교 건물 낙성식을 열었다. 비로소 서간도에 모두가 염원하던 독립운동기지를 마련한 것이다. 선생은 지청천, 김경천, 이범석 등과 교관으로 활동하며 수많은 독립군 전사들을 키워 냈다. 지청천, 김경천과 함께 ‘남만주 삼천’이라 불릴 정도로 명망이 높았다. 졸업생 대부분은 서로군정서를 비롯한 독립군 부대에 들어가 항일투쟁에 참가하는 등 독립운동에서 중추적 역할을 했다. 일제는 신흥무관학교의 명성이 높아지자 1920년부터 애국지사와 가족을 살해하며 탄압하기 시작했다. 그해 6월 봉오동에서 홍범도 부대는 일본군을 대패시켰고 지청천·김동삼이 이끄는 400여명의 교성대(신흥무관학교 졸업생 무장부대)는 청산리 전투에 참전, 일군을 무찔렀다. 일제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양민을 학살하고 독립군 기지를 초토화하는 경신참변을 일으켰다. 신흥무관학교는 폐교를 피할 수 없었다. 독립군들은 일제의 토벌을 피해 남북만주와 연해주로 이동했다. 선생은 부하들을 인솔하고 흥경현으로 옮겨 재기를 준비했다. ●동삼성 민족지도자 38인 무오독립선언 발표 선생은 중국 본토에서도 활동했다. 독립운동 통합을 위해 열린 국민대표대회에서는 임시정부를 새로 구성하자는 창조파 쪽에 섰다. 베이징에서는 군인구락부, 한교교육회, 중한호조사 등을 주도적으로 조직했다. 한교교육회는 일제의 간도학살 때 발생한 한인 고아를 교육한 단체였다. 선생은 베이징 한인 사회를 이끈 중요 인물이었다. 무장투쟁주의였던 창조파는 1923년 6월 임시 헌법을 제정하고 국민위원회를 조직했는데 선생은 위원으로 선임됐다. 코민테른의 지원 약속을 받은 국민위원회는 그해 8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해 고려공산당 중앙집행부와 합쳤고 선생은 군무위원장에 선출됐다. 한편 1922년 8월 남만주에서 활동하던 8단 9회(八團九會)의 독립단체는 통합을 시도한 끝에 대한통의부를 발족시키고 의용군을 편성했다. 그러나 대한통의부는 왕정복고를 둘러싸고 대립이 극심했다. 이런 상황에서 1924년 4월 선생은 통의부 추대를 받고 군사위원장 겸 의용군 사령관에 취임했다. 선생은 의용군을 5개 중대로 재편했다. 또 ‘사관학원’을 세우고 자질이 부족한 군인은 직접 훈련시켰다. 의용군의 전투력은 점차 강해져 독립단 최고가 됐다. 그러나 선생은 겨우 석 달 만에 최후를 맞는다. 그것도 일본군이 아닌 중국군에 의한 어이없는 죽음이었다. 1924년 7월 2일 이른 아침부터 선생은 흥경현 이도구의 산악지대에서 훈련을 지휘하고 있었다. 그런데 오후 1시쯤 중국군이 공격해와 약 3시간 동안 전투를 벌였다. 이른바 ‘흥경사변’ 또는 ‘이도구사변’이다. 독립군은 황급히 전열을 갖추어 교전했지만 선두에서 지휘하던 선생이 총탄에 맞아 쓰러졌다. 중대장 김하석이 선생을 등에 업고 포위망을 탈출했지만 끝내 운명하고 말았다. 겨우 42세였다. 선생은 “일제와 싸우다가 죽으려고 하였더니 무관한 중국 사람과 싸우다가 죽는구나” 하며 통분했다고 한다. ●1924년 의용군사령관 취임 석 달 만에 운명 전투는 일제가 중국군에게 독립군을 공격하라고 사주해서 발생했다. 선생의 일생을 연구해 온 충북대 박걸순 교수는 지난해 세미나에서 동변도윤(東邊道尹) 병극장(克莊)의 비밀 연락을 받고 만나려 하던 중 중국 군대와 충돌해 전사한 것이라고 규정했다. 병극장은 선생과 절친한 사이였으니 일제와 중국군에 속은 셈이다. 중국군은 군인이라기보다 마적(馬賊) 집단에 가까웠다. 박 교수는 “신팔균의 전사는 사이토 총독 저격 의거에 대한 일제의 보복이었다”고 했다. 부인 임수명과 자식들의 최후는 더 비극적이다. 임수명은 1912년 서울의 한 병원에서 간호원으로 일할 때 일경에 쫓겨 환자로 위장해 입원하고 있던 선생을 만나 1914년 결혼했다. 선생이 중국으로 망명하자 선생을 도와 비밀문서 전달, 군자금 모금, 독립군 후원 등의 활동을 했다. 1921년에는 밀명을 띠고 입국한 선생을 따라 만주로 가서 독립운동을 도왔다. ●“일제, 사이토 총독 저격 의거에 대한 보복” 선생이 순국할 당시 임수명은 베이징에서 어렵게 연명하고 있었다. 더욱이 만삭의 몸이었다. 동지들은 대한통의부장으로 장례를 치른 후 부인에게 남편의 죽음을 알리지 않고 귀국을 주선했다. 임수명은 1924년 9월 서울로 돌아와 사직동에서 셋방 한 칸을 얻어 근근이 살다 유복녀를 출산했다. 다른 자녀들도 데리고 있었다. 임수명은 남편의 죽음을 알고 꼭 넉 달 후인 11월 2일 갓난 딸과 함께 자결했다. 박 교수는 “신팔균 전사 후 같은 해에 임수명과 두 자녀가 죽었고 1930년 맏아들 신현충이 자결해 명가 일문 5인이 독립운동으로 비명에 스러졌다. 신팔균 가족과 같은 애잔한 사례는 찾기 어렵다”고 말했다. 정부는 1963년 선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부인에게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선생 부부는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됐다. 논설고문 sonsj@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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