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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종면 칼럼] 지금 ‘場外의 인문학’이 문제인가

    [김종면 칼럼] 지금 ‘場外의 인문학’이 문제인가

    인문학이 위기라고 하지만 그것은 대학을 중심으로 이야기할 때나 통용될 수 있는 말인지 모른다. 대학의 강단 인문학은 빈사지경에 이르렀지만 대학 바깥 인문학의 열기는 사뭇 뜨겁다. 인문학은 더이상 인문학 하는 사람의 전유물이 아니다. 위로는 기업의 리더를 위한 ‘CEO 인문학’에서 아래로는 노숙인을 위한 ‘거리의 인문학’까지 다양한 인문학 프로그램들이 시장에 나와 있다. 지방자치단체 차원의 인문학 전파 움직임도 활발하다. 지난 13일에는 경상북도와 경상남도가 조선 성리학의 양대산맥인 퇴계 이황·남명 조식 사상 교류 협약을 맺어 정신문화 행정의 새로운 모델을 보여주기도 했다. ‘좌(左) 퇴계 우(右) 남명’으로 불리며 경상좌도(경북)와 경상우도(경남)의 학문을 대표한 두 거유(巨儒)가 세상을 떠난 지 500년 만에 처음 만난 셈이니 의미가 크다. 이런 것들이 다 인문학의 지반을 튼실히 하는 일이다. 중앙정부가 일머리도 모르고 인문정신 문화를 진흥하겠다고 섣불리 나서는 것보다 훨씬 낫다. 교육부가 올해 인문학 대중화사업 투자를 67억원으로 크게 늘렸지만 박수는커녕 비아냥을 듣는 것은 그만큼 정부 정책이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젊은 층을 겨냥해 지역 문화축제와 연계한 ‘청춘인문강좌’를 신설한다는데 이런 게 지금 시급한 현안이 첩첩이 쌓여 있는 교육부 수준에서 할 일인가. 인문도시를 25개로 확대한다는 것도 공허하기는 마찬가지다. 경북 칠곡 농촌마을에서도 주민들이 협동조합을 만들어 ‘인문학 마을 만들기’ 사업을 벌여 호응을 얻을 정도로 인문학 바이러스는 전국 골골샅샅이 퍼져 있다. 굳이 광고하듯 인문도시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여 내세우는 것 자체가 인문정신의 품격을 훼손하는 일이다. 교육부가 진정으로 고민해야 할 것은 장외 인문학 열풍과는 달리 구조개혁의 타깃이 돼 벼랑 끝으로 내몰린 대학 인문학의 미래다. 황우여 교육부 장관은 “대학생의 취업이 인문학적 소양보다 우선”이라고 했다. 산업수요에 맞게 정원을 조정하는 대학에 재정을 대폭 지원하는 정책을 추진하겠다며 인문계 대학의 정원 감축도 시사해 왔다. 그러고서 인문학 대중화 사업을 벌이겠다니 무슨 갈라치기 전략도 아니고 한마디로 앞뒤가 안 맞는 처사다. 맥도 모르고 침통 흔드는 격이다. 대학 사회의 학문자본주의(academic capitalism)는 시대의 풍조다. 대학과 기업 간의 전통적 경계는 이미 무너졌다. 그런 만큼 대학도 시장과 친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정도의 문제다. 취업지상주의의 포로가 돼 기업에서 원하지 않는, 돈 안 되는 학과는 하나둘 간판을 내리고 있다. 군대 갔다 오면 내 과가 남아 있을까 노심초사한다는 요즘 대학 풍속도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이런 뒤틀린 현실의 중심에 정부의 ‘대학정원 감축’ ‘특성화 대학’ 정책이 놓여 있다. ‘산업연계 교육 활성화 선도대학’ 사업이라는 것도 결국 대학을 순수 학문의 전당보다는 기업가형 대학, 나아가 취업사관학교로 만들어 가겠다는 것이나 다름없다. 마침내 “입학이 곧 취업인 대학을 만들겠다”고 당당히 포부를 밝히는 대학 수장도 탄생했다. 참으로 난감한 ‘웃픈’ 세상이다. 대학구조개혁 평가에서 낮은 등급을 받으면 입학 정원이 줄고 정부의 재정지원도 제한되니 대학으로서는 구조조정의 칼을 뽑을 수밖에 없다. 결국 취업률이 떨어지는 인문학과가 희생양이 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청년 취업이 아무리 지상 과제라 해도 그것을 구실로 정부가 대학 팔 비틀기식 정원 감축에 나서는 것은 온당치 않다. 강압적인 대학구조개혁 정책은 재고돼야 마땅하다. 대학평가에서 취업률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면 비중이라도 낮춰야 한다. 교육부는 인문학 대중화에 앞서 고사 위기에 처한 대학 인문학 활성화 방안부터 내놓아야 할 것이다. 대학이 인문학의 모판이 되고 베이스캠프가 되지 않는 한 우리 사회의 ‘유행성’ 인문학 열풍은 진정한 의미를 획득하기 어렵다. 인간다움을 채근하는 인문정신이야말로 인간 상실의 시대를 온전히 살아가기 위한 지혜다. 대학은 빵만으로 살 수 없다. 대학에 인문학을 허하라.
  • 학술, 아프리카를 보다

    학술, 아프리카를 보다

    철학·사회학·문학 등 한국의 인문학은 꽤 오랜 시간 동안 서구의 이론을 수입, 모방, 재생산하는 것으로 존재 의의를 삼았다. 학문의 종속성은 그만큼 깊어졌지만, 덕분에 외국에서 유학해 해당 언어가 상대적으로 편한 학자들이 빠르게 이론을 수집했고, 그것을 바탕으로 학계의 어른 역을 자임할 수 있었다. 물론 전통문화를 다루는 몇몇 분야는 제외되겠지만, 이들은 오히려 서구 혹은 또 다른 제3세계를 배척하거나 무관심하게 절연시킴으로써 스스로 고립되는 문제를 낳기도 했다. 지난달 말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산하에 문을 연 범아프리카문화연구센터는 학술적 차원에서 세계의 변방 아프리카를 주목한다. 소장을 맡은 고인환 경희대 교수를 비롯해 김재용 원광대 교수, 고명철 광운대 교수, 이석호 한국외대 교수, 조해진 고려대 교수, 차선일 경희대 교수 등이 서구 중심의 교양 교육이나 담론에서 벗어나 보자는 뜻으로 오랫동안 준비해온 첫 번째 결실이다. 고인환 소장은 “서구중심 담론을 벗어나는 학문적 풍토 마련이라는 과제는 당장 가시적 성과를 바랄 수 없을 정도로 해묵은 과제”라면서 “그간 학계에서 문제의식은 많았지만 단발 행사로 끝나는 경우가 많았고, 최소한 3~5년 이후 성과를 내다봐야 한다면 (연구소 개설을)이제 더이상 늦출 수 없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이는 서구적 근대성과 구미중심주의를 넘어 아프리카·아메리카·아시아 등 비서구 세계와 문화적으로 소통하고 연대하겠다는 의지의 발현이기도 하다. 또한 그동안 서구 학계의 창을 통해 바라본 서구 바깥의 개별 학자, 개별 이론 등을 주체적 시각으로 해석하고 수용하며, 한국적 상황에 접목시킨다는 복안을 갖고 있다. 예컨대 그동안 영문학자들이 오로지 서구적 상황에서 해석하고 반복해온 셰익스피어를 우리의 시각으로 바라보고 해석하며, 비판할 수 있는 학문적 접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때 비로소 단순히 서구 중심의 문화담론을 벗어나는 것을 넘어 문화적 균형감각을 가질 수 있고, 한국 문화 및 학문적 수준과 태도를 더욱 발전시킬 수 있는 자양분으로 삼을 수 있다는 생각이다. 지난달 26일 연구센터 개소 기념으로 가진 학술대회에서 구미 중심으로 최근 진행되는 세계문학론의 불균형성을 중점적으로 논의하는 한편, 프랑스 식민지 출신의 실천적 지식인 프란츠 파농(1925~1961)의 한국적 수용 사례를 심도 있게 다룬 이유이기도 하다. 김재용 교수는 “괴테가 180년 전 세계문학론을 처음으로 언급할 때만 해도 중국 소설, 인도 희곡 등 아시아문학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갖는 등 유럽문학과 아시아문학을 모두 아우르며 세계문학론을 펼쳤다”면서 “산업화 시기를 거치면서 유럽 바깥의 문학은 세계문학의 대열에 낄 수 없는 존재로 격하되고 말았다”고 말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중요한 문학의 생산이 비서구 지역이나 구미에 거주하는 비서구 출신의 경계인 작가들에 의해 이뤄지고 있는 데도 여전히 구미의 이론가들이 세계문학론을 주도하는 현실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고 세계문학론 담론의 주체가 비서구 지역으로 이동해야 하는 당위성을 주장했다. 또한 프랑스령 마르티니크 출신의 흑인으로 정신의학자이자 철학자였으며, 알제리 민족해방운동에 나선 혁명가인 프란츠 파농은 영문학자를 통해 한국에 소개됐다. 서구에서 파농을 수용하는 학문적 이론의 흐름은 그를 민주화 투사로 바라봤다가, 학문적 영역에서 내쳤다가, 또 어느 순간 탈정치화된 이론가로 해석했다. 한국에서도 고스란히 같은 흐름으로 소개되는 데 그쳤다. 차선일 교수는 “파농이라는 제3세계 출신의 흑인 사상가를 수용하고 이해하는 우리의 시각이 서구 중심주의와 식민주의·인종주의 등에 감염돼 있거나 암묵적으로 동조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지적했다. 올해 하반기 무크지 형태로 비서구적 담론을 공유·확산할 수 있는 잡지를 창간시키는 한편,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지도자 넬슨 만델라(1918~2013)의 삶과 정치 철학 등을 연구하며 한국적 상황에 맞게 수용하는 작업을 벌일 예정이다. 라틴아메리카·아프리카 대학들과 학술·문화 교류도 병행할 예정이다. 범아프리카문화연구센터는 역사학· 철학· 문학 등 인문학 분야에서 궁극적으로는 학회 차원으로까지 발전시킬 전망을 품고 있다. 박록삼 기자 youngtan@seoul.co.kr
  • [新 평판 사회] ‘학벌의 벽’ 뚫다 - 마이스터고 출신 20세 청춘

    [新 평판 사회] ‘학벌의 벽’ 뚫다 - 마이스터고 출신 20세 청춘

    ■최소리, 충남 합덕제철고 → 레이캅코리아 연구원 ”어려운 용접 자격증도 척척…중요한 실험은 도맡아 해요” “용접이 가장 어려웠어요. 매캐한 연기 속에 스파크가 튀고 쇳물이 뚝뚝 떨어지는 모습을 보니 ‘잘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앞설 수밖에 없었죠.” 5년 전 충남 당진 신평중학교 3학년이었던 최소리(20·여)씨는 또래의 친구들이 생각하기 힘든 결정을 내렸다. 인문계 대신 실업계(마이스터) 고교, 그것도 여학생에게는 생소한 제철·제강 기술을 배우는 합덕제철고에 입학하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최씨는 “‘뚜렷한 목적 없이 공부하면 어중간한 성적으로 아무 대학이나 가게 되고, 이후가 막막해질 수도 있다’고 하자 부모님도 내 선택을 존중해 주셨다”고 설명했다. 충남 당진시에 있는 합덕제철고에서 그에게 제일 어려웠던 과목은 위험한 용접이었다. 그는 “처음엔 낯설었지만 적응하니까 실력이 나날이 늘었고, 목적이 있는 공부를 하다 보니 나의 큰 적이었던 회의감과 무기력함을 이겨낼 수 있었다”고 말했다. 학교 동기 70여명 중 마음을 터놓고 지낼 여학생은 3명뿐이고, 오전 6시 기상과 함께 태권도를 시작으로 오후 9시 넘어까지 계속되는 수업에 2중고를 겪었다. 하지만 남학생들과 어울려 지내며 외로움을 이겨낸 고교 시절은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았다. 전산응용기계제도, 일반 및 특수용접, 제강, 공유압, 컴퓨터활용 능력까지 6개의 자격증은 성실한 고교 생활의 징표가 됐다. 그리고 2학년이던 2013년 1월 한국방송공사(KBS)가 진행하는 방송 공개채용 프로그램 ‘스카우트’에서 실력과 열정을 인정받아 침구살균청소기 등 가전 제조업체인 레이캅코리아에 취업했다. 인천 남동구 고잔동 본사의 연구원으로 발령받았다. 최씨는 신입 사원으로 잡무를 맡았던 2년 전 한 지인의 “거봐, 대학은 나와야 돼, 고졸이니까 그런 거 시키지”라는 말이 ‘가슴에 콱 박혔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에는 충격이었다. 그래서 대졸보다 더 열심히, 더 완벽하게 일하려고 노력했다”며 “지금은 아주 중요한 실험도 내게 맡기고, 대학을 나오지 않아 부족하다는 이야기도 듣지 않는다”고 전했다. 2년의 연구소 생활 속에서 최씨는 새로운 목표를 잡았다. 자신이 개발한 제품의 해외 마케팅을 직접 하기 위해 영어 공부를 시작한 것이다. 최씨는 “모두들 대학을 당연히 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분위기에서, 그것도 여학생이 마이스터고에 진학하는 것 자체가 도전이었다”며 “‘선택을 책임지겠다는 마음이 있다면 나의 도전은 분명히 빛이 날 것이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믿고 지금도 노력하고 있다”며 미소 지었다. 장형우 기자 zangzak@seoul.co.kr ■오현석, 서울 수도전기공고 → 한울원자력발전소 ”에너지 분야 미래 개척 뿌듯, 후회 없는 선택…일로 승부” “어디에서 일하느냐보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한다는 게 더 중요한 거 같아요.” 경북 울진군에 있는 한울원자력발전소(옛 울진원전)에 근무하는 오현석(20)씨는 ‘서울에서 공부하다 지방에서 생활하니 불편하지 않으냐’는 질문에 덤덤하게 답했다. 오씨는 서울 강남구 개포2동에 있는 수도전기공고를 졸업하기 직전인 2013년 11월 입사, 이듬해 1월 이곳으로 왔다. 2월 학교 마지막 졸업식에도 참석하지 못했다. 오씨가 일하는 원전 건설소 HSSE 관리팀은 원자력발전소와 관련한 시설 가운데 건강·안전·보안·환경 등의 부대 시설을 짓고 관리한다. 같은 또래 친구들이 대학에서 축제와 미팅과 같은 낭만을 즐길 때 오씨는 건설 현장을 묵묵히 지켰다. 같은 팀의 김종헌 차장은 “직원 대부분이 대학과 군 복무를 마치고 입사하지만, 오씨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입사해 처음엔 사실 많이 우려스러웠다”며 “하지만 성실하고 문제를 지적하면 빠르게 받아들여 개선하는 게 바로 오씨의 장점이었다. 같이 일하다 보니 결국 업무 능력과 학벌은 크게 관계가 없더라”고 평가했다. 오씨가 마이스터고에 진학하고 진로를 일찍 선택한 데에는 부모의 도움이 컸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기계 장치 등을 만드는 것을 즐겼다. 휴대전화기나 컴퓨터를 고치고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중학교 때 성적은 항상 상위 30% 이내를 유지했다. 비슷한 성적의 친구들이 일반계 고교에 진학하는 것과 달리 오씨는 기술을 배우고 싶었다. 그가 이런 결심을 고민 끝에 어머니에게 털어놓자 어머니는 ‘마이스터고에 진학하는 게 좋겠다’며 수도전기공고를 권했다. 학교에서 수업을 듣던 중 에너지 분야에 매력을 느꼈고, 원자력발전소를 견학하고 나서 자연스레 자신의 길을 정했다. 그는 스스로 선택한 만큼 후회도 없다. 이제 사회생활 초년생이지만, 미래를 자신의 힘으로 개척한다는 생각에 뿌듯함마저 느낀다. 오씨는 “지친 몸을 이끌고 회사 기숙사에 들어오면 가끔 대학에 진학한 친구들이 부럽기도 했다”면서도 “대학에 다니는 친구들이 잘 보이지 않는 미래를 위해 ‘스펙’을 쌓을 때 나는 미래가 보이는 회사에서 ‘경험’이라는 진짜 스펙을 쌓는다고 생각하니 요샌 오히려 일이 즐겁다”고 털어놨다. 그는 “회사 일은 동료와의 협력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업무 능력 아니겠느냐. 학력이든 나이든 상관없이 일을 잘하면 대접받는 게 바로 사회인 것 같다”며 당당한 웃음을 지었다.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장인수, 서울 미림여자정보과학고 → 펜타시큐리티 ”프로그램 개발 야근도 자처…미래 생각하면 고민은 사치” 사회 초년생 장인수(20)씨에게 2013년 11월 1일은 평생 잊을 수 없는 날이다. 이날은 서울 여의도에 있는 중견 DB 보안기업인 펜타시큐리티에 인턴으로 입사한 날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날’이다. “사무실의 내 책상을 보고 ‘이제 시작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인턴이란 ‘미생’(未生)의 자리였지만 그 자리는 소중했다. 인턴을 거쳐 장씨는 지난해 4월 정식 직원이 됐다. 이 회사에서 데이터베이스를 암호화하는 프로그램을 만들고 있다. 장씨가 이 분야에서 일하기로 한 것은 중학교 1학년 때 안철수 당시 안철수연구소 대표를 알고부터. 안 대표의 기사를 읽고 ‘나도 컴퓨터 바이러스의 백신 프로그램을 만들어야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려면 마이스터고에 진학해야겠다고 생각해 공부에 몰두했다. 중하위권이었던 성적은 전교 30등까지 수직 상승했다. 중학교 2학년 1학기가 끝나고서 부모에게 “미림여자정보과학고에 가겠다”고 폭탄선언을 했다. ‘이제야 우리 딸이 마음잡고 공부하나’ 생각했던 부모의 반대가 거셌다. 장씨는 “부모님과 친척들이 ‘왜 수준 낮은 실업계고에 가느냐’며 반대했다”며 “첫째라서 더 기대가 컸던 아버지의 반대가 특히 심했다”고 전했다. 하지만 부모는 고집쟁이 딸을 이길 수 없었다. 입사 이후 1년이 지나 부모의 생각도 바뀌었다. 장씨는 “인턴으로 지내다 정직원이 되니 월급이 많이 올라서 그런 거 아닐까요?”라고 농담을 건네면서도 “사실 정직원이 되기까지 아버지가 의심의 눈길을 보내 마음고생이 심했다”고 털어놨다. 원하던 일을 하고 있지만 회사생활은 녹록잖았다. 일이 잘 안 풀릴 때에는 좌절도 많이 한다. 장씨는 “그럴 때 ‘내 능력이 부족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면서도 “그렇지만 ‘내가 대학을 나오지 않아서 이런가 보다’라는 생각은 여태 해본 적 없다”고 강조했다. 항상 자신의 노력이 부족했던 것이라고 여긴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최근 밤늦게까지 일을 하는 것도 이런 이유다. 장씨는 2일부터 한국방송통신대에 등교한다. 일을 하면서 틈틈이 부족한 배움을 매워 갈 예정이다. 현장 실습과 이론을 접목하면 업무 능력을 더욱 키울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에서 방송대 진학을 결정했다. “학벌 때문이 아니라 능력을 키우려고 진학한 것”이라고 분명한 어조로 강조했다. 정신없이 일하다 보면 대학 졸업한 친구들이 부러울 때도 있지 않을까. 장씨는 “그런 것 비교하고 좌절하고 고민할 시간이 어딨느냐?”고 맞받았다.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 [新 평판 사회] 껍데기 아닌, 진짜 나를 찾아라

    [新 평판 사회] 껍데기 아닌, 진짜 나를 찾아라

    한국사회에서 ‘그것’은 갓 태어난 순간부터 가동된다. 신생아실을 나와 분유를 고를 때, 같은 반 왕따 친구의 손을 기꺼이 잡아주지 못할 때, 대학 전공을 선택할 때, 직장을 구하거나 이직할 때, 페이스북 친구의 글에 ‘좋아요’를 습관적으로 누를 때, 결혼 상대를 재고 따질 때, 성형외과 의사 앞에 앉아 견적을 받아볼 때, 은행대출을 받아서라도 아파트 평수를 늘려야 할지 고민할 때, 늙어 병든 몸 맡길 병원을 찾을 때조차 그렇다. 우리가 헤어나지 못하는 ‘그것’이란 타인의 시선, 즉 ‘평판’이다. 선택하거나 선택받는 시간과 공간에서는 어김없이 평판에 의존한다. 마지막 묻힐 장지를 고르고, 수의를 고르고, 비문을 새긴 뒤까지도 가능한 좋은 평판이 유지되도록 모색한다. 평판(評判). 타인의 눈에 비친 자신의 이미지다. 어제와 오늘의 행적을 평가받으며, 사회적 성공을 가늠하는 잣대로 쓰이기도 한다. 사회적 존재인 인간은 홀로 떨어져 살지 않는다. 인간관계를 거부하지 않는 한 평판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고 그들로부터 나오게 되는 평가, 즉 평판에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는 이유다. 개인과 집단 사이의 성실한 신뢰가 쌓이고 서로 교감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하지만 문제는 따로 있다. 사회심리학자, 인문학자들은 사회적 평판의 기준이 상당 부분 물질적 가치들로 채워진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부모의 직업, 출신 학교, 아파트 평수, 자동차 배기량, 회사 연봉, 외모의 미추, 인맥 등이 평판을 이루는 핵심 자료로 둔갑한다. 중심을 잃어버린 개인을 옥죄는 수단으로 전락하면서 평판의 순기능은 자취를 감추고, 역기능이 앞쪽으로 튀어나오게 되는 순간이다. 이나미심리분석연구원 이나미 원장(정신과 전문의)은 “공동체 속에 살아가며 타인을 의식하고 배려하면서 조화롭게 사는 데 기여했던 평판의 개념이 21세기 들어 사실상 퇴화됐다”면서 “긍정적 기능은 사라지고 돈, 학벌, 인맥, 직업 등 세속적인 기준을 평판으로 삼는 부정적 기능만 남게 됐다”고 최근의 세태를 지적했다. 성숙한 인격과 품성 또는 내면의 능력 등이 아닌 ‘~카더라’ 식의 소문이 평판의 외피를 쓰고 떠돌기도 한다. 특히 페이스북, 카카오톡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흔히 ‘찌라시’로 표현되는 정보지 등의 뒷 담화를 통해 낱낱이 사생활까지 발가벗겨지곤 하는 연예인 등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심심치않게 일어나는 배경이기도 하다. 고미숙 고전평론가는 “사람들은 남이 부러워하면 자신이 잘사는 것으로 착각한다. 평판은 그럴싸한데 내면의 모습은 허약하기 짝이 없는 불균형이 삶을 휘청거리게 만든다”면서 “현대인의 우울증, 자살, 왕따 등 사회병리현상은 자신에게 정직하지 못한 채 바깥의 시선을 중심 삼은 것의 결과물”이라고 말했다. 그는 “스스로 물어보며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공부가 중요한 이유”라고 덧붙였다. 서울신문은 새로운 기획시리즈 ‘신(新)평판사회-껍데기 아닌, 진짜 나를 찾아라!’를 시작한다. 학벌, 인맥, 외모 등 껍데기가 아닌, 성숙한 인격과 땀 냄새 배어 있는 실력이 진정한 평판의 기준으로 자리 잡기 바라는 간절함에서다. 박록삼 기자 youngtan@seoul.co.kr
  • [문화마당] 디지털 감수성/김경주 시인

    [문화마당] 디지털 감수성/김경주 시인

    인문학 운동이 열풍이다. 디지털 생태계에서 세계와 동떨어지지 않으려면 매일 최신 버전을 찾아야 한다. 눈을 뜨면 보안 시스템을 확인하고 결제 시스템을 통해 생활과 감수성을 업데이트해야 한다. 업데이트 공동체 안에서 개인의 개발 능력은 세계에 흩어진 정보의 교환 체계를 얼마나 잘 활용하느냐에 달려 있다. 우리의 일상과 환경은 여전히 가장 중요한 본질인 인간의 영역을 놓치지 않고 있으며 이웃에게 달려가 한시라도 업데이트를 놓치면 인간의 영역에서 소외되고 인간의 문제에 불감증을 겪을 수 있으니 늘 경계해야 한다고 말한다. 예술가들 역시 시대의 징후에 불감증을 가져서는 안 되는 자들의 창조적 에너지와 다르지 않아 자신의 창작물에서 동시대성을 찾기 위해 분주하다. 인류가 오랫동안 고민해 온 문제들을 우리는 디지털 공동체 ‘SNS’ 안에서 밤새도록 털어놓고 있다. 스마트폰에서 우리는 현실보다 더한 실감으로 현실을 체험하고 소통하는 듯하다. 20세기 초 SF소설에 등장하던 ‘증강현실’이 일상화돼 있는 것이다. 사회와 환경 문제 역시 인류는 시스템으로 그럭저럭 해결하고 있는 듯하다. 하루의 일상은 간단하게 요약하면 휴대폰 충전에서 방전까지의 시간이며, 잠들기 전 다시 충전으로 마무리될 수 있다. 눈을 뜨고 일어나 ‘보안’과 ‘결제’와 ‘업데이트’를 하다 보면 잠자리에 든다. 이 정도면 하루를 잘 구축(업데이트)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 친절한 환경에 얼마나 교감하고 있을까? 분명 우리의 현실은 디지털 생태계로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영역까지 확장됐고 조밀하게 서로에게 연결돼 있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성이 그만큼 증대됐을까? 그 현실성은 인간의 생명과 닿아 있는가? 증강현실은 분명 우리의 이웃이라고 말할 만큼 우리와 교감하고 있을까? 이러한 디지털 감수성이라고 부를 만한 교감을 의심해 봐야 한다고 주창하는 것이 인문학 운동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편리와 속도는 오히려 우리의 교감 신경을 파괴하며 우리의 정신 능력을 파괴할지 모른다는 묵시론적 세계관을 깔고 있다. 왜 디지털 시대에 인문학적 성찰이 중요한지를 역설하는 일은 이제 도시 전체에 바이러스처럼 뻗어 가고 있다. 전후 엉망이 돼 버린 세계의 질서를 바꾸고자 새롭게 역사의 반성을 고찰했던 68혁명의 혈류엔 인간의 문제에 대한 세 가지 지평이 공유돼 있다. ‘첫째, 시민은 평생 세계의 환경을 보호하기 위해 애써야 한다. 둘째, 시민은 평생 정치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셋째, 시민은 평생 문화의 새로움과 창조적인 다양성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가 여기에 해당한다. 진정한 공동체는 인간의 문제를 함께 고백할 수 있어야 하며 상실된 언어를 복원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세계는 이를 실천하기 위해 삶의 현장에서 분투했고 고답과 질서에 투쟁했고 건강한 운동을 만들어 갔다. 그들에게 인문학 운동은 고급 독서와 지적 허영을 채우고 오피니언 리더가 돼 지배력을 갖는 수단이 아니었다. 감각과 속도는 인류를 진성보다 가성의 시대로 더욱 몰아가고 있다. 키보드 워리어들이라고 부르는 자들의 진정성은 SNS에 넘쳐나지만 그들에게 시대의 건강성을 공유할 만한 자세는 턱없이 부족하다. 아이들은 종이로 된 책의 질감보다 아이패드의 터치 감각을 빠르게 익혀 간다. 우리가 설계한 디지털 감수성을 수혈받은 아이들은 또 다른 괴물이 돼 어느 날 우리 앞에 등장할지 모른다.
  • [박근혜정부 3년차 (하)경제·교육·문화 분야] ‘박피아’ 양산… 인사 난맥상 비판 잇따라

    박근혜 정부의 인사 난맥상은 문화체육관광부 안팎에서 상징적으로 드러났다. 출범하자마자 예술의전당 사장에 박 대통령의 싱크탱크인 국가미래연구원 문화예술분야 간사를 맡았던 고학찬씨가 ‘낙하산 1호’로 임명됐다. 한국관광공사 사장에는 선거대책위 홍보본부장이자 인수위 비서실 홍보팀장인 변추석씨, 상임감사에는 재외선거대책위 공동위원장이었던 자니 윤씨가 안팎의 반발에도 연이어 임명됐다. “‘관피아’ 근절을 외치면서도 결국 ‘박피아’가 양산됐다”는 비판이 잇따랐다. 이뿐만 아니다. 지난해 7월 당시 유진룡 문체부 장관은 후임도 정해지지 않고 1차관도 공석인 상황에서 전격 면직됐다. 유 전 장관은 지난해 말 ‘정윤회씨의 문체부 인사 개입설’을 간접적으로 확인해 줬고, 박 대통령이 독대 과정에서 자신에게 문체부 과장의 이름을 거론하며 “참 나쁜 사람이라고 하더라”고 말했음을 폭로해 경질 배경을 짐작하게 했다. 최근에도 김희범 1차관이 6개월 남짓 만에 돌연 사표를 내고 한때 출근을 거부하는 등 바람 잘 날 없는 인사 난맥상을 드러냈다. 반면 예산과 제도로 문화국가의 기초석을 세우겠다는 문화 관련 정책은 비교적 순탄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핵심적으로 내세운 문화재정 2% 확보 공약과 문화기본법 제정이 대표적이다. 2012년 4조 5724억원으로 1.41%이던 문화재정은 매년 조금씩 성장해 올해는 6조 1127억원(1.63%)까지 늘어났다. 문화기본법을 비롯해 문화다양성보호증진법, 지역문화진흥법, 대중문화예술산업발전법 등의 관련 법이 지난해까지 제정됐다. 문체부는 올해 국민여가활성화기본법, 인문정신문화진흥법 등의 제정을 추가로 추진할 계획이다. 문화 관련 예산의 확보 및 법제화는 문화 향유 기획 확대 및 예술인 창작 안전망 구축 등으로 이어진다. 매달 마지막 수요일을 문화의날로 지정했고, 차상위계층을 위한 문화누리카드사업을 도입해 소외계층의 문화 수혜 폭을 점점 넓혀 가고 있다. 또한 대중문화예술인지원센터를 운영하기로 하고, 문화예술 기부금에 소득공제 혜택을 주는 것을 추진한다. 박록삼 기자 youngtan@seoul.co.kr
  • 안방극장도 서점가도… 이순신 발탁한 혁신가 ‘류성룡 열풍’

    안방극장도 서점가도… 이순신 발탁한 혁신가 ‘류성룡 열풍’

    지난해 정도전, 이순신에 이어 이번에는 ‘류성룡(오른쪽·1542~1607) 열풍’의 조짐이 보인다. KBS1 TV 사극 ‘징비록’(왼쪽)이 지난 14일 첫 전파를 탄 뒤 시청자들의 뜨거운 반응을 이끌어내고 있고, 서점가에서는 류성룡과 그의 대표 저술 ‘징비록’ 관련 책들이 쏟아지고 있다. 임진왜란이라는 국가적 위기 속에서 고군분투한 재상과 그가 남긴 반성의 기록이 지금 다시 조명을 받는 배경은 뭘까. 문화계 안팎에서는 “국정 혼란이 계속되는 가운데 무능한 정치권, 곤궁한 민생, 세월호 참사, 급변하는 동북아 정세 등 시대적 위기 상황이 그를 다시 불러내고 있다”고 해석하고 있다.‘류성룡 열풍’의 진원지는 물론 드라마다. KBS ‘징비록’은 지난해 방영된 ‘정도전’ 이후 정통 사극의 계보를 이어갈 드라마로 방영 전부터 큰 기대를 모았다. 지난 22일 4회까지 방영된 ‘징비록’의 초반 시청률은 이미 10% 선. 중장년 남성 시청자들을 중심으로 연일 입소문을 더해 가고 있다. “사료에 충실한 전개와 중견배우들의 호연으로 정통 사극에 대한 갈증을 채워 주는 한편 500년 전 조선의 위기상황을 헤쳐 가는 지도자의 역량에 대중이 주목한 결과”라는 평가가 이어진다. 출판가에는 류성룡 바람이 앞서 불었다. KBS가 ‘징비록’의 제작을 공식 발표한 지난해 6월 이후 류성룡과 징비록, 임진왜란을 조명한 책이 쏟아지고 있다. 이수광, 이재운, 이번영, 박경남 등 작가들은 ‘소설 징비록’을 줄줄이 내놨다. 16~17세기 동아시아 국제전쟁과 이순신 전문가 배상열의 ‘징비록: 비열한 역사와의 결별’(추수밭), 시인 김기택과 전쟁사 연구 대가인 임홍빈의 합작품 ‘징비록: 유성룡이 보고 겪은 참혹한 임진왜란’(알마), 미술사가 이종수의 ‘류성룡, 7년의 전쟁: 징비록이 말하는 또 하나의 임진왜란’ 등 인문역사 서적도 잇따라 출간됐다. 동시대 영웅인 이순신에 비해 대중에 상대적으로 낯선 류성룡이 사회담론의 구심체가 되는 배경에 대해 전문가들은 “조선 역사에 대한 대중적 관심이 늘어난 데다 무엇보다 위기의식이 팽배한 지금의 사회상과 그때가 맞아떨어지기 때문”으로 압축한다. 정해은 한국학중앙연구원 선임연구원은 “류성룡은 전란 속에서 자신을 내던지고 전쟁에 대해 치밀하게 기록하는 등 국정 책임자로서의 역할을 곱씹어 보게 하는 인물”이라면서 “최근 현실정치에 실망한 대중이 국가적 위기를 극복할 희망을 그에게 투영해 보고 있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최전방의 행동가였던 이순신에서 후방의 개혁 인물 류성룡으로 대중적 관심이 옮겨간 대목도 새겨볼 만하다. 세월호 참사로 시름에 빠진 지난해 전쟁을 승리로 이끈 이순신의 영웅담에 열광했던 대중이 뼈아픈 반성이자 패배의 기록인 ‘징비록’에 주목하는 이유에 대해 역사 저술가 배상열씨는 “전쟁의 위험을 방치하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연이어 자초한 조선은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 붕괴, 세월호 침몰 등 재난이 반복되는 지금의 우리 상황과 다를 바 없다”면서 “드라마 ‘징비록’ 역시 전쟁의 암운이 드리우는데도 편 가르기에만 몰두한 조선 조정의 무능함을 가감 없이 그리고 있다”고 꼬집었다. 현 국정에서 거듭되는 인사 난맥상에 대한 대중의 불만이 ‘류성룡 다시 보기’를 부추긴다는 시각도 많다. 임진왜란이 승리하기까지는 이순신과 권율 장군을 발탁해 추천한 류성룡의 개혁정신이 바탕이 됐다는 것이다.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은 “난세의 영웅을 돌아보는 작업은 혼란스러운 현실을 극복하고 미래를 대비하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김소라 기자 sora@seoul.co.kr 김승훈 기자 hunnam@seoul.co.kr 그래픽 김송원 기자 nuvo@seoul.co.kr
  • 정부, 인문학 육성 274억 투입

    정부가 생애주기별 맞춤형 인문학 프로그램에 지난해보다 105억원 늘어난 274억원을 투입한다. 문화체육관광부는 4일 “올해 신규사업으로 은퇴 세대가 청소년, 군인 등 젊은층과 삶의 지혜를 나누며 인문적 소통을 꾀하는 ‘인생나눔교실’에 30억원, 국민들이 온라인상에서 인문 콘텐츠를 접할 수 있는 ‘디지털 인문프로젝트’에 10억원, 소외 청소년층과 단절된 가족을 대상으로 하는 ‘인문예술캠프’에 10억원을 새롭게 편성하는 등 기존의 ‘길 위의 인문학’, ‘이야기 할머니’ 등 프로그램과 함께 인문정신문화 가치 확산을 위한 사업을 적극 추진할 계획”이라면서 “소통을 핵심 화두로 삼아 세대 간, 이웃 간, 가족 간 이해와 화해를 위한 사업을 강화할 것”이라고 밝혔다. 각 지역 도서관 및 박물관과 연계해 인문강좌와 현장체험을 결합한 형태의 사업인 ‘길 위의 인문학’ 사업은 참여 기관이 지난해 260개 기관에서 400개 기관으로, 각 프로그램 운영 횟수도 4410회에서 6500회로 확대된다. 또한 올해 인문정신문화 프로그램 참여 기관은 지난해 4700여개에서 6800여개로 늘어나며 참여자 수 역시 57만명에서 71만명으로 증가할 전망이다. 박록삼 기자 youngtan@seoul.co.kr
  • [열린세상] 뿌리 깊은 나무/이정옥 대구가톨릭대 사회학과 교수

    [열린세상] 뿌리 깊은 나무/이정옥 대구가톨릭대 사회학과 교수

    ‘장그래’가 아직 있을까. 장그래는 비정규직이라는 현실의 틀에 자신을 가두지 않는 열정, 정규 학벌이나 스펙에서 나올 수 없는 창의적인 문제 해결 능력을 갖춘 드라마 속의 젊은이다. 미생, 비정규직 ‘장그래’의 열정은 회사 안에서 ‘우리 팀’이라는 공동체를 만들어 내고 급기야 과장급 정규직의 잠자는 열정까지 깨워 일으켜 새로운 현실을 창조하는 감동과 낙관으로 끝을 맺었다. 우연히 길에서 제자 둘을 만났다. 한 제자는 애써 만든 영화가 상영관을 찾지 못해 ‘자존심’이 상한다고 했고, 다른 제자는 기업의 사회공헌 활동 영상 제작을 했는데 자신의 열정이 마케팅의 수단으로만 활용되는 바람에 일이 신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이들 또한 장그래처럼 청춘의 기백을 잃지 않고 있었다. 열정, 자존심, 신바람. 내가 만난 제자들 그리고 장그래가 하고 있는 말들이다. 그러나 그들의 언어는 2015년 코리아에서 소리 없는 아우성처럼 허공으로 흩어져 사라지고 있을 뿐 담아 줄 새 그릇이 없다. 창조와 혁신경제를 말하나 창조와 혁신의 열정을 담아 줄 그릇을 찾지 못한다면 결국 헌 그릇에 자기 자신을 맞출 수밖에 없다. 이렇게 해서 혁신보다는 적응, 창조보다는 모방, 도전보다는 영합에 길드는 인간형이 재생산된다. 이제 조직에 대한 소속감은 없다. 중요한 일은 시키지도 않지만 맡을 생각도 없다. ‘나’만 있고 ‘우리’는 없다. 그들의 경제주의 논리대로라면 받는 돈보다 적게 일하는 것이 그 논리에 따르는 것이 된다. 소비주의 시대를 지배하는 소비 원칙은 지불한 비용보다 높은 효용을 맛보는 것이다. 그것을 소비자 잉여라고 한다. 이 원칙이 고용 차원에서도 적용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 그러면서도 헌신적이고 열정적이면서 정규직이 되려고 발버둥치는 젊은이들만 머리에 그리고 있다. 열정 자체를 감금해 버리고 있는 데 대해서는 생각 자체를 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시급노동자와 비정규직이 양산되는 사회에서는 열정이 나올 수 없다. 열정은 인간의 존엄에 대한 신뢰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계산과 타산은 열정의 무덤이다. 자격증 취득만 생각하는 교육은 내용과 의미 그리고 질문을 생략한다. 교육이 자격증 취득의 수단이 되면 새로운 창조를 할 수 있는 깊이가 없게 된다. 자격증은 수단이고 자격증을 갖는다는 것은 자신과의 경쟁 그리고 외부와의 경쟁으로부터 보호막을 치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모두가 콘텐츠가 중요하다고 하면서도 정작 콘텐츠를 만드는 기반과 토대를 만드는 데 대해서는 단 한번의 눈길조차 주지 않고 있다. 자격증 발부와 자격증 관리 기관만 무성하다. 창조는 없고 관리만 있는 상태는 관료제 과잉으로 역사에서 도태되는 것을 보아 왔다. 창조경제를 얘기하려면 창조가 가능한 정신문화 인프라를 먼저 구축해야 한다. 손익 계산을 멈추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의 중요성을 볼 줄 아는 눈을 키울 때 창조가 이루어진다. 가수보다는 작곡가를, 배우보다는 시나리오 또는 원작가라는 뿌리를 튼튼하게 해야 한다. 비정규직을 통해 절감되는 급여보다는 한 인간이 조직 속에 기여하는 무형의 헌신과 공동체의 중요성을 인정할 때 창조경제의 정신문화 인프라가 만들어진다. 성공한 사람의 화려함보다는 실패의 과정과 경험을 높이 평가해 주는 사회가 뿌리 깊은 나무와 같은 사회다. 자격증보다는 어려운 문제를 해결할 줄 아는 능력, 도전과 불굴의 정신을 가진 진정으로 우수한 자를 우수한 자로 인식할 수 있게 될 때 창조도 있게 될 것이다. 현실 세계 저 너머 세계를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을 키워 주는 것이 인문학이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 선진국에서 인문학을 전공한 사람들이 거대 기업의 최고경영자로 일하고 있는 것도 이를 말해 주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대학이 실용 학문으로 도배되면 실용이 실용을 만들어 내지 못하는 역설이 현실화된다. 기계와 인간의 차이는 인간은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열정들이 결합하면 새로운 현실이 창조된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과 조직 그리고 자신을 안고 있는 사회에 대한 깊은 신뢰에 바탕을 둔다. 장그래는 우리가 만나고 싶은 이 시대 대한민국의 청춘이다. 그런 청춘들이 뿌리를 내리고 자랄 수 있을 때 대한민국 전체가 뿌리 깊은 나무가 될 것이다.
  • 팍팍한 삶에 대한 근본적 질문의 답을 찾다

    팍팍한 삶에 대한 근본적 질문의 답을 찾다

    절대적 빈곤은 과거에 비해 줄었다. 하지만 부의 편중과 양극화로 인한 삶의 절박함은 더욱 커져 간다. 물질적 가치가 사람의 가치를 좌우하는 식으로 세상은 피폐해지고 있다. 인문학이 학자와 연구자의 손을 떠나 일반인에게 한 걸음 더 다가서는 배경이다. 생활이 팍팍해질수록 삶과 인간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던지는 인문학을 찾는 열망은 더욱 커진다. EBS는 27일 낮 12시 10분 ‘서울인문포럼 2015’ 현장을 담았다. 지난달 14일 열린 제1회 서울인문포럼의 현장 중계다. 김현욱 전 아나운서의 사회와 서울인문포럼 배양숙 집행위원장의 해설이 어우러진 생생한 중계로 인문학의 의미와 함께 사회와 나의 관계성, 인생에서 고민해야 할 지점 등 근본적 질문이 던져지는 생동감 있는 강연 현장이 공개된다. 특히 소설가 김홍신, 시인 문정희의 뜻깊은 강의는 강연장을 찾은 이들에게 삶에 대한 지혜와 통찰을 선사한다. 소설가 김홍신은 ‘인생에도 사용 설명서가 있다’는 주제로 강연을 펼쳐 인간에게 주어진 한 번뿐인 인생의 존재 가치와 찬란하게 살아갈 수 있는 방법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또 1969년 ‘월간문학’ 신인상에 당선돼 등단한 시인 문정희는 ‘문학의 도끼로 내 삶을 깨워라’라는 주제와 함께 인문학의 꽃은 문학, 문학 중 최고 보석의 언어는 시임을 언급하며 한국 문학이 가지고 있는 자긍심, 그리고 인문학 정신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강연한다. EBS ‘서울인문포럼 2015’는 두 명의 강연자가 전하는 인문학 강의를 통해 희망차고 행복한 삶의 새로운 지평을 열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한다. 박록삼 기자 youngtan@seoul.co.kr
  • [당신의 책]

    [당신의 책]

    20세기 아리랑(이태영 지음, 한울 펴냄) 흔히 역사는 굵직굵직한 사건과 일들의 기록쯤으로 인식된다. 하지만 작은 일들과 소시민의 일상을 빼놓고 역사를 말할 수는 없다. 책은 바로 그 거대 기록이 아닌 일상의 궤적에 방점을 찍고 역사를 따졌다. 한국 근현대사의 굴곡을 아리랑 고개로 여겨 그 고난의 고개를 넘었던 많은 사람들의 일상을 촘촘하게 들여다봤다. 개항기부터 시작해 일제강점과 6·25전쟁, 남북 분단, 군부독재 시절을 관통하며 살아온 사람들이 정작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보았는지를 되돌아보게 만든다. 이념과 진영논리보다 상식과 통념에 충실해 역사를 보자는 측면의 글쓰기가 신선하다. “인간 삶의 본질은 큰 사건보다 자잘한 일상에 있는지도 모른다. 그 일상을 꾸역꾸역 살아가는 것이 독립운동이나 민주화운동을 하는 것보다 결코 쉽지만은 않다.” 보수·진보라는 이념과 사상의 이분법적 가르기를 벗어나 양보와 소통의 역사 보기를 강조한 점이 도드라지는 책이다. 320쪽. 2만 9000원. 의사, 인간다운 죽음을 말하다(브렌던 라일리 지음, 이선혜 옮김, 시공사 펴냄) ‘현대의학은 만인에게 혜택과 구원을 주는 공공의 은자인가.’ 의학이 인간생명 유지, 연장에 도움이 됨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의료계 언저리에선 좋지 않고 옳지 않은 일들이 다반사이다. 책은 현대의학과 환자의 인권에 천착해 ‘무엇이 올바른 치료인가’를 묻는다. 저자는 미국 최고의 종합병원이라는 뉴욕-프레즈버티어리언 병원 내과 의사. 직접 치료하고 만난 환자들의 다양한 사례를 다큐멘터리처럼 풀어갔다. 완치의 꿈을 버리지 못한 채 병원을 떠도는 말기암환자, 의료진을 속인 정신질환 환자, 갑자기 자살한 환자…. 치매로 고생하는 노모를 포함해 죽음 직전의 환자들을 통해 말기 혹은 고령 환자에게 고통을 주는 무의미한 치료가 필요한지를 따져 묻는다. 시장 논리에 지배되는 의료자원과 불공평한 분배, 그로 인한 불필요한 치료와 비극적인 상황 고백을 통해 현대의학의 불편한 속사정이 낱낱이 드러난다. 504쪽. 1만 7000원. 나는 시민인가(송호근 지음, 문학동네 펴냄) ‘국민의 시대에서 시민의 시대로’ 사회 현안의 날카로운 진단으로 유명한 저자가 시민사회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여전히 ‘국민’의 수준에 머물고 있는 한국인에게 필요한 건 ‘시민의식’임을 짜릿한 필치로 강조한다. ‘세월호 참사에서 사회적 공공성의 부재가 사회를 얼마나 비참하게 만들 수 있는지를 뼈저리게 느꼈다’고 술회한다. 저자는 우선 구한말의 혼란과 국권 상실, 분단과 전쟁, 군부독재로 이어진 소용돌이 속에서 정상적인 근대 시민사회 구축 기회를 놓쳤음을 안타까워한다. 시민사회의 자율적 윤리가 실종되고 계층상승을 향한 무한경쟁이 판치면서 개인주의와 권리의식만이 머릿속을 채운 게 한국의 현주소라고 말한다. 긴장하고 타인을 배려하며 공동체에 헌신하는 시민윤리를 지닌 한국인으로 거듭나자는 반성문이자 염원기로 읽힌다. 그리고 그 핵심의 메시지는 ‘위기와 갈등이 생겼을 때 즉각 발동되는 행동규범과 윤리의식’을 갖자는 것이다. 400쪽. 1만 5000원. 만약 우리가 천국에 산다면 행복할 수 있을까(토마스 휠란 에릭센 지음, 손화수 옮김, 책읽는 수요일 펴냄) ‘머지않아 현재의 물질 풍요 사회는 자취를 감출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역사가 남긴 가장 기분 좋은 막다른 길로 받아들일 것이다.’ 스칸디나비아 대표 인문학자라는 오슬로 국립대 교수가 제시한 행복의 길. 여러 나라들이 복지국가 모델로 삼은 노르웨이에서 ‘세계는 고장 났고, 우리들의 행복은 그 어느 때보다 위험하다’고 일갈한 성찰과 경고가 눈길을 끈다. 연간 개인 평균소득이 1만2000달러 선을 넘어서면 소득 증가와 삶의 만족도는 비례하지 않는다고 한다. 저자는 그처럼 인스턴트 만족감으로 채워진 세상에서 허무와 불안을 이기는 방법을 찾아낸다. 영화, 고전문학, 심리학, 종교를 넘나들며 건져 올린 처방들이 흥미롭다. 더 큰 차원의 다원주의는 많은 인간의 삶을 개선할 수 있다고 말하는가 하면 급진적인 추락을 줄이기 위해 삶을 모자이크처럼 꾸며 가라고 권하기도 한다. 384쪽. 1만5000원.
  • “영어공부 통해 한층 더 높은 지적 세련을 경험하세요”

    “영어공부 통해 한층 더 높은 지적 세련을 경험하세요”

    최근 퇴임한 노교수의 언어문화에 대한 강연을 듣고 오랜만에 참 행복했다. 이런 행복감을 어디서 또 느낄 수 있을까? 늘 느끼는 거지만 마음 속 촉촉히 스며드는 정신적 행복감은 물질적으로 채워지는 행복감과는 비교할 수 없다. 이러한 것을 바로 지적세련을 경험했다 할 수 있는 것이다. 머리와 마음을 일깨워주었던 강의 내용들을 하나씩 되짚어보며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 것은 바로 ‘인문학의 중요성’과 ‘영어를 읽고 들을 수 있는 능력의 중요성’이었다. 전자는 우리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 즉 우리 인간의 생각과 마음을 탐구하는 학문이기 때문이며, 후자는 세상에 존재하는 50% 이상의 값진 정보들이 영어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영어를 읽고 듣는 능력만으로도 천군만마를 얻은 것이다. 간편히 내 손 안에 있는 핸드폰을 통해 영어로 된 유용한 정보들을 단숨에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 ‘아는 것이 힘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와 같은 말처럼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천지 차이다. 이처럼 우리를 변화시켜 주고 발전시켜 주는 것이 바로 교육의 힘이다. 이런 교육은 나를 변화시키고 나의 생각을 진보하게 하며 나의 마음까지 뿌듯하게 해주는 것이다. 이제 나만 마음먹으면 영어를 배울 수 있는 주변의 모든 여건은 준비돼 있다. 21세기에 접어들면서 온라인 교육이 대세다. 누구나 핸드폰이나 컴퓨터 하나로 배움의 기회를 누릴 수 있게 됐다. 많은 이들이 이런 간편하면서 유용한 방법으로 영어를 이해 할 수 있는 능력을 얻길 바란다. 열린사이버대학교는 사이버 웹을 통해 영어를 배울 수 있는 다양한 강좌들을 꾸준히 업데이트하고 있고 강좌들을 진행하는 교수님들이 학생들의 질문에 즉각적으로 응답함으로써 피드백을 해주고 있다. 열린사이버대학교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언제나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대학이다. 열린사이버대학교 영어학과에서 영어를 공부해보라. 당신은 아직도 일일이 사전을 찾아가며 영어공부를 하고 있는가? 단언컨대 영어뿐 아니라 모든 언어를 공부할 때 개별적인 단어의 뜻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 단어가 쓰인 맥락, 즉 어떤 상황에서 그 단어가 쓰였는지를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래서 영어 원어민이 쓴 글을 가능한 한 많이 읽어야 한다. 그리고 문장 내에서 그 단어가 의미하는 바를 추리할 수 있어야 한다. 가장 좋은 교재는 영어로 쓰여 진 소설이다. 소설에는 인간 삼라만상이 다 들어있기 때문이다. 소설을 통해 우리 인간 세계의 삶을 경험할 수 있으며, 인간이 느끼는 감정, 배경묘사, 인물묘사, 등장인물들 간의 대화 등 보편적인 우리 인간의 삶을 접할 수 있다. 동시에 영어표현들을 맥락과 함께 접할 수 있다. 그 표현들이 실제 어떻게, 어느 상황에서 쓰이는지를 알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열린사이버대학교 영어학과에서는 1학년부터 영 소설을 읽는다. 물론 쉬운 수준의 소설부터 좀 더 발전된 단계로 읽기과정이 준비돼 있다. 영어의 기초 알파벳부터 시작한 학생도 이렇게 4년 동안 꾸준히 공부하고는 졸업 후 어엿한 영어교사가 되고 영어 학원을 운영하고 있다. 스스로를 한층 더 발전된 모습이 되길 원한다면 또 영어를 통한 지적 세련을 경험하면서 주도권을 갖고 인생을 만들어 나가고 싶다면 영어를 간편하면서도 즐겁게 공부해보길 바란다. 열린사이버대학교 영어학과 강혜경 교수
  • [문화마당] 허리케인 죠를 읽다/김경주 시인

    [문화마당] 허리케인 죠를 읽다/김경주 시인

    새해 첫 독서로 만화 ‘내일의 죠’(국내엔 ‘허리케인 죠’로 알려져 있다)를 읽었다. 우리나라에선 애니메이션으로도 꽤 인지도를 가지고 있는 인기 만화가 지바 데쓰야의 대표작이다. 종전 후 1950~60년대 황폐한 일본을 배경으로 어렵고 가난한 사람들 속에서 한 날건달이 복싱을 통해 자기 삶을 개척해 간다는 내용의 만화다. 일명 ‘헝그리 정신’을 강조하는 스토리로 죠는 죽을 힘을 다해 얻어 맞고, 쓰러지고, 다시 일어난다. 페이지가 철철 흐르는 땀 냄새로 가득하다. 내가 죠에 탐닉하게 된 이유는 무엇보다 주인공 죠가 희망이 거의 보이지 않는 싸움만 해 나가는 설정이 호기심을 당겼기 때문이다. 죠는 부랑아로 살면서 사기와 공갈 협박, 폭력에 노출되며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단페이 영감이라는 스승 겸 친구를 만나게 되면서부터 삶이 변하기 시작한다. 영감은 전직 프로 복서 출신이었지만 알코올 중독으로 살아가고 있었는데, 죠를 보고 그를 대단한 복서로 키울 의지를 가지면서 생의 반전을 꿈꾸는 캐릭터다. 복싱 따위에는 관심도 없었던 죠는 소년원과 경찰서를 들락거리지만 결국 소년원 시절 필생의 라이벌인 리키시의 동기 부여로 복싱계에 입문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얻어맞는다. 근성과 패기, 열정으로 범벅이 된 죠는 뚜렷한 목적(의지) 없이 친척집(인생)에 들렀다가 박대당하는 우리들의 삶에 강한 타격을 준다. ‘인생이 우리하고 정말 가장 가까운 친척 같은 것일까’ 하는 의문을 죠는 계속 갖고 있었다. 곰곰 생각해 보면 촌스러운 맷집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누군가에겐 삶을 대하기에 적당한 타이틀이기도 할 것이다. 이 땅엔 챔피언이 되는 것보다 한번 제대로 겨뤄 보고 싶은 링이 필요한 사람들도 많을 테니까. 만화방을 한참 드나들던 시절이 있었다. 90년대 초반까지 지방에 살던 나는 중학교에 올라가면서 열심히 만화책을 보기 시작했다. 그땐 웹툰이 지금처럼 성행하던 시기가 아니었다. 이현세와 박봉성, 허영만 등이 주류를 이루었고 드래곤볼과 북두신권은 당시만 해도 잔혹한 장면이나 청소년 정신 건강에 위기를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부분은 검게 탈색거나 덧칠돼 있었다. 수업 시간에 우리는 책상 밑으로 그 음란물(?)을 몰래 돌려 가면서 하교 때까지 자기 차례를 기다리며 마음을 졸이곤 했다. 내신을 학교에 헐값에 넘기는 일이 잦았다. 나는 그때 한참 그림 그리는 일이 즐거웠던 시기였다. 인문고등학교에 진학하는 것보단 예술고에 가서 미술을 전공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물론 부모님의 반대는 우리의 의지를 언급할 때마다 야생마처럼 펄떡 뛰곤 했다. 휴일이면 만화방으로 달려가서 하루 종일 죽을 치곤 했다. 인생도 연습장이 참 많았으면 좋겠다 싶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나는 ‘내일의 죠’를 만나게 됐다. 나에겐 말썽꾸러기 외삼촌이 여럿 있었다. 공업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 서클로 복싱부를 하고 있었다. 어느 날 삼촌은 내 방문을 두드리고 나에게 ‘내일의 죠’ 전질을 툭 던져 주었다. “너도 보면 좀 나아질 거야.” 그게 처음으로 죠를 만나게 된 날이다. 호세 멘도사와의 마지막 경기 중 단페이 영감과 나누는 대화에서 죠는 이렇게 말하고 다시 일어선다. “불완전 연소된 인생을 살고 싶진 않아.” “부탁이야 영감, 부탁이야, 아무 말도 하지 마. 새하얀 재가 될 때까지 하도록 내버려 둬.”
  • 옆…‘무한대’ ‘다름’을 바라보다

    옆…‘무한대’ ‘다름’을 바라보다

    “옆의 빛, 옆의 아름다움, 옆의 의미, 옆의 옆, 옆의 숨소리. 우리는 지금까지 위아래, 귀천만 얘기했지 옆을 무시해 왔잖아요. 근본의 부재입니다. ‘옆’이란 차이, 다름에 대한 관심이라고 할 수 있어요. 크게 보면 배려, 사랑이 되겠죠. 무한대의 개념이 바로 옆입니다.” 싸구려, 짬뽕, 뽀글뽀글, 알록달록, 플라스틱…. 가치와 현학을 넘나들며 우리의 고정관념을 흔들어 온 최정화(53)의 생각은 요즘 ‘옆’으로 무한확장 중이다. 그게 뭐라고? 그것도 예술이 될까? 의아해지지만 시장이나 후미진 골목에서 발견한 하찮은 일상의 사물들에서 예술적 가치를 찾아내 세계 유수 미술관과 비엔날레를 섭렵한 그이기에 이번엔 또 어떤 둔갑술을 보일지 은근히 기대가 된다. 지난해 4만여명의 관람객이 찾은 복합문화공간 문화역서울284(옛 서울역사)의 대규모 개인전 ‘최정화-총천연색’을 비롯해 삼성미술관 리움의 개관 10주년 기념 ‘교감’전,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에서의 ‘최치원 풍류탄생’전 등 굵직한 전시들에 이어 올 한 해 동안에도 국내외 유명 미술관과 비엔날레, 트리엔날레 등에서 수많은 전시를 앞두고 있는 그를 만나기 위해 개인전이 열리고 있는 청담동 박여숙화랑을 찾았다. ‘타타타:여여(如如)하다’라는 제목으로 열리는 전시에서 그는 형형색색 알록달록한 ‘연금술’(알케미)과 고대 그리스의 코린트·이오니아 스타일의 기둥 머리를 반복적으로 쌓아 올린 ‘세기의 선물’, 우레탄을 입힌 거대한 꽃, 둥근 플라스틱 꽃다발 등 누가 봐도 ‘최정화스러운’ 작품들 외에 철, 유리, 나무를 이용한 신작들을 선보이고 있다. 수십 개의 공예용 장도리에서 머리만 떼어서 길게 쌓아 올린 작품, 기다란 못을 노랗게 물들이고 나무처럼 쌓아 올린 작품, 철 수세미를 이용해 만든 조각 등 일명 ‘철기시대’ 시리즈가 눈길을 끈다. 1990년대 플라스틱 소쿠리를 쌓아 올려 별것 아닌 물건들에서 미학적 가치를 이끌어 냈던 쌓기의 신공이 상업 갤러리를 겨냥해 만든 것 같은 참한 작품들이다. 안쪽에는 유리 가루를 커다란 구슬처럼 뭉쳐서 나무 위에 올려놓았다. ‘관계항’이라는 작품이다. 하나는 한 병에 100만원이 넘는 최고급 샴페인 돔페리뇽, 다른 하나는 소주병을 부숴서 우레탄 접착제로 만들었다. 이거나 그거나 부숴 놓고 보니 매한가지다. 빡빡 민 머리에 잠자리 눈처럼 커다란 뿔테 안경, 검은 재킷에 빨간 가죽바지 차림으로 나타난 최정화는 다소 상기된 표정으로 “전시를 앞두고, 새로운 개념을 정리하고 발전시켜 나갈 때가 가장 흥분된다”면서 “3월 열리는 온양민속박물관 전시에선 ‘옆’이라는 개념을 본격적으로 표현해 낼 계획”이라고 말했다. “개발에 밀려 철거되는 박물관 옆 동네에서 반세기 넘게 살았던 교장 선생님 생활의 역사를 보여 주려 합니다. 1952년에 제대로 공들여 지어진 집인데 27일 철거되고 오갈 데 없어진 가구와 문짝, 집기들을 기증받기로 했어요.” 그는 “우리는 박물관에 있는 우아하고 아름다운 것만 전통이라고 하지만 현재 우리가 몸담으며 살고 만들어 가는 게 진정한 전통”이라면서 “생활에 대한 애정, 삶의 흔적들을 최정화의 화법으로 얘기를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앞서 그가 선보인 작품들의 주제인 ‘생생활활’, ‘꽃’에서 그랬듯이 ‘옆’에 대한 그의 생각도 끝이 없이 이어지는 중이다. “이제 막 시작이니까 작품이 되려면 좀 걸릴 것”이라면서도 그의 생각은 벌써 저만치 앞서 가 있는 것 같았다. 옆의 옆, 옆과 옆, 옆의 깨달음, 옆의 힘, 옆의 원근법, 옆이라는 주인공. 옆의 떨림, 옆의 울림, 빛의 옆, 옆의 탄생, 옆의 자연, 예술 옆의 쓰레기, 쓰레기 옆의 예술. 세상의 모든 옆을 보여 주겠다는 듯 끝없이 이어지는 아이디어들을 손글씨로 적어 놓은 A4 용지가 두툼하다. 세계 미술계에서 가장 많은 러브콜을 받는 작가임에도 자신을 여전히 ‘예술가인 척하는’, ‘작가인 듯’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그에게 올해 스케줄을 물어봤다. “3월 27일부터 방콕의 엠포리움 쇼핑몰에서 개인전이 있고 5월에는 밀라노엑스포와 베이징 파크뷰 개인전, 6월엔 프랑스에서 벌룬 페스티벌, 그리고 밴쿠버 비엔날레, 9월에는 프랑스 릴에서 ‘르네상스’라는 제목으로 도시 곳곳에서 전시가 열리고 호주 브리즈번의 아시아퍼시픽트리엔날레에선 어린이박물관을 만들어요. 12월에는 로마에서 건축과 미술을 아우르는 ‘트랜스포머’전이 열립니다.” 어디 그뿐인가. 그는 인테리어, 건축, 영화 미술감독, 무대 디자인과 연출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고 있다. 전방위 예술가로서 그의 다음 작업 무대는 서울 청담동에 새로 문을 여는 복합공간 G라운지다. 서예박물관 이동국 큐레이터, 문화공간 루프의 민병직 디렉터 등과의 협업으로 ‘봄을 봄’이라는 제목으로 전시와 공연을 보여 주는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추사와 김종학 화백의 작품을 통해 작은 공간에서도 인문 정신을 살려 동서고금, 고전과 현대의 문화와 역사가 어떻게 만나는지를 보여 줄 계획”이라며 앞으로 여름 열음, 가는 가을, 겨우 겨울 등으로 1년에 네 차례씩 선보일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자신의 작품에 대한 국내에서의 평가가 엇갈리는 것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그는 한 치의 주저함도 없이 답한다. “어떻게 보든 저는 다 좋아요. 작품을 만드는 것은 관객이에요. 우리 사회는 언제나 정답을 요구하지만 예술을 보는 방법, 이해하는 방법은 설명서가 필요 없거든요.” 글 사진 함혜리 선임기자 lotus@seoul.co.kr
  • [이태동 鐘樓에서] 영화 예술, 정치 선전도구 아니다

    [이태동 鐘樓에서] 영화 예술, 정치 선전도구 아니다

    20세기에만 해도 반열에 오른 일부 고답적인 유명 작가들도 영화를 우리가 말하는 ‘신파’와 크게 다르게 보지 않았다. ‘호밀밭의 파수꾼’을 쓴 은둔주의 미국 작가 J D 샐린저는 “영화의 엉터리 같은 이야기에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의 마음속은 비열한 자식들”이라고 했다. 그러나 당시 ‘구텐베르크의 은하’를 쓴 마셜 매클루언은 영상문화의 대변혁을 예견하고 “미디어가 메시지다”라고 말했다. 그 후 디지털 시대의 영화예술은 대중 예술로만 머물지 않고 컴퓨터 기술의 향상과 더불어 고급한 종합예술로서 활자로 된 문학을 억압할 정도로 크게 발전해 왔다. 성숙한 형태로 발전한 종합예술인 영화는 “영상으로 쓰는 문장(文章)”이기 때문에 후진적인 의식을 개혁하는 데 그 어떠한 인문학적 텍스트보다 활용 가치가 높은 것으로 인식돼 왔다. 그러나 영화 예술을 인간의 상상력과 재능을 자유로이 발휘하는 미학적 공간으로 사용하지 않고 레닌과 스탈린 시대처럼 정치적이고 이념적인 목적을 수행하기 위한 프로파간다로 이용한다면, 그것은 조지 오웰이 ‘1984년’에서 말했던 ‘빅브러더’의 공화국을 다시금 탄생시키는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 그동안 우리나라 영화산업도 눈부신 발전을 거듭해 영화 관객 1000만명 시대를 열어 가고 있다. 그래서 영화가 국민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어느 미디어 매체보다 크기 때문에 그것은 이미 정치적이고 사회 문화적인 이슈의 핵(核)으로 떠오르고 있다. 우리의 경우에서도 천만 관객이 보는 영화라는 ‘미디어 매체’를 인간의 자유로운 상상력의 활동을 위한 캔버스와 같은 예술의 공간이나 광장으로 사용하지 않고, 정치적인 선전수단으로 전락하게 만든다면 어떠한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인가는 불을 보듯 명확한 일이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에서는 사회의식이 강한 어떤 영화가 흥행에 성공하면 일부 정치인들은 그것을 정치적 논란이나 이념적인 진영 논리의 늪으로 끌고 들어가 이기적인 선전수단으로 몰고 가려는 양상을 보여 왔다. 지난해 12월 말부터 지금까지 많은 국민들의 화제를 모으며 1000만 관객 돌파를 눈앞에 두고 있는 영화 ‘국제시장’은 비록 ‘상업주의와 관객’들을 사이에 두고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한 편의 대중적인 예술작품이다. 하지만 일부 진보주의적인 정치 세력들은 이 영화를 순수한 작품으로 보지 않고 ‘보수 영화’라고 낙인을 찍어 이 영화가 상영된 후부터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정치적 논란과 이념적 진영 싸움의 수렁으로 끌고 들어가 이념적인 프로파간다로 전락시키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행위는 지극히 후진적인 병리 현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실향민인 야당 지도자인 문재인 의원은 이 작품을 보고 난 후 긍정적인 쪽으로 입장을 바꿨지만, 일부 좌파 논객들이 ‘박정희 시대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영화라는 말로 이념적인 논란의 불씨를 지폈던 것은 신중하지 못했다. 한국인의 이념적 갈등이 빚어낸 6·25 한국전쟁을 비롯해 월남전 등과 같은 굴곡 많은 현대사 속에서 그토록 어려운 시련을 겪으면서도 좌절하지 않고 오늘날 세계 속에서 번영하는 국가로 발돋움하는 이야기를 다룬 이 영화를 정치적인 이념 문제에 관한 것으로 치부하는 것이 과연 올바른 시각일까. ‘국제시장’이 하나의 영화예술 작품으로 보편성을 띠고 많은 관객들에게 감동의 물결을 일으키는 것은 개체적인 인간이 불굴의 자유의지와 개척 정신으로 어려움을 극복하는 인간 승리에 관한 역사를 영상미학으로 리얼하게 형상화해 보여 주기 때문이다. 현실을 극복하는 리얼리즘 작품인 ‘국제시장’은 오히려 진보 진영에서 환영해야 할 작품일 수도 있다. 2l세기의 어느 텍스트 못지않게 인간 교육을 위해 필요한 풍요로운 인문학적 자산이 될 수 있는 영화예술을 정치인들의 이기적인 프로파간다 수단으로 전락하게 만드는 어리석음은 피해야 할 것이다. 영화 ‘국제시장’이 보여 주는 참담하고 비극적인 인간 풍경은 다름 아닌 정치·이념적 갈등이 만들어 낸 결과이기 때문이다.
  • [당신의 책]

    [당신의 책]

    수양제(미야자키 이치사다 지음, 전혜선 옮김, 역사비평사 펴냄) 중국 수양제를 촘촘하게 분석한 역사서. 일본의 중국사 학자가 수양제 당시의 중국 역사와 주변 인물관계에 초점을 맞춰 수양제의 모든 것을 재미있게 재현했다. 수양제는 남북조 혼란기를 마무리 짓고 중국을 통일한 수문제의 차남이자 수나라 제2대 황제. 우리에겐 고구려 을지문덕 장군에게 크게 패한 사실로 낯익다. 만리장성 개축과 동서교통로 정비, 대운하 건설 등 역사에 길이 남을 대규모 토목공사를 잇달아 진행했지만 백성의 고통을 무시한 채 운하를 통해 고구려 정벌을 감행했고 그로 인한 민심 이반 탓에 실패한 황제로 기록된다. 자신이 믿었던 사돈이자 조정대신 우문술의 아들에게 비참하게 살해됐다. 책은 이 같은 사실들을 고증을 통해 소설체로 풀어쓴 게 특징. ‘수나라 역사에 관한 이런저런 생각’을 부록으로 붙여 수양제의 부친인 수문제 시해설 반론 등 대표적 역사 쟁점에 관한 저자의 논증도 담았다. 272쪽. 1만 4800원. 세계의 진실을 가리는 50가지 고정관념(파스칼 보니파스 지음, 이명은 옮김, 서해문집 펴냄) 지구촌에서 생겨나는 일들을 실시간으로 알 수 있는 세상. 우리는 과연 국제정보의 진위를 정확히 알고 있을까. 책은 9·11테러와 이라크전쟁 등 50가지 국제이슈에 얽힌 고정관념들을 분석해 진실은 그 이면에 있음을 지적했다. 국제뉴스를 있는 그대로 믿지 말고 비판적으로 수용할 필요가 있다는 게 핵심 내용. 미국, 서구, 선진국 중심의 세계관과 국제정치 질서에서 생겨나는 정보에 의문을 제기한다. 선악, 흑백의 이분법적 사고 틀에서 벗어나라고 주문한다. 특히 전문가도 각자 신념·이익에 따라 국제뉴스를 해석, 전파할 수 있다고 경계한다. 예를 들어 테러의 원인을 종교적 관점에서 보는 통념에 대해 그 진짜 원인은 정치·지정학적 상황 변화임을 지적한다. 미·중 전쟁 발발 가능성에 대해선 냉전 시기 미·소 대립 양상과 달리 중국과 미국은 상호 밀접한 의존관계라고 주장한다. 212쪽. 1만 900원. 생각의 해부(대니얼 카너먼 외 지음, 강주헌 옮김, 와이즈베리 펴냄) 인간 ‘생각’에 관한 첨예한 이슈와 첨단지식을 다룬 책. 행동경제학, 인지과학, 심리철학, 뇌과학계의 석학 22인이 진행해 온 연구 배경과 결과에 얹어 ‘생각’ 연구의 미래 청사진을 조망한다. 최신 뇌과학 연구 결과와 유전자 연구를 통해 ‘생물학적 인간’으로서 사고·심리의 수수께끼를 파헤치는가 하면 사회심리학·철학 등 인문사회학적 연구로 경제활동 주체나 유권자, 전문 직장인 등 ‘사회적 인간’으로서의 의사결정을 분석한다. 시장과 사회에서 판단이 어긋나거나 비합리적 선택을 하는 이유에 대한 설명이 흥미롭다. 대표 저자인 대니얼 카너먼은 인간 생각의 대부분은 무의식적이거나 기계적으로 진행되는 직관적 사고이며 시간과 노력을 들여 단계적, 논리적으로 풀어 가는 정돈된 사고는 소수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특정 관점에 머물지 않고 다양한 분야의 시선에서 학제·통섭적 지식들을 두루 살필 수 있는 게 책의 장점. 524쪽. 2만 2000원. 분열병과 인류(나카이 히사오 지음, 한승동 옮김, 마음산책 펴냄) 2005년 결성된 동아시아출판인회의가 선정한 ‘동아시아 100권의 인문도서’ 중 한 권. 최근 50년간 한국, 중국, 일본, 대만, 홍콩 등 각국에서 출간된 ‘현대의 고전’ 가운데 추린 일본 편이다. 일본 정신의학계의 권위자이자 탁월한 문장가로 소문난 노학자 나카이 히사오의 대표작으로 국내 초역. 흔히 정신병은 비정상 혹은 비이성의 영역에 속하며 때로는 불온한 것으로 배제당하기도 한다. 하지만 정신의학계에서 볼 때 사람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모두 정신병적 기질을 갖고 있다고 한다. 이 책은 이 같은 정신병 중 분열과 강박을 통해 인류의 발전사를 돌아봤다. 소유의 개념 없이 수렵·채집으로 연명하던 인류가 강박적인 농경·목축 인류에 떼밀려 어떻게 정신병적 소수자로 치달았는지를 추적했다. 특히 우울증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강박이 왜 인류사에 미덕이 돼 왔는지, 그 변천사에 얽힌 이점과 부작용을 문화인류학적 입장에서 풀어냈다. 328쪽. 2만 2000원.
  • [신춘문예 평론 당선작] 병든 앨리스 떨어뜨리기-황정은의 소설 - 이한나

    [신춘문예 평론 당선작] 병든 앨리스 떨어뜨리기-황정은의 소설 - 이한나

    1. 황정은, “그녀가 누릴 수 있었던 최고의 호사는 세로글씨로 조판된 세계문학전집을 탐독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 작가가 세계문학전집 중 무엇을 가장 아껴가며 읽었을지 제법 쉽게 유추할 수 있다. 그녀의 소설들을 찬찬히, 살펴보면 말이다. 잿빛 털을 가진 토끼들이 만화 주제가를 부르며 머리를 짓밟고 가고(「문」), 집이 커진 게 아니라 내가 잠시 줄어든 것이며(「오뚝이와 지빠귀」), 그림자가 일어나고(『백』), 지금의 아이러니한 상황을 오롯이 설명해줄 말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적혀 있다(「야행」). 토끼 굴을 낙하하는 앨리스를 보고, 꿈속에서 버섯 규모로 작아져서는 용케 밟히지 않은 채로 길 위에 서며(『나나』), 동생에게는 때마다 앨리스 소년의 이야기를 들려준다(『야만』).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그리고 연작인 『거울 나라의 앨리스』)를 구성하는 여러 모티브들은 황정은의 소설 속에서 꾸준히 반복 등장한다. 황정은은 이를 변형하여 차용하기도 하는데, “그냥 모자가 됐을 뿐인데요”(「모자」, 41쪽), 혹은 “그림자가 일어났다고 말하자 여씨 아저씨는 눈을 깜박였다”(『백』, 30쪽)와 같은 구절 따위가 이에 해당한다. 아버지가 갑자기 모자로 변해도, 그림자가 슬그머니 일어나도, 그녀의 소설 속 인물들은 결코 당황하는 법이 없다. “그냥 모자가 됐을 뿐인데요”라고 말하면 그만이다. 이와 동일하게 이상한 나라(wonderland)에서 앨리스는 이상해(wonder)하지 않는다. 모든 게 지극히 자연스럽게 느껴지기만 한다. 오히려 소녀는 엄숙하게 골무를 수여하는 도도새를 보고 그 꼴이 우스워 웃음을 터뜨리고 싶지만 그들이 너무나 진지해서 웃음을 참는다. 이로써 황정은 특유의 환상성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처럼 그녀의 환상성 일반을 차지하도록 초기작부터 거의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끈질기게, 앨리스를 언급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다음의 인용문이 그 단서를 제공할지도 모르겠다. 오래전 길에서 만난 사람에게 나무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있다. 커다란 나무와 앨리스 소년에 관해서. 앨리스 소년은 그 나무 아래에서, 해가 뜨고 달이 지는 것을 지켜보면서, 기다리고 있었던 거다. 가만히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남자는 나무 바깥으로 나가면 되지, 라고 말했다. 모든 일은 그 새끼가 나무 아래 서 있기를 고집했기 때문 아닐까? 나무 바깥으로 나가면 상황 끝, 오케이? 그렇구나. (…) 하지만 그건 마치 갤럭시와도 같은 대답.(『야만』, 158~159쪽) 끝내는 여장 노숙자가 된, 매일을 가정 폭력에 시달리던 가난한 소년의 이야기, 라고 황정은의 두 번째 장편소설 『야만적인 앨리스씨』는 요약될 수(도) 있다. 소년의 이름은 앨리시어. 동생이 죽은 뒤 모든 걸 놓아버린 그는 동생에게 들려주곤 했던 이야기의 끝자락만을 간직한 채 살아가고 있다. 그 이야기 속에서 앨리스 소년은 나무 아래에 자리한다. 앨리스 소년이 나무 주위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두고 한 남자는 간단히 “나무 바깥으로 나가면 상황 끝, 오케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는 갤럭시와도 같은 대답이라 한다. 황정은의 용어 사전에서 ‘갤럭시’란 ‘타인의 고통은 아랑곳하지 않는 좆같은 거’다. 이를 통해 앨리시어에게(그리고 황정은에게) 앨리스 이야기란 ‘고통’과 관련 있는, 쉽게 포기할 수 없는 것이란 걸 유추해낼 수 있다. 어쩌면 그녀의 소설이 품고 있는 어떤 새로운 가치를 드러낼 수도 있음이다. 다만 섣불리 접근했다간 “그건 마치 갤럭시와도 같은 대답”이라는 말을 듣게 될지도 모르니 신중해야 한다. 소설 속에서 가난한 이들의 환상은 보통 현실을 도피하는 수단으로 쓰인다. 도피할수록 현실의 나,는 희미해진다. 그러나 황정은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읽었다. 환상이 되레 현실의 자아를 첨예화할 수 있음을 안다. 환상이 현실에 대한 고뇌로부터 그들을 멀어지게 하기보다는 가까워지도록 도울 수 있음을 안다. 그래서 그녀는 대담하게도 부르주아지인 앨리스의 방식을 몰래 이용하여 가난한 이들로 하여금 자신의 존재에 대해 생각하도록 한다. 이상한 나라로 이어지는 토끼 굴에 슬쩍 가난한 이들 역시 떨어뜨린다. 2. 먼저 아까부터 괜히 낯이 익던 ‘앨리시어’(Alicia)라는 이름에 주목해보자. 이는 ‘앨리스’(Alice)와 그 형태가 유사하다. 그러나 단순히 앨리스의 남성형 정도에 해당한다고 정의 내릴 수만은 없다. 필자의 추론은 이렇다. 앨리시어(Alicia)는 앨리스(Alice)에 어미 ‘-ia’를 더한 것과 같다. 어미 -ia는 그리스어로 ‘국가’(nation) 또는 ‘병’(illness)을 뜻한다. 이 중 후자를 따르자면 앨리시어는 앨리스에 ‘병’을 더한, 즉 ‘병든 앨리스’가 된다. 이 글에서는 황정은 소설의 주요 인물들을 앨리시어, 즉 병든 앨리스로 칭하고자 한다. 우선 저기 “떨어지고 떨어지고 떨어지”(「낙하하다」, 78쪽)고 있는 앨리시어에게 다가가 보자.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채 몇 장 넘기지 않더라도 앨리스(Alice)와 앨리시어(Alicia) 간의 큰 차이점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첫째로, 앨리스는 토끼 굴 속으로 떨어지지만 앨리시어는 떨어지지, 다시 말해 바닥에 닿지 못한다. 갑자기 쿵! 쿵! 하고 잔가지와 낙엽 더미 위로 떨어진 앨리스와 달리 그는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모르는 채 “검은 공간을 하염없이 떨어져 내릴 뿐이”(「낙하하다」, 61쪽)고, “발밑을 내려다보지만 거긴 너무 멀고 텅 비어 있”(「파씨의 입문」, 219쪽)으며, “아직도 떨어지고, 여태 떨어지고 있는 거다”(『야만』, 132쪽). 둘째로, 토끼 굴 속을 떨어지는 와중에 보이는 물건들이 다르다. 먼저 앨리스는 굴 속에서 양 옆을 살피는데, 그 곳엔 ‘찬장’, ‘책꽂이’, ‘지도’, ‘그림’들이 잔뜩 걸려 있다. 반면 앨리시어가 떨어지는 와중에 곁에 보이는 것들은 “숟가락, 바닥이 두꺼운 유리컵, 방금 깎은 연필, 종이들, 구멍이 세 개 뚫린 단추, 젓가락 한 짝과 호두를 부술 수 있는 가위 따위”(「파씨의 입문」, 219쪽)이다. 우선 이 중 후자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이를 위해서는 다음의 인용문을 읽어 두는 것이 좋다. “‘얘야, 어서 올라와!’ 해도 그냥 올려다보면서, ‘내가 누군데요? 그걸 먼저 말해 줘요. 내가 당신이 말하는 사람이 되고 싶으면 올라가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다른 누군가가 될 때까지 여기 이 아래서 살 거예요.’ 하고 대답해야지.”(『이상한』, 27쪽) 토끼 굴을 통과하여 이상한 나라에 당도한 앨리스는 곧바로 알 수 없는 액체를 마시고는 키가 작아지고, 건포도 케이크를 먹고는 키가 커지는 경험을 한다. 그러곤 외친다. “지금의 나는 누구인 거지? 아, 이건 대단한 수수께끼다!”(『이상한』, 25쪽)라고. 실로 이와 같은 외침 이후에 이상한 나라 안에서의 여러 모험들(adventures)은 이 대단한 수수께끼를 풀기 위한 한 여정으로 둔갑한다. 위의 인용문에서와 같이 앨리스는 당신이 말하는 사람, 정확히 말하자면 ‘나’와 ‘당신’(으로 지칭되는 무언가)의 바람을 충족하는 다른 누군가가 되지 전까지는 굴 밖으로 나가지 않을 예정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다른 누군가’는 도대체 누구를 의미하는가. 이는 아직 불분명하다. 하지만 추측은 가능하다. 의식적으로 고상한 어휘를 사용하려 노력하고(대부분 잘못 사용하지만), 가정교사와 하인들이 있고, 학교에선 불어를 배우며, 때로는 오빠의 라틴어 문법책을 훔쳐보곤 하는 이 소녀는 결말부에 이르러 바로 이렇게 말한다. “그렇게 교양 없이 굴려면 나머지 이야기는 네가 하는 게 좋겠다.”(『이상한』, 104쪽) 즉 ‘교양’을 강조한다. 독일 인문주의의 맥락에서 ‘교양’(Bildung)이란 쉽게 말해 사람 각자가 생득적으로 가진, 인간으로서의 가능성을 최대한 현실화하도록 유도·계몽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는 필연 ‘자아형성(self-formation)’과도 관련이 있다. 자아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란 거다. 이는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많은 규범들을 의식하고 자기 것으로 만들어, 생존해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이탈리아 기행 이후 “나는 주체성을 잃었으나 세계를 발견했다”고 고백한 괴테 역시 자아의 형성이 ‘주체성’이라는 단어보다는 ‘사회화’라는 단어와 더 어울림을 미리 알았다고 볼 수 있다. 앨리스는 토끼 굴 안에서 이런 용어를 내뱉은 것이다. 키가 작아졌다 커졌다 반복되어도, 동물들이 사람 꼴을 하고 말을 건네도, 틈만 나면 “저놈의 목을 치시오!”라고 말하는 여왕을 만나도 소녀의 머릿속은 “지금의 나는 누구인 거지?”라는 물음과 ‘교양’이라는 단어만으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이 둘은 연관되는데, 앞서 공백으로 남겨둔 ‘당신’의 자리에 ‘교양’이 들어설 수 있기 때문이다. 굴 안에 떨어져 “내가 당신이 말하는 사람이 되고 싶으면 올라가겠지만”이라고 말했던 부분에서 ‘당신’을 ‘교양’으로 바꾸면 이는 쉽게 “내가 교양이 말하는 사람(=교양의 지향점을 따르는 사람=교양을 갖춘 사람)이 되고 싶으면 올라가겠지만”이 된다. 앨리스는 본래 무식한 꼬마 취급 받는 것을 두려워하던 인물이다. 이상한 나라에서 소녀는 계속해서 (자기보다도 더) 터무니없는 말과 행동을 일삼는 이들 틈에서 “교양 없는 짓이잖아”, “정말 야만적이군요!”와 같은 말들로 무례함, 교양 없음을 지적해 나가며 그들에게 휩쓸리지 않는다. 이렇듯 앨리스는 이상한 나라 안에서의 모험 내내 ‘교양’을 기준으로 ‘교양 있음/없음’을 나누고 ‘교양 있음’의 편에 자신을, ‘교양 없음’의 편에 이상한 나라의 사람들을 놓는다. “지금의 나는 누구인 거지?”라는 대단한 수수께끼의 해답은, 고로 자아를 찾기 위한 해답은, 자신을 자신 아닌 것과 구별하는 의식 속에서 생겨나는 법이다. 그리고 마침내 너희들은 카드 묶음에 불과하다는, ‘너희는 기껏해야 (나와 달리) ○○에 불과하다’는 깨달음과 동시에 소녀는 잠에서 깨어난다. 교양에 기반한, 앨리스의 이 모든 행동을 가능토록 만든 것들에 대한 힌트는 이미 이 장의 앞부분에 제시되어 있다. 그것은 ‘찬장’, ‘책꽂이’, ‘지도’, ‘그림’. 앨리스가 토끼 굴로 떨어지며 본 것들이다. 유추하건대 대대로 물려온 접시를 보관하는 찬장, 희귀본들이 가득한 책꽂이, 18세기 제국들의 정복지를 표시한 지도, 고조할아버지쯤 되는 윌턴 경의 초상화 등이었을 것이다. 즉 모두가 부르주아지인 앨리스의 자아를 첨예화하는 데에 도움을 주어 소녀로 하여금 잠에서 깰 수 있게, 토끼 굴에서 다시 빠져나올 수 있게 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앨리시어가 본 것들은? 아아, 그것은 “숟가락, 바닥이 두꺼운 유리컵, 방금 깎은 연필, 종이들, 구멍이 세 개 뚫린 단추, 젓가락 한 짝과 호두를 부술 수 있는 가위 따위”이다. 이 잡동사니들을 움켜쥐고 이상한 나라로 들어간다면 앨리스와 같이 쉽게 빠져나올 수 있을까? 이것들로 자아를 첨예화하여 나와 그들을 구분해낼 수 있을까? 글쎄. 턱도 없다. 앨리시어는 모험이 아닌 방황을 할 것이다. 어쩌면 영원히. 3. 한 번 이상한 나라에 당도하면 다시는 빠져나오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앨리시어는 떨어지지 못한다(않는다). 앨리스가 안락한 자아 형성의 과정을 즐기는 동안 앨리시어는 “풉풉 풉풉 풉, 풉, 풉풉풉풉풉풉풉풉풉풉풉”(「무지개풀」, 101쪽)하며 다소 엉뚱한 곳에 자신의 에너지를 소진한다. 또는 TV를 시청한다. 물론 교양 프로그램을 시청하지는 않는다. 한 목격자가 말하길 “단 하나의 채널을 수신할 수 있었는데 몇 번 채널인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노이즈가 심했다. 진동하는 모자이크로 탈색된 화면에서 아마도 남자로 보이는 해체된 얼굴이 바직파직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뼈 도둑」, 187쪽). 그나마 한 채널뿐이고, 그나마 해체된(deconstructed) 얼굴만이 바직파직 떠 있다. 알아들을 수 없다. 이로썬 자아를 견고히 할 수 없다. 이미 절단된 사지는 붙을 가능성마저 잃는다. 유기체(有機體)가 되지 못할 것을 직감한, 교양이라는 ‘틀(機)’이 없는, 병든(-ia) 앨리스인 그는 머리, 팔, 다리, 등, 배로 각기 나뉘어 생각하기 시작한다(「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열차」). 그러곤 계속해서 무언가를 중얼거린다. 해 보세요, 가마. 가마. 가마. 가마. 가마. 이상하네요. 가마, 라고 말할수록 이 가마가 그 가마가 아닌 것 같은데요. 그렇죠. 가마. 가마.(『백』, 37~38쪽) “가마, 가마, 가마, 가마, 가마” 하고 “슬럼, 슬럼, 슬럼, 슬럼” 한다.(『백』) 앨리시어가 보기에 가마는 사람마다 전부 다르게 생겼는데도 그걸 전부 가마, 라고 부르는 건 가마의 처지에서 ‘상당한 폭력’이다. 그러므로 이 ‘상당한 폭력’을 무력화시킬 방법을 강구해낸다. ‘반복 말하기’가 그것이다. 그는 이어서, 말이라는 현상은 B라는 점이 아니라 A에서 B로 이어지는 가느다란 선분이기에 이 A와 B 사이에 숨겨진 무수히 많은 맥락들을 고려해본다면, 정말로 쓸 만하거나 할 만한 말이라는 것은 없다고 설명한다.(「곡도와 살고 있다」) 즉 A라는 한 단어가 B만을 지칭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A는 B도, C도, F도, Z도 뜻할 수 있게 된다. 이로써 “상당한 폭력”은, ‘B’는 희미해진다. ‘반복 말하기’는 기존의 어휘들을 무력화한다. 그간의 ‘맥락’을 끊는다. 동시에 ‘보통’에 대한 강박 역시 누그러뜨린다. A가 B도 F도 될 수 있다면, ‘보통’ 역시 이것도 저것도 다 그 기준이 될 수 있다. 이는 B에 의해, 보통에 의해, 어쩌면 교양에 의해 절단된 사지만을 덩그러니 끌어안고 있던 앨리시어로 하여금 유기체적인 매끄러운 몸을 가지고 다시 “세계의 저편”(「파씨의 입문」, 219쪽)을 생각할 수 있도록 돕는다. 그 저편에는 찬장, 책꽂이, 지도, 그림들이 아니라 숟가락, 바닥이 두꺼운 유리컵, 방금 깎은 연필, 종이들, 구멍이 세 개 뚫린 단추, 젓가락 한 짝과 호두를 부술 수 있는 가위 따위가 있다. 이것이 앨리시어의 ‘보통’이라면 보통이다. 숟가락 뒷면의 뒤집혀진 상(像)으로, 혹은 방금 깎은 연필로 막 써낸 글로 세상을 바라보아도 괜찮다. 다 괜찮다. 그것으로 처참히 찢긴 제 몸이 다시 온전해질 수, 오롯이 그 유일함을 지켜낼 수만 있다면 말이다. 4. 앨리스가 ‘교양’이라는, 선대로부터 켜켜이 쌓아온 그것에 기댄다면 앨리시어는 오로지 자기 자신(또는 자기와 동일시하는 대상)에 흡착한다. 흡, 착, 한다. 있는 힘껏 빨아들이고 착 달라붙는다. 흐읍, 하고 착! 그리고 나서는? ‘나’ 위에 ‘나’를 쌓는다. 그가 말했듯 “세 개의 점이 하나의 직선 위에 있지 않고 면을 이루는 평면은 하나 존재하고 유일하다.”(「대니 드비토」, 52쪽) 이것은 평면이 아닌 ‘나’에 대한 정의이기도 하다. 이 유일한 나, 가 쌓이고 쌓이고 또 쌓인다면? 부족이 되나,라고 나는 물었다. 부족민이고 뭐고 없는데? 네가 있잖아. 라고 나기는 말했다. 족장이자 부족민인 네가 있잖아. 나 하나뿐인데? 하나뿐인 부족도 있는 거지, 세상엔.(『나나』 1366쪽) “하나뿐인 부족”이 된다. 하나뿐인 부족도 있는 거다, 세상엔. 『소라나나나기』는 가난한 세 인물 소라, 나나, 나기가 등장하는 소설이다. 남편을 잃고 반쯤 정신을 놓고 있는 애자, 그리고 그녀의 자식인 나나와 나기를 소라의 어머니가 거두게 되면서 이들은 거의 함께 살아간다. 이 중 성인이 된 나나는 예기치 않게 연인의 아이를 임신한다. 연인과 결혼을 하면 보다 윤택한 삶으로 편입할 수도 있다. 잘 사는 집. 그러나 (잔병도 없는)아버지가 요강을 사용하고 어머니가 요강을 비우고, 가장 좋은 날짜가 7일이니 아기는 바로 그날에 태어나야 한다고 말하는 집. 그걸 모두가 당연히 여기는 집에 그녀는 진입하기를 관둔다. 말했듯, 하나뿐인 부족이 될 것이다. 아이가 태어났는데 세상이 그렇게 끝나버리면 너무 억울할 것 같은 거야. 아이나 나나 말이지. 모처럼 낳았고 모처럼 태어났는데. 그냥, 세계가 끝나버리면.…공룡이 사라졌잖아. 멸종이라서 한순간에 사라져버린 것 같지만 실은 천만년이 걸렸대. 천만년에 걸쳐서 서서히 사라진 거야. 그렇게 금방 망하지 않아. 세계는. 천만년이면 나나가 십만명.…하지만 그 십만번 안에 웃는 나나가 있고 우는 나나가 있고 화를 내는 나나가 있고 그리워하는 나나가 있고 누군가를 좋아하는 나나가 있고 두려워하는 나나가 있고 수줍어하는 나나가 있고 토라진 나나가 있고 기다리는 나나가 있고…(『나나』 3271~3272쪽) 하나뿐인 종(種)이 될 것이다. 공룡도 실은 천만년이나 걸려서 멸했다. 나나는 그러니까 “길게 망해”갈 것이다. “그렇게 금방 망하지는 않겠다는 얘기”다.(『나나』 3272쪽) 이것이 병든 앨리스의 생존법이다. 이상한 나라에서 순조로이 빠져나오기를 가능케 할 수 있는, ‘나’와 ‘남’을 구분할 그 무엇이 부재한 그는 이 ‘병’을 고치려 하지 않는다. 병든 채로라도 오래 버티길 원한다. 이렇게 버티고 버티고… 떨어지고 떨어진다. 떨어지며 ‘나’를 쌓는다. 앨리시어 위에 앨리시어가 떨어지고 떨어진 앨리시어 밑엔 앨리시어가 깔리고 앨리시어가 떨어지고 앨리시어가 포개지고…. 쌓인 앨리시어는 천만년 동안 십만 명의 앨리시어로 살아남을 것이다. “숟가락, 바닥이 두꺼운 유리컵, 방금 깎은 연필, 종이들, 구멍이 세 개 뚫린 단추, 젓가락 한 짝과 호두를 부술 수 있는 가위 따위”여도 좋다. 나, 앨리시어가 유일한 존재임을 상기시키는 거라면. 앨리시어는 모자가 되고(「모자」) 오뚝이가 된다(「오뚝이와 지빠귀」). 나를 쫙 흩뜨려 나와 동일시하는 대상에 가 달라붙거나(「대니 드비토」), 하나 존재하는 평면에 대해 되뇐다.(「낙하하다」) 집중한다. 그렇게 살아남는다. 토끼 굴 속에서 낙하하며 ‘나’를 생각한다. ‘나’를 쌓는다. 5. 근대의 실상에 대해, 마르크스는 “단단한 것은 모두 녹아 날아간다”고 했고, 니체는 “토대라는 토대는 모두 미쳐서 날뛰듯이 산산이 부수고 엉망으로 만드는 것, 모든 토대를 녹여서 부단히 흘러가는 진화를 계속하게 하는 것, 존재하는 것이라면 모두 쉼 없이 해체하고 역사화시키는 것”이라 했다. 이 두 정의를 바탕으로 버만은 근대성(modernity)에 대해 이야기한다. 마샬 버만, 『현대성의 경험』, 윤호병·이만식 역, 현대미학사, 1994. 그에 의하면 근대성은, 자족적이고 비연속적인 개체로써 ‘지금, 여기’를 바라보며 기존의 모든 가치를 덧없게 하는 것이다. 진정 이런 거라면, 앨리시어는 근대성을 자신의 유일한 실존적 조건으로 삼은 자라 할 수 있다. 다시 돌아가, 한국 소설 안에서 환상이 가난과 같은 현실의 문제를 도피하는 수단이 아닌 극복하는 방안이 되는 경우는 드물다. 환상 속에서 끝없이 현실의 ‘나’를 버리기보다 현실의 ‘나’를 세워나가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황정은은 (앨리스의) 환상을 이용하여 소설 내내 그가 자신이 유일한 존재임을 깨닫기를, 하나의 부족이 되어 망해도 길게 망해가기를 바란다. 그녀가 “그럼 길게 망해가자”(『나나』 3272쪽)라고 했을 때는 ‘망함’의 상태를 길게 지속하자는 얘기가 아니다. 최대한 미루자는 것이다. 백년도, 천년도 아닌, 천만년씩이나. 그러므로 길게 망하자는 건 길게 살아남자는 말과 같다. 천만년을, 그것도 근대성을 자신의 유일한 실존적 조건으로 삼은 자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니체의 다음 발언을 유념해야 한다. 개인은 대담하게 자기 자신을 개별화시키게 된다. 다른 한편으로 이와 같이 대담한 개인은 필사적으로 그 자신만의 일련의 규범을 필요로 하고 자아의 보전, 자아의 고양, 자아의 각성, 자아의 해방을 위한 기술과 책략을 필요로 하기도 한다.(『현대성의 경험』, 35~36쪽) 자신만의 ‘규범’과 자아의 해방을 위한 ‘기술’과 ‘책략’이 필요하다. 앨리시어는 아직 이를 갖추지 못했다. 자기 자신에 흡착하는, 위 인용문에 따르면 ‘자아의 보전’ 단계에 간신히 다다랐을 뿐이다. 최근의 소설들에서 가난한 연인과 헤어지고 다른 사람과 결혼하고는 “모두를 당혹스럽고 서글프게 만든 것은 내가 아니라고 말”(「상류엔 맹금류」, 33쪽)하고, “아무도 없고 가난하다면 아이 같은 건 만들지 않는 게 좋아. 아무도 없고 가난한 채로 죽”(「양의 미래」, 146쪽)으라고 소리치곤 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읽는 사람들, 한권의 책을 펴고 읽을 수 있는 사람들은 어쨌거나 이런 현실과 거리가 있는 사람들이고 그 독자들이 이 책을 읽는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다”며 스스로 고립을 자처하는 것도 물론. 그러니 앞으로 더 주목해야 한다. 앨리시어가 자아의 보전에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아의 고양, 각성, 나아가 기존의 모든 것들로부터의 해방에까지 이르게 될 가능성은 높다. 황정은이 “모든 토대를 녹여서 부단히 흘러가는 진화를 계속하게 하는 것”이 필요함을 알고 부르주아지인 앨리스의 환상을 녹여서 기꺼이 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중이기, 진작 교양을 무기로 토끼 굴 바닥에 떨어져 환상의 나라를 누비고 있는 앨리스를 눈앞에 고정시켜 두고, 앨리시어를 토끼 굴 속으로 쉼 없이 밀어 넣고 있기 때문이다. 병든 앨리스는, 병들었기에, 무섭다. 그는 교양이라는 틀이 없는 환자인 동시에 병원체(病原體)이므로. 일단 앨리시어가 저만의 틀을 구축한다면, “숟가락, 바닥이 두꺼운 유리컵, 방금 깎은 연필” 등을 의미화해 나간다면, 그는 토끼 굴 바닥에 가볍게 안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틀은 병원균의 번식 속도처럼 재빨리 퍼져나가 천만년 동안 이어질 것이다. 그때쯤이면 ‘병든’(-ia)이라는 형용사는 지금과는 다른 의미를 지닐지도 모르겠다. 이어질 소설들에서 황정은이 어떠한 기술과 책략을 선보일 것인지 궁금하다. 그러나 다음의 문장을 되뇌며 하루하루 기다리는 수밖에. “내일은 어제와 같지만 어제와는 다를 것이다. 세계의 귀퉁이가 약간 뒤집혔고 점차로 더 뒤집힐 것이다. 앨리시어는 이제 그것을 안다.”(『야만』, 149쪽) <끝>
  • [서울대 추천 도서 100선-읽어라, 청춘] 20세기 천재적 인문·사회과학자…에이즈로 사망

    미셸 푸코는 철학, 심리학, 정신병리학, 역사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나름의 문제의식을 가지고 천착해 독보적 성과를 낸 프랑스의 천재적인 인문·사회과학자다. ‘20세기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라고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다는 평을 받는다. 특히 서양 문명의 핵심인 합리적 이성에 대한 독단적 논리성을 비판했다. 푸코는 1926년 프랑스 푸아티에의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18세에 바칼로레아(대학입학 자격시험)에 합격한 뒤 고등사범학교 준비반 과정에 들어가 공부하지만 낙방했다. 그가 고등사범학교 시험에 합격한 것은 고교 졸업 4년이 지난 1947년. 하지만 불과 4년 뒤인 1951년 교수 자격시험에 합격했다. 그사이 문학, 약학, 의학, 법학 등을 가르치는 소르본에서 1948년까지 철학, 1950년까지 심리학을 공부했다. 1952년에는 정신병리학으로 학위까지 받았고,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루이 알튀세르(1918~1990)의 추천으로 고등사범학교에 자리를 얻어 강의를 시작했다. 푸코는 1970년부터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교수를 지냈다. 학위와 입학 절차, 등록금 없이 학문적 관심이 있는 이들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콜레주 드 프랑스는 ‘문명국’을 자처하는 프랑스인들의 자존심인 동시에 이 학교의 교수가 된다는 것은 프랑스 교육계에서 엄청난 영광으로 여겨진다. 푸코는 콜레주 드 프랑스의 교수로 있으면서 ‘사유 체계의 역사’를 가르쳤는데, 이때 그의 글과 강의는 인문학, 사회과학의 많은 영역에 걸쳐 큰 영향을 줬다. 푸코는 다양한 사회적 기구에 대한 비판, 특히 정신의학, 의학, 감옥의 체계에 대한 비판과 성의 역사에 대한 남다른 통찰을 통해 대중에 널리 알려졌다. 또 권력과 지식의 관계에 대한 이론, 서양의 지식의 역사에 관한 담론을 다루는 그의 사상은 많은 논쟁과 토론을 불러일으켰다. 죽음 또한 파격적이었다. 푸코는 1984년 6월 파리에서 에이즈의 합병증으로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프랑스 유명 인사 가운데 첫 에이즈 사망자였다. 장형우 기자 zangzak@seoul.co.kr
  • [시론] 국립현대미술관장, 비전형 리더십 갖춰야/이명옥 한국사립미술관협회장·사비나미술관장

    [시론] 국립현대미술관장, 비전형 리더십 갖춰야/이명옥 한국사립미술관협회장·사비나미술관장

    요즘 미술계의 핫이슈는 차기 국립현대미술관장 공모다. 미술계에서 국립현대미술관이 차지하는 위상이 매우 높은 데다 정형민 관장이 직위 해제되는 충격적인 사건을 겪었기 때문에 미술인들의 관심이 더욱 집중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폭발적인 세간의 관심에도 불구하고 미술계의 수장이 될 자격을 갖춘 유능한 관장을 뽑는 일이 이번에도 결코 쉽지 않겠다는 우려가 따른다. 그럴 만한 근거가 있다. 우선 과거 문화체육관광부 국립현대미술관장 공개 모집 공고문에 실린 관장의 주요 업무에는 국가대표 미술관인 국립현대미술관의 설립 취지 및 목표, 실천 과제, 향후 미술관이 나아갈 방향이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지 않다. 이는 국립현대미술관 홈페이지에 실린 관장 인사말에서도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미술문화 발전에 기여하며 국민 여러분께 한층 가까이 다가가면서 문화가 있는 행복한 삶을 드리고자 합니다. (…) 복합예술, 과학, 인문학을 비롯한 다양한 학문이 현대미술과 소통할 수 있는 문화의 산실로 거듭날 것입니다.’ 미술관의 존재 목적과 경영이념이 담긴 설립 취지를 명문화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직도 모르고 있다는 증거물이다. 설립 취지는 미술관을 이끌어 가는 보이지 않는 구심점이 될 뿐만 아니라 미술관 직원들을 확고한 단합의 정신으로 뭉치게 하는 힘을 발휘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미술관의 설립 목표가 분명하게 나타나지 않은 한국과 달리 선진문화국의 국립미술관은 설립 목표와 핵심 과제를 국민들에게 명확히 제시하고 적극적으로 실천하고 있다. 예를 들면 영국의 국립미술관인 내셔널 갤러리는 대중들을 위한 미술관이라는 설립 취지를 개관부터 지금껏 충실히 실행하고 있다. 런던의 관광 명소인 트라팔가 광장에 국립미술관이 위치한 것도, 무료 관람 원칙을 굳게 지켜 오고 있는 것도 예술품에 대한 취미를 대중들과 공유하고 그들이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내셔널 갤러리는 아이들의 입장을 허락한 최초의 미술관이기도 한데, 이는 육아 도우미를 구하기 어려운 시민들이 가족 단위로 미술관을 방문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대중친화적 미술관이라는 정체성을 보여 주듯 다른 미술관들은 엄두조차 내지 못하던 1998년 이미 모든 소장품을 데이터 베이스화해 대중에게 공개했다. 프랑스의 국립미술관인 루브르 미술관은 프랑스혁명 정신인 자유, 평등, 박애의 이념을 설립 취지에 담아 미술관 조직과 업무에도 그대로 적용하고 있다. 루브르 미술관은 ‘인류가 남긴 위대한 유산을 즐길 수 있는 미적 안목을 길러 주고 민주적 원칙을 교육시키는 국민들의 평생학교’라는 명확한 목표를 설정하고 야심차게 실천하고 있다. 미술관의 가장 중요한 업무를 고전미술품 수집과 보존에 두고 있는 것도 고대에서 근대까지 이르는 다양한 예술작품을 시대별·사조별로 종합적이고도 완벽하게 보여 주기 위해서다. 작품 해설 서비스를 제공하고, 카탈로그를 출간한 것도 고전미술사를 완벽하게 공부할 수 있는 국민의 궁전으로 만들겠다는 핵심 목표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래서 루브르 미술관은 수십만 점에 이르는 고전미술품을 소장하는 세계 최대 미술관이며 미술 교과서 그 자체라는 찬사를 받고 있는 것이다.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국립현대미술관이 고유의 철학이 없고 설령 있다 하더라도 명확히 전달되지 못해 국민적인 공감을 얻지 못하는 현실은 심히 부끄러운 일이다. 이제 어떤 인물이 국가대표 미술관의 새로운 관장이 될 수 있는 자격을 가졌는지 밝혀졌다. 관장은 무엇보다도 국립현대미술관의 설립 취지와 목표를 명확히 설정하고 명문화하는 작업의 중요성을 인식해야 한다. 국립미술관이 나아갈 방향과 지향해야 할 비전을 확실히 제시하고, 이를 소신과 열정으로 실천하는 비전형 리더십을 가진 인물이 필요하다.
  • [김주혁 선임기자의 가족♥男女] 여성인재 활용과 양성평등 실천 TF 성과는

    [김주혁 선임기자의 가족♥男女] 여성인재 활용과 양성평등 실천 TF 성과는

    여성인재 활용과 양성평등 실천 태스크포스(TF)가 지난 6월 발족됐다. 경제활동 참여 및 의사결정 분야에서 우리나라의 양성평등 수준이 매우 낮은 현실을 극복하고 여성인재 활용을 통해 미래의 성장동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다. 이 문제와 관련한 국내 최초의 자발적 민·관협력체다. 여성가족부가 자리를 깔고 기업·공공기관·민간단체 100개와 17개 정부부처가 자발적으로 참여한 TF는 2017년까지 3년간 달성할 공동 목표를 정해 함께 실천함으로써 경제혁신 3개년 계획의 효과적인 이행을 뒷받침한다. 구성원은 여성고용 확대, 일·가정 양립, 여성 대표성 제고, 양성평등 문화 확산 등 4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80개 실천과제를 토대로 향후 3년간 자율적으로 추진할 실천과제를 선정, 계획을 수립하고 이행한다. TF는 세미나와 전문가 컨설팅, 성과보고회 등을 통해 제도를 소개할 뿐 아니라 제도가 실제 효과를 내도록 하는 노하우를 포함한 우수사례의 공유와 확산을 시도하고 있다. 기업들은 사회적 책임 차원을 넘어 경영 성과를 높이고 다양성을 확보하는 차원에서 여성고용 확대를 추진한다. 시간선택제는 경력단절 예방과 경력단절여성의 재취업에 유리한 제도다. 전일제에서 시간선택제로의 전환을 활성화하기 위해 공공 부문에서 내년부터 시간선택제 전환교사 제도가 시행된다. 민간 부문에서는 기존 전일제 근로자를 시간선택제로 전환하는 사업주에 대해 인건비 등을 지원한다. 현대자동차, CJ그룹, Sk그룹, 스타벅스, 기업은행, 선병원, 유베이스 등 많은 기업이 양질의 시간선택제 일자리를 운용하고 있다. 롯데그룹은 여성고객의 비율이 높은 특성을 반영해 여군장교 특별 전형을 기업 최초로 실시하고 시간선택제 일자리로 올해 2000명을 채용하는 등 여성인력 확보를 중시한다. 시간선택제 채용과 관련, 김진성 롯데그룹 인사팀 수석은 “직무수정과 추가발굴 등을 통해 보완이 필요하며 시간제 근로자들이 잘 적응하도록 인문교육 오리엔테이션 멘토링 등 본인 역량을 십분 발휘할 수 있게 지원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남지민 노사발전재단 선임연구원은 시간선택제 확대를 위해서는 적합한 직무 발굴과 전환형 시간선택제의 효율적 운영 방안 마련, 전일제 근무문화에 익숙한 인식 개선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제도를 갖추는 것뿐 아니라 유명무실하지 않게 잘 활용되도록 접근성을 높이는 것이 중요하다. 풀무원은 임신부가 임신 12주 이전, 36주 이후 2시간씩 단축근무를 시행할 수 있는 제도가 법제화됐어도 눈치 때문에 신청하기 곤란해하는 점을 감안, 임신 주수만 인사팀에 알려주면 인사팀이 때맞춰 상위자에게 제도를 안내함으로써 자동 시행되는 제도를 운영 중이다. 아모레퍼시픽이 출근시간을 오전 7시부터 오전 10시까지 한 시간 단위로 선택할 수 있는 ‘ABC 워킹타임’제도를 시행하는 것을 비롯해 삼성전자, KT, 유한킴벌리 등 유연근무제를 실시하는 기업들도 많다. LG그룹은 평가에서 육아휴직자에 대해 평균(B) 점수를 준다. 삼성전자는 모성보호 기간 중 하위고과를 줄 경우 사유서를 제출하게 하는 불이익 방지 장치를 운영한다. 삼성전자는 모성보호를 위해 사원증과 책상 위 표식 등을 통해 임산부임을 알리고, 임산부 전용 주차장과 통근버스 내 별도 좌석 등도 운영한다. 워킹맘들이 쉴 수 있는 공간인 모아(母兒)룸을 8개 사업장에 모두 63개를 운영하고 있다. 삼성전자 권수현 차장은 “모성보호 관련 부분을 문화로 정착시키기 위해 고민한 결과 눈으로 보여야 한다는 점에 착안해 소소한 부분까지 신경을 썼다”고 말한다. 롯데그룹의 육아휴직 후 복직지원 프로그램과 관련, 권현선 대홍기획 팀장은 “복직하기 한두 달 전부터 회사에서 도태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걱정을 하며 스트레스를 받는데 ‘기다립니다. 기대합니다’란 가이드북을 보내 주니 회사가 나를 버리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며 치유받는 느낌이 들더라”고 말했다. 현대백화점은 산후통·산후우울증 등 배우자의 육체적·정신적 질병이 발생하는 경우 등에 최대 30일의 유급휴가를 부여하는 ‘아빠의 달’ 제도를 운영한다. 육아휴직으로 인한 인력충원 문제와 관련, KT는 6개월 이상 공백이 발생하면 1명을 채용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가족사랑의 날을 운영할 뿐 아니라 매일 초과근무를 하지 않고 정시퇴근하도록 하는 기업들도 늘고 있다. 최고경영자가 초과근무 현황을 2주 단위로 점검하는 SK이노베이션 박현섭 팀장은 “급한 일이 있으면 팀장의 허락을 받아 초과근무를 할 수 있으나 문제는 초과근무가 365일 계속되는 것”이라면서 “정상근무시간의 효율성 확보가 중요하며 정시퇴근을 함으로써 불필요한 회의와 보고서가 줄어든다”고 말한다. 포스코는 2017년 말까지 여성 연봉제 직원 중 리더비율을 현재의 1.5배 수준인 8%까지 향상시킨다는 목표를 세워 두고 있다. 남성들의 불만이 없지 않지만 남성들은 20~30년간 보이지 않는 우대를 받아왔기 때문에 몇 년간 여성인재에 대해 우대해 주는 것은 조금도 역차별이 아니라고 회사가 설득하면 대부분 이해한다고 정창식 부장은 말한다. 한국IBM은 여성 리더를 전략적으로 양성하기 위한 제도 및 경력개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제일모직, 유한킴벌리, 코오롱, 한국씨티은행, 한화그룹, SK그룹 등 여성위원회를 설치 운영하는 기업들도 확산되고 있다. 여성리더 육성을 위해 리더십 교육, 멘토링과 네트워킹, 일·가정 양립 문화 확산을 위한 캠페인 등의 역할을 한다. CEO와 인사책임자의 마인드 변화를 유도하는 일이 가장 핵심적인 성공의 열쇠다. 한국GM은 활동 초기에는 역차별 논란, 비자발적 멤버 구성 등 다양한 이슈로 인해 조직 내에서 활성화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으나 리더십의 꾸준한 지원과 여성위원회 멤버들의 자발적 참여 및 활동, 사내 다양한 계층을 아우를 수 있는 프로그램 개발 등을 통해 여성위원회의 존재와 활동이 안착됐다. 나아가 여성뿐 아니라 다양한 조직 구성원, 협력업체 등과의 공동발전을 모색하고 있다. 협력업체 직원들과 350여명 규모의 여성 콘퍼런스를 최근 개최했고 스타벅스 커피세미나 등 남성 직원들과 함께할 수 있는 다양한 활동도 벌이고 있다. 한국GM 이지은 차장은 “우리 회사에서는 문화가 제도를 앞서고 여성위원회가 문화를 이끌어 가기 때문에 제도가 없어도 양성평등문화가 중간관리자까지 정착돼 있다”고 자신 있게 말했다. 이 차장은 “워킹맘에게 정말 필요한 지원은 사실 제도보다도 아빠가 일찍 집에 들어와 아빠 역할을 하도록 회사가 배려하는 것이며 그게 바로 여성리더 배출의 밑거름”이라고 말했다. 이랜드월드는 채용면접 때 여성면접관을 의무 배치해 50~55%의 여성채용 할당제를 실시, 채용단계에서부터 공정한 기회를 부여한다. 김희정 여가부 장관은 “구성원의 자발적인 동참과 실천에 기반한 ‘여성인재활용과 양성평등 실천 TF’는 민간 부문에서 스스로 실천계획을 수립하고 선도적인 모범사례를 만들어 간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면서 “TF의 성공적인 실천 사례가 다른 기업들의 변화를 유도하고 변화의 흐름들이 모여 사회 전체를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며 우리나라가 국제사회에서도 여성인재 활용의 모범사례로 남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김 장관과 함께 TF 공동 대표의장을 맡고 있는 박용만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은 “생산가능인구가 줄어든 상황에서 여성인재 활용은 우리나라의 미래가 걸린 중요한 문제”라며 TF가 여성인재 활용에 대한 기업들의 막연한 부담을 없애줄 것이라고 말했다. 박 회장은 “여성인재 활용 확산을 위해서는 일하는 방식과 시스템의 과학화가 필요하고 관습이 아닌 합리성에 기반한 인사평가 시스템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며 여성들에게도 인사와 평가의 권한을 온전히 부여해야 제대로 된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다”고 말했다. 세계경제포럼(WEF)의 성 격차지수(GGI)에서 우리나라는 지난해 100점 만점에 63.5점으로 111위를 기록하다 올해는 117위로 순위는 6계단 떨어졌으나 점수는 64.03점으로 다소 올랐다. TF의 목표는 2017년까지 13년 대비 10% 증가한 69.8점 이상으로 늘리는 것이다. 그럴 경우 올해 기준 66위(칠레 69.75) 수준이 된다. happyhome@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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