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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선비 학 타고 금강산 오르다

    “다시 4500 걸음을 가서 비로봉에 올랐다. 사방을 빙 둘러보니, 호호만만(浩浩漫漫)하여 그 끝까지 나아간 곳이 어디인 줄 알지 못할 정도이다. 표표(飄飄)하기가 마치 학을 타고 하늘 위로 오르는 듯하여 아무리 날아가는 새라고 하여도 나보다 위로 솟구치지는 못할 듯하다.” 29세에 요절한 조선 중기의 학자 홍인우가 금강산에 오른 감흥을 적은 ‘관동록(關東錄)’의 한 대목이다. 산중 신선이라도 된 듯, 그 흥이 사뭇 도도하다. 조선 선비에게 산행(山行)은 가슴 속의 티끌을 씻어내는 행위였다. 산놀이를 하나의 유흥으로 즐기되, 산에 올라가서는 세상에 대한 욕심을 잊고 산이 빚어내는 고요함을 사랑했다. 고려대 한문학과 심경호 교수가 쓴 ‘산문기행’(이가서 펴냄)은 이황의 ‘소백산 유람록’, 정약용의 ‘수종사 유람기’, 허균의 ‘원주 법천사 유람기’, 김만중의 ‘첨화령기’ 등 조선 선비들의 대표적인 산중 유람록을 엮은 책이다. 우리 조상은 이미 신라시대 때부터 산에서 노닐며 풍류도를 익혔다. 화랑이 그 한 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산천 유람이 정착된 것은 조선시대부터다. 조선 중기에 이르면 산천 유람에 유흥적인 요소들도 등장하기 시작한다. 주세붕은 청량산에 오를 때 인근 현감과 속관, 사족과 함께 늙은 기생, 피리쟁이, 노래하는 재인, 거문고 타는 여종, 아쟁 켜는 여종까지 이끌고 갔다. 그러나 조선 선비들은 기심(機心), 즉 세상에 대한 욕심을 잊으려는 청유(淸遊·맑은 놀이)의 방편으로 산천 유람을 택한 측면이 강하다. 조선 선비들의 산사랑은 남달랐다. 그들은 별도로 ‘마음에 드는 산’을 하나씩 뒀을 뿐 아니라 바쁜 공무 중에도 틈만 나면 산을 찾았다. 몸이 불편하거나 상황이 여의치 못해 산에 오르지 못할 때는 유람록이나 산수화를 보면서 마음을 달랬다. 그것이 바로 누워서 즐기는 ‘와유(臥遊)’다. 책에는 우리 조상들의 산행준비와 등산방법, 유람록 작성요령 등이 부록으로 실렸다. 오늘날의 여행지침서격인 ‘수친서(壽親書)’, 좁은 길을 지날 때 쓰는 임시상여인 견여(肩輿)와 나귀 등 산행 때 사용한 교통수단, 옷차림 등 흥미로운 인문학적 지식을 전해 준다.2만 9800원.김종면기자 jmkim@seoul.co.kr
  • 재소자, 철학강의 30분만에 “저기요…”

    재소자, 철학강의 30분만에 “저기요…”

    위기를 맞고 있는 인문학이 새로운 꽃을 피우고 있다. 삶의 정체에서 헤매던 교도소 수용인과 노숙인, 성매매 피해여성들에게서다. 이들은 낯선 인문학에서 새로운 삶의 이정표를 찾고 있다. 소외계층에게 인문학 교육을 통해 자존감을 높이는 일명 ‘클레멘트 코스’의 한국판이 정착하고 있다.13일 의정부교도소 수용자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첫 인문학 강의를 계기로 이들에게 삶의 활력소가 되고 있는 클레멘트 코스의 현주소를 두 차례에 걸쳐 집중 조명한다. “인문학을 배운다는 게 뭔지는 모르겠어요. 다만 나중에 어떻게 살지 알고 싶었는데, 무엇을 공부해야 하는지가 막막했죠. 다음 수업이 기대됩니다.” 13일 의정부 교도소에서 미국의 ‘클레멘트 코스’와 같은 인문학 수업을 처음으로 들은 수용자들의 한결같은 소감이다.1995년 미국 뉴욕에서 시작된 클레멘트 코스는 소외된 사람들을 위한 인문학 과정을 말한다. 노숙인과 수용자, 마약 중독자 등에게 금전적 혜택을 주기보다 인문학적인 교육을 통해 살아갈 힘을 주자는 취지에서 개발됐다. 노숙인과 성매매 피해여성 등 소외된 사람들을 위한 인문학 과정은 개발돼 왔지만, 우리나라에서 수용자들이 이 과정에 참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강동운 교도소장은 “수용자 재(再)사회화를 위한 직업훈련은 많았지만, 정작 인간의 내면과 자아를 성찰하게 하는 과정은 없었다.”면서 “인문학 강의가 수용자들이 성공적으로 사회 복귀를 하는 데 도움이 되기 바란다.”고 말했다. 강사와 학생 모두 기대가 컸기 때문일까. 오후 1시30분부터 진행된 수업이 순조롭지만은 않았다. 학생은 잔뜩 긴장했고, 강사로 나선 조광제 철학아카데미 대표는 학생들의 분위기를 파악하느라 바빴다. 이렇다 할 반응이 없이 30분 정도 지났을까. 조 대표가 짐짓 자신이 영화 ‘강원도의 힘’ 출연자라고 너스레를 떨자, 한 수용자가 “촬영을 어디에서 했나요.”라고 질문을 던졌다. 강릉과 속초라고 지명이 나오자 수용자들이 활짝 웃는다.“우리 집이 거기예요. 참 좋지요.” 교감이 통한 듯했다. 수업내용과 관련된 질문도 간간이 나오며 수업은 서서히 제 궤도를 찾아갔다. 조 대표는 6주 동안 수용자들과 함께 정확한 자아의 모습을 찾아 나서기로 했다. 그는 “지식적인 측면보다는 서로를 이해하고 철학을 이용해 삶을 이겨내는 방법을 공부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면서 “수용자들과 교감할 수 있도록 더 노력해야겠다.”고 자신감을 보였다. 홍희경 김민희기자 saloo@seoul.co.kr
  • 의학 오디세이/강신익 등 지음

    인류의 역사는 ‘질병과 의학의 역사’다.1차세계대전의 피해자는 1000만명이 채 안 되지만 전쟁이 끝날 무렵 유행한 ‘에스파냐 독감’은 2000만∼5000만명의 생명을 앗아갔다. 중세 말 흑사병이나 16세기 유럽인들이 몰고온 병원균으로 인한 아메리카 원주민의 몰살도 질병과 의학이 역사와 결코 무관하지 않음을 보여준다.‘의학 오디세이’(강신익 등 지음, 역사비평사 펴냄)는 인문의학과 보건의료사, 고대의학 등을 전공한 4명의 저자가 동서양 의학역사의 가장 위대한 순간을 다룬 인문교양서다. 저자들은 의학이 지닌 인문학적 속성에 주목한다. 이를테면 17세기 의학자 하비가 발견한 혈액순환 원리는 데카르트의 기계론적 철학 발전에 중요한 근거가 됐다는 것. 합리적 의학의 시발점이 된 히포크라테스, 광물학과 연금술을 의학에 접목시킨 파라켈수스,‘노동의학의 시조’ 라마치니,‘사회의학의 원조’ 피르호 등의 이야기가 실렸다.1만 2000원. 김종면기자 jmkim@seoul.co.kr
  • 대학논술 ‘感채점’ 무엇이 문제인가-한양대 입학관련 교수 4人 난상토론

    최근 ‘대학 논술 채점 감(感)으로´ <서울신문 2일자 1면>라는 한 대학 교수의 고백 이후 논술고사 채점에 대한 공정성과 일관성 논란이 제기되고 있는 가운데 논술고사를 치를 일선 대학에 비상이 걸렸다.6일 2007학년도 대입 정시 논술고사를 코앞에 둔 한양대는 지난 3일 입학 관련 교수들이 본지 기자가 참석한 가운데 입학처장실에 모여 이 문제를 놓고 1시간 30여분 동안 난상토론을 벌였다. 이 대학 역시 논술 채점은 뜨거운 감자였다. 이 대학 최재훈 입학처장과 차경준 입학실장,2007 통합형논술개발위원회 인문계분과위원장인 국어국문학과 이도흠 교수, 자연계분과위원장인 물리학과 오차환 교수 등 4명의 토론 내용을 지상중계한다. ▶채점 교수들의 주관성이 논란이다. 정말로 예쁜 글씨가 영향을 미치는가. 최재훈 입학처장(최 처장):예쁜 글씨가 당연히 영향을 미친다. 엄청나게 못쓰면 불이익받는 게 사실이다. 채점에 주관성이 개입되는 것도 분명하지 않겠느냐. 다만 주관적인 요소가 관여되는 점수가 결정적인 영향을 주느냐 여부는 따져봐야 할 문제이다. 대학에서 논술이나 대학별고사를 보려는 이유는 수능과 내신에서 변별력이 없기 때문이다. 대학이 원하는 논술은 객관적으로 변별력을 두자는 건데, 교육부가 주관적인 요소를 많이 개입하게 하라고 시키고 있는 것 아니냐. 대학은 객관적인 것을 원하고 객관적인 답이 있는 논술을 원한다. 결국 그런 의미에서 대학에 자율권을 달라는 말 아니겠느냐. 차경준 입학실장(차 실장):미술 채점도 교수들이 100점,90점식으로 점수를 매기는데 공정하게 한다고 생각한다. 수학이 그러면 가장 논리적이고 채점하기 편하냐고 하면 또 그렇지 않다. 자기 대학에서 좋은 학생 뽑으려고 시험보는 것이기 때문에 대학은 공공기관 입장에서 공공성 확보를 위해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다. 이도흠 교수(이 교수):(이탈리아 철학자) 크로체는 예술을 학문으로 객관화하는 걸 부정했다. 논술도 마찬가지로 근원적으로는 객관적으로 평가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논술이 주관성이 있어서 불공정하다고 비판하면 사실 논술의 의의를 부정하는 것이다. 논술 시행 초기부터 있어 왔던 결함들은 이제까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시스템으로 문제점을 보완해 왔다. 글씨 때문에 점수가 좌우된다고 하는 건 채점 교수들을 모욕하는 것이다. 우리도 인간인 이상 글씨 못쓰면 짜증나고 1∼2점 감점은 될 수 있다. 하지만 1∼2점으로 학생의 운명이 좌우되는데 그걸 그냥 생각없이 매기겠느냐. 오차환 교수(오 교수):학원가에서 예상 문제를 내놓고 전형적인 답안을 만든 뒤 이 답안이 대학별로 점수받는 게 다르다고 객관성을 의심한다. 한 대학 안에서만 점수가 일관성있으면 되지, 학원에서 제시하는 답안에 일치할 필요는 없다. 우리로서는 우리가 요구하는 인재를 뽑기 위해 우리 나름대로의 답을 만들어 놓고 우리 안에서 객관성있게 평가한다. 그런 걸 가지고 객관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본다면 잘못이다. ▶논술을 치르는 과정에서 시행착오는 어떤 점이 있었고 어떤 식으로 보완해 왔나. 이 교수:한양대는 1986년부터 논술을 시행해 오면서 나타난 시행착오를 보완해 왔다. 초기에는 채점 교수들이 공통적으로 보기에 ‘채점 수준이 안되는 교수’들이 없잖아 있었다. 이 때문에 현재는 따로 100여명 되는 채점 가용자원 교수 리스트와 채점 수준이 안되는 교수들에 대한 블랙리스트를 만들고, 블랙리스트는 채점자에서 제외한다. 나이드신 분은 채점 집중력이 떨어지는 측면도 있었다. 그래서 채점 교수들 나이도 45세 이하로 제한한다. 집중력이 떨어지는 문제 때문에 오후 5시 이후에는 채점하지 않는다. 채점장과 휴게실을 바로 옆에 공간배치해 채점하다 집중력이 떨어지면 바로 쉬게 해뒀다. 과거에는 논술 채점 날짜가 5일 연속으로 이어질 때가 있었는데 이 때문에 멍해진 교수들이 많았다. 채점은 사실 3일 이상하면 집중이 안되기 때문에 빨리 끝내야 한다. ▶논술 채점 공정성 확보를 위해 마련한 한양대의 채점 시스템은. 이 교수:시험이 끝나면 출제 교수들이 실제 학생들의 답안을 보고 수준과 눈높이를 측정한 뒤에라야 모범 답안과 출제 의도, 채점 기준을 확정짓는다. 이어 출제 교수들이 90점 수준에서 30∼40점 수준의 다양한 답안지 20개 정도를 뽑아 가채점한 뒤에 채점 교수들에게 출제 의도와 문제 취지를 교육한다. 이후 채점 교수들의 점수와 출제 교수들의 점수를 비교해 본다. 편차가 크면 출제위원장이 점수에 따라 채점 기준을 다시 설명하고 영점 조준하고 가채점을 10장 추가로 한다. 그럼 어느 정도 기준이 잡힌다. 채점은 3명의 교수가 한 팀이 되어 한다. 점수 편차가 10점 이상 나면 다시 채점한다. 논술 시행 초기에는 편차 기준을 7점으로 했지만 교수들이 이에 너무 짓눌려 자유롭게 채점을 못하는 것 같아 1점씩 높이다 보니 10점이 됐다. 교수나 되는 사람들이 잘못 매겼다고 인정하고 번복하는 게 쉽지 않지 않겠느냐. 하루 채점 학생 수도 300∼360명 선에서 끊는다. 더이상 하면 집중력이 떨어질 수 있다. 한양대 시스템만으로 하면 황승연 교수(경희대 사회학과)가 지적한 문제점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차 실장:학생의 점수가 채점자별로 10점 이상 차이나도 이 학생의 답안을 다른 모집단위의 채점 교수들에게 채점시키는 식의 불이익을 주지 않는다. 즉 인문대학에 응시한 학생은 인문대학 논술 채점 교수들만 채점한다. 다른 단위에서 채점하면 원래 채점자 팀에게 채점받은 학생과 형평성에서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논술 채점 기준은 무엇인가. 이 교수:과거에는 사실 맞춤법, 띄어쓰기, 문장의 구성 등 형식성만 봐도 변별이 됐다. 하지만 최근에는 다들 논술을 공부해와 형식성이 떨어지는 학생은 0.5%도 안되기 때문에 형식성은 지엽적인 문제가 됐다. 요즘은 일단 독창적이고 상투성에서 벗어났느냐는 창의성, 논리적 구성과 논거를 통해 객관적으로 논증하고 있느냐는 논리성, 구체적으로 문장을 풀어 가느냐는 구체성 등을 우선으로 보고 글의 양과 문장, 표현 등을 보는 형식성은 뒤에 따진다. ▶지난해 11월11일에 인문계와 자연계 학생 1000여명을 대상으로 대학 사상 처음으로 ‘2008학년도 모의 통합논술’을 실시했는데 문제점과 개선해야 할 점에는 어떤 것들이 있나. 이 교수:시간과 자본이 필요하겠지만 10점 편차 이상 나는 학생들만 따로 채점하는 채점팀을 따로 구성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하나의 보완장치를 더 두자는 의미다. 또 하루 채점 학생 수를 200∼250명 수준으로 더 줄여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이를 위해선 채점 교수들을 또 추가로 교육시켜야 한다는 점이 문제점이다. 통합논술로 가면 인문학적인 상상력과 자연과학적인 논리력을 겸비한 교수들을 다수 확보하고 교육시키는 게 관건이 될 것 같다. 인문·자연계 패러다임을 다 이해한 교수들을 모으고 이해시키는 게 쉽지는 않을 거라고 본다. 오는 3월과 5월 모의통합논술을 2차례 더 치러 보고 교수들을 교육할 예정이다. 오 교수:통합논술에선 사실 인문계보다 자연계가 더 문제다. 자연계는 이제까지 본고사 등을 통해서 정확한 답이 있는 문제를 요구해 왔다. 그때는 누구나 채점을 해도 점수가 명확했다. 통합논술에서는 명확하게 안 나오니까 정확성에 문제가 있더라. 하지만 교육부에서 그렇게 보지 말라고 하니까 어쩌겠느냐. 자연계 교수들이 답이 명확하게 안 떨어지는 논술을 답답해 한다. ▶황승연 교수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이공계 교수들 49.7%가 ‘논술이 우수학생 선발에 적합지 않다.´고 답해 인문·사회계열 교수보다 논술시험에 더 부정적이었는데. 오 교수:적극 동의한다. 현재 체제로 통합논술을 해야 한다면 자연계는 논술 비중이 크지 않아야 한다. 자연계 아이들이 자연계 공부하기도 바쁜데 인문계가 섞인 통합논술을 한다면 또다른 사교육을 조장하는 것이 된다. 본고사라는 게 교육부와의 문제인데, 교육부가 그걸 허용해 주면 자연계로서는 대학의 자율권을 보장받는 시스템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통합논술이 아니라도 자연계만의 발전적인 문제를 얼마든지 낼 수 있다. 자연과학이나 수학의 개념을 묻는 것이라든지, 수행평가와 가까운 실험에서의 오류나 오차에 대한 해결책을 묻는 것 등이다. 이공계 학생들이 창의력을 발휘해서 자연계 대학공부를 하려면 실제 실험에서 발생할 수 있는 문제에 대한 개선점을 찾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결론은 대학자율성의 문제인가. 차 실장:본고사로 돌아가자는 게 아니다. 대학자율권이 주어지면 대학에서 다시 고민해 봐야 한다.1970∼80년대 본고사처럼 수학 정석이나 푸는 방식은 아닐 것이다. 더 발전된 방향으로 가기 위해서는 뭔가 더 연구가 필요할 것 같다. 대학자율권을 보장해 주기 위해 통합논술이 중간단계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단 이 단계를 거치기 위해 학생들이 제일 고통을 받으니까 문제다. 궁극적으로는 그쪽 방향(대학자율성 보장)으로 가야 한다. 오 교수:신입생을 뽑는 것은 대학의 고유 권한인데 전국 대학을 통틀어서 교육부 지침이나 가이드라인을 만드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그 대학 신입생은 그 대학이 책임지고 뽑는 자율성을 줘야 한다. 정리 이재훈기자 nomad@seoul.co.kr
  • [서울신문 신춘문예-희곡당선작]심사평

    올해도 백 편 가까운 희곡들이 응모함으로써 양적인 면에서는 예년과 비슷했으나 좋은 작품들을 찾기는 힘들었다. 희곡 장르에 대한 충분한 독서와 이해, 혹은 관극의 경험 없이 막연한 상투성으로 접근한 경우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구성과 언어 면에서 미흡했다. 좋은 희곡이나 연극을 제대로 접하지 못한 탓에 탄탄한 구성 대신 단편적 아이디어나 어디서 본 듯한 장면의 나열들이 많았고 언어에 성찰의 깊이와 인문학적 향기가 부족했다. 이런 가운데 최종적으로 심사위원들의 손에 남은 후보작들은 ‘도미노’(채승철),‘내비게이션’(한정희), 그리고‘문득, 멈춰서서 이야기하다’(김정용) 등이었다. 이중 ‘도미노’는 한 야생동물 사육사가 연쇄적으로 맞닥뜨리게 된 사건들, 즉 여학생의 피살과 원조교제의 누명, 첫사랑과의 대면, 아내의 가출과 딸의 죽음들을 엮어 놓은 내용이었다. 이런 사건들을 시간상의 역순으로 전개함으로써 이들이 마치 도미노현상처럼 연쇄적으로 벌어졌다는 해석을 역설적으로 강조하고자 했으나 연쇄성이 충분히 부각되지 못했으며 야생동물 사육사라는 의미가 효과적으로 드러나지 못했다. ‘내비게이션’은 한 회사원이 일상의 좌절과 상실감을 내비게이션 속의 가상적 여인을 통해 벗어나고자 한다는 내용인데 무대적 시공을 상상적으로 활용하는 연극적 감각은 돋보였으나 주인공과 주변 인물들이 오가는 현실과 환상들에 최소한의 극적 논리가 부족했다. 마지막으로 ‘모노로그 콰텟’이라는 부제가 붙은 ‘문득, 멈춰서서 이야기하다’는 각각 다른 사연을 지닌 네 명의 인물들이 사중주처럼 엮어 가는 독백들로 이루어져 있는 독특한 형식의 희곡이었다. 네 인물들의 독백들은 표면적으로는 서로 대화를 주고 받는 듯이 이어지지만 이면적으로는 각자 자기 나름의 독자적 흐름으로 전개된다. 그러나 이런 씨줄과 날줄들은 서로 모이고 흩어지고 하면서 각자와 모두가 함께 출렁이는 소리와 의미의 리듬을 형성하게 된다. 공연되었을 때 과연 소기의 효과가 나타날 수 있을까 하는 점에서 일말의 불안이 없지 않았으나 형식의 참신성, 공들인 짜임새, 담백함 속에 섬세하게 빛을 발하는 무대적 센스 등을 높이 사 올해의 당선작으로 밀기로 했다. 손진책, 김방옥
  • [열린세상] 소위 ‘인문학 위기’에 관해/이성형 이화여대 국제정치학 교수

    인류학자 레나토 로살도는 필리핀 루손 지역의 북부에 살고 있는 일롱고트 족의 한 노인에게 물었다. 왜 다른 부족의 머리를 자르는 사냥(헤드 헌팅)에 참가하느냐고. 그 노인은 주변에 누가 죽은 뒤 느끼는 상실감에 기인하는 분노를 처리하기 위해서라고 대답했다. 로살도는 이게 도대체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상실에 기인하는 분노라니. 하지만 같이 현지조사를 하던 부인이 실족해 죽자, 오랫동안 이해되지 않던 그 말을 몸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역시 상실에 기인하는 비통함, 또 그 비통함에 뿌리를 둔 엄청난 분노와 직접 대면했기 때문이다. 의문을 가진 지 14년 만에 답을 얻게 된 것이다. 여기서 그는 민족지를 서술하는 자신의 위치가 ‘입장을 가진 주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인문학의 위기’가 사회에 회자되고 있다. 이제는 하도 들어서 식상할 정도이다. 선언문이 나돌고, 연구비가 증액되었다는 말도 들린다. 인문학이 위기라니? 대체 누구의 위기란 말이냐. 요즘 쏟아져 나오는 인문학 관련 서적들이 얼마나 많은데. 시간을 쪼개가며 읽어도 서가에 쌓여만 가는 인문학 관련서적들을 보면 위기란 말은 가당치 않다. 만일 당신이 책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지금의 한국은 단군 이래 최고의 인문학 르네상스를 맞이하는 중이라고 평가할 것이다. 역사서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매일 밤을 새워도 읽어내기 힘들 정도로 많은 양서들이 출간되고 있지 않은가? 필자가 가끔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 젊은 인문학도들도 ‘위기’ 담론에 시큰둥하다. 이들은 오랜 시간을 강사로 보내면서 제도권에 터전을 잡기를 거의 포기했다. 처음에는 분노가 솟구쳐 올랐지만 이제 거의 체념으로 기가 죽은 사람들이다. 간혹은 간발의 차이로 제도권에 진입하는 데 성공한 사람도 있지만, 이구동성으로 이렇게 말한다. 가능성이 희박한 제도권 진입은 꿈도 꾸지 않으니, 제발 인문학자로서 최소한의 생계를 유지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시간강사 월급이나 정상화하라고 말한다. 기아 임금 문제는 제쳐두고 회자되는 ‘인문학의 위기’란 이들에겐 ‘당신들의 위기’밖에 되지 않는다고. 사실 제도권 안팎의 젊은 인문학자들의 연구와 출판 활동은 활발하다. 위기가 아니라 새로운 변화의 조짐이 보이는 봄철 분위기 같다. 이들에겐 실험정신이 있다. 고답적인 분위기의 인문학적 글읽기와 글쓰기를 혁파하며 새로운 인문학 전통을 세우려 노력하고 있다. 좋은 책을 열심히 번역하기도 한다. 물론 생계를 위협받고 있지만 자신의 노동에 의미를 부여하며 즐겁게 일을 한다.1980년대 반독재 데모 시절 모두 막걸리집에서 벤야민과 보들레르, 아도르노와 스트라빈스키를 토론했고, 예술과 문학과 사회과학에 탐닉했던 세대였다. 그때는 모두가 인문학도들이었다. 이들은 위기의 징후를 달리 본다. 강고한 분과 학문의 벽, 고답적인 교과목, 그리고 학내에 사라진 토론과 실험정신이다. 어느 때부터인지 대학 내 활기찬 지적 토론이 사라졌다. 학자들의 대화도 격이 떨어져버렸다. 명강의라 불릴 만한 강좌도 많지 않은 것 같다. 그런데 연구비를 증액한다고 이런 문제가 해결되느냐고 이들은 반문한다. 게다가 최근 진입하는 학생들은 책을 거의 읽지 않은 인문학 무지의 세대이다. 괴테를 읽어본 적이 없는 학생이 독문학에 관심을 가질 리가 없고, 발자크나 도스토옙스키를 읽지 않은 학생이 프랑스 문학이나 러시아 문학을 전공하겠다고 달려들 리가 없다. 책을 읽지 않고 요약본을 암기하며, 학원에서 배운 앙상한 삼단논법을 글쓰기라고 생각하는 세대를 양산시킨 현행 논술시험 제도도 대학 내 인문학의 수요를 급감시킨 주요인이 아닐까. 차라리 논술시험에 동서양 고전도서 목록을 지정해 주면서 그것만이라도 열심히 읽게 만드는 것이 좀 나은 대안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이성형 이화여대 국제정치학 교수
  • ‘풍부한 학문 보고’ 인문학

    독문학계의 원로인 차봉희 한신대 교수가 정년퇴임을 맞아 30년 교직생활을 회고하는 두 권의 문집을 냈다.제1권 ‘인문학적 인식의 힘’(와이겔리 펴냄,2만 5000원)에서는 ‘수용미학’ 등 저서 9권과 10여권의 번역서를 소개하고,6편의 회고록을 실었다. 제2권 ‘문학적 인식의 힘’(2만 7000원)에는 신문, 잡지, 문예지, 논문집, 학술대회 등에 발표한 글을 모았다. ‘어느 인문학자의 기쁨과 고뇌’라는 부제가 암시하듯 차 교수는 “교수 생활 30여년 동안 인문학은 참으로 많은 시련의 시기를 겪었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그는 “그럼에도 과거의 인문학은 현재의 문화학, 미디어학, 미디어문화학, 미디어미학의 발전을 위한 소중한 문화자산으로서 가장 풍부한 학문적 보고”라고 강조했다. 차 교수는 서울대 문리대와 대학원에서 독어독문학을 전공한 뒤 독일 튀빙겐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전남대와 한신대를 거쳐 현재 한신대 명예교수로 있다.박홍환기자 stinger@seoul.co.kr
  • 박경미의 수학콘서트/박경미 지음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은 자신이 세운 아카데미아의 정문에 ‘기하학을 모르는 자는 이 문으로 들어오지 말라’는 현판을 내걸었다. 플라톤은 수학자는 아니었지만 그의 저서 ‘국가’에서 인간이 수학을 공부해야 하는 본질적인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수학을 현실에서 유용하게 써먹기 위해서가 아니라 수학이 영혼을 진리와 빛으로 이끌어 주는 학문이기 때문이라는 것.‘박경미의 수학콘서트’(박경미 지음, 동아시아 펴냄)는 이같은 인문학적 배경 지식과 더불어 수학적인 논리력과 분석력을 키워주는 책이다. 저자(홍익대 수학교육과 교수)는 일상에 숨겨진 다양한 수학의 원리들을 마치 변주곡을 연주하듯 유려하게 풀어나간다.‘수학은 단순하다-에튀드’‘수학은 즐겁다-디베르티멘토’‘수학은 진화한다-랩소디’ 등 수학과 음악을 연계해 설명한 방식이 눈길을 끈다. 수에 담긴 종교적 의미와 미신을 다룬 항목도 흥미롭다.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은 13명이 식사를 하게 되면 비서를 참석시켜 13이라는 숫자를 피했고, 사업가 헨리 포드는 13일의 금요일에는 일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1만 2000원. 김종면기자 jmkim@seoul.co.kr
  • [통합교과논술 대비 이렇게] (4) 교과서로 시작하자

    [통합교과논술 대비 이렇게] (4) 교과서로 시작하자

    대학들은 공통적으로 교과서에 바탕을 둔 논술 출제를 지향하고 있다. 교과서 내용과 개념을 출제의 기본적인 틀로 삼는 것은 앞으로 시행될 통합논술이 또 다른 입시 부담이 된다는 지적과, 실제 고교 교육과정의 현실과 괴리되어 있다는 비판을 아울러 해소할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이기 때문일 것이다. ●통합논술 기초는 교과서 따라서 통합논술을 준비할 때 가장 우선적으로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이 바로 교과서다. 단, 이 말을 ‘교과서만’ 정독하면 된다는 차원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각 개별 교과서의 주요 개념과 내용을 연계시킬 수 있는 공통적인 개념과 적용의 학습법이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사회 교과서의 ‘분배’의 정의와 윤리 교과서의 ‘도덕적 정당성’의 개념이 서로 통합 연계될 수 있고, 이와 관련한 수리적 연산과 원리가 동원될 수 있을 것이다. 교과서의 주요 개념을 토대로 상호 연계와 적용의 통합적 사고를 더욱 유연성 있게 구사하는 것이 통합 논술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통합 논술에서의 교과서 활용 사례 교과서 내용과 개념을 근간으로 통합논술이 출제된다는 것을 단순한 사실로만 받아들이고 교과서 활용법을 모른다면 실제로는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통합논술이 지향하고 있는 ‘교과서 중심 논술’의 실상을 정확하게 파악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교과서를 근간으로’ 삼는 통합 논술의 의미는 우선 교과서의 내용과 기본 개념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몇 가지의 경우로 나눠 볼 수 있다.1) 교과서의 지문을 발췌하여 그대로 논술 제시문으로 활용하는 경우(2008 서울대 1차 예시 문항),2) 교과서의 주요 개념과 내용을 활용, 적용하는 경우(2008 고려대 예시문항), 3) 각 교과목의 내용을 통합하고 해체하여 하나의 논의 속에 포괄시켜 출제하는 경우(2008 연세대 예시문항)가 그것이다. 이 중에서 특히 서울대 예시문항의 경우는 사회, 도덕, 문학 교과서의 내용을 그대로 제시문으로 활용하고, 그것을 토대로 기본적인 학습 내용과 개념을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학교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2008 통합 논술은 일정한 기준 없이 광범위한 내용을 다뤘던 과거 고전 논술과 달리, 개별 교과서의 내용과 기본 개념을 기준으로 여러 자료들을 동원하여 분석하고 해석하는 경향을 뚜렷이 보여줄 것으로 예상된다. ●기본개념부터 철저히 익혀야 2008 통합논술의 특성은 과거 고전 논술이나 본고사와의 차이를 통해 이해하는 것이 좋다.1990년대 고전 논술이 동서양 고전의 내용을 토대로 광범위한 논제를 다뤘다면, 통합논술은 고교 교육과정을 절대적으로 존중하되, 교과별 연계와 통합을 통해 기본적인 개념과 내용을 새롭고 다양한 자료에 적용하기를 요구한다는 점에서 다르다. 따라서 2008 통합 논술에 가장 잘 대비하기 위해서는 우선 사회, 도덕, 문학, 수학과 같은 교과서의 기본 개념과 내용을 철저히 익혀야만 한다. 교과의 기본적 개념과 내용이 통합 논술에서 본격적으로 활용되는 것은 확실하기 때문이다. 또한 통합논술은 과거 본고사와도 다르다. 기존의 본고사는 제시문에 나타난 주제 파악과 해석, 일정한 수리 계산을 요구하는 지식 측정의 차원에 머물렀지만, 통합논술은 교과서의 내용을 개념원리적인 차원에서 능동적으로 응용하고 적용하기를 요구한다. 따라서 교과서에 제시된 기본적인 개념과 내용을 철저히 이해하는 한편 그것을 여러 도표나 자료에 적용해서 활용할 수 있는 방법론과 실제 연습이 필요하다. ●과목간 연계 훈련 필요 통합논술을 준비하는 수험생들은 교과학습을 넘어 몇 가지 훈련을 더 해야 한다. 우선, 각 과목의 주요 내용과 개념을 단원마다 정리해 나가되 과목간에 연계될 수 있는 공통 항목들을 재정리할 수 있는 통합적 개념과 사고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를테면 문학+역사, 과학+예술, 수학+생물, 종교+과학 등 다양한 조합과 연계를 살필 수 있어야 한다. 관련없어 보이는 과학적 탐구와 예술 활동의 공통점, 수리적 사고와 인문학적 상상력, 역사의 과학성과 문학성 등 상호 경계를 넘나들면서 공유할 수 있는 공통 항목과 개념을 발견해 낼 수 있어야 한다. ●기존 논리와 다른 각도 분석력 중요 통합논술을 제대로 준비하기 위해서는 배경지식적 차원에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들보다는 미시적으로 각종 자료를 통해 도출해 낼 수 있는 자료 해석에 대한 안목도 길러야 한다. 어떤 전제 없이 자료만으로도 구체적인 결론을 도출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런 점에서 도식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기존의 논의들은 참조의 대상일 뿐 실제로는 큰 영향력이 없고, 오히려 기존의 논의와는 다른 각도에서 자료들을 살필 수 있는 분석력이 중요하다. 따라서 교과서의 기본적인 개념과 내용을 기준으로, 독서와 자료 분석력에 관한 실전 연습이 더욱 필요하다. 무엇보다 교과서의 주요 개념과 내용의 통합적 적용을 가장 손쉽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수험생 스스로가 각 교과의 매 장마다 수록된 학습활동의 영역을 유심히 살펴보는 것이다. 교과서에는 각 과목의 해당 단원마다 심화학습이 소개되어 있다. 그 속에 단원의 핵심내용이 농축되어 있기 때문에 그에 따른 학습 활동을 꼼꼼히 해 나가면 통합교과 논술의 예상문제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이성권 메가스터디 언어/논술 강사
  • [문화마당] 인문학의 밭과 시장/황현산 문학평론가·고려대 불문과 교수

    한 대학의 교수들이 인문학 선언을 하고, 전국 대학의 인문학 교수들이 협력하여 인문학 주간이라는 이름으로 특별한 행사를 했던 것이 한 달 전의 일이다. 그래서 제법 세간의 눈길을 끌기도 했지만, 이런 일이 늘 그렇듯이 그 관심이 오래 지속될 것 같지는 않다. 게다가 ‘위기가 있다면 그것은 인문학의 위기가 아니라 인문학자들의 위기다.’라는 말이 뒤따라 튀어나와 이 일에 관계한 사람들의 뒤통수를 때리기도 했다. 아마도 이 말은 ‘너희 인문학자들이 해놓은 일이 무엇이냐.’라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을 터인데, 나 같이 인문학에 발 딛고 있는 사람의 처지에서는 적잖이 원망스러운 말이다. 짧게 말한다면 우리의 인문학자들이 울타리나 지키면서 놀고 있는 것은 아니며, 또 그렇게 처신할 수 있는 정황도 아니다. 인문학이 세상의 직접적인 관심에서 멀어지고 우수한 신진 인력들이 몸담을 수 있는 자리가 줄어든다고 해서, 인문학이 감당해야 할 영역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어서 인문학자 개인들이 떠맡아 책임져야 할 일은 그만큼 더 많아진다. 세간에서 흔히 말하듯 너덜거리는 강의 노트 하나로 10년,20년을 버티는 교수를 나는 본 적이 없다. 오히려 공부를 성실하게 부지런히 하는 사람일수록 표가 안 나는 일만 하게 되는 경우가 없지 않은 것이 이 학문의 성격이기도 해서, 세상에서 잊히고 스스로도 사기가 꺾인 나머지 자신의 일과 삶을 더듬어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같은 소설이라도 쓰고 싶은 심정이라고 고백하는 동료들을 이따금 만난다. 그렇다고 세상과 그 시장을 무턱대고 원망할 수는 없다. 역사적으로 본다면 시장과 시장의 욕망이야말로 인문학이 온갖 억압을 벗고 활동할 수 있는 터전이었고 그 발흥을 도운 동력이었다. 역사를 들먹일 것까지도 없다. 이제 그 시장이 아무리 왜곡되어 있다고는 해도, 세상과 사람을 이해하는 일이 인문학의 임무일진대, 인간들이 저마다 운명을 걸고 있는 그 시장에 대한 성찰의 책임을 어느 다른 손에 떠맡길 수는 없다. 게다가 우리의 인문학 시장은 넓으며, 그 시장을 통해 우리가 소비하는 인문학의 양은 적지 않다. 천만명의 관객 동원이 다반사로 되어버린 우리의 영화도, 동남아의 안방 깊숙이 파고들어간 우리의 방송 드라마도 그 배후에는 어떤 수준의 것이건 인문학이 있다. 각종 기록 영상물들은 말할 것도 없고, 단발성 화장품 광고들까지도 일정한 양의 학문과 예술의 성과를 소비한다. 누구는 활자의 시대가 저물었다고 말하지만, 각종 출판물을 통해서건 인터넷의 게시문과 댓글을 통해서건 우리 시대만큼 문자를 대량으로 소비하는 시대는 일찍이 없었다. 인문학을 요구하고, 인문학이 충족시키고 개선시켜야 할 자리는 어느 시대보다도 많다. 문제는 인문학 소비 시장의 확장과 흥왕이 그 생산자들의 힘을 북돋워주지 못한다는 데에 있다. 이는 마치 시장의 배추 값이 천정부지로 솟아올라도 밭에서 배추를 수확하는 농부는 그 생산비도 채 건지지 못하는 경우와도 같다. 예를 들자면 이렇다. 어느 명망 있는 번역가의 번역에 수많은 오류가 있다고 누군가 지적하면 일시에 사람들의 눈길이 쏠린다. 그러나 전문적인 수준에서 번역의 문체와 수사를 분석하고 그 윤리성과 인문학적 의의를 논의하는 연구와 연구자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그의 연구는 온갖 우회로를 거쳐 수많은 번역 출판물에 이용되고, 그래서 한 권이라도 번역서를 읽은 사람은 그 혜택을 입기 마련이지만, 그 연구의 과정과 환경은 늘 사회의 관심 밖에 있다. 그래서 번역에 관한 논의는 오역이나 트집 잡는 원시적 수준에 머무르고 만다. 관심 밖의 연구에는 사회적 투자도 물론 없다. 이 지식 유통구조를 고칠 수 있는 길은 멀다. 그러나 소비시장의 사회적 투자를 기다리기 전에 생산자들이 제 생산품이 어떻게 소비되어 있는가를 먼저 살피는 일이 그 개선의 첫걸음인 것은 분명하다. 황현산 문학평론가·고려대 불문과 교수
  • [열린세상] 인문학과 초가을/ 이덕연 연세대 헌법학 교수

    ‘혁업불이´(革業不二), 과천 정부종합청사의 복도 게시판에서 본 표어다. 문법에 맞는 표현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발음부터 뭔가 편하지 못하다. 지나치게 급하고 격하게 다그치는 듯한 느낌이 마뜩하지 않다. 궁리 끝에 표어를 만들고 벽에 붙인 사람들에게는 미안한 얘기지만, 중앙행정기관의 품격을 느끼기에는 너무 멋과 맛이 없다. 커다란 성냥갑 세워 놓은 듯한 청사의 모양새만큼이나 인문학적 상상력과는 거리가 멀다. 혁신이 자발적인 참여와 자기계발을 통해 지속적으로 실천되기 위해서는 치열함과 함께 부드러움과 여유가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 단호하기보다는 오히려 부산하기만 한 듯하고, 심중(深重)과 겸손보다는 경솔과 오만한 과시만이 두드러져 보인다. 모든 사물이 다 그러하지만, 특히 중대한 것을 새롭게 바꾸는 것은 우선 멈추어 서서 스스로를 조용히 돌아보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닌가? 신동엽 시인이 “덜 여문 사람은 익어가는 때, 익은 사람은 서러워하는 때’라고 한 ‘초가을’에 고려대 인문학 교수들의 ‘인문학선언’에 이어서 전국의 인문대 학장들이 모여서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그들이 인문학 위기의 한 근원으로 지적한 ‘무차별적인 시장’에서 기대한 만큼의 반향은 불러일으키지 못하였지만, 적어도 계절에 어울리는 이런저런 인문학적 고민거리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는 효과는 있었다. 법학 전공인 필자의 이 글도 작지만 그에 대한 분명한 증거로 기록될 것으로 기대한다. 그런데 ‘성명서’의 절박한 분위기를 비웃듯이 ‘인문학의 위기가 아니라 인문학자들의 위기가 아닌가?’라는 반문과 함께 발전위원회와 기금을 설치하라는 주문에 대해서는 비아냥거림조차 없지 아니하다. 물론 칠판과 백묵만 있으면 된다(?)는 무모한 계산법에 따른 이른바 ‘문사철’(文史哲) 등 인문전공학과의 과잉공급의 문제는 정책의 실패와 대학경영자의 잘못된 선택의 결과일 뿐이다. 또한 ‘궁이불변’(窮而不變)의 소극적인 자세로 통(通)하기를 바라기에는 시장은 냉정하고 약다. 유감이지만 그것이 시장이고, 현실이다. 하지만 이러한 지엽적이고 피상적인 지적들은 도움이 되기는커녕 자칫 문제의 본질을 왜곡하기 쉽다. 환원론적으로 전부가 규정되는 것은 아닐지라도 인문학자의 위기는 상당 부분 인문학의 위기이고, 인문학의 위기는 전체 학문과 예술의 위기로 이어질 수밖에 없고, 결국 ‘좋은 삶’의 가치와 희망을 창출, 교환하고, 교환을 통해 확대재생산하는 과정인 문화의 실종을 피할 수 없게 만든다. 우리가 직면하고 결단해야 할 것은 보다 근본적인 모순이고, 큰 문제다.‘과기산’(科技産)복합체의 본능과 계략에 의해서 거의 장악되어 버린 험한 세상과 세계화의 거친 물결을 넘어서 이상과 현실 사이의 계곡에 다리를 놓는 과제다. 이상을 외면하는 맹목적인 현실과 현실을 무시하는 허망한 이상이 선택의 대안이 될 수 없다면, 물질과 정신, 학문과 예술 및 종교, 과학과 인문학도 마찬가지다. 하나(一者) 속의 여럿(多者)이 같지만 다르고, 구별되지만 분리되어 있지는 않고, 연결되지만 서로 우열을 다투지 않는 상생과 조화의 통합학문, 즉 ‘문화과학’만이 유일한 길이고 답이다. 과학 중심의 ‘학문통합’(consilience)의 가능성과 필연성을 주장하는 에드워드 윌슨에 대하여 웬델 베리는 ‘삶은 기적’이라는 믿음을 갖고 되묻는다.“만일 우리가 ‘우주의 진정한 낯설음’을 파악하고도 농사짓는 법을 잊어 먹는다면 얻는 것이 무엇인가?” 그렇다! 성운의 존재법칙을 알아낸들 ‘별을 노래하는 마음’이 없고,‘별이 바람에 스치우는 소리’를 듣고 보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혁업불이’에 대한 공연한 시비도,‘인문학 성명서’에 대한 쓸데없는 되새김질도 딱히 이유는 없지만 대충 용서가 될 것으로 여겨지는 차분하고 넉넉한 인문의 계절, 가을이라 한번 해 본거다. 이덕연 연세대 헌법학 교수
  • 지혜·울림 가득한 문화칼럼

    “정치지도자는 국민의 원형적인 정서를 완전히 외면해서도 안되겠지만, 그것에 함몰되거나 끌려다녀서도 안된다. 대중의 원시적 정서는 국가를 관리하는 정치적 지혜와 결코 일치할 수 없다. 우리는 노 대통령이 눈물을 흘리는 감상적인 지도자가 아니라, 마하트마 간디가 말했던 것처럼 ‘다른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지도자’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2003년 이태동(67) 서강대 명예교수가 쓴 ‘대통령의 눈물’이란 칼럼의 한 대목이다.영문학자이자 문학비평가로 평생을 문학과 씨름해온 그이지만 그의 정치 칼럼은 어느 대논객의 현장정치평보다 큰 울림이 있다. 문화 칼럼은 그의 ‘전공’. 최근 출간된 ‘대통령의 눈물’(이태동 지음, 문예출판사 펴냄)에는 저자가 지난 10년간 각종 매체에 발표한 정치·사회·문화 칼럼 90여편이 실려 있다.저자의 글은 결코 만만찮은 인문학적 교양을 바탕에 깔고 있으면서도 좀처럼 현학의 기미를 드러내지 않는다. 보기 쉽고 알기 쉽고 읽기 쉽다. 문장삼이(文章三易)의 원칙에 충실하다는 얘기다.1만 2000원.김종면기자 jmkim@seoul.co.kr
  • [옴부즈맨 칼럼] 새 지면 충실한 변화 기대/양승찬 숙명여대 언론학부 교수

    지면의 변화가 많았던 한 주였다. 무엇보다 서울신문의 특화된 분야가 확실히 드러난 지면을 접할 수 있어 반가웠다. 지방분권시대를 맞아 수도권과 지역 독자를 위해 자치행정면을 강화한 것은 서울신문의 강점을 충분히 살릴 수 있는 아주 좋은 변화다. 자치구 소식은 물론 구의회의 움직임까지 상세히 전달하겠다니 더욱 그렇다. 대부분의 신문들이 중앙정부와 중앙정치의 이슈에 치중하면서 전국적인 영향력의 차원에서 뉴스를 다루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물론 이런 뉴스도 중요하지만 시민의 일상생활과 직접적으로 연결되기 힘든 정치, 사회 이슈는 ‘다른 사람들’의 문제로 인식될 가능성이 높다. 풀뿌리 민주주의의 핵심은 시민 참여이고, 이러한 참여를 독려하고 도울 수 있는 유용한 지역 정보의 제공은 언론의 몫이다. 서울신문이 자치행정면을 앞으로 어떻게 채울지 기대된다. 지난주 인천 계양산 개발 논란과 서울 지하철 8호선 연장과 관련한 이슈 등 실생활과 밀접한 지역 문제를 다룬 것을 보니 변화의 가능성이 보인다. 동작구의 자원봉사자들을 다룬 ‘해피콜 주부들’ 기사 역시 우리 주위 사람들이 자치행정에 어떻게 참여하는지를 보여준 중요한 기사였다. 새로 시작한 지면이라 구청장과 구의원을 소개하는 코너를 등장시킨 것은 이해가 간다. 하지만 자치행정면의 구성에서 홍보성 보도자료는 늘 경계하기 바란다. 지방자치단체들에서 제공하는 중요한 행정정보의 전달과, 이들에 대한 감시와 평가 역시 균형을 이루는 지면이 되었으면 좋겠다. 지면변화에서 아쉬운 부분도 있다. 타블로이드 40면으로 제작되던 주말매거진 ‘We’를 신문판형으로 발행하면서 건강, 레저, 연예, 생활에 대한 정보의 고급화를 추구한 개편에 대한 평가는 일단 유보하고 싶다. 24일 첫 발행에서 레이싱걸을 밀착 취재한 내용을 커버스토리로 다루면서 인터넷 여기저기에서 과잉 등장하는 사진을 전면에 걸쳐 게재한 것은 주말매거진의 취지가 무엇인지 고민하게 한다. 주중 지면에서 연예와 관련한 내용을 자제하고 대중문화 현상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주말매거진에서 가벼운 연예기사를 다룰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정보는 일상의 방송프로그램, 무가 생활정보지, 인터넷 포털사이트 등에서 너무나 쉽게 접할 수 있다. ‘만난다,´ ‘떠난다,´ ‘즐긴다´라는 기획코너를 구분한 것은 재미있고 눈에 띄지만 독자들에게 어떤 새로운 정보를 줄지 의문이 든다. 맛집 소개, 음식, 여행 관련 정보는 즐기고 떠나고 싶은 사람들이 효용 극대화를 위해 인터넷 검색을 통해 너무나 쉽게 찾을 수 있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주말에 독자들이 몸의 웰빙에만 관심이 있다는 고정관념을 버리고 콘텐츠의 고급화를 주말매거진 개편 목표로 삼으면 어떨지.‘아는 것이 힘이다’는 코너에서 고사성어와 외국어 몇 문장을 소개하는 것은 교양정보의 구색을 맞춘 것 같은 느낌이다. 우리의 교양을 높이는 데 진정으로 힘이 되는 콘텐츠를 제공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지난주 서울신문이 기능과 효율이 중시되는 한국사회에서 문화콘텐츠의 보고로 인문학의 중요성을 다룬 바 있다. 독자들의 인문학적 소양을 높여주는 기획물을 주말에 배치하는 것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현재 기획하여 연재하고 있는 ‘종교건축이야기’ ‘한민족 문화유전자를 찾아서’ ‘철학산책’ 등은 일상에 바쁜 주중에는 편하게 접하기 어려울 수 있는, 조금은 긴 호흡의 콘텐츠이다. 하지만 이 연재물들은 서울신문만의 것이고 독자들의 교양을 높일 수 있는 좋은 내용을 담고 있다. 조금 한가한 주말시간에 읽을 수 있도록 개편한 16면에서 특화해 편집하는 것도 생각해 볼 수 있겠다. 양승찬 숙명여대 언론학부 교수
  • [문화콘텐츠 뿌리 인문학] 벽란도 만드는 에이스토리

    [문화콘텐츠 뿌리 인문학] 벽란도 만드는 에이스토리

    최근 준비에 들어간 고려시대 수사극 ‘벽란도’가 관심을 끌고 있다. 단순히 최완규(‘상도’,‘올인’,‘허준’ 등)를 중심으로 스타작가들로 뭉친 드라마제작사 에이스토리가 나서서가 아니다. 계속되고 있는 ‘사극실험’의 리트머스 시험지 같은 드라마이기 때문이다.‘벽란도’ 기획 자체가 인문학과 콘텐츠의 결합을 극명하게 드러낸 작업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수사물 제작은 쉽지 않다. 정밀하게 묘사하려면 과학이나 의학지식은 물론, 심리에도 정통해야 한다. 국내 영화나 드라마의 법정물이 할리우드 흉내내기에 그치는 것도 이런 어려움 때문이다. 그럼에도 에이스토리가 수사물을, 그것도 고려시대를 배경으로 만들겠다고 나설 수 있었던 것은 조선시대 수사기록 ‘무원록(無寃錄)’이 있어서다. 말 그대로 ‘억울한 원한을 없도록 하라.’는 의미의 무원록은 각종 살인사건에 대한 수사경험을 기록해둔 책. 요즘으로 치면 일종의 법의학서인 셈이다. 이를 근거로 인기 수사드라마 ‘CSI’와 의학드라마 ‘ER’를 뛰어넘는, 고려시대 ‘감검청’의 활약을 그린 드라마를 선보이겠다는 것이다. ‘무원록’은 그러나 그동안 역사가들의 관심을 끌지 못한, 묻힌 자료였다. 정치사·왕조사 위주로 연구가 이뤄지다보니 살인사건 기록은 큰 의미가 없었던 것. 그러다 김호 경인교대 교수가 이 자료에 주목, 연구·번역하면서 수사물 제작에 목말라하던 작가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세세하게 기록된 이 자료가 나오자 이를 토대로 영화 ‘혈의 누’, 드라마 ‘별순검’이 만들어졌다.‘혈의 누’는 영화로서는 위험부담이 있는 사극추리장르임에도 흥행에 성공했고,‘별순검’은 시청률이 높진 않았지만 일부 드라마 팬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끌어냈다. 사실성 때문이다.‘벽란도’는 바로 그런 바탕 위에 서 있다. 다만 ‘재미’를 위한 드라마적 배려는 있다. 드라마의 시공간적인 배경을 조선에서 고려시대 벽란도로 옮긴 것이 그 한 예다. 이상백 에이스토리 대표는 “당나라·거란·여진·일본은 물론, 동남아 상인과 멀리 아랍 상인들까지 드나들었던 벽란도를 배경으로 삼으면 다양한 이야기를 뽑아낼 수 있을 뿐 아니라, 잠재적인 수출시장인 이들 지역에 친숙한 느낌을 줄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이외에도 ‘벽란도’의 장점은 여러가지다. 우선 수사물에 대한 꾸준한 수요를 들 수 있다.‘범죄’라는 극한상황은 그 자체가 가장 드라마틱하고 인간적이다. 그것은 ‘수사반장’에서 ‘CSI’에 이르기까지 많은 영화나 드라마가 첩보물 형식을 띠는 이유이기도 하다. 또 스토리에서 승부가 갈리기 때문에 제작비 부담이 적다. 대작으로 찍으면 대규모 군중신이나 전쟁신이 빠질 수 없다. 그러나 추리물에는 이런 장면들이 필요없다. 그런 만큼 드라마만 성공적으로 이뤄진다면, 인문학적 연구성과가 구체적인 콘텐츠 사업과 완벽하게 연결된 하나의 모범사례로 기록될 만하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나는 왜 그리고’ 펴낸 철학인생 50년 박이문 교수

    ‘나는 왜 그리고’ 펴낸 철학인생 50년 박이문 교수

    “무슨 할 말이 그렇게 많으십니까.” 대뜸 물어본 질문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노학자는 아직도 계속 책을 내고 있다. 쏟아낸다는 표현이 어울릴지도 모른다. 그것도 공부하는 분야가 속된 말로 ‘잘 안 팔린다.’는 철학인데도. 일흔여섯이 적지 않은 나이라고는 하지만, 대학강단에 선 지 50여년 만에 써낸 책이 대략 헤아려도 50여권이다. 한해에 1권꼴이다. 여기다 한권을 더 얹었다.‘나는 왜 그리고 어떻게 철학을 했나.’(삼인 펴냄)이다. 그렇게 많은 말을 했는데도, 마치 “아∼ 이제야 뭔가 알고 이야기해줄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하고 싶은 듯 하다. 바로 원로 철학자 박이문 선생이다. 이제 연세대에 출강하는 일 말고는 다른 일이 없다. 호젓하니 책만 볼 수 있어 너무 행복하단다. 안 움직이고 책만 보니 편하다는 얘기가 아니다. 노안 때문에 안경도 모자라 돋보기까지 동원해야 할 판이니 독서는 중노동일 터이다. 그럼에도 책을 보는 것이, 너무도 행복하고 즐겁단다. 요즘 어떤 책을 읽느냐고 묻자 ‘통섭’이나 ‘현대 물리학이 발견한 창조주’처럼 인문학적 주제에 대해 생물학자나 물리학자들이 쓴 책들 제목이 줄줄줄 이어진다. 이런 책을 고른 이유는 내후년쯤 책 한권 더 낼 생각이어서다.“‘지(知)’란 무엇인지,‘존재’란 무엇인지,‘선악’은 무엇인지, 이런 개념들에 대해 제 나름대로 생각했었던 것을 정리해볼 참입니다.” 50여년에 걸친 지적 여정의 총결산인 셈이다. 이렇게 얘기하면 과외 안하고 학교수업에만 충실했다는 수석합격생의 모범답안 같다. 그러나 박이문 선생은 차원이 다르다. 그가 걸어온 ‘삶’ 자체가 증거다. 그리 궁핍하지 않던 선비 집안 6남매의 막내로 태어나 일본 유학생이던 큰형 덕에 일찍 문학과 철학에 눈떴다. 중학생 때 목표가 이미 사상가였다. 그 뒤 단 한번도 다른 길을 쳐다본 적 없다. 불문과 교수라는 안정적인 직장도 버리고 철학공부를 위해 프랑스로, 미국으로 떠돈 생활도 그렇게 시작됐다. 철학하는 데 짐이 될까봐 결혼도 안하다 쉰셋에야 가정을 꾸렸다. 운전에도 취미가 없어 일산에서 인터뷰가 있던 서울까지 버스 타고 왔다. 취미는 오직 공부였다. 오죽했으면 2000년에 낸 책 제목이 ‘나의 출가’였겠나.“지금 생각하면 얼른 결혼하고 아이 낳는 게 최고인데, 그 땐 왜 그렇게 결연했는지 몰라. 허허허….” 그런 만큼 그의 책은 특징이 뚜렷하다.‘나는,’이라는 주어를 절대 생략하지 않는다. 똑 부러지게 ‘내 생각은 이렇다.’고 말한다. 그러다보니 어렵거나 딱딱할 것이라는 선입관을 금세 무너뜨린다. 자기 생각을 적다보니 개념이나 문헌자료가 줄줄 나열되는 다른 책과 다르다. 그래서 초판만 나가도 다행이라는 인문서 가운데 반응이 제법 좋다.“제 생각을 얘기하니까 읽으시는 분들도 편안하다, 진실되다 그렇게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그의 이름을 널리 떨쳤던 1980년작 ‘노장사상’도 마찬가지다.“서양철학을 공부했기 때문에 관심이 없었죠. 그런데 학교에서 강의하라고 해 어쩔 수 없이 들여다봤는데, 한 10여년 강의하니까 요게 재미가 있더란 말씀이죠. 그래서 10여년 동안 강의 준비했던 자료를 참고 삼아 두세달 만에 쓴 책이에요.” 이 책은 14쇄를 넘기다 최근 재개정판까지 냈다. 지난해에 낸 ‘논어의 논리’도 그렇게 나온 책이다. 후학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리자, 손을 계속 내젓더니 한마디를 남긴다.“자주적으로 학문하세요. 국수주의나 민족주의를 말하는 게 아니라, 외국 사상과 문물을 받아들이더라도 내가 이해한 만큼, 또 소화한 만큼만 얘기를 하세요.‘유행’이나 ‘거품’에 휩쓸리면 절대 안됩니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주강현의 관해기(전3권)/주강현 지음

    ‘바다는 크고 깊고 유장하여 동서고금의 야광주 같은 이야기가 많으며, 박람강기(博覽强記)의 절대적 지식량이 요구되는 지구 유일무이의 미지의 공간이다.’ 역사민속학자 주강현의 바다예찬은 유별나지만 논리와 진정성이 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파도나 구경하고 조개나 구워먹다 오는 바다에서 그는 인류의 시원을 찾아내고, 무궁무진한 인문학적 이야기거리를 끄집어낸다. 그가 이번엔 비닷 사람들의 일상의 삶을 다룬 ‘주강현의 관해기’(전3권, 웅진지식하우스 펴냄)를 냈다. 제주의 섬 비양도, 피란민들의 애환이 서린 속초 아바이마을, 은빛 멸치떼의 향연이 펼쳐지는 기장, 원시어법이 살아 있는 삼천포 등 한반도에 면한 세 바다의 생활, 민속, 생태, 역사 등을 종합 탐사한 결과물이다.2004년부터 1년여간 서울신문에 연재했던 내용을 보완해 책으로 엮었다. 저자에 따르면 ‘관해’(觀海)란 ‘바다 읽기’ ‘바다 가로지르기’다. 바다의 모든 것을 총체적으로 읽을 수 있게 접근한다는 개념이다. 저자는 이런 관점으로 바닷가 구석구석 70여곳을 찾아다녔고, 이를 질박한 글솜씨를 발휘해 인문학적으로 풀어냈다. 각권 1만 3000원. 임창용기자 sdragon@seoul.co.kr
  • 활을 쏘다/김형국 지음

    활을 쏘다/김형국 지음

    “한민족을 일컫는 동이족(東夷族)은 중화(中華) 동쪽에 사는 오랑캐란 뜻이 아닙니다. 이(夷)의 파자(破字)가 큰 대(大)와 활 궁(弓)인 데서 알 수 있듯, 동쪽의 큰 활잡이 곧 대궁인(大弓人)이란 뜻이지요. 우리 민족은 그만큼 활을 잘 쏘았습니다.” 서울대 환경대학원 김형국(65) 교수가 우리 활의 역사와 문화를 살핀 ‘활을 쏘다­고요함의 동학(動學), 국궁’(효형출판 펴냄)이란 책을 펴냈다. ●美·日 긴활과 달리 힘과 거리 뛰어나 ‘한국공간구조론’등 전공저술과는 별개로 ‘장욱진 : 모더니스트 민화장’같은 예술책도 여러 권 펴낼 만큼 저자의 인문학적 관심은 폭이 넓다. 이번에는 ‘국궁(國弓)문화 찾기’라는 과제에 도전했다. 저자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근대 국궁의 요람’인 인왕산 중턱의 활터 황학정에 오르는 열성 궁사.“쏠수록 묘미가 있고 아무리 배워도 끝이 없어 글로 활을 더 배우고자 한다.”는 말에서 활에 대한 남다른 열정이 묻어난다. 우리 활은 대나무와 쇠뿔 등 재료가 다양하고 길이가 짧으며 굽이가 많은 것이 특징이다. 나무 재료만 사용하고 반달처럼 둥그스름해 굽이가 하나뿐인 일본이나 북미의 활과 비교해 화살을 쏘아내는 힘과 거리가 훨씬 뛰어나다. 활 자체도 우수하지만 우리 민족은 무엇보다 활을 잘 쏘았다. 조선 왕조를 세운 태조 이성계나 시서화 삼절의 문예부흥군주 정조는 가히 신궁(神弓)이었다. 이성계의 활솜씨에 관해서는 여러 일화가 전설처럼 전한다. 왜구와 싸울 때 깃을 단 화살로 왜적의 왼쪽 눈만 쏘아 맞혔다거가, 송도 성문 밖에서 사냥할 때 꿩을 날아가게 한 뒤 고도리살(화살촉을 피나무로 둥글고 뭉뚝하게 만든 나무 화살)로 쏘아 잡았다거나 하는 식이다. ●이성계·정조대왕은 신궁이었다 정조의 활솜씨 또한 입신의 경지였다.50대의 화살을 쏘면 49대를 명중시켰다니 백발백중인 셈이다. 그런데 정조가 50대를 모두 맞혔다는 기록은 없다. 왜 그럴까. 정조는 마지막 화살은 언제나 허공으로 날려버리거나 풀숲을 향해 쏘았다. 그리고 그때마다 이런 말을 덧붙였다고 한다.“활쏘기는 참으로 군자의 경쟁이니, 군자는 남보다 더 앞서려 하지 않으며 사물을 모두 차지하는 것도 기필(期必)하지 않는다.” 요컨대 정조에게 활쏘기는 기술이 아니라 예술이요, 깨달음의 길이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저자는 활쏘기는 심사(心射), 즉 마음으로 쏘는 것임을 강조한다. 활이 갖는 궁극적인 의미는 개인의 구원에서 찾을 수 있다. 한말의 고승 경허 스님은 자신이 머물던 충남 서산 연암산 천장사 법당에 ‘염궁문(念弓門)’이라 적어 놓았다.‘생각의 화살을 쏘는 곳’이란 뜻이다. 번뇌를 화살에 실어 날려버리겠다는 염원의 표현이다.“활쏘기는 각각 자기의 과녁을 쏘는 것”이라는 ‘예기(禮記)’의 구절도 그같은 심신 수행, 마음 다스림의 중요성을 지적한 것이다. ●국궁인구 고작 2만명에 불과 저자는 ‘고요함의 동학’이야말로 국궁의 핵심이라고 말한다. 활을 당기는 팔은 동(動)이고, 땅을 버티고 선 두 다리는 정(靜)이다. 또 날아가는 화살은 동이고 멀리 우뚝 서 있는 과녁은 정이다. 움직임과 고요함이 오롯이 하나가 된 경지. 그래서 활쏘기는 ‘정중동의 예술’이다. 이 책은 고대 중국의 병서와 조선시대 역사문헌 등을 통해 활의 역사를 꼼꼼히 읽어낸다. 아울러 활쏘기 장비, 활터의 모습, 활쏘기 대회 등 우리 활문화 전반을 두루 살핀다. 조선시대 활터 풍경을 엿볼 수 있는 ‘탐라순력도첩’, 영조·정조 임금이 활을 쏘는 모습을 그린 ‘어사도(御射圖)’, 단원 김홍도의 ‘활쏘기와 활 얹기’등 활과 관련된 옛 그림은 물론 통영 한산정에 관한 이야기와 사진도 만날 수 있다. 수군통제영이 있던 한산도의 활터 한산정은 충무공 이순신이 바다를 사이에 두고 활을 쏘도록 만든 곳으로, 배에서 배로 활을 쏘아야 하는 수군 병사들에게 거리감각을 익히게 하려는 배려가 돋보인다. 우리 민족은 활에 관한 한 어느 민족보다 뛰어난 재주와 역사를 지닌 민족이다. 하지만 오늘날 국궁 인구는 배우다 그만둔 휴궁(休弓) 인구까지 합해 고작 2만명에 불과하다. 활쏘는 법을 일러주는 교본류의 실용서 몇권 정도 나와 있는 것이 우리 현실이기에, 국궁문화 전반을 다룬 이 책은 더욱 값어치가 있다.1만 5000원. 김종면기자 jmkim@seoul.co.kr
  • 광화문 문화포럼 아침공론

    광화문 문화포럼(회장 차범석 전 대한민국 예술원 원장)은 8일 오전 7시30분 세종문화회관 세종홀 소연회장에서 정현기 연세대 교수를 초청하여 ‘인문학적 물음과 우리말로 학문하기’를 주제로 아침공론을 갖는다.
  •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당선작] ‘유령’ 작가의 진실/조연정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당선작] ‘유령’ 작가의 진실/조연정

    삶은 살아가는 것이지, 이야기하는 게 아니거든 -‘부넝숴(不能說)’ 중에서 ●편집자주:원고의 각주는 편의상 모두 본문 안에 삽입했습니다. 1. 형식에서 정서로, 혹은 인식에서 믿음으로 김연수는 똑똑하고 성실한 작가다. 이것은 물론 그의 작품이 증명해 주는 바다. 이미 첫 장편 ‘7번 국도’의 하이퍼텍스트적 글쓰기에서 그것이 예고되었고,‘굳빠이, 이상’에서는 그의 ‘좌뇌’가 승한 글쓰기가 과도하다 싶을 만치 절정을 이뤘으며, 최근의 ‘나는 유령작가입니다’에서는 논픽션적 자료의 편집으로 픽션을 제작하는 방식의 글쓰기(이에 대해서는 김연수 심진경 류보선의 좌담 ‘작가-되기, 혹은 사라진 매개자 찾기’, 문학동네 2005년 가을호 참고)가 일가를 이뤘다고 할 만하다. 새로운 소재와 생생한 묘사라는 ‘발로 쓰는’ 글쓰기가 유행하는 가운데, 김연수는 그 나름 ‘읽고 쓰는’ 글쓰기의 장을 적극적으로 열고 있다고나 할까? 예컨대,‘공야장 도서관 음모 사건’의 보르헤스식 모티프에서 ‘연애인 것을 깨닫자마자’에 나오는 경성제대 이어철 박사의 ‘냉수를 마셔라’라는 자료에 이르기까지, 또 휘트먼의 시에서 한시에 이르기까지 그의 레퍼런스는 실로 화려하다. 때문에 그의 작품은 비록 대중적이지 않을지는 몰라도 읽을 만하다. 읽을 만하다는 것은 그 자료적 풍부함과 형식적 공들임이 해석의 욕망을 자극한다는 말이다. 비슷한 시기에 등단한 김영하나 백민석이 “이런 이야기를 할 수도 있다.”라는 소재적 새로움을 문단에 던져줄 때, 김연수는 “이런 식으로도 이야기할 수 있다”라는 형식적 새로움을 마련해 주고 있다. 그는 자칭 “현학적인 문학근본주의자”인 것이다. 더불어 김연수는 시대적 상처와 유관한 작가다. 첫 단편집 ‘스무 살’의 ‘구국의 꽃, 성승경’에서 투신하는 학생 운동가라든지,‘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의 ‘첫사랑’에서 수배자의 고백이라든지,‘그 상처가 칼날의 생김새를 닮듯’의 배경이 되는 광주항쟁과 지역감정의 문제라든지, 이처럼 80년대적 상황과 사회적 투쟁의 상처는 89학번 김연수에 의해 소설 안으로 계속해서 호출된다.“세대의식과 소설가적 자의식을 맞세우며 자신의 소설적 지평을 지속적으로 갱신했다.”는 평가는 그래서 나온 것이다. 물론 김연수가 등단했던 1990년도는 집단의식보다는 ‘나’가 문단의 화두였다. 한편에서는 윤대녕, 신경숙이 ‘나’를 돌아보며 내면으로 침잠할 때, 다른 한편에서는 김영하가 그 ‘나’를 파괴하겠다며 나르시스트의 ‘거울’을 부수고 있었고, 백민석의 주인공들이 엽기적인 행각을 서슴지 않았으며, 여러 문화적 코드들이 혼종된 작품들도 마구 쏟아져 나왔다. 억눌렸(렀)던 개인의 욕망이 불거져 나오기 시작했고, 왜곡된 방식으로 사회의 모순된 구조가 드러났으며, 그 와중에 대사회적인 투쟁이나 고민은 이미 유행지난 옷가지처럼 옷장 깊숙이 처박힌 애물단지가 되어버렸다. 그래도 김연수의 주인공들은, 학생운동의 과잉진압으로 죽은 ‘성승경’의 동생 ‘승진’이 죽은 누나의 원피스를 입고 유령처럼 밤거리를 헤매듯, 그 유행지난 옷가지들을 자꾸 꺼내서 입어본다. 그는 자칭 “80년대에 가까운 작가”이기도 한 것이다. 그렇지만 그 옷은 역시 유행에 걸맞지 않는 터라, 더불어 이 부채의식이라 할 만한 것에 짓눌려 있기에 작가의 상상력의 궤적이 너무나 크고 그의 지적 발랄함이 너무나 경쾌한지라 “김연수에게 문학적 글쓰기는, 자신의 진실을 고통스럽게 토로하는 것보다는 상상력을 통해 세계를 재구성하는 쪽에 훨씬 더 가까이 있다.”(서영채,‘유토피아 없이 사는 법’, 문학동네 2002년봄,p328)라는 지적이 폭넓은 공감을 얻기도 했다. 김연수 식 예의 그 경쾌한 글쓰기는 ‘사랑이라니, 선영아’라는 재치있는 연애소설에서 그 빛을 발하고, 결국 ‘나는 유령작가입니다’에서 편집자, 주석가, 번역가로서의 그의 재구성 능력이 우연과 필연, 진실과 거짓에 관한 통찰까지 얻음으로써 한층 업그레이드된다. 이렇게 본다면 김연수에게 80년대적 상황 혹은 세대 감각, 그리고 그의 작품들을 관통하고 있는 다소 우울한 정서의 문제는 작가가 초지일관하고 있는 형식적 구성력에의 관심, 또 그에 값하는 작가의 능력에 의해 묻혀 버리게 된다. 따라서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에서 징후적으로 등장하는 시대적 배경들과 그 소설집 전체를 관통하는 고독과 비애의 정서는 “이 소설만큼은 연필로 쓰기로 결심했다.”라는 작가의 고백과 함께, 김연수의 작품 목록에서 특이한 것으로서만 간주될 위험을 안고 있는 것이다. 이 작품집의 독특함 혹은 이질성에 대한 평가는 뒤이어 나온 ‘유령작가’의 형식적 강렬함에서 더 힘을 얻고 있는 듯하다. 그런데 최근 장편 연재를 시작한 ‘모두인 동시에 하나인’(문학동네,2005년 겨울호)에서 김연수는 다시 80년대적 상황을 배경으로 끌고 오면서 전후 한국 현대사를 거론하고, 그러면서 인간의 문제에 집중하고 있어서 흥미롭다. 그렇다면 김연수는 어디로 가려는 것일까? 이쯤 되면, 김연수의 ‘변전’(김형중),‘기획력’(심진경), 혹은 ‘문턱 넘기’(김연수)는 여전히 한쪽에는 세대의식, 한쪽에는 작가의식을 놓고 그 양극 사이를 진동하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아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연수 소설에서 ‘모두인 동시에 하나인’ 것은 무엇일까? 이 글은 이러한 질문에서 시작한다. 여기서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김연수는 애초에 인간에 대한 관심이 지대한 작가라는 것이다. 그가 유지해 왔고 벌써 정점에 도달한 듯 보이는 포스트모던적 글쓰기나 불가지론적인 사고에는 세계에 대한 냉철한 인식의 차원을 넘어서는 그 무엇이 있다. 그의 세계인식이 “그러므로 진실은 없다.”는 냉소나 허무주의가 되지 않고,“진실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곧바로 이어지는 것도 바로 인간에 대한 끝없는 관심 때문일 텐데, 그것은 어떤 ‘정서’의 집약을 통해 스며 나오기도 하고,‘의지’ 혹은 ‘믿음’으로 실천되기도 한다.“아프지 말아라, 너무 아파하지 말아라”(‘노란 연등 드높이 내걸고’,‘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 문학동네,2003,p.194. 이하 본문에서 이 책을 인용할 경우 1:페이지수)라는 식의 위로와 “나도 어디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버텨보기로 했다”(‘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농담’,‘나는 유령작가입니다´, 창작과 비평사,2005,p.28. 이하 본문에서 이 책을 인용할 경우 2:페이지수)라는 의지 같은 것들이 김연수를 해체적 허무주의자라는 평가로부터 지켜낸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것은 그 한복판에 항상 ‘언어’에 대한 고민이 놓인다는 점이다. 소설집의 제목에 ‘작가’라는 말을 대놓고 쓸 만큼, 또 작가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작품 목록이 다수에 해당할 만큼 그에게 언어의 운용은 중요하다. 김연수 소설의 인물들이 흔히 무엇을 쓰거나 말하거나 읽고 있다는 사실도 그 증거가 된다. 따라서 우리는 그의 언어 수행 행위를 바탕으로 해서, 김연수만의 진정성과 고민의 내용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다음과 같은 질문들에 답하는 과정으로 이 글은 쓰여진다. 그의 형식적 기발함과 재치와 성실성에 묻혀 버린 김연수의 진정성은 무엇이고, 그가 멈추지 않는 질문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는 그 질문을 지금껏 어떻게, 어디까지 해결했나? 2. 기억으로 말할 수 없는 것, 말로 기억할 수 없는 것-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 작가가 그렇듯 ‘나는 유령작가입니다’의 인물들은 끊임없이 말하거나 쓴다. 김병익이 지적했듯,‘나는 유령작가입니다’의 작품들은 이제 무엇에 대해 쓰기 시작하겠다는 말을 먼저 밝히는 것으로 서두를 뗀다.(김병익,‘(해설)말해질 수 없는 삶을 위하여’, 위의 책)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농담’의 ‘나’는 스스로는 인식하지 못한 채 혼잣말을 계속하고, 그의 이혼한 아내는 꿈꾼 것을 이야기하기 좋아하는 사람이다.‘부넝숴’와 ‘이렇게 한낮 속에 서 있다’의 화자는 아예 독자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한편 ‘거짓된 마음의 역사’는 일방적인 편지 형식이며,‘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의 ‘그’는 세상과 단절된 채, 여자 친구의 자살 원인을 알기 위해 ‘소설’을 쓴다. 유서에 자신에 대한 단 한 줄의 언급도 남겨 놓지 않은 여자친구에게 자신의 존재는 도대체 무엇이었고, 그녀가 자신을 사랑하기는 한 것일까라는 처절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 그는 ‘너’의 흔적을 그리고 ‘우리’의 흔적을 더듬는다. 문제는, 그들의 이야기는 여전히 혼잣말이며,“사랑한다고 해서 한 인간의 꿈 속까지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며,“삶은 살아가는 것이지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며, 편지에는 답장이 없다는 것이며, 소설 속의 인과관계 안에서는 어떤 진실도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처럼 그들의 언어는 장애를 지니고 있다. 말은 할수록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은 새였을까, 네즈미’에서처럼 단어 몇 개로밖에 소통할 수 없는 말하기가 더 단호하고 정확하게 들릴 수 있다. 그렇다면 결국 계속해서 말을 하고 글을 쓴다는 것은 허무한 일인가. 그래도, 여하튼, 침묵은 비겁하다. 그래서 인물들은 말해질 수 없는 것을 또 말하고 쓴다. 전작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의 인물들도 그랬다. 그렇지만 그들은 타인과 소통할 수 없음에 대해서는 무신경하다. 아니 그 점에 대해서는 일부러 외면하고 있다고 말하는 편이 정확할 것이다. 왜일까? ‘첫사랑’의 ‘나’는 수배중이다. 자수할 시간이 임박한 상황에서 ‘내’가 마지막으로 하는 일은 첫사랑 ‘정인’에게 편지를 쓰는 일이다. 그 편지 내용이란 건 거창할 게 없다. 삶의 기로에 서 있는 사람에게 역설적으로 아주 사소한 기억들이 떠올려지듯 ‘나’는 어린 시절의 몇 가지 사건을 떠올리고 그에 대해 고해성사를 해나간다. 자신의 관심이 무시당하자 정인의 뺨을 때린 일, 혜지누나에게 화풀이하듯 “남의 잔에 술이나 따르는 더러운 년이 일식은 무슨 일식”(1:114)이냐며 결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준 일 등을 얘기한다. 그런 고백의 사이사이에 “판문점 도끼만행사건”,“데프콘 발동”,“직선제 개헌”과 같은 정치적 사건들을 무심히 끼워 넣는다. 그런데 그 편지는 단지 자신의 지난날을 정리하고 “아름다운 것을 보고 망쳐버리는 동물은 사람뿐이야.”(1:114)라는 뒤늦은 뉘우침을 고백하기 위한 것이었을까? 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누군가에게 이런 얘기를 남겨야만 한다는 초조한 마음”(1:98)에 사로잡혀 편지를 쓰고 있다는 사실이며, 따라서 특별히 그 대상이 ‘정인’이어야 할 것도 없다는 점이다.‘정인’의 주소는 짐 정리를 하다 우연히 발견되었고, 정인에 대한 기억도 따라서 우연히 떠올려 졌을뿐이다. 결국 고백을 들어줘야 할 그 ‘누군가’는 바로 자기 자신이다. 그는 지난날의 기억을 되짚어가며 스스로를 용서하고 위로하는 과정이 필요했을 뿐이다.“너를 다치게 하지도 않으면서 너를 놓치지도 않는 방법을”(1:105) 연구하던 어린 시절의 ‘나’는 이제 “나를 다치게 하지도 않으면서 너를 놓치지도 않는 방법”이 바로 자기 안에 머물기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까닭 없는 슬픔과 한없는 기쁨과 막연한 불안감이 하늘을 떠도는 먼지 알갱이처럼 내 안에서 서로 섞여서 하나의 거대한 원으로 바뀌는 동안, 조금씩 둥근 원이 태양 속으로 밀려들기 시작했지. 눈물 방울처럼 검은 유리판에 새겨진 그 아름다운 노란빛. 언젠가 보았던 너의, 또 혜지누나의 눈물 맺힌 눈동자처럼 한쪽 부분부터 흔들리는 그 둥근 빛. 그러나 결코 부서지거나 망가지지 않을 그 소중한 동그라미. 무한히 수축됐다가 다시 온 우주로 퍼져나가는 그 노란 물결.(1:118) 이 소설집 전체를 관통하는 이미지를 둥근 노란빛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그 이미지는 이 작품에서 특히 일식을 보는 장면에서 두드러진다. 아버지를 따라 나간 시위에서 처음 본 ‘펄럭거리는 노란빛’, 어린 시절 나를 사로잡았던 그 노란빛,‘나’는 그게 꿈이었고,‘사랑’이었다고 정의 내리고 이제 일식을 보면서 자기 자신을 용서한다. 그렇지만 검은 유리판을 통해서만 볼 수 있고, 태양에 의해 완벽하게 가려진 그 노란빛은 꿈도 사랑도 아니다. 어쩌면 꿈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실재(real)를 가리고 있는 환상일지도 모른다. 어둠 속에서 예쁘던 반딧불이 실은 끔찍한 벌레에 다름 아니었듯 말이다. 이렇게 ‘나’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내 안에서 사랑하고 내 안에서 꿈꾸고 그렇게 자신을 스스로 용서하고 있는 것이다. ‘하늘의 끝, 땅의 귀퉁이’에서 ‘게이코’는 어떤가. 이 작품에서도 편지는 중요한 모티프다.‘태식’과 ‘김씨’가 크리스마스 날 케이크 판 돈을 갖고 사라진 게이코를 찾으러 가는 데는, 게이코가 받았던 펜팔 편지가 중요한 단서가 된다. 게이코의 아버지는 월남 가서 실종됐고, 엄마는 자살을 했고, 따라서 그녀는 ‘천애고아’나 다름이 없다. 그래서,‘엄마’라는 단어 대신 ‘모친’이라는 단어를 쓰는,“하루에 열 마디 이상을 하지 않고”,“말한다고 해도 더듬기 일쑤”(1:29)인 ‘게이코/경자’는 ‘서유진’이라는 이름으로 ‘수잔’에게 펜팔 편지를 쓴다. 답장도 받았고 게이코는 얼굴도 모르는 그 누군가와 서로 소통하는 듯 보이지만, 그 답장은 ‘게이코/경자’에게 온 것이 아니며,‘게이코’가 만들어낸 또 다른 나인 ‘유진’에게 온 것일 뿐이다. 그런데 그녀가 편지에 털어놓는 이야기란,“펜팔 가이드”의 예문대로, 자신은 다니지 않는 학교 얘기, 자신은 가본 적 없는 캠핑 얘기일 뿐이다. 학교와 캠핑, 날씨에 대한 안부를 묻는 것 등이 ‘게이코’ 또래가 누려야 할 삶의 전형이어야 하는 것이다. 말더듬이 게이코는 지구의 반대편에 있는 ‘수잔’에게 일지라도 자신이 그런 삶과는 거리가 먼 빵집에서 일하는 말더듬이 고아라는 것을 이야기할 리 없다. 아니 어쩌면 언어의 장벽 때문에 자기의 이야기를 완벽하게 할 수 없다는 이유로 ‘수잔’을 대화 상대로 택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녀가 말을 더듬는다는 것도 말하기 싫다는 무의식적인 의지의 표명일 수 있듯이 말이다. 그렇다면 ‘게이코’는 왜 편지를 쓸까. 그 편지 역시 ‘첫사랑’의 편지처럼 타인에게 자신을 이해받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녀는 빵집에서 여전히 빵처럼 둥근 그 노란 빛 아래서 편지를 쓰면서, 그렇게 자기를 원하는 방식대로 꾸며내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러나 그런 식으로라면 그녀가 빵집 창문에 다 못 쓰고 간 ‘New Year‘는 결코 오지 않을 것이다. 편지를 쓰지만 여전히 자기 안에 머물러 있듯, 게이코의 행방의 단서가 되었던 편지는 당연하게도, 그녀가 간 곳을 정확히 알려주지 않는다. 이처럼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의 인물들에게 쓰는 행위는 적극적으로 소통하지 않으려는 행위이며, 결국 상처를 견디는 방식이다. 그들은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에 있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또 다른 상처가 될 만한 것들을 차단한다. 단지 각자의 기억을 더듬고 각자의 이야기를 할 뿐이다. 이처럼 그들의 쓰기/말하기/읽기는 자기 충족적이다. ‘리기다소나무숲에 갔다가’의 삼촌과 도라꾸 아저씨가 끊임없이 ‘만담’을 하는 것도 ‘나’의 궁금증에 답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 치유의 과정에 가깝다. 카페 여자와 딴 살림을 차렸다가 그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과 자살 소동으로 시내를 떠들썩하게 했던 삼촌은 내 “인간 연구”의 대상이다. 나는 왜 “인간 연구”에 골몰할까? 대학 1학년 때 분신 장면을 목격한 나는 “죽을 게 뻔한 길인 줄 알면서 걸어갈 수밖에 없는 심정”(1:151)이 무엇일까 라는 숭고한 질문에 대해 생각하고, 그런 질문은 삼촌에게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여하튼 삼촌에게 “물망초 여자 진짜로 사랑했습니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즉 내 질문에 대한 답은 애초에 삼촌으로부터 나올 수 없다. 삼촌 역시 ‘나’에게 답하고 있다는 자의식 없이 그저 자신의 이야기를 주저리주저리 떠든다. 그들 사이에는 질문과 답의 형식이 있기는 하지만 진정한 소통은 없다. 삼촌은 넋두리를 늘어놓듯 자신의 로맨스를 말하기 시작하고, 도라꾸 아저씨는 옆에서 “하이고, 조카 듣는데 창피하지도 않나? 뭔 사설이 그래 기나?” 라는 식의 추임새를 넣어 준다. 가히 ‘만담’ 수준이지만, 혼잣말에 가깝다. 이 ‘만담’ 속에서 나는 삼촌을 이해했고, 삼촌은 공감을 얻었을까? 이해는 앎에서 오는 것만은 아니다. 앎이 이해와 치유의 첫 걸음일 수는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하지만 이해받는 것과 이해하는 것이 다 무슨 소용일까? 삼촌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미 그 길은 가지 않은 길이고, 여전히 삼촌은 ‘리기다소나무 숲’ 안에서만, 혹은 자신 안에서만, 지난 날 부르던 로버트 프로스트의 ‘더 로드 낫 테이큰’을 읊조리는 수밖에 없는 것을. 삼촌과 도라꾸 아저씨가 ‘만담’을 하는 동안,‘노란 연등 드높이 내걸고’의 ‘봉우’는 그야말로 시답지 않은 ‘농담’을 만들어 내고 있다. 전국낙서문학회 지역지부에서 ‘나대로’라는 필명으로 활동하는 봉우에게 삶이란 ‘만반의 준비는? 5천. 평생동지는? 12월 22일’ 따위의 말장난으로만 파악할 수 있는 것에 불과했다. 방위 근무를 마치고 돌아와서는 주간지의 독자페이지에 이런저런 낙서를 지어서 투고하는 일에 열을 올리면서 봉우에게 삶은 더더욱 우스꽝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봉우가 만든 최고의 낙서는 바로 ‘인생이란? 픽션에 불과하다’였다. 어두운 산길을 걸어가는 자신의 망상이 빚어낸 허상과 직면하니 그야말로 인생은 픽션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1:192) 뱃 속에서 죽은 아이를 위해, 자신의 상처를 달래기 위해 절에 들어가 아이의 배냇저고리를 만드는 ‘예정’은 “시답지 않은 주간지에 아무 짝에나 소용없는 낙서 따위나 투고하는”(1:197) 봉우에게 세상을 모르는 ‘멍청이’,‘어릿광대’라고 소리친다. 봉우는 그야말로 상처와 대면하는 것이 두려워 ‘나대로’ 그 상처를 외면하고 살았던 것이며, 그 외면의 방식이 바로 ‘낙서질’이었던 것이다.“아기가 죽으면서 봉우의 마음속에서도 뭔가가 죽어나갔고” “그 자리가 아프지 않을 수 없었지만”(1:198) 봉우는 낙서질을 통해 아픔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고 있었다. 그러나 피하는 일이 상책일 수는 없다. 예기치 못하는 순간 자기를 보호하던 그 ‘노란 빛’은 꺼져버릴 수도 있고,‘리기다소나무 숲’에서 넋두리만 늘어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봉우 역시 “자기만은 어두운 산길에 혼자 버려지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믿었지만” 산에서 길을 잃고 처음으로 두려움을 느낀다. 프로이트 식으로 말한다면 봉우의 그 두려움은 세상과 단절된 느낌이고,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한 불괘 감정으로서의 불안(불안과 증상에 대한 논의는,S. 프로이트,‘억압, 증상, 그리고 불안’,‘정신병리학의 문제들´, 열린책들,2003)에 다름 아닐 텐데, 그 불안은 ‘나대로’의 낙서라는 증상을 극복하고 상처와 맞설 때 비로소 해결될 수 있다. 예정이 자기 안의 ‘노란빛’을 밖으로 드높이 내걸 듯, 혹은 게이코가 빵집을 나와 어디론가 첫걸음을 내딛듯 말이다. 그렇게 했을 때 “노란 꽃잎 가장자리가 흐려지면서 노란색과 초록색과 진회색이 서로 경계도 없이 뒤엉켜”(1:181) 버리듯,“꼭꼭 막아둔 마음의 가장자리도 그렇게 풀리게” 된다. 이제 자기 밖으로 나와 그렇게 풀린 ‘노란빛’은 ‘첫사랑’에서와 달리,‘사랑’도 될 수 있고,‘꿈’도 될 수 있고 뭐든 될 수 있다. 최소한 그럴 가능성은 있다. 이처럼 증상과의 타협에서, 증상에의 만족에서 나오는 첫걸음이 도달해야 하는 것은 결국에 “병에 걸리는 원인을 제거하는 일”(1:229)이며, 이것이 “인간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대비책”이다. 그 원인을 밝히는 일이 어떤 위험을 동반하든 그 알 수 없는 세계 속으로 들어가 보는 일이 필요하고, 그것이 비로소 윤리적인 행위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그들의 상처, 그 병의 원인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이 도출된다. 상처는 분명 어떤 ‘좌절’에서 기인할 텐데, 일단 우리는 각각의 서사 속에 끼워져 있는 시대적 배경들을 통해 그 상처가 밖으로부터 투사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한 경향이 가장 두드러지는 작품은 ‘그 상처가 칼날의 생김새를 닮듯’이며, 이 작품은 일가족의 이야기라는 점에서도 특이하다. 물론 여기에서도 쓰기와 말하기에 값하는 ‘읽기’를 통한 상처치유의 행위가 지속된다. 전라도 출신 아버지가 시대에 무기력했던 자신을 용서하고 그 시대 자체를 용서하는 방식은 바로 ‘신문 스크랩’이다. 그리고 ‘내’가 그 초라한 아버지에게 다가가는 방식도 아버지의 그 신문 스크랩 ‘읽기’이다. 오렌지빛 가로등 불빛에 기대 나는 한 장 한 장 넘겨가며, 천천히, 붙여 놓은 기사를 읽었다.(중략)다 읽은 뒤에 처음부터 다시 읽었다. 글자와 글자 사이, 문단과 문단 사이, 생각과 생각 사이를 읽었다. 아무리 읽어도 나는 알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그 여름 내내 도서관 한쪽에 앉아서 도대체 무엇을 읽었던 것일까? 누구를 용서했던 것일까? 파도와 파도 사이, 바람과 바람 사이, 달빛과 달빛 사이 이런저런 생각이 오갔다.(1:65∼66) 주목할 점은 이 작품에서만큼은 읽기의 방식이 자족적이고 자위적인 행위에 그치지 않고 소통을 위한 매개가 된다는 점이다. 물론 아버지는 여전히 자기 안에 머문 채로 그 상처를 짓누르고 있지만, 그 ‘신문 스크랩’은 ‘나’로 하여금 초라한 자신의 아버지에게 다가가려는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아버지의 신문 스크랩을 아무리 읽어도 그 아버지의 마음에 가 닿을 수는 없지만 여하튼 나는 “고작 딸이 집을 나갔다고 눈물을 흘리는” 아버지를 조금은 이해할 듯하고, 아버지에게 묻고 싶은 게 생기고, 전화를 하기로 마음먹는 것이다.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에서 전적으로 회상에 의존한 작품은 ‘뉴욕제과점’이라는 자전소설 밖에 없다고 작가가 밝혔듯, 우리는 이 소설집을 단순히 회상 형식을 통해 잃어버린 과거의 기억을 더듬는 ‘추억의 보고서’ 또는 ‘반성의 기록’(정선태,‘(해설)빵집 불빛에 기대 연필로 그린 기억의 풍경화’,‘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 문학동네,2003,p.295)으로 읽을 수 없다. 그 속에는 분명,‘언어’에 대한 작가의 관심과 통찰이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스며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작가가 ‘언어’의 불가능성, 즉 언어 자체로는 어떤 진실에도 가 닿을 수 없고, 소통은 애초에 불가능하다는 해묵은 해체적 사고를 재확인하고 있는 것은 아니리라. 가라타니 고진에 따르면, 언어와 비극은 반복될 수 없는 일회성의 성격을 지녔다는 점에서, 즉 구조로 회수될 수 없는 다수성과 사건성이라는 점에서 서로 관련된다. 비극적 인식이란 바로 그러한 언어 안에 놓인 인간 조건을 발견하는 일이며, 이처럼 다시는 반복할 수 없다는 언어에 의한 고통은 인간이 결코 ‘아이로 되돌아갈 수 없다’는 마르크스의 비유로 확인된다.(가라타니 고진,‘언어와 비극’, 조영일 역, 도서출판b,2004,pp65∼86)그런데 고진은 ‘아이’가 단지 비유가 아니며, 아이는 이미 어른 이상으로 인생을 알고 있는 존재, 어떤 순수한 비애와 부조리감을 깨닫고 있는 존재라고 말한다. 이런 논의에 기댄다면,‘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의 전편을 감도는 슬픔과 비애의 정서는 충만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 혹은 잃어버린 기억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반복될 수 없는 ‘기억’, 반복될 수 없는 ‘언어’적 조건과 관련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김연수는 “기억이나 회상을 기본적으로 불신”하며 “글쓰는 순간만의 진실”(김연수 외 좌담, 앞의 글,p.81)을 믿는다고 말했다. 애초에 우리가 ‘기억’해 낼 것은 없고 ‘언어’로 표현해야 할 것도 없고, 믿을 수 있는 것은 순간 순간의 진실일 뿐이라는 말인 듯싶다. 그 일회적인 언어에 의존하여 쓰고 말하고 읽음으로써 자신의 상처 안에 거주하는 방식으로는 상처가 완벽히 치유될 수 없다는 사실을 작가는 말해주고 있다. 이는 “삶은 살아가는 것이지,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는”(2:61) ‘나는 유령작가입니다’의 세계를 예고하고 있는 것이다. 3. 말해질 수 없는 것을 넘어서는 몇 가지 방식-‘나는 유령작가입니다’ 그렇다면 다시 최근작 ‘모두인 동시에 하나인’으로 돌아가 보자. 이 소설에서 화자인 ‘나’의 할아버지는 죽기 전 두 개의 글을 쓰고, 하나의 글만 남겨둔다. 남겨둔 글은 “世上萬事 一場春夢 돌아보매 無常ㅎ구나”로 시작되는 203행의 대서사시로서,“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태평양전쟁, 한국전쟁,4·19,5·16 등 한국 현대사의 최중심지를 관통해온” 한 남자의 생애를 담은 것이다. 물론 겉으로 드러난 그 한 남자의 생애는 또래의 다른 남자의 생애와 크게 다르지 않아, 그 서사시는 한 인간의 내밀한 역사를 다룬 것이라기보다는 시대의 역사를 다룬 시라고 봄이 정확하다. 할아버지는 그 역사를 증명하는 ‘한 남자’일 뿐인 것이다.“할아버지의 또 다른 글은 누구도 읽어보지 못했다.” 할아버지는 죽기 전 자신과 관련된 모든 것을 불태우면서 그 다른 글 역시 태워버렸다. 그 글에는 서사시에서 볼 수 없는 다른 것이 들어 있을 테고, 그것은 인간의 가장 사적인 영역에 속하는 것일 테니 다른 사람은 엿볼 수 없는 게 당연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4·4조의 정형적인 형식처럼 그 서사시가 어떤 일관되고 형식적인 구조에 속하는 추상화된 개인의 삶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면, 불태워진 할아버지의 그 비망록은 여전히 ‘언어’로서도 ‘기억’으로서도 도달할 수 없는 개개인의 진실을 의미한다.“한 개인의 진실이란 깊은 밤, 잠자리에 누워 아무도 몰래 끼적이는 비망록에나 겨우 씌어질 뿐이고”,“서로 살을 비비며 살아가는 부부라고 하더라도 옆에 누운 사람의 비망록을 들여다보지는 못하는 것이니” 할아버지의 그 두 글 사이의 거리는 엄연한 것이고,‘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에서 인과관계의 구조로 엮어진 ‘그’의 소설이 현실(reality)과도, 실재(the real)와도 멀어진 거리와 같다. 실재와 구성화된 그것 사이의 거리는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농담’에서 지도에서 비워진 행로로 상징된다. 일년 전 이혼한 아내와 우연히 재회한 ‘나’는 아내를 따라 인사동 거리를 걷는다. 아니 함께 걸었다기보다는 아내를 따라 걸었던 것인데, 그 ‘길’은 한 개인의 진실로 들어가기 위한 끝없는 여정을 뜻한다. 꿈 얘기를 좋아하는 아내는 애초에 그런 소통의 의지를 지니고 있었지만, 꿈따위는 잠에서 깬 다음 바로 잊어버리는 사람이었던 ‘나’는 그런 아내의 의지조차도 간파하지 못했던 것이다. 깨달음은 언제나 사후적으로 찾아오는 것이라, 그는 이제 그 아내의 진실, 아니 그녀와 자신의 진실을 알아보기 위해 지적도를 사고 그날을 행로를 그려 본다. 하지만 기억의 행로는 언제나 불완전한 것이고, 지형도가 아닌 ‘지적도’일지라도 그것은 실재의 ‘유사물(le semblant)’일 뿐이므로, 그 유사물 속에서는 모방된 진실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바디우(Alain Badiou)에 따르면 진리는 언제나 특수한 상황의 진리(S. 지젝,‘진리의 정치, 혹은 성 바울의 독자로서의 알랭 바디우’,「까다로운 주체」, 이성민 역, 도서출판b,2005,pp.208∼218)이다. 하나로 이어진 선 안에서는 그 다양한 상황의 진리들은 모두 지워져 있을 수밖에 없다. 서로 연결될 수 없음에도 그어지는 그 많은 선들은 다 무슨 의미일까? 역사의 인과관계가, 혹은 지나간 일들의 진실이 도중에 사소하고 우연적이고 꾸불꾸불한 과정을 과감하게 생략하고 단숨에 긋는, 그런 선과 같은 것이라면, 우리가 그날 걸어간 복잡하고 우연에 가까운 행로의 의미는 무엇일까?(2:19) 따라서 ‘나’의 생각이 미치는 지점은 모든 삶의 행로는 우연이고, 그 안에서 진리는 발견될 수 없고, 나의 불행도 그저 불운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삶의 우연성을 인식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 우연에 가까운 행로의 의미를 따져 묻는다. 그리고는, 결국엔,“오랜 시간이 흐르고 하면 지금의 우연한 일들도 모두 필연이 된다”(2:28)는 정답을 얻어낸다.“우리가 만난 것도, 헤어진 것도, 그날 길 잃은 아이들처럼 골목길을 한 없이 걸어다녔던 일들도 필연이 된다는” 것이다. 물론 그게 거대한 ‘농담’일 수는 있지만 자신에게 일어난 우연을 필연으로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나’는 윤리적 행위의 첫 발을 내딛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바디우는 ‘사건에의 충실성’이라는 말로 윤리를 설명한다.(A 바디우,‘윤리학-악에 대한 의식에 관한 에세이’, 이종영 역, 동문선,2001)그가 정의하는 ‘사건’이란 인식 범위 밖에서 발생하며,‘공식적’ 상황이 ‘억압’했던 것을 가시적이게 만드는, 언제나 어떤 특수한 상황의 진리이다. 따라서 사건에의 충실성이란 사건의 견지에서 ‘인식’의 영역을 횡단하고, 그 속으로 개입하고, 사건의 기호를 찾는 지속적 노력을 가리킨다.(이하 한 단락의 내용은 S. 지젝의 앞의 글을 참조하여 정리한 것임) 지젝의 해석에 따르면, 이러한 바디우의 논의는 “범역적 우연성이라는 조건 속에서 (보편적) 진리의 소생”을 문제 삼는다는 점에서, 실재 사물과의 모든 열정적 조우가 환영일 뿐이라는 해체주의적 사고와 대립된다. 요컨대, 후근대적 해체주의자들이 비관주의의 한계 내에 머물러 있을 때, 바디우는 “기적은 실로 일어난다.”는 전적으로 정당한 사유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영원성과 불멸성에 대한 이와 같은 바디우의 추구는 물론 개별적인 상황, 다양성의 상황의 전제로 하는 열린 개념이다. 다소 길게 인용된 바디우의 논의를 따라,‘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농담’에서 결국 내가 삶의 모든 길은 우연이고 진실은 알 수 없다는 회의주의에 빠지지 않고 “결코 질문을 멈추지 않을 작정이었다. 나도 어디 버틸 수 있을 때까지 한번 버텨보기로 했으니까.”라고 말하는 것을 ‘진리’를 위한 행위이고,‘사건에의 충실성’을 담지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나’는 자기 안에 머무는 회피나, 삶은 우연에 불과하다는 회의에 빠지지 않고 한 개인의 진실, 혹은 삶의 진실에 가 닿으려는 ‘행위(act)’를 시작하고 있으며 그에 대한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 태도는 분명, 자기 안의 둥근 노란빛에 의지하여 자폐적으로 말하고, 쓰고, 읽던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 속 인물들의 태도와는 차별되는 모습이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에서 ‘그’가 쓴 소설의 첫 문장이 “패배는 내 안에서 온다. 여기에 패배는 없다.”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그들은 패배주의자가 아니라, 고투하고 있는 인물들임에 분명하다. 그 고투의 방식을 몇 가지 단계로 분류해 보자. 첫 번째는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농담’에서와 같이 진실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끝없이 질문하고 소통에의 의지를 표명하는 방식이다.‘그것은 새였을까, 네즈미’에서 세영과 네즈미가 지도를 보고 찾아간 길이 잘못 된 길이었지만, 세영이 “돌아갈 수 없어, 네즈미. 우린 계속 가야 해”라고 말하는 것도 이 첫 번째 방식 안에서 설명된다. 잘못 들어선 길이 “공로가 아니라 사유지”라는 것도 상징적이다. 구조화되지 않은 상황의 진리, 혹은 개개인의 사적인 비망록을 들여다 보는 일을 멈추지 않겠다는 의미인 것이다. 두 번째는 ‘말’이 아닌 ‘몸’으로 다가가는 방식이다.‘부넝숴’를 한번 보자. 지평리 전투에 투입되었던 중공군 ‘나’는 들판을 가득 메운 매화꽃잎들처럼 지평리를 가득 메우고 있던 전사자들 틈에서 한 조선인 여성 구호원에게 구조된다. 그들을 실어 나르던 트럭이 전복되고 그 둘은 외딴 농가에 고립된다. 날짜가 어떻게 가는 줄도 모르고, 먹을 것도 없고, 죽음을 지척에 둔 상황에서 그들은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그들이 한 일은 두 가지이다. 몸을 섞거나 시를 읊거나. 지금도 잊혀지지 않아. 그때의 일은. 살아 있다는 건 그토록 부끄럽고도 황홀하고도, 무엇보다도 아픈 일이더군. 아프다는게. 소리를 지를 수 있다는 게. 눈물을 흘릴 수 있다는 게 그 순간만큼 기뻤던 적이 없었어. 그래서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는데도 계속하라고 채근할 수밖에 없었던 거야. 우리는 쉬지 않고 몸을 섞었어. 죽음이 지척이었으니까.(2:71) 그들은 살아 있음을 확인하기 위해, 죽음과도 같은 아픔을 느끼면서 몸을 섞는다. 이 장면은 그야말로 ‘고통 속의 향유(jouissance)’를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만하고 그 향유의 끝장을 보는 ‘죽음충동’을 보여준다고 할 만하다. 그들은 그렇게 “몇 번이나 해가 뜨고 저물었는지, 몇 번이나 달이 둥글어졌다가 다시 여위어졌는지”(2:75)도 모른 채, 수색대가 왔다가 그들이 죽었다고 생각하고 그냥 돌아가는 것을 “죽어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의식만 살아서 지켜보고 있는지”(2:75)도 모른 채 죽음과 삶의 경계를 넘나든다. 결국 ‘그녀’는 죽고 ‘‘나’는 살아남는다. 살아남은 ‘나’는 이제 점쟁이가 되어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라캉이 ‘죽음 충동’과 관련하여 ‘두 죽음 사이의 영역’(위의 책,pp.251~265)이라고 말한 곳에 있는 것이 아닌가. 라캉에 따르면 그곳은 상징적인 것과 실재적인 것 사이의 영역으로서 존재의 질서 너머에 있는 유령적 환영의 영역이다. 그곳은 ‘죽음 너머의 삶’이 갑작스레 출현한 장소이고, 상징화되지 않는 ‘불가분의 잔여’이기 때문에 기괴하고 공포스럽다. 예컨대, 그 형상은 운명을 이행한 이후의 오이디푸스, 즉 ‘과도하게 인간적’이고 ‘더 이상 인간이 아닌’ 자, 어떤 인간적 법칙들이나 고려 사항에도 묶여지지 않는 존재에서 찾을 수 있다.‘그녀’의 피를 1000그램이나 수혈받고 죽음의 경계를 넘은 ‘나’는 이 ‘산죽은-파괴불가능한’ 유령적 대상과도 같다. 운명을 보아버린 ‘나’는 이제,“도저히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이야기”,“세상에서 믿기 어려운 얘기”(2:77) 속에 진실이 있다는 것을 온몸으로 보여주는 ‘산죽은’ 존재인 것이다. 이와 같은 두 번째 방식, 온몸으로 인간을 사랑하는 방식이 성공적이라면 그 순간 상징적 질서로 편입되는 어떠한 ‘언어’도 소용 없게 된다. 그렇다고 그 방식이 성공했는가. 그 둘이 함께 ‘몸’을 통해 ‘유사-죽음’을 경험했더라도, 여하튼 현재 ‘그녀’와 ‘나’ 사이에는 역설적으로 ‘죽음’이라는 경계가 놓여 있지 않는가? 여기서 굳이 라캉의 ‘성관계는 없다’는 공식을 끌어올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세 번째로 취할 수 있는 방식은 무엇일까? 그것은 타인의 행위를 아예 그대로 반복하는 것이다. 설령 그게 죽음일지라도. 그것은 소통에의 ‘의지’를 드디어 ‘실천’으로 관철하는 일이며, 반복될 수 없는 ‘언어’의 한계,‘기억’의 한계,‘몸’의 한계를 극복하는 일이 될 수도 있다.‘그것은 새였을까, 네즈미’의 세영이 5년 동안 한결같이 사랑했던 남편에게 자신이 절대로 이해 못하는 다른 삶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그것을 이해하는, 아니 극복하는 방식이 바로 그것이다. 어떤 식이냐 하면, 가장 가까운 사람을 배신하는 사람의 기분이 어떤 것인지 알기 위해 언니의 동거남,‘네즈미’와 섹스를 하는 방식이다. 네즈미에게 “다른 사람의 모든 것을 이해하려고 드는” 세영의 방식이 “무모한 열정”으로 보이지만, 세영의 그 무모한 열정은 끝장까지 간다. 자동차 사고로 남편이 죽어가는 상황에서 2시간 동안 울기만 했던 세영, 그렇게 다른 삶이 있었던 남편의 죽음을 방조했던, 아니 어떤 행동(action)도 하지 않음으로써 적극적으로 행위(act)했던 세영은 결국 ‘자살’한다.(정신분석은 행동과 행위를 분리한다. 행위는 그것의 담지자(행위자)를 근본적으로 변형시키다는 점에서 행동과 다르다. 행위 이후에 나는 ‘전과 동일하지 않다’. 행위 속에서 주체는 무화되고 뒤어이 다시 태어난다는 점에서, 라캉은 ‘자살’을 모든 (‘성공적’) 행위의 전형으로 파악한다. 알렌카 주판치치,‘실재의 윤리’, 이성민 역, 도서출판b,2004,p.133∼134) 세영의 방식이 극단적이고 무모하다면,‘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의 ‘그’는 어떠한가. 이 작품에는 소통 불가능성과 그 불가능을 넘어서는 시도와 그 결론이 모두 담겨 있다. 그것은 “사랑의 모든 국면을 다 경험”함으로써,“심지어 죽음까지”도 경험함으로써만 가능한 결론이다. 여자 친구가 마지막으로 읽은 ‘왕오천축국전’을 읽고 나서도,‘소설’ 쓰기를 통해서도 애인을 이해할 수 없었던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두 가지다. 첫째, 그녀와 자신의 삶에,“어떤 진실도, 상상도, 이해도 없는”(2:151) 가장 합당한 주석을 달며, 그저 “짐작을 하며”,“그 사이를 원래 그대로 틈으로 남겨두고 살아가는 일”(2:143)이거나, 둘째,“지도에서 비워진” 그 곳으로 직접 가보는 일이다.‘그’는 두 번째 방법을 선택한다. 그것이 “서로를 속이는 것도, 속는 것도 없는” “인간에게 누구나 있는 어두운 구멍”(2:43)을 들여다보는 유일한 방법인 것이다. 그것은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의 인물들이 ‘아직 가지 않은 길’이고,‘의지’의 방식을 택한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농담’의 ‘나’가 ‘결국 가야하는 길’이고,‘부넝숴’의 ‘나’가 ‘덜/더 가버린 길’이다. 당연히,‘그’가 낭가파르바트 정상을 향해 가는 것은, 이처럼 ‘몸’으로도 ‘언어’로도 이해 불가능한 그녀를 이해하는, 아니 자신의 진실을 이해하는 마지막 방법이다. 그는 자신과 함께 걸어가는 검은 그림자의 친구와 농담을 주고받으며 껄껄거린다. 여기인가? 아니, 저기. 조금 더. 어디? 저기. 바로 저기. 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 바로 저기. 문장이 끝나는 곳에서 나타나는 모든 꿈들의 케른, 더 이상 이해하지 못할 바가 없는 수정의 니르바나, 이로써 모든 여행이 끝나는 세계의 끝.(2:154) 그곳을 설명할 수 있는 말은 많다. 현실과 꿈이 뒤섞인 공간, 육체의 한계를 넘어선 공간, 어떤 논리도 거부하는 공간, 죽음을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공간 등등. 그러나 어떤 말도 소용없을지 모른다. 그곳은 가보지 않고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 ‘실재’와 대면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현실의 힘으로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용기’이다. 그 길을 가는 ‘그’에게는, 그가 고등학교 시절부터 노트를 사면 항상 옮겨 적던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용기다. 아주 기이하고도 독특하고 불가해한 것들을 마주할 용기”(2:111)라는 릴케의 문장이 떠올랐을 것이다. 용기는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삶의 진실에 도달하고자 하는 자에게 그 용기를 갖는 일은 의무이다. 낭가파르바트 등반은 원정대장이 역설한 바대로 “분명히 의의가 아니라 임무”(2:117)인 것이다.“그 꿈이 제아무리 압도적이라고 해도 원정대는 그곳을 ‘정복’해야만 한다.” 불가능한 것을 자신의 ‘의무’로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오로지 ‘의무’ 때문에 ‘행위’한다는 점에서 ‘그’는 분명 윤리적 주체(‘의무’와 윤리적 행위의 관계에 대해서는, 위의 책,5장 참고)이다. 4. 진실은 어디에,“대뇌와 성기 사이”(김연수,‘모두인 동시에 하나인’, 문학동네 2005년 겨울,p.158)그 어디쯤 ‘유령작가’라는 말에 대해 말들이 많았다. 김연수는 그 의미가 ‘대필작가’ 쯤이 된다고 말했고, 대부분의 논자들은 그 안에서 작가적 자의식을 찾아냈다.‘유령’이라는 말에 방점을 찍어보면 어떨까? 이 글을 마무리 하면서 우리는 김연수의 최근 두 소설집을 이렇게 정리하고 싶다. 죽음을 넘어선 그 어떤 영역을 살펴보고 ‘유령’이 되어버린 작가가,‘아직’ 언어와 기억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고 ‘아이’에 머물고 있는 상처받은 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고 말이다.“아프면 그 아픔을 고스란히 다 느끼라고. 아픈데도 아프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말이다. 왜 그런 거짓말을 하는가 하면 죽기 싫어서다. 그래서 눈물은 조롱거리가 되고 아픔은 비난받고 두려움은 무시되며 믿음은 당연하다고 여긴다.”(2:117). 우울은 도덕적 쇠약함이며, 죄라고 라캉이 말했던가? ‘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의 ‘그’가 위와 같은 말에 의지하여 낭가파르바트로 갔듯이 우리도 각자가 넘어야 할 산 하나쯤은 마음 속에 있을 것이고, 그 산을 넘기 위한 ‘용기’를 지녀야 한다. 그것의 우리의 ‘의무’이다. 그렇지만 ‘죽음’이 윤리적 행위의 전형이라며, 그 죽음을 통해서만 우리는 타자의 진실, 나의 진실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렇다면 현실의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김연수는 이런 질문을 던져준다. 현실에서 이해는 필연적으로 오해가 되고, 살 부비는 부부 사이에서조차 서로의 마음 속 비망록을 들여다 보는 일이 불가능하다면 해결은 한 가지다. 그 “대뇌와 성기 사이” 그 어디쯤에 있을 ‘마음’으로 진실을 그저 믿는 것이다. 김연수의 세계인식과 작가의식은 이제 ‘인간’에 대한 관심으로 모아지고 있는 듯 보인다. 결국 “모든 사람은 단 한 사람”이라는 보르헤스의 말을 인용하면서 말이다(위의 책,p.121)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이제 어떻게 들려줄지 ‘모두인 동시에 하나인’의 장편 연재가 기대된다. <끝> ■ 당선소감 “조금은 자신 갖고 내목소리 낼수 있을것” 글쓰기는 나에게 공포다. 학교에서 몇 개월째 학부생들의 리포트 상담을 하고 있지만 난 과연 내가 누군가에게 글쓰기에 관하여 조언을 해 줄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인가에 대해 항상 회의적이다. 여전히 나는 무엇을 써야 한다는 생각만으로도 안절부절 못하고, 하얀 모니터 앞에서 머릿속까지 하얗게 비워지곤 하는 걸…. 그렇지만 여하튼 읽는 일은 행복하고, 쓰는 일은 나에게 작은 희열을 맛보게 해준다. 그래서 그 일들을 멈출 수가 없다. 혼자 품고 있던 그 공포와 행복 사이에 용기를 채워 준 이번 당선이 정말 기적 같다. 여전히 막막하고 두렵지만, 이제 조금은 자신을 갖고 내 목소리를 낼 수 있을 것도 같다. 그리고 그 목소리가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와 온전히 만날 수 있기를 고대한다. 턱없이 부족한 글이라 몹시 부끄럽다. 앞으로 더 좋은 글을 쓸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감사드린다. 스스로 열심히 공부하시는 모습만으로도 더없이 많은 것을 일깨워 주시는 신범순 지도교수님과 국문과의 모든 은사님들께도 깊이 감사드린다. 꽃비 내리는 자하연을 몇 번이고 함께 맞이했던 1동의 동료, 선·후배들의 자극에도 빚진 바 크다. 함께 공부하던 그 시절이 마냥 그립다. 그리고 나이 서른을 앞에 두고서도 여전히 철없고 무심한 자식을 믿어 주시는 부모님과 가족들께도 감사의 말을 전한다. 마지막으로, 어렸을 적부터, 성실히 읽고 쓰는 일을 너무도 당연한 일상으로 여기게끔 해주신 아버지께 감사드린다. 좋은 글로 보답하겠노라고 다짐해 본다. ●약력 ▲1977년 서울 출생 ▲서울대 국문과 박사과정 수료 ■ 심사평 “‘글쓰는 순간이 진실’ 작가의 본질 파헤쳐” 응모작 총 20편은 작가론이 대부분이었고, 김현론을 비롯한 문학사적인 쟁점을 다룬 게 3편 있었다. 작가론 중에는 시인·소설론이 거의 반반씩이었다. 아마 최근 신춘문예 평론의 주류가 작가론으로 정착된 느낌이다. 특히 전후문학 세대는 말할 것도 없고,4·19세대 작가론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오늘의 작가론 중심으로 이뤄져 있다. 그중 시선을 끈 글은 ‘말하기와 글쓰기의 행복한 공간-김현론’(김윤정),‘몸의 형이상학, 모성적 관능과 타자없는 육체 사이-김선우론’(함돈균),‘속도에 저항하는 시의 모험-김기택론’(강영준)‘‘틈’을 바라보는 시선-배수아 소설을 중심으로’(김나영),‘고독의 의무, 소설의 의무-윤성희 소설집 ‘거기, 당신?’론’(이은주),‘‘유령’작가의 진실-김연수의 최근작을 중심으로’(조연정) 등이었다. 김현론은 정직한 글쓰기의 자세를 보여준 진솔한 비평적 자세가 돋보였으나 개인적인 체험에 너무 함몰된 점이 아쉬웠다. 김선우론은 인문학적인 거시적 시각으로 시인에 접근하면서 미세한 현대적 환상과 성담론을 분석한 점이 돋보였으나 일반론적인 해설위주에 그쳐서 아쉬웠다. 김기택론은 성실한 독법이긴 하나 해설론에 그친 한계가 있었다. 배수아론은 라캉의 틈 이론을 중심으로 작품을 분석하려 했으나 결론이 너무 조급해 보였다. 최종적으로 윤성희론과 김연수론은 우위를 다툴 정도였다. 윤성희론은 반 루카치적인 소설론을 전개한 점이 시선을 끌었지만 문장력이 치밀하지 못한 점이 못내 아쉬웠다. 김연수론은 탈구조주의적인 이론의 틀에 너무 얽매인 느낌이 있으나 기억이나 회상을 불신하고 글쓰기의 순간만이 진실이라는 이 작가의 본질을 정확하게 파헤친 점이 높이 평가되었다. 김윤식 임헌영
  • 대담-인문학과 자연과학이 만나다/도정일·최재천 지음

    국내 인문학과 자연과학을 대중에게 ‘대변’해온 영문학자 도정일과 생물학자 최재천이 마주앉았다. 각기 대학(경희대 영어학부와 서울대 생명과학부)에 적을 두고 연구와 강의에 눈부신 성과를 내고 있으면서도 대중과의 소통을 유독 강조했던 두 사람이다. 영문학자이자 문학평론가인 도정일은 독서운동과 문화운동에, 동물행동학의 세계적 권위자인 최재천은 왕성한 저술을 통해 과학과 대중의 소통에 매진해왔다. 결국 이들이 만난 것도 ‘소통’, 즉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소통을 위해서다. 도정일의 표현대로라면 ‘동물인간과 인간동물 사이의 소통이 어떤 것일 수 있는지 그 가능성을 보자’는 것.‘생명공학 시대의 인간의 운명’이 그 소통을 관통하는 테마다. 이를 위해 두 사람은 지난 2002년부터 2005년까지 10차례의 대담을 나누었다. ‘대담-인문학과 자연과학이 만나다’(휴머니스트 펴냄)는 이들이 나눈 대담에다가 출판사측이 시도한 4차례의 인터뷰를 더해 엮어낸 책이다. 주요 내용은 13개의 테마로 보는 새로운 지식세계다. 유전자와 문화, 복제와 윤리, 창조와 진화,DNA와 영혼, 육체와 정신, 신화와 과학, 인간과 동물, 아름다움과 과학, 암컷과 수컷, 섹스·젠더·섹슈얼리티, 종교와 진화, 사회생물학과 정신분석학 등등. 도정일은 21세기의 화두인 생명공학에 우려 섞인 시선을 보낸다.‘지금 생명공학은 사람들의 상상력을 매혹하고 있다. 죽지 않는 인간, 병에 걸리지 않는 인간, 천재 생산, 성격 개조 등등. 생명공학은 지금까지 인간이 운명으로 받아들였던 자연적 한계를 일거에 제거할 수 있다는 기대와 환상을 뿌리고 있다, 인간이 불멸의 문턱에 올라설 수 있다는 기대를 갖게 하고 있다.’ 하지만 최재천은 그렇게 비관적이지 않다.‘생명과학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미래는 모든 사람이 최대 수명인 120세까지 질병없이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120세 생일까지 섹스도 하고 테니스도 즐기면서도 신나게 살다가 아무 고통없이 떠나는 것이다. 이런 세상이 생명과학자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다.’ 도정일은 묻는다. 생물학적 프로그램만으로 인간의 행동과 가치를 다 설명할 수 있느냐. 생물학이 특별히 인간다움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고. 여기에 대해 최재천은 ‘생물학적=유전학적’이라는 편견이 우리사회를 지배하고 있다고 맞받는다. 생물학엔 유전자에 의해 발현되는 형질들이 환경과 어떻게 상호작용을 하는가에 대한 모든 학문이 포함된다. 비생물학적 차원이라는 것은 없다고 단언한다. 영혼은 유전되는 것일까?최재천은 ‘영혼도 DNA의 씨앗일 수밖에 없다.’고 한다. 모기가 알에서 깨어나면 인간에게 날아와 피를 빨아대는 행위는 이를 명령하는 DNA가 없으면 불가능하다. 인간의 경우 세대가 겹치는 바람에 꼭 DNA속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더라도 살아 있는 전 세대 사람에게서 살아있는 다음 세대 사람에게 전달되는 것이 있다. 문화적 유전을 하는 것이다. 도정일은 그러나 여기에 대해 반박한다. 영혼은 과학적 존재 입증의 대상이 아니라 종교적 믿음의 범주이고, 따라서 복제되지 않고 유전될 수 없다는 것. 하지만 영혼이란 것을 끊임없이 생각하게 하고, 그 존재를 믿고 싶어하는 성향 자체는 인간의 DNA에 들어있다는 점은 인정한다. 결국 그는 ‘생물학적으로 복제·유전되는 것은 그 성향’이라는 수정안을 제시한다. 상당 부분 두 사람은 첨예한 시각차를 드러내면서도 인간을 가운데 놓고 인간을 위한 접점을 모색한다. 그리고 인문학이든, 자연과학이든 타자와 공존하려는 성찰이 요구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도정일에게 그것은 두꺼운 세계다. 인문학적 소양이란 결국 타자를 이해하고 긍정하는 것이고, 이를 통해 가슴을 여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최재천 또한 이점에선 다르지 않다. 과학자들에게도 타자와 공존하려는 생태학적 성찰이 절실히 요구된다고 화답한다. 생명복제의 시대, 인간이 어떤 존재이고, 어떤 존재이어야 하는지를 자연과학과 인문과학을 가로지르는 사유를 통해 곱씹어보게 하는 책이다.2만 5000원. 임창용기자 sdragon@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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