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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역 최고 어른’ 군수:4(공직 탐험)

    ◎억지민원·청탁 거절하느라 진땀/청탁 피하려 심한 마음고생/중앙부처 상대 로비도 고역/항상 주민입장 우선 생각 민선군수의 최대 적은 억지민원과 청탁이다. 金善興 강화군수(62·재선)는 얼마 전 노인부부의 방문을 받았다. 자식이 없어 생활이 안되니 생활보호대상자로 지정해달라는 것이었다. 金군수가 노인들을 위로해 보내고 호적을 떼어보니 자식들이 있어 법적으로는 생활보호대상자가 될 수 없었다. 그러나 “자식들이 버려서 무자식이나 같다”는 노인들의 하소연에 눈 딱감고 담당직원에게 생활보호대상자 지정을 지시했다. 반대로 金군수는 법적으로 가능한 여관건립 허가를 취임 이후 단 한건도 주지 않았다. 러브호텔이 많아지면 문화재 고장인 강화군의 이미지를 흐린다는 이유에서였다. 金군수는 여관업 희망자들의 ‘공적 1호’로 낙인찍히고,7건이나 행정소송에 계류돼 있다. 그는 “소송에서 100% 지겠지만 관내에 피해를 주는 일을 할 수 없다”고 고집을 부린다. 이처럼 민선 군수는 주민 입장을 먼저 생각해야 하기 때문에 실정법을 넘나드는 경우가 많다. 鄭九鎔 경남 하동군수(56·재선)는 아이디어가 돋보인다. 관내 7개 읍·면 주민들의 주요소득원인 섬진강 재첩 채취를 위해 새마을양식계를 만들어냈다. 중앙부처로부터 내수면어업면허를 받아야 하는 원칙을 융통성을 발휘,재첩을 채취토록 열어준 것이다. 군의 피해가 예상되면 군수들이 도나 중앙부처의 지시시항을 따르지 않아 ‘민선 단체장은 인기만을 의식하는 골칫덩어리’라는 원망도 듣는다. 인사와 예산운용 권한이 강화되면서 로비가 많이 들어오는 것도 큰 골치다. 대개 인사와 인허가,관급공사 수주와 관련된 민원이나 청탁이다. 전북지역 金모군수는 취임하자마자 막무가내로 ‘돈가방’을 들고오는 이들이 있어 이를 물리치느라 적잖은 고생을 했다. 어떤 이는 이름도 없이 돈가방만 두고가 군 고문변호사와 상의,관내 사회복지시설에 기탁했다. 또 전북의 모군수는 민원인들이 매일같이 비서실에서 장사진을 이루자 아예 군수실 뒤편으로 비밀문을 만들어 드나들고 있다. 행사참석차 나가다 민원인들에게 붙들려 차질을 빚은 끝에내놓은 고육책이다. 朴鍾振 경기도 광주군수(64·재선)는 청탁 방지를 위해 직원·민원인을 군수실 외에서는 만나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우고 있기도 하다. 재정자립도가 낮은 군들이 중앙부처에 해야하는 로비는 군수들의 고역이다. 이들 대부분이 지방토박이로 중앙부처에 인맥마저 없어 영업직사원이 된 기분으로 서울을 드나든다. 재정자립도가 6.2%로 전국에서 가장 낮은 경북 영양군의 李麗炯 군수(63·초선)는 올들어 기획예산위·행정자치부·농림부 등을 5차례나 드나들며 지원을 요청했다. 그가 자식뻘인 실무진들에게 허리를 굽혀 사정을 설명하고 예산지원을 요청하는데서 영업직 사원에 가까운 민선군수의 단면이 드러난다.
  • 실직 불안속 月收 173만원으로 격감

    ◎본사 라이프스타일 조사… 평균적 한국인 ‘대한씨’ 삶/저축·보험·옷값 등 줄여 내핍생활/“정치인·공무원 가장 못믿을 집단”/“우리국민 고난 슬기롭게 극복” 자긍심도 IMF 관리체제의 1년을 살아온 한국인의 평균적인 삶은 어떤 모습일까. 대한매일은 전국의 성인 3,000명을 표본으로 1인당 무려 550여개에 이르는 설문을 통해 평균적인 한국인 ‘대한씨’를 찾았다. 그의 생활상과 모습은 여론조사결과 응답자의 50% 이상이 공통으로 보인태도와 함께 5개 이상의 분류 가운데 빈도수가 가장 높거나 35% 이상의 분포를 나타낸 태도를 모아 본 가상의 인물이다. 가장인 ‘대한씨’의 월평균 소득은 173만원이다. 지난해에 비해 42만원 정도가 줄어든 셈이다. 저축·보험금·곗돈을 우선적으로 줄였고 옷값과 문화·레저비용도 줄였다. 경조사비도 4만∼5만원에서 3만원(51.7%)으로 줄이는 수밖에 없었다. 사실 지난 여름엔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어서 휴가도 못 갔다(42%). 그는 올해 들어 ‘돈이 없으면 행복해질 수가 없구나’(64.4%)하는 생각이 자꾸든다. 또 ‘현 직장에서 실직할지도 모르겠다’(37.1%)는 불안감마저 들기도 한다. 만약 실직한다면 임금은 낮더라도 재취업할 생각이다(72.3%). 그는 사회에서 성공하고 안 하고는 학벌이나 인맥,재력 혹은 가문보다는 자신의 능력에 달려 있다(64.2%)고 믿고 있다. 대한씨는 그러나 지금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지나온 역사를 되돌아 볼 때 ‘우리 국민들은 인내심이 강하고 고난을 슬기롭게 극복하는 민족’(58.5%)이라는 자긍심을 갖고 있다. 그래서 IMF시대에 가장 존중돼야 할 덕목은 ‘사회구성원간의 협동’(58.8%)이라고 믿고 있다. 그렇지만 IMF이전 수준으로 경기가 회복되려면 앞으로 4∼5년은 걸릴 것(41.5%)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평소 가장 믿을 수 없는 사람은 바로 ‘정치인’(78.2%)이라고 여기고 있다. 정치인과 우리 정치수준을 평가하라면 100점 만점에 38점밖에 줄 수 없다. 공무원의 성실도도 45점 정도밖에 줄 수 없으며 하위직으로 갈수록 불성실하다고 느끼고 있다. 지금 우리 경제는 구조조정이 불가피하지만 정리해고를 최소화하면서도경제회생이 가능할 것(54.6%)이라고 기대한다. 재벌은 소수의 주력기업으로 재편돼야 하며(72.4%) 실업위기 극복,취업난 해소 등 고용문제가 선결과제(61.9%)라고 본다. 눈발 날리는 퇴근길의 ‘대한씨’는 뜨끈한 정종 한 잔이 생각나지만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아 곧장 지하철로 향한다.
  • 직업관(IMF시대의 자화상:12)

    ◎“이직·전직 고려한적 있다” 55.8%/회사원 57% “우리회사도 구조조정 겪었다”/창업 관심 식품요식업·판매업·정보통신업 順 IMF시대를 맞아 직장인들은 감원,정리해고 등의 위기가 언제 닥칠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가지면서도 현재의 직무에 대해서는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게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그러다 보니 이직,전직이나 창업에 대한 관심도 높았다. 직무 만족도와 관련,유보적인 입장인 ‘그저그렇다’가 43.3%로 압도적으로 많았다.나머지중 만족·불만족 의사를 나타낸 비율은 엇비슷했다.‘불만족스럽다’,‘매우 불만족 스럽다’가 21.3%와 4.8% 였고,‘매우 만족’,‘약간만족’이 5.6%와 24.6%였다.한마디로 직장일에 신명을 느끼는 사람은 얼마되지 않음을 보여주는 내용이다.특히 감원 바람이 불면 우선 정리 대상이 될 개연성이 높은 고연령대인 50대의 불만족도(29.2%)가 상대적으로 높았다. 회사원의 57.6%가 자신의 회사도 감원이나 구조조정의 과정을 겪었다고 응답했다. 또 55.8%가 ‘이직,전직을 고려한 적이 있다’고 답했다.연령대별로는 50대가 43.3%,40대 47.8%,30대 59%,20대 59.8%등이었다. 자녀 교육비등의 가계지출이 많은 40∼50대가 상대적으로 이직,전직에 소극적이었다. 창업에 대한 관심도 비교적 높아 직장인들의 고용불안 심리를 대변했다.‘관심이 많은 편이다’ 37%,‘매우관심이 많다’ 12.7%등 적극적인 관심을 보인 비율이 ‘전혀 관심이 없다’(7.6%),‘관심이 적은 편이다’(14.6%)등의 무관심 비율을 압도했다.여성(41.4%)보다 남성(52.5%)이 관심이 높았고 특히 20∼30대(55.2%)의 젊은층의 관심이 높았다. 창업에 관심을 가진 분야는 식품,요식업이 24.9%로 가장 높았고 잡화 판매업(8.2%),정보통신업(6.6%),자재,생산품 판매업(6.0%)등으로 조사됐다.식품,요식업을 선호한 것은 쉽게 접근할 수 있고 다른 업종보다 위험이 적다고 판단한데 따른 것으로 보인다.“불황때는 먹는 장사가 그래도 낫다”는 통념을 다시 한번 확인케하는 대목이다. 공무원이라는 직업에 대해서는 79.5%가 안정된 직업이라고 평가하고 있어 공직사회의 구조조정 바람에도 불구하고 가장 안정된 직장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직업의 의미를 질문에서는 3명중 2명 이상(68.4%)이 돈벌이나 생계유지 수단이라고 응답한 반면 26.9%가 자기발전을 위한 수단,2.1%가 사회에 공헌하기 위한 것 등으로 답했다.이런 가운데서도 20대가 자아실현의 수단으로 인식하는 비율(31.8%)이 40대(19.6%),50대(23.6%)보다 상대적으로 높게 나타났다. ◎성공 조건은 능력·노력/학벌·인맥 등 환경적 요소 비중은 상대적으로 낮아/직장 선택시 우선 고려요소 ‘장래성·안정성’ 사회에서 성공하는데 필요한 조건으론 역시 능력과 노력을 우선으로 꼽았다.하지만 학벌과 인맥도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고 인식했다. 두 가지를 고르라는 질문에서 성공의 조건으로 능력(64.2%),노력(39.5%)등을 많이 들어 개인능력과 스스로의 노력이 앞서면 성공할 수 있다는 인식을 가진 층이 상당히 두터운 것으로 분석됐다.아울러 학벌(29.5%)과 인맥(23.9%)등 환경적 요소도 비중있게 꼽았으나 재력(11.4%)이나 가문(2.2%)등의 배경은 그다지중요하지 않게 봤다. 이런 가운데 여자(19.9%)보다 남자(27.9%)가 인맥을 중시하는 것으로 나타났고 우리사회의 주역이라 할 수 있는 30대 (33.9%),40대(32.4%)가 다른 연령대보다 학벌을 상대적으로 중요하게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돼 관심을 끌었다. 직장을 선택할때 가장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요소로 장래성(25.3%),안정성(22.7%)을 들었다.구조조정 대량해고 등의 불안한 사회 분위기에 대한 반작용의 단면으로 풀이된다.이어 일을 통한 보람(17.9%),적성(17.6%),수입(12.3%)등을 들었다. 그러나 직업선택때 사회적 인식은 거의 무시하는 것(3.9%)으로 나타나 체면을 중시했던 사회풍조는 거의 사라졌음을 반영했다.연령대별로는 20대 특히 미혼자는 장래성(23.0%)과 함께 보람(21.6%)과 적성(21.2%)을 중시했고 50∼60대는 수입(18.6%)을 상대적으로 중요하게 평가해 직업관에 대한 세대간의 스펙트럼을 실감케했다. ◎급여체계와 임금 만족도/52%가 “급여에 불만족”/연봉·연공제 혼합형 선호/“연봉제 해도 임금 비슷” 57% 대부분의 직장인들은 올해의 급여가 지난해와 비교해 전혀 늘지 않았거나 오히려 줄어들었다며 현재의 급여 수준에 불만을 표시했다.임금체계 개선방향과 관련해서는 개인능력에 따라 임금수준을 산정하는 연봉제와 근무연수를 기준으로 한 연공제를 혼합한 형태를 선호했다.급여체계가 바뀌어 연봉제가 실시되더라도 지금과 비슷한 수준의 임금을 받을 것으로 전망했다. 급여증감 여부에 대해 응답자의 93.6%가 ‘전혀 증가하지 않았다’고 응답해 거의 모든 봉급 생활자가 임금동결이나 감소에 따른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임금 감소 정도와 관련해서는 10% 이하 감소가 27.5%,11∼20% 감소가 24%,21∼30% 감소가 11% 등으로 조사됐고 31%이상 감소도 7.1%나 됐다.연령대별로는 40대(16.3%)와 50대(16%)의 감소폭이 20대(10.6%)와 30대(15%)보다 상대적으로 커 임금 수준이 높은 연령대의 삭감율이 높은 것으로 분석됐다. 이런 상황이다보니 급여 만족도는 당연히 낮았다.‘조금 불만족이다’가 39.0%,‘매우 불만족이다’가 13.8%,‘그저그렇다’가 35.7% 였다.반면 조금만족(8.8%),매우 만족(2.5%)등 만족을 표시한 응답자는 극소수였다. 확산되고 있는 연봉제 도입 분위기와 관련,당장 연봉제가 실시되더라도 지금의 임금과 비슷하게 받을 것이라는 비율(57.8%)이 가장 높은 가운데 줄어들 것(19.6%),많아 질 것(21.3%)이라는 우려와 기대의 비율이 비슷했다. ◎정년의 적정성,퇴직금 사용처/“현재 정년 적당” 63%/“국민연금에 부담” 36%/“퇴직금 은행 예치” 42% 58∼65세 정도인 현재의 기업 정년의 적정성에 대해서는 상당수(63.2%)가 적당하다고 평가했다.그러나 10명중 1명 이상(11.2%)은 더 늘리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지적했다. 앞으론 능력제 사회로 갈 것이기때문에 정년규정이 필요없다고 보는 사람도 18.5%나 돼 진취적인 임금관의 단면을 읽을 수 있게했다.정년의 불필요성에 대해 연령대별로는 역시 젊은 층인 20대(24.3%)의 호응이 가장 높았고 성별로는 나이가 들수록 상대적으로 퇴출압력을 많이 받는 여성의 호응율 (25.4%)이 남성(15.4%)보다 훨씬 높았다. 국민연금에 대해서는 부담을 느끼는 직장인들도 상당수 있었다.현재 지출하고 있는 국민연금 납입액이 적당하다(44.1%)는 의견이 우세했지만 많은 편(36.3%)이라는 반응도 만만찮았다.적다고 생각하는 근로자는 17.4%였다.많은편이라며 부담을 느끼는 응답자가 블루칼라(27.0%)보다 화이트칼라(35.4%)가 오히려 많았고 월 가구소득 300만원 이상의 고소득자(38.6%)가 상대적으로 많은 것으로 밝혀져 이채를 띠었다. 퇴직금은 은행에 예치해 노후에 대비하겠다는 응답이 42.9%로 가장 많았다.그러나 새로운 일을 위한 자금으로 활용하겠다는 반응(31.7%)도 상당했다.현직장에 대한 불안의 심리가 이같은 반응으로 연결된 것으로 보인다.퇴직금이 없을 것같다는 응답도 22.8%나 됐다.직장이 위기에 처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는 근로자가 적지않음을 나타내는 대목이다. 퇴직금을 사업자금등으로 활용하겠다는 비중은 여자(22.7%)보다 남자(35.7%)가 훨씬 높아 안정적인 퇴직금 관리를 바라는 여성들의 심리를 대변했다.
  • 日軍 학병서 광복군까지(항일독립군 장정따라 6천리:中)

    ◎삼탑진의 ‘노병’들 숙연한 묵념/“외롭게 죽어간 김학규 장군” 눈시울 붉혀/의연하고 용감했던 그날의 동지들 추모/옛 서안 사령부 터엔 재개발 앞둔 건물만 광복 투쟁의 발자취를 찾아나선 독립유공자협회 일행들의 여정은 장쑤성(江蘇省)쉬저우(徐州)에서 안후이성(安徽省)푸양(阜陽)으로 이어졌다.베이징(北京)출발 4일째인 10월10일이었다.푸양까지는 400리 남짓.당시 푸양은 쉬저우에 주둔하던 일본군과 일진일퇴를 거듭하던 중국군의 최전방 거점.적진 깊숙이 뛰어들어 병력을 교란시키고 갖가지 정보를 모으는 일은 광복군의 몫이었다.산타쩐(三塔鎭) 샤오자오쭈앙(小棗庄)마을.제법 번화한 푸양시 도심에서 승용차로 1시간 거리.반세기전과 다름없는 중국 농촌 그대로였다.‘마지막 독립군’들의 지하공작 본부가 이곳에 있었다.노 광복군들의 눈시울은 금세 붉게 젖었다.누가 먼저랄 것 없이 숙연한 묵념이 이어졌다.“지하공작을 벌이다 일본경찰에 살해된 韓聖洙 동지의 명복과 독립운동의 영웅이면서도 쓸쓸한 말로를 맞았던 광복군 제3지대 사령관金學奎 장군을 위해” “금방이라도 ‘이 사람들!’하고 외치며 나타날 것만 같은 옛 동지들…”.일본군에서 탈출,광복군에 합류했던 일본 專修大 졸업생 韓聖洙씨는 상하이에서 정보를 캐다 희생됐다.“韓동지는 체포된 뒤에도 일본말을 쓰지 않아 통역을 거쳐 심문받았다.난징(南京)형무소에서 목이 잘려 죽을 때까지 일본인들을 꾸짖으며 의연함을 잃지 않았답니다” 이곳서 주로 활약했던 광복군은 20여명.일행중엔 광복회 부회장을 지낸 金祐銓 회원,全履鎬 회원 등 학병 출신과 일본 점령지역을 탈출해 광복군에 가담했던 金國柱 부회장,金九 선생 비서로 일했던 鮮于鎭 선생 등이 끼어있었다. 43년부터 해방때까지 지하공작 활동을 벌였던 金國柱 부회장은 “산둥성(山東省)의 칭다오(靑島)와 지난(濟南) 등 일본 점령지역을 오가며 정보를 캐고 거주 한국인들을 광복군에 합류시키는 일을 했다”고 회고했다.일본 헌병에게 불심검문 받고 유창한 중국어로 딴전 피웠던 기억,가까스로 마련한 군자금 등 이들의 기억은 끝없이 이어지는듯 했다. 일행은 당시윈난성(雲南省) 쿤밍(昆明)의 미국 첩보기구 전략사무국(OSS)을 오가며 광복군과의 군사협력 등 연락업무를 맡았던 金祐銓 회원의 무용담을 들으며 산시성(陝西省)의 시안(西安)으로 향했다. 시안은 광복군이라면 영영 잊을 수없는 대일 항전의 聖地.충칭에 이어 두번째로 광복군 총사령부가 터 잡았던 곳이다.사령부 건물은 시안시 중심부 난위엔먼(南院門) 부근에 있었다.지금은 ‘시안시 공산당 위원회’ 건물과 번화한 상점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광복군 시안시대의 본거지였던 얼부지에 4호는 간이건물에 음식점들이 빽빽히 들어선채 재개발을 기다리고 있었다. 시안 역시 쉬저우나 푸양,린촨(臨泉)에서 처럼 광복군의 자취가 하나하나 사라져 가고 있었다.“표지석이라도 하나 세워 다음 세대들에게 독립군의 투쟁 정신과 역사를 전할 수 있었으면…” 이 다음 누가 이곳을 찾아올 것이며 독립투쟁의 역사가 어린곳을 어떻게 알아볼 것인가….시안을 뒤로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광복직전 광복군 총사령부가 있던 충칭(重慶)으로 발걸음을 옮기는노 광복군들은 안타까움을 떨치지 못했다. ◎광복군 총사령부/1940년 重慶서 발족 두달만에 西安으로 옮겨 광복군 총사령부는 광복군들에겐 따스한 고향이요 용기의 원천이었다.총사령부의 운명은 조국의 처지만큼 순탄치 않았다.총사령부가 발족된 것은 40년 9월 쓰촨성(四川省) 충칭(重慶)에서 였다.나라 잃은 군대에게는 편안한 나날이 없었다. 태어난 지 두달여만인 그해 11월말에는 산시성(陝西省) 시안(西安)으로 옮긴다.시안은 중국군이 일본군의 공세를 막아내던 전략 거점지.본격적인 대일항쟁을 위해서였다.일본군 점령지역이 가까워 정보수집과 한국인 포섭 등이 가능했다. 총사령부라고 해야 시안시 난위엔먼 지역과 얼부지 부근의 허름한 주택이 고작이었다.그나마 42년 9월에는 비워 주어야 했다.일본군의 공세가 거세지고 중국이 광복군의 행동을 통제하려했기 때문이었다. 2년여의 시안시대를 마감하고 다시 충칭으로 돌아가 광복을 맞았다.충칭시 쩌우룽로(鄒容路)에는 총사령부로 쓰였던 건물이 있다.의혈 남아들의 집결지였던 그 곳은 지금도 허름한 음식점으로 쓰이고 있다. ◎白波 金學奎 장군 광복군 제3지대장/일군 맞서 눈부신 전과울린 광복군 대부 광복군 제3지대장 白波 金學奎 장군은 총사령관 李靑天,참모장 李範奭과 함께 광복군의 대부였다. 李範奭 참모장이 지대장으로 지휘한 제2지대가 유격전을 주로 폈다면 金學奎 장군의 제3지대는 정면에서 맞서 싸웠던 광복군의 최정예 부대였다. 장군이 항일전선에 투신한 것은 1919년.19살의 나이로 만주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하면서 부터였다.32살이 되던 32년까지 만주에서 항일 무장투쟁으로 혁혁한 전과를 올렸고 40년 광복군 총사령부가 발족하자 핵심 참모로 참여한다. 그러나 사령부에만 안주하지 않았다.중국군 인맥을 활용,일본군서 탈출한 젊은이들을 린촨(臨泉)의 중국 중앙군관학교로 모아 주도록 했다.그들을 모아 한국광복군 간부 훈련반에서 독립의 간성으로 양성했고 제3지대를 창설했다. 광복후 白波는 평생 몸바쳐 싸웠던 조국에 돌아 왔지만 李承晩 정권과 불화를 빚으며 옥고를치렀다.67년 돌보는 이도 없이 67세를 일기로 서울의 모래내 한켠 판자집에서 숨을 거뒀다. ◎광복군 OSS/미국식 훈련… 한반도 상륙 준비 정예부대 OSS는 한때 전략사무국이란 이름으로 운영됐던 미군의 최정예 첩보기구.적진 깊숙이 고도의 훈련을 받은 첩보요원을 침투시켜 군사 정보를 탐지하고 적의 후방을 교란시키는 임무를 수행했다. ‘광복군 OSS’는 미국식 OSS요원 훈련을 받은 40여명의 정예 광복군들.45년 3월부터 광복될 때까지 중국에 파견된 OSS의 지원을 받아 특수훈련을 받았다. 태평양전쟁 막바지 미군 등 연합군은 한반도 상륙작전을 준비했고 한반도 사정에 밝은 광복군 OSS요원들을 침투시켜 교두보를 확보하게 할 계획이었다. 훈련장은 광복군 제2지대 사령부를 겸해 시안에서 남쪽으로 100여리 떨어진 뚜취쩐(杜曲鎭) 쓰포춘(寺坡村)에 있었다.일행들이 현장을 찾았을때 훈련장 터는 농촌마을을 이루고 있었다.이곳서 가까운 終南山 산기슭위에는 반갑게도 신라시대 당나라에서 포교활동을 하던 원측법사의 사리탑이 마을을 굽어보고 있었다. 젊은날 ‘지옥 훈련’을 마다하지 않으며 조국 광복의 염원을 아로새기던 곳.“살아남을 가능성은 없었다고 생각하면서도 언제나 밝은 모습으로 훈련을 받았다”고 金柔吉 부회장과 광복회 사무총장으로 일하는 石根永 회원은 회고했다. 광복군 OSS 요원의 활약은 갑작스런 일본의 항복으로 실현되지 못했다.광복군들은 조국 광복을 감격과 함께 회한을 안고 맞았다.스스로의 힘으로 찾지못한 광복이었기에 자결권 제약이 올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쓰포춘의 OSS 훈련장을 뒤로 하며 발걸음을 옮기는 일행들은 “광복군의 한반도 상륙이 성사됐다면 역사가 달라질 수도 있었을 텐데”라며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 中 학·관계 탄탄한 인맥/金 대통령 知人들

    ◎劉述卿 전 외교학회장 李淑錚 全人大 간부 등/釣魚臺 오찬 13명 초청 【베이징 梁承賢 특파원】 金大中 대통령은 야인(野人)시절,두차례의 중국방문을 통해 꽤 탄탄한 현지인맥을 형성해 놓았다. 12일 댜오위타이(釣魚臺) 오찬에 초청받은 13명의 중국인사들의 면면을 보면 金대통령의 중국인맥을 대강 파악할 수 있다.학계와 관계에 두루 퍼져 있는 지인(知人)들 가운데 가장 주목되는 인물은 류수칭(劉述卿) 전 인민외교학회장.그는 인민외교학회장 시절,야인 신분인 金대통령을 중국에 초청해준 인물이다.지난 2월 金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했으며 이달 초 서울을 방문,金대통령에게 방중에 대한 사전 자문을 하기도 했다.또 지난 83년 중국민항기 납치사건과 92년 한·중 수교 교섭때는 외교부 관리로서 깊숙이 간여했다.우리의 차관급인 외교부 부부장과 청와대 외교안보수석급인 국무원 외사판공실 주임을 거친 류수칭은 지금도 중국 외교가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소문난 지한파(知韓派)로 알려진 리수정(李淑錚) 전인대(全人大) 외사부부주임도 金대통령 중국인맥의 또 다른 한 축이다.우리로 말하면 국회 통일외교통상위 부위원장격인 리수정은 공산당 대외연락부장(장관급)시절,국민회의와 당 대 당 교류를 하면서 金대통령과 친분을 쌓은 것으로 알려졌다. 주량(朱良) 전 전인대 외사위원장,왕빙첸(王丙乾) 전 전인대 부위원장,다이빙궈(戴秉國) 공산당 대외연락부장 등은 중국 관료출신의 金대통령 인맥이다.또 우수칭(吳樹靑) 北京大 전총장과 후성(胡繩) 사회과학원장,그리고 주룽지(朱鎔基) 총리의 핵심두뇌로 알려진 루신(汝信) 사회과학원 부원장 등은 중국학계의 대표적인 지인들이다.
  • ‘한국의 지성’ 서울대 교수:2(공직 탐험)

    ◎자연大 교수 90% 외국 박사 출신/그나마 십중팔구 미국 유학파/도제식 교수키우기 경향 많아/전임강사서 정교수까지 11년 “서울대 교수는 꿈도 못 꿉니다” 서울대 자연과학대학에서 박사과정을 공부하고 있는 鄭모씨(29).하루의 대부분을 연구실에서 책과 씨름하며 교수의 꿈을 키우고 있다.하지만 모교에 남겠다는 생각은 일찌감치 포기했다.국내에서 대학원과정을 마친 이른바 ‘국내파’는 틈입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서울대 교수자리에 오르기 위해서는 외국유학 경력을 가져야한다.특히 미국의 대학에서 석·박사과정 5년 이상을 거쳐야 한다.IMF이후 자리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더욱 심화된 현상이다.특히 이공계통은 국내박사와 미국박사의 차이가 크다.미국 유명 교수의 사사를 받아야 저명한 명저널에 논문이 실릴 가능성이 커지고 그래야 연구실적을 높게 평가받기 때문이다.자연과학대학 교수 중 10% 정도만 서울대 박사 출신이다.대학 전체로 따져도 서울대박사 출신은 35%에 불과한 형편이다. 서울대 교수의 미국학파 편중이 이따금 문제점으로제기되기도 한다.그러나 세계학계를 주도하는 곳이 미국이기 때문에 십중팔구 미국으로 향한다.독일 등 유럽유학파가 많았던 법대도 최근에는 미국쪽으로 바뀌는 추세다. 게다가 요즘은 서울대에 오기 전에 타대학에서 3∼4년 교수경력을 갖는 것이 필수다.이때도 이왕이면 미국대학의 경력이 좋다.이같은 과정을 모두 거쳐야 당당하게 서울대 교수지원서를 낸다.경력이 좋으면 바로 조교수로,그렇지 않으면 전임강사로 출발한다.조교수를 4년 정도 하고나면 부교수로 승진한다.보통 전임강사에서 정교수까지는 11년 정도 걸린다. 그러나 화려한 경력도 인맥이 뒷받침되지 못하면 빛을 보기 어렵다.특히 교수 정원이 적은 과는 대학 또는 대학원생시절부터 교수의 인정을 받고 교수의 이론을 승계(?)할 준비가 돼있어야 한다. 지난해 치과대학 임용비리가 터지긴 했지만 교수임용에 돈이 개입되는 일은 극히 드물다.불공정시비가 불거지는 것은 주로 인맥에 의한 비리다. 치과대학의 한 교수는 “학문성격이 도제식이어서 대학원 때부터 후계자 비슷하게 키우는경향”이라고 말했다.법대의 모 교수도 “과거 일부 과에서 자기 사람을 교수로 채용하기 위해 상대후보 점수를 깎은 사례들도 더러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폐쇄적이기로 유명한 인문대 모과는 여성을 교수로 채용하지 않는다.몇년전 패기만만한 한 여학생이 석사과정 중 교수,동료들과 MT를 다녀온 뒤 학문의 길을 포기했다.교수가 남자동료들과는 학문토론을 벌이면서 자신에게는 잔심부름만 시키는 것을 보고 ‘아무리 해봤자 길이 보이지 않는다’고 결론을 내렸다. 바늘구멍 만큼 들어가기 어려운 요즘 서울대 교수채용을 보며 노교수들은 가슴을 쓸어내리기도 한다.사회가 전반적으로 팽창하던 시절,손쉽게 서울대 교수가 된 세대들이다. 정년을 2년 앞둔 사범대학 모 교수의 말을 들어보면 그럴만도 하다.“우리 때는 공부하기야 어려웠지만 교수되기는 쉬웠다.내 경우 해당과목을 전공한 교수가 국내에 없어 유학 중 학교측이 ‘귀국할 때까지 교수자리를 비워놓고 기다리겠다’고 연락해왔다.좋은 시절이었다”
  • 규제개혁의 당위성(金在晟의 정가산책)

    “여러 지표상으로 볼 때는 살아나야 할 분위기인데도 경제가 기지개를 켜지 못하고 있어요. 중하위직 공무원의 태업과도 관계가 있지 않나 싶어요.” 국민회의 정세분석위 한 실무자의 푸념이다. 중하위직 공무원들이 ‘안 먹고 안 해준다’는 자세를 고수한다는 지적이다. 후진국형 경제발전에 적용되는 ‘부패의 역할’을 생각케 하는 분석이다. “규제가 많은 후진국에서는 부패가 경제발전에 일정부분 기여한다”는 역설(逆說)과도 연결된다. 우리의 경우 △정경유착은 해방후 대자본 형성을 가능케 했다 △뇌물이 생산활동에 걸림돌이 되는 각종 규제를 무력화했다 △권력의 보호가 성공을 보장하므로 투자촉진 효과도 가져다 주었다는 논리들이다. 그러나 역설이 영구적으로 통할 수는 없는 법. 게임의 룰이 지켜지지 않는 시장경제는 결국 IMF 체제를 불렀다. 이쯤되면 국민의 정부가 강도 높은 사정과 규제개혁을 동시에 추진하는 이유를 알 수 있다. 사정과 규제개혁은 동전의 앞뒷면이라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윤활유(뇌물)를 필요로 하는 불필요한 제도를 없앤다는 것이다. 그러나 관료집단의 칼자루인 규제를 없애기란 결코 만만치 않다. 칼자루를 놓치지 않으려는 이들의 수법은 다양하다. 이를테면 “팔당호 수질이 악화된 것도 주변지역 규제를 풀었기 때문”이라는 등 부작용 사례를 흘리는 것도 그중 하나다. 또 변리사회·세무사회·의사회 등 118개 사업자 단체를 앞세우기도 한다. 변호사회가 규제개혁위원회와 힘겨루기를 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정부가 추진하는 1,974건의 규제개혁 속에는 이들의 복수단체 허용,의무가입 폐지 등으로 이익집단화를 막는 것도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 이들 사업자 단체는 각자 다양한 인맥을 통해 공동여당인 자민련과 국민회의 내부,심지어 내각에까지 영향력을 끼친다. 이에 국민회의는 관료집단의 반발을 무력화하기 위해 규제개혁위원회(공동위원장 金鍾泌 총리·李鎭卨 안동대 총장)에 힘을 실어 주어야 한다는 처방을 내놓고 있다. 규제개혁이 곧 우리사회의 부패사슬을 끊는 출발점이라는 뜻이다.
  • 경정이상 1,182명중 간부후보 출신 대부분

    ◎金 청장 간부 16기… 고시출신은 모두 64명/경찰대1기 1명 총경 진급… 軍출신도 20명 창설 53주년을 맞으며 2만5,000여명이던 경찰의 수는 경찰청 및 13개 지방청에 모두 9만여명으로 4배 가까이 늘었다. 경찰 총수는 초대 경무부장 趙炳玉 박사를 시작으로 그동안 치안국장,치안본부장 등으로 명칭을 바꿔 현 52대 경찰청장인 金世鈺 청장에 이르렀다. 그 발자취 만큼이나 경찰 인맥도 다양하다. 인맥은 크게 간부 후보생,고시,순경공채 및 경위(사)특채,경찰대 출신 등으로 나뉜다. 그러나 이중에서도 특히 간부후보 출신들이 경찰의 큰 흐름을 움직여 왔다는 점을 부인하기 어렵다. 고시출신과 함께 경찰의 양대 인맥을 이어온 간부후보는 경찰조직에서 ‘맏형’ 노릇을 해 오고 있다. 현재 경정 이상의 간부 1,182명 가운데 군출신 20여명,고시 60여명,경찰대학 100여명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간부후보출신인 점을 봐도 알 수 있다. 따라서 경찰조직은 상당기간 동안 경찰대학의 약진이 계속되는 가운데 간부후보와 고시출신간의 각축전이 될수밖에 없다. 간부후보와 고시 자리를 경찰대학 출신이 메워가는 비율에 따라 자연스레 삼각구도가 형성될 전망이다. □간부후보생 간부 후보는 우선 수적으로 많다. 특히 경무관 이상 고위 간부만 해도 전체 66명의 절반 이상인 38명이나 된다. 간부후보 출신들이 경찰의 큰 줄기를 차지하고 있음을 반증하고 있는 셈이다. 경찰 총수인 金청장(간부16기)을 비롯,尹雄燮 청와대 치안비서관,李根明 경기청장,李民雄 강원청장,金本植 전남청장 등이 동기생들이다. 17기에는 金光植 서울청장과 金炯鎭 본청 차장이 있으며 18기의 경무관으로는 서울청 朴珍錫 경무부장이 유일하다.19기는 李茂永 경찰대학장(치안정감)를 비롯해 李八浩 충남청장,李壽一 본청 경비교통국장,金宗佑 경북청장,朴金成 101경비단장,裵熙善 본청 교통심의관 등이 있다. 20기로는 본청 李奎植 본청 기획관리실장,李大吉 정보국장,柳光熙 경찰대학 교수부장,全龍燦 행정자치부장관 보좌관 등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 이밖에 成낙식 전북차장(21기),徐재관 본청 감사관(22기),李근표 충북차장(22기) 등이 뒤따르고 있다. □고시출신 경정으로 출발한 고시 출신의 인맥 역시 만만찮다. 현재 고시출신은 치안감 6명이며 경무관 14명,총경 24명,경정 20명 등 모두 64명이다. 치안감으로는 李憲晩 부산청장,李澤天 서울청 차장,金在鍾 인천청장,田炳龍 경남청장,李道祚 경찰청 형사국장 등이 있다. 경무관으로는 고참인 朴奉泰 본청 방범국장을 비롯해 成樂合 서울청 형사부장,李相業 서울청 정보부장,趙昌來 서울청 경비부장,韓正甲 충남차장,朴萬淳 전남차장,崔圻文 본청 정보심의관 등이 있다. □군출신 본청의 李炳坤 공보관과 徐聖根 경무국장,그리고 李崙祖 경찰대 학생지도부장 등이 군 출신을 대표한다. 총경으로는 본청의 黃학연 형사과장·金부욱 경비1과장·李경범 교통안전과장,그리고 서울청의 權영섭 특수기동대장 등이 있다. □순경공채 및 경사 경감특채 순경 공채 및 경사·경감 특채 출신으로는 치안감인 徐廷玉 보안국장과 具鍾泰 대구청장을 필두로 全判溶 제주청장(경무관)·玄誠一 경기3부장(〃)이 맥을 잇고 있다. 총경으로는 金복현 본청 감찰담광관,權영국 시경 교통안전과장,孫종은 서울송파서장,趙병효 중랑,崔병일 강서,이상호 도봉서장이 있다. □경찰대학출신 경찰대학 출신의 경우 1기로 지난 4월 총경으로 승진한 尹재옥 고령서장이 단연 선두다. 수석입학과 수석졸업의 영광을 안은 인물이다. 그만큼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다. 尹서장과 동기인 金성훈 서울청 정보5계장(경정),趙길형 서울청 정보3계장(〃),朴병국 서울 형사기동대장(〃) 등이 있다. 2기로 주목받는 인물은 朴종준 본청 기획관리과 기획계장. 경찰대 출신 가운데 가장 먼저 경정(91년)을 달아 이번 연말에 총경승진이 유력한 것으로 보인다. 3기로는 韓광일 본청 공보과 공보계장,鄭용선 서울청 도범계장 등이 주목받는 그룹이다.
  • 눈길 끈 친분인사 다과회/과거 인연 知人들 ‘감회어린 만남’

    ◎납치사건 구명·민주화 지원 70여명 초청/金九·張俊河 선생 의문사 규명 의지 밝혀 【도쿄=梁承賢 특파원】 金大中 대통령의 방일 행사 가운데 눈길을 끌었던 것은 도쿄를 떠나기 앞서 9일 오전 일본내 친분인사들과의 만남이었다. 지난 70년대 유신 당시 金대통령이 일본에 체류하고 있을 때 음양으로 도왔던 인사들이다. 초청된 지인(知人)은 70여명. 일본 중·참의원과 교수,언론인,목사 등으로 金대통령의 일본 인맥으로 통한다. ‘DJ 도쿄납치사건’,구명활동,민주화 지원 운동으로 인연을 맺어왔다. 이 가운데 덴 히데오(田英夫) 참의원은 납치사건의 진상규명위원장,사사키 히데노리(佐木秀典) 중의원은 실무책임자로 활동했던 인사들이다. 재일동포인 趙活俊씨는 납치사건 당시 金대통령의 비서. 초등학교 친구 金鍾忠씨는 金대통령이 일본 망명 때 자신의 집을 피신처로 제공했다. AP통신 기자인 洪健杓씨는 납치사건의 진상을 국제사회에 널리 알렸다. 지난 95년 金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했을 때 납치사건기획물을 제작했던 호타 긴코(堀田謹吾) NHK프로듀서와 월간지 세카이(世界)를 발행했던 고(故) 야스에 료스케(安江良江) 사장 미망인과 오카모토 아쓰시(岡本厚) 편집장도 보였다. 또 도이(土井) 사민당당수를 비롯,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전 총리,고노 요헤이(河野洋平) 전 자민당총재,차기총리감으로 꼽히는 가토 고이치(加藤紘一) 중의원 등 金대통령의 일본 정계인맥도 눈에 띄었다. 金대통령이 야당 지도자였던 시절,감시의 눈을 피해 꾸준히 지원한 사람들도 적지않다. 이를 감안한 듯 金대통령은 연설 전 먼저 사회자용 마이크에 서서 깍듯한 예우를 갖췄다. 참석자들을 ‘친구’라고 불렀다. 특히 金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정신대문제 해결을 강조하는 한편 국내문제에도 언급,“金九 선생,張俊河 선생 등 국내에서 의문사한 사건의 진상도 가려져야 한다”고 못박았다. 이에 무사코시 긴히테(武者小路公秀) 훼리스여자대 교수는 환영사에서 “여기 모인 우리는 일본정부가 피해가고 金대통령이 관용으로 넘어가려는 문제에 대해 그냥 넘어갈 수 없다”며 金대통령의 도쿄 납치사건 진상규명 운동을 계속할 뜻을 밝혔다.
  • 1,000여곳 등록… 80∼90곳 활동/국내 무기중개상 현황

    ◎대부분 영관급이상 예편… 인맥동원 로비전/무기시장 연 2조∼3조… 커미션 1,000억대 ‘92년 공군 준장으로 예편한 무기중개업자 申모씨는 E­X(공군 조기경보기)사업과 관련,97년 2월부터 10차례에 걸쳐 현역 공군 소장과 준장인 李모씨와 申모씨를 일식집 등에서 만나 도와달라고 부탁하였다.’ ‘무기중개회사 이사인 金모 예비역 공군중령은 공군 李모 대령의 사무실 책상에서 중형수송기에 대한 자필 메모를 허락 없이 탐지·수집하여….’ 지난 2일 검찰과 국군기무사가 공군 E­X사업계획 등 2급 군사기밀을 미국의 무기중개상에게 넘겨준 혐의로 현역 장교 4명과 국내 무기중개업자 2명을 구속하면서 발표한 수사내용이다.어떤 사람들이 국내 무기중개상으로 활동하고 있는지,어떤 방식으로 무기중개업을 하고 있는지 등을 알려주는 좋은 사례다. 90년 당시 이번에 문제가 된 P­3C의 거래를 중개한 (주)대우의 K씨 또한 군에서 무기구매 업무를 했던 영관 출신이고,현역으로 P­3C 구매업무를 맡았던 H씨 역시 예편 후 무기중개회사를 설립한 것으로알려졌다.8일 국방부에 따르면 국내에 정식 등록된 무기중개상은 국내업체 300여개와 외국업체 700여개 등 모두 1,000여개.그러나 실제로는 80∼90여개 업체만이 국방부의 무기구매 과정에 참여하기 위해 정보를 수집하고 로비전을 벌이는 것으로 알려졌다.‘웬만한 건’ 하나만 챙겨도 1∼2년을 먹고 놀 수 있을 정도로 떨어지는 것이 많다는 소문인 만큼 전직 장교가 직접 중개회사를 차리거나 실무 책임자로 일하는 게 상례다. 국내 무기시장 규모는 연간 2조∼3조원.무기중개 커미션은 총 거래액의 1∼5%,보통 3∼5% 정도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따라서 중개상이 챙기는 커미션만 해도 연간 1,000억원대를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중개상들은 거액의 커미션을 노려 갖가지 연줄을 동원하고 뇌물을 제공하는 등 사업을 따내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특히 외국 대기업체들은 평소 국내 에이전트를 통해 군내 인맥을 구축하는 등 로비선 관리에 많은 공을 들이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 특별빈객·수행원 정상외교 自費 지원

    ◎朴泰俊 총재 등 7명 동행 초청/일 각계인사 접촉 성과 극대화 金大中 대통령의 일본 방문길에 정상외교 측면지원을 위한 특별빈객과 특별수행원들이 포함돼 눈길을 끈다. 특별빈객은 朴泰俊 자민련 총재와 金守漢 전 국회의장.일본 정·재계에 폭넓은 인맥을 구축한 朴총재는 金대통령의 동행초청을 받았다.金전의장은 한·일친선협회 회장 자격으로 수행했다.수행원은 아니지만 申鉉碻 전 총리도 한·일협력위 회장으로서 金대통령에 앞서 일본을 방문했다. 특별수행원은 한·일의원연맹 한국측 수석부회장인 金琫鎬·간사 池大燮(자민련)·梁正圭(한나라당) 의원,대통령 경제고문인 柳鍾根 전북지사,金대통령의 한·일 관계 민간자문역인 崔相龍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장 등 5명이다.金琫鎬 의원은 비리연루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고 있는 한국측 회장인 金潤煥 의원(한나라당)의 대타로 참여했다. 韓勝憲 감사원장이 일본을 함께 방문하는 것도 이채롭다.韓감사원장은 8일 도쿄를 방문,金대통령이 야당시절 친교를 맺은 일본 인사들과의 다과회(9일)에 참석한 뒤 귀국한다.상당수 초청인사 명단을 韓원장이 직접 작성했을 정도로 金대통령과 韓원장의 일본내 지인들은 중복돼 있다. 특별빈객과 특별수행원 등의 일본 여행경비는 공식 수행원과 달리 자신들이 부담하게 된다.
  • “美 교육원조 친미 엘리트 양성”

    ◎임대식씨 ‘50년대 굴절과 선택’ 심포지엄서 주장/관료·학계인사 등 장·단기 유학/정치적 이데올로기·반공체제 구축 미국대학 총장이 방한하면 동문인 국내 유력인사들의 환영행사가 종종 신문에 실린다.그러나 유럽대학 총장 방한 환영행사는 눈에 띄지 않는다.우리 사회의 미국 경사도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이다. 역사문제연구소는 오는 26일 하오 방송통신대학교 별관2층 세미나실에서 ‘1950년대 한국사회의 굴절과 선택’을 주제로 98년 심포지움을 연다.주제는 한국사회 연구의 사각지대가 되고 있는 50년대를 선정했다.한국사회의 근대적 발전논의에서 식민지 시기와 근대화 프로젝트가 시작된 60년대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가 있었지만 50년대는 공백지대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이들은 90년대 한국자본주의의 위기구조 및 정치·사회적 특성들은 50년대 선택적 발전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보는 것이다. 심포지움에서 임대식씨는 ‘1950년대 미국의 교육원조와 친미 엘리트의 형성’이라는 논문에서 미국이 교육·학술,관료 등 지배엘리트에 대한 지원을 통해 친미성향이 조성되는 과정을 추적한다. 논문에 따르면 친미적 상황을 조성하는 첩경은 엘리트들을 친미화하여 정치적 이데올로기적으로 친미­반공체제를 확고히 구축,나아가 그 체제가 유지될수 있도록 경제적 성장을 이루는 것이다.자기편을 만드는 가장 유력한 방식은 장기간 체계적으로 교육시키는 바로 도미유학이다.도미유학이 반듯이 친미파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도미유학파들이 친미파의 골간을 이룬 것은 부정할수 없다.또 유학생들이 우리 전통에 부정적 태도를 보인 반면 서구적 근대에 대해 숭배와 모방의 태도를 보여온 것도 부인하기 어렵다. 도미유학은 지배엘리트들 또는 그럴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에 의해 선택됐다.학자들과 관료들이 교환교수 또는 연수라는 명목으로 재교육이 이루어졌으며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청년들은 장기유학이 이루어졌다. 송인상 전 부흥부장관,이한빈 전 국무총리,김정렴 전 대통령 비서실장 등 유능하고 신뢰할만한 현직 관료들이 미국유학을 떠났으며 특히 경제관료들의 유학이 많았다.교육관료들도 56년 8월 피바디계획에 따라 도미유학이 적극적으로 이루어져 60년대 이후 교육학계에서는 피바디 인맥이 압도했다.언론계에도 미국 연수의 기회가 주어져 박권상,조세형,최병우 등 미국 연수기자들을 중심으로 57년 관훈클럽이 창설된다. 유학은 정식유학,미 국무성지원,원조기관 지원 등 다양한 경로로 이루어져 얼마나 많은 학생들이 해외로 떠났는지 파악하기 쉽지 않다.그러나 각종 자료를 종합해볼 때 해방이후부터 60년대 중반까지 미국유학 경력자는 1만여명을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단기연수,시찰,교환교육을 포함한 것이다.미국유학편향도는 50년대 후반으로 갈수록 더욱 심화된다. 53∼57년 관비유학생 134명 가운데 미국유학생은 69·4%였다.그러나 53년부터 67년까지 정식유학생 7,958명 가운데 86%인 6,845명이 미국유학자였다. 이를 배경으로 미국유학생들은 60년대말 학계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관계 등에도 영향을 미친다. 저자는 미국유학파들이 최고 엘리트들로 부상하면서 미국유학은 개인적 출세의 방편이자 선진적인 물질과 의식이 도입되는 통로였다며 이는 또 우리나라에서 미국식 또는 미국이 의도하는 근대화가 진행됐을 개연성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한다.특히 미국유학파들이 학계를 장악함으로써 그 영향은 보다 장기적이고 심층적이고 광범위한 것이었다고 덧붙인다.
  • 대학가 ‘취업 몸살’ 위험 수위

    ◎예비 學士들 학업 팽개치고 구직 혈안/4학년 학교 수업은 아예 관심조차 안보이고 순수학문 강의실 ‘텅텅’… 취업특강은 ‘빽빽’/교수들도 강의보다 제자 취직에 더 신경 사상 최악의 취업난으로 대학생들이 1,2학년 때부터 학업은 팽개치고 취업에 매달리는 등 대학들이 ‘취업 몸살’을 앓고 있다. 졸업을 앞둔 4학년 학생들은 일자리를 알아보거나 취업 공부를 하느라 학교 수업에는 아예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저학년들도 취업에 유리한 과목만 골라 수강하는 등 대학 전체가 취업 열풍에 휩쓸리고 있다. 이화여대의 경우 4학년생들이 몰렸던 ‘기독교와 세계’‘국어와 작문’‘외국시의 이해’ 등 과목의 강의실은 거의 텅 비었다.학생들이 취업 준비를 하느라 강의에 빠진 탓이다.金모양(23·중어중문 4년)은 “PC통신 구인란을 검색하거나 기업체를 찾아가는 것이 주된 일과”라면서 “2학기 들어 수업에는 거의 출석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숭실대 행정학과 4학년 전공 선택과목인 ‘공기업론’의 수업은 4학년 전원이 결석한 가운데 2∼3년생 몇몇만 자리를 지키고 있다. 반면에 취업특강은 빈자리가 없을 정도다. 한양대의 경우 기업의 중견 여성간부를 초청해 성공 비결을 듣는 2학점짜리 ‘여성과 직업’ 과목은 올 들어 200석의 강의실이 언제나 만원이다.숭실대 중문과 金鍾聲 교수는 강의시간 가운데 30분을 할애,취업 전문가를 불러 특강을 한다. 성균관대는 PC교육과 재무제표,실무영어 등 취업실무 교육에 중점을 두고 있다.대외활동이 활발한 교수들의 인맥을 활용하는 취업 지도교수제를 도입할 방침이다. 경희대는 고심 끝에 아예 ‘취업 스쿨’을 개설했다.1주일에 2시간씩 한 학기 8주 동안 수강하면 1학점을 준다.브리핑 방법이나 비서 실무도 강의 내용에 들어있다.요즘은 비서 실무 강의에 남학생들도 몰린다. 국민대는 오는 23일부터 25일까지를 취업주간으로 정해 구직 특강을 계획하고 있다.저학년에게도 수강을 독려하고 있다. 전남대는 ‘IMF 위기에도 취업할 수 있다’는 특강을 마련,외국인 회사,유통회사,벤처기업,중소기업 등의 전문가를 초청,한달에 2차례씩 강의한다.교수들도 강의보다는 학생들의 취업에 더욱 신경을 쓴다.한양대 공대 교수 100여명은 최근 200여개 회사를 돌아다니며 ‘기업 실무에 맞는 수업을 하고 있다’며 학생들을 선발해 달라고 부탁했다.충북대도 이달 말쯤 교수들을 도내 각 기업체에 보내 졸업생 채용을 요청키로 했다. 한편 서울대 등 서울·경기 지역 15개 대학 학생들은 오는 18일 취업대책 연합기구인 전국학생특별위원회를 발족한다.
  • 혁명원로 대거 퇴역 ‘세대교체’/北 서열 변화

    ◎홍성남·최태복 등 김정일인맥 급부상/군부실세 조명록 인민무력부장 유력 이번 북한 최고인민회의에서는 80대 고령의 혁명원로들이 대거 한직으로 물러섰다.부주석 李種玉 朴成哲 金英柱가 최고인민위원회 상임위 명예부위원장으로 자리를 옮긴데다 2∼4위였던 주석단 서열도 4∼6위로 밀려나 사실상 은퇴한 셈이다. 대신 金正日은 자신의 인맥으로 분류돼오던 인사들을 전면에 내세웠다.대표적인 예가 洪成南(74) 내각총리.김일성종합대와 체코 프라하 공대출신의 테크노크라트인 洪총리는 권력구조의 부침이 심했던 7·80년대에도 정무원 부총리와 국가계획위원장에 수차례 임명될만큼 업무추진력이 뛰어난 것으로 알려졌다.최고인민회의 의장으로 발탁된 崔泰福(68)도 70년대 초 金正日의 후계자부상 과정에서 유일사상체계 확립에 앞장서면서 김정일 인맥의 일원이 됐다. 대외적인 국가수반 역할을 하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에 기용된 金永南(70)은 우리에게 외교부장으로 친숙한 인물로 외교관 외길을 걸어온 비동맹외교의 대가다.94년 북미핵협상 대표였던 강석주 외교부 부부장에게 뒤처진 것으로 알려지기도 했지만 이번에 주석단 서열 2위를 차지,金正日 시대의 실세로 떠올랐음을 증명했다. 온건 개방파 延亨默(67)자강도 책임비서도 김정일의 신임을 얻고 있어 당인사에서 중책을 맡을 가능성이 크다.또 桂應泰(73),金基南(72),金國泰(74),金容淳(64)등 당 비서 4인방과 金正日의 매제인 張成澤(52)도 앞으로의 행로가 관심거리인 실세집단이다. 군부에 신경을 써온 金正日의 인사행태는 이번에도 어김없었다.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에 앉은 趙明祿(68)군 총정치국장은 군내인맥의 대표격.러시아 공군대학에 유학한 공군출신으로 해방전 어린 金正日을 업고 다닐 정도로 깊은 인연을 맺었다.인민무력부장으로도 유력시된다.
  • 서울大 후임총장 7∼8명 물망

    ◎최송화·유평근·장호완·신용하 교수 등 “개혁주도” “덕망있는 인물” 자천타천 부상 서울대 鮮于仲皓 총장이 딸에게 고액과외를 시킨데 따른 도의적 책임을 지고 물러나면서 후임 총장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현재 서울대 내에서 유력한 후임총장 후보로 물망에 오르내리는 인사는 7∼8명 정도.총장직무대행을 수행하게 될 崔松和 부총장을 비롯,兪平根 인문대학장 張浩完 자연대학장 郭秀一 경영대학장 愼鏞廈 사회대학장 金世源 사회대 교수 李仁圭 전 자연대학장 李種昕 교수협의회장 등이 꼽히고 있다. 이 가운데 崔부총장은 서울대가 추진하고 있는 대학구조조정을 차질없이 수행하기 위해서는 대학본부에서 총장이 나와야 한다는 여론을 등에 업고 강력한 후보로 떠오르고 있다. 兪학장과 張학장은 서울대 개혁안이 학내 의견수렴 과정을 거치지 않고 일방적으로 추진되고 있다고 문제점을 지적하며 나름대로의 대안을 제시,지지여론을 이끌어내는 등 지도력을 발휘해 주목받았다. 愼학장은 왕성한 연구활동과 정·관계의 폭넓은 인맥으로 대외인지도가 높아 실추하는 서울대의 명성을 다시 세울 수 있는 인물로 지목되고 있다. 郭학장은 이제껏 경영대가 총장을 한명도 배출하지 못한데다 경영대의 위상을 강화해야 한다는 내부 여론에 힘입어 총장후보로 떠오르고 있다. 평교수들의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는 李種昕 교수협의회장과 지난 96년 鮮于 총장과 총장자리를 놓고 한차례 대결했던 金世源 교수는 개혁성으로,李仁圭 전 학장은 학식과 덕망으로 학내 지지기반이 넓다.
  • 親日의 군상:4/李瑄根 前 문교장관(정직한 역사 되찾기)

    ◎만주 친일파 거두로… 유신 옹호자로/역사는 그를 왜 친일파로 기록하는가/관동군 군량미 ‘보급창고’ 만몽산업의 상무/독립군 토벌 후원단체 ‘동남지구…’ 상무위원/일제 괴뢰정부 만주국 ‘국회의원’ 지내기도/해방후 행적­敎聯회장·3개대학 총장·국민헌장 제정 참여·정신문화연구원 원장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의 가장 건실한 신(新)질서를 건설해야만 될 것은 유구한 인류역사가 우리에게 부과한 중대 사명으로…좀더 솔직하고 좀더 용감하게 신체제 건설에 희생하여 달라는 것입니다. …특히 동남지구특별공작후원회의 활동은…민족협화(民族協和)의 신흥제국(新興帝國·만주제국을 지칭함)에 있어서 가장 솔직한 자기반성으로 이 운동의 광휘있는 실천은 장래 선계(鮮系·조선인)국민에게 정치적으로,사회적으로,정신적으로 반드시 좋은 영향을 가져오리라고 봅니다.…”(‘삼천리’1940.12월호) 누가 쓴 글일까? 만주국(滿洲國) 건설에 조선인들의 적극적인 동참을 호소하고 있는 이 글을 쓴 사람은 일본인이 아니다. 당시 만주에서 활동하던 조선인이다. 하성(霞城) 李瑄根(1905∼1983). 문교장관과 수차례 대학총장을 지낸 이선근이 바로 이 글의 필자다. ‘과연 그가 이 글을 썼을까’하는 의문이 갈 정도다. 왜냐하면 이선근의 해방후 경력은 ‘민족적인’ 냄새로 분칠이 돼 있기 때문이다. ‘화랑도(花郞道) 연구’로 서울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한국독립운동사’를 저술하기도 했던 그다. 얼핏 보면 그는 ‘친일(親日)’과는 거리가 먼 사람같이 보인다. 그러나 한 꺼풀만 벗겨보면 그는 해방후 일찌감치부터 소문난 친일파였음을 알 수 있다. ○독립운동사 저술로 ‘과거’ 위장 일제당시 총독부 기관지였던 ‘매일신보’(每日新報·현 ‘서울신문’의 전신)는 해방후 미군정에 접수된 후 10월 25일 조선인 주주총회를 열고 사장 吳世昌,부사장 李相協,전무 金炯元 등 새 경영진을 구성·발표하였다. 이선근은 주필 겸 편집국장으로 이 명단 속에 포함돼 있었다. 그러나 이 인사는 중도에 좌절되고 말았다. 이유는 새로 임명된 주요간부 대다수가 친일경력자라는 것. 이선근도 이 명단 속에들어 있었다. 과연 이선근은 친일파인가? 구체적으로 언제,어디서,어떤 행적을 했길래 역사는 그를 친일파로 기록하는가. 반세기 이전의 만주(滿洲)땅으로 그를 찾아가 보자. 이선근은 경기도 개풍(開豊·현 개성)사람으로 본관은 전주(全州)다.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데다 일찍 신학문에 눈떠 휘문고보 졸업(1922년)후 이듬해 일본으로 유학길에 올랐다. 1929년 와세다대학 서양사학과를 졸업한 그는 귀국하여 첫 직장으로 ‘조선일보(朝鮮日報)’에 입사하였다. 당시 나이 24세. 그는 입사 1년 반만에 최연소 정치부장을 거쳐 이듬해 약관 25세로 국장이 공석인 국장대리로 승진하여 사실상 편집국장이 되었다. 그 시절을 두고 그는 “입사 한 달만에 사설(社說)을 쓰기도 했다”고 자랑한 바 있다. 그의 신문사 생활은 3년만에 막을 내렸다. 한편 1937년 ‘만주행(滿洲行)’으로 그는 인생에서 한 전환기를 맞는다. 이 무렵 ‘동양(東洋)의 서부’로 불리던 만주는 출세욕에 불타는 군인·지식인,일확천금을 노린 모략자·협잡꾼들이 앞다퉈 모여들던 신(新)개척지였다. 특히 일본인과의 차별대우로 야망을 좌절당한 조선청년들에게 ‘무법지대’ 만주는 오히려 ‘희망의 땅’이었다. 문경보통학교 교사로 있던 朴正熙 전 대통령은 ‘긴 칼 차고 싶어’ 만주로 가서는 군인이 되었고 조선인 일본유학생 상당수는 만주로 가서 고급관리가 되었다. ‘야망가’ 이선근의 ‘만주행’은 당시 시대상황에서 자연스러운 것이었는지 모르지만 아무튼 그로서는 놀라운 변신이었다. 결론적으로 말해 그가 만주에서 보낸 8년은 결국 그에게 ‘친일파’란 오명을 남겨주었다. 1940년 9월21일자 ‘만선일보(滿鮮日報)’를 보면 이 해 만주국 협화회(協和會) 전국연합회(약칭 全聯) 조선계 대표 16명중 한 사람으로 이선근이 소개돼 있다. 이선근의 당시 직책은 빈강성(濱江省) 오상현(五常縣) 안가촌(安家村)분회 부(副)분회장. 조선일보 퇴직후 잠시 고향에서 교편을 잡던 이선근은 이 지역출신 孔鎭恒씨와 의기투합,1937년 만주행에 올랐다. 孔씨는 개성 백만장자의 아들로 일본와세다대학 영문과를 나와 파리와 런던에서 유학한 지식인.그는 유럽 유학후 귀국길에 시베리아,만주를 경유하였는데,이 때 만주에 대규모 농장을 만들 계획을 세웠다가 후에 만몽(滿蒙)산업주식회사를 설립,사장에 취임했다. 이 회사가 조선인 유랑민을 동원,개척한 안가(安家)농장은 총면적 7천만평,수용가구(家口)만도 4천가구에 달하는 대규모였다. 지난 94년 이선근의 친일행적 조사차 안가농장 현지를 답사한 具良根 교수(성신여대·중문과)는 당시 안가농장의 성격을 두고 “관동군(關東軍)의 군량미 보급기지나 마찬가지였다”고 지적하고는 “이 지역에서 생산되는 ‘우창따미(五常大米)’는 지금도 중국 최고의 쌀로 소문나 있다”고 밝혔다. 이선근의 친일활동은 그가 만몽산업의 상무이사로 있으면서 관동군의 군량미 충당에 협조한 점이 그 첫째다. 전통적으로 쌀을 주식으로 해온 일본군에게 있어서 쌀농사는 총포(銃砲) 이상 가는 전쟁물자 지원이였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선근은 당시 만주에서 활동하던 조선인 친일파들과 어울려 친일대열에 가세한다. 대표적인 친일행적의 하나로 ‘동남지구특별공작후원회’ 활동을 들 수 있다. 1940년 10월 만주국 수도 신경(新京)에서 발족된 이 단체는 선비(鮮匪·조선인 항일세력),토비(土匪·만주토착 항일세력) 등 이 지역 항일세력들을 토벌하던 관동군을 측면에서 지원한 조선인 주축의 대표적 친일조직. 당시 만주 건국대 교수로 있던 육당 崔南善은 이단체에서 고문을,이선근은 협화회 봉천성 대표 徐範錫(해방후 6선의원 지냄)등과 함께 상무위원을 지냈다. 나중에 그가 만주국의 국회격인 협화회 협의원에 발탁된 것도 이런 공로(?) 때문이었다. 한편 해방후 이선근은 李承晩정권 하에서 문교장관,성균관대 총장 등을 거쳐 朴正熙정권과 다시 줄을 대는데 여기에는 ‘만주경력’이 알게 모르게 작용한 면이 없지 않다. 朴정권은 만주군관학교와 만주국 관리양성소인 대동학원(大同學院) 출신자 등 만주인맥에 권력기반의 한 줄기를 두고 있었다. 朴정권 말기 총리를 지낸 崔圭夏 전 대통령도 대동학원 출신으로 만주국에서 관리를 지냈다. ○교육·문화계 요직 독식 1968년 ‘국민교육헌장’ 제정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이선근은 朴정권 하에서 승승장구하였다. 문화재위원장(69년),영남대 총장(69년),동국대 총장(74년),대한교련(敎聯)회장(76년),초대 정신문화연구원장(76년)등 교육·문화계의 요직을 거의 독식하였다. 그가 이같은 초특급 대우를 받은 배경에는 그가 유신(維新)체제 홍보의 나팔수를 자임한 공로 때문으로 보인다. 그의 동국대 총장 취임사 한 구절을 보자. “…민족,국가가 총력을 기울여 추진하고 있는 유신(維新)정신,새마을정신으로 우리 동대(東大·동국대)의 발전을 위해 서로 협력하고…”(‘東大新聞’,1974.7.30) 그는 대학총장 시절에도 내놓고 유신체제를 선전한 인물이다. 정식으로 ‘유신옹호’ 논문도 쓰고 강연도 여러 차례 했었다. 박정권 말기인 78년에 문을 연 정신문화연구원(정문연)은 사실상 그의 주도로 설립됐다. 초창기에는 대만의 ‘중앙연구원’을 모델로 하여 순수 학술연구기관을 만든다고 선전하였지만 결과적으로 체제옹호용 기관이 되었다. 권력자를 향한 그의 ‘아부기질’은 李承晩­朴正熙에 이어 全斗煥시대까지 계속됐다. 광주(光州)의 상처가 채 아물지도 않은 시점인 80년 8월. 그는 한인터뷰에서 “全斗煥 장군은 위기상황 극복의 최적임자”라고 추켜세우고는 “全斗煥 장군을 다음 대통령으로 선출해야 된다는데 국민의 여망이 모아지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 국민의 의식수준이 높음을 단적으로 나타낸 것”이라고 지적했다(‘서울신문’,1980.8.20). 지금 그가 살아있다면 뭐라고 변명을 할까. 해방후 대다수 친일파들이 그러했듯이 그 역시 역대 정권때마다 전천후형(全天候型) 인간으로 살다가 생을 마쳤다. 역사학계의 한 중진교수는 “자신의 과거경력을 위장하기 위해 그는 독립운동사와 같은 책을 의도적으로 썼다” 며 “그는 역사학자가 아니라 권력자의 전위대였다”고 혹평했다. 83년 사망할 때까지 그는 과거행적에 대해 단 한번도 뉘우치거나 사죄한 적이 없다. 오히려 ‘국가유공자’로 지정돼 국립묘지 국가유공자 묘역에 묻혔다. ◎協和會란? ‘협화회(協和會)’란 일제가 만주사변 이듬해(1932년) 세운 괴뢰정부 만주국을 통치하기 위해 만든 ‘국가기구로서의 단체’.일본의 대정익찬회(大政翼贊會),조선의 국민총력조선연맹와 같은 관변·어용기관을 본따 전(全)만주의 전(全)인종을 망라하여 조직한 이 단체는 민족간의 ‘협동과 화합’,항일세력에 대한 선무(煽撫)공작 등이 주요 설립목적이다.. 기구는 정부조직의 국무원­성(省)­현(縣)에 대응하여 전국연합협의회­성(省)연합협의회 등의 협의기구와 지방의 집행기관으로 구성돼 있었는데 회장직은 만주국 국무총리가 맡았다. 전체 회원수는 1940년 현재 5족(五族,일본인·만주족·조선족·몽고인·중국인)을 통틀어 1백 67만여 명. 회원 가운데 민족별로 대표자(협의원)를 뽑아 매년 전국대회를 가졌는데 1938년도 전국연합협의회(약칭 全聯)에서는 총참가대표 1백72명중 조선계 대표는 12인이었다.
  • 옐친 조기 퇴진 임박?

    ◎개각 불구 하원 탄핵 태세… 연정 논의서도 소외/총리에 조각·정책수행권 뺏겨 ‘이름만 대통령’ 보리스 옐친의 시대는 끝나는가. 총리 경질에도 불구하고 경제위기와 관련 옐친 대통령에 대한 사임압력이 수그러들지 않으면서 조기하야설까지 나돌고 있다. 정계에서 폭넓은 인맥을 지닌 체르노미르딘을 총리로 재기용하며 의회의 사임공세를 피해가려 했지만 상황이 만만찮다. 하원의 공격은 특히 거세다. 겐나디 셀레즈뇨프 러시아 국가두마(하원)의장은 26일 보리스 옐친 대통령의 자진 퇴진을 촉구하고 나섰다. 여기에 자신의 후계자로까지 지명하는 선심을 베풀면서 자기편으로 끌어들 이려한 체르노미르딘 총리의 행보마저 예사롭지 않다. 체르노미르딘은 수세에 몰려 도움을 요청한 옐친으로부터 독립적인 조각권과 정책수행권한 보장까지 요구해 받아냈다.오히려 자신의 정치적 입지강화를 노리는 인상이다. 체르노미르딘은 하원과 상원(연방회의)의 대표들과 현재 모색중인 연립정부 구성에서 옐친을 완전히 배제시키는 등 오히려 옐친 힘빼기에 주력하고 있다.옐친을 ‘종이 짜르(황제)’로 만들어버렸다. 옐친은 이에대해 앞으로 구성될 연립정부의 활동에는 간섭할 뜻이 없다고 밝혔다.자신의 운명을 체르노미르딘의 손에 맡긴 꼴이어서 이제는 그에게 힘을 실어주는 것 외에는 달리 방도가 없다. 그러나 차기 대권을 노리는 체르노미르딘에게 옐친은 부담스런 존재일수밖에 없어 옐친의 운명은 한 치 앞을 예상하기 힘들다.러시아 정가에선 체르노미르딘이 조만간 하원과 보조를 맞춰 옐친의 조기하야를 촉구할 것이라는 예측도 흘러나온다.옐친의 조기하야설이 가시권에 접어든 이유다.
  • 한진그룹(한국경제를 이끌어온 기업)

    ◎趙重勳 외고집 ‘신용 제1주의’/수송 외길 53년… 5대양 6대주가 좁다/문어발식 확장 지양… IMF시대 생존법 이미 터득/2000년 세계항공화물부문 1위·해운업 3위 목표 우리나라 대기업가운데 한진그룹만큼 ‘한우물만 파 온’ 곳도 없다. 지난 45년 창업 이래 지금까지 땅과 바다와 하늘을 개척하면서 반백년의 역사를 이어왔다. 그래서 기업의 전문성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한진그룹이 갖는 위상은 독보적이다. 문어발식 경영을 지양한 채 수송외길을 고집해 온 덕분이다. 대한민국의 물류산업은 해방이 되던 해 청년 趙重勳의 ‘길’과 ‘수송’에 대한 집념에서 움이 텄다. 趙회장은 당시 인천항에 쏟아져 들어오던 수많은 물자를 보고 수송사업을 착안했다. 누가 하던 일,남이 만든 것을 흉내낸 게 아니었다. 趙회장은 다른 기업이 다방면의 사업에 진출한 것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걸어왔다. 남이 땀흘려 이룩한 분야에 뛰어들어 뒤늦게 모방하거나 무리한 방법으로 경쟁하기 보다는 창의와 신념을 갖고 고집스럽게 자신만의 사업영역을 일구었다. 무모한행동을 거부하는 그에게 ‘보수적’이라는 지적도 따랐다. 하지만 趙회장은 “사업확장을 못한 게 아니라 안했던 것”이라고 회고한다. 잘된다는 남의 사업에 뒤늦게 뛰어들 경우 결국 덤핑경쟁에 휘말릴 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 믿었다. 한진은 오늘날 수송·물류 분야에서 만큼은 전 세계적으로 경쟁력을 갖춘 업체로 평가받는다. 오는 2000년 세계항공화물 부문 1위, 해운업 3위가 목표다. 趙회장은 말을 많이 하는 기업인이 아니다. 그러나 그의 말 중에는 기업경영의 핵심과 세인의 의표를 찌르는 표현이 적지않다. 재계에 널리 알려진 ‘지고 이기라’는 말도 그 중 하나. 눈앞에 보이는 이득보다 신용을 더 중시하라는 얘기다. 趙회장의 사업스타일을 엿볼 수 있는 일화가 있다. 한진은 1956년부터 주한 미군의 용역사업에 참여했는데,어느날 임차해 쓰던 트럭의 운전사가 미군의 겨울 군복인 파커를 트럭째 남대문시장에 팔아 넘긴 사고가 발생했다. 趙회장은 남대문시장에 직원을 상주시켜 놓고 나도는 분실물건을 일일이 추적해 돈을 주고 모두 사서 미군측에 납품했다. 큰 손실을 봤지만 반면에 미군들의 확고한 신용을 얻을 수 있었다. 趙회장의 문제 해결 능력과 신용을 지키려는 자세를 본 미군들은 그 뒤 한진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한진의 22개 계열사들은 이 순간에도 5대양 6대주에서 우리민족의 발이 되고 날개가 되어 한민족의 영토를 넓혀가고 있다. 여기 저기 기웃거렸다면 결코 이루기 힘들었을 일이다. ◎1945년 출범 ‘한진상사’가 모태/66년부터 5년간 베트남 진출로 기반 다져/해외서 번 달러 국내투자로 국가발전 기여 한진그룹의 모태는 해방 직후인 1945년 11월1일 육상화물 운송업을 주 업종으로 인천에서 출범한 한진상사다. 한진은 창업 초기 주한 미군의 용역(수송)을 맡으며 착실히 신용을 쌓았다. 이 신용을 밑천이 돼 한진은 월남 전 당시 미군의 군수물자 수송에 뛰어들 수 있었다. 물론 국내업체로는 처음이다. 한진이 66년부터 71년까지 5년동안 월남에서 벌어들인 외화가 1억5,000만달러. 당시 우리나라의 1인당 국민소득(GNP)이 125∼300달러였던 점을 감안하면 엄청난 돈이다. 한진은 이 돈을 모두 국내에 투자했다. 때문에 한진그룹은 내수시장을 발판으로 성장한 다른 그룹과 달리 해외에서 벌어들인 외화를 국가경제 발전에 재투자했다는 점을 지금도 큰 자랑거리로 여기고 있다. 한진은 △한국전쟁 전후의 미군 용역사업 △월남전 당시 미국 군수물자 수송 △국내 최초의 고속버스사업 △국영 대한항공사의 인수를 통한 항공산업 진출 △해운업의 혁명으로 불리는 컨테이너 수송시스템의 국내 첫 도입의 이정표를 세우며 우리나라의 수송산업 발전을 끌어왔다. 특히 수송산업의 기틀을 다짐으로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추진에 큰 역할을 했다. 창업 반세기가 지난 지금 한진은 땅으로는 국내 전 지역,바다로는 31개국 62개 항구를 운행하는 컨테이너항로 및 부정기 벌크항로,하늘로는 27개국 74개 도시를 잇는 육·해·공 종합수송망을 보유한 세계적인 종합 수송물류그룹으로 성장했다. 우리나라 수송산업의 선구자 역할을 해 온 (주)한진,세계 10위권의 항공회사로 성장한 대한항공,국내 최대 선사인 한진해운 등의 22개 계열사와 2개의 학교법인, 1개의 병원을 거느리고 있다. 지난해 매출액이 12조2,000억원,임직원은 4만여명이다. 한진그룹을 통해 이뤄지는 육·해상 물류규모는 지난해 기준으로 국내 1위 이자 세계 6위 수준. 연안운송과 항만해역 부문이 각각 702만t과 1억2,722t,육상화물 부문이 2,998만t,해운의 컨테이너 부문이 168만TEU(20피트 컨테이너 기준),벌크부문은 5,566만t이다. 항공은 연간 국내외 여객 2,550만명을 수송해 국제 여객운송 세계 14위,화물 부문 수송량은 109만t으로 세계 2위다. 한진그룹은 96년 창업 50주년을 맞아 세계화·정보화시대를 선도하는 ‘세계 초일류의 인류(人流),물류(物流),정보류(情報流) 창조기업’으로 발전하기 위한 비전을 천명했다. 단순한 수송기업이 아니라 사람과 물자,그리고 정보의 흐름을 창출하고 관할하는 창조적 기업으로서,21세기를 이끌겠다는 뜻이다. 한진그룹은 2005년 250대의 항공기와 300척의 선박,6,000여대의 차량을 보유하고 매출액 60조원이 넘는 세계 10위권의 수송·물류그룹으로 부상한다는 청사진을 갖고 있다.◎趙重勳 한진그룹 회장/지구촌 곳곳 누비는 민간외교관/佛의 88 서울개최 지지 유도·韓中관계 개선 한몫/“사업도 국익 바탕서” 국가봉사주의 철저 실천 “기업인이 해외에서 하는 사업활동은 그 자체가 한국을 대표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한순간도 민간외교관이라는 사실을 잊은 적이 없습니다” 趙重勳 회장은 평소 민간 외교관으로서의 역할에 남다른 자부심을 갖고 있다. 기업인으로서 국가에 봉사할 수 있는 기회는 민간외교만큼 좋은 것이 없다는 생각에서다. 특히 국제항공사업은 국익과 직결되는 사안인 만큼 어떤 경우든 국가에 기여하는 쪽으로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게 그의 소신이다. 趙회장의 대표적인 민간외교 활동은 73년 프랑스 인사들을 동원해 북한의 세계보건기구(WHO) 가입을 저지했던 일과 올림픽 위원들을 설득해 88서울올림픽 유치에 일익을 담당했던 일이다. 중국과의 항공교류를 통해 한·중 두나라의 관계 정상화를 앞당겼던 일도 빼놓을 수 없다. 趙회장은 경제계에서 대표적인 지불(知佛)인사로 꼽힌다. 73년부터 한·불 경제협력위원회 위원장직을 맡아 두 나라의 경제 교류와 우호관계 증진에 힘써 왔다. 이 공로를 인정받아 프랑스정부로부터 그동안 세차례에 걸쳐 훈장도 받았다. 81년 9월 세계 각국의 국제올림픽위원회(IOC)위원들이 독일의 바덴바덴에 모일 때까지만해도 서울에서 올림픽이 열릴 거라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 당시 趙회장은 한국측 올림픽 유치단으로부터 프랑스IOC위원을 설득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스칸디나비아 출장 중 급히 일정을 바꿔 일본으로 날아가 현지의 올림픽 유치전략을 파악한 후 프랑스로 떠났다. 프랑스 위원들은 한국이 개도국이라는 이유로 서울 개최를 반대했다. 그러나 한·불경협위원장을 지내며 구축한 프랑스내 인맥을 총동원해 결국 지지의사를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계열사 현황 대한항공:항공운송/기내식제조/항공기제조/호텔(69.3.1) 한진해운:해상운송업(77.5.16) 한진건설:건설업/도시가스/터미널운영/석유업/무역(68.8.9) 동양화제해상보험:손해보험업(22.10.1) 한진중공업:선박건조 및 수리/철도차량/플랜트(89.5.15) 한진:육상운송업(45.11.1) 한불종합금융:종합금융업(77.7.13) 한진종합건설:토목건축업(67.8.10) 거양해운:해양운송업(벌크전용선/95.5.1) 한국공항:항공기지상조업(68.2.20) 한진정보통신:시스템통합/부가통신업(89.11.4) 코리아타코마조선공업:선박건조 및 수리/화차/철구조물(72.6.23) 한국항공:항공기취급업/부정기항공운송업(65.5.7) 한진투자증권:증권업(73.2.24)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건설엔지니어링(63.3.9) 평해광업개발:광업(90.5.19) 정석기업:부동산임대업(73.12.31) 한진관광:여행알선업(61.8.23) 한일레저:골프장(89.1.1) 서울투자신탁운용:투자신탁업(96.5.13) 인천국제공항급유시설:항공기급유업(97.4.30) 협신:항만하역업(62.4.24)
  • 인사·자금 총괄… 엘리트중 엘리트(중앙부처 총무과장:上)

    ◎재경부 文昶模 과장­行試 수석후 줄곧 선두/통일부 朴興烈 과장­설득력 탁월 감원 줄여/국방부 郭柄茂 과장­9급에서 꾸준히 승진/외통부 沈允肇 담당관­外試 11회선두 日本通/법무부 李動圭 과장­한보 재수사 능력 발휘 중앙부처의 총무과장은 ‘과장 중의 과장’으로 불린다.인사와 자금운용을 총괄하는 핵심 자리다. 당연히 장·차관 등 부처 내 최고위 인물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는다. 업무처리 능력은 물론 장·차관의 의중까지 읽어내는 능력까지 갖추지 않고는 수행이 불가능한 자리다. 따라서 총무과장이 된다는 것은 능력을 인정받았다는 증거다. 승진도 보장받은 것이나 다름없다. 과장이지만 실제로는 과장 이상의 책임과 권한을 갖고 있다. 국민의 정부 총무과장들,그들은 누구인가. 중앙부처 총무과장의 면면을 3회에 걸쳐 나누어 싣는다. 재정경제부 文昶模 총무과장(48)은 연세대 정외과 출신으로 행정고시 18회에 수석 합격한 뒤 76년 재무부에서 관료생활을 시작했다. 태국 주재 재무관과 국세심판소 조사관,산업관세과장 등을 거치며 고시동기생 가운데 선두그룹으로 인정받고 있다. 지난 3월 李揆成 장관 취임 직후 부이사관으로 승진하며 총무과장이 됐다. 文과장은 李장관의 대전고 후배이기도 하다. 조용하면서 무리없는 대인관계로 부처 사정에 밝고,차분한 성격에 일처리가 빈틈없다는 평이다. 통일부 朴興烈 총무과장(47)은 서울고와 한양대 경제학과를 나왔다. 행시 22회로 국방부에서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으나 사무관 시절 통일부로 옮겼다. 한때 통일부 안에 인맥이 없어 어려움을 겪기도 했으나 현재 총무과장직을 수행하는 데는 오히려 도움이 되고 있다고 한다. 출신이 다양한 직원이 혼재한 상황이어서 인사에서 편향된 양태가 드러날 경우 갈등이 빚어질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일반직과 별정직,옛 남북대화사무국 출신들로부터 고루 의견을 들은 뒤 인사안을 제출하는 방식이어서 신망이 높다. 정부조직개편심의위원회가 통일부 인원을 12∼13% 줄이려 했을 때 직접 찾아가 정책실 1국1과 폐지안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하고 설득해 결국 직제를 유지시키고 감원폭도 줄였다고 한다.국방부 郭柄茂 총무과장(56)은 65년 9급으로 국방부에 첫발을 디딘 뒤 통계과·심사분석과·감사관실 등을 거쳤다. 총무과는 국방부 내 대령 이하 현역과 일반직의 인사발령이 주된 업무다. 그동안 현역 준장이 맡아왔으나 93년부터 부이사관으로 바뀌었다. 다른 부처와 달리 일반직·현역·군무원·별정직 등 직종이 다양하고 특수한 업무성격 등으로 다소 어려움이 있다. 외교통상부와 법무부는 성격이 조금 다르다.외통부는 인사기획담당관이,법무부는 검찰1과장이 인사를 총괄한다. 외통부 沈允肇 인사기획담당관(44)은 중앙고와 서울대 외교학과를 나온 외시 11회의 선두주자. 주일대사관 1등서기관과 동북아1과장을 역임하는 등 일본통으로 꼽힌다. 소리가 안나면서도 일을 잘 처리하고,사교성도 좋아 선후배가 모두 좋아하는 사람으로 통한다. 법무부 검찰1과는 검찰의 인사·조직·예산을 담당하는 핵심 과이다. 따라서 검찰1과장은 이른바 검찰의 ‘황태자’자리로 불린다. 역대 검찰총장들이 대부분 이 자리를 거쳤다. 현(現) 과장인 李勳圭 부장검사(45)는 충남 온양 출신으로 연세대 법대를 나온 사법시험 20회 출신. 서울지검 남부지청을 시작으로 대전지검 공주지청장,대검 검찰연구관,인천지검 형사3부장,대검 중수1·3과장을 거쳤다. 李과장은 중수1과장 시절 한보비리 사건 재수사 때도 일을 잘 처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검찰1과장으로서는 아직 평가할 만한 단계가 아니라는 지적이다. 검찰인사 만큼 말이 많은 인사가 없기 때문이다. 이달 말쯤으로 예정된 검찰 정기인사 결과에 따라 李과장에 대한 평가도 확실해질 전망이다.
  • 제주(지방정부 싱크탱크:13)

    ◎정통공무원­외부연구원 환상콤비/21세기 제주 도약의 첨병/정통 공무원­梁鍾守 부지사 진두지휘.제주발전 청사진 제시.개발특별법 개정 담당/연구원 그룹­30∼40대 엘리트 중심.지역개발 전략 등 수립.외국투자 유치도 앞장 禹瑾敏 제주도정의 싱크탱크는 크게 청 안팎의 그룹으로 나뉜다. 청내 그룹의 경우 지사가 바뀌고 정책기조가 변하면서 다소 어색한 구석이 없지 않으나 구조조정 작업이 마무리되면 보다 체계적이고 투명한 조직으로 자리잡을 것으로 보인다. 현재는 공직 34년째인 정통 내무관료 출신의 梁鍾守 행정부지사(59)를 머리로 金漢昱 기획관리실장(50)­金榮俊 기획관(51)­金暢禧 법무담당관(48)­吳聖休 기획1계장(50)으로 이어지는 기획통들이 禹지사에게 도정 청사진을 제공하고 있다. 근래 이뤄지고 있는 도의 구조조정 및 정원감축 밑그림과 제주도개발특별법 개정작업도 이 그룹이 맡아 추진하고 있다. 청외그룹은 다양하다. 지난해 5월 개원한 제주발전연구원,6·4 지방선거에서 禹지사의 정책개발 과제를 담당했던 제주대 교수팀,외국 투자자들을 불러들이는 나팔수격의 金榮澤 관광개발정책고문 등이 주축을 이룬다. 禹지사와 학연이나 혈연으로 맺어진 사이라기보다는 지인관계로 얽힌 인맥들이다. 제주발전연구원은 21세기 지식산업 사회에 대비,지역발전에 필요한 지식을 가공하고 확대 재생산하는 일종의 지식공장이다. 고려대 출신의 농업경제 전공 高成寶 책임연구원(36·박사)을 중심으로 수질환경 전공의 金泰閏 연구원(부경대·33·박사과정 수료),도시행정을 전공한 梁德淳 연구원(경희대·37·박사과정 수료) 그리고 최근 공채로 새식구가 될 교통공학 전공의 黃京洙 연구원(서울시립대·33·박사),관광개발 전공의 金義根 연구원(경기대·30·박사) 등 30대 소장 엘리트군으로 꼽히는 5명의 연구원이 21세기 제주 도약을 위한 각종 지역개발 전략을 발굴,수립하고 있다. 개원 이래 △감귤 수급 안정정책의 효과분석 △21세기 제주형 환경도시 조성을 위한 연구 등 25개 연구·사업을 실시했고 올해도 △21세기 읍·면별 발전전략 △지역개발 사업의 추진실태와 효과분석 등 12개 연구·사업을 추진중이다. 제주대 高富彦(숭실대·49·경영학)·張聖洙(경기대·45·관광개발)·玄榮珍(연세대·47·화학공학)·梁永五(부산대·45·수학) 교수 등 4명의 박사가 팀을 이룬 이른바 제주대 교수팀은 禹지사의 123개 공약에 대한 사업별 실천가능 여부와 필요 예산액,완급여부 등을 파악,그 결과를 도로 이관하는 작업에 매달리고 있다. 한국경영인리더십(HLC) 회장으로 있는 金榮澤 고문(48·고려대 교육학)은 지난달 30일 미국 펄토넥스사의 짐 앤더슨사장 등 미국·영국·스위스·일본·홍콩·중국 등 6개국 13개 업체 대표 27명을 제주로 불러 투자설명회를 가진 후 3개 업체로부터 6억5,000만달러의 투자약속을 받아냈고 7개 업체로부터는 투자 의향서를 받는 쾌거를 올렸다. 북제주군 한림읍 금악리 출신인 金고문이 禹지사와 본격적인 친교를 맺은 것은 선거 전후 외자유치 관련 리포트를 제출하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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