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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한민국 소시민, 자신도 모르게 코인 사기의 덫에 걸리다 [파멸의 기획자들 #01~#04]

    대한민국 소시민, 자신도 모르게 코인 사기의 덫에 걸리다 [파멸의 기획자들 #01~#04]

    서울신문 나우뉴스는 ‘사기공화국’ 대한민국에 경종을 울리고자 르포 소설 ‘파멸의 기획자들’을 연재합니다. 우리 사회를 강타한 실제 가상화폐 사기 사건을 나한류 작가가 6개월 가까이 취재·분석해 소개합니다. 독자 여러분께 ‘사기를 피하는 바이블’이자 정부가 범죄에 더 엄하게 대응하도록 촉구하는 ‘여론 환기’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 제보자와 피해자 보호를 위해 사건 속 인물과 가상화폐 거래소, 코인 등은 모두 가명 처리했습니다. ‘It takes money to make money.’돈을 벌려면 돈이 있어야 한다는 미국 속담이다. 돈이 없어서 돈을 마련하려는데, 그러려면 돈이 필요하다는 충고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내용의 격언이 아닐 수 없다.그런데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선 ‘돈이 돈을 번다’는 사실을. 취업하려면 최소한 정장 한 벌은 있어야 면접을 본다. 월급이 나올 때까지 버틸 생활비도 있어야 하고. 주식이나 부동산에 투자하려 해도 어느 정도 종잣돈은 필수다.세상은 우리에게 ‘먼저 내놓으라’고 요구한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돈 많은 이들이 돈을 더 쉽게 불린다. 그래서 대한민국의 평범한 가장들은 늘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리며 살아간다.이런 소시민들을 노려 구원의 손길인 양 다가오는 이들이 있다. 자본주의의 치명적 약점인 경제적 불평등을 파고드는 ‘투자 사기꾼들’이다. 대한민국의 근간을 뒤흔드는 ‘파멸의 기획자들’로 불러야 할 놈들 말이다. 40대 직장인 김민준 경기도 남양주의 작은 빌라. 이 집은 40대 가장 김민준이 사랑스러운 아내 나소연,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 지영과 함께 사는 안식처였다. 가구 공장에 다니는 그에게 딸은 삶의 목표 그 자체였다. 지영의 성적표가 나오는 날은 하루종일 인생의 희망이 샘솟았다.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도 상위권을 유지하는 딸의 반짝이는 눈빛을 볼 때마다, 민준의 가슴 속에는 한동안 잊고 지냈던 유년 시절의 안타까운 꿈이 되살아났다. 동두천의 작은 마을에 살던 소년 민준은 교통사고로 부모님을 잃고 5살 때부터 외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머리가 좋다는 소리를 곧잘 듣던 그는 명문대에 진학해 인생을 바꾸기로 결심하고 어려서부터 공부에 몰두했다. 하지만 가난은 그를 내버려 두지 않았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외할머니마저 돌아가시자 민준은 눈물을 머금고 자퇴서를 내야 했다. 이때부터 낮에는 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검정고시를 준비하는 고단한 삶이 이어졌다. 수년의 분투 끝에 고교 졸업 자격증을 손에 쥐었지만 그의 도전은 거기까지였다. 대학에 입학해서 공부에 전념하려고 해도, 등록금과 생활비가 모자라 직장을 포기할 수 없었다. 야간대에 가볼까도 생각했지만 당시만 해도 밤 근무가 밥 먹듯 이어져 이 역시 쉬운 선택은 아니었다. 군대에 다녀 온 청년 민준은 긴 고민 끝에 진학을 포기하고 생업에 집중하기로 했다. 대신 딸이 태어나자 울먹이며 다짐했다. 절대로 내 보배에겐 가난을 물려주지 않겠다고. 그가 다니는 가구 공장은 규모가 작아 학자금 제도를 기대하기 어려웠다. 400만원에 턱없이 모자란 월급으로는 유명 사립대에 진학하고 싶어 하는 지영의 등록금을 감당하기 버거웠다. 그래서 2년 전부터 부업으로 대리운전을 해왔다. 딸이 대학생이 되면 이 돈으로 미래를 열어주기 위해서다. 퇴근 뒤 서둘러 편의점 도시락을 먹고 피곤한 눈을 비비며 핸들을 잡았다. 고통과 희망이 뒤섞인 고된 노동이었다. 술에 잔뜩 취해 반말과 하대로 자신을 무시하는 이들을 수도 없이 만났다. 그때마다 민준은 오직 한 가지 생각으로 분노와 자괴감을 삼켰다. ‘이 돈은 지영이의 대학 등록금이 된다.’ 그렇게 700일 넘는 땀과 눈물이 모이자 ‘2100만원’이라는 숫자가 통장에 찍혔다. 딸의 대학 생활을 책임질 값진 보물이었다. 그의 심장이 뜨겁게 요동쳤다. 일단 2000만원은 안전하게 6개월짜리 예금에 넣어두었다. 100만원이 남았다. 자투리 돈을 어떻게 쓸까 고민하던 그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이걸 좀 더 적극적으로 굴려서 한 달에 몇만 원이라도 수익을 내 보자. 그걸로 지영이 용돈에 보태주면 되겠다. 최악의 경우에도 100만원만 손해보면 되니까 위험할 건 없어.’ 민준은 주식 관련 정보를 뒤지기 시작했고, 인스타그램에서 ‘무료 단기 급등주 추천’ 광고를 접했다. 그가 그토록 찾던 문구였다. 처음에는 사기꾼들의 허장성세가 아닐까 의심했다. 그러나 ‘최악의 경우에도 100만원만 날리면 된다’는 생각이 안도감을 줬다. 10여분의 고민 끝에 광고 계정 하단에 연락처를 남겼다. 몇 시간 뒤 ‘박순필’이라는 이름으로 카카오톡 메시지 한 통이 도착했다. “안녕하세요. 앞으로 저희가 알려 드리는 급등주가 회원님의 수익에 큰 도움이 될 겁니다. 국내 최고 전문가 이성조 교수님이 도와드릴 건데요. 일단 이 교수님의 비서 김가영 씨를 카톡 친구로 추가해 주세요.” 박순필의 말대로 김가영 비서에게 메시지가 왔다. 민준은 그녀가 보낸 링크를 타고 단체 카톡방에 입장했다. ‘이성조 교수’라는 이가 50명 넘는 회원들에게 열심히 뭔가를 설명하고 있었다. “늘 드리는 말씀이지만 ‘투자의 성공은 시장의 흐름을 읽는 거시적 안목에서 시작된다’ 라는 점을 잊으시면 안 됩니다. 단순히 오르는 종목을 쫓는 것은 투기가 될 뿐이죠. 지난주 미국 FOMC(연방공개시장위원회) 회의 이후 시장은 연준이 예상보다 빠른 시점에 금리 인하를 단행할 수 있다는 ‘피벗’(정책 전환) 기대감에 부풀어 있어요. 어려운 말 같지만 간단합니다. 미국이 조만간 돈을 풀 것이고 그러면 우리 같은 신흥국 시장까지 그 돈이 흘러 들어온다는 거죠. 기술주 중심 코스닥 시장에 강력한 유동성이 공급될 신호탄입니다. 외국인 자본이 밀물처럼 들어오기 전, 우리가 미리 길목을 지키고 있어야 하는데요. 이것이 바로 ‘거시적 안목의 힘’이죠.” 그의 메시지가 끝나기가 무섭게 회원들이 감사의 이모티콘을 쏟아냈다. 단순히 종목 몇 개를 찍어주고 매수·매도 신호만 보내는 일반적인 리딩방과 차원이 달랐다. 국내외 경제 동향부터 글로벌 시장 현황과 전망까지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소개하고 있었다. 이 교수가 잠시 쉬었다가 카톡 대화를 이어갔다. “그러면 이 유동성은 어떤 분야로 가장 먼저 흘러 갈까요? 저는 단언컨대 ‘인공지능(AI) 기반 신약 개발’ 섹터라고 확신합니다. 현재 대한민국은 고령화 사회를 넘어 초고령화 사회로 진입하고 있어요. 누구나 건강 관리만 잘 하면 100살 넘게 사는 것이 당연한 시대가 오죠. 첨단 제약 및 바이오 기술에 대한 국가적 투자와 관심은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TV에서 나오는 뉴스는 늘 봐도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설명은 한 번만 봐도 머리에 쏙 들어왔다. 채팅방에 들어온 지 몇 분만에 이 교수의 정확한 비유와 해박한 지식이 민준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매일 오전 9시 30분, 이성조 교수는 회원들에게 아침 인사를 건네고는 국내 주식 한 종목을 골라 상세히 분석했다. 저녁 7시에는 30분가량 출석체크를 마친 뒤 3시간 넘게 경제 지식을 쏟아냈다. 회비를 받지 않는 강의인데도 수준이 상당했다. 게다가 김가영 비서의 안내로 채팅방에 출석체크 문자 ‘777’을 찍으면 5000원씩 보상금을 적립해줬다. 10번의 강의를 수강하자 정확히 5만원이 계좌로 입금됐다. 민준은 이 교수와 단톡방에 대한 의구심을 완전히 걷어냈다. 그렇게 한 달쯤 지난 어느 저녁 강의 시간이었다. 이날따라 회원들의 이모티콘 반응이 눈에 띄게 줄어 들어 있었다. 이 교수는 ‘낮에 너무 열심히 일하셔서 그런지 수업에서 조는 분들이 많은 것 같다. 여러분들의 잠을 깨워 드리겠다’며 자신이 살아 온 이야기를 꺼냈다. “여러분, 제가 왜 돈 한 푼 받지 않고 이렇게 강의하고 종목을 추천하는지 궁금하시죠? 여기 계신 대부분 회원님처럼 저 역시도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낮에는 돈 벌고 밤에는 공부했습니다. 언젠가는 나에게도 ‘해 뜰 날’이 올 거라는 희망을 품고서요. 그런데 30대 초반, 남의 말만 믿고 주식 투자에 전 재산을 밀어 넣었다가 모든 걸 잃었습니다. 제 돈을 노린 사기꾼들에게 ‘작업’을 당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죠. 삶의 의지를 내려놓고 자살을 시도했어요.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병원에 실려 가서 천우신조로 깨어났습니다. 저를 살리려고 병원까지 업고 오신 분들에게 정말 미안했어요. 그래서 결심했죠. 단 한 번만 더,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인생을 걸고 도전해 보자고.” 채팅방이 일순간 조용해졌다. 다들 이 교수의 다음 메시지를 숨죽여 기다렸다. “그때 저는 다시 태어났습니다. 낮에는 죽어라 돈을 벌었고 밤에는 죽어라 세계 경제를 공부했죠. 국내외 주식과 가상화폐, 부동산, 채권 등 닥치는 대로 연구하고 투자한 뒤 성공과 실패 사례를 자세히 분석했어요. 그렇게 10년 넘게 모은 데이터를 살펴보다가 어느 날 갑자기 물리가 트였습니다. 투자 대상마다 폭등과 폭락 전 나타나는 특별한 매매 패턴이 제 눈에 보이기 시작했어요. 이를 토대로 저만의 ‘필승 투자 공식’을 완성했습니다. 그 덕분에 지금은 남들이 말하는 백만장자가 되었고 누구나 부러워하는 서울 강남의 최고급 아파트에서 조용히 살고 있어요.” 회원들이 감동과 축하의 이모티콘을 보냈다. 이 교수가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말이죠. 언젠가부터 뭔가 허전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어요. ‘내가 처음 투자를 시작했을 때 제대로 된 스승을 만났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내 인생이 이토록 힘들고 괴롭진 않았을 텐데’라고 말이죠. 가난한 이들이 조금이라도 일찍 좋은 스승을 만나면 나처럼 수십년간 고통을 겪지 않고도 부를 일굴 수 있을 텐데. 그러면 다 같이 행복해지는 ‘좋은 세상’을 더 빨리 만들 수 있을 텐데.” 민준은 그 글을 읽으며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이 교수의 인생 역정이 마치 거울처럼 자신의 삶을 그대로 비추는 것 같아서였다. 그의 다음 발언이 민준을 완전히 무장해제시켰다. “여러분, 당시 제 머릿속에 무슨 계시가 떠올랐는지 아세요? 바로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같이 가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생각했죠. 바로 제가 가난한 이들의 ‘참스승’이 되기로요. 여러분의 경제적 어려움을 빨리 끝내 드리고 다 같이 부자가 되는 새 세상을 만들어 보자고. 저는 여기에 남은 삶을 모두 걸었습니다. 예수님이 인류에 종교적 복음을 전했다면 저는 감히 여러분께 경제적 복음을 나누려고 해요.” 민준에게 이 교수는 단순히 투자 정보를 주는 사람이 아니었다. 자신의 삶을 이해하고 공감해주는 유일한 희망이자 ‘투자’라는 종교의 교주였다. 이 교수만 믿고 따른다면 딸에게는 가난을 물려주지 않을 수 있다는 확신이 생겼다. 매일 밤 그는 이 교수의 강의 내용을 꼼꼼히 복습했다. 실제로 이 교수가 추천한 주식 종목에서도 조금씩 수익이 나고 있었다. ‘이 분은 진짜다’라는 믿음이 더욱 커졌다. 그러던 어느 날, 김가영 비서가 긴급 공지를 올렸다. “회원 여러분, 교수님을 시기하는 일부 유료 리딩(투자조언)방에서 우리 채팅방을 사기 조장 등 혐의로 카카오에 신고했습니다. 우리가 이 방을 무료로 운영해 눈엣가시로 여긴 듯 해요. 더는 여기서 공개 채팅방을 운영할 수 없게 됐어요. 교수님께서 카카오 측에 항의하고 있지만, 단체방 폐기를 피하기 힘들 듯해요. 고민 끝에 다른 소셜미디어(SNS)로 채팅방을 옮겨서 열기로 했습니다. 준비되는 대로 링크를 다시 공지할게요.” 다음 날 텔레그램 채팅방 링크가 올라왔다. 민준은 아무 의심 없이 동참했다. 플랫폼은 바뀌었지만, 이 교수와 김 비서의 단톡방 운영 방식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카카오톡에서 텔레그램으로의 이동이 경찰의 추적을 피하기 위한 ‘파멸 기획자들’의 거대한 음모였음을. 민준은 자신이 사기꾼들의 먹잇감이 됐다는 사실을 깨달지 못한 채, ‘희망’이라는 이름의 구렁텅이 속으로 조금씩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50대 농업 스타트업 대표 최승현 전라북도 완주군. 밤이 깊어질수록 적막이 한층 더 두터워졌다. 낡은 창문 너머로 새어 나오는 빛줄기 하나가 어둠을 베고 있었다. 그 빛의 주인은 50대 농업 스타트업 대표 최승현. 2년 전 고통스럽던 결혼 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숨 막히는 도시를 떠나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이제 누구보다 용기 있는 도전자로 살았다. 낮에는 뙤약볕 아래서 억척스러운 농부로 땀 흘리며 작물을 키웠고, 밤에는 컴퓨터 스크린 앞에 앉아 복잡하고 역동적인 금융 시장의 흐름을 읽는 야심 찬 투자자로 활동했다. 그에게 흙냄새 가득한 낮의 삶이 현실의 뿌리라면, 디지털 세상의 밤은 희망을 향한 날개였다. 요즘 그에게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은 존재는 이성조 교수였다. 매일 밤 텔레그램 채팅방에서 진행되는 그의 강의는 기존의 따분한 금융 지식과 다른, 살아있는 통찰력과 경험을 선사했다. 승현은 이런 귀인을 이제야 알게 됐다는 사실이 내내 아쉬웠다. 이 교수의 강의를 들은 지 한 달쯤 됐을까. 국내 주식 시장이 며칠째 내리막길을 걸으면서, 승현의 계좌는 초반 상승분을 대부분 반납하고 원금만 지키고 있었다. 그때 이 교수의 분노에 찬 목소리가 텔레그램을 통해 전해졌다. “여러분, 지금 국내 주식 시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보세요. 누가 봐도 작전 세력이 주가를 계속해서 빼고 있는데, 금융 당국은 이놈들을 잡아들일 생각이 없어요. 대한민국 금융 시장 전체가 썩어빠진 ‘작전 세력들의 집합소’라는 증거죠. 외국인 큰손들도 한국 시장의 ‘불편한 진실’을 잘 알기에 이렇게 탈출하고 있는 겁니다. 정부가 나서서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고쳐야 한다고 선언하고 ‘금융 마피아와의 전쟁’을 선포해야 하지만, 요새 지도자들은 그럴 의지가 없어 보입니다. 대한민국이 새로 태어나지 않는 한 우리 증시에는 투자 모멘텀이 없어요. 그래서 더 이상 국내 주식에는 투자하지 않으려 합니다!” 갑자기 회원들이 술렁였다. ‘그럼 우린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요?’라는 질문이 쏟아졌다. 한동안 침묵이 흐르던 채팅방에 이 교수가 결단 내린 듯 하나의 화두를 던졌다. “가. 상. 화. 폐.” 그는 곧바로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면 금융 천재들과 손잡고 가상화폐 시장을 크게 끌어올릴 것이라며 설득력 있는 논리를 펼치기 시작했다. 승현의 마음속에서 강한 거부감이 파도처럼 일렁였다. 전국에 비트코인 광풍이 몰아치던 2017년, 친구처럼 따르던 지인 박상철이 있었다. 그는 ‘흙수저 탈출’을 외치며 수억 원의 사채까지 빌려 비트코인에 투자했다. 두 달 만에 100% 넘는 수익률을 거둬 잠깐 부자가 된 상철은 승현과 후배들을 유흥주점으로 불러냈다. “니들도 늦지 않았어. 나처럼 큰돈 벌고 싶으면 당장 가상화폐 거래소 가서 계좌부터 만들어!” 아가씨 어깨에 손을 올린 채 의기양양하게 소리치던 그의 오만한 태도가 모두를 불쾌하게 만들었다. 그래도 승현은 그런 상철이 내심 부러웠다. 하지만 그 호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거짓말처럼 비트코인 가격이 폭락했고, 그는 홀연히 동네에서 사라졌다. 소문이 무성했다. 사채업자들을 피해 외국으로 도망쳤다는 이야기도, 조폭들에게 붙잡혀 물고기 밥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상철의 비극적인 실종은 승현에게 비트코인이 ‘패가망신’의 상징으로 깊이 각인되게 만들었다. 그런데 그의 불편한 감정과는 달리, 채팅방의 다수 회원은 이 교수의 새로운 제안에 폭발적 관심을 보였다. 그들은 마치 새로운 구원자를 만난 듯 열렬히 환호했다. 이 교수는 회원들의 호응에 힘입어 “앞으로 가상화폐와 주식 투자를 병행하겠다”고 예고했다. 하지만 그날 저녁부터 강의 내용은 오로지 가상화폐로만 채워졌다. 다음 날 저녁, 이 교수는 ‘아이카프’(IEKAF)라는 해외 가상화폐 거래소를 소개했다. “오늘 소개할 ‘IEKAF’는 미국 재무부와 증권거래위원회 라이선스를 받아 누구나 믿을 수 있는 해외 거래소입니다. 지난 5년 동안 저도 이 거래소를 통해 투자해 왔고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큰 수익을 냈어요. 앱스토어나 구글플레이에서 애플리케이션을 내려받아 회원 가입을 진행해주세요. 궁금한 점은 제 비서나 거래소 내 한국인 전담 매니저에게 문의하시면 됩니다.” 밤이 깊어질수록 승현의 마음속에서 낡은 기억과 새로운 유혹이 충돌하며 혼란의 소용돌이가 일었다. 씁쓸한 과거의 교훈을 지켜야 할지, 아니면 이 교수의 제안을 받아 들여 신세계를 열어야 할지 고민이 커졌다. 이성조 교수의 강의가 끝나자 가상화폐 거래소 IEKAF의 매니저 한 명이 승현에게 개인 메시지를 보냈다. “안녕하세요. 앞으로 회원님의 전담 매니저가 될 박세훈입니다. 가상화폐 거래소 회원 가입이 어려우시면 언제든 편하게 말씀해주세요. 저희 IEKAF에서는 처음 가입하시는 회원님들께 가입 선물로 미화 300달러에 해당하는 300 USDT를 제공합니다. 가입 절차가 완료되는 대로 제게 말씀해주시면 즉시 회원님 계좌로 충전해 드립니다.” ‘가입만 해도 우리 돈 40만원 넘는 돈을 준다고?’ 승현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국내 증권사들이 가입 선물로 1만원 예치금을 주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파격적 혜택이어서다. 반신반의하며 회원 가입을 마치자, 정말로 그의 계좌에 ‘300’이라는 숫자가 선명하게 찍혔다. 눈앞에서 기적이 벌어진 것만 같았다. “이 돈을 다 날려도, 내 돈만 넣지 않으면 전혀 손해 볼 게 없네.” 그동안 가상화폐에 대해 굳게 닫아둔 마음의 문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다. 미지의 세계로 향하는 짜릿한 발걸음의 시작이었다. 다음 날 저녁, 이 교수는 IEKAF 이용법을 상세하고 친절하게 설명했다. 처음 접하는 낯선 화면이었지만, 주식 거래에 능숙한 승현에겐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기존 주식 앱보다 단순하고 직관적이어서 사용이 편했다. 밤 10시가 가까워지자 이 교수가 ‘연습 거래’를 제안했다. “자, 다들 300 USDT 갖고 계시죠? 이제 직접 거래를 시작해 봅시다. 현물 계좌로 들어가셔서 매수 대상을 ‘비트코인’으로 지정하시고요. 예치금의 10%만 투자하세요.” 승현은 망설임 없이 IEKAF에서 받은 300 USDT의 10%인 30 USDT(약 4만 2000원)로 비트코인을 매수하고 다음 지시를 기다렸다. 15분 뒤 채팅방에 “매도”라는 메시지가 올라왔다. 승현은 곧바로 갖고 있던 비트코인을 모두 팔았다. 15분 만에 0.9 USDT(1260원)를 얻었다. 수익률 3%. 금액이 크진 않았지만, 긴장감으로 시작한 첫 코인 투자에서 재미와 짜릿함을 느끼기엔 충분했다. 다음 날 저녁 7시. 승현은 서둘러 식사를 마치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김가영 비서의 강의 안내 메시지가 올라오자 망설임 없이 ‘777’을 눌러 출석 체크를 마쳤다. 7시 30분이 되자 이 교수가 강의를 시작했다. 이날도 주제는 가상화폐였다. 주식은 이제 완전히 접은 것처럼 보였다. 8시 반, 그가 회원들을 새로운 세계로 안내했다. 수익률을 극대화할 수 있는 가상화폐 선물 거래였다. “선물 거래는 매우 위험합니다만, 다행히도 저는 이 분야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노하우를 쌓아왔습니다. 저렇게 변동성이 극심해도 제 눈에는 최적의 매수·매도 패턴이 뚜렷하게 보여요. 여러분도 제 말만 잘 들으시면 단 한 번의 거래로 20~30%의 수익을 거둘 수 있습니다.” 이 교수는 현물 계좌에 있는 USDT 예치금을 선물 계좌로 옮기라고 지시했다. 그리고는 수많은 코인 가운데 ‘QUANTA’를 지정하며 “투자금의 20%만 매수하세요”라고 메시지를 남겼다. 현물 거래에서 자신감을 얻은 승현은 이 교수의 제안에 아무런 거부감도 느끼지 않았다. ‘어차피 밑져야 본전 아닌가’라는 생각으로 300 USDT의 20%인 60 USDT(8만 4000원)로 QUANTA를 샀다. 20분 뒤 이 교수의 지시에 따라 매도 주문도 넣었다. 결과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경이로웠다. 60 USDT를 투자해 20 USDT(2만 8000원)를 벌었다. 20분 만에 투자금액 대비 33%라는 놀라운 수익률이었다. 1억원 어치를 넣었다면 20분 만에 3300만원을 챙겼을 것이다. 종일 흙냄새를 맡으며 땀 흘려야 얻을 수 있는 수확의 보람과는 다른, 매우 강렬하고 중독성 있는 짜릿함과 황홀함이었다. 승현의 마음속에 남아 있던 가상화폐에 대한 마지막 우려가 모두 녹아내렸다. 대신 그 자리를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는 설렘과 기대감이 채웠다. 이날부터 승현은 텔레그램 채팅방에서 한시도 눈을 뗄 수 없었다. 다음 강의가 너무 궁금했고 다음 거래가 너무 기대됐다. 그의 삶에 뒤늦게 찾아온 ‘미지의 유혹’이 너무나 즐거웠다. 그것이 자신의 영혼을 파괴할 ‘쥐약’이라는 사실을 꿈에도 모른 채.
  • 천년고도 경주에서 만나는 인문학…‘경주역사문화포럼’ 개최

    천년고도 경주에서 만나는 인문학…‘경주역사문화포럼’ 개최

    천년고도 경북 경주시에서 인문학으로 지속 가능한 미래를 논의한다. 경북도는 ‘2025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앞두고 오는 21일까지 경주예술의전당에서 ‘2025 국제경주역사문화포럼’을 개최한다고 19일 밝혔다. 세계역사문화도시 경주의 천년 인문 정신과 세계 인문학을 연결하는 이번 포럼은 ‘천년의 길 위에서 별을 바라보다’를 주제로 열린다. 인류가 함께 모색해야 할 지속 가능한 미래에 대해 인문학적으로 접근하는 국제포럼이다. APEC 3대 의제인 ‘연결’, ‘혁신’, ‘번영’을 바탕으로 한 6개 세션으로 구성됐다. ‘어쩌면 해피엔딩’ 뮤지컬로 토니상 6관왕을 수상한 박천휴 작가와 윌 애런슨 작가의 기조 강연으로 포럼을 시작한다. 하버드대 조지프 헨릭, 일본 사회학자 야마다 마사히로, 시인 박준, 여성학자 정희진, 물리학자 김상욱, 철학자 다이앤 엔스 등 국내외 석학과 창작자들이 대거 강연한다. 부대행사로는 경주 예술의전당 분수 광장에서 북 페스티벌이 열린다. 총 10개의 출판사와 동네 책방이 참여해 북마켓을 운영한다. 에코백 만들기, 보이는 라디오, 가족 대상 퀴즈, 재즈 공연 등 시민 참여형 콘텐츠도 다채롭게 마련된다. 19·20일 저녁에는 방송인 서경석, 고명환, 배우 봉태규, 작가 이슬아 등과 함께하는 야외 북토크쇼도 진행한다. 이철우 도지사는 “세계 석학, 창작자들의 담론을 통해 경상북도와 대한민국의 미래 방향을 모색할 것”이라며 “경주포럼이 세계 문화계의 첫 시금석이 될 글로벌 문화협력 플랫폼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철저히 준비하겠다”고 했다.
  • 세상에 나쁜 유전자는 없다

    세상에 나쁜 유전자는 없다

    희귀병·범죄·동성애·암…인류 역사의 변곡점마다오해 부른 8종 편견 해체 과학 용어 중 유전과 유전자처럼 흔하게 쓰이는 것도 없을 것이다. 유전자로 모든 것을 설명하는 ‘유전자 전성시대’라 할 정도다. 그렇지만 암유전자, 노화 유전자, 바람둥이 유전자, 게으름 유전자, 범죄 유전자, 탈모 유전자 등 좋은 것보다는 부정적 의미의 수식어로 더 많이 사용된다. 이렇듯 유전자로 모든 것을 설명하려는 경향은 어떤 현상이나 사건에 궁극적 원인이 있다고 믿으려 하는 ‘본질주의적 편향성’이 인간 유전자에 강하게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결국 이것도 유전자 때문인가. 정우현 덕성여대 약학과 교수는 최신 연구 결과와 역사로 ‘유전자란 무엇인가’를 알기 쉽고 재미있게 풀어낸다. 정 교수는 특히 인류 역사의 중대한 변곡점마다 등장해 사람들에게 가장 큰 오해를 일으키고 비극을 가져온 ▲인종이란 개념을 만든 피부색 유전자 ▲희귀병 유전자 ▲사나운 유전자 ▲우생학의 근거가 된 열등한 유전자 ▲범죄 유전자 ▲성적 성향을 결정한다는 동성애 유전자 ▲암유전자 ▲이기적 유전자 8종을 골라 설명했다. 사람들은 19세기 오스트리아 생물학자 그레고어 멘델이 유전 법칙을 발견하고, 1909년 덴마크 식물학자 빌헬름 요한센이 유전의 단위로 ‘유전자’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하기 전부터 ‘나쁜 피’, ‘더러운 혈통’ 등의 표현으로 ‘나쁜 유전자’라는 것이 있을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했다. 이처럼 유전자 결정론의 역사는 짧지 않다. 유전자 결정론의 가장 큰 문제는 ‘완벽한 유전자’라는 것을 가정한다는 점이다. 이는 모든 사람이 완벽한 유전자를 가진 ‘멋진 신세계’를 만들기 위해서는 나쁜 유전자를 박멸해야 한다는 결론으로 이어지게 한다. 나치 독일이 자행한 제노사이드 범죄의 근거가 된 우생학이 그랬고, 피부색에 따른 인종 차별, 범죄자는 태어날 때부터 문제가 있다는 생각, 동성애는 잘못된 유전자로 인한 질병이라는 생각 등이 그렇다. 나쁜 유전자, 불완전한 유전자만 제거하거나 바꾸면 아무 걱정 없이 건강하게 살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바탕으로 한 ‘유전자 치료’에서도 유전자 결정론의 그림자를 느낄 수 있다. 유전자 결정론이 가진 또 하나의 문제점은 인위적으로 진화의 종말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다. 좋은 유전자가 무엇인지 결정하는 것은 인간이기 때문에 자연 선택에 따른 진화가 의미를 잃고 인류의 종말이 느닷없이 갑자기 찾아올 수 있다. 예를 들어 코로나19처럼 치명적 감염병이 전 세계적으로 확산할 때 인류가 단일 유전자만 갖고 있다면 순식간에 절멸하는 것은 시간 문제다. 저자가 이 책에서 여러 사례를 들어 말하려는 것은 바로 ‘나쁜 유전자는 없다’는 것이다. 유전자는 인류, 아니 생명체가 등장할 때부터 있었다.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이리저리 바뀐 유전자에 좋고 나쁨의 가치를 부여한 것은 바로 ‘인간’이다. 사실 유전자는 인류의 역사를 결정하거나 한 개인의 삶을 지배하는 요소가 아니라 주어진 환경에 따라 변하면서 의미를 형성하는 정보일 뿐이라고 정 교수는 강조한다. “유전자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믿음은 그 자체로 인간의 수많은 가능성을 닫아 버린다. 우리 삶에 우연성이 내재한다는 사실을 인식할수록 삶은 활기가 넘친다. 내가 어디까지 도달할 수 있는지 확인하고자 하는 도전 의식과 각오가 생긴다.”
  • 로마 멸망도, 유럽 제국 부흥도… 결국 ‘돈’의 힘

    로마 멸망도, 유럽 제국 부흥도… 결국 ‘돈’의 힘

    돈은 모든 것을 조종한다. 뉴스 사회 면에 등장하는 수많은 사건 사고들의 원인을 분석해 보면 돈 때문에 촉발된 경우가 적지 않다. 돈은 인간의 생존을 위해서 필수 불가결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아일랜드의 경제학자인 저자는 돈을 중심으로 5000년 인류의 역사를 재해석한다. 책은 인류 대부분이 노예이던 시절부터 물물교환, 금속화폐의 등장, 중세 이후 지폐의 등장, 상업과 금융시스템의 발달을 거쳐 오늘날 디지털 경제와 암호화폐까지 돈의 진화에 대해 세밀하게 관찰한다. 모든 역사적 사건의 이면에는 돈 문제라는 속사정이 있다. 로마 황제들은 자국 화폐의 가치를 떨어뜨려 생활비를 충당했는데 결국 화폐 가치의 하락은 로마 제국의 멸망으로 이어졌다. 또한 유럽이 ‘총·균·쇠’라는 막강한 파워로 아프리카와 아메리카 대륙에서 식민지 사업을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금융업이 있었다. 17~18세기 네덜란드를 필두로 한 영국, 스페인, 포르투갈, 스페인의 제국주의 사업을 뒷받침한 것도 금융업이었다. 기술의 발달과 해양업, 무역업의 발달 뒤에는 고도의 신용 제도를 필두로 한 금융 시스템이 존재했던 것이다. 저자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만든 아스테카 제국에는 아주 기본적인 화폐 형태는 존재했지만 금융 시스템은 전무했다”면서 “화폐는 혁신의 강력한 수단”이라고 지적한다. 책은 연대기적으로 사건을 나열하는 방식이 아닌 인물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무력보다 더 막강한 돈의 힘을 간파했던 독일 나치 아돌프 히틀러의 위조지폐 작전과 러시아를 공산국가로 만들기 위한 블라디미르 레닌의 화폐 말살 정책 등이 대표적이다. 세계 최초의 인쇄기가 독일에서 발명된 이유는 요하네스 구텐베르크가 돈을 벌기 위해 성경 사업에 뛰어들었기 때문이었다. 15세기 독일은 금융 혁신으로 대부업자들이 넘쳐났고 시중에는 돈이 남아돌았다. 만약 가난했던 구텐베르크가 투자금을 빌릴 수 없었다면 인쇄기는 독일에서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17세기 작은 나라 네덜란드가 전 세계에 식민지를 건설할 수 있었던 것은 상인들로부터 자금을 빌려 해군을 지원한 것이 원동력이 됐다. 또한 책에는 그리스 시대의 올빼미 주화, 폼페이 유적지에서 발견된 상업의 신 메르쿠리우스 프레스코화와 콜로세움 등 35점의 도판과 전 세계의 무역로를 한눈에 확인할 수 있는 지도 자료가 삽입돼 내용의 이해를 돕는다.
  • 익숙하지 않은 ‘감각의 英詩’… 우리를 구원할 ‘낯선 언어들’

    익숙하지 않은 ‘감각의 英詩’… 우리를 구원할 ‘낯선 언어들’

    앤 카슨 ‘플레인워터’시와 산문 그 사이 유동하는 언어경계 구분 없이 흐르는 물과 같아비숍 ‘우리는 내륙으로 질주한다’시집 4권·미발표 원고 모은 전집작품서 자신을 레즈비언 규정도휘트먼 ‘사람들은… 몸을 감싸안는다’퀴어 감각 작품들 선별해 재구성몸·영혼 불일치로 평생 괴로워해 지겹도록 들여다봐도 좀처럼 곁을 내주지 않는다. 외국어는 어쩌면 영원한 동경의 대상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영어는 좀 괜찮지 않을까. 우리가 영어에 들인 시간과 돈을 합하면 저 태평양을 메우고도 남을 것이기에. 그러나 이런 오만은 영어로 쓰인 시(詩)를 읽는 순간 곧바로 멈출 것이다. 온몸을 휘감는 익숙하지 않은 감각. 괜찮다. 그 ‘낯섦’이 우리를 구원할 것이다. 영어로 아름다운 성을 쌓았던 북미 시인들의 시집 세 권이 한국어로 도착했다. “그가 나를 사랑했다면 나를 봤겠지/위층 창가에서 창문에 이마를 부딪치고 있는 내 모습을.”(앤 카슨, ‘기울어진 사랑 마을’) 캐나다 시인 앤 카슨(75)의 초기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플레인워터’(난다)는 시와 산문 그 사이에서 유동하는 언어의 아름다움을 포착하고 있는 작품집이다. 영문학 번역가이자 시인으로도 활동하는 황유원이 옮겼다. 1부 ‘밈네르모스 브레인섹스 그림’부터 4부 ‘물의 인류학’까지 일관된 흐름이 없다. 그래서 어떤 총체적인 사상이나 주제로 이 책을 붙잡는 시도는 실패하고 만다. 카슨은 어쩌면 독자가 실패하기를 의도했을지도 모른다. ‘물의 인류학’ 서문에서 카슨은 이렇게 선언한다. “물은 당신이 붙잡을 수 없는 무언가다.” 물은 손에 쥘 수 없다. 세계의 실상도 그렇다. 우리는 다만 깊이 잠길 수 있을 뿐이다. 이 서문의 제목은 ‘잠수’다. 세계라는 물 안에 깊이 침잠하는 것만이 문학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국경을 건널 때 내 귀에 들리던 소리라고는 너의 맥박과/내 귀뼈를 빗질하듯 쓰다듬던, 반물질 같은/바람뿐.”(‘그대와 나 사이에 진실이 있기를’) 카슨은 프리드리히 횔덜린, 에밀리 디킨슨 등 서양문학의 고전뿐 아니라 노자의 ‘도덕경’, 일본의 전통 정형시 ‘하이쿠’ 등도 적극 인용하며 나름의 독창적인 사유를 전개한다. 경계를 구분하지 않고 그저 흐르는 ‘물’처럼. “화장대 거울 속 달은/수백만 킬로미터 너머를 바라본다, … 우주로부터 버림받으면, 달은 지옥에나 가버려, 말할 것이고, 곧장 물웅덩이나 거울을 발견하고는,/그 안에 깃들 것이다./그러나 걱정 따위 거미줄로 싸서/우물에 처박아 버리길.//뒤집힌 세상에서는,/왼쪽이 항상 오른쪽이고,/그림자가 진짜 몸이며, 우리는 밤새 깨어 있고,/하늘은 지금 바다 깊이만큼 얕으며,/당신은 나를 사랑한다.”(엘리자베스 비숍, ‘불면증’) 퓰리처상(1956), 전미도서상(1970) 등을 받은 미국 시인 엘리자베스 비숍(1911~1979)은 일부 영문학 연구자를 제외한 국내 독자에게는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 있었다. 드디어 그의 시 전집 ‘우리는 내륙으로 질주한다’(봄날의책)가 한국어로 옮겨졌다. 소설가 이주혜가 번역을 맡았다. 비숍의 시 전집이 미국에서 출간된 것은 2011년, 그의 탄생 100주년이 되던 해다. ‘북과 남’(1946), ‘어느 차가운 봄’(1955) 등 생전 출간됐던 시집 4권과 함께 시집에 묶이지 않은 것까지 망라했다. 비숍의 사후 발굴된 미발표 원고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그가 레즈비언으로 자신을 규정했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앞서 인용한 ‘불면증’이라는 시는 그래서 더욱 의미심장하게 읽힌다. 화장대 거울이 비추는 세계는 좌우가 뒤집힌 공간이다. ‘나’는 그곳을 간절히 열망하는 듯하다. 뒤집힌 세계에서만이 당신이 나를 사랑할 수 있기에. 비숍의 사랑은 당대 현실에서는 받아들여질 수 없었을 것이다. “여기가 해안이다. 여기가 항구다. … 어떤 것은 아마도 큰 야자수다. 아아, 여행자여,/이 나라가 그대에게 내놓으려는 대답이 고작 이건가? … 우리는 곧장 상투스를 떠난다./우리는 내륙으로 질주한다.”(‘상투스에 도착’) 그에게 시는 단순한 언어의 놀이가 아니라 사랑의 실존을 확인하는, 실감 넘치는 공간이었을 것이다. “나는 전율하는 몸을 노래하지,/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무리가 나를 감싸고 나도 그들을 감싸,/그들은 나를 놓아주지 않을 거야, 내가 그들과 함께하고, 그들에게 응답하고, … 맨 살결을 만질 때 손에서 느껴지는 신비로운 공감,/강줄기처럼 도는 숨결, 그리고 들숨과 날숨, … 나는 말하지, 이 모든 것이 몸뿐 아니라, 영혼의 일부이고 시라고.”(월트 휘트먼, ‘나는 전율하는 몸을 노래하지’) 시집 ‘풀잎’으로 유명한 미국의 거장 월트 휘트먼(1819~1892)의 시 가운데 ‘퀴어’의 감각으로 읽을 수 있는 작품을 뽑아 김성훈 전남대 영문과 교수가 재구성한 시집 ‘사람들은 사람들의 몸을 감싸안는다’(파시클)도 흥미로운 책이다. 영어 원문을 함께 수록해 원전과 번역의 리듬감을 아울러 느낄 수 있게끔 편집했다. 평생 독신으로 살았던 휘트먼은 동성애자 혹은 양성애자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가 명시적으로 밝히진 않았지만. 실제 그렇다고 해도 정체성을 밝히는 건 불가능했을 것이다. 퀴어는 몸과 영혼의 강렬한 불일치. 평생 그것으로 괴로워했겠지만, 그 괴로움은 역설적으로 위대한 문학을 추동하는 힘이 됐다. “나는 육체의 시인이고 영혼의 시인이다./천국의 기쁨이 내게 있고, 지옥의 고통도 내게 있다./기쁨은 내 몸에 접붙여 늘리고, 고통은 새로운 언어로 바꾼다.”(‘나는 육체의 시인이고 영혼의 시인이다’)
  • 제주 ‘돌담쌓기’ 전통기술, 제주도 무형유산 공식 지정

    제주 ‘돌담쌓기’ 전통기술, 제주도 무형유산 공식 지정

    천년 넘은 ‘제주 돌담 쌓기’ 전통기술이 제주도 무형유산으로 공식 지정된다. 제주도는 제주의 자연환경과 생활방식이 결합된 독창적 전통 축조방식인 ‘제주 돌담 쌓기’에 대해 도 무형유산위원회 심의를 거쳐 제주도 무형유산으로 22일 지정 고시할 예정이라고 18일 밝혔다. 화산섬 제주도에서 돌은 주민들의 삶과 밀접한 관계 속에서 극복해야 할 대상인 동시에 소중한 자원으로 인식돼 왔다. ‘제주 돌담 쌓기’가 무형유산으로 지정되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우선 제주의 자연환경에 적응해 형성된 전통적인 돌쌓기 기술로, 틈을 두고 쌓는 구조적 특징을 지녔다. 농경지 경계 담장 및 바람막이 등 다양한 용도로 활용돼 공동체 생활 가운데 자연스럽게 전승돼 왔다. 또한 지역적 특성과 기술 양상의 다양성을 반영하고 있으며, 현재도 도내 각지에서 지역 기술자인 일명 ‘돌챙이’들에 의해 돌담 쌓기 행위가 이어지고 있다. 관련 기술과 용어, 시공 방식 등에 대한 정리와 체계화 노력이 진행되고 있으며, 오늘날까지도 제주 전역에서 이어지는 지역 생활문화로서 제주문화의 정체성과 대표성을 형성하는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제주 돌담 쌓기’는 자연환경에 적응한 축조 방식과 공동체 중심의 전승 양식을 갖춘 점에서 역사성·대표성·지속가능성 등의 측면에서 무형유산으로서 지정가치가 높다고 인정됐다. ‘제주 돌담 쌓기’는 보유자 및 보유단체를 인정하지 않는 공동체 종목으로 지정됐다. 돌담 쌓기가 제주 특정 지역에 한정돼 전승되는 생활관습이 아니라 제주 전역에서 이뤄진 전통 기술이기 때문이다. 고종석 세계유산본부장은 “제주의 자연환경을 극복하고 오랜 시간에 걸쳐 전승돼 온 제주 돌담 쌓기를 무형유산으로 지정하게 돼 매우 뜻깊다”며 “신청기관인 돌문화공원관리소와 함께 제주 돌담 쌓기 기술이 대한민국을 넘어 세계에 널리 알려질 수 있도록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에 행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말했다. 한편, 제주의 전통적 혼례 방식인 ‘제주 가문잔치와 음식문화’가 2026년 국가유산청 미래 무형유산 발굴·육성 공모사업에 선정됐다. 소멸위기의 전통문화 계승·발전을 위한 전승체계를 구축하는데 큰 도움이 될 전망이다. 제주도는 예부터 결혼식을 3일동안 치렀다. 결혼식 하루 전날을 ‘가문잔치’라 하고, 결혼식 다음날을 ‘사돈잔치’라 했다. 결혼식 이틀 전 날은 돗(돼지)을 잡는다. 보통 5~7마리의 돼지를 잡으므로 동네 사람들과 많은 친지, 친구들이 모여 들어서 남자는 돼지를 잡고 여자들은 음식 장만을 시작한다. 결혼식 전날은 하객을 받는 날이다. 전날 마련한 음식을 친지와 하객들에게 대접한다. 가문잔치는 과거처럼 가문들의 모임이라기보다는 요즘은 신부집에서 잔칫날처럼 손님을 대접하는 날로 변하고 있다. 제주도 세계유산본부는 ‘제주 가문잔치와 음식문화’에 대한 전통적 가치를 발굴하기 위해 지난 8월 국가유산청에 공모 신청을 했고, 17일 사업 선정 통보를 받았다.
  • 국립순천대·㈜파루, 스마트농업 기술개발 업무협약 체결

    국립순천대·㈜파루, 스마트농업 기술개발 업무협약 체결

    국립순천대학교 지능형 스마트농업 Grand ICT 연구센터와 신재생에너지 전문기업인 ㈜파루가 지난 15일 ‘스마트농업 관련 기술개발 및 교육 지원’을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전남 지역 강소기업인 ㈜파루는 1993년 창업했다. ‘더 나은 에너지를 통해 인류에게 더 좋은 삶을 제공한다’라는 경영철학을 바탕으로 태양광발전시스템, 인쇄전자, 시설원예, 친환경제품 등 IT 기술 기반의 다양한 사업 분야에서 역량을 인정받고 있다. 특히 코스닥 상장회사로서 첨단 기술력을 바탕으로 로봇방제기, 환경조절기기 등을 개발하는 등 스마트농업 현대화에 기여하고 있다. 국립순천대 Grand ICT 연구센터와 ㈜파루는 이번 업무협약을 통해 스마트농업 분야의 ▲인공지능(AI) 관련 데이터 및 기술을 활용한 시뮬레이터 개발 등 첨단 디지털 기술 분야의 발전과 교육역량 강화에 나선다. 또 ▲스마트팜 등 미래 농업 교육에 필요한 학교 교육과정 운영 지원 체제 구축 ▲재직자 직무능력 향상을 위한 맞춤형 교육과정 지원 등을 중심으로 산학협력 체계를 유기적으로 강화해 나가기로 했다. 이번 협약은 스마트농업 분야 공동연구와 기술개발 및 지역 인재 양성과 산업 발전을 위한 구체적 실천 방안을 담고 있다. 향후 스마트농업 관련 공동연구, 신기술 개발과 교육 콘텐츠 확산에 따른 재직자 재교육, 졸업생 취업 지원 등에서 선순환적인 성과와 시너지가 발생할 것으로 기대된다. 여현 Grand ICT 연구센터장은 “이번 협약은 기업과 대학이 연계한 공동연구 활동을 통해 스마트농업 기술 고도화와 교육역량 강화를 견인하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다”며 “앞으로도 산학협력 네트워크를 지속해서 확장하고, 재직자 재교육과 신기술 개발로 지역 및 국가 스마트농업 발전에 기여하겠다”고 말했다. 강문식 ㈜파루 대표는 “우수한 인재들이 애정을 갖고 지역 발전을 위해 헌신할 수 있도록 물 밑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밝혔다.
  • 전국 방방곡곡 비엔날레로 꽉 찬 가을

    전국 방방곡곡 비엔날레로 꽉 찬 가을

    올해 한국을 대표하는 광주비엔날레, 부산비엔날레는 열리지 않지만 사진, 공예, 디자인, 미디어 등을 내세운 다양한 미술 전람회가 전국을 물들인다. 올해 10회째인 대구사진비엔날레는 ‘생명’을 주제로 18일 막을 올린다. 30여개국 2000여명의 작가가 사진, 영상, 설치 작업 등 700여점의 작품을 선보인다. 대구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리는 주제전의 핵심 정신은 ‘공생세’다. 철학자 글렌 알브레히트가 제안한 용어로 모든 생명체가 상호 연결돼 치유와 회복을 지향하는 시대를 뜻한다. 인간이 지구 생태계에 영향을 미치는 ‘인류세’를 넘어 자연과 인간이 공존 관계가 돼야 한다는 개념이다. 외국인으로는 처음 총감독에 선임된 에마뉘엘 드 레코테는 매년 11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는 대규모 사진 축제 ‘포토 데이즈’의 설립자이자 예술감독이기도 하다. 가와우치 린코(일본)의 개인전이 특별전으로 마련됐다. 11월 16일까지. 14회 전통을 자랑하는 청주공예비엔날레는 지난 4일 60일간의 대장정을 시작했다. ‘세상 짓기’를 주제로 72개국 1300여명 작가의 작품 2500여점을 선보인다. 주제에 걸맞게 의식주를 기반으로 해 인류의 삶과 긴밀히 관계 맺어 온 공예를 주춧돌로 삼았다. 특히 조계종 종정 성파 스님의 평생 화업이 담긴 특별전 ‘성파선예전-명명백백’(明明白白)은 빼놓지 말아야 할 전시로 꼽힌다. 11월 2일까지. 서울시립미술관, 낙원상가, 시네마테크 서울아트시네마 등은 제13회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강령: 영혼의 기술’을 오는 11월 23일까지 진행한다. 정신적이고 영적인 경험이 현대미술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탐구한다. 영화·영상을 주축으로 사운드, 퍼포먼스, 드로잉까지 애니 베전트, 힐마 아프 클린트, 데구치 오니사부로, 백남준 등 50여명 작가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포용 디자인’을 주제로 한 광주디자인비엔날레도 진행 중이다. ‘모든 이가 어려움 없이 사용할 수 있는 디자인’의 개념을 국내에 적극 제시한 최수신 미국 사바나예술대 학장이 총감독을 맡아 19개국 429명이 163점의 작품을 선보인다. 11월 2일까지. 세종 조치원1927아트센터 일원에서는 한글과 예술을 접목한 ‘한글 국제 프레 비엔날레’가 열리고 있다. 2027년 정식 출범하는 한글 국제 비엔날레의 예고편 격이다. 국내외 39명의 작가가 참여해 한글을 다양한 시선으로 재해석했다. 미스터 두들이 1927아트센터 외벽에 새긴 벽화 ‘한구들’은 큰 인기를 끌며 포토존으로 주목받고 있다. 10월 12일까지. 묵향을 음미할 기회도 있다. ‘수묵은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는가’에 대한 해답을 찾는 전남국제수묵비엔날레가 해남, 진도, 목포에서 오는 10월 31일까지 열린다. 오는 26일 개막하는 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에서는 1000여명의 전 세계 종교인이 참여하는 ‘세계 경전 필사전’이 펼쳐진다.
  • 경찰, ‘세계유산’ 종묘 담장 기와 훼손한 50대 남성 검거

    경찰, ‘세계유산’ 종묘 담장 기와 훼손한 50대 남성 검거

    경찰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종묘 담장 일부를 훼손한 50대를 긴급체포했다. 17일 서울 혜화경찰서는 종묘 외곽 담장의 기와 10장을 파손한 혐의(문화유산법 위반)를 받는 50대 남성 A씨를 검거해 조사 중이라고 밝혔다. 앞서 지난 15일 오전 0시 50분쯤 A씨는 기와를 흔들고 잡아당기는 등 훼손했고, 이 장면이 폐쇄회로(CC)TV에 담겼다. 당시 종묘관리소 측은 새벽 순찰 중이던 오전 5시 30분쯤 피해 사실을 확인해 경찰에 신고했다. 훼손된 기와는 암키와와 수키와 각 5장으로, 모두 보수를 마쳤다. 조선의 유교적 전통과 왕실 의례 문화를 보여주는 종묘는 1963년 사적으로 지정됐고, 1995년 12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다. 종묘제례·종묘제례악 또한 2001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경찰은 A씨를 상대로 범행 경위 등을 조사한 뒤 구속영장을 신청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 한 줌의 흙, 인류 신약의 ‘보물 창고’ 될 수 있는 이유

    한 줌의 흙, 인류 신약의 ‘보물 창고’ 될 수 있는 이유

    1943년 미국 럿거스 대학의 셀먼 왁스먼(Selman Waksman) 교수는 실험실 옆 밭의 흙에서 결핵균을 치료하는 항생제 스트렙토마이신(streptomycin)을 발견했다. 이는 토양에 사는 방선균(actinobacteria)의 일종인 스트렙토마이세스 그리세우스(Streptomyces griseus)가 분비한 물질이었다. 이 발견 이후 과학자들은 토양 미생물이 다양한 항생제와 신약의 보고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흙 속에 사는 미생물들은 대부분 실험실 환경에서 배양하기 어려워 연구에 큰 어려움이 있었다. 이들은 자연 상태의 복잡한 토양 환경에서만 생존하고 성장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인류는 여전히 수많은 토양 미생물의 잠재력을 완전히 탐구하지 못하고 있다. 메타게놈 분석의 혁신: synBNP 기술 록펠러대 숀 브래디(Sean Brady) 교수 연구팀은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새로운 접근법을 시도했다. 바로 미생물을 직접 배양하는 대신, 토양 샘플에 들어 있는 모든 유전자를 한꺼번에 분석하는 기술인 군유전체학(metagenomics)을 활용한 것이다. 이 기술은 이미 생물학과 의학 분야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지만, 한 줌의 흙에 수천 종의 미생물이 존재하기 때문에 방대한 양의 유전 정보를 처리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연구팀은 synBNP(synthetic bioinformatic natural products)라는 혁신적인 기술을 개발해 이 문제를 해결했다. 이 기술은 단 하나의 토양 샘플에서 무려 2조 5000억개에 달하는 염기쌍을 기존 방식보다 훨씬 빠르게 분석할 수 있다. 연구팀은 이 방법으로 연구소 주변의 토양 샘플에서 수백 종의 새로운 미생물을 찾아냈을 뿐 아니라, 두 가지 새로운 항생제 후보 물질까지 발견했다. 항생제 내성을 이겨낼 두 가지 후보 물질 연구팀이 찾아낸 첫 번째 물질은 에루타시딘(erutacidin)이다. 이 물질은 세균의 지질인 카디오리핀(cardiolipin)의 형성을 방해하는 기전을 통해 항생제 내성균을 억제하는 효과를 보였다. 두 번째 물질인 트리진타미신(trigintamicin)은 세균의 단백질 합성 과정에 필수적인 ClpX라는 단백질에 작용하는 새로운 기전을 통해 항생제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단 한 개의 토양 샘플에서 이처럼 수많은 신종 미생물과 항생제 후보 물질이 발견되었다는 사실은 매우 고무적이다. 이는 앞으로 synBNP 기술을 활용해 전 세계의 다양한 토양 샘플을 분석하면 인류가 직면한 가장 큰 보건 위협 중 하나인 항생제 내성에 대한 해결책을 다시 한번 흙 속에서 찾아낼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준다.
  • 한 줌의 흙, 인류 신약의 ‘보물 창고’ 될 수 있는 이유 [핵잼 사이언스]

    한 줌의 흙, 인류 신약의 ‘보물 창고’ 될 수 있는 이유 [핵잼 사이언스]

    1943년 미국 럿거스 대학의 셀먼 왁스먼(Selman Waksman) 교수는 실험실 옆 밭의 흙에서 결핵균을 치료하는 항생제 스트렙토마이신(streptomycin)을 발견했다. 이는 토양에 사는 방선균(actinobacteria)의 일종인 스트렙토마이세스 그리세우스(Streptomyces griseus)가 분비한 물질이었다. 이 발견 이후 과학자들은 토양 미생물이 다양한 항생제와 신약의 보고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흙 속에 사는 미생물들은 대부분 실험실 환경에서 배양하기 어려워 연구에 큰 어려움이 있었다. 이들은 자연 상태의 복잡한 토양 환경에서만 생존하고 성장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인류는 여전히 수많은 토양 미생물의 잠재력을 완전히 탐구하지 못하고 있다. 메타게놈 분석의 혁신: synBNP 기술 록펠러대 숀 브래디(Sean Brady) 교수 연구팀은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새로운 접근법을 시도했다. 바로 미생물을 직접 배양하는 대신, 토양 샘플에 들어 있는 모든 유전자를 한꺼번에 분석하는 기술인 군유전체학(metagenomics)을 활용한 것이다. 이 기술은 이미 생물학과 의학 분야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지만, 한 줌의 흙에 수천 종의 미생물이 존재하기 때문에 방대한 양의 유전 정보를 처리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연구팀은 synBNP(synthetic bioinformatic natural products)라는 혁신적인 기술을 개발해 이 문제를 해결했다. 이 기술은 단 하나의 토양 샘플에서 무려 2조 5000억개에 달하는 염기쌍을 기존 방식보다 훨씬 빠르게 분석할 수 있다. 연구팀은 이 방법으로 연구소 주변의 토양 샘플에서 수백 종의 새로운 미생물을 찾아냈을 뿐 아니라, 두 가지 새로운 항생제 후보 물질까지 발견했다. 항생제 내성을 이겨낼 두 가지 후보 물질 연구팀이 찾아낸 첫 번째 물질은 에루타시딘(erutacidin)이다. 이 물질은 세균의 지질인 카디오리핀(cardiolipin)의 형성을 방해하는 기전을 통해 항생제 내성균을 억제하는 효과를 보였다. 두 번째 물질인 트리진타미신(trigintamicin)은 세균의 단백질 합성 과정에 필수적인 ClpX라는 단백질에 작용하는 새로운 기전을 통해 항생제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단 한 개의 토양 샘플에서 이처럼 수많은 신종 미생물과 항생제 후보 물질이 발견되었다는 사실은 매우 고무적이다. 이는 앞으로 synBNP 기술을 활용해 전 세계의 다양한 토양 샘플을 분석하면 인류가 직면한 가장 큰 보건 위협 중 하나인 항생제 내성에 대한 해결책을 다시 한번 흙 속에서 찾아낼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준다.
  • 굴뚝서 생태·바이오 변신…국가 프로젝트 주역 된 서천

    굴뚝서 생태·바이오 변신…국가 프로젝트 주역 된 서천

    충남 서천군이 강력하게 변화를 추진 중이다. 서천군은 한때 인구가 16만명을 넘어섰고 초등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장항제련소와 장항선 철도, 장항 국제무역항 등 대한민국 산업 물류를 이끌며 근현대사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도시였지만 지난해 기준 인구가 4만 8000명으로 쪼그라들었다. 최근 ‘무자비한’ 화재와 집중호우 등 유례없는 재난을 극복한 서천군은 관광 자원을 바탕으로 생태를 복원하고 해양 바이오산업 등을 육성하며 국가 균형발전의 핵심축으로 다시 떠오르고 있다. ●관광 자원 바탕으로 한 생태 복원과 해양 산업 육성 집중 서천군은 신속하게 재난을 극복하면서 지방자치단체들로부터 주목받고 있다. 지난해 1월 발생한 서천특화시장 화재 직후 95일 만에 임시 특화시장을 개장하며 상권 붕괴를 막아 냈다. 서천특화시장은 2027년 2월 재개장이 목표다. 지난 7월 16~20일 집중호우로 인해 공공시설 194건과 사유시설 1862건 등 62억원이 넘는 피해가 발생했지만 신속하게 복구해 군민들이 빠르게 일상에 복귀할 수 있었다. 서해안을 품은 군은 생태 복원과 해양 바이오산업 중심의 미래 성장동력 확보로 경제성장을 꾀한다. 밑바탕은 군이 장항 국가습지 복원과 송림자연휴양림·서천갯벌 등 장항읍 송림 일대에 추진 중인 ‘브라운필드 종합개발 사업’이다. 대한민국 발전 축이었던 장항제련소로 인한 심각한 오염 지역을 대한민국 최초의 자연 복원형 관광지로 탈바꿈하는 사업이다. 환경부는 2009년 오염 토지 110만㎡를 매입해 2013년부터 2020년까지 정화했다. 군은 이곳에 장항 국가습지 복원과 함께 서천 생태관광센터 등을 조성해 국제적인 자연 복원 관광지로 발전시킬 계획이라고 16일 밝혔다. 새 정부 국정 운영 5개년 계획안에 장항 브라운필드 재자연화 구상이 담겨 사업 추진에 속도가 붙었다. 민간 투자 유치를 통한 대규모 숙박 시설 조성도 계획 중이다. 해양 바이오산업 육성을 위한 산업 생태계 조성에도 나섰다. 장항국가생태산업단지 내에 해양바이오산업화지원센터의 가동을 앞두고 있다. 해양 바이오기업을 육성하는 서해권 해양 바이오 클러스터도 지난 3월 한국해양과학기술원(KIOST) 서해연구소 유치가 확정되면서 활성화되고 있다. 무한한 바다의 가치를 이용한 지역 발전도 꾀한다. 국제적 물류 거점 기지로 도약하기 위해 장항항 기능 확대를 추진한다. 서면 일원에 1220억원을 투자해 128실과 수영장 등을 갖춘 리조트도 계획 중이다. 장항항·홍원항 일원에는 국비 612억원 규모 어촌신활력 증진사업이 진행되며, 민간 투자를 포함해 총 7600억원 규모의 관광 프로젝트가 가시화되고 있다. 천혜의 자연을 활용한 ‘축제 도시’도 서천의 매력이다. 해마다 100만명 이상이 찾는다. 유네스코 인류 무형유산으로 등재된 ‘한산모시문화제’는 7년 연속 대한민국 문화관광 우수 축제로 선정됐다. 전국 최대 규모의 맥문동 군락지에서 펼쳐진 ‘장항 맥문동 꽃 축제’는 전국 최고 꽃 축제로 자리매김했다. 지난달 28일부터 4일간 소나무 군락지에서 열려 보랏빛 감성을 자극한 축제에는 22만명이 다녀갔다. 서해안 최고 황금어장답게 ‘사계절 수산물 축제도시’ 애칭도 있다. 3월 주꾸미, 5월 자연산 광어·도미와 장항항 꼴갑(꼴뚜기와 갑오징어), 9월 홍원항 전어·꽃게 등 다양한 수산물 축제가 인기다. 신성리 갈대숲 수변과 송림리 생태·휴양관광 시설, 춘장대해수욕장 해양레저 클러스터화 등 관광지 개발도 더해지면서 전국 최대 생태관광 거점으로 탄생하고 있다. ●정부와 충남에 김 가공 세척수 규제 재검토 공식 건의 하지만 풀어야 할 숙제도 있다. 군은 최근 정부와 충남도에 ‘김 가공 배출수 전용 기준’ 마련과 기존 규제 재검토를 공식 건의했다. 서천은 충남의 대표적 김 주산지다. 500년 역사를 가진 물김 양식 규모는 약 3400㏊로 충남(4110㏊)의 82%를 차지한다. 2014년 전국 최초로 김 가공 특화단지를 조성했고 2023년 김 산업진흥구역에 선정됐다. 서천 김은 우수 품질을 앞세워 김 수출도 주도한다. 서천에는 57곳의 마른김 가공업체가 밀집해 있다. 어업 1000여가구가 3000억원 규모로 생산하는 ‘검은 반도체’ 김 산업의 중심지다. 하지만 과도한 환경 규제가 김 산업 발전에 걸림돌이 됐다. 마서·비인·종천면 등의 33곳 김 가공 시설에서는 하루 3만 4000t의 세척수를 사용한다. 화학물질이나 첨가물을 사용하지 않는데도 세척수는 폐수 배출 시설로 규제받는다. 서천군 관계자는 “세척수는 겨울철 김 양식장 해역에 영양염류를 공급해 ‘김 황백화 현상’ 감소에 도움을 준다”며 “현장 여건을 반영한 환경 기준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 취객이 ‘세계유산’ 종묘 기와 잡고 흔들어 훼손

    취객이 ‘세계유산’ 종묘 기와 잡고 흔들어 훼손

    조선과 대한제국의 왕과 왕비, 황제와 황후의 신주를 모시는 사당이자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종묘 담장 일부가 훼손되는 사건이 발생해 경찰이 수사에 나섰다. 16일 국가유산청과 서울 혜화경찰서에 따르면 전날 종묘의 정문인 외대문에서 서순라길 방향으로 이어지는 외곽 담장에서 암키와 5장, 수키와 5장의 파손이 확인됐다. 야간 순찰 중이던 종묘관리소 근무자가 오전 5시 30분쯤 피해 사실을 확인해 경찰에 신고했다. 폐쇄회로(CC)TV에 녹화된 영상에는 취객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오전 1시쯤 기와를 흔들고 잡아당긴 뒤 훼손하는 장면이 담겼다. 경찰은 해당 용의자를 문화유산법 위반 혐의로 추적 중이다. 국가유산청 궁능유적본부 산하 직영보수단은 이날 오후 4시간에 걸쳐 파손된 기와를 보수했다. 조선의 유교적 전통과 왕실 의례 문화를 보여주는 종묘는 1963년 사적으로 지정됐고, 1995년 12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다. 종묘제례·종묘제례악 또한 2001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 [장준우의 푸드 오디세이] 덤플링, 만티, 교자… 작은 만두에 담긴 광대한 계보

    [장준우의 푸드 오디세이] 덤플링, 만티, 교자… 작은 만두에 담긴 광대한 계보

    어떤 음식은 이름만 다를 뿐 비슷한 형태로 세계 곳곳에서 깊게 뿌리내리고 있다. 대표적인 음식이 바로 만두다. 여행하면서 익숙한 음식이 그리울 때면 그 지역의 만두를 찾아본다. 향미는 조금 다르고 어색할지 몰라도 만두가 주는 포만감은 직관적이다. 만두만큼 많은 국적과 이름을 가진 음식을 찾기란 쉽지 않다. 만두의 역사를 살펴보면 동서양의 교류가 자연스레 보인다. 만두의 기원을 사람 머리를 대신해 밀가루 반죽에 고기를 채워 만든 제물에서 찾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중국 한대 이후 북방 유목민과 한족의 밀 문화가 결합해 형성됐다고 보는 편이 정확하다. 만두는 동서양의 가교 역할을 한 몽골 원나라 제국의 팽창을 거치며 동쪽으로는 한국과 일본으로, 서쪽으로는 러시아를 비롯한 유럽에까지 전파됐다. 대체 어떤 매력이 있길래 이토록 많은 지역에서 만두를 받아들이게 된 걸까. 만두에는 인류가 추구해 온 음식의 이상향이 담겨 있다. 기능적인 면에서 본다면 만두는 완벽한 휴대성을 지닌 음식이다. 반죽으로 속을 감싼 만두피는 일종의 포장과 마찬가지다. 따뜻함만 포기하면 유목민이 말 위에서 한 손으로 먹을 수 있고, 농부가 논밭에서 끼니로 먹을 수 있다. 적절한 열량 지닌 탄수화물과 속 재료에 따라 고기와 야채를 한 번에 섭취할 수도 있다. 만두의 또 다른 매력은 재료를 무한히 포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고급스러운 식재료를 넣어 사치스럽게 즐길 수도 있고, 전날 먹다 남은 음식을 잘게 썰어 속으로 쓸 수도 있다. 이런 융통성 덕분에 만두는 지역마다 다른 식재료와 만나 새로운 변종을 끝없이 만들어 냈다. 만두를 만들 때 손이 많이 간다는 점은 단점이지만 동시에 장점으로도 작용한다. 여럿이서 많이 만들어야 하기에 빚고 먹는 행위가 일종의 공동체 의식을 고양하는 역할을 한다. 할머니는 반죽을 밀고, 어머니는 소를 만들고, 아이들은 서툴게 빚는 모습은 비단 우리뿐만 아니라 동서양을 막론하고 끊임없이 반복돼 온 풍경이다. 주목할 만한 건 한중일 3국에선 만두(饅頭)라는 한자를 함께 공유하지만 저마다 가리키는 음식은 전혀 다르다는 점이다. 중국에서 본래 만두는 고기를 넣은 찐빵이었으나 시간이 흐르며 속이 없는 흰 찐빵(만터우)을 뜻하게 됐다. 만두피의 종류에 따라 이름도 다른데 우리에게 익숙한 발효하지 않은 얇은 피로 만든 만두는 ‘교자’(자오쯔)로, 발효돼 부푼 찐빵 속에 고기가 들어간 만두는 ‘포자’(바오쯔)로 불린다. 일본에서 만두는 고기를 넣은 음식이 아니라 팥소를 넣은 달콤한 화과자, ‘만주’로 불린다. 만두가 일본에 전래될 당시는 불교의 영향으로 육류가 금지되던 시절이었다. 승려나 귀족들이 고기 대신 팥이나 밤, 고구마 같은 식물성 앙금을 넣어 차와 함께 즐기면서 일본에서 만두는 식사보다는 달콤한 디저트를 의미했다. 후대에 여러 중국 음식과 함께 중국식 교자가 일본에 전래되면서 일본에서도 교자란 이름으로 만두가 자리잡았다. 중국에서도 교자는 삶거나, 찌거나, 굽는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는데 일본에서는 교자라고 하면 대부분 구운 교자를 뜻한다. 한국과 중국에서 만두는 명절마다 먹는 가족 의례 음식이지만 일본에서는 단순히 간단한 술안주나 곁들이는 음식으로 자리잡았다는 점도 흥미로운 부분이다. 실크로드를 따라 서쪽으로 가면 변주는 더욱 다채로워진다. 몽골에선 양고기의 진한 맛이 고스란히 담긴 만두가 주식 중 하나다. 쪄서 낸 ‘부즈’와 튀긴 ‘호쇼르’, 만두국용 작은 만두인 ‘반시’ 등은 한국과 중국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러시아의 ‘펠메니’는 오늘날 냉동 만두의 조상 격이다. 미리 만들어 얼려 뒀다가 필요할 때 삶아 먹는 방식으로 추위를 견뎌 냈다.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등에서 만날 수 있는 ‘만티’는 실크로드가 낳은 문화 교류의 산물이다. 만두와 유사한 이름으로 불리는 만티는 손바닥만 한 크기로 빚어내 쪄서 만든다. 튀르키예에서 만티는 보다 작고 정교한 형태로 변형됐다. 작을수록 정성이 들어간다고 여겨 귀한 손님에게는 가장 작은 만티를 대접한다. 초간장에 만두를 찍어 먹는 동아시아와 달리 튀르키예와 러시아, 중앙아시아에서는 시큼한 사워크림이나 요거트 소스에 만두를 곁들인다는 게 특징이다. 유럽에선 만두의 변주인 ‘덤플링’을 만나 볼 수 있다. 만두의 영어식 표현이 덤플링이지만 서양에서 덤플링은 속이 없는 밀가루 반죽을 국물 요리에 넣어 먹는 형태를 뜻하기도 한다. 반죽이 국물을 흡수하며 부풀어 올라 포만감을 주는데, 남은 빵가루나 밀가루를 재활용하는 서민 음식이었다. 독일의 ‘크뇌델’, 체코의 ‘크네들리키’가 대표적이다. 인도의 ‘사모사’, 스페인과 남미의 ‘엠파나다’, 이탈리아의 ‘라비올리’와 ‘토르텔리니’ 등도 만두라는 인류의 발명품이 낳은 자손들로 볼 수 있다. 이처럼 만두는 이름과 디테일한 부분들은 다를지 몰라도 인류가 갖고 있는 음식에 대한 공통적인 열망을 담고 있다. 세계 어디를 가더라도 익숙한 음식 하나쯤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장준우 셰프 겸 칼럼니스트
  • ‘일본군 생체실험’ 다룬 中영화 개봉…중국 거주 일본인들 어쩌나

    ‘일본군 생체실험’ 다룬 中영화 개봉…중국 거주 일본인들 어쩌나

    생체 실험 등의 만행을 저지른 일본군 ‘731부대’를 다른 중국 영화 ‘731’ 개봉을 앞두고 주중 일본인들 사이에서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중국 관영 신화통신은 16일(현지시간) “일본 731부대의 생체실험 등 만행을 고발한 영화 ‘731’이 오는 18일 중국 전역과 호주·뉴질랜드 등지에서 개봉한다”고 보도했다. 자오린산 감독이 연출하고 장우, 왕즈원, 리나이원, 쑨첸 등이 출연한 이 영화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 731부대가 중국 동북지역에서 자행한 생체 실험을 고발하는 작품이다. 행상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주인공 등 무고한 민간인들이 당시 731부대로 유인·구금된 뒤 비인간적인 생체 실험 대상으로 전락하는 과정에서 겪는 고난과 저항 정신 등이 영화의 핵심 스토리다. 보도에 따르면 중국에서 영화 ‘731’이 제작되기까지 무려 12년이 소요됐다. 자오 감독 등 제작진은 오랜 시간 일본 각지와 중국 하얼빈 등지에서 방대한 자료를 수집·검토했고 피해자들의 후손들을 만나 인터뷰했다. 또 중국과 일본에서 기밀 해제된 8000족 분량의 당시 기록과 423시간 분량의 영상 자료도 검증했다. 자오 감독을 10년 넘게 수집한 자료와 생생한 인터뷰 내용을 토대로 731부대에서 자행된 페스트 실험, 벼룩 실험, 냉동 실험, 생체 해부, 인체 표본 등을 제작했고 고증을 거쳐 이를 생생하게 재현했다. 이렇게 제작된 이 영화는 일본군이 만주를 침략하기 위해 조작한 만주사변이 벌어진 9월 18일에 맞춰 개봉한다. 올해는 만주사변 발발 94주년이다. 주일 중국 대사관은 일본 현지에서 응원의 메시지를 보냈다. 주일 중국 대사관은 14일 엑스에 ‘731’ 영화 포스터와 함께 18일 개봉 소식을 전했다. 주중 일본인들은 ‘비상’…중국인-일본인 충돌 우려731부대는 인류의 ‘인간다움’을 위협하는 잔혹한 행위를 저질렀고, 당시 731부대의 만행으로 숨진 중국인과 한국인, 러시아인 등은 수천 명에 달한다. 가혹한 범죄를 저지른 일본군을 고발하는 이번 영화의 개봉이 임박하자 중국에 거주 중인 일본인들은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광둥성(省) 선전의 일본인 학교는 영화 ‘731’이 개봉하는 18일 휴교를 결정했다. 앞서 이 학교에서는 만주사변 93주년이던 지난해 9월 18일 등교 중이던 일본인 학생이 중국인 남성에게 흉기로 공격받아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었다. 베이징 일본인학교는 보안 조치를 강화하기로 했고, 상하이와 쑤저우, 항저우 등지에 있는 일본인 학교 5곳은 영화 개봉 당일 온라인 수업으로 대체할 예정이다. 특히 쑤저우의 경우 지난해 6월 일본인 학교 앞 버스 정류장에서 일본인 모자(母子)와 그들을 돕던 중국인 안내원이 흉기 공격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한 곳이다. 당시 가해자는 52세 중국 남성이었다. 일본인 모자는 부상을 입었으나 생명에 지장은 없었고, 범행을 말리려다 중상을 입은 버스 안내원이 사건 발생 이틀 뒤 사망했다. 일본 당국은 올해에도 유사한 사건이 발생할 것을 우려해 특별 안전 조치를 내렸다. 주중 일본대사관은 지난 11일 “중국에서 고조되는 반일(反日) 감정에 특히 경계해야 한다”면서 “외출 시에는 주변을 주의 깊게 살펴야 한다”고 강조했다.
  • ‘생체실험 저지른 일본군’ 다룬 中영화 개봉…중국 거주 일본인들 비상 [핫이슈]

    ‘생체실험 저지른 일본군’ 다룬 中영화 개봉…중국 거주 일본인들 비상 [핫이슈]

    생체 실험 등의 만행을 저지른 일본군 ‘731부대’를 다른 중국 영화 ‘731’ 개봉을 앞두고 주중 일본인들 사이에서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중국 관영 신화통신은 16일(현지시간) “일본 731부대의 생체실험 등 만행을 고발한 영화 ‘731’이 오는 18일 중국 전역과 호주·뉴질랜드 등지에서 개봉한다”고 보도했다. 자오린산 감독이 연출하고 장우, 왕즈원, 리나이원, 쑨첸 등이 출연한 이 영화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 731부대가 중국 동북지역에서 자행한 생체 실험을 고발하는 작품이다. 행상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주인공 등 무고한 민간인들이 당시 731부대로 유인·구금된 뒤 비인간적인 생체 실험 대상으로 전락하는 과정에서 겪는 고난과 저항 정신 등이 영화의 핵심 스토리다. 보도에 따르면 중국에서 영화 ‘731’이 제작되기까지 무려 12년이 소요됐다. 자오 감독 등 제작진은 오랜 시간 일본 각지와 중국 하얼빈 등지에서 방대한 자료를 수집·검토했고 피해자들의 후손들을 만나 인터뷰했다. 또 중국과 일본에서 기밀 해제된 8000족 분량의 당시 기록과 423시간 분량의 영상 자료도 검증했다. 자오 감독을 10년 넘게 수집한 자료와 생생한 인터뷰 내용을 토대로 731부대에서 자행된 페스트 실험, 벼룩 실험, 냉동 실험, 생체 해부, 인체 표본 등을 제작했고 고증을 거쳐 이를 생생하게 재현했다. 이렇게 제작된 이 영화는 일본군이 만주를 침략하기 위해 조작한 만주사변이 벌어진 9월 18일에 맞춰 개봉한다. 올해는 만주사변 발발 94주년이다. 주일 중국 대사관은 일본 현지에서 응원의 메시지를 보냈다. 주일 중국 대사관은 14일 엑스에 ‘731’ 영화 포스터와 함께 18일 개봉 소식을 전했다. 주중 일본인들은 ‘비상’…중국인-일본인 충돌 우려731부대는 인류의 ‘인간다움’을 위협하는 잔혹한 행위를 저질렀고, 당시 731부대의 만행으로 숨진 중국인과 한국인, 러시아인 등은 수천 명에 달한다. 가혹한 범죄를 저지른 일본군을 고발하는 이번 영화의 개봉이 임박하자 중국에 거주 중인 일본인들은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광둥성(省) 선전의 일본인 학교는 영화 ‘731’이 개봉하는 18일 휴교를 결정했다. 앞서 이 학교에서는 만주사변 93주년이던 지난해 9월 18일 등교 중이던 일본인 학생이 중국인 남성에게 흉기로 공격받아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었다. 베이징 일본인학교는 보안 조치를 강화하기로 했고, 상하이와 쑤저우, 항저우 등지에 있는 일본인 학교 5곳은 영화 개봉 당일 온라인 수업으로 대체할 예정이다. 특히 쑤저우의 경우 지난해 6월 일본인 학교 앞 버스 정류장에서 일본인 모자(母子)와 그들을 돕던 중국인 안내원이 흉기 공격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한 곳이다. 당시 가해자는 52세 중국 남성이었다. 일본인 모자는 부상을 입었으나 생명에 지장은 없었고, 범행을 말리려다 중상을 입은 버스 안내원이 사건 발생 이틀 뒤 사망했다. 일본 당국은 올해에도 유사한 사건이 발생할 것을 우려해 특별 안전 조치를 내렸다. 주중 일본대사관은 지난 11일 “중국에서 고조되는 반일(反日) 감정에 특히 경계해야 한다”면서 “외출 시에는 주변을 주의 깊게 살펴야 한다”고 강조했다.
  • ‘출연료 150배’ 김대호, 프리 선언 후 ○○ 생겨…“미칠 것 같다”

    ‘출연료 150배’ 김대호, 프리 선언 후 ○○ 생겨…“미칠 것 같다”

    아나운서 출신 방송인 김대호(40)가 프리랜서 선언 후 고충을 털어놨다. 지난 14일 방송된 KBS1TV ‘다큐ON’의 ‘명상 인류’에 출연한 김대호는 광우 스님, 배우 김지호와 함께 명상 여행을 떠났다. 이날 방송에서 스트레스 정도를 측정한 결과 김대호는 스트레스 지수 79점, 스트레스 저항도 34점으로 스트레스에 매우 취약한 상태인 것으로 드러났다. 스트레스 저항도는 개인이 외부 스트레스에 얼마나 잘 적응하고 신체적·정신적 손상을 적게 받는지 보여주는 지표다. 스트레스 저항도가 낮으면 스트레스에 노출될 때 불면이나 집중력 저하 등의 증상이 쉽게 나타난다. ‘원하는 대로 상황이 흘러가지 않거나 누군가가 나를 괴롭히는 상황일 때 어떠냐’는 질문에 김대호는 “미칠 것 같다”라고 답했다. 그는 “(프리랜서 선언 후) 다양한 사람들과 만날 일이 많이 생겼다”며 “원래 내 선만 지키면 되는 삶이었는데 많은 사람이 제 선을 왔다 갔다가 하니까 그게 힘들다”라고 토로했다. 이어 “불면과 다양한 상황에 노출되는 부분이 힘들다”고 덧붙였다. 2011년 MBC에 입사한 김대호는 ‘MBC 이브닝 뉴스’, ‘나 혼자 산다’, ‘불만 제로’ 등 다양한 프로그램에서 활약했다. 지난 2월 MBC에서 퇴사한 그는 가수 MC몽이 세운 원헌드레드엔터테인먼트와 전속 계약을 체결했다. 이후 MBC 예능 프로그램 ‘라디오스타’에 출연한 김대호는 ‘몸값이 천정부지로 올랐다는 소문이 있다’는 질문에 “그러려고 나간 것”이라며 “출연료 같은 경우 편차는 있지만 이전보다 100~150배 정도 올랐다”라고 밝혔다.
  • ‘스파이더맨’ 듀플랜티스 6m30 넘었다…통산 14번째 세계신기록

    ‘스파이더맨’ 듀플랜티스 6m30 넘었다…통산 14번째 세계신기록

    ‘스파이더맨’ 아먼드 듀플랜티스(26·스웨덴)가 6m30까지 날아오르며 육상 남자 장대높이뛰기 세계 기록을 또 한 번 갈아치웠다. 자신의 통산 14번째, 올해만 4번째 세계신기록 경신이다. 듀플랜티스는 15일 일본 도쿄에서 열린 2025 세계육상선수권대회 남자 장대높이뛰기 결선에서 최종 6m30을 넘었다. 지난달 13일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열린 그랑프리에서 세운 6m29에서 세계기록을 1㎝ 더 높였다. 이날 6m15를 1차 시기에 홀로 성공해 일찌감치 세계선수권 3연패를 확정지은 듀플랜티스는 곧바로 6m30으로 바를 높여 새로운 기록에 도전했다. 1, 2차 시기에서는 바를 넘어 내려오는 과정에 건드리면서 아쉽게 실패했다. 이에 대기석으로 돌아가 잠시 눈을 감고 명상하며 마음을 가다듬은 듀플랜티스는 다시 장대를 들고 힘차게 도약, 마지막 3차 시기에서 전인미답의 6m30을 넘었다. 듀플랜티스는 2020년 2월 9일 세계육상연맹 인도어 투어미팅(폴란드 토룬)에서 6m17을 넘어 2014년 르노 라빌레니(프랑스)가 세웠던 종전 실내 세계기록(6m16)을 6년 만에 바꿔놨다. 이어 2020년 9월 18일 이탈리아 로마 다이아몬드리그에서는 세르게이 붑카(우크라이나)가 1994년에 세운 종전 기록 6m14를 1㎝ 넘어선 6m15의 실외 세계신기록도 새로 썼다. 듀플랜티스는 올림픽 2연패(2021년 도쿄, 2024년 파리)에 이어 세계선수권 3연패(2022년 유진, 2023년 부다페스트)까지 달성하며 인류의 한계를 또다시 깨트렸다.
  • 전남대 수시 경쟁률 6.3대 1…의학과·수의예 ‘최고 인기’

    전남대 수시 경쟁률 6.3대 1…의학과·수의예 ‘최고 인기’

    전남대학교 2026학년도 수시모집 경쟁률이 평균 6.30대 1을 기록하며 마감됐다. 정원 3977명 모집에 2만5055명이 지원한 결과로, 지난해(6.31대 1)와 비슷한 수준이다. 큰 변동은 없었지만 모집단위별로는 수의예과·의학과·고고학과 등 특정 학과에 수험생들이 몰리면서 눈길을 끌었다. 15일 전남대에 따르면 학생부교과(일반) 전형은 1182명 모집에 7890명이 지원해 6.68대 1을 나타냈다. 이 가운데 가정교육과는 19.67대 1로 가장 치열했다. 같은 교과 전형 중 지역인재 선발에서는 984명 모집에 6322명이 몰려 6.42대 1을 보였으며, 문화인류고고학과가 22.5대 1로 최고치를 기록했다. 학생부종합(고교생활우수자Ⅰ) 전형은 모집 인원이 전년보다 158명 늘어난 870명으로 확대됐음에도 불구하고 지원자가 6576명에 달해 7.56대 1로 오히려 경쟁률이 높아졌다. 특히 수의예과는 무려 24.13대 1을 기록해 전국 최고 수준의 인기를 입증했다. 의학과 역시 변함없는 강세를 보였다. 학생부교과(지역인재) 전형에서는 5.46대 1, 학생부종합 전형에서는 16.1대 1을 기록하며 여전히 의대 진학을 희망하는 수험생들의 쏠림 현상이 두드러졌다. 이 밖에 광역선발 단위인 자율전공학부(1년)가 9.35대 1, 창의융합학부가 9대 1로 집계됐다. 두 전형 모두 다양한 진로 선택이 가능한 학부제라는 특성상 학생들의 관심이 높았던 것으로 풀이된다. 전남대는 오는 9월 26일과 11월 25일 실기고사를 시작으로, 12월 2일 학생부교과 면접, 12월 3일 학생부종합 면접을 진행한다. 최초 합격자는 12월 12일 대학 홈페이지를 통해 발표할 예정이다. 이번 결과에 대해 입시 전문가들은 “전반적인 경쟁률은 지난해와 큰 차이가 없지만, 의학·보건계열 학과의 선호가 여전히 두드러지고, 고고학과·가정교육과 등 일부 학과에서도 이례적으로 높은 경쟁률을 보였다”며 “수험생들의 선택이 안정적인 진로뿐 아니라 특수성과 희소성을 가진 학문 분야로도 확장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분석했다.
  • 찰리 커크와 관용 사이… 자유롭게 토론하되 차이를 인정하라 [노정태의 뉴스 인문학]

    찰리 커크와 관용 사이… 자유롭게 토론하되 차이를 인정하라 [노정태의 뉴스 인문학]

    커크 총격 용의자인 타일러 로빈슨가장 나쁜 방식으로 커크 ‘입’ 막아인간 ‘나만 옳다’ 이기적 성향 지녀볼테르 “관용은 인간에 대한 사랑”톨레랑스, 佛 정신으로 자리잡고민주공화국 기본 정신, 관용에 기반조국 “극우 국힘 존재해선 안 된다”관용의 정신 없는 극단주의적 태도최강욱 “‘2찍’들 모아 묻어 버리면”학살 선동하던 극단주의자와 닮아대중 독재 ‘인민민주정’ 전락 우려공화정 핵심 원리 ‘관용’ 지켜져야 2025년 9월 10일(현지시간), 미국 유타주 오렘에 위치한 유타밸리대 캠퍼스. 야외에 펼쳐진 무대에서 문답이 오가고 있었다. 발언권을 얻은 청중 중 한 사람이 연사에게 물었다. “지난 10년간 벌어진 미국의 총기 난사 사건 범인 중 트랜스젠더가 몇 명인지 아십니까.” 연사가 답했다. “너무 많죠.” 그 말을 들은 관중들은 박수로 화답했다. 질문자는 정답이 ‘다섯 명’이라고 알려 준 후 발언을 이어 나갔다. “지난 10년간 미국에서 벌어진 총기 난사 사건이 총 몇 건인지 아십니까.” 연사는 대답하기 시작했다. “갱 조직 간 폭력 사건을 포함합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하지만 연사의 대답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몇 초 후 총에 맞아 의자 아래로 쓰러졌기 때문이다. 연사의 머리 위에는 “내가 틀렸다는 걸 증명해 봐”(Prove Me Wrong)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피격당한 사람은 1993년생 정치 논객 찰리 커크. 그는 병원으로 이송됐으나 회복하지 못했고 다음날 향년 32세로 생을 마감했다. 9월 13일 현재까지 확인된 바, 용의자는 2003년생으로 유타주립대를 중퇴한 백인 청년 타일러 로빈슨이다. 그는 가족에게 범행을 자백했고 미 연방수사국(FBI)에 체포됐다. “어이 파시스트! 잡아라!”라고 새겨진 탄피 등이 발견됐지만 로빈슨의 범행 동기는 아직까지 완전히 밝혀지지 않은 상태다. 가족 모두가 공화당 지지자인 데다가 로빈슨 스스로도 2017년에 도널드 트럼프 지지 티셔츠를 입고 있었던 사진이 공개되면서 논란은 더욱 커지는 중이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다. 로빈슨이 커크의 ‘입’을 가장 나쁜 방식으로 틀어막았다는 것이다. 다른 생각과 입장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드러낸다는 이유로 남을 살해함으로써 결국 말할 수 없게 만들었다. 우리는 이 시점에서 다시 한번 ‘관용’이라는 가치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볼테르 “관용 실현 위해 욕망 이겨 내야” 1761년 프랑스의 툴루즈에 사는 직물 상인 장 칼라스의 인생에 큰 불행이 닥쳐왔다. 그의 아들이 스카프로 목을 매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개신교도였던 아들은 낭트 칙령이 폐지되고 종교의 자유가 박탈된 프랑스에서 힘겹게 살아가고 있었다. 위그노 차별로 인해 일자리를 구하지 못했고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다가 결국 나쁜 선택을 하고 말았다. 하지만 칼라스의 비극은 끝나지 않았다.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툴루즈는 프랑스에서도 위그노 차별이 가장 심한 곳 중 하나였다. 가톨릭 강경파는 아들을 잃은 아버지에게 엉뚱한 혐의를 덮어씌웠다. 아들이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것을 아버지가 막았고 그래서 아들이 죽게 됐다는 모함이었다. 당사자가 부정하고 있음에도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일단 체포해서 고문해 보면 진실을 밝힐 수 있을 것이라는 어불성설의 논리가 툴루즈에 휘몰아치고 있었다. 성실한 포목상이었던 칼라스는 너무도 억울했다. 그저 다른 종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차별을 당해 왔고, 아들은 그 차별로 인해 죽었으며, 심지어 본인의 목숨까지 위험해졌다. 하지만 그는 죽는 순간까지 단 한 번도 자신의 입장을 번복하지 않았다. 사형당하는 그 순간까지 아들이 개종을 원한 적도, 본인이 개종을 막은 적도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우리에게 ‘볼테르’라는 필명으로 더욱 친숙한 프랑스의 계몽사상가 프랑수아마리 아루에가 팔을 걷어붙이고 이 사건에 뛰어들었다. 칠순의 나이를 넘긴 노인이었음에도 볼테르는 놀라운 열정으로 칼라스의 유족을 면담하고 사건을 조사하며 본인의 뜻에 동조해 줄 유력 인사들을 설득했다. 또한 ‘캉디드’ 등 수많은 책을 써낸 작가답게 ‘관용에 관한 논고’라는 책을 출간했다. 1763년의 일이었다. 볼테르에 따르면 관용은 인간이 보여 줄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일 중 하나다. 왜일까. 우리는 ‘나와 다름’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나만 옳다’고 주장하고픈 이기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신을 믿는다는 이유로, 심지어 같은 신을 믿고 경전을 읽으면서도 그 내용에 대한 해석이 서로 다르다는 이유로 죽고 죽이는 행태는 짐승만도 못하다. 서로 먹고 먹히는 야생의 짐승들조차 그런 이유로 서로 죽이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런 관점에서 볼테르는 선언한다. “관용은 가장 겸손한 형태의 인간에 대한 사랑이며, 개인이 자신의 한계를 이겨 냈다는 명백한 증거가 된다. 관용의 실현을 위해서는 우리 내부의 이기적 욕망을 이겨 내야 하기 때문이다.” ●타인 생각 바꿀 수 있는 방법 거의 없어 볼테르가 이런 주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종교를 현실적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볼테르에게 종교란 사회의 평화와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인류가 오래도록 지녀 온 삶의 양식일 뿐이었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후 진짜로 부활했다고 믿느냐, 가톨릭 신부에게 인간의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권리가 있느냐, 성경에 적힌 내용이 글자 그대로 진리라고 믿느냐 아니냐는 모두 현실에서 경험을 통해 검증할 수 없는 ‘형이상학적 문제’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한 형이상학적 문제가 무의미하다는 뜻은 아니다. 어떤 형이상학적 주장이건 그것을 믿는 사람에게는 매우 중요한 문제다. 하지만 다른 사람도 그 나름의 형이상학적 주장을 품고 있게 마련이며 그러한 주장은 형이상학적인 것이기에 검증될 수도 반박될 수도 없다. 물론 어떠한 계기로 누군가 입장을 바꿀 수야 있겠지만 남의 생각이 바뀔 거라고 기대하거나 강요해서는 안 된다. 그런 기대는 비현실적이다. 볼테르의 말을 들어 보자. “형이상학적 문제에서 모든 사람들이 똑같은 방식으로 생각하게 되기를 바라는 것은 아주 터무니없는 욕심일 것이다. 한 마을에 사는 모든 사람의 정신을 예속시키고 통제하려 하기보다는 차라리 무력으로 세계를 굴복시키는 편이 훨씬 쉬우리라.” 다른 사람의 생각을 바꿀 수 있는 방법은 거의 없다. 완벽한 논리를 동원해 반박할 수 없게 몰아붙인다 한들 속마음으로는 딴 생각을 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와 다른 생각’을 용납하지 못하는 우리의 이기심은 특히 그것이 국가의 힘을 등에 업은 종교라는 제도와 결합할 때 최악의 결과를 불러온다. 장 칼라스 사건 같은 일이 벌어지고 마는 것이다. 볼테르는 치밀한 조사와 유창한 논변으로 칼라스의 무죄를 주장했다. 그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1765년 국왕의 허가하에 재심이 열렸고 칼라스에게 무죄가 선고됐다. 여전히 가톨릭이 국교인 나라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상당히 빨리 정의가 회복된 셈이다. 이렇게 관용, 톨레랑스는 프랑스의 국가 정신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여 정치적 격변 끝에 왕정이 종식되고 프랑스는 공화국이 됐지만 그 속에서 관용의 정신은 더욱 깊게 헌법 정신에 뿌리를 내렸다. 종교적 차이에 대한 관용을 넘어 다양한 문화와 인종, 삶의 방식도 관용할 수 있는 나라를 지향하게 된 것이다. 누군가의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처벌받지 않는 나라, 서로 생각이 다른 사람들끼리 모여 살 수 있는 나라, 각자의 관점을 유지하며 때로는 남을 설득하기 위해 노력할 수 있으나 서로의 한계를 인정하고 긍정하는 나라, 그것이 바로 우리가 아는 민주공화국의 기본 정신이며 그 정신은 관용에 기반을 두고 있다. ●커크와 생각 달라도 조롱은 용납 어려워 우리의 현실로 돌아와 보자. 커크는 사춘기를 지나 남성에서 여성으로 성전환한 선수가 여성 스포츠 리그에 출전하는 것이 불공정하다고 지적했다. 귀를 기울일 만한 여지가 있는 논의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외의 영역에서 나는 그와 생각이 전혀 다르다. ‘미국은 백인이 차별당하는 나라가 됐다’는 둥, ‘여성의 역할은 가정에 있다’는 둥, 커크가 펴 온 주장 중에는 동의할 만한 게 거의 없으며 그런 주장을 열성적으로 퍼뜨리는 것이 사회적인 해악을 초래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커크의 죽음을 두고 ‘총기 규제에 반대하던 자가 총에 맞아 죽었다니 아이러니하다’는 식으로 조롱하는 것은 용납하기 어려운 일이다. 특히 스스로를 ‘정치적으로 올바른’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민주공화국의 핵심 원리인 관용을 저버린 채 폭력을 옹호하는 모습은 그저 어지럽고 혼란스럽다. 민주공화국이란 무엇인가. 민주정의 원리에 따라 국민이 스스로 주권을 갖는 나라, 공화정의 원리에 따라 다양한 가치를 지닌 이들이 공존하는 나라, 그것이 민주공화국이다. 따라서 민주공화국은 1인 1표제의 선거를 치르는 것만으로는 유지되지 않는다. 공화정의 핵심 원리인 관용이 지켜져야 한다. ●대한민국, 공화 가치 없이는 존속 못 해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벌어지는 정치적 풍경을 보며 걱정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도 거기 있다. 조국 조국혁신당 비상대책위원장이 지난 1일 했다는 발언. “윤석열 (전 대통령) 이후의 정치 지형에서 지금과 같은 극우 국민의힘이 존재해선 안 된다.” 관용의 정신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극단주의적 태도다. 그래도 이건 그와 함께 8.15 특사로 사면을 받은 최강욱 전 더불어민주당 교육연수원장에 비하면 ‘순한 맛’이다. “여러분 주변에 많은 ‘2찍’들이 살고 계시는데 한날한시에 싹 모아다가 묻어 버리면 세상에는 2번을 안 찍은 사람들만 남으니까 대한민국 민주주의는 완전히 성공하고 한 단계 도약하지 않겠냐”는 최강욱의 발언이 위그노 학살을 선동하던 극단주의자들의 그것과 뭐가 다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공화주의적 가치 없이는 존속할 수 없다. 나와 다른 주장을 한다는 이유로 타인에 대한 폭력이 용납되거나, 국가가 특정인이나 집단의 사고방식을 억누르려 할 때 민주공화국은 대중이 독재하는 인민민주정으로 전락한다. 우리에게 주어진 길은 단 하나뿐, 자유롭게 토론하되 차이를 인정하고 관용하는 것이다. 노정태 작가·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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