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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시대 ‘태교 지침서’ 엿보다

    고서(古書)라고 하면 고리타분하고 어렵게만 느껴진다. 그러나 우리 민족의 다양한 문화·생활양식이 가득 담긴 고서를 들여다보면 과거에서 현재로 이어지는 지혜를 배울 수 있다. 다큐멘터리 전문 Q채널은 고서를 통해 전통생활 속에 녹아든 삶과 생활의 지혜를 발견하는 역사 다큐멘터리 ‘고서, 지혜의 문’(8부작)을 2일부터 매주 월요일 오후 7시 방송한다. 민족의 사상과 문화가 응축돼 있는 고서가 안내하는 길은 과거로만 향하지 않는다. 현재를 명석하게 볼 수 있는 거울이며, 앞으로 지향해야 할 미래를 제시하는 길이기도 하다. 1부에서는 조선 영조때 사주당 이씨 부인이 쓴 태교지침서인 ‘태교신기’(胎敎新記)를 통해 전통태교의 우수성을 살펴보고 현대의학과의 접목 가능성을 검토한다.2부는 검시(檢屍)에 관한 방법론을 다룬 법의학서 ‘신주무원록’(新註無寃錄)을 통해 조선시대의 법정신과 형벌제도를 살펴본다.3부는 종합무예서인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를 통해 동양무예의 정수와 한국무예의 긍지를 보여준다.4부는 조선시대 양반음식 146가지 조리법을 한글로 소개한 요리지침서 ‘음식지미방’(飮食知未方)을 통해 음식을 실제로 만들어 보고, 우리 전통음식의 우수성과 과학성을 규명한다. 5부에 소개되는 ‘승총명록’(勝聰明錄)’과 ‘용하기’(用下記)는 전통 상업정신을 재조명하는 귀중한 고서다.6부와 8부에서는 각각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와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를 통해 과학기술 및 주거문화에 대한 조상들의 지혜를 엿본다. 이와 함께 7부에서는 미국 인류학자인 스튜어트 컬린의 저서 ‘한국의 놀이(Korean Game)’를 통해 세계인의 눈으로 본 한국의 전통놀이를 소개하고, 그 속에 담긴 교육적 가치를 재조명한다.김미경기자 chaplin7@seoul.co.kr
  • 인류 최초 조상 ‘루시’ 자손 화석 발견

    인류의 최초 조상으로 추정되는 ‘루시’의 자손 화석이 발견됐다. 에티오피아 북동부 디키아에서 발견된 3세 가량의 여자아기 유골은 역시 에티오피아에서 발견된 인류의 ‘어머니’ 루시와 같이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에 속한다고 영국 BBC가 20일(현지시간) 네이처 최신호를 인용해 보도했다. ‘셀람’으로 명명된 이 화석은 2000년에 발견됐으나 당시 사암에 묻혀 있어 한 알갱이씩 긁어내는 작업이 5년 이상 걸렸다. 퇴적물 분석 결과,330만년 전쯤 숨졌으며, 루시와 같은 종의 직립원인임이 확인됐다고 독일 막스프랑크 연구소의 고고인류학자 제레세나이 알렘세게드 박사는 밝혔다. 연구진은 보존상태가 완벽한 보기 드문 아기 화석이라며, 아기가 홍수에 휩쓸려 금세 퇴적물에 파묻혔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두개골 외에 몸통과 팔다리 주요 부위 등도 나왔으며 컴퓨터단층촬영에선 채 돋지 않은 치아가 연령을 가늠케 했다.특히 화석화되기 어려운 설골(舌骨)이 발견돼 인두(咽頭)의 구조와 발성 방식을 짐작케 한다. 혀 근육에 붙은 설골은 침팬지의 것과 매우 흡사해 “사람 엄마보다는 침팬지 엄마의 귀에 더 호소력을 가졌을 것”이라고 연구진은 말했다. 셀람의 하체는 사람과 비슷하나 어깨 뼈가 고릴라를 닮는 등 상체는 유인원에 가깝다. 알렘세게드 박사는 “사람과 유인원의 특징을 모두 갖고 있어 인류의 기원을 규명하는 데 열쇠를 제공할 것”이라고 기대감을 나타냈다.1974년 발견된 루시는 320만년 전의 여성으로 추정되나 일각에선 침팬지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루시는 무릎까지 내려오는 긴 팔을 가져 유인원처럼 나무에 오를 수 있는 조건이지만 실제로 사용했는지, 진화과정의 흔적인지는 의문이다.아직 사암에서 꺼내지 못한 셀람의 발뼈가 그래서 더 관심이다. 만약 엄지발가락이 사람의 엄지손가락처럼 굽었다면 나무타기 능력을 시사한다. 셀람의 두뇌 용량은 성인 아파렌시스의 63∼88%인 330㏄로, 같은 나이의 침팬지와 비슷하다.3세이면 두뇌가 성체의 90%로 자라는 침팬지에 견줘 두뇌 성장이 느린 것이다. 유년기가 긴 것은 인간의 특성이다.박정경기자 olive@seoul.co.kr
  • [책꽂이]

    ●양복 입은 원숭이(리처드 콘니프 지음, 이호준 옮김, 랜덤하우스 펴냄) 동물의 세계에서 배우는 비즈니스 정글 스토리.‘부자들의 역사’를 쓴 베스트셀러 작가인 저자는 원숭이와 침팬지를 비롯해 프레리 들쥐, 아마존의 피라니아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동물들의 습성을 관찰, 직장인들의 생존 메커니즘을 밝힌다. 앙숙인 MS의 스티브 발머와 선마이크로시스템스의 스콧 맥닐리가 극적으로 화해한 이유, 인텔의 앤디 그로브가 정적을 제거하는 장면 등을 생생히 보여준다.1만 5000원.●세상을 바꾼 최초들(피에르 제르마 지음, 최현주 등 옮김, 하늘연못 펴냄) 포크의 탄생지는 터키. 복권은 15세기 베니스 상인들의 창안물. 타자기로 소설을 쓴 최초의 작가는 마크 트웨인. 인류 최초의 포스터 제작자는 15세기 교회의 성가대원. 백화점의 효시는 1837년 파리에서 문을 연 ‘르 프티 마틀로’. 인류가 만든 최초들에 관한 지식들을 골라 실었다.“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최고의 선물은 궁금증과 호기심”이라는 발명왕 에디슨의 말을 실감케 하는 책.1만 7000원.●자클린 뒤 프레 예술보다 긴 삶(캐럴 이스턴 지음, 윤미경 옮김, 마티 펴냄) “이 소녀는 마치 남자 다섯이 하듯 연주한다. 오케스트라의 소리도 그녀의 음을 다 따라가지 못한다.”라는 지휘자 주빈 메타의 평을 들은 세계적인 여성 첼리스트 자클린 뒤 프레의 삶을 조명. 최고의 첼리스트로 손꼽히며 빛나는 연주자의 길을 걷던 자클린은 다발성경화증으로 첼로를 놓고 휠체어에서 지내야 하는 비운을 겪는다. 아르헨티나 출신 유대인 남편인 지휘자 대니얼 바렌보임과의 이야기도 실렸다.1만 8000원.●로빈슨 크루소의 사치(박정자 지음, 기파랑 펴냄) 인류학자 마르셀 모스는 ‘증여론’에서 인디언 축제 포틀라치의 모습을 보여준다. 선물을 주고 환대를 베풀고 결국 미친 듯한 소비와 파괴행위로까지 이어지는 포틀라치. 모스는 이런 행태를 인디언 사회 특유의 관습이 아니라 모든 문명사회를 지탱하는 기본원리로 본다. 책은 소비사회를 사는 현대인의 정경을 그린다. 저자(상명대 교수)는 “현대는 물건의 소비뿐만 아니라 상징의 소비, 이미지의 소비, 기호의 소비가 이뤄지는 시대”라고 말한다.1만 2000원.●디자인은 예술이 아니다(우타 브란데스 지음, 김미숙 옮김, 시지락 펴냄) 책의 제목은 디자이너가 한갓 아름다움만을 추구하는 데 그치지 않고 본질적으로 더 나은 아름다운 세상(생활세계와 노동세계)을 만드는 대장장이 헤파이스토스가 돼야 함을 암시하는 말.‘섹스 없이 디자인은 없다.’라는 화두를 던지는 이 책은 왜곡된 성의식이 구체적 사물로 적나라하게 구현된 장신구 디자인과 향수 디자인을 비판적으로 살핀다.1만 2000원.
  • “해외입양인도 우리민족”

    “해외입양인도 우리민족”

    참여정부 출범 초기인 2003년 10월. 역대 외교부 대사 출신들이 차지해 오던 외교통상부 산하 재외동포재단 이사장에 학자 출신의 재야 인사가 내정됐다. 재외한인학회 회장, 동북아평화연대 이사장 등 ‘필드’의 재외동포 관련 단체를 이끌고 ‘재외동포학’을 수립했다는 평가를 받아온 이광규(75) 서울대 명예교수. 상대국(해외 동포의 대부분이 상대국 국민)을 고려해야 하는 정부 차원의 재외동포 정책과 시민 단체의 재외동포 지원은 기본 접근법이 다르다는 점에서 우려도 나왔고, 역발상의 발전이 있을 것이란 기대도 모았다. 아니나 다를까. 이 이사장 3년 임기 내내 재외동포 정책을 둘러싸고 외교부·법무부 등 정부 부처와 재단의 불협화음은 이어졌다. 하지만 이 이사장은 인류학자의 시각에서, 재외동포 전문가로서 역사의 아픔 속에 세계로 흩어진 우리 동포들을 보듬어내는 일들을 했다는 평가를 얻고 있다. 24일 서울 서초동 외교센터 6층 재외동포재단 사무실에서 그를 만나 지난 3년의 소회를 들어봤다. ▶가장 보람 있었던 일을 꼽자면. -지난여름 국제결혼으로 해외에 나간 분들을 서울로 초청, 조국의 따뜻함을 느끼게 했다. 입양아의 경우 지난 98년 김대중 대통령 취임 직후, 외교부를 방문해 해외로 나간 우리의 입양아 문제를 강조한 이후 정부가 신경을 쓰면서 상당한 인식의 개선과 고국 방문이 이뤄지고 있다. 하지만 입양아들보다 더 힘들었다고 할 수 있는 국제결혼한 우리 동포들 특히 한국전쟁 시기 미군병사와 결혼한 이른바 ‘GI신부’들의 경우는 인식이 그대로다. 이들 중에 누가 개인 영달을 위해 외국인과 결혼하고 한국을 떠났겠나. 모두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남동생의 학비를 대기 위해 미군 병사들과 결혼했다. 영어를 하고 외국 사람과 이야기하는 게 국제화가 아니다. 이들을 포용하고 이들의 외국인 남편, 그 자녀들을 우리 민족으로 감싸 안아야 그게 국제화다. 지난해 국제결혼한 여성들을 초청했는데 응어리진 감정들을 토해내는 것을 보았다. 행사를 열려는데 “뭐가 자랑스러워 이들을 초청하느냐.”는 반대도 극심했다. 올해 미식 프로축구 하인스 워드 선수 모자 열풍을 계기로 그래도 많이 좋아졌다. 미국이나 유럽 등에서 살고 있는 국제결혼자들의 결혼 배경이나 학력, 배우자의 인종 등 겉면을 모두 걷어내고 한마음으로 포용하라고 계몽하고 설득해 왔다. 올 가을에도 2차 대회를 할 계획이다. ▶아쉬운 게 있다면. -재단내 동포들에 대한 연구작업이 태부족해 강화했으면 했는데 잘 안 됐다. 또 해외의 동포 단체에 그동안 추석이나 체육회 등 1회성 행사에 지원해준 돈을 목돈으로 돌릴 테니, 유대인들의 커뮤니티 센터와 같은 수익성을 담보한 동포센터 설립을 해보라는 쪽으로 유도했다. 하지만 한인 단체간 갈등 반목이 생기고, 소송까지 이어지면서 그 계획이 무산지경이 돼 안타깝다. 지난해 미국내 한인 세탁업협회 인사들이 한국을 찾았다. 한국인이 대표적으로 하고 있는 사업은 알다시피 식료품점, 세탁소, 미용용품 조달이다. 한국에선 보잘 것 없어 보일지 몰라도 미국 사회에서 그들의 실제 힘은 막강하고, 조국에 대한 애정 또한 누구 못지않다. 세탁업협회 대표들이 방한해 국제적인 대기업을 방문, 자신들의 세탁물 덮개에 기업 로고를 붙이겠다고 선의의 제의를 했다가, 일언지하에 거절당한 적이 있다. ▶재외동포청 설립 등을 둘러싸고 정부와 대립·갈등을 겪었는데. -해외동포 지원이라는 재단의 정체성 측면에서 보면 정부와의 대립은 불가피하다. 나는 외교정책은 천문학이고, 동포문제는 기상학이라고 본다. 모두 하늘을 쳐다보는 학문이지만 외교는 은하계 태양계를 보고, 재단은 비가 오는지, 날이 맑은지를 본다. 충효의 문제로도 나는 설명한다. 효를 선택하다 보면 충과 배치될 때도 있고 충을 선택하다 보면 효와 배치된다. 외교부는 충을 선택하고 재단은 효를 선택한다. 외교부는 중국이나 러시아 미국 등 우리 교민이 살고 있는 상대국과의 입장 때문에 교민청을 만들 수 없다는 것이고 우리는 동포들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선 이 체제론 어렵다는 논리를 폈지만 잘 안됐다. 정말 동포들을 위한 정책을 추진하자면 충돌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국회에서 동포청 또는 대통령 직속의 재외동포위원회를 설치 하자는 안을 냈는데, 나는 대통령 직속의 위원회를 원한다고 했다. 김수정기자 crystal@seoul.co.kr
  • [이주일의 어린이책] 생활 속 신화로의 여행

    만화 그리스로마 신화가 한동안 크게 유행하면서 총기있는 초등학생들은 신화 속 신들의 계보를 구구단처럼 줄줄이 꿴다.‘우리곁에서 만나는 동서양 신화’(이경덕 지음, 사계절 펴냄)는 기왕 눈뜬 신화세계를 더 깊이, 더 입체적으로 들여다보자고 권유하는 신화해설서이다. 영화, 명화, 일상 등에 알게 모르게 숨겨진 신화의 모티프들을 찾아내 설명해주는 책은 청소년 눈높이에 맞춰졌다. 초등학생이라면 책읽기 수준이 꽤 높은 고학년은 돼야 이해하기가 쉽겠다. 책은 모두 5개 장에 걸쳐 신화세계를 펼쳐보인다. 이미지세대 독자들을 의식해 첫장을 ‘영화로 만나는 신화’로 꾸몄다. 영화를 좋아하는 중학생쯤 되면 누구나 한두 편은 접했을 화제작 9편을 이야깃감으로 삼았다.‘글래디에이터’‘반지의 제왕’‘매트릭스’‘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등이 그들.“영화가 신화를 많이 차용하는 까닭은 그 속에 이야기의 원형이 담겨 있기 때문”이라고 전제한 지은이는 예컨대 “리들리 스콧 감독의 ‘글래디에이터’가 신화의 문법에 맞게 잘 만들어진 영화”라고 귀띔한다. 신화 속 영웅의 탄생과 성장 과정을 고스란히 담아냈다는 것.주인공 막시무스가 가족을 잃고 버려진 뒤 검투사가 되어 점차 실력을 쌓아 인기를 얻고, 종국엔 죽음을 맞는 비극적 결말 등 그 모두가 ‘신화의 일반공식’이란 촘촘한 해설이 흥미롭다. 영웅신화의 또 다른 특징이 아버지의 부재(不在)라는 점을 들며 영화 ‘스타워스’를 예시했다가 맥락이 닿는 명작동화들을 연결시켜 이해를 돕기도 한다. 중간중간에 자투리 상식 팁(tip)까지 덧붙여, 착실한 독자라면 이참에 ‘신화 박사’로 불릴 수 있도록 배려했다.세계적으로 유명한 화가들은 왜 신화를 화폭에 담았을까. 따지고 보면 새삼 궁금한 사실들이 2장(그림으로 만나는 신화)에서 조목조목 해설된다.벨레로폰이 천마 페가소스를 타고 키마이라와 싸우는 루벤스의 그림 ‘벨레로폰’, 경주 천마총의 ‘천마도’ 등 신화나 역사를 차용한 동서양의 유명그림들이 천연색으로 책갈피 곳곳에서 시각효과를 높인다. 이밖에 ‘절에서 만나는 신화’‘길에서 만나는 신화’‘일상에서 만나는 신화’편이 있다. 철학과 문화인류학을 전공한 지은이는 ‘역사와 문화로 보는 일본기행’‘하룻밤에 읽는 그리스 신화’‘신화따라 우주여행’ 등을 내놨다.1만 2000원.황수정기자 sjh@seoul.co.kr
  • [명문대 교육혁명] (17) 加브리티시 컬럼비아대(UBC)

    [명문대 교육혁명] (17) 加브리티시 컬럼비아대(UBC)

    |밴쿠버(캐나다 브리티시 컬럼비아주) 안동환특파원|지난 3월 브리티시 컬럼비아대(UBC)의 양자물리학 강의실. 수업이 시작되자 50여명의 학생들이 저마다 리모컨 형태의 작은 전자장치를 꺼내 들었다. 아니 강의실에서 버젓이 휴대전화를 사용해도 되나 싶었다. 교수가 문제를 내자 학생들이 일제히 전자장치를 누른다. 이 장치가 ‘클리커(Clicker)’로 불리는 휴대용 첨단기기.UBC의 모든 대형 강의실에서 활용된다. 학생 1인당 자신의 고유번호가 등록된 클리커를 사용한다. 출석 확인도 전자식이다. 무엇보다도 ‘쌍방향 대화식(인터랙티브)’ 수업을 구현하는 데 효과적이다. 교수가 출제한 문제나 질문에 클리커로 답변한다. 강의실의 전자칠판에는 곧바로 학생 전체와 개인별 정답률 등 수업 정보가 곧바로 뜬다. 오답을 많이 낸 학생은 교수가 실시하는 개인지도 명단에 등록된다. 학습 효과를 최대한 끌어 올리는 UBC만의 첨단 시스템이다. UBC는 캐나다 서부를 대표하는 주립대다. 매년 치솟는 밴쿠버의 부동산 가격의 상당 부분은 UBC가 끌어 올릴 정도의 명문 인지도를 갖고 있다.UBC의 밴쿠버 경제 창출액은 40억달러에 달한다. 미국 대학들과의 치열한 경쟁 속에서 세계 수준의 대학에 오른 UBC의 성장 동력은 무엇일까. 마르타 파이퍼 총장은 과학 대국을 지향하는 연방정부와 주정부의 적극적인 지원과 국제화 노력을 꼽는다.UBC에 쏟는 정부 연구 지원금만 매년 3억 1500만달러에 이른다. 인종 분포는 매우 다양하다. 유학생은 전 세계 130개 국가,5000명에 달한다. 전체 학부·대학원생의 10분의1.2015년까지 현재 9%대인 외국인 비율을 15%까지 끌어올릴 계획이다. 경영학과 3학년 제시카 강은 “교내 식당에 매일 각 나라 요리가 점심 식사로 제공되고 있다.”고 말한다. 파이퍼 총장은 “재학생의 46%가 이민 자녀이며 절반 이상이 두개 이상의 언어를 구사한다.”면서 “UBC는 세계 시민 육성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말했다. UBC의 숨은 저력은 캐나다 고부가가치 지식산업의 선두주자라는 데 있다.UBC는 648개의 기술 특허 등을 확보하고 있다. 미국 최고 공과대라는 매사추세츠공대(MIT)와 스탠퍼드대를 앞질렀다. 매년 로열티 수입만 1억 5000만달러에 이른다. 대학이 보유한 원천 기술은 고스란히 기업 활동으로 응용된다.UBC 이공계의 특징은 학교 기업인 ‘스핀 오프(spin-off)’제도. 대학 실험실의 연구 성과를 기반으로 설립한 기업만 지난해 현재 117개다. 화이트 헤드 연구부총장은 “전염병인 사스(SARS) 분야와 생명공학, 컴퓨터, 화학 등은 이미 세계 최고 수준에 있다.”고 말했다. 학부 시스템은 통합형이다. 이공계는 물리·화학·생물학을 묶은 ‘사이언스 원’으로, 인문·사회계는 철학·역사·영어를 통합한 ‘아트 원’이라는 통합 교육을 하고 있다. 심리학과 4학년생 제레미 트레보는 “기초 학문을 효율적으로 배울 수 있고, 동시에 학문간의 장벽을 허물 수 있는 장점이 있다.”고 말했다. 세계 석학들을 스카우트하는 데 적극적인 UBC는 미국 대학들에 ‘경계 1호 대상’이다. 최근에는 2001년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인 콜로라도대의 칼 위먼 교수를 전격적으로 영입해 미국 대학들을 충격으로 몰아넣었다.55세의 위먼 교수는 파격적인 연구비 제안에 마음을 돌렸다.UBC가 그에게 제시한 연구비는 1200만 캐나다달러(약 102억원). 화학계의 거장으로 1994년 노벨화학상 수상자 마이클 스미스 교수가 UBC에 둥지를 튼 것도 같은 이유다. UBC는 ‘아시아의 창’으로 불리는 밴쿠버를 빼닮았다. 방대한 자료와 연구 성과를 내면서 아시아학에서 독보적인 존재로 평가받는다. 한국, 중국, 일본, 산스크리트, 펀자브 등 아시아 언어와 문화 연구가 활발하다.53만 5000점의 각국 민족·고고학 자료를 보유하고 있다. 관광 코스로 유명한 식물원과 인류학 박물관은 세계 최대 규모의 ‘토템폴’(북미 인디언 부족을 상징하는 조각 기둥)을 소장하고 있다. 서울 여의도의 절반 크기인 121만평의 광활한 캠퍼스.230만평에 이르는 거대 산림에 둘러싸인 UBC는 그야말로 대자연의 학교로 밴쿠버의 관광 코스로도 사랑받고 있다. sunstory@seoul.co.kr ■ 회계·항공물류분야 세계 최고 |밴쿠버(캐나다 브리티시 컬럼비아주) 안동환특파원|회계학과 파이낸싱·항공물류 분야에서 세계적 수준을 인정받는 UBC 경영대학원(MBA) 사우더 스쿨(Sauder school). 지난 3월 사우더 스쿨의 401호 강의실에서는 엄태훈 석좌교수의 물류 마케팅 강의가 진행되고 있었다. 세계항공학회 회장인 엄 교수는 최근 미국교통학회 대상을 받은 저명 학자다. 이날 수업은 아시아 국가와 기업의 물류 전략이 주제였다. 북미주 시장에 진입할 때 물류 비용 감소 전략뿐 아니라 한국의 ‘동북아 허브’ 전략도 토론 주제로 올랐다. 수업은 다른 비즈니스 스쿨과는 차별화된 방식으로 진행됐다. 엄 교수뿐 아니라 2명의 교수가 공동으로 수업을 진행했다. 바로 사우더 스쿨만의 통합 수업이다. 분야별 ‘케이스 스터디(case study)’마다 회계·마케팅·파이낸싱·재무관리 등 각 분야의 전공교수 2∼5명이 한꺼번에 진행한다. 분야별 이론(코어)을 한꺼번에 배우면서 제기된 문제의 해결책을 즉석에서 도출한다. 사우더 스쿨은 MBA 모든 과정을 통합 프로그램으로 운영하고 있다. 교수들의 세부 전공만 360개에 달한다. 강의실에서 이론과 실무를 통합한 체제다. 지난해 9월 사우더 스쿨에서 MBA 유학을 시작한 이재형(35)씨. 그는 정보통신부 공무원이다. 중앙인사위원회의 선발시험에 합격, 사우더 스쿨에 입학했다. 이씨는 “20여개 국가에서 온 학생들이 3∼4명씩 팀을 이뤄 ‘팀 토크’로 공부한다.”면서 “1년이면 거의 모든 학생들을 알게 돼 강력한 네트워크를 형성하게 된다.”고 장점을 소개했다. 매년 ‘포트폴리오 매지니먼트’ 프로그램에서는 학생들이 직접 거액의 투자금을 파이낸싱한다.50만달러로 시작한 투자액은 현재 200만달러로 늘었다. 그레이스 웅 행정담당 부학장은 “MBA 졸업자의 상당수가 뉴욕 월가와 런던 금융시장으로 곧바로 진출하고 있다.”면서 “현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 학장도 사우더 스쿨 졸업생”이라고 귀띔했다. 학생들이 직접 투자 금액을 맡아 파이낸싱을 경험하는 사우더 스쿨은 아시아와 오랜 인연을 맺고 있다. 싱가포르와 1960년대부터, 중국과는 1980년대부터 인적 교류를 해오고 있다. 상하이교통대학에도 사우더 스쿨 MBA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다. 그레이스 웅 부학장부터 사우더 스쿨 직원의 상당수가 중국계 이민자다. 단일 도시로는 홍콩 출신 졸업생이 가장 많다. 중국계 이민자가 대거 진출, 밴쿠버를 일명 ‘홍쿠버’로 부르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사우더 스쿨은 2003년 모교에 2000만달러를 기부한 졸업생 윌리엄 사우더 박사의 이름을 딴 학교다. 그는 브리티시 컬럼비아주의 대표적인 기업인 사우더사 회장으로 UBC 이사회 의장을 지내기도 했다. 2006년 사우더 스쿨 재학생의 학부 전공은 공대 33%, 경영대 22%, 경제학 11%, 컴퓨터공학 10%, 인문학 10%로 다양하게 분포하고 있다.MBA 전 과정은 15개월로 끝난다. sunstory@seoul.co.kr ■ UBC ‘세금도사’ 이준영씨 |밴쿠버(캐나다 브리티시 컬럼비아주) 안동환특파원|UBC 경영대 3학년생 이준영(26)씨는 캠퍼스 내에서 ‘세금(tax) 도사’로 통한다. 전공인 마케팅뿐 아니라 회계학과 세무 분야에서 전문가 못지않은 실력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이씨는 UBC 학생 봉사단체인 ‘세금 클리닉’ 회장이다. 매년 3월이면 교내 잔디밭에 무료 세금 클리닉을 개설한다. 세금 신고 기간에는 상담 학생들이 폭주한다. 그는 2003년 입학한 후 시작한 봉사활동을 3년째 쉬지 않고 있다. 세무 상담은 학교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다양한 지식을 쌓는 기회가 됐다. 이씨는 중국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UBC에 입학했다. 복잡하고 까다로운 캐나다의 회계·세무 제도를 공부하느라 전공분야뿐 아니라 회계·세무지식을 익히는 데도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회계사와 세무사를 찾아가 조언도 구했다. 전문가 수준의 실무 능력과 지식을 갖추면서 회장에 선출됐다. 세금 클리닉 회원 120명을 관리하면서 자연스럽게 리더십도 배우게 됐다. 지난해에 이씨가 참여한 교내 자원봉사 프로그램만 6개나 된다. 유학생과 재학생을 1대1로 자매결연을 하고 도와주는 교내 ‘인터내셔널 피어 프로그램’의 회장을 맡기도 했다. 이씨는 1년에 32학점을 소화하고 있다. 거의 매일 제시되는 과제와 전공 프로젝트를 해내려면 주말에도 밤을 새우기 일쑤다. 그럼에도 그가 자원봉사 활동을 놓지 않는 이유는 배우고 얻는 게 더 많기 때문이다. 파이낸싱 컨설팅 전문가가 되고 싶다는 이씨는 UBC의 장점을 국제적인 대학으로 소개한다. 세계 130개국에서 온 유학생들이 공유하고 있는 풍부한 지적 경험이야말로 UBC의 가장 큰 자산이라는 설명이다. sunstory@seoul.co.kr
  • 美 베이비붐 세대 ‘강한’ 그랜드파파

    美 베이비붐 세대 ‘강한’ 그랜드파파

    1862년 당시 26세의 나이로 미국 남북전쟁에 참전한 오하이오주 해밀턴의 독일계 이민자 발렌틴 켈러. 그는 162㎝의 작은 키에 마른 몸매였다.30대에 관절염과 폐질환으로 고생했고 41세에 수종(水腫)으로 숨졌다. 발렌틴 시대의 미국인은 보통 40∼50대가 되면 만성질환으로 고통받다 50∼60대에 사망했다. 발렌틴 켈러의 5대 손인 45세의 크레이그 켈러. 그는 한 세기 만에 미국인의 ‘삶과 죽음’이 얼마나 달라졌는지를 극명하게 보여 주는 ‘베이비붐 세대’(베이비 부머)이다. 법원 집행관인 크레이그 역시 5대 할아버지 발렌틴이 살다가 숨진 해밀턴에서 태어나 살고 있다. 그럼에도 더 오래 살고 있고 기대수명은 할아버지의 2배가 넘을 것으로 예측된다. 뉴욕타임스는 30일(현지시간) 과거 어느 세대보다도 혈기 넘치는 ‘그랜드 파파(할아버지)’ 시대가 오고 있다고 보도했다. 더 건강하며 육체적 고통을 덜 느끼는 강력한 ‘올드 보이’가 오는 것이다. 이 신문은 ‘베이비 부머’가 인류학적으로는 유아기에 백신을 접종받은 첫 세대이며 충분한 영양분과 항생제를 공급받은 신인류라고 소개했다. 시카고대 로버트 포겔 박사는 인류가 진화했다고 설명한다. 심장·폐질환, 관절염 등 성인 만성질환의 발생 시기는 100년전 세대보다 최소 10년에서 최대 25년 뒤로 늦춰졌다. 키와 몸무게의 변화뿐 아니라 평균 지능지수(IQ)도 높아지고 있으며 치매발병률은 감소세를 보이고 있다. 미국, 영국, 프랑스, 핀란드뿐 아니라 저개발 국가에서조차 같은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1990년대는 65세 성인의 13%만이 기대수명인 85세를 채웠지만 현재는 절반 이상이 장수하고 있다. 크레이그의 부친인 칼 D 켈러는 폐암으로 65세에 숨졌고 칼의 아버지는 식도암으로 69세에 사망했다. 크레이그의 동갑내기 아내인 샌디의 친정은 유방암 등으로 고통을 겪었다. 그럼에도 베이비 부머인 크레이그 부부는 더 건강하게 오래 살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한다. 과학자들은 유전 요인보다도 어머니의 자궁에서 2살 이전 유아기까지의 기간이 건강과 장수를 결정한다고 분석한다. 1933∼1944년 핀란드 헬싱키에서 태어난 성인 8760명과 스웨덴인 1만 5000명을 분석한 결과가 동일했다. 출생 당시 몸무게가 2.9㎏ 미만으로 생후 2년까지 충분한 영양 공급을 받지 못한 사람이 심장혈관 질환을 더 많이 앓았다. 심혈관 질환은 알츠하이머 발병의 큰 원인이다. 연구에서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 대기근 시대에 태어난 사람도 결과는 같았다. 베이비 부머는 2차 세계대전 종전 후인 1946년부터 1965년 사이에 태어나 혜택받은 유아기를 보낸 첫 세대라는 게 가장 큰 특징이다. 올해 60세가 된 선두 세대는 이제 은퇴를 시작했다. 미국 역사상 가장 부유한 세대로 85세까지의 기대수명이 보장되는 베이비 부머들. 그들 스스로는 “내가 정말 할아버지인가.”라는 의문을 던지고 있다는 것이다. 월스트리트저널도 28일자에서 베이비 부머들에게 ‘록밴드 붐’이 부는 등 인생을 즐기길 원한다고 전했다. 신문은 52세로 1년 매출이 52억달러인 케이블 회사의 최고경영자 제임스 돌란, 벌칸사의 폴 앨런뿐 아니라 조슈아 볼튼 현 백악관 비서실장도 틈틈이 밴드에서 베이시스트로 활동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안동환기자 sunstory@seoul.co.kr
  • [女談餘談] 가슴 다림질/윤창수 국제부 기자

    가슴을 다리면 어떻게 될까. 고통은 물론이고 물집과 감염에 유방암은 물론 아예 가슴을 잃게 될 수도 있다. 돌, 코코넛, 절굿공이 같은 뜨겁게 덥힌 딱딱한 물건으로 소녀들의 가슴을 짓눌러 발육을 방해하는 이른바 ‘가슴 다림질’이 카메룬을 중심으로 한 중서부 아프리카에서 널리 행해지고 있다. 어머니들은 딸의 가슴을 다리는 것은 성적 매력을 없애 성희롱이나 강간의 위험을 막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예전부터 내려오는 풍습이라 모든 이웃들이 하기 때문에 그저 해야 되는 줄 알고 따라 하는 것일 뿐이다. 독일 인류학자 플라비엔 논코는 중부 아프리카에서 여성 400만명이 가슴 다림질로 고통을 받았다는 조사 결과를 지난달 발표했다. 가슴 다림질은 카메룬, 토고, 차드, 베냉, 기니 등에서의 오래된 관습이다. 카메룬에서는 “소녀들은 가슴을 자랑스러워해야 한다. 신의 선물을 자연스럽게 자라도록 허락하라. 가슴을 없애지 말라.”는 전국적인 캠페인을 벌여 어머니들을 교육시키고 있다. 몇 년 전에는 비슷한 캠페인으로 할례 받는 소녀들의 숫자를 많이 줄였다. 우리나라에서도 가야인들이 ‘편두’라 하여 돌로 아기의 이마를 눌러 머리 모양을 성형하는 관습이 있었다. 이렇게 하면 눈꼬리는 약간 치켜 올라가고, 코가 두드러지며, 정수리가 솟아 흔히 외계인의 모습으로 묘사되는 머리 모양을 갖게 된다. 김해 예안리에서 발견된 가야인 두개골에서 편두는 대부분 여성이었다. 가슴 다림질이나 편두는 돌로 인위적 성형을 한 오래된 풍습이란 공통점이 있다. 그렇다면 현재는 이런 일이 사라졌을까. 적령기가 되면 결혼을 하고, 결혼하면 아이를 낳아야 하고, 아이를 기르고 가사를 책임지고…. 여성들에게 ‘무엇을 해야 한다.’는 압박들이 ‘온정적 간섭주의’로, 때로는 ‘인간의 도리’로 포장된다. 물론 모두 ‘너 좋으라고 하는 일’들이란다. 직접적으로 몸을 옭아매거나 바꾸지는 않지만 정신을 지배하는 사회적인 압력도 무시 못하게 무겁다. 윤창수 국제부 기자 geo@seoul.co.kr
  • [월드 리포트] 파리의 새로운 상징 ‘케 브랑리 박물관’

    파리의 상징인 에펠탑 앞은 입장을 기다리는 관광객들로 일년 내내 북적인다. 에펠탑 지척에 한달 전부터 또다른 줄이 생겼다. 지난달 23일 문을 연 케 브랑리 박물관(Le Musee du Quai Branly)에 들어가려는 이들이다.24일 박물관 관계자에 따르면 한 달새 벌써 15만 1000명이 다녀갔다. 자크 시라크 대통령이 임기 7년의 대통령에 첫 당선된 1995년 취임 일성으로 건설 계획을 발표한 지 11년, 착공 5년만에 완공된 케 브랑리 박물관은 문화대국 프랑스의 저력과 전통을 유감없이 발휘한 사례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예전 트로카데로에 있던 인류 박물관과 포르트도레에 있던 아프리카·오세아니아 문명사 박물관을 합친 이 박물관은 그동안 대중으로부터 소외됐던 비유럽 문명을 재조명한다는 의미가 크다. 총 30만점에 이르는 소장품 가운데 세계적 문화유산 3500여점이 영구 전시돼 관람객들은 복도 하나만 건너면 아마존에서 파푸아뉴기니, 마다가스카르까지 다양한 문명을 접할 수 있다. 건축가 장 누벨이 설계한 이 건물은 길이 220m, 높이 10m의 유리 벽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본관, 테라스, 행정동, 미디어테크 등 총 4개의 건물로 구성돼 있다. 박물관 본관은 기둥과 가교, 원색으로 채색된 거대한 큐브를 끼고 있으며 다양한 식물종으로 구성된 1.8㏊의 정원 한가운데 들어서 있다. ‘문화적 다양성에 대한 재인식의 장’을 표방한 이 박물관은 미래적인 디자인의 독특한 외관 못지않게 전시 컨셉트도 21세기 박물관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각종 기획전시회와 이에 어우러지는 문화예술 행사들이 계획돼 있으며 방대한 데이터베이스를 기반으로 전세계 박물관 연구소,15개의 대학과 협약이 체결돼 연구와 교육을 동시에 진행할 예정이다. 이 박물관에 대해 일부 비평가들은 비유럽권의 토착 예술만을 따로 모아 전시하는 것은 서구와 비서구를 분리하는 정신구조를 심화시켜 특정 문명에 대한 평가절하를 부채질할 수 있다는 우려를 나타내기도 한다. 특히 많은 소장품이 과거 식민지에서 수집된 것들이어서 제국주의 색채가 강하다는 지적도 제기됐다. 그러나 이 박물관의 개관을 계기로 파리가 ‘다양한 세계문화가 만나는 교차점’으로 자리매김했다는 점은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다. 인류학자들과 민속학자들은 물론 문화적 호기심이 강한 프랑스인과 수많은 관광객이 앞으로 이 박물관을 찾을 것이다. 세계적인 수준의 박물관 하나가 창출하는 부가가치는 계산이 불가능하다. 프랑스 제5공화국 역대 대통령들은 재임 중 위대한 문화유산을 후대에 남기는 전통을 갖고 있다. 조르주 퐁피두의 퐁피두센터,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의 오르셰 미술관, 프랑수아 미테랑의 그랑 루브르에 이어 시라크 대통령은 재임 중 케 브랑리 박물관을 완성함으로써 그 전통을 이었다. 끊이지 않는 악재로 시라크 대통령은 우울한 통치 말년을 보내고 있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시라크 대통령은 케 브랑리 박물관과 더불어 문화 정책 성적표에서만은 역대 대통령에 견주어 뒤지지 않는다는 평가를 받을 것이다. 후손들은 자질구레한 정치적 실책을 기억할 리 없지만 케 브랑리 박물관은 그의 이름과 함께 영원히 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함혜리 파리 특파원 lotus@seoul.co.kr
  • 신세대 ‘퍼블리즌’이 온다

    신세대 ‘퍼블리즌’이 온다

    ‘나는 공개한다. 고로 존재한다.’ 자신의 생각은 물론 사생활의 노출까지 꺼리지 않는 ‘퍼블리즌(Publizen)’의 특성을 일컫는 말이다. 워싱턴포스트는 23일(현지시간) 자신의 홈페이지나 블로그를 통해 ‘나를 봐 달라. 나에게 클릭해 달라.’고 안달인 요즘 젊은 세대를 퍼블리즌으로 규정했다.‘공개(publicity)’와 ‘시민(citizen)’을 결합한 신조어다. 이들에게 프라이버시는 낡은 개념이며 숨길 것도, 숨길 수도 없는 세상에서 도리어 자신의 모든 것을 가감없이 드러내고 만다. 정보통신 기술의 발달로 도청과 개인정보 수집이 일상화된 현실에서 굳이 감추기보다는 내놓고 즐기는 쪽을 택했다는 것이다. 밤새 술을 마시며 놀았던 사진을 올렸다가 퇴학당하는가 하면, 내밀한 사생활을 담은 동영상도 세상 사람 다 보란 듯이 인터넷에 스스럼없이 올려놓는다. 지하철에서 다른 승객은 아랑곳하지 않고 휴대전화로 수다를 떠는 여성들, 텔레비전 리얼리티쇼에 출연하려고 줄서는 수만명의 사람들 모두 “자기를 알리고 싶고, 유명해지고 싶어하는 퍼블리즌”이라고 신문은 분석했다. 캘리포니아대 문화인류학자 데이너 보이드 교수는 “요즘 신세대에게도 프라이버시가 있다고 보는 것은 구세대의 가정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베이비붐 세대의 자녀들은 항상 누군가의 감시를 받아왔다. 부모가 없는 곳에선 학교 교사, 운동 코치, 심리 치료사가 이를 대신했다. 프라이버시란 개념 자체가 인류의 역사에서 비교적 근래에 생긴 환상에 불과하다는 학설도 있다. 원래 마을 사람들끼리 다 알고 지내다가 프라이버시가 생겼지만 기술 발달로 다시 서로 다 아는 지구‘촌’이 됐다는 주장이다. 워싱턴포스트는 최근 국가안보국이 도청을 한 데 대해 과거처럼 시민들이 거리로 나오지 않은 이유를 퍼블리즌 현상으로 설명하기도 했다. 모두가 공인이 되고픈 퍼블리즌 인구가 늘수록 변호사가 공인과 비공인을 구분하기 어려워지고 리얼리티쇼를 보는 사람보다 출연하는 사람이 많아질지 모른다고 신문은 꼬집었다. 박정경기자 olive@seoul.co.kr
  • ‘동아시아 인류학’ 국제학술회의

    동아시아 인류학·고고학·민속학 관련 최대 규모의 국제 모임인 동아시아인류학회(SEAA)가 주최하는 ‘2006 국제 학술회의’가 13∼16일 ‘동아시아 지역의 인류학’이라는 주제로 홍콩 중문대학에서 열린다.‘한국 고고학의 최신 이슈들’이라는 주제의 세션에는 임효재(한국선사고고학회장) 서울대 교수, 배기동 한양대박물관장, 김경택 한국전통문화학교 교수 등이 참석, 주제발표와 토론을 벌인다.
  • “美 주류경제학의 우산 쓴 학자·관료들 지식 편식 털지 못하고 한미 FTA 고집”

    “美 주류경제학의 우산 쓴 학자·관료들 지식 편식 털지 못하고 한미 FTA 고집”

    ‘ATKE’. 한국의 고도성장을 ‘개발국가론’으로 분석한 앨리스 암스덴 MIT석좌교수가 만든 단어다.‘American-trained Korean Economists’의 머리글자를 딴 말로 ‘미국이 훈련시킨 한국 경제학자’쯤 된다.80년대 말부터 90년대 초까지 미국 내 대학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아간 비미국인의 10%가 한국인이었다는 통계에서 나온 단어다.“(이런 편식이) 한국의 장래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될 것”이라는 말도 남겼다. 박정희와 재벌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암스덴 교수이다 보니 국내 언론들은 숱하게 그를 다뤘지만, 이같은 언급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한·미자유무역협정(FTA) 추진은 바로 이같은 암스덴의 경고가 현실화한 것이라는 목소리가 높다. 사실 한미FTA 추진, 그것도 참여정부 하에서의 추진은 워낙 어이없는 일이라 그 배경을 두고 갖가지 해석이 분분했다. 답은 미국식 주류경제학 논리에 젖은 학계와 관료집단의 승리라는 것이다. 이해영 한신대 교수는 “정운찬·조순 교수의 학맥 조금, 경제사학자나 농촌경제학자 조금 외에는 중도적인 케인스주의자들까지, 소위 비주류경제학자들은 한국학계에서 거의 전멸 상태”라고 진단했다. 그 결과는 “한국은 미국과 경기 동조화뿐 아니라 ‘인식의 동조화’,‘인문학의 동조화’까지 나타나는 현상”으로 요약된다. 스크린쿼터에 문화다양성 개념이 있듯, 인문학계에도 학문다양성 개념이 필요한 시점이라는 얘기다. 이 교수는 특히 재경·통상 관료집단의 신자유주의 집착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는 “7년 전부터 미국과의 통상 문제를 연구해 왔는데, 담당 관료들과 얘기하다 보면 천편일률적으로 오직 ‘시장’과 ‘경쟁’만을 얘기한다.”면서 “그런 의미에서 한국의 경제·통상 관료들은 ‘한국정부’의 관료가 아니라 ‘신자유주의 당파 혹은 정파’이자 ‘노멘클라투라’다.”라고 지적했다. 고병권 ‘수유+너머’ 대표 역시 “서울대 사회과학대 교수 10명 가운데 9명이 미국박사이고 행시 합격자들 대부분을 미국으로 보내는 게 현실”이라면서 “이들을 다양화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병천 강원대 교수도 “미국 주류경제학을 공부한 동기동창들이 학교·연구소 등에 진을 치고 있다 보니 현상분석이나 정책입안 때 서로 다른 이론이나 설명틀을 내세워 경쟁하거나 견제하는 현상이 사라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시장경제라는 주류 분석틀에 맞지 않으면, 특히 칼 폴라니류의 문화인류학적 접근을 구사하는 학자들은 아예 학회나 심포지엄에 초청받지 못하는 사례도 비일비재하다. 이 교수는 ‘시장’이 일종의 종교이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발생한다고 봤다. 그는 “시장을 말하는 순간 모든 논의가 ‘시장경제vs계획경제’,‘개방vs쇄국’이라는 이분법으로만 비쳐진다.”면서 “시장경제라도 어떤 시장경제냐, 개방경제라도 어떤 개방경제냐하는 ‘시장의 다양성’을 말해야 하는 지금 시대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분법”이라고 말했다. 대안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이정우 전 청와대 특보가 언급한 ‘네덜란드식 모델’이 한 예다. 여기에는 오해가 있다. 미국식 모델 반대는 곧 유럽식 모델이고, 이는 곧 프랑스와 독일을 뜻하고, 복지병을 앓고 있는 이들 국가를 왜 따라해야 하느냐는 반론이 그것이다. 신정완 성공회대 교수는 유럽모델에도 프랑스·독일모델과 북유럽모델은 엄연히 다르다고 지적한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무속연구, 한민족 정체성 찾는 일”

    “무속연구는 한민족의 정체성을 찾는 작업인데, 그동안 너무 천대받았고 자꾸 부정하려고만 해 안타깝습니다.” 한국 무속연구에 평생을 바쳐온 국립민속박물관 양종승(54) 학예연구관은 ‘무당’이다. 정식으로 신내림을 받은 적은 없지만, 무당만이 할 수 있다는 작두를 타기도 했다. 승무와 판소리에 능하며, 무형문화재 강령탈춤은 정식으로 이수했다. 그는 무속인들에게 존경하는 ‘후원자’로 통한다. 이런 그가 평생을 모아온 무속 수집품을 정리, 샤머니즘 박물관을 준비하고 있다.“사립박물관은 문을 열면 곧 적자라는 사실을 잘 압니다.”그는 개관이 언제냐는 물음에 선뜻 자신있게 답하지 못했다.“수년 내 문을 열 것”이라는 답변에서 박물관을 여는 것이 얼마나 큰 작업인지 느껴졌다. 사재를 털어 틈만 나면 무속 자료를 모아온 그의 노력으로 조만간 한국은 샤머니즘박물관을 하나 갖게 될 것이다. 전남 여수에서 무속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그는 서울로 상경, 대학에 진학했다. 이때부터 판소리·승무 등을 체험하고,‘큰 무당’ 우옥주·박동신 선생의 집에 기거하며 무속을 배웠다. 이후 직접 무당이 되기보다 무속을 이론적으로 연구, 양지로 끌어내야겠다고 마음 먹고 유학길에 올라 미국 인디애나대에서 문화인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다시 무속으로 화제를 돌렸다.“무속은 한국의 역사·문화의 근저에 자리한 중요한 가치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부정하고 천대해 왔어요.”그는 한국인은 ‘영적인(spritual) 민족’이라고 했다. 한민족 특유의 신바람은 무속에서 비롯됐다는 것. 무속학회장을 역임하고 귀신학회를 창립, 회장을 맡아 샤머니즘 페스티벌, 국제 무속인교류 등을 준비 중인 그의 꿈은 한국 무속의 ‘세계화’와 같은 거창한 것이 아니었다.“외래 종교가 주를 이루는 한국 사회에서 소수 전통신앙을 잘 보전해 가꾸는 것이 제 사명이죠.”연합뉴스
  • [Book&Life] 출판인은 문자문화의 장의사인가

    활자매체의 죽음을 처음 선언한 사람은 캐나다의 문화인류학자 마셜 맥루언이다. 그는 1964년 ‘미디어의 이해’라는 책에서 활자시대의 종언과 전자시대의 도래를 예고했다. 하나의 감각에만 의존하는 배타적 활자매체인 ‘핫 미디어(hot media)’시대는 가고, 여러 감각을 활용해 사람들의 참여를 유도하는 포괄적 성격의 전자매체인 ‘쿨 미디어(cool media)’시대가 왔다고 본 것이다. 그가 말하는 ‘쿨 미디어’란 바로 컴퓨터나 텔레비전 같은 것이다. 그러나 맥루언이 활자시대의 종말을 선언한 지 40여년이 지난 지금도 ‘구텐베르크’는 건재하다. 활자문화는 여전히 지배적이다. 활자문화 혹은 문자문화가 소멸하느니 안하느니 하는 논쟁은 이제 더이상 의미가 없다. 그럼에도 이를 다시금 초드는 것은 아직도 맥루언의 예언을 금과옥조로 여기는 듯한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지난주 제주 서귀포에서는 ‘다매체시대, 독서진흥이 문화강국을 만든다’라는 주제의 출판경영자 세미나가 열렸다. 대한출판문화협회(회장 박맹호)가 주최한 이 행사에서 주제발표자로 나선 영산대 김용석 교수는 생뚱맞게도 “책의 장례를 잘 치를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한다.”고 주장해 주위를 어리둥절케 했다. 그가 언급한 책은 물론 종이책이다. 책 만드는 것을 업으로 삼는 이들을 앞에 놓고 책의 장송(葬送)을 노래하다니…. 그렇다면 그는 왜 적잖은 책을 내고 ‘저술가’라는 타이틀을 달고 다니는가. 그의 말은 차라리 하나의 역설이었으면 좋았을 법했다. 그러나 김 교수는 확신에 찬 어조로 동어반복에 가까운 말들을 쏟아냈다.“문자문화 소멸의 호스피스가 돼야 한다.”“책은 말기 암 환자다.”“출판인들은 문자문화의 장의사를 자임해야 한다.” 활자를 신뢰할 수 없어서인지 그는 ‘안티­나르키소스 미디어로서의 책, 그리고 독서’라는 현학적인 강연 제목만 하나 달랑 내놓았을 뿐, 다른 발표자들과 달리 원고도 만들지 않았다. 창발적 상상력이 넘친 김 교수의 이야기가 끝나자 곳곳에서 질문이 터져나왔다. 커뮤니케이션 전문 C출판사 사장은 “문화의 장의사라는 표현보다 문화의 산파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것 아니냐.”는 ‘힐난조’의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다분히 독단적인 강의에 대한 거부반응이었다. 김 교수가 진정으로 활자문화가 디지털문화로 연이륙하는 데 출판인이 모종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다면, 그의 표현대로 “문화적 기류변동의 예보관이 돼야 한다.”는 메시지를 던지고 싶었다면, 그는 보다 열린 지성으로 임했어야 했다. 그 스스로 어설픈 관념의 노예가 되어 어떻게 남을 지적으로 설득할 수 있단 말인가. 그가 부디 진정한 의미의 ‘카오스 메이커(chaos maker)’가 되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김종면기자 jmkim@seoul.co.kr
  • [김형효 교수의 테마가 있는 철학산책] (22) 평등에 관한 명상

    [김형효 교수의 테마가 있는 철학산책] (22) 평등에 관한 명상

    평등도 자유(21회 글)처럼 근대사상의 핵심 주제다. 무엇보다 먼저 평등의 요구는 불평등한 현실이 참을 수 없기에 일어난 것이다. 불평등한 현실은 사회의 생존경쟁이 불공정한 게임의 법칙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과 같다. 그것은 사회생활이 동일한 조건에서 출발하지 않고 어떤 사람들에게 아주 불리한 조건들을 갖고 출발하게 하는 경우를 말한다. 신분계급에 의한 불평등, 학벌에 의한 불평등, 종족에 의한 불평등, 성별에 의한 불평등, 직업에 의한 불평등 등이다. 이런 불평등이 무엇인가 하는 것은 다 쉽게 알 수 있다. 근대적인 평등의 요구는 저런 중세적 불평등을 부정하는 것이다. 단적으로 불평등 부정의 사상은 인간사회에서 억울함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자비정신의 반영이겠다. 어떤 이들은 불평등 부정의 정신을 불의에 대하여 분노한 사회정의의 요구로 읽기도 한다. 나는 불평등 부정의 정신이 정의의 요구보다 오히려 자비의 정신에 더 가깝다고 여긴다. 왜냐하면 불의에 대한 분노의 정신으로서의 정의감은 어딘지 화가 나 있어서 정의란 이름으로 나온 불의에 대한 증오가 새로운 불평등을 복수심에서 낳을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불평등 부정의 정신이야말로 사회적으로 억울함을 느끼는 자들이 받는 마음의 고통을 풀어주는 자비의 정신으로 여긴다. 이 불평등이 왜 사회적으로 생겼을까? 자연상태에서 인간은 불평등의 억울함을 당할 필요가 없었다고 18세기 프랑스의 철학자 루소는 ‘인간불평등 기원론’에서 밝혔다. 루소는 자연상태와 사회상태를 대칭적으로 읽으면서 자연상태에서 인간은 선량했으나, 사회상태에서 인간이 타락하기 시작했다고 여겼다. 말하자면 ‘생각하는 인간은 타락한 동물’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루소 철학의 출발점이다. 생각하는 인간은 지능을 가진 동물이다. 자연상태에서 인간은 생물학적 본능으로 단순 생존을 추구해 나갔는데, 인간의 지능이 동물적 본능의 역할을 대행함으로써 인간은 생물학적 본능의 자연상태를 떠나 사회학적 지능의 사회상태로 이행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모든 인간의 악은 이 사회상태에서 발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인간의 악은 사회상태를 가져온 지능에서 유래한 것이다. 지능이 인간 사이에 우열을 낳게 하고, 이익을 더 많이 낳는 기술과 지식을 습득하고, 사유 재산을 더 많이 확보하면서 불평등한 지배체제를 굳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인간은 자연에 의하여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났으나, 도처에 지능의 차이로 인간이 스스로 족쇄에 갇혀 사는 불평등과 부자유의 신세가 되었다는 것이다. 루소의 이런 철학은 20세기 프랑스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 인류학에 영향을 미쳤다. 레비스트로스는 자연상태에서의 상호교환의 거래였던 토테미즘이 타 집단에 대한 자기집단의 지능 우위가 입증되면서 토테미즘이 순식간 카스트제도로 변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루소가 말한 감각적 본능과 자연적 균형으로 살 수 있었던 인간의 자연상태나, 레비스트로스가 말한 토테미즘적 완전교환의 상태는 다 유가적 요순 사회와 유사하고, 또 마르크스가 본 원시공산사회와 마찬가지인 것 같다. 그러나 저런 원시공동체는 인간에게 사회적 지능이 등장한 이래로 상실된 낙원과 같다. 낙원의 상실은 사회적 지능의 등장이 가져온 필연적 귀결이다. 구약 창세기에 아담과 이브가 먹었던 금단의 열매도 지능이 인간에게 생겨서 낙원을 잃게 된 인간의 현실을 알려주는 탁월한 신화로 보아야겠다. 지능은 문명의 편리함을 상징하는 경제기술을 발명했으나, 지배종속의 차별을 낳았고, 의기양양한 승자와 앙앙불락한 패자의 사이에 헤겔과 마르크스가 본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적 투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결과에까지 이르게 했다. 루소와 마르크스 같은 근대 철학자들의 한결같은 염원은 지능으로 낙원을 상실한 인간의 사회생활이 어떻게 하면 자연상태의 원시적 순수성으로 재귀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였다. 사회주의의 실습을 통해 공산주의 부활을 꿈꾼 마르크스의 온갖 헛수고를 여기서 다루지 않더라도, 루소의 저서인 ‘사회계약론’도 저런 의도와 같은 맥락에 속한다. 그의 정치사상은 사회생활에서도 자연상태의 부활이 가능한 길을 터놓기 위한 도덕적 정치의 이념들을 담고 있다. 그러나 루소와 마르크스가 생각한 이상적 도덕성의 요구가 실질적으로 선의 도덕성만 구현한 것이 아니고, 그들이 예견하지 못한 불선(不善)의 짙은 어둠을 동반하게 되었다. 현대생활은 그 어둠을 경험하고 있다. 자유사회의 이상은 본의 아니게 이기주의의 보호막으로 이용되는 측면이 생겼고, 평등사회의 이상은 불평등의 억울함을 씻어주기보다 오히려 대등적 평등주의의 가치관을 정당화시켜 주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볼 수 있다. 대등적 평등주의 가치관은 소유론적 평등주의의 가치관과 같다고 하겠다. 가브리엘 마르셀이 그의 저서 ‘인간적인 것을 거역하는 인간들’에서 잘 지적했듯이, 대등적 평등주의의 가치관에는 ‘나는 너와 같다.’는 의식이 강렬하게 깃들어 있다.‘너는 나의 형제다.’라는 형제애를 나타내는 말과 달리 ‘나는 너와 같다.’라는 대등의식은 소유적 불평등에 참을 수 없는 질투와 시샘을 느끼는 심리를 진하게 풍긴다. 대등적 평등주의는 불평등을 부정하는 자비정신과는 다르다. 대등적 평등주의는 강한 자아의 아상(我相)과 아만(我慢)으로 으쓱대고 싶은 자아의 심리와 자기보다 능력이 나은 타자에 대한 증오와 질투의 심리를 동시에 안고 있다. 그런 사회는 오직 소유의 다과만을 비교한다. 사회적 불평등을 자연적 평등의 관계로 복원시키고자 한 루소의 정치사상은 오히려 근대사회에서 소유적 대등주의로 미끄러지는 역효과를 낳았다. 불평등을 부정하고자 하는 루소의 정신은 오히려 사회 전체를 대등심리로 분열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대등주의가 오히려 사회전체에 원한(怨恨)의 심리를 더 자극하게 되리라는 것을 기원전 동양의 순자(荀子)는 미리 통찰하고 있었다. 순자는 사회를 효과적으로 통치하고 사회질서의 유지와 전쟁방지와 경제복지생활과 다소 사치스러운 문화생활의 향유에서 괄목할 만한 업적을 낳기 위하여 사회기능을 분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 이념을 순자는 유가의 경전인 ‘서경(書經)’에서 빌렸다. 그 말이 ‘유제비제’(維齊非齊·큰 평등은 동등하지 않게 함)다. 그는 사회가 소유론적 욕망의 대등한 요구로 나아가면 그만큼 사회적 혼란과 무질서가 대두하리라 믿고, 사회를 차이의 예법으로 구분할 것을 주장했다. 이 순자의 사상은 맹자의 공상적 덕치주의와 달리 대단히 유효하고 실질적인 데가 있으나, 다른 한편으로 우리가 앞에서 거론한 불평등을 부정하는 정신과 잘 맞지 않는 점도 생길 수 있다. 즉 ‘유제비제’가 대등주의의 혼란을 막을 수 있으나, 불평등의 억울함을 씻어주는 데 매우 인색할 수 있다. 순자가 말한 차이의 제도화가 자칫 차별의 불평등을 촉진시킬 수 있겠기 때문이다. 우리의 길은 불평등 부정의 정신을 이으면서 대등적 평등주의에 빠지지 않고, 또 차별적 불평등으로 고착되지 않는 제3의 길을 찾는 데 있다. 루소가 의도하지 않았던 대등적 평등주의나 순자의 ‘유제비제’의 이념이 다 겨냥하고 있는 것은 소유론적 평등관이나 소유론적 차등관이다. 대등한 물질적 소유의 주장이든, 대등한 소유가 오히려 사회질서를 붕괴하는 요인이 된다는 주장이든, 좌우간에 저 두 주장은 다 소유론적 사상을 견지하고 있다. 인간이 소유론적 평등을 주장하면 그것이 필연적으로 대등론으로 미끄러지고, 인간이 소유론적 차등을 주장하면 그것이 계급적 차별론으로 흘러들어가기 십상이다. 우리의 주장은 평등론이 결코 소유론적으로 정착되어서는 안 되고, 존재론적으로 이해되고 생활화되어야 하겠다는 것이다. 존재론적 평등론은 첫째로 불평등 부정의 정신을 견지하는 것이고, 둘째로 루소가 생각한 것처럼 인간의 사회상태를 자연상태로 복원시키려는 원력을 함의하고 있어야 한다. 불평등 부정의 정신은 대등한 평등주의의 이념과 다르다. 불평등 부정의 정신은 억울함이 발생하지 않게 하는 자비의 정신이지, 결코 대등한 소유의식의 당돌한 요구가 아니다. 존재론적 평등은 인간의 사회생활을 자연의 만물이 지니는 존재양식인 ‘상관적 차이’(pertinent difference)로서 바라보는 사고방식에서 가능하다. 상관적 차이는 자연의 만물이 서로 다르기에 상관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는 필연성을 말한다. 자연의 만물은 자기동일성을 지닌 독립적 존재가 아니라, 타자와의 관계 아래서 자기 존재를 발생시키는 의타기적(依他起的·다른 것에 의존해서 생기는)인 존재일 뿐이다. 쉽게 말하면 새는 벌레들과의 상관적 차이에서, 벌레들은 풀들과의 상관적 차이에서 존재하는 의타기적인 존재일 뿐이다. 타자들이 없다면 자기의 존재도 실존하지 못한다. 이런 상관적 차이가 바로 존재론적 평등의 존재양식에 해당한다. 지금 이 글을 쓰는 나는 독립적인 자기동일적 존재가 아니라, 서울신문에 ‘철학산책’의 연재물을 쓰는 의타기적 존재다. 서울신문이 없다면 이 글을 쓰는 나는 실존하지 않는다. 나는 서울신문을 통하여 내 생각을 발표하기에 서울신문이 고마운 존재고, 서울신문도 나의 현전으로 조금은 영향을 받았겠다. 이것이 의타기적인 존재방식이다. 기업의 자본가는 자본과 경영의 측면을 상징하고, 노동자는 기술과 노동의 측면을 대변한다. 또 우리는 기업의 제품을 사는 소비자다. 자본가와 노동자와 소비자는 다 기업의 존재를 평등하게 유지시켜 주는 의타기적 존재양식을 띤다. 이 셋의 관계에서 일방이 없으면 타방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이 의타기적인 차이의 상관성이다. 대등주의나 차별주의는 다 자연의 길이 아니다. 자연의 길에 인간의 미래적 희망이 있다. 평등은 인간의 자존심 대결을 정당화시키는 대등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서로 다르기에 서로 의존해서 살 수밖에 없는 자연적 존재방식을 말한다.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철학
  • 加동포들 ‘한국 알리기’

    캐나다 밴쿠버 교포들이 포트무디시(市)가 주관하는 ‘아시아 문화의 달’ 행사에 참여해 한국 문화를 널리 알리고 있다. 뮤지컬 ‘난타’의 김기승이 연출하고, 영화 ‘쉬리’,‘태극기 휘날리며’의 이동준이 음악을 맡은 뮤지컬 ‘러시’가 3일(현지시간)부터 사흘간 포트무디시 인렛극장에서 앙코르 공연을 하고 있다. 지난달 1일 캐나다 무대에 처음 올려진 ‘러시’는 대학생과 고교생들로 구성된 출연진이 영어와 한국어로 열연을 펼쳐 큰 호응을 받았다. 도예가 김정홍씨는 포트무디 아트센터 블랙베리 갤러리에서 ‘환상의 곡선’이라는 주제로 도자기 전시회를 4일 개막했다. 캐나다인들은 한국 도자기의 아름다움에 탄성을 질렀다. 옆 전시실에서는 ‘추억과 함성’이라는 주제로 교포 11명이 출품한 미술전이 개막돼 오는 28일까지 열린다. 한창현 전 밴쿠버 한인문화협회장은 중요무형문화재 제 49호 송파산대놀이의 가면 10점을 15일 브리티시 컬럼비아대학교(UBC) 인류학 박물관에 기증할 예정이다.밴쿠버 연합뉴스
  • 볼리비아發 ‘자원국유화’ 후폭풍 페루·에콰도르도 동참 움직임

    안데스가 동요하고 있다. 볼리비아발(發) ‘국유화 쇼크’의 여파다. 에보 모랄레스 볼리비아 대통령은 일약 인디오 세계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오랜기간 외국 자본이 지배해온 에너지 산업을 ‘핍박받는 민중’의 이름으로 전격 회수하는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다. ●페루 우말라 후보 “볼리비아 조치 존중” 볼리비아와 함께 안데스 산맥을 끼고 있는 페루와 에콰도르의 동요가 심상찮다.AP·로이터통신 등 외신들은 모랄레스 대통령의 갑작스런 국유화 선언이 안데스 지역에서 진행되는 자원 국유화 움직임에 더욱 힘을 실어주고 있다고 4일 보도했다. 다음달 대선 결선투표를 앞둔 페루에서는 급진 민족주의자인 올란타 우말라 후보의 당선 가능성이 더욱 높아졌다. 지난 1일 모랄레스 대통령의 국유화 포고령 발표 직후 우말라 진영은 “주권수호를 위한 볼리비아의 조치를 적극 존중한다.”고 논평했다. 우말라 후보는 “자원 국유화 계획은 갖고 있지 않지만 국가 지분을 확대하기 위한 외국 기업과의 재계약을 원한다.”고 밝힌 바 있다. ●에콰도르, 美와 석유로열티 책정 갈등 남미 5위의 산유국인 에콰도르는 석유 로열티 책정 문제로 미국 정부와 각을 세우고 있다. 최근에는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 체결에 반대하는 원주민들이 도로를 점거하고 시위를 벌였었다. 에콰도르에 있는 라틴아메리카 사회과학연구소의 에르난 레이에스 교수는 “볼리비아의 국유화는 최근 몇년 새 세력이 위축된 에콰도르 원주민 운동에 중요한 참조점을 준다.”고 말했다. 이들 두 나라가 볼리비아 정세에 특히 민감한 것은 주민 구성의 유사성 때문이다. 옛 잉카제국의 세력권인 안데스 산맥 중부에 있는 까닭에 인디오들이 백인 계통의 주민들보다 많다. 세 나라에 살고 있는 인디오들은 약 5000만명으로 추산된다. 대부분 농업부문에 종사하고 있다. 볼리비아의 인류학자 하비에르 알보는 “인디오들은 자신들을 외국 자본과 결탁한 백인 엘리트들에 의해 소외당한 희생자 집단으로 여긴다.”면서 “이들에게 국유화는 주권회복을 위한 대담한 조치이자 리더십의 새로운 전형으로 비쳐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볼리비아의 국유화가 유가와 세계경제에 미치는 영향력은 당초 우려처럼 크지 않을 것이란 분석이 제기된다. 영국의 인디펜던트는 볼리비아의 가스를 수입하는 나라가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뿐이란 점을 들어 충격은 오래 가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케임브리지 에너지 연구협회의 대니얼 어긴 회장도 AP와의 인터뷰에서 “국유화가 정치적으로 쓸모가 있을지 모르지만 자원채굴에 필요한 투자를 감소시켜 장기적으론 손실을 가져올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세영기자 sylee@seoul.co.kr
  • “세월 가면 독도는 우리 영토로 굳어져”

    |도쿄 이춘규특파원|독도 논문으로 도쿄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한국인 정치학자 현대송(45)씨가 이 대학 동양문화연구소 교수로 채용됐다. 지난달 교수가 된 현씨는 이 연구소에서 국제정치를 연구한다. 오는 10월학기부터는 ‘동아시아 국제관계’ 등의 강의를 맡는다. 도쿄대 동양문화연구소에는 32명의 각국 정치학자들이 아시아 문화인류학과 정치학 등 동양관계학을 연구하기 위해 모여 있다. 현 교수는 한국외국어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도쿄대 대학원 법학정치학 연구과로 진학, 석·박사 과정을 마쳤다. 지난 2004년 1월 ‘전후(戰後) 한·일 관계와 영토문제’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인 유학파로는 두번째 도쿄대 교수가 됐다. 박사학위 논문은 독도 영유권을 둘러싼 한·일 대립사를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으로 대표되는 미국의 애매한 전후 처리정책과 1965년 한·일기본조약에 소급해 고찰했다.‘독도 영유권’을 둘러싼 양국의 상반된 주장과 대립이 야기한 한국인의 대일(對日)인식의 형성과 변화 등을 연구했다. 현 교수는 3일 “지난 1965년 이후 한국과 일본 사이에는 10년꼴로 분쟁의 큰 파동이 있었다.”면서 “지난해와 올해는 4번째 주기인 셈”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런 파동을 거치면서 한국인의 뇌리에는 일본이 ‘군국주의’가 다시 도져 옛날 버릇을 못고쳤다는 식으로, 일본인의 뇌리에는 한국이 ‘국가주의적’ 성향을 지녔다는 식으로 각각 각인됐다.”고 말했다. 현 교수의 논문은 지난 1990∼2001년 발간됐던 한국과 일본 신문의 독도 보도 논조 분석 및 한국 초·중·고교생(2112명)의 대일 의식조사 등을 통해 ‘파동’이 남긴 부정적 여파를 확인했다. 한·일간의 ‘독도 대치’에 대해 현 교수는 “독도는 우리가 실효지배하고 있는 만큼 현명히 대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며 “독도는 세월이 지나면 한국의 영토로 기정사실화되도록 돼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최근 일본의 양심적 지식인인 다카하시 데쓰야 도쿄대 교수의 ‘결코 피할 수 없는 야스쿠니 문제’라는 책을 번역하기도 했다.taein@seoul.co.kr
  • [김형효 교수의 테마가 있는 철학산책] (18)무(無)의 의미와 마음의 혁명

    [김형효 교수의 테마가 있는 철학산책] (18)무(無)의 의미와 마음의 혁명

    오늘은 철학사상에서 무(無)가 어떤 뜻을 지니는지 생각해 보기로 한다. 동양의 불교와 노장사상에서 그 무를 매우 귀하게 여기는데, 전통 서양사상의 주류에서 정반대로 그 무를 별로 달갑지 않은 것으로 여겨 왔다. 서양의 전통사상에서 무는 제조적 기술적 사고의 출발점으로서만 인정하는 경향이 있었다. 즉 지식과 기술을 쌓아서 물건을 제조해 나가는데 임의적 출발의 가정으로서 제로(zero)점을 상상한다. 이것이 서양철학이 무를 이해하는 기본적 태도였다. 실제로 20세기 프랑스의 대표적 철학자로서 제조적 기술적 사고를 싫어한 베르그송마저 그런 생각을 견지했다. 무는 지식과 기술의 축적이 없는 결핍의 상태와 같다. 전통적 서양의 신학은 정신주의적이라서 기술적 제조의 사고를 멀리한 것 같지만, 기실 신의 창조론도 인간의 제조적 생산론과 질적으로 다를 바가 없다. 신이 이 세상을 무로부터 창조했다는 것은 인간이 제조적 기술을 무로부터 쌓아 나간다는 축적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하이데거가 서양 신학은 서양 기술제조철학의 모태에 해당한다고 지적한 것은 탁월한 통찰력이겠다. “아는 것이 힘”이라고 말한 16세기 영국의 철학자 베이컨의 말은 당당하게 기술철학을 공개적으로 세상에 선포한 사건에 해당한다. 기술적 무지와 경제적 빈곤의 탈피가 경제기술주의의 이념이다. 그런데 그 당당한 이념은 몇 가지의 철학적 문제점들을 안고 있다. 인간과 인간의 자아가 이 세상의 중심이고 만물의 척도가 된다는 것이다. 자연과 세상의 모든 것은 인간을 위해서 존재해야 하고, 극단적으로 자아를 위해서 존재하는 한에서만 가치가 있다는 인간중심주의를 정당화하는 결과를 빚는다. 인간중심주의와 이기주의는 종이 한 장의 차이밖에 안 된다. 비록 서양철학이 인간을 이기적인 심리에서 보기보다 논리적 보편적 인간관에서 선양하려고 애썼지만, 보편적 자아는 심리적 자아의 이기심을 살짝 가리는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하다. 스위스의 심리학자 융이 이것을 잘 꿰뚫어 보았다. 경제적 제조적 사고가 필연적으로 낳는 이기심의 소유욕을 제지하기 위하여 서양사상은 또 다른 차원의 도덕적 제조적 사고를 구성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이른바 사회주의적 마르크시즘의 운동이다. 이 운동은 사회도덕적 인간중심주의의 이념으로 이기주의를 척결하려는 사회적 제조론에 다름 아니다. 무를 철저히 배제한 사상이다. 무는 세상의 실천적 혁명의지를 둔화시키는 허무적 도피주의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다. 이처럼 서양의 사상은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다 무를 이해하지 못했고 또 오해했다. 그 동안 서양의 전통철학은 경제적이든 도덕적이든 제조적 기술의 철학을 일구어 왔었다. 제조적 기술(경제적/도덕적)의 철학은 결국 인간의식이 진리를 제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한에서 소유론의 철학이다. 그러나 서양 전통적 철학사상의 적자인 자본주의가 경제기술적 풍요와 편리를 가져 왔으나 탐욕의 병을 낳았다. 사회주의가 그것에 도전했으나 실패했다. 사회주의의 실패는 인간의 자연적 성향에 맞지 않는 당위의 법을 강요했기 때문이다. 자연의 모든 성향은 이익을 좋아한다는 점이다. 자연의 존재방식은 좋은 것을 찾지, 옳은 것을 추구하지 않는다. 이래서 자연의 존재방식을 욕망이라고 우리가 불렀다(1·16회 글). 인간도 무의식적으로 자연이므로 자연적 성향을 거슬리는 것을 인간이 수용하지 않는다. 사회주의의 도덕제조론을 인간이 자연스럽게 수용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이익의 선이 없기 때문이다. 옳음의 선만 주장했지 좋음의 선을 보여 주지 못했다. 이익은 옳음이 아니고 좋음의 편에 서 있다. 그래서 자본주의가 사회주의보다 더 자연스러운 것에 가깝다고 하겠다. 그러나 자본주의적 경제제조론은 소유론적 탐욕의 병을 뿌린다. 자연스러운 인간의 무의식에는 본능이 좋아하는 소유론적 이익과 본성이 좋아하는 존재론적 이익이 있다고 앞에서 수차 거론되었다(1·15·16·17회 글). 소유론적 이익은 이기배타적이고, 존재론적 이익은 자리이타적이다. 존재론적 이익을 통하여 경제와 도덕을 다 생겨나게 하는 제삼의 길을 우리가 찾아야 한다. 그러기 위하여 본성(자성=불성=신성)의 무의식이 되살아나야 한다고 나는 앞에서 여러 번 강조했다. 마음이 무를 익혀서 무의 마음을 활용하는 것이 제삼의 길이겠다. 미국의 동물인류학자인 홀이 그의 ‘감춰진 차원’에서 언급한 것은 여기서 매우 긴요한 자료가 된다. 무의 빈 공간이 거의 없이 빽빽하게 집단생활을 하는 동물들은 비정상적 변태적 성행위를 자행하고 서로 싸우면서 약한 자들을 왕따시키고, 약한 자들은 자살하거나 밤에 몰래 도망가는 이상한 짓들을 자행한다고 한다. 처음에는 죽은 동물들이 먹거리가 부족해서 그런 줄로 알았는데, 나중에 시체들을 해부해 보니까 영양상태가 아주 좋았다는 것이다. 무의 빈 공간이 부족하면, 동물들도 심리적 이상행위를 자행하고 집단생활의 붕괴조짐이 야기된다는 보고다. 무는 아무 것도 안 하는 것이 아니라, 동물들로 하여금 심리의 평정을 유지케 하여 여유를 누리게 하는 안 보이는 구조의 역할을 하는 셈이다. 노자가 말한 바와 같이 무는 무위이무불위(無爲而無不爲=인위적인 작동은 없으나 자연적 작용은 있음)의 역할을 하는 셈이다. 인간의 사회생활도 동물의 군서생활처럼 여유를 느끼게 하는 무의 빈 공간이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사회생활이 너무 촘촘해서 서로 부딪칠 것 같은 생활분위기는 인간들의 마음을 서로 공격적으로 변화시켜 강한 소유욕으로 남을 제거시키거나 지배하려는 탐욕의 도가니로 변하게 한다. 더구나 한국처럼 인구밀도가 세계에서 가장 조밀한 나라들에 속하는 경우에 무의 생활공간이 필수적이다. 비어 있음을 생활 안에서 찾기 어려운 분위기에서 여백의 공간을 생활세계에 창조하는 것은 한국인의 마음을 공격적 소유의 탐욕에서 존재론적인 이타적 사유를 생활 속에 배어들게 하는데 중요한 몫을 한다 하겠다. 기술의 철학이 소유론으로 미끄러지게 하지 않게끔 방지하는 길에서도 무의 공간적 활용에 못지않게 마음의 무를 익히고 닦는 무의 정신교육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여기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공공의 교육에서 당위적 의무만 강조하는 도덕교육의 폐단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무를 닮는 마음의 교육은 마음을 고요히 진정시키는 참선과 명상을 생활화해야 한다. 무의 비어 있음이 주는 고요와 평정과 너그러움을 우리는 마음에 새겨야 한다. 지금과 같은 기술과 자본의 시대에 어떻게 이것들을 적대시하는 반(反)기술과 반(反)자본의 시대에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겠는가? 그런 철학은 또 하나의 공상적 이상주의에 불과할 뿐이겠다. 그러나 경제기술의 이익을 존중하되 사람들의 마음이 소유적 탐욕에 빠지지 않고, 존재론적 이익으로 남들에게 복락을 주는 것을 즐거워하는 정신문화를 가꾸어야 하겠다. 그렇게만 되면 경제적 행위는 바로 도덕적 행위와 다르지 않게 된다. 또 재래의 제조적 경제기술처럼 자연에 주리를 틀고 심문하여 어떤 정보를 자연으로부터 강탈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허공이 뭇 중생들을 이롭게 하는 생명의 비를 저장하여 보시하면 중생들이 제 각기의 근기에 따라 자량(資糧)을 얻어간다고 말한 7세기 신라 의상(義湘) 대사의 ‘화엄법계도’의 구절처럼 ‘일반경제’(general economy)의 실현을 위한 마음의 혁명이 필요하다. 일반경제는 20세기 프랑스의 해체철학자 바타이유가 남긴 사상인데, 그것은 제한적인 몇 사람들만의 이기심을 채우는 재래의 ‘제한경제’(restricted economy) 대신에 아낌없이 주는 태양의 기(氣)가 모든 생명을 살리듯이 그런 마음으로 세상을 넉넉하게 가꾸겠다는 경제기술사상의 대 전환을 가리킨다. 그것은 당위의 도덕적 명령이 아니라, 본성이 좋아서 하는 자발적 기호다. 남의 것을 장악하는 이기적 이익에서부터 스스로 자기가 꽃피운 열매를 남들에게 즐겁게 주는 자리적 이익으로 방향전환을 하게 하는 마음의 혁명 이외에 무슨 희망이 인류에게 또 있을 수 있나? 마음의 혁명은 기업가가 곧 자선가가 되는 길이다. 한 사회가 다 기업가의 덕택으로 가난의 고통을 벗어나 모두 부자가 되고, 부자가 되니 여유가 생겨 정신문화도 상승하고 가난한 나라들을 도와주고 그래서 세계가 한국인을 존경의 눈으로 바라보며 한국인의 높은 품격과 함께 한국상품들을 선호하게 되면, 결국 부자가 되는 길은 탐욕에서가 아니라, 보시에서 시작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닌가? 기업가가 자선가가 되는 길은 오직 마음의 활용에 달렸다(11회 글). 불가의 말에 돈은 관세음보살이기도 하고 마군이기도 하다고 한다. 마음의 활용에 따라 갈라진다는 것이겠다. 기업가는 돈버는 재주를 선천적으로 타고나 그 길을 간 사람이다. 돈을 모았다는 것은 자리의 열매다. 그 열매를 이타적으로 쓰면, 그것이 자선가의 길이 아닌가? 본능의 탐욕을 본성의 원력으로 바꾸면 그렇게 된다. 그러기 위하여 마음이 무를 닮아야 한다. 아무 것도 없는 빈 허공은 모든 것들을 소유하지 않고 그대로 다 포괄하면서 존재케 하는 역할을 한다. 이것이 자연의 필연법이다. 이 법을 어기면 재앙을 받는다. 흔히 천벌이라 부른다. 그래서 중국의 3대 조사인 6세기 승찬(僧璨)대사가 ‘신심명’에서 “유(有)가 곧 무(無)요, 무가 곧 유”라고 말했다. 유는 나의 소유가 아니라 인색하지 않는 무의 것이고, 무한히 관대한 무는 유를 통해 안 보이는 자신을 보도록 암시한다. 그러나 무는 유가 자신의 것이라고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는다. 우리는 다 빈손으로 와서 빈손으로 돌아간다. 무로부터 와서 무로 되돌아간다. 유는 무가 잠시 자신을 만물의 형상으로 위탁한 것에 해당하겠다. 부자들이 돈을 자기 것으로 착각하지 않고, 무가 ‘일반경제’를 시행하도록 빌려준 것이라고 여기는 데서 마음의 혁명이 가능하다. 그러나 그 혁명은 강제적 당위가 아니라, 마음의 본성이 원하는 자발적 기호이어야 한다. 마음이 가난한 기업은 만인의 도움을 받는다.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철학
  • [한승원 토굴살이] 꽃들의 거래

    [한승원 토굴살이] 꽃들의 거래

    마르케스의 소설 ‘백 년 동안의 고독’에 근친상간으로 태어난 자식에게 돼지꼬리가 달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것을 읽으면서 나는 신의 저주로 말미암은 퇴화를 생각했다. 우리에게는 상피(相避)라는 말이 있다.‘가까운 친척 남녀 사이에 저지른 성적 교접’을 뜻한다. 원래는 ‘서로 성관계를 피하는 사이’를 뜻한 말이었다. 그것은 부모 자식 사이, 오누이의 사이, 삼촌과 조카의 사이, 사촌이나 5촌 사이처럼 서로 당연히 성관계를 피해야 하는 사이를 말하는 것이다. 어느 마을에서 오누이의 사이에, 혹은 삼촌과 조카의 사이, 사촌이나 오촌 사이에 간음 사건이 일어나면 ‘그 집안에 피 붙었다네.’ 혹은 ‘상피가 났다네.’하고 말하곤 했다. 어떤 통계를 보니, 여성 남성 모두 철들기 이전에 상피 관계에 있는 사람들과 성관계(혹은 성폭력)를 맺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하여 우리 선인들은 남녀칠세부동석을 강조했던 것일까. 조선조 유학자들은 본관이 같은 자들 사이의 혼례를 절대로 금했다. 왜 근친상간을 금한 것이었을까. 단순히 윤리 도덕 때문일까. 그것에 대한 해답을 프랑스의 문화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가 내놓았다. 브라질 원시 부족사회로 들어가 연구한 결과 ‘거래’ 때문이라는 것이다. 내 딸은 저쪽 집에 주고 저쪽의 딸을 데려온다. 세상의 모든 거래는 권력과 권력 사이의 화해의 수단이기도 하다. 사실은, 우주 자체가 거래를 하고 그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다 거래를 한다. 인연을 따라 생성 소멸한다는 원리도 거래 그것에 다름 아니다. 글로벌 세상 속에서의 우리 살림살이를 들여다 보자. 어디에 거래 아닌 것이 있는가. 당연히 꽃들도 거래를 한다. 꿀벌과 나비를 불러들이기 위하여 꽃들은 꿀과 향기를 준비한다. 벌과 나비는 꿀을 빨아가는 대신 꽃가루를 묻혀 갖고 가 다른 꽃 암술에 전달해 준다. 여기에는 확고한 철칙이 있다. 꿀벌은 꿀을 채취해 가되 절대로 꽃잎이나 암술이나 수술 그 어느 것도 손상시키지 않는다는 것. 모든 꽃들은 자기 꽃들끼리의 미묘한 거래 법칙이 또 하나 있다. 그 미묘한 거래를 위하여 암술 속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드높은 문턱 하나를 마련해 놓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 꽃의 수술로부터 떨어지는 꽃가루가 흘러들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그것은 근친상간을 방지하기 위한 턱인 것이다. 말하자면 다른 꽃의 수술을 꿀벌이나 나비를 통해 받을 뿐, 자기의 수술에서 떨어지는 꽃가루를 받지 않겠다는 절제인 것이다. 진돗개의 순수혈통을 보존하려고 근친 교배를 시키면, 짖을 줄도 모르는 천치 바보들이 50∼60%쯤 태어나는데 그들은 다 도태시켜야 한다. 사람의 경우도 근친상간으로 인해 태어난 자식들은 백치들이 많다. 예로부터 결혼은 한사코 멀고 먼 곳에 사는 사람과 해야 한다고 했다. 그 논리대로 한다면 국제결혼을 하면 강하고 우수한 인재가 태어날 터이다. 같은 종 가운데에서 가장 강한 것은 혼혈종이다. 동식물의 강한 우성의 새 품종을 만들어내는 교배사들은 새로운 틔기 만들기에 골몰한다. 외따로 떨어져 있는 감나무의 암꽃이 다른 나무의 수술에서 꽃가루를 받지 못하고, 자기 수술의 가루를 받아 열매를 맺고, 또 그 열매에서 태어난 감나무가 그와 마찬가지의 과정을 거치곤 하면 ‘고욤’처럼 작은 열매를 맺는 감나무로 퇴행하게 된다. 우주는 거래를 통해 혼혈 종을 만들어내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다. 그 의지가 우주를 새로운 모양새로 바꾸곤 한다. 우리는 한국에서 혼혈아로 태어나 미국에 가서 크게 성공한 청년을 알고 있다. 순수 혈통만을 지키려 하는 것은 억지이고 자폐이다. 문화도 바다를 건너고 산을 넘어 왕래하면서 부단히 섞이어 왔다. 틔기 문화가 강하다. 더욱 강한 틔기 문화를 창출하려면 먼저 우리 순수 문화의 혈통이 보존되어야 한다. 그래야 그 순수문화와 외래문화 사이의 2대 3대 4대의 더욱 강한 틔기문화들이 창출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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