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인동
    2026-08-15
    검색기록 지우기
  • 만삭
    2026-08-15
    검색기록 지우기
  • 리뷰
    2026-08-15
    검색기록 지우기
  • 봄의
    2026-08-15
    검색기록 지우기
  • 59만명
    2026-08-15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3,593
  • 남진, 김前대통령 추모곡 ‘님오신 목포항’ 발표

    남진, 김前대통령 추모곡 ‘님오신 목포항’ 발표

    가수 남진이 故 김대중 전 대통령의 삶과 생애를 기리는 추모곡을 발표한다. 1987년 노태우 전 대통령의 6.29 민주화선언 직후 제작된 ‘님오신 목포항’이 그것. 남진 소속사에 따르면 이 곡은 당시 외부 압력으로 음반활동을 접었다가 최근 DJ 서거를 계기로 20년만에 빛을 보게 됐다. ‘님오신 목포항’은 1987년 LP판으로 처음 만들어졌지만 공연윤리위원회 심의에서 보이콧 당하며 좌절된 바 있다. 이 곡은 1987년 작곡가 이도화 씨의 요청에 따라 음반을 제작했던 가넷 엔터테인먼트의 김성일 대표가 새롭게 편곡작업을 한 것으로 9월 초 정식 공개될 예정이다. 남진은 DJ의 정치적 기반인 목포가 고향이다. 남진은 이번 추모곡이 기존의 ‘목포의 눈물’이나 ‘돌아와요 부산항에’ 못지 않은 대중적 가요로 자리매김하기를 기대하고 있다. 남진은 “이번에 새로 편집을 하긴 했지만 20년전 작업한 음악인지 의문이 들 만큼 앞서간 편곡과 멜로디”라며 “당시 재야인사를 상징하는 ‘인동초 노래’로 지목받아 어쩔수 없이 활동을 중단했지만 좋은 반응이 있으리라고 본다.”고 말했다. 당시 음반을 제작했던 김 대표는 “대통령이 되기 직전이나 직후에도 음반을 낼까 생각해봤지만 핍박받던 시절에 만든 곡이라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분이 돌아가신 지금은 자연스럽게 추모곡 형태로 불릴 수 있을 것 같아 음반을 내게 됐다”고 말했다. 사진=좋은 사람 서울신문NTN 박영웅 기자 hero@seoulntn.com@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꿈에 최진실씨가 꺼내달라…” 황당 진술

    고 탤런트 최진실씨 유골함 절도 용의자가 공개수배 이틀 만에 붙잡혔다. 경찰은 정신병 증세가 의심스러운 유력 용의자로부터 최씨 유골함을 회수했다. 경기 양평경찰서는 용의자 박모(41)씨를 지난 25일 밤 11시10분쯤 대구 상인동 자택에서 검거한 뒤 범행 동기 등을 조사하고 있다고 26일 밝혔다. 박씨 검거에는 지난 24일 공개된 폐쇄회로(CC)TV 화면을 통해 용의자의 얼굴을 알아본 주변 사람의 제보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범행동기 횡설수설 박씨는 경찰 조사에서 “꿈에 최진실이 나타나 납골묘가 답답하니 흙으로 된 묘로 이장해 달라고 했다.”면서 “유골함을 깨고 분쇄된 유골을 꺼내 다른 용기에 보관하고 유골함은 대구 앞산공원 산책로에 묻었다.”고 진술했다. 경찰은 횡설수설하는 박씨의 정신감정을 의뢰했다. 경찰은 CCTV에 잡힌 용의자의 범행 패턴으로 미뤄 묘지나 돌을 잘 다루는 전문가 소행으로 추정했으나, 박씨는 단순한 싱크대 설비업자로 확인됐다. 박씨는 아내(40)와의 사이에 10살, 7살 아들을 두고 있으며 최씨와 개인적 원한관계는 물론 최씨의 열혈 팬도 아닌 것으로 알려졌다. 박씨는 지난 1일 오후 8시쯤부터 다음날 오전 6시까지 양평군 양수리 갑산공원에 있는 최씨 납골묘를 사전답사한 뒤 4일 오후 9시55분에서 10시58분 사이 묘에 접근해 손망치로 분묘를 깨고 유골함을 훔쳤다. 범행 흔적이 남을 것을 염려해 5일 오전 3시36분쯤 묘역에 다시 나타나 물걸레로 묘분을 닦아 증거를 인멸한 뒤 다시 달아났다. 경찰은 25일 박씨를 아는 사람의 제보를 받고 박씨의 휴대전화 통화내역을 발췌해 조사한 결과 그가 범행이 이뤄진 1~5일에 양평에서 8차례 통화한 사실을 확인했다. 용의 차량은 이날 새벽 양평 반원면 봉상리 경찰검문 CCTV에 찍혔으며 홍천과 속초를 거쳐 대구로 도주한 것으로 조사됐다. ●유골함 도난사건 판례없어 경찰은 박씨를 상대로 공범 여부 및 여죄에 대한 추가조사를 한 뒤 특수절도 등(형법상 사체 등의 영득죄 포함)의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할 예정이다. 그러나 봉안묘(납골묘)에 안치된 유골함을 도난당한 사건에 관한 판례가 없는 상태여서, 범인에게 어떤 법 조항을 적용할지는 법리적 검토가 필요한 상태다. 경찰은 ‘분묘 발굴죄’의 적용 여부를 저울질하고 있지만 최씨 유골함이 안치된 곳은 봉안묘로 분묘에 해당하지 않아 현재로서는 ‘사체 등의 영득죄’가 유력한 상태다. 형법 제161조는 ‘사체, 유골, 유발 또는 관내에 장치한 물건을 손괴, 유기, 은닉 또는 영득한 자는 7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여기에 박씨의 경우 특수절도죄까지 적용돼 형량이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선고 형량은 징역 1년에서 최대 징역 15년까지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한편 경찰은 박씨 검거 후 곧바로 다른 용기에 담긴 최씨 유골을 회수했으나 유골이 정작 최씨의 것인지에 대해서는 확인하지 못했다. 유골이 섭씨 600도 이상 고열의 화장을 거치면서 DNA 감식이 어렵기 때문이다. 경기경찰청 과학수사계 관계자는 “이번처럼 봉안시설을 훼손하고 나서 유골함을 훔쳐간 사건은 흔치 않아 회수된 유골이 최씨의 유골이 맞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과학적 검증 방법을 찾고 있다.”고 말했다. 윤상돈기자 yoonsang@seoul.co.kr
  • [시론] DJ 이후 시대의 리더십/임성호 경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시론] DJ 이후 시대의 리더십/임성호 경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김대중 전 대통령은 다차원의 시대 선도자였다. 한국 정치사에 여러 번의 획을 그으며 여러 번 시대변화를 선도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이 국가건설이라는 큰 획을 긋고, 박정희 전 대통령이 산업화라는 큰 획을 그은 데 비해, 그는 민주화라는 획, 지역균형발전이라는 획, 남북화해라는 획 등 여러 차례 획을 그었다. 역대 대통령 중 누가 더 위대한지 비교 평가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바람직하지도 않지만, 그가 수차례에 걸쳐 시대변화의 주인공이었다는 데 이의를 달 수 없다. 물론 그 명암이 분명히 있고 아직도 논란을 낳고 있다. 하지만 그는 다양한 족적을 남기며, 항상 긍정적이지만은 않았지만 시대구분의 여러 계기를 제공했다. 민주화는 김 전 대통령이 선도한 시대변화 중 첫 번째이고 가장 널리 칭송받는 것이다. 권위주의적 탄압을 인동초(忍冬草)처럼 참으며 민주화를 견인한 공로는 참으로 크고 결정적이었다. 야당 지도자로서 추락한 국회의 권위를 지키고 꺼져 가는 정당정치의 불씨를 살리며 민주화를 향한 희망을 불어 넣은 그의 노력이 있었기에 유신 시대와 제5공화국 시대에 이어 민주화 시대가 등장할 수 있었다. 그가 이끈 두 번째 시대변화인 지역주의 구도의 형성은 칭찬보다는 비판을 더 받는다. 1987년 민주 대 반민주 대립구도가 깨지자 김대중·김영삼·김종필 3인은 각기 지역주의 감정을 조장하며 지역주의 시대를 열었다. 물론 김 전 대통령은 오래 차별받아 소외된 호남을 살려 지역균형발전을 이루겠다는 나름대로의 의도를 지녔을지 모른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지역 간 반목과 갈등의 골을 깊게 했다. 민주화나 지역주의 시대가 평생의 경쟁자이자 동지였던 김영삼 전 대통령과의 합작품인 반면, 김대중 전 대통령이 주도한 세 번째 시대변화인 남북화해는 그만의 결단에 의한 것이다. ‘햇볕정책’, 정상회담과 6·15선언, 금강산 관광 등으로 상징되는 남북화해 시대는 그의 오랜 신념 덕에 그 첫 걸음을 뗄 수 있었다. ‘일방적 퍼주기’였고 북핵 개발을 오히려 도왔다는 비난이 있지만, 남북 긴장은 적어도 한동안 크게 줄었다. 시대 선도자로서 김 전 대통령의 영향력은 이념의 사회적 분출에까지 이어졌다. 이념적 폐쇄성을 면치 못하던 우리 사회는 그의 당선 자체, 그리고 그의 적극적 시민사회 지원정책과 남북교류 노력으로 인해 이념적 다양성의 시대에 접어들 수 있었다. 이념의 분출이 지나쳐 남남갈등이 격화됐다는 평가도 있지만, 어쨌든 후임 노무현 전 대통령 시기에 정립된 이념적 대립구도라는 시대추세의 기저에는 김 전 대통령의 원초적 역할이 있었다. 이처럼 여러 갈래의 시대흐름을 이끌며 그는 공과를 함께 남겼다. 우리의 과제는 이 중 공은 살리고 과는 줄이는 것이다. 민주화를 성숙시키되 방종과 아집으로 흐르지 않고, 지역균형발전을 이루되 지역감정을 북돋우지 않고, 남북화해를 진행시키되 그 효과성을 따지고, 이념의 다양성을 중시하되 추상적 이념대립이 구체적 현안 중심의 대화를 막지 못하게 해야 한다. 이제 누가 이런 방향으로 시대를 이끌까? 누구보다 김 전 대통령이 거쳤던 직(職)을 현재 맡고 있는 이명박 대통령과 국회의원들이 그의 공과를 헤아리며 새 시대를 열기 위해 앞장서야 한다. 그러나 그의 카리스마 넘치는 개인적 리더십이 작동하던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 오늘의 사회상황은 개인보다 제도·시스템 중심의 새 시대를 요구하고 있다. 우리 국민 모두가 시대를 이끌어야 할 이유다. 임성호 경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 [옴부즈맨 칼럼] DJ 부고기사로 본 설명방식/한정호 연세대 언론홍보영상학부 교수

    [옴부즈맨 칼럼] DJ 부고기사로 본 설명방식/한정호 연세대 언론홍보영상학부 교수

    사회학자인 로버트 브라운은 사회현상과 사건에 대한 설명방법으로 다음 6가지를 들고 있다. 첫째는 원초적 설명방법이다. 역사적 설명방법으로도 불리는 이 방법은 ‘원래부터 그러하였다.’는 것이다. 원초적 과거를 들어 사건을 해석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성향적 해석방법이다. ‘그런 성향이나 기질이 있어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이유적 설명방법이다. ‘어떤 사건이 일어난 객관적 이유가 존재했다.’는 것이다. 드러난, 혹은 드러나지 않은 인과적 이유를 찾아 설명하는 것이다. 네 번째는 의도적인 설명방법이다. 누군가가, 혹은 국가나 조직체가 ‘무엇을 위해서’ 그러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얻는 것이 무엇이며 그것을 위해 무엇을 어떻게 했나를 중심으로 설명하는 방법이다. 다섯 번째는 실증적 일반화다. “그러한 사건들이 많이 발생했으므로” 유추컨대 이러저러 하다는 설명이다. 여섯 번째는 이론적 설명방법이다. 일반화된 정식이론에 따라 현상이나 사건을 설명하는 것이다. 어떤 학생이 가정교사를 폭행한 사건을 두고 다음과 같이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원초적 해석은 어릴 때 그 학생은 폭력적 언행과 함께 유사한 사건을 일으킨 바 있으며 이번에도 그런 일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성향적 해석은 원래 폭력적 성향과 기질을 가졌기 때문에 폭행했다는 것이다. 이유적 설명방법은 이 학생이 아침에 몸이 좋지 않고 여자친구로부터 절교를 선언당해 홧김에 폭행을 했다는 것이다. 의도적 설명방법은 이 학생이 부모로부터 돈을 받아내려고 폭력시위를 했다는 것이다. 혹은 그를 쫓아내고 원하는 다른 사람을 들이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실증적 일반화의 설명방법은 그가 최근 자주 그러한 유사한 폭행사건을 일으켰고 목격자가 많다는 것이다. 이론적 설명방법은 ‘좌절은 공격성을 초래한다.’는 밴두라(Bandura)의 사회심리학 이론을 동원해 이 학생이 그간 여러 가지 좌절을 겪으면서 폭력성이 커졌다는 현상을 체계적 이론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언론인들은 사회적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이 여섯 가지의 설명방법들을 다양하게 동원했으면 한다. 우리나라 신문 정치면은 의도적 설명방법의 기사들이 가장 많으며 사건사고 기사는 이유적 설명방법이 많이 동원된다. 과학과 의학기사는 잘 아는, 혹은 권위자의 이론으로 설명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좋은 기사를 만들기 위해선 다각도적 해석이 바람직하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하면서 신문들은 온통 그의 일대기를 조명하느라 바쁘다. 그의 업적을 많이 나열한 신문도 있고 역사적 의미를 찾고자 하는 신문도 있다. 공과를 대비시켜 균형을 맞추려는 신문도 있다. 서울신문은 부고기사를 속보나 낙수 등 다른 신문에서 다루지 않은 사실들의 발굴 중심으로 보도했다. 궁금한 전직대통령 첫 국장의 이모저모를 미리 알 수 있도록 보도했다. 비교적 좋은 부고기사라고 본다. 그러나 앞의 6가지 설명방법을 모두 동원했다면 더욱 입체적인 부고기사를 쓸 수 있다고 본다. 그가 4수를 하며 마침내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이유나 경제위기를 해결할 수 있었던 객관적 이유도 들고 남북화해는 노벨평화상 수상을 목적으로 했다는 해석도 존재한다는 의도적 설명방법의 기사를 만들 수도 있다. 인동초가 될 수 있었던 어린 시절의 원초적 사건을 찾아내도 좋고 인내와 감화적 성품의 소유자라는 기질적 해석도 좋다. 역사적 환경과 영웅의 탄생을 연관시켜 조명한 정치이론을 동원할 수도 있으며 그가 진정한 남북통일을 추구했던 절실성을 여러 가지 목격담이나 사례를 들어가며 실증적 일반화의 설명방법을 동원해도 부각시키는 기사를 만들 수 있다. 앞으로 김 전 대통령 부고관련기사는 계속적으로 나올 것인 만큼 이 사회학적 설명방법의 적용을 고려할 만하다. 한정호 연세대 언론홍보영상학부 교수
  • [사설] 김 전 대통령 가신 길 평화·화해로 기려야

    이제 김대중 전 대통령은 떠나고 우리는 남았다. 이 땅의 민주화를 앞당기고, 인권을 살찌우고, 얼어붙은 한반도에 화해와 평화의 햇살을 안겨다 준 김 전 대통령이 어제 다시는 볼 수 없는 영면의 길에 들어섰다. 김대중, 그 이름 석자는 역사가 됐다. 돌이켜보면 우리는 그가 있어서 행복했다. 지금 우리가 대한민국의 국민임을 자부할 수 있는 토양을 갖추는 데 있어서 고인이 이룩한 업적은 실로 지대하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이라는 외침으로 암울한 군사정권 시절 민주주의의 불꽃을 지켜냈다. 혹독한 외환위기를 맞아 나라가 흔들릴 때 국민을 하나로 묶었고, 장롱 속 금붙이들마저 끌어내며 이룩한 경제 회복으로 다시금 세계를 놀라게 했다. 분단 한반도에 대화의 물꼬를 텄고, 남북이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공존공영의 대상임을 일깨웠으며, 인류는 그런 평화의 전령에게 노벨평화상을 수여하며 갈채를 보냈다.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인권의 숭고한 가치와, 용서와 화해만이 모든 어려움을 뛰어넘을 힘이라는 가르침을 고인은 안겨주었다. 김 전 대통령이 서거한 뒤로 지난 엿새 이 땅엔 용서와 화해, 평화와 사랑의 물결이 넘쳐났다. 동서로는 평생 민주화 동지이자 정적인 김영삼 전 대통령과의 화해가 이뤄졌고, 동교동계와 상도동계가 손을 잡았다. 남북으로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조의를 받아든 북한 조문단이 빈소를 찾았고, 우리 정부와 막힌 대화의 실타래를 풀 방안을 논의했다. 서울광장을 비롯한 전국 각지의 분향소로 신분과 계층을 떠난 조문행렬이 꼬리를 물었지만, 거기에 이념과 지역 대립의 흔적은 찾기 힘들었다.고인의 자취가 크고 깊은 만큼 그의 빈자리를 메워야 할 우리의 과제 또한 막중하다. 지역과 이념, 계층의 대립이라는 이 나라 3대 갈등을 치유하고 극복하는 데 사회 구성원 모두가 나서야 한다. 우선 고인이 평생을 바쳐 극복하려 했던 지역주의의 골을 메워야 한다. 이를 위해 정치권은 당파를 떠나 지역갈등 극복을 위한 제도적 방안을 마련하는 데 머리를 맞대기 바란다. 말로만 지역주의 극복을 외칠 것이 아니라 이를 실천할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정치권의 화두로 떠오른 행정구역 개편과 선거제도 개선 등을 논함에 있어서 이 나라 백년대계를 설계한다는 자세로 임해야 할 것이다.이념 과잉의 대결구도 또한 극복해 내야 한다. 정치권뿐 아니라 학계와 언론, 시민사회단체 등 사회의 모든 주체들이 힘을 모아야 한다. 식민통치와 남북 분단, 군부통치라는 현대사의 굴곡이 만든 이념의 덫에서 우리 스스로를 해방시켜야 한다. 나라가 이념의 굴레에 묶여 주춤거리기에는 아직 가야 할 길이 너무도 멀다. 탈이념의 세계사적 조류에서 우리만 퇴행할 수는 없다. 이를 위해 정부는 무엇보다 친서민 행보를 보다 강화, 빈부 격차에 따른 계층 갈등을 극복하는 데 더욱 매진해야 한다. 기회의 균등과 정의로운 분배를 통해 우리 사회 전체가 하나가 되는 통합의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 인동초가 피워 낸 평화와 화해의 꽃을 이제 우리가 가꿔야 한다. 삼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영면을 빈다.
  • [김대중 前대통령 국장] “국민 존경한 님이여… 이제 그 존경 당신께 드립니다”

    [김대중 前대통령 국장] “국민 존경한 님이여… 이제 그 존경 당신께 드립니다”

    ■영결식 시종 장중하고 엄숙했다. 볕이 뜨거운 늦여름 민주주의와 남북화해를 위해 헌신한 ‘인동초 김대중’은 국회에서 마지막 작별인사를 나눴다. 23일 오후 1시55분 국회 본청 앞. 영결식 사회를 맡은 손숙 전 환경부 장관이 “존경하고 사랑하는 김대중 전 대통령을 모신 영구차가 입장하고 있다.”고 말하자 조곡이 울려 퍼졌다. 고인의 대형 영정이 운구차 앞에 섰고, 무궁화대훈장과 노벨평화상 상장이 뒤따랐다. 운구차 뒤로 비통한 표정의 이희호 여사와 유가족이 영결식장에 입장했다. 이어 역대 국장·국민장 사상 최대 규모인 2만여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영결식이 진행됐다. 영결식은 조악대의 애국가 연주와 묵념, 이달곤 행정안전부 장관의 약력보고, 장의위원장인 한승수 총리의 조사, 김 전 대통령 내외와 각별한 관계인 박영숙 미래포럼 이사장의 추도사 등의 순으로 진행됐다. 한 총리는 조사를 통해 “대통령님의 높은 위업을 어찌 몇 마디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라면서 “온 국민이 슬픔 속에 대통령님을 추모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박 이사장은 “국민을 존경하고 사랑했던 선생님, 이제 그 존경과 사랑을 당신께 드립니다.”라면서 “지난날은 진정 고단했으니 부디 편히 쉬십시오.”라고 목이 멘 채 추도사를 낭독했다. 이어 천주교, 불교, 기독교, 원불교 순으로 종교의식이 진행됐다. 김 전 대통령이 천주교 신자였던 만큼 최창무 광주대교구장이 집전하는 천주교의 제례가 먼저 이뤄졌다. 불교에서는 조계사 주지인 세민 스님이, 기독교에서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김삼환 회장과 한국기독교총연합회 엄신형 대표회장이, 원불교에서는 김혜봉 대전충남 교구장이 각각 집전했다. 종교의식이 끝나고 고인의 생전 모습이 담긴 동영상 ‘대통령 김대중’이 상영되자 유가족과 조문객들은 조금씩 흐느끼기 시작했다. 1998년 2월 15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김 전 대통령이 “우리 모두는 땀과 눈물과…”라며 울먹이는 모습이 비치자 이들은 북받치는 감정을 이기지 못한 채 울음을 터뜨렸다. 동영상 상영 직후 이 여사는 침통한 표정으로 부축을 받으며 영정에 헌화했다. 이 여사는 울음을 참으려 입을 꼭 다물었다. 아들 홍일·홍업·홍걸씨 등 유가족이 헌화하는 동안 고개를 숙인 채 입을 꼭 다물던 이 여사는 헌화를 마친 뒤 뒤돌아서면서 그제서야 울먹이기 시작했다. 유족들의 분향이 끝난 뒤 이명박 대통령 내외가 제단에 오르자 영결식장 VIP석 뒤쪽에 있던 한 40대 남성이 “위선자”라고 소리쳐 경호원들의 제지를 받았다. 장내가 소란스러워지자 이 남성은 곧 퇴장해 버렸다. 이어 전두환·김영삼 전 대통령과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부인 권양숙 여사가 헌화했다. 김 전 대통령은 영원한 동지이자 경쟁자였던 고인과의 과거를 회고하듯 침통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권 여사는 고개 숙여 영면을 기원한 뒤 눈을 꼭 감고 울먹였다. 앞서 이 대통령은 영구차가 영결식장에 도착하자 자리에서 일어나 목례한 뒤 식장 정면에 마련된 김 전 대통령의 영정을 계속 응시했다. 유가족이 들어오자 고개 숙여 인사하기도 했다. 주요 인사들의 헌화와 분향이 끝나자 코리안심포니 오케스트라의 반주에 맞춰 성악가 김영미씨, 평화방송 소년소녀합창단이 부른 추모곡 ‘그대 있음에’와 ‘우리의 소원’이 영결식장에 울려 퍼졌다. 3군 조총대가 3발의 조총을 발사했고, 이어 “이제 우리가 존경하고 사랑했던 고 김대중 대통령을 보내드려야 할 시간”이라는 손 전 장관의 울먹임 속에 영결식은 마무리됐다. 고인을 실은 운구차는 1시간10분 남짓 걸린 영결식이 끝나자 오후 3시12분쯤 국회를 나가기 위해 서서히 움직였다. 국회 본청 앞과 의원회관 앞을 지나 3시29분쯤 국회를 떠났다. 운구차는 국회를 나가던 도중 이 여사 앞에 잠시 멈춰 섰다. 이 여사는 끝내 고개를 들지 못한 채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렇게 ‘의회주의자 김대중’은 국회를 뒤로하고 멀어져 갔다. 김지훈 김민희 허백윤기자 kjh@seoul.co.kr
  • [김대중 前대통령 국장] 친환경 고려 인동초도 심지 않아

    김대중 전 대통령은 23일 국립서울현충원의 현 국가유공자 제1묘역 하단에 조성된 264㎡(16×16.5m·80평) 규모의 묘역에 안장됐다. 고인의 묘역은 서울현충원이 위치한 관악산 공작봉(孔雀峰) 기슭의 해발 45m 지점에 있다.공작봉은 ‘공작이 알을 품고 있는 형상’으로 햇볕이 잘 드는 명당으로 알려져 있다. 묏자리는 장조카와 지관(地官) 등이 사전 답사를 통해 정했다.묘역은 80평 규모로 유족의 뜻에 따라 다소 협소하지만, 친환경적으로 꾸며진다. 묘역 가장자리에 심기로 한 인동초는 자생식물 등 주변 생태계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유족의 뜻에 따라 심지 않기로 했다.고인의 묘역은 안지름 4.5m의 원형 봉분과 비석, 상석, 향로대, 추모비 등을 갖추고 있다. 원형 봉분은 2.7m 높이로 12개의 판석이 묘소를 두르고 있다. 옆자리에는 추후 합장을 할 수 있는 공간도 마련됐다.서울현충원은 촉박한 장례 일정을 고려, 묘소 앞에 임시로 나무 비석을 설치했다. ‘제15대 대통령 김대중의 묘’라고 새겨진 나무 비석만이 고인의 묘역임을 표시한다. 삼우제(三虞祭)가 치러진 이후 비석은 화산암의 일종인 오석으로 교체되고 3.46m 높이의 비석 상부에는 국가원수를 상징하는 봉황무늬 조각이 새겨진다.안동환기자 ipsofacto@seoul.co.kr
  • [김대중 前대통령 국장] 하의도 생가터 흙 한줌 뿌리며… 유족들 눈물로 작별

    [김대중 前대통령 국장] 하의도 생가터 흙 한줌 뿌리며… 유족들 눈물로 작별

    ■안장 김대중 전 대통령은 23일 오후 국립 서울현충원에서 파란만장한 이승에서의 삶을 접고 영원한 안식에 들어갔다. 인동초(忍冬草)의 ‘후회 없는 삶’이 산 자들에게는 새로운 과제로 남겨지는 순간이었다. 고인의 마지막을 함께한 참석자들은 이별의 아쉬움과 유지(遺志) 계승의 각오를 눈물로 대신했다. 고인을 실은 영구차는 당초 예정 시간인 오후 5시 직전 서울현충원에 도착했다. 안장식은 고인을 태운 운구 차량이 국가원수 묘역에 도착한 뒤 곧바로 진행됐다. 장엄하고 차분했지만, 고인을 보내는 이들은 한결같이 안타깝고 침통한 표정이었다. 이희호 여사와 직계가족, 장의위원, 민주당 및 동교동계 인사, 국민의 정부 관계자, 전직 비서관, 김대중평화센터 관계자, 일반 시민 등 300여명이 고인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국군 의장대의 조악 연주와 함께 고인과 이별하는 마지막 의식이 시작됐다. 고인에 대한 경례와 종교의식에 이어 헌화 및 분향, 하관, 흙을 관 위에 뿌리는 허토 의식이 순서대로 이뤄졌다. 종교의식은 천주교에 이어 기독교, 불교, 원불교 순으로 치러졌다. 천주교 의식은 고인과 각별한 사이인 함세웅 신부가 집전했다. 불교는 조계사 주지 세민 스님, 기독교는 이해동 목사, 원불교는 이선종 서울교구장이 집전했다. 하관식을 위해 고인이 이동하자 이 여사를 비롯해 유가족과 참석자들은 참았던 울음을 조금씩 토해냈다. 고인을 실은 향나무관이 아래로 내려가자 유족들의 울음 소리는 높아졌다. 이어 허토 의식이 진행되자 참석자들은 하나같이 오열하며 고인과의 이별을 안타까워했다. 허토 의식은 이 여사가 먼저 흙을 뿌리며 시작됐다. 이어 홍일·홍업·홍걸씨, 친인척, 고인의 전직 비서관, 장의위원 관계자, 민주당 인사, 국민의 정부 인사, 현 비서실 인사, 일반 조문객 순으로 진행됐다. 고인의 관에 흙이 뿌려질 때마다 참석자들은 마지막 인사를 건네며 영면을 기원했다. 고인의 고향인 전남 신안군 하의도 생가 터에서 가져온 흙 한 줌도 고인과 함께했다. 장례를 치르는 동안 흐트러짐 없는 모습으로 임하던 이 여사도 허토 의식을 마친 뒤 꾹꾹 눌러 왔던 감정이 터진 듯 눈물을 쏟아냈다. 손수건으로 닦고 또 닦으면서도 이 여사는 눈물이 범벅이 된 채 한참 동안 오열했다. 홍걸씨가 옆에서 이 여사의 등을 어루만지며 슬픔을 나눴다. 이어 군악대의 진혼곡과 조악 연주를 뒤로한 채 고인은 이승에서 마지막 작별을 고했다. 정치권의 한 참석자는 안장식을 마친 뒤 “국장 기간 내내 고인의 생전 말씀과 인연을 떠올리며 하루하루 버텼지만, 끝내 이렇게 가시고 나니 이제야 ‘김대중’과 함께 ‘한 시대’를 보냈다는 사실이 엄청난 중압감으로 밀려온다.”고 털어놨다. 또 다른 참석자는 “그분의 마지막 길이 헛되지 않도록 민주주의와 남북화해의 과제를 엄중히 이어 가겠다.”면서 “그것이 ‘김대중’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몫”이라고 말했다. 김지훈 김민희 허백윤기자 kjh@seoul.co.kr
  • [김대중 前대통령 국장]“우리의 자랑스러운 역사로 영원히 남을 겁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국장(國葬) 장의위원장인 한승수 국무총리는 23일 오후 국회에서 열린 영결식에서 조사(弔辭)를 낭독했다. 다음은 조사 요지. 우리는 오늘 나라의 큰 정치지도자이신 김대중 전 대통령님과 영원히 이별하는 자리에 함께하고 있습니다. 하루빨리 쾌차하시기를 간절히 소망했던 우리들은 애통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습니다. 대통령님은 평생 민주주의와 인권, 평화와 민족화해를 실현하기 위해 헌신해 오셨습니다. 대통령님의 이러한 발자취는 우리의 자랑스러운 역사로 영원히 남을 것입니다. 대통령님은 헌정사상 처음으로 선거에 의한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루어 정치발전의 확고한 기틀을 닦으셨습니다. 분단 이후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남북화해와 교류협력의 큰 길을 열고, 2000년에는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여 대한민국의 위상을 드높인 일은 우리 모두의 자랑이었습니다. 고인의 일생은 참으로 파란만장한 삶이었습니다. 생전에 당신 스스로를 추운 겨울에도 온갖 풍상을 참고 이겨내는 ‘인동초’에 비유했던 것처럼 투옥과 연금, 사형선고와 망명에 이르기까지 험난했던 삶이었습니다. 민주화의 기적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은 대통령님처럼 민주주의에 대한 강인한 신념과 불굴의 용기를 가진 지도자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대통령님이 이루고자 하셨던 민주주의 발전과 평화적 통일 그리고 국민 통합에 대한 열망은 우리의 미래를 열어 가는 길잡이가 될 것입니다. 특히 어려운 이웃과 소외된 계층을 위한 대통령님의 관심과 배려도 오늘의 우리들이 한층 더 받들어야 할 것입니다. 대통령님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우리 사회의 화해와 통합에 크나큰 역할을 하셨습니다. 대통령님은 생전에도 늘 “남북으로 갈라진 것도 모자라 동서로 갈라지고 계층 간에 대립하고 세대 간에 갈등해서는 우리의 미래는 없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대통령님의 유지를 받들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제야말로 지역과 계층, 이념과 세대의 차이를 떠나 온 국민이 한 마음으로 새로운 통합의 시대를 열어가야 하겠습니다. 이제 대통령님은 생전의 그 무거운 짐 모두 내려놓으시고 편히 영면하시기를 빕니다. 그리고 언제까지나 우리 겨레의 앞길을 밝혀주시기를 기원합니다. 온 국민과 더불어 삼가 후광(後廣) 김대중 전 대통령님의 명복을 빕니다.
  • [씨줄날줄]DJ 필적학/진경호 논설위원

    김영삼(YS)· 김대중(DJ) 두 전직 대통령의 차이점을 한마디로 말해주는 우스갯소리가 정치판에 있다. ‘YS는 어려운 문제를 쉽게 풀고, DJ는 쉬운 문제를 어렵게 푼다.’ 과거 요정정치 시절의 행보나 정치자금을 관리하는 스타일을 들어 YS를 남성형, DJ를 여성형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두 사람의 차이는 메모 습관에서도 두드러진다. 대통령 재임 중 청와대에 남긴 자료만 봐도 YS의 친필 메모는 찾아보기가 힘든 반면 DJ는 26권의 업무노트를 남겼을 정도로 메모에 철저했다. 선 굵은 정치와 섬세한 정치의 차이다. 두 사람은 필체에서도 대비된다. YS가 크고 힘 있는 필체를 자랑했다면, DJ는 작으면서도 또박또박 단정한 필체를 뽐냈다. 1980년 신군부에 의해 투옥된 뒤 펜으로 쓴 옥중서신의 글씨는 훗날 청와대 선물 넥타이 문양으로 쓰였을 정도로 아담하고 미려하다. 민주당 박지원 정책위의장과 박선숙 의원이 1990년대 중반 DJ의 측근으로 자리매김한 데는 이들의 글씨체가 DJ의 것을 빼닮았기 때문이란 얘기도 나온다. 두 사람 모두 DJ의 대변인을 지낼 때 DJ의 발언을 깨알같이 작으면서도 또박또박 바른 글씨로, 그것도 한 글자도 빠짐없이 빠른 속도로 받아적는 발군의 솜씨를 발휘했던 인물들이다. 필적학(筆跡學·graphology)에서는 필적은 ‘뇌의 지문’ 이라고 말한다. 성격과 기질 등 개인의 특질이 모두 글씨체에 담겨 있다는 것이다. ‘필적은 말한다’의 저자 구본진 법무연수원 교수는 “항일투사의 필체는 대체로 작고, 반듯하고, 힘차고, 자간(字間)이 좁고, 행간(行間)이 넓은 반면 친일파의 경우 글씨가 크고, 좁고, 길고, 유연하고 자간이 넓은 대신 행간은 좁다.”고 분석한 바 있다. 글자 배열이 오른쪽으로 올라갈수록 성품이 낙관적이라는 분석도 내놓았다. DJ의 친필 일기의 일부가 어제 공개됐다. 용산참사에 대한 비통함과 남북관계에 대한 걱정, 아내와의 사랑 등을 담은 이 글에서 여든다섯의 성상을 넘긴 인동초 DJ는 “인생은 생각할수록 아름답고, 역사는 발전한다.”고 했다. “생이 있는 한 길을 갈 것”이라고도 했다. 하늘에서도 무언가 열심히 메모하고 있을 고인이 그려진다. 작고 반듯하게 또박또박. 진경호 논설위원 jade@seoul.co.kr
  • [열린세상] ‘트랜스 DJ’의 시대를 열어야/김진 울산대 철학과 교수

    [열린세상] ‘트랜스 DJ’의 시대를 열어야/김진 울산대 철학과 교수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해 국민이 비통에 잠겼다. 운명적으로 비슷한 두 분의 전직 대통령을 한꺼번에 떠나보내게 된 충격이 클 수밖에 없다. ‘빨갱이’ ‘좌익 용공분자’ ‘후광’(後廣) ‘인동초’(忍冬草) ‘토머스 모어’ ‘동교동’ ‘행동하는 양심’ ‘아시아의 만델라’ ‘2000년 노벨평화상 수상자’ ‘햇볕정책’ ‘대한민국의 위대한 지도자’ 등은 김 전 대통령을 지칭하는 수사(修辭)들이다. ‘빨갱이’와 ‘좌익 용공분자’는 여운형 선생이 구성한 ‘건국준비위원회’에 일시 몸담았던 인연으로 평생의 꼬리표가 되었다. 그러나 6·25 전쟁 중 오히려 그는 우파 반동세력으로 몰려 복역한 바 있다. 1957년 가톨릭 교회의 영세를 받았으며, 세례명은 토머스 모어였다. 15세기말 영국의 대법관과 하원의장으로 활약했고, ‘유토피아’(1516)의 저자이기도 한 토머스 모어는 헨리 8세가 이혼 문제로 로마 교황청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한 데 불응, 반역죄로 처형된 인물이다. 토머스 모어는 1935년에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시성(諡聖)됐으며,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그를 정치가의 수호성인으로 선언했다. 우리 역시 김 전 대통령이 한국 민주주의의 수호성인으로 시성되기를 희망한다. ‘빨갱이’에서 ‘제15대 대한민국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김 전 대통령의 인생역정은 파란만장했다. 1971년 선거 지원유세서 그는 의문의 교통사고를 당하여 다리에 부상을 입었으며, 1973년 유신독재 치하 정보요원들에게 납치되어 두 차례의 죽을 고비를 넘겼다. 군사정권이 사형선고를 내릴 때마다 그는 불굴의 투지로 일어섰다.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 ‘인동초’(忍冬草)였고, ‘행동하는 양심’과 ‘아시아의 만델라’가 덧붙여졌다. 그리고 5·18 내란 음모사건으로 전두환 정권에 의하여 또 한 번 사형선고를 받았다. 1987년 ‘서울의 봄’과 6월 민중항쟁으로 얻어낸 민주정권의 수립 기회를 야권의 단일화 실패로 지연시킨 책임은 작다고 할 수 없다. 5년 후 노태우 정권 후계자로 지명된 김영삼 후보에게 패배하고 정계은퇴를 선언한 그를 영국으로 떠나보내면서 지지자들 역시 오열하고 세상을 등졌다. 우여곡절 끝, 1997년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는 제15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이후락과 전두환은 죽은 목숨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뇌리에 사무친 정적(政敵)의 이름들을 지우기 시작했다. 그 같은 용서와 화해의 노력은 서거 직전 병상에까지 계속되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우리 역사상 가장 성공한 대통령이었다. 1998년의 외환 위기사태를 3년 만에 극복했으며, 우리나라를 인터넷 강국으로 육성하고 각종 인권정책을 적극적으로 도입하였다. 2000년 6월, 분단 55년만에 남북정상회담을 개최하였으며, 햇볕정책으로 남북간 화해와 협력의 시대를 열었다. 그리고 노벨평화상을 수상함으로써 대한민국의 이름을 세계에 빛나게 했다. 그러나 햇볕정책에 정권의 명운을 걸었으면서도 북한의 핵 개발을 저지하지 못했던 것은 실책에 속한다. 자신의 햇볕정책을 전방위로 수행했던 정몽헌 현대아산 회장을 노무현 정권으로부터 끝까지 지켜주지 못한 것도 실책이었다. 또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를 이념적으로만 해석하여 민주당을 거리투쟁으로 내몰았던 것도 구시대의 이념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탓이었다. 독도문제를 지나치게 양보하고, 오는 9월3일로 100년이 만료되는 청·일 간도협정에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던 것도 한계가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이제 고(故) 김대중 대통령의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계승·발전시키기 위하여 그를 넘어서지 않으면 안 된다. ‘트랜스 DJ’, 그것은 바로 김대중 대통령의 서거를 통하여 그의 유지를 존중하되 그의 실책과 한계를 지양하면서, 내일의 삶에 필수적인 새로운 지혜를 창조하는 ‘희망의 변증법’을 펼치는 일이다. 김진 울산대 철학과 교수
  • [씨줄날줄] 인동초/김종면 논설위원

    적래부자시야(適來夫子時也) 적거부자순야(適去夫子順也). 지금 ‘장자’의 한 구절을 떠올려 본다. 선생께서 이 세상에 온 것은 올 때가 되었기 때문이고, 떠난 것 또한 떠날 순서가 되었기 때문이라는 그 섭리의 말. 하지만 그렇게 애써 담담함을 가장하면 할수록 더욱더 가슴 한편이 무너져내리는 것은 그 죽음의 그림자가 너무 짙기 때문이다. 모진 한파 속에서도 푸름을 잃지 않고 소담한 꽃을 피워내는 인동초(忍冬草). 김대중 전 대통령은 갔지만 남은 이들은 그를 보내지 못하고 있다. 그는 여느 정치인, 여느 대통령이 아니기에 사람들은 하늘을 부르고 땅을 치며 그의 죽음을 애통해한다. 한국 현대사의 대·소 사건을 그만큼 치열하게 몸으로 겪어온 사람은 없다. 서슬퍼런 독재의 칼날에 맞서 사자후를 토하던 모습, 그것은 흡사 덕을 잃은 정권은 민심에 의해 타도돼야 한다는 맹자의 방벌론(放伐論)을 방불케 하는 것이었다. 엄혹한 독재시절, 김대중 그 이름은 입에 올릴 수조차 없던 ‘금기어’였다. 재야인사, 동교동, DJ…은유와 상징이 그의 이름을 대신했고 용공분자, 국가반란의 수괴로까지 매도됐다. 다섯 차례의 죽을 고비를 넘기며 투옥과 연금의 나날을 보냈지만 그는 결코 좌절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건국 이후 최초의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룬 대통령이 됐다. 그는 분노를 다스리고 고독을 감내하며 내일을 준비했다. 모든 국민이 용서하고 화합해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고 사랑이 온누리에 넘치는 새로운 공동체를 꿈꿨다. 용서와 화해,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인동초 정신’이요 ‘김대중 정신’이 아닐까. 어린아이와도 같은 그 천진한 미소를 이제는 다시 볼 수 없다니…. 그의 죽음은 조각조각 갈린 우리 사회에 용광로 같은 화해의 계기를 만들었다. 평생 정치 숙적 YS가 화해를 청했고, 그를 죽음의 법정으로 몰고간 또 다른 전직 대통령도 손을 내밀었다. 이제 김 전 대통령은 민주화의 상징을 넘어 ‘화해의 상징’이라는 더 빛나는 이름으로 기억되어야 한다. 우러를수록 더욱 높고 뚫을수록 더욱 견고한 이여! 언뜻 보면 앞에 있는 듯하다가도 어느 순간 홀연히 뒤에 머무는 까마득한 봉우리. 이제부터 영원까지 부디 평안하소서. 김종면 논설위원 jmkim@seoul.co.kr
  • [김대중 前대통령 서거] 사선 다섯번 넘어… 민주주의 유토피아 꿈꿨다

    [김대중 前대통령 서거] 사선 다섯번 넘어… 민주주의 유토피아 꿈꿨다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은 ‘인동초’, ‘행동하는 양심’으로 불리며 반세기 한국 정치사를 풍미했다. 한국 정치사에서 ‘3김(金)시대’의 한 축이었던 고인(故人)은 1997년 겨울, 반세기만에 ‘선거혁명’을 통한 정권교체를 이뤘다. 3전4기로 대통령에 당선된 뒤에는 외환위기를 극복했고 2000년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켜 한반도 정세의 패러다임을 바꿨다. 5차례의 죽을 고비와 5년여의 감옥생활, 6년여의 가택연금, 3년의 망명생활 등 고인의 삶은 견디기 어려운 시련으로 점철됐다. 가톨릭 세례명인 ‘토마스 모어’처럼 고행하는 구도자의 삶을 이어온 셈이다. “정이 많은 분이다.” 영원한 비서실장인 민주당 박지원 의원은 김 전 대통령을 이같이 묘사했다. 말년에도 거의 매일 서울 동교동 자택을 드나든 박 의원은 “지난 1월 민주당 정세균 대표가 방문해 용산참사에 대해 말을 꺼내자 이내 김 전 대통령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면서 “평소에도 드라마 속 (비참한) 사람들을 보며 눈시울을 붉힐 만큼 평소 인정도 많으셨다.”고 전했다. 말년에는 미국의 버락 오바마 행정부 등장과 맞물려 케네디 전 대통령과 관련된 책을 탐독하고 여론주도층을 만나 서민과 비정규직을 위한 사회 안전망, 생산적 복지를 강조했다고 한다. 전남 목포에서 뱃길로 150리. 김 전 대통령은 1924년 매서운 바닷바람을 등진 하의도라는 작은 섬에서 3남2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신안군 하의면 후광리에는 지금도 생가터가 남아 있다. ‘후광’(後廣)이라는 호(號)도 여기서 따왔다. 중농의 아들이었던 그는 목포상고(현 전남제일고)에 수석 입학한 수재였지만 반일운동으로 학적부에 ‘시찰계요’라고 적힐 만큼 반골기질을 드러냈다. 1945년 약관의 나이에 ‘건국준비위원회’와 조선 신민당에 입당했지만 8개월 만에 탈당한다. 이어 3단계 통일방안(1972년)과 광주 민주화운동(1980년) 등을 거치면서 색깔론에 휘말렸다. 고인은 1946년 첫 부인 차용애 여사와 가정을 꾸리고 해운회사를 경영, 큰돈을 모은다. 뛰어난 상술로 목포일보를 인수한 뒤 주필을 겸하기도 했다. 자금을 끌어대고 경쟁상대를 꺾으며 사람의 마음을 낚는 장사와 정치는 닮은꼴이다. 1950년 한국전쟁 때는 우익단체 참여를 빌미로 인민군에게 처형될 위기에 몰렸지만 이송 중 극적으로 탈출, 첫 죽음의 고비를 넘긴다. 1954년 3대 민의원 선거에서 목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며 본격적으로 정치에 뛰어들었다. 3대를 포함, 4차례 낙선의 쓴잔을 연거푸 마셨다. 1958년 강원도 인제군 민의원 선거 때는 후보등록이 취소됐고, 1959년 보궐선거에선 색깔론에 휘말렸다. 4·19혁명이 일어난 1960년 선거에서도 낙선했다. 1961년 인제군 보궐선거에서 당선의 첫 기쁨을 누린 김 전 대통령. 하지만 사흘 만에 5·16을 맞아 반혁명사건에 연루돼 교도소로 직행한다. 토머스 모어의 교훈은 오히려 고난 극복의 힘이 됐다. “늦어도 100년 뒤면 (토머스 모어처럼) 역사에서 재평가받을 것”이라며 고통을 이겨냈다. 1962년 이희호 여사와 재혼한 고인은 이듬해 목포에서 민주당 후보로 공화당 후보를 제치고 당선됐다. 1964년 5시간20분간 행한 ‘필리버스터’ 발언과 6개월간 13차례 본회의 발언 등은 지금도 기록으로 남아 있다. 1971년 7대 대선은 기회이자 시련의 계기였다. 1970년 45세의 나이에 ‘40대 기수론’의 라이벌 김영삼(YS) 전 대통령을 물리치고 신민당 후보로 나섰지만 이듬해 선거에선 94만표 차로 패배했다. 이후 20년간 혹독한 시련이 밀려왔다. 일본 망명 중인 1973년 ‘김대중 납치사건’을 시작으로 전두환 군사정권까지 55차례의 연금생활, 5년반 동안의 감옥생활, 2차례의 망명생활을 겪었다. 1976년 명동 3·1구국선언으로 구속(긴급조치 9호 위반)됐고, 1981년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훗날 고인은 “솔직히 죽는 것이 두려웠지만 영원히 사는 길을 택했다.”고 회고했다. 가톨릭계의 구명운동 덕에 목숨을 건진 고인은 1982년 도미, 두 번째 망명길에 오른다. 한국인권문제연구소와 민주화추진협의회를 이끌며 민주화 운동의 외로운 무게중심이 됐고, ‘인동초’란 별칭도 얻게 된다. 1985년 12대 총선을 앞두고 전격 귀국한 고인은 김포공항에서 연행돼 가택연금에 처해졌다. 하지만 김영삼 전 대통령과 함께 만든 신한민주당이 2·12총선에서 109석을 확보, 1987년 6월 항쟁의 기틀을 마련한다. 사면복권 뒤 1987년 13대 대선에 출사표를 던졌지만 3위에 머무르며 김영삼 전 대통령과의 후보 단일화 실패에 따른 비난에 휩싸였다. 1988년 총선의 평민당 ‘황색 돌풍’으로 일선에 복귀했지만 1992년 12월 대선에서 패배한 뒤 정계은퇴를 선언한다. 고인은 “40여 년의 파란 많았던 정치생활에 사실상 종막을 고한다고 생각하니 감개무량한 심정을 금할 길이 없다.”며 대선 낙선의 소회를 곱씹었다. 막을 내릴 것 같던 정치인생은 영국으로 건너간 지 6개월만에 다시 불꽃을 살렸다. 1993년 귀국해 아태평화재단을 설립했고, 빗발치는 비판 여론을 무릅쓰고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했다. 이듬해 총선에서 제1야당으로 올라서자 대선 4번째 출마를 선언한다. ‘대통령병 환자’라는 비난이 일었지만 단 1.6%포인트의 표차이로 이회창 후보를 누르고 색깔론과 지역감정의 벽을 넘었다. 보수세력인 자민련과의 DJP연합이 힘이 됐지만, 역설적으로 색깔과 지역의 부조화스러운 조합이기도 했다. 고인의 대표 브랜드는 ‘햇볕정책’이다. 반세기 동안 닫혔던 북쪽의 문을 열게 하는 열쇠로, 서독 빌리 브란트 총리의 동방정책과 궤를 같이한다. 이를 바탕으로 이뤄진 역사적 남북정상회담은 한반도가 ‘레드 콤플렉스’를 벗어던지고 탈냉전체제로 진입하는 촉매제가 됐다. 고인을 한반도 유일의 노벨상 수상자로 만든 일대 사건이었고, 퇴임 뒤에도 논쟁이 있는 사안에 대해 비중있게 언급할 수 있는 유일한 지위를 부여했다. 고인은 대통령 임기말 측근들의 비리가 뒤늦게 터진 데다 아들들이 구속되는 등 마음고생도 적지 않았다. 6·15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키기 위해 북한과 밀거래한 사실은 안타까운 기록으로 남게 됐다. 또 완벽주의와 제왕학적 리더십은 권위주의적 통치라는 오명도 남겼다. 오상도 허백윤기자 sdoh@seoul.co.kr
  • 김대중 前 대통령 서거에 게임계도 추모 물결

    김대중 前 대통령 서거에 게임계도 추모 물결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를 기리기 위한 추모의 물결에 게임업계도 동참하고 있다. 19일 현재 플레이엔씨, 한게임, 넷마블, 넥슨, 피망 등 주요 게임포털들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를 애도합니다.’란 문구와 함께 로고의 색깔을 검은색으로 바꿨다. 인동초의 삶을 살다간 고 김 전 대통령은 ‘IT강국 대한민국’의 초석을 다졌다는 점에서 게임업계와 인연이 깊다. 불모지나 다름없었던 국내 게임산업이 온라인게임 산업을 중심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데는 IT산업의 비전을 제시하고 이속에서 희망을 찾았던 김 전 대통령의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김 전 대통령은 1998년 취임사를 통해 “세계에서 컴퓨터를 가장 잘 쓰는 나라를 만들어 정보대국의 토대를 튼튼히 하겠다.”고 IT강국 의지를 밝혔다. 실제로 김 전 대통령의 재임기간 동안 게임을 포함한 국내 IT산업은 급성장했다. 1998년 1만4,000명에 불과했던 초고속인터넷 가입자수는 2002년 1040만명으로 700배 이상 증가했다. 국민PC 사업으로 PC보급률도 높였다. 당시 엔씨소프트, 넥슨 등 국내 대표 온라인게임 업체들은 이러한 인프라를 바탕으로 세계무대를 향해 커갈 수 있는 결정적인 토대를 마련했다. 이렇듯 국내 게임산업이 코묻는 아이들의 동전이나 긁어모으는 동네 전자오락실 수준에서 잘나가는 현재의 문화산업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데는 김 전 대통령의 역할이 컸다는 게 지배적이다. 김정호 한국게임산업협회장은 “김 전 대통령은 민주화에 큰 획은 그으신 것만큼이나 우리나라가 IT강국이 될 수 있는 산파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사진제공 = 플레이엔씨 캡쳐 서울신문NTN 최승진 기자 shaii@seoulntn.com@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김대중 前대통령 서거… 민주화 꽃 피우고 ‘인동초’ 지다

    김대중 前대통령 서거… 민주화 꽃 피우고 ‘인동초’ 지다

    민주화의 상징이자 남북 화해에 큰 족적을 남긴 김대중 전 대통령이 18일 서거했다. 85세. 지난달 13일 서울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한 지 36일 만이다. 박창일 연세의료원장은 이날 오후 병원 브리핑룸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김 전 대통령이 오늘 오후 1시43분 서거했다.”면서 “폐렴으로 입원하셨지만 다발성 장기부전으로 인해 심장이 멎었고 급성호흡곤란증후군과 폐색전증을 이겨내지 못했다.”고 밝혔다. 민주당 박지원 의원은 회견에서 “부인 이희호 여사와 홍일·홍업·홍걸씨 3형제, 며느리를 비롯해 가족과 측근들이 임종을 했다.”고 발표했다. 박 의원은 “가족들의 뜻을 잘 받들고 정부와도 긴밀히 협조해 김 전 대통령의 마지막 가시는 길을 정중히 모시겠다.”고 말했다. 김 전 대통령은 국립 현충원 국가 원수 묘역에 안장될 예정이다. 김 전 대통령의 시신이 안치된 세브란스병원 영안실에는 국내외 각계각층 조문객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이날 밤까지 400 0여명의 조문객이 빈소를 찾았다. 김영삼 전 대통령과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부인 권양숙 여사 등이 문상했다. 김 전 대통령은 미열 증세로 병원에 입원한 지 이틀 만인 지난달 15일 폐렴 확진판정을 받고 중환자실로 옮겨졌으며 호흡부전으로 인공호흡기를 부착했다. 한때 병세가 호전돼 일반 병실로 갔으나 23일 폐색전증이 발생하면서 다시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29일에는 기관지 절개술을 받았다. 지난 1일 혈액투석 도중 갑자기 혈압이 떨어져 병세가 급속도로 악화된 김 전 대통령은 잠깐 나아지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으나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영면의 길에 들었다. 이명박 대통령은 이날 맹형규 청와대 정무수석으로부터 김 전 대통령의 서거 사실을 보고 받고 참모진과 긴급 상황점검회의를 가졌다. 이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김 전 대통령이 병석에서도 우리 사회의 화해를 이루는 계기를 만들었다.”며 애도의 뜻을 표했다고 이동관 청와대 대변인이 전했다. 이 대통령은 적절한 시기에 조문할 예정이며 영결식에도 참석할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 전 대통령은 ‘인동초’, ‘행동하는 양심’으로 불리며 굴곡 많은 한국 현대 정치사를 풍미했다. 1973년 도쿄 피랍사건 등을 비롯해 5차례의 죽을 고비와 5년여의 감옥생활, 6년여의 가택연금, 3년의 망명생활 등 김 전 대통령의 정치 역정은 파란만장했다. 한국 정치사에서 ‘3김(金)시대’의 한 축이었던 고인은 1997년 15대 대통령에 당선돼 반세기 만에 선거를 통한 평화적인 정권교체를 이뤄냈다. 대통령에 당선된 뒤에는 외환위기를 극복하고 남북분단 이후 처음으로 2000년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켜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김 전 대통령의 서거로 1960년대부터 김영삼·김대중·김종필 세 사람이 이끌어온 ‘3김 시대’는 사실상 막을 내리게 됐다. 이종락 허백윤 오달란기자 baikyoon@seoul.co.kr ■용어클릭 ●다발성 장기부전 한마디로 인체의 핵심 역할을 수행하는 주요 장기들이 동시에 나빠지는 상태로, 병명이라기보다 상황을 아우르는 지칭이다. 신체에 염증성 반응이 심해지면서 심장 기능이 급격히 떨어지고 의식장애가 오며 호흡부전·신부전·간부전 등의 증상이 동시에 나타나 의학적으로 수습이 어려운 상태를 말한다. 만성질환으로 인해 전신성 염증(패혈증)이 왔을 때 주로 발생하며, 심장 기능 정지 등 치명적인 쇼크를 부르는 게 일반적이다.
  • “위장 결혼해도 함께 살면 체류 연장”

    위장결혼으로 입국했지만 이후 애정이 싹터 실제로 결혼생활을 유지해온 중국여성에게 국내 체류를 허가해 줘야 한다는 법원 판결이 나왔다. 서울행정법원 행정12부(부장 장상균)는 중국인 여성 S(40)씨가 서울출입국관리사무소장을 상대로 제기한 체류기간 연장 불허결정 취소 소송에서 원고 승소판결했다고 18일 밝혔다. S씨는 2005년 11월 브로커를 통해 한국 남성 정모씨와 위장결혼을 한 뒤 혼인동거 체류자격(F-2)을 받아 입국했다. 하지만 한국에서 함께 생활을 하면서 정씨에게 애정을 느끼게 됐고, 이후 이들은 여느 부부처럼 사이좋게 지내 왔다. 그런데 지난해 이들이 위장결혼을 했다는 사실이 적발되고 말았다. S씨는 호적을 거짓으로 기재한 공전자기록 등 불실기재 혐의로 기소됐지만, 법원은 이들이 실제로 혼인 생활을 유지하고 있는 점 등을 감안해 벌금 300만원의 선고를 유예하는 선처를 베풀었다. 문제는 출입국관리소가 위장결혼을 이유로 S씨의 체류기간 연장허가 신청을 불허한 것. 1년마다 체류기간을 연장해야 하는 S씨는 남편을 포기할 수 없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재판부는 S씨의 손을 들어 주면서 “위장결혼은 출입국관리법상 체류허가 취소 사유에 해당하지만, 이들이 실질적으로 유효한 혼인생활을 유지해 왔고 S씨가 출국하면 지금까지 이룬 혼인생활이 파탄 위험에 놓이게 되므로 체류기간 연장을 거부한 처분은 재량권을 일탈·남용한 위법이 있다.”고 밝혔다. 앞서 인천지법 역시 중국동포 여성 P씨가 제기한 같은 취지의 소송에서 “위장결혼을 했더라도 실제로 결혼생활을 유지하고 있다면 ‘국민의 배우자’에 해당한다.”면서 체류기간 연장을 허가하라고 판결한 바 있다. 법원 관계자는 “위장결혼을 했어도 실질적인 혼인관계를 유지하면 그 혼인신고도 소급해 효력이 있다고 볼 수 있다.”면서 “최근 형사 사건에서도 이런 경우 선처하거나 무죄를 선고하는 경우가 많은데 행정 처분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뤄져야 한다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유지혜기자 wisepen@seoul.co.kr
  • 해외언론 “민주화의 상징, 김 前대통령 서거”

    해외언론 “민주화의 상징, 김 前대통령 서거”

    대한민국 제 15대 대통령을 지낸 김대중 전 대통령이 18일 오후 서거하자 외신도 발 빠르게 소식을 전하고 있다. 중국 신화통신은 김 전 대통령의 서거소식이 알려진 직후 인터넷판 톱기사로 ‘김대중 전 한국 대통령이 서거했다.’고 보도했다. 신화통신은 김 전 대통령의 출생부터 서거까지의 일대기를 자세히 소개하며 애도의 뜻을 표했다. 이 통신은 “김 전 대통령은 1998년 11월 중국과 국사(國事)를 논의하려 중국을 방문한 이후 여러 차례 방중했다.”면서 “특히 2009년 5월에는 중국인민외교학회의 초청을 받아 강연을 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뉴스전문사이트 ‘중궈왕’(china.com)도 김 전 대통령의 서거소식을 전하며 “그는 한국 민주화의 불굴의 상징이었다.”면서 “어려운 경제위기를 단시간 안에 회복했고, 한국을 IT선진국으로 이끈 대통령이었다.”고 전했다. 이어 “외교방면에서는 북한에 ‘햇볕정책’을 펼치며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회담에 이끌어내는데 성공했고, 이로써 남북관계의 긴장을 완화하고 경제융합을 이루는데 긍정적인 작용을 했다.”고 덧붙였다. 미국 언론도 발 빠르게 소식을 전했다. LA타임스는 서울발 장문의 기사를 싣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향년 85세로 서거했다.”면서 “과거 군사정권 하에서 자행된 사형선고와 암살기도에도 살아남은 반정부 인사이며 북한에 유례없는 ‘햇볕정책’으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인물”이라고 소개했다. 이어 “일부 서구인들은 김 전 대통령을 ‘아시아의 넬슨 만델라’라고 추앙하지만 오히려 자국민들에게는 상대적으로 인색한 평판을 받았다.”고 언급해 눈길을 모았다. 영국 BBC 방송은 김 전 대통령을 “(한국의) 역사를 쓴 인물”이라고 소개했다. 또 “한 평생을 민주화와 북한 관계 회복에 바쳤으며, 수차례 암살 시도와 사형 선고와 고문에도 살아남았다.”고 전하며 김 전 대통령의 ‘인동초의 삶’을 조명했다. 일본의 주요일간지인 요미우리와 아사히 신문도 각각 인터넷판 톱기사로 고인의 서거 소식을 실시간으로 보도했다. 이밖에도 중동 알자지라 방송과 워싱턴 포스트, CNN 방송 등 많은 매체들 역시 이를 전하며 관심과 애도를 표하고 있다. 사진=신화통신, CNN, BBC 캡처 서울신문 나우뉴스 송혜민·강경윤 기자 huimin0217@seoul.co.kr  @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김미화ㆍ손석희 라디오, 김대중 前 대통령 추모 방송

    김미화ㆍ손석희 라디오, 김대중 前 대통령 추모 방송

    MBC 라디오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추모 특집 방송을 마련한다. 18일 오후 6시 5분부터 방송되는 ‘김미화의 세계는 그리고 우리는’에서는 한완상 전 부총리, 소설가 유시춘 씨와의 인터뷰를 통해 김 전 대통령과 함께한 시간들을 돌아본다. 이어 ‘특집 미니 다큐’시간에는 2008년 10월 김미화와 김 전 대통령이 나눴던 인터뷰 내용을 소개한다. 또 19일 오전 6시 15분 ‘손석희의 시선집중’에서는 ‘김대중 전 대통령 추모특집-한국 민주화의 인동초, 지다’라는 이름의 특집 방송을 마련했다. 이 날 방송에서 김 전 대통령의 육성으로 구성된 미니 다큐멘터리를 방송하고 퇴임 이후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된 손석희와의 인터뷰 내용을 다시 들어본다. 사진제공 = MBC / 사진설명 = 2005년 2월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인터뷰하는 손석희 서울신문NTN 우혜영 기자 woo@seoulntn.com@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상상플러스’ DJ서거로 결방…‘다큐 3일’로 대체

    ‘상상플러스’ DJ서거로 결방…‘다큐 3일’로 대체

    KBS 2TV ‘상상플러스’가 18일 김대중 前 대통령의 서거로 결방된다. KBS 측은 18일 방송 예정이던 ‘상상플러스’ 대신 ‘다큐3일’을 방송하기로 결정했다. 김 전 대통령이 서거한 이날 방송 3사 가운데 유일하게 심야시간대 방송이 예정된 예능 프로그램이었던 ‘상상플러스’는 김보연, 남상미, 백지영, 서인영 등이 출연하는 ‘여름특집 2탄’을 방송할 예정이었다. 이외에도 KBS는 1TV ‘9시 뉴스’를 10분 늘려 70분으로 확대 편성했다. 또 뉴스 직후엔 당초 예정됐던 ‘시사기획 쌈’ 대신 김 전 대통령의 역정을 되돌아보는 보도특집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인동초의 삶과 꿈’이 방송된다. 한편 김대중(金大中.85) 前대통령은 지난달 13일 폐렴으로 신촌세브란스에 입원한 뒤 중환자실에서 집중치료를 받았지만 8월 18일 오후 1시43분 끝내 눈을 감고 말았다. 사진제공 = KBS 서울신문NTN 정병근 기자 oodless@seoulntn.com@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北억류 유씨 석방] “금강산·개성도 풀렸으면”

    현정은 회장이 방북한 상태에서 그동안 남북한 당국간에 뜨거운 현안이었던 유성진씨가 석방되자 현대그룹과 개성공단 입주기업들은 대북사업의 활성화를 기대하며 일제히 환영한다는 입장을 보였다. 현대그룹 관계자는 “유씨의 석방은 꼬여 있는 대북사업 문제를 풀 수 있는 단초였다.”면서 “현 회장이 귀환해 금강산 관광이나 개성관광 등 다른 문제들도 속 시원히 뚫렸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는 직원인 유씨 문제가 풀렸지만 금강산과 개성 관광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현대아산이 현재의 어려움에서 헤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현대측에서는 현 회장의 북한 체류기간이 길어지면서 내심 김정일 위원장 면담은 고사하고 유씨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오면 어쩌나 하는 우려를 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유씨 문제가 풀리면서 원했던 최소한의 성과는 거둔 만큼 안도하는 분위기도 감지된다. 이밖에 현대측은 현 회장 방북이 순수한 기업적 차원에서 이뤄진 것임을 누차에 걸쳐 강조해 눈길을 끌었다. 이번 현 회장의 방북이 정부의 메신저가 아니라 기업 경영자로서 북측에 억류돼 있는 직원 문제를 해결하고, 교착상태에 빠진 대북사업을 활성화하기 위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는 궁극적으로 남북문제는 기업이 아니라 정부 당국 간에 풀어야 할 사안이라는 인식 때문이다. 여기에는 조연인 현대가 너무 부각되는 것 아니냐는 일각의 우려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개성공단 입주기업들도 유씨의 석방에 환영의 뜻을 나타냈다. 유씨의 석방으로 그동안 악화됐던 남북관계가 개선되기를 기대했다. 이인동 개성공단기업협회 사무국장은 “유씨의 석방은 그동안 경색됐던 남북관계가 풀리는 시발점”이라며 “아울러 입주기업의 가족들에게는 가족들의 신변에 대한 불안감도 해소되고 바이어들에게도 개성공단이 앞으로 잘 될 것이라는 기대감도 준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개성공단 입주기업에 대한 대출자금 지원 등도 주문했다. 김성곤 김효섭기자 sunggone@seoul.co.kr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