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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남기씨 민주열사 곁 영면

    백남기씨 민주열사 곁 영면

    지난해 11월 14일 경찰의 물대포를 맞고 쓰러져 10개월 만에 숨진 백남기씨의 유해가 6일 오후 광주 북구 운정동 5·18 구묘역에 안장됐다. 이곳에는 이한열과 이철규, 강경대, 김남주 등 46명의 ‘민족·민주열사’가 잠들어 있다. 백남기 전남투쟁본부는 앞서 이날 오전 고인의 고향인 전남 보성 생가에서 추모식을 열었다. 이어 오후엔 광주 동구 금남로 옛 전남도청 앞 5·18 민주광장에서 시민 등 5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고인의 넋을 위로하는 노제를 열었다. 노제는 민중의례, 연도 낭독, 조사, 조가, 유가족 인사, 씻김굿 등의 순으로 진행됐다. 투쟁본부는 이어 영락공원에서 화장 절차를 밟고, 과거 5·18 열사들이 묻혀 있는 5·18 구묘역에 그의 유해를 안장했다. 고인은 중앙대 총학생회 부회장이던 1980년 5월 8일 당시 박정희 유신 잔당(전두환·노태우) 장례식을 주도하는 등 민주화운동에 앞장섰으며, 같은 해 5월 17일 계엄포고령 위반 혐의로 체포돼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이듬해 3월 풀려났다. 유가족들은 고인이 경찰 물대포에 맞아 쓰러져 의식불명이던 올해 초 광주시에 5·18 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 신청서를 제출해 현재 심사 중이다. 고인이 5·18 유공자로 결정되면 국립 5·18 민주묘지로 이장이 추진될 가능성도 있다. 고인은 지난해 11월 14일 쌀 수매가 인상 공약 이행 등을 촉구하기 위해 서울 광화문에서 열린 집회에 참가했다가 경찰이 발포한 살수를 맞아 쓰러진 뒤 병원으로 옮겨졌다. 그는 서울대병원에 317일 동안 머물다가 지난 9월 25일 숨졌다. 경찰은 백씨 시신에 대한 부검영장을 발부받고 집행을 시도했으나 무산됐고,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가 불거지고 나서 경찰은 부검영장 재발부를 포기했다. 즉, 고인이 숨진 지 41일 만에 영결식과 발인이 치러졌다. 광주 최치봉 기자 cbchoi@seoul.co.kr
  • 농부 백남기 광주 5.18묘역에 안장돼

    지난해 11월 14일 경찰 물대포를 맞고 쓰러져 10개월 만에 숨진 고 백남기 씨의 유해가 6일 오후 광주 북구 운정동 5·18 구묘역에 안장됐다. 이곳에는 이한열과 이철규, 강경대, 김남주 등 46명의 ‘민족·민주열사’가 잠들어 있다. 백남기 전남투쟁본부는 앞서 이날 오전 고인의 고향인 전남 보성 생가에서 추모식을 열었다. 이어 오후엔 광주 동구 금남로 옛 전남도청 앞 5·18 민주광장에서 시민 등 5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고인의 넋을 위로하는 노제를 열었다. 노제는 민중의례, 연도낭독, 조사, 조가, 유가족 인사, 씻김굿 등의 순으로 진행됐다. 투쟁본부는 이어 영락공원에서 화장 절차를 밟고, 과거 5·18 열사들이 묻혀 있는 5·18 구묘역에 그의 유해를 안장했다. 고인은 중앙대 총학생회 부회장이던 지난 1980년 5월8일 당시 박정희 유신 잔당(전두환·노태우) 장례식을 주도하는 등 민주화 운동에 앞장 섰으며, 같은 해 5월17일 계엄포고령 위반 혐의로 체포돼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이듬해 3월 풀려났다. 유가족들은 고인이 경찰 물대포에 맞아 쓰러져 의식불명이던 올해 초 광주시에 5·18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 신청서를 제출해 현재 심사 중이다. 백남기 농민이 5·18 유공자로 결정되면, 국립 5·18 민주묘지로 이장도 추진될 가능성도 있다. 고인은 지난해 11월14일 쌀 수매가 인상 공약 이행 등을 촉구하려고 서울 광화문에서 열린 집회에 참가했다가 경찰이 발포한 살수를 맞아 쓰러진 뒤 병원으로 옮겨졌다. 그는 서울대병원에서 317일 동안 머물다가 지난 9월25일 숨졌다. 경찰은 백씨 시신에 대한 부검영장을 발부받고 집행을 시도를 했으나 무산됐고,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가 불거지고 나서 경찰은 부검영장 재발부를 포기했다. 즉 고인이 숨진 지 41일 만에 영결식과 발인이 치러졌다. 광주 최치봉 기자 cbchoi@seoul.co.kr
  • 故 백남기 유족 “부검 반대”·우상호 “부검한다고 두번씩 달려드는 건 처음 본다”

    故 백남기 유족 “부검 반대”·우상호 “부검한다고 두번씩 달려드는 건 처음 본다”

    29일 법원이 고 백남기 농민의 부검영장을 발부했다. 이에 유족은 “아버지를 돌아가시게 만든 사람들 손에 다시 아버지 몸이 닿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라며 부검을 반대했다. 우상호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 또한 이날 오전 국회에서 “백남기 농민 가시는 길은 마지막 길 만큼은 국민들 애도 속에서 편안히 갔으면 좋겠다. 칼까지 휘둘러 뭐하는지 모르겠다”며 부검 시도 중단을 촉구했다. 그는 “한 농민의 죽음도 끝까지 갈등과 파국으로 모는 지 이해할 수 없다”면서 “도대체 이 정부가 곳곳에서 갈등을 해결하고 상처를 치유하기보다는 곳곳에서 오히려 갈등을 유발하고 자꾸 감정을 유발하는 정책만 피는데 도대체 왜 이러나”라고 질타했다. 그는 “이번처럼 부검한다고 두번씩 달려드는 것은 처음 본다”며 “제가 1987년 이한열 열사가 병원에서 27일간 백남기 농민처럼 누워계시다 돌아가셔서 장례식 집행위원장을 했다. 그 후에도 수많은 장례식장을 봐왔는데 지난 30년 사이 이런 일은 처음”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이한열 열사는 뇌속에 최류탄 파편이 있어 그 증거를 찾기 위해 부검했다”라며 “백남기 농민의 부검 이유가 뭔가. 생생히 영상으로 그 분 쓰러진 장면이 채증됐고 수개월간 병원에서 관찰한 의사들의 소견 외에 무엇이 또 필요한가”라고 반문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우상호 “백남기, 이한열 생각나게 해... 부검하는 이유 대체 뭐냐”

    우성호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가 29일 법원이 고 백남기씨의 부검영장을 발부한 것에 대해 강도 높에 비판했다. 우 원내대표는 이날 오전 국회에서 열린 정책조정회의에서 “지난 1987년 이한열 열사도 백남기 농민처럼 병원에서 누워있다가 돌아가셨다”면서 “이 열사는 뇌 속에 최루탄 파편이 있어 부검을 했는데, 백남기 농민을 부검하는 이유는 도대체 뭐냐”고 되물었다. 우 원내대표는 또 “생생한 영상으로 그 분이 쓰러진 장면이 채증됐고 수개월간 병원서 관찰한 의사들의 소견 외에 무엇이 또 필요하냐”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 정부는 곳곳에서 갈등을 해결하고 상처를 치유하기 보다는, 곳곳에서 오히려 갈등을 유발하고 감정싸움을 유발하는 정책만 편다”며 “도대체 왜 이러느냐. 왜 한 농민의 죽음을 끝까지 갈등과 파국으로 모는 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이어 “청와대가 뭘 하고 있는지를 모르겠다. 너무 갈등이 많고, 도처에 싸우지 않는 곳이 없다”며 “차분한 분위기 속에서 후속대책을 논의하자”고 호소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씨줄날줄] 백남기씨 부검 논란/임창용 논설위원

    [씨줄날줄] 백남기씨 부검 논란/임창용 논설위원

    1987년 7월 5일 새벽 신촌 세브란스병원에 경찰이 들이닥쳤다. 경찰이 쏜 최루탄을 맞고 한 달여간 사경을 헤매던 이한열군이 숨지자 바로 시체를 압수해 가려고 한 것이다. 병원에서 밤을 새우며 이한열을 지켜 온 수많은 학생들이 경찰을 온몸으로 막으면서 영장 집행은 무산됐다. 결국 가족과 교수, 학생 대표가 입회한 가운데 부검이 실시됐고, 최루탄 파편이 뇌를 파고들어 사망에 이른 것으로 사인이 최종 밝혀졌다. 시국 사건에서는 부검을 둘러싸고 공권력이 유족 또는 시민단체들과 충돌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 1987년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된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도 마찬가지다. 박군은 그해 1월 서울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조사를 받던 중 물고문을 당해 숨졌다. 경찰은 쇼크사라고 발표했다. “탁자를 탁 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황당한 설명이 이어졌다. 이를 도저히 믿기 어려웠던 당시 최환 검찰 공안부장은 변사 사건에 대한 상세한 보고를 요구했다. 경찰의 회유와 협박, 윗선에서의 거센 압력이 이어졌다고 한다. 최 부장이 버티자 경찰은 ‘그럼 경찰병원에서 부검을 하자’고 요구했다. 그러나 객관성 담보를 위해 한양대병원에서 당시 황적준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법의학과장이 안상수 검사, 한양대 병원 의사, 가족 대표 입회 아래 부검을 실시했다. 그날 부검으로 박종철군의 사인은 ‘쇼크’가 아니라 물고문이었음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2009년 용산 재개발 철거 현장에서 많은 사람이 숨진 ‘용산참사사건’에선 경찰이 철거민 유족들에게 알리지 않고 사고 당일 부검을 해 강한 의혹을 샀다. 미리 유족에게 통보해야 하는 법규정을 무시하고 작전을 치르듯 부검했기 때문이다. 유족들은 두개골이 훼손되고 이빨이 없는 등 시신 상태 등을 이유로 국과수의 ‘화재사’ 결론을 믿을 수 없다며 유족 입회하에 재부검하라고 요구했다. 지난해 민중 총궐기 시위 도중 경찰의 물대포에 맞아 의식불명에 빠졌던 백남기씨가 며칠 전 숨지면서 시체 부검을 놓고 경찰과 유족 측이 갈등을 빚고 있다. 경찰은 정확한 사인 규명을 위해 부검이 불가피하다는 입장이다. 유족의 반대에 압수수색 검증 영장을 신청했지만 법원에 의해 기각당했다. 유족은 “피해 상황에 대한 증거와 상세한 의료기록, 검안의 의견서 등 사망 과정이 투명하게 드러나 있다”며 부검에 반대하고 있다. 부검은 변사 사인을 밝히는 데 필수 과정이다. 다만 시신을 눈으로 검사하는 현장 검안과 의료기록만으로 사인 소명이 충분하면 생략된다. 백씨 사건처럼 경찰이나 유족, 정치권의 의견이 엇갈리는 경우엔 더 조심스러운 접근이 필요하다. 자칫 정치적 이해에 휘말리기 쉽기 때문이다. 부검이 꼭 필요하다면 이한열·박종철군의 사례처럼 유족이 신뢰하는 전문가 입회하에 시행하는 방안을 검토해봄 직하다. 임창용 논설위원 sdragon@seoul.co.kr
  • 바스러진 ‘L의 운동화’ 우리의 삶도 함께 훼손… 복원 아픔은 치유의 길

    바스러진 ‘L의 운동화’ 우리의 삶도 함께 훼손… 복원 아픔은 치유의 길

    ‘이한열 운동화’ 복원 과정 그려… “운동화는 피해자이자 증인… 복원의 의미 독자에게 묻고 또 물어” 1980년대 삼화고무에서 만든 타이거 운동화는 그 시절 ‘모두의 운동화’였다. 운동화는 1987년 6월 민주화 시위 현장도 디뎠다. 그리고 모두가 그 신을 신고 집으로 돌아갈 때 그러지 못한 한 청년이 있었다. 최루탄 쇳조각이 숨골에 박혀 숨진 스물한 살의 이한열이다. 그해 여름을 영영 건너오지 못한 청년, 주인을 잃고 28년을 홀로 버틴 운동화를 소설가 김숨(42)이 문장으로 복원했다. 새 장편 ‘L의 운동화’(민음사)다. 100여 조각으로 바스러진 이한열의 운동화는 ‘이미 사망 선고가 내려진 환자’나 마찬가지였다. 열, 빛, 산소, 오존, 물, 미생물로 열화된 운동화는 지난해 3월 김겸 미술품 복원가가 3개월간 매달린 끝에 제 모습을 회복했다. 작가는 지난해 4월 김겸 복원가의 강의를 듣다 이한열 운동화 복원에 대한 이야기에 빨려 들어갔다고 했다. “집에 돌아와 ‘써지면 쓰자’고 했는데 써지더라구요.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제게 왔어요. 인연이 닿았던 거죠.” 원고지 800쪽 분량인 작품에서 작가가 소설의 절반을 할애해 독자들에게 묻고 또 묻는 것은 ‘복원의 이유’다. “L의 운동화를 왜 복원해야 되는지 질문을 끊임없이 해야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건 곧 ‘왜 우리가 이한열이라는 인물을 기억해야 하는가’와 동등한 질문이거든요.” 이 과정에서 그는 치밀하게 조탁한 문장으로 현대 미술사의 문제작들을 숱하게 거론하며 사유의 재료들을 뿌려놓는다. 폴리우레탄으로 이뤄진 ‘물질’이자 공장에서 대량 생산된 ‘기성품’인 운동화를 왜 복원해야 하는 걸까. “이한열의 운동화는 지금 우리의 삶이 제대로 가고 있는지 묻는 것 같아요. 그의 운동화가 훼손되는 동안 우리의 삶도 많이 훼손됐죠. 개인사도 현대사도요. 그래선지 그의 운동화를 복원하는 건 우리의 훼손된 삶이나 정신을 복원하는 느낌이었어요.” 작가는 소설로도 답을 건넨다. L의 운동화 복원은 L을 애도하는 행위이자 L을 복원하는 작업이라고. 그건 운동화가 ‘L이라는 한 개인의 유품을 넘어서서 시대의 유품’이기 때문이라고. 복원을 고민하는 화자(복원가)에게 L기념관 관장은 이렇게 말한다. “피해자도, 증인도 없는 법정을 상상해 보았어요. (중략) 피해자가 이미 죽고 없으니, 피해자를 대신할 운동화를 어떻게든 살려야 하지 않을까요? 피해자이자 증인이니, 어떻게든 살아서 증언하도록요.”(55쪽) 작가는 작품에서 미군 장갑차에 치여 숨진 효순이, 미선이 사건, 제주 4·3사건, 일본군 위안부 문제 등 우리 근현대사의 ‘트라우마’로 남은 기억들도 불러낸다. 그가 올 하반기에 낼 장편은 위안부 할머니들을 다룬 ‘한 명’(현대문학)이다. 고통스러운 사건, 기억을 문장으로 되살린다는 점에서 이번 작품과 맥이 닿아 있다. 김숨의 소설 작업이 ‘복원’과 닮은꼴이라 해도 좋겠다. “복원의 의미가 기억해내는 것, 망각하고 있던 일을 되살리는 것이잖아요. 그래서 오랫동안 복원과 훼손의 문제에 대해 흥미를 갖고 있었어요. 복원은 물질에만 해당되는 문제가 아니에요. 트라우마를 겪은 집단이나 개인이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들을 기억하는 것 자체가 복원이거든요. 그걸 증언한다는 건 감당하고 아파해야 할 것도 많겠죠. 하지만 치유는 거기서부터 시작됩니다.” 정서린 기자 rin@seoul.co.kr
  • [커버스토리] 정진석 “기자 시절 우상호 총학생회장 내가 취재했잖아”

    [커버스토리] 정진석 “기자 시절 우상호 총학생회장 내가 취재했잖아”

    #1. “더불어민주당 우상호 원내대표가 연세대 총학생회장을 하면서 이한열 열사의 영정을 들고 있을 때 제가 사회부 기자로 취재를 하고 있었다.”(2016년 5월, 정진석 새누리당 원내대표) #2. “(김대중 정부 당시)청문회 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간사였던) 제가 찬성하면 (박지원 국민의당 원내대표가)증인 채택이 되는 거고 반대하면 안 되는 것이었는데 한번은 봐 드리고 한번은 하도록 했다.”(2016 5월, 정진석 원내대표 라디오 인터뷰) 대한민국은 학연과 지연, 혈연 등 사적 네트워크가 촘촘하게 얽힌 인맥(人脈) 공화국이다. 입법권력의 중심인 ‘여의도’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선거의 계절이면 없던 인연도 만들어 내는 게 국회의원들이다. 2015년 재·보궐 선거에 출마한 한 정치인이 지역구와의 인연을 언급하며 “집사람을 만나 연애했던 추억이 서린 곳”이라고 했던 일화는 유명하다. ●인맥공화국 축소판… 최대 학맥 서울대 82학번 영화 ‘내부자들’에서 보듯 국민이 막연하게 떠올리는 정치권 인맥의 이미지는 ‘비리·부패’와 맞물려 있다. 형님, 동생이 술잔을 부딪치는 과정에서 부당 거래가 넘쳐나는 식이다. 현 정부 들어 정국을 뒤흔들었던 ‘성완종 게이트’나 정운호 법조비리 사건도 ‘마당발’ 인맥과 얽혀 있다. 하지만 정치의 영역에서 인맥의 순기능이 절실할 때도 적지 않다. 꽉 막힌 정국에서 개인적 인연, 상호 신뢰에 기반한 관계 덕에 때론 숨통이 트이곤 한다. 한계산업 구조조정처럼 초당적 지혜를 모아야 할 때는 더욱 그렇다. 3일로 취임 한 달을 맞은 새누리당 정진석, 더민주 우상호 원내대표와 국민의당 박지원 원내대표의 ‘인연’이 주목받았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비리·부패 이미지… 의원들엔 ‘관계’ 순기능 지난해 별세한 박상천 전 민주당 대표와 박희태 전 국회의장의 인연은 여전히 회자된다. 서울대 법대 및 고등고시 동기인 두 사람은 1997년 국민회의 원내총무(지금의 원내대표격)였던 박상천 의원에 이어 박희태 의장이 신한국당 원내총무를 맡으면서 여야 원내 대결을 주도했고 2003년과 2008년 박희태 의장(한나라당)과 박상천 의원(새천년민주당, 통합민주당)은 각각 당 대표로서 다시 맞섰다. 20대 국회를 중심으로 정치권에 숨겨진 인맥의 단면을 들춰 보자. 임일영 기자 argus@seoul.co.kr 장진복 기자 viviana49@seoul.co.kr
  • [길섶에서] 어떤 후배/임창용 논설위원

    한동안 잊고 있던 오래전의 불편한 느낌을 떠올린 건 한 대학 후배 때문이었다. 28년 만에 동문 모임에서 본 그는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온 듯 생생하게 기억을 복원시켰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한가운데 섰던 후배다. 항쟁의 도화선이 된 연세대생 이한열이 최루탄을 맞아 쓰러지는 순간 뒤에서 부축했던 친구다. 그 자신도 며칠 뒤 최루탄에 맞아 의식불명에 빠졌다가 뇌 수술을 받고 가까스로 깨어났다. 이한열의 피격 순간을 담은 대형 걸개그림은 이후 6월 항쟁의 상징이 됐다. 80년대 민주항쟁에서 난 참여하는 듯 마는 듯 경계에 있었다. 당위와 현실에 두 발을 어정쩡하게 걸친 채였다. 그래선지 묵직하게 체한 듯 불편했다. 그런 느낌은 잊고 있다가도 빚쟁이처럼 불쑥불쑥 찾아왔다. 영화 ‘동주’를 보았을 때, 한강의 맨부커상 수상 소식을 듣고도 그랬다. 한강은 “깊이 잠든 한국에 감사드린다”고 소감을 전했다. 우리 현실을 꼬집는 반어적 의미로 읽힌다. 그는 광주민주화운동을 다룬 ‘소년이 온다’에서도 ‘광주가 수없이 되태어나 살해되었다’며 광주가 현재진행형임을 깨우쳐 줬다. ‘깊이 잠든 한국’은 현실의 야만을 말하는 것일까. 임창용 논설위원 sdragon@seoul.co.kr
  • DJ가 영입한 운동권 ‘젊은피’… 친노·친문과 친한 범주류

    DJ가 영입한 운동권 ‘젊은피’… 친노·친문과 친한 범주류

    원내외 대변인만 8번 맡은 고수 김종인과는 ‘민생 우선’ 공감대 金 “호흡 안 맞겠냐” 협력 의지 4일 더불어민주당의 새 원내대표로 선출된 우상호 의원은 ‘86(80년대 학번·60년대생) 운동권 그룹’의 대표주자로 분류된다. 우 의원은 1987년 연세대 총학생회장과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부의장을 하면서 민주화운동 선봉에 섰다. ‘6월 항쟁’ 시위 과정에서 숨진 대학 후배 이한열씨를 위한 서울시청 앞 대규모 장례식의 집행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2000년 김대중(DJ) 전 대통령이 전대협 출신인 이인영 의원과 함께 ‘젊은 피’로 영입하면서 제도권 정치에 진입했다. 하지만 16대 총선에서 새천년민주당 소속으로 서대문갑에 출마했으나 연세대 81학번 동문인 당시 한나라당 이성헌 전 의원에게 패했다. 이를 포함해 20대 총선까지 이 전 의원과 다섯 번 승부를 겨뤄 5판 3승을 거뒀다. 우 의원은 원내외에서 총 8번 대변인을 역임한 경력도 갖고 있어 ‘당의 입’으로 불린다. 우 의원이 원내대표로 선출되면서 김종인 비상대책위원회 대표와의 관계에도 관심이 쏠린다. 일단 김 대표와 우 의원이 지난해 ‘문재인·이종걸’ 투톱의 갈등을 재현할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두 사람이 수권 정당을 목표로 ‘민생 이슈’를 전면에 내걸어야 한다는 점에서 일치된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날 우 의원은 원내대표 수락연설에서 “민생의 고단한 삶을 위로하고 새로운 해법을 제시하겠다”고 밝혔다. 김 대표도 경제비상대책기구 인선을 서두르며 경제민주화를 앞세우고 있다. 일각에서는 우 의원이 86 운동권 출신이라는 점에서 김 대표와 충돌할 거라는 의견도 있다. 그동안 김 대표는 낡은 운동권 정당 개혁을 강조한 바 있다. 그러나 김 대표는 이날 ‘우 의원과 호흡이 잘 맞겠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호흡이 안 맞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며 협력 의사를 밝혔다. 우 의원은 친노(친노무현)·친문(친문재인) 직계는 아니지만 범주류로 분류되며 그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지난해 국민의당 안철수 상임공동대표의 탈당 국면에서 당내 수도권 및 중진 의원들 주도로 만들어진 중재안을 당시 대표였던 문재인 의원에게 직접 전달하며 소통 채널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범수 기자 bulse46@seoul.co.kr
  • [서울포토] 이한열 묘소 참배하는 문재인 전 대표

    [서울포토] 이한열 묘소 참배하는 문재인 전 대표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전 대표가 8일 오전 김홍걸 광주공동선대위원장과 함께 광주 북구 민족민주열사묘역을 찾아 이한열 열사의 묘소에서 참배를 하고 있다. 정연호 기자 tpgod@seoul.co.kr
  • 공군 부사관 집단 가혹행위 및 성추행 사건 축소 은폐관련 기자회견

    공군 부사관 집단 가혹행위 및 성추행 사건 축소 은폐관련 기자회견

    마포 이한열 기념관에서 군인권센터 주최로 공군 부사관 집단 가혹행위 및 성추행 사건 축소 은폐관련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안주영 기자 jya@seoul.co.kr
  • 6월 민주항쟁 주역 이한열 운동화 복원 과정 토대로 장편소설 나온다

    6월 민주항쟁 주역 이한열 운동화 복원 과정 토대로 장편소설 나온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주역 고 이한열 열사가 숨질 때 신었던 운동화(위 사진)를 복원하는 과정이 소설로 나온다. 밑창이 100여 조각으로 부서질 만큼 심하게 손상됐던 이 열사의 운동화는 올해 그의 28주기를 맞아 복원돼 현재 이한열기념관에 전시돼 있다. 18일 이한열기념사업회에 따르면 소설가 김숨(41·여)씨는 이 열사의 운동화 복원 과정을 모티브로 한 장편소설 ‘L의 운동화’를 내년 초 출간을 목표로 집필 중이다. 작가는 ‘투견’, ‘침대’ 등 소설집과 장편소설 ‘백치들’ 등을 냈다. L의 운동화는 미술품 복원 전문가를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이 열사의 운동화가 복원되는 과정을 묘사한다. 김 작가는 복원 작업을 맡은 김겸 박사의 미술품 복원에 관한 강의를 들은 것을 계기로 집필을 마음먹고 경기도 과천연구실에서 김 박사를 인터뷰하고 복원 작업을 지켜봤다. 김 작가는 “운동화 복원 소식을 듣고 마음이 떨렸고 복원 과정을 세세하게 묘사하는 것만으로도 소설이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김 작가는 소설에 들어갈 이한열 열사의 생존 당시 이야기와 선후배 및 유족들의 뒷이야기 등도 사업회를 통해 전해들었다. 그는 “소설을 쓰기 전까지만 해도 6월 민주항쟁의 기폭제가 된 역사적 인물로만 알고 있었지만, 소설을 쓰면서 이 열사가 더욱 가깝게 다가왔다”면서 “그는 우리 모두가 기억해야 할 형, 오빠, 남동생이자 아들”이라고 말했다. 오세진 기자 5sjin@seoul.co.kr
  • 잊혀졌던 이한열 피 묻은 깃발 발견

    잊혀졌던 이한열 피 묻은 깃발 발견

    6월 민주항쟁의 주역인 고 이한열 열사의 혈흔이 묻은 깃발이 철거가 예정된 건물 창고에 15년여간 방치돼 있다가 뒤늦게 발견돼 이한열기념관의 품으로 돌아갔다. 13일 이한열기념사업회에 따르면 지난달 7일 연세대 학생인 정우민(22·도시공학과), 강승윤(22·전기전자공학부)씨가 ‘연세 화학공학과’라는 글자가 적힌 깃발을 사업회에 기증했다. 붉은 천 위에 금색 글자가 새겨진 깃발 아래 동판에는 ‘87년 6월 9일 피 흘리는 이한열 열사를 감쌌던 연세대학교 화학공학과 깃발, 2001년 6월 9일 제작, 87년 화공과 깃발의 보존을 위한 특별위원회’라고 적혀 있다. 핏자국처럼 보이는 검붉은 자국도 군데군데 눈에 띄었다. 정씨와 강씨가 발견한 천이 바로 이 열사가 최루탄을 맞고 숨진 1987년 6월 9일 화공과 학생들이 전두환 정권 규탄 시위 현장에 들고 나간 학과 깃발이다. 이 열사를 기리기 위해 2001년 화공과 졸업생과 재학생 20여명이 특별위원회를 만들어 영구 보존을 목적으로 이 깃발을 액자 형태로 테두리 처리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인수인계가 제대로 되지 않아 철거를 앞둔 건물 캐비닛에 그대로 방치돼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오세진 기자 5sjin@seoul.co.kr
  • “이한열 운동화는 역사 담긴 예술 작품”

    “이한열 운동화는 역사 담긴 예술 작품”

    세계적 미술품 복원 전문가인 미국의 수전 슈슬러(62·여)가 최근 복원된 고 이한열씨의 운동화에 대해 “역사가 담긴 하나의 예술 작품”이라며 찬사를 보냈다. 1987년 6월 9일 이씨가 전두환 정권을 규탄하는 시위 도중 최루탄을 맞고 쓰러질 당시 신고 있던 운동화는 세월이 흐르면서 밑창 고무가 여러 조각으로 부서지는 등 손상이 심해졌다. 운동화는 올해 이씨 28주기를 맞아 미술품 복원 전문가 김겸(47) 박사의 손에 의해 복원돼 최근 서울 마포구 이한열기념관에 전시됐다. 국내 근대문화제 보존과 활용을 주제로 한 학술행사에 참석한 슈슬러는 14일 “이한열을 알고 있다”며 “그의 복원된 운동화를 접하면서 당시 사건이 한층 가깝게 다가왔다”고 말했다. 미국에서 30여년간 미술품 복원 전문가로 활동한 그는 “복원 분야에서는 순수 미술품 복원을 좀 더 높은 차원으로 여기고 운동화와 같은 일반 사물 복원은 다소 하찮게 보는 시각이 있다”며 “하지만 이한열의 운동화는 역사의 이야기가 담긴 사물로 순수 미술품만큼이나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강조했다. 슈슬러는 “운동화의 상태가 너무 좋지 않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려운 작업이었을 것”이라면서 “나였다면 이 작업을 선뜻 맡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민석 기자 shiho@seoul.co.kr
  • “이한열 열사의 민주화 열망 52t 보령암에 담아낼 것”

    “이한열 열사의 민주화 열망 52t 보령암에 담아낼 것”

    “새 기념비가 사람들에게 1987년 6월의 함성을 다시 떠올리게 하는 상징이자 통로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한열은 28년 전 독재에 저항하던 모든 젊은이들의 모습 그 자체이니까요.” 26일 경기 남양주시 와부읍 석주조각원. 이경복(50) 작가는 이한열 열사의 새 기념비 제작의 막바지 작업을 하느라 5월 불볕더위도 잊은 듯했다. 전두환 독재정권을 향한 민주화 외침이 전국을 울리던 그해 6월 9일. 연세대 2학년 이한열이 머리에 최루탄을 맞고 쓰러졌다. 이한열은 그로부터 27일 만에 숨을 거뒀지만 그의 죽음은 대한민국 역사의 지침을 돌려놓는 위대한 이정표가 됐다. 그의 피가 연세대 정문에 뿌려지고 난 이듬해, 넋을 기리기 위해 교내 한열동산에 추모비가 세워졌다. 하지만 30년에 가까운 풍상 속에 추모비는 곳곳에 상처가 났다. 이한열기념사업회는 기념비를 새로 만들기로 하고 이 작가에게 제작을 의뢰했다. 이 작가는 이 분야의 전문가다. 2011년 러시아 연해주 지역에 새롭게 세워진 ‘안중근 외 11인의 단지동맹 기념비’가 그의 작품이다. 그는 이날 높이 1.3m의 원석 주위를 맴돌며 쉴 틈 없이 일했다. 올 3월 본격적으로 시작된 이 작업에 석공예명장 김동철(53)씨 등 베테랑 석장 4명이 달라붙었다. 기념비는 다음달 9일 한열동산에서 처음 공개된다. 이 작가와 이한열기념사업회는 이 상징물의 명칭을 ‘추모비’에서 ‘기념비’로 바꿨다.“이한열이라는 인물에 대한 추모를 넘어서 그의 죽음을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과 함께 민주화 항쟁의 도화선으로 기억하자는 의미입니다.” 기념비의 원석은 52t 짜리 보령암이다. 보령암은 검은 빛을 내는 화강암 중에서도 입자가 곱고 단단해 보존성이 뛰어난 원석으로 알려져있다. “한국 민주주의 격동기의 기억을 간직하는 기념비이기에 널찍한 모습에 강인한 기운을 지닌 원석을 골랐습니다.” 기념비에는 최루탄을 맞은 이 열사가 7월 5일 숨지고, 7월 9일 국민장이 치러질 때 나이가 22살이었다는 것을 함축하는 ‘198769757922’이라는 숫자가 새겨진다. 기념비 앞에는 디지털 시계도 함께 설치된다. 이 작가는 “기념비를 지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현재의 나와 기념비가 설명하고 있는 이한열 열사 사망 사건과의 관계를 질문해볼 수 있도록 구상했다”고 했다. 28년간 연세대 한열동산을 지킨 이한열열사추모비는 추후 보존작업을 거쳐 연세대 박물관에 전시될 예정이다. 이 추모비의 보존 작업 역시 이 작가가 맡았다. 최훈진 기자 choigiza@seoul.co.kr
  • [단독] “이한열 열사의 민주화 열망 52t 보령석에 담아낼 것”

    [단독] “이한열 열사의 민주화 열망 52t 보령석에 담아낼 것”

    “새 기념비가 사람들에게 1987년 6월의 함성을 다시 떠올리게 하는 상징이자 통로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한열은 28년 전 독재에 저항하던 모든 젊은이들의 모습 그 자체이니까요.” 26일 경기 남양주시 와부읍 석주조각원. 이경복(50) 작가는 이한열 열사의 새 기념비 제작 막바지 작업을 하느라 5월 불볕더위도 잊은 듯했다. 전두환 독재정권을 향한 민주화 외침이 전국을 울리던 그해 6월 9일. 연세대 2학년 이한열이 머리에 최루탄을 맞고 쓰러졌다. 이한열은 그로부터 27일 만에 숨을 거뒀지만 그의 죽음은 대한민국 역사의 지침을 돌려놓는 위대한 이정표가 됐다. 그의 피가 연세대 정문에 뿌려지고 난 이듬해, 넋을 기리기 위해 교내 한열동산에 추모비가 세워졌다. 하지만 30년에 가까운 풍상 속에 추모비는 곳곳에 상처가 났다. 이한열기념사업회는 기념비를 새로 만들기로 하고 이 작가에게 제작을 의뢰했다. 이 작가는 이 분야의 전문가다. 2011년 러시아 연해주 지역에 새롭게 세워진 ‘안중근 외 11인의 단지동맹 기념비’가 그의 작품이다. 그는 이날 높이 1.3m의 원석 주위를 맴돌며 쉴 틈 없이 일했다. 올 3월 본격적으로 시작된 이 작업에 석공예명장 김동철(53)씨 등 베테랑 석장 4명이 달라붙었다. 기념비는 다음달 9일 한열동산에서 처음 공개된다. 이 작가와 이한열기념사업회는 이 상징물의 명칭을 ‘추모비’에서 ‘기념비’로 바꿨다. “이한열이라는 인물에 대한 추모를 넘어서 87년 6월 민주화 항쟁 과정에서 있었던 많은 헌신과 희생들을 기억하자는 의미입니다.” 기념비의 원석은 52t짜리 보령석이다. 보령석은 검은빛을 내는 화강암 중에서도 입자가 곱고 단단해 보존성이 뛰어난 원석으로 알려졌다. “한국 민주주의 격동기의 기억을 간직하는 기념비이기에 널찍한 모습에 강인한 기운을 지닌 원석을 골랐습니다.” 기념비에는 최루탄을 맞은 이 열사가 7월 5일 숨지고, 7월 9일 국민장이 치러질 때 나이가 22살이었다는 것을 함축하는 ‘198769757922’이라는 숫자가 새겨진다. 기념비 앞에는 디지털 시계도 함께 설치된다. 이 작가는 “기념비를 지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오늘의 나와 이한열 열사가 민주화를 외쳤던 시대의 관계를 질문해 볼 수 있도록 구상했다”고 밝혔다. 28년간 연세대 한열동산을 지킨 이한열열사추모비는 추후 보존 작업을 거쳐 연세대 박물관에 전시될 예정이다. 이 추모비의 보존 작업 역시 이 작가가 맡았다. 최훈진 기자 choigiza@seoul.co.kr
  • 김무성·문재인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

    김무성·문재인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

    공무원연금 개혁안 등 정치 현안을 두고 대립하고 있는 여야 대표가 18일 나란히 5·18광주민주화운동 기념식에 참석해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했다. 광주 국립5·18민주묘지의 기념식에 참석한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와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는 우천으로 흰색 우비를 입고 행사장 맨 앞줄에 나란히 앉았다. 양당 대표와 정의화 국회의장 등 참석자 대부분은 행사 마지막에 합창 형식으로 불린 ‘임을 위한 행진곡’을 따라 제창했지만 국무총리대행으로 참석한 최경환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과 박승춘 국가보훈처장은 부르지 않았다. 양당 대표는 전야제에서 ‘불청객’ 취급을 받았던 것에 함께 유감을 표한 것으로 전해졌다. 김 대표는 전야제 행사장에서 물세례를 받았고, 문 대표도 최근 당의 상황이 반영된 듯 환영받지 못했다. 유은혜 새정치연합 대변인은 “문 대표는 전야제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김 대표에게 안타깝게 생각한다고 말했다”면서 “김 대표에게 나가라고 한 것은 주최 측의 공식 입장이 아니라 한 사람의 돌발행동이었다고 설명했다”고 전했다. 김 대표도 이날 기념식이 끝나고 취재진과 만난 자리에서 “(문 대표와) 어젯밤 상황에 대해 얘기했다”고 말했다. 공무원연금 개혁안 등에 대해서는 논의하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문 대표는 이날 기념식에 참석하기 한 시간 전 망월동 5·18 구묘역에 들러 예를 올렸다. 이어 이한열 열사 묘소와 김남주 시인 등의 묘소를 하나하나 찾기도 했다. 문 대표는 “저와 우리 당은 광주정신으로 더 통합하고 더 혁신해서 이 땅의 민주주의를 반드시 지켜내겠다”고 말했다. 문 대표는 전날 광주 서을에서 당선된 천정배 의원과 심야 회동을 가졌다. 양측의 만남은 천 의원이 지난 3월 새정치연합을 탈당한 후 처음이다. 문 대표 측에서 먼저 연락해 만남이 성사됐으며 별도 배석자 없이 한 시간가량 술잔을 기울이며 대화를 이어간 것으로 알려졌다. 기념식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한 것과 관련해 김 대표는 “어제 (정의화) 국회의장과 밤늦게 이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 이것은 제창돼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광주 안석 기자 sartori@seoul.co.kr 광주 한재희 기자 jh@seoul.co.kr
  • “최차규, 부대비로 1300만원 옥침대 사”

    “최차규, 부대비로 1300만원 옥침대 사”

    최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상에서 각종 의혹이 제기된 최차규 공군참모총장이 과거 지휘관으로 근무하면서 부대 운영비를 개인 용도로 썼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임태훈 군인권센터 소장은 30일 서울 서대문구 이한열기념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최 총장이 2008~2009년 공군 제10전투비행단장 재임 당시 부대 운영비 300만원을 착복한 것으로 의심된다”고 주장했다. “당시 군 수사라인은 착복한 돈의 용처가 명확하고 추가 횡령이 있으리라 판단해 수사를 개시하려 했으나 외압으로 하지 못했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임 소장은 또 “최 총장이 (공군참모총장으로 부임한) 지난해 4월 이후 아들을 서울 홍대까지 관용차로 태워 주라고 운전병에게 지시했고, 8~9월쯤 최 총장 아들이 공관 헌병에게 문을 늦게 열었다는 이유로 욕설을 한 사실도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고 주장했다. 군인권센터는 최 총장이 부대 비용으로 1300여만원 상당의 외국산 옥침대를 사들였고, 공관 천장과 바닥 공사에 1억 8000만원을 지출했다는 의혹도 제기했다. 공군 공보실은 “최 총장은 단장 재임 시기를 포함해 복무 기간 동안 부정한 돈도 받거나 유용한 적이 없다”며 “군인권센터 주장은 일주일 동안 공관병으로 근무했을 뿐인 예비역 병사의 근거 없는 주장을 바탕으로 한 것”이라고 반박했다. 이어 “수입 옥침대 의혹은 사실과 다르며 375만원 상당의 국산 침대를 구매했다”고 밝혔다. 최훈진 기자 choigiza@seoul.co.kr
  • ‘6월 항쟁 도화선’ 이한열의 최후 함께한 운동화 복원

    ‘6월 항쟁 도화선’ 이한열의 최후 함께한 운동화 복원

    전두환 독재정권을 향한 국민들의 민주화 외침이 전국을 울리던 1987년 6월 9일. 연세대 2학년 이한열이 머리에 최루탄을 맞고 고꾸라졌다. 이한열은 27일 만에 숨을 거뒀지만 그의 죽음은 대한민국 역사의 지침을 돌려세우는 위대한 이정표가 됐다. 그가 최후의 순간에 신고 있었던 운동화가 28년 만에 복원된다. 1990년대 부도가 난 삼화고무의 ‘타이거’ 제품인 이 운동화는 현재 폴리우레탄 재질의 밑창이 부스러지는 등 만지지도 못할 상황이다. 한 짝만 남은 이한열의 운동화는 가족이 보관하다 2004년 이한열기념관으로 옮겨졌다. 기념관은 지난해 고인의 옷가지 등 유품을 보존 처리했지만 운동화는 복원 전문가를 찾지 못해 처리를 미뤄 왔다. 운동화의 복원을 맡은 사람은 근현대 미술품 복원 전문가 김겸(47) 박사다. 김 박사는 “많은 이야기가 담긴 운동화이기에 이한열 열사가 신던 그 상태로 되돌리자는 목표를 세웠다”면서 “보관이 잘못돼 변형된 부분은 어쩔 수 없지만 나머지는 최대한 본래 상태로 복원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 박사는 미국에서 미술가 마르셀 뒤샹의 폴리우레탄 작품을 보존 처리한 기록을 참고하고 있다. 김 박사는 원제품 보존을 위해 운동화 끈조차 풀지 않고 작업 중이다. 그는 “이한열의 이야기는 곧 우리 세대의 이야기”라면서 “역사성을 지닌 사물은 원형대로 관리하고 유지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최훈진 기자 choigiza@seoul.co.kr
  • [단독] 친일작가 가옥에 밀려 미래유산 안 된 반민특위 터

    [단독] 친일작가 가옥에 밀려 미래유산 안 된 반민특위 터

    친일 논란 인물의 가옥이 ‘서울 미래유산’에 포함되는가 하면, 참스승상을 정립하겠다며 시작한 ‘이달의 스승’ 첫 대상자로 친일 인사가 뽑혀 논란이 예상된다. 시민사회단체와 학계에서는 “서울시와 교육부의 몰역사성이 드러난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8일 서울시에 따르면 지난 1일 공개된 서울시미래유산 홈페이지에는 1980년대 대표적 공안사건인 ‘학림사건’의 발원지인 대학로 학림다방과 엘리트스포츠의 요람 태릉선수촌,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헌책방 대오서점 등과 함께 친일 논란이 제기된 시인 노천명·서정주, 교육자 겸 정치인 김성수의 가옥도 포함된 것으로 확인됐다. 종로구 필운대로의 노천명 가옥은 그가 1949~1957년 거주했던 곳으로 “현재 서촌에 몇개 남지 않은 한옥으로 보존할 가치가 높다”는 이유로 뽑혔다. 1969년 지어진 관악구 남부순환로의 서정주 가옥은 현재 ‘서정주 기념관’으로 쓰이고 있다. 두 시인은 태평양전쟁과 강제 징병 찬양시를 써,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2009년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4인 명단에 포함됐다. 종로구 계동길의 김성수 가옥은 1918~1955년 김성수가 거주했던 곳으로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의 배후지원 및 민족교육, 민족문화의 보급을 위해 노력했던 장소로 보존가치가 있다”는 명목으로 뽑혔다. 하지만 김성수는 조선총독부의 태평양전쟁 동원을 위한 징병 및 학병 지원을 찬양·독려한 점 등이 인정돼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 포함됐다. 후손들이 소송을 제기했지만, 서울행정법원은 “1942~1944년 김성수가 전국 일간지에 태평양전쟁 동원을 위한 징병 및 학병을 찬양하며 선전·선동을 하는 글을 지속적으로 기고한 점 등이 인정된다”며 친일진상규명위 결정이 적법하다고 판결했다. 앞서 서울시는 2012년 급속한 사회변화 속에서 근·현대 유산이 사라질 것을 우려해 ‘서울미래유산 보존사업’을 시작했다. 2013년 293건에 이어 지난해 55건 등 모두 350여건의 미래유산을 선정했다. 하지만 친일 논란을 빚은 인물들의 유산은 뽑힌 반면, 1980~1990년대 민주화운동의 상징적 유산들은 예비후보에 포함됐다가 최종 선정과정에서 제외된 것으로 확인됐다. 1987년 6월항쟁의 도화선이 된 이한열 열사의 기념비, 기념관과 1991년 시위도중 백골단에 맞아 강경대 열사가 숨진 명지대 정문 담장 등이 대표적이다. 1948년 친일파 청산을 위해 제헌국회에서 설치했던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본부 표석은 시민단체 추천에도 후보조차 오르지 못했다. 미래유산 선정에 참여한 서울연구원 민현석 박사는 “친일 행적에 대해 고민하다가 (친일 유산을 빼버리면) 남길 게 없더라”면서 “친일을 했다고 해도 그들의 문학사·정치사적 의미가 더 크다고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교육부의 ‘이달의 스승’은 첫 선정자부터 논란에 휩싸였다. 교육부는 지난달 “끝까지 창씨개명을 하지 않고 매일 아침 학생들에게 우리말로 훈화한 청렴한 교육자”라며 서울대 총장을 지낸 최규동 조선교육연합회(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의 전신) 초대 회장을 선정했다. 하지만 역사정의실천연대는 일제시대 관변잡지 ‘문교의 조선’ 1942년 6월호에 드러난 그의 친일 행적을 공개했다. 당시 중동학교 교장이자 수학교사였던 최규동은 ‘죽음으로써 임금(천황)의 은혜에 보답하다’라는 제목의 논설에서 “기다리고 바라던 조선동포에 대한 병역법 시행이 확정돼 반도 2400만 민중도 마침내 병역에 복무하는 영예를 짊어지게 되었다”며 “조선동포가 내선일체의 이념에 눈을 뜨고 마음속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정성을 피력해 온 결과이자, 폐하(천황)의 중요한 신하라는 자질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교육부 관계자는 “그가 친일 인명사전에도 나오지 않았고, 논설이 일본어로 돼 찾기가 어려웠다”며 “역사 전문기관 등에 재검토를 요청하고 계기 수업 등은 중단토록 하겠다”고 말했다. 방은희 역사정의실천연대 사무국장은 “친일 인명사전에 나오지 않았다고 해서 친일 행적이 없다고 덮어버린 것은 역사인식이 그만큼 무개념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지적했다. 윤수경 기자 yoon@seoul.co.kr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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