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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왕위계승’ 말많은 日왕실

    ‘왕위계승’ 말많은 日왕실

    일본 사회가 왕실 문제로 법석이다. 왕위 계승 문제에다 왕세자비에 대한 왕실내 따돌림 분위기와 잇단 ‘돌출행동’. 거기에 옛 왕족의 복권문제와 ‘천황제 존폐’주장까지 겹쳐 시끄럽기 그지없다. 아키히토 일왕의 둘째아들인 아키시노노미야 이후 40년간 일본 왕실에 남아 출산이 없는 것이 ‘소동’의 근본 원인이다. 왕위계승방안을 규정한 왕실 전범의 개정을 둘러싼 공방이 국민적으로 확산되고 ‘왕세자의 힘겨운 결혼생활’이 입방아에 오르는 등 ‘왕실 소동’은 세간의 관심 속에 갈수록 복잡하게 엉켜들고 있다. |도쿄 이춘규특파원|“일본인은 남성 왕을 원한다. 그렇지만 핵가족 시대에 안정적으로 왕위를 계승하는 것도 중요하기 때문에, 여계왕(여왕의 자녀 출신 왕) 인정 문제로 왕실 전범 개정 공방이 일고 있다.” 54년째 일본 왕실을 취재하고 있는 ‘왕실 저널리스트’ 가와하라 도시아키(85)는 서울신문과 인터뷰를 갖고 ‘왕실 소동’ 배경을 설명했다.(가와하라는 인터뷰에서 줄곧 왕은 천황 폐하, 왕세자는 황태자, 왕실은 황실이라고 불렀다.) ▶‘왕실 소동’의 해결 방안은. -둘째 아들 아키시노노미야의 부인인 기코 빈이 아들을 낳으면 자연스럽게 해결된다. 기코 빈이 임신한 태아가 아들인지 딸인지는 몇달 안에 판명된다. 옛 왕족을 부활시킨 뒤 나루히토 왕세자의 외동딸 아이코 공주가 그들 중 한 명과 결혼, 아들을 낳게 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노리노미야 전 공주가 아들을 낳아도 전범 개정이 쉬워진다. 개정을 늦추는 게 자연스럽다. ▶왕세자와 세자비 이혼설은. -그런 정도는 아니다. 이혼하기 어려운 여러 가지 제약이 있다. 마사코 비가 아이코 공주에 대한 애정이 각별한 것도 변수다. 전례가 없는데도 외국 순방때 아이코 공주를 데려가려고 했을 정도였다. 왕족의 이혼 사례는 19세기말 단 한 번 있었는데 와병이 이유였다. 나루히토 왕세자가 이혼하고 새 장가를 들어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주장도 물론 있다. ▶왕세자의 마사코 비에 대한 사랑은. -오랫동안 애정이 각별했지만 최근 마사코 비가 왕실 신년 노래회에 몸이 아프다고 참석하지 않은 뒤 왕궁에서 승마를 하는 등 도리에 어긋난 행동이 이어지면서…. 세자는 이 결혼이 힘들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나루히토 왕세자의 처지가 어려울 것 같은데…. -술을 잘 마신다. 위스키, 포도주, 맥주, 청주도 마신다. 미치코 왕비도 술을 좋아한다. 왕비가 “세자는 나의 술 선생”이라고 말했다고도 한다. 왕은 술이나 담배를 전혀 안한다. 아키시노노미야는 술은 하지만 담배는 안한다. 한 왕족은 술을 많이 마셔 3차례 입원했었다. ▶마사코 비는 진짜 와병 중인가. -마음의 병이다. 그래서 좋아졌다, 나빠졌다 하는 주기가 있다. 의도적으로 아픈 척한다는 얘기도 있지만 우울증은 정말이다. ▶마사코 비가 왕실에서 ‘이지메’를 당하나. -이지메는 아니지만 이지메보다는 약간 기피를 당하는 분위기다. ▶왕세자 일가는 고전하고, 둘째 아들인 아키시노노미야 일가는 부상하고 있다는데. -그대로다. 마사코 세자비의 행동 등으로 왕이나 미치코 비와의 사이가 서먹하다. 그러나 기코빈은 매우 온화하고, 붙임성도 좋아 평판이 아주 좋다. 일본인들의 마사코 비에 대한 시각도 지난해보다 나빠지고 있다. ▶‘천황제’의 위기란 지적은. -지금 그 정도는 아니다. 왕은 국민의 상징이다.80% 이상의 국민이 천황제가 좋다고 한다. 왕족의 생활이 매우 건전하다. 적어도 수십년은 위기가 없을 것이다. ▶왕실에서 여성의 지위는. -차별은 남아 있지만 거의 사라지고 있다. ▶아이코 공주가 왕세자에게 파파라고 하던데, 왕실 용어는 안 써도 되나. -아버지를 지칭하는 오모사마라는 왕실 용어가 있지만 파파라 부른다. 예전에는 안 그랬다. 그래서 우익들이 비판한다. ▶소동이 언제까지 계속될까. -올 한해동안은 소동이 계속될 것이다. 왕위 계승을 규정한 전범 개정은 서두를 일이 아니다. 왕과 세자가 건강하기 때문에 최소 20∼30년은 큰 문제가 없다. ▶궁내청의 전범 개정에 대한 입장은. -개입하지 않는다. 총리가 왕의 의도를 이심전심으로 파악, 문제를 해결할 것이다. ▶반대가 많은데도 고이즈미 총리가 3월 개정을 추진했던 것에 대해 ‘일왕의 뜻’이란 설이 있다. -왕의 뜻에 따라 밀어붙이는 것처럼 하면 국민들이 “왕을 정치에 이용한다.”며 비판한다. 정치권에는 “여계왕은 왕의 뜻”이란 풍문이 돌고 있다. 아이를 많이 낳지 않는 상황에서 남성 왕에 매달리는 것은 무리가 있다. 이를 반영하듯 여왕에는 반대가 거의 없다. 그러나 여계왕에는 반대가 적지 않다. ▶여왕은 되는데, 여계왕은 안 되는가. -지금까지 125대 일왕 중 여왕은 8명 있었다. 이들은 모두 이혼, 미혼, 미망인 등으로 자식이 없어 후계 문제가 없었다. 다음 왕이 성인이 될 때까지만 여왕을 했다. 남계론자들은 여계를 인정하면 만세일계(萬世一系) 이어져온 일본 왕실의 남성 염색체가 전달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남성 염색체 XY와 여성 염색체 XX 중, 여계가 될 경우 이어져온 왕실의 남성 염색체 Y가 전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면 대안이 있어야 하는데. -1947년 11개 옛 왕족의 지위 박탈이 있었다. 그들에게 왕족의 지위를 부여하거나 양자로 입적, 남계를 잇도록 하자는 것이다. 그렇지만 옛 왕족은 60년간 민간인 생활을 해, 그것도 논란의 여지가 있다. ▶일본 방송과 신문들은 왕실 보도에 신중하다. 금기가 남아 있나. -금기는 아니다. 일간지는 영향력이 커 신중한 것이다. 주간지들은 영향력도 적어 민감한 문제도 거리낌 없이 보도한다. ▶50년간 왕실 취재중 변한 것은. -과거에는 불경죄가 있었다. 패전 후 사라졌다.‘천황’은 신적인 지위였다. 그러나 1946년 인간 선언과 함께 바뀌었다. 국가의 원수도 아니고, 상징적 지위만을 갖게 됐다. 취재 관행도 조금씩 바뀌고 있다. ▶왕실 취재단은 어떻게 구성됐나. -궁내청 안에 전국지와 지역지, 방송, 통신사 등으로 기자 클럽이 있다. 프리랜서·외신기자 등은 기자단에 못낀다. 예전엔 20∼30년씩 출입한 기자가 있었지만 요즘은 순환이 빨라졌다. ▶궁내청 출입기자에게도 제한되는 것이 많은가. -왕궁에 자유롭게 들어갈 수 없고 단체로 움직인다. 취재기자가 직접 왕을 보거나 개인적으로 인터뷰할 수도 없다. 연간 1∼3회 단체로 인터뷰하는 것도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전범 개정안의 국회 처리는. -기코 빈의 임신으로 가을이나 내년 정도로 미뤄지지 않겠는가. ▶왕실 저널리스트는 어떻게 취재하나. -옛 왕족, 현 왕족의 주변, 남작·백작 등 옛 귀족의 주변을 취재한다. taein@seoul.co.kr ■ 왕실 저널리스트 가와하라 1921년 홋카이도 출신으로 메이지대학 중퇴 뒤 1952년부터 프리랜서로 전인미답의 일본 왕실을 취재한 ‘왕실저널리스트’ 1호. 다쿠쇼쿠대학 객원교수를 지냈다.1984년 당시 영국유학중이던 현 나루히토 왕세자와 2시간 단독 인터뷰를 하는 등 많은 특종을 건져낸 왕실 취재의 산증인이다.‘마사코비’‘마사코황후’‘마사코사마와 황족들’ 등 3권의 저서가 140만부 이상 팔리는 등 20권 이상의 저서가 있다. ■ 왕위계승 쟁점은 무엇 |도쿄 이춘규특파원|현행 왕실 전범은 ‘왕위 계승 자격은 왕통에 속하는 남자계 남자의 왕족으로 한정한다.’고 규정돼 있다. 개정안의 골자는 ‘여왕·여계왕을 인정해 남녀를 불문하고 장자의 왕위 승계를 우선한다.’는 것이다. 임신 6주째인 것으로 7일 알려진 일왕의 둘째 며느리 기코 빈이 가을에 아들을 출산한다고 해도 남자 왕손은 한명뿐이고 공주 셋을 포함해도 왕손은 4명에 불과하다. 따라서 남자 왕손이 보태지더라도 승계를 둘러싼 불안감은 완전히 씻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여계왕을 인정하는 방향으로의 전범 개정은 필연적이라고 보는 전문가들이 많다. 다만 어떤 내용으로 어떤 시기에 개정하느냐가 관건이 될 뿐이라는 견해다. 일본 국민의 63%도 여계왕 허용에 찬성한다고 6일 니혼게이자이 여론조사 결과 밝혀졌다. 기코 빈이 아들을 낳으면 각각 1,2순위의 왕세자와 아키시노노미야는 변함 없지만, 그의 아들이 3위가 된다. 하지만 여계왕, 장자 우선으로 전범을 개정하면 승계 순위가 크게 달라져 왕세자를 이어 아이코 공주가 2위, 아키시노노미야가 3위, 마코 4위, 가코 5위, 기코 빈의 세번째 자녀가 성별에 관계없이 6위가 된다. 왕실 소동이 빚어지게 되는 원인이다. 아울러 마사코 비가 왕실 생활의 스트레스로 생긴 우울증을 이유로 생일 잔치나 신년 노래회 등에 자주 빠지면서 왕실을 둘러싼 입방아 거리로 등장하고 있다. 반면 여왕·여계왕을 인정하면 궁극적으로 ‘천황제’가 흔들릴 수 있다고 보는 보수파는 좌불안석이다. 왕실의 성역과 금기가 하나씩 무너지면 근본적인 변화가 일 수밖에 없고, 결국 ‘천황제 무용론’으로 이어질 것을 우려해서다. 그래서 명확한 대안도 없는 상태에서 남계왕에만 집착하는 것이다. taein@seoul.co.kr
  • 日 메이지대학서 명예박사학위

    신방웅 충북대총장(국·공립대학총장협의회장)은 최근 주요 국가간 대학 교류의 활성화를 위해 일본·미국·러시아를 다녀왔다. 신 회장은 이번 순방에서 10여개 대학 총장들과의 협약에서 전공 및 특성이 맞는 학과와 단과대학간의 교류 및 학점 인정 등 협력 방안을 강화해 나가기로 했다. 신총장은 일본 메이지대학에서 우리나라 대학총장으로는 처음으로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 신 총장은 “이번 방문을 통해 현지 대학들이 국가위상이 높아진 한국 대학들과의 교류에 상당한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며 “총장협의회 등을 통해 구체적인 교류 확대방안을 논의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 貿協공채 170대 1

    사법시험 등 전문자격증 소지자들도 예외없이 취업 전선에 뛰어들고 있다. 25일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15명을 선발하는 2006년도 대졸 신입사원 공채에서 2563명의 지원자가 몰려 170대1의 경쟁률을 보였다. 특히 지원자 가운데는 변호사 및 사시합격자 3명, 공인회계사 8명, 미국공인회계사 10명, 관세사 3명, 세무사 3명, 국제무역사 98명, 외환관리사 20명 등 전문자격증 소지자 145명이 포함됐다. 이른바 ‘사(士)자 출신’들의 경쟁률만 따져도 10대1에 육박한다. 또 미국의 뉴욕대·UCLA·일리노이대, 일본의 와세다대·메이지대·법정대, 중국의 베이징대·칭화대, 러시아의 모스크바국립대 등 내로라하는 해외 유명대학 졸업생 105명도 서류를 제출했다. 이와 함께 토익(TOEIC)시험 만점자 18명을 비롯, 전체 지원자의 49.8%(1267명)는 토익 성적이 900점 이상이었다. 무협 관계자는 “올해 공채에서 사상 처음으로 이공계 출신에게도 문호를 개방, 컴퓨터와 전기·전자 등 이공계 출신 146명도 지원했다.”면서 “경쟁률뿐만 아니라 지원자들의 자질도 갈수록 향상되는 추세”라고 말했다. 무협은 오는 28일 서류전형 통과자를 발표한 뒤 논술·한자시험과 면접 등을 거쳐 다음달 말쯤 최종 합격자를 결정할 예정이다.장세훈기자 shjang@seoul.co.kr
  • [어떻게 지내세요] 방송기자 1호 문제안씨

    [어떻게 지내세요] 방송기자 1호 문제안씨

    “방송이나 신문에 사용되는 말과 글은 초등학생이나 노인들에게도 쉽게 전달돼야 합니다.” ‘방송기자 1호’를 아시나요? 문제안(86)씨가 바로 주인공이다. 문씨는 8·15 광복과 함께 대한민국 초대 방송기자로 활약하면서 광복의 현장을 우리말로 생생하게 취재·전달해 전 국민의 심금을 울렸다. 특히 이승만 박사의 귀국을 특종보도했으며, 남로당 박헌영 인터뷰 등 격동의 현장을 구석구석 누볐다. 아울러 6·25 당시에는 서울신문 종군기자로 활약하면서 정전협정 과정을 상세하게 보도했다. 또한 한글 타자기 개발로 유명한 공병우 박사와 최현배 박사의 적극적인 권유와 도움으로 ‘한글운동가’로 오랫동안 활동했다. 지금도 일주일에 두 번씩 서울 종로구 신문로의 한글학회에서 미수를 바라보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한글 전도사’로 남다른 의욕을 과시한다. 한글학회에서 문씨를 만났다.“마라톤의 손기정 선수와는 양정고 같은 반에 있었지. 당시 한글 말살 정책에도 불구하고 장지영 선생께서는 우리들에게 일주일에 1시간씩 몰래 한글을 가르쳐 주셨어. 숙직실에서 밤새며 책을 만들고….”라고 회고했다. 또 “장 선생님은 강의 마지막날 ‘한글책을 잘 간직했다가 필요한 사람에게 꼭 전해 주라.’고 하시면서 눈물을 흘렸지. 요즘처럼 무슨 개혁이니 혁명이니 하는 것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큰 감동을 받았어.”라고 당시의 한글사랑을 술회했다. 방송기자 1호가 된 사연에 대해 “1942년에 경성중앙방송국 단파방송사건이라는 것이 있었지.” 하면서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경성중앙방송국은 기술과에 근무하는 몇몇 사람이 도쿄방송을 그대로 이어받아 한반도와 만주, 중국 등지로 송출했지. 그러던 어느날 기술과 직원 한 사람이 미 샌프란시스코 방송을 청취하게 됐는데 일본군이 태평양 전쟁에서 미군에 밀리고 있다는, 비밀이나 다름없는 내용이었지. 이런 소문은 기술과 직원들을 뛰어넘어 장택상씨 등 지식인들 사이에도 급속히 퍼졌어. 당연히 일본 경찰이 수사를 했고 기술과 직원 등을 비롯해 200여명이 잡혀 갔어. 그러자 아나운서가 모자라 공채를 통해 방송국에 입사했지. 때마침 광복이 되면서 우리말로 보도하는 방송기자가 필요해 그 1호가 된 셈이지.” 문씨는 45년 9월9일 경성방송국이 “지금부터 우리말로 시작합니다.”라는 감격의 멘트와 함께 첫 방송기자가 됐다. 한 달여 만에 이승만 박사의 귀국을 특종보도하는 행운을 안았다. 이후 조선통신 경향신문 자유신문 서울신문 조선일보 등을 거쳤다. 일본 메이지대학에서 연극영화를 전공한 그는 66년부터 서라벌예대를 시작으로 74년 수도여사대,79년 원광대 교수 등을 각각 지냈다.87∼99년에는 한글문화단체모두모임 사무총장을 역임했다. 종군기자로 금성화랑무공훈장을 받았으며 63년 최우수문화영화상(남대문),96년 제18회 외솔상(한글운동 실천부문) 등을 수상했다. 저서로는 ‘종군기 남북삼천리’ 등 13권을 남겼다. 건강관리를 위해 술과 담배를 전혀 안 하며 대한승마협회 부회장과 스키·요트협회 이사를 지낼 만큼 평소 운동을 좋아한다. 글 김문기자 km@seoul.co.kr 사진 안주영기자 jya@seoul.co.kr
  • 이민우 前신민당 총재 별세

    이민우 전 신민당 총재가 9일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89세. 1958년 4대 민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한 뒤 6선(4·5·7·9·10·12대)을 거쳤고,78년엔 국회부의장도 역임했다. 비록 김대중·김영삼 전 대통령과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 등 이른바 ‘3김’의 그늘에 가려 대권 도전 기회까지는 잡지 못했지만,40여년 동안 야당의 외길을 걸어왔다.‘전두환 정권’ 말기인 1986년 12월 직선제 개헌논의의 와중에서 내각제 개헌과 선(先) 민주화론을 주장한 이른바 ‘이민우 구상’을 발표해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다. 당시 양김씨, 즉 김대중·김영삼 전 대통령이 탈당하고 신민당이 와해되자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정계 은퇴 후에는 정치와는 일절 인연을 끊었다. 특히 야당 중진 때는 물론 야당 총재 시절과 정계은퇴 후에도 1999년 태릉의 한 아파트로 거처를 옮길 때까지 강북의 삼양동 구옥에서 기거, 양계장을 꾸려나가면서 ‘삼양동 거사’라는 별칭을 얻기도 했다.‘어진 돌’이라는 뜻을 지닌 인석(仁石)이라는 호에 걸맞게 후덕하고 서민적인 풍모로 여야 정치인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해왔다. 원칙에 충실한 정치인으로 한번도 계보를 바꾸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일제치하인 1915년 9월5일 청주에서 태어나 41년 일본 메이지대학 법학과를 중퇴한 뒤 46년 충북신보 영업국장을 거쳐 48년 고향인 청주에서 시의회 부의장으로 정계에 입문했다.4·19 이후 장면 총리의 인준 문제를 둘러싸고 민주당 신·구파가 갈등을 빚을 때 구파가 민주당에서 갈라져 나와 신민당을 창당하자 이에 가담했다. 이후 야당의 거목이었던 유진산 선생이 이끄는 ‘진산계’의 오른팔 역할을 해왔다. 진산이 작고한 이후에는 유치송 전 민한당 총재와 함께 ‘견지동 동우회’를 이끌었다.9대 국회 후반 신민당이 김영삼 전 대통령의 강경파와 이철승 전 신민당 총재의 온건파로 대립할 때 김 전 대통령편에 서서 정치적인 동지관계를 형성했다. 이 인연으로 5·17 이후 김 전 대통령이 정계은퇴 성명을 냈을 때 3개월 가량 총재권한대행직을 맡았으며, 정치규제 중에는 민주산악회의 회장직을 맡기도 했다. 박준석기자 pjs@seoul.co.kr
  • [메트로 의회]시의회 수도이전 반대 전선 흔들

    [메트로 의회]시의회 수도이전 반대 전선 흔들

    1000만명 서명운동 등 수도이전반대를 겨냥한 서울시의회의 표면적 행보가 빨라지고 있으나 주도권을 확보하려는 지도부의 알력과 불화로 수도이전반대 전선에 균열 조짐이 보이고 있다. ●특위장·기획위원장·의장 신경전 수도이전반대운동을 이끌고 있는 의회내 양대 기구의 사령탑인 명영호 수도이전반대특별위원회 위원장과 정병인 수도이전반대 대책위원회 기획위원장이 기구 운영방식을 놓고 이견을 보이고 있는 가운데 임동규 의장이 특위의 돌출행동(?)에 제동을 걸고 나선 것이다. 이같은 지도부의 갈등은 ‘이명박-손학규 공조체제’에 힘을 실어주지 못하고 대시민 설득과 동참에도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어 향후 귀추가 주목된다. 명·정,명·임간의 불편한 관계는 최근 수도이전반대 특별강연차 내한한 일본 메이지대 이치카와 히로오 교수 초청건을 계기로 수면 위에 떠올랐다. 명 위원장이 수도이전반대 특별 강연에 따른 예산 지원을 요청하자,정 위원장 등 수도이전반대 대책위가 거부했다. 강사료·숙박비 등 1000여만원의 경비 지원과 관련,대책위 의장인 임 의장과 정 기획위원장이 ‘사전에 협의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지원거부 의사를 밝혔다. 막후에서 노력하고 있지만 현재까지 예산지원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정 위원장은 이치카와 교수 초청건은 명 위원장의 개인적인 일로 격하시켰다. 그러자 명 위원장은 “이 일은 특위에서 기획·의결한 사항”이라고 맞받았다. “대책위는 상징적인 기구로 자문기구에 불과한 반면 특위는 조례상 정식기구”라며 “대책위는 특위에서 기획·의결한 사항을 지원하면 된다.”고 못박았다.특위의 독립성을 강조한 것이다. ●예산 지원 문제로 티격태격 대책위가 사사건건 특위 활동에 제동을 걸면 특위가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며 특위 활동에 예산의 뒷받침이 제대로 안돼 ‘안타깝다.’는 반응을 보였다. 홍보차량·지하철 포스터 제작 등 예산지원이 이루어진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밝혔다. 이같은 명 위원장의 발언에 대해 대책위의 핵심 멤버인 정 위원장이 발끈했다.그는 “수도이전반대 특위는 수도이전반대 대책위와 기획위원회 밑에 있는 실무기구에 불과하다.”며 강한 톤으로 명 위원장을 비판했다.사실상 특위의 위상을 평가절하한 발언으로 해석된다. 정 위원장은 또 “특위의 중요한 사항은 기획위원회에서 걸러진 뒤 대책위에서 승인을 받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치카와 교수 초청강연건 외에 다른 사항도 대책위 및 기획위원회와 협의없이 특위가 단독으로 처리하면 예산지원은 ‘없다.’고 강경한 입장을 나타냈다. ●의회권력 확보 노린 세대결 이처럼 양측의 입장이 팽팽히 맞서고 있는 가운데 명 위원장은 “예산지원을 해주면 좋고 안해주면 할 수 없지.”라는 반응을 통해 서운함 감정을 표출했다.명 위원장과 임 의장간의 보이지 않는 신경전도 수도이전반대운동의 응집력을 약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명 위원장은 “임 의장이 후반기 의장에 출마하면서 1년 이내에 그만두겠다고 약속했다.”면서 차기를 겨냥했다. 외부의 도움없이 자신의 조직을 갖고도 이길 수 있다는 명 위원장의 자신감이 임 의장의 신경을 건드리는 요인이다. 이는 ‘명·정’이 전면에 등장한 특위와 대책위의 대립은 사실상 ‘의회권력’을 확보하려는 세대결인 동시에 고도의 정치적 수 싸움이라고 봐야 한다. 어쨌든 이같은 지도부의 충돌은 수도이전반대운동의 구심점 상실과 탄력 약화로 이어질 것이라는 데에 이론이 없다. 최용규기자 ykchoi@seoul.co.kr
  • 명영호 서울시의회 수도이전반대 특위장

    명영호 서울시의회 수도이전반대 특위장

    서울시의회가 수도이전반대 수위를 한층 높이고 있다. 지난달 30일 구성된 수도이전반대특별위원회를 중심으로 종전 보다 체계적이고 강력한 반대운동을 펼쳐나갈 태세를 갖추고 있다. 반대운동의 선봉장격인 명영호 서울시의회 수도이전반대특별위원회 위원장으로부터 구체적인 투쟁계획을 들어봤다. 특위의 활동계획은. - 이미 알려진대로 10일 오후 5시 시청앞 서울광장에서 ‘1000만명 서명운동’을 시작으로 수도이전에 대한 반대여론에 다시 불을 지필 것입니다. 특히 이날부터 서울시의회의 대다수 의원들은 서울광장에 마련한 1000만인 서명운동본부의 천막에서 노숙투쟁에 돌입합니다.의원들은 24시간 이곳을 교대로 방문해 서명작업과 농성으로 수도이전에 대한 시민들의 반대 분위기를 확산시킬 것입니다.의원들의 반대투쟁은 오는 11월초 헌법재판소가 신행정수도건설 관련법에 대해 위헌이란 판결을 내릴 때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또 14일에는 일본 메이지대학의 이치가와 교수를 초청해 수도이전의 어리석음을 지적하는 강연회를 준비했습니다.시민 등 1000여명이 시의회 별관에서 강연회를 듣고 수도이전의 부당성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17일에는 범국민운동본부 발대식을 갖고 강도 높은 대정부 반대투쟁을 벌여나갈 것입니다. 집행부와 이명박 시장에 대한 주문은. - 특위 구성에 앞서 시의회는 지난 7월14일 일본 도쿄도의회를 방문해 도쿄의 수도이전반대운동에 대해 설명을 들었습니다.도쿄의 경우 도지사가 최일선에 나서 수도이전반대운동을 주도하고 있습니다.서울시도 이명박 시장을 비롯한 집행부가 지금보다 강도 높게 수도이전을 반대해야 할 것입니다. 특위는 도쿄도의 수도이전반대 관련 자료 500부를 번역,발간해 전국 지방의회와 국회의원 등에 배포해 우리의 반대투쟁을 적극적으로 알리고 있습니다. 시민의 관심도가 아직은 미흡한데…. - 그동안 시의회 주도의 수도이전 반대운동이 시민운동으로 확산되지 못했습니다.보다 활발한 시민운동,나아가 범국민운동이 될 수 있도록 특위가 앞장설 것입니다. 우선 시민들의 승용차와 지하철 등에 수도이전의 부당성을 알리는 홍보 스티커를 부착할 것입니다. 각 구별로는 ‘서울수도지킴이 발대식’을 갖도록 해 주민들의 참여를 높이고 동사무소마다 서명작업도 병행해 나갈 것입니다.자치구의회도 저마다 수도이전반대특별위원회를 구성해 기초단위의 반대운동을 전개할 것을 약속했습니다. 이동구기자 yidonggu@seoul.co.kr
  • 국회 정무위 22명 ‘출자총액제한제’ 들어보니

    국회 정무위 22명 ‘출자총액제한제’ 들어보니

    국회 규제개혁특위 김혁규 위원장 내정자의 ‘출자총액제한제,제로 베이스 검토’ 발언으로 이를 둘러싼 ‘여·여 갈등’이 예상되는 가운데 공정거래법 개정안이 원안대로 국회를 통과할지 주목된다.정부안인 공정거래법 개정안은 지난 6월 열린우리당이 공정거래위와의 당정협의를 통해 확정했고,출자총액제한제 존치 및 금융사의 의결권 제한 조항이 핵심이다. 열린우리당 의원들은 “경기침체를 핑계로 시장개혁안을 완화하거나 폐지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다.반면 한나라당 의원들은 “실효성도 떨어지고,기업들의 투자심리를 위축시키는 만큼 폐지돼야 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당론’과 다른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일부 열린우리당 의원들은 당론대로 ‘존치’를 수용하면서도 투자기피로 인한 경기침체 주장에 곤혹스러워 했다.한나라당 소장파 의원들도 ‘폐지=반개혁’이라고 낙인 찍히는 분위기를 우려했다. 서울신문이 10일 공정거래위를 관할하는 국회 정무위 소속 의원 22명을 전화로 설문조사한 결과,출자총액제한제의 현행 유지에 대해 김희선 위원장을 포함한 열린우리당 의원 6명과 한나라당 고진화 의원 등 모두 7명이 찬성했다.찬성이 절반을 넘지 못했다. 김 위원장은 “당론이 한두 의원의 입을 통해 뒤집히는 것처럼 외부에 보여서는 안 된다.”며 강하게 반발했다.문학진 의원은 “대기업 경영의 투명화가 여전히 필요하다.”면서 “과연 출자총액제를 폐지·완화한다고 투자를 더 할까 회의스럽다.”고 말했다. 문 의원은 “경제가 어렵더라도 원칙을 지켜 나가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한나라당 고 의원은 “재벌그룹이 구조개혁을 추진해 왔지만,선단식 경영의 폐해가 여전하다.”며 현행 유지에 찬성했다. ‘폐지’를 주장하는 측은 한나라당 유승민·이한구·김정훈 의원 등이다.유 의원은 “시장 규율이 설 때까지 한시적으로 규제하겠다는 것인데,일관성을 잃어버렸다.”고 말했다. 김 의원도 “현재 우리의 경제상황은 투명성과 건전성보다 투자 촉진에 비중을 둬야 한다.”면서 “출자총액제한에 대한 졸업조건을 명문화해야 한다.”고 한걸음 더 나아갔다. 존치와 폐지의 점이지대로 ‘완화’를 주장하는 의원도 적지 않았다.열린우리당 강길부 의원을 비롯해 이근식·신학용 의원,한나라당 나경원·이계경 의원이 그렇다.신 의원은 “정부안을 지지하지만,재계가 주장하는 투자제한이라는 대목을 집중적으로 짚어봐야 한다.”고 밝혔다.이계경 의원은 “결합재무제표 등을 통한 간접규제로 전환해야 한다.”고 말했다.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28)인간이 평등할 수 있을까?-백정해방운동 (上)

    20세기 세계를 움직인 100대 사건 중 하나는 1923년 진주에서 일어난 형평사운동이었다.여러 세기에 걸쳐 인간 이하의 천민으로 분류되어 수탈과 탄압,능멸과 죽임의 공포 속에서 살아온 백정(白丁)들도 인간이라는 백정해방운동을 형평사운동이라 불렀다.일본의 부락민(部落民),유대인 차별 정책인 게토,인도의 최하층민 수드라,노예시장의 매매물건인 아프리카 흑인들과 같이,1923년 이전 한국의 백정들도 인간이 어찌 평등할 수 있느냐는 조선시대 정치이념의 제물로 희생된 우리의 이웃이었다. 형평사운동을 계획하고 탄생시켰으며,그후 십여년 동안 한국사회에서 억압받는 사람들의 인권문제를 줄기차게 제의했던 사람들 중에서 강상호(姜相鎬)와 장지필(張志弼) 두 사람을 꼽을 수 있다. ●진주 형평사운동은 ‘백정해방운동’ 장지필은 대물림한 백정 집안 후손이었다.그의 부친 장덕찬(張德贊)은 경남 의령의 백정인데 상당한 재력가였다.백정의 주된 사업인 도살업,육류판매,피혁의 건조와 가공,쇠기름(牛脂)의 생산 판매,소피(牛血)를 이용한 식품의 제조와 판매,가축의 내장과 뼈의 판매,이를 이용한 음식점의 독점적 운영은 오랫동안 백정 계급만의 전용물이었다. 이 사업은 이윤이 많이 남기로 유명한 데다 국가로부터 세금 징수의 대상도 아니었기 때문에 일찍부터 생각이 깊었던 이들은 큰 재산을 모을 수도 있었다.19세기 후반 이후 서울과 지방의 토호들은 백정들의 전유물이었던 도축장 경영권을 빼앗는 농간을 부렸다.많은 백정들은 토호들의 자본에 흡수되어 신분의 억압 외에 다시 경제적 수탈 대상이 되었고,이중의 인권유린에 시달렸다. 장덕찬은 대구의 김경삼,부산의 이성순,마산의 이상윤과 박유선,진주의 이학찬 등과 함께 대한제국을 대표하는 백정출신 부호였다.당시에는 재력가라 하여도 백정신분으로 서당이나 향교 같은 교육기관에 나가 공부할 수 없었다.백정들은 평민들과 같은 자리에 머무는 것은 물론이고 공공장소에 얼씬거리는 것도 금지되었으며,교회 설립 초기에는 일반인과 백정이 함께 예배보는 것도 문제가 되었다.장덕찬은 집에 독선생을 초빙해 자식들에게 공부를 시켰는데,장덕찬의 아들 장지필은 요즘식 가정교사 밑에서 공부하여 일본 메이지대학까지 유학하였다.행운아였던 셈이다. ●‘장지필’은 백정 출신의 부호 장덕찬은 평생토록 백정 해방을 꿈꾸며 투쟁하였다.그는 1887년 무렵 경상도 관찰사에게 백정도 패랭이를 벗고 망건을 쓸 수 있게 해 줄 것을 요구하며 경상도 71개 군에 있던 백정공동체인 도중(都中)들을 모아 시위를 벌였다.그 과정에서 곤장을 맞고 고문도 당했지만 요구를 끝까지 외쳐 경상도 백정들에게 큰 용기를 불어넣었다.장덕찬에게 곤장을 가하며 백정들의 요구를 거부했던 경상도 관찰사는 이호준(李鎬俊·1821∼1901)인데 그의 아들이 한일합방을 주도한 이완용이다. 관찰사와 담판을 벌였을 만큼 재력과 식견을 갖추었던 장덕찬은 아들에게 백정 해방을 위한 투쟁정신을 물려주었다.아버지의 뜻을 잇는 장지필은 세상의 두터운 차별의식과 싸우기 위해서는 재력과 신학문을 동시에 갖추어야 한다고 믿어 동경유학을 감행했고,귀국하여 백정해방 운동에 전력을 다한 백정 해방 이론가이자 실천가였다. ●‘강상호’ 양반신분으로 독립운동 헌신 반면 강상호는 당시 진주사회의 대표적인 지성인 중 한 사람으로 양반신분이며 부유한 집안의 큰아들이었다.일제 식민지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모든 국민이 문맹에서 눈을 떠야 한다며 학교 세우기와 신식교육을 장려했고,직접 기미년 만세시위운동에 참여하여 옥고를 치르기도 한 행동하는 지성이었다.애국계몽운동의 하나로서 동아일보 창간 주주로 참여했고,신간회활동 등 일제에 문화적으로 항거했던 인물이다. 따라서 장지필과 강상호가 지향하는 백정해방운동의 목표는 서로 달랐다.강상호는 민족운동과 사회주의운동이 미분화된 상태에서 순진하다 할 수 있는 민족운동노선을 따른 데 반하여,장지필은 백정 고유의 산업에 일반인들이 진출하지 못하게 하여 백정계급의 경제적 토대를 지키고 장차 백정들의 삶을 향상시키고자 하였다.관념적인 백정해방운동은 성공할 수 없으며,중요한 것은 한국 사회에서 가장 천한 신분인 백정들이 경제적으로 자립하는 것뿐이라고 믿었다.경제적 자신감이 있어야만 백정해방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이처럼 두 사람이 믿는 바는 달랐지만,1923년이라는 시대상황은 한국역사상 최초의 인권해방운동이라는 이름으로 장지필과 강상호가 함께 움직일 수 있게 하였다. 1919년 기미만세운동 이후 조선총독부는 문화통치를 표방하였다.민중 활동이 비교적 자유로워진 것이다.국내에는 다양한 사회운동 조직이 생겨났고,각 조직은 민족해방운동의 뜻을 폈다.겉으로는 조직 회원들이나 민중의 계몽을 표방했으나 궁극적으로는 민족해방을 바란 것이다. 민족해방운동은 크게 세 가지 갈래로 나뉘었는데,첫째는 일본에 무장 투쟁하여 국권을 회복하고자 한 민족독립운동으로 만주와 중국을 중심으로 일어났으며,애국주의 이상을 행동으로 옮기는 데 치중했다.두 번째는 대종교,보천교 등의 종교단체를 중심으로 한 운동이었고,세 번째는 3·1운동을 이끈 세력이 주도한 문화 계몽 운동이었다. 강상호가 문화 계몽 운동에 매진하고 있던 중에 진주의 대표적인 부자 백정 이학찬이 새집을 장만하여 강상호의 이웃으로 이사하였다.강상호는 이학찬의 이사를 계기로 백정들과의 교류를 시작하게 된다. 원래 진주 지방에는 여느 행정 관청이 있는 주요 지방 도시와 마찬가지로 관청 관할 아래에 백정들의 거주지가 정해져 있었다.이른바 백정마을 혹은 백정놈 동네였다. 경국대전에서 규정한 백정단취(白丁團聚) 조항에 따라 거주이전이 금지되었고 죽는 날까지 한 곳에 머물러 살았다.혹 거주지를 이탈하면 엄하게 처벌받았는데,마을 밖으로 여행하기 위해서는 관청에서 발행한 통행 증명서가 필요했다.통행증명서에는 목적지와 여행 기간이 적혀 있어서 이를 어길 때에도 무거운 처벌이 내려졌다. ●개도살 요구 거절한 백정, 매질당해 죽어 그러나 1863년 고종임금이 즉위하면서 실시한 특별사면으로 백정마을에서 살던 백정들은 거주이전의 자유를 얻게 된다.거주이전 금지 규정이 해제되자 전국의 백정들은 숙명 같았던 옛 거주지를 벗어나 일반인들이 사는 마을 가까이로 옮겨가기 시작했고,재력 있는 백정은 마을 안으로 옮겨가기도 했다. 백정들과의 교류를 통해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강상호는 기미 독립만세 시위 이후 어느날 충격적인 사건을 목격하였다.진주공원에서 청년들에 의해 백정이 죽임을 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청년들은 백정마을에 사는 백정을 강제로 데려와 개를 잡으라고 강요하였다. 그러나 그 백정은 청년들의 요구를 완강하게 거절하였고,결국 매질을 견디지 못해 죽었다.이후 백정들이 청년들을 고소하였지만 죽은 백정은 호적이 없으므로 그를 죽인 청년들에게 살인죄를 적용할 수 없다는 일본 경찰의 판결이 내려졌다.살인죄가 성립하려면 죽은 자의 신원이 확인되어야 하는데 아무런 법률적 증거가 없으므로 산짐승이나 벌레를 죽인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이었다.이 사건은 강상호가 백정해방운동에 적극 관여하는 계기가 되었다.˝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28)인간이 평등할 수 있을까?-백정해방운동 (上)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28)인간이 평등할 수 있을까?-백정해방운동 (上)

    20세기 세계를 움직인 100대 사건 중 하나는 1923년 진주에서 일어난 형평사운동이었다.여러 세기에 걸쳐 인간 이하의 천민으로 분류되어 수탈과 탄압,능멸과 죽임의 공포 속에서 살아온 백정(白丁)들도 인간이라는 백정해방운동을 형평사운동이라 불렀다.일본의 부락민(部落民),유대인 차별 정책인 게토,인도의 최하층민 수드라,노예시장의 매매물건인 아프리카 흑인들과 같이,1923년 이전 한국의 백정들도 인간이 어찌 평등할 수 있느냐는 조선시대 정치이념의 제물로 희생된 우리의 이웃이었다. 형평사운동을 계획하고 탄생시켰으며,그후 십여년 동안 한국사회에서 억압받는 사람들의 인권문제를 줄기차게 제의했던 사람들 중에서 강상호(姜相鎬)와 장지필(張志弼) 두 사람을 꼽을 수 있다. ●진주 형평사운동은 ‘백정해방운동’ 장지필은 대물림한 백정 집안 후손이었다.그의 부친 장덕찬(張德贊)은 경남 의령의 백정인데 상당한 재력가였다.백정의 주된 사업인 도살업,육류판매,피혁의 건조와 가공,쇠기름(牛脂)의 생산 판매,소피(牛血)를 이용한 식품의 제조와 판매,가축의 내장과 뼈의 판매,이를 이용한 음식점의 독점적 운영은 오랫동안 백정 계급만의 전용물이었다. 이 사업은 이윤이 많이 남기로 유명한 데다 국가로부터 세금 징수의 대상도 아니었기 때문에 일찍부터 생각이 깊었던 이들은 큰 재산을 모을 수도 있었다.19세기 후반 이후 서울과 지방의 토호들은 백정들의 전유물이었던 도축장 경영권을 빼앗는 농간을 부렸다.많은 백정들은 토호들의 자본에 흡수되어 신분의 억압 외에 다시 경제적 수탈 대상이 되었고,이중의 인권유린에 시달렸다. 장덕찬은 대구의 김경삼,부산의 이성순,마산의 이상윤과 박유선,진주의 이학찬 등과 함께 대한제국을 대표하는 백정출신 부호였다.당시에는 재력가라 하여도 백정신분으로 서당이나 향교 같은 교육기관에 나가 공부할 수 없었다.백정들은 평민들과 같은 자리에 머무는 것은 물론이고 공공장소에 얼씬거리는 것도 금지되었으며,교회 설립 초기에는 일반인과 백정이 함께 예배보는 것도 문제가 되었다.장덕찬은 집에 독선생을 초빙해 자식들에게 공부를 시켰는데,장덕찬의 아들 장지필은 요즘식 가정교사 밑에서 공부하여 일본 메이지대학까지 유학하였다.행운아였던 셈이다. ●‘장지필’은 백정 출신의 부호 장덕찬은 평생토록 백정 해방을 꿈꾸며 투쟁하였다.그는 1887년 무렵 경상도 관찰사에게 백정도 패랭이를 벗고 망건을 쓸 수 있게 해 줄 것을 요구하며 경상도 71개 군에 있던 백정공동체인 도중(都中)들을 모아 시위를 벌였다.그 과정에서 곤장을 맞고 고문도 당했지만 요구를 끝까지 외쳐 경상도 백정들에게 큰 용기를 불어넣었다.장덕찬에게 곤장을 가하며 백정들의 요구를 거부했던 경상도 관찰사는 이호준(李鎬俊·1821∼1901)인데 그의 아들이 한일합방을 주도한 이완용이다. 관찰사와 담판을 벌였을 만큼 재력과 식견을 갖추었던 장덕찬은 아들에게 백정 해방을 위한 투쟁정신을 물려주었다.아버지의 뜻을 잇는 장지필은 세상의 두터운 차별의식과 싸우기 위해서는 재력과 신학문을 동시에 갖추어야 한다고 믿어 동경유학을 감행했고,귀국하여 백정해방 운동에 전력을 다한 백정 해방 이론가이자 실천가였다. ●‘강상호’ 양반신분으로 독립운동 헌신 반면 강상호는 당시 진주사회의 대표적인 지성인 중 한 사람으로 양반신분이며 부유한 집안의 큰아들이었다.일제 식민지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모든 국민이 문맹에서 눈을 떠야 한다며 학교 세우기와 신식교육을 장려했고,직접 기미년 만세시위운동에 참여하여 옥고를 치르기도 한 행동하는 지성이었다.애국계몽운동의 하나로서 동아일보 창간 주주로 참여했고,신간회활동 등 일제에 문화적으로 항거했던 인물이다. 따라서 장지필과 강상호가 지향하는 백정해방운동의 목표는 서로 달랐다.강상호는 민족운동과 사회주의운동이 미분화된 상태에서 순진하다 할 수 있는 민족운동노선을 따른 데 반하여,장지필은 백정 고유의 산업에 일반인들이 진출하지 못하게 하여 백정계급의 경제적 토대를 지키고 장차 백정들의 삶을 향상시키고자 하였다.관념적인 백정해방운동은 성공할 수 없으며,중요한 것은 한국 사회에서 가장 천한 신분인 백정들이 경제적으로 자립하는 것뿐이라고 믿었다.경제적 자신감이 있어야만 백정해방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이처럼 두 사람이 믿는 바는 달랐지만,1923년이라는 시대상황은 한국역사상 최초의 인권해방운동이라는 이름으로 장지필과 강상호가 함께 움직일 수 있게 하였다. 1919년 기미만세운동 이후 조선총독부는 문화통치를 표방하였다.민중 활동이 비교적 자유로워진 것이다.국내에는 다양한 사회운동 조직이 생겨났고,각 조직은 민족해방운동의 뜻을 폈다.겉으로는 조직 회원들이나 민중의 계몽을 표방했으나 궁극적으로는 민족해방을 바란 것이다. 민족해방운동은 크게 세 가지 갈래로 나뉘었는데,첫째는 일본에 무장 투쟁하여 국권을 회복하고자 한 민족독립운동으로 만주와 중국을 중심으로 일어났으며,애국주의 이상을 행동으로 옮기는 데 치중했다.두 번째는 대종교,보천교 등의 종교단체를 중심으로 한 운동이었고,세 번째는 3·1운동을 이끈 세력이 주도한 문화 계몽 운동이었다. 강상호가 문화 계몽 운동에 매진하고 있던 중에 진주의 대표적인 부자 백정 이학찬이 새집을 장만하여 강상호의 이웃으로 이사하였다.강상호는 이학찬의 이사를 계기로 백정들과의 교류를 시작하게 된다. 원래 진주 지방에는 여느 행정 관청이 있는 주요 지방 도시와 마찬가지로 관청 관할 아래에 백정들의 거주지가 정해져 있었다.이른바 백정마을 혹은 백정놈 동네였다. 경국대전에서 규정한 백정단취(白丁團聚) 조항에 따라 거주이전이 금지되었고 죽는 날까지 한 곳에 머물러 살았다.혹 거주지를 이탈하면 엄하게 처벌받았는데,마을 밖으로 여행하기 위해서는 관청에서 발행한 통행 증명서가 필요했다.통행증명서에는 목적지와 여행 기간이 적혀 있어서 이를 어길 때에도 무거운 처벌이 내려졌다. ●개도살 요구 거절한 백정, 매질당해 죽어 그러나 1863년 고종임금이 즉위하면서 실시한 특별사면으로 백정마을에서 살던 백정들은 거주이전의 자유를 얻게 된다.거주이전 금지 규정이 해제되자 전국의 백정들은 숙명 같았던 옛 거주지를 벗어나 일반인들이 사는 마을 가까이로 옮겨가기 시작했고,재력 있는 백정은 마을 안으로 옮겨가기도 했다. 백정들과의 교류를 통해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강상호는 기미 독립만세 시위 이후 어느날 충격적인 사건을 목격하였다.진주공원에서 청년들에 의해 백정이 죽임을 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청년들은 백정마을에 사는 백정을 강제로 데려와 개를 잡으라고 강요하였다. 그러나 그 백정은 청년들의 요구를 완강하게 거절하였고,결국 매질을 견디지 못해 죽었다.이후 백정들이 청년들을 고소하였지만 죽은 백정은 호적이 없으므로 그를 죽인 청년들에게 살인죄를 적용할 수 없다는 일본 경찰의 판결이 내려졌다.살인죄가 성립하려면 죽은 자의 신원이 확인되어야 하는데 아무런 법률적 증거가 없으므로 산짐승이나 벌레를 죽인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이었다.이 사건은 강상호가 백정해방운동에 적극 관여하는 계기가 되었다.
  • 日 메이지大와 박물관교류협정

    신방웅(申芳雄) 충북대 총장은 일본을 방문,29일 메이지대와 박물관 공동사업 교류협정을 맺었다.˝
  • ‘한반도 구석기’ 첫 해외나들이

    한국 선사문화의 보고로 일컬어지는 단양 수양개 유적이 처음 확인된 것은 1980년이었다.충주댐 수몰지역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중기 구석기시대에서 청동기시대에 이르는 유적의 존재가 드러났다.1만 8630년 전 것으로 측정된 후기 구석기 문화층에서는 무려 3만여점의 석기가 나왔다.이후 청원·청주·진천 등 충북 지역 곳곳에서 구석기 유적이 드러나고 있다. 이 지역 구석기 유적 발굴 및 연구의 중심에 서 있는 것이 충북대 박물관(관장 신영우)이다.충북대 박물관은 일본 메이지(明治)대 박물관과 ‘한국 수양개 유적과 일본의 구석기 시대’특별전을 공동 주최한다. 메이지대는 1949년 일본 최초의 구석기 유적인 이와주쿠(岩宿)유적을 발굴했고,이후 일본 구석기 연구자의 80%를 배출한 구석기 연구의 명문이다. ‘수양개’특별전은 새달 1일부터 5월31일까지 메이지대 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열릴 예정.충북대 박물관은 단양 수양개와 구낭굴 유적,청원 두루봉동굴과 소로리 유적에서 나온 구석기시대 유물 427점을 출품한다. 이번 특별전은 두 나라 학계에 모두 뜻깊다.한국 쪽에서 보면 구석기 분야에서 갖는 최초의 해외 전시회이다.그동안 한두 점의 구석기 유물이 해외에 소개된 적은 있지만,이번처럼 많은 유물이 주제가 뚜렷한 전시회에 나간 적은 없다.올해는 지난 1964년 구석기 유적을 한국 최초로 공주 석장리에서 발견한 지 40주년을 맞은 해다. 일본학계로는 2001년 밝혀진 후지무라 신이치(藤村新一) 전 도호쿠(東北)구석기문화연구소 부이사장의 전기 및 중기 구석기 유적 날조 사건의 충격에서 벗어나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학술행사가 될 수 있다.그동안 충북지역 구석기 발굴을 주도한 이융조 충북대 교수는 수양개의 대표유물인 슴베찌르개가 전라도지역을 거쳐 일본의 규슈(九州)로 전해졌다는 학설을 제기한 적이 있다.이번 특별전에 이 슴베찌르개를 일본의 관련 유물과 함께 전시하는 것도 일본의 후기 구석기에 미친 한반도의 영향을 규명해 보자는 의도다.일본의 구석기 연구가 그저 연대를 올리는 데 급급하지 않고 ‘정상화’돼 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별전에서는 슴베찌르개 말고도 수양개의 좀돌날 등 크기가 작은 세석기(細石器)와 수양개 및 청원 소로리의 주먹도끼·주먹대패 등 대형석기를 일본의 후기 구석기 유적 20여곳의 유물과 비교 전시한다.이밖에 청원 두루봉동굴에서 나온 곰·코뿔이·원숭이·호랑이 등의 동물화석과 출토된 인골을 복원한 ‘흥수 아이’도 출품된다. 한편 특별전이 열리는 동안 ‘수양개와 그 이웃들’을 주제로 한 국제학술회의도 마련된다.한국·일본·중국·러시아·폴란드·미국 등의 학자 2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5월14일부터 19일까지 현지에서 열린다.충북지역 구석기 문화의 양상을 밝히는 ‘수양개‘학술회의는 충북대 박물관이 주도해 올해로 9회째를 맞는다. 서동철기자 dcsuh@seoul.co.kr˝
  • [부고]

    ●애국지사 고영호 선생 애국지사 고영호 선생이 24일 오후 9시 제주대학병원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84세. 북제주 출신인 선생은 지난 1943년 일본 메이지대학 재학 중 ‘조선독립 청년당’을 조직해 활동하다 붙잡혀 징역 1년6월의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가족으로는 부인 송영심씨와 아들 대혁씨가 있다.발인 27일 오전 7시.011-690-2316. ●李相益(한양대 명예교수)씨 별세 明燮(삼영EEC 대표)龍燮(케이에스타 기술이사)禎根(한국건설관리공사 과장)美燮(미국 거주)廷燮(한양대 간호학과 교수)씨 부친상 金台煥(미국 거주)趙誠民(한양대 법과대학 교수)씨 빙부상 24일 오후 7시24분 서울 한양대병원,발인 26일 오전 10시 (02)2290-9460 ●張秀植(전 인천지방노동위원회 위원장)씨 빙모상 24일 오후 9시 서울 강남성모병원,26일 오전 6시 (02)590-2560 ●尹炳炫(산림청 공보담당 서기관)씨 빙모상 25일 오전 5시 전북 전주시 송천동 대송장례식장,발인 27일 오전 10시 (063)274-0761 ●乃南正(전 손해보험협회 상무)南益(자영업)南仁(TNT코리아 차장)씨 부친상 冠后(스왓닷컴 직원)씨 조부상 25일 오전 1시 경기 광명성애병원,발인 27일 오전 8시 (02)2689-9053 ●崔重淳(자영업)重哲(보성문화인쇄 대표)씨 모친상 24일 오후 3시35분 서울 신촌세브란스병원,발인 26일 오전 8시 (02)392-1899 ●徐光朝(한국알미늄 전무)씨 상배 25일 0시 서울아산병원,발인 27일 오전 9시 (02)3010-2239 ●蔡載學(기린산업 고문)씨 모친상 24일 오후 11시10분 서울아산병원,발인 27일 오전 9시 (02)3010-2254 ●李源祥(서울 이원상치과의원장)熙祥(대한생명 직원)씨 부친상 25일 오전 1시 서울아산병원,발인 27일 오전 10시 (02)3010-2267 ●李春熙(자영업)長熙(〃)振熙(〃)永熙(〃)씨 모친상 25일 오전 2시 서울아산병원,발인 27일 오전 8시 (02)3010-2238 ●金相大(자영업)相雲(동원증권 삼성동지점 차장)씨 모친상 25일 0시30분 서울 보라매병원,발인 27일 오전 9시30분 (02)835-4899 ●盧承會(오산대학장)씨 모친상 25일 오전 9시50분 서울 강남성모병원,발인 27일 오후 10시 (02)590-2609 ●奇熙鍾(전 서울 성문학원장·여의도순복음교회 권사)씨 별세 金光洙(이시스코리아 이사)希洙(한세대 교수)仁卿(코오롱패션산업연구원 학과장)씨 모친상 金貴淑(서울 신방학초등학교 교사)씨 시모상 吳炯根(대한생명 동방법인 대표)李榮敏(서강대 연구교수)朴鍾敦(자영업)씨 빙모상 24일 오후 8시30분 서울아산병원,발인 27일 오전 8시 (02)3010-2291 ●白奇夏(경성야금 대표)水夏(문화일보 산업부 기자)씨 부친상 25일 오후 5시35분 서울대병원,발인 27일 오전 (02)760-2010 ●朴亨元(자영업)承遠(서울 마포구청 직원)奭原(자영업)씨 모친상 任聖宰(자영업)楊柄浩(세계일보 판매국 수도권2팀장)씨 빙모상 25일 오전 11시 서울 적십자병원,발인 27일 오전 10시 (02)2002-8936 ●崔相昊(㈜언고 부회장)吳常奇(현영전자 이사)李性周(삼보자동차상사 상무)씨 빙모상 25일 오후 2시 서울 신촌세브란스병원,발인 27일 오전 8시 (02)392-0299 ●金成漢(도경산업 사장)씨 부친상 東郁(한국경제신문 경제부 기자)씨 조부상 25일 오후 4시 서울 성북동 1의106번지 자택,발인 27일 오전 5시 (02)766-5675 ●金淸一(전 중앙일보 제작부차장)씨 별세 志硏(이대목동병원 운동처방사)씨 부친상 鄭炳雲(부광합동법률사무소 변호사)姜寶鉉(국군청평병원 군의관)씨 빙부상 25일 이대목동병원,발인 27일 오전 5시 (02)2650-5444 ●김인구(전 현대그룹 PR사업본부 이사)씨 모친상 25일 오후 4시 서울아산병원,발인 27일 오전 10시 (02)3010-2240
  • [부고]

    ●애국지사 고영호 선생 애국지사 고영호 선생이 24일 오후 9시 제주대학병원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84세. 북제주 출신인 선생은 지난 1943년 일본 메이지대학 재학 중 ‘조선독립 청년당’을 조직해 활동하다 붙잡혀 징역 1년6월의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가족으로는 부인 송영심씨와 아들 대혁씨가 있다.발인 27일 오전 7시.011-690-2316. ●李相益(한양대 명예교수)씨 별세 明燮(삼영EEC 대표)龍燮(케이에스타 기술이사)禎根(한국건설관리공사 과장)美燮(미국 거주)廷燮(한양대 간호학과 교수)씨 부친상 金台煥(미국 거주)趙誠民(한양대 법과대학 교수)씨 빙부상 24일 오후 7시24분 서울 한양대병원,발인 26일 오전 10시 (02)2290-9460 ●張秀植(전 인천지방노동위원회 위원장)씨 빙모상 24일 오후 9시 서울 강남성모병원,26일 오전 6시 (02)590-2560 ●尹炳炫(산림청 공보담당 서기관)씨 빙모상 25일 오전 5시 전북 전주시 송천동 대송장례식장,발인 27일 오전 10시 (063)274-0761 ●乃南正(전 손해보험협회 상무)南益(자영업)南仁(TNT코리아 차장)씨 부친상 冠后(스왓닷컴 직원)씨 조부상 25일 오전 1시 경기 광명성애병원,발인 27일 오전 8시 (02)2689-9053 ●崔重淳(자영업)重哲(보성문화인쇄 대표)씨 모친상 24일 오후 3시35분 서울 신촌세브란스병원,발인 26일 오전 8시 (02)392-1899 ●徐光朝(한국알미늄 전무)씨 상배 25일 0시 서울아산병원,발인 27일 오전 9시 (02)3010-2239 ●蔡載學(기린산업 고문)씨 모친상 24일 오후 11시10분 서울아산병원,발인 27일 오전 9시 (02)3010-2254 ●李源祥(서울 이원상치과의원장)熙祥(대한생명 직원)씨 부친상 25일 오전 1시 서울아산병원,발인 27일 오전 10시 (02)3010-2267 ●李春熙(자영업)長熙(〃)振熙(〃)永熙(〃)씨 모친상 25일 오전 2시 서울아산병원,발인 27일 오전 8시 (02)3010-2238 ●金相大(자영업)相雲(동원증권 삼성동지점 차장)씨 모친상 25일 0시30분 서울 보라매병원,발인 27일 오전 9시30분 (02)835-4899 ●盧承會(오산대학장)씨 모친상 25일 오전 9시50분 서울 강남성모병원,발인 27일 오후 10시 (02)590-2609 ●奇熙鍾(전 서울 성문학원장·여의도순복음교회 권사)씨 별세 金光洙(이시스코리아 이사)希洙(한세대 교수)仁卿(코오롱패션산업연구원 학과장)씨 모친상 金貴淑(서울 신방학초등학교 교사)씨 시모상 吳炯根(대한생명 동방법인 대표)李榮敏(서강대 연구교수)朴鍾敦(자영업)씨 빙모상 24일 오후 8시30분 서울아산병원,발인 27일 오전 8시 (02)3010-2291 ●白奇夏(경성야금 대표)水夏(문화일보 산업부 기자)씨 부친상 25일 오후 5시35분 서울대병원,발인 27일 오전 (02)760-2010 ●朴亨元(자영업)承遠(서울 마포구청 직원)奭原(자영업)씨 모친상 任聖宰(자영업)楊柄浩(세계일보 판매국 수도권2팀장)씨 빙모상 25일 오전 11시 서울 적십자병원,발인 27일 오전 10시 (02)2002-8936 ●崔相昊(㈜언고 부회장)吳常奇(현영전자 이사)李性周(삼보자동차상사 상무)씨 빙모상 25일 오후 2시 서울 신촌세브란스병원,발인 27일 오전 8시 (02)392-0299 ●金成漢(도경산업 사장)씨 부친상 東郁(한국경제신문 경제부 기자)씨 조부상 25일 오후 4시 서울 성북동 1의106번지 자택,발인 27일 오전 5시 (02)766-5675 ●金淸一(전 중앙일보 제작부차장)씨 별세 志硏(이대목동병원 운동처방사)씨 부친상 鄭炳雲(부광합동법률사무소 변호사)姜寶鉉(국군청평병원 군의관)씨 빙부상 25일 이대목동병원,발인 27일 오전 5시 (02)2650-5444 ●김인구(전 현대그룹 PR사업본부 이사)씨 모친상 25일 오후 4시 서울아산병원,발인 27일 오전 10시 (02)3010-2240˝
  • 책꽂이

    ●월드뮤직(서남준 지음,대원사 펴냄) 사이먼 앤드 가펑클이 부른 ‘엘 콘도르 파사’,잔잔한 선율과 삶을 성찰하는 가사로 유명한 이 노래는 에스파냐의 지배에 반기를 들고 잉카제국의 재건을 꿈꾸었던 마지막 잉카 황제 투팍 아마루를 기리는 노래다.지금도 안데스의 인디오들은 투팍 아마루의 영혼이 한마리의 콘도르가 돼 안데스의 창공을 날며 잉카의 후예들을 지키고 있다고 믿는다.팝송,칼립소,보사노바 등 세계음악에 얽힌 이야기들을 다뤘다.1만 7000원. ●벨기에 이야기(이성기 지음,학민사 펴냄) ‘유럽의 눈’‘유럽의 심장’으로 불리는 벨기에의 문화체험기.벨기에는 네덜란드식 발음이고 영어론 벨지움,프랑스어로는 벨지크라 한다.면적은 3만㎡ 남짓으로 경상남북도 정도밖에 되지 않는,인구 1000만의 작은 나라다.로마시대 이래 외세의 압제에 시달리면서도 그들만의 독특한 플레미시 예술을 꽃피웠고,중세부터 해상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해온 유럽의 소강국 벨기에의 저력을 들여다 본다.9000원. ●유대인(정성호 지음,살림 펴냄) ‘디아스포라’란 그리스어로 ‘이산’‘흩어진다’는 뜻으로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을 떠나 이교도 세계에 흩어져 있던 것을 가리킨다.기원전 7세기에 바빌로니아인에 의해 예루살렘에서 쫓겨나 19세기 게토에서 해방되기까지 유대인들은 몇몇 작은 그룹으로 나뉘어 세계 곳곳에서 고립돼 살았다.어떻게 해서 유대인들은 그들을 에워싼 다른 민족에 동화되거나 흡수되지 않고 견딜 수 있었을까.저자(강원대 교수)는 그 힘은 바로 유대인들의 종교적 법전인 ‘탈무드’에서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3300원. ●질문의 힘(사이토 다카시 지음,남소영 옮김,루비박스 펴냄) “제대로 된 질문이 상대를 움직인다.처음 만난 사람과도 3분 만에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다.” 저자(메이지대 교수)는 질문에도 잘못된 질문과 제대로 된 질문이 있다며,올바른 질문을 던지는 원칙과 테크닉을 제시한다.무라카미 류,무라카미 하루키,스티븐 스필버그,무하마드 알리 등 ‘대화의 달인’에게 듣는 대화의 기술과 상대방의 마음을 여는 법을 소개한다.8700원.
  • 40년간 ‘한끼수행’ 청화스님 입적

    조계종 원로회의 위원이자 전남 곡성 성륜사 조실인 청화(淸華·속명 강호성) 스님이 12일 오후10시30분 입적했다.세수 80세.법납 56세. 전남 무안에서 태어나 24세에 백양사 운문암에서 만암 대종사의 상좌인 금타화상을 은사로 출가한 스님은 60여년간 전국 사암과 토굴에서 묵언과 좌선 수행으로 일관해온 선승.스님은 광주사범을 졸업하고 일본 메이지대 유학길에 올랐으나 1년 만에 징병으로 끌려와 광복을 맞았으며 해방정국의 좌우대립에 고민하다가 부인과 아들 한명을 남겨두고 출가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종파성을 지양한 통불교(通佛敎)를 주창했다. 40여년간 줄곧 하루 한끼만 먹는 수행으로 조계종 선법수행 체계를 세웠으며, 겸손한 인품 때문에 불교계의 큰 어른으로 통했다. 1985년 한국전쟁 당시 폐허가 된 동리산 태안사를 중창하고 3년간 묵언정진의 결사를 하면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다비식은 16일 오전 10시 성륜사에서 원로회의장으로 봉행된다.(061)363-0081. 김성호기자
  • 세계인 - 우리는 이렇게 산다 / “느린것이 좋다”日 ‘슬로 라이프’ 바람

    고도성장기,세계 제2의 경제대국,1인당 국민소득의 미국 추월로 절정에 달했던 자신감이 거품경제 붕괴,장기 불황으로 여지없이 추락해버린 일본 열도에 ‘천천히,천천히’의 물결이 일고 있다.당황하지 않고,서두르지 않고,천천히 살아가는 동경(憧憬)의 생활 스타일을 좇는 일본인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1980년대 패스트 푸드의 상징인 미국의 맥도널드가 로마에 진출하려는 데 대한 반발로 시작된 슬로 푸드(Slow Food)운동.빠르고 편리하고 효율적인 것보다는 조악해도 느긋하고 자연스러움에 포인트를 두는 슬로 라이프는 슬로 푸드의 ‘버전 업’인 셈이다. |도쿄 황성기특파원|“‘느린’ 쪽이 좋은 것도 있고,‘빠른’ 쪽이 좋은 것도 있다.둘 중 어느 한쪽을 택한다기 보다,예를 들어 바쁘게 일하면서도 휴일은 시골에서 지내는 것도 한 방법이다.” 일본의 유명 뉴스캐스터인 지쿠시 데쓰야(68)는 ‘슬로 라이프(Slow Life)’의 전도사이다.곳곳에서 강연할 때면 반드시 “‘슬로’는 시간개념이 아니다.바람직한 마음의 상태”라고 강조한다.그의 강연은 언제나 슬로 라이프의 비결을 전수받으려는 일본인들로 성황을 이룬다. ●“천천히 하면 몸과 마음이 건강” 도쿄 시내 한복판에 개인 사무실을 갖고 있는 야노(52)는 출퇴근은 물론 웬만한 시내 볼일의 교통수단은 자전거이다.그는 “전철이나 택시보다는 느리지만 도쿄의 대도시 풍경 속에 느긋하게 생각할 여유를 준다.”는 것이 이점이라고 말한다.딱히 슬로 라이프를 의식한 것은 아니지만 여유있게 사는 즐거움을 자전거를 타면서 느끼게 됐다고 덧붙였다. 아이치(愛知)현의 바닷가에 이웃한 농장인 ‘이토 그린 농원 펜펜’에서 50여명의 젊은이들이 농장주인 이토(50)의 얘기에 귀를 기울인다.“이게 씨앗이고,땅에 떨어져서 파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파,페퍼민트 등 다양한 야채가 재배되고 있는 6000㎡의 밭에는 군데군데 잡초도 섞여 있고,천연비료로 쓰려고 베어낸 풀더미에 갖가지 벌레들도 쉽게 눈에 띈다.“지렁이나 미생물 덕분에 부드럽고 좋은 흙이 생겨났다.”고 참가자들에게 설명하는 이토는 병원에서 인공투석 기사로 일하다 6년 전 “농장에 생을 걸겠다.”고 밭을 사들이고 슬로 라이프의 길로 나섰다. 고치(高知)시는 지난 6월 젊은 직원 12명으로 ‘슬로 라이프 추진위원회’를 설치했다.추진위의 임무는 자연이나 전통문화를 살려 느긋하고 풍부한 생활을 할 수 있는 내 고장 만들기를 위한 보고서를 작성하는 것이다.지난 4월 고치 시정의 기본방침으로 채택된 ‘슬로 라이프에 의한 인간회복의 내 고장 만들기’가 채택된 데 따른 것이다. ●잇따라 선보이는 ‘슬로 푸드’ 추진위 위원장인 나가노 이사오(33·소방국 소속)는 10월쯤 슬로 라이프 주간을 설정해 시민들에게 첫 선을 보일 예정이라고 밝혔다.추진위는 산중 콘서트,향토요리 강좌 등 슬로 라이프에 어울리는 행사를 중심으로 꾸민다는 계획이다. 자연과 내 고장을 강조하는 슬로 라이프를 경영의 원동력으로 삼자는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다. 지난 16일 도치기현 상공회의소는 ‘슬로 라이프 운동추진사업’ 1차 실행위원위를 열었다.“가치관이 변화하는 가운데 종래의 경영수법으로 기업을 지원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고 판단한 상공회의소는 도치기 이외에는 경험할 수 없는 맛,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침체 일로의 지역경제를 부흥한다는 복안이다.슬로 푸드,슬로 라이프가 일본인의 생활에 파고들 조짐을 보이자 이에 편승한 상품도 잇달아 선보이고 있다. 식품회사인 에비스는 다음달 11일 ‘슬로 라이프 스튜’의 판매에 들어간다.조리 시간이 다른 제품보다 더 걸리고 화학조미료를 넣지 않아 자연의 맛을 즐길 수 있다는 컨셉트를 강조했다.자연을 강조한 스튜 하나로 에비스는 한해 10억엔(한화 100억원)의 매상을 올린다는 계획을 세웠다. 다이와하우스 공업도 슬로 라이프를 실천한 경량철골 구조의 주택을 선보였다.거실의 남북쪽으로 커다란 입구를 내고 천장에도 창을 내 바람이 잘 통하게 했으며 함께 조리하고 먹을 수 있는 개방형 부엌 등이 자랑거리.공사비는 평당 58만엔이다. 슬로 라이프를 테마로 한 책방도 생겨났다.도쿄 아카사카에 지난달 문을 연 한 책방은 ‘화(和),슬로 라이프,아시아,에스닉’이라는 코너를 설치했다.슬로 푸드를 다룬 책이나 느긋한 풍경의아시아 마을을 촬영한 사진집 등 2000여 종류의 서적을 갖추고 슬로 라이프를 추구하는 일본인들의 요구에 부응하고 있다. 노령화,도시화에 따른 주민 감소로 고민하는 산골 마을도 슬로 라이프를 재정 개선책이나 주민 이주의 유인책으로 삼고 있을 정도이다. 아이치현의 젠만초(千万町)는 초등학교가 취학아동의 감소로 폐교 위기에 놓여 있을 만큼 편의점은 물론 휴대전화도 불통인 ‘불편 그 자체’로 인구 200명의 산골 깡촌.슬로 라이프를 추구하는 도회 사람이 이주하거나 놀러올 수 있도록 300년된 농가를 개조해 농촌생활의 체험 시설로 내놓았다.개조된 농가 뒤편에는 계단식 밭이 펼쳐져 있다.이곳을 찾는 도회 사람들은 이 농가와 밭에서 농작물을 키우는 경험을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주민들로부터 된장 담그기같은 전통생활을 체험하는 것은 물론 감자 같은 산골 특산물을 맛볼 수 있다. ●자연친화 운동으로 확산 추세 얼마 전 출간된 2003년판 환경백서의 ‘슬로 라이프의 추천’이란 항목.“지구온난화나 쓰레기 같은 지구규모로 전개되고 있는환경 문제 해결의 열쇠는 지역사회에 있다.”소비자가 지역에서 생산된 지역특산물을 소비하는 ‘지산지소(地産地消)’수입식품의 수입량에 수송거리를 계산해 식품의 환경부하를 표시하는 ‘식품 마일리지’의 개념을 소개하면서 백서는 슬로 라이프를 권하고 있다. 기후(岐阜)시는 슬로 라이프 운동을 펼치는 개인,단체에 1개 사업당 50만엔을 지원하겠다고 지난 6월 발표하기도 했다. 지난 18일자 아사히신문의 독자투고란.“여행이 황급하기만 하다.국내여행은 분 단위로 행동하고,해외여행은 버스로 하루 500㎞나 이동한다.아침부터 저녁까지 강행군이다.한곳에 며칠이라도 좋으니 느긋하게 머물며 지내고 싶다.‘아무 것도 없는’ 서비스도 이제는 괜찮지 않은가.” 6월22일 도쿄의 명물인 도쿄타워를 비롯,일본 전국의 빌딩,시설 2000여곳에 오후 8시부터 두시간 동안 일제히 불이 꺼졌다.‘느린 것이 아름답다’는 책의 저자인 쓰지 신이치 메이지대 교수 등 시민단체가 주도한 행사였다.행사에 참가한 시민들은 촛불을 켜들고 어둑한 도시 속에서 슬로 라이프의 뜻을 되새겼다. marry01@ ■시즈오카현 가케가와市선 |도쿄 황성기특파원|일본 중부지역의 시즈오카현 가케가와(掛川)시는 슬로 라이프를 선구적으로 실천하고 있는 아담한 마을이다.인구 8만 2000명의 소도시 가케가와에 슬로 라이프가 본격도입된 것은 지난해 12월.‘슬로 라이프의 달’로 정하고 시 전역에서 113개의 이벤트를 치렀다. 행사의 하나인 슬로 사이클링에는 남녀노소 60여명이 참가해 30㎞의 거리를 4∼5시간에 걸쳐 천천히 달렸다.‘달렸다’기보다는 달리다,멈췄다,자전거를 끌었다 하면서 경치를 감상하고,다른 참가자들과 얘기도 나누며 느긋하게 이벤트를 즐겼다.지난 5월부터는 ‘느림보 버스’가 시내를 달리기 시작했다.시내 2개 코스 각각 12㎞를 45분에 순환하는 100엔짜리 슬로 라이프 버스는 급한 용건이 있는 사람이라면 답답해 앉아 있을 수 없을 정도로 느려터졌다. “인생을 80살까지 살 수 있다고 할 때 시간으로 환산하면 70만 800시간.그중에 일하는 시간은 7만시간에 불과하고 나머지 63만시간은 천천히 즐겨야 할 시간이라는 것이 가케가와의 제안”이라고 슬로 라이프를 측면에서 지원하고 있는 가케가와 시청 기획인재과의 니보리 노리코는 설명한다.니보리는 “편리하고 빠른 것을 추구하는 바쁜 21세기는 물질적 풍요는 있지만 정신적 빈곤은 심화되는 시대”라면서 “슬로 라이프를 실천함으로써 마음의 풍요로움을 얻고 나누자는 것이 우리 시의 생각”이라고 덧붙였다. 일본 전국에서 처음으로 슬로 라이프 개념을 시민생활과 행정에 도입할 것을 제안한 시는 시민들로부터 슬로 라이프 아이디어를 모집,이중 40개를 채택했다.시민들이 참가하는 슬로 라이프 행사에는 시 예산 2000만엔도 지원했다. 가케가와 시의 슬로 라이프는 7가지로 구성돼 있다.자동차를 타지 않고 천천히 걷자는 슬로 페이스,기모노,유카타 같은 전통의상을 입자는 슬로 웨어,가급적 천연식품으로 식생활을 하자는 슬로 푸드,오래된 주택에서 진정한 편리함과 멋을 찾자는 슬로 하우스,느긋하게 나이 들어 가자는 슬로 에이징,무농약·유기농을 권하는 슬로 인더스트리,죽을 때까지 배우자는 평생교육 개념의 슬로 에듀케이션. “7가지를 다 실천할 수는 없겠지만 살아가는 데 이들을 의식하고 실천하려고 할 때 삶이 보다 풍부해질 수 있을 것”이라는 게 니보리의 낙관적인 전망이다.
  • “애국심·술마시기 강요 싫긴해요 하지만 ‘한국인’ 11년 후회없죠”일본서 귀화 제주시 공무원 문현일씨

    제주 국제자유도시추진단 기획조정담당관실에서 계약직 공무원으로 근무중인 문현일(文賢一·39)씨는 원래 일본 사이타마(埼玉)현에서 태어난 일본인이다.그러나 십여년 전 한국인으로 귀화,제주의 1호 귀화 공무원이 됐다.1992년 8월 서울이 고향인 아내 강훈주(姜薰姝·32)씨와 결혼,희수(10)와 희경(7) 형제를 두고 있는 그는 아내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결혼 6개월 만에 조국과 ‘하기노 겐이치(萩野 賢一)’라는 이름을 버리고 한국 국적을 땄다. 메이지대(明治大)에서 상학을 전공한 그가 한국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오래 전이었다.82년 경주와 서울 등지를 여행하면서 일본과는 전혀 다른 ‘고즈넉한 정서’에 푹 빠졌다.기와집 처마,한복 입은 여인 등에 홀딱 반했다는 것이다. 대학을 졸업한 뒤 십여년 전 돌아가신 아버지의 회사에서 일했으나 한국의 매력을 떨치지 못해 89년 겨울 한국행을 결심했다.고려대에서 6개월간 한국어를 배우고 서울의 학원에서 일본어 강사로 4년째 일하던 중 인생의 전환점을 맞았다.지인의 소개로 방송대 학생이던 지금의아내를 만나 열애에 빠졌고 ‘그 사람이 너무 좋아’ 3개월 만에 결혼했다. 한국으로의 귀화는 결혼 후 한국외국어대학원 일어연수원에서 근무하던 93년 2월,그러니까 결혼 6개월 후쯤이었다.한국에서 일하고 있고 한국인을 아내로 맞은 마당에 기왕이면 완전한 한국사람이 되고 싶었다.“아내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일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에서였다.귀화할 때 가장 어려웠던 것은 성을 정하는 일이었다.김,이,박씨는 너무 흔해서 싫었다.일주일 내내 고심 끝에 문(文)씨 성을 골라냈다.“그렇지,일본 하면 무(武)로 통칭되는 ‘사무라이’가 상징이지만 한국은 예부터 무보다 문(文)을 숭상하지 않았는가.그렇다 문이다.” 이어 문씨가 99년 부산정보대 전임강사로 발령받으면서 식구 모두가 부산으로 이사했다.제주와의 인연은 지난해 8월 국제자유도시 관련 계약직 공무원 모집공고를 접하면서 맺게 됐다.웹디자이너인 아내와 아이들은 부산에 남겨둔 채 바다를 가운데 둔 별거아닌 별거생활이 시작됐다.도청에서 그가 맡은 일은 일본인과의 상담과 통역.도지사와 국장의 일본 출장길에는 늘 그가 낀다.작년 10월에는 예술단 활동의 하나로 야마구치(山口)현에,지난 2월에는 오키나와 국제자유도시 선진지 시찰차,그리고 최근에는 우근민 도지사와 함께 돼지고기 수출 협상차 도쿄·가고시마(鹿兒島)·오사카를 다녀왔다. 이제 공무원생활 10개월여.“가장 큰 고통은 술을 못하는데 술자리가 많아 안마실 수도 없고 선뜻 피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혼자 집에 가서 뭐 하느냐는 말엔 할 말도 없고요.” 상급 직원들의 자기식 주장에 눈높이를 맞추는 것도 어렵다고 했다.그는 한국에 대한 느낌도 솔직히 털어놓았다.“귀화시험 때 애국심을 강요하는 듯한 문제는 조금 싫었고,일본에선 아이들에게 질서를 강조하는데 한국에서 아이들의 기를 죽이면 안된다는 생각이 큰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퇴근 후 주로 TV를 시청하거나 일본영화 비디오를 본다.미술이 취미라 틈나는 대로 제주도의 풍광을 화폭에 담기도 한다. 방 한 칸을 빌려 혼자 살고 있는 그는 한 달에 한 번 찾아오는 토요일 휴무 때 부산으로 간다.일반 공무원들은 휴가일정을 짜 여름휴가에 나서고 있지만 문씨는 계약직이라 휴가가 없다.그래서 8월중 4일쯤 연가를 받아 아이들과 실컷 놀아줄 참이다. 제주 김영주기자 chejukyj@
  • [열린세상] 도시근교 ‘멋대로 개발’

    요즈음 같은 봄철에는 주말에 야외로 드라이브를 나가 도로변 경관도 감상하고 때로는 맛있는 음식점에 들르는 등 행락을 즐기는 일이 많다.그러나 도로를 달리며 보는 경관이 시골다운 농촌의 모습도 아니고 도시 교외의 전원적인 경관도 아닌 매우 혼잡한 양상을 띠고 있어 혼란스럽고 지저분하다는 느낌을 자주 받는다. 대도시 주변의 땅들이 농촌적 토지이용에서 무분별하게 도시적 토지이용으로 변해가면서 여러 가지 유형의 부조화한 경관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도로변에 가장 자주 눈에 띄는 것이 음식점,전문상가,대형 마트 등 위락경관이다.문제가 되는 것은 이들 시설,특히 각종 음식점들의 난립한 간판일 것이다.저마다 대형 입간판 혹은 플래카드를 경쟁적으로 설치해놓아 통일로변이나 양평가로변 어느 가로는 마치 간판 속을 통과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와 더불어 사이사이 보이는 5,6층 규모의 소위 러브호텔도 그 국적불명의 묘한 지붕모양이나 그것에서 연상되는 숙박의 의미와 함께 우리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주유소 또한 도로의기능상 필수적인 것이지만 너무 자주 나타나 지루한 감을 준다.주유소간 거리제한이 전국적으로 철폐된 후로 더욱 많아져 각기 광고용으로 오색기와 플래카드,안내문 등을 경쟁적으로 거대하게 설치해놓아 더욱 눈에 거슬린다. 달리다 보면 갑자기 논두렁 위에 하늘 높이 치솟은 아파트도 만나게 된다.용인 일대에 난개발로 들어선 대단위 아파트 단지가 지금 문제되고 있지만,여기서는 국도 주변의 소규모로 들어선 나홀로 아파트들이 그 위압적인 경관으로 주변을 제압하는 경우의 문제를 말하는 것이다. 아마 형태적 측면에서 가장 부조화한 것은 7,8층 규모의 거대한 물류창고나 냉장창고일 것이다.이것은 유통업체들이 출하조절을 위한 저장용으로 교통 편의상 세운 것으로,이 지역의 토지이용과는 무관하게 제멋대로 들어선 것이다. 이들 도시 근교 경관을 형성하는 시설들은 서로 직접적인 연관성도 없고 형태적·기능적으로도 매우 이질적이고 때로는 상충되어 하나의 조화된 경관으로서 일체감이 없다.더구나 이들 시설 사이의 빈 터는 마치 임자 없는 땅같이 방치된 채 그곳에 쓰레기,폐비닐,각종 폐기물 등이 어지럽게 널려 있어 마치 폐허가 된 황무지를 연상케 하는 경우도 많다. 도시는 본질적으로 팽창하므로 도시 주변의 농촌지역이 도시적 기능으로 바뀌는 것은 피할 수 없지만,그 계획과 관리가 체계적이지 않아 이런 관리의 사각지대가 나온 것이다. 근본적인 요인은 도시지역같이 엄격하게 도시계획법으로 다스리지 않고,규제의 측면에서 느슨한 준농림지역으로 방치함으로써 개발업자의 이기심이 작용하여 자기 편의대로 개발했기 때문이다. 도시 주변의 경관은 도시와 농촌의 점이지대로서,도시에서 맛볼 수 없는 독특한 분위기를 제공하는 장소로서의 제 모습을 찾아야 할 것이다.아름다운 전원적인 경관을 유지하면서 도시와의 근접성을 최대한 살려 적절한 도시시설이 품위 있게 들어서야 할 것이다.예컨대 양수리 카페의 거리 같은 주제가 살아 있는 가로경관이 좋은 예가 될 것이다. 다행히 금년 초부터 시행하는 국토의 이용 및 계획에 관한 법률에서는 도시와 농촌을 구분하지 않고 전 국토를 일관된 하나의 제도적 장치로 규제함으로써 국토의 총체적 관리가 가능하도록 했다. 이 법에 의하면 난개발이 문제가 되었던 도시로 편입이 예상되는 과거의 준농림지역은 ‘계획관리지역’으로 묶어 체계적인 계획을 전제로 개발하도록 했다.그 상세한 지구단위계획 내용 중에는 경관계획도 포함되어 있어 법체계상 처음으로 경관에 관한 문제가 제도적 장치를 갖추게 되었다.이 법적 장치가 슬기롭게 운용되어 바람직한 도시 근교 경관이 실현되도록 기대해 본다. 이 규 목 서울시립대 교수 조경학
  • [Look!아시아] 1부 新장보고 루트르포 (3)쇼와 붐,일본

    |도쿄 황성기특파원|‘잃어버린 10년’의 아픔을 겪고 있는 일본인들은 지금 일본 역사상 가장 활력이 넘쳤다는 쇼와(昭和)시절에 대한 향수로 상처받은 마음들을 달래고 있다.당시를 테마로 한 서적,영화,패션,심지어 과자점까지 찾는 사람들의 발길로 북적인다.그러나 ‘좋았던 옛날’에 대한 향수와 좌절감에서 시작된 이러한 사회적 트렌드는 ‘일본어 붐’ 등 일본적인 것에 대한 애정으로 발전되며 민족주의의 재발현이라는 우려를 낳고 있다. 요코하마(橫濱) 시내 미나토미라이 21지구.이곳에 들어선 ‘하이카라 요코초’에는 쇼와시대(1926∼1989년)를 재현한 약방,과자점,사진관 등 상점들이 늘어서 있다.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이곳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언제나 붐빈다.연인들,혹은 가족끼리 놀러 온 사람들은 연신 “이때가 좋았네.”,“그리워,이때로 돌아갈 수 없나.”라는 탄성을 터뜨린다. 2001년 4월 문을 연 당시에는 호기심에서 젊은이들이 많이 찾았으나 지금은 입소문이 퍼져 그들의 부모세대나 할머니,할아버지 세대들도 찾는다.3대가 함께 이곳을 찾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하이카라 요코초의 운영회사인 ‘젠토’의 니시무라는 “테마를 쇼와 30년대(1950년대 후반∼1960년대 전반)로 잡은 것은 그때가 일본에 가장 힘이 넘쳤던 시대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그는 “일본인들이 이 시대를 그리워하고 지금의 어려움을 치유받는다고 판단했다.”고 덧붙인다. 오메(靑梅)시의 ‘쇼와 레토로 박물관’은 전후 부흥시대인 쇼와 30년대를 컨셉트로 과자점,문구,영화간판 등을 전시하고 있다.이 박물관은 당초 지방에서 불고 있는 심각한 불황으로 빈 가게들이 늘면서 상가 부흥을 위해 고안됐으나 예상 외의 성황을 누리고 있다. 도쿄 긴자에도 메이지 제과가 쇼와 초기를 재현한 카레 전문점을 오픈했고 오다이바에도 쇼와 상점가가 명물로 등장해 언제나 손님들로 북적거린다.서점에는 ‘쇼와 천황’ 같은 쇼와 시대를 테마로 한 서적들이 즐비하다. 쇼와 시대의 신문소설을 드라마화한 ‘진주부인’이 지난해 공전의 시청률을 올렸는가 하면 ‘황갈색 머리소녀’,‘낡은 시계’ 등 쇼와 시대의 노래가 리바이벌돼 젊은이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또 젊은 세대에게 전쟁 중 일본 국민의 고생을 전달하기 위한 취지로 1999년 개관한 ‘쇼와관’에는 지난해 4월부터 10월까지 15만명이 찾기도 했다. “회고 붐이다.옛날로 돌아가자기보다 시간 감각이 어긋나 있는 현상이다.젊은 세대는 과거의 것이 흡사 새로운 것처럼 보이고 나이든 세대는 그리움이다.시간이 텅 비어 있다.”(사회평론가 미야자키 데쓰야) 일본어붐은 이런 쇼와붐과 함께 찾아왔다. ‘소리를 내 읽고 싶은 일본어’가 140만부라는 히트를 친 뒤 ‘아름다운 일본어’‘상식으로서 알아두고 싶은 일본어’등 일본어를 주제로 한 책들이 물결을 이뤘다. 일본어붐의 배경에는 구구한 설이 있다.붐에 불을 댕긴 ‘소리를…’의 저자 사이토 다카시(메이지대 교수)의 말대로 “신체학의 발로”이기도 하고 “일본 문화의 회복”(시인 다와라 마치)이기도 하다. 이중에서도 일본인의 정체성 찾기라는 주장이 가장 설득력을 갖는다.“80년대 나카소네 총리의 전후 총결산 때부터 시작된 일본인들의 아이덴티티 찾기의 흐름에 일본어 붐은 놓여 있다.”(이종원 릿쿄대 법학부 교수) 쇼와붐,일본어붐이 자기 정체성 찾기의 상징이라고 한다면 지금 왜 이런 문화적 민족주의(내셔널리즘)가 나타나고 있는 것일까. 미야자키는 “9·11테러,월드컵 16강 진출,북한의 일본인 납치 등 일본인을 한덩어리로 만드는 국내외 사건이 잇달았다.”고 설명한다.이런 한덩어리가 되는 위험은 무엇인가.“쇼와붐이든 일본어붐이든 그 공통 키워드는 ‘일본’이다.일본의 아름다움 같은 것을 좇다 보면 합리적 사고를 넘어 불합리하고 감정적으로 흐를 수 있다.”(이종원 교수) 민방 아사히 TV는 새해 벽두 5시간짜리 토론 프로그램의 주제로 ‘전후 민주주의와 내셔널리즘’을 택했다.자신감에 충만해 있던 일본,일본인들이 거품경제 붕괴와 ‘잃어버린 10년’을 거치면서 민족주의적 성향을 띠기 시작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사사키 다케시 도쿄대 총장의 ‘경고’는 귀담아 들을 만하다.“일본에는 좌절감이 있다.좌절감은 내셔널리즘같은 것으로 흐르기 쉽다.일본의 정치가 공동화되고 있다.무슨일이 일어날지 예상하기 힘들다.”붕괴의 10년이 시작된 지금,일본에서 무엇이 일어날지 한시도 눈을 뗄 수 없게 됐다. marry01@kdaily.com ◆‘쇼와 30년대'란 |도쿄 황성기특파원|일본에서 붐을 이루고 있는 ‘쇼와 30년대’(1955∼1964년)에는 어떤 일들이 있었기에 일본인들이 그 시절을 이토록 그리워하는가. 전쟁의 잿더미에서 다시 일어선 그들은 도쿄 올림픽 개최를 계기로 그들의 자존심을 완전히 회복하고 고도 성장기에 들어선다.1956년 유엔에 가입한 일본은 1957년 일본원자력연구소의 원자로가 임계(臨界)에 성공하고 도쿄 인구는 850만명으로 세계 인구 1위의 도시로 올라선다. 1958년에는 당시 세계 최고층이라는 도쿄타워가 도쿄 시내 한복판에 건설되고 이듬해 아키히토(明仁·현 일왕) 왕세자가 결혼했으며 사상 첫 일본인 미스 유니버스가 탄생한다.2년 뒤 60년에는 컬러 TV방송이 시작됐으며 61년에는 도쿄가 인구 1000만 도시로 부상한다.이어 1964년 도쿄 올림픽이 열리면서 쇼와 30년대를 특징짓는 힘과 번성의 시대는 절정에 이른다. 이런 쇼와 30년대에는 일본의 공업사회가 완성단계에 들어선다.수도 도쿄로의 집중,규격 대량생산형 사회의 틀이 잡힌 것이다.이 시기에 이른바 ‘연공서열’,‘종신고용’으로 특징지어지는 일본식 경영 스타일이 정착되면서 근무처나 회사라는 조직에 충성을 다하는 ‘회사인간’이라는 말도 탄생한다. 이러한 일본식 경영에 맞춰 촌락을 비롯한 지역사회 중심의 대가족사회에서 핵가족 사회로 바뀌고 지연·혈연사회에서 직장을 중심으로 한 직연(職緣)사회로 변화한다. 히로히토(裕仁) 일왕의 연호인 쇼와(昭和)는 시대 전체로 볼 때 침략,식민지배,전쟁과 패전과 부흥을 겪었으며 군사대국에서 경제대국으로 변신한 다종다양한 시대이기도 했다. ◆일본 정신과 의사가 진단하는 '쇼와 붐' |도쿄 황성기특파원|“경제가 좋지 않아 일본인은 지금 무엇을 믿어야 할지 모른다.믿을 수 있고 변함 없었던 대기업,전통기업,은행들의 도산은 물론 교사의 비리,의사의 의료사고가 잇달아 일어나면서 아무 것도 신용할 수 없게 됐다.” 정신과 의사 가야마 리카가 보는 현대 일본인이다.마음을 의지할 곳이 없게 된 일본인에게 희망과 성장이 있던 ‘좋았던 과거에 대한 향수’는 어쩌면 당연하다는 진단이다. ●쇼와붐을 어떻게 해석하면 좋은가. 밝은 앞날을 찾을 수 없을 때에 과거 일본이 좋았던 시대,일본인이 열심히 뛴 전후 부흥 시대를 생각하게 된다.물질적,경제적,과학적 발전이 사람을 행복하게 한다는 등식이 있었던 태평스러운 시대였다.당시를 겪었던 윗 세대나 겪지 못한 젊은 세대는 쇼와시대에서 일종의 파워,세계적으로 일류가 되고자 했던 그리움을 느끼는 것이다. ●일본,일본어붐 현상은 어떻게 봐야 하나. 일본에는 전쟁의 싫은 기억 때문에 강제로 한덩어리가 되는 데 대해 엄청난 알레르기가 있었다.젊은 세대도 그렇다고 생각했으나 월드컵에서의 일본 붐과 일본어 붐을 전혀 저항없이 받아들여 너무 놀랐다.그들은 “전체주의가 아니라 단지 축구가 좋을 뿐”이라고 하지만 일본이 좋다고 하면 무의식중에 다른 나라는 싫다는 정반대의 의미도 생기기 때문에 조심해야 하는데도. ●그것이 일본의 젊은 세대의 문제점인가. 남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딱 잘라 대답하지 않는 것이 일본인의 미덕이었다.결단력이 없다든가 우유부단하다고 비난받는 그런 것들이다.그러나 요즘 젊은이에게는 그런 것이 없다.정신장애자를 사회와 격리해서는 안 된다는 논의가 있으면 그들은 “격리해야 한다.”고 잘라 말한다.미국식으로 분명한 태도를 취하는 것을 멋있다고 생각한다. ●일본인은 어디로 가는가. 하나의 흐름이 있으면 반대의 흐름이 일어나는 힘이 아직 있다.그러나 경제악화로 반작용이 쉽지 않다.이시하라 신타로 도쿄 도지사처럼 극단적으로 말하는 사람이 나오면 순식간에 그쪽으로 쏠려버릴 가능성이 있다.그래서 걱정이다.젊은 세대는 무력감이라든지 상상력 결여로 지금은 그런 큰 사회문제가 되지 않고 있지만 이시하라 신당의 움직임이 나왔을 때에 순식간에 그쪽으로 쏠려버리는 밑바탕이 되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걱정된다. ●이시하라 신당이 위험하다는 것인가. 그들이 이시하라의 정치이념을알고 지지한다기보다 그가 미디어에 자주 등장하고 낯익은 얼굴이기 때문에 지지하곤 한다.정치가는 다 똑같다는 체념 속에서 친근하고 쉬운 말을 힘있게 하는 이시하라에게 쏠리는 것이다.우경화라고 단정하긴 어렵다.그렇지만 젊은 사람 중에서 역사를 모르는 사람이 많고 지식인 중에서도 과거보다 지금부터가 중요하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그것은 위험하다. ●납치 일본인에 대한 언론의 보도태도도 그런 맥락인가, 일본은 세계 속에서 북한을 바꿀 수 있다는 중요한 입장에 있는데도 넓은 시야나 장기적으로 뭔가를 생각할 수 없게 됐다.대단히 근시안적으로 되고 있다.납치도 내 가족의 문제라고 간단히 생각해버리고 만다. ■가야마 리카는 43세.도쿄의대 졸업.신문,잡지,TV에서 사회·문화비평을 비롯,현대 일본인의 ‘마음의 병’을 독특한 시각으로 분석하고 있는 젊은 정신과 전문의.월드컵에서 나타난 일본 젊은이들의 민족주의 성향을 분석한 ‘소 내셔널리즘 증후군’을 비롯,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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