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비판 잣대로 민주화세력을 비판하라”
박정희를 비판하는 동일한 논리로 민주화세력도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국내 진보진영의 대표적 이론가인 조희연(52) 성공회대 사회학과 교수가 주장의 발원지다. 지금까지 민주화세력이 비판 대상엔 가혹한 기준을, 자신에겐 관대한 ‘이중잣대’를 적용해온 측면이 있다는 조 교수의 문제의식은 그 자체로 논쟁적이다. 민주화세력에 성찰의 계기를 제공한다는 점에서도 주목된다.
조 교수는 최근 발간된 ‘마르크스주의 연구’ 2008년 봄호에 게재한 ‘헤게모니 균열의 문제설정에서 본 현대 한국 정치변동의 재해석’이란 논문에서 박정희의 몰락과 민주화세력의 지리멸렬을 동일한 틀거리로 분석했다. 그는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흔히 민주세력은 적대자에 대한 기준과 자기편에 대한 기준을 이중적으로 적용해 왔으나, 박정희를 비판하는 방법론으로 스스로를 비판할 수 있다면 성찰의 폭이 훨씬 넓어질 것”이라고 논문 취지를 설명했다.
조 교수가 양측에 공통적으로 적용한 잣대는 ‘헤게모니 구축’과 ‘헤게모니 균열’이란 관점이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박정희 정권은 경제 개발과 산업화를 시대적 과제로 부각시킨 ‘조국근대화’ 담론, 개개인의 다양한 차이를 주변화시키고 하나로 통일시키는 ‘국민화 프로젝트’, 고도성장을 향한 ‘개발동원체제’ 등을 통해 대중의 동의기반을 확보하며 헤게모니를 구축할 수 있었다.
반면 현대아파트 분양과 와우아파트 붕괴로 대변되는 부동산투기와 부실공사,‘광주대단지 사건’으로 이미지화된 도시재개발과 철거민 양산, 전태일 분신으로 기억되는 피폐한 노동환경 등 고도성장의 환희가 사라지면서 곳곳에서 파열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국민으로서의 일체감은 붕괴됐고, 계급·계층간 불평등은 확산됐으며,‘민중’이란 저항적 주체가 출현해 헤게모니는 균열됐다.
●헤게모니 구축과 헤게모니 균열 분석
조 교수는 민주화세력도 동일한 과정을 거치고 있다고 본다. 민주화세력은 반독재라는 대의 하에 ‘시민’이란 ‘민주개혁동맹’의 헤게모니 집단성을 형성했다. 그는 “국민의 집단성이 근대화의 주체로서 개발독재에 호명된 것이라면, 시민의 집단성은 반독재란 과제에 동의하는 민주개혁동맹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것”이란 말로 민주화세력의 헤게모니 구축을 정의했다.
반면 지구화의 속도가 심화되면서 민주화세력 또한 피할 수 없는 헤게모니 균열에 직면했다는 게 조 교수 진단이다. 그는 “이제 시민은 없다.”고 단언한다. 이미 다른 종족이 돼버린 정규직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는 공통의 시민성을 공유하기 어렵게 됐고, 미등록 이주노동자와 정주 외국인 사이의 차별적 대우는 시민의 인종적·종족적·민족적 분화를 촉진했다. 상류층은 일국적 엘리트를 넘어 글로벌 엘리트를 지향하고, 민주개혁을 지향하는 시민적 동질성은 깨졌다는 것이다.
조 교수는 “민주화의 성공적 진전으로 민주성과 투명성은 높아졌지만, 계급적으로 양극화된 대중은 삶의 고통이 증대되는 현실을 맞닥뜨리게 됐다.”면서 “반독재 민주정부의 출현을 지지했던 여러 개인, 집단, 계급·계층조차도 배제와 소외를 느끼면서 지지를 철회하게 됐다.”고 지적했다. 박정희 정권의 몰락이 ‘국민’으로 포섭했던 사람들의 균열을 막지 못한 결과인 것처럼, 민주화세력의 지리멸렬 또한 ‘시민’으로 포섭되지 못한 사회적 약자들의 이탈과 균열 때문에 생긴 결과라는 것이다.
●박정희와 민주세력의 다르면서 같은 점
박정희와 민주화세력은 속살은 다르나 유사한 외투를 입었다. 개발동맹과 민주개혁동맹,‘동원된 국민’과 ‘저항적 시민’이란 내용은 서로 다르지만, 둘 다 본질적으로 집단적 특성을 띤다. 집단은 배제를 양산할 수밖에 없다. 박정희 정권은 정치적·경제적 배제를 토대로 체제를 공고화했다. 민주화세력은 반독재라는 단일 의제 아래 여성, 환경, 성평등, 인권 등 소수자 문제를 배제했고, 지구화는 배제의 폐해를 더욱 가속화시키고 있다. 조 교수가 보기에 한국 현대사에서 헤게모니 구축과 균열은 하나의 흐름을 형성한다. 박정희가 구축해낸 ‘국민’은 반독재세력이 구성해낸 ‘민중’으로 분열·변화했다.1987년 이후엔 시민운동이 구성해낸 ‘시민’으로 바뀌었고,97년 이후 외환위기와 민주정부 집권기를 거치면서는 ‘시민의 분열’ 과정을 겪고 있다. 서로 매우 다르면서도 흡사한 부분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조 교수는 “박정희 헤게모니의 붕괴 과정을 고찰하면 반독재 민주세력 헤게모니 붕괴의 전후가 보일 뿐 아니라 폭넓은 성찰이 가능해진다.”고 강조한다. 진보개혁진영의 자기성찰을 거듭 촉구해온 조 교수의 새 논문이 침체 국면을 맞고 있는 민주화세력에 어떤 울림을 줄지 관심을 모은다.
이문영기자 2moon0@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