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이완용
    2026-03-05
    검색기록 지우기
  • 위험성
    2026-03-05
    검색기록 지우기
  • 4·3 사건
    2026-03-05
    검색기록 지우기
  • 자동화
    2026-03-05
    검색기록 지우기
  • 차인표
    2026-03-05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340
  • 16C중반∼1970년 붓과 묵의 대가전/오늘 인사동 대림화랑서

    ◎이정의 「대나무」∼서동균의 「매화」 등 120점 조선시대 3대화가로 꼽히는 16세기 묵죽화가 탄은 이정(1541∼1622)의 대나무그림부터 지난 78년 타계한 국전 초대작가 죽농 서동균(1902∼1978)의 매화그림까지.서울 인사동의 대림화랑(733­3738)이 17∼29일에 여는 「고금명현유묵전」은 이같이 16세기 중반부터 지난 70년대 중반까지 400여년간 80명 명현의 글씨와 사군자·문인화 120점을 전시한다. 문화유산의 해에 걸맞는 이 전시는 그야말로 붓과 묵의 대가전.1500년대의 이항복·서경우·백광훈·채유후·정광성을 비롯해 1600년대의 유덕장·이하곤·홍명일·김진상·이덕흠·심정주,1700년대의 심사정·강세황·채제공·조희룡·신위·김정희·임희지·홍직필·이영익이 들어 있다.또 1800년대 인물로는 정인보·경봉·김윤식·김성근·윤용구·최익현·김돈희·이남식·서병오·김규진·양기훈·박영효·김태석·이하응·김옥균·유길준·조소앙·오세창·고희동·이완용·이준용,1900년대엔 이응로·손재형·서동균까지 망라돼 있다. 이 자리에는 애국지사와 매국노의 글씨체도 한자리에서 선보이며 나라가 망한 뒤 총독부가 있는 곳을 등지고 살면서 큰 갓을 눌러쓰고 다닌 우국과 울분의 심정이 잘 담긴 석촌 윤용구의 글씨와 그림이 이채롭다. 한편 대림화랑측은 고미술전시로선 드물게 전시도록에 전시품가격을 일일이 명기,관람객에게 공식적인 가격을 제시하고 있다.
  • 이완용 암살 미수/이재명 의사 수사기록 “햇빛”

    ◎검찰,일제강점기 자료 2백77권 공개/“국적 없애려 거사” 의연한 진술/모의과정 등 상황 생생히 전달 『대한민국을 망하게 한 송병순,이완용 등 국적을 죽이지 않으면 이 나라가 발전부강할 수 없어 거사했다』 을사5적 이완용을 살해하려다 미수에 그쳤던 이재명 의사가 1910년 당시 경시청에서 조사한 신문조서에서 밝힌 의거 동기다. 대검 공안부(최병국 검사장)는 14일 광복 51돌을 앞두고 이완용모살사건 수사기록 등을 포함,일제 강점하에 있었던 1909년부터 43년까지의 검찰자료 2백77권을 공개했다.이들 자료는 현재의 서울지검에 해당하는 경성지방재판소 검사국이 소장하고 있던 것을 해방후 넘겨받은 것이다. 이 가운데 경성지방재판소 검사국 명의의 「총리대신 이완용모살사건 수사기록」에는 이재명 의사의 거사 동기와 모의과정 등을 담은 신문조서와 증거물,참고인조서,구류장까지 들어있어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다. 수사기록에 따르면 「1909년 12월20일 경성 명치정 프랑스 교회 앞에서 벨기에황제 추도회에 참석하고 돌아가는이완용 총리대신을 살해하기 위해 이재명이 칼로 좌견갑부와 요부 등 2곳을 찔렀으나 차부 박원문이 저지,미수에 그쳤다.이 때문에 박원문은 칼에 찔려 숨지고 이재명이 다시 대신에게 달려들다 호위순사에게 체포됐으며…」라고 적고 있다. 이 의사는 당시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황사용과 만나 『미국이 이렇게 발달하고 부강한 것은 국가를 위해 생명을 버리는 일을 개의치 않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송병순이라든가 이완용과 같은 국적을 어떻게하더라도 죽이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결의했다. 대검은 앞으로 형사 판결문 원본철과 이완용 모살미수사건 수사기록 등 역사적 보존가치가 높은 자료 등은 마이크로 필름화해 보관하고 국사편찬위원회 등 역사연구기관에도 참고자료로 전달할 예정이다.
  • 노씨 구입 센터빌딩 정동별관 을사조약 체결한 “치욕의 터”

    ◎덕수궁의 일부… 궁중연회장으로 일제땐 외국인 사교클럽 사용도 노태우 전대통령이 비자금을 은닉하기 위해 사들인 부동산가운데 일본과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한 치욕의 문화재(서울시 유형문화재 53호)도 포함돼 있어 화제다. 노씨가 지난 92년12월 사돈기업인 동방유량의 계열사인 경한산업 명의로 매입한 서울센터빌딩의 정동별관내 주차사무실 건물이 그곳이다.경한산업측은 덕수궁 옆 7백여평 크기의 공터를 주차장으로 쓰고 있다.주차사무실 건물은 2층 벽돌집으로 아치형 창과 베란다 등으로 꾸며진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건물중 하나다.1905년 11월17일 이완용과 일본총리대신 이토 히로부미가 을사보호조약을 이곳에서 체결했다. 이 건물은 원래 덕수궁의 일부로 궁중 연회장으로 사용되었으며 중명전으로 불렸다. 일제는 한일합방뒤 이곳을 경성구락부라 부르며 외국인들을 위한 사교클럽으로 사용했다.
  • 와다 하루키 도쿄대 교수 아사히신문 기고(해외논단)

    ◎“일본은 「합방조약」 원천무효 인정하라” 일본의 에토 다카미(강등륭미) 전총무청장관 망언파동속에 도쿄대학의 와다 하루키(화전춘수) 교수(러시아·한국사 전공)는 14일 아사히(조일)신문에 기고한 칼럼에서 문제의 한·일 합방조약은 강제적으로 체결됐기 때문에 당초부터 무효라는 한국측 주장을 받아들이는 것이 현실적 해결책이라고 주장했다.그의 칼럼을 요약한다. 일본은 전후50년 국회결의에서 식민지 지배와 아시아국가 국민들에게 고통을 준 것을 인정하고 반성의 뜻을 나타냈다.일본은 그렇게한 이상 일·한 합병조약 성격에 관한 일·한 기본조약 제2조의 해석을 수정하여 양국간에 해석이 엇갈리는 부분을 통일할 필요가 있으며 그것은 가능한 일이다. 1965년 체결된 일·한조약 제2조는 1910년 체결된 합병조약의 무효를 선언하고 있다.한국측은 협상과정에서 조약전문에 「일본제국주의의 과오」에 대해 언급할 것을 요구했으나 일본측이 거부했기 때문에 제2조가 역사에 관한 유일한 조항이 됐다.그러한 애매한 표현 때문에 그후 합방조약의무효 시점을 둘러싼 양국의 해석차이가 문제되어왔다. 한국측은 강제적으로 체결된 조약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무효라고 주장해왔다.식민지지배는 불법·부당한 침략이었다는 것이다.일본측은 그러나 조약은 정당하게 체결되어 유효했으며 한국이 독립한 1948년 8월15일부로 무효라고 주장해왔다.식민지지배는 합의에 의한 합법적인 통치였다는 논리다.당시 일본정부내에는 한국통치에 대한 반성·사죄의 감정은 없었다. 한국과 일본의 이러한 해석의 대립은 조약협상과정에서 타협의 여지가 없었다.그러나 교섭이 너무 오래 걸리며 한·일 양국은 협상타결을 우선하고 문제의 조항은 양측이 자신의 주장대로 해석한다는 선에서 타협점을 찾았다.그 결과 양국은 과거창산에 있어서 정반대의 인식을 가져왔으며 그러한 현상은 30년간 계속돼왔다.그러한 상황속에서 양국민이 공통의 역사인식을 가질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하지만 서로 다른 역사인식을 갖는 현상을 하루빨리 청산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한 현상의 청산을 서두르지 않으면 안되는 또하나의 이유는 일본과 북한의 국교정상화교섭이 시작됐기 때문이다.지금 회담의 재개를 기다리고 있는 양국 국교정상화교섭은 최종적으로는 일·한조약과 같은 형태로 결론날 것으로 보인다.양조약에는 당연히 정합성이 있어야 한다.그렇기때문에 일·한조약에 대한 해석이 통일되지않은 상황에서 일본과 북한이 국교정상화교섭을 마무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일·한합방조약의 성격과 관련,최근 합병조약의 전제가 되는 19 05년의 을사보호조약은 한국측대표가 위협속에 조인했기 때문에 조약으로서 무효라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그 조약으로 대한제국은 일본의 보호국이 되어 외교권을 박탈당하고 일본정부의 중개가 없으면 국제조약을 체결할 수 없게 됐다.일본정부는 한국이 일본의 방침에 따르는가를 감독하기위해 통감을 파견했다. 일본정부가 합병을 결정하고 통감부를 통해 당시 이완용 총리로 하여금 조약에 따라 합병에 동의하도록 요구했다.이총리는 그러한 통감의 명령에 따를수밖에 없었다.그러한 조약체결에는 어떠한 대등성도 없고 자유의사의 여지도 없었다. 합병조약은 당시의 세계에서는 열강에 의해 유효하다고 인정되어 일본에 의한 한국합병은 승인됐다.당시 일본정부는 그 조약이 유효하다는 전제로 정책을 추진했다. 그러나 오늘날 되돌아보면 한민족의 의사에 반해 강제적으로 체결된 합병조약에 따른 일본의 한국합병과 식민지지배는 어떤 의미로도 합법화·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된다.그러한 의미에서 조약은 처음부터 무효라고 말할수 있다.일본은 문제의 제2조 해석을 한국측의 해석대로 통일하는 것이 유일한 현실적인 해결의 길이다.
  • 20일 본회의(의정초점)

    ◎“일 총리 망언 성토” 갈수록 고조/한일관계 전면 재검토 촉구 잇따라/“을사조약 무효 남북공동 결의” 주문 20일 국회 본회의 통일외교 안보분야 대정부질문에서는 무라야마 도미이치(촌산부시)일본총리가 『한·일합방 조약은 합법적으로 체결된 것』이라고 망언한 것을 놓고 한·일관계의 전면재검토를 요구하는 의원들의 강경발언이 주조를 이루었다. 여야의원들은 특히 일본 정·관계 지도자들의 잇단 망언이 신군국주의화라는 구조적 경향속에서 나오고 있다는 데 한 목소리로 우려를 표시했다.그러나 정부의 대응방안에 대해서는 소속당에 따라 시각차를 드러내기도 했다. 박근호 의원(민자)은 먼저 『신은 어찌하여 2차대전의 도발국이며 한민족을 식민통치한 간악한 일본을 갈라놓지 않고 선량한 우리 민족에게 이렇게 가혹한 시련을 주시는 것이냐』고 울분을 토로했다.박의원은 『일본측의 잇단 침략 합리화 발언은 경제력증대와 군사대국화라는 군국주의로 진행하는 과정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분석한뒤 『일본수상의 한·일합방조약 합법발언으로한·일관계 악화는 물론 한·미·일 삼각관계의 균열과 남북분단의 고착화가 초래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일본 수상과 외상등의 망언이 일제 식민지지배등 한·일과거사 청산문제를 놓고 너무 「어정쩡하게」 대응해온 정부의 자세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지적도 신랄하게 쏟아졌다. 임채정 의원(국민회의)은 『94년과 95년 2년사이에만도 모두 7건의 망언이 있었다』면서 『그러나 정부는 기껏해야 해명을 촉구하고 유감표명에 그쳐왔다』고 안이한 대응을 꾸짖은 뒤 남북공동으로 일본에 망언해명을 요구할 의향을 물었다. 망언에 대한 정부의 「늑장대처」도 도마에 올랐다.이세기의원(민자)은 『외무부의 대처가 왜 그렇게 한가하냐.평양방송 보도를 전해듣고 알았다는 게 사실이냐』고 따졌다. 정부의 강력한 대응과 적절한 조치,새로운 한·일관계 설정등에 대한 다양한 처방도 나왔다. 박근호 의원은 『외무부장관은 유엔에서 일본의 악랄함과 강제력을 행사한 을사보호조약,정미7조약,한·일합방을 성토하고 식민통치동안의 모든 비행과 징용,정신대문제등을 낱낱이 세계만방에 알리라』고 요구했다. 김원웅 의원(민주)은 『남북공동으로 을사조약 원천무효 결의안을 채택하자』면서 대일문제에 대한 남북한 협조문제를 거론했다.김의원은 또 『제2의 을사조약으로 불리는 한·일조약체결에 앞장선 당사자를 처벌하지 않으면 제2의 이완용이 나온다』면서 민족반역자 처벌특별법 마련을 통한 사법처리를 요구하기도 했다. 이시영 외무부 차관은 답변에서 『한·일관계 재정립에 대한 국민들의 요구에 정부도 인식을 같이한다』고 전제한뒤 『한·일합방조약은 강압에 의한 것으로 원천 무효라는 입장을 바탕으로 한·일기본조약 2조의 올바른 재해석등 강력한 조치를 각종회담과 외교경로를 통해 추진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이차관은 『모든 국민이 받아들일 수 있는 한·일역사 관계의 재정립을 위해 의원외교 차원의 뒷받침도 부탁한다』고 거국적 대응을 강조했다.
  • 무라야마 총리의 발언을 반박한다/신용하 서울대 교수·사회학

    ◎“한일합방 국제법상 원천적 무효” 과거 일본의 총리와 정치인들이 한반도 침략과 관련한 망언을 수없이 되풀이해왔지만,최근 무라야마 도미이치 현총리의 망언을 대하고는 더욱 커다란 실망감을 금할 수 없다.무라야마 총리만은 이전의 총리들과는 다른,양식을 갖춘 인물로 생각했었기 때문이다.그가 왜 그런 발언을 했는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일본의 제국주의가 한반도를 침략하여 각종 조약을 맺은 것은 당시의 국제공법에 비쳐서도,또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완전히 불법적인 것이다. 우선 을사5조약을 보자.일제는 1904년 2월8일 대규모의 일본군대를 한반도에 불법 상륙시키고,러일전쟁을 도발했다.주권국가인 대한제국의 아무런 승인도 없이 대규모 군대를 상륙시킨 것은 합법인가,불법인가.더욱이 남의 나라 강토에서 외국과의 전쟁을 도발해 피비린내 나는 전장을 만든 것이 합법인가,불법인가. 당시 일제는 러일전쟁에는 참가하지 않은,2개 사단의 대한제국주차(주둔) 일본군을 보내 대한제국의 수도와 조정을 장악했다.1905년 11월17일일제는 바로 이 주차군으로 대한제국의 궁궐을 포위,을사조약의 체결을 강요한 것이다. 당시의 국제공법에 따르면,전제군주국가가 외국과의 조약을 맺으려면 황제가 승인,비준하는 서명날인이 있어야 한다.또 입헌군주국과 공화국에서는 황제의 서명날인에 의회의 동의가 추가돼야 조약이 체결되는 것이다.그런데 과연 대한제국의 조약체결권자인 광무황제가 을사5조약에 서명,날인을 했는가. 당시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해 황제의 자문기구인 어전회의가 2차례 열렸다.황제가 참석한 1차 회의에서 조약체결안은 만장일치로 부결됐다.그러자 이토 히로부미와 일본 주차군사령관은 황제가 참석한 회의라서 그런 결과가 나왔다며 황제를 배제시킨채 2차 회의를 열어 조약체결에 찬성하도록 강요했다.이때도 총리대신서리인 한규설이 완강히 반대하자 일본군은 대신들이 보는 앞에서 그를 연행해가는 만행을 저질렀다.이런 상황에서 5명의 반역자가 일본군의 무력에 굴복한 것이다.그러나 그 회의는 자문회의였기 때문에 국제법상 아무런 구속력도 가질 수 없는 것이다.또일본은 당시 외무대신 박재순과 일본공사 하야시 고노스케가 서명한 조약안을 황제에게 추인받으려 했으나,광무황제는 끝까지 서명날인하지 않았다.따라서 이 조약은 성립조차 되지 않은 것이었다. 그러나 일제는 마치 이 을사5조약이 성립된 것처럼 대외에 공포하고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했으며,1906년 2월1일에는 한양에 일본통감부를 설치했다.식민지화를 위한 정지작업이 시작된 것이다.그러나 을사조약이 체결되지 않은 조약이기 때문에 거기에 근거한 일본통감과 통감부는 전적으로 불법이다. 또하나 빠트릴 수 없는 것은 당시 일제의 이러한 불법행위에 대해 대한제국 전역에서 국민들이 항일의병을 조직해 무력항쟁을 했다는 사실이다.일제가 불법적인 무력으로 국권을 빼앗으려 하니 생명을 걸고 대응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당시 축소발표된 일본군측의 통계로도 1907년부터 1910년 사이에 전국적으로 14만1천6백명의 의병이 참가한 2천8백60회의 전투가 벌어져,1만6천7백명의 의병이 사망하고 3만6천7백70명이 부상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또일제는 1910년 8월22일 한일합병조약을 체결했다고 주장하는데,그 조약문도 일본 정부와 통감부가 일방적으로 만들어서 서명을 강요한 것이다.당시 서명자는 일본의 데라우치 통감과 대한제국의 이완용 내각총리대신이다.그러나 통감 설치를 규정한 을사조약이 무효이기 때문에 데라우치 통감의 서명은 국제공법상으로 원천적인 무효인 것이다.한일합병조약 뿐만 아니라,일본통감이 내린 모든 명령과 지시,법규등은 모두 원천적으로 무효인 것이다. 실제로 2차대전 종전을 전후한 카이로 선언,포츠담 선언,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등에서 국제사회는 일본의 침략적 야욕으로 맺은 조약은 전부 무효라고 선포했으며,1945년 8월10일 일제는 항복하면서 포츠담 선언의 무조건 수락을 통보한 바 있다. 이렇게 볼 때 을사5조약과 한일합병조약은 불법적인 것이고,이를 일제가 무력으로 강제집행한 것에 불과하다. 무라야마 총리는 엄연한 역사적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이제라도 『한일합병조약이 법적으로 유효했다』는 발언을 취소하고 한국민에게 사과해야 할 것이다.
  • 송병준 증손자 송돈호씨/7천억대 5백만평 땅 기증

    ◎“조상 친일의 속죄로…”/복지법인 숭덕원과 장애인대 설립/5조원 상당부동산소유권도 위임/“15평전세 살지만 무거운 짐 던 느낌” 『친일파 조상이 남긴 국내외 5조원대의 땅을 되돌려받아 사회에 환원함으로써 역사에 속죄하고 싶습니다』 이완용의 증손자에 이어 구한말 대표적인 친일파 송병준의 후손이 국내와 일본에 있는 조상의 땅을 되찾기 위한 소송을 벌이는 과정에서 시가 7천억원 상당의 부동산을 사회복지시설에 무상기증했다. 송병준의 증손자인 송돈호(50·송파구 잠실동 주공아파트)씨는 10일 증조부와 조부의 명의로 돼 있는 부동산 5백20만여평을 사회복지법인 숭덕원(이사장 김건준)측에 장애자들을 위한 기술대학 설립비용으로 기증했다. 이와함께 송씨는 현재 정부기관 등의 명의로 된 국내와 일본의 부동산에 대한 소유권반환 청구소송절차를 숭덕원측에 위임했다. 이에따라 숭덕원측은 등기부상 산림청·국방부·교육부 등의 명의로 된 시가 7천억원대의 또다른 국내 부동산 5백만여평과 일본 농림성 명의로 된 동경·북해도 등 일본내 4곳의 시가 4조원대 부동산 7백60만여평을 넘겨받기 위한 법적 절차를 벌이고 있어 추이가 주목된다. 5조원대의 어마어마한 부동산이 걸린 이 송사에서 숭덕원측이 승소할 경우 이 재산이 모조리 복지시설로 흡수될 가능성이 높다. 송씨가 기증동의서에서 『숭덕원측이 추적발굴한 증조부와 조부명의의 부동산을 재단에 기증한다』는 의사를 밝혔기 때문이다. 이날 송씨가 기증한 부동산은 인천시 북구 산곡동 15일대 대지 30만평,경남 사천군 서포면 금진리 36일대 대지 10만8천평 등 전국에 산재한 5백20만여평에 이른다. 또 소유권반환 청구소송작업을 추진중인 국내 부동산은 서울 마포구 상암동 246일대 국방부 명의의 대지 90만여평을 포함,5백만여평에 이르고 있다. 이와함께 일본 북해도(북해도 천상군웅오정 대자 48번지) 일대 농경지와 방목지 7백50만평과 현재 귀족별장지인 동경도(동경도) 조포시 소재 3천여평 등 일본내 7백60만여평의 부동산에 대해서도 오는 5월부터 일본정부를 상대로 소유권 반환청구소송을 제기할 예정이다. 이에대해 숭덕원측은 『올해부터 개인의 해외부동산 취득이 자유화된만큼 일본 정부와의 송사에서도 승소할 자신이 있다』고 공언하고 있다. 현재 산림청과 국방부명의로 된 인천시 북구 산곡동 산20의 2일대 등 2필지 공시지가 10억6천여만원상당의 6천2백여평에 대해서는 송씨 등 후손7명이 이미 지난해 10월 서울민사지법에 소유권확인 청구소송을 냈다. 이들은 당시 소장에서 『상속받은 부동산을 등기하지 못한 사이 국가가 진정한 소유자가 나올때까지 잠정적인 조치로 보전등기를 한 것』이라며 이 땅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했다. 송씨가 엄청난 재산을 숭덕원에 기증하게 된 사유는 친일파이자 민족 반역자로 역사에 기록되고 있는 선대의 땅을 물려받아 편안히 살기에는 양심이 허락치 않을 뿐더러 이를 되찾는 과정에서 친일파 시비에 말려들기도 싫기 때문이라고 10일 기자에게 밝혔다. 그는 젊은 시절 큰 회사의 중견 간부로 근무하던중 친일파의 자손이란 사실이 드러나 따가운 눈총을 견디다 못해 사직할 수 밖에 없었던 개인적 비화도 간직하고 있다. 전세 4천만원짜리 15평 주공아파트에서 노모를 모시고 있는 송씨는 5년전부터 조상의 산소 소재지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드러나지 않은 문중재산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재산환수작업에 몰두해왔다. 송씨는 『재산환원을 통해 역사에 지은 죄를 조금이나마 갚을 수 있기를 바랄뿐』이라며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송병준(1858∼1925)은 조선 고종때 무과에 급제,1904년 러일전쟁때 매국노 이용구 등과 함께 일진회를 조직,황제양위운동을 벌였으며 이완용내각에서 농상공대신·내무대신을 지내며 한일합방 상주문과 청원서를 제출하는 등 매국활동을 했던 인물이다.
  • 임은 왔건만/오동춘(굄돌)

    「임이여 못살겠소 임그리워 못살겠소 임 떠난 그날부터 겪는 이 설움이라 임이여 어서 오소서 기다리다 애타오」 위 시조는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함흥감옥에서 옥살이 하던 외솔 최현배박사가 옥중에서도 나라를 생각하며 읊은 「임생각」중의 셋째수이다.잃은 조국의 새빛을 기다리는 나라사랑의 시정신이 뜨겁게 느껴진다.만해 한용운도 「님의 침묵」에서 「님은 갔습니다.아아,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라고 시의 첫머리에 뜨겁게 읊고 있다. 외솔과 만해가 몹시 기다리던 이 임은 누가 떠나게 했는가? 매국노 이완용인가? 아니면 악랄한 일제이던가? 아니다.도산 안창호는 우리나라를 일제로부터 망하게 한 책임자는 나 자신이라고 못박았다.나 자신이란 경술국치를 당하던 당시의 2천만 동포를 뜻하는 것이다.겨레가 똑똑하지 못하여 사랑하는 임(나라)를 잃었던 것이다. 이 잃은 임을 되찾기 위해 외솔은 우리 국어사랑 나라사랑의 횃불이 되고,만해는 우리나라가 민주 자주 독립국임을 세계에 알리는 3·1운동의 횃불이 되었던 것이다.내가 죽어 통일된다면 기꺼이 죽겠다던 도산은 미국에서 흥사단을 조직하여 무실 역행 충의 용감의 4대정신으로 잃은 임을 되찾으려다 끝내 순국의 거룩한 삶을 마쳤다. 우리 애국지사들이 목숨 바쳐 찾던 임은 원자탄 두 알의 하늘 심판으로 일제의 무조건 항복과 함께 뜨거운 8월에 돌아온 것이다.아,임 맞은 감격도 잠깐이요,임은 다시 허리병을 만나 반세기나 심히 앓고 있다. 임의 허리병은 우리 책임이다.8월의 국치일,광복절의 의미를 되새기며 외솔·만해·도산의 애국 애족정신을 우리는 깊이 본받아야 할 것이다.우리 임의 깊은 허리병이 이 8월에 낫도록 우리 뜨겁게 기도하자.
  • 덕수궁/궁궐:9(서울 6백년만상:46)

    ◎함녕전 화재후 1906년 중건/고종,수옥헌을 거처로… 을사조약 체결도/석조전은 최초 서양식건물… 9년걸려 지어 덕수궁은 궁의 이름을 고종의 존호를 따온데서 알 수있듯이 고종과는 떼 놓을 수 없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고종41년(1904년) 4월14일 덕수궁 함녕전에서 불이나 대한문과 대분의 전각이 불에 탔다.중신들은 고종에게 경복궁이나 창덕궁으로 옮길 것을 권했으나 경복궁의 민비 참변사건과 창덕궁에서 갑신정변·임오군란의 쓰라린 경험때문에 옮기기를 꺼려했다.이에 고종은 화마를 면한 수옥헌으로 거처를 옮기고 중건에 착공,2년뒤 완공을 보았다. 오늘날 남아 있는 모든 전각들은 이때 지어진 것들이다. 고종이 거처를 옮긴 수옥헌에서 이듬해 11월18일 이등박문을 앞세운 일제의 강압과 이완용의 매국행위로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됐다.또 고종이 헤이그밀사사건을 계획했던 곳이기도 하다.결국 이 사건으로 고종이 왕위에서 물러나고 왕위를 이어받은 순종이 창덕궁으로 옮길때까지 거처로 삼았다.지금은 자취도 없이 사라졌으나 수옥헌은 정동교회를 조금지나 오른쪽으로 꺾어져 들어가 미대사관저와 인접한 곳에 있었다. 영국의 건축가 하딩이 설계,1900년에 공사에 착공한뒤 9년만에 완공한 석조전은 두개의 동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우리 나라 최최의 서양식 건물로 화강암으로 쌓아 올린 3층건물이다.임금의 거처로 쓰일 예정이었으나 완공을 못보고 국운이 기울어 빛을 보지 못했다. 석조전은 광복후 미소공동위원회 회의장으로 사용되기도 했으며 이후 국립박물관 국립현대미술관으로 사용되다 지금은 궁중유물 전시관과 문화재관리국사무실로 쓰이고 있다. 덕수궁의 또하나의 현대식 유물은 석조전 앞의 청동 분수대.1937년 만들어진 이 분수대는 2차대전당시 일제에 의해 전시물자로 철거돼 콘크리트로 대체됐다가 지난 84년 복원됐다. 정문인 대한문을 들어서면 여느 궁궐과 마찬가지로 김천교라는 돌다리가 놓여있다.이 돌다리는 일제가 자동차 통행을 위해 흙으로 덮었두었으나 광복후 40년이 지나도록 존재자체를 모르다가 지난 86년에 비로소 복원되는 말못할 사연을 안고 있다. 일제에 의해축소되고 훼손된 덕수궁은 1960년대 들어 또한번 시련을 겪었다.태평로의 발전을 저해한다는 이유로 담장을 허물어 대한문에서부터 태평로 파출소까지 철책을 두른 것이다. 이때 오늘날 시민들의 만남의 광장으로 애용되고 있는 대한문과 문앞을 지키고 있는 두마리의 석수도 태평로의 도로가 넓혀진 만큼 뒤로 물러나는 설움을 받았다.이것도 모자라 서울시는 덕수궁을 시민공원으로 만든다는 발상아래 스케이트장을 만들고 상점과 음식점을 지었다.담장도 뒤로 물러 앉은 상태로 복원됐으나 궁궐내부는 옛모습을 많이 잃었다. 그러나 옛것과 새로운 것이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덕수궁안에 들어서면 언제나 유유자적했던 선조들의 정취를 맛볼 수 있어 좋다. 비록 옛 모습이 훼손되기는 했어도 서울의 궁궐 가운데 가장 도심에 자리잡고 있는 덕수궁의 규모는 1만8천여평.크기는 작지만 각박한 현실에 쫓겨 사는 서울시민들에겐 더없이 소중한 휴식공간으로 서울의 새로운 상을 만들어 가고 있다.
  • 창덕궁/순종이 마지막 아전회의 연곳/궁궐:4(서울6백년만상:41)

    ◎낙선재는 국상중에 왕후가 머물러/“출산 지장” 왕비침소엔 용마루 없어 『맑은 시내 굽이굽이 물소리 길게 들리는데… 울어대는 매미소리에 흥이 절로 돋아나니 시한수 읊으며 술잔이나 들어보세』 12살의 어린나이로 왕위에 오른 고종은 보위 4년인 1867년 나라의 진운은 아랑곳 않고 신정왕후(조대비)와 흥선대원군에게 모든 정무를 맡기고 창덕궁 상원(현재의 비원)의 풍경을 즐기며 그냥저냥 소일했다. 고종5년 왕은 경복궁으로 옮겼으나 5년뒤 겨울 경복궁 자경전에 불이나 창덕궁으로 다시 옮겨 10년동안 머물면서 임오군란(1882년)과 갑신정변(1884년)을 겪었다. 이로부터 23년이 지난 광무11년(1907년) 8월 창덕궁은 경운궁(현재의 덕수궁)에서 즉위한 순종황제를 맞이하니 왕궁에서 「황궁」으로 그 위상이 격상됐다. 그러나 말이 황궁이지 그 위엄은 떨어질대로 떨어져 일본인들이 아무런 제재없이 무단으로 출입했다.신하들의 조하를 받던 인정전과 황제가 거처하는 희정당은 이등박문등 일제침략자들을 위한 향응접견장소로 전락했고,비원에서는학생들의 운동회가 열리기도 했으니 궁중의 위엄은 찾을 길이 없었다. 융희4년(1910년) 8월29일 창덕궁에서 마지막 어전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순종은 일제와 이완용등 친일파들의 협박에 못이겨 한일합방의 조칙을 내리고 그 문서에 옥쇄를 찍고 말았으니 태종이 서울에 환도한(1405년)뒤 5백5년만에 여러차례 화재에도 불구하고 중건·재건을 거듭했던 창덕궁의 영화는 막을 내렸다. 한일합방으로 순종은 황제에서 「창덕궁전하」로 격하되었다.그러나 경복궁 경희궁 덕수궁이 일제에 의해 무참히 파괴됐으나 그래도 창덕궁은 창덕궁전하가 계신 때문으로 1917년 왕비가 거처하던 대조전등 전각들이 불탄 것을 제외하고는 훼손을 면해 잘 보존된 고궁으로 남아있다. 일제는 순종의 마음을 위로해준다는 구실로 경복궁의 교태전을 헐어 대조전을 복원하였다.그러나 건축과정에서 서양풍과 왜색이 가미돼 옛모습을 많이 잃은채 오늘에 이르고있다. 왕비가 거처하던 구중궁궐의 치밀처소인 대조전엔 용마루가 없다.대조전처럼 용마루가 없는 왕비의 침전은 경복궁의 교태전과 창경궁의 통명전이 있는데 이들 이름은 모두 『음양이 서로 통하여 조화를 이룬다』는 뜻으로 왕자의 생산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용마루는 지붕의 제일 높은 곳으로 천지간의 자유로운 음양교환을 차단한다하여 선인들은 왕비의 처소에는 용마루를 설치하지 않았다 한다. 순종은 1926년 4월26일 대조전에서 세상을 떠났다.순종의 승하는 6·10만세운동의 계기가 되기도했다. 대조전과 희정당의 후원에 있는 낙선재는 원래는 창경궁에 속한 건물이었다.국상중에 소복한 왕후가 거처하던 이곳은 순종이 승하한뒤 윤비가 기거하다 생을 마감했으며 비운의 황태자 영친왕 이은이 병든몸으로 환국해 1970년 이곳에서 세상을 떠났다.낙선재는 지난 89년 4월30일 일본인 황태자비 이방자여사마저 떠나보내고 생명의 숨결을 잃은채 세인의 기억속에서 사라져 가고있다. 79년 복원정비된 창덕궁은 비원을 포함,모두 15만2백평으로 비교적 보존이 잘돼 고궁의 한적한 멋을 느낄수 있다.
  • 정치인의 생존전략(정치판 달라진다:2)

    ◎「발로 뛰는 표밭가꾸기」 주력/시간쪼개 현지 방문… 교회·양로원 등 공략/후원회 구성… 깨끗한 선진국형 모금 확산 5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의 국회의원 회관은 텅 비어 있었다.임시국회가 마감된 바로 다음날이어서 그렇겠지만 빈 정도가 다른 때보다 훨씬 심했다. 이웃에 있는 민자당 당사도 마찬가지였다.김종필대표와 문정수사무총장등 3역을 빼고는 중간당직자들 대부분이 출근을 하지 않았다.거의 모두가 지역구에 내려갔기 때문이다. 「공직선거및 선거부정방지법」등 정치관계법안의 완전타결로 정치환경이 혁명적으로 변화되면서 의원들에게는 「지역구만이 살 길」이 됐다.이제는 돈으로는 조직을 관리할 수도,표를 살 수도 없어 평소부터 표밭 다지기에 나서야 하는 것이다. 민자당 의원들은 더욱 급해졌다.상반기까지 지구당 위원장들을 개혁인사로 물갈이 한다는 얘기가 들리고 있다.교체의 폭은 50∼60명까지 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파다하다.문총장은 평상시 지구당 정비작업의 차원이므로 현체제를 뒤흔들만큼 큰 폭은 아닐 것이라고 해명하고 있다.그럼에도 지구당 위원장들 사이에서는 위기감이 팽배해 있는게 현실이다.여기에는 민주당도 예외가 될 수 없다. 새로운 정치환경은 검은 돈의 정치권 유입을 차단해 의원들의 주머니를 압박하고 있지만 떳떳한 정치자금의 조달을 가능하게 해 주고 있다.후원회의 회원수는 2백명에서 3백명으로 늘어났고,1년에 두번만 허용되던 모금횟수는 4번까지 할 수 있게 됐다.선거 때는 6번까지 가능하다.1억원이던 후원금의 상한액도 1억5천만원으로 늘어났다. 의원들은 이처럼 새로운 정치문화에 적응하기 위해 선진국형 모금을 시도하고 있다.무작정 초청장을 보내 『한푼 냅쇼』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 관리도 하고 의정활동의 밑천도 충당하는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다.이들은 지지자들의 참여폭을 넓히기 위한 각종 프로그램의 개발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스스로를 「상품」으로 내놓고 적극적인 「세일즈」에 나서는 사례들은 이같은 생존전략에서 나온 결과이다. 지난해 처음으로 신문광고를 통해 1억2천만원을 모금했던 민자당의 박범진의원은 이달 중순 다시 한번 신문광고를 내기로 했다.민주당의 이철의원은 지난해말 문화,연예계 인사들을 불러놓고 디너쇼를 열어 짭짤한 수입을 올리자 「올해도 다시 한번」을 생각하고 있다.민주당의 홍사덕의원은 특유의 재담을 내걸고 토크쇼를 개최해 1억원을 거둔 바 있다. 같은 당의 이부영의원은 오는 4월부터 한길사의 책 광고모델로 TV에 나온다.이의원은 모델료를 받지 않는데 돈보다는 유권자에게 이미지를 심어주겠다는 의도를 갖고 있다.역시 같은 당의 김원웅의원은 지난해 이완용재산의 국고환수등에 주력했던 의정활동을 부각시키기 위해 독립운동관계자들로 후원회를 구성했다. 민주당의 정대철의원은 오는 6월 2일 5천명규모의 지지자 모임을 만들 계획이다.정치자금 조달창구가 아니라 「싱크탱크」인 정책자문그룹을 구성하고 지지자 계층을 넓히기 위한 것이다.정의원과 김원기민주당 최고위원은 후원회를 미국에까지 이어놓고 있다. 이밖에 임채정 박석무 유인태 제정외 장영달 박계동 신계륜 이철의원등 민주당의 개혁정치모임 회원들도 후원회의 활성화를 통해 깨끗한 정치를 시도하고 있다. 민자당의 정필근의원은 지역구인 경남 진양이 농촌지역인데도 농산물 개방의 불가피함을 강조하는등의 소신과 초선의원답지 않게 돋보이는 의정활동을 통해 유권자들에게 파고들고 있다. 이러한 방식이 다소 간접적인 표밭 가꾸기라면 시간을 쪼개 직접 지역구를 누비는 적극적인 「맨투맨」전략도 부쩍 늘고 있다.지난해 보궐선거를 통해 의사당에 입성한 민자당의 박종웅의원은 주말이면 빠지지 않고 지역구인 부산의 사하구에 내려간다.박의원은 시장 사찰 교회 양로원등을 분야별로 공략하고 있는데 7일까지 이틀동안 병원을 돌 예정이다.제정구의원은 시흥·군포지구당 사무실에서 주로 문제되는 쌀,야채류등 우리 농산물의 중개및 대리판매운동을 펴오면서 이익금을 남기지 않는 대가로 자신을 알리고 있다. 벙어리 냉가슴을 앓는 의원들도 상당수다.정치개혁을 가져올 장치는 마련됐지만 국민들의 의식수준이 이를 뒷받침하기에는 아직 미흡하기 때문이다.그렇다고 해서 개혁의 대세를 거스를 수도 없고,그저 속으로끙끙앓으면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돈·조직보다 정책” 변신 안간힘/중앙·지구당 대대적 정비… 의정활동 역점/민자/“맞대결 할만하다”… 「대안야당」 이미지 부각/민주/여야 정치환경변화 대응 부심 정치관계법의 국회통과에 따라 선거풍토 변혁의 일선 책임자로 나서게 된 여야의원들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묘책을 마련하느라 모두가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여야 정당도 중앙당과 지구당의 대폭적인 개편,공천기준의 전면 재검토등 체질 개선을 서두르고 있다. ○…민자당은 이제 여권 프리미엄이 없어진만큼 당운영이나 선거,정치자금등 모든 문제를 제로베이스에서 다시 검토하고 있다. 특히 지난날처럼 중앙당과 지구당을 방만하게 운영하면 도태될 수밖에 없다고 판단,근본적인 변화를 꾀하고 있다. 이를 위한 최우선적 과제가 인적 구조의 틀을 바꾸는 것이라는데도 공감하고 있다.이것은 지구당위원장의 과감한 물갈이를 통한 세대교체를 의미한다.이른바 관록이나 경력만을 앞세우고 선거 때는 돈과 조직으로 표를얻는 것은 이제 옛말이다.당지도부도 이같은 인식아래 대폭적인 지구당 정비를 실천에 옮길 방침이다.이와 관련,재력은 더이상 공천 기준이 아니라는 말이 공식화돼버렸다. 의원들도 혁명적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겠다는 모습이다.『지구당 관리만이 살길』이라고 굳게 마음먹고 있는 것이다.우려와 탄식도 여기저기서 눈에 띈다.주로 여권 프리미엄에 익숙해진 민정·공화계의원들이다.그렇다고 민주계의원들도 걱정을 안하는 것은 아니다.지난 총선을 여당소속으로 치러본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하지만 앞으로 지역구만 잘 다지면 어떤 정치외풍에도 끄덕하지 않을 것이라는 긍정적 측면도 염두에 두는 것 같다. 박정수의원은 『이제는 충실한 의정활동으로 평가받는 분위기가 조성될 것』이라고 내다보았다.김영구의원도 『중진이라고 명성 하나만 믿고 안일하게 대처해서는 큰코 다칠 것』이라면서 『지역별·직능별 간담회를 수시로 개최,민의를 기민하게 수렴하고 여당의원의 이점을 충분히 활용해 정책으로 잘 반영한다면 오히려 이득이 될 수있다』고 희망 섞인 전망을 했다.박희태의원은 『여당 프리미엄이 없어졌다는 말은 여야 후보간 조건이 같아졌다는 것이지 조직이 없어졌다는 얘기는 결코 아니다』면서 『조직관리에 보다 많은 신경을 쓰겠다』고 다짐했다. ○…민주당은 여당과의 이해득실을 저울질할 때 별로 밑지는 것이 없다는 반응.예전처럼 돈이 그렇게 많이 필요없는데다 선거범죄에 대한 재정신청의 주체가 검찰에서 후보와 정당으로 확대돼 관권개입이 상당히 줄어들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다.이기택대표는 『앞으로는 돈없고 힘없는 야당도 여당과 한번 맞대결해 볼만 하게 됐다』고 말했다. 민주당은 앞으로 정책 개발 없이는 선거를 치를 수 없다는 판단아래 당의 정책기능을 획기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한다는 방침이다.정책정당으로서의 이미지 제고만이 선거에서 이길 수 있는 길이라는 인식에서다. 정책위는 지금까지 국회 의원회관에서 주로 열리던 정책토론회와 공청회등을 외부에서 확대 개최하는 방안을 강구하고 있다.또 전 지구당에 개정된 정치관계법의 내용과지침을 시달하는 한편 유명무실한 당무감사를 강화해 달라진 선거환경에 대한 적응력을 키워나갈 계획이다. 의원들은 중앙당차원의 정책개발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유권자들과 부단히 접촉하는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권한이 강화된 선관위의 철저한 중립이 전제돼야 한다고 말한다.법이 바뀌었다고 해서 수십년간 내려온 불법관행이 하루 아침에 사라지기는 어려운 것이 아니냐고 반문하고 있다.
  • 갑오경장 1백주년… 그 개혁운동 재평가와 역사적 교훈

    올해는 갑오경장 1백주년을 맞는 해다.갑오경장은 1894년7월부터 1896년2월까지 약 1년반동안 지속된 제도개혁운동이었다.이 기간동안 우리나라는 구시대의 질서에서 신시대의 질서로 편입되는 엄청난 변혁을 겪었다.지난해 새정부 출범 이후 우리는 또다른 개혁의 시대를 숨가쁘게 달려왔다.1백년만에 다시 변혁의 기회를 맞이한 것은 우연의 일치만은 아닐 것이다.갑오경장이 제도의 변혁이었다면 지금은 당시의 엄청난 변화에 비견될 의식의 개혁이다.올해는 새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개혁의 성패를 가늠할수 있는 중요한 시점.「외세에 의존한 정권탈취 및 유지책」이라는 시각에서 「기반이 확보될 때까지 시한부로 일본의 후원을 기대한 자율적인 개혁운동」으로 재정립된 갑오경장을 재조명하고 지금 추진되고 있는 개혁을 성공으로 이끌 역사적 교훈을 찾아본다. ◎재평가 작업/민중지지 못얻은 미완의 제도개혁/농민 염원 수용… 국정에 새바람/민주·자립 등 근대적 이념 표명/“일제 등에 업고 권위주의적 추진으로 실패” 갑오경장은 조선조를거치며 쌓인 민중들의 원성이 1894년 동학농민봉기로 나타나자 새로 들어선 정권이 그 불만을 아우르기 위해 시도한 제도개혁운동이었다.그로부터 1백년뒤,제3공화국 이후 국민의 민주화에 대한 염원이 문민정부의 등장을 가져오고 그들의 요구를 수용해 개혁이 이루어지고 있는 오늘날의 상황과 크게 다를바 없다. 다만 갑오개혁의 주체들은 일본이라는 외세의 무력의 도움을 받아 집권했고 「잠정적」이라는 단서는 달았지만 그들의 지원으로 개혁을 추진하려 했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었다.여기에 갑오경장 주역들의 「개혁은 곧 서구화 내지 일본화」라는 소신은 그것이 비록 역사적 관점에서 옳은 판단이었다 할지라도 구성원들의 폭넓은 지지를 얻지 못했다.갑오경장이 미완의 개혁으로 끝난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또 갑오경장이 그동안 그 역사적 비중에 상응하는 평가를 받지 못해왔던 것도 여기에 이유가 있을 것이다. ○혁명적 이상추구 그러나 갑오경장이 재평가되고 있는 시점에서 되돌아 본 갑오개혁파의 개혁정책은 당시로서는 가히 혁명적 이상의 변혁을 추구했음을 알수있게 해준다. 갑오경장을 주도한 개화파 관료들은 집권하자마자 외무아문을 신설해 근대적 자주외교를 펼칠 준비를 갖추었다.이어 국호를 대조선제국으로,국왕을 대조선황제로 부르고 1896년부터 건양이라는 독자적 연호를 채택해 국가적 자주 독립을 내세웠다. 이들은 민주주의적 발상에 입각한 몇가지 참신한 정치제도개혁도 실시했다.개혁추진의 핵심인 군국기무처를 입법·자문기관인 「의사부」로 만들어 행정부에 대치시키는 의회설립안을 만들었던 것도 이 가운데 하나이다.또 조선협회라는 일종의 정당을 발족시키기도 했다. ○지방제도 일원화 이들은 8도·5유수부로 대표되는 종래의 지방행정체제도 23부·3백37군으로 개편했다.지방제도를 일원화함으로써 행정의 합리화를 기함과 동시에 지방관으로부터 사법권과 군사권을 박탈해 근대관료적 색채가 농후해졌다.또 「향회조규」와 「향약변무규정」을 발포해 초보적인 지방자치제를 실시코자 했다. 경제분야에도 힘을 기울였다.개혁파는 일본으로부터 차관을 도입해 재정정리와 민간산업 진흥을 도모하고 근대적 자립경제의 기초를 다지는 경제개발 계획을 세웠다.이 계획은 경인철도 건설을 통해 수입을 늘리는 외에 왕실재정을 정리해 정부수입을 늘리는 한편 새로운 세원을 발굴하고 세수의 결손을 줄이며 민간상공업을 진흥한다는 내용까지를 포함한다. 이미 잘 알려진 대로 능력본위의 평등사회를 실현하겠다는 개화파의 사회개혁 의지도 중요한 대목이다.이들은 집권하자마자 「사민동등지법」을 확립해 전통적 신분제도의 철폐에 착수했다.양반과 상민을 구별하지 않고 인재를 등용하고 같은 양반에서도 문반과 무반의 차별을 없앴다.공사노비를 풀어주고 인신매매를 금했으며 역정 광대 백정도 모두 면천케 했다.이밖에 죄인에 대한 고문이나 연좌법을 폐지하고 너무 이른 결혼과 과부의 재가를 허용하는등 여성의 지위를 향상시키는데도 관심을 기울였다. ○해외유학 적극적 개화파는 과거제도 중심의 교육제도가 조선을 쇠퇴케 한 근본원인이라 생각해 합리성과 실용 위주로 교육제도를 개선코자 했다.이에 곳곳에 학교를 세우고 본국문,즉 한글의 사용을 장려해 정부의 공문과 관보도 국한문 혼용체나 순한글로 쓰도록 했다.또 적극적인 유학정책을 펴 1895년에는 약2백명을 국비로 도쿄에 유학시켰고 미국인 선교사가 경영하는 배재학당에 2백명의 관비장학생을 입학시켜 신학문을 배우게 할 계획도 마련했었다. 갑오개화파의 이 모든 정책 대부분은 물론 일본과 관련한 부정적인 해석이 있어왔다.또 대부분이 민중의 의사를 도외시한 위로부터의 개혁이었다는 점만으로도 그동안 권위주의 시대에 대항해 온 일군의 학자들에 의해 비판받아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제는 다양한 시각의 존재가 필요해졌다.권위주의 시대에 역사에서 필요한 교훈이 한방향으로 귀결되었다면 문민시대에 필요한 역사적 교훈은 다양하기 때문이다.갑오경장에서 현재 행해지고 있는 개혁의 교훈을 찾으려 하는 것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또 갑오경장을 일방적인 예속의 역사로 해석하는 것은 자존심을 위해서도 이제는 벗어나야 할 대목이다. ◎발단·경과/대원군추대,친일내각 수립/20개월간 전반적 혁신 단행 민씨정권은 1884년 갑신정변을 수습하고 나름대로 서구의 기술을 도입하는등 근대적 개혁을 추구하고 있었지만 열강의 침투에 속수무책이었다.또 지배층 위주의 개혁이었기에 농민층과의 충돌은 불기피했다.1894년 동학농민봉기가 일어나자 자력진압이 불가능한 민씨정권은 청에 응원군을 요청하는 한편 농민군의 요구를 일정수준으로 받아들이는 선에서 협상을 시도했다.그러나 민씨정권의 요청에 따라 청군이 아산만에 들어오자 일본은 천진조약을 빌미로 곧 이어 군대를 인천에 상륙시켰다. 민씨정권은 청·일양군공동철병론을 주장했으나 일본은 조선의 개혁에 대한 청·일공동지도론을 제의했다.이에 청이 내정간섭이라며 이를 거부하자 일본은 침략을 위한 독자적인 개혁의 원칙을 제시했다. 민씨정권은 이 요구를 거절하고 농민군의 폐정개혁요구를 반영하는 선에서 정권의 위기를 넘기려 했으나 일본은 7월23일 경복궁을 기습하여 민씨정권을 무너뜨리고 대원군을 추대했다.이어 김홍집을 수반으로 하는 친일계와 중립계로 정부를 개편했다. 1894년7월에서 1896년2월에 이르는 갑오경장기간 정계에서 부침하던 정파는 다섯 그룹으로 대별된다.김홍집 김윤식 어윤중 유길준등 갑오경장파와 박영효 서광범등 갑신정변파,박정양 이완용 윤치호등 미국·러시아등 외국공관을 배경으로 하던 정동파,대원군 이준용 이태용등 대원군파,그리고 고종과 명성황후를 둘러싼 홍계훈 이도철 이학균등 궁정파등이었다. 이 가운데 갑오경장 전기간에 걸쳐 가장 오래 정권을 장악하고,따라서 개혁운동에서 가장 큰 역할을 담당한 세력은 갑오경장파였다. 이들은 처음에 대원군파와의 제휴로 집권해 제1개혁기(1894년7월27일∼12월17일)에 군국기무처를 중심으로 개혁을 주도했다.이어 제2개혁기(12월17일∼1895년5월21일)에는 갑신정변파와 연립내각을 구성해 공동으로 개혁을 추진했다.제3개혁기(5월31일∼7월6일)에 갑오파는 갑신파와의 알력으로 김홍집과 조희연이 내각에서 사퇴했지만 다른 멤버는 남아 박영효가 주도하는 개혁에 동참했다.갑오파는 제4개혁기(7월6일∼8월28일)와 제5개혁기에는 정동파와 궁정파의 합세로거세될 위기를 맞았으나 제6개혁기(10월8일∼1896년2월11일)에 궁정파가 실권하자 다시 득세,집권하여 개혁운동을 재개했다. 갑오경장은 그러나 과격한 개혁조치에 불만을 품어오던 고종이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을미사변이 일어나 대일감정이 극도로 악화된 사이 1896년2월에 러시아공사관으로의 망명(아관파천)으로 개혁정권이 붕괴되고 친러정권이 들어섬에 따라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역사적 교훈/“민의따른 개력이 최상의 통치”/폭넓은 지지속 군사·재정 뒷받침 필수/“외세의존땐 성공 못한다” 역사의 명제 갑오경장이란 지금으로부터 1백년전 1894년에 동학농민봉기와 청일전쟁을 배경으로 추진되었던 획기적인 근대화운동을 뜻한다.이 개혁운동을 통해 종래의 중국적인 우리나라 통치·행정구조 및 외교·재정·군사·경찰·사법제도 등이 일본 내지 서구식으로 크게 바뀌었다. 갑오경장때 추진된 일련의 「혁명적」개혁조치는 그후 많은 수정을 거치면서도 보존되어 오늘날 한국 사회 및 문화의 일각을 이루고 있다. 갑오경장은 1894년 봄의 제1차동학농민봉기를 계기로 서울에 불법적으로 침략해온 일본군이 7월23일 경복궁을 강점한 상황하에서 개시되었다.이때 (흥선)대원군을 받든 일군의 친일개혁관료들이 신정부를 구성하고 군국기무처라는 초정부적 입법기구를 만들어 그 곳에서 2백여개의 개혁안을 심의,채택함으로써 역사적인 「대경장」의 막을 올렸던 것이다. 이 개혁운동에는 처음부터 일본의 입김이 작용하였다.즉,갑오경장에는 「타율적」인 측면이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그러나 갑오경장을 전적으로 일본의 지도와 후원에 힘입은 개혁운동으로 간주하는 것은 잘못이다. 개혁운동 초반에 개혁을 주도했던 김홍집 김윤식 어윤중 박정양 유길준등 20여명의 군국기무처 의원들은 1880년대 초반에 외교사절단원 혹은 유학생으로서 일본·청국·미국 등에 건너가 세계정세를 파악하고,특히 명치일본의 「문명개화」운동과 청국의 양무운동 등을 조사,연구한 끝에 조선의 자주독립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개화,자강의 방안을 고안하여 이를 실천에 옮겼던,나름대로 애국심이 강한 개명관료들이었다.그들은임오군란(1882)과 갑신정변(1884)을 거치면서 청국이 종주권을 내세워 대한간섭을 강화하자 정치적으로 실세하여 국내외에서 망명내지 유배생활을 강요당하가나 정부요직에서 소외당하였다.따라서 그들은 반청·독립사상이 강한 반면에 친일적 성향을 띠었으며 또 친청보수세력인 민씨척주에 대해 비판적이면서 대원군에게 호의적인 세력이었다. 그들은 오랫동안 개화·자강정책을 연구·실천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제도개혁을 스스로 추진할 능력과 의욕이 있었다.과연 초기 갑오경장을 담당했던 군국기무처 의원들은 대원군의 지도하에 동학농민군이 요구한 폐정개혁안을 수렴하면서 제도개혁을 거의 완전히 자율적으로 추진했다.갑오경장 중반에 내각 대신 혹은 협판으로서 개혁운동에 참여하였던 박영효·서광범·윤치호 등은 갑신정변(1884)때 자신들이 겪은 일본정부의 배신을 귀감으로 삼되 미국·일본에서의 망명생활,유학에서 스스로 터득한 개혁사상을 기초로 자율적 개혁추진을 도모했다.이러한 점에서 갑오경장은 조선인 개화파 관료들의 「자율적」 개혁운동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갑오경장을 담당했던 조선의 개혁관료들은 우선 국민 상하의 존경과 지지를 얻는데 필요한 위신이 부족한 데다,자기들의 권력을 뒷받침해 줄 독자적인 군사력과 개혁의 실현에 필요한 자긍력이 없었다.따라서 그들은 이러한 기반을 확보할 때까지 잠정적으로 일본의 후원 내지 지원을 받으려 하였다.결국 이러한 그들의 대일본 의존정략이 갑오경장을 중도반계의 실패작으로 만든 요인이 되었다. 갑오경장은 왕조의 유신과 중흥을 도모했던 조선왕조 최후의 개혁운동이었다.이 운동에서 원래 기대되었던 목적이 달성되었다면 조선왕조는 중흥되었을 것이고,1910년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민족적 비극은 없었을 것이다.근원적으로 따져 볼 때,갑오경장은 오랫동안 축적된 조선민중들의 불만이 동학농민봉기라는 과격한 형태로 표출된 다음 정부가 서둘러서 개시한 개혁운동이다.만약 조선정부가 민중들의 불만요인을 미리 파악하여 적시에 필요한 개혁을 축적해 나갔더라면 외세의 간섭도 면하고 또 갑오경장 같은진통도 겪지 않았을 것이다.여기에서 우리는 집권자가 국민들의 요망을 미리 미리 알아차려 시의적절하게 작은 규모의 개혁들을 하나 하나 펼쳐나가는 것이 최상의 국가경영 철학임을 깨닫게 된다.이것이 갑오경장에서 우리가 얻는 최대의 역사적 교훈이다.아울러서 우리는 개혁사업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개혁세력을 뒷받침해 줄 튼튼한 군사력과 재정이 필수라는 사실을 확인하며,나아가 민중을 도외시한 외세의존적인 개혁운동은 결코 성공하지 못한다는 역사적 교훈을 얻는다.
  • “구한말 3개 한·일조약 무효”/여·야의원,결의안 국회제출

    ◎민자선 철회 검토 여야의원 20명은 3일 을사5조약,정미7조약,한일합방조약 등 3개 한일조약의 원천무효를 확인하는 결의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이 결의안은 1905년 대한제국 외부대신 박재순과 일본국 특명전권공사 임권조사이에 맺어진 을사5조약과 1907년 대한제국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일본국 통감 이등박문이 서명한 정미7조약,1910년 이완용과 일본국 통감 사내정각가 서명한 한일합방조약 등은 원천적 무효라고 선언한 내용을 담고 있다. 민자당은 이에 대해 이들 조약이 지난 65년 한일협상때 이미 공식적으로 무효화된 점을 감안,이 안건을 철회하는 것을 검토중이다.
  • 전국 사냥터 4곳 새달 일제 개방/다가온 사냥철… 꾼들은 설렌다

    ◎멸종 막게 제주·거제·경남북에 국한/산토끼·고라니는 수렵대상서 제외/이동과녁 사격 연습 쌓으면 성과 높아 엽사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사냥철이 돌아왔다.11월1일부터 내년 2월말까지 4개월동안은 산림청이 정한 수렵허용기간.그동안 수렵욕구에 목말라 했던 많은 엽사들이 준비를 마치고 수렵장 개장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수렵은 인류의 가장 오래된 스포츠.지구상에 인류가 출현한이래 농경문화의 도입은 최근에 불과한 일로서 지금까지 인류 역사의 99%이상은 수렵을 생활기반으로한 것이었다. 이같이 수렵을 생업으로한 원시조상의 피가 우리몸에 흐르고 있음인지 사냥을 나가면 활력이 용솟음치고 많은 운동량에도 불구하고 힘든줄을 모른다.이제 단백질원의 확보가 아닌 단순한 레저스포츠로서 심신단련과 인격도야를 목적으로 하는 수렵은 40대와 50대의 성인병 예방에 특히 좋다.더불어 유해조수도 구제하고 수렵인이 낸 입렵료는 지방재정을 살찌우는 부수효과도 지닌다.올해 사냥터로 개방되는 엽장은 제주도·거제도 고정수렵장과 순환수렵장으로 지정된 경상남·북도 일원의 1만4천㎦이다.포획조수는 멧돼지·고라니·수꿩·산비둘기·까마귀류·오리류·참새 등.멧돼지·고라니는 엽기내 1인 각 2∼3마리,수꿩·산비둘기·까마귀류·오리류는 1인 1일 각 2마리까지 포획할수 있다.단 참새는 무제한.그러나 경상남·북도 모두는 서식밀도가 낮은 산토끼,경남은 추가로 고라니가 수렵대상에서 제외됐다. 수꿩·오리 등 조류 수렵지로는 경북 문경군·안동군,경남 김해군·창녕군·합천군이 돋보이며 멧돼지·고라니 등 수류 수렵지로는 경북 금릉군·영덕군·영일군·울진군·청송군 등이 유리하다는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총기소지자는 40여만명으로 이중 엽총소지자는 1만명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공기총소지자이다.그러나 공기총으로는 동물을 포획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해 불법사냥만을 부추길뿐이다.사냥의 본령은 역시 엽총사냥이라고 할수 있다.엽총에다 엽견을 갖추고 클레이사격을 통해 틈틈이 연습을 쌓으면 포획확률은 크게 높아진다. 사냥을 할때는 반드시 수렵인으로서엽도를 지키는게 매우 중요하다.엽도를 지키지 않으면 수렵인은 생태계 먹이사슬의 추악한 최종포식자일 뿐이다.새끼 밴 야생조수를 포획하지 않음은 기본이며 날고 있지 않는 조류도 쏘지 않는게 사냥꾼의 예의다.또 동물에게 고통을 주는것은 죽음보다 더한 것이라는 생각으로 부상당한 야생조수는 끝까지 추적해 사살하고 숨통이 끊어지지 않은 야생조수는 확인사살해야 한다. 한편 수렵인들은 문민시대 들어서 처음 맞는 사냥철을 맞아 구한말 이완용 내무총리대신 시절 제정된 법을 모체로한 현행 수렵관련법규의 개정을 요구하고 있어 주목되고 있다.현행 수렵관련법규의 경찰서 엽총 가영치 규정은 72년 미국 대통령 방한시 경호상의 임시조치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것으로 마땅히 폐지되고 다른 규정들도 문민시대에 맞게 완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에 앞서 수렵인들도 잘못된 관행을 스스로 바로잡지 않으면 안된다.몸보신을 위해 즉석에서 포획한 동물의 피를 빨아먹고 사용한 탄피를 산야에 그냥 버리는 행위 등은 지양되어야 한다.관련학자들은 『이제 수렵인들도 생태계를 충분히 고려해 생태계에 기여하는 사냥을 함과 동시에 야생조수보육에 적극 힘쓰는 등 문민시대에 걸맞는 새로운 수렵문화를 확립해야 한다』고 말한다.
  • 한일합방 조약 무효/국회서 결의안 추진/여야의원 18명

    여야의원들로 구성된 「이완용명의 토지재산 국고환수추진 의원모임」은 경술국치일을 하루 앞둔 28일 국회에서 회의를 열고 국회차원의 한일합방조약 무효결의를 추진키로 했다. 여야의원 18명은 이날 회의를 마친뒤 이만섭국회의장,김종필민자당대표,이기택민주당대표를 방문,결의안 채택건의문을 전달했다. 의원들은 건의문에서 『한일합방은 국제법상 원천무효인 을사조약에 의거해 이뤄졌을 뿐만 아니라 위협적인 분위기속에서 체결됐기 때문에 역시 원천무효』라고 밝혔다. 의원들은 또 「반민족행위자 재산몰수법안」작성을 서둘러 이번 정기국회에 제출키로 했다.
  • 문민정부 첫 광복절에 생각한다(특별대담)

    ◎친일세력 축출이 정기회복 지름길/관료사회서 온존… 국가기강 확립 걸림돌/총독부 청사 철거 현정권 임기중 실현을/임정선열 5위 봉환 역사적 쾌거/문제있는 독립유공자 재심 절실/정신대문제 등 일제만행 규명… 사죄 꼭 받아내야 15일로 광복 마흔여덟돌을 맞았다.특히 문민정부 출범 첫해에 맞이한 광복절은 여느때보다 뜻깊다.상해임정 선열들의 유해가 봉환되고 구조선총독부청사,총독관저가 철거되는 등 일제의 잔재를 일소하고 민족정기를 바로 잡는 작업이 사실상 처음으로 이뤄지고 있기 때문이다.문민정부가 처음으로 맞는 8·15 광복절의 역사적인 의미와 우리 민족이 풀어나가야 할 향후 과제를 좌담으로 정리해본다.이날 좌담회에는 김승곤광복회회장과 신용하서울대교수가 참석했다. □참석자 김승곤 광복회 회장 신용하 서울대 교수 ▲김회장=광복을 맞아 12년동안 항일운동을 하며 떠돌던 중국에서 고국으로 돌아왔을 때입니다.놀랍게도 친일파들의 권세가 여전하더군요. 더구나 극심한 좌우익 투쟁을 교묘히 이용해 친일파들은 중국에서 항일운동을 한 사람들을 공산주의자로 매도했습니다.51년 광주의 한 신문사에 입사할 때도 독립운동사실을 숨겨야만 했을 정도였습니다. 남북분단의 비극이나 순국선열들이 지금껏 이역을 떠돌수 밖에 없었던 것은 지금껏 관료사회를 쥐고 있던 이들 친일파때문입니다. 독립운동을 했다고 떳떳이 말할 수 있게 된 것은 불과 몇년 되지 않습니다.독립운동가들이 그동안 제목소리를 낼 수가 없었던 것이죠.그만큼 우리 사회의 친일세력은 뿌리가 깊습니다. 이번 임정선열 5위의 봉환은 친일파들때문에 퇴색해버린 민족정기를 되살릴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습니다.또한 이를 통해 국가기강도 바로 세울 수 있게 됐습니다. ▲신교수=우리 헌법 전문은 상해임시정부의 법통계승을 명문화하고 있습니다.그러나 실제로 정책을 시행하는데는 문제점이 매우 많았습니다. 임정 요인의 유해 5위를 공식적으로 국내에 봉환한 것은 매우 획기적입니다.즉 민족의 정기를 학립하고 국가기강을 바로잡을 수 있는 전망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지요.독립정신을 계승 발전해 세계속의 한국으로 발돋움,선진국으로 진입할 수 있는 정신적인 계기를 마련한 것은 물론이고요. 김영삼대통령이 그동안 논란속에서 미루어 왔던 구조선총독부 청사를 철거토록 지시한 것은 확실한 용단이라 생각합니다.옛 총독관저의 철거도 마찬가지지요. 그러나 문제는 김대통령의 민족정기 앙양의지와는 달리 일부 세력과 관료들의 개혁의지가 부족하다는데 있다고 봅니다. ▲김회장=총독부 청사의 건립의도부터 생각해봅시다.우리 임금이 살던 경복궁안에 짓지 않았습니까.우리 민족의 맥을 끊기 위한 것이지요.창경궁에 동물원을 세운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총독부 건물은 일제의 상징입니다.해방과 동시에 가장 먼저 철거됐어야 합니다. 물론 이승만대통령때부터 역대 정권들이 철거를 고려했었지요.그러나 지금껏 손을 대지 못했습니다.이는 행정부에 있는 친일수구세력들의 방해때문입니다. ▲신교수=조선총독부를 지을당시 일본의 건축전문가들은 남산이나 서울시청자리를 주장했습니다.그러나 당시 데라우치총독이 영구 통치를선언하는 의미에서 조선왕궁의 정궁인 근정전을 헐고 짓도록 했습니다.즉 일제가 한국 식민통치의 상징을 만든 것이지요. 그런데 더욱 기가 막힌 일은 이를 중앙박물관으로 사용한 것입니다.5000년 역사를 일제의 식민통치 상징에 넣어놓았으니 민족적 열등감을 「배양」시키고 일본인에게는 우월감을 조장해 왔습니다.5공때는 철거계획이 한때 검토됐으나 무산됐고 6공때도 연구됐지요.그러나 경비문제를 들고 나온 관료들의 반대에 부딪쳐 철거되지 못했습니다. 당시 관료들이 대통령을 속인 것입니다.뜯어다가 복원하는데는 엄청난 비용이 든다는게 반대이유이지만 이 건물은 복원가치가 없습니다.우리 고유의 유물도 아닌데 뭣때문에 복원합니까.정 아쉽다면 모형을 하나 만들어 독립기념관의 일제침략관내에 전시하면 그만이지요. 또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박물관의 이전시기입니다.정부에서는 2000년까지 완공한다고 발표했는데 김대통령의 임기가 끝나는 97년까지 마쳐야 합니다.그렇지 않으면 아직도 막강한 수구세력에 의해 무산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김회장=그렇습니다.김대통령 임기안에 이전해야 합니다.지금도 우리 사회에는 친일세력들이 남아있습니다.김대통령이 퇴임한 뒤에 이들이 어떤 주장을 내세우며 이전에 반대할지 모르는 것입니다. 화제를 돌려 정신대문제를 한번 짚고 넘어가야겠습니다.최근 일본 연립정부가 우리 한국인 여자들을 강제로 끌고가 위안부로 이용한 사실을 인정한데 대해 마치 대단한 의미가 담긴 양 높이 평가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일본정부가 사과한 것도 아니고 그저 정신대문제에 대해 강제성이 있었다고 인정한 것을 놓고 우리 외무부가 『외교적으로 정신대문제는 청산됐다』고 밝힌 것은 성급한 것입니다. ▲신교수=동감입니다.새로 들어선 일본의 연립정부는 정신대문제와 관련해 전후청산차원이라며 「강제성」만을 인정했습니다.범죄행위에 대해 배상이나 사죄는 없는데 이는 용납할 수 없으며 일본에 휘말리는 우리의 외교정책은 자주외교 대등외교가 아니라고 봅니다.독일은 패전후 즉시 사죄하고 배상금을 물었는데 일본은 이를 철저히 외면하고 있습니다. ▲김회장=정신대문제를 포함해 일제 만행에 대해 전반적인 진상규명과 일본의 전적인 사죄가 있어야 합니다. 가을로 예정된 김대통령의 일본방문에서는 분명한 답변을 일본정부로부터 반드시 받아내야 할 것입니다. ▲신교수=잘못된 과거역사의 청산은 물론 국제화시대의 대처라는 측면에서도 친일파들에 대한 역사적인 재조명이 시급합니다.민족의식이 소멸되면 강대국에 종속될 수 밖에 없지요.이완용이가 나라를 판 대가인 은사금으로 사들인 땅을 증손이 나타나 법원에 제소,여러건 승소판결을 받았지요.이는 제2의 이완용이 나올 수 있는 토양을 만든 것이나 다름없습니다.김구선생이 독립운동가들을 잡으러 다니던 친일파에게 암살당하고도 진상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습니다.이러한 것들은 건국직후 친일파들을 몰아내지 못한 때문입니다.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보훈처는 국가로부터 독립유공자로 인정돼 포상을 받은 경우라도 친일행각에 문제가 제기되는 부분이 있으면 재심해야 합니다.그러나 그 기준은 엄격하고 과학적,합리적이어야 합니다. ▲김회장=친일파에 대한 재조명이 역사적 과제임은 분명합니다.문제는 현실적으로 친일파를 어떤 기준으로 가려낼 것인가 하는 겁니다.정부로서도 친일파에 대한 역사재조명이 무척 어려울 줄 압니다.그러나 서두르지는 않더라도 꾸준히 작업을 벌여나간다면 소기의 성과를 거두리라 기대해봅니다. ▲신교수=우리는 일본으로부터 새로운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최근 들어선 일본 연립내각의 핵심인 오자와 이치로는 PKO법안의 초안 배경이 된 「오자와특별조사위」를 이끌어온 인물입니다.이 위원회의 조사보고서는 앞으로 국제사회가 미주권 EC권 일본권 등 3개 블록화되므로 일본이 아시아지역의 통합과 주도력을 발휘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한국은 일본의 아시아정책의 개편대상중의 하나이므로 자칫 말려들면 정치 경제 군사 문화적으로 종속될 위험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김회장=일본은 한일관계를 영원한 동반자인양 표현하고 있습니다.그러나 6백90억달러의 무역불균형을 이루고 있는 관계가 동반자일수 있습니까. 일본은 한국전쟁을 통해 경제발전을이룩할 수 있었습니다.동북아시아의 전략거점으로 일본을 택한 미국이 각종 기술원조를 아끼지 않으면서 지원했기 때문에 일본의 성장이 가능했던 겁니다. 그러나 일본은 겉으로는 동반자 운운하면서 우리나라에 기술지원을 꺼리고 있습니다.우리나라를 경제협력국이 아니라 시장으로만 여기고 있을 뿐입니다.이런 상태에서 양국이 진정한 협조적 관계를 이루기는 어렵습니다.우리 국민의 반일감정은 정부의 입장과는 달리 그전과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거듭 말하지만 김대통령의 가을 일본방문에서는 반드시 말뿐이 아닌 실질적인 일본의 사죄를 얻어내야 할 것입니다.이와함께 기술이전과 무역역조시정등에 대한 일본정부의 실질적인 약속을 보장받아야 할 것입니다.
  • 한·일 합방 일 정부문서 공개/데라우치 초대총독 작성…본국에 보고

    ◎일군 7월하순부터 경성서 무장 대기 초대 조선총독이었던 데라우치 마다사케(사내정의)가 1910년 8월29일 한일합병 전후의 상황을 일본 내각총리대신에게 보고한 공문서 내용이 국내에서 공개됐다. 서지학자 이종학씨는 12일 기자회견을 갖고『데라우치가 합병 3개월쯤 뒤인 11월21일 총리대신 가쓰라 다로(계태낭)에게 정식보고한 문서인「조선총독보고 한국병합시말」을 지난 2월 일본의 모정부기관 기록보관소에서 발견했다』고 밝혔다. 이 문서에 따르면 데라우치는 합병에 따른 한국인의 저항을 우려,그해 6∼7월에 걸쳐 경성및 의병활동 지역에 일본군을 배치했으며 특히 경성과 용산에 주둔중이던 병력은 7월 하순부터 무장대기시킨 것으로 밝혀졌다. 한국 군대에 대해서는 친위부장관겸 시종무장관 이병무를 통해 군대를 해산하지 않고 일본군에 예속시켜 준다고 설득했다. 데라우치는 이어 8월16일 대한제국의 총리대신인 이완용을 자신의 관저로 불러 『내각대신으로서 시국을 원만하게 해결하는데 도움을 준 사람에게는 작위를 내릴 뿐더러 모두 중추원 고문으로 임명하겠다』고 회유했다. 이에 대해 이완용이 학부대신 이용식이 완강하게 반대한다고 보고하자 이용식을「수해위문」명목으로 일본에 보낼 것을 획책하기도 했다. 이밖에 ▲일본측이 당초 순종황제에게 태공이라는 칭호를 주고 나라이름도 사용치 못하게 하려다 반발에 부딪히자 이왕 칭호와 조선을 인정한 사실 ▲이완용이 합병에 반대하는 고종황제의 동태를 감시한 사실 ▲순종 설득에 지장을 줄 우려가 있는 궁내부대신 민병석과 시종원경 윤덕영을 데라우치가 직접 만나 회유한 사실등이 담겨 있다. 「조선총독보고한국합병시말」은 일왕에게도 보고된 정식문서로서 72쪽 분량에 1만2천여자가 수록돼 있다. 서지학자 이씨는『이 문서는 일본측이 공개하지 않는 것을 몰래 사진촬영해 왔다』고 밝혔다.
  • 국회의장과 국무총리와(사설)

    의회운영의 연륜이 45년이나 되었고보면 우리 국회도 이제는 후진성을 벗어나 성숙한 의정상을 보일 때도 되었다.그것을 막아온 권위주의시대가 가고 문민개혁의 시대를 맞이했으면 여야가 낡은 틀을 깨고 새로운 개혁정치에 나서는 것이 국민의 요구에 부응하는 길이다. 지난 주말 국회본회의 대정부 질문 첫날 의사진행을 둘러싸고 고함과 욕설이 오가는 가운데 여야가 서로 상대당의 대표에 대해 극한적인 인신공격을 벌이는,시대 역행의 구태를 재연한 것은 참으로 실망스럽기 짝이 없다. 국회본회의의 그런 분란을 지켜보면서 첫째로 지적할 것은 국회운영의 절차와 과정이 선진화되어야겠다는 점이다.의사진행발언이란,말 그대로 국회의 회의진행에 관한 발언이지 정부에 대한 질의와는 다른 것이다.의사진행발언에 대해 국무총리가 답변한 전례가 없는 것도 그때문이다.물론 국회법은 어떤 사항을 긴급히 처리할 필요가 있는 경우 국회의장은 의사진행발언을 허가토록 하고 있다.그런데도 국회의원이 의사진행발언을 통해 국무총리의 답변을 요구했고 국회의장은 「긴급한 처리」의 경우로 판단했는지 답변을 시켰다. 입법기관인 국회가 새로운 관례를 만든다고 이상할 것은 없다.그러나 충분한 이해의 바탕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다수당인 민자당이 전례를 들어 문제점을 지적한 것은 있을수 있는 일이다.국회가 행정부의 시녀라는 비판을 받았던 지난 시대와는 분명히 달라져야 한다.그러나 견제와 균형이라는 원칙위에서 국회와 행정부는 국정운영의 동반자로서 상호존중의 관계를 정립해야한다.행정부를 대표해서 국회에 출석한 국무총리가 국회의 의사진행에까지 개입되고 여당대표의 거취문제에까지 답변해야 할 의무는 없다고 본다. 국회의 위상과 의장의 위신은 절차를 중시할때 높아지는 것이지 고압적인 질책으로 높여지는것이 아니다. 다음으로,우리정치도 이제 수준높은 토론문화와 관행을 가져야겠다는 점이다.여·야의 고위당직자들이 서로 상대당의 대표를 두고 「제2의 이완용」이라거나 「한방에 날려버리겠다」는 폭언을 쓰면서 어떻게 함께 국사를 논의하자는 것인지 이해할수 없다.민주정치는 이성을바탕으로 상대의 이견을 존중하되 명랑한 대화풍토속에서 토론하고 타협하는 신사정치라는 것을 모를리 없을 것이다. 지난 시대의 대결과 투쟁의 여야관계는 이제 한 수레의 두바퀴로서 공존하고 경쟁하는 동반관계로 바뀌지않으면 안된다.국회의사당에서 고함을 지르고 욕설을 퍼붓는 것이 정치활성화가 아니며 강한 야당인 것도 아니다.문민시대에 맞는 도덕성과 전문성,그리고 민주의식을 바탕으로 활발한 정책대결을 통해 정치의 생산성을 높일때 국회는 신뢰받는 정치의 중심이 되는 것이다.여와 야,국회와 행정부의 「동반의식」의 불재를 경계하면서 남은 회기동안 거듭나는 국회를 보여줄 것을 기대한다.
  • 반민족 행위자 재산 몰수법 제정을 추진

    이완용후손재산환수저지 의원모임(간사 구천서·김원웅의원)은 다음 국회에서 「반민족행위자 재산몰수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하고 국회차원의 특위를 구성하는 방안을 본격 추진키로 했다. 모임은 이를 위해 27일 상오 국회에서 전체의원 모임을 갖고 특별법제정과 국회특위구성을 위한 구체적인 문제를 논의하고 이완용후손재산환수저지모임에 동참의사를 밝힌 여야의원 1백6명의 명단을 공개한다.
  • 반민족연 김봉우소장 「친일파 99인」 3권 완간(인터뷰)

    ◎“친일인사에 대한 종합 심판서죠”/총독부·경찰서 자료 토대… 정확도 자신 『역사상 식민지 치하에서 벗어난뒤 반역자를 처단하지 않은 나라는 우리나라 밖에 없습니다.이처럼 사회 전반에 기강이 서지 않는 상황에서 이 책은 국내 최초로 만들어진 친일파에 대한 심판서라고 할수 있습니다』 일제하 분야별 주요 친일인사에 대한 친일이력서라고 할수 있는 「친일파 99인」 전3권(돌베게간)을 최근 완간한 반민족문제연구소 김봉우소장(46)은 『친일 인사에 대한 최초의 심판서가 이제서야 처음 나온데 대해 부끄러움을 느낀다』고 말문을 열었다. 『이 책은 분명 민족의 부정적인 측면에 대한 연구 결과입니다.그러나 자기 부정성에 대한 연구는 자기 사랑과 자기 긍정으로 회귀하고자 하는 당연한 욕구에서 출발한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친일파 99인」은 제목 그대로 일제하의 각계 인사 99명에 대한 친일 기록이다.정치와 경제,사회·문화 등 3권으로 묶여진 이 책에는 이완용과 송병준,박영효에서 부터 이능화,김활란,황신덕,모윤숙,현제명에 이르기까지 각계인사들의 친일기록이 담겨있다.이 책은 또 박흥식과 김기창 등 아직 생존하고 있는 인사들의 친일기록까지 싣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우리 연구소의 목표는 사실 「친일 인명사전」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그러나 2만5천명에 달하는 친일인사의 기록을 사전으로 남긴다는 것은 보통일이 아니었지요.그래서 사전을 만들기 위한 예비작업을 겸해 사전을 만드는데 대한 국민적 동의를 구한다는 목적에서 이 책을 기획하게 됐습니다』 반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파 연구에 평생을 바친 임종국선생의 유지를 받들어 지난 19 91년2월 발족됐다.「친일 인명사전」역시 임선생이 당초 소규모로 구상했던 것을 연구소가 발족된뒤 의욕적으로 범위를 크게 넓힌 것이라고 한다. 『이 책을 위해 처음에는 친일인사 2천명을 추렸지요.다시 2백명을 고른뒤 다시 종합적인 점검을 거쳐 마지막으로 각 분야를 대표하는 친일인사 99명을 골라냈습니다.99명을 골랐다는데 대해 굳이 의미를 부여하자면 미완의 작업을 뜻한다고나 할까요.1백명을 골랐다면 친일인사선별작업이 어느 정도 완료됐다는 느낌을 줄수 있으니까요』 이 책이 발간된뒤 책에 실린사람들의 후손으로 부터 어느 정도의 반발이 있었다고 한다.그러나 연구소측이 책의 내용의 정확도에 자부심을 갖는 것은 생존하고 있는 인사들로 부터는 아무런 반발이 없었다는데 있다고 했다.그도 그럴 것이 이 책의 내용은 개인적인 진술이나 소문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조선총독부나 경찰서 등 관청에서 발간한 자료를 기초로 했기 때문이다. 반민족문제연구소는 이 책의 완간에 이어 이미 「친일 인명사전」과 「친일파 총서」를 펴내기 위한 준비작업에 들어갔다. 『이 작업은 과거에 있었던 친일인사 규명작업에 대한 공포와 가능성에 대한 회의,시간적으로 너무 늦지않았느냐는 역사인식에 대한 무지를 극복해 나가기 위한 것입니다.그래야 민족의 자주성이 회복되고 주체성도 비로소 세워지지 않겠습니까』 김소장은 「친일파 99인」이 많이 팔려 앞으로의 작업에 국민적 격려가 되고 경제적으로도 보탬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라면서 웃었다.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