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최고 기초과학 산실 이화학 연구소(G7으로 가는 길:33)
◎연구소 과감히 개방… 연구원 25%가 외국인/임기제 「계약고용」 도입… 조직의 효율성 등 확보/“개량기술론 한계” 2천년 목표 「프런티어 프로그램」 시행/광역학 등 첨단 5개분야 장기적 안목 집중투자
일본 토쿄에서 동북쪽으로 1백㎞,와코(화광)시에 있는 이화학연구소의 한 연구동.연구실 안에서 연구원간에 토론이 한창 벌어지고 있다.재료공학의 세계적 권위자인 히로유키 사사베박사가 이끄는 초정밀광전소자학(나노포토닉스)연구팀에 속한 이들은 청바지에 티셔츠,혹은 턱수염을 텁수룩이 기르고 있어 연구원이라기보다는 대학생처럼 보인다.4명중 3명은 푸른 눈의 외국인.나이도 20대 후반이거나 30대 초반이다.한켠에는 테이블 위에 먹다 남은 케이크와 찻잔이 흐트러져 있다.
75년의 오랜 역사를 지닌 일본 최고의 기초과학연구소 정경 치고는 뜻밖의 모습이다.노벨상 수상자를 2명이나 내고 기술대국 일본을 일으키는 버팀목이 돼왔다는 전통 깊은 연구소라면 엄격한 권위나 세월의 냄새가 풍겨나야 하지 않을까.
『독일에서 온 연구원이 계약기간이 만료돼 송별파티를 막 끝낸 참입니다.우리는 파이버를 깎아낸 다음 화학파트에서 개발한 물질을 집어넣어 새로운 스위칭소자를 만들어내는 연구를 하고 있는 중이고요』 연구팀의 중간책임자 하라 마사히코(원정언) 박사는 태연하게 설명한다.
외국인 연구원의 과감한 채용,계약제 고용제도,물리와 화학·생물등 다양한 전공자가 한팀을 이뤄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학제적(Interdisciplinary)연구,젊은 연구원의 대거기용….
○노벨상수상 2명 배출
하나 만으로도 엄청난 개혁이라 할 수 있는 이같은 일이 전통 깊은 연구소에서 동시에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결코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80년대초에 국가과학기술개발의 방향을 놓고 대토론이 벌어졌습니다.지금까지의 개량적인 기술개발만으로는 더이상 경제발전을 뒷받침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왔지요.서방국가들이 이룩해놓은 기초과학에 무임승차해서 경제적 이익만 챙기고 있어서는 안된다는 반성도 나왔습니다.그 결과 미래를 향한 여러 지침이 제시됐는데 창조적 기초과학연구강화,국제화,연구조직의 유연성 등이 그것이었어요』
이화학연구소 미야카와 카즈오(궁천수부) 이사는 『이와 같은 지침을 구체적으로 실천에 옮기기 위해 만든 것이 이화학연구소의 「프런티어 리서치 프로그램」』이라면서 『사사베박사의 연구팀은 이 프로그램의 재료연구실 연구팀중 하나』라고 설명했다.
프런티어 리서치 프로그램은 「선단적 기초연구」를 내걸고 1986년 시작됐다.
오는 2000년까지 15년동안의 장기계획으로 발진된 프로그램인 만큼 연구주제부터 대단히 거시적이다.연구소가 전문가들과 오랜 토론 끝에 선정한 연구주제는 바이오 호메오스타시스(생체항상성),프런티어 재료,뇌·신경과학,광역학,생체모방기술등 5개 분야.연구소는 전혀 생소한 이 분야를 집중공략하기 위해 주제별로 연구실을 만들고 연구실마다 4∼5개의 연구팀(총 26팀)을 구성,7∼8년단위 연구를 시작했다.
○7∼8년 단위로 연구
「국제화」를 위해서 연구소를 과감히 개방한 것도 눈에 띈다.각 연구실은 네이처지 등 세계적인 과학저널에 모집광고를 내 세계 일류과학자를 끌어모았다.그 결과 프런티어 프로그램의 연구원은 총 2백48명중 25%인 62명이 미국·독일·한국·프랑스·인도등에서 온 외국인이다.연구책임자자리에도 과감히 외국인을 앉혔다.또 신선한 아이디어를 찾아 젊은 층을 대거채용,연구실은 생기가 넘친다.연구원의 평균 연령은 33.7세.
하지만 무엇보다 파격적인 것은 임기제 계약고용제도의 도입이다.사람을 한번 채용하면 정년까지 일자리를 보장하던 「종신고용」은 세계가 찬사를 아끼지 않던 일본적 경영전통이다.하지만 연구소는 종신고용제가 조직의 유동성과 창의를 떨어뜨리고 비능률·비경제적이라는 일부 비판을 수용,모든 연구원을 1년 계약제로 채용했다.
미야카와 이사는 『처음엔 아주 걱정했지만 결과는 성공적이었다』고 말한다.국내외에서 우수한 과학자가 대거응모해온 것.반도체 연구실 이시바시 코지(석교항치)박사는 『젊은 과학도에게는 안정된 직장도 좋지만 좋은 연구성과를 낼 수 있는 여건 자체가 더욱 중요하다』면서 『일단 좋은 연구성과를 올리면 좋은 직장에 좋은 조건이 마련되는 것 아니냐』고 연구원의입장을 설명했다.
프런티어 연구원은 일단 팀의 일원이 되면 생활걱정이나 연구비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연구원 채용등 모든 권한은 과제책임자에게 부여돼 외부간섭 없이 연구에 전념할 수 있다.평가방식도 독특해 매년 의무적으로 보고서 제출 따위는 하지 않는다.대신 전체연구기간이 절반정도 경과했을 때,그러니까 3∼4년정도에 한번 중간평가를 받는다.그러나 이 평가도 전원 외부인에 의한 전문가평가로 수행돼 비판보다는 바람직한 방향제시에 주력한다는 설명이다.
○논문만 1천6백여건
프런티어 프로그램은 이제 10년에 접어들면서 구체적인 성과물을 하나씩 내놓고 있다.그동안 발표된 논문만도 1천6백여건.지난해에는 원자층 제어성장을 용이하게 하는 새로운 양자 나노구조 제작기술을 개발,양자 나노구조의 물성 규명에 획기적인 전기를 만들었고 신경세포의 분화를 일으키는 유전자를 발견,노인성 치매 치료에 새로운 전망을 던져주기도 했다.
이들 연구성과는 당장 어떤 응용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하지만 남이 하지 않은 창의적 첨단연구는 미래 일본기술의 저력으로 재생산될 것이 분명하다.일본은 불확실한 것에 대한 과감한 투자라는 새로운 전략으로 미래를 개척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일 와코시=신연숙·최해국 특파원〉
◎전문가 인터뷰/창조성연구 대가 일 교육학자 온다 아키라 박사/“창의력 향상은 곧 잠재력 계발”/소질 발휘할수 있는 환경조성이 중요
「창의력은 과연 키워질 수 있는 것일까」 창조성 연구의 대가인 일본의 교육학자 온다 아키라(은전창·61·도요대학 명예교수)박사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스스로 창의력 부족을 느끼고 있는 사람에게는 절망을 주는 답변이다.하지만 너무 실망할 일은 못된다.『소질이 있어도 환경이 주어지지 않아 창의력 발휘를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 그 다음 답변이기 때문이다.온다박사를 만나 창조성에 대해 물어보았다.
창조성이란 무엇인가.
▲창조성은 새로운 가치 있는 것,또는 아이디어를 창출하는 능력으로 정의될 수 있다.종교나 예술에서는 상상력과 직관력,과학분야에서는 논리적 사고가 창조력의 원천이 될 것이다.
창조성은 증진시킬 수 있는가.
▲양면성이 있다.창조성은 특별한 재능의 창조성과 자기실현의 창조성으로 나눠볼 수 있는데 후자의 입장을 강조하고 싶다.인간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잠재능력을 일생동안 10%이상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연구도 있다.여기에서 교육이나 연구관리가 개입할 여지가 생긴다.
창조력 향상을 위해서 중요한 것은.
▲어릴 때부터의 교육,특히 국가가 관심을 갖고 나가야 한다.교육은 첫째로 창조적 사고를 위해 발산적 사고를 유도해야 한다.발산적 사고란 지금까지 동양의 교육이 행해온 수렴적 사고와 대칭되는 말로 어떤 표준을 설정해놓고 여러가지 방법을 사고해보는 것을 말한다.둘째로는 직감적 사고력을 키워나가야 한다.섬광 같은 지혜의 번뜩임은 가르침을 통해서가 아니라 체험을 통해 느낌으로써 오는 것이다.호기심과 탐구심을 갖고 스스로 파고들어 실패해보는 게 필수적인 과정이다.최근의 정보사회화는 경험부족·비인간화를 초래할까봐 염려스럽다.
일본 기술을 창조성 측면에서 평가한다면.
▲일본인의 창조력이 가미됐다고 본다.일본은 메이지시대부터 서양문화를 유입,모방하고 개선해 좋은 물건을 냈다.그중에는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은 것도 많다.이제는 개량 아닌 첨단개발이 남았는데 이를 위해서는 독립기술을 독창적으로 해나가야 한다고 본다.이런 측면에서 일본은 교육부터 바꿔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