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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3년 맺은 정전협정… 60년 넘게 ‘국지적 휴전’

    2차 북미 정상회담에서 북미 양자 간 종전선언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현재 한반도를 지배하고 있는 정전협정에 관심이 쏠린다. 정전협정은 1950년 6월 25일 발발한 한국전쟁을 중지하기 위해 1953년 7월 27일 클라크 유엔군 총사령관과 김일성 북한군 최고사령관, 펑더화이 중공인민지원군 사령관 사이에 맺은 협정이다. 6·25 전쟁의 정지 및 평화적 해결이 이뤄질 때까지 한반도 내 쌍방 간 적대 행위 및 모든 무장행동의 정지를 담고 있다. 1951년 7월 10일 개성에서 첫 정전회담이 연린 이후 2년여간 765차례 회의 끝에 협정이 성사됐다. 휴전선 확정과 휴전 감시기구 설립, 외국군 철수 등 문제는 비교적 수월히 해결됐으나 포로 교환 문제로 첨예하게 대립하면서 시간을 끌었다. 정전협정 발효로 남북이 대치했던 38선은 사라지고 대신 현재의 휴전선이 확정됐다. 남북한 사이에는 비무장지대, 군사분계선이 설치됐고, 전쟁포로 인도·인수가 이뤄졌다. 또 유엔군과 북한군 장교로 구성되는 군사정전위원회 본부가 판문점에 설치되고 중립국감시위원단이 들어섰다. 그러나 정전협정 상황은 적대행위가 일시적으로 정지될 뿐 전쟁 상태는 계속되는 ‘국지적인 휴전상태’다. 정전협정이 60년 넘게 지속되고 있는 경우는 전 세계에서 한반도가 유일하다. 1974년부터 평화협정 체결을 주장해 온 북한은 ‘한국 대신 정전협정 당사국인 미국과 체결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교전 당사국인 우리나라가 정전협정에서는 제외된 점을 구실로 삼은 것이다. 정전협정 조인 당시 우리 측에서는 최덕신 육군 소장이 대표로서 배석만 했다. 여기에는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강력히 반대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이후 1997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한국전쟁 당사국인 남북한과 미중 대표가 모여 평화협정 체결을 위한 4자회담을 열었지만 성과는 없었다. 종전선언만으로는 정전협정을 대체할 수 없다. 종전선언은 정치적 선언이고 법적 효력을 가지려면 평화협정을 체결해야 한다. 이재연 기자 oscal@seoul.co.kr
  • “국가 권력이 부풀린 서훈등급…사상·이념 족쇄 풀고 재평가를”

    “국가 권력이 부풀린 서훈등급…사상·이념 족쇄 풀고 재평가를”

    24일 서울신문 심층 설문조사에 참여한 역사학계 전문가들은 “이제부터라도 사상과 이념의 족쇄에서 독립운동가들을 풀어 줘야 한다”고 밝혔다 민족주의자, 자유민주주의자,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무정부주의자 여부를 떠나 ‘한국의 독립을 위해 무엇을 했는가’를 최우선 기준에 놓고 평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울러 남북 화해 분위기를 반영하고 통일에 대비하고자 우파 독립운동사 위주로 진행됐던 연구 범위도 넓혀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한국 독립 위해 무엇을 했는지 평가해야 역사학계는 김원봉(1898~1958)과 박헌영(1900~1956)으로 대표되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계열 활동가들을 독립운동사에서 복권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원봉은 경남 밀양에서 태어나 스무 살이던 1918년 중국 난징의 진링대학(현 난징대학)에 입학한 뒤 서양 제국주의 국가들이 조선 같은 약소국을 돕지 않을 것이라는 ‘불편한 진실’을 깨닫고 무장투쟁가의 삶을 선택했다. 이듬해 ‘의열단’을 창단하고 광복을 맞아 한국에 돌아온 1945년까지 26년간 일제와 끊임없이 맞서 싸웠다. 조선총독과 친일파, 한국인 밀정을 처단하고자 의열투쟁을 진두지휘했고, 1938년 중국 국민당 정부로부터 첫 한인 무장세력으로 인정받은 ‘조선의용대’도 세웠다. 서울신문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취재에 동행한 이원규 작가는 “만약 그가 해방 뒤 ‘친일 경찰’ 노덕술(1899~1968)에게 치욕스런 고문을 당하지 않았다면 북한으로 넘어가지 않았을 것”이라며 “(노덕술의 고문은) 일부 친일파가 독립운동가보다 우위에 섰던 당시 대한민국의 현실을 상징하는 뼈아픈 사건”이라고 설명했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는 “김원봉은 해방 뒤 북한 정권 수립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지금까지도 대한민국 독립운동사에서 배제되고 있다. 하지만 이는 후대에 만들어진 시각으로 역사적 진실에 부합하지 않는다”며 “독립운동을 한 사람이라면 그가 어떤 사상을 가졌든지 상관없이 해방을 맞은 1945년까지 무엇을 했는지를 기준으로 평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역사학계 “임병직 서훈은 5등급이 적당” 학계에서는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고평가된 인물로 임병직(1893~1976)과 이승만(1875~1965)을 지목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당시 정권을 쥔 이들이 자신과 측근의 공적을 지나치게 부풀렸다는 지적이다. 임병직은 이승만이 미국에 머물던 시절 그를 보좌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미위원부 위원을 지냈고 해방 뒤 외무부 장관과 주인도 총영사 등을 맡았다. 박정희(1917~1979)의 5·16 쿠데타를 지지했고, 사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등급)에 추서됐다. 그에 대한 서훈등급을 두고 ‘정치적 처세의 결과물’이라는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홍선표 하나역사연구소장은 “임병직은 이승만의 비서 일을 한 것 말고는 한국 독립에 크게 기여한 게 없다. 학계에서는 ‘5등급 정도가 적당하다’는 평가가 많다”며 “그럼에도 그가 김구, 윤봉길 등과 같은 반열의 유공자가 된 것은 1976년 서훈 심사 당시 (임병직이 지지선언을 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국가 권력에 의해 포상 체계가 흔들린 대표적 사례로 반드시 거론돼야 할 인물”이라고 비판했다. 이와 함께 역사학계는 우리 독립운동사에 가장 큰 역할을 한 인물로 김구(1876~1949)와 안창호(1878~1938), 안중근(1879~1910)을 꼽았다. 외국인으로는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1889~1970)와 장제스(1887~1975), 후세 다쓰지(1880∼1953)를 들었다. 스코필드는 영국 태생의 캐나다 감리교 선교사로 1919년 일제의 제암리 학살사건 참상을 전 세계에 타전해 일제의 만행을 알렸다. ‘석호필’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으며 ‘3·1 운동 민족대표 제34인’으로도 불린다. 후세는 일본의 인권변호사로 박열(1902~1974) 등 항일운동가들을 변론하며 한국의 독립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제대로 된 독립운동사 연구 풍토 마련해야 학계에서는 3·1운동과 임시정부 설립 100주년을 맞아 정부가 우리 역사학계의 현실을 보다 냉정하게 진단해 제대로 된 독립운동사 연구 풍토를 만들 수 있게 노력해 줄 것을 요청했다. 언론 역시 일회성 100주년 기획들로 끝내지 말고 독립운동사 연구자들을 지속적으로 지원할 방안을 강구해 달라고 주문했다. 홍 소장은 “역사의 성과는 (국가나 언론의) 각종 기념행사나 기획기사들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아무도 찾지 않던 자료를 어렵게 발굴해 밤새워 연구하는 외로운 학자들에 의해 피어나는 것”이라며 “우리 역사학계 연구 수준은 매우 미약하다. 인문학이 고사 위기인데 역사학계 역시 마찬가지다. 밤낮 없이 연구실에 처박혀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연구에 몰두하는 이들에게 희망과 열정이 피어오르게 할 지원책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한시준 단국대 사학과 교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문서가 1932년 윤봉길 상하이 훙커우 공원 의거와 한국전쟁 등으로 대부분 소실됐다. 아직도 행방을 모른다. 정부는 (일본이나 북한 등과 교섭해) 이것부터 찾아야 한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무엇보다도 먼저 해야 할 일”이라고 강조했다. 박찬승 한양대 사학과 교수도 “독립유공자 포상이 1960년대부터 시작됐다. 그사이 상당수 자료가 사라져 지금도 연구하는 데 어려움이 많다”며 “아직도 3·1운동, 독립운동과 관련해 포상을 못 받은 분들이 다수다. 보훈처 등에서 연구를 지원한다면 성과가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정부의 무질서한 서훈 체계에 대한 비판도 있었다. 이번 기회에 독립운동가 서훈 체계를 전면 재조정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다. 대한민국 건국훈장은 국가 수립에 뚜렷한 공을 세웠거나 국기(國基)를 다지는 데 공적이 있는 자에게 수여한다. 대한민국장(1등급)과 대통령장(2등급), 독립장(3등급), 애국장(4등급), 애족장(5등급) 등 5단계로 돼 있다. 지난해 말 기준 국가보훈처 서훈을 받은 독립유공자는 남성 1만 5180명, 여성 357명 등 모두 1만 5537명이다. 김주용 원광대 한중관계연구원 교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상징으로 가산을 모두 팔아 신흥무관학교를 세운 이회영(1867~1932),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을 지낸 이상룡(1858~1932) 등이 3등급에 그치고 있다”고 지적했다.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은 “이승만은 대통령 재임 중 자신을 1급으로 ‘셀프 서훈’해 지금까지도 문제가 되고 있다. 독립유공자에 대한 서훈 제도를 근본적으로 손봐야 한다”며 “정부는 독립운동 주동자 가운데 거사를 벌이다가 죽지 않은 이는 알아주지도 않는다. 이건 정말 아니다. 단순 정량 평가가 아닌 정성 평가를 통해 종합적으로 살펴봐야 한다”고 설명했다.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설문응답자 명단 기유정 서울대 한국정치연구소 연구원, 김삼웅 신흥무관학교 기념사업회 공동대표, 김주용 원광대 한중관계연구원 교수, 김태웅 서울대 역사교육과 교수, 김형목 독립기념관 선임연구위원, 노상균 연세대 국학연구원 연구원, 박환 수원대 사학과 교수, 반병률 한국외대 사학과 교수,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 박찬승 한양대 사학과 교수, 백옥진 전국역사교사모임 회장, 신효승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이양희 충남대 충청문화연구소 연구원, 이원규 역사소설가, 장규식 중앙대 사학과 교수, 장석흥 국민대 국사학과 교수, 장세윤 동북아역사재단 수석연구위원, 전성현 동아대 사학과 교수, 조한성 민족문제연구소 선임연구원, 최기영 서강대 사학과 교수, 한시준 단국대 사학과 교수, 홍선표 하나역사연구소장, 익명 요청 2명(가나다순)
  • 봉건군주제 뛰어넘은 3·1운동… 상하이 임시정부 씨앗되다

    봉건군주제 뛰어넘은 3·1운동… 상하이 임시정부 씨앗되다

    급작스런 고종 서거… 3·1운동에 도화선복벽주의 아닌 왕정 극복한 민족자결주의 19세기말 독립협회 등 민주공화정 꿈꿔 수많은 임정 탄생… 세 키우기 위해 통합우리나라 헌법 전문에는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했다”고 돼 있다. 정부는 중국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정) 수립일인 4월 11일을 공휴일로 지정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1919년 3·1운동의 정신을 계승한 임정의 의미를 기리자는 취지다. 19세기 말부터 우리 민족은 민주공화정에 대한 열망을 서서히 키워 나갔다. 고종의 죽음을 계기로 3·1운동으로 이를 분출했고 상하이에 임정을 세워 계승했다. ●3·1만세운동 도화선이 된 고종의 죽음 “사실 조선 멸망의 최대 원인은 궁정 자체에 있었다.” 1910년 중국의 대표적 개혁가 량치차오(1873~1929)는 사라진 대한제국을 두고 이렇게 개탄했다. 그는 “오늘날(20세기 초) 입헌국에서 군주는 정치적 책임이 없고 약정도 할 수 없다. 하지만 전제국가는 이와 다르다. 국가의 운명이 전부 궁정 한 곳에 달려 있다”고 설명했다. 조선이 전제군주제에서 입헌군주제로 탈바꿈하지 못해 망국에 이르렀다는 지적이다. 1910년 8월 29일 일본은 강제로 병탄조약을 맺고 대한제국을 식민지로 삼았다. 육군 대장이 조선 총독으로 부임해 행정과 입법, 사법권을 모두 장악했다. 우리 역사의 최대 암흑기였던 36년간의 일제 통치기간이 시작됐다. 1919년 1월 21일 고종(1852~1919)이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 한반도 전체가 충격과 비통에 휩싸였다. 건강 하나만큼은 ‘완전체’에 가깝던 그가 돌연사하자 ‘고종이 독살당했다’는 소문이 빠르게 퍼져나갔다. 성난 민초들이 고종의 서거를 애도하고자 서울로 향했다. 이런 움직임이 3·1운동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됐다. 하지만 이들이 ‘복벽주의’(나라를 되찾아 왕을 다시 세우겠다는 주장)를 내세운 것은 아니다. 되레 일본으로부터 독립할 새 나라는 대한제국(조선)을 계승하되 국가의 주인은 왕이 아니라 인민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은 24일 “3·1운동 당시 고종에 관한 구호가 아예 없었다”면서 “1911년 중국 신해혁명, 1917년 러시아혁명, 1918년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의 공통점은 황제로 상징되는 절대 권력을 부정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우리 민족은 고종의 죽음을 계기로 왕정을 완전히 극복했다. 3·1운동은 과거 봉건군주제를 넘어선 것이기에 가히 ‘혁명’이라고 부를 만하다”고 강조했다. ●1896년 독립협회 때부터 민주공화제 열망 우리 민족은 대한제국 멸망 이전인 19세기 말부터 민주공화정에 대한 열망을 키워 나갔다. 1896년 조선에 기독교인을 중심으로 독립협회가 만들어진 것이 대표적이다. 자주독립과 천부인권 존중, 한글 사용 등을 강조했는데, 배후에는 헨리 거하드 아펜젤러(1858~1902)를 포함해 서양 선교사들이 있었다. 아펜젤러는 배재학당을 만들어 조선인에게 영어와 민주주의를 가르쳤다. 이승만(1875~1965)도 이 학당의 학생이었다. 독립협회는 종종 대중집회인 만민공동회를 열었다. 만민공동회는 관민공동회로 이어지며 국정개혁의 대원칙을 결정하기도 했다. 미국의 한인들이 발간한 신한민보 1910년 7월 6일자 사설에는 독립협회 정신을 계승해 “현 정부(대한제국)가 일본에 투항한 지 오래됐는데, 우리는 인민의 정신을 대표해 우리의 복리를 도모할 만한 정부를 세울 것임을 선언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런 움직임은 일본 병합 뒤 국내외 망명정부 수립으로 이어졌다. 1911년 12월 연해주 한인들은 항일 결사체인 권업회를 세웠다. 이들은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대한광복군 정부를 수립했다. 1917년 12월에는 ‘전로한족중앙총회’를 세워 독자적인 활동에 나섰다.1915년 3월 중국 동포들은 상하이에서 신한혁명당을 결성했다. 1917년 7월 박은식과 신채호, 김규식 등 독립운동가 14명이 대동단결선언을 발표했다. 이들은 독립운동 최고기관으로 공화정제로 운영되는 임시정부를 건설하자고 주장했다. 국내에서도 3·1운동을 준비한 천도교를 중심으로 임시정부수립운동을 펼쳤다. 3·1운동을 계기로 수많은 임시정부가 생겨났다. 이 가운데 러시아 대한국민의회(노령정부)와 중국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서울의 한성임시정부는 힘을 모으고자 하나로 통합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아는 임정의 시작이다. 김정인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추진회’ 기획소통분과위원회 위원장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임을 명시한 임정의 임시헌장은 정당성의 기원을 3·1운동에서 찾고 있다”고 밝혔다. 1920년 1월 임정 신년축하회 연설에서 내무총장 안창호는 민주공화국 탄생의 감격을 이렇게 전했다. “오늘날 우리나라에는 황제가 없나요? 있습니다. 과거에는 황제가 단 한 사람밖에 없었지만 이제는 2000만 국민이 모두 황제요. 제군 모두가 황제란 말입니다. 황제란 무엇이오? 주권자의 이름입니다. 지금은 제군이 모두 다 주권자외다.”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 [단독]“독립운동가 김원봉, 재평가·복권 1순위”

    [단독]“독립운동가 김원봉, 재평가·복권 1순위”

    “이승만 비서 임병직 지나치게 고평가좌파 계열 4명·박헌영도 재평가돼야”독립운동사 연구 우파 편향 지적도친일청산 부재·일관성 없는 서훈 비판역사학계는 가장 먼저 재평가와 복권이 이뤄져야 할 독립운동가로 김원봉(1898~1958)을 꼽았다. 반대로 지나치게 고평가돼 재고가 필요한 인물로는 임병직(1893~1976)을 들었다. 역사학자들은 “우리 독립운동사 연구가 우파에 치우쳐 미진한 점이 많다”며 “정부가 연구 범위를 넓힐 수 있도록 (학계를) 적극적으로 지원해야 한다”고 진단했다. 서울신문이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24일 역사학계 전문가 25명을 심층 설문조사한 결과 32%(8명)가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재평가가 시급한 인물로 김원봉을 지목했다. 그는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 출신으로 한국광복군 부사령관과 군무부장 등을 맡아 민족 해방을 앞당겼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어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 전체(4명), 박헌영·이동휘(각 3명) 등이 뒤를 이었다. 학계에서는 대체로 좌파계열 활동가들에 대한 복권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전성현 동아대 사학과 교수는 “김원봉은 경남에서 손꼽히는 인물이지만 북한 정권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재조명이 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진 남북 관계 등을 감안해) 사회적 합의를 이뤄야 할 때가 왔다”고 설명했다. 반면 설문에 응한 역사전문가 중 36%(9명)는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지나치게 높게 평가된 인물이 임병직이라고 답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의 보좌관 출신으로, 1976년 건국훈장 가운데 최고등급인 ‘대한민국장’에 추서됐다. 2위 이승만(7명·28%), 3위 김구(2명·8%) 순이었다. 김삼웅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공동대표는 “임병직은 이승만의 비서였다는 이유만으로 (별다른 공적 없이) 1등급 훈장을 받았다. 과거에는 이승만처럼 스스로에게 최고 훈장을 주는 ‘셀프 서훈’도 만연했다. 이제부터라도 대한민국 서훈제도 자체를 근본적으로 손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학계에서는 우리 정부의 가장 큰 과오로 ‘제대로 된 독립운동사 연구 틀을 갖추지 못한 점’(32%·8명)을 들었다. 친일 청산 부재와 일관성 없는 서훈(각 6명)도 도마에 올랐다. 박환 수원대 사학과 교수는 “최근 정부와 언론이 역사에 잘 알려지지 않은 새 인물 찾기에 주력하고 있는데, 이미 나온 인물에 대한 정확한 연구와 평가가 병행돼야 한다. (요즘 정부와 언론의) 노력이 실제 역할이 적었던 이들을 의도적으로 치켜세우는 식으로 변질돼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장규식 중앙대 사학과 교수는 “해방 직후 우리 정부가 친일 청산을 제대로 하지 못해 우리 사회가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친일 행적자 대부분이 단죄를 받지 않고 세상을 떠났다. 대한민국 정부가 아니라 ‘시간’이 대신 친일파를 청산해 줬다”고 꼬집었다.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 설문응답자 명단 기유정 서울대 한국정치연구소 연구원, 김삼웅 신흥무관학교 기념사업회 공동대표, 김주용 원광대 한중관계연구원 교수, 김태웅 서울대 역사교육과 교수, 김형목 독립기념관 선임연구위원, 노상균 연세대 국학연구원 연구원, 박환 수원대 사학과 교수, 반병률 한국외대 사학과 교수,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 박찬승 한양대 사학과 교수, 백옥진 전국역사교사모임 회장, 신효승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이양희 충남대 충청문화연구소 연구원, 이원규 역사소설가, 장규식 중앙대 사학과 교수, 장석흥 국민대 국사학과 교수, 장세윤 동북아역사재단 수석연구위원, 전성현 동아대 사학과 교수, 조한성 민족문제연구소 선임연구원, 최기영 서강대 사학과 교수, 한시준 단국대 사학과 교수, 홍선표 하나역사연구소장, 익명 요청 2명(가나다순)
  • 설훈 “20대 지지율 하락, 이명박근혜 교육 받아서?” 망언 논란

    설훈 “20대 지지율 하락, 이명박근혜 교육 받아서?” 망언 논란

    세차례 인터뷰서 거듭 주장한국당 “청년 혐오…사퇴해야”설훈 “오해 일으켜 죄송” 사과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인 설훈 의원의 이른바 20대 비하 발언으로 정치권과 온라인이 발칵 뒤집혔다. 최근 20대 남성들의 문재인 정부 지지율이 하락한 것이 이들 세대가 이명박·박근헤 정부 때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을 내놓은 것이다. 설 의원은 망언 논란에도 거듭된 언론 인터뷰에서 주장을 굽히지 않다가 “오해를 일으켜 죄송하다”며 결국 사과했다. 자유한국당과 바른미래당 등 야당은 전임 정부의 교육을 탓한 설 의원의 발언에 대해 ‘청년 혐오’라며 거세게 비판했다. 문제의 발언은 지난 21일 인터넷 매체 ‘폴리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시작됐다. 설 의원은 문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에 대한 20대 남성의 굳건했던 지지율이 하락한 원인을 묻는 질문에 “젠더 갈등 충돌도 작용했을 수 있고 기본적으로 교육의 문제도 있다”고 답변했다. 현재 20대가 학교 교육을 받았을 때가 10년 전부터 집권 세력인 이명박·박근혜 정부 시절이었고 그때 제대로 된 교육이 됐을지 의심스럽다는 게 설 의원의 주장이다. 그는 유신 이전에 학교 교육을 마친 자신을 예로 들면서 “되돌아보면 민주주의 교육을 잘 받은 세대였다고 본다”며 “민주주의가 중요한 가치이고 대한민국이 민주주의로 앞으로 가야 한다는 교육을 정확히 받았다”고 말했다. 그런 교육이 있었기에 유신정권이 잘못이라는 걸 몸으로 느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설 의원은 정확한 분석이 아니라 조심스러운 추측이라고 덧붙였다. 설 의원은 이튿날 문화일보와의 전화 인터뷰에서도 같은 맥락의 주장을 반복했다. 그는 “인간의 의식과 사고를 규정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차지하는 게 교육”이라며 “이명박·박근혜 정부 때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까지 제대로 된 교육을 받았다면 보다 건강한 판단을 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설 의원은 자신의 발언이 물의를 일으키자 해명에 나섰다. 그는 22일 오후 세종시청에서 열린 예산정책협의가 끝난 뒤 기자들과 만나 “일부만 떼어서 보면 실언으로 비칠 수 있겠지만 내가 한 이야기의 녹음을 다 풀어서 들어보면 그렇지 않다”고 설명했다. 그는 거듭 “어떤 교육을 받았느냐에 따라 그게(지지율 하락과 교육이) 연관이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며 “그래서 특별히 연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설 의원은 “20대가 독특한 현상이 있다. 다른 연배에 비해 당 지지율이, 특히 남성이 다른 현상이 나타나면 (그 이유가) 뭔가인지를 찾아봐야 한다. 그래서 제가 생각할 때는 그때의 교육환경이 있을 수 있다고 보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야당은 정부의 정책 실기를 되돌아보지 않고 전 정부를 탓하는 설 의원의 발언을 거세게 비난했다. 이만희 한국당 원내대변인은 이날 논평을 통해 설 최고위원을 겨냥, “국정문란과 경제 정책 실패에 더해 특히 최악의 고용 참사와 갈등 지향적인 성 정책으로 젊은 층의 외면을 받고 있는 것을 정말 모른단 말인가”라고 비판했다.이 원내대변인은 “국민을 계몽과 훈계의 대상으로 보는 또 하나의 국가주의적 발상일뿐”이라며 “설훈 최고위원의 논리대로라면 현 정권초기에는 지지율이 높았으니 교육을 탓하려면 전 정부가 아니라 현 정부의 대학과 기업에서 이뤄진 교육을 탓해야 하는 것 아닌가”라고 지적했다. 장능인 한국당 대변인은 “과거의 일부 인사의 입에 올리기도 민망한 ‘국개론’, 국민 개·돼지 발언을 능가하는 역대급 망언”이라며 “본인이 속한 진영에 대해 지지를 보내지 않으면 바로 교육도 제대로 받지 않은 멍청이가 된다는 건가. 국개론에 이어 ‘이개론’, ‘이남멍’이라는 신조어를 설파라도 하겠다는 것인가”라고 직격했다. 이어 “설 최고위원은 본인의 잘못을 즉각 인정하고 의원직에서 사퇴해야 한다”며 “그렇게 하지 못하겠다면 민주당은 2030세대를 모욕한 설훈 최고위원을 제명하고 국민께 사과하기 바란다”고 촉구했다. 김홍균 바른미래당 청년대변인은 논평에서 “여당의 ‘청년 혐오 릴레이’에 설훈 최고위원이 동참했다”며 “설 최고위원 자신은 이승만, 박정희 정부가 설계한 교육제도 속에서 교육받았다. 대부분 민주화운동의 주역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이는 이승만, 박정희 정부의 교육제도가 건강한 비판의식과 인지력을 배양했기 때문인가”라고 반문했다. 김 대변인은 “스스로의 등에 칼을 꽂는 빈약한 논리에 청년들은 웃음 섞인 분노를 금할 수 없다”며 “우리 20대는 부정에 대항한 촛불 혁명의 시작이었고, 모든 과정과 결과에 동참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지금도 우리는 문재인 정권의 부정과 부패, 무능을 비판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며 “이런 청년들의 건전한 불만을 전 정권의 교육탓으로 매몰시키는 것은 참으로 비열한 언사”라고 비판했다. 이어 “설 최고위원은 우리가 받은 민주주의 교육을 탓하지 마라”며 “청년들의 분노와 서러움을 그저 성숙하지 못한 무능한 인지의 어리광 탓으로 돌리지 마라. 대신 스스로의 무능함과 여당, 나아가 정부의 무능함을 탓하라”고 요구했다. 민주평화당 김형구 수석부대변인은 논평에서 “국민 상식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발언”이라면서 “청년실업 등으로 인한 20대 지지율 하락에 반성하기는커녕 되지도 않는 말장난을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 “민주당은 20대에게 상처를 주고 국민을 분노에 차게 한 발언에 대해 즉각 사과하라”고 요구했다. 이에 설 의원은 공식 입장문을 내고 “오해를 불러일으켜서 상처가 된 분들이 있다면 이유를 불문하고 죄송하다”며 “다만, 사실이 아닌 일로 20대 청년들을 자극하고 갈등을 초래하지 않았으면 한다”고 해명했다. 그는 “젊은 세대를 겨냥해 지적한 게 아니다. 교육이 인간의 의식과 사고 규정에 큰 영향을 미치는 만큼 교육 환경과 정책의 구조적 문제를 지적한 것”이라며 “모든 책임은 열악한 교육환경을 만든 본인을 포함한 여야 정치권과 기성세대에 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오달란 기자 dallan@seoul.co.kr
  • [그 책속 이미지] 펜을 든 동양 소년, 독립을 외치다

    [그 책속 이미지] 펜을 든 동양 소년, 독립을 외치다

    파리의 독립운동가 서영해/정상천 지음/산지니/316쪽/1만 6000원 빛바랜 흑백사진, 서양 소년들 사이로 익숙한 외모의 동양 소년이 앉아 있다. 다부진 입매가 돋보이는 소년은 일제강점기, 임시정부의 권유로 프랑스로 유학 간 서영해(원 안)다. 우리 중고등학교에 해당되는 보베시의 ‘리세’에서 파란 눈의 축구부 급우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다. 엄혹했던 시절, 일제에 저항해 어떤 이는 총과 폭탄을 들었지만 어떤 이는 펜을 들고 낯선 땅에 갔다. 외교관이자 언론인, 소설가였던 서영해는 일생을 서방세계에 조선 독립의 당위성을 알리는 데 힘썼다. “미국에 이승만이 있다면 유럽에는 서영해가 있다”고 할 정도로 임시정부의 공식적인 양대 외교 축이었지만, 안타깝게 역사에 오랫동안 묻혀 있었다. 책 ‘파리의 독립운동가 서영해’는 상하이 임시정부의 막내로 활동하다 1920년 프랑스로 유학 간 청년 서영해를 그린다. 그는 임정 외무부의 지시로 고려통신사를 설립하고, 일본의 한반도 침략상을 전 유럽에 알렸다. 불어로 장편소설 ‘어느 한국인의 삶의 주변’과 민담집 ‘거울, 불행의 원인’ 등도 집필,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유럽에 알리려고 노력했다. 그는 오스트리아 여인 엘리자와 결혼해 아들 스테판을 낳았고, 스테판의 딸인 수지 왕이 할아버지의 첫 전기에 추천사를 썼다. “할아버지는 흐르는 물에 과감히 역행해서 헤엄치는, 그리고 지칠 줄 모르고 열심히 일하는 대단한 이상주의자였고, 평화수호자였으며, 반파시스트이자 섬세한 예술적 감각을 지닌 애국자였을 것이다.” 이슬기 기자 seulgi@seoul.co.kr
  • 독립운동가 144명 생애 한 권에… 인명사전 출간

    독립운동가 144명 생애 한 권에… 인명사전 출간

    김구, 유관순, 신채호 등 독립운동가 144명의 전 생애를 다룬 ‘한국독립운동인명사전’이 출간됐다. 독립기념관은 21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출판보고회를 열고 “2015년 광복 70주년을 맞아 독립운동사를 집대성하는 편찬사업을 시작한 이래 올해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한국독립운동인명사전 특별판(전3권)을 출간했다”고 밝혔다. 이 인명사전은 단순 나열식이 아니라 주요 독립운동가들의 삶과 독립운동 활동을 상세히 기록한 전기 형식으로 만들어졌다. 특별판에는 정부로부터 독립운동에 대한 공로로 대한민국장(31명)과 대통령장(91명) 서훈을 받은 122명과 독립장 서훈자 가운데 독립운동에 끼친 영향이 크다고 인정된 22명 등 독립운동가 총 144명의 삶과 투쟁이 기록돼 있다. 1권과 2권에는 손병희 선생 등 민족대표 33인과 유관순 열사가 포함됐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 이승만과 김구 주석 등 각료급 독립운동가들이 수록됐다. 3권에는 독립운동을 지원한 외국인인 쑨원, 장제스, 헐버트, 스코필드 등이 수록됐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최근 독립유공자 지정 여부로 논란이 된 김원봉 의열단장 등 북한정권 수립 활동에 참여한 독립운동가들을 다루지 않았다. 편찬위원장을 맡은 신용하 서울대 명예교수는 “김원봉 선생은 의열단장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방장관 등을 지낸 인물로 독립운동 공적에서는 걸출하지만 정치권의 반대로 원고를 준비해 놓고도 싣지 못했다”며 “2024년 완간되는 사전에 (김원봉 선생도) 넣기를 소망한다”고 말했다. 최광숙 선임기자 bori@seoul.co.kr
  • [곽병찬 칼럼] 보수 야당이 ‘20년 집권’하려면

    [곽병찬 칼럼] 보수 야당이 ‘20년 집권’하려면

    썩 내키는 표현은 아니지만, 김영삼 전 대통령의 차남 김현철씨 말대로 지금 자유한국당에는 “더이상 개혁보수가 설 땅이 없어 보인”다. 내키지 않는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없어 보이’는 게 아니라 없기 때문이요, 둘은 지금까지 과연 한 번이라도 ‘개혁보수’의 둥지가 됐는지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물론 5·18 광주항쟁 관련자들을 단죄하고, 5·18을 법적으로 민주화운동으로 자리매김하고, 신군부의 주력인 하나회를 해체하고, 금융실명제를 단행한 것은 지금의 자유한국당 당사에 사진이 걸려 있는 김영삼 전 대통령이었다. 호랑이굴에 들어가 호랑이를 잡은 것이니 ‘개혁’이 아니라 ‘혁신’이라는 표현도 아깝지 않다. 하지만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남북 대결 구조라는 민족의 정수리에 박힌 말뚝을 더 깊이 박아 버렸다. 이에 관한 한 그는 이전 군사정권 이상으로 수구적이었다. 1994년 남북은 남북 정상회담을 약속했다. 대결 구조를 변화시킬 획기적 계기였다. 그러나 김일성 주석이 사망하자마자 그는 전군에 비상경계령을 내리는 등 군사적 대비태세를 강화하고, 심지어 북미 제네바 합의 이행에 딴지를 걸었다. 북한 정권의 붕괴를 기대한 것이지만, 이전의 군사정권보다 더 졸렬했다. 북한을 ‘핵 무장 외길’로 내몬 배경 가운데 하나였다. 정수리의 말뚝을 더 깊이 박았으니, 다른 외과적 개혁은 의미를 갖기 힘들었다. 시비를 거는 게 아니다. 한국의 보수정당에 포기할 수 없는 기대가 있어 하는 말이다. 기대라니? ‘비정상체제’를 끝내기 위한 전당대회가 비정상 집단에 끌려가는 자유한국당의 막장 꼴을 보고도 기대 운운하다니, 제정신인지 의심받을 수 있겠다. 하지만 자유한국당이 정수리의 말뚝을 뽑는 데 꼭 필요한 보수정당의 평화 이니셔티브에 대한 기대를 포기할 수는 없다. 독일 기독교민주당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기민당은 2차 세계대전 후 미국 주도하에 이루어지던 냉전의 첨병이자 동독 및 동구권과의 체제 대결에서 선봉이었다. 1969년 동독에 대한 포용 및 동구권과의 관계개선(동방정책)을 내세운 사회민주당에 정권을 내줬음에도 1980년대 초까지 이런 대결 정책을 포기하지 않았다. 1982년에야 사민당의 동방정책을 대부분 수용하면서 재집권했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때 동구권이 기민당 정권을 신뢰하고, 동독 주민들이 서독과의 통합에 적극적으로 나선 것은 이런 기민당의 변화 덕분이었다. 기민당은 1982년부터 지금까지 부패 스캔들로 7년간 정권을 내준 것을 제외하고 30년째 집권하고 있다. 우리는 전쟁까지 치렀으니, 보수정당의 평화 주도권은 더 중요하다. 보수정당이 아니면 대결을 통한 북 체제의 파괴라는 환상과 석고처럼 굳어 버린 대북 적대감을 완화하거나 해소하기 힘들다. 보수정당의 지지가 없이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평화로운 서울 답방은 이루어지기 힘들다. 그들의 협조가 있어야 대한민국 열차는 북한을 지나 유라시아로 뻗어 갈 수 있다. 남북 정상이 합의한 비핵화와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는 국가 정책으로 설 수 있다. 한반도 평화 국면은 보수정당에게 기회다. 길은 사민당이 깔았지만 결실은 기민당이 거둔 것처럼 블루오션이다.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진보세력 20년 집권의 꿈’을 이야기했다면, 보수정당은 30년 집권의 꿈을 현실로 만들 수 있는 기회다. 피하거나 거스를 수 있는 흐름도 아니다. 이미 피할 수 없는 대세다. 북미 협상은 이제 어느 한쪽도 발을 빼기 힘들게 됐다. 이승만부터 박근혜에 이르기까지 오로지 적대적 남북 관계를 이용해 정권을 유지하거나 확대하려 했던 타성 때문에 눈앞에 두고도 보지 못할 뿐이다. 정두언 전 의원이 말한 ‘집포당’(집권을 포기한 정당)의 행태는 그런 타성의 결과다. 자유한국당판 경기동부연합이라는 ‘한 줌도 안 되는’ 태극기부대에 얹혀 다니고, 유력 후보자가 그 눈치를 보느라 국회와 헌법재판소, 사법부 등 헌법기관의 의결과 결정을 부정하고, 김진태·김순례·이종명 등 ‘5·18 망언’을 입에 달고 다니는 자들이 당을 쥐락펴락하고…. 물론 숨어 있는 다수는 “우리가 대한애국당인가. 김진태 데리고 우리 당에서 좀 나가 달라”는 조대원 최고위원 후보의 말에 공감할 것이다. 묻고 싶다. 보수정당은 집권할 의지가 있는가? 그러면 타성을 버리고 독일 기민당의 길을 가라. 20년 집권을 원하는가? 그러면 한반도 평화의 이니셔티브를 잡아라.
  • 대구시민주간에 ‘달빛 탐방’ 첫 선

    대구시민주간에 ‘달빛 탐방’ 첫 선

    오늘 국채보상운동 기념식 이어 28일엔 2·28민주운동 재연행사 창작 뮤지컬·역사탐방 등 행사 풍성대구와 광주 고교생 각 35명이 오는 26~27일 역사에 대해 교감하는 시간을 갖는다. 대구시민주간에 처음 생긴 ‘달빛(달구벌+빛고을) 상호탐방’ 프로그램이다. 대구시는 21~28일 시민주간 행사를 마련한다고 밝혔다. 2017년 시작해 3년째다. 1907년 2월 일본에서 도입한 차관 1300만원을 갚아 주권을 회복하려던 국채보상운동, 1960년 자유당과 이승만 정권의 독재에 맞선 2·28민주운동 등 나라가 어려울 때마다 분연히 일어났던 2대 시민운동을 기리기 위해서다. 올해 행사엔 ‘대구 시민이어서 자랑스럽습니다’라는 슬로건을 달았다. 시민주간 시작을 알리는 국채보상운동 기념식은 21일 오후 2시 북구 산격동 엑스코에서 열린다. 기념사업회 감사패 전달, 국채보상운동 유공자 표창에 이어 제42회 자랑스러운 시민상 시상식도 뒤따른다. 창작 뮤지컬 ‘기적소리’ 갈라 공연, 대구시립·경북도립국악단의 컬래버 연주와 국악 연주 등 다양한 공연이 펼쳐진다. 28일 중구 공평동 2·28기념중앙공원에서 대미를 장식할 2·28민주운동 재연행사엔 경북고 등 참여 8개 고교 학생들과 시민이 함께한다. 이어 기증을 통한 나눔 행사인 ‘북(BOOK)돋움 나눔 대장정’, 국채보상운동의 역사적 장소를 탐방하는 ‘발자취를 따라서’ 프로그램도 마련돼 있다. 행사 내용과 할인혜택은 네이버와 다음 카페에서 ‘대구’를 검색하면 확인할 수 있다. 권영진 시장은 “대한민국 시대정신을 뽐낸 현장엔 늘 있었다는 시민 자긍심을 높이고 위대한 시민정신을 계승·발전시키는 계기로 기대한다”며 웃었다. 대구 한찬규 기자 cghan@seoul.co.kr
  •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임정 군사작전 5일 앞두고 日 패망…물거품 된 ‘자주독립의 꿈’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임정 군사작전 5일 앞두고 日 패망…물거품 된 ‘자주독립의 꿈’

    4부 광복의 여명 : 충칭 시기 ③ 미완의 ‘대한민국’ <끝>1940년 9월 한국광복군을 창설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45년 8월 7일 미국 첩보기관 전략사무국(OSS)과 한미 연합 군사작전을 최종 합의했다. 20일까지 한반도에 침투하기로 하고 출동 명령을 기다렸다. 하지만 15일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임정으로서는 허탈할 수밖에 없었다. 자주독립을 위해 쏟아부은 노력이 물거품이 돼 버렸다. ●임정에 너무나도 아쉬운 해방 김구(1876~1949)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광복군을 국내에 진입시키려고 했다. 영국에서 망명정부를 이끌던 프랑스 샤를 드골(1890~1970)이 레지스탕스 부대를 이끌고 파리에 입성했듯 임정도 광복군을 모아 서울로 들어가려고 했다. 미국 OSS와 한반도 진공을 추진하는 동시에 중국 산시성 옌안에 있던 김두봉(1889~1961)의 조선의용군, 소련 연해주 지역에서 활동하던 김일성(1912~1994)의 항일유격대 등과 손잡고 압록강을 넘어가려고도 했다. 임정이 실제로 미국, 중·소 한인부대와 연계해 대일전쟁을 수행했다면 대한민국의 역사는 지금과는 달라졌을 수도 있다. 해방 뒤인 1948년 3월 김구가 안창호(1878~1938) 10주기 추도식 때 한 말이다.“선생이여, 우리 조국이 해방된 것을 10분(100%)으로 보면 7분(70%)은 우리 애국 선열들의 피와 땀입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최후의 3분(30%)이 우리 힘으로 되지 못한 까닭에 해방에 기괴한 내용이 담기게 됐습니다.” ●대만, 국제사회 미아 임정 도운 유일한 우방 2차 세계대전이 연합군의 승리로 굳어져 가던 1943년 7월. 임정 수뇌부가 중국 국민당 정부 총통 장제스(1887~1975)를 만났다. 김구 등이 “국제사회에 한국의 독립을 주장해 달라”고 호소했고, 장제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같은 해 11월 이집트 카이로에서 열린 회담에서 그는 프랭클린 루스벨트(1882~1945) 미국 대통령과 윈스턴 처칠(1874~1965) 영국 총리의 반대를 물리치고 한국의 독립을 명문화했다. 당시 인도의 독립운동가로 훗날 총리가 되는 자와할랄 네루(1889~1964)는 한국을 “아시아 식민지 국가 가운데 열강에게 독립을 보장받은 유일한 나라”라고 부러워했다. 카이로 회담은 1914년 이후 일본이 점령한 영토를 제자리로 돌려놓으려고 모인 자리였다. 1910년 일본의 식민지가 된 한국은 논의 대상이 아니었지만 장제스가 예외 조항까지 만들어 도왔다. 1932년 4월 윤봉길(1908~1932)의 상하이 훙커우공원 의거를 보고 우리 민족의 항일 의지를 높이 샀기 때문이다. 국민당 정부(현 대만)는 국제사회에서 ‘미아’가 될 뻔한 임정을 마지막까지 지켜준 유일한 친구였다. 하지만 중국의 노력에도 미국과 영국, 소련 등 열강의 반응은 차가웠다. 여러가지 이유를 들어 임정을 한반도의 정식 정부로 승인하지 않았다. 루스벨트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한국의 독립과 임정의 승인은 별개다. 한국 독립운동 단체들이 분열돼 임정의 대표성을 인정할 수 없다. 임정은 한반도와 연계가 없다. 중국이 임정을 승인하면 소련도 친소단체를 승인할텐데 이렇게 되면 연합국 내에서 마찰이 생겨날 수 있다.” 처칠도 임정을 인정하면 인도 등 영국 식민지들이 동요할 수 있다고 보고 반대했다. 실망스럽지만 임정 요인들은 모두 개인 자격으로 한국에 돌아와야 했다. 1945년 11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임정 직원과 가족들이 차례로 귀국했다.●임정, 국제정세 못 읽고 선거불참…한독당 소멸 임정 인사들이 귀국하자 시민들은 환영의 뜻을 나타냈다. 김구의 거처이자 임정 청사 역할을 한 경교장(현 강북삼성병원)은 인파로 붐볐다. 1945년 12월 임정 인사들은 서울운동장(현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열린 환국 행사에 참석했다. 15만명이 몰려와 이들을 축하했다. 하지만 미 군정은 자신 이외의 어떠한 정부 활동도 인정하지 않았다. 이는 임정에도 마찬가지였다. 이때부터 김구는 미 군정 규정을 어기고 임정을 사실상의 정부로 간주하려고 해 갈등을 빚었다. 직접적 도화선은 신탁통치 문제였다. 1945년 12월 소련 모스크바에서 미·영·소 3개국 외상이 만나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를 결의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임정은 즉각 국무회의를 열고 반탁운동에 나섰다.앞서 임정은 1943년 영국과 미국이 한국을 국제 공동관리하는 방안을 논의했다는 뉴스가 나오자 중국 충칭에서 ‘재중자유한인대회’를 열어 반대운동을 펼쳤다. 임정 연구의 권위자인 한시준(65) 단국대 사학과 교수는 “해방 뒤 임정의 반탁운동은 충칭에서 국제 공동관리에 반대했던 연장선상에 있던 것”이라며 “일제가 패망하면 한국은 곧바로 독립해야 한다는 것이 임정의 확고부동한 믿음이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김용옥(71) 한신대 석좌교수는 “당시 모스크바 삼상회의가 논의한 신탁통치안은 (임정이) 반대할 성격의 것이 아니었다. 미소 공동위원회는 합리적이고 바람직한 방안을 내놨다”며 “당시 전 국민이 일치단결해 신탁통치를 찬성했어야 했다. 그러면 분단도 일어나지 않았고 1948년 제주 4·3사건과 여순 민중항쟁도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美군정, 비밀리에 임정 해체공작까지 임정은 1945년 12월 31일 ‘국자 1·2호’라는 포고문을 발표했다. 신탁통치를 강행하려는 미 군정 대신 자신들이 정부 역할을 맡겠다는 것이었다. 1946년 1월 1일 미군정 사령관 존 리드 하지(1893~1963)가 김구와 언성을 높여 싸운 끝에 상황을 수습했다. 이때부터 미 군정은 임정을 위험한 존재로 보고 협력 대상에서 배제했다. 비밀리에 임정 해체 공작도 개시했다.이후 김구의 여러 정치적 시도는 번번이 무산됐다. 1948년 5월 10일 총선거가 실시돼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세워졌다. 9월 9일 북한에서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됐다. 38선을 경계로 국토와 민족이 둘로 나뉘었다. 임정 세력이 주축이던 한국독립당은 “남한만의 정부 수립에 반대한다”며 총선 참여를 거부했다. 제헌의회에서 정치권력을 얻지못한 한독당은 결국 세를 잃고 와해됐다. 당시 국제 정세와 한국사회 분위기를 제대로 읽지 못한 ‘패착’이었다는 평가가 많다.●주요 임정 지도자들 어두운 말로 주요 임정 지도자들의 말로도 불행했다. 1947년 7월 여운형(1886~1947)은 좌우 합작운동을 펼치다가 살해됐다. 김원봉(1898~1958)은 친일경찰 노덕술(1899~1968)에게 고문을 받은 뒤 월북했다. 그가 자신의 비서였던 중국인 학자 쓰마로(100·미국 거주)에게 보낸 편지에는 “북조선은 그리 가고 싶은 곳은 아니다. 하지만 남한 정세가 너무 나쁘고 (일부 우익들이) 나를 (죽이려고) 위협해 살 수가 없다”고 적혀 있었다. 한국전쟁을 1년 앞둔 1949년 6월 김구도 안두희(1917~1996)의 총탄에 스러졌다. 그의 나이 73세였다. ‘못생긴 나무가 선산을 지킨다’고 했던가. 몰락한 양반 가문에서 태어나 과거시험에 번번히 떨어져 이른바 ‘과거 낭인’으로 살았다. 1919년 마흔이 넘은 나이에 “임정 문지기라도 하겠다”고 상하이로 찾아가 명망가들이 떠난 이름 뿐인 정부를 끝까지 지켰다. 임정을 독립운동의 구심체로 되살리는 데 누구보다 큰 공헌을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가 꿈꾸던 민족단일국가의 염원은 이뤄지지 않았다. 이렇게 대한민국은 ‘미완의 건국’으로 남았다.●‘1919년 임정이 대한민국의 시작’ 분명히 그렇다고 임정이 우리 역사에서 사라진 것은 아니다. 1948년 7월 초대 대통령이 된 이승만(1875~1965)은 취임 직후 ‘대한민국 30년’이라는 연호를 썼다. 독립운동가들이 상하이에 임정을 세운 1919년을 대한민국의 시작으로 보고 이를 계승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뉴라이트 등은 “대한민국이 1948년 건국됐다”고 주장한다. 여기에는 ‘대한민국은 (독립운동가들의 노력이 아니라) 미국의 힘으로 세워진 나라’라는 속내가 있다. 하지만 이들이 ‘건국의 아버지’로 여기는 이승만조차 그렇게 생각하진 않았던 것 같다. 이승만은 대한민국 정부 초대 내각 16명 가운데 자신을 포함한 5명을 임정 요인으로 채웠다. 대통령 이승만, 부통령 이시영(1868~1953), 국회의장 신익희(1892~1956), 국무총리·국방부장관 이범석(1900~1972), 무임소장관 이청천(1888~1957) 등이다. 당시 정부도 한국 독립을 위한 임정의 공로를 높이 평가했음을 알 수 있다. 1987년 국회는 ‘6월 항쟁’으로 얻어낸 9차 개헌을 통해 대한민국의 법통이 임시정부에 있다는 사실을 재차 천명했다. 어떤 이들은 연합국이 해방을 가져다 줬다고 말한다. 한국이 독자적으로 일제를 이기지 못했고 국제사회도 임정의 노력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계 제패를 꿈꾸며 전 세계로 세를 넓혀가던 강대국 일본을 우리 혼자 막지 못했다고 해서 독립을 위한 피나는 노력을 폄하할 이유는 없다. 또 연합국이 임정을 승인하지 않았던 배경에는 일본 항복 뒤 전리품을 더 많이 차지하려는 정치적 의도가 숨어 있다. 그들의 시각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해방은 거져 얻어진 것이 아니다. 우리는 전 세계에서 어느 나라보다도 오래 그리고 치열하게 일제와 맞서 싸웠다. 대한민국은 임정이 중심이 된 독립운동 세력의 길고 긴 투쟁의 산물임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물증 없이 드루킹 진술 인정”… 법률가 입 빌려 사법부 신뢰성 지적

    “물증 없이 드루킹 진술 인정”… 법률가 입 빌려 사법부 신뢰성 지적

    외부인사 통해 검토…객관적 비판 부각 “허위진술한 증인 다른 증언 인정은 희귀” 한국당 “文, 닉슨 하야 이유 생각해봐야” 평화당 “한국당, 쫓겨난 이승만 되새겨야”더불어민주당이 19일 민간 법률 전문가를 내세워 김경수 경남지사의 1심 유죄 판결문을 조목조목 비판하고 나선 것은 사법부에 대한 사적 반발이 아니라 객관적 비판임을 부각시키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하지만 자유한국당이 이번 사건을 ‘워터게이트 사건’에 비유하며 공세를 가하고 나서면서 공방이 격해지고 있다. 차정인 부산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민주당 주최 기자간담회에서 김 지사와 ‘드루킹’(김동원)이 공모공동정범임을 인정한 1심 판결문을 정면 비판했다. 차 교수는 “실행행위를 하지 않은 사람에게 공모공동정범을 인정하기 위해선 상하관계나 지휘·복종관계, 제약관계가 있었는지를 충분히 검토하고 중요한 판단요소가 돼야 한다”며 “판결문을 검토한 결과 김 지사와 드루킹 사이에 지시, 승인, 허락 관계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판단된다”고 밝혔다. 또 “드루킹과 경공모 회원이 이미 범행계획을 세우고 있는 상태에서 그 계획을 인지한 것만으로는 지시, 승인, 허락행위가 인정되기엔 법리상 부족하다”며 “공모사실을 뒷받침하는 증인들의 진술 역시 대체로 일관되지 않고 허위진술을 한 증인의 다른 진술 부분의 신빙성을 이토록 방대하게 인정한 판결은 일찍이 본 적이 없으며 희귀한 예”라고 했다. 법무법인 양재 소속 김용민 변호사도 1심 판결문의 문제점은 직접적인 물적 증거 없이 신빙성이 떨어지는 드루킹 일당의 진술을 증거로 인정했다는 점이라고 지적했다. 김 변호사는 “2016년 온라인 로그기록과 킹크랩 프로토타입 재연동영상 등 언급된 물적 증거는 그 자체로 김 지사의 업무방해 범행을 입증하는 직접적 증거가 되지 못한다”며 “더 중요한 건 드루킹 등의 진술 증거인데 김 지사를 공범으로 만들기 위해 진술을 조작한 흔적이 나왔는데 진술의 신빙성을 인정해 버린 게 가장 큰 문제”라고 했다. 한국당은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사임한 리처드 닉슨 전 미국 대통령까지 거론하며 집중 공세를 퍼부었다. 나경원 원내대표는 의원총회에서 “(지난주 방미 당시) 닉슨 전 대통령이 모든 사건을 지휘했던 워터게이트 호텔 205호에 묵으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면서 “워터게이트 사건을 보며 ‘진실은 언젠가 밝혀지는구나’라고 느꼈다”고 말했다. 김한표 의원도 “문재인 대통령은 닉슨 전 대통령이 왜 하야했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며 “이유는 단 하나, 바로 거짓말이다”고 했다. 이에 민주평화당 문정선 대변인은 “닉슨을 거론하기 전에 이승만과 자유당이 왜 국민에게 돌팔매를 맞고 쫓겨났는지부터 자유당을 계승한 한국당은 되새겨야 한다”고 비판했다. 강윤혁 기자 yes@seoul.co.kr
  • [이기철의 노답 인터뷰] “통용항공, 일자리 새로 만드는 틈새시장이야…몇가지만 해결되면”

    [이기철의 노답 인터뷰] “통용항공, 일자리 새로 만드는 틈새시장이야…몇가지만 해결되면”

    조일현 협회장이 말하는 ‘비행기 택시’ 시대“‘비행기 택시’ 시대가 곧 온다고 말하면 사람들이 비웃어요. 1960~70년대, 검정 고무신 신고 다닐 때 자동차 판매장이 고무신 파는 가게보다 더 많을 날이 올 거라고 상상이나 했느냐고 되묻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조용해집니다. 비행기 택시 시대는 가만히 있어도 올 수밖에는 없는 시대적 상황이 되고 있습니다. 빨리 시작하면 더 큰 시장을 차지할 수 있지요. 남북 관계가 좋아지면 더욱 필요해지고.” 민간용 경비행기를 택시처럼 이용하는 ‘통용항공산업발전협회’가 한국과 중국 사이에 협약을 맺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지난 15일 조일현(64) 초대 협회장을 서울 여의도에서 만났다. 조 협회장은 17대 국회의원 시절 국회 상임위원회인 건설교통위원회 위원장을 지내기도 했다. 베이징대학에서 중국 공산당을 연구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중국통으로 통한다. 한국통용항공산업발전협회는 지난해 11월 발족했고, 중국과 업무협약을 맺는 등 소프트랜딩에 탄력이 붙었다. “韓통용항공, 국가적 추진 中겨냥 신생 분야시진핑 ‘비행기’ 시대 개척 야심찬 계획 추진내년까지 경비행기 5천기, 비행장 8백곳 확보”- 통용항공이란 말이 낯설다. “통용항공(通用航空)이란 말은 중국에서 만들어 사용하는 용어인데, 우리는 중국 시장 진출을 겨냥해 이를 가져와 사용하고 있습니다. 군사와 대형 항공 서비스, 항공 수송을 제외한 것으로 영어로는 ‘제너럴 에비에이션(general aviation·GA)’이라 통칭합니다. 보통 4인승에서 100인승 이하의 경비행기로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을 말합니다. 손님을 부정기적으로 실어나르는 택시, 스포츠 및 관광 사업뿐만 아니라 대규모 농장에 하는 농약살포도 통용항공 산업에 포함합니다. 우리나라엔 개념만 들어온 신생 분야이지요.” - 전 세계 통용항공의 규모는. “땅덩어리가 넓은 미국, 캐나다 등에서 먼저 통용항공 서비스가 시작됐습니다. 2016년 말 기준으로 전 세계에 36만대의 통용 항공기가 있고, 미국이 21만대를 보유하고 있지요. 중국엔 3000여 대에 불과합니다. 중국이 2020년까지 경비행기 5000기를 확보하고, 2021년부터 비행기 택시 서비스를 시작할 계획이랍니다. 국제항공운송협회(IATA)에 따르면 중국 항공여객 시장은 2016년 5억명에서 20년 뒤인 2036년에 15억명으로 3배가량 성장할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예컨대 중국 통용항공기가 3만대 필요할 때 우리가 1만대만 공급한다고 하면 그게 어딥니까. 우리가 차지할 규모가 얼마나 될 것이냐에 대해서는 과거 정주영 회장이 울산에 현대차 공장을 세울 때 한국 자동차시장 크기를 알았을까요. 저도 그런 심정입니다.” - 중국 통용항공 시장, 잠재력이 무섭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통용항공을 미는 것도 다 까닭이 있습니다. 장쩌민 전 주석은 ‘마이카’ 시대를, 후진타오 전 주석은 ‘고속철’ 시대를 열었지요. 이에 시 주석은 ‘비행기’ 시대를 열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추진합니다. ‘중국 제조 2025’에서 통용항공을 10대 육성전략 가운데 하나로 꼽았습니다. 중국 입장에선 통용항공이 고속철도망을 까는 것보다는 더 경제적입니다. 내년까지 경비행장을 전국 800곳을 갖추기로 하고 한창 공사 중입니다. 몇 년 이내에 경비행장이 1000곳이 넘을 겁니다. 중국에서 제대로 된 통용항공 시대가 꽃피우기 위해서는 경비행기 수만 대가 필요합니다. 우리의 중국 파트너(중국 통용항공산업발전협회)에 따르면 경비행기를 사려는 중국 사람이 30만명에 이르고, 조종사 자격증을 따려는 사람은 100만명이라고 합니다. 또 중국 각 성에서 조종사 면허 발급기관을 확보하는 중이라고도 하더라고요.” “1953년 첫 자체 기술로 ‘부활’ 제작‘반디호’는 ‘하늘을 나는 페라리’ 극찬산업화 ‘실패’ … 하늘길 열리지 않아개발 대기업…생산은 중기 영역 문제”- 의욕만으로 진출할 수 있나. 우리의 항공기 제조 수준은. “물론입니다. 현재도 수원에 있는 베셀은 2인승 항공기(KLA100)를 만들었습니다. 이게 시속 200km로 14시간 비행이 가능합니다. 우리나라는 경비행기 제조 기술을 이미 확보하고 있습니다. 66년 전인 1953년 10월 대구에서 국산 경비행기 1호인 ‘부활’을 만들어 시험비행에 성공했습니다. 1991년에는 순수 국산 경비행기 2호인 ‘창공91호’를 개발했지만, 판로를 개척하지 못해 산업으로 연결하지 못했지요. 1993년 국산 3호기인 ‘까치’를 제작했지만, 후속 투자가 이어지지 않아 역시 실패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한국형 전투기 개발사업도 진행되면서 경비행기 제작에 필요한 각종 기술을 괄목하게 습득했습니다. 2001년 9월 21일 순수 국내 기술로 만든 4인승 ‘반디호(firefly)’ 선진국 경비행기에 손색이 없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우리 경비행기 제조 역사를 보면 연구원들의 피와 땀, 눈물, 목숨이 배여 있지요. 한국 제품은 완성도가 높고 안전하면서도 다른 선진국보다는 가격 경쟁력이 있다고 중국이 보는 겁니다. 그래서 거래를 하고 싶어하지요.” - 항공기 제조 기술은 상당한 데, 산업화 실패 원인은. “한국항공우주연구원이 만든 반디가 2004년 남북극을 경유하는 세계 일주에 성공했습니다. 당시 이를 몰았던 미국 탐험가 거스 매클라우드(64)는 반디호를 ‘하늘을 나는 페라리’라고 평했습니다. 민간 항공기로는 최초로 미국에 수출도 됐습니다. 2011년 한국항공우주산업(KAI)가 KC-100(나라온)은 미국 연방항공청(FAA) 기준을 다 통과했고요. 그러나 역시 산업화는 실패했습니다. 이런 제조 도면은 모두 책상 서랍 속에서 잠자고 있지요. 판로 개척을 못 하면서 산업화에 실패한 겁니다. 거기에는 ‘하늘길’에 대한 문제도 있고. 경비행기 개발은 최소 1000억원이 들어가는 대기업 영역입니다. 그런데 대당 4억~5억원 정도 주문받아 생산하는데, 그 부분은 중소기업이 할 입니다. 이런 특징 때문에 선진국도 잘 못 합니다. 한국이 경비행기 만든다고 해도 군사용이나 대형 항공기가 아니어서 선진국은 국가 차원에서는 별로 신경도 안 씁니다. 날개를 접어 주차장(격납고)에 보관하는 등 첨단 기술이 들어간 것은 이들 국가가 보호하지만. 그리고 다른 나라들은 진출하려도 경비행기 제조 기술이 없습니다. 한국에겐 일자리 창출의 새로운 틈새시장이 될 겁니다.” “정부 지원 없으면 ‘대장간’ 수준 못 벗어나항공 관제 문제, 계기판 인증 문제 해결 시급韓지역별 준비 시급 … 싱가포르도 올해 시작”- 통용항공에 언제부터 관심을 뒀나. “국회 건교위원장을 지낼 때 선진국과 공항 관계자들로부터 ‘비행기 택시’ 시대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그러다 문재인 대통령이 야인이던 2016년 8월 경남 양산의 자택을 찾아갔습니다. 당시 문 대통령은 ‘나는 대통령이 되어 평화로운 한반도를 만들고 싶다. 남북이 하나가 되어 평화를 정착시킬 수 있을 때만이 한반도는 당당한 미래를 열 수 있고, 영원한 평화를 보장받을 수 있다. 남과 북이 서로를 위하고 함께 발전하기 위해서는 역사의 공유와 동질성 회복이 무엇보다 우선이다. 이를 위해서는 쉬운 왕래와 진정한 교류가 필요하다. 따라서 빠른 왕래와 효과적인 방안을 찾아야 한다.’라고 한 말씀을 듣고 통용항공에 대해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졌습니다. 최근 남북 관계가 급속화되면서 더욱 필요해졌고요.” - 자동차는 정부가 길을 닦아줬는데, 활주로는 어떻게. “도로 건설 비용으로 활주로 충분히 낼 수 있습니다. 자동차 길은 산도 뚫고 강도 메워야 하지만 경비행기 활주로는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짧아도 됩니다. 경비행기 활주로는 길이 200m 이내면 충분하지요. 민간영역에서도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그것보다는 관제 문제 해결이 시급합니다. 무엇보다도 비행기 제조에서 제일 어려운 게 계기판인데…. 경비행기에 장착될 계기판과 관련해 인증기관 설립이 필요합니다. 반도체 제조와 정보통신(IT) 기술이 우리가 세계 최고이니 계기판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 분야 전문가들도 공통적으로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이걸 공신력 있는 기관에서 인증받아야 합니다. 인증기관 만드는 것만 해도 정부가 크게 도와주는 겁니다.” - 정부 할 일도 많다. “통용항공은 정부가 관심을 두고 집중하지 않으면, 민간에만 맡겨서는 ‘대장간’ 수준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정부가 심기일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보다 훨씬 작은 싱가포르도 올해부터 비행기 택시 서비스를 시작합니다. 우리나라도 전국을 지역별로 어디에 어떻게 비행기 택시 서비스를 시작할지 준비해야 할 때가 됐습니다. 그리고 비행기는 로봇이 못 만듭니다. 거의 전부 사람 손이 직접 만들어야 합니다. 기술집약적이면서도 일자리 창출도 많은 분야인 셈이지요. 그러기에 서둘러야 할 일입니다.” “‘中기술 먹튀’ 우려? …‘당연’안주 말고 경쟁력 확보 노력도中과 교류 확대로 신뢰 쌓아야”- 협회가 할 일은. “현재 국내에 경비행기 제조와 관련된 업무를 정리하고 관리하는 곳이 없습니다. 이게 우리 협회가 할 일이지요. 각 분야의 전문 기술과 지식을 엮어서 하나의 토대를 만들고 또 협회에서 구축한 기반을 토대로 회사를 세우거나 합작 회사를 만들게끔 유도하는 역할을 할 생각입니다. 정부나 중국을 비롯한 대외 창구 역할도 하고. 제조·정비·조종사 양성·부품공장 계열화 등 꿰맬 일이 많습니다. 현재 20개 기업이 등록돼 있는 데 협회가 출범했다고 하니 문의가 많아. 그리고 경비행기 제조에는 대략 6000개의 부품이 필요합니다. 그러면 후방산업 효과도 막대합니다. 그리고 중국 조종사들을 교육도 우리가 하게 할 계획입니다. 중국에서 딴 조종사 자격증으로 외국에서는 경비행기를 몰 수 없거든요. 한국에서 딴 자격증은 국제운전면허증처럼 다른 나라에서도 다 인정해 줍니다. 중국인들이 그걸 노리고 있습니다.” - 통용항공, 다른 활용 가능성은 많겠다. “사실, 이국종 교수가 말하는 ‘닥터 헬기’는 갖췄다고 해도 평상시엔 사고가 날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처지입니다. 응급헬기를 지역별 비행기 택시회사에 위임사항으로 주는 겁니다. 이걸 중국 시 주석이 추진하고 있습니다. ‘읍급 콜’이 들어오면 이 회사에서 바로 출동하는 겁니다. 중국은 한국 기술로 병원 응급실이 탑재된 헬기를 만들고, 의료진이 탑승하는 한중일 3국 해상재난 체계를 갖추자고 제안한 상태입니다. 중국이 그런 해상재난 헬기를 다 사주겠다는 겁니다. 이거 한대 가격이 얼마인줄 아세요? 600억~700억원입니다. 중의학이라는 게 응급상황에서 별로 쓸모없고, 한국 의료기술은 세계 수준인 것을 중국이 잘 알기에 이런 제안을 한 겁니다.”- 중국의 ‘기술 먹튀’가 우려된다. “중국의 항공 기술은 세계적입니다. 군사용이나 대형 항공기 제조 수준은 거의 미국이나 유럽 수준의 90%에 달했습니다. 드론은 오히려 더 앞섰고요. 다만, 경비행기 분야에서는 우리보다 뒤처졌져 있습니다. 중국은 현재 특허가 다 끝나 단종된 ‘세스나’를 만드는 수준입니다. 그러나 우리 경비행기 기술도 중국이 금방 습득할 것이라고 봅니다. 따라잡힐 우려도 있지만, 우리도 끊임없이 노력해서 경쟁력을 갖춰야지, 여기에서 안주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자동차 산업을 막 시작하던 시절, 현대나 기아차가 미국에 공장을 지어 진출할 것이라고 생각이나 했습니까. 경비행기도 미국에 진출할 날이 올 겁니다.” - 그래도 너무 중국 의존적이다. 중국, 과연 믿을 만 한가. “시진핑 정부가 확실하게 밀고 있으니, 통용항공은 시간만 지나면 궤도에 오를 것이라 생각합니다. 필요한 경비행기를 한국이 생산하면 다 사가겠다는 것이다. 물론 한국 제품이 완성도가 높고 안전하면서도 다른 선진국보다는 가격 경쟁력이 있다는 조건에서 말이죠. 이런 제안을 한 파트너인 쉬창둥(徐昌東·67) 중국 협회장은 시 주석이 애지중지하는 인재입니다. 그의 부친이 중국 상하이에서 독립운동하던 이승만 전 대통령과 같이 한 인쇄소에서 일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충남 예산에 있는 윤봉길 의사 기념관을 참배합니다. 지난달 한국을 방문했을 때도 일부러 찾아가 아들과 손자까지 3대가 함께 고개 숙여 참배했습니다. 그 전에도 두어번 와서 참배했지요. 한국에 대해 좋은 인상과 감정을 갖고 있지요. ‘한국 사람은 중국 사람을 못 믿고, 중국 사람은 한국 사람을 안 믿는다.’라는 말은 옛말이 되고 있습니다. 교류를 통해 서로 확인했고, 신뢰를 쌓아가고 있지요.” “베이징대 박사학위 조기졸업에 한문 실력 발휘어릴 적 가난해 서당 3년 다녀…高2때 군 입대도‘봉이 김선달’ 놀림감 생수도 산업화 성공 전력” - 중국에 대해 얼마나 잘 아나. “개인적으로 내가 박사학위가 2개인데 하나는 중국 베이징대에서 딴 겁니다. 국회의원 선거에 떨어지고 2000년 중국에 갔지요. 가서 지내보니 ‘밥값보다 통역비’가 더 들어요. 그때 베이징대에서 박사학위 과정 모집을 보고 ‘저기 들어가면 말은 배울 수 있겠지.’라는 생각에 지원했지요. 중국정부론을 전공했는데, 이게 사실은 중국 공산당을 연구한 겁니다. 옛날에 서당에서 한문 공부한 게 큰 효과를 봐서 2년 반 만에 조기졸업했습니다. 고생도 무척 많이 했는데…. 학위 수여식에 총장이 불러서 가니 나 혼자입디다. 총장이 ‘100년 역사에 정식 조기졸업한 학생은 두 번째’라고 하더라고요. 2004년 한국 돌아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되고, 그해 7월 졸업식장에 갔습니다. 중국에서 박사학위 과정을 공부할 때 직접 베이징대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고요. 파견교수 자격으로 학생들 점수를 직접 매겼습니다.”- 서당을 다녔다고? “난 화전민의 아들로, 강원도 홍천에서 태어났습니다. 초등학교를 마치고 집안이 너무 어려워, 할아버지가 하시던 서당에서 3년간 한문을 배웠습니다. 그게 베이징대에서 박사학위 밟을 때 정말 요긴하게 쓰일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러다 세 살 아래 동생들과 중학교, 고등학교에 같이 들어갔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소집영장’이 나와 군대 갔습니다. 군 제대하고 3학년 마치고 대학에 진학하고…. 25살이던 대학교 2학년 때 국회의원 출마한다고 1500만원 싸들고 선관위 등록하러 갔었습니다. 그때 소 한 마리 값이 30만원이던 시절이야. ‘나이가 적으니 대학교 졸업하고 출마하라.’면서 후보 등록을 안 받아줬어….” 비행기 택시 서비스가 어찌 보면 황당무계해 보인다. 하지만, 지금은 누구나 사서 마시는 생수 판매도 당초에 허무맹랑한 사업처럼 보이긴 마찬가지였다. 생수 판매도 조 협회장이 양성화에 앞장섰던 사업이었다. “1990년대 초쯤이었는데, 생수 판매를 허가하자고 하니 ‘봉이 김선달’이니 ‘국민 위화감 조성’이니 하면서 엄청 반대가 많았습니다. 당시 수출용으로 생수를 판매하는 것은 괜찮다고 허용된 상태였습니다. 주로 미군 PX에 들어갔지요. 업체는 물통 배달료만 받고, 허가 품목도 아니어서 정부가 수질 검사를 못 했습니다. 그게 오히려 맹점이어서 수질이 엉망이었던 것이지요. 결국 판매를 양성화·산업화시켰고, 국민은 더 깨끗한 물을 마시게 됐습니다.” 글·사진 이기철 선임기자 chuli@seoul.co.kr
  • “역사를 바로잡는 것이 역사를 기억하는 첫 번째 일”…손현주, 김상덕 재조명

    “역사를 바로잡는 것이 역사를 기억하는 첫 번째 일”…손현주, 김상덕 재조명

    배우 손현주가 친일파 청산을 위해 만든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위원장 ‘김상덕’의 기록자로 나선다. MBC 특별기획 ‘1919-2019, 기억․록’은 대한민국의 독립과 해방,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헌신한 100인의 인물을, 이 시대 대표 샐럽 100인이 ‘기록자’를 통해 새롭게 조명하는 3분 캠페인 다큐 프로그램이다. 해방 후, 일제강점기 친일파를 청산해야 한다는 국민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에 제헌국회는 친일파를 처벌할 특별법 제정에 착수해 ‘반민족 행위특별조사위원회’(이하 반민특위)를 설치하고, 독립운동가 ‘김상덕’을 위원회의 위원장으로 역임하여 친일 잔재 청산에 앞장섰다. 이후, 김상덕 위원장은 반민특위의 활동에 불만을 품은 친일 경찰들로부터 암살 위협을 받았음에도 굳건하게 친일파 청산을 이어갔다. 그러나 친일파 처단에 소극적이었던 이승만 정권 아래 친일파들의 방해공작으로 반민특위는 1949년 8월, 무력하게 해산되고 말았다. 조국 독립을 위해 헌신하고 친일파 청산에 주력했던 독립운동가 김상덕 위원장은 6·25전쟁 중 북한에 의해 납북되었고, 유족들은 연좌제로 힘들게 살았다. 배우 손현주는 “기록자 100인에 포함되어 영광”이라며 “역사를 바로잡는 것이 역사를 기억하는 첫 번째 일”이라며 ‘기억·록’에 참가 소감을 밝혔다. 한편,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수 수립 100주년을 맞아 방영 중인 MBC 특별기획 ‘1919-2019 기억·록’은 캠페인과 다큐를 접목시킨 포맷으로 매주 화, 수, 목요일 밤 9시 55분에 정규 방송된다. 이외 시간에는 수시 방송한다. 문성호 기자 sungho@seoul.co.kr
  •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1941년 태평양전쟁 발발하자… 임정, 마침내 日에 선전포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1941년 태평양전쟁 발발하자… 임정, 마침내 日에 선전포고

    4부. 광복의 여명 : 충칭 시기 ② 일본의 패망1910년 한반도를 차지한 일본은 1931년 중국 만주를, 1937년 중국 대륙을 침략하며 제국주의 팽창 야욕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필리핀과 말레이시아, 싱가포르까지 점령한 뒤 “독일과 중동에서 만나겠다”며 버마(현 미얀마)·인도 전선까지 세력을 확대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마지막 정착지인 중국 충칭에서 당·정·군 체제를 갖춘 뒤 ‘전쟁 괴물’이 된 일본의 패망을 기다렸다. 해방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일찍 찾아왔다.●임정, 1945년 2월 28일 독일에도 선전포고 1937년 7월 일본이 중일전쟁을 일으키자 영국과 미국은 자신들이 선점한 중국 내 이권을 빼앗길 것을 우려했다. 일본에 석유 수출을 금지했다. 이후 일본은 제조업 가동에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1941년 12월 미국의 해군기지인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 공격했다. 미국과의 협상을 통해 석유금수 조치를 풀어 보겠다는 의도였다. 하지만 당시 두 나라 간 군사력 차이를 감안할 때 진주만 공습은 무모한 결정이었다. 미국은 즉각 일본과의 전면전을 선언하며 ‘태평양전쟁’(1941~1945)에 나섰다. 이 전쟁은 임정이 바라던 일이기도 했다. 광복군을 양성해 뒀다가 일본이 중국, 미국과의 전쟁에 나서면 이들을 도와 독립을 쟁취하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임정은 일제가 진주만을 공격한 직후 주석 김구(1876~1949)와 외무부장 조소앙(1887~1958) 명의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일선전성명서’를 발표했다. “우리가 3000만 한인과 정부를 대표해 중국과 영국, 미국 등 여러 나라와 함께 일본과의 전쟁을 선포한 것은 일본을 격패시키고 동아시아를 재건하는 가장 유효한 수단이기에 민주진영의 최후 승리를 미리 축하한다.” 임정은 독일에 대해서도 선전포고했다. 1945년 4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연합국 회의가 열릴 예정이었는데, 이 회의에 참가하려면 3월 1일 이전에 독일에 선전포고를 해야 해 하루 전인 2월 28일 발표했다.●中 통제받은 광복군, 9개 조항 행동준승 논란 1940년 9월 태어난 광복군은 중국 국민당 정부의 도움으로 활동할 수 있었다. 하지만 중국이 지원하던 또 다른 한인 부대였던 조선의용대 대원 상당수가 1941년 3~5월 본진을 이탈해 화베이 지역으로 떠나자 국민당 정부는 당황했다. 같은 해 11월 중국은 광복군에 대한 지원을 유지하는 조건으로 ‘한국광복군 행동준승’이라는 9개 조항을 전달했다. 중국 중앙군 참모총장의 명령과 통제를 받아 광복군이 움직일 수 있도록 한 게 핵심이었다. 독립운동사 전문가인 이현희(1937~2010) 전 성신여대 사학과 명예교수는 “이 준승은 광복군이 사실상 중국의 고용군이 된다는 것으로 매우 굴욕적인 군사협정이었다. 중국이 임정을 어떤 존재로 여겼는지 의심스럽게 만들었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중국 입장에서는 자국 영토에서 활동하는 외국 군대를 통제하려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것이며, 당시 한인 독립운동 세력이 중국으로부터 충분히 신뢰를 얻을 만한 모습을 보여 주지 못했기에 어느 정도 간섭이 불가피했다는 반론도 있다. 임정은 중국의 준승 명령에 분개해 청사를 중국에서 미국으로 옮기는 방안을 검토하고자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 이승만(1875~1965)과 협의하기도 했다. 결국 중국은 우리 측의 지속적인 요구로 1944년 8월 광복군 통제권을 임시정부에 돌려줬다.●광복군, 한지성·문응국 등 임팔전투 투입 일본은 1942년 1월 영국의 식민지 버마를 침공했다. 인도에 주둔해 있는 영국군이 즉각 대응에 나섰는데, 이를 버마 전투(1942~1945)라고 한다. 영국군은 영어와 일본어를 완벽하게 구사할 수 있는 인재가 필요했다. 광복군은 영국의 요청을 받아들여 ‘인면전구공작대’를 꾸렸다. 인도와 버마 전선에서 활동하는 공작부대라는 뜻이다. 이들은 1943년 8월 영국군 총사령부가 있던 인도 캘커타에 도착했다. 한지성(1913~?)과 문응국(1921~1996) 등 9명이었다. 공작대는 영국군에게서 심리전 교육 등을 받고 1944년 초 임팔전선에 투입됐다. 임팔은 인도와 버마의 접경지역으로 열대밀림 산악 지대다. 광복군은 1945년 7월 일본군이 버마에서 완전히 패해 철수할 때까지 1년 넘게 영국군을 도왔다. 1945년 9월 이들은 충칭의 광복군 총사령부로 무사히 복귀했다. 한지성의 증언이다. “우리 공작대는 언제고 전투할 수 있도록 무장한 뒤 적(일본군)과 가장 가까운 진지에서 일본어로 방송을 했다. 선전문을 제작해 살포하고 일본군 문건을 번역하며 포로를 심문했다.”광복군은 미군과 함께 한반도 진공 작전도 추진했다. 미 중앙정보국(CIA)의 전신인 전략사무국(OSS·1942~1945)과 함께 한반도와 일본 본토에서 지하공작에 나서는 것이었다. OSS 특수훈련을 받은 광복군 대원을 국내에 잠입시켜 여러 활동에 나서기로 했는데, 이를 ‘독수리 작전’이라고 불렀다. 1945년 4월 OSS 요인들이 충칭의 임정 청사로 찾아와 작전 내용을 상세히 설명했고 김구는 이를 승인했다. 영화 ‘군함도’(2017)에서 독립운동 인사를 구출하고자 일본 나가사키현 하시마섬(군함도)에 잠입한 박무영(송중기 분)이 광복군 소속 OSS 요원이다.OSS는 같은 해 5월부터 광복군 내 엘리트들을 차출해 군사훈련을 시켰다. 대표적인 이들이 훗날 고려대 총장을 지낸 김준엽(1920~ 2011)과 사회운동가로 활약한 장준하(1918~1975)다. 이들은 일본군 학도병으로 끌려갔다가 탈영해 광복군에 합류했다. 김준엽은 1987년 개헌 당시 대한민국이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했다는 조문을 삽입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장준하는 박정희(1917~1979)의 독재에 반대하다가 1975년 의문사했다. ●승전국 지위 확보·강대국 간섭없이 독립 목표 임정은 미군의 지시로 국내에 진격할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하지만 8월이 되자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갔다. 히로시마(6일)와 나가사키(9일)에 원자폭탄이 떨어졌다. 8일에는 소련이 선전포고를 하며 만주국을 점령했다. 당시 일본 측 기록을 보면 일본군은 나가사키 원폭 투하보다 소련 참전에 더 큰 충격을 받았다. 주변의 모든 나라가 적이 됐다는 사실을 깨달은 일본은 15일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광복군의 국내 진공 작전도 결국 무산됐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취재에 동행한 이원규(72) 작가는 “당시 임정은 한반도에 잠입해 2차 세계대전 승전국 지위를 확보하는 것이 목표였다. 그러면 강대국의 간섭 없이 한반도 독립을 얻어낼 수 있을 것으로 봤다”며 “일본이 일주일만 늦게 항복해 광복군이 한반도에 참전했다면 대한민국의 역사가 달라졌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고 말했다. 일부 학계에서는 광복군이 미군과 공동 작전에 참가했더라도 그 수가 워낙 적어 승전국 지위를 확보하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본다. 그래도 임정이 자신의 역량을 총동원해 일본과의 전쟁에 나섰다는 사실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 외세에만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독립을 쟁취하고자 노력했다. 광복군의 국내 진공 작전을 무의미하다고 평가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일본의 패망이 다가오던 1944년. 임정은 좀더 정교하고 구체적으로 새 나라의 밑그림을 그려야 했다. 1943년 ‘카이로선언’(미·영·중이 일본 문제 논의)으로 조선 독립을 보장받은 시기였기에 이를 반영해 헌법을 개정했다. 주석(대통령) 중심제를 기본으로 하되 의원내각제를 가미해 절충적 정부를 구성했다. 교육과 직장, 노약자 부양을 요구할 권리를 보장하고 파업권도 명시했다. 사회민주주의 형태의 국가다. 이는 1941년 임정이 조선민족혁명당과의 합작을 앞두고 좌우를 아우르기 위해 내놓은 ‘건국강령’의 영향이 컸다. 건국강령을 지은 이가 ‘사민주의자’ 조소앙(1887~1958)이다.●조소앙의 삼균주의, 건국 이념 기초로 작용 일본 메이지대에서 법학을 전공한 그는 1919년 3·1운동 뒤 중국으로 망명해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했다. 1919년 스위스 루체른에서 열린 만국사회당대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해 임정을 정식 국가로 승인해 줄 것을 호소했다. 1930년 한국독립당을 창당했다. 한독당은 1940년 5월 우파 통합정당의 이름으로 계승돼 임정의 여당이 됐다. 그는 개인과 개인, 민족과 민족, 국가와 국가가 모두 균등해지려면 정치와 경제, 교육의 세 가지 조건이 동등해야 한다고 믿었다. 이것이 삼균주의인데, 훗날 건국강령의 이론적 기반이 됐다.●남한 단독정부 수립 반대… 한국전쟁 때 납북 해방 뒤 김구와 함께 한독당을 이끌었고, 1948년 12월 우리나라 최초의 좌파 정당인 사회당을 창당했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해 전국 최고득표율로 당선됐지만 6·25전쟁 때 납북됐다. 만약 임정의 ‘1944년 헌법’대로 해방 정부가 꾸려졌다면 지금쯤 우리는 독일이나 스웨덴을 모델로 한 사민주의 국가에 살고 있을 것이다. 조석곤 상지대 경제학과 교수는 “1948년 제헌헌법은 건국강령의 경제조항을 계승하고 있다. 그것은 장기간에 걸쳐 이룬 사회적 합의의 산물”이라고 설명했다. 충칭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한국당 5·18 망언이 불러낸 ‘김영삼(YS) 계승의 자격’ 논란

    자유한국당 김진태·김순례·이종명 의원의 5·18 민주화 운동 모독 망언이 2015년 서거한 김영삼(YS) 전 대통령을 16일 정치권으로 다시 불러냈다. 지난 8일 문제의 공청회 이후 연일 날 선 비판을 이어간 정치권은 한국당 회의실 벽에 걸린 김 전 대통령의 사진을 문제 삼았다. 더불어민주당 등 한국당을 제외한 여야 4당은 한국당이 세 의원에게 꼼수 징계를 내린 것을 강하게 비판하며 김 전 대통령의 사진을 걸 자격이 없다고 비판했다. 김 전 대통령 사진 논란에 불을 댕긴 것은 YS의 차남이자 김영삼민주센터 상임이사를 맡은 김현철씨다. 김씨는 15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한국당 전당대회가 수구적인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확인되면 아버님 사진은 그곳에서 내려주기 바란다”고 했다. 지난 8일 문제의 공청회를 주최한 후 한국당 전당대회 당대표 경선에 출마한 김진태·김순례 의원을 겨냥한 발언으로 풀이된다. 특히 김씨는 “그런 수구반동적인 집단 속에 개혁 보수의 상징인 김영삼 대통령의 사진이 걸려 있다는 자체가 어울릴 수 없는 빙탄지간(氷炭之間·얼음과 숯처럼 서로 어울릴 수 없는 사이)”이라고 지적했다. 김씨는 지난 13일에도 “아버님은 문민정부 당시 5·18 민주화 운동의 정신을 계승하는 정부가 문민정부라고 규정하고 특별법을 만들어 전두환을 위시한 신군부세력을 단죄했다”며 “김 전 대통령은 지난 1983년 5·18일을 기념하기 위해 23일간의 목숨을 건 단식투쟁을 하기도 했다”고 적었다. 이해식 민주당 대변인도 15일 국회 정론관 브리핑에서 “5·18 민주화 운동을 왜곡 날조하고, 그 유공자들을 모욕하고 있는 당 일각의 망동 주의자들에게 판(전당대회)을 깔아주고 있는 한국당은 차라리 김 전 대통령의 사진을 당사에서 떼라”며 “그것이 최소한의 예의”라고 비판했다. 여야를 막론한 정치권에서는 5·18의 부정은 김 전 대통령에 대한 부정과 마찬가지라는 게 공통 인식이다. 1980년 5월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3년간 불법 가택연금을 당한 김 전 대통령이 당시 자신의 사저를 둘러싼 전경들을 향해 “나를 감금할 수는 있어, 힘으로 이런 식으로 할 수는 있어. 그러나 내가 가려고 하는 민주주의의 길은 말이야, 내 양심을, 마음을 전두환이가 뺏지는 못해!”라고 외친 장면은 한국 민주화 투쟁 역사의 하이라이트 중 하나다. 김 전 대통령은 취임 후 1993년 5·18 특별담화를 통한 광주민주화운동 명예회복을 선언했다. 1995년 5·18 특별법 제정을 지시했고, 1997년 대법원 판결로 전두환씨에게 무기징역이 선고됐다. 김 전 대통령은 2010년 8월 15일 이명박 전 대통령 초청으로 청와대을 방문했을 때 전씨가 함께 초대되자 “전두환이는 왜 불렀노, 대통령도 아니데이. 죽어도 국립묘지도 못 간다”라고 면박을 준 적도 있다. 한국당이 세 의원에 대한 입장을 명확히 표하지 못할 때 YS와 정치를 함께한 김무성 한국당 의원, 무소속 서청원 의원 등 상도동계가 가장 먼저 나선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지난 11일 두 의원은 각각 입장문을 내고 5·18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김병준 한국당 비상대책위원장도 지난 10일 “한국당 회의실 벽에는 ‘건국’ 이승만, ‘근대화’ 박정희 대통령과 함께 ‘민주화’ 김영삼 대통령의 사진이 걸려 있다”며 “한국당은 다양한 의견이 제기될 수 있는 정당이지만, 기본적으로는 5·18에 관한 문민정부의 역사적 결단을 존중하고 계승할 책무가 있다”고 했다. 하지만 14일 한국당 윤리위가 이종명 의원만 제명하고, 전당대회에 출마한 김진태·김순례 의원의 징계는 전당대회 뒤로 미루면서 한국당이 김 전 대통령과 문민정부를 계승한 정당이 맞느냐는 비판이 계속되고 있다. 손지은 기자 sson@seoul.co.kr
  • 김현철 “한국당, 아버지 사진 내려주길”…‘5·18 망언’ 비판

    김현철 “한국당, 아버지 사진 내려주길”…‘5·18 망언’ 비판

    자유한국당 일부 의원들이 5·18 민주화운동은 ‘폭동’이었다고, 5·18 유공자들은 ‘괴물 집단’이라고 망언하자 고 김영삼 전 대통령의 차남인 김현철씨가 “그런 수구·반동적인 집단 속에 아버지 사진이 걸려있다는 자체가 도저히 어울릴 수 없다”고 비판했다. 현재 자유한국당 당사에는 이승만·박정희·김영삼 전 대통령의 사진 액자가 걸려 있다. 김씨는 지난 14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작금의 자유한국당의 행태를 보면 박근혜 정권의 탄핵을 통해 처절한 반성과 환골탈태하는 모습을 보여도 시원찮을 판에 다시 과거 군사독재의 향수를 잊지 못해 회귀하려는 불순한 움직임이 여기저기서 감지된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그런 수구·반동적인 집단 속에 개혁보수의 상징인 김영삼 대통령의 사진이 그곳에 걸려있다는 자체가 도저히 어울릴 수 없는 빙탄지간”이라고 비판했다. ‘빙탄지간’은 얼음과 숯의 사이라는 뜻으로, 서로 맞지 않아 화합하지 못하는 관계를 이르는 말이다. 김씨는 “이번 전당대회를 통해 과거 수구적인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확인되면 반드시 아버님의 사진은 그곳에서 내려주기를 바란다”고 밝혔다.앞서 지난 8일 자유한국당의 김진태·이종명 의원 공동 주최로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 공청회에서 이종명 의원은 “5·18 사태가 발생하고 나서 5·18 폭동이라고 했는데, 시간이 흘러 민주화 운동으로 변질됐다”고 말했다. 이 공청회에 참석한 같은 당의 김순례 의원은 “저희가 방심한 사이 정권을 놓쳤더니 종북 좌파들이 판을 치며 5·18 유공자라는 괴물 집단을 만들어내 우리의 세금을 축내고 있다”고 말했다. 김진태·이종명·김순례 의원을 비판하는 여론이 커지자 자유한국당은 전날 이종명 의원을 제명했다. 반면 오는 27일 자유한국당 전당대회 때 실시되는 당 대표 선거에 출마한 김진태 의원과 최고위원 선거에 출마한 김순례 의원에 대한 징계는 유예했다. 지난 13일에도 김씨는 페이스북을 통해 자유한국당 일부 의원들의 망언을 강하게 비판했다. 김씨는 “아버지는 문민정부 당시 5.18 민주화운동의 정신을 계승하는 정부가 문민정부라고 규정하고 특별법을 만들어 전두환을 위시한 신군부세력을 단죄했다”면서 “1983년 아버지가 상도동에 전두환의 신군부에 의해 3년째 연금당할 때 5월 18일을 기해 23일 간의 목숨을 건 단식투쟁을 통해 5.18을 기념하기도 했다”고 밝혔다. 김영삼 정부로부터 보수의 정통성을 찾겠다는 자유한국당이 5·18을 부정하고 매도하는 발언을 해서는 안 된다는 지적인 셈이다. 오세진 기자 5sjin@seoul.co.kr
  • 5·18 단체들 한국당 항의 방문… “광주 영령 능욕, 석고대죄하라”

    5·18 단체들 한국당 항의 방문… “광주 영령 능욕, 석고대죄하라”

    김병준 비대위원장에 “공식 입장 밝혀라” 진상규명위 한국당 추천 몫 포기 요구도 金 “광주 비대위나 5·18 묘역 참배 검토” 국회에 3인 제명 절차·특별법 처리 촉구 민주당, 특별법 개정 관련 긴급 토론회 광주 시민단체, 3인 명예훼손 혐의 고소자유한국당 김진태·김순례·이종명 의원의 5·18 민주화 운동 모욕에 분노한 5·18 단체와 광주지역 시민단체 회원 200명이 13일 5대의 전세버스 등을 나눠 타고 국회를 찾았다. 대부분의 회원들이 국회 앞에서 항의시위를 벌이는 가운데 이들 중 대표 격인 20여명이 국회에 들어가 세 의원의 국회 제명 절차와 특별법 처리를 촉구했다. 논란의 진앙인 한국당의 김병준 비상대책위원장과 마주 앉아 북한군 개입설에 대한 한국당의 공식 입장을 명확하게 밝히라는 요구도 했다. 하지만 문희상 국회의장과 여야 5당의 일부 대표는 방미 중이어서 만나지 못했다. 오전 9시 민주평화당은 장병완 원내대표 등 지도부 발언에 앞서 대표들에게 발언권을 내줬다. 김후식 5·18민주화운동부상자회장은 “민의의 전당 국회 내에서 범법자와 피의자를 데려다가 공당인 한국당이 공청회를 주최했다”고 성토했다. 한국당에서는 김 비대위원장과 김용태 사무총장이 무거운 표정으로 이들을 맞았다. 다른 정당 방문과 달리 격노한 감정을 그대로 드러낸 이들은 북한군 개입설에 대한 당의 공식 입장, 당 징계와 국회 징계에 대한 입장, 반(反)5·18 처벌법 동참 여부, 진상규명위 한국당 추천 몫 포기 등을 요구했다. 특히 유봉식 진보연대 대표는 “광주 영령을 모욕하고 능욕한 데 대해 당 지도부가 광주에 직접 와서 무릎 꿇고 석고대죄 수준으로 대국민 사죄를 하라”고 촉구했다. 대표자들의 주요 발언을 받아 적은 김 비대위원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광주 시민들과 5·18 희생자, 유가족들께 다시 한번 사과드린다”고 했다. 또 “광주에 가서 비대위를 열고 5·18민주묘지를 참배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말했다. 다만 진상조사위 추천, 특별법 개정 동참 등과 관련해선 “나경원 원내대표가 출타 중이라 협의를 하지 못해 바로 말씀을 못 드려 죄송하다”고 했다. 이들은 민주당 홍영표 원내대표, 바른미래당 박주선 의원, 정의당 윤소하 원내대표 등도 만났다. 민주당이 여야 4당이 공동으로 발의하기로 한 특별법 개정안에 대한 학계 의견을 듣기 위해 개최한 긴급 토론회에서는 다양한 의견이 나왔다. 김재윤 전남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북한군 개입설 지만원씨에 대해 2012년 대법원 무죄 선고는 명예훼손죄로 처벌하려 했기 때문”이라며 “독일 형법처럼 별도의 처벌 규정을 마련, 형법적으로 규제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했다. 반면 홍성수 숙명여대 법학부 교수는 “5·18에 대한 부정을 처벌한다면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의 업적에 대한 부정을 처벌하자는 주장이 당장 대두될 것”이라고 신중론을 밝혔다. 한편 광주지역 시민단체인 ‘오월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오사모)은 13일 서울중앙지검에 지만원씨와 한국당 김진태·이종명·김순례 의원을 명예훼손 등의 혐의로 고소했다. 오사모는 “이번 공청회에선 독일인 기자 힌츠페터가 북한 고정간첩이었다고 주장하며 사자의 명예마저 훼손했다”고 비난했다. 오사모는 고소장 제출 이후에도 북한군 투입 주장이 왜곡된 사실임을 입증하기 위한 자료와 증언을 수집·분석해 검찰에 제출할 예정이다. 5월 단체 등 광주지역 100여개 시민사회단체는 16일 오후 4시 광주 금남로에서 한국당 망언 의원 3명 퇴출과 역사왜곡처벌법 제정 등을 촉구하는 범시민 궐기대회를 갖기로 했다. 서울 손지은 기자 sson@seoul.co.kr 광주 최치봉 기자 cbchoi@seoul.co.kr
  • “3·8의거는 4·19혁명 잇는 징검다리”

    “3·8의거는 4·19혁명 잇는 징검다리”

    “대구 2·28과 마산 3·15 학생의거 사이에 대전 3·8 학생의거가 있죠. 3·8의거가 4·19혁명을 잇는 징검다리인 셈입니다.” 김용재(75) 3·8민주의거기념사업회장은 24일 서울신문 인터뷰에서 “4개 학생의거와 광주 5·18항쟁, 6·10 전국반독재투쟁을 포함한 6대 민주화운동 중 지난해 11월 가장 늦게, 충청권 첫 국가기념일 지정을 받았다”며 이렇게 밝혔다. 이날 3·8기념탑을 세운 대전 서구 둔산동 둔지미공원 명칭이 국가지명위원회 가결을 거쳐 ‘3·8의거둔지미공원’으로 변경되자 “잊혀졌던 대전 학생의거가 자리를 좀 잡아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3·8의거는 1960년 3월 8일 촉발됐다. 대전고 학생 1000여명이 ‘이승만 독재정권 물러나라’, ‘학원 자유를 달라’고 외치며 1㎞ 떨어진 한밭운동장까지 행진했다. 당시 대전고 2학년 진급을 앞뒀던 김 회장은 “대통령 선거 때인데 가정방문 온 교사로부터 자유당을 찍으라는 말을 들었다”고 돌아봤다. 사복경찰이 학교에 상주했다. 운동장 앞에서 행진을 막는 경찰과 육탄전이 벌어졌고 학생 80명과 이들을 선동했다는 빌미로 교사 2명을 붙잡아 갔다. 김 회장은 “기마부대와 학생을 잡아갈 트럭 100여대가 출동했고 소방차로 물을 뿌리며 진압했다”고 덧붙였다. 이어 보문고, 호수돈여고 등 대전 8개 고교 학생들이 합동시위에 나서려고 했으나 사전 발각돼 봉쇄됐다. 학교마다 강제로 9일과 10일 시험일정을 잡아 학생들을 묶어 놓았다. 낙제제도 때문에 시험을 앞두곤 학생들이 꼼짝도 못했다. 그러나 집단적 학생시위는 대전역 주변에서 사흘이나 계속됐다. 교장이 각서를 쓰고 검거된 학생들을 데려왔다. 대전대 영문학과 교수를 지내고 한국현대시인협회 이사장으로 일하는 김 회장은 “3·8의거 참여 후 자유, 민주, 정의를 새기며 살아 왔다”며 “시민 모두 3·8의거를 알 수 있도록 계속해서 알리고 우리나라 민주화의 꽃도 더 필 수 있도록 힘을 보태겠다”고 입을 앙다물었다. 대전 이천열 기자 sky@seoul.co.kr
  • [세종로의 아침] 익숙한 무지/김성호 문화부 선임기자

    [세종로의 아침] 익숙한 무지/김성호 문화부 선임기자

    ‘3·1운동 100주년,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세월의 두께와 100년의 의미 때문일까. 곳곳에서 3·1운동 정신을 되살리자는 구호와 몸짓이 요란하다. 100년 전 아픔과 구국의 희생을 상기해 미래 한국의 발판으로 삼자는 외침이 하늘을 찌를 듯하다. 그 와중에 애국가 논란이 뜨겁다. 안익태 작곡의 애국가 말이다. 민족문제연구소가 펴낸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이 오른 안익태. 그의 행적이 친일을 넘어 일본과 결탁한 독일 나치 파시즘의 나팔수였다는 흔적이 속속 드러나면서 애국가 폐지의 주장이 힘을 얻어 가는 형국이다. 보수, 진보 진영의 논객들이 주거니 받거니 논쟁을 잇는 가운데 여론의 대치도 점입가경이다. 일단 세간의 입장은 ‘계속 쓰자’는 쪽이 우세다. CBS 의뢰를 받은 리얼미터가 전국 성인 502명을 대상으로 애국가 교체를 물은 결과 반대 응답이 58.8%로 찬성 24.4%보다 압도적으로 많았다. 뭐 굳이 바꿀 필요가 있느냐는 대중 인식의 우위로 읽힌다. ‘계속 쓰자’는 쪽 주장은 이렇다. 정부 수립 이후 줄곧 불러 왔던 애국가를 이제 와서 폐기 처분하려 드느냐는 관성의 대응이 주축이다. 여기에 친일인사 작품이란 이유로 써선 안 된다는 주장에 동조하지 않는 입장이 거들고 있다. 예술가와 작품의 분리다. 이를테면 친일 문인 서정주의 작품이 교과서에 계속 수록되고 있지 않느냐는 식의 항변이다. 하지만 냉철하게 따져 보면 애국가, 적어도 안익태 애국가는 그런 편의주의와는 차원이 사뭇 다르다. 많은 이들이 갖고 있는 인식과 달리 애국가는 국가(國歌)가 아니다. 이승만 정부 출범 후 국가로 정해 관습법적으로 쓰여 왔을 뿐 법적 지위를 부여받지 못했다. 70여년간 국가·공공단체의 공식 행사나 이런저런 자리에서 당연히 부르고 들어온 국가 대용일 뿐이다. 모르는 결에 몸에 밴, ‘익숙한 무지’의 흔적일 수 있다. 예술가와 작품의 분리라는 편한 원칙도 그다지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 국가는 국기(國旗), 국화(國花)와 함께 한 나라의 대표적 상징이다. 언제 어디서든 떳떳하게 만나고 자랑스럽게 여겨야 하는 나라의 얼굴인 셈이다. 기왕에 국가처럼 굳어진 애국가를 굳이 폐기 처분할 이유가 없다는 주장에도 일리는 있어 보인다. 하지만 애국가를 부를 때마다 포개지고 떠오르는 친일·친나치 작곡자의 얼굴을 힘겹게 용인할 이유 또한 없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나치 독일 부역자를 가혹하게 응징한 프랑스를 굳이 떠올리지 않더라도 말이다. 지금까지 밝혀진 작품 궤적과 생애를 들춰 보면 안익태는 표리부동한 작곡가요, 지휘자임을 부인할 수 없다. 적어도 나라 사랑, 즉 애국의 차원에서 보자면 그렇다. 미국에서 1936년쯤 애국가를 처음 작곡해 발표한 직후 안익태는 이런 말을 남겼다. “대한국 애국가를 부르실 때는 애국가 말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면서 애국적 정신으로 활기 있게 장엄하게 부르시되 결코 속히 부르지 마십시오.” 그 말대로 애국적 정신으로 활기 있게 장엄하게 부를 수 있는 애국가를 만났으면 한다. 보수니, 진보니 편 가르기는 집어치우고 떳떳한 국가를 한번 고민해 보자. 3·1운동 100주년의 해에. kimus@seoul.co.kr
  •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윤봉길 의거 후 일제 핍박…상하이 떠나 8년간 ‘고난의 행군’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윤봉길 의거 후 일제 핍박…상하이 떠나 8년간 ‘고난의 행군’

    1929년 10월 미국발(發) 경제공황이 전 세계로 퍼졌다. 1차 세계대전 승전국인 미국과 영국, 일본은 그간 협력하던 자세를 버리고 각자도생에 나섰다. 내수시장 규모가 작았던 일본은 경제 위기를 탈출하고자 1931년 9월 중국 만주를 공격했다. 1932년 1월에는 상하이도 침공했다. 이 지역 이권을 선점한 미국과 영국이 철군을 요구하자 일본은 1933년 2월 국제연맹을 탈퇴하며 이들과 갈라섰다. 이 시기 임정은 일본의 공세를 피해 상하이에서 항저우, 전장, 창사, 광저우, 류저우, 치장 등으로 ‘고난의 행군’을 시작했다. 마지막 정착지인 충칭에 도착하는 데 8년이 걸렸다. 역사학계에서는 이를 ‘임정의 이동시기’라고 부른다.●“임정 지도자 중 군대 편성 실현은 김구뿐” 일본이 열강 질서에서 이탈해 파시즘으로 치닫던 1932년 4월 29일. 중국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일왕 히로히토(1901~1989)의 생일 축하연이 열렸다. 일제가 점령지 한복판에서 보란 듯 승전고를 울리는 모습에 중국인들은 말할 수 없는 굴욕감을 느꼈다. 이런 상황에서 스물네 살 한국인 청년 윤봉길(1908~1932)이 폭탄을 던져 시라카와 요시노리(1869~1932) 등 일본군 수괴들을 한꺼번에 처단했다. 그의 희생으로 한국 독립운동이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각지에서 지원금이 쇄도하며 임정의 권위가 되살아났다. 중국인들은 자신들의 모욕을 한국이 대신 갚아준 것에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이때부터 두 나라는 항일 역사 인식을 공유했다. 중국 국민당 정부도 임정을 ‘진정성 있는 파트너’로 대하기 시작했다. 국민당 지도자 장제스(1887~1975)는 임정을 경제적으로 지원하고 중국군관학교 뤄양분교에 한인특별반도 마련했다. 한국독립군(1930년대 북만주에서 활동하던 항일부대) 출신 이청천(1888~1957) 등이 교관으로 참여했다. 이곳 출신들은 1940년 9월 임정 최초 정규 부대인 한국광복군의 주축이 됐다. 장제스는 일본의 패망이 유력하던 1943년 전후처리를 논의하려고 연 카이로회담에서 미국과 영국의 반대에도 한국 독립 약속을 받아냈다. 임정 연구의 권위자인 한시준(65) 단국대 사학과 교수는 “1919년 임정이 세워진 뒤로 수많은 지도자가 있었다. 하지만 (항일투쟁의 최종 목표인) 군대 편성 계획을 실현한 이는 김구뿐이었다”며 “한반도에서 멀리 떨어진 충칭에서 광복군을 만들어 낸 일은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임정은 잃은 것도 많았다. 일제가 즉각 보복에 나섰기 때문이다. 윤봉길이 훙커우 공원에서 거사를 벌인 것이 오전 11시 40분쯤이었는데, 일본 경찰은 오후 1시 프랑스 조계로 들이닥쳤다. 대대적인 체포 작전을 벌여 안창호(1878~1938)를 비롯한 임정 관계자 12명을 체포했다. 그간 임정은 ‘폭력을 쓰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프랑스 조계 당국의 보호를 받았다. 하지만 윤봉길 의거에 충격을 받은 프랑스는 더이상 임정을 지켜 주지 않았다. 이때부터 임정은 상하이를 떠나 생존을 위한 장정에 나섰다. 일본 경찰과 군대, 밀정을 피해 중국 각지를 떠돌았다. 우선 급한 대로 찾아간 곳이 상하이에서 멀지 않은 항저우였다. 1932년 5월 임정 국무위원 대다수가 상하이에서 빠져나와 이곳으로 모였다. 반면 김구와 일부 위원들은 항저우 인근 자싱으로 몸을 숨겼다. 서로 흩어져 있는 것이 임정 존속에 유리하다고 판단해서였다. 중국 국민당 첩보기구 소속 천리푸(1899~2001)가 김구의 피난처를 주선했다. 그는 저장성장을 지낸 자싱의 유명인사 추푸청(1873~1948)에게 “김구를 누구보다 잘 챙기라”고 부탁했다. 이때부터 김구는 추푸청의 비서 겸 수양아들 천둥성의 별채(메이완제 76호) 등에서 숨어 지냈다. ●가장 두려운 것은 돈에 눈이 먼 ‘한국인 밀정’ 항저우는 ‘물의 도시’라는 별명답게 호수와 수로가 산재해 있다. 임정 요인들은 일제의 감시를 피하려고 배를 띄우고 호수 위에서 회의를 열었다. 말 그대로 ‘물 위에 떠다니던 정부’였다. 항일무장단체 의열단 리더 김원봉(1898~1958)이 배를 타고 김구를 만나러 가는 장면이 나오는 영화 ‘암살’(2015)은 바로 이 시기 항저우 임정을 배경으로 했다. 하지만 이곳 생활도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임정이 상하이를 떠났다는 것을 눈치챈 일제가 추격에 나섰다. 특히 김구에게는 일본 외무성과 조선총독부, 중국 상하이주둔군 사령부가 각각 20만 대양(大洋·중국 화폐단위)을 걸었다. 60만 대양은 지금 가치로 150억~200억원에 달하는 거액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취재에 동행한 이원규(72) 작가는 “당시 김구 등 임정 요인들은 일본 경찰보다 한국인 밀정을 더욱 두려워했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독립운동의 큰 적은 현상금에 눈이 먼 우리 자신이었다”고 씁쓸해 했다. 김구는 많은 이들에게 쫒기며 인생에서 가장 외롭고 힘든 때를 보냈다. 다음은 광복군 출신 인권변호사 태윤기(1918~2012)가 쓴 수기 ‘회상의 황하’ 가운데 일부다. “윤봉길 의거 뒤로 일본은 대(大)상금을 건 동시에 밀정 300여명을 풀어 백범을 생포하는 데 집중했다. 김구는 이를 눈치채고 2년 가까이 행적을 감췄고 임정 요인에게도 위치를 알리지 않았다. 그의 행방을 아는 이는 안공근(1889~1940·안중근의 동생)뿐이었다. 그러면 김구는 어디에 있었을까. 그는 중국옷을 입은 촌로 복장을 하고는 ‘정크’라고 부르는 작은 배로 이 마을 저 마을 떠돌아다녔다.”‘풍찬노숙’ 김구 지키며 생사 함께한 中 처녀 뱃사공 주아이바오 ●부인 역할하며 日검문서 보호한 주아이바오 풍찬노숙하던 김구를 5년이나 돌보며 일본 경찰과 밀정으로부터 안전하게 지켜준 중국인 여성이 있다. 자싱에서 뱃사공으로 일하던 주아이바오(1913~?)다. 사실상 김구의 두 번째 부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김구는 ‘장천’, ‘왕사장’, ‘장전추’라는 가명을 쓰며 광둥인 행세를 했다. 하지만 중국어가 서투른 데다 키도 너무 커 쉽게 의심을 샀다. 실제로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가 풀려나는 등 일촉즉발의 위기를 맞기도 했다. 1933년 추푸청의 장남 추펑장은 그에게 신분 세탁을 위해 위장결혼을 제안했다. 김구는 자싱에서 추푸청의 집에 갈 때 우연히 만난 처녀 뱃사공을 떠올렸다. 세상 물정에 어두워 자신의 정체에 관심을 두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그렇게 김구와 주아이바오의 선상(船上) 생활이 시작됐다. 백범이 57세, 주아이바오가 20세였다.처음에는 김구에게서 매달 일정 금액을 받고 일하는 계약 관계였던 것 같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신뢰가 쌓여 운명공동체로 바뀌었다. 주아이바오는 9년 전 아내 최준례(1889~1924)를 잃고 혼자 살던 김구를 애틋한 마음으로 보살폈다. 밤낮없이 이뤄지는 경찰 불심검문에서 그를 지켰다. 1937년 중일전쟁 때는 일제의 폭격이 극심하던 난징까지 따라가 그와 생사를 함께 했다. 이들은 정식으로 혼인하지 않았을 뿐 부부로 살았다. 둘 사이에 자녀가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사실 여부는 확인되지 않는다. 시간이 갈수록 일본의 공세가 거세지던 1937년 11월. 김구는 주아이바오의 안전을 염려해 집으로 보냈다. 그것이 그와의 마지막이었다. ‘백범일지’에도 당시 안타까운 감정이 기록돼 있다. “난징에서 떠날 때 주아이바오를 고향인 자싱으로 돌려보냈다. 지금도 이따금 후회되는 것은 그와 헤어질 때 여비를 100원밖에 주지 못한 것이다. 뒷날을 기약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해 돈을 넉넉하게 주지 못한 것이 지금도 미안할 따름이다.” 김구는 왜 그와 재혼하지 않았을까. 가족들의 반대가 극심했다고 전해진다. 서른일곱 살이라는 나이 차가 큰 걸림돌이었다. 서울신문 중국 취재에 동행한 김주용(53) 원광대 교수는 “주아이바오는 김구의 장남 김인(1917~1945)과 네 살밖에 차이가 안 났다. 차남 김신(1922~2016)은 한국 독립운동의 상징이 된 아버지가 이런 일로 구설에 올라 대사(大事)를 그르치지 않을까 걱정이 컸다”고 설명했다. 그런 부담 때문이었을까. 김구는 해방 뒤 주아이바오를 찾아가지 않았다. 그를 한국에 데려갈 때 생길 정치적 파장을 고려한 결정이 아니었나 싶다. 김구의 경쟁자인 이승만(1875~1965)이 스물다섯 살 연하였던 벽안(碧眼)의 이혼녀 프란체스카 도너(1900~1992)와 함께 귀국한 것과 대비되는 대목이다.●중국 작가에 의해 소설 ‘선월’로 재탄생 중국 작가 샤녠성(71)은 김구와 주아이바오의 이야기를 소설 ‘선월’로 재탄생시켰다. 여기서 주아이바오는 1949년 김구가 살해됐다는 소식에 충격을 받아 자살한 것으로 나온다. 하지만 샤녠성은 몇 년 전 중국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그가 1970년대까지 생존했다는 것을 최근에 들었다. (김구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결혼하지 않고 평생 혼자 살았다고 한다”고 밝혔다. 이원규 작가는 “주아이바오는 백범과 함께 살며 어렴풋하게나마 그의 목에 거액이 걸려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것”이라고 전했다. 당시 현상금을 받고자 김구를 노리던 한국인이 많았지만 이 가난하고 순박한 중국 여성은 그와의 인연을 소중히 여겨 끝까지 의리를 지켰다. 오늘날 대한민국이 임정의 법통을 계승했다고 믿는다면 이 나라가 주아이바오에게도 큰 빚을 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한다. 상하이·항저우·자싱·난징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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