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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기도 없네… 박근혜 기록 어디 있나요” 대통령기록관서 희귀자료 된 ‘朴 전시물’

    “여기도 없네… 박근혜 기록 어디 있나요” 대통령기록관서 희귀자료 된 ‘朴 전시물’

    올 4월 대선 선거포스터 기록관에 첫 등장 기록관 “기록물 선별·영상제작 시간 걸려” “부끄러운 것도 역사… 기록물 배제 말아야”“여기도 없네. 어디 가야 볼 수 있나요?” 지난 16일 세종시 다솜로 대통령기록관. 행정수도 세종시의 주요 관광코스가 된 기록관을 찾은 사람들은 이 같은 질문을 던지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방문객에게 박근혜 전 대통령과 관련한 전시물은 ‘숨은그림찾기’를 해야 겨우 찾을 정도의 ‘희귀 자료’에 속하기 때문이다. 대통령기록관에는 이승만 전 대통령부터 박 전 대통령까지 11명의 기록물 3068만여점이 보관돼 있지만 박 전 대통령 자료만 유독 찾아보기 쉽지 않다. 박 전 대통령이 2017년 3월 탄핵되면서 기록물 1120만여점이 같은 해 5월 이곳에 이관됐지만 2년 8개월이 넘도록 전시 준비 작업 중이다. 박 전 대통령이 처음 기록관에 등장한 것은 지난 4월 22일이다. 기록관은 4층 역사관 내 전직 대통령들의 사진이 나란히 걸려 있는 전시 포스터 옆에 박 전 대통령의 대선 선거포스터를 전시했다. 5월 20일에는 1층 ‘대통령 상징관’의 비어 있던 공간에 박 전 대통령 사진도 걸었다. 하지만 여전히 전시가 부실한 상태다. 역사관 내 ‘대통령의 역할’을 소개해 놓은 ‘공무원 임면’ 코너에는 전직 대통령의 관련 활동 사진이 있지만 박 전 대통령만 빠져 있다. ‘대통령의 정상외교’ 코너에도 박 전 대통령의 정상외교만 소개돼 있지 않다. 체험관도 마찬가지다. ‘대통령의 하루’ 코너에서는 역대 대통령들의 집무실과 기자회견, 외빈 접견 등 활동 영상이 나오지만 박 전 대통령은 영상에 한 컷도 나오지 않는다. 기록관 관계자는 “전시 기법의 한 형태일 뿐”이라고 말했다.이 때문에 기록관 안팎에서는 정치적 판단에 따라 기록관 전시에서 배제했다는 주장과 함께 상위 기관으로부터 외압을 받은 게 아니냐는 추측까지 쏟아진다. 대통령기록관 관계자는 “박 전 대통령에 대한 전시는 마땅히 빠르게 진행됐어야 하지만 늦어졌다. 다만 내부 규정에도 대통령 퇴임 후 언제까지 전시를 하라는 규정은 없다. 지난해 예산 3억원을 확보해 연초부터 개편사업을 하고 있다”면서 “기록물을 선별 제작해 새롭게 영상 등을 만들어 올리고 한정된 공간에서 박 전 대통령을 추가하려다 보니 시간이 걸린 것”이라고 설명했다. 홍성걸 국민대 행정학과 교수는 “행정 기관의 서비스는 수용자 입장에서 빠르면 빠를수록 좋은 것”이라면서 “대통령이 죄가 있든 없든 재임 중 통치기간에 발생한 기록은 역사적 산물로서 기록 공개는 정권이나 가치 관계에 따라 판단될 문제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기록관에 따르면 박 전 대통령의 기록물은 올해 크리스마스 이전에는 볼 수 있다. 기록관은 다음달 20일까지 개편 작업을 완료할 계획이다. 다음달 4일이면 박 전 대통령이 탄핵된 지 1000일이다. 박 전 대통령에 대한 기록들이 어떤 모습으로, 어떤 내용으로 공개될지 관심이 쏠린다. jurik@seoul.co.kr■강주리 기자의 K파일은 강주리 기자의 이니셜 ‘K’와 대한민국의 ‘K’에서 따온 것으로 국내에서 벌어진 크고 작은 이슈들을 집중적으로 다룬 취재파일입니다. 주변의 소소한 일상에서부터 시사까지 독자들의 궁금증을 풀어드리겠습니다. 더 자세한 내용은 온라인 서울신문에서 볼 수 있습니다.
  • “여기도 없네… 박근혜 기록 어디 있나요” 대통령기록관서 희귀자료 된 ‘朴 전시물’

    “여기도 없네… 박근혜 기록 어디 있나요” 대통령기록관서 희귀자료 된 ‘朴 전시물’

    올 4월 대선 선거포스터 기록관에 첫 등장 기록관 “공개 늦어졌지만 외압은 없었다” “부끄러운 것도 역사… 기록물 배제 말아야” “여기도 없네, 어디 가야 볼 수 있나요?” 지난 16일 세종시 다솜로 대통령기록관. 행정수도 세종시의 주요 관광코스가 된 기록관을 찾은 사람들은 이 같은 질문을 던지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방문객에게 박근혜 전 대통령과 관련한 전시물은 ‘숨은그림찾기’를 해야 겨우 찾을 정도의 ‘희귀 자료’에 속하기 때문이다. 대통령기록관에는 이승만 전 대통령부터 박 전 대통령까지 11명의 기록물 3068만여점이 보관돼 있지만 박 전 대통령 자료만 유독 찾아보기 쉽지 않다. 박 전 대통령이 2017년 3월 탄핵되면서 기록물 1120만여점이 같은 해 5월 이곳에 이관됐지만 2년 8개월이 넘도록 전시 준비 작업 중이다. 박 전 대통령이 처음 기록관에 등장한 것은 지난 4월 22일이다. 기록관은 4층 역사관 내 전직 대통령들의 사진이 나란히 걸려 있는 전시 포스터 옆에 박 전 대통령의 대선 선거포스터를 전시했다. 5월 20일에는 1층 ‘대통령 상징관’의 비어 있던 공간에 박 전 대통령 사진도 걸었다. 하지만 여전히 전시가 부실한 상태다. 역사관 내 ‘대통령의 역할’을 소개해 놓은 ‘공무원 임면’ 코너에는 전직 대통령의 관련 활동 사진이 있지만 박 전 대통령만 빠져 있다. ‘대통령의 정상외교’ 코너에도 박 전 대통령의 정상외교만 소개돼 있지 않다. 체험관도 마찬가지다. ‘대통령의 하루’ 코너에서는 역대 대통령들의 집무실과 기자회견, 외빈 접견 등 활동 영상이 나오지만 박 전 대통령은 영상에 한 컷도 나오지 않는다. 박 전 대통령의 ‘대통령후보 당시 선거홍보물’ 전시 형태도 내용이 보이는 다른 대통령들과 달리 얼굴 사진 표지만 보이도록 책자가 덮인 채 놓여 있다. 기록관 관계자는 “전시 기법의 한 형태일 뿐”이라고 설명했다.이 때문에 기록관 안팎에서는 정치적 판단에 따라 전시에서 배제했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기록관 관계자는 “전시물 공개가 늦어지거나 일부가 빠져 있는 것은 사실이나 외압이나 정치적 판단은 없었다”면서 “기록물을 선별 제작해 새롭게 영상 등을 만들어 올리고 한정된 공간에서 박 전 대통령을 추가하려다 보니 시간이 걸린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전시는 임의 규정이고 내부 규정에도 대통령 퇴임 후 언제까지 전시를 하라는 규정은 없다. 지난해 예산 3억원을 확보해 연초부터 개편사업을 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홍성걸 국민대 행정학과 교수는 “전시 규정 기간이 없다 해도 뒤늦게 해도 된다는 것은 아니다”라면서 “자랑스러운 것도 부끄러운 것도 다 역사인데 정권에 따라 기록물을 배제하는 것은 역사를 왜곡하는 행위”라고 말했다. 기록관에 따르면 박 전 대통령의 기록물을 연내 볼 수 있다. 기록관은 12월 20일까지 개편 작업을 완료할 계획이다. 다음달 4일이면 박 전 대통령이 탄핵된 지 1000일이다. 박 전 대통령에 대한 기록들이 어떤 모습으로, 어떤 내용으로 공개될지 관심이 쏠린다. 세종 강주리 기자 jurik@seoul.co.kr ●강주리 기자의 K파일은 강주리 기자의 이니셜 ‘K’와 대한민국의 ‘K’에서 따온 것으로 국내에서 벌어진 크고 작은 이슈들을 집중적으로 다룬 취재파일입니다. 주변의 소소한 일상에서부터 시사까지 독자들의 궁금증을 풀어드리겠습니다.
  • “박근혜가 없네”…대통령기록관 ‘박근혜’ 미스터리 [강주리 기자의 K파일]

    “박근혜가 없네”…대통령기록관 ‘박근혜’ 미스터리 [강주리 기자의 K파일]

    관람객들 “朴 기록 왜 전시관에 없나요?”‘대통령의 하루’ 영상 등 5곳서 朴 없어전직 대통령 틈에 ‘박근혜 숨은그림찾기’기록관 “전시기간, 내부 규정 없다…한정된 공간 내 한 번에 배치 한계”학계 “기록관, 전시·교육·홍보 법적기능…혈세 맞게 고객 중심 빠른 행정서비스 해야”“잘잘못 떠나 역사 기록 공개…평가는 별도”열흘 뒤 탄핵 1000일…朴기록 공개 주목[편집자주 - 강주리 기자의 K파일은 강주리 기자의 이니셜 ‘K’와 대한민국의 ‘K’에서 따온 것으로 국내에서 벌어진 크고 작은 이슈들을 집중적으로 다룬 취재파일입니다. 주변의 소소한 일상에서부터 시사까지 독자들의 궁금증을 풀어드리겠습니다. 더 자세한 내용은 온라인 서울신문에서 볼 수 있습니다.] 정부부처가 밀집한 세종시의 주요 관광코스가 된 대통령기록관에 관람을 온 사람들은 저마다 고개를 갸우뚱한다. 그리고 비슷하게 한마디씩 한다. “여기도 없네?” 무슨 말일까.  ● 2년 넘게 대통령기록관 자리 없던 박근혜 2016년 2월 세종시 다솜로에 개관한 대통령기록관에서 최근까지 흔적을 찾기 힘들었던 대통령이 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다. 2017년 3월 10일 박 전 대통령은 헌법재판소가 2016년 12월 9일 국회에서 가결된 탄핵소추안을 인용하면서 대통령직에서 파면됐다. 이후 박 전 대통령에 대한 모든 기록물(1120만여점)은 탄핵을 당한 지 두 달 만인 2017년 5월 19일 대통령기록관에 이관을 완료했다. 정부 관계자에 따르면 당시 박 전 대통령이 작성한 메모지, 전자문서 등 다양한 종류의 기록물들이 공개할 것과 비공개할 것 등등 콘텐츠 분류 작업을 1년 이상 거쳤다.그러나 대통령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률에 따라 국민들에게 공개열람·전시·교육·홍보 등의 목적으로 설치 운영되고 있는 대통령기록관에서 역대 대통령인 박 전 대통령의 기록은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지 2년이 넘도록 볼 수 없었다. 실제 기자가 지난해 가을에 이어 올해 초 대통령기록관을 방문했을 때 기록관 1층 ‘대통령 상징관’에 전시된 유리판 8장을 겹쳐 만든 역대 대통령 대형 사진 가운데에서 박 전 대통령의 자리는 여전히 비어 있었다. 4층 ‘대통령 역사관’에도 이명박 전 대통령의 옆 박 전 대통령 대선 선거포스터 자리에는 아무것도 걸려 있지 않았다. 기록관 어디에서도 박 전 대통령의 흔적은 없었다. 당시 기자를 포함해 관람을 왔던 시민들이 현장에 있는 직원에게 “박 전 대통령에 대한 전시물은 없느냐”고 물었고 그때 기록관 직원은 “보완할 게 있어 잠시 보관 중”이라고 설명했었다. 대통령기록관 측은 관람객들의 비슷한 지적과 박 전 대통령 지지자들을 중심으로 한 전시 항의들이 있었다고 한다. 박 전 대통령의 휘호가 적힌 기록관 정문 인근에 놓인 표지석에는 존치와 철거 논란 속에 테러를 우려해 보이지 않게 한때 덮개를 씌워놓기도 했다.● 2년 2개월 만에 朴존영 세워졌지만… 그 결과, 대통령기록관에서 박 전 대통령은 어쩌다보니 희귀한 분이 됐다. 기록관에는 대한민국 이승만 초대 대통령부터 박 전 대통령까지 11명의 기록물 3068만여점이 보관돼 있다. 물론 이 가운데 역대 대통령을 상징하는 대표성이 있는 일부분만이 복제, 영상 등 제작과정을 거쳐 전시된다. 시민들에게 박 전 대통령이 처음으로 기록관에서 보여진 건 지난 4월 22일이다. 박 전 대통령이 물러난 지 2년 2개월 만이다. 대통령기록관 측은 4층 역사관 내 전직 대통령들의 사진이 나란히 걸려 있는 전시 포스터 옆에 휑하니 비어져 도드라지게 눈에 띄었던 공간에 박 전 대통령의 사진이 실린 대선 선거포스터를 전시했다. 남북통일을 염원하는 박 전 대통령의 연설 영상도 공개됐다. 5월 20일에는 1층에 사진이 걸렸다.  ● 靑집무실 영상, 정상외교 등 5곳에 박근혜 빠져 지금은 어떨까. 지난 16일 세종시 대통령기록관을 다시 찾았다. 탄핵된 지 2년 8개월이 지났지만 박 전 대통령 관련 전시물은 여전히 ‘숨은 그림찾기’다. 전직 대통령들과 다른 몇 가지가 이상한 점들도 발견된다. 기자가 찾은 건 5가지 정도였는데 눈썰미가 좋은 관람객들은 더 많이 찾았을지도 모른다. 우선 대통령 역사관 내 ‘대통령의 역할’을 소개해놓은 전시 공간에는 ‘공무원 임면’ 코너가 있다. 행정부 수장인 대통령은 헌법(제78조)과 법률이 정하는 바에 따라 공무원을 임명 또는 해임시킬 수 있다. 이 핵심 권한이 임기 중에 실제 이뤄졌음을 보여주는 ‘인증’ 사진들이 10명의 전직 대통령별로 전시돼 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이 5부 신임장관에게 임명장을 수여하는 모습, 전두환 전 대통령이 대법원 판사에 임명장을 수여하는 모습 등 모든 전직 대통령의 활동 사진이 있지만 박 전 대통령은 빠져 있다.전시실 중앙에 놓인 ‘대통령의 정상외교’ 코너에서도 마찬가지다. 각 대통령 시기별로 주요 업적에 대한 안내와 기록물들이 전시돼 있지만 박 전 대통령의 정상외교는 이곳에 전혀 소개돼 있지 않다. 3층 대통령 체험관에서도 박 전 대통령의 모습은 찾기 힘들다. ‘대통령의 하루’를 소개하는 전시면에서는 역대 대통령들의 시간대별 활동 영상이 나온다. 대통령 관저에서 출근한 모습과 청와대 집무실에서 업무를 보는 모습, 춘추관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접견실에서 외빈을 접견하는 모습도 나온다. 영빈관에서 공식 행사를 마친 뒤 대통령 관저로 퇴근 이후 모습까지 대통령들의 모습을 편집해 만들어 놓았다. 그러나 박 전 대통령의 모습은 영상에서 단 한 컷도 나오지 않는다. 대통령의 업무공간인 집무실을 재현해놓은 전시실 벽에는 대통령들이 실제 집무실에서 업무 중인 장면을 영상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도 박 전 대통령의 전임인 이명박 전 대통령을 끝으로 영상은 끝난다. 춘추관 기자회견 영상에서도 박 전 대통령은 없다. 박 전 대통령의 ‘대통령후보 당시 선거홍보물’ 전시 형태도 다른 대통령들과 조금 다르다. 역대 대통령의 대선 홍보물은 대부분 책자가 펼쳐진 형태로 당시 주요 공약들이 어느 정도 보이고 공간을 차지하는 면적들도 그만큼 넓다. 그러나 박 전 대통령은 얼굴 사진이 크게 나온 표지만 보이도록 책자가 덮인 채 놓여 있다. 박 전 대통령과 가까운 거리에 놓인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선거홍보물의 경우 얼굴이 크게 나온 전단지 형태와 홍보물 책자를 펼친 2가지 형태로 놓여 차지하는 면적과 전시 형태에서 대조를 이룬다. 대통령기록관 관계자는 “전시 기법의 한 형태일뿐 다른 의도는 없었다”고 설명했다. ● 朴 전시 장기 지연에 정치적 해석 분분 대통령기록관 안팎에서는 다양한 해석들이 나온다. 박 전 대통령 기록물에 대한 전시 지연과 선별적 전시 공개가 기록원의 독자적인 판단일 수도 있고 기록원을 둘러싼 외압이 있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개인의 선호도에 따른 태도나 관점으로 전시공간이 기획됐거나 박 전 대통령에 대한 정치적 판단에 따라 기록관 전시에서 배제했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 대통령기록관을 잘 아는 복수의 정부 관계자에 따르면 2017년 문재인 정부 출범 초기 기록관에는 제도개혁을 위한 적폐청산 태스크포스(TF)팀이 자체적으로 구성됐다고 한다. 정부 관계자는 “TF 당시 5~7개의 과제가 선정됐는데 말단지엽적인 과거 특정 사건에 대한 보복까지 있었다”면서 “박근혜 정부 당시 기록관이 법률 제정사업으로 국회에 발의했던 공공기록물 규제개혁 정책들을 뒤집고 당시 정책을 담당했던 공무원들에게 책임을 추궁하는 일이 벌어졌다”고 털어놨다.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 산하의 대통령기록관이 상위 기관으로부터 박 전 대통령의 전시와 관련한 외압을 받은 게 아니냐는 추측까지 쏟아졌다. 정부 관계자는 “박 전 대통령이 임기를 맞추지 못하고 중간에 나가면서 자신의 기록을 인계해줄 후임 관장을 정하지 못했다”고 전했다. 대통령기록관은 대통령기록물법 제24조에 따라 기록관장이 국가기록관리위원회 위원장이 지명한 대통령기록관리전문위원회 심의 결과를 존중해 주요 사항을 결정하고 운영하도록 하고 있다. 현재 기록관장은 개방형 직위로 고위공무원 나급(국장급)에 속한다. ● 기록관 “외압 없었다…전시기간 내부 규정 없어” 대통령기록관 측은 박 전 대통령의 전시물 공개가 늦어지거나 일부 전시물이 빠져 있는 것은 사실이나 상위 기관의 외압이나 정치적 판단은 없었다고 밝혔다. 법적으로 대통령 퇴임 후에 언제까지 기록물 등을 전시해야 한다는 규정도 없어 위반 사항이 아니라는 점도 언급했다. 기록관 측은 용역이 끝나는 다음 달까지는 박 전 대통령에 대한 전시물이 다른 전직 대통령들과 동일한 비중으로 전시될 것이라고 말했다. 대통령기록관 관계자는 “늦어지기는 했지만 지난해 예산 3억원을 확보해 개편사업을 연초부터 하고 있다”면서 “전시 콘텐츠는 기록물을 선별 제작해 새롭게 영상 등을 만들어 올리고 한정된 공간에서 박 전 대통령을 추가하려다 보니 한 번에 하기가 어렵고 공간의 재배치에 시간이 걸린다”고 지연 이유를 설명했다. 전시 기간에 대한 내부 규정이 없다는 점도 거듭 강조했다. 대통령기록관 관계자는 “내부 규정에도 대통령 퇴임 후 언제까지 전시를 하라는 규정은 없다”면서 “다만 박 전 대통령의 전시를 빠른 시간 내에 하는 것은 맞는 것 같다”고 말했다. 대통령기록물법 제24조 2항에는 대통령기록물에 대한 효율적 활용과 홍보를 위해 필요한 때에 대통령기록관에 전시관 등을 둘 수 있다고 나와 있다. 당초 기록원 측은 이 부분을 전시에 관한 임의 규정에 해당하는 것으로 해석했으나 이미 전시관이 설치된 상황에서 역대 대통령에 대한 전시는 당연히 해야하는 것이 맞다고 인정했다.● “기록 공개에 정권 판단 안돼…행정서비스 신속히” 이에 대해 홍성걸 국민대 행정학과 교수는 “국민 세금으로 운영되는 대통령기록관은 전시·교육·홍보 등 기능이 법적으로 명시돼 있는 만큼 행정 서비스를 마땅히 해야 하는 기관”이라면서 “행정 서비스는 수용자인 국민 입장에서 고객 중심 마인드를 지향해야 하고 빠르면 빠를수록 좋은 것으로 전시 기간 규정이 없다고 해서 100년 뒤에 해도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홍 교수는 “대통령기록관은 가치중립적으로 운영돼야 한다”면서 “대통령이 죄가 있든 없든 재임 중 통치기간에 발생한 역사적 기록은 역사적 산물로서 기록 공개는 정권이나 가치 관계에 따라 판단될 문제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박 전 대통령이 탄핵된 이후에 국민과 대통령의 명예에 훼손이 발생했다면 이 역시 그대로 전시해 후세의 평가를 받으면 되는 일이지 자랑스러운 것도 부끄러운 것도 다 역사인데 정권에 따라 기록물을 배제하는 것은 역사를 왜곡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적폐청산 TF에 대해서도 생각이 다르면 적폐로 둘 수 있다는 데 대해 “초법적인 발상”이라고 비판했다. 홍 교수는 “역사에 대한 평가는 한 번에 끝나는게 아닌 후세에 의해 시대 상황에 따라 반복적으로 재해석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기록관에서 만난 한 관람객은 “대통령기록관은 대통령 개개인의 업적 유무와 관계 없이 역대 대통령의 순수한 기록관으로 국민에게 보여줘야 한다”면서 “이념과 정치적 이해로 구분해 운영된다면 국민의 혈세로 만든 의미가 왜곡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 박근혜 기록 12월 공개…“역사 평가는 후대의 몫” 박 전 대통령의 기록물 등 전시는 올해 크리스마스 이전에는 볼 수 있을 전망이다. 기록관은 지난 8월 업체를 선정해 12월 20일까지 개편 작업을 완료하기로 한 만큼 그 전까지는 박 전 대통령의 자료들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박 전 대통령에 대한 전시는 물론 전직 대통령들이 외국 정상에게 선물로 받은 그림, 공예품 등을 추가로 전시하는 기획전시도 다음달 열릴 예정이다. 열흘 뒤면 박 전 대통령이 탄핵된 지 1000일(12월 4일)이 된다. 2년 9개월 만에 세상 빛을 보는 박 전 대통령에 대한 기록들이 어떤 모습으로, 어떤 내용으로 공개될지 관심이 쏠린다.글·사진 세종 강주리 기자 jurik@seoul.co.kr
  • [씨줄날줄] 역사 다큐 ‘백년전쟁’/전경하 논설위원

    [씨줄날줄] 역사 다큐 ‘백년전쟁’/전경하 논설위원

    ‘친일인명사전’ 편찬으로 유명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원래 명칭은 반(反)민족문제연구소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인 1948년 9월 구성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에서 이름을 가져왔다. 반민특위는 친일파의 공격으로 겨우 1년여 뒤인 1949년 해체됐고, 반민특위 판결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제대로 집행되지 못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2009년 출간한 친일인명사전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도 수록돼 있다. 박 전 대통령이 1940년 만주군관학교에 들어가 2년 뒤 일본 육사 본과 3학년으로 편입, 1944년 일본군 육군 소위로 임관됐다는 이유에서다. 박 전 대통령의 아들 지만씨가 당시 법원에 게재금지·배포금지 가처분 신청을 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민족문제연구소는 박 전 대통령이 만주군에 혈서로 지원했다는 1939년도 신문 기사도 제시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2012년 11월 박 전 대통령을 다른 각도에서 재비판했다. ‘한강의 기적’이 박 전 대통령의 업적이 아니라 미국의 동아시아 반공 정책 덕분이라는 것이다. 수출주도형 전환의 근거로 1978년 미 의회에 보고된 프레이저 보고서 및 비밀 해제된 미 기밀보고서 등을 인용해 역사 다큐로 제작했다. ‘백년전쟁-프레이저 보고서: 누가 한국 경제를 성장시켰는가’라는 제목이었다. 이 다큐는 2013년 1월 시민방송 RTV를 통해 방송되면서 그해 출범한 박근혜 정권의 역사 논쟁에 불을 댕겼다. 결국 이승만 전 대통령을 다룬 ‘백년전쟁-두 얼굴의 이승만’과 함께 그해 7월 방송통신심의위원회로부터 ‘관계자 징계 및 경고’라는 중징계를 받았다. 객관성, 공정성, 명예훼손 금지 조항을 위반했다는 이유에서 2014년 1심, 2015년 2심에서도 유죄가 유지됐다. 그런데 대법원은 어제 방송 내용의 공정성 등을 심의할 때 매체별, 지역별, 프로그램별 특성을 고려해야 한다며 방통심위의 제재가 부당하다며 파기 환송했다. 대법원은 “백년전쟁은 공적 인물과 공적 관심사를 반영해 시청자가 제작한 역사 다큐멘터리”라면서 “사자의 명예 존중 규정을 위반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시했다. 대법원은 역사적 논쟁은 피할 수 없으며 인류의 삶과 문화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끄는 건전한 추진력이 된다고도 했다. 친일 논란은 아직 우리 사회의 뜨거운 감자다. 문재인 대통령이 2017년 8월 14일 독립유공자 및 유족과의 오찬 간담회에서 “‘독립운동하면 3대가 망하고, 친일하면 3대가 흥한다’는 말이 사라지게 하겠다”고 했다. 광복 72년에도 이런 말이 나온다는 사실이 참 슬프다. 이런 상황 탓에 일본이 한국에 뻣뻣한 태도를 보이나 싶어 떨떠름하다. lark3@seoul.co.kr
  • 대법, 이승만·박정희 비판 다큐 ‘표현의 자유’로 인정했다

    대법, 이승만·박정희 비판 다큐 ‘표현의 자유’로 인정했다

    전합 13명 중 7명 “공정·균형 위반 아냐” 박근혜 정부 방통위서 징계·제재 처분 시민방송, 재심 청구 기각 되자 소송 제기 ‘명예훼손’ 기소 다큐 감독·PD 무죄 확정2013년 박근혜 정부 때 방송통신위원회가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을 비판적으로 다룬 역사 다큐멘터리 ‘백년전쟁’을 제재한 것은 부당하다는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이 나왔다. 기존의 역사적 평가와 다른 해석을 제기했다고 해서 행정기관이 제재하는 것은 헌법상 보장된 ‘표현의 자유’를 위축시킬 수 있다는 취지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김선수)는 21일 ‘백년전쟁’을 방영한 시청자 제작 TV채널 시민방송이 방통위를 상대로 낸 제재조치명령 취소소송 상고심에서 원고 패소 판결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법에 돌려보냈다. 방통위의 제재가 정당했다는 반대 의견(6명)도 만만치 않았지만, 전합 13명 중 7명(다수 의견)이 “이 사건 각 방송은 객관성, 공정성, 균형성 유지 의무와 사자(死者) 명예존중 의무를 위반했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한 결과다. 2012년 11월 시사회를 통해 처음 공개된 ‘백년전쟁’은 일본이 우리나라를 강제병합한 1910년부터 100년의 역사를 담기 위해 4부작으로 기획된 독립 다큐다. 같은 시공간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와 친일파를 한 화면에 함께 보여 주자는 취지로 기획됐다. 이 중 이 전 대통령 편인 ‘두 얼굴의 이승만’과 박 전 대통령 편 ‘프레이저보고서’ 영상이 유튜브 등에서 입소문을 타면서 독립 다큐 중에서는 이례적으로 흥행에 성공했다. 2013년 1월부터 3월까지 시민방송에서도 이 두 영상은 각각 29차례, 26차례에 걸쳐 방영됐다. 하지만 이 영상으로 논란이 일자 방통위는 2013년 8월 “공정성과 객관성, 명예훼손 금지 규정을 위반했다”며 방송 프로그램 관계자들을 징계 조치하고 관련 사실을 방송을 통해 고지하라고 명령했다. 방통위는 “이 전 대통령이 사적인 권력을 채우기 위해 독립운동을 했고 출세를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는 내용의 미국 중앙정보국(CIA) 문서 등 미국 입장의 사료와 부정적인 기사·인터뷰만을 인용한 것을 문제 삼았다. 또 여대생, 백인 여성들과 데이트를 즐겼다며 사생활을 거론하거나 독립자금을 횡령한 인물로 묘사해 이 전 대통령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봤다. 박 전 대통령과 관련해서도 “그는 수출주도형 전략을 제시한 적이 없었다”는 내용의 프레이저보고서(1978년 미국 의회에 보고된 문건) 등 부정적 보고서를 인용한 것은 사실을 왜곡한 것이라고 했다. “일제 때 한국 민족을 배신했던 친일파였고, 해방 후에는 공산주의자로 활동하다가 체포됐는데 동료들을 전부 밀고해 죽게 만들고 자신의 목숨을 건졌다”는 내용을 언급한 것도 박 전 대통령의 명예를 훼손한 것이라고 봤다. 이에 시민방송은 방통위를 상대로 재심을 청구했지만 기각되자 소송을 냈다. 1심과 2심은 방통위 손을 들어줬다. 역사적 인물에 대한 새로운 의혹을 제기하는 데 그치지 않고 특정 입장에 유리한 방향으로 편집·재구성해 공정성과 객관성을 상실했다는 것이다. 이날 조희대·권순일·박상옥·이기택·안철상·이동원 등 대법관 6명도 같은 논리를 폈다. 앞서 이 전 대통령 명예를 훼손한 혐의(사자명예훼손)로 기소된 다큐 감독 김모(52)씨와 프로듀서 최모(52)씨는 지난 6월 항소심에서 무죄를 선고받고 그대로 확정됐다. 김헌주 기자 dream@seoul.co.kr
  • “이승만·박정희, 친일파로 묘사한 다큐 ‘백년전쟁’ 제재는 부당”

    “이승만·박정희, 친일파로 묘사한 다큐 ‘백년전쟁’ 제재는 부당”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일 행적을 다룬 역사 다큐멘터리 ‘백년전쟁’에 대해 방송통신위원회가 제재한 것은 부당하다고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판단했다. 소송을 제기한 지 6년 만의 결론이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21일 ‘백년전쟁’을 방송한 시민방송 RTV가 방송통신위원회를 상대로 “제재조치 명령을 취소해달라”고 낸 소송의 상고심에서 원심을 깨고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대법원은 “방송이 공정성·객관성·균형성 유지의무 및 사자 명예존중 의무를 위반하였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또 “이 다큐는 이미 많은 사람에게 충분히 알려져 사실상 주류적 지위를 점하는 역사적 사실과 해석에 의문을 제기해 다양한 여론의 장을 마련하고자 한 것”이라면서 “그 자체로 다른 해석의 가능성을 전제한다”면서 편향적인 내용이라는 의견에 동의하지 않았다. 이어서 “역사적 인물 평가는 각자 가치관·역사관에 따라 때로는 상반되게 나타나고, 역사적 논쟁은 인류의 삶과 문화를 긍정적 방향으로 이끄는 건전한 추진력이 된다”며 “방송내용 중 역사적 평가 대상이 되는 공인의 명예가 훼손되는 사실이 적시됐어도 심의 규정을 위반했다고 볼 수 없다”고 설명했다. 박근혜 정부 시절인 2013년 방송된 백년전쟁은 이 전 대통령과 박 전 대통령에 대해 비판적인 내용을 담아 그 적절성을 두고 진보·보수 세력 간 논쟁을 촉발했다. 다큐는 이 전 대통령이 기회주의자로서 권력욕을 채우기 위해 독립운동을 했다고 주장했다. 박 전 대통령에 대해서는 친일·공산주의자로 미국에 굴종했으며 한국 경제성장의 업적을 자신의 몫으로 가로챘다고 해석했다. 방통위는 이러한 다큐멘터리에 내용에 대해 “사회적 쟁점이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된 사안을 공정성과 균형성을 유지하지 못한 채 다뤘다”며 프로그램 관계자를 징계·경고하고 이를 방송으로 알리라고 명령했다. 앞서 1·2심은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을 희화했을 뿐 아니라 인물에 대한 새로운 관점·의혹 제기에 그치지 않고 특정 입장에 유리한 방향으로 편집·재구성해 사실을 오인하도록 적극적으로 조장했다”며 방통위의 제재가 적법했다고 판단했다. 곽혜진 기자 demian@seoul.co.kr
  • 6년만에 오명 벗은 이승만·박정희 다큐 ‘백년전쟁’...대법 “제재 부당”

    6년만에 오명 벗은 이승만·박정희 다큐 ‘백년전쟁’...대법 “제재 부당”

    대법 “객관성·공정성 위반 안해”이 전 대통령 명예훼손도 무죄 “이승만 전 대통령이 맥아더 장군에게 한국을 단독으로 점령해달라는 내용의 러브레터를 보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일제 때 한국 민족을 배신했던 친일파였다.” 2012년 11월 시사회에서 처음 공개된 독립 다큐멘터리 영화 ‘백년전쟁’은 이 전 대통령과 박 전 대통령에 대해 이렇게 묘사했다. 미국 중앙정보국(CIA) 문서, 미 의회에 보고된 ‘프레이저 보고서’ 등을 인용한 이 다큐가 유튜브 등에도 올라오자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고 소위 ‘대박’을 쳤다. 2014년 5월까지 누적 관람객이 500만명(민족문제연구소 추산)을 넘었다.이 다큐를 놓고 진보-보수 역사 논란이 불거졌고, 소송까지 이어졌지만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21일 “객관성, 공정성, 균형성 유지 의무와 사자(死者) 명예존중 의무를 위반하였다고 볼 수 없다”고 결론 내렸다. 역사적 평가가 극명하게 갈리는 인물에 대해 한쪽 면만 보여줬다 해도 헌법상 보장된 ‘표현의 자유’로 볼 수 있다는 취지다. 백년전쟁은 일본이 우리나라를 강제 병합한 1910년부터 2011년까지 100년의 역사를 담기 위해 4부작으로 기획된 독립 다큐멘터리 영화다. “왜 우리나라 역사 다큐는 윤봉길, 안중근 등 독립운동가를 다룰 때 친일파를 제외할까”라는 질문에서 출발했다고 한다.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와 친일파를 한 화면에서 함께 보여주자는 의도였다. 2012년 개봉한 1부는 1945년 해방까지를 다뤘다. 이후 이 전 대통령과 박 전 대통령을 조명한 다큐가 나왔다. 민족문제연구소 등에서 제작비 2500만원을 들인 이 다큐는 2013년 1월부터 3월까지 시청자 제작 TV 채널 시민방송에서도 이 전 대통령 편 ‘두 얼굴의 이승만’과 박 전 대통령 편 ‘프레이저 보고서’가 각각 29회, 26회 방영됐다. 하지만 방송통신위원회는 2013년 8월 시민방송에서 방영한 이 두 영상이 공정성과 객관성, 명예훼손 금지 규정을 위반했다며 방송 프로그램 관계자들을 징계·경고 조치하고 관련 사실을 방송을 통해 고지하라고 명령했다. 시민방송은 방통위를 상대로 재심을 청구했지만 기각되자 소송을 냈다. ‘두 얼굴의 이승만’ 영상에는 이 전 대통령의 초대 대통령 선출 과정 등을 1948년 CIA 문서 등을 통해 분석한 내용을 담고 있다. 방통위는 “이 전 대통령이 사적인 권력을 채우기 위해 독립운동을 했고, 자신의 출세를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는 CIA 문서, “이 전 대통령은 한인 학교에서 반일 사상을 가르친다는 것을 부인했다”는 내용을 실은 미 지역 신문 등을 인용한 것을 문제 삼았다. 또 “이 전 대통령이 피 튀기는 테러까지 동원해 국민회를 장악하고 현란한 부동산 재테크에 착수했다”, “나은 마흔 여섯에 스물 두살짜리 여대생과 여행도 하고 틈만 나면 최고급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고 최고급 호텔에서 잠을 잤다. 미국 수사관들은 그를 기소해버렸다”는 영상 속 나레이션도 불명확한 내용을 사실인 것처럼 방송해 시청자를 혼동케 했다고 지적했다. 박 전 대통령 편인 ‘프레이저 보고서’ 영상도 방통위는 공정성과 객관성을 상실했다고 봤다. 이 영상에서는 1978년 미국 의회에 보고된 프레이저 보고서 등이 인용됐는데, 이 보고서에는 “한국의 중장년층은 박 전 대통령이 수출주도형 전략을 제시해서 한강의 기적을 만들었다고 믿고 있지만 박 전 대통령은 수출주도형 전략을 제시한 적이 없다”는 내용이 나온다. “박 전 대통령이 해방 후에 공산주의자로 활동하다가 체포됐는데, 동료들을 전부 밀고해서 죽게 만들고 자신의 목숨을 건졌다”는 미국 기밀보고서 내용도 영상에 소개됐다. 이에 대해 방통위는 “박 전 대통령을 경제성장의 업적을 가로챈 인물로만 묘사한 것으로 사실을 정확하고 객관적 방법으로 다루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이후 방통위의 제재에 불복한 시민방송이 소송을 제기했지만 1심과 2심은 연달아 방통위 편을 들었다. 1심은 “새로운 관점이나 의혹을 제기하는데 그치지 않고 특정 입장에 유리하게 하거나 사실을 오인하도록 적극 조장하고 두 전직 대통령을 희화화했다”고 방통위 손을 들어줬다. 이에 시민방송 측은 “역사 다큐는 특정한 시각을 전제로 역사적 사실을 해석하고 재구성하는 것이라, 달리 해석될 가능성이나 입장을 반영하지 않았다고 방송의 공정성·객관성을 갖추지 않은 근거로 봐선 안 된다”는 취지로 항소했다. 하지만 2심 역시 “사회적 쟁점이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된 사안을 다룰 때 공정성과 균형성을 유지하고, 관련 당사자 의견을 균형있게 반영할 의무는 해당 방송이 역사 다큐 형식을 취했어도 면제되지 않는다”고 1심 판단을 유지했다. 이후 2015년 8월 대법원에 상고된 이 사건은 대법원 1부에 배당됐다가 지난 1월 전원합의체에 회부됐다. 한편, 이 전 대통령 명예를 훼손한 혐의(사자명예훼손)로 기소된 이 다큐 감독 김모(52)씨와 프로듀서 최모(52)씨는 지난 6월 항소심에서 1심과 마찬가지로 무죄를 선고받았고 이 판결은 그대로 확정됐다. 1심은 국민참여재판으로 진행됐는데 김씨에 대해선 배심원 9명 중 8명이, 최씨는 7명이 무죄로 판단한 바 있다. 김헌주 기자 dream@seoul.co.kr
  • [In&Out] 시대변화와 정치의 세대교체/류홍채 경기대 정치전문대학원 교수

    [In&Out] 시대변화와 정치의 세대교체/류홍채 경기대 정치전문대학원 교수

    반공·산업화 세대와 386 반독재투쟁 세대는 각자의 신념에서 비롯된 독선과 아집, 배타성이 공통점이다. 그들의 배타성이 민주적 정치·경제 발전의 발목을 잡고, 사회적 변화에 따라 자연스럽게 이루어져야 할 세대교체와 새로운 시대의 준비를 방해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독재와 가난 그리고 전쟁위협을 극복했으나, 여전히 냉전 논리에 머물러 있는 세대 간 싸움으로 더이상 발전하지 못하고 있다. 반공·산업화 세대와 386 세대는 여전히 ‘자유’ 대 ‘사회’, ‘민주’ 대 ‘반민주’라는 구시대적 이데올로기 싸움을 이어 오고 있다. 국제적으로 냉전은 종식되고 국내정치는 민주주의가 발전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승리를 위한 싸움이라기보다 기득권을 지속하기 위한 상호의존적 관계로 보이고, 그들에게 민주주의와 사회변화에의 관심이 없는 것 같다고 하면 무리일까. 독립운동 세대는 미 군정기 3년간 순식간에 지워졌고, 1948년 정부수립 이후 이승만·박정희·전두환 시기 기득권 세력은 자신들의 부당성을 감추기 위해 반공과 경제살리기를 최고의 가치로 포장했다. 그것으로 국민들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유린했던 과거를 정당화하며 지금도 자유를 말하지만 여전히 그것은 특권층의 자유다. 386세대는 자신들이 추구했던 가치가 폐기되었으나 찰나의 희생의 대가를 극대화하면서 그 유통기한을 지속시키려 하고 있다. 선배들과 후배들을 배제시키고, 진보의 가치들과 실천을 망각한 채 집단적 기득권 유지를 최우선하는 진영논리적 행태가 그들이 타도하려 했던 독재자와 그 추종자들의 정치적 태도에 닮아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일까. 사회변화 정도는 크게 정치·경제·문화적으로 현격한 차이를 보일 때 구별된다. 사회변화는 느리고 안정적일 수도 있고, 급격하고 역동적일 수도 있다. 그러나 변화의 속도가 발전 또는 퇴보의 의미와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지난 75년간 국가 전반에 있어서 급격한 사회변화를 수차례 겪었지만, 독립과 4·19, 1987년 민주화와 2017년 탄핵은 발전이었고 한국전쟁과 5·16, 유신체제와 12·12사태는 퇴보이다. 반공 세대와 반독재 세대를 중심으로 형성된 2019년 한국정당정치의 교착 상태는 새로운 발전을 막아서고 있다. 머지않아 다가올 제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생산의 개념과 방식의 변화, 노동력 투입의 최소화로 사회의 기본 질서가 급격하게 변화될 것으로 예측된다. 이러한 변화의 시기에 소모적 이념논쟁을 하는 세대가 아닌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는 세대로의 교체가 절실하다. 시대가 변화되면 변화를 이끄는 세대로의 교체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물론 안정적인 사회변화를 위해서는 신구의 조화를 잘 이루어야 한다. 한국 정치의 마지막 세대교체는 2000년에 이루어졌다. 2000년 체제 이후 20년이 다 되도록 새로운 세대교체는 시작도 못 하고 있다. 그 핵심적 원인이 기득권을 형성하고 있는 산업화 세대와 386 세대의 배타성에 있다고 할 것이다.
  • 체육시설로 변한 독립투사 묘역 5년내 당당히 제 모습 찾는다네

    체육시설로 변한 독립투사 묘역 5년내 당당히 제 모습 찾는다네

    서울신문이 서울시, ㈔서울도시문화연구원과 함께하는 2019서울미래유산-그랜드투어 ‘제29차 효창공원’ 편이 지난 9일 용산구 효창동과 청파동 일대에서 2시간 30분 동안 진행됐다. 서울미래유산을 사랑하는 참석자 40여명은 이날 오전 10시 지하철 6호선 효창공원앞역 1번 출구를 출발했다. 투어단은 먼저 백범김구기념관을 둘러보고 김구 선생 묘역 앞에서 묵념을 올렸다. 윤봉길·이봉창·백정기 의사를 모신 삼의사 묘역과 임정요인 묘역에서 숙연한 마음으로 절정을 향해 치닫는 가을을 느꼈다. 시신을 찾지 못해 비어 있는 안중근 의사의 가묘가 일행의 가슴을 저리게 했다. 이날 일정은 김세중미술관을 거쳐 선린인터넷고등학교 교정에서 마무리됐다. 해설을 맡은 박정아 서울도시문화지도사는 알차고 유익한 해설 보따리를 풀어 공감을 얻었다.이날의 서울미래유산은 효창운동장, 선린중·고 향나무와 선린인터넷고 강당 등 3곳이다. 미래유산이던 조각가 김세중과 시인 김남조 가옥은 김세중미술관으로 변신하면서 미래유산에서 해제된 사실을 확인했다. 영욕의 효창운동장도 효창공원 성역화 사업에 따라 축구장만 남고 관중석과 조명탑, 육상트랙은 사라질 것으로 보인다. 효창공원과 효창운동장을 분리하던 흉물스러운 담장도 철거돼 2024년까지 전체 면적 16만㎡의 당당한 독립운동기념공원으로 조성된다. 독립공원에 어울리지 않는 반공투사 위령탑, 육영수 여사 경로 송덕비, 원효대사 동상도 옮기거나 철거될 전망이다. 효창운동장 옆 이봉창 의사 생가터에는 기념관을 건립하기로 했다. 선린인터넷고 교정에 서 있는 210년 묵은 향나무는 1899년 국내 최초의 관립 상공학교로 설립된 옛 선린상고 개교를 기념, 고종이 명동 중국대사관 동편 학교 교정에 기념식수한 어사목을 1913년 옮겨온 것이다. 서울미래유산 지정을 알리는 기념동판이 땅바닥에 부착돼 읽기 어려울 정도로 닳고 부식돼 있었다. 돌과 벽돌을 접합재인 모르타르를 사용해 쌓아 올린 조적조 양식의 학교 강당은 1920년대 학교 건물을 대표하는 건축양식이다. 우리에게 낯익은 효창공원 옆 효창운동장은 멋쩍은 조합이다. 이름에 어울리지 않는 굴곡의 수난사 때문이다. 1786년 정조는 5살 때 세상을 떠난 큰아들 문효세자를 가슴에 묻으며 ‘효성스럽게 번창하라’는 뜻에서 효창묘라고 이름 지었다. 1870년 고종이 효창원으로 격상시켰다. 일제강점기 용산에 군사령부와 철도기지가 들어서면서 1921년 효창원을 빙 둘러싼 골프코스가 조성됐다.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집을 잃은 이재민 수용소를 거쳐 1927년 공원으로 본격 개발됐다. 문효세자 묘를 고양 서삼릉으로 이전했을 때 효창공원은 이전의 3분의1 규모로 쪼그라든 상태였다. 1945년 해방과 함께 독립운동가 묘역으로 조성됐다. 국립현충원이 없던 시절의 현충원이었다. 묘역 조성을 주도한 김구 선생도 이곳에 묻혔다. 윤봉길·이봉창·백정기 등 무장투쟁 삼의사의 유해를 봉환하고, 임시정부 이동녕 주석·차리석 비서장·조성환 군무부장의 묘도 안장했다. 유해를 찾지 못한 안중근 의사의 가묘도 만들어 놨다.이승만 초대 대통령은 효창공원 내 애국지사 묘역에 제2회 아세아축구대회 유치용 축구경기장 건립을 추진했다. 효창공원 내 독립지사 묘역 참배 행렬이 줄을 잇자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아첨꾼들의 장난질이었다. 격렬한 반대 끝에 묘역을 유지한 상태에서 운동장을 만드는 절충안이 도출됐다. 효창원 경내 15만 그루의 나무와 연못을 메워 운동장을 만들었다. 국내 최초의 국제 규격 축구경기장이다. 박정희 대통령 때도 반공투사 위령탑, 대한노인회, 육영수 여사 송덕비가 들어서면서 효창공원의 정체성은 독립운동가 묘역에서 도심 체육시설로 변모했다. 2002년 효창공원 테니스장 자리에 백범기념관을 짓고, 2005년 노무현 대통령이 효창공원을 제2의 국립묘지로 민족공원화하는 사업을 추진했지만 축구장 대체 부지가 마련되지 않아 흐지부지됐다. 청파역은 조선시대 한양도성과 삼남지방을 연결하는 도성 밖 첫 번째 역이었다. 도성~경기도 광주 구간 제1구간이다. 특히 군사 업무를 담당하는 병조의 직할 역은 교통통신상 가장 중요한 지역에 설치했는데 청파와 노원역에 뒀다. 세종실록에 “청파와 노원 두 역은 인구나 물산이 메마르고 쇠잔하나 전달하는 문서는 가장 번거로우니…”라고 기록돼 있다. 19세기 초 편찬된 만기요람에서는 “청파역과 노원역에는 역졸이 모두 합쳐 288명이 있고, 말은 160필이 준비돼 있다”고 두 역의 무게감을 알렸다. 청파동을 상징하는 ‘청파배다리 터’ 표석은 무악(안산)에서 발원한 무악천이 한강으로 흘러들어 가는 만초천변 큰 다리 이름이다. 만초천을 경계로 삼는 주교동과 석교동 등의 지명이 이 다리에서 유래했다. 여기서 ‘용산 운하’를 뚫자는 계획이 나왔다. 태종 13년(1413년) 좌의정 하륜이 “서울과 경기의 군인 1만 1000명을 징발해 숭례문 밖에 운하를 파서 용산까지 들어온 선박을 숭례문 앞까지 끌어들일 수 있게 물길을 연장하자”는 장계를 올렸다. 태종은 “모래땅이어서 물이 차지 못할까 걱정되고 인력을 쓰는 어려움이 있다”면서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당시 한강을 이용한 물자와 인력 수송은 오늘날 철도와 고속도로, 항공편을 모두 합친 물류수송로에 해당한다. 육상과 수상 운송에서 차지하는 청파역의 비중을 짐작할 만하다. 다만 만초천이 흐르는 용산 일대는 저지대여서 홍수의 위험에 노출돼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주로 만리동~청파동~효창동 구릉지를 거쳐 칠패시장과 숭례문에 이르렀다. 청파라는 지명의 유래는 확실하지 않지만 서울시사편찬위원회의 ‘동명연혁고’ 용산구편에 따르면 푸른(靑) 야산의 언덕(坡)이 많아서 생겼다는 설과 조선 전기의 문신 청파 기건(미상~1460)이 살았다는 양설로 나뉜다. 청파 일대는 지형상 배문중·고 뒷산인 연화봉을 기점으로 남쪽으로 능선을 따라가다가 효창공원에 못 미쳐 남동쪽으로 갈라져 당고개 능선을 따라 만초천에 이르는 지역이다. 한성부 서부 용산방에 속했다. 근대 이후 청파역을 품은 용산역과 서울역이 서울의 제일 관문이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청파 4계 축소리’라는 용어가 있다. 청파 4계란 지금의 청파동 1~3가와 원효로 1가 등 조선시대 청파 1~4계 지역의 지역단위다. 청파동 일대를 청파 4계라고 하고, 이 지역 노래꾼의 소리를 사계 축소리라고 했다. 19세기 서울 시정 음악을 이끈 전문 소리꾼 집단을 지칭하는 용어였다. 사계 가객으로 불린 이들은 돈을 받고 불려 다니면서 노래를 부르는 전문 직업인이었다. 노래를 듣는 장소는 청파, 마포, 왕십리, 서빙고 등지의 ‘움집’이라는 소리방이었다. 청파를 주무대로 활동한 남녀 음악가들은 서울 긴잡가, 수잡가, 사설지름시조, 휘모리잡가 등을 불렀다. 이들의 소리는 도성 밖 소리방의 안진소리, 경성소리, 선소리 등으로 알려졌으며 서울 토박이 소리로 인정받았다. 이들의 소리가 근대 실내극장 설립 이후 대중음악의 주류를 형성했다. 잡가 명창으로는 박춘경·추교신·조기준·박춘재가 꼽힌다. 특히 박춘재는 1902년 최초의 관립 공연장인 협률사 창립 공연에 참가했으며 가장 많은 유성기 음반을 취입했다. 1914년 최초의 사설극장 광무대의 대표 가수이기도 했다. 종로4가와 5가를 거쳐 1930년부터 1936년까지 만리동 고개에 흥룡극장을 지어 상설공연을 계속했고, 해방 무렵까지도 공연을 이어 나갔다. 갖은 곡절로 얼룩진 효창공원의 장소성이 구성진 서울 토박이 노래로 이어진 게 아닐까. 글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 원장사진 김학영 연구위원 ■다음 일정 : 제30회 서울의 문학4(외솔 최현배의 사주오 두부장수) ■집결장소 : 11월16일(토) 오전10시, 독립문역 4번 출구 ■신청(무료) : 서울미래유산 홈페이지(http://futureheritage.seoul.go.kr) ■문의 : (사)서울도시문화연구원 (www.suci.kr)
  • 황교안 “정시 50% 이상 확대” 교육비전 발표

    황교안 “정시 50% 이상 확대” 교육비전 발표

    자유한국이 대학 입시 전형에서 수학능력시험 점수를 중심으로 뽑는 정시 비율을 50% 이상 확대하는 교육 정책안을 발표했다. 학생부종합전형(학종)은 교육 소외계층 선발에 활용하고 교육감 직선제를 폐지하겠다는 방향도 제시했다. 한국당은 12일 서울 중구 배재학당 역사박물관에서 ‘개개인의 성장을 위한 공정한 교육’이라는 정책 비전을 제안했다. 이는 9월 22일 발표한 경제 대안 ‘민부론’과 지난달 24일 내놓은 외교안보 정책 대안 ‘민평론’에 이은 한국당의 세 번째 정책 비전이다. 황교안 대표는 발표에서 “언제부턴가 우리 교육이 병들어 죽어가고 있다”며 “특히 국민이 관심이 큰 대학입시제도조차 주무부처 장관은 까맣게 모른 채 대통령 말 한마디로 순식간에 뒤집히기도 했다”고 주장했다. 황 대표는 공정한 교육과 관련해 “정시 수능 전형 비율을 50% 이상으로 확대하는 ‘고등교육법 개정안’을 내일(13일) 국회에 제출하겠다”며 핵심 정책으로 내세웠다.황 대표는 “조국 사태에서 보듯 지금의 대학입시 제도는 학생의 능력이 아니라 부모의 능력이 결과를 좌우한다. 수시 중심, 학생부종합전형(학종) 중심의 현 대학입시 제도가 불공정과 불의의 온상이 됐다”며 “국민들께서 원하시는 대로 정시를 확대해 공정성을 높여야 한다”고 설명했다. 나아가 황 대표는 수시 전형을 단순화하고, 학종은 공정성, 객관성, 투명성, 신뢰성을 높여 교육 소외계층 선발에 활용하겠다고 했다. 또한 교육 행정체제 개혁을 위해 “‘지방 교육자치에 관한 법’을 개정해 교육감 직선제를 폐지하고, 시도지사-교육감 러닝메이트제를 도입하겠다”고 말했다. 황 대표는 또 초·중등교육법을 개정해 교육감이나 교육부가 임의로 외고·국제고·자립형사립고 지정 취소할 수 없도록 하고, 이념·정치편향 교육을 하며 정치적 중립 의무를 위반한 교원을 처벌하는 조항을 신설하겠다고도 했다. 정용기 정책위의장은 “지방대의 경우 정시를 50% 이상으로 하면 학생모집을 못한다는 현실을 감안해 대통령령으로 예외를 둘 수 있게 할 예정”이라며 “당 소속 전원의 서명을 받아 제가 대표발의한다”고 설명했다. 한편, 황 대표는 발표 장소인 배재학당 역사박물관에 전시된 이승민 전 대통령 흉상을 본 뒤 “초대 대통령으로서 대한민국 민주주의 국가를 만드는 데 정말 큰 공헌을 하신 분이다. 그 정신을 저희가 잘 받들어서 자유대한민국을 잘 지켜내겠다”고 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1894년 배재학당에 입학해 이듬해 졸업했다. 오달란 기자 dallan@seoul.co.kr
  • “한국전 전후 무차별적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 8부 능선 넘어”

    “한국전 전후 무차별적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 8부 능선 넘어”

    1948년 한반도 남쪽에 이승만 정권이 들어선 뒤 한국전쟁 발발 전후로 정치적 반대 세력, 소위 ‘빨갱이’를 소탕한다며 무차별 민간인 학살이 자행됐다. 우익 청년단체 등 지방 토착세력도 군경의 협조 또는 묵인 아래 수많은 민간인을 학살했다. 이유도 모른 채 끌려가 잔혹하게 총살당하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민간인 학살 피해자가 100만명이 넘는다는 자료도 있다. 하지만 분단 체제에서 피해자 유족들은 빨갱이 가족으로 매도당하며, 연좌제의 사슬에 묶인 채 침묵을 강요당했다. 70여년이 지난 지금도 진상 규명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비극적인 현대사를 바로잡고 피해자와 유족들의 명예회복이 이뤄지기 위해서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기본법’(과거사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해야 한다. 그러나 진상규명위원회의 중립성 유지 등에 의구심을 갖고 있는 자유한국당의 반대에 가로막혀 아직도 계류 중이다. 그나마 반가운 소식이라면 얼마 전 특별법이 국회 행정안전위원회를 극적으로 통과했다는 것이다. 20대 국회 회기가 반년도 남지 않은 게 변수지만 지난달 30일 서울신문과 만난 김하종(86) 한국전쟁유족회 특별법추진위원장(경주유족회장)은 “8부 능선은 넘었다”며 가장 어려운 관문을 통과했다고 말했다. -상임위 통과에도 상당한 진통을 겪었다. 야당 의원들의 반대가 극심했는데. “국회 행안위 회의가 열리는 날이면 아침 일찍 열차를 타고 서울로 와 회의실 앞을 지켰다. 한국당 의원을 만나면 ‘지난번에 협조해 준다고 해 놓고 자꾸 반대하면 어떡하느냐’고 따져 묻기도 했다. 우는 아이 젖 준다는 말이 있듯이 우리가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 -지난 5월 행안위 회의장에도 들어갔는데. “당시 회의장이 난장판이었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발언권을 준다고 하더라. 80세를 전후한 우리 유족들이 또 얼마나 세월을 기다려야 할지, 그때까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지 막막하다고 했다. 유족들의 통한의 눈물을 닦아 줄 과거사법을 통과시켜 달라고 호소했다.” 과거사법 개정안은 노무현 정부 때 설립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를 다시 가동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한국전쟁 전후 시기에 불법적으로 이뤄진 민간인 집단 사망·상해·실종 사건도 다루게 된다. 20대 국회 들어 관련 법안만 7개나 발의됐지만 여야 대치 속에 논의가 진척되지 못하자 김 위원장은 지난 5월 유족회 회원들과 함께 학살 피해자 유해 40여구를 들고 국회 앞에서 농성을 벌였다. 6월 들어 속도가 나는 듯했지만 한국당이 상임위 의결 직전 이 법안을 안건조정위에 회부하겠다고 하면서 넉 달이 더 지체됐다. 그래도 김 위원장은 지난달 22일 행안위 전체회의에서 법안이 통과되자 “얼마나 기쁜지 눈물이 다 났다”고 말했다. -그 오랜 세월 체력이 부치지는 않았는지. “1960년 10월 전국유족회가 결성될 당시 총회가 열렸는데 그때 참석한 33명 중 유일한 생존자다. 끝을 내겠다는 심정이다.” 김 위원장은 경북 경주시 내남면 출신으로 경주유족회장도 맡고 있다. 한국전쟁 전후 시기에 내남면에서만 140명이 넘게 희생됐다고 한다. 그의 일가친척 22명도 빨갱이에 협조하는 ‘용공분자’(공산주의에 동조하는 사람)로 몰려 1949년 8월 1일 우익 청년단체인 민보단 단원들과 순경 등에 의해 총살됐다. 김 위원장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내남면 민보단장은 이후 3선 의원을 지낸 이모씨였다. 김 위원장 부친도 몰살당한 친척들을 매장하기 위해 현장에 갔다가 민보단원에게 두들겨 맞고 9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 -그 시절을 어떻게 견뎠나. “당시 국민학교 담임 선생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신사적 복수’를 하라고. 이씨보다 더 높은 지위에 오르라는 얘기였다. 등록금을 낼 형편도 안 됐지만 모친을 설득해 뒤늦게 공부를 했다. 경주에서 고등학교까지 다닌 뒤 서울대 법대에 진학했다. 졸업 후에는 시험을 쳐서 법무부 형정국(현 교정본부)에 들어갔다.”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 있었을 텐데 형정국을 그만둔 까닭은. “1960년 4·19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졌다. 부친과 집안 사람이 억울하게 돌아가셨는데 명예를 회복시켜 드려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나중에 복직시켜 주겠다는 약속을 받고 사표를 냈다. 경주로 내려와 이씨를 살인, 방화, 약탈 혐의로 고발했다. 이씨가 구속되자 상황이 달라지더라. 학살 피해자 유족 860여명이 모여들었다. 그렇게 경주유족회가 만들어졌고 젊은 나이에 회장직을 맡게 됐다. 그해 11월 4000여명(경찰 추산 2500명)이 참석한 가운데 경주 지역 양민피학살자 합동위령제를 지냈다.” -그런데 1년 만에 상황이 바뀌었다. “1961년 5·16쿠데타로 박정희 정권이 들어선 뒤 유족회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혁명재판소에서 재판을 받았다. 당시 검사는 소급 입법인 특수범죄처벌에 관한 특별법을 적용해 “사형에 해당하는 중죄이나 청춘이 아까워 무기징역을 구형한다”고 했다. 재판부는 7년을 선고했고, 중간에 사면을 받아 실제 복역한 기간은 2년이 좀 넘는다. 유족회 총무를 했던 쌍둥이 동생도 6개월을 복역했다. 반면 사형선고를 받았던 이씨는 증거불충분으로 나중에 무죄로 풀려났다.” -사면이 됐어도 요주의 인물로 분류돼 제약이 많았을 것 같다. “전담 경찰이 매일 집으로 왔다. 앞으로 취직은 못 하니까 장사를 하든지, 농사를 짓든지 양자택일하라고 하더라. ‘개천에서 용이 났다고 했는데 네가 어찌 이렇게 됐느냐’며 모친이 대성통곡했다.” -나라가 원망스러웠을 것 같다. “걱정하는 모친을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고 위로했다. 당시 개간 붐이 일었는데 약 6600㎡(약 2000평)를 직접 개간했다. 젊은 사람이 개간을 했다는 소문이 퍼졌는지 경주시장이 찾아왔다. 시장한테 유족회 회장이라고 소개하고 “직장 생활을 할 수 있게 해 달라”고 부탁을 했다. 얼마 안 돼 취업을 해도 좋다는 통보를 받았고, 지인이 운영하던 동방고등공민학교를 인수했다. 이후 불국사실업중학교, 경주여상 교장 등을 지냈다. 하지만 1989년 사회안전법이 폐지될 때까지 정보경찰도 교장실을 안방 드나들듯 찾아와 감시했다.” 경찰의 감시 속에 유족회와 멀어지는 듯했지만 김 위원장은 유족들의 부탁을 뿌리칠 수 없었다. 2010년 재심을 청구해 무죄를 확정받고 국가를 상대로 민사소송까지 끝낸 뒤 2015년 다시 경주유족회장을 맡았다. 55년 만이다.-어려운 길을 또 택했다. “해마다 위령제를 지내는데 장소가 여의치 않아 경주역, 예식장, 식당 등을 전전했다. 유족회장을 맡고 나서는 위령탑 건립을 추진했다. 경주시가 조례를 제정하고 1억 5000만원을 지원해 줬다. 2016년 경주 황성공원에 위령탑을 세우고 740여명의 희생자 이름을 새겼다. 당시 두려워서 신청을 못 한 희생자 가족들도 연락이 오고 있다. 추가로 이름을 새겨 나갈 예정이다.” -가족들은 걱정이 클 것 같다. “자녀들을 위해 다시는 유족회 활동을 하지 말라는 게 어머니와 아내의 유언이었다. 딸만 다섯인데 걱정하는 건 마찬가지다. 지난 추석 때도 가족들이 모였을 때 많이 설득을 했다. 아직 명예회복을 못 한 피해자 유족을 위해서라도 유종의 미를 거두고 싶다.” 글 사진 대구 김헌주 기자 dream@seoul.co.kr
  • 한양대 교수 “위안부 연구자들, 민족주의적 거짓말“…학생회 강력반발

    한양대 교수 “위안부 연구자들, 민족주의적 거짓말“…학생회 강력반발

    한양대 한 한국계 미국인 교수가 강의 중 “위안부 연구자들은 민족주의적 거짓말쟁이”라는 등의 발언을 내놓아 논란이 일고 있다. 학생들은 강력히 반발하며 사과를 요구하고 나섰다. 이 교수는 3년 전에도 위안부 비하 발언으로 단과대학 차원의 경고를 받았다. 1일 한양대 모 학과 학생회에 따르면 A교수는 이번 학기 전공수업에서 “위안부를 연구하는 한국 역사학자들은 정량적 연구를 활용하지 않고 5∼10명의 최악 사례에 주목해 전체 위안부를 일반화한다”며 “민족주의적 거짓말쟁이”라고 말했다. 또한 “위안부와 같은 민감한 주제에 관해 이야기하려면 그 수가 몇이었는지, 그중 좋지 못한 대우를 받은 수는 몇인지를 밝히라”라고도 했다. A교수는 친일 논란을 빚은 이영훈 이승만학당 교장 등의 저서 ‘반일 종족주의’를 수업시간에 인용하며 “한국 사학자들이 민족주의에 기반해 조작해낸, 진짜 현실이 아닌 ‘합의된 현실’에 새로운 패러다임의 전환을 가져오는 책”이라고 호평한 것으로 전해졌다. 해당 학과 학생회는 지난달 30일 대자보를 통해 “반성의 태도와 개선의 의지가 없다”며 A교수에게 공식 사과를 요구했다. 학생회는 영어로 진행된 강의 녹취록을 확보했으며 교내 인권센터 등을 통해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학생회는 “(문제가 불거지자) 교수가 면담을 통해 ‘다양한 방법론을 보여줘야 하는 강의에서 위안부에 대한 연구들을 단지 언급한 것뿐’이라고 답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학문의 다양성을 내세우며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편향적 시각으로 인권 침해적 발언과 역사 왜곡을 정당화하고 있다”며 “강의라는 명분으로 정당화될 수 없는 피해자들에 대한 인권모독”이라고 반박했다. 한양대 측은 “이번 사안을 엄중하게 바라보고 있다”며 “사실 관계를 확인하고자 면밀하게 조사하고 있고, 절차와 원칙에 따라 최대한 신속히 처리할 것”이라고 밝혔다. A교수는 2016년 자신의 위안부 관련 발언이 문제가 된 당시 단과대 학장의 구두경고를 받고 나서 이를 수용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이하영 기자 hiyoung@seoul.co.kr
  • 억겁의 시간 바람이 새긴 영원의 염원

    억겁의 시간 바람이 새긴 영원의 염원

    강원 고성의 국가지질공원을 찾아가는 길. 시간이 빚고 자연이 조탁한 풍경들이 있는 곳이다. 지질은 인간이 지구의 주인이 되기 이전 시대의 것들을 보여 준다. 그래서 그 나름의 매력이 있는 듯하다. 서낭바위와 능파대, 화진포호, 송지호 등을 돌아봤다. 모두 공룡이 이 땅을 지배하던 시절에 형성된 풍경들이다.# 영험한 기운이 서린 곳 ‘서낭바위’ 고성에서 국가지질공원으로 지정된 곳은 화진포와 송지호 해안(서낭바위), 고성 제3기 현무암(운봉산), 능파대 등 네 곳이다. 이 가운데 급경사로 오르기가 쉽지 않은 운봉산을 제외하면 대부분 평지에 있어 쉽게 접근할 수 있다.서낭바위가 있는 송지호 해안으로 먼저 간다. 강원평화지역국가지질공원 홈페이지는 서낭바위를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송지호해변 남쪽의 화강암지대에 발달한 암석해안으로 화강암의 풍화미지형(風化微地形)과 파도의 침식작용이 어우러져 매우 독특한 지형경관을 이루고 있다. 특히 화강암층 사이로 두터운 규장질 암맥(岩脈)이 파고든(관입) 형태를 이루어 독특한 경관을 형성한다.” 서낭바위 일대의 기반암은 화강암이다. 공룡들이 지구의 주인이었던 약 1억 7000만년 전 중생대 쥐라기에 형성됐다. 화강암은 풍화작용의 영향을 쉽게 받는다. 풍화가 한참 진행되면 사람 손으로도 부서질 만큼 약해진다. 이때 바위들이 울퉁불퉁한 모양새를 갖게 되는데 이를 풍화미지형이라 부른다. 불쑥 솟은 형태의 토르, 바위 평면에 구멍처럼 형성된 라마, 바위 측면을 따라 벌집처럼 뚫린 타포니 등이 이에 속한다. 화산활동이 한창일 때는 마그마가 이들 암석 사이로 관입하기도 한다. 서낭바위 일대엔 이 같은 지질현상들이 다양하게 펼쳐져 있다. 대표적인 게 부채바위다. 마그마가 파고든 암맥, 차별침식, 풍화 등의 과정을 거쳐 아주 독특한 형태를 갖게 됐다. 부채바위는 보는 각도에 따라 형태가 달라진다. 가장 닮은 건 문어가 아닐까 싶다. 과장을 좀 보태면 암컷 문어가 다리를 망토처럼 펄럭이며 먹이사냥 나가는 모습을 빼닮았다. 지구 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그렇듯 부채바위 역시 사라질 운명이다. 지구온난화로 인한 해수면 상승이 이를 부채질하고 있다. ‘문어의 머리’ 부위가 특히 그렇다. 언제 굴러떨어질지 알 수 없다. 지금도 목 부위가 가늘어져 콘크리트 등으로 덧댄 흔적이 보인다. 부채바위 옆 암벽에는 이른바 ‘여근석’이 있다. 건물이 완벽히 가리고 있어 눈에 띄지 않는다. 건물 뒤로 돌아가야 비로소 보인다. 이 일대를 ‘음양이 조화를 이룬 공간’이라고 보는 이도 있다. ‘돌출된’ 바위들과 여근석이 함께 있다는 이유에서다. 물론 믿거나 말거나다. 문암리 등 이 일대에서 나무로 깎은 남근을 제물로 바치는 별신제가 이어져 오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듯하다. 나라 안에서 남근을 바치는 제의 풍습이 남은 곳은 고성 문암과 삼척 신남 등 두 곳인 것으로 전해진다. 서낭바위는 오호리 마을의 서낭당(성황당)이 위치한 것에서 유래했다. 서낭당은 마을의 수호신인 서낭신을 모신 신성한 장소다. 넓지 않은 구역이지만 어딘가 범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지는 건 그 때문이지 싶다. 이 일대는 최근에 알려졌다. 군사시설로 통제되다 일반인의 출입이 허용되면서 비로소 빛을 보게 됐다. 무속인들에게는 영험한 곳으로 입소문이 나는 중이다. 특히 부채바위 등 독특하게 생긴 바위마다 치성을 올리는 무속인들의 발걸음이 분주하다.# 능파대·화진포호·송지호… 굴곡진 시간의 풍경들 화진포호는 고성 북쪽에 있다. 우리나라에서 규모가 가장 큰 석호(潟湖)다. 후빙기(後氷期)인 신생대 제4기를 대표하는 지형으로, 약 3000년 전쯤 지금과 같은 호수의 형태를 갖춘 것으로 추정된다. 석호에선 바닷물과 민물이 섞이는 ‘갯터짐’ 현상이 일어난다. 이 덕에 해양과 민물 생물이 함께 살아가는 독특한 자연환경이 형성됐다. 화진포호는 두 개의 호수가 8자 모양으로 연결된 형태다. 남호가 더 크고, 바다와 통하는 물길은 북호에 있다. 화진포 뒤 응봉(122m)에 오르면 호수 전경이 한눈에 담긴다. 응봉 정상까지는 등산로를 따라 30분 남짓 걸어 올라야 한다. 호수 주변에 이승만, 김일성, 이기붕 등 당대 권력자들의 별장이 남아 있다. 겨울에는 큰고니(백조, 천연기념물 201호) 등 수많은 겨울 철새의 낙원으로 변한다. 거진항에서 화진포호까지 이어진 해안도로를 달리는 재미도 쏠쏠하다.고성 남쪽의 능파대는 타포니 지형이 압도적인 풍광을 선사하는 곳이다. 벌집처럼 구멍이 숭숭 뚫린 바위, 티스푼으로 땅콩버터를 여기저기 퍼낸 듯한 바위 등 특이한 형태의 바위들이 늘어서 있다. ‘파도를 능가하는 돌섬’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풍경이다. 타포니는 암석의 측면에 벌집처럼 파인 구멍들을 이르는 말이다. 이런 형태를 만든 건 소금기다. 수없이 긴 시간 동안 화강암의 틈을 파고들어 간 염분이 바위를 부숴 이 절경을 만들어 냈다.고성에서 요즘 뜨는 명소 몇 곳을 덧붙이자. 토성면의 문베어 브루잉 탭하우스는 수제 맥주를 즐길 수 있는 곳이다. 고성에서 가장 ‘힙’한 곳으로 꼽힌다. 문베어는 지하 200m에서 퍼 올린 물로 맥주를 빚는다고 한다. 건물 1층은 브루어리, 2층은 펍이다. 판매하는 맥주는 금강산 골든에일 등 세 종류다. 가진해변 옆의 ‘카페 테일’은 가정집을 카페로 개조했다. 매장 안에서 커피를 마시는 것도 좋지만 피크닉 세트를 빌려 바닷가에서 마시는 재미가 각별하다. ‘카페 달홀’도 입소문 난 곳. 고구려 때 고성 지역을 일컫던 옛 지명 ‘달홀’(達忽)을 업소 이름으로 썼다. 바다를 보며 커피를 마실 수 있다. 봉포해변에 있다.# 달밤 안주 삼아 수제 맥주 한잔… 설악산 이불 삼아 꿀잠 밤이면 미시령 옛길을 찾아보자. 옛 휴게소 자리에서 굽어보는 속초 야경이 퍽 로맨틱하다. 수많은 별을 이고 있는 울산바위의 자태도 낮과는 사뭇 다른 느낌을 준다. 켄싱턴리조트 설악밸리가 1일 문을 연다. 설악산 일대에 처음 들어서는 단독형 리조트여서 고성, 속초 지역 관광 활성화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것으로 예상된다. 설악밸리는 켄싱턴호텔앤드리조트가 운영하는 20여개 리조트 가운데 최상위 등급 숙소다. 토성면 옛 고성 잼버리장 인근에 터를 잡아 번잡하지 않은 적요한 분위기가 일품이다. 설악산 울산바위 조망도 좋고 멀리 동해바다를 굽어보는 맛이 있다. 내부 인테리어는 친환경 목재 등으로 마감했다. 리조트 단지 옆으로는 신선호(연못)와 화암사까지 다녀오는 산책로, 해먹 존, 사슴목장 등이 조성됐다. 밤에는 신선호 주변에서 빛의 축제가 열린다. 객실은 모두 144실이다. 바젤(17실), 루체른(35실) 등 단독형 객실과 로잔(36실), 베른(56실) 등 연립형 객실로 구성됐다. 객실마다 2~3개의 침실을 둬 가족 단위 여행객에게 최적화했다. 이번 소프트 오픈 이후 가족농장 등 부대시설을 강화한 뒤 내년 봄에 그랜드 오픈할 예정이다. 글 사진 고성 손원천 선임기자 angler@seoul.co.kr
  • ‘범죄는 조선인’ 日극우세력 혐한 전시회, 공공기관에서 버젓이

    ‘범죄는 조선인’ 日극우세력 혐한 전시회, 공공기관에서 버젓이

    일본 극우세력들이 주도한 ‘혐한 전시회’가 일본 지방자치단체의 공공시설에서 버젓이 개최돼 파문이 일고 있다. 자지체장은 뒤늦게 법적 조치를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한일 단교’, ‘반이민’ 등을 내건 극우세력 정치단체인 일본제일당은 지난 27일 ‘일본인을 위한 예술제 아이치 토리카에나하레 2019-표현의 자유전’을 열었다. 지난 8월 위안부 피해자를 상징하는 ‘평화의 소녀상’ 등을 전시했다가 일본 정부와 우익세력의 압력 및 협박에 전시가 중단됐던 진보진영 작가들의 전시회 ‘아이치 트리엔날레 2019-표현의 부자유전·그 후’의 제목을 비튼 것이다. 전시는 재일 한국인과 아이치 트리엔날레 관계자들에 대한 혐오를 부추기는 것들로 채워졌다. 이승만 전 대통령의 초상화가 불타는 장면이 담긴 영상이 상영됐고 ‘범죄는 언제나 조선인’ 등 혐한 내용이 적힌 카드 등도 전시됐다. 일본제일당 대표이자 대표적 혐한단체 ’재일 특권을 용납하지 않는 시민의 모임‘(재특회)의 전 회장 사쿠라이 마코토가 흰색 저고리에 검정색 치마를 입고 평화의 소녀상을 조롱하는 퍼포먼스와 연설을 했다.‘헤이트스피치‘(혐오선동발언)에 반대하는 일본 시민단체는 전시 장소인 아이치현 여성종합문화센터 윌아이치에 “부당한 차별적 언동을 할 경우 시설 이용을 불허할 수 있다”는 아이치현의 시설이용규정을 근거로 행사를 중단시키라고 요구했지만, 윌아이치 측은 “판단이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거부했다. 아이치 트리엔날레 실행위원장을 맡았던 오무라 히데아키 아이치현 지사는 29일 기자회견을 열고 이 전시회를 헤이트스피치 행사로 규정하고 “윌아이치 측이 행사를 중단시키지 않은 것은 부적절했다”고 지적했다. 오무라 지사는 “전시를 중단시키지 않고 진행한 윌아이치에 대해 법적 조치 여부를 포함해 가능한 대응 조치를 검토하라고 지시했다”며 일본제일당에 대한 법적 조치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이런 (헤이트스피치) 활동을 어떻게 막을지는 솔직히 말해 매우 어려운 과제로, 많은 분들의 다양한 지혜를 모으고 싶다”고 했다. 도쿄 김태균 특파원 windsea@seoul.co.kr
  • 남영동서 되새기는 대한민국 민주주의 100년…기획전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남영동서 되새기는 대한민국 민주주의 100년…기획전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인권 유린과 말살의 참혹한 공간이었던 옛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 자리에서 대한민국 민주주의 100년사를 되새기는 기획 전시가 열린다. 일제로부터의 독립운동과 군부 독재정권에 맞선 민중 투쟁은 물론 노동계 투쟁의 역사까지 총망라했다.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는 29일 남영동 민주인권기념관에서 ‘대한민국 민주주의 100년-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기획전을 개최한다. 독립운동 정신을 계승한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발자취를 살펴보고, 새로운 대한민국 미래를 구상하기 위해 기획됐다. 전시는 크게 ▲전시주제관 ▲독립운동관 ▲반독재투쟁관 ▲노동100년관 ▲시민관 등으로 구성됐다. 1919년부터 2019년까지 100년간 국민이 이끌어 온 한국 민주화의 흐름을 100여 점의 사진과 ‘기미독립선언서’ 등 150여 점의 기록물 등을 통해 보여준다. 민주화와 관련된 다양한 자료를 액자에 담아 갤러리 형식으로 전시관을 마련했다. 별관 1층 ‘전시주제관’에서는 ‘우리 헌법의 역사와 민주주의’를 주제로 1919년 3·1운동부터 현재까지 민중의 피와 땀, 지혜로 일군 민주주의를 헌법 변화와 주요 사건으로 살펴본다. ‘대한민국 민주주의 100장면’과 임시정부 당시 임시헌장과 건국강령 제정을 주도한 조소앙 선생 육성 연설과 메시지 등도 직접 확인할 수 있다. 본관 4층 ‘독립운동관’에서는 ‘민주주의의 출발, 독립운동’을 주제로 좌우합작 독립운동사와 독립운동 전체 흐름 등을 살펴볼 수 있다. ‘독재의 그늘과 시민의 저항’을 주제로 한 본관 3층 ‘반독재투쟁관’은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으로 이어진 독재정권에 항거하며 민주주의를 쟁취한 발자취를 따라간다.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노순택의 ‘망각기계’ 연작 시리즈도 함께 전시된다.이 밖에 본관 3층 ‘노동100년관’에는 ‘일하는 사람들의 100년’을 주제로 과거부터 현재까지 이어온 일에 대한 기록을 ‘노동 100년 연표’로 돌아보고, 일하는 사람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마주하는 공간이 마련됐다. 마지막 전시관인 ‘시민관’은 ‘민주주의의 미래, 시민’을 주제로 1987년 6·10민주항쟁 이후 변화한 시민운동과 법 개정 과정을 살펴본다. 지선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은 “대한민국의 바탕이 되는 ‘민주주의’ 역사가 시작된 것은 100년 전인 1919년 3·1만세운동과 그해 4월 출범한 임시정부 수립으로부터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며 “이번 전시가 100년 동안 민주주의를 발전시켜온 우리 시민의 노력을 다 같이 보고 들으며 가슴 속에 공감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전시는 무료로 다음 달 30일까지 이어지며, 매주 월요일은 휴관. 박성국 기자 psk@seoul.co.kr
  • ‘왕의 기운’ 서린 낙산서 넉넉한 품·뛰어난 풍광을 보다

    ‘왕의 기운’ 서린 낙산서 넉넉한 품·뛰어난 풍광을 보다

    서울신문이 서울시, 사단법인 서울도시문화연구원과 함께하는 2019서울미래유산-그랜드투어 ‘제26차 서울의 영화4’ (유현목 감독의 수학여행) 편이 지난 19일 종로구 연건동과 명륜동, 이화동 일대에서 2시간 동안 진행됐다. 서울미래유산을 사랑하는 참석자 40여명은 이날 오전 10시 혜화역 3번 출구에서 집결, 서울대학교병원 안 옛 대한의원(의학박물관)을 향해 출발했다. 대한의원은 1907년에 준공된 서울대병원의 뿌리다. 새로 건립된 암병원 4층 옥상은 창경궁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조망 명소로 떠올랐다. 옛 창경원을 무대로 촬영된 영화를 되새김질하기에 좋은 곳이었다. 명륜동 한옥밀집거리를 지나 건축가 김수근의 붉은 벽돌건물 감상길에 올랐다. 김수근이 누이 김순자와 자형 박고석을 위해 설계한 명륜동4가 ‘고석공간’을 거쳐 샘터사옥~아르코 예술극장~아르코 미술관이 줄줄이 이어졌다. 박길룡이 설계한 옛 경성제국대학 본관(예술가의 집) 현관 앞 두 그루 감나무에는 주렁주렁 매달린 감이 불타고 있었다. 내년 1월 중 수리가 끝난다는 이화장을 먼발치에서 바라본 뒤 1897년 탑골공원 대문기둥을 가져다 세운 옛 서울법대(서울사대부속초등학교) 정문 앞에서 일정을 파했다. 이날의 서울미래유산은 무형유산인 영화 ‘수학여행’과 유형유산인 대한의원, 명륜동 한옥밀집거리, 샘터사옥, 마로니에공원, 아르코 예술극장, 아르코 미술관 등 모두 7개였다. 참석자들은 “영화를 꼭 보고 싶어졌다”, “50년 전 수학여행을 다녀온 기분”, “알뜰한 설명을 해준 해설사가 담임선생님으로 출연해도 좋을 듯…” 등등의 답사 후기를 남겼다. 해설을 맡은 전혜경 서울도시문화지도사는 참석자들을 50년 전 꿈의 서울 수학여행으로 인도했다.서울의 좌청룡 낙산(해발 126m)은 비록 낮지만 품이 넉넉하고 풍광이 뛰어난 산이었다. 종로구 이화동·동숭동·창신동을 끼고 있고 동대문구 신설동과 성북구 보문동·삼선동 등 3개 자치구까지 길게 이어진다. 낙산은 풍수도참설의 피해자였다. 조선이 한양을 도읍으로 정할 때 장자(맏아들)와 친가를 뜻하는 좌청룡 낙산이 차자(작은아들)와 처가를 뜻하는 우백호 인왕산(338m)보다 낮아 장자와 친가가 차자와 처가에 기울어진다는 변고설이 끊이질 않았기 때문이다. 정도전 등 신진 사대부들이 주장한 ‘백악 주산론’과 무학대사를 중심한 불교세력의 ‘인왕산 주산론’이 팽팽하게 맞선 까닭이다. 태종 때 하륜의 ‘무악 주산론’까지 등장해 치열한 삼파전을 벌였다. 결과적으로 백악산이 최후의 승리를 거둬 경복궁이 법궁이 되면서 조선은 장자 승계의 원칙이 어그러졌다. 조선 27명의 왕 중 장자는 5대 문종, 6대 단종, 10대 연산군, 12대 인종, 18대 현종, 19대 숙종, 20대 경종, 27대 순종 등 8명에 불과했다. 42년 동안 재위하면서 최악의 여난에 시달린 숙종을 제외하면 대부분 병약하거나 재위 기간이 짧거나 존재감이 없었다. 임진왜란 때 불탄 경복궁을 재건하지 않고 296년 동안 창덕궁을 법궁으로 사용한 것도 기가 센 인왕산과 거리를 둔 결과다.낙산 기슭에는 제17대 효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 봉림대군 시절에 살던 잠저 용흥궁과 손아래 동생 인평대군의 석양루가 사이좋게 마주 보고 있었다. 흥선대원군의 부친 남연군이 인평대군의 7대손이므로 조선의 마지막 왕 고종과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순종은 인평대군의 직계후손이다. 공과를 떠나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을 탄생시킨 이화장은 인평대군의 왕기가 서린 석양루를 품고 있다. 조선 한문 4대가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 문장가 장유는 “집터를 물색하며 거북이에 물어보니 저 낙산 언덕을 점지했다. 냇물이 반으로 나뉘어 두 갈래로 흐르는 이곳이야말로 평소 낙양(한양) 동촌의 승지(명승지)로 일컬어져 온 곳이다. 금원(창경궁)과 가까워 북극성(왕)의 존엄한 처소를 우러러볼 수 있어 더욱 좋다”라고 ‘인평대군의 새 저택에 대한 상량문’에서 석양루의 땅기운을 치켜세웠다. 냇물이 반으로 나뉘어 흐른다는 얘기는 성균관 위 옛 흥덕사에서 흘러내린 흥덕천의 흐름을 말한다. 성균관 또한 반궁이라 해 반수의 상류를 지칭하고 하류는 성균관 노비들이 사는 반촌이라고 일컬었다. 석양루는 신숙주의 손자 신광한의 옛 집터에 세워졌다. 신광한은 “나는 집 이름을 기재라고 했다. 우리 집은 동쪽 산이 우뚝 솟아 있는데 그 산을 보려면 발꿈치를 들어 바라보면 되고. 우리 집 서쪽 길이 평평하고 곧은데 그 길을 가려면 발꿈치를 들고 가면 된다. 우리 집 앞에는 하천이 콸콸 흘러가는데 물이 흘러가서 쉬지 않는 것을 보면 발꿈치를 들어 감탄하게 된다. 우리 집 뒤쪽에는 소나무가 무성하게 서 있는데 겨울철에도 시들지 않는 것을 보면 발꿈치를 들어 바라보게 된다…”고 자택을 자화자찬했다. 사람들은 이 집이 있는 언덕을 신대라고 불렀다. 왕을 6명이나 섬겼고, 영의정을 2번 지내면서 국방과 외교에 공을 세웠던 신숙주의 음덕이었다. 조선 말 역사가 김택영이 지은 역사책 ‘한사경’에 따르면 “좌의정 신숙주가 노산군(단종)의 부인(정순왕후)을 노비로 삼고자 주청했으나 왕(세조)이 윤허하지 않았다”는 대목이 나온다. 또 “신숙주가 단종 부인을 노비로 삼겠다고 청한 것은 매우 간사하고 악한 것”이라고 평했다. 한때 주군으로 모셨던 왕의 부인을 첩으로 삼고자 한 행위를 비판한 것이다. 조카를 죽인 비정한 세조였지만 청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리고 그 누구도 조카며느리를 범하지 못하도록 낙산 동망봉 정업원에 비구니로 출가시켜 버렸다. 신대로 상징되는 신숙주 가문의 영광은 오래가지 못했다. 세종~문종~단종에 대한 의리를 저버리고 세조의 편에 서면서 영화를 누렸으나 조선 후기 집권한 사림파가 사육신을 추앙하면서 변절자로 낙인찍었기 때문이다. 대신 ‘숙주나물’이라는 오명이 따라다녔다.서울을 중심으로 저술한 인문지리서 ‘동국여지비고’에 “인평대군 집을 석양루라고 불렀다. 기와와 벽 등에 그림이 새겨져 있고 규모가 크고 화려해서 서울 장안에서도 으뜸가는 집이었다. 지금은 장생전(궁중 장례식에 쓰일 관을 제작하던 관아)이 됐다”고 기록했다. 낙산 아래 신대와 용흥궁, 낙양루, 장생전의 옛 땅에서 조선의 효종, 고종, 순종 등 3명의 왕과 대한민국 초대 이승만 대통령이 나왔다. 현재 이화장 뒤뜰은 신대요, 대문 앞 주차장은 저녁볕이 좋은 낙양루이며, 마주 보는 곳에 효종의 잠저인 용흥궁이 있었다. 또 이곳에는 조선 최고의 화가 김홍도의 스승인 표암 강세황도 기거했다. 18세기 문인화의 대가 표암이 낙양루 바위에 남긴 ‘紅泉翠壁’(홍천취벽)이라는 글씨가 이화장을 짓는 과정에서 사라졌다. 1960년대까지도 남아 있었지만 계곡에 집이 들어서면서 어딘가 묻혀 버렸다고 한다. 이화장은 1945년 오랜 망명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한 이승만이 돈암장과 마포장을 전전하자 지지자 30여명이 모금운동을 펼쳐 구입해준 집이다. 마포장에서 백주테러의 위기를 넘긴 이승만에게는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여 경비에 용이한 이 집이 적격이었다. 마당에는 이승만 동상이 서 있고, 이승만기념관이 있다. 산사의 칠성당을 연상시키는 숲속의 별채가 조각당이다. 1948년 제헌의회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승만이 이곳으로 내각 후보자를 불러 면담한 뒤 국무총리와 12부 장관을 뽑은 정부 수립의 산실이다. 4·19 혁명으로 하야한 뒤 이곳에서 여생을 마치길 원했지만 미국 하와이로 쫓겨났다. 1965년 사후 국내로 운구된 시신이 잠시 봉안됐고, 미망인 프란체스카 여사는 1970년 귀국해서 1992년까지 살았다. 글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 원장사진 김학영 연구위원 ■다음 일정 : 제27차 관악산 아랫마을 ■집결 장소 : 10월 26일(토) 오전 10시 사당역 6번 출구 ■신청(무료) : 서울미래유산 홈페이지(http://futureheritage.seoul.go.kr) ■문의 :㈔서울도시문화연구원(www.suci.kr)
  • [흥미진진 견문기] 장안 3대 건물 중 하나인 ‘대한의원’ 100여년 역사 실감

    [흥미진진 견문기] 장안 3대 건물 중 하나인 ‘대한의원’ 100여년 역사 실감

    단풍잎이 하나, 둘 물들고 감이 익어가는 화창한 투어 날 첫 방문지 대한의원으로 향했다. 대한의원은 지어졌을 당시 장안의 3대 건물 중 하나로 이름을 떨쳤다는데 지금 봐도 붉은 벽돌의 외관은 품위 있고 아름다웠다. 내부의 삐걱거리는 계단은 100여년이 넘은 건물의 역사를 실감 나게 했으며, 2층 의학박물관은 우리나라 의학의 역사와 ‘구보 교수 망언 사건’, ‘1920년대 말을 타고 왕진을 가는 모습’ 등 의학과 관련된 다양한 얘기가 전시돼 흥미를 끌기에 충분했다. 서울대학교병원 암병동 옥상에 올라 눈앞에 시원스레 펼쳐진 창경궁의 전경을 바라보며 전혜경 해설사의 다정한 목소리로 창경궁의 역사와 영화 ‘수학여행’의 얘기를 들었다. 홍화문 앞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선생님을 기다리는 순박한 영화 속 아이들 모습과 당시 유원지였던 창경원에 소풍을 와서 멋모르고 좋아했던 내 초등학교 시절의 모습이 오버랩 됐다. 영화 속 아이들의 좌충우돌 수학 여행기를 통해 선유도 섬마을의 모습과 생활상을 엿볼 수 있었다. 대학로로 넘어가는 길에 만난 명륜동 ‘고석공간’은 김수근이 누이를 위해 지었다는 얘기에 왠지 정감이 느껴졌고, 동숭동에 있는 김수근의 붉은 벽돌 건축물들에 대한 기대감을 높였다. 내부공간과 외부공간이 이어지는 샘터사옥을 지나 아르코 예술극장과 아르코 미술관이 둘러싼 오래된 고목들이 운치를 더하는 마로니에 공원으로 들어섰다. 김수근 건축물의 울퉁불퉁 붉은 벽은 햇살을 받아 벽돌의 육중함을 덜어내고 마로니에 공원에 활기를 불어넣고 있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이 거주했던 이화장에 도착했으나 수리 중이라 내부를 볼 수 없어 아쉬웠고, 마지막 장소인 서울사대부속초등학교에 이르렀다. 탑골공원 정문에 있던 기둥이 독립정신을 학생들에게 키워주기 위해 이곳으로 옮겨져 학교 정문 기둥으로 사용하게 됐다는 얘기를 들으며 영화 ‘수학여행’ 속 선생님이 떠올랐다. 팍팍한 삶을 사는 섬마을 아이들에게 넓은 세상을 경험하게 하고, 희망과 꿈을 주고 싶었던 선생님의 따뜻한 관심과 노력은 이 시대를 사는 우리가 본받아야 할 마음이 아닐까. 황미선 책마루독서교육연구회 연구원
  • 청남대에 임시정부 기념공원 조성

    청남대에 임시정부 기념공원 조성

    충북도가 옛 대통령 전용별장인 청남대를 활용해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을 벌인다. 도는 청남대 골프장 일부 부지에 임시정부 기념공원과 역사교육관을 건립한다고 23일 밝혔다. 조각공원 개념인 기념공원에는 임시정부 수반을 지낸 여덟분의 동상이 배치된다. 이승만·박은식·이상룡·홍진·김구 등 다섯분 동상은 이미 완성됐고, 이동녕·송병조·양기택 등 세분 동상은 제작이 마무리단계다. 동상 크기는 실물 1.5배다.2022년 완공예정인 역사교육관은 2600㎡(지하1층,지상 2층) 규모로 지어진다. 국비 30억원 등 총 80억원이 투입된다. 교육관에는 임시정부 수반들의 업적을 담은 역사기록화 여덟점과 수반들이 사용했던 도장 등 관련 자료가 전시될 예정이다. 가로 3m, 세로 2m 크기인 기록화는 작업이 끝나 현재 청남대 업무동 1층에 임시 전시중이다. 김구 선생 기록화는 백범일지와 김구 선생의 의연한 모습, 한인애국단 활약상, 광복군의 항일투쟁 모습을 역동적으로 표현했다.도는 기록관 준공에 앞서 내년 4월쯤 전국 광복회원과 독립유공자 후손 등 보훈가족들을 초청해 기념공원 개막행사를 가질 계획이다. 도 관계자는 “임시정부 수반도 대통령 역할을 해 대통령 테마관광지인 청남대에 모시게 됐다”며 “이번 사업을 통해 청남대는 역대 임시정부 수반과 대통령을 한자리에서 볼수 있는 유일한 곳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청주시 문의면에 위치한 청남대는 1983년부터 20년간 대통령 전용별장으로 사용되다 2003년 민간에 개방됐다. 청주 남인우 기자 niw7263@seoul.co.kr
  • 한국 최초의 여성 경무관 독립운동가 황현숙 선생

    한국 최초의 여성 경무관 독립운동가 황현숙 선생

    독립유공자 황현숙(1902~1964) 선생이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경무관이라는 사실이 새로 확인됐다. 경찰청은 황현숙 선생이 1948년 경무관으로 특채돼 당시 치안국 여자경찰과 과장에 임명된 사실을 확인했다고 22일 밝혔다. 그동안 최초의 여성 경무관은 2004년 승진한 김인옥 전 제주지방경찰청장으로 알려져 있었다. 경찰은 1946년 7월 경무부 공안국에 여자경찰과를 설치하면서 여성 경찰 제도를 도입했다. 1947년 수도경찰청에 여자경찰서를 처음으로 만들었고, 같은 해 7월 부산, 대구, 인천에도 여자경찰서가 세워졌다. 당시 안창호 선생의 조카딸인 안맥결 총경, 유관순 열사의 올케인 노마리아 경감 등이 여성 경찰로 활동했다. 황 선생은 1919년 3월 20일 직접 만든 태극기를 들고 충남 천안 입장면에서 만세운동을 이끌다 공주형무소에 갇혔고, 이때 유관순 열사와 함께 복역한 독립운동가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 때는 동맹휴학의 배후로 지목돼 투옥됐다. 정부 수립 후 초대 내무장관 윤치영의 권유로 경찰에 입문한 그는 1950년 퇴임 이후 ‘조선여자국민당’을 창당했다. 또 이승만 전 대통령, 김구 선생 등과 함께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위원’으로도 활동했다. 경찰청 관계자는 “현재까지 여성 5명을 포함한 55명의 독립운동가 출신 경찰을 확인했다”며 “앞으로도 조국을 위해 헌신한 독립운동가 출신 경찰관을 발굴해 참된 경찰 정신의 표상으로 기리겠다”고 말했다. 홍인기 기자 ikik@seoul.co.kr
  • [길섶에서] 세상 생각/손성진 논설고문

    기자랍시며 현학적인 낱말 몇 개로 잘난 척하는 짓이 부끄러운 줄은 안다. 정작 깊은 덕망과 식견을 가진 이들은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는 음지에서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업덕을 쌓고 있다. 그런가 하면 한 돈쭝도 안 되는 얄팍한 지식으로 학자인 척, 최고인 척하며 설치는 사람들은 보기에도 꼴사납다. 시절이 하수상해질수록 은둔한 재목들은 현실과 담을 쌓고 꼭꼭 숨어버리니 얼치기들이 더욱 날뛴다. 그런 사람들이 앞으로 나서고, 또 나서도록 이끌고 밀어줘야 하는데 그러지 않으니 문제다. 세상이 시끄러울 때 선비들이 초야에 묻혀 학문을 닦는 데 몰두한 것은 조선시대에도 그랬긴 하다. 정치나 사회나, 이리저리 흔들리는 시국의 중심을 잡아줄 원로들은 어디에 있는지, 괜히 남 탓하며 문득 원망을 느낄 때가 있다. 독재 정치가 이승만도 가인 김병로 선생 같은 인물을 중용함으로써 자신의 마음이 완전히 비뚤어지지 않았음을 보여 주었다. 가인과 같은 시대의 표상이 있었기에 지금까지 도덕과 윤리의 붕괴만은 막을 수 있었다고 굳게 믿는다. 좌든 우든, 옳은 소리라고는 할 줄 모르는 위정자들을 볼 때 이 시대가 수십, 수백 년 전보다 조금도 나을 것 없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삭일 수 없다. sonsj@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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