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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 정치에 국민은 큰 불신·불만, 87년 체제엔 한계… 도약 위해 개혁해야 [대한민국은 선진국인가]

    한국 정치에 국민은 큰 불신·불만, 87년 체제엔 한계… 도약 위해 개혁해야 [대한민국은 선진국인가]

    1987년 민주화 이후 3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간 한국 정치는 많은 변화의 과정을 겪었다. 독재와 장기집권 그리고 이를 위한 선거 부정과 헌정 왜곡으로 점철됐던 과거와 달리 이제는 전반적으로 공정하고 자유로운 선거 경쟁이 확립됐고 정당 간 권력 교체도 일반적인 것이 됐다. 하지만 정치권에 대한 국민의 불신과 불만은 대단히 높다. 지금 우리 정치는 어디에 서 있을까?전두환 군사 정권에 대한 국민 저항이 한국의 민주화를 이끌었지만 사실 그 당시 민주화는 우리나라만의 일은 아니었다. 우리와 비슷한 시기에 전 세계 수십 개 국가가 민주화를 이뤘다. 1970년대 중반 그리스, 스페인, 포르투갈에서 시작된 민주화의 흐름은 브라질, 아르헨티나 등 남미로 이어졌고 다시 필리핀, 인도네시아, 대만, 한국 등 아시아로 넘어왔다. 그 뒤 소련과 동유럽 공산주의가 무너지면서 구동구권이 민주화됐고, 만델라의 남아공을 필두로 아프리카 지역으로까지 확대됐다. 이처럼 1970년대 중반 이후 약 30여년간 세계 곳곳에서 민주화가 실현됐다. 정치학자 새뮤얼 헌팅턴은 이를 두고 민주화의 ‘제3의 물결’이라고 불렀다.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전 세계가 자유민주주의 체제로 귀결되는 ‘역사의 종언’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이후 시간이 흐르면서 각국의 정치는 서로 다른 모습으로 변모해 갔다. 민주화가 모든 나라에서 반드시 안정된 민주주의로 나아간 것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최근 들어서는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모습이 곳곳에서 목도되고 있다. 푸틴의 일인 지배 체제가 구축된 러시아는 말할 것도 없고 헝가리, 폴란드, 튀르키예 등 한때 민주화를 이뤘던 국가에서 명백한 민주주의의 후퇴가 나타나고 있다. 한번 민주화를 이뤘다고 해서 그것이 저절로 그 나라의 민주주의를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한국의 민주주의는 다른 나라와 비교할 때 어떤 평가를 받고 있을까. 영국의 시사저널 이코노미스트는 세계 167개국을 대상으로 매년 민주주의 지수(democracy index)를 조사한다. 선거 과정과 다원주의, 시민 자유, 정부 기능, 정치 참여, 정치 문화 등 다섯 가지 기준에 의한 평가를 통해, 각국의 민주주의를 ‘완전한 민주주의’, ‘결점 있는 민주주의’, ‘혼합 체제’, ‘권위주의 체제’로 구분하고 나라별 순위도 매긴다. 지난해 조사에 따르면 한국은 전체 167개국 중 16위로, 21개 국가만이 포함된 ‘완전한 민주주의’ 국가로 평가받았다. 참고로 북한은 165위였다. 또한 스웨덴 예테보리대 정치학과에서 조사하는 민주주의 다양성(V-Dem) 조사에서도 한국은 조사 대상 180개 국가 중 상위 10%만이 속하는 선진 민주주의 국가로 평가받았다. 이처럼 한국은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작동이라는 점에서 선진국으로 평가받고 있다. 한국이 ‘민주주의 포럼’이나 ‘G7(주요 7개국) 플러스’ 회합에 초청받는 등 국제사회에서 인정받고 있는 것이나 유엔을 비롯한 각종 국제기구에서 보다 큰 역할을 맡게 된 것도 시민적 자유와 인권, 언론의 자유, 법의 지배 등 국제사회의 보편적인 규범을 준수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또한 영화, 드라마, 음악 등 K컬처의 확산 역시 민주주의 진전과 함께 자유로운 상상과 표현이 허용된 결과이다. 하지만 이런 외부의 높은 평가는 사실 우리 국민 대다수에게는 와닿지 않는다. 오히려 상당수 국민은 이런 평가가 오히려 뜻밖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눈앞의 한국 정치는 불만과 불신의 대상일 뿐 긍정과 희망의 모습을 찾기 힘들기 때문이다. 한국 민주주의에 대한 외부와 내부의 상반된 평가는 우리 정치가 다시 기로(岐路)에 서 있게 됐음을 의미한다. 민주주의를 평가하는 외부 기관의 관점은 민주주의의 작동에 대한 것이다. 공정하고 자유로운 선거, 법과 제도에 따른 통치, 정치적 반대의 허용과 다원주의, 시민의 자유와 권리 보장 등이 측정 지표이다. 그런데 민주화 당시의 구호였던 ‘대통령 직선제 개헌’으로 요약되는 ‘87년 체제’가 추구했던 목표가 바로 이것이었다. ‘민주주의 선진국’으로 평가받게 된 것은 지난 30여년간의 노력을 통해 1987년 당시 우리가 소망했던 바를 어느 정도 실현했다는 점을 입증해 주는 것이다. 이러한 성취에도 불구하고 한국 정치에 대한 국민의 불만과 불신이 높다는 것은 이제 ‘87년 체제’가 한계에 다다랐다는 것을 의미한다. 제도적으로 볼 때 ‘87년 체제’는 대통령 직선제와 지역주의에 기반한 양당 정치를 특징으로 한다. 그런데 대통령제에 대한 당시의 관심은 ‘대통령을 내 손으로 뽑겠다’는 데 집중돼 있었을 뿐, 권위주의 체제하에서 강화돼 온 대통령의 강력한 권력을 분산해야 한다는 데 대해서는 큰 문제의식이 없었다. 즉 87년 체제는 강력한 권력을 지닌 대통령을 민주적 방식으로 선출하겠다는 것이었다. 더욱이 87년 체제는 대통령이 되고 싶어 했던 김영삼, 김대중이라는 두 정치 지도자와 분리해서 생각하기 어렵다. 사실 우리나라에서 대통령제가 도입되고 유지돼 온 가장 중요한 원인은 바로 강력한 대통령, 그들 때문이었다. 이런 우리의 특성은 기존에 존재하던 13개의 국가를 하나로 묶어 내기 위한 제도적 필요에서 만들어진 미국 대통령제와 다른 점이다. 제헌국회 때 헌법기초위원회가 합의한 내각제 정부 형태가 하루아침에 대통령제로 바뀐 건 이승만 때문이었다. 내각제였던 제2공화국을 무너뜨리고 다시 강력한 대통령제를 도입한 건 박정희였다. 그리고 민주화의 열기를 ‘대통령 직선제 개헌’으로 묶어 낸 것은 김영삼, 김대중이었다. 한국의 대통령제는 정치적 풍파를 겪으면서 형성된 강한 카리스마와 권위를 갖춘 이러한 정치 리더의 존재를 전제로 유지됐다. 여러 가지 경제적, 사회적 어려움을 걸출한 정치 지도자가 나타나 일거에 해결해 줄 것이라는 유권자의 기대 심리는 이런 역사적 경험 속에서 형성된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독립운동이나 민주화 투쟁을 통한 ‘영웅적 서사’를 갖춘 리더를 더이상 기대할 수 없게 됐다. 더욱이 정당정치가 새로운 리더를 제대로 키워 내지 못하면서 정치 경험이 일천하거나 아예 없는 정치적 외부자가 대중매체와 여론조사를 통해 갑작스럽게 리더로 부상하고 있다. 리더십에 대한 올바른 검증이 이뤄지기 어렵게 된 것이다. 충분한 준비 없이 당선된 이로서는 ‘대통령직의 무게’를 감당하기 어렵고, 국민으로서는 정치 지도자의 권위와 리더십에 대한 존경심을 갖기 어렵게 됐다. 더욱이 민간 영역의 발전과 함께 강한 대통령을 정점으로 하는 국가의 역할도 과거만큼 효과적이지 않게 됐다. 지난 10년간 대통령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고, 이번에도 전망이 그리 밝아 보이지 않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87년 체제의 또 다른 축인 정당정치 역시 한계에 봉착했다. 지역주의 양당 정치는, 분열적이라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민주화 이후 정치적 안정과 권력 교체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오늘날 거대 양당은 정치적 기득권을 상징하게 됐다. 정당은 국회의원, 정치 엘리트만의 집단으로 전락했고 사회적으로 제기되는 다양한 요구와 이해관계를 대표할 수 없는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조직이 됐다. 지역주의와 당파적 양극화라는 양당의 정략 속에 유권자는 선택을 강요받는 수동적 존재가 돼 버렸다. 동시에 정당은 불신의 대상이 됐고 시민은 정당 대신 직접 거리로 나서게 됐다. 이제 정치적 변화가 불가피하게 됐다. 87년 체제하에서 지난 30여년간 우리 정치는 나름대로 의미 있는 성과를 거뒀다. 그러나 과거 패러다임은 이제 한계에 봉착했다. 새로운 도약을 위한 근본적인 정치개혁이 필요한 시점이다.영국 런던정경대(LSE) 정치학 박사. 한국정치학회장, 한국정당학회장 역임. 저서로 ‘의외로 사람들이 잘 모르는 정치’, ‘한국 정치의 결정적 순간들’ 등 다수가 있다.
  • 조용기 목사 1주기… “박정희 대통령 산업화운동에 기여한 분”

    조용기 목사 1주기… “박정희 대통령 산업화운동에 기여한 분”

    지난해 소천한 조용기 목사 1주기를 맞아 추모 예배가 열렸다. 여의도순복음교회는 14일 조 목사의 1주기를 맞아 이영훈 목사가 히브리서 11장 13~16절로 ‘영원한 본향’의 설교를 했다고 전했다. 이 목사는 “조용기 목사님은 한평생 절대 긍정의 믿음을 소유하고 거룩한 꿈을 꾸며 전진한 하나님의 큰 종이었다”면서 “우리도 긍정적인 생각을 하고, 거룩한 꿈을 꾸고 믿음으로 고백하며 나아가자”고 말했다. 조 목사가 생전 강조한 3중 축복과 5중 복음을 되새긴 이 목사는 “우리 교회는 4차원의 영성으로 생각을 변화시키고, 거룩한 꿈을 꾸고, 믿음으로 꿈을 붙잡고, 입술로 선포하며 나아가 세상을 바꾸도록 만드는 사명을 실천해 나가자”고 강조했다. 이날 예배는 김천수 장로회장의 기도, 베데스다찬양대의 “겟세마네 동산에서” 특별찬양, 형제 교회 회장 및 순복음엘림교회 민장기 목사의 헌금기도 등의 순서로 이어졌다. 축도는 새서울순복음교회 이호선 목사가 맡았다.1주기에 맞춰 영산목회자선교회(영목회) 주최로 지난 13일 여의도순복음교회 예루살렘성전에서 ‘영산 목회자 콘퍼런스’도 열렸다. 서울신대 박명수 명예교수가 ‘근대 복음주의 신유운동의 역사와 조용기 목사’, 한상인 광주순복음교회 목사가 ‘영산 조용기 목사와 교회 성장’, 이호선 새서울순복음교회 목사가 ‘영산 조용기 목사의 해외선교’, 김형근 순복음금정교회 목사가 ‘영산의 4차원 영성과 목회 적용’에 대해 각각 발제했다. 조 목사의 신유사역에 대해 의의를 살핀 박명수 교수는  “해방 이후 한경직 목사가 이승만 대통령의 건국운동에 기여했다면 조용기 목사는 박정희 대통령의 산업화운동에 기여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면서 “교회사적으로는 오순절운동이 한국 교회의 중심에 서도록 만든 주인공”이라고 조 목사를 평가했다.
  • “깊은 위로와 유감”…무고한 권총강도에 20년 만의 경찰 입장

    “깊은 위로와 유감”…무고한 권총강도에 20년 만의 경찰 입장

    21년 전 국민은행 권총 살인강도의 범인이 최근 검거되면서 사건발생 이듬해 범인으로 몰렸다 구속 전 피의자심문(구속영장실질심사)에서 풀려난 무고한 용의자들에게 경찰이 20년 만에 유감을 표명했다. 대전경찰청은 14일 입장문을 내고 “대전경찰은 2001년에 발생한 국민은행 강도살인 사건의 피의자 3명을 이듬해 8월 검거해 검찰에 구속 송치한 사실이 있다”며 “용의자로 지목돼 조사를 받는 등 어려움을 겪게 한 것에 대해 당사자에게 깊은 위로의 말과 함께 유감을 표한다”고 밝혔다. 이어 “이들이 받은 피해는 ‘형사보상 및 명예회복에 관한 법률’에 따라 보상이 이뤄질 수 있도록 적극 협력하겠다”고 했다. 경찰은 2002년 8월 현역 군인을 포함한 20대 3명을 범인으로 특정해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이들이 2001년 12월 21일 오전 10시쯤 대전 서구 둔산동 국민은행 충청지역본부 지하주차장 1층에서 복면을 쓰고 권총으로 청원경찰 등 2명과 함께 현금수송차량을 몰고온 이 은행 용전동지점 출납과장 김모(당시 45세)씨에게 공포탄 1발과 실타 3발을 쏘고 현금 3억원이 든 가방을 빼앗아 달아났다는 것이다. 김씨가 왼쪽 가슴·허벅지 등에 총을 맞고 병원에 옮겨진 뒤 숨지면서 총기를 이용한 범죄로 전국을 경악케 했다.하지만 이들은 법원의 영장실질심사에서 “경찰한테 수없이 맞은 등 고문에 의한 허위 자백”이라며 강압수사를 주장했고, 대전지법은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영장을 기각했다. 20년이 지난 최근 진범인 이승만(52)·이정학(51)이 검거 구속되면서 경찰의 잘못된 수사로 억울한 옥살이를 할 뻔한 사실이 드러났다.게다가 사건발생 4년 후인 2005년 경찰의 협박으로 국민신문고에 ‘영장 기각된 그 용의자들이 범인이다. 재수사가 필요하다’란 글을 올렸다는 인물이 최근에 나타나 파문이 일었다. 그는 언론에 “풀려난 용의자들 친구인데 당시 경찰이 ‘너도 용의자다’고 협박하며 ‘시키는 대로 하면 용의 선상에서 빼주겠다’고 제안해 무서워서 글을 올렸다. 경찰이 ‘그 용의자들이 범인이다’ 등 초안까지 작성해 줬다”고 주장했다. 경찰은 진범 검거 후 20년 전 용의자로 몬 사람을 찾아가 사과하고 보상 방법을 안내했다. 이성선 대전경찰청 강력계장은 “문자를 보내 만남을 타진했는데 3명 중 한 명만 응답해 그 사람만 만났다. ‘억울하다’고 했다”며 “검찰청 피해자보상심의회에 보상을 신청한 사람은 아직 없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 대통령실 대변인

    대통령실 대변인

     ‘성북동 산에 번지가 새로 생기면서/본래 살던 성북동 비둘기만이 번지가 없어졌다./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에 떨다가/가슴에 금이갔다…’  시인 김광섭이 환갑을 훌쩍 넘긴 1969년 발표한 ‘성북동 비둘기’다.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릴만큼 널리 알려져 있는 작품이다. 그런데 아는 사람이 많지 않지만 시인 김광섭은 1948년 7월 정부 수립과 함께 이승만 대통령의 초대 공보비서관이 되면서 첫 대변인 역할을 했다. 지금으로 치면 대통령실 대변인이다. 최초의 청와대 대변인은 경무대를 청와대로 바꾼 뒤 당시 윤보선 대통령이 1960년 4·19 이후 처음 임명한 김준하씨다. 신문기자 출신인 김씨는 19개월간 대변인을 했는데 5·16으로 윤 전 대통령이 1962년 3월 사임하게 될때 대통령 하야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김대중 정부때는 2002년 박선숙씨가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청와대 대변인에 발탁됐다. ‘대통령의 입’인 청와대 대변인은 신문기자 출신들이 많이 등용됐는데 노무현 정부때는 이례적으로 노 대통령의 참모이자 정치적 동지들이 여러 번 대변인을 맡았다. 윤태영,김만수,정태호,천호선 대변인 등이다. 노무현 정부때부터 차관급인 홍보수석과 1급인 대변인이 분리되면서 대변인의 역할이 상대적으로 줄었다. 대변인은 주로 기자브리핑을 전담했다. 이명박 정부때는 남녀 대변인 공동체제가 처음 선보였다. 방송기자 출신인 박선규·김은혜 대변인이다. 박근혜 정부에서도 윤창중·김행 남녀 대변인을 뒀지만 이 체제가 오래가지는 못했다.  대통령실 대변인은 대통령의 복심중에 복심이다. 매일 아침 대통령을 직접 만나고 주요 현안에 대한 회의를 한다. 대통령 일정과 행사에도 거의 빠짐없이 참석한다. 대통령의 발언을 기자들에게 전달하고,그 의미를 설명하는 것도 대변인의 몫이다. 정치,사회,경제 모든 분야를 다뤄야 하는 만큼 잘 몰라서 엉뚱한 말실수를 하는 일도 잦다. 심지어 대통령 발언을 ‘마사지’해서 논란을 빚거나 부적절한 행동으로 입길에 오르기도 한다. 문재인 정부의 박경미 청와대 대변인은 3·9대선이 끝난 뒤 문 대통령의 메시지를 대독하다 울음을 터트려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윤석열 정부는 현재 대통령실 대변인이 공석이다. 추석 전 인적쇄신을 통해 강인선 대변인을 4개월만에 해외홍보비서관겸 외신대변인으로 이동,배치해서다. 강 대변인은 김은혜 홍보수석이 온 뒤 17일만에 대변인직에서 물러나게 됐다. 대통령실은 후임 대변인은 발표하지 않고 일단 이재명·천효정 남녀 부대변인 체제로 운영하기로 했다. 대변인 공석사태가 길어져서는 안되겠지만,그렇다고 시간에 쫓기듯 인선을 해서도 안된다. 이번만큼은 엄격한 스크린을 통해 제대로 일할,능력있는 사람을 발탁해야 할 것이다.
  • 검·경 수사력 저울에 올린 21년 전 국민은행 권총 살인강도

    검·경 수사력 저울에 올린 21년 전 국민은행 권총 살인강도

    21년 전 대전 국민은행 권총 살인강도범이 붙잡혀 검찰로 송치되면서 검·경 수사력 경쟁이 본격 펼쳐질 것으로 보인다. 10일부터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박탈) 법과 이를 저지할 ‘검수원복’(검찰 수사권 원상복구) 시행령 개정안이 시행되면서 이 사건의 검찰 수사범위를 놓고 검·경 입장이 달라 주목된다.9일 대전지검에 따르면 경찰이 지난 2일 이 사건 주범 이승만(52)과 이정학(51)을 검찰에 송치하기 전에 이미 조석규(형사3부장) 팀장 등 검사 5명을 비롯해 총 15명으로 특별수사팀을 구성, 대대적 후속 수사를 예고했다. 검찰이 이처럼 대규모 수사팀을 꾸린 것은 흔한 일이 아니다. 검찰 관계자는 “워낙 오래된 사건이다보니 직접적 증거 확보가 여의치 않다. 경찰이 단서를 찾아낸 공이 있지만 보강 증거가 무척 중요하기 때문에 철저한 수사가 필요하다”며 “경찰과 유기적으로 협력하겠다”고 했으나 안팎에서 단순히 그렇게만 보지 않는다.이 사건은 2001년 12월 21일 오전 10시쯤 대전 서구 둔산동 국민은행 충청지역본부 지하주차장 1층에서 이승만·이정학이 복면을 쓰고 권총으로 청원경찰 등 2명과 함께 현금수송차량을 몰고온 이 은행 용전동지점 출납과장 김모(당시 45세)씨에게 공포탄 1발과 실탄 3발을 쏘고 현금 3억원이 든 가방을 빼앗은 뒤 달아나 장기 미제로 있었다. 김씨는 왼쪽 가슴·허벅지 등에 총을 맞고 병원에 옮겨졌으나 숨졌다. 이들이 쏜 38구경 권총은 두 달 전인 같은해 10월 15일 자정 대전 대덕구 송촌총 골목길에서 도보 순찰 중이던 경찰관(당시 33세)을 훔친 승용차로 들이받아 의식을 잃고 쓰러지자 빼앗은 것으로 드러났다. 이승만은 경찰조사에서 “내가 권총을 쐈고, 범행 차량도 운전했다. 현금수송차량 돈가방은 이정학이 빼앗았다”며 “경찰관 들이받은 차도 내가 운전했고, 이정학이 경찰관의 권총을 탈취했다”고 진술했다. 경찰이 수사에서 캐낸 이정학의 증거는 유전자(DNA)와 자백 등이 있지만 주범인 이승만의 증거는 자백과 이정학의 진술에 그치고 있다. 대전 모 변호사는 “이정학은 DNA 등이 있어 권총을 직접 쏘지 않았어도 공소시효 없는 이승만의 살인죄가 증명되면 공동정범이 돼 살인 혐의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라며 “오히려 범행을 주도한 이승만이 자백과 진술만 있는 상황에서 검찰 수사 및 재판 진행 때 경찰에서의 자백을 번복하면 공소유지에 어려움이 있을 수도 있다”고 했다. 핵심 증거인 권총의 행방을 증명하지 못한 것은 걸림돌이다. “권총을 대전대 인근 야산에 숨겨놨다 2008년 개발 소식이 들려 발견될까 봐 꺼내서 망치로 잘게 부서 조금씩 버렸다”는 이승만의 진술 뿐이다. 강탈한 현금 사용 경로도 중요한 증거지만 아직 확보하지 못했다. 이승만은 “주식으로 탕진했다”고 했지만 주식거래계좌 등 물증을 확보했다는 경찰 발표는 없었다. 범행 차량인 그랜저XG 외에 두번째 도주 수단인 흰색 승용차는 차종 파악도 안됐다. 추가 공범 여부도 이승만·이정학은 “우리 둘 뿐”이라고 말했으나 불명확하다. 언론 등에서는 ‘운전 전담자 등 공범이 더 있을 것’이라고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이 뿐 아니라 당시 전국적으로 속출한 다른 은행강도 사건과의 연관성도 조사할 부분이다. 2002년 3월 충남 서산에서 7억여원을 옮기던 농협 현금수송차량이 강탈 당하는 등 밀레니엄이 시작된 2000년대 초기 1년여 간 대전·충남 6건 등 전국적으로 은행 및 현금수송차량 강도 사건이 잇따랐지만 대다수 미제로 남았다.검찰은 이런 여죄를 밝히는데 ‘검수완박’ 때문에 한계가 있다고 주장한다. 검찰 관계자는 “검·경 수사권 조정으로 다른 여죄가 드러나도 검찰이 수사를 개시할 수 없다. 경찰이 송치한 범죄에 한해서만 수사, 기소할 수 있다”며 “(다른 은행강도 범행 등) 여죄가 있으면 공소시효가 지났어도 공익적 목적이 있을 경우 직접 해야 하지만 할 수 없다”고 했다. 검수완박이 미제사건 해결에 도움이 안된다는 주장이다. 반면 경찰 관계자는 “검찰이 수사하려면 부패·경제범죄로 확대해 얼마든지 수사할 수 있다”며 “지난 7일 ‘검수원복’ 시행령 개정안까지 국무회의에서 통과됐는데 검찰 수사에 장애가 있겠느냐”고 반박했다.대전경찰청 미제사건전담수사팀이 이승만을 검찰에 송치하는 날 그의 여죄를 갑자기 발표한 것도 검찰 수사를 염두에 둔 것이라는 얘기가 나왔다. 이승만이 국민은행 범행 1년여 후인 2003년 1월 22일 오전 8시 29분쯤 대전 중구 은행동 패션몰 밀라노21 인근에서 현금자동지급기 관리대행사 현금수송차량을 절도해 차량 내 금고에 있던 현금 4억 7000만원을 훔쳤다고 자백했다는 것이다. 국민은행 사건을 합치면 이승만의 범죄 수익만 모두 6억 2000만원에 이르는 셈이다. 검찰에 사건을 넘기기 직전에 경찰이 이같은 여죄를 발표하자 취재진 사이에서는 “경찰이 검찰 수사 과정에서 이른바 ‘털릴’(수사 미흡 등) 것에 대비해 흘린 것이 아니냐”는 말이 나돌았다. 이승만은 이정학이 충북 모 불법게임장에 남긴 담배꽁초에서 DNA가 경찰에 노출되면서 꼬리가 잡혔고, 지난달 25일 강원 정선카지노 주변 찜질방에서 범행 21년 만에 검거돼 강도살인 혐의로 구속됐다.
  • 권총 살인강도범 이승만, “밀라노21 현금차량도 내가 털었다”

    권총 살인강도범 이승만, “밀라노21 현금차량도 내가 털었다”

    21년 전 대전 국민은행 권총 살인강도 주범 이승만(52)이 1년 1개월 후 대전 패션몰 ‘밀라노21’ 후문 인근에서 발생한 4억 7000만원 규모 현금수송차량 절도 사건도 자신이 저질렀다고 진술했다.국민은행 사건을 수사 중인 대전경찰청 미제사건전담수사팀은 2일 이승만이 검찰 송치 전에 이같은 추가 범행을 털어놓았다고 밝혔다. 이 사건은 2003년 1월 22일 오전 8시 29분쯤 대전 중구 은행동 패션몰 밀라노21 후문 인근에서 현금자동지급기 관리 대행사인 한국금융안전 소속 현금수송차량이 도난당한 것이다. 이 차량은 도난 4시간 만인 이날 오후 1시 30분쯤 현장에서 1㎞ 떨어진 문창동 W파크 지하주차장에서 발견됐다. 차량 안의 금고는 자물쇠가 절단되고 금고에 있던 현금 4억 7000만원은 사라졌다. 이날 현금 수송은 한국금융안전 직원 백모(당시 28)씨와 동료 이모(29)가 맡았다. 백씨는 당시 “차 문을 잠그고 이씨와 밀라노21 내 H은행 현금자동지급기 3대에 2000만원씩 총 6000만원을 채워넣고 돌아와 보니 차량이 사라졌다”고 말했다. 현금자동지급기는 밀라노21 지하 1층과 지상 5층에 있어 돈을 모두 채워넣고 나오는 데는 39분 정도 걸렸고, 그동안 수송차량은 감시원 없이 무방비 상태에 있었다. 이승만은 이날 “검찰에 송치되기 전에 다 털어놓고 가겠다”면서 추가 범행을 자백하고 “밀라노 범행은 혼자 저질렀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성선 대전경찰청 강력계장은 “이승만이 ‘현금차량의 열쇠를 복제해서 금고를 열었다’, ‘국민은행처럼 총기를 사용하지 않았고, 다른 추가 범행도 없다’고 진술했다”고 말했다. 다만 이승만 진술의 진위 여부는 현재 확인하기 어렵고, 공소시효가 지나 처벌도 불가능하다. 밀라노21 건물은 지금도 운영되고 있다. 이승만은 고교 동창인 이정학(51)과 함께 복면을 쓰고 2001년 12월 21일 오전 10시쯤 대전 서구 둔산동 국민은행 충청지역본부 지하주차장 1층에서 권총으로 청원경찰 등 2명과 현금수송차량을 몰고온 이 은행 용전동지점 출납과장 김모(당시 45세)씨에게 공포탄 1발과 실탄 3발을 쏘고 현금 3억원이 든 가방을 빼앗아 달아난 혐의를 받고 있다. 김씨는 왼쪽 가슴·허벅지 등에 총을 맞고 병원에 옮겨졌으나 숨졌다. 범행에 사용한 38구경 권총은 범행 두 달 전인 같은해 10월 15일 자정 대전 대덕구 송촌총 골목길에서 도보 순찰하던 경찰관(당시 33세)을 절도 승용차로 들이받아 의식을 잃게 하고 빼앗았다. 이승만은 이정학의 유전자(DNA)가 경찰에 노출돼 범행 21년 만에 강원도 정선카지노 주변 찜질방에서 검거돼 지난달 27일 구속됐다.
  • “언젠가 죗값 받을 줄 알았다”…이승만·이정학 “죄송하다”

    “언젠가 죗값 받을 줄 알았다”…이승만·이정학 “죄송하다”

    21년 전 대전 국민은행 권총 사건의 주범 이승만(52)은 2일 “언젠가는 내가 지은 죗값을 받을 줄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이승만은 이날 오전 9시 검찰에 송치되기 위해 대전 동부경찰서를 나오면서 ‘범행을 부인하다 왜 자백했느냐’는 취재진의 질문에 “완전 범죄를 꿈 꾼 것은 아니다. 죽을 죄를 지었다”며 이같이 말했다. 그는 “나로 인해 피해를 받은 경찰관과 운명을 달리한 피해자에게 진심으로 죄송하다는 말씀을 올리고 싶다”면서 “지금 죽고 싶은 심정밖에 없다”고 고개를 떨구었다.같은 시간 검찰 송치를 위해 대전 둔산경찰서를 나오던 공범 이정학(51)도 “피해자와 유족에게 죄송하다”고 말했다. 마스크를 벗어달라는 취재진의 요구에 가족 때문인지 응하지 않았다.대구지역 모 고교 동창인 이들은 2001년 12월 21일 오전 10시쯤 대전 서구 둔산동 국민은행 충청지역본부 지하주차장 1층에서 복면을 쓰고 권총으로 청원경찰 등 2명과 함께 현금수송차량을 몰고온 이 은행 용전동지점 출납과장 김모(당시 45세)씨에게 공포탄 1발과 실탄 3발을 쏘고 현금 3억원이 든 가방을 빼앗아 달아난 혐의를 받고 있다. 김씨는 왼쪽 가슴·허벅지 등에 총을 맞고 병원에 옮겨졌으나 숨졌다. 범행에 사용한 38구경 권총은 범행 두 달 전인 같은해 10월 15일 자정 대전 대덕구 송촌총 골목길에서 도보 순찰 중이던 경찰관(당시 33세)을 훔친 승용차로 들이받아 의식을 잃게 만들고 빼앗은 것이다. 이승만은 검거 후 이정학과 달리 범행을 전면 부인하다 지난달 31일 밤부터 범행을 자백하기 시작했다. 이승만은 조사에서 “내가 은행 직원에게 권총을 쏘고 범행 차량을 운전했다”며 “현금수송차량 돈가방은 이정학이 빼앗아 범행 차량에 옮겨 실었다”고 자백했다. 이어 “경찰관을 들이받을 때도 내가 운전했고, 이정학이 쓰러져 있는 경찰관의 허리에서 권총을 탈취했다”고 덧붙였다. 범행 후 권총과 관련해 이승만은 “현금수송차량을 턴 뒤 승용차를 2차례 바꿔 갈아타며 권총과 돈가방을 대전대 인근 야산에 숨겨놓았다”며 “돈가방은 범행 후 다시 만나 1억 5000만원씩 나눠 가졌고, 권총은 그대로 놔뒀는데 2008년 개발 얘기가 나와 발견될까 봐 꺼내서 망치로 잘게 부서 조금씩 버렸다”고 설명했다. 이승만은 이정학과 나눈 돈을 “주식에 투자했다가 탕진했다”고 진술했다. 반면 이정학은 “나는 9000만원밖에 받지 못했는데, 집에 숨겨뒀다 분실했다”며 서로 다른 진술을 내놨다. 이들은 범행 후 서로 연락도 안했던 것으로 전해졌다.이승만은 범행 전에 불법 복제테이프를 팔면서 생계를 꾸렸는데 두 차례 단속에 걸리고 구치소까지 다녀오자 사회에 대한 불만을 품고 일정한 직업이 없던 이정학을 끌어들여 범행을 저질렀다고 진술했다. 경찰은 2015년 충북 외곽 불법게임장을 덮쳤을 때 도박자들이 달아나자 각종 증거물로 유전자(DNA)를 확인하던 중 이정학이 남긴 담배꽁초의 DNA와 국민은행 범죄 차량 안 마스크에서 검출한 DNA가 일치하는 것을 확인하고 용의자를 특정했다. 경찰은 지난달 25일 이정학을 대전에서 검거하고, 이승만을 강원도 정선카지노 주변 찜질방에서 붙잡아 같은달 27일 강도살인 혐의로 구속했다.
  • “죄송합니다” 21년만에 사과한 은행 강도살인 피의자

    “죄송합니다” 21년만에 사과한 은행 강도살인 피의자

    대전 국민은행 권총 강도살인 피의자들이 21년 만에 피해자와 유족들에게 사과했다. 이 사건을 주도적으로 계획하고 총까지 쏜 혐의를 받는 이승만(52)은 2일 오전 검찰에 송치되기에 앞서 대전 동부경찰서 포토라인에 서서 “저로 인해 피해를 받으신 경찰관분, 운명을 달리하신 피해자분께 진심으로 죄송하다는 말씀을 올린다”고 말했다. 검은색 점퍼에 마스크를 한 채 취재진 앞에 선 이승만은 인터뷰 내내 고개를 푹 숙였다. 21년 만에 검거된 심정을 묻자 “지금 죽고 싶은 심정밖에는 없다”면서, 처음에 범행을 부인하다 시인한 이유로는 “언젠가 제가 지은 죄(에 대한 벌)를 받을 줄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같은 시각 둔산경찰서에서 포토라인에 선 이정학(51)도 “깊이 사죄드린다”고 말했다. 검은 모자를 눌러쓰고 검은색 마스크를 쓴 이씨는 ‘피해자 유가족에게 할 말은 없느냐’고 묻자 양손을 앞으로 모으고 고개를 푹 숙인 채 이같이 답했다. 이씨는 21년만에 붙잡힌 심경을 묻자 잠시 한숨을 쉰 뒤 “죄송하다”고 말했다. 범행을 시인하느냐는 물음에는 고개를 작게 끄덕이기도 했지만, 마스크를 벗어달라는 취재진의 요구에는 응하지 않고 호송차에 올라탔다.. 이승만과 이정학은 2001년 12월 21일 오전 10시께 대전 서구 둔산동 국민은행 지하 주차장에서 현금 수송차량을 차량으로 가로막은 뒤, 38구경 권총으로 은행 출납 과장 김모(당시 45세) 씨에게 실탄을 쏴 살해하고 현금 3억원을 들고 달아난 혐의를 받는다. 총기는 같은 해 10월 15일 0시께 대덕구 송촌동 일대에서 도보 순찰 중이던 경찰관을 차량으로 들이받은 뒤 빼앗은 것이었다. 장기 미제로 남아있었던 이 사건은 2017년 10월 과학수사의 발전으로 범행에 사용한 차 안에 있던 마스크와 손수건에서 유전자 정보(DNA)가 발견되면서 수사가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경찰은 충북지역 불법 게임장에서 발견된 DNA와 해당 DNA가 같은 것을 확인하고, 5년 동안 게임장 관련자들을 조사해 지난달 25일 사건 발생 21년 만에 이승만과 이정학을 검거했다.
  • “교육과정 개정 국민의견 수렴하겠다”더니...

    “교육과정 개정 국민의견 수렴하겠다”더니...

    2022 개정 교육과정 시안을 공개하며 “국민의 의견을 수렴하겠다”던 교육부가 보수진영의 문제 제기에 즉각 보완 입장을 밝혀 논란이 일고 있다. 의견수렴을 다 받기도 전에 이를 수정하겠다는 의도를 내비치면서, 그 의미가 상당 부분 퇴색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를 두고 연구진 압박에 나선 것 아니냐는 의심도 이어진다. ●“13일까지 의견수렴”이라더니... 교육부는 초등 5·6학년이 2026년부터 배울 사회과 교육과정에서 ‘대한민국 수립’ 내용이 빠졌다는 일부 언론 보도에 대해 1일 설명자료를 냈다. 현행 초등학교 사회과 교육과정에 배정된 시수에 비해 학습량이 과하다는 현장 의견을 반영했고, 기존 인물·문화사 중심 구성방식을 생활사 중심으로 전환하면서 성취기준에서 이를 누락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현행 교육과정에 포함된 ‘대한민국 정부 수립’, ‘6·25 원인’ 등을 학생들이 앞으로도 빠짐없이 학습할 수 있도록 개정 교육과정을 보완하고자 노력하겠다”고 덧붙였다. 교육부는 전날 2022 개정 교육과정 고교 한국사 과목 시안에 ‘6·25전쟁‘에서 ‘남침’이 빠지고 ‘민주주의’ 서술에서 ‘자유’가 빠졌다고 일부 언론이 지적하자 설명자료를 내기도 했다. 교육부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 ‘6·25 남침’은 헌법 정신과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는 기본 상식으로 2018년에 개정된 현행 역사과 교육과정에도 포함된 사항”이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공개안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아 우려가 제기된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헌법 정신에 입각한 역사 교육과정 개정을 추진할 계획”이라고 했다. ●여당 “연구진 다시 구성” 주장도 교육부는 지난 30일 국민참여소통채널 홈페이지(educhannel.edunet.net)에 2022 개정 교육과정 시안을 공개하면서 “교육과정 시안을 공개한 일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보름 동안 국민의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겠다”고 밝혔다. 문제가 된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 수립’ 등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이념논쟁을 일으켰던 대표적인 표현들이다. 박근혜 정부가 한국사 국정교과서를 추진하면서 이른바 ‘뉴라이트’를 비롯한 보수 쪽이 꾸준히 이를 거론했다. 예컨대 ‘대한민국 수립’을 ‘대한민국 건국’으로 해야 한다는 내용의 ‘1948년 건국론’이 대표적이다. 이승만 정권이 대한민국의 뿌리임을 강조하는 이 표현은 친일·독재 미화 비판을 받아왔다. 교육부는 오는 13일까지 국민 의견수렴을 받고서 이달 말이나 다음 달 초쯤 공청회를 열 계획이었다. 이를 종합해 연구진이 교육과정을 일부 수정하면 교육과정 개정 관련 위원회 심의를 진행한다. 조만간 구성하는 국가교육위원회가 이를 받아 12월까지 심의·의결하고 개정 교육과정을 확정한다. 그러나 이런 설명과 달리 의견수렴을 진행하자마자 자신들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설명하고 나서면서 교육부가 일종의 ‘방향’을 제시한 것이란 지적이 나온다. 이에 따라 박근혜 정부가 추진한 국정 교과서 사태처럼 ‘역사 논란’이 재현될 가능성도 커졌다.여당인 국민의힘의 이태규 의원은 이날 오전 국회에서 열린 원내대책회의에서 “편향되고 비뚤어진 교육과정을 즉시 폐기하고 균형 잡힌 연구진을 구성해 다시 시작할 것을 강력히 촉구한다”고 주장했다. 한덕수 총리도 이날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전체회의에 출석해 “국민이 알아야 하는 것과는 괴리가 있다. 자유민주주의, 남침 등이 논의되고 포함되는 게 좋겠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퇴색한 의견수렴…역사논란 재점화 교육계의 한 인사는 이런 논란을 촉발한 교육부의 행태를 두고 “다양한 의견을 수렴한 뒤 옳고 그름이나 사실 여부를 따지고 문제를 논의하기도 전에 교육부가 보수 진영에 동조한 셈인데, 이러면 사실상 의견수렴 과정이 무의미해진다”면서 “앞서 문재인 정부에서 추진한 교육과정 개정을 교육부가 직접 고치면 문제가 생길까 봐 의견수렴이라는 과정을 거치겠다는 의도로도 보인다”고 했다. 문재인 정부에서 추진한 2022 교육과정 개정은 지난해 11월 총론 발표 뒤 12월부터 8개월 동안 연구를 진행했다. 새 정부가 들어서자 교육부가 정치적인 입장을 취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교육과정을 최종적으로 의결하는 국가교육위원회 출범을 두고 이배용 전 한국학중앙연구원 원장이 유력하다는 소문도 이런 의구심을 키운다. 이 전 원장은 앞서 2011년 교육과학기술부 산하 자문기구인 역사교육과정개발추진위원회 위원장을 맡으며 ‘민주주의’ 표현을 ‘자유민주주의’로 바꾸는 데에 핵심적 역할을 했다. 박근혜 정부의 ‘국정 역사교과서’ 발행을 주도한 인물로도 알려졌다. 장홍재 교육부 학교혁신정책관은 이와 관련 “아직 확정하지 않은 안이기 때문에 의견수렴과 교육과정심의회 검토, 국가교육위원회의 심의·의결을 거쳐 보완할 계획”이라며 “연구진에 압박을 가하거나 할 의도는 없고, 현재 공개된 안 역시 초안일 뿐”이라고 밝혔다.
  • “권총은 깨 버리고, 돈은 주식 탕진”…이승만 “내가 범행주도” 자백

    “권총은 깨 버리고, 돈은 주식 탕진”…이승만 “내가 범행주도” 자백

    21년 전 대전 국민은행 권총 사건의 범행을 부인하던 이승만(52)이 자신이 범행을 주도했다고 자백했다. 이승만은 당시 권총으로 은행 직원 1명을 살해하고 현금 3억원을 강탈했다 최근 검거됐으나 공범인 이정학(51)과 달리 범행을 전면 부인해왔다. 이승만은 이정학과 나눈 돈을 주식으로 탕진했다고 말했다.대전경찰청 미제사건전담수사팀은 1일 대전청 브리핑룸에서 기자들과 만나 “이승만이 어제 밤부터 자신이 은행 직원에게 권총을 쏘고 범행 차량을 운전했다고 자백했다. 돈가방은 이정학이 빼앗았다고 했다“며 “범행에 사용한 권총은 이승만이 대전대 뒷산에 숨겨놨는데, 2008년 개발 얘기가 나와 꺼내서 망치로 잘게 부숴 조금씩 버렸다고 했다”고 밝혔다. 대구지역 모 고교 동창인 이들은 2001년 12월 21일 오전 10시쯤 대전 서구 둔산동 국민은행 충청지역본부 지하주차장 1층에서 복면을 쓰고 권총으로 청원경찰 등 2명과 함께 현금수송차량을 몰고온 이 은행 용전동지점 출납과장 김모(당시 45세)씨에게 공포탄 1발과 실탄 3발을 쏘고 현금 3억원이 든 가방을 빼앗아 달아난 혐의를 받고 있다. 김씨는 왼쪽 가슴·허벅지 등에 총을 맞고 병원에 옮겨졌으나 숨졌다. 범행에 사용한 38구경 권총은 범행 두 달 전인 같은해 10월 15일 자정 대전 대덕구 송촌총 골목길에서 도보 순찰 중이던 경찰관(당시 33세)을 훔친 승용차로 들이받아 의식을 잃고 쓰러지자 빼앗은 것이다. 이 때도 이승만이 승용차를 운전해 경찰관을 들이받았고, 이정학이 쓰러진 경찰관의 권총을 빼앗았다. 둘은 이 권총을 들고 그랜저XG 절도 차량을 이용해 국민은행 현금수송차량을 털자마자 돈가방을 싣고 300m쯤 떨어진 건물 지하주차장으로 가 미리 대기해놓은 승용차에 옮겨 싣고 7분 거리의 서구 갈마동 지하주차장으로 갔다. 이곳에서 이승만은 자기 승용차로 돈가방을 옮겨 대전대 뒷산으로 가 권총과 함께 묻어 숨긴 뒤 대전 동구 판암동 자신의 집으로 귀가했다. 이 과정에서 경찰 검문은 없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정학은 이승만과 갈마동에서 헤어진 뒤 대전역까지 택시를 타고 가 열차로 대구에 내려갔다. 이후 둘은 다시 만나 1억 5000만원씩 나눈 것으로 알려졌다. 이정학은 이 부분에 대해 “나는 9000만원밖에 받지 못했고, 집에 숨겨뒀다 분실했다”고 진술했다. 이성선 대전경찰청 강력계장은 이날 “이승만은 1억 5000만원을 주식투자로 탕진했다고 진술했다”고 했다. 범행시 현금수송차량에 3억원씩 든 돈가방이 2개였으나 한 개만 갖고 도주했다. 이 계장은 “권총 발사에 사람이 쓰러지자 당황해 둘 다 챙기지 못했다”면서 “은행 직원이 숨진 사실도 뉴스를 보고 알았다고 진술했다”고 말했다. 이어 “권총을 정신 없이 쏘고 달아난 뒤 보니 실탄이 한 발도 남아 있지 않았다는 이승만의 진술로 미뤄 범행 당시 공포탄 1발에 실탄 4발을 다 쏘았는데 찾지 못한 것 같다”며 “실탄은 김씨 몸과 국민은행 지하주차장 바닥, 현금수송차량에서 3발만 발견됐다”고 설명했다.이 계장은 “이승만이 은행 현금수송차량을 털기 전에 불법 복제테이프를 팔면서 살았는데 두 차례 단속에 걸리고 교도소까지 다녀오자 사회에 대한 불만을 품고 범행했다. 당초 은행을 털려다 현금을 수송하는 차량을 보고 대상을 바꿨다”면서 “경찰관 권총 강탈도 은행털이를 염두에 두고 저질렀다”고 했다. 당시 이승만은 결혼한 상태로 형편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 일정한 직업이 없어 역시 형편이 어려운 미혼의 이정학을 끌어들여 범행에 나섰다. 둘은 찜질방 등에서 함께 지내며 범행을 모의했다. 현재 이정학은 가정이 있으나, 이승만은 사건 후 이혼하고 여기저기 떠돈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은 2015년 충북 외곽 불법오락장을 덮쳤을 때 도박자들이 달아나자 각종 증거물로 유전자(DNA)를 확인하던 중 이정학이 남긴 담배꽁초의 DNA와 국민은행 범죄 차량 내 수거 마스크, 손수건에서 검출한 DNA가 일치해 이정학을 대전에서 검거, 추궁해 이승만을 강원도 정선카지노 주변 찜질방에서 붙잡았다.경찰은 지난달 27일 둘을 강도살인 혐의로 구속했다. 살인죄의 최고형은 사형이다. 경찰은 둘 다 ‘다른 공범은 없다’고 진술했지만 공범 여부와 함께 여죄에 대해서도 계속 수사하기로 했다. 경찰은 2일 오전 둘을 검찰에 송치할 예정이다.
  • “내가 권총 쐈다”…‘국민은행 강도살인’ 이승만, 21년 만에 자백

    “내가 권총 쐈다”…‘국민은행 강도살인’ 이승만, 21년 만에 자백

    21년 전 대전 서구 둔산동에서 벌어진 ‘국민은행 강도살인 사건’에서 총을 쏜 것은 이승만(52)이었다. 대전경찰청은 1일 오후 3시 브리핑을 열고 “강도살인 혐의를 받는 이승만이 지난달 31일 오후부터 심경 변화로 자신의 범행을 자백했다”고 밝혔다. 이승만과 이정학(51)은 지난 2001년 12월 21일 오전 10시쯤 대전 서구 둔산동에 있는 국민은행 충청지역본부 지하 1층 주차장에서 은행 관계자 3명이 현금 가방을 내려 옮기는 순간 권총으로 협박, 현금 3억원이 들어있는 가방 2개 중 1개를 챙겨 달아난 혐의를 받고 있다. 이때 이승만은 은행 출납 과장이었던 A(45)씨에게 총을 쐈고 A씨는 사망했다. 공범인 이정학은 이승만이 A씨에게 총을 쏘는 틈을 타 3억원이 들어있는 가방 2개 중 1개를 챙겨 범행에 사용했던 그랜저XG에 실은 것으로 확인됐다. 범행 후 이들은 범행 현장 약 300m 떨어진 서구 둔산동 소재의 한 상가 건물 지하 주차장으로 이동해 다른 흰색 차량으로 바꿔 타고 범행에 사용했던 승용차 안에 자동 점화장치를 설치, 불을 냈다. 차량은 같은 날 오후 6시쯤 발견됐다. 앞서 이들은 치밀하게 범행을 계획했다. 이승만은 이정학과 함께 같은 해 10월 14일 오후 9시 30분쯤 서구 월평동에서 시동이 걸린 채 주차된 흰색 쏘나타를 훔쳤다. 다음 날인 15일 0시쯤 권총을 구하기 위해 대덕구 비래동 골목길을 배회하고 있던 이들은 혼자 순찰 중이던 경찰관을 차량으로 충격해 의식을 잃게 한 후 권총을 강취했고 쏘나타를 600m가량 떨어진 길가에 버린 채 도주했다. 그리고 범행 약 20일 전 수원 영통구 영통동에서 시동일 걸린 채 세워진 검은색 그랜저 XG를 훔쳐 범행에 이용했다. 공범 이정학 자백하자 이승만 심경 변화훔친 3억원 분배 진술은 엇갈려 앞서 이승만은 자신의 혐의를 전면 부인하고 있었지만 경찰이 프로파일러를 투입하고 심층 조사를 실시하면서 이승만의 마음이 열렸고 공범인 이정학이 자백했다는 사실을 인지하자 직접 자백을 결심한 것으로 파악됐다. 이승만은 본인이 범행을 주도적으로 이끌었고 총을 경찰로부터 강취할 당시 직접 운전했고 총을 쐈다는 내용의 자백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이승만은 범행 당시 피해자인 A씨가 갖고 있던 가스총 근처로 손을 뻗자 당황해 총을 쐈다고 진술했다. 이들이 자백한 진술 대부분은 일치하지만 훔친 3억원의 행방에 대해서는 서로 진술이 엇갈리고 있다. 이정학은 자신이 9000만원을 챙겼고 이승만이 2억 1000만원을 가져갔다고 자백했지만, 이승만은 이번 자백에서 훔친 돈 3억원을 똑같이 절반으로 나눴다고 주장했다. 이승만은 훔친 돈을 주식 등에 투자했으나 모두 탕진했다고 진술했다. 이에 주식거래 내역 등 추가 조사가 이뤄지고 있다. 권총을 범행 후 대전 동구의 한 대학교 인근 야산에 묻어 둔 이승만은 지난 2008년 꺼내 망치로 잘게 부순 후 수차례에 걸쳐 나눠 버린 것으로 조사됐다. 경찰은 과거 이승만이 불법 테이프 복제를 하다 교도소 등을 다녀오는 등 처벌을 받자 사회에 불만이 생겨 범행을 저질렀고, 이정학은 이승만을 따라 범행에 가담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승만은 원래 현금수송차량에서 현금 가방을 훔치는 것이 아닌 은행 강도를 계획했지만 같은 시각에 현금수송차량이 은행에 들어오는 것을 보고 계획을 바꾼 것으로 전해졌다. 현재 이들 모두 피해자와 유족에게 사죄를 표하며 죄를 뉘우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경찰 관계자는 “피의자 2명에게 적용된 강도살인 혐의는 모두 적용될 것으로 보이지만 경찰관에게 권총을 강취한 혐의는 공소시효가 끝난 상황”이라며 “여죄나 추가적인 공범이 있는지 등 송치 후에도 추가 수사를 이어갈 방침”이라고 전했다. 경찰은 피의자들을 2일 검찰에 송치할 예정이다.
  • 마스크에 남긴 DNA에 덜미 잡혔다… 21년 만에 드러난 ‘대전 강도살인범’

    마스크에 남긴 DNA에 덜미 잡혔다… 21년 만에 드러난 ‘대전 강도살인범’

    21년 전 대전 국민은행에서 벌어진 권총 강도살인 사건의 범인이 밝혀진 데는 유전자(DNA)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드러났다. 대전경찰청은 30일 브리핑을 열어 이 사건의 피의자 이승만(52)과 이정학(51)을 검거한 경위를 발표했다. 이들은 2001년 12월 21일 오전 10시쯤 대전 서구 둔산동 국민은행 지하 1층 주차장에서 현금 수송 차량을 몰고 온 은행 출납과장 김모(당시 45세)씨에게 실탄을 발사해 살해한 뒤 현금 3억원을 빼앗아 달아난 혐의를 받는다. 이들은 사건 두 달 전인 10월 15일 0시쯤 대덕구 송촌동 일대에서 도보 순찰 중이던 경찰관을 차량으로 들이받은 뒤 빼앗은 권총을 범행에 사용했다. 사건 직후 300m 떨어진 상가 건물 지하 주차장에서 차량을 바꿔 타고 달아난 이들이 경찰에 덜미를 잡히는 데는 21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경찰이 대대적인 수사를 벌인 지난 21년간 이들은 단 한 번도 수사선상에 오른 적이 없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경찰은 수사 과정에서 용의자로 20대 3명을 검거했으나 증거 불충분 등을 이유로 구속 영장이 기각됐다. 몇 년간 답보 상태였던 수사는 2017년 전환점을 맞았다. 범행에 사용된 차 안에서 발견된 마스크와 손수건에서 신원을 알 수 없는 유전자가 검출됐기 때문이다. 이 유전자는 2015년 충북의 한 불법 게임장에 남겨진 담배꽁초에서 검출된 유전자와 동일한 것으로 확인됐다. 경찰은 손님과 종업원 등 게임장에 출입했을 가능성이 있는 1만 5000명에 대한 수사를 벌인 끝에 지난 3월 유전자의 주인을 밝혀냈다. 2001년 당시 목격자 진술 등을 토대로 작성된 몽타주와 얼굴이 비슷한 사람의 얼굴을 추리고, 차량을 훔친 전력이 있는 전과자들을 확인했다. 결국 유전자의 주인이 이정학이라는 것을 알게 됐고, 지난 25일 이정학을 검거했다. 이정학의 진술을 토대로 이승만도 체포했다.
  • “권총은 바다에 버렸다” “돈은 잃어버렸다”…정선카지노 주변서 검거

    “권총은 바다에 버렸다” “돈은 잃어버렸다”…정선카지노 주변서 검거

    21년 전 권총으로 은행 직원 1명을 살해하고 현금 3억원을 강탈한 대전 국민은행 범인 50대 2명이 붙잡힌 것은 몇년 전 범인 한 명이 불법오락실에 유전자(DNA)를 남겼기 때문으로 밝혀졌다. 범행 차량에 있던 마스크 등에서 나온 DNA와 14년 후 불법오락실에 남은 한 담배꽁초의 DNA가 일치했던 것이다. 대전경찰청은 30일 대전청에서 브리핑을 열고 이 사건 범인은 이승만(52)·이정학(51)이라고 발표했다.이들은 2001년 12월 21일 오전 10시쯤 대전 서구 둔산동 국민은행 충청지역본부 지하주차장 1층에서 복면을 쓰고 권총으로 청원경찰 등 2명과 함께 현금수송차량을 몰고온 이 은행 용전동지점 출납과장 김모(당시 45세)씨에게 공포탄 1발과 실탄 3발을 쏘고 현금 3억원이 든 가방을 빼앗아 달아난 혐의를 받고 있다. 김씨는 왼쪽 가슴·허벅지 등에 총을 맞고 병원에 옮겨졌으나 숨졌다.고교 동창인 이들은 범행 두 달 전인 같은해 10월 15일 자정 대전 대덕구 송촌총 골목길에서 도보 순찰 중이던 경찰관(당시 33세)을 훔친 승용차로 들이받아 의식을 잃고 쓰러지자 38구경 권총을 빼앗아 현금수송차량 범죄에 이용했다. 권총은 현재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이정학은 경찰에서 “이승만이 ‘바다에 권총을 버렸다’고 말했다”고 진술했다. 이정학은 범행을 인정하고 이승만은 범행 일체를 부인하고 있다. 경찰조사 결과 이정학의 진술에 따르면 이정학이 경찰관의 권총을 탈취하고, 이승만이 국민은행 범행시 권총을 쏴 김씨를 살해했다. 범행 전후 운전은 이정학이 했다고 했다. 경찰은 이날 브리핑에서 “이정학의 진술이 구체적이고 일관돼 신빙성이 높다”고 밝혔다. 이들은 당시 대전에서 일용직 등을 전전하며 돈을 많이 찾는 사람을 알아보려고 은행을 맴돌다 현금수송차량이 일정하게 들락거리는 것을 보고 범행을 모의한 것으로 밝혀졌다. 범행 후 강탈한 3억원 중 2억 1000만원은 권총을 쏜 이승만, 9000만원은 자신이 나눠가졌다고 이정학은 경찰에서 진술했다. 이정학은 “9000만원을 집에 숨겨뒀다가 잃어버렸다”고 했다. 이들이 꼬리를 잡힌 것도 도박이다. 경찰이 2015년 충북 외곽 불법오락장을 덮쳤을 때 도박자들이 달아나자 담배꽁초 등을 통해 DNA를 확인하던 중 국민은행 범행 차량 내 수거 마스크와 손수건에서 검출한 DNA와 일치해 이정학이 용의자로 특정된 것이다. 이정학을 대전에서 검거, 추궁해 강원도 정선카지노 주변 찜질방에서 이승만을 붙잡았다. 이들은 당초 국민은행 범행 후 그랜저XG 차량을 불 태우려 했으나 실패해 마스크 등 증거를 남기게 됐다. 경찰은 브리핑에서 “이정학은 가정을 꾸려 일용직과 임시직을 전전하며 살고, 이승만은 일용직 등을 하며 혼자 살고 있다”면서 “돈 배분 문제로 이견이 있는 등으로 범행 후 서로 연락이 없었다”고 했다. 경찰수사 과정에서 2002년 용의자로 20대 3명이 특정돼 구속영장이 신청했으나, 이들이 법원에서 “경찰한테 맞아 허위 자백했다”고 반발하면서 증거불충분으로 기각됐다. 경찰은 브리핑에서 “이들과 이번에 잡은 범인 둘의 연관성을 찾지 못했다”며 “사건 당시 제기된 경찰·은행 관계자와도 무관하다”고 설명했다. 경찰이 현재 확보한 증거는 이정학의 DNA 일치와 자백, 사건 당시 목격자 진술, 실물과 비슷한 몽타주라고 발표했다. 경찰조사 과정에서 2015년 형사소송법 개정으로 살인죄의 공소시효가 사라진 것을 묻자 이승만은 “그 사건 범인 붙잡히지 않았나요”라고 했고, 이정학은 “무서워서 신경을 끄고 살았어요”라고 답변했다.대전경찰청은 이날 신상공개 심의위원회를 열어 “범행이 잔인하고 피해가 중대하다. 증거도 충분하다”고 둘의 이름과 얼굴 사진 등 신상공개를 결정했다. 둘은 지난 27일 강도살인 혐의로 구속됐다. 경찰은 권총의 행방과 여죄를 캐는 한편 추가 공범 여부도 조사할 방침이다. 사건 당시 한 목격자가 “범인 한 명이 조수석에 타자 차가 달아났다”고 말해 운전만 맡은 또다른 공범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 ‘21년 전 국민은행 강도살인’ 범인…이승만·이정학 신상 공개

    ‘21년 전 국민은행 강도살인’ 범인…이승만·이정학 신상 공개

    21년 전 전국을 충격에 빠트렸던 ‘대전 국민은행 권총 강도살인 사건’의 피의자들 신상정보가 30일 공개됐다. 2001년 12월 사건이 발생한 지 20년 10개월 만이다. 대전경찰청은 이날 신상공개위원회를 열고 해당 사건의 피의자 이승만(52), 이정학(51)의 이름과 나이, 얼굴을 공개하기로 결정했다.  외부 전문가를 포함해 7명으로 구성된 위원회는 “범행이 잔인하고 중대한 피해가 발생했고 충분한 증거가 있으며 공공의 이익이 인정돼 특정강력범죄 처벌에 관한 특례법 제8조의2에 근거해 피의자들의 성명과 나이, 얼굴을 공개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 경찰차 들이받고 권총 뺏은 후 범행 모의 경찰은 지난 25일 유력한 용의자였던 이정학을 먼저 검거했다. 이후 공범인 이승만을 추가로 검거해 지난 27일 구속영장을 발부받았다.이씨 등은 범행 두 달 전인 지난 2001년 10일 대전시 대덕구 비래동에서 순찰 중이던 경찰을 차량으로 들이받아 권총을 뺏은 뒤 범행을 모의했다. 이후 약 2개월 뒤인 12월 21일 오전 10시쯤 대전시 둔산동 국민은행 둔산지점 지하주차장에서 은행 직원 김모(45) 과장을 권총으로 쏴 숨지게 한 뒤 현금 3억원을 빼앗아 달아났다. 이들은 흔적을 없애기 위해 도주에 사용한 차량을 방화하려고 시도했지만, 발화가 되지 않아 실패했다.  경찰은 100여 명으로 구성된 수사본부를 차리고 수사에 나섰다. 그러나 당시 범인들은 복면을 쓴 상태여서 신원을 특정하기 어려웠다. 또한 차량용 블랙박스나 폐쇄회로TV(CCTV)가 없던 시절이라 수사에 어려움을 겪었다. 범행에 사용된 차량도 20일 전 훔친 것이었고, 지문 등 단서가 남아있지 않았다.  결국 경찰은 사건 발생 1년 3개월 만인 2003년 3월 말 수사본부를 해체했다. ● 범행 차량에서 발견된 손수건…DNA 결정적 단서 ‘대전 국민은행 권총 강도살인’ 사건의 공소시효 만료일은 2016년 12월이었다. 그러나 2015년 형사소송법 개정으로 살인죄 공소시효가 폐지되면서 대전경찰청 미제사건전담수사팀은 해당 사건을 계속 수사해왔다. 이 과정에서 미제수사팀은 현장에 남아있던 손수건에 주목했다. 손수건은 용의자들이 얼굴을 가리는데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경찰은 이 손수건에 있던 유전자를 재수사중이던 2018년 확보해 보관해 왔었다. 감정 결과, 유전자는 2015년 충북의 한 불법 게임장에서 수거한 물품에서 채취한 유전자와 일치했다.대전경찰청 백기동 형사과장은 “유류물에서 검출된 유전자가 2015년 충북 소재 불법게임장 현장 유류물에서 검출된 유전자와 동일하다는 감정 결과를 지난 2017년 10월 회신받았다”고 설명했다. 이어 “종업원과 손님 등 게임장에 출입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되는 1만 5천여 명에 대해 범행 연관성을 확인해나가는 수사를 진행한 끝에 올해 3월경 이정학을 유력한 용의자로 특정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경찰은 보강 수사 등을 거쳐 지난 25일 이정학을 검거했고, 이승만과 범행했다는 진술을 토대로 이승만을 긴급 체포했다.
  • [속보] 대전 국민은행 권총 강도살인 피의자 이승만·이정학 신상공개

    21년 전 대전 국민은행에서 권총으로 직원을 살해하고 현금 3억원을 빼앗아 달아난 혐의로 경찰에 구속된 이승만(52)과 이정학(51)의 신상정보가 30일 공개됐다.
  • ‘韓과 전혀 다른’ 대만의 논문 표절 대처 [이철의 차이나 핀홀]

    ‘韓과 전혀 다른’ 대만의 논문 표절 대처 [이철의 차이나 핀홀]

    대만의 정치 세력은 크게 세 개다. 집권 여당인 민주진보당(민진당)과 중화민국을 세운 국민당, 그리고 민진당을 탈당해 대만민중당을 만든 커원저 타이베이 시장 그룹이다. 한국 언론에서는 ‘민진당은 반중, 국민당은 친중’으로 보는데 필자가 볼 때 이런 인식에는 다소 왜곡이 있다. 국민당은 대만의 정체성이 중국 대륙에 있다고 보는 것일 뿐 ‘친중’ 성향은 아니다. 다만 지금의 국민당은 이렇다 할 비전이나 전략 없이 시대의 흐름에 끌려 다니고 있어 그런 오해를 받아도 변명이 쉽지는 않다. 오랫동안 대만은 민진당과 국민당이 격돌하는 정치 구도를 유지해왔다. 이들의 갈등은 우리나라 양대 정당의 충돌 못지 않으며 때로는 더 치열하다. 대만에서 선거철이 되면 ‘택시도 골라서 타야 한다’는 말이 나돈다. 택시 기사와 승객이 지지 정당을 두고 논쟁이 벌이다가 치고 받는 사례가 종종 생겨나서다. 그간 대만은 북부에선 국민당이 우세했고 남부에선 민진당이 유리했다. 북부는 정부의 전폭적인 재정 지원 덕분에 산업 벨트로 육성됐다. 덕분에 국민당에 호의적이다. 반면 남부는 농업이 중심이고 제도권 정치에서도 배제됐다. 국민당에 대한 반감으로 민진당이 우위를 차지한다. 이런 정세는 대만에 세 개의 서로 다른 성향의 집단이 존재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첫 번째 부류는 외성인(대만 외부에서 온 사람들)이다. 1949년 국공내전에서 패한 장제스가 40만 병력을 이끌고 건너올 때 동행한 이들로, 대만의 정치·경제 권력을 대부분 장악했다. 자신을 ‘중국인’으로 여기고 대만에서 힘을 길러 대륙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일부 언론에서 국민당을 ‘친중’으로 규정하는 것은 이러한 역사적 배경에 기인한다. 두 번째 부류는 내성인 혹은 본성인(대만 토박이)이다. 17세기 명·청 교체기에 일부 한족이 청나라에 저항하고자 이곳으로 들어와 터를 잡았다. 푸젠 지역에서 해상 세력을 이끌던 정성공(鄭成功·1624~1664)이 1661년 병력을 이끌고 건너와 유럽 세력을 몰아낸 것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표면적으로 청의 지배를 받았지만 실제로는 자치를 유지했다. 청 말기에는 형식적인 간섭조차 사라졌지만 얼마 안 가 일본에 할양돼 식민지 시기를 보냈다. 일본이 패망하자 다시 방치됐다가 국민당이 들어오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이 때문에 내성인들은 국민당을 ‘점령군’으로 여기기도 한다. 이들은 자신을 ‘중국인’이 아닌 ‘대만인’이라고 생각한다.세 번째 부류는 내·외성인과 인종이 다른 고산족(高山族·높은 산속에 사는 원주민)이다. 대만에 가장 먼저 정착했기에 ‘진짜 주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의 시각에서 보면 대만은 포르투갈과 청나라, 일본 제국이 차례로 지배했고 마지막은 외성인이 차지한 상태다. 내성인이나 외성인 모두 ‘남의 집 안방을 힘으로 빼앗고 주인 행세를 하는 이들’에 불과하다. 대만의 인구 구성을 보면 내성인 85%, 외성인 12%, 고산족 원주민 2% 정도다. 일반적으로 외성인들은 국민당을, 내성인과 고산족은 민진당을 지지한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타이베이 공항이 자리잡은 타오위안과 반도체 파운드리(위탁생산) 세계 1위인 TSMC 공장이 있는 신주는 북부 지역의 도시임에도 민진당의 지지세가 높다. 주민들의 평균 연령이 낮고 교육 수준이 높은 데다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이 강하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이런 상황에서 올해 12월 열리는 지방선거를 앞두고 현 신주시장인 린즈젠이 민진당의 타오위안시장 후보로 선출됐다. 이 지역이 민진당 우세 지역인 데다가 린 후보의 이미지가 매우 좋았기 때문에 낙승이 점쳐졌다. 그런데 뜻밖에도 린 후보의 석사 학위 두 개가 잇따라 표절 의혹에 휘말리면서 상황이 꼬였다. 그가 2017년 1월 국립 대만대학교 국가발전연구원에 제출한 석사학위 논문이 같은 학교 출신 위정황의 2016년 7월 논문을 그대로 베꼈다는 주장이 나온 것이다. 대만대는 우리나라의 서울대에 해당하는 최고 명문 학교다. 위정황은 대만 정부 조사국 공무원으로 린 후보처럼 대만대 국가발전연구원 석사 과정을 이수했다. 두전화 전 대만대 교수는 “두 논문의 유사도가 70%에 달한다”며 린 후보의 지도 교수였던 천밍퉁 대만 국안국장(국정원장)을 겨냥해 “이렇게 부실한 논문을 통과시킬 수는 없다. 이를 제대로 해명할 수 없다면 린 후보는 선거에서 물러나라”고 비판했다. 앞서 린 후보는 2008년 중화대에서도 석사 학위를 받았는데, 국민당 소속 왕홍웨이 타이베이시의원이 “그의 논문을 분석한 결과 같은 해 중화대 과학기술관리학과가 외부 기관에 위탁 수행해 제출받은 연구 보고서를 그대로 표절했다”고 추가 폭로했다.린 후보는 차이잉원 총통이 매우 아끼는 정치인으로 알려져 있었다. 실제로 차이 총통은 이번 논란에 대해 “그가 스스로 표절이 아니라고 말했다면 응당 믿고 지지해야 한다”고 감싸고 돌았다. 민진당도 “우리당 차기 유력 정치인에 대한 흠집내기를 멈추라”며 지원 사격에 나섰다. 우군을 확보한 린 후보는 지난달 24일 기자간담회를 열고 논문 집필 과정을 설명하며 “표절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선거를 포기하지 않겠다. 끝까지 싸워 결백을 입증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그의 해명은 썩 명쾌해 보이지 않았다. 곧바로 국민당 왕홍웨이 의원은 두 논문이 동일하거나 유사한 부분을 거론하면서 “오타까지 똑같다”고 지적했다. 전 국민당 입법의원 출신이자 미디어 재벌인 자오샤오캉도 방송에서 “이는 ‘복붙’임이 분명하다”고 비꼬았다. 여론도 그의 편이 아니었다. 더 버티는 것이 무의미하고 느낀 린 후보는 결국 시장 선거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수세에 몰린 민진당은 현 입법위원인 정윈펑을 새 시장 후보로 긴급 투입했다. 정 후보는 지난달 린즈젠이 간담회를 열었을 때 그를 도우려고 자리를 함께 했다. 자신의 논문임에도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던 린 후보와 달리 그는 논문과 관련된 이슈들을 명확하게 짚고 설명해 깊은 인상을 남겼다. 결과적으로 당시 기자회견은 ‘포스트 차이잉원’으로 주목받던 린즈젠이 추락하고 ‘민진당 구원투수’로 정원펑이 떠오르는 순간으로 남게 됐다. 학위 논문 표절 논란을 두고 대만대가 취한 단호한 태도는 지금 우리나라 대학들과 달랐다. 대만대는 해당 논문을 신속하게 검토한 뒤 논문에 문제가 있음을 솔직하게 인정했다. 하지만 린즈젠과 민진당은 이를 수용하지 않아 일을 키웠다. 앞서 말했듯 타오위안은 민진당 지지세가 강한 지역이다. 여당이 린즈젠 문제를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처리했다면 그의 도덕성 논란에도 여전히 선거 승리를 기대할 수 있었다. 그런데 대만대의 판단을 정면으로 거부하면서 판이 달라졌다. 시장 선거 구도가 ‘민진당 대 국민당’에서 ‘민진당 대 대만대’, ‘거짓 대 진실’로 바뀐 것이다. 민진당이 정치적 실책을 범해 ‘지는 게임’을 자초했다. 차이 총통 역시 지지도가 급락해 리더십에 타격을 입었다. 린즈젠은 대만대는 물론 중화대 석사 학위까지 취소돼 대만 정치인 가운데 두 개의 석사 학위를 동시에 취소당한 최초의 인물로 남게 됐다.반면 대만대는 이번 논란에 진정성있게 대응해 자신의 권위를 지킬 수 있었다. 대만대 출신 사회 리더들도 명예와 존엄, 진실을 지키려고 용기를 낸 모교를 응원했다. 시민들도 대만대에 박수를 보냈다. 과거 우리나라에서도 이와 비슷한 사례가 있었다.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 대통령 시절 이기붕 국회의장이 자신의 아들 이강석을 이 대통령의 양자로 보냈는데, 덕분에 이강석은 두 사람의 막강한 권력을 등에 업고 서울대 법과대학에 입학했다. 그러나 졸업은 할 수 없었다. 권력을 두려워하지 않던 교수들이 대통령의 아들에게 ‘FM대로’(봐주지 않고 엄격하게) 학점을 준 탓이다. 필자는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이 아들 박지만을 서울대가 아닌 육군사관학교로 보낸 것이 당시 사례를 반면교사 삼았기 때문으로 본다. 한국의 대학들은 대통령도 함부로 다루지 못할 만큼 자신의 권위를 지키고자 애썼다. 그러나 작금의 상황을 보면 이제 대학 학위는 남의 생각을 가져다가 짜집기를 해도 대가만 충분히 지불하면 별 문제가 되지 않는 ‘상품’으로 전락한 것 같다. 윤석열 대통령의 부인 김건희 여사가 남의 논문을 ‘대폭 참고’했어도 대학은 공식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다”고 발표했다. 일부 교수는 “우리 분야에서 표절은 피할 수 없다”며 이를 대놓고 두둔하는 듯한 발언도 내놨다. 이를 견제하고 바로잡아야 할 야당도 크게 나은 것은 없어 보인다. 이재명 민주당 의원이나 조국 전 법무부 장관도 논문 표절 의혹에서 자유롭지 못하니 말이다.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은 논문 표절 여부를 판정할 능력과 식견을 갖고 있지 않다. 대학과 교수들이 우리 사회에 만연한 논문 표절 문제에 침묵한다면 보통 사람들은 더 이상 상아탑의 도덕성과 권위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진리와 정직을 목숨처럼 지킨다던 대학의 명예와 전통이 우리나라에선 모두 사라진 것일까. 대학들이 진실을 말하지 못하고 있고 누가 어떤 과정을 거쳐 논문 표절 여부를 판단했는지도 설명하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필자는 ‘내가 지지하는 정당의 정치인이어도 그의 거짓은 지지할 수 없다’는 대만 민중들의 정치의식에 경의를 표한다. 오래전 졸업한 모교의 빛 바랜 교훈을 이들에게 헌사하고 싶다. VERITAS LUX MEA!(진리는 나의 빛!)
  • 영빈관에 드러누운 한혜진…靑 화보에 “국가 품격 떨어졌다”

    영빈관에 드러누운 한혜진…靑 화보에 “국가 품격 떨어졌다”

    탁현민 전 청와대 의전비서관이 청와대를 배경으로 한 패션 화보에 대해 “국가의 품격이 떨어졌다”며 탄식했다. 탁 전 비서관은 지난 22일 페이스북에 올린 장문의 글에서 윤석열 정부의 청와대 개방을 일제강점기 일본이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만들어 개방했던 것에 빗대며 비판했다. 탁 전 비서관은 “일본이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만든 이유는 식민지 백성들에게 오락거리를 제공하면서 대한제국의 권위를 떨어뜨리고 새 권력인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호감을 얻기 위한 수단이었다”며 “과연 윤석열 정부의 청와대 폐쇄는 어떤 이유냐. 윤석열 정부의 청와대 폐쇄는 절차와 과정 그리고 기대 효과 면에서 모두 실패한 결정”이라고 주장했다. 탁 전 비서관은 “윤석열 정부가 청와대 폐쇄로 인해 연쇄적이고 지속해서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고 예견했는데 이미 의전, 경호, 보안, 소통, 업무 연속성, 위기대응 등 모든 면에서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대한민국 ‘대통령사’라는 역사의 단절과 대통령과 국가의 권위, 외교행사 등에서도 문제가 되고 있다”며 “자업자득인데 참으로 속상한 것은 그 자업자득이 대한민국의 국격과 많은 국민의 부끄러움으로 전이된다는 것”이라고 개탄했다. 또 “이번 광복절 경축식의 장소가 용산의 새 대통령 집무실 앞마당인데, 그저 국방부 연병장에 불과했던 장소를 광복절 경축식의 장소로 결정하고 어떤 상징도, 역사성도, 미래에 대한 메시지도 없이 파리한 행사를 했다”고 꼬집었다. 탁 전 비서관은 “청와대는 영욕의 공간이다. 그 모든 시대가 아름다웠던 것은 물론 아니다. 지우고 싶고, 가리고 싶고, 숨기고 싶은 역사도 그 안에 있다. 하지만 그 또한 역사다. 미국이 백악관을 영국에게 점령당했었다고 폐쇄하지 않았듯이, 역사는 그러한 치욕까지도 유지하고 보존해 새로운 시대 새로운 권력에게 엄중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며 “우리는 역사의식과 인문적 소양이 없는 정치권력이 얼마나 국가의 품격을 떨어뜨릴지 슬프지만 우리는 지속적으로 확인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앞서 보그는 지난 22일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청와대 그리고 패션!’이라는 제목의 화보를 공개했다. 총 32장으로 구성된 화보에는 청와대 본관, 영빈관, 상춘재, 녹지원 등이 배경으로 담겼다. 촬영에는 모델 한혜진을 비롯해 김원경, 김성희, 오송화, 이애리 등이 참여했다. 이번 화보에서 모델들은 도포, 저고리, 버선, 노리개 등 한복 요소를 매치하거나 한복을 빗댄 드레스를 입고 청와대 곳곳을 누볐다. 한혜진은 본관 2층 영빈관에서 분홍색 꽃 여러 송이가 달린 드레스를 입고 의자에 누워 포즈를 취해 눈길을 끌었다. 또 접견실에서 만개한 꽃봉오리처럼 제작된 검은색 드레스에 갓을 연상시키는 모자를 착용하고 포즈를 취하기도 했다.김원경은 꽃 자수가 새겨진 남색 드레스를 입고 한쪽 다리를 드러낸 채 청와대 본관에 있는 ‘금수강산도’를 배경으로 촬영했다. 드레스에 도포를 걸치고 노리개, 갖신 등을 매치한 모델 5명은 화려한 샹들리에가 드리운 영빈관 2층의 연회장에서 단체 촬영도 진행했다. 이번 화보는 문화재청이 ‘문화유산 방문 캠페인’의 하나로 보그와 협업한 것이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우리 문화유산에 대한 관심이 방문으로 이어지도록 하기 위해 보그와의 협업을 추진했다”고 밝혔다.한편 청와대는 1948년 초대 이승만 대통령을 시작으로 역대 대통령 12명이 머물렀던 장소로, 윤석열 대통령이 취임하며 지난 5월 10일 국민에 개방됐다. 지난 16일까지 약 155만명이 방문한 것으로 알려졌다.
  • 尹, 상하이 임시정부 적통 인정… 건국절 논란 없었다

    尹, 상하이 임시정부 적통 인정… 건국절 논란 없었다

    윤석열 대통령은 15일 광복절 경축사에서 독립운동을 “민주공화국과 자유·인권·법치가 존중되는 나라를 세우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하며 3·1 독립선언과 상하이 임시정부 헌장, 매헌 윤봉길 의사의 독립정신을 함께 언급했다. 매해 광복절마다 1919년 4월 임시정부 수립일을 건국일로 보는 진보 진영과 1948년 이승만 정부 수립을 건국으로 보는 보수 진영 간 역사 갈등이 반복돼 온 가운데 윤 대통령은 경축사에서 상하이 임시정부의 ‘적통’을 사실상 인정하는 자세를 보인 것이다. 윤 대통령은 독립운동을 “자유를 찾기 위해 시작됐다”며 자유민주주의적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투쟁으로 규정하며 진보 진영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상하이 임시정부 역사를 이번 경축사에서 끌어안았다는 분석이다. 과거 이명박 전 대통령이 2008년 광복절 행사를 ‘대한민국 건국 60주년 및 광복 63주년 경축식’이라고 정했고, 박근혜 전 대통령은 2016년 광복절을 “광복 71주년, 건국 68주년”이라고 말하는 등 보수 정부는 이승만 정부 수립을 건국의 기점이라고 강조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윤석열 정부는 취임 후 첫 광복절에서 건국절 관련 논란을 일으킬 만한 행보를 보이지 않았다. 앞서 문재인 전 대통령은 취임 첫해인 2017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2년 후 2019년은 대한민국 건국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는 해”라고 밝혀 당시 정치권과 역사학계에 건국절 논란의 불을 지핀 바 있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이번 경축사는 그동안 소모적으로 계속된 건국절 논란을 더이상 무의미하게 만든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이번 경축사를 계기로 건국절 논란이 완전히 종결될지에 대해서는 전망이 엇갈린다. 상하이 임시정부의 적통을 인정하면서도 자유민주주의적 가치를 전제조건으로 달았다는 점에서 좌파·진보 진영을 중심으로 이견이 제기될 수 있다는 의미다. 이날 윤 대통령은 “자유와 인권이 무시되는 전체주의 국가를 세우기 위한 독립운동은 결코 아니었다”고 언급해 일제강점기 당시 좌익계열 독립운동과는 다소 거리를 두는 듯한 모습도 보였다.
  • 김승연 회장 부인 서영민씨 암투병 끝 별세

    김승연 회장 부인 서영민씨 암투병 끝 별세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의 배우자인 서영민씨가 지난 7일 미국에서 별세했다. 61세. 9일 재계에 따르면 서씨는 암 투병으로 미국의 한 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중 병세가 악화돼 끝내 눈을 뜨지 못했다. 재계 관계자는 “서씨의 건강이 나빠지며 김 회장과 장남인 김동관 한화솔루션 사장, 차남 김동원 한화생명 부사장, 삼남 김동선 한화호텔앤드리조트 상무 등이 최근 미국으로 가 서씨의 곁을 지켰다”며 “유족들이 현재 장례 절차를 논의하고 있으며 장례식은 유족의 뜻에 따라 비공개로 진행될 예정”이라고 말했다. 고인은 12∼16대 국회의원과 내무부 장관을 지낸 서정화 국민의힘 상임고문의 딸로, 서울대 약대 4학년에 재학 중이던 1982년 김 회장과 결혼했다. 조부는 이승만 정권 시절 법무부 장관을 지낸 고 서상환씨다.
  •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부인 서영민 여사 암으로 별세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부인 서영민 여사 암으로 별세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의 배우자인 서영민(사진) 여사가 지난 7일 미국에서 별세했다. 61세. 9일 재계에 따르면 서 여사는 암 투병으로 미국의 한 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중 병세가 악화되며 눈을 뜨지 못했다. 재계 관계자는 “서 여사의 건강이 나빠지며 최근 김승연 회장과 장남인 김동관 한화솔루션 사장, 차남 김동원 한화생명 부사장, 삼남 김동선 한화호텔앤드리조트 상무 등이 미국으로 가 서 여사의 곁을 지켰다”며 “현재 유족들이 장례 절차를 논의하고 있으며 장례식은 유족의 뜻에 따라 비공개로 진행될 예정”이라고 말했다. 고인은 12∼16대 국회의원과 내무부 장관을 지낸 서정화 국민의힘 상임고문의 딸로, 서울대 약대 4학년에 재학 중이던 1982년 김 회장과 결혼했다. 김 회장이 1981년 한국화약그룹(한화그룹의 전신) 창업자인 부친 고 김종희 회장이 갑작스럽게 작고하면서 29세의 젊은 나이에 회사를 물려받은 이듬해였다. 고인은 결혼 이후에도 학업을 지속해 서울대 약대를 수석 졸업한 것으로 알려졌다. 고인의 조부는 이승만 정권 시절 법무부 장관을 지낸 고 서상환 장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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