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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동 30돌 맞는 우리나라 원자로1호 「트리가 마크2」

    ◎고급원자력인력 양성 산실로/62년 첫 불로 원자력시대 개막/각종 실험 등 원전발전에 큰 몫/수명다할 10년후엔 보존·폐로 갈림길에 우리나라 최초의 연구용원자로 「트리가 마크2」가 올해로 가동 30주년을 맞았다.한국에 첫 「제3의 불」시대를 열어준 연구용 원자로 1호의 점화 30주년을 맞아 한국원자력연구소는 31일 기념학술대회와 특별전시회등 조촐한 기념행사를 벌인다.「트리가 마크2」는 19 59년 7월 이승만대통령 정부하에서 착공,62년 3월 점화돼 지금까지 원자력연구개발및 고급인력양성의 산실역할을 해왔다. 점화 당시 제원은 수조 냉각수의 나연대류로 냉각되는 수조형 소형 연구로로 20%농축 우라늄 연료봉 80개가 노심에 꽂혀 1백킬로와트의 출력을 냈다.「트리가 마크2」란 이름은 훈련(T),연구(R),동위원소 생산(I)등 이 원자로의 3대 이용목적과 건설사인 미국 제너럴 아토믹사의 첫자를 따서 붙여진 고유모델명.「트리가 마크2」의 건설에는 온나라가 절대빈곤 상태에 있던 당시로서는 엄청난 금액인 70만달러(35만달러는 미국의 무상지원)가 투입돼 정책결정자들의 강력한 원자력 개발의지를 엿보게 한다. 이같은 정책의지에 부응이라도 하듯 건설당시 과대한 규모라는 논란을 빚기도 했던 출력규모는 곧 용량한계에 이르러 69년도에는 2백50킬로와트로 출력증강을 해야했으며 72년도에는 2메가와트급의 연구로2호기를 완공,우리나라 원자력개발은 78년 최초의 원자력발전소인 고리1호기 가동을 향해 힘찬 발걸음을 계속했다. 오는 94년 완공 예정으로 대덕연구단지에 짓고있는 다목적 연구로 KMRR이 사업비 9백34억원 열출력 30메가와트(3천만킬로와트)로 1호 규모의 3백배에 이르고 전국에 가동중인 원자력발전소가 9기에 이르러 국내 총발전량의 40%를 공급하고 있는 것을 감안하면 실로 엄청난 원자력계의 발전이 있었다고 할수 있다. 초창기부터 연구로 운전에 참여했던 이창건박사(63·한국원자력연구소 연구위원)는 『무엇보다 트리가 마크2의 공로는 한국원자력계의 고급인력을 양성한데 있다』고 말한다.그에 따르면 각 대학의 원자력공학,핵물리학전공자들은 이 원자로에서 실험을 하고 훈련을 받았으며 지금까지 3천여명의 고급인력이 이곳을 거쳐나갔다.각종 원자로 재료시험,원자력 특성실험과 산업용 의학용 동위원소 생산도 공적에서 빼놓을수는 없다. 현재도 일부 원자로기초실험과 대학생 실습용으로 사용되고 있는 「연구로1호」는 앞으로 약 10년의 수명을 남겨놓고 또하나의 커다란 책무를 기다리고 있다.국내에서는 한번도 없었던 원자로폐쇄,즉 폐로기술실증의 첫경험을 제공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기 때문이다.원자력연구소 원자력연구개발단 김병구단장은 『연구로1호는 그대로 보존해 원자력박물관으로 사용하자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면서 『보존이냐 폐로냐의 문제는 현재의 서울공릉동부지사용계약이 만료되는 95년이후 부지소유주인 한전과의 협의에 달려있다』고 말했다. 공릉동 원자력병원강당과 원자력연구소서울사무소에서 각기 개최되는 학술대회와 특별전에는 우즈베크 핵물리연구소장 율다셰프박사와 미국 MIT 핵공학과의 토드레아스교수등의 특강과 30년전 원자로 초창기시절의 역사적인 문서와 사진,유물등이 전시된다.
  • 새 전기「세기와 더불어」허동찬씨의 분석(신고 김일성자서전연구:4)

    ◎김형직 우상화에 조선국민회 이용/회원명단에 포함된 사실 뒤늦게 알아/68년판 전기부터 정치·군사 투쟁가로/단체성격도 임정과 관계 없는듯이 기술 김일성은 그의 부친 김형직이 조선국민회 회원이었다는 사실을 50세가 넘도록 모르고 있었다.이 점은 부친이 조선국민회의 「지도자」였다는 대대적인 선전이 행하여지고 있는 오늘의 시점에서 보면 특기할 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김일성은 조선국민회 뿐 아니라 그것보다 더 기초적인 사항들에 대해서도 모르는 것이 많았던 인물이다.예를 하나만 들면 그는 52년 전기에서는 부친이 1928년에 36세로 사망하였다고 말하고 있다.그후 사망한 해는 26년으로 시정되었으나 사망당시의 부친의 나이는 1964년에 나온 박상혁의 「조선민족의 위대한 령도자」까지 32세로 시정된 일이 없었다.이러한 전기들에는 조선국민회 같은 것은 단 한줄도 기술되지 않았었다. 조선국민회는 1917년에 평양에서 결성된 비밀결사이다.이 결사의 회원명단에 김형직의 이름이 있는 것을 발견한 사람은 당시 일본에서 조총련의영향하에 있었던 재일사학자 강덕상교수이다. 강교수는 지금은 조총련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고 있지만 1960년대까지는 북한을 지지하고 있었다.그런 관계로 그는 60년대에 김형직과 관련된 자료들을 조총련을 통하여 북한에 보냈다. ○재일사학자 발견 그런데 이 자료를 입수한 무렵의 북한은 김일성의 유일지도체제를 세우는 와중에 있었다.그는 1967년에,해방전 보천보전투 때 이 전투를 국내에서 도운 박금철 이효순 등을 숙청하고 「당의 유일사상체계 확립」을 서두르게 되었다.당의 유일사상체계 확립이란 북한주민이 오직 김일성의 사상만으로 사고하고 그의명령지시 대로만 움직이며 과업수행 과정에서 언제나 김일성에게 충성을 바쳐야 하는 체제를 확립한다는 말이다. 김일성은 이 책동의 일환으로 1968년에 백봉이라는 가명을 쓴 저자이름의 「민족의 태양 김일성장군」을 출판하게 하였다.종전의 김일성전기와는 내용이 판이한 이 전기에서 비로소 「조선국민회」를 김형직 우상화의 도구로 이용한 것이다. 그는 이 책에서 김형직을 우상화하는데 단순히 그를 과대선전하는 정도로 만족하지 않고 역사적인 존재인 국민회 자체를 북한체제의 「정통성」에 부합되도록 그 활동내용을 뜯어 고쳐버렸다. 1917년에 실제로 평양에서 조직된 조선국민회는 1919년에 대한민국회로 개편되어 상해임시정부의 지도를 받게되는 조직이었다.이 국민회가 19년 10월에 상해임정에 보낸 규칙초안을 보면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설립목적이 있다. 「대한정을 관민상화하고 자순하며 신의 공보를 유종함을 목적으로 함」 당시의 대한국민회는 일제식민지하에서 대한이란 국호를 사용하고 관민이 서로 화합하여 자문을 주고 받는 정치를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그러나 이 단체는 동시에 신에만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기독교단체이기도 하였다.훌륭한 독립단체이기는 하였지만 한편으로는 종교결사이기도 하였던 것이다.대한민국회의 전신이 조선국민회이므로 조선국민회도 이상과 거의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한편 68년 백봉이 쓴 전기에 나오는 「조선국민회」는 그 목적을 다음과 같이 설정하고 있다. 「이조직은 우리 나라에서 과학적 마르크스­레닌주의사상이 보급되기 이전에 벌써 반제민족해방의 과업을 정확히 내세웠으며 조국독립을 달성하기 위한 방도로서 외국세력에 의거하는 것이 아니라 자주적인 힘에 의거하며 청원이나 개량의 방법이 아니라 정치적활동과 군사적 활동을 적절히 배합할 것을 내세웠다」 북한에서는 이상과같이 원래의 조선국민회나 대한국민회의 설립목적에서 신과 종교를 빼고 이 결사가 마치 무신론자의 단체인 것처럼 만들었다.또 외세의존이나 「청원이나 개량의 방법」같은 것을 부정하여 상해임정과의 연계를 끊어버렸다.이 국민회의 성원들 속에는 미국이나 재미교포와의 연계를 가지고 있었던 인물이 많았는데 이러한 연계마저 끊어서 「반제민족해방의 과업」을 수행하는 「자주적인」정치비밀결사였던 것처럼 그 목적을 바꾸어버린 것이다. 김일성은 50세 무렵까지 부친 김형직의 정치활동 중에 조선국민회원 시기가 있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그러나 이 점에 대하여 알게 된 순간부터 조선국민회의 활동을 그대로 두는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존재인 조선국민회가 설정한 목적 자체를 이상과 같이 변경하게 하였다. ○50세 넘도록 몰라 그러나 백봉의 전기가 나오는 무렵은 아직 김일성의 유일사상체계 확립책동이 초기단계에 있었다.이 때문에 북한이 설정한 목적에는 「마르크스·레닌주의사상이 보급되기 이전」시기에 국민회가 결성되었다는 설명이 붙어 있다.이것은 조선국민회는 마르크스·레닌주의 조직이 아니며 김형직도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는 의미로 보아 무방할 것이다. 또 백봉은 「이 조직은… 3·1운동 이전의 가장 큰 반일운동조직이었다」라고 하였다.3·1운동 이전의 가장 큰 반일조직은 따로 있지만 이러한 표현은 김형직이 3·1운동 이전 밖에 조선국민회에 있지 않았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백봉은 3·1운동 이후 조선국민회가 대한국민회로 발전하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이 때문에 그는 독재자인 아들의 뜻과는 정반대로 이승만이 설립한 상해임정에 김형직이 붙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조선국민회는 3·1운동 이전의 조직이라고 그 활동을 중도에서잘라버렸는지도 모른다. 하여간 「민족의 태양 김일성장군」은 김형직이 공산주의자가 아니라는 것,조선국민회에서의 그의 활동은 3·1운동 이전이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점에서 그후의 전기들과 구별되는 전기이다. 현대사자료25,강덕상론,일본 미스즈서방간,544면 「민족의 태양 김일성장군」백봉저,1968년 평양 인문과학출판사간,14면 같은책 동면
  • 21세기 한반도안보전략 새로 짰다

    ◎워싱턴,「한­미 안보협회의」 뭘 남겼나/평시작전권 환수로 자주 국방 틀 마련/“위기때는 즉각대응” 전쟁억지력 강화/북한 핵개발 저지 공조체제 가시화도 큰 성과 제24차 한미연례안보협의회의(SCM)는 ▲북한의 핵사찰 촉구를 저변에 깔고 있는 93팀스피리트훈련준비와 주한미군 2단계 철수계획 유보 ▲6공 공약사항인 평시작전통제권의 한국군에로의 이양 ▲한반도 위기시 미국이 즉각 해·공군전력을 투입하는 신속전개억제전력(FDO)개념 도입 ▲21세기를 대비한 장기적 한미군사협력방안을 마련키 위한 제도적 장치 마련등 굵직굵직한 성과들을 거둔 것으로 평가된다. 특히 양국이 북한을 겨냥,남북의 각종 교류와 대화를 최대한 존중한다는 전제아래 북한의 핵개발 저지를 위한 한미공동책을 구체적으로 가시화시켰다는 것은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남북대회 존중 또 양국이 공동성명을 통해서까지 「북한이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핵안전협정에 서명하고 동협정을 이양하며 IAEA핵사찰을 수용하겠다고 결정한 것은 한반도 평화를 위해 필요하고 유용한 일단계 조치라는데 인식을 같이했다」고 전례없이 각별한 평가를 내린 것은 주목할만한 부분이라 하겠다. 이번 SCM은 양측이 끝까지 절충을 벌여야할 핫이슈는 없었지만 한중수교·북한핵·남북대화·주한미군감축등 급변하는 한반도안보환경에 대한 한미 양국의 공동인식및 대처가 긴요하다는 점에서 내외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특히 양국이 대통령선거를 앞둔 시점이라는 정치적 전환기에 이미 구축된 안보협력관계를 공고히 다질 필요성이 대두되었고,21세기에 대비한 장기적 한미군사협력방향의 구체적 모색이 필요한 시점에 개최됨으로써 그 의미를 부여받았다. ○한국군 역할 제고 북한의 핵사찰 촉구와 핵개발 저지문제는 공동성명·양국 국방장관 단독회담·제14차 한미군사위원회회의(MCM)등 여러 곳에서 일관되게 강조되었다. 이중 「넌­워너 2단계 주한미군 감축계획은 북한의 핵개발 의혹이 해소될 때까지 계속 유보하되 핵문제 해결시에도 감축계획 재개문제는 한미간 긴밀히 협의한다」는 부분과 93팀스피리트훈련준비에 대한 합의등은 대북압력수단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평시작전통제권의 한국군 단독행사는 미국의 동아시아전략구상에서 한국군의 역할을 제고시켜 자주국방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크다.그동안 주한미군이 행사해온 평시작전통제권은 6·25직후인 50년7월14일 당시 이승만대통령의 서한으로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이 유엔군사령관에게 넘겨진 이후 42년여만의 일이다. 평시작전통제권이 「늦어도 94년말 이전」에 한국군에 이양되면 한국합참의장이 ▲평시 부대이동및 배치권한을 갖게되고 ▲팀스피리트훈련등 한미연합훈련을 한국군 주도로 실시하는등 전술적 통제권이 행사되며 ▲전시에 대비한 작전계획 수립에도 한국군 의견이 충분히 반영돼 한반도 방위는 한국군이 주도하고 미군은 이를 지원하는등 한국군 숙원인 자주국방 달성에 획기적 전환점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또 하나의 성과인 FDO의 즉각전개는 전쟁발발 이전단계라도 적의 군사적 위협이 증대되면 미 해·공군전력이 미리 전개됨으로써 적의 도발을 억제한다는 새로운 개념으로 우리측이 지난해부터미국측에 계속 강조해 왔다.이같은 FDO의 즉각전개는 한반도에서의 전쟁억제를 위한 사전조치를 한층 강화시켰다는데 의미가 있다. 21세기를 지향한 한미안보협력방안은 현재로선 윤곽없이 모호하다.다만 통일후라도 우리는 열강 사이에서 자주국방의 한계보완이 계속 절실하며,미국측으로서는 세계전략 차원에서 지역안정을 유지하고 성내에서 자신들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한국의 지원을 필요로하기 때문에 상호협력방안 모색이 제기된 것이다. 이밖에 이번 회의에서 한미연합사령부(CFC)의 장래 문제에 관한 실질적 토의는 없었으나 한반도에서 북한의 위협이 계속되는한 평시작전통제권 전환과 관계없이 CFC의 존속이 필요하다는데 인식을 함께한 것도 성과라 할 수 있다.
  • 평상시 작전권 94년이전 이양/한­미 합의

    ◎미 신속군 남침위기땐 즉각 투입/내년 팀스피리트훈련 계획대로 재개 【워싱턴=안병준특파원】 제24차 한미연례안보협의회의(SCM)가 8일 상오10시(한국시간 9일 새벽)워싱턴의 미국방부에서 이틀간의 공식일정을 끝내고 15개항의 공동성명을 채택한뒤 폐막됐다. 최세창국방부장관과 리처드 체니 미국방장관은 이날 공동성명을 통해 『미국의 한국방위역할을 지원적역할로 전환하기 위해 한국군에 대한 평시작전권을 94년12월31일까지 한국군에 이양하기로 합의하고 남북관계,특히 상호핵사찰등 진전이 없을 경우 팀스피리트93훈련을 실시하기 위한 준비조치를 계속해 나가기로』의견을 함께 했다. 이로써 6·25직후인 50년7월14일 당시 이승만대통령의 서한으로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이 당시 맥아더 유엔군사령관에게 넘겨진 이후 44년여만에 평시작전통제권을 환수하게 됐다.그러나 전시작전통제권은 주한미군사령관이 겸직하고 있는 한미연합사령관이 행사한다. 최장관과 리처드 체니 미국방장관은 이날 회담에서 평시작전통제권이양의 구체적인방법과 절차는 양국 실무진들이 공동으로 연구,93년 가을 서울에서 개최될 제25차 SCM에서 최종결정키로 했다. 이와관련,국방부 관계자는 평시작전통제권의 이양시기가 빠르면 93년말이나 94년초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전했다. 한미양국은 주한미군의 추가감축은 북한의 핵개발에 대한 불확실성이 철저하게 규명될때까지 유보하기로 합의하고 남북합의에 의한 상호핵사찰이 이행될 경우 미국은 주한미군의 군사시설을 공개할 준비가 되어있음을 재강조했다. 이에앞서 이필섭합참의장과 콜린 파웰미합참의장은 7일 미국방부에서 제14차 한미군사위원회(MCM)를 열고 한반도에 위기가 고조될 경우,전쟁발생 이전에 미국이 공군및 해군전력을 급속히 전개해 전쟁억제력을 유지하는 신속전개억제전력(FDO)개념을 새로 도입시키기로 했다.
  • 「마음의 고향」/우리 옛영화 파리에 있다

    ◎48년 제작,16㎜ 흑백필름… 제작자 이강수 보관/함세덕희곡 「동승」 각색… 최은희 데뷔작/개봉당시 이승만대통령 각료들과 감상 몇개 남아있지 않은 1940년대 영화작품 가운데 1948년작 「마음의 고향」(윤용규감독)을 이 작품의 제작자인 파리거주 이강수씨(74)가 지니고 있다.이 영화는 국내에도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어 자료부족을 절감하고 있는 영화관계자들을 기쁘게 할 것으로 보인다.「마음의 고향」은 이씨 개인의 인생항로를 바꿔 길고긴 타국살이로 이끈 작품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함세덕원작 희곡 「동승」을 영화로 만든 것이며 이강수씨가 시나리오로 각색하고 기획·제작도 맡았다.출연진은 변기종·석금성·김선영 등 당시 유명배우와 무명시절의 최은희 그리고 아역의 유민 등이다.촬영은 잘 알려진 한형모. 이씨는 30세때 이 작품 하나만을 만들고는 영화제작을 계속하지 못했다.그는 처녀작에 대한 애착때문에 40여년간 일본과 프랑스로 삶의 터전을 옮겨다니면서도 꼭 챙겼다.흑백 16㎜필름인데 보존상태가 비교적 좋은 편이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어느 절의 12살 애기중 도성.이 소년은 얼굴도 모르지만 착하고 아름다운 어머니가 언젠가 찾아올 것이라고 믿는다.실상인즉 그 어머니는 고아로서 절에서 성장했으며 어느 남자와 눈이 맞아 도주했다가 세살된 도성을 절에 맡기고는 또 다른 남자한테 간 뒤 소식이 없었다.소년은 이런 내력을 모른다. 죽은 어린 아들의 재를 지내러 온 젊고 친절한 미모의 과부 서울아씨(최은희)가 도성을 수양아들로 삼기로 한다.이 무렵 도성의 생모(김선영)가 마음을 돌려잡고 아들을 찾으러 왔다가 이 사실을 알고는 장래를 위해 아들이라고 불러보지도 못하고 홀로 슬픔을 억누른채 돌아선다. 입양은 다른일 때문에 보류된다.주위사람의 탄식을 귓곁에 얼핏 들으면서 도성은 서울아씨와 만나던 애절한 표정의 아주머니가 생모라는 것을 깨닫는다.봇짐을 꾸려 어머니를 찾으러 떠나는 도성의 걸음걸이가 힘차다. 도성역 유민의 연기가 훌륭하고 김선영 또한 인상적이다.뒷날 대스타가 되었고 아직도 현역으로 있는 최은희의 젊을적 모습을 볼 수 있다.변기종(주지역)과 석금성(과부의 어머니역)의 이름은 옛 영화애호가들에게 향수를 느끼게 할 것이다. 영화배우 윤정희씨는 이 영화를 보고나서 『보고 싶었는데 정말 좋은 영화였다』면서 『최은희씨의 데뷔작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이강수씨 말로도 『최은희씨가 전에 다른 작품에도 출연했지만 인정을 받고 있지는 못했다』는 것으로 보아 출세작으로 보는데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아역의 유민은 좋은 배우로 성장했을 수도 있을 터인데 『그 뒤 난리가 터져서 그 통에 어찌 됐는지…』 이씨는 소식을 전혀 듣지 못했다고 한다.이씨 자신 또한 『전쟁이 아니었으면 영화 제작을 더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씨는 직업적 문필가는 아니었으나 문학을 좋아하여 틈만 있으면 시 소설 희곡 시나리오를 썼으며 그중 「흘러간 수평선」이란 소설은 신문(어느 신문인지 본인은 기억하지 못했으나 부인이 결혼전해인 19 40년에 읽었다고 말함)에 「춘인」이란 필명으로 연재했다고 한다. 『영화를 좋아해서 시나리오를 써보곤 했지만 영화 제작 경험도 없으면서 「마음의 고향」을 만들게 된 것은 함세덕의 신문 신춘문예 당선 희곡 「동승」이 지닌 인간미가 너무 좋아서였다』고 그는 말했다.이 영화를 만드느라 집을 잡히고 은행 돈을 끌어댔는데 『은행이 영화계에도 돈을 빌려주었다더라』하고 화제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씨는 범한무역이라는 회사의 일로 1950년 가족과 함께 일본도쿄에 건너가 있었다.그뒤 가족이 일본으로 합류했다.가지고 간 「마음의 고향」을 일본인 친구에게 보여준 것이 그를 영화 수입상인 유니온 영화사에 입사케 하는 계기를 만들었으며 안정된 일본 생활을 보장해주었다.업무 때문에 프랑스에 자주 갔다가 파리의 예술적 환경에 끌려 19 60년 가족과 함께 일본을 떠났다. 생계를 위해 파리에서 일식집을 시작했는데 선견지명이 있었던지 그 뒤 일본인 유럽 관광바람을 타게 되어 재미를 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들만 다섯을 두었으며 이들중에서 몇이 식당업을 이어받았다. 요즘 이씨는 신병으로 거동과 대화가 자유롭지 않으나 「마음의 고향」에 대해서는 되도록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했다.
  • 백범 암살전 이 대통령 만나/안두희씨 회견

    ◎“범행 고무하는 말 들었다” 백범 김구선생암살범 안두희씨(75)는 24일 하오6시 서울 종로구 동숭동 우당기념관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범행직전인 지난49년6월20일 당시 경무대 대통령집무실에서 이승만대통령을 직접 만났으며 이 자리에서 이대통령으로부터 백범암살을 고무하는 말을 들었다』고 주장했다. 안씨는 구체적인 암살일시와 방법에 대해선 자신이 속해있던 포병의 장은산사령관으로부터 명령받았으며 채병덕육군참모총장을 통해 신성모국방장관이 배석한 자리에서 이대통령을 만나 윗사람들 이야기를 잘 들으면 된다』는 말을 들었다고 주장했다. 한편 경찰은 현장에 안씨를 데리고 나타난 권중희민족정기구현회회장(56)을 안씨에 대한 납치등의 혐의로 인천중부서로 연행,조사중이다.
  • “당내 동요없이 대선서 승리 자신”/김영삼총재 청와대 회동뒤 밝혀

    ◎노 대통령 당적이탈 결심 처음엔 만류/민주주의 훌륭한 마무리 적극 뒷받침/개각엔 야 의견 등 대폭 수렴 시간 걸릴듯 민자당의 김영삼총재는 『노태우대통령이 민자당적을 떠났다 하더라도 나는 12월 대선에서 절대 승리할 자신이 있다』고 장담했다. 김총재는 노대통령이 민자당적 이탈과 중립선거내각구성 의사를 밝힌 18일 저녁 상도동 자택에서 기자들과 만나 이같이 밝히고 『이제 국회는 틀림없이 정상화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노대통령이 당적을 떠나겠다는 의미는. ▲노대통령의 이번 결심은 6·29선언 이상가는 혁명적인 것이다.이는 새 선거문화를 창조하겠다는 의지로 높이 평가해야 한다.내 입장에서는 노대통령이 남은 5개월 임기동안 민주주의를 훌륭히 마무리하도록 적극 뒷바침하겠다. ­오늘 청와대에서 논의된 내용은. ▲점심식사까지 같이 하며 장시간 얘기했으며 두 사람간 신의가 중요하다고 본다.중립내각에 대해서는 나의 건의를 대통령이 전적으로 받아 들였다. 당적이탈 문제는 노대통령이 먼저 얘기하길래 처음에는 만류했다.노대통령은 『중립내각을 구성해도 내가 당적을 가지고 있으면 야당이 뭐라고 할 것이니 김총재를 위해 명예총재와 당을 떠나는 것이 좋겠다』는 얘기를 했다.그래서 나는 당적만이라도 가지고 있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개진했으나 노대통령이 『더 우스워질 수 있으며 깨끗하게 떠나는 것이 낫다』고 말해 대통령결심에 따르기로 했다.나는 또 이번 대선에서 절대 승리할 자신이 있다는 얘기도 했다. ­앞으로 민정계동요등 당내 불안은 없겠는가. ▲그런 생각은 할 필요가 없다.노대통령을 상당히 사랑하는 당내 인사 다수가 민자당이 압도적으로 이기기 위해서는 노대통령이 당적을 떠나는 게 도움이 된다는 건의를 여러차례 나에게 한 바 있다.기본적인 것은 항상 믿음이다. ­향후 당·정협조는 어떻게 되는가. ▲현재 우리가 다수당이다.민자당이 적극 지원치 않으면 노대통령의 임기가 제대로 마무리가 안된다.내가 책임을 지고 적극 뒷받침하는 게 도리라고 생각한다.이것은 정국안정을 위한 것이며 중립선거내각은 별개 문제이다. 정부도 우리와 상의하지 않으면 예산심의등도 안되므로 민자당이 아직 집권당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야당의 대응은 어떻게 보는가. ▲야당은 이번 조치를 진실하게 받아들여 국회정상화에 응해와야 한다. ­개각절차와 내용은. ▲학계·교육계·언론계·종교계 일반시민등을 모두 만나 충분한 의견을 듣고 결정하겠다.야당대표들과도 함께,또 따로따로도 만나 봐야 하므로 시간이 좀 걸릴 것같다.10월 초 정도 될 것같다.그리고 이번에는 총리임명에 대한 국회인준을 먼저 받은 뒤 그 총리의 제청을 받아 멋있게 장관을 임명하자는 건의를 했더니 노대통령도 그렇게 하자고 했다.이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며 이승만박사때부터 한번도 지키지 못한 일이다.이번에 내가 처음 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개각범위는 상당히 대폭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야당과의 협의절차는. ▲의견이 여러가지로 있을 것이다.각계중에서도 야당의견을 가장 중요시해서 듣겠다.
  • “공정선거로 집권정당성 확보할터”/김영삼총재 회견내용(전문)

    저는 충남연기군의 관권선거와 관련하여 집권당 총재로서 분명한 입장을 밝히고자 이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아직 수사가 진행중이므로 결론을 내리기는 이른 시점이긴 하지만 여러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저는 연기군에서 관권선거가 있었다는 심증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유야 어떻든 온국민이,그리고 저자신이 그토록 비판해왔던 관권선거가 일부 공무원과 우리당 후보자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상황증거가 드러나고 있는 이상 당시 집권당 대표최고위원으로서 감독을 철저히 하지 못한데 대한 책임을 통감하고 역사와 국민앞에 부끄러움을 금치 못하며 이자리를 빌려 진심으로 국민에게 사죄를 드립니다. 따지고보면 관권선거는 어제 오늘의 문제만은 아니었습니다.멀리 이나라에 민주주의제도가 도입된 이래 최근에 이르기까지 관권이 선거에 개입해 왔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이같은 관권선거는 이승만정권말기에 극에 달해 마침내 4·19혁명의 불길을 댕겼습니다. 저자신도 지난 40여년의 정치생활기간중 대부분 공작정치·관권선거의 피해자였고 특히 4대국회의원선거에서는 투표함 바꿔치기로 제 일생 처음으로 낙선의 아픔을 겪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그같은 투표·개표 부정은 많이 사라졌지만 아직도 관권선거와 금권타락선거의 관행은 여전히 선거공정성에 큰 의문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사회에 만연돼 있는 한국병의 징후들,이를테면 해이된 기강과 무책임,황금만능주의와 부정부패,사치향락과 무질서 그리고 온갖 범죄등의 가장 큰 원인은 역대정권의 정통성과 도덕성의 결핍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러기에 한국병을 근원적으로 고치는 첫 단계는 집권과정의 정당성확보,즉 깨끗하고 공정한 선거를 치르는 것이라는 신념을 갖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같은 신념을 지난 8월28일 총재취임연설에서도 분명히 밝힌 바 있습니다.참고로 취임사의 한부분을 다시 소개해 드릴까 합니다. 『강력한 정부,강력한 리더십은 집권과정부터 정당할때 비로소 가능합니다. 힘은 총구나 금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도덕성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저는 부정으로 당선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저는 깨끗한 선거를치르겠습니다.그리고 두가지 악폐만은 반드시 뿌리뽑겠습니다.하나는 금력으로 권력을 만들 수 있다는 생각과 또 하나는 권력으로 금력을 만들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관권선거 김권선거는 이제 시대착오적 유물입니다.이같은 유물로는 새역사를 이끌 수 없습니다.우리 국민들도 이같은 유물로 좌우되기에는 이미 성장할대로 성장했습니다. 저는 이같이 성장한 우리국민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선거문화,더 나아가 정치문화의 선진화를 위한 몇가지 제언을 드리고자 합니다. 첫째,이번 연기군사건에서 관권선거에 관련된 공무원과 후보자는 성역없이 정치적·사법적인 모든 책임을 묻도록 하겠습니다.비록 이번 사건에 직접 개입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정치적으로 중립적 위치에 서야 할 공무원들을 감독하지 못한 부서 책임자들에게도 응분의 정치적 책임을 물을 것입니다. 이같은 엄중한 문책이야말로 앞으로 공무원들이 다시는 선거에 개입하지 못하도록 하는 분위기 일신에 기여할 것입니다. 둘째,저는 모든 공무원이 민주주의 파수꾼으로서의 자긍심을갖고 불편부당의 중립성을 갖고 국민에게만 봉사토록 만들겠습니다.이를 위해 대통령선거법등 모든 법령을 고쳐 공무원들이 선거에 관여할 여지를 한점도 남기지 않도록 하겠고 지금까지 행정선거 의혹을 받아온 일체의 불법선거 관행도 없애도록 하겠습니다. 여기에는 직업공무원제의 확립등 신분보장이 따라야 합니다.독립적인 인사위원회의 설치운영도 검토할 것입니다.지방화시대에 맞춰 국가 및 지방공무원 체계를 개선하고 사기앙양을 위한 획기적인 처우개선책도 마련될 것입니다. 셋째,공명선거에 대한 소명감은 정부 여당과 함께 야당과 국민모두에게 필요합니다.불법 타락선거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정부 여당뿐 아니라 야당과 국민 모두가 성숙된 의식으로 함께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아울러 법집행은 어느쪽에나 엄정하게 적용될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자 합니다. 이번 선거는 조국을 정치선진국의 반열에 올려놓는 계기가 되어야 합니다.선진국으로 가는 변화와 개혁이 바로 이번 선거에서 시작될 것입니다. 연기군사건은 저에게 변화와 개혁을 행동으로 실천으로 보여줄 수 있는 더없이 좋은 기회를 주었습니다. 과거는,그리고 역사는 보다 밝은 내일을 창출하려는 사람에게는 항상 소중한 거울입니다. 저는 우리 후손들에게 보다 밝은 정치제도와 정치문화를 유산으로 남겨줄 것입니다.미래는 밝을 것입니다.우리에게 희망이 있습니다.
  • “YS당선 이변없는한 확실시”

    ◎일 원간지 「현대」,「김 총재론」서 전망/“물리적 배경없이 「정상」에 오를 첫 인물” 한국의 새로운 실력자 김영삼 민자당대통령후보가 선거에서 승리한다면 그는 민중운동이나 군이라는 물리적 힘의 배경없이 권력의 정점에 오르게 된 한국정치 사상 최초의 인물로 후세의 역사에 기록될 것이라고 일본의 월간잡지 「현대」10월호가 보도했다. 이 잡지는 「신실력자 김영삼의 김맥과 인맥」이라는 제목의 김영삼 인물론에서 이같이 보도하고 『상당한 이변이 없는한 김후보의 당선은 확실하다』고 전망했다.다음은 일본의 자유기고가 고토 다카오(오도륭부)가 서울에서 직접 취재한 김영삼 인물론의 요약이다. 지난 87년 대통령선거에서 한국의 어떤 월간잡지가 「1노3김」의 4후보에게 『과거에 거짓말을 한 적이 있는가』라고 질문했을때 『있었다』고 대답한 사람은 김영삼후보 뿐이었다.이는 김영삼이라고 하는 정치가를 이해하는데 있어 더할 나위없이 적절한 에피소드이다. 그로부터 5년,김후보는 40년간의 야당생활을 청산하고 이번에는 입장을 1백80도 전환하여 여당 민자당의 대통령후보가 됐다.그는 3당통합에 대해 『언젠가 역사가가 나의 판단은 시의적절한 것이었다고 평가해줄 것을 바라고 있으며 그렇게 되도록 노력하고 싶다』고 말했다. 박정희·전두환·노태우대통령등 군인출신 역대 대통령에 비해 야당 출신인 김영삼 민자당총재가 12월 대통령선거의 가장 유력한 후보로 등장한 것은 한국 민주화에 대전환을 가져오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번 선거는 「20년 숙명의 라이벌」로 불리는 「양금」의 대결이 되고 있다.그러나 김영삼후보가 당선되는 것은 상당한 이변이 없는 한 틀림없을 것이다.더욱이 김영삼후보는 두터운 인맥과 김맥을 형성하고 있다. 김영삼후보가 당선되면 그는 거의 반세기만에 한국최초의 정당정치를 통한 대통령이 되는 셈이다.초대 정권의 이승만대통령은 독립운동에 의해,장면총리는 4·19학생혁명에 의해,박정희·전두환전대통령은 쿠데타에 의해 정권을 잡았다.노태우대통령은 87년 12월 대통령선거에서 승리했으나 80년 5·17사태로 권력을 장악한 군부 주체세력의한사람이었기 때문에 정치 자체를 통해 최고 권력자의 지위에 올랐다고 볼수 없다.그점에 있어 김영삼후보는 의회정치의 산물이라고도 할수 있는 정치가 경력의 소유자다.만일 김후보가 당선되면 민중운동이나 군이라는 물리적 힘의 배경없이 권력의 정상에 오른 인물로 역사에 이름을 남기게 될 것이다.
  • 다시 새기는 그 충절/이달의 독립운동가 신규식선생

    ◎서울신문사·국가보훈처 공동선정 선열들의 애국·애족사상을 기리기 위해 서울신문사와 국가보훈처가 마련한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예관(예관) 신규식선생이 선정됐다.9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신규식선생이 한·중수교 시점에서 재조명된다는 것은 의미가 있다.선생은 단순한 독립운동가로서가 아니라 독립운동의 2대 조류인 외교중심론과 무장투쟁론을 접목시켰을 뿐만 아니라 국력배양·민중계몽운동·경제적 자립기반 확충등 총체적 운동을 치열하게 전개했기 때문이다.신규식선생의 43세 짧은 생애를 되새겨 본다. ◎상해 임정수립 주역… 중국승인 얻어내/한·일 합방 직후 망명… 12년간 항일운동 매진/신해혁명 참여… 손문정부와 연계투쟁 길터/22년 임정분열에 통분,병석에서 25일간 단식… 43세로 생 마감 신규식선생이 남긴 명저 「한국혼」은 이렇게 시작된다. 『마음이 죽어버린 것보다 더 큰 슬픔이 없고,망국의 원인은 이 마음이 죽은 탓이다.…우리의 마음이 곧 대한의 혼이다.다 함께 대한의 혼을 보배로 여겨 소멸되지 않게하여 먼저 각자 자기의 마음을 구해 죽지 않도록 할 것이다』 이 글에 담긴 선생의 철학은 목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소신찬 행동으로 이어진다. 19세기말에서 20세기초 사이 망국의 한을 온몸과 마음 바쳐 투쟁으로 승화시킨 신규식선생의 웅변이 지금 이 시대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음은 무엇을 뜻하는가.우리의 독립이 진정한 의미의 독립이라 할지라도,나라가 남과 북으로 갈라진 책임은 누가 져야 하는 것인가. ○충북 문의서 출생 신규식선생은 1880년 1월13일 충북 문의군(현재 청원군)에서 중추원 의관을 역임한 신용우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신채호 신백우와 함께 「산동삼재」라고 불렸다. 17세때 신학문에 뜻을 세우고 상경,관립한어학교를 거쳐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하여 무덕을 쌓게 되었다.신동으로 불리며 한학등 구학문에 능통하고 문학에도 탁월한 자질을 지녔지만 기울어가는 국권을 회복하는 길은 오직 국력배양에 있다고 생각했다. ○을사년 순국기도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육군참위로서 지방군대와 연계,대일항전을 계획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13도 유생들이 조약 철회를 상소하고,장지연은 황성신문에 피를 토하듯 「시일야 방성대곡」을 썼다.민영환 조병세 홍만식등은 자결했다. 민심이 가마솥 끓듯 펄펄 끓을 때였다.청년장교 신규식은 계동·가회동·운니동등의 솟을대문들을 골라 몽둥이로 후려치며 미친듯 소리 질렀다. 『을사오적들은 나오너라!』 신규식은 호랑이라도 잡을 듯 거리를 쏘다녔지만 역부족이었다.운니동 집으로 돌아 왔을 때 그는 자신이 한낱 미약한 존재였음을 확인했을 뿐이다. 사흘을 문걸어 잠그고 굶었다.그리고 결론을 내렸다.민영환등의 순국은 소극적 행동이 아니라 적극적 투쟁의 하나라고 생각했다. 『죽음은 거름의 역할을 하는 것­내한몸 거름이 되어 무수한 열매를 맺을수 있다면 여한이 없겠다』(「한국혼」 참조·26살 신규식의 이같은 생각은 그러나 후일 「치욕을 알면 피로써 죽음을 할 수 있고,치욕을 씻으려면 피로써 씻어야 한다」는 투쟁적 신념으로 바뀐다) 신규식은 독약을 마셨으나 문을 부수고 들어온 가족들에 의해 겨우 목숨을 구했다.그러나 약기운이 번진 오른쪽 눈은 시신경을 다쳐 애꾸가 되었다.거울을 들여다 본 신규식은 냉소를 지었다. 『애꾸,그렇다.이 애꾸눈으로 왜놈들을 흘겨보기로 하자.어찌 나 한사람만의 상처이겠는가.우리민족의 비극적 상징이다』 이때부터 청년 신규식은 흘겨볼 예(예)자,볼 관(관)자­예관으로 자호를 삼아 끝까지 사용했다. 문동학원·덕남사숙의 설립 또는 지원,중동학교장 취임,공업전습소생들을 중심으로한 「공업연구회」조직,월간 「공업계」창간,윤치성 민대식등 퇴역장교를 규합한 황성광업주식회사 설립·운영,민족종교인 대종교에의 입교,분원자기공장의 설립과 고려자기 재현운동…등등이 선생의 무서운 행동력을 입증한다. 그러나 1910년 「보호」라는 양의 탈을 쓰고있던 일제는 본색을 드러냈다.경술국치가 그것이다.우리나라는 통째로 그들의 입속으로 삼켜졌다. 선생은 다시한번 자결을 생각했으나 마음을 고쳐먹고 1911년 상해로 망명,운명할 때까지 12년여 동안 위대한 업적을 남기게 된다. 첫째는 당시세계정세를 능동적으로 이용하면서 독립운동의 2대 조류인 외교중심론과 무장투쟁론이라는 두가지 운동노선을 접목시켰다는 점이다.혁명가적 열정과 선각자적 혜안을 함께 갖춘 선생은 중국혁명동맹회에 가입,송교인 진기미 손문등과 교류하며 중국신해혁명에 외국인으로 참여하여 나중 중국국민당정부와의 항일연계투쟁의 기틀을 마련했다. 1911년 여름 어느날 선생은 손문과 함께 자리를 했다. 『예관선생이 우리 동맹회를 도와주시니 참으로 장한 일이십니다』 『바로 중국혁명운동이 한국독립에 직결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어떤 점에서 그렇습니까?』 『역사적으로 볼 때 양국 사이는 순치(순치)의 관계였습니다만 중국은 우리를 속국시한 것도 또한 사실입니다.혁명이념으로 볼 때 과거 우리에게 진 묵은 빚을 청산해주리라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과연 듣던대로 훌륭한 논객이요.애국자이십니다』 선생과 손문의 혁명적 동지애는 변함없이 지속됐다.이 우정을 바탕으로 선생은 손문의 도움을 얻어 많은 우리 젊은이들을 적성에 따라 교육시켰다. ○3·1운동을 점화 둘째는 3·1독립운동과 상해임정수립의 주춧돌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선생은 1917년 조소앙 박용만등 13명의 독립운동가와 함께 선포한 「대동단결선언」을 통해 핀란드 폴란드등 당시 피압박민족의 독립을 열거하며 이는 좋은 징조이므로 우리나라도 통일된 최고기관 즉 정부의 조직필요성을 역설했다.또 국내와 일본등에 동지들을 밀파,2·8독립선언에 영향을 끼쳤다. 1919년 3·1운동이 터졌고 상해에서 선생은 프랑스 조계내에 독립임시사무소를 개설,정부수립을 추진했다.(언론인이며 3·1운동 민족대표 33인중 한명인 오세창은 『3·1운동은 예관에 의해 점화되었다』고 단언하고 있으며 당시 일경비밀정보도 『…이 소요를 유발시킨 데에는 상해거주 불령선인들의 선동에 크게 힘입었다』고 쓰고 있다) 상해임정도 수립되었고 5월에는 손문등 중국광동정부로부터 국가승인도 얻어내는 외교적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정부수립후 고질적 파벌의식과 지방색·출세욕 등이 뒤엉켜 1921년4월 이후 임정은 혼란에 빠져들었다.선생은 병원에 누워 의정원 회의참석을 거부했다.4월10일 소위 「재미파」이승만이 내각수반이 되었다. 이듬해까지 병석에 누운 선생은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한국인들이 단합되지 않는 것을 통탄하면서 25일동안이나 불식·불언·불약을 고집했다. 이튿날인 1922년9월25일.선생은 마지막 남은 숨을 호흡단절법으로 끊고 이승을 버렸다. 『정부…정부…』 희미한 소리가 숨을 거두는 그의 목에서 새어나왔다.단식 25일만에 처음 나온 말은 선생이 세상에 남긴 마지막 말이 되었다.그 말은 70년이 지난 지금 이 시대에도 남아있을 유언이 아닐는지…. ◎독립운동에 외교적으로 크게 공헌/역사적 평가/신승하 고려대교수·동양사 예관 신규식은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상 알려져있는 것보다 숨겨져있는 공이 많은 분이다.특히 중국에서 한국임시정부가 수립될 수 있었고 또한 중국정부나 중국인들로부터 중국에서 우리나라 임시정부가 독립운동을 지속할 수 있도록 지원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은 분이다.그런데 불행하게도 1922년 43세의 젊은 나이로 일찍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그 평가를 제대로 받지 못한 분이다. 구한말 애국계몽운동때부터 구국자강을 위하여 실업과 교육밖에 없다는 신념아래 학교를 세우고 또한 우리나라에선 제일 먼저 실업전문잡지인 「공업계」를 발간하였다.그러나 나라를 잃게 되자 중국으로 망명하여 상해에서 중국혁명당 인사들과 접촉하고 동맹회에 가입하였다.그리고 중국이 잘되어야만 우리나라도 잘될수 있다는 생각아래 그들과 함께 신해혁명에 참가하여 이후 중국 혁명당인들과의 교류가 더욱 밀접하게 될 수 있었다. 그는 인재의 양성이 절실하다 보고 우리 젊은이들을 위하여 학교를 세웠으며 또한 중국인의 무관학교는 물론 일반 학교에도 입학을 주선하고 심지어 외국유학까지 보냈다.그리고 독립운동을 널리 알리고 선전하기 위하여 진단이란 잡지를 상해에서 발간하였다. 1921년에 손문이 광주에서 광동호법정부를 수립하자 한국임시정부 의정원은 그를 전권사절로 파견하였다.그리하여 한국임시정부가 호법정부의 승인을 받고 중국의 각 군사학교에서 한국학생의 수용을 허가받아 이후 황포군관학교 광동대학 등에 한국 젊은이들이 많이 입학되었으며 이들은 독립운동의 기간이 되었다. 따라서 신규식의 평가는 단순한 독립운동의 차원에서 할 것이 아니라 한걸음 앞서 독립운동을 위한 또 이를 전개하는 과정가운데 중국과의 관계에서 중요한 역할과 공헌이 있었음을 높게 사야 할 것이다.
  • 이승만 전 대통령 27주기 추모예배

    우남 이승만박사 제27주기 추모예배가 19일 하오3시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 현충관에서 이박사의 양자 인수씨(61·명지대 법정대학장)와 신현확 전국무총리,이한빈 전부총리,김정례 전보사부장관 등 유족·친지 3백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엄수됐다.
  • 분단문학/90년대 새 방향모색 활발

    ◎이청준·김원일·구효서씨,새방법론 제시/피해의식 버리고 화해의길 모색/북한주민 삶의 실상 작품화 시도/평론가들 “침체 벗어나기위한 바람직한 현상” 반겨 분단문학의 퇴조 기미가 역력한 가운데 분단문학의 새로운 전망을 모색하는 글들이 현역작가들에 의해 잇따라 발표되고 있다. 소설가 이청준씨는 「문예중앙」여름호의 권두에세이 「통일을 향한 문학」,소설가 김원일씨는 최근 출간된 분단소설선 「달맞이꽃」(중원사간)머리글 「분단시대를 마감하며」에서 각기 자신들의 분단문학관을 펼치며 90년대 분단문학의 갈길과 새로운 방법론을 제시하고 있어 관심을 끈다.이에 앞서 지난봄 소설가 구효서씨는 젊은 세대로서 자신의 분단문학관을 장편소설 「전장의 겨울」로 형상화해 주목을 끌었었다.이같은 시도들은 현재 침체를 겪고 있는 분단문학 창작에 돌파구를 틔워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해방공간에서 좌우익 갈등의 묘사로부터 출발한 분단문학은 6·25를 거치면서 휴머니즘문학·반전문학으로 변모하였으며 60년대 최인훈씨의 「광장」이라는 뛰어난 성과를 낳고 70년대 성장기를 거쳐 80년대에는 탈이데올로기적인 장편소설로 만개했다.그러나 90년대에 들어와선 통일지향문학으로 나아가고 있을 뿐 뚜렷한 성과를 보이지 않고 있는 상태다.순수하게 분단문제를 다룬 것으로 올해 발표된 소설로는 현길언씨의 「여자의 강」,구효서씨의 「전장의 겨울」,이청준씨의 「가해자의 얼굴」,홍상화씨의 「유언」정도이다.이같은 부진은 작가들의 관심이 대부분 분단문제를 떠나있으며 소재의 확대에도 불구하고 독자들이 기존의 시각에 식상해 있기 때문으로 새로운 시각의 확보 등 분단문학이 한단계 진전해야 할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다. 이를 위해 소설가 이청준씨는 권두에세이 「통일을 향한 문학」에서 피해자의 입장을 대변해왔던 이제까지의 분단소설의 경향과는 달리 가해자의 처지에 서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수난자의식은 자기 수난에 대한 보상과 보복의 대상을 겨누고 드는 대립적 힘의 악순환을 부르기 쉬운 반면 자책과 속죄의 괴로움으로 수난자의 용서와 화해를 구하는 가해의식의 각성은 효과적으로 민족의 화해와 통일의 길을 열어나가게 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 그는 또 앞으로의 분단문학은 보다 더 활발한 평등성의 고양으로 자유지향성과의 균형있는 조화를 이뤄나가야 한다고 강조하고 「북녘 인민들」의 삶의 실상에 대한 작품화가 분단문학의 새 과제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김원일씨는 「분단시대를 마감하며」라는 분단문학에 대한 회고와 반성의 글에서 지금까지 분단문학에서 큰 비중으로 다뤄져왔던 남로당의 자리에 현재 북한을 통치하고 있는 정치세력이 들어서야 한다고 주장했다.왜냐하면 그들이야말로 북조선을 세워 6·25전쟁을 수행한 실세로서 오늘의 북한사회를 건설하며 인민을 이끌어 온 주체이기 때문이라는 것.그는 『앞으로의 분단문학이 북한의 현정치세력을 정면으로 끌어들여 객관화시키지 않고서는 영원히 반쪽문학으로 남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한국전쟁의 기원을 천착한 소설 「전장의 겨울에서 한국전쟁의 발발이 김일성과 이승만 두 사람의 집권욕에서 비롯됐다는 결론을 내린바 있는 구효서씨는 분단문제를 다룸에 있어 사회과학적 시각 뿐만 아닌 인문과학적 시각의 필요성을 새롭게 강조했다.현대정보산업사회에 있어 그 사회의 성격에 맞게 복잡한 시각들을 포괄해야만 분단문제에 대한 올바른 파악이 비로소 가능하다는 주장이다. 이같은 주장들에 대해 문학평론가 김윤식씨는 『분단문학이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문제로 나아가는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지적하고 앞으로 작가들의 활발한 창작성과를 기대했다.
  • 내가 겪은 「1950년여름」/윤남경 작가

    ◎인공기 보면 아직도 떨리는 이가슴… 『아직도 옛말 삼기는 멀다』 몇해전까지만 하더라도 6·25가 돌아오면 나는 이 말을 되뇌이곤 했었다. 6·25 당시 부산으로 피란을 간 뒤에도 『언제쯤 이런 생활을 옛날얘기삼아 우리 후손들에게 들려줄 수 있을까.마치 우리가 3·1운동 얘기나 임진왜란때 이야기들을 할머니에게 듣듯이 말이다』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우리 후배들은 공산당 얘기를 해달라는 것이 아니라 숫제 인민공화국 깃발을 흔들며 거리로 뛰쳐나가는 것을 볼때 나는 꺄악하고 소리라도 지르며 그 자리에 주저앉을뻔 했던 것이다. 우리는 그런 극단으로밖에 사물을 판단못하는 것일까. 지금으로부터 40여년전 대학기숙사에서 한가롭게 노래를 하고 있는데 우리 귀에 난데없는 대포소리가 쿵쿵하고 울릴 때 우리는 그저 국군의 훈련소리라고만 믿고 있었다.그러나 며칠뒤 사감선생님이 속히 집으로 돌아가거나 지방 학생들은 연고자를 찾아가라고 다급하게 말할때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고 부산이 집이었던 J는 이미 길이 막혀 이리저리 걸식하다시피 살면서 그 시절을 지냈다.영문도 모르고 집에 가 있는 내 귀에 모교인 K여고에서 인민재판을 연 결과 사형선고가 내려진 몇사람 속에 내가 끼었다는 소문을 듣고는 즉시 이모님댁으로 몸을 피했다.그때 기독학생회장과 훈육부장을 겸하고 있었으니까 그런 모양이다. 그러나 이모님댁에도 밤마다 내무서(경찰서)원들이 집을 뒤지며 젊은 남자는 인민군으로,젊은 여자는 의용군이나 간호원으로 끌고가는 바람에 거기도 못 있고는 땀띠의 투성이 얼굴로 골방에서 뛰쳐나와 집에 가서 식구들 얼굴을 한번만 보고 어디론가 가리라 하고 집에 가보니 모두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인민군이 후퇴하기 직전에 몇몇집식구들은 다 죽이고 가는데 우리집도 그중의 하나라는 것이다.그러니까 빨리 피하라고 누군가가 귀띔을 해주었다.그들은 종적인 명령계통은 잘 서 있지만 횡적인 연락에는 둔하니 장소만 바꾸면 된다는 것이다. 결국 큰고모님네와 작은아버지 식구들하고 한 20여명이 성북동에 있는 작은 고모님댁으로 갔으나 가자마자 누군가가 찔렀다면서 내무서원들이 들이닥쳐 아버지 머리에 권총을 들이대며 『네가 상공장관인 아무개지?』하고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할머니가 질겁을 하며 권총을 부여잡고 그애는 장관의 동생이라고 소리치시는 바람에 위기를 모면한 일도 있었다. 결국 노인과 어린이만 빼놓고는 우리를 굴비엮듯이 엮어 끌고가니 그것을 본 동네사람들이 혀를 차며 『어제도 몇십명을 잡아다 뒷동산에서 죽이더니 오늘도 또 저렇게 죽이는구나』하는 말이 들렸다.어머니 친구분중 한사람은 잡혀 갈때 검정고무신과 흰고무신을 한짝씩 신고가면서 내가 죽거든 이 고무신을 보고 찾으라고 하며 끌려갔는데 정말 그들이 도망간 뒤 삼청동 산 웅덩이속에서 얼굴은 썩어 분간할 수가 없었으나 고무신때문에 찾은 일도 있었다. 우리를 끌고간 그들은 한사람 한사람씩 밤새도록 심문을 했으며 새총인지 무슨 총인지를 들고 공연히 사람들 얼굴에 겨냥하며 쏘는 시늉도 해보고 어디서 훔쳤는지 길다란 일본 사무라이 칼을 빼서 사람을 후려치는 흉내도 내보고 갖은 악독한 짓을 다하며 사람을 밤중까지 묶어 두었다.내게는 어디 다니느냐고 하기에 정직히 대학생이라고 말하니까 갑자기 표정이 잔인해지더니 『흥! 난 인민학교도 못나왔소.당신 나를 업신여기기요?』하고 대드는게 아닌가.업신여기다니 내 목숨을 쥐고있는 사람인데라고 생각했으며 『이승만이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는등 몇가지 이상한 질문을 던지더니 자기들도 사람 죽이는데 진력이 났는지 다음날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다.그때 풀어주는 것은 정말 기적중의 기적이라고 모두 말했다.그대신 자기들을 욕하면 또다시 잡아들인다고 협박도 했다. 인민군이 내려오자 멋도 모르고 환영하며 협력했던 사람들도 뒤에 알고보니 대부분 쫓겨났거나 숙청당했다는 것이다.이유는 서울에서 이북으로 도망가지 않고 그대로 살고 있었으니 반동분자라는 것이다.결국 이용할대로 이용해먹은 뒤에는 발길로 걷어차버리는 것이 그들의 속성인 줄 알기 때문에 그들이 무슨 달콤한 말을 하더라도 속지 않으리라는 것이 그당시 우리들의 심정이었다. 그 더운 복중에도 솜이불을 뒤집어 쓰고 라디오를 들으면(들키면 사형이니까 목숨걸고 듣는 단파 라디오였다)미국의 소리방송에서 『여러분 오늘도 얼마나 수고하셨습니까?』하고 나올때 정말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오늘 하루도 죽지않고 살았구나하는 실감때문이었다. 쌀을 구경못하는 배고픔에다가 전쟁전에 먹었던 군것질거리 생각이 나서 참기 어려웠지만 그보다도 사람을 믿을 수 없었던 것이 가장 괴로운 일이었다.그들은 자식이 부모를,이웃이 이웃을 모두 못믿고 감시하고 서로 내무서에 일러바치는 자들만이 영웅이라고 가르친 까닭에 정말 누구하고 마음놓고 이야기할수 없었다. 그러나 북쪽사람도 우리 부모요 형제들이다.우리는 하루속히 통일이 되어 사람을 속삭이는 날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그러나 공산주의,김일성주의에 물들은 사람들하고는 아직도 마음놓고 흉금을 털어놓지 못한다는게 솔직한 내 심정인 것이다.
  • “미,한국 휴전직전 중립화 검토”/이 전 대통령 북침땐 감금계획

    ◎미 비밀문서 분석 【워싱턴 연합】 미국은 한국동란 휴전협정 조인을 불과 한달 앞두고 휴전후 한반도를 중립화하는 문제를 심각하게 검토했으며 휴전후에도 이승만 대통령이 북침을 개시할 경우 한국정부 지도자들을 감금하는 방안도 검토했던 것으로 15일 밝혀졌다. 이같은 사실은 최근 발간된 「해방에서 자립까지의 한미관계­20년간의 기록」이라는 책에 수록된 미행정부의 비밀문서에 기록된 것이다.이책은 도널드 맥도날드조지타운대 명예교수가 미행정부의 5천여종이나 되는 각종 문서를 토대로 정리한 것이다. 이 책에 따르면 당시 덜레스 미국무장관의 재가를 받은 53년6월16일 국무부 정책보고서는 휴전후 남한을 미국의 군사 동맹국으로 묶어두고 남북분단을 무한정 계속하는 방안과 한반도를 중립화하는 두가지 방안을 검토한 끝에 『통일되고 중립화된한반도를 확보하는 것이 미국의 국가이익에 부합되고 미국의 목표가 돼야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 환경보호·자원절약 아이디어 백출

    ◎한국부인회 주최 생활용품 재활용작품 전시회/우유팩·헌 달력이 멋진 놀이기구로/프란체스카여사 「알뜰유품」도 공개/주부들,“근검정신의 산교육장… 나도 실천하겠다” 다짐 주변을 둘러보면 한번 쓰고 버리기엔 아까운 물건들이 너무 많다. 언젠가 다시 활용할 수 있겠지 하고 모아 두었던 물건들을 유용한 생활용품으로 만들어 쓸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한국부인회(회장 임명순) 주최로 열린 생활용품 재활용 아이디어작품 전시회(3∼8일 롯데백화점 잠실점 시민광장)에서 환경을 보호하고 자원 절약효과를 낼 수 있는 다양한 아이디어들이 발표돼 관심을 모았다. 가정폐기물 재활용의 필요성을 인식시키고 스스로가 환경보전 활동에 주인의식을 갖고 재활용품 분리수거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유도하는 것을 목적으로 실시된 이번 전시회에는 아이디어작품 공모전에서 금상을 차지한 양경아어린이(전주 서원국5년)의 「빈 우유팩을 이용한 쌓기블록」을 비롯,재활용의 아이디어가 반짝이는 생활용품 60여점이 전시됐다. 또한 이번 전시회에서는 근검절약을 몸소 실천하며 살았던 고프란체스카여사의 자원 재활용 유품들이 공개되기도 했다. 「빈 우유팩을 이용한 쌓기블록」은 빈 우유팩에 톱밥을 채우고 봉한 다음 색지로 포장해서 만든 블록.만들기가 간단할 뿐 아니라 유치원에서 쌓기 놀이에 쓰일 수 있으며 국민학교 산수시간에 쌓기 나무에 관한 문제를 푸는데 자료로도 활용할 수 있다. 또 은상을 차지한 이행숙씨(경기도 의정부시)의 「젓가락 퍼즐」도 철지난 달력의 뒷면에 골판지등을 붙여 세로로 길게 자른 퍼즐놀이기구.미취학 아동들에게 관찰력과 추리력을 길러주는 학습교재로도 사용할 수 있다. 이밖에 윤추자씨(도봉구 창동)가 고안해낸 비누케이스,최창순씨(영등포구 신길동)의 헌우산을 이용한 시장가방,도혜자씨(경북 상주군)의 폐타이어를 이용한 원탁등은 단순한 폐품 이용을 벗어나 교육적,실용적 가치를 지닌 작품으로 높이 평가됐다. 해진 손주의 털스웨터와 바지를 풀어 뜨개질한 조끼,무릎을 기운 손자의 내복,몽당연필등 고프란체스카여사의 유품들도 절약정신이 그대로 담긴 것들이어서 교훈적이었다.특히 낡고 색이 바랜 한복을 뜯은 천에 천조각을 채워 손수 만든 구두속 주머니,큰 종이 박스를 활용해 사용하던 옷걸이장,지나간 잡지를 이용한 이승만대통령의 신문기사스크랩등 무심코 버리기 쉬운 물건들을 생활도구로 활용한 유품 앞에서는 관람객들이 떠날줄을 몰랐다. 이 전시회를 보기 위해 딸아이의 손을 잡고 나온 신천동의 주부 김정윤씨(30)는 『지독하다는 생각이 들만큼 알뜰하게 활용한 생활용품들을 보고 많은 아이디어를 얻었을 뿐 아니라 아이에게도 산교육이 됐다』며 『집에 돌아가 실제 생활에 응용해 보겠다』고 말했다.
  • “부친 백범암살과 무관/당시 의원 낙선… 안동에 칩거”

    ◎장택상씨 두딸 주장 건국초기 수도경찰청장을 지낸 고 장택상씨의 유족들은 4일 안두희씨가 장씨의 암시를 받아 백범 김구선생을 암살했다는 주장에 대해 『안씨는 자신이 저지른 죄를 덮어버리려는 의도에서 거짓말을 했으며 백범암살사건과 고인과는 아무 관계도 없다』고 주장했다. 장택상씨의 셋째딸인 병혜씨(61·미국뉴저지주거주)와 다섯째 딸인 병초씨(48·미국 메릴랜드주거주)는 이날 상오 기자회견을 자청,이같이 밝히고 『고인은 백범선생 암살당시인 49년 6월26일에는 경북안동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낙선해 쉬고 있었으며 외무부장관직 역시 이승만대통령과 정견을 달리해 취임3개월만인 48년 11월15일에 물러났으므로 이정권에 유리하도록 백범암살을 암시했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주장』이라고 반박했다.
  • 다시 새기는 그 충절/이달의 독립운동가 이상룡선생

    ◎서울신문사·국가보훈처 공동선정/“무력으로 독립쟁취” 만주 항일투쟁 이끌어/한일 합방직후 망명,신흥무관학교 등 설립/독립군단체 통합 주도… 임정국무령도 역임/의병활동·교육자로 평생 구국활동… “광복전 유해 옮기지 마라” 유언도 선열들의 애국·애족사상을 길이 본받기 위해 서울신문사가 마련한 이달의 독립운동가에 상해임시정부의 초대 국무령을 역임한 이상룡선생이 선정됐다. 5월의 독립운동가 이상룡선생은 1896년 경북지역의 의병으로 활동하다 한일합방이후인 1911년 만주로 망명,그곳에 한인사회를 건설하고 신흥무관학교를 설립,독립전쟁을 위한 인재양성과 항일무장투쟁을 벌였다. 1926년 1월 국무령을 사임한 이 선생은 32년 5월12일 74세의 노령으로 중국 길림성에서 서거했다. 이 선생의 생애와 사상 업적을 되새겨 본다. 1925년 3월23일 상해임시정부 임시의정원은 미국의 위임통치안을 제안한 이승만대통령을 탄핵면책하고 국무총리 박은식을 대통령으로 추대했다. 박은식대통령은 임시정부헌법을 대통령중심제에서 내각책임제로 개헌하고 국무총리에 해당하는 국무령에 만주지역에서 가장 큰 독립운동단체인 한족회와 통군부를 이끌던 이상은선생을 지명했다. 1911년 만주로 이주한 이 선생은 만주에 항일독립운동기지를 만들어 청년들에게 군사교육을 시키는 한편 동포들에게 독립운동의식을 고취,신망을 한몸에 받고 있었다. 이 국무령은 만주에서 독립군을 지휘하며 항일무장투쟁에 앞장서온 김좌진·오동진·김동삼 선생들을 국무위원에 임명하고 임시정부가 활발한 무장독립투쟁을 이끌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국무위원들은 민족주의자 공산주의,창조파와 개조파,국내파와 해외파 등으로 나뉘어 임시정부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다. 1926년 1월 이 선생은 초대 국무령을 사임하고 다시 만주에 돌아와 독립운동조직인 의정부·신민주·참의부의 통협에 심혈을 기울이고 힘썼다. 윤봉길의사가 상해 홍구공원에서 폭탄을 투척,일본 군국주의 지도자들을 살해한 뒤 12일만인 1932년 5월12일 이 선생은 74세로 만주 길림성 소성자에서 『외세때문에 좌절하지 말고 더욱 면려하여 독립을 관철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노환으로 선거했다. 70평생중 반세기에 걸친 이 선생의 일관된 구국노력은 의병활동·민족계몽운동·독립군지도자·임시정부 정치지도자·교육자·사상가 등 당시의 가능한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했다. ○32년 74세로 별세 이 선생의 깊은 학식과 큰 인품은 조국은 되찾겠다는 의지와 정열로 승화되어 민족진영이나 사회주의 진영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많은 추종자들을 낳았다. 이 선생은 1858년 11월24일 경북 안동에서 유학자 이승목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명문가의 후예로 태어난 이 선생은 유학자로서의 학문적인 수업을 쌓다가 1896년 일자 명성왕후를 시해하자 영남지방의 의병에 참가했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지방유지들과 합자,가야산에 군사기지를 건설할 계획을 계획을 세웠으나 자금부족과 일본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 선생은 김동삼 등 동지들과 안동에 대한협회 안동지부를 결성,민족각성과 청소년 교육등 민족자강운동에 헌신했다. 1910년 일제가 한반도를 강점하자 이 선생은 국내최대의 항일비밀경사 신민회에 가입했다. 신민회는 전국 13개 도의 유지들과 부호들을 규합,만주에 거대한 조선인 자치구를 설립할 목적으로 이민을 모집하고 있었다. 이시영·이회영·이동영·주진수·김창환 등 구한말의 관리와 양반·선비들은 가산을 정리하고 무인지경이던 만주로 이민을 떠났다. 1911년 4월 53세의 이 선생은 52명의 대가족을 인솔하고 만주로 이주했다. 이 선생은 만주의 땅을 매입하여 조선인 촌락을 만들고 학교와 교회를 설립,청년들을 교육시키고 무관학교를 세워 독립전쟁을 일으킬 목적으로 동지들과 함께 개척이민의 선두에 섰다. 이 선생은 만주에 도착하자마자 유하현 삼원포에 거류민단조직인 경학사를 설립,사장에 취임했다. 경학사는 1914년 부민단으로 발전되고 신흥학교를 설립,인재를 양성했다. 이 선생은 3·1운동직후에는 한족회를 설립,동포들에게 민족자긍심과 독립정신을 고취하고 한인청년들을 신흥무관학교에 입교시켜 1천여명에게 군사교육을 받게 했다. 이 선생은 만주지역에서 활동하는 무장독립운동단체들을 통합,독립전쟁을 일으키기 위한 서로군정서를 설립,총재에 취임했다. 부총재에는 여준,정무청장은 이탁,참모부장은 김동삼,독립군사령관엔 지청천을 임명,일제에 항거하는 한편 국내 진공작전계획도 세웠다. ○서로군정서 총재 당시 만주에는 3·1운동이후 일제의 탄압과 만행에 시달린 조국의 열혈청년들이 대거 이주해와 2천여명을 무장킬 수 있었다. 이 선생의 서로군정서 조직은 당시 해외독립운동단체중 최대규모였다. 1919년 4월13일 이동영·이시영선생이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자 이 선생은 『한민족에 두개의 정부가 있을 수 없고 광복운동에는 단결이 가장 큰 선결조건』이라는 이유를 들어 참모들을 대동하고 임시정부 산하의 군사조직으로 들어갔다. 이 선생은 상해 임시정부에서는 외교와 내치·재정을 담당하고 만주의 항일무장세력은 단결해서 군사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고 부하들을 설득,조선의용대를 조직하고 북만주와 시베리아에서 활동중인 홍범도·이동주 등과 항일연합전선을 펼 것을 모색했다. ○통군부 확대개편 이선생은 1920년초 북경에서 개최된 조선인 군사통일회에 참가,박용만·신숙 등과 군사기구의 통합방안을 협의하고 22년 6월에는 만주지역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을 이룬 통군부를 조직했다. 그뒤 이 선생은 통군부를 다시 확대개편하여 17개 독립운동단체로 하여금 통의부를 구성하는 등 독립군의 군세확장에 혼신의 힘을 다하였다. 전통깊은 유학자집단에서 태어나 성장한 이 선생은 다른 독립운동가들과는 달리 외교나 교육에 치중하지 않고 일생동안 무력항일투쟁만을 주장했다. 조국광복을 위해서는 일본제국주의와 무력으로 싸워서 이기는 수 밖에 없고 이를 위해서는 중국·소련 등과 연합해서 독립군을 조직,화력과 무장을 갖추어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1925년 3월 미국에 체류하면서 위임통치를 주장하던 이승만대통령이 탄핵되자 국무령에 취임한 이 선생은 임시정부를 독립군지휘관으로 구성,활발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려고 작정했다. 그러나 이 선생의 구상은 내분으로 결실을 보지 못하고 지리멸렬하게 되자 26년 1월 국무령직을 사임하고 다시 만주로 돌아왔다. 만주에 돌아와 독립운동단체들을 통합,지도하던 이 선생은 일본이 만주국을 설립한 32년 5월12일 노령으로 별세했다. 『국토를 찾기전에는 내 유해를 고국에 싣고 가지말라』고 한 유언을 남김으로써 이 선생의 유해는 광복된지 45년만인 90년 9월 국가보훈처 주관으로 중국 흑룡강성에서 봉환,대전국립묘지에 안장됐다. 유족으로는 증손자인 항회·범회씨가 서울에 살고 있으며 선생의 기념사업회 결성을 준비중이다. 정부에서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역사적 평가/20년대 독립군총사로 불멸의 업적 석주 이상룡 선생은 70생을 오직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민족지도자였다. 이 선생은 1896년부터 1910년까지 향리에서는 의병의 지도자로서,민족계몽운동가 또 2세교육자로 활동했으며 1911년 만주로 이전해서는 민족의 선구자로서 역할을 다했다. 이 선생은 독립운동의 방략으로 교육·산업운동과 항일무장투쟁을 병행해야 한다고 굳게 믿고 이를 동지들과 함께 실행에 옮겼다. 그는 만주의 한인사회에서산업과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경학사와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고 동포들의 법적지위를 확보하기 위해 중화민죽회에 진정서를 제출하는등 외교적인 노력을 통해 한인들의 권익옹호에 앞장섰다. 이 선생은 이주한인들의 생업을 위해 벼농사를 적극 권장,지도해 만주에서 쌀을 생산했으며 경제적인 기반이 마련된뒤 독립군을 조직했다. 그는 경학자·부민단·한족회·군정부·통의부·정의부·혁신의회 등으로 이어지는 항일 민족독립운동단체를 직접 지도해 만주지역의 민족지도자로서 불멸의 자취를 남겼다. 이 선생은 노년에는 김동삼을 위시한 여러 혁명가들을 지도함으로 써 항일대열에 영향을 끼쳤다. 그는 1923년 해외 항일독립운동단체의 책임자들이 한자리에 모인 상해의 국민대표회의에 김동삼을 파견,6개월동안 의장을 활동시켜 항일독립운동의 전략·전술을 수립하게 했다. 유학자로서,의병으로서,때로는 민족의 교육자요 지도자로서 다양한 역할을 하던 이 선생은 1932년 5월 조국광복을 보지 못하고 망명지에서 순국하고 말았다. 조국을 위해 헌신한그의 혁명가적인 행적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 우리의 귀감이 되어 남을 것으로 확신한다.
  • 백범암살/엇갈리는 증언… 진상규명 본격화해야

    ◎일제청산·단정반대로 이박사와 갈등/극우·친일파 조직적음모 여부가 초점/안 1년복역후 출감… “암시”발언 의무투성이 백범 김구선생 암살사건의 진상은 과연 어떤 것일까.암살지령을 내린 배후는…? 사건발생 43년이 지나도록 줄곧 단독범행을 주장해온 암살범 안두희씨(75)의 최근 증언으로 이 사건이 다시 세인의 관심을 끌고 있다.안씨는 최근 두차례에 걸쳐 『김창용육군특무대장·장택상초대 수도경찰청장,노덕술수도경찰청수사과장,최운하수도경찰청정보과장 등이 나와 반공이념·인생철학이 같았으며 이들 모두 백범을 미워했다.누구로부터 암살지시를 받지는 않았지만 이심전심으로 알고 범행을 결심했다』고 증언해 갖가지 추측만 무성하게 낳고 있다.백범암살사건의 전말과 관계자들의 증언,앞으로의 사건전개 전망등을 짚어본다. ○안두희발언 계기 사건전말·관계자주장 재조명 백범은 1919년 중국의 상해로 건너가 이봉창·윤봉길의사등의 의거를 지도하는 등 독립운동에 몸바쳐 임시정부의 주석에까지 올랐다.그는 8·15해방을 맞아 45년11월 26년만에 광복 조국에 돌아왔다. ◎반탁운동에 앞장 백범은 서대문 경교장에 숙소를 정한 뒤 28년 이시영 이동령 등과 함께 중국에서 창당한 한국독립당을 이끌며 45년 12월 모스크바삼상회의에서 우리나라에 대한 신탁통치가 결의되자 반대운동에 앞장섰다. 47년 11월 국제연합(유엔)은 남북총선거에 의한 독립정부수립을 결의하고 48년초 총선거감시위원단을 한반도에 파견했다. 그러나 백범은 『남한만의 단독정부수립은 남북분단을 고착화 시킨다』면서 5·10선거에의 참여를 거부하고 통일정부수립을 위해 김규식과 함께 평양으로 가 김일성 김두봉등과 4자협상등을 벌였으나 아무런 성과를 얻지 못했다. 백범은 8월15일 이박사를 대통령으로 한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된 뒤에도 경교장에 머물며 일제잔재의 청산과 통일정부수립 등의 노선을 견지,갈수록 이박사등과 거리가 멀어졌다. 이같은 상황아래서 49년 6월26일 정오 경교장 2층 집무실에 있던 백범은 육군포병사령부 소속 안두희소위가 쏜 4발의 총탄에 맞아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쳤다. 안두희는 범행직후 『단독범행』이라고 밝힌뒤 헌병사령부 김병삼대위 등 헌병들에게 연행돼 육군중앙고등군법회의(재판장 원용덕소장)에서 「살인및 군인의 정치관여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이태원 형무소에 수감됐다.한달뒤 대전형무소로 이감된 그는 곧이어 징역15년으로 감형됐으며 백범 1주기를 하루 앞둔 50년 6월25일 6·25의 발발과 함께 형집행정지처분으로 석방됐다. 전쟁이 한창이던 그해 7월10일 육군소위로 복직됐으며 51년 국회질의에서 이같은 사실이 문제가 되자 소령으로 예편,강원도에서 식품군납업체를 경영하게 됐다. 그의 「단독범행」주장에 대해 49년8월 한독당 중앙상무위원회는 이대통령에게 ▲백범이 안을 응대한 시간이 겨우 3분에 불과하고 안과 같은 청년과 정치언쟁을 벌였다는 것은 상식에 맞지 않는다▲범인의 심리로 일시적 흥분에 의한 것이면 1발로 족할 것이며 저격후 8발의 탄환이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권총을 던지고 체포당한 것은 안의 개인적 행동으로 간주할 수 없다▲경교장 경비경찰관의 손에 체포되는 즉시 난데없이 헌병대가범인을 데려간 것은 있을 수 없다는 등의 진상규명 요청서를 보내 의문을 제기했다.백범의 장례는 그해 7월5일 서울운동장에서 국민장으로 엄수됐다. ◎새로운 내용은 없어 백범암살에 대한 안두희씨의 최근 증언이후 안씨의 배후문제에 대한 또다른 증언들이 쏟아지고 있으나 그동안의 증언들과 거의 비슷한 것으로 새로운 것은 별로 없으며 안씨 역시 최근 두차례의 증언에서 일부 대목을 번복하는 등 오락가락하고 있다. ▲안두희씨(범인)=당시 백범을 암살하라는 직접적인 지시를 받지는 않았으나 김창용육군특무대장 초대수도경찰청장을 지낸 장택상씨와 친일경찰관으로 수도경찰청 수사과장이던 노덕술,정보과장 최운하씨 등으로부터 백범을 암살해야 된다는 강력한 암시를 받고 공감해 범행했다. ▲김신씨(70·백범아들·전교통부장관)=김창용육군특무대장 등이 지시했다는 안씨의 증언은 빙산의 일각이다.이승만정권하에 있던 친일세력과 해방후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을 추진한 세력을 중심으로 당시 군부와 경찰·정계 고위층을 망라한 정권차원의 배후세력이 선친살해에 관련되었다는 일부 증거를 갖고 있다.그러나 정확한 명령계통을 밝히지 못해 공개하지 못하고 있다.진상규명 작업은 계속돼야 한다. ▲최대교씨(91·변호사·당시 서울지검장)=사건직후 최초지휘때 김병삼헌병대위가 한때 경교장출입을 막기도 했다.권승렬법무부장관과 함께 대책을 숙의하기 위해 이범석국무총리 집에 갔으나 꿩사냥을 갔다고 해 신성모국방장관 집으로 가 아프다는 신장관을 겨우 만나 『경무대에 빨리 백범피살 사실을 알려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하자 『이제 진정한 민주주의가 됐다』고 말했다.또 검사장인 나도 모르게 범인 안씨에게 비밀당원증을 발급해준 김학규 한독당 조직부장 등 민간인 7명의 살인교사죄 구속영장을 김익진 당시 검찰총장이 직접 청구,한격만서울지법원장에 의해 발부됐다.이를 김총장에게 항의하자 『저 영감(이대통령 지칭)이 일체 비밀로 하라고 해서 그러니 양해해 달라』고 해 백범암살 수사가 왜곡되고 있다고 판단,얼마뒤 사표를 냈다. ◎“동족에 죽을일 없다” ▲선우진씨(71·당시 백범비서실장)=백범피격 하루전 대광고교 교감 박동엽씨가 찾아와 『옛 제자인 김정진소령을 만났더니 역시 제자인 오병순소위가 암살조에 가담,괴로운 나머지 털어 놓았다』고 밝혀 『몸조심 하십시오』라고 백범선생께 말했다.백범은 『동족에게 맞아 죽을 일은 하지 않았다』면서 이같은 경고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말을 박씨로부터 들었다. ◎인천에서 사격 훈련 ▲정관일씨(71·안씨와 육사특8기 동기생으로 포병사령부에 함께 근무)=안씨는 당시 장은산포병사령관의 지시로 인천앞바다 비밀사격훈련장에서 주5회 극비사격훈련을 받았다. ▲홍영기씨(74·국회의윈·당시 육군법무감실검찰과장)=안씨를 기소한뒤 채병덕육참총장이 부르더니 『안두희에게 몇년을 구형할 생각인가』고 물어 『살인범이니 마땅히 사형』이라고 대답했더니 『사형은 너무 심하니 징역10년만 구형하면 좋겠다』고 말했다. ◎배후 은폐위한 사기 ▲한필동씨(72·사건당시 김창용특무대장과 같은 부대에 근무·미국거주)=김창용의 지시로 백범을 암살했다는 안두희씨의 증언은 진짜 배후인물을 감추기 위한 거짓말이다.내가 알기로는 신성모국방장관·채병덕육참총장,김태선내무장관 등의 비호아래 장은산포병사령관이 요원들을 훈련시키고 전봉덕헌병사 부사령관이 작전을 지휘하는등 백범암살이 조직적으로 이뤄졌다. ▲김교식씨(56·현대역사자료연구소장)=안씨의 증언은 앞뒤가 맞지않으며 직접 명령을 내렸던 조직을 보호하기 위해 사건뒤 수사과정에서 처음 만난 김창용을 끌어들였을 뿐이다.당시 상황으로 미루어 장택상 노덕술 최운하씨 등도 암살사건에는 개입하지 않았고 김태선씨 또한 김지웅을 지원하며 경찰쪽에서 별도의 암살계획을 세우고 있었기 때문에 포병장교인 안씨와 접촉이 있었다는 것은 납득이 가지 않는다.암살계획의 시나리오는 포병사령부쪽에서 실행을 맡고 헌병사령부쪽에서 현장을 감시하며 육군정보국제3과에서 수사종결처리를 맡는 것으로 짜여진 것으로 보는게 옳다. ○서거43년… 「백범암살 재조명」을 보며/박성수 정문연교수 ◎민족정기 바로잡는 계기로/「통일민족주의」의 큰뜻 되새겨야 할때 최근백범 김구선생의 암살범 안두희가 범행 40여년만에 드디어 일부 배후 인물을 밝혔다 하여 세인을 놀라게 하고 있다.그러나 그의 증언 내용이 겨우 빙산의 일각을 드러냈을 뿐 바다속의 엄청난 얼음덩어리는 여전히 그 정체를 드러내지 않은 채 잠겨 있다. 안두희의 증언 자체가 이처럼 불성실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범행이 얼마나 중대한 과오였는가에 대해서도 거의 반성하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에 더욱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는게 세론이다.아직도 안두희는 자신을 애국지사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할 정도로 그의 증언 태도는 오만하기까지 했다. 백범 김구선생은 한국독립운동사의 대명사라 해도 과언이 아닌 큰 인물이다.그의 이름 두자를 빼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27년사를 쓸 수 없음은 물론 광복이후 47연사도 기술할 수 없는 것이다. 『백범이 살아 있었어야 한다』는 말은 어느 누구에게 물어 보아도 이구동성으로 나오는 대답일 것이다.백범은 생전에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라고 칭송받게 만들어야 한다고 외쳤었다.「아름다운 나라」란 더러운 나라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뜻일 뿐만 아니라 선생 자신이 아름드리 거목이듯이 이 나라도 아름드리 나무로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가 군정을 반대하고 남북협상의 불가능에 도전한 사실을 안두희와 같은 극우반공주의자들은 단순한 용공주의자로 몰아 세울수 있었을지 모른다.그러나 평생을 통일운동에 몸바친 선생의 혈적을 모르는데서 온 무지의 소치였다.흔히 임정을 상해시대 14년(1919∼32년),이동시대 8년(1932∼40년),중경시대 5년(1940∼45년)으로 구분하고 있는데 이 27년을 단순한 독립운동의 역사로 보아서는 안된다.그것은 동시에 통일운동의 역사였기 때문이다. 특히 중경시대에 이르러 모든 민족주의 진영은 임정산하에 통일되었으나 공산주의자들 만은 연안으로 도주하여 중공산하에 들어갔으며 1950년 6·25 남침의 주력부대가 되는 김무정의 소위 조선의용군이 되었다.김구선생은 귀국후 임정시절에 이루지 못했던 통일운동을 광복된 조국에서 실현하려고 했다.그것이 군정반대로 나타난 것뿐이다.그에게 있어 남북통일은다름아닌 한국독립운동의 연속이요 완성이었던 것이다. 좌우익투쟁의 피비린내나는 해방정국에서 그것은 부당하게도 김구로선으로 명명되어 그 실질이 왜곡되고 말았으나 그것은 김구자신의 역사신앙이었던 것이다. 만일 김구선생이 그때 없었어도 될 안두희라는 인간,아니 짐승에게 쓰러지지 않고 살아계셨더라면 우리 현대사는 얼마나 달라졌을까를 모두들 궁금하게 생각하면서 아쉬워하고 있다. 다른것은 몰라도 최소한 남북의 분단상태를 악용한 이른바 사이비 통일민주주의만은 이땅에 뿌리 내리지 못했을 것이고 진실된 통일민주주의가 자라나서 통일의 날을 앞당겼을 것이다. 오늘처럼 김구선생의 독립정신,통일정신이 절실한 때가 또 있었을까.또 오늘처럼 우리나라가 아름드리 나라로 커야 한다고 바라던 시대가 또 있었을까.다시한번 경교장의 비극을 되돌아보고 우리의 앞날을 생각할 때라 할 것이다.
  • “백범암살 이 대통령 책임”/당시 주한미대사관 직원이 밝혀

    【워싱턴 연합】 백범 김구선생 암살사건은 권력기반을 강화하던 이승만 전대통령에 그 책임이 있었다고 당시 미대사관에서 외교관으로 근무한 도널드 맥도널드씨(73)가 22일 말했다. 현재 조지타운 대학에서 한국정치를 가르치고 있는 맥도널드 교수는 이날 『누가 구체적으로 지시했는지 확실한 증거는 없었지만 우리는 이승만대통령이 책임이 있다고 생각해 왔다』고 말하고 『직접 명령을 내리지는 않았지만 그는 부하들이 자기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리고 일을 하도록 했다』고 설명했다.
  • 한·베트남/두나라 대표부설치 합의 배경

    ◎경협 확대위한 「수교포석」/17년만에 「빗장」풀어… 연내수교 점치기도/인도차이나국과의 교류확대 전소기지로 한국과 베트남이 오는 7월중 양국 수도에 연락대표부를 교환·설치키로 합의함으로써 지난 75년 4월 베트남공산화와 함께 단절됐던 양국관계가 17년만에 정상화의 길로 접어들게 됐다. 양국은 그동안의 대사급 내지는 영사급의 외교관계를 수립할 것이라는 낙관적인 전망에도 불구하고 연락대표부라는 다소 어정쩡한 형태로 관계정상화의 골격을 갖추었지만 한때 양국이 교전당사국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상당한 수준의 관계개선이 아닐 수 없다. 또 이번에 설치될 무역대표부의 기능이 정치적인 분야까지 포괄할 뿐아니라 대표부의 직원들이 외교관 신분에 준하는 지위를 가진다는 점에서 최근에 들어서야 비로소 중국정부관리와의 접촉이 허용된 주북경무역대표부의 경우보다는 진일보한 것이다. 지난해 4월 서울에서 개최된 제47차 유엔아시아태평양경제사회이사회(ESCAP)총회 때 이상옥 외무부장관과 부 코안 베트남외무차관의 면담으로 시작된 양국간 수교교섭논의는 같은 해 9월 박철언 전체육청소년부장관이 극비리에 베트남을 방문,두 무오이 총리 등 정부고위관계자들과 만나 조속한 외교관계수립에 인식을 같이함으로써 관계가 급진전됐다. 이후 한국정부의 3차례에 걸친 수교교섭단 파견과 진 염 동력자원부장관,민·관합동자원조사단,자원경제조사단의 베트남방문에 이어 당 반 탄 우전총국장,트란 룸 중공업부장관 등 베트남 고위관리들의 방한으로 국교수립의 분위기가 성숙돼 왔다. 최근에는 한주통산·포항제철·한국지퍼 등 한국기업들이 현지공장 설립과 교역대금직결제를 위한 은행의 교환·설치합의에 이어 한국중소기업의 베트남내 전용공단설치논의가 활발히 진행되는 등 양국간에는 이미 실질협력이 이루어지고 있는 상태다. 이번에 정식 국교수립이 아닌 연락대표부의 교환·설치라는 외교관계상 독특한 형식을 벌린것은 베트남측이 수교를 대가로 20억달러에 이르는 경제협력을 요구한데다 미국이 전쟁포로(POW)와 실종자(MIA)송환문제의 미해결을 들어 한국에 수교시기를 늦추어줄것을 요청해 왔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한·베트남 국교수립은 지난달초 리처드 솔로몬 미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담당차관보가 하노이에서 인도적 차원의 베트남지원 확대방안을 논의한데 이어 최근 미국의 다국적기업인 AT&T사가 베트남당국과 미국과 베트남을 직접 연결하는 통신망가설사업계약을 체결하는 등 그동안 부담으로 작용해왔던 미·베트남 관계가 개선 일변도를 걷고 있어 빠르면 연내에 전격적으로 이루어질 가능성도 적지 않다. 또 1인당 GNP가 2백달러를 겨우 넘는 베트남으로서는 경제건설을 위해 싫든 좋든 한국과 손을 잡을 수밖에 없고,한국역시 빅 베어(Big Bear)유전등 엄청난 지하자원과 값싸고 풍부한 노동력을 가진 베트남에 눈을 돌릴 수밖에 없는 입장으로 양국 모두 조기수교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연락대표부 설치를 기점으로 양국간의 수교교섭은 급진전될 것으로 보인다. 이번 한·베트남 연락대표부 교환·설치 합의는 베트남과의 관계개선이라는 측면외에도 동남아국가연합(ASEAN)과의 협력,캄보디아와의 관계정상화 등에도 상당한 파급효과를 미칠 것으로 기대된다. □한·베트남 교류및 교섭 일지 ▲55·10 한국,월남공화국 승인 ▲56·5 공사급 외교관계 수립 ▲57 대사급 〃 ▲57·9 고딘 디엠 대통령 방한 ▲58·11 이승만대통령 월남 방문 ▲64·9∼73·3 한국군 월남전 참전 ▲66·10 박정희대통령 월남 방문 ▲69·5 티우 대통령 방한 ▲75·4 한국대사관 철수 ▲91·4 서울 ESCAP총회시 이상옥외부장관 부 코안 베트남 외무차관 면담 ▲91·8 권헌성 이철용의원 베트남 방문 ▲91·9 박철언 전체육청소년부장관 〃 ▲91·9 수교교섭 준비위한 정세조사단 파견 ▲91·12 제1차 수교교섭 정부대표단 파견 ▲92·1 제2차 〃 ▲92·1 진념 동자부장관 베트남 방문 ▲92·2 당반탄 베트남 우전총국장(장관급) 방한 ▲92·2 트란 룸 베트남 중공업부장관 〃 ▲92·3 민·관합동자원조사단,베트남 방문 ▲92·3 제3차 수교교섭 정부대표단 파견 ▲92·4 자원경제조사단 베트남 방문 ▲92·4 한·베트남연락대표부,설치 합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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