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이승만
    2026-03-11
    검색기록 지우기
  • 울트라
    2026-03-11
    검색기록 지우기
  • 유럽파
    2026-03-11
    검색기록 지우기
  • 성매매
    2026-03-11
    검색기록 지우기
  • 페널티
    2026-03-11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2,787
  • 장인정신 어디로 갔나/김재설(해시계)

    새 정부가 들어서며 중소기업 지원문제가 활발히 논의되고 있다.이번에는 말로만 끝나지 않고 실제로 만져질 수 있는 결과를 가져오기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그러나 정부의 지원에 앞서 기업을 경영하시는 분들이나 일하시는 분들의 자세가 먼저 확립되어야 한다는 평범한 진리가 되 새겨진다. 내 연구실을 찾아오신 애연가 손님 한분이 담배를 태우시려고 몇번이나 애쓰시다가 불꽃만 튕기는 일회용 라이터를 내던지시며 하시던 말씀이 생각난다.『이 회사 돈 좀 번 모양입니다.요새 이 회사 제품중 불량품이 너무 많아졌어요.몇년 전만해도 세계 어디에 내어 놓아도 손색이 없었는데.그때는 라이터 하나에 국산품도 이만하면 하는 자랑을 느꼈으니까요』 그렇다면 문제는 심각하다.지난날 우수한 제품을 만들던 그 자랑스런 기술은 지금 어디로 갔나.기술 부족 때문이라면 정부가 지원해 줄 수도 있고 그래도 안되면 외국에서 기술을 도입할 수도 있다.그러나 정성 부족 때문이라면 그것을 어떻게 지원하고 어디서 도입한단 말인가. 우리 사회에는 노사분규가 있던회사 차는 당분간 사지 말라는 말이 있다.문짝이 그렇고 범퍼가 그렇고 자동차가 말썽만 부린단다.분규 후에는 작업자의 정성이 떨어진다는 이야기다.분명한 것은 노동자의 권익을 주장하는 것과 자기 제품에 정성을 쏟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라는 점이다. 이승만대통령 시절 반일교육 속에 청소년기를 보낸 탓인지 나도 역시 다른 나라라면 몰라도 일본이 잘 된다는 것은 말만 들어도 배가 아프기 시작하는 사람중의 하나다.그러나 그 일본 사람들에게 배워야 할 이야기 하나 하자. 70년대 미국 시장에서 값싼 차는 일본차였다.그러나 값에 비해 정교하고 뛰어난 성능에 미국 자동차 업계가 긴장했고 그 이유를 조사했다.그때 나온 말중 이런 이야기가 있다.미국과 일본의 자동차 조립공장에 각각 수영복만 입혀 여자를 통과시켜 보자.미국 공장에서는 온갖 괴성과 외설이 터져 나오고 소란속에 작업이 잠시 중단될 것이다.탓할 일은 아니다.남자들이니까.그러나 일본 공장에서는 기계 소리 외에는 조용하게 작업이 계속될 것이다.그렇다면 일본의 조립공들은 남자가 아닌가? 여자에게 관심도 없는가? 그것은 아니다.그들도 남자이고 여자에게의 관심은 마찬가지다.다만 그들은 반라의 여인이 자기 옆을 지나친 것도 모르고 있을 뿐이다.그만큼 작업에 열중한다.장비,기술,훈련 모든 면에서 미국이 일본을 앞서지만 작업에의 열성도,즉 정성의 차이가 오늘 일본 자동차로 하여금 미국 안마당에서 미국 차를 밀어내게 한 것이다. 우리도 우선 있는 기술로라도 정성을 다 해야 한다.나귀를 물가로 끌고 갈 수는 있어도 물을 마시게 할 수는 없다는 금언은 기술 지원에서도 역시 진리이다.장인정신의 회복이야말로 그 지원 효과를 극대화 할 수 있는 선결조건이기 때문이다.
  • 성대 국립화 추진/정부와 구체 협의

    성균관대 장을병총장은 30일 상오 『현재 재단이 없는 사립대학인 이대학을 국립 또는 준국립대로 전환키로 하고 정부가 구체적인 문제를 협의중』이라고 밝혔다. 장총장은 이날 『성균관대는 조선조시대인 1398년에 설립돼 국립교육기관으로서의 역할을 해왔다』면서 『해방이후 이승만정권하에서 정치적인 이유로 사립대가 되었지만 이제 국립대학으로서 제위치를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성균관대는 지난해말 재단이사장을 겸하고 있는 장총장이 노태우전대통령과 이문제를 협의했으나 이달초에도 청와대를 방문하여 김영삼대통령에게 국립화문제를 건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 새 정부 출범 첫 국회연설 관례 왜 깼나

    ◎김 대통령의 과감한 “허례 떨치기”/“개혁은 형식보다 내용 중요”… 행동으로/일부선 “의회 무시한 처사” 부정시각도 김영삼대통령이 집권후 가장 먼저 달려가고 싶은 곳중의 하나가 국회 본회의장일 것이다.25세 최연소 국회의원으로 당선돼 한평생을 활동해온 곳이다.스스로 의회주의자임을 자처하면서 역대 최다선인 9선을 기록한것이 김대통령이다. 그러한 김대통령이 이번 임시국회에서 연설하지 않았다.새정권 출범직후 대통령의 국회연설이 행해졌던 관례도 깼다. 민주당측은 이에 대해 「국회를 무시하는 처사」라고 비난했다.정가 일각에서도 『대통령이 개혁·사정에 치중하다보니 국회를 정치의 중심으로 인정않으려는 생각을 가진 것 아니냐』는 관측이 있었다.3공·5공초기에도 국회의 역할은 미미했었다.청와대가 워낙 「강했기」때문이었다. 그러나 김대통령의 임시국회 불참을 3공·5공때와 비슷하게 보는 시각은 설득력이 없다.청와대를 「큰 집」,국회를 「작은 집」으로 생각하거나 여야를 1중대,2중대,3중대로 분류하는 냉소는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국회가 무시당한다면 스스로의 잘못에 의한 것이지 대통령이 연설하지 않은 탓은 아니다. 이전 정권에서 대통령이 국회연설을 한 것을 살펴보면 「국회출석=국회존중」이 아님이 잘 나타난다. 정부측 대표가 국회 본회의에서 행하는 연설종류는 관행상 국정연설,시정연설,국정보고등으로 대별된다.대통령이 헌법에 보장된 「국회출석 발언권」을 행사하는 경우가 국정연설로 지칭된다.시정연설은 대통령이 예산안과 관련한 제안을 하는 것으로 통상 국무총리가 대독한다.이번 임시국회에서 행한 국정보고는 총리가 정부 업무 전반에 대해 국회에 보고하는 형식이다. 대통령은 국회 출석·발언권이 있지만 국회가 대통령에게 출석을 강요할 수는 없다.삼권분립원칙을 지키자는 취지이다. 따라서 지금까지 대통령이 국회에 출석한 것은 국회 요구때문이라기보다 자신이 「빛」을 내기위한 경우가 많았다. 국가체계가 덜 잡혔던 1공의 이승만전대통령은 15회나 국회에서 연설을 했다.이어 박정희·전두환 전대통령은 미대통령이 연두교서를 의회에서발표하는 방식을 모방하려했다.각각 6회·5회에 걸쳐 국회에 나와 연두교서나 치사를 발표했다.노태우전대통령은 2차례 개원식을 포함,4번 국회에서 연설했다. 미국식 연두교서발표가 「괜찮아」보여 모방하려다 여야관계가 냉각,국회분위기가 나빠지면 유야뮤야시키곤 했다.국가주요 정책을 국회에서 대통령이 직접 발표하겠다고 생색낸 경우도 있었으나 국회의원들은 「들러리」에 불과했다.연설내용보다 대통령입장때 야당의원들이 기립할 것인지,야유는 안할 것인지등이 더 문제가 됐다. 김대통령은 이런 「하례」를 떨치겠다는 생각을 가진 듯하다.국민인기가 상한가로 치솟고 있는 상황에서 국회에 나와 「개혁대통령」이미지를 과시할 수도 있었겠으나 유혹을 뿌리쳤다.개혁은 「내용」이 중요하지,「형식」은 문제되지않는다는 실용주의의 발로이다. 야당측이 앞뒤 다르게 행동하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민자당은 민주당이 오히려 김대통령의 국회연설에 부정적이었다고 주장한다.김대통령의 「개혁연설」이 국회를 압도하면 그렇지않아도 주눅이 든 야당이더 초라해지리라는 논지이다. 여당도 대통령연설을 기피한 인상이 든다.재산공개라는 호된 서리를 맞고도 더이상의 「참회의 눈물」을 요구했던 김대통령의 따가운 비난을 다시 듣고 싶지않았을 것이다.청와대와 국회간에 흐르는 미묘한 감정기류가 대통령의 국회출석을 방해한 측면도 있다.
  • 4·19주역들 정치권 실세로 부상/33돌 계기로 본 그때 그사람들

    ◎박관용실장·최형우의원 여 핵심에/4·18결의문 읽은 이기택 야 대표로 정치인들이 학창시절을 회고하면서 자랑스럽게 내세우는 경력이 있다.「4·19세대」와 「6·3세대」가 바로 그것이다. 4·19세대는 지난 60년 4·19혁명을 주도했던 57∼60학번사이의 대학생출신으로 지금은 50대중반의 연령층이다.이들보다 3∼4년 늦게 한일국교정상화반대데모에 적극 가담했던 50세전후의 인사들을 「6·3세대」로 불린다. 혁명이나 학생운동을 이끌며 정치지향성을 보였던 이들중 다수가 정계에 진출한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4·19」혹은 「6·3세대」중 일부는 3·5공의 군사정부에 참여하기도 했지만 이들이 풍기는 이미지는 「개혁적」인 동시에 「반체제적」이었다. 김영삼정부출범후 이들 세대는 정치의 중심으로 대두하기 시작했다.4·19의 재평가라는 김대통령의 시대인식과 과감한 개혁추진이 그러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다.과거 야당에 몸담았던 최형우의원,박실용 청와대비서실장(4·19세대)김덕용정무1장관(6·3세대)등이 문민정부시작과 함께 여권의 핵심실세로 자리잡았다.민주당의 이기택대표·이부영최고위원,신정당의 박찬종대표등 야권 차기대권주자들도 4·19나 6·3학생운동을 거쳤다. 19일은 4·19혁명 33주년 기념일이다.그 당시 학생혁명을 주도했던 대학은 고려대였다.고대학생들은 60년4월18일 혁명의 신호탄을 쏘아올린 대대적 시위를 벌였다.이 시위의 선언문작성자가 이재환의원(민자)이며 이세기의원(민자)이 정경대학생위원장으로 선언문을 낭독했다.이기택 민주당대표(당시 상대학생위원장)는 이승만정권을 타도하자는 결의문으로 사자후를 토했다. 신경식 민자당총재비서실장도 당시 영문과 4학년으로 시위에 앞장섰고 김중위·문정수의원등 민자당 중진 상당수가 4·19의 주역이었다.야당의원을 지낸 정재원·강경식씨도 고대출신 4·19세대이다. 서울대에서는 이수정전문화부장관이 선언문을 초안했고 같이 문구를 다듬었던 윤식씨는 유정회의원을 지낸뒤 현재 미하와이에 체류하고 있다.선언문을 복사·배포하는 일을 맡았던 황선필씨는 5공정부에서 청와대대변인,문화방송사장을 역임했다. 민자당의 박범진·강우혁,민주당의 박실의원과 이장춘 전오스트리아대사도 서울대시위를 주도했다.그러나 서울대 출신 4·19세대들중 문리대 학생회장을 지냈던 안병병씨를 비롯,이영일·염길정·정남씨 등은 구민정당의원을 지냈으나 3당통합후 공천탈락·선거패배로 「쓸쓸한」시절을 보내고 있어 눈길을 끈다.특히 학보사기자였다가 나중에 총학생회장까지 오른 이대섭씨는 과기처·정무장관과 3선의원을 역임하다 수서사건에 연루,옥고를 치른 끝에 칩거하고 있다. 연세대의 경우 유영철 당시 학생위원장이 3공에서 4·19유공포장을 거부하고 경제계에 진출,동아건설사장에 재직하고 있다.정계에서는 김봉조의원이 민자당내 민주계 핵심으로 등장하고 있으며 정창화 전국회농림수산위원장도 연대 학생시위의 주도자였다. 새정부출범이후 「정치명문대」로 떠오른 동국대 4·19시위는 민자당의 김영구총무와 최형우의원,야당의원을 지낸 고 장충준씨 등이 이끌었다.최의원은 민자당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강력한 실세로 떠오르다 아들의 부정입학의혹으로 주춤하고 있으며 장전의원은 지난해 여름 교통사고로 타계했다. 전통적 야도 부산에서는 김대통령의 측근중의 측근인 박관용비서실장과 서석재 전의원이 동아대학생으로 4·19시위에 가담했다.서전의원은 동아대 총학생회장이었다. 당시 김정수 부산대 약대학생위원장과 허재홍 수산대학생위원장도 지금은 어엿한 집권여당의 4선·2선의원으로 각각 자리잡고 있다. 경북대 총학생회장으로 4·19이후 수습을 주도했던 인사가 이치호 민자당 당무위원이고 유인학·신기하의원(민주)등은 전남대에서 총학생회·법대학생회를 이끌며 반독재투쟁을 벌였었다.
  • 고려호/역사속 바뀌어온 모습을 좇는다(배:32)

    ◎한국해온의 개척선… 일 군수품 수송/1952년 우리해운사상 첫 태평양횡단 국가경제 발전의 요체는 유통체제의 확보에 있다.육상에서의 고속도로 개통이 한국 경제를 부흥시켰다면 해상에서의 해운로 확장도 한국 경제 활성화의 큰 몫을 담당했다고 생각된다.태평양 횡단의 해운로를 개척한 것은 고려호였다. 고려호(7천t급 화물선)는 원래 일본인 소유의 화포호로서 2차대전시 일본의 군수물자를 조선으로 수송하는 임무를 맞고 있었다.2차 대전이 끝날 무렵인 1945년 초,부산 용당앞 해상에서 미군 기뢰에 의해 침몰되어 암초위에 버려져 있었다.해방된 이후 고려호는 적산선박으로 분류되어 사람들의 접근이 금지된 채 방치상태에 있었다가 남궁 연씨(현재 80세·서울 거주)가 공매과정을 통해 15만원에 인수했다. 남궁 연씨는 고려호를 모체로한 극동해운회사를 설리하고 미국과 한국을 왕래하는 선로개설을 결심하였다.그것은 항로를 개설함으로써 국제무역을 발전시키자는 의도였다.미국취항계획이 구체화되는 과정에서 새로운 고민이 발생하였다.그것은 당시 민간인으로서 7천t에 달하는 대형선박을 운항할 전문항해사와 기관사가 없었기 때문이다.국제무역이 국가발전의 요체이며 그 기초가 대양항로의 개설임을 알고 있는 이승만 대통령은 대형함운항 능력을 소유하고 있는 한국 해군에 협조 명령을 내렸다.대통령의 명령을 받게된 해군은 운할 요원의 인선에 착수하여 초대 선장엔 당시 해군준장인 박옥규씨(2대 해군참모총자어를,기관장엔 권태춘 대령을 발탁하고 사관급 선원도 모두 해군장병으로 구성하였다.약두달간의 숙달훈련을 마친 고려호 선원들은 1952년10월21일 관부연락선 대합실 앞에 있는 부산항 1부두에서 처녀취항식을 가졌다.
  • 이달의 독립운동가 노백린선생(다시 새기는 그 충절)

    ◎서울신문사·국가보훈처 공동선정/“항일구국” 기개 편 한말 마지막 무인/정미년 군대해산뒤 독립운동 투신/미서 비행단 조직 조종사 40명 양성/“말타고 남대문 입성” 한남기고 상해서 숨져 을사오조약이 강제로 체결된 1905년. 강제로 조약을 체결한 이등박문은 통감부를 서울에 설치하고 한국측 고관들을 초청,큰 연회를 주최했다. 연회장에는 「을사오적」 이완용 송병준등도 참석해 일제 앞잡이들과 잔을 부딪치며 간신의 비굴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때 연회장의 잔잔한 연주를 깨뜨리는 커다란 목소리가 참석자들을 긴장시켰다. 『워리! 워리!』 이완용등 역신들 바로 코 앞에서 나는 소리였다.그들 앞에는 어디서 나타났는지 6척 장신에 기골도 장대한 사나이가 떡 버티고 서 있었다. ○을사오적 등 능멸 오적들은 물론 이등박문등도 개 꼬리 감추듯 숨을 죽이고,상황 전개에 눈치를 살폈다. 자신들을 「나라를 빼앗고 팔아먹은 개같은 놈들」로 매도하는데도,안절부절 못하는 형국이었다. 「개들」이 모인 연회장은 「개판」이 된 채 끝나고말았다. 일제와 그 주구들의 모임을 이렇게 휘저은 사나이는 음식상에 침을 탁! 뱉은 뒤 뚜벅뚜벅 연회장을 빠져 나갔다. 우리가 지금 얘기하는 4월의 독립운동가­이 당찬 사나이는 누구인가. 노백린선생은 1875년 1월 10일 황해도 송화군 풍해면 성하리에서 시골선비 노병균의 3형제중 막내로 태어났다.어릴 때부터 남달리 키가 크고 얼굴이 커 성격이 호탕했으나 마음은 침착했다. 부친은 아들 백린이 장차 무인이 될 것으로 예견하며 내심 그럴 바에야 지장이 되는 게 좋겠다고 생각,학문연마에 뒷바라지를 아끼지 않았다. ○황해 송화서 출생 웅지를 품고 서울에 온 선생은 당시 내무대신 박영효의 주창에 따라 세워진 대한제국정부 관비생으로 뽑혀 각도 수재 1백20명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 간다. 도쿄 경응의숙­성성학교를 거친뒤 일육사 11기생으로 입학한 것이 독립운동가로 일생을 마친 선생의 이력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25세 열혈청년으로 귀국한 선생은 당시 원솔부 회계국총장인 민영환의 주선으로 육군참위에 임명된 이후 한국무관학교 교관­노일전쟁 참관­육군무관학교장­헌병대장­육군연성학교장등을 거친다. 무인으로서의 기백과 대쪽 같은 성품으로 나라가 쇠퇴하는 과정에서,선생이 앞서 소개한 일화처럼 울분을 터뜨린 것은 이 무렵인 것으로 추정된다.(독립유공자 고 한철수선생 회고담) 을사오조약이 체결된 2년후인 1907년 8월1일 한국군대는 해산이라는 비운을 맞게 된다.최후의 무인 노백린도 군복을 벗었다. 선생이 독립운동가로 변신한 것은 이때부터이다. 신민회 활동 틈새에 선생은 고향으로 내려가 광무학당을 설립,교사가 되어 후진양성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1908년에는 김구 최명식 김홍량등과 해서교육총회를 만들어 독립정신 고취에 앞장섰다. 선각자들의 이같은 운동이 활발해지자 일제는 목조르기를 시작했다. 다른 독립운동가들처럼 선생도 변장을 했다.「황금에 미친 놈」처럼 금광사업에 손을 대는 척도 하고,서울에선 피혁상회·양화점등을 경영하며 등신처럼 굴었다. 『내가 진정한 무인이라면 왜놈들과의 일전을 불사해야 하는데…』 선생의 슬픔과 안타까움은차라리 고통이었다.그만은 유독 「군인」이었기 때문이다. 1915년 선생은 미국 망명길을 택한다.이후 8년여동안 미국에서의 활동은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전투조종사 양성과 항일비행전단의 조직에 전념한 것이었다. 당시 해외에서 조종사를 양성한다는 것은 엉뚱하기까지 했으나,평소 『도쿄를 쑥대밭으로 만들자!』고 호언한 선생은 그같은 불가능한 과업을 가능한 것으로 만들었다. 어려운 재정여건 아래서도 5대의 값비싼 연습비행기를 확보하고 40여명의 조종사를 배출시킨 것은,당시상황을 고려할 때 우리나라의 군사상 길이 빛날 일이라 하겠다. 노백린의 말년은 그러나 실의와 좌절로 얼룩져 갔다. 그것은 1919년 4월23일 서울에서 치러진 국민대회와,이어 조직된 한성임시정부에의 참여에서 비롯됐다. ○동경 공습이 목표 상해임정까지 이어진 한성임정의 법통 속에서 우리는 독립운동사의 부끄러운 단면을 발견하게 된다. 그 장본인은 여러 독립지사들과 갈등을 빚은 이승만의 등장이다. 대통령 이승만 임정하에서 군무부총장이라는 각료직을 맡은노백린은 자주 의견충돌을 했다. 그때마다 노백린은 『나는 이승만의 군무총장이 아니고 한성정부의 군무총장이다』는 강경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정쟁이 계속되자 선생은 말술을 마시며 『육군정복에 말타고 남대문에 입성하면 여한이 없겠다』고 말했다. 선생은 상해시내에서 교통사고를 입은뒤 1926년 1월22일 망국의 한을 품은 채 숨을 거두었다. 정부는 지난 62년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 「계간문예」에 「느티나무」 연재 소설가 문순태씨(인터뷰)

    ◎“광주문제는 분단역사 맥락서 파악해야” 『문민시대가 열린 만큼 작가들 스스로 마음의 빗장을 풀고 사회와 역사를 「열린 시각」으로 포괄적이고 객관적으로 조망해야 합니다』 대하소설 「타오르는 강」「걸어서 하늘까지」「문신의 땅」등을 쓴 소설가 문순태씨(52).역사·사회의식이 강한 소설들을 줄곧 발표해온 그가 새시대에 걸맞는 작가들의 역할을 강조하고 나섰다.현재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주역이었던 주인공이 목사로 변신해 환경운동에 헌신하는 내용의 장편소설 「느티나무」를 서울신문 계간문예에 연재하고 있다. 『주변에서는 내가 5·18의 본질을 축소하고 있다고 비난하기도 합니다.그러나 광주문제는 지역문제로 제한시켜서는 안됩니다.분단역사의 전체적인 맥락에서 파악하고 이를 분단극복으로 확대시켜야 한다는 생각이지요』 이 작가의 말을 들어보면 「느티나무」도 그런 맥락의 소설이다.지금 우리 사회가 필요로 하는 것은 호흡이 길고 선이 큰 역사소설이라는 주장 역시 분단극복의 확대선상에서 해석될 수 있다. 『70년대이래 작가들은 현실사회에 대한 직설적인 비판이 어렵자 조선시대이전의 역사를 통해 오늘을 재조명하는 우회적인 방법을 취했습니다.현실의 벽이 두텁기도 했지만 작가정신이 나약했기 때문이지요.그러나 이제는 오늘을 통해 오늘을 보는 「정공법」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해방이후 활동한 정치인물을 다룬 역사소설을 쓰고 싶다고 했다.이승만과 김일성,그 이후의 시대를 거쳐 김영삼신임대통령에 이르는 격변의 현대사를 담은 대하소설로 다뤄볼 요량으로 자료를 모으고 있다. 『6·25를 포함한 그 시대를 투영하자면 마지막 체험 세대인 40∼50대가 담당해야합니다.그것은 작가가 짊어진 「시대적 사명」입니다.리얼리스트들의 몫이라 할 수 있지요』 구상중인 새 소설을 착수하기전에 마무리지을 일들이 많다.역사소설「타오르는 강」을 근 20년만에 완결짓는 일도 그 계획의 하나다.그리고 「느티나무」연재가 끝나면 미완성으로 남겨둔 「무등꽃」도 완성할 생각이다.
  • 대통령비서실의 「제자리 찾기」 방향(출범 김영삼신한국:3)

    ◎청와대 국정전략의 산실로/기구·인원 줄이되 기능은 확대/월권개입 탈피… 개혁의 핵으로 「김영삼시대」의 출범 의미는 변화와 개혁에 있다.그것은 혁명과는 전혀 다르다.과거 권위주의 시대의 왜곡된 것들이 본연의 자리를 되찾는 것임에 분명하다. 청와대의 개혁과 변화도 마찬가지이다.시대의 변화와 동떨어진 자리에서 본래의 자리로 되돌아 오는 것이다.비서진 인선,기구개편,개방등도 결국은 「제자리찾기」의 한 부분일 뿐이다.제자리를 찾는다는 것은 무엇인가.그것은 개혁의 산실로 탈바꿈하는 것이다.권부의 상징에서 일하는 청와대로 국민에게 다가서는 것을 뜻한다. 첫 출발은 수작이었다는 평가이다.먼저 2개월여의 장고끝에 내놓은 비서진 인사는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와 개혁의 의지,청와대의 향후 역할을 알리는 데 성공했다.지역구 4선의 중진인 박관용의원을 비서실장으로 기용한 것부터가 이례적이었다.여론을 중시하는 의원출신을 기용함으로써 국민과 가까이 있는 청와대를 만들겠다는 의지인 것이다.박실장이 내정 제1성으로 『과거 처럼비서실이 월권행위를 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고 말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 이다. 민간인 출신인 박상범경호실장의 등장과 수석비서진의 면면도 그 맥을 같이하고 있다.특히 재야출신인 김정남「신한련」의장을 사회문화수석에 파격적으로 기용한 것은 변화 그 자체였다.개혁의 강도와 변화의 범위를 실감케한 파격의 결정이기도 했다.물론 전병민씨 인선파문이 옥에 티였다.그러나 그리 문제될 게 없다는 것이 중론이다. 윤곽이 드러난 청와대 조직개편도 같은 방향이다.「작고 강력한 정부」와 연결되어 있는 조직개편은 기구및 인원의 축소로 요약되고 있다.12명의 차관급 이상 비서관을 9명으로 줄이고 각 수석실의 기구도 대폭 통폐합했다.의전수석을 따로 두지않고 1급 의전비서관을 둔 것이 그 좋은 예이다. 반면 업무 추진력은 강화될 것으로 예상된다.김대통령은 인선후 『비서실이 바로 개혁의 주체』라고 말한바 있다.고통의 분담 차원에서 줄이긴 하나 기능및 책임까지 줄인 것은 아니라는 지적인 것이다. 취임식날인 지난 25일 12시를 기해 26년동안 경호상의 이유로 통제되어온 청와대 앞길과 효자로,팔판로를 개방한 것도 결론은 「개혁청와대」의 한 부분이다.인왕산의 완전 개방도 국민과 함께 조깅을 해온,산을 느낄줄 아는 문민대통령의 모습을 과감히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당시 이경재공보수석은 『국민과 좀더 친숙한 대통령이 되기 위한 조치이며,주변 교통체증을 해소하기 위한 것』이라고 개방 배경을 설명한 바 있다.비록 작은 것일 수도 있지만 이는 「국민을 먼저 생각하는」 정책추진을 예측케 하는 대목이다.즉 개혁과 변화란 국민 불편의 최소화를 위한 방편이며 거기에 목표를 두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렇게 현재까지 드러난 일련의 조치들로 볼때 김영삼청와대는 크게 「일하는 청와대」 「개혁의 산실」 「국민과 함께하는 청와대」를 지향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이 점에서 일단은 합격권에 들어선 것으로 보인다. 다만 문제는 지금부터라는 인식이다.김대통령이 취임사에서도 밝혔듯이 궁극적인 지향 목표인 신한국은 한꺼번에 이룰 수 없는 것들이 태반이다.지역이기주의,기득권층,하루아침에 떨치기 어려운 오랜 관행등 장애도 많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선 청와대가 과거처럼 정책에 개입하는 수준이 아닌 국정운영 방향과 전략을 수립하는 산실이어야 한다.남은 기구개편도 이 차원에서 이뤄져야 할 것이다.또 더이상 권부의 모습이 아닌 고통의 얼굴을 국민에게 보여야한다.『재산공개에 수석비서관들이 솔선수범하라』는 김대통령의 지시도 이를 염두에 둔 때문이다. 현 개혁에 대한 인식과 범위도 시간이 흐르면 또하나의 타성이 된다.따라서 시대의 요구에 항상 귀기울이며 변화에 변화를 거듭해야 할 것이다. ◎전문가의 시각/“대통령의 두뇌이어야 한다”/지역갈등 해소 등 「심도의 정책」 개발을/이남영 숙대교수·정치학 새로운 문민대통령이 취임하였다.취임식장은 권위주의와 군사문화가 지배하던 시절은 지나가고 새로운 문민정치시대가 열림을 선언하는 역사적인 장소였다.김영삼대통령은 정통성을 확보하고 있기 때문에 커다란 정치적 부담없이 개혁을 진행시켜 나갈 수 있는 유리한 입장에 서 있다. 행정부가 대통령의 수족으로서 기능한다면 청와대는 대통령의 두뇌이다.두뇌의 역할을 담당하는 청와대가 새로워 지지 않고서는 참된 의미의 개혁정치는 힘들 것이다.과거 청와대는 권력의 상징이었다.청와대는 온갖 비리의 온상이 되기도 하였다.청와대는 국민과 대통령을 차단시키는 장치로서 기능하였다.따라서 청와대는 국민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오직 국민위에 군림하려 하는 권력기관에 불과했던 것이다. 과거의 청와대는 대통령 개인의 정치적 야심을 충족시키기 위한 기능을 담당하였다.그들은 대통령직을 개인으로 형상화했기 때문이다.대통령직은 개인 대통령의 것이 아니라 국민의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즉 대통령직의 두뇌를 담당하고 있는 청와대내의 인사들은 대통령 개인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을 위해 봉사해야 하는 것이다. 청와대는 다음과 같이 새로워 져야 한다. 첫째,청와대내에는 대통령의 두뇌역할을 담당할 수 있는 전문가 집단이 충분히 확보되어 있어야 한다.대통령 개인이 국가적인 모든 일을 혼자서 결정할 수는 없었다.중요 사안에 대하여 대통령에게 여러가지 가능한 대안을 제시해 줄 수 있는 전문가들이 필요한 것이다.청와대 인사를 기용할 때 그가 무슨 일을 어떻게 할 수 있는가를 보고 기용해야 한다.전문지식과 능력보다 정치적인 친분관계를 더 중요하게 고려했던 것이 과거의 인사정책이었다면 이젠 과감히 그러한 사고방식으로부터 떠나야 할 때이다. 둘째,각 행정부서가 국가의 일상적인 업무를 처리해 나가는 기관이라면 청와대는 특정의 주요한 정치적 사안들을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해결방안을 도모할 수 있는 기관이어야 한다.예컨대 지역갈등이나 계층간의 갈등 문제의 해결은 행정적인 조치만으로는 해결이 거의 불가능하다.그 문제들은 고도로 정치적이면서도 심리적인 현상이기 때문이다.이와같이 특정한 주요 문제들을 심도있게 다룰 수 있는 사람들이 대통령 주변에 있어야 할 것이다.대통령은 국가적인 중요사안에 대하여 고민하고 그 고민의 결과로서 국민을 위한 참신한 정책을 개발해 내야 한다.청와대는 국가적인 중요사안에 대하여 끊임없이 고민하는 사람들이 모인 장소여야 한다.고민의 과정이 국민에게 전달될때 대통령은 설득력을 갖게 된다.한 저명한 학자의 말대로 민주주의 사회에서의 대통령의 권력은 국민을 설득할 수 있는 힘으로부터 창출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셋째,청와대는 국민과 대통령을 연결시켜 주는 가교의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대통령은 국민의 소리를 가능한한 여과 장치없이 직접 들어야 한다.그러나 대통령은 관료집단,의회,정당 등 여러 제도적인 장치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국민의 소리를 직접 듣기 어렵다.청와대는 투명해야 한다.국민의 소리를 거울처럼 대통령에게 비춰 주어야 한다.우리 정치사는 국민의 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했던 대통령이 거의 없음을 보여준다.그 이유 중의 하나는 청와대 인사들이 대통령과 국민 사이에 인의 장막을 쳤기 때문이었다.이승만,박정희 대통령 등이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 했던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얼마전 있었던 청와대 비서실장 및 수석 비서관들의 인선 과정에 대하여 대다수 국민들이 커다란 관심을 보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개혁은 바로 대통령 자신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국민의 요구였던 것이다.청와대는 더 이상 권력의 상징이어서는 아니 된다.청와대는 국민의 것이기 때문에 국민과 더욱 가까이 있어야 한다.안정속의 개혁을 이루겠다는 새 정부의 목소리는 보다 개혁적인 정책의 개발로서 연결되어야 한다.청와대로 진출한 새로운 인사들은 역사적인 소명의식을 가지고 대통령직을 충실히 보좌하여 개혁의 깃발을 높이 올려야 할 것이다.
  • 「독립정신」(화제의 책)

    ◎1904에 쓰인 이승만박사 옥중기 대한민국 초대대통령 우남 이승만박사의 옥중기.당시 무기수로 7년째 한성감옥에서 복역중이던 이박사가 19 04년 2월19일부터 같은해 6월29일까지 4개월10일동안 쓴 우국충정어린 글이다. 건국이후 이박사에 대한 상반된 역사평가는 접어두고 이 책에는 당시 러·일전쟁 개전소식을 옥중에서 전해들은 우남이 극비리에 들여온 지필로 기록한 원고를 종이말이 새끼로 꼬아 밖으로 내보냈다는 눈물겨운 사연이 간직돼 있다. 1909년 발간시 금서조치되었다가 여러차례 중간되었지만 고어·사어가 많고 난해한 한자어가 많아 이번에 현대 맞춤법과 띄어쓰기로 바로 잡아 새로 펴냈다. 이승만지음 정동출판사 6천원.
  • “방송국서 부친 납북”/유공지정거부 취소소

    전남 장흥읍 건산리에 사는 김영웅씨(51)는 12일 6·25전쟁 당시 아버지 도현씨(당시 38세)가 이승만대통령의 사수명령에 따라 방송국 송신소를 지키다 피랍된 만큼 국가유공자로 보상을 받아야 한다며 보훈처장을 상대로 「국가유공자 지정거부취소」 청구소송을 서울고법에 제기했다.김씨는 소장에서 「6·25 전쟁당시 한국방송공사(KBS)전신인 서울중앙방송국 송신과장 겸 연희송신소장으로 재직하던 아버지가 이대통령의 국가 주요기관 사수명령에 따라 송신소를 지키다 납북된 사실이 방송계 등 각계에 의해 확인된 만큼 국가유공자로 대우해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씨는 『이대통령의 위법한 명령으로 인해 국가 유공자들의 후손들이 43년간 입은 피해액 9조99억원을 국가가 배상해야 한다』며 『침략전쟁을 일으킨 북한·중국·러시아등 2차 배상청구인들도 인류평화기금 등으로 13조원씩 모두 39조원을 내놓아야 한다』고 말했다.
  • 대통령임기의 「마지막 5분」(정경문화포럼)

    ◎역사와 민족에 대한 책임 막중한 직무/현장순시 통한 공약사업 점검은 당연 축구는 경기시작 5분과 끝날때 5분이 중요하다고 한다.전열이 미처 정비되기 전의 초반 실점과 막판의 방심이 게임을 그릇칠 위험이 크기 때문이다.골프도 마찬가지이다.첫 홀을 「올 보기」(All Bogey)로 적자는 너그러운(?)제의도 몸이 풀리기 전의 상황을 보아주자는 동양적 미덕에 다름아니다.매사 시작과 마무리가 중요하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대통령직 수행도 이 원칙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미국의 부시대통령은 임기가 끝나는 날까지도 이라크와의 전쟁을 수행했다.뒤를 이은 클린턴대통령도 취임직후부터 세계를 향한 경제전쟁의 고삐를 늦추지 않고 있다. 지금 우리 청와대에 대해서는 말들이 많다.취임을 한달도 안남겨 놓은 차기대통령에 대한 「주문」도 있고 현직대통령에 대한 「지적」도 나온다.봉황마크는 권위의 상장이니까 사용해서는 안되겠다,청와대를 관광명소로 개방하라,직제와 기능은 어떻게 개편해야 한다는 등 문민대통령에 대한 바람이 적지 않다.그러나 아직은 「청와대」라는 명칭 자체를 바꾸어야 한다는 주장은 나오지 않고 있다.하기야 이승만대통령시절의 경무대,박정희·전두환대통령때의 청와대는 「절대」에 가까운 권위의 상징이었다.청와대는 권부 그 자체였다.에스프리(esprit)가 바뀌면 그 형식도 변해야하는 것은 당연하다. 진정한 문민정부시대에 있어서의 청와대를,국정수행의 실체인 헌법기관을,어떤 내용으로 어떻게 변모시켜야할 것인가의 문제가 「명칭」하나로 좌우될 수는 없다.그러나 권부의 상징이었던 청와대의 개칭은 필요할지도 모른다.그것은 「대통령의 집」「효자동집무실」또는 「북악정사」등 어떤 이름이라도 좋다.그 뜻은 꼭 명칭을 바꾸라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의 개선이 중요하다는 의미이다.청와대에서 나오는 말은 언제나 신뢰성을 가져야하며,그곳에서의 업무처결은 국가의 장래를 위한 「결단」의 표현이어야 한다는 말이다.그 이미지의 개선은 빨리 이루어져야 한다.김영삼정권출범 초기에 해당하는 1년이내가 그 시한이라고 볼 수 있다.그러나 대통령의 임무가 어찌 시기를구분하여 중요성이 다를 수 있을 것인가.그럴 수 없다.불행하게도 대통령은 결과로서 평가받는 자리이다.동기의 선의나 과정의 민주적인 정당성만으로는 면책될 수 없는 결과책임을 지고 있다.따라서 대통령은 역사에 대한 책임을 그 무엇보다 중시하지 않으면 안된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선택불가피한 일은 아무리 고통스럽고 인기가 없더라도 장한 결단을 내리고 줄기차게 추진하는 대통령이어야 한다.21세기를 내다보면서 국가발전과 국민의 잠재력을 최대한 발현할 수 있도록 국정개혁에 전력투구하는 대통령이어야만 된다.나라의 장래는 바로 이런 개혁의 성패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세는 임기말이라고 예외가 될 수는 없다.떠나는 대통령이 무엇이 그처럼 행사가 많으냐는 비난도 없지 않은 모양이다.노태우대통령은 임기를 불과 25일 남겨놓은 상황에서 주요공약 사업의 추진사항을 점검,독려하기 위해 전국의 공사현장을 직접 돌아보고 있다. 또 각계 각층의 인사들을 청와대로 초청해 재임기간동안의 협조와 지지에 감사를 표하고 국정수행 경험을 술회하는 기회를 갖는다.임기내에 정리해야할 일을 차기정부에 넘겨 짐이 되도록 하지 않겠다는 뜻이다.이와같은 청와대행사는 엄연한 국정수행의 일환이다.그러나 지난 25일 민주당의원 26명은 부부동반 청와대초청만찬에 참석하지 않았다.『퇴임을 앞두고 연일 계속되는 청와대만찬에 대해 민주당은 참석할 수 없다.한시라도 국정을 소홀히 해서는 안되는 마당에 만찬은 불필요하다』는 당론을 앞세웠다.이에대해 청와대측은 『그동안 국정을 걱정했던 여야의원들과 한자리에 만나 식사라도 함께하며 석별의 정을 나누어 보려는 소박한 생각에서 계획했던 것』이라고 설명하고 『민주당이 이같은 순수한 취지에서 마련된 자리를 잔치판 운운하며 불참키로 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섭섭한 감정을 억누를 수 없는 것이 솔직한 인지상정아니겠는가』라고 언급했다. 청와대행사에 대한 거부감은 비단 이것 뿐이 아니었다.비근한 예가 지난해 11월 교토(경도)한일정상회담이었다. 이것은 정상들의 실무회담이라는 좋은 선례를 남긴 회담인데 대다수 신문은 이를비판했다.이에대해 노대통령은 『일관성있게 비판했다면 모르겠는데 조금 있다가 논조가 돌아서지 않았는가』라고 지적하고 『언론의 비판에 대해 쓴약은 양약이다라는 원칙을 갖고 있었으나,쓴약은 쓴약인데 양약이 안되는 것이 있더라』며 한탄한 일이 있다. 국정의 최고 책임부서에 대한 국민들의 기대는 클 수 밖에 없고,그에 따른 주문은 많을 수 밖에 없다.그러나 그 주문은 한마디면 족하다.임기 5년을 통틀어 간단없이 국정개혁의 성과를 올려달라는 것이다.국민의 이같은 희망은 대통령자신이 접촉하는 모든 인사들을 통해,또 그가 선임하는 「언제나 바른말을 할 수 있는 비서실장」을 통해 수렴될 수 있는 것이다.
  • 사실 바로 전하기/최갑석 재향군인회 중앙이사(굄돌)

    강원도 철원군 문혜리에서 북쪽으로 가면 한탄강이 나온다. 한강이나 낙동강처럼 수량이 많고 강이 크지는 않지만 군사전략적으로는 중부전선의 극히 중요한 지점으로 6·25동란당시 여러번 주인이 바뀐곳이다. 10m가 넘는 절벽밑에 자갈로 된 강바닥위로 맑은 물이 흐르는 이곳은 여름철에는 많은 피서객들이 모이기도한다. 한탄강위의 다리 이름이 한글로 「승일교」라고 씌어있다. 언제부터인가 이 고장 주민들과 이곳에 주둔해 있는 군 부대장병들은 「승일교」를 6·25당시 격전지이며 북한의 김일성이 반쯤 놓은 다리를 국군이 38선을 넘어 북진하면서 이승만대통령이 완성을 한 다리로 이때문에 다리이름도 「승일교」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의기양양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6·25당시 이 지역의 전략적 중요성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있던 21연대장인 박승일대령이 북한군을 맞아 장렬히 전사한 것을 기념하기위해 「박승일교」라고 명명했던것이 다리의 보수과정에서 박이라는 글자가 빠져버리고 「승일교」라고만되어 이야기를 만들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꾸며낸 말이다. 70년대 육군오뚝이부대장으로 이 지역에서 사단장을 하던 필자는 6·25에 참전했던 군단장들과 함께 승일교의 참된 유래를 장병들에게 누누이 설명한바 있었다. 20년이 지난 지난여름 이곳으로 피서를 갔던 필자는 이 지역 장병들과 주민들이 아직도 「승일교」를 이승만대통령과 김일성의 합작품이라고 설명하는 것을 보고 어이가 없었다. 우리 군대의 전사와 지형지물에 얽힌 향토사가 왜곡되고 있는 사실을 보고 부끄러운 생각마저 들었다. 개인이나 부대 또는 고장의 역사는 당시의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기록함으로써만 사료로 존재하게 된다. 오뚝이부대장 당시 필자는 작전책임지역내의 지형 지물을 연구하며 산과 강,부락과 사찰,교량과 도로등을 샅샅이 답사하면서 유사시 작전계획을 수립했었다. 우리 주변에 더 이상의 망발은 없는지 다시 한번 살펴보아야 하겠다.
  • 새 정부 제로베이스개혁 호기/역대정권보다 홀가분한 입장 분석

    ◎과거청산·부정선거론 등 굴레 없어/인수위 활동때부터 강력한 영향력 김영삼대통령당선자는 지난 23일 기자들과 함께 하는 자리에서 차기정부가 몇 공화국이냐는 질문에 『정치학자들중에는 2공화국이라는 사람들도 있다』고 말했다.이는 해방이후 지금까지를 1공화국으로 보는 시각도 있을 수 있다는 얘기다. 물론 그같은 견해는 많은 논란의 소지를 안고 있다. 최소한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박사정권은 제1공화국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 반론의 대표적인 예이다. 어쨌든 『2공화국이라는 의견도 있다』는 말은 김당선자의 의욕과 자신감은 물론 이제 곧 출범할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의 정치적 성격과 운용방향에 대해서도 중요한 시사를 던져주는 것이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는 강력한 영향력을 가질 것이 확실시된다.이는 김당선자가 역대 어느 대통령보다도 공명정대한 선거에 의해 완승을 거둔 문민정치인이라는데서 오는 힘이다. 지금까지 어느 대통령도 김당선자와 같은 여건은 갖지 못했었다.과거의 모든 대통령이 정통성및 부정선거시비 또는과거청산이라는 굴레에 시달렸다.그러나 김당선자의 인수위는 그같은 굴레가 없다. 예컨대 이승만박사는 친일분자처벌,장면정권은 3·15부정선거및 반민족주의청산,노태우대통령은 관권선거시비및 5공 청산등에 매달려야했다. 개혁을 추진해야 할 집권초기에 과거사 문제로 힘을 소진한 것이다.특히 노대통령은 실질적인 「킹메이커」가 전두환전대통령이었던만큼 운신의 폭이 제한돼 있었다. 인수위의 성격은 김당선자측이 당초 「대통령직인수위원회설치령」이 아니라 「정권인수위원회설치령」이라는 제목으로 정부당국에 제안한데서도 잘 나타난다.법률적으로는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적절하다는 법제처의 의견을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김당선자측은 설치령의 제목은 정권인수,설치령안의 구체적인 조문에서는 정부인수라는 표현을 사용했었다. 이는 노대통령 당시의 취임준비위와 비교하면 엄청난 변화다.노대통령때에는 취임을 준비하는 것이었지 정권이나 정부를 인수하는 것이 아니었다고도 할 수 있다. 설치령에 규정된 인수위원회의 권한도 막강하다.필요한 인원및 예산지원은 물론 국정전반에 걸쳐 제로 베이스(zerobase),즉 영점에서 개혁을 추진할 수 있는 기능을 부여했다고 할수 있다.물론 우리나라 국정 모두가 개혁의 대상은 아닐 것이다.그러나 인수위의 권한만큼은 국정전반을 개혁할 수 있도록 근거규정을 마련한 것은 틀림이 없다. 김당선자의 개혁방향은 인수위와 함께 자문기구인 「신한국건설위원회」에서 결정된다.신한국건설위원회는 「신경제건설단」「지역감정해소를 위한 인사위원회」「공무원부정부패방지위원회」등 5개정도의 위원회를 두어 개혁의 방향을 결정하고 인수위원회를 거쳐 대통령당선자에게 보고하도록 되어있다.신한국건설위원회가 인수위의 하부기구는 아니지만 인수위가 건의내용을 걸를 수 밖에 없다는 점도 인수위 역할의 중요성을 더해주고 있다. 위원장 밑에 정치·행정·경제·외교·안보·통일·법사·노동·여성·문화·교육·환경·언론·의전·총무등 15개 분야의 부를 맡게 될 위원들의 인선에도 당연히 관심이 쏠리고 있다. 김당선자는 『인수위가 차기 내각의 성격을 갖는 것은 절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이는 6공화국 당시의 취임준비위 멤버들 대부분이 노대통령이 집권하는 동안 장관으로 입각하는등 영예를 누렸던 것을 의식,그같은 기대를 사전에 차단하려는 의지로 해석된다.하지만 김당선자의 그같은 언급에도 불구,인수위 멤버들이 차기정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는 기대는 여전하다. 전체적으로는 인수위원의 절반에서 3분의 2정도는 당내 인사들이 주축이 되리라는 전망이다.당내인사를 주축으로 하는 것은 아무래도 정권창출에 기여한 인물이 중용되어야 한다는 의견때문이다.나머지는 각계각층의 참신한 전문가·학자·행정경험이 있는 관료출신,지역성을 감안한 호남출신등이 기용될 것으로 보인다. 위원장으로는 정원식전국무총리가 유력하다.정권창출에 기여했을 뿐 아니라 학식과 덕망을 갖추고 있고 당내의 어느 누구도 그의 기용에 불만을 나타내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김윤환 이한동 이춘구 정호용의원등 당내중진들은 가급적 실무진들을 기용한다는 방침에 따라 포함되지 않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현재 거론되고 있는 인사는 정책통인 서상목 백남치 강용식정책조정실장 김영수 정세분석위원장 김영진기조실장 최병렬 박관용 김덕용 강재섭 강삼재의원 이원종부대변인등 실무당직자와 김중위정무 오인환정치 이경재공보 박재윤경제 정주년의전 한리헌경제 특보 또는 보좌역,호남출신인 황인성 정책위의장 김식 전의원 등이다. 또 김당선자의 싱크탱크 역할을 해온 송희년 한국개발원(KDI)원장 이규억 KDI선임연구위원 차동세 럭키금성경제연구소장 구본호 전KDI원장 한완상 이명현 표학길 서울대교수 최평길 연세대교수 한기춘 외국어대교수등 자문그룹도 거명되고 있다.
  • 중학생때의 꿈 대통령되기까지(김영삼 결단·돌파 40년:하)

    ◎정치역정/정치사 고비마다 대세 이끌어/창랑 만나 정치투신… 25세 의원당선/민주화 일념 야당 40년에 숱한 고난 정치거산 김영삼 ­. 한국정치사와 함께 성장해온 그는 마침내 대통령에 당선됐다. 「결단의 정치인」 「소신과 용기의 소유자」 「대세와 순리를 중시하는 지도자」등 그에게 붙여진 수식어는 화려한 경력만큼이나 많다. 그는 만25세의 어린나이로 최연소 국회의원에 당선돼 오늘에 이르기까지 숱한 고난과 격동의 세월을 보냈다. 38세에 원내총무에 올라 5회연속 피선되었으며,우리 정치사에 전무후무한 국회의원 9선의 경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는 야당총재 4번,여당총재 한번의 신기록도 갖고있다. 그러나 그를 정치지도자로 높이 평가하는 이유는 화려한 경력때문이 아니라 그가 한국정치의 큰변화를 주도해온 결단의 정치인이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한국현대정치사의 대세를 주도했다고 할수있다. 1950년 그는 처음으로 정치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49년 정부수립 기념웅변대회에서 외무부장관상을 타게되었고 이때 외무부장관인창랑 장택상씨와 인연을 맺게되었다.50년5월 국회의원선거에 장씨가 출마하자 그의 선거운동을 도왔고 51년부터 53년까지 장씨가 국회부의장·국무총리시절 비서관으로 정치에 첫발을 내디뎠다. 25세가 된 김영삼은 제3대 국회의원에 출마,최연소나이로 고향인 거제에서 당선됐다. 이때 그는 자유당소속의원이었다.그는 경무대를 방문한 자리에서 이승만대통령에게 3선개헌의 부당성을 제기했으나 오히려 이대통령으로부터 무안을 당했다.이에 자유당의원이면서도 3선개헌표결에서 반대표를 던지고 7개월만에 자유당을 탈당했고 이후 소장파의원들과 사사오입개헌의 부당성을 주장했다. 이때부터 김영삼은 90년1월 3당합당 때까지 37년간 오로지 야당외길을 걸었다. 4·19와 5·16은 김영삼을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정치인으로 성장하게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4·19후 재선의원인 김영삼은 당시 신민당소장파의원을 중심으로 정치정화운동서클인 「청조회」를 구성하는등 청년정치지도자로서의 활약이 돋보였다.5·16이후 신민당이 해체되고 대부분의 정치인이 정치정화법에 묶여있는 상태에서도 그는 「군정종식」과 야당전열재정비를 위해 힘썼으며 63년3월 군정연장반대시위로 서대문구치소에 수감되는 수난도 겪었다. 김영삼은 63년12월 제6대국회의원선거에서 전국 최고득표로 당선되었다.이후 그는 제1야당에서 5차례의 원내총무에 피선되면서 군사정권과의 투쟁을 실질적으로 진두지휘했다.3공화국정권에 대항하여 야당을 진두지휘하던 원내총무시절 그는 두려움을 모르는 용기와 결단의 지도자로 부각되었다. 1970년 그는 「40대 기수론」을 제창하여 일약 야권의 지도자로 발돋움하게된다.그의 나이 42세였다.김영삼은 70년 신민당대통령후보지명전에서 1차투표에서는 이겼으나 결선투표에서 김대중씨에게 패했다.그는 패배후 깨끗이 승복하고 김씨의 당선을 위해 힘을 아끼지않았다. 72년 유신헌법선포당시 김영삼의 행동은 그가 국민적지도자임을 나타내준다. 당시 그는 미국을 방문중이었다.그를 초청했던 라이샤워 코헨 교수와 미국무부관리들은 그의 투옥을 우려해 귀국을 만류했으나 그는 『국민과 동지들이 겪고있는 고통을 함께 나누겠다』며 곧바로 귀국하는 용기를 보였다.귀국후 그는 곧바로 가택연금을 당했지만 유신헌법 개정운동에 착수,기나긴 반유신투쟁의 길에 들어섰다. 74년 유진산총재가 별세하고 그는 40대나이에 만장일치로 신민당총재에 당선됐다.정계투신 20년만의 야당당수취임이었다.총재 김영삼은 이후 개헌투쟁을 진두지휘했고 이때 그가 인용한 「닭의 목은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말은 암울한 시대에 민주화의 희망을 안겨준 명언으로 회자되고 있다. 김영삼은 77년 2번째 야당총재에 취임,반유신투쟁의 선봉에 섰다.총재취임후 경찰의 신민당사난입,총재직무정지가처분,의원직제명등 온갖 박해가 계속됐다.그러나 그는 『잠시살기위해 영원히 죽는길을 택하지 않을것이며 잠시 죽는것 같지만 영원히 사는길을 택할것』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며 반유신투쟁을 강화해 나갔다.김총재의 의원직제명에 항의해 신민당의원들은 전원 사퇴서를 제출했고 부산과 마산에서는 소요사태까지 발생,마침내 10·26으로 유신체제가 막을 내렸다. 80년 서울의봄을 거쳐 신군부의 등장으로 그는 81년5월까지 두번째의 가택연금을 당했다.김영삼은 이때 1년간의 연금기간을 「자신과 싸운 분노의 1년」이었다고 술회한다. 83년 광주민주화운동 3주년을 맞아 그가 결행한 23일간의 단식은 그동안 숨죽여온 민주화투쟁에 불씨를 당겼다. 84년 민추협결성→85년 신민당창당→2·12총선돌풍→직선제개헌운동→87년6월 민주화운동으로 이어지는 민주화의 대장정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김영삼은 6·29선언으로 맞은 87년 대통령선거에서 패배했다.야권분열로 인한 패배라고 그는 솔직히 시인했다.이후 총선에서는 헌정사상 최초의 여소야대 국회가 탄생,정치·사회전분야는 혼란이 계속됐다.김대통령당선자는 이러한 상황에 직면하여 근본적인 사고의 전환을 단행했다.헌정사상초유인 여당과 야당의 통합을 추진한 것이다.그에게는 가장 힘든 결단이었다.일각의 비난도 거셌지만 그는 극복했다. 3당합당이후 김영삼대표의 행보는 순탄치만은 않았다.내각제파동을 겪었고 이질적인 계파간의 갈등은 끊임없이 그를 뒤흔들었다.그는 합당후 2년간을 야당생활 40년보다 힘들었다고 술회하기도 했다.그러나 그는 정면돌파식 승부로 기어이 민자당대통령후보 경선에 승리했고 이제 대통령선거에도 당당히 승리했다.제1공화국에서 제6공화국에 이르는 파란만장한 41년간 정치행로의 총결산이었다. 그는 『역사에 단순히 기록되는 대통령이 아니라 역사에 길이 남는 대통령이 되고싶다』고 말해왔다. 국민들은 지금 그의 경륜과 탁견·소신과 의지에 큰 희망을 걸고있다.
  • 김대중후보,대표사퇴 왜했나

    ◎대선 역전극 노린 막판 승부수/부동표 흡수·당결속 2중포석 민주당의 김대중후보가 14일 기자회견을 통해 당대표직을사퇴키로 선언한 것은 선거 막바지 당결속을 강화함과 동시에 부동표 흡수를 통해 막판 역전극을 노린 승부수라고볼 수 있다. 김후보측은 앞으로 남은 3일간의 선거활동 기간동안「타후보의 지지선언」유도,「김권폭로」등 연속적인 「카드」를 준비할 계획이었으나 진척상황이 여의치 않아 이번 선언을 승부수로 삼은 것으로 보인다. 김후보는 지난 5월의 전당대회등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선거의 당락에 관계없이 당무일선에서 물러날 것』임을 강조해왔다. 그러나 그때마다 당내 민주계는 당무일선에서 후퇴할 것을 강력히 요구해왔고 이에 대해 뚜렷한 「보장책」을 내놓지 못했었다.따라서 당내일각에서는 김후보의 당권포기에 대해 강한 의구심을 갖고 있었으며 이것이 당의 결속에 장애를 가져온 것 또한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후보가 선거 막판에 대표위원직을 내놓은 것은 이번 카드를 최대한 활용해보겠다는 계산이 깔린것이다. 수도권의 부동층이 역대의 어느 대통령선거때보다 많은 시점에서 「당권포기」카드를 던짐으로써 효과의 극대화를 노렸다고 볼 수 있다. 즉 『김대중은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유권자들에 대해 『약속은 반드시 실천한다』는 지도자상을 부각시킴으로써 수도·중부권에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부동층의 시선을 자극해보자는 것이다. 특히 김후보는 이번 선언에서 대표직사임을 천명하면서 『존경하는 이기택 대표최고위원과 당지도자 여러분이 당을 원만히 이끌어 달라』는 주석을 붙임으로써 영남권 유권자는 물론 당내 민주계의 영남권공략에 추진력을 불어넣기 위해 애쓰고 있다. 김후보의 이러한 의도는 『노태우대통령과 거국내각구성을 협의할 것』이라거나『대화합의 마음가짐에서 이승만박사와 박정희전대통령의 묘소를 참배했다』고 강조한 대목에서 명백히 찾아볼 수 있다. 이와 함께 후계구도에 대해 의구심을 버리지 않고 있는 당내 일부세력들에 대해서도『안심해도 된다』는 「보장」을 해줌으로써 당내의 결속을 유도,효과의 극대화를꾀하고 있다. 그러나 새로운 표의 창출보다는 고정표가 많은 김후보의 득표기반으로 볼 때 이번 선언이 부동표의 확보에 어느정도로 영향을 미칠 지는 아직 미지수이며 선언의 실효성에 대해서도 의문을 갖는 층이 당내외에 적지않은 것도 사실이다. 지난 대선때의 후보사퇴 번복,광역선거 이후 당권포기에 이은 복귀등 「전력」등을 들춰내지 않더라도 민주당은 다수의 간부들이 「이대표로의 무조건적 당권이양」에 동의하지 않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또한 김후보가 의원직 사퇴를 유보한 것도 의구심을 갖게하는 대목중의 하나라는 지적이다. 더욱이 김후보는 평소 『후계자로 생각하는 사람이 3∼4명 있다』고 공언해 왔음에도 당내기반이 취약해 「리더십」에 문제가 있는 이대표에게 당권을 넘겨준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 “승세 굳히자”… 휴일 접전지 공략(대선 유세현장 13일)

    ◎“교육·복지 등 민생 선결”… 경기지역 누벼/김영삼/영남 재공약… 지역·계층간 대통합 역설/김대중/“경제·교통난 해결”… 수도권 강행군/정주영/박찬종/“인물·지역 고리 끊자”/백기완/“진보세력 총결집을” ○신도시 민원 해결 약속 ▷김영삼후보◁ 평택·오산·군포·의왕시등 경기도 남부지역을 헬기로 이동하며 마지막 휴일유세를 전개. 김후보는 이날 유세에서 특히 『요즘 「바꿔보자」고 하는 어느정당을 들여다보면 색깔이 분명치 않다』면서 민주당과 김대중후보를 겨냥. 김후보는 『그동안 평양방송은 남한의 특정후보를 지지하라고 선동했고 이 김영삼이만은 반드시 떨어뜨리라고 선동하고 있다』면서 『그런데 얼마전 북한이 지지하라고 선동한 그 후보는 김일성노선에 동조하는 전국연합과 손을 잡았다』고 민주당과 전국연합의 정책연합을 지적. 김후보는 이어 『이 사실을 두고 지금 평양방송은 연일 흥분하고 있다』면서 『북한이 원하는 후보를 대통령으로 뽑아야 합니까.아니면 우리가 원하는 대통령 후보를 뽑아야 합니까』라고 반문하며 지지를 유도. 그는 이날 유세지역이 서울에 인접한 농촌형 소도시임을 감안,농수산물유통단지건설및 서울과 연계되는 전철건설등을 공약으로 내세웠고 특히 군포및 의왕유세에서는 『신도시 건설과정에서 드러난 여러가지 민원을 시급히 해결하고 고등학교등 교육시설을 대폭 늘려 주민들의 교육문제를 해결하겠다』고 약속. 그는 이날 유세에서 체육에 대해서도 관심을 표시,『우리 체육인이 88올림픽과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우리나라를 세계에 빛냈으나 올림픽이 끝나자 체육인에 대한 관심과 대우가 다소 소홀해졌다』고 지적하며 『88올림픽이후 조성된 5천억원의 체육진흥기금이 체육인들의 활동에 실질적인 뒷받침이 될수 있도록 활용하고 순수체육인 모임인 체육회 역할을 확대하겠다』고 공약.김후보의 이날 경기지역 유세에는 정원식선거대책위원장이 연사로 참석해 김후보의 결단력과 지도력·정직성을 강조하며 지지를 호소했고 유세장마다 식전행사에서 연예인들의 여흥마당을 마련,청중들의 관심을 돋우기도. 김후보는 평택유세를 마친후 이지역 청년회의소를 방문,40여명의 회원들과 간담회를 가진뒤 즉석에서 「조국미래」라고 쓴 친필 휘호를 써 증정. 김후보는 또 군포유세에 앞서 군포시 산본2동 소재 엘림복지타운을 방문하고 무의탁노인을 위로했으며 귀경길에는 의왕인근의 나환자요양소인 「성나자로마을」도 방문해 나환자및 요양소 관계자들도 격려. 한편 이날 평택유세에서는 젖소를 키워 성공한 윤기태씨(30)와 오산유세에서는 어촌계간사로 어가 소득 증대에 앞장서고 있는 고재성씨를 「신한국인」으로 소개. ○김영삼후보 집중 비난 ▷김대중후보◁ 영남지역 재공략에 나섰으나 악천후로 헬기가 뜨지 못하자 예정됐던 안동·구미유세중 구미유세가 취소되는등 우여곡절. 김후보는 그대신 안동의 풍천시장을 들른뒤 서울의 국립묘지를 방문,이승만·박정희전대통령과 무명용사비 등을 참배하고 밤에는 63빌딩에서 열린 「민주당후원회의 밤」행사에도 참석하는등 취소된 유세일정의 공백을 메우는데 안간힘. 당초 안동과 구미지역을 헬기로 갈 계획이었으나 비바람이 몰아치자 이를 취소하고 여객기편으로 예천에 도착,승용차로 갈아타고 안동역광장에서 선거공고일 이후 두번째 유세. 김후보는 이지역유세에서 김영삼후보가 「색깔론」을 들어 자신을 비난하고 있는데 대해 『놀라움과 배신감을 금할 길 없다』고 분개하고 연설의 반이상을 김영삼후보의 비난에 집중. 김후보는 이어 『김영삼후보가 전국연합을 시비하고 있지만 그 자신이 5·6공의 야당시절에 전국련합 인사들과 하나가 돼 공동투쟁하지 않았는가』고 반문하고 『그의 용공조작에는 별도로 시비하고 싶지 않다』고 피력. 김후보는 『만일 김영삼씨가 당선된다면 재야 각계세력을 본체만체 할 것이기 때문에 혼란은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지역·계층·세대간 4분5열된 우리의 상황에 대해 국민통합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나 뿐』이라며 지지를 호소. 김후보는 또 농어촌 부채탕감공약과 관련,타후보가 『그럴 능력이 없다』고 비난을 퍼붓고 있는 것과 관련해 『농어민의 빚은 농정실패에서,도시영세민과 근로자의 빚은 생활비에서 생긴 빚』이라면서 『부동산투기 이익금을 환수하고 재정중 정권유지비를 없애면 부채를 탕감할 수 있다』고 반박. ○국립대학 신설 등 제시 ▷정주영후보◁ 상오에는 현대관련 기업이 밀집해 있는 울산에서 대규모집회를 갖고 하오에는 안성·평택·수원·오산및 인천에서 잇따라 중소규모집회를 갖는등 강행군.이날 유세는 일정이 빡빡하게 짜여진데다 심한 바람으로 인해 헬기운항에 어려움을 겪는 바람에 일부지역 유세가 30분∼1시간 늦어지기도. 정후보는 『집권하면 경제난·교통난·환경난·교육난등 우리나라의 「4대란」을 해소할 것』을 약속하며 『그래서 여러분들이 국민당을 선택한 것을 나중에 자랑스럽게 여기도록 하겠다』고 역설. 정후보는 이어 지역공약으로는 울산에서 ▲직할시 승격 ▲울산대의대 부속병원설립을,수원에서는 ▲서민아파트 5만가구공급 ▲국립교육대학 신설,인천에서는 ▲인천항∼만석동∼인천교를 연결하는 화물차전용외곽도로 건설 ▲학익천 복개공사를 제시. ○영남 부동표 확보 주력 ▷박찬종후보◁ 대구·부산등 영남지역에서 유세를 갖고 민자·민주·국민등 주요 3당 후보를 싸잡아 비난하며 부동표확보에 진력. 박후보는 『오랜 인연을 맺고 지난 대통령선거에서 찍어줬던 인물의 고리 그리고 지역감정의 고리,돈의 고리에서 선뜻 헤쳐나온다고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안다』며 『그러나 급변하는 세계의 조류속에 우리 한국이 영원한 미아로 전락되는 것을 방치할 수는 없다』고 자신에 대한 지지를 호소. ○이종찬 후보사퇴 맹공 ▷백기완후보◁ 서울 보라매공원에서 유세를 갖고 이종찬후보의 중도사퇴를 비난하고 3당후보를 격렬히 공격. 백후보는 『이종찬이라는 졸장부를 비롯,보수정치꾼들이 수백억원의 돈을 거래하면서 막판 이합집산을 거듭하고 있다』면서 『정주영·이종찬·김대중씨뿐 아니라 한국병환자 김영삼씨도 이들과 합작해 보수지배체제를 영구화해 노동자·민중을 절망의 나락으로 빠뜨리려 한다』고 공격하고 이들에 맞서 진보세력이 총결집해야 한다고 역설.
  • 3당공약 과기정책/“정보빈곤”“내용부실”

    ◎기술경영경제학회 월례토론회서 주장/대부분 인기에 영합… 체계성 결여/재원마련책 등 없어 실현성 의문/“국회에 상설기구설치 등 제도적 보완 절실” 14대 대통령선거에서는 역대 어느 대선에서보다도 구체적이고 다양한 과학기술정책관련 공약들이 비중있게 제시돼 국정운영에 있어 과학기술정책의 위상 강화를 실감케하고 있다. 하지만 각 후보의 과학기술 관련 공약들은 지금까지 좋다고 제시된 아이디어는 모두 백과사전식으로 나열해놓은 「인기영합성」내용들로 대부분 참신성이 부족하거나 조직적이질 못해 실현가능성이 극히 의문시된다는 지적이 강하게 일고 있다. 기술정책 전문가들의 모임인 기술경영경제학회가 18일 상오 서울 조선호텔 갤럭시룸에서 가진 제3회 월례토론회 「과학기술공약정책의 동향분석」도 이같은 분석이 지배적으로 제기된 자리였다. 이 자리에서 서울대 행정대학원 노화준교수는 주제발표를 통해 역대 대선및 총선에서의 과학기술관련 공약과 실천정도를 분석하고 『이번 대선에서는 과학기술관련 공약들이 어느때보다 구체적인 표현으로는 나타나고 있으나 정책의 우선순위 언급이나 막대할것으로 예상되는 재원마련책,다른분야 정책들과의 통합적 연계방안이 제시되지않아 실효성은 의문스럽다』고 밝혔다. 그에따르면 우리나라에서 과학기술진흥을 대선공약으로 제시한것은 60년 4대 대통령선거에서 이승만이 처음이었고 총선공약으로 사용한것은 역시 60년 장면의 민주당정부가 처음이었다.하지만 과학기술 관련 공약은 박정희정권시절까지도 교육정책의 일부거나 경제성장정책과의 연결선상에 놓여있었다.과학기술이 별도분야로 취급돼 구체적 진흥책이 제시된것은 81년 11대 총선과 87년 13대 대선때부터.이는 80년대 중반에는 이미 과학기술이 우리 사회에서 중요한 경제·사회적및 정치적 이슈가 되어 있었음을 뜻한다. 하지만 이같은 공약들은 한때 유권자의 관심은 끌었지만 국회활동이나 정부의 정책과정에서 실효성있게 구현되지는 못했다.노교수는 그 한 예로 과학기술투자를 91년까지 GNP의 3%,2000년대초까지 GNP의 5% 이상으로 늘린다는 공약이 있었으나 실제 91년 현재투자율은 2%에 불과한것으로 추정되고 연구원 1인당 연구개발비는 오히려 줄고 있다는 지표를 제시했다. 노교수는 이번 대선공약들도 상당부분이 정부예산의 뒷받침이 전제돼야 하는것들로 교통,주택,환경문제등 다른 중요과제들과의 우선순위,국민의 추가적인 세금부담여부를 따져볼때 실효성은 기대하기 어렵다고 지적한다.예컨대 ▲광주 대구 부산 전주 강릉등의 지방과학산업단지 조기완성(민자) ▲2천년까지 과학기술투자 GNP대비 5%로 확대(민주) ▲향후 10년간 과학기술예산의 정부예산 10%수준확대(90년예산 세출예산액의 2.93%)등이 이같은 항목들(별표 참조). 토론에 나선 서울시립대 무역학과 강철규교수,고려대 행정학과 염재호교수등은 결론적으로『정당의 과학기술정책 빈곤은 곧 정보빈곤에 기인한다』고 지적하면서 『정당의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정책입안을 지원하기위해 국회내에 관련정책정보를 제공할수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거나 미국의회의 기술평가국과 같은 상설기구를 국회내에 설치하는 방안을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 가동 30돌 맞는 우리나라 원자로1호 「트리가 마크2」

    ◎고급원자력인력 양성 산실로/62년 첫 불로 원자력시대 개막/각종 실험 등 원전발전에 큰 몫/수명다할 10년후엔 보존·폐로 갈림길에 우리나라 최초의 연구용원자로 「트리가 마크2」가 올해로 가동 30주년을 맞았다.한국에 첫 「제3의 불」시대를 열어준 연구용 원자로 1호의 점화 30주년을 맞아 한국원자력연구소는 31일 기념학술대회와 특별전시회등 조촐한 기념행사를 벌인다.「트리가 마크2」는 19 59년 7월 이승만대통령 정부하에서 착공,62년 3월 점화돼 지금까지 원자력연구개발및 고급인력양성의 산실역할을 해왔다. 점화 당시 제원은 수조 냉각수의 나연대류로 냉각되는 수조형 소형 연구로로 20%농축 우라늄 연료봉 80개가 노심에 꽂혀 1백킬로와트의 출력을 냈다.「트리가 마크2」란 이름은 훈련(T),연구(R),동위원소 생산(I)등 이 원자로의 3대 이용목적과 건설사인 미국 제너럴 아토믹사의 첫자를 따서 붙여진 고유모델명.「트리가 마크2」의 건설에는 온나라가 절대빈곤 상태에 있던 당시로서는 엄청난 금액인 70만달러(35만달러는 미국의 무상지원)가 투입돼 정책결정자들의 강력한 원자력 개발의지를 엿보게 한다. 이같은 정책의지에 부응이라도 하듯 건설당시 과대한 규모라는 논란을 빚기도 했던 출력규모는 곧 용량한계에 이르러 69년도에는 2백50킬로와트로 출력증강을 해야했으며 72년도에는 2메가와트급의 연구로2호기를 완공,우리나라 원자력개발은 78년 최초의 원자력발전소인 고리1호기 가동을 향해 힘찬 발걸음을 계속했다. 오는 94년 완공 예정으로 대덕연구단지에 짓고있는 다목적 연구로 KMRR이 사업비 9백34억원 열출력 30메가와트(3천만킬로와트)로 1호 규모의 3백배에 이르고 전국에 가동중인 원자력발전소가 9기에 이르러 국내 총발전량의 40%를 공급하고 있는 것을 감안하면 실로 엄청난 원자력계의 발전이 있었다고 할수 있다. 초창기부터 연구로 운전에 참여했던 이창건박사(63·한국원자력연구소 연구위원)는 『무엇보다 트리가 마크2의 공로는 한국원자력계의 고급인력을 양성한데 있다』고 말한다.그에 따르면 각 대학의 원자력공학,핵물리학전공자들은 이 원자로에서 실험을 하고 훈련을 받았으며 지금까지 3천여명의 고급인력이 이곳을 거쳐나갔다.각종 원자로 재료시험,원자력 특성실험과 산업용 의학용 동위원소 생산도 공적에서 빼놓을수는 없다. 현재도 일부 원자로기초실험과 대학생 실습용으로 사용되고 있는 「연구로1호」는 앞으로 약 10년의 수명을 남겨놓고 또하나의 커다란 책무를 기다리고 있다.국내에서는 한번도 없었던 원자로폐쇄,즉 폐로기술실증의 첫경험을 제공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기 때문이다.원자력연구소 원자력연구개발단 김병구단장은 『연구로1호는 그대로 보존해 원자력박물관으로 사용하자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면서 『보존이냐 폐로냐의 문제는 현재의 서울공릉동부지사용계약이 만료되는 95년이후 부지소유주인 한전과의 협의에 달려있다』고 말했다. 공릉동 원자력병원강당과 원자력연구소서울사무소에서 각기 개최되는 학술대회와 특별전에는 우즈베크 핵물리연구소장 율다셰프박사와 미국 MIT 핵공학과의 토드레아스교수등의 특강과 30년전 원자로 초창기시절의 역사적인 문서와 사진,유물등이 전시된다.
  • 새 전기「세기와 더불어」허동찬씨의 분석(신고 김일성자서전연구:4)

    ◎김형직 우상화에 조선국민회 이용/회원명단에 포함된 사실 뒤늦게 알아/68년판 전기부터 정치·군사 투쟁가로/단체성격도 임정과 관계 없는듯이 기술 김일성은 그의 부친 김형직이 조선국민회 회원이었다는 사실을 50세가 넘도록 모르고 있었다.이 점은 부친이 조선국민회의 「지도자」였다는 대대적인 선전이 행하여지고 있는 오늘의 시점에서 보면 특기할 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김일성은 조선국민회 뿐 아니라 그것보다 더 기초적인 사항들에 대해서도 모르는 것이 많았던 인물이다.예를 하나만 들면 그는 52년 전기에서는 부친이 1928년에 36세로 사망하였다고 말하고 있다.그후 사망한 해는 26년으로 시정되었으나 사망당시의 부친의 나이는 1964년에 나온 박상혁의 「조선민족의 위대한 령도자」까지 32세로 시정된 일이 없었다.이러한 전기들에는 조선국민회 같은 것은 단 한줄도 기술되지 않았었다. 조선국민회는 1917년에 평양에서 결성된 비밀결사이다.이 결사의 회원명단에 김형직의 이름이 있는 것을 발견한 사람은 당시 일본에서 조총련의영향하에 있었던 재일사학자 강덕상교수이다. 강교수는 지금은 조총련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고 있지만 1960년대까지는 북한을 지지하고 있었다.그런 관계로 그는 60년대에 김형직과 관련된 자료들을 조총련을 통하여 북한에 보냈다. ○재일사학자 발견 그런데 이 자료를 입수한 무렵의 북한은 김일성의 유일지도체제를 세우는 와중에 있었다.그는 1967년에,해방전 보천보전투 때 이 전투를 국내에서 도운 박금철 이효순 등을 숙청하고 「당의 유일사상체계 확립」을 서두르게 되었다.당의 유일사상체계 확립이란 북한주민이 오직 김일성의 사상만으로 사고하고 그의명령지시 대로만 움직이며 과업수행 과정에서 언제나 김일성에게 충성을 바쳐야 하는 체제를 확립한다는 말이다. 김일성은 이 책동의 일환으로 1968년에 백봉이라는 가명을 쓴 저자이름의 「민족의 태양 김일성장군」을 출판하게 하였다.종전의 김일성전기와는 내용이 판이한 이 전기에서 비로소 「조선국민회」를 김형직 우상화의 도구로 이용한 것이다. 그는 이 책에서 김형직을 우상화하는데 단순히 그를 과대선전하는 정도로 만족하지 않고 역사적인 존재인 국민회 자체를 북한체제의 「정통성」에 부합되도록 그 활동내용을 뜯어 고쳐버렸다. 1917년에 실제로 평양에서 조직된 조선국민회는 1919년에 대한민국회로 개편되어 상해임시정부의 지도를 받게되는 조직이었다.이 국민회가 19년 10월에 상해임정에 보낸 규칙초안을 보면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설립목적이 있다. 「대한정을 관민상화하고 자순하며 신의 공보를 유종함을 목적으로 함」 당시의 대한국민회는 일제식민지하에서 대한이란 국호를 사용하고 관민이 서로 화합하여 자문을 주고 받는 정치를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그러나 이 단체는 동시에 신에만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기독교단체이기도 하였다.훌륭한 독립단체이기는 하였지만 한편으로는 종교결사이기도 하였던 것이다.대한민국회의 전신이 조선국민회이므로 조선국민회도 이상과 거의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한편 68년 백봉이 쓴 전기에 나오는 「조선국민회」는 그 목적을 다음과 같이 설정하고 있다. 「이조직은 우리 나라에서 과학적 마르크스­레닌주의사상이 보급되기 이전에 벌써 반제민족해방의 과업을 정확히 내세웠으며 조국독립을 달성하기 위한 방도로서 외국세력에 의거하는 것이 아니라 자주적인 힘에 의거하며 청원이나 개량의 방법이 아니라 정치적활동과 군사적 활동을 적절히 배합할 것을 내세웠다」 북한에서는 이상과같이 원래의 조선국민회나 대한국민회의 설립목적에서 신과 종교를 빼고 이 결사가 마치 무신론자의 단체인 것처럼 만들었다.또 외세의존이나 「청원이나 개량의 방법」같은 것을 부정하여 상해임정과의 연계를 끊어버렸다.이 국민회의 성원들 속에는 미국이나 재미교포와의 연계를 가지고 있었던 인물이 많았는데 이러한 연계마저 끊어서 「반제민족해방의 과업」을 수행하는 「자주적인」정치비밀결사였던 것처럼 그 목적을 바꾸어버린 것이다. 김일성은 50세 무렵까지 부친 김형직의 정치활동 중에 조선국민회원 시기가 있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그러나 이 점에 대하여 알게 된 순간부터 조선국민회의 활동을 그대로 두는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존재인 조선국민회가 설정한 목적 자체를 이상과 같이 변경하게 하였다. ○50세 넘도록 몰라 그러나 백봉의 전기가 나오는 무렵은 아직 김일성의 유일사상체계 확립책동이 초기단계에 있었다.이 때문에 북한이 설정한 목적에는 「마르크스·레닌주의사상이 보급되기 이전」시기에 국민회가 결성되었다는 설명이 붙어 있다.이것은 조선국민회는 마르크스·레닌주의 조직이 아니며 김형직도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는 의미로 보아 무방할 것이다. 또 백봉은 「이 조직은… 3·1운동 이전의 가장 큰 반일운동조직이었다」라고 하였다.3·1운동 이전의 가장 큰 반일조직은 따로 있지만 이러한 표현은 김형직이 3·1운동 이전 밖에 조선국민회에 있지 않았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백봉은 3·1운동 이후 조선국민회가 대한국민회로 발전하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이 때문에 그는 독재자인 아들의 뜻과는 정반대로 이승만이 설립한 상해임정에 김형직이 붙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조선국민회는 3·1운동 이전의 조직이라고 그 활동을 중도에서잘라버렸는지도 모른다. 하여간 「민족의 태양 김일성장군」은 김형직이 공산주의자가 아니라는 것,조선국민회에서의 그의 활동은 3·1운동 이전이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점에서 그후의 전기들과 구별되는 전기이다. 현대사자료25,강덕상론,일본 미스즈서방간,544면 「민족의 태양 김일성장군」백봉저,1968년 평양 인문과학출판사간,14면 같은책 동면
  • 21세기 한반도안보전략 새로 짰다

    ◎워싱턴,「한­미 안보협회의」 뭘 남겼나/평시작전권 환수로 자주 국방 틀 마련/“위기때는 즉각대응” 전쟁억지력 강화/북한 핵개발 저지 공조체제 가시화도 큰 성과 제24차 한미연례안보협의회의(SCM)는 ▲북한의 핵사찰 촉구를 저변에 깔고 있는 93팀스피리트훈련준비와 주한미군 2단계 철수계획 유보 ▲6공 공약사항인 평시작전통제권의 한국군에로의 이양 ▲한반도 위기시 미국이 즉각 해·공군전력을 투입하는 신속전개억제전력(FDO)개념 도입 ▲21세기를 대비한 장기적 한미군사협력방안을 마련키 위한 제도적 장치 마련등 굵직굵직한 성과들을 거둔 것으로 평가된다. 특히 양국이 북한을 겨냥,남북의 각종 교류와 대화를 최대한 존중한다는 전제아래 북한의 핵개발 저지를 위한 한미공동책을 구체적으로 가시화시켰다는 것은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남북대회 존중 또 양국이 공동성명을 통해서까지 「북한이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핵안전협정에 서명하고 동협정을 이양하며 IAEA핵사찰을 수용하겠다고 결정한 것은 한반도 평화를 위해 필요하고 유용한 일단계 조치라는데 인식을 같이했다」고 전례없이 각별한 평가를 내린 것은 주목할만한 부분이라 하겠다. 이번 SCM은 양측이 끝까지 절충을 벌여야할 핫이슈는 없었지만 한중수교·북한핵·남북대화·주한미군감축등 급변하는 한반도안보환경에 대한 한미 양국의 공동인식및 대처가 긴요하다는 점에서 내외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특히 양국이 대통령선거를 앞둔 시점이라는 정치적 전환기에 이미 구축된 안보협력관계를 공고히 다질 필요성이 대두되었고,21세기에 대비한 장기적 한미군사협력방향의 구체적 모색이 필요한 시점에 개최됨으로써 그 의미를 부여받았다. ○한국군 역할 제고 북한의 핵사찰 촉구와 핵개발 저지문제는 공동성명·양국 국방장관 단독회담·제14차 한미군사위원회회의(MCM)등 여러 곳에서 일관되게 강조되었다. 이중 「넌­워너 2단계 주한미군 감축계획은 북한의 핵개발 의혹이 해소될 때까지 계속 유보하되 핵문제 해결시에도 감축계획 재개문제는 한미간 긴밀히 협의한다」는 부분과 93팀스피리트훈련준비에 대한 합의등은 대북압력수단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평시작전통제권의 한국군 단독행사는 미국의 동아시아전략구상에서 한국군의 역할을 제고시켜 자주국방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크다.그동안 주한미군이 행사해온 평시작전통제권은 6·25직후인 50년7월14일 당시 이승만대통령의 서한으로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이 유엔군사령관에게 넘겨진 이후 42년여만의 일이다. 평시작전통제권이 「늦어도 94년말 이전」에 한국군에 이양되면 한국합참의장이 ▲평시 부대이동및 배치권한을 갖게되고 ▲팀스피리트훈련등 한미연합훈련을 한국군 주도로 실시하는등 전술적 통제권이 행사되며 ▲전시에 대비한 작전계획 수립에도 한국군 의견이 충분히 반영돼 한반도 방위는 한국군이 주도하고 미군은 이를 지원하는등 한국군 숙원인 자주국방 달성에 획기적 전환점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또 하나의 성과인 FDO의 즉각전개는 전쟁발발 이전단계라도 적의 군사적 위협이 증대되면 미 해·공군전력이 미리 전개됨으로써 적의 도발을 억제한다는 새로운 개념으로 우리측이 지난해부터미국측에 계속 강조해 왔다.이같은 FDO의 즉각전개는 한반도에서의 전쟁억제를 위한 사전조치를 한층 강화시켰다는데 의미가 있다. 21세기를 지향한 한미안보협력방안은 현재로선 윤곽없이 모호하다.다만 통일후라도 우리는 열강 사이에서 자주국방의 한계보완이 계속 절실하며,미국측으로서는 세계전략 차원에서 지역안정을 유지하고 성내에서 자신들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한국의 지원을 필요로하기 때문에 상호협력방안 모색이 제기된 것이다. 이밖에 이번 회의에서 한미연합사령부(CFC)의 장래 문제에 관한 실질적 토의는 없었으나 한반도에서 북한의 위협이 계속되는한 평시작전통제권 전환과 관계없이 CFC의 존속이 필요하다는데 인식을 함께한 것도 성과라 할 수 있다.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