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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언니콩고·아우콩고… 헷갈리는데(박갑천 칼럼)

    헷갈리게 하는 나라이름들이 있다.가령 오스트리아와 오스트레일리아.이승만 대통령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 친정은 오스트리아인데 오스트레일리아로 잘못 생각,친근미 담는답시고 「호주댁」이라지 않았던가.통일전의 남북예멘도 섞갈리게 하던 이름.국제사회에서는 우리 남북한도 더러 혼동한다. 근자에는 중앙아프리카쪽 두개의 콩고가 헛갈리게 한다.얼마전까지만 해도 「콩고공화국」과 「자이르」로서 헷갈릴게 없었다.한데 집안싸움끝에 모부투정권을 내쫓은 카빌라가 자이르대신 「콩고민주공화국」이라고 이름을 고쳤기 때문이다.더구나 자이르에 이어 콩고공화국에까지 내전의 매지구름은 번져나고 있어 신문읽는 눈을 기연가미연가하게 만든다. 이 두나라는 유역면적 세계2위라는 콩고강을 끼고 동서로 나뉜다.동쪽 옛 자이르인 콩고민주공화국이 언니콩고.면적이 2백34만여㎢이니 우리 남북한 합친 22만여㎢보다 10배가 넘는다.서쪽 콩고공화국은 면적이 34만여㎢이므로 아우콩고인 셈이다.1482년 유럽사람으로는 처음으로 포르투갈의 디에고 캄이 콩고강하류로 탐험왔을때는 콩고왕국이 다스리고 있었으니 나라경계가 그어졌을리 없는 자유로운 천지였다. 금을 긋는건 유럽세력의 실살이 부딪치면서.1880년 프랑스해군 브라자가 콩고강 서쪽으로 와서 프랑스국기를 단다.그무렵 동쪽콩고에서는 영국탐험가 스탠리가 도시(레오폴드빌:지금의 킨샤사)를 세우고 있었다.그들사이엔 영토분쟁도 일어난다.남의 안방에서의 이끗챙기기였으니 생각하자면 우습다. 1885년 콩고조약에 따라 콩고강 동쪽은 벨기에령,서쪽은 프랑스령으로 갈려있다가 1960년 독립한다.이때 국제사회는 동쪽을 옛벨기에령콩고 또는 레오폴드빌콩고,서쪽을 옛프랑스령콩고 또는 브라자빌콩고로 구별하여 부르기도.그후 71년 집권한 동콩고의 모부투대통령이 자이르로 고치면서 혼동은 없어졌다.한데 이번에 독립당시의 이름 콩고민주공화국으로 되돌아감으로써 서쪽 콩고공화국과 다시 또 헷갈리게 한다. 강자들의 땅뺏기횡포는 역사가 흘러도 퉁때를 남긴다.그들로해서 나라이름이 오락가락 알송달쏭 해지는 것 아닌가.어쨌건 현실은 구별돼야할상황.역시 자리따라 가리사니잡는게 무난할 듯 싶다.내전이 일단 끝난 콩고민주공화국을 동콩고,뒤이어 내전이 불붙은 콩고공화국을 서콩고라 부르는 식으로.〈칼럼니스트〉
  • 한국전 포로 처리문제 학술회의 민경길 교수 주제발표

    ◎미귀환 국군포로 송환 인도주의 원칙서/국제인권법상 문제로 접근땐 남북간 또다른 쟁점 야기 6·25 47주년을 맞아 「한국전쟁과 전쟁포로 처리문제」를 주제로 한 학술회의가 국방군사연구소 주최로 10일 하오 1시 전쟁기념관에서 열렸다. 다음은 민경길 육사교수가 주제 발표한 「한국전쟁 포로에 대한 송환문제」를 요약한 것이다. 한국전쟁의 미귀환 국군포로의 송환문제는 지난 53년부터 64년까지 9차례에 걸쳐 군사전전위원회에서 논의되었으나 뚜렷한 진전을 보지 못했다.그러다 94년 귀순자 조창호씨의 증언 등을 계기로 국군포로에 대한 정확한 실태조사 및 송환을 재검토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우리가 북측에 미귀환 국군포로의 송환을 요구할 경우 남북간에는 많은 법리적 문제점들이 제기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송환 거부 포로 ▲전쟁 범죄를 범한 포로 ▲자진 전향자 송환 ▲고의적 불법적 억류 포로의 송환 문제 등을 들 수 있다. 우선 송환거부 포로에 대한 문제와 관련,유엔측은 53년 7월 휴전협정이 타결되기 이전인 52년 11월에 억류포로 가운데 3만7천명을 민간인 억류자로 분류해 일방적으로 현지에서 석방했으며 휴전협정 타결 한달전인 53년 6월에는 한국정부가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반공포로 2만7천명을 석방했다. 그러나 이는 휴전협정을 통해 잠정적으로 합의되긴 했으나 쌍방의 합의가 아니어서 미귀환 국군 포로 처리 문제가 제기될 경우 뜨거운 논쟁의 대상이 될 것이다. 「전쟁범죄를 범한 포로에 대한 문제」 역시 상당한 논란 거리다.이들 포로는 전쟁범죄인으로 분류돼 사법당국에 의해 재판에 회부돼 자유형을 선고받고 복역한 후 석방됐었다. 그러나 복역을 마치고 석방된 후 「타의로」 원소속지로 송환되지 않은 사람의 경우,관련 전쟁 법규의 해석상 억류하고 있는 측에서 송환하지 않을수 있는 권리가 있는지에 대한 논란이 있을수 있다.포로의 자격 요건과 관련된 전시법령의 해석문제도 같은 맥락이다. 특히 이 문제와 관련된 국제법규들이 남북한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줄 만큼 명백하지 않다.또 이 문제를 국제인권법상의 문제로 취급할 경우 남북간에는 국가보안법 존폐문제라는 더 뜨거운 쟁점과 연결될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미귀환 국군포로의 송환문제는 국제법상의 구체적인 관련규칙보다는 기본원칙에서 출발해야 가능하다.인도주의 원칙과 상호주의 원칙이 바로 그것이다.즉 전시법규칙에 따른 포로송환의 완결이라는 차원보다는 남북화해 및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생존자 확인 및 자유의사에 따른 거주지 선택」에 중점을 두고 접근하여 나가야 한다.왜냐하면 상호주의 원칙은 이 문제의 해결에 있어서 벗어나기 힘든 중요한 기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귀환 국군포로의 송환문제는 전쟁범죄인 포로의 처리 등 한국전쟁에서의 포로와 관련된 모든 문제들과 함께 일괄적으로 처리하지 않을수 없을 것으로 예상된다.
  • 통일정책론/양영식 지음(화제의 책)

    ◎분단후 남북관계·통일문제 자료 정리 분단이후 현재까지의 통일문제와 남북관계를 방대한 현장자료를 토대로 정리.통일원 남북회담사무국 상근위원인 지은이는 이 책에서 역대정권의 통일론을 조목조목 비판한다.그는 교조주의적인 반공노선을 택했던 이승만 정부의 폐쇄적 통일론을 「십자군적 해방통일론」으로,장면 민주당시대의 백화제방식 통일논의를 수세적 소극론으로 규정한다.또 박정희 정부의 「선건설·후통일」이라는 「실력배양론」은 이승만 정권 이래의 통일회피적 노선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것이며,5·6공화국에서 현재의 문민정부에 이르기까지 한국은 북한에 대화를 구걸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지적한다.60년 4월 학생혁명세력과 87년 6월 민주항쟁세력의 통일론을 심층분석하고 있는 점도 주목할만한 대목.끝으로 지은이는 ▲보다 견실한 민주화 ▲국부 축적 ▲초당적 통일정책 추진 ▲신축적인 대북정책 전개 ▲통일전문가 양성 등을 민족통일의 조기실현을 위한 5대 조건으로 꼽는다.박영사 2만6천원.
  • 야권의 반응/“김 대통령 퇴진” 강경론 들끓어

    ◎국조권 등 투쟁수위 높이기로 30일 김영삼 대통령의 담화에 대해 야권은 온통 분노하고 규탄했다.불붙은 「화약고」가 되면서 진화할 수 있는 단계를 넘어선 형국이다.「강력한 대여투쟁」 등 외길 수순임을 선언하고 나섰다.다만 화약고가 모두 소진될 때까지냐,적정 시점에서 진화하느냐가 앞으로의 숙제다. 이날 국민회의 지도위에서는 강경론이 들끓었다.『하야한 이승만대통령의 전철을 밟지 않을까』(이종찬 부총재),『8월까지 극명투쟁을 통해 9월초까지 김대통령을 퇴진시켜야 한다』(채영석 의원) 『오늘 담화는 분쟁의 마무리가 아니라 새로운 시작』(정대철 부총재) 등이었다. 자민련 역시 격앙됐다. 국민회의측은 이런 분위기속에 「투쟁수순」을 공개했다.김대통령에 대한 직접 조사까지로 「상한선」을 높였다.국회 청문회에 세우고,국정조사권을 발동키로 방침을 정했다.특별검사제의 도입도 관철키로 했다.투쟁시한은 「92년 대선자금」전모가 드러날 때까지임을 거듭 확인했다. 야권은 김대통령에 대한 「하야론」도 제기하고 있다.자민련 김종필 총재는 『하야를 해도 헌정중단은 아니다』고 못박았다.심양섭 부대변인은 『국민 각계 각층에서 분출한 퇴진론의 향배를 예의주시할 것』이라고 논평했다. 야당은 다음달 2일 양당 「8인공동위」에서 투쟁방향을 논의한다.「강경투쟁」에서 「전면투쟁」내지 「극한투쟁」으로 수위를 높이게 될지 아직은 미지수다.현재로서는 여론을 예의주시하며 강도를 조절하겠다는 전략이다. 하지만 극한투쟁을 놓고 야권도 속셈이 복잡하다.김대통령을 국회 청문회에 세우고,하야시키고 하는 것등의 투쟁방식에 대한 회의론도 만만치 않다.김대통령을 사지로 보내는 것보다 무력화의 단계로 몰아가는 전략이 더 효율적이라는 판단에서다.
  • 한국의 도전과 선택/김호진 외(화제의 책)

    ◎전문학자 46명이 쓴 21C 국가경영론 정치·경제·사회 등 각 분야 전문학자 46명이 쓴 21세기 국가경영론.21세기 한국의 국가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정부의 구조를 축소지향적으로 개편하고 정부를 기능적으로 재조정,주민참여를 골간으로 하는 자치원리를 효율적으로 가동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또 부패문화를 청산하고 공직윤리를 확립해야 하며,행정도 최소비용으로 최대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업형 행정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견해도 밝힌다. 이 책은 역대 국가 지도자의 리더십 특성을 분석하고 21세기에 걸맞는 지도자상을 모색한다.이승만 초대 대통령은 가부장적 권위형,장면 총리는 민주적 표류형,박정희 대통령은 교조적 기업가형,전두환 대통령은 저돌적 해결사형,노태우 대통령은 소극적 상황적응형,김영삼 대통령은 공격적 승부사형이라는 것.21세기의 바람직한 국가 지도자상은 정치·행정개혁,국부축적,국민복지,통일실현,부패척결,국가경쟁력 강화 등의 정책과제를 동시에 실현할 수 있는 「기능적 통합형」 인물이어야 한다는게 이 책의 결론이다.나남출판 2만8천원.
  • 국사편찬위,48∼87년 역사 「자료 대한민국사」로 정리

    ◎건국이후 현대사 첫 공식 편찬사업/각종 공·사문서­신문자료·회고록·증언 망라/주관 개입막게 원문 수록… 편년체방식 채택 정부출범 반세기만에 정부의 공식문서는 물론 모든 현대사의 사료를 망라하는 역사편찬 사업이 시작된다. 국사편찬위원회는 올해부터 오는 2020년까지 1948년 8월 정부출범부터 87년 12월 제5공화국시기까지 40여년의 역사를 정리하는 「자료 대한민국사」 편찬작업을 시작한다고 밝혔다. 이는 지난 68∼74년에 편찬된 「자료 대한민국사」의 작업을 23년만에 계승 발전시킨 것이다.기존의 「자료…」는 1945년 8월부터 1948년 8월까지의 사료를 정리한 것으로 대한민국정부 출범이전 미군정기만을 다루고 있다. 따라서 이번 「자료…」는 건국이후 역사에 대한 정부의 첫 공식 편찬사업이라 할 수 있다. 「자료…」에는 건국이후 대한민국의 역사와 발전과정을 당시 국내외에서 만들어진 각종 공·사문서와 기록,신문자료,회고록,증언 등이 광범위하게 수집 정리된다.주관적인 입장이 개입되는 것을 막기 위해 수집된 원자료는 아무런 해석없이 그래로 수록한다. 특히 원자료를 날자별로 수록하는 편년체적인 편찬방식을 채택했다.편년체적 기술방식은 조선실록의 편찬방식과 같은 방식으로 가장 객관적인 역사기술 방식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를 위해 국사편찬위원회는 국제·외교·정치·경제·사회·문화 등 각 분야의 정부 공식 기록이외에 퇴직한 공직자의 개인소장 기록과 미국 정부 보존자료,흩어진 각 정부부처 및 정보기관의 자료도 가능한 한 최대한 수집할 예정이다. 올해부터 2020년까지 5단계로 나누어 간행할 예정으로 우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1948년8월∼50년6월까지의 사료를 정리해 2000년에 8권으로 출간할 예정이다.우선 총무처 정부기록보존소에 보관돼 있는 국가 공식 행정문서가 1960년 이후에야 제대로 갖추어져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60년 이전의 사료편찬은 현재 살아있는 정부 인사의 증언이나 유족들이 보관하고 있는 자료가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초대 이승만 대통령의 경우 현대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미국정부와 주고받았던 각종 서신이 현재 이화장에 보관되어 있어 열람이 쉽지 않다.또 60년 이후라 할 지라도 정부의 모든 영구·준영구 문서가 정부기록보존소에 제대로 이관되지 않고 각 기관에 산재돼 있는 실정이다. 「자료…」 편찬작업의 실무책임자인 국사편찬위원회 이상근 근현대사실장은 『기초조사결과 문서보존기간에 대한 편의적 분류때문에 중요문서가 폐기되거나 국가정책결정과정에 참여했던 주요 인사들이 그에 관련된 문서를 자의적으로 폐기하거나 빼돌린 경우가 많은 것 같다』며 앞으로 예상되는 편찬작업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 금도끼 은도끼(외언내언)

    『나는 이 배를 ○○○호로 명명하나니 이 배와 승무원 모두에게 신의 축복과 가호가 깃드소서』 새로 지은 배를 선주에게 인도하기 직전에 그 이름을 짓는 명명식에서는 전통적으로 선주측의 여성이 나와 이런 축문을 낭독한 뒤 금도끼나 은도끼로 테이프를 자른다.명명자는 그 배의 대모가 된다. 도끼는 대모가 보관한다.국내에서는 한진해운 조수호 사장의 부인 최은영씨가 20개가 넘는 금도끼와 은도끼를 갖고 있다.가족들이 명명해 온 회사의 전통에 따라 행사를 도맡은 덕분이다.조중훈 한진그룹 회장의 부인 김정일씨가 7개,조회장의 외동딸 현숙씨가 5개,조양호 한진그룹 부회장의 부인 이명희씨가 3개 등 조회장의 부인과 딸·며느리들이 모두 40여개 금도끼와 은도끼를 갖고 있다.기네스북에 오를만한 기록이다. 반면 해운업계의 라이벌인 현대상선은 대부분 재계와 관계의 고위직 인사의 부인을 명명자로 선정한다.역대 해운항만청장의 부인들이 단골 멤버이고 전경련 등 재계 인사와 통상산업부장관의 부인 등이 고루 참여했다. 역대 대통령 부인들도대부분 선박의 대모가 됐다.초대 이승만 대통령의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를 제외하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부인 육영수 여사부터 현 김영삼 대통령의 부인 손명순여사에 이르는 퍼스트레이디들이 그들이다. 90∼95%의 순도를 지닌 은도끼는 10여년 전부터 금도끼를 대신하는 추세다.도금 제품임에도 금도끼는 50만∼1백만원인 은도끼보다 훨씬 비싼탓이다.조선업계와 해운업계의 불황 때문에 이런 절약풍조는 더욱 강화되고 있다. 조선소에서 후판을 설계도면대로 처음 자를때 조선소 대표와 선주가 참석해 갖는 강재 절단식과 건물의 상량식에 해당하는 용골 거치식도 간소해지거나 없어지고 있다.재래식 고사로 때우는 사례도 허다하다.멋있고 이국적인 행사가 돈 때문에 간소해지는 것을 아쉬워하는 사람도 있을 법 하다.
  • 굽힘없는 소신파… “역사 곧게” 경사 아호/이 대표는 누구인가

    ◎대법관시절엔 소수의견 많이내 유명/「현직검사 구속1호」 이홍규옹이 부친 신임 이회창 대표의 별명은 「대쪽」이다.아호는 경사(역사를 곧게 한다는 의미).강직과 불굴,지조,소신 등이 연상된다. 그의 강직한 이미지는 정치인으로서 상품가치도 크게 높여 대선경쟁에서 그를 흔들리지 않는 여권의 유력주자로 버티게 하는 힘이 돼 왔다. 황해도 서흥출신으로 지난 81년 최연소 대법관에 임명,86년까지 재직하면서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 46건중 16건의 주심을 맡아 이 가운데 10여건에 대해 소수의견을 내놓았다. 그의 집안은 충청도의 소문난 명문가다.광주지검장을 지낸 아버지 이홍규옹(93)은 몇년전까지만 해도 맨손으로 철봉운동을 할 정도로 자기관리가 엄격했다.특히 이옹은 검사시절 강직한 성품으로 이승만정권 초기 정권의 미움을 사 「현직검사 구속 1호」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큰 아버지 이태규 박사(92년 작고)는 우리나라 자연과학계의 태두다. 이대표는 지난 4·11총선을 앞두고 정치에 입문한 이후 철저한 외부 보안속에 자기 사람 만들기작업을 해왔다.자신이 직접 맨투맨식으로 각계각층의 인사를 접촉하는 스타일이라 드러나지 않은 지지자가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드러난 인사들만해도 후원회 발기인 명단 18명중 회장인 정재석 전 부총리를 비롯해 김두희 전 법무·윤동윤 전 체신·김시중 전 과기처·황영하 전 총무처 장관 등 장관출신만 5명에 달한다. 원내에서는 서상목 백남치 황우여 의원 정도가 드러내놓고 「이대표맨」을 자처하고 있다.강용식 김덕 김영일 박성범 신영균 안상수 의원 등도 이대표 진영에 가까운 인사들로 꼽힌다. 이대표의 대선캠프는 수송동 이마빌딩에 차려져 있다.유경현 전 평통사무총장,안동일 변호사,이흥주 삼성고문,진경탁 전 의원,진영 변호사 등이 특보단을 구성,경선전략 등을 가다듬고 있다.캠프관리는 중앙일보 편집국장출신의 고흥길 비서실장이 맡고 있다.이들이 중심이 된 참모회의에서는 최근 당내 경선 규정에 대비해 미국식 예비선거제도 반대,결선투표제 도입,대의원수 증대 등의 기본 원칙을 가다듬었고 오는 4월 대규모 추대위 발족 방침을 결정하기도 했다.학계에선 안병만 외대총장과 방석현 서울대 교수 등이 가깝다.
  • 김구와 황장엽(김호준 정치평론)

    1948년4월19일 김구는 역사적인 남북협상의 장도에 올랐다. 이날 경교장에는 이른 아침부터 많은 군중들이 모여 그의 북행길을 막았다. 『못가십니다. 가시면 공산당 놈들에게 붙들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합니다. 생명이 위험합니다』 군중들은 함성을 지르며 발을 굴렀다. 김구의 신변안전이 염려돼 평양행 중지를 호소하는 것이었다. 그가 탈 자동차가 떠나지 못하도록 땅에 드러누운 청년도 있었다. 『여러분! 38선이 굳어지면 민족의 앞날이 불행합니다. 내 나이 일흔셋이니 살만큼 살았소. 민족을 위한 일이라면 주저할 것이 없소. 어서 길을 열어 민족의 운명을 타개할 수 있도록 해주시오』 경교장 베란다에서 군중 해산을 호소하는 김구의 눈은 충혈돼 있었다. 48년초 한반도는 미소의 치열한 각축속에 남북분단의 고착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김구의 북행은 남북에 각기 단독정부가 들어서는 것을 막고 남북총선을 통해 통일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정치협상이 목적이었다. 그러나 협상상대인 김일성 김두봉 등 북의 공산주의자들도 남의 이승만과 마찬가지로이미 단독정부 구성을 추진중이어서 김구의 북행은 실패로 끝나고 16일만에 서울로 귀환한다. 김구는 북행 두달전에 발표한 저 유명한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이라는 장문의 성명에서 피를 토하듯 통일조국의 건설을 위해 신명을 바칠 각오를 밝힌다.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않겠다』는 그의 절규 속에는 확실히 한국민족주의의 고귀한 이상이 담겨 있다. ○통일정부 수립위해 북행 그로부터 꼭 29년후 북한 주체사상의 설계사 황장엽이 남행을 결행했다. 그는 자신의 망명동기에 대해 『우리 민족을 불행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한 문제를 …북을 떠나 남의 인사들과 협의해 보기로 결심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올해 74세의 황장엽은 자기 발로 걸어 들어온 북경주재 한국대사관에서 쓴 자술서에서 『나의 여생은 얼마 남지 않았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남과 북의 화해와 통일에 도움을 주고 싶다』고 술회했다. 김구의 북행과 황장엽의 남행은 동기면에서많은 유사성이 발견된다. 그 유사성은 「민족」 「통일」 「여생」의 세 단어로 압축할 수 있을 것 같다. 황장엽의 경우 민족진영의 거두 김구처럼 대표성도 없고 그를 기다리는 협상테이블도 없다. 그럼에도 자신의 망명동기를 거창하게 『민족문제 협의』라고 밝힌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의 망명은 현실도피라기 보다 민족문제에 대한 도전으로 보아야 한다. 우리는 그의 망명에서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평범한 진리에 다시 눈을 뜨고 북한동포의 아픔을 우리 자신의 아픔으로 여기는 각성을 가져야 한다. 북한주민의 굶주림에는 관심이 없이 시위만 벌이는 남한사회에 대해 그는 『이해하기 어렵다』고 힐난했다. 그의 이 원망(?)은 따지고 보면 민족주의와 동의어인 동포애의 갈구다. 황장엽을 김구에 비교하는 것에 불쾌감을 나타낼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공산주의에 붙어 호의호식하던 어용학자를 감히 민족해방과 조국독립에 평생을 바친 큰 지도자와 같은 반열에 올려놓다니 가당치 않은 일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의 망명이 김구가 생전에 그토록 목말라했던 민족주의, 남북의 대결정책에 짓눌려서 꺼져만가는 그 민족주의의 불꽃을 다시 활활 타오르게 하는 전기가 될 수 있다면 저 세상의 김구도 싫지만은 않을 것이다. ○민족주의 불꽃 다시 지피자 김일성·김정일체제의 사상적 기저를 제공해온 북한 제1의 이론가 황장엽은 자신의 망명이 『고민하고 또 고민한 끝』에 결행된 것이라고 토로했다. 무엇이 그를 그토록 고민하게 만들었으며 그가 협의코자 하는 민족문제의 타개책은 무엇인지 우리는 진지하게 들어보아야 할 것이다. 황장엽은 한반도에 두개의 주권국가가 존재하는 남북간의 국가연합이 북한이 갖고 있는 통일정책의 기본이며 통일의 최종단계라고 밝힌바 있다. 그러나 이번 망명전에 작성했다는 이른바 「귀순결심 서신」에서는 남한을 주체로 한 통일론을 강력히 시사했다. 우리는 그의 통일론이 왜 바뀌었는지를 규명해야 할 것이다. 또 진정한 통일의 길이 무엇인지에 관해 허심탄회하게 토론해야 한다. 그의 망명을 우발적 사건으로 넘겨서는 안된다. 북을 자극하거나 정치적 목적에이용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통일문제를 민족적 토대에서 새롭게 접근하고 해결하는 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김구는 『마음속의 38선이 무너져야 땅위의 38선도 철폐될 수 있다』고 설파했다. 또 공산주의자도 껍질을 벗기면 같은 피를 가진 한 민족임을 일깨우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황장엽의 망명이 김구의 바다같은 민족주의를 오늘에 다시 살리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논설위원실장〉
  • 공익정론 외길 초일류 고급지로(서울신문 51년)

    □45년∼84년 ·항일지 「대한매일신보」 뿌리로 ·54년 소설 「자유부인」장안 선풍 ·56년 언론사상 첫 한글판 제작 □85년∼현재 ·CTS 첫 도입 등 언론사에 큰 획 ·서울신문,스포츠서울 뉴스넷 개통 ·96년 10월 전면가로쓰기 단행 서울신문은 해방공간의 어지러운 상황이 한창 전개되던 1945년 11월22일 태어났다. 서울신문 탄생은 당시 언론계는 물론 정치·사회·문화계로부터 비상한 관심을 모은 하나의 사건이었다.일제 총독부 기관지 역할을 한 매일신보의 인쇄시설과 건물 등을 고스란히 물려받아 신문발행에 절대적으로 유리한 조건을 갖춘데다 이제야 비로소 민족의 기대와 염원을 담아낼만한 권위있고 책임있는 언론기관이 등장한다는 점 때문이었다. 서울신문은 이와 함께 창간호를 1호가 아닌 제13738호로 시작했다.이는 새 시대를 맞은 해방조선의 대변기관을 자임하는 동시에 1904년에서 한일합방까지 지령 1461호를 기록한 대한매일신보와 이후 1945년 11월10일자(13737호)를 끝으로 미군정청으로부터 정간처분을 받은 매일신보의 전통을잇는다는 정통성의 표현이었다. 창간 이래 3년 가까운 기간 중립지 노선을 고수해온 서울신문은 그러나 국토가 분단되고 공산화 위협이 거세지자 반공지로 변신한다.직접적인 계기는 1949년 5월3일 공보처가 내린 발행정지 처분이었다.이유는 반정부기사를 많이 싣는다는 것이었다.그러나 이후에도 각종 현안이나 이승만정부에 대한 건설적 비판논조는 계속 이어갔으며 미군철수안·여순반란사건·국가보안법 문제 등에서 비교적 온건하고 균형있는 입장을 견지했다. 한국전 발발은 서울신문에도 큰 시련이었다.기자 1명을 포함한 사원 8명이 목숨을 잃었고 시설 일부가 두차례나 파괴·해체당했으며,고단한 부산 피난시절을 감당해야 했다.그러나 서울신문은 멈추지 않았다.51년 4월6일에는 서울수복후 첫 진중신문을 발행,「우리는 돌아왔다」는 사설을 게재함으로써 서울시민들을 감격에 젖게 했다. 6·25전란은 한편으로 서울신문에 대한 정부의 통제를 강화시키는 계기가 됐다.이는 자유당 발족을 전후해 통치기반의 공고화를 꾀했던 이승만정부의 구상에 의한 것이었다.하지만 이같은 상황에서도 서울신문은 정치부문에선 친정부적 성격을 분명히 하면서도 기타 문제에 있어서는 시시비비를 엄정하게 가리는 절묘한 균형을 취했다. 한편 50년대초 반공포로 석방·휴전협정 조인·한일회담 결렬 등 역사적 사건들이 쉼없이 전개되는 속에서도 서울신문은 사회적으로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사상초유의 인기와 시비를 몰고 왔던 소설 「자유부인」의 연재가 그것이다.54년 1월1일부터 그해 8월6일까지 모두 215회에 걸쳐 연재된 「자유부인」은 시대상을 적나라하게 묘사함으로써 독자들에게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6·25의 상처가 채 아물지 않은때 전후의 퇴폐적 분위기에 휩쓸려 허영과 향락으로 치닫는 여성을 묘사한 이 소설은 장안에 숱한 화제를 낳으며 소설의 윤리성과 창작의 자유에 관한 논쟁을 불러 일으키기도 했다. 1960년 4·19혁명은 서울신문에게 시련과 희망을 동시에 안겨주었다.4·19 그날 시위군중에 의해 사옥이 불타는 수난을 당한 반면,곧이어 출범한 제2공화국 하에서 서울신문은 「불편부당과 엄정중립」을 다시 표방할 수 있는 기회를 맞게 된다.그러나 새출발의 기쁨도 잠깐,극심한 경영난으로 서울신문은 61년 5월9일부터 무기한 휴간에 들어갔다. 5·16 쿠데타는 서울신문에게 재기의 길을 열어주었다.7개월째 발행되지 못하던 서울신문이 집권층의 후원과 재벌들의 호의적 반응으로 그해 12월21일 속간된 것이다.이때부터 서울신문은 비약적인 사세신장을 이루었으나 한편으로는 5·16 군사정부와 뒤이은 제3·제4공화국의 입장을 대변하는 길을 걷게 된다.특히 72년 10월 유신으로 빚어진 전환기에서 서울신문은 친정부적 성격을 굳히게 된다.서울신문의 성격상 당시로선 어쩔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서울신문은 창간 30주년인 75년을 기점으로 사세중흥기를 맞게 된다.고속 오프셋 윤전기의 가동으로 신문발행의 전환기를 마련했고 ▲지령 1만호 기념 만호장학금 신설 ▲의료보험제 도입 ▲급여인상 등 사원복지를 크게 향상시켰다. 5공 출범한 81년은 서울신문으로선 새롭게 내실을 다지는 원년이 됐다.대중문화에 대한 욕구를 해소할 길이 없던 청소년층을 위해 「TV가이드」를 창간,대중문화를 선도했는가 하면 「예술과 비평」을 선보여 고급문화를 추구하는 독자들을 만족시켰다.바야흐로 종합언론사로서의 면모를 갖춰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서울신문은 이와 함께 국내 최고 종합일간지다운 면모를 다지고자 새 사옥 마련에 나섰다.82년 1월1일 태평로를 떠나 을지로 임시사옥으로 이사한 뒤 3년여에 걸친 대역사끝에 새 사옥을 마련한 것. 85년 1월1일 준공된 서울신문·프레스센터 사옥은 한국언론 제2세기의 개막을 알리는 전조였다.이때부터 서울신문은 쾌적한 환경에 최첨단 시설을 갖춘 「한국언론의 메카」로 자리잡았다.특히 이 시기에 도입된 CTS 제작시설은 신문발행사에 한 획을 긋는 역사적인 사건으로 기록됐다.국내 신문사로는 최초로 CTS를 도입한 서울신문은 다른 신문사들의 부러움을 한껏 즐기며 신문제작 역사에 뚜렷한 이정표를 남겼다. 서울신문의 비약적 발전을 위한 사건은 또 있었다.그해 6월23일 「스포츠서울」의 탄생이 그것이다.86 아시안게임과 88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보다많은 스포츠 정보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켜 주고자 창간한 「스포츠서울」은 30분만에 창간호 가판이 완전매진되는 등 새로운 신화를 창조하면서 지금까지 정상의 스포츠·연예·오락 전문지로 군림하고 있다. 스포츠·연예·오락전문지 「스포츠서울」,시사주간지 「뉴스피플」,대중문화 전문주간지 「TV가이드」,여성월간지 「퀸」등을 자매지로 둔 서울신문은 이제 또한번의 도약의 발판을 마련했다.증자를 통한 5세대 CTS와 최첨단 윤전기의 도입을 마무리한데 이어 「서울신문·스포츠서울 뉴스넷」이 1일 접속횟수 1백만을 돌파함으로써 전자신문계의 신기원을 이룩한 것이다.21세기에 진정한 정론지로서 독자들을 찾아갈 서울신문의 밝은 미래는 이미 시작됐다. □약사 1945년 △11.22 서울신문 창간 1946년 △3.1 제1회 「3·1기념 서울·인천간 왕복마라톤 경기대회」개최(77년 32회까지 존속) 1948년 △10.18 시사지 「주간 서울」 창간 1951년 △3.8 전란으로 휴간 △6.9 피란지 부산에서 서울 복귀 1953년 △8.16 첫 견습기자 공채 실시 △9.1 어린이신문 「주간소년서울」 창간 1954년 △1.1∼8.6 소설 「자유부인」연재 1956년 △10.18 언론사상 첫 한글판 제작 1958년 △10.1 신문사상 처음으로 조석간 발행 1960년 △4.19 시위군중에 의해 사옥 전소 △4.26 휴간 △6.27 속간 1961년 △5.9 경영난으로 휴간 △12.21 속간 1962년 △8.13 석간으로 전환 1966년 △2.9 한국 최초로 1백만원 고료 장편소설 당선작 시상 1968년 △9.22 대중 주간지 「선데이 서울」 창간 △11.22 전 지면에 걸쳐 한글전용 단행 1975년 △3.30 「주간 스포츠」 창간 △11·2 「주간 소년서울」 폐간 1978년 △10.5 보관자료 마이크로필름화 1981년 △7.18 청소년 주간지 「TV가이드」창간 1982년 △1.1 을지로 임시사옥으로 이전 1985년 △1.1 언론사상 처음으로 CTS 도입,태평로 신사옥 입주 △6.23 스포츠 전문지 일간 「스포츠 서울」 창간호 발행 1989년 △9.23∼10.18 파업 1990년 △6.23 여성월간지 「퀸」창간 1991년 △7.31 구로공장 준공 △12.31 「선데이 서울」폐간 1992년 △1.5 자매지 주간 「피플」창간 △7.3 대구인쇄본부 준공 △12.25 「피플」,「뉴스피플」로 제호 변경 1994년 △2.18 「깨끗한 산하지키기 운동본부」발족 1995년 △11.22 서울신문·스포츠서울 뉴스넷 개통 1996년 △1.29 서울신문·스포츠서울 뉴스넷 국내 첫 동화상 속보체제 시작 △10.1 전면 가로쓰기 단행
  • 「백범암살 진실」 영구 미제 가능성/안두희 피살과 배후규명 노력

    ◎당사자 통한 진실규명 불가/「참회록」 존재여부 관심 집중 백범 김구 선생의 암살범 안두희씨의 피살로 백범 암살의 진실을 당사자의 입을 통해 확인할 길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자칫 영구 미궁에 빠질 가능성도 커졌다. 안씨는 지난 49년 6월 범행 이후 지금까지 암살 동기 및 배후에 대해 한번도 속시원하게 털어놓은 적이 없었다.단독범행이라는 말만 되풀이해왔다. 진실 규명작업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60년 4·19 혁명 직후부터였다.「김구 선생 살해 진상규명 투쟁위원회」가 구성되면서 안씨를 집요하게 추궁했으나 끝내 안씨는 입을 열지 않았다. 한동안 세인의 관심에서 멀어졌던 안씨는 87년 권중희씨에게 각목폭행을 당하면서 조금씩 말문을 열기 시작했다. 91년 처음으로 미국 중앙정보부(CIA)의 전신인 OSS를 배후로 거론했으며,92년 4월12일에는 김창용 특무대장이 4∼5차례에 걸쳐 자신에게 암살지시를 했다고 「증언」했다. 92년 9월에는 권씨에게 붙잡힌 상태에서 『범행 6일전 경무대에서 이승만 대통령과 신성모 국방장관,채병덕육군참모총장 등을 만났다』고 말해 당시 권력 핵심부의 배후관련성을 시사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안씨는 『권씨 등의 강요에 의해 자백한 것』이라고 곧바로 부인해 의문만 증폭시켰다.94년 국회 백범 암살진상규명위원회에서도 단독범행이라는 기존의 주장을 되풀이했다. 이제 진실은 92년 그가 쓰겠다고 약속했던 「참회록」의 존재 가능성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안씨의 유품에서 참회록이 발견되지 않는다면 백범암살의 진상규명은 역사가들의 몫으로 남겨지게 된다.〈김태균 기자〉 ◎피살 안두희는 누구인가/백범 저격… 47년간 은둔생활/암살죄로 15년형… 6‘25때 사면·군복귀/한때 군납공장 운영… 강원 제2갑부로/4·19후 「응징」 두려워 개명후 자취감춰/87∼88년 권중희씨에 수차례 납치·피습/94년 국회 증언… 암살 배후인물 안밝혀 백범 김구 선생을 지난 49년 6월 26일 경교장에서 4발의 총탄으로 저격,암살했던 안두희씨는 범행후 47년 동안 은둔과 잠행속에 살아왔다. 범행 당시 32세의 포병장교였던 안씨는 평생을 「백범 시해범」이라는 꼬리표를 단채,세상에서 자신의 존재를 숨기는데 전전긍긍했다. 안씨는 백범 시해 직후 징역 15년형을 언도받고 복역하던 중 6·25가 터지면서 당시의 실세였던 김창용 특무대장의 비호로 형집행정지처분을 받아 포병장교로 복귀했으나 전투도중 부상당해 51년 군복을 벗었다.56년 옛 동료장교들의 도움으로 강원도 양구에 군납공장을 지어 군대 부식을 공급하면서 부를 쌓았다.한때 강원도에서 두번째로 세금을 많이 낼 정도였다. 그러나 얼마후 터진 4·19혁명은 그가 진정한 죄과를 치르게 되는 계기가 됐다.혁명 직후 「김구 선생 살해진상규명 투쟁위원회」가 발족되면서 본격적으로 쫓기는 신세가 됐다.공장 문도 닫고 처 박모씨와 3남2녀의 자녀들을 데리고 「안영준」 등 가명을 써가면서 종로구 명륜동,동대문구 신설동,강원도 양구 등지로 도망다녔다. 안씨를 「응징」하려는 추적자들의 노력도 집요했다.65년 곽태영씨로부터 칼로 두군데나 목을 찔린 뒤 극적으로 살아나는 등 피습이 이어졌다.여러차례 이민을 시도했으나 법무부로부터 출국자 블랙리스트에 올라 실패했다.장성한 자녀들은 주위의 따가운 눈총을 견디다 못해 70년대 말 모두 미국으로 이주했다.부인 박씨도 합의이혼하고 자녀들의 뒤를 따랐다. 86년 김명희씨(63)와 재혼하는 등 은둔에 「성공」,편안한 삶을 살아오던 그가 다시 세인의 관심을 끌게 된 것은 87년 3월 27일 집요하게 그를 추적해온 권중희씨의 피습을 받으면서부터였다. 권씨와의 질긴 악연은 이때부터 이어져 88년 2월,92년 2월과 4월·9월 등 여러 차례에 걸쳐 권씨로부터 납치 및 구타를 당했다. 말년에는 언론사의 인터뷰에도 응하고 94년엔 국회 법사위에서 병상에 누운채 증언하는 등 약간씩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다.하지만 백범 시해가 자신의 단독범행이라고 주장하는 점은 한결같았다.〈김태균 기자〉 □안두희씨 피습일지 ▲87년 3월27일=권중희씨,서울 마포구청 버스정류장에서 각목으로 안씨의 머리 구타. ▲88년 2월=권씨 등 3명,인천 집에서 안씨를 나무 막대로 구타. ▲92년 2월28일=권씨 등,백범묘소에서 안씨를 각목으로 폭행. ▲92년 4월12일=권씨 등,안씨 집으로 찾아가 안씨 구타. ▲92년 9월23일=권씨 등 4명,안씨를 경기 가평군 농장으로 납치,구타.
  • 여의도 광장(외언내언)

    『안군의 고국방문 비행을 손꼽아 고대하던 30만의 경성부 인민은…여의도 넓은 벌판을 향하였는데…구름같이 모여드는 그 수효가 무려 5만에 달하여 광막한 여의도 벌판에는 사람으로 바다를 이루게 되었다』우리나라 최초의 비행사 안창남씨가 1922년 12월10일 여의도에서 첫 비행시범을 보였던 날의 같은날자 동아일보 기사의 일부다. 여의도가 비행장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지 않다.그러나 실은 김포공항이 개항한 60년2월까지 여의도는 서울의 관문이었다.광복 사흘후인 45년 8월18일 상해 임시정부의 이범석 장준하 김준엽 등 광복군을 태운 C47 수송기가 내린 곳도 여의도였고 초대 대통령이 된 이승만이 미군특별기 편으로 첫 환국한 곳도 여의도였다. 비만 오면 물에 잠기던 여의도가 본격 개발되기 시작한 것이 68년.소양강댐이 들어서며 한강의 홍수위가 낮아지게 됐기 때문.옛 활주로 자리에 「5·16광장」이 들어선 것이 71년의 일이다.유신시대의 종막과 함께 이름이 여의도광장으로 바뀌었지만 북경의 천안문광장,모스크바의 붉은광장보다 넓은 이 광장은 한동안 한국민의 자부심이기도 했다.11만4천여평에 이르는 광대한 이 광장에서는 국군의 날 행사를 비롯해 대규모행사가 모두 열렸고 공휴일이면 평균 5만여 시민이 나와 자전거와 롤러스케이트를 즐기는 휴식공간. 그런데 이 광장을 녹지공간으로 바꿔보려는 계획을 서울시가 내놓았다.여의도광장이 그저 「너른 빈터」로 그 크기에 비해 효용성이 떨어진다는 일부의 비판에 따른 대안이다.시는 94년 이곳에 1백층짜리 쌍둥이빌딩을 세우고 지하에 대규모 문화·스포츠·레저공간을 만드는 「꿈의 여의도」를 계획했다가 반대여론에 부딪친 일이 있다.지나친 개발은 여의도를 오히려 망칠수도 있다는 것이 반대의 골자.그대로 두자는 쪽도 만만치않다. 그러나 대체적인 여론은 바꿔보자는 쪽인것 같다.시대의 변천을 실감한다.
  • 김부자 찬양…「충성 맹세문」까지/8개 한총련사무실 압수품을 보면

    ◎북 동조 유인물 무더기로 나와/남한정권 비난… 북 비판은 없어 한총련의 친북 이적성은 경찰이 지난 17일 전국 8개 한총련 사무실에서 압수한 증거물품을 분석한 결과 여실히 입증됐다. 김일성 부자를 찬양하는 등 북한의 전략전술을 그대로 따르고 있어 충격적이다.북한체제에 대한 비판을 찾아볼 수 없다. 특히 「수령님을 모시는 입장과 자세」란 제목의 유인물을 비롯,「나는 수령님께 무한히 충직한 수령님의 전사이다」라는 문구 등이 적힌 맹세문까지 발견돼 한총련의 이적성이 한계를 넘어섰음을 알 수 있다. 한총련산하 강총련(강원지역 총학생회연합)의 경우 4기 통일선봉대 자료집을 통해 자신들이 지향하는 통일은 연방제통일이고 한국과 미국이 결코 평화와 통일을 바라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등 북한의 노선에 동조하는 논조를 그대로 폄으로써 이적단체임을 스스로 노출시켰다. 이밖에 본부 사무실 등에 김일성이 직접 제기,북한이 93년4월 최고인민회의 제9기 5차 회의에서 채택한 것으로 알려진 「조국통일을 위한 전민족 대단결 10대 강령」을 베껴 쓴 대자보와 북한을 찬양하고 남한의 현정권을 비난하는 수많은 유인물이 나왔다.조선대에서는 김일성 부자가 나란히 서있는 대형 사진이 나와 사진의 사용목적을 가늠케 해준다. 「한국전쟁」이라는 5부작 2백50분짜리 비디오테이프는 해방후 한반도가 미국에 분단되면서 이승만정권이 미국의 배후조종으로 남한권력을 장악한 것으로 묘사했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수령님을 마음속으로부터 높이 우러러 모시고 수령님을 위하여 모든 것을 다 바치는 끝없이 깨끗하고 뜨거운 충성심을 깊이 간직해야 합니다』라는 맹세문도 나왔다.맹목적인 충성을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경찰은 이번에 압수한 물품은 학원가의 좌익 폭력세력을 검거해 유죄를 입증시키는데 결정적인 증거가 될 것이라며 압수품에 대한 정밀분석작업을 진행하고 있다고 밝혔다.
  • 국내전문가 미 문서관리국 발굴자료 공개

    ◎대전 피란 이승만 정부/개전초 전황파악 “캄캄”/신성모 국방,대통령에 거짓보고 일관/북 동포 걱정하며 오히려 “북진” 큰 소리 이승만 정부는 6·25발발 3일만에 대전으로 수도를 옮기고도 전쟁진행상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으로 밝혀졌다. 양태진 동아시아영토문제연구소장이 미국립공문서보존관리국(내셔널 어카이브)에서 발굴,23일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1950년 7월초 전선에서 국군이 북한군에게 대패,후퇴를 거듭하는 데도 신성모 국방장관은 이승만 대통령에게 전세가 호전된다는 거짓보고를 한 것으로 드러났다. 신장관은 7월3일자로 된 「제4차 보고서」에서 식량문제에 언급,『대전에 한하여는 아직 넉넉히 지내며 앞으로 서울이나 이북동포의 식량을 생각하여 다량을 확보하자고 농림부장관에 말했다』라고 보고했다.이는 전황이 매우 불리한 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이북동포의 식량을 걱정함으로써 마치 국군이 곧 북진할 것처럼 호도한 것으로 풀이된다. 이어 7월5일자 「제6차 보고서」에서는 『어제(7월4일) 상오 11시부터 강력한 적이 10여대의 탱크를 앞세우고 영등포에서 안양·시흥·수원 도로로 침입했으나 국군은 수원시내에서 적군과 혼전을 하고 있다』고 믿기지 않는 전과를 내세웠다. 당시 정부는 개전 3일만에 대전으로 임시수도를 옮긴 상태였으며,신장관의 보고서가 나온 지 10여일 뒤인 7월16일에는 다시 대구로 이전해야만 했다.〈연합〉
  • “역사는 시대적 삶의 기록”/공판서 본 전씨 역사관

    ◎이승만­건국·박정희­경제·5공­국위선양 평가해야 12차 공판에서 전두환피고인측은 공판이 시작된 이래 가장 강력한 어조로 「5공식」 역사관을 폈다. 이들은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는」 보수 반동의 논리라는 비난을 의식한 듯 지금의 역사진행 상황을 수정주의 역사관이라고 비판하면서 나름대로의 논리를 개진했다. 전피고인측은 「역사는 시대적 삶의 기록」이라는 중국의 역사가 사마천의 역사관을 인용하면서 자신들은 집권 후 유일하게 전 정권을 매도한 사실이 없었던 정권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현정권은 건국 이래 모든 정권을 반민주적이고 부도덕적이라고 매도,국민들은 「역사적 허무주의」에 빠져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이승만 정권은 대한민국을 좌·우익의 이념적 혼란에서 공산독재화를 막아냈고 공산군의 침략을 격퇴,나라의 기초를 세운 공로가 있다고 평가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3공화국은 경제개발로 나라의 국력을 배가시켰고 자주국방과 무기체제의 자립화 계기를 만든 점을 높이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5공화국은 이른바 「3고」시대에 경제를 파탄의 위험에서 구해냈고 외채를 격감시켰으며 강력범이 횡행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고 강변했다. 또 노태우 피고인과 함께 6·29을 통해 민주화를 이루었고 88올림픽의 유치로 국위를 선양하는 등의 공로를 세웠다고 주장했다. 6공이 민주화와 개방화로 북방외교에 성공한 것도 치적으로 내세웠다. 5·6공은 건국 이후 한국을 이끌어온 이승만·박정희 정권의 정통성을 잇는 정권이라는 논리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들의 역사관이 보수주의라기보다는 수구주의라고 비판한다. 전피고인 등에 대한 재판이 과거 역사에 대한 부정이 아니라 잘못된 과거의 진실을 밝혀내고 새 도약의 기초를 세우자는 차원에서 진행되는 것이지 좌·우 이념 논쟁의 소산이 아니기 때문이다.〈박상렬 기자〉
  • 이달의 독립운동가 유일한 선생/서울신문사·보훈처·독립기념관 선정

    ◎미주 항일조직 「해외 한족대회」 주도/민족경제 살리며 26년 유한양행 설립/41년부터 OSS 특수공작대서 활약 국가보훈처는 미주지역에서 한인자유대회,해외한족대회 등에 참여,조국독립을 위해 헌신한 유일한 선생(1894∼1971)을 6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1894년 12월13일 평양에서 태어난 선생은 11살때인 1905년 미국으로 유학,네브래스카주 커니에 정착했다.선생은 1909년 박용만이 미주지역에서 최초로 설립한 「한인소년병학교」에 입교,상오에는 농장에서 학비를 벌고 하오에는 학과공부와 군사훈련을 받았다.이 학교에서의 3년간 생활에서 형성된 민족의식과 자주독립 사상은 선생이 전개한 독립운동의 원천이었고 기업경영의 지표로 작용했다. 헤스팅스 고교를 거쳐 미시간주립대학 4학년에 재학중이던 1919년 선생은 「한인자유대회」에 대의원자격으로 서재필,이승만,조병옥,임병직 등과 함께 참가했다. 대학을 졸업한뒤 라초이 식품회사를 설립,여기서 마련된 자금으로 귀국해 26년 유한양행을 설립했으며 연희전문학교 교수로도 활동했다.선생이 유한양행을 설립한 것은 민족의 실력양성과 경제적 자립을 염두에 둔 것이다. 1930년대 들어 일제의 만주침략과 중일전쟁 등으로 국내외 상황이 긴박하게 돌아가자 선생은 30년대 후반부터 미국에 체류하면서 수출선의 다변화를 위해 유럽 및 중국 시장개척에 노력하는 한편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와이 호놀룰루에서 개최된「해외한족대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이 대회는 대한민국 임정의 후원 아래 항일독립전선에 모든 역량을 집결하여 광복대업을 촉성하기 위한 대일 민족통일전선의 일환으로 구상된 것이었다. 41년 12월7일 일제의 진주만 폭격으로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선생은 미군 전략정보처(OSS)의 한국담당 고문으로 활약했다.조국광복에 대한 선생의 투철한 의지는 45년 「냅코작전계획」의 참여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OSS가 수립한 이 계획은 반일 민족의식이 투철한 재미한인을 선발,특수공작훈련을 시킨뒤 한국과 일본에 침투시켜 적후방을 교란하려는 작전이었다.45년 1월 이 작전계획의 핵심요원으로 선발된 선생은제1조 조장으로 임명돼 명령을 기다리던 중 일제의 항복으로 작전실행을 하지 못했다. 선생은 46년 7월 미국에서 귀국한 뒤 유한양행을 재정비,사장과 회장,대한상공회의소 초대 회장으로 활동하면서 민족경제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아울러 52년 고려공과기술학교,64년 유한공고 등을 설립운영했고 개인 소유주식을 각종 장학기금으로 출연하는 등 자본의 사회환원에도 힘썼다.특히 69년 기업의 제일선에 은퇴하면서 혈연관계가 없는 전문경영인에게 경영권을 인계,전문경영인 시대의 서막을 열었으며 한국에서 최초로 종업원 지주제를 실천하는 등 기업경영사에 남을 선진적인 일들을 몸소 실천했다.선생은 71년 3월11일 76세로 타계했으며,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지난해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황성기 기자〉
  • 소설 「태백산맥」 법정 선다/검찰,저자 조정래씨 기소키로

    ◎2년여 검토… “보안법 위반” 결론/“한국 최고소설” 평가… 재판 주목 소설 「태백산맥」이 출간된지 10년만에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법정에 선다. 태백산맥의 국가보안법 위반(이적표현물)여부를 수사해 온 검찰은 저자 조정래씨(53)에 대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적용,불구속 기소키로 방침을 정했다. 서울지검의 고위관계자는 30일 『그동안 법률적 검토를 거친 결과,사법처리가 불가피하다는 결론을 내렸으며 조만간 불구속 기소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에 따라 출간 때부터 치열한 논쟁을 불러 일으켰던 「태백산맥」의 국가보안법 위반 시비가 재연될 전망이다. 지난 86년 첫 출간돼 89년 10권으로 끝을 맺은 「태백산맥」은 무려 4백여만부가 팔려 나간 베스트셀러로 「분단 소설의 최고봉」이라는 문단의 평가를 받았다. 국가보안법 위반 시비에 본격적으로 휘말린 것은 지난 94년 4월.이승만 전 대통령의 양아들 이인수씨(명지대 교수)와 한국전쟁참전총연맹 등 8개 단체가 작가 조씨와 도서출판 한길사 대표 김언호씨를 국보법 위반과 명예훼손 등 혐의로 경찰에 고소하면서부터이다. 경찰은 당시 조씨를 한차례 불러 조사한 끝에 ▲이승만정권을 친일세력 집권정부로 묘사 ▲농지개혁 소작 쟁의를 미화 ▲빨치산을 인민해방전사로 묘사 ▲6·25를 조국해방전쟁으로 표현한 점 등을 들어 이적성이 있다고 판단하고 사건을 검찰로 송치했었다. 검찰도 같은 의견이었지만 2년여 동안 사법처리를 미뤄왔다.문단 인사들이 선정한 「한국 최고의 소설」로 꼽히는 등 발간 당시부터 엄청난 화제와 반향을 불러 일으켰기 때문이다. 이에 앞서 90년 9월 대검 공안부도 자체 조사 결과 이적성은 인정된다고 판단하고서도 사법처리를 하지 않았다. 검찰은 그동안 혐의는 인정되지만 처벌은 하지 않는 「기소유예」와 「불구속 기소」 방안을 놓고 저울질해 오다 최근 기소쪽으로 방침을 정했다. 검찰의 관계자는 『혐의사실이 워낙 명백하며 기소유예 사안에 해당하지 않는다』며 『조만간 조씨를 불러 조사한 뒤 기소할 것』이라고 말했다.〈박은호 기자〉
  • 미그기 귀순 계기 김정일체제 긴급 점검/전문가 좌담

    ◎“북,「최악의 위기」 외교수단으로 역이용”/군부강경파 득세… 대남도발 계속 예상/4자회담 큰틀엔 영향 미치지 않을것/한·미 공조 더욱 긴요… 북의 「자폭식 군사공격」 배제못해 식량난과 에너지난등으로 요약되는 극도의 경제적 어려움으로 최근 북한체제의 총체적 난국이 가중되고 있다.23일 터져나온 북한 미그19기 조종사의 귀순사건 역시 북한체제의 불확실성을 입증한 사례라는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서울신문은 24일 도널드 그레그 전 주한미대사(코리아소사이어티회장)와 허남성 국방대학원 교수,홍승길 서울신문 국제전략연구소 연구위원(전안기부 북한정보국장)의 긴급 정담을 통해 「고장난 비행기」에 비유되는 북한체제의 현실상을 진단하고,한·미등 국제사회의 바람직한 대북 정책을 점검해 보았다.〈편집자주〉 ▲그레그 회장=23일 북한의 한 조종사가 귀순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북한의 공군 파일럿 귀순사건으로선 13년만에 생긴 일입니다.저에게 놀라운 점은 북한으로부터의 귀순자가 오히려 적다는 사실입니다.과거 동독에 비해 그렇다는 겁니다. 그러나 어쨌든 북한사회에서 높은 지적 수준과 기술력을 갖춘 촉망받는 우수한 조종사가 한국으로 귀순했다는 사실은 북한군부의 현재 「기분」,즉 사기나 준비태세를 반영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이 비행사의 10년간 비행시간이 3백50시간에 불과했다는 사실입니다.1주일에 불과 1시간도 실제 비행 훈련을 못했을 정도라면 한·미 공군에 비해 형편없이 적은 훈련량일 것입니다.이래가지곤 한국과의 전투가 벌어지면 북측은 거의 승산이 없다고 여겨집니다. ○북 내부반발 확산 ▲홍승길 연구위원=미그19 귀순은 최근 북한이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고 젊은 「귀족 계층」과 외국생활 경험이 없는 계층까지 북한체제에 회의하고 있음을 반증하기 때문에 의미가 큽니다.아직까지는 북한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세 기둥,즉 김일성의 카리스마와 당노선 및 통제메커니즘이 붕괴됐다는 징후는 없지만 내부 반발이 젊은 귀족계층으로 확산돼가고 있어 김정일이 이를 지탱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그레그 회장=재미있는 말씀입니다.저는 지난 22∼23일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와 미 아메리칸대가 공동주최한 한 세미나에서 주북한대사로 내정된 러시아의 발레리 데니소프 외무부 아시아1국 부국장과 의견을 교환하는 자리에서 그로부터 김정일이 북한권력을 장악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물론 저도 이에 동의했습니다. 다만 김정일은 김일성만한 카리스마가 없기 때문에 그의 아버지의 자리에 서서히 다가서려는 듯합니다.북한의 강경파들이 변화를 싫어하는 것은 사실이나 김정일이 이들에게 반대급부를 주면서 잘 통제하고 있는 인상입니다.북한이 휴전협정 무효화공세를 펴면서 미국과 새 평화협정을 맺으려고 하는 것도 그것이야말로 강경파들에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반대급부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미 양국이 4자회담을 북한에 공동제안한 것은 적절한 선택이었습니다.특히 중국을 참여시켰다는 점이 그렇습니다.4자회담이라는 틀이 마련됨으로써 한국은 미국의 향후 대북 정책에 대해 그렇게 「염려」하지 않아도 되게 됐으며,북한 또한 한·미가 그들에 대한 목조르기나 붕괴를 추구하지 않는다는 인식을 갖게 될 것으로 기대됩니다. ▲허남성 교수=그레그 회장께서 북한군의 잇따른 도발을 북한 사회 변화를 위한 보상,강경파를 무마하기 위한 보상으로 보는 분석은 매우 흥미롭습니다.그러나 전 다른 의도가 있다고 봅니다.북한은 지난 4월4일 현재의 정전협정 무효를 선언했고 북한군의 도발은 자신들의 말이 빈말이 아님을 보여주기 위한 의도라고 봅니다.그리고 앞으로도 도발은 계속될 것입니다.7∼8명 단위에서 20∼30명 정도로 규모가 커지고 어선납치,20년전 판문점 도끼만행사건과 같이 극단적인 도발도 가능합니다.북한의 대남도발에는 첫째 미국을 군사회담장에 끌어들이고,둘째 북한내부의 결속을 강화하며,셋째 한국의 국론분열과 혼란을 유도하고,마지막으로 한·미,한·일간의 관계를 분열시키겠다는 배경이 깔려있습니다. 지난해 10월10일 열렸던 노동당창건 50돌 행사때 김영춘 이하일등 갓 차수로 승진한 군인들이 당비서보다 먼저 호명되고 군 열병식을 하는가하면 최광이 경축사를 해 당이 아닌 군 행사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혁명1세대를 중심으로 군부 강경파가 상당히 전면에 나서 엄청난 영향력을 갖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홍위원=김정일은 금년 하반기에 권력을 완전 승계할 것으로 예측됩니다.근거로 삼년상 얘기가 있고 또 3년간의 경제개혁이 올해로 끝나고 내년부터 7차 경제개혁이 시작된다는 점,그리고 오는 10월 김일성이 창건한 「타도제국주의 동맹」 70주년을 맞는다는 점 등을 들 수 있습니다.그러나 향후 경제실정과 미국과의 관계에 따라 내년으로 넘길 수도 있습니다. ▲그레그 회장=지난 3년간 한국의 북한에 대한 태도가 많이 변한 것 같습니다.제가 한국을 떠난 지난 93년 무렵만 해도 통일을 늦추는 게 좋다는 의견이 우세했습니다.남북간 경제적 격차를 줄여 10∼15년 후에 통일하는게 유리하다고 본 것입니다.그러나 그후 김일성 사망이 한국민의 심경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 같습니다.한국인에게 사악한 인물로 비쳐지고 있는 김일성 대신에 좀 「이상하게」 보이는 김정일이 지도자가 된데다가 독일통일 과정에서 엄청난통일비용을 지켜본뒤 남한 사람들의 생각이 바뀌지 않았나 여겨집니다.더욱이 북한의 경제력이 한국을 따라잡기는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갈수록 격차가 벌어져 통일이 멀수록 통일비용만 늘어나기 때문에 지금 통일하는게 낫다는 의견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북한을 현실적인 파트너로 여기고 협상하는 게 낫다고 보는 계층과,북한의 지금 상황을 그대로 방치해 붕괴하도록 내버려둬야 한다는 두 부류로 한국사회의 대북관이 엇갈리고 있는 느낌입니다.더욱이 문제는 어느 쪽이 주도세력인지조차 불분명하다는 점입니다. ▲허교수=북한체제의 연착륙을 놓고 한·미간에 이견이 있는 것처럼 비쳐지고 있는데 그 이유는 연착륙에 대한 정의가 애매하기 때문입니다.저는 연착륙을 안락사라는 의미로 씁니다.그러나 미국은 북한이 현재의 경제위기를 극복,정상 상태로 진입하는 뜻으로 사용하고 있는데,이렇게 되면 통일이 더 어렵게 될 뿐입니다.따라서 한·미간에 연착륙에 대한 개념을 분명히 하고 상호 합치점을 도출해야 합니다.미국에서 포용정책을 들고 나오는데,유연한 대처는 좋지만 유화적인 것은 문제입니다. ▲그레그 회장=오늘 우리가 하고 있는 이같은 토론에 귀순한 북한 조종사도 노출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또 한국의 정치지도자들도 대북 정책을 좀더 일관성있게 펴나갔으면 하는 권고를 하고 싶습니다. 덧붙여 말씀드린다면 한국의 지도자는 이승만·장면·박정희등으로 이어지고 있는 동안 북한은 김일성­김정일로 승계되고 있습니다.제 생각으론 북한에도 박정희와 같은 역할을 할 인물이 나중에 출현할 가능성이 높고,한국측이 이 사람과의 대화가 오히려 잘 될수도 있다고 여겨집니다. ▲홍위원=제주에서 한·미정상은 한반도 문제해결은 당사자가 중심이 돼야 한다는 점을 재확인했습니다.미국이 북한 개입정책을 펴고 있는데 이는 남북대화와 연결해야 남북관계 발전의 여건이 조성됩니다.남북대화는 동결됐는데 미·북관계만 발전되면 한국민의 대미불신을 야기해 양국간 복잡한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봅니다. ▲허교수=북한의 식량난은 과장된 측면이 많아 크게 걱정할 수준은 아니라고 봅니다.60년대초 우리나라 국민 1인당 쌀소비량은 연간 1백36㎏이었습니다.북한의 경우 1인당 1백50㎏이라고 설정하고 2천3백만명이니까 3백50만t 정도인데 여기에 자연감소량을 감안해 1백만t을 더해도 연간 4백50만t이면 굶어죽지는 않습니다.북한의 90년 들어 양곡생산량은 연간 4백만t 안팎입니다.93년 3백80만t,95년 홍수로 3백30만t으로 올해에는 약 2개월치의 양곡이 부족할 것으로 분석됩니다.7∼8월쯤이 어렵겠지만 지하경제에 약 1백만t의 쌀을 갖고 있다고 추측돼 미국처럼 쌀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식량난 과장됐다 ▲그레그 회장=상호간의 무지 때문에 이견이 생기는 경우가 왕왕 있다고 봅니다.한미간 뿐만 아니라 남북한 간에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한·미간에 공조를 더 잘 유지하자면 정확한 식량사정등 북한에 대한 정보를 더 잘 공유하는 게 중요합니다. ▲허교수=4자회담에 대해 북한은 앞으로도 신속하게 반응은 하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중국이 이 제안에 적극적이지 않고 러시아도 배제된 상태에 대해 반발하고 있고 북한은 4자회담이 아니더라도 미사일과 유해송환협상등 다양한 대미채널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또 시간을 끌면 끌수록 떡이 커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고 수정제의를 통해 공을 이쪽으로 넘길 수도 있다는 심산입니다.북한은 최악의 위기사태를 유효한 외교수단으로 역이용하고 있습니다.핵협상때 벼랑끝외교에서 이번에는 「자폭위협 외교」라는 얘기도 있을 정도입니다.하여튼 앞으로 3∼4년이 매우 중요합니다.북한이 우세한 군사력으로 공격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죠.따라서 국방비를 일종의 안보보험금으로 보고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레그 회장=김정일이 하반기쯤에 공식적인 권력승계 절차를 밟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는 홍위원님의 말씀이 상당히 흥미로웠습니다.김이 정확히 언제 최고위직 승계 절차를 밟을지 모르지만 권력승계후에는 4자회담에 참여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할 것으로 보입니다.한·미 양국은 북한이 이렇게 나가도록 분위기를 조성하는 게 바람직할 것입니다.이같은 관점에서 북한의 식량사정에 대해한·미 양국이 엄밀하게 공동 평가해 공동으로 대응할 필요성이 있다고 봅니다.이런 가운데 김정일이 권력을 승계하고 4자회담을 수용한다면 한반도의 긴장국면이 완화되는 새로운 상황을 기대할 수 있을 듯합니다. ○「경보망 구멍」 충격 ▲홍위원=미그19기의 귀순이 4자회담의 큰 틀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단,북한의 지도층이 개방하니까 이런 일이 터진다고 판단할 경우 당장에는 4자회담이 위축될 수는 있다고 봅니다.이번 일을 계기로 북한내부의 저항문제에도 지속적인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허교수=저 역시 그렇게 생각합니다.단기적으로는 내부단속을 강화해 역효과가 있겠지만 근본적으로는 큰 영향을 미치지는 않을 것으로 봅니다. ▲홍위원=한가지 첨언하고 싶은 것은 이번에 서울시의 조기경계망에 허점이 드러났다는 우려할 만한 사실입니다.항상 전쟁터에 있다는 업무자세가 필요한 때입니다. ▲허교수=서울시의 민방위 경보체제에 구멍이 뚫린 것은 충격적인 사태입니다.수시로 해오던 훈련도 주민불편을 이유로 간헐적으로실시하는데 이는 잘못입니다.이번 사건을 계기로 민방위 문제를 재고해 전화위복의 기회가 되길 바랍니다.〈정리=구본영·김균미 기자〉
  • 해방공간의 주역들/김학준 지음(화제의 책)

    ◎이승만·김구·하지 등 내외국인 활동상 조명 지난해 8월부터 4개월동안 동아일보에 연재했던 인물평전을 모은 책.여운형 박헌영 송진우 이승만 김구 조소앙 김창숙 김성수 신익희 김병로 김규식 허헌 백남운 이범석 안재홍 서재필 장덕수 조병옥등 한국인 18명과 남한주둔 미점령군사령관 하지,소련 부영사 샤브신등 격동의 해방공간에서 3년동안 남한 현대사를 움직인 주역들을 지은이 특유의 감각적인 관찰로 그려냈다. 해방부터 대한민국 정부수립까지의 시기를 이민족의 지배기로 보면서 첨예하게 대립한 외세에의 협조­대결세력을 확연히 부각시키면서 이들의 명암을 통해 역사적 교훈을 유도하는게 특징.미국과 소련의 한반도 분할점령으로 시작된 해방 이후 자유 독립에 대한 연합국과 한국인들의 인식차,그리고 그로인한 충돌을 축으로 해 이에 대한 주역 20명의 활동상을 의미있게 짚어내고 있다. 박헌영은 조선공산당을 재건한 비운의 혁명가,이승만은 분단정국을 이끈 탁월한 현실주의자,김성수는 반공 반독재로 일관한 합리적 민족주의자로 성격지었으며 안재홍은 신국가건설론을 제창한 좌우합작 지지자,서재필은 대통령 추대를 고사한 독립운동의 선구자로 부각시기고 있다.각 인물별로 자료소개와 어록을 실었고 해방 3년간 연대기도 덧붙였다. 동아일보사 5천5백원.〈김성호 기자〉
  • 기미년 「서울역 만세시위」 주도/이달의 독립운동가 신익희 선생

    ◎서울신문·보훈처·독립기념관 선정/3·1운동 전국확산 계기… 일에 쫓겨 망명/임정 수립·만주 「대일전선동맹」 결성 주역 국가보훈처와 독립기념관은 2일 해공 신익희 선생(1894∼1956)을 5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법무총장과 임시의정원 부의장을 지내면서 항일독립투쟁을 펼치고 광복후에는 국회의장을 역임했다. 1894년 6월9일 경기도 광주군 초월면 서하리에서 태어난 선생은 어려서 한학을 수학한 뒤 13살때인 1908년 상경,한성외국어학교 영어과에 입학했다.일제로부터 국권을 되찾고 민족적 수모를 설욕하는 방법은 서구의 진보한 문명을 받아들여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판단,영어과를 택했다. 선생은 조국이 일제의 식민지가 된 1910년 졸업했다.극일의 심정으로 일본유학을 단행,1912년 일본 와세다대학 정치경제학부에서 수학하고 귀국,중동학교 등에서 교편을 잡았다. 윌슨 미국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천명한 1918년 림규·송진우·최남선 등과 독립운동을 밀의한다.3·1운동을 지켜본 선생은 3월5일 서울역 앞에서 만세시위를 추진한다.3·1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계기를 만들면서 일경에 쫓기는 몸이 돼 중국으로 망명길에 오른다. 선생은 상해에서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을 추진하고 같은 해 4월13일 임정수립을 대내외에 공포하는 한편 대한민국을 민주공화제로 하는 10개항의 임시헌장도 선포한다. 임정의 조각이 이루어지자 선생은 초대 내무차장 겸 내무총장대리로 선임되어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대리로 부임한 안창호를 도와 임정의 국내 행정조직인 「연통제」를 창안,실시하게 된다. 임정 법무총장·외교부장을 두루 역임한 선생은 한국청년 5백명을 모집,군사행동을 위한 유격대성격의 「분용대」도 편성하는 등 한·중 합작에 의한 대일항전을 역설했다.한국혁명당을 창당한 선생은 만주사변과 상해사변을 도발하며 중국침략을 노골화한 일본에 맞서 모든 독립운동단체와 정당이 결속할 것을 주장,「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을 탄생시키기에 이른다.그러나 가맹단체간 협의기관인 이 동맹은 결속력과 통제력에 한계를 드러내 1935년 남경 금릉대학에서 민족통일전선의 원칙아래 신한독립당·의열단·조선혁명당·한국독립당 등 5당 통합을 이뤄낸다. 선생은 조선의용대 병력이 모여 있는 낙양으로 가서 조선민족해방동맹과 연합,무장투쟁노선의 「조선민족해방투쟁동맹」의 결성을 주도했으며 1941년에는 한·중합작으로 한·중문화협회를 조직한 뒤 다시 임시정부에 합류하게 된다. 1943년 4월 임정 선전부의 선전위원회에서 조소앙·유림 등과 활동하면서 대한민국의 선전계획수립과 실행에 이바지했다.1944년 5월 임정의 연립내각성립 때 내무부장에 선임되어 활약하다가 중경에서 광복을 맞는다. 광복이후 선생은 1945년 12월2일 임정요인의 2차환국 때 자주적 민족국가건설의 희망을 안고 귀국하지만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신탁통치안이 결의되자 김구주석을 도와 반탁운동을 선도했다. 이런 가운데서도 선생은 1946년 국민대학을 설립,민족국가건설의 동량을 육성하는 한편 「자유신문」을 발행,민족 자주성을 길러나가는 데 일조했다. 1948년 5월 제헌의원선거때 경기 광주에서 출마,당선됐고 이승만의 후임으로 국회의장에 선출되어 활약하면서 대한민국건국에 크게 공헌하게 된다.1956년 민주당 대통령후보로 출마했으나 5월5일 호남선 열차 안에서 뇌일혈로 급사했다.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황성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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