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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혁명적 정화(金三雄 칼럼)

    단재 신채호선생은 우리는 ‘혁명적 정화’가 없는 민족이라고 아쉬워했다. 혁명 쿠데타 반정 정변 경장 등 정치상의 모든 방법이 나타났지만 한번도 ‘혁명적 정화’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해방 후에도 몇차례 기회가 없지 않았다. 건국과 함께 반민특위에서 친일반역자들을 처단하여 민족정기를 바로잡는 정화의 기회가 있었지만 이승만 세력에 의해 좌절되고, 4·19혁명후 독재세력을 청산할 혁명재판이 열렸지만 군사 쿠데타에 짓밟히고 말았다. 6월항쟁후 여소야대 국회의 5공청산 작업은 3당야합으로 역전되고,문민정부의 개혁은 역사의식의 부재와 너무 쉽게 부패하여 스스로 청산의 대상으로 전락되었다. 金大中 정부의 개혁작업은 지금 심한 도전에 직면했다. 모든 개혁을 좌절 역전시킨 반개혁 수구세력의 도전이 다시 나타난 것이다. 최근의 몇가지 사례만 봐도 과연 이들의 도전으로 개혁이 가능하겠느냐는 의문이다. 첫째,햇볕론에 대한 수구세력의 도전이다. 이들은 동해안 간첩사건을 계기로 햇볕론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다. 과거 햇볕론이 없고 강경일변도로 나갈때도 수차례 공비가 출몰했던 사실을 외면한채 정부의 햇볕 정책때문에 간첩이 나타난 것처럼 비판하면서 왜 응징하지 않느냐고 앙탈이다. 한바탕 붙기라도 하잔 말인지,지난 50년 강풍정책의 결과를 한 번쯤 돌아봐야 하지 않겠는가. 둘째,국민정신을 반개혁 성향으로 오도한다. 반민주와 쿠데타와 양민학살을 일삼아온 독재자들을 영웅으로 추켜세우면서 국민이 개혁보다 강압통치 시대에 향수를 갖도록 여론을 조성한다. 셋째,‘우파는 사정(司正) 좌파엔 화해’란 도식을 만들어 햇볕정책을 색깔론으로,개혁을 우파 또는 특정지역에 대한 탄압으로 비약시키면서 계층과 지역감정을 조장한다. 명백히 드러난 수뢰 정치인의 사정도 표적수사 또는 지역차별이라고 억지를 부려 정치권의 사정과 개혁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군사독재와 부정부패의 늪지대에서 성장해온 남한의 극우세력과 부자 세습체제에서 성장해온 북한의 극좌세력은 평소 가장 적대적 상대인 듯 하지만 비상시에는 서로를 필요로 하는 ‘적대적 공조관계’가 유지된다. 예컨대,1972년 朴正熙의 유신헌법과 金日成의 주석제헌법 개정이 거의 동시에 단행되고, 87년 야권의 승리가 보이는 듯 할 때 마유미(김현희)의 대한항공 폭파사건,92년 대선때 이선실의 간첩사건,96년 총선때 판문점 무장북한군 출몰사건,97년 대선때 특정세력과 북측의 내통사실 등 개혁세력에 유리한 상황이 전개되면 북한은 어김없이 안보위기나 공안사건을 만들어 수구세력을 도와주었다. 최근 북한의 잠수정침투사건도 햇볕론이 국민의 관심을 모으면서 소떼입북, 금강산관광등 한창 화해무드가 조성될 때 나타나 수구세력의 입지를 도와준 셈이다. 한국의 수구세력은 민주주의와 반공을 내세울 도덕적 자격을 갖고 있지 못하다. 그들은 민주주의를 학살해온 독재전위 세력이었으며,반공은 자신들의 기득권 유지를 위한 방편일 뿐이고, 오늘의 국난을 불러온 중심세력이기 때문이다. 독재자를 영웅시하고 화해정책을 용공시하고 사정을 계층과 지역감정으로 몰아가면서 개혁의 발목을 잡는 수구세력에 대한 ‘혁명적 정화’없이는 국난극복은 불가능하다. 50년만의정권교체는 민족모순과 사회모순을 바로 잡으라는 역사의 뜻이고,색깔론과 지역감정을 뛰어넘으라는 국민의 선택이다. 언제까지 이런 해묵은 ‘악령과 괴담’속에서 우리 정치와 사회가 세월을 보내야 하겠는가. 정부는 더 이상 원칙없는 온정주의와 눈치보기로 개혁에 갈팡질팡해서는 안된다. 좀더 과감한 사정과 개혁으로 5,000년 묵은 역사의 찌꺼기들을 퇴출시켜야 한다. 보수라는 이름 아래 역사의 방향과 전진을 가로막는 기득세력의 ‘여론’을 혁파해야 한다. 金大中 대통령은 1917년 러시아혁명의 어려웠던 시절 레닌의 침착함과, 1932년 대공황때 보인 루스벨트 대통령의 밝은 미소,프랑스가 패배한후 국민을 다시 규합한 드골의 리더십,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처칠의 여유와 지략으로 총체적 개혁을 단행할 때이다. ‘혁명적 정화’를 통해 제2 건국을 이뤄야 한다. “태양이 비칠때 풀(草)을 말리라”는 서양격언이 있다.
  • ‘朴正熙 살리기’ 똑바로/柳一相(특별기고)

    일부 언론이 ‘박정희 살리기’에 나섰다.마치 오늘의 경제난국을 해결해 줄 천지신명의 반열에 박정희 장군을 올려놓으려는 듯한 느낌이다.그러나 박정희 정권의 실적위주 결과지상주의 경제개발방식이 오늘의 경제난국을 잉태한 근본원인이었다는 것을 진단해주는 언론논평은 찾아보기 힘들다.역사적 인물 가운데 죽은 자와 산자의 명암이 어쩌면 이렇게 갈리는지 필자는 그 형평성 문제에 어리둥절할 따름이다. 일제 치하에서 출세를 위해 교직을 버리고 일제의 위성국가인 만주국의 장교가 되어 독립군을 족치고 해방후 민족분단과정에서 결코 떳떳하지 못했던 정치군인 박정희의 모습이 축소취급되는 것은 그의 통치 18년이 이미 오늘을 사는 우리들 모두에게 일정한 관성을 부여했기 때문이라고 보아 너그러이 봐주자.그리고 도탄에 빠진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군 본연의 임무로 돌아가겠다던 그의 약속위반도 이승만 정권과 장면 정권의 부패와 무능에 대한 대안으로서 국민들이 그의 리더십에 대해 투표로 보여준 간곡한 성원때문이고 더 큰 일을 위해 작은 약속쯤 어길 수 있다는 사회윤리적 방어논리를 편다면 이 역시 일단 수긍해주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진정 분노케하는 것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경제개발과 민족통일이라는 국민의 여망을 자신의 평생 집권을 위한 명분으로 삼아 직접 유신쿠데타를 조직하여 이를 성공시키면서 사회적 생명력을 가진 우리 사회공동체에 남긴 지울 수 없는 흔적들이다.이 분노의 원천은 바로 군관산(軍官産)복합체의 이권 농단과 그것의 분배를 둘러싼 지배집단 내부의 불신과 모함,그리고 그것의 사회적 집단 감염현상이라고 하겠다. 박정희 집권하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경제적으로 윤택해졌으며 오늘의 명성과 권세를 누리게된 일부 언론인들이 그들의 기득권을 지켜주는 성채의 주인인 고(故) 박정희 장군에게 보내는 존경과 충성심도 이해한다.그러나 박정희 시대의 산물인 곡필과 아세(阿世)가 깊이 이 땅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갈 후손들에게 삶의 방향을 설정하는데 혼조를 줄 우려가 크기에 몇가지 증거로 부득이 박정희 칭송론을 반박한다. 첫째,오늘의 경제발전을 이룩한 주역은 당시 자신들의 젊음을 고스란히 바쳤던 민중들,이제는 중년을 넘어섰거나 노년기에 이른 근로대중들이었다.그들은 월남전쟁을 비롯하여 열사의 아라비아 사막까지 맨몸둥이 하나로 달러를 캐러 나갔다. 둘째,오늘 우리가 인간으로서 누리는 이만큼의 기본권 역시 한줌의 재가 되고 산천에 썩어 비료가 된 열사들을 비롯하여 피터지게 맞고 조롱당하며,직장에서 쫓겨나 거리를 헤매야 했던 반유신 민주화 투쟁으로 고난받은 이웃들이 치른 거룩한 희생 덕분이다. 이제 언론은 박정희씨의 업적을 홍보함으로써 역사의 시계바늘을 뒤돌리려 하지 말고,그의 강권억압통치 때문에 사랑하는 이와 사별한 사람,비인간적 학대로 영육이 망가진 사람,학교와 직장에서 쫓겨난 사람들에게 그의 이름으로 속죄를 빌어야 한다.
  • 헌법정신과 국회상(金三雄 칼럼)

    절대군주제와 식민통치를 거쳐 우리 손으로 헌법을 만들고 헌정을 시작한지 50년이 되었다.봉건적 신민사회에서 신분과 권리가 바뀌고 자유와 평등이 보장되는 근대적 시민국가로 발돋움한지 반세기가 된 것이다. 헌정 반세기의 역사는 그러나 독재와 반독재 투쟁의 피어린 역정이기도 했다.그 역정의 작용과 반작용의 역학이 50년만의 여야 정권교체로 새 정부가 들어서고서도 국회가 파행을 면치 못하는 후유증으로 남는다. 우리 헌법은 당초 내각제 시안이 이승만의 권력욕으로 대통령제로 바뀐 것을 시작으로 그동안 독재자들의 장식물이 되어 9차례나 뜯기고 찢기는 누더기 신세를 면치 못했다. 헌법이란 용어는 중국의 고전에서 유래한다. 중국 고전〈국어(國語)〉의 「진어(晋語)」편에는 ‘상선벌간 국지헌법야(賞善罰姦 國之憲法也)’라 하여 “선을 상 주고 간을 벌하는 것이 나라의 헌법이다”라는 말이 처음으로 쓰여졌다.또 에는 ‘능출호령명헌법의(能出號令明憲法矣)’즉 “능히 호령을 내려 헌법을 밝힌다”는 구절이 있다.그리고 에는 ‘헌자법야(憲者法也)’라 하여 “헌은 법이다”는 말이 있다. 이들 고전에 나타난 헌법이란 말을 명법(明法) 또는 엄법(嚴法)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설명이다. 일본에서는 성덕태자의 〈17조 헌법〉도쿠가와 시대의 〈헌법부류(憲法部類)〉〈헌법류집(憲法類集)〉,복택유길(福澤揄吉)의 〈율례(律例)〉,가등홍지(加藤弘之)의 〈국헌(國憲)〉,이등박문의 〈명치헌법〉등으로 나타난다. ○부끄러운 국회 모습 우리나라의 경우 1894년 제정된 ‘홍범(洪範)14조’에서는 아직 헌법이란 용어가 쓰여지지 않았지만,1919년 상해임시정부에서 ‘임시헌정’이라 하여 헌법의 의미가 함축된 용어를 공식적으로 사용한 바 있다.1907년 유진오 박사의 부친 유치형이 처음으로 〈헌법〉이란 교과서를 내고, 1918년 신익희가 보성전문에서 비교헌법을 강의했다. 해방조국은 1848년 6월1일 제헌국회 본회의에서 헌법기초의원 선임을 위한 전형위원의 선출로 헌법제정 작업이 시작돼 7월17일 마침내 헌법이 제정 공포되었다.이렇게 제정된 헌법은 독재자들에 의해 누더기가 되고 헌정은 상처투성이의 고난을 겪었다.이 ‘상처’는 아직도 아물지 않고 있다. 50년 세월은 결코 짧은 기간이 아니다.분단과 전쟁과 혁명과 쿠데타,그리고 경제건설의 어지러운 상황이기는 했지만 우리는 많은 희생을 치르며 민주헌정을 지켜왔다.여야 정권교체도 이루었다.그럼에도 우리 정치는 여전히 한심한 수준이다.몇 달째 원 구성을 못하고 국난극복과 개혁의 앞장은 커녕 발목을 잡고있다.권력형 부정사건에는 약방의 감초격으로 국회의원이 끼어들고 지역감정 조장발언은 국회의원들의 단골 메뉴처럼 되었다. 국민통합과 화합기능은 커녕 분열과 갈등을 부채질한다.정부기관은 물론 공기업과 사기업이 구조조정의 아픔을 겪고 있는 터에 유독 국회만은 이를 외면한 상태에서 정쟁으로 날을 지샌다.동해안에 무장간첩이 출몰하고 노동자들이 강경노선으로 선회하는데도 무대책일 뿐인 국회가 제헌 50주년의 의미를 어디에서 찾는단 말인가. ○구조개혁 앞장서라 지난해 외환위기와 증권시장 붕괴를 예측한 바 있는 증권전문가스티브 마빈이 “제2환란이 오고있다”고 경고하고,미국의 여론 주도층은 한국에 투자를 꺼리는 이유를 분단이나 노사불안보다 ‘여소야대 등 한국정치의 불안정성’을 첫째 요인으로 열거한다.정치인들이 각성 발분해야 할 경고의 메시지다. 정치개혁이 선행되지 않고는 어떤 개혁도 성공하기 어렵다.특히 지금처럼 고비용 저효율의 정치구조를 그대로 두는 국정개혁은 공염불에 불과하다.150만 실업자와 퇴출당사자들의 저항에 부딪히게 된다. 미증유의 국난기에 전혀 위기의식을 느끼지 못한채 정당의 하위기관으로 전락하여 선거지원이나 하는 국회라면 문제는 심각하다.제헌절을 앞두고 “선을 상 주고 간을 벌하는 것이 나라의 헌법”이란 헌법의 의미를 새기면서 국회의 분발을 기대한다.
  • 국군포로 송환(정직한 역사 되찾기)

    ◎‘실종 45년’ 2,000명 생존 추정 올해는 6·25전쟁 발발 48주년,종전 45주년이다.반세기 동안 죽은줄로만 알고 있던 국군포로들이 버젓이 살아서 돌아오는 현실은 우리에게 충격을 안겨주었다.이는 그동안 무대책으로 일관해온 우리의 국군포로 송환 문제 인식에 일대 각성의 전기를 가져왔다.18일은 이승만 정부의 반공포로 석방 45주년이기도 하다 최근 梁珣容 일병의 귀환은 94년 趙昌浩 소위의 귀환과 함께 생존 국군포로의 존재를 명확히 했다.100여명의 생존자 명단까지 확인되고 있다.북한에 억류돼 강제노역 등 어려운 삶을 연명해온 이들은 대부분 70세 전후.더이상 기다릴 여유도 없다.이들의 송환노력에 박차를 가하는 것야말로 민족상흔 치유의 첫걸음이 된다.그 현실과 대책을 살펴본다. ◎정부의 해결방안/송환문제는 남북관계 진전 봐가며 추진/정착돕게 연금지급 근거법 등 제도 정비 북한에 억류된 국군포로 문제와 관련,정부는 두갈래 대책을 추진하고 있다. 1차적으로 남북 이산가족 상봉 차원에서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을 강구중이다.북한은 6·25전쟁 포로가 없다고 강변하고 있다.때문에 전쟁포로의 존재 유무를 놓고 소모적 공방을 벌이기 보다는 우선 생사확인부터 해보자는 취지다.송환은 남북관계의 진전을 보아가면서 추진키로 했다. 또 지난해 탈북자보호법을 만든데 이어 올 가을 정기국회에서 ‘귀환자지원법’을 제정키로 했다.국군포로나 강제납북자는 대한민국 국민이다.이들이 한국으로 돌아오는 경우는 북한 주민의 귀순과 다르다. 지원내용도 달라야한다.정부는 지난해말 귀환한 梁珣容씨 같은 국군포로에게 정당한 수준의 연금을 지급할 근거규정도 마련키로 했다. 인도적 차원에서는 모든 방법을 동원한 송환 추진이 당연하다.제네바 포로협약을 근거로한 송환 공식요구,유엔 총회 및 안보리에서 문제제기 등을 생각할 수 있다.남북경협과 포로송환을 연계하는 방법도 있다. 그러나 이를 쟁점화함으로써 지금도 어려운 남북관계가 돌이킬 수 없는 상태에 이를 가능성을 정부는 염려한다. 曺龍男 통일원 인도지원1과장은 “북한은 현재 국군포로가 없으며 강제납치한 경우도 없다고주장하고 있다”면서 “남북관계의 확실한 진전 없이는 국군포로 문제가 해결되기 어렵다”고 밝혔다.유가족들이 여러 국제기구를 통해 개인 차원에서 국제여론을 환기시키는 방법도 있으나 실효성이 의문이라는 것이다. 국군포로 및 강제납북자 유가족과 민간단체들은 정부의 태도가 불만이다.李哲承 건국50주년기념사업준비위 회장은 “국군포로와 함께 6·25 당시,그리고 그 이후 강제납북된 민간인들을 송환하기 위해 유엔과 국제적십자사를 통해 정정당당하게 우리의 주장을 전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기념사업준비위는 국군포로 송환 촉구 100만 서명운동도 벌이고 있다. ◎2만2,562명 전사/6·25 희생국군 분류/1만7,020명 실종처리/민간 7,000여명 남북 국방부는 6·25전쟁에서 실종된 국군숫자가 4만1,954명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중 2만2,562명이 추후에 전사처리 되었다. 나머지 1만7,020명을 실종으로 처리했고 2,372명을 미확인으로 분류했다. 국방부의 실종자 분류는 정확한게 아니다.주로 유가족 증언을 토대로 한탓이다.유가족이 신고해오면 전사로 처리하고 제보가 없는 경우 실종으로 분류했다. 현재 생존 국군포로는 2,000명 안팎일 것으로 관계당국은 추산하고 있다. 6·25전쟁 기간동안 납북된 민간인을 뜻하는 실향사민(私民)은 7,000여명이다.동진호 선원 등 전쟁후 납북억류자는 450명이다. ◎기고/지만원 군사평론가/‘戰士일생 관리’시스템 갖춰라 ○희생자 보상 형편없어 군이 무기를 구매할 때는 무기의 일생을 관리하기 위한 ‘종합군수지원’(ILS;Integrated Logistic Support)시스템을 운영한다.그러나 정작 전사(戰士)들의 일생을 관리하는 ILS시스템은 만들어져 있지 않다.군이 스스로의 일생을 관리하는데 게을리해온 것이다. 94년 10월 趙昌浩 소위가 64세의 나이로 귀환했다.그에게는 밀린 봉급,퇴직금,연금조로 1억6,000만원이 지급됐다.조국을 위해 아까운 일생을 송두리채 희생당하고 탈출해온 노전사에게 주어지는 돈 치고는 너무나 초라했다. 98년 4월 梁珣容씨가 72세의 나이로 귀환,기자회견을 가졌다.그에게는 45년간 밀린 사병봉급 200만원이지급됐지만 그는 이 돈을 군에 반납했다.그에 대한 국가의 대접이 겨우 이런 식이냐는데 대한 섭섭함과 항의의 뜻이었을 것이다.결국 그에게는 탈북자지원법에 따라 6,400만원 지급이 결정되긴 했지만,이 또한 국가의 도리가 아니었다. ○희생의 대가 충분히 정부는 ‘국군포로(귀환자)특별법’을 연내로 제정하고 적십자 기구나 유엔 등의 협력을 얻어 북한에 남아 있을 포로의 귀환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하지만 포로송환 문제를 전적으로 담당하는 주관 주체도 아직은 만들지 않고있는 듯하다.전사들의 일생을 관리하기 위한 시스템이 준비돼 있지 않은 것은 바로 군 자신들의 수치요,직무유기다.그러나 더 부끄러운 것은 전우애의 실종이다. 200만원을 돈이라고 지급하는 군수뇌의 식견에도 문제가 있지만 더 큰 문제는 군전체가 72세의 나이로 적진을 탈출해온 기막힌 영웅들을 열열이 환영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현역 장병들과 향우회에서는 실직자들에게는 봉급의 10%를 떼어주면서도 그 기막힌 고통을 치르고 돌아온 전우를 위해 단 한푼의 성금도 갹출하지않았다.눈만 뜨면 외치는 전우애는 과연 무엇이며 이들이 목숨바쳐 따랐던 상관이란 과연 무슨 존재들이란 말인가. 전쟁이 나면 70만 현역은 누구나 다 포로가 될 수 있다.그들도 포로가 되면 두사람의 노병들처럼 북에서는 아오지탄광에서 혹사 당하고,남에서는 불청객에 가까운 대우를 받게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희생당하는 자만 억울하다.그러면 다음 전쟁에는 누가 나가 싸우려 할 것인가.국가는 위기에 처했을때 국민에게 국가를 위해 목숨 바쳐달라고 당당히 호소할 수 있어야 한다.그러나 지금의 우리 국가는 그런 입장에 서있지 못하다. ○보병전 개념 수정해야 이번 기회를 통해 군은 두가지 교훈을 얻어야 한다.하나는 전사의 일생관리를 책임지는 곳은 군이어야 한다는 사실이다.집행은 다른 행정부처에서 하더라도 마스터플랜과 시스템은 군이 만들어야 한다.아울러 월남전에 참가했던 병사가 고엽제 질환과 유사한 질환을 앓으면 무조건 보상해주어야 한다. 또다른 하나는 실속없이 사상자와 포로를 대량으로 양산할 수 밖에 없는 지금의 보병전 개념을 수정해야 한다는 사실이다.지금의 전쟁은 전자전과 화력전이다.군은 이에 대한 충분한 장비를 구비했다.그러나 안타깝게도 군은 현대적 장비를 가지고도 19세기식 보병전에 집착하고 있다.세상이 모두 빠르게 변하고 있는데 한국군만 변화의 사각지대가 아닌지 생각해주기 바란다. ◎작년 탈북 국군포로 梁珣容씨 인터뷰/“편지왕래 물꼬라도 텄으면”/북에 남겨진 전우 생각하면 가슴 찢어져/정확한 숫자 조사·국제여론 유도 아쉬워 지난해말 북한을 탈출한 국군포로 梁珣容씨(72)는 경남 함양군 수동면 원평리 고향집에서 살고 있다. 실명한 왼쪽 눈,몇 개만 남은치아,절룩이는 다리….45년간 긴긴 억류의 흔적은 아직도 그를 괴롭힌다. 그러나 북녘에 남겨진 동료들을 생각하면 몸보다 마음이 더 아프다. ­귀환후 첫 6·25를 맞는 느낌은. ▲지금도 미귀환 포로로 북한 공산체제 아래서 온갖 고난을 당하고 있을 동료들이 생각납니다.제네바협정을 지키지 않는 북한당국에 대해 우리 정부의 대응이 너무 미약한 것 같습니다. ­정부에 바라는 사항은. ▲미국은 6·25전쟁 전사자들의 유골까지 본국으로 송환하고 있는데 우리는 포로는 물론 전사자 조사 조차 제대로 안돼 있어 실망을 금할 수 없습니다.이는 역대 대통령들이 성의를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백발노인이 자식의 생사를 알기 위해 찾아와 눈시울을 붉히는 것을 봤을 때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습니다. 북한을 상대하려면 처음부터 너무 크게 시작하면 안됩니다.우선 편지왕래라도 하여 살아 있다는 사실만이라도 확인해야 합니다. 한국도 국력이 신장됐으니 국제여론을 환기시켜 북한이 전쟁포로들의 생사여부라도 확인해주도록 해야 합니다. ­지원금 수령을 계속 거부할 것인지요. ▲지난 4월 귀환 기자회견을 마치고 동생(병용·64)이 연금수령을 거절하며 국방부관계자에게 거칠게 항의하는 것을 보고 크게 놀랐습니다.‘여기가 조국이구나’하는 것을 새삼 느끼기도 했지요.북한에 억류됐던 세월동안 조국이 그리웠고,나이가 들면서 고향 선산에 묻히겠다는 일념 밖에 없었습니다.돈이 탐나서 돌아온게 아닙니다.하지만 46년전에 일등병이었는데 지금도 일등병 연금을 준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정부가 관련법을 고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바뀐 법에 의해 책정된 연금은 받아야지요.
  • 白凡 재조명:3­1(정직한 역사 되찾기)

    ◎통일사상의 정수/“自主없는 통일 허구” 날로 새로워/列强 간섭 배제하고 ‘민족의 힘으로’ 역설/지역·이념 뛰어넘는 화합의 정신 일깨워 20세기 후반 세계사를 지배하던 냉전은 끝났다.그러나 한반도의 냉전은 과거사가 아니라 여전히 현실이다.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린 거대한 시대의 흐름도 남과 북의 이념적 분단의 벽은 넘지 못했다.철옹성 같은 분단의 벽을 넘어 화해와 통일의 길로 가는 일은 이 시대 우리들의 소명이다.그 일의 출발점을 金九 선생의 민족화해와 자주적 평화통일론에서 찾으면 어떨까. 백범이 추구한 이상의 완결편은 민족의 자주적 평화통일이었다.그는 생의 마지막 부분을 민족통일을 위해 바쳤다.1948년 2월엔 ‘3천만 동포에게 읍고(泣告)함’이라는 호소문을 발표했다.“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시에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고 선언했다.백범은 냉전이라는 불리한 국제정세와 이승만과 김일성이 각각 미국과 소련을 배경으로 단독정부를 구성하려는 어려운 시대상황에서도 통일에 대한 꿈을 버리지 않았다. 그는 남북협상을 위해 1948년 4월19일 38선을 넘었다.공산주의자들에게 이용만 당할 뿐이라는 많은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평양을 방문했다.북측에 의해 미리 짜여진 각본이었기 때문에 실질적인 성과를 거둘 수는 없었다.그러나 남북협상의 성공만이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민족의 자주적 힘에 의한 평화통일 노력 그 자체도 중요했다.민족의 운명을 외세에만 맡기지 않고 자주적 통일을 위해 힘 쓴 지도자가 있었다는 것은 소중한 역사다. 백범은 한반도가 분단의 위기에 빠지자 정치·이념적인 반대세력과도 손을 잡았다.그의 통일노력은 정치적 계산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민족의 미래를 위해 통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그의 철학을 행동으로 보여준 것이다. 백범은 남북한에 단독정부가 수립되면 민족간에 전쟁이 일어나고 통일의 길은 더욱 멀어질 것이라고 우려했다.그의 우려는 모두 현실화됐다.한반도에는 이념적 분단만 있는 것이 아니다.남쪽에는 정치·지역감정에 의한 또 하나의 분단이 있다.그 ‘마음의 분단’이 얼마나 심각한가는 이번 6·4지방선거에서 다시 확인됐다. 지역감정·혈연·이념 등에 의한 분열은 민족의 화합으로 바뀌어야 한다.백범의 애국적 민족사랑은 좋은 전환의 매개체가 될 수 있을 것이다.이념과 정치적 이익을 초월한 백범의 민족사랑 정신은 세속적 이익을 최고의 가치로 생각하는 많은 현대인들이 배워야할 중요한 덕목이다. 백범의 자주적 평화통일론도 시공(時空)을 초월하여 오늘의 유효한 통일정책이 될 수 있을 것이다.한반도 통일은 물론 우리만의 힘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미국·중국 등 강대국들의 이해관계도 중요한 변수다.강대국들은 그러나 한반도 통일을 달가워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 민족의 적극적이고 자주적인 노력 없이는 통일은 불가능하다.백범의 자주적 통일론이 오늘의 통일정책에도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반도에는 지금 과거와 다른 차원의 남북교류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그러한 변화를 남북화해로 승화시키기 위해 그동안 ‘박제’됐던 백범의 민족화해와 통일론에 생명을 불어넣어현재화해야 하지 않을까. 백범은 ‘今日我行跡(오늘 내가 걸어간 자국은) 遂作後人程(드디어 뒷사람의 길이 되니라)’라는 서산대사의 시를 휘호로 즐겨 썼다.그가 넘었던 38선을 鄭周永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16일 다시 넘는다.반세기만에 마침내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이다.남북교류가 활성화되면 그의 더 큰 소망인 민족의 화해와 통일도 가까워질 것이다. ◎DJ와의 인연/상대후보 백범암살 배후 드러나 3選 의원에/효창공원 골프연습장 공사 중단시켜 “報恩”/기념사업회 이사… 동상 건립 적극 재정 지원 金九 선생과 金大中 대통령은 살아온 시대가 다르다.민족의 큰 지도자 백범이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했을 때 金대통령은 20대 초반이었다.그러나 두사람간에는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운명적인 인연이 있다. 그들의 인연은 60년대 중반 金대통령이 정치적 위기에 빠졌을 때 그가 존경하던 백범의 ‘도움’으로 위기를 넘기며 시작됐다. 金대통령은 67년 7대 총선에서 힘겨운 선거운동을 하고 있었다.朴正熙 정권은 야당의 ‘떠오르는 별’이었던 당시 金大中 의원을 낙선시키기 위해 대대적인 공세를 펼쳤다.집권당인 공화당의 물량공세로 金대통령의 지역구였던 목포는 흥청거렸다. 집권당의 전략적인 집중 공세로 金대통령의 3선은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다.그러나 그에게 ‘행운의 여신’이 나타났다.상대방 후보였던 김병삼(당시헌병 대위)씨가 백범 시해 사건에 연루됐다는 사실을 金대통령측에서 알아차린 것이다. 金洙振(66·현재 국민회의 당총재 특보)씨는 선거 열흘전쯤 김병삼씨 관련 내용을 담은 책을 준비했던 金龍熙(77)씨를 찾아가 金大中 후보를 도와달라고 부탁했다.金씨는 상대방 후보가 김병삼이라는 말을 듣고 도와주기로 했다.金씨는 李承晩 정권이 무너지자 안두희를 잡아 검찰에 넘긴 사람이다.그는 안두희의 고백과 사건 관계자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김병삼씨의 관련 내용을 담은 ‘이것이 진상이다’라는 책을 준비했다. 金大中 후보 진영은 절판됐던 이책을 비밀리에 다시 제작했다.투표 나흘전인 6월4일 목포역에 15만명 이상의 군중이 모였다.박순천 초대 신민당당수는 “공화당후보 김병삼씨는 백범암살을 뒤에서 조종한 사람입니다.그러한 사람이 어떻게 국회의원이 될 수 있습니까”라고 폭로했다.‘이것이 진상이다’라는 책 3만5,000부가 즉석에 배포됐다.선거분위기는 급변했다.6월8일 투표결과 金大中 후보가 당선됐다. 金大中 대통령은 백범 추모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왔다.그때의 간접적 도움 때문에 그런 것은 물론 아니다.백범에 대한 존경심 때문이다.67년 서울시가 효창공원내 백범묘소와 3의사(義士) 묘소중간에 골프연습장을 만들기 위한 공사를 했었다.국회건설위 소속이었던 그는 공사를 중단시켰다. 그는 백범기념사업협회 이사를 지내기도 했다.매년 백범 추모제에 참석해 왔다.남산에 백범동상을 세울 때도 자금지원을 했다. ◎초라한 ‘묘역 성역화’/담장교체·소나무 식재 기념관 건립 예산 부족/구청 녹지과 관리맡아 “국가관리 필요” 여론 金九 선생의 묘는 효창공원에 있다.이봉창·윤봉길·백정기 의사,이동녕·차이석·조성환 선생의 묘도 함께 있다.많은 사람들은 최고 지도자였던 백범을 비롯 7명의 애국지사가 안장돼 있는 선열들의 묘를 국립묘지화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서울시는 지금 효창공원의 장·단기 성역화 작업을 하고 있다.단기계획(97년∼99년)에 따라 담장 교체공사가 진행되고 있다.용산구청의 유동렬씨는 1,326m에 이르는 담장공사는 연말까지 마무리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소나무 600그루도 새로 심었다.호국이념을 상징하는 대형 조형물(높이 11.7m 폭3m)도 공원입구에 세울 예정이다.장기계획은 7명의 애국지사들을 위한 기념관 건립이다.하지만 예산이 문제라고 유씨는 말한다. 성역화 작업이 진행중인 효창공원은 그러나 국립 현충원(국립묘지)과 비교할 때 너무도 초라하다.국립묘지는 국가가 관리하지만 효창공원은 용산구청의 공원녹지과에서 관리한다.기능·고용직 공무원 7명이 관리인의 전부다. 백범기념사업협회의 선우진 상임이사는 金九 선생이 귀국후 45년 12월부터 49년 6월 암살당할 때까지 3년6개월간 숙소 및 집무실로 사용했던 경교장(京橋莊)도 원래의 모습대로 복원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기고/세계화시대의 백범/都珍淳 창원대교수·한국현대사 백범이 안두희에 의해 비운의 생을 마감하자,엄항섭은 그의 서거를 ‘달은 하나지만 뭇 강에 자신의 모습을 도장처럼 박아내는 월인천강(月印千江)’이라 표현하였다.세계화 시대에 아직도 우리의 가슴에 아로새길 민족주의자 백범의 월인천강은 남아 있는가. ○개방과 주체 선택 강요 한반도는 미국·일본·중국·러시아 등 강대국에 휩싸여 있어 선진 문물의 수입 등에서 적지 않은 장점도 있지만,사대와 식민 그리고 분단의 역사가 증거하듯 늘 강한 원심력이 작용하였다.따라서 한반도의 ‘역사적 화두’는 늘 대외적 개방과 민족적 주체를 겸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대개 어느 하나로 편향되는 경향을 띄었고,그 극단에 민족적 비극이 자리하고 있었다.개방과 선진만 쫓아가면 사대·식민·분열의 굴레로,주체와 자주만 강조하면 후진과 망국의 역사로 이어졌다. 그렇다면 현재는 어떠한가.지난해 말 나라가 환란(換亂)위기에 빠진 이후,이제 우리는 진정 세계화되어 가고 있는 지 모른다.삼척동자도 IMF을 운위하고,뉴스는 언제나뉴욕 월가(Wall Street)의 동향을 전하며,국내 증시 또한 이에 따라 춤추고 있다. 그러나 진정한 세계화는 민족현실에 굳건히 뿌리 내린 토대 위에서만 가능하다.때문에 작금의 현실은 백범이나 민족주의를 박물관의 골동품으로 보낼 것이 아니라,과거에 대한 추모를 넘어서 현재적 생명력으로 되살려 낼 것을 요구하고 있다. 세계화 시대에 민족 주체성을 확보하기 위한 최대의 과제는 남북의 화합과 통일이라고,누구나 이야기한다.그러나 그것은 단지 관습적·수식적 문구(文句)에 지나지 않고 생활력은 전혀 없는 실정이다.문제의 심각성을 체감하기 위해 최근 외국의 한반도 문제 권위자나 기관의 진단을 들어보자. ‘한반도의 통일을 지지하지만 문제는 시간’이라느니,‘북한이 붕괴하더라도 유엔 관리하에 두는 것이 효과적’이라느니,‘남·북한이 민주적 분단관리체제로 영연방과 같은 느슨한 연방(confederation)이 필요하다’는 등의 언급은 다름아닌 ‘분단체제에 대한 균형적 관리’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최근 정세에 대응하기 위한 ‘전술적 발언’이 아니라,역사와 구조를 지닌 ‘전략적 개념’들이다.북한이 강한 군사력으로 남한을 통일하려 했던 한국전쟁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나,소련·동구권의 붕괴 이후 남한이 우월한 경제력으로도 북한을 흡수하지 못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강력하고 일방적인 통일 한반도의 출현을 열강들은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현재 남북관계는 분명 ‘냉전적 대립’에서 ‘평화적 교류’로 나아가고 있지만,그것이 통일의 기초가 될지 분단의 장기 지속을 초래할 지는 매우 불투명한 상황이다.따라서 우리는 두번 깨어나야 한다.먼저 남북 사이에 누가누구를 삼킬 수 있다는 미몽에서 깨어나야 하며,다음에는 평화를 넘어 통일에 이르는 길은 자주적 노력 없이는 결코 불가능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낄 필요가 있다.강대국이 해줄 수 있는 최대치는 한반도의 화해와 평화에 대한 보장이다. ○강대국 역할 제한적 해방 직후 백범도 좌우·남북의 체제 대립적 정치구도의 한가운데 있었다.그러나 민족 분단의 위기가 박두하는 것을 목도하면서,그는 좌우·남북 대립의 구도 속에서 유실되었던 민족문제에 다시 주목하여 “조국이 없으면 민족이 없고,민족이 없으면 무슨 당 무슨 주의 무슨 단체가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호소하였다.민족을 위한 남북의 화해와 평화통일,이것이야 말로 백범이 남긴 월인천강의 핵심인 것이다.이후 백범이 노래한 시와 글도 모두 ‘자주적 평화통일’로 요약되거니와,그의 죽음도,그리하여 그의 부활도 모두 여기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과연 우리에게 남아 있는 백범의 모습은 어떠한가.정치적 입지나 정파적 이해관계를 위해 백범을 거론하면서도,그 생애의 총 귀결점인 ‘평화통일의 민족적 백범’은 허다하게 유실되어 있는 실정이다.백범은 자신의 미진한 바를 민족 앞에 바로 세웠으되,추앙한다는 우리는 백범를 다시 거꾸로 세우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가 없지 않다.
  • 국립묘지·열사릉 교환참배(김삼웅 칼럼)

    ○유족 상호방문 성묘토록 남한이나 북한이나 일제시대 민족해방을 위해 투쟁하다 돌아가신 애국지사들을 모시는 성지가 있다. 우리는 서울 동작동의 국립묘지가 있고 북한에는 평양근교 신미리에 애국열사릉이 있다.서울 국립묘지의 애국지사 묘역에는 상당수의 항일지사가 묻혀있고 1995년에는 임시정부 요인 묘역이 새로 조성되었다.박은식 신규식 노백린 김인전 안태국선생 등 임정요인 44명의 유해가 임정묘역에 안장되었다. 1986년 9월 완공된 평양의 애국열사능에는 김규식 조소앙 오동진 양세봉 최동오 홍명희 이기영 선생 등이 묻혀있다.이곳에는 이승만 정권에 의해 처형된 조봉암 선생의 가묘도 있다고 한다. 서울 관악산 줄기 43만평의 대지에 자리잡은 동작동국립묘지는 조선조 단종에게 충성을 바쳤던 사육신의 제사를 모시던 육신사(六臣祠)가 있었던 곳으로 공작이 알을 품고 있는듯한 상서로운 기맥이 흐른다는 명당으로 꼽힌다. 평양시내에서 서남쪽으로 2㎞정도 떨어진 곳에 자리잡은 애국열사릉은 오목한 분지가운데 돋아있는 곳에 위치한 전형적인 좌청룡 우백호의 배산임수(背山臨水)의 명당으로 알려진다. 국립묘지와 열사릉의 풍수지리를 소개하자는 것이 아니다.새정부가 출범하면서 남북관계에 숨통이 트이고 각계 인사들의 방북의 발길이 잦아진다.리틀엔젤스의 평양공연에 이어 재벌총수도 소떼를 몰고 판문점을 넘는다고 한다. 국가가 가장 어려웠던 시절에 조국해방을 위해 한마음이 되어 항일전선에 섰던 선열들이 분단과 함께 남북으로 갈리고 사후에는 ‘이산가족’이 된 것도 비극인데 자손들이 성묘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은 얼마나 가슴아픈 일인가. 애국선열에 대한 국민의 도리를 생각해서라도 국립묘지와 애국열사릉에 묻힌 독립지사들의 유족이 교환방문을 통해 성묘할 수 있도록 남북한 정부가 길을 터야 한다. 국립묘지에 안장된 애국지사의 유족으로 현재 북한에 생존한 사람도 있을 것이며,애국열사릉에 묻힌 독립지사의 유족으로 남한에 생존한 사람도 많을 것이다. 남북한 정부나 양측 적십자사가 나서서 뒤늦게나마 유족이 선대(先代) 애국지사들의 묘소를 찾아 성묘를 할 수있도록 하는 것이 참다운 보훈의 정신이고 국민의 도리라고 생각한다. ○항일지사는 민족동질성의 원형 분단 반세기를 넘기면서 남북한 사이에는 각가지 이질적 요인들이 켜켜히 쌓여가고 있다.이런 속에서 민족적 동질성을 찾는다면 일제강점기의 독립투쟁과 항일지사들의 존재가 아닐까 한다. 남과 북이 이념과 체제를 달리하면서도 풍광좋은 터를 골라 애국지사들의 묘역을 만들고 성역화하는 것도 이런 연유때문일 것이다. 남북한 정부는 애국지사들의 보훈정신에서,그리고 인도주의와 겨레의 동질성 회복차원에서 이 일을 조속히 성사시켰으면 한다.그리하여 오는 광복절이나 늦어도 추석에는 남북의 애국지사 유족들이 판문점을 넘나들며 국립묘지와 애국열사릉에 묻힌 조상을 찾아 참배하고 성묘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 白凡 재조명:2­1(정직한 역사 되찾기)

    ◎생애 재평가/利害­이념 초월… 독립­통일 헌신/애국단 의거·광복군 참전 지휘/상황논리 정치이익과 타협 배격/‘한국의 간디’ 역사성 부여해야 역사는 정직해야 한다.그러나 세계사는 일그러진 역사로 얼룩져 있다.세계사의 많은 갈등과 분쟁은 굴절된 역사의 산물이다.한국의 현대사에도 일그러진 역사가 있다.그중의 하나가 백범 金九 선생에 대한 잘못된 평가다. 백범의 독립운동은 과격한 테러에 의존했고 현실인식도 부족했다는 일부 지적이 있었다.그의 실패한 남북협상은 현실 정치가로서의 한계를 나타낸 것이라는 평가도 있었다.그러한 평가는 그러나 친일세력들의 식민사관과 백범을 죽인 권력집단의 인위적인 ‘평가절하 시나리오’의 한 부분일 뿐이다. 테러리즘 비난은 주로 ‘한인애국단’ 활동 때문이었다.백범은 애국단을 창설하고 애국단의 李奉昌 의사와 尹奉吉 의사의 의거를 지휘했다.그러나 애국단 활동을 테러리즘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일제 강점을 합법적 지배구조로 보는 민족 반역적인 친일 세력들의 식민사관에 지나지 않는다. 서울대학의 愼鏞廈 교수는 “애국단 활동은 침체된 독립운동을 부활시킨 독립운동사의 중요한 부분”이라고 강조한다.애국단 활동에 고무된 국내외 동포들은 임시정부의 중요성과 독립운동의 성과를 재인식하고 재정지원 등을 재개했다.그 결과 집세도 제대로 못내던 초라한 임시정부의 활동이 활성화됐다. 대외적으로는 중국의 신뢰와 협조를 다시 얻어 중국에서의 독립운동이 활성화된 결정적 계기가 됐다.1930년대 들어 중국에서의 독립운동은 꺼져 가는 불꽃과 같았다.일제가 조작한 1931년 7월의 ‘만보산사건(萬寶山事件)’으로 한국인에 대한 중국사람들의 증오와 적대행위가 만연되며 독립운동은 거의 불가능했다. 그러나 尹奉吉 의사의 의거는 일본침략군에게 상하이(上海)를 점령당한 중국인들의 울분과 한을 풀어준 통쾌한 일이었다.중국 중앙군 사령관 장제스(蔣介石)는 “중국군 30만명이 해내지 못한 일을 한국청년이 해냈다”고 극찬했다.그후 중국은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에 협조적이었다.애국단의 의거는 특히 국제도시 상하이·도쿄 등에서 일어났기때문에 한국민족의 독립운동을 전세계에 알리는 중요한 역할도 했다. 백범은 국제사회의 냉엄함도 잘 알고 있었다.망명중 제국주의 열강이 중국을 어떻게 수탈하는 지를 체험을 통해 알았다.자주적 독립의 중요성을 절감했다.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광복군의 참전을 서두른 것도 자주적 독립을 위한 전략이었다. 그러나 역사는 보다 빨리 바뀌었다.광복군이 참전하기 전에 일본이 항복한 것이다.그는 백범일지에서 “일본의 항복은 내게 기쁜 소식이라기보다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일이었다.수년간 애써 참전 준비를 한 것도 다 허사다.걱정되는 것은 우리가 이번 전쟁에서 한 일이 없기 때문에 장래 국제간에 발언권이 박약하리라는 점이다”라며 아쉬워했다.프랑스의 드골 장군이 전후 프랑스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연합군에 앞서 파리 입성을 고집했듯이 백범도 국제정세의 흐름을 정확히 읽고 있었다.그는 일본과의 전쟁에 주도적으로 참여해야 자주독립이 보장될 것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백범은 귀국후 독립운동의 연장선상에서 민족통일을 위해 헌신했다.통일한국만이 진정한 민족의 광복이라고 강조했다.일부는 백범의 이러한 통일노력을 공산주의 본질을 잘 몰랐던 현실 정치가로서의 한계라고 매도했다.그러나 그는 독립운동과정에서 이념적 갈등을 경험하면서 공산주의의 실체를 잘 알고 있었다.특히 중국에서 국공(國共)분열이 얼마나 참담한 비극이었는 지를 직접 눈으로 보았다.결국 분단국가가 성립되면 같은 민족간의 갈등과 전쟁을 피할 수 없다고 판단,통일한국의 건설을 위해 남북협상을 강행했다. 그는 정치적 이익과 이념을 초월하여 독립과 통일을 위해 일생을 받쳤다.그의 위대함은 상황이 불리한 줄 알면서도 정치적 이익을 위해 타협하지 않고 민족의 미래를 생각한 점이다. 그의 일생은 애국의 역사였다.그러나 현실정치는 그에게 참된 역사성을 부여하지 않았다.그러한 오류는 고쳐져야 한다.백범은 현대사의 가장 위대한 지도자로 재평가되야 한다.그는 ‘한국의 간디’라 할 수 있다.백범에 대한 올바른 평가는 정직한 역사를 되찾는 일이다.정직한 역사는 민족의 밝은 미래를 보장한다.◎암살의 진상/이승만 정권­軍部 합작품 1949년 6월26일.그날은 비극의 일요일이었다.민족의 위대한 지도자 金九 선생이 암살된 것이다.분노와 애도의 물결 속에 온 겨레는 슬픔에 잠겼다. 백범은 7월5일 온 국민의 애도 속에 효창공원에 안장됐다.그의 죽음에 대한 진상도 함께 묻혀 버렸다.자신의 집무실 경교장(京橋莊)에서 당시 포병소위였던 안두희에게 피살됐으나 그 배후는 베일에 가려져 왔다. 안두희는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그러나 1년도 못되어 석방된 후 육군에 복귀,대위까지 진급했다.후에 국회에서 그 사실이 문제되자 제대했다.그러나 자유당 정권의 비호아래 암살의 ‘정당성’을 주장하기도 했다. 李承晩 정권이 4·19혁명으로 무너지자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민간차원의 운동이 일어났다.그러나 61년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난 후 진상조사활동은 거의 중단됐다.그 이후에도 활발한 활동은 없었다.곽태영·권중희·노송구씨 등에 의한 안두희 추적만 있었을 뿐 국가적 차원의 조사는 없었다. 본격적인 진상조사는 92년 11월5일 ‘백범 김구선생 시해 진상위원회(위원장 이강훈)’가 국회에 청원서를 내면서 시작됐다.국회의 청원심사소위원회(위원장 강신옥 의원)는 95년 12월18일 조사보고서를 발표했다.보고서는 안두희의 우발적 단독범행이 아니라 면밀하게 모의되고 조직적으로 역할 분담된 정권적 차원의 범죄였다고 결론내렸다. 안두희는 거대한 조직과 역할에서 하수인에 지나지 않았다.암살사건은 고급정보 브로커였던 김지웅이 전반적으로 조율했다.그의 지시를 받는 홍종만은 암살 하수인들을 관리했다.이들은 모두 정권적 비호를 받았다. 그러나 암살의 일차적 배후는 군부쪽 이었다.암살명령은 장은산 당시 포병사령관이 내렸다.김창룡 특무대장은 사건후 적극 개입했다.채병덕 총참모장,전봉덕 헌병부사령관,원용덕 재판장,신성모 국방장관 등은 사후 처리를 주도했다. 백범 암살에서 가장 큰 쟁점은 李承晩 전 대통령과 미국의 관련성이다.李 전대통령은 정권적 차원의 범죄라는 차원에서 도덕적 책임이 있다.사건후 개입한 것도 확인됐다.미국도 암살사건의 내막을 알 수 있었을 것으로판단된다. ◎안두희 ‘처단’ 朴琦緖씨/“정의 일깨우고 싶었습니다”/힘겨웠던 독방생활/김구 선생 떠올리며 감내/어려운 사람 잘 사는 세상 왔으면 朴琦緖(49)씨는 버스 운전기사다.보통 사람으로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다.그러나 그에게는 또다른 모습이 있다.金九 선생 암살범 安斗熙를 죽인 ‘정의의 사나이.’ 그는 정의라는 말을 좋아한다.安斗熙를 죽인 것도 사회의 정의를 일깨우기 위해서였다고 말한다.“위대한 민족 지도자 金九 선생을 시해한 사람이 제명을 다하는 것은 역사의 정의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1996년 10월23일.安斗熙는 朴씨의 ‘정의의 봉’에 맞아 죽었다.“옳은 일을 했다고 생각했습니다.죄의식은 크게 없었습니다.하지만 고뇌의 시간도 많았습니다.그러나 누군가 이 일을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3년형의 판결을 받았다.감시 카메라가 있는 독방에서 생활했다.“교도소 생활은 힘들었습니다.추위는 정말 고통스러웠습니다.귀와 발이 동상에 걸렸습니다.그러나 고통의 순간마다 金九 선생의 힘들었던 감옥생활을 생각했습니다.金九 선생과 비교하면 나는 얼마나 편한가라고 위로했습니다.”성당에 다니는 그는 성경과 백범일지,역사책 등을 많이 읽었다고 말했다. 그는 3월13일 사면으로 청주감옥을 나왔다.잠시 중단했던 운전대를 다시 잡았다.부천에 있는 소신여객 사람들은 그를 환영했다.“회사 노조원들의 석방운동이 고마왔습니다.광복회와 백범 김구선생 기념사업협회의 석방운동도 감사했습니다.” 출옥후 그의 집에는 조그만 변화가 나타났다.“아이들(딸 2명 아들 1명)의 보는 눈이 달라졌습니다.그저 평범한 아빠로 보던 그들이 존경의 마음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살인자의 아내’라는 부담을 느끼던 아내도 자랑스런 남편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평범한 운전기사로 남기를 원한다.그는 오늘도 피곤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태우고 김포공항과 월미도 사이를 달린다.“나의 버스를 타는 사람들은 대부분 어려운 사람들입니다.그런 사람들도 잘 살 수 있는 올바른 사회가 실현됐으면 좋겠습니다.”올바른 사회를 만드는 것이 金九 선생의 큰 뜻을 살리는 길이라고 그는 말했다.
  • 반민특위의 좌절과 개혁세력(金三雄 칼럼)

    초하의 6월이 열리면 우리는 6·25한국전쟁과 반독재 6월 민중항쟁을 생각한다. 한국 현대사의 물굽이를 바꾼 큰 사건이다. 그런데 6월이면 잊어서는 아니 될 또 하나의 사건이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앞의 두 사건에 못지 않는 사건이다. 단재 신채호의 필법을 차용하여 ‘한국현대사의 제1대사건’이라면 무엇일까. 해방 건국 분단 전쟁 4월혁명 5·16쿠데타 10월유신 10·26사태 5·17쿠데타 광주항쟁 여야정권교체 등, 안정된 사회라면 1세기에 한번 겪을까말까할 일을 우리는 숨돌릴 틈도 없이 무수히 치렀다. 그 ‘다사다난(多事多難)’중에 정신사적으로나 정치사회적 측면에서 국민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사건의 하나는 이승만 정부의 반민특위 해체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로써 민족을 배반한 반역자들을 하나도 처벌하지 못하고 친일세력이 건국과정과 그 이후 권력의 핵심으로 자리잡으면서 사회정의와 민족정기가 설자리를 잃은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학계에서 ‘6·6사건’으로 불리는 친일경찰의 반민특위 습격사건은 1949년 6월6일 상오에 자행되었다. ‘웃어른(이승만)’의 양해를 받은 무장경찰은 관할인 서울 중부서장 윤기병의 지휘로 반민특위 사무소를 습격하여 요인들을 체포하고 기물을 파괴했다. 시경국장 김태선 내무차관 장경근 종로서장 윤명운 등 일제경찰출신들이 중심이 된 만행이었다. 이날 경찰에 끌려간 특위 직원들은 심한 고문을 당하고 많은 관련 자료가 폐기되었으며 지방의 특위 사무소도 피습되어 업무가 마비되었다. ○청산하지 못함 반민세력 국민적 환호와 기대를 받으면 진행되던 반민특위의 친일파 청산작업은 이렇게 하여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반면 친일파들은 이승만과 결탁하여 뿌리를 내리고 군사정권과 문민정부를 거치는 동안 가지를 쳐서 기득세력권을 형성하게 되었다. 반민특위를 와해시키려는 친일세력의 공작은 집요했다. 이들은 반민특위인사들을 ‘빨갱이집단’이라 음해하면서 정신적 지주인 김구를 살해하고 국회프락치사건을 일으켜 항일독립운동 세력을 제거했다. 친일파들이 독립운동가들을 완벽하게 제거한 6·6사건의 진상은 독재치하에서 묻혀지고, 식민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부끄러운 역사가 반세기 동안 이어지게 된 것이다. 50년만의 정권교체로 집권하게 된 김대중 정부의 책임과 사명은 막중하다. 현실적으로는 경제를 희생시켜 IMF체제에서 해방되는 일이며, 역사적으로는 반민특위의 좌절이래 전도된 가치관과 사회정의를 바로 잡는 일이다. ○개혁, 반민특위 정신으로 친일세력에 뿌리를 둔 수구세력은 그동안 키워온 인적 물적 기반을 바탕으로 여전히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들은 김대중 정부의 개혁을 훼방하고 국가적 위기상황에도 눈을 돌린채 기득권 유지에 연연하면서 사사건건 개혁의 발목을 잡는다. 반민특위의 좌절로 지난 반세기의 역사가 독재와 불의로 점철되었듯이 김대통령의 개혁이 실패하면 역사는 또 얼마나 가혹한 시련을 안겨줄 것인지, 수구세격은 이를 외면하는 것이다. 하루빨리 김대통령의 개혁의지를 뒷받침할 컨트롤 타워로서의 개혁주체(세력)가 형성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청산할 것은 청산하고 개혁할 것은 개혁하여 국난을 극복해야 한다. 뼈저린 반민특위 좌절의 역사는 한번으로도 족하다.
  • 혼미의 인도네시아… 총은 ‘약자’가 쏜다(박갑천 칼럼)

    인도네시아 사태는 암담하고 처참했던 우리 80년대를 떠올리게 한다. 학생시위와 과격 진압에 분노하는 시민의 합세와 장갑차와 한겨레 가슴에 불을 뿜는 총부리와….다만 방화·약탈 등 일부 시민들의 빗나간 난동만은 우리 경우와 다르다.결과는 모르나 대통령 하야설은 문득 40년전 李承晩을 연상케도 한다. “그 이승만의 4·19때 최루탄이 있었다면…”하는 가상론이 곧잘 나온다.피를 본 군중의 가세로 해서 파국은 더 빨리 다가왔기에 하는 말들이다.5·18광주민중항쟁은 어떤가.진압군의 무차별 발포와 잔혹행위가 사태를 악화시키고 만 것 아니던가.그동안 최루탄 망국론도 나온 터이지만 사실은 그후의 수많은 시위에서 인명살상을 줄였다는 것이 최루탄 예찬론.그 최루탄을 넘어선 인도네시아 총소리는 마침내 쏜자의 조총(弔銃)으로 되들리게 될 것인지도 모른다. 부부싸움만해도 불뚝 성질내며 막말하는 남편은 아내한테 지는 법이다.백성을 네뚜리로 보면서 총기를 쓰는건 그런 남편에 비유할 수 있다.총기보다 무서운 것은 민심이기 때문이다.(31장)이 “무기는 상서롭지 못하다”(兵者不祥)고 말한 뜻도 그런 원리에서 출발되었다 할 것이다.는 계속하여 “남의 나라와 전쟁하며 사람 죽이기를 좋아하는 자는 천하에서 뜻을 얻지 못하는 법”이라고 덧붙인다.한데 하물며 내겨레 가슴에 총을 겨누는 일이겠는가. 중국·인도·미국에 이은 세계 제4위 인구대국 인도네시아.13세기말께 기세등등 주변국을 굽잡아나간 원(元)나라 쿠빌라이의 침공군을 물리친 싱고사리왕국도 그들 조상이다.그에 이은 모조파이트왕조는 한때 동남아시아를 꺼두르는 황금시대를 구가하기도.오늘날 수도 자카르타거리나 대학이름에 보이는 ‘하얌=우르크’‘가자=마다’는 그 왕조때의 왕과 그를 보좌한 재상이름을 딴 것이다. 모조파이트왕조가 있었던 자바에서는 인도네시아를 ‘섬과 섬의 나라’란뜻으로 ‘누산타라’라 부른다.인도네시아란 이름은 독일 인류학자 A.바스티안이 ‘인도의 섬들’이란 뜻으로 ‘인도스 네소스’(Indos Nesos)라 부른데 기원한다고 한다.수도 자카르타는 ‘자카트라’라고도 하는데‘승리의 도시’라는 뜻이다. 천혜의 자원 가멸진 저력의 나라 인도네시아.승리의 도시 자카르타에서 울릴 승리의 소리는 어디서 어떻게 날 것인지.우리경제와도 관계가 깊은 나라이기에 우리의 관심도 유다르다.
  • 民權단체 등장과 반작용(秘錄 南柯夢:6)

    ◎독립협회 결성에 ‘魚頭鬼面의 무리’ 비난/高宗의 해산령에도 활동 계속하자/徐載弼 등 주동자 17명 투옥/李承晩은 탈옥미수로 사형선고/하야시日公使 上奏로 특사 석방 ‘남가몽’의 저자 정환덕(鄭煥悳)이 경북 영천(永川)에서 처음 상경한 것은 1897년 가을,나이 40때였다.이 때는 갑신정변이 일어난지도 13년이 지나 세상은 온통 개화사상으로 들떠 있었다.1894년 일제는 동학란을 구실로 청일전쟁을 일으켰고 김홍집 등 개화파를 시켜 갑오개혁을 단행했다.그리고 이듬해는 을미사변을 일으켜 명성황후를 시해했다.바로 그 다음해가 정환덕이 상경한 때였다. 정환덕은 상경하기 두달 전 길몽(남가몽)을 꾸었다.황학사의 한 암자에서 수도하고 있는데 하루는 꿈에 산신령이 나타나더니 “공부 더 할 필요없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1896년 徐載弼이 결성 “광무 원년(1897년) 7월 16일 밤 황학사(黃鶴寺) 동편 운수암(雲樹庵)의 동대(東臺)에 누워 잠이 들었는데,흰 도포를 입은 산신령이 청려장(靑藜杖·명아주 대로 만든 지팡이)을 짚고 내려와 마루에좌정한뒤 말하기를 ‘자네가 수학(象數學-易學)에 마음을 쏟은지 벌써 7년이나 되었으나 글의 요령(참뜻)이 어떠한 것인지 알지 못하고 글만 줄줄 읽어온 것으로 안다.그러니 글의 행간에 숨겨진 뜻을 해득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더니 산신령이 청려장을 짚고 돌연 “나라가 망했다”고 개탄하는 것이 아닌가. “슬프게도 금수강산이 벌써 다른 사람의 손아귀에 들어갔으니 애석하도다! 이런 때를 당하여 비록 주(周)나라 800년을 일으킨 강태공(姜太公)이 나타나도 안되고,한(漢)나라 4백년을 보좌한 장자방(張子房)이 나타난다 하더라도 아무 쓸데가 없다.하물며 자네가 약간의 역학을 배웠다 하여 큰 운수(大數)를 잡을 수 있다고 자신하겠는가.헛되이 정력을 대수에만 집착하지 말고비록 작은 운수(小數)에 지나지 않다 하더라도 잡는 것이 좋을 것같다.너의 신상에는 앞으로 십년간 통운(通運)이 있으니 부지런하고 게으르지 말라.시국의 변화를 따라 잘 대처하면 자신과 처자를 온전하게 보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꿈을 꾸고 선뜻 서울에 올라와 보니독립협회 회원들이 아우성을 치며 거리를 누벼 장안은 온통 난장판이었다. “사람같지 아니한 무리(匪類),즉 어두귀면(魚頭鬼面)의 무리들이 작당을 하여 단체를 만들고 이름을 독립협회라 하고 광화문 앞에 모여서 밤낮으로 선동하고 있었다.이 때문에 소란상태가 이르지 않는 곳이 없으므로 문안이나 성밖을 막론하고 온 서울의 인심이 점점 물끓듯 하여 장차 군자는 설땅이 없을 것같은 조짐이 보였다.” 독립협회는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미국으로 망명한 서재필이 11년만에 귀국,1896년 7월 2일 결성한 단체였다.우리나라 최초의 민권당(民權黨)이요,민주주의의 시작이었다.지금 많은 역사가들이 독립협회를 찬양하고 있으나 당대의 절대 다수는 그렇게 보지 않았다. 예컨대 정성우(鄭惺憂)라는 선비는 상소하기를 “갑신정변때 망명했던 역당들이 갑오 6월의 난을 일으켰으며,다시 을미 8월의 대역(大逆)을 양성한 것이다.소위 개화의 무리들이 외국으로 망명하였다가 환국,둔갑해서 말을 바꾸기를 부국강병이라 하고 외국인을 불러들여 대변(大變)을 일으켰다.흉도(兇徒) 서재필이 외신(外臣)이라 자칭하며 국권에 간여하고 있는 것은 무슨장난이며 독립신문이라는 것은 정부를 훼방하는 글 뿐이요,의리를 저버린 것이다.이것은 다만 나라를 전복시키려는 음모다”고 통렬히 비난하였다.그러니 ‘남가몽’이 독립협회 회원을 ‘비도’라 했다해서 상식에 어긋나는 말은 아니었다. “이때에 황상폐하(고종)께서는 특별히 교서를 내리시어 ‘지금 너희들이 이같은 어려운 시대를 당하여 죄망에 걸리어 스스로 알지 못하는 곳에 빠져들고 부득이하게 핍박되어 평시와 다르게 되었으나 내가 마땅히 용서해주고 놓아줄 것이다.각자 돌아가 농사짓는 자는 농사짓고 장사하는 자는 장사에 부지런히 힘써 생업에 안착한다면 어찌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는가’고 경고하여 깨우쳤다.” ○영은문 헐고 독립문 건립 그러나 독립협회 회원들은 해산하지 않고 한결같이 사단을 야기하였다.이에 고종과 순종이 크게 진노,직접 광화문루 위에 올라가 교시를 내려 말하기를 “짐(朕)이 너희 무리들의 범죄를 풀어서 놓아주고 각자 돌아가 생업에 안착할 의사를 누차 깨우쳐 주었으나 듣지 않으니 너희 무리들은 도무지 정치 밖에 있는 백성으로 국민이 아니다.사세가 부득이하니 너희들을 차별없이 소멸시키고 말겠다” 하고 대포를 성루에 높이 달아매고 위력을 보이니 독립협회 회원들은 해산하고 말았다. “내가 서울에 갔을 때는 차차 평온해지고 시골도 점점 진정상태에 접어들고 있었다.그러나 남은 재앙이 이어져 수해와 기근이 겹치게 되고 도적이 날뛰어 천재(天災)와 시변(時變)이 해마다 일어나지 않는 때가 없었다.겉으로는 조금 안정을 되찾는 듯했으나 안으로는 점점 비상시국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서재필은 먼저 사대주의의 상징인 영은문을 헐고 독립문을 세웠다.이어 모화관의 편액을 독립관으로 바꿔 달았다.봄부터 독립관에서는 치열한 토론회가 열렸는데 모두가 전직 판서·참판·승지 등 고위층들로 가마를 타고 나타나 앞마당은 거마로 꽉 찼다.또한 토론을 처음 하는 사람들이라 발언권을 얻어도 말이 나오지 않아 그냥 연단에 서있다 내려가는 사람도 많았다. 하루는 토론 주제가 “길에 가로등을 달아 도적을 없앱시다.”였다.한 사람이 일어서서 “가로등이 비치면 도적이 은신할 데가 없으니 매우 유용합니다”고 주장했는데 반대론도 만만치 않았다.어떤 사람은 “도적이 어디 길에서 도적질 합디까.남의 집 캄캄한 다락이나 곳간에서 도적질하기 때문에 가로등을 세워봐야 소용없습니다”고 하였고,다른 사람은 “가로등으로 밤도둑은 막을 수 있으나 밤에 등불을 켜고 남의 집에 들어가는 명화적(明火賊)에게는 가로등이 소용없고 또 청천백일하에 선량한 백성의 고혈을 빨아먹는 낮도둑(부정부패 관리)에게는 백촉,천촉,억만촉의 등불을 켜도 막을 수 없습니다.여러분!”이라고 소리쳤다. ○법무대신 韓圭卨이 감형 때마침 회장에 몰래 숨어들어와 있던 내부협판(內部協判·내무부 차관) 김중환(金重煥)이 이를 듣고 곧장 고종에게 달려가 “독립협회에서는 국왕을 비롯한 모든 정부요인들을 절국대도(竊國大盜)라 몰아붙이고 있습니다”라고 과장했다.고종은 대로하여 해산령을 내렸고 그래도 해산하지 않고 이듬해 여름까지 세번이나 직소를 올리자 어용단체 황국협회(皇國協會)로 하여금 몽둥이로 독립협회원을 두들겨 패고 감옥에 가두고 말았다. 이때 독립협회 주동자는 18명이었는데 윤치호를 뺀 17명 모두가 서소문 감옥에 갇혔다.그중에서도 이승만(李承晩)은 가장 과격한 분자라 사형선고가 내려졌으며 한번 탈옥하다가 붙잡혀 들어왔으므로 꼭 죽어야 될 신세였다.그런데 하늘이 도왔는지 한규설(韓圭卨)이 법무대신이 되더니 그를 감형하였고,1904년 일본공사 하야시(林權助)가 고종에게 상주(上奏)하여 특사로 풀려났다.하야시는 훗날 초대 대한민국 대통령을 살려내리라는 것을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 여순반란사건(대한민국 50년:12)

    ◎20개월 앞서 치른 ‘6·25 리허설’/진압에 미군 고문단 관여… 한국전 미 개입 레일 깐셈/주한미군 철수 연기·국가보안법 제정 촉발한 효과/좌파세력의 투쟁방식 게릴라전으로 전환한 계기로 “경찰이 쳐들어 오고 있다” 1948년 10월19일 여수시 신월동 국군 제14연대.늦가을의 어둠이 짙게 깔린 하오 8시쯤 14연대의 연병장에서는 고함소리가 적막을 갈랐다.연대 인사계 지창수 상사의 목소리였다. “경찰을 타도하자.조선인민군이 남조선해방을 위해 38선을 넘어 남진중에 있다”.지상사의 선동에 연병장에 모여든 장병들은 “옳소”를 연발했다.반대한 하사관 3명은 즉석에서 사살됐다.연병장에 모인 2천5백여명의 병력은 순식간에 무장하고 시내로 뛰쳐나갔다.여순사건은 이렇게 일어났다. ‘경찰이 쳐들어 온다’는 선동으로 일어난 여순사건은 당시의 시대상황 탓이다.해방 5개월뒤인 46년 1월부터 각 시도별로 연대 창설 및 모병업무가 시작됐다. ○병력 절반 이상이 좌익 이른바 ‘향토경비대’.14연대는 여순사건 5개월전에 창설됐지만 당시의 경비대는 경찰의 보조기관에 불과하다는 게 일반인들의 인식이었다.특히 경찰은 허술하게 조직된 경비대원들을 오합지졸로 간주하는 시선을 감추지 않았고 군인들은 일제의 주구였던 경찰이 자신들을 폄하하는 것이 못마땅했다.게다가 무기·장비·복장·급식 등 모든 처우에서 경찰에 비해 크게 뒤떨어져 불만은 팽배해 있었다. 46년부터 48년 사이에 많은 젊은이들이 군에 지원했다.새 조국의 건설을 위해,친일경력의 면죄부를 받기 위해,또는 공산혁명을 일으키기 위해 군을 선택했다.향토경비대 입대과정에서는 신원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하지만 처우 등의 불만때문에 군을 그만두거나 탈영하는 이가 적지 않아 충원작업은 어려움을 겪었다. 14연대가 여순사건의 진원지였던 까닭은 병력의 절반이상이 좌파였기 때문이다.미군정의 무장단체 해산령과 남로당의 조직적 침투로 군은 적화돼 있었던 것이다.군정의 해산령은 좌익계열의 분열을 가져왔으며 좌파들은 경찰의 추적을 피해 군대로 물려들었다.남로당은 사병들에게 ‘반경의식’을 고취시켜 미군정의 물리적 기반인 경찰과 군의 반목을 조장하려 했다.다시말해 군을 정치투쟁의 공간으로 활용하려 했다는 것이다. 지창수 상사가 연병장에 서기 직전,당세포 40여명과 함께 무기고를 미리 점령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좌익세력때문에 가능했다.좌익은 비상계엄령이 발령된 제주치안 확보를 위해 연대가 출동하기 전날밤에 여순사건을 일으켜 좌익반란을 본토에 확대하려 했다는 게 당국의 시각이다.국무총리 겸 국방장관인 이범석은 여순사건 진압 직후 “공산주의자들은 여수에서 반란을 일으켜 제주사태를 남한 각지에서 전개하려 했다”고 지적했다. 거리로 뛰쳐 나간 반군들이 여수시가지로 진입한 것은 5시간여 뒤인 20일 새벽 1시20분.이들은 여수읍내 좌익단체와 학생단체에 무기를 지급했고 상오 3시쯤에는 여수경찰서를 점령했다.반란군은 이어 주요기관을 완전 장악했으며 거리에는 온통 인공기의 물결을 이뤘다.여수 인민위원회가 복구됐고 인민재판소는 체포된 경찰,국군장교,지주,그리고 우익인사들을 처형했다.이 때숨진 경찰관은 5백여명.반란군은 식량창고를 개방해 쌀배급을 실시했으며 창고에서 흰 고무신을 꺼내 주민들에게 나눠줬다.이런 인민행정은 14연대 병력이라기 보다는 남로당과 연계된 토착 좌익세력에 의해 이뤄졌다.보복정책과 동시에 선심정책이 이뤄졌던 것이다. ○식량창고 탈취 쌀 배급 반란군은 상오 8시 순천행 통근열차를 타고 북상하기 시작해 순천읍을 장악했다.이어 광양,곡성,구례,고흥 등 동부 전남지역을 손아귀에 넣었고 경찰은 반군이 오기도 전에 도망하는 일도 벌어졌다.군인들의 봉기는 토착 좌익세력들과 어울려 거대한 민중봉기로 발전했다. 반란군이 순천에 진입할 즈음 서울에서는 긴급히 비상회의가 소집됐다.국방장관 이범석,주한미군 임시군사고문단 로버츠 준장,경비대총사령관 송호성 준장 등이 참석한 회의는 작전지도부를 광주에 급파하기로 했다.21일에는 송호성 사령관이 반군토벌사령관으로 임명됐다.전군 지도부가 총력대응 태세로 대응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토벌군은 반란 사흘째인 22일 계엄령을 선포한 가운데 진압작전에 나섰으나 초기에는 별다른 성과를얻지 못했다.군 자체가 지휘불능과 병력 붕괴상태가 나타나기도 했다.가까스로 순천 탈환작전에 성공한 토벌군은 23일 여수 진압에 나섰다.송호성 사령관은 부산에서 급파된 병력 지원을 받아 바다에서 박격포 포탄을 쏟아 부었다.하지만 박격포 포사격의 미숙과 반군의 강력한 저항으로 엄청난 사상자만 낸 채 실패하고 말았다. ○AP통신기자도 사망 송사령관은 24일 2차 여수진압작전을 직접 폈으나 오히려 자신이 반군의 기습으로 부상만 입었다.AP통신기자가 총탄에 맞아 숨진 것도 이 때였다.두차례의 실패를 맛본 토벌군은 반란 8일째인 26일 대대적인 여수 탈환작전에 나섰다.이날 정오쯤 경비정 6척이 여수반도를 포위한 채 배위에서 엄청난 박격포 포격을 가했다.여수시내는 불바다로 변했고 5분의 3은 잿더미로 바뀌었다.하지만 토벌군의 작전이 개시될 즈음 반란군들은 모두 시내를 빠져나간 뒤였으며 학생들과 좌익단체 회원들만 남아 있었다.27일에야 여수 시내를 완전 탈환함으로써 9일동안의 여순사건은 진압됐으나 2천3백여명의 목숨을 앗아갔다.2천8백여명이 군사재판에 회부됐다. 여순사건으로 국가보안법이 제정됐으며 주한미군 철수도 연기됐다.전남 동부지역을 휩쓴 여순사건은 좌파세력의 투쟁방식이 대중투쟁에서 게릴라투쟁으로 바뀐 것 뿐이었다.지리산으로 들어간 반군세력 주력들은 벌교 등지에서 유격전으로 빨치산 투쟁을 벌였다.해방후 좌우익이 반란과 진압으로 대규모 충돌한 여순사건은 2년뒤 한국전쟁을 예고하는 전주곡이었다.다시말해 여순사건은 한국전쟁의 리허설이었고,전쟁은 사실상 이미 시작됐던 것이다. 50년이 지난 오늘도 여순사건의 상흔은 여전히 지워지지 않고 여수·순천주민들에게 남아 있다.여수·순천 시민들은 여순사건을 ‘여순병란’으로 바꿔 불러주기를 바라고 있다.시민들의 봉기가 아니라 ‘향토 경비대 14연대’의 반란이라는 것이다. ◎미군기 정찰­진압 병력 수송 참여/주한 미 24군 ‘G­3보고서’ 입수 확인 여순사건에서 미국의 역할은 결정적이었다.주한 미군의 보고서는 당시의 상황을 사태발생과 진압 등 5개 분야에 걸쳐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다.기록자는주한 미24군 G­3.제목은 ‘여수와 대구 등지에서의 반란사’로 돼 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주한미군은 이승만 대통령의 승인없이는 사건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워 놓고 있었다.주한미군 임시군사고문단(PMAG)의 로버츠 단장은 미국인들이 직접적인 전투에 참여하지 말 것을 명령했다.따라서 미군은 지휘역할을 맡았다. 주한미군 군사고문단 G­3의 제임스 하우스만 대위,G­2의 존 리드 대위 등은 미군의 직접 개입없이 가장 빠른 시일내 반란군을 포위·진압할 수 있는 작전을 수립했다.이에따라 하우스만 대위와 리드 대위 등은 송호성 경비대총사령관,육본 정보참모부장 정일권,정보국장 백선엽 등과 함께 광주로 직접 내려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미군의 C­47 수송기는 한국군 병사,무기,기타 물자를 대구에서 실어 날랐으며 주한미군 군사고문단의 정찰기들은 반란기간 내내 여순지역을 감시했다. 미군 비행사들은 여수의 반란 세력이 2개의 군 중대와 1천여명의 민간인으로 구성돼 있는 것으로 보고했다.여순사건이 2년뒤 한국전쟁의 리허설이었듯이 미군의 한국전 참전 조짐도 이때부터 시작됐던 것이다.
  • 이상은 선생 전집/한국의 중국철학 새로운 평가

    ◎국내 신 유가철학 선구자… 수필 등 실어 ‘한국의 신 유가철학 1세대의 선구’로 꼽히는 경로 이상은 선생(1905∼1976)의 방대한 학문적 업적이 4권의 책으로 정리돼 나왔다.동양철학 전문출판사인 예문서원에서 펴낸 ‘이상은선생전집’이 그것이다.‘당대 신유학’이라 불리는 현대 유가철학은 중국철학을 대표하는 조류이다.20세기초 서양문화와의 대립과 수용의 소용돌이 속에서 당시 지식인들은 전통문화에 대해 비판하는 한편 동양철학의 진로와 역할을 모색했다.그런 바탕에서 현대철학의 주된 흐름으로 새롭게 떠오른 것이 바로 ‘당대 신유학’이다. 경로는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북경대학 철학과를 졸업한 뒤 고려대학교 교수,학술원 회원,중국학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그는 학행을 겸비한 지식인의 전형을 보여줬다.하나의 예로 경로는 6·25전쟁의 와중에서도 장기집권을 기도하던 이승만 정권이 계엄령을 선포하고 마음대로 헌법을 개정한 부산정치파동이 일어나자 ‘중화민국과 원세개’라는 제하의 논설을 발표해 이승만 정권의 불법을 비판했다.이로써 그는 최초의 필화사건을 겪었다. 그러나 경로가 남긴 자취는 무엇보다 한국의 중국철학과 한국철학 연구의 선하를 이룬 것으로 평가받는 그의 학문세계에서 빛난다.경로의 학문방법과 내용은 당대 학자들의 그것을 뛰어넘는 것이었다.그는 현대인과 유리된 채 전래의 ‘성균관’이나 ‘향교’안에만 머물던 ‘유교’를 본래의 모습인 ‘유학’으로 바꾸려고 노력했다.또한 유학의 의의를 비판의식과 가치의식,그리고 문화정신에서 찾았다.유학자로서의 경로의 문제의식은 항상 과거를 되살려 현대에 도움을 주는 데 있었다.이번에 나온 전집에는 한국과 중국철학에 대한 그의 주요 논문들이 거의 망라됐으며 시론·수필·번역문 등 다양한 저술들이 포함됐다. 1권과 2권은 한국철학편.일제시대를 거치면서 부정적으로만 인식돼 오던 전통학문에 대한 새로운 평가를 내린 ‘한국에 있어서의 유교의 공죄론’,근대화문제와 관련된 한국유학의 개신을 다룬 ‘유교의 이념과 한국의 근대화문제’,본격적인 한국철학 논문으로 평가받는 ‘사칠논변과 대설·인설의의의’ 등의 글이 실렸다.3권은 중국철학 관련 논문모음이다.맹자와 공자를 중심으로 전개된 유학논쟁의 핵심문제인 성론에 대해 분석한 ‘맹자의 성선설에 대한 연구’를 비롯해 유가윤리를 새롭게 해석한 ‘상하관과 차별관’,유일한 도가철학 논문인 ‘허무의 동양적 특성’,‘순자의 인심도심론’등이 담겼다.마지막 4권은 실천하는 지식인으로서의 시대적 고뇌와 인간적 체취를 느낄 수 있는 각종 수필과 시론 형태의 글들이 주류를 이룬다.“공자가 자신의 수제자인 안회를 가리켜 학문을 좋아하는 제자라고 칭찬할 때,안회는 ‘불천노 불이과’,곧 노여움을 옮기지 않고 허물을 두 번 다시 범하지 않는다고 했다.인간의 정서생활에 있어서 가장 조절하기 어려운 감정이 바로 분노이다”(‘학문과 인생’) 경로는 한 편의 에세이를 통해서도 생활이상에 충실하려는 유학의 정신을 우리에게 일깨워준다.
  • 선거제도:하(대한민국 50년:11)

    ◎67년 총선 131개 선거구 중 86곳 무효 소송/71년 대선선 지역감정 촉발 박 후보,94만표차 DJ눌러/80년 대선 ‘체육관통대선거’ 1표 기원 100% 찬성 기록도 그릇된 선거의 과정과 결과는 민주주의의 역사를 후퇴시키기도 제자리 걸음으로 남아있게도 한다. 60년 3·15 부정선거의 과정은 4·19혁명이라는 결과를 낳았다.또 4·19가 낳은 제2공화국은 허약한 권력기반으로 인해 5·16군사쿠데타를 낳았다.5·16은 유신체제를 낳았고 유신은 체육관 선거라는 기형적 선거제도를 잉태했다.유신은 필연적인 결과로 5·17이라는 사생아를 낳았다.87년 국민들의 욕구 분출로 대통령 직선제라는 정상적인 선거형태가 이루어지기까지는 30년가까운 세월이 흘렀다.이어 97년 대선까지 또 10년의 세월이 흘러 마침내 여야 정권교체,후유증없는 공명선거라는 민주발전의 결과를 얻게됐다.한번 잘못끼워진 단추를 바로잡는데 역사는 자그만치 40년 가까운 세월을 요구했다. ○‘한지붕 두가족’ 민주당 분당 60년 4·19혁명후 7월 29일,민의원과 참의원 선거가 실시됐다.이어8월 12일,민·참의원 합동 간접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구파인 윤보선이 당선됐다.그러나 8월 17일 민의원 본회의에서 구파인 김도연 국무총리인준동의안이 부결됐다.이틀뒤인 19일에야 신파인 장면 국무총리인준동의안이 가까스로 가결됐다.내각제의 제2공화국이 탄생되는 순간이었다.그러나 구파 대통령과 신파 총리의 갈등은 앞으로의 정국불안을 예고하는 신호탄이었다.‘한지붕 두가족’의 민주당은 끝내 민주당과 신민당으로 갈라섰고 몰락의길을 걷게 된다.당시 곽상훈 민의원의장이 당적을 떠나며 한 고별사는 다가올 상황을 극명하게 내다보고 있다.“민주당의 신·구파 지도자들은 파벌의성쇄에 앞서 당과 국가의 영고에 책임을 져야 한다.민족의 영웅이 될 수도있고 민족의 죄인도 될 수 있다.제1공화국은 이승만의 아집으로 망했다.제2공화국은 당신들의 아집과 파쟁으로 나라가 멸망할 수도 있고,당신들의 아량과협조로 욱일승천할 수도 있다”” 새벽 총소리와 함께 시작된 5·16은 왜곡된 선거문화의 새로운 시작이었다.이후 92년 대선 이전까지 정치권은선거가 끝날때마다 부정선거와 지역감정이라는 후유증에 시달렸다. 67년 5월3일 실시한 제6대 대통령 선거 결과 박정희 대통령이 신민당의 윤보선 후보를 1백16만여표차로 누르고 당선됐다.선거 결과에 대해 신민당은 관권,금권,투·개표 부정 등 사상 유례없는 부정선거 때문이었다고 주장했다.신민당은 이어 6월8일 실시된 7대 국회의원선거도 계획적 전면부정선거라고 주장하며 무려 8개월동안 선거무효 투쟁을 벌였다.전국 131지역구 가운데 당선 및 선거무효 소송이 제기된 지역은 3분의 2에 달하는 86개 지역에 달했다. 70년 40대 기수론과 함께 신민당 대통령후보로 부상한 김대중은 여세를 몰아 공화당의 박정희 대통령을 압박했다.3선개헌으로 권력연장의 토대를 마련한 박대통령은 71년 4월 27일 실시된 제7대 대통령선거에서 김대중 후보를 94만여표차로 눌렀다.7대 대선은 전형적인 조직 대 바람의 선거였다.안보논쟁이 가열되고 선거 열기가 달아오르면서 영남과 호남사이의 지역감정이 선거이슈로 떠오르기 시작했다.여당의 지역감정 촉발에 김후보도대구 유세에서 “대중이가 대통령 자격은 있으나 전라도 출신이라서 못찍겠다면 그런 표는 안 받아도 좋다.63년 선거에서 박대통령은 전라도 지지표로 당선됐다“고 열변을 토하기도 했다.이후 김대중 후보는 73년 동경 납치에서부터 80년 내란 음모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고 미국으로 망명하는 등 엄청난 정치적 박해를 받게된다. 3선개헌을 하면서까지 힘겹게 권력을 연장한 박대통령은 드디어 72년 10월17일,그나마 유지되고 있던 헌정의 초시계를 원점으로 되돌리고 만다.이른바‘10월 유신’.비상계엄하에 국회는 해산되고 정치활동이 중지되는 헌정중단의 사태가 빚어졌다. ○85년 총선 신민당 돌풍 유신헌법에 따라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가 그해 12월15일 실시됐다.통대의원 후보자 선정은 해당지역의 경찰서장과 시장 군수,정보책임자 등으로 구성된 지역협의회의 자료를 토대로 관계당국이 결정했다. 72년 12월 23일 장충체육관.통대의원 2천359명 중 단 2표의 무효표를 제외한 전원이 박정희 대통령을 8대 대통령으로 선출했다.이후 통대의원들은 9대 박정희,10대 최규하,11대 전두환 등 세번이나 체육관 대통령 선출 거수기 노릇을 해야했다.79년 10월 26일.유신의 심장은 내부의 총격으로 무너졌다.이어 80년 ‘서울의 봄’은 신군부의 5·17확대 계엄과 함께 얼음장 밑으로 사라졌다.그해 8월 27일 통대의원들은 총투표자 2천525명 가운데 2천524명이 단독 후보인 전두환에게 찬성표를 던졌다.그나마 한명은 반대가 아닌 기권이었다.100% 찬성은 공산국가에서나 벌어지는 투표행태만은 아니었다는 기록을 남기게 됐다. 내연하던 민주화 바람은 85년 2월 12일 제12대 총선에서 ‘신민당 돌풍’으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창당한지 불과 한달도 안된 김영삼과 김대중 공동지분의 신민당이 지역구 50석을 얻었고 전국구까지 합치면 67석의 제1야당으로 부상했다.다음날 조간신문들은 ‘신당태풍’‘신당바람’이라는 제목으로 머릿기사를 장식했다.민정당은 놀랐고 신민당은 환호했으며 여당의 1중대 2중대로 불리우던 민한당과 국민당은 침통했다.워싱턴타임즈,뉴욕타임즈,르몽드 등 외신들은‘신민당의 부상은한국민들의 민주화 열망을 대변한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이런면에서 ‘2·12총선’은 억눌려 있던 국민들이 깨어나고 있음을 보여주었고 또 ‘체육관 대통령’ 선출제도의 변화를 감지케하는 전환점이었다.멈춰버린 역사의 시계바늘이 제자리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한 순간이었다.이 역사의 시계바늘은 드디어 87년 정권이 국민에게 항복한 6·29선언으로 직선제대통령선거가 부활됐다.87년,92년 대선을 거쳐 우리 선거사는 97년에 이르러서야 여야정권교체라는 최초의 경험을 갖게된다. ◎선거관리 산증인 김유영 선관위 사무총장/“97년에 와서야 선거의식 성숙”/집권자의 확고한 공명의지가 관건 남조선 과도정부의 군정장관이었던 윌리엄 에프 딘 소장은 1948년 3월3일자 행정명령으로 ‘국회선거위원회’를 설치하고 위원 15명을 임명했다.이승복,백인제,이갑성 등이 15인 위원이었다.이어 치러진 5·10 총선이 대한민국최초의 선거였고 선거관리 역사의 시작이었다. 제2공화국은 헌법상 독립기관인 중앙선거위원회 필요성을 제기했다.이에따라 60년 6월17일 개별법률로서 선거위원회법이 공포됐고 헌법상 독립기관인 중앙선거위원회가 설치됐다.63년 1월 16일 선거위원회법은 선거관리위원회법으로 대체됐고 닷새후인 21일 역사적인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창설됐다.초대 위원장에는 사광욱대법관이 취임했다. 63년 창설때부터 지금까지 선거관리의 현장을 한번도 떠난적이 없는 김유영 중앙선관위사무총장은 현대 선거관리사와 개인사의 궤적을 같이한다.김총장은 “정부여당에 의한 조직적인 3·15 부정선거는 결과적으로 4·19와 5·16으로 이어져 역사의 흐름을 바꿔놓았다”고 선거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김총장은 “3·15 이후 60년대 선거는 조직적인 정부의 부정선거는 없었지만 탈법·관권·금권선거가 부정적인 선거풍토로 자리잡았다”면서 “당시는 여야 야나 가릴것 없이 선거법이 있어도 교통법규 정도로 여기는 경시풍조가 만연했다”고 당시의 선거풍토를 회고했다. 김총장은 88년 치러진 여소야대 4당체제하에서의 동해 국회의원보궐선거가 선거문화 발전의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고 보고있다. 그는 “선거 사상 최초로 4당 국회의원후보와 사무장 전원이 고발되고 후보매수로 한 정당의 사무총장이 구속된 혼탁상은 선거풍토 개선의 계기를 제공했다”고 말했다.이후제정된 통합선거법에 따라 치러진 97년 12월 19일 대선은 선거사상 유례없는 공명선거로 평가했다.김총장은 “92년과 97년 대선을 제외하고는 한번도 부정선거 시비가 없었던 적은 없었다”면서 “97년 대선은 정당과 후보자가 결과를 깨끗이 승복했고 국민들도 자유스런 분위기에서 자신들의 의사를 표현했다“”고 말했다.김총장은 “국민들의 선거의식은 이제 성숙단계에 접어들었다”면서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집권자의 확고한 공명선거의 의지”라고 강조했다.
  • 도산 배우기/최홍운 논설위원(외언내언)

    겨레와 나라 위해 한 평생을 열정적으로 살다 간 도산 안창호 선생(1878∼1938)의 정확한 사망시간에 대해서는 기록마다 다소 차이가 있다.주요한의 ‘도산 전기’에는 “1938년 3월10일 밤,시계가 12시를 땡땡 치는 것과 동시에 도산의 맥박과 호흡이 끊어졌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1938년 3월10일자로 종로경찰서장이 경기도 경찰부장과 경성지방법원 검사정,각 경찰서장에게 보낸 경종고비(경성 종로경찰서 고등계 비밀문서) 제 2468호 ‘안창호의 사망에 관한 건’을 보면 0시 6분으로,그리고 동대문경찰서장이 작성한 경동고비(경성 동대문경찰서 고등계 비밀문서) 제 1070호 ‘정치 요시찰인 사망에 관한 건’에는 0시 5분으로 돼 있다. 1∼6분의 차이가 있어 당시 시계의 정확도에 문제가 있음을 보여주지만 그것이 무슨 문제겠는가.민족의 큰 별이 지금으로부터 꼭 60년 전에 떨어진 사실만은 분명히 전해주고 있다. 10일 상오,선생의 서거 60주년을 맞아 서울 강남구 신사동 도산공원 묘소에서는 신임 김의재 보훈처장과 권쾌복 광복회장,흥사단원 등 200여명이 모여 추모식을 가졌다.비록 조촐했지만 그 어느 때보다 뜻깊은 추모식이었다. 선생께서 그토록 염원했건만 결국 보지 못하고 ‘경성제국대학 병원’에서 쓸쓸히 숨을 거두었던 조국의 광복이 이룩된 지 53년,그리고 나라가 세워진지 50년이 되었건만 우리는 지금 6·25이후 최대 국난으로 일컬어지는 IMF관리하의 경제위기를 맞고 있다. “밥을 먹어도 독립을 위해,잠을 자도 독립을 위해 살아야 한다”고 외친 민족주의 사상가 도산 선생의 가르침이 이토록 가슴에 와 닿은 적도 없었을 것이다. 선생의 가르침 가운데 특히 되새겨야 할 부분은 ‘서로 돕고 사랑해야 한다’는 뜨거운 민족애와 ‘폭력보다 정신력이 앞서는 독립운동’을 주창하고 실천한 평화주의,수감중 온갖 고초를 겪으며 심문을 받는 중에도 ‘조선민족 독립의 대업을 이루려는 것이 흥사단과 동우회의 목표’라고 분명히 밝힌 용기와 정직성일 것이다. 상해 임시정부 수립 때는 결코 자신이 나서지 않고 이승만을 앞세웠던 점도 정부요직 인사철인 요즘 생각해볼 일이다.‘무실역행’. 정신적인 실력뿐아니라 현실적인 실력도 길러 실천하는 길이야말로 지금 우리가 할 일일 것이다.
  • 선거제도:상(대한민국 50년:10)

    ◎5·10 첫 총선 ‘애국심 투표율’ 95.5%/56년 3대 정·부통령선거 자유당서 불법 자행/60년 3·15땐 온갖 부정 총동원… 4·10혁명 유발 민주주의 발전은 선거의 성숙도와 정비례한다.헌정 초기에 성숙되지 못한 권력은 독재의 풍토를 조성했다.이는 급기야 부정선거를 초래했고 결과로 4·19혁명을 불러왔다.5·16군사 쿠데타와 유신헌법에 따른 기형적인 선거제도를 거쳐 드디어 97년에 이르러서야 여야 정권교체라는 최초의 민주적 선거혁명을 경험하게 됐다. 1947년 11월 14일.유엔총회에서는 ‘유엔 감시하에 남북한 총선거를 실시하고 그 국회가 정부를 수립케 하기 위해 유엔임시한국위원단을 파견한다’는 미국의 제안이 43대 0,기권 6으로 가결됐다.그러나 파견된 유엔한국위원단은 북한에 주둔한 소련 점령군의 방해로 남북 총선을 실시할 수 없음을 유엔에 보고했다.유엔은 1948년 2월6일,가능한 지역내의 선거 실시 권한을 한국위원단에 부여했고 이에 따라 역사적인 제헌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되게 됐다. ○26개 정당·단체서 1명씩 드디어 1948년 5월 10일.남북분단과 내전을 우려하는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총선이 실시됐다.당시 언론에는 ‘애국의 단심을 결집한 감격의 투표’ 등의 제목으로 분위기를 전했다. 이날 투표에는 7백84만871명의 유권자 가운데 7백48만7천649명이 참여해 95.5%라는 놀라운 투표율을 기록했다.첫 총선에는 무소속 417명을 비롯해 이승만의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등 48개 정당 및 사회단체에서 모두 948명의 후보가 등록,평균 4.4대 1의 경쟁률을 나타냈다.이 가운데 단 한명의 입후보자를 가진 정당 단체도 무려 26개나 됐다. 유엔임시한국위원단은 이날 선거에 대해 “완전히 만족하지는 않으나 한국의 통일과 주권을 향한 일보의 진전이 될 것이며 투표과정도 대체로 원활히 진행됐다”고 유엔에 보고했다.미군정청의 하지 중장도 “한국의 자유선거는 민주주의의 승리”라고 평가했다. 이같은 평가에도 불구하고 대구 광주 보성 화순 등 각지역에서는 좌익 등 남한 단독선거를 반대하는 세력들에 의해 통신망 파괴와 경찰서 습격,선거공무원 피살 등소란사태가 빚어졌다.당시 선거를 전후한 폭동 및 폭행사건 등은 총 1천47건으로 집계됐다. 선거 결과 정원 200명중 4·3민중항쟁으로 제주도 2개구가 제외되어 198명이 당선됐으며 북한을 위해 100석은 유보시켰다.정당별 분포에서는 무소속이 85석을 차지했으며 다음으로 이승만의 대한독립촉성회가 55석을 얻었다.김성수의 한국민주당이 29석,대동청년단 12석,조선민족청년단 6석,대한독립촉성농민총연맹 2석,대한노동총연맹 1석을 차지했다.김구의 한독당후보들은 무소속으로 출마해 30석을 얻었다. 초대 국회는 제헌헌법을 제정한뒤인 1948년 7월20일 상오 10시 신익희 국회부의장의 사회로 초대 대통령선거를 국회의원들의 간접선거로 실시했다.이승만 180표,김구 13표,안재홍 2표,무효 1표로 이승만을 초대 대통령에 선출했다.이어 부통령 선거에서는 이시영이 당선됐다. 38선에서 소규모 충돌사건이 자주 일어나고 5월 위기설이 정국을 불안케하는 가운데 1950년 5월30일,제2대 총선이 실시됐다.제2대 총선은 대한민국 정부 주관으로 실시한 첫 선거였다.6·25 한국전쟁의 와중에서도 선거는 실시됐다.야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끝내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발췌개헌안의 통과로 1952년 8월5일 제2대 대통령 및 부통령 선거가 실시돼 대통령에는 자유당의 이승만,부통령에는 무소속의 함태영이 당선됐다.직선제 대통령 선거는 이승만에게 독재의 길을 열어 주었다.이 선거에서 이승만정권은 야당에게 선거운동을 할 시간을 주지 않기 위해 선거 준비기간을 17일로 단축시켰다.당시 선거법은 선거일 40일전에 선거일자를 공고하도록 돼 있었으나 52년의 선거만은 예외규정을 두었다. ○유권자보다 많은 표도 1956년 5월 15일 치러진 제3대 대통령과 부통령 선거는 자유당에 의한 갖가지 관권선거와 부정선거가 자행됐다.선거 10일전 신익희 후보의 급작스런 사망으로 대통령에는 이승만 후보가 당선됐지만 부통령에는 자유당의 이기붕 후보를 누르고 민주당의 장면 후보가 당선됐다.이는 자유당 정권의 실정에 대해 제한적이나마 국민들의 심판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대중 민주주의의 발전으로 평가된다.‘못 살겠다 갈아보자’는 간결하면서도 핵심을 담은 민주당의 구호는 자유당 정권에 대한 국민들의 정서를 대변했다. 1960년 3월 15일 실시된 제4대 정·부통령 선거는 자유당의 집권 연장이냐,최초의 여야 정권교체냐 하는 갈림길이었다.이미 대통령선거에 앞서 58년 5월2일 실시된 총선에서는 정통야당 민주당의 승리로 끝났다. 대선에 앞서 1월 29일 민주당 대통령후보인 조병옥 박사가 신병 치료차 미국으로 떠나자 이승만 정부는 7월까지 여유가 있던 선거일자를 3월15일로 앞당겨 실시한다고 공고했다.조박사에게 선거운동 기간의 여유를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그러나 미국의 월터리드병원에 입원중이던 조박사는 2월15일 심장병으로 사망했고 야당에서 대통령후보를 내지못함에 따라 선거전은 부통령선거전 양상으로 변했다. 자유당은 이대통령이 후계자로 지목한 이기붕을,민주당은 장면을 각각 부통령후보로 내세웠다.선거전이 불꽃을 튀기는 가운데 이미 4·19의 전조들이 곳곳에서 불거져 나왔다.일요일인 2월 28일 대구 수성천변에서 열린 민주당의 정견발표회에학생들이 집결할 것을 우려해 당국은 학생들의 일요등교를 강행했다.이에 반발한 3백여명의 경북고 학생들은 학교를 뛰쳐나와 경북도청앞에서 시위를 벌여 주동학생 30여명이 구속됐다.3월5일과 14일에는 서울과 마산 등에서 소규모 학생시위가 잇따랐다. 3월15일.투표개시전에 4할의 무더기 투표가 나오는가 하면 투표함 검사를 거부하고 집단 대리투표를 하는 등 민주주의의 초석인 자유선거와 비밀선거는 완전히 파괴된 가운데 투표가 실시됐다.개표과정에서도 올빼미표가 등장했다.민주당의 투개표참관 포기로 투표와 개표를 마음대로 조작한 자유당은 이승만과 이기붕의 득표를 지나치게 많이 발표해 총유권자수를 초과하는 지역도 있었다.대구의 한 선거구에서는 이기붕이 5천표,장면이 32표로 발표된 곳도 있었다.이날 밤 자유당은 긴급 간부회의를 열어 이승만은 80%,이기붕은 70∼75% 정도로 지지율을 조정하도록 지시하기도 했다. 선거 결과를 믿는 국민들은 아무도 없었다.민심은 자유당을 떠났다.부정선거를 통해 국민들의 기본권을 유린당한 이승만정권은 결국 4·19학생의거로 역사의 뒷전으로 사라지는 종말을 맞았다. ◎여,50년 2대총선 야 중진 ‘좌경용공’ 조작/미 대사관 비밀 주간전문 ‘조인트위커’서 확인 선거에 있어서 상대를 음해하는 흑색선전은 우리의 선거사와 역사를 같이한다.최초의 총선에서 부터 가장 최근인 97년 12월 대선에까지 흑색선전은 여지없이 등장했다.주요선거때마다 ‘용공’문제가 이슈화됐으며 지난 대선때는 ‘북풍’문제로 까지 이어졌다.그러나 시민의식이 성숙되어가면서 흑색선전은 효과가 급격히 떨어지고 있다.이는 우리 선거문화 발전의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주한 미대사관은 한국정부의 주도아래 처음으로 1950년 5월30일 치러진 제2대 총선에서 “윤치영 이범석 임영신 등 대한국민당 지도부가 야당인 민국당 중진들을 ‘좌경용공세력’으로 조작하여 결정적인 타격을 입혔다”고 본국에 보고하고 있다. 주요현안에 대한 사건보고와 논평을 담은 미대사관의 비밀 주간전문 조인트 위커(JOINT WEEKA)에는 “총선을 앞두고 한국정부와 정당들은 갈수록 공익과 신문 등에 신경을 쓰고 있다”면서 “상대당을 누르기 위한 루머도 난무하고 있다”고 당시 상황을 묘사했다. 미 대사관측은 “특히 민국당은 각 선거구에서 후보당 일백만원까지 지원해주었다.48년 선거때와 달리 민국당은 각 선거구마다 한 후보씩만을 지원하기로 계획하고 있다”고 보고했다.또 “대한국민당은 혼란을 야기하고 민국당을 누르기 위해 지역구마다 한사람의 후보를 지원하는데 덧붙여 70명정도의 ‘새도우’후보(비밀공천자)들을 지원한다는 소문을 냈다.따라서 적은 수의 후보를 미는 정당은 갈수록 줄어들었다”고 보고하고 있다.돈선거와 함께 상대당을 혼란시키고 같은 정당내에서도 서로를 의심케하기 위한 흑색선전이 동원됐다는 얘기다. 보고전문은 관권선거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경찰은 48년때와 마찬가지로 선거가 자유롭고 비밀리 진행될 것이라는 기대에도 불구하고,선거결과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라고 부정적인 견해를 나타냈다.
  • 의회정치의 시련(대한민국 50년:9)

    ◎49년 무장경찰대,국회반민 특위 습격 폭거/친일파 대거 구속되자 이승만 “특위활동 중지” 지시/‘프락치사건’국회부의장 등 15명 무더기 구속 사태도 이승만 한사람의 고집으로 하룻밤새 의원내각제가 대통령제로 바뀌기는 했어도 대한민국 의정 50년의 문을 연 제헌국회는 정치의 중심무대였다.1948년 5월31일 개원한 제헌국회는 의회민주주의의 이상을 지향했다.필요한 권한이 주어졌고 의사진행은 민주적이었다.의원들간에 횟수경쟁이 벌어질 만큼 발언도 자유로웠다.이승만 대통령도 국회의 건의나 요구가 있을 때마다 국회에 출석,의원들의 질의에 답변하고 주요법안 심의때는 정부의 입장을 직접 설명하는 등 국회를 존중했다. 그러나 이승만이 초대내각 구성에서 원내 최대정파인 한민당을 배제한 것을 계기로 정부와 국회는 불신과 갈등의 관계로 접어들었다.의정 초기 정부와 국회의 대결은 대부분 국회의 승리로 귀결됐다. ○지방자치법 폐기 일방통고 1948년 8월에 시작해 이듬해 4월까지 계속된,지방자치제 실시여부를 둘러싼 힘겨루기에서 국회가승리를 거둔 것은 당시 행정부에 대한 입법부 우위의 정치구도를 상징하는 사건이었다.이때만 해도 정부와 국회의 대결은 권한의 유무나 헌법의 해석 등 입헌주의의 틀 안에서 이루어졌다. 하지만 지방자치 문제에서의 패배를 고비로 정부는 이 틀을 깨려 들었다.정부는 국회가 폐회하기를 기다려 1948년 5월12일 지방자치법 폐기를 일방통고했다.정부의 재재의 요구가 처리되지 않았기 때문에 지방자치법은 계류중인 상태였으며 따라서 국회의 폐회로 자동폐기됐다는 게 정부측이 내세운 어거지 논리였다.이때부터 이승만 정권은 노골적인 국회탄압에 나섰다.갓 싹을 틔운 의회민주주의에 시련이 시작됐다. 제헌국회때 정부와 국회간 대결은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 문제에서 정점을 이루었고 이의 전개와 결말은 이후 대한민국 의정 50년사의 성격을 규정하는 결정적 잣대로 작용했다.일제하의 친일파 및 민족반역자 처벌문제는 농지개혁과 함께 건국이후 떠오른 최대과제중의 하나였다.국회는 헌법제정과 내각구성을 마친 직후인 1948년 8월5일 이를위한 특별법기초위원회를 설치하고 한달만인 9월7일 반민족행위처벌법(반민법)을 통과시켰다.이에 따라 국회내에 특위가 설치되고 법원과 검찰에는 특별재판관,특별검찰관으로 구성된 특별재판부가 구성됐다.특위활동은 이듬해 구체화해 49년 1월8일 친일자본가 박흥식을 필두로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을 속속 체포했다. 반민특위가 활동에 나서자 정부내 친일파세력은 필사적으로 저항했고 저항의 선두에는 행정및 정치적 기반을 이들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이승만이 섰다.이승만은 특위활동이 활발해지자 반민법 개정을 요구하는 특별담화 발표(1월10일),체포된 친일경찰 노덕술에 대한 석방요구(1월24일),반민법 개정안 제출(2월15일),반민특위 활동의 중지 및 특경대 해산 지시(4월16일) 등으로 특위를 계속 압박했다. ○“남로당과 연결” 전격 구속 그럼에도 특위가 6월4일 서울시경 사찰과장 최운하,종로서 사찰주임 조응선을 체포하는등 고삐를 늦추지 않자 이틀뒤 무장경찰대가 반민특위를 습격하기에 이르렀다. 아울러 당시 정부와 국회의 관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이 국회 프락치사건이다.정부와 국회가 극한대결로 치닫던 5월20일 소장파의원 3명이 국가보아법 위반 혐의로 전격 구속됐다.이유는 이들이 남로당과 연결되어 국회에서 프락치활동을 했다는 것이었다.이어 8월14일 소장파의 좌장격인 국회부의장 김약수 등 의원 12명이 추가구속됐다. 이같은 국회프락치사건은 반민특위의활동 및 이후 정부와 국회의 관계에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 이사건의 정치적 배경은,당시 수사총책인 검찰총장 권승렬이 국회에서“이사건에 물적 증거라는 것은 없습니다마는…,다소는 있습니다마는…,대개 물적 증거가 박약한…서로 연락해서 논의한 사건은 사람의 말에 의해서 판단하는 것밖에 없습니다”(49.5.23 국회속기록)고 한 보고에서 유추해 볼 수있다.그때 미국·영국 등 주요 우방은 반민특위 습격과 국회프락치사건을 ‘이승만의 뜻’으로 보았음이 최근 발굴한 자료에서 밝혀지기도 했다. 어쨌든 국회프락치사건으로 입법부 우위를 떠받쳐온 힘의 원천인 소장파의원들은 몰락하고 소장파가 주도한 반민특위 활동도 마찬가지로 힘을 잃게 됐다.또 이 사건은 정부가 정치적 반대자들을 친공으로 몰아 제거하는길을 트는 출발점이 됐다.국회는 반민족행위의 공소시효를 단축하는 개정안을 7월6일 이승만의 요구대로 통과시켰고 이로써 반민특위 활동은 사실상 전면중지됐다. 소장파가 제거된 이후 국회는 원내 제1세력인 민국당이 중심이 되어 행정부를 견제하기 위한 내각책임제 개헌을 추진했다.하지만 개헌은 1950년 3월14일 국회에서 부결돼,국회의 패배로 결말나고 이를 고비로 국회우위 시대는 종식을 맞았다. ○“행정부 견제” 내각제 추진 제헌국회 2년새 벌어진 일련의 사건은 민주정치의 기반인 국회의 행정부종속을 초래,행정부 만능인 권위주의 통치가 이땅에 뿌리내리는 씨앗이 됐다.그결 과 비상계엄령과 백골단 등에 의한 공포분위기 속에 기립표결로 헌법을 바꾼 2대 국회의 발췌개헌,민의의 대표인 국회의원들을 소수점으로 계산한 3대국회의 사사오입개헌 등 파행이 이어지다 끝내 1961년 5·16 군사쿠데타,72년 유신,80년의 군사쿠데타 등 세 차례 헌정중단의 비극으로까지 연결됐다. 제헌국회는 의회민주주의의 가능성과 시대적 한계를 동시에 드러냈다.다양한 정파로 구성됐지만 친일파와 지방자치 문제의 처리에서 보듯 초정파적 단결력으로 정부를 제압하는 힘을 과시했다.사안에 따라 연합과 대립의 관계를 형성,민의의 대변기구로서 시민사회의 다양한 이해와 갈등을 신축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구조를 갖추었던 셈이다.이런 점에서 제헌국회는 의회민주주의의 가능성을 확인시켜준 소중한 경험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1949년의 일련의 사태는 이러한 가능성을 좌절시킴과 동시에 합법적인 정치활동의 공간,즉 정치민주화의 폭을 크게 제약했다.반세기 가깝게 우리 정치를 옥죄어온 권위주의 체제는 이때 이미 싹튼 것이다. ◎미 “국회 프락치사건 이승만의 뜻”/미군정 사법부근무 프란켈 보고전문서 확인 이승만 대통령은 헌법에 규정된 입법부의 독립에 관해 자기중심적이고 편의주의적인 인식을 가졌다. 미군정 당시 사법부와 경제협조처(ECA)에 근무한 에른스트 프란켈은 국회프락치사건을주의깊게 관찰한 결과를 에버렛 드럼라이트 주한미대사관 참사관에게 전달했다.국회프락치사건 재판이 한창 진행중인 1950년 3월22일 드럼라이트는 미 국무부에 프란켈의 보고를 전문으로 보냈다. 이 보고에서 프란켈은 재판의 공정성과 관련해 “검사는 고문에 따른 자백에 의존하고 판사들은 변호사가 신청한 증인채택을 거부하는 등 재판이 편향되게 진행됐다”고 주장했다.이어 “재판장은 기소된 의원들이 비록 ‘좋은’일을 했더라도 남로당 지시에 따른 것이라면 불법”이며 특히 “미군철수를 요청하고 국군의 북진통일을 반대한 것은 범죄”로 보았음을 밝혔다. 프란켈은 또 이승만을 “자신의 권위와 지도력을 보장하는 한 국회를 구성한 정당과 개인들이 어떤 주장을 제기해도 수용한 반면 분단에 관련한 문제나 체제기반을 침식하는 정치적 반대활동은 결코 용인하지 않았다”고 평가했다.결국 미국은 애초부터 국회프락치사건을 정치적인 것으로 파악했음을 시사해 주는 것이다. 한편 이보다 앞서 반민특위 습격사건이 발생한지 나흘뒤인 49년 6월10일 영국의 서울총영사 C. 홀트는 어네스트 베빈 외무장관에게 보낸 전문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반민특위 본부 습격을 지시했다”고 보고했다. 미·영 양국의 주한 외국관들이 본국에 보고한 이같은 내용들은 그동안 일부에서 제기해온 국회프락치사건의 행정부 작위설을 뒷받침하는 귀중한 자료들이다.
  • 국민의 정부 출범­취임사에 담긴 정책방향

    ◎경제정책/전문화된 재벌·내실있는 중기 육성/계열사 3∼6개로 축소… 공존 토대 마련/부당한 내부거래 차단·투명경영 유도 국민의 정부에서는 재벌(대기업)에 대한 개혁이 경제정책의 핵심과제로 확실하게 자리잡았다. 김대중 대통령은 25일 취임사에서 격렬한 어조로 재벌개혁의 당위성과 필요성을 역설했다. 김대통령은 “국민의 정부는 대기업과 이미 합의한 개혁을 반드시 관철시켜 기업의 고질적인 병폐를 청산할 것”이라고 했다. 기업의 투명경영,계열사간 상호지급보증 금지,건전한 재무구조확립,핵심기업의 설정과 중소기업과의 협력,지배주주와 경영자의 책임체제 확립이 재벌개혁을 위한 5대 과제로 제시되고 있다.계열사간 부당한 내부거래를 없애고 사외이사 제도를 도입하려는 것은 이러한 개혁을 위한 조치들이다.그 동안 막강한 영향력은 행사해 왔지만 책임은 지지 않았던 회장실과 기획조정실을 폐지하도록 하려는 것도 재벌개혁의 수단들이다. 30대그룹은 오는 2000년 3월 말까지 계열사간 빚보증을 완전히 없애야 하고 재무구조 개선약정을당장 26일부터 주거래은행과 체결해야 한다.재벌회장(오너)들에게는 무엇보다 김 대통령이 강조한 지배주주와 경영자의 책임이 실질적인 부담이 될 것이다.김 대통령이 “대기업에 자율성은 주겠지만 지배주주와 경영자가 경영을 잘못하면 책임은 묻도록 하겠다”고 말한 것은 기업오너들에게 권한과 책임을 같이 지도록하라는 것이다.회장이 경영을 하려면 실제로 계열사의 대표이사 자격으로 하라는 게 새정부의 뜻이다. 재벌들은 주력업체 3∼6개만 남기고 계열사도 정리해야만 한다.김 대통령은 “잘못 하다가는 나라가 파산할지도 모를 위기를 겪는 요인 중 하나는 대기업들이 경쟁력없는 기업들을 문어발처럼 거느렸기 때문”이라고 재벌들의 계열사 정리를 강렬한 톤으로 촉구했다.중소기업 지원과 농어민을 위한 정책도 새 정부의 중요한 경제과제로 꼽히고 있다.김 대통령이 “중소기업을 집중적으로 지원해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다같이 발전해 나가도록 하겠다”면서 “농어민들의 소득을 높이겠다는 약속을 5백만 농어민에게 하겠다”고 분명히 말한 것은주목된다. 박정희 정권 때부터 대기업 위주의 성장정책을 펴왔다면 앞으로는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같이 발전하고 공존하는 쪽으로 경제정책의 방향을 확실히 바꾸겠다는 의미다.김 대통령이 시장경제주의에 바탕을 둔 철저한 경쟁의 원리를 지켜나가겠다고 한 것은 부실한 기업은 억지로 살리지 않고 퇴출시키는 게 바람직하다는 뜻이다. ‘대중경제론’은 시장경제를 원칙으로 하되 재벌의 전문화와 중소기업육성을 두축으로 해 펼쳐지게 됐다. ◎대북정책/정상회담엔 신중… 비정치분야 협력 확대/4자회담 통한 집단안보체제 구축 주력 김대중 대통령은 25일 취임사에서 상호무력 불사용, 흡수통일배제,남북간 화해와 협력추진 등 대북 3대원칙을 천명하고 남북기본합의서이행과 이를 위한 특사교환,정상회담을 제의했다. 이는 김대통령이 평소 피력해온 대북정책이 그대로 담겨있는 것이다. 특히 남북기본합의서의 실천을 위해 특사교환을 제의함에 따라 지난 93,94년 개최됐다가 북측의 ‘서울 불바다’발언으로 중단된 남북간 특사교환을 위한실무접촉이 재개될 가능성도 점쳐지고 있다. 특사교환은 93년 북한이 먼저 제안한 바 있어 김대통령의 이번 제안은 북한측에서도 큰 부담없이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라고 정부의 한 당국자는 전망했다. 김대통령은 또 북한이 원한다면 정상회담에도 응할 용의가 있다고 밝혀 북한과 국제사회에 정상회담 개최의사를 선전했다.그러나 개최조건으로 ‘북한이 원한다면’이라는 단서를 달아 일각에서 우려하는 성급한 회담추진보다는 신중한 자세를 취할 것임을 시사했다. 이와 함께 취임사에는 대북경수로 건설,대북 식량지원,4자회담의 지속적 추진과 더불어 정경분리에 입각한 경제교류 확대,이산가족상봉 등이 다시 한번 강조되고 있다. 김대통령은 4자회담과 관련해서는 ‘자주적 집단안보체제 마련을 위해 반드시 성공시키겠다’고 천명해 4자회담 추진의 강력한 의지를 시사하는 한편,문민정부 말기에 모든 대북문제를 4자회담틀내에서 풀려던 것과는 달리 안보문제는 4자회담,남북문제는 남북 당국간 대화를 통해 해결해 나가겠다는 의도를 내비친 것으로 분석된다. ◇역대 대통령 취임사 비교 대통령 국정목표 취임사 주요 내용 주용공약 이승만 민주주의 정부수립에 따른 국민 (48.7) 화합 호소.동포라는 △정부구성 완료 용어 자주 사용.국부 △평화적 남북통일 라는 인상 강하게 품김 박정희 주체적 새로운 정치풍토 조성. △견실한 경제사회 (63.12)민주민족 경제근대화,부패척결 토대 구축 주의 △부정부패 청산 △정책대결 정치풍 토 조성 최규하 민생정치 자유에 대한 책임강 △정치권력 남용과 (79.12) 조 과도기 상황에서 국정분열방지 위한 특별한 정책제시는 개헌 없음 △과학기술 진흥 전두환 정의복지 부정부패 척결,의식구 △정치과열방지 및 (80.9) 사회 구현 조개혁 강조 평화적 정권교체 △과외 폐지 △민간주도 경제 노태우 권위주의 민주주의 실현 강조. △신뢰받는 정부 (88.2) 청산 보통사람들의 위대한 △반대세력 비판수 시대 용 △지역갈등 해소 △폭력·투기 방지 김영삼 신한국 변화와 개혁을 강조 △부정부패 척결, 창조 고통분담 호소.문민 위로부터의 개혁 (93.2) 시대 개막선언.우리다 △경제회생 함께 신한국으로 강조 △국가기강·권력회 복 김대중 국난극복과 국민의 정부 선언.국 △정치보복·지역차 국민화합 난극복과 재도약의 시 별 금지 대를 열자고 강조.국 △작지만 강한 정 민에 의한 정치약속. 부 국난극복을 위한 단합 △물가안정·기업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혁 의 동시발전.각분야의 △교육개혁총체적 개혁 △자주적 집단안보 △남북정상회담 특 사 교환 제의
  • 야당세력의 형성(대한민국 50년:8)

    ◎48년 8월 한민당 “이승만정권에 투쟁” 선포/조각 배분 푸대접 받자 초대총리 지명 인준 부결/보수세력에 지나치게 기대 ‘보수야당’ 성격 고착 이승만정권에 대응한 야당세력의 출현은 바로 한국민주당에서 비롯된다. 한민당은 미군정기인 45년 9월16일 좌우대립속에서 지주세력 등 우익측 인사들로 결성된 보수반공연합체 정당으로 출발했다. 중경의 임시정부를 정통정부로 추대하고,여운형을 중심으로 한 건국준비위원회의 인민공화국 타도를 모토로 내걸었다. 한민당은 창당 당시에는 이승만 김구 김규식 등의 임정요인들을 지지하고 이들과 함께 반탁운동을 전개했으나 김구 등 임정세력들과의 노선차이로 결별했다. ○건국까지는 손발 맞춰 그러나 단독정부수립을 주장한 이승만과 한민당은 손발을 맞춰 건국까지 이끈다.이승만과 한민당의 관계는 ‘정약결혼’이라는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이승만은 그들의 국내 지지기반이 필요했고 대신 한민당은 이정권에서 권력을 주도하려는 야심이 있었던 것이다.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귀국한 이승만은정약결혼속에서도 내심 ‘친일정당’으로 비판받던 한민당과 계속 제휴하는 것은 자신의 노선까지도 손상받을 우려가 있다고 판단했다. 48년 7월20일 제헌국회에서 내각제를 대통령제로 바꿔 초대 대통령에 당선된 이승만은 바로 조각작업에 착수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하나씩 드러냈다. 먼저 한민당이 국무총리로 내세운 당위원장 김성수안을 거부하고 조선민주당 부당수였던 이윤영을 총리로 지명,국회인준을 요구했다. 이에 한민당도 기다렸다는듯 즉각 인준을 부결시켰으며,결국 이범석을 총리로 지명해 인준받은 이승만은 김도연에게 재무장관 자리 하나를 주는 것으로 한민당의 조각참여를 제한했다. 한민당은 이 사건을 ‘이승만의 배신’으로 간주하고 자연스럽게 야당의 길로 전향했다.한민당의 이승만에 대한 불만은 48년 8월8일 발표한 성명에 잘 나타나있다. 이 성명은 ‘…본당원으로서 정부에 국무위원으로 입각한 사람은 김도연 1인뿐이어서 극히 빈약하다.본당은 신정부에 대해 시시비비주의로써 임할 것은 물론이거니와…”라고 주장해 이승만정권에 대한 투쟁을 선포한 것이다. 한민당은 본격 야당으로 강화하기 위해 대한국민당의 신익희 세력 등을 규합,민주국민당(민국당)을 창당하기에 이른다. 따라서 한민당은 창당 3년4개월만인 49년 1월26일 자연해체하게 되고 49년 2월10일에는 민국당으로 자리잡게 된다. 민국당은 이어 정부12개부처의 각료중 7명이나 차지해 세를 불려나갔으나 이승만 대통령의 권한을 축소하기 위해서는 내각책임제 개헌밖에 없다고 여겨 이를 서두르기 시작했다. 민국당은 50년 1월 79명의 서명으로 된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했다.50년 3월14일 국회 본회의에서 내각책임제 개헌안이 표결에 부쳐졌으나 부결로 끝났다. ○49년 2월 민국당 창당 하지만 민국당은 동조자를 확보해 계속 이정권에 도전하는 공세를 펴나갔다.민국당 신익희의 국회의장직 진출로 민국당이 반 이승만세력을 한창 규합해 갈 즈음 6·25전쟁이 일어났다. 이로써 국회활동도 중단되고 정쟁은 사그러지는 듯 했으나 이승만측의 정권에 대한 욕심은 굳건했다.전쟁중에도 민국당이 차지한 의회를 거치지 않고 바로 선거를 치르기 위한 직선제 개헌에 불을 붙인 것이다. 그러나 이어 청·장년들을 강제징집·수용해놓고 간부들은 돈을 횡령한 ‘국민방위군사건’과 ‘거창양민학살사건’을 겪으며 정부불신임이 팽배해지면서 내각책임제 개헌안이 힘을 얻기 시작했다. 이는 마침내 이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야당 국회의원들을 마구 잡아들인 ‘부산정치파동’으로 연결돼 반정부 물결이 거세게 일어났다. 당시 문헌들에서 한민당은 흔히 기본적인 자유와 인권의 수호자로,또한 이승만의 독재적인 행정부 권력에 맞서는 의회 특권의 수호자로 묘사돼있다. 그러나 한민당은 사실상 토지와 지방권력등을 대변하는 기관으로 군림했으며 재원의 분배와 부의 통제를 둘러싸고 중앙 행정권력과 투쟁을 벌일 뿐이었다. ○6·25중에도 개헌 추진 미 중앙정보국(CIA)은 당시 한국 국회를 대한민국 내의 ‘민주주의 정신의 터전’이고 흔히 입법부에서의 논의가 정부관리들과 가열된 공방을 야기시켰다고 파악했다. 그런데 이 국회가 ‘서구의회의 전형적인 모습과는 거리가 멀며’ 집행부에 대해서는 전혀 효과적인 억제를 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승만의)‘보나파르티즘’(Bonapartism)에 어떤 장애도 되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한민당은 민주국민당으로 변신해서도 국가관료의 고위지도부에 계속 참여했다.49년초 도지사,시장,군수등의 명단은 45∼46년 지방관리들의 명단과 놀라울 정도의 연속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한민당이 야당으로 자리매김했으면서도 이승만정권의 정책에는 동조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즉 한민당은 이승만의 보수주의적 반공노선에 동조함으로써 혁신 세력들을 견제할 수 있었던 것이다.그러면서도 자기 지분을 늘리기 위해 6·25전쟁의 소용돌이속에서도 의원내각제 개헌을 무리하게 추진하는 모습을 보이는 등 많은 한계를 드러냈다. 이는 CIA가 50년 당시 대한민국에서 ‘정치적 경쟁’은 ‘보수지도자들 사이에서만 존재했다’고 평가한데서도 알 수 있다. 한민당은 수많은 당명의 교체속에서도 현재까지 한국 야당의 명맥을 이어준 ‘뿌리’로 치부되고 있다.그러나 첫 야당이 보수세력에 지나치게 기댐으로써 지금까지 한국정치에서 야당의 성격을 보수로 규정하게 만드는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 ◎“야 한민당 관료기구 주도”/49년 미 관리 작성 ‘남한정세 조사’ 보고서 확인 이승만정권시기 관료기구에서 한민당의 주도성과 한계는 1949년 3월 미국관리 맥도널과 로지엘이 직접 대한민국 전역을 여행하며 작성한 ‘남한 정세의 조사’라는 보고서와 미국무부 문서 등 당시 문헌에서 발견할 수 있다. ‘남한 정세의 조사’에 따르면 당시 각 지역의 도지사·시장·군수 등은 1945∼46년 미군정기 지방관리와 거의 일치함을 보여준다.한민당이 이승만정권에 대한 투쟁을 선언했으면서도 관료기구를 주도했던 것이다. 한민당 후신인 민주국민당도 역시 ‘산업가 및 지주들’의 후원을 받는 ‘가장 크고 영향력 있는’ 정당이었다.따라서 이승만정권과 이들 야당세력 사이에는 ‘권력을 향한 경쟁 이외에는 모든 것이 부차적’이었으며 ‘내부 파벌투쟁 또한 강력해 하찮은 자극에도 당을 뛰쳐나가게’ 만들었다.이와 같은 상황에서 한국의 야당은권위주의적 통치권을 획득하려는 노력에 의해 움직여졌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체질적 요소가 이어져 왔다고 볼 수 있다. 미 공문서 기록관리청(NARA) 국무부 일반문서중 50년총선관련자료(Developments concerning the 1950 general election)에 따르면 당시 한국 정당의 정강은 유교체제탓인지 정부에 대해 온정적 시각을 담고 있다고 표현돼있다.게다가 당시 이는 정강자체는 의미없는 것으로 여겨져 부실한 정당정치를 알 수 있다.이들간에 이데올로기의 차이도 권력투쟁에 있어 부차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다.민국당과 대한국민당 양대정당 사이의 주요한 이슈는 민국당이 행정부에 반대하고 국민당은 지지한다는 차이,그것으로 족했던 것이다.국민당 당수 윤치영도 주한미대사관 관리에게 개인적으로 “우리 당과 민국당의 위치에 큰 차이는 없다”고 말한 바 있다. 또 민국당은 자유주의를 공언했으나 산업가,지주 등의 지지를 등에 업어 보수정당에서 한발짝도 나가지 못했다.
  • 미군정 폐지와 행정권 인수(대한민국 50년:7)

    ◎정부수립후 3개월 지나서야 ‘정권’ 확보/한·미대표단,군­경찰 지휘권 놓고 첨예 대립/하지­이승만 직접담판 통해 ‘점진 이양’ 합의 1948년 9월4일 열린 제헌국회 제57차 회의에서 이범석 국무총리는 대한민국 정부와 미군정 사이에서 진행되는 행정권이양 회담에 관해 중간보고를 했다.이총리의 보고는,국회가 9일전 긴급결의해 국회의장 명의로 서한을 보낸데 따라 갖게 됐다.이총리는 회담에서 한국측 수석대표였다. 이총리는 먼저 “한미 양국간에 이견이 있어 회담에 매달리다 보니 경과보고가 늦어졌다”고 사과한 뒤 “행정권을 완전히 이양받은 다음에야 인적·물적 토대에 근거하여 시정방침(국정지표)을 마련할 수 있다”는 취지로 발언했다.이날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지 20일째인데도 정부가 아직 행정권을 인수하지 못해 국정운영에 차질을 빚고 있는 사실을 국무총리가 공개시인하고 양해를 구한 것이다. ○재산권처리 협상도 난제 2년 11개월에 걸친 미군정은 형식상 48년 8월16일 0시를 기해 폐지됐다.16일 아침 이승만 대통령은 대한민국 대통령령 제1호를 발표,미군정청 과도정부로부터 이관되는 행정업무를 11부4처별로 정리했다.이에 따라 17일부터 신생정부 각부처의 장은 과도정부의 미국인 고문들과 구체적인 인수절차 협의에 들어갔다.19일에는 대통령 담화를 통해 과도정부에 소속된 한국인 관리의 직책을 새정부에서도 보장했다. 이처럼 한국정부가 발빠르게 인수절차를 밟았다고 해서 행정권이 쉽게 넘어온 것은 아니었다.양쪽은 인계인수할 행정권의 범주를 결정하는 큰 테두리에서 상당한 견해차를 보였다. 한국정부와 미군정 간의 행정권이양 회담은 16일 하오2시 중앙청내 미군정 민사처 사무실 200호실에서 처음 열렸다.양쪽 대표는 한국에서 이총리와 윤치영 내무부장관·장택상 외무부장관,미군정측의 무초 주한미국대사·헬믹미군정 민사처장(소장)·드럼라이트 미군정 정치고문 참사관 등 6명이었다.무초대사는 그달 23일에야 부임하는 바람에 첫회의에는 참석하지 못했다. 회의는 처음부터 순조롭지 않았다.첨예하게 대립한 부분은 ▲군(당시의 조선국방경비대와 해안경비대)과경찰에 대한 지휘권 문제 ▲한미간 재정 및 재산권처리에 관한 협정 등이었다.군정측은 한국에 미군이 주둔하는 한 군과 경찰에 대한 지휘권을 미군사령부가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한국정부로서는 어림없는 일이었다. 재정문제에 관해서는 한국측이 미군정이 보유한 물적 재산을 최대한 넘겨받기를 원했고,더불어 미국의 지속적인 지원도 요구했다.회의에 진전이 없자 양쪽은 하루에 상하오 두차례로 회동을 늘리기로 합의,이를 한국정부 김동성 공보처장이 정식 공표하기도 했다. 당시 회담에 임한 미군정측은 “이범석 총리를 비롯한 한국측 대표들이 이승만 대통령의 손아귀에 쥐어 있기 때문에 논의과정에서 권위를 갖지 못한다”는 시각을 가져 불만이 많았다. 그래서인지 주한미군 사령관 하지가 출국을 사흘 앞둔 8월24일 이대통령을 방문,직접 담판을 짓고서야 ‘군경에 관한 통수권’문제가 해결됐다.26일 조인한 ‘군사통수권 이양에 관한 협정’내용은 ▲군경에의 통수권은 가급적 점진적으로 이양하되 ▲미국이 국방경비대·해안경비대 장비를 원조하며 ▲미군이 주둔하는 한 이 문제를 계속 협의한다는 것이었다. ○9월30일에 시정연설 이 합의에 따라 경찰지휘권이 대한민국의 내무부장관에게 정식으로 넘어간 것은 9월3일 정오를 기해서였다.내무부는 곧바로 경찰조직 9국실 가운데 감찰실·총감부·수사국·교육국·공보실 등 5개국을 없애고 공안국·통신국·총무국·여자경찰국 등 4국실만 남기는 개혁을 단행했다.지방경찰 직제는 그대로 유지했는데 막상 지방 경찰력을 인수할 때는 미군정청과 가까운 일부인사들의 반발이 적지 않았다. ‘물자 현금 인사 및 정부직권의 이양’협정은 9월11일 타결됐다.이승만 대통령은 9월30일 국정지표를 제시하는 시정방침 연설을 할 수 있었다.미군정 과도정부의 중앙 각부처가 인원·재산 등을 한국정부에 이관하는 작업이끝난 날은 11월 18일이었고 지방 행정기구까지 완전히 신생정부가 인수한 때는 11월 20일이었다.정부수립 석달여가 지나서야 대한민국의 행정권이 비로소 확립된 것이다. 미군정청(재조선미육군사령부군정청·USAMGIK)은 1945년 9월9일 서울 중앙청(옛 총독부)에 설치됐다.행정실무를 책임질 첫 군정장관으로는 아놀드 소장이 임명됐다.미군정은 초기부터 ‘영어를 알고 행정겸험이 있는’한국인을 활용한 고문제도를 시행했다.45년 12월에는 한 직위에 미군과 한국인을 한사람씩 두는 ‘한인·미인 양국장’제도로 바꾸었다.이때 참여한 인사가 광공국장 대리 오정수,학무국장 유억겸,농상국장 이훈구,경무국장 조병옥 등이다. ○행정훈련서 친미 양성 해방된지 1년쯤 지났을 때는 모든 부처의 장에 한국인이 진출,한인관료 체계가 자리잡았다.47년 2월12일 안재홍을 민정장관에 임명했고,그해 6월3일에는 미군정청 한국인기구를 ‘남조선 과도정부’라 개칭했다.이어 47년 9월12일에는 행정권을 남조선과도정부에 넘겨 새정부에의 이양에 대비했다. 이같은 미군정청의 정책에 대해서는 두가지 엇갈린 평가가 존재한다.하나는 미군정이 나름대로 일정표를 갖고 한국인들에게 행정훈련을 시켰다는 것이며,다른 하나는 신생국가에 친미파를 조직적으로 양성했다는 시각이다. 미군정이 대한민국 정부 수립의 토대를 마련한 공이 적지 않은 반면에,일제의 한인 관료군대부분에게 재생의 공간을 제공함으로써 일제청산에 큰 걸림돌을 남기기도 했다. 미군정이 이땅에 시행한 법령은 태평양 미육군 총사령부 포고 4건,남조선과도정부법령 14건,미군정법령 219건,행정명령 24건,부령 및 지령 115건,조선과도정부입법결의안 4건,미군정청포고 7건,기타 11건 등 모두 398건에 이른다. ◎미,한국협상대표단 불신/본사 특별취재반,‘제이콥스 보고서’ 입수 확인/“이범석 권한 없고 이승만이 모두 결정” 미국이 한미 행정권 이양회담에 임하면서 이범석총리를 비롯한 한국측 대표단에 불신을 가진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서울신문 특별취재반이 최근 입수한 ‘제이콥스 보고서’는 당시 회담 분위기를 선명하게 보여준다.J K 제이콥스는 주한 미24군 정치고문으로 회담경과를 정기적으로 미 국무부에 보고했다.이번 자료는 1948년 8월22일 작성했으며 그가 보낸 5번째 보고서이다. 제이콥스는 8월20일 상오10시와 하오2시 7∼8차 회의가 잇따라 열렸으며,7차 회의에서 이총리가 “자신에게는 권한이 없고 결정권은 아직도 이승만 대통령 수중에 있다”고 실토했음을 보고했다.이어 미군정측의 헬믹소장이 구체적인 항목들을 나열하며 의견을 물었지만 이총리는 명확한 답변을 회피했다고 전했다. 이같은 한국측 태도에 자극받았음인지 하지사령관은 8월24일 이승만을 만나 ‘군사통수권 이양 협정’을 직접 협상했다.미 본국 정부도 우회전술로 한국정부를 압박했다. 트루만 미국대통령은 8월27일 ‘한국경제원조 계획’을 미군정에서 다루지 말고 국무부 경제협력국에서 수립할 것을 지시했고,마샬 국무장관은 9월1일 기자회견 석상에서 “미국은 국제연합 한국위원단(UNTCOK)의 보고가 있을때까지 행정권 이양에 관한 최종 결정을 미룰 수밖에 없다”고 공언했다. 이후 한미행정권 이양에는 가속도가 붙었다.이승만이 미국의 압력에 굴복했다기 보다는,회담에서 상대가 내민 카드를 서로 탐색하다가 결국 수뇌부에서 결정을 내린 것으로 볼 수 있다. □특별취재반 ▲이경위 부국장겸 정치부장 ▲이용원 문화부 차장 ▲김경웅 정치부기자 ▲최병렬 문화부 기자 ▲김종면 문화부 기자 ▲박정현 정치부 기자 ▲서정아 정치부 기자 ▲강선임 DB부 기자
  • 청와대/황병선 논설위원(외언내언)

    서울 종로구 세종로 1번지.북악산 자락의 청와대 자리는 풍수지리상 최상의 길지에 속한다.북한산과 북악산을 주산으로 좌청룡인 낙산,우백호인 인왕산,그리고 명당수인 청계천이 흘러 배산임수의 더없는 명당자리다.6공 당시인 90년 현재의 새 관저를 짓기위한 토목공사중 ‘천하제일복지’라 새겨진 조선조 중기 작품으로 보이는 표석이 발견되기도 해 길지임을 증명했다. 너무나 뛰어난 명당인 때문인지 청와대 자리는 얽히고 설킨 사연이 우리 역사의 기복만큼이나 복잡하다.고려때 조그만 이궁이 세워졌던 이 명당 자리에 태조 이성계가 경복궁을 창건했고 청와대는 이 경복궁의 후원터에 해당한다.이 후원에는 오운각 융문당 등과 함께 경무대가 세워져 과거장으로 쓰였는데 이 경무대주변이 청와대 터인 것이다. 자유당시절 무소불위 권세의 상징이었던 이승만 대통령의 집무실과 관저로 사용되기전 경무대는 일제 조선총독의 관저로,해방후에는 미 군정장관 하지장군의 숙소로 쓰이는 서글픈 과거를 가졌다.4·19직후 윤보선 대통령은 시위대의 공격목표,원부의 상징처럼 된 경무대 명칭을 건물의 청기와에서 따온 청와대로 바꿨다.당시 서울 시사 편찬위원을 맡았던 김영상씨가 청와대와 함께 ‘화령대’를 제시했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이성계가 건국후 중국 명나라에 보내 국호로 선택을 구했던 조선과 화령에서 따온 것이었다. 그뒤 박정희 대통령때는 ‘청’보다는 ‘황’색이 더 존귀함을 나타낸다며 ‘황와대’로 바꿔야 나라에 길하다는 의견이 제시되기도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은 일화가 남아 있다.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가 출범하며 구총독부 건물과 함께 총독관저였던 옛 청와대 건물은 완전 철거됐다. 새 정부 인수위가 ‘국민의 정부’에 걸맞게 청와대 명칭을 바꾸는 문제를 검토한다는 보도다.권위주의적인 이미지를 떠올린다는게 이유다.김영삼 정부도 청와대를 개방하며 ‘관광명소’로 만든다고까지 했었다.이름바꾸기도 따지고 보면 옛것을 부수는 일이다.대통령이 바뀔 때마다 과거의 것을 부수기보다 국민의 사랑을 받는 멋진 정치로 대통령 집무실과 관저의 이름이 정겨운 이미지로 국민에게 다가가도록 하는 것이 더 좋은 방법은 아닐까.이제 우리 정치도 워싱턴의 백악관이나 런던의 다우닝가 10번지처럼 전통있는 권부의 애칭을 가질때가 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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