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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사학계 아직도 황국사관 못벗어”

    ●회고록 '인간 단군을 찾아서' 출간 상고사 연구학자 최태영 옹. “역사가 올곧게 정립돼야 개인과 사회가 바른 길을 나아가게 됩니다.올바른 역사의식이 그 무엇보다 요구되는 것도 이 때문이지요” 격동의 근·현대사를 한 몸으로 겪어온 최태영옹.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법학자요,상고사 연구자로서 한세기를 살아온 원로학자이다.최근 그의 인생 역정을 정리한 회고록 ‘인간 단군을 찾아서’(학고재 펴냄)가 100회 생일을즈음해 나왔다. “일제강점기를 살면서 왜곡되고 질곡의 나락으로 떨어진 우리 현실을 보면서 역사를 바로잡는 것이 큰일이라 생각했어요.일제가 식민사관으로 부정하는 단군의 실체를 학문적으로 연구해 역사적으로 증명하고 싶었습니다” 최옹은 우리 상고사에 관한 자료를 처음 손에 쥐게 된 동기를 이렇게 말했다. 그가 걸어온 인생역정은 이렇듯 오늘에 사는 우리들에게 교훈과 길잡이 역할을 하기에 충분하다.그는 공부 외에는 단 한 군데도 곁눈질하지 않은 올곧은 학자로 잘 알려져 있다. 글을 정리한 김유경 전 경향신문 문화부장은 “격동의 한국역사를 살아 오시는 동안 친일·친공을 한번도 하지않은 유일한 분”이라며 “삶의 자세가예나 지금이나 한결같고 깨끗한 이미지를 가진 어른”이라고 말했다.특히 그를 일제 당시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일본어를 쓰는 것을 거부한 유일한 분이라고 소개한다. 회고록은 단군전설이 있는 황해도 구월산 근처에서 태어나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가 걸어온 파노라마같은 길을 일화중심으로 따라간다.여기에는 그가 접촉했던 우리 역사속의 인물들이 그려지고 있다.박영효와 서재필,이승만,김구를 필두로 정인보와 홍명희,이광수,김성수,양주동이 등장하고 한국 근·현대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원한경(언더우드 2세),모펫,게일,쿤스 같은개신교 선교사들도 있다. 회고록은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거나 잘못 알려진 사실도 바로잡고 있다.예컨대 연세대 전신인 연희전문 설립자인 언더우드가 일제 치하에서 학교를 지키기 위해 신사 참배를 허용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실제론 그가 신사참배를 반대했으며,김구와 이승만이 결정적으로 충돌한 첫케이스가 48년 연희전문에서 열린 언드우드동상 제막식이었음을 밝힌다. 특히 식민사학의 전형이라 할 수 있는 사학자 이병도와 김재원 전 국립중앙박물관관장과 얽힌 일화는 주목을 끈다.최옹은 두 지인을 식민사학에서 탈피시키려 애써 결국은 이들을 환골탈태시켰다고 책을 통해 밝힌다. “신채호와 정인보 등 민족사학자들이 대거 납북되거나 사망해 일제하 조선사편수회에 참여했던 식민사학자들이 대거 강단에 서게 됐으며 그 중심인물이 이병도 였습니다.이병도는 결국 단군이 실재인물이라는 점을 인정했으나그 후학들이 실증사학에 매달려 숲을 보지 못하는 점이 안타깝습니다”최옹은 한국 사학계가 아직까지 일제의 ‘황국사관’을 답습하고 있다며 젊은 역사 후학도들을 질타했다. 그의 인생관은 언제나 ‘서두르지 않고 한결같이’ 살아가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무슨 일이든 서두르면 안돼요.급하게 가면 탈이 나게 돼 있거든요.사고가 한곳으로 쏠리는 것도 위험하기 짝이 없습니다”.이 때문에 최옹은 방문하는 젊은이들이 좌우명을 써달라면언제나 ‘한결같이 살자’란 문구를 적어준다고 말했다. 최옹은 일제 식민사관에 대항하기 위해 뛰어든 상고사연구에 얽힌 삶도 소상히 소개했다. “역사가 깊은 나라에는 신화가 있습니다.여기에 역사적 사실이 반영돼 있지요.하지만 우리의 경우 다릅니다.일제가 민족정신을 말살시키기 위해 신라가 한국사의 시작이라며 단군조선을 미신으로 치부하는 역사적 왜곡을 한 것이지요.조상의 뿌리가 잘리면서 단군과 우리가 이산가족이 된 것입니다”최옹에게는 대한민국 학술원 최고령 회원,3·1운동으로 옥고를 치른 유일한생존자,서울대 초대 법대학장을 역임한 한국 법학의 살아있는 전설,한국 상고사 연구가란 직함이 언제나 따른다.국내 사학계에는 그의 학맥이 없음에도불구하고 학계에서 논란이 일고 있는 단군사상을 가장 안전하게 학문적으로통합할 수 있는 학자로 꼽히는 것도 이런 연유에서 비롯된다. 최옹은 일본 메이지대를 졸업한 뒤 경신학교 이사장 겸 교장을 역임했다. 해방후에는 이승만정권에 합류하지 않고 정치를 멀리했고 한국전쟁이 끝난뒤에는 상고사연구에 본격 뛰어들었다. 최옹은 현재 인천에서 의사인 외동아들과 살고 있다.거동은 힘들지만 밤새워글을 읽는다고 말하는 그는 아직까지 서재를 지키는 것은 왜곡된 우리역사를 복원하기 위해서라고 말했다.회고록은 그동안 최옹이 발표한 글에다 그의강의노트 및 메모,구술 등을 김유경 경향신문 전 문화부장이 정리한 것이다. 정기홍기자 hong@
  • 비밀해제 美軍문서로 밝혀진 경북 덕천리 학살

    [덕천AP연합] 한국전쟁 초기에 한국 군경이 경북 달성군 덕산리 덕천마을등에서 2,000여명의 좌익정치범을 재판없이 처형했으며 당시 미군이 이를 알고 있었음이 비밀에서 해제된 미군 문서들과 목격자들에 의해 밝혀졌다. 일부 학자들은 한국전쟁 당시 한국정부가 북한군에 밀려 퇴각하면서 남한내의 좌익들이 공산 침략자들과 협력하는 것을 막기 위해 상당수 좌익 죄수들을 비밀리에 처형했다고 주장해왔다. 북한 역시 남한 지역을 점령했을 때 많은 우익 인사들을 처형했다.AP 통신은 한국전 당시 충북 영동군 노근리에서의 미군에 의한 학살사건을 조사하는과정에서 덕천마을 총살사건 관련 미군 보고서 2건과 이와 관련된 고위층들의 서신이 포함된 미군 문서들을 찾아냈다. ‘최고 비밀’로 분류됐다 해제된 이 문서들에 따르면 당시 최고 사령관인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이런 대량 총살 사건들 가운데 최소한 한 건은 알고있었다. AP 조사결과 당시 덕천 학살사건들에 대한 미군 보고서가 맥아더 장군에게 전달됐다.맥아더 장군은 미 외교관들에게 “검토해서 적절하다고 판단되는 조치를 취하라”고 지시한 것으로 확인됐다.존 무초 당시 주한 미국대사는 나중에 쓴 보고서에서 그가 이승만 대통령과 신성모 국방장관에게 불법적이고 비인간적인 즉결처형을 그만둘 것을 촉구했다고 밝혔다. 무초 대사는 50년 8월25일 맥아더의 참모장인 미8군 사령관 월튼 L 워커 중장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는 이대통령에게 한국 군경과 청년들이 게릴라를포함한 적군 포로들을 처형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정당한 법절차를 밟은 뒤에인도적 방법으로 처리하라고 촉구했다”고 말했다. 미군 헌병대 수사관이었던 프랭크 피어스 1등상사를 비롯한 미국인 목격자들은 12∼13세 정도의 소녀 1명이 포함된 여성 등 모두 200∼300명의 죄수들이 50년 8월10일 덕천 마을 인근산에서 남한 경찰에 의해 처형됐다고 보고했다.피어스 상사는 1쪽짜리 보고서에서 “처형이 끝난 지 약 3시간 뒤에도 일부는 살아서 신음했으며 (신동재) 골짜기에 쌓인 시체더미 어디선가에서 비명소리들이 들렸다”고 썼다. 무초 대사의 최고위 측근인 에버릿 드럼라이트는 한 문서에서 그가 6월 초에 대전에서도 유사한 총살사건이 일어난 데 대해 항의한 바 있다고 대사에게 보고했다고 밝혔다.
  • ‘세계를 흔들흔들‘

    현대 사회에 가장 큰 영향을 준 대표적인 인물 100명을 만화로 엮은 ‘세계를 흔들흔들 현대인물 100’(중앙M&B·전2권)이 출간됐다. 이 책은 국내외의 주요 신문과 잡지에서 선정한 ‘세기의 인물’들을 중심으로 100명의 현대 인물을 뽑아,△정치 △지식과 발명·발견 △경제 △문화·예술 △종교·사회 등 다섯 분야로 나누었다. ●정치 미국의 제28대 대통령인 토머스 우드로 윌슨(1856∼1924)을 비롯해요시프 스탈린,더글러스 맥아더,마하트마 간디,넬슨 만델라,존 F.케네디,김구,이승만,김일성,박정희 등이 실려 있다. ●지식과 발명·발견 프랑스의 곤충학자인 장 앙리 파브르(1823∼1915)를 포함해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우장춘,스티븐 호킹,토머스 에디슨 등이 소개됐다. ●경제 ‘강철 왕’이라 불리우는 미국의 기업가 앤드루 카네기,헨리 포드,이병철,정주영,빌 게이츠,손정의 등이 나온다. ●문화·예술 20세기를 대표하는 화가인 파블로 피카소를 비롯해 찰리 채플린,어니스트 헤밍웨이,월트 디즈니,손기정,백남준,비틀스 등이 각각 수록돼있다. ●사회·종교 아프리카 밀림의 성자인 알베르트 슈바이처,장애를 극복하고희망을 나누어 준 빛의 천사 헬렌 켈러,마더 테레사,김수환,마틴 루터 킹,달라이 라마 등이 실려 있다. 김명승기자
  • [대한시론] 4·13 총선이 남긴 숙제

    4·13 총선거의 결과가 나왔다.선거에 대한 감회나 평가는 각자,각 당의 입장에 따라 다를 것이지만,어떻든 국민의 선택이고 결단이란 점에서 일응 겸허하게 그 결과를 받아들여야 한다.다만 선거를 통해 나타난 우리의 모습이예쁘냐,그렇지 못하고 미흡하냐 하는 것은 별문제이다.따라서 그 점을 두고우리의 진로를 진지하게 모색해 나름대로 제언하고 싶다. 먼저 총선연대가 벌인 낙선운동에서 제시된 낙선대상자가 상당수 낙선되었다는 점이다.이 점에서 우리의 정치구도는 그래도 계속 노력해가면 개선될수 있다는 희망을 주었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해야 한다. 다음에는 정당별 당선 수에서 여당과 야당,양당 구도로 나아가고 있다는 점이다.‘철새정당’이나 색깔시비의 지역정당이 쇠락해 가고 있다.그런데 한편으로 혁신·진보정당의 좌절은 50여년의 보수독재의 잔재가 남아 있는 풍토에서 아직도 넘어야 할 고비가 많다고 하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가장 안타까운 현상은 지역정서와 지연 연고의식이 일부 지역에서 더욱 거세게 나타났다는점이다.이 점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관점에서 논구되어야 할 것이지만,먼저 대통령과 여당 지도자에게 한마디 한다.어떻게 하든지 ‘지역 패거리주의’를 돌파하기 위해 보다 솔직하고 과감하며 성실한 대국민 접근과 견실한 정책이 꾸준히 추진되어야 한다. 이 난제를 풀지 못하면 한국의 정치발전은 있을 수 없다.이유가 어떻든 지역주의의 망국병을 뿌리뽑는 노력이 각계 각층으로부터 전개되어야 한다.이 운동이야말로 향후 시민운동과 사회운동이 담당해야 할 몫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이번 선거는 부패 보수기득권 세력이 총선연대와 386세대,인터넷으로 나타나는 네티즌의 목소리,개혁을 발목잡는 부패세력을 방치할 수 없다는 새 세대의 각성,외국 비판세력의 재벌 구조문제 제기 등에 대항해 생사를걸고 총력전으로 도전했던 싸움이다.물론 끝난 싸움은 아니지만,그들은 과거 독재하에서 얻은 특권과 특혜,재산과 사회적 지위 등 유리한 점이 개혁의회오리바람에 휩쓸려 날아가 버릴까봐 결사적으로 자기편을 지원했다. 이번 선거는 무엇보다 50여년 뿌리를박아 온 독재하의 부패구조에 도전해정권을 교체하여 개혁을 추진하는 정권의 정치구도 재정비로서 의의가 있다. 이 점에서 김대중 정부는 선거에서 승리했느냐,패했느냐 하는 것을 한마디로 단정할 수는 없다.다만 김대중 정부로서는 최선을 다한 것으로 보이며,구독재정권처럼 불법을 자행하는 무리수는 자제했다고 본다.과거의 선거판을 보면 이 점은 알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향후 정국을 어떻게 이끌어 갈 것인가이다.국민에게 직접 국정을 알리고 국민과 함께하는 정부라는 것을 체감토록 하여 개혁을 위한 재정비로서 정계개편에 나서야 할 것이다.변화된 상황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대응해야하는 것이다.기존틀이나 기득권 세력의 현상고착 등 올가미에 걸려들어서는안된다. 이번 선거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 일반적 징후와 현상은 우리 사회에는 아직도 구시대 우민정책의 잔재가 건재하다는 점이다.이를 그대로 놓고서는 21세기 정보기술혁명의 시대에 살아남을 수 없다. 특히 시민의식이 근대 이전의 수준에 머무르고 있는 것을 내버려둔 채로 일부정치말썽꾼의 눈치나 보고 비위를 맞추려고 해선 안된다. 지금 내외정세는 남북정상회담에까지 이른 시대이다.그런데 일부 이승만시대나 박정희시대에 써먹던 색깔론이나 호전적 무책임한 강경책이 애국 반공인양 멍텅구리 짓을 하는 것이 통하는 사회가 되어서는 안된다.그러한 정치색맹으론 21세기 정치에선 설 자리가 없다는 것을 국민이 알고 소리높이 외치도록 되어야 한다. 이번 선거는 우리 나름의 성숙도와 함께 구시대 구세력의 잔재가 건재함을보여주었다.우리의 그러한 한계를 시인하고 그것을 뛰어넘는 전기를 마련하기 위하여 개혁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우리 정치가 제모습을 찾는 것은 개혁의 성패여부에 달려있다. 한상범 동국대교수 법학.
  • YS시절 남북 회담추진 과정

    김영삼(金泳三) 정권은 과거 어느 정권보다 남북정상회담에 적극적이었다. 이는 최초 문민정부였다는 강점을 가졌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김 전대통령은 93년2월 대통령취임 이후 줄곧 정상회담에 대한 강한 의지를보였다. 김영삼 정부의 이런 노력은 94년에야 나타났다.당시 남북은 그해 7월25∼27일까지 사흘간 평양에서 정상회담을 개최키로 전격적으로 합의했다.그러나정상회담을 보름여 남겨두고 김일성(金日成) 주석의 사망으로 정상회담은 무산됐다. 사실 당시까지 남북긴장이 지속되고 있었다.93년에 이어 94년 3월까지 계속된 남북특사교환을 위한 실무접촉이 북측대표의 ‘서울 불바다’ 발언으로무산된 상태였다.또 북한의 핵확산방지조약(NPT)탈퇴 등으로 회담분위기가조성되지 않았다. 이런 긴장 분위기를 정상회담 분위기로 바꾼 것은 카터 전미국대통령이었다.그는 94년 6월 평양을 방문하고 돌아와 “김일성주석이 정상회담에 동의했다”는 뜻을 전해왔다. 이후 정상회담은 급류를 타게 됐다.남북 양측은 그해 6월28일 판문점 ‘평화의 집’에서 부총리급 예비접촉을 비공개로 갖고 정상회담 일정에 전격 합의했다.그후 여러차례에 걸쳐 실무자 접촉을 갖고 순조롭게 세부일정을 합의했다.사상 최초로 남북정상이 한자리에 앉을 수 있다는 기대감이 국민들 사이에 팽배했었다. 그러나 7월8일 김주석의 사망으로 상황은 돌변했다.북측은 며칠 뒤 정상회담 연기의사를 전해왔다. 김영삼정권 이전에도 막후에서 정상회담 노력이 있었다.박정희(朴正熙) 정권때부터 비공식적인 접촉이 추진돼 5공때는 장세동(張世東) 안기부장이,6공때는 박철언(朴哲彦) 청와대특보가 ‘메신저’역할을 했다.그러나 이승만(李承晩) 정권때는 ‘북진통일’이 국시였던 만큼 정상회담은 상상할 수 없었다. 박준석기자 pjs@
  • “워싱턴시 명물 벚꽃은 한국산”

    [워싱턴 연합] 미국의 수도 워싱턴도 해마다 이맘 때면 벚꽃 놀이가 한창이다. 각지에서 수십만 인파가 몰려 포토맥 강변에 만개한 벚꽃을 즐기는 유명한관광코스로 자리잡은 게 벌써 오래 전의 일이다. 미국인들은 대부분 이들 벚꽃이 일본이 선물한 일본산이라고 알고 있지만실은 한국에서 건너온 토종 한국산이라는 이론이 제기됐다. 워싱턴시 아메리칸대학의 김형국 교수(정치학)는 7일 미시시피주 출신인 존랭킨 하원의원이 43년 6월28일 워싱턴 벚나무들의 원산지를 일본에서 한국으로 바꾸자는 결의안을 제출한 사실이 밝혀졌다고 말했다. 랭킨 의원은 당시 미국에 망명하고 있던 이승만 박사가 43년 4월8일 한국의독립을 염원하며 아메리칸대학에 벚나무 4그루를 심은 사실을 강조하고 포토맥 벚나무의 원산지가 한국이라는 유력한 이론이 제기돼 있다고 제안 이유를 밝혔다. 포토맥 강변의 벚나무는 10년대 일본이 우호의 상징으로 워싱턴시에 기증한3,000여 그루가 워싱턴의 추운 날씨에 적응하지 못해 모두 죽은 후 한국에서가져온 벚나무들을 심었다는것. 김 교수는 태평양 전쟁으로 반일 감정이 극에 달해 있던 시절에 결의안이제출됐지만 채택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며 현재 처리 결과를 추적 중이라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벚나무들의 출처가 한국산으로 밝혀질 경우 친한파 의원등의 협조를 얻어 원산지 정정을 다시 추진할 필요가 있다는 견해를 보이고 있다.
  • [대한시론] 정치를 투기판으로 만드는 사람들

    사람들은 왜 정치에 매혹되는가? 정치는 ‘권력에의 길’이기 때문이라 한다.그렇다면 권력은 무엇을 하자는 것인가? 소영웅주의적인 권력관이나 권력이 부귀영화를 약속하던 봉건사회의 권력구도 때문에 이 모양인가? 지금은 명색이나마 민주주의를 말하는 세상이기 때문에 권력에의 길로 나선사람들이 정치가 돈벌이 잘되는 장사라고 내놓고 말하진 못한다. 권력의 자리를 차지해 좋은 일을 하겠다고 핏대를 올린다.일찍이 이승만은 나라를 세운다고 했고,그의 그늘에 정체를 감춘 친일파는 반공애국을 한다고 했다. 이승만 이후시대의 군사독재는 ‘근대화’를 한다고 탈취한 권력으로 거만의 부를 축적하기도 했다.군사정권 30여년에 자기 본업을 집어치우고 권력에의 길로 뛰어든 이들이 줄을 이었다.학자가 강단을 등졌고,기자가 붓을 버리고 감투에 매달렸고,관직을 발판으로 정계에 뛰어든 관리가 더 위세좋은 감투를 차지했고,법률가가 법전을 팽개치고 밀실정치로 날을 지새는 재미에 빠졌다. 기업은 정경유착에서 벼락부자의 비밀을 체득했다.군인이 정치연단에 서는판에 그에 못지않게 약삭빠르고 야심 있는 사람들이 정상배의 이득을 놓치지않았다. 그래서 기회주의와 출세주의가 판을 치는 세태가 되어 정치란 직업은 몫이 좋은 큰돈 만지는 직업이 되었다.이른바 ‘대가성 없는 돈’(?)이면‘정치자금’이라는 면죄부로 그 취득의 합법성이 보장되었다. 결국은 이렇게 막가다가 지금은 몽땅 망하게 되었다. 정치가 투기판이 되고 그러한 카지노에 무법자의 마피아가 합세되면 나라는망한다. 표 모으는 기술이 진실이 전무한 빌 공(空)자의 공약이 되니,아무도안 믿는다. 그런데도 상대방을 공략하는 데는 말로 해야 하는 싸움이니,거짓말도 거창한 거짓말이 난무한다.히틀러는 대중은 조그만 거짓말은 의심해도 엄청난 새빨간 거짓말엔 속는다고 했다.히틀러의 이런 선동술을 체득한 그의 제자들이어찌 이리 많은지…. 문제는 유권자가 바르게 투표하면 된다고 한다.옳은 말이지만,이 유권자를미치게 하는 마약으로 정치판에서 애용되어 오는 것이 지역감정의 자극 선동이고 뒷구멍에서 학연과 각종 연줄로 패거리짜기이다.그것으로도 효험이 없으면 ‘안보’ 귀신과 ‘빨강색’ 칠하기 요술방망이를 휘둘러댄다.50여년을써먹어도 아직도 유효한 처방으로 정상배의 단골처방이 되고 있다. 결국 돈벌이 정치,투기판 정치는 우민정치,바보놀이 정치로 이어져왔다.친일파가 일본제국주의자들로부터 크게 배운 것은 ‘조선사람은 때려야 한다’는 우민관이고 민족멸시이다.대중을 경멸·멸시하여 원색적 감정의 자극으로조정·관리해온 조선총독부의 지배정책에서 배운 것이다. 일찍이 강동진이 쓴 ‘일본의 조선지배정책사 연구’(도쿄대 출판회)를 보면 일제가 우리를 얼마나 철저하게 타락시키고 바보로 만들어왔는가 하는 점을 알 수 있다. 이승만시대 이래 친일 기득권세력은 국민을 바보로 보았다.군사정권에서는모든 국민을 이등병으로 처우하는 사회의 병영화를 꾀했다.이러한 구 시대의부끄러운 잔재에 도사린 사회적 편견을 개인이나 당파의 정치적 야심을 채우기 위해 악용하는 것은 가장 악질적인 것이다. 지금 선거전을 보면 시민을 깔보고 원색적인 자극 과장과 왜곡을 거리낌 없이 자행하는 자들이 겁도 없이 날뛰고 있다.밝은 대낮에 모두가 보고 듣고있는 데서 유치하고 치사한 거짓말을 태연히 하고 있는 자들이 사회의 지도층을 자처하고 있다.시민의 감정을 자극시키려고 상궤를 벗어난 모함도 서슴지 않고 있다. 상품을 팔기 위한 거대 광고도 피해가 많지만,정치광고의 속임수는 나라와사회를 통째로 망치는 무서운 해독을 끼친다.그래서 우리는 정치에서 무책임을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韓 相 範 동국대교수·법학
  • [4·13총선 D-24] 각당 선거전 이모저모

    민주당이 최근 여야의 경제공방에 대한 유권자들의 여론 동향을 파악하기위해 지난 17일부터 이틀동안 전국 20세 이상 성인남녀 1,002명을 대상으로자체 전화여론조사를 실시한 결과를 19일 공개했다.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한나라당이 제기한 국가채무 논란이 경제회복에악영향을 줄 수 있다’는 질문에 대해 절반 이상인 65.7%의 응답자가 ‘그렇다’고 답했다.대구·경북(70.8%),부산·울산(57.2)지역의 응답자 상당수도그런 식의 답변을 했다는 것이다.민주당은 특히 한나라당 지지자의 68%가 ‘경제회복 악영향’을 지적하고 나선 대목에 크게 의미를 두는 눈치다. 국가채무가 과다해진 것은 현정부의 실정(失政)때문이라는 한나라당의 주장과 관련,국가채무가 ‘김대중(金大中)정부와 민주당의 책임’이라는 응답자는 9.8%에 그쳤고 ‘김영삼(金泳三)정부와 한나라당에 책임’이 있다는 응답자가 40.9%로 나타났다.여야의 공동책임이라는 응답도 39.6%가 나왔다. ‘한나라당이 국가채무,국부유출 등을 주장하며 경제가 곧 위기에 처할 것처럼 발표하고 있다’는 질문에 대해서는 9.8%가 ‘바람직하다’고 답했으며,한나라당 지지자 가운데서도 19.7%만이 이에 대해 바람직하다고 답한 것으로 조사됐다. ‘공명선거와 정책선거를 잘 실천하고 있는 정당은 어느 정당인가’를 묻는 항목에서는 민주당(23.9%)이 한나라당(14.2%)에 비해 다소 좋은 평가를 받았으나,47.2%의 응답자가 ‘잘 모른다’는 유보적 태도를 취했다. 정당지지도를 묻는 질문에서는 민주당(28.8%)이 한나라당(21.9%)보다 인기가 높은 것으로 조사된 반면,여성 응답자들은 한나라당(24.3%)을 민주당(23. 5%)보다 더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민주당은 이같은 여론조사를 토대로 볼 때 한나라당의 최근 국가채무와 국부유출을 둘러싼 대여(與)공격은 국민적 공감대가 없는 것이라고 맞받아쳤다. 주현진기자 jhj@. *김근태-노무현의원 왜 당권도전 선언 했나. 민주당의 ‘차세대 리더’로 꼽히는 민주당의 김근태(金槿泰)서울 선대위원장과 부산에서 교두보 확보에 나선 노무현(盧武鉉)의원이 지난 18일 부산에서 당권도전을 ‘공동 선언’해 눈길을 끌고 있다. 김의원은 이날 노의원 후원회 참석차 부산을 방문,기자간담회를 갖고 “총선 후 민주당의 새로운 지도력 창출을 위해 힘을 모을 것이며 전당대회에서선의의 경쟁과 페어플레이를 아끼지 않을 것”이라며 당권 도전을 선언했다. 노의원도 후원회 연설을 통해 “이번 선거에 승리하면 새로운 정치지도력 창출을 위해 당권에 도전하겠다”고 밝혔다. 두 인사의 당권 공동선언은 여러가지 해석을 낳고 있다. 먼저 여권내 같은 차세대 주자인 이인제(李仁濟)선대위원장을 견제하기 위한 포석이라는 시각이다.이위원장이 수도권과 대전·충청권 유세를 통해 여권내 차기 주자로서의 입지를 굳히려는 데 따른 자구책이라는 설명이다. 민주당의 총선 전략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이들의 당권 도전선언은 여권 핵심부와의 교감하에 이뤄진 것으로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당 지도부가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것도 이같은 관측을 뒷받침하는 대목이다. 최대 격전지인 서울에서 김 의원의 이미지를 부각시키고,영남권에서는 노의원의 차세대 리더 가능성을 내세우면 민주당 전체의 득표력을 상승시키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는 해석이다.이에 따라 민주당의 총선지원유세는 이인제위원장에다 두사람을 가세시킨 ‘3두 체제’로 전개될 가능성이 높다. 지원연설 요청에 눈코 뜰새 없이 바쁜 이위원장으로서는 한결 짐을 더는 효과도있다. 당권 도전 선언에는 노의원 개인의 ‘지역구 굳히기 전략’도 함축돼 있는것으로 보인다.공천 단계의 여론조사에서는 경쟁 후보를 크게 앞선 것으로알려졌던 노의원은 최근에는 상당히 추격을 당한 것으로 알려졌다.노의원의당권 도전은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져 왔지만 재야 출신의 김위원장과 다시 한번 공동 선언을 함으로써 이른바 ‘시너지 효과‘를 겨냥한 것이 아니냐는분석도 나오고 있다. 강동형기자 yunbin@. *자민련 '忠北 지키기'바쁜걸음. 자민련이 19일 충북 사수(死守)에 나섰다.상대당의 도전이 거센 지역에 당력을 집중했다.따로 다니던 ‘투톱’이 이날만은 힘을 합쳤다. 출동한 3곳은 텃밭이면서도 ‘위험지역’.충주는 김선길(金善吉)의원이 민주당의 이원성(李源性)전대검차장과 힘겨운 일전을 벌이고 있다.청주상당의구천서(具天書)의원은 민주당이 기습카드로 내민 홍재형(洪在馨)전경제부총리를 다시 만났다.청원의 오효진(吳效鎭)지구당위원장은 한나라당 신경식(辛卿植)의원과 재격돌하고 있다. 그래서 민주당과 한나라당을 모두 타깃으로 삼았다.김종필(金鍾泌)명예총재는 이날 충주지구당(金善吉)개편대회에서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이 내각제열의가 상실되고 딴전을 피우고 유보한 것을 자민련에 뒤집어 씌우고 있다”면서 “민주당이 전국화를 한다는 데 국민의 정부로 끝날 것”이라고 비난했다.한나라당측에도 “한나라당 사람들이 나라를 결딴내고도 속죄의 뜻으로열심히 협력하겠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느냐”면서 “내 것은 내가,네 것은 내가,이것이 한나라당 사람들의 놀부 근성”이라고 성토했다. 이한동(李漢東)총재는 “민주당 서영훈(徐英勳)대표가 발행인으로 있는 통일정보신문에 의하면 김대통령의 햇볕정책에 대해 북한측은 ‘허망된 개꿈’이라고 정면으로 받아치고나왔다”면서 “일방적으로 달러를 보내고 식량비료를 보내면서 남북대화를 구걸하다시피 하고 있다”고 민주당측을 비판했다. 이규양(李圭陽)부대변인은 논평에서 병무비리 수사와 관련,“민주당 이인제(李仁濟)선대위원장이 성역없는 수사 운운하고 있지만 집권당의 신종 선거운동 개입”이라고 지원사격했다. 박대출기자 dcpark@. *한나라당, YS 입 빌려 '與 때리기'. 한나라당 홍사덕(洪思德)선대위원장은 19일 오전 김영삼(金泳三·YS)전대통령의 상도동 자택을 방문했다.이날 방문은 홍위원장측의 요청에 의한 것으로알려졌다.총선 쟁점을 매일 만들기 힘든 상황을 감안,YS의 ‘입’을 빌려 현정권을 다시 비난하자는 의도가 깔려 있다. YS정권 시절 정무장관을 지낸 홍위원장은 상도동을 방문하자 마자 “97년대선 당시 완벽하게 공명선거 분위기를 만들었는데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은위법이나 불법을 감싸는 듯한 발언을 해서 (이번 선거양상이) 뒤틀어졌다”고 전·현직 대통령간의 갈등 관계를 미묘하게 유도하는 발언으로 말문을 열었다.이에 YS는 “공명선거가 없으면 민주주의가 아니다”면서 “나는 공명선거를 위해 대선때 한나라당에서 김대중씨의 비자금을 수사하라고 요구할때도 수사를 중단시켰다”고 홍위원장의 주장에 동조했다.YS는 중소기협 중앙회장 등의 민주당 입당에 대해서도 “용납할 수 없다”며 비난했다. YS는 병역비리 수사와 관련,“선거를 한달 앞두고 이런 일을 한다면 삼척동자라도 야당탄압이라고 생각한다”고 주장했다.홍위원장이 “4·13선거에서관권·금권선거로 여당이 다수를 차지할 때 어떻게 되겠냐”고 묻자 YS의 ‘독설’은 도를 더해갔다.YS는 “심각한 사태로 발전할 것”이라며 “이승만(李承晩)박사의 망명과 박정희(朴正熙)의 죽음,전두환(全斗煥)의 멸망을 역사가 가르쳐줬는데도 김대중씨는 모르고 있다”고 비난했다.YS는 그러면서 “국민은 부정에 저항할 줄 알아야 한다”면서 “개혁이 안되면 혁명이 일어난다는 케네디의 말도 있다”고 덧붙였다. 김대통령을 공격하는데 있어서는 홍위원장과 뜻을 같이 하던 YS는 ‘한나라당 지지’부분에서는 중립을지켜 눈길을 끌었다.홍위원장은 “야당의 힘이한 곳으로 모아지고 있다”며 은근히 한나라당에 대한 지지를 요청했다.YS는그러나 “의원 36명을 빼갔는데도 제대로 못싸웠다”면서“야당이 무서울 정도로 싸우지 않는다”고 한나라당에 불만을 털어놓았다. 최광숙기자 bori@. *민국당 '선명성 부각'안간힘. 민국당은 20일 조순(趙淳)대표의 기자회견을 기점으로 현정권에 대한 강도높은 포격을 시작했다.한나라당이 제기한 ‘여권 2중대 시비’를 비켜가면서 선명야당으로서의 위상정립을 노리는 셈이다.텃밭으로 여기는 영남권에서조차 지지도가 뜨지 않자 대여 공세로 돌파구를 열어보려는 것같다. 이래선지 이날 조 대표의 ‘DJ 공세’는 한껏 날이 섰다.그는 민주당의 공천과 정치자금 조성,아태재단 문제 등을 공박하면서 “김대통령은 총선에서손을 떼고 엄정중립을 지켜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어 경제전문가답게 현정부의 금융·경제정책을 조목조목 비판하면서 “자화자찬으로 일관된 현정부의 경제정책 때문에 3∼4년내에 IMF위기를 다시 맞게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바통을 이어받은 장기표(張琪杓)최고위원의 공격은 더욱 신랄했다.그는 최고위원회 결의사항임을 앞세워 아태재단을 주요 공격목표로 삼았다.“어떤형태로든 대통령 자제들의 권력행사를 용납할 수 없으며 김대통령의 친인척들 모두를 공직에서 퇴직시켜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민국당의 ‘DJ 공격’은 1단계로 ‘반(反)DJ전선’을 형성한 뒤 ‘반 이회창 정서’를 결집하겠다는 2단계 총선구상에 따른 것이라는 흔적이 역력하다.당초 ‘반 DJ,반 이회창’이란 두마리 토끼를 잡겠다는 전략이 혼선을 부르면서 ‘선DJ 후이회창 공세’로 가닥이 잡혀가고 있다. ‘이회창 저격수’로는 김윤환(金潤煥) 최고위원을 내보낼 계획이다.김 최고위원은 “한나라당 이총재의 공천전횡과 실체를 국민들에게 알리겠다”며민국당 TV 방송연설에 1번 타자로 지원했다는 후문이다. 대구·경북(TK)지역 일부에서의 ‘반 이회창 정서’를 표로 연결하려는 안간힘인 셈이다. 민국당은 이와 함께 ‘조순 배수진’을 ‘히든 카드’로 모색하고 있다.김최고위원은 기자들에게 “이런 상황에서는 조 대표가 비례대표 7∼8번으로출전,배수진을 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오일만기자 oilman@
  • [김삼웅 칼럼] 신탁통치 문제의 역사인식

    김종필 자민련명예총재가 “찬탁인사가 정부요직에 있다”고 한 발언으로불거진 색깔론은 선거때면 나타나는 고질의 하나로 치면 그만이지만,신탁통치문제를 정략으로 삼는 정치인들의 역사인식에는 아쉬움이 따른다. 대한민국이 건국되기 전 해방공간에서 있었던,어느 측면 민족분단의 계기가된 탁치(託治)문제가 반세기도 한참 지난 오늘의 시점에서,그것도 학술토론아닌 총선전략으로 제기되는 것은 우리 정치풍토가 얼마나 비지성적인가를보여준다. 한반도의 탁치문제가 외교석상에서 처음으로 제기된 것은 1943년 영국총리이든과 미국대통령 루스벨트의 워싱턴회담에서였다.그후 카이로·테헤란·얄타·포츠담회담을 거치면서 구체화되었다.원래 한반도 탁치안은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루스벨트에 의해 구상되었다.그는 1942년 이래 전후 식민지에 신탁통치라는 새로운 제도를 적용시킬 것을 구상했다.식민지 국민은 자치능력이 부족하므로 일정기간의 교육을 통한 준비기,즉 국가의 신탁통치를 거친후 독립시킨다는 구상이었다. 1943년 11월 말 테헤란에서 열린 미·소 양국회담에서 루스벨트가 한국의탁치안을 제시하여 합의되었다. 이후 1945년 2월 얄타회담에서 미국은 소련이 한반도에 지배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을 막기 위해 탁치안을 구체화하려했다.그러나 일본의 패망이 예상외로 빨라 한반도를 미·소 양국이 분할점령하게 되고,한반도 문제를 매듭짓기 위해 모스크바 3상회의가 열렸다.여기서미국이 제시한 탁치안에 소련이 수정안을 내어 채택되었다. 모스크바 3상회의 탁치안 1945년 12월 미국의 번스 국무장관,영국의 베빈 외무장관,소련의 몰로토프외무장관이 모스크바에서 결정한 탁치안의 요지는 ⓛ한국을 독립국가로 재건하기 위해 임시적인 한국민주정부를 수립한다 ②한국임시정부 수립을 돕기위해 미·소공동위원회를 설치한다 ③미·영·소·중의 4개국이 공동관리하는 최고 5년 기한의 신탁통치를 실시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내용이 국내에 알려지자 정치세력은 찬반양론으로 분열되고 격렬한 찬반투쟁이 전개되었다.3상회의 내용이 국내에 처음으로 알려진 것은 1945년 12월 27일이다.미국발 보도로알려진 이 소식은 “미국은 즉시 독립을 주장하며 소련은 신탁통치를 주장한다”는 내용이었는데,이는 사실과 다를 뿐 아니라 탁치와 독립을 은연중 대립시키는 내용이었다. 이에 김구와 임정계열은 반탁과 즉각독립을 내걸고 반탁운동의 선두에 나섰다.김구는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하는 과도정부수립”을 천명하면서 미군정에 대응하고 나섰다.이러한 반탁운동은 광범위한 대중적 지지를 받았다.초기반탁입장을 취했던 좌익세력은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통일위원회 설치를 제의했으나,임정측이 비상정치위원회의 소집을 통해 통일정부를 추진하고자 하여 결렬되었다.그러나 이른바 ‘인민공화국’과 조선공산당은 46년 1월 2일3상회의 지지를 선언하고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을 결성,좌익만의 통일전선을 이루었다. 한편 우익은 임정을 중심으로 비상정치회의 준비회를 열고,이승만의 독립촉성중앙협의회가 이에 합세,좌익이 불참한 가운데 비상국민회의를 개최했다. 이로써 좌우분열은 극에 달했다. 실제로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은 ‘신탁통치와 임시정부수립및 그를 통한독립’이라는 내용이었으나 이를 둘러싸고 친일세력과 민족세력간의 대립구도가 좌·우익간의 대립구도로 바뀌고,김구 등의 통일정부수립 노력이 이승만의 단독정부수립 노선에 의해 좌절됨으로써 결국 탁치안은 친일분자 및 우익세력에게 도덕적 명분을 부여하는 계기가 되었다.그리고 찬·반투쟁 과정에서 정파간의 격렬한 대립을 벌이게 되어 민족분열의 계기를 만들었다. 민족·반민족에서 좌·우대결로 3상회의 결정에는 한반도의 분단보다 통일정부 수립을 가능케 할 구상이 많이 포함돼 있었음에도 당시 정치지도자들은 ‘신탁통치’ 측면만을 부각시키고 미·소의 타협을 유도하려는 노력을 하지 못했다.지도자들이 국제적 식견이 있었다면 이 제안을 통일정부수립의 계기로 활용할 수 있었을 것인데도그러지 못하고 극심한 분열과 대립을 가져온 것은 민족사적 비극이다. 비슷한 시기 4개국 관리체제에 놓인 오스트리아 지도자들은 정파간의 협력과 외교력으로 통일정부를 수립했다.정치인들이 배워야 할 교훈이다. 김삼웅 주필
  • 오늘 이동녕선생 60주기…되돌아본 업적

    지난 96년 5월17일 15대 국회 개원을 며칠 앞두고 여의도 국회의사당 중앙홀에서 한 역사적 인물의 흉상 제막식이 거행됐다.국회의사당 내에 특정인의 동상이 건립된 것은 처음있는 일이었다.흉상의 주인공은 상해 임시정부 의정원(현 국회)의 초대 의장을 지낸 석오(石吾) 이동녕(李東寧·1869∼1940)선생.국회가 선생의 동상을 의사당 내에 건립한 것은 상해 임시의정원을 구성하고 초대 의장을 맡아 의회민주주의를 도입한 업적을 기리기 위해서였다. 1919년 중국 상해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될 때부터 해방 때까지 선생은 임정의 ‘기둥’ 역할을 했다.임시정부 공식출범 직전인 1919년 4월10일 임시의정원의 초대 의장으로 선출된 선생은 국호 ‘대한민국’과 임시헌법·관제(官制)를 제정,3일 후인 4월13일 이를 만천하에 공포하였다.선생은 임시의정원 초대 의장을 비롯해 의정원 의장 3회,주석(主席) 4회 등 무려 일곱 차례나 임정의 요직을 역임하였는데 이는 임정의 역사를 통틀어 유일한 기록이다. 1869년 충남 천안에서 태어난 선생은 1897년 독립협회 활동으로 이준·이승만 등과 함께 7개월간 옥고를 치렀으며,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동지들과 결사대를 조직,대한문 앞에서 항의 연좌데모를 벌이다 또 2개월의 옥고를 치렀다.1907년 양기탁·유동열·안창호 등과 신민회를 조직한 선생은 1910년 국권 상실 후 만주로 망명,신흥무관학교를 창립하여 초대 교장에 취임,군사교육을 통한 독립정신 고취에 진력하였다. 국내는 물론 만주·노령(露領)·중국 등 국내외에서 해방 때까지 독립운동에 헌신한 선생은 일제의 유혹에도 굴하지 않고 끝내 지조를 지켰다.또 임정 내 이념·계파간 갈등 속에서도 별다른 ‘잡음’없이 요직을 중임한 것은선생이 공명정대한 업무처리와 온후한 인품으로 동지들로부터 존경을 한몸에 받은 때문이다.백범 김구(金九) 선생은 ‘백범일지’에서 “선생은 재덕이출중하나 일생을 자기만 못한 동지를 도와서 선두에 내세우고,스스로는 남의 부족을 보충하고 고쳐 인도하는 일이 일생의 미덕이었다”고 평한 바 있다. 한편 선생의 여러 분야에 걸친 활동 가운데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이언론계활동이다.1897년 ‘독립협회사건’으로 투옥,이듬해 출감한 선생은 당시 이종일(李鍾一)이 경영하던 ‘제국신문’의 논설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사설을쓰기도 하였으며,1907년 신민회 조직 후에는 당시 구국항일지 ‘대한매일신보’의 발행을 지원하기도 했다. 정운현기자 jwh59@. *이동녕선생 60주기 추모식.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과 임시의정원 의장을 지낸 석오 이동녕(李東寧) 선생의 60주기 추모식이 13일 오후 2시 선생의 묘소가 있는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에서 열린다. 석오이동녕선생기념사업회(회장 姜英勳)가 주최하는 이 추모식은 상동교회이동학 목사의 추모기도를 시작으로 인하대 윤병석 명예교수의 약사 보고,추모·추념사,추모가 제창,헌화 분향 순으로 진행된다.추모식에는 최규학 국가보훈처장,고건 서울시장,윤경빈 광복회장,박유철 독립기념관장,유족대표 이석희 (주)대우 상담역을 비롯해 각계 인사 200여명이 참석한다. 정운현기자. *석오 이동녕선생 60주기에 즈음하여. 선열의 유지가 날로 퇴색되는 개탄스런 시기에 석오 이동녕 선생의 60주기를 맞음은 실로 감회가 새로울 뿐 아니라 나라와 겨레에 대한 의미가 남다르다 하겠다. 20대 젊은 나이로 과거에 급제하여 앞날이 보장되었음에도 모든 영화를 버리고 독립운동이라는 가시밭길로 뛰어든 것은 선생의 혁명적인 기질이 짙었음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선생의 독립투쟁은 국내에서 뿐만 아니라 눈보라치는 만주벌판,얼음땅 시베리아,연해주,그리고 황야의 중국대륙에 이르기까지 수륙(水陸) 수만리를 뛸 만큼 웅장하고 방대한 발자취에서 충분히 엿볼 수 있다. 우리 민족운동사에서 선생의 높은 위상은 가난과 무지에서 방황하던 암울했던 구한 말 뛰어난 문필로 여성해방운동과 민권사상을 주창했던 선각자였다는 데서 더욱 그렇다.이같은 민족사상의 맥락은 이미 3·1의거 직전 만주땅길림성에서 이른바 ‘무오(戊午)독립선언’에 앞장섰던 기개에서도 찾을 수있다.1919년 중국 상해에서 수립된 임시정부 초기 선생은 초대 의정원 의장으로서 역사적인 민주헌법 제정에 앞장섰는데 이는 선생의 투철한 민주사상을 담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임시정부 주석 4차례,의정원 의장 3차례 등 총 7차례에 걸쳐 임시정부의 대임을 맡는 동안 선생은 항상 온화한 성품으로임시정부를 이끌었다. 독립운동의 열기가 한창이던 1910년대 선생은 국권회복을 위해 인재양성이시급함을 통감하고 남만주 해외망명기지에서 최초의 교육기관인 ‘서전서숙’에 손수 출자하여 동지들과 운영하였다.또 최초의 군사학교인 ‘신흥학교’를 세워 초대 교장에 부임해 후일 대한광복군의 초석을 다졌다.선생의 이같은 교육적인 열정은 멀리 노령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한국군 사관학교를 세우려다 발각돼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선생은 평소 덕행과 예절로도 많은 사람들로부터 두터운 신뢰를 받았다.당시 친러파와 친일파 간의 사상적 갈등,각 지방 파벌 간의 혼란 속에서도 선생은 초연한 입장에서 민족진영의 단합체인 임시정부를 처음부터 끝까지 사수한 ‘터줏대감’이었다.전해오는 얘기에 따르면,조선총독 사이토가 한국인 관리를 중국에 밀파,선생의 귀화를 적극 권유하였으나 일제의 유혹을 끝내 물리쳐 선생을두고 ‘불멸의 민족혼’으로 칭송하고 있다. 선생은 독립운동 방략을 논의하는 자리가 혼란스러울 때마다 이를 중재하고 수습하였는데 이는 겸손과 높은 식견을 갖춘 선생의 영도력에서 비롯한 것이었다고 동지들이 증언하고 있다.선생을 두고 ‘민족운동의 선구자’이자‘임시정부의 총수’라고 일컬었던 것은 강직한 성품과 철두철미한 민족주의사상,그리고 애국철학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겠다.선생은 항상 남을 존중하고 남을 앞세우며 자신은 뒷전에서 도와주는 미덕의 소유자였다. 임시정부 시절 선생은 해외로 망명하기 전 서울 상동(尙洞)교회에서 기독교에 입교해 전덕기 목사를 알게 된 것을 늘 행복해 했다.또 그 시절 상동교회를 중심으로 최초의 항일조직인 신민회를 창건한 사실을 몹시 그리워했다고전해오고 있다.1940년 선생은 조국광복을 불과 5년 앞두고 이역만리에서 향년 72세로 서거하였다.독립운동의 와중에서 참아왔던 지병인 급성폐렴이 악화된 탓이었다.선생은 유언으로 ‘민족진영의 대동단결과 정당의 통합’을남겼다.선생의 장례는임시정부 수립 후 첫 국장으로 예우하였으며 해방 후백범 김구선생의 지시로 유해가 봉환됐다.오늘 선생의 60주기를 맞아 선생의 영전에 향을 사르며 그 큰뜻을 되새긴다. 김석영 이동녕선생 기념사업회 상근부회장
  • 행정직공무원 3년간 계속 감소

    지난 40년 동안 공무원 정원은 어떤 변화를 가져왔을까.제1공화국에서 ‘문민정부’까지는 공무원 수가 꾸준히 증가했다.그러다 ‘국민의 정부’ 출범후 강력한 구조조정으로 공무원 정원이 감소하기 시작했다.정부 조직도 당시집권자의 의지에 따라 휘둘린 경향이 짙었다. 행정자치부의 자료를 바탕으로 대한매일 행정뉴스팀에서 분석한 바에 따르면 이승만(李承晩)정부 시절인 지난 60년말 전체 공무원은 23만7,476명이었다.당시 정부는 독립국가로서 면모를 갖추는 데 필요한 기구를 만드는 데 급급했다.대륙식 행정체제를 모방하다보니 11부 4처 3위원회로,행정수요의 예측에 의한 기구라기보다 형식요건을 갖추기에 급급한 인상이 짙었다. 제2공화국인 장면(張勉)정부는 내각책임제 채택에 따라 국무총리와 국무원(내각)의 지위를 크게 강화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공무원 수는 23만7,500명으로 이승만정부 시절보다 겨우 24명만이 늘어났다. 제3공화국은 국가안보와 경제개발계획을 중점 추진한다는 목표아래 국가조직도 확대일로를 걸었다.2원 14부 4처 14청으로 공무원 수가 무려 55만6,793명(79년 기준)으로 많아졌다. 전두환(全斗煥)씨가 집권한 제 5공화국 초기는 대폭적인 정부조직 개편으로고위공직자가 많이 줄었으나 집권 말기인 87년엔 집권전보다 10만8,622명이늘어난 70만5,053명이 됐다. 가장 기구가 팽창했던 때는 노태우(盧泰愚)대통령시절이다.2원 16부 6처 15청 2외국으로 공무원 정원이 88만6,179명나 됐다.국민의 삶의 질과 관련된조직이 강화됐다고하나 공무원의 비대화를 초래,오히려 국민들로부터 비판요인을 제공한 셈이 되고 말았다. 문민정부시절인 김영삼(金泳三)대통령집권 때는 93만4,247명으로 6공화국보다 전체적으로는 4만8,068명이 늘어났으나 행정직공무원은 3,163명이 줄어들었다. ‘국민의 정부’가 들어서면서 공무원은 대변혁기를 맞는다.김대중(金大中)대통령은 아예 ‘대통령령’으로 국가직 공무원 수를 정해놨다.현재 정원에묶여있는 국가공무원 수는 27만3,982명(지방공무원,교육직,헙법기관 제외)이다. 국민의 정부는 2차례에 걸쳐 정부조직 개편을 단행 현재 17부 4처 16청에 88만989명이 근무하고 있다.문민정부때보다 5만여명이 줄어든 수치다.이를 다시 분류해보면 순수국가 행정직 공무원은 8만1,042명에 불과하고 나머지는지방공무원이나 공안직,교육직 등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앞으로도 국가직 공무원은 별로 늘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게 공통적인 의견이다.반면 공무원 총정원제에 영향을 받지않는 지방직을 비롯,교육직 또는공안직 등은 언제든지 늘어날 소지가 있다. 행자부 관계자는 “행정부를 제외한 입법 사법부는 98년 이후 오히려 10%인원이 증가됐다”면서 “이는 구조적으로 모순이 있다”고 말했다. 홍성추기자 sch8@
  • 서대문형무소 역사 첫 고찰

    ‘현저동 101번지’. 서울 서대문구 무악재 왼편 언덕바지,현 독립공원 일대를 지칭한 지번이다. 조선왕조의 도읍을 한양(현 서울)으로 정한 무학대사는 일찍이 이 일대를 가리켜 “과연 명당중의 명당이나 한때 3,000명의 홀아비가 탄식할 곳”이라고예언한 바 있다. 무학대사의 말은 과연 적중했다.‘한일병합’ 2년전이자 ‘헤이그밀사사건’ 이듬해인 1908년 10월 이곳에는 당시로선 ‘동양최대·최신 규모’의 경성(京城)감옥이 들어섰다.당시 이미 조선병합을 꾀하고 있던통감부는 장차 일제에 항거하는 ‘죄인’들이 크게 늘어날 것에 대비,미리이곳에 대형 감옥을 만든 것이다.이후 이곳은 우리나라 감옥의 대명사로 불렸다.그러나 놀랍게도 서대문형무소의 역사를 들여다볼 수 있는 자료집 한권이 없는 실정이다. 오랫동안 친일문제와 한국현대사를 천착해온 대한매일 김삼웅 주필(57) 이최근 출간한 ‘서대문형무소 근현대사’(나남출판)는 서대문형무소의 역사를처음으로 다뤘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이 책은 김 주필이 순국선열유족회가 발행하는 월간지 ‘순국’에 97년 11월부터 금년 1월호까지 기고한 25회 분량의 연재물에 이승만 관련 부분을 보탠 것이다.저자는 집필과정에서 “관련자료의 절대부족이 가장 큰 애로였다”고 토로했다. 지난 88년 서울시가 옥사(獄舍)·담장·망루 등을 대거 철거,독립공원을 조성하면서 지금 이곳은 한낱 놀이터로 변모하였다.그런 이곳을 저자는 당시자료와 증언을 통해 이곳이 대표적인 민족수난사의 현장임을 입증해 보이고있다.백범 김구·이승만 등을 비롯해 3·1의거만세·105인사건·신간회사건·수양동우회사건 등 일제강점기 대형 독립운동사건에 연루된 애국지사들이이곳에서 옥고를 치렀음을 당시 재판기록과 관련문서를 통해 밝혀내고 있다. 64세의 노구로 사이토(齋藤實)총독에게 폭탄을 던진 강우규 의사를 비롯해한말 의병장 허위·이강년 선생,유관순 열사,임시정부 노동국총판 김동삼 선생 등이 최후를 마친 곳도 모두 이곳이다.일제의 보복을 두려워한 나머지 김동삼 선생의 시신을 수습하려는 자가 나서지 않자 만해 한용운 선생이 “내평생 선생님의 시신만이라도 뫼실 수 있다면 큰 영광”이라며 김 선생의 시신을 수습한 것은 가슴 뭉클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이 책은 단순히 독립운동가들의 행적만 살핀 것이 아니다.일제의 감옥정책,당시 일제가 사용한 형구(刑具),서대문감옥에서 애국지사들이 남긴 시·서한등을 비롯해 조선총독부 시정연보를 통해 당시 한국의 감옥실태 등 우리 행형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들도 곁들이고 있다.부록으로 여기서 옥고를 치른독립운동가들의 신상기록이 수록돼 있다.해방이후 역사에 대해서는 후편에서다룰 예정이다. 저자는 “우리 학계가 독립운동사처럼 명분·명예가 따르는 연구에만 매달리다 보니 서대문형무소 같은 ‘어두운 역사’는 언제나 망각,또는 배척의대상이 돼 왔다”고 말했다.값 1만5,000원. 정운현기자 jwh59@
  • [대한광장] 민주당 정책위원장 이재정 신부에게

    자네의 요즘 직함이 민주당 정책위의장이라는 사실은 보도를 통해서 알고있네만 나는 지금 이 글을 민주당 정책위의장이 아니라 공당의 정책위의장이된 나의 친구 이재정 신부한테 쓰고 있다네.그러니 성격상 이 글은 사신(私信)이지만 일간 신문의 지면을 빌려서 쓰고 있으니 굳이 가른다면 공개 사신쯤 될까 모르겠군.아무러면 어떤가. 30년쯤 전 박정권이 3선개헌을 시도했을 때 장공 김재준 목사님이 이병린변호사,천관우 선생 등과 함께 3선개헌 반대 국민운동을 이끄신 것은 자네도잘 알고 있겠지.그때만 해도 기독교 지도자가 정치 현실에 직접 참여하는 것이 일반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정서적으로 낯선 일이었네.아니,그렇게 말해서는 안되지.이승만씨를 비롯해 윤보선,장면,정일형 등 이 나라 정계를 이끌어온 인물들이 모두 기독교 신자였는데 기독교인들 정서에 기독교 지도자의 정치 참여가 낯설었을리 있겠는가. 그런데도 당시 기독교계에서는 김재준 목사의 정치 현실 참여를 두고 ‘정교분리의 원칙’을 거론하며 마땅찮은 눈으로 비판하는 소리가 자못 높았지. 그 무렵 어느 사석에서 들은 김재준 목사님의 한 마디는 내 가슴에 깊이 새겨져 아직도 지워지지 않고 있다네.그 분은 저 투박한 함경도 사투리를 섞어이렇게 말씀하셨지. “현실에 살면서 현실에 참여 안할 수 있어? 문제는 현실에 참여하느냐 않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참여하느냐지.깨끗한 참여가 있고더러운 참여가 있을 뿐인 게야” 그토록 마틴 루터까지 들먹이며 정교분리의 원칙을 내세우는 자들이 이승만정권이나 장면 정권 때는 왜 한마디도 하지 않았던 것일까.이런 얘기를 더길게 늘어 놓을 이유도 시간도 없네.나는 다만 자네가 공당의 정책위의장이라는 중요한 자리에 앉기까지 많은 고민을 했으리라 짐작하고 그 고민이 낳은결단을 우선 지지하면서, 이왕에 발을 들여놓았으니 재야에 있을 때 품었던뜻을 마음껏 펼쳐보라는 그런 말을 전하고 싶을 따름일세. 많은 경험자들이 그렇게들 말하더군.정치판에 들어가기 전에는 가능하리라여긴 일들이 일단 들어가서 보니까 그게 아니더라고.한두 사람의 뜻과 힘만으로는 도무지 어떻게 손써볼 수없을 만큼 굳어져 있고 썩어 있더라고.어떤가.자네도 혹시 그런 느낌을 벌써 받고 있는 건 아닌가. 나는 그들의 말이 터무니없는 변명이나 핑계는 아니라고 보네.그러나 그런말을 들을 때마다 늘 마음 한 구석이 개운치 않았어.자네 생각엔 어떤가.마하트마 간디 같은 사람도 이 나라 정치판에 뛰어들면 그런 말을 할까.백범선생님이 환생하시어 오늘 여의도에 진출해도 한 사람 힘 가지고는 어림도없다고 고개를 저으며 맥없이 물러날까. 한두 사람의 뜻과 힘을 스스로 가벼이 여기니까 그 뜻과 힘이 맥을 못추는것이라고 나는 생각하네.자네와 내가 유일한 스승으로 모시고 있는 예수를보세.그 분 앞에서 누가 감히 한 사람의 뜻과 힘을 가볍다 말하겠는가.그러나 만일 그 분이 당시의 정치판에 (자의든 타의든) 발을 들여놓으신 뒤 일신(一身)의 살아 남을 구멍을 찾느라고 스스로 죽는 길을 외면했더라면,우리가또한 어떻게 한 사람의 위대한 길에 대하여 그것을 신뢰할 수 있겠나. 자네나 나나 어차피 그 분의 부르심을 입었으니 언제 어디서나 살아남을 길을찾을 게 아니라 어떻게 죽을 것인지 그 길을 찾아야 할 것일세.내가 굳이자네를 무슨 무슨 당 정책위의장 아무개 신부(神父)라고 부르는 이유를 깊이헤아려 주시기 바라네,친구여. 이현주 목사 아동문학가
  • 영웅사관·신비주의 허상 비판 ‘현대 한국사회 이해와 전망’

    동국대 강정구(사회학과·학술단체협의홰 상임의장) 교수가 최근 한울아카데미에서 ‘현대한국사회의 이해와 전망’을 출간했다.평소 한국사회의 분단·통일문제,민족문제 등에서 진보적 입장을 견지해온 강 교수 특유의 성향이물씬 풍기는 책이다. 책 머리말격인 ‘총론’에서 엘리티즘과 신비주의에 매료된 일군의 학자들을겨냥해 ‘학문신비주의’라고 비판하고는 “이 세상을 더 진보적이고 더불어 사는 공동체로 만드는데 공헌하지 못하는 학문이 필요 있을까”라고 묻고있다. 강 교수는 “해방후 한국의 현대학문은 지적 과잉서구화에 몰입돼 주체적 모습을 상실했다”면서 민족·민중학문의 건설을 주장하고 있다. 특히 인문사회과학의 임무를 탈신비화와 ‘가면벗겨 폭로하기’로 보고 일부언론의 ‘이승만되살리기’와 ‘박정희영웅만들기’ 등 영웅사관을 경계해야한다고 지적하고 있다.값 1만8,000원정운현기자
  • [김삼웅 칼럼] 한국적 ‘보수’의 탈을 벗기면

    인간의 심성은 에덴동산 이래로 보수와 진보의 양면성을 간직해왔다. 신의계율을 어기고 금단의 과일을 탐낸 이브가 진보적 경향을 표현했다면 아담은안전과 안정을 존중하는 보수적 경향을 나타냈다고 할 수 있다. 시인 에머슨은 인류를 과거에 집착하여 추억에 잠기는 보수파와 미래를 바라보며 희망을 설계하는 진보파로 분류했다. 로렌스 로웰은 좀더 세분하여△급진파=현상에 불만이며 개혁에 낙관적인 집단 △자유주의파=현상에 만족하되 개혁의 가능성을 신봉하는 집단 △보수파=현상에 만족하며 개혁의 가능성을 부인하는 집단 △반동파=현상에 만족하지 않을 뿐 아니라 개혁에 대해서도 비관적인 집단으로 분류했다. 인간사회는 복잡하고 다양하다. 따라서 보수와 진보 역시 다양한 배합을 이루면서 존재한다. 반동주의와 급진주의를 양극으로 하여 그 중간에 보수주의와 진보주의가 스펙트럼의 색(色)과 같이 상이한 여러가지 색조를 띠고 배열해 있다. ‘반동’과 ‘급진’이 현상의 과격한 변화를 희구한다면 보수는온건한 ‘현상고집’이고 진보는 온건한 ‘변화갈망’을 추구한다. 그래서 에머슨은 “각자가 중요한 절반이다. 그러나 어느것도 전부가 될 수 없는 절반이다. 각자가 상대방의 잘못을 폭로하고 있으나 참된 인간이기 위해서는 양자는 결합하지 않으면 안된다”라고 지적했던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크게 왜곡된 현상중의 하나는 보수주의라는 이념체계와 보수를 자처하는 사람들의 실체다. 언제부터인지 변종된 보수주의라는 이데올로기가 우리 정치의 주인 노릇을 하며 안방을 차지해왔다. 카를 마르크스가 살아나 북한공산주의의 실상을 지켜보면 기절할 것처럼 ‘보수주의 성서’라는 ‘프랑스혁명의 성찰’을 쓴 버어크가 살아나 한국적보수주의의 정체를 알면 역시 기절할 지 모른다. 보수주의라는 이데올로기적 의미와 사회심리학적 의미가 지나치게 왜곡되었기 때문이다. 이승만정권 이래 독재정권을 떠받들며 정치 경제적인 특권을 누려온 세력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는 포장용으로 ‘보수’를 차용하면서 보수주의는보신주의(保身主義)로 변용되었다. 이들은 한국전쟁과 냉전체제를 겪으면서체질화된 국민의 보수심리에 편승하여 민주인사나 통일운동세력 그리고 개혁인사들을 급진주의 또는 좌경으로 매도하면서 왜곡된 보수이념의 독점지배체제를 구축해왔다. 그러다 보니 정치인들이 ‘살아남기 위해’너도나도 보수의 간판을 달게 되어 ‘유사(類似)’보수의 경쟁이 벌어지고 사이비 보수세력은 걸핏하면 색깔론으로 상대적 진보 또는 개혁세력을 용공으로 몰면서 기득권에 철망을 쳤다. 그동안 사이비보수세력은 군사정권과 결착하여 학계 언론 재벌 금융 산업정보를 장악하여 한국 사회를 자신들의 ‘입맛’대로 요리했다. 남북긴장,지역갈등, 권언유착, 정경유착으로 지배구조를 강고하게 구축해왔다. 이들은 민주주의를 압살하면서 ‘자유민주주의’를 내세우고, 소수재벌 중심의 특권경제 체제를 만들고는 ‘산업화 주체’로 자부하고, 끝없이 남북대결을 부추기면서 ‘민족주의 세력’으로 행세한다. 보수언론·보수지식인들의 여론조작이 이를 뒷받침한다. 이것이 오늘 우리의 이른바 보수주의 또는 보수세력의 정체이고 실상이다. 한국적 비극이고 소극(笑劇)이다. 이제 위장된 보수세력은 그 이념과 행위에 걸맞는 ‘수구’의 본명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보수주의의성장을 촉진하는 길이고 보수주의 이념체계를 정립한 버어크에게 속죄하는길이기도 하다. 보수주의(conservatism)의 어원은 Conservar 즉 ‘건저내어 유지한다’는뜻이라 한다. 여기서 보수라면 ①보수할만한 가치가 이미 존재한다는 것과②그 가치있는 것에 대한 위험이 또한 박두했거나 조성되어 있을 때 가능하다. 그렇다면 한국의 사이비 보수세력에게 ‘보수할만한’가치는 무엇인가. 기득권과 보신 이외의 아무것도 없다. 정치개혁은 사이비 보수정치, 위장된 보수언론의 탈을 벗기는 작업부터 시작해야 한다. 국민의 80%이상이 지지하는 시민단체의 정치개혁을 시대착오적인 음모론과 배후설을 제기해 본질을 흐리는 ‘사이비 보수’의 본질을 혁파하지 못하고는 어떤 개혁도 불가능하고 자칫 그들로부터 ‘좌경급진’으로몰리게 된다. 김삼웅 주필
  • [대한광장] ‘反日’

    개봉 전부터 입소문이 무성했던 ‘러브레터’는 깔끔한 영화인 모양이다.봤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봐도 그렇고 뭔가 남보다 특이한 안목을 드러내려고 노력하는,그래서 좋은 얘기 끝에 뭔가 찜찜한 시비 달기를 즐겨하는 영화평론가들의 비평을 훑어봐도 흰소리가 없는 걸 보면 말이다. 며칠 전 어느 신문에서 읽은 나를 상념에 잠기게 한 짤막한 에세이도 ‘러브레터’ 이야기다.요약하자면 어느 대학의 교수라는 그 에세이의 필자는 부인의 채근으로 신정연휴에 ‘러브레터’를 본다.영화는 인상적이었지만 그는영화에 쉽게 몰입하지 못하는데 그 이유는 그 영화가 일본영화이고 바로 그일본영화를 극장에서 보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필자는 일본말 대사,일제시대에 우리가 입었던 그대로의 고등학생 교복…등에 대해 알 수 없는 거부감과 두려움을 느낀다.필자는 끝내 “여주인공같이깨끗하고 예쁜 딸이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는 부인의 말에 “영화에서 봤으면 됐지 왜 그런 욕심까지 내느냐”고 면박을 줌으로써 모처럼의 외출을 망치고 만다. 세대 차이가 있긴 하지만 일본에 대한 한국인들의 ‘거부감과 두려움’은일반적인 것이다.물론 한국인들의 그런 반일감정은 36년간의 식민지 체험을 근거로 한다.그 체험은 그 체험을 전해 듣기만 한 나 같은 세대에게도 충분히 가슴아픈 것이었으며 그 상처는 반세기가 지난 오늘도 아물지 않았다.일본 극우주의자들은 여전히 일제의 식민통치가 조선인에게 이로운 것이었다고 주장하곤 한다.힘이 주어진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대동아공영권의 기치를 들고 일어 설 그들은 여전히 우리의 분노와 반감의 대상이다. 문제는 일본 극우주의자들에 대한 그런 정당한 반감이 일본 민족 전체 혹은 일본인들 전체에 대한 반감과 혼동되는 일이다.우리의 가슴아픈 식민지 체험은 일본 극우주의자들과 한국 민중간의 문제이지 일본민족 전체와 한국민족 전체의 문제는 아니었다.우리는 일제 식민지 체험을 한 세대가 갖는 일본에 대한 정서적인 거부감으로 이해할 수 있다.그러나 우리는 일본 극우주의자들에 대한 우리의 정당한 분노와 경계를 더욱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 그런정서적인거부감을 좀더 정확하고 분명한 것으로 만들 필요가 있다. 독립운동가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어 처음 한 일이란 망치를 들고 다니며 경무대 안의 일본제 전기스위치를 모조리 깨뜨리는 것이었다고 한다.그러나 이승만은 바로 그 망치로 반민특위를 깨뜨리고 친일파들을 중용함으로써 한국현대사의 기본틀을 망가뜨리고 말았다.그후 50여년 동안 한국정부의 반일정책이란 이승만의 그런 코미디를 그대로 따르는 것이었다.이승만의 뒤를 잇는 박정희,그리고 그의 아들을 자처한 두 군인은 술자리에서 일본군가를 부르는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이 대통령을 지내는 동안에도 그런 허풍선이 반일정책은 유지되었다. 이제 우리는 지난 50여년 동안 우리가 막연하고 부정확하게 지녀온 반일감정이,독도 얘기만 나오면 온 국민이 머리띠를 두르는 그 일사불란한 순진함이 반일을 내세운 친일정권들에 어떻게 이용되었는지에 대해 되새길 필요가있다(이 얘기가 심하다 생각되면 종군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해 한국정부가 보여온 야비하고 잔인한 태도를 중국이나 북한정부의 그것과 비교해 보라). 그 에세이를 읽은 다음날인가,텔레비전 아홉시 뉴스에는 일본 문화에 휩쓸리는 젊은이들이라는 기획취재가 나왔다.수입제한 조치가 풀리면서 너도나도 일제 캠코더를 찾는다는 얘기와 젊은이들 사이에 ‘러브레터’ 주인공의 독백 대사를 외우는 게 유행이라는 얘기가 기자의 독립운동가풍 멘트에 실리고 있었다.프로그램 개편철이 오면 프로듀서들을 모조리 일본으로 출장보내곤하는 한국 방송사의 아홉시 뉴스에서 말이다. 김규항 아웃사이더 편집주간
  • [대한시론] 새 천년 첫해의 선택

    내게 있어서 21세기 새 천년 맞이는 장밋빛 기대보다 걱정이 앞선다.‘세계화’라는 지구단위 시장화나 정보기술의 혁명으로 생긴 변화는 예전 못지않게 ‘힘센 놈이 싹쓸이하는 세상’을 만들었다.아무리 ‘신자유주의’라는구호로 미화해도 그 그늘을 보아야 한다.약한 나라나 개화에 뒤처진 개인은어느 때보다 가혹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다. 우리가 개인으로서나,또는 겨레(민족)로서나 살아남을 전략과 전술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다.무엇보다 식민지 잔재와 함께 반세기 동안 이어온 부패독재구조의 틀을 깨고 정치,경제,법제,사회 등 모든 부문의 개혁을 단행하는것이다.이 개혁을 주도하는 정치적 주축이 바로 서야 한다.그것은 당장 새해의 국회의원 선거를 올바로 치르는 일과 연관된다. 우리는 해방후 반세기 동안 선거를 통해 정치권력에 국민의 이름으로 정통성을 인정해왔다.그래서 총칼로 밤중에 정권을 강탈한 자들도 선거라고 하는 정치적 격식만은 어떻게든 갖추려고 했다.여기서 선거가 끊임없이 우민정치로 조작되었다.이 점은 우리 스스로가 부끄러워하고 반성해야 할 일이다. 그 동안의 경과를 보아라.미군정시대의 ‘통역정치’는 그렇다 치고,이승만시대의 친일관료의 득세와 횡포,그리고 군사정권의 보다 사납고 교활한 지배로 넘어왔다.군사정권은 친일파 군인들이 주도하게 되자 학자·교수들을 먼저 들러리로 이용하고,선전기술자로 언론인이 이에 따르고,개발독재의 설계에 경제기술관료가 조력하고,탄압의 칼날은 법기술자인 율사가 앞장을 섰고,명망가라는 얼굴팔린 마음 약하고 줏대없는 이들이 심부름을 했다. 이들은 대개 일본제국시대부터 시세영합과 출세의 천재적 재능을 발휘해오며 민족을 배반해왔다.이들이 독재의 공범자로 거든 선거란 타락선거로 표현할 수 있다.돈이 판치고,거짓말과 속임수가 난무하는 난장판이고,학연·지연·혈연이란 연줄로 엮어지는 선거이며,각종 구실로 먹이고 주는 잔치선거판이었다.이 선거운동 과정에서 각종 거짓말과 무책임에 이르러선 말문이 막힐 정도이다.그래서 대선 당시에 나는 정당 및 후보의 ‘정치공약등록 책임제’를 제안했다.공약의 요지와 그법령요강,재정염출근거와 시행효과 등을 구체적으로 명시해 등기시켜서 사전 통제하고 사후 책임을 부과하자는 것이었다.정상적 정치풍토라면 이런 제안은 필요도 없을 것이다. 공식선거가 ‘바보놀이’로 전락되어 유명 탤런트 후보가 표를 모아서 당선되는 것도 특이한 현상이 아니라,지금에는 각 정당이 표 모으는 인기있는 얼굴을 찾기에 이르렀다.선거의 쇼화(흥행화)현상이 절정을 달린다.선거가 흥행이 되고,정치가 연극이 되고,정치인이 배우가 되는 시대성을 아주 거역할순 없다.그러나 정치가 놀이로 가볍게 다루어지고,특히 ‘바보놀이’가 되면 나라일을 망친다.자기 운명을 투전판 노름 정도로 다루는 민중의 정치수준이 나라꼴을 제대로 갖추게 할 순 없다.더더구나 21세기에 말이다. 정치에서 만성고질병의 하나로 정치인의 부정축재가 있다.나라금고 도둑에게 나라금고 열쇠를 맡기는 것은 후진국에서만 볼 수 있다.스위스은행의 도금고 애용자가 누구인가? 마피아와 독재자들 아닌가? 시민사회의 정치는 공적 업무이고 헌신이며 봉사이다.돈벌이가아니다.정치인은 자기 몸을 불살라서 자기 사명을 다하는 데서 보람을 느낀다.그래서 공인으로서 존경을 받는다. 우리에게도 그러한 정치인이 있어야 한다.머리에 든 것이 없는 소영웅주의자나 속물적 출세주의자가 정치판을 넘실대며 국민이 그들에게 속으면 나라가 어지럽게 된다.그래서 우리는 정치인의 책임윤리를 말하지 않는가? 우리주변을 돌아볼 적에 독재에 아부 추종하고 무능으로 해를 끼쳤으며 부정축재로 지탄을 받은 자들이 아직도 국민을 속이며 날뛰고 있다.정상배가 활개짓하는 정치판을 그대로 두고선 21세기의 길을 갈 수 없다.정치판에 끼어드는좀벌레를 털어내는 풍토를 만들어야 국민이 살아남는다. 韓相範 동국대교수·법학
  • 1954-1956년 정부 기록사진 화보

    국정홍보처는 29일 지난 54년부터 56년까지의 정부 활동 및 시대 상황을 담은 ‘대한민국 정부 기록사진집’ 제2권을 발간했다.이 책에는 6·25 전쟁복구기의 산업현장,이승만(李承晩)대통령 당시의 선거 실태,냉전시대의 우리 상황 등과 관련한 사진 505장이 수록돼 있다.국정홍보처는 사진집을 중앙및 지방행정기관,국·공립도서관,박물관,언론사,대학 사진학과 등에 배포했으며,일반인들은 서점에서 구입할 수 있다. 이도운기자 dawn@
  • 현길언 장편소설 ‘잊지못할 일들을 너무‘

    ‘80년대를 상징하는 단어가 무엇일까’를 묻는다면 아마도 상당수의 한국사람은 ‘어두움’을 선택할지도 모르겠다.5공(共)이라는 긴 터널을 지나 끝이 보일 때쯤,대통령 후보 단일화의 실패로 새로운 어둠이 시작됐던 기억은 많은 사람에게 새천년을 불과 며칠 앞둔 오늘까지도 생생하다. 장편소설 ‘잊지 못할 일들을 너무 빨리 잊어버린다’(밀알)를 새로 낸 ‘작가 현길언(59·한양대교수)이 80년대를 보는 인식도 한치 앞도 바라볼 수 없을 만큼 캄캄했다는 점에서는 다를 것이 없다.그는 그러나 “당시 사람들에게는 ‘열려진 사회에 대한 희망’이라는 공통분모가 있었다”고 말한다.민주화가 이루어진 사회를 만들려는 소망이 지식인 뿐 아니라 온 국민을 감싸고 있었고,그것이 사회발전의 에너지로 작용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염원하던 ‘민주화’가 이루어졌음에도 오늘날 시민들이 처하고 있는 정황은 80년대와 크게 다르지 않다.무엇보다 정치가 시민들에게 꿈을 심어주지 못하고 있고,그런 정치에 대한 환멸은 전사회적인 허무주의를 낳고 있다는 것이다.삶 자체가 투기화하고 있는 최근의 우리 모습도 꿈이 없어졌기때문이라는 것이 그의 진단이다. 요즘 확산되고 있는 이른바 ‘박정희 신드롬’도 연장선상에서 해석한다.과거의 정치적 지도자에 대한 공정한 평가라면 문제가 없지만,현재의 정치적허무를 보상하기 위한 대안이라면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다는 것이다.이 작품은 이처럼 마모되어 버린 ‘열려진 시대에 대한 꿈’을 환기하려는 뜻에서구상했다고 한다. ‘잊지 못할…’은 92년 발표한 장편 ‘투명한 어둠’의 속편에 해당한다.‘투명한…’에 등장했던 3공 시절 대학생 연합서클의 멤버들이 그대로 다시등장한다.그 가운데 강철규는 법과대 4학년 때 사법시험에 합격했으나,시국사범으로 기소된 친구 민상구의 재판을 지켜보면서 법관의 길을 포기한다.그는 87년 대선 당시 후보단일화를 내걸었으면서도 양보하려고 하지않는 두 진영의 움직임을 지켜보면서 ‘가상의 역사’를 소설로 쓰기 시작한다. 선거전이 혼탁해지면서 두 야당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 테러를 당하고,그결과 야권이 유리해지자 여당은 선거를 연기한다.선거가 예정됐던 날,민중은 투표장을 에워싸는 무저항 운동을 벌이자,계엄령을 내렸던 군부가 스스로원대복귀하여 결국 민중의 승리로 끝난다는 내용이다.그러나 가상소설을 마무리짓는 순간 TV에서는 여당후보의 승리를 알리는 뉴스가 들려오고,화면에서는 개표부정을 주장하며 구로구청에서 농성하는 젊은이들이 비쳐짐으로서‘꿈’은 깨진다. 현길언은 ‘만약…’이라는 가상의 역사는 현실의 대안이 될 수 없다고 강조한다.그러면서 김구가 테러를 당한 것이 아니라,이승만이 암상당했으면 민주화가 좀 더 빨리 이루어졌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지만,‘그렇게 됐으면 끝없는 내전이 계속됐을 것’이라는 정치학자들도 있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그런 만큼 ‘잊지 못할…’에는 꿈이 없는 정치에 대한 환멸을 가상의 역사를 통해 충족하려는 극도의 허무주의를 경계하고,궁극적으로 정치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자는 메시지를 담고 싶었다고 말한다. 중심된 가치가 없는 사회는 아무리 경제형편이 나아진다고 해도 소망하는 사회로 발전해나갈 수 없지만,정치가 안정되어 시민들에게 꿈을 심어주면 시민들 스스로 그런 사회를 만들어 가게 된다는 설명이다. 서동철기자 dcsuh@
  • [변혁으로서의 문학과 역사] 연재를 마치며

    이 연재의 목적은 광복 이후 오늘까지,20세기 후반기의 한국문학이 정치사회사적으로 당했던 검열과 규제와 탄압의 양상을 시대별로 정리하려는 것이었다.주로 작품을 중심으로,그것도 사회체제나 정치 이데올로기의 측면에서만다뤘기 때문에 몇몇 필화 사건들은 빠졌다. 예컨대 지역감정을 유발하여 투옥까지 당했던 조영암의 ‘하와이 근성 시비’라든가,역시 같은 이유로 월간 ‘문학사상’을 몇 호 정간 당하게 만들었던 오영수의 ‘특질고’같은 사건인데,다른 자리에서 다뤄져야 할 것이다. 사회적으로 크게 비화되진 않았으나 독재자에 의하여 슬그머니 폐기처분 당해버렸던 서정주의 ‘이승만박사 전기’(1949)도 흥미있는 사건이었다.진보당가의 작사 시인 박지수,김동명 시인의 국가보안법 반대 논설문,소설 ‘오발탄’ 때문에 교직에서 쫓겨난 해직교사 제1호 이범선,이병주·송지영의 민족의식이 강했던 논설과 투옥 사건,단편 ‘임진강’으로 곤욕을 치렀던 유주현,희곡 ‘수치’로 물의를 빚었던 시인 구상,통혁당 관련으로 치도곤을 당했던 조동일·임중빈,동베를린 사건 관련의 천상병,1974년 문학인 사건의 이호철·정을병·김우종·장백일,긴급조치로 구속 당했던 김지하,언론인 해직기자 김병익,남민전 사건의 김남주 시인,김대중 내란 음모사건의 송기원,대학에서 해직 당한 김병걸·송기숙·백낙청,민족문학작가회의에 의한 여러 차례에 걸친 각종 집회와 시위로 끊임없이 연행 당했던 고은·신경림·민영·박태순·이문구·조태일·채광석·김정환,노동해방문학 사건에 연루되었던김사인·임규찬·정남영 등등은 문학인의 직접적인 사회참여 활동이 가져왔던 변혁운동의 일환이었다. 1990년대 이후에도 문학인은 가장 앞섰다.세칭 ‘문학인 방북 사건’ 제1호는 작가 황석영이었다.1989년 3월 20일,남한작가로 공개적으로는 처음으로황석영은 북한을 방문,아마 지금까지도 가장 많은 북한인사들과 가장 넓은지역을 두루 다닌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그는 독일과 미국 등지에서 4년 동안 망명생활을 하면서 기행문 ‘사람이 살고 있었네’를 ‘신동아’와 ‘창작과 비평’에 연재하다가 필화를 일으키기도 했으며1993년 귀국,구속되었다. 두 번째 방북 문인은 시인 박영희였다.그는 1991년 4박5일 동안 방북했다가7년의 수감생활을 겪어야 했던 불굴의 시인이다.1962년 무안에서 출생한 이시인은 중학 2년 때 학업을 중단하고 상경,공원·구두닦이·신문배달·건축공사장 인부 등 밑바닥 인생을 체험하면서 시집 ‘조카의 하늘’‘해뜨는 검은 땅’을 냈다.박시인은 일제 치하의 광부 징용을 서사시로 쓰기 위해 그취재차 방북을 감행했으나 전혀 목적을 이루지 못하여 아예 일정을 앞당겨귀국,즉각 투옥당했다. 세 번째의 방북은 작가 김하기였다.부산소설가협회 소속회원들과 백두산 등정 후 연길식당에서 술을 마신 뒤 실종,나중에 월북으로 밝혀졌던 이 사건은분단 민족사에서 가장 ‘문학적인 사건’으로 꼽을 만하다. 문학은 사회정치사적인 측면만이 아니라 에로티시즘과도 끊임없이 마찰했다. 박용구의 ‘계룡산’ 이후 박승훈,염재만으로 이어졌던 외설시비는 마광수와장정일에 이르러 그 절정을 이루면서 20세기를 마감한다. 20세기 세계 문학사에서 변혁으로서의 문학운동은 아마 한국이 가장 풍성한목록을 작성할 수 있을 것이며,이것은 21세기의 밑거름이 될 것이다. [임헌영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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