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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GA퀄리파잉스쿨, 최경주 4R 공동45위

    최경주(슈페리어)가 내년도 미국남자프로골프(PGA) 시드권 획득 가능성을 높였다. 최경주는 3일 캘리포니아주 라퀸타의 PGA웨스트 토너먼트코스(파72·7,204야드)에서 계속된 PGA 퀄리파잉스쿨 4라운드에서 이글 1,버디3, 보기 2개로 3언더파 69타를 쳐 합계 10언더파 278타로 공동 45위를 형성했다. 이날 현재 내년 시즌 시드가 주어지는 35위권은 합계 11언더파로 최경주와는 1타차에 불과해 남은 이틀간의 라운드에서 선전을 펼칠 경우 우리나라 선수 최초의 PGA 풀시드 획득이 기대된다.3번과 4번홀에서 보기와 버디를 주고받은 최경주는 8번홀(파5)에서 이글을 잡아내타수를 9언더파까지 줄이는 데 성공했다.최경주는 13번홀(파5)에서버디를 추가해 상승세를 이어갔으나 14번홀(파4)에서 보기로 주춤한뒤 16번홀(파5)을 버디를 막아내는 뒷심을 발휘해 막판 선전이 기대된다. 한편 청각장애인 골퍼 이승만(20)은 2언더파 70타를 기록,합계 4오버파 292타로 공동 149위에 머물러 전망이 어두워졌다.
  • ‘복제하고 싶은 인물’ 세종대왕 1위

    우리 나라 위인들 중 ‘복제하고 싶은 인물’에는 세종대왕이,‘복제하고 싶지 않은 인물’에는 김영삼 전 대통령이 한 네티즌 여론조사에서 각각 1위로 뽑혔다. 영화홍보사 젊은기획이 인간 복제를 소재로 한 영화 ‘6번째 날’의개봉을 앞두고 영화사이트 ‘조이씨네’를 통해 네티즌 2,852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복제하고 싶은 인물은 세종대왕(19%),이순신(18%),김구(13%),광개토대왕(7%),박정희(6%),허준(4%),유관순(3%),김대중(3%) 순으로 나타났다. 김 전 대통령(21%)과 이완용(18%),전두환(11%),박정희(10%),이승만(7%),노태우(5%),김대중(3%),연산군(2%) 등은 복제하고 싶지 않은 인물로 꼽혔다. 황수정기자 sjh@kadily.com
  • 최근 각계 추모·기념사업 활발

    남북 화해시대를 맞아 해방공간의 이데올로기 갈등 와중에서 희생된 몽양(夢陽) 여운형(呂運亨·1886∼1947) 선생의 추모·기념사업이각계에서 다채롭게 추진되고 있다. 첫 사업으로 27일 오후 3시 몽양의 고향인 경기도 양평에서 양평문화원과 양평 백운신문사 공동주최로 추모강연회가 열린다. 이날 강연회에는 여철연(몽양추모사업회장)·운혁(몽양의 6촌 동생)·명구·원구 등 몽양의 친척과 이문구,윤후명,김주영·백시종 등 문인,민병채 양평군수,김인옥 양평경찰서장 등 관내유지들도 참석할 예정이다. 이날 강연회의 초청강사는 암살 당시 몽양의 수행비서였으며,현재남측 생존인물 가운데 몽양과 가장 근접거리에 있었던 원로시인 이기형씨(84·민족문학작가회의 고문).이씨는 ‘몽양 여운형 선생,탄생과 생애,그리고 정치사상’을 주제로 한 강연회에서 “숭고한 민족지도자 몽양 선생에 드리워진 역사의 그늘,소위 ‘빨갱이’의 낙인이 어디서 비롯되었으며,어떻게 조작되었는지를 낱낱이 밝힐 터”라고 말했다. 이번 강연회는 본격적인 ‘몽양 기념사업’의 신호탄인 셈인데,몽양의 역사적 비중에 견주어볼 때 뒤늦은 감이 있다. 몽양은 일제하 상해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상해거류민단장,조선중앙일보 사장 등 요직을 역임했으며,국내파로서 해방때까지 독립운동을한 인물이다. 또 해방후 정부수립 직전 국민여론조사에서는 이승만과 거의 동률의지지율을 획득했었다.이만큼 해방공간의 지도적 인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간 이렇다할 추모·기념사업이 없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중도 좌파로 활동한 몽양에 드리워진 ‘사상적 굴레’가 가장큰 원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그간 몽양의 기념사업이 고향주민들 사이에서 간간이 거론될 때마다 몽양에 대한 이념적 편견이 장벽으로작용해오다가 최근 남북관계 개선으로 서서히 물꼬가 트이고 있는 것이다. 몽양 기념사업에 앞장서고 있는 신승한(67) 양평문화원장은 “현재몽양의 생가는 한국전쟁 당시 폭격으로 인해 전소됐으며,생가터 250평만 남아있을 뿐”이라며 “생가복원 및 기념관 건립을 서두르지 않으면 앞으로 선생의 고향인 양평에서조차 선생의 흔적을 찾기가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몽양의 기념사업을 추진하고 있는 또다른 한 축은 민족문학작가회의를 중심으로 한 문인들이다. 그간 왜곡된 역사인식을 바로잡는 데 앞장서온 작가회의는 몽양이 남북 양측에서 민족지도자로 추앙받고 있음을 주목하여 남북공동으로기념사업을 추진할 계획이다. 사단법인 형태로 추진될 가칭 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회장 이문구)는 내달중 단체를 설립하여 내년 2월,6월,10월 등 모두 세 차례에걸쳐 학술대회를 개최할 계획인데 10월 행사는 평양에서 여는 방안도 추진중이다. 또 몽양의 3녀이자 북한최고인민회의 부의장인 여원구씨도 이 사업에 참여시킬 방침이다.기념사업회는 또 양평군 신원1리 소재 몽양의 생가복원과 양평군내 기념관 건립과 함께 ‘평전’ 등 책자를 간행해몽양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바로잡을 계획이다.기념사업회의 백시종(57,소설가) 상임이사는 “몽양에 대한 올바른 평가,우리 현대사에 대한 올바른 진단만이 남북동반시대의 진정한 기틀을 구축할 수 있을것”이라고 말했다. 정운현기자 jwh59@
  • 옌볜대 權철교수 ‘베이징 추이화후퉁’확인

    [베이징 김규환특파원] 대한매일신보 주필을 지낸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선생이 일제 치하 암울했던 1920년대를 전후해 베이징(北京)에서 주요 활동거점으로 삼았던 ‘추이화(翠花)후퉁(胡同·골목)’의 위치가 처음으로 확인됐다. 중국 옌볜(延邊)대 조선어언문학과 권철(權哲·71) 교수는 19일 “신채호 선생의 생애에 관심이 많아 선생의 베이징시대 사적지를 집중추적·답사하던 중 그동안 정확한 위치는 알려지지 않은 채 문헌상으로만 전해져 내려오던 베이징 시내의 추이화후퉁을 찾아내는 성과를 거뒀다”면서 “이번 추이화후퉁의 발견은 우리 민족의 정기를 크게 드높이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베이징 시내의 후퉁은 이름이 있는 것이 3,600여개이고 이름이없는 곳을 포함하면 무려 1만여개가 넘을 정도로 많을 뿐만 아니라,후퉁의 대부분이 미로로 이뤄져 있어 선생의 추이화후퉁을 찾아내는데는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며 그러나 “추이화후퉁의 사료적 가치를한 단계 높이려면 아직 미진한 부분이 많아 앞으로도 확인작업을 계속해야할 것”이라고 말했다.신채호 선생의 주요 활동거점이 추이화후퉁 내의 어느 집이었는지를 아직 정확하게 찾아내지 못한 탓에 그집을 찾기 위해서는 앞으로 많은 선생의 베이징 사적지에 대한 답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베이징시 시청취(西城區) 추이화제(街) 안에 있는 추이화후퉁은 1919년 상하이(上海) 임시정부의 내분과 갈등에 회의를 품고 결별한 신채호 선생이 보합단(普合團) 조직에 참여해 실천적인 독립운동 방안을 모색하는 한편,임시정부는 보다 적극적인 독립투쟁기구가 돼야 한다는 무력항쟁의 주전론(主戰論)을 적극 폈던 유서깊은 곳.이 시기의신채호 선생은 상해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해 한성 정부의 법통을 따르자고 주장하며 전권위원회 위원장직을 맡았다. 그러나 임시정부가강대국의 위임통치를 주장하는 이승만(李承晩)을 대통령에 추대하고좌우의 이데올로기적 갈등의 골이 깊어지자,베이징으로 돌아와 임시정부에 맞서 중국 동포들에게 반일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한편 한국고대사 연구에 전념했다. 권 교수는 특히 신채호 선생이 베이징에서 부인 박자혜(朴慈惠)여사와 살림을 꾸린 것으로 알려진 추이화후퉁 인근의 진스팡제(錦什坊街)20호와 21호집을 찾아내지 못했고,‘조선사’를 집필하기 위해 머물렀던 보타암(普陀庵) 등의 사적지가 베이징시의 재개발 사업으로찾아낼 수 없다는 것이 더욱 아쉽다고 밝혔다. khkim@
  • [대한시론] 친미와 반미의 허구적 인식

    미국에 대한 비판이나 이의제기를,한국의 매카시스트는 “반미는 용공이고 좌경이며 결국 빨갱이”라고 물아붙여왔다.국제관계에서 각나라가 국가이익을 겨루는 경우에는 냉정하여 인연이나 정리에 구애되지 않는다.그런데 이 당연한 사실이 우리에겐 통하지 않은 채 친미일변도의 가치기준이 독판무대가 되어 왔다. 미국이 1945년 일제로부터 해방시켜준 은인이고 1950년 전쟁에서 구원해준 혈맹이란 사실이 우리 대미관의 전부로서 압도하다시피 해왔다.그런데 미국뿐이 아니라 어느 외국에 대해서도 그런한 자세와 정서는 유치한 정치인식이다.나라 사이에는 영원한 벗도 없고 적도 없다.이 현실에 눈을 크게 뜨고 땅에 발붙이고 서야 한다.이것이 실리주의 이전에 아주 정상적인 정치인식이다. 우리의 국제관계 인식이나 외교감각이 감상적 굴레에 얽혀 친미와반미의 인식에 머무르게 된 연유를 따져보면,우선 서양열강과의 교류이전에 중국 중심의 사대교린(事大交隣)에 머물렀던 국제실정 인식수준에서 철저하게 탈피하지 못한 데 문제가 있다. 조선시대의 중국이현재론 미국으로 대체된 격이다. 조선때 명나라가 쇠망해가고 새로이청나라가 중원의 주인이 될 당시, 우리는 임진난리에 은혜를 입고 유교 모국이란 명분 때문에 시세를 거슬러 청나라로부터 두번 침략당했다.19세기 서구 제국주의 열강이 아시아에 발을 들여놓아 국제질서가재편되는 시기에도 조선 양반지배층은 소중화를 자처해 위정척사를고집하다 서양 앞잡이가 된 일본 제국주의에게 침략당했다. 이전에 우리는 아셈이란 거창한 국제회의를 치러냈고 그 성과도 평가할 만하다.그러면서도 외국 정상 등 귀빈에게 잘 보이려고 지나치게 허식을 부리는 무리는 하지 않았나 하는 불안도 있다.국제거래에서는 외교도 결국 장사 이상의 실리 챙기기이기 때문이다.그래서 국제관계 인식은 봉건적 정서에 젖어 있어도 안되고 냉전시대의 매카시스트적·친미일변도식의 편파된 시각으로 쏠려도 안된다.그러한 정치인식은 유아적 인식수준이고,심하면 한정치산자(限定治産者)의 지능수준으로 전락되어 결국은 나라 일을 망치기 때문이다. 과거 우리 지도층의 국제관계 인식의 유아적 순진성 때문에 치명상을 입은 일은,1905년 러·일전쟁 당시 미국이 필리핀 보존을 위해 일본 제국주의와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어 조선을 팔아넘긴 사정을몰랐던 비극적 사건을 들 수 있다. 1919년 3·1운동 당시에는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아시아 민족의 해방이라고 또 한번의 크나큰 착각에 사로잡혀서 미국을 짝사랑했다.당시 미 국무부 주변을 맴돌며 외교를 통한 독립에 앞장선 이승만식 친미 일변도의 외교가 그후 우리의 국제관계 인식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결국 외국에 대한 정치인식이 바르게 깨어나는 계기가 된 것은 1980년 광주민주항쟁을 겪으면서다.참으로 수업료치곤 막대한 희생의 대가였다.당시에 미국정부는 자기의 국익기준으로 신군부집단에 손을들어주고,한국민족의 민주화투쟁은 불안하다고 봐서 묵살한 것이다. 여기서 일부 학생이 미 대사관 건물을 점거·방화하는 등 반발하지만이 문제는 국제관계의 인식차원에서 냉정하게 미국의 실체와 입장을분석해볼 수밖에 없다. 국제관계에서 제 나라 이익을 지키고 주장하느라 미국과 갈등을 빚는 일은 언제고 있을 수 있다.우리 정부는 그런 일을 극력 피하려는나머지 입지를 양보해선 안된다.또 다른 문제는,미국 비판을 모두 위험시해서 용공으로 몰아붙여 공격하는 것은 정상적인 사고방식이 못된다는 점이다.물론 매카시스트들은 지금은 정권의 밖에서 오히려 정권측을 때리는 수단으로 친미정서를 이용한다.그래서 현직 대통령에게까지도 반미적이란 딱지를 붙이려 해서 여당대표가 진땀을 흘리며항변해야 하는 실정이다.오히려 DJ의 친미성이 지나친 것 아닌가 걱정인데 말이다. 어쨌든 색맹(色盲)의 국제관계 인식이나 함량미달의 한정치산적 또는 유아적 지능으로 정치를 대하는 것은 책임 있는 정치인으로선 실격이다.정치는 장난이 아니다.그리고 정치는 개인의 분풀이 무대가되기엔 너무나 중대한 나랏일이기 때문이다. 한상범 동국대교수·헌법학
  • 경교장·돈암장등 50년이상된 건축물 ‘등록문화재’특별관리

    정부는 구한말 이후의 근대 건축물을 등록문화재로 지정,특별 관리해 나가기로 했다. 규제개혁위원회는 13일 근대화 과정 및 해방 전후에 형성된 근대 문화유산이 없어지거나 훼손되는 것을 막기 위해 문화재보호법을 이같이 개정,내년 상반기 중 시행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규제개혁위는 건축된 지 50년 이상 지난 건조물과 기념물 중 학계,지방자치단체,소유자로부터 문화재 등록 신청을 받아 문화재위원회의심의를 거쳐 등록문화재 지정,소유자나 별도의 관리자를 통해 집중관리토록 할 방침이다. 문화재청은 백범 김구(金九)선생이 서거한 경교장,이승만(李承晩)박사가 기거하던 돈암장을 비롯해 철원 노동당사,영국공사관 등 전국적으로 208건의 건축물을 등록문화재 지정 대상으로 검토하고 있다. 등록문화재로 지정되면 내부 시설은 개조가 가능하나 외형은 원형대로 보존해야 하는 제약이 뒤따른다.그러나 등록문화재에 대해서는 관리 및 수리비용을 지원하는 한편 종합토지세,상속세 등 세금 감면 혜택을 부여한다는 방침이다. 규제개혁위는 또한 문화재발굴비용 지원 대상을 확대,건설공사를위한 발굴 조사 중 중요 유적이 확인돼 사업 시행이 불가능하게 된경우 등에 대해서도 문화재 발굴비용을 지원키로 했다.이와 함께 사유문화재 보호를 위해 필요하면 주변 토지와 건물을 국가 또는 지자체가 수용 또는 사용할 수 있도록 관련 규정을 개정하기로 했다. 이지운기자 jj@
  • [오늘의 눈] 동상 철거와 역사적 평가

    지난 5일 서울 영등포구 문래공원 내에 있던 박정희(朴正熙)전대통령의 흉상이 민족문제연구소 회원 등 시민들에 의해 철거됐다.이 흉상은 박 전대통령 집권 초기인 지난 66년 홍익대측이 세웠다.‘5·16혁명 발상지’라는 좌대 위에 세워진 박 전대통령의 흉상은 군모에육군소장 계급을 단 군복 차림이었다.얼핏 보아도 박 전대통령이 주도한 5·16을 찬양할 목적을 띄고 있음을 알 수 있다.흉상이 있던 문래공원은 5·16을 준비했던 6관구사령부가 있던 곳으로 5·16 세력들에게는 ‘성지’인 셈이다. 역사적 인물의 동상이 시민들에 의해 철거된 경우는 이번이 처음은아니다.5·16 1년 전인 1960년 4·19혁명 당시 시위대는 파고다공원(현 탑골공원)에 있던 한때 ‘국부(國父)’로 칭송받던 이승만 대통령의 동상을 고꾸라뜨렸다.시위대는 ‘독재자 이승만’을 외치며 이 전대통령의 동상을 종로거리에서 질질 끌고 다녔다.얼마후에는 김두한씨가 청년들을 동원,남산중턱(현 남산식물원 자리)에 있던 이 전대통령의 동상을 역시 철거했다. 시민들에 의해 흉상이철거된 최근 사례로는 지난 96년 청주 3·1공원에 있던 친일목사 정춘수 동상 철거가 있다.정춘수는 3·1 의거 당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사람이었으나 일제 말기에 변절하고 친일행적을 남긴 인물이다.3·1공원에는 민족대표 가운데 충북 출신 6명의 동상이 서 있었는데 지난 96년 2월8일 이 지역 사회단체 회원들은 “민족지사와 친일 변절자 동상이 함께 서 있는 것을 묵과할 수없다”며 이를 철거했다. 이에 앞서 지난 90년 경남 통영지역 소장 문인들은 “이충무공 동상과 시비,한산대첩비,3·1의거탑이 건립된 남망산에 친일작가 유치진동상을 건립한 것은 용인할 수 없다”며 철거운동을 전개했고,급기야유치진 동상은 시민들에 의해 철거됐다. 역사적 인물의 동상(흉상) 철거시비는 근본적으로 역사적 평가가 이루어지지 않았거나 공과(功過)가 교차된 인물의 기념물을 섣불리 세운 데서 비롯된다.따라서 흉상철거를 ‘공적 시설물 파손행위’ 이전에 역사의 평가문제로도 따져 볼 필요가 있다.이번 사건으로 ‘박정희기념관’ 건립을 둘러싼 논쟁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될 전망이다. ■정 운 현 특집기획팀 차장jwh59@
  • 張仁煥의사 쾌거 劇化 ‘극본’ 발굴

    1908년 3월 23일 미국 샌프란시스코 부두에서 통감부 외교고문인 친일미국인 스티븐스를 권총으로 쏴 처단한 한말 애국지사 장인환(張仁煥·1876∼1930)의사의 쾌거를 극화한 극본 사본이 미국에서 입수,공개됐다. 재미 한인이민사연구가 안형주(安炯柱·63)씨가 미국 LA에서 입수,5일 본지에 보내온 ‘한말 의사 장인환 사극’은 1951년 1월 미국 LA에서 김강(金剛)이 편저한,30여쪽의 인쇄본으로 총3막이다.이 극본은당시 정황을 생생히 재현하고 있어,사료적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 제1막은 장 의사의 의거 하루전인 3월 22일 상항(桑港,샌프란시스코) 대한인공립협회관이 무대이며,등장인물은 장 의사와 동지 10여명. 이들은 스티븐스가 현지신문 ‘크로니클’지와의 인터뷰에서 ‘조선에 대한 일본의 경영히 훌륭하여 한일간에 병합운동 있다’는 등의모욕적인 발언을 한데 대해 그가 머물던 페어몬트호텔로 찾아가 항의하고 돌아온 뒤였다.이들은 스티븐스에게 기사취소를 요구하였으나스티븐스가 ‘한국에 이완용같은 충신이 있고,이등(伊藤,이토 히로부미)같은 통감이 있으니 한국의 행(幸),동양의 복(福)이다.신문기사가사실이니 정정할 것이 없다’고 반박하자 일행 가운데 정재관이 격분,의자로 스티븐스의 면상을 난타하여 유혈이 낭자했다. 제2막은 이튿날(23일) 오전 9시 샌프란시스코 페리(선창).등장인물은 장 의사와 동지인 전명운(田明雲)의사 등.이날 오전 9시 스티븐스는 워싱턴으로 가기 위해 자동차로 이곳 선창에 도착했다.스티븐스에게 먼저 총격을 시도한 사람은 전명운 의사였다.그러나 전 의사는 탄환이 불발이었고,뒤이어 장 의사가 단총 세발을 쏘았다.그 가운데 두발이 스티븐스에게 적중했고 한발은 전 의사가 맞았다.사극은 장 의사가 ‘세 방을 쏘고는 총을 쥔 채 장승같이 서 있었고,스티븐스는장 의사를 보는 듯 하더니 얼굴을 찡그리고 자빠졌다’고 당시 상황을 묘사했다. 마지막 제3막은 이 해 12월 23일 가주(加州,캘리포니아주) 최고법정에서 열린 장 의사에 대한 재판광경.무대에는 장 의사와 동지들을 비롯해 재판관계자,각국 기자 3∼4명도 등장한다.이 재판에서 장 의사는 ‘2등살인죄’로 징역 25년을 선고받고 복역 10년만인 1919년 1월 가석방됐다.장 의사의 동지들은 당시 뉴욕에 체류중이던 이승만(李承晩)을 불러와 통역을 부탁하였는데 이승만은 ‘나를 살인사건에통역이나 하라고 불렀단 말이냐’며 통역을 사절하고 되돌아갔다고사극에 기록돼 있다. 한편 편저자 김강(본명 金承燁·1902∼?)은 감리교신학교 졸업후 28년 처자를 데리고 도미,LA에서 조선혁명당 미국지부를 만든 인물이다.33년 남가주대학에서 지질학을 공부한 그는 41년 ‘공산당원’혐의로 미 연방수사국에 체포돼 조사를 받았으나 45년 1월부터 8개월간미국전략사무국(OSS)의 한국 첩보원모집 책임자를 지내기도 했다.48년 6월 당시 LA에서 발간되던 주간 ‘독립’의 편집인을 지낸 그는 60년 미국에서 추방되자 처자가 있는 남한 대신 북한을 택했는데 북한에서의 그의 활동내용은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독립기념관 이동언 연구원은 “안중근·백범 등의 일대기가 무대에올려진 적은 있지만 이는 모두 근년의 일”이라며 “해방 직후에 작성된 장 의사의 사극내용은 후에 나온 전명운 의사의 일대기 등에서사실로 확인되고 있다”고 말했다.자료발굴자 안씨는 “국내 연극무대에서 이 사극이 공연돼 독립운동가들의 애국정신을 되새기는 기회가 됐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정운현기자 jwh59@
  • [대한광장] 거창 학살사건의 전국화와 세계화

    얼마 전 거창 민간인 학살 49주기 추모식에 참여했다.신원면 골짜기에서 718명의 억울한 생명이 처참하게 학살되었을 당시를 생각하니가슴이 저미는 아픔을 가눌 수 없었다.그래도 거창 학살사건은 정부의 지원 아래 위령제라도 지낼 수 있었고 명예 회복의 길이나마 열렸으니까 이나마 다행이다. 놀랍게도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은 이곳 남녘 땅에서만 약 100만 이상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더욱 놀라운 사실은 이 엄청난 학살가운데 좌익과 북한 인민군에 의해 저지러진 학살은 12만 9,000명쯤으로 남한 정부에 의해 공식화되고 있다는 점이다.이는 대부분의 민간인 학살이 이승만 정부에 의해 자행되었음을 의미한다. 인류 역사에서 가장 절대적인 보편적 가치는 인간 생명의 존엄성이다.그러나 이곳 한반도에서는 이 생명의 존엄성이 외세와 국가,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킬 의무를 부여받은 바로 그 국가에 의해 여지없이 허물어져버렸다.나라의 주인이라는 국민은 전쟁을 빌미로 헌신짝취급도 받지 못하였다.이로 인해 비참하게 희생된 원혼과 그 유족들의 원한은 이곳 한반도 상공을 배회하고 있다.이제 더 이상 이러한야만의 역사를 묻어 둘 수는 없다.인권과 평화와 통일의 업적으로 노벨평화상까지 받은 나라에서 가장 원초적 인권인 인간 생명을 앗아가는 극악한 인권 침해를 역사의 뒤안길로 밀쳐버릴 수는 없다. 피해자 수준의 실태조사 수준을 넘어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명령구조에 의해 자행된 가해자 수준의 진상조사가 철저히 이루어져야 한다. 이에 따라 개별 가해자에 대한 심판을 비록 늦긴 하였지만 내려야 한다.동시에 이들 피학살자와 그 유족에 대한 명예 회복과 정부의 공식적인 사죄가 늦게나마 뒤따라야 한다.그리고 이 부끄러운 과거에 대한 공식적인 참회의 역사가 후세들에게 길이 역사 교훈으로 전수되어야 한다.이어서 21세기를 맞아 전쟁을 빌미로 한 민간인 학살을 지구촌에서 제거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와 지구촌 시민운동이 전개되어야할 것이다. 이같이 거창사건의 전국화와 세계화를 꾀하면서 짚어볼 게 있다.바로 양민과 민간인을 구분하는 문제이다.굳이 거창 유족들은 거창 학살사건을 양민 학살로 불려지기를 원한다.곧,거창사건의 희생자는 한결같이 아무런 잘못이나 죄가 없이 무고하게 희생된‘양민’이라는점을 강조하자는 것이다.전쟁 당시는‘양민증’이라는 것이 있었다. 이를 소지하지 못한 사람은 언제나 무슨 일만 생기면 혐의부터 먼저받는 위협을 받아 왔다.수없이 무고한 민간인들이 학살되는 상황에서양민증을 소지하지 못한 사람들은 쉽게 학살의 표적으로 몰리고 희생되었을 것이다.거창 유족들이 세계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양민 학살이라는 이름을 굳이 고집하는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들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지만 보편적 인권의 개념에서는 이 구분을 받아들일 수 없다.굳이 구분하는 저변에는 반인권적 해석이 따르기 때문이다.곧,양민은 안 되지만 잘못이 있는 사람이나 빨갱이는 죽여도 좋다는 암묵적인 동조가 깔려 있다는 점이다.잘못이 있거나 지은 죄가 아무리 심하더라도 제대로 된 재판 절차에 의해 엄밀히 다뤄지지 않았을 경우 비록 전쟁의 와중이라 하더라도 이는 국가폭력에의한 인권의 심대한 침해행위이다. 좌익도 마찬가지다.사상과 이념의 자유는 천부적 권리이다.국가보안법으로 이들을 처벌할 수는 없다.이들이 형법상의 범죄행위를 저지르지 않았다면 결코 처벌되어서는 안됨에도 불구하고 한국전쟁 전후로이곳 남한 땅에는‘빨갱이는 죽여도 좋다’는 국가의 원시적 폭력이횡행하였다.모든 민간인은 양민이다.이들이 형법상의 사형에 버금가는 죄를 범하지 않았을 경우 이들에 대한 학살은 비록 국가보안법에의거했다 하더라도 범죄행위이다.21세기 초입에 이러한 범죄행위에대한 과거 청산과 이들 학살에 대하여 사람이 중심이 되는 새로운 접근이 요구된다. 강정구 동국대 교수·사회학
  • 연락소·대표부·대사관 차이

    웬디 셔먼 미 대북정책조정관은 조명록(趙明祿)북한 국방위 제1부위원장을 만난 뒤 북·미간에 그동안 알려진 ‘연락사무소’ 개설 단계를 뛰어넘어 ‘외교대표부’ 설치를 추진하고 있음을 시사했다.이들과 공식 대사관과의 차이점을 알아본다. ■연락사무소(LIAISON OFFICE) 정식으로 외교관계를 수립하지 못한두 나라가 대사 또는 영사 기능이 필요할 때 임시로 설치하는 것을말한다.연락사무소의 기능과 인원,업무 범위 등은 양국 합의에 의해이뤄진다.1973년 미국과 중국이 외교관계를 시작하면서 설치한 것이처음이다.연락사무소 근무자는 외교관에 준하는 특권을 주는 것이 관행이다. ■외교대표부(DIPLOMATIC REPRESENTATIVE) 완전한 수교 이전 과도적단계라는 점에서 연락사무소와 비슷한 성격을 갖는다. 하지만 외교대표부의 역할에 영사업무,통상업무,문화교류사업 등이보다 포괄적으로 포함된다는 면에서 연락사무소보다는 외교적 지위가한 단계 격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외교관계 완전 정상화 직전의 단계로 이해할 수 있다.이승만 정권때우리가 일본에 한국대표부를 만든 것이 예가 된다.상황 여건은 다르지만 현재 우리는 대만에 대표부를 두고 있다.유엔대표부 등 국제기구 설치 대표부와는 구별된다. ■대사관(EMBASSY) 완전한 국교 정상화가 이뤄질 때 설치되는 것으로정상적인 국가 외교 활동을 수행하게 된다. 북·미가 대사급 외교관계를 갖는다면 미국이 북한을 하나의 ‘국가’로 인정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홍원상기자 wshong@
  • [‘6.15’이후의 북한](8)비전향장기수 최하종씨

    지난 9월2일 평양은 들끓고 있었다.64명의 비전향 장기수가 송환되는 이 날을 북측은 임시휴식일(공휴일)로 정했다.아침 10시 판문점을 통해 송환된 비전향 장기수들이 평양시 초입인 통일거리 환영행사장에 도착한 것은 오후 3시35분.고층아파트촌인 통일거리는 환영인파로 발디딜 틈도 없었다. 이날 북으로 돌아간 비전향 장기수중 한 사람인 최하종씨(73).그의개인사는 우리 현대사의 단면을 그대로 보여주는 면에서 특기할 만하다. 최씨가 남으로 내려온 것은 62년 3월.‘5·16혁명’ 주체중 한 사람이었던 삼촌 최주종(작고·주택공사 사장 역임)장군을 만나러 내려왔다.최장군은 박정희 전대통령의 만주군관학교·일본육사 후배 출신. 최씨는 함경북도 성진(현 김책시)에서 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중국 하얼빈공대와 김책공대를 나와 당시 국가계획위원회에 근무중이던,북의 청년 엘리트였다.남으로 내려온 이유를 그는 “삼촌과 통일문제를협의하기 위해”라고 밝혔다. 그런데 서울에 와서 삼촌에게 연락하자마자 그는 바로 체포됐다.삼촌은 “그것이 너도 살고 나도 사는 길이다”면서 “재판정에서 ‘강제로 내려왔다’고 진술해라.그러면 내가 빼내 주겠다”고 했다.그러나 최씨는 끝내 “자진해서 내려왔다”고 진술했고 결국 무기형을 받았다. 최씨가 감옥문을 나선 것은 36년 만인 1998년.당시 그는 만70세였다.이북에서 태어나 생의 절반 이상을 이남에서 보내야 했던 그에게는남쪽과는 또 하나의 큰 인연이 있다.바로 북에 두고 온 부인이 서울출신이었던 것이다.부인의 이름은 김재숙(70).대한매일에서 출판한‘북한인명사전’에는 상업성 국장을 지내고 은퇴한 것으로 나와 있다. 김씨는 일제하 신간회 서기장을 지낸 독립지사 김항규 선생(93년 건국포장 추서)의 딸이다.김선생은 해방후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면서 이승만 정부에 참여를 끝내 거부했다.초대 대법원장을 지낸 김병로선생,허헌 변호사와는 일제하 결의형제를 한 사이였지만 김병로 선생이 단독정부에 참여한 후로 그와 결별했다.48년 김선생이 서울의 한달동네에서 쓸쓸히 눈을 감았을 때 김병로 대법원장이 경찰 사이드카를 앞세우고 달동네 상가를 찾아오는 바람에 동네사람들이 모두 깜짝 놀랐다고 한다. 김여사는 48년 월북해 허헌 집안에서 기거했고,김일성종합대학 경제학부를 나와 상업성에 근무하던 55년,최씨와 결혼했다.그러나 부부는 결혼한 지 6년 만에 헤어져야 했다. 9월2일 오후 7시 평양시민들의 열광적인 환영 속에 환영행사를 마친 비전향 장기수들은 고려호텔 식당에서 가족들과 둘러앉았다.마침내마주앉은 최하종·김재숙 부부.최씨에게 감회를 물었다.“우선 기쁘고요,우리는 다른 이산가족들처럼 헤어지지는 않아도 되니 울 일은없겠구나 했는데 판문점에서 아내의 얼굴을 본 순간 끝내 눈물을 흘리고 말았습니다.” 그는 자신들을 돌봐준 남쪽 사람들의 고마운 사연을 죽을 때까지 잊지 않겠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신준영기자 현지르포 junyoung@
  • [해외 항일전적지를 찾아서] (10)美洲 거점 워싱턴DC·미디아市

    [필라델피아·워싱턴DC 김삼웅주필] 8월초 필라델피아시는 공화당전당대회 관계로 온 시가지가 시끌벅적하고 호텔방의 예약도 어려웠다.변두리 초라한 모텔에서 자고 오전 일찍 펜실베이니아주 미디아시에 위치한 서재필박사 기념관을 찾았다. 대지 1.5에이커, 건물 4,000평방피트의 이 건물은 서박사가 1925년에 입주하여 1951년 서거할 때까지 25년동안 조국의 독립과 근대화를염원하며 활동의 근거지로 삼아 기거했던 곳이다.이 유택은 1987년서박사기념재단이 구입하여 기념관 뿐만 아니라 한국이민 역사에 관한 도서실과 연구실 등으로 사용되고 있다. 서박사가 쓰던 유물 가운데 역사적 유품은 이미 한국독립기념관으로이관되었으며 그밖의 유품들은 기념관에서 보관하고 있다는 이지영사무총장의 설명이다.유물중에는 서박사의 손떼묻은 성경책과 일기장이 전시돼 있고 1925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안창호 선생과 찍은 사진도걸려있다. 정원이 한국식으로 꾸며진 것이나 한국산 대나무를 심은것 등은 서박사의 조국사랑 정신을 기리는 것이라 한다. 서박사는 김옥균·홍영식 등과 갑신정변을 일으켜 18세 나이로 병조참판이 되었으나 정변의 실패로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해 워싱턴대학 의과대학에 입학,세균학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으면서 미국과 인연을 맺었다.서박사는 1894년 갑오경장때 귀국하여 독립협회를 창립하고,1896년에는 ‘독립신문’을 창간해 국민의 독립정신을 드높이는한편 사대의 상징인 영은문 터에 독립문을 세웠다. 그러나 수구세력의 책동으로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3·1운동 후에는 한국문제를 세계여론에 호소하는 한편 ‘한인친구회(Friends of Korean)’를 조직,재미교포들을 결속해 독립운동후원회를 만들었다.그리고 상해 임시정부와 긴밀한 연락을 취하면서 외교위원장 자격으로 필라델피아에 ‘한국통신부’를 두고 활약했다. 1922년에는 워싱턴 군축회의에 독립을 청원하는 연판장을 돌렸고 1925년에는 호놀룰루의 범태평양회의에 한국대표로 참석,일본의 야만성을 폭로했다.독립운동으로 파산상태에 이르러 펜실베이니아대학에서강의하고 광복후 80세의 노령으로 미군정 고문으로 초빙되어귀국,노혁명가로 국민의 추앙을 받았으나 시국의 혼잡함속에서 세번째로 미국으로 건너가 여생을 마쳤다. 서박사의 미국내 독립운동 사적지로는 1914년 4월 필라델피아에서개최한 ‘한인자유인대회’의 장소와 1919년에 창설한 ‘한국통신부’건물을 들수 있다.한국통신부는 상해 임시정부 구미위원부의 산하인데도 불구하고 서박사의 노력으로 필라델피아에 본부를 두고 독자적인 조직으로 활발하게 대미선전 활동을 벌였다.1919년 한국통신부는 필라델피아 체스넛 1524번지 웨이트맨 빌딩 825호에서 ‘한국평론(Korea Review)’을 발행하면서 국제사회에 일본 식민통치의 부당성과 한국독립의 당위성을 선전했다. 서박사는 1920년 9월부터 한국통신부 바로 옆 체스넛 1537번지에 Philip Jaisohn Company라는 인쇄소와 문방구점을 운영하면서 ‘한국평론’을 발행하였다.8층 건물이었던 한국통신부 건물이 현재는 3층 건물만 남아 GAP outlet라는 의류체인점이 들어있다.인쇄소와 문방구가있던 건물도 신축되어 약품상이 입주해 있다. 서재필 이승만 조병옥 등 유학생과 임병직 선교사 등 150여명이 모여 ‘한인자유인대회’를 열었던 필라델피아 17가 리틀극장은 지금도여전히 연극 전용극장으로 이용되어 고색창연함을 보여준다.필라델피아 역사보존회가 승인한 역사보존물(제391호)로 지정돼 있다.서박사 일행은 한인자유인대회에서 임시정부 수립과 한국독립을 천명하고결의안을 채택한 다음 미국독립기념관까지 태극기 퍼레이드를 벌이고 한국통신부 설치를 결의했었다.서박사는 이 대회에서 의장으로 추대되었다. 필라델피아 미디아시 로즈 트리공원에는 서박사의 광복운동과 생애를 기리는 서재필박사 기념비가 세워져 이웃주민들의 발길을 멈추게한다. 대한제국 정부는 1880년대부터 대미외교를 중시하여 워싱턴시에 주미외교의 본산인 주미공사관을 설치했다.처음에는 박정양 공사가 워싱턴시의 스트리트 1513번지 3층 건물을 임대해 쓰다가 1891년 시 중심지인 15가 1500번지의 독립빌딩을 당시로는 거금인 2만5,000불을주고 매입, 공사관으로 사용했다. 현재 백악관에서 동북쪽으로 길게 뻗은 버먼트 에버뉴가 13 번가와교차하는 노건로타리에 위치한다.주소가 로건 15번지다.이 공사관은대한제국이 국권을 일제에 빼앗길 때까지 공관으로 사용하다가 강제합병과 함께 주미일본대사에게 넘어갔다. 대한제국 황제 이희의 명의로 등기되었던 이 건물이 1910년8월29일주미일본대사 우찌다에게 공사관 건물과 토지일체가 어떠한과정을 거쳐 넘겨졌는지는 미궁으로 남아있다. 소유권이 넘어가고 곧미국인 홀트에게 매각되어 현재는 개인소유 주택으로 사용중이다. 워싱턴 한인연합회에서는 1998년 이 건물의 매입을 시도했으나 예산부족으로 중단했다.한말 풍운과 함께 조국의 비극을 상징하는 유서깊은 이 건물을 현지 교민의 성금과 본국정부 지원으로 매입하여 사료관 등으로 사용했으면 한다.붉은 벽돌조 콘크리트건물로 상태가 비교적 양호한 편이다.영사관의 한미외교사료실장을 맡아 근현대 한미관계사의 사료를 수집·정리하고 있는 노령의 양기백 박사는 직접 현장을 안내하면서 이 건물의 역사를 증언한다. 워싱턴구미위원회는 1919년 상해에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함께이승만이 대통령에 선임되면서 이승만이 프랑스 파리의 주 파리위원회와 필라델피아 대한민국 통신부를 통합, 워싱턴구미위원회(구미위원부)를 조직하고 김규식·이대위·임병직 등이 업무를 수행케하였다 워싱턴 구미위원회는 창설때부터 1922년까지 노스웨스트 H스트리트1314번지 콘티넬탈 드르스트 빌딩에 본부를 두고 외교활동을 벌였다. 워싱턴시 중심가에 있는 이 빌딩은 그후 철거되고 그 자리에는 1951년에 신축한 뉴욕 에버뉴 장로교회가 웅장한 모습으로 세워지면서 옛자취를 찾을 수 없게 되었다. 구미위원부는 1922년에 개최된 워싱턴 국제회의를 겨냥한 외교활동에서 별 성과를 올리지 못한 뒤로는 활동이 현저하게 위축되었으며본부도 몇차례 옮겨 다녔다.1927∼1931년 구미위원회 본부였던 파크로드 1310번지의 붉은 2층 양옥은 지금도 옛 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kimsu@
  • [대한시론] 한국 매카시스트의 소갈머리

    남북분단 이래 친일파에게 면죄부를 안겨준 사이비 ‘반공주의’는한국판 매카시즘으로 모습을 갖추어 이 사회를 지배해 왔다.1991년소비에트 체제의 해체로 냉전시대가 끝나고 1998년 우리에게는 반세기 만에 정권 교체가 있었지만 한국의 매카시즘은 여전히 위세를 떨치며 건재하다.과거와 달라진 것은 매카시스트가 정권에 기생하는 상황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렇지만 일제시대 이래 친일 기득권세력으로부터 이승만 정권과 군사정권을 거치며 군림해온 기득권층은 아직도 우리 사회의 실세다.독재정권하에서 특혜로 뿌리를 내려 도사리고 있는 재벌과 일부 관료및 사회 각계 요직에 박혀있는 구세력 인사들의 힘은 여전히 막강하다.한국의 매카시스트들은 바로 그들의 이해를 대변하여 정부의 개혁을 물어뜯고 훼방놓고 있다.여기서 기막힌 일은 한국의 매카시즘은 1950년대의 미국의 그것처럼 일시적인 열병이 아니라 거의 만성화된제도적 힘을 지닌 극우의 횡포란 점이다. 6·15 남북공동선언으로 남북교류가 활발해지자 매카시스트의 도전은 아주 감정적이고상궤를 훨씬 벗어나기 시작했다.이미 그들은 정권교체가 이룩되자 미칠 지경이 돼서 정권에 흠집 내기를 “DJ정부는 좌경세력의 광란시대”(정모 의원의 말)라고 악을 써댔다.법률상식으로 봐도 비방의 한도를 훨씬 넘은 명예훼손이고 모략중상이다. 우리사회에서 빨갱이로 낙인찍히면 그것은 ‘사회적 사형선고’이다.매카시즘의 횡포가 바로 그러한 낙인찍어 ‘폐인 만들기’였다.그런데 지금도 그러한 수법을 버젓이 쓰며 정권에게까지 도전한다.정권이 문제삼으면 그것 자체를 이용하겠다는 심보와 함께 현 정권이 과거의 군사정권처럼 탄압의 칼을 함부로 휘두르지 않으리라는 치밀한 계산하에서 하는 물어뜯기이다. 그렇다면 한국의 매카시스트가 달성하고자 하는 목표는 무엇인가?우선 그들은 남북교류 자체가 용공행위로서 못마땅하다.결국 북에 대한 군사적 대결의 강경노선을 고수해야 한다는 것이다.그렇지만 그러한 군비경쟁은 남북이 함께 자멸에 이르는 길이다.이미 1953년 정전협정 당시에 무력통일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확인됐다.다음에 그들은부패기득권 구조를 유지하려는 것이다. 기득권 유지에 위협을 준다고 생각되는 재벌개혁이나 정경유착의 부패구조 청산을 중단하고 군사정권시대같은 개발독재 체제로의 회귀와 복고를 꿈꾸고 있다.그래서 현 정권이 빨리 끝나길 바라고 심지어는 앞당겨 끝내고 싶어 안달이다. 그렇지만 재벌개혁을 비롯해 전반의 민주화가 없이는 우리는 몰락한다.나라나 겨레가 몰락한다.매카시스트가 대변하는 것은 재벌의 시장독점과 특혜대출,노사분쟁의 관권에 의한 치안대책적 제압 억제,대북긴장 고조 속에서 기득권 유지,구조의 안정 정착이다.그렇지만 그러한 개발독재의 효용성은 이미 시효가 끝났다.매카시스트와 그에 동조하는 사이비 지식인의 집념은 완강하다.특히 매카시즘의 법률적 발판 기능을 해온 국가보안법의 개폐가 마치 안보를 망가뜨리는 듯이 허풍을 떤다.우리나라가 국가보안법 없이는 하루도 지탱 못하는 형편없이 허약한 나라라는 논리를 태연히 내세우고 있다. 한국의 매카시스트가 조작해온 몇가지 신화를 보면 그 정체를 쉽게엿볼 수 있다.영국의 외무부 관리였고 역사가인 E.H.카를 공산주의자라고 법정에서 감정의견을 내놓아 세상을 웃겼다.정경유착과 경제파탄의 장본인을 근대화의 공로자로 뻔뻔스럽게 내세워 코웃음을 치게하고 있다.미국 비판과 미국과의 거래 논리 관철을 반미이고 용공이라고 매도하고 있다. 이런 무지와 독단은 국익에 적합한 것도 아니고 자유민주주의의 옹호도 아니다.21세기 세계화와 정보 기술혁명의 시대에는 그야말로 사고의 일대 전환이 있어야 한다.그런데 국제관계나 정치·사회 인식에 대한 기본상식도 결여한 채 구시대의 독단을 진리로 착각해 고집을부려 웃음거리가 되고 나라일을 그르치는 것은 보기에 딱하다.더구나 책임있는 지위에 있었거나,있는 사람이 그러니 더욱 안됐다. 분단 이래 매카시스트가 정권에 기생하며 위세를 떨쳐왔으나 정권교체로 사정이 달라졌다.그들은 버려진 고아의 심정으로 위기의식에 사로잡혀 현 정권을 심정적으로 거부한다.국민이 선택한 정권교체를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그래서 기존 법제의 테두리까지도 넘어서며 악을 써댄다.그렇지만무법의 자유는 자유가 아니다.국민의 무지에 편승해 이리떼가 온다는 소동놀이로 정치조작을 하는 작태도 끝장내야만 하는 시점에 이른 것이다. 한 상 범 동국대교수·법학
  • [네티즌 칼럼] 집권당을 개혁하라

    한가위 연휴동안 고향에서,친지들과 나눈 이야기들 중에는 정치가차지하고 있는 비중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그 이야기들 중에는 누가DJ의 발목을 잡는가,혹은 왜 정치권은 싸우기만 할까 하는 식의 ‘싸잡아 욕하기’가 대부분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나는 일단 개혁 지체와 관련 두 가지를 말하고자 한다.첫째,아직도기승을 부리는 극우세력 부분이다.대북관계에서 튀어보지 않고서는자신들의 정체성이 확보되지 않는 극우단체·언론·보수야당들이 심각할 정도로 개혁의 발목을 잡고 있다.어디 대북관계 뿐인가.정부가추진하고자 하는 정책에 조금이라도 전향적인 흔적이 묻어있으면 이들은 현실성이나 합리성 여부를 떠나 ‘of the·by the·for the 색깔’적인 시비를 건다. 건국이래 이어져온 ‘이승만정권의 정통성’을 가지고 자해공갈을하는 폭력집단.그 뻔한 수작은 삼척동자도 알 수 있지만 모든 자해공갈의 피해자들이 그렇듯 DJ는 말없이 당하고 있을 뿐이다.잃을 것은쇠사슬 뿐인 나는 ‘이승만과 그의 후예들이 싫어요’를 외치며 광화문 네거리를 질주할 수도 있지만,‘대한민국 대통령’인 김대중은 그렇게 할 수가 없다.아무튼 이 자해공갈단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러 왔고 또 휘두르고 있는 중이다.기억하는가,97년 대선을.일개 극우집단이 대선후보들을 한자리에 모아놓고 사상검증을 했던,그 전무했고 또 후무할 것이 분명한 엽기 퍼포먼스를.2000년 9월의 현실도 달라진 바 없어 안타깝다. ‘활자로 된 것이면 무엇이든 믿어버리는 우매한 대중’이라는 히틀러의 망언이 여전히 유효한 남한사회에서 판매부수 1위를 차지하고있는 언론.‘우리가 남이가’ 한 마디면 동남쪽 도민 천 몇 백만을인사불성으로 만들어버릴 수 있는 당.외국인이나 외계인이 보고 있는,우리의 후손이 보게 될 시대의 넌센스를 생각하면 너무나도 망신스러워서 밤에 잠이 오지 않는다. 둘째,집권당도 책임을 져야 한다.특히 집권당내 예비 대권주자들이나 중견정치인들이 제역할을 못해주고 있다.특히 386 세대들의 자중지란,힘에 부치는 모습도 역력하다.집권당 내부사정을 난도질할 생각은 없다.집권당을 대표하는 정치인들의 개혁성이 보수 야당의 정치인들 못지 않게 의문시된다.양심과 지조,미래를 관통하는 일관된 철학과 소신을 갖춘 차세대 리더가 보이지 않는다.그럼에도 차기 대권논의가 솔솔찮게 나오는 정치현실이 개탄스럽기까지 하다. ‘젊은 박정희’에 ‘386세대의 도덕성’까지 거론되고 있지만,분위기 따라 움직이는 정치인들의 행태때문에 도무지 믿음이 가지않는다. 즉 권력에 집착하는 정치꾼들 때문에 이도저도 안되고 있다.저마다“자기 이외에는 안된다”고 주장하지만,자기점검과 자기개혁은 제대로 한 것을 보지 못하였다.이와 관련 집권당의 분발이 요구된다.누군가 십자가를 지지 않는 이상 집권당의 무기력증이 지속될 것이다. 시민단체와 이른바 진보적 지식인 집단도 개탄스럽다.그들은 사사건건 정권의 도덕적 흠집을 찾아내,DJ에게 ‘대안의 부재’를 지적하지만,내가 보기에 이 지적은 자승자박에 가깝다.광주의 등에 칼을 꽂은이른바 386 국회의원들도 있다.다 지난 얘기가 아니다.얼렁뚱땅 넘어갈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속시원한 매듭 한번 없이 문제거리만 키워온 대책없는 부류들이기 때문이다.쓰다 보니 정치권에 대한 냉소가되고 말았다.30년 인생 중 단 10초도 기성 정치판을 누비는 정치인들을 지지한 적이 없다.단순무식 초지일관 좌파인 나를,그저 냉소하는청년으로,DJ지지자로 만들어버리는 이 현실이 기막힐 뿐이다. △김형렬 WP우플 기자 pissed@chollian.net
  • [외언내언] 무대에 되살아난 丹齋

    지난달 12일 KBS-TV의 인기 프로그램 ‘역사스페셜’이 ‘발굴!스티코프의 비밀수첩,김구는 왜 북으로 갔나’를 방영했다.백범(白凡)김구(金九)가 1948년 4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한 전말과 그의 자주통일 의지를 소개하는 내용이었다.이후 KBS 홈 페이지의 프로그램 시청평 난에는 “김구선생이 그처럼 훌륭한 분일 줄 미처 몰랐다.정말 존경한다”는 글이 수십건 올랐다.대부분 중고생과 20대가 쓴 글이었다.시청평들을 읽으면서 씁쓰레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우리 사회가 자라나는 세대에게 백범선생조차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구나’하는 생각에서였다. 우리는 일제에게 35년간 나라를 빼앗긴 참담한 역사를 갖고 있다.그렇다고 해서 그 역사가 마냥 부끄럽지만은 않은 까닭은 치열하게 항일독립투쟁을 벌인 선열들의 존재가 워낙 뚜렷하기 때문이다.그런데도 아이들에게 독립운동가 열 사람만 꼽으라고 주문하면 대체로 “이승만(李承晩)·김구·유관순(柳寬順)·안중근(安重根)·이준(李儁)”정도를 들고는 머뭇거린다.독립운동가 이름을열 손가락에 꼽지 못할만큼 우리 사회는 애국 선열들을 대중화해 친숙하게 만드는 일에 소홀했다. 지금 서울 종로5가 연강홀에서는 단재(丹齋)신채호(申采浩)를 주인공으로 한 연극 ‘꽃뫼연’공연이 한창이다.추석날 시작해 오는 17일까지 매일 오후 4시30분·7시30분 두차례 무대에 오르는 이 연극은사실 제목 자체가 생소하다.‘꽃뫼’는 단재가 태어난 충북 청원군낭성면 화산(花山=꽃뫼)마을이니,꽃뫼 연(鳶)은 결국 창공을 누비는연과 같은 선생의 높은 뜻과 쾌활한 기상을 상징한다. 단재가 역사를 “아(我=나)와 비아(非我=내가 아닌 것)의 투쟁”이라고 정의한 것처럼 연극도 단재와 ‘미리(미르)’의 대립구도로 진행된다.미리는 용(龍)의 옛말이지만 선생은 소설 ‘용과 용의 대격전’에서,미리를 민중을 억압하는 상징물로 형상화한 바 있다.따라서연극에서의 미리는 단재 내부의 욕망·나약함 같은 인간적 약점이자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같은 침략의 원흉,또 일본제국주의 그 자체로 변신을 거듭하며 사사건건 대치한다.아울러 을사조약·한일병합·고종황제 독살 등의 역사적 사건과 단재의 개인사가 씨줄·날줄로 얽혀 전개된다. 단재가 누구인가.그는 대한매일신보의 주필로서 일제의 침략 야욕을 앞장서 파헤친 당대의 논객이요,민족주의사관을 정립한 역사학의 거목이자,1936년 여순감옥에서 숨지기까지 26년동안 이역을 떠돌며 온몸으로 광복을 추구한 애국지사이다.그 단재를 추석연휴 마지막 날연극무대에서 만나면서 “나는 아이들에게 선생을 가르쳤는가”라고자문했다.그리고 부끄러웠다. 이용원 논설위원
  • 광복군 창군60주년 기념 학술세미나 주제발표 요지

    한국광복군동지회(회장 김우전)는 오는 17일 광복군 창군 60주년을앞두고 14일 오전 10시 세종문화회관 3층 대회의실에서 기념식과 학술세미나를 갖는다.‘한국광복군의 역사적 정통성’을 주제로 한 이번 세미나에서는 광복군의 역사적 정통성과 의의 등을 확인하는 여러편의 논문이 발표된다. 이중 김삼웅 대한매일 주필,김행복 국방군사연구소 연구위원,한시준 단국대 교수 등의 주제발표문 3편을 요약한다. ■광복군의 정통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김삼웅 대한매일 주필) 임시정부가 창설한 한국광복군은 역사성·정통성에도 불구하고 해방후 창군과 건국과정에서 소외·배척됐다.그 이유는 크게 4가지로 분석할수 있다. 첫째,수적인 열세이다.해방전 일본군·만주군에 복무했던 한국인은39만여명이었으나 광복군 출신은 3만5,000여명에 불과했다. 둘째,미군정이 일본군 전력자나 영어 구사가 가능한 학도병 출신들을 중용했다. 셋째,광복군 계열의 분열현상이 심했다.광복군출신 가운데 오광선은광복청년회,이범석은 조선민족청년단,이청천은 대동청년단을 조직했다.이념적으로도 임시정부 우파계열을 중심으로 대한무관학교,좌파계열로 조선국군학교(중앙육군사관학교) 등이 대립했다. 넷째,초대대통령 이승만의 인사정책이 편파적이었다. 이승만은 임정요인들과 광복군을 건군 참여에서 배제했다. 광복군 출신의 이범석이국무총리겸 국방장관이 되었으나 이승만정권의 임정 배척 노선을 극복하지 못했다. 다가오는 통일시대를 맞아 국군의 정통성과 ‘국군의 날’ 재정립이 시급한 과제로 대두되고 있다. 이제 대한민국 군사(軍史)를 광복군으로 소급하여 정통성을 확보하고 국군의 날 역시 광복군 창건일로 고치는 것이 마땅하다. ■한국광복군 정통성의 국가승인 문제(한시준 단국대 교수) 광복군은해방후 국내와 중국에서 건군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이 작업은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중국측은 공산당과 대결하는 상황에서 광복군의 건군 활동을 불안요소로 간주했다.또 미군정은 임정과 광복군의 존재를인정하지 않았다. 광복군이 미군정의 건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은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나 국군 창설과정에서 광복군의 역할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미군정 하의 통위부와 조선경비대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국방부와 국군으로 개편되었는데,통위부장 유동렬은 모든 권한을 국방부장관 이범석에게 이양하였다. 광복군에 의해 미 군정의 군권(軍權)이 대한민국 국군으로 넘겨진것이다.정부수립후 광복군 출신들은 창군의 일원으로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현재 국군은 광복군의 역사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국군의 뿌리를 국방경비대,육사의 연원을 군사영어학교에 두고 있다.이제우리 군의 뿌리와 연원을 되찾아야 한다. ■광복군의 군사적 특성(김행복 국방군사연구소 연구위원) 광복군은군사령부가 먼저 편성되고 예하부대는 차후 구성됐다.인적자원은 중국 관내에서 양성된 군사간부와 만주에서 이동해온 독립군 세력이 주축을 이뤘다. 이들은 이른바 초보활동에 의해 장병을 모집해 1년만에 3개사단을형성하려고 했다.그러나 일제의 무자비한 소탕작전, 병력모집의 곤란성, 중국의 간섭 등으로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 이 과정에서 영국군의 요청으로 인도·미얀마에 파견된 공작대원들은 성공적인 작전을 수행했고 미국 첩보기구 OSS와의 훈련도 마쳤다. 광복군은 임정의 국군이었으나 정규군이라기보다 비정규군·특수전부대의 기능과 역할을 수행하는 데 머물렀다.이 점 때문에 광복군의의의를 가볍게 보는 경향이 있다.그러나 망명정부가 이국 땅에서 만든 광복군은 조직적·통일적·지속적인 군사활동을 수행했으며 이는대단히 의미있는 일이다. 정리 정운현기자 jwh59@
  • 57~58년 정부 기록사진집 3권 발간

    국정홍보처는 5일 지난 57,58년 사회 전반의 모습을 담은 ‘대한민국 정부 기록사진집 제3권’을 펴냈다.사진집에는 한국전쟁으로 파괴된 사회기반시설 복구·건설 현장,산업 일선과 판자촌등 시가지 표정,이승만 당시 대통령의 국내외 행사 참석 모습등 당시 시대 상황을 보여주는 426장의 흑백사진이 실려있다.국정홍보처는 1,000부를 발간해 중앙 및 지방행정기관,국·공립도서관,박물관,대학 등에 배포하는한편 일반인에게도 판매할 방침이다.
  • [해외항일전적지를찾아서] (8)美洲 독립운동 전초기지 하와이

    [호놀룰루(하와이)김삼웅 주필] 지금 하와이 한인사회는 이민 100주년(2003년)을 앞두고 행사준비에 바쁘다.하와이 이민 100년사는 바로한민족 이민사와 같고 미주지역 독립운동사와도 맥락을 같이한다. 1903년 1월 13일 대한제국 수민원(綏民院)총재 민영환이 발행한 여권을 소지한 노동이민 97명이 미국상선 갤릭호를 타고 23일 간의 긴항해 끝에 호놀룰루항에 상륙한지 100년이 다가오는 것이다.하와이이민은 1905년 을사조약 체결 직전까지 65척의 선박편으로 7,200여명의한인이 하와이섬으로 이민,오아후섬 등 농장에서 사탕수수 재배와 관개사업에 종사했다. 일제시대 미주지역 항일독립운동은 바로 이러한 이민동포들의 힘으로가능했다.그러나 을사조약과 함께 한국의 외교권을 강탈한 일제가 한국인의 해외이민을 봉쇄함으로써 하와이 이민도 중단되었다. 하와이이민 한인들은 혹독한 노동에 시달리면서도 근면성을 발휘해 몇년이지나면서부터 일부는 샌프란시스코와 로스앤젤레스 등 미국본토로 건너가기도 했다.그러나 대부분이 현지에 정착하면서 역량을모았다. 현지 석간신문 Evening Bulletin지 1903년 2월 26일자에는 “지난 1월 31일 이곳 와이아루아 농장에 도착한 한인들은 몸이 건강하며 농업에 익숙한 사람들이다.그들은 모두 만족해 하며 농장노동일에 힘쓰고 있다.그러나 그들의 임금은 저렴한 것이 현실이다”라고 보도했다.한인들은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10시간 이상의 노동에 하루품삯이 남자는 69센트,여자는 50센트에 불과했다.교민들은 이렇게 열악한 생활을 하면서도 그중 일부를 떼어 독립운동자금으로 헌금했다.중국에 세워진 임시정부 운영자금의 상당액이 하와이 한인들이 보낸 돈이었다. 한편 교민들은 1905년 하와이 에바농장에 한인감리교회를 세워서 정신적인 유대를 나누는 한편 애국단체를 만들어 조직적인 항일운동에나섰다.1907년 하와이 각 지방에 분립되어 있던 24개 단체대표 30여명이 호놀룰루에 모여 하와이 한인단체를 총망라하는 ‘한인합성협회’를 조직하고 1909년 2월 1일에 ‘국민회’를 창립했다.국민회는 1910년 명칭을 ‘대한인국민회’로 고치고 조직 강화와 조국해방 사업에 필요한 외교·교육·출판사업 등을 관장할 인재의 필요성을 실감하여 1912년 네브라스카대학 정치학과를 수학한 박용만(朴容萬)선생을 초청했다. 박용만의 출현으로 하와이 대한인국민회는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고,주정부로부터 경찰권을 부여받는 등 크게 신뢰를 받게 되었다.한인국민회는 1914년 호놀룰루시의 중심가인 밀러 스트리트 1306번지에 회관을 마련했다.초기에는 월세집을 얻어서 사용하다가 김종학 총회장때 회원들의 성금 7,250달러를 들여 목조 2층 양옥을 건축해 1948년현재의 회관으로 이전할 때까지 전후 30여년동안 독립운동과 한인사회 발전의 모태가 되었다. 1층은 상점,2층 회의실,그리고 2층 뒷편의 일부는 국민회 노인들의편의시설로 이용된 회관은 그러나 아쉽게도 하와이 주정부의 토지수용령으로 철거되었다.하와이대학 최영호교수는 국민회관 자리는 현재밀러스트리트의 하와이 주청사와 주지사 관저 사이에 위치한 국기게양대 앞이라고 지목한다. 하와이 지역의 독립운동은 박용만 선생의 등장과 함께 본격화되었다.박용만을 중심으로한 지도급 인사들은 1914년 독립군을 양성하는 사관학교를 세우면서 본격적인 무장투쟁 준비에 나섰다.교포들로 부터의연금을 받아 군용지를 마련하고 대한제국 광무군인 출신의 노동이민을 중심으로 사관학교 간부와 학도 124명으로 ‘조선국민군단’을창설한 것이다. 한인사회에서 ‘산너머 병학교’로 불린 사관학교의 교장은 박용만이었다.그는 조선국민군단 단장도 겸했으며 대대장에 박종수,중대장심세권,소대장 박충식 등의 간부진으로 편성되었다.지금은 주택지로변한 이곳은 호놀룰루시에서 63번 도로를 따라 동북쪽으로 10마일쯤떨어진 해안을 낀 아후이마누언덕에 위치해있다.박용만은 이곳에 조선국민군단 본부와 사관학교를 세워 한때는 311명의 병력을 훈련시켰다.그리고 1909년 헤스팅스에 한인소년병학교를 세우고 국민회의 기관지 ‘국민보(國民報)’를 발행하는 등 독립운동에 열정을 바쳤다. 그러나 박용만 중심의 하와이 독립운동은 국제정세(1차세계대전)의변화와 이승만과의 노선갈등(박용만은 무력독립투쟁,이승만은 외교노선)으로 사관학교도 20마일쯤 떨어진 카후구 사탕수수 농장으로 옮겨졌다가 얼마 안있어 해산되고,박용만은 중국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독립운동에 헌신하다가 암살됐다. 현재의 대한인국민회 회관은 호놀룰루시 북쪽 룩 애비뉴 2600번지푸노이계곡 언덕위 아담한 스페인풍 2층건물로 자리잡고 있다.1946년현 위치로 이전한 이 건물이 독립운동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하와이 한인사회를 발전시켜온 상징적 건물이다.300여평의 부지에 2층콘크리트 벽돌 건물의 전시장에는 지금도 국민회의 역사를 입증해주는 각종 문건과 자료가 많이 있다.1910년대에 제작된 태극기와 성조기,국민회 회원들이 납부한 독립운동자금 기록부,독립운동기금을 넣어두었던 두개의 대형금고,1922년 제작되어 각급 회의때 사용한 의사봉 등이 보존되어 있다.그러나 기관지 ‘국민보(國民報)’를 찍었던인쇄기는 본국 독립기념관으로 옮겨졌다. 1918년 12월 이승만 박사와 30여명의 이민신도들에 의해 세워진 호놀룰루시 리리하 스트리트 1832번지의 한인기독교회는 이박사가 하와이 독립운동의 본거지로 삼았던 곳이다.1938년에 4만달러를 들여 신축해 지금까지 사용해온 것을 최근 교회당 재건축을 위해 주정부 허가를 기다리고 있다.교회사무실과 교회예배당,이박사 동상 등은 보존되고 이박사 기념관이 새로 건립중이다.현재 300만 달러의 예산으로1층의 교회당과 2,3층의 광화문 누각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이와는 별개로 이승만박사와 이민 초기 하와이 한인들이 주축이 되어 1903년에 세운 ‘그리스도 연합감리교회’는 그동안 이전을 거듭하여 1948년에 케아우모쿠 1639번지의 현 위치에 2년전 신축돼 옮겨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하와이 항일운동사적지를 살피면서 아쉬웠던 대목은 이승만 전대통령과 관련해서는 상당한 규모로 신축중인 기념관을 비롯해 많은 유적이보존되고 있는데 비해 박용만선생의 사적은 거의 찾아 보기가 어렵다는 점이다.하와이 독립운동의 양 날개의 한쪽인 박용만 선생이 너무잊혀지고 푸대접을 받고 있는 것이다.박용만선생의 독립운동 역할을상기한다면 지나친 불균형이 아닐 수 없다. 한인회장의 거취를 둘러싸고 교민사회가 극심한 갈등을 빚고 있는것을 빼고는 이민 100주년기념사업을 준비중인 하와이 한인사회는 국권침탈기 하와이 이민 동포들의 고난의 이민사와 독립운동사 발굴·조사·정리에 열정을 모으고 있다.어떤 사람은 이승만-박용만의 뿌리깊은 노선갈등의 잔재라고 해석하기도 했다. kimsu@
  • [김삼웅 칼럼] ‘민주’ 없고 ‘나라’ 없는 정당행태

    집권 민주당의 전당대회가 열린 날 원내 제1당인 한나라당은 청와대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같은 날 평양 인민문화궁전에서는 제2차 남북장관급회담을 열어 투자보장협정과 경의선복원,경협을 위한 제도적장치 마련 등을 논의했다.남북화해와 남남대결의 어처구니없는 진풍경이 한반도에서 동시에 벌어진 것이다. 6·25한국전쟁이 한창인 1952년 7월 피란수도 부산에서는 이승만의권력연장을 위한 정치파동이 일어났다. 발췌 개헌파동이다.1592년 임진왜란으로 군신(君臣)이 의주로 피란을 가서도 동인과 서인들은 왜란의 책임을 물어 상대방 탄핵에 열을 올렸다.와중에서 유성룡은 이항복의 비호로 겨우 살아남아서 전란을 총지휘하게 되었다. 정치가 국난극복과 민생보호가 아닌 자신들의 권력싸움,이해다툼의방편이었음을 말해준다.지난 2년 동안 IMF환란 극복과정에서 우리 정치가 보인 행태도 임진왜란과 6·25전란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귀화한 한 외국인은 한국인을 ‘독 속의 게’에 비유했다.독 속에게를 한 마리만 넣어두면 혼자 힘으로 빠져나오는데여러 마리를 넣어놓으면 서로 올라가는 놈의 발목을 잡기 때문에 결국 한 마리도 빠져나오지 못한다는 것이다.참으로 부끄러운 일면을 지적했다.상생과화합을 내세우면서도 공생보다 독생,밖(外)보다 안(內)에서 싸우길좋아한다. 9월1일 평양에서 끝난 2차 장관급회담의 성과로 이산가족 서신교환,군사긴장 완화 및 군 직통전화 개설을 위한 군 당국자회담,쌀 차관공여,3차 장관급 제주회담,임진강 수해방지공동추진,경협제도화 등 전방위 남북교류가 ‘급물살’을 타게 되었다. 이러한 남북한간 긴장완화로 한반도를 둘러싼 4강간에 영향력 유지를 위한 미묘한 신경전이 활발해지고 있다.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 최근호는 “궁극적으로는 통일로 이어질 남북간 화해는 환영받을일이지만 동시에 이해 관계자들을 매우 동요시켜 미국은 한국과 일본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문제를 재검토하게 하고 중국·일본·러시아간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둘러싼 경쟁관계에 다시 불을 붙이게 될 것”이라 내다 봤다. 한반도 주변의 움직임이 이렇다.국가(민족)의 미래를 내다보고 걱정하는 정치인(정당)이라면 급물살을 타고 있는 남북관계를 뒷받침하기위해 주변 4강 문제를 심도있게 연구하고 국회(또는 정당)에 4강과친선협회 등을 강화하여 정부의 입지를 도와야 할 것이다.이때의 ‘정부’는 정권이 아닌 국가와 동의어이다. 의원외교라면 너도나도 미국으로만 몰려가 관광인지 외교인지 구분할 수도 없는 일정을 보내다가 귀국하는 한심한 행태는 시정돼야 한다.미국 외교도 중요하지만 못지 않게 중국·러시아·일본과의 외교적 뒷받침도 남북화해-통일로 가는 길목에서는 매우 중요하다. 2차대전후 오스트리아 정치지도자들은 네 토막으로 쪼개진 나라를 초당파적인 외교력으로 신탁통치를 종식시키고 통일국가를 수립했다. 우리 정치인들도 나라의 장래를 위해 전문성을 바탕으로 친미파·친중파·친일파·친러파로 나뉘어 국익외교에 나서야 한다.그래야 4강에 둘러싸인 반도국가가 안전과 통일을 기약할 수 있다.한말 매국노들처럼 그들의 앞잡이가 되란 말이 아니다. 대미외교를 강화하되 다른 3강과의 관계도 소흘히 해서는 안된다는주장이다.그런 역할은 정부의 외교력만으로는 한계가 있고 국회가 담당해야 한다.다른 나라들도 다 그렇게 한다.외교문제가 너무 ‘벅차’다면 내정이라도 성실하게 챙겨야 할 것 아닌가. 폭우와 태풍으로 수많은 이재민이 가족과 재산을 잃고,중국산 농수산물 파동으로 국민이 불안에 떨고,몇달째 계속되는 의사들의 집단파업으로 의료기능이 마비되고,산불피해·구제역·저소득층 보호를위한 추경 등 산적한 현안이 오로지 정치문제로 발목이 잡혀있다.여름 임시국회에 이어 정기국회까지 파행을 거듭하더니 야당은 장외투쟁을 벌인다. 민주당에 ‘민주’ 없고 한나라당에 ‘나라’ 없다는 세간의 지탄을면하려면 민주당은 날치기 등 비민주적 행태를 버리고,한나라당은 나라를 생각하지 않고 대권욕에만 빠져있는 당노선을 바꾸어야 한다.386세대 등 정치개혁을 내걸고 당선된 개혁성향 의원들이 앞장서 정기국회부터 정상화시켜라. 그렇지 않으면 ‘무노동무임금’원칙이라도지켜라. 김삼웅 주필
  • [김삼웅 칼럼] 분단사의 한 매듭 비전향장기수

    고난의 한국현대사는 남의 나라에서는 쓰이지 않는(생기지 않는) 용어가 다수 사용된다.‘비전향장기수’도 그중의 하나이다.이 용어의‘비전향’에는 강고한 이데올로기의 갑골(甲骨)이,‘장기수’에는반인권·비인도주의의 야만성이 배인다. “지면에 옥(獄)을 그려놓아도 사람은 그것을 피하고 나무를 깎아형리(刑吏)를 만들어도 사람은 그것과 면대하기를 싫어한다”고 사마천은 ‘임안(任安)에게 드리는 글’에서 말했다.감옥을 말하는 ‘옥(獄)’자는, 사나운 개 두마리가 사람의 입(言)을 지키는 모양을 하고있다. 자유를 구속하는 형상인 것이다.감옥은 인간의 육체와 정신을속박하고 자유를 박탈하기 때문에 누구나 이를 기피한다. 며칠후(9월2일)면 ‘비전향장기수’63명이 북한으로 간다.70세 이상이 대부분으로 평균 32년6개월씩을 0.75평의 감방에서 인생의 대부분을 보낸 사람들이다. 직설적으로 표현하면 이들은 남한체제를 부정하고 전복하려던 간첩과 빨치산출신이고,에돌아 보면 분단시대의 희생양이다.어찌됐건 그들의 개인이나 가족사는 통한의아픔이고 민족사적으로는 ‘콩깍지로콩 삶는’ 비극이다.무엇보다 짧게는 15년,길게는 45년을 복역한 이들의 짓밟힌 삶은 누가,무엇으로 보상할 것인가.이데올로기? 신념?분단시대? 이들을 보내면서 지금이 과연 2000년대의 문명사회인가,문명은 이데올로기의 상위개념인가,하위체계인가를 묻게 한다.그리고 여전히 병들고 늙어서 폐인이 되다시피한 노인들을 이념과 거래의 장삿속으로만 인식하려는 색맹(色盲)의 군상을 지켜본다. 중세의 혼돈을 즐기는 군상은 근세의 여명이 오는 것을 두려워했다. 오랜 독점지배로 굳혀진 기득권의 철옹성에서 밝아오는 여명도 마녀의 눈빛으로 보이고,지구는 여전히 평면일 뿐이었다.“지구가 돌다니,마녀다! 화형에 처해라”던 중세의 도그마가 이 땅의 논리로 대변된다. “을지훈련을 축소한 것은 북쪽 주장을 추종한 것이다” “경의선이 복원되면 주한미군의 철수론에 악용될 수 있다” “정상회담 합의(제2항)는 헌법위반이다” 따위의 시대착오적,뒤틀린 도그마는 오늘을 중세와 21세기의 시공(時空)을 착각하게 만든다.언제까지 분단의 철옹성에서 이념의 색안경을 쓰고 동족끼리 광란의 칼춤을 추자는 것인가.탈냉전시대에도 ‘민족’이라는 노적가리에 불지르고 싸라기 주워먹자는 것인가. 비전향장기수들의 북송을 지켜보면서 진심으로 가슴아파하는 사람들이 있다.‘납북자’와 ‘국군포로’를 둔 가족이다.이들의 서운함(정부에)과 원망(북쪽에)은 당연하다.남북 당국은 대화를 통해 시급히풀어야 한다.이 문제가 비전향장기수와 같은 것은 아니지만 분단의아픔이고 반인도주의적이기는 마찬가지다.또한 틈새만 보이면 화해협력을 적대관계로 되돌리려는 냉전세력에게 빌미를 주게 된다. 사실 ‘납북자’와는 별개로 ‘국군포로’는 매우 복잡하고 미묘한문제다.말하기 쉽게 ‘비전향장기수와 맞교환’ ‘상호주의 원칙’이제기되지만 정서적인 호소력은 지닐지 몰라도 문제의 해법은 아니다. 휴전협정에 따른 남북한 포로교환으로 국제법상 종결된 사안인데다가남쪽에서 파견한 북파요원문제, 휴전협정 직전 이승만 정부가 석방한2만5,000명의 반공포로문제 등과 연계시키게 될것이기 때문이다. 일이 이렇게 꼬이면 지금의 작은 가능성마저 물거품이 되고 남북은다시 양쪽의 극우·극좌세력의 뜻대로 대결과 적대관계로 되돌아간다.그러한 ‘닫힘’보다 작은 ‘열림’을 확대하면서 순차적으로 풀어가는 것이 보다 빠르고 쉬운 길이다. 이쯤에서 함께 주의해야 할 것은 돌출행동을 자제하는 일이다.50년이상 순치된 국민의 냉전의식이 하루아침에 씻기기는 쉽지 않다.북송비전향장기수들을 ‘애국투사’로 치켜세우거나 지나친 환송식 등은국민의 정서와는 걸맞지 않는다. 당사자들도 조신해야 한다.“조국이 나를 42년 동안 옥살이를 시켰지만 원망하지 않습니다.분단된 조국의 비극일 뿐이지요”(이종환)란자세를 북한에 가서도 지켜주길 바란다.그래야 화해협력이 지속되고통일의 길이 열린다. 김삼웅 주필 kims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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