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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차관이상 정무직 역임자 정부수립이후 1,934명

    지난 48년 정부 수립 이후 2000년 12월31일까지 차관 이상의 정무직을 역임한 사람은 총 1,934명으로 밝혀졌다. 직위별로는 대통령·총리 57명,장관급 기관장 226명,장관776명, 차관 581명,청장(처장) 351명이 배출됐다. 이같은사실은 대한매일이 26일 단독 입수한 ‘역대 정부의 정무직 인사현황’ 보고서에서 밝혀졌다.이 보고서는 중앙인사위원회(위원장 金光雄)가 지난 3월 정부 고위직 인사의 출신지·고교별 조사때 만들어졌으나 공개하지 않은 부분이다. 보고서에 따르면 정무직 역임자 중 864명은 차관 이상 직위를 1회만 역임했으나 408명은 2개 이상의 직위를 역임했다.이에 따라 차관 이상 직위를 한번이라도 차지한 자연인은 모두 1,272명으로 조사됐다. 차관 이상 정무직을 가장 많이 역임한 사람은 진념 현 재정경제부 장관으로 현 직위까지 8회를 기록했다. 7회를 기록한 사람은 없고 6회 3명,5회 22명,4회 41명,3회 88명 등이다. 출신 지역별 분포를 보면 영남지역의 경우 2000년에 이르기까지 인구비율에 비해 정무직 비율이 매년 5.3%씩 과대배출된 것으로 나타났다.즉 영남지역의 인구비율이 평균 32%일때 매년 정무직 비율은 평균 37.3%를 차지한 것이다. 보고서는 이밖에 ‘인사 편중지수’에따라 역대 정부의인사 편중도를 비교한 결과 이승만 정부의 정무직 인사가가장 편중됐다고 밝혔다.이승만 정부 다음으로 노태우,전두환,김영삼,박정희,김대중 정부 순으로 인사 편중이 심했다는 지적이다. 이번 조사를 담당한 중앙인사위 관계자는 “고위 공직의지역 편중 인사문제를 둘러싼 논란이 계속되고 있으나 이에 대한 객관적인 통계자료조차 없었다”면서 “이 보고서는 역대 정부의 정무직 인사의 지역 편중 실상을 합리적기준에 의해 작성된 유일한 통계자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홍성추기자 sch8@
  • [데스크 시각] 여의도 일제청산 바람

    최근 서울 여의도 정가에 한 줄기 신선한 ‘바람’이 불고있다. 여야 의원들이 망라돼 추진하고 있는 ‘친일잔재 청산바람’이 그것이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여야 의원 23명은 지난 5일 친일잔재청산을 슬로건으로 내걸고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회장 김희선 의원)을 결성했다.우리 국회의원들 입에서 ‘민족정기’라는 말이 나온 자체가 참으로 오랜만의일이다.해방후 반민특위가 와해된 이후 아마 처음이 아닌가싶다. 김희선 회장은 인사말에서 “우리 국회는 1948년 반민족행위처벌법(반민법)을 제정해 일제잔재 청산을 시도했으나 친일세력의 반발로 무산됐다”면서 “선배 의원들이못한 민족정기 수호의 대업을 이어 가겠다”고 밝혔다. 김 회장의 ‘다짐’대로라면 ‘제2의 반민특위’라도 만들어 보겠다는 각오같은데 뒤늦었지만 민족사적으로 참으로반갑고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이날 모임에는 여당의대표가 나와 “일본 역사교과서에 대한 대응 못지않게 우리내부의 일제잔재 청산도 중요하다”며 축사까지 했다니 더욱 이들의 행보에힘이 실리는 듯하다. 잘 알다시피 해방후 우리 민족에게 주어진 양대 과제는 통일·민족국가 수립과 일제잔재 청산을 통한 민족정기 확립이었다.그러나 반세기 전의 상황을 돌이켜보면 우리의 모습은 정반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국토는 양분되고 독립국가에서는 차마 있을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났다.외세에 빌붙어 기득권을 누리며 민족반역을 저지른 자들이 다시 권력엘리트로,거대자본가로,명망가·지식인으로 재등장하게 된 것이다.이는 우리처럼 2차대전 당시 외세의 지배 아래 있었던그 어떤 나라에서도 유례를 찾을 수 없다. 해방후 때를 놓친 ‘민족정기 확립’은 두고두고 민족적과제로 남아왔으나 이승만 정권 이후 역대 정권에서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진 정치인·정당은 극히 찾아보기 어려웠다. 일부 독립운동 경력을 가진 정치인들마저 대세론을 앞세워‘친일’시류에 편승해 민족정기를 짓밟아 왔다.이같은 형국이고보니 친일경력자가 단상에서 독립운동가에게 훈장을내리고,친일파가 대일외교 전면에 나서는가 하면,심지어 이들이 독립유공자의 공적을 심사하기까지 했다.친일경력자가큰 감투를 내세워 국립묘지에 버젓이 묻히고, 법원이 친일파가 매국의 대가로 축적한 재산을 실정법을 이유로 보호해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처사였는지도 모른다. 지난 8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친일문제는 역사학계를 포함해 우리사회의 여러 ‘성역’ 가운데 하나였다.이 때문에친일문제 전문연구자가 손에 꼽을 정도이고,예산이 없어 아직 ‘친일인명사전’ 하나도 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 새천년을 사는 우리의 현주소이다.지난 95년 해방 50주년을 계기로 총독부 청사 철거,‘국민학교’ 명칭 개정 등 잠시 이문제가 사회적 의제로 설정되는가 싶더니 이 역시 ‘잔칫상의 안주’ 정도로 끝나버리고 다시 대중적 관심에서 멀어졌다. 제발 이번만은 과거처럼 끝나지 않기를 바란다.이같은 움직임이 비록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사건이 계기가 됐다고는 하나 이제라도 우리의 ‘부끄러운 과거’를 반면교사로삼았으면 한다.모처럼 여의도에 일고 있는 ‘민족적 바람’에 박수를 보내며 특별법 제정에 앞서 이 문제의 대중적 확산을위해 국회의원·전문연구자·독립운동가·법조계·일반시민들이 참여한 대토론회를 제안한다. 정운현 문화팀 차장
  • [대한광장] 과거 반성없는 수구언론

    좋은 기회가 생겨 현업 언론인을 모시고 학교에서 ‘일류언론’이란 주제로 강연 자리를 가졌다.강연이 끝날 무렵에강의실에 들어간 나는 당혹스럽기 그지없는 한마디를 우연히 듣게 됐다. ‘얼마전에 한 신문이 언론개혁 시리즈를 게재하면서 유력지들의 과거 친일문제를 다뤄 일전불사를 벌였다.사실 상대방 신문들의 친일행각들은 그런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불가피한 것이었다.지금 언론개혁을 외치는 진보적인 그 신문도 그맘때 존재했더라면 친일언론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그런 불가항력의 상황에서 자유로운 자가 과연 누가 있었겠는가’라는 요지의 말이었다. 여기서 그 언론인 개인의 언론관을 따지고 탓할 생각은 전혀 없다.귀중한 시간을 쪼개어 불원천리 방문하여 강연까지해준 것만 해도 고마울 따름이다. 다만 그 말의 연장선 위에서 우려되는 것은 불가항력을 내세운 상황론이 자칫하면한국언론의 역사와 현실을 바라보는 시각을 크게 왜곡시킬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일제하에서 반민족 친일언론 행각을 자행했고 또한불과 20년전 군사독재정권하에서 침묵과 굴종으로 일관한일부 언론들에게 무책임하게 면죄부를 주는 꼴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문제의 상황론이 적용될 경우 역사에 대한 옳고 그름의 판단이란 한마디로 쓸데없는 일이다.항일독립투쟁이나반독재투쟁이 갖는 역사적 의미는 깡그리 없어져버린다.굳이 지금 일본 역사왜곡 교과서 문제나 광주민중항쟁의 의미를 따질 이유가 없다.독일이 유대인 살인행각을 반성하고프랑스가 친(親)나치 인사를 처벌하는 등의 외국 교훈들도배울 필요가 없을 것이다.역사에 대한 평가와 되새김이 전혀 필요 없는 것이다. 최근 언론개혁운동에서 일부 언론들과 언론인들이 비난받아 마땅한 이유는,단순히 일제와 군사독재 시절에 저항의목소리를 내지 못해서가 아니라 무엇보다 자신의 과거 행적에 대해 사과와 반성을 할 줄 모를 뿐 아니라 도리어 오만과 뻔뻔함마저 보이고 있는 태도 때문이다.단적인 예를 들자면 ‘할말을 하는 신문’은 도대체 언제부터 할말을 하기시작했던가? 또 지금 언론사 세무조사, 신문고시 등을 가리켜 언론탄압,언론길들이기라고 비판하고 있는 유력지들은과거 동아 광고사태나 보도지침,언론인 강제해직의 문제를갖고 군사정권을 신랄하게 비판한 적이 있었던가? 언론사가 대국민 사과성명을 한 것도 우리 언론사상 딱 두번으로 기억한다.일제하 총독부 기관지였던 매일신보가 해방직후 자신의 친일언론 행각에 대해 사과성명을 한 것과그리고 4·19혁명 직후 KBS 아나운서들이 이승만 정권의 나팔수 노릇을 한 것을 반성하는 성명을 발표한 것 등이다. 반면에 오랜 전통을 자랑하고 이른바 ‘민족지’라고 자처하고 있는 신문들이나 20여년 동안 군사독재정권에서 유착과 굴종으로 일관했던 언론사들이 솔직한 반성을 한 적은한번도 없다. 일본에서 패전 직후에 아사히신문과 마이니치신문이 언론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점에 대하여 대국민 사과성명을 1면에 게재한 것과 비교하면 한국언론은 그것의 발뒤꿈치에도 따라가지 못한다. 오히려 일부 언론들은 6·10 시민항쟁이 쟁취한 언론자유에 편승하여 돌연 반독재투쟁에 앞장서는 투사로 돌변했다. 그들은 자신을 과거 권력의 언론탄압에 의한 피해자요 희생자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오히려 그들은 권력에 대한 협력자요 동반자이자 가해자라는 것은 이미 오래 전부터 각종 자료에서 드러난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된 언론들과 언론인들은 지금 부당한 기득권을 장악하여 언론자유를 외치면서 ‘선출되지 않은 권력’,무한권력을 행사하고 있다.그 이유는 그들이 제대로 청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게다가 지금 일부 신문들이언론개혁에 저항하면서 몰역사적이고 반개혁적인 자세를 취하는 것을 보면 한국언론의 역사가 거꾸로 가고 있다는 느낌이다. 주동황 광운대 교수
  • [대한광장] 껍데기 정치 이제 그만

    노예제 시절에 권력은 노예소유자의 것이었고 봉건제 아래서는 국왕과 영주의 것이었다.권력의 소유자와 집행자가 분리되지 않은 한몸이었던 것이다.그러던 것이 시민혁명을 거치면서 권력의 소유자와 집행자가 분리되면서 권력은 국민의 것이 되었다.‘권력의 민주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권력의 집행자로부터 소유권을 분리하여 국민이 권력의 주인이 되도록 한 데는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그러니 현대민주주의 아래서 권력의 국민 귀속성은 정치적 관계의 정언 명제로서,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절대진리이다. 여기서 정권은 권력의 집행기관이며 권력자는 법률에 따라 권력을 집행하는 무리에 불과할 따름이다.이 관계가 뒤바뀌면 정치가 뒤집어지고 역사가 거꾸로 흐르게 된다.이것이 현대사회에서 권력과 국민의 관계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현실의 권력은,이승만과 박정희가 그랬던 것처럼,늘 국민으로부터 자립하려는 무절제한 욕망을 갖는다.국민에 의해 ‘위임된 권력’은 어느 순간 스스로 ‘창조된 권력’으로 변질된다.그 결과분산되어야 할 권력이 집중되고 개방되어야 할 권력이 은폐되며,급기야는권력 스스로가 생명력을 가지고 목숨을 연장하려 한다.이때 권력은 겸손함을 버리고 오만한 자세로 국민을 무릎꿇게 하지만 결과는 늘 비극적이다. 몇가지 사례를 보자.국민의 정부에서 ‘국민’이 사라져버렸다.최초의 평화적 정권교체라는 찬사와 함께 국민의정부가 들어선 지도 이미 3년을 넘겼다.그러나 국민의 정부에 ‘국민’이 없다는 지적은 매우 뼈아픈 현실이다.정부가 국민의 뜻에 따라 국정을 운영하고 국민의 힘을 바탕으로 개혁을 추진하겠다고 약속했지만 국민은 국정운영과개혁의 주체가 아니었다.국민의 정부 아래서도 국민은 여전히 권력의 대상일 뿐이다.그 결과는 개혁의 혼돈과 지연으로 나타나고 있다. “개혁이 피로하다”고 한다.지난 3년간의 개혁은 “개혁에 대한 화려한 수사,개혁구심의 부재,소모적인 정쟁,개혁의 지연”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그런데 얼마나 개혁했다고 벌써 개혁이 피로하다는 말인지,마무리해야 할 무슨 개혁이 있다는 말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정작 피로한 것은 개혁이 아니라 무리하게 권력을 독점하고 있는소수 권력자들과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개혁 분위기에 무임승차하고 있는 수구적인 인사들 아닌가. 실상을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국정에서 배제된 국민들은개혁의 대상이 되어 ‘고통전담’의 고역을 치르느라 힘든데 권력자들은 가능하지도 않은 ‘개혁전담’의 악역을 수행하느라 힘든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보자.부패한 조선 후기사회를 개혁하고자했던 영조대왕은 51년 7개월,그 뒤를 이은 정조대왕은 24년 3개월,합해서 76년 동안 개혁을 추진했지만 조선사회는 개혁되지 못했고 그 결과 100년 후 나라가 망하는 비운을 맛보았다.개혁다운 개혁없이 3년 만에 개혁을 끝내자는권력자들의 참담한 역사인식과 천박한 개혁철학에 조의를표할 따름이다. 마지막으로 권력에 대한 욕심이 국민을 끝없이 기만하고있다.민주당은 차기 정권에 대한 환상에 빠져 살이 곪고뼈가 썩는 줄도 모르고 몸집 부풀리기에 여념이 없다.제것도 아닌 권력을 놓고 개헌론을 지피면서 주인인 국민은안중에도없다.한나라당은 3년간을 오직 한길 개혁저지를위해 몸부림쳐 왔다.그 ‘한’나라당이 결정적인 국면에서 ‘몇’나라당이 될지 예측하기도 어려운 상황에서 마치집권기회를 포착한 것처럼 호가호위하고 있다.개혁의 남루한 간판을 걸친 잡동사니 정당과 개혁이라면 쌍수를 들어비난하는 정당이 우리의 미래를 책임지겠다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고 싶다.국민은 정말 피곤하다고.부패하고 무능한 정치에 피곤하고 국민을 봉으로 아는 낡은 정치에 피곤하다.건달처럼 몰려다니는 패거리 정치에도 피곤하고 소리지르며 싸우는 시정잡배 같은 난장판 정치에도 피곤하다.국민들은 깨끗하고 생산적인 정치를 원하고 철학과 소신을 가지고 국민을 위하는 정치,서로 존중하면서 토론하고대화하는 정치를 원한다.어디 이런 정치 없소?[정 대 화 상지대 교수]
  • 박정희시대 유산 어떻게 극복하나

    ‘박정희시대’는 과거사인가,동시대사인가. 박정희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차치하고라도 ‘박정희시대’는 여전히 ‘현재적’의미로 규정되고 있다.이는 그 시대의 유산이 우리사회 곳곳에 산재해 있으며,우리는 여전히 그와의 ‘연속’선상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시민단체 관계자들의 박정희 흉상 철거,‘박정희기념관’ 건립을 둘러싼 논란 등 박정희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는 가운데 16일로 5·16쿠데타 40주년을 맞았다.한국정치외교사학회가 ‘5·16의 정치외교사적 평가’를 주제로 지난 10일 토론회를 개최한 데 이어 14일에는 성공회대 민주화운동자료관이 ‘박정희·박정희체제의 평가와 극복’을 주제로 학술토론회를 열었다.이날 토론회는 평소 박정권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를 펴온 학자들이 주제발표와토론의 주류를 이뤘다. 흔히 박정희를 ‘위인’으로 평가하려는 부류들이 내거는 ‘깃발’은 단연 경제개발이다.이에 대해 김대환 인하대교수는 ‘박정희식 경제개발의 공과’라는 주제발표를 통해 그 허구성을 지적했다.김교수는 “박정권의경제개발은 근대화 신화의 중심테제이자 유일한 요소였다.정치·사회 등 다른 근대화 조건들이 척박하여 신화의 깃발을 경제개발밖에 꽂을 데가 없었다”면서 “대부분의 동시대인들의이 신화의 위력에 빨려들어간 감이 없지 않다”고 말했다. 김교수는 또 한국경제의 가장 큰 문제점인 대외종속현상은 박정희의 개발정책이 추진되는 과정에서 심화됐다고 비판했다. 박정권의 남북관계·통일문제에 대해서도 통렬한 비판이제기됐다.강정구 동국대 사회학과 교수는 “민간차원의 통일운동·논의를 모두 반공법으로 처벌하였고,‘선건설 후통일’또는 ‘승공통일’로 실질적인 분단고착화 내지 반통일 기조를 지속시켰다”며 “4·19 후 고조된 시민사회의 통일역량을 이승만시대로 되돌려 민족사적으로는 반통일·반민족의 평가를 받아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한편 ‘인간 박정희 평가’에서 조현연 성공회대 연구교수는 박정희가 ▲항일독립군 출신 ▲청렴한 서민형 정치지도자 ▲용인술의 천재이자 의리의 정치지도자라는 등 세가지 ‘신화’를 하나씩 벗겨냈다.조교수는 오히려 세간의평가와는 정반대의 ‘사실’을 내세워 ‘신화의 허구’를역사의 진실 앞에 드러내 보였다.독립군이기는 커녕 오히려 만주군 장교였으며,일본은 그에게 개인적 출세의 발판이자 정신적 고향이었다고 비판했다.또 박정희는 권력유지를 위해 각종 권력형 비리를 주도하였으며,말년에 향락과방종한 생활을 한 것은 물론 사상적 변절,인간적 배신으로 얼룩진 삶을 산 장본인이라고 혹평했다. 마지막으로 박정희시대의 부정적 유산 극복방안과 관련,주종환 동국대 명예교수는 “박정희시대는 총체적으로 외세에 대한 굴종과 종속,남북대립 극대화·분단고착화로 규정할 수 있다”며 “민족·민주·민중진영의 대연합과 올바른 민주철학 확립만이 이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주장했다. 정운현기자 jwh59@
  • 백범 김구 영문편지 첫 공개

    백범 김구 선생이 해방 이듬해 미국과의 통상관계 수립을위해 한독당 관계자를 미국에 파견,당시 미 상무장관에게 보낸 편지(영문)가 새로 발견됐다.당시 임정세력과 미국 정부간에 정식 외교라인이 없었던 상황에서 백범이 미국정부 각료에게 통상 관련 서한을 보낸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1946년 8월 31일자로 작성된 이 편지는 발신지가 당시 한독당 본부가 자리잡은 운현궁으로 돼 있다.편지의 발신자는 한독당 위원장(Chairman Independence Party)인 백범,수신자는 미 상무장관 아브렐 해리먼(1891∼1986)이다.또 이 편지를가지고 미국으로 건너간 사람은 전경무(田耕武·1900∼1947)당시 재미한족국내파견대표단 외교위원이었다.백범은 편지에서 전씨를 워싱턴 주재 한독당 특별대표로 소개하고 전씨가미국정부에 한미 양국의 통상관계 수립을 요청할 것이라고밝히고 있다. 노경채 수원대(사학과) 교수는 “46년 2월 백범이 미군정자문기구인 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의 총리를 맞고 있어서 미국과 관계가 나쁘지 않았다”고 전제하고 “백범이 한독당위원장 자격으로 특사를 통해 미국측에 편지를 전달한 것은이승만과의 정치적 역학관계 등을 감안,미국과 독자적인 유대관계를 맺기위한 시도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편지 수신자인 해리먼은 제2차 세계대전과 전후의 냉전기간 동안 외교관으로서 미소간의 외교관계를 주도한 인물로 루스벨트 대통령시절 소련대사,영국대사를 지냈으며 케네디 대통령시절 국동문제담당 국무차관을 지낸 인물이다. 한편 이 편지는 재미사학자 안형주씨(安炯柱·65)가 미국 LA에 거주하는 전씨의 사촌여동생으로부터 입수한 것으로,편지 하단에는 백범의 한문 서명,낙관과 함께 ‘K.Kim’이라는 영문서명이 부기된 점이 이채롭다.백범의 비서를 지낸 선우진 백범기념사업회 상임감사는 “미군정초기 백범이 미국정부 각료에게 편지를 보낸 경우는 희귀한 사례”라고 말했다. 정운현기자 jwh59@. * 백범편지 전달 전경무씨는. 백범의 편지를 휴대하고 미국으로 건너간 전경무씨는 1906년 사탕농장 노동자로 하와이로 건너간 재미한인 이민1세대의 후손이다.미 본토로 건너가 미국인에게 입양돼 미시건대를 졸업한 전씨는 임시정부 후원단체에서 외교·선전활동을 벌였다.1941년 재미한인들의 통합단체인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의사부 위원으로 선임되었으며,1944년 임정에서 새로 구성한 주미외교위원부의 외교위원장 비서로 활동하였다. 해방후 올림픽대책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선임된 그는 한국올림픽위원회의 IOC가입을 위해 다양한 외교활동을 전개했다.1947년 5월 스톡홀름에서 열리는 IOC총회 한국대표로 참석차미 군용기를 타고가던 그는 일본 후지산 부근에서 비행기 추락사고로 타계했다. 지난 95년 정부는 뒤늦게 그의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건국훈장 애국장(4등급)를 추서했다.그의 묘소는 서울 도봉구 우이동에 있었는데 돌보는 이가 없어 도시개발 과정에서 유실된것으로 알려졌다.
  • [김삼웅 칼럼] 미국과 사대언론의 인식전환을

    국가에도 시운(時運)이 따르는가. 우리는 가끔 좋은 기회를 놓치면서 좌절과 패배를 신념처럼 안고 살아간다. 1945년해방공간은 한국 현대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시기였다. 일제질곡에서 해방된 겨레는 새나라 건설의 희망에 부풀었다. 우익도 좌익도, 빈부격차도, 지역갈등도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애국자와 친일파의 간극이 있었을 뿐이다. 우리는 그 좋은 기회를 놓쳤다. 지도자들이 국제정세를 내다보는 안목과통찰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해방공간의 훼방꾼은 느닷없이불거진 신탁통치문제였다. 1945년 12월27일 전후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모스크바에 모인 미·영·소 외상은 한국문제 4개항에 합의했다. ①임시 조선민주주의 정부를 수립한다. ②조선 임시정부 구성을 원조할 목적으로 미·소공동위원회를 설치한다. ③한국 임시정부 수립을 돕기 위해 미·소·영·중의 4개국이 공동관리하는 최고 5년 기한의 신탁통치를 실시한다. ④2주일 이내에 조선에 주둔하는 미·소 양군 사령부 대표로 회의를 소집한다. 그런데 이 합의문 전문(全文)이 아닌 신탁통치 문제만 국내에 전해지면서 국민의 반발은 마치 벌집을 쑤셔 놓은 듯했다. 즉각독립을 기대했던 국민에게 신탁통치란 상상하기 어려운, 마른 하늘의 날벼락이었다. 신탁통치 문제를 둘러싸고 풀리지 않는 하나의 미스터리가있다. 45년 12월27일 동아일보는 1면 머리기사에서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미국은 즉시 독립 주장’이란 제목의 보도를 했다. 이 기사는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3개국 외상회담을 계기로 조선독립문제가 표면화하지 않는가 하는 관측이 농후해가고 있다. 즉 번즈 미국무장관은 출발 당시에 소련의 신탁통치안에 반대하여 즉시 독립을 주장하도록 훈령을 받았다고 하는데, 3국간에 어떤 협정이 있었는지는 불명하나 미국의 태도는 카이로선언에 의해 조선은 국민투표로써 그 정부 형태를 결정할 것을 약속한 점에 있는데, 소련은 남북 양지역을일괄한 한국신탁통치를 주장하여 38선에 의한 분할이 계속되는 한 국민투표는 불가능하다고 하고 있다”면서 ‘소련의구실은 38선 분할점령’이라는 큰 제목을 달아 보도했다. 이 보도를 근거로 이승만과 한민당, 김구와 임정세력은 신탁통치를 주장한 장본인이 소련이라 주장하면서 격렬한 반탁운동을 전개했다. 모스크바 3상회담이 진행중인 시점에서 반탁운동에 불을 지른 이 기사는 3상회담의 내용을 신탁통치안으로 국한시켜 보도하면서, 미국은 즉시독립을 주장하고 소련은 신탁통치를 주장한 것으로 왜곡한 것이다. 이 기사의 배경에는 당시 언론을 통제하던 미군정의 단순실수인지, 아니면 반소·반탁감정을 형성하기 위한 모종의 국제음모가 개입된 것인지는 아직도 미스터리다. 문제는 국가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시기에 잘못된 기사 하나가 역사의 물굽이를 바꿨다는 사실이다. 6·15선언 이후 현시점은 해방공간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남북이 적대와 대결을 접고 화해와 통일국가의 기초를 닦는절호의 기회인 것이다. 그런데 미국 부시대통령의 대북강경정책으로 한반도정세가 흔들리고 있다. 여기에 남북화해를못마땅하게 여기는 수구세력과 사대언론이 부화뇌동하면서포용정책이 위협을 받고 있다. 다행히 페르손 스웨덴총리를통해 북한이 2003년까지미사일 발사를 유예하고 남북공동선언을 이행할 것임이 확인됐다. 이제 부시 미국정부와 한국의 사대언론이 변할 차례다. 한국과 미국은 혈맹관계이다. 우리도 미국의 은혜를 입었지만 미국도 우리에게 빚을 졌다. 분단과 신탁통치문제는 묻어두고라도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일본의 작용으로) 한국을 전승국에서 제외시킨 것은 씻을 수 없는 과오이고 빚이다. 우리 임시정부가 대일 선전포고를 하면서 일제와 싸웠는데 한국을 제외시킴으로써 배상금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거듭된 망언과 역사교과서 왜곡의 수모를 겪게 되었다. 이런 사실을 안다면 미국은 남북화해에 협력해야 한다. 언론도 민족적 양심에서 남북문제를 보도해야 한다. 내일(9일) 한국을 방문하는 리처드 아미티지 미국무부 부장관 일행은 한반도와 동북아 평화를 위해서는 대북 포용정책이외의 대안이 없다는 것을 새롭게 인식하기 바란다. 그것이 미국의 이익에도 부합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김삼웅 주필 kimsu@
  • 국가보훈처, 美 첩보전략국 ‘냅코작전’자료집 출간

    일제말 미 첩보전략국(OSS)의 한반도 침투계획인 ‘냅코작전(Napko Project)’ 관련자료가 집대성돼 출간됐다. 국가보훈처는 최근 미국에서 새로 입수된 자료 등을 모아‘해외의 한국독립운동사료’시리즈 제24권으로 발행했다. 대모험을 꾀한다는 ‘nap’과 ‘Korea’를 합쳐 만든 용어로 보이는 ‘냅코작전’은 1944∼45년 당시 미국의 특수공작기관인 OSS가 잠수함과 낙하산으로 한반도에 특수요원을 침투시켜 정보수집,거점확보,태업 등의 활동을 벌이려했던 작전이다. 이는 중국에서 광복군과 협동해서 추진했던 ‘독수리작전’과 함께 OSS의 가장 대표적인 대일 특수작전으로 불리고 있다.이 작전은 미국이 태평양전쟁을 조속히 끝내기 위하여 추진한 것으로,재미한인들이 출기차게 요구한 한인 게릴라부대 창설요구와 그에 따른 특수부대 운용경험과 항일운동에 몸바치려는 미주지역의 애국동포들이 존재했기에가능한 것이었다. 재미한인들은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 발발직후 중국 중경의 임시정부 산하 광복군과 결합하거나 아니면 재미한인만으로 독립적인 한인부대 또는 게릴라부대를 창설,대일특수전·정규전에 자신들을 투입시켜 달라고 미군당국에 끊임없이 요청했다.당시 미국은 CIA의 전신인 COI(정보조정국,1941년7월 창설)를 통해 중국에서 대일정보를 수집하는 계획을 추진했는데 이 과정에서 이승만(李承晩)을 통해한인들과 연결고리가 만들어졌다. 한편 냅코작전은 1944년 중반 이후 장석윤(張錫潤·97·전 내무장관·경기 일산)이 위스콘신주 맥코이 포로수용소에 들어가 한인공작원의 명단을 확보하고 대강의 계획을수립하면서 본격화됐다.이 작전에는 장석윤·유일한(柳一韓·유한양행 설립자) 등 재미한인 10명,김현일 등 한인포로 6명,박순동(朴順東) 등 학도병 출신 3명 등 총19명의한인요원들이 참가하였다.이번 자료집에는 학도병 출신 3인이 버마에서 일본군을 탈출,이 작전에 참가하는 과정을보여주는 자료들이 처음으로 공개됐다. 냅코작전에 참가한 한인들을 연령별로 보면 20대 3명,30대 8명,40대 6명,50대 2명 등이며,이들은 안정된 삶을 추구할 수 있음에도 위험한 임무에 자원했다.특히 재미한인출신 변일서(邊日曙)의 경우 대일전 참전을 위해 합의이혼을 했으며,이근성(李根成)은 공작원으로 침투하기 위해 미간의 사마귀 제거 성형수술을 받기도 했다.이들은 샌프란시스코 연안의 한 섬에서 3∼4개월간 유격훈련·무선훈련·폭파훈련 등은 물론 침투용 잠수정을 제작,가상훈련까지 마친 상태였다.그러나 아깝게도 일제의 패망으로 이들의한반도침투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자료집의 해제를 쓴 정병준(鄭秉峻)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는 “이들이 실제 전쟁에서 미친 영향은 미미했으나,태평양전쟁 말기 재미한인들의 독립운동사에 찬란히 빛날 공적을 남겼다”고 평가했다.이들의 항일투쟁활동은 재미사학자 방선주(方善柱) 박사의 자료발굴로 90년대 들어 세상에 처음 알려졌다.이들 가운데 독립유공 포상을 받은 사람은 유일한 등 5명에 불과하다. 정운현기자 jwh59@. * 냅코작전 참여 장석윤은. ‘냅코작전’의 핵심인물로 현재 유일한 생존자인 장석윤(張錫潤·97·경기도 고양시 거주)전내무장관은 “원폭투하로 일본이 항복하면서 한반도침투계획이 수포로돌아갔다”고 아직도 아쉬워했다. 1904년 강원도 횡성 출생인 장씨는 1923년 도미,밴더빌트대에서 수학·지질학을 전공한 뒤 LA한인사회 등에서 활동했다. 1942년 5월 미 육군에 입대하여 미군 첩보전략국(OSS) 1기생으로 졸업한 장씨는 1944년 7월까지 중국,버마,인도전구(戰區)에서 이승만 박사와 중경 임시정부,미군 사이의 연락관을 지냈다. 이후 OSS가 추진한 ‘냅코작전’에 참가하여 샌프란시스코에서 각종 특수훈련을 받았으며,나중엔 교관으로 근무했다. 해방후 귀국,미24군단 G2(정보처)에서 3년간 근무한 그는 이승만 정권 하에서 내무부 치안국장,내무부장관을 거쳐3·4대 민의원을 역임했다.그와 함께 ‘냅코작전’에 참가했던 인사 가운데 유한양행 창업자 유일한(작고)은 지난 95년 건국훈장 독립장(3등급)을 받았으나 그는 아직 미포상 상태다. 그는 “국민의 한사람으로서 마땅히 해야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97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허리가 조금 불편한 것 이외에는 건강도 좋은 편이다. 슬하에 딸만 넷을두었는데 심상필 홍익대 총장이 둘째,박태규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가 세째사위다. 정운현기자
  • [씨줄날줄] 기록문화

    선사시대 이후 인류 역사는 기록의 역사다.기록을 잘 남긴 역사는 후세에 가르침을 준다.역사는 기록 때문에 두려운 것이며 역사 앞에 설 때 누구든 경건해지는 것이다. 작년 3월에 설립된 국내 유일의 서울 명지대학교 ‘기록과학대학원’은 ‘기록 후진국’인 우리나라의 기록문화에대한 인식 제고와 정착을 위해 본격적인 채비를 하고 있다.최근 제2대 대학원장으로 취임한 박희종(朴熙宗)교수는 올봄 3학기를 맞아 50명의 재학생을 ‘현대판 사관(史官)’으로 육성하겠다고 다짐하고 있다.현재의 특수대학원 지위를 앞으로 전문대학원으로 확충·전환하는 한편 기록 작성·관리·열람·전시를 망라하는 전문적인 ‘기록 관리인’을 양성하는 기관으로 우뚝 서겠다는 것이다. 사단법인 한국국가기록연구원도 작년에 이어 오는 6월25일부터 8월까지 충북 청주 고인쇄박물관에서 제2회 한국시민기록문화전을 개최한다.이번 문화전은 역시 청주에서 개최되는 제5회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 자문회의(6월27∼29일)를 기념해 열리게 되며 주제는 ‘삶,사랑 그리고기록’으로 정했다고 한다.일반 시민들의 가족·친구·이웃에 대한 사랑이나 일에 대한 열정을 담은 ‘소중한 개인기록’을 공모해 전시하게 된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기록문화가 뒤떨어져 있다.피비린내 나는 조선시대의 사화(士禍) 때문에 어떤 가문에서는 기록을 남기지 말라는 유언을 후손들에게 했다고도 한다.그래서 그런지 대한민국의 현대사에서도 민감한 현안이 걸린 회의일수록 기록 없이 회의를 진행하는 경우가 많았다.이승만 대통령 시대의 외교문서는 거의가 대통령의 사신(私信)으로 처리되다시피 했고 이 때문에 당시 대외 교섭기록의 상당부문은 멸실되고 말았다.박정희 대통령 시대의 안가(安家)정치도 관계자 증언 이외는 기록으로 남겨지지 않았다. 조선시대의 정사를 기록하는 사관들은 임금의 기침소리까지 다 적었으며 이들이 기록한 사초(史草)는 임금이라 할지라도 열람할 수 없을 정도로 엄격히 다루었다.개인이든나라든 기록을 소중히 여기고 이 기록을 통해 역사를 축적하고 전진시켜 나가야 한다.특히 공직자로서 국사에 종사했던 사람들은 공직경험을 회고록 형태든,참회록 형태든관계없이 기록으로 남겨 우리 사회가 함께 공유하도록 하는 기록문화를 키워 나가야 한다. 이경형 수석논설위원 khlee@
  • “”현대사를 이끈 사람들 디지털로 되살렸죠””

    “교육적 가치가 높은,국내 최대의 동영상 인물사이트를 구축하겠습니다” 현대사를 장식한 주요 인물들의 친필 휘호(붓글씨)와 육필·육성을 한자리에 모은 인물정보 사이트(www.docuyoo.co.kr)가 생겼다. 지난 30년간 다큐멘터리 전문 프로듀서(PD)로 활동해온 류호석(柳豪錫·63) 유프로덕션 대표가 그동안 모은 인물 다큐멘터리 자료를 바탕으로 200여명의 친필 휘호와 육성 등을 온라인으로 옮긴 것. 유 대표는 “다큐멘터리를 만들면서 저명인사들에 대한 자료가 많이 부족하다는 것을 느꼈다”면서 “교육적인 가치가 있는 인물자료들을 모아 인터넷이란 매체를 통해 제공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류 대표는 초대 이승만(李承晩) 대통령부터 현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에 이르는 역대 대통령을 비롯,정치분야 백낙준(白樂濬) 유진오(兪鎭午),사회 함석헌(咸錫憲),문학 서정주(徐廷柱) 김동리(金東里),교육 이병도(李丙燾) 허웅(許雄),미술 김은호(金殷鎬) 허백련(許百鍊),영화 유현목(兪賢穆),종교 김수환(金壽煥) 월하(月下) 등 현대사에 굵은 획을 그은인사들의 휘호를 디지털화해 제공한다.그는 “처음엔 100명의 휘호로 시작했지만 주변 분들의 도움으로 50여명을 더 모았다”면서 “휘호들의 뜻을 알려달라는 요청이 많아 교육적 의미를 담은 뜻풀이 작업도 거의 마친 상태”라고 말했다. 휘호 이외에도 70여명의 육필과 40여명의 동영상 자료들이함께 제공된다.류 대표는 “올해말까지 100여명의 동영상 자료를 구축하는 등 국내 최대의 온라인 멀티미디어 인물자료관으로 발전시킬 계획”이라고 말했다. 그는 “온라인 뿐아니라 오프라인에서도 현대사의 인물들에 대한 자료를 한자리에 모아 선보일 수 있는 자료실을 만드는 것이 꿈”이라고 말했다. 김미경기자 chaplin7@
  • 이승만·이기붕일가 재산 지금돈으로 93억

    ‘4·19혁명’에 의해 무너진 자유당 정권의 이승만(李承晩) 전 대통령과 이기붕(李起鵬) 일가가 보유하고 있던 재산이 요즘 가치로 93억원 정도였던 것으로 드러났다. 정보공개 청구에 의해 정부기록보존소(소장 조기현)가 18일 공개한 ‘특정조사위원회 관계철’에 따르면 4 ·19혁명3개월 후인 7월 허정(許政) 과도내각은 국민들의 과거 청산요구에 부응,특정재산조사위원회를 구성해 이승만·이기붕일가의 국내외 재산에 대해 광범위한 조사를 벌였다. A4용지 436쪽 분량에 달하는 자료에 따르면 이 전대통령의재산은 15억환,이기붕 가족의 재산은 5억환 정도였다.이 둘의 재산 총액(20억환)은 서울시의 소비자물가 변동(46.4배)을 감안할 때 지금 돈으로 92억8,000만원(1원은 10환)에 이르는 것이다. 이 전대통령 재산으로는 서울 종로구 사저인 이화장(梨花莊)과 한일은행에 예치된 예금 625만4,953환(2,900만원 상당)이 있었으며 당시 이화장에서는 골동품과 미술품 100여점이 확인됐다.또 이기붕 가족의 재산에는 서대문구 충정로에 있던 저택과 예금액 6억7,000만환(31억900만원 상당) 등이 있었다. 이들의 재산은 대부분 국가에 환수되지 않은 채상속인이나 연고자에게 양도된 것으로 나타났다. 대전 이천열기자 sky@
  • [사설] 일제 만행 특별법 제정해야

    ‘나라와 문화를 생각하는 의원 모임’소속 여야 국회의원 12명과,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민족문제연구소 등 시민·학술단체들이 힘을 합쳐 ‘일제하 강제동원 피해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제정을 추진하고 있다.오는 6월 입법을목표로 의원 서명을 받는 이 특별법안은, 일제가 군인·군속·노무자·일본군 위안부 등을 강제동원한 진상을 파악하는 것을 골자로 삼고 피해자 위령사업,피해자·유족 지원 등도 담겠다고 한다. 우리는 특별법 제정을 환영한다.또 이를 추진하는 국회의원·단체들에게 성원의 박수를 보낸다.개인을 상대로 한범죄가 발생해도 그 과정과 피해 규모를 밝히는 것은 가장기초적인 일이다. 하물며 나라를 빼앗겨 전 국민적으로 당한 피해를 광복 50년이 넘도록 실태조차 제대로 파악하지못한 현실은 정말 부끄러운 일이다.비록 역대 정부가 해결하지 못한 것이긴 하나 이제라도 꼭 풀어야 한다.더욱이지금은 일본의 역사왜곡이 초미의 현안이 된 시점이다.상대방에게 역사를 왜곡한다고 질타하면서 우리가 그 실상을정확히 모른다는 사실 자체가 말이 안된다. 특별법 제정 과정에서 경계해야 할 점은 ‘실효성 없는과거 들추기’등등의 궤변을 앞세워 이를 반대하는 세력의준동이다. 그 세력에게는 엄중히 경고한다.일제강점기에우리 민족이 당한 피해를 조사하는 일에,어떤 이유를 내세워서라도 반대하는 것은 반민족적인 행위로 결코 용서할수 없다. 광복 후 첫 정부인 이승만정권 때 친일파 청산을 위해 ‘반민특위’를 결성한 바 있다.그러나 친일세력의 농간으로흐지부지돼, 결국 반세기가 지나도록 친일 문제를 청산하지 못한 아픈 역사를 갖고 있다.이번 특별법 제정에는 여야 정치인은 물론이고 언론인·학자·일반국민 등 모두가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노력해야 한다.그래서 제정 과정을면밀히 지켜보아 또다시 친일 잔존·계승세력이 조직적으로 방해하지 못하도록 철저히 감시해야 한다.
  • 한국사 왜곡 백태/ (하)유럽·美洲

    유럽과 미주 등에서는 우리나라의 역사를 거의 다루지 않고 있다. 다뤘다 해도 분량은 극히 미미하다.문제는 적은 기술임에도 불구,일본 교과서의 영향으로 ‘식민사관’이나 과거의통계자료를 인용, 잘못 서술되고 있다는 것이다.심지어 단일민족을 다인종 국가로 분류하고 최근 별세한 정주영 전현대 명예회장을 94년에 사망한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 영국을 비롯,유럽 6개국과 캐나다 등 7개국의 교과서에나오는 우리 역사와 관련된 내용을 간추린다. ■오스트리아 통계의 오기와 함께 부정적인 면이 부각됐다. 지리교과서에 나오는 4,000개 이상의 섬은 3,600여개의섬,‘여름에는 남풍과 북동풍이 불고’는 남서계절풍 또는남동계절풍으로,겨울에는 ‘냉풍이 반도에 분다’는 차가운 북서계절풍으로 고쳐야 한다. 한국의 공업발전은 높은 노동생산성과 긴 노동시간,낮은임금의 도움을 받았다고 설명했다.1주일에서 6일동안 50∼60시간을 노동하고,중소기업이나 가족 기업에서는 약 70시간 노동한다.대기업에서 노동자의 임금은 시간당 2.6달러이다.여성의 임금은 이것의 절반도 안된다고 덧붙였다. ■캐나다 일본의 식민사관을 토대로 기술하고 있다.‘동남아시아(95년판)’의 269∼282쪽에서는 ‘수백년 동안 중국의 속국’이라고 왜곡했다.또 ‘일본은 한국 땅에서 커다란 발전을 이룩했다.철도·도로·항구를 건설했으며 산업을 발달시켰고 교육의 기회를 확대시키려 노력했다’고 서술,한국이 식민지화를 통해 근대화되었다는 ‘식민지 근대화론’을 펴고 있다. 96년판 10학년용 교과서의경우,‘남한은 유엔 평화유지군에 의해 독립을 되찾았다.유엔협상으로 종전되었으나…(397쪽)’로 기록했다.한국전쟁 동안 주권을 잃은 적이 없을뿐더러 ‘종전’은 휴전이나 정전으로 바꿔야 한다. ■영국 근현대사 중심의 토막 정보수준이다.한국은 경제성장국보다 냉전시대 전쟁 당사국으로 더 많이 다루고 있다.‘노동·고용·발전(94년판)’에는 동해를 일본해로(147쪽),‘정주영씨는 현재 사망했다.동생 정세영씨가 현대의새로운 회장이다.(원문 152쪽)’고 잘못 기록했다. ■프랑스 역사 영역에서는 일본의 한국침략,분단,한국전쟁 정도만 간단히 소개하고 있다.93년판 고 2학년 역사 교과서에서 ‘일본은 1931년부터 한국,대만,만주를…합병하였다(56쪽)’라는 내용은 ‘일본은 1895년 청일전쟁 직후 중국으로부터 대만을 할양받았고,1910년에는 한국을 강제로점령했고,만주는 1931년 무력으로 점령했다’는 내용의 잘못된 기록이다. 89년판 지리교재에서는 북한 주민의 잦은 귀순과 관련,‘한국과 홍콩은 최근에 수백만 정치망명자들의 혜택을 입었다(43쪽)’고 사실관계를 왜곡했다. ■독일 한국 관련은 세계사와 연계해 약간 다루고 있다.특히 과거 군사정권에 의해 이뤄진 비민주적 군사독재의 인식을 바탕에 깔고 있다. ‘과거로의 여행(94년판)’에서는 ‘1905년부터 이 나라(한국)는 일본의 지배하에 있었다’(207쪽)고 기술했다.1905년은 일본에 외교권을 빼앗긴 해이므로 1910년으로 수정해야 한다. ‘시간과 인간(95년판)’의 175쪽의 ‘국회는 이승만을국가원수로 선출했고 대한민국임을 공포했다.3개월후 북한은 자국을 조선인민공화국으로 명명했다’는 내용 중 3개월 후는 ‘한달도 안돼’,즉 1948년 9월9일로 바꿔야 한다. ■스페인 한국 관련 내용은 책 1권당 평균 1쪽도 안된다. 하지만 종속적 성격을 부각시킨 경향이 짙다. 에스파냐 4권에는 ‘한국의 인종은 중국-몽골,문자는 중국문자,종교는 불교(116쪽)’로 왜곡했다.인종·문자·종교 등 모든 내용이 사실과 다르다.또 ‘기나긴 역사를 통해 중국 러시아와 일본의 지배를 받았다’는 내용은 ‘여러번 외침을’이라고 수정해야 옳다.일본으로부터 한국의독립연도도 1948년으로 잘못 표기했다. ■네덜란드 한국전쟁만을 주로 다뤘다.다른 국가와 같이조선왕조를 이씨왕조로 표기했다. 박홍기 이순녀기자 hkpark@. *해방 이후 역대 대통령에 대한 평가 오류. 해방 이후 역대 대통령에 대한 평가 및 객관적 사실관계도 곳곳에서 오류가 나타난다. 이승만(李承晩) 초대 대통령은 군부와 전혀 관계가 없는데도 ‘8·15 해방 이후 남한은 군부지도자를 최고통치자로 하는 체제를 채택했는데….(태국,고교 3학년1학기 사회,147쪽)’라고 기술돼 있다.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은 일본어를 유창하게 구사했으며일본에서 훈련받은 군사교육의 많은 영향을 받고 있었다. 당시 남한의 지배계급이 정치·경제적인 정보를 얻은 수단은 일본 신문과 잡지들이었다.일본 식민권력에 협력했던점에 대해서는 어떠한 청산작업이나 조사도 이뤄지지 않았다.(러시아 교과서) 또 박 대통령 때 코리아게이트 스캔들과 관련,대통령의형제인 박동선과 한국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20여명의 미국상원의원과 몇몇 하원의원에게 100만달러를 뇌물로 주었다는 점이 적발됐다.(필리핀,아시아의 역사와 문명,98년판)그러나 박동선씨와 박 대통령은 혈연적으로 아무 관계가없다.따라서 대통령이 신임하는 박동선으로 바꿔야 마땅하다. 또 이 교과서에는 전두환(全斗煥) 대통령에 대해 ‘미국과 미얀마를 늘상 여행한 남한의 대통령이었다’고 기술했는데,이는 삭제하는 게 바람직하다.전 대통령과 관련,‘1983년 북한은 그가 양곤을 여행하고 있을 때 암살하려 했다’고 기록했다. 필리핀의 교과서 ‘아시아 국가들의 역사(98년판)’에서는 ‘군부독재 하의 남한’이라는소제목 아래 ‘1961년부터 1993년까지 남한은 다음과 같은 군부 독재자가 통치했다.박정희장군→최규하→전두환→노태우’로 기술했다.최규하 전 대통령을 장군으로 분류한 것이다.게다가 ‘1979년 10월26일 박정희 장군은 자신의 정보부장에 의해 암살되었다.그의 군사적 리더십은 온건파였던 또다른 세명의장군이 계승했다’라고도 서술했다. 박홍기기자
  • 한국사 왜곡 백태/ (상)아시아 7개국 경우

    한국교육개발원이 세계 14개국의 교과서를 정밀 분석한결과 한국 역사에 대한 왜곡 및 잘못 게재 정도가 심각한것으로 드러났다.조사에 포함되지 않은 나라들도 비슷할것으로 생각된다.교육개발원이 조사한 국가들을 아시아와유럽으로 나눠 우리 역사 왜곡사례를 시리즈로 살펴본다. ■중국 초·중 ‘중국역사’‘세계역사’교과서 모두 한국최초의 고대국가인 고조선은 전혀 언급하지 않은 채 마치최초의 국가가 고구려인 양 서술하고 있다. 상해판 등의‘역사’교과서는 공통적으로 ‘발해는 독립된 국가가 아닌 당왕조 내 하나의 지방정권’으로 규정했다.고급 중학교 ‘세계 근대현대사’,상해판 ‘역사’교과서는 3·1운동의 발발 요인을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아닌 ‘고종의독살설’이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처럼 왜곡했다. 한국전쟁에 대한 평가도 4개 출판사 ‘중국역사’교과서가 대체로 ‘항미원조전쟁은 승리를 거두었다’라고 주관적으로 적었다.‘중국역사’ 제4권 초급중학과본의 경우,한국전쟁이 북침에 의해 발생한 것처럼 서술했다. ‘세계역사’제1권 초급중학과본(98년판)에서는 ‘조선인민은 옛날부터 조선반도에 살고 있었다.기원전후 시기에걸쳐 조선반도 북부지역을 통치했던 것은 고구려 노예제국가이다(56쪽)’고 서술,중국 동북지방의 광대한 영토를차지했던 고구려를 언급하면서 조선반도 안의 작은 나라인것처럼 왜곡했다. 고구려를 조선반도 북부지역의 국가로 축소시킨 점은 상해판 초·중 ‘역사’,사천판 초·중 ‘세계역사’ 교과서도 마찬가지다.‘세계역사’에서는 또 ‘많은 학자들은 조선어를 연구하여 중국어와 결합시키면서 28개의 자모를 제정했다. (59쪽)’고 기술,세종대왕의 과학적·독창적인 한글 창제를 왜곡했다. ■태국 고교 3학년1학기 사회 교과서(98년판)에는 ‘일본은 불교·서예·젓가락 사용법·한자 등 중국의 문화를 한국을 경유해 받아들였다.(131쪽)’고 기술했다.한국은 단지 중국의 문화를 일본에 전파하는 교량 역할만 했다는 일본 식민사관의 영향을 보여주는 부분이다.또 군부와는 관계없는 이승만 대통령을 ‘8·15 해방 이후 남한은 군부지도자를 최고 통치자로하는 체제를 채택했다(147쪽)’고기록했다. 교육부 학술과가 펴낸 중 2학년용 사회과 교재에서는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한반도가 남한과 북한의 두나라로분리된 사건은 1953년 7월27일 일어났다’고 한 내용 중 38도선은 45년 8월15일 직후이며 53년 7월27일은 남북정전협정이 체결된 날을 잘못 서술한 것이다. ■필리핀 아시아의 역사(98년판)에서는 일본의 식민사관인임나일본부설을 그대로 인용, ‘신라의 금관에서 볼 수 있는 곡선 모양의 보석들은 일본 제국 상징의 흔적이었다(60쪽)’‘야마토 정권의 천왕은 정복자로서 한국에 왔었으며일본의 통치는 668년 한반도가 권력조직을 확립하기까지지속되었다(65쪽)’고 기술하고 있다. 특히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합리화하는 의도를 고스란히담기도 했다.‘일본은 자유로운 새 질서를 수립함으로써위에 언급한 나라들에 평화와 안전을 가져다주려 했다.(276쪽)’‘진보와 아시아 대륙 및 전세계에 대한 강력한 지도력의 또다른 단계를 위한 최초의 발걸음일 뿐이다(281쪽)’ 등이 예이다.심지어 ‘이홍장은 1885년 이토 히로부미와의 협정 이후 한국을 근대화시키기 위해 노력했다(302쪽)’는 등의 내용을 통해 조선이 중국의 식민지였던 듯이설명했다. 단일 민족인 우리나라에 대해 ‘북한의 주민들은 몽골혈통이기 때문에 키가 크고 건강하며 혈색이 창백하다.반면에 남한 주민들은 혼혈이며 키가 작고 혈색이 나쁘지 않다’는 엉뚱한 내용도 있다.북한은 몽골인종,남한은 남방계통으로 분류한 것이다. ■인도네시아 중학교 역사 교과서(95년판)에서는 ‘1894년일본은 중국을 침공했다. 중국은 일본에 쉽게 항복했는데그 결과 중국은 대만과 코리아를 일본측에 넘겨줘야 했다’며 한국을 중국의 속국으로 기록했다.고교 역사 1학년의경우, ‘당나라 (618∼907년)는 또한 한국·일본을 지배했다’는 내용도 들어 있다. ■러시아 동해는 한결같이 일본해로 기록하고 있다.우리나라를 극동의 신흥공업국이라고 할 정도로 단편적인 기술에머물렀다. 현대사 부분에는 ‘값싼 노동력은 국내·국제무대에서 남한 기업경영의 성공의 중요한 전제조건이었다. 전세계에서 가장 긴 노동시간, 집회 결사 및 단체협약 그리고 파업에 대한 노동자들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은 정부의 가혹한 반노동정책 등이 그 이유였다’는 등 부정적으로 썼다. ■말레이시아 중 3학년 지리 84쪽에서는 서울을 동해쪽으로 치우쳐 표기하고 있다.또 ‘일본·중국·한국·태국·인도네시아·필리핀 등 화산활동이 일어나는 지역에서는지열자원이 생산되고 있다’며 화산지역으로 분류했다. ■인도 한국 중심으로 쓰여진 내용이 적다.‘세계 역사의조망’(옥스퍼드대학 출판·95년판)은 1875년 운요호사건과 관련,‘한국은 오랫동안 중국의 속국이었다.한국은 중국에 원조를 요청했다’고 기록했다.민비시해사건과 관련,‘왕비를 제거하고 하옥했다.’라고 왜곡했다. 박홍기 이순녀 전영우기자 hkpark@. * 세계사속의 동해. 현재 국제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대부분의 세계 지도책에는 ‘동해’ 명칭이 ‘일본해’로 표기되어 있다.많은 국가의 지도책·교과서에 아직도 ‘동해’를 ‘일본해’로적고 있는 것을 시정하지 못하고 있는 정부의 무성의한 태도는 비난받아마땅하다. 일본은 1870년 이후 출간된 지도에서 예외없이 ‘일본해’로 적고 있다.일본 정부가 세계 각국의 교과서에 동해를일본해로 표기하도록 하기 위해 정책적으로 간여했다는 의구심이 일고 있다. 그러나 일본도 18세기 전후 발간된 권위있는 지도 중 많은 지도에서는 동해를 조선해로 표기했다.1810년 ‘신정(新訂)만국전도’,1838년 만국전도,1850년 지학정종도(地學正宗圖),1855년 지구만국전도,1870년 명치개정만국여지분도 등의 지도에서도 동해를 조선해로 썼다. 우리나라는 기원 전 59년 이래 문헌상에서 일본과 사이의바다를 동해로 불러왔다.광개토왕비(411년)를 비롯, 삼국사기(1145년)와 삼국유사(1284년)에서도 수없이 동해의 기록를 찾을 수 있다.현존하는 고지도인 신증동국여지승람의팔도총도에도 동해라고 명백히 적혀있다. 중국의 경우, 요·송·금·원·명·청 등 916∼1912년의여러 시기에도 동해로 표기됐다.러시아의 지도에는 1678년(동양해),1725년(동해),1734년(동해)에 나온 지도에는 동양해 또는 동해로 적고 있다. 17∼18세기 유럽의 고지도에서도 마찬가지다.1615년 포르투갈에서 만든 지도,1674·1744·1752년의 영국 지도,1750년 파리에서 출간한 지도,1771년 대영백과사전 초판에도한국해(Sea of Corea)로 쓰였다. 박홍기기자
  • 초대 대법원장 김병로선생 평전 나왔다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을 지낸 가인(街人) 김병로(金炳魯·1888∼1964)선생의 평전이 민음사에서 출간됐다.저자는 정치학자로 ‘정치전기학’을 연작 형태로 내오고 있는 김학준 현동아일보 사장겸 발행인. 총 13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기본적으로 가인의 삶을 편년체로 서술하고 있다.제3∼7장에서는 가인이 경성전수학교교수로 있다가 32세 되던 해인 1920년 변호사로 전신해 조선공산당사건,김상옥의사사건 등 독립운동 사건을 변호한사실과 조선물산장려운동,조선민립대학 설립운동 및 신간회중앙집행위원장으로 활동한 사실 등을 사료로 적시하고 있다. 직업적으로 볼 때 법률가인 그의 삶은 해방후부터 본격적으로 꽃피기 시작한다.미 군정청 사법부장 및 법전 기초위원으로 신생 대한민국의 법률토대를 마련하였으며,1948년정부수립 후에는 초대 대법원장으로 임명돼 1957년 정년퇴임할 때까지 법전 편찬과 법원 조직 정비에 헌신하였다.특히 이듬해 반민특위가 결성되자 특별재판부 재판관장을 맡아 친일,반민족행위자 처단에 진력하였는데 이 일로 당시이승만 대통령과 불편한 관계를 갖기도 했다. 정년퇴임후 그는 ‘정치인 김병로’로 변신,인생의 후반부를 정치권 언저리에서 마감하였는데 그의 정치역정은 화려한 경력에도 불구하고 순탄치만은 않았다.제5대 민의원 선거에 고향인 전북 순창에서 출마한 그는 육군법무관 출신의후배 법조인인 홍영기 후보(전 국회부의장)에게 패배하기도했다.이 때 주변에서 그에게 홍후보 진영에서 불법선거운동을 했다며 선거무효및 당선무효소송을 내라고 권하자“선거는 한번 하지 두번 하나”라는 한마디로 거절하기도했다. 그는 민정당 대표 최고위원,국민의 당 대표 최고위원을 지냈으며,1963년에는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에 맞서 범야권 대통령후보 단일화에 앞장서기도 했다. ‘평전’은 가인 개인의 삶은 물론 그가 살았던 시기,즉우리 현대사의 정치상황과 당대 정치인들의 활동상을 엿볼수 있는 재미도 주고 있다. 정운현기자 jwh59@
  • 청와대 홈페이지 ‘역대 대통령’ 등장

    청와대 홈페이지(www.cwd.go.kr)의 ‘역대 대통령’ 코너가 새롭게 단장돼 18일 선을 보였다.‘역대 대통령’ 코너는 이승만(李承晩)·윤보선(尹潽善)·박정희(朴正熙)·최규하(崔圭夏)·전두환(全斗煥)·노태우(盧泰愚)·김영삼(金泳三)전대통령과 국빈선물 전시관,기념우표 전시관 등 모두 9개의 주메뉴로 구성돼 있다. 이 코너에는 역대 대통령의 주요 연설문,약력,연표,사진자료,육성녹음,동영상자료 등 다양한 자료가 수록돼 있다.아울러 역대 대통령의 취임사,신년사,6·25 전쟁중 부산으로옮겨간 국회 사진,박정희 전대통령의 빈소사진 등 희귀한자료들과 함께 정부조직법 공포 문서,베트남 파병결정 문서등 연대별 주요 관련 자료들도 실려 있다. 오풍연기자 poongynn@
  • 역대정부별 정무직 출신지

    정부 수립때부터 지난해 12월31일까지 모두 1,934명이 대통령,총리,장·차관,처·청장 등 정무직 공무원으로 역임했거나 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 중 출신지 비율은 이승만 정권의 편중률이 가장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노태우 정부,최규하·전두환 정부,김영삼 정부도 일부 지역에 치우진 인사를 한 것으로 조사됐다. 이어 윤보선·장면 정부,박정희 정부 1기(61∼72년),2기(72∼79년) 순이었다. 현 정권의 경우 비교적 출신지별로 골고루 분포돼 있는것으로 분석됐다. 또 재임기간이 길었던 박정희 정권때에도 정무직 공무원의 지역 안배가 꽤 잘된 편에 속한다. 하지만 이승만 전 대통령이 황해도 평산 출신인 점과 이정부때 오히려 경인지역 출신이 많이 등용된 점을 감안하면 연고지 중심의 편중 인사라고 하기는 어렵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해석이다. 현 정부의 경우는 아직 임기가 2년 정도 남아 있기 때문에 ‘가장 낮다’고는 할 수 없지만 조사시점을 기준으로지역 편중도가 낮은 것은 사실이다. 임용률은 전국을 경인(서울 포함)·영남·호남·충청·강원 등 5개 지역으로 나눠 볼 때 경인지역 출신이 가장 높고 이어 영남,충청,강원,호남 순이었다. 호남 출신의 경우 역대 모든 정부에서 다른 지역 출신에비해 임용률이 크게 떨어졌으나 현 정부에서는 평균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반면 영남 출신은 최규하·전두환 정부와 노태우 정부,김영삼 정부 당시 임용률이 급상승했고,현 정권 들어 낮아지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최여경기자 kid@
  • 고위공무원 출신지 영남 32%·호남 23%

    2000년 1월 현재 1∼5급 직업 공무원 1만5,000여명의 출신지별 현황은 영남이 4,858명(32.3%)으로 가장 많고,호남은 4,123명(27.5%)으로 나타났다.이어 충청 2,621명(17.5%),서울을 포함한 경인 2,586명(17.2%),강원 638명(4.2%),기타 193명(1.3%) 순이었다. 이중 1∼3급 고위 공무원 1,840명의 출신지 현황은 영남606명(32.9%),호남 439명(23.9%),경인 382명(20.8%),충청304명(16.5%),강원 67명(3.6%) 등이었다. 중앙인사위원회가 16일 발표한 역대 정권 공직 인사 분석결과에 따르면 이승만(李承晩)정권때부터 김영삼(金泳三)정권까지는 지역별 인구 대비 장·차관급 정무직 및 3급이상 고위직,그리고 5급 이상 직업 공무원 비율에 있어 영남 출신의 편중 인사와 호남 출신의 소외가 두드러졌으나국민의 정부 들어 호남 출신이 상당폭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정부는 인구 비례 등을 감안할 때 이제야 편중 인사가 어느 정도 해소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각 부처별 요직(공무원 선호직)의 지역별 점유율은 호남의 경우 전두환(全斗煥)정부 13.9%,노태우(盧泰愚)정부 10.0%,김영삼 정부 11.0% 등으로 인구수(1949년 당시 호남출신 인구비율 25.2%)에 비해 크게 낮았으나 현정부 들어27.3%으로 수직 상승했다. 이승만 정권에서부터 김영삼 정권에 이르기까지 정무직공무원 누적 재임기간 비율의 경우 영남은 17∼47%에 이르렀으나 호남은 4∼15%에 불과했다.그러나 현 정부 들어서는 호남이 25%로 상승한 반면 영남은 24%로 역대 정권에비해 크게 줄었다. 1∼3급 공무원의 출신 고교는 경기고 7.3%,경북고 4.6%,광주일고 3.9%,서울고 3.5%,전주고 3.1% 등의 순이었으며출신 대학별로는 서울대 31%,고려대 7.9%,육군사관학교 7%,연세대 6.4%였다. 한편 정부는 차관 인사때 장관과는 다른 지역 출신을 임명하는 방안을 고려하는 한편 주요 정책결정 직계라인에같은 지역·같은 학교 출신이 편중되지 않도록 운영할 방침이다.또 각 부처별로 선호 직위를 자체 선정,특정 지역출신의 선호 직위 점유비율이 모집단 비율을 현저히 초과하는 경우 기관장이 자율적으로 해소토록 촉구하고,부당한 인사 청탁을 하는 공무원에 대해선 명단을공개하고 인사상 불이익을 주는 등 인사 쇄신책을 시행할 방침이다. 홍성추기자 sch8@
  • 학살양민 추정 유골 수백구 발굴

    한국전쟁 당시 양민이 대량 학살된 것으로 추정되는 경북경산시 평산2동 폐 코발트광산에 대한 유골 발굴작업을 벌이고 있는 경산시민모임 양민학살 대책위원회(위원장 張明秀·44)는 11일 현장에서 유골 수백여구를 발굴했다. 대책위는 “코발트 광산 입구에서 100여m 지점에 가로막혀있던 두께 2m가량의 콘크리트를 폭약으로 발파하고 갱도를따라 80여m 들어가보니 유골 수백여구가 흩어져 있었고 일부는 총알이 박힌 것도 있었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발굴팀은 충북대 중원문화연구소와 연세대 법의학팀을 동원,발견된 유골을 수습하는 한편 이들의 사망시기와 사인 등을 정확히 규명하기 위해 감식작업을 벌이기로 했다. 시민대책위와 양민학살 피학살자 유족회(회장 柳閏巖·65)는 지난 9일 코발트 광산에 대한 본격적인 발굴작업에 착수했었다. 시민대책위 장 위원장은 “50년대 보도연맹 가입자와 대구교도소 재소자 등 대구 인근 주민 3,500여명이 군용트럭으로실려와 학살당했다”고 주장하고 “사실 확인작업과 함께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발굴작업을 시작했다”고 밝혔다. 또 그는 “지난 50년 7월 이승만 정권이 극동미사령관인 맥아더 장군에게 군사 작전권을 이양한 뒤 경산 양민학살이 이뤄진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이번 발굴작업에는 미군양민학살 진상규명 전민족특별위원회(위원장 李鍾隣·67)와 미국 ‘평화를 위한 재향군인회’소속 국제조사단 3명도 참관했다. 한편 이 광산에서는 지난해 1월 학살사건 이후 처음으로 입구에서 50여m 떨어진 지점에서 유골 40여점이 발견된 바 있다. 경산 황경근기자 kkhwang@
  • 황온순할머니, 자식 4명과 전쟁기념관 방문

    ‘전쟁 고아의 어머니’ 황온순(黃溫順·101) 할머니가 6일모처럼만의 나들이를 했다. 황 할머니는 이날 휠체어에 몸을 의지한 채 이강훈(61) 한국 안경협회 회장 등 자신의 손으로 기른 4명의 전쟁고아 출신 인사들과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 특별기획전시장을 찾았다. 만남은 전쟁기념관이 주선했다.전쟁의 참상과 전쟁고아들의아픔을 알리는 6·25 전쟁 당시의 보도사진 가운데 황 할머니의 사진도 포함돼 있으니 ‘한번 구경 오시라’고 요청한것이다. 황 할머니는 급히 연락이 닿은 이 회장과 신현성(58·전 청룡부대 주임상사)·황병진(53·장안사 스님)·곽해오씨(59)와 함께 동고동락하던 당시를 회고하면서 사진전을 돌아봤다.행사내내 말은 별로 없었지만 따뜻한 시선으로 애정을 표현하는 것 같았다. 아직도 한국보육원장,휘경학원 이사장직을 맡고 있는 황 할머니는 6·25당시 미 공군 리셀 브레이즈델 목사가 1,000여명의 전쟁고아를 서울에서 제주로 이송했을 때 이승만 대통령의 부탁에 따라 이들을 인계받아 직접 양육한 주인공. 브레이즈델 목사와는 지난 1월 26일 50년만에 재회했었다. 기념관에 걸린 한장의 사진속에는 두 사람이 만날 당시의 감격적인 순간도 담겨있었다. 노주석기자 j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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