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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신병원 수용 환자 8명 집단 탈출/7명 검거

    【부산=이기철 기자】 21일 하오 8시11분쯤 부산시 금정구 두구동 308 동래정신병원(원장 박재훈)에서 정문제(37),박명호씨(33)등 수용환자 8명이 병원직원 박용진씨(38) 등 2명에게 흉기를 휘둘러 상처를 입힌뒤 집단 탈출했다. 정씨 등 7명은 도주 50여분만인 하오 8시55분쯤 병원에서 1㎞ 떨어진 경남 양산군 동면 여락리 7번 국도 버스정류장에서 출동한 경찰에 의해 붙잡혔으나 박명호씨는 도망쳤다. 정씨 등은 입원실에 있다가 갑자기 직원 박씨 등에게 각목 등 흉기를 휘둘러 쓰러뜨린 뒤 이불천으로 손발을 묶고 열쇠를 빼앗아 탈출했다.
  • 민속연구가 심우성(이세기의 인물탐구:91)

    ◎남사당패 쫓아 풍물 놀고 탈 만들고…/현장 찾아 자료 채집·기록… “발로공부” 평가 받아/1인극 「쌍두아」는 인형에 혼을 담은 산무대로/「꼭두각시 놀음」·「발탈」 무형문화재 지정에 큰몫 심우성(민속연구가) 「나는 얼굴에 분칠을 하고/삼단같은 머리를 땋아내린 사나이/초립에 쾌자를 걸친 조라치들이/날라리를 부는 저녁이면/다홍치마를 두루고 나는 향단이가 된다./……산넘어 지나온 저 동리엔/은반지를 사주고 싶은/고운 처녀도 있었건만/다음 날이면 떠남을 짓는/처녀야!/나는 집씨의 피였다./내일은 또 어느 동리로 들어간다냐/ 시인 노천명은 옛유랑 예인집단의 기약없는 인생과 서글픈 족적을 이렇게 노래부르고 있다.몇년전 타계한 예용해씨는 「일수가 좋으면 공청에나 또는 주막집 기역자 판을 끼고 잘때도 있지만 인심이 사나운 마을에서는 처마끝에서 비를 피해야 할 때도 있다」고 남사당패의 일상을 그의 저서에 쓰고 있다. 그러나 누더기에 걸식행각으로 밥을 빌어먹을 망정(걸양) 그들은 「꼭두각시놀음(우희)으로 관중을 웃기고 울리는 소박한 신명에 겨워 살다가」 「어느 낯선 고장에서 길섶 아침이슬처럼」 사라져버린다고 했다. 판소리나 춤이나 연극을 하는 예인들의 대부분은 설날 명절 때 동네에 찾아든 유랑극단이나 광대패의 공연을 구경하다가 그들의 연희에 반해 길을 따라나서거나 부모의 대를 이어받는 수가 흔하다.인형극연희자인 심우성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그러나 그의 예능 기질은 누가 시킨 것도 권한 것도 아니며 집안의 내력을 이어받은 것은 더욱 아니다.단지 그의 마음속에서 끝없이 일고 있던 불가사의한 「끼」에 의해 뒤늦게 연희자로 돌아선 케이스다. ○머슴살던 노인에 영향 그는 언제부턴가 남사당패의 삶을 쫓아 풍물을 놀고 탈과 인형을 만들고 「취발이」나 「미얄할미」나 허세부리는 샌님,미소를 머금은 백정의 탈을 쓴 온갖 인형을 조종하면서 때론 분노로 때론 질타로 어느 때는 주책없고 어느 때는 넉넉하게 인간사의 천태만상을 손끝에서 펼치더니 어느 날 스스로 연희자가 되어 직접 무대에 오르기 ○시작했다. 그가 민속연희중에서도 유독 인형극인 꼭두각시 놀음에 심취하게 된 것은 무대장치 안에서 벌어지는 상황과 무대밖의 공간이 연결되는 극적 공간의 자유로움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그리고 그의 무대는 혼자서 극중인물이면서 등장인물을 소개하는 해설자에다 산받이까지 도맡아 양반들의 어처구니 없는 횡포나 위선위귀를 징치하기도 하고 재난을 물리치는 홍동지의 기개를 앞세우는 등 지배층에 대한 세찬 비판을 표방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른바 「광대」란 역사속에 놓여진 동시대인들의 희로애락을 세상으로 되돌리는 영혼의 울림대이기를 자처한 사람이며 그는 자신의 역할에 완전히 만족하는 사람일 것이다. 그는 충남 공주의 만석지기 외아들로 태어나 서울에서 휘문중에 다니다가 6·25를 만나 고향인 공주군 의당면에 머물면서 김재철의 「조선연극사」를 읽은 것과 집안의 나이든 머슴인 정광진노인으로부터 남사당패들의 내력을 들은 것이 연희자가된 동기다. 한때는 소설가 신문기자가 될뻔도 했고 서울 중앙방송국 아나운서로 활약하기도 했으나 아나운서 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걸핏하면지방 방송국에 출장간다는 핑계로 옛 남사당패를 찾아 나섰고 거의 전국을 떠도는 뜬 광대노릇으로 서서히 잊혀져 가던 풍물놀이(농악) 버나(대접돌리기) 살판(땅재주) 어름(줄타기) 덧뵈기(탈놀음) 덜미(인형극 꼭두각시놀음)등 남사당놀이 여섯가지를 재현해 내는데 수많은 돈과 시간과 정열을 들여왔다.가족들에겐 의논도 없이 3년만에 방송국을 집어치우고 나서도 「어디어디 답사,무슨무슨 녹음 촬영」등으로 새벽부터 집을 뒤쳐나가는가 하면 여행과 술에 지쳐 며칠씩이나 대낮에도 이불을 펴고 눕는 것이 다반사였다.오죽하면 그의 부인(권숙현여사)이 「올해도 당신 작년처럼 그렇게 지낼거예요」했다는 말이 이를 단적으로 증명한다. ○방송국 아나운서 출신 그는 가뜩이나 쪼들리는 살림에서 부친이 마련한 집을 팔기도 하고 동해안 서해안으로 다니다가 간첩혐의를 받기도 하고 녹음기와 카메라와 어렵사리 찍은 필름을 빼앗기기도 했다.5·16직후에는 종로 YMCA강당서 남사당창단 기념으로 남사당놀이중 「덧뵈기」를 공연하려 했을 때 「남사당」이 정당이름인줄 잘못알고 종로경찰서에 연행되는 웃지못할 에피소드를 빚기도 했다.59년 8월,전국에 흩어져있는 남사당패를 모아 지금의 남산도서관 자리인 빈터에서 요즘의 약장사처럼 「꼭두각시 놀음」을 공연한 것이 본격적인 해설가의 출발이 되었고 그후 전국각지 순회공연으로 「꼭두각시 놀음」과 「발탈」을 공연한 것이 후에 이 놀이들이 중요무형문화재(3호 7호)로 지정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냈다. 그가 「책이 아닌 발로 공부한 사람」이란 평을 듣는 것은 자료수집에 혈안이 되어 현지에서 이를 확인보충하고 채집·기록한 공적과 실제로 수백여회에 이르는 연희를 주관하고 실연한데서 비롯된 것이다. 심우성.민속예술에서 괴팍한 개성을 보이지 않는 사람은 드믈다.틀이 번듯하고 아나운서 출신답게 우아한 말씨를 쓰지만 그도 어쩔 수 없이 광대기질을 타고난 사람에 틀림없다.이제 그 시절의 남사당패는 사라지고 없으나 유일하게 그 흔적과 체취를 물씬 풍기는 무대가 있다면 심우성의 1인무언극이 남아 있다고 할 수 있다. 『뒤늦게 나마 재혼하는 과부의 설렘으로 무대에 서렵니다』 비장한 인사말과 함께 그가 지난 80년 공간사랑 소극장무대에서 선보인 첫번째 1인극 「쌍두아」는 글자그대로 머리가 둘,손은 넷에다 발이 둘인 전남 구례지방 풍장굿의 비비새놀이에 나오는 접광대를 본뜬 것으로 음악과 인형과 자신의 몸짓만으로 두동강난 조국의 분단된 역사를 상징적으로 드러내고자 했다. 뒤에서 인형을 조종하던 그가 이렇게 무대에 나서게 된 것은 「속되고 다난한 편력으로부터 스스로를 정리하는 전기가 되고 그리고 인형속에 혼을 불어넣는 산무대를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며 이는 「연희자가 무대에 나와 인형과 함께 춤춘 최초의 시도」로서 평론가 양혜숙은 「가면극이 인형극으로 거듭나면서 우리 예술사의 흐름을 크게 바꿔놓은 계기다 되었다」고 평하고 있다.지난 88년 초연이래 최근까지 공연되고 있는 「남도 들노래」도 「민족적 아픔과 통일에의 염원」을 담아 분단을 넘어 통일로 가는 길목에서 희생된 한 젊은이의 장례식을 치르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민속박물관 5월 개관 「민속이란 고전적이기 때문에 그것을 원형그대로 보존하라」는 강한 비판도 있었으나 그는 「민중의 습속이 시대따라 변하듯이 우리가 추구하는 민속극도 그 모습이 달라질 수 있고 옛 것을 재현하는 연극이 아니라 옛 것을 바탕으로 오늘의 것을 한다」는 의지다. 그는 지난해 고향인 공주에다 오랜 숙원이던 민속박물관 건립을 시작,각종 탈전시에서 모든 농기구에 이르기까지 민속과 관련된 자료전시관및 야외공연장을 오는 5월쯤 개관할 예정이다.가족은 노부모와 부부와 아들 하용씨(27·미캘리포니아대 경제학과 졸업)가 그를 돕고 있다. 호라티우스는 일찍이 「인간은 타인의 끄나풀에 조종당하는 인형 같이 움직인다」고 했지만 그의 인형은 「하나의 굳어버린 표정속에서 눈물을 흘릴 때 웃고 있고 웃어야 할 때 울고 있는」 아이러니와 시니시즘의 묘미를 그 때마다 능란하게 연출해낸다.오늘 그의 소원은 「타고난 광대의 운명」속에서 「피가 흐르고 살아숨쉬는 진짜 인형」이 되어 「인간이 가장 인간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가」를 관중을 웃기고 울리는 소박한 신명으로 핍진하게 이룩하려는 것이다. □연보 ▲1934년 충남 공주출생 ▲53년 서울휘문고졸업 ▲53∼56년 서울중앙방송국 아나운서 ▲58년 홍익대 신문학과졸업 ▲59년 남사당놀이패공연(남산) ▲60년 남사당놀이중 「덧뵈기(탈놀음)」공연(종로 YMCA강당) ▲64년 민속극회 남사당결성 ▲66년 한국민속극연구소 창설 ▲79년부터 극단 서낭당창단,전통인형극 「꼭두각시놀음」「발탈」「만석중놀이」,창작인형극 「홍동지의 나들이」「신경림의 농무」「청개구리는 왜 날이 궂으면 우는가」「우리산 우리강」외 김명수춤판,강만홍 인도무용,이동안 전통무용,이매방 민속무용,김숙자 무속무용,우옥주 만구대탁굿등 공연 ▲80년 1인극 「쌍두아」로 무대데뷔(공간사랑소극장) ▲83년 우리문화연구소장,인형극 「만석중놀이」(문예회관소극장) ▲85년 「문」(산울림소극장) ▲86년 서강대·한양대강사 ▲90년 인도 국제인형극제에서 1인극 「남도 들노래」 참가 ▲91년 프랑스·말레이시아·일본민속극제 참가 ▲93년 「판문점 별신굿」 공연 ▲94년 제주 4·3항쟁추념 「남도 들노래」및 동학농민혁명 1백주년기념 「새야새야」(문예회관대극장)등 3백여회 공연 현재=우리문화연구소장,민학회회장 「남사당패연구」(74년)이후 「한국의 민속극」「한국의 민속놀이」「전통무용용어의 연구」「마당굿 연희본 1·2」,평론집 「민족문화와 민중의식」「꼭둑각시놀음」등 20여권 서울시문화상(인문사회과학부문·79년)
  • 위장결혼(외언내언)

    고대의 결혼풍습에 약탈혼이라는 게 있다.신부가 모자라던 시절 신랑이 친구와 작당하여 이웃마을 처녀를 납치해오는 방법이다.우리나라에서도 옛날에 양가댁 과수를 홑이불에 싸서 둘러메고 달아나던 보쌈풍습이 있었다.개가가 여의치 않던 시절,「과부 업어가기」는 수절의 인습을 허무는 인간다움이 깔려 있는 것이다. 요즘엔 어떤 목적을 위해 가짜로 결혼식을 올리는 위장결혼이라는 게 생겨났다.합법적 입국이나 취업을 위해 엉뚱하게 악용된 위장결혼은 60∼70년대 미국이민이나 일본취업용으로 성행했었다.미국 영주권을 갖고 있는 교포와 서류상 부부가 돼 출국한 뒤 현지에서 이혼절차를 밟는다.돈벌이를 위해 일본인과 위장결혼,일본에 입국했다가 이혼을 안해주고 매달 돈만 울거내는 사기꾼에게 시달리는 여성도 많았다. 농촌 총각이 신부기근으로 장가를 못들어 심각한 사회문제로 제기되었을 때 중국 교포처녀와 우리 농촌 총각의 짝짓기가 성행했었다.외국산 신부를 수입하기보다는 같은 동포 사이의 짝짓기가 훨씬 자연스러운 결합이 아닌가.몇년전까지만 해도 현지 교민회와 농협등 국내단체의 주선으로 「맞선여행」이 성황을 이루었고 그렇게 맺어진 부부가 우리 농촌을 지키며 잘 살고들 있다. 그이후 교포처녀의 사기결혼이 속출하기 시작했다.93년 무렵부터 결혼해 국적을 취득한 뒤 패물등을 챙겨 잠적하거나 3∼4개월만에 일자리를 찾아 가출하는 신부가 늘었다.심지어는 유부녀가 처녀를 가장,시집오는 경우까지 생겼다.가엾은 농촌 총각을 울리던 사기극이었다. 이제는 중국 교포여성에게 위장결혼을 알선,거액을 챙기는 회사까지 등장했다.이들은 내국인 독신자를 모집해 중국으로 데리고 가 결혼식을 올리고 귀국해 초청장을 보내주는 수법을 썼다.그 대가로 1인당 5백만∼7백만원을 받았다니 교포여성의 출혈이 얼마나 컸을 것인가. 전에는 위장결혼을 미국·일본에 수출했는데 이젠 중국에서 수입하는 꼴이 돼버렸다.이것도 세태의 변화인가.
  • 정치범 11개 수용소에 20만명 복역/북한 탈출 3인 일문일답

    ◎“96년안에 무력통일 된다”… 군사훈련 강화/작년 10월 노란부대 쌀 배급… “남한산” 수군 ­귀순동기는. ▲이순옥=나는 함북 온성군 상업관리소 간부물자공급소 책임자였고 남편 최정학(56)은 온성남자고등중학교 교장이었다.85년 10월쯤 옷감구입을 위해 중국에 다녀온뒤 온성군 안전부장 김병준이 아들 혼수용 양복을 상납하라고 요구,불응하자 「국가재산 탐오죄」라는 누명을 씌워 13년형을 받고 평남 개천교화소에 수감됐다.6년간 갖은 고초를 겪다 출소한 뒤 충성으로 섬겨온 중앙당에 억울함을 호소했더니 오히려 재수감하겠다고 협박하고 남편과 김일성종합대학에 다니던 아들마저 모두 쫓겨나 그 동안의 믿음이 사라져 죽더라도 외아들인 동철이만은 자유롭고 보람된 곳에서 살게 하고 싶어 탈출을 결심했다. ▲최동철=평소 전자공학에 관심이 많아 몰래 들은 남한방송을 통해 경제가 발전되고 자유로운 남한사회를 동경하게 됐으며 김일성대학의 학생들 수준이 너무 형편없어 실망을 하고 있던중 어머니의 누명으로 강제 퇴학당했다. ­아편 재배실태는. ▲최동철=91년부터 담배농장의 부업토지의 아편재배 현장에서 근무했다.북한은 「도라지(양귀비)를 심어 생활필수품을 자체적으로 해결하라」는 김일성의 지시에 따라 전국적으로 아편농장을 운영,외화벌이에 나섰다.안전원들의 철저한 감시속에 대규모로 재배되며 주로 홍콩·일본 등지에 밀반출되거나 중국교포들과 생필품을 직접 바꾸는 밀매가 성행하고 있다고 들었으며 재배중인 아편을 몰래 뜯어 당간부에게 뇌물로 바치거나 몇몇이 모여 몰래 피우기도 한다.최근에는 중독자도 크게 늘었다고 들었다. ­당간부의 부패실태는 어떤가. ▲이순옥·최동철=어려운 식량사정에도 불구하고 당간부는 예전과 크게 다르지 않은 생활을 하고 있어 최근 빈부차가 더욱 극심해 졌다.고위간부인 1호간부는 한달에 육류4㎏·기름 3㎏·담배 30갑이 지급된다. 몰수당한 우리재산이 중앙당에 귀속되지 않고 컬러TV는 형을 내린 재판장이,냉장고는 검사가,자전거는 도안전원이,외투는 감찰간부가 중간에서 차지한 것에서 부패의 실상을 알았다.「당일꾼은 당당하게먹고,안전원은 안전하게 먹고,보위원은 보이지 않게 먹는다」는 말이 널리 퍼져 있다. ­정치범 수용소에 있는 정치범의 숫자 등 실태는. ▲최동철=함남·북지역에만 11개의 정치범 수용소가 있었다.한 관리소에 2만여명이 수용된 것으로 미루어 20여만명이 있는 것 같았다. ­북한 교도소내의 인권실태는. ▲이순옥=인간 이하의 처참한 생활이다.개천 여자교화소의 경우,수용능력은 6백명정도이나 80년대 중반이후 사회범죄가 크게 늘어나 1천8백∼2천여명까지 수용하고 있었다.나는 수용소에서의 고문으로 이 4개가 부러졌고 수용생활 중 입이 돌아가고 허리와 다리 통증이 심해 거동도 할 수 없었으나 치료를 받지 못했다. ­북한군의 갱도적응훈련이란. ▲최광혁=지난해 12월 두차례 실시했다.많은 용도의 갱도 가운데 남한으로 통하는 것도 있다는 말을 들었다.1개 군단의 2개 연대가 합동으로 갱도공사를 하는 것을 보았고 전쟁준비와 관련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핵·화학무기를 직접 본 적이 있는가. ▲최광혁=핵무기를 직접 본적은 없지만 남한에 핵무기가 많으니 우리도 핵개발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을 많이 들었다.특히 간부들은 지구를 깨뜨릴 수 있는 무기가 있으니 신심을 가지라는 말을 많이 한다. ­북한의 식량난은. ▲최광혁=지난해 10·11월 평소와는 달리 노란부대의 쌀이 1차분 들어와 남한쌀이란 수군거림이 있었다.휴가를 가도 직접 얼굴을 보이기 전에는 배급을 주지 않는다.이대로 가면 곧 폭동 등 변화가 예상되는 분위기다. ­북한군의 사기,특히 김정일 체제이후의 상황은. ▲최광혁=최근 식량난과 보급품부족으로 하사관들의 사기가 낮다.하루 식량배급량이 8백g이지만 수송도중 간부들의 편취로 6백50g정도밖에 안되고 부식도 시래기국·미역국·염장무 3쪽정도가 고작이다. 지휘관들은 『96년에는 가만히 있지 않겠다.이제는 무력통일이다』라며 훈련을 강화하고 작년 11월에는 『조국통일 시기가 다가오고 있으니 무기관리를 잘하라』는 말도 들었다. ­김일성 종합대학의 입학자격과 생활상은. ▲최동철=출신성분이 좋은 중앙당 간부의 자식들은 공부를 잘 못해도 입학하고 학교생활에 별 문제가 없다.김일성종합대학 학생들의 실력은 너무 낮다.27살에 입학하는 제대군인의 경우 수학과 영어 기초가 모자라 예비반을 만들어 가르친다.정치사상에 대한 교육이 많고 모내기와 건설사업,행사에 동원되는 일이 너무 많아 전공을 공부할 시간이 별로 없다. ◎이순옥씨,북 교화소 실상 폭로/“신생아 태어나면 즉시 살해·암장”/우는 여죄수는 7일간 독방에 수감/물고문에 화로 고문… 억지 자백 강요/수형자 거의 영양실조… 흙까지 먹어 25일 귀순자 3인의 기자회견에서 북한의 정치범과 일반죄수들은 인간 이하의 처참한 생활을 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순옥씨는 우리로 치면 구치소인 함북 청진 농포집결소와 교도소인 평남 개천 사회안전부 제1교화소에서 자신이 6년 2개월동안 겪은 참상을 폭로했다. 이씨는 지난 86년 10월 농포집결소에 수감돼 1년여동안 지내면서 벽돌을 굽는 뜨거운 노속에 갇혀 극심한 호흡곤란 속에 화상을 입는 등 악랄한 고문을 받았다. 또 ▲담요를 온 몸에 씌우고 집단구타한 뒤 실신하면 짐승처럼 질질 끌고가서 물을 뿌리는 고문 ▲형틀 의자에 묶어놓고 채찍을 휘두르는 고문 ▲감옥 창살에 양손·발을 묶고 고무호스로 손가락을 때리며 발로 차고 몽둥이로 구타하는 고문이 되풀이됐다. 그래도 말을 안듣자 주전자로 물을 강제로 먹인 뒤 실신하면 배위에 판자를 올려놓고 밟아서 먹은 물을 토하게 하고 의식이 회복되면 재차 반복하기도 했다. 3백㎏짜리 벽돌을 4명이 들것으로 나르게 시키고 제대로 못 움직이면 무차별 구타하거나 잠을 안재우며 공포·억압적 분위기에서 억지 자백을 강요하는 것도 견디기 힘들었다. 혹한에 알몸으로 1∼2시간 무릎을 꿇도록 해 동상에 걸렸고 남자들 앞에서 알몸이 된 채 채찍질을 당할 때는 여자로서의 수치심 때문에 차라리 죽고싶었다고도 말했다. 하루 3백g의 소금국으로 연명하거나 「감식처분」이라는 명목으로 2∼3일 동안 굶기는 일도 흔했다. 87년 11월 개천교화소로 옮겨져 겪은 일은 더 참혹했다. 이 교화소에서는 임신 7∼8개월이 된 여죄수는 위생원이 주사를 놓아 사산시키고 아이가 살아 태어나면 목졸라 죽이는 만행이 저질러졌다. 시체는 인근 야산에 암매장됐으며 이 과정에서 임산부가 울면 「당에 대한 반감」이라며 7일동안 독방에 수감됐다. 생활고가 가중되면서 특히 가정주부 수감자들이 급격히 늘어 20명을 수용하는 한 감방에 70∼80명씩 수용돼 겨울에는 한 이불을 10여명씩 덮고 「다른 사람의 발을 안고」 자야 했다.작업복 한 벌,죄수복 한 벌로 10년정도를 버텨야해 옷감이 절어 살이 베어질 정도였다. 작업에 필요하거나 질문에 대답하는 것 말고는 말을 할 수 없고 화장실 용무도 단체로 감시하에 봐야했다. 이러한 참혹함 때문에 대부분 척추뼈가 굽어 곱사등이가 되고 다리가 「문어처럼」 휘어지는 등 성한 사람이 거의 없었다.일부 수용자는 극심한 영양실조 때문에 외부작업을 할 때는 진흙을 파먹기까지 한다는 것이다. 이씨는 『북한에서는 수용소를 「땅위의 지옥」이라고 부른다』고 전하고 『지금 생각해도 어떻게 살아나왔는지 모르겠다』면서 눈물을 흘렸다.
  • 혼자살던 60대 노인 사망 10일만에 발견

    의지할 곳 없이 홀로 살던 60대 노인이 숨진 뒤 10여일만에 발견됐다. 13일 하오 9시쯤 서울 서초구 방배4동 2134 김재신(67·무직)씨의 단칸 사글세방에서 김씨가 숨져 있는 것을 친구 배동호씨(65·서울 동작구 동작동)가 발견,경찰에 신고했다. 배씨는 『며칠동안 김씨 집에 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아 찾아가 보니 김씨가 이불위에 반드시 누운 채 숨져 있었고 얼굴 등이 심하게 부패해 있었다』고 말했다. 경찰은 부패상태로 미루어 김씨가 10여일전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 무의탁 생활보호대상자인 김씨가 고혈압과 당뇨병을 오랫동안 앓아왔다는 배씨의 말에 따라 일단 지병으로 숨진 것으로 보고 정확한 사인을 조사중이다.
  • 애연가 신세 처량하게 만드누나(박갑천 칼럼)

    세상에는 의지가 굳은 사람도 있고 여린 사람도 있다.굳은 사람의 마음고삐는 단단한데 비겨 여린 사람의 그건 느슨하다.느슨한 사람의 경우 어떤 결심을 하고서도 『지어먹은 마음 사흘을 못간다(작심삼일)』 안중근의사는 본디 호주가였다.하건만 어느날 나라위해 큰일하겠다고 동지들과 맹세하면서 다른 맹세도 곁들인다.『나는 술을 좋아하오.하지만 오늘부터는 국권을 되찾는 날까지 술을 끊겠소』.에멜무지로 한 말은 아니었다.그후로 그는 술을 한방울도 입에 안댔다니까.국권을 되찾은 다음 옛동지들과 석양배라도 즐기다가 지금쯤 나이 탓에 술을 끊고 있는 것일까. 화담 서경덕은 어떤가.황진이와의 관계를 보자.면벽 10년의 지족선사를 텡쇠로 우그러뜨린 황진이.양반 반치기 할 것 없이 사내라면 그 분결같은 선녀 한번 안아보려고 도리깨침 흘리는 「역사적 명기」 아니던가.그 황진이가 저라서 이불속으로 기어들어와 그러안아도 덤덤하기가 돌부처 같았다지(「동야휘집」등).도술부리는 전우치도 오금을 못펼만큼 선인의 경지에 이른 사람이기에 가능한 자제력이었던가. 그렇다해도 의지­자제력 여린 사람을 반드시 인격과 결부지어 생각할 일은 또 아니다.세종임금이 아꼈던 경호 최치운은 애주가였다.과음을 걱정한 임금은 절제하라는 친필을 써주었으며 그는 벽에 그걸 걸어놓고 경계는 했다.하지만 나가면 취해 돌아왔다(「소문쇄록」).성종때의 재사 칠휴거사 손순효도 그점에서 같다.어느날 임금이 『이제부턴 마시되 석잔을 넘기지말라』고 이른다.얼마후 하표문지을 일로 찾았더니 해질 무렵에야 입대했는데 등걸잠이라도 잤는지 꼴이 말아니었다.나무라니까 『밥주발로 석잔만 마셨나이다』.그런 고주망태로도 글을 짓는데 야무진 매조지하며 글자하나 고칠것 없었다니(「오산설림초고」)놀라운 글재주였다 할 것이다. 술끊기보다 어려운게 담배끊기라는 사람도 있고 그반대라는 사람도 있다.하여간 끊는다 끊는다 발싸심하면서도 담배 못끊는 사람들은 자신의 여린 의지력을 개탄한다.새해들면서 그애연가들의 처지가 「죄인」같이 돼간다.흡연구역에서만 피우라는 국민건강증진법의 엄포때문인데 굿뒤에날장구칠 일도 아니 잖은가.「금연」이란 두글자는 송충이나 독사 보는 것같아 『소름끼친다』(수필「애연소서」)던 공초 오상순.지하의 그는 이흐름을 어찌 받아들이고 있는고.
  • 조선성씨 집성촌(압록강 2천리:19)

    ◎봉성­본계현일대 서·문씨들 “오순도순”/이주후 300여년 걸려 서가보·박보촌 등 형성/동성동본 혼인기피… 다른민족 아내로 맞아/조상숭배 대단… 혼례전 선조묘소 절하고 예식치러 요령성은 한반도와 중국 대륙을 왕래하자면 반드시 지나가야하는 회랑이다.그래서 오가는 길에 주저앉아 눌러살기도 하고 일부러 찾아와 자리를 잡기도 했다.동아시아 역사와 무관치 않은 요령성 이유민은 대를 두고 많은 후손을 남겼다.오늘의 조선족과 크게 구별되는 이유민의 역사는 꽤 오래되어 요령성에는 조선 성씨를 가진 유명한 집성촌이 더러 있다. 서씨와 문씨가 많이 사는 요령성 봉성현의 서가보,박씨의 못자리판인 본계현 산성자향의 박보촌이 대표적 집성촌이다.박씨의 경우는 박보촌 말고도 개현 진둔향의 박가구가 또 있다.이들이 집성촌을 이룬 것은 약 3백∼3백50여년이 된다고 한다.그러니까 이유민으로 들어온 선조로부터 약10∼11대손이 조선 성씨의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봉성현 서가보의 문씨 선조가 요령성에 첫발을 들여놓은 시기는 17세기 중엽이었다.서가보의 문씨가 현재 보존하고 있는 「문가씨보서」의 머릿말을 보면 내력을 잘 밝혔다.시조는 문서였는데 본래 조선인이었다는 것과 압록강에서 1백20리 떨어진 옥상좌동(평안북도 땅)에서 세세대대를 살았다고 기록했다.그리고 문씨 시조 문서가 청나라 순치연간(1644∼61년)에 시험을 치러 역관이 되었다는 사실을 적었다. ○청나라 역관신분 정착 문서는 역관이 되었을 때 나이는 30살이었고 조선에서 중국으로 들어오는 첫 관문인 요령성 봉성현 봉황성에 배치받았다.6품 통역관 직책으로 조선사절의 신분을 조사하는 일을 담당했던 그는 늘 후덕한 인상을 풍겼다.그리고 김씨와 나씨,박씨 등 세 부인 사이에서 아들 셋을 두었다.그 후손들은 1911년 신해혁명까지 한 자리에서 세습 통역관의 대를 이었다.이들이 봉성일대에 여러 문가촌을 이루어 살고 있다. 봉성현에서 진장을 지낸 윤희봉(35)씨 이야기에 의하면 문씨와 서씨 말고도 여러 조선 성씨를 가진 만족(만주)이 요령성에 많이 살고 있다는 것이다.현재 단동시 조선족문화관장인 그는 조선 성씨를 가진 민족의 생활상을 소상히 알고 있었다. 『만족들 중에는 최씨와 김씨,백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있디요.집성촌은 아닙네다만,심심치 않게 만날 수 있습네다.술자리에서 더러 자리를 같이 하면 자기 조상이 아무개 누구라면서 조선족 만난 것이 반갑다고 난리를 칩데다.그들 조상도 대개 문씨네 조상과 같은 시기에 건너온 사람들이디요.그러나 문씨와 서씨네 만큼은 조선의 냄새가 덜 합네다.문씨네는 초상을 당하면 흰상복에 삼띠를 두르고 여자들은 머리를 풀어 흰댕기를 매더란 말입네다』 그리고 본계현 삼성자향 박보촌에는 40가구가 박씨들이었는데 전체주민의 40%를 차지했다.박보촌은 만족어로 쌍하스마후다.17 25년부터 그렇게 불렀으니 3백년의 이주역사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청나라 초에 박대와 박오가 땅을 부친 것이 동기가 되어 지금까지 그 후손들이 박보촌의 맥을 잇고 있다.지금 박보촌에 자리잡은 박씨네는 박오의 후손이라고 한다. 청나라 가경연간(1796∼1821년)에 만든 「박씨족보」는 박씨 자신들이 조상신을 모신다는 사실을 기록했다.이는 한족이나 만족이 모시는 신보다 하나가 더 많은 것이다.이 마을 박문수(89)노인은 어렸을 때 자신이 실제로 본 조상신을 기억해냈다. 흰 두루마기에 갓을 쓰고 통 넓은 바지차림을 한 노인이었다고 했다.노인이 기억한 조상신상이라는 것은 아마도 영정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박보촌 박씨네들의 조상숭배 의식은 혼인풍속에도 나타났다.그들은 혼례를 올리기 이전에 먼저 고구려 고분에 재배분향하고 이어 박씨 조상묘소에 절을 올리고 내려와 예식을 치른다.혼례 전에 찾는 고구려 고분은 박보촌에서 3백여m 떨어진 산성유적 꼬우리광즈(고려방자)안에 있다.박씨의 조상들이 이주해온 이역타국에서 민족의 뿌리를 찾고자 노력한 흔적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최·김·백씨 만족도많아 박보촌 박씨들은 장례식 축문에서도 고구려를 떠받들었다.첫 구절에 「당나라 백만 대군이 침입하매 연개소문이 이를 무찔러 쫓아버렸도다」(당국백만대군입침 연개소문격이지퇴)라는 말이 나온다.고구려의 영광을 예찬한 이 글은 후손들에게어떤 긍지와 자신감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이들의 족보에는 동성동본끼리의 혼인 흔적이 전혀 없다.한족과 만족의 잡거지역에 살았던 터라 다른 민족을 아내로 맞았다.그럼에도 조선족 전통음식인 된장과 간장을 집집마다 담갔다.또 옷과 이불 호청에 풀을 빳빳하게 먹이는 습속도 그대로 간직했다.어른을 공경하는 전통예절 역시 철저히 지켜 집안 어른의 밥상은 작은 소반에 따로 차렸다. 조선의 성씨인 박씨가 많기로는 개현 진둔향 박가구가 단연 으뜸이다. 박씨 성을 가진 사람이 89가구 2백87명을 헤아렸다.심양∼대련을 잇는 일망무애한 요동평원에 자리한 이 마을 이웃에도 고려산성과 같은 고구려유적이 있다.조선의 글과 그림이 있는 옹기와 조선의 낫과 호미,3백근짜리 동종이 마을에 전해내려왔으나 지금은 없어지고 말았다.지금은 돌절구 방아확 하나가 남아있다.그 절구마저도 깨진채 절반쯤 땅속에 묻혔는데,무심한 빗물이 확을 가득 채웠다. 마을 어귀에는 화강함 비석 하나가 서 있다.청나라 연호로 가경14년(1809년)에 박씨 가문의 6대손 박동국을 기리기 위해 아들 4형제가 세운 것이다.박경청이 보존하고 있는 족보를 훑어보았더니 모계도 4대까지는 조선족 이름을 적었다.그후로는 한족이나 만족의 이름이 섞여 나왔다.마을 사람들을 길에서 만나면 한어로 『나도 조선족』이라면서 어깨를 으쓱거렸다. ○마을어귀에 박씨 비석 중화민국시기에 이 마을에 사는 형씨들이 마을 이름을 박가구 대신 형가구로 바꾸려는 움직임을 보인 적이 있다.박씨들은 현에 진정하는 등 반대운동을 벌여 마을 이름을 지켰다는 것이다.한번은 좀 떨어진 다른 조선족 마을에서 안노인 둘이서 고사리를 꺾으러 박가구까지 갔는데 마을 박씨들이 집으로 불러들여 융숭한 대접을 해주었다.그리고 조선족 안노인들이 꺾어온 고사리나물 보따리를 10여리나 되는 정거장까지 등짐으로 날라다 주는 따뜻한 인정을 베풀었다. 요령성 조선 성씨들의 집성촌에서는 지난 1982년 중국 총인구조사 당시 조선족으로 돌아가는 운동을 벌였다.그 결과 서가보,박보촌,박가구에 사는 조선 성씨를 가진 사람들 모두가 정부의 비준으로 조선족 대열로 들어왔다.피는 물보다 진한 것이어서 그들에게 무한한 연민의 정이 우러났다.
  • 최악의 식량위기 맞은 북한 참상

    ◎평북 한 병원서만 8∼11월 1,420명 아사/“5월까지 전지역에 배급 중단” 포고령/하루한끼로도 올식량 1백20만t 부족/땔감·옷·침구 태부족… 양곡·가축 절도 성행 식량난으로 인한 북한의 총체적 위기상황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 북한은 오는 5월까지 군대와 평양 등 특수지대를 제외한 전지역에 대한 식량배급을 중단하고 『양곡·가축 강탈자는 즉결처형하라』는 포고령을 내린 것으로 3일 밝혀졌다.지난해 8월부터 최근까지 여러차례 평양·신의주·선천 등 북한지역을 폭넓게 방문,현황을 직접 목격한 관계자로부터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심각한 식량난으로 어린이와 노약자 등의 아사자가 속출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젊은엄머 비관 자살 작년 여름의 수재후 설치된 북한의 「큰물피해대책위원회」(대외사업분과 책임자 정윤형)의 한 관계자는 북한의 올 식량수요량은 7백만t임에 비해 지난해 수확량은 3백40만t에 그쳐 3백60만t이나 부족하다고 지적했다.이 관계자는 또 1일1식(1인당 4백g)으로 연명한다 해도 절대부족량이 1백20만t임을 지적,『이것없으면 우린 다 굶어 죽는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미 지난해 8월부터 11월 사이 평안북도 소재 한 병원에서 굶어죽은 것으로 사망진단이 내려진 사람이 1천4백20명이나 발생했다고 한 병원장이 증언했다.신의주 동림군의 한 인민학교 교실에는 어느 날 정원 37명중 겨우 6명이 등교했을 뿐이며 평안북도 소재 모병원에서 「영양실조사」로 판명된 사람은 어린이와 노약자였다. 이 병원 원장은 사망원인을 「영양실조」로 기재했다는 이유로 당국의 문책을 받기도 했다.또 어린애가 굶어 죽어가는 것을 보다 못한 젊은 엄마들은 『자식 죽는 것 보기 전에 내가 먼저 죽는다』며 자살하는 경우도 발생하고 있다고 이 의사는 증언했다. 더욱이 김일성 생시에 비해 카리스마와 국가장악면에서 훨씬 떨어지는 김정일이 지배하는 현재의 상황은 판이해 『전혀 딴 나라 같은 인상을 받았다』고 중국 연변지역에서 자주 북한을 내왕하는 고위소식통들은 말했다.주민은 김정일의 지도로 「만풍년」을 이루었다든가,김의 직접적인 신속지시로 수해민을 모두 위난에서 구했다는 식의 선전·구호는 허황된 말로 귓전으로 흘려버리고 있으며 『인민을 먹여살리지 못하는 것이 나라냐』는 울분에 젖어 있기도 하다는 것이다.북한은 김정일의 실책을 호도하고 이러한 주민의 심리를 돌리기 위해 「불가항력의 천재」를 강조하고 「미제와 그 앞잡이 남조선 때문」이라는 적개심을 부추기고 있다는 것이다. 이 관계자들은 북한이 수해지구뿐만 아니라 전국에 걸쳐 식량·에너지·생필품 등의 절대부족에 따른 극도의 피폐상을 보이고 있는 것은 김일성·김정일 지도체제의 실책이 누적시킨 『천재 아닌 인재』라고 지적했다.국가예산의 군편중배정,다락밭 개발,농민 의욕상실,협농확대 등이 인민생활을 피폐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북한당국은 배고픈 주민이 먹을 것 있는 집을 터는 사례가 빈발함에 따라 양곡과 가축을 강탈하는 자는 즉결처형한다는 포고문까지 게시하고 있다고 한다. 북한 고위당국자로부터 직접 북한의 화급한 문제를 설명 듣고 지원을 요청받은 관계자들은 북한이 가급적 수재피해상황을 부풀려 외부세계로부터 보다 많은지원을 끌어들이려 하고 있는 것 같다고 밝혔다.이 관계자들이 공개한 평양통계국 집계에 따르면 침수유실된 가옥은 ▲신의주·의주지역이 6천호 ▲곽천·희천지역 6천1백호 ▲황해도 은파·신계지역 2천5백호 ▲강원도 이천·통천지역 5백50호 ▲황해도 이산지역 2천10백호 ▲기타 9천호 등 총 2만6천2백50호 정도로 5∼6인가구로 환산하면 약 15만명이 집 잃은 이재민이란 추산이다. ○김정일 말 안믿어 지난해 「큰물」사태 이후 최근까지 북한지역을 널리 시찰,북한측과 지원문제를 논의한 관계자들은 먹을 것·땔감·옷·침구 등의 태부족으로 이번 겨울 얼어죽고 굶어죽는 사람이 많을 것이라고 증언했다.이들은 북한주민으로부터 『선생님,해바라기이불 좀 갖다 주세요』,『차라리 수해민이 부럽습니다』라는 호소를 받았다고 전했다.「해바라기이불」이란 북한주민이 가리키는「가족공동이불」로 끼니는커녕 온갖 필수품의 곤궁으로 극심한 생활난을 겪고 있음을 웅변하고 있다.방 한가운데 이불 한장을 깔아놓고 온 식구가 다같이 해바라기모양으로 부챗살을 그리며 누워 하체부분만 덮고 잔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인 까닭이다. ○나무껍질 벗겨 연명 요즈음 북한에선 나무껍질도 먹거리와 땔감 등 다목적 자원이라는 소식이다.발전량이 형편없고 석탄도 제대로 생산하지 못함에 따라 열차·자동차운행에 심각한 차질이 빚어지고 옛날의 호롱불이 다시 가정에 등장할 정도이기 때문이다.특히 사망자를 위해 제대로 관조차 사용하는 경우도 드물다는 후문이다.땔감도 없는 판에 관에 사용할 나무는 턱도 없는 탓이다.군수공장에서 유출되는 대포박스를 관으로 대용하게 되면 운 좋은 케이스이고 그런 행운조차 없으면 시체를 그대로 매장한다는 것이다.
  • 국적,북에 구호품 전달/식량·담요 등 2만6천여가구에

    【제네바 AP 연합】 국제적십자사는 지난 여름 극심한 홍수 피해로 집을 잃고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는 북한의 2만6천여가구에 식량과 담요·옷가지 등을 나눠주기 시작했다고 인권단체들이 16일 밝혔다. 국제적십자사연맹과 회교국의 적십자사 조직인 적신월사는 현재 북한적십자사를 통해 13만여 이재민에게 식량을 배급하고 있다. 이재민들에게는 또 이미 섭씨 영하 10도 이하로 떨어진 차가운 겨울을 지낼 수 있는 담요·이불·옷가지 등 방한용품이 제공되고 있다고 적십자사는 밝혔다.
  • 대설(외언내언)

    아침에 일어나 문을 열고 밤새 내린 눈이 소복히 쌓여있는 걸 보면 탄성이 절로 나온다.마을도 길도 나무도 온통 은백색에 파묻혀 신천지로 변한 정경이 주는 감동이다.「밤에 온 눈/아침에 문을 여니/하이얀 세상이 더 좋와요」(김광섭의 「설경」) 옛날부터 눈이 많이 오면 이듬해 풍년이 든다고 했다.보리를 많이 심던 시절엔 푸지게 오는 눈을 기다렸다.「눈이 보리의 이불」이었기때문.보리 싹을 눈이 덮어줘 동해)를 막아 주었던 것이다.정월 초하루 눈이 펄펄 내리면 서설이라고 했다.정초가 아니라도 결혼 첫날밤 눈이 오면 좋다고 했다.장례날도 마찬가지.눈은 순결과 정화의 상징으로서 사람들의 마음을 포근하게 해주는 힘을 갖고 있다. 그러나 폭설은 낭만적 시정과는 달리 엄청난 피해를 가져다 준다.지난해 설 연휴에 영·호남지방의 폭설로 2백53억원의 피해를 낸 적이 있다.수박·오이등 비닐하우스와 축사가 무너졌기 때문이다.강설량 관측사상 최고의 적설이었다. 93년 1월에도 영동지방에 1m가 넘는 폭설이 내려 1백여 마을이 고립되는 큰 재난을 겪었다.1m이상 눈이 쌓이면 야생동물인 노루 고라니 꿩이 굶어죽게돼 사람들이 주는 먹이에 생명을 의지하게 된다.우리나라에서 최고 적설량은 55년1월 울릉도의 2m95㎝.이웃집과 눈속에 터널을 뚫어 왕래해야 할 정도다. 오늘(7일)은 눈이 많이 온다는 대설이다.절기답게 며칠전부터 전남북과 중부 내륙지방에 「대설주의보」가 내려져있다.그러나 몇년째 계속되는 겨울 가뭄으로 전주지방은 격일급수제가,속초지방은 제한급수제가 실시될 정도로 물 사정이 급박하다.눈이라도 많이 내려 겨울가뭄을 해소시켜 준다면 얼마나 좋을 것인가. 「부드러운 설편이 생활에 지친 우리의 얼굴을 어루만질때 우리는 부지중에 온화한 마음과 인간다운 색채를 띤 눈을 가지고…」 김진섭 수필의 한 구절이다.뇌물정국으로 지치고 허탈해진 사람들의 마음에 대설의 함박눈이라도 내려 위안을 주었으면….
  • 제1공화국의 과오(새로쓰는 한국 현대사:46)

    ◎이승만­이기붕 장기집권으로 건국공로 퇴색/중석불­원면사건 등 고질적 정경유착 싹 키워 대한민국사 첫쪽에 등장한 제1공화국은 오명으로 얼룩졌다.국가의 기초를 다진 공화국일지라도 과오가 공적을 가려버린 것이다.그 이유는 이승만 대통령이 카리스마적 지배로 일관한 권위주의정권이었다는 데 있다. 이승만 대통령은 12년간 절대권력을 유지하는 동안 관료와 경찰을 철저하게 끌어들였다.필요할 때는 군도 직접 동원했다.그래서 충성심에 젖어 있는 봉건적 엘리트가 주변에 몰려들었다.이들 그룹은 이승만의 카리스마에 쉽게 편승하여 지배영역을 거침없이 확대해나갔다.그리고 사사오입이라는 전대미문의 국회 개헌투표를 통해 건국대업을 이룩한 이승만에 한해 종신대통령으로 당선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절대권력 위해 군 동원 제1공화국에서 3대에 걸쳐 대통령자리를 차지한 이승만의 종신집권욕은 대단했다.가히 독선이었다.그의 정치고문이던 로버트 T 올리버박사(전펜실베이니아대 교수)는 자신의 저서 「대한민국 건국비화」에서 당시 이승만대통령의 심경을 명확히 밝혔다.1959년 봄 서울에 온 자신이 이대통령에게 1960년에는 대통령직을 내놓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더니 『누가 맡아 일을 할 것이오』라고 반문했다는 것이다.그러니까 대통령직에서 물러설 뜻이 조금도 없었다는 이야기다. 이승만은 자기자신이 없어서는 안된다는 신화속에 산 인물이다.그래서 자신이 대통령직에 있는 한 부통령자리는 별스럽지 않은 것으로 여겼다.다만 자신에게 충직한 인물을 부통령자리에 앉히고 싶어했을 뿐이다.당시 이승만은 정·부통령선거에서 함께 당선한 장면 부통령과는 같은 단상에 앉아서도 대화를 나누지 않는 사이였다. 이때에 이승만 의중에 자연스럽게 떠오른 인물은 이기붕 이었다.이기붕은 장면에게 부통령자리를 놓친 바 있지만 이승만은 또 그를 점찍었다.이기붕이 60년 선거에서 이긴다고 하면 부통령은 매력적인 자리였다.이승만대통령이 제4대 대통령선거에서 당선하더라도 이미 고령이라는 사실을 고려하면 더욱 그러했다. 이기붕은 미국 유학시절에 일찍 이승만과 인연을 맺었다.이승만의 환국후 개인비서로 일하다 한국전쟁 직전에 서울시장을 거쳐 전쟁중 국방장관에 기용된 것을 계기로 권력의 양지에 들어섰다.이어 1953년 창당한 자유당의장에 선출되고 54년 5·20선거에서는 서대문 을구에서 민의원에 당선했다.그리고 민의원의장을 차지하는 것으로 자유당 제2인자가 되었다.실세로 부상한 것이다. 제3대 민의원을 뽑는 5·20선거는 관권에 의한 혹독한 탄압선거였다.그래서 이기붕과 서대문 을구에서 경선키로 한 조봉암 은 유권자 추천심사에서 제동이 걸려 입후보자등록조차 못하고 말았다.이기붕은 압도적 지지를 얻은 것으로 되어 있으나 뒷날 여론에 밀려 19 58년 제4대 민의원선거에서는 서대문 을구를 버렸다.부랴부랴 선거구를 경기도 이천으로 옮겨 당선하는 정치곡예를 연출했다. 그럼에도 이기붕의 지위는 전혀 변하지 않았다.이천에서 민의원에 당선하기 전해인 57년 맏아들 강석이 이승만 대통령의 양자로 들어가 있던 터라 오히려 막강해졌다.이무렵 사람들은 서대문로터리에서 가까운 그의 집을 「서대문경무대」라 불렀다.거대한 집권여당 자유당을 거머쥐고 대통령을 움직일 수도 있는 확고한 지위의 제2인자자리를 굳힌 것이다. 이승만대통령의 장기집권은 민주주의방식의 국가경영과는 거리가 멀었다.그의 집권은 통치 그것이었다.그래서 채찍 말고도 당근이 필요했다.당근으로 비유되는 돈,다시 말하면 정치자금을 거두어들였다.그 돈은 이승만대통령에게도 직접 전달되었고,그를 핵으로 한 권력주변 인물도 챙겼다.정치와 돈,정권과 재벌의 유착이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그 정치자금은 주로 한국은행의 돈을 산업은행이 지정한 기업에 대출하는 이른바 연계자금에서 조달되었다.58년2∼4월 사이에 39억7천만환(원)을 11개 대기업에 대출해주었다.당시 야당인 민주당은 이 자금대출을 통해 10억환의 정치자금을 챙겼다고 주장했다.이 기업 가운데는 해방 이후부터 이승만에게 생활비를 댄 태창의 백악승이 끼었는데,자유당시절 가장 많은 특혜를 받았다. 제1공화국의 경제비리는 어떤 정치적 이슈가 불거질 때마다 터져나왔다.부산정치파동이 있던 1952년 중석불사건에 이어 58년 5·2선거에 따른 연계자금사건이 그것이다.3·15정부통령선거에서도 외환·금융·건설입찰을 통해 70억환의 자금을 마련했다.특히 1958년 정부통령선거를 7개월 앞두고 실시한 4개 시중은행에 불하되어 큰 의혹을 불러일으켰다. 정치자금과 맞물린 비리는 돈이 될 만한 틈새가 보이면 비집고 들어갔다.심지어는 외원 달러를 들여 민수용으로 구입한 솜뭉치를 국방부가 국군의 겨울나기이불과 방한복을 만든다는 명목을 달아 빼돌렸다.그 유명한 1956년의 원면사건이다.50만달러어치나 되는 62t짜리 8천2백54뭉치의 솜을 유령회사 등에 되팔았다.이익금은 물론 자유당의장 이기붕에게 돌아갔다. ○손원일 해임으로 수습 이 사건으로 세상이 떠들썩했으나 겨우 쥐 한마리를 잡는 꼴이 되었다.국방부장관 손원일을 해임하는 선에서 사건을 마무리했다.그리고 나서 손원일은 곧바로 해외여행길에 올랐다.이 원면사건 조사책임자는 육군특무대장 김창룡 소장이었다.그는 사건을 매듭짓지 못한 채 갈등관계가 있는 다른 패거리의 저격을 받고 숨졌다.그의 죽음은 원면사건과직접 관련을 가진 사건은 아니었으나 이승만대통령을 등에 업은 정치군인의 비극으로 기록되고 있다. 제1공화국의 말기증상은 여러 분야에서 표출되었다.1960년3월15일 제4대 대통령과 부통령을 뽑는 3·15선거는 그 대표적 케이스로 이승만을 핵으로 한 그 추종자의 몰락을 재촉했다.선거는 전해 59년3월 선거내각의 내무부장관으로 기용된 최인규에 의해 철저한 부정선거로 치러졌다.치안국장 이강학을 비롯한 전국 경찰과 내무공무원의 사전투표 등 온갖 부정방법이 동원되었다. 그 3월15일 이른 봄,날씨는 차가웠으나 하늘은 맑았다.그런데 하늘 무서운 줄 모르는 부정선거가 착착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최인규는 그 시간 국무회의를 마치고 나와 기자들에게 『전국의 투표가 평화스럽게 치러지고 있다』고 능청을 떨었다.민주당 대통령후보 조병옥이 서거하고 없는 이 선거에서 자유당 대통령후보 이승만이 9백63만표,자유당 부통령후보 이기붕이 8백33만표로 집계되었다.민주당 부통령후보 장면의 표는 1백84만여표에 불과했다.그러나 투표결과를 아무도 믿지 않았다. □특별취재반 ▲황규호(문화부 부국장급) ▲이용원( 〃 차장) ▲김성호( 〃 기자) ▲김영중(조사부 〃)
  • 구타에 앙심 방화 동료 2명 숨지게/공익근무요원 구속

    【여천=남기창 기자】 전남 여수경찰서는 2일 매를 맞은데 앙심을 품고 숙소에 불을 질러 동료 2명을 숨지게 한 전남 여천시 화양면의 산림분야 공익근무 요원 김남호(22·전남 여천군 화양면 학동리)씨를 현주건조물 방화치사 혐의로 긴급 구속했다. 김씨는 이날 상오 0시50분 쯤 전남 여천시 화양면 나진리 화양면 면사무소 미화원 대기실에서 술에 취한 채 잠자던 공익근무 요원 박정현(22·여천군 돌산읍 둔전리),김성진씨(22·여천군 돌산읍 평사리)의 이불과 옷에 석유 10여외ℓ를 뿌리고 라이터로 불을 붙여 숨지게 한 혐의이다.
  • 영장 청구 5시간만에 발부/검찰·법원·안양교도소 주변

    ◎수사관 9명 한밤 합천 급파… 상오 수감 계획/전씨 안양교도소 구금 결정… 긴급 시설 점검 12·12 및 5·18 특별수사본부는 2일 전두환 전대통령이 소환에 불응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하자 곧바로 사전구속영장을 발부받아 집행에 나서는 등 강경 분위기 일색이었다. ○…전씨에 대한 구속영장은 이날 하오 6시10분쯤 서울지법 당직실에 접수됐으며 수감장소는 안양교도소,영장의 유효기간은 12월31일까지로 기재. 구속영장이 접수되자 곧바로 심리에 들어간 형사 항소3부 신흥철판사는 『대통령이든 누구든 법 앞에서는 평등한 만큼 원칙에 따라 처리할 것』이라고 짤막하게 소감을 피력. ○…신판사는 이날 검찰이 청구한지 5시간10여분만인 하오 11시23분쯤 전씨에 대한 사전구속영장을 발부한 뒤 기자들과 만나 『당직 판사로서 원칙에 따라 영장을 발부했다』고만 밝혔다. 신판사는 영장발부 사유에 대해 『12·12가 군사반란인지 여부에 대해 전씨는 답변서를 통해 「합수부의 정당한 직무수행이었다」고 범행을 부인한 바 있어 증거인멸의 우려가 있다고판단했다』고 설명. ○‥검찰이 영장에 첨부한 「12·12사건 수사기록」은 1만5천여쪽에 커다란 보자기로 5뭉치나 되는 방대한 분량. 24권으로 이루어진 수사기록은 「정승화 내란방조건(공판기록)」(11번째권),「피의자 대법원재판기록」(16〃),「김재규 등 내란사건기록」(21권〃) 등으로 구성됐으며 6번째권에는 허삼수·성환옥·이종민·최석립·이상상·송응섭·정동호·구창회·이학봉·고명승·장기오·최세창씨 등 12·12사건 피고소·고발인들의 진술조서가 포함. ○…3일 0시쯤 3대의 승용차에 나눠타고 전씨가 머무르고 있는 경남 합천으로 급파된 압송팀 9명은 내려가자 마자 전씨에게 구속영장을 보여주고 곧바로 집행,빠르면 3일 상오 안으로 안양교도소에 수감시킨다는 계획. 검찰은 압송 과정에서 생길수 있는 물리적 충돌 등 만약의 사태에도 대비,경남 합천 관할 창원지검 거창지청에 협조를 요청하는 한편 현지 주민들의 동향을 파악하는 데도 상당한 신경을 쓰는 모습. 한편 이종찬 본부장은 이날 노태우 전대통령에 대한 12·12 사건 첫 방문조사와 관련,『수사기밀이므로 절대 밝힐수 없다』고 했으나 「노씨가 진술을 성실히 했나」라는 물음에 『오늘 조사에서 진술을 좀 받았다』고 말해 노씨가 새로운 사실을 털어놓았거나 성실하게 조사를 받았음을 암시. ○…최환 서울지검장은 3일 0시5분쯤 기자실에 잠깐 들러 『당초 검찰은 전씨를 밤샘조사한 뒤 다음날 귀가시키고 5·18특별법 제정등 상당한 시일이 지난 뒤에 사법처리할 계획이었다』면서 검찰의 전격적인 사전구속영장 발부는 순전히 전씨의 선택에 따른 것이었다고 설명. 최검사장은 이날 『그분(전두환씨)으로 봐서는 검찰의 소환을 받고 2일 낮에 나오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었는데…』라고 말문을 연뒤 『김기수 검찰총장과 내가 전씨의 변호인인 이양우 변호사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검찰의 입장을 충분히 설명했었다』고 설명. ○…이날 안양교도소는 미결수사동 중 독거실을 선정,난방장치 등 소내 시설을 긴급 점검하는 등 33년 교도소 역사 이래 최고의 거물급 인사인 전씨의 수감에 대비. 교도소측은 『감방은 1평에서 4평까지다양하나 방의 크기가 정확한 등급으로 나눠지지는 않는다』고 밝히고 『전씨의 경우 3평 가량의 독거실에 수감될 것』이라고 설명. 교도소 직원들은 『과거 이철희씨 등 거물급을 다룬 경험은 있지만 전직 대통령은 처음이라 처우에 고심하고 있다』면서 『교도원 인력이 부족해 서울구치소에 수감돼 있는 노씨 처럼 3명이 한조를 이뤄 3교대로 24시간 밀착 계호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고 걱정. 안양교도소는 서울구치소와 달리 난방시설이 전혀 돼 있지 않으며,매트리스외에 수감자가 요청할 경우 담요와 이불이 3장까지 지급되고 특별한 경우 조그마한 보온물통이 지급된다. ○…검찰은 상오 9시 전씨의 성명 발표를 듣고 하오 11시까지 일체 향후 대책을 밝히지 않다가 기자들의 질문이 빗발치자 11시30분쯤 간략한 브리핑을 통해 노씨에 대한 조사계획만을 공개. 이 때까지만 해도 이날은 노씨에 대한 조사로 끝날 것 같은 분위기였으나 하오 2시쯤 추가 브리핑 계획이 알려지면서 분위기가 급전.
  • 번호 단 수의입고 아침점호…/미결수 노씨 「구치소 생활 24시」

    ◎「1식3찬」 아침식사 깨끗이/첫날 안대청해 눈가리고 잠자리에 칭호번호 「1×3×」. 17일 서울구치소 독방에서 이틀째 밤을 맞은 노태우 전대통령은 『1×3×』로 불린다.노태우라는 이름도 따라붙지 않는다.그냥 「1×3×」다.일반 미결수처럼 순서에 따라 받은 배정번호다.하얀 수인복 가슴에는 「1×3×」라고 적힌 번호표가 붙어 있다.예외란 없다. 노씨는 다른 재소자처럼 이날 상오 6시30분 기상나팔소리를 들으며 잠자리에서 일어나 아침점호를 받고 침구를 정돈했다.이불 한채와 모포 석장.노씨는 침구를 가지런히 개 붙박이 장에 넣은 뒤 침상에 걸터앉아 사방을 둘러보며 깊은 상념에 잠겼다고 교도관들은 전했다. 전날 집에서 가져온 흰색 솜옷 상의와 회색 하의 한복을 그대로 입은 채였다. 이어 교도관의 안내로 복도쪽 출입문 밖으로 나와 바로 옆 세면실에서 세수를 했다. 노씨의 독방은 원래 미결수들이 검찰이나 구치소측의 조사를 받을 때 사용하던 일종의 「별채」안에 있다.3.5평 크기로 목제침상과 붙박이 장,식탁겸용 철제책상,걸상 등이 비치돼 있다.TV는 없다.오른쪽 방은 좌변기와 세면대,샤워시설이 갖춰진 목욕실.왼쪽 방은 검사들이 노씨를 조사할 때나 가족이나 변호사가 면회를 할 때 사용토록 할 예정이라고 구치소측은 밝혔다. 상오 7시 아침식사 시간.쌀과 보리가 8대2로 섞인 밥과 시금치국,오징어무조림,깍두기 등 「1식3찬」.노씨는 전날 독방에 수감된 직후 저녁을 먹었을 때처럼 아침식사를 깨끗이 비웠다.낮 12시,된장국,생선찌개,배추김치로 짜여진 점심식사도 마찬가지. 구치소 관계자들은 노씨가 매 끼니 식사를 모두 비우는데 대해 『오랫동안 군생활을 한 탓도 있지만 모든 것을 체념하고 구치소생활에 적응하기 위한 것이 아니냐』고 해석했다. 아침식사후 노씨는 집에서 가져온 불교서적을 2시간동안 읽었다. 노씨는 상오 10시30분 독방 옆방에서 김유후 전사정수석을 만나 1시간여동안 이야기를 나눴다.이어 교도관의 안내로 건물 뒤쪽 8평 정도의 빈터로 나가 30분동안 맨손체조와 걷기운동을 했다. 하오 1시45분쯤에는 아들 재헌씨와 최석립 전경호실장,박영훈 비서실장 등을 1시간여동안 면회를 했다.노씨는 『건강이 어떠시냐』는 물음에 『괜찮다』고 대답했다.재헌씨는 양말,내의와 역사서적 3∼4권을 전했다. 재헌씨는 면회를 마친 뒤 『아버지가 구치소로 가기 전 전화통화도 못했으며 구치소장이 면회시켜 주겠다고 해서 왔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노씨는 밤 8시 취침준비에 들어갔다.독방 밖에는 계호요원 3명이 노씨의 동태를 지켜보았다.구치소측은 취침시간 이후에도 불이 켜져 있어 책을 보거나 편지를 쓰는 정도는 가능하다고 밝혔다. 노씨는 첫날밤 교도관들에게 안대를 요청,눈을 가린 뒤 잠자리에 들었다.한 계호요원은 『노씨가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는 것 같았다』고 전했다. 노씨는 독방에 수감되기 전 신체검사를 받으면서 『신경성 위염 증세가 있어서 정로환을 복용해 왔는데 구치소안에서도 먹을 수 있느냐』고 물어 허락을 받았다. 구치소측은 노씨의 감방을 「별채」에 마련한 것은 다른 재소자의 위해가능성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계호상의 문제가 아니면 일반 재소자와 똑같이 취급한다는원칙을 거듭 강조했다. 노씨는 일반 미결수처럼 자신의 비용으로 두가지 신문을 구독할 수 있으나 아직 신청하지 않았으며 집필도구도 요구하지 않았다고 구치소측은 밝혔다. ◎구치소 면회 온 노재헌씨 일문일답/“아버지 건강하시니 다행/내의·책 몇권 넣어드렸다” 서울구치소에 수감된 노태우씨의 아들 재헌씨가 17일 하오 3시45분쯤 박영훈 비서실장·최석립 전경호실장 등과 함께 1시간여동안 노씨를 면회한 뒤 구치소를 나오다가 기자들과 맞닥뜨렸다. 다음은 재헌씨와의 일문일답. ­아버지의 건강상태는 어떤가. ▲특별히 불편하신데는 없어 보였다. ­식사는 잘하고 있다고 했나. ▲비교적 잘 드시는 편이었다. ­지금 심정은. ▲말할 수 없다.그분이 건강하시니 다행이다. ­만나서 무슨 말을 나눴나.구체적으로 얘기해 달라. ▲별로 한 말은 없고 양말과 내의 등 수감생활에 필요한 물건들을 좀 넣어 드렸다. ­다른 물건은 전하지 않았나. ▲평소 즐겨 읽으시던 책 몇권을 가져다 드렸다. ­무슨책인가. ▲역사소설이다….­매일 면회올 생각인가.모친(김옥숙씨)은 오지 않나. ▲정확한 계획은 없다.이제 가봐야겠으니 좀 비켜달라.
  • 부실 교과서/이수열 방송위 전문심의원(굄돌)

    국어가 앓고 있다.우리말의 모범을 보여 주어야 할 국어교과서에도 잘못된 표현이 많다. 현행 국민학교 3학년 2학기 국어 읽기 교과서 11째쪽 「말을 타고 지나가는 허름한 차림의 장군을 보고…」는 일본식 연결구조로 된 잘못된 글이다.「허름한 차림의 장군」을 「허름하게 차린 장군」이라고 고쳐야 하는데,그렇게 해도 문장의 흐름은 자연스럽지 못하다.성분의 차례를 바꿔 「허름하게 차리고 말타고 가는 장군을 보고…」나,「허름한 차림으로 말타고 가는 장군을 보고…」라고 고쳐야 국어다워진다. 16째쪽 「포근한 햇솜의 꽃사슴 이불」도 「햇솜의」와 「꽃사슴 이불」의 연결구조가 일본말을 닮은 것으로 우리말에는 어울릴 수 없다.「햇솜」이 「꽃사슴 이불」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꽃사슴의,포근한 햇솜 이불」이나 「포근한,꽃사슴의 햇솜 이불」이라고 해야 국어답고 시의 리듬도 산다. 47째쪽 「가운데 부분을 내용에 따라,다시 몇 개의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까?」에서 「몇개의 부분」은 국어를 치졸하게 만드는 일본말투 찌꺼기다.「개의」를 빼고 「몇부분」이라고 해야한다.「다섯곳」을 「다섯개소」,「백 석」을 「백 개석」이라고 하는 것도 그런 예다. 54째쪽 「나무야,누워서 자라」에서 「자라」는 「자거라」로 고쳐야 한다.「자다」는 거라변칙동사이기 때문이다. 98째쪽 「원님으로부터 상을 받은 욕심쟁이 농부는 왜 울었을까요」는 영어 from 구문을 흉내낸 문장이다.국어의 탈격(탈격)조사는 「께서」와 「에게서,한테서」이므로 「원님으로부터」는 「원님께서」나 「원님에게서」 「원님한테서」라고 해야 한다. 이처럼 잘못된 글이 각급학교 교과서에 두루 스며들어 마약처럼 작용해서 슬기로운 새싹들의 배달겨레다운 얼을 죽인다.
  • 북한 수해복구지원 지구촌 손길…

    ◎유엔·적십자사 등 모금 “턱없이 부족”/국제신뢰 상실… 한·일 「큰손」역할 가능성 올여름 북한전역을 강타한 집중호우로 사상최악의 수해를 당한 북한을 향해 세계 주요국과 국제기구의 구호손길이 조금씩 밀려들고 있다. 북한은 수재발생 이후 유엔을 비롯한 거의 모든 국제기구와 미국·일본·독일등 주요 선진국정부나 민간단체에 손을 내밀고 있다.이같은 SOS에 지금까지 가장 크게 화답한 쪽은 인도적 지원국(DHA)등을 산하기구로 거느린 유엔이다. 유엔은 지난 8월말부터 9월 상순에 걸쳐 북한 수해지역을 돌아본 DHA·세계보건기구(WHO)·유엔아동기금(UNICEF)·세계식량계획(WFP)·유엔식량농업기구(FAO)등의 보고를 종합평가한 바 있다.이를 통해 북한 수재복구에 당장 1천5백71만2천2백50달러가 소요될 것으로 추산했다. 이 액수를 모금목표로 정한 유엔은 9월11일 현재 WHO 10만달러,DHA 5만달러,UNICEF 5만달러,WFP 5만달러,UNDP(유엔개발계획)5만달러 등 유엔 산하기구 30만달러와 각국 정부·민간단체에서 들어온 지원등 도합 50만4천4백달러를 모은 것으로 알려졌다. 국제적십자사의 현재까지의 모금액수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다만 14일 대한적십자사를 비롯한 각 회원국에 대북 구호를 위해 현금 1백50만달러와 담요·누비이불·쌀·수송차량 등 2백50만달러상당의 물품등 전체규모 4백만달러의 지원에 대한 분담참여를 요청해놓고 있다. 정부차원에서는 미국정부가 2만5천달러,노르웨이정부가 10만달러를 내놓았다.일본도 유엔의 대북 지원요청을 받아들여 50만달러규모를 무상지원키로 했는데,미수교국에 대해서는 처음으로 정부개발원조(ODA)에 따른 무상자금을 제공키로 한 것으로 산케이신문이 14일 보도한 바 있다.독일은 의약품과 유아용품등의 지원을 위해 관련물품 확보작업에 들어간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아직 북한에 답지한 수재복구지원규모는 북한당국의 기대치에는 크게 밑돌고 있다.이처럼 피해규모에 비해 국제사회의 지원규모가 턱없이 적은 것은 북한 스스로 자초한 측면이 강하다.이솝우화의 「양치기소년」처럼 그동안 국제사회로부터 신뢰를 잃은 탓에 결정적 순간에 큰 지원을 얻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물론 이들 제3국과 국제기구의 일과성 구호로는 복구가 어려울 것이라는 관측이 벌써부터 제기되고 있다.올 7,8월 3차례 북한을 할퀴고 간 수마가 남긴 상흔이 워낙 깊고 큰 탓이다.유엔기구들은 북한 현지조사에서 북한전역의 75%에 달하는 지역에서 약 10만가구 50만명의 이재민과 1백50억달러상당의 재산피해가 발생,수해지역의 주민수는 약 5백20만명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한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같은 엄청난 북한의 수재복구수요에 동참할 수 있는 나라는 현실적으로 한국과 일본 정도밖에 없다는 것이 중론이다.북한의 최대후원국이던 중국마저 올초부터 식량부족에 허덕이고 있는데다 올여름 요령성과 길림성등에 커다란 수재를 입어 대북 식량지원여력을 상실했다. 그래서 북한당국자들이 수해지원에 있어서도 궁극적으로 「큰손」구실을 할 수 있는 쪽은 동족인 우리밖에 없다는 현실을 하루속히 깨달아 당국접촉을 통해 공식지원요청을 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 달라진 혼인풍속(압록강 2천리:6)

    ◎사라진 전안례… 기러기 대신 통닭이…/신부는 치마·저고리에 서양식 너울 쓰고/교배례 생략 중국식 본떠 깍지걸이 건배/혼수감으로 가전제품은 필수… 사회문제로 장백조선족자치현 용강향 이도강촌에 머무르는 동안에 재수가 좋아서 결혼식을 만났다.신랑은 조선족기숙제소학교 이헌(46)교장의 아들 남일(24)군이고 신부는 이성숙(23)양이었는데,둘 다 소학교 교원이었다.말하자면 부부교원이 될 이들의 결혼식은 상오11시쯤 신랑과 신부가 승용차를 타고 신접살림을 차릴 집에 도착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후덕한 인심은 그대로 이들의 신접살림집은 그냥 빌린 것이다.이도강촌에서는 셋집이란 말이 통하지 않는다.돈을 내놓지 않고 살 집이니까 「빌려든 집」이 적절한 표현인지도 모른다.신랑 신부에게 집을 내준 집주인의 이야기 속에는 이도강촌 고산지대 마을의 후덕한 인심이 그대로 배어났다.도시생활이랍시고 연길에서 살아온 나 자신이 후덕한 인심 앞에 사뭇 왜소해질 뿐이었다. 『돈을 어찌 받겠습니께.아들 장가가면 들일라고 지은 집이라 지금은 어짜피 비울 집인데….사람 들어서 집 보아주면 좋지비.너 좋고 나 좋고인데 돈을 받는다는 게 말이나 되우.신랑 신부,이 집에서 돈 많이 모아 나가면 되지비.나 아무 생각 없수다』 이러한 인심 한 복판에서 베풀어지는 혼례인지라 산골마을이 온통 박신댔다.차에서 내린 신랑 신부가 쌍 희자를 거꾸로 오려 붙인 대문께로 다가서자 폭죽소리가 갑자기 진동했다.기다란 장대끝에 매달린 폭죽이 연신 터졌다.매캐한 화약연기가 사방을 덮고 폭죽 부스러기가 능지처참을 당한 꼴로 땅바닥에 너부러져 나뒹굴었다.폭죽소리에 액귀가 놀라 도망가는 대신 행복이 쌍을 지어 들어오라는 중국식 혼례풍습이 어느 사이 조선족사회를 비집고 들어온 것이다. 옛날엔 색시가 첫날 신에 흙을 묻히면 안된다고 해서 마당에 깔아놓은 멍석이나 짚을 밟고 지나갔다.그런데 지금은 신랑이 신부를 번쩍 안아들고 들어갔다.첫날 대낮부터 신랑품에 드는 행복을 만끽한다고나 할까.신랑은 양복을 입고 신부는 치마저고리차림을 했다.그러나 뒤집어쓴 너울에는 서양식 레이스가 달렸다.그리고 색동옷을 입은 동남동녀가 꽃바구니를 들고 꽃보라를 날리면서 신랑 신부를 인도해왔다.동서양 혼합절충식의 혼례였다. 신부가 신랑집 대반의 안내에 따라 방으로 들어가 사뿐히 자리를 잡았다.신부의 너울 뒤로 한쌍의 원앙을 수놓은 벽보가 보였다.원앙은 중국 한족들이 사랑의 상징으로 여기는 새다.오늘날 조선족 젊은이들이 쌍기러기를 원앙으로 착각하는 것처럼 이 혼례집에서도 원앙새가 기러기자리를 빼앗아버렸다.그러니 전통혼례에 반드시 들어가야 할 전안상은 물론 전안례도 생략되었다. 조선족 전통혼례식의 전안례는 고구려시대부터 유래되었다고 한다. ○기러기는 사랑의 상징 신랑이 신부를 맞을 때 흰 색깔의 산 기러기 한 마리를 품에 안고 가서 전안례를 치른 뒤 날려보냈다.그러다 번거로운 산 기러기 대신 나무기러기(목안)로 바뀌었다는 것이다.그런데 지금은 나무기러기마저 사라졌다.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전안례 발상지이자 고구려 강역이었던 압록강유역 조선족사회 혼례에서 나무기러기도 보이지 않고 있는 사실이….압록강유역에는 감동적으로 유전되는 전안례 전설이 있다.그 옛날 패수(압록강)벌에 살던 총각 길랑과 처녀 미월이 사랑을 맺었다.그들은 우연히 다리가 부러진 기러기를 구해다 키웠다.길랑이 과거를 보러가던 날 미월은 아리랑산까지 배웅하고 이별의 아리랑을 불렀다.길랑이 떠나고 해가 바뀐 어느 단옷날 그네 뛰는 미월의 미색에 반한 마을의 원 김호가 첩을 삼기 위해 납치했다. 미월이 말을 듣지 않자 옥에 가두었다.미월은 눈물어린 사연을 적은 쪽지를 자신이 보살피던 기러기 다리에 매달아 날려보냈다.길랑은 기러기편에 보낸 쪽지를 받았다.암행어사가 된 길랑은 귀로를 재촉하여 처형 직전의 미월을 구하고 김호를 처단해버렸다.「길림성 민간문학전집」 장백조선족 자치현편에 나오는 이 전설은 「아리랑」과 「춘향전」을 기묘하게 합성한 느낌을 준다.어떻든 기러기는 사랑과 믿음,화목과 정절을 의미하는 날짐승이라 할 수 있다. 전안례가 사라진 이도강촌 혼례상 위에는 부리에 고추를 문 삶은 통닭 한마리가 올라 있었다.웃음이 절로 났는데,삶은통닭은 소래기에 잔뜩 담아 놓은 팥속에 다리를 묻고 서 있는 포즈를 취했다.마을 총각 둘이서 상을 맞들어 움직여놓자 대반으로 앉은 아주머니가 포도주를 따라 상 위로 세번을 돌려 신부를 주었다.신부는 세 모금으로 꺾어 포도주를 마셨다.이어 신랑은 풍덩하게 생긴 주례격의 아주머니가 따라 준 술잔을 비웠다. ○바가지 엎어지면 아들 그리고 나서 주례격의 아주머니가 건네주는 바가지에서 과자를 꺼내 한 입을 물고 바가지를 내동댕이쳤다.바가지가 엎어졌다.그것을 바라본 하객들이 좋아라 하면서 손뼉을 쳤다.바가지가 엎어졌기 때문에 아들을 본다는 것이었다.아들이건 딸이건 조선족이 또 한번 생명의 씨앗을 뿌릴 수 있게되었다는 사실이 대견스러웠다.어느 틈에 신랑이 신부 곁으로 바싹 다가갔다. 신랑 신부는 오른 손에 술잔을 받아들었다.그리고 깍지걸이로 키스라도 하듯 얼굴을 맞대고 술을 마셨다.교배례를 대신한 모양이다.그럭저럭 혼례절차가 끝났다.대반을 맡은 아주머니가 신부집에 보낼 상을 챙기기 시작했다.아주머니는 우선 고추를 문닭목을 비틀어 빼고 나서 종이에 둘둘 말아 신부 치마폭에 싸주었다.신랑도 신부집에서 닭모가지를 얻어오는 것은 마찬가지다.혼속이 자꾸만 변질되고 있는 것이다.전안례나 교배례 같은 전통의식이 사라진 대신 신부 혼수가 자꾸 늘어나 딸가진 부모들의 걱정도 크다. 이날부터 신혼살림을 차릴 방에는 신부가 해가지고 온 혼수가 그들먹했다.윗방에 놓인 옷장과 이불장에는 신부 친정에서 마련한 이불이며 옷가지가 가득한 것은 물론 텔레비전과 전축·전기밥솥이 한쪽에 따로 자리를 차지했다.그래서 늘그막 남정네들 사이에 『장가 한번 더 갈걸…』하는 우스갯소리까지 생겨났다.
  • 순천·부산서도 「뇌물 선출」/교육위원 비리

    ◎경기도의원 1명 수뢰 추가 확인 경기도의회 민주당 수석부총무 이광수(53·수원)의원이 교육위원 선거에 출마했다 낙선한 문제복(56)씨로부터 1백만원을 받은 사실이 밝혀졌다. 교육위원 선출과 관련된 금품수수 사건을 수사 중인 수원지검 공안부는 30일 문씨가 도의원들에게 건네준 1백만원권 수표 19장 중 1장이 뒷면에 이의원의 전화번호와 주민등록번호,이름이 적힌 상태로 은행으로 되돌아온 것을 확인하고 이의원을 소환·조사하기로 했다. 이와 함께 문부촌(53·광명)의원에게 금품을 제공한 변석(67·안양시 교육위원 낙선자)씨와 현 안산시 교육위원인 최영덕(47)씨 등 2명도 소환,조사를 벌여 변씨가 10여명에게 이불감을,최씨가 20여명에게 가정용 비상약품을 돌린 사실을 확인했다. 문의원은 양평군 교육위원 후보 이병욱씨로부터 금노리개 1개를 받는 등 20여명으로부터 갈비짝과 과일,음료수 등을 받았다. 한편 광주지검 순천지청 수사과는 이 날 압수수색 영장을 발부받아 전남도 교육위원 당선자인 박홍규(61·전 여천고 서무과장)씨의 예금계좌에 대한 수사에 나섰다. 부산지검도 교육위원 선거와 관련 부산시 의원들에게 금품을 제공했다는 정보를 입수,내사 중이다.
  • 침수지역 쓰레기처리 새 골칫거리로/「재니스」 수재현장 이모저모

    ◎장병들 작전하듯 복구작업 신속 전개/답지하는 구호품… 속옷없어 아쉬움도 ○…육군 제51사단은 28일 부대장병과 각종 중장비를 동원,나흘간 집중호우로 피해를 본 수원·화성·평택 등 경기 남부지역에 대한 수해복구를 위해 긴급 출동. 부대측은 특히 「피해발생」은 「적의 침투」,「복구지원」은 「적의 섬멸」이라는 이색 구호를 내걸고 마치 전투에 임하듯 작업에 나서 눈길. ○…굴포천의 범람으로 인천지역에서 가장 많은 피해를 입은 계양구 상야·평동 일대 주민들은 이날 상오 물에 잠긴 가옥들이 서서히 드러남에 따라 그동안 대피해 있던 상야국교에서 돌아와 가재도구를 말리는 등 피해복구에 구슬땀. 주민들은 침수된 논의 벼를 일으켜 세우는 작업과 함께 일부 파손된 도로및 제방의 복구에도 안간힘. ○…대전시는 28일 인근 충남지역의 수해를 조기에 복구하기 위해 「총력 복구지원령」을 내리고 시가 보유한 중장비 가운데 포클레인 2대,덤프트럭 10대를 이날 제방과 도로유실 등 극심한 피해를 낸 예산,보령 등지에 긴급 지원. 또 수해지역 출신 2백여 시 산하 공무원들에게 고향을 찾아 복구 작업을 돕도록 3박4일간의 특별휴가 조치도 내렸으며 전 공무원들을 대상으로 이불과 옷가지,생필품 모금운동도 전개. ○…가옥들이 침수됐던 충남 연기군 조치원읍 지역에서는 쓰레기 처리문제가 새로운 골칫거리로 등장.이는 침수피해 주민들이 일반 쓰레기뿐 아니라 못쓰게 된 가전제품과 가구까지 마구 집앞에 버리기 때문. 군 재해대책본부 관계자는 『피해자들의 어려운 사정을 고려해 이틀간 쓰레기를 무상수거했으나 쓰레기를 마구 버리는 사례가 갈수록 늘고 있다』며 『수해를 입어 상심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과태료를 부과하겠느냐』고 고충을 실토. ○…지난 23일부터 내린 집중호우로 충남 연기군 동면 지방도 5백91호선 미호교 상판교체공사현장의 우회도로가 2백여m가량 유실돼 도로가 전면 차단됐으나 복구가 늦어져 주민 불편이 큰 실정. ○…수재민들에게 보내는 구호품 가운데 꼭 필요한 물건이 빠져있어 이재민들이 아쉬워하고 있다. 이는 적십자사 등 사회 각 분야에서 보내는 구호품이 대부분 모포,의류 등 생필품인 반면 속옥은 거의 없어 학교 관공서 등에서 지난 25일부터 4일째 지내고 있는 이재민들이 내부위생에 어려움을 겪기 때문. 충남도 재해대책본부의 한 관계자는 『구호품을 보내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마움을 느끼지만 구호품의 목록을 정할때 특별한 상황에 대한 좀 더 세심한 고려를 해주었으면 좋겠다』고 전언.
  • 10대소녀 계획적 범행에 경찰 아연/기술학원 방화수사 주변

    ◎학원측 “출입문 자물쇠 제거” 도 지시 묵살/방화 도화선된 탈출기도자 5명 질식사 경기도여자기술학원 방화사건 이틀째인 22일 주동자 16명이 사법처리된데 이어 학원측 관계자들로 수사가 확대되면서 이번 사건의 경위와 학원운영상의 문제점이 낱낱이 드러나고 있다.경찰은 이번 사건의 사회적인 여파를 감안,학원 관계자들에 대해서도 구타사실이나 비리·관리소홀 등 혐의사실이 드러나면 전원 사법처리할 방침이다. ○…경찰은 당초 이번 사건이 사전모의 없이 단순우발적으로 연쇄방화가 일어났을 가능성에 대해서도 수사를 벌였으나 막상 사전공모에 의한 계획적인 범행임이 드러나자 허탈해 하는 모습.한 경찰관은 『10대소녀들이라 설마설마 했는데 역할분담까지 하는등 조직적으로 범행을 저질렀다니 자백을 받고도 믿기지 않는다』며 침통해 하는 표정.사고현장과 병원에 있던 부모들은 이 사실을 전해듣고 『평소 학원이 어떻게 원생을 관리했기에 이 지경까지 몰고 갔느냐』며 거세게 학원측을 성토. ○…사건 수사를 맡고 있는 용인경찰서장 송동익 총경은 이날 상오 기자 브리핑에서 『적은 인력으로 많은 원생과 학원 관계자를 밤샘 조사하느라 어려움이 많았다』고 토로한 뒤 『그러나 원생들의 자백에서도 드러났듯이 예상외로 단순한 범죄였다』고 한마디.그는 또 이번 사건으로 인한 사상자규모나 학원측의 관리소홀과 운영문제점을 지적하는 분위기를 의식한 듯 『앞으로 따질 일이 있으면 당연히 따져야 되지 않겠느냐』며 학원운영 전반에 대한 수사확대 가능성을 강력히 시사.일부 수사관은 그러나 『8개 병원에 안치된 37구의 시신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사체검안서를 작성하는등 사망자 시신처리문제도 간단한 것이 결코 아니다』라며 볼멘소리. ○…방화당시 원생들이 인화물질까지 준비했다는 소문이 한때 나돌았으나 경찰수사결과 일부 원생이 이불을 쌓아두고 그 위에 화장품으로 사용하는 오일을 뿌린 것으로 확인. ○…경기도지방경찰청이 지난 93년말 이번에 사고가 난 경기도여자기술학원에 대한 전면수사에 착수했다가 아무 이유없이 도중에 내사종결처리한 것으로 밝혀져 그 이유를 놓고설왕설래.경찰은 당시 가혹행위가 많고 운영비사용에 문제가 많다는 투서를 잇달아 접수하고 수사에 착수했으나 얼마 뒤 아무 성과없이 내사종결처리한 것.당시 수사에 참여한 한 경찰관은 『경기도여자기술학원이 종교재단에서 운영하는데다 너무 고압적으로 나와 제대로 수사가 진행되지 않았다』고 전언. ○…사건직후 용인경찰서에 연행돼 이틀째 조사를 받고 있는 원생들은 처음에는 한결같이 긴장된 모습으로 방화행위나 사전공모사실을 완강히 부인했으나 자신들의 방화로 많은 인명피해가 났다는 수사관들의 말을 듣고 울음을 터뜨리면서 범행일체를 순순히 자백.37명의 동료원생이 죽음을 당했다는 말을 듣고 방화를 주동한 한 원생은 『우리처럼 조금만 빨리 뛰어나왔으면 살 수 있었을 텐데』라고 울먹이며 뜻하지 않은 참변이 믿기지 않는 듯한 모습. ○…주동자로 밝혀져 사법처리된 16명의 원생 가운데는 일란성 쌍둥이도 끼어 있어 수사관들을 안타깝게 하기도 했다.이 자매는 한사코 가담사실을 부인하다 약속이나 한 듯 동시에 뉘우치는 표정으로범행을 시인했다는 후문. 이번 수사에는 사건성격상 경기지방경찰청 소속 무술여경 48명이 전격동원돼 톡톡히 한몫.이들은 주로 원생들을 설득하거나 상담을 맡으며 화장실을 일일이 따라다니며 도주나 자해 등 만일의 사태에 대비. ○…부상을 입고 입원한 원생은 대부분 당시의 참혹한 기억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악몽에 시달리는 모습.사고직후 인근 동수원병원 응급실로 옮겨졌다가 이날 의식을 회복한 윤모양(16)은 옆침대에서 아직 정신을 잃고 누워 있는 원모양(17)을 바라보며 『잠을 자고 있는데 언니가 막 깨우면서 불이 났다고 빨리 밖으로 나가자고 해 달려나오다 의식을 잃었는데 이렇게 나만 깨어나고』라며 울먹이는 모습. 원양은 지난 19일 같은 원생 5명과 함께 식당 뒤 철조망을 넘어 달아나다 경비원에게 붙잡힌 뒤 「1개월교육연장」의 중징계를 받아 이번 방화사건의 도화선을 제공한 당사자.그러나 당시 함께 붙잡힌 5명의 원생은 모두 2층 화장실에서 질식사한 채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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