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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 책을 말한다]2000년간 검증된 동양 지혜의 정수

    지구상에서 가장 많이 읽히는 책은 성경이라고 단언해도 좋다. 그렇다면 가장 많이 읽히는 고전은 뭘까 하는 의문도 가질 수 있을 것 같다. 서양에서는 조사를 좀 해봐야 하겠으나 적어도 동양에서는 ‘사기(史記)’나 ‘삼국지(三國志)’가 아닐까. 동양의 인구가 서양보다 훨씬 많으니 결과적으로 이 두 고전을 지구촌에서 가장 많이 읽히는 책으로 꼽아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실제로 13억 인구를 자랑하는 중국에서도 이 두 권이 가장 많이 읽히는 고전으로 손꼽힌다. 막강한 권력과 금력을 갖고 있거나 유명하다고 반드시 훌륭한 사람이 아닌 것처럼 많이 읽혔다고 좋은 책이라는 법은 없다. 그러나 두 고전은 그렇지 않다. 이미 2000여년 가까운 세월 동안 검증을 받았다. 먼저 사기의 경우 중국의 대문호 루쉰(迅)이 일찍이 “역사가가 부른 만고에 빛날 노래, 운율 없는 이소(離騷·초나라 시인 굴원의 대표 시)이다.”라고 찬탄했을 정도다. 여기에 저자 사마천(司馬遷)이 한(漢) 무제(武帝)에 의해 남성을 거세당한 후 피를 토하면서 평생 동안 쓴 ‘필생의 서’라는 사실까지 더할 경우 글줄깨나 읽었다는 사람이 이 책을 읽지 않았다는 것은 저자에 대한 모독일 수도 있다. 더구나 재미와 교훈, 감동까지 껴안은 이 고전은 교양인의 필독서라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다. 삼국지는 구구한 설명이 필요 없을 것 같다. 진수(陳壽)의 원전뿐 아니라 이를 토대로 쓴 소설 삼국연의의 판본만 해도 수십 종에 이를 정도니까. 최근에는 인터넷 게임이나 영화의 소재로도 활용되고 있으므로 시쳇말로 수많은 사람들의 고용 창출에도 도움을 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원래 지존은 둘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래서 대체로 거의 모든 분야에서 누가 지존인지 승부를 가리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고전의 세계에서는 이런 극단적인 이분법이 별로 통하지 않을 수도 있다. 다들 그 자체로 나름의 가치가 대단하기 때문이다. 요즘 중국에서 한창 주가를 올리는 전통문화 연구가인 밍더(明德) 역시 이런 점을 잘 알고 있는 작가가 아닐까. 아예 이런 사실을 깊이 자각하고 두 고전을 하나로 묶어 이 책 ‘왼손에는 사기, 오른손에는 삼국지를 들어라’(홍순도 옮김, 김영수 감수, 더숲 펴냄)를 출간하는 세계 최초의 시도를 한 것을 보면 분명 그렇다고 해야 할 듯하다. 이 책은 순수 학술서는 아니다. 아쉽게도 두 고전의 모든 내용을 완벽하게 다루고 있지도 않다. 그러나 두 고전에서 보편적이면서도 핵심적인 성공과 처세의 지혜, 세상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담은 이야기들만 골라내 독자들에게 시너지 효과를 주려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평가해줄 만한 책이라고 단언할 수 있지 않을까. 사기 연구의 국내 최고 권위자인 김영수 교수의 정성 어린 감수도 이 책을 빛나게 하는 요인이다. 2만 2000원. 홍순도 번역가
  • “기업 살아남으려면 유교윤리로 무장해야”

    “기업 살아남으려면 유교윤리로 무장해야”

    “자본주의의 위기에서 살아남으려면 기업은 유교 윤리로 무장해야 합니다.” 미국 매사추세츠대의 에드워드 로마르(61·비교경영윤리) 교수는 지난달 28일 두 번째로 한국을 찾았다. 지난달 29일부터 오는 25일까지 서울 명륜동 성균관대에서 열리는 국제하계대학(서머스쿨)에서 ‘세계화의 윤리’를 주제로 강의하기 위해서다. 16년 동안 IBM사의 마케팅 담당자였던 로마르 교수는 동양윤리사상과 경영학의 접목을 주장해왔다. ●관계지향적 유교윤리가 조직 화합 일궈 로메르 교수는 14일 성대 명륜캠퍼스 국제관에서 기자와 만나 “현대기업들이 지속가능한 발전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유교적 윤리관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로마르 교수는 유교철학이 가진 특유의 관계 지향성에 주목하면서 이 때문에 유학사상이 기업윤리로 적합하다고 말했다. 그는 “한자어 중 부모(父母), 형제(兄弟) 등 관계를 나타내는 것이 유독 많은데 이는 동양인들이 인간관계를 중시한다는 증거”라면서 “관계지향적인 유교윤리를 기업의 도덕규범으로 활용할 경우 개인주의적 성향을 극복할 수 있고 조직 화합을 일궈낼 수 있다.”고 말했다. 기독교윤리를 비롯한 서양철학은 절대자의 기준에서 선악을 구분해 악을 배타적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강하다. 하지만 관계를 중시하는 유교 윤리관은 개인을 이분법적으로 판단하지 않아 개인과 조직 갈등을 쉽게 풀 수 있도록 돕는다는 것이 로마르 교수의 설명이다. 그는 학습을 통한 지식습득을 강조하고 있는 유교적 가치관에도 주목했다. ‘배우고 때로 익히면 기쁘지 않겠는가.’(學而時習之 不亦說乎)라는 논어구절을 인용한 그는 “기업의 지속적 발전을 위해선 구성원들이 직무지식과 도덕지식을 끊임없이 재교육받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자신이 일했던 IBM사의 3대 지향점이 ‘지식’, ‘존경’, ‘인간에 대한 서비스’였다고 소개하면서 “서양기업이지만 유교적 가치관을 바탕으로 조직을 운영하다보니 조직원간의 융화가 잘 이뤄질 수 있었다.”고 말했다. ●사람에 대한 탐구없이 좋은 경영자 못돼 그는 마지막으로 “한국 학생들이 실용학문에만 관심을 쏟고 인문학은 쓸모없는 학문이라고 여긴다고 들어 매우 안타깝다.”면서 “‘경영은 인간에 관한 것’이라는 피터 드러커의 말처럼 사람에 대한 탐구 없이는 좋은 경영자가 될 수 없다.”고 충고했다. 유대근기자 dynamic@seoul.co.kr
  • 과학기술학 관점으로 근대 세계 재해석

    프랑스 석학 브뤼노 라투르 파리정치대학교수는 가장 독창적인 과학기술학자 중 한 사람이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과학기술자’가 아닌 ‘과학기술학자’라는 것. 과학 이론이나 기술 자체를 연구하는 게 아니라 과학기술이 어떻게 사회와 정치에 영향을 미치는지를 분석한다.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홍철기 옮김, 갈무리 펴냄)는 1991년 출간 이래 24개국에 번역된 라투르의 대표작이다. 근대사상의 영역에 과학기술학의 관점을 적용해 사회와 과학, 기술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재검토하는 이 책은 라투르 사상의 입문서이기도 하다. 제목만 보면 탈근대주의자의 무수한 근대성 비판서와 한 묶음으로 여기기 쉽다. 하지만 라투르는 근대성이 지닌 보편적 합리성의 한계와 그로 인한 폭력성을 비판하는 탈근대주의와 궤도를 달리한다. 탈근대주의는 근대성의 개념을 공유한 상태에서 근대인을 비판하지만 라투르는 근대성과 근대인에 대한 이해를 전혀 새로운 시각에서 제시한다. 이를테면 근대인은 사실과 가치, 주체와 대상, 자연과 사회, 야만과 문명을 엄격하게 구분했고, 이것이 그들을 전근대인과 구분시켜 주는 본질이라고 생각했다. 라투르는 그러나 실제로 근대인들은 자연과 사회, 과학과 문화, 지식과 이익이 구분될 수 없게 뒤얽힌 비인간적 사물인 하이브리드를 엄청난 규모로 증식했다고 주장한다. 근대성이 태동하던 17세기 영국에서 토머스 홉스와 로버트 보일이 진공 펌프를 둘러싸고 벌인 논쟁을 시작으로 오존층 파괴, 에이즈, 유전자 변형식품에 이르기까지 과학과 정치, 기술과 사회는 언제나 이 하이브리드에 의해 연결되어 있다고 본다. 문제는 근대인이 자신이 창조한 하이브리드 이해하기를 거부했다는 것이다. 과학논쟁은 근대적 이분법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과학과 기술이 사회적 이익이나 권력에 의해 구성된다는 ‘근대 구성주의´와 자연적 사실은 사회나 문화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는 ‘과학적 실재론’이 팽팽한 대립각을 세워 왔다. 라투르는 이같은 이분법을 근대성의 비대칭성이라고 정의한다. 그리고 이론과 실제가 달랐던 ‘언행의 불일치’를 근대인의 딜레마로 꼽았다. 라투르는 이런 이유로 “근대성은 시작조차 하지 않았고, 근대 세계는 존재한 적도 없으며, 누구도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고 주장한다. 문제 해결은 비대칭성을 교정하는 것이다. 라투르는 과학과 기술에 대한 인류학적 연구를 그 방법으로 제시한다. 계몽주의 자체를 반대하는 반근대적 전통주의나 냉소적인 탈근대주의와는 입장이 다른 것으로, 라투르는 이를 비근대적 계몽주의라고 부른다. 핵심에는 근대인의 본질인 하이브리드에 대한 이해가 있다. 하이브리드를 이해해야만 사회와 자연, 정치와 과학을 보다 잘 이해할 수 있고, 현재의 정치사회적 위기와 환경기술적 위기라는 이중의 위기에 대처할 수 있다고 라투르는 강조한다. 2만 5000원.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서울광장] 실패한 역사에서 길을 찾는다/오일만 논설위원

    [서울광장] 실패한 역사에서 길을 찾는다/오일만 논설위원

    현실과 이상 사이에는 늘 괴리가 있기 마련이다. 국가정책의 집행에서도 정책의 취지와 현실이 늘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정책에 내재된 현실적 이해 관계가 얽혀 있어 상황은 복잡해진다. 이념적 색채까지 보태지면 정책의 본질과 국익보다는 당파 이기주의가 부각된다. 역사를 돌아 보면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국론이 분열되고 나라를 어렵게 하는 정책이 적지 않았다. 비정규직 파동을 지켜 보면서 떠오른 것이 11세기 후반 북송조(北宋朝)의 신법·구법 논쟁이다. 중국 역사상 가장 격렬했던 논쟁 가운데 하나다. 고갈된 재정난 타개를 위해 농민과 소상인들을 보호하고 육성하려던 왕안석(王安石·1021∼1086)의 신법은 지주·관료·종친 등 구법파들의 이익과 정면 충돌한다. 피비린내 나는 신·구파의 권력투쟁으로 이어지면서 1127년 북송 멸망의 원인을 제공했다. 후세 역사가들은 “신법의 이상은 높으나 현실의 벽을 넘기가 어려웠다.”고 평했다. 신·구법 싸움에서 간과할수 없는 교훈은 정책집행의 일관성 문제다. 조선조의 사색 당파처럼 재상(국무총리격)이 속한 정파에 따라 신법이 폐기됐다 부활하는 일이 반복됐다. 정책을 집행하는 관료들은 다음 정권의 향배를 살피면서 적당히 처신하는 풍토가 만연했다. 법 집행에 활기가 떨어졌고 신법은 실패로 돌아갔다. 우리의 노동정책도 이런 전철을 밟고 있지나 않은지 우려된다. 노동부는 참여정부가 제정한 비정규직 법안 시행과 후속 조치에 소극적인 자세를 보였다는 비난에 직면해 있다. 이영희 노동부 장관은 취임 직후부터 노동시장 유연성을 강조해 왔다. 이 장관의 이런 철학이 노동부의 소극대응으로 이어지고 문제를 더욱 악화시킨 측면이 있다. 더욱 중요한 문제는 우리 사회의 이분법적 정치 문화를 고려할 때 정권이 바뀔 때마다 국가정책이 오락가락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반면 성공한 정책은 분명 이유가 있다. 시대정신을 관통하는 민심의 지지와 실천 가능한 현실성, 그리고 효율적인 정책집행이 삼위일체가 돼야 한다. 중국의 개혁·개방 정책을 보자. 극좌 노선인 문화 대혁명의 광기가 휩쓴 직후라 실용노선에 대한 인민들의 광범위한 지지가 있었다. 덩샤오핑(鄧小平)이라는 지도자의 전략·전술도 탁월했다. 무엇보다 일관성있게 정책을 집행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반면 1958년에 시작된 대약진 운동은 철저한 실패작이다. 마오쩌둥(毛澤東)의 조급증이 문제였다. 15년 안에 영국의 강철 생산량을 따라잡는다는 목표는 애초부터 무리였다. 현실성이 결여됐고 의욕이 앞섰다. 2004년 3월에 제정된 ‘성매매 방지법’ 역시 이상이 현실을 앞지른 사례가 될 것이다. 성 충동이 인간의 본능인 이상 매매춘을 법으로 근절하기는 어렵다. 시행 5년을 맞아 성매매 시장은 더욱 음습해졌고 사회적 비용은 폭증했다. 20세기 초 미국의 금주법 역시 종교적 이상을 법률로 강제했지만 ‘알코올의 욕구’를 어찌 막을 수 있겠는가. 비정규직 문제 역시 이상과 현실의 해법이 혼재됐고 한국적 모순과 갈등이 얽히고 설킨 사안이다. 여당은 당장의 해고사태 방지와 노동시장 유연성이라는 현실에 초점을 맞췄고 야당은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라는 근원적 해법을 중시하고 있다. 비정규직법이 당파적 이익이 아닌 성공한 정책이 되기 위해선 여야 모두 역사가 남긴 실패의 교훈을 곱씹을 필요가 있다. 오일만 논설위원 oilman@seoul.co.kr
  • [공연리뷰] 뮤지컬 ‘스프링 어웨이크닝’

    완벽한 절망으로 닫힐 듯하던 무대는 마지막 순간 실낱 같은 희망의 틈새를 열어 두었다. 성적을 비관해 자살한 모리츠, 낙태수술을 받다 숨진 벤들라의 무덤 앞에서 이 모든 비극의 원인 제공자인 멜키어는 끝내 죽음의 유혹을 떨치고 일어선다. 자신들을 절벽끝으로 몰아붙인 기성 사회와는 다른 새로운 세상을 만들겠노라 다짐하면서. 10대 청소년들의 욕망과 절망을 이토록 과감하고 격정적으로 드러낸 무대가 또 있을까. 뮤지컬 ‘스프링 어웨이크닝’은 누구나 경험했고, 익히 알고 있지만 감히 입밖으로 꺼내지 못했던 것들을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 임신과 낙태, 자살, 동성애 등 감추고 싶고, 부정하고 싶은 것일수록 더욱 환한 조명아래 노출시키는 대범함은 이 작품이 왜 도발적이고, 파격적인 뮤지컬로 불리는지를 입증한다. ‘스프링 어웨이크닝’은 명확한 이분법적 대립구조를 바탕으로 한다. 권위와 억압으로 무조건적인 복종을 강요하는 기성 세대와 사춘기의 충동과 열정에 사로잡힌 청소년들. ‘어른도 아이도 아닌 몸’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성에 대한 호기심은 어른들의 무지와 무관심에 의해 왜곡되고, 그로 인한 피해는 고스란히 아이들의 몫으로 남겨진다. 성애 묘사와 노출신은 예상만큼 충격적이진 않다. 단순히 호기심을 자극하기 위한 장면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령 줄에 매달린 이동 무대에서 불안하게 이뤄지는 벤들라와 멜키어의 성애 장면은 줄타기하듯 위태로운 그들의 심리를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오히려 교복 품안에서 마이크를 꺼내 세상을 향해 절규하듯 노래를 부르고, 있는 힘껏 발을 구르며 내면의 분노를 날 것 그대로 보여 주는 장면이 기성세대에겐 더 심리적인 충격일 수 있다. 김무열(멜키어)과 조정석(모리츠), 김유영(벤들라) 등 주연 배우들에게선 잠재적 기량이 엿보였지만 캐릭터에 완전히 몰입하려면 좀더 시간이 필요해 보인다. 2010년1월10일까지 두산아트센터 연강홀. (02)744-4337.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간이역에 담긴 추억과 역사

    간이역에 담긴 추억과 역사

    고속철도보다는 무궁화호 같은 소박한 기차가 좋다. 투박한 기차의 진동 소리를 곁들이며 다소 느린 속도로 창밖 풍경을 만끽한 뒤에 비로소 자그만한 간이역에 도달한다. 인적 드문 시골에 홀로 덩그러니 서 있는 간이역은 아스라한 추억과 낭만, 서정성의 상징이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일제강점기 수탈의 아픔과 맞닿는다. 한반도 철도산업의 시작으로 만들어진 간이역은 물자 약탈과 젊은이들의 징용, 노동력 착취의 수단일 뿐이다. ●하고사리역 등 23개 문화재 등록 간이역은 이렇게 ‘서정적 대상’이기도 하고, ‘수탈의 아픔’이기도 하다. 임석재 이화여대 건축과 교수는 “간이역이 서정적이라면 왜 서정적인지 좀 더 객관적이고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수탈의 근거라면 이 역시 건축적으로 증거가 나타나게 돼 있다.”면서 이분법적 태도에서 벗어나 간이역을 바라본다. 1910년대 간이역이 처음 들어선 뒤 남한에는 모두 100여개의 간이역이 지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은 40여개. 2007년에 문화재로 등록된 강원도 삼척 하고사리역을 포함해 23개가 등록문화재이다. 이 중 임 교수는 2006년 7월까지 직접 찾아가고 사진기에 담은 16개 간이역의 건축적 특징과 역사를 ‘한국의 간이역’(인물과사상사 펴냄)에서 소개한다. ●한국형·산간형·바닷가형으로 변화 보통 간이역이라고 하면 직사각형에 삼각형을 하나 얹은 모양을 떠올린다. 그러나 임 교수는 “간이역들에서 관찰되는 차이나 변화는 간이역이라는 이름 하나로 뭉뚱그려 넘겨버릴 일이 아니다. 박공(지붕과 벽을 이루는 삼각형 단면의 모서리), 차양, 구성, 비례감 등에서 똑같은 것은 하나 없을 정도로 차이가 매우 크다.”고 설명한다. 1914년 지어진 전북 익산의 춘포역과 군산의 임피역을 섞으면 간이역의 표준설계가 나온다. 큰 육면체에 지붕을 얹은 단순한 형태는 수직비례이다. 김제·만경 평야의 수평 구조와 대조를 이룬다. 일본이 농촌지역을 제압하려는 의도로 볼 수도 있다. 지붕과 차양을 이루는 두 겹으로 된 지붕은 일본식 건축이지만 다목적 공간으로 차양의 쓰임새는 한옥에 가깝다. 차양은 맞이방(대기실)이 좁으면 노천 대기공간으로 쓰이고, 승강장을 통과하는 곳으로 미리 큰 짐을 내놓거나 궂은 날씨에 눈과 비를 피하며 우산을 펼 시간을 벌어주는 배려있는 장소이다. ●일산역 할머니품·율촌역 어머니상 모습 이런 표준설계를 반복하면서 간이역들은 한국형, 산간형, 도심형, 바닷가형으로 변화한다.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아 쉬고 있는 모습의 수평적 구도를 가진 원창·율촌·일산역 등은 한국형이다. 도경리·심천·반곡역 등은 수직선이 두드러진 산간형, 신촌·화랑대·동촌역 등은 커다란 박공으로 큰머리를 하나 단 듯한 도심형이다. 진해·남창·송정역 등은 지붕 장식, 창문 등을 흥겹게 변형시킨 바닷가형으로 꼽힌다. 책은 초반에 건축적 지식을 풀어내며 시작해 다소 딱딱한 느낌이다. 그러나 가면 갈수록 경쾌하고 홀가분하게 간이역 여행을 떠난다. 춘포역과 임피역은 젊은이의 골격과 기개를 닮은 군인의 모습, 가은·원창·율촌역은 반듯하게 앉아 바느질하며 엄하게 자식을 교육하는 어머니상, 일산역은 할머니의 품 같다면서 재미를 더한다. 1만 7000원. 최여경기자 kid@seoul.co.kr
  • 이란 민병대, 시위대에 총격 7명 사망

    이란 대선의 후폭풍이 유혈사태로 옮아가고 있다. 15일(현지시간) 시위대 7명이 테헤란 자유광장에서 민병대의 총격으로 사망했다. 그러자 시위대가 16일 오후 5시 테헤란 도심의 발리에아스르 거리에서 대규모 시위를 하겠다고 밝히면서 풀뿌리 시민에서 유력 정치인들까지 아우른 오랜 체제불만이 격화되는 양상이다. 전날처럼 수십만명이 도심을 에워싼다면 1979년 이슬람혁명 이후 가장 큰 규모의 반정부 시위로 번지며 혼란정국을 틀어쥐려는 정부당국에 직접적 ‘도전’이 될 것이라고 로이터통신이 16일 보도했다.●캠퍼스에도 난입해 학생에 총격미르 호세인 무사비 후보의 지지자 100만명은 4일째 테헤란 혁명광장 등을 행진하며 ‘도둑맞은 선거’를 규탄했다. 시위대가 외치는 “우리는 싸운다, 그리고 죽는다.”라는 구호처럼 사상자도 속출하고 있다. 현지 파얌 라디오는 16일 테헤란의 자유광장 인근에서 한 무리의 시위대가 민병대기지를 공격하려다 7명이 숨지고 여러 명이 부상하는 사고가 발생했다고 보도했다. ●무사비 후보 “어떤 대가도 치를 것” 영국 인디펜던트는 이란 혁명수비대의 준군사조직인 바시지 대원들이 테헤란대 캠퍼스에 난입, 5~7명을 총격 살해했다는 학생들의 증언을 전했다. 이란 보안군은 경찰에 돌을 던지는 시위대를 곤봉으로 진압하고 공중에 발포하기도 했다. 이날 정부의 시위 불허를 무시하고 군중을 이끈 무사비 후보는 “어떤 대가도 치를 것”이라며 결연한 의지를 내보였다. BBC방송은 “이란사회의 갈등은 개혁파 대 보수파의 이분법적 구도를 뛰어넘어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의 군사주의와 포퓰리즘 노선에 함께 반대하는 양상”이라고 분석했다.시위가 격화되자 정부의 계엄령 선포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리처드 불리엣 미 컬럼비아대 중동연구소 역사학 교수는 부정선거 조사에 나선 혁명수호위원회가 대선 결과를 승인한 뒤에도 시위가 이어질 경우 “최고지도자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가 계엄령과 통행금지령을 선포, 강경 대응에 나설 수 있다.”고 우려했다.●오바마 진퇴양난이란과의 관계경색을 우려해 이란 대선에 대해 직접적인 언급을 피하던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도 15일 폭력사태에 깊은 우려를 표하며 처음 입을 열었다. 오바마 대통령은 “이란의 지도자가 누가 될지는 이란인들의 결정에 달린 일”이라며 “미국은 이란의 주권을 존중하고 이란 내부 문제에 간섭을 피할 것”이라고 밝혔다. 또 핵프로그램 등 양국간 ‘직접적이고 강력한 대화’를 추진할 뜻도 나타냈다. 그러나 이번 사태로 오바마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진퇴양난에 빠졌다. 강한 비판은 역풍으로 작용할 수 있고 미온적인 반응은 유약한 인상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백악관은 승산이 없는 상황에 놓여 있지만, 미국의 관점을 주입하는 것보단 뒤로 물러나 있는 게 최선의 선택”이라고 입을 모았다. 반대로 공화당 등 국내에서는 그의 유화책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며 강경대응을 촉구하고 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아마디네자드의 재선으로 이란과의 핵협상은 더 어려워졌으며, 부정선거 의혹으로 그의 입지가 대선 전보다 약해져 적극적인 협상의 길도 차단됐다고 위기론을 더했다.정서린기자 rin@seoul.co.kr
  • [씨줄날줄] 초식남/함혜리논설위원

    일반적으로 ‘남성다움’을 이야기할 때 초식동물보다는 공격적이고 전투적인 육식동물에 비유하곤 한다. 그런데 요즘 일본에서는 ‘초식남’이라는 돌연변이가 나타나 고전적인 개념을 뒤흔들고 있다. 일본 30대 미혼남성 400명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 자신이 초식남이라고 생각하는 남성이 무려 74%에 달할 정도다. ‘초식남의 연애학’(모리오카 마사히로), ‘초식남, 여성화된 남자가 일본을 바꾼다’(우시쿠보 메구미) 등 관련 서적들이 쏟아지고 초식남을 주인공으로 한 TV드라마 ‘공카쓰’가 인기를 끌었다. 소비자에게 정보와 안락함을 제공하는 초식성 기업도 등장했다.  초식남은 일본어로 소쇼쿠케이단시(草食系男子)의 줄임말로 공격적이지 않고 온순하며 자기애가 강한 20∼30대의 남성을 일컫는다. 조직을 위해 자기 희생을 서슴지 않는 일중독 샐러리맨으로 대표되는 전통적인 가부장적 일본 남성에서 한참 동떨어진 셈이다. 초식남의 특성 몇 가지를 들어보면 이렇다. 연애나 섹스에 거부감을 갖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적극적인 것도 아니다. 여성을 단순한 이성으로 보지 않고 동등한 인격체로 존중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술집보다는 카페를 주로 찾고 패션이나 미용에 관심이 많다. 연애보다는 독신생활을 즐긴다. 경쟁을 싫어하고 대인관계에 소극적이다. 심한 경우 자신이 남자라는 의식조차 없어 앉아서 소변을 보거나 브래지어를 착용해야 안심하기도 한다.  일본에서 초식남이 늘어나는 이유는 뭘까? 초식남이라는 용어를 2006년 처음으로 사용해 화제를 일으킨 여성 컬럼니스트 후카사와 마키는 이들이 물질적으로 풍요한 세대에 태어나 치열하게 살 필요가 없었다는 점, 버블경제와 장기적인 경기침체기에 성장해 미래에 대한 환상이 없었던 점을 꼽았다. 이론의 여지가 있지만 또 다른 중요한 이유가 있다. 초식남이 늘어난 것은 높은 추진력과 책임감, 성공목표가 확고한 ‘육식성 여자’가 많아지고 있다는 것의 방증일 수 있다. 여성들의 경제적 능력과 지위가 향상되면서 남성들은 여성을 더이상 성, 연애, 결혼의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 어쨌든 여성성과 남성성이라는 이분법적 구분은 급격하게 허물어지고 있다. 진화론자들은 이를 어떻게 볼지 궁금하다. 함혜리논설위원 lotus@seoul.co.kr
  • 민주 ‘丁-李 투톱체제’로

    ‘바람 잘 날 없던’ 민주당이 바뀌었다. 당권을 놓고 주류와 비주류가 사사건건 다른 목소리를 내던 모습이 잦아들었다. 민주당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를 계기로 내부의 골을 메우고, 한 목소리를 내기 위한 소통 창구를 넓히고 있는 것이다. 투톱 체제로의 변신이 대표적이다. 그동안 민주당은 당헌·당규에 따라 당 대표에게 권력을 집중하는 원톱체제로 운영돼 왔다. 하지만 최근 정세균 대표는 원내 운영권을 이강래 원내대표에게 넘겼다. 친노 386 중심의 주류가 장악하던 당권을 비주류 대표주자인 이 원내대표에게 나눠주면서 자연스레 비주류의 참여 폭도 넓어졌다. 2일 원내대책회의에 원내대표단 말고도 중진의원들을 대거 참석시킨 것도 이례적인 일이다. 주류와 비주류가 이견을 보이던 뉴 민주당 플랜 입안 작업은 비주류의 요구대로 우선 순위에서 밀렸다. 당초 이달 중 최종안을 확정하려던 정 대표가 “6월 임시국회를 앞두고 당력을 집중해야 한다.”는 비주류의 목소리를 수용한 것이다. 당 관계자는 “사실상 투톱체제로의 변화가 주류와 비주류라는 이분법을 허물고 있다.”고 전했다. 계파간 목소리의 공백은 여권에 대한 강경 대응으로 채워지고 있다. 민주당은 전날 김경한 법무부장관 등 수사책임 라인의 경질을 요구한 데 이어 이날 원내대책회의에선 ‘내각 총사퇴’를 요구했다. 민주당의 변신은 진보진영 결집을 통해 노 전 대통령의 서거 이후 정국을 풀어가야 한다는 인식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친노 핵심인사들을 영입하기 위한 사전 정비 작업이라는 성격도 짙다. 열린우리당을 해체하고 참여정부 말기 ‘노무현’을 부정하려 했던 멍에를 벗기 위해선 이해찬 전 국무총리,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 등의 영입이 절실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당 관계자는 “당내 갈등부터 갈무리해야 한다는 자성이 당내에서 공감대를 얻고 있다.”면서 “민심이 노 전 대통령의 적통 역할을 민주당에 부여하고 있는데, 당 안에서 접시 깨는 소릴 낼 순 없지 않느냐.”고 말했다. 정치컨설팅업체 포스의 이경헌 대표는 “노 전 대통령 서거를 계기로 민주당이 최대 목표인 정국 주도권 탈환을 위해 역할 분담에 나선 것으로 풀이된다.”면서 “민주당의 변신이 친노와 공동의 진로와 비전으로 승화될지가 향후 정국에 큰 전환점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는 “뉴 민주당 플랜도 ‘노무현 정신’이나 참여정부의 공과를 승계하는 것과 함께 맞물려 가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홍성규기자 cool@seoul.co.kr
  • 주민번호 뒷자리 2xxxxxx→1xxxxxx 로 가는 여정, 그 일상

    주민번호 뒷자리 2xxxxxx→1xxxxxx 로 가는 여정, 그 일상

    “난 남자야, 그냥 다른 남자.” 다큐멘터리 영화 ‘3xFTM(쓰리 에프티엠)’이 새달 4일 개봉한다. 포스터의 글귀대로 영화는 ‘다른 남자’ 3명의 일상을 기록한 작품이다. 다른 남자? 그러니까, 이들은 통상적인 ‘남·여’의 이분법적 인식에서 살짝 비껴서 있다. 모두 생물학적 여성으로 태어났지만 남성으로 살기를 원한다. 눈치챘겠지만 FTM은 ‘여자에서 남자로(female to male)’의 영어 약자이다. 법적 성별을 남성으로 바꾸고 싶어하지만, 주민등록번호 뒷자리를 ‘2’에서 ‘1’로 바꾸기까지 그리고 바꾼 뒤에도 넘어야 할 산이 적지 않다. 영화는 이들의 성전환 배경과 과정, 사회적 편견으로 인한 상처와 극복 여정을 속깊은 친구와의 대화처럼 조근조근 들려준다. ●“누군가 한사람은 나서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성전환남성(FTM)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 자체가 아예 없잖아요? 그건 존재 자체를 모르는 거고, 그만큼 FTM에 대한 한국사회의 차별과 억압이 심하다는 것을 말해주죠. 이 다큐는 FTM에 대한 이해를 넓히기 위한 일종의 시작점 같은 영화예요.” 개봉을 앞두고 얼마 전 서울 중구 한 카페에서 만난 김일란 감독은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두 주인공 김명진, 한무지(이상 가명)씨도 함께 한 자리였다. 감독의 말처럼 ‘3xFTM’은 FTM에 관한 국내 첫 다큐멘터리 영화이다. 그동안 성전환여성(MTF·male to female)에 관해서는 연예인 하리수, 영화 ‘천하장사 마돈나’와 ‘언/고잉 홈’ 등을 통해 어느 정도 대중적으로 알려졌지만, FTM은 예술 영역에서도 거의 사각지대에 머물러 있던 것이 사실이다. “누군가 한 사람은 나서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성전환남성도 똑같은 사람이란 이야기를 하고 싶었죠”(김명진) 영화는 이들이 겪는 열악한 삶의 조건을 잘 드러낸다. 김씨는 2006년 호적상 성별을 바꾸었다. 호르몬 치료만 한 상태였지만, 건강이 안 좋아 수술 받기 힘든 몸이란 병원 진단서를 일일이 제출해내서 이뤄낸 일이었다. 이후 징병검사를 받아야 했던 그는 성별변경 관련 증거서류에도 불구하고 “육안으로 확인해야 한다.”는 요구에 신체검사에서 바지를 내려야 했다. 이에 대해 국가인권위원회에 제소한 결과 성전환자에 대한 징병신체검사 개정을 이끌어냈지만, 손해배상소송은 1심에서 패소해 현재 항소 중이다. 이게 끝이 아니었다. 입사를 위해 ‘여자중학교’, ‘여자고등학교’에서 ‘여자’자만 지워 이력서를 써낸 그는 얼마 뒤 회사측으로부터 고소를 당했다. 다행히 무혐의 판정으로 끝났지만, 이미 잘린 뒤였다. 다시 들어갔던 대기업에서도 6개월만에 같은 이유로 명예퇴직을 당했다. 요즘 싸우고 있는 대상은 국민건강보험공단이다. “남자로서 가슴, 자궁을 지닌 것은 장애와 같다.”며 성전환수술에 대한 보험 적용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성전환수술 보험 안 되고 부작용 위험 커 한씨는 가슴 절제수술에 이어 최근 자궁 적출수술을 했다. 하지만 성별변경까지는 아직 요원하다. 성별변경을 위해서는 대법원 예규에 따라 성기수술도 해야하지만, 비용이 엄청난데다 부작용의 위험성마저 크다. 영화 속에서 “여성이라 말하고 합격했다. 연봉 2800만원에 내 영혼을 팔았다.”며 절규했던 회사에는 끝내 입사하지 않았다. ‘3xFTM’은 성적소수문화 환경을 위한 모임 ‘연분홍치마’가 기획한 커밍아웃 3부작 중 하나다. 이후로 정치인 최현숙씨의 이야기를 담은 ‘레즈비언 정치도전기(홍지유·한영희 감독)’, 4명의 남성 동성애자들을 다룬 ‘종로의 기적(이혁상 감독)’이 계속될 예정. ‘3xFTM’은 김 감독에겐 기지촌 다큐멘터리 ‘마마상’(2005년)을 잇는 두 번째 작품이기도 하다. 그는 지난 2006년 ‘성전환자 성별 변경 관련법 제정을 위한 공동연대’에 참여하면서 주인공들을 만났고, 그해 가을쯤 활동 성과를 정리하기 위한 차원으로 다큐멘터리를 기획하면서 이들에게 출연을 제의하게 됐다. ‘3xFTM’을 찍는 과정은 녹록지는 않았다. 주인공들은 심적 부담감 때문에 촬영 도중 한번씩 다 ‘잠수’를 타기도 했다. 하지만 몇 개월 안 가 스스로 돌아왔다. 김명진씨는 “감독님이 그러더라고요. ‘네가 이 다큐의 끝에서 얻을 수 있는 게 하나라도 있다면 좋겠는데, 잃는 것만 있으면 지금 와서 그만둬도 너를 잡지 않겠다.’고요.”라고 회상했다. 조바심 낼 법도 했지만, 감독은 별로 걱정하지 않았단다. “이 다큐에 응할 정도의 사람이면 쉽게 포기할 수 없을 거라고 봤어요. 제가 끌어들인 것도 있지만, 각자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참여한 거라고 봤죠. 그들의 ‘자기 동기’를 믿고 기다렸어요.” 지난해 4월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첫선을 보인 영화는 이후 다수의 국내외 영화제에 초청을 받는 것은 물론 2008년 서울독립영화제 우수작품상, 여성영화인모임 다큐·단편 부분 여성영화인상 등을 수상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소규모 상영을 예상하고 만들었던 영화가 일반 극장에까지 걸리게 된 건 관객의 힘이 컸다. 한무지씨는 “FTM에 대한 좋은 이미지가 생겼다는 얘기를 많이 해주시더라고요. 용기를 많이 얻었어요.”라고 고마워했다. ●“관객에 대한 믿음으로 개봉 용기내” 영화에서 “난 엄마 뱃속에서부터 남자”라고 했던 또 한명의 주인공 고종우(가명) 씨는 이날 아쉽게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매체 인터뷰에 대한 부담감과 아웃팅(타인에 의해 성적소수자들의 정체성이 알려지는 일)에 대한 두려움 때문인 듯했다. 김씨와 한씨도 마찬가지 심정이지만, 관객을 믿는다고 했다.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함부로 아웃팅하지 않을 거라고 믿어요. 다만, 우리 모습이 또다른 선입견을 심어주지 않을까 걱정되긴 해요. 우리 외에도 정말 많은 FTM들이 있으니까요. 이 다큐가 일상에서 만나게 되는 FTM들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데 작은 도움이라도 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한무지) “영화 카피처럼 우린 그냥 ‘다른 남자’일 뿐이에요. 예전에 여자였기 때문에 조금 더 여자를 잘 이해할 수 있는 남자일 뿐, 전염병을 가진 사람도 특이한 사람도 아니거든요. 관객들이 우리를 그냥 한 인간으로, 똑같은 사람으로 봐줬으면 좋겠어요.”(김명진) 글 강아연기자 arete@seoul.co.kr 사진 손형준기자 boltagoo@seoul.co.kr
  • [서울광장] 사문난적, 구동존이/오일만 논설위원

    [서울광장] 사문난적, 구동존이/오일만 논설위원

    건국 61년을 돌아보면 한국의 정치 문화는 늘 분열과 대립의 양상으로 전개돼 왔다. 독재에 맞선 반독재 투쟁에서 대립구도는 어찌 보면 필연적 수순이다. 1987년 6월 민주화 항쟁 이후 비로소 우리는 세계 정치조류와 비슷한 진보와 보수의 경쟁구도를 갖추게 됐다. 불과 20년 남짓이다. 긴 흐름으로 보면 분단국가라는 현실이 한국정치를 짓누르는 상황에서 분열과 대립의 정치문화가 형성된 것은 자연스러운 진행이라는 지적도 있다. 그럼에도 우리를 답답하게 하는 것은 도무지 출구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분열과 대립의 정치를 끝내자는 구호와 미사여구는 화려했지만 정작 의미있는 시도는 번번이 좌절됐고 희망의 싹마저 잘려 나가는 형국이다. 이런 정치 문화는 하루아침에 솟아나지 않았다. 조선 500년을 지배한 주자학은 배타성이 매우 강한 학문이다. 상대방을 배격해야 자신의 존재가치를 입증받는다. 조선조 사색당파의 권력투쟁은 더욱 이분법적 사고를 심화시킨 측면이 강하다. 상대방을 사문난적(斯文亂賊·교리를 어지럽히는 사상이나 사람)으로 몰아붙여 정치적 생명을 끊어놓는다. 정적의 ‘씨’를 말리려는 멸문지화(滅門之禍·한 집안이 다 죽임을 당하는 끔찍한 재앙)의 형벌도 서슴없이 자행됐다. 동인과 서인이 다시 남·북인과 노·소론으로 분열되는 과정에서 보복 정치는 더욱 보편화됐고 이분법적 정치 문화는 고스란히 한국 정치판에 녹아 있는 것이다. 2009년 5월, 우리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이라는 국가적 불행에 직면해 있다. 역사의 한복판에 서서 그 파장과 무게에 눌려 있다. 우리 앞에 놓인 것은 분열과 공존의 갈림길이다. 어디로 갈 것인가. 평생 지역주의 타파와 영·호남 통합을 주장해 온 노 전 대통령은 분명 공존의 길을 가리킬 것이다. 공존은 더 이상 선택이 아니라 우리의 생존 전략이다. 이미 국제적으로 강한 추동력을 지닌 시대정신으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동양을 열등하고 착취 가능한 대상으로 접근했던 서양의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이나 서양을 비인간적이고 천박한 물질 문화로 비하했던 동양의 옥시덴탈리즘(Occidentalism) 모두 이미 자기반성 모드에 들어갔다. 글로벌 경제는 동서양의 문화적 공존과 통합을 더욱 가속화시키는 자기 복제력을 갖췄다. 학문의 영역에서도 ‘지식의 통합’이라고 불리는 통섭(統攝·Consilience)의 이론이 강세를 보이는 이유다.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먼저 공존의 공간을 넓혀가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합리적 진보와 건전한 보수세력의 공감 지대를 확보할 필요가 있다. 진정한 자기반성과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전제 조건이 돼야 한다. 정파적 이익과 정치공학적 접근은 더 큰 갈등과 분열로 귀결된다. 공존의 시너지 효과는 대단하다. 당장 민생 문제와 경제위기 극복, 남북문제 등 주요 현안에서 실현 가능한 대안을 도출할 수 있다. 거대담론일수록 실천이 어렵다. 우선 우리 사회 곳곳의 대립 공간에서부터 시작해 보자. 먼저 같은 점을 찾아보되 차이점은 그대로 내버려 두는 구동존이(求同存異)의 지혜로 갈등의 폭을 줄이는 것도 방법이다. 일정한 성과를 바탕으로 더 커다란 ‘작품’을 만드는 유소작위(有所作爲)의 적극적 공존의 사고가 우리 사회에 확산되기를 기대한다. 우리의 이분법적 사고를 허물고 공존의 철학에 자양분을 공급하는 그 어떤 시도와 실험도 계속돼야 한다. 오일만 논설위원 oilman@seoul.co.kr
  • 민주당 ‘뉴플랜’ 정체성 싸움 비화

    민주당 ‘뉴플랜’ 정체성 싸움 비화

    “불분명한 정체성으로 당을 공리공담(空理空談)에 빠뜨렸다.”, “정체성 확립을 향한 첫발을 내디뎠다.” 민주당내 주류와 비주류가 19일 또다시 맞붙었다. 새로운 정체성과 노선 설정을 위해 마련된 ‘뉴 민주당 플랜’이 불씨가 됐다. 이날 오후 ‘뉴 민주당 플랜’을 논의하기 위해 서울 영등포 당사에서 마련된 국회의원·지역위원장 전체회의에서다. 앞서 뉴 민주당 비전위원회(위원장 김효석)는 지난 17일 보수와 진보의 이분법을 뛰어넘는 ‘현대화의 길’을 새 노선으로 삼고, 사람 중심의 ‘포용적 성장’과 기회의 평등을 확대하는 ‘기회의 복지’를 2대 발전전략으로 설정한 ‘뉴 민주당 플랜’ 초안을 발표했다. 당 지도부는 이날 토론회를 시작으로 군더더기를 떼고 살을 붙여 ‘새로운 민주당’을 선언하겠다는 계획이다. 하지만 당내 주류와 비주류간 논쟁이 ‘대안 야당’과 ‘선명 야당’ 사이에서 겉돌고 있는 데다 치열한 당 주도권 싸움과도 맞물려 있어 험로가 예상된다. 이날 토론회도 시작부터 ‘색깔 논쟁’으로 시끄러웠다. 비주류 모임인 민주연대가 포문을 열었다. 공동대표인 이종걸 의원은 ‘뉴 민주당 플랜’ 초안을 “실패한 신자유주의를 확대한 것에 불과하다. 한나라당과 다를 게 없다.”며 비난했다. 초안에 담긴 ‘성장을 위한 시장 자율 확대’도 성토 대상이 됐다. 이 의원은 “우리 사회의 최대 문제인 양극화 심화는 신자유주의 확대와 시장·기업의 무분별한 자유에 따른 것임이 드러났고, 미국도 그 정책노선을 수정하고 있다.”면서 “막연하고 애매한 개념과 미사여구를 나열해 불필요한 분란만 일으키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반면 서종표 의원은 “한나라당과 비슷한 게 있다고 해서 ‘한나라당의 2중대’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국민이 요구하는 것을 한나라당이 한다고 해서 무조건 반대해서도 안 된다.”고 주장했다. 서 의원은 “정책·인물별로 새로운 흐름을 담은 새 상품을 내놓고 국민이 사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옛 민주계인 박상천 의원은 “‘현대화’라는 방향성에는 공감하지만 개념이 다의적인 만큼 ‘중도개혁주의’라고 표현하자.”면서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 중산층 하부를 끌어올 수 있는 정체성을 확립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토론회에 앞서 추미애 의원도 비판에 뛰어들었다. 추 의원은 이날 광주에서 기자간담회를 갖고 “‘뉴민주당 플랜’은 한나라당의 재·보선 참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낮은 민주당 지지율의 원인을 ‘유권자의 보수화’에서 찾는 잘못된 인식에 따른 것”이라면서 “지도부가 개혁 실패로 중산층·서민의 이탈을 초래한 책임과 반성을 외면하고 있다.”며 당 쇄신을 주문했다. 이에 정세균 대표는 토론회에서 “초안은 답안지가 아니라 문제지”라면서 “함께 참여해 비판하고 의견을 제시해 답안지를 만들자.”고 밝혔다. 당 지도부는 다음달 9일까지 7대 권역별로 전국 순회 당원 토론회를 갖고 의견을 수렴해 6월 중순에 ‘뉴 민주당’을 선언할 계획이다. 홍성규 허백윤기자 cool@seoul.co.kr
  • [사설] ‘뉴민주당플랜’ 성숙한 정치로 이어지길

    민주당이 어제 당의 새로운 가치와 정책 방향을 담은 ‘뉴민주당플랜’ 초안을 내놓았다. ‘더 많은 기회’와 ‘더 높은 정의’, ‘함께 사는 공동체’를 3대 가치로 삼고 ‘포용적 성장’과 ‘기회의 복지’를 2대 발전전략으로 제시했다. 뒤로는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패러다임을 극복하고, 앞으로는 지구촌 무한경쟁시대에 걸맞은 발전전략을 펼쳐 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재집권 실패도 모자라 지난해 총선에서마저 참패하고, 그 뒤로도 10%대의 지지율에 주저 앉은 현실에서 새로운 정당으로 탈바꿈하지 않고는 살아 남을 수 없다는 절박감이 배어 있다. 선언 초안이 지적했듯 21세기 지식정보시대에서는 좌·우, 진보와 보수의 낡은 이분법을 뛰어 넘어야 한다. 약자를 도외시하는 무책임한 성장도 있을 수 없으며, 분배만을 강조하다 공도동망(共倒同亡)해서도 안 될 일이다. 그런 점에서 민주당이 비록 초안에서이기는 하나 탈(脫) 이념을 선언한 것은 신선하게 다가온다. 좌우, 보혁의 낡은 이념구도를 벗어 던지고 성장과 분배를 동시에 지향하는 ‘포용적 성장’과 기회의 균등 및 확대를 통해 중산층과 서민을 끌어 안겠다고 밝힌 점도 평가할 일이다. 분배가 소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한나라당의 작은 정부론에 맞서 큰 정부론을 내세운 점도 눈길을 끈다. 뉴민주당플랜은 갈 길이 멀다. 당장 당내 비주류 진영에선 ‘한나라당 2중대 선언’이라거나 “중도개혁의 가치를 외면했다.”는 등의 비판이 터져 나오고 있다. 내일부터 초안에 대한 당내 의견을 수렴하는 과정에서 정세균 대표측 주류와 정동영 전 대표측 비주류간 주도권 싸움으로 비화하면서 배가 산으로 가는 형국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시대 흐름에 부합하려는 초안의 정신이 훼손되는 일은 없길 바란다. 당내 민주화를 어떻게 구현하고, 폭력으로 위협받는 의회주의를 어떻게 지켜 나갈 것인지에 대한 진지한 성찰도 뒤따라야 할 것이다.
  • 비주류 무혈쿠데타… 丁리더십 ‘흔들’

    민주당에 일대 사건이 일어났다. ‘61.3%’의 반란이다. 주류인 김부겸 원내대표 후보는 고개를 떨궜고, 정세균 대표 체제는 뒤통수를 맞았다. 4·29 재·보선의 단맛이 채 가시기도 전이다. 거의 ‘무혈 쿠데타’ 수준이다. 국회 상황을 총괄하는 원내대표 자리가 비주류에게 넘어갔다는 것은 정 대표 체제의 위기와 리더십 약화를 뜻한다. 단순히 ‘주류 대 비주류’의 이분법적 시각으로 경선 결과를 해석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비주류의 힘만으로 ‘61.3%’를 포섭하긴 힘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오는 말이 ‘정 대표 체제에 대한 반감과 경고’라는 것이다. 중립지대 의원들과 주류에서 이탈한 표심이 어우러졌다는 얘기다. 수도권의 한 재선 의원은 15일 “주류에 대한 강력한 경고 메시지”라고 풀이했다. 그는 정 대표 체제를 “당과 국회를 일방통행식으로 이끌어온 지도부”라고 표현하며 “당은 당 대표가 맡고 원내 문제는 원내대표가 맡는, 진정한 ‘투톱 체제’로 바뀌어야 한다.”고 주문했다. 다른 다수의 의원들도 ‘정세균 대표·원혜영 원내대표 체제가 지난 한 해 동안 제1야당의 힘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했다.’는 평가가 경선 결과에 반영됐다고 해석했다. 정치권 관계자는 “‘경선 반란’에는 민주당이 정한 85개 ‘MB악법’과 퍼주기 추경예산안 방어에 실패한 데 대한 책임 추궁의 의미도 담겼다.”고 말했다. 쟁점법안을 ‘원천 봉쇄’하지 못하고 ‘지연’시키는 데 그쳤다는 위기감도 당내 대표적인 ‘전략기획통’을 신임 원내대표로 선택한 요인으로 풀이된다. 정 대표로선 비주류와의 관계 개선이 불가피하다. 비주류가 요구하는 정동영 전 통일부장관의 복당 문제도 재고할 수밖에 없다. 경선 과정에서 이 의원과 후보단일화를 이룬 이종걸 의원은 10월 재·보선 이전에 정 전 장관의 복당 요구를 받아들이라고 정 대표를 압박해 왔다. 이강래 신임 원내대표도 경선 과정에서 “복당의 중재자 역할을 하겠다.”고 공약했다. 다만 이 원내대표가 이날 당내 화합을 목표로 타협을 위한 중재를 먼저 시도하겠다고 밝힌 만큼 정 대표가 어떤 카드를 내놓을지는 좀 더 지켜볼 문제다. 당 안팎에서는 주류와 비주류의 대결 구도가 당장 수면 위로 떠오르진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6월 임시국회에서 미디어관련법 등의 처리를 막아야 한다는 공동의 목표가 있기 때문이다. 당내에서는 이 원내대표가 첫 시험 무대인 6월 국회에서 어떤 성적표를 내느냐에도 관심을 쏟고 있다. 정치컨설팅업체 포스의 이경헌 대표는 “어쨌든 이번 경선이 흥행에 성공했고, 단합의 장이 된 만큼 그에 따른 충분한 효과를 6월 국회에서 보여줄 수 있느냐가 ‘정세균·이강래 체제’의 첫 과제”라고 말했다. 홍성규 허백윤기자 cool@seoul.co.kr
  • 싱그런 오월 그분들의 글향기가…탄생 100주년 문인들 조명 활발

    싱그런 오월 그분들의 글향기가…탄생 100주년 문인들 조명 활발

    5월 햇살을 받으며 서울 청계천을 걷는 사람들은 모두 멋을 아는 멋쟁이다. 잘 차려입은 한 벌 옷도 빛나고 넥타이도 참 단정하다. 하지만 올해로 탄생 100주년을 맞는 소설가 구보 박태원(1909~1987)만큼 서울 청계천을 사랑한 멋쟁이가 있을까. 양복에 넥타이는 기본이요, 최신유행 아이템이던 대모테 안경에 단장까지 쥐고 1930년대 모던보이 구보는 청계천 광교와 수표교 사이를 거닐었다. 7일 구보가 사랑하는 청계천 변에 서 있는 프레스센터에서 ‘탄생 100주년 문학인 기념문학제’가 열렸다. 박태원은 물론이요, 시인 모윤숙과 신석초, 소설가 김내성, 안회남, 현덕, 평론가 김환태, 이원조 등 1909년생 문인들을 주제로 한 심포지엄이 벌어졌다. 또 ‘문학의 밤’ 등 다양한 행사도 함께 치러졌다. 심포지엄은 1930년대에 문학지형에 초점이 맞춰졌다. 기조발제를 맡은 최원식 인하대 교수에 따르면 1930년대는 “한편에서는 ‘순수문학의 황금시대’로 찬미했고, 다른 편에서는 탈이념의 수렁에 빠진 시기로 애도”했던 시기. 하지만 최 교수는 1930년대를 “두 경향이 날카로운 긴장의 형태로 대화하며 상호진화를 거듭한 시기”라고도 평가했다. 이날 다룬 8명의 1909년생 문인들은 그 치열하던 1930년대 문단에서 모두 하나씩 큰 발자취를 남긴 인물들이다. 박태원은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천변풍경’으로 익히 유명하다. 박태원 주제 발표를 맡은 강상희 경기대 교수는 이날 발표에서 “모더니즘과 리얼리즘의 이분법을 무색하게 만듦으로써 한국 소설사의 평균 키를 크게 웃도는 높이를 확보했다.”고 그를 평가했다. 평론가 김환태는 예술을 중심에 둔 인상주의 비평을 창안한 순수문학주의자다. 이원조와 함께 ‘1930년대 순수문학논쟁’에 참여한 인물. 김환태와 이원조의 순수문학논쟁을 주제로 발표한 하정일 원광대 교수는 이 논쟁을 ‘계몽론 대 자율성론’, ‘파시즘에 대한 상반된 대응’, ‘이식성을 보는 다른 시각’이란 세 측면에서 보고 분석했다. 김내성은 국내 장르 소설의 아버지격인 인물이다. 그는 ‘마인(魔人)’을 비롯한 추리소설로 1930년대 대중소설계를 휘어잡았다. 최근 장르 문학의 활성화로 그가 재조명 받고 있는 가운데, 조성면 인하대 교수가 그의 작품세계를 훑어내렸다. 식민지 시기 대표적 여성 시인인 모윤숙과 고전적이고 목가적 세계를 그린 시를 많이 남긴 신석초도 두말할 필요가 없는 거물급 문인들이다. 이날 행사에는 주제 발표를 맡은 연구자들 외에도 소설가 박태원과 시인 신석초의 유가족도 참석해 자리를 빛냈다. 심포지엄이 끝나고 같은 날 오후 7시에는 서울 산림문학관에서 ‘문학의 밤’ 행사도 개최했다. 여기서는 현덕의 ‘남생이’, 김내성의 ‘마인’을 원작으로 한 판소리 및 연주, 마임 공연 등이 벌여졌으며 김내성, 박태원, 현덕 등 1909년생 문인들의 유가족이 참석해 생전 문인들에 얽힌 추억들을 나눴다. 한편 같은 날 이화여대에서는 ‘영운 모윤숙 탄생 100주년 기념 세미나’가 열려 이어령 이화여대 석좌교수, 김용직 서울대 명예교수, 시인 김남조 등이 참석했다. 또 오는 7월에는 이화여대에서 ‘박태원과 세계문학, 세계문학 속의 박태원’이란 주제로 구보학회의 학술대회도 열린다. 구보는 10월 말 그가 사랑하던 청계천에서도 만날 수 있다. 박태원의 소설 ‘천변풍경’을 바탕으로 한 화가들의 그림 20여점이 청계천을 주제로 한 다른 작품들과 함께 전시될 예정이기 때문이다. 강병철기자 bckang@seoul.co.kr
  • 알맹이 없는 ‘새로운 진보’

    알맹이 없는 ‘새로운 진보’

    4·29 재·보선에서 ‘절반의 승리’를 거둔 민주당 지도부가 당 쇄신을 주창하며 한껏 들뜬 분위기다. 조만간 ‘새로운 진보’를 핵심으로 하는 뉴민주당 플랜도 발표할 예정이다. ‘좌파와 수구의 이분법적 사고가 아닌 새로운 진보를 추구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난해 6월 전당대회 당시 정세균 후보가 뉴민주당 플랜을 공약으로 내건 이후 지금껏 뚜렷한 결실 없이 시간을 끌어온 데다 ‘새로운 진보’라는 슬로건도 추상적인 개념 제시에 그쳐 ‘수권 야당’으로서 내부 쇄신에 역부족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민주당 플랜을 통해 당의 체질을 어떻게 개선하고 현 정부에서 민생과 복지, 남북관계 등 현안을 어떤 식으로 풀어나가겠다는 것인지 대국민 메시지를 찾기 힘들다는 이유에서다. ‘새로운 진보’가 기존 노선인 ‘중도개혁’보다 왼쪽으로 이동했다는 평가를 받기는 하지만 차이점도 현재로선 명확하지 않다. 현 지도부가 재·보선 이후 비주류와의 세력 다툼에서 구심력 이완을 막기 위해 설익은 이슈를 던진 게 아니냐는 시각까지 제기된다. 당의 한 관계자는 5일 “당내 이견이 많아 아직 구체적인 방안을 논의 중”이라고 말했다. 정치권의 한 관계자는 “민주당이 이번 재·보선으로 이제 막 숨통이 트였을 뿐인데 만병통치약이라도 얻은 것처럼 안이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면서 “과거 오류에 대한 자성도, 정체성에 대한 절박감도 없어 보인다.”고 지적했다. 정장선 의원이 이날 의정서신을 통해 “재·보선에서의 조그만 승리에 안주하지 말고 혁신하는 자세로 수권정당의 면모를 갖춰야 한다.”고 일갈한 것도 이같은 분위기를 반영한다. 허백윤기자 baikyoon@seoul.co.kr
  • [월드이슈] 이스라엘 아랍인 사면초가

    [월드이슈] 이스라엘 아랍인 사면초가

    아랍과 이스라엘. 이 이분법적인 틀 안에서 극심한 차별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국적은 이스라엘이지만 아랍 민족으로 분류되는 ‘이스라엘 아랍인(Israeli Arabs)’이 그들이다. 이들은 이스라엘 시민권자이지만 ‘시오니즘의 국가’를 표방하고 있는 헌법의 테두리 안에서는 엄연한 이방인이다. 아랍에서 보면 ‘이스라엘인’이고 이스라엘에서 보면 ‘아랍인’인 이들이 겪는 설움은 크다. 이스라엘 아랍인들의 모태는 1948년 이스라엘 건국 뒤 외국으로 떠나지 않았던 팔레스타인인들이다. 당시 아랍인 95만명 가운데 80%는 외국으로 쫓겨났지만 나머지 15만 6000여명은 이스라엘에 남았다. 이들과 그 후손들은 현 이스라엘 인구의 19.7%를 차지하고 있다. ●이스라엘 빈곤층의 53% 차지 하지만 인종차별은 계속됐다. 최근 이스라엘 헤브루 대학교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정부가 아랍 출신 아이들에게 투자하는 교육비는 유대인 출신의 3분의1에 불과했다. 아랍인들이 병역에서 배제돼 있어 정부 지원이 차이를 보이는 까닭이다. 이는 유대인과 아랍인의 교육 수준 차이로 귀결, 취업과 임금 차별로 이어졌다. 뉴욕타임스는 “이스라엘 극빈층의 53%가 이스라엘 아랍인이며 임금 수준은 유대인에 비해 29%가 낮다.”고 보도했다. 이스라엘의 분석가 시몬 샤미르도 ‘이스라엘 아랍인’이란 연구보고서에서 “취업과 임금 차별은 다시 이들 자녀들의 교육 기회를 박탈한다.”고 악순환 구조를 지적했다. 이스라엘 아랍인들은 이슬람 무장세력의 테러로부터도 자유롭지 못하다. 이들의 터전이 이스라엘인 만큼 무장세력의 무차별 테러에 그대로 노출돼 있다. 이스라엘 아랍인들은 테러로 매년 수십명이 목숨을 잃는다. 특히 2006년 레바논 전쟁 당시에는 43명의 민간인 사망자 가운데 19명이 이스라엘 아랍인들이었다. 이들은 이스라엘 정부를 향해 “정부가 이스라엘 아랍인들의 거주 지역에 보호조치를 해주지 않아 피해가 컸다.”고 반발, 이등국민의 설움을 토로했다. ●악화되는 反아랍 정서 차별 문제는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 이젠 인종차별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하려는 움직임까지 생긴다. 영국의 일간 가디언은 최근 성공한 이스라엘 아랍 기업인 파디 무스타파의 사연을 소개했다. 이스라엘 아랍인들이 살고 있는 움 알 팜 출신인 그는 고향에서 아랍 출신에 대한 ‘유리천장’을 깬 모범사례로 통한다. 하지만 최근 우파 연정의 탄생에 무스타파의 앞날은 어둡다. 극우 정치인 아비그도르 리버만이 부상하면서 인종차별 정책이 실현될 가능성이 커진 탓이다. 리버만은 이스라엘 아랍인의 거주지역을 팔레스타인 영토로 넘겨 유대인 순혈주의를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이들이 이스라엘에서 계속 살길 원한다면 충성 맹세를 한 뒤 군복무를 하도록 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 정책이 시행된다면 무스타파의 고향 움 알 팜은 팔레스타인에게 넘어갈 게 뻔하다. 무스타파는 직업을 버리고 팔레스타인으로 귀화하거나, 충성서약을 한 뒤 가족과 생이별을 해야 한다. 최근 반(反) 아랍 정서는 더욱 강해지는 분위기다. 이스라엘의 아랍 인권단체인 ‘급진주의반대운동’이 지난해 설문조사를 한 결과 ‘이스라엘 아랍인들과 한 건물에서 같이 살 수 없다.’고 답한 유대인은 75%에 달했다. 이들의 투표권을 박탈해야 한다는 의견도 40%나 나왔다. 2007년 조사에 비해 반 아랍 정서는 더욱 거세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지구촌 곳곳은 아직도 인종 차별로 곤욕을 치른다. 민주주의가 발달된 미국과 유럽에서도 인종 문제는 아직도 ‘뜨거운 감자’다. 하지만 이스라엘 아랍인의 문제는 사뭇 다른 양상을 띤다. 적어도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인종차별을 합법화하는 식으로 제도가 퇴행하는 경우는 없지만 리버만의 정책은 ‘제도적 후퇴’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데니스 가이츠고리 하버드대 교수는 최근 “리버만에게 핵심적 역할을 부여하는 것은 민주주의 국가인 이스라엘의 기반을 위태롭게 하는 일”이라고 경고했다. 이경원기자 leekw@seoul.co.kr
  • [내 책을 말한다] “서동설화 버리긴 너무 아깝잖아”

    사극 열풍은 끊임없이 이어진다. 사극의 상상력은 신윤복을 남장여자로 각색할 만큼 역사가들의 상상을 초월하여 그들을 불편하게 만든다. 역사가들이 사극에서 주목하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하지만 사극 제작자는 이야기 그 자체에 관심이 있다. 사극 제작자는 이야기를 만들 목적으로 역사적 사실을 수단으로 사용한다면, 역사가에게 이야기란 역사적 사실을 전달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이처럼 수단과 목적이 서로 엇갈려 있다는 것이 둘 사이의 소통장애를 일으키는 요인이다. 심판관은 대중이다. 선택은 생산자가 아닌 소비자가 하기 때문이다. 판정은 뻔하다. 대중은 역사가들이 쓴 책들은 거의 읽지 않지만 역사소설과 사극은 열심히 본다. 그 결과 대학의 사학과는 만성적 위기에 봉착했지만, 대중문화에서 역사는 전성시대를 구가한다. ‘역사들이 속삭인다: 팩션열풍과 스토리텔링의 역사’(김기봉 지음, 프로네시스 펴냄)는 역사전성시대에서 역사학위기가 발생한 원인을 진단하고 처방하려는 목적으로 집필됐다. 팩션(faction)이란 사실(fact)에 허구(fiction)를 합한 단어조합이다 내 테제는 역사가들은 실제 일어났던 ‘현실의 역사’를 쓴다면, 사극이나 역사소설은 ‘꿈의 역사’라는 것이다. 역사가들은 전자는 사실이므로 진실이고, 후자는 허구이므로 거짓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런 이분법으로 현실과 꿈의 관계를 보는 것은 의미가 없다. 왜냐면 인간은 꿈꾸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꿈 없는 현실은 무의미하고, 현실 없는 꿈은 공허하다. 중요한 것은 꿈과 현실의 분리가 아니라 ‘꿈의 대화’다. 역사를 “현재와 과거의 대화”라고 정의한다면, 현재의 역사가가 과거와 대화하려는 시도조차가 ‘꿈의 대화’다. “한 사람이 꾸면 꿈이지만 다수가 꾸면 이미 현실이다.”라는 말이 있다. 이것의 전형적 예가 ‘삼국유사´에 나오는 서동설화다. 무왕과 선화공주가 살았던 시대 백제와 신라 정세로 보아 두 사람이 그런 로맨스 끝에 결혼에 골인했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일이다. 이것은 한마디로 ‘현실의 역사’로는 실현될 수 없는 ‘꿈의 역사’다. 최근 미륵사지에서 발굴된 사리봉안기는 우리를 그런 ‘꿈의 역사’로부터 깨어나게 만드는 사료다. 그럼 어떻게 해서 미륵사 석탑에 서동왕자와 선화공주의 국경을 초월한 사랑이야기가 깃들게 됐을까. 이 문제를 주제로 한 학술발표회에서 실증사료를 토대로 해서 역사를 바라봐야 한다는 원로 역사가의 반박에 곤욕스러워진 어느 소장 역사가는 “그럼에도 선화공주는 버리기엔 너무 아깝다.”고 토로했다. 이런 인간의 열망이 설화와 팩션 생명력의 원천이고, 역사신드롬이 끝나지 않는 이유다. 서동왕자와 선화공주 이야기는 ‘현실의 역사’를 왜곡할 목적이 아니라 그것을 초월할 수 있는 삶의 기적에 대한 민중의 염원이 만들어낸 ‘꿈의 역사’다. 근대 실증사학이 이 같은 ‘꿈의 역사’를 과학의 이름으로 금지했다면, 탈근대 “팩션시대, ‘꿈꾸는 역사’를 許하라”는 것이 내 책의 주장이다. 김기봉 경기대 사학과 교수
  • [열린세상] ‘봉 상스’ 없는 미움은 이제 그만/김동률 KDI 언론학 연구위원

    [열린세상] ‘봉 상스’ 없는 미움은 이제 그만/김동률 KDI 언론학 연구위원

    지난해 봄이었다. 나를 포함한 열명 남짓한 교수들이 세미나 건으로 아키바레쌀로 유명한 일본의 아키타현을 찾았다. 대절해 놓은 전세버스의 기사는 노인의 나라답게 일흔이 넘은 노인. 노기사는 버스가 설 때마다 날렵한 동작으로 먼저 내려 나무로 된 발 받침대를 출입문 앞에 살짝 놓았다. 지면과 출입문간의 높이에 따른 불편함을 최소화하기 위한 조치이다. 체류기간 동안 비가 올 경우 우산을 챙겨주는 것은 물론이고 말끝마다 ‘아리가토’하며 고개를 숙인다. 친절한 ‘일본인’ 노 기사에게 부담을 느끼는 쪽은 ‘한국인’ 우리들이었다. 사흘간 잘 달리던 버스는 막판에 고장이 났다. 우리들이 모찌가게에 들러 떠드는 동안 노기사는 공구를 들고 고장난 버스와 씨름하고 있었다. 반시간 정도 지났을까, 버스는 우렁찬 소리와 함께 시동이 걸렸고, 일행은 다시 차에 올랐다. 그러나 잠시 뒤 어떻게 알았는지 또 다른 버스가 뛰따라 왔고, 수리한 버스가 행여 다시 고장날지 모른다며 바꿔탈 것을 요구했다. 더욱 놀랄 일은 그 다음에 일어났다. 새 버스 출발 직전, 고장났던 버스의 기사가 차에 올랐다. 백발의 노인은 괘념치 말라는 우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고개를 구십도로 숙이며 용서를 빌고 또 빌었다. 빌기를 마친 그는 이어 자신의 지갑에서 꺼낸 1만엔짜리 지폐를 공손하게 전해주고 떠났다. 1만엔권 지폐가 남겨진 버스 안에는 일순간 숨막히는 정적이 감돌았다. 한국사람이 그렇듯이 일본사람들도 예를 든 노인기사처럼 존경할 만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또는 그럴 필요조차 없는 사람도 수없이 많다. 지난 몇 주간 우리는 일본에 대해 따갑게 들었다. ‘봉중근 의사’란 말을 유행시킨 WBC 야구도 그렇고, 김연아와 아사다 마오·안도 미키가 맞붙은 세계 피겨선수권대회도 그렇다. ‘WBC 한(恨), 연아가 풀어야’ ‘일본선수 연습방해’라는 자극적인 신문 제목부터, TV를 볼 때마다 미운 감정을 드러내는 진행자의 중계에다 일본선수의 실수까지 즐거워하는 상황에서는 당황스럽기까지 하다. 이처럼 우리는 한·일간 경기가 열릴 때마다 대부분의 일본선수들을 지나치게 부정적인 모습으로 그려내고 있다. 그렇게 해야만 이분법적 구도가 명확해지고 시청자들은 더욱 쾌감을 느끼며 카타르시스에 몰입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결과 일본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일본을 우리의 잠재적인 적쯤으로 인식하는 민족주의적 감정만이 증폭되고 있지나 않을까 두렵다. 비록 승자와 패자가 엇갈리는 스포츠 게임이긴 하지만 보다 객관적이고 적절한 균형감각을 유지할 수는 없을까. 선입견만을 되풀이하거나 우리가 보고 싶은 모습만 보고자 한다면 역사에서 교훈을 얻을 수 없다. 우리는 일본을 지나치게 과거의 잣대로만 평가하려고 한다. 도쿄의 롯폰기에서, 파리·뉴욕에서 한국학생들끼리 나누는 우리말을 듣게 되는 것은 이제 낯설지 않다. 오늘날 한국 젊은이들에게 한가지 특징이 있는 듯하다. 그것은 무례하게 보일 정도로 당당하다는 것이다. WBC 허구연 해설자가 그랬다. “요즈음 젊은 선수들, 기성세대와 달리 일본에 대해 감정이나 콤플렉스 없습니다. 만나 보면 일본이 별거냐, 이길 수 있다.”라고 너무나 쉽게 얘기하더라고. ‘봉 상스(Bon sens)’가 없는 일본인들의 행태와 일본의 과거에 대한 분노는 지극히 정당하다. 하지만 극단적인 증오가 파괴하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고, 과거에 대해 부인하는 것은 그들의 불행이다. 어차피 그들이 우리의 자존심과 분노를 풀어줄 수 없을진대, 우리가 이제는 일본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행복해진다. 벌거벗은 감정의 알몸에는 옷을 입혀 가려주는 것이 좋다.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에 맞춰 흐르는 김연아의 눈물쯤에서 기성세대의 일본 콤플렉스는 이제 끝내면 어떨까. 김동률 KDI 언론학 연구위원
  • “밥먹여주는 민주주의를 해야”

    “밥먹여주는 민주주의를 해야”

    “한국의 진보그룹이 가지고 있는 관습적인 사고방식은 민주·독재의 이분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홍성민 동아대 교수) “지금까지 진보는 먹고 사는 문제에 무관심한, 혹은 무능한 진보였다. 민주노총과 전교조는 자기들끼리의 논쟁에 갇혀 진보 진영의 천덕꾸러기로 전락했다.”(주대환 사회민주주의연대 공동대표) “진보진영은 비판과 반대의 목소리만 높일 뿐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김윤태 고려대 교수) ●민주·독재 이분법서 벗어나지 못해 자기 반성의 목소리는 냉철했다. 26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한반도선진화재단(이사장 박세일)과 좋은정책포럼(이사장 변형윤) 공동주최로 열리는 심포지엄 ‘한국의 진보를 말한다’에 발제자로 나서는 인사들은 미리 내놓은 발표문에서 현재 진보 진영이 처한 위기를 날카롭게 진단했다. 이들이 지적하는 위기의 원인은 일맥상통한다. 진보의 가치는 시대 변화에 따라 새로운 문제에 직면하는데, 진보 그룹은 그 흐름을 읽지 못하고 경직된 대결구도에 매몰돼 국민과의 소통에 실패했다는 것이다. 민주노동당 정책위의장을 지낸 주대환 대표는 ‘한국 진보에 미래는 있는가’란 글에서 “노동운동이 자기 조합원 눈앞의 이익에만 몰두해 국민적 지지를 잃은 탓에 진보 전체가 국민의 지지를 잃었다.”고 지적했다. 김윤태 교수는 ‘한국 진보의 비교사적 고찰’에서 “1987년 이후 민주화운동은 방향 감각을 상실했다. 정당은 국회의 권력 게임에 매몰됐고, 노동조합은 점점 쇠퇴했다.”고 말했다. 홍성민 교수는 ‘한국의 진보,그들은 누구인가’에서 “민주주의 모델을 상정하고 그것이 아니면 이단이고, 비겁한 타협이라고 매도하는 수준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들은 이러한 자기 반성을 전제로 새로운 진보운동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사회경제적 문제 해결을 중심과제로” 주 대표는 ‘진보의 재구성’을 위한 뉴레프트 운동을 제안한다. 그는 “도덕적 우월감이 없는 좌파를 지향하고, 대한민국을 긍정하며, 국가의 역할을 인정하는 등 사상적 전환과 관점의 변화를 통해 진보는 환골탈태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 새로운 진보는 사회경제적 문제의 해결을 중심과제로 삼아 “밥 먹여주는 민주주의”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윤태 교수는 “2008년 촛불시위는 정부와 국회가 아닌 거리와 가상공간에서 새로운 민주주의의 잠재력이 표출됐다는 점에서 새로운 진보의 지평을 확대한 중요한 사건”이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촛불을 들고 거리에 모이는 것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서 “사회운동의 역동적 힘은 정치사회의 현실적 대안과 긴밀하게 연결돼야 하며, 정당과 사회운동은 함께 손을 잡고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번 심포지엄은 뉴라이트 계열인 한반도선진화재단이 지난해 11월 한국미래학회와 더불어 보수 진영의 자기 성찰 자리인 ‘한국의 보수를 말한다’를 연 데 이어 두번째로 마련한 행사다. 보수와 진보가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돌아보고, 그 토대 위에서 건설적 대화를 통해 이념의 간극을 좁히자는 취지다. 6월엔 진보와 보수 인사가 참여하는 ‘보수와 진보의 대화’심포지엄이 예정돼 있다.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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