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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월의 호국인물 김홍일장군

    전쟁기념관은 29일 ‘7월의 호국인물’로 6·25 전쟁 때 한강 및 낙동강전투를 성공적으로 지휘한 김홍일(金弘壹·1898∼1980) 육군 중장을 선정했다. 김 장군은 평북 용천에서 출생,일제 당시 한국의용군사령관,중국군사단장,광복군 참모장 등을 역임했으며,이봉창 의사의 항일투쟁을 지원하기도 했다. 광복 후에는 한국군 육군 준장으로 임관돼 6·25 전쟁에 참여했다. 김 장군은 북한군의 남침으로 서울이 실함(失陷)되자 시흥지구 전투사령관을 맡아 북한군 1군단을 상대로 6일동안 한강전선을 지켰다.이 전투로 국군이 후퇴하고 미국 지상군이 참전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얻을 수 있었다. 김장군은 이후 1군단 창설 군단장으로 진천전투,화령장전투,안동전투에서 낙동강방어선을 사수했다. 51년 육군 중장으로 예편 후 중화민국 대사,7대 국회의원,신민당 당수,광복회장 등을 역임했다.건국훈장 독립장과 태극무공·을지무공·청조근정 훈장을 받았다. 노주석기자 joo@
  • 순국선열 묘소·동상 관리 엉망

    일제 치하에서 독립운동과 민족정기 회복에 몸 바친 선열들의 묘소와 동상·기념비 등 애국심을 일깨우는 귀중한 시설물이 내팽개쳐지고 있다.관리 주체가 국가보훈처,문화재관리청,지방자치단체,각 기념사업회 등으로 분산돼있어 체계적 관리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관리비 예산이 부족한것도 원인이다. 사적 330호인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은 상해임시정부 요인이었던 김구·이동녕·조성환·차리석 선생과 이봉창·윤봉길·백정기 의사의 유해가 안치된곳.그러나 공원에는 애국지사들의 묘소나 기념물의 위치를 알 수 있는 표지판조차 없다. 김구 선생의 묘비는 비바람에 퇴색해 회색으로 변했고,비둘기와 까치 등의배설물을 뒤집어 쓴 채 외롭게 서 있다.봉분에도 잡초만 무성하다. 이봉창 의사의 동상은 다 쓰러져가는 울타리 안에 초라하게 자리잡고 있다. 주변에는 솔방울과 쓰레기가 너저분하게 널려 있다.곁에 나란히 있는 이봉창·윤봉길·백정기·안중근 의사의 묘소와 묘소로 올라가는 계단은 언제 청소를 했는지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지저분하다. 공원관리사무소 직원 이모씨(53)는 “하루 평균 2,000여명의 시민들이 찾아와 무책임하게 쓰레기를 버리고 간다”면서 “8명의 직원으로는 쓰레기 청소도 버겁다”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남산공원에도 안중근 의사를 비롯,순국 선열 10명의 동상과 9개의 기념비가있으나 사정은 효창공원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동상과 기념비들은 건립된지30년이 넘어 심하게 녹이 슬었고,심지어 표면이 떨어져 나간 것도 있다. 공원관리사무소에 따르면 공원내 동상 관리에 배정되는 예산은 연간 180만원 안팎.관리사무소 관계자는 “동상에 스며든 녹과 기단의 화강암에 낀 때를 제거하려면 동상 1개당 2,000여만원이 든다”면서 “예산이 모자라 1년에한번 비둘기 배설물만 닦아 낸다”고 말했다. 서울 강북구 수유동 애국선열 묘역의 이준 열사,이시영 선생, 광복군 18인묘소와 위훈비 관리도 엉망이다.이준 열사 위훈비는 이끼와 거미줄로 범벅이돼 있고 흉물스런 철조망이 묘소를 둘러싸고 있다. 묘역 입구에 사는 이시영 선생의 며느리 서차희(徐且喜·90)씨는 “예전에는 정부에서 묘소 관리를 도와주곤 했는데,요즘은 지원이 거의 없어 동네 사람과 참배객들의 힘을 빌려 청소한다”고 말했다. 국가보훈처 선양정책과 신명철(申明澈)서기관은 “공원·기념비·묘소 등의관리 주체가 제각각인 현 상황에서는 시설물의 소재 파악조차 힘들다”면서“관리체계를 일원화할 수 있는 법령 정비가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윤경빈(尹慶彬)광복회장도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 산재해 있는 독립운동유적지에도 관심을 가질 때”라면서 “선열들의 넋이 깃든 곳을 보살피지 못하는 것을 국민 모두 부끄러워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창구기자 window2@
  • 오늘 임정수립 81돌 기념식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81주년 기념식이 13일 오전 10시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서 열린다. 국가 보훈처가 주관하는 기념식에는 박태준(朴泰俊)국무총리를 비롯,3부 요인과 윤경빈(尹慶彬) 광복회장 등 임정관련 독립유공자 등 2,000여명이 참석한다. 오후 2시 서울 효창원 의열사(義烈祠)에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인 김구(金九)·이동녕(李東寧)·조성환(曺成煥)·차이석(車利錫)선생과 이봉창(李奉昌)·윤봉길(尹奉吉)·백정기(白貞基) 의사의 위업을 기리고 추모하는‘효창원 7위 선열 추모제전’이 거행된다. 노주석기자 jo
  • [오늘의 눈] 안중근의사 유해발굴 정부가 지원해야

    서울 효창공원 오른쪽 입구 언덕에는 윤봉길·이봉창·백정기 등 ‘3의사묘역’이 있다.묘역 한가운데는 태극기를 새긴 비석이 있고,제단 좌우로는‘고귀한 이름을 오래 후세에 전한다’는 의미의 ‘유방백세(遺芳百世)’ 네글자가 묘소 앞에 한자씩 새겨져 있다.그런데 제일 왼쪽 끝,‘世’자 뒤에있는 묘는 다른 묘소와 달리 비석도,묘비명도 없다.아직 묘소 주인의 유해을찾지 못해 임시로 마련해둔,이를테면 가묘(假墓)인 셈이다.최근 유해발굴문제로 온 나라가 떠들썩한 안중근 의사가 바로 이 가묘의 주인공임을 아는사람은 많지 않다. 해방후 환국한 백범 김구 선생이 제일 먼저 착수한 것이 순국한 동지들의유해 봉환사업이었다.1946년 5월 일본에서 3의사의 유해를 봉환,이곳에 유택을 마련한 백범은 미처 유해를 찾지 못한 안 의사의 유택을 이곳에 마련해둔것이다.항일운동의 화신이자 사사롭게는 사돈 간인 안 의사의 유해를 찾지못해 이곳에 가묘를 만든 백범의 당시 심정이 어떠했을까. 고향이 황해도 해주인 안 의사의 흔적을 남한땅에서 찾기란 쉽지않다.다만남산중턱에 있는,일제하 구 조선신궁(朝鮮神宮)터에 마련된 안의사기념관에서 안 의사의 ‘애국혼’의 한 자락을 겨우 느낄수 있을 뿐이다.한국인보다는 일본인 관광객들이 더 즐겨찾는다는 이 기념관은 안 의사 의거일(10월26일)과 같은날 최후를 마친 박정희 전대통령이 재임시 세운 것이다. 기념관 왼편에는 안 의사가 태극기를 들고 서있는 동상이 있고 뒤로는 안 의사의 행적 등을 새긴 석판이 둘러져있다.그 가운데 안 의사의 ‘최후의 유언’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공원 곁에 묻어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返葬)해다오.나는 천국에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항일투쟁을 하다가 이국땅에서 순국한 애국지사 가운데 드물게 안 의사는조국이 독립되면 자신의 유해를 고국땅에 묻어달라고 유언하였다.그러나 우리는 해방 반세기가 지나도록 아직도 그 유언 하나를 제대로 받들지 못했다. 지금 국내외 민간단체에서는 안 의사의 유해발굴 및 봉환을 위해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정부는 이들 민간단체의 활동을 적극 지원,안 의사의 유해가 국내에 봉환될 수 있도록 국민적 지혜를 모아야 할 것이다. 정운현 특집기획팀 차장
  • [데스크 시각] 공무원들의 ‘무심함’

    얼마전 폴란드 작곡가 헨리크 고레츠키의 교향곡 3번 일명 ‘슬픔의 노래(Symphony of Sorrowful Songs)’를 들은 적이 있다.나지막하게 시작하는 도입부에 이어 비장하면서도 격정적인 중간부와 곡 중에 나오는 소프라노,그리고 다시 나지막이 들릴듯 말듯 끝을 맺는,마치 거대한 산을힘들게 올랐다가내려오는 듯한 선율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음악을 들은 후 고레츠키와 그의 음악세계에 대해 보다 자세하게 알고 싶어 여기저기 수소문하였다.그러나 과문한 탓인지 별다른 정보를 얻을 수 없어주한 폴란드대사관으로 전화를 걸었다.자기 나라 사람으로 현재 살아있는 작곡가니까 잘 알고 있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대사관측의 대답은 그런 사람이 있느냐,혹시 펜데레츠키(Penderecki:폴란드 작곡가로 그의 교향곡 제5번은 ‘코리아’이다)를 잘못 알고 얘기한 것이 아니냐는 등 엉뚱한 말을 하는 것이었다.결국 이름 철자까지 알려주는 등 우여곡절 끝에 며칠 후에야 그에 대한 아주(?) 간단한자료-그것도 폴란드어사전을 복사한 것이라 읽어볼 수도 없었지만-를 받고‘공무원들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저렇게 다 무심한가’하는 생각을 했다. 무심하기는 우리도 마찬가지다.지난해말 일본 시마네(島根)현 주민 몇 가구가 우리나라 독도로 호적을 옮겨 국내 여론이 들끓고 있을 무렵이었다.철도청은 우리의 ‘동해’가 영어로 ‘Sea of Japan(일본해)’으로 쓰인 ‘철도화물운송’ 책자를 제작,전국의 주요 역과 관련업계에 배포했다. 그러나 철도청 인터넷 홈페이지에 이를 비난하는 글이 실리자 그런 사실조차 모르고 있던 철도청은 뒤늦게 책자를 회수하는 등 소동을 벌였다.철도청은 그 책임을 디자인회사측의 부주의로 돌렸지만 실은 철도청 관계자의 ‘무심함’이 빚어낸 것이었다. 국가보훈처가 최근 제작,전국의 학교와 도서관 지자체,관광업계 등에 배포한 ‘길따라 역사탐방’이란 책도 ‘무심함’으로만 돌려버리기에는 너무 한심하다는 생각이 든다.상식 차원의 지식조차 없는 상태에서 빚어진 어처구니없는 내용들이 담겨있기 때문이다.이 책은 최근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문화유적답사와테마여행프로그램이 활발히 개발되고 있는 점에 착안,애국선열들의 항일 위업을 현창하고 그 유적지를 홍보하기 위해 제작한 것이라고 한다. 전체적으로 일반 관광명소와 여행안내용 책자로는 별 문제될 것이 없다.그런데 정작 책의 제작목적에 따른 대상유적지와 인물선정에 이해되지 않는 내용이 담겨 있는 것이다.특히 ‘서울시편’을 보면 대표적인 애국선열들은 제쳐두고 친일행적 논란을 빚고 있는 인사들을 마치 독립운동의 상징적인 인물들인 것처럼 소개해 놓고 있다.또 서울 시내의 대표적인 독립운동 관련 유적지인 남산을 비롯해 효창공원,장충공원,탑골공원,서대문형무소(현 독립공원) 등에 대한 설명은 단 한 줄로 언급되어 있다. 잘 알다시피 남산에는 임시정부 주석을 지낸 백범 김구 선생과 성재 이시영 선생의 동상과 안중근의사기념관 등이 있다.그리고 효창공원에는 백범,윤봉길·이봉창 의사 등 독립운동가 7인의 묘소,장충공원에는 유관순·이준 열사의 동상이 있다.또 탑골공원은 3·1 의거의 성지이며 서대문형무소는 애국지사들이 처형된사형장과 ‘유관순 굴’이 복원되어 있는,항일유적지 순례코스로는 빼놓을 수 없는 곳들이다. 아무리 관광여행관련 안내책자라고 해도 전문가의 감수는 받았어야 했다.그렇지 않고 외부 필자의 집필대로만 제작했다는 것은 단순히 담당공무원의 ‘무심함’으로만 돌려버릴 수가 없다.적어도 해당 부처의 담당공무원이면 상식으로라도 알고 있어야 할 사항들이기 때문이다.이 일은 사소한 것 같지만결코 사소한 일이 아니다.자라는 청소년들에게 항일위업을 현창하고 그 유적지를 홍보하기 위한 일이라면 더욱 그렇다. 박찬 특집기획팀장
  • 애국지사 유적지 홍보책자 파문

    국가보훈처가 애국선열들의 항일위업을 현창하고 유적지를 홍보하기 위해제작,배포한 책의 내용 가운데 일부가 필자의 전문지식 부족과 당국의 감독부실로 오히려 선열들을 모독하고 항일투쟁사를 왜곡했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국가보훈처는 국내 독립운동 관련 사적지를 찾는 일반인들에게 애국정신을현창한다는 목적으로 7,000만원의 예산을 들여 ‘길따라 역사탐방’ 3,000부를 제작,지난해말 전국의 학교·도서관·지자체·관광관련업계 등에 배포했다.이 책은 최근 들어 청소년을 대상으로 문화유적 답사와 테마여행 프로그램이 개발되고 있는 점에 착안,국내 567개 독립운동·전쟁 관련 사적지를 124개 권역별로 나눠 주변의 관광명소와 함께 여행안내용으로 제작한 것. 그러나 책의 첫머리에 등장하는 ‘서울편’은 대상 유적지는 물론 항일행적을 두고 논란이 있는 인물을 부각시켜 선정배경에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동부편 첫장에는 어린이대공원에 대한 소개와 함께 고하 송진우 동상 사진을싣고 있다.이는 옆 페이지에 실린 남강 이승훈·유관순 동상 사진의 두 배가 넘는다. 또 북부편에는 망우산에 있는 13도창의군탑과 고려대 교정에 있는 인촌 김성수의 대형사진이 실려 있다.인촌의 경우 ‘전라북도편’에서도 생가 사진과 함께 생가내의 동상사진을 중복게재하고 있는데 대형 동상 사진을 실은경우는 두 사람뿐이다. 이에 대해 한 독립운동가는 “송진우와 김성수는 친일행적 때문에 그들이받은 건국훈장 박탈 여부를 놓고 논란이 됐던 인물”이라며 “이들을 마치독립운동의 상징적 인물인 것처럼 편집한 것은 항일로 일관한 선열들에 대한 모독이자 역사왜곡”이라고 주장했다. 서울의 대표적 독립운동 관련 유적지인 남산과 효창공원·탑골공원·장충공원·국립묘지·구서대문형무소 등에 대한 설명이 없는 것도 문제.남산에는임시정부 주석을 지낸 백범 김구와 성재 이시영 선생의 동상,안중근의사기념관이,효창공원에는 백범을 비롯해 윤봉길·이봉창 등 독립운동가 7위의 사당과 묘소가 있다. 또 탑골공원은 ‘3·1의거의 성지’이며,장충공원에는 유관순·이준 열사의 동상이 있다.국립묘지에는 국내 외에서 항일운동을 한 선열의 유해를 안장한 묘역이 있고 구서대문형무소(현 독립공원)에는 애국지사들이 처형된 사형장을 비롯해 ‘유관순굴’이 복원돼 있다.그러나 이 책에서는 이같은 유적지에 대해 서울편 말미의 ‘그밖에’ 항목에서 단 한줄로 언급하고 있다. 이에 대해 국가보훈처 관계자는 “필자 선정과 책 내용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며 “서울시편은 추가로 수정제작해 재배포하겠다”고 밝혔다. 정운현기자 jwh59@
  • [김삼웅 칼럼] 2·8독립선언과 노애국지사들

    “3·1운동은 우리 근대사의 서리고 서린 산맥 가운데 위연히 솟은 한 고봉(高峰),이 봉우리 위에 서서 보면,외세의 침노 속에 끈질기게 저항하면서 생성 발전해온 우리 민족의 발자취가 멀리 가까이 제자리를 드러내면서 부각된다.3·1운동은 우리 근대민족운동사의 큰 호수,이 이전의 모든 근대 민족운동의 물줄기가 이리로 흘러들고,이후의 모든 근대 민족운동이 여기서 흘러나가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천관우,‘3·1운동 50주년 기념논문집’ 편집후기) 3·1운동은 근대 민족운동사의 거대한 호수다.그렇다면 3·1운동의 발원지는 어디인가? 바로 1919년 2월 8일 일본 도쿄 조선기독교청년회관(YMCA)에서 일본에 유학중이던 학생들이 한국의 독립을 요구하는 선언서와 결의문을 선포한 것에서 비롯한다.재일 유학생들은 11명의 실행위원을 선출하여 조선청년독립단을 조직하고 2월 8일 오전 독립청원서와 독립선언서를 도쿄 주재 각국대사관,일본정부,중의원,조선총독부에 보내고 오후 2시 500여 회원의 환호속에서 2·8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유학생 거의 전원이 모인 이날 독립선언회의에서 학생들은 독립실행방법을토의하려다가 일경에 강제해산당하고 실행위원들은 체포되었다.이에 앞서 송계백과 최근우가 선언서 일부를 국내로 반입하여 현상윤·송진우·최남선 등에게 전달,3·1운동의 직접적인 계기를 만들었다.재일 한국 독립운동의 성지 YMCA 건물은 그동안 부채로 존폐의 위기에 있던 것을 지난 연말 정부가 21억6,000만원을 지원하여 은행빚과 건물지하공사비를 갚게 되었다. 스가모감옥터의 노애국지사들 2월 8일 도쿄 YMCA 회의실에서는 2·8독립선언 81주년 기념행사가 조촐하게 거행되었다.재일본 한국 YMCA가 주최한 이날 행사에는 국내에서 윤경빈(尹慶彬) 광복회장과 이강훈(李康勳) 전 회장 등 생존 애국지사와 독립운동가후손 40여명이 참석하여 기념식의 의미를 새롭게 했다. 동경한국학교 초등부 어머니합창단이 ‘독도는 우리 땅’을 불러 참석자들을 숙연케 만들었다.행사후 가진 간담회에서 유학생 대표들은 활자로만 읽었던 노애국지사들과의 대면을 감격스러워하면서 새로운 한·일관계와 학생운동의 진로 등을 물었다. 다른 외국에 비해 ‘재일유학생’의 존재는 유별하다.그것은 한말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파견된 유학생중에 매국노로 변신하거나 2·8독립선언을 주도한 학생중에 악질 친일파가 된 경우, 일제시대 많은 유학생들이 총독부 관리나 법관이 되어 일제의 주구노릇을 하고 해방후에는 독재정권의 앞잡이로 전락한 때문이다.독립운동에 참가한 사람은 소수에 불과했다. 일본유학생들은 이 부분에서 갈등을 느낀다고 했다.그래서 말했다.같은 물을 소가 먹으면 젖을 만들지만 뱀이 먹으면 독을 만든다,어찌 일본유학생들뿐이겠는가.국내외의 명문대학 출신들이 친일파가 되고 독재의 주구노릇을한 다른 쪽에서는 의로운 길을 선택한 사람도 적지 않다,역사가 어느 쪽을승자로 기록할지는 자명하지 않은가라고. 방일 첫날 노애국지사들은 일제식민지 시대 많은 한인애국자를 수감하고 처형한 스가모(巢鴨)형무소를 방문했다.지금은 공원으로 바뀐 이곳은 이봉창·김지섭 의사 등이 옥고를 치르다 사형이 집행된 곳이다.이강훈 옹도 13년 옥살이를 했다.노애국지사들은 만감이 서린 표정으로 구석구석을 살피고, 우리 애국선열들의 명복을 비는 묵념에는 생존 지사들의 흐느낌이 배어 2월의 차디찬 스가모 공원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다.이곳에서 숨진 선열들을 기리는돌비석 하나라도 세웠으면. 도쿄헌책방의 노애국지사들 유학생들과의 간담회 자리에서 한 학생이 물었다.생존애국지사들이 대부분7,80 고령인데 사후 광복회의 존립문제와,일제와 맞서 싸운 세대가 아직 생존해 있는데도 독립운동사가 먼 망각의 역사로 퇴락하고 있는 터에 이를 잇는 방법은 무엇인가-. 이것이 어찌 일본유학생들만의 의문일까만 나는 예상외의 장소에서 ‘해답’을 얻었다.행사를 마치고 도쿄 번화가에 즐비한 헌책방에서 삼삼오오로 만난 우리 노애국지사들의 형형한 눈빛에서 그리고 그들이 찾는 일제시대의 자료와 일본을 알아야 한다면서 푼푼이 모은 용돈으로 일본현대사의 신간을 사는 모습에서,“노병은 사라질지언정 죽지 않는다”는 것을.-일본 도쿄에서[김삼웅 주필]
  • 보훈처 ‘임정 80주년 기념논문집’서 새사실 공개

    1932년 1월 8일 육군 관병식을 마치고 환궁하던 일황의 마차에 폭탄을 던진 한인애국단 소속 이봉창(李奉昌)의사의 의거는 흔히 ‘사쿠라다몬전(櫻田門前)사건’이라고도 불린다.이는 의거현장이 일본 황궁의 앵전문 앞임을 지칭한 것이다.그러나 이 의사의 재판자료 등에 따르면 의거현장은 도쿄 치안의총본부격인 경시청 청사앞으로 밝혀지는 등 새로운 사실이 확인되고 있어,관련자료의 재검토가 절실한 것으로 지적된다. 최근 국가보훈처가 출간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 80주년기념 논문집’(상·하)에 실린 ‘이봉창의거 연구서설’이라는 글에서 최서면(崔書勉·72)국제한국연구원장은 “이 의사와 관련된 기존 기록·연구성과 가운데 상당수 오류가 발견됐다”면서 “대표적인 사례를 보면 의거현장은 기존 주장인사쿠라다문 앞이 아니라 경시청 청사 정문 현관앞”이라고 밝혔다.최원장은증거자료로 이 의사의 의거 당일자 일본신문의 기사와 의거 직후 경시청 청사 앞에서 일경들이 현장조사를 하고 있는 사진을 공개했다. 1932년1월 8일 오전 도쿄 시내요요기(代代木)연병장에서 열린 육군 관병식에 참석한 일황이 황궁으로 돌아가기 위해 도쿄 경시청 정문앞을 지날 무렵일황이탄 마차대열에 폭탄이 날아들었다.폭탄을 던진 주인공은 상해임시정부의 김구가 이끄는 한인애국단 소속 이봉창 의사였다.그러나 그동안 이 의거사건은 ‘경시청앞 사건’ 대신 ‘사쿠라다몬전사건’으로 불려왔다.의거 당일 오사카마이니치신문(大阪每日新聞)은 호외에서 “경시청 정문 바로 앞에서 32세 가량의 청년이 폐하의 마차에 폭탄을 던졌다”고 보도했다.일본정부역시 당일 첫 발표문에서는 ‘도쿄시 고오지마치구(麴町區) 소도사쿠라다몬쵸(外櫻田門町) 1번지 경시청 현관앞’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이틀후부터 일본정부는 이 사건을 ‘사쿠라다몬(櫻田門)사건’ 으로고쳐 부르게 했다.사쿠라다몬은 경시청 현관에서 100m 이상이나 떨어진,황궁을 둘러서 흐르는 호(濠)건너에 있는 문이다.최 원장은 “수도치안의 총본부격인 경시청 앞에서 발생한 대역(大逆)사건이어서 경찰의 체면을 위해 의도적으로 사건명을 왜곡한 것같다”며 “이제라도 ‘경시청앞 사건’으로 고쳐부르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했다. 최 원장은 이밖에도 ‘이봉창전’을 비롯해 정신문화연구원에서 출간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등에 나오는 이 의사 관련기록에 오류가 적지 않다고 지적했다.우선 이 의사가 한 때 근무했다는 만선철도(滿鮮鐵道)는 당시 한국에 없었으며,의거당일 만주국 황제 부의(溥儀)가 일황과 함께 관병식에 참석했었다는 것도 사실과 다르다고 말한다.최 원장은 또 ‘이 의사가 예심도 거치지 않고 사형선고를 받고 그 해 1월 10일 순국했다’고 기록돼 있으나 실지로는 이 의사는 총 9차례에 걸쳐 신문을 받았으며 ‘의거 전날 긴장을 달래기 위해 유곽에서 폭음을 했다’는 기록 역시 틀린 내용이라고 주장했다. 최 원장은 “일본 최고재판소에는 14책 분량의 이 의사 신문·재판기록이보존돼 있으며,외교사료관도 이 의사 관련 고문서철 5권을 소장하고 있다”면서 “그동안 우리 학계에서 1차자료에 대한 접근노력이 부족했다”고 지적했다. 정운현기자 jwh59@
  • [의열 독립투쟁](18)김상옥 의사

    1923년 1월 12일 저녁 8시.서울시내 한복판인 종로 네거리에 있던 종로경찰서(현 제일은행 본점자리)에 폭탄이 날아들어 일경과 신문기자 등 수 십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당시 종로경찰서는 조선인 탄압의 대표적 기관으로 이곳에 폭탄을 던진다는 것은 엄두도 낼수 없는 일이었다.사건직후 일경은 총동원령을 내려 범인검거에 나섰으나 실패하였다. 사건 발생 10일만에 일경은 겨우 단서를 잡고 범인검거에 나섰는데 검거과정에서 일경측은 간부 등 수 명이 목숨을 잃었고 범인은 자결로 최후를 장식하였다.일제통치의 심장부에 폭탄을 던진 범인은 당시 33세의 조선인 청년김상옥이었다. 김상옥(金相玉) 의사는 1890년 1월 5일 서울 어의동(현 효제동)에서 태어났다.본관은 김해,구한말 군관을 지낸 김귀현(金貴鉉)의 3남 1녀 중 차남으로태어난 김 의사는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14세때부터 낮에는 대장간에서 말 발굽을 만드는 일을 하면서 가사를 도왔다.러일전쟁후 동대문교회에 나가 기독교에 입교한 김 의사는 1906년 동대문 교회안의 신군(信軍)야학교를 다니며뒤늦게 주경야독하며 시세에 눈을 뜨게 되었다. 이후 어의동 보통학교를 다니면서도 마을 서당에서 한문을 수학하며 배움의 의지를 불태운 김 의사는 20세 되던 해인 1909년 직접 동흥야학교를 세워불우한 청소년들에게 배움의 길을 열어주었고,이곳에서 손정도,이종소,임용호 등을 만나 시국을 토로하면서 민족의식을 키워갔다.1912년 김 의사는 동대문밖 창신동에 영덕철물상회를 설립,경영하였다.철물상회는 날로 번창하였으나 김 의사는 망국민으로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특히 삼남지방의 장터를 다니면서 약을 팔고 기독교를 전도하면서 일제의 조선침략상을 더욱 뼈저리게 체험하게 되었다. 1919년 3·1의거가 발발하자 4월 1일 동대문교회내 영국인 피어슨 여사 집에서 비밀결사 ‘혁신단’을 조직,‘혁신공보’를 발간하여 독립사상을 전파했다.김 의사는 이 해 12월 암살단을 조직하여 일본고관 및 친일파에 대한응징과 숙청을 기도했고 이듬해 4월에는 광복단 결사대의 한훈,유장렬 등과함께 전라도 지방에서 친일파수 명을 총살하고 오성 헌병대분소를 습격,장총 3정과 군도 1개를 탈취하였다.김의사는 이 해 8월 미국의원단 일행이 동양 각 국을 시찰하는 길에 내한한다는 소식에 접하고 5월부터 미국의원단 환영행사에 참석하는 사이토 총독을 암살키로 하였다.그러나 이 계획은 사전에 일경에 탐지되어 함께 거사를 모의했던 동지들이 대거 체포되었다. 한편 상하이로 건너간 김 의사는 의열단에 입단,1921년 7월 국내로 들어와충청도·전라도 등지에서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한 후 다시 상하이로 돌아갔다.김 의사는 1923년 1월 조선총독이 일본제국의회에 참석하기 위해 도쿄로 가는 기회를 이용하여 또다시 총독을 처단키로 하였다.권총 4정과 실탄 수 백발,대형폭탄을 가지고 농부차림으로 변장한 김 의사는 야음을 틈타 압록강철교를 건너 국내 잠입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사전에 정보를 입수한 상하이주재 일본영사관의 통보로 조선총독부에서 엄중한 경계를 편 데다 상하이로부터 들여온 무기를 보관하고 있던 한우석 동지가 일경에 체포되면서 거사는 곤란한 상황에 빠졌다.그러던 중 1월 12일 밤 종로경찰서 투탄사건이 발생했다.이 사건으로 종로경찰서 건물 일부가 파괴되고,행인 7명이 크게 다쳤다. 거사후 김 의사는 삼판동(현 후암동)에 있는 매형(고봉근)집에 은신하였다. 그러나 집요한 추적을 벌이던 일경은 폭탄 투척 후 5일만인 1월 17일 새벽김 의사의 은신처를 급습하였다.종로경찰서 수사주임 미와 경부(警部)의 지휘 아래 20여명의 무장 일경들이 집을 포위한 가운데 총격전이 벌어졌는데이 과정에서 종로경찰서 형사부장 다무라가 사살되고 이마세,우메다 경부 등 수명이 중상을 입었다.일경의 포위망을 뚫고 나와 남산을 가로질러 장충동쪽으로 은신한 김 의사는 왕십리의 안장사(安藏寺)에 이르러 승복으로 변장한 후 일경을 기만하기 위해 짚신을 거꾸로 신고 산을 내려왔다.무내미(현수유리) 이모집을 거쳐 19일 새벽 일경의 경계망을 피해 혁신단 동지인 효제동 73번지 이혜수(李惠受·여)의 집에 은신,동상을 치료하는 한편 앞으로의거사를 구상하였다.그러나 거사 10일만인 1월 22일 새벽 이곳 은신처도 일경에발각되고 말았다. 경기도 경찰부장 우마노의 지휘 아래 시내 4개 경찰서의 기마대와 무장경찰 수 백명이 효제동 일대를 겹겹이 포위한채 결사대가 지붕을 타고 집안으로들이닥쳤다.이후 3시간 반에 걸친 총격전 끝에 일경 10여 명을 살상한 김 의사는 오른쪽 넓적다리에 총상을 입은 채 인근집 화장실로 피신하였다가 단한 발 남은 탄환으로 자신의 머리를 향해 방아쇠를 당기고는 33세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감하였다.가족들이 김 의사의 시신을 수습하면서 확인한 총상은 무려 열 한 군데였다고 한다.김 의사는 1남 1녀를 두었으나 장남은 해방전에 요절하였고 조카 태운(泰運·72·경기도 수원 거주)씨가 양자로 입적돼있다. 이명화 독립기념관 연구원 * '의열 독립투쟁' 연재를 마치며지난 8월부터 시작된 본 연재는 이번 회로 막을 내린다.8월 13일자 ‘매국노의 상징’ 이완용을 응징한 이재명 의사를 시작으로 그간 의·열사 열여덟 분의 위국헌신(爲國獻身)의 삶을 되새겨 보았다.일황을 처단하려 했던 이봉창·박열·김지섭 의사,조선총독 사이토를 처단하려 했던 강우규·송학선 의사,일제 침략자를 처단(모의 포함)한 안중근·윤봉길·백정기·전명운·장인환·조명하 의사,일제 침략기관에 폭탄을 던진 김익상·장진홍·김상옥·곽재기·박재혁·나석주 의사,친일파를 처단한 이재명 의사,그리고 의열단원으로 일곱 차례나 일경에 붙잡혀 16년동안 감옥생활을 한 김시현 의사 등등.우리 항일투쟁사에서 찬란한 공적을 남긴 의·열사는 이 분들 외에도 무수히많다.그 분들에 대해서는 후일을 기약키로 한다. 연재를 마치면서 한 가지 언급해 두고 싶은 것은 이 분들의 후손들의 삶이다.연재 중 확인결과 대부분의 후손들은 그동안의 소문대로 생활형편이 여유롭지 못했다.대개의 경우 제대로 배우지 못한 것이 큰 원인이었다.특히 몇몇 후손들의 경우 현행 관계법의 문제로 인해 연금수혜조차 받지 못하고 있어안타까움을 더했다.최근 이들 가운데 일부는 선대가 받은 건국훈장을 당국에 반납,사회적 논란을 야기시킨 바 있다.관계당국은 그들을 외면만 할 것이아니라 관계법령을 개정해서라도 대책마련에 나서야 할 것이다. 조국광복을 위해 일신을 초개와 같이 국가에 바친 의·열사들의 애국적 삶은 한민족과 더불어 유방백세(遺芳百世)할 것이다. 정운현기자 jwh59@
  • [의열 독립투쟁] (15)이봉창 의사

    20세기 전반기 한국과 중국을 비롯한 동남아 여러 나라들이 일제의 침략을받았다.일제의 침략을 받은 각 민족은 국가와 민족을 보존하기 위해 일본에저항해 싸웠다.그러나 한국민족만큼 강인하고 격렬하게 일제와 싸운 민족은드물었다.그 중에서도 침략의 괴수인 일왕 처단을 시도한 민족은 우리민족뿐이었다. 1932년 1월8일 일본의 수도 도쿄 한복판에서 일왕이 타고 가던 마차에 폭탄이 날아들었다.일왕을 처단하려는 조선인 애국지사가 던진 세번째 폭탄이었다.1924년 박열(朴烈) 의사가 히로히토의 결혼식에 폭탄을 던지려다 사전에발각되었고,1925년엔 김지섭(金祉燮) 의사가 일본궁성으로 들어가는 이중교에 폭탄을 투척한 바 있었다. 히로히토에게 폭탄을 던진 한국인 청년은 이봉창(李奉昌) 의사였다.이 의사는 1900년 서울 용산에서 태어났다.그의 집안은 수원의 철로부근에 있던 땅을 일본인에게 빼앗긴 탓으로 그는 어려운 환경속에서 자랐다.소년시절에는일본인이 경영하는 제과점에서 고용살이와 용산역에서 기차운전 연습생으로일하기도 했다.그리고일본 오사카로 건너간 뒤 6년여동안 나고야 등지를 떠돌며 노동으로 삶을 꾸려갔다. 청년으로 성장하면서 이 의사는 일본인과 분간할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일본말을 잘했을 뿐만 아니라 일본 습속도 잘알고 있어 겉모습은 일본인과 다를 바 없었다.그러나 일본인의 고용살이를 하면서,또 일본에서 막노동을 하면서도 그의 마음속에서는 한민족의 피가 끓고 있었다.스무살때 경험한 3·1의거를 계기로 그는 일본에 대한 적개심과 조국독립에 대한 열의를 불태우고있었다. 1931년 1월 상해 임시정부를 찾아간 이 의사는 임시정부 인사들을 만나 “당신들은 독립운동을 한다고 하면서 일왕은 왜 못 죽입니까”라고 일왕의 처단을 촉구했다.일왕을 손쉽게 죽일수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그를 임시정부에선 의심스럽게 여겼다.그의 행색이나 말투가 일본인과 흡사하였기 때문에수상히 여긴 것이다.김구(金九)는 직원을 시켜 이 의사를 은밀히 떠보도록하였다.어느 술자리에서 이 의사는 “작년에 도쿄에서 일왕이 능행(陵行)한다고 행인들을 엎드리라고 하기에 엎드려생각하기를 지금 나에게 폭탄이 있다면 쉽게 죽일 수 있지 않을까 싶었습니다”라며 자신이 일왕을 죽일수 있다는 얘기를 또다시 꺼냈다. 그를 은밀히 살피던 김구가 이 의사를 직접 만났다.그는 “제 나이 이제 서른 한 살입니다.앞으로 서른 한 살을 더 산다고 해도 지금보다 더 나은 재미는 없을 것입니다.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지난 30년 동안에 인생의 쾌락을 대강 맛보았습니다.이제부턴 영원한 쾌락을 위해 독립사업에 몸바칠 목적으로 상해에 왔습니다”라며 자신의 진심을 김구에게 털어놓았다. 당시 김구는 한인애국단을 조직,독립운동의 한 방법으로 의열투쟁을 모색하고 있던 때였다.일왕을 죽일 수 있다는 것과 독립사업에 몸바치겠다는 이 의사의 각오는 김구를 감복케 하였다.두 사람은 자주 만났고,마침내 일왕을 폭살시키기 위한 계획을 추진하기로 하였다.준비는 김구가 맡았다.김구는 중국군에 복무하고 있던 김홍일(金弘壹)에게 부탁하여 상해 병공창에서 폭탄을만들었다.준비한 폭탄은 두 개였다.하나는 일왕을 처단하기 위한 것이었고,다른 하나는 이 의사 자신의 자결용 폭탄이었다. 1931년 12월 13일 이 의사는 한인애국단에 정식으로 가입하였다.단장 김구가 지켜보는 가운데 이 의사는 “나는 참된 적성(赤誠)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국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적국의 괴수를 도살(屠殺)하기로 맹서하나이다”라는 선서를 했다.적국의 괴수,그것은 일왕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일본인으로 가장한 이 의사는 이 해 12월말경 일본 도쿄로 향했다.그는 일왕이 1932년 1월 8일 요요기(代代木) 연병장에서 거행되는 신년 관병식에 참여한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이 날을 거사일로 결정하였다.김구에게는 “물품은 1월 8일 방매하겠다”는 전보를 보내 거사일을 알렸다.이 의사는 거사장소로 일본궁성 근처에 있는 경시청 앞을 택하였다.일왕은 경시청을 지나 사쿠라다몬(櫻田門)을 통해 궁성으로 들어가도록 되어 있었다. 1932년 1월 8일,예정대로 신년 관병식이 거행되었다.이 의사는 경시청 정문 앞에서 일왕을 기다리고 있었다.일왕이 탄 마차행렬이 앞을 지나자 이 의사는 뛰쳐나가며 손에 든 폭탄을 일왕을 향해 힘차게 던졌다.폭탄은 일왕이 탄 마차 뒤쪽에서 굉음을 내며 폭발하였다.순간 일장기를 든 기수와 근위병이탄 말 두필이 거꾸러졌다.그러나 안타깝게도 폭탄의 위력은 일왕에게 미치지 못하였다.폭탄을 만든 김홍일은 ‘회고’에서 군중과 일왕의 거리가 100미터 되는 것을 고려하여 폭탄을 멀리 던질 수 있도록 가볍게 만들었다고 했다.위력이 약했던 것이다. 이 의사의 일왕 저격의거는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그중에서도 중국의 반응은 남달랐다.중국의 각 신문은 이 의사의 의거를 대서특필하면서 “한국인 이봉창이 일왕을 저격하였으나 불행하게도 적중하지 못하였다”고 하며,일왕을 폭살하지 못한 것을 매우 애석해 했다.일제는 이러한 중국의 보도에 반발,1932년 1월 상해를 무력으로 침공하는 ‘상해사변’을 일으켰다. 이 의사의 의거는 일본제국주의가 신격화해놓은 일왕을 폭살시키려 했다는점에서,그리고 일제의 심장부인 도쿄 경시청 앞에서 일어났다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현장에서 체포된 이 의사는 그해 9월 30일 도쿄 대심원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10월 10일 순국하였다. 해방후 김구는 일본에 있던 이 의사의 유해를 윤봉길·백정기 의사의 유해와 함께 봉환,효창원에 안장하였다.정부는 62년 이 의사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을 추서하였다. 한시준 단국대 역사학과 교수 **이봉창의사 주변 일본제국주의의 총수격인 일왕에게 폭탄을 던지고 자신은 적지 일본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이봉창 의사.순국 당시 이 의사는 32세로 미혼이었다.그런 이 의사에게 직계후손이 있을 리 없다.이 의사와 가장 가까운 혈손으로는 이복형의 딸인 질녀 은임씨가 유일했던 것으로 전해진다.은임씨는 이 의사가 독립운동에 투신하기 전 일본서 노동자생활을 할 때 이 의사의 뒷바라지를 했다.거사를 앞두고 이 의사는 백범에게 질녀를 돌봐달라고 부탁했던 것으로 전해지는데 해방후 환국한 백범은 은임씨에게 집을 사주는 등 이 의사와의 약속을 지켰다.은임씨도 이미 수 년전 작고했다. 순국선열이나 애국지사 중에서도 번듯한 후손을 둔 경우는 그래도 낫다.기념관이나기념사업회를 운영하기도 하고 묘소를 돌보기도 한다.그러나 이 의사처럼 후사가 없는 선열들의 경우는 죽어서도 외롭다. 현재 이 의사를 기리는 기념사업회나 추모단체는 없는 실정이다.다만 효창원순국선열추모회가 4월 13일 합동추모제를 지내고 있을 따름이다.동상 역시 지난 95년에야 겨우 효창원에 건립됐다.이 의사처럼 일점 혈육도 남기지 못한채 청춘에 간 애국선열은 이래저래 마음이 아프다.당국이나 종친에서 ‘외로운 영혼’을 위해 양자라도 한 사람 세워주는 것이 도리가 아닐까 싶다. 정운현기자
  • 臨政 對日선전포고 58주년 기념강연 요지

    한국독립유공자협회(회장 閔泳秀)와 한국광복군동지회(회장 金祐銓)는 9일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일선전 성명서’ 선포 58주년을 맞아 오전 9시 30분 세종문화회관 대회의실에서 기념식을 가졌다.이어 평택대 조항래(趙恒來)교수와 대한매일 김삼웅(金三雄)주필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사활동’‘대일선전포고의 배경과 광복군의 위상‘이라는 주제로 각각 기념강연을 하였다.강연내용을 요약,정리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사활동’(조항래·평택대 교수) 임시정부는 초창기 군무부장 산하에 참모부를 두어 군사지휘체계를 확립하였다.1920년 임정은 이 해를 ‘독립전쟁의 해’로 선포하고 ‘국민개병제’를 통해 독립전쟁이 임정의 기본 실천목표임을 천명하였다. 1923년 국민대표회의 실패를 전후로 임정은 극도로 약화되어 직속군대의 필요성을 절감하였지만 당시 임정은 이같은 여건이 조성돼 있지 않았다.결국임정은 다른 항일단체들이 애국청년들의 군관학교 입교를 주선,독립군 군관양성에 주력하였다.게다가 1932년 이봉창·윤봉길 양 의사의 의거로 한중간에 군사합작의 기틀이 조성되기 시작했다. 한국 광복군은 1940년 9월 17일 임정의 주도로 자주적으로 창설되었으나 초창기 광복군은 중국 군사위원회가 제시한 ‘한국광복군 9개항 행동준승’때문에 한동안 중국군에 예속돼 있었다. 1941년 12월8일 일제가 태평양전쟁 개전을 선포하자 중국정부에 이어 ‘대일선전포고문’을 선포하였는데 이는 광복군의 자주성을 천명한 것이다.중국대륙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해오던 광복군은 인도·버마전선에 공작대를 파견,영국군과 공동으로 대일투쟁을 벌였으며,또 미국 전략첩보처인 OSS와 군사합작을 이루어 공동작전을 추진하기도 했다. ■‘대일선전포고의 배경과 광복군의 위상’(김삼웅·대한매일 주필) 1941년 12월9일 임시정부의 대일선전포고는 임시정부 26년사에서 가장 획기적인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임정이 일본에 대해 선전포고를 할 수 있었던 것은 광복군이라는 무장병력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광복군은 멀리 한말의 의병투쟁에 뿌리를 둔 것으로 ‘우리민족의 국수(國粹)’로 조직된 것이다.1940년 9월17일 임시정부의 국군으로 창군된 광복군은 1946년 5월 환국할때까지 5년 8개월여간 중국대륙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는데 특히 연합국의 일원으로 항일전에 참여,마침내 조국독립을 쟁취하였다. 건국후 광복군은 대한민국 국군의 모태가 되었으나 이승만 정권의 소외정책으로 국군 창군과정에서 직접적인 역할을 다하지는 못했다.그러나 의병·독립군의 맥을 이어온 광복군은 대한민국 국군의 정신적·사상적 모태와 이념이 되는데 부족함이 없다고 하겠다. 따라서 ‘국군의 날’은 6·25전쟁때 국군이 38선을 반격한 ‘10월1일’이아니라 광복군 창군일인 ‘9월17일’로 지정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정리 정운현기자 jwh59@
  • [의열 독립투쟁] (11)박열 의사

    일제 강점기 항일투사들의 최대 목표는 국적 일왕(日王)을 처단하는 일이었으나 철통같은 경비를 뚫고 일왕을 처단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그러나 항일투사들은 틈을 노렸다.그 중 한 분이 1932년 1월8일 관병식을마치고 돌아가는 히로히토에게 도쿄 사쿠라다몬 앞에서 수류탄을 던진 이봉창(李奉昌) 의사이며,이보다 앞선 의거는 박열(朴烈·1902∼1974) 의사가 일왕 부자(父子)의 처단을 준비하다가 체포된 거사이다. 박의사는 1923년 9월 일본 왕세자 결혼식 날에 일왕 부자를 한꺼번에 폭살하려고 폭탄입수를 계획하다가 비밀이 누설되어 검거되었다.일왕 부자 폭살기도사건으로 일본인 부인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여사도 함께 구속된다.두 사람은 사형선고를 받고 무기징역형으로 감형되어 수감 중 가네코 여사는의문의 죽음을 당하였고,박의사는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23년을 일제 감옥에서 보냈다. 박의사의 옥중생활을 날수로 따지면 8,091일,햇수로는 22년 2개월 1일이 된다.세계감옥사에 전과범의 옥중 생환자 중에 일수를 따져 22년의 생환기록은 있으나 ‘대역사건’이라는 일죄일범(一罪一犯)으로 햇수로 23년이란 감옥생활을 일관한 혁명가가 살아서 나온 기록은 당시까지만 해도 유례없는 일이다. 흔히 박의사를 ‘무정부주의자’라고 부른다.일본 제국주의의 상징인 일왕을 처단하여 조선의 자주독립으로 만민평등의 사회를 만들겠다는 것이 박의사의 생각이자 사상이었다.박의사는 이 계획을 추진하기 위해 의열단원 김한(金翰)을 통해 상해 의열단측으로부터 폭탄을 입수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못했다.다시 일본인 선원 스기모토에게 부탁했으나 역시 뜻을 이루지 못하자 자신의 추종자이며 같은 ‘불령사(不逞社)’회원인 김중한(金重漢)에게 부탁했는데 이것이 사전 발각의 빌미가 되었다. 김중한의 일본인 처가 경찰에 밀고하여 관동대진재의 와중에 박의사와 가네코를 비롯,불령사 동지들이 체포돼버린 것이다.일제강점기에 수많은 항일투사가 일제의 법정에 섰지만 박의사 부부처럼 당당하게 자신들의 소신,즉 일제타도의 당위성을 피력한 사람은 흔치 않았다.그것도 적도(敵都) 도쿄법정에서. 박의사 부부는 1925년 9월 이른바 ‘대역사건’의 주범으로 일본 대심원 특정법원에 섰다.박의사는 공판에 앞서 4가지 조건을 법원에 제시했다.첫째,조선민족을 대표하는 입장에서 조선의 왕관·왕의를 착용토록 할 것.둘째,법정에 서는 취지를 선언토록 해줄 것.셋째,조선어를 사용토록 통역을 준비할 것.넷째,피고의 좌석을 일인 판사의 좌석과 동등하게 만들 것 등이었다.박의사가 제시한 4가지 조건 중 일제는 첫째,둘째 조건은 들어주고 셋째는 거부,넷째는 재판장의 간청으로 철회했다. 이렇게 하여 박의사는 조선의 국왕을 상징하는 의관을 갖추고 법정에 서서일왕 부자 폭살의 이유를 진술하여 일본열도를 소용돌이에 몰아넣었다.긴 재판 끝에 박의사 부부에게 사형이 선고되고 이어 무기로 감형되었다.옥중의‘괴사진’사건으로 일본내각이 붕괴되는 등의 파란을 겪으면서 가네코는 옥중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고 박의사는 일본에서도 가장 심하다는 아키다형무소 등에서 복역하다가 일제 패망과 함께 맥아더사령관의 정치범 석방조치로1945년 10월27일석방되었다. 석방 이후 일본에서 신조선건설동맹위원장 등 민단 건설에 노력하던 박의사는 48년 8월 정부수립 기념행사 참석차 귀국했다가 6·25 때 서울 장충동에서 인민군에 납북되었다.납북 후 북한에서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회장 등을 역임하다가 1974년 1월18일 74세로 타계,평양 근처 애국열사능에 안장되었다. 박의사는 1902년 2월 경북 문경에서 태어나 경성고등보통학교 때 3·1 만세운동에 참가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신문배달,막노동꾼 등의 일을 하면서 세이소구(正則)영어학교에 다녔다.이 무렵 일본의 사상가이며 아나키스트인 오스키,이와사의 영향을 받아 자신의 인생관과 사회관을 형성하게 되었다. 3·1운동을 전후하여 일본에는 한국인 노동자·유학생이 4만여명에 달했다. 유학생은 매국노 자제를 비롯한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노동하면서 공부하는고학생이 대부분이었다.박의사도 고학을 하면서 정태성·조봉암 등과 진보적 사회단체인 ‘흑도회(黑濤會)’를 조직,재일한국인의 권익옹호와 조국해방운동에 나섰다.조직을 ‘흑로회(黑勞會)’‘흑우회(黑友會)’로 바꿔가면서 항일운동을 벌인 박의사는 부인과 ‘현사회’와 ‘불령선인’ 등 기관지를발간했지만 일본경찰은 닥치는 대로 압수·소각했다. 박의사의 ‘대역사건’이 발표되자 일본의 언론은 대서특필로 이를 보도하고 도쿄의 조선유학생 학우회가 총궐기 태세로 수감중인 박의사를 지원하고나섰다.그러나 국내언론은 검열과 통제로 사건내용을 구체적으로 보도하지못했다.박의사의 일왕 부자 폭살계획은 폭탄의 입수과정에서 차질과 정보누설로 좌절되었다.또한 이것이 관동대진재의 와중에 정치적으로 이용되어 ‘대역사건’으로 포장되고,조선인 대량학살을 호도하는 데 악용되었다.남쪽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항일운동을 하다가 북쪽에서 사망한 박의사는 20세기 민족사의 비극을 상징한다.89년 3·1절에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지만 아직도 그의 독립투쟁과 아나키즘사상에는 ‘흑도(검은 파도)’가 덮여있는 실정이다.생가나 향리 어디에도 박의사의 추모비 하나가 세워져 있지 않다.비운의 애국투사이다. 김삼웅 대한매일 주필·‘박열 평전’저자 kimsu@*박열 의사 부인·후손들 박열 의사의 첫 부인이자 아나키즘운동의 동지였던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여사는 박의사와 함께 대역죄 혐의로 1926년 3월 사형선고를 받고 복역 중열흘 후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그런데 이로부터 4개월 후인 7월 가네코 여사는 형무소에서 의문사하였는데 유해는 경북 문경 박의사의 선산에 안장됐다.지난 73년 일본측에서 가네코 여사의 유해를 옮겨가려고 했으나 정화암·양일동 선생 등 아나키스트들의 반대로 무산됐다.박의사와 가네코 여사는 정식 결혼식을 올리지는 않았으며 슬하에 자식도 없었다. 박의사가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린 부인은 지난 76년 타계한 박의숙(朴義淑·본명 張義淑)여사이다.두 사람이 결혼한 것은 1947년.당시 박여사는 도쿄여대 일어과를 다니면서 아르바이트로 일본 국제신문 기자로 근무했는데 출옥 1주년 맞아 박의사의 인터뷰를 갔다가 인연이 돼 결혼하게 됐다.박의사는 47세,박여사는 29세였다.박여사는 결혼 1년 만에 장남 영일(榮一·51·육군 준장)씨를,이듬해에장녀 경희(慶姬·현재 일본거주)씨를 낳았다.그러나 행복도 잠시,6·25 와중에 박의사는 납북됐고 가족들은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이때 박여사는 남편의 뜻을 따른다는 뜻에서 성을 장씨에서 박씨로 바꾸었다.장남이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당시 북한에 있던 박의사로부터 장남을 한국으로 데려가 교육시키라는 편지를 받고 박여사는 장남을 육군사관학교에 입학(67년)시켰다.박의사의 장남 영일씨는 현재 군 정보계통에 근무중이며 97년 장성으로 진급했다.현재 영일씨의 가족은 서울에 살고 있다. 정운현기자 jwh59@
  • [대한광장] 지진피해 타이완 지원 이유

    일본의 한신 대진재,터키 지진재난에 이어 타이완 전 섬이 몽땅 침몰하는듯한 대참사가 일어나 세계가 경악과 비탄을 금치 못하고 있다.최근에는 멕시코에서도 큰 규모의 지진이 발생,지구촌이 지진피해로 몸살을 앓고 있다. 그러나 이런 지구의 재앙은 천재만은 아닌 것같다.60억 인구의 자연훼손,오염,산업폐기물 투기,불법 매몰,마구잡이 간척및 굴착 등 인재에 자연이 노한 것이 아닌가하는 여론도 심심치 않게 나돌고 있다. 타이완은 9월 21일부터 리히터 규모 7.6의 강진과 10일 동안의 크고 작은여진으로 사망 2,060명,부상 8,672명,실종 및 매몰 189명으로 집계됐으며 건물 6,100동이 붕괴·반파되고 5,398동이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그러나 실제이 숫자는 정확치 않고 더 늘어날 것이 분명해 사망이 6,000명에 이를 것으로 보고 있다니 얼마나 심각한가를 체감적으로 인식할 수 있다. 타이완당국은 지진 구호를 위해 약 3조원(800억 타이완 달러)을 투입하고전국에 6개월간 비상사태를 선포하였다.리덩후이 총통이 재난구제책을 발표하면서 재난지역에 군경파견,생필품 사재기 엄벌 등의 긴급조치를 취하고 있다.국민들도 재해구호기금으로 630만달러를 내놓았고 유력한 대선후보도 내년 대선자금 600만 달러를 전액 쾌척하였다고 한다. 이에 맞춰 우리의 119구조대가 현지에 급파되어 매몰돼 있던 소년을 무너진 건물속에서 구조했다.또 우리 국민 22만명이 모금한 성금을 주한 타이완대표부에 전달하기도 했다.이를 계기로 그동안 한국에 가졌던 타이완 국민들의 감정도 좋아져 타이완간의 항공협상이 재개되리라는 소식도 들린다. 일본정부도 9월25일 각의에서 50만 달러를 지원하기로 결정했고 이밖에 각종 구호장비와 식량,가설주택,발전기 18대,그리고 건물 안전진단 전문가들과 훈련받은 개까지 보내기로 했다고 한다. 한국은 1992년 중국대륙과 수교하면서 매우 성급하고도 미숙하게,일방적으로 사전 통고도 없이 쫓기듯 매정하게 타이완에 대해 단교조치를 취했다.금싸라기같은 서울 명동의 대사관 자리도 중국측 외교관이 급작스럽게 짐을 챙겨가지고 입주케 했다.이에 대한 울분과 응어리가 가시지 않아 타이완내 한국유학생들은 고통을 당해야 했고,교민들은 고개를 떨구고 골목길로만 다녀야 했다. 1910년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긴 신규식,이동녕,김구 등 40여명의 우리 애국지사는 상하이로 가 대한민국 임시정부(1919∼45)를 수립하고 27년간 국민당과 함께 중국대륙을 이동하며 독립투쟁을 했다.이때 국부 쑨원(孫文) 총통이 임시정부 청사와 식량을 마련해줬고,그가 작고한 1925년부터 45년까지는 장제스(蔣介石) 총통이 물심양면으로 지원,우리 임시정부가 일제 강점하에서대표성을 갖고 국내외 독립운동을 통합할수 있었다. 1940년 3월 13일 중국 지장에서 순국한 이동녕 주석은 유언으로 이런 말씀을 남겼다.“우리가 일제에게 완전 점령당하지 않고 나라를 우리손으로 찾을수 있게 적극 지원한 것은 국민당 총통과 중국민이니 그 은혜를 잊지 말라”. 장 총통은 광복후 1948년 대한민국이 건국될 때까지 수백만원의 건국준비자금을 지원해주기도 했다.김구 주석은 환국할 때 장 총통에게 “27년 동안 도와준 은혜를 무엇으로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예의가 바른 우리나라는 두고두고 갚을 것”이라며 그가 마련해준 고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특히 장 총통은 이봉창의거(1932년 1월 8일)에 이어 윤봉길의거(1932년 4월 29일)를 본 뒤 임정을 적극 지원하면서 “두 나라의 우정과 신의,교류는 영원히 이어질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로부터 54년이 지난 지금 타이완은 섬 자체가 침몰할지도 모르는 대지진으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일제하의 어려운 시절,우리를 도와줬던 타이완의 재난과 참사를 결코 남의 나라 일로만 바라보고 있어선 안될 것이다./이현희 성신여대교수.현대사
  • [의열 독립투쟁](7) 백정기 의사

    무정부주의 독립운동은 한민족의 민족해방운동 방법론 가운데 무시할 수 없는 비중을 차지하는 투쟁방략 중 하나였다.그러나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백정기(白貞基·1896∼1934) 의사는 일찍이 무정부주의사상(아나키즘)을 수용하고 독립운동에 매진한 선각자였다. 일제하 한국인 무정부주의자들은 일제의 식민지 지배체제는 물론,소수의 특권계급(공산당 등)이나 일당독재,약탈적 경제제도,사회적 불평등,노예적 문화·사상 등도 타도 대상으로 규정하였다.따라서 이런 한국인들의 무정부주의운동은 독립운동의 주체가 노동자와 농민 등 민중이라고 설파하고,민중이주체가 된 암살·파괴·폭동 등 폭력혁명론적 투쟁방법론을 제창한 사실은주목된다.일제에 대항할만한 군사력이나 경제력,조직적 기반 등이 별로 없는 식민지의 민중입장에서 자신의 희생을 무릅쓴 의·열투쟁은 오히려 정당한수단이 되는 것이다.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 의거’는 우리민족의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그러나 같은 곳에서 윤 의사와 거의 동시에일제 침략세력을 응징코자 한 영걸이 있었으니,그가 바로 백정기 의사이다.그러나 이같은 사실은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백의사는 윤봉길의사의 의거를 가까이서 지켜보면서 공원 출입증을 구하지 못해 안타깝게도거사에 참여하지 못했다는 일화가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백의사는 1896년 1월(음력) 전라북도 정읍에서 태어났다.본관은 수원으로 뒷날 호를 구파(鷗波)라 하여 ‘백구파’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다.어릴 때 부친을 여의고 홀어머니 슬하에서 어렵게 자랐다.타고난 성품이 총명하고 활달하여 14세 전후에는 사서삼경에 통달할 정도로 뛰어난 자질을 보였다.또 신학문도 배워 정치·경제·사상사에 대한 식견을 갖추기도 했다. 1919년 3·1운동을 전후한 시기에 서울을 왕래하면서 독립운동의 진전상황을 목격하고 고향의 3·1운동을 주도하였다.이 해 8월 동지 4명과 함께 상경,서울과 인천 등지에서 일제기관의 파괴를 꾀했으나,뜻을 이루지 못하고 중국 펑톈(奉天,현 瀋陽)으로 망명했다.이곳에서 후일 ‘육삼정 의거’에 같이 참여하게 되는 동지 이강훈(李康勳·전 광복회장)을 만났다. 1920년 겨울부터 1923년 후반기까지는 군자금 조달과 주요 기관·시설파괴등을 목적으로 국내와 일본 도쿄 등지를 왕래하며 독립운동에 매진하였다.1923년 말 우여곡절 끝에 중국 베이징으로 건너간 백 의사는 그곳에서 신채호(申采浩)·이회영(李會榮)·김창숙(金昌淑) 등 쟁쟁한 독립운동가들을 만나큰 영향을 받았다.특히 이때 이들과 교유하면서 무정부주의 사상을 수용하였다.그리하여 1924년 4월 이회영·이을규(李乙奎)·이정규(李丁奎)·정화암(鄭華岩)·유자명(柳子明)등과 함께 재중 한인 최초의 무정부주의 조직 ‘재중국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결성하게 된다.이 연맹은 중국·일본·대만·베트남 등 아시아 각국의 무정부주의자들이 참여한 조직이었다. 1930년 4월에는 유자명·정화암 등과 함께 역시 무정부주의 단체인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을 조직했으며 그해 10월말 정화암 등과만주로 건너가 ‘한족총연합회’에 참여하는 등 조직적으로 항일투쟁을 전개했다.특히 백 의사는 이곳에서 일부독립운동가들의 민중 억압을 비판하는연극을 공연하여 재만 한인들의 갈채를 받기도 했다.지병이 악화로 1931년 5월경 상하이로 돌아온 의사는 몸을 요양하는 한편,영국인 전차회사의 매표원으로 일하며 일정한 직업이 없이 독립운동에 열중하고 있는 동지들을 부양했다. 1932년 윤봉길 의사의 의거로 평소의 소신을 펼칠 좋은 기회를 놓쳤다고 한탄하고 있던 백 의사는 마침 일본 육군대신 아라키 사다오(荒木貞夫)가 항일투쟁 세력을 탄압하기 위해 중국주재 일본공사 아리요시 아키(有吉明)에게 4천만 엔(圓)이란 거액을 지원,중국정부의 고관들을 매수하기 위해 상하이의‘육삼정(六三亭)’이라는 요리집에서 모임을 갖는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이에 백 의사를 비롯해 정화암·이강훈·원심창(元心昌)등 10명의 무정부주의자들은 1933년 3월5일 상하이에 있는 백 의사의 아파트에 모여 거사를 논의했다.그런데 여기에 모인 사람들이 서로 의거에 나서겠다고 해 제비뽑기로 주동자를 뽑게 되었다.추첨결과 백정기와 이강훈이 결정되자 일본에서 건너온 무정부주의자 원심창도 동행을 자청,최종 3인이 선정되었다. 마침내 운명의 1933년 3월 17일.중국인 동지 왕야차오(王亞樵)로부터 입수한 권총과 수류탄,고성능 폭탄을 품에 간직한 백정기와 이강훈 등은 밤 8시경 육삼정 건너편 송강춘(松江春)이란 음식점에서 아리요시 등이 회합을 끝내고 나오기를 기다렸다.그러나 안타깝게도 의거를 눈앞에 둔 순간 미리 거사정보를 입수하고 대비하고 있던 일본·중국 관헌에게 세 사람 모두 붙잡혀 거사는 실패하고 말았다.‘육삼정 의거’는 비록 실패하였지만 성과는 적지 않았다.거사 직후 ‘상하이시보(上海時報)’를 비롯해 중국 신문은 물론 국내의 주요신문들도 이 사건을 대서특필하였다. 현장에서 피체된 백 의사는 일본 나가사키(長崎)법원에서 무기징역형을 선고받고 이사하야(諫早)감옥에서 복역중 1934년 6월 5일 영양실조와 병고로향년 39세로 순국하였다.백 의사의 유해는 해방 이듬해 김구 선생의 지시로윤봉길·이봉창 의사의 유해와 함께 봉환돼 서울 효창공원에 안장됐다.그리고 1963년 3월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장세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 운동사硏 연구원‘文博 *‘육삼정 의거' 나머지 2人은 ‘육삼정 의거’의 주역 3인 중 나머지 두 동지는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우선 두 동지 가운데 청뢰(靑雷) 이강훈(李康勳) 선생은 아직 생존해 있는데 생존 애국지사 가운데 최고령자이다. 이 선생은 올해 96세의 노구에도 불구하고 애국선열 관련 행사에는 빠지지않고 참석하고 있다. 금년 백범 50주기 추도식에서도 자필로 쓴 추도문을 낭독했다.젊어서 백야김좌진(金佐鎭)장군을 곁에서 모셨으며 백 의사와 함께 체포된 후 15년형을선고받고 일본감옥에서 복역중 해방을 맞았다.해방후 일본 현지에서 백의사등 3의사의 유해 봉환에 앞장섰으며 60년까지 재일거류민단에서 간부로 활동했다. 4·19혁명후 귀국해서는 혁신계 인사들과 함께 활동하다가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60년대말부터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에 편찬위원으로 참여했으며 자서전 ‘민족해방운동과 나’를 비롯,독립운동 관련 저서도 여러권 남겼다.보훈처 독립유공자 공적심사위원과 광복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원심창(元心昌,일명 元勳) 선생 역시 백 의사와 같이 체포되어 무기징역을언도받고 복역중 8·15해방을 맞아 투옥 22년만에 일본 가고시마형무소에서석방됐다. 해방후 민단(民團)창립에 참가,11·12대 중앙단장을 지냈다.71년 7월 4일 일본에서 타계후 ‘의사’로 추존돼 재일한국인 사회장으로 치러졌다. 두 사람 모두 77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3등급)을 받았다. 정운현기자 jwh59@ *백정기 의사 유족근황과 추모사업 백정기 의사는 의거 당시 기혼자였으나 후손을 남기지 못하고 순국했다.현재 백 의사의 유족으로 등록된 백계현(白械鉉·65)씨는 백 의사의 동생 백진수(白珍守·46년 작고)씨의 아들로 백 의사에게 양자로 입양된 사람이다.백의사의 동생 진수씨도 국내 항일 공적으로 지난 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백 의사의 양자 계현씨는 한 때 공직생활과 개인사업을 하였으며 광복회 사무총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백의사 추모사업은 고향인 전북 정읍에서 주로 추진되고 있다.정읍시는 수년전부터 시 예산으로 백 의사의 사당과 기념관 건립을 추진해왔으나 IMF사태 이후 자금난으로 모두 중단된 실정이다.현재 정읍에는 백정기의사기념사업회(회장 朴在福·전 정읍시의회의장)가 구성돼 추모사업을 해오고 있으며매년 4월 13일 효창공원 3의사 묘역에서 공동추모제가 열리고 있다.기념물로는 58년 전북도민의 성금으로 정읍에 세워진 ‘순국기념비’와 독립기념관경내의 ‘어록비’ 등이 있다. 정운현기자
  • [義烈 독립투쟁] (6) 윤봉길 의사

    1932년 4월29일 오전 11시30분쯤 상하이(上海) 홍구(虹口)공원(현 노신공원)에서는 일본군이 상하이사변의 승전기념식을 겸해 일본국왕의 생일잔치,이른바 천장절(天長節) 기념식이 거행되고 있었다.이날 한국의 의혈청년 윤봉길(尹奉吉)이 그 단상에 폭탄을 던져 상하이 침공의 우두머리인 일본군사령관 시라카와(白川義則)대장을 비롯한 10여명의 원흉들을 쓰러뜨렸다. 당시 현장에서 러시아 여행객이 찍은 비디오를 보면,사열대와 함께 엎어지고 쓰러지는 원흉들의 모습은 마치 일본 제국주의와 세계 제국주의가 함께무너지는 장쾌함을 보였다.윤의사가 세계로부터 정의의 삶을 대변한 ‘의사'로 불리고 있는 것는 바로 이 때문이다.당시 세계의 언론들은 상하이를 주목했는데 인도주의를 지향하는 언론일수록 제국주의를 맹타한 윤의사를 높이치켜세웠고 또 한국의 독립운동을 들먹였다.국내외 동포들은 한국인의 독립운동에 대해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특히 ‘상하이의거’를 주도한 임시정부와 한인애국단,그리고 한인애국단 단장 백범 김구(金九)를 주목하기 시작했다.임시정부가 한인애국단을 결성해 의열투쟁을 전개했던 것도 그러한 주목을 끌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왜냐하면 1차대전이 끝난 뒤에는 파리강화회의의 안정기조라고 하는 신제국주의적 질서에 온 세계가 눌려 독립운동도 외면당하고 있었으므로 그 신질서를 깨야 할 필요가 있었다.그 기회를 만들기 위해 한인애국단을 만들고 의열투쟁을 전개했던 것이다. 때마침 뉴욕 월가(街)의 증권파동을 계기로 경제공황이 몰아쳐 왔고,일본제국주의가 만주를 침공하더니 다시 상하이를 침공하여 상하이의 한국 임시정부 인사들은 그것을 파리강화체제를 무너뜨리는 기회라고 생각했다. 임시정부는 한인애국단을 만들면서 일본 군국주의의 대륙침략에 대한 반격작전을 세웠다.이봉창(李奉昌)의사로 하여금 일제의 심장인 도쿄 궁성을,최흥식(崔興植)·유상근(柳相根)의사로 하여금 만주침략의 아성인 관동군사령부를 공격토록 한데 이어 윤의사로 하여금 상하이 침공의 선봉을 꺾어놓는다는 소위 ‘삼면작전’을 세웠다.이같은 작전을 구상한 사람은 백범이었는데윤의사의 ‘상하이 의거’ 성공으로 전세계를 진동시켰다. 윤의사는 원래 농민운동을 통해 고향의 부흥을 꾀하던 진보적 계몽주의자였다.고향인 충남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에서 야학당과 청년회·체육회·부흥원을 조직하였으며 ‘농민독본’도 저술했다.그러나 경제공황까지 덮친 식민지 하에서 농민운동이 성공하기는 어려웠다.윤의사는 마침내 ‘장부출가 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 즉 ‘대장부는 뜻을 세워 한번 집을 나서면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는 결연한 의지를 불태우며 중국 대륙으로 향했다.그것이 1930년 윤의사가 23세 때의 일이다. 처음 산둥(山東)반도의 칭다오(靑島)에서 세탁부로 일하던 윤의사는 이듬해5월 상하이로 건너갔다. 때마침 상하이에서 상하이사변이 일어나 일본군과중국군이 싸우는 대포소리를 들으며 고향의 어머님께 보낸 편지에서 “민족과 민족이 부닥치는 소리가 꽝꽝합니다”라고 표현했다. 그 꽝꽝하는,민족과민족이 부닥치는 소리를 들으며 윤의사는 의사가 되기 위해 꿈을 키웠다. 청년 윤봉길은 백범 김구를 찾아가 한인애국단에 가입하였다.자신의 생명을불태워 정의를 현양하는 꿈을 실현코자 했다. 윤의사는 ‘성인군자는 살아서영예가 있지만 의사는 죽어서 말한다’는‘꿈’에 한 걸음 더 다가간 것이다. 1932년 4월29일 아침 윤의사는 일본식 도시락과 물통,일본 국기를 들고 홍구공원을 향해 떠났다.도시락과 물통이 바로 폭탄이었다.이 폭탄은 당시 중국군 장교로 상하이 병공창에 근무하던 김홍일(金弘壹·중국명 王雄·전광복회장)이 만든 것이었다. 의거 당일 아침 윤의사는 백범과 살아서는 ‘마지막 식사’를 같이했다.그리고 윤의사는 자신의 시계와 백범의 시계를 바꾸어 찼다.자신의 시계는 6원짜리였고 백범의 것은 2원짜리였다.“선생님,나는 한시간밖에는 시계가 필요치 않습니다”라며.죽음을 앞에 둔 청년이 보여준 태연한 여유를 보면서 백범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그렇게 떠나간 윤의사에게 시계는 아니나 다를까한 시간밖에 필요치 않았다.11시반쯤 홍구공원의 폭음과 함께 그 시계도 멈추고 말았다. 윤의사의 의거로 침체됐던 독립운동이 생기를 찾고 활기를 띠게됐다.또 국내외 동포가 다시 임시정부로 마음을 모으게 됐고 국제적으로도 한국독립을새롭게 인식하게 됐다. 중일전쟁 와중에서 임시정부가 중국대륙 곳곳으로 이동하면서도 쓰러지지 않고 항전할 수 있었던 것이나 1940년 충칭(重慶)에 정착,8·15광복때까지 항전할 수 있었던 것은 윤의사의 의거로 국내외 동포들의 마음을 한 군데로 모으고 중국정부를 비롯한 국제적 지원을 얻어낸 결과라고 할 수 있다.의거후 현장에서 체포된 윤의사는 일본으로 이송돼 그해 12월19일 가네자와(金澤)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일제는 윤의사의 시신을 길거리에 묻어 행인들이 밟고 다니게 했는데 이같은 야만성은 일본제국주의밖에는 없다.해방후 윤의사의 유해는 백범의 지시로 이봉창·백정기(白貞基)의사등과 함께 봉환,효창공원에 안장됐다. [조동걸 국민대 명예교수] *尹의사의 사회개혁 활동 매헌(梅軒) 윤봉길 의사는 초창기 야학·문맹퇴치운동 등에 헌신한 개혁주의 성향의 농촌운동가였다.윤의사가 20세 되던 해인 1927년에 출간한 ‘농민독본(農民讀本)’은 윤의사의 계몽사상을 집약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당초3권으로 구성된 이 책은 제1권은 유실되고 현재 제2·3권만 전해오고 있다. 제2권은 ‘계몽편’으로 편지 쓰는 법,인사법 등 생활교양과 조선지도,백두산 등에 대한 소개 등 일반상식을 가르치고 있는데 현재 8과까지만 보존돼있다. ‘농민의 앞길’이란 제목의 제3권은 농촌개혁 방향과 농민의 당면과제 등을 제시하고 있다.앞부분에는 ‘소리의 갈래’등 한글맞춤법도 소개돼 있다. 총 25과로 구성된 제3권은 현재 7과까지만 보존돼 있다. 제2권이 기초학습자료라면 제3권은 일종의 사상독본이라고 할 수 있다.당시 윤의사로부터 야학지도를 받은 예산군 덕산마을 사람들은 오랫동안 이 ‘농민독본’을 암송하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김학준(金學俊)인천대총장은 윤의사 평전에서 “매헌은 한낱 시골의 야학당교사가 아니라 이미 이 무렵부터 사회개혁과 이상국가 건설을 꿈꾼 선각자적 지식인이었다”고 평했다. 정운현기자 jwh59@kdaily·com *윤봉길의사 직계후손들 근황 윤의사는 부인 배용순(裵用順·88년 작고)여사와의 사이에 두 아들을 두었다.윤의사 의거 당시 장남 종(淙)씨는 세살이었고 둘째 담(淡)은 배 여사 뱃속에 있었다.둘째 담은 두살때 영양실조로 일찍 세상을 떴다. 일제때는 일제의 방해로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한 장남 종(淙)씨는 해방후 성균관대 경제학과를 졸업,10여년간 농수산부 공무원으로 근무하다 84년간경화로 타계했다. 윤의사의 부인 배여사는 남편없이 외아들을 키우며 어렵게 살다가 88년 82세로 작고했는데 배여사의 장례는 사회장으로 치러졌다.윤의사 의거 50주년인 82년 배여사는 국민훈장 목련장을 받았는데 이 해 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는 ‘배용순 효부상’을 제정,매년 윤의사 의거일인 4월29일 예산 충의사(忠義祠)에서 시상하고 있다. 현재 윤의사 직계후손 가운데 가장 웃어른은 윤의사 며느리 김옥남(金玉南·67·서울 동작구 상도동 거주)씨.김씨는 딸 여섯에 끝으로 아들 하나를 두어 겨우 윤의사의 대를 이었다.김씨는 “백범 김구 선생의 아들 김신(金信)장군이 교통부장관 재직시절 김포공항에 스낵 가게를 주선해줘 겨우 살림을꾸려왔다”며 “윤의사의 후예 7남매를 모두 반듯하게 키운 것이 큰 보람”이라고 말했다. 윤의사의 유일한 손자 주웅(柱雄·29)씨는 고려대 기계공학과를 졸업하고현재 현대자동차 남양연구소에 재직중인데 97년에 결혼,아들 하나를 두고 있다.주웅씨 위로 누나 여섯 사람도 모두 출가했다. [정운현기자]
  • [義烈 독립투쟁](4)송학선 의사

    일제에 맞서 국권수호와 조국광복을 위해 헌신한 의병·독립군·광복군·의사·열사 가운데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한 분들이 의외로 많다.신돌석(申乭石)의병장을 비롯해 ‘봉오동 전투의 영웅’ 홍범도(洪範圖)장군,일왕에게 폭탄을 던진 이봉창(李奉昌)의사 같은 분이 그런분들이다.1926년 순종(純宗) 승하 직후 창덕궁 금호문(金虎門) 앞에서 조선총독 사이토를 처단하려 했던 송학선(宋學善)의사 또한 그러한 인물 가운데한 분이다. 1893년 서울 천연동에서 출생한 송 의사는 13살 때 보통학교를 1년 다닌 것 외에는 별다른 교육을 받아 본 적이 없다.또 극심한 가난 때문에 어려서는가족이 흩어져 방랑생활을 하였으며 일본인이 경영하는 농구상점·사진관 등을 전전하며 호구(糊口)를 해결하기도 하였다.말년에는 영양실조로 각기병까지 걸려 고생한 송 의사였지만 조국에 대한 애정은 배운 사람 못지않았다. 1926년 ‘금호문 의거’로 체포된 후 일본인 판사가 “피고는 어떤 주의자(主義者)인가,사상가(思想家)인가?”라고 묻자 송의사는 “나는 주의자도 사상가도 아니다.나는 아무 것도 모른다.다만 우리나라를 강탈하고 우리 민족을 압박하는 놈들은 백번 죽어도 마땅하다는 것만은 잘 알고 있다.총독을 죽이지 못한 것이 한이 된다”고 답변하였다.송 의사는 사상·주의는커녕 배후세력이나 후원자조차 없었다.굳이 송 의사를 평가하자면 순수한 애국심에서비롯한 민족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송 의사의 의거는 1926년 4월 26일 조선왕조 마지막 임금인 순종의 승하가직접적인 계기가 됐다.대한제국의 마지막 임금으로 망국의 쓰라림을 경험한순종의 승하 소식은 많은 조선인들에게 망국의 슬픔을 절감하게 했던 것이다.이 소식을 접한 백성들은 전국 곳곳에서 머리를 풀고 엎드려 궁성을 향해망곡(望哭)하였으며 서울에 거주하던 백성들은 창덕궁으로 몰려들어 통곡하기도 하였다.고종 승하후 3·1의거를 경험한 일제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군경(軍警) 총동원 채비를 갖춘 채 창덕궁 일대에 삼엄한 경계를 펼쳤다. 평소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처단한 안중근(安重根)의사를 흠모해오던송 의사는 사이토 총독을 처단키로 결심하고 의거에 사용할 칼을 구입,기회만을 기다리고 있던 중이었다.그러던 차에 4월 26일 순종이 승하하자 송 의사는 사이토가 조문차 순종의 빈소가 있는 창덕궁을 찾을 것으로 확신하고창덕궁 입구에서 처단키로 작정하였다.이튿날 송 의사는 창덕궁 정문인 돈화문(敦化門) 앞에서 군중들 틈에 끼여 사이토가 나타나기를 기다렸으나 사이토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 다음날 장소를 바꿔 돈화문 서쪽 금호문 앞에서 사이토를 기다리고 있던 송 의사는 오후 1시 10분경 고관 차림의 일본인 3명을 태운 자동차가 창덕궁으로 들어가자 그 중 1명이 사이토일 것이라고 판단하였다.얼마후 그들이탄 자동차가 금호문으로 나오자 송 의사는 비호같이 자동차에 뛰어 올라 왼쪽에 앉은 자의 오른쪽 가슴과 왼편 허리를 찌른 후 다시 중앙에 앉아 있는자의 가슴과 배를 찔렀다. 목적을 달성했다고 판단한 송 의사는 차에서 내려 인근 재동(齋洞) 방면으로 내달렸다.현장을 목격한 일경들이 추격하여 송 의사를 에워쌌으나 이들은 송 의사를붙잡기는커녕 오히려 육탄전에서 여러 명이 중상을 입었다.그러나 중과부적으로 송 의사는 결국 현장에서 체포되었다.당시 신문보도에 따르면,일경 5,6명은 칼을 빼들고는 달려들지도 못한 채 한참 서서 송 의사를 바라보다가 돌멩이를 집어던졌다고 한다(‘동아일보’,1926.5.2).송 의사는 일경 수 명과 대치 와중에도 의연한 기개를 잃지 않았다. 한편 송 의사가 처단한 자들 가운데 사이토는 포함돼 있지 않았다.그들은경성부 평의원 다카야마 다카유키(高山孝行)·사토 도라지로(佐藤虎次郞)·이케다 조지로(池田長次郞) 등 3인이었다.이들 가운데 칼을 맞은 다카야마는 즉사하고,사토는 중상을 입었다.또 육탄전 와중에 송 의사의 칼을 맞은 조선인 순사 오환필(吳煥弼)과 일본인 기마경찰 1명도 중상을 입었다. 일제에 피체된 송 의사는 사형을 언도받고 거사 이듬해인 1927년 5월 19일서대문형무소에서 34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송 의사의 의거는 비록 목표로삼았던 사이토를 처단하지는 못했지만 그 반향은 실로 대단했다.3·1의거 이후 급격히 활성화되었던 한민족의 독립운동은 1920년대 중반에 이르면서 일시 소강상태에 빠져 있었다.또 일부 조선인들은 사이토의 교활한 ‘문화정치’ 전략에 일시적으로 말려들어 현실에 안주하고 있던 상황이었다.바로 이러한 때 서울 한복판에서 한 순박한 애국청년의 의거를 계기로 조선민족은 다시 민족의식을 회복하게 되었고 비록 3·1의거 수준에는 미치지 못하였으나이는 다시 6·10만세 의거로 불타오르게 된 것이다. 1962년 정부는 송 의사에게 건국훈장 독립장(3등급)을 추서하였다.송 의사피체 후 보도된 신문기사에는 가족으로 부모와 동생 2명만 언급돼 있을 뿐처자에 대한 얘기는 없는 것으로 봐 의거 당시 송 의사는 미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현재 송 의사 관련 기념사업회나 추모모임이 없는 것은 물론 보훈처에서 유족의 근황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나라를 위해 목숨을바친 순국선열이 가신 지 한 세기도 채 못돼 벌써 잊혀지고 있으니 안타깝고 부끄러운 노릇이다. 채영국 독립기념관 연구원·문학박사*의거 현장 금호문 앞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敦化門) 좌우에는 작은 문 두 개가 있다.오른쪽으로는 단봉문(丹鳳門),현대그룹 사옥쪽인 왼쪽으로는 금호문(金虎門)이 있다. 바로 이 금호문 앞이 송학선 의사가 조선총독 사이토를 처단하려 했던 현장이다. 서울에 남아 있는 조선왕조 궁궐 가운데 창덕궁은 조선왕조의 멸망을 지켜본 궁궐이라고 할 수 있다.이는 조선조 마지막 임금인 순종이 이곳에 기거하면서 망국을 맞았기 때문이다.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고종으로부터 양위를 받은 순종은 황제 즉위 후 덕수궁에서 이곳 창덕궁으로 옮겨 기거하고 있었다. 1910년 8월 ‘한일병합’으로 나라를 잃게 되자 일제는 순종을 황제에서 왕으로 격하시킨 후 ‘이왕(李王) 전하’ 혹은 창덕궁에 기거한다고 해서 ‘창덕궁 전하’라고 부르곤 했다. 일제는 ‘망국의 임금’인 순종을 위로한다는 미명하에 망국 이듬해인 1911년부터 인근 창경궁에 동물원·식물원을 조성하면서 궁궐을 훼손하였다.창경궁이 창경원으로 격하된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송 의사의 의거 현장인 금호문 앞 일대는 창덕궁 관광객들의 주차장으로 사용되고 있다.현재 이곳에는 송 의사의 의거현장임을 알리는 표지석은 물론안내판 하나도 서 있지 않다.창덕궁 관계자는 “최근 일본인 관광객이 부쩍늘었다”고 말했다. 정운현기자 jwh59@*사이토총독 어떤 인물인가 일제하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처단 대상으로 지목했던 사이토 마코토(齋藤實)는 일본 해군대장 출신으로 제3·5대 조선총독을 역임했다.재임기간은 10년 1개월로 역대 조선총독 가운데 중임한 사람은 사이토가 유일하다.1856년 일본 이와테(岩手)현에서 태어난 사이토는 해군병학교를 졸업하고 25세인 1882년 해군 소위로 임관했다.이후 해군에서 승승장구,41세인 1898년에는 해군차관,1906년에는 49세의 나이로 해군의 수반인 해상(海相)에 올라 8년여 동안 자리를 지켰다.이어 1919년 8월부터 두 차례나 조선총독을 역임했고,1932년 5월 일본 내각의 수상에 취임하였다. 일본 군국주의 체제하에서 정치엘리트로 내각 수반직에까지 오른 사이토는두 얼굴을 지닌 대표적인 인물이었다.사이토는 3·1의거 후 조선인들의 민족의식이 가장 고조되어 있을 때 조선총독으로 부임하게 된 것이다. 그는 총독 취임 후 소위 ‘문화통치’라는 슬로건 아래 문관(文官)총독제허용,헌병경찰제 폐지,지방자치제 실시,산미증산계획 등을 내걸었다.그러나이러한 사탕발림식의 제도는 그의 재임기간 내내 거의 실현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더욱 강화된 무단통치로 나타났다.즉 문관출신 총독은 해방이 될 때까지 단 한 사람도 임명된 적이 없고,경찰은 이름만 바뀐 채 이전보다 더 늘었으며 증산된 쌀은 한국인의 입으로 들어가는 대신 모두 일본으로 실려 나갔다. 한편 사이토는 부임 초부터 한국 독립운동가들로부터 처단 대상으로 지목됐었다.경성(현 서울)에 부임하는 날 남대문역(현 서울역)에서 64세의 노 투사 강우규(姜宇奎)의사로부터 폭탄세례를 받은 것을 시작으로 1924년 5월에는만주의 독립군단인 참의부(參議部) 대원들이 압록강을 순시하는 그와 그의일행을 공격,목숨을 잃을 뻔하기도 했다.그러나 그는 결국 귀임 후 1936년 2월 26일 소위 ‘2·26사건’때 후배 청년장교들에게 암살당했다. 채영국 연구원
  • [義烈 독립투쟁] 金祉燮 의사(3)

    ‘동지 여러분 앞.삼가 새해를 축하합니다.제(弟)는 288시간만에 세상 구경을 하게 되었습니다.참말 지저(地底)의 생활이었습니다.그 속에서 생각할 때에는 이 세상 비애,적막,번민 모든 고통이 한꺼번에 이 사람의 흉중으로 총집되어 경도광랑(驚濤狂浪)의 소리만 들릴 적에 할 일없이 어서 나와 어복(魚腹)으로 들어가라고 유인하고 최촉하는 공포를 주던 것이 마치 왕생(往生)의 일인 것 같습니다.…’ 이 내용은 1924년 1월 5일 도쿄 소재 일왕(日王)의 궁성 앞 니주바시(二重橋)에 폭탄을 투척,조선민족의 독립의지를 만방에 떨친 김지섭(金祉燮)의사가 일본에 도착한 후 상하이(上海)의 동지들에게 보낸 편지의 모두 부분이다.무려 12일간을 석탄 운반 화물선의 창고에 몸을 숨긴채 일본에 도착한 김의사는 당시의 고통스런 상황을 마치 죽었다 살아 나온 것 같았다고 적고 있다. 김 의사는 1884년 7월 21일 경북 안동에서 출생하였다.20대 청년시절 한때상주보통학교 교원과 금산지방법원 서기 겸 통역으로 재직하기도 하였으나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귀향하여 뜻을 같이하는 동지를 모아 국권회복의길을 강구하였다.이후 김 의사는 만주·연해주·상하이 등을 다니며 독립운동에 전념하였으며 1922년 4월에는 고려공산당에,그 해 여름에는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였다. ‘이중교 의거’에 앞서 김 의사는 1923년 3월 같은 단원인 김시현(金始顯)·유석현(劉錫鉉) 등과 함께 국내에 있는 일제의 침략기관을 파괴하기로 하고 대량의 폭탄을 중국으로부터 국내로 반입하려 했다.그러나 이 계획은 동지로 위장침투한 경기도 경찰부 소속 조선인 경찰 황옥(黃鈺)의 밀고로 실패하고 말았다.김 의사는 다행히 사전에 피하였으나 김시현·유석현 등은 일경(日警)에 체포돼 옥고를 겪었다. 그 해 12월 김 의사는 거사 자금을 마련키 위해 조선인 총독부 판사 백윤화(白允和)에게 5만원을 요구하였다.그러나 백은 요구를 들어줄 듯하다가 결국에는 배신,동지 윤병구(尹炳球)만 체포되고 말았다.백방으로 거사자금 마련을 하던 중 1924년 초 도쿄에서 일본 총리를 비롯하여 조선총독 등이 대거참석하는 ‘제국의회(帝國議會)’가개최된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김 의사는 일제 침략주의자들을 처단할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판단,동지 최윤동(崔允東)에게서 입수한 폭탄 3개와 여비 100원을 준비하여 상하이 포동(浦東)부두에서 도쿄로 향했다.당시 김 의사는 일본인 소유 석탄운반선 천성산환(天城山丸)의 창고에 몸을 의탁하였는데 이 과정에는 일본인 공산주의자 히데시마 히데지(秀島廣次)와 선원 고바야시 간이치(小林幹一)·구로시마 리게이(黑島里經)의 도움이 있었다. 1923년 12월 31일 일본 후쿠오카현(福岡縣)에 도착하여 나카무라 겐타로(中村彦太郞)라는 일본 이름으로 여관에 투숙한 김 의사는 여기서 3일을 보낸후 모포·외투·시계 등을 전당포에 맡겨 여비를 마련한 다음 도쿄로 향했다.기차 안에서 제국의회가 휴회됐다는 소식을 접한 김 의사는 거사계획을 변경하여 일본 제국주의의 상징인 일왕(日王)의 궁성을 폭파키로 결정하였다. 1월 5일 도쿄에 도착한 김 의사는 우선 궁성의 규모·구조를 사전답사한 후 날이 저물기를 기다렸다.오후 7시경 일본인 관광객과 뒤섞여 이중교 앞으로 접근하자 감시 경찰이 의심스런 눈초리로 더 이상 궁성 쪽으로 접근하지 말 것을 종용하자 김 의사는 일경을 향해 폭탄 한 발을 던지고 재빨리 이중교를 건너 궁성 정문쪽으로 향하였다.이에 궁성 보초병 2명이 달려들며 김 의사에게 총을 겨누자 김 의사는 나머지 폭탄 2발을 일경들이 달려드는 궁성쪽을 향해 연속적으로 던졌다.그러나 김 의사가 던진 폭탄 3발은 모두가 불발이었다.김 의사가 타고온 배는 습기가 많은 화물선이어서 도쿄로 오는 동안폭탄의 화약이 모두 젖어버린 탓이었다.김 의사의 의거로 일본전역은 경악을 금치 못하였다.자신들이 ‘신(神)’으로 받드는 일왕의 궁성에 조선인이 폭탄을 들고 뛰어들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었다.내무차관의 견책에이어 경시총감·경무부장·궁성 경비책임 경찰서장 등 치안책임자가 줄줄이파면되었다. 현장에서 체포돼 히비야(日比谷)경찰서에 구금돼 있던 김 의사는 1924년 9월 9일 열린 공판에서 직업을 묻는 판사에게 “조선 독립당원과 혁명사원이다”라고 당당히 말하였다.또 10월 11일 공판에서는 장문의 ‘진술서’를 통해 일제의 침략정책을 통박한 다음 “이번에 내가 취한 행동은 침략정치에도취된 왜국(倭國)관민을 각성시키고 반성을 촉구하기 위함이었다”라고 밝혔다. 재판정에서 김 의사는 자신에게 사형이 아니면 무죄를 줄 것을 주장하였으나 일제는 무기징역을 언도하였다.1927년 20년으로 감형된 김 의사는 옥중에서도 의거 당시의 의기를 굽히지 않았으나 고문 후유증이 악화돼 이듬해 2월 20일 뇌일혈로 지바(千葉)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그 때 김 의사의 나이는 44세였다.채영국 독립기념관 연구원*金祉燮 의사 후손 근황 김지섭 의사의 직계 유족으로는 며느리 최수희(崔秀禧·75·대구 거주) 여사와 손자 3형제가 있다.김 의사의 외아들 재휴(在烋)씨는 생전에 회사원으로 근무하다가 지난 94년 78세로 노환으로 작고했다. 김 의사의 손자 3형제는 모두 각자 가정을 꾸리며 살아가고 있다.장손 두현(斗鉉·47)씨는 경북고와 서울대 화공과를 졸업한 수재로 현재 전남 여수에거주하고 있는데 독일계 외국인회사인 한국바스프(주)생산부장으로 재직중이다.슬하에 1남1녀. 둘째 손자 광현(洸賢·44)씨는 대학졸업 후 롯데건설에 근무중이며 경기도부천에 거주하고 있다.셋째 손자 기현(己鉉·39)씨는 모친 최 여사를 모시고 대구에서 개인사업을 하고 있다. 장손 두현씨는 “어릴 때부터 아버님으로부터 할아버지께서 독립운동을 하셨다는 얘기를 듣고 자랐다”며 “할아버님의 애국정신을 본받아 열심히 살고 있다”면서 “현재 선산에 안장돼 있는 할아버지를 국립묘지로 이장하고싶다”고 말했다. 김 의사의 묘소는 경북 예천군 호명면 직산리 대지동에 자리잡고 있다.김의사를 기리는 기념물로는 경북 안동 영호루에 있는 기념비와 독립기념관 경내 시비(詩碑)가 있다.매년 2월 20일 김 의사 순국일에 추모행사가 거행되고 있으나 별다른 기념사업회는 없는 상태.1962년 김 의사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이 추서됐다.정운현기자 jwh59@*日 궁성 어떤 곳인가 일본인들은 그들의 왕이 거주하는 궁성을 ‘황거(皇居)’라고 부른다.수도도쿄(東京)시내 치요다구(千代田區)에 위치한 일본의 왕궁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정권을 잡고 막번체제(幕藩體制·1603∼1867)를 이끌 시기에는 에도성(江戶城)으로,제122대 왕인 메이지(明治·1868∼1912)가 ‘황거’를 교토(京都)에서 옮겨온 이후에는 도쿄성(東京城)으로 불렸다.막번시기에는 실질적인 최고 권력자인 쇼군(將軍)이 궁성의 주인이었으며 메이지 이후부터는 왕의 거주지가 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를 물리치고 권력을 잡은 이에야스는 자신의위엄을 살리기 위해 히데요시가 세운 오사카성(大阪城)보다 훨씬 더 큰 궁성을 만들 것을 명령하였다.따라서 이 궁성은 그의 손자인 3대 쇼군 이에미쓰(家光)시대에 와서야 완성되었다. 이같이 오랜 기간 대규모로 축조된 궁성의외부에는 적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해자(垓字·궁성 밖으로 둘러서 판 연못)가 이중으로 설치돼 있다.해자는 간다천(神田川)에서 북서방향으로 우시고미·이치가야·요쓰야·아카사카 등을 띠를 두르듯 감싸고 있다.그리고 궁성에는 아카마쓰 성문(파수꾼이 망을 보는 바깥쪽 성문) 등 36개의 성문이설치돼 있다.현재는 안쪽 해자로 둘러 싸인 약 30만평의 땅에 궁성이 조성돼 있고,현 일왕 아키히토(明仁)가 이 곳에 살고 있다. 일본의 이같은 왕궁은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한국을 침략하면서 부터는 한국 의·열사들이 폭파대상으로 삼은 주요 목표물 가운데 하나로 떠올랐다.그곳에 거주하는 일왕 역시 처단대상이었다. 김지섭(金祉燮) 의사의 ‘이중교의거’ 이외에도 1932년 1월 8일에는 이봉창(李奉昌) 의사가 왕궁의 사쿠라다문(櫻田門) 앞에서 일왕을 향해 폭탄을 던졌다.김 의사가 폭탄을 던진 이중교는 궁성 정문 앞에 있는 다리.이중으로구성돼 있다고 해서 이중교(二重橋)라고 부른다.길이는 약 29m,폭은 약 7m다. 채영국 연구원
  • 의열 독립투쟁(2)-강우규 의사

    일제 강점기 독립투사 가운데서 의사(義士)라고 하면 흔히 20∼30대 열혈청년을 떠올리는 것이 보통이다.실제로 윤봉길(尹奉吉)·조명하(趙明河)의사는의거 당시 24세였고,이봉창(李奉昌)의사는 32세, 김상옥(金相玉)의사는 33세,그리고 나석주(羅錫疇)의사는 36세였다. 1924년 일황의 궁성 정문 앞 니주바시(二重橋)에 폭탄을 던진 김지섭(金祉燮)의사가 의거 당시 44세로 드물게 40대에 속하는 정도다. 그런데 환갑이 넘은 60대 나이로 의거를 행한 의사가 있다면 믿을 수 있을지.그러나 실제 우리 의열투쟁사에는 60대 노(老)투사의 의거기록이 있다. 1919년 9월2일 오후 5시경.서울의 관문인 남대문역(현 서울역) 주위에는 일본 군경이 삼엄한 경계를 펼친 가운데 어느 고관의 도착을 기다리는 준비가부산하게 진행되고 있었다.이윽고 5시가 되자 사이토 마코토(齋藤實)신임 총독 일행을 태운 열차가 플랫폼으로 도착하였다.사이토 총독 내외와 일행은출영나온 내외 인사·신문기자들과 인사를 나누고는 이내 귀빈실로 들어갔다. 얼마 후 사이토가 귀빈실에서나와 입구에 마련된 쌍두마차에 오르려 하자인근 한양공원(현 남산공원)에서는 그의 부임을 축하하는 21발의 예포(禮砲)소리가 울려퍼졌다.예포가 끝나고 사이토가 마차에 오르는 순간 사이토가 탄마차 인근에 폭탄 한 발이 굉음을 울리며 작렬하였다. 마차를 호위하던 호위병을 비롯해 신문기자 등 30여명이 일순간 현장에서 고꾸라졌다.폭탄이 떨어진 곳은 사이토가 탄 마차로부터 불과 7보(步) 정도 떨어진 거리였다. 3·1의거 후 격앙된 조선민족의 감정을 잠재우기 위해 소위 ‘문화통치’라는 허울을 내걸고 부임한 신임 총독 사이토.그가 조선 땅에 첫 발을 내디딘후 받은 첫번째 선물은 ‘폭탄세례’였다.이날 신임 총독이 부임하는 자리에폭탄을 던져 조선인의 기개를 만천하에 드높인 의사가 바로 강우규(姜宇奎)의사다.강 의사의 그때 나이는 64세,이미 환갑이 지난 노인이었다.일제하 숱한 의·열사 가운데 강 의사는 가장 고령에 속한다. 1855년(철종 6년) 평안남도 덕천(德川)에서 태어난 강 의사는 한일합병으로 나라가 망하자 “눈에 들어오는 것이모두 보고싶지 않은 사람,보고싶지 않은 물건”이라며 이듬해 봄 가솔(家率)을 이끌고 북간도로 이주하였다.만주길림성에 정착하여 신흥촌을 건설하고 동광학교를 세워 교육사업에 진력해온 강 의사는 1919년 국내에서 3·1의거가 일어나자 이에 호응하여 만주·노령(露領) 등지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그해 5월 노령의 ‘노인동맹단’에 참가,노인단을 대표하여 조선총독을 폭살키로 작정한 강 의사는 시베리아에서 러시아인으로부터 러시아 돈 50원을주고 영국제 폭탄 한 개를 구입한 후 6월11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일본 배를타고 원산을 거쳐 8월5일 서울에 도착하였다. 국내로 들어와 안국동 김종호(金鍾鎬)의 집에 머물면서 최자남(崔子南)·허형(許炯) 등과 거사 계획을 세운 강 의사는 마침 하세가와(長谷川好道)에 이어 사이토가 신임 총독으로 부임한다는 정보를 접하고 남대문역에서 그를 처단키로 결심했던 것이다. 9월2일 의거 당일 강 의사는 폭탄을 명주수건에 싸 허리춤에 차고 그 위에저고리와 두루마기를 걸쳐 입었다.또 시골영감 티를 내기위해 파나마 모자에 가죽신을 신고 양손에는 양산과 수건을 하나씩 들고 남대문역으로 향했다.이런 강 의사를 주목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역 구내 다방에서 군중 틈에 끼여 기회를 엿보고 있던 강 의사는 사이토가 귀빈실에서 나와 마차에 오르려하자 마차를 향해 폭탄을 던졌다.그러나 강 의사가 던진 폭탄은 투탄거리가 불과 6∼7m 정도에 그쳐 사이토가 탄 마차에는 미치지 못한데다 폭탄의위력이 약해 사이토를 처단하는 데는 실패했다. 사이토는 폭탄의 파편이 혁대를 스치는 정도에 불과했고 같이 부임한 정무총감 미즈노(水野鍊太郞)는 경미한 부상을 입는 데 그쳤다.그러나 성과가 적은 것은 아니었다.이 사건으로 현장에서 총 37명의 부상자를 냈는데 이 가운데 스에히로(末弘又二郞) 경기도 경시(警視)는 파편이 왼쪽 엉덩이를 관통하는 상처를 입어 9일 후인 9월11일 사망하였다.또 ‘대판조일(大阪朝日)신문’의 다치바나(橘)특파원은 파편이 복부를 뚫고 들어가 11월1일 사망하였으며야마구치(山口諫男)특파원은 오른쪽 어깨에 중상을 입고 결국 팔을 절단 하였다. 한편 사건 직후 일경·헌병들은 남대문 일대에 비상령을 선포하고 범인 검거에 혈안이 돼 수색을 벌였다.그러나 60대 노인인 강 의사는 별다른 검문도받지 않은 채 무난히 현장을 빠져나왔다. 며칠간의 수소문 끝에 투탄자가 노인이라는 사실을 파악한 일경은 의거 보름 만인 9월17일 가회동 하숙집에서강 의사를 체포했다. 강 의사를 체포한 사람은 조선인 경찰 가운데 애국지사 탄압으로 악명이 높았던 김태석(金泰錫)이었다. 강 의사는 재판 과정에서도 의연함과 당당한 기개를 잃지 않아 일본인 재판장이 ‘영감님’ ‘강선생’으로 호칭하였다고한다.고등법원의 항소가 기각되어 사형이 확정되자 강 의사는 면회온 장남중건(重健·작고)에게 “사람은 한번 나면 죽는 것이다.네가 나의 사형을 슬퍼한다면 내 아들이 아니다.나는 내가 우리 민족을 위하여 아무 일도 이루어놓지 못하였음을 슬퍼할 뿐이다.내가 이때까지 자나깨나 잊지 못하는 것은우리나라 청년들의 교육이다.내가 이번에 죽어서 우리 청년들의 가슴에 어떠한 감상과 인상을 주게 된다면 그 이상 보람 있는 일이 없겠다…”고 하고는그 뜻을 전국 13도의 각 학교와 교회에 알릴 것을 부탁하였다. 노 투사는 최후까지 조국을 걱정하였다.1년간의 옥고를 치른 강 의사는 이듬해 11월29일 오전 9시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그때 나이 65세였다. 교수형이 집행되기 직전 형 집행자가 “유언이 없느냐”고 묻자 대답 대신사세시(辭世詩) 한 편을 마지막으로 남겼다. 사형대에 홀로 서니(斷頭臺上) 춘풍이 감도는구나(猶在春風) 몸은 있으되 나라가 없으니(有身無國) 어찌 감회가 없으리요(豈無感想) 강 의사의 유해는 처음에는 현 은평구 신사동 소재 공동묘지에 묻혔는데 54년 수유리로 이장됐다가 67년 다시 국립묘지(애국지사 묘역)로 이장됐다.1962년 정부는 강 의사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등급)을 추서하였다.강 의사의 의거현장인 서울역 역사(驛舍) 앞에는 강 의사의 의거를 알리는 기념표지석이 오가는 행인들의 눈길도 끌지 못한 채 쓸쓸히 서 있다. 한편 강 의사의 직계 후손은 대가 끊긴 상태다.장남 중건씨는 연해주에서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며 친손녀 영재(榮才)씨도 수년 전 작고했다.영재씨의부군은 도쿄제대 출신의 농학자로 수원농사시험장장을 지낸 최병석씨.현재강 의사와 가장 가까운 친족으로는 조카 항렬의 강영복(姜榮福·72·서울 거주)씨로 강씨가 강 의사의 훈장과 훈장증을 보관하고 있다.그러나 직계 후손이 아니어서 연금수령은 못하고 있다.강 의사의 제사는 평안남도 중앙도민회에서 매년 순국일인 11월29일 지내고 있다.변변한 일대기 한 권도 없고 그흔한 추모사업회,기념사업회 하나 없는 것은 대가 끊겨 돌보는 이가 없는 탓이다.강 의사가 살아서보다 죽어서 더 고적(孤寂)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정운현기자 jwh59@
  • [대한시론] 임시정부 법통계승 기념사업

    1987년 10월12일 국회의 의결을 거쳐 그해 10월27일 국민투표를 통해 제9차로 개정된 현행 헌법전문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한다’고 명시했다. 이는 대한민국이‘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것을 뜻한다. 법통 계승이 왜 중요한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을 것이다.헌법이 선언적인 의미만 갖는 형식적인 글귀가 아니라면 헌법전문에 명시한 법통 계승은 거기에 상응하는 실질적인 조치를 요구하고 있음이 당연하다.더구나 같은 전문에 명시된‘3.1운동’과‘4.19민주이념’에 대해서는 가시적인 조치가역대 정권에 의해 취해졌다.그런 점을 감안한다면 임정에 대해서도 예우가필요하다. 개정 헌법에서 임정과의 관계를 적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헌법하에서 출발한 노태우 정부나 김영삼 정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는 조치를 적극적으로 취하지 않았다.기껏 김영삼 정부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요인 몇분의 유해를 국립묘지에 안장했을 뿐이다. 50년 만에 교체되었다는 이 정권이 앞의 정권들과 차별성을 보이려면 임정의 법통 계승문제의 해결도 하나의 시금석이 될 수 있다.이에 법통 계승과관련된 몇가지를 거론하고자 한다. 첫째,임정 유적지 보존이다.임정은 상해에서 시작하였지만 1932년 한인애국단의 윤봉길 의사의 의거 후에는 계속 피난하지 않으면 안되었다.임정이 충칭(重慶)까지 옮겨간 여러 지방의 유적지를 찾고 후손들이 찾을 수 있도록보존해야 한다.오랜 세월이 지나 정확한 유적지를 알 수 없는 곳도 많겠지만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분들이 생존해 계시는 동안에 서둘러야 한다.이런 문제는 주재국 정부와의 외교적 교섭이 앞서야 하겠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고 본다. 둘째,임정기념관의 건립이다.지금까지 임정기념관이 설립되지 않은 것은 임정의 권위와 전통을 의도적으로 거부한 세력에 의한 것이지만 결코 떳떳한일은 아니다.임정기념관은 임정 관계자료와 독립운동 관계자료 및 일제강점기 총독부의 자료 등,이 시기 연구에 필요한 자료를 완벽하게 갖춘다.그렇게 되면 이곳에 와서 독립운동과 민족 반역의 역사를 모두 찾아볼 수 있게 된다. 필자는 여러번 임정기념관 설립 최적지는 헐어버린 조선총독부 자리라고 주장한 바 있다.주장의 의도는 광화문 일대의 국가 핵심 건물의 배치도가 종전에는 경복궁→조선총독부→정부종합청사의 순서로 되어 그것이 상징하는 것이 가관이었는데 조선총독부 자리에 독립광장과 임정기념관을 대신한다면 조선왕조가 독립운동(임정)을 거쳐 대한민국에 이르게 되었다는 바른 역사의식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셋째,효창원 등 국립묘지 밖에 있는 임정 요인 묘역을 국립묘지 수준으로예우하는 것이다.이런 묘역들은 나름대로 전통을 갖고 있기 때문에 국립묘지로 이장한다는 것이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현재 효창공원은 임정주석 김구와 임정 요인(이동녕 조성환 차리석),삼 의사(윤봉길 이봉창 백정기)의 묘역으로 조성되었다.이 묘역을 국립묘지 수준으로 격을 높이고,효창공원이라는 이름도 거기에 맞게 개정해야 한다. 끝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임정 자료의 체계적인 편찬이다.여기에는 의정원과 정부의 각종 기록,독립신문,독립운동사 편찬자료 및 각국 정부·인사 및해외 교민들과 왕래한 문서들이 해당된다.그동안 국사편찬위원회 등 여러 곳에서 많은 자료를 출간하였고 최근 대한매일이 발간한 ‘백범 김구전집’에서도 상당 부분 보완하였다.임정 요인들이 귀국할 때에 두 트럭분의 문서를가져왔으나 소실된 것 같다고 하니 안타깝기 짝이 없다.지금이라도 늦지 않으니 정부는 임정자료를 수집하기 위한 한시적인 기구를 만들어 본격화시켜야 한다. 최근 임정자료 수집만을 위해 학계 중진들이 연구소 설립을 계획하고 있다. 정부가 이 사업을 직·간접으로 지원한다면 역사에 남는 정권으로 기억될 것이다. 이만열 숙명여대 교수·한국사
  • [대한매일 발간 白凡 金九 全集](上) 주요내용

    백범 서거50주년 기념사업으로 본사가 출간한 ‘백범김구전집’은 백범의일생과 임정의 독립운동사를 집대성한 역작으로 평가되고 있다.본지는 ‘전집’의 주요내용과 편찬과정에서 새로 발굴된 자료를 상·하 두 차례에 걸쳐특집으로 소개한다. ‘백범김구전집’은 일제하에는 조국광복을,해방후에는 자주·통일국가 수립을 위해 일생을 바친 ‘겨레의 큰 스승’ 백범 김구선생의 발자취를 처음으로 집대성했다는 점에서 우선 큰 의의가 있다.‘전집’은 선생이 활동했던 구한말·대한제국기·일제강점기·해방정국 당시의 관련자료를 포괄적으로수록하였는데 일부 판독이 어려운 자료는 현대문으로 풀거나 일문(日文) 판결자료 등은 국역,부기함으로써 자료의 활용가치를 한층 높인 것으로 평가된다. 전12권으로 구성된 ‘전집’은 크게 ‘백범일지’등 선생의 저작물에 대한평가와 동학·의병운동,임시정부 활동,해방후 건국·통일운동,서거후 진상규명·추모 관련자료와 친필휘호·사진 등 총 5부로 나눌 수 있다. ■제1부(1·2권)는 ‘백범일지’와 ‘도왜실기(屠倭實記) 등 선생의 친필저작을 해독,직해본으로 부기하였다.‘백범일지’는 선생이 1926년 상해 임시정부의 국무령에 취임한 후 살아서 환국할 수 없다고 판단,두 아들(仁·信)에게 집안내력과 자신의 이력을 유서격으로 쓴 것으로 상해시절에 쓴 ‘상권’,1941년 중경에서 쓴 ‘하권’,그리고 환국후 서울에서 쓴 ‘하권의 계속분’ 등 3부작으로 구성돼 있다.‘백범일지’는 해방후 춘원 이광수가 내용중 일부를 윤문하여 1947년 국사원에서 초간본을 출간했는데 이승만정권 시절 한때 금서로 취급받기도 했다.‘전집’에는 이본·판본에 대한 해제·평가도 곁들이고 있다. ■제2부(3권)는 선생의 일생중에서 잘 알려지지않은 청년기를 다룬 부분으로 선생이 17세때 과거에 낙방한 후 동학에 입문,동학농민전쟁에 참여한 내용과 청일전쟁 후 반일운동의 본거지였던 청나라의 요동(遼東)지역을 원정한사실을 당시 자료로 복원하였다.또 선생이 ‘명성황후시해사건’의 원수를갚기 위해 일본군 중위를 살해한,소위 ‘치하포사건’을 규장각 자료와 당시 인천주재 일본영사관자료를 통해 분석하고 있는데 이는 ‘청년백범’이 질풍노도기를 거쳐 자기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을 해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이밖에 안악·신민회사건 관련 내용은 판결문을 번역,부기하였다. ■제3부(4·5·6·7권)는 백범과 임시정부 관련자료의 집대성이다.4권은 임정의 상해(上海)시기(1919.4∼1932.4)와 1932년 윤봉길의거 이후의 이동시기(1932.5∼1938.11)등 임정의 20년 역사를 임시정부 일반·한인애국단·정당·군관학교 등 네 분야의 자료로 재구성한 것이다.총325건.5권은 임정이 중경(重慶)에 도착하여 해방때까지 활동한 기록을 엮은 것으로 당시 선생은 임시정부 주석·한독당 중앙집행위원장·한국광복군 통수권자 등을 맡아 임정과 광복군의 실질적인 책임자로 활동하였다.자료 속에는 중경시절 선생 명의로 신문·잡지 등에 발표한 글과 선생의 영문 전기(傳記)도 2건 포함돼 있다.총175건.6권자료는 한독당과 광복군 관련자료를 특화하여 편찬한 것으로 광복군 창설과 관련,중국측과의 교섭자료가 상당수 포함돼 있다.총168건.제7권은선생이 임시정부와 광복군의 총책임자로 활동하면서 중국측의 지원·협조를 요청하기 위해 중국측 인사와 주고받은 공함(公函)·간찰들로 이 가운데는 임정 승인문제를 둘러싼 중국내부의 공함들도 포함돼 있다.총318건. ■제4부는 환국후 백범의 건국·통일운동 관련 자료를 정리한 것으로 국내자료(8권)와 미국측 자료(9권)로 나뉘어져 있다.국내자료는 당시의 신문자료와 ‘국내외 동포에게 고함’(1945.9.3) 등 선생 명의의 성명서·연설문·담화문 등을 망라했다.미국자료는 당시 임정세력과 국내정치권에 대한 미군정과정보기관의 보고서·메모록 등을 체계적으로 정리,분석한 것이다. ■제5부는 선생의 서거후 암살 진상규명 관련자료(12권)와 추모록(10권),그리고 선생의 친필휘호·사진(11권)등을 엮은 것이다.친필휘호 가운데는 이번 ‘전집’간행을 계기로 경향각지에서 수집된,‘답설야중거(踏雪野中去)…’등 선생의 대표적 휘호 200여 점이 수록됐으며,암살진상규명 부분에서는 서거 이후 최근까지의 관련자료가 망라됐다.부록으로는 선생의 연보·연구논저목록을 수록했다. ‘전집’에 수록된 자료는 그동안 국내·외에 산재한 백범·독립운동 관련자료를 집대성한 것으로 상당수는 이번에 처음 공개되는 것이다. 국내자료는 백범기념사업회와 유족이 소장중인 자료를 비롯해 독립기념관·국사편찬위원회·서울대학교 규장각·정부기록보존소·국립중앙도서관 등 관련기관과 개인소장 자료를 모은 것으로 1925년 전후 나석주(羅錫疇)의사가선생에게 보낸 편지 7통 등은 이번에 처음 공개되는 것이다. 해외자료 가운데 대만자료는 총통부 당안관·중국국민당 당사위원회·중앙연구원 근대사연구소·국사관 등에서 입수한 것으로 상당수가 최초공개 자료다. 미국자료는 미 국립문서보관소·하버드대 옌칭연구소·스탠퍼드대 후버연구소 등에서 입수한 것으로 광복군의 OSS 관련문서·사진,해방공간의 자료 등이 보완되었다.일본 외무성사료관에서는 윤봉길·이봉창 등 한인애국단 관련자료가 상당수 발견되었다. 정운현기자 jwh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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