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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눈도귀도즐거워] 연극 자객열전

    조말,예양,형가는 중국 고서 ‘사기’의 자객열전에 나오는 인물들이다.춘추전국시대에 이들은 의리와 명분을 내세워 홀몸으로 적진에 침입해 초개같이 목숨을 버렸다.극단 파티의 ‘자객열전’(박상현 작·이성열 연출)은 이들로부터 시작해 19세기말 러시아 혁명가들과 미국의 아나키스트 엠마 골드만,그리고 체첸 여전사들까지 동서고금의 테러리스트들을 조명한다. 극은 이들에 얽힌 에피소드를 씨줄로,백범 김구(김세동)와 이봉창(임진순)이 일왕 암살을 모의하고자 수차례 회동을 갖는 장면을 날줄 삼아 시공간을 넘나드는 한편의 가상드라마를 엮어낸다.이 연극의 묘미는 허를 찌르는 구성과 등장인물들에 대한 재해석.감옥에서 식욕을 이기지 못해 괴로워했다는 백범의 독백은 민족의 큰 스승으로서의 위대함 이면에 가려진 인간적인 면모를 느끼게 한다.방대한 사건들을 인형극과 그림자극 등으로 재치있게 처리한 무대 기법도 돋보인다.지난달 말 문예진흥원예술극장 소극장에서 초연된 데 이어 오는 8일부터 7월4일까지 대학로 설치극장 정미소에서 앙코르 공연된다.(02)745-0308.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기고] 휘호로 만나는 백범/홍원식 (사)백범정신실천연합 사무처장

    ‘문무겸비’의 지도자로 백범 김구 선생을 든다면 의외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동학혁명군 청년장교 경력과 ‘치하포 사건’ 당시 무기를 든 일본군 장교를 맨손으로 해치운 전설 같은 경력 외에,역사적인 ‘이봉창·윤봉길 의거’도 백범이 세운 치밀한 작전 하에서 실행된 것임을 감안할 때 김구 선생이 ‘실전’에 탁월한 역량을 가진 사람임은 쉽게 간파된다 할 것이다. 반면 ‘문인’ 백범에 대한 초상은 쉽게 스케치되지 않는다.먼저 서재필 이승만 안창호 등 당대의 지도자로 불렸던 사람들과 달리 백범은 이렇다 할 학력이 없기 때문이다.몰락한 양반의 후손으로 아버지마저 뇌졸중으로 쓰러져 반신불수가 되어 불우한 청소년기를 보내야 했다.백범은 서당 공부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독학으로 ‘육도·삼략’ 등을 설파해 나가던 18세에 ‘동학혁명군’에 가담하게 된다.동학군 선봉에 섰으나 패한 뒤,안중근 의사 부친의 소개로 만난 당대의 유학자 후조 고능선의 가르침을 잠시 받았을까 백범은 세상에 내놓을 만한 소위 ‘학벌’이 없다. 그러나 백범이 생전에 남긴 ‘친필휘호’ 속의 글을 읽다 보면 동시대 그 어느 지도자에게서보다 원숙한 ‘문인의 향기’를 진하게 맛보게 되어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다.수려한 글씨체뿐만 아니라,그 글의 내용 속에 녹아 있는 ‘백범사상’이 주는 숙연한 감동과 교훈 때문이다.청사에 길이 빛날 ‘3·1 민족저항권’ 행사를 발판으로 탄생한 ‘대한민국임시정부 27년사’ 그 자체라 해도 무방하다.백범이 남긴 진귀한 이 휘호들은 환국(1945년 11월23일) 이후 숙소로 쓰여졌던 ‘경교장’(지금의 강북 삼성병원 현관)에서 씌어진 것이다.겨레의 장래가 걸린 민족적 현안을 앞에 두고 ‘유사(사이비) 독립운동가’들이 판을 치고 있던 상황에서,사선을 넘나들며 평생을 조국과 민족을 위해 보낸 노 독립운동가는 붓을 들어 마음을 다스리며 진퇴여호(進退如虎)의 장고를 거듭했던 것 같다.‘신탁통치 반대’,‘남북한 단일정부 수립 반대’,‘4·8 남북연석회의 제안 및 결행’,‘5·10 단독선거 불참’ 등 주요 현안에 대한 백범의 결단은 이러한 집필장고(執筆長考)의 산물이었으리라.‘경천애인(敬天愛人)’ ‘행복가정(幸福家庭)’ ‘민족정기(民族正氣)’와 같은 휘호와 함께 “명예와 치욕에 놀라지 아니하고,한가로이 뜰 앞에 피고 지는 꽃을 본다.…(중략)….맑은 하늘과 밝은 달은 어느 곳에나 떠 있건만,나방은 오로지 밤 촛불에만 뛰어드는구나.아! 슬프도다! 나방이와 올빼미 같지 않은 자 이 세상에 몇이나 될꼬.”와 같은 현실인식을 담은 한시도 있다.“굽이치는 장강은 동으로 흐르는데,부서지는 물보라에 영웅들 사라지고,푸르른 저 산은 옛 모습 그대로인데,석양은 몇 번인가 황혼에 젖었던가.” 서정성 깊은 장문의 한시 등 백범이 남긴 친필휘호와 자작시는 의외로 많다. 지난 13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제85주년을 맞았다.월드컵으로 세계인의 호평을 받았던 대한민국이 부정한 정치자금이 판을 치는 ‘부패 공화국’에다 ‘탄핵정국’까지 겹쳐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는 가운데 맞은 임시정부 수립 기념식은 착잡하기 이를 데 없었다.대한민국이 안고 있는 이 구조적 혼란상은 광복 직후에 ‘민족정기’를 바로 세워 민족적 양심에 따른 ‘정의로운 건국’을 하지 못한데서 기인한다. 오늘은 위기의 대한민국에 ‘전화위복’의 기회라 할 수 있는 ‘4·15 총선’ 투표일이다.후보자들은 물론 유권자들이 더욱 주목할 만한 백범이 애송하던 시가 있다.백범이 휘호로 써서 선물하기를 좋아했던 서산대사의 시 “눈 덮인 들판을 걸어 갈 때,발걸음 함부로 남기지 말라. 오늘 네가 남긴 발자국은 뒤 따라 오는 사람들의 이정표가 되리니.”가 바로 그것이다.신중한 언행으로 ‘언행일치’를 이룰 수 있는 진정한 국민대표를 선출하기 위한 신중한 주권행사를 부탁하는 ‘백범의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맹목적인 연고주의나 극단의 정당주의는 대한민국을 ‘두 번 죽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홍원식 (사)백범정신실천연합 사무처장˝
  • [씨줄날줄] 상하이 임정 청사/이상일 논설위원

    ‘낙엽은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폐/포화에 이즈러진 도룬 시의 가을하늘을 생각케 한다/길은 한줄기 구겨진 넥타이처럼 풀어져/월광의 폭포속으로 사라지고….’역사에 밝지 못한 사람들은 ‘상하이(上海)임시정부’하면 학교때 읽은 김광균의 시 한편이 주는 이미지가 어쭙지 않게 먼저 떠오른다.여기에 망명 정부란 말이 주는 당당하지만 쓸쓸한 이미지,악전고투했을 당시 독립운동 상황 등이 오버랩된다. 상하이 임시정부 청사는 연건평 48평에 연립주택형 3층 건물.말이 정부 청사이지 일반 주택과 다름없다.그래도 임정 청사는 1919년 4월 상하이에 마련된 뒤 한국인의 거점이 되었다.김구 주석은 이봉창 열사에게 일본 왕에 폭탄 투척을 지시했다.한반도 도·군·면에 책임자를 두어 한국인들과 연결하는 연통제를 실시한 구심점도 임정이었다.또 일제치하를 탈출한 한국인들을 일시 보호한 장소가 된 곳도 임정 청사였다.임정은 1932년까지 상하이에서 13년간 유지되다 그후 일제의 반격으로 항저우(杭州)등으로 연이어 청사를 옮겼다. 상하이 임정 청사는 요즘 한국 관광객들이 많이 찾고 있지만 길가도 아니고 여전히 외진 곳에 있다고 여행객들은 전했다.“주소가 ‘마당로(馬當路) 306-4호’인 임시정부청사는 왜 이리 찾기가 힘든지….인천에 있는 차이나타운처럼 생긴 중국식 집들과 작은 가게들 사이를 돌아다녔다.주소인 306번지가 없었다.나중에 보니 중국인들이 사는 골목 한 귀퉁이에 있었다.”10여년전인 1993년과 지난 2001년 두번에 걸쳐 복원됐는데도 잘 찾기 어려울 정도라면 독립운동 당시는 얼마나 보잘것없었겠는가. 임정 청사를 포함한 주변 1만 4000여평에 대해 상하이 시 당국은 재개발을 추진하다 지난 10일 일시 중단했다고 한다.재개발 사업주체 입찰에서 한국의 토지공사가 유력해지면서 중국업체들이 반발하자 시 당국이 입찰을 취소하고 신중한 검토에 들어갔다는 것이다.앞으로 수의계약방식으로 우리측에 개발권이 넘어올 것으로 한국은 희망하고 있지만 적어도 누가 추진하건 임정 청사 보존에 관해 중국으로부터 확약을 받았다고 하니 다행이다.다만 재개발한다고 주변 지형을 너무 바꾸지 말고 당시의 거리 상황과 분위기를 살려 역사를 느끼게 했으면 싶다. 이상일 논설위원 bruce@˝
  • [기고] 백범·유관순 열사를 화폐 모델로/홍원식 (사)백범정신실천연합 사무처장

    헌법은 전문에서 대한민국의 정치적 출발 시점을 1919년 ‘3·1민족저항권행사일’로,법적 태동 시점은 대한민국임시정부 탄생일(1919년 4월13일)로 하고 있다.헌법의 ‘국가태동일’ 명시는 단순한 상징적 의미에 그치지 않는 법적 의미를 내포한다.일제하는 물론 광복 후 ‘미·소 군정’하에서 자행된 기본권 침해에 대한 ‘통일한국’에서의 보상기준 시점으로 검토 가능할 것이다. 또 1948년 남·북한 정부수립 이후 발생한 토지몰수 등 민족 성원의 재산권 침해에 대한 보상 시점으로 유력시될 수 있다.당장에 문제가 되고 있는 조선족을 비롯한 재외동포의 국적 부여 시점으로도 선택할 여지가 있다.3·1절은 역사 속에서뿐만 아니라 현재와 미래에서도 큰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매년 돌아오는 3·1절을 맞으면 33인보다 먼저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유관순이다.3·1운동이 일어나자 이화학당 고등과 1학년생으로 만세시위운동에 참가한 처녀 독립운동가.‘3·1항거’로 이화학당이 휴교하자 유관순은 충남 천안으로 귀향,예배당을 중심으로 서울의 독립시위 상황을 설명하면서 마을유지들을 규합했다. 그 결과 같은해 음력 3월1일 아우내(병천)장터에 수천 군중을 모아 독립만세를 선창하며 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이때 부모를 비롯해 많은 인사가 피살되었으며,유관순은 주모자로 체포되어 가혹한 고문을 받았으나 끝내 굴하지 않았다.7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면서도 독립만세를 부르며 옥중항쟁을 벌이다 옥사하였다. 이 ‘순백의 독립열사’가 뜻있는 이들의 마음에 ‘영원한 누나’로 자리잡고 있다면,민족의 영원한 사표로 자리잡은 사람도 있다.보·혁을 막론하고 제반언론의 여론 조사에서 공통으로 나타나는 ‘20세기 가장 존경받는 민족지도자’,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역사 그 자체라 할 백범 김구 선생이 그 분이다. ‘3·1민족저항운동’을 기폭제로 탄생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27년 역사는 파란만장하다.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윌슨 미국 대통령에게 한반도 신탁통치를 간청하는 공문을 보낸 사실이 국제사회에 알려져 ‘자의적 직무집행’을 이유로 탄핵·파면되면서 임시정부의 고난은 예견됐다.많은 이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임시정부를 떠나거나 배반의 길로 돌아섰다.그러한 와중에서 시종(始終)을 임시정부와 함께하였을 뿐만 아니라,세계인의 관심 대상에 들지 못하던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이봉창 의거’와 ‘윤봉길 의거’를 통해 전세계에 알리는 쾌거를 이룬 백범. 민족의 광야에 남긴 백범의 거대한 발자국은 광복 직후 ‘미·소 점령군’에게 큰 부담으로 작용했으며 그를 경계하는 요인이 됐다.그런데도 백범은 “그 어떠한 이념도 민족의 하나됨보다 우선할 수 없다.민족의 분열을 막는 것이야말로 이 시대의 독립운동”이라고 가슴에 호소하며 48년 남북연석회의를 주도하는 등 전국을 순회했다.그는 비명에 우리 곁을 떠났으나 ‘20세기 가장 존경받는 한국인’으로 겨레의 가슴에 자리잡고 있다. 33인도 아니면서 3·1절이면 사무치는 정으로 생각나는 백범과 유관순 두 분.기왕에 새 화폐를 만들 계획이라면 이 두 분을 그 주인공으로 삼으면 어떨까.동서남북으로 갈라진 것에도 성이 차지 않았는지,소위 보수니 진보니 하며 세를 지어 ‘내전’에 휩싸여 있는 지금,새 화폐를 볼 때마다 두 분의 얼굴을 만난다면 민족대통합을 위한 전기가 될 뿐만 아니라 남녀 평등주의에도 부합할 듯해서 하는 제안이다. 홍원식 (사)백범정신실천연합 사무처장˝
  • ‘내고장 바로 알기’ 區 프로그램 봇물

    자치구들이 ‘내 고장 바로 알기’ 프로그램을 잇달아 내놓고 있다. 용산구는 관내에 연고를 둔 애국선열들의 어록 게시판을 오는 21일쯤 버스정류장에 설치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 지난 2월 전문가들이 동참하는 선정위원회를 발족시켰다.대상 선열은 모두 10여명으로 정류장 27곳에 이들의 어록이 등장,오가는 시민들의 가슴에 희생정신을 되새기게 한다. 백범 김구 선생의 어록에는 “우리는 개인의 자유를 주장하되 공원의 꽃을 꺾는 자유가 아니라 공원에 꽃을 심는 자유여야 한다.”는 내용.이봉창 의사 어록에는 “영원한 쾌락을 도모하고자 독립사업에 헌신할 목적으로 상하이로 왔다.”는 글이 실린다. 중대부속병원 앞,지하철 6호선 녹사평역 입구 등에 가로 90㎝,세로 150㎝ 크기로 설치될 게시판에는 사진과 인물소개 안내문도 곁들인다. 강동구는 현재 구에 편입된 경기도 광주군 초월면 출신으로 독립운동과 민주주의 발전의 기틀을 다진 해공 신익희 선생 기념사업과 백제역사 재조명사업을 펼치고 있다.최근 신익희 선생의 아동 전기(傳記) 발간작업을 마치고 관내 각급학교와 청소년 시설에 1000부를 나눠줬다.오는 6월에는 천호동에 해공문화체육센터를 개관한다.‘해공축제’와 전시회도 열 계획이다. 백제문화에 대한 관심도 남다르다.김충환 구청장이 “고구려 동명왕릉(평양시 강동군)과 신라 박혁거세왕의 능(경주)은 있는데 백제의 도읍지인 옛 하남위례성 주변엔 이에 걸맞은 능이 없어 역사의 한 축을 잃는 결과가 됐다.”고 지적한 뒤 불이 붙었다. 이에 따라 ‘온조대왕 기념사업’에 올해 최대의 역점을 두고 세종대 교수진에게 사당 건립을 위한 규모 및 형태,지리적 위치 선정을 의뢰하는 등 본격적인 준비에 들어갔다.부지는 암사동 선사주거지 건너편,또는 하일동 능골이 유력하다. 동작구는 관내 초등학생들을 대상으로 다음달 27일까지 상반기 문화재 탐방교실을 운영한다.벌써 500여명이 신청해왔다.조선조 태종의 맏아들로 세종에게 왕권을 내준 비운의 왕자 양녕대군의 묘가 있는 상도4동 ‘지덕사’와 노량진1동 사육신묘 등 유적 7곳을 도는 코스다.동양중 인근 ‘할딱거리’(고갯마루가 가파르기 때문에 오르려면 숨이 가빠진다고 해서 붙인 별명) 등 각 동네의 옛 지명을 소개하는 140쪽짜리 소책자도 만들어 배포했다. 송한수기자 onekor@
  • [기고] 이봉창의사 순국 70주기를 맞으며

    “우리 2000만 한민족을 괴롭히고 억압하여 못살게 한 자는 일본천황이다.이 자를 내가 처단해야 빼앗긴 나라가 독립할 수 있다.” 이말은 1931년 초 상하이(上海)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지도자 석오 이동녕 선생과 백범 김구 선생을 찾아가 일왕의 폭살을 자원했던 이봉창 의사(1901~32)의 절규요 한민족의 대변이었다.31세의 그는 스스로 원해서 일본침략의 최고 지휘자를 처단코자 했으므로 지도받은 다른 의열사보다 가치가 매우 높다. 그는 1932년 1월8일 오전11시를 지나 폭살 시도 3번째 지점인 도쿄 중심 경시청 앞에서 일왕이 연병장으로부터 궁성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폭살하려 했으나 실패했다.그러나 그 자리에서 당당히 “나 여기 있어 잡아가!”라고 소리치며 의연하게 연행되어 갔다.일제는 속전속결로 그해 10월 10일 이치가야(市谷)형무소에서 그를 사형에 처했다.지금으로부터 70년전의 일이다. 뜻깊은 고희의 추모연륜을 맞아 호남형의 미혼청년 이봉창 의사로부터 무엇을 배울까.첫째,그는 식민지 상황에서의 최고의 가치는 독립임을 자기 희생으로 보여주었다.그는 일본인으로부터 극심한 차별과 나라없는 슬픔을 동시에 느끼면서 국가와 민족이 세계속에서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일본에 조금만 협력해도 호의호식할 수 있어 친일파가 양산되는 분위기였으나 그는 이를 결연히 거부했다.식민지 상황에서 못살고 고통을 받는다 해도 대한민국이 독립된 후 내나라의 떳떳한 주인이 되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생각했다.이봉창으로부터 애국의식의 투철함이 무엇인가를 알게 한다. 둘째,그에게는 남다른 인내심과 용기가 넘쳐 흘렀다.일본인의 극심한 차별대우에도 그는 뒷날을 위해 은근과 끈기로 참았다.그는 효창동 자택에서 청년애국단을 조직하고 동지를 모아 ‘큰 사업(독립운동)’을 일으키려 했다.그러나 여의치 않아 집안의 도움을 받아 ‘호랑이를 잡으러 굴’에 가듯 일본행을 결심했다.일본에서 5·6년정도 국제정세를 분석하고 기회를 포착하고자 한 것이다. 그는 일본정보원들의 감시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창가를 기웃거리고 도박장을 드나드는 위장을 하기도했다.마침내 그는 교토(京都)일대에서 일왕의 거동을 보고 제거의 결심을 굳혔다.그러나 자금과 작전이 필요했다.이를 달성하기 위해 상하이 임시정부로 갔다.임시정부 지도자들도 그의 용기와 용의주도한 행동에 감동했다.인내심과 용기는 그를 역사의 위대한 인물로 남게했다. 셋째.자유·정의·권리를 위해 일신의 안위를 따지지 않았다.토인비의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생명을 담보로 해야 한다.”는 논리를 알 리 없었겠으나 그는 이를 실천한 것이다.정의를 쟁취하려면 큰 희생이 뒤따른다고 믿었다.일왕이란 ‘신(神)’같은 존재를 넘어뜨리는 것을 그는 정의로운 공공의 이익취득 수단이라고 믿었다.이동녕 선생과 김구 선생앞에서 선서할 때 “지난 31년간 쾌락을 맛보았는데 이제 뭐가 아쉽겠습니까.웃으며 저를 보내 주세요.”라고 당당히 외치던 그의 음성은 곧 질곡으로부터 권리를 찾으려는 한국 젊은이의 정의로운 몸부림이었다.이봉창 의사가 서거한 지 7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그는 바람직한 한국 청년의 건강하고 싱싱한 참모습의 모델로 남아 있다.현실의 쾌락과 자신만의 이익을 우선하는 오늘날 그가 더욱 그리워진다. 이현희 성신여대 명예교수 한국사학 명예논설위원
  • 책꽂이 / 이봉창 평전 등

    ◆ 이봉창 평전(홍인근 지음,나남출판 펴냄) = 1932년 일본 도쿄 경시청 현관앞에서 일왕에게 수류탄을 던지고 스스로 체포돼 사형선고를 받은 이봉창 의사의 업적을 조명.이 의사의 의거는 중국 언론에 크게 보도돼 이른바 ‘1·8상해사변’의 빌미를 제공했으며,한인애국단 제2호 의거인 윤봉길 의사의 거사가 성공할 수 있는 기반이 됐다.1만 5000원. ◆ 유인원,사이보그,그리고 여자(다나 해러웨이 지음,민경숙 옮김,동문선 펴냄) = 자연과 살아 있는 유기체,사이보그 유기체(유기적ㆍ기술적 구성요소를 모두 수용하는 체계) 등의 창조에 대한 설명,서사,설화 등을 분석.주제는 ‘생물학을 통한 세상 읽기’.1920년대 영장류학부터 20세기 후반 면역학에 이르기까지 생물학이 세상의 요구에 맞춰 어떻게 진화해 왔는가를 보여준다.2만 5000원. ◆ 이슬람문명(정수일 지음,창작과비평사 펴냄) = 1400여년간 이어온 이슬람교는 여러 편견 탓에 ‘폭력과 타락의 종교’로 폄하돼 왔고,중세를 풍미한 이슬람 문명의 역사적 공헌은 외면당하기 일쑤였다.저자는 이슬람문명은 이슬람교를 바탕으로 한 복합문명체란 관점에 선다.토막상식이 아니라 문명으로서의 이슬람을 총체적으로 알려주는 입문서.1만 8000원. ◆ 업그레이드 사회 못되는 70가지 이유(김기덕 지음,서해문집 펴냄) = 악화가양화를 구축하는 ‘그레샴의 법칙’은 우리 삶의 현장에서도 통용된다.부끄러움을 부끄러움으로 알지 못하는 이기적 심성의 인간들이 오히려 성공의 사다리를 오르는 경우가 많다.언론인 출신인 저자는 우리 사회를 ‘제멋대로가는 사회’로 규정,그 일그러진 모습과 함께 대안을 제시한다.9500원. ◆ 조선 최강상인(이용선 지음,동서문화사 펴냄) = 상도를 지키며 지조있는 상인의 길을 걸어온 최봉준·이용익·임상옥 등 3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다큐멘터리소설.전3권.각권 1만2000원. ◆ 혈액형을 알면 아이의 재능 100% 살린다(노미 도시타카 지음,김상현 등 옮김,동서고금 펴냄) = 혈액형에 따른 아이들의 성향과 행동특성을 분석.인간발달 과정으로 볼 때 인성의 80%가 형성되는 유아기에 초점을 맞췄다.8500원. ◆ 신학-정치론(베네딕트 데스피노자 지음,김호경 옮김,책세상 펴냄) = ‘마지막 중세인이자 최초의 근대인’으로 불리는 17세기 네덜란드의 철학자 스피노자의 종교론.스피노자는 신은 자연의 모든 것을 창조한 초월적인 존재가아니라 자연 속에 실존하는 존재로 본다.또 철학을 신학에 종속시킨 중세적흐름과 신학을 철학에 종속시키는 계몽주의적 입장에 모두 반대,철학과 신학이 각각 독립된 영역을 갖고 있음을 강조한다.4900원. ◆ 서양철학의 파노라마1·2(앤소니 고틀립 지음,이정우 옮김,산해 펴냄) =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르네상스에 이르는 서양철학의 역사를 쉽게 풀어쓴 교양서.‘이코노미스트’지 편집장인 저자는 저널리스트다운 핵심을 찌르는 서술로 서양철학사에 대한 ‘파노라마적’ 전망을 제시했다.일반 철학사에서 소홀히 취급한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을 비중있게 다뤘고,자연과학과의 연관성을 중시했으며,소피스트들의 긍정적인 측면을 지적한 점 등이 이채롭다.각권 1만 5000원.
  • [발언대] 순국선열 유해봉환에 관심 갖자

    31일 베트남전에 참전했다가 전사한 고(故) 박우식 소령의 유해가 35년 만에 조국의 품에 돌아왔다. 선열 유해봉환을 추진하고 있는 정부 부처에 몸 담고 있는 사람으로서 깊은 감명을 받았다.국가를 위해 순국·전사한 분들의 유해발굴 사업은 국민의 애국심 함양 차원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정부의 소임이 아닌가 싶다. 필자는 서울 용산에 있는 효창원(孝昌園)에 가끔 들르곤 한다.효창원에는 백범 김구 선생 등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要人)의 묘소와 이봉창·윤봉길·백정기 의사 등 3의사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3의사 묘소 옆에는 안중근 의사의 가묘(假墓)가 함께 자리잡고 있다.그 곳을 들를 때마다 광복이 된 지 5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고국으로 모셔 오지 못한 데대한 아쉬움과 함께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곤 한다. 국가보훈처는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펼치다 쓸쓸히 생을 마감한 순국선열의 유해봉환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지금까지 해외에 있는 227위중 77위의 유해는 국내에 모셔 왔으며,미봉환된 150위중 60위는 현지에 단장또는 보존하고 유족들과 협의해 6위의 봉환을 추진하고 있다.안타까운 것은 그중 64기는 지형변동 등으로 묘소의 소재 확인이 곤란하다는 점이다.안중근 의사의 경우도 포함돼 있다. 중국·미국·러시아 등 해외묘소 실태조사를 꾸준히 실시해 많은 성과를 거두었으나,현지 사정 및 인력·예산 문제 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그러나 유해봉환 사업은 언젠가는 꼭 찾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인내심 있게 추진돼야 한다.여기에 국민적 관심과 참여가 더해지고 오늘을 사는 우리의 노력이 후세들에게 이어져 결실을 맺게 된다면 먼저 가신 선열들의 공훈과 희생에 조금이나마 보답하는 길이 될 것이다. 오늘은 광복절이 들어 있는 8월을 여는 첫 날이다.이번 8월에는 가족과 함께 효창원과 독립기념관 등 선열들의 나라사랑 정신이 살아 숨쉬는 현충시설을 찾아 보는 소중한 시간을 가져 보는 것이 어떨까.후손들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말이다. 김종성 (국가보훈처 차장)
  • 빙그레 김호연회장 독립유공자 돕기

    빙그레 김호연(金昊淵·사진·47)회장이 독립유공자 후손들을 남모르게 돕는 사실이 알려져 화제다. 김 회장은 지난 93년부터 순천장학회를 통해 학업성적이 우수한 불우 청소년 1000여명에게 학비를 지원해오다가 지난해부터는 생활 형편이 어려운 독립유공자 후손 100여명에게도 중·고교 및 대학교 등록금을 지원해왔다. 김 회장은 또 암울했던 일제치하에서 대한 남아의 의기를 만천하에 떨친 이봉창(李奉昌)의사가 변변한 기념단체 하나 없이 홀대받고 있다는 사실을 전해듣고 지난해 3월 ‘이봉창기념사업회(회장 金鎭炫 전 과기부장관)’설립을 물심 양면으로 정성껏 도왔다.사재를 털어 서울 용산구 효창동에 기념사업회 사무실을 빌려줬고 그 후로도 각종 행사비와 임대료,관리운영비 등을 지원해오고 있다.김 회장이 재벌가의 일원으로서 이처럼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삶에 관심을 갖기까지는 부인 김미(金美)여사의 영향이 적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졌다. 김 여사의 부친이 바로 백범 김구(金九)선생의 둘째 아들로 현재 선친 기념사업회의 회장을 맡고 있는 김신(金信)전 교통부장관이다.김구 선생이 김 회장의 처조부인 것이다. 김경두기자 golders@
  • “이봉창의사 헌신정신 길이 지켜야”

    지난 1932년 1월 8일 일본 도쿄 경시청 앞에서 일왕 히로히토에게 폭탄을 던진 뒤 체포돼 순국한 이봉창의사의 ‘의거70주년 기념식’이 ‘이봉창의사 기념사업회(회장 金鎭炫)’ 주최로 8일 오전 서울시 용산구 효창원에서 거행됐다. 기념식에는 이재달 국가보훈처장,윤경빈 광복회장,석근영광복군 동지회장 등 정부·독립운동단체 관계자와 기념사업회 관계자,시민 등 50여명이 참석했다. 이 의사에 대한 묵념과 약사(略史)보고에 이은 기념사에서김진현 사업회장은 “이 의사의 거사는 3·1운동으로 불붙은 항일 독립운동이 20년대 말부터 분열되고 피로한 양상을 보인 시점에서 항일의 열정을 재결집시킨 쾌거였다”고 말하고 “일제 치하에 있던 아시아의 여러 민족이 행한 항일행동중 일왕을 대상으로 한 유일한 것이었다”고 평가했다. 기념사업회의 한 관계자는 “이 의사가 32살의 짧은 생애를 마감하며 우리에게 보여준 헌신과 이타(利他)의 정신은 근대 항일민족주의 역사와 자료들조차 제대로 정리 못하고 있는 지금의 우리를 부끄럽게 하고 있다”면서“지난해 2월재발족한 기념사업회가 앞장서서 효창동 생가터 복원 등을통해 일반인들에게 이의사 의거의 역사성을 인식시켜 나갈것”이라고 말했다. 최병규기자 cbk91065@
  • 이봉창의사 日王에 폭탄 던진 곳 ‘경시청앞’

    이봉창(李奉昌)의사가 1932년 1월 8일 육군 관병식을 마치고 환궁하던 일왕(日王·裕仁)의 마차에 폭탄을 던진 곳은도쿄 시내 황궁의 출입문인 앵전문(櫻田門)앞이 아니라 인근 경시청 앞임을 보여주는 당시 현장약도가 처음 공개됐다. 그동안 일제는 이 사건이 일본 수도치안의 총본부격인 경시청 앞에서 발생한 ‘대역(大逆)사건’이어서 경찰의 체면을고려해 ‘앵전문 사건’으로 왜곡해 불러왔다. 최서면(崔書勉·73)국제한국연구원장은 10일 단국대학교주최 이 의사 순국 69주년 추모학술회의 주제발표에 앞서일본 외무성사료관에서 입수한 약도를 공개,“이 의사의 의거현장은 앵전문 앞이 아니라 경시청 앞으로 확인된만큼 ‘경시청 앞 사건’으로 고쳐불러야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의거 직후 일경이 작성한 약도에 따르면,이 의사는 일왕일행이 경시청앞을 지나갈 무렵 호위경찰 뒤에서 일왕의 마차에 폭탄을 던졌다.일본정부 역시 당일 첫 발표에서는 의거현장을 ‘도쿄시 고오지마치구(麴町區) 소도사쿠라다몬쵸(外櫻田門町) 1번지 경시청 현관앞’이라고 발표했다.그러나 이틀 뒤부터 일본정부는 이 사건을 ‘앵전문 사건’으로 고쳐부르게 했다.앵전문은 황궁의 여러 출입문 가운데 하나로 경시청 현관에서 100여m 이상 북쪽에 떨어져 있다. 정운현기자
  • 부끄러운 白凡묘역…술판 ‘전락’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총리의 야스쿠니(靖國) 신사 참배 강행으로 반일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지만항일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은 점점 멀어지고있다. 백범(白凡) 김구(金九) 선생 등 상해임시정부 요인 4명과이봉창(李奉昌) 의사 등 삼의사(三義士)의 묘소와 영정이안치돼 있는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은 낮에는 노숙자들의쉼터로,밤에는 불량 청소년들의 술자리로 바뀐지 오래다. 공원 내에는 백범 묘소외에 이동녕(李東寧)·조성환(曺成煥)·차이석(車利錫) 선생 등 ‘임정요인 묘역’과 이봉창·윤봉길(尹奉吉)·백정기(白貞基) 의사를 함께 모신 ‘삼의사 묘역’이 조성돼 있다. 하지만 광복절을 하루 앞둔 14일에도 애국지사들을 기리는 참배객들은 거의 눈에 띄지않았다.더욱이 공원관리소장 최영화씨(54)는 광복절인 15일에도 유족과 기념사업회의 참배가 예정돼 있을 뿐 지방자치단체나 정부 차원의 공식 참배 일정은 없다고 전했다. 공원 안에는 더위를 피해 나온 노인들과 조깅이나 산책을즐기는 시민들이 간간이 눈에 띄었다. 백범 묘역 뒤 쪽 숲에는 노숙자와 청소년들이 먹고 버린 소주병과 담배 꽁초가 뒹굴었다. 7인의 영정을 모셔두고 매년 4월 합동추모제전을 치르는의열사(義烈祠)는 문이 굳게 닫혀 있어 시민들의 발걸음을돌리게 했다. 또 공원 안에는 창고가 없어 의열사 뒤 후미진 곳에 폐자재가 흉물스럽게 쌓여 있었다. 김구 선생의 묘역 정문은 페인트 칠이 벗겨졌고, 철문에달려 있는 태극기 문양도 페인트 칠이 제대로 되어있지 않았다.지난 5월 말부터 ‘백범기념관’ 건립 공사를 시작한건립위원회측은 “99년 6월부터 기념관 건립비 모금을 시작했지만 아직 절반도 채우지 못했다”고 말했다. 공원관리자는 “올들어 효창공원에는 25만 7,000여명이 찾았지만정작 공원 안 묘역으로 들어가 참배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전했다. 묘역만 있을 뿐 역사자료관이나 현장체험을 할만한 볼거리가 없어 최근에는 중·고생들의 견학도 거의끊겼다. 두 딸을 데리고 ‘삼의사 묘역’을 둘러본 김혜숙(金惠淑·40·여·서울 성동구 행당동)씨는 “광복절 전날이라 공원을 찾았지만 묘소에 꽃 한송이도 놓여 있지 않아 아이들보기가 부끄러웠다”고 말했다.한편 재한 일본문화원에 따르면 야스쿠니 신사에는 매년 600만명의 참배객들이 몰려들어 우리와는 대조적인 모습이다. 류길상 안동환기자 ukelvin@
  • 이총리 임정82돌 기념사

    정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82돌을 맞아 13일 오전서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기념식을 갖고 임정수립의뜻을 되새겼다. 국가보훈처가 주관한 중앙기념식에는 이한동(李漢東) 국무총리를 비롯,3부 요인과 임정 관련 독립유공자 유족,윤경빈(尹慶彬) 광복회장 등 광복회원,각계 대표,시민 등 2,000여명이 참석했다.지방에서도 자치단체별로 기념식이 열렸다. 이 총리는 기념사에서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은 그들의 미래세대에게 과거 역사의 의미를 잘못 전달하는,참으로 우려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며 “식민지 지배와 침략전쟁으로 이웃 국민들에게 엄청난 고통을 준 엄연한 역사적 사실을 왜곡 해석하는 일부 일본 역사학계의 잘못은분명히 시정돼야 한다”고 강조했다.또 “일본 정부는 우리의 충고를 겸허하게 받아들여 역사교과서 시정을 위한해결책을 마련할 것을 강력히 촉구한다”고 말했다. 보훈처는 또 이날 오후 서울 용산 효창원 의열사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요인 김구(金九)·이동녕(李東寧)·조성환(曺成煥)·차이석(車利錫)선생과 이봉창(李奉昌)·윤봉길(尹奉吉)·백정기(白貞基)의사의 위업을 기리는 ‘효창원 7위선열 추모제전’을 거행했다. 노주석기자 joo@
  • 이봉창의사 의거 러시아까지 영향

    일왕에 폭탄을 투척한 이봉창 의사 의거가 당시 러시아인들의 배일사상 고취에 큰 영향을 준 사실을 입증한 자료가첫 공개됐다. 국가보훈처는 1932년 1월 8일 이봉창 의사 의거가 결행된이틀 뒤인 1월 10일부터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라디오 방송국이 당시 사건을 보도한 자료를 일본 외무성 외교사료관에서 입수,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82주년을 기념해 11일공개했다. ‘소하 7년 관병식 조선인 불경(不敬)사건’이란 제목의문서에 따르면 블라디보스토크 라디오방송은 “일본에서 1월 8일 일어난 암살사건은 일본의 제위(帝位)와 그 신성(新聖)에 대해 벌써 누구도 믿지 않는다는 명료한 증거다”고보도했다. 이에 대해 일본 정부는 이 방송을 ‘불경(不敬)방송’으로규정, 시로타(廣田弘毅) 당시 러시아 주재 일본대사를 통해러시아 정부에 엄중 주의와 함께 방송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고 항의문을 전달했다고 문서는 밝혔다. 단국대 한시준(韓詩俊) 교수는 “이 자료는 이봉창의사 의거의 공간적 지평을 확대해 주는 것으로, 그 영향이 한,중,일 3국을 넘어러시아에 까지 미쳤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노주석기자 joo@
  • [해외 항일전적지를 찾아서] (19.끝)일본 도쿄

    도쿄시내를 동서로 가르는 지하철 유라쿠초센(有樂町線)의 중간지점에는 사쿠라다몬(櫻田門)이라는 역이 있다.이 역의 3번 출구는 경시청 입구로,4번 출구는 사쿠라다몬으로 나온다.황궁으로 들어가는 관문인 사쿠라다몬에서 바라보면 왼쪽으로는 고색창연한 법무성 건물이,오른쪽으로는 멀리 일본 의회의사당 건물이 한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바로 정면,불과 80m 정도의 거리에는 일본 치안의 총본산인경시청 건물이 위압적인 모습으로 우뚝 서 있다.기자가 이곳에 도착한 시각이 마침 점심시간이었다.초겨울의 쌀쌀한 날씨에도 불구하고인근 관공서에 근무하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짝지어 사쿠라다몬을 지나 황거(皇居·황궁)앞 광장에서 조깅을 하고 있었다.일본사람들이길조(吉鳥)로 여기는 까마귀는 떼를 지어 날아다녔고,그 아래로 일본의 상징 일황이 거주하는 황거가 적막에 갇혀 있었다. 일제하 항일 독립투사들의 의열투쟁은 조선 땅이나 중국·러시아 등망명지는 물론 적지의 중심부인 일본 본토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1932년 1월8일.일황 히로히토(裕仁)는 도쿄시내 서북부에 위치한 요요기(代代木)연병장에서 신년 관병식을 마치고 황궁으로 되돌아오고 있었다.일황이 탄 마차가 황궁 입구의 사쿠라다몬에 다다를 무렵 난데없이 폭탄 하나가 날아들었다.폭탄은 일황이 탄 마차 뒷편에서 굉음을 내며 터졌다.순간 일장기를 든 기수와 근위병이 탄 말 두마리가거꾸러졌다.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폭탄의 위력은 일황에게까지 미치지는 못하였다.폭탄을 만든 김홍일(金弘壹·전 광복회장,작고)은 회고록에서 “군중과 일황의 거리가 100m 정도가 될 것을 고려하여 폭탄을 멀리 던지도록 가볍게 만들었다”고 했다.가볍게 만들다보니 상대적으로 위력이 약했던 것이다. 거사의 주인공인 이봉창(李奉昌·1900∼1932)의사는 의거후 현장에서 체포돼 그해 9월30일 도쿄 대심원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10월10일 이치가야(市谷)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백범 김구 선생이 이끈 한인애국단 소속인 이의사는 의거에 앞서 “물품(폭탄)을 1월8일 방매하겠다(터뜨리겠다)”는 내용의 전보를 백범에게 보내 거사일을 미리 알렸다.당일 이의사는 일황이 관병식을 마치고 경시청을 지나 사쿠라다몬을 통과하여 황궁으로 들어가는 것을 알고 경시청 정문 앞에서 일본인으로 가장해 기다리다가 거사를 성공시킨 것이다. 의거후 일본은 발칵 뒤집혔다.식민지 백성인 조선인이 도쿄 중심부,그것도 일본 치안의 총지휘부인 경시청 앞에서 일황이 탄 마차에 폭탄을 던진 ‘사건’은 충격적인 일이었다.일본은 이 사건을 ‘사쿠라다몬 사건’이라고 부른다. 이에 대해 최서면(崔書勉)국제한국연구원장은 “엄격히 말해서는 ‘경시청앞 사건’으로 부르는 것이 정확하나 ‘사쿠라다몬사건’역시일황과 관련된 표현이므로 크게 틀린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이의사의 의거현장인 경시청 정문 오른쪽에는 ‘경시청 창립 100주년 기념식수’라는 자그마한 기념표석이 서 있으나 이의사의 의거를 알리는기념물은 어디에도 없었다.일본 경찰로서야 ‘수치스런 기억’이겠지만 이는 또 하나의 역사은폐가 아닐까. 경시청 앞에서 사거리를 지나 황거를 에워싼 해자(垓子,궁성 주위에방어용으로 파놓은 연못)를 건너 사쿠라다몬으로 들어서면 황거의 분위기가 완연히 느껴진다.도쿄 시내 한가운데 위치하면서도 마치 외떤 섬과 같은 분위기가 든다.문 안으로 들어서면 거목과 잘 포장된 길이 황거로 안내한다.포도((鋪道)가 끝나는 지점에 작은 자갈이 깔린길이 나타나는데 넘실거리는 해자의 물결과 함께 황거가 모습을 드러낸다. 도쿄 시내 치요다(千代田)구에 위치한 이 궁성은 도쿠가와 이에야쓰(德川家康)의 손자인 3대 쇼군 이에미쓰(家光)시대에 만든 것으로 해자가 이중으로 조성돼 있다.황거의 면적은 총30만평 규모로,제122대왕인 메이지(明治)가 황거를 교토(京都)에서 옮겨온 뒤 도쿄성으로불린다.자갈밭 중간지점 쯤에는 이중으로 된 돌다리가 나타나는데 흔히 이를 니주바시(二重橋)라고 부른다.바로 황거를 연결하는 다리로,길이는 약 29m,폭은 약 7m정도다. 지방에서 도쿄 관광을 온듯한 일본인들이 니주바시를 배경으로 무리를 지어 기념사진을 찍곤 했다.기념사진 촬영용으로 만든 계단식 간이의자가 있었고 전담 사진사도 두 명이나 됐다.이곳에서 관광객들에게 사진을 찍어주는 다나카 아키코(田中明希子·22·국제관광사진주식회사 소속)씨는 “관광객이 니주바시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즐겨찍는다”고 말했다.사진값은 2장 1세트로 2,100엔(송료 별도)이라고했다. 니주바시 입구에는 3명이 경비를 서는데 근처까지 관광객의 접근이가능했다.회청색이 감도는 황거 건물을 가장 가까이서 볼 수 있는 곳이었다.사진 몇장을 찍고는 다시 기념사진 찍는 곳으로 내려와,잠시짬을 내 쉬고 있는 다나카씨를 찾아갔다. 기자는 일제강점기때 이곳에서 발생한 ‘조선인 폭탄투척’사건을 아느냐고 물었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봉창의사의 사쿠라다몬사건은 물론 김지섭(金祉燮·1884∼1928)의사의 니주바시폭탄투척 사건도 전연 몰랐다.학교에서 그런 내용을 배우지 않았다고 했다.더러 한국인 관광객이 찾아와 기념사진을 찍곤하지만 그런 얘기를 하는 사람은 아직 없었다고 했다. 1924년 1월5일 오후7시쯤 한 조선인이 니주바시에 던진 폭탄사건으로 일본은 소용돌이에 빠졌다.신(神)으로 받드는 일황의 궁성에 조선인이 폭탄을 들고 뛰어들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다.내무차관견책에 이어 경시총감·경무부장·국성 경비책임 경찰서장 등 치안책임자가 줄줄이 파면되었다. 의열단 소속 김의사는 1924년초 도쿄에서 일본총리를 비롯해 조선총독 등이 참석하는 제국의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이들을 폭살할목적으로 23년말 상하이 포동(浦東)부두에서 일본으로 향했다.그러나 제국의회가 갑자기 연기됐다는 소식을 접한 김의사는 계획을 변경,일본 제국주의의 상징인 일황 궁성을 폭파키로 결정하였다.그러나 접근이 불가능하자 날이 저물기를 기다렸다가 궁성 입구인 니주바시에폭탄을 던진 것이다. 아깝게도 김의사가 던진 폭탄은 불발이었다.타고온 배가 습기 많은화물선이어서 도쿄로 오는 동안 폭탄이 모두 젖어버린 탓이었다.김의사는 현장에서 체포돼 무기징역을 언도받고 복역중 고문 후유증으로1928년 2월20일 뇌일혈로 지바(千葉)형무소에서 순국했다. 76년전 김의사가 목숨을 내놓고 폭탄을 던진 니주바시 아래로 백조들이 무리를 지어 쌀쌀한 초겨울 날씨를 한가로이 즐기고 있었다. 도쿄 글 정운현기자 jwh59@. *연재를 마치며. 구한말 항일민족지 ‘대한매일신보’의 창간정신을 되살려 민족정론지로 거듭 태어난 ‘대한매일’이 금년 7월초부터 매주 수요일(일부화요일)자에 장기기획물로 연재한 ‘해외항일전적지를 찾아서’는 일제강점기하 선열들의 항일투쟁 현장을 관련자료와 현지 전문가들의도움을 받아,현장답사를 통해 생생히 복원한 점에서 평가할만 하다. 금년초 대한매일은 김삼웅 주필과 편집국 특집기획팀 소속 취재기자와 사진기자,외부전문가 등으로 특별취재반을 편성해 해외에 산재한항일유적지 실태를 파악한 뒤 구체적인 지역선정과 일정확정에 들어갔다.논의 끝에 최종 중국 러시아 미국 일본 등 4개국을 답사대상지로 선정했다. 무장투쟁 본거지인 중국의 동북3성을 첫 답사지로 결정했다.중국은지역이 광범위한데다 항일운동 주무대였다는 점에서 독립군이 무장투쟁을 벌인 동북3성과,임시정부·광복군의 활동무대인 관내지역을 2차로 나눠 답사했다.이어 미국 러시아 일본의 항일유적지 현장답사와취재 순으로 이어졌다. 이번 기획연재는 ‘청산리전투’등 항일투쟁사에서 찬란한 전과로 기록된 독립투쟁의 현장을 기자가 직접 답사하여 딱딱한 논문 형태가아닌,재미있고 현장감있는 신문기사로 풀어냈다는 점에서 학계의 높은 평가를 받았다.그러면서도 관련자료와 현지 역사학자·주민 증언을 토대로 해 학술적 가치도 결코 적지 않다고 인정받았다. 특히 답사과정에서 보존가치가 크나 방치된 유적을 현장사진과 함께실감있게 보도함으로써 관계당국이 적극적으로 발굴·보존하는 방안을 마련토록 자극을 주었다.또 독자들에게는 선열의 위업을 현창하고애국심을 고취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음을 자부한다. 아울러 취재반은답사과정에서 북한 김일성주석이 소년시절 다닌,중국 길림시 소재 육문(毓文)중학을 남한 최초로 취재하였으며 박정희 전대통령의 만주군관학교 졸업 당시 사진을 발굴하는 등 과외의 성과도 거두었다.취재반은 이번 답사를 통해 취재·보도한 내용을 보완,내년초 이를 단행본으로 엮어 출간할 계획이다. 정운현기자
  • [발언대] ‘대일선전포고’ 정신 되새기자

    민족의 웅비와 새로운 도약을 꿈꾸며 시작한 새 천년의 첫해가 저물어 간다.벌써 100여년전 ‘요즘 사람들은 유시유종(有始有終)이 드므오’라 하신 월남 이상재 선생의 말씀처럼 얼마나 많은 계획들이 처음에 시작된 대로 끝을 맺었는지 돌아볼 때다. 새 천년의 희망처럼 민족단합의 대기류와 노벨상 수상 같은 감동과감격의 시간도 있었고 그와는 달리 어려워진 경제여건 때문에 사회가많이 위축돼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러한 시점에서 1941년 12월9일 주권국가로서 조국의 근세사에 처음인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일 선전포고는 상승된 통일무드에 박차를 가하고 어려운 경제여건을 극복하는 데 필요한 용기와 힘을 실어주는 역사적 사건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일제 강점기 35년의 고난사에서도 우리 민족은 3·1운동을 시작으로민족의 정신적 응집력을 키워 왔으며 윤봉길·이봉창 의사 등 수많은 의열사들이 쾌거를 이어왔다.1940년 광복군을 창군한 것은 그간의독립투쟁을 위한 민족 의지와 힘이 하나로 뭉쳐 탄생한 결정체였다. 1년 후인 1941년12월9일의 대일 선전포고는 명실상부한 주권국가로서의 첫번째 발동이었다.이것은 작게는 조선이 자주국임을 국제사회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음과 동시에 넓게는 자유와 평화를 사랑하는인류의 인도적 세계질서를 확립하고자 하는 대의적 의미를 담고 있다. 지금 우리는 민족 대단합의 통일을 민족 지상과제로 삼고 있으며 국제적 경쟁력을 갖춘 선진경제국가로의 변모를 시도하고 있다. 이 두가지 목표를 위해서는 외부 지원과 자구적인 능력개발도 중요한 요소로 꼽을 수 있다.그러나 하마터면 세계사에서 민족이 사라질뻔한 위기 상황에서 발동한 대일 선전포고에는 조국과 세계평화를 위한 민족의 집념과 의지가 담겨 있다. 이를 시원적 원동력으로 삼아 50년 분단의 벽을 넘어 민족적 동질성을 회복하고,작은 경제위기를 극복해 보다 큰 국가의 힘을 만들어낼수 있는 생산적 가치창출을 기해야 할 것이다. 권오석[청주보훈지청 관리과장]
  • 정치 뉴스라인

    ■항일 광복군의 직계 후손인 한나라당 김원웅(金元雄·대전 대덕·재선)의원 후원회가 6일 저녁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열렸다. 후원회에는 ‘다시 모인 광복군’이란 표어에 걸맞게 김구 선생의손자 김진씨,김좌진 장군의 손녀 김을동씨,안중근 의사의 조카 안춘생씨,윤봉길 의사의 조카 윤용씨,이봉창 의사의 조카 이세현씨,박은식 임시정부 주석의 손자 박유철씨,신철휴 의열단장의 아들 신홍우씨,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지낸 차이석·백정기·이강연 선생의 아들 또는 손자 등 150여명의 생존 독립유공자 및 유족이 참석했다.윤경빈광복회장,박유철 독립기념관장,조문기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 등 민족단체 대표와 최열 환경운동연합 사무총장 등 시민단체 관계자도 자리를 함께 했다. ■민주당 홍보위원회(위원장 金榮煥 의원)는 7일부터 23일까지 여의도 당사 1층 홍보전시관에서 김대중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수상을 기념하는 사진전을 연다. ‘하의도에서 노벨평화상까지’라는 주제의 사진전에는 소년시절부터 정치 입문,민주화 투쟁,15대 대통령 당선,노벨평화상 수상에 이르는 김 대통령의 정치역정이 담긴 사진 100여점이 전시된다.
  • [해외 항일전적지를 찾아서] (14)항일운동 총본거지 上海·嘉興

    필자가 상해를 찾기는 이번이 네번째이다.홍교공항에서 택시를 타고 시내를 향해 달리는 동안 눈길을 끈 것은 30∼40층짜리 신축빌딩들이었다.거의 수직으로 치솟고 있는 중국경제를 상징하는듯 했다.이도시에 숱하게 많은 우리의 항일유적들이 또 몇개 사라졌겠구나 생각하며 곧장 옛 프랑스 조계(租界)인 회해중로(淮海中路)를 향해 달렸다.우리의 항일운동 유적들이 그 거리와 근방에 몰려있기 때문이다. 상해는 국제교통의 요충지이며 각 국의 조계가 설정돼 국제정세 파악이 쉬워 1910년 한일합방 이후 우리 항일투사들은 최우선의 활동근거지로 삼았다.취재팀은 마당로(馬當路) 보경리(寶慶里)의 임정청사부터 찾아갔다.전체면적 16평.공간은 비좁지만 당시 집무실이 복원되어 있다.주중(駐中) 한국대사관 인터넷 홈페이지 ‘중국내 독립운동사적 안내’를 보면 98년 한해동안 이곳을 방문한 한국인 관광객은무려 8만여명이라고 한다.대부분 이곳이 첫 임정청사라고 생각하고독립운동의 성지(聖地)처럼 여기는 듯하다.그러나 이곳은 임정이 여덟번째로 자리잡아,1926년부터 1932년까지 머문 장소이다. 임정청사에서 5분쯤 걸어 옛 흥륭다원(興隆茶園)을 찾아갔다.윤봉길 의사가 김구 주석과 의거를 밀의한 장소였다.건물은 그대로인 듯하고 ‘상청(常靑)식품’이라는 간판이 붙어 있다.헐리지 않고 70년이지나도록 남아 있는 게 고마워 취재팀은 그 집에서 생수를 사 마셨다. 차를 타고 윤봉길 의사의 열혈이 서린 홍구공원(현재의 노신공원)을 항해 달렸다.임정은 1919년 4월 13일 조직된 이후 모든 항일세력을결집하지 못했다.김구 주석은 임정의 침체를 극복하고 이런 분위기를 반전시키기 위해 암살과 폭파 전문의 한인애국단을 조직했다.이 조직의 첫 성공이 이봉창 의사의 동경 사쿠라다몬(瓔田門) 의거였다.일왕의 마차에 폭탄이 미치지 못해 근위병들만 죽고 말았지만 적에게준 충격은 컸다. 다음 의거의 주인공이 윤봉길 의사였다.고향의 아내에게 “丈夫出家生不還(장부출가생불환.장부가 집을 나가면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는 유언을 남기고 상해로 망명한 윤의사는 한인애국단에 가입했다.일제가 전승기념행사겸 일왕의 생일축하 행사를 벌인다는 정보를 입수한 김구 주석의 명을 받고 의거를 결심하였다.1932년 4월 29일 11시40분,행사장의 전원 묵도시간 단상을 향해 폭탄을 던져 상해 점령 일군 총사령관 시라카와(白川義則)대장 등 침략의 원흉들을 폭살했다. 1개 군단이 한달동안 저항하고도 상해를 일본군에 빼앗겨 치욕감에빠져있던 중국인들은 일제히 환호를 올렸다.중국군 총사령관 장개석은 “중국의 백만대병도 불가능한 거사를 한국 용사가 단행하였다”고 극찬했다.중국인들은 때로 일제의 눈치를 보며 비협조적이었고 만보산사건 이후 한인들에게 악감정을 가졌으나 이 때부터 한인 애국지사들을 동지의 정으로 포용하기 시작했다.그리고 임정은 침체국면을벗어나 강력한 투쟁의 시대를 맞게 되었다. 교통체증으로 많은 시간을 소비한 뒤에 노신공원에 도착했다.윤 의사의 의거현장에는 중국 근대사상가인 노신의 동상이 드넓은 잔디광장을 바라보며 앉아있다.기록을 보면 동상자리가 단상,그리고 그 앞잔디밭이 시작되는 곳이 윤 의사가 물병폭탄을 던진 곳이다.의거현장에서 가까운 언덕에는 윤 의사의 충혼을 기려 1994년에 세운 ‘매정(梅亭)’이 의젓하게 자리잡고 있다. 필자는 그곳에서 묵념하고 있는 한국관광객들을 발견하고 다가갔다. 경남 창원에서 온 교사들이었다.진영고교 성정수 교사(40)는 “자랑스런 항일전쟁의 역사가 잊혀지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말하며화단에 핀 상사화(想思花)를 바라보았다.윤의사의 단심(丹心)을 상징하는 걸까.석양을 받아 상사화는 찬란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윤의사의거 이후 악에 바친 일제는 광란하듯 임정인사들을 쫓기 시작했다. 김구 선생은 60만원의 현상금이 붙은채 아슬아슬하게 피신했고,임정은 이후 여러 곳을 이동해야 했다. 취재팀은 상해에서 하루를 묵고 다음날 아침 김구 선생의 피신처였던 가흥으로 향했다.중국이 독일 폭스바겐사(社)와 합작생산한 산타나 승용차는 항주로 가는 고속도로를 질풍처럼 내달렸다.장강(長江)으로 통하는 운하의 수로가 띠를 두르듯 뻗어있고 이따금 물소들이보이는 비옥한 평야가 스쳐 지나갔다.가흥이 호수를 낀 조용한 농촌일 것이라고 짐작한 것은 큰 잘못이었다.6차선이 넘는 큰길이 뻗어가고 깨끗한 신축건물이 임립하고 있었다. 김 주석은 전 강소성장(江蘇省長) 저보성의 목숨을 건 비호 아래 그의 양아들 진동생(陳桐生)이 반 양식으로 지은 호반별장에 은신했다. 낮에는 뒷문으로 나가 여자 뱃사공 주애보(周愛寶)가 젓는 거룻배를타고 남호(南湖)로 나가 거미줄같은 운하망을 타고 오르내리며 피해다녔고 밤이면 별장에 빨래가 널린 안전신호를 보고 들어가 잠을 잤다.배를 타고 남경까지 간 적도 있었다.김 주석이 은신했던 매만가(梅灣街) 76호 별장은 거의 완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었다.남호를 동남쪽에 등지고 앉았는데 호수 쪽으로 큰 들창이 나있고 뒷문이 만들어져 있다. 차를 돌려 남호 선착장 유원지로 가보았다.1935년 10월,15명의 임정 지도자들이 유람선을 타고 비밀의정원 회의를 열었던 남호는 그리깨끗하지는 않았지만 풍광은 아름다웠다.바람에 밀려오는 물비린내를 맡으며 캔맥주를 사 마시는데 ‘중국혁명의 요람’이라 쓴 안내판이 보였다.1921년 모택동이상해에서 공산당 창당대회를 열려다가 정보가 새 나가자 이곳 남호에서 유람선을 빌어 대회를 마쳤다는 기록이다. 상해로 돌아온 취재팀은 황포탄(黃浦灘) 의거현장을 찾아갔다.황포탄은 수천리를 흘러온 양자강이 황해로 빠져나가는 하류로 바다나 다름이 없다.1922년 3월,의열단원들은 일본군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를 저격하였다.필리핀에서 오는 기선에서 내리는 순간을 노렸다.명사수인 오성륜(吳成崙)이 권총을 발사했으나 그 자가 갑자기몸을 숙이는 바람에 뒤따라 내리던 영국인 여자가 맞았다.이어 김익상(金益相)이 또 총을 쏘고 폭탄을 던지고 이종암(李鐘岩)도 폭탄을던졌지만 다나카는 마차를 타고 피신했다.이종암은 현장탈출에 성공했으나 김익상과 오성륜은 체포당했다.김익상은 조선총독부 폭파사건의 주인공.의거에 성공하고 수십 개의 포위망을 뚫어 중국으로 탈출해온지 반 년만에 다시 나섰으나 이번엔 탈출하지 못하고 붙잡혀 20년을 복역했다. 의열단원들이 수천 명의 일본군과 인파들 속을 달리며 용맹을 떨친의거현장은 지금의외탄(外灘)공원의 북단이다.상해에서 황포탄 풍광을 보기에 가장 좋은 곳.중국이 자랑하는 포동(浦洞)개발지구가 건너다보인다.거기서 다시 택시를 잡아타고 육삼정(六三亭) 의거현장으로 갔다.무정부주의 계열의 비밀결사 남화(南華) 한인청년연맹의 백정기·이강훈·원심창·이규창 등은 여기서 아리요시(有吉) 주중 일본공사를 폭살하려다가 사전 누설되어 모두 옥에 갇혔다.당시 유명했던 육삼정은 헐리고 그 자리에 방향(芳香)·영안(永安)·부옹(富翁)등주점들이 들어서 세월의 무상함을 더해 주고 있었다. 상해 이원규(소설가·동국대 겸임교수)
  • 이봉창의사 재조명 국제학술대회

    1932년 1월8일 관병식을 마치고 환궁하던 일왕의 마차에 폭탄을 던진 이봉창(李奉昌)의사의 독립투쟁 정신을 재조명하는 국제 학술행사가 2일 단국대에서 열렸다.이날 행사에는 오랫동안 일본 내 독립운동관련 자료를 발굴해온 최서면(崔書勉)국제한국연구원장을 비롯해 국내 연구자,일본·대만의 학자,언론인 등이 주제발표 및 토론자로 참여했다. 최 원장은 기조강연에서 “지난 94년 광복 50주년을 앞두고 평소 존경해오던 이 의사에 대한 자료 수집에 나섰다”면서 “당시만 해도국내 학계는 기본적인 자료조차 갖추지 못한 상황이었다”고 말했다. 최 원장에 따르면 기존 국내의 저작·연구물은 오류 투성이다.우선이 의사가 만선(滿鮮)철도에 근무했다거나,1932년 만주국 황제가 방일해 관병식에 일왕과 같이 참석했다는 부분,또 통감부 외교고문 스티븐스의 한자 표기인 ‘수지분(須知分)’을 ‘잘 알려진 바’로 번역한 것 등은 중대한 잘못이라는 것이다.최 원장은 “이는 원본 자료를 확인하지 않고 잘못 번역된 일본 자료를 맹신한 탓”이라고 지적했다.한편 주제발표에서 한시준(韓詩俊)단국대 교수는 ‘이봉창 의사의일왕 저격 의거와 그 의의’를,호춘혜(胡春惠)중화민국 국립정치대교수는 ‘이봉창의거가 중국에 미친 영향’을,야마시타(山下靖典)아사히신문 문화기획부장은 ‘이봉창 의사에 관한 일본 자료 현황’등을 각각 발표했다.이번 학술회의는 단국대 개교 53주년 및 이봉창 의사 장학회 창립기념 행사로 마련됐다. 정운현기자 jwh59@
  • 구국의 뜻 되새기자/ 해외 항일유적 현황·실태

    중국 상해를 방문하는 한국인들의 필수 방문코스 가운데 하나는 홍구공원이다.이는 1932년 4월 29일 이곳에서 있은 천장절 기념식 행사장에 폭탄을 던져 주중 일본공사와 일본군 수뇌 수명을 폭살시킨 윤봉길 의사의 애국혼을느껴보고자 함이리라.윤의사 의거는 단순히 일제의 고관 수 명을 살상한 정도에 그친 게 아니라 당시 임시정부에 대해 미온적이던 장개석 정부의 마음을 돌려놓아 물심 양면의 지원을 받아내기에 이르렀다. 일제강점기 항일세력들은 일제의 탄압을 피해 중국·러시아·미국 등지에본거지를 잡고 항일투쟁을 전개했다.이들이 활동근거지로 삼은 항일유적지는생생한 ‘민족혼의 현장’이라고 할수 있다.낯선 이국땅에서 접한 선열의 이 름이나 묘소,항일전적지는 후대들에게 애국심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정부차원에서 이를 보존해야 하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수십권의 항일운동 관련 홍보책자보다 선열의 얼이 서린 ‘흔적’ 하나가 민족정신을 고취하는데 훨씬 효과적일지도 모른다. 1910년 한일병합으로 국권을 상실하자 항일세력들은 국내·외에서 국권회복투쟁을 전개하였다.이들은 1919년 전 민족이 궐기한 ‘3·1의거’와 같은 비 폭력 투쟁은 물론 안중근·윤봉길 의사로 상징되는 의열투쟁,그리고 청산리·봉오동전투와 같은 대규모 무력항쟁도 전개했다.국내외에서 다양한 형태로 전개된 항일투쟁은 곳곳에 그 애국혼의 ‘흔적’을 남겨두고 있다.그 가운데 임시정부 청사 등 일부는 정부의 복원·보존 노력으로 상태가 양호한 것도 있으나 아직도 많은 유적들이 방치돼 있는 실정이다. 최근 보훈처가 전문가들의 조언과 자체 현장조사를 통해 집계한 결과에 따르면,해외독립운동 관련사적(시설물 포함)은 모두 317개소로 파악됐다.이들중 244개소는 중국지역에 소재하고 있으며,흔히 ‘만주’로 불리는 동북3성일대에 163개소가 밀집돼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중국을 제외한 아시아 지역에서는 러시아 36,일본 4,카자흐스탄 4,대만 2곳 등 총46개소이며,그밖에 미주지역 24개소(미국 22,멕시코 2),유럽지역 3개소(프랑스 1,네덜란드 2)등이다. 중국내 항일전적지는 동북3성 가운데 하나인 길림성에집중돼 있으며 그 가운데서는 용정(龍井)일대가 단연 으뜸이다.90년대 들어 중국관광이 늘어나면서 한국인들이 가장 즐겨찾는 곳 가운데 하나가 바로 용정이다.이곳은 우리귀에 낯익은 가곡 ‘선구자’의 고향으로 비암산,일송정을 비롯해 민족시인윤동주의 생가와 묘소가 있어 더욱 한국인들의 발길을 끌고 있다.이밖에도인근 교외에 위치한 ‘3·13반일의사릉’을 비롯해 서전서숙·명동촌교회와‘봉오동전투’ 전적지도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인근 화룡현에는 3·1의거 이듬해인 1920년 10월 독립군이 일본군 3,000여명을 궤멸시킨 ‘청산리전투’ 현장과 대종교 3종사의 묘소가 남아 있다.흑룡강성 하얼빈에는 안중근의사의 의거현장을 비롯,경박호·사도하자 전투지가 남아있고,영안(寧安)에는 김좌진장군의 묘소와 김 장군이 운영했던 정미소,그리고 신민부 군정파본부,고려공산당 북만지부 건물 등이 남아있다.또요령성 봉천에는 편강렬의사의 전투현장,신빈현에는 양세봉장군 순국지·서로군정서 본부,단동에는 이륭양행(怡隆洋行)건물이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이륭양행은 당시 영국식민지인 아일랜드출신 무역상 윌쇼가 경영하던 건물로 임시정부는 그의 도움을 받아 이곳에 교통국을 두고 국내와 연락거점으로 활용했었다.집안현,장백현 일대에는 독립군의 유적이 곳곳에 산재해있다. 1919년 임시정부가 수립돼 10여년을 머문 상해에는 임정 청사를 비롯해 임정기관지 독립신문사 터,윤봉길의사의 의거현장인 홍구공원(현 노신공원),애국지사 다수가 묻혀 있는 만국공묘(외국인 묘지),인성학교 등이 남아있다.북경에는 단재 신채호,우당 이회영 선생이 활동했던 흔적과 신한혁명단본부 자리가 남아있고,1932년 윤의사의거후 피난길에 오른 임시정부가 머물다간 진강,가흥,기강,장사,항주 등지에도 백범 김구 선생의 피난처를 비롯해 임정청사 이전지가 더러 남아있다.강소성 남경에는 의열단원들의 합숙지이자 민족혁명단의 본부였던 호가화원이 있다.서안에는 OSS훈련지와 광복군 2지대주둔지가,임정 마지막 정착지인 중경에는 임정 청사를 비롯해 광복군사령부본부건물(현 미원식당 건물) 등이 남아있다.국토 전역에 걸쳐서 항일투사들의 피와 혼이 서려있는 중국은 ‘항일전적지의 진열장’이라고 할만하다. 중국 다음은 러시아로 모두 36개소의 항일독립 유적지가 있다.일제 당시 연해주로 불린 블라디보스토크에는 최초의 한인거주지를 비롯해 신한촌,해조신문사 터 등이 남아있고,크라스키노에는 안중근 의사가 동지들과 ‘단지동맹’을 맺은 커리마을이 있다.하바로프스크에는 한인사회당 창당지와 지금은시민휴식공원으로 변한 독립군 전투지,그리고 1937년에 사망한 한인들의 무덤이 남아있다. 또 리르쿠츠크에는 고려공산당 창당대회지(현 레닌거리 23번지 인민의 집)와 이범윤 유배지 등이 남아있다.89년 소련붕괴후 러시아에서 분리된 카자흐스탄에는 ‘봉오동전투의 영웅’ 홍범도 장군의 옛집과 동상,묘소(크질오르다시 공원묘지)가 있으며,계봉우 선생의 묘소도 여기에 있다. 미국에는 한인 이민들이 처음 정착한 하와이를 비롯해 샌프란시스코·로스앤젤레스·뉴욕 등에 민족세력들의 활동무대가 남아있다.하와이에는 당시 한인들의 구심체 역할을 했던 한인기독교회·한인기독학원을 비롯해 조선국민단 사관학교,하와이국민회관 등이 남아있다.샌프란시스코에는 전명운·장인환 두 의사가 친일미국인 스티븐스를 처단한 현장인 페어부두,스티븐스가 투숙했던 페어호텔이 90년이 넘는 세월속에서도 여전히 옛 모습을 지키고 있다. 이곳엔 대한국민회의 기관지 신한민보의 발간지(페리스트리트 232)도 여전히 남아있다.로스앤젤레스에는 애국지사이자 대표적 재미한인 지도자였던 도산 안창호 선생의 고가(남가주대 구내소재)와 흥사단중앙회관이 남아있다.이밖에도 캘리포니아 클로세트 윌로스에는 계원 노백린 장군의 한국비행단 설립지가,네브래스카주에는 박용만의 한인소년병학교 설립지(현 헤이스팅스 네브래스터니 농장)가 남아있다.구미위원회 관련 유적은 뉴욕에 있다. 그밖에 프랑스 파리에는 평화회의 대표관과 임시정부 파리통신국,네덜란드에는 ‘헤이그밀사’ 가운데 한사람인 이준 열사의 묘역과 데용호텔이 항일관련 유적지로 기록할 만하다.일본에는 2·8독립선언의 현장인 도쿄기독교청년회관과 김지섭·이봉창의사의 의거현장인 도쿄 궁성의 앵전문과 이중교 일대,즉 일본의 최심장부가 바로 항일유적지인 셈이다. 정운현기자 jwh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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