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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제품 발표 신경전…삼성·LG ‘新가전전쟁’

    신제품 발표 신경전…삼성·LG ‘新가전전쟁’

    한동안 잠잠했던 삼성전자와 LG전자의 ‘가전전쟁’이 불을 뿜고 있다. 제품 출시 경쟁은 물론 두 회사의 홍보전도 점점 치열해지고 있다. 반도체를 제외한 거의 모든 품목에서 겹치는 상황이어서 경쟁이 불가피하다지만 자칫 ‘소모전’으로 흐를 가능성도 크다는 지적이다. ●엎치락 뒤치락 출시 경쟁 삼성전자와 LG전자는 지난 22일 스팀 기술을 적용한 드럼세탁기를 세계 최초로 출시한다고 앞다퉈 발표했다. 삼성전자가 주름제거 기능을 가진 10㎏ 용량의 하우젠 은나노 드럼세탁기를 개발해 3월 출시한다고 밝히자 이에 질세라 LG전자도 13㎏ 용량의 스팀 기능 드럼세탁기 ‘스팀 트롬’을 내놓는다고 발표했다. 삼성이나 LG 양쪽 다 스팀 기능 세탁기 개발·출시가 세계 최초라고 강조했다. 앞서 지난달 31일에는 32인치 슬림형 브라운관(CRT) 디지털 TV를 세계 최초로 선보였다고 경쟁적으로 발표했었다. 그러나 양사가 물량을 충분하게 확보하기도 전에 출시경쟁에 치우치고 설 연휴가 끼는 바람에 시판이 2주 이상 지연, 정작 소비자들이 제품을 구매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피말리는 홍보전 제품 출시 경쟁 이면에는 두 회사 홍보팀의 미묘한 신경전도 맞물려 있다. 올초 나란히 홍보팀 수장이 바뀐 양사는 한치의 양보도 없는 홍보전쟁으로 긴장의 수위를 높여가고 있다. 22일 스팀 기능 드럼세탁기 출시 보도자료는 3시간 간격(삼성 오전 9시,LG 낮 12시)으로 배포됐다. 21일에는 디지털방송 안내 기능인 EPG(Electronic Program Guide) 탑재 TV를 둘러싸고 반론과 재반론을 주고 받았다. 삼성전자가 세계 최초로 전 채널의 디지털 방송을 안내하는 DLP TV를 출시했다고 밝히자 LG전자는 참고자료를 통해 “이미 지난해 10월 미국에 EPG 기능을 갖춘 PDP TV를 내놓았기 때문에 삼성의 세계 최초라는 표현은 맞지 않다.”고 반박했다. 삼성측은 곧바로 자사 제품은 디지털 튜너가 두개로 하나뿐인 경쟁사와 차별된다고 재반박했다.LG측 역시 디지털 튜너를 한개만 달거나 두개 다는 것은 기술의 문제라기보다는 비용상 선택의 문제일 뿐이라고 맞섰다. 슬림브라운관 TV 출시 ‘해프닝’ 역시 양사의 홍보전과 관련이 있다.LG전자가 먼저 보도자료를 내자 허를 찔린 삼성이 곧바로 보도자료를 배포, 언론에는 두 회사 제품 사진이 나란히 실렸지만 정작 매장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지난 14일 LG전자는 세계적인 디자인상인 iF디자인상을 9개나 휩쓸었다는 보도자료를 냈지만, 삼성전자가 뒤이어 참고자료로 12개 수상 소식을 밝히는 바람에 빛이 바랬다. 연초 미국에서 열린 국제가전쇼인 CES를 앞두고는 삼성전자가 13개 제품이 상을 받고 LG전자가 16개 상을 받아 ‘수상대결’이 벌어지기도 했다. ●36년 구원(舊怨), 최후의 승자는? 두 회사의 자존심 대결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69년 삼성전자가 설립될 당시 사돈기업(고 이병철 회장 차녀가 구인회 회장 삼남과 결혼)이었던 금성사는 계열 신문사를 통해 삼성의 전자사업 진출을 강하게 비판했고 삼성도 초창기 대대적인 ‘출혈공세’까지 불사하며 금성사를 압박했었다.90년대 후반 이후 반도체와 휴대전화를 앞세운 삼성전자의 압도적인 우세로 기우는 듯했으나 가전부문만큼은 LG의 저력이 여전했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윤종용 부회장이 직접 생활가전총괄을 맡으면서 수원에 있던 전자레인지 라인을 말레이시아로, 세탁기·에어컨 라인을 광주로 이전하는 대수술을 단행하는 등 절치부심했다. 올들어 바뀐 국내영업 ‘사령탑’들의 의욕도 경쟁에 기름을 붓고 있다. 삼성전자는 이현봉 사장이 생활가전총괄로 옮긴 대신 러시아법인장으로 재직하며 성과를 거둔 장창덕 부사장이 국내영업사업부장을 맡고 있다.LG전자는 송주익 한국마케팅부문장이 현업에서 물러나고 미주법인에서 ‘Life’s good’ 등으로 LG브랜드를 키워놓은 강신익 부사장이 국내영업을 지휘하고 있다. 류길상기자 ukelvin@seoul.co.kr
  •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삼성家 ①-CJ그룹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삼성家 ①-CJ그룹

    CJ그룹에는 삼성그룹의 모태인 제일제당의 오랜 ‘역사와 전통’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1953년 설탕회사로 출범, 제일모직·삼성전자·삼성생명 등 현재 삼성그룹의 기업적 ‘젖줄’이 된 곳이 바로 CJ(옛 제일제당)다. 또 삼성의 인재를 길러낸 ‘인재사관 학교’ 역할을 했던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90년대 중반까지 CJ하면 떠오르는 것은 설탕·밀가루 등을 만드는 식품회사 정도였다. 그 이후 점차 생명공학, 홈쇼핑, 엔터테인먼트 등 신세대 사업으로 외연을 확장하면서 식품회사의 틀과 이미지를 완전히 벗어던졌다.1995년 그룹 분리 당시 1조 5000억원이었던 그룹 매출은 지난해 8조원, 영업이익은 97억원에서 5000억원으로 껑충 뛰었다. 자산 기준 재계 서열 23위의 기업으로 도약했다. 끊임없이 모험과 변신을 꿈꾸는 벤처기업처럼 역동적으로 사업을 발굴, 추진해 온 덕분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삼성가(家)의 장손이 우뚝 서있다. ●부친 ‘공백’ 메우는 직계 장손 CJ는 고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의 장손인 이재현(46) 회장이 이끌고 있다. 그의 부친은 고 이 회장의 장남인 이맹희(76) 전 제일비료 회장. 부친이 할아버지 눈밖에 나는 바람에 이 회장은 일찌감치 부친을 대신, 집안의 대소사를 챙기며 삼성과 제일제당에서 경영 수업을 쌓았다. 한솔그룹(창업주의 장녀 이인희 고문), 신세계(4녀 이명희 회장), 새한미디어(차남 고 이창희 회장)에 이어 가장 늦게 삼성에서 떨어져 나왔다.1993년 시작된 CJ의 계열 분리 작업은 지난 97년 법적으로 완전히 정리됐다. 이 회장이 36세때의 일이다. 그룹을 혼자 경영하기에는 나이나 경험이 모두 부족했다. 그러다 보니 CJ는 자연히 이 회장과 외삼촌인 손경식(66) 회장이 함께 경영하는 ‘쌍두마차’ 체제로 유지됐다. 손 회장은 대외업무, 이 회장은 내부경영 등으로 역할 분담을 했다는 것이 CJ측의 공식적 설명이지만 이들의 역할을 뚜렷하게 구분짓기 어려웠다는 것이 중론이다. 그만큼 이 회장의 비중이 컸다는 얘기가 된다. 이 회장의 ‘등극’은 삼성가의 3세 경영이 본격화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장남인 이재용 삼성전자 상무, 이인희 한솔그룹 고문의 3남 조동길 한솔그룹 회장 등 사촌들과 함께 삼성가의 3세 경영시대를 여는 주역으로 떠올랐다. 서울 남대문로 본관 사옥에 있는 그의 할아버지 흉상은 그가 삼성가의 직계 장손임을 상징해 주고 있다. ●평범한 혼인, 드러나지 않은 내조 고 이 회장의 장남 맹희씨는 부인 손복남(71)씨와의 사이에서 2남1녀를 뒀다. 자녀 모두 평범한 집안과 혼인해 이렇다 할 화려한 혼맥이 눈에 띄지 않는다. 맹희씨가 코흘리개인 네살 때 이미 “아이들이 자라면 혼인을 시키자.”는 양가 어른의 언약이 인연이 돼 손씨와 결혼했다. 이화여대 교육학과 출신인 손씨는 부친이 경기도 지사와 농림부 양정국장을 지낸 손영기씨다. 손복남씨가 부친을 모시고 병원에 가는 것을 먼 발치에서 지켜보고 난 뒤 맹희씨는 결혼을 결심했다고 한다. 손씨는 삼성가의 맏며느리로서 겉으로는 화려해도 남편이 풍상을 겪자 말 못할 마음의 고통을 삭이며 살아왔다. 서울 장충동 집에서 시부모를 모시며 3남매를 키웠다.CJ가(家)의 명실상부한 ‘안주인’ 역할을 묵묵히 해오고 있는 것이다. 경영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았으나 제일제당의 최대주주로 있다가 주식 증여를 통해 경영권을 장남 재현씨에게 넘겼다. 재현씨는 어릴 때 할아버지로부터 각별한 사랑과 함께 엄격한 교육을 받았다. 체격 등 외모, 사고나 행동방식까지 조부와 비슷해 ‘리틀 이병철’이라고도 불린다. 결혼 후 “나가서 신혼살림을 하라.”는 부모님의 얘기에도 “할머니를 모시고 살겠다.”며 고집을 피워 2001년 1월 할머니 박두을씨가 별세할 때까지 서울 장충동 집에서 모셨다. 지금도 모친 손여사와 함께 장충동 집에서 산다. 경복고, 고려대 법대 출신인 재현씨는 “누구 덕을 본다는 이야기를 듣기 싫다.”며 1983년 씨티은행에 취직,‘탈 삼성행’을 시도했다. 하지만 조부인 고 이병철 회장이 “재현이에게 왜 남의 집살이를 시키냐.”는 불호령을 내려 결국 85년 삼성의 주력 계열사였던 제일제당 경리부 평사원으로 입사했다. 이후 88년 경리부 차장,89년 기획관리부장으로 승진했다.92년부터 1년 정도 삼성전자 전략기획실 이사대우로 일하기도 했다.93년 제일제당 이사로 친정에 복귀해 97년 부사장,99년 부회장을 거쳐 2002년 회장에 올랐다. 부산 출신으로 이화여대 미대 장식미술학과를 졸업한 부인 김희재(46)씨와는 대학시절 미팅을 통해 결혼, 딸 경후(21)씨와 아들 선호(16)군을 뒀다. 두 자녀는 현재 해외 유학 중이다. 90년대 중반 이 회장은 회식을 끝내고 밤늦게 직원들을 집으로 데려와 2차 술자리를 갖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도 부인 희재씨는 한번도 짜증을 내지 않고 뒷바라지해 직원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기도 했다. 또 이 회장과 함께 노인무료급식소 등에서 김장을 하고 노인들의 가정에 도배도 하는 등 사회봉사활동에도 열심이다. 이 회장의 장모인 김만조씨는 ‘김치박사’로 유명하다.CJ의 김치개발에도 참여했다. 영국과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김씨는 연세대, 서울여대 등에서 교수로 재직했다. ●홈쇼핑·영화등 사업다각화… 재계 23위 ‘껑충’ 이 회장의 누나 미경(48)씨는 부친이 유학 중이던 미국에서 동생 재현씨와 함께 태어났다. 어릴 때 ‘미키’라고 불린 것을 계기로 지금도 ‘미키 리’라는 이름으로 해외 활동을 한다. 중학교때 대통령배 영어 웅변대회에서 1등을 하기도 했다. 영어외에 불어, 중국어에도 능통하다. 경기여고, 서울대 가정학과, 미국 하버드대에서 동아시아연구로 석사학위를, 상하이 푸단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밟았다. 1995년 제일제당 멀티미디어 사업부 이사 시절 스필버그 등이 설립한 세계 최대의 영상소프트회사인 ‘드림웍스’와 제일제당의 합작을 성공시킨 주역이기도 하다. 당시 이건희 회장과 이재현 회장은 직접 미국으로 건너가 스필버그와 협상을 벌일 만큼 드림웍스 설립에 남다른 애착을 보였으나 결국 그는 삼촌 대신 동생 재현씨의 손을 들어주었다는 후문이다. 지난해 말 CJ엔터테인먼트 사업의 글로벌 부문을 맡아 사업의 본격적인 해외진출을 진두지휘하게 됐다. ■ ‘비운의 황태자’ 이맹희씨-삼성 경영서 물러난 뒤 유랑생활 고 이병철 회장의 장남이자 이재현 회장의 부친인 맹희(76)씨는 요즘 몽골에 머물고 있다. 과거 유목민의 후예들이 사는 그 곳이 그에게는 오히려 편안함을 준다고 했다. ‘비운의 황태자’‘양녕대군’은 맹희씨에게 따라 다니는 수식어다. 그는 삼성을 이끌 ‘운명’을 타고 났지만 오히려 바람처럼 떠도는 처지가 그의 ‘운명’이 된 ‘풍운아’다. 동생 이건희 회장으로 후계구도가 정해진 후 그는 형제들은 물론 자신의 가족들과도 떨어져 세속을 등진 채 살아왔다. 그의 ‘유랑생활’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그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부친이 기업을 일구는 것을 보며 컸다.1938년 삼성의 설립으로 기록되는 삼성상회 간판 아래 부친이 대구에서 국수공장을 운영할 당시 공장 귀퉁이 방안에서 부친이 새우잠을 자며 일하는 것을 보며 자라난 삼성 성장사의 산증인이기도 하다. 경북고 32회 출신으로, 노태우 전 대통령, 고 김윤환 의원, 정호용 전 의원 등 TK출신 정치인들과는 친구사이다. 그는 일본, 미국 유학을 거쳐 안국화재 업무부장을 시작으로 중앙일보, 삼성전자 부사장 등 직함이 무려 17개에 이를 정도로 강도 높은 경영 수업을 받았다. 이 때만 해도 그의 호칭은 삼성의 ‘젊은 부총수’였고, 아무도 그가 삼성의 경영 대권 주자로 낙점될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세계 최대의 비료공장을 만들려 했던 선친이 ‘사카린 밀수사건’으로 1966년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자 그는 실질적으로 그룹을 맡기도 했다. 하지만 선친의 눈밖에 나면서 그룹 경영에서 완전히 손을 떼야 했다. 그때가 1971년이었다. 그는 회고록 ‘묻어둔 이야기’에서 “자신이 삼성에서 일한 기간은 7년이고, 물러난 것은 기업이 혼란에 빠져서가 아니라 몇마디로 간단하게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사정이 있어서다.”라며 부친의 주장이 사실과 다르다고 했다. 부친이 동생 이건희 회장으로의 대권이양 선언시를 회고할 때는 “아버지와의 사이에 상당한 틈새가 있었지만 언젠가는 나에게 삼성의 대권이 주어질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며 당시의 ‘충격’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bori@seoul.co.kr ■ 차세대 사업의 양날개 ‘左-미경, 右-재환’ 차남 재환(44)씨는 배재고, 타이완대 정치학과 출신으로 현재 경영기획실 중국담당 상무로 베이징에서 근무하고 있다. 한때 제일제당 일본지사 부장으로 근무하기도 했다. 재환씨는 일본과 중국쪽 사업에 관심이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7·8·9대 국회의원을 지낸 민기식 전 의원의 딸 재원(38)씨와 결혼, 딸 소혜(15)양과 아들 호준(7)군을 뒀다. 재원씨는 연세대 경영학과를 나왔다. ●“오너보다 CEO로 평가받겠다.” CJ맨들이 보는 이 회장은 ‘꿈과 비전·열정이 큰 사람’으로 요약된다. 회사의 실적을 보고 받으면 “최소한 얼마는 돼야 하는데, 회사가 좀 더 커야 한다.”며 항상 아쉬움을 토로한다. 사원들과의 대화를 ‘정말’ 즐긴다. 좀처럼 격식을 따지지 않는다. 책상에 걸터 앉아 얘기를 하고, 직원들과 남산에 올라 자유토론도 한다. 회사의 경영 방침과 경영 철학을 직접 설파, 공감대를 넓혀나가는 식이다. CJ 관계자는 그런 그의 행보를 두고 “오너라기보다는 유능한 최고경영자(CEO)로 평가받고 싶어한다.”고 말했다. 최태원 SK 회장이 사석에서 “이 회장은 정말 공부를 열심히 한다.”면서 “10년 뒤 살아 남을 사람(오너)은 이 회장밖에 없다.”고 말했다는 얘기도 들린다. 그만큼 오너 2,3세들 중에서 가장 성공적으로 안착한 경영인이란 방증이다. 재벌가의 후손들이면 보통 가는 해외유학 코스도 밟지 않은 ‘토종파’인데도 그의 기업 문화론은 어느 기업보다 앞서간다. 오래된 보수적인 회사로 짧은 시간에 젊고 활기찬 기업으로 변모시킨 것은 바로 ‘이재현 식’ 기업 문화에서 비롯됐다. 국내 최초로 복장 자율화,‘∼님’으로 호칭 통일, 플렉서블 타임제(자율 출퇴근시간), 층마다 비치된 간이 도서관 등은 다 그의 작품이다. CJ의 역사가 순탄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삼성과의 결별을 앞둔 94년 10월 삼성측이 제일제당에 이학수 당시 삼성화재 부사장(현 삼성 구조조정본부장)을 파견, 삼촌 이건희 회장과 조카 이 회장의 신경전은 제일제당이 삼성본관에서 95년 4월 현재의 사옥으로 이사오기까지 6개월간 계속됐다. 제일제당이 보유한 부동산, 삼성생명주식 평가방법을 놓고 양측은 치열한 공방을 벌인 끝에야 제일제당은 ‘독립’을 선언할 수 있었다. 삼성그룹에서 분리될 당시의 제일제당은 삼성의 전자 및 중공업 위주의 우선 투자전략에서 밀려 성장한계를 보인 상황이었다. 식품회사라는 고정된 이미지도 그룹 성장의 걸림돌로 작용했다. 그러나 1995년 독자경영을 시작한 이후 이 회장 주도로 식품 등 기존의 사업을 다지면서 미디어·영상·물류·유선방송·홈쇼핑 사업 등 다각화된 사업으로 포트폴리오를 짰다. 식품·정보통신·화장품, 음료사업 등 매년 수십억에서 수천억원의 적자를 내는 비주력 사업은 과감히 매각했다. 이 가운데 인터넷사업인 드림라인은 이 회장이 주도한 사업 중의 하나였으나 그다지 빛을 보지 못했다. 그렇지만 ‘미련’을 갖지 않고 구조조정을 무난하게 해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현재의 식품, 식품서비스, 바이오, 미디어&엔터테인먼트, 신유통 등 4개 분야를 CJ의 핵심 사업으로 확정했다.“설탕이나 파는 식의 마인드로 살아 남을 수 없다.”면서 이 회장은 당시 직원들의 신발끈을 조였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내실있는 임원 김주형(58) ㈜CJ 대표이사 사장은 1972년 제일제당에 들어온 이후 최고 경영자자리에까지 오른 입지적인 인물. 곡물구매 전문가로 자기 색깔을 내지 않으며 두루 회사를 아우르는 ‘덕장’형이다. 각양 각색의 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자칫 불협화음이 나올 수 있는 갈등 사안들을 절묘하게 중재·조정하는 ‘조율사’로서 탁월한 역할을 해낸다는 평이다. 특유의 친화력과 유연성 덕분이다. 그는 아랫사람에게도 존대하며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경청해 권위의식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포근한 느낌을 준다. CJ개발 문성기(56)사장은 1974년 제일제당에 입사, 신사업 본부장 등을 거쳐 99년부터 CJ개발 대표를 맡았다. 우리나라 골프장 최초로 미국 LPGA 대회를 유치해 2002년 부터 3년 연속 성공적으로 개최,CJ의 골프장 ‘클럽 나인브릿지’를 세계 100대 회원제 골프장으로 만드는 것은 물론 CJ그룹을 해외에 알린 주역이다. 조용하면서도 강한 리더십이 강점이다. 이태호(57) CJ푸드시스템 대표(부사장)는 1973년 삼성그룹으로 입사, 사료본부장 등을 거쳐 2003년 말부터 CJ푸드시스템을 맡았다. 사료본부장 시절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으로 일찌감치 사업을 확장한 주역이다. 부하직원들로부터 냉철한 판단력과 따뜻한 마음을 가진 리더로 평가받는다. 의사결정이 빠르고 사업의 비전 제시력이 강하다는 평이다. 소탈한 성격으로 격식에 얽매이지 않아 평이 좋다. 박동호(49) CJ엔터테인먼트 대표(부사장)는 ‘비즈니스맨의 모범’으로 불린다. 국내 최초로 멀티플렉스(복합상영관) 극장체인인 CGV를 도입, 업계 1위로 성장시켜 사업역량을 인정 받으면서 한국 영화판을 좌지우지하는 ‘충무로 파워맨’으로 입지를 굳히고 있다. 지난해 게임업체인 플래너스를 전격 인수하는 수완도 발휘했다.‘튀는’ 사람들과 일하는 분야에서 내부를 꼼꼼하게 추스르고 챙기는 관리자의 역할에 꼭 맞는 인물이다. 김진수(54) CJ홈쇼핑 대표(부사장)는 제일제당 마케팅 실장 등을 거쳐 다국적기업 한국 존슨의 사장으로 잠시 외도했다가 친정으로 복귀한 케이스. 마케팅실장때 대상(옛 미원)과의 조미료 전쟁에서 ‘다시다’로 역전을 이뤘고, 식품본부장 시절에는 ‘햇반’ 등 신상품을 시장에 안착시켰다. 중국 홈쇼핑시장에 진출하는 개가를 올리기도 했다. 해외통이자 마케팅 전문가로 평가 받는 그는 분단위로 스케줄을 관리할 정도로 자기관리에 철저하다. 박대용(53) CJ GLS 대표(부사장)는 업계에서 손꼽히는 물류 전문가다.1977년 제일제당에 입사,89년 물류개선팀장으로 발탁된 이후 16년간 물류관련 업무에만 종사해 왔다. 지난 99년 택배사업에 진출,3년만에 매출 1000억원을 돌파하며 CJ GLS를 택배업게 ‘빅 4’에 합류시켰다. 권위보다는 따뜻한 가슴으로 부하직원들을 대하는 ‘온화한 리더십’의 소유자다. 정진구(60) CJ푸드빌 대표(부사장)는 패밀리 레스토랑인 스카이락·빕스·한쿡과 베이커리 뚜레쥬르 등 외식사업을 총괄한다. 아이스크림전문점 배스킨 라빈스, 커피전문점 스타벅스 등이 그의 손을 거쳐 최고 브랜드로 성장했다. 국내 외식 업계의 ‘미다스의 손’으로 불린다. 직관력과 현장 감각이 뛰어나 한국에 진출하려는 외국기업들의 영입대상 1순위로 알려져 있다.2003년 말 CJ그룹에 부사장으로 영입됐다. 김홍창(51) CJ투자증권 대표(부사장)는 1981년 당시 제일제당에 입사, 제일투자증권 상무, 제일선물 대표 등을 거친 대표적인 관리·금융통. 제일선물 대표 당시 업계 8∼9위에 불과했던 회사를 1년여 만에 업계 2위로 끌어올려 놓기도 했다. 이재현 회장의 입사 초기 수년간 경리·관리 부서에서 함께 근무하기도 했다. 직원들과 스스럼 없이 이메일을 주고받는 등 격의없는 성격이며 조직 밀착 경영에 강하다는 평이다. 지난 1월 정기인사에서 전격 발탁된 CJ미디어 강석희 대표(상무)는 자타가 인정하는 제약마케팅의 귀재다. 마케팅에서 보여준 실력이 미디어라는 복합다기한 사업분야에서 어떻게 적용될지 관심사다. bori@seoul.co.kr ■ 손경식 회장은 누구 손경식(66) 회장은 이재현 회장의 외삼촌이면서 CJ그룹을 이끄는 또 다른 한 축이다. 이 회장에게 할아버지 고 이병철 회장이 정신적 지주라면 외삼촌 손 회장은 ‘경영 스승’인 셈이다. 이 회장이 회사 중대 사안을 놓고 허심탄회하게 얘기를 나누는 상대다. 경기고 2학년때 검정고시로 서울대 법대에 입학할 정도여서 ‘천재’라는 얘기를 들었다. 손 회장은 누나이자 이재현 회장의 모친인 손복남 고문이 삼성가로 시집가면서 삼성과 인연을 맺었다. 1968년 미국 오클라호마주립대 경영학 석사과정을 마치고 공부를 하려던 그를 고 이병철 회장이 비서실로 불러들였던 것. 아무리 가까운 혈연이라도 능력이 없으면 발탁하지 않는 삼성가에서 그는 77년 38세의 나이에 안국화재(현 삼성화재)사장으로 발탁돼 삼성을 이끌 리더로 자리잡았다. 안국화재는 자신의 부친인 손영기 전 경기도지사가 사장을 맡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1993년 6월 제일제당이 삼성그룹에서 계열 분리되면서 조카 이 회장의 ‘후견인’ 역할이 요구됐다. 당시 경영 수업을 받던 재현씨를 어떻게든지 잘 보호해 제일제당의 ‘주인’으로 ‘옹립’해야 하는 임무가 주어진 것. 그는 주저하지 않고 삼성전자에서 일하던 조카 재현씨와 함께 제일제당 대표이사 부회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후 삼성과의 분리과정에서 갈등을 겪는 등 제일제당이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구원 투수’로 활약했다. 96년 5월 “삼성과의 관계를 청산하고 제일제당 그룹으로 새롭게 출발한다.”며 삼성그룹과의 결별을 공식 선언한 것도 그였다. 거대 그룹의 우산 아래서 떨어져 나온 제일제당이 큰 위기를 겪지 않고 오늘의 CJ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손 회장의 역할이 컸다는 것이 안팎의 평가다. 화려한 학맥으로 그는 정·관·재계의 인맥 네트워크가 강하다. 재작년에는 경기고 명예 졸업장을 받았다. 부인 김교숙(59)씨와의 사이에 1남 1녀를 두고 있다. bori@seoul.co.kr ●특별취재반 산업부 홍성추 부장(부국장급·반장) 박건승·정기홍·류찬희·김성곤·최광숙차장 안미현·주현진·류길상·김경두기자
  •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삼성그룹 ⑤-금융 계열사 CEO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삼성그룹 ⑤-금융 계열사 CEO

    지난 2002년 5월24∼25일 경기도 용인에 있는 삼성그룹 연수원 ‘창조관’에 삼성의 금융사 7인의 ‘수장’들이 긴장된 표정으로 속속 모여 들었다. 직전 전자사장단 회의에서 “현재 실적에 자만하지 말고 미래를 대비하자.”고 주문했던 이건희 회장이 무슨 말을 던질지 모르는 상황. 오후 3시부터 시작된 회의는 삼성생명, 삼성화재, 삼성카드, 삼성캐피탈, 삼성증권, 삼성투신운용 등 업종별로 중장기 전략을 발표한 뒤 새벽 1시까지 토론이 이어졌다. 회의를 함께 한 이 회장은 “문제가 있는 경영방식은 즉각 고쳐 금융사들도 삼성다운 ‘일류경영’을 해야 할 것”이라면서 “해외 선진 금융사들의 본격적인 진출에 대비해 핵심 금융전문인력을 확보하고 벤치마킹해 상품·서비스 개발 능력을 향상시켜야 한다.”고 주문했다. 토종 대 외국자본의 한판 승부가 벌어지고 있는 현 상황을 미리 대비한 것이다. 이 회장은 2001년 회의때도 “사고가 난 뒤 보험료율만 올리지 말고 교통사고를 줄이기 위한 연구개발(R&D)에 노력하라.”고 주문해 삼성화재가 최초로 ‘삼성교통안전문화연구소’를 설립하는 계기가 됐다. 이 회장이 전자계열에 이어 금융사 사장들과 전략회의를 가진 데서 나타나듯 금융업은 전자와 함께 삼성의 양대축이다. 삼성은 지난 세월 현대·LG 등과 늘 수위를 다퉈왔지만 금융만큼은 독보적인 지위를 유지했다. 현재 자산기준으로 삼성생명이 90조원을 넘어섰고 삼성화재 14조원, 삼성증권 6조원에 육박한다. 웬만한 시중은행과 맞먹는 수준이다. ●자산 90조, 삼성의 ‘젖줄’을 일군 사람들 삼성생명은 57년 4월 강의수, 전중윤, 윤삼영, 강일성, 김용수, 강화두 등 7인의 경제인이 57년 공동으로 세운 동방생명이 전신이다. 초대 사장과 회장을 지낸 고 강의수 회장은 권영길 민주노동당 국회의원의 장인이다. 당시 동방생명 마산지부장이 효성그룹 창업주인 고 조홍제 회장이었다. 동방생명은 설립 2년 만에 국내 생보업계 1위로 뛰어오른 데 이어 62년에는 동남증권(현 하나증권) 설립, 동양화재 주식 매입, 동화백화점(현 신세계백화점) 인수 등 사세를 넓혀 나갔다. 하지만 63년 1월 강 회장이 운명하자 곧바로 어려움에 빠졌고 그해 7월 삼성의 일환이 된다. 삼성생명은 삼성의 지배구조를 지탱하는 ‘대들보’로서 그만큼 부담도 안고 있다. 삼성생명은 삼성자동차 채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건희 회장이 삼성생명 주식 400만주를 내놓으면서 해외 및 국내여론의 집중적인 주목을 받았다. 그때 일부 해외언론은 이 회장을 가리켜 ‘책임을 질 줄 아는 유일한 경영인’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다. 이재용 상무가 최대주주인 삼성에버랜드가 갖고 있는 삼성생명 주식 19.34%도 관심의 초점이 되고 있다. 에버랜드는 지난해 말 삼성생명 지분 6%를 제일은행에 5년간 신탁하면서 금융지주회사로 지정되는 것을 피하려고 하는데 당국의 결론이 주목된다. 참여연대가 지난해 4월 이수빈 회장을 비롯한 경영진을 배임혐의로 고발한 것도 걸려 있다.99년 회사가 손해를 봐 가면서 우리은행과 주식을 맞교환해 지배주주에게 ‘이득’을 안겨줬다는 주장과 삼성자동차 ‘우회지원 대출’ 등이 고발 사유였다. 이같은 경영외적인 비중을 제외하고도 삼성생명은 국내 생명보험 시장의 35%를 점유하고 있는 선두업체로 올해 자산 100조원 돌파가 예상되는 등 화려한 실적을 자랑하고 있다.2003년 미 포천지가 선정한 세계 500대 기업가운데 생보사 부문 19위에 랭크됐다.2010년까지 자산 200조원, 매출액 47조원을 달성하여 ‘글로벌 종합금융서비스회사’로 거듭나는 것이 목표다. 과거 삼성의 계열사 가운데 삼성생명 돈을 빌리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였다. 삼성생명빌딩과 중앙일보빌딩, 종로타워, 강남의 하이닉스빌딩 등 수많은 빌딩이 삼성생명 소유다.1116개 지점의 영업용 부동산의 장부가만 3조 5158억원에 달한다. ●생명의 산 증인, 이수빈과 배정충 삼성생명의 경영은 99년 12월부터 배정충(60) 사장이 책임지고 있다. 전북 전주생인 배 사장은 전주고와 고려대 경영학과를 마치고 69년 삼성생명(당시 동방생명)에 입사했다. 입사 당시 삼성생명의 자산은 30억원(현재 90조원)에 불과했다. 생명보험시장이 급격히 성장하던 70∼80년대를 영업 현장에서 보낸 배 사장은 삼성화재 대표를 거쳐 99년 ‘친정’의 대표이사로 금의환향했다. 취임 직후 가장 먼저 한 일이 한달에 걸쳐 전국의 영업현장을 순회한 일일 정도로 현장을 우선시한다. 한번 본 숫자는 거의 잊어버리지 않을 정도로 ‘수리’에 밝다.4년 만에 삼성생명에 돌아왔을때 사장실에 불려 간 간부들이 업무와 관련된 통계숫자를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자 일일이 수정해주며 ‘불호령’을 내린 일화는 유명하다. 반면 아무리 바빠도 회사 임직원이나 거래처, 지인들의 상가에는 빠지지 않고 참석할 정도로 인간적인 면도 강하다는 평이다. 이수빈 회장도 삼성생명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다. 65년 삼성그룹 공채 6기로 입사,13년 만에 제일모직 대표이사로 초고속 승진한 그는 25년간 제일합섬, 제일제당, 삼성항공, 삼성생명, 삼성증권의 CEO와 삼성 금융그룹 회장을 맡아 ‘직업이 사장’으로 불린다. 보험 경영에 손익과 효율을 중시하는 경영 방식을 접목했고 생명보험 경영의 핵심인 영업소장과 설계사의 위상 강화를 통해 업계 1위의 기반을 구축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삼성생명은 그 역사만큼이나 거쳐간 인물들의 면면도 화려하다. 2대 사장을 지낸 이호씨는 20대,31대 내무부장관과 8대,20대 법무부장관을 역임했다.63년 삼성으로 넘어 오면서 새로 구성된 경영진에는 LG그룹 구인회 창업주의 3남이자 이병철 회장의 둘째 사위인 구자학 아워홈 회장이 포함돼 눈길을 끈다. 이명희 신세계 회장의 시아버지인 정상희씨는 71∼78년 회장을 지냈고 김만제 전 포철회장도 경제부총리를 마치고 91∼92년 회장을 맡았다. ●사돈과 사위가 맹활약한 삼성화재 삼성화재는 1951년 3월 경남 함안 출신의 구진현씨가 세운 재단법인 ‘훈세사(勳世社)’에서 출발한 안보화재와 한국일보 창업주인 고 장기영 회장이 초대사장을 지낸 안국화재가 전신이다. 안보화재와 안국화재는 63년 합병으로 한 회사로 태어났고 93년 말 삼성화재로 이름을 바꿨다. 삼성화재의 사사에는 유난히 ‘인척’들의 활약이 돋보인다. 이맹희씨의 장인인 손영기 전 경기도지사는 삼성에 인수된 직후인 61년 안국화재 사장을 맡은 뒤 운명(76년)하기까지 사장을 지냈다.CJ그룹 이재현 회장의 외삼촌이자 손영기씨의 아들인 손경식 CJ 회장은 93년 7월 당시 제일제당 부회장으로 자리를 옮길 때까지 경영을 맡았다. 이병철 회장의 4녀 덕희씨의 남편인 이종기씨와 자리를 맞바꾼 것이다. 이종기씨 역시 2000년 3월 경영에서 물러날 때까지 삼성화재를 국내 대표 손보회사로 키워놨다. 안국화재 지분이 많던 이맹희씨도 65∼67년 임원을 지냈고 부인 손복남씨도 85∼93년 상무로 일했다. 삼성화재 역시 긴 역사만큼이나 거물급 인사들을 많이 배출했다. 동부화재 김순환 사장은 2001년까지 부사장을 지냈고 조용철 CJ홈쇼핑 사장도 99년까지 삼성화재에서 일했다. 박해춘 LG카드 사장, 박종익 전 손보협회 회장도 삼성화재 출신이다. ●신경영으로 이끈 이학수와 이수창 이학수 삼성 구조조정본부장이 실질적으로 삼성화재 대표를 지낸 것은 94년 12월∼96년 8월로 1년 8개월밖에 되지 않지만 삼성화재의 ‘경영체질’을 혁신적으로 바꿔 현재의 고도수익을 낳는 경영시스템을 만들어 놓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본부장은 94년 초 제일제당 대표로 잠시 나갔다 돌아오고 나서 바로 삼성화재 CEO로 부임하자마자 17%였던 시장점유율을 30%까지 끌어 올리겠다고 공언했다. 당시 삼성화재 임원들은 ‘불가능한 목표’라며 주저했지만 “삼성이 명색이 ‘영남기업’으로 알려져 있는데 대구에서 4위, 부산에선 3위, 경북은 7위라는게 말이나 되느냐? 전부 1위로 끌어 올리자.”는 이 본부장의 격려에 설득당할 수밖에 없었다. 실제 94년 17.6%였던 삼성화재의 점유율은 96년 23.6%로 급등,2,3위와의 격차를 10%이상 벌렸고 2001년 대망의 ‘30%’를 달성하는 데 성공했다. 이 본부장은 또 자동차보험의 공격적인 확대, 설계사 수당 100% 인상, 품질보증제 시행 등 ‘신경영’을 도입하며 삼성생명에 비해 뒤처져 있던 삼성화재의 위상과 직원들의 사기를 크게 높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배구단 창설, 삼성화재배 세계바둑대회 등을 통해 회사 이미지 개선에도 기여했다. 이 본부장, 배정충 현 삼성생명 사장의 뒤를 이어 99년 대표이사로 취임한 이수창(56) 사장의 경영성적도 눈부시다.99년 26.9%였던 점유율을 지난해 32%로 끌어 올리며 2,3위업체와의 격차를 더욱 벌렸다.2003년,2004년 세계적인 신용평가기관인 S&P로부터 국내 민간기업 중 최고등급인 A+를 받았다. 매월 마지막주에는 영업점과 보상 현장을 깜짝 방문하는 등 ‘현장경영’에 철저한 이 사장은 2002년 업계 최초로 ‘삼성애니카’라는 브랜드 경영을 도입했고 2001년 진입이 까다롭기로 유명한 중국시장에 진출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은행의 손해보험업 진출이 예정된 올해는 향후 10년간 회사의 명운을 좌우할 중대한 시기”라며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경북 예천의 대창고를 졸업한 이 사장은 독특한 전공(서울대 수의학과)으로도 유명하다. 한때 사법시험을 준비했지만 결국 경영인으로 성공했다. ●아직 꺼지지 않은 카드의 ‘불씨’ 삼성의 금융사업 가운데 가장 고전하고 있는 분야는 신용카드다. 삼성카드는 지난해 1조 5000억원의 유상증자를 단행한데 이어 올해도 1조 2000억원의 증자계획을 발표했다. 이에 따라 삼성전자(46%), 삼성생명(34.5%), 삼성전기(4.7%), 삼성물산(3.1%) 등 삼성 계열사들은 지분만큼 증자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 삼성카드의 적자로 인한 지분법 평가손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이건희 회장은 이미 2002년 “신용카드가 신용사회 저변확대에 기여했지만 과열 경쟁으로 인해 사회·경제적인 부작용이 일어날 수 있다.”며 ‘주의’를 당부했지만 카드사태는 현실화됐다. 유석렬(55) 사장은 신용카드 부실이 불거진 2003년 대표이사를 맡아 그동안 삼성캐피털과의 합병, 유상증자, 해외자산유동화증권(ABS) 발행 등으로 숨가쁜 시간을 보냈다. 경기고와 서울대 경영학과를 거쳐 74년 제일모직에 입사한 유 사장은 입사직후 회사의 권유로 한국과학기술원(KAIST) 산업공학과에 진학한 ‘드문’ 케이스다. 삼성전자 반도체 미국법인 근무를 거쳐 91년부터는 비서실 재무팀에서 일했다. 미국법인 관리부장 시절 동료가 최광해 현 구조본 재무팀장이다.97년 삼성캐피털 대표이사로 CEO 생활을 시작한 유 사장은 삼성증권 사장, 삼성생명 자산운용부문 사장을 역임했다. ●‘투자은행’으로 변신중인 삼성증권 92년 국제증권을 인수하면서 출범한 삼성증권은 98년 수익증권 판매고 최단기간내 10조원 돌파 등 짧은기간에 업계 선두권으로 도약했다. 일찍부터 ‘약정경쟁’을 지양하고 자산관리형 영업으로 변신을 시도, 현재 투신수탁고가 20조원에 달해 자산관리부문에서 은행 등과 경쟁을 벌이고 있다. 조흥은행, 국민은행 지분 매각 작업에 공동주간사로 참여하는 등 외국계 대형 증권사들이 사실상 독점하고 있는 투자은행(Investment Banking) 부문에서도 이들과 경쟁할 수 있는 유일한 토종증권사로 평가받고 있다. 우리금융지주 회장으로 영입된 황영기 전 사장에 이어 지난해 5월 삼성증권 사장에 취임한 배호원(54) 사장은 삼성그룹 내에서도 대표적인 자산운용 및 재무 전문가로 꼽힌다. 배 사장은 경남고와 연세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77년 제일합섬 경리과를 시작으로 비서실 재무팀 부장, 삼성생명 자산운용본부장, 삼성투신운용 사장, 삼성생명 자산·법인부문 총괄 사장 등 해당 분야에서 전문성을 쌓아왔다. 금융전문가답게 깔끔한 이미지지만 직원들과 ‘해장국 미팅’을 즐기는 등 소탈한 모습도 갖고 있다. ●벤처투자, 투신운용, 선물 등으로 확장되는 금융사업 삼성은 삼성물산의 벤처사업팀을 확대,99년 유망 벤처기업을 발굴·육성하는 삼성벤처투자를 설립했다.2003년 대표이사로 부임한 김상기(55) 사장은 대구 출신으로 경북사대부고와 연세대 경영학과를 졸업, 삼성생명, 삼성증권에서 주로 일했다. 지난해 말 현재 수익증권 22조 2000억원, 뮤추얼펀드 1000억원, 투자자문 38조 1000억원 등 60조가 넘는 자산을 관리하고 있는 삼성투자신탁운용은 2003년부터 삼성화재 부사장을 역임한 황태선(57) 사장이 맡고 있다. 경북 상주생으로 김천 성의종고와 고려대 경영학과를 졸업했다. 선물 관련 제품의 판매·컨설팅, 정보 수집 등을 담당하는 삼성선물은 지난해 3월부터 정주영(57) 사장이 맡고 있다. 정 사장 역시 황 사장의 고향인 경북 상주 출신으로 상주고와 서울대 농업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삼성생명을 거쳐 삼성증권 리테일 사업본부장을 역임했다. ukelvin@seoul.co.kr ■ 삼성의 금융비화 삼성은 삼성물산을 시작으로 제일모직, 제일제당, 삼성전자 등 거의 모든 회사를 손수 일궜지만 오늘날 100조원이 넘는 자산을 운용하고 있는 금융사업은 대부분 인수한 것이다. 묘하게도 인수한 금융사는 승승장구하고 있는 반면 삼성이 직접 설립한 금융관계사는 어려움에 처해 있다. 지난해 삼성증권 황영기 사장이 우리금융지주 회장 후보로 추대되자 재계에서는 곧바로 삼성의 우리은행 ‘인수설’이 불거져 나왔다. 우리은행이 삼성자동차의 주 채권은행인데 삼성에서 잘 나가던 황 사장이 굳이 자리를 옮길 필요가 있었느냐는 것이다. 삼성의 부인이 아니더라도 삼성이 은행을 소유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보인다. 하지만 한때 시중은행의 대부분을 소유했고 이후에도 끊임없이 제1금융권 진입을 노렸던 삼성인지라 의혹의 눈길은 쉽게 거둬지지 않는다. 고 이병철 회장은 50년대 중반 이승만 정부가 추진한 시중은행 주식 공매에 참가해 12억 9000만환에 흥업은행(구 한일은행) 주식 83%를 소유하게 됐다. 이어 조흥은행주 55%를 매입했다. 흥업은행 신탁부에서 상업은행주 33%를 갖고 있었으므로 삼성은 당시 4개 시중은행 가운데 3개 은행을 직간접적으로 지배했던 것이다. 황영기 회장이 맡고 있는 우리은행이 한일은행과 상업은행이 합친 것이므로 삼성과 우리은행의 인연이 질기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5·16 쿠데타로 삼성이 소유하고 있던 은행 지분은 정부 소유로 돌아갔다. 삼성으로서는 한국비료(한비)와 대구대·은행을 박정희 정권에 뺏긴 셈이다. 하지만 삼성과 금융사업의 인연은 58년 안국화재 인수로 재개된 뒤 63년 동방생명 인수로 본격화된다. 금융사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던 고 이병철 회장은 63년 봄 동방생명 임원이 찾아와 회사를 인수해달라고 부탁했다고 회고했다.5월22일 당시 동방생명 임원 대부분의 주식이 먼저 삼성으로 넘어왔고 강의수 회장의 유족들도 7월16일 지분을 넘겼다. 강 회장의 유족이 권영길 민주노동당 국회의원의 부인 강지연 여사다. 삼성과 민노당의 ‘악연’도 역사가 긴 셈이다. 삼성은 92년 11월 배현규씨 등 국제증권 대주주로부터 영업권을 양도받아 삼성증권을 탄생시켰다.96년에는 국제선물(현 삼성선물)을,98년에는 동양투신(현 삼성투신운용)을 인수했다. 반면 88년 설립한 삼성카드는 현재 그룹의 ‘뜨거운 감자’로 전락했고 95년 설립한 삼성캐피탈도 부실을 줄이기 위해 지난해 삼성카드와 합병해야 했다.99년 설립한 삼성벤처투자도 ‘벤처 붐’이 사그라지면서 큰 재미를 보지 못했다. ukelvin@seoul.co.kr ■ 생명·화재 역대 대표이사 ●삼성생명 강의수(57.4∼62, 권영길 민주노동당 의원 장인) 이 호(∼63, 전 내무부·법무부 장관) 조우동(∼69, 전 삼성중공업 회장) 이겸재(∼71) 원종훈(∼78) 고상겸(∼83) 배상욱(∼84, 전 체신부 장관) 박태원(∼85) 이수빈(∼91) 황학수(∼95, 전 삼성카드 부회장) 이수빈(∼99, 현 삼성사회봉사단장) 배정충(∼현재) ●삼성화재 손영기(∼76, 이맹희씨 장인) 손경식(∼93, 현 CJ회장) 이종기(∼2000, 이병철 회장 넷째 사위) 강경수(∼93) 홍종만(∼94, 전 삼성자동차·삼성코닝정밀유리 사장) 이중구(∼94, 현 삼성테크윈 사장) 이학수(94∼96, 현 삼성 구조조정본부장) 배정충(∼98, 현 삼성생명 사장) 이수창(∼현재) ●특별취재반 산업부 홍성추 부장(부국장급·반장) 박건승·정기홍·류찬희·김성곤·최광숙차장 안미현·주현진·류길상·김경두기자
  • 신세계百 ‘이병철 흉상’ 세운다

    오는 8월 오픈하는 신세계백화점 본점에 고 이병철 삼성 창업주의 흉상이 들어선다. 12일 신세계백화점에 따르면 최근 이명희 회장의 지시로 고 이병철 회장의 흉상을 본점 사무실 로비에 세우기로 하고 흉상 작업을 벌이고 있다. 최근 본점 오픈을 앞두고 과거와는 달리 사보에 등장하는 등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이 회장은 “아버지가 아니면 오늘의 내가 있겠느냐.”면서 이같은 지시를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이미 이 회장은 기존에 제작된 부친의 여러 흉상을 보고, 부친의 생전 모습과 가장 흡사하다고 결론을 내린 용인 연수원의 흉상을 골랐다는 후문이다. 신세계측은 이 흉상과 똑같은 모습으로 실물사이즈로 흉상을 제작할 방침이다. 막내딸로 누구보다도 부친으로부터 귀여움을 받던 이 회장은 신세계백화점 본사 회의실과 자신의 아들인 정용진 부사장 방에도 부친의 초상화를 걸어 놓고 부친의 경영철학을 신세계맨들에게 전파하고 있다. 부친을 누구보다 닮으려고 애쓰고 노력하는 이 회장은 실제로 부친의 경영스타일를 가장 빼닮았다는 얘기를 듣고 있다. 최광숙기자 bori@seoul.co.kr
  • [재계 인사이드]신세계 경영에 목소리 낸 이회장

    [재계 인사이드]신세계 경영에 목소리 낸 이회장

    이명희 신세계그룹 회장이 오는 8월 신세계 본점 오픈을 앞두고 처음으로 ‘목소리’를 냈다. 평소 전문 경영인에게 일임, 좀처럼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있기에 그의 첫 목소리는 주목을 받기 충분했다. 비록 사보를 통해 밝혔지만 백화점 사업의 방향, 인재 중요성, 신세계인의 기본자세 등 광범위하게 자신의 경영 ‘색깔’을 표출했다. 회사안에서는 이 회장의 이러한 구체적인 목소리에 ‘의외’라며 놀라움을 표시하고 있다. 회사 출근도 1년에 손꼽을 정도로 조용한 행보를 보였었기 때문이다. 최근 발간된 사보 1월호에 ‘본점 오픈을 앞두고’란 제목으로 경영비전을 내외에 알렸다. 이 회장은 이 글에서 “본점은 우리의 자존심이며 얼굴이자 상징”이라며 “올해는 신세계가 재도약하는 원년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백화점은 패션을 추구해야 하고, 고객을 기다리지 않고 찾아가야 하며, 차별화된 상품으로 경쟁력을 갖춰야 한다.”며 백화점 사업에 대한 전반적인 방향 제시를 했다. 평소 부친인 고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의 경영 스타일을 빼닮았다는 얘기를 듣는 이 회장은 자신의 경영 스승이 부친임을 여지없이 나타냈다.“선대 회장께서 가장 힘쓴 것이 인재 육성이었다.”면서 인재육성을 강조했고, 또 “선대 회장께서는 성공한 일을 다시 돌아보지 않았고 늘 새로운 것을 찾으셨다.”면서 적극적으로 사업에 임할 것을 주문했다. 이 회장은 실제로 젊은 시절 부친이 제일모직 등 현장 일선을 방문할 때 언니인 이인희 한솔그룹 고문과 함께 수행하며 경영수업을 쌓아왔다. 이 회장은 또 “앞으로도 중요한 방침만을 지시하고 구체적인 실천에 관한 사항은 모두 전문 경영인에게 위임할 것”이라며 전문 경영인 체제를 계속 유지할 뜻을 밝혔다. 한 일간지에 ‘신규사업을 시작하거나 사람을 만나기로 약속하면 모든 정보를 철저히 사전조사한 후에 사업에 착수하거나 면담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는 부친의 경영철학을 항상 수첩에 갖고 다닐 정도로 부친에 대한 존경심이 대단하다. 그는 부친이 회장직을 오빠인 이건희회장에게 물려준 뒤 골프장을 자주 찾을 때 항상 골프 파트너로 낙점될 정도로 부친으로부터 사랑을 많이 받았다는 후문이다. 신세계백화점 관계자는 “이번 사보의 글은 본인이 직접 구술한 것을 정리한 것”이라면서 “평소 소리없이 회사를 방문할 정도인 이 회장이 얼마나 신세계 숙원사업인 본점 재개발에 대해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최광숙기자 bori@seoul.co.kr
  •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삼성그룹 ④-무역·중화학·서비스 CEO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삼성그룹 ④-무역·중화학·서비스 CEO

    “삼성물산의 역사는 삼성그룹의 역사입니다.” 삼성그룹의 모태기업인 삼성물산의 지난해 매출은 9조 6963억원으로 주력인 삼성전자 57조 6324억원의 6분의 1에 불과하다. 하지만 삼성물산은 삼성전자 지분 4.0%를 비롯해 삼성석유화학, 삼성정밀화학, 삼성카드, 삼성SDS, 제일기획 등 숱한 관계사의 지분을 갖고 있다. 이건희 회장이 주식 1.38%를 보유하고 있고 등기임원(회장)으로 직접 챙기고 있는 데서도 그 비중을 짐작할 수 있다. 이 회장이 등기임원으로 활동하는 삼성 계열사는 삼성전자, 삼성SDI, 삼성전기, 삼성물산, 제일모직, 호텔신라, 삼성에버랜드뿐이다. 국내 종합상사 1호인 삼성물산은 84년 3위,1998∼2000년,2002년에 2위를 기록했던 것을 제외하면 종합상사의 매출기준이 달라진 2003년까지 줄곧 매출 1위 기업 자리를 지켜왔다. ●‘그룹의 역사’ 삼성물산과 인재들 고 이병철 회장이 28세였던 1938년 3월1일 대구시 서문시장 인근 수동(현 인교동)에서 250여평 규모로 출발한 삼성상회가 삼성물산의 전신이다. 이 회장은 이에앞서 경남 마산에서 정미소사업으로 큰 돈을 벌었지만 ‘부동산 투자’에서 다 날리고 자본금 3만원으로 상회를 시작했다. 삼성(三星)의 삼은 우리민족이 가장 좋아하는 숫자로 크고 많고 강한 것을, 성은 밝고 높고 영원히 깨끗이 빛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첫 사업은 대구일대에서 생산되는 사과 등 청과물과 포항의 건어물 등을 만주와 중국으로 수출하는 일이었다.‘라면부터 미사일까지’ 취급한다는 종합상사의 70년전 버전인 셈이다. 삼성물산은 삼성의 대표기업답게 거쳐간 인물들의 면면이 화려하다. 초창기 삼성상회의 지배인으로 영입된 이순근씨는 이병철 회장의 와세다대 동문이다. 그는 정계에 투신했다 월북, 농림상까지 지낸 것으로 알려졌다. 이 회장은 거의 모든 경영을 이순근씨에게 맡겼는데 오늘날 ‘전문경영인’ 체제를 일찌감치 시험한 것이다. 서울로 거처를 옮긴 지 1년 만인 1948년 종로2가 ‘영보빌딩’ 근처 2층건물에 삼성물산공사로 간판을 걸 당시에는 효성그룹 창업주인 조홍제 회장이 전무를, 김생기씨가 상무를 맡았다.1949년 11월 마른오징어 3만근을 배에 싣고 홍콩으로 떠난 조홍제씨가 교포무역상과 챤넬양행으로부터 오징어를 담보로 각각 면사 50근을 외상매입한 것이 국내 최초의 D/P(Document against Payment Base) 거래로 꼽힌다. 조홍제 회장은 62년 효성물산, 한국타이어를 갖고 삼성을 떠난다. 김생기씨도 삼성에서 독립, 영진물산·영진식품·혜성개발 등을 일궈냈다. 삼성물산 창립멤버로 60∼61년 사장을 역임한 고 허정구씨도 눈에 띈다.LG그룹 구인회 창업주의 사돈인 고 허만정씨의 장남인 허씨는 이후 삼양통상을 설립했다. 허남각 삼양통상 회장, 허동수 GS칼텍스정유 회장, 허광수 삼양인터내셔널 회장의 아버지다. 70년에 대표이사를 지낸 정상희 사장은 3·5대 국회의원과 삼호무역 회장을 역임했고 신세계 이명희 회장의 남편인 정재은 명예회장의 아버지다. 이병철 회장과 고 홍진기 전 중앙일보 회장을 이어준 신현확 전 국무총리는 86년 이병철 회장의 요청으로 삼성물산 회장으로 영입됐다. 홍 회장의 공백을 메우며 이건희 회장 체제가 자리를 잡은 91년까지 물산 회장과 삼성미술문화재단 이사장을 지냈다. 이필곤 전 부회장도 삼성물산 대표이사를 두차례(85∼93년,95∼97년)나 지낸 대표적인 ‘물산맨’이다. 이 부회장은 삼성의 자동차사업 진출을 진두지휘하다 사업진출 차질에 대한 ‘책임’을 지고 중국으로 물러난 뒤 삼성을 떠났다. 서울시 부시장을 거쳐 현재 알티전자 회장과 삼성 CEO 출신들의 모임인 ‘성대회’ 회장을 맡고 있다.93∼95년 사장을 역임한 신세길씨는 현재 서울반도체 회장이다. 현명관 부회장은 아직도 물산의 비상근 회장 직함을 갖고 있다. 삼성물산은 2001∼2004년 배종렬 사장을 끝으로 공동대표체제가 굳혀졌다. 건설부문의 이상대(58) 사장은 충남 서천생으로 경복고와 고려대 정외과를 졸업했다.73년 제일합섬으로 입사한 뒤 대부분 삼성건설에서 일했다. 건설이 삼성물산에 합병되면서 97년 삼성물산 전략기획실장으로 일했고 2000년부터 주택부문 대표를 맡았다. 이 사장의 경복고 2년 선배인 상사부문 정우택(60) 사장은 서울대 금속공학과를 졸업하고 포항제철을 거쳐 77년 삼성물산에 입사했다. 휴스턴 지점장, 카자흐스탄 법인장 등 줄곧 상사부문에서 전성기를 구가했다. ●이병철의 세번째 회사 제일모직 1954년 9월 설립된 제일모직은 삼성상회, 제일제당(53년)에 이은 삼성의 세번째 회사다. 긴 역사만큼이나 숱한 인재들을 배출했는데 이학수 구조조정본부장, 김인주 구조본 차장, 최도석 삼성전자 경영총괄 사장, 김징완 삼성중공업 사장, 안복현 삼성BP화학 사장, 유석렬 삼성카드 사장 등이 제일모직에서 잔뼈가 굵었다. 지난해 제일모직 대표이사로 부임한 제진훈(58) 사장은 경남 산청생으로 진주고와 부산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제일모직에 입사한 ‘모직맨’이다. 제일모직에는 올초 상무보로 승진한 이건희 회장의 차녀 서현씨와 남편 김재열 상무가 같이 일하고 있다. ●‘봄날’을 기다리는 화학·중공업 80년 유공 인수 실패,90년대 중반 자동차 사업의 좌절 등으로 자동차·중공업∼정유·석유화학·화학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중화학그룹’을 도모했던 삼성의 꿈은 사실상 좌절됐다. 오늘날 삼성을 대표하는 업종은 전자와 금융이다. 하지만 화학·중공업 계열사들의 ‘절치부심’이 예사롭지 않다. 화학·중공업 계열사 CEO가운데 비교적 많이 알려진 CEO는 허태학(61) 삼성석유화학 사장이다. 경남 고성생으로 진주농림고와 경상대 농학과를 졸업한 뒤 69년 중앙개발(현 삼성에버랜드)에 입사했다. 허 사장은 중학교와 고등학교 진학마저도 조부의 강한 반대에 부딪힐 정도로 보수적인 농촌출신으로 한때 덴마크의 달라스나 그룬트비히 같은 농촌 계몽자를 꿈꾸었다고 한다. 호텔신라 총지배인, 삼성에버랜드 사장, 호텔신라 사장을 거쳐 2003년 삼성석화에 자리를 잡았다. 에버랜드 사장시절에는 ‘캐리비안베이’라는 테마파크를 조성, 리조트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대표이사로 재직하던 93∼2002년 삼성에버랜드는 이재용 상무에게 경영권을 넘겨주기 위한 ‘징검다리’로 부상하면서 구설수도 따랐다. 허 사장은 96년 에버랜드의 전환사채(CB)를 이 상무에게 저가로 발행한 것과 관련, 최근 징역 5년을 구형 받았지만 지금도 공공연히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이건희 회장을 꼽을 정도로 삼성에 대한 애착이 강하다. 삼성 CEO 가운데 거의 유일하게 개인 홈페이지를 운영할 정도로 ‘자기 PR’에도 열심이다. 삼성과 고 이병철 회장에게 큰 상처를 줬던 삼성정밀화학(옛 한국비료)은 제일합섬, 에버랜드, 삼성전자, 삼성종합화학, 삼성중공업, 삼성카드, 삼성자동차 등 가장 많은 회사를 옮겨 다닌 것으로 유명한 이용순(59) 사장이 2003년부터 맡고 있다.64년 8월 27일 설립된 ‘한비’는 유명한 ‘사카린 밀수사건’을 계기로 67년 10월 삼성이 주식의 51%를 국가에 헌납한 회사다. 한비는 이후 산업은행이 대주주로 공사형태로 운영됐지만 방만한 경영 등으로 위기를 맞자 94년 다시 삼성의 품으로 돌아왔다. 고홍식(58) 삼성토탈 사장은 삼성 사장단 가운데 몇 안되는 호남 출신으로 광주일고와 한양대 기계공학과를 졸업했다. 유난히 영남출신 CEO가 많은 삼성에서는 전주 출신의 배정충(60) 삼성생명 사장, 전남 구례생인 양인모(65) 삼성엔지니어링 부회장과 고 사장이 호남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LG전자 김쌍수 부회장이 기계공학과 1년 선배다. 72년 삼성에 입사한 고 사장은 줄곧 제일합섬에서 일하다 92년 비서실 경영팀장,93년 신경영실천위원회 팀장 등을 맡으며 그룹 전반의 일을 익히기 시작했다.95년 삼성종합화학 소속으로 화학소그룹 전략기획실장을 맡으며 화학계열에 본격적으로 발을 담갔다.2001년부터 삼성종합화학 CEO를 맡으며 97년 당시 부채비율 800%로 ‘회생불능’이었던 삼성종합화학을 프랑스 토탈과의 합작과 고효율 경영으로 지난해 매출 2조 8000억원, 영업이익 5700억원(이익률 21%)이라는 ‘알짜기업’으로 변신시켰다. 순차입금 비율은 20%로 뚝 떨어졌다. 스스로 “화학이 곧 내 인생”이라는 고 사장은 2010년 이익 1조원 돌파를 목표로 삼성그룹 내에서 비교적 위상이 처지는 화학 사업의 ‘중흥’을 노리고 있다. 2006년 세계 1위 조선업체를 목표로 하고 있는 삼성중공업은 ‘현장경영’,‘극한원가’,‘질적인 1위’를 부르짖는 김징완(59) 사장의 지휘하에 부활을 꿈꾸고 있다. 경북 달성생인 김 사장은 현풍고와 고려대 사학과를 마치고 73년 제일모직에 입사했다. 중공업과는 88년부터 인연을 맺어 2001년 대표이사로 부임했다. 세계에서 가장 크고 생산성 높은 조선소를 만들고 싶었던 이병철 회장은 일본 IHI사와의 합작을 통해 경남 통영시 안정리에 150만평 규모의 조선소를 세울 계획이었다. 하지만 오일쇼크의 여파로 계획은 차질을 빚었고 썩 내키지 않던 거제의 우진조선을 인수하는데 만족해야 했다. ●또 하나의 ‘초일류’, 삼성 서비스 삼성에버랜드가 언론에 크게 부각될 때는 대부분 삼성그룹의 지배구조와 관련돼 있다. 그도 그럴것이 에버랜드는 이건희 회장(3.72%)은 물론, 이재용 상무 25.10%, 이부진 호텔신라 상무, 이서현 제일모직 상무보, 이윤형씨 등 세딸이 나란히 8.37%의 지분을 갖고 있다. 고 이병철 회장의 4녀인 덕희씨의 남편인 이종기 전 삼성화재 회장(0.48%), 맏딸 이인희 한솔그룹 고문의 남편인 조운해 전 고려병원장도 0.08% 지분을 갖고 있다. 하지만 이 회사는 국내 최대, 세계 6위권의 테마파크와 골프장, 빌딩관리 등 자산관리, 단체급식 등 유통, 조경 등 환경사업을 영위하며 지난해 매출 1조원 1600억원, 순이익 800억원대를 거둘 정도로 탄탄한 경영을 자랑한다. 박노빈(59) 사장은 보성고와 서울대 수학과를 마치고 74년 제일제당으로 입사,91년 삼성중공업을 거쳐 93년부터 에버랜드에 발을 담갔다. 사업 구상이후 무려 7년이 지난 79년 개관한 호텔신라는 초기 경기하락과 오일쇼크까지 겹쳐 적자에 허덕였다. 이병철 회장은 호암자전에서 “홍진기 회장의 총 지휘하에 손영희 사장이 경영을 맡고 장녀 인희가 고문이 돼 음식조리 등 안살림을 챙기고나서부터야 경영이 호전됐다.”고 회고했다. 경복고와 서울대 응용화학과를 졸업하고 줄곧 삼성물산에서 해외영업을 담당한 이만수(55) 사장이 2003년부터 경영을 맡고 있다.2001년 호텔신라로 들어와 지난해 상무보 승진에 이어 올초 상무로 승진한 이부진씨도 각별한 애정을 쏟고 있다. 삼성의 서비스 사업 가운데 가장 독특한 영역인 보안업체 에스원은 2002년부터 이우희(58) 사장이 맡고 있다. 삼성가의 고향인 경남 의령 출신으로 삼성내 거의 유일한 이건희 회장의 친척이다. 이 사장은 부산고와 부산대 법학과를 마치고 제일제당에 입사했다.94년부터 계속 비서실 인사팀장으로 일해왔다. 국내 최대 광고회사인 제일기획 배동만(61) 사장은 보성고와 고려대 축산학과를 졸업하고 73년 중앙일보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제일제당, 호텔신라를 거쳐 비서실 홍보팀장, 에스원 대표이사를 역임한 뒤 2001년 제일기획 사장으로 부임했다. 지난해부터 건국대 언론홍보대학원에서 겸임교수를 맡고 있다. ■ 초창기 사업동지 이병철·조홍제 세간에는 삼성 창업주인 고 이병철 회장과 효성 창업주인 고 조홍제 회장이 경남 진주의 지수보통학교를 다녔고 삼성을 공동 창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조 회장은 지수보통학교를 다니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1910년생인 이 회장은 서당을 다니다 1922년 3월 지수보통학교 3학년에 편입했다. 이 회장의 고향은 의령군 중곡면 중교리지만 진주시 지수면과는 인접해있다. 지수에는 이 회장의 둘째누이 분시씨가 결혼해 살고 있었다. 알려진 것과 달리 이 회장은 지수보통학교를 졸업한 것이 아니라 그해 9월 서울의 수송보통학교로 전학했고 25∼29년에는 중동학교를 다녔다. 1906년생으로 이 회장의 형인 병각씨와 동갑인 조 회장은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다 상경,1922년 중동학교 초등과 1,2,3학년 과정을 이수하고 이듬해 협성실업학교 초등과 4,5,6학년 과정을 마쳤다. 효성 관계자는 “언제부터인지 선대회장과 삼성 이병철 회장,LG창업주인 고 구인회 회장이 지수보통학교 동문으로 소개됐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고 말했다. 이 회장은 또 29년 도일,30년 와세다(早稻田)대 전문학부 정경과로 입학했고 조 회장은 27년 와세다대 공업전문학부에 입학했지만 29년 일본 호세이(法政)대 경제학부에 다시 입학한다. 둘의 동업관계에 대한 회고도 조금씩 다르다. 이 회장의 자서전인 호암자전은 48년 서울 종로2가에 삼성물산공사를 세울 당시 전무가 조홍제 회장, 상무가 김생기 전 영진약품 회장이었으며 설립자본금의 75%는 이 회장이, 나머지 25%는 조 회장, 김 회장, 이오석, 문철호, 김일옥씨가 분담했다고 밝혔다. 반면 조 회장의 회고록 ‘나의 회고’에는 48년 말 평소 안면이 있던 이 회장이 명륜동 조 회장의 집을 찾아와 사업얘기를 하던 차에 조 회장이 사업자금 800만원을 빌려준 것으로 나온다.2개월 뒤쯤 조 회장은 200만원을 더 투자해 1000만원을 채웠다. 이 회장이 이미 투자한 돈은 700만원이었다고 나와있다. 한국전쟁으로 잠시 헤어졌던 둘은 51년 이 회장이 당시 가족이 피난가 있던 마산에 들렀다가 조 회장을 만나 부산에 새로 차린 삼성물산에 와서 일하기를 권하면서 다시 이어졌다. 조 회장 역시 이와 비슷하게 기억했다. 호암자전은 또 조 회장과의 결별에 대한 별도 언급없이 63년 3월 2일 효성물산과 한국타이어, 한일나일론을 양도했다고만 명시했다. 나의 회고는 60년 3월초 일본 도쿄에서 골프를 치던 도중 이 회장이 결별 의사를 밝혔다고 소개한다. 이날 두 사람은 서로의 지분에 대해 언쟁을 가졌다. 둘의 재산분배는 62년 8월 이 회장의 자택에서 다시 논의된다. 조 회장은 “내 지분이 삼성 전체의 3분의 1쯤 되니 제일제당을 떼어달라.”고 제의하고 이 회장도 이를 받아들였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지분 문제는 쉽게 해결되지 않고 갈등이 점점 커지다 64년에야 결론이 난다. 조 회장은 자신이 분배받은 재산(한국타이어와 한일나일론의 삼성 지분 50%, 효성물산)은 3억원 정도로 자기 몫의 10분의 1도 안됐다고 밝혔다. 분가하면서의 불화는 한동안 재계 인사들에게 회자됐었다. 그러나 지난 84년 먼저 세상을 떠난 조 회장의 빈소를 이 회장이 찾아와 한참동안 머물며 ‘앙금’이 없었음을 내외에 알렸다.3년뒤인 87년 이 회장도 영면했다. ukelvin@seoul.co.kr ■ 삼성물산 역대 대표이사 1938년 이병철 회장 1960년 허정구 사장(LG창업주 구인회 회장의 사돈 허만정씨의 장남, 삼양통상 창업주) 1961년 박도언 사장 1963년 김선필 사장 1966년 안동선 사장 1967년 김진하 전무 1967년 박태암 사장 1967년 성상영 사장 1968년 정수창 사장(전 두산그룹 회장) 1970년 정상희 사장(이명희 신세계 회장 시아버지) 1971년 김정렬 사장 1974년 이은택 사장 1977년 손상모 사장(전 동부그룹 부회장) 1978년 송세창 사장(전 나산그룹 부회장) 1981년 경주현 사장(전 삼성종합화학 회장) 1984년 배상욱 사장 1985년 이필곤 사장 1993년 신세길 사장(현 서울반도체 회장) 1995년 이필곤 부회장(현 알티전자 회장) 1997년 현명관 부회장(현 전경련 부회장) 2000년 이상대 사장(현 건설부문) 2001년 배종렬 사장 2004년 정우택 사장(현 상사부문) ●특별취재반 산업부 홍성추 부장(부국장급·반장) 박건승·정기홍·류찬희·김성곤·최광숙차장 안미현·주현진·류길상·김경두기자
  • [옴부즈맨 칼럼] 기획 심층기사가 돋보인다/천원주 한국언론재단 언론사업팀 차장

    서울신문에 읽을거리가 넘쳐난다. 기사가 전반적으로 대형화 심층화됐다. 기획기사들이 늘었고 다양해졌으며 무엇보다 과감한 전진배치가 눈에 띈다. 새해 들어 연재하기 시작한 송두율칼럼이 지면에 무게감을 싣는다면 김홍신칼럼은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날로 악화되고 있는 신문 경영환경을 지면의 차별화로 뚫고 나가려는 의지가 엿보인다. 이 가운데서도 ‘클릭 이슈’는 다매체시대의 경쟁상품으로서 가치가 크다. 신문독자들의 눈길이 인터넷으로 옮겨가는 이유 중의 하나는 이 기획이 추구하는 것처럼 “독자들이 궁금해 하는 이야기의 이면을 추적”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경찰 플라스틱 총탄 사용’(1월11일자)은 논란의 여지가 많았음에도 언론에 비중 있게 다뤄지지 않은 이슈였다.‘외대 총학 공개-주체사상 문건’(1월18일자)도 보수 매체들이 매카시 바람으로 몰아갔던 사안이었다. 이들 이슈들에 확대경을 들이대고 진실과 경위를 추적한 노력은 평가받을 만하다. 이처럼 한 발 늦더라도 내용이 충실한 쪽이, 속보경쟁에 뛰어들어 부정확한 기사를 남발하거나 수박 겉핥기식 내용에 머무는 것보다는 경쟁에서 유리하다는 것을 ‘클릭 이슈’는 증명하고 있다.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는 파격과 규모의 방대함에서 놀랍다.9명의 대형 취재팀 구성, 두 개면 이상을 배려한 집중화,50회로 다뤄질 방대함은 올 한해 서울신문을 읽는 즐거움을 더해줄 것 같다. 삼성그룹의 가계를 다룬 1월10일자에는 창업자인 이병철 회장부터 3세까지의 가계를 정밀하게 탐구해서 소개했다. 그들의 면면을 상세하고 입체적으로 분석한 것은 기자들의 열정과 의지가 없었으면 힘든 작업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기획이 재벌들의 겉모습만 소개되고 있는 듯한 인상을 풍겨 아쉽다. 명문대 출신임을 강조하고 경영자적 자질, 또는 성공 비법 등 긍정적인 면들만 집중 부각되고 있는 점도 지적받을 부분이다. 삼성그룹의 성공 요인을 구조조정본부에서 찾은 1월17일자 ‘막강파워 구조조정본부’도 그렇다. 구조조정본부가 삼성이 글로벌 경쟁력을 갖추는 데 지대한 기여를 한 점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재벌체제의 사령탑’으로서 해체압력을 받는 이유도 동시에 거론했으면 기사의 균형과 함께 기획 취지가 더욱 살아났을 것이란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연재를 마친 ‘2005 문화코드’ 또한 현대 문화의 흐름과 담론을 읽게 해준 유익한 기획물이었다.1월1일자 ‘팩션’은 팩트와 픽션이 합쳐져서 시너지효과를 만드는 문화계 현상을 소개했는데 꼼꼼한 취재가 무척 인상 깊었다. 환경 문제가 삶의 문제를 넘어 보통사람들의 정치 문화 경제적 코드로 자리잡을 것이라는 1월11일자 ‘녹색진보’ 편도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삶의 과제를 던져주는 의미 있는 내용이었다. 여기서 문제점으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 현상적인 내용 소개에 치중한 나머지 문화현상의 본질을 조명하기에는 완성도에서 다소 미흡했다는 것이다. 신문의 경쟁력 확보 방안에 있어서 기획 심층기사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요즘 종합 일간지들이 기획취재팀 또는 탐사보도팀을 속속 신설하는 것도 이런 현상의 반영일 것이다. 별도의 전문팀을 꾸리든 그렇지 않든 간에 중요한 것은 편집국 내에 기획심층취재 문화가 공유되고 확산돼야 한다는 것이다. 요즘 서울신문의 지면에서는 이런 분위기를 읽을 수 있어서 좋다. 연초의 기획 바람이 계속 이어져 서울신문의 경쟁력으로 자리매김하길 기대한다. 천원주 한국언론재단 언론사업팀 차장
  • 한일협정차관 “정부 계산착오 3억弗 날렸다”

    한일협정차관 “정부 계산착오 3억弗 날렸다”

    지난 17일 공개된 한일협정 회담 자료와 관련된 파장이 가라앉지 않고 있는 가운데 당시 이병철 삼성회장이 우리 정부의 대일 청구권이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했다고 비판한 것으로 밝혀져 주목받고 있다. 이 회장의 고언은 상업차관을 6억달러로 늘릴 수 있었지만 우리 정부가 1억달러에 ‘만족’했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한일회담 당시의 정황은 이 회장이 1985년 펴낸 회고록 ‘호암자전’ 152∼157쪽에 자세히 소개돼 있다. 한국 재계를 대표하는 인물이긴 하지만 민간인이었던 이 회장이 정부간 협상에 ‘간여’하게 된 것은 김동조 당시 주일대사의 부탁 때문이었다. 이 회장은 한비공장 설립에 필요한 차관을 얻기 위해 일본 도쿄에 머물던 64년 당시 김동조 주일 대사가 찾아와 “무상 3억달러, 유상 2억달러, 상업차관 1억달러로 추진되고 있는 대일청구권을 무상 6억달러, 유상 2억달러, 상업 1억달러로 늘리면 어떻겠느냐.”고 상의해 와 “무상·유상 차관은 어렵겠지만 일본 수출입은행이 관장하는 상업차관은 증액 가능성이 있다.”고 조언했다. 이에 김 대사는 상업차관을 늘리는 쪽으로 힘을 써 달라고 했고 이 회장은 친분이 있던 우시바 신타로(牛場信彦) 외무성 외무심의관과 회동을 갖게 된다. 이 회장, 우시바 심의관, 김봉은 당시 한국은행 도쿄지점장, 김 대사가 골프를 마친 뒤 도쿄의 유명한 복요리집인 ‘후쿠겐(鰒源)’에서 식사를 하며 우시바 심의관에게 상업차관을 6억 달러로 늘려 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미온적이었던 우시바 심의관은 이 회장이 인도, 파키스탄에 제공된 일본의 상업차관액을 근거로 조목조목 따지자 증액 가능성을 내비쳤다. 하지만 당시 정치인들이나 정부 관료들은 상업차관의 중요성에 대해 인식이 부족했다. 이 회장은 이후 김 대사를 만났더니 “본국에서 상업차관 증액보다는 유상자금 2억달러의 이자를 인하하고 상환기한을 15년에서 25년으로 늘리는 편이 유리하다는 결론을 내려 상업차관 증액은 추진않기로 했다.”고 털어놔 크게 실망했다고 회고했다. 이 회장은 “유상차관의 이자를 낮출 때 생기는 수천만 달러의 작은 이익 때문에 국가 백년의 큰 이익을 놓친다. 외자를 도입해 공장을 세우고 빚을 갚아 나가면서 한국경제를 키워 가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 상업차관을 늘리거나 유상차관의 이자를 낮추는 방법중 하나를 택하라는 일본측의 답변을 얻어냈지만 결국 대일청구권은 유상차관의 이자를 낮추는 쪽으로 결정됐다. 호암자전은 상업차관이 1억달러였다고 밝혔지만 최근 공개된 한일회담 문서에는 ‘3억달러 이상’으로 조정된 것으로 명시돼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증액 가능성이 높았던 6억달러에 비해서는 3억달러가 모자라는 액수다. 이 회장은 “당시 6억달러는 오늘날(85년) 60억달러 이상의 가치가 있다. 만약 상업차관이 늘어났다면 한국경제의 성장은 한결 앞당겨졌을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 한일회담이 성사된 뒤 우시바 심의관을 만날 때마다 “상업차관을 6억달러로 늘려주지 않아 한국경제 발전이 늦어졌다.”며 타박을 주자 “일본 같으면 경제인 말에 귀를 기울였겠지만 한국은 모든 일이 관리들 말대로 되기 때문이 아니겠느냐.”며 오히려 ‘역공’을 당했다는 일화도 소개했다. 유상차관의 이자를 낮추는 것보다 상업차관 증액이 절실하다는 이 회장의 주장은 당시 한비공장 설립 자금 등이 중요했던 이 회장의 주관적인 판단일 수 있다. 하지만 한일협정 직후인 66년 당시 장기영 경제부총리가 1주일간이나 일본에 머물면서 5000만달러의 상업차관을 도입하려 했지만 실패하는 등 이후 외자도입에 애를 먹은 것에 비춰 보면 그 타당성을 찾을 수 있다. 한편 정일영 당시 외교부 차관은 24일 “실제 그런 논의가 있었고 당시 정부도 (상업차관을)3억달러까지 제안했었다.”면서 “국내에서도 ‘금리를 생각해야 한다.’는 주장과 ‘우리는 임금이 낮으니 벌어서 갚자.’는 주장이 워낙 팽팽했지만 지금의 눈으로 평가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고 밝혔다. 정 전 차관은 한일협상이 한창이던 63년 겨울, 보리밭에 뿌릴 비료 500만달러어치를 일본에서 외상으로 들여오기도 힘들 정도로 당시 ‘외자’가 절실했다는 점에는 동감을 표시했다. 이지운 류길상기자 ukelvin@seoul.co.kr
  •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삼성그룹 ③-삼성전자를 이끄는 CEO들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삼성그룹 ③-삼성전자를 이끄는 CEO들

    삼성전자의 지난 2004년 연간 매출은 57조 6324억원, 영업이익 12조 169억원, 순이익은 10조 7867억원으로(103억달러) 100억 달러를 돌파했다. 순수 제조업체로는 도요타에 이어 두번째다. 일본의 요미우리(讀賣)신문, 니혼게이자이(日本經濟)신문 등은 삼성전자의 실적을 경제면 머리기사와 사설 등으로 취급하며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삼성전자의 지난해 이익은 마쓰시타(松下)전기, 히타치(日立),NEC, 도시바(東芝), 후지쓰(富士通), 미쓰비시(三菱), 오키(沖)전기 등 일본 10대 메이커의 지난해 순이익 합계 5370억엔(약 5조 3700억원)의 2배에 달하는 것이었다. ●이병철 회장,37년전 “전자사업하겠다” 삼성전자의 이같은 고속 성장은 69년 전자업계의 후발주자로 출발할 당시 ‘중복투자’ 등의 비난에 휘말렸던 것에 비하면 격세지감이다. 고 이병철 회장은 68년 사돈인 고 구인회 LG회장(이 회장의 차녀 숙희씨가 구 회장의 삼남 자학씨의 부인)과 안양골프장에서 라운딩 도중 전자사업 진출 의사를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68년 12월30일 창립 발기인은 조우동 동방생명 사장, 손영기(이병철 회장 장남 맹희씨의 장인)안국화재 사장, 이병철 회장, 정상희(이병철 회장 5녀인 이명희 신세계 회장의 시아버지)씨, 이맹희(당시 삼성물산 부사장)씨, 김재명(삼성 창업공신으로 이후 동서식품을 설립, 당시 제일제당 사장)씨, 정수창(당시 삼성물산 사장)씨였다. ●윤종용 부회장,“초밥이든 휴대전화든 속도가 생명” 삼성전자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삼성전자의 주요 경영진들에 대한 관심도 점점 커지고 있다. 96년말부터 9년째 삼성전자를 이끌고 있는 윤종용(61) 부회장은 국내보다 해외에서 더 유명하다. 그동안 숱한 상을 받았던 윤 부회장은 올 초에도 비즈니스위크가 선정한 세계 최고경영자상을 받았다. 그것도 한번이 아니라 2004년에 이어 두번째 선정(Repeat Perfomer)으로 조 후지 도요타 사장, 스티브 잡스 애플컴퓨터 사장, 카를로스 곤 니산 회장 등이 윤 부회장과 함께 연속 선정됐다. 경북 영천 출신으로 경북사대부고와 서울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하고 66년 삼성에 입사했다. 윤 부회장은 상무시절인 80년대 중반 잠시 네덜란드 필립스 본사로 자리를 옮기기도 했지만 이건희 회장의 부름을 받고 88년 삼성으로 돌아왔다.VCR와 DVD를 더해 빅 히트를 친 ‘콤보’제품을 탄생시킨 주역이다. 윤 부회장은 오늘날 삼성전자를 대표하는 반도체나, 휴대전화 등을 한번도 맡아본 적 없고 가전부문에서 잔뼈가 굵었다. 스스로도 “나는 비전문가요 ‘사이비’”라고 털어놓은 적도 있다. 하지만 98년 7월 한달에만 무려 1700억원의 적자를 냈던 삼성전자를 오늘날 10조원대 이익을 내는 회사로 만든 데 윤 부회장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다. 윤 부회장은 컬러TV의 재고를 줄이기 위해 수없이 공장 가동을 중단시키던 삼성전자의 고질적인 문제를 과감히 혁파했다.97년말 8조 7000억원에 달하던 재고와 채권을 99년말 5조 2000억원으로 40%나 줄인 것이다.97년 국내 5만 8000명, 해외 2만 5000명이었던 인력은 각각 30%(1만 7400명),40%(1만명)나 회사를 떠나야 했다.120개가 넘는 사업과 제품을 매각하거나, 철수, 분사, 합작했다. 그래서 ‘진정한 혁신가’,‘기술 마법사’ 등 그에게 따라다니는 수많은 별명 가운데서도 ‘구조조정의 달인’을 빼놓을 수 없다. 지난해 삼성전자 주주총회때 회의 진행을 방해하는 참여연대 관계자들에게 “당신 주식 몇 주나 가졌어? 나도 주주야.”라며 호통을 칠 정도로 솔직하고 거침없는 화법으로 유명하다. 강한 경상도 사투리 억양까지 겹쳐 투박하게 들리지만 간결하다. 윤 부회장을 대표하는 경영 키워드는 ‘스피드’인데 그는 “초밥이든 휴대전화든 모든 부패하기 쉬운 것은 속도가 생명이다.”는 말로 핵심을 잘 설명한다. 스피드에 대한 윤 부회장의 애착은 “돌다리를 두드려 보고도 남이 건너간 뒤에야 건넌다.”던 이병철 회장과 달리 “돌다리가 아니라 흙다리라도 있으면 건넌다.”는 지론에서 잘 드러난다. 윤 부회장은 “우리는 지금 초일류로 가느냐, 추락하느냐의 중대한 기로에 서 있다.”며 직원들을 다그치는 등 기회 있을 때마다 ‘위기’를 강조한다.1993년 3월 이건희 회장의 제2창업 5주년 기념식사인 “21세기를 앞두고 남은 7년은 세계 초일류 기업으로 살아남느냐 주저앉고 말 것인가를 결정하는 결단의 순간이 될 것이다.”란 말에서 모티브를 빌려 왔다. 이 회장의 ‘선문답’을 누구보다 잘 이해한다는 윤 부회장다운 벤치마킹이다. 아들 태영(31)씨는 탤런트로 활동 중이다. ●황창규 사장, ‘황의 법칙’은 계속된다 경북 월성 출생으로 경북고와 서울대 전자공학과를 마친 이윤우(59) 부회장은 기흥공장장으로 일하던 80년대 중반 일본업체의 덤핑공세와 반도체 경기침체기에도 과감하게 256KD램과 1메가D램 양산 체제를 갖춰 삼성반도체의 신화를 이뤄냈다.68년 삼성전관(삼성SDI)으로 입사했다가 76년 삼성반도체 생산과장으로 반도체와 인연을 맺었다. 지난해 황창규 사장에게 반도체총괄사장 자리를 물려주고 신설된 대외협력담당 부회장으로 자리를 옮겼고 올해 인사에서는 삼성전자 기술총괄(CTO)을 맡았다. 삼성 기술의 총아인 삼성종합기술원도 관장한다. 최형인(56) 한양대 연극영화과 교수가 부인이다. 황창규(52) 반도체총괄 사장은 아직 50대 초반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벌써부터 삼성전자 대표 사장으로 거론된다. 황 사장이 총괄사장을 맡은 지난해 삼성반도체는 매출 18조 2200억원, 영업이익 7조 4800억원으로 41%라는 기록적인 영업이익률을 달성했다. 삼성전자 전체 이익의 62%가 반도체의 몫이었다. 16메가D램 개발팀장을 맡았고 세계최초로 256메가D램 개발에 성공하는 등 탁월한 연구개발 능력에 언변까지 화려하다. 엔지니어 출신 사장들이 커뮤니케이션에 약한 것과 대조된다. 딱딱한 주제인 반도체로 강연을 하면서도 5분 간격으로 수강생들의 웃음보를 터뜨릴 정도로 센스가 좋다. 삼성전자 사장 출신인 진대제 정보통신부 장관과 마찬가지로 핵심을 정리하는 브리핑 능력도 탁월한 것으로 알려졌다.2001년 당시 난드플래시의 강자였던 도시바가 전략적 제휴를 제의해 온 것에 대해 그룹의 의견이 반반으로 갈리자 이건희 회장에게 반대 논리를 펼쳐 결국 제휴를 무마시켰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난드플래시 세계 점유율 65%로 독보적인 1위를 달렸다. 부산 출생으로 부산고와 서울대 전기공학과를 졸업하고 매사추세츠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반도체의 집적도는 1년반 만에 2배로 증가한다.”는 인텔 창업자 고든 무어의 법칙을 깬 ‘황의 법칙’(반도체의 집적도는 1년에 2배씩 증가한다)으로도 유명하다. ●이기태 사장, 승부욕이 휴대전화 성공신화로 이기태(57) 정보통신총괄 사장은 세계에서 가장 감각적인 디자인을 자랑하는 삼성 휴대전화를 책임지는 사령관답지 않게 ‘불도저’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휴대전화를 벽에 집어 던져 삼성 제품의 튼튼함을 확인시키는 것으로 해외 바이어와의 협상을 시작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95년 3월 구미사업장에서 벌어진 무선전화, 팩시밀리 등 15만대의 ‘불량제품 화형식’을 지켜보면서 다져진 오기 덕분이다. 대전 출생으로 보문고와 인하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했다.73년 삼성전자 라디오과에 입사한 뒤 줄곧 제조쪽에서 일하다가 90년 화상무선기기사업부로 옮기면서 휴대전화와 인연을 맺었다. 승부욕 강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며 사표도 두어차례 냈지만 이건희 회장의 돈독한 신임을 받고 있다. 선비 같은 용모의 최지성(54) 디지털미디어총괄 사장은 강원도 삼척 태생으로 서울고와 서울대 무역학과를 거쳐 77년 삼성물산에 입사했다.85∼91년 반도체 구주법인장을 지냈는데 당시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던 삼성반도체를 ‘007가방’에 가득 싣고 험한 알프스 산맥을 자가 운전으로 넘어 다니며 애걸하다시피 영업을 했다고 한다. 삼성전자 사장단 가운데 유일하게 비서실에서 2차례(81∼85년,93∼94년) 근무해 시야가 넓은 편이다. 이상완(55) LCD총괄 사장은 서울고와 한양대 전자공학과를 마치고 76년 삼성전자에 입사했다. 반도체분야에서 생산기술·마케팅 등을 담당하다가 93년 걸음마를 뗀 LCD사업을 맡았다. 초창기 아직 세계적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던 삼성 LCD를 팔기 위해 도시바, 소니, 미쓰비시 등 일본업체들을 일일이 직접 만나는 등 개발부터 판매, 품질까지 책임진 ‘톱 세일즈’로 유명하다. 천안공장, 세계 최대 LCD단지인 충남 아산 탕정공장 준공 등으로 LCD사업을 삼성전자의 ‘수종사업’으로 키워 놓았다. 경쟁사 대표의 ‘배신자’라는 비난에 유난히 속상해 하는 등 자부심이 대단하다. 이상운(53) ㈜효성 사장이 친동생이다. 지난해 윤종용 부회장이 직접 맡았던 생활가전총괄 사장으로 최근 부임한 이현봉(56) 사장은 경남 함안출생으로 진주고와 서울대 경영학과를 마치고 76년 삼성전자에 입사했다. 이상현 전 삼성전자 중국본사 사장, 제진훈 제일모직 사장, 박양규 삼성네트웍스 사장의 진주고 1년 후배다. 인사부장, 인사팀장 등 주로 인사부문에서 일한 때문인지 중앙인사위원회 자문위원, 중앙노동위원회 사용자 위원 등 외부활동이 많았다.2001년부터 2년간 국내영업사업부장을 맡으며 까다롭기로 유명한 내수시장 공략에 공을 들여왔다. ●최도석 사장, ‘안방살림’ 꼼꼼히 챙겨 인사, 재무, 기획, 홍보 등 스태프 기능을 총괄하는 최도석(56) 경영총괄 사장(CFO)은 마산고와 연세대 경영학과를 마치고 75년 삼성 재무인력의 양성소인 제일모직 경리과로 입사했다. 이학수 부회장이 당시 관리본부장이었다.80년 삼성전자로 옮긴 뒤에도 줄곧 경리·관리·재경·경영지원 등 ‘안방살림’을 도맡아 왔다. 삼성 사장단 가운데 가장 술이 셀 정도로 화통한 스타일이지만 연 매출 70조원(연결기준)이 넘는 회사의 재무를 총괄하고 있는 만큼 일에 있어서는 누구보다도 꼼꼼한 편이다. 삼성은 전자-SDI-전기-코닝-코닝정밀유리-테크윈으로 이어지는 ‘전자소그룹’을 유지하고 있다. 전자소그룹의 지난해 본사 매출(코닝·코닝정밀유리는 2003년)은 무려 69조 8897억원, 순이익은 11조 9618억원원에 달했다. 전자를 제외하고 가장 중량감 있는 CEO는 삼성SDI 김순택(56) 사장이다. 72년 그룹 공채로 입사해 제일합섬 소속으로 회장 비서실에서 주로 일했다.92∼94년 삼성전관 기획관리본부장을 지낸 인연으로 96년말 비서실을 떠나 삼성전관에 둥지를 틀었다.2000년부터 5년째 삼성SDI 대표이사를 맡으며 사업구조를 브라운관에서 PDP,OLED,2차전지, 모바일LCD 등으로 바꿔놓았다. ●김순택 사장, 작년 해외출장 거리만 27만㎞ 무슨일이 있어도 신입사원 교육에는 빠지지 않는 데다 신입사원이 부서에 배치된 후에는 직접 이메일을 보내 안부를 묻는다.“기업의 가장 위대한 자산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매년 110일 이상을 현장에서 보낸다. 중국, 말레이시아, 독일, 헝가리, 멕시코, 브라질의 10개 공장을 방문한 지난해 해외 출장거리가 27만㎞에 달했다. 삼성전기 강호문(55) 사장은 경기 부천 출생으로 서울고와 서울대 전기공학과를 졸업했다. 이석재(57) 삼성코닝정밀유리 사장이 전기공학과 68학번 동기다. 황창규 사장은 72학번, 권오현 사장(시스템LSI사업부장)은 71학번이다. 첫 사회생활은 금성전선에서 출발했지만 곧바로 삼성전자로 옮겨와 반도체, 컴퓨터, 네트워크 등을 담당했다.2002년부터 삼성전기 사장을 맡으며 삼성전기의 부활을 꿈꾸고 있다. 큰 키(180㎝)에 미소가 인상적이다. 성균관대 예술학부장인 임학선(55) 교수가 부인이다. 브라운관 유리를 생산하는 삼성코닝은 충북 보은 출생으로 용산고와 성균관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송용로(60)사장이, 세계 최대 LCD유리기판 업체인 삼성코닝정밀유리는 이석재 사장이 맡고 있다. 디지털카메라와 항공기 엔진 등을 담당하는 삼성테크윈은 삼성물산·영상사업단·삼성생명 대표를 역임한 이중구(59) 사장이 책임지고 있다. 삼성그룹의 ‘IT축’인 삼성SDS 김인(56) 사장은 경남 창녕, 대구고와 고려대 경영학과 출신으로 그룹 비서실 인사팀장, 호텔신라 총지배인 등을 역임했다. 네트워크, 인터넷전화·국제전화 등을 영위하는 삼성네트워크 박양규(57) 사장은 삼성SDS, 삼성자동차의 설립 작업에 관여했다. ukelvin@seoul.co.kr ■ 삼성반도체 ‘30년 비화’ 삼성은 지난해 12월6일 반도체사업 30주년 기념식을 갖고 2010년까지 25조원을 투자해 누적매출 200조원, 신규 일자리 1만개를 창출키로 했다.12월6일은 이건희 회장이 1974년 사비를 들여 한국반도체 지분 50%를 인수한 날이다. 삼성전자뿐 아니라 한국경제를 먹여 살린다는 평을 받는 반도체지만 출발이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본지가 입수한 1992년 삼성그룹 비서실의 보고서 ‘삼성의 반도체 사업’에 따르면 사업 초기 삼성은 기술확보에 애를 먹다 해외업체에 지분을 양보하고서라도 기술을 도입하려 했었다. 이 보고서는 91년 4월 반도체 사업의 어제와 오늘, 문제점 등을 파악하라는 이건희 회장의 지시에 의해 작성됐다. 삼성반도체의 시련은 고 이병철 회장이 일본 NEC의 고바야시 사장을 초빙, 기술지원을 요청했지만 76년 방한한 NEC 엔지니어들이 기술이전을 기피하면서 시작됐다. 선진국과의 기술격차 등으로 반도체가 적자를 면치 못하자 이번에는 이건희(당시 부회장)회장이 미 페어차일드 본사를 수차례 직접 방문, 기술이전을 요청했고 마침내 승낙을 받아냈다. 페어차일드의 요구조건은 삼성반도체 지분의 30%를 내놓으라는 것. 이 회장은 지분을 양보하더라도 기술 이전이 필요하다고 판단했지만 협상을 위해 미국에 파견된 이모 상무 등 실무진은 “삼성의 기술수준으로는 신기술(당시 페어차일드는 64KD램 개발에 성공)에 도전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려 기술도입이 좌절됐다.79년 더 이상 반도체사업을 방치할 수 없다고 판단한 이병철 회장은 당시 가전·TV생산담당이었던 김광호(이후 삼성전자 회장을 역임)이사를 반도체로 보내 사업정상화 특명을 내렸다. 당시 강진구 반도체사장은 직원들에게 김 이사를 소개하면서 “만약 김 이사로도 삼성반도체를 살리지 못한다면 더 이상 반도체사업을 계속할 수 없다.”며 배수진을 쳤다. 강진구 회장은 삼성전자 사장(73∼82년), 삼성전자 회장(88∼92년,93∼98년)은 물론 한국반도체 사장(75∼79년), 삼성반도체통신 사장(81∼88년), 삼성GTE통신 사장(77∼80년) 등을 역임하며 오늘날 삼성전자가 있기까지 많은 공헌을 했다. 김 이사는 대방동과 부천으로 나눠졌던 공장을 부천으로 통합하고 80년말 삼성반도체를 삼성전자에 인수합병시키는 한편 홍콩 시계칩 시장을 집중공략, 전세계 시계칩 시장의 50%를 차지하던 홍콩 시장 점유율을 60%로 끌어 올리며 흑자회사로 변신시켰다. 82년 2월8일 유명한 ‘도쿄선언’으로 반도체 사업 본격화를 선언한 이병철 회장은 부천공장을 대체할 대규모 반도체공장 부지를 물색했는데 후보지로 수원, 신갈저수지 부근, 관악골프장 부근, 판교 부근, 기흥이 선정됐다. 국내외 지질·수질 전문가들과 이 회장이 직접 헬기를 타고 조사한 끝에 12월18일 기흥지역이 최종 낙점됐다. 하지만 당시 기흥은 절대농지에다 산림보존지역으로 공장 설립이 불가능했다. 이에 이 회장과 내무부장관을 역임했던 최치환 반도체부문 사장 등이 정부를 끈질기게 설득,1차로 10만평에 대한 허가를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수도권 공장 억제 정책과 땅값 문제 등 삼성전자 반도체공장의 고민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특별취재반 산업부 홍성추 부장(부국장급·반장) 박건승·정기홍·류찬희·김성곤·최광숙차장 안미현·주현진·류길상·김경두기자
  •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삼성그룹 ②-막강 파워 구조조정본부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삼성그룹 ②-막강 파워 구조조정본부

    지난해 삼성은 ‘건국 이래 최대 불황’이라는 어려움을 뚫고 매출액 135조원, 세전 이익 19조원을 달성하는 놀라운 저력을 보였다. 경영혁신 신경영을 선언하기 전인 1992년과 비교해 볼 때 매출은 4배, 이익은 80배로 뛰었다.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의 기술경영 자매지인 ‘닛케이(日經) 비즈테크’는 지난해 10월호에 ‘삼성, 역전의 방정식’이란 제목으로 48쪽에 걸친 특집을 게재하면서 이건희 회장의 리더십과 구조조정본부의 전략·보좌 시스템을 격찬했다.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들이 재벌 체제의 사령탑으로 지목하며 해체 압력을 가하는 구조본이 해외에서는 오히려 한국 대기업의 글로벌 경쟁력으로 평가받은 것이다. ●재벌 개혁의 상징, 삼성 신화의 원동력 지난 98년 그룹 비서실에서 구조조정본부로 이름을 바꾼 삼성 구조본은 법무실, 재무팀, 경영진단팀, 기획팀, 인사팀, 홍보팀, 비서팀 등 7개 실·팀으로 구성돼 있다. 규모는 생각보다 크지 않아 각 계열사에서 파견나온 100여명이 일하고 있다. 구조본은 그 자체로서 별도 법인이 아니기 때문에 직원들이 구조본 명함을 쓰지만 실제 소속은 삼성전자, 삼성생명, 제일기획 등으로 나뉘어 있다. 구조본이 재벌체제를 상징하며 폐지 압력을 받고 있지만 삼성은 구조본 체제를 유지하면서 IMF 이후 사상 최대 실적을 경신, 세계적인 기업으로 거듭났다. 구조본에서 일하다가 계열사로 옮긴 임원들은 하나같이 “구조본이 계열사 전반을 넓고 높은 시각에서 조명해 주지 않으면 계열사간 중복투자, 과당경쟁 등 ‘누수’가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고 입을 모은다. 지난해 삼성을 끈질기에 괴롭힌 삼성에버랜드의 금융지주회사 문제도 구조본에서 해법을 내놓았다. 삼성에버랜드가 보유 중인 삼성생명 지분 일부(6%)를 제일은행에 5년간 신탁하고 일정기간 의결권을 행사하지 않기로 결정한 것.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들은 삼성의 결정이 공정거래법 15조 즉, 누구든지 지주회사의 행위제한의 적용을 면탈하려는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는 규정에 어긋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공정위는 삼성의 ‘묘안’이 현행법에 어떻게 위반되는지 정확한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 ●신경영 전도사 이학수 부회장 구조본의 현재 수장은 삼성의 ‘2인자’ 이학수(58) 부회장이다.97년 비서실장을 맡은 이후 8년째 구조본을 이끌고 있는 이 본부장은 이건희 회장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바로 뒤에서 수행한다. 이 회장이 서울 태평로 삼성본관보다 한남동(최근 이태원으로 이사) 자택에서 주로 업무를 보는 스타일이기 때문에 사실상 이 본부장이 그룹 업무를 책임지고 있다. 이 본부장은 이 회장의 의중과 경영철학을 누구보다 잘 꿰뚫어 낸다. 이 회장의 두터운 신임과 계열사 CEO들의 폭 넓은 지지를 받고 있다. 이 본부장은 2003년에 이어 지난해에도 연말에 출입기자들과 오찬을 함께 하며 삼성에 대한 기자들의 궁금증을 어느 정도 풀어줬다. 반응은 “(이 본부장이) 생각보다 소탈하고 부드러워 보인다.”는 의견이 압도적이었다. 그만큼 외부에 비친 그의 모습이 카리스마 그 자체였던 것이다. 경남 밀양생으로 부산상고, 고려대 상대를 졸업한 이 본부장은 노무현 대통령의 고교 1년 선배라는 이유로 현 정부 출범 이후 줄곧 주목을 받았다. 노 대통령 탄핵심판의 주심을 맡았던 주선회 재판관도 고향이 비슷하고 고대 동창이어서 가까운 편이다. 비서실에서 같이 일하다가 열린우리당 재정위원장을 거쳐 지난해 대한주택공사 사장으로 임명된 한행수씨는 부산상고 2년 선배다. 윤증현 금융감독위원장은 중학교(마산중) 동창이다. 이 본부장은 “취임 이후 삼성이 승승장구하고 있다.”는 평가에 “내가 운이 좋았을 뿐”이라며 겸손해 하지만 삼성자동차 사태와 외환위기로 그룹 전체가 위기에 빠진 상황에서 강력한 구조조정과 개혁으로 헤쳐나온 일등공신으로 평가받는다. 94∼96년 안국화재에서 막 이름을 바꾼 삼성화재 대표이사를 맡으며 경영 능력도 검증받았다.94년 삼성과 제일제당(CJ)의 관계가 불편할 때 제일제당 대표이사로 파견된 사람도 이 본부장이었다. 이건희 회장이 그만큼 믿고 맡길 수 있었던 것이다. ●오른팔의 오른팔 김인주 사장 지난해 부활된 구조본 차장직에 오른 김인주(47) 사장은 이 본부장, 삼성전자 CFO인 최도석 사장과 함께 ‘제일모직 경리팀 사단’으로 불린다. 경남 김해생으로 마산고를 졸업했다. 서울대와 한국과학기술원에서 산업공학을 전공한 김 사장은 80년 제일모직에 입사한 뒤 90년부터 비서실(현 구조본)에서 일하며 줄곧 재무를 담당했다. 김 사장은 97년 이사,98년 상무,99년 전무,2001년 부사장,2004년 사장으로 초고속 승진했다. 이 본부장의 마산중 후배인 김 사장은 유력한 차기 본부장 후보로 거론된다. 재무팀은 IMF때 전 계열사를 샅샅이 뒤져 각종 부실과 문제점 등을 찾아내고 강력한 구조조정을 지휘했다. 당시 김 사장은 자신의 키보다 더 높은 분량의 보고서를 제출했고, 그때 수립했던 전략이 오늘날 삼성의 밑거름이 됐다.CJ, 신세계, 한솔 등을 분가시킬 때마다 대주주와 계열사간에 얽히고 설킨 지분관계를 말끔히 정리한 것도 재무팀의 공이다. 삼성의 지배구조를 지탱하는 것도 재무팀의 역할이다. 재무팀이 ‘빛나는’ 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김 사장은 2003년 말 대선자금 수사때 고역을 치러야 했다. 당시 검찰 수사에서 구조본 재무팀이 맡아야 하는 ‘악역’이 공개됐다. 정치자금 마련부터 전달 수단과 방법까지 재무팀이 담당한 것이다. 궂은 일은 도맡아야 하는 만큼 ‘보상’도 철저하다. 삼성은 지난해 시민단체 등의 거센 비난을 받았던 이 본부장과 김 사장을 오히려 한 직급씩 승진시켰고 대선자금 제공에 연루됐던 윤석호 전무(대외협력담당)도 삼성SDS 부사장으로 영전시켰다. ●구조본의 ‘7인방’ 김 사장의 뒤를 이어 재무팀을 맡고 있는 최광해(49) 부사장은 부산 출생으로 경남고와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했다.93년부터 줄곧 재무팀에서 일했으며 삼성의 지주회사격인 삼성에버랜드의 감사를 맡기도 했다. 이종왕(56) 법무실장(사장)은 경북 경산생으로 경북고와 서울대법대를 졸업했다. 사시 17회로 노무현 대통령과 동기다.99년 대검 수사기획관을 끝으로 검찰을 떠나 국내 최대 로펌인 ‘김&장’의 대표변호사를 지내다가 지난해 삼성으로 자리를 옮겼다. 장충기(51) 기획팀장(부사장)은 부산고와 서울대 무역학과(현 국제경제학과) 72학번이다. 그는 94년 기획팀으로 오기 전에는 삼성물산에서 영업과 전략기획팀장을 맡았다.‘불도저와 돌다리’라는 독특한 별명이 붙어 있는데 소신껏 밀어붙이면서도 섬세하게 고려하기 때문에 주변에서 붙여준 것이다. 이런 스타일이 기획과 대외 관계를 총괄하는 기획팀장에 적격이라는 평이다. 노인식(54) 인사팀장(부사장)은 서울 중앙고와 성균관대 법대를 졸업하고 삼성전자 인사팀에서 일하다가 97년 구조본으로 자리를 옮겼다. 유연하고 합리적인 성품으로 인사팀장의 전형이라는 평을 듣고 있다. 이건희 회장이 5∼10년후 뭘 먹고 살지에 대한 해답으로 제시한 우수인재 확보와 글로벌 인재전략을 뒷받침하고 있다. 그룹 계열사의 감사를 총괄하는 최주현(51) 경영진단팀장(부사장)은 경북고와 서울대 경영학과를 졸업했다. 삼성전자 미주 본사에서 일하다가 99년 구조본으로 이동한 뒤 지난해부터 경영진단팀장을 맡고 있다. 작은 구멍이 조직을 망가뜨리기 전에 이를 집어내는 ‘사전 진단형’ 감사에 주력하고 있다. 실제 지난해 삼성의 모 해외조직의 잘못을 감사에서 적발해 현재 대대적인 개혁을 진행 중이다. 배재고,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출신인 이순동(57) 홍보팀장(부사장)은 홍보를 경영의 한 축으로 끌어 올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삼성전자 홍보팀을 창설, 책임자로 시작해 20여년간 일하다가 99년부터 홍보팀장을 맡고 있는 이 부사장은 삼성이 최고의 기업 이미지와 글로벌 브랜드가 되는 데 기여했다. 전경련 경제홍보협의회장과 한국PR협회장을 맡으며 ‘반기업 정서 해소’에도 앞장서고 있다. 이건희 회장과 늘 함께하는 김준(47) 비서팀장(전무)은 고려대 경제학과를 마치고 삼성생명에 입사한 뒤 94년 비서실 부장으로 비서 업무를 시작했다.2001년부터 비서팀장을 맡아 1년에 수개월을 해외에서 보내는 이 회장을 수행하느라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지만 언제나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업무에만 충실하다는 평이다. 이같은 ‘노고’를 인정받아 지난 12일 인사에서 전무로 승진했다. ●삼성의 인재 양성소 계열사 전반을 아우르는 구조본의 업무 성격 때문에 구조본 출신은 ‘엔지니어’ 출신과 함께 삼성 CEO의 양대축을 형성하고 있다. 삼성SDI 김순택 사장이 대표적인 케이스다. 경북대 경제학과 출신인 김 사장은 72년 제일합섬으로 입사했지만 78년 비서실 감사팀,91년 비서팀장 등 구조본에서만 17년을 일했다. 구조본 경영진단팀장을 6년간 맡은 박근희 중국본사 사장은 계열사 사정을 훤히 꿰뚫고 있다. 지난해 구조본에서 삼성캐피탈 사장으로 옮겨 삼성카드와의 합병, 증자 등을 마무리지은 뒤 ‘문제’가 발생한 중국본사로 옮겼다. 박 사장은 청주대 상학과 출신으로 ‘실력을 따지지 학력은 따지지 않는다.’는 삼성식 인사의 상징이다. 김징완 삼성중공업 사장도 경영진단팀장을 2년간 맡았고 이우희 에스원 사장은 기획홍보팀장·인사팀장을, 김인 SDS 사장은 인사팀장, 유석렬 삼성카드 사장은 재무팀장을 역임했다. 일본본사 정준명 사장과 이창렬 사장은 둘다 비서팀장 출신이다. 중국본사도 지난해까지 비서실 출신인 이형도 회장-이상현 사장체제로 움직였다. 최근 사장으로 승진한 삼성전자 북미총괄 오동진 사장도 비서실 감사팀장·경영분석팀장을 지냈다. 최근 세계 규모의 광고홍보대행사로 면모를 바꾼 제일기획의 배동만 사장도 전략홍보팀장 출신이다. 최지성 삼성전자 디지털미디어총괄 사장, 이석재 삼성코닝정밀유리 사장, 고홍식 삼성토탈 사장, 안복현 삼성BP화학 사장, 김상기 삼성벤처투자 사장, 한용외 삼성문화재단 사장 등도 비서실을 거쳐간 CEO다. ●한국 재계를 움직이는 구조본 ‘동문’ 구조본 출신으로 외부에서 맹활약하는 이들도 숱하게 많다. 황영기 우리금융 회장은 1989년부터 94년까지 비서실 재무팀 이사로 일했다. 삼성전자, 삼성생명을 거쳐 삼성증권 사장으로 일하다가 우리금융 회장으로 뽑혔다. 김신배 SK텔레콤 사장도 78년 삼성에 입사해 90년 비서실 국제팀 차장을 지내다가 95년 SK텔레콤의 전신인 한국이동통신으로 옮겨갔다. 김 사장은 김인주 사장의 서울대 산업공학과 2년 선배로 윤창번 하나로텔레콤 사장과 동기동창(74학번)으로 ‘산공과 전성시대’를 열고 있다. 현명관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은 93∼96년 비서실장을 역임했다. 제주 출신인 그는 공무원에서 삼성인으로 변신, 비서실장까지 지낸 특이한 이력을 갖고 있다. 디지털방송 관련업체인 알티캐스트 지승림 사장은 비서실 기획팀장(부사장)까지 승진했다가 2000년 그만뒀다. 알티캐스트는 계열사인 알티전자 회장에 삼성물산 회장 출신의 이필곤씨를 영입하면서 삼성과의 끈끈한 연을 이어가고 있다. 삼성은 구조본을 중심체로 움직이지만 보다 상위의 의사결정은 ‘구조조정위원회’에서 이뤄진다. 삼성은 지난해 구조위의 구성원을 6명에서 11명으로 늘렸다. 구조본에서는 위원장인 이학수 본부장과 김인주 사장이, 삼성전자에서는 윤종용 부회장, 이윤우 부회장, 최도석 사장, 황창규 사장이 참여한다. 금융계열사 대표로 배정충 삼성생명 사장, 이수창 삼성화재 사장, 유석렬 삼성카드 사장이, 이밖에 이상대 삼성물산 사장, 김징완 삼성중공업 사장도 계열을 대표해 참석한다. 구조위는 2주에 한번꼴로 회의를 개최, 신규 사업 진출과 투자, 사업조정, 구조조정 전략 등을 논의한다. 구조위에서 논의된 내용은 이건희 회장의 최종 승인을 받고 실행에 들어간다. ukelvin@seoul.co.kr ■ 구조본의 역사 ‘재계의 청와대’로 불리는 삼성 구조조정본부는 1959년 5월 고 이병철 회장의 지시로 탄생했다. 이 전 회장은 삼성의 규모가 날로 커져 계열사의 일들을 직접 챙기기 힘들어지자 관리조직을 분산한다는 차원에서 비서실을 만들었다. 처음엔 삼성물산안의 과조직으로 출발, 직원은 20여명에 불과했다. 초대 실장은 당시 제일모직 총무과장이던 36세의 이서구씨로 2년 6개월간 비서실을 맡으면서 조직의 기반을 닦았다. 이씨는 제일제당, 중앙개발 대표이사를 거쳐 삼성문화재단 이사를 끝으로 삼성을 떠났다. 대림콘크리트 사장, 고문을 지냈지만 지금은 은퇴했다. 비서실이 막강한 파워를 갖기 시작한 것은 70년대 들어서다. 삼성의 조직 규모가 급팽창하면서 비서실의 기능은 크게 확대됐다. 지난 72년 당시 비서실 구성을 보면 송세창 실장(전 나산 부회장), 이두석 실차장(현 성우회장), 이수빈 재무팀장(현 삼성사회봉사단 회장), 심명기 기획팀장(전 인천무역상사협의회장), 손병두 조사팀장(전 전경련 부회장), 양인모 비서팀장(삼성엔지니어링 부회장), 이용석 감사팀장(전 삼성화재 전무), 한의현 마케팅팀장(전 유양정보통신 사장) 등이다. 계열사를 벌벌 떨게 만드는 감사팀은 67년 1월에 발족됐다. 당시 비서실 근무자의 전언에 따르면 이병철 회장이 어느 날 비서실 직원을 다 불러 놓고 문을 걸어 잠근 뒤 “계열사의 경영 진단과 능률 감사를 위해 감사실을 만든다.”고 전격 발표했다. 78년부터 90년까지 비서실장을 맡은 소병해씨는 강력한 추진력과 엄격한 관리로 비서실의 기능을 크게 강화시켰다. 소 실장 시절 비서실은 15개팀에 250여명의 인력을 거느린 대조직으로 성장했다. 기능도 인사 위주에서 감사, 기획, 재무, 국제금융, 경영관리, 정보시스템, 홍보 등으로 다양해졌다. 소 실장은 삼성생명·삼성카드 부회장을 거쳐 삼성화재 비상임 고문으로 있다. 삼성의 은퇴 임원 가운데 최고 대우를 받고 있으며 최근 건강이 많이 나빠진 것으로 알려졌다. 비서실은 자율 경영을 강조하는 이건희 회장이 회장으로 취임한 이후 기능과 역할이 점차 축소됐다. 이 회장의 취임은 87년 11월이다. 91년부터 93년까지 비서실장을 지낸 이수빈 회장은 이 회장의 서울사대부고 4년 선배로, 이 회장이 그룹 경영을 속속들이 이해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이 회장의 신경영 선포와 맞물려 93년 6월부터 비서실장을 맡은 현명관 현 전경련 부회장은 삼성 공채 출신이 아니어서 ‘개혁’ 작업에 적임이었다는 평가다. 현 부회장은 “비서실장으로 있으면서 회장을 법정에 세운 게 가장 가슴 아팠다.”고 회고했다. 90년 이후 점차 조직이 축소된 비서실은 98년 IMF 체제에 돌입하자 계열사 사업 및 인력구조조정이 핵심현안으로 등장하면서 발전적으로 해체되고 지금의 구조조정본부로 재탄생하게 됐다. 하지만 삼성의 사장단 50여명 가운데 20여명이 구조본 경력을 갖고 있고, 계열사 경영진에 구조본 출신이 중용되는 전통이 계속 이어져 내려온다. ●특별취재반 산업부 홍성추 부장(부국장급·반장) 박건승·정기홍·류찬희·김성곤·최광숙차장 안미현·주현진·류길상·김경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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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업자원부 △산업정책국장 李東根 ■ 법무부 ◇4급 전보△서울보호관찰소 남부지소장 金種鎬△수원보호관찰소장 李晳煥△춘천〃 盧淸漢△대구〃 林鍾柱△광주〃 李祥泳△창원〃 韓相文△전주〃 金仁相△법무부 관찰과 朴守煥△수원보호관찰소 관찰과장 姜鎬成△대구〃 〃 金喆浩 (출입국관리)◇서기관 승진△법무부 입국심사과 金鍾昊△부산출입국관리사무소 관리과장 朴圭凡◇서기관 전보△법무부 입국심사과장 禹基鵬△〃 체류심사과장 李春馥△서울출입국관리사무소 심사국장 韓榮春△김해출입국관리사무소장 黃義昭△수원〃 尹用仁△대구〃 朴民錫△광주〃 孫宗河△마산〃 孫弘基△화성외국인보호소장 李石化△청주〃 李福男△세종연구소 교육파견 金昌石 ■ 보건복지부 ◇4급 전보·업무지원△공보관실 박정배△기획예산담당관실 전병왕△의료급여과 정흥수△장애인정책과 은성호△한방산업단지조성팀 최종균 ■ 국회사무처 ◇이사관 승진 △통일외교통상위 전문위원 金聲遠 △환경노동위 〃 李東根 ◇부이사관 승진 △산업자원위 입법조사관 權奇源 △국제국 의전과장 金匡默 △여성위 입법조사관 洪承邱 △국회예산정책처 파견 金要煥 林翼相 ◇서기관 승진△산업자원위 입법조사관 朴喆浩 △법제사법위 〃 許秉兆 ◇이사관 전보△정무위 전문위원 鞠慶福 ◇부이사관 전보△법제실 법제심의관 林中豪 △정보위 입법심의관 孫忠悳 △관리국 시설심의관 鄭然重 △연수국 교수 金瑃淳 △의사국 기록심의관 吳仁燮 △행정자치위 입법조사관 金洙興 △환경노동위 〃 尹鎭勳 ◇서기관 전보△총무과장 孫石昌 △감사관실 감사담당관 李仁燮 △의사국 의사과장 田尙洙 △관리국 회계과장 李載錄 △연수국 의정연수과장 全永福 △국회운영위 입법조사관 李再雨 △법제사법위 〃 李貞華 △통일외교통상위 〃 朴昌賢 △행정자치위 〃 朴正鎬 △교육위 〃 金鉉植 △과학기술정보통신위 〃 鄭昌謨 △보건복지위 〃 李成基 △건설교통위 〃 朴出海 △정보위 〃 姜大出 △예산결산특위 〃 任錫淳 △법제실 경제법제과 법제관 鄭雲慶 △의사국 의사과 李定垠 △농림해양수산위 입법조사관 權寧振 金學培 △보건복지위 〃 崔容熏 △예산결산특위 〃 申恒溱 △국제국 국제기구과 崔善瑩 △연수국 교육훈련과 李福雨 △총무과 吳明鎬 △국회기록보존소 張世勳 ■ 병무청 ◇과장급 전보△서울지방병무청 징병관 金泰化△병무민원상담소장 權永鎬△충원국 징집과장 崔鎭龜△인천ㆍ경기지방병무청 징병관 朴昌林△국방대학교 교육파견 鄭利植 ■ 기상청 ◇부이사관 전보△중앙공무원교육원 파견 洪允◇부이사관 승진△기획국 기획과장 崔致英◇서기관 전보△기획국 국제협력과장 鄭然昻△예보국 예보관 徐愛淑 朴寬營△대전지방기상청 인천기상대장 丁甲泰△기후국 장비담당관 金鎭國△광주지방기상청 기후정보과장 李美子△총무과 金琪洛◇서기관 승진△제주지방기상청 예보과장 金東浩 ■ 농촌진흥청 (농업과학기술원)△환경생태과장 李定澤 △농업해충과장 韓萬鍾 △유용곤충과장 黃錫祚 △농약평가과장 任建宰 (충청북도농업기술원)△시험연구부장 朴成圭 △기술보급부장 韓炳學 ■ 한국정보보호진흥원 ◇단장 △정책기획단 백의선△인프라보호단 이재일△정보보호기술단 조병진△보안성평가센터 노병규△개인정보보호단 직무대행 이창범 ◇국방대학원 파견 △책임연구원 박광진 ◇팀장 △업무혁신팀 류찬호△정책개발팀 조규민△기반기획팀 이강신△보안관리팀 장상수△기술기획팀 원유재△암호응용팀 전길수△심의지원팀 강달천△지원조사팀 정연수△평가기획팀 이완석△평가2팀 허창열△대응협력팀 이시흥△총무팀 김영대 ■ 수협중앙회 ◇승진(부장)△자재사업부 金貴枰 (팀장)△경영 鄭知烈△가맹사업 董松鶴△특판 梁容喆△바다마트상계점 金丙喆△바다마트신내점 崔鉉滿◇전보(부장급)△유통사업부 韓在淳△판매사업부 崔鍾根△노량진수산(주)파견 金泳燮(팀장급)△운영 張順鍾△노량진시장현대화 李重燦△공판 金侍鍾△수매관리 安在文△상품개발 徐京源△급식사업 金龍原△강서공판장 洪義喆△가락동공판장 黃泰洙△구리공판장 李守鎔△노량진수산(주)파견 李根熙△강서공판장활성화TF팀파견 智東勳 金鉉佑△춘천군납사업소 韓智敎△의정부군납사업소 李鍾浩△기업마케팅팀 金潤夏 崔上基 姜泰國△바다마트잠실점 朴龍極△바다마트종암점 金永培△바다마트서초점 姜赫中△바다마트원주점 金容伯△바다마트김포점 朴炯仲△바다마트동대문점 漁泳一△바다마트서현점 金珍旭 ■ 이데일리 △편집국장 孫東榮△보도제작국장 金鎭奭△기획관리본부장 金憲秀 ■ 동국대 ◇서울캠퍼스△부총장 金丙植△정각원장 李英浩△기획인사처장 劉錫天△대외협력처장 겸 건학100주년기념사업회 본부장 李觀濟△기획인사처 기획심사팀장 金潤吉△〃 예산〃 朴君緖△대외협력처 기획사업〃 孫在英△건학100주년기념사업회 기념사업〃 金煐鎭△제3캠퍼스건립추진단 기획〃 겸 건설〃 朴東壽△학생처 학생복지실장 李聖鎭△총무처 시설관리팀장 朴正勳△〃 재무회계〃 朴煥午△언론정보대학원 교학부장 吳光鎭△산학협력단 행정지원부장 金盈忍 ◇경주캠퍼스△총무처장 徐丙洙△기획처 대외협력팀장 李建培△교무처 학사지원실장 黃周煥△〃 학생선발〃 金英洙 ◇의료원△의료원장 李錫玄△분당한방병원장 金慶鎬△강남한방병원장 李源哲 ■ LG카드 (승진)△전무 허주병 신종균△상무 윤병묵△이사대우 류인창 (보직 변경)◇본부장급△금융영업본부장 정주용△상품개발실장 지광수△할부리스영업본부장 임창진△영남영업〃 안상훈△영남채권〃 권오흠△직할영업〃 이주성△서울영업〃 이봉섭◇지점장 및 부서장△울산지점장 문상인△천안〃 김형배△서울영업지원팀장 이병철△서울채권지원〃 문병선△강릉채권지점장 임명빈△포항채권〃 이재완△전주채권〃 유구종△리스크관리팀장 이현상△경영정보〃 이승우△신용기획〃 송주영△할부신용관리〃 오태준△강남지점장 서원석△동대문〃 이원걸△상계〃 이재용△강릉〃 곽재근△대구〃 노호민△수원〃 성경훈△창원〃 이상관△영등포채권〃 이병술△신촌채권〃 전병찬△상계채권〃 이재근△분당채권〃 김태희△의정부채권〃 조세준△인천채권〃 김승래△부천채권〃 임주혁△수원채권〃 황민철△대전채권〃 도승찬△청주채권〃 이정현△서대구채권〃 김영호△부산채권〃 정광호△동부산채권〃 제신욱△울산채권〃 유성문△창원채권〃 정재동△중부채권지원팀장 박경래△서울통합채권〃 남효준△중부통합채권〃 강원규△준법감시〃 박지환△경영관리〃 문동권△금융〃 신중완△영업기획〃 성충기△시장개발〃 이철희△법인영업〃 배연태△할부영업〃 허병하△오토리스〃 남선모△고객서비스〃 김정훈△인사〃 이찬홍△노사협력〃 김용훈△총무〃 이병호
  •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①삼성그룹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①삼성그룹

    어느 시대에나 나라와 집단을 움직이는 인맥은 있다. 과거 권위주의적인 시절에는 권력 중심의 인맥이 조명을 받았지만, 요즘은 자본을 토대로 형성된 인맥집단이 눈길을 모은다. 지난해 말 단행된 주요 그룹 인사에서 창업자의 2,3세들이 사장이나 임원으로 속속 승진하면서 재계의 ‘가계도’가 주목받고 있는 것도 무관치 않다. 사실 재계의 인맥과 가계에 대한 관심은 그다지 우호적이지 않다. 빈부격차가 커지면서 계급간 갈등이 악화되는 현실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리 사회가 발전해 왔듯이 90년대 이후 재벌가문의 인맥도는 정략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는 게 중론이다. 한국의 주요 그룹들이 창업에서부터 2세,3세로 내려오면서 어떻게 가업을 승계해 왔고, 총수와 더불어 대그룹을 일군 주역들이 누구인지를 주 1회씩 연중 기획으로 조명해 본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후원자인 메디치가, 근세유럽 최고의 명문가로 알려진 합스부르크왕가, 미국의 케네디·부시가 등 서양에는 그 사회가 인정해 주는 명문가가 있다. 한국에도 수백년 내력의 명문가문이 존재했지만 지금에 와서는 존재가 미약하다. 대신 일제치하와 근대화 과정을 거치며 자본을 축적한 ‘재계 명문가’들이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권력이 최우선이었던 시대가 지나고 금력의 위력이 커질수록 재계 명문가의 위상도 커지고 있다. 재계 명문가를 일군 창업주들은 대부분 좋은 집안 출신도 아니고 고등교육을 받지도 못했지만 대를 내려오면서 후손들은 명실상부한 상류층의 자격을 갖추게 된다. 한국의 몇 안되는 ‘상류층 클럽’의 최정점에 재벌 2,3세들이 서 있고 또 그 정상에는 삼성가의 사람들이 자리하고 있다는 데 의문을 제기할 사람은 많지 않다. 고 호암 이병철 회장이 일군 ‘삼성가’는 오늘날 대한민국 재계의 대표 가문이라는 칭호를 받고 있다. 이 회장은 1938년 29세때 자본금 3만원과 은행자금 20만원으로 ‘삼성상회’를 설립했다. 만주에 청과물과 건어물을 수출하고 제분업을 병행하면서 1년 만에 두배의 이익을 거뒀고 이를 토대로 연산 7000석 규모의 ‘조선양조장’을 매입하며 삼성의 기틀을 세웠다. 현재 삼성은 자산규모 92조원으로 공기업인 한국전력에 이어 2위다. 하지만 지난해 자산을 꾸준히 늘려 올 4월 공정거래위원회의 발표가 나면 명실상부한 재계 1위로 부상할 전망이다. 삼성은 지난해 매출 136조원, 세전이익 19조원이라는 경이로운 경영성과를 이뤄냈다. 직접 수출만 527억달러로 우리나라 전체 수출(2542억달러)의 21%를 차지했다. 삼성그룹의 시가총액은 한때 120조원을 넘었다가 현재 94조원에 달한다.2위인 LG그룹(36조원)과 비교해 보면 그 비중을 짐작할 수 있다. 삼성은 또 CJ, 신세계, 한솔, 새한그룹과 연결돼 있고 중앙일보그룹, 보광그룹과도 인연을 맺고 있다. 지난해 기준으로 신세계 5조 2000억원(21위),CJ 4조 9000억원(23위), 한솔 3조 4000억원(36위), 중앙일보·보광 1조원 등을 더하면 ‘범 삼성가’의 자산은 106조 5000억원에 달한다. ●다양하지만 화려하지 않은 혼맥 이런 위상에도 불구하고 삼성의 혼맥은 의외로 담백하다. 특히 이건희 회장대로 내려오면서 특별한 집안을 ‘간택’하지 않았다. 이미 재계 최고의 반열에 올라선 삼성가로서는 더 이상 혼맥을 통해 뭔가를 기대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이병철 회장 사후 삼성은 91년 11월 신세계와 전주제지(한솔),93년 6월 제일제당(CJ),95년 7월 제일합섬(새한),99년 중앙일보 등을 독립시키며 세포분열을 거듭했다. 새한을 제외하고는 각자의 영역에서 안착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병철 회장은 8명(3남 5녀)이나 되는 자녀를 분가시켰지만 명성만큼 화려한 혼맥은 아니었다. 이맹희씨가 그의 회고록에서도 밝혔듯이 이 회장은 혼사를 통해 권력층과 줄을 잇는 체질이 아니었다. 다만 자유당 시절 법무장관과 내무장관을 역임한 고 홍진기씨 집안과 사돈(이건희 회장)을 맺은 것이나 둘째딸 숙희씨를 LG의 창업주인 구인회 회장의 3남인 구자학씨에게 시집보낸 것 정도가 눈에 띈다. ●비운의 장손가, 화려한 부활 장남 이맹희씨는 어릴 적부터 약조가 돼 있던 손영기 전 경기도 지사의 딸 손복남씨와 결혼했다. 한때 17개 계열사 경영을 맡으며 장남의 역할을 다했지만 일찌감치 그룹 경영에서 발을 빼야 했다. 맹희씨의 존재는 항상 껄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는 ‘묻어둔 이야기’,‘하고 싶은 이야기’ 등의 회고록에서 “고 이병철 회장이 제일제당·제일모직 등 ‘제일’자 계열과 안국화재(현 삼성화재)를 나에게 넘기기로 했었다.”고 발언,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기도 했다. 맹희씨는 현재 대구와 부산을 오가며 살고 있다. 당대에 이루지 못한 맹희씨의 꿈은 지난 2002년 장남인 이재현씨가 CJ그룹의 회장으로 취임하면서 어느 정도 풀렸다. 고려대 법대 출신인 이 회장은 삼성과 무관한 씨티은행에 공채를 통해 입사했다. 그러나 이병철 회장이 제일제당 경리부로 자리를 옮기도록 했다. 그는 이후 93년 잠깐 현재 이재용 상무 자리인 삼성전자 전략기획실 이사로 일한 것을 제외하고는 줄곧 제일제당과 함께 했다. 이 회장은 비록 CJ그룹이 삼성그룹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규모 차이가 나지만 삼성가의 장손으로 그 위상이 만만치 않다. 이병철 회장의 부인인 박두을 여사도 2000년 타계하기 직전까지 서울 장충동에서 이 회장과 함께 살았다.87년 이병철 회장 장례식때 영정을 들고 앞장선 사람도 이 회장이었다. CJ그룹은 지난해 말 인사에서 미국에 머물던 이 회장의 누나인 미경씨를 CJ엔터테인먼트,CJ CGV,CJ미디어 및 CJ아메리카 담당 부회장에 임명했다.CJ는 이 회장의 외삼촌 손경식 회장이 공동회장을 맡고 있다. ●새한의 도전과 좌절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일본인인 이영자씨와 연애 결혼한 차남 창희씨는 91년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한비사건(사카린 불법유통사건)으로 한때 수감생활을 하기도 했고 67년 삼성이 인수한 새한제지(전주제지) 이사로,68년에는 삼성물산 이사로 일했지만 그룹 경영에서는 한발 비켜서 있었다. 창희씨는 고 이병철 회장과 이건희 회장의 와세다대 동문이다. 창희씨 사후 새한은 부인 이영자씨를 회장으로 97년 새 CI를 선포하며 독립그룹으로 발을 내디뎠지만 곧바로 경영위기를 겪고 만다.2000년부터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에 돌입했는데 채권단에 따라 ㈜새한 계열과 새한미디어 계열로 나눠졌다. 새한미디어는 현재 론스타로의 매각설이 흘러나오고 있다. 새한은 99년 일본 도레이사와 3대7 합작을 통해 도레이새한을 출범시켰다. 2000년 지분을 채권단에 양도한 이영자 전 회장과 아들인 이재관 전 부회장은 현재 미국에 체류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새한은 삼성의 분가그룹 가운데 유일하게 몰락하고 말았지만 혼사만큼은 화려했다. 장남 재관씨는 동방그룹 김용대 회장가의 딸인 희정씨와 중매로 결혼했다. 재관씨는 ㈜동방 주식 1만 6000여주를 갖고 있지만 경영에는 참여하지 않고 있다. 재찬씨는 최원석 전 동아그룹 회장의 딸인 선희씨, 재원씨는 김일우 서영주정 사장의 딸과 결혼했다. 막내딸인 혜진씨도 조내벽 전 라이프그룹 회장가로 시집갔다. ●글로벌 삼성을 만든 이건희 회장 3남인 이건희 회장이 삼성그룹의 2대 회장이 된 것은 유교적 전통과 장자승계가 원칙인 한국에서 의외로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이병철 회장은 70년대에 이미 ‘3남 후계’ 방침을 확정했다. 이병철 회장은 ‘호암자전’에서 “장남 맹희는 주위의 권고와 본인 희망대로 그룹 경영을 일부 맡겨 봤지만 6개월도 못가 맡겼던 기업은 물론 그룹 전체가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면서 “창희는 그룹 산하의 많은 사람을 통솔하고 복잡한 대조직을 관리하는 것보다는 알맞은 회사를 건전하게 경영하고 싶다고 희망해 희망대로 해주었다.”고 밝혔다. 이건희 회장에 대해서는 “와세다대 1학년때 중앙매스콤을 맡아보라고 했더니 본인도 좋다고 했는데 조지워싱턴대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서는 그룹 경영에 차츰 참여하기 시작했다. 내가 겪은 기업경영이 하도 고생스러워 중앙일보만 맡았으면 하는 심정이었지만 본인이 하고 싶다면 그대로 놔두는 것이 옳지 않을까 생각했다.”고 회고했다. 양녕대군, 효령대군 대신 3남인 충녕대군(세종)을 택한 태종의 결단과 닮은 꼴이다. 87년 11월19일 이병철 회장이 타계한 뒤 12일 만인 12월1일 삼성의 2대 회장에 취임한 이 회장은 주변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17년 만에 삼성의 차원을 바꾸는 데 성공했다. 이 회장이 취임한 1987년 매출 13조 5000억원과 비교하면 14년 만에 매출이 10배로 늘어났다. 세전이익은 1900억원에서 19조원으로 100배나 늘었다. 원달러 환율이 100원 이상 절상된 올해도 삼성은 매출 140조원, 세전이익 14조 6000억원을 목표로 세웠다. 이 회장의 ‘신경영 전도사’라는 평가를 받는 이학수 삼성 구조조정본부장은 최근 이 회장의 ‘17년 경영’을 이렇게 평가했다. “반도체 투자 같은 천문학적인 액수는 보통의 최고경영자(CEO)들은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 한때 잘나갔던 일본 반도체 업체들도 CEO들이 결단을 내리지 못해 투자시기를 놓쳤다. 반면 삼성은 이 회장이 전략을 제시하고 투자를 결정해 줌으로써 강력한 리더십이 생긴다. 계열사 사장들은 회장의 비전 제시를 책임감 있게 충실히 이행하고 구조본은 이 과정에서 정보분석 등 보좌업무를 수행한다. 삼성의 힘은 이같은 ‘3각 경영시스템’에서 나온다고 자타가 공인하고 있다. 사장을 비롯해 임직원들이 ‘우리 회장’을 진심으로 따르고 승복하니까 이같은 영향력이 나오는 것이다.” 이 회장과 홍라희 여사의 만남은 부친들끼리 미리 약조가 돼 있는 상태에서 66년 일본 도쿄 하네다 공항에서 처음 이뤄진 뒤 7개월 뒤인 67년 5월 결혼으로 이어졌다. 홍 여사는 당시로는 큰 키(165㎝)에 미모와 지성을 갖춘 재원으로 이후 한국 재계의 ‘퍼스트레이디’로 자리매김했다. 서울대 미대(응용미술학과) 출신인 홍 여사는 79년 막내 윤형씨를 낳고 난 뒤인 83년 현대미술관회 이사로 ‘대외활동’을 시작했다. 67년 삼성으로 시집온 뒤 이건희 회장의 후계구도가 확정된 71년부터는 삼성그룹의 사실상 ‘안방마님’이었지만 서열상으로 엄연히 형님(맹희·창희씨 부인)들이 있고 위로 시누이가 넷(인희·숙희·덕희·순희씨)이나 있어 편하기만 한 상황은 아니었을 것이다. 홍 여사는 85년부터 98년까지 친정아버지(고 홍진기씨)가 회장으로 있는 중앙일보 상무로 재직했다.95년 호암미술관장으로 취임한 홍 여사는 96년에는 삼성문화재단 이사장까지 맡았지만 98년 이사장직을 남편인 이 회장에게 돌려줬다. 지난해 4월 현대미술관회 부회장으로 선임됐고 같은 해 11월에는 서울 용산구 한남동 ‘승지원’ 옆에 국내 최고 수준의 미술관인 ‘리움(Leeum)’을 개관, 관장으로 취임했다. 해외활동도 활발해 93년부터 CIMAM(국제근현대미술박물관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뉴욕 현대미술박물관 국제이사회 회원, 영국 테이트갤러리 국제이사회 회원이다. 이같은 활동을 인정받아 96년 프랑스 문학예술훈장인 ‘코망되르’를 받았고 2003년에는 제57회 자랑스런 서울대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딸들의 맹활약 삼성가는 딸들의 경영활동이 활발하기로 유명하다.5명의 딸 가운데 덕희(숙명여대)씨를 제외하고는 모두 이화여대 출신이다. 장녀인 이인희씨는 경북지방의 대지주였던 조범석가로 시집갔다. 남편인 조운해씨는 고려병원(현 강북삼성병원) 원장·이사장 및 병원협회장을 역임했다. 현재도 맏사위 자격으로 삼성에버랜드 주식을 일부 갖고 있다. 인희씨는 91년 삼성에서 분리,92년 한솔그룹으로 이름을 바꾸며 새 출발했다. 한때 계열사가 16개에 이르는 등 승승장구했지만 외환위기를 겪으며 현재는 8개 계열사로 줄었다. 장남인 조동혁 회장에 이어 현재 그룹 경영은 3남인 조동길 회장이 맡고 있다. 차남인 조동만 전 한솔PCS 회장은 PCS 사업매각 관련 비리로 비운의 주인공이 됐다. 차녀인 숙희씨는 LG가로 시집을 갔다. 남편인 구자학씨는 해군 소령으로 예편한 뒤 제일제당, 동양TV 이사, 호텔신라 사장, 중앙개발 사장 등 처가에서도 활발한 경영을 펼쳐 눈길을 끈다. 그는 삼성이 전자사업에 진출한 것을 계기로 본가로 돌아간 뒤 금성사 사장,LG반도체·LG건설 회장 등 굵직한 자리를 맡다 지난 2000년 외식산업인 ‘아워홈’을 갖고 독립했다. 지금도 LG가에서 구자학 회장은 ‘구씨답지 않게 낭만적이면서도 미스터리한 인물’로 회자된다. 주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삽입형 생리대인 ‘탐폰’을 국내 처음으로 내놓는 등 여성적인 섬세함은 ‘LG가’보다는 ‘삼성가’에 가까운 모습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숙희씨의 아들 본성씨도 한때 삼성 계열사에서 일했다. 딸인 명진씨는 고 조중훈 한진그룹 회장의 막내아들인 조정호 메리츠증권 회장과 결혼했다. 3녀 순희씨는 대학교수와 결혼, 평범한 생활을 하고 있다. 4녀 덕희씨는 삼성가의 고향인 경남 의령의 대지주 이정재씨 집안으로 시집갔다. 마산고와 서울대 상대를 나온 남편 이종기씨는 중앙일보 부회장, 제일제당 부회장을 거쳐 삼성화재 회장까지 지내다 은퇴했다. 그는 지금도 삼성전자 주식 8만주 이상을 보유하고 있는 ‘큰손’이며 동서인 조운해씨와 마찬가지로 에버랜드 주식도 갖고 있다. 삼성가의 딸들 가운데 가장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는 사람은 5녀 이명희 신세계 회장. 이 회장의 시아버지는 4·5대 국회의원과 삼호방직·삼호무역 회장을 지낸 정상희씨로 남편인 재은씨가 차남이다. 남편인 정재은씨는 경기고·서울대 공대를 졸업하고 미국 컬럼비아대학에서 수학한 엘리트. 삼성항공·삼성종합화학 부회장, 삼성전기 회장, 삼성전자 대표이사 등을 역임하며 삼성그룹에서 맹활약하다 분가와 함께 삼성을 떠났고 현재 신세계 고문직을 갖고 있다. 신세계가의 후계자인 정용진 부사장은 미스코리아 출신 고현정씨와 결혼했다가 2003년 이혼했다. ●최고의 사돈감,‘소박한’ 결혼 이건희 회장은 홍 여사와의 사이에서 재용(삼성전자 상무), 부진(호텔신라 상무보), 서현(제일모직 부장), 윤형(학생)씨를 낳았다. 이재용 상무는 경복고와 서울대 동양사학과를 거쳐 일본 게이오대,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을 마쳤다.91년 삼성전자에 입사했으며 차분히 경영수업을 받고 있다. 현재 삼성전자 전략기획실 중장기 전략담당인 이 상무는 최근 소니와의 7세대 LCD(액정표시장치)합작사인 ‘S-LCD’의 등기이사로 등재돼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S-LCD는 삼성과 소니가 ‘명운’을 걸고 시작한 사업. 차기 CEO로 꼽히는 구타라기 겐 소니컴퓨터엔터테인먼트 대표를 이사로 내세운 소니는 삼성측에 이 상무의 이사 등재를 특별히 부탁했다. 이 상무는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첨단기술에 관심이 많아 혼자서도 사업장을 둘러보고 관련 전문가들에게 전문지식을 습득하는 등 열심히 ‘경영수업’을 받고 있다는 평이다. 이 상무는 98년 대상그룹 임창욱 회장의 장녀인 세령씨와 결혼해 1남 1녀를 두고 있다. 당시 ‘미원-미풍 전쟁’을 벌였던 삼성과 대상이 사돈을 맺었다는 점과 연세대(경영학과 2학년)에 재학중이었던 세령씨의 빠른 결혼, 영호남 대표기업의 혼사 등이 화제를 모았었다. 임씨는 삼성가 며느리라는 지위 외에도 ㈜대상 주식 10.22%를 보유하고 있는 등 만만치 않은 재력을 자랑한다. 세령씨의 서문여고 동창들에 따르면 학창시절부터 말수 없이 조용한 데다 미모를 갖춰 일찌감치 ‘최고의 신부감’으로 꼽혔다고 한다. 지난해 초 호텔신라 상무보로 승진한 부진씨는 연세대 아동학과 출신으로 99년 삼성 계열사의 평범한 회사원 임우재씨와 결혼했다. 임씨는 현재 삼성전자 소속으로 미국 유학중이다. 미국 뉴욕의 패션전문학교 파슨스 출신인 둘째딸 이서현 제일모직 부장은 2000년 동아일보 사주인 김병관 회장의 차남인 재열씨와 결혼했다. 재열씨는 지난해 초 제일모직 상무로 승진했다. 아직 미혼인 막내 윤형씨의 배필이 누가될지 벌써부터 재계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이화여대 불문과 98학번인 윤형씨는 지난해 싸이월드에 개설한 미니홈피가 소개되면서 화제가 됐었다. 당시 윤형씨는 재벌가의 딸답지 않는 소탈하고 귀여운 글을 많이 남겨 ‘삼성가’에 대한 세인들의 궁금증을 어느정도 풀어줬다. 지금은 활동이 중단됐지만 ‘다음’의 윤형씨 팬카페(이뿌니 윤형이네) 회원수가 1만 2000여명이 넘을 정도로 연예인 못지 않은 인기를 누렸다. ●이씨가와 홍씨가 LG가 구씨-허씨의 ‘합작품’이라면 삼성은 이씨와 홍씨가 함께 이끌어 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 홍진기 회장의 장남인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이 최근 각을 세워왔던 노무현 정부의 주미대사로 내정됨에 따라 현 정권과 중앙일보, 삼성가로 이어지는 관계가 다시 한번 주목받고 있다. 고 이병철 회장과 고 홍 회장의 인연은 4·19 직후 홍 회장이 3·15 부정선거와 관련해 옥고를 치르고 있을 때 이 회장이 면회를 가면서 시작됐다. 전 국무총리 신현확씨의 소개로 이뤄졌는데 신현확씨도 이후 삼성물산 회장까지 지내며 삼성과 돈독한 인연을 유지했다.87년 이병철 회장 사후 이건희 부회장을 2대 회장으로 추대한 회의도 신현확씨가 주재했다. 홍 회장은 65년 라디오서울(동양방송 전신) 개국 4개월 뒤 경영을 맡았는데 80년 신군부에 동양방송을 ‘강탈’당하는 등 우여곡절 끝에 오늘날의 중앙일보를 일궈냈다. 홍 회장이 삼성그룹에서 직접 경영한 것은 중앙일보(66∼67년,68∼86년)밖에 없지만 그가 삼성에 끼친 영향은 말로 다하기 어려울 정도다. 삼성의 언론사업에는 비화가 있다.‘호암자전’과 ‘삼성 60년사’에 따르면 이병철 회장은 60년대 초 정계 투신을 결심했었다. 기업가의 사회적 공헌이 전적으로 무시되고 오히려 ‘부정축재자’,‘정치적 희생양’이 되는 경우가 많은 현실(한비의 국가 헌납 등)에 환멸을 느낀 이 회장이 직접 정치를 하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1년간의 고심 끝에 정치보다는 언론사업을 택했다. 이른바 ‘정권은 유한하지만 언론은 무한하다.’는 세간의 ‘이치’를 일찌감치 간파한 셈이다. 홍 회장은 이병철 회장의 타계 직전인 86년 먼저 세상을 떠났는데 이 회장은 조사를 통해 “당신은 내 일생을 통해 제일 많은 시간을 접촉한 평생의 동지요, 삼성을 이끌어 온 같은 임원이요, 사업의 반려자였고, 가정적으로는 나의 사돈이었다.”며 진한 애정을 감추지 않았다. ●관·언·재의 홍씨 4형제 홍씨 가문은 네 아들을 뒀는데 하나같이 훤칠한 용모에 좋은 머리를 갖고 있다. 주미대사로 내정된 중앙일보 홍석현 회장은 서울대 전자공학과와 미 스탠퍼드대 경제학 박사 출신의 엘리트로 30대(39세)에 세계은행(IBRD)의 이코노미스트를 지냈고 이후 청와대 비서실장 보좌관,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위원 등 정부쪽 일도 수행했다. 홍 회장은 삼성코닝 상무·부사장으로 경영일선에서 뛰다 99년 중앙일보의 계열분리를 계기로 중앙일보 회장에 취임했다. 아시아인 최초로 세계신문협회(WAN) 회장에 올라 국제사회에도 그 이름을 알렸다. 홍 회장의 장인은 박정희 대통령 시절 검찰총장, 법무부장관, 중앙정보부장을 지낸 고 신직수씨다. 사시 18회인 둘째 홍석조 인천지검장은 경기고, 서울대 법대 출신으로 서울지검 남부지청장(현 남부지검장), 법무부 검찰국장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홍 지검장은 차기 검찰총장 후보로도 거론되고 있다. 홍 지검장의 부인은 양택식 전 서울시장의 동생 양기식씨의 딸이다. 서울대 사회학과 출신인 홍석준 삼성SDI 부사장은 86년 미 노스웨스턴대 경영학 석사를 마친 뒤 삼성코닝 이사로 입사했다.95년 삼성전관(현 삼성SDI) 상무로 이동, 기획홍보팀장을 거쳐 2002년 부사장(경영기획팀장)으로 승진했다.‘로열 패밀리’임에도 불구하고 직원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꿰고 있을 정도로 자상한 면모를 갖고 있다. 선친때부터 살아 온 서울 성북동 집을 지키고 있다. 4남인 홍석규 보광그룹 회장은 지난해 말 인사에서 회장으로 승진, 오너 경영을 본격화했다. 경기고와 서울대 외교학과를 졸업한 홍 회장은 79년 제13회 외무고시에 합격, 외무부 의전과에서 외교관 생활을 시작했다. 홍 회장 역시 형과 마찬가지로 청와대 비서실에서 근무했다.95년 외무부 기획조사과장을 끝으로 공직생활을 마감한 홍 회장은 보광 상무이사로 경영활동에 뛰어들었다. 제8대 한국여자프로골프협회(KLPGA) 회장, 대한스키협회 부회장, 한국광고업협회 부회장, 서울대 기성회 회장 등 외부활동도 활발하다. 보광그룹은 아직 일반에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편의점인 보광훼미리마트, 자판기 유통업체인 휘닉스벤딩서비스, 보광창업투자, 휘닉스커뮤니케이션즈, 문화상품권 발행사인 한국문화진흥 등을 계열사로 두고 있다.PDP(플라스마디스플레이패널) 부품업체인 휘닉스PDE, 반도체 관련 업체인 휘닉스디지탈테크, 반도체패키지 제조업체인 STS반도체통신 등 전자 계열사들은 사돈기업인 삼성전자, 삼성SDI 등과 거래가 활발하다. 특히 지난해 코스닥에 등록된 휘닉스PDE는 홍 회장이 13.89%, 홍석조 인천지검장, 홍석준 삼성SDI 부사장, 홍라영씨가 나란히 10.89%를 보유해 눈길을 끈다. 홍씨가의 주력은 중앙일보 그룹이지만 실제 ‘자금줄’은 보광그룹임을 짐작할 수 있다. 앞으로 보광이 주요그룹으로 성장한다면 정·관계, 언론계를 주름잡은 이 가문이 재계에서도 능력을 검증받게 된다. 막내인 홍라영씨는 노신영 전 국무총리의 둘째아들인 철수씨와 결혼했다. 노 전 총리의 장남 경수씨는 현대산업개발 정세영 명예회장의 큰딸 숙영씨, 차녀 혜경씨는 ㈜풍산 류진 회장과 결혼했다. 이대 불문과, 미국 뉴욕대 예술경영학 석사 출신인 라영씨는 95년 삼성문화재단 기획실로 입사, 현재 삼성미술관 부관장직과 한국박물관협의회 부위원장 등을 맡고 있다. ukelvin@seoul.co.kr ■ 이병철 회장의 경영어록 ●“사장이라고 하더라도 잘 모르는 경우에는 가리지 말고 물어봐야 한다. 그렇게 해서 2∼3년이 지나면 물어보는 횟수가 차츰 줄어들 것이 아니겠는가. 나 역시 혼자 삼성 전체를 경영하는 것이 아니라 삼성 전체가 과거 오랫동안의 경험을 살려서 움직여 나가는 것이다.”(1983년 6월 반도체회의) ●“인재제일, 인간본위는 내가 오랫동안 신조로 실천해온 삼성의 경영이념이자 경영의 지주이다. 기업가는 인재양성에 온갖 정성을 쏟아야 한다. 인재양성에 대한 기업가의 기대와 정성이 사원 한사람 한사람의 마음에 전달되어 있는 한 그 기업은 무한한 번영의 길을 걸어갈 것이다.”(1982년 10월 기고문) ●“사람을 관찰해 보면 세 부류가 있다. 첫째 어려운 일은 안 하고 쉬운 일만 하며 제 권위만 찾아 남만 부리는 사람, 둘째 얘기를 해도 못 알아듣는 사람, 셋째 알아듣긴 해도 실천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1982년 9월 사장단 오찬회의) ●“모든 설비투자계획에 있어서 5년 정도만 내다보고 세우지 말고 10년 이상 50년 정도의 장기 안목 위에서 세워야 한다.”(1977년 6월 삼성조선 건설현장) ●“미국에서는 사람의 후천적 교육에 치중하고 소질은 별로 평가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나는 선천적 소질 내지는 능력에 60%를 두고 교육에 40%를 둔다. 사람은 노력 여하에 따라서 달라진다. 하지만 아무나 노력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노력할 수 있는 능력은 따로 있다고 봐야 옳을 것이다.”(1976년 6월 ‘재계회고’) ●“일이 잘돼 나갈 때 오히려 다가올 불행을 각오해야 한다. 기업가도 뜻하지 않은 좌절을 겪어본 기업가가 좌절을 모르고 자라난 기업가보다 훨씬 더 강인한 기업경영 능력을 갖고 있다.”(1975년 9월 ‘최고 경영자와의 대화’) ■ 이건희회장의 경영담론 ●“그동안은 세계의 일류 기업들로부터 기술을 빌리고 경영을 배우면서 성장해 왔으나, 이제부터는 어느 기업도 우리에게 기술을 빌려 주거나 가르쳐 주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 우리는 기술 개발은 물론 경영 시스템 하나하나까지 스스로 만들어야 하는 자신과의 외로운 경쟁을 해야 한다.”(2005년 1월3일 신년사) ●“반도체 사업 진출 당시 경영진들이 ‘TV도 제대로 못 만드는데 너무 최첨단으로 가는 것은 위험하다.’고 만류했지만 우리 기업이 살아남을 길은 머리를 쓰는 하이테크산업밖에 없다고 생각해 과감히 투자를 결정했었다. 다른 분야도 그렇지만 반도체에서 시기를 놓치면 기회손실이 큰 만큼 선점투자가 무엇보다 중요하다.”(2004년 12월 반도체 30년 기념식) ●“4∼5위에서 2∼3위로 가는 것하고 2∼3위에서 1위로 가는 것은 근본적으로 다르다.”(2003년 11월 휴대전화사업 격려 자리에서) ●“행정규제, 권위의식이 없어지지 않으면 21세기에 한국이 일류 국가로 될 수 없다. 우리나라의 정치는 4류, 관료와 행정조직은 3류, 기업은 2류다.”(1995년 4월 중국 베이징 특파원 오찬간담회) ●“선친이 장사하는 것을 보며 세살 때부터 주판을 갖고 놀았다. 정치보다 장사를 잘 알고 거기에 맞는 사람으로 키워졌다. 난 양복과 잠옷만 있고 중간 옷이 없다. 잠옷 입고 있는 시간이 더 많은데 잠옷을 입고 정치할 수는 없지 않으냐.”(94년 10월 마이클 헤슬타인 영국 상공부 장관과 만찬자리에서 정치 참여에 대해) ●“변하는 것이 일류로 가는 기초다. 앞으로 5년이면 회장 취임 10년인데 10년 해서 안 된다면 내가 그만두겠다. 자기부터 변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마누라하고 자식만 빼고 모두 바꿔라.”(93년 6월 신경영 선포) ●특별취재반 산업부 홍성추 부장(부국장급·반장) 박건승·정기홍·류찬희·김성곤·최광숙차장 안미현·주현진·류길상·김경두기자
  • ‘이병철.com’ 삼성 귀속 정당

    |제네바 연합|‘이병철 닷컴(이병철.com)’의 소유권이 삼성측에 귀속돼야 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제네바 소재 세계지적재산권기구(WIPO) 도메인 네임 분쟁중재센터는 7일(현지시간) ‘이병철.com’을 둘러싼 소유권 분쟁에서 원고인 삼성네트웍스의 주장을 인정, 이 도메인 네임을 보유한 한국의 ABC 컴퍼니에 대해 소유권을 이전토록 결정했다. 중재센터는 결정문에서 “한국에서는 ‘이병철’이라는 이름이 삼성그룹 창업자를 쉽게 떠올리게 한다는 점에서 비록 상표나 서비스표로 등록되지는 않았지만 보호받을 가치가 있다.”고 지적했다. 중재센터는 또 “보호받을 가치가 있는 권리로 존속하는 것이라면 ‘이병철’에 대한 이름은 그의 상속인들에게 귀속되는 것이 타당할 것으로 판단된다.”고 밝혔다.
  • NYT가 반한 서울의 ‘멋’ 서울의 ‘맛’

    NYT가 반한 서울의 ‘멋’ 서울의 ‘맛’

    서울 사람에게 서울은 단지 무덤덤한 생활 공간이다. 아니, 탈출하고 싶은 답답한 도시일 뿐이다. 매일 스쳐 지나가는 남산타워의 모습과 인사동·청담동 거리는 회색도시의 프로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건 무관심에서 비롯된 우리의 오만이나 착각이 아닐까. 미국의 유력 일간지 뉴욕타임스(NYT)는 우리가 무심했던 서울을 꼼꼼하게 되짚었다. 그것도 ‘도쿄에 버금가는 화려한 볼거리와 재미가 있다.’며 서울 관광을 적극 추천했다. 서울은 많은 볼거리 먹을거리를 품고 있는 매력적인 도시다.NYT가 찾아낸 서울의 볼거리와 먹을거리에 확대경을 들이대고 다시 돌아봤다. 조현석기자 hyun68@seoul.co.kr ■ NYT가 반한 서울의 ‘멋’ ●“왜 서울에 가야 하는가” NYT는 이 같은 물음을 던지며 서울 관광을 적극 권했다. 신문은 눈부신 경제성장과 더불어 서울의 마천루는 나날이 화려해지고 있으며 문화시설도 세계적인 수준이라고 평했다. 압구정동과 청담동, 이태원 등은 미국 웨스트 할리우드나 일본 하라주쿠 못지않다고 칭찬했다. 관광 코스로는 낮에는 인사동 갤러리와 남산 서울타워, 한남동 삼성미술관 리움을 돌아보고, 밤에는 청담동 재즈바나 클럽, 이태원 나이트클럽을 가보라고 권했다. 이 가운데 삼성미술관 리움(www.leeum.org)은 지난해 10월 13일 개관한 세계 수준의 국내 최대 사립미술관으로 예약제로 운영돼 아직 일반인에겐 생소한 곳이다. 삼성그룹 창업주인 이병철가(家)가 수집한 1만 5000여점의 소장품을 전시하는 리움은 건물 자체가 예술품이어서 서울의 새로운 명소로 떠오르는 곳이다. 리움은 뮤지엄1과 뮤지엄2, 삼성 아동교육문화센터 등 3개의 건물로 구성돼 있다. 특히 뮤지엄1은 세계적인 건축가 스위스의 마리오 보타의 작품.‘청자진사 연화문 표형주자’(국보 133호)와 ‘고려 금동대탑’(국보 213호),‘고려 불화 아미타삼존도’(국보 218호) 등 국보 25점과 보물 35점이 전시돼 있다. 뮤지엄2는 천재 건축가 프랑스의 장 누벨의 작품이며, 삼성아동교육문화센터는 네덜란드의 렘 쿨하스가 설계했다. 그러나 사전에 예약(2014-6901)을 해야만 볼 수 있으며, 예약시간도 오전 10∼12시까지로 예약이 쉽지 않다. 한국의 전통문화가 살아 숨쉬는 인사동도 꼼꼼히 살펴 보면 새롭게 다가온다. 종로구 안국동 로터리에서 종로 2가 방향으로 뻗어 있는 400여m의 좁은 골목길에는 수백여개의 골동품 판매점과 고서적 전문점, 공방, 전통찻집 등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최근에는 인사아트센터 맞은편에 복합문화쇼핑몰 쌈지길이 개관했다. 쌈지길 1층 첫걸음길 마당엔 각종 문화행사가 열리며,3층에는 무형문화재 및 전승작가의 공방이 들어서 있다.2층과 4층에는 잠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찻집과 식당이 있다. ■ NYT가 혹한 서울의 ‘맛’ ●“이곳이 맛 있대요” 서울의 먹을거리로 장충동의 한국요리 전문점 지화자와 청담동 이탈리아식 퓨전 레스토랑 카페 74, 논현동의 미스터 차우가 첫번째에 꼽혔다. 국립중앙극장 1층에 있는 지화자(2269-5834·www.jihawajafood.co.kr)는 조선왕조 궁중음식 중요 무형문화재 38호로 지정돼 있는 황혜성 교수의 맏딸 한복려씨가 운영하는 한정식집. 전통음식을 지키는 일을 일생 업으로 삼고 살아온 황 교수는 자신에게 궁중음식을 가르치던 스승인 궁궐 상궁이 돌아가신 후부터 궐안에서 배운 궁중음식 요리법을 전수해 지난 71년 인간문화재로 지정됐다. 음식은 구절판과 신선로를 비롯해 생과방의 떡과 한과 등 다양한 식단이 마련돼 있다. 궁중만찬(9만 9000원)과 궁중진상(7만 2000원), 점심에만 하는 낮것상(2만 5000원), 진짓상(1만 5000원) 등이 있다. 워낙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이라 예약해야 한다. 최근 삼청동(733-5834)에 분점을 열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차이니즈 레스토랑 미스터 차우(517-2100·www.mrchowseoul.com)는 다양한 딤섬요리를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시금치즙으로 색을 낸 새우만두와 물냉이와 마른새우가 들어 있는 딤섬, 파인애플을 넣은 볶음밥이 일품이다. 호텔로비와 같은 고급스러운 분위기에서 식사를 즐길 수 있다. 런치코스는 2만 5000원부터 시작하며, 디너코스는 3만 5000원부터다. 특히 저녁식사후 새벽 3시까지 운영하는 분위기 좋은 3층 클럽으로 자리를 옮겨 술을 마실 수 있다. 청담동 골목에 있는 카페74(542-7412)는 식사는 물론 커피, 와인까지 즐길 수 있는 복합 레스토랑. 이 곳에서는 신선한 과일과 오렌지 필렛, 아이스크림을 토핑해서 먹는 바삭한 와플 브런치, 웰빙족을 위해 오븐에서 가장 맛있게 구워낸 아몬드 크러스트를 씌운 농어구이, 담백하면서도 부드러운 맛을 자랑하는 모차렐라 치즈를 덮은 크림 스파게티 등을 먹을 수 있다. 아울러 W서울 워커힐 호텔의 우바(2022-0333)는 이색적인 카페. 독특한 UFO 모양의 DJ부스, 천장에서부터 연결되는 달걀 모양의 의자 등을 갖추고 있어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우바는 40여종의 다양한 보드카와 60여 종이 넘는 와인, 다양한 양주와 칵테일이 준비돼 있다. 서울 힐튼호텔의 나이트클럽 아레노(317-3244)와 청담동 재즈클럽 화수목(548-5429)은 서울의 밤을 즐길 수 있는 곳으로 소개했다. 이 밖에 서울내 추천할 만한 숙소로는 워키힐호텔과 신라호텔, 인터컨티넨탈호텔 등을 권했다.
  • [인사]

    ■ 특허청 ◇과장 승진 △기획관리관실 행정법무담당관 郭泳穆◇과장 전보△특허심판원 심판관 權相俸△국제지식재산연수원 지식재산교육과장 孫榮飾 ■ 농촌진흥청 △중앙공무원교육원 파견 徐孝德 △난지농업연구소장 직무대리 姜尙祚 △세종연구소 파견 奇正老 △연구개발국 연구관리과장 金鎭和 △농업과학기술원 농산물안전성부 유해물질과장 崔柱鉉 △원예연구소 과수과장 芮秉佑 △한국농업전문학교 행정과장 申泰澈 ■ 서울시 시설관리공단 △기술본부장 權赫斗△여미지식물원운영센터 소장 梁泰爀 ■ 벤처기업협회 ◇부장 승진 박정배 ■ 인천국제공항공사 ◇본부장 △운항본부장 서완동◇원장△교육훈련원장 최병국◇처장△품질안전처장 소진영△재산관리〃 서태연△공항운영센터장 박문수△운항지원처장 김혁종△전력〃 오영달△운영〃 이호진△정보통신〃 김기풍△전기통신〃 박정근◇팀장△경비보안팀장 최영기△품질관리〃 조현호△환경관리〃 서상쾌△물품관리〃 김기중△레이더〃 이병철△통신시설〃 김두현△전력운영〃 배을환△항공등화건설〃 이형렬△예산〃 최병국 ■ 국민일보 △논설위원 겸 교계협력부문장(이사) 金相吉 ■ 동아TV △상무이사 유창원△기획편성국 부국장 권용석△패션제작국 〃 곽재우△SO담당 〃 박성호△기술국 부장 남성현△기획 인사팀장 이석원△재무 회계팀장 조재섭△총무 관리팀장 허기석 ■ 성신여대 △생활과학대학장 崔仁勵△음악대학장 李英珉 ■ 미래신용정보
  • [부시 2기와 한반도 진로] 발비나 황 헤리티지재단 동북亞정책분석관

    [부시 2기와 한반도 진로] 발비나 황 헤리티지재단 동북亞정책분석관

    |워싱턴 이도운특파원|“2차대전 이후 미국 최고의 동맹은 바로 한국이다. 펜타곤의 군인들은 ‘한·미간의 군사협력 수준이 미국의 동맹 가운데 최상’이라고 말하고 있다. 미국은 한국의 자유를 위해 피를 흘렸고, 한국은 미국이 큰 전쟁을 벌일 때마다 도와주고 있다. 전 세계에서 그만큼 굳건한 동맹관계가 어디에 있는가?”미국의 보수적 싱크탱크인 헤리티지재단의 발비나 황 동북아시아 정책분석관은 서울신문과의 신년 인터뷰에서 “북한 핵 문제 해결을 둘러싸고 한국과 미국 사이에 이견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양국 동맹관계의 틀은 기본적으로 굳건하다.”고 강조했다. 황 분석관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미관계가 삐걱거리는 것은 동맹으로서의 기대치가 높은데 비해 한국과 미국 모두 상대방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조지 W 부시 대통령 2기의 한·미관계를 어떻게 전망하나. -앞으로 4년 동안 양국 관계가 개선되기를 희망한다. 부시 대통령은 동맹국들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끈끈한 유대를 맺어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절실하게 깨달았을 것으로 본다. 온건파인 콜린 파월 국무장관은 물러나지만 강경파들은 건재하다. 한반도 정책이 강성화되는 것 아닌가. -그렇지 않다. 무엇보다 부시 대통령과 그의 행정부가 지난 4년 동안 ‘매파적(hawkish)’이었다거나 ‘강경(hard-line)’했다는데 동의하지 않는다. 부시 대통령이 개인적으로 북한의 김정일을 싫어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는 독재자이고 북한 주민을 굶주리게 만들었다. 누가 그런 김정일을 좋아하겠는가. 그러나 부시 정부는 북한 핵 문제와 관련해 지난 4년간 일관되게 평화적이고 외교적인 해결을 모색해왔다. 강경정책이라면 군사적 대응이나 경제 제재를 말할 것이다. 그런 것은 전혀 없지 않았다. 또 후임 국무장관인 콘돌리자 라이스나 국가안보보좌관으로 내정된 스티븐 해들리가 파월보다 강경하다는 징표는 없다. 한·미관계가 껄끄러운 것은 어느쪽의 책임일까. -한국과 미국 모두 최근 들어 상대방에 대해 잘못된 인식을 갖고 있는 것 같다. 또 상대방의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미국 정부는 한국에서 미국의 정책에 대한 오해가 확산되는 상황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다. 반면 한국 정부는 미국 정부에 외교적으로 하는 말과 한국 국민을 상대로 하는 말이 일치하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한·미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요인들을 꼽는다면. -한국 사회가 급격한 변화를 경험하면서 북한에 대한 시각도 놀랄 만큼 빠른 속도로 바뀌고 있다. 하지만 미국에서 볼 때 북한은 커다란 위협으로 남아있다. 대규모 군대와 미사일, 핵 무기 개발 및 확산, 인권 유린 등이 바로 위협 요소다. 반면 한국 국민들은 북한의 약화를 두려워한다. 김정일 체제가 무너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것이다. 이처럼 북한을 보는 기본적인 시각에 괴리가 있기 때문에 정책의 목표도 달라지는 것이다. 6자회담은 계속될 것으로 보는가. -아마 한 번이나 두 번 정도 더하지 않을까. 그러나 미국 정부가 지난 3차 회담에서 내놓은 제안을 북한이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인내심에 한계가 올 것으로 본다. 미국에서 6자회담이 아니라 5자회담을 말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 -나 역시 지난 6월부터 북한이 참석하지 않아도 6자회담을 예정대로 열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5자회담이 아니라 북한이 빠진 6자회담이다. 그렇게 해서 6자회담이 계속되지 못하는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가를 국제사회에 분명하게 밝힐 필요가 있다. 실제로 5자회담이 열린다면 어떤 의미가 있나. -6자회담의 종언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이후는. -다음 단계(Next Stage)로 넘어갈 것이다. 다른 외교적 대안은 없는지 찾아본 뒤에 결국 유엔으로 가게 될 것이다. 북한이 핵을 포기할 것으로 보나. -천만에. 북한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핵 무기를 보유하려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6자회담이 무슨 필요가 있는가. -북한의 의도가 그렇다 하더라도 김정일이 이를 포기하도록 국제사회가 강력한 압력을 넣자는 것이다. 다시 말해 북한이 핵을 포기하면 얻을 수 있는 당근과 반대의 경우 감수해야 하는 채찍을 모두 보여주자는 것이다. 지금 6자회담의 문제는 한국이 당근만 주고 채찍은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북한이 원하는 당근은 미국산(産)이 아닐까. -그래서 한국이 주는 당근은 낭비라고 말하는 것이다. 만일 한국이 북한에 대한 지원을 줄이면 오히려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것이다. 워싱턴에서 북한의 붕괴를 말하는 목소리도 있다. -그들의 입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미국 정부는 지금 강제로 북한 정권을 교체할 만한 이해관계가 전혀 없다. 더욱이 북한의 붕괴가 가까워졌다는 시각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북한이 붕괴하는 사태가 발생한다고 가정할 때 북한지역은 누가 맡게 되는가. 자동적으로 남북통일이 이뤄지는 것이냐. -바로 그런 문제에 대해 미국 정부가 적절한 대응책을 마련하고 있는지 의문이다. 북한 붕괴의 결과가 통일이 될 것인가는 예측하기 어렵다. 붕괴가 어떻게 이뤄지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미 정부 고위관리가 정권교체가 아니라 체제전환(Regime Transformation)을 말했다. 무슨 뜻인가. -정권의 행태를 바꾸자는 것이다. 말하자면 꼭 정권 자체를 바꿀 필요는 없는 것이다. 북한인권법이 북·미관계, 그리고 한·미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영향을 미쳐서는 안 된다. 북한과 한국 모두 이 법에 대해 잘못 생각하고 있다. 이 법은 중국에 있는 탈북자들을 돕기 위한 법이다. 북한 자체에는 큰 영향이 없을 것이다. 어찌보면 중국을 겨냥한 법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미국이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북한인권을 이용한다는 말인가. -그게 아니다. 중국이 탈북자 문제를 적절하게 처리하지 못하고 있다. 유엔고등난민판무관(UNHCR)이 역할도 제대로 못하게 가로막는 것 아닌가. 그런 면에서 중국에 좀 더 압박을 가하자는 것이다. 미국에선 네오콘(신보수주의자)들이 어느정도의 영향력을 갖고 있는가. -네오콘의 파워는 과장돼 있다. 물론 정부의 중요한 자리에 네오콘들이 자리잡고 있다. 그들이 이라크전에서는 실제로 영향력을 미쳤다. 그러나 이제는 그들도 힘을 잃어가고 있다. 사실 이름은 네오콘이지만 그들은 정통 보수주의자들과는 많이 다르다. 오히려 우드로 윌슨, 시어도어 루스벨트 전 대통령의 고전적 리버럴리즘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네오콘의 창시자인 리바이 스트라우스도 공산주의에서 출발한 것 아닌가. 미국의 가장 중요한 동맹은 영국인가. -유럽에서는 그렇다. 그러나 영국이 세계에서 미국의 가장 중요한 동맹이라는 데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는다. 미국으로서는 어느 한 나라를 찍어서 가장 중요한 동맹이라고 말할 수 없다. 미국에 동맹은 수직적인 순위의 개념이 아니라 수평적인 개념이다. 한국은 몇번째로 중요한 동맹인가. -아시아에서는 한국과 일본이 가장 중요한 동맹이다. 요즘은 미·일관계가 나은 듯하다. -미국이 늘 일본을 신뢰하는 것은 아니다. 미·일동맹의 시작을 돌아보자. 미국은 일본에 원자폭탄을 터뜨리고 점령했다. 미·일동맹은 공통된 이해관계(common interest)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다. 지난 50년간 미국이 전쟁을 벌였을 때 한국은 한번도 도움주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나 일본은 “헌법 때문에…”라는 등의 이유를 들어 소극적으로 대응해 왔다. 끝으로 주미 한국대사의 역할을 말한다면. -미국으로서는 누가 오든지 받아들이지 않겠는가. 좀 더 활동적이고, 적극적이고, 왕성한 활동가이면서 영어도 잘한다면 좋겠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주미대사가 노무현 대통령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현지의 상황을 솔직하게 얘기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라고 본다. dawn@seoul.co.kr ■ 발비나 황은 누구 발비나 황은 워싱턴의 보수적 싱크탱크인 헤리티지재단의 동북아시아 정책분석관이다. 발비나 황 분석관은 아시아재단의 스캇 스나이더 동북아담당국장, 맨스필드재단의 고든 플레이크 연구원 등과 더불어 워싱턴의 대표적인 ‘신세대’ 한반도 전문가로 꼽힌다. 특히 한국에서 태어난 황 분석관은 한국의 신문과 방송 등 1차적인 정보에 대한 접근도 가능하기 때문에 한국과 북한에 대한 이해도가 다른 전문가에 비해 깊은 편이다.AP통신이나 CNN, 뉴욕타임스 등을 통해 한국관련 정보를 접하는 다른 한반도 전문가들과 견줘 비교우위를 갖고 있는 것이다. 1973년 설립된 헤리티지재단은 고 이병철 삼성·정주영 현대그룹 회장 등도 관심을 갖고 지원해온 기관이다. 따라서 전통적으로 한반도 문제를 중시한다. 조지 부시 대통령 취임 이후 네오콘(신보수주의자) 중심의 미국기업연구소(AEI)에 주도권을 빼앗겼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으나, 차츰 보수주의 본가로서의 역할과 위상을 되찾아가고 있다. 황 분석관은 매사추세츠주의 명문여대인 스미스 칼리지를 졸업하고 컬럼비아 대학원에서 국제관계를, 버지니아 대학원에서 경영학을 각각 공부했다.98년부터 99년까지는 풀브라이트 장학생으로 서울에서 한국의 대외경제 정책에 관한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하기도 했다. 황 분석관은 미국 상무부와 워싱턴의 해외투자회사에서도 일한 경험이 있으며, 조지타운대학과 아메리칸대학에서 국제관계와 정치경제를 강의한다. 한국 이름은 황영경이다.
  • [2005 문화코드] ① 팩션(팩트+픽션)

    [2005 문화코드] ① 팩션(팩트+픽션)

    새해에는 어떤 문화적 현상 혹은 흐름이 주목받을까. 새로운 문화현상을 지금 여기서 어떻게 해석하고 바라볼 것인가를 이야기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도 가장 의미있는 답을 얻기 위해선 이른바 ‘코드’ 접근법에 기대지 않을 수 없다. 서울신문은 5회에 걸쳐 2005년 문화현상을 전망하고 해석한다.‘팩션’‘신(新)한류’‘미래담론’‘생명사상’‘녹색진보’등 다섯 갈래로 나눠 다양한 문화현상의 본질을 짚는다. ■ 출판 상상력의 시대다. 문화장르에 ‘상상’의 메타포가 빠진 적이 한순간이라도 있었을까마는 현실은 사뭇 다르다. 출판·방송·영화할 것없이 부쩍 전에 없던 창작기류가 흐른다. 이른바 2005년에도 현재형으로 진행될 것으로 예감되는 문화코드 ‘팩션(faction)’이다. ●‘다빈치 코드’로 촉발된 열풍 식지않을듯 지난해 하반기 출판가에서 비롯된 용어 ‘팩션’이란, 사실(fact)과 허구(fiction)를 결합한 문학형태다. 주로 역사를 바탕으로 상상력을 추리기법으로 가미하는 만큼 역사추리소설 혹은 지식소설로 불리기도 한다. 지난해 6월 국내 출간된 세계적 베스트셀러 ‘다빈치 코드’로 촉발된 팩션열풍은 좀체 식을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전례없는 출판시장의 불황에도 불구하고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베텔스만)는 출간 6개월여 만에 무려 100만부를 넘게 팔아치웠다. 댄 브라운의 저작으로 ‘다빈치 코드’의 전작에 해당하는 역사추리소설 ‘천사와 악마’도 잇따라 전략적으로 출간돼 쏠쏠한 재미를 봤다. 이후 서점가에는 팩션소설들이 줄을 잇고 있다. 르네상스시대 문헌의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죽음과 계시의 사건들을 다룬 ‘4의 규칙’(랜덤하우스중앙),17세기 이탈리아의 한 여관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의 진실을 캐는 과정에 당대 유럽의 역사가 화려하게 펼쳐지는 ‘임프리마투르’(문학동네)도 그 범주에 속한다. ‘다빈치 코드’의 성공으로 그 효과를 덤으로 누린 책도 적지 않았다.‘성배와 잃어버린 장미’(루비박스),‘다빈치 코드의 진실’(예문),‘다빈치 코드 깨기’(규장) 등이 그들이다. ●인문학적 지식 바탕으로 추리력 발휘 이 소설들의 공통점은 하나같이 한 사건을 실마리로 해서 이야기를 풀어간다는 점.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사건해결에 필요한 수많은 단서들이 제시되고 그들을 통해 역사이해 등 인문학적 지식이 바탕이 된 추리력을 발휘하게 된다. 사실 팩션이란 개념이 처음 도입된 분야는 문학이 아니라 저널리즘쪽이었다.1960∼70년대 텔레비전에 신문의 인기가 밀리자 독자들의 시선을 붙잡기 위해 기사문체를 딱딱하지 않고 재미있게 픽션화한 데서 유래했다는 것. 그렇다면 팩션의 불씨가 문화전반으로 옮겨붙은 배경은 어디에 있을까. 정답은, 당연히 문화소비자인 ‘대중’의 변화된 욕구다. 문학평론가 김동식씨는 “대중적 흥미에다 폭넓은 인문학적 교양을 쌓을 수 있는 ‘두마리 토끼’를 잡는 소설읽기는 현대인들에게 꾸준히 인기를 누릴 것”이라고 해석했다. 팩션열풍에서 새삼 ‘팩트’(사실)가 강조되는 이유부터 따져봐야 한다는 목소리도 의미심장하다.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은 “예전에는 정보의 실체가 보였으나, 인터넷 시대에는 그것들을 구체적으로 볼 수가 없다.”고 전제,“(대중은)정보의 실체로 연결될 수 있는 계기를 찾는 것”이라고 분석했다.‘단테클럽’을 읽은 독자들은 자연스럽게 단테의 ‘신곡’을 찾게 되고,‘다빈치 코드’ 독자들은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궁금해 한다는 것이다. ●‘팩션’ 1960~70년대 부드러운 신문기사서 유래 획일화된 일상에서 벗어나고픈 욕구와, 실체적 정보에 다가서려는 인터넷 시대의 반동적 욕망이 결합해 팩션을 낳고 있는 셈이다. 새해에도 출판가에서는 팩션식 소설의 인기는 계속될 것 같다. 인기작가 이인화가 7년 만에 선보여 화제인 신작 ‘하비비’(해냄)도 팩션형태.‘삼국지’의 영웅 조조가 남긴 비밀지도의 행방을 놓고 암투를 벌이는 이야기 얼개다.‘다빈치 코드’가 표절작품이라는 논란을 제기한 루이스 퍼듀의 ‘다빈치 레거시’(팬아스)도 최근 새로 서점가에 합류했다. 베텔스만도 상반기 중 댄 브라운의 또다른 인기추리소설 ‘디지털 포트리스’를 선보일 예정이다. 황수정기자 sjh@seoul.co.kr ■ 영화 역사적 사실에 허구를 가미한 ‘팩션 영화’를 국내외에서 한 편씩 꼽으라면 누구나 ‘황산벌’(2003)과 ‘포레스트 검프’(1994)를 떠올릴 듯 싶다.‘황산벌’은 김유신, 계백 장군을 사투리 때문에 싸우게 만들었고,‘포레스트 검프’는 IQ 75인 청년으로 하여금 미국 현대사의 중심축을 가로지르게 하는 상상력을 발휘했다. ‘실감나는 상상력’으로 관객들을 즐겁게 했던 이같은 팩션 영화는 최근 들어 국내외 할 것 없이 그 수가 늘고 있다. 한국영화의 올해 개봉·제작 리스트에도 여러 편이 올라있다. 하지만 추리 코드를 전제로 하는 문학 분야와 달리, 영화에서는 다양한 장르를 아우르는 것이 그 특징이다. 2월 개봉예정인 ‘그때 그사람들’은 10·26을 기초로 캐릭터와 모든 정황을 허구로 구성한 블랙코미디. 크랭크업을 거의 앞둔 ‘혈의 누’는 구한 말 천주교박해를 배경으로 연쇄살인사건을 추적하는 추리 공포 사극이고, 올 여름 개봉예정인 ‘천군’은 남북한 병사가 과거로 휩쓸려가 이순신 장군을 만난다는 내용의 팩션 영화다. 하반기 개봉을 목표로 준비 중인 ‘대한독립만세’는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을 배경으로 양아치들의 활약을 그린 코믹 액션 영화다. CJ엔터테인먼트 한국영화팀 관계자는 “한국영화에서는 스릴러 장르가 발전하기 못했기 때문에 ‘다빈치 코드’류의 추리물을 발견하기는 어렵지만, 픽션을 가미한 실화 소재의 영화는 많이 제작되고 있다.”고 말했다. 할리우드도 예외는 아니다. 현재 상영중인 ‘내셔널 트레저’는 미국 건국 초기의 거물들이 속해있던 프리메이슨이라는 단체를 바탕으로, 이들이 지폐나 건축물에 보물지도를 숨겨놓았다는 상상력을 동원했다.‘다빈치 코드’도 내년 중에 미국 컬럼비아사에서 영화화될 예정이다. 영화평론가 전찬일씨는 “실제사건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는 엄밀히 말하면 모두 팩션”이라면서 “항상 새로운 소재를 고민하는 제작자들에게 팩션 영화는 창작보다 쉬우면서도 지금까지 덜 다뤄졌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라고 분석했다. 김소연기자 purple@seoul.co.kr ■ 드라마 안방극장에도 ‘팩션’바람이 거세다. 현재 방영되고 있거나 곧 전파를 탈 TV드라마들을 보면, 역사적 사건과 과거 성공한 인물 등 과거 사실을 바탕으로 작가의 상상력을 가미한 ‘팩션’작품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이달말 첫 전파를 타는 MBC 주말드라마 ‘제5공화국’은 10·26 사태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서거한 뒤 12·12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은 전두환 전 대통령 시절의 혼란의 정치사를 드라마화한 작품.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등 전직 대통령들과 5·18 광주민주화운동 등 정치사가 리얼하게 재연될 예정이다. 현재 인기리에 방영 중인 KBS2TV 대하드라마 ‘해신’은 해상왕 장보고의 생애와 당대 사건 등을 ‘팩션’에 입각해 재구성한 작품. 방영 초기부터 ‘원균 재조명’을 둘러싼 뜨거운 논란에 휩싸인 KBS1TV 대하드라마 ‘불멸의 이순신’도 이순신과 원균이라는 역사적 인물과 임진 왜란 등 역사적 사실을 현대적인 시각으로 재해석했다. 실존 인물인 삼성 고 이병철 회장과 현대 고 정주영 명예 회장을 모델로 한 MBC ‘영웅시대’도 과거 60∼70년대 격동기의 ‘재벌 이야기’와 ‘정경유착’ 등 격동의 정치·경제사를 기초로 모든 정황을 허구로 구성한 ‘팩션 드라마다. ‘팩션’요소를 이야기 전개의 중심축으로 삼은 드라마들은 올 한해에도 속속 기획되거나 제작될 예정이다. 지난 2000년 무기도입을 둘러싼 정치권 불법 로비 의혹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재미교포 로비스트 ‘린다 김’과 군 전력 증강 사업(일명 백두사업)을 소재로 한 TV드라마가 올 하반기 이후 제작에 들어갈 예정이다. 성공 벤처기업을 모델로 한 TV 드라마도 곧 선보인다. KBS 김현준 드라마 1팀장은 “최근 역사적 사건과 인물을 소재로 한 ‘팩션’작품이 속속 등장하는 것은 과거를 현대적 시각에서 재해석하려는 사회내 분위기와 제작진의 창작 욕구가 맞아 떨어져 생겨나는 것으로 볼 수 있다.”면서 “‘팩션’외에도 고전을 리메이크 하는 등 ‘과거 지향’적인 추세는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고 전망했다. 이영표기자 tomcat@seoul.co.kr
  • [재계 인사이드] 재벌 2·3세 ‘경영일선으로’

    재벌총수의 2·3세들이 연말연시 인사철을 맞아 속속 경영 전면에 포진하고 있다. 대학교수를 그만두고 경영에 합류하는가 하면 몇년간의 공백끝에 복귀하거나 초고속 승진을 하고 있다. 나름대로 전문지식과 경험을 쌓은 이도 적지 않지만, 무책임한 ‘경영권 상습’이라는 비판도 적지 않다. 때마침 공정거래위원회의 재벌 친인척 ‘지분 족보’가 공개돼 이같은 논란이 당분간 가열될 전망이다. 고(故)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의 장남 이맹희씨의 큰딸인 이미경(46)씨는 27일 부회장 직함을 달고 CJ그룹에 전격 승진했다. 공식직함은 CJ엔터테인먼트·CJ CGV·CJ미디어·CJ아메리카 담당 부회장. 지난 1995년 다국적 엔터테인먼트 회사 ‘드림웍스’ 설립을 주도하며 왕성하게 활동하던 그는 그러나 이후 해외파견(CJ엔터테인먼트 상무) 형태로 미국에 머물며 사실상 그룹 경영에서는 물러나 있었다.CJ측은 “엔터테인먼트 사업 등에 대한 전문 식견과 해외 네트워크를 가진 전문가가 필요하다는 판단 아래 친동생인 이재현 그룹 회장이 직접 (경영 합류를)요청했다.”고 설명했다. 구평회 LG 창업고문(E1 명예회장)의 셋째아들인 구자균씨도 이날 교수직을 완전히 그만두고 LG산전 관리담당 부사장으로 변신했다.LG산전은 LG전선그룹의 핵심계열사이다. 미국 텍사스대에서 재정학 박사학위를 받은 구 교수는 국민대 경영학과 교수를 거쳐 고려대 국제대학원 교수로 재직하다 휴직한 상태다. 구 고문의 큰아들인 자열씨는 LG전선 부회장, 자용씨는 E1 부사장이다. 구두회(구 고문의 동생) 극동도시가스 명예회장의 외아들 구자은 LG전선 이사도 이날 1년만에 상무로 승진했다. 이에 앞서 ‘본가’인 LG그룹에서도 구인회 창업주의 둘째동생 고 구정회씨의 아들인 구자민 상무가 LG전자 부사장으로, 구본무 LG그룹 회장의 사촌인 구본진 부장이 LG상사 상무로 각각 승진했다.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아들인 정몽윤씨는 이달초 현대해상 등기이사로 복귀했다.8년만의 컴백이다. 정몽근 현대백화점 회장의 아들인 지선씨와 교선씨도 얼마전 아버지로부터 지분을 넘겨받아 후계구도를 굳혔다.1997년 과장으로 입사한 지선씨는 5년만에 부회장으로 승진했고, 교선씨는 기획이사로 승진했다. 현대그룹의 장손인 정의선(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의 아들) 부사장도 기아차 유럽시장 공략을 책임지는 등 경영전면에 나서고 있다. 안미현 류길상기자 hyun@seoul.co.kr
  • [재계 인사이드] 다시 주목받는 삼성家 파워

    [재계 인사이드] 다시 주목받는 삼성家 파워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차기 회장으로 이건희 삼성 회장을 공식 추대하기로 한 것을 계기로 삼성가의 ‘파워’가 다시 한번 주목받고 있다. 이미 이 회장의 처남인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이 주미대사로 내정된 뒤여서 삼성가의 위상이 어디까지 올라가느냐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전경련이 이 회장을 회장으로 추대하려다 실패한 게 한두번이 아니지만 그 어느 때보다 의지가 강한 데다 여건도 어느 정도 무르익어 실현 가능성이 없지만은 않다. 전경련은 이 회장이 삼성과 전경련 일을 모두 챙기는 데 부담을 느낄 것에 대비해 ‘행사담당 수석부회장’직을 신설, 회장의 업무 부담을 줄여줄 계획까지 수립했다. 전경련의 ‘삼고초려’에도 불구하고 삼성가의 반응은 탐탁지 않다. 삼성은 이 회장이 그룹 경영에 전념하는 것이 재계와 국가경제에 기여하는 부분이 더 크다는 점에서 전경련 회장직을 맡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무려 10년간(77∼87년)이나 전경련 회장을 맡은 데 반해 선대 이병철 회장은 초대 회장을 1년간 맡았을 뿐일 정도로 외부 ‘타이틀’에 관심이 없는 이력도 이를 뒷받침한다. 한 경제단체 고위 관계자는 “이 회장의 수락 여부와 상관없이 재계의 ‘러브콜’이 끊이지 않을 만큼 이 회장의 위상이 절대적이라는 것을 확인한 셈”이라고 말했다. 전경련 회장이나 주미대사 말고도 삼성은 그동안 숱한 인재들을 각 분야에 진출시켰다. 삼성전자 사장 출신으로 참여정부 최장수 장관인 진대제 정보통신부장관이나 정통부장관을 거쳐 국회의원까지 지낸 남궁석 전 삼성SDS 사장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류길상기자 ukelvin@seoul.co.kr
  • [홍석현 주미대사 발탁] 홍석현 누구인가

    신임 주미대사로 내정된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은 경기고와 서울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스탠퍼드대학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77∼83년 세계은행(IBRD) 경제개발연구소 경제조사역으로 근무했고 귀국한 뒤에는 재무부장관 비서관과 대통령 비서실 보좌관 등을 거쳤다. 1985년 한국개발연구원(KDI)에서 연구위원으로 일한 뒤 다음해에 삼성코닝 상무로 발탁되면서 삼성과 인연을 맺었다.1994년 중앙일보 사장에 취임해 1999년부터 중앙일보 회장을 맡고 있다.2002년 세계신문협회 회장에 선출돼 올해 연임됐고 현재 한국신문협회 회장직도 맡고 있다. 홍 내정자의 부친은 고 홍진기 전 법무·내무장관. 홍 내정자의 누나인 홍라희 여사가 삼성 이병철 전 회장의 3남인 이건희 회장과 결혼하면서 두 집안은 끈끈하게 결합하게 됐다. 홍 내정자는 스탠퍼드대 한국 총동문회장(1997년 12월∼2000년 12월)을 지냈으며,1993년부터 1999년까지 스탠퍼드대에 재직했던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 내정자와도 가까운 사이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그는 1997년 대선 당시 ‘이회창 후보 전략보고서’ 문제로 국민신당으로부터 고발을 당하고 1999년에는 탈세 혐의(보광그룹 대주주)로 74일간 구속되기도 했다. 구혜영기자 koohy@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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