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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효성 창업주 탄생 100주년 기념식

    효성그룹은 고 만우 조홍제 창업주 탄생 100주년 기념식을 15일 오후 6시 하얏트호텔에서 연다고 밝혔다. 1906년 경남 함안에서 출생한 조 창업주는 중앙고보 시절 6·10만세 운동 주동자로 옥고를 치르고,1935년 일본법정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한 뒤 호암 이병철 회장과 삼성물산 창립에 참여했고 이후 제일제당과 제일모직 설립을 주도했다. 1962년에는 이병철 회장과의 동업을 청산하고 효성물산을 토대로 독자사업을 펼치면서 1966년 동양나이론을 설립해 화학섬유사업을 시작했다. 동양나이론(현 ㈜효성)은 비약적 발전을 거듭해 타이어코드 세계 1위, 스판덱스 세계 2위, 나일론 세계 5위의 세계적인 화섬 메이커로 자리잡았다. 조 창업주는 또 인재육성에 남다른 열정을 지니고 실행에 옮긴 경영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1959년 배명중고등학교 이사장으로 취임해 20여년간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1976년에는 동양학원 이사장직을 맡아 동양공업전문대학을 설립하는 등 전문기술인력의 육성에도 진력하다가 1984년 1월 78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한편 효성그룹은 조 창업주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늦되고 어리석을지라도’라는 제목의 일화집을 출간한다.김경두기자 golders@seoul.co.kr
  • [농업 희망을 쏜다] (10) 수평적 계열화로 일군 양돈조합 신화

    [농업 희망을 쏜다] (10) 수평적 계열화로 일군 양돈조합 신화

    “돼지를 기르는 것은 농업이 아니라 공업이라고 생각했죠.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익숙한 소를 키웠는데 소값 파동으로 쫄딱 망했죠.”국내 협동조합의 역사를 새로 쓰고 있는 도드람양돈조합의 진길부(61) 조합장은 지난 1982년 축사도 없는 경기도 이천에서 소 대신 돼지를 키우기 시작한 경위를 이렇게 설명했다. 고(故)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이 당시 용인 자연농원에서 돼지 4만∼5만마리를 키웠는데 축산법상 1만마리로 제한받자 양돈 기술자들이 이천 등지로 몰리면서 돼지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이 지금의 초석이 됐다고 했다. 하지만 영세 축산농가의 틀을 벗어난 계기는 아이로니컬하게도 우루과이라운드(UR) 협상에 따른 농산물 시장개방이라고 설명했다. ●위기 의식에서 싹튼, 농민이 주인된 양돈조합 제주 출신인 진 조합장은 서울 농과대학을 졸업한 뒤 3년간 직장생활을 했다. 대학에서 배운 전공을 살리겠다는 취지로 농업에 뛰어들었으나 현실은 너무나 냉엄했다. 송아지를 밴 젖소를 180만원에 샀는데 소값 폭락으로 본전마저 다 날렸다. 때마침 용인 자연농원의 돼지들과 기술자들이 근처로 분산되면서 돼지 30마리를 빌려 키울 기회가 생겼다.“지금 생각해보면 실패도 하나의 과정이라고 생각됩니다. 소값 파동을 겪으면서 위기관리 능력을 쌓았다고 할까요. 풀을 먹는 소와 달리 곡물을 먹는 돼지는 손이 많이 가 게으르면 망한다는 사실도 깨달았습니다.” 80년대 말 돼지 수입이 결정되면서 진 조합장은 다시 위기를 맞게 된다. 일단 친하게 지내던 양돈농가 5∼6명과 ‘무명회’를 조직했다. 정보를 나누자는 친목적 성격이었다. 이후 뜻을 함께 하는 양돈농가 13명을 중심으로 1990년 이천양돈조합을 결성했다. 임의조합이기 때문에 등록은 안됐지만 돼지 1만 7000마리를 키우면서 공동대응에 인식을 같이하게 됐다. ●생산에서 가공, 유통 등으로 번진 수평적 계열화 진 조합장은 돼지 수가 불어나면서 사료의 중요성에 눈을 떴다.“돼지 사육에는 사료의 비중이 매출의 50%를 차지할 정도입니다.”그래서 양돈농가를 설득, 사료공장을 세우기로 했지만 자본이 턱없이 부족했다. 결국 사료생산업체인 S산업에 지분을 출자하는 합작형태로 ㈜도드람을 출범시켰다. 문제는 양돈조합의 지분이 20%에 불과해 농가의 목소리가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경영상 이익을 추구하는 S산업측과 사료비를 조금이라도 아끼려는 양돈조합의 이해관계는 처음부터 엇갈렸다. 더욱이 S산업은 창투사의 지원을 받은 벤처기업으로 농가의 사정에 밝지 못했다. 진 조합장은 생산된 사료의 70∼80%를 쓰는 양돈농가가 불이익을 받아서는 안된다며 2000년 9월1일 결별을 선언했다. 앞서 96년 공식적인 양돈품목조합으로 경기도에 등록하면서 S사료 등에 주문자상표부착(OEM) 방식으로 사료를 주문, 미리 내실을 다진 결과였다. 돼지 사육에서 기틀을 잡았지만 시장 교섭력은 한참 떨어졌다.“생산이 부족한 50∼80년대에는 생산에 매달리면 됐으나 90∼2000년대에는 어떻게 팔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해답은 양돈산업의 역할분담과 수평적 계열화로 귀결됐다. 먼저 전문경영인을 영입, 기업형 협동조합으로의 변신을 꾀했다. 이후 조합은 종돈과 사료, 양돈기술을 책임지고 농가는 돼지 출하에만 전념토록 했다. 현재 ‘파레스피드’라는 사료공장 이외에 농협 등 전국 7개 공장에서 OEM 방식으로 사료를 공급받고 있다. 도축은 도드람 LPC, 가공은 바른터, 유통은 ㈜도드람푸드 등의 자회사가 맡고 있다. ●브랜드 돼지고기로 10년내 시장 10% 장악이 목표 도드람조합은 도축된 돼지의 70∼80%를 ‘도드람포크’라는 브랜드로 내놓는다. 전국 766개 농가로부터 생돈을 공급받고 있다. 이들 농가가 키우는 돼지들은 전국에서 사육되는 돼지의 16%에 이른다. 하지만 브랜드의 시장점유율은 1.5%에 불과하다. 진 조합장은 “도축시설에 대한 정부의 관리가 미흡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도드람조합은 위생적이고 첨단의 도축시설을 갖췄습니다. 때문에 브랜드육에는 1마리당 도축비가 1만원 남짓 들어갑니다. 하지만 중간 상인들은 비위생적인 도축장에서 돼지를 잡기 때문에 도축비를 절반 이하로 제시합니다.”살아있는 돼지의 가격은 조합이나 일반 농가나 큰 차이가 날 수 없다. 사료비 때문에 기껏해야 1000원 정도 차이가 난다는 것. 하지만 중간 상인들은 도축비를 크게 낮춰 일반 양돈농가에 비싼 가격을 제시해 돼지들을 사기 때문에 시장에서 브랜드육은 클 수가 없다고 진 조합장은 지적했다. 피해는 비위생적인 돼지고기를 먹는 소비자에게 전가된다고 덧붙였다. 따라서 이를 관리·통제 하는 시스템이 필요한 데 현실적으로는 어려움이 있다는 것. 정육점에서 팔리는 모든 육류가 마치 비위생적인 제품으로 인식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2001년 ‘도드람 한마당’이라는 직영음식점을 개설, 소비자로부터 직접 신뢰를 얻고자 했다. 그 결과 지난해 1월에는 ‘소비자 문제를 연구하는 시민의 모임’으로부터 우수축산물 브랜드 인증을 받았다. 앞서 세계식품박람회에서는 세계 최고의 고기로 호평받기도 했다. 도드람양돈조합은 10년내 ‘도드람포크’의 시장 점유율을 10%까지 끌어올린다는 목표를 갖고 있다. 백문일기자 mip@seoul.co.kr ■ ’도드람’ 성공요인 분석 협동조합과 회사의 장점을 결합한 기업형 조합으로 생산 농가들이 합심해 ‘규모의 경제’를 일군 대표적인 사례다. 경영은 최고경영자에게 위임해 의사결정의 효율성을 극대화했고 조합은 지주회사처럼 자회사들의 소유권을 확보했다. 그 결과 책임경영이 이뤄졌고 실현된 이익은 조합원에게 골고루 돌아갈 수 있는 구조를 갖추게 됐다. 개인의 카리스마에 의존한 리더십보다는 지속적인 교육과 조직활동을 통해 조합의 정체성을 유지한 게 특징이다. 도드람은 양돈산업 발전에 필수적인 위생과 품질인증, 생산성 향상, 정보화, 환경개선 등을 경영 목표로 삼았다. 전통 경영에 젖어 조직화가 쉽지 않은 농촌사회에서 조합원 766명이 강력한 리더십을 형성한 원동력이기도 했다. 지금은 브랜드를 통한 마케팅 전략이 일반화했지만 80년대 후반에 도드람이 브랜드를 마케팅에 접목시킨 것은 당시 양돈업계에서는 최초이자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게다가 돼지고기를 지육 형태로 일본에 수출함으로써 우리 농산물도 해외에서 팔릴 수 있다는 자신감과 가능성을 보여줬다. 통관이 까다롭기로 유명한 일본을 개척할 수 있었던 이유는 워낙 품질과 위생관리가 철저했으며 돼지고기를 국내뿐 아니라 해외로 수출하겠다는 목표를 처음부터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구제역 발생으로 대일 수출이 중단됐지만 머지않아 수출이 재개될 것으로 예상된다. ■ 정부에 바라는 벤처농기업의 소리 농기업 대표들은 하고 싶은 말들이 적지 않다. 금융지원 문턱이 제조업체보다 턱없이 높고 신기술 인증이 쉽지 않다. 농업일을 하면서도 근로자들은 농업인으로서의 혜택을 받지 못한다. 생산제품들이 제조업과 농산물의 경계선에 있어 당국으로부터 이중규제를 받기도 한다. 유통이 선진화되지 않아 판로를 확보하기가 무척 어렵다. 하지만 드러내 놓고 속사정을 말할 수도 없다. 열악한 농업 환경에서 자칫 당국의 ‘미운 털’이라도 박히면 경영에 막대한 타격을 받기 십상이다. 매출이 50억원이 넘는 농기업이 200여개,30억원 이상인 농기업이 500개에 이르지만 제도적으로 이들을 지원할 장치는 많지 않다. 정운천 한국농업CEO연합회 회장은 9일 “정부가 각종 농업·농촌 정책을 추진하는데 있어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할 사항은 농촌이 아닌 농업인”이라고 강조했다. 농업 체제가 급변하는 상황에서 농촌을 사업화하는 것은 좋지만 사람이 아닌 기존의 농촌시설에 투자하는 것은 효율성이 없다고 했다. 예컨대 정보화마을이나 신활력산업, 농촌종합개발 등 각 부처들이 경쟁적으로 농촌 회생책을 내놓고 있지만 책임질 주체가 60살을 넘긴 농민이라면 처음부터 한계가 있다는 것. 따라서 우수한 농업인을 키우기 위한 각종 지원과 교육시설이 선결돼야 하며 면(面)단위로 도시계획을 짜되 30∼40대가 중심이 되는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른 농기업 대표들도 “무엇보다도 정부는 시장에 대한 정확한 정보와 자각을 바탕으로 산·학·연과의 연대체제를 갖출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정부, 농민, 시장 등이 따로 움직이면 네트워크를 중심으로 한 시너지를 볼 수 없다고 지적했다. 농림부 관계자는 “혁신 중소기업체인 ‘이노-비즈(inno-biz)’ 대상에 농업경영체도 새로 포함시켜 패키지 방식으로 지원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면서 “농기업을 평가하는 지표가 개발되면 이같은 불만들이 많이 해소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지표를 개발하고 있는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의 김영생 연구위원은 “장기적으로 성장 가능성이 있느냐가 관건이며 ‘이노-비즈’로 선정되면 담보없이 신용대출만으로 30억원을 받을 수 있고 각종 연구비 지원에다 최고경영자에 대한 교육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농기업이 아닌 제조업으로 이노-비즈에 선정된 농기업들은 “이노-비즈 지원을 받으면 200억원의 시너지 효과를 내는 것과 같을 것”이라고 말했다. 백문일기자 mip@seoul.co.kr
  • “中企 장인정신 갖고 기술력 확보해야”

    윤종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중소기업이 살아남을 수 있는 ‘해법’을 제시했다. 윤 부회장은 2일 대전 대덕컨벤션타운에서 열린 중소기업 정책혁신 포럼에서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는 자본금 3만원(현재가치 2억 5000만원)으로 시작했고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는 소판 돈 70원(약 60만원)으로 현대그룹을 일구는 등 대기업도 처음에는 중소기업으로 시작했다.”면서 “이들 기업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열정과 자신감을 통해 미래에 보게 됐으며 인재·기술의 중요성을 깨달으면서 지금의 자리에 서게 됐다.”고 말했다.윤 부회장은 “디지털 시대는 경험보다는 두뇌, 창의력, 스피드가 중요한 시대로 이를 바탕으로 소프트웨어를 만들고 남다른 디자인을 할 수 있으면 대기업이든 중소기업인든 누구나 세계 일등이 될 수 있다.”면서 “자식에게 사업을 물려주겠다는 신념을 갖고 일하면 안될 것이 없다고 본다.”고 강조했다. 윤 부회장은 또 한국 중소기업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장인정신을 갖고 기술력을 확보해야 하고 국내만 보지말고 세계를 봐야 하며 대기업과의 상생협력, 우수한 인재 확보·육성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류길상기자 ukelvin@seoul.co.kr
  • [서울의 문화재] (10) 경교장

    [서울의 문화재] (10) 경교장

    지난 12일 백범 김구(金九) 선생이 기거하다가 서거한 경교장(京橋莊)을 찾았다. 경교장은 2층 석조 건물로 외부 벽면은 화강암과 타일을 붙이고 슬레이트에 고기비늘형 덮개가 씌워져 있는 일본식 건물이다. ●병원건물로 변신… 역사적 의미 거의 몰라 현재 경교장은 강북삼성병원 건물로 쓰이고 있다. 경교장엔 약국과 간호실, 보호자 대기실 등이 있다. 이날도 수많은 외래환자들이 드나들었다. 하루에 700∼800명이 오간다고 한다. 병원 관계자는 “가끔 학생들이 단체로 오긴 한다. 하지만 개인이 역사적 의미를 알고 오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말했다. 파란만장했던 역사의 현장에 날마다 수백명이 경교장과 백범을 보고 느끼기 위해서가 아니라 병원일을 보기 위해 온다는 건 안타까운 일이다. 이유는 다르지만 백범이 있던 당시에도 하루가 멀다하고 이곳엔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다고 한다. 한국독립당 재정부장을 지냈고 1948년 백범과 함께 남북정치회담에 참여했던 신창균(작고)씨는 7년 전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김구 선생이 돌아온 뒤 경교장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았다.”면서 “애국자뿐만 아니라 이광수나 최남선 등 친일파도 선생을 등에 업고 죄를 조금이라도 지우려고 했고 입신과 출세를 위해 온 사람도 많았다.”고 전했다. 하지만 단독정부 수립문제로 백범이 이승만과 대립하고 남북협상을 위해 북한에 다녀온 뒤 사람들의 발길이 뚝 끊겼고 정치자금을 가져오는 사람들도 점점 줄었다고 한다. 이런 경교장에 1949년 6월26일 수십만의 인파가 다시 몰렸다. 이날 백범은 육군 소위 안두희의 저격을 받고 운명했다. 이날 우리 민족은 국부를 잃었고, 슬픔에 잠겼다. 영결식 날인 7월5일 서울운동장에서 장지인 효창공원까지 인파가 길을 메우고 선생의 죽음을 애도했다고 한다. 백범이 서거한 뒤 경교장은 타이완 대사관저로 잠시 쓰이다가 한국전쟁 때는 의료진 주둔지로,9·28수복 후엔 미군특수부대가 주둔하는 등 파란만장한 역사가 이어졌다. 휴전 후 경교장은 월남대사관으로 쓰이다가 1968년 고 이병철 회장의 맏사위가 주인이었던 고려병원이 인수,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그러면서 백범과 경교장의 관계는 사람들로부터 잊혀졌다. 건물 앞 구석에 ‘김구 선생이 서거한 곳’이란 작은 푯말이 있을 뿐 방문한 환자들도 전혀 그 사실을 몰랐다고 한다. 무관심 속에 1996년 경교장은 철거 위기에 처했다. 같은 해 1월 강북삼성병원은 “경교장이 병원 한가운데 있어 병원 건물 신축이 불가능해 이전 또는 철거하겠다.”고 밝혔다. 당시 김구선생기념사업회 등 관련 단체가 강력 반대운동을 펼쳤다. ●이승만 전 대통령 머물던 이화장과 대조적 이에 병원측은 “경교장이 문화재로 지정돼 있지 않아 철거가 가능하다.”며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또 시 문화재위원 2명도 “현장 답사 결과 철거나 이전이 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반발이 빗발치자 서울시는 2일 뒤 문화재위원회를 열고 “경교장이 문화재로 지정되진 않았지만 김구 선생이 거처하면서 암살당한 사적이기 때문에 ‘경교장 이전 불가’”라고 못박았다. 오랫동안 경교장이 문화재가 못 된 건 심한 내부변형 때문이다.1998년 8월29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김구 주석 서거 50주기 추모공연준비위원회’와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관계자가 서거 49년만에 처음 암살 현장을 방문해 추도식을 가졌을 때, 그 곳은 이미 오래전에 ‘의사휴게실’로 바뀐 뒤였다. 하지만 이승만 전 대통령이 동시대에 기거했던 이화장은 대조적이다.1982년 서울시 기념물 6호로 지정됐고 사진과 유품 수천점이 전시되고 있었다. 이승만의 양아들 이인수씨의 소유인 이곳엔 평소에도 30∼40명의 관람객이 찾아오고 관리에 필요한 돈은 서울시에서 부담, 보존하고 있었다. 경교장도 결국 2001년 4월6일 서울시 유형문화재 129호로,2005년 6월13일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됐다. 강북삼성병원은 2001년 경교장이 속한 본관의 리모델링 계획서에 암살 현장에 ‘백범기념실’ 설치를 포함시킨 것으로 알려졌다. 오랫동안 제기된 경교장 복원 여론을 반영한 것이다. 현재 2층엔 백범이 기거했던 방 모습을 재현한 백범기념실이 있다. 이곳엔 그의 흉상과 일생을 다룬 전시물이 있다. 하지만 모두 새 제조물일 뿐 어느 곳에서도 그의 유품은 없다. 또 강북삼성병원은 이미 1996년 10월 2층을 백범의 유품 등의 전시 공간으로 활용하라는 서울시의 권고를 달갑지 않게 생각한 바 있다. 백범 김구는 국민 모두가 독립운동 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인물이고, 대한민국 정부는 임시정부의 법통을 잇고 있다. 하지만 경교장과 이화장은 백범을 중심으로 한 임시정부 세력은 실세했고, 친일파는 득세했다는 뼈 아픈 역사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글 박지윤기자 jypark@seoul.co.kr
  • [염주영 칼럼] 상속세는 자본주의 파수꾼이다

    [염주영 칼럼] 상속세는 자본주의 파수꾼이다

    기업들이 달라지고 있다. 정몽구 회장의 구속을 계기로 재계에 많은 변화의 조짐들이 나타나고 있다. 그 가운데 가장 주목되는 부분이 상속세에 관한 입장 변화다. 이번 주 초 신세계는 자진해서 상속세를 1조원이나 내겠다고 선언하고 나섰다. 삼성에서는 그 이상의 세금도 낼 수 있다는 얘기가 흘러나오고 있다. 지금까지 국내에서는 ‘상속세=바보세’라는 등식이 성립돼 왔다. 정직하게 내는 사람이 오히려 바보라는 뜻이다. 재벌가의 상속세 납부실적은 이를 잘 보여준다. 역대 상속세 최고액 납부자는 1355억원을 낸 설원량 대한전선 회장 유족들이다. 그 다음은 신용호 교보생명 창업자 유족이 낸 1338억원이다. 반면 삼성가의 이병철 회장 유족은 176억원, 정주영 회장 유족은 300억원만 냈다. 기업규모와 납부액을 감안하면 신세계의 ‘상속세 1조원 자진납부 선언’은 커다란 변화라 아니할 수 없다. 무엇이 기업의 생각을 바꾸게 했을까.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법과 정부의 의지 문제라고 생각된다. 우선 상속세법이 달라졌다. 참여정부가 출범한 2003년에 완전포괄주의로 개정됐다. 그 결과 종래에는 모호하고 빠져나갈 구멍이 많았던 규정들이 투명하고 명확하게 정비됐다. 법을 집행하는 정부의 의지도 과거와는 크게 달라졌다. 법을 어기면 적당히 봐주지 않는다는 것을 정몽구 회장의 구속이 잘 보여준다. 그러나 아직도 세상의 변화에 둔감한 집단이 있다. 전국경제인연합회와 일부 보수언론은 상속세를 폐지하거나 대폭 개편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주장의 논거는 이렇다. 상속세를 다 내면 지분이 줄어 경영권을 2세에게 승계하기 어려우므로 상속세를 폐지하거나 대폭 낮춰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재산권은 세금만 낸다면 자자손손 대물림할 수 있지만 경영권은 그렇게 할 수 없다. 경영능력의 검증을 통해 주주들로부터 위임받은 권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업과 기업경영권을 동일시해선 안 될 것이다. 상속세 논쟁은 결국 부의 세습을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문제로 귀착된다. 부의 세습이 죄악인가. 그렇지는 않다. 개인의 이기심과 탐욕을 인정하고 출발하는 것이 자본주의다. 우리가 사유재산제를 인정하는 이상 그 재산을 자식에게 물려주든 사회에 환원하든 그 선택은 기본적으로 소유자의 자유임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부의 세습이 권력 세습과 마찬가지로 민주사회가 지향해야 할 가치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부의 형성에 어떤 기여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누구의 자식이라는 이유만으로 막대한 부를 대물림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유재산제 하에서 부의 세습은 불가피하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도덕적이라거나 합리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상속세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부족한 부분을 메워주는 최소한의 법적 장치라고 할 수 있다. 부의 세습이 갖는 흠결을 보완하고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하는 비용인 셈이다. 그 최소한의 기준을 거부하는 것은 단견이며 현명하지 못한 생각이다. 부시 행정부의 상속세 폐지법안에 반대운동을 벌이는 빌 게이츠 시니어(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회장의 부친)의 다음 발언은 음미해 볼 만하다. “부자들은 사회에 특별한 빚을 지고 있기 때문에 상속세를 내야 한다. 부자들의 부는 자본주의에 대한 사회의 강력한 지지 없이는 불가능하다.”자본가와 기업인들은 자본주의의 최대 수혜자들이다. 그들이 상속세 폐지를 주장하는 것은 자본주의를 위태롭게 하는 일임을 알아야 한다. 수석논설위원 yeomjs@seoul.co.kr
  • 이건희회장 집 85억 2000만원 가장 비싸

    이건희회장 집 85억 2000만원 가장 비싸

    우리나라에서 가장 비싼 집은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에 있는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의 자택이다. 이 회장은 이밖에 전국에서 세번째와 네번째로 가장 비싼 집도 보유, 국내 최고가 주택 5채 가운데 3채를 갖고 있다. 27일 건교부에 따르면 이건회 회장의 자택은 공동주택 871만가구와 단독주택 430만가구 등 국내 1301만가구를 통틀어 공시가격이 가장 높았다. 국내에서 가장 비싼 이 회장 자택의 공시가격은 85억 2000만원으로 지난해보다 10억 7600만원 올랐다. 공시가격이 시가의 80% 수준도 안 되는 점을 감안하면 실제로 100억원을 훨씬 넘을 것으로 추산된다. 이 회장은 또 공시가격 기준 국내에서 세번째로 비싼 서울 중구 장충동1가 단독주택(71억원)도 갖고 있다. 고 이병철 선대회장이 살았던 집으로 한때 이재현 CJ 회장이 살다 떠난 뒤 지금은 비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아파트, 연립주택, 다세대주택 등 공동주택 중에서는 서초구 서초동에 있는 빌라 ‘트라움하우스5’가 가장 비싸다.230평형인 이 집의 공시가격은 40억원으로 지난해(32억 8000만원)보다 7억 2000만원 올랐다. 트라움하우스는 2003년 분양됐으며 대피할 수 있는 철벽 방공호,24시간 경비원이 상주하는 폐쇄회로 감시시설, 원목 마루, 수가공 대리석, 철제 유압식 현관문, 중앙정수시스템, 스팀 사우나, 수공으로 덧칠한 벽체 등 최상급의 자제와 시설을 갖추고 있다. 주현진기자 jhj@seoul.co.kr
  • [세계는 ‘실탄’ 없는 에너지전쟁중] 한국 유전투자 日의 15분의 1… 공공투자는 28배差

    [세계는 ‘실탄’ 없는 에너지전쟁중] 한국 유전투자 日의 15분의 1… 공공투자는 28배差

    한국의 지난 1월 원유 도입액은 지난해 같은달(23억 8100만달러)보다 무려 74.5%나 증가한 41억 9600만달러였다.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던 지난해 9월의 41억 6500만달러를 뛰어 넘었다.2월 역시 44억 8100만달러로 최고치 경신을 이어갔다. 이같은 고유가 여파로 1∼2월 무역수지 흑자는 8억 8000만달러로 지난해 1∼2월 50억 800만달러의 5분의1에도 미치지 못했다. 말 그대로 한국경제에 ‘빨간불’이 켜진 셈이다. 지난 16∼17일 3년 만에 개최된 해외 주재 상무관 회의에서도 에너지·자원 확보 문제가 주요 이슈로 떠올랐다. 서울신문은 러시아·캐나다·사우디아라비아·브라질·인도네시아 등 자원부국 상무관과 중국·일본·인도 등 자원 확보에 여념이 없는 국가 상무관들이 참석한 가운데 ‘긴급 좌담회’를 갖고 숨가쁘게 돌아가는 세계 각국의 에너지 전쟁 현황과 우리의 대응 방안을 모색해 봤다. ●오영호 산업자원부 자원정책실장 최근 주요국의 에너지 자원 확보 경쟁은 수요-공급이 불균형을 이룬데다 에너지 자원이 중동, 러시아 등 지역적으로 편재되고, 이를 둘러싸고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것이 주된 요인이다. 특히 미국의 대 중동 영향력 확대와 중국의 사활을 건 에너지 확보 노력이 최근의 고유가와 맞물려 자원전쟁으로 격화되고 있다. 이처럼 에너지 자원을 확보하기 위한 강대국간의 경쟁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군사력도 하나의 수단으로 동원될 소지가 있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원유 확보와 중국 견제로 보는 시각이 있는가 하면, 중국-일본간에도 시베리아 송유관 노선결정 문제와 천연가스가 매장된 센카쿠 열도의 영유권 분쟁 등 자원확보 경쟁이 뜨겁다. ●김동선 주 중국 상무관 2000∼2005년 중국경제는 연평균 9% 성장했고 에너지 소비 증가율은 11%에 이르렀다. 중국도 석유 생산국이지만 워낙 수요가 많기 때문에 지난해 수입의존도가 42.9%나 된다. 때문에 외교력과 경제력을 총동원해 에너지 확보에 사활을 걸고 있다. 매년 초 외교부장이 아프리카를 순방하고 있고 원자바오 총리와 후진타오 주석도 이미 아프리카를 순방한데 이어 올해도 후진타오 주석이 아프리카 10개국을 돌아볼 예정이다. 특히 지난해 중국해양석유총공사(CNOOC)가 미국의 정유사 유노칼을 인수하려 했지만 미 정부의 제재로 실패한 이후 반미 성향인 아프리카 수단, 남미 베네수엘라, 이라크·이란, 인도·카자흐스탄 등과 활발한 에너지 외교를 펼치고 있다. 지난해 8100억달러에서 올해 1조달러로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는 외환보유고를 활용한 해외 자원 투자도 무섭다. 중국 국영석유회사인 페트로차이나(석유천연가스집단공사·CNPC)의 유전 투자(2004년)는 72억달러로 한국석유공사(6억 6000만달러)의 11배나 된다. 확보한 매장량도 109억배럴로 석유공사(7억배럴)의 15배가 넘는다. ●서석숭 주 일본 상무관 일본은 세계 2위 석유수입국으로 수입의존도가 높고 특히 중동 의존도가 88%나 되는 등 우리와 유사한 구조다. 다만 석유비축량이 153일치나 되고 에너지소비가 포화상태에 이르러 최근 국제유가 인상 등에 대한 절박함이 우리보다는 덜한 편이다. 배럴당 80달러까지는 버틸 수 있다고 보고 있다. 하지만 석유의 중동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사할린 석유·가스개발 프로젝트, 카자흐스탄·카스피해 유전 지분매입 등 해외 유전 탐사에 과감한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 특히 미국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란 아자데간 유전 투자를 감행했는데 고이즈미 정부의 친미성향을 감안하면 이례적이다. 군사안보는 미국의 힘으로 해결되지만 에너지자원은 직접 챙겨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기 때문이다.2000년까지 일본이 해외 유전개발에 투자한 금액은 501억달러로 한국(32억달러)의 15배가 넘었다. 이 가운데 공공부문의 투자는 200억달러로 한국(7억 2000만달러)의 28배나 됐다. ●이병철 주 인도 상무관 인도는 이제 완전한 고도성장 가도를 달리고 있다. 연간 8% 이상 경제성장이 확실시된다. 당연히 에너지 소비도 늘어 인도의 석유 수입의존도는 2004년 70%에서 2030년이면 94%로 늘어날 전망이다. 때문에 자국내 미개발 유전을 적극 탐사하기 위해 72개 광구를 국내외 업체에 분양했다. 해외 투자도 활발한데 국영 석유회사인 ONGC는 이란·이라크·러시아·수단 등 10개국의 탐사·생산 사업에 참여했다. 또 다른 석유회사인 IOC는 LNG구매와 유전 투자를 더해 25년간 300억달러를 투자하는 계약을 이란과 체결했다. 원자력에 대한 관심도 대단한데 9개의 원전을 건설중이다. ●오영호 실장 자원 확보에 목을 맨 국가들과 달리 러시아 등 자원 부국들은 에너지 기업에 대한 정부의 지배력을 강화하는 등 에너지 자원을 국익 극대화를 위한 무기로 활용하고 있다. 실제 어떻게 움직이고 있나. ●유종주 주 러시아 상무관 중동의 불안으로 자원부국인 러시아의 위상이 굉장히 높아졌다. 러시아는 천연가스 매장량 세계 1위(26%), 석유 매장량 6위(6.1%)다. 정부가 세계 최대 가스회사인 가즈프롬 지분 10.74%를 추가 매입해 지분을 50% 이상으로 늘리는 등 에너지 자원을 국유화하고 있다. 과거에는 핵무기로 세계를 지배했다면 이제 에너지 자원이 무기가 되는 셈이다. 올초 엄청난 파문을 일으킨 우크라이나 가스 공급 중단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러시아 정부는 유럽쪽에 편중돼 있던 에너지 공급과 송유·가스관을 아·태지역으로 확대할 계획인데 2020년까지 약 1300억달러가 투입된다. 사할린 개발사업에는 일본에서도 자금을 대고 있다. ●염동관 주 브라질 상무관 국제 원자재난으로 외국기업의 남미 자원개발에 대한 관심이 높지만 12개국 가운데 8개국에 좌파정부가 출현 또는 수립될 예정이어서 에너지 자원을 무기화하려는 경향이 뚜렷하다. 볼리비아에서는 비록 실행에 들어가지는 않았지만 외국기업을 국유화하겠다는 ‘섬뜩한’ 발언까지 나왔다. 반미성향이 강한데다 서방기업들이 자신들의 자원을 착취했다는 의식도 강하다. 중국이 상당히 공을 들이고 있다. ●김동용 주 사우디아라비아 상무관 세계 원유 매장량의 60%, 가스매장량의 37%가 중동에 묻혀 있다. 중동국가들은 러시아나 남미와 달리 에너지를 무기화하기보다는 적정가격을 유지하면서 석유로 인한 국가 재정수입을 극대화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요즘 들어 달라진 부분이라면 대표적인 친미국가인 사우디가 미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인도, 중국과 손잡고 공급처를 다변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사우디 초대 국왕이 미국과의 우호적인 관계 유지를 유언으로 남길 정도이기 때문에 대미 관계가 크게 악화되지는 않을 것이다. 중동 국가들은 경제의 석유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석유화학 플랜트 건설,IT산업 투자에 나서고 있는데 우리로서는 좋은 기회다. ●신동학 주 인도네시아 상무관 인도네시아는 전 세계 석유의 1.8%를 생산하는 17대 산유국이자 아시아 유일의 석유수출국기구(OPEC) 회원국이지만 기존 유전의 노후화와 신규 유전 개발 부진으로 2004년 석유 순수입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눈에 띄는 에너지 정책은 지난해 10월 석유 소비자 가격을 2100루피아에서 4500루피아로 2배 이상 올려 버린 것이다. 그동안 정부 보조금으로 석유 소비가격을 낮게 유지해 왔는데 이로 인해 재정이 악화되자 이같은 조치를 단행한 것이다. 앞으로 석유 의존도를 줄이고 천연가스로 에너지원을 다변화할 방침이다. 원자력에 대한 관심도 높아져 2016년 가동을 목표로 우리와 물밑에서 협상중이다. ●문승욱 주 캐나다 상무관 우리는 잘 모르지만 캐나다는 세계 9위 석유 생산국이자 사우디에 이어 2위 부존국이다. 천연가스 생산도 3위다. 다만 해외고객이 미국밖에 없기 때문에 ‘소문’이 안났을 뿐이다. 캐나다산 원유·가스가 미국 전체 소비의 15%를 차지한다. 캐나다 원유는 중동과 달리 오일샌드(아스팔트라 불리는 역청이 모래 등과 결합된 형태)로 존재하는데 분리 비용이 배럴당 25달러나 돼 그동안 외면받았지만 고유가로 ‘몸값’이 크게 뛰었다. 내년쯤이면 캐나다 원유 생산의 절반을 오일샌드가 차지할 것이다. 캐나다가 에너지 수출의 100%를 미국에 의존하기 있기 때문에 불안감을 느끼고 있던 차에 중국이 나타났다. 지난해 후진타오 주석이 방문해 오일샌드 개발을 합의했다. 캐나다 정부도 미국 방향으로만 뻗어 있던 송유관을 태평양 연안으로 확장할 계획이다. ●오영호 실장 에너지 확보와 함께 수요관리도 중요한데 각국의 에너지 절약 시책을 소개해 달라. ●김동선 상무관 중국은 현재 68%에 이르는 석탄화력 의존도를 줄이고 천연가스, 신재생에너지의 비중을 늘릴 계획이다. 각 성에서 남발되던 화력발전소 건립을 중단시키는 등 엄격히 규제하고 있다. 대신 원전 31기를 추가로 건설할 계획이다.2010년까지 단위 GDP당 에너지 소모량을 지난해 말 대비 20% 줄인다는 목표다. ●서석숭 상무관 일본은 승용차의 에너지 소비를 2010년까지 95년 대비 22.8% 낮춘다는 방침이다. 하이브리드카 보급을 촉진하기 위해 세제우대는 물론 보조금까지 주고 있다.2010년까지 태양광주택 100만가구를 보급하고 대체에너지 비율을 7%까지 높일 방침이다. ●오영호 실장 일본은 전기요금이 워낙 비싸서 태양광 등 대체에너지 개발 욕구가 우리보다 강할 것이다. 한국은 1982년 한전이 공사로 전환한 이후 지난해까지 전기요금을 8차례 올렸고 11차례나 내려 요금 인상이 0.5%에 그쳤다. 대체에너지는 발전단가가 높기 때문에 막대한 정부 보조금이 필요한데 산업성장을 지원하기 위해 유지했던 각종 에너지요금 지원을 재검토해야 할 시점이다. 세계 에너지 질서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국가 차원의 에너지 안보전략을 모색해야 한다.20년 이상을 계획기간으로 하는 국가에너지기본계획을 올해 말까지 수립해 내년 상반기중 확정할 계획이다. 최근의 에너지 위기는 역으로 우리에게 기회일 수도 있다. 산유국들이 석유 가채 매장량이 고갈될 수 있다는 인식이 높아져 산업 발전 욕구가 강하다. 조선, 디스플레이, 반도체, 자동차, 철강 등 우리의 강점을 적절히 활용하면 과거처럼 에너지를 ‘구걸’하지 않아도 된다. 자원 부국들이 주로 구미 열강 식민지 경험이 있기 때문에 중국 같은 강대국과의 자원 확보 경쟁에서 유리한 측면도 있다. 물론 메이저급의 자원 개발 전문기업·전문인력 육성이나 막대한 규모의 자원개발 재원 마련 등은 시급한 과제다. 류길상기자 ukelvin@seoul.co.kr
  • 두을재단, 97명에 장학금

    두을장학재단(이사장 이인희 한솔그룹 고문)은 4일 서울 강남구 역삼동 한솔그룹 사옥에서 여대생 97명에게 장학증서를 수여했다. 재단은 장학생들이 졸업 때까지 등록금 전액과 자기계발비를 지원하고 졸업 후에도 전문분야 진출을 꾸준히 도울 계획이다. 장학생은 여성 진출이 미흡한 이공계, 고급 공직 등의 분야로 진출하려는 여대생을 중심으로 선발했다. 재단은 삼성그룹 창업자인 고 이병철 회장의 부인 고 박두을 여사의 장학사업에 대한 유지를 기려 2000년 설립됐다. 한솔그룹 이인희 고문, 신세계그룹 이명희 회장, 호암미술관 홍라희 관장, 제일제당(현 CJ) 손복남 고문, 새한그룹 이영자 전 회장이 기금을 조성한 국내 첫 여성장학재단이다. 재단측은 “졸업생들이 공무원·대기업 등으로 진출하고 있어 앞으로 우리 사회를 이끌어나갈 인재들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고 밝혔다.류찬희기자 chani@seoul.co.kr
  • 이인희 한솔고문 희수연

    삼성 창업자인 고(故) 이병철 회장의 3남5녀 중 첫째 딸이자 이건희 회장의 큰누나인 이인희(77) 한솔그룹 고문이 20일 강원도 오크밸리에서 희수연(喜壽宴)을 가졌다. 희수연에는 이 고문의 동생인 숙희·순희·덕희·명희(신세계 회장)씨와 아들인 조동혁·동만·동길(한솔그룹 회장)씨, 조카인 이재현(CJ그룹 회장) 등 범(凡) 삼성가 등 내외 인사 300여명이 참석했다. 범 삼성가가 한자리에 모인 것은 지난달 18일 고 이병철 회장의 18주기 합동 참배식 이후 한달여 만이다. 이종락기자 jrlee@seoul.co.kr
  • “뒤돌아볼 소중한 시간 됐습니다”

    “뒤돌아볼 소중한 시간 됐습니다”

    이건희 삼성 회장이 최근 정·재계와 언론계 등 사회지도층 인사들에게 연하장을 보내 관심이 쏠린다. 삼성측은 “해마다 연하장을 보낸 만큼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고 밝혔지만 이 회장이 올해 겪은 일들과 100일 이상의 장기 해외체류 등이 맞물리면서 그의 연하장 메시지가 이목을 끈다. 이 회장의 연하장에는 “지난 한 해는 뒤를 돌아볼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밝아오는 새해에는 미래와 희망을 함께 나눌 수 있는 보람찬 한 해가 되었으면 합니다.”라는 간단한 글귀로 이뤄져 있다. 송년인사로 해석될 수 있는 대목이 있지만 여러 의미로 해석할 수 있는 구절도 있다. 이 회장은 지친 심신으로 연내 귀국이 어려워지면서 연하장으로 연말연시 인사를 대신한 것으로 보인다. 이 회장은 오는 22일 청와대에서 열리는 ‘대·중소기업 상생협력회의’에 참석하기가 어려울 것으로 알려져 이에 앞서 열리는 가족행사인 이인희(77) 한솔 고문의 ‘희수연’에도 불참할 전망이다. 이 고문은 고 이병철 삼성 회장의 장녀로 오는 20일 강원도 오크밸리에서 희수연을 갖는다. 김경두기자 golders@seoul.co.kr
  • 교보 사옥 ‘광화문 글판’ 15년째 명물

    서울 종로 1가 1번지에 위치한 교보생명 사옥은 2006년 대대적인 리모델링을 계획하고 있다.지난 1980년 준공 이후 처음이다.25년이란 세월의 흔적이 믿기지 않을 만큼 여전히 세련된 멋을 풍기는 이 빌딩 곳곳에는 고 신용호 창립자의 아이디어와 손길이 묻어 있다. 답답한 도심속 명상의 여유를 제공한 ‘광화문 글판’은 15년째 이 지역 명물로 자리잡고 있다. 기업 홍보 플래카드나 걸었을 법한 시대적 배경을 감안하면 창립자의 글판 아이디어는 매우 독특하지 않을 수 없다.그가 문학과 예술분야의 타고난 기질을 경영에 접목시킨 ‘감성경영의 선도자’란 평가를 받는 이유다. 그는 유달리 건축에 관심이 많았다. 사옥 설립 계획을 세우며 외국 건축물 견학에 나서기도 했고, 아예 전문통역관을 두고 외국의 유명 건축가들을 초청해 강의를 듣기도 했다.교보빌딩 3층의 집무실 책상에는 생전에 즐겨 봤던 건축 관련 도서들과 습지에 그렸던 설계도면들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실제로 그는 사옥의 엘리베이터 자재까지 일일이 챙기는 열성을 보였다. 세계 10대 건축가인 마리오 보타에게 1987년 맡긴 강남 교보타워 설계는 1996년에야 완성될 수 있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깐깐한 관여와 완벽성 때문에 무려 열일곱 번이나 전문가의 설계를 퇴짜놓은 일은 건축에 대한 그의 전문성과 집착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어릴 땐 병마와 싸우느라 고향 친구를 사귀지 못했고 학교 문앞에도 가보지 못해 동창생이랄 만한 이도 없었지만, 고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가 이끌었던 골프모임인 ‘수요회’를 통해 각계 인사들과 친분을 쌓을 수 있었다.그곳에서 만난 고 월전 장우성 화백은 교보빌딩의 색깔을 정해준 그의 40년 지기로 꼽힌다. 예술을 사랑해 이육록 화백의 후원자로 활동하며 골프장 회원권까지 선물로 주었을 정도다. 이 화백이 그린 436점의 수채화는 광화문 교보빌딩과 연수원인 천안 계성원 곳곳에 걸려 있다. 그는 말년까지 170㎝의 올곧은 서구적 체형을 유지하며 색조와 무늬가 유별날 만큼 깔끔하고 똑 떨어진 옷차림으로 눈길을 끌었다. 그에게 심미적 감각이 배어 있다는 평가가 그래서 나온다.jhj@seoul.co.kr
  • 병원은 인술이냐 기업이냐

    병원은 인술이냐 기업이냐

    4월은「보건의 달」- .「빌딩·붐」과 발맞춰 요즘 서울엔 병원 신축「붐」이 일고 있다.「한 집 건너 병원」도 그렇지만 병원들의 고층화, 특대화, 기업화 경쟁 또한 치열하다.「병원주식회사」도 있다.「병원장사」는 정말 괜찮을까. 서울시내에 있는 종합병원, 일반병원의 수는 모두 1백여 개. 병원이「호텔」이라면 여관 정도에 해당하는 의원 또한 1천 5백여 개소나 있다. 이들 병원들이 요즘 갑자기 대형화하는 이변이 생겼다. 서울대학병원이 1천 2백「베드」를 목표로 작년에 신축기공된 데 이어 영등포엔 역시 1천「베드」규모의 군종합병원이 세워지고 있다. 경희대학교는 지상 17층의「매머드」병원을 이미 신축 완료했으며 한양대학교도 20층짜리 종합「메디컬·센터」를 구내에 지으리라는 정보. 이화여자대학교, 우석대학교, 한일병원 등에서도 10층 이상의 특대형 병원 건축을 계획 중에 있고「가톨릭」의대에서는 13층짜리 산재(産災)병원을 신축 중에 있다는 소식이다. 요즘엔「병원주식회사」라는 새 용어가 생겼다. 주식회사 형태를 갖춘 우리나라 최초의 의료법인체는 지난해 11월 5일 개원한 고려병원. 의료법인체는 아니지만 합자형식으로 이루어진 개인병원엔 11층짜리 성심병원도 있다. 지난번 종합병원으로 새로 발족한 서대문의「한 병원」은 개인소유로 1백「베드」를 넘은 최초·최대의 병원. 서울 시내에 있는 큰 병원을 구역별로 보면 - ▲ 중구 = 성모병원, 경찰병원, 국립의료원, 백병원, 성심병원, 제일병원 ▲ 종로구 = 서울의대부속병원, 이화여대부속병원, 우석의대부속병원, 안국병원. ▲ 서대문구 = 고려병원,「세브란스」병원, 적십자병원, 한일병원. 대부분이 중구, 종로구, 서대문구에 밀집해 있다. 병원관리학을 전공한「세브란스」병원 임의선(林宜善)원장에 의하면 현대 병원의 대형화, 기업화는 어쨌든 불가피하다. 새로운 학문, 새로운 의료기재를 항상 들여와야 하는 병원은 재력이 있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경영의 합리화를 도모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의사가 아니면 병원장이 될 수 없도록 한 우리나라 의료법도 근본적으로 시대성을 외면한 것이라는 중론이다. 일본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의료법인체는 병원의 특수성을 살리면서 일방 그 기업성을 그대로 유지시킬 수 있는 이상적인 병원 형태라는 것. 20층을 향해 치솟는 병원도, 주식회사를 표방하는 의원도 결국은 시대적 요구로 옹호될 수밖에 없는「인술혁명」의 초기증상이라는 것이다. ◇ 국립의료원 (을지로 6가 18-79) 병상(病床) 450 / 직원 653명 / 58년 개원 / 19개 과목 진료 1958년 9월 30일 개원.「스칸디나비아」3국이 작년 9월까지 관리했다. 총 병상수 450개. 진료과목이 19개로 우리나라에선 가장 많은 과목을 진료하는 종합병원. 해마다 약 1백만「달러」어치의 최신의료장비를 도입, 지금까지는 국내에서 가장 시설·장비가 좋았으나 정부 인수로 앞으론 다소 발전이 둔화되리라는 의료계의 전망. 상임전문의 43명, 상임의사 9명,「레지던트」71명,「인턴」17명, 간호원 214명, 기타 359명 등 직원 653명. 원장 윤유선(尹裕善). ◇ 성심병원 (필동 2가 82-1) 병상 160 / 직원 243명 / 3등 입원료 800원 원장 윤덕선(尹德善). 한국의과학연구소 부속병원이다. 지상 11층, 연건평 1440평으로 총 병상수는 160「베드」. 입원료는 특실(9개) 6천~7천원, 1등실 4천~5천원, 2등실 1천 5백~2천 5백원, 3등실 8백원. 특실엔 변소,「샤워」, 냉장고, 전화, 응접실「세트」에「카피트」가 깔려 있다. 3등실까지「에어컨」이 들어가고 국내유일의 SPS장치(산소흡인·특수「가스」공급을 중앙화한 것)가 되어 있다. 의사 53명, 간호원 56명, 간호보조원 53명, 기사 13명, 사무직원 70명으로 구성. ◇ 성모병원 (명동 2가 1) 병상 426 / 1936년 개원 / 최저입원료 8백원부터 병실 136개에 병상수는 426개. 1936년 5월 11일 경성구 천주교회 유지재단이 관리하는 병원으로 개원, 내과·외과·소아과·산부인과·정형외과·흉곽외과·안과·피부과·이비인후과·비뇨기과·물리요법·치과·정신신경과·임상병리과 등 15과목 진료. 특실이 7천~8천원, 1등 5천원, 2등 4천원이며 그 다음 2천 5백원, 1천 8백원, 1천원, 8백원짜리「베드」가 있다.「가톨릭」계 병원은 이밖에도 성「요셉」, 성가(聖家), 성「바오로」등 3개가 서울 시내에만 더 있다. 증축계획은 없는 듯. 의료원장은 유수철(柳秀徹) 신부. ◇ 서울의대 부속병원 (연건동 28) 병상 500여개 / 직원 778명 / 공동실 입원료 7백원부터 총「베드」수 5백여 개. 1899년 서립된 최고(最古)·최대의 국립 의료기관이다. 71년 준공을 목표로 신축 중인 새 건축물은 쌍 Y자형의 초「매머드」. 1천 2백「베드」이상을 확보하여 동양 굴지의 대병원이 될 듯. 대통령의 최종 결재가 안나 예산규모는 확실치 않으나 20억~30억원의 신축자금이 투입될 예정이란다. 입원료는 특A 4천 5백원, 특B 3천 5백원, 2천 5백원, 2천 1백원, 1천 9백원(이상 1인용)이며 공동실은 1천 50원, 7백원짜리의 두 가지가 있다. 진료과목은 16과목. 상임의사 81명,「레지던트」133명을 포함, 직원수는 778명. ◇ 고려병원 (충정로 1가 1) 병상 130 / 원장 조운해(趙雲海)씨 / 6인실 입원비 1천원 원장 조운해씨는 삼성재벌 총수 이병철(李秉喆)씨의 맏사위. 지하 1층, 지상 7층으로 병상수는 130「베드」. 증축이 끝나면 5월 1일부터 180「베드」로 늘어난다. 입원료는 특A실이 8천원, 특B실이 5천 5백원, 2인실 2천 3백원, 4인실 1천 6백원, 6인실 1천원. 특실에는 TV, 냉장고, 전화,「인터폰」, 욕실 등 호화시설이 갖추어져 있다. 옛 경교장(京橋莊) 자리. 「센트럴·시스팀」으로 된 냉·난방시설 완비. 고려병원은 주식회사 형식으로 된 국내 초유의 의료법인체.「인큐베이터」10개, 인공소생기 2개로 된 신생아실의 시설이 국내 최고라는 평. ◇ 한양메디컬센터 (행당동 산 812) 병상 600 목표 / 3월 기공 / 내년까지 우선 5층만 완공 작년에 인가를 받은 한양대 의대 부속병원. 지상 20층에 600「베드」를 목표로 하고 있다. 지난 3월 31일 기공. 작년에 뽑은 의예과생들이 본과생이 되는 내년 3월까지 우선 5층만을 완공 160「베드」를 확보할 예정이다. 총예산 20억원 정도. 문교부의 8월말 한(限) 시설확보 지시가 있어 기공을 서둘렀는데 한양대 측은 교수와 진료「팀」확보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완공되면 아마도 한국에서 가장 높은 병원 건물이 될 듯. 성동구 관내 주민을 주로 진료 대상으로 할 예정. ◇ 세브란스병원 (신촌동 산15) 병상 500 / 1885년 개원 / 일반병실 입원료 900원 오는 8월 10일께 준공하는 별관 특실(90「베드」)까지 합하면 총 병상수는 500. 1855년 개원된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병원. 광혜원(廣惠院)이 모체. 부속 재활원이 있고 곧 일본 의료단체의 시설기재 기증으로 부속 암「센터」를 세울 예정이다. 입원료는 특A 9천원, 특B 5천 5백원(별관)이고 본관은 특실 8천원, 1인용 4천 5백원, 2인용 2천 2백원, 일반병실(5~6인용) 9백원이다. 단위 사설 의료기관으론 국내 최대. 하루 입원료 2만 5천원짜리 귀빈용 특실이 하나 있다. 연간 예산만도 5억여 원. ◇ 경희대 부속병원 (회기동 산4) 병상 1000 / 70년 봄 개원 예정 / 양방·한방·치과 등을 한곳서 지상 17층. 1천「베드」규모의「매머드」종합병원인데 70년 봄까지 우선 6백「베드」를 완공, 개원한다. 건물공사는 이미 완료. 서독차관과 AID자금 2백만「달러」로 지금 최신의료기재를 도입 중에 있는데 특기할 만한 기계론「코발트·60」,「다이나·카메라」등. 경희의대엔 한방과가 있어 이 병원엔 양방·한방·치과가 함께 들어서 명실공히 종합병원이 될 듯. 비교적 큰 병원이 없는 청량리 방면 주민의 보건 관리에 역점. 총 공사비 2억원(외자 포함)이 투입됐다. [ 선데이서울 69년 4/20 제2권 16호 통권 제30호 ]
  •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동양그룹-창업주 故 이양구회장家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동양그룹-창업주 故 이양구회장家

    동양은 국내 재벌가(家)에서 최초로 사위가 승계한 그룹이다. 동양 창업주인 고 이양구 회장이 1945년 북에서 혈혈단신으로 월남한데다 이관희(76)여사 사이에 딸만 둘을 둔 것과 무관치 않다. 이 창업주의 차녀인 화경(49)씨가 일찍이 경영에 참여해 현재 오리온 사장직을 맡고 있지만 동양의 ‘경영 대권’은 맏사위인 현재현(56) 동양 회장과 둘째 사위인 담철곤(50) 오리온 회장에게 돌아갔다. 가족 구성원이 단출한 만큼 이 창업주가(家)의 혼맥도는 정·관·재계에 든든하게 뿌리를 내린 국내 여느 재벌가와 달리 단순하다. 또 이 창업주가 딸들의 통혼을 통해 사돈가(家)의 후광을 기대하기보다 자신의 유업을 이어갈 사위들의 ‘사람 됨됨이’를 우선적으로 고려한 것도 혼맥의 단순함을 더했다. 특히 오리온 담 회장의 집안이 화교 출신이어서 더욱 그러하다. ●‘설탕왕·시멘트왕’ 이양구 창업주 동양 창업주인 서남(瑞南) 이양구 회장은 1916년 함경남도 함주군의 작은 농가에서 부친 이교흠(작고)씨와 모친 김성자(작고)씨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부친이 25세의 젊은 나이로 병사하면서 서남의 어린 시절은 힘겨운 생활로 점철됐다.15세의 늦은 나이에 보통학교 졸업장을 받은 서남은 상급학교 진학 대신 ‘함흥물산’이라는 일본인이 운영하는 식료품 도매상에 취직했다. 서남은 훗날 이곳에서 ‘정직과 신용’이라는 상도를 배웠다고 밝혔다. 8년간 악착같이 돈을 모은 서남은 1938년 식품도매상인 ‘대양공사’를 시작으로 6·25전까지 수차례의 회사를 세우며, 막대한 부를 축적했지만 그때마다 역사의 수레바퀴에 치여 뜻을 제대로 펼치지 못했다. 고향에 수십만평의 토지와 1억원에 가까운 거금도 삼팔선과 전쟁으로 잃었다. 그러나 그는 부산에서 설탕도매업을 기반으로 재기에 성공했다. 전시의 특수 경기와 생필품 부족이 거꾸로 그에게 기회를 준 것이다. 서남은 부산과 마산, 대구 등에서 이른바 ‘설탕왕’으로 불렸다. 서남은 당시 국내 유일하게 설탕을 생산했던 고 이병철 삼성 회장, 고 조홍제 효성 창업주와 가까운 사이였다. 서남은 1955년 삼성 이 창업주와 풍국제과의 배동환씨 3인의 공동 출자로 동양제당공업주식회사를 설립했으며, 풍국제과의 경영에도 참여해 오늘날 오리온(옛 동양제과)의 기틀을 다졌다. 또 동양제당이 국내 최고의 역사를 지닌 삼척시멘트를 인수하면서 서남은 자연스럽게 시멘트 사업에 진출하게 됐다. 서남은 1957년 삼척시멘트를 동양시멘트공업주식회사로 사명을 변경한 뒤, 노후시설 교체와 증산을 통해 한때 시멘트 왕국을 건설하기도 했다. 그러나 기업 경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신규 업체의 대거 진입으로 시멘트가 남아돌았고, 정부의 금융 긴축정책으로 동양은 뿌리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 결국 서남이 훗날 ‘운명의 날’이라고 밝혔던 1971년 9월10일 법원에 회사보전신청을 제출해 세인으로부터 온갖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눈덩이처럼 불어난 사채에도 불구하고 동양은 살아났다. 정부의 사채동결조치가 사실상 동양의 구명줄이었으며, 평상시 쌓아온 정직과 신용도 큰 도움이 됐다. ●운명적인 만남 서남과 이관희 여사의 인연은 그야말로 드라마틱하다.6·25가 이들을 만나게 하고, 또 헤어지게 만들었지만 결국은 거제도에서 부부의 인연을 맺게 했다. 6·25 발발로 3년 5개월만에 공군 소속으로 귀향한 서남은 모친의 부탁에 이관희씨와 약혼했다. 그의 나이 34세였다. 관희씨는 당시 함흥의 명문인 영생고녀(永生高女)를 나와 교편을 잡고 있었다. 그러나 중국군의 전쟁 개입으로 두 사람은 결혼식도 못올리고 생이별을 하게 됐다. 부산으로 내려온 서남은 가족 소식을 알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니다가 뒤늦게 피란선을 타고 월남해 거제도에 머물던 관희씨와 극적으로 만났다. 이 여사는 현재 서남재단 이사장으로 남편의 유업을 기리고 있다. 서남과 이 여사는 슬하에 장녀 혜경(53)씨와 차녀 화경씨 등 2녀를 뒀다. 이화여대 미대와 동대학원을 졸업한 혜경씨는 평소 집안끼리 잘 알고 지내던 고 김옥길 이화여대 총장의 중매로 1976년 현재현 회장과 결혼했다. 현 회장은 당시 부산지검 검사로 재직중이었다. 그는 경기고와 서울대 법대를 졸업했으며, 대학 3학년 때 12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혜경씨는 현재 전공을 살려 동양매직 고문으로 활동하고 있다. 현 회장의 집안은 전형적인 선비 가문이다. 고려대 초대 총장을 지내고 ‘유학계의 마지막 거두’로 알려진 고 현상윤 총장이 그의 조부이며, 이화여대 의대 교수를 역임한 고 현인섭씨가 그의 부친이다. 그는 고 현 교수의 3남2녀 가운데 셋째다. 첫째는 고려대 대학원장인 현재천(61)씨이며, 둘째는 현재민(59) KAIST 교수, 장녀는 현재희(51) 세종대 교수, 차녀는 현재란(49) 의사로 현재 이화의원 원장이다. 현 회장과 이 고문은 ‘정담(28·여)-승담(25·남)-경담(23)-행담(18)’ 등 1남3녀를 두고 있다.2세 모두 미국 스탠퍼드대를 다녀 현 회장과 동문이다. 첫째인 정담씨는 스탠퍼드대에서 심리학과 경제학을 복수로 전공한 뒤 지금은 MBA(경영학 석사) 과정을 밟고 있다. 장남 승담씨는 컴퓨터 사이언스와 경제학을 전공하고 있으며, 차녀 경담씨는 커뮤니케이션을 공부하고 있다. 막내딸 행담씨는 스탠퍼드대 교양학부 1학년에 재학중이다. 서남의 둘째 딸 화경씨는 이화여대 사회학과 출신으로 1980년 뜨거운 열애끝에 담철곤 회장과 부부의 인연을 맺었다. 담 회장의 선친은 대구에서 한의원을 운영했으며, 타이완 국적으로는 한의원 경영이 쉽지 않아 일찍이 한국 국적을 취득했다. 화경씨와 담 회장은 슬하에 경선(20)씨와 서원(16·남) 1남1녀를 뒀다. 경선씨는 미국 컬럼비아대에서 인문학을 전공하고 있으며, 서원군은 국내에서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다. 서남가(家)의 혼맥은 이처럼 단순하지만 그나마 현 회장 집안을 통해 정·재계에 인연이 이어진다. 현 회장의 조부인 현상윤 전 총장은 6∼8대 국회의원이었던 김봉환 전 국회법사위 위원장과 사돈지간이다. 김 전 법사위원장은 손경식 CJ 회장과 사돈으로 연결된다. ●잉꼬 부부 이 고문과 현 회장은 중매로 만났지만 두 사람의 사랑은 애틋하고 각별하다. 결혼 이후 경영수업을 위해 미국 스탠퍼드대에 홀로 유학한 현 회장은 이 고문에게 자주 편지를 보냈고, 편지 첫 머리에 늘 ‘사랑하는 당신’이라고 적었다. 담 회장과 이 사장은 서로가 첫 사랑이다. 대구에서 서울로 유학온 담 회장은 중학교 3학년 때 이 사장을 같은 반 친구로 처음 만났다. 이 때부터 서로에게 끌린 두 사람은 10년 이상 연애했다. 담 회장이 미국 조지워싱턴대로 유학간 4년이 유일하게 떨어진 시간이었다. 이 때도 두 사람은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수백통의 편지를 주고 받았으며, 하루가 멀다하고 비싼 국제전화를 하는 탓에 꾸중도 많이 들었다. 이제는 눈빛만 봐도 서로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 수 있을 정도다. 그러나 친구에서 연인, 다시 부부로 인연이 이어지기까지 두 사람은 험난한 과정을 거쳤다. 오랜 만남을 지속했던 두 사람이었지만 막상 결혼때는 집안 반대가 만만치 않았다는 후문이다. 담 회장과 이 사장은 국내 재계에서 보기 드문 ‘부부 CEO(최고경영자)’다. 담 회장은 현재 이 사장이 총괄경영을 맡고 있는 오리온의 엔터테인먼트사업 아이디어를 추진한 주역이다. 이 사장은 “나는 다소 감성적인 반면 담 회장은 실용적이어서 상호 보완이 된다.”면서 “시간이 갈수록 서로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져 이제는 이 세상에 가장 친한 친구이자, 동시에 더없이 훌륭한 사업 파트너”라고 곧잘 언급한다. ●혹독한 경영 수업 서남은 사위들을 후계자로 키우기 위해 더 철저하게, 더 강하게 경영 수업을 시킨 것으로 유명하다.“내 딸, 내 사위라고 해서 특혜는 없다.”는 것이 서남의 ‘후계자론’이다. 현 회장은 75년 부산지검 검사로 입문한 뒤 결혼과 함께 경영자로 변신했다. 그는 77년 동양시멘트 이사로 재계의 첫 발을 내디뎠고, 초고속 승진을 통해 동양의 후계자로 대내외에 알려졌다. 그러나 후계자의 길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이 창업주는 타계하는 날까지 두 사위와 작은 딸에게 이론과 실전으로 혹독한 경영자 수업을 시켰다. 현 회장은 스탠퍼드대 경영대학원에서 국제금융을 전공한 이후, 이 창업주로부터 직접 경영수업을 받았다. 낮에는 현장을 같이 누비며 실전과도 같은 수업을 받았고, 밤에는 새벽까지 수십년동안 쌓아온 이 창업주의 경영 노하우를 전수받았다. 이 창업주의 경영수업은 이틀 정도 잠을 안재우는 일이 허다할 정도로 강도가 높았다. 이화경 사장은 동양제과(현 오리온)에서 인턴사원으로 일을 시작했으며, 담철곤 회장도 유학을 마친 후 동양시멘트 구매부 과장으로 입사했다. 이 창업주는 ‘경영자가 되려면 기본부터 충실해야 한다.’며 두 사람 모두 구매부로 발령냈다. 이후 이 사장은 영업부를 제외한 각 부서를 돌며 업무를 익혔다. 특히 마케팅담당 시절엔 획기적이고 신선한 광고로 광고담당자들을 놀라게 했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초코파이의 ‘정(情) 시리즈’ 광고다. 그는 입사 26년만에 오리온그룹의 외식과 엔터테인먼트사업을 담당하는 CEO에 올랐다. 이 사장은 최근 경제전문지 포브스코리아가 발표한 한국의 여성부호 50인 가운데 8위(1652억원)에 올랐다. 담 회장도 81년부터 동양제과로 자리를 옮겨 구매부장과 사업, 관리, 영업 상무 등을 거치며 89년 동양제과 CEO에 올랐다. ●동양·오리온의 분가 이 창업주가 1989년 타계한 이후 동양의 경영권은 가족간 협의를 통해 맏사위인 현 회장이 승계했고, 둘째 사위인 담 회장은 동양제과를 맡았다. 현 회장과 담 회장은 13년간 각각 시멘트·금융, 제과·엔터테인먼트 등의 사업영역에서 독자 경영을 해왔다. 이 때문에 사위간에 기업 분할은 자연스럽게 이뤄졌다. 여기에 동양제과가 영상미디어 분야에 투자와 외자유치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30대 기업집단으로 제한을 많이 받아 계열분리가 빨라졌다. 동양제과는 2001년 9월1일 동양에서 분가했다. 동양그룹 32개 계열사 가운데 제과와 엔터테인먼트 계열의 16개사가 떨어져 나간 것이다. 그러나 동양과 오리온(옛 동양제과)은 여전히 그룹 CI(기업이미지)를 함께 사용할 정도로 뿌리에 대한 깊은 유대감을 이어가고 있다. 현 회장은 “동양과 오리온의 분가는 미래 지향적인 경영을 위해서이며, 한 뿌리에서 나온 두 그룹이 한국경제의 거목으로 성장하기 위해 가지를 펼치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계열분리 이후 동양은 금융분야에 집중하고 있다. 동양종합금융증권은 증권·종금·투신업을 아우르는 종합금융사로 거듭났으며, 동양생명은 6년 연속 흑자를 내고 있다. 동양은 현재 제조업 6개사, 금융 7개사로 총자산은 15조원 수준이다. 지난해 매출액은 4조 300억원을 기록했다. 오리온그룹은 케이블 방송과 영화 등 엔터테인먼트 사업에 집중해 계열사를 26개사로 늘렸다. 지난해 매출액 1조 5300억원을 올렸다. 특히 미디어플렉스의 극장사업체인 메가박스는 전국에 117개 스크린을 확보하며 최고의 영화관으로 자리매김했으며, 영화투자 배급사인 쇼박스는 ‘말아톤’과 ‘웰컴투 동막골’,‘가문의 위기’ 등을 잇달아 흥행시켜 설립 3년만에 업계 1위로 올라섰다. 여기에 베니건스를 중심으로 한 외식사업과 편의점 사업체인 바이더웨이 등도 견고한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동양·오리온의 대표 CEO 노영인(59) 동양시멘트 사장은 30여년을 시멘트업계에 종사한 산증인이다.98년 동양시멘트 대표이사로 취임한 그는 외환위기 한파를 수출로 돌파했다. 그동안 시멘트 수출은 채산성이 안 맞고, 선진국의 품질검사가 까다로워 시늉만 내왔다. 그러나 노 사장은 특유의 카리스마로 밀어붙여 99년에는 창사이래 최대 물량인 171만t을 세계 각국으로 수출했다. 덕분에 579억원의 순익을 기록해 기나긴 적자의 늪에서 빠져나왔다. 노 사장은 동양의 실질적인 지주회사인 동양메이저의 대표이사도 겸직하고 있다. 박중진(54) 동양종합금융증권 부회장은 금융업계에선 신사로 통한다. 친근한 말투가 트레이드 마크. 그는 조지워싱턴대 MBA 출신으로 미국 공인회계사(AICPA) 자격증을 갖고 있다. 탄탄한 이론을 바탕으로 동양증권과 동양생명, 동양종금을 거치며 10년이상 실전 금융을 익혔다. 윤여헌(57) 동양생명 사장은 행시 14회 출신으로 건설부와 재무부를 거쳐 95년 동양에 합류했다. 윤 사장은 겉치레보다 실리를 추구하는 ‘내실형’ 스타일이다. 철저한 손익 위주의 경영을 선호한다. 오리온그룹을 이끄는 전문 경영인으로는 김상우(48) 오리온 대표이사를 꼽을 수 있다. 김 대표는 1987년 오리온(옛 동양제과)에 입사한 이후 줄곧 마케팅 분야를 맡았다. 농심이 장악한 국내 스낵시장에 포카칩과 스윙칩 등을 출시해 오리온의 돌풍을 일으켰다. 오일호(53) 스포츠토토 사장은 1987년 오리온 마케팅부 과장으로 입사해 오리온그룹과 인연을 맺었다. 004년엔 스포츠토토 사령탑을 맡아 차별화된 마케팅으로 초기 난관을 극복했다. 특히 가라앉은 ‘토토´를 최근 ‘토토 붐´으로 확산시킨 것은 그의 공이 컸다는 평이다. golders@seoul.co.kr ■ 창업주 두딸 이혜경·화경씨 ‘닮은 듯 닮지 않은 두 자매.’ 이혜경(53) 동양매직 고문은 국내 ‘재벌가(家)의 딸’들이 그러하듯 나서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전공(이화여대 미대)을 살려 동양매직 고문으로 활동하고 있지만 가정에 더 충실한 편이다. 그러면서도 장녀로서 모친인 이관희(서남재단 이사장) 여사를 도와 부친의 뜻을 기리는 서남재단의 이사로서 사회봉사 활동에 적극적이다. 반면 이화경(49) 오리온 사장은 1975년 동양제과(현 오리온) 인턴사원으로 입사해 밑바닥을 두루 거친 뒤 26년만에 오리온 사장에 올랐다. 약력에서 알 수 있듯 이 사장은 그동안 ‘경영자의 길’을 걸어왔다. 언니와는 다르게 ‘바깥 일’을 더 중시한다. 이 때문에 자매를 잘 아는 지인들은 보통 언니를 ‘살림꾼’으로, 동생을 ‘여장부’로 부른다. 이 고문은 소박하면서 다정다감하다. 살림을 손수 챙기며, 요리 실력이 수준급이다. 미술 감각을 살려 실내 장식과 정원 등은 손수 꾸민다. 또 혼자서 곧잘 동대문 시장에 나가 살림 도구나 가족 옷을 산다. 자녀 교육에도 각별한 정성을 쏟는다.1남3녀를 모두 미국의 명문 대학인 스탠퍼드대에 진학시킨 것은 이 고문의 노력과 관심 덕분이다. 이 고문은 자녀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한때 사회활동을 극도로 자제했으며, 수년간 미국에 머물며 자녀 뒷바라지를 했다. 현 회장도 틈틈이 아이들의 영어와 수학을 직접 가르쳤다. 막내딸 행담씨가 올해 대학에 들어가면서 이 고문은 건강 관리를 위해 처음 골프채를 잡았다. 이 사장은 경영인, 아내, 엄마의 ‘1인3역’을 소화하느라 늘 시간에 쫓긴다. 그렇다고 어느 하나 소홀한 법이 없다. 자녀(1남1녀)와 함께하는 시간을 갖기 위해 업무 외의 약속은 잡지 않는다. 경영인으로서 이 사장은 어떨까. 호탕하고 도전정신이 강해 부친을 빼닮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월간 현대경영이 2003년 8월 100대 기업 비서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신세대 여비서들이 모시고 싶은 CEO’에 뽑히기도 했다. 그만큼 업무상의 유연함과 직원 배려가 돋보인다는 것이다. 이 사장은 인턴사원으로 출발해 구매부, 조사부, 마케팅부 등 주요 부서를 거쳐 누구보다 현장 분위기와 실무진의 고충을 잘 알고 있다. 오리온의 외식 및 엔터테인먼트 계열사 직원들은 이 사장을 열정적인 CEO로 평가한다. 이 사장이 전담하는 계열사는 온미디어와 미디어플렉스, 외식 사업부문인 롸이즈온 등 3개사. 일주일을 나눠 각각의 회사에 출근한다. 이 사장은 현장 경영을 중시한다. 직원들과 직접 회의를 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며, 영화사업을 담당하는 CEO로서 때로는 서울 삼성동의 메가박스에서 하루종일 영화를 보기도 한다. 이 사장은 “내가 재밌고, 감동을 받아야 관객들에게 권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말한다. golders@seoul.co.kr ■ 두 CEO 경영스타일 비교 ‘외유내강 VS 실용주의’ 사위들이 경영권을 승계하다 보니 현재현(56) 동양 회장과 담철곤(50) 오리온 회장은 곧잘 비교의 대상이 된다. 재계 안팎에선 현 회장을 선 굵은 외유내강형으로, 담 회장을 철저한 실용주의형으로 분류한다. 기업의 성장세로는 담 회장의 오리온이 빠르다.1989년 매출액 1360억원에 불과했던 동양제과(현 오리온)를 지난해 1조 5300억원으로 10배 이상 키운 것은 신규 사업을 진두지휘한 담 회장의 공이 크다. 현 회장은 오리온이 분가한 이후 그룹 구조조정에 매진했다. 금융계열사를 통합, 매각하면서 부채비율을 낮추는 데 주력했다. 이 덕분에 1000%를 웃돌았던 부채비율은 어느 정도 안정궤도에 진입했다. 상대적으로 그룹의 외적 성장은 더디었지만 속은 눈에 띄게 알차졌다. 현 회장은 최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CEO 서밋’에서 유창한 영어 실력을 과시하며, 재계의 ‘스타 CEO’로 떠올랐다.CEO 서밋 의장으로서 각국 CEO(최고경영자)들과 토론 및 기자회견을 깔끔하게 소화해 화제가 됐다. 그는 이처럼 남들이 멍석을 깔아주지 않는 한 자신의 진면목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 외유내강형 CEO로 불리는 까닭이기도 하다. 현 회장은 화를 내지 않는다. 늘 입가에 미소를 머금는다. 그룹 총수가 화를 내서 임직원들의 기를 꺾으면 차후 일 진행이 쉽지 않다는 생각에서다. 대신 원칙에 따라 결정된 내용은 남들이 주저해도 과감하게 추진한다. 현 회장이 경영자로서 평가받은 첫 사업은 1984년 일국증권(현 동양종합금융증권) 인수다. 당시만 해도 증권사는 대형사고와 부실경영의 대명사로 인식됐던 터라 임직원들의 증권사 인수 반대는 만만치 않았다. 그렇지만 현 회장은 자본금 20억원에 지점이 덜렁 하나뿐인 일국증권을 불과 5년만에 10대 증권사로 키워냈다. 이를 계기로 동양은 30년간 지속된 시멘트와 제과 사업에서 탈피해 금융업 중심으로 업종 다변화를 일궈냈다. 현 회장의 취미는 바둑. 중학교 시절 바둑을 배워 고등학교 때는 적수가 없을 정도였고, 대학 때는 교내 대회에서 수차례 우승을 했다. 장수영 9단에 2점으로 버티는 아마 고수다. 현 회장의 고교·대학 동기들은 그를 ‘티없는 친구’로 기억한다.“품성이 맑고 깨끗하며 원만할 뿐 아니라 일처리까지 깔끔하다.”는 것이다. 담철곤 회장은 실용주의자이자 ‘일벌레’라는 평가를 받는다. 요즘도 시간이 아깝다는 이유로 골프를 치지 않는다. 대신 스키 등 다이내믹한 스포츠를 좋아한다. 그렇다고 냉혹한 스타일도 아니다. 직원들은 잔정이 많은 CEO라고 얘기한다. 한 임원의 설명이다.“부장 시절에 기획안을 제출했다가 담 회장으로부터 ‘이건 아닌 것 같다’는 말을 들었어요. 그런데 그 다음날 회장으로부터 휴대전화가 왔습니다.‘다시 생각해 보니 일리가 있다’는 내용이었죠. 직원의 기를 꺾지 않으려는 회장의 배려였지요.” 담 회장은 인재에 대한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90년대 초반에는 20대 중심의 신규 사업팀을 구성한 뒤 수십억원을 투자했다. 그러나 여러 분야의 사업에 진출해 쓴맛을 많이 보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들은 훗날 오리온의 케이블 TV사업과 극장·외식사업 등으로 진출해 현재의 그룹 규모를 갖추는데 일조했다. 담 회장은 위기를 기회로 잘 엮는다. 국내 제과사들이 90년대 안방시장에 안주하며 저성장의 어려움을 겪을 당시, 해외시장을 개척하며 오리온의 고성장을 주도했다.2003년엔 남들이 모두 망했다고 평한 체육복표 사업체 스포츠토토를 인수해 그룹의 미래 성장동력으로 바꿔 놓고 있다. golders@seoul.co.kr ●특별취재반 산업부 홍성추 부장 (부국장급·반장) 박건승·정기홍·류찬희 차장 이종락·이기철·주현진·류길상·김경두기자
  • 손경식 CJ 회장 서울상의 회장에

    손경식 CJ 회장 서울상의 회장에

    서울상공회의소는 22일 임시 의원총회를 열어 손경식(66) CJ회장을 신임 서울상공회의소 회장으로 선출했다. 이로써 박용성 전 회장의 사퇴로 회장 공석 상태인 대한상공회의소도 손 회장을 새 회장으로 맞게 됐다. 손 회장은 이날 70여명이 참석한 임시 의원총회에서 만장일치로 신임 회장에 추대됐다. 손 신임 회장은 지난 94년부터 서울상의 의원, 상임의원, 부회장 등으로 활동했다. 대한상의는 오는 29일 별도로 전국 지방상공회의소 대표들이 참석하는 자체 임시 의원총회를 열어 회장을 선출하지만 서울상의 회장이 대한상의 회장을 맡는 것이 관례여서 손 회장이 대한상의 회장을 맡는 것도 확정적이다. 손 신임회장은 박용성 전 회장의 잔여 임기인 내년 2월 말까지 회장 직을 맡게 되지만 특별한 문제가 없는 한 다시 임기 3년의 차기 회장에 선출될 전망이다. 손 신임회장은 회장으로 선출된 뒤 “막중한 책임감을 느낀다. 상공업계의 권익 대변과 회원들의 경제적 지위 향상을 위해 열과 성을 다할 것”이라고 소감을 밝혔다. 손 회장은 고 이병철 삼성 회장의 장남인 이맹희씨의 처남이자 이재현 CJ회장의 외삼촌으로 CJ그룹을 이끄는 또 다른 축이다. 그는 누나이자 이재현 회장의 모친인 손복남 고문이 삼성가로 시집가면서 삼성과 인연을 맺었다. 경기고 2학년 때 검정고시로 서울대 법대에 입학할 정도여서 ‘천재’라는 얘기를 들었다. 지난 68년 미국 오클라호마주립대 경영학 석사과정을 마치고 공부를 계속 하려다 고 이병철 회장이 비서실로 불러들였다.77년 38세의 나이에 안국화재(현 삼성화재) 사장으로 발탁됐다.93년 6월 제일제당이 삼성그룹에서 계열 분리될 때 제일제당 대표이사를 맡아 분리작업을 무난히 이끄는 등 조카인 이 회장의 ‘후견인’이자 ‘경영 스승’ 역할을 해왔다. CJ는 그룹 분리 이후에도 이 회장과 손 회장이 함께 경영하는 ‘쌍두마차’ 체제로 유지됐다. 제일제당이 거대 삼성그룹의 우산 아래서 떨어져나와 큰 위기를 겪지 않고 오늘의 CJ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도 손 회장의 역할이 컸다는 게 재계의 대체적인 평가다. 부인 김교숙(59)씨와의 사이에 1남1녀를 두고 있다. 이종락기자 jrlee@seoul.co.kr
  • 부친 18번째 기일에 참석못한 이건희회장

    이건희 삼성 회장이 부친인 고 이병철 선대 회장의 기일을 뜻하지 않게 해외에서 맞게 됐다. 삼성은 18일 “이 회장이 올해 이병철 삼성 창업주의 기일에 참석하기 어려울 것 같다.”고 밝혔다. 이 회장이 부친의 기일에 참석하지 못한 것은 지난 대통령 선거에 앞서 해외에 머물렀던 2002년에 이어 올해가 두번째다. 이 회장은 지난 87년 11월19일 77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이 회장을 제외한 삼성가(家)와 계열사 사장단은 삼성 창업주인 호암 이병철 회장의 18주기를 맞아 이날 경기도 용인 삼성에버랜드에 위치한 이 회장 묘소를 참배했다. 창업주의 장손인 이재현 CJ그룹 회장과 이건희 회장의 장남 이재용 삼성전자 상무 등 삼성가 3세들이 대부분 참석했다.또 창업주의 장녀인 이인희 한솔그룹 고문과 5녀 이명희 신세계 회장 등 삼성가에서 분가한 방계 그룹들의 핵심 인사도 함께했다.김경두기자 golders@seoul.co.kr
  • 공석중 대한상의 회장에 손경식 CJ회장 추대될듯

    박용성 전 회장의 사퇴로 공석이 된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에 손경식(66) CJ 회장이 추대될 것으로 보인다. 대한상의는 17일 “손 회장이 지난 15일 열린 서울상공회의소 부회장단 회의에서 서울상의 회장으로 추대됐으며 손 회장도 이를 수락했다.”고 밝혔다. 그동안 통상적으로 서울상의 회장이 대한상의 회장을 겸직해왔기 때문에 손 회장이 대한상의 회장을 맡을 가능성이 높다. 서울상의는 오는 22일 임시 의원총회를 열고 손 회장을 회장으로 공식 추대하고, 대한상의도 곧이어 전국 지방상공회의소 대표들이 참석하는 임시의원총회에서 회장을 선출할 예정이다. 새로 선출되는 대한상의 회장은 박 전 회장의 잔여 임기인 내년 3월말까지 회장직을 맡게 되지만 특별한 문제가 없는 한 다시 임기 3년의 차기 회장에 선출될 전망이다. 손경식 회장은 고 이병철 삼성 회장의 장남인 이맹희씨의 처남으로 현재 외조카인 이재현 회장과 함께 CJ그룹의 공동 회장으로 그룹을 이끌고 있다. 손 회장은 한일은행과 삼성전자를 거쳐 73년 안국화재(현 삼성화재) 이사로 옮긴 뒤 전무, 사장, 부회장을 지냈으며 93년 제일제당(현 CJ) 대표이사 부회장에 올랐고 이듬해부터 회장을 맡고 있다.이종락기자 jrlee@seoul.co.kr
  •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삼양그룹(1)-창업주 김연수家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삼양그룹(1)-창업주 김연수家

    일반인들에게 ‘삼양설탕’(현 ‘큐원설탕’)으로 익숙한 삼양사는 한국 근대경제사를 주도한 명문 기업이다. 호남 거부의 후예인 김연수(金秊洙) 창업주는 일제하인 1924년 순수 민족자본으로 기업을 설립, 한국기업의 명맥을 이었다. 김 창업주는 형인 인촌(仁村) 김성수씨가 동아일보를 설립하고 꾸려가도록 뒷받침했고, 여러 차례 재산을 털어 고려대와 고려중앙학원의 기틀을 마련하도록 뒤에서 도왔다. 그러나 김 창업주는 일제하에 기업을 경영함으로써 최근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인사인명사전을 편찬하면서 친일인사로 선정하는 등 사후에 ‘친일’ 시비에 휘말리고 있기도 하다. 때문에 근대 한국경제의 산증인인 김 창업주의 삶은 굴곡 많은 우리 근대사의 한 단면이기도 하다. ●병약했던 어린 시절 김 창업주는 1896년 10월1일 전라도 고부군 부안면 인촌리에서 부친 김경중씨와 모친 장흥 고씨 사이에서 2남으로 태어났다. 형의 호인 인촌은 바로 두 형제가 태어난 동네 이름을 따온 것이다. 김 창업주의 부친은 1만 5000석 지기의 호남 최대 거부였고 학문에도 조예가 깊었다. 부친은 일제하에서 나라가 영영 없어지는 것으로 알고 당시 저명한 사학자들을 몰래 불러 ‘조선사’를 17권이나 엮을 정도로 민족애가 투철했다는 게 삼양그룹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김 창업주는 어린 시절 외롭게 지냈다. 김 창업주의 부모는 그가 태어나기 전 세 명의 아들과 한 명의 딸을 일찍 잃었다. 여기에다 한 명뿐인 형인 인촌이 큰아버지인 김기중씨가 대를 이을 아들이 없자 양자로 보내졌기 때문이다. 어릴 적 김 창업주는 몸이 허약했다. 폐가 약했으며 위도 튼튼하지 못해 일찍이 폐와 소화기 계통의 질병으로 자식을 잃은 경험이 있는 부모의 애를 끓게 했다. 이런 이유로 개구쟁이처럼 장난이 심하고 활발했던 인촌과는 달리 김 창업주는 조용한 것을 좋아했고, 과묵하고 내성적인 성품을 지녔다. ●27세에 경영인으로 출발 김 창업주는 15세 되던 1910년 12월8일 자신보다 두 살 위인 박하진씨와 혼인을 맺었다. 결혼 이후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거쳐 한국인 최초로 교토제대 경제학부를 졸업했다. 그는 고국으로 돌아온 이듬해인 1922년 형의 권유로 경성직뉴와 경성방직의 전무와 상무에 취임, 경영인의 삶을 시작했다. 김 창업주는 고무신과 ‘태극성표’ 광목을 대히트시킴으로써 일본자본과 맞서는 최대의 민족회사를 일궜다. 집안 내력을 잘 아는 김재억 삼양사 상임감사는 “30년대 경성방직은 우리나라 금융거래 절반을 담당할 정도의 민족 최대 기업이었다.”고 말했다. 김 창업주는 또한 농촌재건을 위해 소작농을 협동농업 형태로 결합한 근대영농을 시작했다. 이를 발판으로 1924년 삼수사(三水社)를 설립해 호남 일대의 소유농토에 대한 근대화 작업에 나섰다. 장성, 줄포, 고창, 명고, 신태인, 법성, 영광농장을 차례로 개설해 기업형 농장으로 탈바꿈시켰다. 간척사업에도 눈을 돌려 손불농장과 해리농장의 2개 지역에 1070정보의 농토를 만들었다. 이 시기에 상호가 삼양사(三養社)로 바뀌었다. 어느 날 한 작명가가 찾아와 ‘물 수’(水)를 ‘만인의 양식’이라는 뜻인 ‘기를 양’(養)으로 바꿀 것을 권했다고 한다. 김 창업주는 만주벌 개척에도 나섰다.5개 협동농장을 개설한 데 이어 봉천에 남만방적을 설립했다. 남만방적은 한국기업 최초의 해외생산법인이다. 그러나 1945년 해방으로 만주의 사업장들을 고스란히 놓고 철수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제당업으로 재기에 나서 해방공간을 겪으면서 반민특위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김 창업주는 한국 전쟁 이후 해체상태에 놓였던 삼양사 재건에 나섰다. 그는 재기의 발판으로 제당업과 한천제조업을 선택했다. 당시 설탕은 수입에 의존해온 대표적인 외화소비 품목이었기 때문이다. 울산 바닷가를 메워 그곳에 제당공장과 한천공장을 건설했다. 그는 1956년 삼양을 제당으로 키우면서 주식회사 삼양사를 출범시켰다. 자신이 대표이사 회장에 취임했고, 사장에 3남인 상홍(83), 상무에 5남 상하(80)를 앉혔다.3남과 5남이 삼양사를 맡는 전통은 3세에도 그대로 이어져 삼양그룹은 현재 상홍씨의 장남 윤(53)씨와 상하씨의 장남 원(48)씨가 삼양사 회장과 사장을 맡고 있다. 둘째 아들들인 량(51)씨와 정(46)씨도 각각 삼양제넥스 사장과 삼남석유화학 부사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당시 삼양사보다 수익률이 높았던 해리염전을 삼양염업사라는 별개의 회사로 독립시키고 맏아들 상준(작고)을 사장에 임명해 경영을 맡겼다.3공화국때 문교부장관과 5공화국에서 국무총리를 역임한 차남 상협(작고)에게도 삼양염전의 지분 25%를 떼어주어 형제간 경영권을 일찌감치 교통정리했다. ●재계의 거목으로 김 창업주는 1962년 설립한 삼양수산을 통해 다양한 어종을 가공, 수출하는 등 한때 냉동선만 21척을 보유할 정도로 수산업에도 주력했다. 이처럼 제당과 수산업으로 재기에 성공한 그는 4·19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자 한국경제협의회(현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에 취임, 한국 재계의 얼굴이 되었다. 경영이 본 궤도에 오르자 김 창업주는 전주방직을 인수, 삼양모방(주)을 설립했다. 이어 1969년 전주에 대단위 폴리에스테르 공장을 건설했다. 이로써 70년대 들어 삼양은 국내 초창기 산업의 중심이었던 제당으로 확고한 제조업체로의 변신을 이룩했다. 이 당시 삼양은 매출액에서나 기업선호도에서 상위를 차지하는 국내 정상급 기업으로 우뚝 섰다. 김 창업주는 사업에 투신한 지 만 53년이 되던 1975년 회장을 상홍에게, 사장에 상하를 임명하는 등 ‘2세경영’을 출범시키고 은퇴했다. 그의 나이 80세일 때였다. 그는 은퇴 후 농촌으로 돌아가 마지막 열정을 쏟다가 1979년 84세의 일기로 생애를 마감했다. ●교육사업도 아낌없는 지원 그는 기업경영에만 몰두하지 않았다. 고려대와 고려중앙학원의 운영기금을 출연한 것을 비롯해 양영회와 수당장학회를 설립, 교육사업에도 힘썼다. 문성환 삼양사 부사장은 “창업주는 두 재단을 통해 대학생 2만여명에게 대학등록금을 비롯해 하숙비, 책값, 소정의 용돈까지 장학금으로 대줬다.”고 회고했다. 이런 김 창업주의 혜택을 받은 대표적인 인물로는 한덕수 경제부총리, 오세철 연세대 교수 등이 꼽힌다. 경성방직의 회계를 맡아 김 창업주를 도왔던 국어학자 이희승 박사는 “수당(秀堂·김 창업주의 호)은 돈 쓰는 데도 일가견을 가진 사람으로 만금을 쓰면서도 기업경영에는 한 푼을 아꼈다.”고 그의 용전(用錢)철학을 전했다. 김 창업주는 경쟁회사에도 관대했던 묵묵한 성격의 경영인으로도 정평이 나 있다.1966년 삼양의 경쟁회사 창업주 이병철 회장이 운영하던 한국비료가 이른바 ‘사카린 밀수사건’으로 곤혹을 치렀다. 임원들이 ‘사카린 없는 삼양설탕’이라는 문구로 대대적인 광고전을 벌이자고 수차례 건의했지만 받아들이지 않은 사례는 그의 성품을 읽는 일화로 경영인들에게 지금껏 회자되고 있다. ●방대한 혼맥…사회 각 분야와 사통팔달 김 창업주는 부인 박씨와의 사이에 7남6녀 13명의 자녀들을 두었다. 아들로는 장남 상준(작고), 차남 상협(작고),3남 상홍(83),4남 상돈(81),5남 상하(80),6남 상철(70),7남 상응(작고) 등 7남과 장녀 상경(79), 차녀 상민(78),3녀 정애(75),4녀 정유(73),5녀 영숙(72), 막내 희경(66) 등 6녀를 두었다. 김 창업주 가문의 혼맥은 정계·관계·학계·언론계·재계·교육계 등과 거미줄처럼 얽힌 방대한 혼맥을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김 창업주의 성격이 소탈해 자식들에게 정략 결혼을 요구하기보다는 평범하고 무난한 결혼을 시켰다는 게 대체적인 평이다. 김재억 감사는 “창업주의 생활철학이 권세를 배격하는 것이어서 자식들이나 3세들의 결혼에도 사돈 될 집안의 내력과 상대방의 성실성을 먼저 봤다.”고 회고했다. 김 창업주는 특히 자녀들의 대부분은 중매결혼으로 짝지웠지만 사위와 며느리를 맞는 데서는 당시로는 상당히 진보적인 입장이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는 사위를 고를 때는 가문을 따지지 않고 사람됨됨이와 능력을 위주로 보았고, 며느리는 후덕한 집안 출신으로 신식교육을 받은 신여성이기를 원했다. 특히 사돈가의 위치를 보고 정혼하지 않은 것으로 유명해 그의 직접 사돈 가운데는 정관재계의 거물은 눈에 띄지 않는다. 김 창업주의 며느리들 가운데 위로 세 명은 이화여전 출신 등으로 당시의 김 창업주가 원했던 신여성들의 표본이 많았다. 반면 창업주의 형인 인촌 성수씨도 9남4녀를 두어 대가를 이뤘는데 장남인 상만(작고) 전 동아일보 명예회장의 직계 자손들은 화려한 혼맥을 자랑하고 있다. 고려대 이사장이자 동아일보 전 회장인 장손 병관씨는 장남 재호(41·동아일보 대표이사 전무)씨를 이한동 전 총리의 차녀인 정원(38)씨와 결혼시켰고,2남 재열(37·제일모직 상무)씨는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차녀인 서현(32·제일모직 상무보)씨와 결혼했다. 김연수 창업주 자녀들의 혼맥을 살펴보면 장남 상준씨는 당시 집안과 각별하게 지내던 이화여대 총장 김활란 박사의 소개로 이뤄져 1943년 구영숙씨의 맏딸 연성(85)씨를 부인으로 맞았다. 상준씨는 보성전문 상과를 나와 조흥은행에 근무할 때였고 연성씨는 이화여전 음대를 졸업한 직후였다. 상준씨는 3명의 딸을 출가시켜 정·관·재계 인맥을 형성했다. 장녀 정원(62)씨의 부군은 고려대와 국가대표팀에서 축구선수로 활약했던 김선휘(68·삼양염업사부회장)씨다. 축구를 좋아하던 상준씨는 모교인 고려대 축구팀을 지원했는데, 이 일로 선휘씨가 상준씨 집에 드나들면서 자연스럽게 혼사가 맺어졌다. 차녀 정희(58)씨는 5공시절 당시 거물 정치인이었던 김진만씨의 맏며느리로 보내 동부그룹 회장인 김준기(64)씨를 사위로 맞았다.3녀 정림(57)씨는 전 문교장관 윤천주씨의 장남 대근(59)씨와 결혼했다. 대근씨는 현재 동부아남반도체 대표이사 부회장과 동부그룹 소재분야 부회장을 맡고 있다. 상준씨의 장남 병휘(60)씨는 한양대 자연과학대 자연과학부 수학전공 교수로 재직하고 있고, 차남 범(52)씨는 독신으로 지내며 개인사업을 하고 있다. 차남 상협씨는 해방 직후 고려대 부교수 시절, 의사 김준형씨의 2남3녀 가운데 맏딸 인숙(82)씨와 연애결혼에 성공했다. 인숙씨도 니혼조시 대학을 나온 당시 보기 드문 일본 유학 신여성이었는데 상협씨의 도쿄제대 동창 부인의 소개로 만나 연애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장녀 명신(58)씨를 송진우 전 동아일보사장의 아들인 상현(65) 서울대 법대교수와 혼인시켰다.2녀 영신(56)씨는 정태섭 전 변호사의 아들 성진(58)씨와 결혼했다. 외아들 한(52)씨는 메리츠증권 부회장으로 있다. 3남 상홍(83)씨는 구 치안본부 재직시절 수원갑부 차준담씨의 2남2녀 가운데 맏딸 부영(79)씨와 백년가약을 맺었다. 부영씨는 이화여고와 이화여전을 나온 재원이었다. 상홍씨는 2남2녀 가운데 장남 윤씨를 전 서울신문사 김종규 사장의 딸 유희(46)씨와 혼인시켜 벽산그룹 김인득 회장과 한 다리 건너 사돈이 됐다. 또 차남 량씨는 장지량 전 공군참모총장의 막내딸 영은(46)씨와 백년 가약을 맺었다. 영은씨의 오빠 장대환씨는 매일경제 신문 창업주 정진기씨의 사위로, 현재 매일경제신문 대표이사회장 인쇄인 겸 발행인과 현 매일경제TV 대표이사 회장이다. 장녀인 유주(56)씨를 사업가 윤주탁씨의 2남 영섭(59·고려대 상대교수)씨에게 시집 보내 윤주탁씨와 직접 사돈간인 박태준 전 민자당 최고위원과 연결되고 있다. 영섭씨의 남동생인 영식씨가 박 전 위원의 장녀 진아(48)씨와 결혼했다. 4남 상돈씨는 6·25 직후 김유황 전 광장㈜ 부사장의 딸 용옥(73)씨와 결혼했다. 상돈씨는 맏형인 상준씨의 중매로 장남 병진(52)씨를 축구협회 부회장과 축구대표팀 감독을 지낸 한흥기씨의 딸인 혜승(45)씨와 맺어줬다. 차남 영로(50)씨는 사업을 하던 정형식씨의 딸 은미(46)씨와 혼인했다. 외동딸 희진(45)씨는 전 대한항공 이사 오명석씨의 외아들 광희(49)씨에게 시집갔다. 광희씨는 전 나이스정보통신 전무이사를 역임했다. 5남 상하씨는 삼양사 설탕공장 설립관계로 일본에서 일하고 있던 1953년 아버지의 부름을 받고 귀국, 바로 박상례(75)씨와 혼인을 맺었다. 상례씨는 공무원 출신인 박규원씨의 딸로 김 창업주의 친구가 중매를 섰다. 외동딸인 영난(44)씨를 송하철(45·주식회사 항소 사장)씨와 결혼시켜 송남석 모나미 회장의 막내며느리로 보냈다. 장남 원씨를 배영화 경희어망 회장 딸인 주연(45)씨와 맺어 줬다. 차남 정씨는 안상영 전 부산시장의 딸인 혜원(39)씨와 결혼했다. 6남 상철(70)씨는 사업을 하던 우근호 씨의 딸 정명(63)씨를 부인으로 맞았다. 7남 상응(작고)씨는 공무원 생활을 했던 권오경씨의 5녀중 셋째딸 명자(53)씨와 결혼했다. 장녀 상경(79)씨는 아폴로박사 조경철씨와 결혼 후 이혼해 조서봉(필립), 조서만(조지) 등 두 아들을 두고 있다. 차녀 상민(78)씨의 남편은 이두종(작고)씨로 활발하게 삼양사의 경영에 참여했다. 온양 지주의 아들로 자란 두종씨는 1956년 삼양사 과장으로 입사해 이 회사의 대표이사 부사장까지 올랐다.1984년 회사를 떠난 뒤에도 삼양그룹이 운영하는 재단법인 양영회와 수당장학회 이사장을 역임했다. 3녀 정애(75)씨는 교육계에 몸담았던 조종립씨의 아들 석(작고)씨와 결혼했다. 석씨는 서울대 상대 출신으로 결혼 후인 57년 삼양사에 사원으로 입사, 총무부장·경리부장·이사·상무·대표이사 부사장을 거쳐 전 삼양제넥스 상임고문까지 역임했다. 4녀 정유(73)씨의 남편은 전 서울대 부총장인 김영국(작고)씨다. 그는 인천에서 사업을 하던 김덕창씨의 8남매 가운데 3남으로 인천이 낳은 천재로 불리었다. 이들은 김 창업주 친구의 소개로 결혼했다. 영국씨는 서울대 정치학과 총동창회장을 지낸 상하씨의 후배이자 매제인 셈이다. 5녀 영숙(72)씨는 미국인 스테푸친과 결혼, 딸 페기, 아들 프랭크를 두고 미국에서 살고 있다. 막내딸 희경(66)씨도 교육자였던 김종규씨의 아들 성완(68·삼양사 의약사업 고문)씨와 결혼, 미국에 거주하고 있다. 성완씨는 미국 유타대학 석좌교수로 인공심장 분야의 권위자다. jrlee@seoul.co.kr ■ 창업주의 친일논란 민족문제연구소는 지난 8월29일 친일인사인명사전 편찬을 앞두고 수록예정자 명단 3090명의 이름을 공개했다. 이 명단에는 삼양사의 창업주 김연수씨도 포함됐다. 김씨는 전쟁협력 분야에서 ▲1939년 만주국 명예 총영사 ▲1940년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 이사 ▲조선방적 이사장 ▲1940∼1945년 중추원 참의(자문위원)를 지냈다는 이유로 선정됐다. 이에 대해 삼양그룹측은 대응을 일절 자제한 채 구체적인 언급을 회피하고 있다. 다만 그룹의 한 관계자는 “창업주가 일제의 압제에 죽음으로 항거하는 등 깜짝 놀랄 만하게 대항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나름대로 일제의 폭거에 맞서 민족자본을 형성했다.”며 “후세에 역사가들이 올바른 평가를 내릴 것”이라고 비교적 담담하게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지금보다 반일 감정이 팽배했던 1949년 반민특위 재판에서도 창업주는 무죄를 받았다.”고 해명했다. 또 창업주는 창씨 개명도 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김 창업주의 일대기인 ‘한국 근대기업의 선구자’에는 일제시대 그의 행적이 상세히 수록돼 있다.6부로 구성된 전기에는 4부 ‘고난의 시절’ 편에 일제에 협조할 수도, 항거할 수도 없었던 고심의 일단들이 실려 있다. 김씨는 중추원 참의 임명과 관련해 1940년 5월 조간신문에 자신이 칙임참의에 임명됐다는 기사를 보고 내무국장 우에다키에게 항의하러 갔지만 결국 그의 완력에 굴복했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그는 이후 ‘설사 내가 지녔던 일제치하의 모든 공직이나 명예직이 스스로 원했던 것이 아니고 위협과 강제에 의한 것이었다고 할지라도 일단 그런 직함을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조국과 민족앞에 송구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며 통렬한 자기반성의 글을 실었다. 김 창업주는 반민특위에 검거돼 7개월간 수감됐지만 이런 반성의 자세가 참작됐는지 재판에서는 무죄 판결을 받았다. 당시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피고는 경성방직을 경영함에 강력히 일본자본과 싸웠고, 항상 한민족을 위한 경제적 기반확립에 노력했고, 경성방직의 상표를 태극기에서 모방한 것으로 보아 피고의 행위는 많이 참작할 곳이 있으며, 그 외의 관직 및 명예직은 일제의 압력에 못이겨 피동적으로 맡은 것이라고 증명되며, 또 피고는 한국의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많은 학생에게 원조를 해 그의 혜택을 본 자의 수는 현재 수백명에 달하는 것이니 이 점으로 피고가 남긴 공적은 크다고 할 것이며, 기타 증인의 증언을 통해 볼 때 피고를 단순히 친일 및 반민족행위자라고 규정할 수 없을 것”이라고 판시했다. jrlee@seoul.co.kr ■ 형 김성수와 동생 김연수 ‘한 배에서 태어난 형제가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 인촌(仁村) 김성수와 수당(秀堂) 김연수를 아는 주위 사람들의 한결같은 평가다. 인촌과 수당은 호남갑부 김경중씨의 두 아들이었지만 성격은 딴판이었다. 수당은 어릴 때부터 말수가 적고 침착하고 내성적인 성격이었다. 반면 형 인촌은 활달하고 외향적이었다. 여기에 형제는 다섯살이나 터울이 져 어린 시절엔 서로 어울리는 일이 적었다. 그런데도 두 사람은 평생을 친한 형제로 지냈다. 인촌은 수당이 근대적 교육을 받도록 인도했다.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동생을 일본으로 가게 해 중·고등학교와 교토제대 경제학부를 졸업하도록 도왔다. 수당은 일본에서 유학생활을 하며 일찍이 ‘기업인’이 될 것을 결심했다. 오사카의 공장지대에서 받았던 강렬한 인상이 결단의 계기였다. 이처럼 수당의 행적은 형 인촌의 행적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실제로 수당이 기업가로서 길을 걷는 데는 인촌이 설립하고 인수한 기업의 경영을 맡음으로써 시작됐다. 수당이 경영인으로 첫 발을 내디딘 것도 1922년 형이 운영하던 경성직뉴와 경성방직의 경영인을 맡고부터다. 이후 수당은 경영인으로서 성공하자 인촌을 적극 도왔다. 생전에 인촌은 수당이 없었으면 교육사업을 비롯한 자신의 활동이 어려웠을 것이라고 곧잘 술회했다. 수당은 언제나 인촌에게 돈 걱정은 하지 말고 마음껏 뜻을 펼치라고 말했다. 인촌이 설립한 고려중앙학원이나 고려대, 경성방직과 동아일보 등 모두 동생의 재정적인 지원을 받지 않은 것이 없었다. 특히 수당은 1940년대까지 고려중앙학원과 고려대에 기부한 재산이 연 평균 250만원에 이르렀는데, 이를 현 시가로 어림잡아 환산하면 1000억원(쌀값 기준)을 훨씬 넘는 액수다. 그러면서도 동생은 형이 하는 일을 뒤에서 묵묵히 돕기만 했다. 그는 “모든 것을 형님이 알아서 하시니까 나는 재정적인 지원만 하면 된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형을 만날 때마다 “형님은 교육과 문화사업을 하세요. 저는 뒤에서 돈을 대리다.”라며 든든한 후원자를 자임했다. jrlee@seoul.co.kr ●특별취재반 산업부 홍성추 부장 (부국장급·반장) 박건승·정기홍·류찬희 차장 이종락·이기철·주현진·류길상·김경두기자
  •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효성그룹 (1)-창업주 故조홍제 회장家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효성그룹 (1)-창업주 故조홍제 회장家

    효성의 입사 면접은 깐깐하기로 유명하다. 예컨대 ‘한강의 물 무게는 얼마나 되나, 대한민국 바퀴벌레의 총 수는.’등의 질문들이 쏟아진다. 그러나 ‘대략, 약, 수준, 정도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고 불확실한 답을 내놓는다면 효성에선 그리 환영받지 못한다. 효성은 숫자에 관해 근거 없는 ‘적당주의’를 체질적으로 싫어한다. 이는 효성 창업주인 고 만우 조홍제 회장의 경영 스타일에서 비롯됐다. 그는 어떤 사항이든 계수화해서 보고 받기를 좋아했으며, 그래야 납득을 했다. 만우 회장도 중요한 경영상의 결재를 할 때는 철저히 계수에 입각해서 처리했다. 특히 신규 사업은 앞으로 발생할 수 있는 변수마저 계산에 넣고 사업을 추진했을 정도다. 시쳇말로 “1년간 지급하는 로열티와 그 기술을 이용해 얻은 이익을 금액으로 계산해 향후 10년간의 수지계산서를 만들라.”고 한다면 요즘 실무진도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올 것이다. 그러나 만우 회장은 40년전에 이를 당연하게 지시했으며, 당시 효성 실무진도 이에 익숙했었다. 그의 이같은 ‘계수 경영’은 그만의 독특한 성냥개비 계산법을 낳았다. 그가 계산하기 위해 손가락에 성냥개비를 끼우고 슬슬 돌릴라 치면 실무자들은 계산이 혹시 틀리지 않았을까 긴장하곤 했다고 한다. 그의 꼼꼼한 경영 스타일은 창업 과정에서도 잘 드러난다. 효성의 주력 사업으로 훗날 나일론을 선택하기에 앞서 만우 회장은 공학과와 경제학과 출신의 엘리트 10여명을 뽑아 당시엔 생소한 기획부를 구성, 무려 2년간 20여종의 유망 업종을 검토하게 했다. 오늘날 효성의 제조업 전통과 실속 우선주의, 심사숙고형 기업 문화, 철저한 계산으로 돌다리도 두드리는 사업 풍토 등은 만우 회장이 효성에 남긴 유산들이다. 또 꼬장꼬장하고 대쪽같은 그의 성격은 효성을 늘 정치권과 거리를 두게 했으며, 생전에 2세들의 분가를 마무리한 것은 ‘돈 만큼은 가족이라도 철저해야 한다.’는 그의 오랜 경험에서 나온 것이었다. 최근 재계의 불미스러운 일련의 일들을 보면 만우 회장의 혜안이 놀랍기만하다. ●늦되고, 어리석은 만우(晩愚) 만우 회장은 모든 게 늦었다. 신학문을 접한 것이 17세였고, 고보(중·고등학교)에 들어간 것이 약관(弱冠)을 앞둔 19세였다. 또 대학을 졸업한 것이 이립(而立·30세)이었으며, 사업에 첫 발을 내디딘 것이 불혹(不惑·40세)을 넘어서였다. 그리고 효성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독자 사업을 시작한 것이 이순(耳順·60세)을 앞둔 56세였으니, 늦어도 한참 늦었다. 그는 스스로 늦되고, 어리석다는 뜻으로 호를 ‘만우(晩愚)’로 지었다. 그러나 출발이 늦었을 뿐 그의 성취는 작지 않았다.1960년대 부실기업이었던 한국타이어와 대전피혁을 정상화시켰으며, 현재 나일론 세계 4위, 타이어코드 세계 1위인 동양나이론(현 효성)을 설립했다.70년대엔 효성금속과 효성기계 등으로 사업 영역을 넓혀 한때 총 24개 계열사의 재계 5위 그룹으로 성장시켰다.40∼50대를 받쳐 삼성 성장에 일조를 했던 만우는 56세의 늦은 나이에 창업, 불과 10년 만에 효성을 세계적인 기업으로 올려 놓은 것이다.1981년 포천이 뽑은 500대 기업 속엔 만우의 삶이 고스란히 투영된 효성과 삼성이 나란히 포함됐다. ●진정한 가장은 애처가 늦었던 만우 회장이 빠른 것도 있었다. 그는 15세 때 집안 뜻에 따라 진주 하씨가의 차녀 정옥(작고)씨와 결혼했다. 당시 하씨가는 진주에서 쌀 2000섬 규모의 부호로 개화한 집안이었다. 부인 정옥씨는 신학문을 깨친 신식 여성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유교 생활이 몸에 밴 만우였지만 아내 사랑만큼은 각별했다고 한다. 만우는 무슨 일이든 아내와 함께 하는 것을 좋아했다. 당시엔 ‘팔불출’ 소리를 들을 만한 행동이었다. 회사에 있다가도 아내가 아프다고 하면 아무리 바쁜 일이 있어도 열 일을 다 제쳐놓고 들어왔다. 또 틈을 내 여행도 같이 자주 다녔다. 사업에서 물러났을 때엔 매일 아침 아내와 함께 창경원 산책을 취미로 삼았으며, 함께 시장에 나가 장을 보는 것도 즐겼다. 특히 만우 자신도 말년에 몸이 불편했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아내의 병수발을 자식 몫으로 두지 않았다.78년 아내가 먼저 세상을 떠나자 만우는 아내의 상청(혼백을 모시는 제단을 마련하는 일) 돌보는 일을 1년간 직접 했다. 당시 만우 자신도 간병인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움직이는 것조차 힘들었던 심한 신부전증을 앓고 있었다. 만우는 사람을 고를 때도 이런 점을 중요하게 여겼다. 그는 사람을 쓸 때 세가지를 봤다. 첫째가 반골 유무, 둘째가 지론 출중이며 셋째가 진정가장(眞正家長)이었다. 반골 유무와 지론 출중은 누구든지 고려할 만한 요소이겠지만 진정 가장은 꽤 이채롭다. 만우는 가정이 제대로 서야 사회와 국가가 제대로 선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직원 중에 바람을 피우거나, 첩을 얻는 사람이 있으면 무조건 내치라고 했다. 실제로 부장급의 한 직원은 여자 문제로 이혼을 하게 되자 그 자리에서 쫓겨났다. “가정 하나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이 회사를 어떻게 다스리겠나.”이것이 만우의 생각이었다. ●고 이병철 삼성 회장과 동업 만우 회장의 회고록 ‘나의 회고’에 따르면 그는 1945년 해방과 함께 서울로 올라와 당시 자금난을 겪고 있던 이병철 삼성물산 사장에게 자금을 빌려준 계기로 동업을 시작했다. 만우 회장은 어린 시절 호암(고 이병철 회장의 호)의 친형인 병각씨와 지기여서 두 사람은 이미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만우와 호암의 동업은 사실상 삼성이라는 대그룹의 출발점이었다. 고 이 회장의 기획력과 만우 회장의 꼼꼼한 일처리는 자산규모 1700만원의 삼성물산을 설립 3년 만에 48억원이라는 순이익을 올리게 했다. 삼성물산의 성공은 제일제당(현 CJ그룹)과 제일모직 등의 제조업 진출로 이어졌다. 특히 제일모직은 만우 회장이 자금 마련부터 기계설비 발주, 기술 숙련 등 모든 과정을 진두 지휘했다. 제일모직의 당시 ‘골덴덱스’는 영국제와 마카오 복지를 대체할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다. 이렇듯 조·이 투톱 체제는 불과 10년 만에 삼성을 명실공히 한국 제일의 재벌로 성장시켰다. 그러나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이 회장은 돌연 만우 회장에게 동업 청산을 요구했으며, 만우도 ‘이쯤에서 재산을 정리하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는 생각으로 흔쾌히 동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분 문제에 대한 의견 조율이 안되면서 두 사람의 갈등은 점차 깊어갔다. 이 과정에서 만우는 4·19와 5·16 군사 쿠데타로 이어진 급변하는 정국에서 삼성 대표로 부정 축재자라는 오명을 스스로 뒤집어쓰고 수감 생활을 하기도 했다. 정국이 점차 안정되면서 호암과 만우는 다시 재산 분배에 대한 논의를 계속했지만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옳다, 그르다 싸우기만 하면 자기 사업을 할 수 없다.’고 판단한 만우는 결국 3억원을 받는 것으로 삼성과의 모든 정리를 마무리했다. 이 때가 그의 나이 56세였다.15년간 대주주이자 경영인으로서 삼성을 국내 최고의 기업으로 키우는 데 일조를 했지만 그 ‘끝’은 그다지 아름답지 않았다. 만우는 ‘나의 회고’에서 당시 이 결정을 이렇게 밝혔다.“오늘날 70년을 살아오는 동안 내가 내리지 않을 수 없었던 수많은 어려운 결단 가운데서도 가장 현명한 결단이 아니었나싶다. 그런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분배받을 재산에만 연연했더라면 내 독자사업은 시작도 못해보고, 재산은 재산대로 찾지 못한 채 끝나게 되었으리라.” 그러나 만우와 호암의 결별에도 양가의 인연은 대(代)를 이어 지속됐다. 만우 회장의 장남인 조석래 효성 회장과 호암 회장의 차남 고 이창희 전 새한미디어 회장은 일본 와세다 대학에서 함께 공부했다. 또 조 회장의 부인인 송광자(61) 여사와 이건희 삼성 회장의 부인인 홍라희 여사는 서울대 미대 동창이다. 3세로 내려오면 인연은 더 깊고 다양해진다. 조 회장 차남인 조현문(36) 효성 전무와 이재용 삼성전자 상무는 친구 사이다. 장남인 조현준(37) 부사장과 이 상무는 일본 게이오대학에서 같이 공부했다. 삼성가인 이재현 CJ 회장과 정용진 신세계 부사장, 김병관 전 동아일보 회장의 아들인 김재열(이건희 회장 사위) 제일모직 상무 등도 조 회장가(家)의 3형제(현준·현문·현상)와 잘 어울린다. 조 부사장은 “같은 또래인 데다 어린 시절부터 잘 어울려 요즘에도 운동 모임을 자주 갖는다.”고 했다. ●사돈들의 활약 효성은 재벌가 가운데 사돈들의 활약이 유달리 두드러진다. 특히 만우 회장은 건강이 악화되면서 아들 후견인의 역할을 사돈들에게 맡겼다. 장남인 조석래(70) 회장의 장인인 송인상(91) 한국능률협회 회장은 만우의 지기이자 조 회장의 후견인이었다. 송 회장은 재무부 장관과 한국수출입 은행장을 두루 거친 경제계의 거물로 조씨가와 사돈을 맺기 전부터 만우와 친분이 두터웠다.78년 만우가 경영일선에서 물러난 이후엔 사위를 도우며 경영에 본격적으로 참여했다. 송 회장은 80년부터 16년간 동양나이론 대표이사 회장을 맡았으며, 지금은 효성 고문으로 있다. 차남인 조양래(68) 한국타이어 회장에겐 처남들의 경영 참여가 눈에 뛴다. 외환은행장을 지낸 손위 처남 홍용희씨가 고문으로 활약했으며, 또 다른 손위 처남인 홍건희 한국타이어 부회장도 경영에 참여할 정도로 한국타이어는 한때 ‘조·홍’ 공동 경영체제를 이뤘다. 삼남 조욱래(56) 동성개발 회장도 장인인 김종대 전 대전피혁 회장의 경영 도움을 많이 받았다. 만우 회장은 77년 대전피혁을 28세에 불과한 욱래 회장에게 맡기고 난 뒤, 사돈인 김종대 전 농림부 장관에게 아들의 뒷일을 맡겼다. 경험이 부족한 아들의 단점을 김 전 장관에게 보완해 달라는 뜻에서다. 김 전 장관은 회장직을 맡아 경영에 나섰다. ●양말 빠는 회장님 만우 회장은 자식들이 혹시나 ‘부잣집 아들 병’에 걸릴 것을 몹시 경계했다. 이 때문에 일부러 엄하게 대했을 뿐 아니라 확실한 경제 개념을 심어주기 위해 어릴 때부터 용돈 예산을 짜게 했다. 또 아들들이 유학을 떠날 때는 유학 기간에 필요하다고 판단한 최소 경비를 한꺼번에 쥐어주며 돈이 남든지, 모자라든지 간에 더 이상의 용돈을 보내주지 않았다. 덕분에 2세들은 유학 시절에 툭하면 접시 닦이를 해서 학비를 벌어야 했다. 그러나 만우가 늘 엄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한번은 중학교에 다니던 양래가 영어책을 잃어버려 난감해 할 때 친구에게 그 영어책을 빌려오게 한 뒤, 밤새 직접 필사를 했다. 또 장남인 석래가 일본에서 고등학교를 다닐 때, 사업차 방문한 만우는 장남의 하숙집에 널려 있던 양말을 깨끗이 빨아 놓을 정도로 자식에 대한 애정이 깊었다. 그는 공석에선 자식이라도 하대를 하지 않았다. 조 회장은 선친에 대해 이렇게 회고했다.“선친은 자식을 키운다고 할까, 믿어준다고 할까 하는 점이 굉장히 강해요. 당시 일반적인 가정과 달리 아들을 독립적인 인격체로 대하고, 자식들의 결정을 무척 존중해 주셨습니다.”실제로 만우 회장은 조 회장이 전공으로 경영학을 선택하기를 바랬지만, 공학을 전공하겠다는 아들의 뜻을 존중해 주었다. 만우는 “재산이라는 것은 있다가 없어지기도 하고, 없다가 들어오기도 한다. 자식에게 재산보다는 스스로 일해서 생활해 나갈수 있는 능력을 꼭 길러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고 한다. ●화려하게 뻗은 2세 혼맥 조씨가(家)의 혼맥은 여느 재벌가 못지않게 사통팔달로 뻗어 있다. 전직 대통령가(家) 뿐 아니라 정·관·재계 골고루 인연이 닿아 있다. 만우와 부인 하 여사는 슬하에 3남 2녀를 뒀다. 장녀와 차녀인 명숙(작고)씨와 명률(78)씨는 만우가 고향인 함안 군북에 있을 때, 인근 대지주 집안에 시집보냈다. 장녀 명숙씨는 진주여고를 졸업한 뒤, 진양 대지주인 허정호(80)씨와 백년가약을 맺었다. 당시 세브란스의전(현 연세대 의대) 학생이었던 정호씨는 신한병원 원장을 지냈다. 둘째 딸 명률씨는 산청 대지주인 권동혁가(家)의 장남인 병규(80)씨와 인연을 맺었다. 병규씨는 한때 효성건설 회장을 역임했다. 효성의 혼맥은 장남인 조석래 회장의 결혼으로 정·재계 중심부로 들어간다. 학업 때문에 결혼이 늦은 조 회장은 그의 나이 32세 때, 송인상 회장의 3녀 광자씨를 평생의 배필로 맞아들였다. 조 회장은 처가를 통해 신명수 전 신동방 회장과 이봉서 단암산업 회장과 동서지간이 된다. 또 신 전 회장가는 노태우 전 대통령과 연결되며, 이 회장가는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와 연이 닿아 있다. 차남인 조양래 회장은 66년 지인의 소개로 법조계 원로인 홍긍식 전 변호사협회 회장의 차녀인 문자(64)씨와 혼례를 치렀다. 조 회장은 이명박 서울시장과 사돈지간이다.3남인 조욱래 회장은 경기여고 교장인 손영경씨의 중매로 김종대 전 농림부 장관의 딸인 김은주(50)씨와 결혼했다. 김 전 장관은 신명수 전 신동방 회장의 부친인 고 신덕균 전 신동방 명예회장의 처남이기도 하다. 조씨가의 혼맥은 방계도 만만치 않다. 만우 회장의 동생인 고 조성제 대전피혁 사장은 5남 3녀를 통해 관·재계의 명망가를 사돈으로 맞아들였다.3남 경래(73)씨는 홍재선 전 전경련 회장의 딸 애수(68)씨와 결혼했으며,4남 익래(70)씨는 원용필씨의 딸 정선(68)씨와 결혼했다. 원용필씨는 원용석 전 경제기획원 장관의 친형이다. 장녀 장숙(68)씨는 정종철 전 서울시장의 아들 창순(70)씨와 결혼했다. golders@seoul.co.kr ■ 조석래 회장의 ‘명문 처가’ 조석래(70) 효성 회장의 처가인 송인상(91·효성 고문) 한국능률협회 회장의 가계도를 들여다보면 화려하다는 단어가 부족할 정도다. 송씨가(家)는 고 김동조 전 외무부장관 가문과 쌍벽을 이룰 정도로 한국 상류사회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전직 대통령가와 사돈으로 연결되어 있을 뿐 아니라 정·관·재·법조계에 이르기까지 ‘그물망 혼맥’으로 촘촘히 엮여 있다. 송 회장 본인도 일제시대의 식산은행을 시작으로 재무부 이재국장과 한국은행 부총재, 부흥부장관, 재무부 장관, 룩셈부르크 대사,EC대사, 한국수출입은행장, 동양나이론(현 효성) 회장 등 관·재계를 넘나드는 화려한 이력을 자랑한다. 슬하에 1남4녀를 둔 송 회장과 최연순(91) 여사는 딸을 모두 국내 대표 집안에 시집보냈다. 특히 손주들의 통혼을 통해 노태우 전 대통령과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 집안과도 연결된다. 장녀 송원자(66)씨는 이봉서(69) 전 상공부 장관과 인연을 맺었다. 이 전 장관은 경기고와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와튼스쿨을 나왔으며, 현재 부동산임대업체인 단암산업 회장이다. 이 전 장관의 부친 고 이필석옹은 상업은행장과 국제화재 회장을 지냈다. 이 전 장관의 3녀인 혜영(33)씨는 1997년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의 장남 정연(42)씨와 화촉을 밝혔다. 두 사람은 정연씨의 친구 소개로 만나 인연을 맺은 것으로 알려졌다. 혜영씨는 숙명여대 대학원을 졸업했으며, 정연씨는 현재 연세대 국제대학원 교수로 재직 중이다. 송 회장의 차녀 길자(63)씨는 신명수(64) 전 신동방 회장과 백년가약을 맺었다. 신 전 회장과 길자씨는 2남 1녀를 뒀으며, 장녀인 정화(36)씨가 노태우 전 대통령의 장남 재헌(40)씨와 결혼했다. 재헌씨는 미국 조지타운대를 나와 변호사로 활동 중이다. 한나라당 이 전 총재와 노 전 대통령은 송 회장가(家)를 통해 ‘사돈의 사돈’인 셈이다. 이렇게 가지치기를 하게 되면 송 회장가는 고 최종현 SK그룹 회장과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 김승연 한화 회장과도 이어진다. 3녀 송광자(61)씨는 조 회장과 67년 결혼해 현준-현문-현상 3형제를 뒀다.4녀 송진주(59)씨는 주관엽(61)씨와 혼인했다. 진주씨는 서울대와 예일대(박사)를 거쳐 현재 미국 캘리포니아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golders@seoul.co.kr ■ ‘예산 샌님’ 조홍제 前회장 만우 조홍제 전 회장의 별명은 샌님과 구두쇠였다. 만우의 고향 사람들은 그를 그냥 샌님도 아닌 ‘예산 샌님’이라 불렀다. 미리 예산을 꼼꼼하게 짜놓고 융통성 없이 그대로 집행하는 데서 비롯됐다. 당시 도움을 받기 위해 만우 회장의 사무실 문턱을 넘는 사람들은 헤아릴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만우가 배정해 두었던 예산이 바닥나기 일쑤였다. 그러면 만우는 “올해 예산이 떨어졌으니까 내년에 보자.”고 했다고 한다. 만우의 먼친척 동생인 조영제씨의 회고는 이렇다.“사회봉사도 회사 경영과 마찬가지로 예산 집행을 한다 이겁니다. 요즘엔 그럴 수 있다 하지만 40년전에 그런 경비를 예산짜서 집행하는 기업가가 대한민국에 또 어디 있겠습니까.” 만우는 구두쇠로도 유명했다. 그냥 구두쇠가 아닌 ‘통 큰’ 구두쇠였다. 그가 세상을 떠나고 난 뒤, 신발장에 남은 것은 밑창이 다 닳은 구두였다는 사실은 잘 알려진 일화다. 그는 내의도 해진 것을 기워입었으며, 양복 역시 다 떨어져 못 입게 되기전까지 새 양복을 맞추는 법이 없었다. 그의 근검절약 정신은 가족들이라고 예외가 아니었다. 자식들에게 용돈을 줄 때는 늘 빠듯하게 줘 낭비하는 버릇을 갖지 않게 했으며, 손자에게 주는 세뱃돈도 천원짜리 한 장으로 때우곤 했다. 만우는 자신이 먹고, 쓰고, 입는 데에는 한없이 검소했지만 자신이 가치 있다고 믿는 일엔 수십억원을 내놓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았다. 쓸 때는 쓰고, 쓰지 않을 때는 쓰지 않는, 그런 구두쇠였다. 만우가 돈을 아끼지 않은 곳은 교육 사업이었다. 대학시절 은사 권유로 교수가 될까 했던 만우는 1950년대부터 영남장학회를 통해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전달했으며, 고향 함안군의 몇몇 학교에 시설을 마련해 주었다.76년엔 운영 부실로 재정난에 빠진 동양학원의 이사장을 맡아 대규모 채무를 해결해줬으며, 학습환경 개선을 위해 당시로서는 거금인 25억원을 내놓았다. “나는 학교에서 돈 한푼 가져가지 않을 겁니다.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을 테니 선생님들은 오직 좋은 교육만을 해주시기 바랍니다.”만우 회장이 이사장으로서 원했던 유일한 소망이었다. golders@seoul.co.kr ●특별취재반 산업부 홍성추 부장 (부국장급·반장) 박건승·정기홍·류찬희 차장 이종락·이기철·주현진·류길상·김경두기자
  • [길섶에서] 맥아더의 약속/이상일 논설위원

    삼성그룹 창업자인 고 이병철 회장은 1982년 미국에서 맥아더 장군의 부인을 만났다. 명예박사 학위를 받으러 보스턴대학에 가는 길이었다. 이 회장은 자서전에서 “이승만 박사와 맥아더 장군이 없었더라면 한국의 독립과 6·25 전승이 과연 있었을까 항상 생각해 왔다.”고 말했다. 이 회장이 선친과 교분이 있는 이 박사에게 가까운 감정을 느꼈다고 할 수 있으나, 맥아더의 경우 노기업가는 그저 전쟁 승리에 공헌한 장군으로 감사한 듯하다. 워싱턴에서 가까운 맥아더기념관을 찾아가자 맥아더의 미망인은 한국 국민과 관련된 갖가지 일화를 들려주었다. 그리고 대접한 한국음식을 처음인 듯 맛있게 들었다. 이 회장은 이후 미국 맥아더기념관과 에버랜드안의 호암미술관앞에 똑같은 맥아더 동상을 세웠다. 한국을 방문해달라는 이 회장의 초청 제의에 당시 맥아더 미망인은 “혼자서는 해외 나들이를 하지 않기로 결혼때 남편과 굳게 약속했다.”며 사양했다고 한다. 젊었을 때 왜 해외나들이 금지 약속을 했는지, 왜 그렇게 오래 지키는지 그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미망인이 생존해서 최근 한국의 맥아더 동상 철거 시비를 본다면 더욱이 오지 않았을 것이다. 이상일 논설위원 bruce@seoul.co.kr
  • [부고]

    ●원로 한학자 조병호 선생 원로 한학자이자 서예가인 정향(靜香) 조병호(趙柄鎬) 옹이 3일 낮 12시15분 대전 건양대병원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92세. 충남 청양에서 태어난 고인은 6세 때부터 위창 오세창과 우하 민형식 선생으로부터 한학 및 금석학을 수학했으며, 특히 금석학에 조예가 깊어 중국 금문(金文)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글꼴을 연구·해석해 중국학계에 널리 알려졌다.1939년 조선미술전람회(선전) 서예부문,1950년 중국·만주국·일본 3국의 합동전인 흥아전의 작문과 서예부문에 입선했다.43세 되던 1956년에는 흐트러진 민족혼과 국혼을 바로잡기 위해 사재를 털어 고향인 충남 청양군 정산에 단제묘(檀帝廟)를 창건하기도 했다.1993년에는 단군사당을 포함해 10억원대의 전재산을 대전대학교에 기증했으며, 대전시로부터 대전시민문화상을 받기도 했다. 빈소는 대전 건양대종합병원. 발인은 5일 오전 8시30분. 장지는 충남 청양군 정산면 덕성리 선영.011-240-1504. ●소병해 삼성화재 고문 소병해 삼성화재 고문이 2일 오후 9시24분 서울대병원에서 지병으로 별세했다.63세. 고인은 1978년부터 만 12년간 고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의 비서실장으로 근무해, 삼성에서 역대 최장 비서실장이란 기록을 갖고 있다. 당시 강한 추진력으로 비서실의 기능을 강화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후 삼성생명 대표이사 부회장, 삼성미주전자 부회장, 삼성카드 부회장 등을 역임했다. 영안실은 삼성서울병원, 발인은 6일 오전 7시.(02)3410-6915. ●신승남(전 검찰총장)승희(자영업)승환(엘케이로지스틱 사장)숙희(신세기산업 사장)씨 부친상 유선주(전 한일은행 부장)박정구(자영업)송호근(와이지-원 사장)씨 빙부상 3일 강남성모병원, 발인 6일 오전 9시 (02)590-2697,2698 ●박종호(정신과 의사·풍월당 대표)씨 모친상 박봉윤(괴정범일병원 이사장)송정호(전 법무부 장관·변호사)김오수(동영물산 대표)씨 빙모상 2일 삼성서울병원, 발인 6일 오전 7시 (02)3410-6920 ●홍찬석(전북대 교수)씨 부친상 4일 삼성서울병원, 발인 6일 오전 9시 (02)3410-6916 ●김경수(삼성증권 잠실지점 부장)흥수(외교통상부 서기관)씨 모친상 3일 삼성서울병원, 발인 6일 오전 9시 (02)3410-6908 ●변영기(전 대건통상 사장)씨 별세 성엽(전 영풍축산 사장)씨 부친상 신기복(전 캐나다 대사)이필호(하이메트 사장)홍세택(대한제분 전무)최백(재미교포)씨 빙부상 4일 고대안암병원, 발인 6일 오전 8시 011-719-3007 ●김연문(현대시멘트 부사장)연성(영진로지스틱스 상무)씨 모친상 2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5일 오전 6시 (02)3010-2293 ●윤영현(대일사 대표)영진(G&R 전무이사)용석(민주평통 고양시협의회 사무국장)석(뉴질랜드 한우리교회 부목사)씨 부친상 홍현광(대우 매직스 과장)씨 빙부상 3일 신촌세브란스병원, 발인 5일 오전 8시30분 (02)392-0699 ●박정엽(한국국제교류재단 편집장)정식(서울대 교수)정대(한양대 〃)정갑(이큐무역회사 사장)정연(치과의사)정열(〃)순복(재미 의사)씨 부친상 황인봉(재미의사)씨 빙부상 3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6일 오전 9시 (02)3010-2295 ●김원상(한마루유통 대표)원항(사업)원일(전문건설 공제조합)원경(상명여중 교사)씨 모친상 이범(범우I.S.P 대표)씨 빙모상 손운숙(서울 방산초등학교 교사)씨 시모상 4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6일 오전 5시 (02)3010-2292 ●손교균(국민은행 마장동 지점장)김흥배(구리시청 건축과)씨 빙모상 4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6일 오전 7시 (02)3010-2251 ●박종민(철기 이범석장군기념사업회 부회장)씨 상배 영수(명화석유 회장)창욱(사업)정숙(동바원예 대표)정순(경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씨 모친상 상훈(Bain & Company Korea)씨 조모상 4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6일 오전 8시30분 (02)3010-2268 ●김태헌(산들네트웍스 부장)씨 모친상 4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6일 오전 6시 (02)3010-2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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