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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재계 인맥 대해부 (4부) 뜨고 지는 기업&기업인 동원그룹] 장남, 명태잡이 배·차남 참치캔 공장서 혹독한 경영수업

    [재계 인맥 대해부 (4부) 뜨고 지는 기업&기업인 동원그룹] 장남, 명태잡이 배·차남 참치캔 공장서 혹독한 경영수업

    “자녀에게 주고 싶지 않지만 줘야 하는 것이 ‘고생’이다. 온실 속의 화초는 강해질 수 없다. 강하게 단련시킬수록 그 사람이 더 강한 사람이 되는 것은 자연의 이치다.” ‘마도로스’ 출신 창업주 김재철 동원그룹 회장의 혹독한 경영 수업은 재계에서도 유명하다. 김 회장은 2004년 12월 일찌감치 장남은 금융(한국투자금융지주), 차남은 식품·수산·포장재 등 생활산업(동원그룹)으로 나눠 후계 구도를 정리했다. 이는 두 아들을 밑바닥에서부터 엄격하게 훈련시켜 위기에 대응하는 맷집을 키우고 사업의 모든 것을 철저히 경험으로 체득해 이론과 실무에 능한 ‘멀티통합형’ 리더로 키우겠다는 김 회장의 경영 철학이 반영된 것으로 해석된다. 우애가 돈독한 두 아들은 현장에서 오래 근무해 친화력이 있고 소탈하다. 큰아들 김남구 한국투자금융지주 부회장은 1987년 대학을 졸업한 뒤 원양어선을 타야 했다. 입사에 앞서 4개월간 해역이 험하기로 유명한 러시아 베링해에 나가 명태잡이배에서 하루 16시간 그물을 던지고 명태를 잡았다. “경영자는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애환을 몸으로 깨달아야 한다”는 아버지 김 회장의 뜻에 따른 것이다. 오너 2세답지 않게 김 부회장은 명태 어획에서부터 갑판 청소 등 온갖 허드렛일을 도맡는 훈련 과정을 거쳤다. 동원산업에도 임원이 아닌 말단 사원으로 입사했다. 4년간 평사원으로 근무한 김 부회장은 1991년 일본 게이오대 대학원(경영관리 전공)을 졸업한 뒤 동원증권으로 옮기며 금융업계에 첫발을 내디뎠다. 2003년 1월 계열분리 당시 모기업인 동원산업이 아닌 금융부문을 택한 건 김 부회장의 결정이었다. 대리, 기획담당 상무, 부사장을 거쳐 2004년 3월 동원증권 대표이사 사장에 오른 김 부회장은 이듬해 6월 자사보다 덩치가 큰 한국투자신탁을 인수했다. 기존 동원금융지주보다 시가총액이 두배나 많은 1조원대의 한국투자금융지주를 출범시켜 대표이사 사장이 됐다. 같은 해 한국투자증권 부회장, 2011년에는 한국투자금융지주 부회장에 오르며 독자적인 경영권 승계를 굳혔다. 김 부회장은 한국투자금융지주 지분 20% 이상을 보유한 최대 주주다. 털털한 상남자 스타일의 김 부회장은 2004년 당시 5조원에 불과한 소규모 동원증권(현 한투증권) 자산을 지난해 23조원까지 끌어올리며 업계 정상에 올려놨다. 동원산업, 동원F&B, 동원시스템즈 등 모기업을 이끌게 된 차남 김남정 동원그룹 부회장의 경영 수업도 형 못지 않게 팍팍했다. 대학을 졸업한 1996년 부친의 지시로 신입사원으로 입사해 경남 창원의 참치캔 제조 공장에서 사무직이 아닌 생산직으로 일했다. 참치캔 포장과 창고 야적 등은 모두 김 부회장의 몫이었다. 당시 2세가 공장에서 일한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누군지 몰랐을 만큼 혹독한 현장 수업을 받았다는 후문이다. 김 부회장은 이어 바쁘기로 소문난 서울 청량리 도매시장 일대에서 2년간 영업사원으로 일하며 현장 경영을 체험했다. 김 부회장은 이후 동원산업 식품사업본부(현 동원F&B) 마케팅팀에서 양반김 담당 마케터로 일하다 기획팀을 거쳐 2003년 미국 미시간대 경영대학원(MBA)을 수료했다. 2004년 회사로 복귀한 김 부회장은 동원F&B 마케팅전략팀장, 동원산업 경영지원실장 등 계열사를 두루 거쳤다. 2011년에는 동원그룹 지주사인 동원엔터프라이즈 부사장 자리에 올랐으며 2013년 12월 부회장으로 초고속 승진했다. 지난해 1월부터 동원그룹 부회장으로 그룹을 진두지휘하고 있는 김 부회장은 같은 해 8월 포장재회사 테크팩솔루션을 인수하는 등 식품에 치우친 사업구조를 다각화하는 데 팔을 걷어붙였다. 지난해 그룹 자산 5조원을 돌파한 후계자 김 부회장은 동원엔터프라이즈의 지분 67.98%를 보유해 아버지 김 회장(24.5%)보다 3배가량 지분이 많다. 포브스코리아에 따르면 김 부회장은 5월 현재 1조 6786억원의 자산을 보유해 한국 주식 부자 21위에 올라 있다. 강주리 기자 jurik@seoul.co.kr
  • [세월호 참사 1년-리멤버 0416] “꺼내 줄게 기다려, 미안해”… 그 바다는 여전히 울고 있었다

    [세월호 참사 1년-리멤버 0416] “꺼내 줄게 기다려, 미안해”… 그 바다는 여전히 울고 있었다

    15일 오전 7시 전남 진도군 팽목항. 전날까지 뿌리던 빗줄기는 잦아들었고, 출렁이던 바다도 노여움을 거뒀다. 한 해 전 304명의 죄 없는 생명을 삼켰던 바다가 이날만큼은 원혼을 위로해도 좋다고 인심을 쓴 듯했다. 부두에는 최대 258명까지 탈 수 있는 여객선이 1시간 전부터 대기하고 있었다. 목적지는 진도군 조도면 병풍도에서 북쪽으로 약 3㎞ 떨어진 곳. 1년 전 세월호가 침몰한 그 해역이다. 40여분 뒤 버스 6대에 나눠 탄 세월호 희생자 가족 200여명이 팽목항에 모습을 드러냈다. 가족들은 참사 1주년을 하루 앞둔 이날 침몰 해역에서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고 실종자 9명의 귀환을 염원하는 헌화를 하기 위해 이곳을 찾았다. 여객선 안은 숙연했다. 가족들은 객실에서 조용히 대기하거나 객실 밖 난간에 기댄 채 먼발치를 말없이 응시했다. 난간 곁에 서 있던 단원고 2학년 8반 고 안주현군의 어머니 김정해(45)씨도 깊은 생각에 잠겼다. 갑자기 고개를 숙인 어머니의 눈물이 주르륵 수면 위로 흩날렸다. “차디찬 바닷속에서 우리 주현이가, 또 주현이 친구들이 분명 ‘살려 달라’고 울부짖었을 텐데, 말도 못할 고통을 겪었을 텐데, 아무것도 못해 준 게 미안해서….” 김씨는 1년 만에 사고 해역을 다시 찾았지만 바다에 나서는 일이 쉽진 않았다. “솔직히 망설였어요. 과연 그 끔찍했던 기억과 마주할 수 있을까 겁나기도 했고….” 하지만 김씨는 이렇게라도 아이와 만나는 길을 택했다. 오전 10시 46분 여객선은 세월호 침몰 해역을 표시한 노란색 부표 앞에 도착했다. 가족들은 실종자의 이름을 차례로 외쳤다. “우리가 꼭 찾겠습니다”라는 다짐이 이어졌다. 헌화가 시작됐다. 국화꽃을 비롯해 초코바, 과자, 책, 노란색 종이배, 빨간 편지 봉투 등이 던져졌다. 여객선은 순식간에 절절한 호곡의 바다가 됐다. 단원고 2학년 7반 허다윤(실종)양의 이모 박은경씨는 침몰 지점을 향해 목 놓아 외쳤다. “꺼내 줄게! 기다려! 미안해! 사랑한다!” 이윽고 정적이 흘렀다. 악명 높은 맹골수도의 파도도 잠잠해졌다. 실종자들과의 만남은 30여분 만에 끝났다. 오전 11시 20분 여객선은 침몰 해역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단원고 2학년 1반 고 김주아양의 아버지 김칠성(55)씨는 딸에게 약속했다. “아직 아무것도 해결된 게 없어요. 실종자도 안 돌아왔고, 인양도 아직 안 됐고, 내 새끼가 왜 죽었는지도 제대로 안 밝혀졌고. 그러니 다시 와야죠. 이 바다로.” 진도 오세진 기자 5sjin@seoul.co.kr
  • [단독] [염전 노예 그 후 1년] 일할 곳도 없고 해봤자 月 5만원… 가족은 염전 주인에게 “다시 데려가라”

    [단독] [염전 노예 그 후 1년] 일할 곳도 없고 해봤자 月 5만원… 가족은 염전 주인에게 “다시 데려가라”

    7일 오후 전남 목포시 호남동 목포역 인근 뒷골목. 여관과 여인숙 간판이 빼곡하게 내걸린 골목에 땅거미가 내려앉자 60~70대 여성들이 하나둘 나왔다. “놀다 가세요. 놀다 가. 방 있어.” 이들이 호객하는 대상은 오갈 데 없이 역전을 떠도는 인부들이다. 한 여인숙 주인은 “넉 달 동안 우리 집에 머물던 60대 ‘염부’(소금 만드는 일에 종사하는 인부)가 그저께 사라졌다”며 “(염전이 쉬는) 겨울 내내 밀린 방값, 술값을 염전 주인이 내주면 해마다 이맘때쯤 일하러 갔던 사람인데 야반도주를 한 것”이라고 말했다. 수십년간 김 양식장과 고기잡이배에서 일했다는 홍모(56)씨는 “염전이나 김 양식장 업주, 고기잡이배 선주들이 인력을 구할 때 소개비를 아끼려고 직접 와서 인부들과 얘기를 해 본 뒤 밀린 방값, 술값 등을 대신 내주고 데려간다”고 설명했다. ●가족에게 인계됐지만 한 달 만에 돌아오기도 신안군 염전에서 장애인과 노숙인 등 무연고자들에 대한 강제노역과 폭행, 임금 착취, 인권 유린 등이 불거진 지 1년이 흘렀다. ‘현대판 노예’ ‘염전 노예’라며 여론이 들끓었다. 불법 인력 유입의 창구로 목포 시내 직업소개소가 거론되면서 당국의 집중적인 단속이 이뤄졌다. 하지만 여관업으로 등록된 일부 숙박업소에서는 여전히 불법적인 인력거래가 이뤄지고 있었다. 직업소개소를 통하려면 인당 70만~100만원을 소개비로 건네야 하는 데다 얼마 버티지 못하고 떠나면 소개비를 날리는 셈이어서 염전 주인들이 이런 방식을 더욱 선호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염전 주인들이 숙박업소를 통해 염전 인부를 구하는 방식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목포역 앞에서 40여년간 장사를 했다는 상인은 “장애가 없다면 누가 죽도록 일하고 돈도 잘 못 받는 염전에 가겠나. 염주들이 데리고 가는 사람은 누가 봐도 좀 부족해 보이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하지만 당국은 신고가 들어오지 않는 한 숙박업소까지 단속할 근거가 없다는 이유로 손을 놓고 있는 실정이다. 실제 경찰과 지방노동청이 지난달 3주간 합동으로 일제 점검한 결과 ‘염전 노예’ 사건이 최초로 불거진 신의도에서 지적장애가 의심되는 염부가 10여명 발견됐다. 또한 합동점검단이 조사를 한 염전 336곳 가운데 11곳에서 23명의 염부들이 총 1억 9000여만원의 임금을 받지 못한 사실이 드러났다. 경찰은 임금 체불 외에 폭행 등 다른 위법 행위가 의심되는 염주 5명을 상대로 내사에 들어갔다. 지난해 구출됐다가 염전으로 돌아온 염부들도 눈에 띄었다. 12년간 염전에서 일했다는 문모(51)씨는 경찰 조사 후 강원도의 가족에게 인계됐지만 적응하지 못하고 한 달 만에 염전으로 돌아왔다. 경찰 관계자는 “지적장애가 의심된다고 격리가 능사는 아니다”라며 “지난해 구출된 염부 중 다수가 신안 일대에서 또다시 염전 일을 하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염전에서 일하는 지적장애인들의 임금 체불과 인권유린을 막으려면 장애인 인권단체 등 전문가를 참여시켜 상시적으로 염전을 살펴봐야 한다고 지적한다. 지난해 경찰 일제조사 때 지적장애인 진술 조력인으로 참여했던 박수인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팀장은 “그나마 노하우가 쌓인 경찰 인력이 정기인사로 교체된데다 현재 도서지역을 관할하는 경찰서 7곳에 2~3명씩 있는 인권수사팀에는 장애인 인권을 다룰 전문인력이 없다”며 “이들이 지적장애가 의심되는 염부들을 한두 번 면담한다고 해서 인권유린 등 위법행위가 있었는지 알아채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 ●지적장애인 구출만 하고 사후대책 전무 지자체 등 당국의 사후 관리에 대한 아쉬움도 지적됐다. 염전 노예 피해자들이 생활해 온 노숙인 재활시설의 한 사회복지사는 “지난해 구출만 이뤄졌지 사후 관리나 대책은 전무했다”며 “지적장애인들이 일할 수 있는 보호작업장에 들어가려면 몇 개월을 기다려야 하고 임금은 5만~20만원 수준”이라고 말했다. 이어 “피해자 대부분이 시설에서만 지내는 생활을 답답해하다가 자진해서 염전 주인에게 받아 달라고 연락할 정도”라고 전했다. 글 사진 신안 최훈진 기자 choigiza@seoul.co.kr 목포 서유미 기자 seoym@seoul.co.kr
  • 여성 독립운동가 재조명 대토론회

    여성 독립운동가 재조명 대토론회

    ‘통일의 길, 한국여성 독립운동에서 찾다’라는 주제로 여성 독립운동에 관한 대토론회가 오는 25일 오후 1시 30분 국회의원회관 대회의실에서 열린다. 3·1절을 앞두고 황인자 국회의원과 국가보훈처가 공동주최하는 이번 토론회는 이배용 한국학중앙연구원장이 기조강연을 맡고, 박용옥 성신여대 명예교수가 좌장을 맡았다. 심옥주 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장, 신영숙 이화여대 이화사학연구소 연구원, 윤정란 서강대 종교연구소 연구원, 이방원 한국사회복지역사문화연구소장, 김정아 국가보훈처 전문관, 오일환 보훈교육연구원장 등 7명의 전문가 패널이 참여한다. 세화여중, 경신고, 춘천여고, 정신여고, 덕성여대, 경희대 등 중·고·대학생 9명도 청소년 패널로 함께한다. 2014년말 기준 독립유공 포상자는 모두 1만 3744명이다. 이중 외국인이 47명, 여성이 246명, 남성이 1만 3451명이다. 일제 침략에 항거한 여성 독립운동가는 무수히 많지만 정부로부터 서훈을 받은 여성독립유공자는 단 2%에도 못 미치는 실정이다. 예를 들어 모든 가족이 독립운동을 했던 오희옥 애국지사의 경우 아버지가 1962년 독립장을 서훈 받았지만 함께 독립운동을 했던 어머니는 1995년, 오 지사와 언니는 1990년에 애족장 서훈을 받은 것처럼 독립운동사에 있어 여성이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황 의원은 “올해는 광복과 함께 분단이 된지 70년이 되는 해로 나라의 독립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했던 순국선열의 고귀한 뜻을 되새겨야 할 뜻 깊은 해임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우리 사회는 여성 독립운동에 너무나 무관심했다”면서 “이번 국회 토론회가 이 땅에서 여성으로 살아가며 조국의 독립을 외쳤던 한국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치열했던 삶을 재조명함으로써 진정한 독립과 광복의 완성, 나아가 통일의 길을 찾는 데 소중한 기회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김주혁 선임기자 happyhome@seoul.co.kr
  • 위키리, 미국서 지병으로 별세 ‘한국서 어떤 활동했나 보니..’

    위키리, 미국서 지병으로 별세 ‘한국서 어떤 활동했나 보니..’

    위키리(본명 이한필)가 12일 향년 79세로 미국 LA에서 별세했다. 고인의 장남은 “로스앤젤레스에 거주하던 아버지가 오늘 오후 5~6시쯤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셨다”며 “3형제가 모두 한국에 살고 있어 미국으로 가 장례 절차를 논의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위키리는 1960년대에 활동한 가수로 1960년 미8군 쇼단체인 ‘메이크 인 후피 쇼’(Make in Whoopy Show)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1963년 최희준, 유주용, 박형준과 함께 포클로버스를 결성했고 ‘저녁 한때의 목장 풍경’, ‘종이배’, ‘눈물을 감추고 등을 연이어 성공해 많은 인기를 얻었다. 사진=서울신문DB 뉴스팀 seoulen@seoul.co.kr
  • 위키리 별세 “전국노래자랑 초대 MC” 얼마나 유명했나

    위키리 별세 “전국노래자랑 초대 MC” 얼마나 유명했나

    위키리 별세 위키리 별세 “전국노래자랑 초대 MC” 얼마나 유명했길래 1960년대 가수이자 방송진행자로도 활약한 위키리(본명 이한필)가 12일 미국에서 별세했다. 79세. 고인의 장남은 “로스앤젤레스에 거주하던 아버지가 오늘 오후 5~6시쯤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셨다”며 “3형제가 모두 한국에 살고 있어 미국으로 가 장례 절차를 논의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서라벌예술대학 연극영화과를 졸업한 위키리는 1960년 미8군 쇼단체인 ‘메이크 인 후피 쇼’(Make in Whoopy Show)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1963년 최희준, 유주용, 박형준과 함께 남성 사중창단 ‘포클로버스’(네잎클로버)를 결성했다. 포클로버스는 당시 보기 드문 학사 출신들로 구성됐으며 각자 솔로로 활동하며 때에 따라 팀으로 함께 무대에 서는 ‘따로 또 같이’ 팀으로 1964년 1집, 1966년 2집을 발표했다. 포클로버스 1집 타이틀곡으로 수록된 위키리의 데뷔곡 ‘저녁 한때의 목장 풍경’이 당시 크게 히트했다. 이어 ‘종이배’, ‘눈물을 감추고’ 등을 부른 위키리는 1970년대 중반 국어순화운동 당시 본명인 이한필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는 방송에서 진행자로도 크게 활약했다. 1960년대 중반부터는 동아방송의 라디오 교통정보 프로그램 ‘달려라 위키리’의 DJ를 맡았고 1976년부터 TBC ‘쇼쇼쇼’를 진행했다. 또 송해(88)에 앞서 1980년 11월부터 5년간 ‘전국노래자랑’의 초대 MC도 지냈다. 대중음악평론가 박성서 씨는 “위키리 씨는 ‘한국의 바비 달린’으로 불리며 미8군 쇼에서 활동을 시작했고 당시 경기고와 서라벌예술대학을 나온 ‘인텔리’ 가수였다”며 “1960년대 우리 대중음악의 흐름을 바꿔놓으며 시대를 리드한 인물로 MC로도 활동한 엔터테이너”라고 평했다. 영화에도 출연하며 다방면에서 활동한 고인은 1992년 미국으로 건너 가 교포방송 KATV에서 ‘굿 이브닝 코리안’을 진행하는 등 미국에서 거주해왔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위키리 별세 ‘전국노래자랑’ 초대 MC, 미국서 지병으로 숨져

    위키리 별세 ‘전국노래자랑’ 초대 MC, 미국서 지병으로 숨져

    ‘위키리 별세’ 가수 겸 방송진행자 위키리(본명 이한필)가 12일(한국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지병으로 별세했다. 79세. 위키리는 1960년대 미8군 쇼 무대에서 데뷔했으며 ‘종이배’, ‘눈물을 감추고’, ‘저녁 한때의 목장 풍경’ 등 히트곡을 남겼다. KBS ‘전국노래자랑’ 초대 MC(1981~1985)이기도 한 그는 ‘밤하늘의 브루스’(1966), ‘폭풍의 사나이’(1968) 등 방송·영화계를 넘나드는 활발할 활동을 펼쳤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위키리 별세, ‘전국노래자랑 초대MC’ 한국의 바비달린 그는 누구? 과거 히트곡 보니

    위키리 별세, ‘전국노래자랑 초대MC’ 한국의 바비달린 그는 누구? 과거 히트곡 보니

    위키리 별세, ‘전국노래자랑 초대MC’ 한국의 바비달린 그는 누구? 과거 히트곡 보니 ‘위키리 별세’ 전국노래자랑 초대 MC 위키리(본명 이한필)가 12일 향년 79세로 미국 LA에서 별세했다. 위키리는 지난 12일(현지시간) 미국 LA에서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고인은 평소 지병을 앓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고인의 장남은 “로스앤젤레스에 거주하던 아버지가 오늘 오후 5~6시쯤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셨다”며 “3형제가 모두 한국에 살고 있어 미국으로 가 장례 절차를 논의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위키리는 1960년대에 활동한 가수로 1960년 미8군 쇼단체인 ‘메이크 인 후피 쇼’(Make in Whoopy Show)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1963년 최희준, 유주용, 박형준과 함께 포클로버스를 결성했고 ‘저녁 한때의 목장 풍경’, ‘종이배’, ‘눈물을 감추고 등을 연이어 성공해 많은 인기를 얻었다. 위키리는 방송에서 진행자로도 크게 활약했다. 위키리는 1960년대 중반부터는 동아방송의 라디오 교통정보 프로그램 ‘달려라 위키리’,1976년부터 TBC ‘쇼쇼쇼’를’쇼쇼쇼’를 진행했다. 특히 1980년 11월부터 약 5년간 KBS 2TV ‘전국노래자랑’의 초대 MC로 송해와 호흡을 맞췄다. 대중음악평론가 박성서 씨는 “위키리 씨는 ‘한국의 바비 달린’으로 불리며 미8군 쇼에서 활동을 시작했고 당시 경기고와 서라벌예술대학을 나온 ‘인텔리’ 가수였다”며 “1960년대 우리 대중음악의 흐름을 바꿔놓으며 시대를 리드한 인물로 MC로도 활동한 엔터테이너”라고 평했다. 사진=서울신문DB(위키리 별세) 연예팀 seoulen@seoul.co.kr
  • 위키리 별세 “전국노래자랑 초대 MC” 과거 인기 ‘대박’

    위키리 별세 “전국노래자랑 초대 MC” 과거 인기 ‘대박’

    위키리 별세 위키리 별세 “전국노래자랑 초대 MC” 과거 인기 ‘대박’ 1960년대 가수이자 방송진행자로도 활약한 위키리(본명 이한필)가 12일 미국에서 별세했다. 79세. 고인의 장남은 “로스앤젤레스에 거주하던 아버지가 오늘 오후 5~6시쯤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셨다”며 “3형제가 모두 한국에 살고 있어 미국으로 가 장례 절차를 논의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서라벌예술대학 연극영화과를 졸업한 위키리는 1960년 미8군 쇼단체인 ‘메이크 인 후피 쇼’(Make in Whoopy Show)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1963년 최희준, 유주용, 박형준과 함께 남성 사중창단 ‘포클로버스’(네잎클로버)를 결성했다. 포클로버스는 당시 보기 드문 학사 출신들로 구성됐으며 각자 솔로로 활동하며 때에 따라 팀으로 함께 무대에 서는 ‘따로 또 같이’ 팀으로 1964년 1집, 1966년 2집을 발표했다. 포클로버스 1집 타이틀곡으로 수록된 위키리의 데뷔곡 ‘저녁 한때의 목장 풍경’이 당시 크게 히트했다. 이어 ‘종이배’, ‘눈물을 감추고’ 등을 부른 위키리는 1970년대 중반 국어순화운동 당시 본명인 이한필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는 방송에서 진행자로도 크게 활약했다. 1960년대 중반부터는 동아방송의 라디오 교통정보 프로그램 ‘달려라 위키리’의 DJ를 맡았고 1976년부터 TBC ‘쇼쇼쇼’를 진행했다. 또 송해(88)에 앞서 1980년 11월부터 5년간 ‘전국노래자랑’의 초대 MC도 지냈다. 대중음악평론가 박성서 씨는 “위키리 씨는 ‘한국의 바비 달린’으로 불리며 미8군 쇼에서 활동을 시작했고 당시 경기고와 서라벌예술대학을 나온 ‘인텔리’ 가수였다”며 “1960년대 우리 대중음악의 흐름을 바꿔놓으며 시대를 리드한 인물로 MC로도 활동한 엔터테이너”라고 평했다. 영화에도 출연하며 다방면에서 활동한 고인은 1992년 미국으로 건너 가 교포방송 KATV에서 ‘굿 이브닝 코리안’을 진행하는 등 미국에서 거주해왔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위키리 별세, 송해 앞서 전국노래자랑 초대 MC ‘향년 79세 지병으로..’

    위키리 별세, 송해 앞서 전국노래자랑 초대 MC ‘향년 79세 지병으로..’

    ‘위키리 별세’ 가수 겸 방송진행자 위키리(본명 이한필)가 12일 미국에서 향년 79세의 나이에 지병으로 별세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한 매체의 보도에 따르면 위키리의 장남은 “로스앤젤레스에 거주하던 아버지가 오늘 오후 5~6시께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셨다”며 “3형제가 모두 한국에 살고 있어 미국으로 가 장례 절차를 논의할 예정”이라고 밝혔다고 보도했다. 서라벌예술대학 연극영화과를 졸업한 위키리는 1960년 미8군 쇼단체인 ‘메이크 인 후피 쇼’(Make in Whoopy Show)에서 활동을 시작해 1963년 최희준, 유주용, 박형준과 함께 남성 사중창단 ‘포클로버스’(네잎클로버)를 결성했다. 포클로버스 1집 타이틀곡으로 수록된 데뷔곡 ‘저녁 한때의 목장 풍경’등의 히트곡을 남기며 스타덤에 올른 위키리는 ‘종이배’, ‘눈물을 감추고’ 등을 부르며 1970년대 중반 국어순화운동 당시 본명인 이한필로 활동하기도 했다. 위키리는 방송 진행자로도 활약했다. 1960년대 중반부터는 동아방송의 라디오 교통정보 프로그램 ‘달려라 위키리’의 DJ를 맡았고, 1976년부터 TBC ‘쇼쇼쇼’를 진행했다. 특히 송해에 앞서 1980년 11월부터 5년간 ‘전국노래자랑’의 초대 MC를 지냈다. 영화에도 출연하며 다방면에서 활동한 위키리는 1992년 미국으로 건너가 교포방송 KATV에서 ‘굿 이브닝 코리안’을 진행하는 등 미국에서 거주해왔다. 위키리 별세 소식에 네티즌은 “위키리 별세..안타깝다”, “위키리 별세..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위키리 별세..계속 미국에 계셨구나”, “위키리 별세..명복을 빕니다”, “위키리 별세..어떤 병이길래”등 반응을 보였다. 사진 = 서울신문DB (위키리 별세) 연예팀 chkim@seoul.co.kr
  • [부고] 전국노래자랑 초대 MC 위키리

    [부고] 전국노래자랑 초대 MC 위키리

    1960년대 가수이자 유명 방송진행자로도 활약했던 위키리(본명 이한필)가 12일 미국에서 별세했다. 79세 서라벌예술대학 연극영화과를 졸업한 위키리는 1960년 미8군 쇼 단체인 ‘메이크 인 후피 쇼’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1963년 최희준, 유주용, 박형준과 함께 남성 사중창단 ‘포클로버스’(네잎클로버)를 결성했다. 포클로버스는 당시 보기 드문 학사 출신들로, 각자 솔로로 활동하다가 때에 따라 팀으로 함께 무대에 서는 ‘따로 또 같이’ 팀이었다. 포클로버스 1집 타이틀곡이자 위키리의 데뷔곡 ‘저녁 한때의 목장 풍경’이 당시 크게 히트했다. 이어 ‘종이배’, ‘눈물을 감추고’ 등을 부른 위키리는 1970년대 국어순화운동 당시 본명인 이한필로 활동했다. 1960년대 중반부터는 동아방송의 라디오 교통정보 프로그램 ‘달려라 위키리’의 DJ를 맡았고 1976년부터 TBC ‘쇼쇼쇼’를 진행했다. 또 송해에 앞서 1980년 11월부터 5년간 ‘전국노래자랑’의 초대 MC도 지냈다. 1992년 미국으로 건너가 교포방송 KATV에서 ‘굿 이브닝 코리안’을 진행하는 등 미국에서 거주해 왔다. 김소라 기자 sora@seoul.co.kr
  • 위키리 별세, 미국서 지병으로.. ‘안타까워’

    위키리 별세, 미국서 지병으로.. ‘안타까워’

    위키리(본명 이한필)가 12일 향년 79세로 미국 LA에서 별세했다. 고인의 장남은 “로스앤젤레스에 거주하던 아버지가 오늘 오후 5~6시쯤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셨다”며 “3형제가 모두 한국에 살고 있어 미국으로 가 장례 절차를 논의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위키리는 1960년대에 활동한 가수로 1960년 미8군 쇼단체인 ‘메이크 인 후피 쇼’(Make in Whoopy Show)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1963년 최희준, 유주용, 박형준과 함께 포클로버스를 결성했고 ‘저녁 한때의 목장 풍경’, ‘종이배’, ‘눈물을 감추고 등을 연이어 성공해 많은 인기를 얻었다. 사진=서울신문DB 뉴스팀 seoulen@seoul.co.kr
  • 위키리 별세 ‘전국노래자랑’ 초대 MC…그는 누구?

    위키리 별세 ‘전국노래자랑’ 초대 MC…그는 누구?

    ‘위키리 별세’ 가수 겸 방송진행자 위키리(본명 이한필)가 12일(한국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지병으로 별세했다. 79세. 위키리는 1960년대 미8군 쇼 무대에서 데뷔했으며 ‘종이배’, ‘눈물을 감추고’, ‘저녁 한때의 목장 풍경’ 등 히트곡을 남겼다. KBS ‘전국노래자랑’ 초대 MC(1981~1985)이기도 한 그는 ‘밤하늘의 브루스’(1966), ‘폭풍의 사나이’(1968) 등 방송·영화계를 넘나드는 활발할 활동을 펼쳤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위키리 별세, 미국서 향년 79세로 별세 ‘그는 누구?’

    위키리 별세, 미국서 향년 79세로 별세 ‘그는 누구?’

    전국노래자랑 초대 MC 위키리(본명 이한필)가 12일 향년 79세로 미국 LA에서 별세했다. 고인의 장남은 “로스앤젤레스에 거주하던 아버지가 오늘 오후 5~6시쯤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셨다”며 “3형제가 모두 한국에 살고 있어 미국으로 가 장례 절차를 논의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위키리는 1960년대에 활동한 가수로 1960년 미8군 쇼단체인 ‘메이크 인 후피 쇼’(Make in Whoopy Show)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1963년 최희준, 유주용, 박형준과 함께 포클로버스를 결성했고 ‘저녁 한때의 목장 풍경’, ‘종이배’, ‘눈물을 감추고 등을 연이어 성공해 많은 인기를 얻었다. 사진=서울신문DB 뉴스팀 seoulen@seoul.co.kr
  • 위키리 별세, 누군가 보니 ‘전국노래자랑 초대MC’ 이력보니

    위키리 별세, 누군가 보니 ‘전국노래자랑 초대MC’ 이력보니

    위키리(본명 이한필)가 12일 향년 79세로 미국 LA에서 별세했다. 고인의 장남은 “로스앤젤레스에 거주하던 아버지가 오늘 오후 5~6시쯤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셨다”며 “3형제가 모두 한국에 살고 있어 미국으로 가 장례 절차를 논의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위키리는 1960년대에 활동한 가수로 1960년 미8군 쇼단체인 ‘메이크 인 후피 쇼’(Make in Whoopy Show)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1963년 최희준, 유주용, 박형준과 함께 포클로버스를 결성했고 ‘저녁 한때의 목장 풍경’, ‘종이배’, ‘눈물을 감추고 등을 연이어 성공해 많은 인기를 얻었다. 뉴스팀 seoulen@seoul.co.kr
  • 위키리 별세…‘전국노래자랑’ 초대 MC, 미국서 지병으로 숨져

    위키리 별세…‘전국노래자랑’ 초대 MC, 미국서 지병으로 숨져

    ‘위키리 별세’ 가수 겸 방송진행자 위키리(본명 이한필)가 12일(한국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지병으로 별세했다. 79세. 위키리는 1960년대 미8군 쇼 무대에서 데뷔했으며 ‘종이배’, ‘눈물을 감추고’, ‘저녁 한때의 목장 풍경’ 등 히트곡을 남겼다. KBS ‘전국노래자랑’ 초대 MC(1981~1985)이기도 한 그는 ‘밤하늘의 브루스’(1966), ‘폭풍의 사나이’(1968) 등 방송·영화계를 넘나드는 활발할 활동을 펼쳤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위키리 별세 “전국노래자랑 초대 MC” 얼마나 유명했길래

    위키리 별세 “전국노래자랑 초대 MC” 얼마나 유명했길래

    위키리 별세 위키리 별세 “전국노래자랑 초대 MC” 얼마나 유명했길래 1960년대 가수이자 방송진행자로도 활약한 위키리(본명 이한필)가 12일 미국에서 별세했다. 79세. 고인의 장남은 “로스앤젤레스에 거주하던 아버지가 오늘 오후 5~6시쯤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셨다”며 “3형제가 모두 한국에 살고 있어 미국으로 가 장례 절차를 논의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서라벌예술대학 연극영화과를 졸업한 위키리는 1960년 미8군 쇼단체인 ‘메이크 인 후피 쇼’(Make in Whoopy Show)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1963년 최희준, 유주용, 박형준과 함께 남성 사중창단 ‘포클로버스’(네잎클로버)를 결성했다. 포클로버스는 당시 보기 드문 학사 출신들로 구성됐으며 각자 솔로로 활동하며 때에 따라 팀으로 함께 무대에 서는 ‘따로 또 같이’ 팀으로 1964년 1집, 1966년 2집을 발표했다. 포클로버스 1집 타이틀곡으로 수록된 위키리의 데뷔곡 ‘저녁 한때의 목장 풍경’이 당시 크게 히트했다. 이어 ‘종이배’, ‘눈물을 감추고’ 등을 부른 위키리는 1970년대 중반 국어순화운동 당시 본명인 이한필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는 방송에서 진행자로도 크게 활약했다. 1960년대 중반부터는 동아방송의 라디오 교통정보 프로그램 ‘달려라 위키리’의 DJ를 맡았고 1976년부터 TBC ‘쇼쇼쇼’를 진행했다. 또 송해(88)에 앞서 1980년 11월부터 5년간 ‘전국노래자랑’의 초대 MC도 지냈다. 대중음악평론가 박성서 씨는 “위키리 씨는 ‘한국의 바비 달린’으로 불리며 미8군 쇼에서 활동을 시작했고 당시 경기고와 서라벌예술대학을 나온 ‘인텔리’ 가수였다”며 “1960년대 우리 대중음악의 흐름을 바꿔놓으며 시대를 리드한 인물로 MC로도 활동한 엔터테이너”라고 평했다. 영화에도 출연하며 다방면에서 활동한 고인은 1992년 미국으로 건너 가 교포방송 KATV에서 ‘굿 이브닝 코리안’을 진행하는 등 미국에서 거주해왔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고품격 문화콘텐츠 개발 등 역점”

    “고품격 문화콘텐츠 개발 등 역점”

    “신한류의 중심에 한국학이 있습니다. 고품격이면서도 지속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시대의 중심 콘텐츠를 개발하는 데 주력할 계획입니다. 대중과의 눈높이를 맞춰 소통하고 공감하는 것이 첫 번째 행보가 될 것입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이하 한중연)이 한국학의 대중화, 콘텐츠의 품격화, 문화 콘텐츠의 외교자원화를 선언했다. 이배용 원장은 27일 서울 중구 태평로 프레스센터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지난해부터 시행한 ‘찾아가는 한국학 콘서트’를 일반인뿐 아니라 청소년들도 참여할 수 있도록 확대 추진할 것”이라면서 “집적된 한국학 역량을 국민들에게 돌리며 그 꽃과 열매가 더욱 풍성하게 결실을 맺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한중연은 한국학 콘텐츠 대중화의 세부적인 내용 중 하나로 조선 시대 과거시험 답지 시권(試券)에 대한 종합적인 연구를 진행한다. 조선 시대 양반 사회의 문화적 본질을 파악하고 과거제도의 실상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조선 시대 문화상, 사회상의 구체적인 모습을 파악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문화 콘텐츠로서 출판물, 영상물 등으로 가공할 계획이다. 또한 2024년까지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편찬 사업 2단계에 들어간다. 전국 230여개 시·군·구 지역의 다양한 향토문화 자료를 체계적으로 집대성하고 인터넷 등 다양한 정보통신매체를 통해 서비스하며 이를 바탕으로 이용자들이 다시 새로운 지식 콘텐츠로 가공해 내는 순환형 지식정보시스템 구축의 일환이다. 특히 세계 각국에 퍼져 있는 한민족의 전통문화 자료를 발굴, 분석해 체계적으로 집대성하는 세계한민족문화대전 중장기 마스터플랜을 마친다. 연말까지 그 첫 작품으로 ‘세계한민족문화대전-중국편’이 나올 예정이다. 이 밖에 세계 35개국 455권의 교과서를 분석해 한국 관련 내용의 오류 시정에 나설 계획이다. 이 원장은 “한국학은 한민족 정신문화의 근간이자 콘텐츠의 보고”라면서 “더 많은 역사적 자료들이 빛을 보고, 인류가 이에 감동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다”고 말했다. 또 “문화적 경쟁력을 높이고 후세에 자긍심과 창의성을 전달하는 데 취약한 부분이 있는 것이 사실인 만큼 이를 보완하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박록삼 기자 youngtan@seoul.co.kr
  • 국내여행 | 창원·거제의 쏠쏠한 재미

    국내여행 | 창원·거제의 쏠쏠한 재미

    그곳에서만 가능한 경험! 여행자가 가진 가장 원초적인 욕망이다. 그런 이유에서 내게 해금강과 거제 조선소의 가치는 동가였다. 산업도 때론 풍경이 된다. ●창원에 대한 새로운 시선 창원컨벤션센터에 도착했을 때 김호남 부단장이 말했다.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실제 가동률이 70%나 됩니다. 전국 최고 수준이죠. 이공계열과 람사르 협약 같은 환경관련 행사로 특화되어 있어서 잘 모르시는 경우가 많지만요.” 코엑스COEX도 알고 킨텍스KINTEX도 알고, 벡스코BEXCO도 알지만 세코CECO, 즉 창원컨벤션센터는 처음이었다. 시작이 신선했다. 새로운 시점의 여행이었다. 산과 바다, 명소를 찾는 여행이 아니라 산업시찰의 관점에서 다시 보는 창원과 거제. 1박2일의 시간은 턱없이 부족했지만 같은 도시에 대해 전혀 새로운 느낌을 갖기에는 충분했다. 세코의 건축 설계는 기계의 터빈을 닮아 있었다. 세코가 한국국제기계박람회KIMEX의 홈구장이기 때문. 1997년에 경남국제기계박람회로 시작했다가 1999년부터는 한국국제기계박람회로 규모가 커졌고, 세코 개관 이후 2006년부터 세코로 자리를 옮겨 개최하고 있는 기계설비 분야의 대표적인 박람회다. 아무리 시설 좋고 잘 조직된 국제행사라고 해도 그 만족도는 케이터링서비스에서 판가름이 나는 경우가 많은데 세코 1층의 레스토랑 하트Heart에서 안도를 얻었다. 이웃한 창원 풀먼호텔에서 운영한다는 이 뷔페 레스토랑에서는 세계 어느 나라와 비교해도 빠지지 않을 음식들을 서울의 절반도 안 되는 가격에 제공하고 있었다. 횡재라고 느낄 정도였다. 신선하고 즐거운 충격은 창원국제사격장에서도 이어졌다. 남자들에겐 군대의 추억, 여자들에겐 그저 위험한 일로만 여겨지던 사격이 신나는 게임, 중독성 있는 스포츠로 바뀌기까지는 불과 30분도 걸리지 않았다. 역시 아는 것과 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다. 국내 유일의 국제규격 사격장인 만큼 시설도 장비도 믿음직했는데, 2018년 국제사격선수권대회를 앞두고 개보수 공사를 할 예정이라니 더 좋아지는 일만 남았다. 창원국제사격장 사격 체험 창원국제사격장은 국내에서 유일하게 국제사격연맹ISSF의 기준을 만족시킨 곳으로 2018년 세계사격선수권대회가 개최될 장소다. 초보자도 누구나 사격을 해 볼 수 있다. 클레이(25발 2만2,000원), 공기총(20발 3,000원), 화약총(10발 1만4,000~2만원) 055-712-0725 삼성중공업 거제조선소 투어 견학용 셔틀버스를 타고 이동하며 보안상의 문제로 사진촬영은 전망대에서만 가능하다. 견학은 무료지만 3일 전에 신청서를 접수해야 한다. 견학 소요 시간은 20~30분 정도. 월~금요일 10:00, 14:00 055-630-6015 www.shi.samsung.co.kr ‘삼성’스러운 거제삼성호텔 잘 알려지지 않은 거제의 특1급 호텔. 총 166개의 객실은 바다 혹은 야드를 향하고 있으며 ‘삼성’이라는 브랜드에 합당한 시설과 서비스를 제공한다. 스탠다드 객실의 공시 요금이 1박에 30만원이 넘는다. www.sghotel.co.kr 창원컨벤션센터 CECO 연간 110만명 이상이 방문하는 경남의 대표적인 전시·컨벤션센터다. 2개의 전시장과 컨벤션홀을 갖추고 있다. 브릿지를 통해 특1급 풀만호텔로 연결되며 그 옆으로 롯데마트, CGV 영화관 등의 쇼핑엔터테인먼트 시설까지 있어서 원스톱 서비스가 제공된다. www.ceco.co.kr ●살기 좋은 마진창 마산, 진해, 창원이 통합 창원시(의창구, 성산구, 마산합포구, 마산회원구, 진해구로 구성되어 있다)라는 이름 아래 모인 지도 벌써 14년이 넘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마진창이라는 이름을 기억한다. 뉴스를 타고 재분리 주장과 지역 갈등에 대한 이야기가 들려오는 것도 여전하다. 하지만 이방인의 눈에 창원은 그저 살기 좋은 도시로만 보였다. 기계공업단지라는 도시의 위상과는 어울리지 않게 유럽의 마을을 연상시키는 주택가의 소담스런 풍경이나 도시 풍경을 크게 훼손하지 않는 작은 상점들의 어우러짐. 109만명의 인구가 연회비 3만원만 내면 242개의 자전거 터미널에서 자유롭게 대여하고 반납할 수 있는 2,500여 대 이상의 자전거를 보유한 자전거 대여 시스템 ‘누비자www.nubija.com’까지, 창원은 한번 살아보고 싶은 도시다. 섬으로 눈을 돌려도 마찬가지다. 교통이 불편했던 도서 벽지에 연륙교를 놓아 새로운 길을 찾았다. 해양공원으로 개발된 진해 음지도도 그중 하나다. 때를 맞추기 위해 버스는 굽이굽이 열심히도 달렸지만 음지도 창원해양공원에 도착했을 때는 결국 늦고 말았다. 해가 눈앞에서 막 사라졌다. 엘리베이터도 마음이 급했는지 단숨에 27층 전망대에 올랐다. 하지만 빈 하늘에는 아쉬움만 붉게 번져 가고 있었다. 2013년 12월부터 창원해양공원의 랜드마크로 우뚝 선 솔라타워는 높이 136m로 국내 최고 높이의 해상전망대다. 유리창을 통해 우도부터 저도까지, 진해만의 가깝고 먼 섬들이 아직은 뚜렷했다. 서서히 어둠의 썰물에 잠기는 섬들. 먼 바다에는 오징어잡이배의 불빛이 등대처럼 명멸하기 시작했다. 전망대의 역할이 전부가 아니다. 솔라타워의 외벽을 채운 것은 2,000여 장의 태양광 집열판들. 200가구가 하루 동안 사용할 수 있을 만큼의 전기가 만들어지기에 자급자족하고 남은 전기는 한전에 판매도 한다. ●거제의 美, 산업의 풍경 지난여름 찾았던 거제에서 가장 눈에 거슬리는 존재들이 바로 바닷가에 우뚝 솟은 초대형 크레인들이었다. 멋진 일몰의 실루엣을 다 망쳐 버리는 삭막한 구조물들. 그런데 삼성중공업의 거제 조선소가 ‘투어’ 일정으로 잡혀 있었다. 심지어 전날 숙소는 ‘크레인 뷰’의 호텔이었다. ‘거제에 삼성호텔이 있다고요?’ 나만 금시초문인가 했더니 창원토박이라는 카페 주인이 되물었다. 2005년 오픈했지만 이웃 도시 창원 사람들조차 잘 모르는 모양이다. 그러나 삼성중공업 조선소의 VIP라면 모를 리 없는 호텔이다. 압도적으로 크거나 화려하지 않지만 어느 것 하나 손색이 없었다. 아이보리 톤의 클래식한 객실에 최신형 평면 스크린 TV는 어쩐지 조화롭지 않은 느낌이었지만, 여기는 ‘삼성’호텔이 아닌가. 드디어 삼성중공업에서 운영하는 거제조선소 견학이 시작됐다. 상투적인 문구로만 인식되어 왔던 ‘세계 최고의 조선소’가 마치 팝업북처럼 눈앞에 입체로 펼쳐졌다.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길이 285m의 선박은 그냥 ‘큰’ 배가 아니었다. 높이 249m의 서울 여의도 63빌딩을 통째로 담을 수 있는 크기다. 버스를 타고 이동하며 설명을 듣는 견학은 20분 정도로 짧고 전망대를 제외한 곳에서는 촬영도 하차도 할 수 없었지만 그 모든 설명을 듣고 나자 그동안 흉물이라고 생각했던 ‘골리앗 크레인’들에게 고개를 숙이고 싶을 지경이 됐다. 이곳에서 가장 비싼 선박에 속한다는 한 LNG선은 대한민국 전 가구가 하루 동안 사용할 수 있는 양의 가스를 영하 163도로 액화해 운송한다. 과연 7조원의 값어치다. 바다 속으로 1만2,000m까지 파고 들어갈 수 있다는 드릴쉽은 또 어떤가. 참고로 에베레스트의 높이가 8,848m다. 축구장 4개 크기의 육상도크가 모두 3개, 그 안에서 연간 180만톤의 선박을 만들 수 있는데, 1979년 건립 이래 지금까지 1,056척을 수주하여 924척을 성공적으로 인도했다. 세계 10대 조선소 중 4개(삼성, 대우, STX, SPP)가 한국기업이고 모두 경남에 자리잡고 있다니 어깨가 으쓱할 만하다. 조선소를 나와 구조라 선착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앞서 보았던 배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작은 유람선은 손님들을 가득 채우고 해금강 풍경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십자동굴, 사자바위, 일월봉 등의 이름이 붙은 기암괴석들. 아무리 큰 크레인을 올려도 아무리 많은 돈을 들여도 만들어 낼 수 없는 자연의 풍경이 지척에 있었다. 여행을 마치며 거제 해금강과 거제 조선소의 가치는 동급이 되었다. 자연의 풍경이 아름다운 만큼이나 산업의 풍경도 아름답게 느껴졌다. 땀 흘린 노동으로 삶을 일구는 사람들과 해금강 유람선에서 잠시의 여유를 느끼려는 사람들이 결코 다르지 않듯이 말이다. 글 천소현 기자 사진 Travie photographer 지성진 취재협조 경남컨벤션뷰로 055-212-6713 거제해금강유람선 거제 구조라선착장에서 출발해 해금강 풍경을 관람하는 유람선을 탈 수 있다. 외도에 하선했다가 다음 배로 돌아오는 코스도 있다. 세월이 흘러도 여전한 기암괴석의 풍광은 좋지만 오래된 선박은 조금 불편하게 느껴진다. 구조라 유람선 www.gujora.com 해금강 코스(50분) 성인 1만4,000원 거제 옥림해녀해물횟집 거제의 해녀들이 직접 잡은 신선한 해산물로 끓여 내는 해물탕은 담백하고도 진하다. 한적한 옥림바다 앞에 위치해 있어서 일부러 찾아가야 하지만 그깟 불편 따위야 아무것도 아니게 만드는 해물탕이다. 경남 거제시 일운면 옥림길 91 055-682-3749 해물탕 3만~5만원 창원해양솔라파크 건물 전체가 태양열 집광판으로 덮여 있는 136m 높이의 건물이다. 꼭대기의 전망대에서는 거제 다도해의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데 특히 일몰이 아름답다. 1층 국제회의장이 품고 있는 파노라마 경치도 압권이다. 창원해양공원에는 솔라타워 외에도 군함전시관, 해전사체험관, 해양생물테마파크 등이 있다. 창원시 진해구 명동로 62 055-712-0425 9:00~18:00 창원해양공원 | 어른 3,000원 창원솔라타워 | 어른 3,500원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 [단독] [세월호 수색중단 한달] “낙지 등 ‘진도산’ 붙이면 안 팔려 헐값 처분, 관광객 발길도 끊겨… 밥 먹고 살기 힘들어”

    10일 진도 팽목항엔 정기 여객선으로 뭍을 드나드는 조도권 주민 말고는 오가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이곳과 이웃한 진도 서망항 수협 위판장도 썰렁하기는 마찬가지다. 조도 해역과 인근 신안에서 나는 각종 수산물이 모이는 진도수협 서망 위판장은 세월호 사고의 직격탄을 맞았다. 평상시엔 진도를 찾는 외지인들이 꼭 들러서 꽃게, 오징어, 활어 생선류 등을 구입하는 수산물 거래의 중심지다. 그러나 세월호 참사 이후 개점휴업 상태가 지속됐다. 실종자 수색이 중단된 지 한 달을 맞았으나 상황은 나아지지 않고 있다. 이곳에서 도소매를 겸하고 있는 O수산 주인 최정숙(47)씨는 “수산물 위판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즈음 세월호 침몰 사고가 발생하면서 여태껏 꽃게와 오징어 등 주요 수산물을 거의 팔지 못했다”며 “지금은 수색이 중단됐지만 외지인들이 진도 방문을 꺼리는 바람에 수산물 거래는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해 6~8월 오징어 위판 때만 3000만원의 수익을 올렸으나 올해는 공쳤다”며 “어디다 내놓고 말을 못 하지만 밥 먹고 살기도 힘들 정도”라고 털어놨다. 실제로 오징어 주산지인 맹골수도 일대에선 올여름 내내 주야간 실종자 수색 작업이 펼쳐지면서 조업 자체가 이뤄지지 않았다. 더욱이 진도 연안 일대 오징어잡이 배들이 완도나 신안 지역의 위판장으로 발길을 돌려 여름 수산물 위판이 중단되다시피 했다. A도매상 김모(52)씨는 “요즘 낙지가 많이 잡히는 계절인데도 손님이 아예 없어 알음알음으로 지인들에게 헐값에 처분하고 있다”며 한숨지었다. 진도수협 서망사업소 직원 김황진씨는 “지난해 여름 오징어 위판액은 활·선어를 합쳐 110억여원에 달했지만 올해는 9억여원에 그쳤다”며 “이는 가격 하락을 우려한 어선들이 위판장을 다른 지역으로 옮긴 탓”이라고 말했다. 세월호 사고 여파로 ‘진도산’이란 딱지가 붙으면 안 팔린다는 것이다. 섬 민박 등 관광업계도 철퇴를 맞았다. 철따라 관광객이 몰리는 조도면 관매도 관매·관호마을 150여 가구는 대부분 민박집을 운영한다. 이 가운데 규모를 갖춘 전문 민박집도 9곳에 이른다. 그러나 지난 4월 세월호 침몰 이후 단체와 개인 예약이 모두 취소됐다. 그 이후론 아예 손님이 찾지 않고 있다. 이곳에서 민박집을 운영하는 김모(78)씨는 “세월호 사고 이후 단 한 명의 손님도 받지 못했다”며 “정부와 군에 보상과 대책을 요구했으나 생활안정자금으로 80여만원을 지원받은 게 전부”라고 말했다. 관매마을 조창일(75) 이장은 “평상시엔 가구당 한 해 민박 수입을 1000만~3000만원 정도 올렸는데 올해는 관광객의 발길이 끊기면서 생계를 걱정해야 할 형편”이라며 “그나마 대부분 사업자 등록이 안 된 농어촌 민박집이라 피해를 보상받을 길이 없다”고 말했다. 세월호 침몰 해역과 이웃한 동·서 거차도 일대 200여 가구 주민들도 극심한 피해에 시달리고 있다. 주민들은 자연산 돌미역과 톳 등 해조류를 공동 채취해 생계를 꾸리고 있다. 매년 6~7월 이뤄지는 돌미역 채취를 통해 가구당 600만~800만원을 벌어들였으나 올해는 한 푼도 손에 쥐지 못했다. 한 뭇(20가닥)에 100만원을 호가하는 진도곽(돌미역)이 세월호에서 흘러나온 기름으로 오염됐다. 또 서울 등지의 도매상이 주문을 잇따라 취소했다. 지난여름 동안 주요 수산물인 멸치와 오징어 잡이도 거의 중단됐다. 해조류피해보상대책위원장으로 활동 중인 동거차도 이장 조이배(73)씨는 “손해사정 법인과 공동으로 구체적인 피해액을 산정하고 이를 사고 선사의 보험회사 등에 제출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진도 본섬 주민들도 사고 여파에 따른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다. ‘세월호 참사 진도군 범군민대책위’가 조사한 지난 4월 16일~6월 30일의 피해액은 관광소득 200여억원, 어업소득 690여억원 등 모두 890여억원으로 집계됐다. 관광소득에는 관광객, 택시, 외식업, 노래방, 건어물 판매, 숙박업 등의 매출 감소가 포함됐다. 어업소득은 수협 위판장, 통발협회, 김생산어민협회, 어류 양식협회, 전복협회, 낚시업계, 해산물종묘협회 등의 피해액을 근거로 삼았다. 범대책위는 최근 실종자가족대책위와 공동으로 기자회견을 열고 “침몰한 선체로 인해 조업에 차질이 빚어지고 있다”며 조속한 인양을 촉구하고 나섰다. 대책위는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진도군을 ‘위험한 곳’, ‘가지 말아야 할 섬’ 등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있어 선체를 인양하지 않고는 참사 발생 전 ‘청정 진도’, ‘보배섬 진도’의 명성을 회복하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호소했다. 대책위 박준영 간사는 “세월호 침몰 해역은 진도와 목포, 신안 등 서남권 지역 어민들이 고기를 잡으며 수백년 동안 지켜온 삶의 터전”이라며 “정부는 다도해해상국립공원의 수중 생태계 보호에도 소홀히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전남도의회도 세월호 인양 촉구 결의안을 지난 9일 채택했다. 군 관계자는 “세월호 참사 여파로 진도 이미지가 크게 훼손됐고, 관광과 특산품 판매가 반 토막 나 영세 상공인들은 생계 유지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국회는 세월호특별법에 주민 피해를 보상하는 조항을 반드시 명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진도 최치봉 기자 cbchoi@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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