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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리/카페 문화(아랍서 지중해까지:20)

    ◎인생과 예술얘기꽃 피우는 시민들/19세기엔 사르트르·보부아르등 예술인 아지트… 지금은 관광객 즐겨 찾아 파리의 문화는 카페문화,웃음문화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실제로 파리만큼 한집 건너 카페인 곳은 어느 도시에서도 본것 같지 않다. 실내에서 길까지 연장된 카페에 앉아 지나다니는 사람들과 거리를 바라보는 여유있는 모습들,신문을 읽기도 하고 담소를 하기도 한다. 바가 함께 있는 형식의 카페도 많은데 그런 곳에서는 사람들이 카운터에 기대 선채 카페올레나 에스프레소를 마시는 모습을 볼수 있다.의자에 앉을 필요까지 없이 그저 잠깐 들러 커피나 혹은 맥주를 서서 한잔 마시고 가는 것이다. 여행객 배낭족들이 걷다가 지치면 잠시 쉬어가기도 한다. 카페가 완전히 생활화되어 있는 이곳 사람들의 카페 정서를 이방인은 어림쳐서만 느낄뿐 언제까지고 알 수 없으리라는 생각이 든다.이국인들이 우리나라의 아리랑이나 바위고개같은 정서를 결코 언제까지 알수 없으리라 단정지을 수 있듯이. ○화려한 샹젤리제 거리 특히 카페거리로 알려진곳은 몽파르나스·몽마르트·생제르맹,그리고 개선문을 바라보는 샹젤리제거리다. 「개선문」을 쓴 레마르크는 샹젤리제의 한 카페에 앉아 실제로 개선문을 바라보며 그 소설을 썼다고 하는데 카페 바닥에는 그곳에 왔던 예술인들의 사인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고 한다. 그 거리에 서서 개선문을 보았을 때 이 세상 사람 누구에게나 최소한 어머니가 있을 것임에도,즉 고독을 막아주려 애쓰는 마지막 존재가 있음에도 왜 사람들은 저토록 고독해야 하는가 라는 생각을 하며 영화 끝장면을 보던 때의 기억이 났다. 몽파르나스와 몽마르트언덕은 19세기초부터 가난한 예술인들의 아지트가 되었던 곳이다.드랭,브라크,피카소,루소,레제,동겐,모딜리아니,유위릴로,샤갈,로트레크,아폴리네르,로랑생,사르트르,보부아르등 수많은 예술가들이 밤낮으로 카페에 모여 얘기를 꽃피우는 동안 낡은 것은 깨지고 새로운 것이 창출되곤 했다.다다이즘·큐비즘·모더니즘·초현실주의·인상파·입체파 등은 다 그곳에서 탄생된 것 들이다. 그들은 비록 가난하였지만 하루하루가격정적이며 장미의 향기가 나는 것 같았다고 그 시절을 산 예술가들이 회고하는 필름을 본적이 있다.거친 언쟁과 카페에서의 말다툼을 술회하였고 예술·인생·혼돈이 함께 소용돌이 치는 곳이었으며 지상의 낙원이었다고 회상하기도 했다.그러나 지금의 몽파르나스는 사업을 하는 돈 많은 사람들의 오가는 곳이 되어 있다.지하철이 몽파르나스 역에 머물때 그 향수를 지니게 하던 이름이 다른 곳과 똑같이 벽 표지판에 써붙여져 있는 것이 나는 이상할 지경이었다.밖으로 나오니 59층의 새로 지은 몽파르나스타워가 나지막한 고풍스런 건물들 속에 우뚝 서 있는 것이 보인다. ○고풍스러운 건물 즐비 한 카페의 갸르송에게 안내 책자에서 본 유명한 네개의 카페가 한데 모여있는 거리를 물었더니 무엇인가 말을 담은 표정으로 손을 들어 가르쳐준다.이곳도 좋은 카페인데 꼭 그곳으로 가려하는 동양의 관광객에게 그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었을까. 몽파르나스 대로와 라스파이 대로가 마주치는 교차점 부근에 있는 돔·쿠플·로통드·셀렉트,이 카페들은 망명 후의 레닌·헤밍훼이·헨리 밀러·사르트르와 보부아르들이 애용했던 카페라고 한다.그 중 한 카페에 앉아 길 건너 보부아르가 태어났다는 건물의 창을 바라보노라니 그가 지금은 사르트르와 함께 몽파르나스 묘지에 누워 있다는 사실이 전혀 현실감 없이 다가든다. 시간이란 그런 것일까. 일요일 상오이어서인지 거리는 한산하고 간혹 밀차를 끌고 가는 주부와 지팡이를 짚고 걷는 노인들의 한가한 산책이 눈에 띈다. 카페에도 사람들이 별로 없다.깨끗이 단장을 한 카페,이제는 그런 예술가들이 찾아올리 없는 곳을 관광객을 의식해서인지 더욱 손질하고 갈고 닦아놓은 것 같다. 이나라 사람들은 만나면 화제가 하나의 주제에 대한 토론이나 책·연극·영화·전시회라고 한다.그러므로 사람들과 대화하기 위해서도 그런 관람을 소홀히 할 수가 없으며 아무리 사업상 만났다 하더라도 우선 그런 대화로 교류가 시작된다고 한다. 사회당이 집권하고부터 연극표값이 비싸졌는데도 두달 전에 예약하지 않으면 볼 수가 없다.세계 각곳에서 연극을 보기 위해 온 지식층과 머리가 하얀 사람들이 관람객의 대부분이고 젊은 층까지 골고루 분포되어 있는데 이들은 돈이 없는 것은 자신의 잘못이 아니지만 실력이 없는 것은 자기의 잘못이라고 생각한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마을마다 있는 도서관은 아이들로부터 노년층까지 애용되고 있고 레코드까지도 빌려준다.바로 이러한 시민들에 대한 국가의 철저한 봉사가 국민들의 의식 수준을 높여놓는 것이구나 생각되었다.책과 레코드로 돈을 번다기보다 사람들은 그것을 향유할 권리가 있다고 말해주는 것 같다.사람이 사람의 대접을 받고 있다고 절실히 느끼는 순간이었다.카페 문화 외에 파리는 웃음의 문화라고 하는데 그것은 어디서 연유된 것일까.웃음을 우주적 농담이라고 라즈니시는 표현했지만 웃음은 참으로 여러 의미를 함유하고 있다고 하겠다.슬픔보다 더 깊은 곳에서 나오는 것이 웃음이라는 것을 우리는 종종 느낄 수 있다. 코미디 후랑세이즈에 가면 웃음의 문화를 만날 수 있을까.그 극장에는 일년내내 몰리에르의 희곡을 많이 올리고 라신과 코르네유의 것도 올려지는데 극의 성격은 해학과 풍자 익살 이런 것으로 인간의 가면적 속성을 벗겨주고 사회상의 의표를 찌르는 것들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웃음이라하면 어떤 흥성거림·즐거움·신선함 같은 것으로 떠오른다.파리는 흥성거리며 즐거움을 주고 있는가. ○피에로 무언극에 낭만 언뜻 차가워 보이는 파리의 외면상의 느낌속에서,그러나 몽마르트 언덕에서 무언극을 하던 피에로가 우선 다가든다.퐁피두 미술관 앞에서 풍선으로 만든 야구 방망이를 가지고 극을 벌이고 있는 남자,거리에서 아주 작은 장난감 침대에다 장난감만큼 작은 강아지 두 마리를 재우며 손으로 유성기를 돌려 음악을 틀고 있는 사람을 보았을때의 느낌이 다가든다.거기에는 인간 본연의 무엇인가를 건드려주는 고도의 감성이 있었으며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웃음같은 것을 솟아나게 하던 것이다.동전그릇을 앞에 놓고 자기 속의 무엇인가를 내보이는 거리 곳곳에서 만나지는 사람들,그저 단순한 생계수단이 아닌 생에 대한 천진한 호기심,타인을 아랑곳 않는 자신만의 세계,그러나 타인에게 나누어주는 마음,인간애 같은 것들이 거기에 있었다. 몽마르트의 피에로에게 차를 한잔 같이 마실 수 있는가 우리가 청했는데 가까이 가는 사람에게마다 손과 뺨에 키스를 하던 그가 스튜디오로 연습하러 가야한다고 사양했다.아,저 무언극이 매일매일의 훈련으로 남의 심중에까지 가서 닿을 수 있는 것이로구나,차를 마시자고 청한 일이 무언가 몹시 무례하게 여겨져 부끄러웠다. 모든 것이 제 자리에 있는 성숙된 느낌,조용하며 알찬 생활을 가지고 있는 듯한 개개인의 모습,길을 물으면 예부터 알던 사람같은 표정으로 가르쳐주는 순수한 얼굴들. 카페의 정서나 웃음의 정서,이 모든 것이 하루 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며 문화가 발달된데에서 파생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좀더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다면 이곳에도 문제점들이 물론 있을터이지만,그러나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생각하며 살아가도록 모든 제도와 시민들의 의식이 적어도 이상을 향하고 있음을 알것 같았다.
  • 부산/러시아인 보따리무역 기지로(심층취재)

    ◎텍사스촌주변 실태와 문제점/개미군단 형성… 91년이후 20만 입국/잡화·식품류 “불티” 지역경제에 한몫/1백30여 점포난립… 고객유치 출혈경쟁 안해야/러인 총기류 밀반입·조직적밀수 방지대책 절실 부산 거리에 러시아인들이 넘쳐나고 있다.지난 90년 한·소수교가 이루어지면서 부터 한두명씩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한 러시아인들은 갈수록 그 수가 늘어 이제 부산거리에서는 어디서나 쉽게 맞닥뜨릴수 있다.이같은 러시아인들의 부산입항 러시는 지역경제에 러시아 특수를 불러 일으키고 있기도 하지만 방치 해 둬서는 안될 갖가지 문제점도 제기되고 있다.실태와 문제점을 점검 해 본다. ▷러시아거리◁ 25일 하오 부산역 마즌편 속칭 텍사스거리.읽어내기 힘든 러시아어 간판이 즐비한 상가 골목길에는 삼삼오오 무리지어 가게를 들락거리는 낯선 모습의 이방인들이 자주 눈에 띈다.러시아어로 된 광고문에 눈길을 보내는 것을 보면 이들이 어느나라 사람인지 쉽게 알아 볼 수 있다. 하나같이 반바지에 슬립퍼를 신은 허름한 차림의 이들 러시아인들은 라면상자를 어깨에 둘러메기도 하고 어떤이는 운동화꾸러미를 사들기도 했다.사 모은 물건을 부대자루에 담아 산더미처럼 쌓아 놓거나 중고품인듯한 냉장고를 앞에놓고 운반할 차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도 보인다.6·25이후 미군들로 인해 이름 붙여진 「텍사스촌」이 이제 밀려드는 러시아인들 때문에 「러시아거리」로 탈바꿈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핀·이쑤시개등 자질구레한 것에서 부터 초코파이·라면·맥주등 식료품과 중·하급품의 TV·냉장고·세탁기·VTR등 전자제품을 비롯,쇼퍼·싱크대등 가구와 중고자동차에 이르기까지 닥치는대로 사가고 있다. 쇼핑규모는 한사람당 3백∼5백달러정도이나 한꺼번에 2백∼3백명이 구입하는 「개미군단」이기 때문에 전체적인 구매력을 무시할수 없다.5천∼1만달러상당의 물품을 구입,자국에서 2∼5배의 차액을 남기고 되파는 수법의 「보따리 장사꾼」까지 가세하면서 이 일대의 상권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입국현황◁ 올들어 지난달 말까지 입항한 러시아선박과 인원은 모두 1천2백30척에 6만1백여명인 것으로부산해운항만청은 집계하고 있다.또 91년에는 6백40척에 5만여명,92년 1천79척에 4만3천5백16명,93년은 1천3백28척에 6만1천6백97명인 것으로 나타났다.91년부터 지난달 말까지 부산에 입항한 러시아선박은 모두 4천2백77척에 20만명에 이른다. 92년 하루평균 입국인원이 1백40명,93년에 1백84명에서 올상반기 2백40명으로 해를 거듭할수록 증가추세를 보이고 있다.부산항 출입국관리소 관계자는 『이같은 입국현황은 입국신고 수치이며 이들이 머무는 기간이 3∼4일에서,길게는 5∼6개월정도인 점을 감안하면 3∼4배정도 추정돼 그동안의 유동인구는 80만명을 웃돌것』이라고 추산했다. ▷상가실태◁ 이들이 집중적으로 모여드는 텍사스촌과 청관골목을 잇는 1㎞남짓한 거리는 온통 러시아어간판으로 뒤덮여 마치 러시아의 어느 중소도시를 연상케 하고 있다.이들 가게는 신발·의류·잡화·가구·금은·시계등을 주로 취급하고 있다. 부산동구청은 러시아인을 대상으로 이곳에 들어선 가게가 모두 1백30여곳인 것으로 집계하고 있다.청관골목에서는 신발가게 11곳,의류 25곳,잡화 39곳,가구 6곳,금은시계방 3곳등 84곳이고 텍사스촌은 신발 13곳,의류 15곳,잡화 16곳,가구 2곳등 46곳으로 이 일대에서 러시아인을 대상으로 호황을 누리고 있다.이는 지난해말의 70여곳에 비해 2배 가까이 늘어난 수치다.특히 이들 가게들은 러시아교포나 노어과 대학생들을 아르바이트로 채용,치열한 고객유치 경쟁까지 벌이고 있다. ▷문제점◁ 이곳에서는 한탕을 노린 업주들간의 과열 경쟁으로 중저가 상품에 대한 덤핑이 판치고 있다.상인들의 극성스러운 바가지 상혼과 불량·저질상품도 러시아인들에게 좋지 못한 인상을 주는 요소로 꼽힌다. 이곳을 자주 찾는 러시아인 엘레나씨(40·여 블라디보스토크 거주)는 『텍사스촌에는 서울과 달리 상품이 다양하지 못해 서울에서 필요한 물건을 구입하는 경우가 가끔 있다.단일 품목만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상점들이 몇군데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언어의 불편도 개선되어야 할 점이다.부산시는 영어와 일어 통역안내원을 두고있지만 노어 통역원은 한사람도 없고 단지 러시아인을 위한안내판만 2곳에 설치하고 있을 뿐이다. 러시아인들의 불법행위도 늘어가고 있어 또다른 문제점으로 등장하고 있다. 최근들어 특히 러시아인들이 부산항을 통해 몰래 반입하는 권총·공기총등 총기류의 밀반입을 막는데 검·경·세관등 수사당국에 비상이 걸렸다.실제로 지난 10일 상오5시 부산 남외항에 정박중이던 러시아선적 탈니키호(5천4백67t)에 미제 권총 6정과 실탄 2백92발을 숨겨 들여오다 부산본부세관당국에 의해 적발되는등 러시아인이 지난 91년부터 지금까지 모두 5건 10건의 총기 밀반입이 발각됐다. 러시아인들이 뿌리는 달러가 제도권 금융기관으로 흡수되지 않고 지하경제로 스며들고 있는데 대해서도 속수무책이다.은행등 금융기관은 「외국환등록증」이 없으면 한꺼번에 1만달러 이상을 환전해주지 않을뿐더러 암달러상들은 은행보다 10∼20원정도 높게 환전해주기 때문에 암달러상이 활개치고 있다. 러시아선원들의 밀수도 늘어나고 있는 추세.지난해 러시아인들이 밀반입한 물품은 모두 10건에 3천5백77만원상당으로 이는 92년의 2건 1백72만원보다 건수는 5배,금액은 20배이상 증가했다.이들이 들여오는 물품은 대부분 녹용·냉동명태·명란등 기초적인 수산물이지만 카메라와 은괴등도 적발되고 있어 앞으로 밀수가 조직적이고 품목도 다양화 될 것으로 수사기관은 전망하고 있다. ◎당국의 의견/“가격표시제 실시로 「바가지」 추방”/안내소 등 편의시설 확충… 연계 관광지도 개발/김상원 부산시 관광국장 『쇄도하는 러시아인에 대해 부산시가 지금까지는 소극적으로 대처했으나 앞으로는 이들이 부산을 계속 찾도록 하는 유인책을 마련할 것입니다』 김상원부산시 교통관광국장은 부산에 오는 러시아인들은 순수 관광여행이 아니라 사실상 쇼핑객들인 만큼 업소들간의 과당경쟁으로 덤핑과 상품의 질하락을 막는 것이 급선무라고 강조했다. 이들 러시아인들은 북태평양 베링해및 캄차카반도 연근해등에서 조업이 끝나고 돌아가는 길에 쇼핑을 위해 부산항에 들르고 있으며 이같은 점을 감안하여 좀더 계획적이며 적극적인 유치·관리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당장의문제는 업소들간의 지나친 경쟁으로 러시아인들에게 저질상품을 팔아 한국상품에 대한 불신의 폭을 높이고 있는 현실에 대한 처방이다. 이에대해 김국장은 『상품의 질저하를 막기위해 텍사스촌·청관골목을 비롯,롯데1번가·코오롱상가·국제시장등 2천여 상가에 가격표시제를 실시,상거래질서를 확보하도록 지도하겠다』고 다짐하면서 『특히 러시아인들은 주로 부산에 선박을 이용해 입항하기 때문에 출·입국때 세관·출입국관리사무소·항만청등 관련기관과 상인들간에 긴밀한 협조체제를 갖춰 부산에 계속 오도록 하는 유인대책을 마련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김국장은 이와함께 『우선 급한대로 세관옆 통선장과 텍사스골목내에 관광안내소를 설치해 노어로 표기된 부산관광지도를 나눠주는 한편 화장실과 국제용 공중전화를 설치하는등 러시아인들을 위한 각종 편의시설이 조만간 확장된다』고 덧붙였다. 김국장은 현재 모업체가 청관골목내 화교학교옆에 지하2층 지상 7층규모의 상가를 건립,면세점도 갖추는등 이곳에서 모든 쇼핑이 가능한 「러시아타운」을 건립중이라고 소개했다. 부산시는 러시아인들이 부산항에 내려서자마자 최근 들어선 동래온청장으로 대거 진출,허심청등지에서 온천욕을 즐기는등 부산전역을 누비고 다님에 따라 부산전체를 관광지로 개발하는 방안도 마련중이다. ◎현장의 소리 ○김대복씨 32·부산유통대표/시장 활성화위해 보세구역 지정을 부산경제에 크게 기여하고 있는 텍사스거리의 활성화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보세구역 지정이 시급한 실정이다.또 상인들은 상품다양화및 전문화를 통한 시장경쟁력 강화방안을 마련해야 한다.부산항을 통해 들어온 러시아인들이 서울 이태원의 보세구역이나 남대문시장으로 빠져 나가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보아야 한다. 대부분 영세업체인 이곳 상인들의 덤핑판매도 심각한 수준으로 출혈경쟁에 따른 피해가 크다. 러시아 현지은행의 신용상태가 좋지 않아 신용장(L/C)개설이 되지않는 것도 상품판매에 커다란 장애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실제로 러시아 상인들의 상품 구입한도액이 2만달러를 넘을 경우 3∼4차례에 걸쳐 물품을 판매한 것처럼 편법을 사용,면장을 끊어주고 있는 형편이다. 특히 5∼10달러등 소액판매의 경우 면장처리가 되지않아 세금계산서 발부가 불가능해 무자료판매로 오인될 소지도 높다.따라서 빠른 시일내에 텍사스촌지역 상가에 대한 별도의 관리규정 마련이 시급하다. ○김연열씨 53·텍사스상우회 회장/80%이상 영세상… 세금혜택 줬으면 부산 텍사스촌과 청관골목의 가게들마다 이해관계가 엇갈려 결집된 목소리가 나오기 매우 어렵다. 텍사스촌이 러시아거리로 변하기 시작한지가 벌써 오래됐는데도 상인들의 의견을 집약하고 이해를 대변할 수 있는 번영회조차 구성하지 못하고 있다. 가게의 80%이상이 세들어 장사하는 영세상들이다.대부분의 상인들은 특히 텍사스촌이나 청관골목이 외국인 전용거리인데도 면세점도 없어 이곳이 보세구역으로 지정되길 원한다. 당국은 이들 업소에 대해 면세점으로 허용해주려는 입장을 보이고 있으나 그럴 경우 매장이 30평이상에다 관광특산품을 판매해야 하기 때문에 세금관계도 만만찮아 영세업자들이 면세점 지정을기피하고 있는 실정이다. 청관골목과 텍사스촌을 묶어 통합번영회를 추진해 상인들의 결집된 목소리를 내는 한편 러시아인 고객을 계속 붙잡아두기 위해 바가지상혼을 배격하고 친절운동을 정착시키는데 노력하는등 상인들 스스로의 자각도 필요하다. 아울러 당국에서는 이들의 출·입국절차나 세금문제 또는 언어소통문제 해결에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 아테네/파르테논 신전(아랍서 지중해까지:14)

    ◎아크로폴리스의 가장 웅장한 유적/기원전 5세기 대페르시아 전승기념으로 수호신 아테나 위해 건립 아테네까지 와서 이것마저 보지않고 간다면 말도 안된다는 고정관념 때문일까?그 재미없는 유적탐방으로 결국 하루를 보내고 말았지만,그런 상투적인 강박관념은 그리스로 넘어오기 전부터 염두에 늘어붙어 따라왔던 것이어서 시간을 허비했다는 느낌까지는 차마 들지 않았다.아크로폴리스나 그 신전들은 그만큼 아테네 어디서나 노상 눈에 띄었다.시내 복판에 언덕이 있어서도 그랬지만 어쩌다 현대식 건물들에 가려 보이지 않을때는 예의 민주주의니 헬레니즘이니 하는 텅빈 관념들이 잊을세라 곧잘 뇌리로 스며들면서 자리를 메우려 한 때문이었을 것이다.그런 관념을 불신한다는 정도가 아니라 손으로 직접 만져서 감촉된 것까지도 믿지 못하는 기묘한 버릇이 필자에게는 있다.눈앞에 보이는 그 어떤 세계도 피가 통하지 않으면 결국은 헛것에 불과하다는 소린데,고질인 신경통의 오랜 경험 탓일지도 모른다.그 유명한 파르테논 신전도 예외가 아니었다. ○헬레니즘 명성뿐 아크로폴리스의 유적들 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크고 웅장한 도리스 양식의 신전.건물둘레 1백60m,46개의 가공대리석 원주,기둥높이 10m,기단은 가로 31m,세로 70m.페르시아 전승기념으로 기원전 447∼432년에 걸쳐 집권자 페리클레스에 의해 조각가 페이디아스의 지휘로 아테네의 수호신 아테나를 모시기 위해 세워졌다. 그리스인의 건출술이 어떻고 부조가 어떻고 하면서 그런 상식적인 해설을 늘어놓은 책자와 그 확인만으로는 더구나 아무것도 알수 없다.필자는 급기야 숙소인 카라벨호텔 객실에 딸려있던 터무니없이 넓은 거실까지도 거기 연관을 시켜보았다.아마 가족용이거나 상용회의실 삼아 그런 공간이 덤으로 필요했던 것인지 덕택에 막혔던 숨도 몰아쉬고 거기서 편지도 쓰고 했지만,폴리스라 불리던 고대 도시국가의 소위 그 민주적인 이념이나 제도란 것이 이런 구닥다리 호텔의 공간배정 같은 것과도 무슨 연루가 있는 것이나 아닐까.기원전 4세기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정책이후 발진해서 근대 서구문명의 2대 근간정신이 되었던 헬레니즘이란 것은 또 어떤가.선지자가 고향에서 배척받고 불교가 발상지인 인도에서 떠나버렸듯이,아테네의 어디에도 그런 흔적은 없지 않은가.있는 것은 잔해와 상품화한 그 명성뿐,말이 통하지 않는 시민들은 입을 다물고 일행들은 가게만 기웃거리고 있다.결국 전 기항지인 이스탄불에서 겪은 작은 에피소드로까지 거슬러 올라가서야 생각의 가닥이 잡혔다. ○조각상과 거리 멀어 그 이전의 로마시대는 제쳐놓고라도 그리스는 15세기부터 19세기 중엽을 넘어설 무렵까지 무려 4백여년 간이나 터기의 식민지였다.우리와 일본의 그것은 약과라고 할수밖에 없을 정도로 그 지배과정에서 일어났던 온갖 만행,학살사건의 원한으로만 따진다면 그런 철천지 원수지간이 또 있을 것같지 않아 최근까지 설왕설래하던 영토분쟁까지 떠올리면서 주의를 기울였으나,항로에는 아무 이상의 기미가 없었다.하다못해 그리스인과 터키인이 서로 인상쓰는 모습이라도 보았으면 했던 것은 아니다.그 이스탄불의 중앙통에서 구두를 닦다 바가지를 쓸 뻔했던 일이 엉뚱하게도 아크로폴리스가 발현하고 있는 그런 그리스 정신이란 것과도 연관이 될듯하면서 뇌리에 떠올랐던 것이다.그 에피소드란 것도 실은 하잘 것 없는 공중도덕에 지나지 않는다. 어리숙해 보였던지 구두를 마무리한 소년은 처음 말했던 요금의 세배쯤을 더 내라고 떼를 쓰기 시작했다.그냥 달라고 했으면 동정심이라도 일어났을 것을 『돌라(딸라)!돌라!』하면서 하도 영악스럽게 굴어 이쪽에서도 분통이 터졌을 것이다.행인들이 한 둘씩 모여들기 시작하더니 저마다 한마디씩 엄한 어조로 소년을 꾸짖었다.아이는 얼굴을 붉히고 계면쩍어 하면서 비실비실 모습을 감췄다.명동이나 종로 한복판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면 우리는 어땠을까 하는 연상이 그제야 필자의 얼굴마저 화끈거리게 했다.이방인 하나가 가령 그런데서 우리 아이들에게 그런 찐드기를 당하고 있는 꼴을 보았다면 급하게 딴데로 눈을 돌려버리고 나는 모른척 그냥 지나쳐가고 말지 않았을까.이 경우 떼를 쓰는 아이는 각박한 현실이고,그것을 꾸짖는 어른은 전통이든가 소양에 등을 대고 있었을 것이다. 동서문화의 요충지라고는 해도 이스탄불의 그 터키행인들이 설마 공자한테서 그런 도덕심을 배운 것같지는 않았다.그들은 4백년 동안이나 지배를 하느라고 하면서도 모르는 새 그리스 전래의 그 시민정신이란 것을 제것으로 삼켜버렸던 게 아니었던가.이 사소한 사건에서 필자가 느낀 감상이나 거기서 끌어낼 수밖에 없었던 교훈의 요지는 그것이었다.물론 자국이나 다른 전통감각 내지 소양같은 것도 그 터키인들은 다분히 혼용해서 함께 지니고 있었을 것이다. 아테네 사람들은 옛 조각에서 흔히 보는 그런 균형잡힌 생김새가 아니었다.이마와 미간에서 그대로 이어지는 코는 대체로 비슷한 모양새를 하고 있었으나 그밖에는 얼굴도 울퉁불퉁 제멋대로이고,더구나 여인들의 표정이나 몸매는 팔등신의 그것과도 거리가 멀었다.그녀들이 보다 이지적이고 강해보이는 인상을 주고 있었다면 차라리 그런 점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리스인들의 이념과 현실의 차이를 이런데서까지 추출할 생각이 필자에게는 없다.쇳된 기타소리 비슷한 음색을 내고 만돌린을 닮은 전통악기 부주키를구경하려고 파네스피스티미우 대학가를 헤매면서 맞닥뜨린 그곳 젊은이들도 그런 인상에서 벗어나지 않았다.유행가나 팝송을 흥얼대며 왁짜하게 거리를 메우면서도 어딘지 근엄하달까 절대로 자신을 방기해버리지는 않는 묘한 구석이나 기색이 학생들의 표정에는 역력했고,대중문학작품들 조차 고풍스런 표지디자인을 한채 일사불란하게 진열된 서점가 풍경 같은 것은 더구나 말할 것도 없다.악기점 얘기가 나왔으니 말이지,요르단에서부터 터기·이탈리아·스페인·파리에서까지 한번씩은 기웃거린 그런 가게에서 질좋은 물건이라며 내놓는 기타가 우리 제품이어서 어안이 좀 벙벙했던 것도 사실이다. 이쪽을 중국이나 일본인으로 착각했던 모양으로 코리안이라고 하자 그들은 실소했다.피아노 제작기술이 서방에서 인정받고 있다는 것은 진작에 알고 있었지만,비교적 싼 것에서부터 몹시 비싼 기타에 이르기까지 그렇게 메이드 인 코리아 사태를 당하자 미상불 우쭐한 기분이 되지말란 법도 없었다.의식을 하고 있는지 무심한지는 몰라도,아테네 사람들이 가령 자국이나 외지에서 그들의 시민정신이라든가 거창하게도 예의 헬레니즘 운운하는 이념이나 그 편린이라도 깨닫고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면 아마 이 비슷한 우쭐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도시국가의 몰락이후 헬레니즘은 불가피하게 내셔널리즘 혹은 극단적인 개인주의를 소극적인 철학으로 삼고 범세계,전인류라는 생각을 적극적인 이상으로 밀어올리면서 동방과 유럽전역으로 퍼져갔다. ○근엄함 잃지 않아 서로 상충하는 이 두 논리의 거듭한 격돌,변천이 오늘날 우리가 마주치는 서구문명의 그 중심적인 양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시내로 들어오는 거리 곳곳에서 보게되는 대형간판의 아름다우나 그로테스크한 그 온갖 상품광고들 역시 터전밖에서 번창했다가 지금은 몰락으로 접어들고 있음이 틀림없는 그런 문명의 잔해거나 그 상징으로 보였다고 하면 좀 과장일까. 밤이 깊자 이 지혜롭고 강인했던 유적도시도 어둠에 잠겼다.어느 옛거리에서 였던가 올리븐지 느티나문지 거창하게 얽힌 가지 한복판에 웅크린 커다란 들고양이 한마리가시야에 들어왔다.동물의 움직임을 따라 이리저리 눈길을 옮겨가노라니 무성한 잎사귀들 너머,황토빛 야간조명을 받은 아크로폴리스와 파르테논 신전이 얼핏 또 보였다. 어딘가 피가 통하는 듯하면서 신전의 윤곽이 비로소 분명해지는 듯한 느낌을 필자가 받은 것도 그때다.
  • 프랑스에선:1(녹색환경가꾸자:68)

    ◎프랑스인의 85% “분리수거 생활화”/유리병은 38%가 재활용품/“쓰레기 최소화”… 가구당 한해 304㎏뿐/음식찌꺼기·종이 등 이용 퇴비 만들기도 프랑스는 추한 것도 아름답게 느껴지게 하는 나라인 것같다.예술의 도시 파리 시내에는 갖가지 쓰레기통이 있다. 일반 쓰레기를 담는 자그마한 통에서부터 보도의 한쪽에 서있는 초록색의 대형 쓰레기통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쓰레기통이 있다.파리를 찾는 이방인들에게는 이런 것들조차 호기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거리에서 마주치는 대형쓰레기통은 2가지가 있다.빈병을 모아두는 곳과 신문잡지를 모으는 곳으로 구분돼 있다.이렇게 분리수거해서 재활용하는 병은 연간 82만7천개로 전체 소비되는 병의 38%에 해당된다. ○쓰레기통 2종 갖춰 신문과 잡지는 연간 15만t이 수거되고 있고 분리수거에 참여하는 사람은 4천7백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집계된다.프랑스 전체 인구가 5천5백만명인 점을 감안하면 85%의 국민 대다수가 전폭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병·신문·잡지·건전지등 분리수거되는 쓰레기의양은 연간 2만4천여t.분리수거 쓰레기와 그냥 버려지는 쓰레기들을 모두 수거하기위해 동원되는 덤프트럭등 차량수는 파리 시내에만도 1천6백대에 이른다. 여러가정이 모여 사는 파리시내의 5∼6층 가정집 건물에는 2종류의 쓰레기통이 비치돼 있다.하나는 노란색으로 일반 쓰레기를 버리는 것이고 파란색 뚜껑의 다른 하나는 신문 잡지를 버리는 것이다. ○쓰레기발전소 추진 신문 잡지를 이 쓰레기통에 버려두면 읽을 거리가 필요한 다른 가정에서 쓰레기통을 열고 볼만한 잡지는 가져다 읽곤 한다.또 쓰레기통 부근에는 빈 포도주병을 모아두는 곳이 따로 있어 분리 수거가 생활화돼 있다. 프랑스의 가정은 쓰레기를 발생시키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쓰레기는 발생시키지 않도록 하는 것이 최상」이라는 의식이 뿌리깊기 때문이다. 한해에 한 가구에서 평균 3백4㎏의 쓰레기를 버려 유럽에서 가장 적게 쓰레기를 버린다.바로 이웃의 독일이 3백31㎏의 가정 쓰레기를 버리고 있고 미국이 8백64㎏,영국 3백53㎏,스위스 4백27㎏,벨기에 3백13㎏,덴마크 4백69㎏,일본 3백94㎏등의 쓰레기 양산에 비하면 상당히 적은 수치다. 생활 쓰레기가 발생되는 일은 불가피하더라도 쓰레기도 자원이라는 의식이 몸에 배어 있어 분리수거와 재활용을 하려는 의식과 노력이 철저하기 때문이다. 분리수거의 대표적인 사례로는 프랑스 북서부 덩케르크시가 꼽힌다.인구 21만여명의 덩케르크시 당국은 지난91년부터 청색 쓰레기통 3만6천개를 제작,각 가정과 회사의 사무실에 나눠줬다. 이곳에 빈병과 신문·잡지,플라스틱 제품,금속류등을 모아두면 시당국에서 거두어가 분리·처리한다.지난해의 수거량은 1만5천t으로 이일을 시작하기전인 90년 6천2백t에 비해 무려 2.5배의 양을 분리 수거했다. ○1주일만에 걷어가 덩케르크시는 빈병의 전부를 수거하고 신문 잡지는 절반정도,플라스틱 제품과 금속류도 절반정도를 수거한다.지금은 쓰레기를 태워서 발생하는 열을 이용하는 발전소 건설을 자체적으로 추진하고 있으며 끊임없이 쓰레기를 활용하는 방안을 연구하고 있다. 프랑스 북부의 보폼시는 생활쓰레기를 퇴비로 만들어 쓰는데 성공한 곳이다.인구 2만2천명의 이도시는 쓰레기 매립장이 포화상태에 이르고 새로운 매립장 건설도 주민들의 반대로 여의치 않자 지난해초 녹색 쓰레기통을 고안해 냈다. 발효가 되지 않도록 특수 제작된 이쓰레기통에는 음식물 찌꺼기,유기물 찌꺼기,광택지를 제외한 종이가 모아져 1주일에 한번씩 수거된다.시행 6개월만에 전체 쓰레기의 50%인 6백t의 녹색쓰레기가 모아져 농가의 퇴비로 활용됐다. 파리 근교의 릴라시에서는 쓰레기를 버리지 말고 재활용하자는 내용을 담은 한 컷짜리 삽화를 아빠용,엄마용,가족용의 3가지로 만들어 각 가정에 배포해 시민들의 의식전환에 앞장서고 있다. 프랑스 환경부는 최근 쓰레기 분리수거와 관련한 보고서를 만들면서 이 삽화를 활용하기도 했다. ○메탄가스 활용연구 「적게 버리고 많이 수거하고 잘 처리한다」는 생각을 가진 공업도시 릴은 쓰레기에서 고부가가치를 찾고 있다.쓰레기를 활용하기 위해 프랑스 최초로 쓰레기 선별센터를 만들어 재활용 가능한 쓰레기를 찾고 돼지사료로 쓰기도 한다.음식물찌꺼기등으로이미 6천t의 돼지 사료를 만들었으며 쓰레기에서 발생되는 메탄가스를 활용하기 위한 방안을 연구중이다. 「쓰레기도 자원이다」 프랑스 국민의 이런 인식 전환은 24년의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지난71년 환경부를 창설해 쓰레기 문제를 주도적으로 해결하고 있지만 쓰레기에서 고부가가치를 찾으려는 프랑스 국민들의 노력은 정부는 물론 지방자치정부에 의해 주도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 그라나다/알함브라 궁전(아랍서 지중해까지:11)

    ◎스페인 최후의 이슬람궁… 신비 가득/나자리왕조가 13∼14세기 건설… 빼어난 건축술­정교한 세공에 숨막혀 그라나다의 구시가 산타 안나 교회앞에는 세 갈래의 길이 있었다. 『알함브라?』 그러자 수염이 텁수룩한 신부님이 긴 소매 속에서 나온 창백한 손으로 언덕길을 가리켰다.세월과 사람들의 발걸음에 닦이어 빤질빤질 윤이 나는 언덕길에서 흘러내리는 빛의 물살이 다리를 휘청거리게 했다.어디서 어떻게 모습을 드러낼지 모르는 알함브라의 신비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길 양쪽으로 늘어선 옛날 집들은 지난날의 비밀을 삼킨 채 그 작은 창문들을 조가비처럼 닫고 있었다.오!벽이 익혀온 시간의 열매들이여. 1층의 연쇄상점들 앞을 지나노라니 캐스터네츠소리가 따다따다 귀를 즐겁게 했고,어둠침침한 어느 상점 안에서는 집시풍의 옷을 입은 여인이 부채로 일으킨 바람을 깊숙이 팬 앞가슴 사이로 밀어넣고 있었다. 휘어진 언덕길 끝에 울창한 삼나무숲 사이로 뚫린 또다른 길이 포개질 듯 기다리고 있었다.서늘한 바람이 계곡속에 숨어 있는 여울물소리를 실어왔다.그 소리가 구르는 듯한 기타 선율로 바뀌면서 알함브라의 슬픈 역사에 젖어들게 했다. ○이사벨여왕에 패퇴 알함브라는 「붉다」는 뜻으로 그라나다 동쪽 언덕에 위치한 무어족의 귀족행정도시의 이름이었다고 한다.13세기에 나자리왕조의 시조인 알 아마르가 자신의 왕궁을 그곳에 지음으로써 그것이 찬란한 알함브라역사의 시초가 되었다.주건물의 대부분은 요세프1세(1353∼1391년)와 그의 아들 모하메드 5세시대에 지어졌고,부분장식들은 레콩키스타(7세기부터 이베리아반도에 유입해온 회교도들이 점거하고 있던 국토를 기독교도들이 되찾기 시작한 운동)의 폭풍에 휘말리면서도 계속되었다.미구에 떠나야 할 것을 예감했기에 왕들은 자신들의 자취로서 아름다움을 그 땅에 영원히 심으려 했다. 이사벨여왕과의 싸움에서 패한 최후의 왕 보아부달은 왕궁을 떠나 시에라네바다의 험준한 고갯길에서 궁전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한편 이 왕궁을 접수한 기독교도들은 그곳을 예배당으로 활용하는 한편 이사벨여왕의 손자인 카를로스5세는 궁전안에 르네상스양식의 또다른 궁전을 건축했다.이를 두고 그라나다 출신의 명상시인 가르시아 로르카는 「알함브라궁전은 자신의 내부에 카를로스5세가 있음을 느끼지 못한다」고 안타까워했다. 경사가 가파라질수록 길은 삼나무숲 깊숙이 파고드는 듯 하더니 갑자기 하늘이 파랗게 열리는 곳에 붉은 성벽과 「심판의 문」이 우뚝 솟아 있었다.말발굽모양의 아치에는 코란 5계명을 나타내는 손가락이 조각되어 있었다. 알히베스광장에 쏟아져내리는 햇빛은 눈부시다 못해 얼어붙는 듯 소름이 끼쳤다.짙은 나무그림자에 돌바닥이 검게 패어 있었다.검은 고양이 한마리가 제 몸보다 더 검은 그림자를 끌고 카를로스5세 궁전 담밑을 따라 모퉁이로 사라졌다. 성채·왕궁·정원·여름별장으로 분리해서 파는 입장권 4장을 샀다.그리고 먼저 궁전의 심장부로 들어가는 첫관문인 메사르홀로 들어섰다.이곳은 기독교도들이 접수한 뒤 예배당으로 활용되면서 기독교식 건축물로 개조되어 본래의 모습이 많이 파괴되었으나 아랍식 문양이 정교하게 세공된 대들보만으로도 그 빼어난 솜씨에 도취되기에 충분했다. 왼쪽의 아치문을 지나 아리야네스(천인화)중정으로 들어갔다.장방형의 긴 못이 중앙에 있는 안달루시안 아랍식 안뜰.속세와 차단된 묵중하고도 투명한 정적이 감돈다.하늘·도금양나무·뜰을 둘러싼 건물의 아치문과 기둥들이 수조의 조용한 물속에 잠겨 행복하고도 덧없는 꿈에 취해 있다.빛과 그늘까지도 그 행복한 꿈에 녹아들어 있다.무엇이 이 꿈꾸는 물의 성채를 침범할 수 있을까.문은 모두 열려 있으나 들어갈 방법을 알지 못하는 세계. ○중앙엔 사자상 분수 왕의 접견실인 대사의 방과 코마레스탑에서 라이온궁전으로 발길을 옮기노라니 등뒤에서 어떤 문이 닫히는 느낌이었다.마치 누군가 되돌아갈 길을 막아버리는 것 같았다. 촛대처럼 가느다란 1백24개의 대리석 기둥들이 떠받치고 있는 장방형 회랑으로 들어섰다.햇빛이 눈을 시리게 하는 뜰의 중앙에 열두마리의 사자에게 둘러싸인 하얀 대리석 분수에서 물줄기가 솟아오르고 있었다.이곳은 오직 왕 한사람만 드나들 수 있는 하렘이었다.건물 2층에는왕의 후궁들이 거처했다. 그 옛날 왕족인 아벤세라헤스가문의 한 남자가 하렘의 여자에게 접근한 것이 발각되어 목이 잘린 뒤 그 목이 방의 중앙 분수대 위에 놓여져 목에서 흘러내린 피가 사자의 분수대까지 흘러왔다고 한다. 회랑천장의 정치한 세공으로부터 간신히 눈길을 돌려 자매의 방에 들어섰을 때였다.숨이 턱 막히는 현란한 아름다움 속에 깊숙이 갇혀버리는 것 같았다.벽을 따라 천장까지 미끄러져 올라간 눈길 끝에는 신기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사실 난 이러한 아름다움과의 대면을 두려워해왔다.릴케의 「비가」 중에는 「아름다움이란 우리가 가까스로 견딜 수 있는 무서움의 시작에 불과하므로/우리가 아름다움을 그토록 찬미함은 파멸하리만큼 아름다움이 우리를 멸시하기 때문이다」라는 구절이 있다. 파르탈정원을 뒤로 하고 처녀의 탑 앞에 이르른 나는 더이상 발걸음을 옮길 수가 없었다.회랑에 놓여 있는 의자에 주저앉았다.마음 깊은 곳에 상처를 입은 것 같았다.여기 이 자리에서 나이팅게일의 노래를 들으며 생을 마감해도 좋으련만…나에게 있어 알함브라와의 만남은 깊은 상처로 남겨졌다.호텔로 터덜터덜 돌아가 다시 너절한 일상과 마주할 일이 버겁기만 했다. 5월3일,지도조차도 던져버리고 혼자서 호텔을 나섰다.알함브라궁전의 코마레스탑에서 바라본 건너편 산기슭의 하얀 동네를 찾아갈 참이었다.그곳은 아랍인 거주지역으로서 길들이 미로처럼 얽혀 있어 이방인은 길을 잃기가 십상이라고 한다.일을 저질러보려는 내게 그 미로는 너무나 매혹적인 구실이었다. 택시는 나를 산 니콜라광장에 내려놓고 돌아갔다.조약돌이 다닥다닥 박혀 있는 뜰의 돌벤치에 앉아 관광기념품을 팔고 있는 집시아주머니가 캐스터네츠를 치며 다가왔다.그녀에게서 캐스터네츠 치는 법을 10분쯤 배우고 나서 하나를 샀다. 광장에서 건너다 보이는 알함브라궁전의 전경이 슬프도록 아름다웠다.시에라 네바다산의 눈 덮인 흰 능선이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궁전을 감싸고 있었다.서양남자가 광장 한켠에서 이젤을 세워놓고 그 전경을 화폭에 담고 있었다.축대를 걸터듬고 앉아 알함브라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한시간 남짓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나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친듯이 미로 헤매 니콜라교회를 끼고 오른쪽으로 돌아간 곳에 카르멘이라는 정원을 가진 고급저택이 있었다.우체통구멍으로 들여다본 그 집의 파티오엔 핏빛처럼 붉은 칸나꽃이 가득했다. 벽과 벽 사이의 좁은 미로에서 아랍인의 혼이 스며나와 내 손을 잡아끄는 듯했다.이곳의 옛주민들은 레콩키스타로 그라나다가 기독교인들에게 함락되었을 때 최후까지 저항하여 흰 벽과 돌길이 붉은 피로 물들었다고 한다. 방향을 알 수 없을만큼 미로 깊숙이 들어온 듯했다.혼자뿐인 길 위에 어디선가 발소리가 들려왔다.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다보았다.흑단처럼 검은 머리를 반듯하게 빗어넘기고 검은 진바지에 흰 티셔츠 차림의 여성이 저만큼서 걸어오고 있었다.무심히 바라본 그녀가 지난밤 넵튠이라는 극장식 타블라오에서 만난 플라멩코 무희라는 것을 알아본 순간,나는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여러 무희들 중에서 오직 그녀만이 나를 사로잡았다.그녀의 춤에서는 격정과 비애가 동시에 교차하고 있었다.폭발하듯 솟구치는가 하면 검으로 자르듯 끊어지며 다시 폭발하고… 어느 순간 나는 저 춤속에 빠져 죽고 싶다고 생각했다.그것이 그라나다에서 경험한 두번째 마음의 죽음이었다. 그녀가 내 앞에까지 걸어왔다. 『잠깐,당신은 무용수지요』 그녀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어저께 당신의 춤을 봤어요.나는 플라멩코에 대해 아는 것이 없지만 깊이 매혹됐어요.특히 당신의 춤에』 『고맙습니다』 그뿐 우리는 더이상 할 말이 없었다.그녀를 붙잡는 대신 나는 다른 미로 속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얼마쯤 가노라니 마음이 미어지는 듯 아팠다.몸을 돌이켜 다시 그 장소로 달려가보았으나 그녀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사방으로 뚫려 있는 미로 가득히 닫혀 있는 문들뿐이었다.미친듯이 미로를 헤매었으나 나는 어느 문을 두드려야 할지 알 수 없었다.눈을 가린 채 손을 맡기고 어디론가 따라가던중 갑자기 손을 놓아버린 것이다.왜 그랬을까.하지만 여행이 끝난 지금도 나는 여전히 그녀를 찾고 있다.그녀의 이름은 스텔라다.
  • 이민 간 「직지심체요절」/신재인(서울광장)

    청주는 아직도 그 고운 자태가 때묻지 않은 넉넉하고 편안한 마을이다.너무 화려하게 개발되어 있지도 않고 그렇다고 벽촌처럼 고립되어 있지도 않다.내가 있는 대전에서 엑스포 덕을 본 신작로를 따라가면 반시간이면 금방 목에 와 닿게 된다.그래서 가끔 고향의 냄새가 나는,그리고 어머님의 손때가 묻은 음식을 먹고 싶을 때에는 소리없이 이 소박한 마을을 찾아 들어간다.그리고 우연히 한 음식점에서,나기정 청주시장을 만나 뵙게 된다. 그분은 인심좋은 동네 아저씨와 같은 표정을 하고 처음 보는 이방인에게도 마음을 크게 열고 악수를 청한다.그리고 조금 딱딱하다 싶은 명함을 꺼내어 준다.명함에 있는 직함은 대한민국 청주시장이다.주소에도 어김없이 대한민국이 들어가 있다.아마도 청주시가 중국의 연길시와 자매결연이 되어 있어서 외국사람들을 많이 접촉하기 때문에 나라 이름을 분명하게 쓰고 있는 것 같다.그런데 그 명함 뒷면에는 마치 사진우편엽서처럼 초가집 모양을 본뜬 현대식 건물사진을 인쇄해 놓고 청주 고인쇄 박물관(직지심체요절)이라적고 있다.아마 흥덕사라는 절이 옆에 있는지 둥그런 부채살 무늬의 흥덕사 입구도 사진의 오른쪽 끝에 수줍게 앉아 있다.그래서 자연스럽게 이 사진을 명함의 뒷면에 자리잡게 한 그 연유를 묻게 되었다. 센강을 옆에 끼고서 파리는 성당,박물관,궁전,개선문,오페라하우스,에펠탑등 자랑스런 문화와 예술의 유산으로 화려한 치장을 하고 있다.그중에서도 국립도서관은 빼어난 외모는 없지만 그 안에 소장되어 있는 많은 귀중한 책들의 원전이 있어서 프랑스 국민 모두가 사랑하는 시설중 하나가 된다.뷔용,라블레,파스칼이 지은 원전들도 여기에 있고 구텐베르크의 성서 두권도 그곳에 있다.그리고 이 도서관 안에는 동양문헌실이 있고 그 오른쪽 조그마한 방은 보통 잠겨 있어서 일반인의 관람이 허락되어 있지 않고 있다.그 방안에는 조선말기에 프랑스 대리공사로 우리나라에 나와 있던 콜랭드 플랑시가 수집해서 가져간 그리고 후에 소유권이 프랑스 정부로 귀속된 한국의 고전 「직지심체요절」(직지심경)하권이 조심스럽게 보관되어 있다.이 책은 그 말미에 1377년 청주목의 흥덕사 주지가 인쇄한 것으로 적혀있고 인쇄방법은 금속활자를 사용하였다.이것은 서양에서 구텐베르크가 처음으로 금속활자를 사용한 시기보다 무려 70년이나 앞선 것이어서 1972년 세계 도서의 해에 프랑스 정부는 인류역사상 최초의 금속활자로 인쇄된 책으로 유네스코로부터 공인을 받게 되었다.그래서 아주까리 기름 냄새가 베어나는 한지로 만든 우리나라의 고전 원본인 이 「직지심체요절」은 프랑스 파리 국립도서관의 한가운데서 밀폐되어 꼭 필요한 사람만이 알현하는 보물이 되어 버렸다. 1985년 청주시는 주택난을 덜기 위해서 운천동에 택지개발을 하고 있었다.그리고 흙속에서 「서원부 흥덕사」라고 새겨진 쇠북과 「황룡십년 흥덕사」라고 새겨진 큰 그릇 뚜껑을 찾게 되었다.그리고 이 문화유물들은 우리가 그렇게 찾고 있었던 세계 역사상 처음으로 금속활자로 책을 인쇄하였던 장소 「흥덕사」가 바로 그곳이라는 사실을 감격적으로 입증해주었다.그러나 사실 그곳의 세계 기술사적인 가치에 대한 평가는 정부와 국민들로부터 높게인정받지를 못하였다.그래서 프랑스를 방문해서 그곳 사람들로부터 우리나라의 훌륭한 문화유산에 대한 칭찬 특히 「직지심체요절」이란 책에 대한 설명을 들은 분께서 한국에 돌아와 흥덕사터를 찾고 그곳에 조그마한 박물관을 짓도록 할 때까지 그자리는 그저 동네 아이들이 즐겨 찾는 빈터에 불과했었다.그러나 이제는 그 자리에 아담한 박물관이 서 있다.그리고 그 안에는 우리나라 옛날 훌륭한 책들의 원본과 사본들이 전시되어 있다.그렇지만 아직도 그곳에는 그 자리에서 세계 처음으로 금속활자로 인쇄된 「직지심체요절」은 없고 흔적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그것이 안타까워 청주시장은 자기의 명함 뒷면에 박물관의 사진을 넣어 못다한 말을 하려고 한다.8월5일에는 북한 핵문제가 중심이 된 북미 회담이 열리고 8월6일은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진 날이며 8월15일은 광복절이다.기술은 국가의 흥망성쇠를 좌우하는데 우리 기술이 앉아 있는 집은 빈집뿐이어서 가슴이 허전하다.
  • 서울말씨:상(서울 6백년 만상:48)

    ◎조선시대 「북촌말」이 대표적 서울말/지역·계층·직업따라 독특한 언어권 형성/해방전까지 통용… 「토박이말」 듣기 힘들어 서울말씨를 두고 「정말 깍쟁이 같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언뜻 부드럽게 들리지만 지나치게 매끄러워 반들거리는 것이나 맺고 끊는 게 분명한게 얌체 같은 서울사람 기질과 꼭 맞아떨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막상 서울로 올라와 살다보면 경상도 사내도,제주도 비바리도,충청도 양반도 자연스럽게 입에 배는 것이 서울말이다. 경상도 사람들은 억센 억양 때문에 티가 나는 경우가 많지만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이방인들은 1∼2년쯤 지나면 모두 서울사람처럼 서울말을 썩 잘하게 된다. 오늘날의 서울말은 서울토박이들이 쓰던 서울방언이 아니다.서울에서 순 서울말을 듣기가 어렵게 된 것이다.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팔도강산의 사투리가 자연스럽게 녹아들었고 바쁜 세상살이에 맞춰 어법은 적당히 무시되고 존·경칭어는 곧잘 생략됐다. 해방전까지만 해도 서울토박이들의 서울말은 건재(?)했었다.당시 쓰였던 서울말은 지역과 계층·직업등에 따라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조선시대 양·상반으로 나눠 거주지를 달리하던 것이 해방 될 무렵까지 이어져 성안 북쪽 「북촌」에서는 높은 벼슬아치들이 그들의 품위에 맞는 「북촌말」을 썼고 성안 남쪽 「남촌」에서는 「남촌말」을 쓴 것으로 전해진다. 남촌에는 벼슬하지 못한 양반이나 낮은 벼슬아치들이 모여 살았다.또 청계천 언저리 「중촌」에는 장사치들이 많이 살아 그네들의 언어권을 형성했다.언론인 조풍연씨는 그의 저서 「한국의 여로」에서 북촌을 우대,남촌을 아래대라고 하고 우대사람,우대말이 서울사람 서울말을 대표했다고 적고 있다. 한글학자 한갑수씨는 성문을 중심으로 광희문 밖 주변을 「앞대」,독립문 밖 주변을 「뒤대」라고 불렀다고 기억했다.그는 이들 앞·뒤대 사람들은 서로 지역감정이 좋지 않아 자기네만의 독특한 어투를 고집했다고 전했다. 예로 뒤대사람은 매음절 다음에 「ㅂ모음」을 덧붙였다.「가봐야지」라면 「가바봐봐야뱌지비」라고 했던 것이다. 또 이들 앞·뒤대 사람말고도말투에서 티가 났던 사람들은 마포 주변에 모여살던 이들이다. 이들은 「오」로 발음할 것을 모두 「우」로 발음하는 경향이 심했다. 「돈 없어 못해」를 「둔 업수 뭇해」라고 했고 어미는 「­ㅆ수」,「­보우」,「­가우」,「ㅆ다우」등 모두 우로 끝냈다.이처럼 「오」를 「우」로 발음하는 것은 오늘날 서울말의 특성으로 남게 됐다. 말끝을 올리면서 「그리고」를 「그리구」하는 말은 요즘도 자주 듣는다. 계층에 따른 차이는 그들 부류가 쓰는 단어자체에서 비롯되기도 했지만 어미나 경칭어등에서 뚜렷이 구별됐다. 말을 시작하기전에 「그러닝깐두루」「가설라무네」「저 거시끼니」「그게 뭐더라」등의 군소리들은 짐짓 점잖은 체 하기 위해 양반들을 흉내내 4대문안 서민들이 흔히 썼던 서울방언이다. 「계십쇼(계십시오)」「그런뎁쇼」(그런데요)등은 서울의 하층계급만 사용하던 말이다. 양반들은 천천하고 느리게 말을 했다.「그게 무엇인가 궁금하던 차에 그가 내려 왔기에 물어봤더니러니 그것이 떡이래야」(그것이 무엇인가 궁금하던차에 그가 내려와서 물어봤더니 떡이더라).이 말에 쓰인 「­ㅆ더니러니」와 「­이래야」등은 체면을 중시하는 양반 노인네들이 즐겨쓰는 어미였다. 물론 궁중에서만 사용하는 특수 용어는 따로 있었고 명문있는 사대부집안에서도 자신들만의 용어를 사용했다. 대표적인 것이 호칭으로 남자형님을 언니,사위를 「∼랑」,남의 손자를 영포,남의 아들을 영식,딸은 영애,남의 할아버지를 조부장이라고 했다. 이같은 사대부 용어들은 오늘날까지 몇몇 서울 사대부 집안에서 그대로 지켜지고 있다.
  • 낙천적인 스페인사람들/마드리드(아랍서 지중해까지:10)

    ◎돈키호테 후예들 거리마다 북적/“내일을 걱정하는 자는 이방인”… 밤새도록 먹고 마시며 흥청 스페인식 상상력? 그것은 이런 것이 아닐까. 대야를 투구로,빗자루를 창으로 삼아 불의와 대적하는 기사(돈키호테). 아리아를 부르는 앵무새,탬버린에 맞추어 황금달걀을 백개나 낳는 암탉,사람의 생각을 알아맞히는 원숭이,기분나쁜 추억을 잊게 해주는 찜질약,먹으면 보기 싫은 사람을 눈에 안 보이게 하는 물약 등을 잔뜩 싣고 마콘도마을에 나타난 집시들(백년동안의 고독). 연인이 언니와 결혼하는 것을 보고도 말없이 두 사람의 결혼케이크를 만드는 티타,그녀가 케이크반죽 속에 떨어뜨린 눈물 때문에,케이크를 먹고 난 모든 하객들이 일제히 울음을 터뜨리고 구토를 한다(달콤 쌉싸름한 초콜릿). 여자의 얼굴은 옆모습과 앞모습이 어우러져 있고,유방은 옷 밖으로 튀어나와 목덜미에 붙어 있다.무릎을 포갠 한쪽 다리는 치마이자 그녀가 앉아 있는 소파의 다리이기도 하다(피카소). 멀리 하얀 바다와 깎아지른 단애가 있고,돌상자에 뿌리를 박은 죽은 나뭇가지에 시계가 빨래처럼 걸려 있다.돌상자모서리에 걸려 있는 또다른 시계는 지금도 계속 엿가락처럼 늘어나는 중이다(달리). ○스페인 부의 집결지 이들이 보여주는 황당무계한 초현실적 세계인식.스페인에 가면 일부러 무엇을 보려고 애쓰지 않고,스페인식 상상력을 몸으로 느껴본다는 것이 내 전략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그 방법까지도 이미 스페인 자신이 말해주고 있었다.고야의 판화 중에는,두 눈을 가린 백작부인이 이상한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채 자기의 왼손을 사기꾼같은 남자에게 내맡기고 있는 그림이 있다.음흉한 속셈을 간신히 감추고 있는 남자에 반해,그의 떨거지들은 그녀의 미래가 송두리째 자기들의 수중에 들어와 있는 것에 대해 짓꿎은 미소를 감추지 못하고 있다. 고야는 그녀의 도도한 모험에 대해 이런 제목을 붙여놓고 있다. ­그녀는 「예」라고 말한다.그리고 자신의 손을 낯선 사람에게 내맡긴다. 오후 다섯시에도 햇빛은 베일 듯 강렬했다.푸에르타 델 솔(태양의 문)로 가는 길이었다.길 양쪽에 즐비한 상점들은 마드리드가 스페인 부의 집결지라는 것을 과시하는 듯했다.고급상품들이 진열된 진열장 앞엔 행인들의 발이 줄줄이 묶여 있었고,매장 안엔 손님들이 북적거렸다. 마침 걸치고 있는 옷이 너무 무겁게 느껴지는 참이어서 여성용 의류상점으로 들어갔다.소매없는 셔츠 하나를 고르고 그것을 입어보는 데는 적지않게 시간이 걸렸다.거침없이 어깨와 팔을 드러내놓고 거리로 나오니 태양이 가슴 깊숙이 파고드는 듯했다. ○인생의 즐거움 만끽 「아하!」여행중 내내 꼭꼭 닫혀 있던 마음의 문이 저절로 벙싯 열렸다.벼랑끝까지 따라가보리라.눈을 가리고 모험을 할 바에는 스페인이 얼마나 좋은 나라인가.남은 문제는 무엇에 대해 「예」라고 대답하느냐였다. 길가에 우두커니 서서 기다리고 있던 일행들이 곱지 않은 시선으로 맞았다. ­친구여,스페인에서는 날 찾지 마라.몸은 곁에 있어도 마음은…아니,몸도 마음도 연기처럼 증발해버리더라도 부디 찾지 말기를. 그들은 시무룩하게 내 행색을 흘겨보았다. 푸에르타 델 솔은 끝이 빤한 아주 작은 광장이었다.그곳을 중심으로 10개의 방사선 도로가 뻗어나가는 까닭에 턱없이 사람들이 붐빈다는 것 외에 그럴싸한 입상 하나 눈에 띄는 것이 없었다.시민들이 약속을 할 때 징표가 된다는 마드리드의 문장인 곰상이나 시계탑조차도 인파에 묻혀버린 모양이었다.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과 어깨를 맞비비고 있는데,벽을 쌓듯 둘러선 사람들 사이로 꿈꾸듯 나른한 선율이 흘러나왔다.「아랑페이스 협주곡」「알함브라의 추억」.오래전부터 내 마음을 길 위로 이끈 선율이었다. 그들은 플루트·기타·베이스로 이루어진 3인조 악사들이었다.그밖에 굶주림과 외로움을 함께 해온 개가 있었다.기타 케이스에 떨어져 있는 두 장의 지폐와 몇닢의 동전들이 부끄러울 지경으로,연주는 진지했고,그 선율은 순수했다.선율에서 묻어나는 집시의 우수가 해 저무는 들녘쪽을 가리켜 보이는 듯했다. 나는 생각했다.집에 있는 플루트를 들고 저들을 따라나서도 좋지 않을까. 그런데 주위를 둘러보니 낯선 얼굴들뿐이었다.일행들은 저만큼 마요르광장쪽으로 가고 있었다. 펠리페3세가 1617∼1619년 사이에 완성한이 광장은 사방이 4층 건물로 둘러싸여 있다.세번이나 화재가 발생해 개조를 한 끝에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고 한다.옛날에는 왕가의 의식과 종교재판의 화형식이 이곳에서 행해졌고,그후엔 투우와 야외연극,성인식,정당대회 등이 열리는 장소로도 널리 쓰여왔다고 한다. 광장에선 네덜란드축제가 열리고 있었다.높이 뜬 노란 애드벌룬이 중앙에 있는 펠리페3세의 동상을 내려다보며 축제의 현수막을 펄럭였고,각종 행사가 벌어지고 있는 천막 앞에는 구경꾼들이 몰려 있었다.꽃씨와 구근을 파는가 하면,통나무로 나막신을 만드는 과정을 보여주기도 하고,한편에선 6인조 밴드가 네덜란드 민속음악을 연주하고 있었다.광장 둘레에 즐비한 카페에는 관광객과 시민들이 음료를 마시며 축제를 멀찍이서 바라보았고,다른 한편에선 거리의 화가들이 즉석에서 초상화를 그려주고 있었다. 손님이 없어 무료하게 앉아 있는 화가에게로 다가갔다. 『1960년대만 해도 스페인은 서부유럽에서 제일 가난한 나라였다.언제부터 이런 눈부신 경제성장이 이루어졌는가』 『1975년 프랑코체제가 무너진 이후 스페인엔 자유선거,자유시장,자유언론이 가능해졌다.이제 당신은 이 도시 어디에서도 그의 기억을 되살릴 수 없을 것이다』 『스페인 사람들은 메손에서 밤새도록 먹고 마시며 얘기하기를 즐긴다고 하는데,그러고도 어떻게 다음날 일을 할 수 있는가』 『일 때문에 우리는 인생의 즐거움을 희생시키지는 않는다.대화·음식·가족·우정을 중요시하는 것이 우리의 풍습이다.우리는 하루를 두번 산다.낮과 밤의 생활.내일을 걱정하는 것은 이방인의 생각이다』 카페마다 사람들이 북적거려 빈 의자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그들이 가진 가장 큰 컵으로 맥주를 시켰다.광장을 둘러보고 돌아온 K가 내 앞에 놓인 커다란 맥주잔을 미심쩍게 바라보았다. 『너 그거 다 마실 수 있어?』 『그럼.그리고 또 마실 건데』 해가 저물고 있었다.도시의 각 가정에선 여인들이 거울 앞에서 몸단장을 하고 있을 법했다.라벤더향기가 코끝을 스쳐가는 듯했다. 그런데 내 앞엔 무슨 건수가 일어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동료는 내가 다 못마실 맥주에돈을 낭비하는 것마저 아까워하는 판이었다. 일행들이 아르고 데 쿠치예로스거리에 있는 「엘 쿠치」레스토랑으로 갔을 때였다. 『우리 오늘밤은 이곳 사람들이 하는 식으로 밤새도록 이집 저집 찾아다니며 마셔보면 어떨까요?』 ○카페 빈자리 없어 나는 일행들의 염려를 묵살하고 주문을 받으러 온 웨이트리스에게 음식이름을 늘어놓았다.생야채 혼합 샐러드,흰 강남콩과 생소시지,왕새우 철판구이,오징어튀김,정어리 소금절임,가다랭이 토마토졸임,석류소스를 친 피망구이,어패류와 고기를 함께 익힌 밥,그리고 맥주 10병이었다.밤새도록 먹기 위한 나의 이 과도한 주문은,『그걸 어떻게 다 먹으려고 그래?』하는 핀잔과 함께 대폭 수정되었다. 일을 좀 저질러보려고 몸살을 아무리 앓아도,분별력 있는 동료들에게 둘러싸여 꼼짝달싹도 할 수 없었다.매우 간소한 우리의 식탁 옆에서는 마드리드의 젊은이들이 떡 벌어지게 차려놓고 유쾌한 담소에 여념이 없었다.그런데도 웨이트리스는 연방 그들의 자리로 새 음식을 나르고 있었다. 한편에선 퇴근후 바를 순회하는 사람들이 카운터에 선 채로 올리브를 안주삼아 가볍게 한잔씩 하고 있었다.솔직히 말해서 나는 그들이 부러웠다. 「예」라고 대답할 태세가 갖추어져 있음에도,손을 잡아줄 그 무엇이 좀처럼 나타나주지 않았다.그것은 분별력 있는 동료들 탓이기보다,그림 속의 백작부인처럼 눈을 가리지 않은 내 탓인지 몰랐다.나 자신의 분별력이 결코 눈을 감지 못하는 탓이었다. 하지만 그라나다에서 나는 마침내 일을 저질렀다.
  • 깊기만한 흑백의 골(임춘웅칼럼)

    지난 6월 14일자 칼럼에 O·J·심슨에 관한 이야기를 쓴 일이 있다. 70년대 미식축구계를 빛냈던 불멸의 흑인스타 O·J·심슨이 백인이었던 전처와 전처의 젊은 백인애인을 살해한 혐의로 구속된 사건을 두고 미국이 시끄럽다는 것,미국민들은 억만장자인 심슨이 왜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질렀는지 의아해 한다는 것,그리고 그들은 이제 영웅을 잃은 허전함에 당황하고 있는 것 같다는 내용이었다. 이 사건은 벌써 두달째 매일같이 뉴스의 초점이 되고 있다.예심과정에서부터 심슨의 재판은 빠짐없이 TV로 생중계되고 있고 그의 변호사와 검찰의 한마디 한마디가 다 뉴스다.처음에는 경찰이 살인현장에서 영장없이 채취한 증거물들이 법적효력이 있느냐는 법이론 논쟁이 중심이 되다가 최근엔 흑백문제로까지 비화될 낌새를 보이고 있다. 살해된 피해자들이 백인이고 살해혐의를 받고 있는 인물이 흑인이라고는 하나 그들은 부부였던 사이로 그것이 인종문제와 무슨 연관이 있는 것일까 하는게 우리같은 이방인들에게는 우선 궁금한 일이 아닐 수 없다.심슨이 살인자라고 해도 그것은 애증의 문제이지 피부색의 문제는 아닐 것이라는 게 우리들의 상식이다. 미국도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사는 사회이긴 하나 때로는 한국적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들이 있다.심슨 사건도 그런 예중의 하나일 것이다. ABC뉴스가 최근 전국적으로 여론조사한 것을 보면 백인은 63%가 심슨이 유죄라고 믿는데 비해 흑인은 불과 22%만이 심슨이 유죄라고 보고 있다.그밖에 CNN·갤럽여론조사에서도 흑인의 60%가 심슨은 결백하다고 보고 있는데 비해 백인은 58%가 거꾸로 심슨의 유죄를 지목하고 있다. 동일한 사건을 똑같은 정보를 통해 판단하는데 흑백간 이런 견해차를 보이고 있다는데 미국인종문제의 심각성이 있다.미국의 흑백문제는 심슨사건같이 케이스별로 보아서는 파악할 수 없는 대목이 많다.보다 더 본질적인 문제가 아닌가 싶다.백인들은 흑인들이 너무 많은 것을 바라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흑인들은 너무나 많은 것을 박탈당하고 있다는 강박관념에 늘 사로잡혀 있다. 유럽의 백인들은 아프리카 대륙을 발견했을 때 아프리카의 흑인들을 「야수」(Beast)라고 믿었던 때가 있었다.같은 인간으로 보지 않았던 것이다.미대륙의 초기 개척시대에도 백인들은 흑인들 앞에서 옷을 예사로 벗을 때가 있었다.흑인을 감정을 가진 인간으로 보지 않았던 것이다. 먼 옛날얘기이긴 하나 그런 차별의식이 아주 없어진 것은 아니다.많이 개선됐고 백인중 더 많은 사람이 그들 선조들이 가졌던 편견이 잘못됐다는 것을 알고 있으나 모든 백인이 다 그렇게 느끼고 있는 것은 아니다.이런 틈바구니에서 살고 있는 흑인들은 모든 일을 피해의식에서 보고 피해의식속에서 파악하려 한다.다 잘못된 일이지만 그것이 엄존하고 있다는 현실이 문제인 것이다.심슨은 최근 그의 변호인단에 코크란이란 젊은 흑인변호사를 추가했다.변호인단 색깔이 더욱 짙어졌다.공교롭게도 검찰측은 모두가 백인이다.더욱 흥미를 끄는 것은 이 재판의 재판장에 랜스 이토란 일본계 판사가 지명된 일이다.흑백의 대결(?)에 황인종이 심판을 보는 형세가 됐다.결과가 궁금하다.
  • “민단·조총련 화합의 계기로”/「정상회담」 일동포들의 반응

    ◎남은 북포용·민족이익 생각해야 분단의 비극을 낯선땅에서 더욱 아프게 느껴온 재일동포들은 남북정상회담이 민족통일에 앞서 일본에서의 「남북대결 상황」을 끝내고 대화합을 실현할수 있는 역사적 회담이 되기를 바라고 있다. 재일동포사회에는 이같이 다른 해외동포들과는 또 다른 바람이 있기 때문에 남북정상회담에 대한 기대가 더욱 높다.그러나 북한을 잘 아는 재일동포들중에는 김일성주석은 체제유지가 아니라 민족의 이익을 생각하여야 하며 김영삼대통령은 북한을 포용하는 대담함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지적하는 사람들이 많다. 일본 오사카(대판)에서 재일동포등을 상대로 FM방송을 보내는 「미니FM사랑방송」의 오광현 대표는 『재일동포는 미국이나 중국의 동포와는 달리 민단과 조총련으로 갈라지는 분단의 아픔을 안고 살고 있다』고 지적하고 남북정상회담이 재일동포사회 전체의 민족화합의 계기가 되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그는 『남북정상이 만나 악수를 나누는 것 자체가 하나의 역사다.그 역사적 만남이 그동안 이방인으로서의 민족차별과 함께 민단과 조총련으로 나뉘어 반목과 대립을 되풀이해온 민족적 비극도 씻어줄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미니FM사랑방송은 이러한 기대를 갖고 남북정상회담회담 관련 뉴스를 신속하게 보도하고 있으며 동포들로부터 앞으로도 계속 보도해 달라는 요청을 많이 받고 있다』고 오대표는 말했다.미니FM사랑방송은 비록 일부 주민들을 상대로 하는 소규모이지만 일본에서 처음으로 한국어와 일본어로 방송되는 FM방송이다. 재일동포단체인 민단의 김용우 부단장은 『재일동포들은 남북정상회담이 민족통일에 기여할 것으로 보고 좋은 결과가 나오기를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민단은 7월4일 남북정상회담합의를 환영하는 담화문을 발표했다.담화문은 『남북정상회담으로 반세기에 걸친 분열·대립의 역사가 청산되고 민족화합과 통일의 일대 전기가 마련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북한은 지금까지 남북협상에서 보여준 양면성을 버려야한다』고 지적했다. 조총련의 강태일 국제국장도 『남북정상회담은 민족사에 남을 역사적 사건』이라며 환영한다고 말했다.그는 『김대통령의 평양 방문때 북한주민들은 그를 환영할 것』이라고 말했다.그러나 『김주석이 서울에 올 수 있겠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그것은 아직 결정되지않은 일』이라며 구체적인 언급과 예상을 거부했다.회담의제와 관련,그는 『핵문제는 미·북한 고위급회담에서 논의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조총련이었다가 한국을 방문한후 탈퇴한 동포로 구성된 모국방문추진위원회의 한 관계자는 『정상회담 합의는 김대통령의 대담한 결단의 결과』라고 전제하고 『남북한은 체제와 권력유지가 아니라 민족의 이익을 우선한다는 냉정한 자세로 회담에 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과 북한을 각각 5회이상 방문한 그는 『단시일내에 많은 결과를 기대할 수는 없지만 민족통일의 큰 틀을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하고 『재일동포들이 남북한을 자유로이 방문할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 바그다드·암만/“신의 도시” 바빌론(아랍서 지중해까지:5)

    ◎시간도 멈춰선 「2천5백년전 왕국」/거대한고 장엄한 이슈타르게이트… 네자르왕의 위엄 보는듯 고고학자들은 로맨티스트들이다.바빌론 궁전의 유명한 「행진의 거리」복판에 섰을때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그들은 역사의 미궁속으로 끊임없이 잠입을 시도하고 있다.마치 현대의 어린이가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속으로 여행을 꿈꾸듯이 바그다드에서 남쪽으로 90㎞,차로 한시간 남짓 걸리는 이 고속도로를 달리는동안 나도 그 비슷한 공상을 하면서 가슴이 설레었다. 신의 도시,고대 인류가 만든 불가사의 중의 하나,이같은 수식어로 바빌론은 역사의 문외한에게도 널리 알려진 이름이다.그 이름이 주는 매력과 신비감 때문에 나는 갑자기 엉뚱한 「증발의 유혹」에 빠졌는지 모른다.영화 「타임머신」에서 인간은 첨단기계를 이용해서 「과거와 미래로의 여행」을 자유롭게 하고 있다.최근 대전엑스포에서 시승해 본 「미래의 서울로 가는 자동차」는 이보다 한층 단순하고 솔직했다.이것은 고속으로 전개되는 대형 멀티비전 화면을 이용한 것이다.그러나 바빌론에서 시간여행을 하는데는 그런 구차스런 문명의 이기들이 전혀 필요하지 않다.여기에는 고대 바빌로니아 왕국의 공간이 완벽하게 갖춰져 있을뿐 아니라 이 공간에서는 시간도 잠을 자고있다. ○외성은 흔적 없어 먼저 우리앞을 막아선 것은 청색으로 채색된 거대한 이슈타르 게이트였다.이슈타르는 사랑의 여신이란 뜻이다.이 문은 본래 바빌론내성의 출입문인데 외성의 흔적이 모두 사라진 지금 바빌론 궁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출입구 구실을 하고 있었다.우리 눈에 거대하게 보이는 이 문도 복제품으로 원형의 절반 규모밖에 안된다고 한다.이슈타르 게이트의 전면에는 이상한 동물의 모양이 무늬처럼 일정하게 조각되어 있는데 그 형태는 말과 개의 중간쯤이라고 할까.이것은 상상의 동물로 바빌로니아의 수호신이었다.상상의 동물은 궁안의 여러군데 벽에서도 발견되었다. 입구를 통과하자 오른쪽에 뜻밖에 소규모의 현대식 건물이 보였다.이 건물은 바빌론박물관으로 1899년 이도시가 처음 발굴될때 발견된 여러가지 유물을 보관하고 있었다.박물관을 지나약간 오르막진 언덕으로 올라가자 눈앞에 행진의 거리와 왕궁의 웅장한 성벽들이 나타났다.행진의 거리는 철책으로 가장자리를 둘러쌌는데 그 길이가 수백m는 될것 같았다.성벽들은 행진의 거리 좌우로 일정한 간격을 두고 질서정연하게 늘어서 있었다.거리의 바닥에는 단단한 흙벽돌이 깔려 있는데 이것은 원형이 그대로 보존된 상태였다.행진의 거리는 「적들은 절대로 통과하지 못하는 곳」이란 뜻이 있고 이곳에서는 매년 신에게 영광을 돌리려는 축제가 열렸었다.그러나 네부카드 네자르가 죽고(BC605∼562) 불과 20년이 채 지나지 않아 이 승리의 거리에 페르시아의 정복자들이 말발굽소리를 울리며 행진했다는 사실(BC539)을 보면 역사의 아이러니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2500년전의 길바닥 위로 뜨거운 햇볕이 작렬하고 있었다.성벽으로 에워싸인 행진의 거리는 정적이 가득했다.문득 이 공간에는 시간이 정지되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그렇다면 저 성벽들 사이로 걸어들어가서 네부카드 네자르의 병사들과 신하들을 당장 만나볼 수도 있지 않을까?거리 복판에 서서 나는 잠시 이런 공상에 빠져들었다.그러나 이 공상은 금방 깨지고 말았다.성벽을 쌓은 벽돌들마다 네부카드 네자르 대신 사담 후세인의 이름을 새겨놓고 있었던 것이다. ○벽돌엔 후세인 이름 사실 이 거대한 왕궁은 후세인의 지시에 의해 최근 복원된 하나의 무대세트에 불과한 것이다.후세인은 2500년전 이 도시를 수복하고 예루살렘을 정복했던 네부카드 네자르의 후계자를 자처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수백만달러를 들여 바빌론을 복원시켰고 왕궁의 성벽을 쌓은 벽돌에는 네부카드 네자르의 이름대신 자신의 이름을 새겨넣은 것이다.후세인은 자기 이름이 다시 2500년 뒤에 위대한 정복자의 이름으로 회자되기를 바라는 것일까. 9월에 열리는 바빌론축제도 옛 영광을 되살리겠다는 사담의 의지에 따른 것이다.이 축제가 열리는 주무대인 그리스 극장은 바빌론성에서 수백m 떨어진 한적한 들가운데 외롭게 버려져 있었다.일종의 야외극장인 이 무대가 그리스극장이란 이름을 갖게된 것은 BC300년경 바빌론에 수도를 정하고 이곳을 통치했던 그리스의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건축되었기 때문이다.얼핏 봐서 무척 현대적으로 설계된 이 야외무대를 건립하는데 사용된 벽돌이 모두 바벨탑의 잔해에서 거둬들인 것들이란 사실이 흥미로웠다. 궁전의 성벽을 조금 벗어나 옆뜰로 나서면 넓은 공터의 복판에 커다란 사자상이 버티고 있다.높이 2m,폭2·5m의 이 용맹한 사자상은 그러나 지금은 보아주는 사람이 별로 없어 무척 쓸쓸하게 보였다.이 사자상은 사랑의 여신 이슈타르를 상징한 것이란 얘기도 있고 적들을 제압하는 상징물이란 얘기도 있으나 어느쪽인지 확인할 수는 없었다.다만 자세히 관찰해보면 사자밑에는 사람이 누워있고 사자는 앞발로 인간을 찍어누르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이것을 보면 침략자를 제압한다는 왕궁의 수호신 역할을 하지 않았나 짐작되기도 한다. 그 유명한 바벨탑의 유적은 바빌론성에서 거의 1㎞쯤 떨어진 외딴 언덕위에 있다.바벨탑은 존재하지 않고 다만 전설이 있을 뿐이다.누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실제로도 그랬다.그러나 바벨탑은 희미하게 존재하고 있었다.이 구약의 불가사의 중의 하나를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사실은 어쨌든 의심하기 좋아하는 이방인을 잠시나마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우리는 그것을 육안으로 확인하기 위해 땀을 뻘뻘 흘리며 밋밋하고 먼 언덕길을 올라갔다. 거대한 분화구가 나타났다.미사일이나 큰 폭탄이 떨어져 거대한 웅덩이를 만든 것 같았다.벽돌조각이나 건축물의 다른 잔해조차 흔적이 없었다.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이 대역사를 벌였다는 느낌은 쉽게 받았다.웅덩이의 넓이나 깊이로 미뤄볼 때 그 규모가 엄청났으리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바벨이란 말에는 「하느님의 문」이란 뜻과 「혼돈」이란 뜻이 함께 있다.거대한 웅덩이 잔해를 봤을때 한마디로 혼돈이란 말이 생각났다. 백성들은 하느님에 대한 종교적 열정,하느님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 열망으로 이 제단을 쌓아올라갔다.그러나 여호와께서 내려와서 보시고 이것은 백성들이 자기를 두려워하지 않을뿐 아니라 자기네끼리만 뭉치면 무슨 일이든 해치울 수 있다는 교만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판단하고 탑의 건축을 중지시켰다.창세기 11장에는 바벨탑에 관해 대강 이런 얘기가 나와있다.여호와께서는 자신에 대한 백성들의 열정을 왜 배신으로 오해했을까?옛날이나 지금이나 인간의 뜻을 신에게 올바로 전하는 일은 그처럼 힘든 것인가? ○탑문화 크게 발달 이라크 남부에는 구약의 표적물이 유난히 많다.바벨탑을 위시해서 아브라함의 고향이라는 「우르」,쿠르나의 에덴동산 등이 그것이다.「노아의 방주」는 바빌론에 끌려온 유태인들이 수메르인들의 홍수얘기를 전해듣고 훗날 돌아가서 신화로 꾸며냈다는 얘기도 전해지고 있다.분명한 것은 유프라테스 평원에는 탑이 많다는 사실이다.유프라테스 뿐아니라 나일강 유역도 마찬가지다.평원에는 산악지대와 달리 하늘로 높이 솟은 탑문화가 유독 발달되어 있다.사람들은 수직으로 솟아오른 탑에 의지해 자기의 권력의지와 신에 대한 갈망까지 모두 표출하고 있는 셈이다.바벨탑의 잔해는 인간의 그 끝없는 욕망의 허망감을 웅변으로 말해주고 있었다. 바빌론성 외곽을 멀리 벗어난 곳에 인류최초의 성문법전을 만든 함무라비 대왕의 석상이 있었다.법전을 새겨놓았다는 높이 2.5m크기의 돌기둥도 있었는데 이것은 모형이었다.원형은 파리의 루브르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바빌론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것들도 자연 보잘것이 없었다.귀중한 유산들이 열강의 손으로 넘어가버린 탓이다.박물관 진열대에는 고작해야 문자가 새겨진 돌조각들,작은 토기 몇점만 뒹굴고 있었다. 그곳에서 눈길을 끈것은 1899년 독일인 콜데베이에 의해 처음 발굴이 시작되기 직전의 바빌론성의 전경과 발굴이 진행되는 현장의 사진들이었다.발굴직전의 바빌론 성은 짙은 안개에 싸인 고성의 모습처럼 아름답고 신비로 가득했다.내 입에서 저절로 탄성이 나왔다.그런가하면 발굴현장 사진은 시장바닥처럼 어지럽기 짝이 없었다.아,귀중한 유물을 훔쳐가기 위해 발굴이라는 이름으로 이 신비의 고도는 얼마나 잔인하게 파괴되었던가,나는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 바그다드·암만/모술의 유적들(아랍서 지중해까지:3)

    ◎3천년전 앗시라아왕국 성터 곳곳에/날개 달린 황소상엔 위엄 서려… 성마티 수도원은 “회교이방지대” 이탈리아 사람들은 언제나 쾌활하고 붙임성이 좋았다.이십여명의 이탈리아인들이 모술 유적 관광길에 줄곧 우리와 동행했는데 그들은 계속해서 즐겁게 떠들고 노래를 불렀다.그바람에 우리도 잠시 즐거운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암만에서 바그다드로 오는 길에 우리와 동행했던 두명의 독일인에 비하면 이들은 얼마나 쾌활하고 사교적인가? 고고학자라는 독일인들은 시종 음침한 표정으로 자기네 끼리만 쑥덕거리고 이방인과는 좀처럼 대화를 트려고 하지 않았다.버스 한대에 이탈리아인들과 동승해서 상오 열시쯤 호텔을 빠져나갔다.뜨거운 햇빛이 모스크의 하얗고 둥근 지붕 위에서 이글거리고 있었다.비교적 널찍한 고도의 거리에는 차량도 인적도 보이지 않았다.흙으로 견고하게 지은 낮은 건물 처마 밑을 자세히 보면 남루한 아라비아 의상을 걸친 두세사람이 그늘에 숨어앉아 바깥 거리를 조용히 바라보고 있다.시내를 벗어나 동남쪽으로 40㎞쯤 달려갔을때 황량한 들 가운데 흙벽돌로 제법 높이 세운 벽이 나타났다.주위에 철조망을 둘러놓고 엉성한 출입문도 만들어 놓았다.관리인인 노인이 나와서 커다란 자물통을 끄르고 우리를 울타리 안으로 안내했다.이탈리아인들이 대동한 자국인 가이드가 말했다. 『이곳이 두번째 수도였던 님루드요.니네베에 비하면 제법 볼게 많이 있어요』 ○성벽내부 잘 보존 수도라는 말이 아주 야릇하게 들렸다.흙벽돌 몇장을 쌓아놓은 폐허를 놓고 수도라니.그러나 사르곤왕의 북서궁과 남서궁이 존재했을 때 이곳 성벽이 연장 8㎞에 달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이라크 국내에는 만개의 유적지가 있는 걸로 알려져 있다.모술은 이라크에서도 대표적인 역사유적도시이며 특히 아시리아제국의 네개의 수도들이 티그리스 강을 끼고 도시 근교에 자리잡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아수르,님루드,니네베,코르사바드등인데 이가운데서도 님루드가 비교적 부조품과 장식들을 충실히 유지하고 있었다.성벽 내부에는 뜻밖에 많은 유적들이 있었다.그것들은 선명하고 완전했으며 이제야 우리는 기원전 천년에 실재했던 왕궁의 위엄을 실감할 수 있었다.왕의 연회장으로 들어서는 입구에는 터번을 두른 인자한 표정의 석상 둘이 나란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안뜰 한쪽 벽에 부조된 날개 달린 거대한 황소상은 특히 강한 인상을 주었다.거대한 날개는 섬세하고 아름다웠으며 다리의 근육에는 힘이 넘쳤다.짧고 날카로운 쐐기 모양의 설형문자가 촘촘하게 기록된 석판들이 여러개 있었다.이 문자가 바로 뒷날 페니키아 문자를 거쳐 지금 쓰이는 알파벳의 시조가 된 문자이다. 성벽 바깥 들에는 비교적 옷을 깨끗하게 입은 아이들이 즐겁게 뛰어놀고 있었다.주변에 인가가 없으므로 이 아이들은 다른 지역에서 소풍을 왔을 것이다.자세히 살펴보니 저쪽 언덕 아래 부모들이 차를 세워놓고 기다리고 있었다.수메르인의 후손들이 삼천년 고도의 유적에 와서 천진난만하게 뛰어놀고 있는 것이다.함께 사진을 찍자고 했더니 빨간 스웨터를 입은 예쁜 소녀는 얼굴을 붉히며 달아난다.간신히 사진 한장을 찍었는데 소녀는 곧 검은 차드르를 둘러쓴 엄마 쪽으로 달려가버렸다.저아이도 멀지않아 차드르로 해맑은 얼굴을 감추고 말겠지.이런 생각을 하자,왠지 마음이 무거워졌다. 「니네베는 거대한 도시이며 이곳을 한번 돌아보는데 사흘이 걸린다」구약의 「요나서」에는 이런 글귀가 나온다.(요즘 쓰는 구약은 니느웨로 표기하고 있다).「요나서」의 요점은 극도로 타락한 니네베를 징벌하기 위해 여호와가 요나를 파견하는 것으로 되어있다.이 기록에 따르면 니네베는 당시 부와 번영의 상징이었다.그러나 우리가 그곳에 갔을 때 니네베는 5m 높이의 성벽 일부와 세개의 성문으로 겨우 지난날의 흔적을 지탱하고 있었다.세개의 성문도 최근 몇년사이에 이라크 문화부의 노력으로 복원되었다고 한다.이곳에도 님루드에서 봤던 것과 아주 흡사한 날개 달린 황소상이 입구를 장식하고 있었다.이것은 그동안 흙속에 묻혀 있던 것으로 1941년 큰 비가 왔을 때 우연히 발견된 것이라고 한다. ○부와 번영의 상징 니네베 성 근처의 잔디가 돋아난 야트막한 언덕에 아주 작은 모스크가 하나 있었다.낮은 담장으로 전면만 둘러친 이 작은 건물은 이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으로 눈길을 끌만한 별다른 특징은 없었다.누군가가 저것이 요나의 무덤이라고 말했다.그제서야 사람들의 눈길이 그곳으로 쏠렸다.「선지자 요나의 모스크」로 이름지어진 이 무덤은 니네베가 발굴되던 1847년 비슷한 시기에 발견되었다.그 무덤을 바라보면서 요나의 전설과 방금 둘러본 니네베 성벽의 선명한 황소상이 함께 연상되었다.니네베를 구하려고 요나는 이곳에 왔으니까 그 무덤이 여기 있는 것은 아주 자연스럽다.그러나 니네베는 실재했고 요나의 실재는 육안으로 증명된 것이 없다.저 무덤마저 요나의 전설을 증거해주지는 않는다.이것은 예수의 부활만큼이나 내게는 난해하고 복잡한 문제였다. 모술시 교외의 성 마티 수도원으로 가는 길에 버스속에서는 작은 해프닝이 벌어졌다.이탈리아인들이 노래를 불러대자,우리 쪽 한사람이 갑자기 경쟁심이 생겼는지 사회자격인 이탈리아인 가이드에게 우리 일행중에 칸초네 가수가 있노라고 허풍을 친 것이다.마치 기다렸다는듯 젊은 이탈리아인들이 박수를 치고 괴성을 질러댔다.그바람에 갑자기 칸초네 가수가 된 나는 달리는 버스에 앉아 난생 처음 노래를 부르지 않을 수 없었다.사실은 이탈리아인들 앞에서 이탈리아말로 노래를 부른다는게 약간 어깨가 으쓱해지는 일이기도 했다.「아름다운 너의 얼굴」­이 노래는 한때 결혼식장에서도 두어차례 부른 경험이 있었다.그리고 이탈리아인들 가운데 제법 아리따운 처녀와 젊은 부인들도 섞여 있었다.이방인 관객들이 환호성을 올렸고 이것을 계기로 아시리아 고토를 여행하다 우연히 합류하게 된 한국인과 이탈리아인들 사이에 이해와 우정의 폭이 한층 넓어졌다. 1271년 실크로드를 따라 모술을 방문했던 마르코 폴로는 「동방견문록」에서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모술은 거대한 왕국이며 여러 인종들이 살고있다.마호메트를 신앙하는 아랍인들,그밖에 그리스도를 따르는 다른 종족들이 있다.이들 그리스도 신자들은 로마교회법을 따르지 않는 다른 종파들인데 네스토리우스파,야곱파,아르메니아파가 그것이다.­이 기록을 보더라도 모술 지방에는 회교 뿐 아니라 비록 소수나마 여러 종파의 기독교인들이 거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이라크 국내 종교적 분위기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믿는 것과 달리 비교적 자유로운 편이었다.유태인을 증오하는 사담 후세인도 아시리아의 기독교인에 대해서는 호감을 갖고 있으며 그의 심복으로 걸프전 당시 협상창구역을 맡았던 타리크 아지즈도 아시리아계 기독교인이다. ○차드르 착용 안해 깎아지른듯한 높은 산 중턱에 요새처럼 견고하게 지어진 회색건물이 바라다보였다.이것이 서기 4세기에 세워진 마크로우브산의 성 마티 수도원이다.버스가 가까스로 산중턱 수도원 입구까지 기어올라갔다.사람들이 들어가는 길목의 그늘에 앉아 쉬고 있고 노점을 차리고 애세서리나 담배를 파는 여인들도 있었다.이쪽 분위기는 조금 달랐다.차드르를 착용한 여인이 하나도 없다는 점이었다.남자들의 의상도 제멋대로다.모두가 기독교도들인 탓일 것이다.마티 수도원은 야곱파의 본산이며 인근에 메르기란 기독교 마을도 있었다.그 마을을 잠시 방문했을 때 이층집 베란다에서 바깥거리를 바라보는 여인의 멋진 옷차림과 아름다운 자태,그리고 이방인의 시선을 조금도 꺼리지 않는 개방적인 태도가 무척 인상적이었다.수도원 내부에는 예배실과 수많은 방들,그리고 큰 동굴같은 우물도 있었다.많은 방에는 신자들이 가족과 함께 와서 묵고 있었는데 그들은 병자의 쾌유나 소망성취를 기원하러 찾아온 손님들이었다.그 손님들보다 훨씬 많은 동서양의 관광객들이 수도원 마당으로 몰려들어오고 있었다.이곳이 인기가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마크로우브산 중턱으로 찾아오는 길이 험하다는 점을 제외하면 수도원 내부에 특별한 볼거리는 없었다.사람들은 이곳이 알라신의 바다에 홀로 떠있는 그리스도의 섬이란 점 때문에 더욱 흥미를 갖는 것이 아닐까? 만약 방문자가 기독교인이라면 특별한 감회를 느끼는건 당연할 것이다.
  • 바그다드·암만/하트라의 축제(아랍서 지중해까지:2)

    ◎「저항의 역사」 신전을 무대로 재현/로마군 물리친 베드윈족 그려… 제사땐 양을 제물로 우리가 모술의 호텔 현관으로 들어설 때 아가씨 몇명이 나와서 일행들의 가슴에 빨간 장미 한송이씩을 달아주었다.가이드로 나온 사람,호텔 종사원들이 달려나와 박수까지 쳐줬다.우리를 환영한다는 뜻인데 이 장면은 약간 어색했다.환영하는 그들도,꽃을 받은 우리도 우리가 완전한 동지라는 확신은 아직 갖지 못했던 것이다.몇사람의 아랍계 사람을 제외하면 일행은 대부분 미국과 그 추종세력(?)인 서방세계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모술시로 두시간 내겐 그 꽃선물이 「동지가 되어준 것」에 대한 보답이라기 보다 지루한 기차여행을 견디고 모술까지 와준 것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로 받아들여졌다.바그다드 정거장에서 모술역까지는 꼬박 9시간이 걸렸다.호텔 만수르의 어떤 가이드는 간밤에 모술까지 서너시간이면 갈 수 있다고 말해줬다.서너시간이 9시간으로 늘어난 것이다.이곳 사람들의 시간개념이 매우 희박하다는 것은 여러곳에서 확인되었다. 바그다드 정거장은 우선 그 구역이 매우 넓고 복잡한 선로와 플랫폼이 질서정연하게 분리되어 있는 점이 특징이었다.시설은 아주 낡았지만 최초의 설계가 매우 치밀했음을 알 수 있었다.이 정거장이야말로 독일제국이 3B 정책의 상징으로 건설한 바그다드 철도의 시발점이 아닌가.비잔티움·베를린으로 이어지는 이 노선에서 모술도 중요한 거점의 하나였다.우리는 독일제국이 식민쟁탈의 수단으로 건설해 놓은 이 고색 창연한 철도를 이용해 모술로 가는 것이다. 넓고 긴 플랫품에는 북쪽에서 귀환하는 많은 군인들과 고향으로 가는 많은 민간인들이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특히 군복을 느슨하게 입은 젊은 군인들이 아주 많았다.해가 진뒤 스산한 저녁나절에 군인들과 검은 차드르 혹은 흰 수건을 머리에 두른 부녀들이 한데 뒤섞여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모습이 마치 피난길의 한 장면을 연상시켰다. 객차 좌석에 앉아있는 부녀자들은 거의 표정이 없었다.군인들도 표정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그들은 골격이 크고 윤곽이 분명해서 희노애락을 드러내기가 한층 쉬울텐데 마치님루드궁전 입구의 돌조각처럼 시종 무표정이다.저들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물자궁핍과 낙후된 생활환경에 잔뜩 불만을 품고 있을까? 혹은 유구한 역사가 현재와 혼재되어 그 역사의 숨결을 하루하루 생생하게 느끼며 살고있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는 것일까? 그야 어떻든 그들이 우리 이방인의 시각에서 보면 놀라울만큼 순수하고 순진하다는 것은 분명했다.그점은 그들의 투명하고 매혹적인 눈빛에서 쉽게 읽어낼 수 있었다. 바그다드∼모술간 철도주변은 대부분 이른바 「비옥한 초승달 지역」에 해당되는 곳이다.밤에는 못봤지만 새벽이 되자 차창 밖으로 크게 자란 옥수수밭과 밀밭,감자밭들이 이어지고 있었다.그러나 농지관리는 산만했고 구획이 정해진 농지보다 버려진 초지가 많은걸 볼 때 경작방법은 아직 원시상태에 머물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들에는 천막 가득 모술에는 아시리아제국의 수도였던 니네베성터가 아직 그대로 남아 있다.이 도시 자체가 유적이었다.인구 백만을 헤아리는 북부 최대도시로 알려졌지만 현대도시란 느낌보다 역사의 시간속에 그대로 머물고 있는 고대도시란 인상을 강하게 받았다.우리가 묵은 모술호텔은 이 도시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위에 자리잡고 있었다.호텔에 도착해서 잠시 휴식을 취한 뒤 우리는 모술 유적관람을 뒤로 미루고 축제가 열리는 하트라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모술에서 하트라까지 버스로 다시 두시간 반이 소요되었다.가는 길목에서 이따금 언덕위에 설치된 포대와 군인들을 볼 수 있었다.이 포대는 아마 터키 국경부근에 출몰하는 무장 쿠르드족을 겨냥하고 있을 것이다.양떼나 놀고 있어야 할 한가로운 언덕위에 견고하게 구축된 포대와 병사들,이것은 오늘날 이라크가 처해 있는 복잡한 내외환경을 웅변으로 말해주는 상징물로 보였다. 대상도시 하트라는 AD 1세기쯤 아라비아 반도에서 흘러온 베드윈족들이 건설한 도시로 알려져 있다.유명한 하트라 성도 베드윈의 캐러밴들(대상)이 세운 신전이며 하트라 부근에는 베드윈의 분위기,그 흔적들이 도처에 널려있었다.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를 보면 검은색 아라비아 의상을 걸치고 쿠트라란 이름의터번을 쓴,말을 탄 용감한 병사들이 많이 등장한다.골격이 뚜렷한 얼굴,멋진 수염,날카로운 눈빛이 이 용맹한 무사들의 공통된 특징이다.하트라에는 이런 복장,용모를 지닌 사람들이 유독 많았다.길가에 천막을 설치해 놓고 사람들이 많이 모여앉아 있었다.수염을 멋지게 기른 베드윈의 촌장쯤 되어 보이는 남자들이 수십명 천막아래 나란히 앉아 축제를 기다리고 있었다.천막안에도 사담 후세인의 초상화는 한가운데 걸려있었다.한쪽에서는 산채로 양의 목을 베어 큰그릇에 그 피를 쏟아붓고 있다.사람들이 양의 피를 마시려고 주위로 몰려들었다. 축제때면 알라신에게 살아있는 양의 피를 바친다는 베드윈의 관습을 실행하고 있는 중이었다.멀리서 온 극동의 손님에게도 친절하게도 한 양푼의 양의 피를 권한다.우리가 질겁하고 뒤로 물러서자,촌장들은 점잖고 인정스런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이런 천막들 숫자가 하트라성으로 다가갈수록 점점 늘어났다.들에는 흰 천막들이 홍수를 이루고 있었다. 축제의 본무대인 신전은 거대하고 웅장한 건축물이다.헬레니즘의영향을 받은 코린트식과 이오니아식의 화려한 원기둥들이 즐비하며 벽면의 조각품에도 그리스나 페르시아의 양식이 도입된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얼핏 보면 그리스의 파르테논 신전을 많이 닮은 꼴이었다.그리스 신화 속의 괴물인 메두사의 머리가 전면 벽에 크게 부조된 것도 좋은 증거물이었다.무대로 사용되는 신전의 회랑에는 아무런 장식물도 설치되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 무대가 너무 썰렁하고 보잘것이 없었다.그러나 개막프로인 「사막의 힘」(춤과 노래가 혼합된 무용음악극)이 펼쳐지면서 붉고 푸른색 조명이 비쳐지자,지금까지 그늘진 폐허로만 보였던 그 무대가 갑자기 역사의 현장을 되살린 것 같은 지극히 환상적인 무대로 돌변했다.투구와 갑옷을 입고 방패와 창을 든 고대 로마군의 진격과 거기에 맞서는 베드윈 용사들의 항전­이것은 AD 2∼3세기 로마군이 하트라 성채를 공략했으나 주민의 저항으로 퇴각했던 실제 역사를 재현한것­이같은 극의 전개와 무대배경이 된 하트라 신전의 전면 회랑은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저음의 합창 장엄 이 무대는 역사물을 다룬 어떤 오페라 무대보다 더 장엄하고 더 환상적이며 더 실제적이었다.유적현장을 장식없이 그대로 무대로 사용한 착상에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그러나 주최측이 심혈을 기울인 「사막의 힘」은 구성과 춤동작에서 다소 산만한 느낌을 주었다.볼쇼이의 명품 「스팔타카스」처럼 춤동작이 좀 더 다양하게 일사불란하게 이루어졌다면 그 환상적인 무대는 좀 더 빛이 났을 것이다.대형 스피커를 통해 울려퍼진 아랍인의 합창­이것은 하트라에서 내가 가장 감동을 받았던 부분이다.정치적 의미를 배제하고 단순히 소리라는 측면에서 그것은 아름답고 장엄한 합창이었다.저녁 어스름에 뒤덮인 하트라의 평원을 찌렁찌렁 울려줬던 아랍 남성들의 저음은 충분히 매력적이었고 어떤 비원을 담고 있는 듯한 그 노래가락은 군중에게 충분한 호소력을 지니고 있었다.이 합창을 듣고 나는 하트라의 축제가 소기의 목적을 거두고 있음을 확인했다.왜냐하면 거기 모인 군중들­대부분이 차를 가졌거나 차에 편승이 가능한 중류층 이상이며 이들은 지배이데올로기 편에 서있을 가능성이 많지만­의 표정이 노래가 들리는 순간 하나같이 엄숙해졌기 때문이다.그들은 그 순간에 침략자를 상기하고 지도자를 중심으로 민족이 더욱 뭉쳐야 한다고 다짐한건 아닐까. 하트라 축제의 포스러를 보면 신바빌로니아 왕국의 네부 카드 네자르 2세(BC 605∼562년)와 나란히 사담 후세인의 얼굴이 나와있다.네부 카드 네자르 2세는 바빌론의 재건자이며 특히 예루살렘을 함락하고 유태인을 끌어다가 노예로 부린 장본인이다.이 포스터가 말하는 것은 후세인이 바로 그의 계승자란 사실이다.후세인은 아득한 역사의 한 페이지를 빌려 그의 통치이념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그는 역사의 복원을 외치며 국민에게도 역사와의 동거를 끊임없이 요구하고 있었다.
  • 르네상스호텔 총지배인 프라거 가족(훈훈한 우리가정:15·끝)

    ◎“오랜 외국생활서 가족 소중함 절감”/“일요일은 가정의 날” 오붓한 시간 함께/두딸과 자주 대화 나누며 유대감 심어 세계가 좁아지면서 세계 여러 곳을 옮겨다니며 생활하는 사람들이 많다.이국에서의 생활은 즐거움도 있지만 고충도 따른다.이들이 겪는 고충은 대체로 외로움과 건강,자녀의 올바른 교육및 성장문제등이다. 서울이 세계속으로 뻗어가며 서울도 이방인들이 제법 많이 사는 도시로 바뀌고 있다.「호텔맨」으로서 잠시 한국에서 생활하며 어려움을 가족간의 끈끈한 유대로 잘 이겨내고 있는 한 「외국가정」이 있다.서울 강남구 역삼동 라마다 르네상스호텔의 총지배인 로버트 프라거씨(39)가족. 이들은 지난해 3월부터 두번째 한국생활을 하고 있다.프라거씨는 지난 87년부터 89년까지 이 호텔 식음료 부총지배인으로 일했었다.이후 홍콩 르네상스호텔의 부총지배인으로 근무하다 이번에 총지배인으로 한국에 돌아왔다. 이 가정의 보금자리는 호텔방.아담하게 꾸며진 거실,스테파니(8)와 키에스텐(5)두딸의 침실,놀이공간겸 서재,주방,부부침실등 호텔방을 개조해 가정집으로 꾸민 총지배인 전용집이 생각과는 달리 특별해 보이지는 않는다. 부인 폴라 프라거씨(35)는 『한국이 불과 몇년사이에 몰라보게 발전했다.처음 남편이 한국에서 근무할 당시 둘째딸 키에스텐을 낳아 한국에 대한 남다른 애착을 갖고 있다』며 「친절한 나라」한국에서 생활하는것을 기뻐했다. 프라거씨는 작지만 다부진 몸매에 날카로운 눈,독일식의 딱딱한 영어에서 연상케하듯 군복만 입혀놓으면 영락없는 「독일병정」.「독일병정」답게 정열적이고 부지런하며 빈틈없는 일처리로 정평 나 있다. 프라거씨는 아침6시30분에 기상해 하루 4차례씩 호텔의 시설을 점검하는등 24시간 일속에 파묻혀 지낸다.사무실과 이웃한 곳이 집이지만 가족과의 식사는 거의 없다. 이 때문에 프라거부인은 아버지몫까지 맡아 자녀들에게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두 딸이 한남동 독일국제학교에서 하교하는 낮12시30분부터 숙제를 봐주고 사회체육강사의 경험을 살려 자녀의 발레와 기계체조등 다양한 스포츠도 함께한다.또 매주 금요일에는 아이들과용산시민공원에 피크닉간다. 그는 『친지나 이웃등 대화상대가 없어 외로움을 많이 타 자칫 아이들의 성격형성에 장애가 될 수도 있으므로 가족간 많은 대화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있다』고 강조했다. 일요일은 프라거씨가 정한 「가정의 날」.이날이면 자전거하이킹을 즐기거나 성당에서 지내는등 가족이 함께 움직인다. 프라거씨는 『오랜 외국생활에서 가족의 소중함을 새삼 느끼게 됐다』면서『비록 단 하루의 짧은 시간이지만 가족사진을 많이 찍는등 가족이 항상 곁에 있다는 것을 아이들에게 심어주기위해 각별히 노력하고 있다』며 가족의 유대감을 중시했다.
  • 「정 명훈」과 「명훈 정」(객석에서)

    서양사람들이 동양사람의 이름을 부르는데는 두가지 기준이 있는 것 같다.정치지도자 이를테면 「마오저퉁」「덩샤오핑」「김영삼」「노태우」등은 깍듯이 우리식 순서로 부른다. 그런데 음악가의 경우는 예외없이 「명훈 정」「요요 마」「세이지 오자와」다.왜 정치지도자는 「프레지던트 김영삼」이면서 음악가는 「마에스트로 명훈 정」일까. 「정명훈」이나 「명훈 정」이나 그게그거 일수도 있다.그러나 「명훈 정」이라는 호칭의 이면에는 서양사람들이 지금까지 자신들만의 전유물이었던 서양음악에 도전하고 있는 이방인들을 향해 쌓아놓은 높다란 장벽이 보이는 것만 같다. 우리는 정명훈을 물론 「정명훈」으로 부른다.서양음악으로 출세한 한국사람이라는 것이다.그런데 서양사람들은 정명훈이 몸만 한국에서 태어났을 뿐 그들이 서양식 전통으로 키워 능력을 인정받게 한 서양음악가라고 생각한다.그가 바스티유오페라의 음악감독이 된 것을 두고 어떤 사람은 『국립극장에 동양사람을 내세운 것을 보면 프랑스사람들은 역시 대범하다』며 엉뚱한 감탄을 하기도 한다.그러나 그들의 뇌리속에 정명훈은 「동양인」이라기 보다는 「서양음악가」다.「명훈 정」이지 「정명훈」은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같은 동양음악가에 대한 서양식 관점은 어느 틈엔가 걸러지지 않은채 우리의 의식 속에 자리잡아가고 있는 것 같다.우리 음악가들의 이름은 제대로 부르면서도 중국사람인 마요요(마우우)는 「요요마」·린쵸량(임소량)은 「쵸량 린」으로,일본사람인 오자와 세이지(소택정이)는 「세이지 오자와」로 굳어져 버린 것이다. 이미 우리 귀에 익어버린 「요요마」를 당장 「마요요」로 부르자는 것은 억지일수도 있다.그러나 언젠가는 그렇게 불러야 할 것으로 믿는다.우선 우리에게 새로이 소개되는 사람만이라도 제이름을 불러주어야겠다는 생각이다.오는 23일 세번째 내한연주회를 갖는 대만출신의 바이올리니스트 린쵸량의 경우도 「쵸량 린」으로 완전히 굳어지기 전에 「린쵸량」으로 고향을 찾아주는 것이 어떨까.
  • “미여우 코카인 요구 했었다”/「알몸연기 거부 소동」 내막

    ◎거절하자 잔금 챙기고 줄행랑/영화사측,손배소제기 LA행 최근 한국영화에 출연하기 위해 입국했다가 알몸촬영을 거부해 귀국한 것으로 알려진 미국 여배우 2명의 귀국사유는 이와는 달리 코카인을 요구하다 이를 거절당한데 따른 것으로 알려졌다. 비디오및 영화제작업체인 유호프로덕션은 17일 『지난 14일 AP통신이 이들이 알몸촬영을 거부하고 귀국했다고 보도했으나 리사 헤일런드라는 예명을 쓰고 있는 엘리자베스 헤구드(33)가 코카인을 요구해왔다』면서 『이를 거절하자 계약기간을 어기고 돌아간 것』이라고 밝혔다. 엘리자베스 헤구드와 사라 벨로모(20)라는 미국 여배우 2명은 「이방인」,「성애의 여행」이라는 두편의 성인 비디오용 성애물을 오는 6월부터 출시한다는 계획아래 지난 4월부터 외국 여배우 교섭에 나선 유호측과 열흘 일정으로 촬영하기로 합의하고 지난 7일 입국했다.이들은 8일 하오부터 10일까지 예정대로 촬영에 응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10일 하오 예정에 없던 잔금지불을 요구,유호측이 잔금까지 모두 지불하자 「대단히 고맙다」며 감사해하기도 했다.그런데 11일 갑자기 리사가 촬영장소인 청평에서 혼자 서울로 올라와 다른 곳에서 촬영을 마치고 서울 중구 풍전호텔에서 쉬고있던 사라와 함께 무작정 돌아가겠다고 선언했다는 것이다. 유호측은 『당시 리사는 코카인이라는 마약을 구해달라고 말했다』면서 『이를 거절하자 미국으로 간 것같다』고 설명했다. 유호측의 유병호사장(37)등 관계자들이 지난 11일 하오 3시쯤 서울 중부경찰서에서 이를 협의하기위해 주한미국대사관의 한 관계자를 만났는데 그는 유호측 설명은 무시하고 출연계약금을 받지않았다고 주장하는 여배우들의 입장만 되풀이,유씨에게 「사기꾼같다」,「묻는 말에만 대답하라」고 몰아세웠다는 것이다. 유사장과 직원 민굉석씨(27·해외영업부)는 17일 하오3시 대한항공편으로 두 여배우와 이 문제를 따지기 위해 로스앤젤레스로 출발했다.이들은 여배우들의 교섭을 담당한 에이전시및 여배우들을 상대로 피해배상소송을 국제변호사를 통해 제기할 방침이다.
  • 카뮈 유작 「최초의 남자」 햇빛

    ◎60년 교통사고 현장서 수습한 원고 딸이 34년만에 출판/알제리에서의 유년기 담은 자전소설/전재의 폐해·보조리에 대한 관념 토로 알베르 카뮈의 알려지지 않은 미완의 유고작이 발간돼 관심을 모으고 있다. 1960년 카뮈가 47세의 나이로 교통사고로 숨진지 34년만에 빛을 보게 된 작품은 「최초의 남자(LEPREMIER HOMME)」.교통사고 현장에서 수습한 1백44페이지의 핏자국 어린 원고를 딸 카트린 카뮈가 소중히 보관하고 있다가 이번에 3백35페이지의 책으로 펴 냈다. 이 작품이 주목되는 것은 카뮈의 문학세계를 더욱 깊이 이해하게 하는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자전소설 「최초의 남자」에서 카뮈는 처음으로 자신의 유년기에 대해 털어놓고 있다. 이 작품에서 그는 아버지,어머니,할머니,자신이 다니던 국민학교와 알제리의 고등학교,유년시절 쓰던 방등을 그대로 그리고 있다.믿을수 없을 정도로 생생하게 그려진 어린 시절의 이야기에서 당시 알제리의 부조리한 상황을 이해하게 된다. 카뮈는 1953년 세인트 브리유에서 이 소설을 구상했다.어머니 카트린셍테는 그해 어느날 40세이던 카뮈를 세인트 브리유에 있는 그의 아버지 무덤에 데려 간다.29세로 생을 마감한 그의 아버지의 묘비에 씌어진「1885∼1914」를 보는 순간 카뮈는 아버지의 일을 알고 싶어진다.카뮈는 제2장에서 이 소설을 쓰게된 배경을 이같이 밝히면서 『어머니는 더이상 아버지에 애착이 없는 듯 보였다』고 회고했다. 카뮈는 곧바로 부모가 생활했던 알제리로 가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더듬는다.1913년 젊은 부부가 작은 이륜마차에 가재도구 몇개만 줄로 엮어 매달고 알제리 사막의 한 마을에 도착하는 장면에서 소설은 시작된다.만삭인 젊은 부인이 도착 하자마자 낳은 아이가 바로 알베르 카뮈다. 아버지 루시앙 카뮈는 알베르 카뮈가 태어난뒤 얼마 되지 않아 전쟁터로 나간다.카뮈는 모로코 전선등에 투입된 아버지를 통해 전쟁의 공포에 대해 간접 경험을 하게 된다.비참하게 숨진 병사를 목격하고 악몽에 시달리던 아버지의 체험은 소설 「이방인」에서 나타난다. 그의 아버지는 마른 전투에서 숨졌다.너무 어렸던 카뮈는 아버지에 대해 단편적인 순간밖에 기억하지 못하는데다가 어머니는 언어장애로 거의 아무 말을 하지 못했다.카뮈는 이런 침묵의 상황을 작품속에서 매우 강하게 얘기하고 있다. 『젊은 어머니는 청춘의 병을 앓고 있었고 그것때문에 들리지도 않아 언어장애를 앓게 됐다.당시 할머니는 어머니가 장티푸스를 앓고 있다고 했다.잃어버린 시간들을 잘 간직하기 위해서는 더이상 기억해내려 하지 말아야 한다』 카뮈는 어머니가 알제리의 한 셋집에서 날이 어둑어둑 해 졌는데도 램프를 켜지 않은채 의자에 앉아있던 장면들을 기억하고 있다. 「최초의 남자」 문장마다에서 그는 어머니에 대해 독자를 강하게 감동시키고 있다.어머니가 살던집이 폭격을 받았을때의 상황에 대해 카뮈는 『맹목적인 테러도,어머니를 마구 두들겨 패는 것도 모두 싫다.정의도 좋아하지만 어머니도 좋아한다』고 묘사하면서 부당함과 부조리에 대한 관념을 밝히고 있다. 이 작품에서 카뮈는 앞에는 망망대해가 펼처져 있고 뒤에는 끝없는 산이 놓인 가운데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상황으로 과거를 회상하고 있다.
  • 70년 주사로 첫발… 사회복지통/첫 여성구청장 이현희씨

    ◎섬세함 살려 주민복지 높일터 『여성의 섬세한 면을 살려 주민과의 대화에 힘쓰는 한편 주민들이 피곤한 몸을 쉬고 삶을 재충전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도록 행정을 펴나가겠습니다』 일선행정의 최고책임자인 대구시 남구청장에 발령된 이현희대구시가정복지국장. 그는 자신의 발령소식에 조금은 얼떨떨해 하면서도 『하루빨리 비가 좀더 내려야 할 텐데… 걱정』이라며 여유를 보였다. 대구시에서 비교적 유복한 가정에서 1남5녀중 둘째딸로 태어난 이신임청장은 경북여고,고려대 법대 행정학과와 대학원을 나와 지난 70년 대구시청 행정주사(6급)로 공직에 첫발을 디뎠다. 그후 민원실장·부녀아동과장·부녀청소년과장을 거쳐 지난 88년부터 가정복지국장을 역임하는등 공직생활 대부분을 사회복지분야에서만 근무해왔다. 이신임청장은 행정의 기본은 주민복지라며 무엇보다 지역특성에 맞는 복지행정에 주력해나가겠다고 다짐했다. 때로는 남자직원들이 자신을 이방인 취급하고 간혹 업무제동까지 걸어올 땐 정말 그만두고 싶었으나 『어렵게 배운 지식을 사장시키는 것은 죄악』이라며 다독여주시던 부친의 뜻을 새기며 공직생활을 계속해왔다고 말했다. 이신임구청장은 지난 83년 대구어린이회관에 이어 여성회관과 가정복지회관을 건립하는등 지역사회복지수준을 한단계 높이는 데 남다른 보람을 느끼고 있다. 이구청장은 지난 68년 대아철강대표인 박정무씨(54)와 결혼,시어머니까지 모시면서도 공직생활을 차질없이 이끌어와 주위로부터 맹렬여성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구청장임명에 대한 소감을 묻자 『원리원칙을 존중하며 남구 주민 모두가 원하는 방향으로 구정을 이끌어나가겠다』며 밀린 업무를 추스렸다. ▲경북 영주출신(52) ▲대구시 민원실장 ▲보사부 부녀아동과 부녀계장 ▲대구시 부녀아동과장 ▲부녀청소년과장 ▲대구시 가정복지국장.
  • “골목길도 한눈에”… 「안내 문화」 발달(유세진 귀국리포트:6)

    ◎지도­거리표지판 세밀… 이방인도 쉽게 찾아 독일에서 생활하면서 느낀 편리한 것중 하나가 잘 발달한 안내문화다.처음 찾는 낯선 곳에서 느끼는 막연한 불안감이야 전혀 없을 수 없지만 곳곳에 있는 인포마치온(안내소)을 통해 지역정보에 대한 안내를 받을 수 있다. 관광지든 아니든 어느 공항이나 기차역에 내리면 누구나 인포마치온 표시(i)를 쉽게 찾을 수 있다.여기서 그 도시의 시내지도라든가 교통편,숙박시설 등에 대한 기본 정보를 얻을 수 있다.공항이나 기차역 뿐만 아니라 자동차로 어느 도시로 들어갈 때도 인포마치온이 어디에 있는지 알려주는 표지판이 거리마다 붙어 있다.이들 안내소는 낯선 곳을 찾은 이방인들이 느끼는 불안감을 상당 부분 해소시켜 준다. 독일은 흔히 자동차 천국이라고 불리는데 이는 자동차운행을 쉽게 하기 위한 갖가지 제도가 충분히 뒷받침되고 있기 때문이다.독일 전국토를 얼기설기 가로지르는 잘 닦여진 도로망은 기본으로 치더라도 자동차의 편리한 운행을 뒷받침해주는 단적인 예로 지도와 거리의 표지판을 들수 있다. 서울에서도 이제 거리에 이름을 붙이는 일이 늘고 있지만 아직도 주택가 등의 작은 길에는 이름이 없는 곳이 많다.그러나 독일의 모든 길은 자신의 이름을 갖고 있다.또 크든 작든 모든 거리마다 그 거리의 이름을 알려주는 표지판이 붙어 있다.따라서 처음 찾은 낯선 도시라 해도 그곳의 지도만 갖고 있으면 거리에 붙은 표지판을 보고 지도상에서 자신의 현위치를 파악하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독일의 지도는 매우 자세하다.항공촬영한 사진을 바탕으로 아주 작은 길까지 빠짐없이 지도에 나타나 있다.지도 뒤에 붙어 있는 「찾아보기」란에서 찾고자 하는 지명만 찾으면 자신의 현위치든 가고자 하는 목적지든 쉽게 확인할 수 있다.처음 찾는 낯선 곳이라 할지라도 지도를 보고 현위치에서 어디를 거쳐 목적지까지 이르는 길을 파악하는게 가능하다. 단순히 지명만을 찾는게 아니라 관공서라든가 병원,극장,스포츠 시설 등 공공건물의 위치도 주소와 함께 지도뒤에 붙어 있다.또 주요기관의 전화번호 등도 지도에 붙어 있고 웬만한 생활안내도 지도뒤의 부록을 보면 알 수 있다.그런 만큼 지도는 독일생활에 있어 필수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지도가 아무리 자세하다 하더라도 거리에 표지판이 붙어 있지 않다면 아무 소용없을 것이다.독일 모든 도시의 거리들에는 거리의 이름과 번지수가 적혀 있는 표지판이 붙어 있는데 이들 표지판이 자세하게 제작된 지도와 함께 길을 찾아가는 어려움을 해결해 주는 것이다. 우리의 경우 아직 지도가 보편화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주소만 갖고 낯선 곳을 찾아가는 일은 쉽지 않다.아직 이름을 갖지 못한 수많은 작은 길들까지 일일이 이름을 붙이고 또 작은 골목길까지 표지판을 만들어 붙이려면 무척 힘들 것이다.그렇다 해도 이제 우리도 이같은 일을 시작해야 할 것이다. 서울,부산과 같은 대도시는 물론 작은 시골 마을까지도 안내소가 생겨야 한다.그곳을 찾고 이용하는 사람이 얼마가 되든 우리 지방을 찾은 이방인들에게 우리 지방을 자세히 안내해주는 문화를 이제 우리도 생활화해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된다.
  • 무공해 동계올림픽/정태화 체육부기자(오늘의 눈)

    은빛의 설원이 광활하게 펼쳐져 있는 노르웨이.그 가운데서도 릴레함메르는 마치 동화에나 나옴직한 산속의 작은 도시이다. 이 북구의 조그마한 마을이 지금 겨울스포츠의 대제전인 동계올림픽을 치르느라고 온통 야단법석이다. 이곳저곳이 불야성을 이루고 세계 각국에서 몰려든 올림픽 패밀리와 관광객들로 북적거린다. 하지만 조금만 눈을 돌리면 「이 도시가 과연 올림픽을 개최하는 도시인가」 의문이 들 정도로 미지의 세계가 곳곳에 펼쳐져 있다. 쌓인 눈을 그대로 이고 있는 순백색의 순결한 침엽수들의 고고한 모습은 자연의 순리를 한눈에 느끼게 해준다. 매연가스를 매일 들이 마시며 찌들대로 찌든 가슴에 와닿는 때묻지 않은 신선한 공기는 생전 처음 겪어보는 섭씨 영하 20도를 오르 내리는 혹한조차 오히려 따사롭게 느껴졌다. 철새를 보호하기 위해 경기장까지 옮겨간 하마르 바이킹홀,환경파괴를 막기 위해 동굴속에 지은 이외비크 아이스링크등 이번 올림픽을 「그린올림픽」「무공해올림픽」으로 이름 짓지 않더라도 릴레함메르를 처음 찾아온 이방인에게는 이 세상 어디에 이처럼 자연을 아름답게 보존한데가 있는가를 생각케 하며 옷깃을 여미게 한다. 세계인들의 가장 큰 축제가운데 하나인 올림픽을 치르면서도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지켜 나갈수 있는 힘은 과연 어디에서 온 것일까. 노르웨이인들이 젖줄로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는 미외사호수에서 아무것도 모른채 멱을 감던 외국인때문에 한동안 식수원으로 사용조차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마치 전설처럼 남아있다. 바로 이러한 철저한 자연보호 정신이 면면히 이어져 아직까지 천혜의 관광자원을 그대로 이어 올수 있게 한 원동력이 된 것이 아닐까. 선수들의 거센 숨소리와 코치들의 함성이 한데 어울리는 경기장이나 수천명 혹은 수만명이 운집하는 관중석이나 이들이 떠나고 난 자리에는 고요한 정적만이 감돌뿐 쓰레기더미는 보이지 않는다. 머리를 식히기 위해 무심코 빼든 담배를 입에 물다가도 한번 주위를 살펴보게 되고 길가에 떨어진 한조각의 휴지도 먼저 본 사람이 반드시 줍는 작은 마음씨가 한데 어울려 올림픽의 신기원을 이룩한 무공해 올림픽,환경올림픽의 주역들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한때 바이킹을 타고 이웃을 기웃거리는 천덕꾸러기에서 이제는 지구보호에 앞장서는 세계 제일의 환경국가가 된 노르웨이의 힘은 바로 너와 내가 함께 자연을 지키고 가꾼 덕분이라는 생각을 떨칠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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