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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푸른 눈의 예수들…빛고을엔 ‘희생의 꽃’이 핀다, 형형색색 고물들…양림동 펭귄마을엔 보물이 산다

    푸른 눈의 예수들…빛고을엔 ‘희생의 꽃’이 핀다, 형형색색 고물들…양림동 펭귄마을엔 보물이 산다

    20세기 초, 광주 양림동에 푸른 눈의 선교사들이 발을 디뎠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지구 반대편으로 훌쩍 떠날 수 있는 오늘날과 달리 당시만 해도 낯선 이국땅을 밟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겠지요. 태어나 자란 고향을 뒤로하고 남의 나라에 오는 것, 말도 안 통하는 땅에서 배곯고 병든 이들과 함께하는 것, 머나먼 타지에서 눈을 감는 것,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어주는 것, 매 순간순간이 크나큰 결심이고 용기이자 헌신이 아니었을까요. 미국과 캐나다 출신 선교사들은 양림동 언덕배기 땅을 사들여 집을 짓고 교회와 병원을 세웠습니다. 3·1운동을 하는 신자들을 돕고, 한센병 환자의 손을 잡았으며, 남루한 이들을 보살폈습니다. 오늘날 그들이 지은 건물은 번듯한 근대 문화재가 되고, 이방인 선교사들의 행적은 아름다운 역사가 됐습니다. 양림동역사문화마을의 조붓한 골목길에는 100여 년 전 양림동에 살았던 이들의 삶이 고여 있습니다.1904년 12월 25일 광주 양림동에 있는 유진 벨 선교사 사택에서 성탄절을 기념하는 예배가 열렸다. 전라남도 지역에 울려 퍼진 첫 기도문, 첫 찬송가였다. 1900년대 초 양림동에 온 미국 남장로회 소속 선교사 유진 벨과 클레멘트 C 오웬은 성탄절 예배를 시작으로 작은 동네에 터를 잡고 기독교를 전파한다. 생소한 종교를 믿는 이방인들이 읍성 내에 자리잡기는 어려웠다. 가까스로 자리를 잡은 곳이 양림동, 병들어 죽은 이들의 시신을 내다 버리는 풍장터가 있는 곳이었다. 그러지 않아도 가진 게 없던 시절, 마을에는 병들고 배곯는 이들이 지천이었다. 이국의 선교사들은 복음을 가르치기에 앞서 복음을 실천한다. 자신의 개인 재산을 털고 본국의 후원금을 그러모아 양림산 자락 땅을 사들인 뒤 학교와 병원, 교회를 지은 것이다. 양림동역사문화마을을 둘러보는 4.5㎞의 골목길은 양림동에 머무른 작은 예수들의 행적을 뒤따르는 길이다.●좁은 골목 사이로 오웬기념각과 광주 최초의 양림교회 양림동역사문화마을에 깃든 기독교 역사를 음미하려면 양림오거리 아래 오웬기념각을 출발점으로 삼는 게 좋다. 바로 옆에 광주 최초의 교회인 양림교회가 있으며, 수피아여학교, 우일선선교사사택, 호남신학대 선교사 묘원 순으로 동선이 잘 연결된다. 이 골목 저 골목을 바지런히 누벼도 1시간 30분이면 충분하다. 걷다 보면 만나는 서양식 건축물은 선교사 이름이 붙은 것들이 대부분이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다. ‘네덜란드 식으로 회벽돌을 쌓았다’, ‘원형 창과 첨두아치 형상의 창문을 조화롭게 배치했다’는 안내문 설명을 읽기에 앞서 이곳에 얽힌 선교사들의 삶을 아는 것이 먼저라는 것. 그렇지 않으면 양림동은 그저 오래된 동네요, 사택은 고색창연한 서양식 건물에 지나지 않는다. 양림동에 거주한 선교사들은 어떤 이들이었을까. 한국인만큼 한국을 사랑했던 이들은 한국 이름으로 살았다. 유진 벨은 ‘배유지’, 로버트 M 윌슨은 ‘우일선’, 클레멘트 C 오웬은 ‘오원’ 또는 ‘오기원’, 엘리자베스 셰핑은 ‘서서평’으로 불렸다. 1895년 한국에 온 배유지 선교사는 수피아여학교를 세웠다. 여자여서 배움이 어렵던 시절, 여학생들은 근대식 학교에서 교육의 권리를 보장받았고, 민족의 앞날을 고민해 행동으로 옮겼다. 광주 지역 3·1운동 만세시위를 주도해 1000여 명의 군중을 이끌었고, 교복을 찢어 태극기를 만들었고, 신사 참배를 거부했다. 우일선 선교사는 제중원 원장으로 의료 선교에 앞장섰다. 워싱턴대학교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은 촉망받는 의료인은 광주한센병원, 여수 애양원을 여는 등 한센병 환자를 향한 사랑이 극진했다. 서서평 선교사는 1934년 풍토병과 영양실조로 죽으며 자신의 시신을 해부하는 데 쓰라는 유언을 남겼다. 하나같이 가장 보잘것없는 이에게 해준 것이 곧 나에게 해준 것이라는 예수의 말을 몸소 실천하는 삶이었다. ●배유지 선교사 만든 수피아여학교, 아치형 창문·회벽의 조화 의료 봉사를 하던 오원 선교사는 급성폐렴으로 세상을 뜬다. 한국에 온 지 5년 만이었다. 오원과 그의 할아버지, 윌리엄 오웬을 기념해 세운 건물이 오웬기념각이다. 요즘 용어를 빌리자면 복합문화공간이랄까. 예배는 물론, 수많은 강연, 음악회, 무용과 연극 공연이 열린 공간이다. 수피아여학교에 들어서자마자 마주하는 예배당은 광주 구 수피아여학교 커티스 메모리얼 홀, 선교사들이 주일마다 예배를 드리던 곳이다. 학교를 세운 배유지 선교사를 기리는 뜻에서 ‘배유지 기념 예배당’이라고도 한다. 아치형 창문과 회벽이 어우러져 고아한 아름다움이 풍긴다. 건축물 기행의 하이라이트는 호랑가시나무를 지나면 나타나는 2층 건물, 윌슨 선교사 사택이다. 우일선 선교사가 살던 집이자 광주에서 가장 오래된 서양식 건물로 소개되는 곳이다. 미국 영화에서 볼 법한 ‘잘생긴’ 주택은 회색 벽돌을 네덜란드 식으로 쌓아 올리고 내부는 회반죽을 칠했다. 외관만큼 집에 서린 사연도 아름답다. 이곳은 우일선 선교사의 사택이자 광주 최초로 고아원 사역을 시작한 장소다. 마당 한편에는 은단풍 나무가 있다. 우일선 선교사가 고향에서 종자를 가져와 심은 것이란다. 은단풍은 자신과 고향을 이어주는 끈이자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주는 벗이었으리라. 누군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열거하지 않더라도 어떤 죽음은 그 자체로 많은 것을 말해 준다. 윌슨 선교사 사택에서 걸어서 10분 거리, 호남신학대 언덕에 아담한 묘원이 있다. 배유지와 오원 선교사를 포함해 양림동과 호남을 기점으로 활동한 22명의 외국인 선교사들이 잠들어 있는 묘원이다. 본명과 한국 이름이 나란히 새겨진 비석 앞에는 방금이라도 누가 다녀간 듯 싱그러운 꽃다발이 있다.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들의 삶을 기억하는 이들이 건넨 안부 인사다. 선교사들은 눈을 감은 후에도 고국이 아닌 양림동에 묻혔다. 그들이 사랑해 마지않은 까만 눈의 사람들,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이들을 한껏 안아줄 수 있는 양림동 언덕배기에.출발점이었던 오웬기념각 근처에 마을의 또 다른 명소, 펭귄마을이 있다. 양림 커뮤니티센터 뒤편의 골목길은 예상을 뛰어넘는다. 옛날 주택이 다닥다닥 붙은 골목길은 색색의 폐품으로 가득하다. 목록 한번 다양하다. 멈춰버린 시계, 고물 자전거, 이 빠진 그릇, 녹슨 실로폰, 줄 나간 바이올린…. 신제품이 쏟아져 나오는 세상에서 구닥다리 취급을 받는 것들, 효용이 중요한 세상에서 제 기능을 다한 것들이 여기서는 귀한 취급을 받는다. 사람들 카메라에 쉴 새 없이 담기는 예술 작품, 정크아트가 된 것이다. 펭귄마을의 시작은 화재가 나 방치돼 있던 빈집에서 가져온 고물이었다. 김동균 촌장을 주축으로 마을 주민들은 맥주 병뚜껑으로 물고기 몸통을, 깨진 장독대 뚜껑으로 펭귄 팔을 만들어가며 길거리 미술관을 만들었다. 알록달록한 고물은 쓸모없다 여긴 것을 다시 한번 들여다보라고 속삭인다. ‘유행 따라 살지 말고 형편 따라 살자’처럼 노년의 지혜가 담긴 글귀, 라면땅부터 뽀빠이까지 불량식품 가게에서의 소소한 군것질도 놓치기 아까운 즐거움이다. 버드나무가 울창해 ‘버들 양’(楊)에 ‘수풀 림’(林), ‘양림’(楊林)이란 이름이 붙은 양림동은 젊은이들에겐 놀 거리 많은 핫플레이스다. 엿가락처럼 늘어진 골목에 세련된 레스토랑과 한옥 카페가 들어섰다. 양림동은 변화에 유연한 동네다. 풍장터에서 기독교 문화를 꽃피운 마을은 어르신의 손때 묻은 작품과 젊은이의 재잘대는 목소리가 공존한다. 양림동의 앞날이 기대되는 이유다.●예향의 도시 축소판…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예향의 고장, 아시아문화 중심도시, 광주. 이 도시의 예술적인 면면이 궁금하다면 양림동역사문화마을 맞은편 국립아시아문화전당(ACC)으로 향하면 된다. 2015년에 문을 연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은 아시아 문화예술 전반을 아카이빙하고 전시하는 복합문화공간이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 최후 항전지인 옛 전남도청 자리에 들어서 역사적 의미도 깊다. 부지는 민주평화교류원, 어린이문화원, 문화정보원, 문화창조원, 예술극장 총 5개 시설로 나뉜다. 재밌는 점은 건축의 특이성이다. 구 전남도청 본관, 별관, 경찰청 본관을 활용한 민주평화교류원을 제외하면 모두 지하에 들어서 있어 거대한 지하세계 같다. 그렇다고 어두침침하거나 습한 기운은 없다. 건물 지붕에 설치된 70여 개 채광정 덕이다. 채광정은 낮에는 햇볕을 지하 깊숙이까지 받아들이고 밤에는 은은한 불빛을 뿜어낸다. 총면적 16만 1000㎡. 우리나라 문화 공간 중 가장 큰 규모이다 보니 여행자는 입구에 들어선 순간 어디를 둘러봐야 할지 당황하기 십상이다. 시간이 여의치 않은 여행자에게 넓은 부지는 때로 부담이므로. 광주에 흐르는 예술의 향기를 맡고 싶되 1시간 남짓밖에 시간이 없다면 문화정보원 라이브러리파크로 향하자. 전시 규모가 아담해 가벼운 마음으로 휘이 둘러볼 수 있다. 도서관, 박물관, 갤러리, 극장을 하나로 묶은 라이브러리파크는 무료 전시를 자주 연다. 문화창조원은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공간이자 기획 전시가 열리는 공간이다. 6개 복합관에는 아시아를 주제로 국내외 이름난 아티스트들의 작품이 올라간다. 문화생활을 한 뒤 가을볕에 몸을 바짝 말리고 싶다면 문화창조원 뒤편 하늘마당이 제격이다. 잔디밭에 돗자리를 깔고 삼삼오오 피크닉을 즐기는 모습은 전시만큼 인상적이다.●무등산 품에 안고 달리는 모노레일 무등산은 광주 시민들에게 집 앞 공원 같은 산, 지산유원지 모노레일은 어릴 적 추억을 되살리는 이름이다. 지산유원지 앞마당으로 소풍을 갔다, 리프트를 타고 무등산을 올랐다, 엄마 손 꼭 붙잡고 모노레일을 탔다…. 지산유원지 모노레일에 얽힌 추억은 1980~90년대 이곳을 찾은 어린이의 수만큼 각양각색일 것이다. 1980년부터 2005년까지 선로를 달리던 모노레일은 운영업체 부도 등으로 운행이 중단됐다가 11년 만인 2016년부터 운행을 재개했다. 모노레일을 타러 가는 방법은 두 가지다. 무등산 등산로를 따라 산길을 오르는 방법과 745m 길이의 리프트를 타는 방법. 빨갛고 노란 철제 리프트는 1990년대 광주로 되돌아가는 타임머신이다. 타임머신은 시속 5㎞로 느릿느릿 움직인다. 리프트가 두 발을 대신하고 시간은 넉넉하니 가족, 연인, 친구는 번다한 일상에서 못다 한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모노레일은 탑승역인 빛고을역과 종착점인 팔각정 아래를 25분 동안 왕복한다. 끼이익, 모노레일에서 이따금 섬뜩한 소리가 난다. 선로가 하나라 약간의 덜컹거림도 피할 수 없다. “아빠, 여기서 떨어져도 죽진 않겠죠?” “이거 누가 타자 그랬어! 무섭잖아!” 롤러코스터처럼 위아래를 오르내리는 스릴은 없지만 옛날 놀이기구를 타는 듯한 짜릿함에 여기저기서 즐거움 섞인 볼멘소리가 터져 나온다. 모노레일 밑으로 나무들의 초록색 정수리가 빼곡하다. 종착점인 팔각정은 무등산 향로봉 기슭에 자리해 광주 도심이 한눈에 담긴다. 드넓은 광주가 아담해지는 순간, 빛고을의 따사로운 볕이 내리쬐는 순간, 마음이 쉰다. 글 이수린(여행작가) 사진 장명확(사진작가) ■여행수첩(지역번호 062) →가는 길 서울에서 승용차로 갈 경우 경부고속도로 오산IC를 타고 논산천안고속도로 천안분기점을 지나 호남고속도로를 이용한다. 서광주IC에서 서광주 쪽으로 들어선 뒤 중외공원 입구에서 ‘무등산, 시청’ 방면으로 좌회전한다. 양동시장에서 ‘남광주교차로, 양동시장’ 방면으로 들어서 천변좌로를 따라 2㎞가량 이동하면 양림동역사문화마을이다. →맛집 충장로에 있는 1960백선청원모밀(268-1960)은 60년 가까운 역사를 자랑하는 메밀 집이다. 역사만큼 음식 맛이 깊어 2011 미슐랭 그린가이드 한국 편에 이름을 올렸다. 가다랑어포와 다시마로 국물을 내는 여타 메밀 집과 다르게 멸칫국물로 육수를 내 시원하다. 영미오리탕(527-0248)은 ‘백종원의 3대천왕’에 나온 뒤 사람들로 더욱 북적인다. 들깻물에 미나리와 오리를 넣고 걸쭉하게 끓인 들깨오리탕이 유명하다. 푸짐한 남도 밥상이 당긴다면 금다연(374-1000)이 어떨까. 친환경 식재료를 써서 호박죽, 전, 회까지 한 상 가득 거하게 차려낸다. →잘 곳 양림동역사문화마을 주변에 게스트하우스가 여럿 있다. 호남신학대 부근의 호랑가시나무언덕 게스트하우스(682-0976)는 옛 선교사의 사택을 리모델링했다. 고즈넉한 적벽돌 집의 2층 테라스에서는 바비큐 파티를 즐길 수 있다. 지산유원지 내에 자리한 호텔무등파크(226-0011)는 골프연습장, 온천사우나, 볼링장 등 부대시설이 다양하다.
  • [사설] 난민 혐오는 안 될 말이다

    지난 주말 서울 도심은 난민 찬반 집회로 떠들썩했다. 종로대로를 사이에 두고 이쪽에서는 “난민 혐오를 멈추자” 하고, 저쪽에서는 “난민 때문에 국민 불안이 심각하다”고 맞섰다. 이날 맞불 집회는 난민 수용 문제에 첨예하게 대립하는 우리 사회의 현주소를 보여 줬다는 점에서 우려가 깊다. 지난 14일 법무부는 제주 체류 예멘인 난민 신청자 중 23명에게 1년 동안의 인도적 체류를 허가했다. 예멘 난민 신청자 484명 가운데 임신부, 미성년자, 영유아 동반 가족 등을 우선 보호하기로 한 조치다. 이들에게는 제주 이외의 다른 지역으로도 갈 수 있도록 ‘출도 제한’ 조치도 풀어 줬다. 이런 정부 방침이 나오자 난민 수용 찬성과 반대를 주장하는 단체들이 동시에 주말 집회를 열었던 것이다. 주권 국가의 국민은 어떤 의지든 표현할 권리가 있다. 건강한 사회를 염려한다는 점에서 어느 쪽의 주장도 전적으로 틀렸다고 볼 수 없다. 특히 내전으로 국가 기능이 없어진 예멘 난민들은 이전의 행적을 파악하기 어렵기 때문에 국민 사이에 ‘이슬람 공포증’이 생기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극단적인 이방인 혐오로 국내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을 무조건 배척하려는 시각은 온당하지 않다. 더더구나 난민을 잠재적 범죄인으로 보는 편견은 문명국가의 구성원에게 걸맞은 덕목이 아니다. 난민 신청을 받은 1994년 이후 지금까지 난민을 인정한 비율은 2%도 채 되지 않는다. 심사 기준이 까다롭다는 것은 일각에서 걱정하는 테러리스트 등을 걸러내는 기준이 그만큼 촘촘하다는 의미다. 무조건적인 두려움 탓에 생기는 난민 혐오를 걷어내고 넓은 아량으로 포용할 줄 아는 국민 역량을 보여 줄 때가 바로 지금이다. 난민 관련 부서의 인력 확충 등 제도적 보완을 늦추지 않는 것은 정부의 몫이다.
  • 무너진 계파 투표, 차기 일본 총리 결정에 변수됐다

    무너진 계파 투표, 차기 일본 총리 결정에 변수됐다

    “무너지는 계파 투표가 차기 일본의 총리 결정에 변수됐다” 다음달 20일 실시되는 일본 집권 자민당의 총재 선거를 둘러싸고 일본 정계에 전례없던 새로운 움직임들이 생겨나고 있다. 이번의 변화는 같은 정치 파벌, 계파의 경우 일사분란하게 특정인, 한 사람에게 표를 몰아주던 ‘계파 투표’의 전통이 이례적으로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집권당 총재가 총리를 겸하기 때문에, 총재 선거는 곧 총리 선거가 된다. 최근 NHK, 아사히신문 등에 따르면 변화는 일본 정계의 제3대 파벌인 다케시다 파에서 생겨났다. 당초 일본 정계의 1~3대 주요 파벌 모두가 현 총리인 아베 신조에게 몰표를 주겠다고 한 상황에서 다케시다 파 내부에서 반발이 일어났다. 다케시다 파는 내홍을 겪다가 결국 다케시타 와타루(71) 회장이 자율 투표를 결정했다. 최근 나가노에서 열린 다케시다 파벌 회동에서 다케시타 와타루 회장은 ”가능하면 (한 사람에게 파벌 소속원 전원이 몰표를 몰아주는) 단일화하겠다는 생각을 강하게 갖고 왔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면서 파벌 지지 후보자 단일화를 포기하고 사실상, 각자 알아서 투표하라는 ‘자주 투표’를 선언했다. 당 총무회장을 맡고 있는 그 자신은 이례적으로 아베의 라이벌인 이시바 시게루 전 간사장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타케시다 파는 다케시다의 형, 다케시다 노보루 전 총리가 창당했다. ‘경세회’가 전신이다. 과거는 당내 최대 계파로 전성시대를 누렸고, 타케시다 노부로를 비롯해 하시모토 류타로, 오부치 게이조 등의 3명의 총리를 배출하는 등 절대적 존재감을 과시하며 명문 정파이다. 그러나 근년들어서는 유력한 총재 후보를 내지 못한 채 일본 정계의 3번째 파벌로 떨어진 상태이다. 타케시다파 의원수는 55명에 그치지만 이것이 의미하는 함의는 결코 적지 않다. 이 같은 결정은 “국민들의 민의를 대변하겠다”는 메시지를 발신하고 있다는 점에서 무게가 실린다. 의원내각제인 일본의 경우, 국민들의 호불호 및 입장에 관계없이, 국회의원들이 ‘자신들만의 리그’에서 정하는 인물이 당 총재가 되고, 총리가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일본 정치에서 국민들의 뜻과 국회의원들의 선호에 괴리가 생기고, 국민들의 의사가 반영되지 못하는 총재 선거, 총리 선출이 종종 있다. 아베 신조 총리가 지난해부터 불거진 학원 스캔들로 벼랑끝에 몰렸던 상황에서도 기사회생하고, 다음달 총재선거에서 압승을 거두는 분위기로 일본 정계의 흐름이 진행되고 있는 것도 이 같은 의원들의 리그에서 선거가 이뤄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케시다파의 결정은 일단 일반 국민들의 관심도 끌었고, 당원 선거에도 영향을 줄 것으로 보인다. “국민들의 뜻도 반영하는 총재, 총리를 뽑아라”는 메시지가 확산되고 있는 셈이다. 자민당 총재선거는 중의원, 참의원 등 양원 국회의원 405명에 한 표씩을 주고, 100만명의 당원 득표수를 비례 배분해 역시 405표를 할당해 놓고 있다. 아베 총리가 현직 국회의원들에게는 상대적으로 압도적인 우세를 보이고 있지만, 일반적인 국민 여론이 아베의 장기집권, 연임을 지지만 하고 있는 것은 절대 아니다. 현 자민당 집권파에게는 이방인격인 이시바 시게루 전 간사장과의 대결이 될 이번 선거에서 아베 총리는 자민당 내 7개 파벌 가운데 이시바 전 간사장이 이끌고 있는 이시바파 등을 제외한 5개 파벌의 지지를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요미우리신문은 지난 6일 자민당 소속 의원의 70% 이상이 아베 총리를 지지한다는 조사 결과도 내놓았다. 그러나 이런 와중에서 “총재 선거를 또 국민들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너희들(국회의원들 및 정파들) 이해관계로만 결정하려고 하느냐”는 외침들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그 여파로 다케시다파의 자율 투표 결정이 나왔다. 진원지 가운데 하나는 ‘참의원의 대부’로 불리며 정계 은퇴 뒤에도 다케시다 파벌에 영향력을 가진 원로인 아오키 미키오 전 자민당 참의원 의원회장(84)이 있다. 다케시타 노보루 전 총리의 비서도 역임해 다케시타 파벌과 긴밀한 관계인 그가 이렇게 아베 지지를 피하고 이시바 전 간사장 측에 선 것은 왜 일까. 아오키 전 회장의 생각을 잘 알고 대변해 온 한 다케시다파 국회의원은 “일반 국민들, 일반 유권자 가운데 ‘아베는 이제는 아니다’ 라는 감정이 강하다”라고 강조했다. 그는 “내년 여름 참의원 선거를 생각하면 아베 총리 대신 이외의 선택을 보이지 않으면 자민당 전체가 가라앉는다. 이시바 전 간사장를 지지하는 것도 아베에 대한 대안을 보여주는 것이다. 현재로서는 그것밖에 (선택이) 없다”라고 말했다. 침묵하고, 정부와 리더들의 결정을 순응하고 잘 따르는 일본 국민들의 상당수는 아베 총리에게는 피로감을 느끼고 있다. 아베의 총재 당선 여부와 관계없이 다른 목소리들도 반영해야 된다는 반성이 깔려있다. 겉으로 보는 (아베 총리가 압도적인 승리를 거둘 것이라는) 수의 대결과 그와 또 다른 내부의 흐름(다른 목소리도 반영하고, 국민의 생각도 고려해야 한다)은 일본 정치의 변화를 상징한다. 이 같은 움직임 속에 시모무라 하쿠분 전 문부대신 등 아베 총리를 지지하는 도쿄도 출신 국회 의원들이 24일 모임을 열고 다음달 초에 집회를 열기로 하는 등 일반 당원 표 획득에 전력을 다하겠다고 다짐한 것도 이 같은 흐름을 의식해서이다. 이들은 ‘불손한’ 움직임에 대응하고, 일반 당원 표를 단도리해야 한다고 부산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자민당은 차기 총재 선거를 다음달 7일 고시한 뒤 20일 투표 및 개표를 한다. 이석우 선임기자 jun88@seoul.co.kr
  • 박원 ‘미스터 션샤인’ OST 참여, 13일 발매 ‘어떤 곡?’

    박원 ‘미스터 션샤인’ OST 참여, 13일 발매 ‘어떤 곡?’

    싱어송라이터 박원이 tvN ‘미스터 션샤인’ OST에 참여한다. tvN 주말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측은 드라마의 여덟 번째 OST인 박원의 ‘이방인’ 음원과 뮤직비디오가 오는 13일 낮 12시, 국내 음원 사이트를 통해 공개된다고 전했다. 박원의 곡 ‘이방인’은 비참한 현실에 마주친 사랑은 과분한 꿈 같다는 내용을 담은 곡으로, 큰 고통이지만 오히려 달게 받겠다는 역설적인 사랑에 대한 노래이다. ‘연일 그대를 그리지만 또 바라만 보다 걸음을 멈추오’, ‘맴도는 그리움이 주는 괴로움마저 달게 받으리’, ‘후회로 가득한 내 삶에 그댄 덧없이 사라질 나를 감싸오’와 같은 가사로 애절함 마음을 담아내었다. 또한, 담담한 어쿠스틱 피아노와 콘트라베이스 연주로 시작되는 편곡은 곡의 긴장감을 유지하면서도 잔잔한 사랑의 고통을 적나라하게 표현했다. 여기에 섬세한 감성으로 마음을 울리는 박원의 보컬이 더해져 애틋함을 한층 배가시켰다. 특히, 제목 ‘이방인’은 조선에서 태어났으나 미국인의 신분으로 조선에 돌아온, 조선인에게 낯선 유진 초이(이병헌 분)를 의미하기도 하며, 한편으로는 자신의 신분을 지우고 낭인이 된 구동매(유연석 분), 일본으로 건너가 유학을 하고 돌아온 김희성(변요한 분)을 포함, 각자의 방법으로 격변하던 시대를 지나는 세 남자 모두를 아우를 수 있는 제목이다. 박원은 섬세한 감성의 보컬과 마음에 와 닿는 솔직한 가사가 매력적인 싱어송라이터로, ‘all of my life’, ‘노력’, ‘나를 좋아하지 않는 그대에게’ 등의 곡으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특히, ‘all of my life’는 실시간 음원 차트 1위에 등극하는 등 음원 강자로도 자리매김했다. 한편, tvN 주말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은 신미양요(1871년) 때 군함에 승선해 미국에 떨어진 한 소년이 미국 군인 신분으로 자신을 버린 조국인 조선으로 돌아와 주둔하며 벌어지는 일을 그린 드라마이다. 매주 토, 일 오후 9시 방송. 연예팀 seoulen@seoul.co.kr
  • 선예, 폴라리스 엔터테인먼트와 전속계약..활동 계획은?

    선예, 폴라리스 엔터테인먼트와 전속계약..활동 계획은?

    걸그룹 원더걸스 출신 선예(본명 민선예)가 폴라리스 엔터테인먼트와 전속 계약을 체결했다. 10일 폴라리스 엔터테인먼트는 “전속 계약과 관련해 선예와 오랜 시간 얘기를 나눴고, 뜻깊고 좋은 일을 함께 하자는데 의견을 같이 했다”고 밝혔다. 이어 “선예의 연예계 활동 복귀에 대한 문의가 많으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현재 정확한 활동 계획에 대해서는 세워지지 않았다”면서 “5년간 두 아이의 엄마로써 화목한 가정을 꾸려온 아내로써 살아온 선예가 향후 열어갈 인생 3막에 대해 따뜻한 시선으로 응원해 주시길 부탁드린다”고 당부했다. 선예는 지난 2013년 1월 캐나다 교포 출신 선교사인 제임스 박과 결혼한 뒤 올해 JTBC ‘이방인’이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행복한 가정 생활을 공개한 바 있다. 폴라리스 엔터테인먼트는 마지막으로 “어려운 결정을 해준 선예에게 고마운 마음이다. 힘들 때나 어려울 때 힘이 되어줄 가족같은 마음으로 함께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사진=인스타그램 임효진 기자 3a5a7a6a@seoul.co.kr
  • [책꽂이]

    [책꽂이]

    번역의 정석(이정서 지음, 새움 펴냄) 2014년 알베르 카뮈의 소설 ‘이방인’의 오역을 지적하는 새로운 번역서를 내놨던 저자가 번역에 대한 기존의 인식이 어떻게 잘못됐는지 자신의 번역론을 정리했다. 남의 것을 베끼다시피 한 번역서가 역자의 이름과 출판사의 마케팅에 힘입어 최고 베스트셀러가 되는 등의 현실을 꼬집는다. 352쪽. 1만 5000원.몸은 사회를 기록한다(시민건강연구소 지음, 낮은산 펴냄) 우리의 건강이 ‘개인의 문제’라기보다는 동네·학교·일터에서의 불평등, 차별과 부패, 제도, 기술, 정치 등 사회구조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파헤친다. 집값 상승이 세입자 건강에 미치는 영향, 이주 아동의 의료 접근성, 자연재해로 인한 피해 등 우리 몸에 새겨진 불평등의 흔적을 좇는다. 260쪽. 1만 4000원.유전자는 우리를 어디까지 결정할 수 있나(스티븐 하이네 지음, 이가영 옮김, 시그마북스 펴냄) 브리티시컬럼비아대학교 문화심리학 교수인 저자가 지능, 성격 등 인간 조건에 대한 유전적 해석을 사회문화적 관점에서 분석했다. 키, 우울증, 범죄자 등을 결정하는 유전자가 따로 있다고 여기는 본질주의 편향에 대해 파헤친다. 408쪽. 1만 8000원.주문을 틀리는 요리점(오구니 시로 지음, 김윤희 옮김, 웅진지식하우스 펴냄) 일본 NHK 방송국 PD 출신의 저자가 예정된 메뉴가 아닌 엉뚱한 음식을 대접받은 경험을 계기로 기획한 프로젝트 ‘주문을 틀리는 요리점’을 진행하면서 일어난 에피소드를 담았다. 치매나 인지 장애를 앓고 있으면서도 홀 서빙 스태프로 일한 노인들의 실수를 너그럽게 이해한 손님들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232쪽. 1만 4000원.우리 집에 용이 나타났어요(엠마 야렛 글·그림, 이순영 옮김, 북극곰 펴냄) 어느 날 아이 ‘두레군’의 집에 귀여운 용 한 마리가 나타난 가운데 레군이가 소방관, 세계동물복지협회 이사, 단짝 친구 등 다섯 명의 전문가에게 용과 집에서 살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주고받은 편지의 내용을 실은 그림책. 책 중간중간 봉투에 담긴 편지를 직접 꺼내 읽어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32쪽. 1만 5000원.프로이트의 농담이론과 시조의 허튼소리(이영태 지음, 채륜 펴냄) 성(性)을 소재로 하거나 음담패설에 해당하는 조선후기 사설시조 노랫말을 철학자 프로이트의 이론과 미학을 바탕으로 새롭게 해석한다. 고약한 질병, 파계승, 불구 동물, 해충 등 사설시조의 소재에 따라 나눠 설명한다. 228쪽. 1만 3000원.
  • 폴라리스 측 “선예와 전속 계약, 긍정적으로 논의 중”

    폴라리스 측 “선예와 전속 계약, 긍정적으로 논의 중”

    걸그룹 원더걸스 출신 선예가 폴라리스 엔터테인먼트와 계약을 논의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7일 한 매체는 선예가 폴라리스 엔터테인먼트와 손을 잡고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다고 보도했다. 이에 대해 폴라리스 엔터테인먼트 측은 “선예와 전속계약을 긍정적으로 논의 중이다. 하지만 아직 확정된 부분은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한편, 선예는 2007년 그룹 원더걸스로 데뷔한 이후 2013년 캐나다 교포이자 선교사인 제임스 박과 결혼해 그룹을 탈퇴했다. 현재 두 아이의 엄마인 선예는 최근 JTBC ‘이방인’에 출연해 일상 생활을 공개한 바 있다. 사진=인스타그램 연예팀 seoulen@seoul.co.kr
  • [2030 세대] 마이너, 검열하는 삶/한승혜 주부

    [2030 세대] 마이너, 검열하는 삶/한승혜 주부

    프랑스로 아이를 데리고 휴가를 갔다. 혼자도 긴장되는 외국 여행에 아이를 동반하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떠나기 전부터 대비했는데 개중 인상 깊었던 차이가 식당문화였다. 프랑스에서는 우리나라와 다르게 입구에서부터 직원의 안내를 기다려야 하고, 주문이나 계산 시에도 직원을 큰 소리로 불러서는 안 되며, 눈을 마주친 뒤 테이블 앞으로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그걸 지키지 않아 싫은 소리를 듣거나 불편한 상황에 처했다는 글을 많이 읽었기에 늘 조심했다. 그러다 보니 식사 한 번 하는 것이 매번 큰일이었다. 한번은 한참 동안 기다려도 직원의 대응이 없었다. 지쳐서 칭얼대는 아이를 안고 조바심이 났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러다 갑자기 한 무리의 미국인이 들어와 아무렇지 않게 직원에게 말을 걸고, 직원도 자연스럽게 응대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우리도 한참 전부터 와 있었다고 뒤늦게 이야기하니 그제서야 자리를 안내했다. 프랑스의 식당문화라고 알고 있었던 것이 처음부터 잘못된 정보였을지도 모른다. 식당에 따라 다를 수도 있다. 문화란 지역에 따라 다르며, 시간에 따라 조금씩 바뀌기도 하고, 무엇보다 이 세상에 절대적인 것은 없으니까. 그러나 나는 ‘무례하고 무지한 아시아인’으로 보일까 두려웠던 것이다. 이럴 때는 서양인들이 참 부럽다. 의식하지 않고 마음껏 행동할 수 있다는 것이. 설사 에티켓이나 매너에 어긋난 행동을 하더라도 단순한 문화 차이로 용인될 수 있다는 것이. 부정적인 피드백이나 반응 앞에서도 쓸데없는 피해의식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 잘못해도 이상한 ‘개인’으로 남을 뿐 집단 전체로 묶이지 않으리라는 것이. 하루는 파리 라빌레트 과학관에 갔는데 근처의 아주머니가 놀고 있는 아이와 지켜보던 나를 향해 번갈아 손가락질을 하며 화를 냈다. 프랑스어는 모른다고 하니 프랑스에 왔으면 프랑스어를 해야 한다고도 말했다. 어안이 벙벙했다. 대체 아주머니가 분노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설마하니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시비를 건 것은 아니겠지. 온갖 생각이 맴돌았다. 겉으로는 당당한 양 앉아 있었지만, 마음 한켠은 불안과 불쾌함으로 위축되었다. 돌아오는 길에 아이의 사소한 장난을 두고도 평소보다 호되게 혼을 냈다. 아이는 잘못이 없었는데.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곳에서 우리는 개인이 아닌 이방인이자, 동양인임을. 아이를 데리고 다니는 삶이 한국이라고 편했던 것은 아니다. 아이가 다른 사람 앞에서 조금 떠들기만 해도, 장난을 치기만 해도, 잠시 떼를 쓰기만 해도, 마음이 철렁 내려앉았다. ‘무개념 부모’나 ‘맘충’이 될까 봐 늘 신경을 곤두세웠다. 무언가 잘못했을까 봐 항상 스스로를 검열하며 지냈다. ‘나’의 실수가 아니라 ‘애엄마들’의 실수가 되니까. ‘나’의 잘못이 아닌 ‘여성’의 잘못이 되니까. 소수자들은 혹독한 검열을 거치며 살게 된다. 검열은 소수자일수록 더욱 심해지기 마련이므로.
  • ‘맘충’을 피하려고 검열하는 소수자의 삶이란!

    ‘맘충’을 피하려고 검열하는 소수자의 삶이란!

    프랑스로 아이를 데리고 휴가를 다녀왔다. 혼자라도 긴장이 되는 외국행에 아이까지 동반하려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기에 떠나기 전부터 이것저것 공부하면서 대비했다. 여러 가지 차이가 있지만, 개중 인상 깊었던 것은 프랑스의 식당문화였다. 프랑스에서는 우리나라와 다르게 입구에서부터 직원의 안내를 기다려야 하고, 주문이나 계산 시에도 서버를 소리내어 불러서는 안되며, 눈을 마주친 뒤 테이블 앞으로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그걸 지키지 않아 싫은 소리를 듣거나 불편한 상황에 처했다는 글을 많이 읽었기에 늘 조심하려고 했다. 기분 나쁜 일은 되도록 안 만드는 편이 좋으니까. 그렇게 기다리는 과정이 많다보니 식사 한 번 하는 것이 매번 큰일이었다. 한 번은 식당 앞에 서있는데 한참 동안 직원의 대응이 없었다. 날이 뜨거웠고, 지쳐서 칭얼대는 아이를 안고 조바심이 났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러다 갑자기 한 무리의 미국인이 들어오더니 아무렇지 않게 직원에게 말을 걸었는데, 직원 역시 자연스럽게 응대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뒤늦게 우리도 한참 전부터 와 있었다고 이야기하니 그제서야 자리를 안내해주었다. 어쩌면 프랑스의 식당문화라고 알고 있었던 것이 잘못된 정보였을지도 모른다. 무조건 먼저 말을 걸어서는 안되는 것이 아니며 식당에 따라 손님 쪽에서 왔다고 알려줘야 하는 곳이 있는지도 모른다. 문화란 한 국가 내에서도 지역에 따라 다르며, 시간에 따라 조금씩 바뀌기도 하고, 무엇보다 이 세상에 절대적인 것은 없으니까. 땡볕에 기다리느라 지쳐서 식사를 마치지도 못하고 잠든 아이를 바라보며 스스로 바보같이 느껴졌다. 무작정 대기하지만 말고 그 사람들처럼 진작 물어볼 걸. 그러나 그렇게 하지 못했던 것은 혹여라도 ‘무례하고 무지한 아시아인’으로 보일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이럴 때는 서양인들이 참 부럽다. 무언가를 의식하지 않고 마음껏 행동할 수 있다는 것이. 설사 에티켓이나 매너에 어긋난 행동을 하더라도 단순한 문화 차이로 용인될 수 있다는 것이. 그로 인한 부정적인 피드백이나 반응 앞에서도 쓸데없는 피해의식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 누군가 잘못된 행동을 했을 때에도 그저 이상한 ‘개인’으로 남을 뿐 집단 전체로 묶이지 않으리라는 것이. 하루는 파리 라빌레트 과학관에 갔는데 근처에 있던 아주머니가 놀고있는 아이와 지켜보던 나를 향해 번갈아 손가락질을 하며 화를 냈다. 프랑스어는 모른다고 하니 프랑스에 왔으면 프랑스어를 해야한다고 말했다. 어안이 벙벙했다. 아이는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서 놀았고 다른 아이와 스친 일 자체가 없었다. 즉 놀이감이나 놀이 순서 등으로 다툴 일이 없었다는 이야기다. 대체 아주머니가 분노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내가 모르는 별도의 규칙이라도 있는 것인가. 설마하니 요즘 세상에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시비를 건 것은 아니겠지. 온갖 생각이 맴돌았다. 잘못한 것이 없으니 겉으로는 당당한 양 앉아 있었지만, 마음 한켠은 불안과 불쾌함이 뒤섞인 감정으로 위축되어 버렸다. 돌아오는 길에 아이의 사소한 장난을 두고도 평소보다 호되게 혼을 냈다. 사실 아이는 잘못이 없었고 정말로 그 아주머니가 이상한 사람이었던 것인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곳에서의 우리는 그냥 개인이 아닌 이방인이자, 동양인인 것이다. 사실 아이를 데리고 다니는 삶이 한국에서라고 편했던 것은 아니다. 아이가 다른 사람 앞에서 조금이라도 떠들기만 해도, 장난을 치기만 해도, 잠시 떼를 쓰기만해도, 마음이 철렁 내려앉았다. ’무개념 부모‘나 ’맘충‘이 될까봐 늘 신경을 곤두세웠다. 무언가 하나라도 잘못했을까봐 항상 스스로를 검열하며 지냈다. ’나‘의 실수가 아니라 ’애엄마들‘의 실수가 되니까. ’나‘의 잘못이 아닌 ’여성‘이라는 집단의 잘못이 되니까. 아마 어떤 사람들은 그저 여성에 애엄마일 뿐인 나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더욱 혹독한 검열을 거치며 살고 있을 것이다. 검열이라는 것은 소수자일수록 더욱 심해지므로. <글: 한승혜 주부>
  • ‘맘충’을 피하려고 검열하는 인생

    프랑스로 아이를 데리고 휴가를 다녀왔다. 혼자라도 긴장이 되는 외국행에 아이까지 동반하려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기에 떠나기 전부터 이것저것 공부하면서 대비했다. 여러 가지 차이가 있지만, 개중 인상 깊었던 것은 프랑스의 식당문화였다. 프랑스에서는 우리나라와 다르게 입구에서부터 직원의 안내를 기다려야 하고, 주문이나 계산 시에도 서버를 소리내어 불러서는 안되며, 눈을 마주친 뒤 테이블 앞으로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그걸 지키지 않아 싫은 소리를 듣거나 불편한 상황에 처했다는 글을 많이 읽었기에 늘 조심하려고 했다. 기분 나쁜 일은 되도록 안 만드는 편이 좋으니까. 그렇게 기다리는 과정이 많다보니 식사 한 번 하는 것이 매번 큰일이었다. 한 번은 식당 앞에 서있는데 한참 동안 직원의 대응이 없었다. 날이 뜨거웠고, 지쳐서 칭얼대는 아이를 안고 조바심이 났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러다 갑자기 한 무리의 미국인이 들어오더니 아무렇지 않게 직원에게 말을 걸었는데, 직원 역시 자연스럽게 응대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뒤늦게 우리도 한참 전부터 와 있었다고 이야기하니 그제서야 자리를 안내해주었다. 어쩌면 프랑스의 식당문화라고 알고 있었던 것이 잘못된 정보였을지도 모른다. 무조건 먼저 말을 걸어서는 안되는 것이 아니며 식당에 따라 손님 쪽에서 왔다고 알려줘야 하는 곳이 있는지도 모른다. 문화란 한 국가 내에서도 지역에 따라 다르며, 시간에 따라 조금씩 바뀌기도 하고, 무엇보다 이 세상에 절대적인 것은 없으니까. 땡볕에 기다리느라 지쳐서 식사를 마치지도 못하고 잠든 아이를 바라보며 스스로 바보같이 느껴졌다. 무작정 대기하지만 말고 그 사람들처럼 진작 물어볼 걸. 그러나 그렇게 하지 못했던 것은 혹여라도 ‘무례하고 무지한 아시아인’으로 보일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이럴 때는 서양인들이 참 부럽다. 무언가를 의식하지 않고 마음껏 행동할 수 있다는 것이. 설사 에티켓이나 매너에 어긋난 행동을 하더라도 단순한 문화 차이로 용인될 수 있다는 것이. 그로 인한 부정적인 피드백이나 반응 앞에서도 쓸데없는 피해의식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 누군가 잘못된 행동을 했을 때에도 그저 이상한 ‘개인’으로 남을 뿐 집단 전체로 묶이지 않으리라는 것이. 하루는 파리 라빌레트 과학관에 갔는데 근처에 있던 아주머니가 놀고있는 아이와 지켜보던 나를 향해 번갈아 손가락질을 하며 화를 냈다. 프랑스어는 모른다고 하니 프랑스에 왔으면 프랑스어를 해야한다고 말했다. 어안이 벙벙했다. 아이는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서 놀았고 다른 아이와 스친 일 자체가 없었다. 즉 놀이감이나 놀이 순서 등으로 다툴 일이 없었다는 이야기다. 대체 아주머니가 분노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내가 모르는 별도의 규칙이라도 있는 것인가. 설마하니 요즘 세상에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시비를 건 것은 아니겠지. 온갖 생각이 맴돌았다. 잘못한 것이 없으니 겉으로는 당당한 양 앉아 있었지만, 마음 한켠은 불안과 불쾌함이 뒤섞인 감정으로 위축되어 버렸다. 돌아오는 길에 아이의 사소한 장난을 두고도 평소보다 호되게 혼을 냈다. 사실 아이는 잘못이 없었고 정말로 그 아주머니가 이상한 사람이었던 것인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곳에서의 우리는 그냥 개인이 아닌 이방인이자, 동양인인 것이다. 사실 아이를 데리고 다니는 삶이 한국에서라고 편했던 것은 아니다. 아이가 다른 사람 앞에서 조금이라도 떠들기만 해도, 장난을 치기만 해도, 잠시 떼를 쓰기만해도, 마음이 철렁 내려앉았다. ’무개념 부모‘나 ’맘충‘이 될까봐 늘 신경을 곤두세웠다. 무언가 하나라도 잘못했을까봐 항상 스스로를 검열하며 지냈다. ’나‘의 실수가 아니라 ’애엄마들‘의 실수가 되니까. ’나‘의 잘못이 아닌 ’여성‘이라는 집단의 잘못이 되니까. 아마 어떤 사람들은 그저 여성에 애엄마일 뿐인 나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더욱 혹독한 검열을 거치며 살고 있을 것이다. 검열이라는 것은 소수 자성을 띌수록 더욱 심해지므로.<글:한승혜 주부>
  • 45세 이방인, 월드컵 우승 마법 부릴까

    45세 이방인, 월드컵 우승 마법 부릴까

    스페인 출신… 4강 감독 중 최연소 역대 외국감독 성적 준우승이 최고 4강팀 중 3개국이 모두 자국 감독1930년 우루과이에서 첫 대회가 열린 국제축구연맹(FIFA) 월드컵 축구대회에서는 4년 전 브라질 대회까지 모두 자국인 감독을 앉힌 나라들이 우승했다. 단 한 번의 예외가 없다 보니 ‘월드컵의 전통’이 되다시피 했는데 벨기에가 이 전통을 깰 수 있을까. 월드컵 우승을 경험한 감독은 19명이다. 1934년과 1938년 대회 2연패를 일군 비토리오 포조(이탈리아)가 유일하게 혼자서 두 번이나 경험했다. 11일 4강전을 시작하는 러시아월드컵에서도 확률적으로는 자국인 감독이 우승할 가능성이 더 크다. 4강에 오른 나라 가운데 프랑스와 잉글랜드, 크로아티아가 자국인 감독이 지휘하고 벨기에만 유일하게 외국인 감독이다. 네 나라 사령탑 가운데 가장 젊은 로베르토 마르티네스(45) 벨기에 감독은 스페인 사람이다. 마르티네스 감독은 2007년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스완지시티 지휘봉을 처음 잡았고 이후 2009년 위건, 2013년 에버턴 감독을 역임했다. 2016년 8월 마크 빌모츠의 후임으로 벨기에 대표팀을 맡아 최근 23경기 연속 무패 행진(18승5무)을 잇고 있다. 그는 특히 수석코치로 티에리 앙리(프랑스)를 영입해 다국적 코칭스태프를 꾸렸으며 2009년 영국 여성 베스 톰프슨과 결혼하는 등 코스모폴리탄 기질을 갖고 있다. 독일어, 프랑스어, 네덜란드어, 로만쉬어(라틴어에서 파생된 언어) 등 다양한 언어로 갈라져 있어 선수들이 라커룸이나 기자회견 등에서 영어로 의사 소통하는 벨기에 대표팀의 특성에 딱 들어맞는 감독인 셈이다. 그는 또 대학에서 물리치료를 전공했고, 경영학 석사과정을 밟는 등 공부하는 지도자로도 잘 알려져 있다. 지금까지 월드컵에서 외국인 감독이 거둔 최고의 성적은 준우승이다. 1958년 스웨덴월드컵에서 개최국 대표팀을 이끈 잉글랜드 출신의 조지 레이너 감독, 1978년 아르헨티나 대회에서 네덜란드 대표팀을 지휘한 에른스트 하펠(오스트리아) 감독인데 마르티네스가 그들을 뛰어넘을지 주목된다. 최병규 전문기자 cbk91065@seoul.co.kr
  • [고전의 향연-옛 선비들의 블로그] 천재적 필력에도… 당나라·신라서 모두 소외당한 ‘한문학의 시조’

    [고전의 향연-옛 선비들의 블로그] 천재적 필력에도… 당나라·신라서 모두 소외당한 ‘한문학의 시조’

    “오직 세상의 사람들만이 모두 너를 죽여 시체를 늘어놓으려고 생각한 것이 아니요, 땅속의 귀신들까지도 이미 암암리에 너를 처단할 논의를 마쳤느니라.”(不唯天下之人, 皆思顯戮 ; 抑亦地中之鬼, 已議陰誅)이 살벌한 표현은 최치원(崔致遠·857∼?)의 문명(文名)을 천하에 떨치게 한 ‘격황소서’(檄黃巢書)의 한 구절이다. 흔히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으로 불린다. 그 논조가 얼마나 준엄했는지 황소는 격문을 읽다 이 구절에 이르자 간담이 서늘해져서 저도 모르게 침상에서 떨어졌다는 전설이 전한다. 이 글이 실린 출전이 바로 최치원의 문집인 ‘계원필경집’(桂苑筆耕集)이다. 중국 당나라 말에 황소라는 장수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최치원은 토벌대장인 고변의 휘하에서 비서 역할을 하는 종사관이었다. 계원필경은 이 기간에 최치원이 지은 수많은 글을 엄선해 편찬한 문집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문집 계원필경은 우리나라 천여 년 문학사에서 현재 전하는 것으로는 가장 오래된 문집이다. 그런 까닭에 최치원은 흔히 한문학의 비조로 불린다. 이에 대해 홍만종은 “최치원은 문체를 크게 구비하여 우리나라 문학의 시조가 되었다”라고 했다. 신위는 “공이 높은 시조로서 처음으로 개창하였다”라고 말했다. 계원필경의 서문을 쓴 홍석주나 서유구 등도 비슷한 평을 남기고 있다. 그러나 최치원의 문학에 대한 평가가 찬양 일변도인 것은 아니다. 이규보는 “최치원은 미개지를 개척한 큰 공이 있으니 우리나라 사람들이 모두 그를 종주로 여긴다”라고 칭찬했다. 그는 격황소서에 대해서도 “귀신을 울리고 바람을 놀라게 하는 솜씨”라고 극찬하면서도 “그러나 그의 시가 대단히 높지는 않으니 아마도 그가 중국에 들어간 때가 만당 이후에 해당하기 때문이 아닐까”라고 했다. 성현도 “지금 그가 지은 것을 보자면 비록 시구에 능하기는 해도 뜻이 정밀하지 못하며, 비록 사륙문에 재주가 있으나 말이 정제되지 못하였다”고 지적했다. 이 밖에 서거정, 허균 등도 부정적인 견해를 보인 바 있다. 계원필경 산문은 대부분 ‘사륙변려문’(四六騈儷文) 위주로 돼 있다. 최치원이 모시던 상사인 고변의 ‘변’(騈)과 그가 쓴 글이 사륙 ‘변’(騈)려문으로 같은 한자를 쓰는 일은 한마디로 ‘기이한 인연’이다. 사륙변려문은 글자 수를 4·6자, 4·6자로 배열하거나 아니면 4·4자, 6·6자 등으로 배열하는 등 대구를 철저하게 지키는 정형성이 특징이다. 변려문은 전체를 대구로 구성하는 데다 특히 어려운 고사를 많이 사용해 글이 매우 까다로운 특징이 있다. 그만큼 번역하기가 어려우며 각주도 일반 산문보다 훨씬 많이 필요하다. 그래서 서거정 같은 대학자도 계원필경에 대해 “이해되지 못하는 곳이 많다”면서 “괴상하고 궁벽하여 족히 천하를 움직이기에 충분하지 않다”라고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는 오히려 그만큼 최치원의 학문 수준이 높았음을 방증한다.최치원이 일부 부정적인 평가를 받은 이면에는 당을 시대로 구분했을 때 가장 낮게 평가되는 만당(晩唐) 때에 해당한다는 사실과 후대에 진실성이 모자랐다고 비판받는 변려문에 치우쳤다는 점이 어느 정도 작용했다. 그러나 후대에도 변려문은 옥책문, 전문, 반교문 등 궁중 의례문에 꾸준히 사용됐다. 또 매우 중요한 실용문인 상량문도 반드시 변려문으로 지어져 그 역할이 지속됐다. 관점에 따라 평가를 달리하기는 하지만, 이규보와 성현의 견해를 잘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듯 그에 관한 평가가 반드시 객관적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계원필경은 최치원의 학문적 역량이나 당시의 시대상 등을 알려 주는 더없이 귀중한 문헌이다.#영원한 이방인, 전설을 넘어 신화가 되다 최치원은 12세에 당나라에 유학 가서 7년 만인 18세의 나이에 유학생을 상대로 한 과거인 빈공과에 합격하고 관직 생활에 들어섰다. 20세의 젊은 나이에 선주의 율수현위가 되어 하급 지방관을 지냈는데, 이때 지은 작품을 모아 ‘중산복궤집’(中山覆集)이라는 문집을 엮었다. 몇 년 뒤 23세 때 황소의 난이 일어나자 고변의 종사관이 돼 약 4년간 군영에서 수많은 문서를 도맡아 저술하였다. 특히 24세 때 서두에 소개한 ‘격황소서’로 온 세상에 이름을 떨쳤다. 28세에 귀국을 결심하고 당나라를 떠나 이듬해 3월 신라로 돌아왔는데, 그의 유학 과정을 단적으로 표현한 말이 유명하다. “무협의 겹겹 봉우리 나이에 베옷으로 중국에 들어갔다가, 은하계 여러 별자리의 나이에 비단옷으로 동국에 돌아오다.”(巫峽重峯之歲, 絲入中原; 銀河列宿之年, 錦還東國) 무협의 봉우리 12개는 유학 갈 때 나이를 나타내며, 하늘의 대표적인 별자리 28개는 중국을 떠날 때 나이를 나타내는 식으로 활용한 것이다. 비단옷으로 돌아왔다는 것은 출세하여 금의환향했다는 의미이지만, 신라에서의 삶은 기대에 충족되는 것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큰 포부를 펴보려고 의욕을 가졌으나 골품제 한계로 좌절을 겪었다. 몰락해 가는 신라 말 정세 탓에 자신의 역량을 발휘할 여건도 마땅치 않았다. 10여년 동안 중앙과 지방의 관직을 전전하다가 40여세 장년의 나이에 관직을 버리고 사방을 소요했다. 경주의 남산, 영주의 빙산, 합천 청량사와 해인사, 지리산 쌍계사, 합포의 월영대 등에 그의 발자취가 남아 있다.마침내 은거를 결심하고 해인사에 들어가 머물렀는데, 그 이후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마지막 삶에 대해 여러 가지 이야기가 전해진다. 특히 가야산의 신선이 되었다는 설화가 널리 퍼져 마침내 신화가 되었다. 유학 생활한 당나라에서나 고국인 신라에서나 세상에서 소외된 이방인으로서 그의 내면 정서를 잘 드러내 주는 시는 가장 널리 알려진 ‘추야우중‘(秋夜雨中)이다. 秋風唯苦吟 갈바람 속 고심하며 시만 읊나니 世路少知音 이 세상에 진정한 벗 거의 없어라 窓外三更雨 창 밖에는 한밤중에 비 내리는데 燈前萬里心 등불 앞엔 만 리 먼 곳 그리는 마음 이 시에서 ‘만리심’(萬里心)을 신라에서 당나라를 향하는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지만, 그렇게 한정할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오히려 이역만리 당나라에 있을 때 고국을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분명한 근거가 없을 때에는 상식을 따르는 것이 순리이기 때문이다. 김영봉 한국고전번역원 번역위원 ●계원필경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문집… 中 회남시에서 지은 글 모음 최치원의 문집으로, 우리나라에 현전하는 가장 오래된 문집이라는 역사적 의의가 있다. 모두 20권 4책으로 편찬됐는데, 1∼16권은 회남 절도사인 고변의 막부에서 종사관으로서 고변을 대신해 지은 글이다. 따라서 글의 주인공은 최치원이 아니고 고변으로 돼 있다. 17권 이후가 자신에 대한 글이다. 대부분 산문이고 시는 17권에 30수, 20권에 27제(題) 30수가 실려 있다. 국역본 해제를 비롯해 여러 곳에서 그동안 책 이름 중 ‘계원’의 뜻을 ‘문장가들이 모인 곳’이라거나 ‘한림원’ 등으로 잘못 풀이하고 있기에 이 기회에 분명하게 바로잡는다. 계원은 사전적으로는 몇 가지 뜻이 있으나 계원필경의 ‘계원’은 최치원이 글을 지을 때 머물렀던 회남의 별칭이다. 즉 계원필경집은 ‘계원(회남)에서 문필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지은 글 모음’이라는 뜻이다. 지금도 중국 회남시에는 ‘계원촌’(桂苑村)이라는 지명으로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이는 또 다른 저술인 중산복궤집의 작명 원리와 똑같다. 여기에서도 ‘중산’은 글을 지은 곳의 지명을 가리킨다. 최치원의 다른 시문집으로 ‘고운선생문집’(孤雲先生文集·고운집)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동문선(東文選) 등 여러 문헌에 산재한 작품을 수집해 1926년에 간행한 것이어서 문헌적 가치는 높지 않다.
  • [러시아의 외침-우뜨라 라시야] 신태용호 여정서 느끼는 러시아제국의 저력·숨결

    [러시아의 외침-우뜨라 라시야] 신태용호 여정서 느끼는 러시아제국의 저력·숨결

    축구대표팀이 스웨덴에 분패한 현장은 과거 러시아제국의 ‘주머니’로 불렸던 니즈니노브고로드였다. 13세기에 박람회가 열릴 정도로 일찍이 우랄과 페르시아를 잇는 활발한 교역의 중심지였다. 볼가강과 오카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있던 옛 경기장을 폭파하고 새로 스타디움을 지으며 이웃 주에서까지 근로자들을 징발해 값싼 임금으로 착취했다고 말들이 많았다. 옛사람들이 교역의 터전을 방어하기 위해 쌓았던 크렘린(성채) 위에 동상 하나가 두 강이 유유히 합류하는 것을 고즈넉이 굽어보고 있다. 대문호 막심 고리키다. 숱한 저작들로 러시아의 양심을 깨운 그가 강의 역사, 교역의 역사와 현재, 미래를 주시하고 있다. ●대하소설 ‘고요한 돈강’의 무대 상트페테르부르크 베이스캠프로 돌아온 대표팀은 23일 멕시코와의 조별리그 2차전이 열리는 로스토프나도누로 21일 다시 떠난다. 1980년대 많은 이들의 눈을 밝혔던 대하소설 ‘고요한 돈강’의 무대다. 신태용호의 발걸음이 몽골의 유럽 침공 루트였으며 중국의 종이 제조술이 전해진 경로였던 고리키의 고향에서 미하일 숄로호프의 고향을 거쳐 27일 독일전이 열리는 타타르족의 터전인 카잔까지 이어지는 것은 우연치곤 흥미롭다. 러시아제국의 저력과 숨결, 웅혼함이 느껴지는 여정이다. 지난 12일 대표팀이 러시아에 입성한 뒤 여정을 함께 하고 있다. 러시아인들은 기자를 매번 놀라게 했다. 보행자가 길을 건너면 자동차가 먼저 멈춰 선다. 운전자들은 거의 경적을 울리지 않는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는 버스에 오른 이방인에게 서로 길 안내를 하겠다며 승객들과 차장이 입씨름을 했다. 니즈니노브고로드의 기자단의 숙소에 도착한 것은 지난 16일 밤 10시 30분이었다. 지친 몸으로 샤워를 하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여성 콘시어지가 커피와 호박케이크, 초콜릿 등을 담은 쟁반을 내밀며 미소 지었다. 19일 이른 새벽 공항으로 떠나는 일행에게 호박케이크, 샌드위치, 과일 등이 담긴 봉지를 건넸다. 그 도시의 어느 레스토랑 매니저는 생각이 안 나는 영어 단어를 떠올리느라 연신 몸을 흔들어 대면서 우리 일행과 의사소통을 하려고 진땀을 흘렸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나 크렘린, KGB, 체첸이나 크림반도 진압과 같은 근육질 이미지의 정부, 체제와 길거리에서 만난 장삼이사 러시아인들은 많이 달랐다. 근엄한 얼굴로 안 된다고 하면서도 어떻게든 다른 방법을 슬쩍 알려 주는 친절을 경험한 기자들도 적지 않았다. ●월드컵이 러 이미지 바꾸고 있어 당연한 얘기지만 일주일여 러시아의 서부를 조금 돌아보고 장님 코끼리 만지듯 그릇된 결론을 내릴 수는 없는 일이다. 지금도 러시아 어디에선가 밖으로 드러나지 않은 곳에서 폭압적이고 인권을 유린하는 행위가 벌어질지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 하나, 러시아월드컵이 다른 어느 곳보다 러시아를 변화시키고 있을 것이란 막연한 기대와 희망이다. bsnim@seoul.co.kr
  • [남상훈의 글로벌 리더십 읽기] 중국에 발령 나면 배우자가 두 번 운다

    [남상훈의 글로벌 리더십 읽기] 중국에 발령 나면 배우자가 두 번 운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만날 때, 헤어질 때. 떠날 때, 돌아올 때. 신록이 싱그러운 6월은 귀환의 계절. 방학 혹은 졸업으로 학생들이 집으로 돌아간다. 유학생들은 자신들의 나라로 돌아간다. 객지 생활 내내 그리워했던 고국으로 돌아가는 길. 그 길은 어떤 길일까.중국 유학생 베로니카. 캐나다에 있는 동안 중국을 그리워하다가 몇 년 전 중국을 찾았을 때 충격을 받는다. 현금 결제 문화. 캐나다에 있을 때는 카드 결제. 현금 없이 다니는 것이 습관이 됐는데 그 습관 때문에 낭패를 본다. 최근 방문 시 다시 한번 충격을 받는다. 그사이에 현금 대신 알리페이나 위챗페이로 바뀐다. 현지 핸드폰이 없으면 불편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중국에 있는 동안 캐나다가 그립다. 나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 유학 온 지 5년 만에 한국에 돌아가는 기회. 이국 생활에 지칠 때마다 한국만 가면 모든 것이 다 좋기만 할 것이라 상상한다. 그런데 막상 가서 지내는 동안 이방인 된 듯한 느낌이랄까, 뭐라고 딱히 설명하기 힘든 묘한 느낌이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더니 다시 미국에 돌아와 비행기에서 내릴 때 마치 고향에 돌아온 것 같은 편안한 느낌이 든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느낌에 스스로 놀라고 의아했었다. 우리나라 한 대기업의 해외 파견자들 사이에 회자하는 흥미로운 이야기. ‘중국으로 발령 나면 배우자가 두 번 운다’고. 설명은 이렇다. 중국으로 발령을 받고 집에 돌아가 소식을 전하면 배우자가 ‘왜 하필이면 중국이냐’며 가기 싫다고 울고, 가서 몇 년 살다 한국으로 돌아오라고 하면 오히려 그때는 ‘돌아가기 싫다’며 운다는 것이다. 떠나는 길도 돌아오는 길도 모두 만만치 않은 글로벌 여정의 복잡함, 그리고 오묘함. ‘집 떠나면 고생’이라는 말처럼 객지의 삶은 힘들다. 물 바뀐 물고기, 옮겨 심은 나무, 외국 생활하는 사람. 다 비슷하다. 처음에는 시들시들하다가 조금씩 나아진다. 존재하는 생명체들의 원동력이 적응력이지만, 우리의 적응력은 무한하지 않다. 오히려 상당히 제한적이다. 이문화 환경에 들어가면 제한된 적응력 때문에 고생을 한다. 극복을 못 하는 사람들은 중간에 포기하고 돌아온다. 그런데 익숙한 환경인 고국으로 돌아오는 길이 스트레스? 얼핏 이해가 어렵지만 드물지 않은 현상이다. 일컬어 ‘역문화 충격’(reverse culture shock). 흥미로운 것은 역문화 충격이 문화 충격보다 더 힘들다는 점. 왜 그럴까? 예상치 못했던 충격이라 그렇다. 외국에 갈 때는 힘든 걸 예상하지만 고국에 돌아올 때는 자신도 고국도 그사이 바뀐 것을 모르고 익숙환 환경으로 돌아간다는 생각에 편안함을 예상했다가 어려움을 당하니 당황하게 된다. 회사가 귀환자들의 역문화 충격을 극복하도록 도와주지 않고 오히려 가중시키기도 한다. 한 대형 은행에서 글로벌 선진 금융 기법을 배워 오라고 해 뉴욕으로 파견을 나간 K. 일년 동안 열심히 배운 뒤 한국에 돌아오니 그사이에 잊혀진 존재가 돼 있다. 국제 업무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지방의 한 부서로 발령을 받고 크게 실망한다. 이러한 어려움을 알고 귀환 발령을 받으면 아예 현지에서 사표를 내고 그곳에 눌러앉는 사례도 많다. 이런 현상은 글로벌 시대에 개인을 넘어서 회사, 크게는 국가적 손실이라 아니할 수 없다. 모든 것을 돈의 관점에서만 볼 일은 아니다. 리암은 아프리카 잠비아에서 봉사활동을 하다가 캐나다로 돌아온다. 수도 시설이 없어 우물 하나 파는 데 드는 비용이 400만원. 가난한 주민들은 꿈도 못 꾼다. 리암은 강물을 끌어다가 식수 및 생활용수로 사용하는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그 와중에 말라리아에도 걸린다. 그리고 캐나다로 돌아오니 안 보이던 것이 보인다. 물을 펑펑 허비하는 사람들. 충격을 받는다. 자신에 대한 충격. 리암은 바뀐다. 물통에 물을 받아 샤워를 한다. 시인 프루스트는 말한다. 진정한 여정의 목적은 새로운 경치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을 갖는 것이라고. 글로벌 여정의 궁극적 목적도 내 나라 및 나 자신을 새롭게 볼 수 있는 눈을 얻는 일이다. 역문화 충격이란 그 눈이 내 안에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겪는 탄생의 고통이다.
  • [노주석의 서울살이] 표석이 불친절하다

    [노주석의 서울살이] 표석이 불친절하다

    서울은 오래된 도시다. ‘정도 600년’이라는 옛 구호에서 벗어나지 못한 분도 더러 계시지만 ‘서울 2000년’설이 정립된 지 벌써 10년이 흘렀다. 로마처럼 2000년 된 판테온 신전의 실물을 보여 줄 수 없는 게 서울의 한계다. 그렇다고 서울의 기원을 무작정 늘린 건 아니다. 삼국사기의 ‘한성백제 기원전 18년 건국’ 기록을 우리 손으로 부인할 까닭은 없지 않은가. 서울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그리고 대한제국의 멸망과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한강의 기적이라는 파란만장한 대사건을 거치면서 성장했다. 조선 초기에 비해 인구는 100배가 늘고, 면적은 30배가 넓어졌다. 경기도를 야금야금 서울로 편입시킨 덕분이다. 예를 들어 서울 도봉구는 일제강점기에는 경기도 양주군과 고양군이었는데 1949년에 서울로 편입됐다. 서울은 지구상에서 가장 압축적으로 성장한 글로벌 도시다. 문화재 약탈·파괴와 역사왜곡, 전쟁과 산업화 과정에서 역사의 향기는 자취를 감췄다. 원주민이 사라지고, 정체성을 상실한 서울은 ‘이방인의 도시’, ‘만인의 타향’이 됐다. 서울은 표석(標石)의 도시다. 사라진 것에 대한 ‘애도의 염’으로 가득 찼다. 불행하게도 300여개의 표석이 남았을 뿐이다. 종로·중구 도심에만 표석의 70% 이상이 몰려 있다. 오래된 도시가 남긴 역사문화의 파편이다. 표석은 특정 시공간을 거쳐 간 인물이나, 발생한 사건의 전말을 묵묵히 말해 준다. 어떤 사람과 사건을 통해 명멸하고 진화했는지 온몸으로 증언한다. 도시의 사연을 전해 주는 표석은 거리 인문학의 보물 창고다. 거리의 인문학 열풍이 뜨겁다. 인문학을 즐기려고 너나없이 거리로 나선다. 서울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서울의 역사성을 느끼려는 사람들이다. 사람들은 장소의 역사에 한 번 놀라고, 장소의 끈질긴 관성에 두 번 놀란다. 필자가 표석의 숫자를 300여개라고 애매하게 표기한 것은 정확한 숫자를 파악하기 어려워서다. 표석의 명멸과 부침 그리고 진화가 여전히 진행형이기 때문이다. 표석의 도시, 서울의 표석 현황을 알려 주는 곳은 없다.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한국콘텐츠진흥원이 2010년에 개발한 문화콘텐츠닷컴 자료에 의존해야 한다. 이 사이트에 따르면 표석은 1985년부터 모두 363개가 설치됐다고 한다. 또 다른 서울시 자료를 보면 335개가 세워졌다고 적혀 있다. 317개에서 363개까지 고무줄처럼 오르내린다. 건립, 철거, 수정되기를 거듭한 탓이다. 다른 한편으론 31조원의 예산을 쓰는 서울시가 운영하는 그 많은 기관, 그 많은 사이트 중에 표석의 현황을 일목요연하게 보여 주는 곳이 없는 탓이다. 역사도시 타령은 공염불이다. 도시 스토리텔링은 구두선이다. 표석 디자인도 어지럽다. 표석의 종류만 7~8가지쯤 된다. 판석기본형에 판석기둥형, 주사위형, 벽돌기둥형, 책형, 책상형, 벽돌벽부형까지 너무나 다양한다. 진짜 표석인지 분간도 어렵다. 건립 주체를 알 수 없고, 소재도 벽돌과 함석, 유리, 자연석 등 중구난방이다. 다양화도 좋지만, 이 정도면 표석이 아니라 차라리 표지판이나 안내판이라고 해야 할 판이다. 표석의 위치가 이리저리 바뀌는 것도 마땅치 않다. 도로가 새로 놓이거나 화단이나 전봇대가 바뀌면 슬그머니 딴 곳에 가 있다. 늘 보도 모퉁이에 없는 듯 숨어 있다. 표석의 권위는 사라지고, 장기판의 졸 신세다. 표석의 문구는 불친절의 극치를 이룬다. 무얼 알려 주려는지 요령부득이다. 친절한 표석이 서울의 표정을 풍부하게 하고, 정체성을 세우는 기본이 된다. 300개가 넘는 표석을 관광자원화해야 비로소 자랑할 만한 역사도시가 될 것이다.
  • [김응교 교수-작가의 탄생] 더 낮은 곳으로… 순례하는 여행자, ‘손’보다 ‘발’로 먼저 쓴 서울 이야기

    [김응교 교수-작가의 탄생] 더 낮은 곳으로… 순례하는 여행자, ‘손’보다 ‘발’로 먼저 쓴 서울 이야기

    정말 칠십대 노인일까. 너무 젊게 보이는 그가 다가왔다. 낮게 웃는 편한 얼굴을 대하자 190㎝ 정도의 큰 키가 주는 위압감은 금세 사라졌다. 2013년 10월 12일, 동국대 정각원에서 그와 대담하기로 한 날이었다.“김 선생 작품 중 영어로 출판된 책이 있어요? 읽고 싶어요.” 만나자마자 상대의 책을 읽고 싶다고 묻는 외국 작가는 처음이었다. 후에 알았는데 그는 만나기로 한 작가가 있으면, 되도록 그의 작품을 읽고 만난다고 한다. 상대의 책을 읽고 만나려는 예의를 느낄 수 있었다. 이날 몇 가지 질문을 했는데 모두 겸손하게 받아줬다. ●“서울은 아름답게 반짝이는 깨진 유리 간직” 2008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장마리 귀스타브 르 클레지오(78)는 1940년에 프랑스 니스에서 영국계 아버지와 프랑스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소개할 때 그는 프랑스혁명 때 공포정치를 피해 모리셔스 섬에 정착한 이민자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말하곤 한다. 태어나자마자 독일군이 점령한 프랑스에서 빈궁한 생활을 경험했고, 어린 시절을 아프리카에서 지냈던 체험은 그의 소설 곳곳에 나온다. 오랫동안, 나는 어머니가 흑인이기를 꿈꿔 왔다. 아프리카에서 이 나라, 이 도시로 돌아왔을 때, 나는 아무도 알지 못했고, 이방인이 되어 있었다. 그 현실에서 도피하기 위해 난 어떤 이야기를, 어떤 과거를 혼자 지어냈던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가 은퇴할 나이가 되어 우리와 함께 살기 위해 프랑스로 돌아왔을 때, 나는 아프리카인은 바로 그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다. 나는 과거로 돌아가 처음부터 다시 이해해 봐야만 했다. 그리고 그 추억을 담아 이 작은 책을 썼다. (르 클레지오, ‘아프리카인’, 문학동네, 2005, 7~8쪽) 1960년 젊은 시절, 알제리 민족해방운동에 대항하는 프랑스군에 참전해야 할지 고민하기도 했다는 그는 태국에서 지내며 유교, 도교, 불교적 가치를 익히기도 했다. 그는 늘 순례하는 여행자였다. 그의 노마드적 삶은 고독한 구도자의 순례길이었다. 그가 살아온 이력은 다양성을 존중하는 한 인물이 성숙해 가는 과정을 보여 준다. 이런 과정을 거쳐 소외된 사람들, 제3세계의 시각에서 그는 글을 써 왔다. 단순한 이국인의 눈으로 쓰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소설 속에 들어가 그늘진 등장인물의 말을 대신해 주려고 한다. 작중인물에 작가가 거의 빙의(憑依)된 상태라고나 할까. 어릴 때 아버지가 보는 잡지에서 한국전쟁 사진을 처음 봤던 그는 2001년에 한국을 방문하고 독학으로 한글을 공부한다. 2007년부터 1년간 이화여대 석좌교수를 지내며 한국을 제2의 고향으로 여긴다. “김소월 시 ‘진달래꽃’, 윤동주 시 ‘별헤는 밤’, 황석영 소설 ‘삼포 가는 길’, 이청준 소설 ‘예언자’를 좋아합니다.” 그가 좋아하는 한국문학 작품도 대부분 여행이나 디아스포라의 여정을 담은 작품들이다. 지난해에 낸 중편소설 ‘빛나’를 읽으면 그가 서울을 샅샅이 몸으로 체험하며 썼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지하철에서는 유리창에 비친 사람들 모습을 볼 수 있지만 그 영상은 흐릿하기 일쑤다. 게다가 내가 관찰하고 있다는 사실도 금방 들킨다. 모든 사람이 유리창을 향해 있기에, 그들에게도 창문에 비친 내 모습이 잘 보인다. 그런 면에서 버스가 훨씬 쉽고 편하다. 낮에는 창문으로 거리의 사람들을 마음껏 관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르 클레지오, ‘빛나’, 서울셀렉션, 2017, 14쪽) 그는 손으로 쓰기 전에 발로 쓴다. 몸으로 세포로 체험해 보고 쓴 글이다. 이 소설에는 어떤 길이 있을까. “흥미로운 서울을 저는 ‘깨진 거울’로 생각합니다. 전체보다는 깨진 조각으로 빛나고 있는 유리 같아요. 그래서 서울은 다양한 인상을 줘요. 판타지가 넘치고, 다양한 상상력이나 감성이 충만합니다. 아름답게 반짝이는 깨진 유리를 서울은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 소설에는 깨진 유리처럼 조각조각 이야기들이 나온다. 주인공 ‘빛나’는 전신이 마비된 다른 여성에게 서울에서 본 다섯 가지 이야기를 해 준다. 이야기들은 전혀 관계가 없으면서도 각기 나름의 빛을 반사한다. 처음엔 집중해서 읽기가 어렵다. 너무도 어려운 퍼즐 맞추기와 비슷하다. 각각의 이야기는 서로서로 연결된다. 지하철 같은 칸에 탔던 사람들이 언젠가는 서울이라는 대도시 어디에선가 다시 만날 운명이라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처럼 말이다. (‘빛나’, 190쪽)조금 맞추기 시작하면 조각난 이야기끼리 연결되면서 헤어나기 힘들 정도의 흡인력으로 독자를 빨아들인다. 첫째, 열아홉 살 주인공 ‘빛나’는 전라도에서 자라다 서울로 왔다. 반지하방에서 쥐와 고군분투하던 빛나는 불치병을 앓고 있는 여인 살로메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알바를 맡는다. 고단하게 살아가는 ‘빛나’는 청년실업시대의 청년이다. ‘빛나’는 얼굴 없는 스토커를 통해 대도시의 공포를 체험하기도 한다. 딸이 둘 있는 르 클레지오는 여성을 소설 주인공으로 쓰길 좋아하는데 이 소설 역시 여성이 주인공이다. 둘째, 희귀한 병에 걸려 전신마비가 된 채 죽어가는 40대 환자 살로메와의 만남이다. 대도시 서울에 사는 몸과 마음이 병든 ‘부서진 주체’의 모습이다. 병든 그녀는 더 재밌는 이야기를 듣고 싶어 ‘빛나’를 따라다니는 스토커를 고용하기도 한다. 셋째, 비둘기를 키우는 조한수씨 부부 이야기다. 38선을 넘어오던 어릴 때, 조씨 어머니는 비둘기 한 쌍을 데려왔다. 나이가 든 조씨는 비둘기에게 북녘 고향땅으로 편지 나르는 훈련을 시킨다. 북쪽에 두고 온 가족을 그리며 분단국가에서 살아가는 슬픈 실향민의 모습이다. 넷째, 미용실에 홀연히 나타난 키티라는 고양이 이야기다. 키티 목에 걸린 작은 가방에 쪽지를 넣으면서 주민들은 대화를 한다. 키티가 전해주는 신비한 이야기를 미용실 원장은 기다린다. 메신저 고양이의 역할에 어두운 동네에 작은 빛이 드리운다. 아파트에 고립된 사람들을 따뜻하게 이어 주던 키티는 어느 날 조용히 사라진다. 다섯째, 나비라는 아이돌 가수의 길이다. 교회에서 찬양하면서 행복했던 나비는 목사에게 성추행을 당한다. 아픔을 이겨내고 가수의 길을 걷던 나비는 마침내 탐욕스러운 사내의 희생양이 되어 모든 걸 빼앗기고 목숨을 끊는다. 아이돌 스타의 성공과 슬픔, 그 그늘진 뒷골목이다. 여섯째, 부모에게서 버림받는 아이와 몰래 그 아이를 키우는 간호사 이야기다. 보육원에서 양부모를 기다리는 아기들과 달리 자란 나오미는 성장하면서 이상한 능력을 보인다. 일반인에게는 보이지 않는 영혼과 대화할 수 있는 능력이다. 일자리를 찾지 못하는 젊은이, 영혼이 병든 환자들, 분단으로 고통받는 실향민, 소비사회에서 소비되는 아이돌, 부모에게 버림받은 아이들 등 작가가 조명하는 여섯 가지 순례길은 외면받고 있는 사람들이다. 주변인 곁으로 다가가는 그의 관심은 제주도 해녀를 담은 소설 ‘폭풍우’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는 2011년 명예 제주도민이 됐다. 작가는 방배동 서래마을, 신촌, 당산동, 오류동 등 서울 곳곳을 조명한다. “서울에는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이 모여 살아요. 다채로운 이야기와 신화가 창조되는 서울은 ‘다층성’이 두드러지는 공간이지요. 풍부한 상상이 가능한 공간입니다. ”서울의 다층성을 강조하는 그의 말대로, 이 작품에는 다양한 계층의 인물이 등장한다. 대도시의 풍광, 분단 문제, 종교 문제, 대중문화의 문제 등 다양한 주제들이 녹아 있다. 상황 설정이나 섬세한 묘사가 자연스러워 읽다가, 가끔 한국인이 쓴 소설로 착각하기도 했다. 그의 소설은 절망에 빠지지 않는다. ‘황금물고기’ ‘라가’ ‘빛나’에는 비극적인 운명에 견디며 맞서는 인물들이 나온다. 이 모든 이야기를 나누던 살로메가 세상을 등지고 ‘빛나’는 단독자로서 살아갈 것을 다짐하면서 소설은 끝난다. 강남에는 비가 내리고, 인천 쪽에는 태양이 빛난다. 비를 뚫고 북한산이 북쪽에서 거인처럼 떠오른다. 이 도시에서 나는 혼자다. 내 삶은 이제부터 시작될 것이다. (‘빛나’, 237쪽) ‘빛나’라는 이름은 ‘빛나다’에서 만든 이름이다. 화려한 도시 이면에 울적한 어둠을 담아낸 작가가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빛나’라는 제목처럼 빛나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상처받은 사람들 곁으로 처음 만났던 6년 전 그날, 그는 넘어져 팔을 크게 다쳐 병원에 들러 일곱 바늘을 꿰매고 왔다. 오랜 강연과 대담을 마치고 사람들이 그 곁으로 와서 사진 찍으려 했다. 붕대를 감은 오른손 대신 왼손으로 계속 사인해줬다. 사진 찍기를 바라는 분들을 외면치 않고 나직하게 웃으며 받아주셨다. 사진 찍다가 옆에 앉은 나에게 또 “김 선생의 비평이든 작품을 읽고 싶다”고 또 말했다. 나는 선생님 귀에 가까이 대고 소곤대듯 말씀드렸다. “선생님 저는 수준이 낮은 작가예요.” 그러자 그는 갑자기 내 오른쪽 어깨에 손을 올렸다. 힘내라는 뜻일까. 그 미소와 큰 손길이 고마웠다. 함께 저녁식사를 하러 가다가 광화문에서 시위대를 만났다. 그는 저 시위는 어떤 목적으로 하는 것인지 세세히 물었다. 그날, 왜 그가 모리셔스 섬을 점령한 영국을 부당하게 생각하여 아버지의 모국어인 영어가 아닌 프랑스어를 ‘작가 언어’로 택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날, “이민자들은 사회를 위협하는 적이 아니라 문화를 풍요롭게 만들어 주는 존재”라고 했던 그의 말이 그냥 나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촛불혁명을 세계사의 중요한 순간으로 평가하는 르 클레지오는 소설에서뿐만 아니라 일상에서도 모든 사람, 특히 낮고 상처받은 사람들 곁으로 다가가는 문사다. 시인·숙명여대 교수
  • 중국서 뺨맞은 기자, 트럼프 보좌관으로 일한다

    중국서 뺨맞은 기자, 트럼프 보좌관으로 일한다

    전직 베이징 특파원들이 중국에 가장 적대적인 정책을 펴는 미국과 호주에서 관료로 일하며 중요 정책 수립에 참여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아시아 담당 선임보좌관인 매트 포팅어(45)다. 포팅어는 미 매사추세츠주립대에서 중국어를 전공하고 로이터통신에서 3년 기자 생활을 한 뒤 월스트리트저널(WSJ)에 합류해 2001년부터 중국 베이징 특파원으로 활약했다. 그가 WSJ에서 미 해병대로 전직하기 직전에 쓴 ‘펜보다 강하다’란 칼럼을 보면 베이징 특파원들이 얼마나 중국 정부로부터 혹독한 대접을 받는지 잘 드러난다.  7년간 중국에서 지낸 포팅어는 중국 정부가 핵연료를 다른 나라에 판다는 내용을 취재하다가 스타벅스에서 정부 관련자로부터 얼굴을 맞았다. 지방을 돌며 관리들의 부패상을 취재하다가 공안에 체포되어 심문을 받았고, 그들이 보는 앞에서 취재수첩을 일일이 찢어 변기에 흘려보내야만 했다. 포팅어는 베이징 특파원으로 일하던 중 31살의 나이에 미 해병대에 자원입대하기로 결심하고 5년간 근무했다.  해병대 근무를 시작하기 전 포팅어는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중국에서 서방의 시각은 이방인일 뿐이다”라며 “언론 자유와 투표권이 없는 중국에서 근무하며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 미국을 보호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됐다”고 전했다. 현재 포팅어는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의 북한 방문에 동행하고, 대북 정책에 대한 백 브리핑을 하는 등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아시아 외교 정책을 세우는 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  호주는 중국을 겨냥한 내정간섭 금지법을 추진하는 등 지구 상에서 가장 중국과 불화하는 국가다. 외국 스파이의 정치 로비 활동 등을 금지한 내정간섭 금지법의 토대를 만든 장본인은 바로 전직 베이징 특파원으로 시드니 모닝 헤럴드와 페어팩스 미디어에서 일했던 존 가노다. 호주 국가안보 정보기구(ASIO)에서 말콤 턴불 호주 총리의 자문관으로 2년간 일했던 가노는 지금은 공무원 신분을 벗어나 컨설팅 회사를 차렸다.  지난해 베이징 외신기자협회(FCCC)는 ‘접근 금지’란 연례 취재 환경 보고서를 펴냈다. 모두 218명의 회원 가운데 117명이 설문에 응답했으며 이 가운데 40%가 취재환경이 전년보다 악화했다고 밝혔다. 이는 2016년 보고서의 29%보다 더 늘어난 수치다. 중국 정부의 취재 활동 제한은 비자 발급 거부, 감시, 구금 등으로 이뤄지며 특히 신장 자치구와 북한 접경지대에서 취재 거부를 당한 사례가 많았다.  두 명의 전직 베이징 특파원을 모두 잘 아는 한 중국 전문가는 “중국 정부는 전직 베이징 특파원들이 정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라며 “만약 중국이 특파원들에게 좀 더 나은 대접을 했다면 이들의 중국에 대한 강경한 시각이 바뀔 수도 있었다”고 말했다.  베이징 윤창수 특파원 geo@seoul.co.kr
  • “증오·이념의 ‘페스트’ 극복하는 분단 한반도 은유”

    “증오·이념의 ‘페스트’ 극복하는 분단 한반도 은유”

    “페스트(흑사병)는 ‘보이지 않는 공포’라 더 두렵고 정신마저 황폐화시키는 존재예요. 스스로 시스템을 통제하고 있다고 믿는 그래서 헌법마저 손쉽게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잘못된 신념에서 가해진 ‘블랙리스트’도 일종의 페스트죠. 하지만 공포와 부조리가 전부는 아니에요. 카뮈는 화해와 휴머니티, 저항 정신을 통해 페스트를 극복하는 인간의 의지를 보여 줘요. 그게 페스트를 국립극단 무대에 올리고 싶었던 이유이기도 해요.”지난 18일 서울 중구 명동예술극장에서 막을 올린 연극 ‘페스트’는 박근형(55) 연출가가 5년 만에 국립극단에 복귀한 작품이다. 그가 2013년 9월 국립극단에서 초연한 연극 ‘개구리’는 당시 박근혜 대통령을 비하했다는 악평을 받으면서 정부 검열과 블랙리스트 사태의 발단이 됐다. 지난 22일 명동예술극장 무대에서 박 연출가와 페스트의 무대를 만든 박상봉(39) 디자이너를 만났다. 박 연출가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모든 군인은 불쌍하다’부터 ‘페스트’까지 두 사람이 ‘합’을 맞춘 작품만 7편에 달한다. 1947년 발표된 ‘페스트’는 ‘이방인’과 함께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카뮈의 대표작이다. 지중해의 소도시 ‘오랑’에서 어느 날 쥐들이 떼로 죽은 후 사람들이 피를 토하며 처절하게 죽어간다. 페스트가 점령한 도시는 외부와 차단돼 고립되고 시민들은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친다. 카뮈의 페스트는 영화, 연극 등 다양한 장르에서 변주된 고전이지만 2015년 한국에서는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사태라는 현실 상황이 됐다. 페스트를 직접 각색한 박 연출가는 “병균이 재난이 되고, 이를 극복하는 과정이 한국 사회와 연결됐다”며 “하지만 작품을 구상하면서 동시대 문제로 다루고 싶었던 건 메르스가 아니라 증오와 이념이 지배하는 분단 상황이었다”고 설명했다. 카뮈의 페스트를 비틀어 한반도의 분단 상황에 빗댄 건 ‘박근형표’ 반전이었다. 그는 원작의 해안 도시 ‘오랑’을 연극에서는 고립된 섬으로 바꾸고, 거대한 철문 방화벽을 무대에 내리는 방식으로 한반도의 ‘장벽’을 상징화한다. 박 연출가는 오랑을 한반도로, 장벽은 남북을 가른 휴전선으로 대입해 연상했다고 한다. “남북 간 적대감이야말로 거대한 페스트 같은 거예요. 북한에 대한 맹목적인 증오는 집단 최면이나 광기이기도 해요.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원인인 페스트가 중요한 게 아니라 결국 그것에 대응하는 태도, 그것을 극복하고 마침내 화해하는 이야기를 담고 싶었어요.” 박 디자이너는 “작품에서 보면 권력자가 장벽을 더 높게 올리고, 군인들이 감시하면서 공포를 키우고, 페스트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책임을 전가한다”며 “박 연출가가 무대에 장벽이 필요하다고 말했을 때 ‘아, 남북 분단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있구나’라고 느꼈다”고 말했다. 박 디자이너의 토로다. “장벽이 필요하다는 연출가의 주문을 어떻게 소화할까 꽤 고민했어요. 그러다 철로 된 방화벽을 떠올렸죠. 그건 소방법에 따라 공연장에 설치돼 있던 진짜 방화벽이에요. 큰 부담을 덜었죠.” 연극 ‘페스트’의 무대는 극도로 절제돼 있다. 격랑이 이는 바다, 바람 등 자연의 물성을 이미지화한 수조와 커튼을 제외한 소품이나 장치는 무대에서 치워 버렸다. “연극의 공간은 심리적 공간이에요. 고립감이든 공포심이든 배우들이 표현해 내고 만들어 내야 하는 것입니다. 박근형 연출가의 미학은 소극장에서 더 생생해져요. 군더더기 없는 무대를 만든 이유죠. 배우들의 존재감이 제대로 드러나는 무대를 만들자고 의기투합한 결과물이죠.”(박상봉) 안동환 기자 ipsofacto@seoul.co.kr
  • 절망의 땅에서 희망의 땅으로… 시간을 돌린 도시

    절망의 땅에서 희망의 땅으로… 시간을 돌린 도시

    드레스덴은 흔히 ‘엘베강의 피렌체’라 불린다. 바슈타이 일대를 ‘작센 스위스’라 부르는 것과 비슷하다. 왜 ‘자체발광’의 아름다움을 가진 곳에 굳이 이웃 나라의 도시 이름을 얹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만큼 고전적인 풍경을 갈무리한 곳이라 이해하면 될 듯하다. 독일 작센주의 주도인 드레스덴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등 연합국의 폭격으로 도시의 90% 이상이 파괴됐던 곳이다. ‘융단 폭격’의 기원이 된 곳도 바로 여기다. 하지만 드레스덴 사람들은 절망의 땅에서 희망을 일궜다. 전쟁만큼 고된 시간을 거쳐 거의 완벽하게 도시를 되돌려 놨다. 이방인이 이 도시에서 마주하는 건 우아한 중세의 시간이다. 엘베강을 따라 돌거나, 두 발로 옛 시가지를 걸을 때마다 늘 경탄할 만한 풍경들이 따라온다.먼저 옛 시가지의 프라우엔 교회부터 찾는다. 바로크풍의 거대한 돔이 인상적인 교회다. 드레스덴 재건의 상징 같은 곳이기도 하다. 2차대전 뒤 드레스덴 사람들은 산산이 부서진 프라우엔 교회의 돌들을 모아 번호를 매겨 보관했다고 한다. 그 돌 하나하나에 재건의 희망과 의지도 새겼을 터다. 교회 재건의 모티브를 제공한 이는 독일 태생의 미국인 생물학자 귄터 블로벨이다. 그가 1999년 노벨 의학상 수상으로 받은 상금을 모두 기부한 이후 국민 성금과 정부의 지원이 이어졌다. 프라우엔 교회는 안팎이 예술 작품이다. 외형은 웅장하고 내부는 우아하다. 교회 가장 높은 곳은 전망대다. 늘 관광객들의 발걸음이 이어진다. 전망대에 서면 여태 지나온 곳과 앞으로 가야 할 곳이 한눈에 담긴다.드레스덴에서도 바로크 건축의 정수로 꼽히는 건물은 츠빙거 궁전이다. 18세기 초 지어졌다가 2차대전 때 완파됐고, 이후 20년간 복원 작업을 거쳐 옛 모습을 되찾았다. 현재는 미술관, 박물관 등으로 이용되고 있다. 특히 미술관이 인상적이다. 대표적인 소장품은 ‘시스티나의 성모’다. 르네상스 시대 3대 거장 중 한 명으로 꼽히는 라파엘로의 걸작이다. 그림은 1514년 완성된 것으로 전해진다. 아기 예수와 성모 마리아를 중심으로 교황과 성녀 바르바라를 정돈된 구도로 그려 냈다. 이 밖에 렘브란트의 ‘사스키아와 함께 있는 자화상’(1635), 베르메르의 ‘뚜쟁이’(1656년) 등 수많은 거장들의 작품이 전시되고 있다.드레스덴을 말할 때마다 빠짐없이 등장하는 인물이 있다. ‘강건왕’ 아우구스투스(1670∼1733)다. 작센의 제후이자 폴란드의 왕이었던 인물이다. 마초들에겐 354명의 자녀를 뒀다는 그의 ‘전설적인 강건함’에 더 귀가 솔깃할 법하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선출권을 가진 선제후였던 그는 당대 최고의 바로크 예술품들을 수집하고 드레스덴궁을 미술관처럼 꾸미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곳이 바로 현 드레스덴궁의 ‘그린 볼트’다. 은의 방, 청동의 방 등 7개의 방에 당대 최고의 예술품들을 채워 넣었다.가장 널리 알려진 건 보석의 방이다. 41캐럿짜리 녹색 다이아몬드 등의 보물들이 가득하다. 그가 수집한 예술품들은 지난해 말 서울 용산의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왕이 사랑한 보물’전을 통해 한국인들에게 선을 보이기도 했다. 당시 한국에 전시되지 못한 작품이 ‘무굴 제국 아우랑제브 황제의 왕좌’다. 무굴제국 황제의 연회장을 보석과 귀금속으로 재현한 작품이다. 5000개의 다이아몬드와 각각 500개의 루비, 에메랄드가 쓰였다고 한다. 전시된 보물들은 진품이다. 2차대전 동안 작센 스위스 국립공원에 보관된 덕에 화를 피할 수 있었다. ‘브륄의 테라스’도 필수 방문 코스다. 독일의 문호 괴테가 “유럽의 발코니”라고 상찬했다는 곳이다. 원래 강변의 성벽이었다가 사람의 발걸음이 잦아지면서 ‘브륄의 테라스’라 불리게 됐다. 테라스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빼어나다. 옛 시가지의 건물과 발 아래 엘베강 일대 풍경을 한눈에 담을 수 있다. 테라스는 무료로 상시 개방된다. 아울러 ‘강건왕’ 아우구스투스의 심장이 묻혔다는 가톨릭 궁전교회와 국립 오페라하우스, 슈탈호프 외벽에 그려진 101m 길이의 ‘군주의 행렬’ 벽화 등도 빠짐없이 둘러봐야 한다.이제 엘베강을 따라 드레스덴을 돌아볼 차례다. 수백년 전부터 이 강을 오갔던 증기선들이 여태 운항하고 있다. 물론 증기선 안팎으로 시설 개·보수는 했지만, 증기를 이용해 수차를 돌리는 방식은 여태 이어지고 있다.‘브륄의 테라스’ 앞 선착장이 출발지다. 증기선이 물살을 헤치며 나갈 때마다 사뭇 다른 풍경들이 다가섰다 사라진다. 필니츠궁은 또 하나의 바로크 걸작으로 꼽히는 건물이다. 아우구스투스가 부인을 위해 지은 여름 별궁으로 알려졌다. 강변 쪽 건물은 ‘물의 궁전’, 그 뒤로 바로크 양식의 정원을 갖춘 건물은 ‘산의 궁전’이라 불린다. 저물녘에는 공연도 열린다. 증기선 관광객을 위한 일종의 퍼포먼스이긴 해도 거대한 야외무대에서 펼쳐지는 아름다운 오페라를 감상하는 듯하다. 드레스덴은 러시아의 문호 도스토옙스키가 여러 차례 방문했던 곳이다. 1869~71년 사이엔 실제 거주하기도 했다. 이 시기에 그의 딸이 태어나고 드레스덴의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디 이터널 허즈밴드’, ‘악령’ 등의 초고가 작성되기도 했다. 엘베 강변에 그의 동상이 서게 된 데는 이 같은 사연들이 얽혀 있다. 2006년엔 메르켈 독일 총리와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참석해 동상 제막식을 갖기도 했다. 글 사진 드레스덴(독일) 손원천 기자 angler@seoul.co.kr
  • [2018 서울미래유산 그랜드 투어] 600년 역사 깨운다 광장의 울림 퍼진다 ‘서울의 찬가’ 울린다

    [2018 서울미래유산 그랜드 투어] 600년 역사 깨운다 광장의 울림 퍼진다 ‘서울의 찬가’ 울린다

    서울신문이 지난 12일부터 서울시 및 서울도시문화연구원 등과 함께하는 ‘2018 서울미래유산-그랜드투어’를 시작했다. 올해로 세 번째다. 미래유산이란 아직 문화재로 등록되진 않았지만 미래 세대에 물려줄 가치가 있는 유·무형의 서울 근현대 문화유산이다. 지난해 투어와 비교할 때 유형의 유산에서 무형의 유산으로, 사대문 안에서 사대문 밖으로 답사 영역을 넓힌 게 특징이다. 투어는 지난해 참가자들이 재체험을 희망한 사대문 안 주요코스 6개, 문학과 영화를 중심으로 새로 선정된 무형 서울미래유산 6개, 그리고 지역별·어젠다별·계절별 코스 23개 등 총 35개 코스로 편성했다. 오는 12월 말까지 매주 토요일 오전 10시부터 두 시간 동안 열리며 혹서기인 7, 8월 두 달 동안은 저녁 6시부터 8시까지 5회 동안 야간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추석 연휴 첫날인 9월 22일(토)과 마지막 날인 9월 26일(수) 2회는 ‘한가위 특별투어’로 운영한다. 전문성을 갖춘 18명의 베테랑 해설자가 투입되며 매회 3명 이상의 진행요원이 안전한 투어를 보장한다. 국내 도보답사 프로그램 중 처음으로 오디오 가이드시스템을 도입했다. 소음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을뿐더러 해설사 앞에 있어야만 들리던 불편도 해소할 수 있어 박물관이나 미술관처럼 편안하게 답사여행을 할 수 있다. 이르면 7월부터 서울시 각 중학교에서 추천, 선발된 ‘미래청소년 기자단’도 동행해 탐방 분위기를 풋풋하게 띄울 예정이다. 참가 신청은 서울미래유산(futureheritage.seoul.go.kr)에서 참여하기, 탐방, 접수 순으로 하면 된다. 매주 월요일 오전 9시부터 그주 참여자를 선착순으로 30명 받는다. 대기자도 10명 선착순 모집한다. 무료다.# 도로원표·광화문지하보도…걸음마다 미래유산 2018년 첫 투어가 시작된 5월의 두 번째 토요일인 지난 12일 온종일 비가 내렸다. 이날 10시쯤 종각역 4번 출구 앞에서 집결해 오디오 가이드시스템을 지급한 뒤 사용법을 시연할 예정이었지만 빗줄기가 굵어져 역 안으로 들어가야 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연등행사 등으로 광화문과 종로 일대 차량 진입이 통제돼 불참 및 지각자가 속출할 것으로 예상됐다. 기우였다. 답사용 단체 카톡방에서 교통통제 및 집결지 변경을 알리는 긴급 메시지를 수신한 예약자 30여명이 예외 없이 시간을 지켰다. 형형색색 우산을 받쳐 든 참가자들은 진행자들의 ‘철통 호위’를 받는 가운데 이기훈 해설사와 함께 정시에 보신각을 출발했다. 지난달 새로 설치한 녹두장군 전봉준 동상을 보고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된 서울 공인 맛집인 청일집, 미진, 청진옥을 둘러봤다. 중학천을 따라 고종즉위40년기념 칭경비전과 교보문고 앞 벤치에 편안하게 모신 ‘3대’의 작가 횡보 염상섭도 만났다. 도로원표와 광화문지하보도, 충무공 동상, 세종대왕 동상을 차례차례 누볐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 8층 옥상에서 비에 젖은 백악산과 경복궁의 운치를 만끽한 뒤 세종로공원에 서 있는 ‘서울의 찬가’ 노래비에 얽힌 해설과 세종문화회관 40년사를 들으면서 비에 젖은 세종로 투어를 마무리했다. 참석자들은 이날 처음 지급된 고감도 오디오 가이드시스템 덕분에 비가 쏟아지는 와중에도 큰 불편 없이 낭만적인 투어를 즐길 수 있었다고 입을 모았다. 참가자 단체 카톡방에서 바로바로 찾아볼 수 있는 해설 자료는 덤이었다. ‘한국의 얼굴’이자 서울의 중앙인 광화문광장과 세종로의 지층은 현재 아스팔트 지상보다 무려 8m 아래에 있다. 태조 이성계와 삼봉 정도전이 활보하던 최초의 인공도로면 위에 조선 중후기 도로 층이 쌓이고, 또 19세기와 일제강점기 때 지층 등 모두 11개의 지층이 겹겹이 덮여 지금의 표면을 이뤘다. 광화문 8m 지층 속에 600년 묵은 역사가 차곡차곡 쌓인 셈이다.# 서울의 주축은 백악~경복궁~숭례문~관악 서울은 산과 성곽의 도시이다. 유교와 풍수의 원리가 겹겹이 에워쌌다. 성곽으로 둘러싼 경계에 내사산이 있고 외곽에 외사산이 있다. 내사산 북쪽의 백악산(북악산)은 현무, 동쪽의 낙산(낙타산)은 청룡, 서쪽의 인왕산은 백호, 남쪽의 남산(목멱산)은 주작이 각각 수호신이다. 외사산 북쪽 삼각산(북한산)은 백두산의 정기를 이어받은 조산(祖山·풍수설에서 혈에서 가장 멀리 있는 용의 봉우리)이요, 지리산에서 뻗은 관악산은 아침마다 임금을 알현하는 조산(朝山)이다. 조선의 법궁인 경복궁은 북악을 조산으로 자리를 잡았다. 근정전은 도시의 중앙에서 서쪽으로 쏠린 상태에서 남향을 바라보고 앉았고 남북 간 축선인 주작대로는 삼각산과 관악산 축선상에 놓였다. 도시 중앙에 동서를 가로지르는 도로를 만들었는데 그것이 종로(운종가)이다. 오늘의 세종로사거리에는 황토마루(黃土峴)라는 나지막한 언덕이 있었다. 관청가인 육조거리와 운종가가 만나는 지점이다. 육조거리에서 숭례문에 이르는 주작대로는 직통으로 연결하지 않았다. 광화문광장 끝자락에서 왼쪽으로 꺾어 종로 보신각까지 간 뒤 지금의 남대문로를 통해 숭례문까지 이르는 이른바 정(丁)자형 길이다. 서울의 주축(主軸)은 백악~경복궁~숭례문~관악이었다. 서울 중앙의 매력에서 음식을 뺄 수 없다. 서울음식이란 무엇일까. 명물 음식점은 도심재개발로 옛 터를 잃고 빌딩 속으로 뿔뿔이 흩어졌지만 여전히 명맥을 잇고 있다. 투어단은 이날 빈대떡의 청일집, 해장국의 청진옥, 메밀국수의 미진을 순례하면서 서울음식의 정체성에 대해 잠시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다. 서울미래유산 목록에 오른 42개의 음식점 중 종로구에는 이들 3곳을 포함해 이문 설농탕(설렁탕), 진아춘(중식), 형제추어탕(추어탕), 열차집(빈대떡), 원조할머니 기름떡볶이(떡볶이), 유진식당(냉면) 등 모두 9곳이 포진한다. 중구에는 용금옥(추어탕), 은호식당(꼬리곰탕), 문화옥(설렁탕), 우래옥(냉면), 안동장(중식), 명동 할매낙지(낙지볶음), 부민옥(해장국), 오장동 함흥냉면(냉면), 고려 삼계탕(삼계탕), 유림면옥(메밀국수), 산골막국수(막국수), 진주회관(콩국수), 라 칸티나(양식), 무교동 북어국집(북엇국), 전주중앙회관(비빔밥) 등 무려 15곳이 선정됐다. 종로·중구 2개 구에만 전체의 절반이 넘는 24곳이 집중돼 있다.# 궁중요리 등 서울 전통음식은 잊혀져 가 한결같이 서민음식이다. 궁중요리와 반가음식의 고향인 서울에서 살아남은 미래유산은 서울의 전통요리가 아니라 지방과 외국에서 온 이방인들이 퍼뜨린 팔도요리와 외국음식이란 점이 특징이다. 보통 서울음식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궁중요리와 설렁탕, 빈대떡, 민어탕, 불고기에서 서울음식의 지평이 확대된 것을 알 수 있다. 지금의 서울음식은 종로의 설렁탕과 빈대떡, 신당동 떡볶이, 을지로 평양냉면과 골뱅이, 동대문 닭 한마리, 오장동 함흥냉면, 신림동 순대, 마포 돼지갈비, 왕십리 곱창, 장충동 족발, 성북동 칼국수처럼 특정 지역에 몰려 있는 특정 음식이 손꼽힌다. 서울로 모여든 이북 사람, 영호남 사람이 음식과 함께 서울이라는 문화공동체 안에 두루 섞였다. 비빔밥 문화이다. 안타깝게도 서울토박이 음식은 뒷전으로 밀렸다. 글 노주석 (사)서울도시문화연구원장 사진 이원석 연구위원 ●다음 일정 : 서울사방 동촌(대학로 일대) ●일시 및 집결장소 : 5월 19일(토) 오전 10시 혜화역 2번 출구 마로니에공원 좋은공연안내센터 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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