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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세계문학의 경계에서… 조국 향한 그리움이 흐른다

    한국·세계문학의 경계에서… 조국 향한 그리움이 흐른다

    1946년 독일서 독일어로 펴낸 소설초판 매진에 현지 교과서 실리기도日 피해 망명한 작가의 자전적 얘기20세기 이주자 문학 고전 반열 올라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00번째 책새로운 번역으로 한국 독자에 선봬 한국인의 기억과 정서가 한국어가 아닌 독일어로 품어져 있다면, 이것은 한국문학일까 독일문학일까. 낯선 당혹감을 안긴 채 60년간 도도하게 흘러왔던 이미륵(1899~1950)의 소설 ‘압록강은 흐른다’가 새 번역으로 우리에게 도착했다. 한국문학의 세계적 위상이 어느 때보다 높아진 지금, 이 소설을 다시 읽으며 새삼스러운 질문 몇 가지를 덧붙이지 않을 수 없다. 세계는 무엇이며 그 속에서 한국의 위치는 어디인가. 문학에 ‘국경’이 있는가, 있다면 그것은 누가 정하는가. “‘다른 시대가 도래한 거야’라고 내가 계속해서 말했다. ‘우리가 어두운 잠을 자고 나니 더 밝은 시대가 온 거지. 새로운 바람이 잠자던 우리를 깨웠어. 긴 겨울이 지나고 지금은 봄이다, 이렇게 사람들이 말하고 있어.’”(‘시계’ 부분·92쪽) 소설에는 작가의 생애가 그대로 담겨있다. 이미륵의 본명은 이의경이고, 미륵이라는 이름은 어머니가 붙여준 아명(兒名)이다.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난 미륵은 엄격한 유교적 가정환경에서 한학을 배우며 자랐다. 그러다 신식 교육을 접하고 1917년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해 의학을 공부한다. 1919년 3·1운동에 가담하고 일제의 탄압을 피해 1920년 압록강을 건너 망명한다. 작품은 이미륵이 중국 상하이를 거쳐 독일에 도착한 직후까지의 여정을 다룬다. 동양의 전통과 서양의 신문물 사이에서 개인이 겪는 혼란과 고뇌를 담담한 문장으로 포착한다. 둘의 차이를 숙고할 틈 없이 강제로 밀고 들어오는 일제의 탄압은 우리가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바꿔야 하는지 성찰할 기회를 놓치도록 만들었다. 작가는 거기에 대한 분노도 빼놓지 않는다. “아, 처참한 시절, 더러운 세상이로다!”(‘옥계천변에서’ 부분·111쪽) 작품은 1946년 독일 피퍼출판사에서 독일어로 간행됐다. 초판이 매진될 만큼 독일 독자들에게 사랑받았으며, 독일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수록되기도 했다. 독문학자이자 수필가였던 전혜린의 번역으로 한국에 1959년 처음 소개됐다. 독일에서 고향을 그리워했지만 끝내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한국전쟁 발발 직전 독일에서 세상을 떠났던 이미륵은 2024년 11월에 유해가 봉환돼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됐다. 소설이 이번에 새로 번역된 건 올해 민음사의 창립 60주년과 맞물리면서다. 민음사는 회사의 대표 브랜드 ‘세계문학전집’의 100번째 책마다 중요한 한국문학 작품을 선정해 재발간한다. ‘압록강은 흐른다’는 500번째 작품으로 이름을 올렸다. 작품을 옮긴 안삼환 서울대 독문과 명예교수는 “요즘도 나는 이따금 이미륵의 순수한 영혼이 나를 감싸 주는 듯한 행복한 환각에 빠지곤 한다”며 “번역을 통해 비로소 나는 1894년 동학농민혁명과 1919년 3·1혁명에서 숨져 간 선열들의 인고와 슬픔을 추체험할 수 있었다”고 했다. 20세기 디아스포라 문학의 고전으로 남은 이미륵의 소설은 한국문학과 세계문학 사이의 경계가 어디에 놓여있는지 질문한다. 한국어로 번역돼 독자들에게 여운과 감동을 주고 있는 세계문학의 여러 정전은 세계문학인가, 한국문학인가.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 다양한 언어로 읽히고 있는 한국 작가들의 작품은 한국문학인가 아닌가. 굳이 구분한다는 게 과연 의미는 있는 것인가. 민음사 편집자이기도 한 문학평론가 박혜진은 작품해설에서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 “우리에게는 민족과 국가를 문학보다 크게 생각하려는 습성이 있다. 이미륵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 형식적으로 이 작품은 독문학에 속한다. 현실의 국적을 따지자면 이미륵은 독일인이었고 작품 또한 독일어로 쓰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구분들은 사실 별 의미가 없다. 문학이란 읽는 사람의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미륵의 진짜 국적이 노스탤지어라고 생각한다.”(‘수암, 떠도는 우리의 마음’ 부분)
  • 독립기념관, 독일 베를린서 ‘광복 80년’ 공동전시회

    독립기념관, 독일 베를린서 ‘광복 80년’ 공동전시회

    독립기념관은 10일부터 오는 2026년 2월 4일까지 독일 베를린 한국문화원에서 광복 80주년 공동 전시회를 개최한다고 13일 밝혔다. 주독일한국문화원과 공동으로 기획한 이번 전시회는 한글독립운동과 한글을 주제로 열린다. 전시자료는 우리말 큰사전 원고, 훔볼트 대학교 강의 허가서 등 55점을 선보인다. 이번 전시회에서는 독일에서 활동한 한국의 독립운동가 이극로, 이의경(이미륵)과 함께 베를린 및 인근 지역에 남아있는 한국 독립운동 사적지도 소개한다. 독립기념관 관계자는 이번 공동 전시처럼 국외 관계기관 또는 문화·교육기관 등과 교류·협업하며 한국 독립운동의 가치를 세계에 알리는데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 “아들아, 조선을 위한 투사가 돼라”… 피 끓어오르게 한 윤봉길의 편지

    “아들아, 조선을 위한 투사가 돼라”… 피 끓어오르게 한 윤봉길의 편지

    국경을 뛰어넘은 편지히로히토 즉위식 보러 갔던 이봉창한글편지 소지 이유로 유치장 갇혀김규식, 편지·전보·신문사 찾아가유럽 각국에 한국 기사 518회 게재‘조선공산당 사건’ 12명 피고 무죄日변호사 편지 “이것이 나의 의무”치명적인 오해의 편지밀정 조문 간 이회영 부인 오해받아김창숙 ‘절교 편지’에 얼굴 보고 화해김창숙, 옥살이 차남에게 안부 편지해방되고서야 아들 유골 전해 받아3·1운동 가담했던 이미륵 獨 망명편지로 어머니 별세 소식 듣게 돼 편지란 위험한 물건이다. 1928년 히로히토 일왕 즉위식을 보러 갔던 이봉창은 경찰에 끌려가 일주일 동안 유치장에 갇혀 있어야 했다. 이유는 단 하나, 그가 한글 편지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전까지 충실한 일본 국민이 되려고 노력했던 이봉창은 1932년 1월 일왕을 다시 찾아갔고, 수류탄을 던졌다. 3개월 뒤 중국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일본군에게 폭탄을 투척한 윤봉길은 두 아들에게 이런 편지를 남겼다.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하여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아라.” 일본의 침략은 군대와 기차 그리고 우체국과 함께 왔다. 전보와 엽서, 편지는 조선 곳곳을 통제하고 감시하는 수단으로 작동했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 편지는 독립운동가들에게도 무척이나 유용한 도구였다. 일제가 공들여 구축한 우편통신망이 독립의 대의를 알리는 ‘틈’으로 작용했다. 또한 사람의 피를 끓어오르게 하는 편지를 통해 결의를 북돋을 수도 있었다. 만주에 있는 신흥무관학교 교관 이탁은 미국 캘리포니아에 있던 안창호와 편지로 독립군기지 건설 관련 정보를 주고받았고, 몽골 울란바토르에서 의사로 활동했던 이태준은 중국 베이징에 있는 김원봉과 의열단 활동을 의논했다. 편지를 통해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멀리 멕시코 이민자들한테서도 독립성금을 받을 수 있었다. 그들의 편지 속에 대한독립을 위한 열정, 동지나 가족을 잃은 슬픔과 분노, 좌절과 희망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서울신문은 광복 80주년을 맞아 독립운동가들이 주고받았던 편지 가운데 일반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내용과 사연들을 취합해 그들의 열정과 좌절, 광복과 해방을 향한 염원을 되새겨 봤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프랑스에서 열린 파리강화회의를 통해 한국 문제를 알리기 위해 노력했던 김규식은 열정적인 외교 활동을 펼쳤고, 그런 노력 덕분에 1919년 3월부터 이듬해 10월까지 유럽 각국 신문에 한국 관련 기사가 518회나 게재될 수 있었다. 당시 한 기록은 김규식의 활동을 이렇게 증언했다. “밤을 새워 가며 편지를 쓰고, 전보를 부치고, 신문사를 찾아다녔다.” 독립운동 무대 자체가 중국과 일본, 미국 등으로 넓어지면서 편지 교류도 국경을 뛰어넘었다. 자연스럽게 대의에 동참하는 외국인들도 늘어났다. 광산기술자로 한국과 인연을 맺은 앨버트 테일러는 1919년 3월 7일 영국에 사는 장모에게 보낸 편지에서 아내가 아들을 낳았다는 얘기를 길게 쓰다가 끝부분에 자신의 근황을 무심한 듯 전한다. “미국 AP통신 한국 통신원으로 임명됐습니다. 최근까지도 이 일로 매우 바빠서 먼저는 정부 관료들에게 연락하고 또 최근 사망한 한국의 마지막 왕의 국장에 참석했으며, 그리고 한국의 독립운동을 살피고 그에 관해 기사를 썼습니다.” 테일러가 3·1운동 소식을 전 세계에 알린 수단 역시 편지였다. 테일러는 일본이 설치한 우편 제도를 활용해 3·1운동 상황과 일제의 탄압을 전 세계에 보도했고, 특히 독립선언서를 영어로 번역해 국제사회에 알리는 데 공헌했다. 일제를 비판하고 한국인들을 대변하는 변론 활동에 열성이었던 일본인 변호사 후세 다쓰지는 1927년 10월 ‘조선공산당 사건’을 변호해 12명의 무죄 판결을 끌어냈다. 그는 당시 피고인들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다. “설사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해도 당신들이 국가 권력의 위법한 검거와 취조에 항의하는 법정 싸움에 협력하는 것이 나의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안창호는 1927년 지린성에서 일제의 사주를 받은 중국 경찰에 체포돼 옥고를 치른 적이 있는데, 그를 구하기 위해 가장 열심히 뛴 사람은 톈진에 있는 난카이대의 설립자인 중국인 장보링이었다. 장보링은 만주 최대 군벌 장쉐량을 비롯해 유력자들에게 많은 친필 편지를 보내 안창호의 신원을 보증하고 “일본의 요구를 수락하지 말아 달라”고 요청했다. 결국 한 달이 안 돼 안창호는 석방될 수 있었다. 독립운동가들은 극도로 긴장한 채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다. 일제 경찰은 물론 밀정의 감시를 의식해야 했다. 그런 긴장감이 때론 치명적인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김달하는 중국 베이징에서 독립운동가 행세를 하다가 1925년 ‘다물단’이라는 독립운동단체에 처단된 일제의 밀정이었다. 김달하는 평소 형편이 어려운 독립운동가와 가족들을 도와주며 환심을 샀는데, 그런 사람 중에 이회영의 부인 이은숙도 있었다. 이은숙은 김달하가 죽은 이유도 모른 채 아들 이규창을 데리고 조문을 다녀왔다. 얼마 뒤 우체부가 김창숙이 보낸 편지를 전해 줬다. “우당장(이회영) 내외가 김달하 초종(初終)에 조상을 갔으니 앞으로 절교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이은숙은 품에 칼을 지니고 김창숙이 묵고 있던 집을 찾아가 격하게 항의했다. 결국 김창숙은 이은숙에게 사과하면서 오해를 풀었다. 얼굴도 보기 싫으니 짧은 편지로 대신하겠다는 김창숙의 분노와 직접 얼굴을 보고 오해를 풀지 않으면 자칫 남편의 생명까지도 위험해질 수 있다고 느낀 이은숙의 위기감이 교차하는 장면이다. 김달하가 처단된 계기는 사실 김창숙의 폭로였다. 김창숙은 김달하가 자신에게 독립운동을 포기하고 귀국하라고 회유했다고 증언했다. 오랫동안 증언 말고는 뚜렷한 물증이 없었다. 하지만 21세기가 돼 결정적 증거가 나왔다. 편지였다. 1998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된 독립운동가 김규흥을 두고 밀정 의혹이 제기된 적이 있다. 1918년부터 2년 동안 조선 주둔 일본군 사령관으로 일했던 우쓰노미야 다로가 생전에 썼던 일기를 유족들이 2007년 공개했는데 김규흥과 여러 차례 만나 정보를 교환했고 돈도 줬다는 언급이 나왔기 때문이다. 우쓰노미야가 김규흥을 이용한 게 아니라 오히려 김규흥이 우쓰노미야를 역이용했다는 반론도 있어서 결론이 나지 않은 상태다. 그런데 그것과 별개로 김규흥이 상하이에서 1919년 12월 우쓰노미야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김달하의 행적이 드러났다. 김규흥은 편지에서 “김달하를 중요한 자리에 써서 큰일을 맡게 해야 합니다. 그를 후하게 대하고 환심을 얻어야 합니다. 김달하에게 활동비 3만엔을 주고 저에게도 2만엔을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썼다. 일제강점기는 식민지 백성으로 떨어진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 숨 막히는 굴레일 수밖에 없었다. 독립운동으로 인한 망명과 수감 속에서 이별의 슬픔을 전하는 편지가 끊이지 않았다. 경성의전에 다니며 의사를 꿈꾸던 이미륵은 3·1운동에 가담했다가 경찰의 추적을 받게 됐다. 이미륵의 어머니는 38세에 어렵게 얻은 3대 독자가 투옥돼 고문받는 것보단 압록강을 건너 망명하는 게 낫다며 그의 등을 떠밀었다. 이미륵은 상하이를 거쳐 1920년 독일에 정착했다. 얼마 안 돼 고국에서 편지가 도착했다. 이미륵은 편지 내용을 담담하게 적는 것으로 훗날 독일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리는 자전소설 ‘압록강은 흐른다’를 마무리 짓는다. “나는 먼 고향에서 첫 소식을 받았다. 내 맏누님의 편지였다. 지난가을에 어머님이 며칠 동안 앓으시다가 갑자기 별세하셨다는 사연이었다.” 생활비라도 벌기 위해 가족과 떨어져 잠시 귀국한 이은숙은 이듬해인 1928년 남편 이회영의 편지를 받았다. 급한 사정이 생겨 두 딸인 규숙과 현숙을 홍숙경과 홍숙현이란 이름으로 톈진에 있는 부녀구제원(고아원)에 보냈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규숙은 18세, 현숙은 9세였다. 이은숙은 딸들이 이름까지 바꿔 고아원에 들어갔다는 소식에 충격을 받아 혼절했다. 1932년 10월 이은숙은 짤막한 편지를 받았다. 지금 새로운 곳으로 떠나는데 그곳에서 안정이 되면 편지할 테니 답장하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불안해하던 이은숙은 얼마 뒤 딸의 전보를 받았다. “아버님이 다롄 경찰서에서 돌아가셨음. 갈 것인지 통지 바람”이라고 돼 있었다. 그렇게 부부는 영원히 이별했다. 김창숙은 1927년 상하이에서 일제 경찰에 체포돼 14년 형을 받고 복역하다 고문 후유증으로 건강이 극도로 나빠졌다. 결국 1934년 형집행정지로 출옥해 4년이나 요양을 해야 했다. 그런 와중에 독립운동 혐의로 1938년 대구형무소에 갇힌 둘째 아들 찬기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뒤 “오장육부가 터질 듯한” 아픔을 느꼈다. 큰아들 환기가 19세 나이에 고문 후유증으로 죽은 뒤 둘째마저 잃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김창숙은 아들에게 편지를 썼다. “네 아비는 꿈이나 생시, 먹을 때나 쉴 때 언제고 오직 네가 무사히 돌아올 것만 바라고 있다.” 김찬기는 1941년 출옥한 뒤 그해 중국으로 망명했다. 중국 충칭에 있던 대한민국임시정부에 합류했지만 1944년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김창숙은 해방되고 나서야 아들의 사망 소식과 함께 유골을 전해 받았다. 시대가 엄혹하다고 해서 엄숙하고 근엄하고 진지한 편지만 오간 것은 결코 아니었다. 미국 언론인 님 웨일스가 쓴 ‘아리랑’의 실제 주인공으로 유명한 독립운동가 김산은 ‘혁명을 위해 결혼은 포기하겠다’고 함께 맹세했던 김성숙이 “중산대학에 다니는 아름다운 광둥 아가씨”를 만나 “첫사랑이면서 격렬한 연애” 끝에 결혼하자 큰 배신감을 느꼈다. 김성숙은 “네가 아가씨를 알게 된다면 나보다도 훨씬 깊이 빠져들 거야”라고 말했지만 김산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랬던 김산이 몇 년 뒤 사랑에 빠졌다. 김산은 곧바로 상하이로 편지를 보냈다. “나는 당신의 낭만적인 난센스를 모조리 용서합니다. 실은 오늘 밤 나는 어느 사람이 저지른 어떠한 일이라도 용서해 주고 싶은 심정입니다. 김 형이 내게 한 말이 맞았어요. 유감스럽게도 너무나 정확했어요.” 김성숙과 두쥔훼이 부부는 함께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일했지만 해방 뒤 김성숙만 귀국하고 두쥔훼이와 세 아들은 중국에 남으면서 생이별하게 됐다. 냉전에 휩쓸리면서 편지를 주고받을 방법조차 없었다. 김성숙은 가족들을 그리워하며 고국에서 외롭게 세상을 떠났다. 남북 사이 편지 교환도 다를 게 없었다. 영화 ‘고지전’에서는 국군과 인민군 병사들이 전투 와중에도 서로 편의를 봐주며 편지를 몰래 전달해 주는 장면이 나오는데, 휴전협정이 체결되면서 그런 편법조차도 불가능해졌다.
  • ‘압록강은 흐른다’ 이의경 지사, 105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온다

    ‘압록강은 흐른다’ 이의경 지사, 105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온다

    ‘압록강은 흐른다’의 저자이자 ‘이미륵’이라는 필명으로 잘 알려진 독립유공자 이의경(애족장) 지사의 유해가 1919년 조국을 떠난 지 105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온다. 1899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난 이 지사는 경성의학전문학교 재학 중이던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만세운동에 참여했고 그해 5월 독립외교 활동을 위해 꾸려진 대한민국청년외교단에서 편집부장으로 활동했다. 이어 8월 만세시위 때 사용된 ‘경술국치 경고문’ 등의 선전물 인쇄를 담당해 일제의 수배 대상에 오르자 중국 상하이로 망명해 임시정부 일을 도왔다. 1920년 프랑스를 거쳐 독일로 간 이 지사는 하이델베르크대학에서 의학을, 뮌헨대학에서 철학과 동물학을 공부했다. 1927년 뮌헨대학 재학 중 벨기에에서 개최된 ‘세계피압박민족결의대회’에 한국대표단으로 참가해 ‘한국의 문제’라는 소책자의 초안을 작성하고 결의문을 독일어 등으로 번역해 조국의 독립 의지를 세계에 알렸다. 1928년 이 지사가 유년 시절부터 독일 유학 과정을 회상하며 조선 후기부터 식민지 시대에 이르는 역사적 변혁기를 배경으로 집필한 ‘압록강은 흐른다’는 최우수 독문 소설로 선정되고 독일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 이 지사는 뮌헨대학 동양학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 1950년 3월 위암으로 별세했고, 독일 바이에른주 그래펠핑 신묘지에 안장됐다. 국가보훈부는 오는 16일 오후 1시 인천국제공항에서 이 지사가 이역만리에서 조국을 그리워하며 생전에 남긴 유필인 ‘평생 일편심’을 주제로 봉환식을 갖는다. 다음날 이 지사 유해는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된다. 보훈부는 이 지사의 유해 봉환을 위해 12일 독일 현지로 오진영 보훈정책실장을 단장으로 하는 정부 대표단을 보냈고, 이 지사의 파묘와 유해 봉환에 협조해 준 페터 쾨슬러 그래펠핑 시장과 관계자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고 유해 봉환 절차에 들어간다. 강정애 보훈부 장관은 “압록강을 건너 조국을 떠나신 지 105년 만에 돌아오시는 이 지사께서 국민의 추모와 예우 속에 영면하실 수 있도록 만전을 기할 것”이라며 “국외 안장 독립유공자분들의 유해를 마지막 한 분까지 고국으로 모셔 국가를 위한 헌신을 끝까지 책임지도록 하겠다”고 강조했다. 해외 안장 독립유공자의 유해 봉환은 1946년 백범 김구 선생과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의사 등을 모셔온 것이 처음이었고 이 지사는 149번째다.
  • ‘압록강은 흐른다’ 저자 ‘이미륵’…이의경 지사 유해 105년 만에 고국 돌아온다

    ‘압록강은 흐른다’ 저자 ‘이미륵’…이의경 지사 유해 105년 만에 고국 돌아온다

    ‘압록강은 흐른다’의 저자이자 ‘이미륵’이라는 필명으로 잘 알려진 독립유공자 이의경(애족장) 지사의 유해가 1919년 조국을 떠난 지 105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온다. 1899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난 이 지사는 경성의학전문학교 재학 중이던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만세운동에 참여했고 그해 5월 독립외교 활동을 위해 꾸려진 대한민국청년외교단에서 편집부장으로 활동했다. 이어 8월 만세시위 때 사용된 ‘경술국치 경고문’ 등의 선전물 인쇄를 담당해 일제의 수배 대상에 오르자 중국 상하이로 망명해 임시정부 일을 도왔다. 1920년 프랑스를 거쳐 독일로 간 이 지사는 하이델베르그대학에서 의학을, 뮌헨대학에서 철학과 동물학을 공부했다. 1927년 독일 뮌헨대학 재학 중 벨기에에서 개최된 ‘세계피압박민족결의대회’에 한국대표단으로 참가해 ‘한국의 문제’라는 소책자의 초안을 작성하고 결의문을 독일어 등으로 번역해 조국의 독립 의지를 세계에 알렸다. 1928년 이 지사가 유년 시절부터 독일 유학 과정을 회상하며 조선 후기부터 식민지 시대에 이르는 역사적 변혁기를 배경으로 집필한 ‘압록강은 흐른다’는 최우수 독문 소설로 선정되고 독일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 이 지사는 뮌헨대학 동양학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 1950년 3월 위암으로 별세했고, 독일 바이에른주 그래펠핑 신묘지에 안장됐다. 국가보훈부는 오는 16일 오후 1시 인천국제공항에서 이 지사가 이역만리에서 조국을 그리워하며 생전에 남긴 유필인 ‘평생 일편심’을 주제로 봉환식을 갖는다. 다음날 이 지사 유해는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된다. 보훈부는 이 지사의 유해 봉환을 위해 12일 독일 현지로 오진영 보훈정책실장을 단장으로 하는 정부 대표단을 보냈고, 이 지사의 파묘와 유해 봉환에 협조해 준 페터 쾨슬러 그래펠핑 시장과 관계자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고 유해봉환 절차에 들어간다. 강정애 보훈부 장관은 “압록강을 건너 조국을 떠나신 지 105년 만에 돌아오시는 이 지사께서 국민의 추모와 예우 속에 영면하실 수 있도록 만전을 기할 것”이라며 “국외 안장 독립유공자분들의 유해를 마지막 한 분까지 고국으로 모셔 국가를 위한 헌신을 끝까지 책임지도록 하겠다”고 강조했다. 해외 안장 독립유공자의 유해 봉환은 1946년 백범 김구 선생과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의사 등을 모셔온 것이 처음이었고 이 지사는 149번째다.
  • 독일에서 외교 독립운동이끈 지식인들…7월의 독립운동가 선정

    독일에서 외교 독립운동이끈 지식인들…7월의 독립운동가 선정

    국가보훈부는 독일에서 일제 식민통치의 냉혹한 현실을 알리고 독립운동에 매진한 황진남, 이의경, 김갑수 지사를 7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30일 밝혔다. 이들은 유럽 최초의 한인 유학생단체인 유덕고려학우회를 독일에서 결성해 각종 선전문을 제작, 배포하고 국제회의에 참석하는 등의 방식으로 일본의 침략행위와 한국의 상황을 세계에 알렸다. 1897년 함흥에서 태어난 황진남 지사는 1920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외무부 참사로 임명된 뒤 독일로 건너가 베를린대학에서 유학했다. 그는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일본에서 무고한 조선인들이 대량 학살되자 진상을 조사하고 ‘한인학살’과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제목으로 전단을 제작해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고 조선의 항일의지를 널리 알렸다. 또 재독한인대회가 열리자 ‘한국에서 일본의 유혈통치’라는 전단을 배포해 각국의 정부와 국민들이 조선의 독립을 적극 지지해 줄 것을 호소했다. 1899년 해주 출생인 이의경 지사는 이미륵이란 이름으로도 널리 알려진 작가로, 경성의학전문학교 재학 중 3·1운동에 가담해 ‘국치기념경고문’을 배포하는 등의 활동을 했다. 일제에 수배되면서 상하이로 망명한 뒤 독일 뮌헨대학에서 유학했다. 이 지사는 1927년 벨기에 브뤼셀의 에그몽궁에서 ‘세계피압박민족대회’가 개최되자 한국대표단으로 참가해 한국 내 총독정치 철폐, 한국의 독립 확보,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 승인 등을 제안, 결의문에 포함시켰다. 1894년 서천에서 태어난 김갑수 지사는 1915년 중국 상해로 건너가 조선인 유학생회를 이끌며 항일 운동에 몸담았다. 1921년 상해임시정부에서 파송하는 유학생 16명을 인솔해 독일 유학길에 올랐고, 뷔르츠부르크대학교에서 유학했다. 그는 1921년 베를린에서 결성된 유럽 최초의 유학생단체 ‘유덕고려학우회’의 첫 간사장을 맡았고, 기관지인 ‘회보’라는 잡지를 발행해 재독한인의 동향과 국내외의 소식을 알렸다. 보훈부는 “독립운동의 불모지와도 같았던 독일에서 국제외교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홍보물을 배포하고 국제대회에 참가해 독립에 대한 의지와 열망을 알린 재독한인학생들의 활동은 해외 독립운동사에 큰 이정표를 남겼다”고 평가했다. 정부는 이들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황진남(2019년)・이의경(1990년) 선생에게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김갑수(1993년) 선생에게는 건국포장을 각각 추서했다.
  • 이의경 애국지사 유해 독일서 봉환 추진

    국가보훈부는 광복 80주년을 계기로 독일 뮌헨 근교 그래펠핑시에 묻힌 소설 ‘압록강은 흐른다’의 작가이자 독립유공자인 이의경(필명 이미륵) 애국지사의 유해에 대한 국내 봉환을 추진한다고 12일 밝혔다. 강정애 보훈부 장관은 10일(현지시간) 페터 쾨슬러 독일 그래펠핑시장과 함께 이 지사의 묘소를 참배한 뒤 별도 환담을 갖고 유해 봉환 실무협의를 진행하기로 했다. 1899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난 이 지사는 1919년 3·1운동에 가담했고 대한민국청년외교단 편집부장으로 활동하다 발각되면서 일제의 감시를 피해 상하이로 망명했다. 1920년에는 독일로 망명해 항일 활동을 펼쳤고 광복 이후에는 뮌헨대 강사로 일했다. 1950년 사망해 그래펠핑 묘역에 묻혔다. 그가 1946년 독일에서 출판한 자전적 소설 ‘압록강은 흐른다’는 한국의 정신문화와 생활상을 서구에 알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보훈부는 올해 7월의 독립운동가로 이 지사를 선정했다.
  • 잊혀지지 않는 한국인 이미륵

    잊혀지지 않는 한국인 이미륵

    독립운동가로, 독일에서 작가와 교육자로 활동했던 이미륵(본명 이의경)을 기념하는 추모식 및 강연회가 독일 현지에서 열린다. 미륵은 그의 필명이다. 독일 뮌헨 이미륵기념사업회는 오는 23일 이미륵 추모식 및 기념강연을 연다고 12일 밝혔다. 추모식은 이미륵이 안장된 그라펠핑 시 프리드호프 묘역에서 열린다. 강연회는 뮌헨 이미륵한국문화공간에서 그의 삶과 휴머니즘에 기반한 작가 활동을 주제로 열린다. 1899년 3월 8일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난 이미륵은 경성의학전문학교를 다니다 1919년 3·1운동에 참가한 뒤 일본 경찰에 ?긴다. 그 뒤 그는 압록강을 건너 중국과 프랑스를 거쳐 1920년 독일에 정착했다. 당시 이미륵은 상해 임시정부 산하 비밀운동단체 대한청년외교단 편집부장을 맡고 있었다. 이미륵은 뮌헨대학에서 이학박사를 받은 뒤 같은 대학 동양학부에서 한국어와 동아시아문학, 동양철학 등을 강의했다. 1931년 소설 ‘하늘의 천사’라는 작품으로 독일 문단에 데뷔했고, 한국에 관련된 이야기 및 단편 ‘수암과 미륵’ 등을 발표했다. 1946년에는 자전적인 소설 ‘압록강은 흐른다’라는 독일어 소설을 발표해 큰 반향을 일으키면서 독일 문단에서 주목받는 작가가 됐다. 이 작품은 독일 교과서에도 수록됐고, 전쟁 직후 피폐했던 독일인들의 마음을 달래주고 치유해준 글로서 사랑을 받았다. 또 작품이 아름다운 독일어로 쓰였다는 평도 받았다. 당시 대부분 독일인들은 그의 작품을 통해 한국을 알게 됐고 한국에 대한 친근감을 느끼게 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1950년 위암으로 타계한 그는 1963년 대통령표창(독립운동공로),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등을 받았다. 기념사업회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그의 생애를 조망하는 행사를 준비해 왔다. 이석우 선임기자 jun88@seoul.co.kr
  • 독립운동 투쟁 기록, 영·독·일서 잇따라 나왔다

    독립운동 투쟁 기록, 영·독·일서 잇따라 나왔다

    김규식, 英 총리에 보낸 독립청원 서한 영문 국호 ‘Republic of Korea’ 첫 사용 1920년대 주독 日대사관 외교전문엔 獨 유학 한인들 독립운동 사찰한 정황 日 개인 소장 독립선언서 초판 원본도1919년 3·1운동 이후 대한민국 독립을 위해 해외 각지에서 분투한 지사들의 활동상을 한눈에 알 수 있는 사료들이 잇따라 발견됐다. 대한민국의 영문 국호 ‘Republic of Korea’를 처음으로 사용한 임시정부 외교문서에 이어 일본이 독일에서 한인 유학생들의 조직적 독립운동을 사찰했다는 정황도 드러났다. 주미 특파원 출신 언론인 모임인 한미클럽은 26일 미국 존스홉킨스대 제임스 퍼슨 교수의 도움을 받아 영국 국립문서보관소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1919년 5월 데이비드 로이드조지 당시 영국 총리 앞으로 전달한 외교문서를 발견했다고 밝혔다. 이 문서에 따르면 1차 세계대전 전후 처리를 논의한 파리 평화회의에 임시정부를 대표해 파견된 김규식 선생이 ‘대한민국’(Republic of Korea) 국호를 사용한 영문 독립 청원 서한을 1919년 5월 24일 로이드조지 총리 앞으로 전달했고, 영국 정부는 5월 30일 이를 접수했다. 청원 서한에는 국제사회가 새로운 대한민국과 임정을 한국민 전체를 대표하는 정통성 있는 체제로 인정해 줄 것과 임정이 3·1운동 등 일본에 항거한 독립운동의 결과로 창설됐다는 내용 등이 담겼다. 한미클럽이 발견한 다른 영국 외교문서에는 미 소재 대한인국민회 총회장인 안창호 선생이 1919년 4월 초 로이드조지 총리에게 전문을 보내 민족자결주의에 따라 한민족의 독립이 인정돼야 한다고 강조한 내용도 담겨 있다. 그러나 이 전문에 첨부된 영국 정부 문서에는 ‘일본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요청을 수용하지 말 것’을 건의하는 의견서도 첨부돼 있어 당시 냉혹한 국제질서를 보여 준다.일본 측이 1920년대 독일에서 한인 유학생들의 조직적 독립운동을 사찰했다는 문서도 처음으로 확인됐다. 독일 본대학 박희석 일본한국학과 교수는 1920년대 일본 외교전문 등을 분석한 결과 주독 일본대사관이 베를린 인근 소도시 포츠담의 건물에서 정기적으로 모인 한인들을 사찰한 사실이 드러났다고 25일(현지시간) 밝혔다. 이극로·이미륵 선생이 주축이 된 재독 한인 유학생 조직 ‘유덕고려학우회’는 1923년 10월 23일 베를린에서 집회를 열고 일본의 한인 학살과 식민지배에 항거했는데 이 건물에서 사전 모의를 한 것으로 분석됐다. 주독 일본대사가 1925년 일본 외무대신에게 발신한 전문에는 “베를린 근교 포츠담 알테 루이지엔슈트라세 85번지에 한인들이 모이는 곳이 있다. 지난번 관동대지진과 관련해 전단을 만드는 등 비밀작업을 하는 곳으로 보인다”고 적혀 있다. 한편 일본 아사히신문은 3·1운동 때 국내에 배포됐던 독립선언서의 초판 원본이 일본 나가사키의 한 개인 주택에서 발견됐다고 전했다. 이를 소장한 사람은 전직 교사인 사토 마사오(67)로 3·1운동 당시 평양에서 도자기 가게를 운영하던 그의 할아버지가 당국의 감시를 뚫고 몰래 일본으로 반입한 것으로 추정된다. 아사히는 “한국에서도 원본은 박물관과 개인 등 8장만 남아 있다”고 설명했다. 서울 하종훈 기자 artg@seoul.co.kr 도쿄 김태균 특파원 windsea@seoul.co.kr
  • ‘이미륵상’에 강수진 예술감독

    ‘이미륵상’에 강수진 예술감독

    강수진 국립발레단 예술감독이 한국과 독일 양국 관계 발전에 기여한 인물에게 주어지는 ‘이미륵상’ 수상자로 뽑혔다. 한독협회는 강 감독이 1986년 한국인 최초로 독일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에 입단, 30년간 한국을 대표하는 발레리나로 활동하면서 양국 문화예술 교류에 공헌한 점을 고려해 제9회 이미륵상 수상자로 선정했다고 7일 밝혔다. 시상식은 오는 10일 밀레니엄서울 힐튼 호텔에서 열린다.
  • [씨줄날줄] 제2 수에즈운하/서동철 수석 논설위원

    ‘우리는 홍해를 항행하였다. … 봉운이 나를 깨워 갑판으로 인도하였다. “시나이 산.” 그는 이렇게 말하고는 아주 먼 거리에 검푸른 빛으로 어렴풋이 보이는 산정을 가리켰다. 그날 밤, 우리의 배는 수에즈운하를 통과하였다. 큰 여객선은 모래 언덕 사이의 좁은 물길을 고생스럽게 간신히 지나갔다. 좌우로 쓸쓸한 풍경이 창백한 달빛 아래에 전개되었다. 천천히, 우리가 걷는 것보다도 별로 빠르지 않은 속도로, 휘황찬란한 창을 수없이 가진 배가 처참한 빈 사막을 미끄러져 갔다.’ 독일에서 문명(文名)을 떨친 작가 이의경(1899~1950)의 자전적 소설 ‘압록강은 흐른다’의 한 대목이다. 이미륵이라는 필명으로 더욱 잘 알려진 그는 경성의전 재학 시절 3·1운동이 일어나자 학생운동을 주도하다 중국 상하이로 망명한다.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일을 돕다가 유럽으로 건너가 1920년 독일에 정착하게 된다. 독일 문단에서 호평을 받으며 베스트셀러에 오른 이 소설에 묘사되어 있는 대로 당시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가려면 수에즈운하를 통과하는 것이 당연했다. 지중해의 포트사이드와 홍해의 수에즈를 잇는 길이 193.3㎞의 수에즈운하는 1869년 11월 17일 개통됐다. 수에즈는 고대 이집트 시대부터 홍해와 나일강을 잇는 교통의 요지이자 무역의 중심지 역할을 했던 유서 깊은 도시다. 반면 포트사이드는 수에즈운하 개발에 따라 새로 만들어진 도시로 포트(port)라는 유럽어식 표현에 이슬람 세계에서 흔한 사이드(Said)라는 인명이 더해진 지명이다. 수에즈운하는 프랑스인 페르디낭 마리 드 레셉스가 운하 개발권을 따내 1859년 4월 25일 착공했다. 드 레셉스에게 운하 개발권을 넘긴 사람이 당시 오스만제국의 이집트 총독 사이드 파샤였다. 1863년 세상을 떠난 그의 후계자 이스마일 파샤가 운하의 개통을 축하하는 뜻으로 이탈리아 작곡가 베르디에게 의뢰해 오페라 ‘아이다’가 탄생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수에즈운하로 아시아와 유럽 사이의 항로는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을 돌아갈 때보다 절반이나 짧아졌다. 부(富)의 보고인 아시아, 중동, 아프리카에 영향력을 확대하기 급급했던 유럽 국가들은 수에즈운하를 사이에 두고 수없이 충돌했다. 영국이 1875년 이집트 정부의 운하 지분을 사들인 이후 지배권을 오래 행사했지만, 1959년 이집트의 나세르 정권이 옛 소련의 지원으로 전격 국유화에 성공했다. 이집트가 제2 수에즈운하를 건설해 6일(현지시간) 개통식을 가졌다. 일부는 기존 운하와 나란히 새로운 운하를 뚫었고, 일부 구간은 폭과 깊이를 늘려 쌍방향 통행이 가능하도록 했다. 이집트 정부는 통행료 수입이 많이 늘어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또 어떤 갈등의 불씨가 될지는 짐작조차 할 수 없다. 이제는 중국까지 나서 운하의 지분을 확보하려 동분서주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서동철 수석 논설위원 dcsuh@seoul.co.kr
  • 잔치 잔치 열렸네~ 전국 곳곳 ‘책 잔치’

    9월 ‘독서의 달’을 맞아 책 잔치가 전국 곳곳에서 펼쳐진다. 2일 문화체육관광부에 따르면 지방자치단체, 도서관, 학교 등이 연대해 전국 각지에서 6700여건의 다양한 행사가 열린다. 풀뿌리 독서동아리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지역 독서활동가가 170여개 독서 활동에 참여하며, 인문학자와 함께 관련 지역을 탐방하는 ‘길 위의 인문학’ 프로그램이 전국 120여개 도서관에서 11월까지 진행된다. 지역주민이 관심을 둔 주제를 바탕으로 지역 대학과 전문가가 참여하는 ‘독서아카데미 강좌’가 11월까지 운영되며, 취약지역 주민을 위한 ‘문학 작가 파견 사업’도 전국 70개 도서관에서 열린다. 국립중앙도서관은 ‘압록강은 흐른다’의 작가 이미륵 전시회를 비롯해 디지털북페스티벌, 장애인 독서한마당 등 풍성한 행사를 마련했다. 13일부터 10월 27일까지 본관 1층 로비에서 열리는 ‘이미륵:독일이 사랑한 동양의 현인’ 전시회에는 도서관이 소장한 이미륵 개인 문고 자료를 중심으로 미공개 서신, 친필 원고, 유품, 친필 서예 작품 등 80여점이 전시된다. ‘디지털북 페스티벌 2013’(24~26일)은 최신 기술을 활용한 전자책 전시 및 체험을 통해 디지털 출판시장의 흐름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자리다. 30일에는 제3회 장애인 독서 한마당이 열린다. 각 지역에서는 ‘책 읽는 학교, 책 읽는 직장, 책 읽는 마을’(서울 성북), ‘보수동 책방 골목 책의 소리를 듣자’(부산 중구), ‘찾아가는 북콘서트 책 마실 가자’(경기 화성) 등의 다양한 독서프로그램이 마련된다. 오는 25일 서울 서대문 구립 이진아도서관에서는 독서문화진흥에 기여한 유공자를 발굴해 포상하는 ‘제19회 독서문화상 시상식’이 열린다. 파주 북소리(9월 28일~10월 6일, 파주출판도시 일대), 와우북페스티벌(9월 18~23일, 마포 홍대주차장 주변) 등의 대형 행사도 이어진다. 다음 달 23일에는 도서관, 출판, 독서 관계자 3000여명이 참여하는 제50회 전국도서관대회가 제주에서 열린다. 이순녀 기자 coral@seoul.co.kr
  • 이미륵상에 엄태정 명예교수

    한독협회(회장 김영진)는 15일 ‘제7회 이미륵상’ 수상자로 엄태정(74) 서울대 명예교수를 선정했다. 엄 명예교수는 한국의 조각을 독일에 소개함으로써 양국의 문화 교류 증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16일 주한독일문화원에서 시상한다.
  • [책꽂이]

    ●대동이탐구(서병국 지음, 한국학술정보 펴냄) 지나, 즉 중국에서 동방을 일컫는 동이에 대해 우리 스스로 소중화 의식에 사로잡혀 부정적인 인식에만 주목하고 있음을 비판하고 있다. 중국 스스로 동이를 자랑스러운 문화민족으로 서술하고 있으며 이러한 인식에 바탕을 두고 현재 동북아시아 평화정착에도 중요한 요인이 될 수 있음을 언급하고 있다. 3만 2000원. ●오래된 미래교육(정재걸 지음, 살림터 펴냄) 전통적인 교육모형으로서 ‘만두모형 교육관’을 주창하고 있다. 주자가 마음을 만두로 비유한 데에서 따온 것으로 공의(公義)를 위한 인성교육, 환경교육, 통일교육, 세계시민교육의 필요성과 방법론을 밝혔다. 1만 8000원. ●압록강은 흐른다(이미륵 지음, 전혜린 옮김, 범우 펴냄) 일제 강점기 독일로 망명한 학자 이미륵 본인의 자전적 소설로 독일은 물론 국내에서도 이미 숱한 판본으로 나왔다. 이 책에서는 원래 40개의 이야기 중 24개를 간추려서 실었다. 9000원. ●종이봉투 크리스마스(케빈 A 밀른 지음, 손정숙 옮김, 황소자리 펴냄) 크리스마스가 코앞이다. 하늘은 흰 눈을 만들기 위해 애쓰고 아이들은 울지 않으려 애쓰는 때다. 종이봉투를 쓴 소녀 카트리나와 주인공 몰러의 특별한 크리스마스 이야기다. 따뜻하고 푸근한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꿈꾸게 만드는 작품이다. 1만 1500원. ●야구공을 던지는 몇 가지 방식(하린 지음, 문학세계 펴냄) 야구가 문학화되는 과정과 그 결과물은 이제 더이상 새삼스럽지 않다. 하지만 가족의 구성원들이 투수의 구질 혹은 야구 선수들의 인생에 능청스럽게 빗대는 과정은 시인의 상상력과 무변한 사유의 일단을 확인시켜 준다. 물신숭배의 자본주의에서 피폐해지고 파편화되는 개인의 비참함이 해학적으로 다가오는 시편들이 곳곳에 있다. 7000원. ●거짓말하고 싶지 않았어!(아네테 노이바우어 지음, 김종민 그림, 윤혜정 옮김, 미래!아이 펴냄) 성장 과정과 아이들의 거짓말은 거의 불가분에 가깝다. 책은 덜컥 거짓말을 한 이후 친구들과의 관계 속에서 겪는 솔직한 고민들이 실감나게 그려져 있다. 어설프게 훈계하는 어른들은 없다. 9000원.
  • 디지털음원으로 만나는 임형주의 ‘압록강은 흐른다’

    디지털음원으로 만나는 임형주의 ‘압록강은 흐른다’

     한·독수교 125주년을 맞아 SBS와 독일 방송사 BR(Bayerischer Rundfunk)이 공동으로 제작한 SBS 창사특집 드라마 ‘압록강은 흐른다’의 OST가 디지털 음반으로 발매된다.  드라마 ‘압록강은 흐른다’는 일제의 탄압을 피해 망명한 뒤 따스한 인간애로 독일인을 감동시킨 고(故) 이미륵 선생의 일대기를 잔잔한 감동으로 그려낸 작품. 지난해 방영 이후 방송 요청이 이어져 올해 1월 신년특집으로 재방송됐고, 지난 6월에는 영화판으로 재편집돼 극장 상영을 하는 등 큰 호응을 얻었다. 내년에는 한국 드라마 최초로 독일에 수출되어 BR 방송을 통해 방영될 예정이다.  소니뮤직이 내놓은 이번 ‘압록강은 흐른다’ OST는 온라인 음원사이트를 통해 서비스되는 디지털 음반. 드라마 OST 음반으로는 이례적으로 전곡이 팝페라테너 임형주의 음악으로 채워졌다.  임형주는 “지난 2월 첫 미니앨범 ‘My Hero(마이 히어로)’을 내놓으면서 ‘압록강은 흐른다’의 OST 음반 1만장을 제작해 증정한 적이 있었다. 발매 2~3달 만에 전량이 다 팔리면서 팬들의 요청이 계속됐는데도 음원 서비스도 하지 못해 아쉬웠는데 디지털 앨범으로 발매할 수 있어 기쁘다.”고 전했다.  ‘압록강은 흐른다’ OST의 디지털 음반은 오는 16일부터 서비스된다. 인터넷서울신문 event@seoul.co.kr
  • ‘압록강은흐른다’, 무난한 시청률 잔잔한 감동

    ‘압록강은흐른다’, 무난한 시청률 잔잔한 감동

    SBS 창사특집드라마 ‘압록강은 흐른다’(극본 이혜선ㆍ연출 이종한)가 시청자들에게 감동을 선사하며 무난한 시청률을 기록했다. 15일 시청률조사회사 TNS미디어코리아에 따르면 지난 14일 3회 연속 방송된 ‘압록강은 흐른다’는 1부 7.1%, 2부 8.6%, 3부 7.0%의 시청률을 기록했다. 또 다른 시청률 조사회사인 AGB닐슨미디어리서치 결과에서도 1부가 7.9%, 2부가 10.4%, 3부가 7.8%의 시청률로 동시간대 방송된 다른 프로그램과 비슷한 수준으로 집계됐다. ‘압록강은 흐른다’는 한ㆍ독 수교 125주년을 맞아 SBS와 독일 방송사 BR이 공동으로 제작한 드라마로, ‘압록강은 흐른다’의 동명소설 원작자인 이미륵(본명 이의경 분)의 삶을 조명했다. 이미륵의 어린 시절과 청년 시절 이야기는 소설 ‘압록강은 흐른다’와 속편 ‘그래도 압록강은 흐른다’를 각색했고 소설로 쓰여지지 않은 그의 독일에서의 생활은 수필과 서간문, 신문기사, 주변 인물들의 인터뷰를 통해 픽션으로 재구성했다. 일제의 탄압을 피해 망명한 후 나치의 탄압 속에서도 따스한 인간애로 독일인을 감동시킨 이미륵의 일대기는 시청자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선사하기에 충분했다. 방송 후 ‘압록강은 흐른다’의 시청자 게시판에는 “오랜만에 보는 감동적인 드라마였다.” “자랑스런 인물의 일대기를 볼 수 있어 좋았다.” “시대의 아픔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였다.” 등 호평의 글이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2부 마지막 부분에서 화면이 빨리 감기는 방송사고가 발생해 시청자들에게 아쉬움을 남겼다. 사진=sbs 서울신문NTN 정유진 기자 jung3223@seoulntn.co.kr@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獨망명 작가 이미륵의 삶 재조명

    獨망명 작가 이미륵의 삶 재조명

    SBS는 소설가 이미륵(1899~1950)의 생애를 조명한 창사특집 드라마 ‘압록강은 흐른다’(극본 이혜선·연출 이종한)를 14일 오후 8시50분에 방송한다. 한·독 수교 125주년을 맞아 SBS와 독일 방송사 BR(Bayerischer Rundtunk)이 공동 제작한 이 작품은 1946년 발표된 이미륵의 자전적 소설 ‘압록강은 흐른다’와 후속 ‘그래도 압록강은 흐른다’를 토대로 했다. 이 작품에는 황해도 해주에서 출생한 이미륵이 경성의전 재학시절 임시정부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중국 상하이를 거쳐 독일까지 건너가게 된 파란만장한 인생사가 담겨 있다. 독일로 망명한 이미륵은 소설가로 변신해 전쟁으로 인한 인간성 상실의 문제와 동양의 문화, 사상을 작품으로 풀어냈다. 당시 독일 평론가들은 그의 문장을 카프카나 베른하르트에 견줄 만큼 간결하면서도 뛰어나다고 평가했다. 총 12억원의 제작비가 투입된 이 드라마는 3부작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에는 이미륵의 가족사와 성장기,2부에서는 그의 독일 탈출기와 정착기,3부는 독일에서 한국의 정서와 동양철학을 전파하는 원숙기를 그린다. 특히 주인공 이미륵 역을 위해 무려 4명의 배우가 출연해 눈길을 끈다.5살 미륵과 11살의 소년 미륵 역에는 SBS드라마 ‘왕과 나’에서 어린 연산군으로 출연했던 정윤석 군과 어린이드라마 ‘고스트팡팡’에서 열연한 노민우군이 각각 맡았다. 청년 미륵에는 SBS 7기 공채 탤런트 출신으로 ‘성녀와 마녀’, 영화 ‘사랑따윈 필요없어’,‘그놈 목소리’등에 출연한 연기자 최성호가 캐스팅됐다. 그리고 중년 미륵에는 현재 10여년 가까이 독일에서 활동 중인 오페라가수이자 배우인 우벽송이 맡아 열연을 펼친다. 이밖에도 신구, 나문희 등 중견 연기자와 귀화 독일인 이참 등 독일 배우들이 참여했다. 드라마 제작진은 지난 7월 초 독일과 미국에 있는 배우들을 화상 오디션으로 선발한 뒤 서울과 인천, 경남 하동, 전남 구례, 전북 고창 등과 독일 현지 촬영 등 총 4개월간 촬영했다. 독일에서는 2009년 BR방송에서 전파를 탈 예정이다. 연출은 ‘관촌수필’,‘화려한 시절’,‘토지’ 등을 지휘한 이종한 PD가 맡았다. 이PD는 “이미륵이 인종이 다르고 언어가 다른 사람들을 감동시킨 핵심을 알려주고 싶었다.”면서 “그의 파란만장한 인생과 전쟁 속에 숨은 휴머니즘 등을 조명하고 싶다.”고 밝혔다. 이은주기자 erin@seoul.co.kr
  • 정운택, SBS 창사특집극 ‘노개런티’ 특별출연 화제

    정운택, SBS 창사특집극 ‘노개런티’ 특별출연 화제

    배우 정운택이 SBS 창사특집극 ‘압록강은 흐른다’(극본 이혜선ㆍ연출 이종한)에 노개런티로 특별 출연해 화제다. 정운택은 출연 이유에 대해 “학창시절 소설 ‘압록강은 흐른다’를 감명 깊게 읽었다.”며 “언젠가는 이 작품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감독님에게 출연 제의를 받고 바로 그때가 지금이라고 생각이 들어서 출연료에 관계 없이 출연을 결심하게 됐다.”고 전했다. 최성호ㆍ나문희 주연의 ‘압록강은 흐른다’는 한독수교 125주년을 맞아 작가 이미륵(1899~1950)의 생애를 다룬 특집 드라마로 오는 11월 경 SBS에서 3부작으로 방송될 예정이다. 한편 정운택은 2001년 영화 ‘친구’로 데뷔해 2002년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신인연기상을 수상한바 있다. 이후 영화 ‘보스 상륙 작전’ ‘두사부일체’ ‘투사부일체’ 드라마 ‘로비스트’ 등에 출연하며 인상깊은 연기를 선보이고 있다. 사진=JJ패밀리엔터테인먼트 서울신문NTN 정유진 기자 jung3223@seoulntn.co.kr@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열린세상] 괴테의 독일에 압록강이 흐르게 한 이미륵/최창일 현대시인협회 이사·시인

    [열린세상] 괴테의 독일에 압록강이 흐르게 한 이미륵/최창일 현대시인협회 이사·시인

    밤비행기를 타고 우린 낯선 도시 뮌헨으로 갔다. 한국문인협회(이사장 김년균)가 주관하는 해외 심포지엄과 2008년 해외 문학상을 시상하기 위해서다. 해외문학상은 조국을 떠나 해외에서 모국어인 한국어로 작품을 쓴 이에게 준다. 창작활동을 해온 우수한 동포 문인을 발굴, 상을 드림으로써 그간의 노고를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함이다. 제 17회째인 해외문학상 수상자는 ‘배우수업’의 강유일 소설가다. 강유일은 독일의 라이프치히 대학교에서 독일문학연구소 문학창작과에서 강의하고 있다. 그는 2005년 ‘피아노소나타 1987’과 ‘배우수업소설’이 독일에서 번역되어 출간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상을 주러 간 협회 일행은 뜻밖의 행운을 만났다. 뮌헨에서 두어 시간 남짓한 거리에 ‘그래도 압록강은 흐른다’의 작가 이미륵 박사가 묻힌 묘를 안내하겠다는 가이드를 만난 것이다. 1946년 전후 독일 문단을 놀라게 하였던 이미륵의 자전적 소설 ‘그래도 압록강은 흐른다’는 남부 독일 언론의 이슈가 되어 100여개의 신문이 그의 작품을 소개했다. 이미륵은 가장 한국적이고 가장 세계적인 작가로 한국의 문학과 세계간의 다리를 놓은 온유한 중재자로 평가받고 있다.50년이 지난 지금까지 작품이 꾸준히 호평 받으며 사랑받고 있다. 그의 이야기들은 우리가 잃어가고 있는 추억이다. 역사이며 살아 가는 생활이다. 우아하고 따뜻한 인간애가, 순수함과 고결함으로 숨 쉬고 있다. 이런 李義景(이미륵의 본명)의 묘소를 안내받게 된다. 1899년에 황해도에 출생하여 1951년에 독일에서 영면한 작가 이미륵. 청년 이미륵은 일제하의 조국의 독립운동에 나선다. 일경에 쫓겨 안중근 의사의 조카 봉준씨의 소개로 마르세유를 거쳐 1920년 독일에 망명하게 된다. 하이델베르크에서 의학을 전공한다.1928년 뮌헨 대학에서 동물학 박사학위를 받는다. 뮌헨 대학 동양학부에서 강의를 하게 된다. 사진 촬영에도 일가견이 있던 그는 독일의 여러 신문에 한국의 전통적인 정서가 담긴 사진을 기고한다. 낯선 동양의 문화를 전파 하는데도 힘을 쏟는다.1951년 3월20일에 51세의 나이로 생을 마친다. 그가 묘지에 묻히던 날, 독일 친구들은 이미륵 박사가 평소 들려준 한국말로 애국가를 불러 주었다. 타국에서의 죽음이었지만 3백여명의 조문객이 모여 성대한 장례식을 치러 준다. 그가 처음 묻힌 장소는 눈이 녹지 않는 공원묘지 외곽 음산한 곳이다. 그의 묘소를 관리하고 있는 교포인 송준근 옹에 의하면 한국 정부와 교포가 뜻을 모아 공원의 정원이 널찍이 보이는 양지바른 곳으로 1995년 이장을 했다. 독일인이 묻히는 평수보다 세 배의 넓이로 묘소를 만들었다. 사연 많게 자식들도 모두 고인이 되었다. 위암으로 죽음을 앞둔 이미륵 박사를 돌본 이는 독일인 여자 친구 에파 크라프트란다. 그의 현재 나이는 94세. 그는 한국인의 방문이 있으면 매우 정중하게 대해 준다. 마치 이미륵 박사를 대하듯 말이다. 그가 얼마나 인격자로 살았는지에 대한 일화가 있다. 전후 독일 경제 사정은 매우 어려워 시민들은 배급을 받아서 생활하였다. 그가 받은 보급표에 한 장이 더 딸려 들어 온 것을 발견하고 곧바로 반환한다. 이런 이 박사를 두고 당시 신문은 미담으로 소개하였다. 가짜 보급표까지 나돌던 궁핍한 시기에 조선의 선비정신을 유감없이 보여 주었다. 이 박사는 망명과 나치 출현의 2차대전이 일어난 충격 속에서 삶에 대한 봉사를 놓지 않고 살아갔다. 독일인들은 그를 두고 ‘자랑스러운 한국의 위대한 아들’로 부르고 있다. 이 박사가 기거한 옛 집터의 독일인 집주인은 기념조형물과 동판을 통해 한국의 옛 문인을 기념하고 있다. 괴테의 독일, 한국인 이미륵 박사의 빛의 문학이 지금도 숨 쉬고 있다. 최창일 현대시인협회 이사·시인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6)백제인의 사랑 질표율사(하)

    삼국시대 후반 백제는 신라와의 지루한 전쟁으로 몹시 불우한 시대를 이어갔다. 신라는 백제를 넘어서 당나라와의 보다 적극적인 외교를 통해 국력을 키우고 싶어했고,그러자면 백제는 신라에 가장 골치 아픈 장애물이 되었다.두 나라의 갈등은 피할 수 없는 운명처럼 보였다.신라의 집요한 침략전쟁 속에서 백제는 좌절하지 않기 위해 미륵신앙을 껴안았다.단순한 전쟁 회피나 불안을 달래기 위한 방편으로 서가 아니라 신라의 군사 공격을 꺾어 응징하는 힘과 근원적으로 죽고 죽이는 살상전이 없는 세계에 태어나 살고 싶다는 구원을 향한 절절한 신앙이었다. 미륵신앙은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백제인들은 백제 땅이 미륵부처가 강림하실 약속의 땅으로 선택되기를 희망하면서 미륵사를 크게 짓고 미륵부처가 오시기를 기다렸다.미륵사가 삼국시대를 통하여 가장 규모가 큰 사찰이었음은 백제인들의 그같은 소망이 투영된 백제인의 마음으로 이룩한 신앙의 결정체였다. 미륵신앙은 100년이 넘도록 뜨겁게 달아올랐다.온 나라가 미륵신앙의 성지였다. 이같은백제의 미륵신앙을 유심히 살펴보던 신라가 뒤늦게야 슬며시 미륵사상을 배워가더니 백제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미륵신앙을 현실화시키기 시작했다. ●신라에 정복 뒤 좌절빠진 백제 유민 화랑도와 미륵사상을 연결시켜 현실적인 국력으로 바꿔낸 것이다.미륵신앙을 표방하는 사찰을 짓기도 했지만 미륵사상이 현실화된 화랑도를 통하여 군사력을 극대화시킨 신라는 그 힘을 바탕으로 삼아 백제를 정복해버렸다. 어이없게도 신라의 지배 아래로 떨어진 백제는 그들의 염원으로 이룩한 미륵성지들과 함께 소망의 땅에서 절망의 땅으로 쫓겨난 셈이 되고 말았다. 좌절감은 크고 깊었다.이제 백제인들은 백제 유민이란 말로 바뀌는 가혹한 운명에 놓였다.그 때부터 처절한 저항의 날들이 시작되고,원한 또한 깊어졌지만 한번 뒤바뀐 운명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신라는 아주 천천히 백제 땅과 사람을 신라의 제도 안으로 끌어들여 갔다.먼저 백제의 역사를 신라기년(新羅紀年)으로 고쳐 신라기(新羅紀)에 삽입시켰다.백제를 정복한 지 100년이 가까워진 757년(경덕왕 16) 진표가 태어나 자란 고향의 땅 이름을 원래 지명인 두내산현에서 만경(萬頃)으로 바꾸었다.이는 정복지 백제에 대한 신라의 완전한 자신감의 표현이기도 했다.진표는 이제 만경들판에서도 그치지 않는 백제유민들의 원한과 저주의 나날들이 미륵신앙의 힘으로 해원되어 신라와의 상생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을 느꼈다.이같은 격변속에서 진표는 아버지와 진지한 의논 끝에 금산사(金山寺)의 숭제(崇濟)법사를 의지하여 출가하기로 결심했다. ●유민들 고난 해결위해 ‘망신참회법’ 수행 숭제법사 또한 백제 유민으로서 일찍 당나라 정토종을 이끌던 선도(善導·613∼681)화상 법맥을 이어온 스님이었다.이제 진표는 스님이 되어 숭제법사의 가르침을 받기 시작했다.숭제법사는 진표스님께 점찰선악업보경(占察善惡業報經)을 주면서 각별한 수행을 권했다.점찰경이라고 부르는 이 경전은 말법시대(末法時代)가 되면 불교를 신앙하는 이들이 많은 어려움과 장애에 부닥쳐 수행에 곤경을 겪게 되고,산란한 마음때문에 갈피를 잡지못할 경우가 많게 된다고 했다.이때 숙세의 선악업보가 현재의 고락길흉을 점찰하여 참회하고 반성하면서 마음의 안락을 얻도록 하는 방법을 말하고 있다. 숭제법사는 진표스님에게 계법(戒法)을 지니고 미륵과 지장보살에게 참회하여 직접계법을 받아 세상에 널리 전할 것을 당부했다. 진표스님은 백제 유민들이 100년 가까이 겪고 있는 그 고난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과 능력을 구하기 위해 17년 간의 긴 고행에 돌입했다.육신의 고통을 잊어버리는 수행법의 하나인 망신참회법(亡身懺悔法)을 선택했다.육신을 버리지 않고는 깨달아지지 않는 수행법이었다.백제 유민들이 한 세기토록 겪은 육신의 고통을 자신의 한 몸으로 다 받아내겠다는 각오였다. 참회의 참(懺)은 산스크리트 Ksama의 음역으로 용서를 비는 것,뉘우치는 것을 뜻한다.내가 범한 죄를 부처 앞에서 고백하는 것,회개한다는 것인데,원시불교에서 비구는 자기가 범한 죄를 석가세존 또는 장로비구에게 고백하여 심판받도록 되어 있었다.비구는 보름마다 모여서 우포자타(uposatha·포살·布薩)라는 의식을 행하고,계율의 조목을 읽힐 때 마다 죄가 있을 때는 스스로 말하고 일어서야 했다.이렇듯 대승불교에서는 자기의 죄를 인정한 자는 모든 부처 앞에 참회하고,온몸을 던져 진리에 귀의하는 맹세를 하며,부처의 자비심으로 모든 중생의 잘못을 거두어주는 은혜를 입음으로써 죄의 공포에서 해방된다고 했다. 이같은 의식의 궁극 목표는 죄의식이 전혀없어진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라 하였다. 진표스님이 이같은 망신참회법을 선택한 것은 직접 자신이 진리를 체험하여 확신하기 위해서였다.그런 뒤 백제 유민들에게 참회의 필요성을 말하고,참회를 통하여 진정한 해방을 누리고 자유를 숨쉬고 사는 삶을 권하려는 것이었다.육신의 고통을 극복하는 참회법은 일찍이 석가모니 시대부터 있어왔다.하루에 한 끼,이틀에 한 끼,사흘에 한 끼를 먹거나,나무 열매나 꽃으로 요기를 하거나,한 다리를 들고서 있거나,진흙 먼지 속에 누워있거나,가시덤불 위에 누워있거나,물과 불 위에 누워있거나,어깨쭉지의 살에 구멍을 뚫고 그 속으로 끈을 밀어 넣어 나무가지에다 묶어놓고 피를 흘리며 매달려 있는등의 육신을 고통속으로 몰아 넣어 그 고통을 잊어버림으로써 위대한 정신을 깨달으려는 수행법이었다. 진표스님의 망신참회법은 이들 전통적 수행법보다 훨씬 더 처절했다. 760년(경덕왕 19) 쌀 20말을 쪄서 말린 것을 가지고 변산의 부사의방(不思議房)에 들어가면서 백제 유민의 고통을 구원할 수 있는 깨달음을 구하지 않고는 살아서 그 방문을 걸어나오지 않을 것이라는 다짐을 했다. 미륵부처 앞에서 부지런히 계법을 구했다.대부분의 출가승려들이 해온 전통적 수행법에 따른 정진이었다.그러나 3년이 넘도록 미륵불은 아무런 대답도 주지 않았다.그때 진표스님은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경전에 쓰여있는 수행법에 따라 참회하는 것만으로 백제 유민들의 그 오래고 참혹한 고난이 해결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신라가 백제를 정복한 것은 땅 위에 백제 한 나라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국가가 서로 경쟁하면서 살아가는 것을 인정할 때는 피할 수 없는 약육강식의 세상 일이라고 볼 수밖에 없었다. ●우주 모든 것의 상관성 깨달아 진표스님이 망신참회법 수행을 결심한 것은 신라의 백제 침공을 꾸짖고 회개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그보다는 백제인들이 한 세기가 넘도록 미륵신앙을 지니고 혼신껏 기도했지만 그에 대한 회답이 신라의 지배 아래서 굴욕적인 삶을 살도록 한 것이라면,왜 그래야 했는지를 알고 싶었으며,장차 백제유민들은 어떻게 살아야 원한과 저주의 불길속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그 해답을 얻기 위한 것이었다. 진표스님은 자신의 고통이 모든 백제유민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으며,그 끈은 모든 신라 사람들에게까지 이어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주에서 홀로 태어날 수 있는 것은 없고,태어나 홀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모든 것은 모든 것과 관계있다는 깨달음이 진표스님의 확신으로 차올랐다.백제인들의 고통이 소멸되지 않고는 자신이 결코 안락할 수 없는 이유를 깨닫게 된 것이다.이제 남은 문제는 백제인들의 고통을 없애줄 방법을 터득하는 일이었다.그 방법은 수행자 자신의 죄의식 없는 상태에 도달하는 참회법으로는 불가능한 차원에 닿아야만 깨달을 수 있음을 알고는 육신을 버리기로 했다.온 우주는 마음의 문제이지 육신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비장한 결심으로 21일 동안 육신을 던져넣는 참회수행을 단행했다.바위 아래로 몸을 던졌다.푸른 옷을 입은 동자가 나타나 진표스님을 안아 바위 위에 올려 놓고 사라졌다.다시 절벽 아래로 몸을 던지는 수행을 강행했다.3일째 되자 팔과 다리가 부러져 일어서 걸을 수도,물건을 쥐기도 어려웠다.이제는 온몸을 굴려 언덕 아래로 떨어지는 참회수행을 계속했다.오직 마음으로 미륵을 불러 대답을 원했다.차츰 고통을 잊는 상태로 몰입했다.이제 온전한 것은 머리 뿐이었다.머리 마저 깨뜨려버림으로써 살고죽는 불편함마저 초월하고 싶었다.7일째 되던 날 밤 지장보살이 나타나 팔과 다리를 고쳐주고,가사와 발우를 전했다.수기(授記)가 내려진 것이다.그때부터 새로운 수행을 시작했다.21일을 다 채웠을 때 그토록 갈망했던 고통을 치유시키는 지혜가 터득되었다.금산사로 다시 돌아온 것은 29세 때였다.금산사에다 청동으로 빚은 미륵장육상을 모시고 그 아래서 외치기 시작했다.사자후(獅子吼)를 토한 것이다. ●신라 지도자들에도 참회 설파 만경들에서 농사짓던 이들이 미륵불을 기다렸지만 미륵불이 오지 않는 까닭을 말하면서 진정한 미륵을 만날 수 있는 비법을 설파했다.백제인의 마음속에는 신라를 향한 증오와 저주로 꽉 차있기 때문에 미륵의 소식이 와닿지 않는다고 했다.이미 미륵은 와 있는데도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한다고 했다.증오와 원한과 저주로 피흘리고 죽이는 일이 그치지 않는 한 미륵은 영원히 만날 수 없다고 설득했다.신라를 용서할 수 있는 것은 백제인들뿐이며,백제인의 용서를 통해서만 신라가 나라다울 수 있고,신라가 나라다워야만 백제인의 마음에서 증오와 저주가 사라질 수 있으며,그래야만 공존과 상생을 이룰 수 있다고 절규했다. 신라의 지도자들을 향해서도 외쳤다.백제인을 능멸하고,빼앗고,죽이는 통치법으로는 신라도 끝없는 고난속으로 빠져들 뿐이며,오만과 편견과 무력으로 이룬 한 때의 번영이 더 큰 재앙으로 변하는 것을 막으려면 참회하는 길뿐임을 설파했다. 신라인의 참회가 있어야만 백제인과 공존할 수 있음을 타일렀다.마침내 신라의 왕과 귀족,지도자들이 진표스님의 법문에 무릎을 꿇었다.진정한 통일신라는 그 때부터 시작되었다.진표스님의 온 몸을 던진 백제 사랑은 한 시대의 고난과 불행을 극복해 내는 위대한 지도자의 참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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