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이란 전쟁
    2026-04-11
    검색기록 지우기
  • 정책대안
    2026-04-11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11,291
  • 조목조목 짚어 본 통일 이후 ‘통합’

    이명박 대통령이 지난해 광복절 치사에서 평화통일 3단계와 통일세 구상을 주요 대북 메시지로 제시한 이후 각계에서 통일에 대한 논의가 터져나왔다. 또 얼마 전 ‘후계자’ 김정은의 급부상으로 촉발된 북한의 정정 불안 때문에 통일이 목전에라도 다가온 듯 철저한 준비를 요구하는 목소리도 높았다. 하지만 활발하게 전개된 논의에 비해 통일 이전의 ‘통합’이나 이후의 구체적인 전개 방식 등에 대해서는 아직 체계적인 접근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또 관념적 시각에서 통일 문제를 보거나, 정치·경제 중심의 좁은 잣대로만 논의가 전개되는 경향도 없지 않았다. ‘통일 이후 통일을 생각한다’(박명림 외 6명 지음, 푸른역사 펴냄)는 통일의 준비 과정과 통일 이후 발생될 문제들을 조목조목 짚고 있다. 책은 남북통일이 ‘결론’이 아닌 통일 문제의 ‘시작’이란 인식에서 출발한다. 이를 위해 정치·경제는 물론 교육과 언어, 음악, 문학 등 다양한 영역을 넘나들며 통일 이전과 통일, 그리고 그 이후를 대비하는 구체적인 방안을 모색한다. 박명림 연세대 지역학 협동과정 교수는 “통일이 온전했던 이전으로의 ‘회귀’가 아닌 60여년간 독자적으로 생존해 온 두개의 한국을 단일국가로 새롭게 ‘건설’하는 과정”이라며 “남북이 ‘통합’에 대한 준비 없이 제도통일 과정에 돌입하면 극단적인 사회재분열로 연결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김영윤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남북한의 경제 통합 과정에서 나타날 수 있는 문제점을 독일 등 외국의 경험을 원용해 살펴보고, 통일을 위해 필요한 비용과 구체적인 조달 방법 등에 대한 방안을 찾는다. 독일이 동·서독 간 화폐 교환비율을 1대1로 상정한 결과와 통일 이후 발생한 소유권 분쟁, 동독의 시장경제체제 전환 과정 등을 우리의 상황과 등치시켜 비교·검토한다. 임홍빈 서울대 명예교수는 남한의 ‘한글맞춤법’과 북한의 ‘조선어규범집’ 등 두 체제의 어문 규정을 통해 분단 이후 남북한 언어의 이질화 과정과 남북 언어의 현황을 점검한다. 아울러 통일 한국에서는 남한을 기준으로 어문 규정을 수립할 것을 제안한다. 김재용 원광대 국문학과 교수는 먼저 북한 문학계의 현실을 이해한 뒤, 이를 바탕으로 남북 문학 교류를 전개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민경찬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교수도 남북 음악계의 이질성이 향후 ‘문화전쟁’으로 비화될 위험성이 있다고 경고한다. 북한의 1-4-6-4의 기간학제와 남한의 6-3-3-4 기간학제 등 교육체계의 이질성도 문제다. 이종재 서울대 명예교수는 남과 북이 ‘통합’을 이루기 위해서는 먼저 북한의 교육이 당성, 혁명성, 계급성을 구비한 사회주의식의 인재양성에서 벗어나 보편적 전인교육으로 전환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1만 7500원. 손원천기자 angler@seoul.co.kr
  • 총성 없는 문화전쟁 시대 소수자들의 외침을 듣다

    총성 없는 문화전쟁 시대 소수자들의 외침을 듣다

    오레오, 리츠 등 식료품을 생산하는 기업 나비스코의 사장은 우리 모두가 (아마도 나비스코가 가공한)같은 음식을 먹는 동질적 소비의 세계가 오기를 기대한 적이 있다. 반면 맥도널드 햄버거는 자기 고유의 메뉴를 지역 문화의 기호와 욕구에 들어맞도록 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맥도널드는 유럽에서는 포도주와 맥주를, 일본에서는 데리야키 버거를, 중국에서는 쌀 버거를 제공하고 있다. 맥도널드 햄버거는 세계 전역에 단지 빅맥만을 공급하지 않는 것이다. 세계가 통합되는 전지구화(globalization)는 문화적 동질화보다는 오히려 이질화를 증대한다는 주장이 있다. 만일 지구 상에 장소와 문화 간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과연 사람들이 여행을 하려 하겠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미국의 비판적 지리학자 돈 미첼 시러큐스대 교수는 여기서 맥도널드 햄버거가 쌀 버거를 제공하는 것이 문화적 다양성을 보존하는 데 크게 이바지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권력은 누구에게 귀속되어 있느냐고 질문한다.돈 미첼의 ‘문화정치 문화전쟁’(류제헌 외 옮김, 살림 펴냄)은 문화를 논하는 데 빠질 수 없는 문화정치와 그것이 표면화된 문화전쟁을 통해 문화지리학이라는 학문에 비판적으로 접근하는 책이다. 문화의 지리적 분포에 대해 연구하는 학문인 문화지리학은 전통적으로 정치와는 선을 그어 왔지만 저자는 “문화의 또 다른 이름은 정치”라는 이유에서 문화지리학이 문화정치에 개입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한다. 미국의 대표적 진보 지식인인 미첼이 책에서 궁극적으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배려다. 자본 세력은 국경을 초월해 부(富)를 자기들 맘대로 좌지우지한다. 상대적으로 사회적 소수자들은 점점 더 절박한 생존의 문제로 내몰리고 있다. 문화전쟁은 사회적 소수자들이 있는 곳이면 어디서든 일어날 수 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동성애자,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흑인,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사람, 독일의 유대인, 보스니아의 평화주의자, 밤 10시에 지하철에 홀로 서 있는 여인, 땅이 없는 농민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경계 짓고 확정 짓기 위해 투쟁한다. 문화전쟁은 영토와 경제력, 군사력을 기반으로 한다는 점에서 군사전쟁과 다를 바 없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샌프란시스코에서 해마다 열리는 ‘게이 해방의 날’에 동성애자들은 거리행진 등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적극적으로 알리고 공적인 공간에서 자신들의 행위가 정당화될 수 있도록 투쟁한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에서 진행된 전무후무한 교외지역의 팽창은 남성 근로자를 중심으로 하는 핵가족을 전형적인 가족의 형태로 만들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 북미, 유럽, 호주 등에서 이뤄진 교외 주택지구의 급성장은 아내와 엄마를 집 안에 묶어두고 의도적으로 자녀 등하교, 가족을 위한 장보기, 집 안 청소 등의 주된 제공자로 고정하려고 고안된 것이었다. 책은 문화지리학이란 학문을 다룬 학술서다. 하지만 일상생활에 실재하는 문화전쟁의 사례들을 통해 눈에 보이는 문화의 역학관계를 확인하는 것도 자못 흥미진진하다. 3만원. 윤창수기자 geo@seoul.co.kr
  • [김문이 만난사람] 서울올림픽 ‘굴렁쇠 소년’ 윤태웅 
7일 뮤지컬 ‘오! 당신이 잠든 사이’에 도전

    [김문이 만난사람] 서울올림픽 ‘굴렁쇠 소년’ 윤태웅 7일 뮤지컬 ‘오! 당신이 잠든 사이’에 도전

    #상황1 감격의 장면을 떠올린다. 1981년 9월30일 독일 바덴바덴. 국제올림픽위원회(IOC)의 사마란치 위원장이 전 세계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세울 코레아(Seoul, Korea)!’라는 역사적 단어를 내뱉었다. TV로 실황중계를 지켜보던 대한민국 국민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서로 부둥켜안으며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바로 이 시간. 서울 강남에서는 한 남자 아이가 탄생했다. 아이는 이 같은 국가적 경사를 알기라도 하듯 그 누구보다도 ‘응애 응애’ 하는 울음소리가 힘차고 씩씩했다. #상황2 1988년 9월 17일 서울 잠실의 올림픽 메인스타디움. 태권도 격파 시범이 끝나고 잠시 술렁일 때 8살 된 한 어린이가 들어섰다. 까만 반바지에 하얀 반팔 티셔츠, 빨간 챙이 달린 하얀 모자를 쓴 어린이는 굴렁쇠를 굴리며 운동장 한가운데로 나아갔다. 굴렁쇠가 쓰러지면 어떻게 하나. 현장의 10만 관중은 물론이고 TV를 지켜보던 전 세계인의 숨조차 멈추게 했다. 잠시 후 어린이는 운동장 한가운데에서 손을 흔들며 활짝 웃었다. 그제서야 가슴 쓸어내리던 손으로 모두 기립 박수를 쳤다. 어린이는 다시 굴렁쇠를 굴리며 앙증맞게 사라졌다. #상황3 2011년 3월 29일. 서울 대학로 예술마당. 한 청년의 눈빛이 가슴 시리도록 촉촉하게 젖어 든다. 이어 애절하게 노래를 부른다. ‘만남이 달콤함만은 아니듯/이별이 아픔만은 아니듯/사랑에 머물 수는 있어도 절대로 갇히면 안 돼요/열려진 문으로 나가요 무지개를 좇으려 하지 말고/괜찮아 울어도 좋아요/그대를 아껴요 그대가 먼저야.’ 생김새로 보아 여인의 미성일 것 같았지만 남성 특유의 바리톤 음성으로 강한 흡인력을 내뿜는다. 윤태웅(30)씨. ‘영원한 굴렁쇠 소년’으로 통한다. 서울 올림픽 개막식 당시 굴렁쇠 굴리기를 통해 ‘인류의 화합과 번영, 평화’를 전 세계에 전하는 ‘찐한 장면’을 연출했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서울은 세계로, 세계는 서울로’라는 영원히 잊지 못할 감동의 도가니를 만들어 냈다. 그가 굴렁쇠를 굴리게 된 인연은 ‘상황1’에서 보듯 1981년 9월 30일 올림픽 개최지로 선정된 바로 그날 태어난 2400명 중 한 명의 호돌이로 뽑혔던 것. ●오디션 거쳐 주인공 ‘닥터 리’ 발탁 올림픽 이후 그는 평범하게 지냈다. 그러다 2002년 6월 서해교전 당시 연평도에서 해병으로 군복무 중인 사실이 알려졌다. 이어 2006년 1월 ‘19 그리고 80’에서 중견배우 박정자씨와 호흡을 맞추며 연극 배우로 데뷔해 화제가 됐다. 그가 이제는 뮤지컬 무대에 도전한다. 오는 7일부터 10월 초까지 대학로 예술마당에서 ‘오! 당신의 잠든 사이’의 주인공 ‘닥터 리’라는 새로운 모습으로 변신하게 된다. 윤씨가 뮤지컬 데뷔 무대로 선택한 ‘오! 당신이 잠든 사이’는 공연계의 ‘미다스 손’이라고 불리는 장유정 연출의 작품이다. 2005년 초연 이후 1800회가 넘게 무대에 올렸을 정도로 대학로의 장수 뮤지컬로 손꼽힌다. 지난 29일 대학로에서 한창 연습 중인 윤씨를 만났다. 뮤지컬 배우로 데뷔하는 소감이 어떨까. 비교적 차분하면서도 조용한 말투로 대답한다. “연기를 시작하면서 뮤지컬 배우에 대한 꿈을 갖고 있었고 언젠가는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때마침 오디션을 한다기에 용기를 내고 도전했지요. 처음이라 그런지 잘해야겠다는 욕심과 부담도 동시에 있고 또 한편으로는 두려움도 있습니다.” ‘오! 당신~’에서 그는 다양한 캐릭터를 맡게 된다. 우선 ‘닥터 리’ 역은 가톨릭 무료 병원의 유일한 훈남 의사로 외로운 환자들의 몸과 마음을 함께 치료해 주는 인물이다. 병원장 ‘베드로 신부’와 시종일관 부딪치지만 누구보다 마음이 따뜻한 캐릭터로 감동을 준다. 또한 환자들의 사연이 하나둘씩 펼쳐질 때마다 카사노바, 6·25 전쟁 속 우체부 소년, 동네 양아치 등 다섯 가지의 캐릭터를 소화하게 돼 그의 활약상이 기대된다. “이 작품은 병원에서 어느 날 반신불수 환자가 사라지면서 시작되는 내용이지만 미스터리와 드라마, 로맨스 등이 함께 어우러지면서 코믹과 감동을 선사합니다. 그동안 이 작품을 보신 분도 많겠지만 새로운 캐스팅으로 다른 감동을 맛볼 수 있을 겁니다.” 뮤지컬이란 연기와 노래, 춤이 함께 뒷받침돼야 관객들에게 감동을 선사할 수 있는 장르다. 그는 지난 2006년 연극 데뷔 때에도 오디션을 통해 무대에 올랐고 연극계 대선배인 박정자씨와 연기를 하면서 나름대로의 실력을 선보였다. 또 현재 출연 중인 tvN ‘롤러코스터’에서도 열연하고 있다. 그렇다면 노래와 춤은? “단기간 노래(성악) 레슨을 받으며 준비를 했지만 역시 어렵다는 것을 새삼 느끼고 있습니다. 부족한 점도 발견되고 있고, 또 그럴 때마다 깨닫고 배우면서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춤이야, 운동신경도 남보다 뛰어나고 어느 정도의 끼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작품의 연출자는 윤씨에 대해 “놓치기 쉬운 감정선까지도 잡아내면서 캐릭터의 특성을 풍부하게 표현할 줄 아는 배우”라면서 노래와 춤도 잘 소화해내고 있다고 기대감을 전한다. 윤씨는 이번 뮤지컬 무대를 통해 또 한번 연기영역을 넓히는 만큼 기회가 되면 영화 쪽에도 진출해 연기자로서 완성도를 높일 생각이라고 했다. “원래 영화 쪽에도 관심이 있습니다. 준비를 하다가 못한 경우도 있고 해서 언젠가는 완성품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지요.” ●바리톤 음색… 강한 흡인력 내뿜어 화제를 돌렸다. 앞에 언급했듯이 2차 서해교전 때 그는 연평도에서 근무했다. 당시의 상황을 잠시 떠올린 그는 사뭇 진지한 자세로 돌아온다. “그때 해안포 중대에서 근무했습니다. 2002 월드컵 때 한국과 터키의 경기가 있던 날이어서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지요. 당시 바로 코앞에서 벌어진 실제 상황이라 처음에는 두려움과 공포로 다가왔지만 전쟁을 가상해서 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총을 들고 달려가고 싶은 마음도 들더군요. 우리 해군 병사들이 희생되는 것을 보고 전쟁이 이런 것이구나 하는 비참함도 경험했습니다.” 해병대에 자원한 것은 어릴 적부터 익혀 온 태권도(현재 공인4단)가 계기가 됐다. 해병대 출신인 사범에 대한 존경심의 발로에서였다. “제가 복무할 때에는 연평도에서 인천을 오고 가는 쾌속정이 없어서 외박은 아예 없었고 휴가를 나갈 때에도 날씨로 인해 일정이 다소 달라지곤 했지요. 중국집에서 자장면 먹고 한 곳밖에 없던 노래방에서 노래도 부르고, 또한 인정 많던 아저씨와 아줌마들과 만났던 기억 등 지금도 마을의 모습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그런데 지난해 연평도 포격 사건때 피해를 입는 광경을 보고 정말 가슴이 아프더군요. 또 날아오는 포탄에도 불구하고 바로 맞대응하는 후배 해병들을 보고 대견하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연평도의 비극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군의 모습에 대해 일부 질타를 받는 것도 있지만 애정 있게 포용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최근 불거진 해병대의 구타 문제와 관련해서는 약간 웃으면서 언급을 피한 뒤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라는 말로 대신했다. 그는 2009년 10월 치열하게 군생활을 했던 연평도를 다시 찾았다. 일이 잘 풀리지 않아 답답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여행지로 연평도를 선택했던 것. 여기에서 그는 우연히 KBS 예능프로그램 ‘1박2일팀’을 만나 깜짝 출연을 한다. 이를 놓고 ‘조작 의혹설’에 잠시 휘말리기도 했다. 그래서 당시 상황을 물었다. ●연출자 “감정선 안 놓쳐… 노래·춤도 잘 소화” “삶이 힘들었을 때 카메라 하나 달랑 들고 무작정 연평도를 찾았지요. 여기저기 사진 찍으며 돌아다녔습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1박2일팀’을 만났습니다. 녹화 장면을 보면서 사진도 찍고 주변을 얼쩡 거렸지요. 이때 현장에서 프로그램 작가를 만났어요. 작가는 그런 저에게 누구냐고 물었고 ‘88올림픽 호돌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즉석에서 인터뷰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는 살아오면서 물어보는 사람들이 많아 ‘굴렁쇠 소년’이라는 얘기를 수도 없이 했단다. 이와 관련된 비화 한 토막을 들려준다. “88올림픽 당시 이어령 선생님이 총연출을 하셨지요. 원래 선생님은 동양화의 한 폭처럼 쓱 지나가는 걸로 했습니다. 그라운드에 나와 굴렁쇠를 굴리며 중간에 멈추지 않고 그냥 사라지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분야를 맡은 이덕분 세종대 교수가 중간에 박수라도 받게 해야 되는 거 아니냐고 우겨서 결국 그라운드 한복판에서 굴렁쇠를 어깨에 메고 손을 흔들며 박수를 받게 됐습니다.” 당시 이 광경을 지켜보던 많은 사람들이 ‘혹시 굴렁쇠가 쓰러지면 어떡하나.’ 하고 걱정을 많이 했다고 하자 그는 “그런 얘기가 있었는데 이어령 선생님께서 어린이가 굴리는데 아무려면 어떠냐. 쓰러지면 자연스럽게 다시 세워서 계속 굴리라고 했다.”고 회고했다. 그와 인터뷰 시간은 30여분. 연습 스케줄을 감안했기 때문이다. 그에게 꿈이 무엇인지 물었다. “비록 짧지만 인생이라는 것이 계획대로 되는 게 없는 것 같습니다. 일이 닥칠 때마다 최선을 다하다 보면 언젠가는 스스로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연극과 뮤지컬 등 닥친 일에 최선을 다하다 보면 영화출연도 제게 좋은 인연으로 다가오겠지요. 지금은 ‘오! 당신이 잠든 사이’에만 몰입할 겁니다.(웃음)” 편집위원 km@seoul.co.kr ●배우 윤태웅은 1981년 9월 30일 88올림픽이 확정되던 날 서울 잠원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경희대와 조흥은행 소속 축구선수로 활약했다. 윤씨는 태어난 날짜가 인연이 돼 88올림픽 당시 ‘올림픽 호돌이’에 뽑혔으며 ‘굴렁쇠 소년’이란 별명을 얻었다. 1994년 잠원초등학교를 거쳐 신반포중학(1997년)과 서울고(2000년)를 나왔다. 어릴 때부터 태권도를 배운 그는 해병대 출신 태권도 사범의 영향으로 2001년 12월 해병대에 자원 입대해 연평도에서 군복무를 했다. 2004년 2월 제대한 뒤 곧바로 경기대 체육학과에 복학했고 2006년에 졸업했다. 그해 1월 공개 오디션을 거쳐 ‘19 그리고 80’으로 연극무대에 데뷔했다. 이후 ‘올 인더 타이밍’ ‘난 새에게 커피를 줄 수 없다’ 등에 출연했다. 현재는 tvN의 ‘롤러코스터’에서 열연 중이며 결혼정보 회사 ‘듀오’의 모델로도 활약하고 있다. 오는 7일부터 10월 초까지 뮤지컬 ‘오! 당신 잠든 사이에’에서 다양한 캐릭터로 관객들과 만날 예정이다. 결혼은 내년쯤에 할 생각이란다.
  • “독도문제에 너무 몰입하면 민족주의 광풍에 휩쓸릴 것…日 학습지도요령 깨부숴야”

    “독도문제에 너무 몰입하면 민족주의 광풍에 휩쓸릴 것…日 학습지도요령 깨부숴야”

    일본 교과서 문제가 불거지면서 다시 바빠진 곳이 있다. ‘아시아평화와 역사교육연대’다. 일본 역사교과서 왜곡 문제가 불거지자 학계·시민단체 전문가들이 2001년 ‘일본교과서바로잡기운동본부’로 출범시킨 단체다. 중국의 ‘동북공정’ 문제까지 터지자 지금의 형태로 확대 개편됐다. 이번에도 민간 차원에서 일본 교과서 왜곡에 대한 심층 분석과 대응방안을 모색한다. 교과서 분석 작업을 총괄지휘하는 이신철(46) 공동운영위원장(성균관대 동아시아역사연구소 수석연구원)을 30일 서울 명륜동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연구실에서 만났다. →일본 교과서 왜곡의 대명사는 후소샤(扶桑社) 출판사였다. 이번엔 지유샤(自由社)와 이쿠호샤(育鵬社)다. 어떤 차이가 있나. -일란성 쌍둥이다. 종군위안부 문제를 서술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면서 1997년 출범한 극우단체가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새역모)이었다. 이들은 2001년 후소샤를 통해 교과서를 냈다. 그 뒤 계속 교과서를 냈지만 채택률이 1%에도 못 미치는 등 지리멸렬하자 내분이 일어나면서 새역모가 두개로 쪼개졌다. 이때 생겨난 ‘교육재생기구’라는 단체가 후소샤의 자회사인 이쿠호샤와 손잡았다. →이쿠호샤는 후소샤의 실패가 투박한 서술 때문이었다면서 조금 더 세련되게 접근하겠다고 공언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독도 영유권 주장을 비롯해 서술이 개악된 이유가 뭔가. -조금 복잡한 사정이 있다. 후소샤는 자신들이 교과서 문제로 너무 표적이 되어 있으니 자회사로 이쿠호샤를 만들었고, 이게 교육재생기구와 손잡았다. 기존의 새역모는 지유샤로 갈아탔다. 지유샤의 경우 일본 국내법적으로 교과서를 낼 수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교과서를 내는 출판사 자격 요건 가운데 전문가를 5명 이상 보유하고 교과서 출간 6개월 전에 회사가 설립되어야 한다는 등의 제한 규정이 있다. 그런데 지유샤는 고작 사장 1명과 직원 3명에 불과한 급조된 회사다. 그런데도 교과서 검정 신청을 했는데 받아들여졌다는 게 무척 의외다. 이쿠호샤의 세련된 서술이란 것도 잘못 알려진 대목이다. 2006년 교과서 채택 과정에서 일본내 반대 운동 진영이 쓴 전술 가운데 하나가 끊임없이 흠집 잡기였다. 요코하마에서 이 전술이 특히 먹혀들었다. 후소샤 교과서를 갖다놓고 일본사 서술이 잘못된 부분을 집요하게 문제제기했다. 그러다 보니 교육청에서 수정 공문을 내려보낼 수밖에 없었고, 이게 쌓이다 보니 결국 후소샤에서 틀린 부분을 통째로 들어내는 삽지 작업까지 했다. 이쿠호샤가 세련되게 서술하겠다고 한 것은 이렇게 꼬투리 잡힐 짓을 안 하겠다는 뜻이지, 극우 논리를 완화하거나 정교하게 다듬겠다는 얘기가 아니다. →일본 교과서에 등장한 독도 문제 왜곡이 어느 정도인가. -예전에도 독도 문제를 거론한 교과서들이 있었다. 차이라면 예전에는 한·일 양국 간 영유권 문제가 있다는 식의 비교적 건조한 서술방식이었던 데 반해 지금은 아예 한국이 불법점거하고 있다고 못 박고 있다는 점이다. 일본 역사학계에서도 한국이 독도를 불법점유하고 있다는 주장은 안 나온다. 아예 한국땅이라고 인정하거나, 우익쪽 학자라 해도 양국 간 다툼이 있다는 수준에 그친다. 그런데 교과서에 ‘불법점거’라는 표현이 들어간 것이다. 이는 일본 문부성의 요구사항이 그대로 반영된 것으로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 다만 독도 문제에만 너무 초점이 맞춰지면 한·일 양국의 내셔널리즘(민족주의)만 강화시킬 우려가 있다. →일부 전문가들은 독도 문제에 너무 몰입하면 일본 우익의 손에 놀아난다고 주장한다. 반면 이 같은 주장이 전형적인 한국 외교관료들의 논리라며 비판하는 목소리도 있는데. -교과서 문제에 초점을 맞추자는 게 우리 태도다. 독도 문제는 얼마든지 논의할 수 있고, 강력 항의할 수도 있다. 그런데 너무 지나치면 애국주의 물결에 휩쓸릴 수 있다. 일본은 일본대로, 한국은 한국대로 내셔널리즘 광풍이 불어닥치면 그 다음 행보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가장 본질적으로 다뤄야 할 문제는 아베 정권 당시 만들어진 학습지도 요령을 어떻게 깨부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이를 위해 전반적인 역사 인식 자체를 문제삼아야 하고, 그래야 다른 나라들과 연대해 움직이는 데 도움이 된다. →독도 외에 다른 대목은 어떻게 교과서에 서술됐는가. -가장 중요한 게 사실 그 부분이다. 식민지, 전쟁 미화 등의 내용이 들어가 있다. 일제의 식민지배가 한국에 도움이 됐고, 위안부 문제는 아예 취업을 위해 공장에 간 것처럼 쓰여져 있다. 대동아전쟁은 아시아해방전쟁으로 미화했다. 2차대전 당시 미국과 치른 오키나와 전쟁에 대해 자신들의 침략전쟁은 쏙 빼버리고 미군이 침범해와서 많은 일본인들이 피해를 봤다는 식으로 서술했다. 결국 무라야마 담화, 간 나오토 담화 등 한·일 우호적인 내용의 담화를 깡그리 무시해버린 것이다. 이는 아시아 평화에 대한 직접적 위협이라는 점에서 오히려 독도 영유권 문제보다 장기적으로 더 위험한 대목들이다. 한마디로 애국심 고취를 위해 자신들에게 불리한 대목은 전부 빼버렸다. →그 대목에서는 우리나라도 자유롭지 못하다는 지적이 있다. 2008년 뉴라이트 진영의 대공세로 금성사 교과서가 문제되면서 집필자였던 김한종 한국교원대 교수가 교육과학부를 상대로 소송을 내기도 했다. -옳은 지적이다.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면서 2008년 교육안을 다시 만들었고, 교과서도 수정됐다. 대한민국 정체성과 애국심을 고취하는 대목이 강화됐고 북한 인권 문제도 거론했다. (교과서가) 정치 논리에 휘둘리기는 한국이나 일본이나 매한가지다. →교과서가 나오기 직전 일본을 다녀온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제까지 우리는 (교과서) 검정채택 결과가 나오면 그에 맞춰 대응했다. 그런데 검정 과정에 이미 일본 정부가 깊숙히 개입한 이상 결과가 나온 뒤에 대응하면 늦다는 반성이 나왔다. 그래서 관련 일본 단체들과 힘을 합쳐 미리 여론을 조성하기 위해 두루 만나고 왔다. →일본 시민단체들의 분위기는. -2001년에는 왜곡 교과서 채택률이 0.039%에 그쳤다. 그런데 최근에는 1.7%까지 올라갔다. 미미하지만 계속 올라가는 추세다. 채택률 상승 못지 않게 중요한 점은 이런 왜곡 교과서들이 다른 출판사의 서술방향에까지 악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일본 시민단체들의 위기의식이 상당할 수밖에 없다. →교과서 채택 저지 운동은 어디에 집중되나. -아무래도 교토와 요코하마다. 도쿄의 경우 우리로 치자면 구(區) 단위로 교과서가 채택된다. 그런데 교토와 요코하마처럼 우익 정치인들의 영향력이 큰 곳은 좀 더 광역화돼 시(市) 단위로 채택된다. 그래서 이들 지역을 우선 타깃으로 삼았다. 글 사진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WHO&WHAT] 독재자의 만찬

    [WHO&WHAT] 독재자의 만찬

     ‘민주’(民主)가 당연하게 여겨지는 오늘날, ‘독재’(獨裁)란 말은 듣는 것만으로도 유쾌하지 않은 단어다. 다른 사람의 운명을 멋대로 좌우하고 과장된 논리나 종교와 다를 바 없는 맹목적인 믿음을 강요하는 독재에 대한 거부감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한국인에게도 ‘독재’는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길거리로 뛰쳐나와 군사정권에 맞서 밑으로부터의 민주화를 일궈냈다는 자부심,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 최장수 독재체제(북한)와 마주하고 있는 현실 등 우리는 독재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중동과 북아프리카 지역에 몰아닥친 ‘재스민 혁명’에 전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 수십년간 그래온 것처럼 아랍권의 민주화 운동이 ‘찻잔 속 태풍’이 될 것이라는 전망은 이미 빗나갔다. 권력을 지키고자 하는 자들과 권리를 찾고자 하는 이들의 싸움은 점점 격해지고 있고, 이젠 국제사회의 개입도 본격화됐다.  가상 인터뷰 ‘WHO&WHAT’의 이번 주인공은 역사 속 인물들이다. 이름 자체가 공포가 되고, 금기어가 됐던 이들. 현대 정치사를 피로 물들이며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난, ‘악몽’ 그 자체였던 네 명의 독재자들을 만찬장에 초대해 그들이 생각하는 재스민 혁명과 ‘독재’ 그리고 ‘민주화’에 대해 들어봤다. 사회:독재돼지 나폴레옹(소설 ‘동물농장’의 주인공)  식당으로 들어서는 네 사람의 표정은 썩 밝지 않았다. 살아생전 서로 배신의 총부리를 겨눴던 사이도 있었고, 서로 ‘사상적 동지’로 돈독한 관계를 자랑하던 이들도 있었다. 그들 사이에 가로놓인 반세기의 시간도 서먹한 분위기를 가시게 하지는 못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는 말이 사전에서 바로 튀어 나온 듯한 이들은 같은 자리에 마주앉아 있다는 사실 자체가 마뜩치 않아 보였다.  콧수염을 기른 사람이 셋, 군복을 입은 사람이 셋이었다. 앞에 이름표를 놓을 필요조차 없이 얼굴만으로도 누구인지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아돌프 히틀러, 이오시프 스탈린, 마오쩌뚱, 사담 후세인. 인류 또는 자기의 민족을 위해 떨쳐 일어났다는 대의명분을 앞세웠지만 결국엔 자기자신의 안위와 비뚤어진 욕망으로 가득찬 이미지만 역사에 남긴 공통점을 가진 이들. 한 사람만 있어도 공포를 느끼게 할 만한 20세기 정치가 네 명이 한 자리에 모였다.  이날 만찬 자리는 현재 국제정세를 감안하면 상당히 늦은 감이 있었다. 시대적 차이는 있지만, 각자의 전성기 시절 국내외 정치에 대해서라면 남부럽지 않을 역량을 과시했던 이들에게 중동과 북아프리카를 강타하고 있는 ‘쟈스민 혁명’에 대해 묻지 않는다면 과연 누구한테 물어야 한단 말인가. 더구나 만찬의 주제가 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독재’인데 말이다.  네 사람의 만남에 적합한 사회자를 찾기란 쉽지 않았다. 민주화 전문가나 학자는 남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는 이들을 통제하기엔 늘 역부족이기 마련. 결국 메이너 농장의 절대권력자 나폴레옹(조지 오웰의 소설 ‘동물농장’에 등장하는 독재자 돼지)에게 어려운 역할을 부탁했다. 1945년 처음 세상에 알려진 이후, 지금까지 농장을 완벽하게 통제하고 있는 나폴레옹의 능력이라면 참석자들도 특별한 불만이 없을 것이란 판단에서였다. 오웰이 묘사한 것처럼 나폴레옹은 ‘사람이 돼지인지, 돼지가 사람인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능수능란하게 만찬장의 분위기를 이끌어갔다. 화제는 자연스럽게 본인들의 얘기와 현재 상황을 비교하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오늘의 메뉴●  애피타이저 - 당신은 떳떳한가  메인 디시1 - 당신의 국민은 왜 당신을 버렸을까  메인 디시2 - 당신은 부패했나  디저트 - 당신의 사랑은 진짜였나      <애피타이저> 당신은 떳떳한가.   →나폴레옹 인간 세상 최고의 독재자들을 한 자리에서 만나게 돼 기쁘다. 나야 동물 100여마리 거느리는 수준이지만, 당신들은 수백만명에서 수억명에 이르는 사람의 목숨을 한 손에 좌우했던 사람들이지 않은가. 실제로 죽이기도 많이 죽였고…. 당신들보다 훨씬 잔혹하거나 무자비한 사람도 없진 않지만, 20세기 이후 독재자들 중에서 가장 대중적으로 알려져 있다는 점에서 선정됐다는 점을 밝혀둔다. 우선 당신들이 지금 이 테이블에서 떳떳하게 고개를 들고 있을 수 있는 자신감의 근원부터 묻고 싶다.   히틀러 정당성을 묻는거냐. 어디까지나 국민들이 원해서 적합한 위치를 맡았을 뿐이다. 내가 총통이 됐을 때 4500만명이 투표에 참가했고 그중 3800만명이 찬성했다.(히틀러는 1934년 대통령 파울 폰 힌덴부르크가 죽은 직후 1시간 만에 대통령직과 총리직을 통합하고 최고사령관 직까지 합쳐 그 자리에 오른 다음 투표를 실시했다.) 국민들이 내가 이루고자 하는 바에 자발적으로 동참해서 내가 그 위치에 올랐다는 증거다. 정당성의 측면에서 과거의 왕들과는 평가부터 달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왕 중에서도 네로나 헤롯 같은 사람이 있었고, 나름 성군(聖君)으로 존경받는 사람도 있는 모양이지만 그들은 왕으로 태어나 왕으로 살면서 그 권력을 조금 더 쓰느냐 마느냐의 차이가 있었을 뿐이다.   스탈린 난 볼셰비키 혁명을 주도했고 성공시킨 레닌이 직접 지목한 정당한 후계자다.(실제로는 레닌이 그의 위험성을 경고한 편지를 공개하려고 했지만, 스탈린이 의도적으로 막았다. 뿐만아니라 스탈린은 레닌의 후계자가 되기 위해 여러 장의 사진과 역사기록을 조작했다.) 그루지아 출신이라는, 심지어 러시아어를 잘 하지 못한다는 단점에도 불구하고 범 러시아 지역에서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다는 데 대해 지금까지 의심해 본 적이 없다. 국민의 지지가 없으면 독재고 뭐고 간에 아예 정권을 잡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최소한 총과 칼로만 쿠데타를 일으켜서 최소 몇 년 이상 유지한 사례가 얼마나 될지 지난 100년 간을 꼽아봐라. 처음엔 그렇게 잡더라도 국민에게 비전을 제시하지 않으면 유지가 안되는 게 정치다.   →나폴레옹 그 말씀을 액면 그대로 믿는다면 여기 있는 사람들이 역사에 악인으로 이름을 남긴 것 자체가 불가사의한 일이다. 듣다보니 무아마르 카다피 리비아 국가원수가 요새 연설을 통해 계속 반복하고 있는 논리와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어쨌든 그 얘기는 나중에 이어가기로 하고, 최근 전 세계 최고 관심사인 ‘쟈스민 혁명’에 대해 들어봤나.   마오 내용이야 어떻든 오랜만에 가슴이 뛰는 기분이다. 지난해 12월 한 청년이 분신을 하면서 벌어진 일이 불과 석달 만에 이렇게까지 커지다니. 벌써 두 나라(튀니지·이집트)의 정권이 뒤집혔고 리비아, 시리아, 바레인도 내전이 한창이지 않은가. 난 ‘공산당’을 알리고 ‘혁명 동지’를 모으기 위해 10만여명을 이끌고 1934년 370일 동안 1만 5000㎞를 걸어야했다.(마오는 12개의 지방을 지나고 18개 산맥과 24개 강을 건넜다. 마오의 짐은 두 장의 담요와 홑이불, 외투 한 벌, 책 몇 권 뿐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러고도 15년 이상 지나서야 중국을 세울 수 있었다. 고작 석달이라니 정말 대단하지 않은가. 지금 같은 세상이라면 보다 완벽한 혁명을 꿈꿀 수 있을 것 같다.   히틀러 거기엔 100% 동감한다. 요즘처럼 다양한 수단이 있었으면 내가 연설을 일부러 석양무렵에 하면서 다양한 무대장치를 동원하는 수고는 덜 수 있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이런 아이디어는 히틀러의 선전장관이었던 요제프 괴벨스의 능력이라는 얘기가 정설이다.) 아! 물론 난 연설 대신 다른 방법으로 국민들을 설득해야 했겠지만 말이다.   후세인 참석한 다른 사람들은 딱 와닿지 않을 수도 있는데, 내 입장에서 쟈스민인지 뭔지는 정말 충격적인 일이다. 아랍에는 ‘하마’라는 게 있다. 1980년대 초반에 시리아의 하마라는 조그마한 마을에서 군사정권에 저항하는 민란이 일어났는데, 정부는 마을 전체를 지도에서 지워버리다시피 했다.(2만명의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다. 시리아 정부는 그 숫자를 본보기 삼아 일부러 널리 공포했다.) 그 이후 ‘하마’는 절대권력에 대항하는 반항에 대한 응징을 뜻했다. 아랍권에서 조금이라도 목소리를 내던 반 체제 인사들은 힘을 잃었고, 일반인들은 조용해졌다. 그게 지금까지 아랍권을 지탱해온 버팀목이었다. 왕정이든 사회주의 체제든 광범위하게 사용돼 왔다. 물론 무력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국영TV와 신문을 장악하고, 시골에서 도시로 몰려드는 사람들을 집중적으로 공략해 세뇌시켰다. 나름 치밀했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한 순간에 무너질 줄은 솔직히 상상도 못했다.   →나폴레옹 후세인 당신과 카다피가 유난히 비슷한 점이 많다고 들었는데.   후세인 카다피와 나는 소위 말하는 ‘역경의 자식들’이다. 전통적인 아랍사회가 혈통과 명문을 높이 떠받드는 점이 가장 큰 타도의 목표가 됐다는 점에서 일면 비슷하다고 볼 수도 있다. 아랍에서는 아버지의 이름이 중요시되지만 혹시 내 아버지나 카다피의 아버지 이름을 아는가? 뭐 사실 이 만찬장에 있는 다른 사람들도 크게 다르지는 않지만 말이다. 우리는 기존 사회의 합의나 계급은 무시하고, 아랍의 전통적인 가치들이 권력에 장애가 된다면 과감히 지워버렸다.  <메인디시1> 당신의 국민은 왜 당신을 외면했나.   →나폴레옹 슬슬 본격적인 식사로 들어가보자. 여러분은 다들 수십년에 걸쳐 자기 나라는 물론 주변국가, 나아가 전 세계에까지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앞서 스탈린이 말한 것처럼 독재는 총칼 만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많은 국민의 열광적 지지를 받는 지도자의 위치에 오르는 게 선행돼서 가능했다. 그런데 끝까지 초심을 유지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인지 통치스타일이 변하면서 서서히 독재자가 돼 가는 공통점이 나타났다. 말은 자꾸 바뀌고, 점점 잔혹해지면서 다른 사람의 말을 안듣게 되었는데.   스탈린 국민들에게 제시했던 내 목표는 무조건 우리가 추구해야 할 목적이었다. 어떤 수단을 써서든 달성하는 것이 최우선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모두가 내 뜻에 복종해야 했다. 의견이 다른 사람들은 틈만 나면 배신하려 하고, 권력을 잡기 위해 나를 밀어내려고 했다. 심지어 공장 노동자들도 내 목표량에 미달했다. 충분히 열심히 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스탈린은 5개년 경제계획을 세워 모든 농민들이 국가 소유의 조합에 가입하게 했다. 그러나 대부분 농민들은 재산을 내주는 대신 땅을 불태우고 가축을 죽였다.) 결국 나는 그들을 피로 다스릴 수 밖에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가까운 사람들조차 나에게서 등을 돌리는 것처럼 생각됐다. 잠도 잘 오지 않았다. 나에게 있어 가장 큰 기쁨은 적을 정하고, 만반의 준비를 한 다음 철저하게 복수를 하고 잠자리에 드는 것이었다.   히틀러 난 독일 국민에게 약속한 것을 대부분 다 지켰다.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 정책에는 본인의 증오 이외에 ‘독일 국민들에게 잘 통할 것’이라는 정치적 계산이 깔려 있었고, 실제로 주효했다.) 솔직히 내가 세운 모든 계획 중에 딱 하나 틀린 게 있었는데, 바로 전쟁에 졌다는 것이다. 난 거창하게 세계정복 같은 공약을 내세우지 않고, 우리가 받을 수 있을 걸 받자고 얘기했을 뿐이다. (히틀러의 전쟁은 세계를 상대로 한 전쟁이라기보다는 영국과 프랑스 양강으로 구분돼 있던 유럽 내에서 독일의 정당한 위치를 인정해 달라는 권리찾기에 가까웠다. 세계를 상대로 한 전쟁이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히틀러 본인이 잘 알고 있었다.) 실제로 우리 독일 사람들은 1933년부터 2차대전이 본격화되기 이전, 내가 제3제국을 이끌던 시기를 역사상 가장 행복했던 시기로 기억한다. 연합군과의 전쟁에서 지지만 않았다면 난 절대로 여기 다른 ‘실패한 독재자’들과 함께 앉아있지 않을거다.   마오 국민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는 공통된 적이 필요했다. 사회를 뒤집어 엎으려면 당연히 원동력이 필요하고, 그 힘은 밑에서부터 나온다. 히틀러는 그것을 외부(유대인)에서 찾았고, 나와 스탈린은 노동자·농민을 앞세워 인민의 적을 만들어내는 수법을 썼다. 그런데 정권을 잡고 공공의 적이 어느 정도 정리되면 당연히 사회적 결집력과 추진력이 떨어지지 않겠나. 난 1950년대 중반에 무조건 억누르기만 했던 스탈린과는 다른 길을 가려고 했다. 지식인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도록 허용했는데 금방 사회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졌다. (마오는 헝가리에서 검열 완화 이후 폭동이 일어난 것을 보고 ‘모든 의견’을 허용하는 대신 ‘공산당의 입지를 굳히는 의견’만을 허용했다.) 고작 6주간 ‘백화제방·백가쟁명’(쌍백) 정책을 펼쳤는데 불온성을 이유로 잡아들인 사람이 100만명이 넘었다.   →나폴레옹 뭐 결국엔 자기가 옳다는 생각을 계속해서 주장했고, 국민들이 그에 부응하지 않았기 때문에 폭압적인 독재자들로 될 수 밖에 없었다는 논리인 것들 같은데. 국민들이 언제 돌아서는 것을 느꼈나.   스탈린 독재에 대한 대중의 영합은 독재권력이 국민들이 원하는 것을 주기 힘들어지면 힘을 잃기 시작한다. 인류 역사를 통틀어서 일반 국민들에게 정치적인 이데올로기가 가장 중요했던 적은 과거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정권이 제시하는 조건이나 삶의 질에 만족하면 그 권력을 지지하지만 그게 안 되면 외면하는 게 국민들의 속성이다. 내 영향력이 다소간 줄어든 것도 ‘산업화’라는 당면과제가 생각만큼 잘 진행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도 큰 문제는 아니다. 영향력이 떨어지면 그걸 보완하기 위해 총과 칼이나 숙청, 강제노동 등을 동원하면 충분히 되돌릴 수 있다. (스탈린은 꾸준한 생산력 증대를 원했고, 만족하지 못하면 계속해서 무력을 사용했다.) 이런 것이 독재자와 왕의 가장 큰 차이점이자 독재자에게 불리한 점이다. 독재자는 국민들이 실망하면 이를 되돌리기가 군주보다 훨씬 힘들다. 엘리자베스1세 말기에 영국 국민의 생활수준은 역사상 최저였지만, 아무도 그런 사실은 기억하지 않는다.   히틀러 이번 아랍혁명이 ‘빵의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고 들었다. 식량값 폭등 같은 단편적인 시각에서 볼 수는 없는 문제다. 원래 독재자는 국민들이 납득할 수 있는 명확한 미래상을 제시하고 조금이라고 가까이 가고 있다고 믿게 해야 한다. 정권을 지지하는 국민들 입장에서 ‘어제보다 조금 나아진 오늘’은 별 의미가 없다. 독재자가 “5년 후에 우리가 이 정도 수준에 살고 있을 것”이라고 제시하면 반드시 거기에 가 있어야 한다. (히틀러가 뚜렷하게 정책에 실패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표방하는 제3제국이 명확한 수치를 제공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게 이뤄지지 않으면 위기가 찾아오는 거다.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를 표방했던 독재정권들이 망가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조금씩 나아지는 건 왕정 아래서도 얼마든지 가능한데, 정권을 잡으려는 독재자들은 국민들에게 “우리 모두 잘 살 수 있다.”고 소리친다. 결국 삶에 찌들어 있는 대중의 지지를 받아 순식간에 정권을 장악할 수 있지만, 결코 그들이 약속한 삶은 만들어낼 수 없다.   후세인 아랍권의 문제가 심각한 건 사실이지만, 구조적으로 ‘복지독재’라는 희한한 형태가 있어 국민들이 모두 돌아서는 시기를 간단히 전망할 수는 없다. 사우디아라비아나 쿠웨이트 같은 왕권독재 국가에서는 독재의 정도가 다른 나라보다 심하면 심하지 덜하지 않은데, 국민들의 삶은 다른 나라보다 풍요롭다. 일자리도 주고 의식주 걱정도 없다. 대학도 보내준다. (아랍의 왕조 체제에서는 가진 자의 수가 극히 제한돼 있고, 이들은 인자한 독재자의 모습을 띤다. 이들은 국부를 독점하는 만큼 그것을 나눠주는 방식에 관심이 많다.) 그럼 이 상황을 뒤집어서 민주화가 되고 완전한 자본주의 국가가 되면 어떻게 되느냐. 가진 자의 수가 늘어나면 전혀 혜택을 받지 못하는 절대 빈곤층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게 된다. 민주화라는 것은 결국 허상이다. 위와 같은 상황이 벌어진다고 가정했을 때 민주화를 원하는 사람들의 대다수는 “난 가진 자의 입장에 설 기회가 생긴다.”는 생각만 한다. 결국 ‘기회’라는 게 어느 순간 현재 생활에 대한 불만을 뛰어넘느냐가 관건이 아닐까 싶다.  <메인디시2>당신은 부패했나.   →나폴레옹 ‘권력은 부패하고, 절대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한다’고 영국의 역사학자 로드 액튼 경이 말했다. 독재와 관련된 경구 중 가장 유명한 말이 아닐까 싶다. 흔히들 독재자는 부패하기 때문에 망한다고 생각한다. 정말 부패가 독재의 종착점인가.   히틀러 진정한 목표가 있는 독재자는 부패할 시간이 없다. 난 채식주의자에 담배조차 피우지 않는다. 가끔 맥주를 마시기는 하지만, 내 뒤를 아무리 캐봐라. 내가 부정적인 일에 연루됐다는 어떤 증거도 발견하지 못할 거다. 심지어 난 평생 두 여자(의붓여동생의 딸인 겔리 라우발, 최후를 같이 했던 에바 브라운)만을 사랑했고, 한명이 죽은 후에야 다른 사람을 만났다. 만약에 지금 세상처럼 청문회가 있다면 난 무조건 100% 무사 통과다. 오로지 위대한 제3제국을 세우겠다는 목표 이외에 개인적인 욕심 따위는 없었다. 제3제국이 부패해서 망했다고 말할 수 있나. 난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다.   스탈린 나 역시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한다. 사람들이 나를 ‘금욕주의자’라고 부를 정도로 난 개인적으로 즐기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내 딸 스베틀라나가 나중에 쓴 책을 보면 알 수 있지만, 내 가족들조차도 화려한 옷이나 식사는 꿈도 꾸지 못했다. (스탈린은 부인을 잃은 후 스베틀라나를 사실상 ‘어린 퍼스트레이디’로 대접했고, 자식 중 유일하게 애정을 쏟았다.) 오로지 대업을 완수하는 것만이 내가 평생을 생각했던 유일한 관심사였다. (얄타 회담에서 스탈린을 만난 윈스턴 처칠의 부관들은 스탈린에 대해 “지금까지 만나본 중 가장 철두철미하고 명석한 지도자”라는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나폴레옹 최근 아랍권의 가장 큰 문제는 본인은 물론이고 부인이나 아들, 측근들이 부패한 경우가 많다는 것인데 후세인 당신도 자식 간수에 실패한 대표적인 사례 아닌가.   후세인 독재자는 외로운 존재다. 누군가를 몰아내고 그 자리에 앉았으면, 언젠가 자신도 똑같은 일을 당하지 말란 보장이 없다. 결국에 믿을 사람은 가족 밖에 없다. 그런데 가족은 통제가 불가능하다. 각자 욕심을 부리게 마련이고, 절대자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대부분 용서 받는다. (후세인의 큰아들 우다이는 공식 행사에서 사람을 총으로 쏘아 죽이거나 싸움을 벌이는 등 난폭했다. 정신박약아라는 설도 있다.) 튀니지의 벤 알리, 이집트의 무바라크, 리비아 카다피 모두 가족이 문제였고 자식한테 권좌를 물려주기 위해 무리수를 뒀다. 결국 ‘부패’의 진정한 원인은 독재자의 개인적인 성향보다는 독재가 갖고 있는 근본적인 1인 중심적인 체제에서 찾아야 한다.   마오 아무리 독재라도 권력은 최소한의 시스템이라도 갖추고, 그 안에서 움직여야 한다. 권력을 사유화하고 개인적으로 대놓고 이용하기 시작하면 그게 부패한 거다. 난 솔직히 주지육림이 부럽지 않을 정도로 방탕한 생활을 즐기기도 했지만, 최소한의 기구를 갖고 있었고 그걸 이용해서 모든 것을 움직였다. (그의 문화혁명을 앞장서서 주도했던 홍위병은 결국 스스로 부패하고 갈라져 사라져갔다.) 간단히 말해서 사회를 바꾸기 위한 목표를 갖고 조직이 사회를 지배하는 것이지 개인이 가진 것을 오로지 지키려는 목적으로 조직을 운영한다면 그건 독재자 중에서도 가장 저질이라고 생각한다. 카다피나 북한의 김일성, 저기 앉아있는 후세인이 대표적인 인간들이다.  <디저트>당신의 사랑은 진짜였나   →나폴레옹 곧 무너질 것 같았던 카다피가 계속 버티고 있다. 심지어 쟈스민 혁명이 곧 사그라들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쟈스민 혁명은 어디까지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나.   히틀러 국민을 장악하는 수단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내가 연설을 통해 국민을 사로잡았다면 카다피한테는 TV로 보여지는 강력한 모습과 반미 감정몰이가 결정적인 힘을 줬다. 그런데 최근 유행하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는 그걸 뛰어넘을 수 있다. 결국엔 모든 것이 정보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북한이 왜 저렇게 폐쇄정책을 고집하겠나. 밖에서 국민들이 정보를 얻기 시작하면 바깥세상이 더 낫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러면 지금까지 주장해 온 모든 것들이 허사가 된다. 결국 정보가 공개되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럴듯한 꼬임이나 세뇌만으로 할 수 있던 독재의 시대가 끝났다. 결국 총과 칼을 통한 억압만이 가능하다는 얘기인데, 이번에 혁명이 실패해도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니니까 나중에 또다시 내란이 일어나는 건 불을 보듯 뻔하다. 한번 떨쳐 일어났던 기억은 생각보다 오래가는 법이다.   마오 그래도 중국은 꽤 오래 버틸 수 있을 것 같다. 리비아가 여러 개의 부족이라서 마지막 한 고비를 넘을 원동력이 부족한 것처럼 중국 역시 민족이 다양하고 워낙 지역도 넓기 때문에 하나로 모으는 추진력이 떨어질 수 밖에 없다. 무엇보다 중국은 아직 폭발적인 성장을 계속하고 있다. 국민들이 뭔가를 추가적으로 기대할 여지가 남았다는 얘기다. 특히 연안지역만 개방해서 충분히 통제가 가능하도록 하고 조금씩 열어가면서 개방과 통제라는 두가지 토끼를 모두 잡았다는 점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반면 북한 같은 경우에는 특정지역만 열고 통제하는 게 불가능하다. 결국에 경제적 몰락을 극복하기 위해 체제붕괴를 피하기 힘들다.   후세인 내가 보기엔 미국이 얼마나 나서느냐가 관건이다. 군사적, 외교적으로 영향력이 절대적이니 말이다. 여기 있는 네 사람 모두 미국과는 좋은 감정이 아니겠지만, 내 경우에는 특히 그렇다. 솔직히 대량 살상무기라는 말도 안되는 이유를 달아서 억지로 쫓아낸 것 아니냐. 이번에도 이집트에는 개입 안하고, 리비아에만 개입하려고 꼼수를 쓰는 모습이라니…. 결국 다른 나라의 민주화를 자기 입맛대로 골라서 이용하겠다는 것 밖에는 안된다. 민주화니 어쩌니 떠들지만 실제로 국제사회를 독재하고 있는 건 미국이다.   →나폴레옹 이제 마무리할 시간이다. 철저하게 자기자신의 논리로 무장한 당신들에게 물어보나 마나겠지만, 당신들은 정말 국민들의 사랑을 받았다고 생각하나.   스탈린 1994년 김일성이 죽었을 때 눈물을 흘리던 평양 시민들을 기억하나. 그 원조가 바로 나다. 내 시신을 보겠다고 몰려든 사람들 때문에 수백명이 깔려 죽었다. (영하의 날씨였지만 방부처리된 시신을 보기 위해 몰려든 조문객의 일부가 바리케이드에 부딪히거나 밟혀서 목숨을 잃었다.)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나.   마오 내가 죽은 후 숱한 변화 속에서도 난 중국 사람들에게 잊혀지지 않는 존재다. 톈안먼 광장에 걸려있는 내 초상화가 모든 것을 말해준다고 생각한다. (마오가 죽은 1976년 그의 문화혁명으로 쌓인 불만이 폭발한 톈안먼 사건이 일어났다. 1981년 그의 후계자 덩샤오핑은 마오의 문화혁명을 ‘내란’으로 규정했다.)   박건형기자 kitsch@seoul.co.kr   ■도움말 주신 분들 임지현 한양대 사학과 교수 김한지 한국외대 중동연구소 책임연구원 최 진 대통령리더십연구소 소장 류한수 상명대 역사콘텐츠학과 교수 장대익 동덕여대 교양학부 교수 한양대 비교역사문화연구소
  • “저환율로 물가 잡아라”

    “저환율로 물가 잡아라”

    동일본 대지진과 연합군의 리비아 공습 여파 등으로 물가 압박이 더욱 거세지고 있다. 정부의 ‘미시 대책’들이 총동원됐음에도 불구하고 물가상승률 5%대 진입은 초읽기에 들어갔다. 뒤늦게 ‘거시 카드’를 내놓았지만 정책의 방향성이 뚜렷하지 않다. 성장과 물가 사이에 눈치보기가 여전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주요 ‘거시 대책’ 가운데 금리 부문은 탄력이 붙었다. 특히 총부채상환비율(DTI) 규제 부활로 향후 금리 인상에 따른 가계부채 불안감을 다소 진정시켰다. 하지만 물가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환율은 여전히 안갯속이다.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를 비롯해 많은 경제 전문가들은 물가를 잡기 위해 ‘저(低)환율 정책’으로 전환할 때라고 주문한다. 24일 서울 외환시장에서 원·달러 환율은 1121원으로 마감했다. 지난 1월 19일 1110.3원을 기록한 이후 계속 오름세다. 동일본 대지진과 리비아 사태 등이 겹치면서 환율은 지난 17일 올들어 최고치인 1140원대(장중)로 치솟기도 했다. 말일 종가 기준으로 환율을 보면 ▲지난해 9월 1140.2원 ▲10월 1125.3원 ▲11월 1159.7원 ▲12월 1134.8원 ▲올해 1월 1121.5원 ▲2월 1128.7원 등이다. 지난해 9~10월 글로벌 ‘환율 전쟁’과 주요 20개국(G20) 서울 정상회의 개최로 전세계의 이목이 집중됐을 때 원·달러 환율은 떨어졌다. 하지만 그 이후엔 계속 오름세를 탔다. 대외 변수를 감안하더라도 정책당국이 지난해 11월 이후 환율에 개입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유가를 비롯한 국제 원자재값이 급등한 지난 3~4개월 동안 환율은 이처럼 물가 안정보다 수출에 도움을 주는 방향으로 진행됐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환율이 물가에 미치는 파급력은 국제 유가의 4배에 이른다. 환율과 국제유가가 각각 10% 상승했을 때 물가에 미치는 영향은 환율이 0.8%포인트, 유가는 0.2%포인트 수준이라는 것이다. 환율은 수입물가에 바로 영향을 주기 때문에 파급 속도도 물가 변수 가운데 빠른 편이다. 삼성경제연구소는 최근 내놓은 ‘수입물가 환경분석 및 정책적 시사점’이란 보고서에서 “두바이유 가격과 국내 소비자물가와의 시차 상관계수를 추정한 결과 시차 3개월에서 상관계수가 가장 높게 나타났다.”고 밝혔다. 배럴당 100달러를 돌파한 두바이유가 이달부터 국내 물가에 본격 반영된다는 뜻이다. 정진영 수석연구원은 “정부가 성장에도 신경을 쓰다 보니 환율 하락폭이 커질 때마다 개입했을 것으로 본다.”면서 “수출이 워낙 좋기 때문에 정부가 환율을 내버려두면 자연스럽게 떨어지는 방향으로 움직일 것”이라고 말했다. 현정택 인하대 교수는 “환율이 시장 기능으로 내려간다면 내려가게 둬야 한다.”면서 “리비아 사태 등으로 환율이 움직일 때마다 미세 조정에 나서서는 안 된다.”고강조했다. 이용섭 민주당 의원도 고환율이 고물가의 원인이라고 지적하고 환율을 적정하게 조정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경두기자 golders@seoul.co.kr
  • 美 “2선 후퇴”·나토 ‘자중지란’ 英·佛 주도 전쟁 되나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21일(현지시간) 리비아 공습에서 미국은 제한적인 역할만 할 것이며 작전지휘권도 이양할 것이라는 입장을 거듭 밝혔다. 반면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는 전날에 이어 이날도 미국이 뒤로 물러날 경우 지휘권을 넘겨받는 문제를 두고 토론을 벌였지만 끝내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면서 리비아 공습 작전은 영국과 프랑스가 주도하고 미국은 뒤에서 보조해주는 양상으로 흘러가고 있다. 미국은 현재로선 나토가 작전을 지휘하길 기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가뜩이나 금융위기 이후 정부 재정이 압박을 받는 데다 이라크·아프가니스탄에서의 전쟁이 끝나지 않은 상황이라 국내 여론도 곱지 않기 때문이다. 현재 리비아 공습작전은 통일된 중앙지휘부 없이 각국 지휘부가 그때그때 협의해 수행하는 실정이다. 이 때문에 지난 19일 첫 공습 작전명도 ‘오디세이 새벽’(미국), ‘엘라미’(영국), ‘아르마탕’(프랑스), ‘모바일’(캐나다) 등 나라마다 제각각이었다. 하지만 미국의 바람과는 달리 나토가 지휘권을 넘겨받을 가능성은 갈수록 낮아지고 있다. ●나토는 주저하는 햄릿? 나토는 지난 20일에 이어 21일에도 상주대표부 대사급 회의를 열어 리비아 공습 지휘권 인수 문제를 논의했지만 결론을 내지 못했다. 전문가들 사이에선 앞으로도 회원국 간 합의는 요원하다는 회의적인 전망이 높아지고 있다. 나토가 비행금지구역에서 작전을 수행하려면 28개 회원국 전원 동의를 얻어야 하지만 입장 정리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독일 관영 도이체벨레는 21일 분석기사에서 리비아 작전을 놓고 주저하는 나토의 고민을 희곡 ‘햄릿’에 등장하는 대사인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에 빗대 표현했다. 나토 전문가인 영국왕립국방연구소 리사 에런슨 연구원은 “나는 오히려 나토 회의에서 대사들이 결론을 끌어냈더라면 더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많은 나토 회원국들이 “명확한 목표도 없이 불분명한 갈등에 개입하기 위해 나토 영역을 벗어나 작전을 수행하는 것을 크게 우려한다.”는 점을 이유로 들었다. 미국도 아니고 나토도 아니라면 가장 가능성이 높은 시나리오는 영국과 프랑스가 각자 작전 지휘와 병참 제공 등으로 역할을 분담해 작전을 주도하는 방안이다. 벨기에 브뤼셀에 있는 국방보안의제(SDA) 자일스 메릿 국장은 “가뜩이나 지지율 하락으로 고전하는 영국과 프랑스 정부로서는 리비아 공습을 주도하는 것이 긍정적인 여론을 이끌어내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보고 영·불 주도의 공습을 대단히 반길 것”이라고 전망했다. 양국은 이미 지난해 합동군사작전을 명시한 안보조약을 체결하기도 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모두 리비아 사태 초기부터 군사개입에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영국은 카다피를 대상으로 한 인도적 개입을 주창했고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은 가장 먼저 리비아 반정부군을 유일한 합법정부로 인정하고 리비아 제재에 앞장섰다.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는 21일 하원에서 열린 공개 토론에서도 “군사작전은 필요하고 합법적이고 올바른 것”이라면서 “작전을 벌이지 않았다면 수많은 민간인들이 학살당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지상군 투입할까 카다피군이 장기전을 염두에 두는 상황에서 공습만으로는 의도한 성과를 얻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 갈수록 분명해지면서 리비아에 지상군을 투입할지 여부도 관심거리다. 하지만 지상군 투입이 유엔 안보리 결의만으로 가능한지도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캐머런 영국 총리는 카다피가 적법한 목표물일 수 있다고 말한 반면 데이비드 리처드 참모총장은 “카다피 제거는 절대 작전 목표가 아니다. 그 문제는 유엔 결의가 허용하지 않았다.”고 말했다며 작전목표를 둘러싼 입장차이를 지적하기도 했다. 지상군 투입이 자칫 이라크나 아프간처럼 수렁이 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반군 세력을 합법 정부로 인정하고 무기와 물자 등을 제공하는 측면지원으로 방향을 틀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이와 관련, 영국 데일리메일은 영국 공수특전단(SAS) 소속 정예요원들이 이미 리비아 현지에서 정찰활동을 하고 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강국진기자 betulo@seoul.co.kr
  • 中·러·아랍연맹 “공습 반대”

    다국적군이 리비아에 대한 군사작전에 돌입했지만 강대국들의 입장은 엇갈린다. 무엇보다 러시아와 중국의 반대가 거세다. 아랍국가연맹이 공식적으로 공습에 반대하고 나서는 등 아랍 이슬람권의 반미·반서방 기류도 점차 강도를 높여 가고 있어 향배가 주목된다. 중국 외교부 장위 대변인은 20일 리비아에 대한 군사 공격에 유감을 표시했다. 장 대변인은 “중국은 리비아 정세의 전개 상황을 면밀하게 지켜보고 있다.”면서 “중국은 한결같이 국제 관계에서 무력을 사용하는 것에 반대해 왔다.”고 말했다. 러시아도 거들었다. 러시아 외무부는 이날 대변인 성명을 통해 “성급하게 채택된 유엔 결의 1973호에 의해 이뤄진 (다국적군의) 군사 개입을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러시아는 중국과 함께 비행금지구역에 관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 표결에서도 기권표를 행사한 바 있다. 중국과 러시아가 군사 개입을 적극 반대하는 데에는 리비아와의 이해 관계가 얽혀 있다. 러시아는 최근까지 리비아와 18억 달러(약 2조 322억원) 규모의 무기 수출 계약을 추진하는 등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현재 리비아군 장비의 80~90%는 러시아산이다. 중국도 비슷하다. 최근 중동에서 자국의 국제 정치력을 확대하고 리비아산 석유를 안정적이고 값싸게 공급받으려는 중국 입장에서도 군사 개입을 통한 리비아의 정권 교체는 국익에 별다른 실익이 없다는 분석이다. 중동에서도 의견은 갈린다. 카타르와 아랍에미리트연합(UAE)은 군사 개입에 참여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반면 아랍권 22개국으로 구성된 아랍연맹(AL)과 아프리카 53개 국가로 구성된 아프리카연합(AU)도 다국적군은 리비아 공격을 즉각 중단하라고 촉구했다. 반카다피 시위를 지지해온 이란도 리비아를 식민지화하려는 서방의 의도를 경계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중동은 서방 주도의 군사적 개입으로 알카에다와 같은 테러 집단의 영향력이 커질까 우려한다. 브루킹스연구소의 이브라힘 샤르키 부소장은 최근 AF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아랍권은 이라크 전쟁 경험 때문에 군사개입에 특별히 민감할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이경원기자 leekw@seoul.co.kr
  • [부고] 90년대 ‘美 외교의 대명사’ 워런 크리스토퍼

    [부고] 90년대 ‘美 외교의 대명사’ 워런 크리스토퍼

    1990년대 미국 외교의 대명사처럼 한국 국민에게 그 이름이 각인된 워런 크리스토퍼 전 국무장관이 지난 18일(현지시간) 로스앤젤레스 자택에서 85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그는 신장암과 방광암에 따른 합병증을 앓아 왔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19일 성명을 통해 “고인은 단호하게 평화를 추구한 유능한 외교관이자 꿋꿋한 공무원, 충성스러운 미국인이었다.”고 평가했다. 크리스토퍼는 기본적으로 협상론자였다. 그는 지미 카터 행정부에서 국무부 부장관으로서 1979년 이란 주재 미국 대사관 인질 사건이 터지자 52명의 인질 석방 협상에 참여했다. 빌 클린턴 행정부에서는 국무장관으로서 1993년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를 탄생시킨 오슬로 평화협정, 1994년 요르단과 이스라엘의 평화조약 체결, 1995년 보스니아 평화협정 중재 등에 참석했다. 그는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미국 정부가 민간인에게 주는 최고의 훈장인 자유훈장(Medal of Freedom)을 받기도 했다. 크리스토퍼는 한국의 김영삼 정부와 클린턴 정부 당시 한·미 외교 마찰의 전면에 서 있었다. 1996년 8월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 발생 직후 크리스토퍼는 “모든 당사자가 추가적 도발 행동을 말아주기를 촉구한다.”며 남북 쌍방의 군사적 행동 자제를 요청하는 발언을 해 대북 강경노선을 외치던 한국 정부의 반발을 샀다. 당시 독자적인 대북 군사적 응징까지 검토하던 김영삼 대통령은 “만약 일본이나 미국이 고도로 훈련되고 무장한 외국의 특수부대 침투를 받았다면 아마 그 나라를 상대로 전쟁을 했을 것이고, 특히 미국은 벌써 그 나라를 공격해 이미 그 나라가 없어졌을 수도 있다.”며 크리스토퍼의 발언에 대해 불만을 피력했다. 당시 크리스토퍼는 김영삼 정부의 대북 군사행동을 막기 위해 외교력을 총동원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카터 전 대통령은 회고록에서 크리스토퍼를 가리켜 “내가 알았던 최고의 공무원이었다.”고 평가했다. 워싱턴 김상연특파원 carlos@seoul.co.kr
  • “그에게 지진·쓰나미보다 더 불운한 건 꽃이 팔리기도 전에 시드는 것 ”

    “그에게 지진·쓰나미보다 더 불운한 건 꽃이 팔리기도 전에 시드는 것 ”

    “김에게는 화원의 꽃이 팔리기도 전에 시들어 죽거나, 누군가 돌을 던져 화원의 유리를 깨뜨리고 도망가는 게 전쟁이나 지진보다 더 불운이었다. 지진이나 쓰나미 같은 것은 어쩌지 못하는 사이 모두에게 닥치는 일이었다. 그러니 두려울 게 없었다. 모두 무사한데 자신에게만 불운이 닥치는 것. 김이 생각하는 불행은 그런 것이었다.” 편혜영(39)의 신작 소설집 ‘저녁의 구애’(문학과지성사 펴냄)의 표제작에 등장하는 주인공 김의 직업은 화원 주인이다. 10년도 더 전에 만났던 친구는 다짜고짜 김이 한때 은혜를 입었던 어른의 화환을 주문한다. 남쪽으로 380㎞ 떨어진 도시에 있는 장례식장으로 근조 화환을 가져간 김은 아직 어른이 죽지 않았다는 친구의 전화에 하릴없이 낯선 도시에서 어른의 죽음을 기다린다. 소설집 ‘저녁의 구애’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동일한 공간에서, 동일하게 분절된 시간표를 지키며, 동일한 식사를 하고, 동일한 의복을 입고, 동일한 독서를 하고, 동일한 교통수단으로 출퇴근하는 삶, 그래서 어떤 차이도 없고, 차이가 없으니 상처도 없고, 그래서 어떤 굴곡도 없이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완전히 동일해지는 나날의 연속, 즉 복사기와 같은 삶’을 산다. ‘토끼의 묘’의 주인공은 낯선 도시의 파견직이며, ‘동일한 점심’의 주인공은 대학교 복사실 주인이다. ‘관광버스를 타실래요?’ ‘산책’ ‘정글짐’ ‘크림색 소파의 방’의 주인공들 역시 그날이 그날 같은 회사원이거나 파견직이다. ‘통조림 공장’은 아예 통조림 공장을 무대로 도시에 사는 통조림 같은 현대인의 일상을 그려낸다. 문학평론가 김형중씨는 “초기 편혜영의 소설들에서 자주 등장하던 그로테스크한 소재들, 가령 시체나 쓰레기, 악취 같은 것들은 사라졌지만 낯선 도시 문명에서의 나날의 삶 모두가 섬뜩한 미궁”이라고 해석했다. 편혜영의 소설에서 확인하는 것은 자연의 혼돈에 맞서 우리가 만든 도시 문명이 결국 ‘동일성의 지옥’이란 것이다. 탄탄하고 틈 없이 건조한 문체와 독특한 상상력으로 무장한 편혜영의 단편 소설에서는 ‘매연이 섞인 공기, 일정한 간격으로 심어진 수종이 같은 가로수’ 따위를 유일한 자연으로 경험하며 살아온 현대인들의 비애를 뼈저리게 체감할 수 있다. 윤창수기자 geo@seoul.co.kr
  • [박명재 세상 추임새] 춘래불사춘, 그들에게 진정 봄이 오게 하라

    [박명재 세상 추임새] 춘래불사춘, 그들에게 진정 봄이 오게 하라

    자연은 이제 완연한 봄이다. 산과 강·들의 온갖 꽃과 나무들 그리고 땅속의 갖가지 생명들이 탄생과 부활의 소생을 시작하고 있다. 봄을 찬미하고 노래한 시인과 문인들이 참으로 많지만 삼봉(三峯) 정도전(鄭道傳)이 “봄이란 봄의 출생이며, 여름은 봄의 성장이며, 가을은 봄의 성숙이며, 겨울은 봄의 갈무리(收藏)이다.”라고 말한 것만큼 봄의 계절적 의미를 잘 압축해서 표현한 것이 없을 것 같다. 그렇다. 봄은 자연 속에 싹이 움트고 꽃이 피는 생명과 향기의 계절이다. 동시에 우리 인간들에게는 고난의 겨울을 이기고 새로운 시작과 출발 그리고 전진과 성장의 아름답고 행복한 희망과 꿈을 주는 계절이다. ‘낡은 말뚝도 봄이 돌아오면 푸른빛이 되기를 희망한다.’라는 핀란드의 속담이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그런데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봄이 와도 봄 같지 않은 우울하고 답답한 마음 탓에 이 땅의 아름답고 약동하는 봄의 기운과 희망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진정한 봄을 느끼게 될 때 이 땅의 봄은 완전한 자연의 봄, 참다운 인간의 봄이 될 것이다. 먼저, 지난 겨울 내내 구제역과 폭설, 가축 전염병 등으로 한없는 실의와 좌절에 빠져 있는 농어민, 축산 농가들이 하루빨리 시름을 털고 재기할 수 있도록 실효성 있는 정책과 완벽한 후속 대책이 지속적이고 효율적으로 추진되어야 한다. 경제논리와 축산주권 이론이 부딪치는 혼선과 정책의 갈등을 하루빨리 수습하고 그들의 얼어붙은 가슴에 희망의 봄 강물이 다시 흐르게 하여야 한다. 매몰된 가축의 침출수가 겨우내 얼었다 녹아 흐르는 강물에 스며들어 우리의 산하를 더럽히지 않도록 철저한 관리와 완벽한 대책이 이루어져야 한다. 둘째, 졸업과 함께 대학을 떠나 사회 속으로 취업의 문을 찾아 나서는 젊은이들에게 최대한 일자리가 보장될 수 있도록 청년 실업대책이 효율성 있게 추진되기 바란다. 봄을 가장 강렬하게 느끼고 받아들여야 할 이 땅의 젊은이들이 얼음 두께보다 더한 무거운 가슴과 답답함, 막막함으로 이 봄을 맞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경제정책의 최우선 과제로 청년들을 위한 취업정보, 취업지도, 취업알선 등 청년 일자리 창출에 사활을 다해 우리 젊은이들이 희망과 꿈을 실은 봄의 전령사가 되게 하여야 한다. 봄은 누가 뭐래도 무릇 젊은이들의 계절이기 때문이다. 셋째, 북한의 못된 만행으로 자식과 가족, 삶의 터전을 잃고 겨울보다 더 혹독한 시련과 고통을 겪고 있는 천안함 유족과 연평도 주민들에게 재기와 새 출발의 기운을 북돋아 그들의 가슴에 봄의 온기를 느끼도록 해야 한다. 이 땅을 수호하고 지킨 자랑스러운 호국 용사로서, 접적지역의 용감한 국민으로서 그들에게 정부의 각종 지원 정책 못지않게 진정어린 국민들의 존경과 감사, 고마움을 느낄 때 그들의 가슴에 남아 있는 통한의 잔설이 조금씩 녹아내릴 것이다. 끝으로 7000만 대한민국 국민 전체와 삼천리 금수강산 전 국토에 봄의 햇살이 구석구석 골고루 비치기 위해서는 우선 경색된 여야 관계가 원활하게 작동되어 산적한 국정현안과 민생대책이 효율성 있게 추진되고, 좌초한 남북관계에 대화와 타협의 물꼬가 터져 더 이상의 포격과 폭침 그리고 핵전쟁의 위험이 사라져 평화와 공존의 남북관계가 이루어져야만 진정 이 땅에 완전한 봄, 진정한 봄이 오게 될 것이다. 어디 그들뿐이랴. 혹한과 폭설 못지않은 사회의 높은 벽과 단절에 응어리진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 고통받는 이들의 가슴에도 진정 봄이 오게 될 때, 우리의 산천에 버들잎은 제대로 가지마다 푸르고(楊柳絲絲綠) 복숭아꽃 또한 제대로 송이송이 붉게(桃花點點紅) 피어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올해는 이 땅에 봄이 와도 봄이 온 것 같지 않다는 춘래불사춘이 아닌, 봄이 오니 진정 봄 같다는 춘래여진춘(春來如眞春)이 되었으면 한다.
  • 日 70여년째 국제사회 지원… 88개국 앞다퉈 “日 돕겠다”

    ①한발 앞선 ‘공공외교’ 비록 지난해 중국에 추월당해 ‘넘버3’로 내려앉았지만 일본은 여전히 초경제대국이다. 초유의 국가적 재난을 당했지만, 경제력만으로 따지면 어느 나라보다 강한 복원력을 지닌 나라인 것이다. 그럼에도 전 세계 88개 국가가 일본을 돕겠다며 앞을 다투고 있다. 적어도 미국과 중국을 제외한 나머지 86개국은 일본보다 경제력이 뒤진다. 그중에는 아프가니스탄처럼 오랜 전쟁을 겪고 있는 나라들도 적지 않다. 이들이 지원 대열에 줄을 선 것은 바로 일본이 지닌 국제적 위상, 그리고 소프트파워의 힘이다. 일본이 수십년 동안 펼쳐온 국제사회에 대한 기여가 이번 지진·쓰나미 위기 속에 도움의 손길로 되돌아오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바로 일본 ‘공공외교’의 힘이다. 그동안 센카쿠 열도를 놓고 일본과 영유권 갈등을 빚어온 중국 네티즌들 사이에선 “쓰촨 대지진 때 보여준 그들의 행동이 고마워 일본을 미워하지 않는다.”며 신속히 일본을 지원하라고 촉구하는 글이 인터넷에 올랐다. 중국 정부도 적극적인 지원에 나섰다. 일본은 중국과 긴장 관계 속에서도 쓰촨 대지진 구호뿐 아니라 1979년부터 공적개발원조(ODA)를 통해 중국에 도움을 줬다. 1979년부터 2009년까지 유상자금협력이 3조 3160억엔, 무상자금협력 1544억엔, 기술협력이 1704억엔 등에 이른다. 지난해만 해도 인재육성 장학계획이란 이름으로 4억 9200만엔을 지원했다. 기존 외교가 전문외교관 대 전문외교관 중심이라면 공공외교는 장기적인 국가이익을 목표로, 정부를 포함한 상대국 대중을 대상으로 한다. 수행 주체도 외교관이 아니라 정부, 개인, 비정부기구 등을 포괄한다. 공공외교에는 국제사회 대중의 요구를 이해하고, 자국의 관점을 제시하고, 자국과 국민에 대한 오해를 교정하고, 국제사회의 공통된 대의에 참여하고, 리더십을 키우는 일과 같은 광범위한 영역이 포함돼 있다. 버락 오바마 미국 행정부 출범에 즈음해 미국의 ‘소프트파워위원회’가 제시한 5대 전략목표 가운데 세 번째가 바로 공공외교였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소프트파워위원회에 따르면 공공외교의 목적은 “한 나라의 ‘정부’가 아닌 ‘국민’과 소통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일본의 공공외교는 아시아에서 가장 오랜 역사와 다양한 노하우를 자랑한다. 일본의 공공외교는 1934년 국제교류진흥회를 세우고 해외 문화단체와 네트워크를 형성하며 일본을 소개하는 등의 활동을 시작한 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940년 아시아 국가로는 최초로 체코 프라하에 일본 정보문화원을 개설한 것도 특기할 만하다. 일본의 공공외교는 1970년대에 골격이 형성됐다. 개발도상국의 문화와 교육 활동을 지원하는 정부 원조가 본격화된 것도 이때부터다. 1978년 아세안(ASEAN) 문화기금을 설립하고 대규모 지원을 시작했고, 1980년에는 아세안 국가의 차세대 젊은이들을 후원하는 청년장학금제도도 마련했다. 1980년대부터는 일본국제교류기금을 중심으로 일본어 보급 사업도 본격화했다. 1990년대부터는 NHK 월드 등을 통한 미디어 공공외교로 확장했다. 강국진기자 betulo@seoul.co.kr ②‘메이와쿠’는 없다 사재기·새치기·울부짖는 사람 거의 없어 지진이나 태풍, 화재 등 국가 재난이 발생하면 흔히 범죄와 약탈, 무질서와 폭동이 횡행한다. 사재기도 판을 친다. 하지만 도호쿠 대지진이 일어난 지난 11일 이후 일본에서는 이런 모습을 찾아 볼 수 없다. 길게 늘어선 줄에서 차례를 기다리다 자신에게 순서가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새치기를 하거나 다른 이를 밀치는 사람도 없다. 실제로 지진 이후 신오쿠보에서 목격된 장면은 일본인의 질서의식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코리아타운 내 슈퍼마켓에서 근무하는 한 직원(24·여)은 “11일 지진이 발생했을 때 많은 사람이 놀라서 모두 밖으로 몰려 나가는데, 계산대에 있던 일본 사람들은 끝까지 기다리다 계산을 마치는 모습이 특이했다.”면서 “우리 같으면 계산이고 뭐고 일단 바구니 던지고 뛰쳐나갈 텐데 참 대단했다.”고 말했다. 사재기가 없는 것도 ‘이방인’의 눈에는 특이했다. 대지진 첫날에는 주택가나 사무실 주변 슈퍼마켓 등에서 라면과 빵 등 비상 생필품을 사려는 사람들이 간혹 눈에 띄었지만, 4일째인 14일에는 그런 모습이 거의 자취를 감췄다. 주택가 슈퍼마켓에는 다시 라면과 빵, 음료수가 쌓이고 있다. 일본 사람들의 질서의식은 어릴 때부터 몸에 밴 ‘메이와쿠(迷惑) 회피 정신’에서 나오는 것이다. 메이와쿠는 ‘남에게 끼치는 폐’를 뜻한다. 일본의 가정과 학교에서는 ‘남에게 폐를 끼치지 말라.’고 수시로 교육한다. 이런 뜻인 ‘메이와쿠 가케루나’를 아예 가훈으로 삼는 집도 적지 않다. 또 일본 학교에는 ‘인내하는 힘’(耐える力)이라는 캐치프레이즈가 붙어 있는 곳이 많다. 단체생활을 위해 개인은 참고 순응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일본인들은 꾸준하고 일관된 재해 대처 교육을 유치원 때부터 받는다. 책상 옆에는 늘 재해에 대비한 방재 두건이 걸려 있다. 이러한 철저한 재해 예방 교육은 메이와쿠 정신과 함께 대형 재해에 침착하게 대응하게 하는 비결이 된다. 재해를 당한 일본인들이 크게 흐느끼거나 울부짖는 일도 거의 없다. “내가 그런 행동을 하면 나보다 더 큰 피해를 당한 이들에게 폐가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도쿄전력이 제한 송전에 나선 14일 예상치보다 전력 수요가 많지 않아 오전 6시 20분부터 오전 10시까지 송전을 제한하려던 제1그룹에 대해 송전 제한 계획을 취소한 것에서도 다른 사람을 위해 내가 전기를 아껴 쓰겠다는 일본인의 고통분담 정신을 확인할 수 있다. 대지진과 쓰나미, 원전의 방사능 유출로 인해 일본이 초토화되고 있지만 일본인들이 무서울 정도로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는 것도 이런 배려 정신의 발로인 셈이다. 도쿄 이종락특파원 jrlee@seoul.co.kr ③세계 최고 지진경보 체제 세계 1000개 관측소 연계 “전국민에 지진 1분 전 경보” 지난 11일 일본을 강타한 지진은 인간의 힘으로 막기엔 너무나 무시무시한 재앙이었다. 그럼에도 일본이 입은 피해는 재앙의 크기에 비해서는 약하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 철저한 사전 대비를 제도화한 시스템의 힘으로 열악한 자연환경을 극복한 셈이다. 차분한 준비와 침착한 대처에 세계 외신들도 감탄을 금치 못했다. AP통신은 “일본이 세계 최고 수준의 대비를 한 덕분에 2004년 인도네시아 쓰나미와 지난해 아이티 지진 때보다 피해가 훨씬 적었다.”고 보도했다. 규모 7.0이었던 아이티 대지진 사망자는 30만명이 넘었고 인도네시아 쓰나미 사망자는 약 23만명이었다. 일본의 지진 경보 시스템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하지만 이번 지진은 이마저도 뛰어넘을 정도로 강력했다는 점에서 불가항력이었던 점도 있었다. 일본 기상청이 동북부 해안에 쓰나미 경보를 내린 것은 11일 오후 2시 49분. 높이 10m의 쓰나미가 해안을 덮친 건 오후 3시 정각 무렵이었다. 해안가 주민들은 대피할 겨를도 없었다. 그러나 기상 전문가들은 “일반적인 재난상황을 감안했을 때 이번 지진경보가 늦었다고 보기는 힘든 상황이었다.”고 지적했다. 외신에서도 일본의 사전 경보 시스템에 대한 찬사가 이어졌다. AFP통신은 “일본 국민 수천만명이 지진경보 시스템을 통해 진동이 발생하기 약 1분 전에 지진이 발생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면서 “이는 전 세계 1000여곳의 지진관측소와 연계된 일본의 정교한 재해경보 시스템 덕분”이라고 평가했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도 “철저한 준비 덕분에 최악의 사태를 면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고 보도했다. 다만 일본 정부가 지진이 잦았던 도쿄 남서부를 중심으로 지진 대비책을 준비하고 별다른 지진이 없었던 도호쿠 지역에 대한 대비는 상대적으로 등한시했다는 지적은 뼈아픈 대목이다. 뉴욕타임스(NYT)는 “평소 쓰나미에 대한 경계심과 대피 훈련 덕분에 피해자를 줄일 수 있었다.”고 전했다. 강국진기자 betulo@seoul.co.kr
  • [이슈 인터뷰] ‘한국 테크노크라트 효시’ 오원철 前 경제2수석

    [이슈 인터뷰] ‘한국 테크노크라트 효시’ 오원철 前 경제2수석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 방위산업부터 중화학공업까지 경제계획을 입안, 집행했던 오원철(83) 전 청와대 경제2수석은 1977년 발행된 미국 뉴스위크지를 보 관하고 있다. ‘한국인이 몰려온다’라는 제목의 기사는 한국의 수출·중화학공업 위주의 성장을 다뤘다. 이 잡지는 지난해 9월에는 ‘한국은 진정한 기술강국이 됐다’는 특집기사를 다시 내보냈다. 기술을 해외에 전수해 먹고살 수 있는 나라. 오 전 수석이 팔십평생 꿈꾸던 나라가 실현된 셈이다. 10일 서울 서초동에서 만난 오 전 수석은 그래도 갈 길이 멀다고 말한다. 그는 지금이야말로 정략에 따라 움직이는 정치인 대신 기술관료(테크노크라트)가 과학기술 정책 결정권을 가져야 한다고 역설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내용이다. 대담 박선화 경제에디터·정리 홍희경기자 →지난 1970년대 중화학공업 육성정책이 그러께 아랍에미리트연합(UAE) 원전 수출이라는 열매를 맺었는데. -원전 수출은 사실상 40년 전에 기획된 것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동족을 죽이는 병기를 만들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원자력 발전소를 만들었다. 원자폭탄꽃 대신 산업성장의 기반이 되는 값싼 전기 생산과 원전 수출이라는 ‘무궁화 꽃’을 마침내 피워냈다. 당시 우리는 일본처럼 필요할 때 (핵무기를 생산할 수 있는) 기술능력을 갖춰야 한다고 생각했고, 10·26 이전에 박 전 대통령에게 우라늄농축용 분말인 ‘옐로 케이크’를 보고하기도 했다. 하지만 신군부가 들어선 뒤 국내 원자력 기술개발은 사실상 중단됐다. →수출 위주 중화학공업 정책은 이제 개발도상국에 경제개발 교과서처럼 되었다. 핵심분야 가운데 가장 애착이 남는 부분은. -철강·석유화학·기계·조선 등 6대 분야 가운데 하나라도 빠졌다면 중화학공업 성장 역사는 없었다. 여기에 기초과학을 연구할 대덕연구단지까지 모두 7개 분야를 집중육성했다. 오로지 국토의 균형발전과 업종의 특성을 고려해 제대로 입지를 잡아 성공적으로 육성했다고 자부한다. 산업정책을 펴는 데 있어 정치권의 이해관계를 따르면 안 된다. →지방자치단체별로 과학벨트 유치 경쟁이 한창인데. -지금 정부에는 전문 기술관료가 발을 붙이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깝다. 과학벨트 논쟁에서도 과학기술자들은 소외됐다. 만일 1960~70년대 이렇게 했다면, 경제발전은 없었을 것이다. 조선업을 육성하려면 수심이 깊은 바다라는 입지를 찾아야지, 정치적인 표심을 계산해서는 안 된다. 과학벨트 선정은 과학기술자 집단에게 맡겨 놓으면 된다. 설령 그들이 싸우더라도 그 속에서 제대로 된 방법을 찾아낼 것이다. →결정은 정치인인 대통령의 몫이 아닌가. -지휘관과 참모의 역할은 구분되어야 한다. 과거 박정희 대통령이 중화학공업 육성자금으로 100억달러를 빌려야 한다고 하자 재무부 쪽이 난색을 표했다. 이에 박 대통령은 “내가 전쟁을 하자는 것도 아니지 않으냐.”라고 설득해 정책을 강행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국민들은 전쟁에도 따라줬는데, 후손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에 돈을 핑계로 주저하면 안 된다는 의미였다. 지휘관은 전체를 파악해서 방향을 정해야 한다. 물론 많이 알고 있어야 한다. 당시 박 대통령 집무실에는 대형 한반도 지도에 북한군과 우리군의 전력이 표시되어 있었다. 하루는 박 대통령이 불러 “적기가 뜬 뒤에는 이미 늦으니, 단추 하나로 적을 제압할 기술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가 미사일 개발을 할 수 있었다. 만일 이 기술이 계속 유지발전됐다면, 북한은 연평도 도발을 생각도 못했을 것이다. 지휘관이 방향을 제시하면, 참모인 기술관료는 계획서를 만들고 집행을 하며 지휘관의 머리와 손발 역할을 해야 한다. 그래야 정책에 힘이 실린다. 지휘관도 과학기술자를 우대하는 쪽으로 정책을 펴야한다. →테크노크라트가 역량을 발휘할 방법은. -정부에 테크노크라트가 들어가 국가계획을 세울 여건이 조성되어야 한다. 지금은 과학기술부도 없고, 청와대에도 과학기술자를 대변할 인물이 없는 같다. 새롭게 생긴 국가과학기술위원회에는 정책을 집행할 권한이 없지 않을까 우려된다. 기동타격대처럼 정책을 세우고 집행할 수 있는 태스크포스팀 같은 조직이 필요한데, 오히려 그런 팀이 너무 많고 컨트롤타워는 없는 게 현실이다. →한국의 압축성장 과정이 끝났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 아닌가. -흔히 한국의 성장방식을 ‘압축성장’이라고 한다. 일본 학자가 개발한 용어를 국내 정치권에서 사용했다. 그런데 ‘압축’보다는 ‘성장’에 방점을 찍어야 한다. 우리는 산업혁명을 이뤄냈다. 영국이 수공업인 방직공장에서 시작해 증기 동력을 통해 산업혁명 단계를 밟았듯이, 우리도 수출을 해야겠다는 인식을 갖게 된 뒤부터 산업혁명 단계를 밟았다. 1963년까지만 해도 생선·김·돼지털·인모 같은 것을 닥치는 대로 수출했다. 그러다가 교육도 못 받고 형편도 어려워 3~4명씩 좁은 방에 합숙하며 살던 여공들이 수출산업의 주역이 됐다. 다음에는 남성 기능사가 나섰다. 월남전 이후 미군 하청을 통해 경험을 쌓은 인력이 생기며, 중동 건설현장이라는 시장에 투입됐다. 당시 영어로 된 도면을 읽을 수 있는 인력을 키우려고 공고 3학년생 2000명을 교육시켰다. 이들을 소년병이라고 불렀다. 용접은 어른들이 해도, 도면을 읽고 지시하는 일은 소년병이 했다. 이들이 점차 성장해 경제발전의 역군이 됐다. →최근 공학한림원에서 받은 대상 상금을 기탁했는데. -여공들과 남성 기능사·기술자는 그야말로 한국 산업혁명의 주역이었다. 관료들도 열심히 했지만, 현장의 공에 비할 바가 못 된다. 이들을 위해 써달라고 상금을 전부 기탁했다. →앞으로 한국이 어떤 방향으로 나가야 하나. -한국 사람은 끈기가 부족하다고 한다. 일본에서는 러일전쟁 때 전쟁이 일어났는지도 모르고 연구에 매진했다는 과학자의 일화가 있다. 고 이병철 삼성 창업자도 같은 얘기를 했다. 집적회로(IC) 기술을 들여오기 위해 한국 연구진에게 맡겼더니, 안 되는 이유만 설명하고 연구비를 더 달라고 요구했단다. 타이완 연구자에게 다시 일을 맡기자 근성 있게 매진하더니 6개월 만에 만들어냈다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요즘 우리 젊은 세대는 끈기와 창의력이 뛰어난 것 같다. 최근 ‘위대한 탄생’이라는 프로그램과 비보이를 보면, 원하는 꿈을 이루기 위해 갖은 고생을 하며 성공하려는 끈기를 발견할 수 있다. 다만 기능사·과학기술자들은 국익을 위한 사명감으로 임했으면 좋겠다. saloo@seoul.co.kr ■ 그는…박 前대통령이 국보라 부른 사나이 1970년대 후반 어느 날 저녁 서울 프라자호텔. 박정희 대통령이 창원공단 순시를 마친 뒤 오원철 청와대 경제2수석을 가리키며 “임자는 국보야, 국보.”라고 불렀다. 일순 오 수석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고, 김정렴 비서실장 등 주변에는 침묵이 흘렀다. 오 수석은 우리나라 중화학정책을 입안하고 주도한 전문 기술관료의 대표적 인물로 평가받는다. 황해도 해주 출신으로 서울대 화학공학과를 졸업한 뒤 공군 소령을 거쳐 국내 최초 자동차회사인 시발자동차와 국산자동차의 공장장을 지낸다. 이듬해인 1961년 5·16이 일어나 국가재건최고회의 기획조사위원회 조사과장을 맡은 이래 상공부 화학과장, 공업1국장을 맡으며 1차 5개년 개발계획과 수출제일주의 정책을 실행했다. 1970년에 차관보로 승진해 울산 석유화학단지를 건설하고, 1971~79년 10·26이 날 때까지 청와대 경제2수석으로 일했다. 이때 조선, 원자력, 대덕단지 등 7개 중화학공업 정책을 주도하고 방위산업 육성을 총괄했다. 율곡사업 진행 시 깐깐한 결재 때문에 12·12 이후 신군부에 미운털이 박혀 13년간 은둔생활을 하기도 했다. 요즘도 백선엽 장군 등 지인들과 어울리며 과학기술 강국을 강조한다고. 팔순을 비켜가듯 젊은이를 혼내며 박장대소하는 게 건강 유지의 비결이란다.
  • 최고령 현역배우 장민호·백성희씨 “그때 배웠지, 연극엔 편집이 없다는 것을”

    최고령 현역배우 장민호·백성희씨 “그때 배웠지, 연극엔 편집이 없다는 것을”

    “지난해 12월 극장 현판식 때 잠시 무대에 올라 연극 ‘파우스트’의 독백을 일부 했는데 60여년 연극 인생 가운데 그날이 가장 떨렸어. 객석에 누가 앉았는지도 몰랐을 정도이니…. 마치 20대 때 첫 무대에 올랐던 기분이었지. 잠깐 맛보기로 연극 대사 치는 데도 그렇게 떨렸는데 이번에는 정식 개관작품이야. 생각해 봐. 자기 이름이 붙은 극장 무대에 선다면 얼마나 긴장되겠어. 이번만큼은 연기가 아닌 무대에서 진짜 인생을 살 듯 공연하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야.” 며칠 전 감기에 걸려 몸이 좋지 않다며 짤막한 인터뷰를 주문하던 장민호(87)씨는 막상 인터뷰가 시작되자 20대 못지않게 힘이 넘쳤다. 옆자리의 백성희(86)씨는 “연출을 맡은 손진책 감독(국립극단 예술감독)이 연습 때 하도 혼을 많이 내 공연 때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며 웃었다. 손 감독은 애써 못 들은 척했다. 두 사람은 자신들의 이름을 딴 백성희장민호극장(서울 서계동) 무대에 11일 개관작 ‘3월의 눈’을 올린다. 연습에 한창인 국내 최고령 남녀 현역배우를 극장에서 만났다. ●200편 이상 동반 출연… 20여편은 ‘부부 연기’ 장씨가 먼저 “백 선생 눈치만 봐도, 냄새만 맡아도, 아니 숨소리만 들어도 난 그녀의 생각을 알 수 있다.”며 호탕하게 웃었다. 질세라 이어지는 백씨의 응수. “아무리 친해도 남녀가 유별한데 무대에서 포옹하는 게 어렵잖아. 근데 나는 장 선생님이라면 맘 놓고 포옹할 수 있고, 손도 쓰다듬을 수 있어. 이 남자, 내 손안에 있다니까.” 두 사람이 함께한 작품은 200편이 넘는다. 그 중 부부로 나온 작품만도 ‘백년 언약’ 등 20여편이다. 이번 ‘3월의 눈’에서도 노부부를 연기한다. “진짜 부부보다 더 끈끈한 관계”라며 두 사람은 또 한번 웃음을 터트린다. 아무리 오래 무대에 섰어도 기계가 아닌 지라 더러 실수도 한다는 두 사람. 하지만 상대가 대사를 잊었다 싶으면 ‘귀신같이’ 빨리 알아채고 메워 준다고. 60여년 무대 위 동고동락이 가져다준 노하우다. ●상대가 대사 잊었다 싶으면 ‘귀신같이’ 메워줘 무대에 얽힌 우여곡절과 감동의 순간을 물어 봤다. 장씨는 수백편 출연작 가운데 1973년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 개관 작 ‘성웅 이순신’을 절대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우리나라에 그럴 듯한 극장이 처음 생겼으니 첫 공연에 당시 박정희 대통령 부부와 정·재계 인사들이 대거 참석했어. 잘 나가다가 글쎄, 맨 마지막 하이라이트 장면에서 무대가 돌아야 하는데 회전이 안 되는 거야. 대망신이었지. 그때 배웠어. 연극에는 편집이 없다는 것을.”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땀이 난다.”는 장씨는 “연극은 현장예술”이라는 말을 몇 번이고 강조했다. 그는 40년에 걸쳐 ‘파우스트’ 공연만 네 번 해 ‘파우스트 장’이란 별명도 갖고 있다. 백씨는 첫 데뷔무대를 가장 잊지 못한다고 말했다. “1943년 극단 현대극장의 ‘봉선화’로 데뷔했는데 첫 무대 때 수많은 눈이 나만 바라봐서 객석이 너무 무서웠어. 전쟁터에 나가는 용사 심정이었지. 콧등에 땀이 얼마나 송송 맺히던지…. 첫 장면을 무사히 마치고 무대 뒤로 퇴장하는데 등에서 땀이 비 오듯 흘렀어.” 가장 힘들었던 작품은 1964년 국립극단의 연극 ‘만선’이란다. “기존 역할과 전혀 다른 색깔의 구포댁 역을 해야 했는데 정말 힘들게 공연을 마쳤어. 그런데 고생하고 노력한 만큼 대가가 오더라고. ‘만선’으로 백상예술상 제1회 여우주연상을 받았지. 변신을 시도한 첫 작품이면서 성과가 바로 이어진 작품이라 기억에 오래 남아.” ●“국립극단 법인화, 올 것이 왔다 싶었다” ‘한국 연극계의 산 증인’인 두 배우는 한국 연극사상 떠들썩한 사건이었던 ‘국립극단 법인화’를 어떻게 볼까. 국립극단은 지난해 8월 법인으로 전환하면서 장씨와 백씨, 두 원로 배우만 빼고 모든 단원을 내보냈다. 잠깐의 침묵 뒤에 백씨가 입을 열었다. “국립극단이 철밥통이다 뭐다 말들이 많았는데 솔직히 (1973년) 장충동으로 온 뒤 한동안 공무원들이 자리를 꿰차고 있었어. 그러니 연극에 발전이 없었지. 한번쯤 개혁이 있어야 마땅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지라 (법인화 당시) 올 것이 왔구나 싶더라고. 중요한 건 이제부터 앞으로 얼마나 잘해 나가느냐야.” 그때 국악인이자 배우인 김성녀(61) 중앙대 교수가 예고 없이 등장했다. 그는 손진책 감독의 부인이기도 하다. 두손엔 떡 상자가 들려 있었다. “두분 선생님, 여전히 너무 곱고 멋지세요. 응원차 들렀어요. 떡 좀 드세요.” 떡을 안기는 60대 김 교수도, 떡을 받아든 80대 두 배우도 마냥 들뜬 신인들 같았다. 1시간 넘게 이어진 인터뷰 탓에 지칠 만도 한데 노() 배우의 표정에 ‘피곤’이란 단어는 없었다. 영하 3도의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신문에 실릴 사진이 밝게 나와야 한다.”며 바깥 촬영을 강력히 주장하는 두 사람. 진정한 프로의 기(氣)가 어떤 것인지 생각하게 했다. 공연은 오는 20일까지다. 김정은기자 kimje@seoul.co.kr
  • ‘보셨죠!’ 예비 태극전사들 조광래호 승선 경쟁

    그라운드의 축구 전쟁이 시작됐다. 태극마크를 향한 선수들의 눈빛도 불타기 시작했다. ‘예비 태극전사’들은 5~6일 한국과 일본 프로축구 개막전부터 골 폭죽으로 겨우내 갈고닦았던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김정우(상주)와 박기동(광주FC)이 2골씩 뽑았고, 윤빛가람(경남FC)도 결승골로 이름값을 했다. J리그 이근호(감바 오사카)는 결승골을 어시스트했고, 조영철(니가타)은 어시스트 해트트릭으로 포효했다. 이천수(오미야)도 두골로 신호탄을 쐈다. 수원 이용래·염기훈·정성룡 등 기존 태극전사들은 FC서울전에서 맹활약하며 대표팀을 ‘찜’했다. 조광래 감독은 ‘행복한 고민’에 빠졌다. 가장 눈에 띈 건 박기동(23)이다. 대구FC와의 개막전에서 멀티골로 신생팀 광주의 3-2 승리에 앞장섰다. 발재간이 좋고 포스트플레이에 능했다. 191㎝, 83㎏로 체격도 우월하다. 현장에서 지켜본 조 감독은 “득점력이 뛰어나고 균형도 좋은 선수다. 상당히 긍정적인 모습을 봤다.”고 호감을 드러냈다. 박기동은 ‘쌍용’ 이청용(볼턴)·기성용(셀틱)과 함께 청소년대표로 태극마크를 달았던 유망주. 일본 J2리그 FC기후에서 뛰다 올 시즌 우선지명선수로 광주FC에 입단했다. 16개팀 최연소 주장이다. 일본에서는 이근호(26)가 희망을 부풀렸다. 세레소 오사카와의 J리그 개막전에서 결승골을 어시스트했다. 2-1 승. 지난해 남아공월드컵행을 이끈 이근호는 정작 최종 엔트리에서 탈락했다. 조 감독도 지난해 8월 A대표팀 데뷔전 이후 이근호를 외면해 왔다. 그러나 최근 “공격수 자원이 부족한데 이근호는 동계훈련을 잘했다. 최근 6개월간 활약도 나쁘지 않았다.”고 호출 가능성을 높였다. 지난해 한국선수 J리그 최다골(10골)을 터뜨린 조영철(22)도 후쿠오카전에서 도움 해트트릭을 올려 3-0 승리의 선봉에 섰다. 지난해 나이지리아전·이란전·일본전에 연속으로 발탁되며‘조광래호의 신데렐라’로 주목받은 조영철은 아시안컵 명단에서 탈락하며 칼을 갈아 왔다. 오는 25일 온두라스, 29일 몬테네그로와 A매치가 잡혀 있다. 구자철(볼프스부르크)·손흥민(함부르크SV)·남태희(발랑시엔) 등은 소속팀 적응을 위해 부르지 않는다. 지동원(전남)도 부상 중이라 박주영(AS모나코) 외에 확실한 공격 자원이 없다. 골맛을 본 선수들이 설레는 이유다. 조은지기자 zone4@seoul.co.kr
  • [디도스 공습] 해외 피해사례

    사이버 테러가 전 지구적인 현안으로 부상한 지는 오래됐다. 사이버보안에 많은 공을 들이는 선진국도 예외가 아니다. 2009년 4월 미국에서는 국방부(펜타곤) 보안 시스템이 뚫리면서 3000억 달러짜리 차세대 스텔스 전투기 F35의 개발 정보가 정체불명의 해커들에게 유출된 적도 있다. 같은 해 7·7 디도스 공격 때도 미 백악관과 재무부, 연방무역위원회 등이 피해를 입었다. 초창기 사이버 테러는 주로 호기심이나 돈을 목적으로 한 개인에 의해 벌어졌다. 하지만 갈수록 정치적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사이버 테러를 활용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지난해 신종 악성코드인 스턱스넷이 이란 원자력발전소를 사이버 공격해 원심분리기 1000여대를 고장 낸 사례에서 보듯 은밀히 타국을 공격하는 무력 시위로 이용되기도 한다. 스턱스넷의 파괴력은 이란에서 그치지 않았다. 지난해 10월쯤에는 독일 지멘스 시스템을 사용하는 중국 내 컴퓨터 600만대와 1000여개 산업시설에 막대한 피해를 끼쳤다. 사이버 공격을 전쟁의 한 형태로 수행하기 위해 해커부대를 전략적으로 육성하는 국가도 늘고 있다. 스턱스넷은 미국·이스라엘 정보기관이 비밀리에 개발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중국은 2003년부터 베이징, 광저우 등지에 해커 2000여명으로 구성된 ‘전자전 부대’를 창설, 운영하고 있다. 러시아도 옛 소련 국가보안위원회(KGB)의 후신인 연방보안국(FSB)에 사이버전 전담 부서를 두고 사이버 무기 개발과 전문가 양성에 힘을 쏟고 있다. 2008년 8월 러시아 해커들은 그루지야의 주요 정부 사이트와 통신서비스 등을 공격해 대통령 홈페이지와 20여개 금융·방송사 사이트를 다운시킨 바 있다. 강국진기자 betulo@seoul.co.kr
  • “내년엔 아흔, 그래도 캔버스 앞에만 서면 가슴이 뛴다”

    “내년엔 아흔, 그래도 캔버스 앞에만 서면 가슴이 뛴다”

    “제사 지내려면 병풍이라도 있어야 했으니 동양화 쪽은 그래도 먹고살 만했는데 서양화는 참 어려웠어. 한국전쟁 때 부산으로 피란 간 이중섭(1956년 작고)은 국제극장 뒤에서 점심으로 만날 호떡을 얻어먹었지. 그땐 호떡이 제법 커서 한끼로 때울 만했거든. 가격은 생각 안 나는데, 그렇게 비싸지도 않았어. 그런데 그 호떡 하나 사먹을 돈조차 없어 늘 쩔쩔맸지. 그러니 주인장이 불쌍해서 돈 조금만 받고도 주고, 공짜로도 주고 그랬어. 미안하고 고마웠던 이중섭이 할 줄 아는 거라곤 그림이니, 그림 하나를 정성껏 그려서 줬어. 주인장도 그걸 받기는 했는데 참 난감한 거야. 나중에 보니 그걸 장독 뚜껑으로 쓰고 있더라고. 유화물감이니까 기름기가 있어서 물기를 잘 막아주거든. 자존심이 무척 강했던 이중섭이지만 제 눈으로 그걸 보고도 아무 말 못했지. 그땐 시절이 그랬어.” “아깝네요. 그거 하나 잘 갖고 있었으면 지금 몇억원은 할 텐데.” “예술가의 삶이란 게 그런 거 같애. 내가 프랑스에서 살던 곳이 페뢰야. 빛이 좋아 화가들이 좋아하는 곳이지. 고흐가 살던 오베르하고 가까운 곳이기도 해. 언젠가 오베르에 갔더니 그곳 주민들이 이런 얘기를 해. 고흐가 권총자살하는 데 잘못 쐈대. 즉사한 게 아니라 한 3~4일 앓다가 죽은 거지. 장례가 골치 아팠어. 이름 없는 가난뱅이 화가인 데다, 그런 방식으로 죽었으니 다들 꺼림칙한 거지. 겨우겨우 이웃의 도움을 받아 장례를 치렀는데 이번엔 삯으로 줄 돈이 없는 거야. 그래서 그림 하나씩 가져가라 그랬대. 그런데 아무도 안 가져갔다는 거야. 그때 아무거나 하나 골라 집었어 봐…. 어휴.” 지난 3일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백영수(89) 화백을 만났다. 이중섭·김환기·장욱진·유영국·이규상 화백 등과 더불어 1950년대 신사실파 화폭을 개척한 대표적 작가 가운데 한 사람이다. 신사실파는 일본을 통해 유입된 서구의 후기인상파적 화풍을 뛰어넘기 위해 이들이 결성한 단체다. 동인 중 유일한 생존 작가가 백 화백이다. 한국 근대미술의 산 증인으로 불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가 1977년 프랑스로 떠났다가 올 1월 34년 만에 영구귀국했다. 따뜻한 느낌의 ‘모자(母子) 시리즈’로 국내는 물론, 유럽 화단에도 상당히 이름이 알려져 있다. 롯데호텔에서 백 화백을 만난 것은 영구귀국 뒤 첫 전시가 롯데호텔 1층 롯데갤러리 재개관전이어서다. 롯데호텔 전신은 1956년 세워진 반도호텔이다. 이곳 1층의 반도화랑이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상업갤러리다. 롯데갤러리 재개관을 맞아 백 화백을 비롯, 김종화(93), 권옥연(84), 황용엽(80), 윤명로(75) 등 원로 작가 다섯 명의 작품을 모았다. 백 화백은 ‘모자 시리즈’와 더불어 ‘여백 시리즈’를 내놓았다. 그런데 원로 작가들의 명성에 비해 호텔 로비 한쪽 구석에 자리 잡은 갤러리가 어째 좀 옹색해 보인다. 내걸린 작품 수도 그리 많지 않다. 백 화백에게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에이, 이것만 해도 엄청난 거지. 반도화랑은 더했어. 그 시절 화랑이란 게 일종의 기념품 가게였거든. 반도호텔 맞은편에 미국공보원이 있었고 옆에는 국립도서관이 있었지. 거기다 최고의 요지였던 명동이 곁에 있었고…. 그러다 보니 드나드는 외국인들이 많았는데 이 사람들이 반도화랑에서 작품들을 사갔어. 이때 박수근(1965년 작고)이 그린 그림이 조선 풍속화야. 외국인 눈에 맞춘 거지. 덕분에 미군 부대 초상화가에서도 벗어났고….” 반도화랑에서 일을 배운 박명자(67) 회장이 나가서 살림 차린 곳이 바로 현대화랑(지금의 갤러리 현대)이다. 박수근 화백도 반도화랑 전시를 통해 화단에 본격 데뷔했다. “그땐 반도호텔이 9층인가 해서 주변에서 제일 높았어. 그림 그린답시고 몰려다니면서 명동에서 막걸리 한잔 마시고 9층 칵테일 바에서 분위기 내고 그랬지. 반도화랑을 열었던 이대원(2005년 작고)이 오며 가며 이런저런 일거리도 줬고….” 당시 서양화 위상은 볼품없었다는 게 백 화백의 회고다. 심지어 이념 장벽까지 있었다. 장욱진(1990년 작고) 화백은 땅과 황소를 벌겋게 그렸다고 기관원에게 끌려갔단다. 사상이 의심스럽다고 추궁당하던 시절, 이중삼중 생활고에 시달렸다. “나도 무지하게 일했어. 서울신문사 뒤에 코오롱 아케이드 있지? 그게 1969년에 지어졌는데 그 지하 아케이드 디자인을 내가 했어. 그것만 했겠어? 국립극장이 생긴 지 얼마 안 됐을 때라, 무대미술 작업도 내가 했지. 문예잡지나 시집 같은 책에다 삽화며 도안 그려넣는 일도 숱하게 했어. 그런데 그건 비교적 사정이 나은 거였어. 그나마 (작가) 이름값이 있으니 얻을 수 있는 일거리였거든. 이름 없는 작가들? 그냥 마냥 굶는 거지 뭐. 이중섭도 그렇게 굶어 죽은 거지.” 당시 작가들이 ‘괜찮은 일거리’로 꼽았던 것이 백화점 전시였다. 그런데 이것도 유쾌한 것만은 아니었다. “백화점 전시라는 게 지금처럼 멋지게 하지 않았어. 맨 꼭대기층에 전시해 두면 사람들이 내려오면서 보고 상품을 사라고 해둔 거지. 일종의 미끼 상품이야.” 그렇게 자존심에 상처 받아가면서도 뭐가 좋아 그렇게 그림에 매달렸을까. “그냥.” 허무한 답이다. 말이 이어진다. “하얀 캔버스를 앞에 두고 마주 앉아 있으면 그냥 좋아. 이번엔 내가 또 뭘 만들어낼 수 있을까, 막 설레. 얼마 전에 프랑스 오르세 미술관에 갔는데 마네 그림이 너무 좋은 거야. 여러 번 본 건 데도 너무 좋더라구. 나도 저렇게 멋진 거 하나 그리고 싶다, 이 생각밖에 안 들어.” 젊었을 때도 그 생각만으로 버텨냈다고 한다. “내 젊었을 때만 해도 샤갈, 미로, 피카소, 달리가 살아 있을 때였어. 수입된 유럽잡지를 통해 그 그림을 보면 너무 부러운거야. 나도 저런 작가가 되고야 말테다, 그 희망 하나로 버틴 거지.” 실은 한가지 이유가 더 있단다. “좋아하는 일인 데다 늙어 죽을 때까지 할 수 있잖아. 마티스는 아흔 넘어 손에 힘이 떨어지니까 가위로 종이를 오려서 작품을 만들어냈어. 르누아르는 말년에 골다공증이 오니까 몸에다 붓을 묶어서 그림을 그렸어. 그걸 보면서 그림이란 게 평생 할 수 있는 직업이구나, 하는 계산도 했지.” 그렇게 지켜온 게 바로 한국 현대미술이라는 자부심이 강하게 묻어나온다. 1977년 프랑스로 건너간 것은 파리의 한 화랑이 백 화백의 진가를 알아봤기 때문이다. 초대전으로 프랑스에 불러 들이더니 아예 주저앉혔다. 10년 넘는 활동기간 동안 큰 개인전만도 22차례, 이런저런 전시회까지 합치면 100회 넘게 전시를 열었다. ‘한국에서 건너온 뛰어난 화가’라는 명성이 쌓였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했던가. 1989년 교통사고를 당하더니 1994년 위암 선고까지 받았다. 한동안 붓을 놓을 수밖에. 몸을 추스린 뒤 더 이상 비행기를 타기 싫어 영구귀국을 결심했다. 원래 살던 경기 의정부 집으로 고스란히 되돌아왔다. 하지만 창작 의욕만큼은 왕성하다. 아직도 주머니에 종이와 연필을 넣고 다니면서 눈을 사로잡는 장면은 재빨리 스케치한다. “아직 더 그릴 수 있어. 언젠가 프랑스 한인회에서 경로잔치 같은 걸 해 주겠다길래 펄쩍 뛰었지. 아직도 하얀 캔버스 앞에만 서면 가슴이 뛰는데 무슨….” 속으로는 고민도 있다. “미술가란 남이 안 하는 모양이나 색깔을 찾아내야 하니 스케치를 계속 모아두고 있지만 언젠가는 (그 중에 작품으로) 뽑아내야지. 그리는 시간 자체보다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더 필요해.” 오는 10월쯤 신작 전시회를 열 계획이다. 글 사진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백영수 화백이 걸어온 길 ▲1922년 경기 수원 출생 ▲1945년 일본 오사카미술학교 졸업 ▲1945년 전남 목포고등여학교 미술교사 ▲1947년 서울 화신백화점 개인전 ▲1952년 해군 종군화가 미술전 ▲1953년 신사실파전(국립미술관)▲1973년 국립현대미술관 60년전 ▲1977년 프랑스행 ▲1978년 소시에테 나쇼날 보졀 그랑파레(파리) ▲1981년 프랑스 주재 한국작가전(파리), 프랑스현대작가전(도쿄도미술관) ▲1983년 살롱 도톤느 그랑파레(파리) ▲1985년 AAM전(파리) ▲1986년 프랑스 작가 초대전(일본, LA), 국제현대미술전(모나코) ▲2007년 신사실파 60주년(서울) ▲2011년 영구 귀국
  • [중동혁명과 소프트파워] 알자지라에 치이고 CCTV에 밀리고 힐러리 ‘미디어 공공외교’ 자아비판

    미국의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은 정권 초부터 외교방향을 ‘소프트파워’ 구축으로 정했다. 군사력을 앞세운 하드파워 시대가 저물고 정보·문화와 같은 소프트파워가 국가경쟁력을 좌우하게 됐음을 간파한 것이다. 하지만 임기 후반에 접어든 지금 미국의 소프트파워가 경쟁력을 잃었다는 진단이 다른 누구도 아닌 힐러리의 입을 통해 나왔다. 2일(현지시간) 힐러리가 의회에서 내뱉은 진단을 곱씹어 보면 미국 외교의 위상과 고민을 확인하게 된다. 힐러리는 하원 외교위원회 청문회에서 중국의 돈을 앞세운 ‘초청 외교’ 앞에서 갈수록 초라해지는 미국의 현주소를 전했다. 그는 “중국은 태평양 지역에서 엄청난 돈을 쓰고 있다. 반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피지나 파푸아뉴기니에 국제개발처(USAid·미국의 국제원조기관)의 깃발을 꽂고 있는 것뿐”이라고 말했다. 힐러리가 정보 전쟁에서 졌다고 자인한 것도 충격적이다. 돌이켜보면 튀니지 민주혁명 이후 중동에서 미국이 보인 행보엔 결함이 있었다. 처음부터 사태의 향배를 제대로 예견하지 못하고 어정쩡한 자세를 보이다 뒤늦게 민심을 좇기에 바빴다. 민심에 밀착하지 않고 기존 관행에 안주하다 정보전에서 쓴맛을 본 것이다. 힐러리가 아랍권의 CNN으로 불리는 알자지라를 극찬하면서 미국 방송을 혹평한 것은 귀를 의심할 정도다. 알자지라는 9·11테러 이후 오사마 빈 라덴 등을 인터뷰하면서 명성을 떨친 탓에 미국인에게는 사실상 적국의 매체로 각인돼 왔기 때문이다. 힐러리는 진지한 뉴스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알자지라에 경박하기 짝이 없는 미국 상업방송은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인식을 드러냈다. 힐러리 장관이 지적한 것은 결국 미국이 추진해온 ‘미디어 공공외교’가 중국이나 러시아에 밀리고 있다는 자아비판이나 다름없다. 상대국 정부뿐 아니라 상대국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공공외교에서 뒤처지고 있음을 경고한 것이다. 미국이란 나라의 이념과 호감도를 높이는 일은 외교관뿐 아니라 각 정부기관, 개인, 비정부기구 등을 포괄한다. 특히 미디어 역할의 중요성은 강조할 필요도 없지만 미국이 중국에 뒤처지기 시작한 것에 대한 위기의식을 토로한 것이다. 오바마 행정부 출범 전 민주·공화를 아우르는 원로들로 구성된 스마트파워위원회는 스마트파워 활성화를 선언했지만 이라크·아프간 전쟁에 경제위기까지 겪으면서 이의 해결에 몰두하느라 결과는 답보 상태다. 힐러리의 토로는 최근 들어 미국의 입장을 대변하고 확산시킬 미디어의 전쟁에서도 밀리고 있음을 지적한 것이기도 하다. 미국의 언론매체들은 규모에서나 활동력에서나 중국의 CCTV, 신화통신 등에 이미 따라 잡힌 상태다. 힐러리의 문제 제기가 지금의 외교·정보 전쟁에서 밀리기 시작한 미국의 소프트 파워를 일신시킬 계기가 될지 아니면 단순한 자괴감의 표출일지 주목된다. 워싱턴 김상연특파원·서울 강국진기자 carlos@seoul.co.kr
  • [열린세상] 새 세상이 열리는 중동현장에서/이희수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열린세상] 새 세상이 열리는 중동현장에서/이희수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지난 두달 가까이 중동에서 현장연구를 하고 막 돌아왔다. 잘못된 정권을 뒤엎으려는 거센 분노와 새 세상을 만들려는 뜨거운 열기의 한가운데서 나도 새로운 공부를 하고 왔다. 9·11테러 이후 10년간 세상이 바뀌었듯이 중동의 아랍국가들도 엄청나게 변했음을 느꼈다. 많은 국내외 전문가들이 이번 사태를 종파 간·부족 간 권력 갈등과 소외의 문제로 분석하려 하지만, 본질적으로 이번 아랍 민주화 시위는 50년 동안 억눌려 왔던 민주, 인권, 복지, 삶의 질을 향한 근원적 변화의 문제이다. 아랍세계이니 다른 세계와 다를 것이라는 전제가 잘못되었다. 다만 독립 이후 최초로 경험해 보는 민주화 실험의 서투른 시작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왜 튀니지에서 촉발된 정권 퇴진 시위가 이집트 무바라크 대통령을 하야시키고, 42년 철권통치의 카다피까지 무너뜨리면서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가 넘는 이웃 왕정 산유국으로까지 걷잡을 수 없이 번져가고 있는가? 아랍은 80년 전만 해도 하나의 공동체였다. 아랍어를 사용하고, 이슬람교를 믿으며 아랍인이라는 정체성을 공유하면서 1300년 동안 하나라는 집단의식이 강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그런 아랍세계가 1~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서구 열강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22개의 개별국가로 쪼개져 버린 것이다. 더러는 왕정을 유지하고 더러는 군사 쿠데타를 통해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거듭났다. 통치체제는 각각이지만 그들을 묶어 두는 아랍정신은 지금도 맥이 통하고 있는 셈이다. 이처럼 서로에게 영향을 받은 거대한 변화의 욕구가 이슬람식 민주주의라는 새로운 가능성을 부르짖고 있다. 첫째, 극단적 이슬람 원리주의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았다. 그들의 생각 중심에는 이념이나 종교 대신 철저하게 삶이 들어와 있었다. 치솟는 물가와 대학을 나와도 직장을 구할 수 없는 청년실업 문제, 30~40년 한결같이 억눌러 온 권위주의 왕정과 군사독재정권을 향한 극에 달한 불만과 분노, 자유롭게 말하고 인간답게 살고 싶은 희구가 자욱이 깔려 있었다. 둘째, 그들은 새로운 삶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소셜네트워크의 힘이고 인구의 60~70%를 차지하는 20대 후반 이하 젊은 층의 요구였다. 그들은 페이스북과 트위터를 통해 세상과 실시간으로 호흡하면서 자신들의 처지를 처절하게 인식하기 시작했다. 유선전화 시대를 거치지 않는 파격적인 변화의 속도다. 록카페에서 몸을 흔들고 여성들의 히잡 색깔이 화려해졌다. 외국의 유명 브랜드 회사들이 연이어 명품 히잡을 출시하면서 이슬람 여성들의 패션도 첨단을 달리고 있었다. 셋째, 그들은 투명하고 공정한 사회를 부르짖고 요구하기 시작했다. 1세대 지도자들은 비록 장기집권과 독재적 통치형태를 밟았어도 기본적으로 독립전쟁의 영웅으로서, 혁명 지도자로서, 국부로서 최소한의 국민 공감대와 신뢰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런 공헌도 못한 그의 자식들이 권력을 세습하고 호화로운 사치행각에 국가의 부를 탕진할 때 그들은 좌절하고 때로는 침묵으로 인내해야만 했다. 넷째는 미국의 새로운 역할에 대한 주문이다. 독재정권에 시달려온 아랍 민중들은 권력자들을 비호해온 미국에 대한 반감이 강하다. 동시에 미국 주도의 새로운 세계질서 구도에 편승하고자 하는 욕구가 또한 묘하게 존재한다. 따라서 미국이 종래처럼 이스라엘 안보와 석유 이익이란 두개의 축을 지키기 위해 독재정권과도 협력하고 지원해 주던 중동정책에서 벗어나야 한다. 아랍 국민들은 미래의 세계질서는 미국-서구, 중국-동아시아 축과 함께 중동-이슬람 축이 굳건히 자리잡아 함께 공존하며 협력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것의 실현을 위해 노력한다. 이제는 우리도 중동-이슬람 세계를 무지와 편견 속에 주변부로 몰아내기보다는 주류세계의 파트너로 인식하고 중심부로 끌어들이는 작업을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인구 15억에 57개국을 거느린 세계, 자원과 자본을 가진 거대한 시장을 버려두고 진정한 글로벌 경쟁을 논하는 것은 한참 잘못되었다는 생각이다.
  • [지청천 ‘자유일기’] 백산 지청천장군은 누구인가

    [지청천 ‘자유일기’] 백산 지청천장군은 누구인가

    백산(白山) 지청천 장군은 한국 광복군의 총사령관으로, 항일 무장독립운동을 진두지휘한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였다. 1888년 서울 삼청동에서 태어난 지 장군은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다 1904년 한국무관학교에 입학해 일찌감치 군인의 길로 들어섰다. 이후 신문물을 배우기 위해 1908년 스무살의 나이에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정부 유학생으로 선발돼 육군유년학교를 거쳐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 조국에서 3·1운동이 발발한 1919년은 백산에게도 중대한 전환기가 됐다. 일본군을 탈출해 만주 봉천성으로 망명한 그는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의 대열에 합류했다. 대형(大亨)이라는 본명을 청천(靑天)으로 개명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푸른 하늘을 되찾겠다’는 의미의 ‘청천’이란 이름에는 일제의 탄압에서 벗어나 조국의 독립을 되찾겠다는 의지가 담겼다. 일본 육사에서 정규 교육을 받은 백산은 만주에 설립돼 있던 신흥무관학교 교장으로 취임해 독립군 양성에 힘을 쏟았다. 당시 “조국 광복을 위해 싸웁시다. 싸우다, 싸우다 힘이 부족할 때에는 이 넓은 만주벌판을 베개 삼아 죽을 것을 맹세합시다.”라는 그의 독립 의지를 담은 개교식 연설은 독립군들 사이에 두고두고 회자되기도 했다. 1920년 김좌진·홍범도 장군과 함께 청산리전투에서 일본군을 대파한 뒤 보복을 피해 헤이룽장성(黑龍江省) 자유시로 옮긴 백산은 이곳에서 다시 고려혁명군관학교를 세워 독립전쟁을 위한 전열을 가다듬었다. 1925년 양기탁·오동진 등과 항일독립운동단체인 정의부를 조직해 만주 일원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는 등 혁혁한 공을 세운 그는 1937년 임시정부에 합류, 국무위원과 한국독립당 집행위원 등을 맡아 임시정부를 항일투쟁의 구심체로 자리매김하는 데 크게 공헌했다. 1940년 9월 17일 한국광복군 창설에 참여하고 총사령관을 맡아 한국 군을 대표하게 된 백산은 중국을 비롯한 연합군과 협력해 일본군과 직접 전투를 벌이는 데 앞장섰다. 1946년 4월 28일 광복을 맞은 조국으로 돌아온 백산은 혼란한 국내 정세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청년이 힘을 길러야 한다며 전국 규모의 대동청년단을 결성하기도 했다. 이후 1947년 제헌국회 의원, 정부 수립 후 초대 무임소장관을 역임했으며, 제2대 국회의원, 민주국민당 최고위원을 지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윤샘이나기자 sam@seoul.co.kr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