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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보 불안에 보수 달래기… 국방부, 전작권 ‘연기’ 대신 ‘점검’ 표현

    안보 불안에 보수 달래기… 국방부, 전작권 ‘연기’ 대신 ‘점검’ 표현

    정부가 2015년 말로 예정된 전시작전통제권(전작권) 전환 시기를 다시 협의하자고 미국에 제의한 배경이 주목된다. 정부가 전작권 전환 문제를 꺼내든 시점은 지난 3월 북한이 전쟁 분위기를 조성하며 위협 수위를 급격히 높인 직후로 알려졌다. 지난 2월 12일 3차 핵실험을 단행한 북한은 3월 5일 정전협정을 백지화하겠다고 위협한 데 이어 같은 달 26일 전략로켓군과 장거리포병 부대에 ‘1호 전투근무태세’ 명령을 내리는 등 위협 수위를 끌어올렸다. 이런 상황은 2010년 이명박 정부 당시 전작권 전환 시기를 처음 늦출 때의 명분과 과정, 모두 비슷하다. 참여정부 당시인 2007년 2월 양국은 국방장관 회담을 통해 전작권 전환 시기를 2012년 4월 17일로 못 박았다. 하지만 2009년 5월 북한의 2차 핵실험 이후 연기 주장이 불거졌고, 2010년 3월 천안함 침몰 이후 안보 위협이 고조되면서 연기론이 급물살을 탔다. 결국, 2010년 6월 26일 당시 이명박 대통령과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한·미 정상회담에서 2015년 12월 1일로 전환 시기를 미뤘다. 노무현 정부에서 합의한 전작권 전환 일정에 대해 보수정권에서 처음부터 의지가 없었던 것 아니냐는 지적이 제기되기도 했다. 이미 정치적 논란 끝에 한 차례 연기했던 데다 2015년 전작권 전환이 박근혜 대통령의 대선공약이란 점을 의식한 듯 국방부는 ‘재연기’란 표현을 극도로 꺼렸다. 국방부는 전작권 전환 재연기 소식이 알려진 17일 보도자료에도 ‘연기’ 대신 ‘점검’으로 에둘러 표현했다. 국방부 당국자는 “김관진 장관은 헤이글 장관에게 연기란 표현을 쓴 적이 없다”고 말했다. 또 다른 국방부 관계자는 “논의가 진행 중인 상황에서 미 국방부 관료가 실수로 언론에 ‘재연기’ 얘기를 꺼낸 것 같다”고 설명했다. 정부가 전작권 전환 시점를 늦추려는 배경에는 김정은 체제가 들어선 이후 북한의 핵과 미사일 위협 등 안보 불안이 커지고 있는 데다 보수층에 대한 고려가 맞물린 것으로 풀이된다. 현재 한미연합사령관(주한미군사령관)이 행사하는 전작권이 한국군 합참의장에게 전환될 경우 연합사령부는 해체된다. 물론, 전작권 전환 뒤에도 연합사가 가칭 ‘연합전구(戰區)사령부’로 대체되면서 연합방위체제는 유지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새누리당 일각과 성우회·재향군인회 등 보수단체를 중심으로 “연합사가 해체되면 양국 안보관계의 틀이 근본적으로 흔들리게 된다”며 전작권 전환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았다. 임일영 기자 argus@seoul.co.kr
  • [이슈 & 논쟁] 한국사 수능 필수

    [이슈 & 논쟁] 한국사 수능 필수

    반만년 역사를 한 학기에 가르치는 파행적 교육법으로 청소년들의 역사 인식과 한국사 교육이 위기에 처했다. 고등학생 10명 가운데 7명이 6·25전쟁을 ‘북침’이라 일컫고, ‘3·1절’을 제대로 읽을 줄 아는 학생이 드문 것이 현실이다. 정부는 뒤늦게 역사교육 강화 방안 마련에 나서며 한국사를 수능 필수과목으로 지정하는 방안을 고심 중이다. 학생들이 한국사 교과서를 다시 손에 쥘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대학 입시 반영만큼 효과적인 대책이 없다는 현실적인 고민과 중국과 일본이 촉발시킨 ‘역사전쟁’에 맞서기 위해 한국사 교육 강화가 시급하다는 절박함이 반영됐다. 하지만 한국사 수능 필수가 능사일까. 입시 위주 암기식 역사교육이 우리 역사에 대한 학생들의 흥미를 떨어뜨릴 것이라는 우려도 만만치 않다. 양측의 주장에 대해 전문가 의견을 들어 본다. 홍희경 기자 saloo@seoul.co.kr·일러스트 길종만 기자 kjman@seoul.co.kr [贊] 조법종 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 “357시간 교육…中·日보다 적어 더이상 외면받는 과목 방치 안돼” 최근 국가적 이슈가 돼 버린 역사교육 문제에 대한 ‘대통령의 결단’으로 역사교육 강화 방안이 구체화되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의 역사교육은 매우 기형적인 교육방식과 입시제도에 의해 ‘학교에서 가르치지만 배우지 않는 과목’으로 전락했다. 또 중국·일본과의 역사 갈등으로 인해 국가적으로 한국사 교육의 중요성이 강조되지만 정작 학생들은 소 닭 보듯이 역사 과목을 보고 있다. 더욱 개탄스러운 것은 중국에서는 애국주의 교육의 핵심으로 중국사가, 일본에서는 과거 영광 재현을 위한 과목으로 일본사가 강조되는데 한국에서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역사교육에 손을 대더니 학생에게 외면받는 한국사를 만들어 버렸다는 현실이다. 특히 이명박 정부는 중국·일본과 역사전쟁을 한다면서도 현재 시행 중인 2009 개정 교육과정에서 역사교육 시간을 총 357시간(초등 102시간, 중등 170시간, 고등 85시간)으로 중국(446시간), 일본(375시간)에 비해 가장 적게 만들었다. 게다가 ‘집중이수제’라는 학원주입식 단기 속성 방식이 도입되면서 중·고교에서는 2년에 배울 한국사 내용을 1년 또는 1학기에 몰아서 가르쳤다. 결국 이미 중학생 때부터 한국사는 재미없고 짜증만 나는 과목이 돼 버렸다. 더욱이 한국사는 2005학년도 대입수능 필수에서 선택과목이 되면서 27.7%만 선택하더니 서울대 진학생만 공부하는 과목이 된 이후인 2013학년도 수능에서는 전체 응시생의 7.1%(4만 3918명), 그리고 2014학년도 수능 6월 모의평가에서는 6.7%(4만 243명)가 선택했다. 만일 서울대마저 입시 과목에서 한국사를 제외한다면 한국사는 선택 0% 과목으로 전락할지도 모를 상황이 됐다. 이는 대입이란 지상목표 앞에 입시와 관련이 없는 과목이면 어떤 명분과 논리로도 선택받지 못하는 가슴 아픈 우리 교육의 현실을 보여 주는 것이다. 최근 고등학교에서 특강을 하는 도중 극소수 학생만이 기초적인 역사 관련 물음에 답을 하는 모습을 보았다. 나중에 특강이 끝나고 고 3학생이 자신은 서울대를 준비하지 않아 진작 한국사를 포기해 우리 역사를 잘 몰랐는데 1학년 후배가 답을 잘하는 것을 보고 너무 부끄럽고 화가 났다고 했다. 솔직히 한국사를 공부하고 싶어도 서울대에 갈 학생이 아닌 사람은 좋은 점수를 얻지 못해 선택할 수 없는 현재 상황이 너무 화가 난다고 심경을 토로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반면 미국 조기 유학을 준비하는 지인의 아들은 미국 대학을 들어가기 위한 시험인 SAT를 준비하면서 미국 역사를 열심히 공부하고 있었다. 우수한 인재가 유학을 가면서 미국사는 열심히 하지만 한국사는 전혀 알지 못하는 상황인 것이다. 이렇게 우리 역사에 대한 이해 없이 성장한 ‘우수한 해외유학 인재’가 우리나라에 돌아와 국가 운영에 참여할 때 과연 무엇을 근거로 나라의 미래를 책임질 수 있을까. 이공계 학생들은 더더욱 역사 과목을 접할 길이 없다. 정말 역사가 필요 없는 것일까. 1980년대 철길을 도로로 바꿔 확장하는 공사가 실시됐는데, 일제가 의도적으로 우리 역사 유적을 파괴하고 한반도의 혈맥을 끊기 위해 부설한 철길을 도로로 덮게 됐다. 뒤늦게 이를 알려 주니 당시 지역 국토관리청장이 공사 설계 때 그 내용을 알았으면 유적을 복원한 뒤 도로 방향을 바꿨을 것이라며 안타까워했다. 당시 5억원이면 될 유적 복원이 이제 1000억원이 넘는 대공사가 돼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이는 우리 사회 전 분야에 걸쳐 역사 지식과 인식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 주는 사례다. 인문계뿐만 아니라 이공계 학생들에게도 우리 역사에 대한 이해와 교육이 절실히 필요함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 한국사 교육 정상화는 대입수능 필수화가 아니면 현실적인 효과가 없다는 것이 교육계의 답이다. 학생들의 부담이 문제이긴 하지만 우리 미래의 주역을 위해 필요한 것이라면 국가 백년을 아니 만년을 위해 할 것은 해야 한다. [反] 나인호 대구대 역사교육과 교수 “시험 위한 역사교육 본질 흐려져…정치·이데올로기의 도구로 전락” 얼마 전 여러 언론은 청소년들의 역사에 대한 무식함을 연일 질타했다. ‘3·1절’과 ‘6·25’에 대한 무지, ‘야스쿠니 신사(神社)’의 ‘젠틀맨’(紳士)으로의 오해와 같은 비난이 그것이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국사교육의 강화와 한국사의 수능 필수 과목 지정’ 주장이 거세지고 있다. 그런데 이것이 과연 정확한 진단에 입각한 타당한 주장일까. 먼저 정량적 기준에서 볼 때 한국사가 경시되고 있다는 생각은 편견이다. 많은 사람들이 개탄하기를 국사 과목이 서울대 입시를 위한 소수에게 한정돼 대다수의 학생에게 외면을 당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예를 들어 2012학년도의 경우 사회탐구 영역 가운데 ‘국사’를 선택한 학생은 12%에 불과했으나, 같은 한국사 계열인 ‘근현대사’ 과목은 45%로 세 번째로 많이 선택된 과목이었다. 위에서 언급한 역사 지식은 모두 ‘근현대사’에서 가르치는 것들이다. 국사 과목이 외면을 당해 한국사 지식이 빈곤하다는 말은 사실과 어긋난다. 같은 맥락에서 한국사를 모르고는 각종 공무원 시험 및 공기업 시험에서 엄청난 불이익을 받고 있다는 사실도 지적해야겠다. 9급 공무원, 경찰 공무원 그리고 소방공무원 시험에서 한국사는 필수 과목이다. 또 외무·행정고시에 지원하려면 한국사검정능력시험 2급에 합격해야 한다. 올해부터 중등교원임용시험에 지원하기 위해서는 이 시험 3급 합격이 필수적이다. 이 밖에 각종 공기업 시험에서 이 시험이 요구되는 것은 물론이다. 둘째, 시험 준비를 위한 한국사 교육 및 학습이 더 큰 문제다. 네덜란드의 역사가 호이징가가 말했듯이 역사란 과거가 우리에게 던져 주는 의미를 해석하는 작업이다. 그러나 시험을 위한 역사교육은 이와는 거리가 멀다. 역사교육 과정에 담긴 이론과 현장 교사들의 교육학적 고민은 시험이라는 넘을 수 없는 벽 앞에서 무기력할 수밖에 없다. 역사는 이제 필연적으로 암기 위주의 딱딱하고 지루한 과목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몇 가지 주제를 선택해 심도 있는 토론 수업을 진행하고 역사 에세이를 쓰게 하는 유럽 및 미국의 역사교육과 단 1점이라도 더 높은 점수를 올리기 위해 주입식으로 교과서의 진도를 끝내야 하는 우리의 역사교육은 결코 같은 것일 수 없다. 그럼에도 한국사의 수능 필수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암기 위주의 수업이 아닌 토론과 이해 위주의 역사 수업을 주장한다면 이는 공허한 수사학에 불과하다. 셋째, 한국사만을 강조한다면 이는 외눈박이 역사교육에 불과하다. 앞서 언급한 수능 관련 통계를 한 번 더 언급하자. 불과 8%의 응시자만이 선택한 세계사는 사회탐구 과목 가운데 꼴등을 차지했다. ‘세계화’의 시대에 우리의 세계사 인식은 쇄국시대에나 걸맞은 수준이다. 미국 및 유럽, 그리고 일본의 역사교육에서 자국사와 세계사의 비중은 거의 반반이다. 다행히 우리나라에서도 개정 7차 교육과정 이후 ‘세계사 속의 한국사’ 교육의 틀이 갖춰졌다. 그러나 현재 국제 역사학계의 흐름이 초국사(transnational history), 더 나아가 글로벌 히스토리의 패러다임 속에서 진행되는 것을 고려한다면 한국사와 세계사가 더욱 유기적으로 통합된 역사교육이 이뤄져야 한다. 마지막으로 한국사 교육을 강조하는 목소리 가운데 역사교육을 국가안보와 애국주의, 즉 국가주의와 민족주의의 도구로 간주하는 흐름을 읽을 수 있다. 현재 동아시아의 평화를 해치는 한·중·일 삼국의 ‘역사전쟁’은 ‘과거를 현재의 욕망으로 해석’하려는 이러한 민족주의 역사학의 산물이다. 더 나아가 근래 과열되고 있는 한국사 교과서를 둘러싼 이념 논쟁을 보자. 역사가 정치와 이데올로기를 위한 날카로운 무기로 사용되고 있지 않은가. 이처럼 역사가 정치와 이데올로기의 도구로 기능하는 한 나는 역사교육의 강화에 반대한다. 이런 역사의 과잉은 니체가 말했듯이 현재의 삶을 질곡시킨다. 미래를 향한 창조성과 에너지를 고갈시키기 때문이다.
  • [정전협정 60년] (7) 한반도 분단을 보는 외국의 시각(상)

    [정전협정 60년] (7) 한반도 분단을 보는 외국의 시각(상)

    ■미국·중국의 입장 美 ‘中 견제 전초기지’ vs 中 ‘대미 완충지대’… 전략적 인식 심화 미국은 공식적으로는 조야(朝野)를 막론하고 한반도 분단의 조속한 종식과 평화적 통일을 바란다는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지난달 25일(현지시간) 미국 연방하원의 여야 의원들이 한국전쟁 발발 60주년을 맞아 ‘한반도 평화·통일 기원 결의안’을 발의한 것이 단적인 예다. 하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그리 간단치 않다. 한반도 통일은 어디까지나 미국의 국익에 부합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통일 한국’은 친미적이어야 한다는 전제 조건이 숨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만약 ‘통일 한국’이 친(親)중국 성향으로 기울 것이란 우려가 제기될 경우 한반도 통일에 대한 미국의 자세는 소극적으로 변할 개연성이 크다. 현실주의 이론의 대가인 미국 시카고대학의 존 미어셰이머 교수는 2011년 한 세미나에서 “그동안 급속한 국력 신장을 이룬 중국이 향후 수십년간 더욱 힘을 키워 미국을 능가할 정도가 된다면 한국은 중국에 편승해 살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전망한 바 있다. 이런 맥락에서 급부상하는 중국을 견제하는 것을 동아시아 정책의 기조로 설정한 버락 오바마 행정부가 한국에 공을 들이는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다. 지리적으로 중국에 매우 근접해 있는 한국이야말로 대(對)중국 견제의 전초기지로 삼기에 더할 나위 없기 때문이다. 최근 미국이 틈만 나면 한·미 동맹을 “린치핀”(linchpin·핵심)으로 부르며 중요성을 부여하는 배경에는 이런 계산법이 작용한다. 한반도가 통일되면 북한발 위협이 사라지면서 미국의 한반도 방위 부담이 줄어들 것이란 관측이 과거에는 많았지만 최근 중국의 국력이 급신장하면서 이런 전망에도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한반도 통일 이후에도 미국은 중국 견제를 위해 한반도 방위 역량을 유지하려 할 가능성이 높다. 이 경우 중국과의 갈등이 불가피해질 것으로 보인다. 중국인들이 ‘한국전쟁’ 하면 떠올리는 것은 ‘미군의 북한 침략’이다. 중국의 대표 백과사전 격인 사해(辭海)에는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과 관련해 “한국에 내전이 일어나자 미군이 북을 침략하고 나아가 중국 변경인 단둥(丹東)까지 치고 올라온 탓에 중국이 전쟁에 참여해 나라를 지키고 북한을 도와 미국을 물리쳤다”고 미화한다. 중국에서도 김일성의 남침설을 제기하는 학자들이 있다. 화둥(華東)대학 역사학과 선즈화(沈志華) 교수는 러시아 비밀 문서를 토대로 한 연구를 바탕으로 꾸준히 남침설을 제기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2010년 환구시보 영문판에서 “스탈린이 1950년 4월 김일성의 남침 계획을 허락했고, 그해 5월 중국 베이징에서 마오쩌둥(毛澤東)으로부터 미군이 개입하면 중국이 돕겠다는 승락을 받았다”며 남침설을 주장했다. 그러나 주류 역사관은 아직도 북침이다. 일부 개혁파 지식인들은 “중국의 참전 결정은 마오가 소련과 밀착해 국내 정권 기반 강화 수단으로 삼기 위해 이뤄진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당국의 인식을 바꾸기에는 역부족이다. 참전 결정은 마오가 내린 것이고 마오는 중국의 국부여서 마오에 대한 부정은 곧 중국 공산당의 권위를 훼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중국 전문가들은 한·중 관계가 어느 때보다 좋지만 당국이 아직은 한국전쟁에 대한 시각은 물론 한반도에 대한 근본적인 태도를 바꿀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고 있다. 역사학자 장리판(章立凡)은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북핵은 중국에도 위협 요소여서 중국이 북에 대한 지지를 거둬들이고 미국과 협력하면 북한 문제는 바로 해결된다”면서 “다만 이 경우 미군의 도움으로 남한 주도의 통일이 이뤄질 것으로 예상되고, 중국은 여전히 완충지대로서의 북한을 포기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한반도 분단 해결에는 장애물이 많다”고 내다봤다. 워싱턴 김상연 특파원 carlos@seoul.co.kr 베이징 주현진 특파원 jhj@seoul.co.kr ■러시아·일본의 시각 러 “北, 중·러 감정골 이용 땐 분단 상황 지속” 1948년 한반도 분단은 냉전의 산물이었다. 미국과 함께 냉전의 한 축을 이뤘던 소련(현 러시아)은 영토 접경 지역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막을 ‘완충지대’가 필요했다. 홍완석 한국외대 러시아연구소 소장은 “소련은 영토가 크기 때문에 항상 완충지대를 만든다. 유럽의 핀란드, 중앙아시아의 몽골이 대표적이다. 북한도 그중 하나”라고 설명한다. 소련은 38선 이북을 동아시아에서 사회주의의 보루로 삼았지만 1950년 한국전쟁 이후 소련이 갖고 있던 영향력의 우위는 서서히 중국으로 넘어가기 시작한다. 북한 문제 전문가인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 국제학부 교수는 “소련은 미국과 중국의 영향력을 차단하려고 북한 정권을 지지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전쟁 즈음만 해도 북한 지도부가 혁명적 이상주의를 어느 정도 유지했기 때문에 러시아의 시각에서 북한의 남침은 침략이 아닌 해방전쟁이었다”며 한국전쟁에 대한 러시아의 입장을 설명한다. 그러나 중국이 사회주의 진영에서 러시아의 패권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면서 중국과 소련 간 감정의 골이 깊어졌고, 북한이 이를 잘 활용하면서 분단이 계속 이어지게 됐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단을 끝내기 위해서는 러시아의 역할이 남아 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기계형 한양대 아태지역연구센터 연구교수는 “러시아는 한국이 통일되는 게 동북아의 안정에 기여한다고 생각한다. 통일 한국이 중국과 일본을 견제할 수도 있는 등 한국의 통일이 러시아의 장기적인 이익과도 일치한다고 보고 있다”고 말했다. 러시아가 분단의 ‘당사자’였다면 일본은 ‘수혜자’였다. 분단이 고착화된 결정적 계기 중 하나인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일본을 한국전쟁의 병참기지로 만들고 싶었던 미국의 입장 때문이다. 미국은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일본과 서둘러 맺었고, 이를 통해 패전국 일본은 정치적으로 ‘정상 국가화’ 됐다. 김민규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은 “일본의 정치인들은 이런 점을 대놓고 말하지 않는 경향이 있지만 한반도의 지정학적 요인이 일본에 혜택을 줬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라고 말했다. 김민희 기자 haru@seoul.co.kr
  • [데스크 시각] 책, 불쏘시개 그리고 스마트폰/황수정 문화부장

    [데스크 시각] 책, 불쏘시개 그리고 스마트폰/황수정 문화부장

    이삿짐을 정리하다가 문득 오래전 읽었던 책을 뒤적인다. 프랑스어권에서 큰 인기를 누리는 벨기에 출신의 여성 작가 아멜리 노통브의 희곡 ‘불쏘시개’다. 100쪽도 채 안 되는 짧은 작품이지만 기발한 설정이어서 기억에 생생한 책이다. 바깥세상은 피 튀기는 전쟁터, 금세라도 얼어죽을 만큼 혹독한 날씨. 대학에서 문학을 가르치는 교수의 집 서재에 교수와 조교 커플이 숨어 지낸다. 갇힌 그들에게 허락된 것은 거대한 서가의 책들뿐이다. 세 남녀는 어떤 선택을 할까. 생존 앞에서 책은 불쏘시개로 전락한다. 서재의 온도를 1도씩 높이는 가치와 사정없이 저울질당하면서다. 그렇게 점점 비어 가는 서가에 쓸쓸히 공명하는 절규, “문학이 우리 삶에 무엇을 해줄 수 있지요?” (종이)책의 가치를 역설적으로 웅변한 희곡이다. 책갈피의 먼지를 털어내며 속으로 웃어본다. 이 해묵은 책들을 눈 질끈 감고 이젠 그만 내버릴까, 아니면 이삿짐에 욱여넣을까. 작가의 세계에서 책은 생존의 무게와 팽팽히 가치를 겨루건만, 한낱 이삿짐 덩치나 줄여 보겠다는 얄팍함이라니…. 책꽂이에 빼곡한 아동서들을 보면서 다시 생각은 이어진다. 버릴 요량이라도 해볼 수 있는 책이 있다는 건 그래도 흔감한 일이다, 저 어린이책(엄마표 필독서)들이 치워지고 나면 우리 아이들에게는 훗날 취사(取捨)를 고민할 책들이 있기나 할까. 최근 여성가족부는 전국의 초등 4학년, 중 1학년, 고 1학년 학생 163만여명을 대상으로 스마트폰 이용 습관을 전수조사했다. 결과는 새삼 놀라울 것도 없었다. 열에 두 명쯤(24만여명)이 스마트폰 중독 위험군에 들었다. 스마트폰을 잠시라도 손에서 떼어놓으면 금단현상을 겪는 부류다. 3개 학년의 조사치가 이 정도라면 초·중·고생 전체로 범위를 넓히자면 중독 위험군이 족히 100만명은 된다는 얘기다. 일상생활에서도 이런 징후는 네 집 내 집 할 것 없다. 컴퓨터 게임을 하든 TV를 보든 이 땅의 아이들은 ‘재미나라 요지경’인 스마트폰을 쉼없이 주무른다. 모처럼 밥상머리에 같이 앉아서도 카톡 대화방을 들락거리느라 안절부절못한다. 가족대화 밥상머리 교육이란 애당초 글러 먹은 상황이다. 이 아이들이 책의 활자를 반길 리 만무한 노릇. 이쯤 되면 21세기 최악의 발명품은 스마트폰이라는 탄식이 절로 나온다. 지난해인가. 중학교 교실의 게시판에서 최악의 발명품이 빚어내는 통제불능의 궤적을 확인한 적 있다. 학습 프로그램과는 전혀 상관없는 스마트폰 사용 예절 가이드로 게시판이 꽉 찼다. 언어폭력과 떼카(카톡 왕따)의 괴물을 낳는 스마트폰의 위력에 백기투항해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어진 교실은 말할 수 없이 초라했다. 어느 통계를 빌리자면 스마트폰을 사용한 이후 사람들의 독서량은 48%나 줄었다. 스마트폰은 힘이 너무 세고, 종이책은 태풍 앞에 비칠댈 여유조차 없는 호롱불이다. 미련한 인류는 스스로 이룩한 진보의 무게에 짓눌려 신음한다. 인간이 본질적으로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성찰과 사유가 전제돼야 함은 만고의 진리다. 사유할 시간을 스마트폰에 모조리 저당잡힌 우리는, 우리 아이들은 얼마나 더 노력해야 행복해질까. 코흘리개에게까지 스마트폰을 안겨 주머니를 부풀리는 기업들에 행복저당세를 물리면 좋겠다. ‘부모자식 갈등세’ 내지 ‘스마트 양육세’쯤으로 이름 붙이면 어떨까. 다수의 권리와 이익을 고민한다는 맥락에서 그 또한 경제민주화 아닌가. 황수정 문화부장 sjh@seoul.co.kr
  • [정전협정 60년] 현재진행형 비극 (하) 참전 군인들 인터뷰

    [정전협정 60년] 현재진행형 비극 (하) 참전 군인들 인터뷰

    ■윌리엄 웨버 ‘한국전 미군참전용사 기념재단’ 회장 “참전 증인들 사라져가 안타까워” “세월이 흐름에 따라 생존한 한국전쟁 참전용사들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이 안타깝습니다. 한국전쟁에 대해 가장 직접적인 지식을 갖고 있는 우리가 모두 사라져 버리면 한국전쟁이 미국인의 의식에서 완전히 실종될 것만 같아 걱정입니다.” 인생 거의 전부가 ‘한국전쟁의 역사’인 노병(老兵)은 자신의 사후(死後)에 한국전쟁의 역사가 겪게 될 운명을 벌써부터 걱정하고 있었다. 한국전 정전 60주년을 맞아 서울신문이 만난 윌리엄 웨버(87·예비역 대령) ‘한국전 미군 참전용사 기념재단’ 회장은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한국전 참전용사다. 해마다 6월 25일이 다가오면 그는 언론들의 1순위 인터뷰 대상이 된다. 한국전에 참전했다가 한쪽 팔과 다리를 잃은 그의 외모 때문만이 아니다. 그 누구보다 한국전쟁을 기억하고 한국을 사랑하는 일에 대한 열성이 그를 특별하게 하고 있다. 그는 워싱턴의 한국전 참전기념비 옆에 서 있는 19명의 미군 병사 조각상 가운데 하나의 실제 모델이기도 하다. 지난 5월에는 미국을 방문한 박근혜 대통령을 직접 만나기도 했다. 웨버 회장은 1943년 17살의 나이에 직업 군인으로 미 육군에 입대해 2차대전에 참전했다. 이어 1950년 8월 육군 187 공수 낙하산부대 소속 대위로 인천 상륙작전과 함께 한국 땅을 처음 밟았다. 서울 수복 후 그는 평양 등 북한 내 요충지 곳곳에서 벌어진 전투에 참여해 승전보를 울렸다. 하지만 중공군의 개입으로 중부전선까지 밀린 그는 1951년 1월 격전지 강원도 원주에서 북한군의 수류탄에 오른쪽 팔꿈치 아래와 오른쪽 무릎 아래를 잃고 말았다. 이 부상으로 그는 전선과 이별했다. 지난달 24일(현지시간) 워싱턴에서 열린 북핵 문제 관련 세미나에 의족에 의지한 몸을 이끌고 나타난 그에게 ‘20대 젊은 나이에 소중한 팔다리를 잃은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유감스럽지 않다. 한국전에서 정규군으로 복무한 것은 내게 무한한 영광”이라며 마치 젊은 현역 군인처럼 우렁차게 답했다. 정전 60주년을 맞는 소회를 물었더니 그는 이렇게 답했다. “지난 60년간 또 다른 전쟁이 없었다는 사실에 감사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참전용사들이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죽어 가고 있다는 것이 슬프다. 앞으로 15년 뒤에는 정전 75주년 기념식이 열린 텐데 그때는 극소수의 참전용사만 살아 있을 것이라는 얘기를 우리 참전용사들끼리 하곤 한다. 왜냐면 지금 가장 어린 참전용사가 80살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그는 “한국전쟁은 ‘알려지지 않은 전쟁’에서 ‘잊혀진 전쟁’이 돼 가고 있는데 앞으로 완전히 미국 역사에서 실종될까 걱정된다”고 덧붙였다. 그는 “2차대전에 참전해 일본군과 싸울 때만 해도 한국과 중국, 일본 사람은 모두 똑같은 줄 알았지만 1950년 한국 땅에 처음 왔을 때 한국인은 일본인과 완전히 다른 문화를 가진 다른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면서 “그런 한국인들을 위해 싸운 것은 더없이 가치 있는 일이자 영광, 특권이었다”고 힘주어 말했다. ‘한국 정부가 참전용사들에게 충분히 보답하고 있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그는 “그건 말할 필요도 없다. 진심을 다해 끊임없이 미국에 감사를 표하는 나라는 세계에서 한국밖에 없다”고 했다. ‘다시 한국전이 일어난다면 참전하겠느냐’는 질문에 그는 단 1초의 머뭇거림도 없이 “당연히 참전할 것이다. 그건 물어볼 필요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이 있다면 다 할 것이다. 바로 1950년에 나는 그렇게 했다”고 답했다. 웨버 회장에게 한국전은 박제된 역사가 아니다. 90세를 바라보는 고령임에도 그는 미국에서 ‘한국전 알리기’의 선봉장 역할을 하고 있다. 현재는 워싱턴의 링컨기념관 앞에 있는 한국전 기념비 옆에 미군과 카투사 전사자들의 이름을 모두 새긴 ‘한국전 추모벽’ 건립을 위해 백방으로 뛰는 중이다. 2002년 참전 이후 51년 만에 한국을 방문한 이후 올해 세 번째이자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한국행을 계획하고 있는 웨버 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이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올해가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원주를 꼭 한 번 가보고 싶습니다.” 글 사진 워싱턴 김상연 특파원 carlos@seoul.co.kr ■ 중국인민지원군 출신 자빙수 전 中인민공안대 교수 “美의 침략 언론보도 믿고 참전” “한국전은 중국에서 ‘항미원조’(抗美援朝·미국에 대항해 조선을 돕다)로 표현한다. 이 말과 같이 한국전은 중국이 미국의 침략에 맞서 나라를 지키기 위해 북한을 도와 목숨 바쳐 싸운 정의로운 전쟁이라는 믿음에는 변함이 없다. 그러나 그로 인해 남북이 분단됐는데 한국전쟁 정전일인 7월 27일이면 항미원조 승리 운운하며 자축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중국 인민지원군 출신의 자빙수(査秉樞·81) 전 중국인민공안대 교수는 매년 7월 27일을 ‘한반도정전기념일’로 고쳐 불러야 한다며 이같이 말했다. 지난 5일 베이징 무시디(木?地) 자택에서 만난 그는 “세월이 지나면서 언론 등을 통해 한국전쟁은 북침이 아닌 남침이란 사실을 알게 됐다”면서 “하지만 중국 인민지원군은 미군이 턱밑까지 치고 올라온 탓에 나라를 구하기 위해 전쟁에 참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라며 전쟁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자 전 교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1949년 신중국 건국과 함께 자원 입대했다. 타이완을 수복해 통일을 이루려는 국가정책에 따라 인민해방군 25군 75사 소속으로 푸젠(福建)성 최전방에 배치됐다. 그러나 이듬해인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이후 미군이 단둥(丹東) 변경을 폭격했다는 등 미군의 침략에 초점이 맞춰진 언론 보도로 미국이 타이완 국민당 정부를 도와 중국을 칠 것이란 위기감이 고조됐다. 부대 전환 배치를 신청해 한국전에 참여한 데는 이 같은 국내 분위기가 작용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전투로는 1952년 7월 13일부터 14일 동안 강원도 상감령 동북쪽 남대천에서 벌어진 ‘금성(城) 반격전’을 꼽았다. 중국 입장에서는 원래 북의 땅에 침입한 미군을 물리쳤다는 의미에서 이 전투를 반격전이라고 부른다. 그는 “이 전투만 버텨 내면 미국과 정전협정을 체결해 전쟁이 끝날 것이라는 말을 듣고 우리는 죽을 힘을 다해 싸웠다”고 회고했다. 미군을 상대로 중국 인민지원군 25만여명이 참가한 이 전투에서 그는 오른쪽 다리와 허리를 다쳤다. 그는 정전 이후에도 북한 재건 사업에 투입되며 1953년 10월부터 황해남도로 배치돼 1년간 고 유옥례씨 집에서 지냈다. 당시 14세이던 유씨의 딸 김영희로부터 조선인민군진군가, 조선국가, 아리랑, 봄노래, 샘물터의 노래, 푸른 하늘의 노래 등 27개의 북한 노래를 배웠다. 한국 노랫말을 중국어로 표기해 적어 둔 노래 연습장과 유씨 가족의 사진을 보며 지금도 그 시절을 회상한다. 영희씨와 주고받은 100여통의 편지도 간직하고 있다. 서로 말이 통하지 않은 탓에 지인들의 도움을 받아 두 나라 언어로 적어 가며 수십년간 소통의 끈을 이어 갔다.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오라버니’라는 문구 등 편지 내용 곳곳에 깊은 우의가 배어 있다. 문화대혁명 등의 시기를 제외하고 영희씨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줄곧 연락을 주고받았다. 의료품, 식료품, 의류 등을 북에 보내 주기도 했다. 그는 “중국은 참전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만약 참전하지 않았더라면 남북은 분단되지 않았을 것”이라면서 “외세의 개입 없이 남북이 자체적으로 통일하도록 돕는 것이 중국이 (한국에) 진 빚을 갚는 일”이라고 말했다. 글 사진 베이징 주현진 특파원 jhj@seoul.co.kr ■‘재일학도의용군 동지회’ 부회장 김완기씨 “조국의 전쟁 소식에 태극기 혈서 쓰고 참전” 1950년 6월 25일. 22살의 청년은 아침을 먹으며 라디오를 듣다 자신의 귀를 의심하는 소식을 접한다. 현해탄 건너 조국에 전쟁이 발발했다는 것이다. “어쩌다 같은 민족끼리 총칼을 들이대게 됐나”라는 참담한 심정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던 청년은 개전 3일 만에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했다는 소식을 듣고 참전을 결심한다. 그후 63년이 속절없이 흘렀고, 청년의 얼굴엔 주름살이 내려 앉았다. 재일학도의용군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한 김완기(85)씨를 지난 3일 만났다. 충남 공주에서 태어난 김씨는 12살 때인 1940년 공부를 하기 위해 부모님과 함께 큰아버지가 있는 구마모토현으로 갔다. 대학에 진학해 엘리트가 되라는 부모님의 바람과 달리 광복 이후 진학을 포기하고 민단 소속으로 조직 활동에 앞장섰다. 전쟁이 터지자 김씨를 포함한 642명의 재일학도의용군은 태극기에 혈서로 참전 의사를 밝히고 조국으로 향했다. 미군 부대에 배치돼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을 시작으로 김씨는 전쟁의 참상을 온몸으로 경험했다. “고막이 터져 육군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었다. 일본에서 함께 배를 타고 참전한 친구들을 그곳에서 만났는데 동상 때문에 손발이 잘린 전우들이 수두룩했다”고 김씨는 회고했다. 미군의 순환배치 방침에 따라 1·4 후퇴 즈음인 1951년 1월 일본으로 복귀한 김씨는 “이대로 그만둘 수는 없다”며 다시 입대를 자원했다. 100여명이 지원해 58명이 국군에 재입대하게 됐고, 김씨는 1952년 6월까지 전선에 머물렀다. 이후 김씨는 일본으로 돌아가려고 했지만 일본 정부가 “허락 없이 참전했고 일본 거주도 불확실하다”며 입국을 막았다. 결국 부산 소림사에서 재일학도의용대(현 재일학도의용군 동지회의 전신)를 만든 뒤 정전 후인 1953년에는 서울 종로구 인사동 탑골공원 뒤편에 사무실을 꾸렸다. 그곳을 본적으로 등록하고 1961년까지는 수용대기소에서 생활했다. 국내 안착도 일본 귀환도 아닌 애매한 생활의 연속이었다. 그 사이 일본에 있던 김씨의 가족은 전쟁통에 모두 유명을 달리했고, 공주에 남아 있는 가족들도 정전 이후에야 겨우 연락이 닿았다. 현재 동지회 부회장으로 일하고 있는 김씨는 “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국민들이 학도의용군의 존재를 모르는 게 가장 안타깝다”고 말했다. 정부는 종전 후 10년 뒤인 1963년에야 일본에 안치돼 있던 전사자 53명의 유해를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했고, 1968년 재일학도의용군을 국가유공자로 인정했다. 글 사진 김민희 기자 haru@seoul.co.kr
  • [정전협정 60년] 국군포로·납북자 현황

    국군 포로와 납북자 가족들은 지난 60년 동안 저마다 가슴속에 커다란 ‘멍에’를 안고 평생을 견뎌 왔다. 사랑하는 가족을 지척에 두고도 만나지 못하는 현실은 정전 체제의 한반도가 풀어야 할 커다란 숙제 가운데 하나다. 정부는 1990년대 이후 귀환한 국군 포로와 탈북자들의 증언에 근거해 현재 북한에 있는 국군 포로를 500여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앞서 국가정보원은 2006년 6월 공개한 자료에서 탈북자 신문 등을 통해 국군 포로 총 1734명의 신원이 확인됐으며 이 중 생존자는 548명, 사망자는 885명, 행방불명자는 301명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이 가운데 북한을 탈출해 한국으로 돌아온 국군 포로는 1994년 조창호 소위를 비롯해 80명에 불과하다. 북한은 정전협정에 따른 포로 교환으로 국군 포로 문제가 일단락됐으며 강제 억류 중인 국군 포로는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명칭도 ‘국군 포로 출신’이란 표현을 사용한다. 하지만 포로 교환 당시인 1953년 유엔군사령부가 집계한 국군 실종자 8만 2318명 가운데 공산군이 최종 송환한 국군 포로는 8343명뿐이다. 북한이 2000년 이후 이산가족 상봉자 명단 교환 과정에서 공식적으로 생사를 확인해 준 국군 포로는 19명이며 이 중 17명이 남측 가족과 상봉했다. 국군 포로와 납북자 송환 운동을 벌여 온 사단법인 ‘물망초’(이사장 박선영)는 지난 4월 북·중 국경 인근의 북한 탄광 지역에 국군 포로 113명이 생존해 있다며 이들의 명단을 공개하기도 했다. 정부가 추정하는 ‘전후 미귀환 납북자’ 숫자도 517명에 달한다. 대부분 선원들이다. 귀환한 전후 납북자 3318명 중 3310명은 납북 후 1년 이내에 송환됐지만 8명은 30년 이상 북한에 억류돼 있다 2000년 이후 탈북에 성공해 귀환한 것으로 전해졌다. 6·25전쟁 당시 납북된 ‘전시 납북자’는 공식 집계된 인원만 1991명이다. 북한은 송환은 커녕 납북 사실을 시인도 하지 않고 있다. 일본과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일본인 납북자 및 그 가족까지 돌려보내고 있는 것과 대조적이다. 이현정 기자 hjlee@seoul.co.kr
  • [커버스토리-전국에 부는 캠핑 열풍] 낭만과 추억으로 친 텐트 우리 네 식구 11만원의 행복

    [커버스토리-전국에 부는 캠핑 열풍] 낭만과 추억으로 친 텐트 우리 네 식구 11만원의 행복

    본격적인 무더위가 시작된 지난 주말(6월 29일) 경기 수원에 사는 김흥수(39)씨 가족은 용인시 처인구 원산면 독성리 연미향마을 캠핑장을 찾았다. 집에서 승용차로 30~40분 정도 걸려 주말에 가족들과 자주 찾는 곳이다. 이날 오후 5시쯤 캠핑장에 도착한 김씨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텐트 설치 장소를 물색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평지에 텐트를 쳤지만 날씨가 갑자기 더워진 탓에 강한 햇빛을 피할 수 있도록 그늘이 있는 숲 속 사이트를 골랐다. 이미 20여명의 캠퍼들이 명당에 진을 치고 있었다. 김씨는 최근 새로 장만한 그라운드 시트 등 장비를 차에서 꺼내 텐트를 설치하기 시작했다. 그 사이 아내와 초등학교에 다니는 두 아들은 캠핑장에서 운영하는 체험 프로그램을 즐겼다. 이날 캠핑장에서는 하우스에서 재배하는 방울토마토 따기와 감자 캐기 프로그램을 선보였다. 김씨가 이곳을 찾는 이유 중 하나는 아이들이 즐길 수 있는 농촌 체험 프로그램이 있어서다. 1시간쯤 지났을까, 텐트는 완성됐고 중간에 카프를 쳐 아늑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체험을 마치고 온 아이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텐트 속으로 뛰어들어 서로 껴 앉고 뒹굴며 놀았다. 김씨는 그제서야 한숨을 돌리고 캠핑장을 둘러볼 여유가 생겼다. 구봉산 자락에 있는 캠핑장은 곳곳에 원두막이 있어 농촌의 정취를 자아내게 했다. 웅장하거나 화려하지는 않지만 숲 속에 있어 한적하고 조용한 느낌을 줬다. 가족이 조용히 머물다 가기에 딱 좋은 곳이란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허기가 느껴졌다. 시계를 보니 오후 6시 30분. 김씨 부부는 아이들이 즐겁게 노는 모습을 보면서 식사 준비에 들어갔다. 준비해 온 삽겹살과 아이들이 좋아하는 소시지를 불판에 굽고 밥과 밑반찬으로 성찬을 즐겼다. 노릇노릇 구워진 삽겹살을 상추에 싸서 입에 넣으면 몇 번 씹지 않아도 그냥 넘어갔다. 유명 특급 호텔에서 제공해주는 음식도 이보다 못할 것 같았다. 아이들도 고기와 소시지를 더 달라며 아우성이다. 역시 캠핑의 “백미”는 바비큐 요리라는 말이 실감났다. 옆 텐트에서도 즐거운 만찬은 시작됐다. 분당에서 왔다는 이광희씨는 “가족들이 모닥불을 피워 놓고 진솔하게 대화하는 것만큼 더 좋은 가정교육이 없다는 생각에 도시 근교 캠핑장을 자주 찾는다”고 했다. 양념을 빌리기 위해 몇마디 대화를 주고 받았을 뿐인데 김씨와 이씨 가족은 벌써 친한 이웃이 되어 있었다. 아빠들은 서로 맥주를 권하며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나누고, 아내들은 자녀 교육문제를 소재로 이야기 꽃을 피웠다. 아이들은 텐트 속에서 만화책을 보다 아빠의 스마폰으로 게임 삼매경에 빠져들었다. 문뜩 하늘을 보니 밤하늘을 수놓은 별들이 머리 위로 쏟아지고 있었다. 이보다 더 낭만적인 분위기가 또 있을까. 김씨 부부는 모닥불 앞에서 자연을 벗 삼아 밤늦도록 추억과 낭만을 나누었다. 다음 날 아침 구봉산에 울려 퍼지는 새소리에 잠을 깼다. 부산하게 아침을 준비하는 캠퍼들 속에서도 서둘러 아침식사를 준비했다. 어제 먹다 남은 고기와 소시지 등으로 김치찌개를 끓였다. 역시 야외에서의 밥맛은 꿀맛이었다. 아이들도 반찬 투정 없이 한 그릇을 몽땅 비웠다. 식사를 마친 후에는 숲 속 산책. 산길의 경사가 완만해 아이들도 부담없이 걸을 수 있었다. 전쟁놀이를 하는 냥 아이들은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며 신나게 놀았다. 오전 10시 30분쯤 텐트를 걷고 짐을 대충 싼 후 집으로 향했다. 오는 길에 캠핑장 인근에 있는 ‘와우정사’란 사찰을 들렀다. 금동을 입힌 커다란 부처님 머리가 유명한 곳이다. 향나무를 깎아 만든 와불은 국내 최대 규모로 길이 12m, 높이가 3m에 이른다고 한다. 경내를 산책하고 열반전에 누워 있는 불상 등을 천천히 구경한 후 내려왔다. 와우정사 입구뿐 아니라 주변에 시골 밥상 등 맛집도 즐비해 가족나들이 코스로도 제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김씨 가족이 이번 1박2일 나들이에 쓴 비용은 1박 캠핑료 3만원을 비롯해 음식 재료 및 주전부리 비용 5만원, 점심값 3만 3000원 등 모두 11만 3000원이었다. 김씨는 “빼어난 경관을 갖추지는 않았지만 도심 근교에 있는 캠핑장은 경제적인 측면뿐 아니라 시간적으로도 유용해 바쁜 도시민들이 가족들과 부담없이 즐기기에 적당한 나들이 코스인 것 같다”고 말했다. 글 사진 김병철 기자 kbchul@seoul.co.kr
  • [기고] 빌 게이츠가 본 한국의 농업/이양호 농촌진흥청장

    [기고] 빌 게이츠가 본 한국의 농업/이양호 농촌진흥청장

    얼마 전에 방한했던 마이크로소프트(MS)의 공동 창업자인 빌 게이츠는 창조경제와 에너지, 원전 문제 등을 놓고 다양한 협력 방안을 논의했다. 그중에서 가장 눈길을 끈 것은 농업에 대한 그의 관심과 세계 농업분야에서 한국의 역할을 강조한 대목이었다. 그는 1960년대 최빈국에서 50년 동안 괄목한 만한 경제 성장을 이룬 한국이 ‘원조를 받은 국가에서 원조를 주는 유일한 국가’가 됐다며 큰 관심을 가졌다. 한국이 앞으로 세계 농업분야에서 많은 역할을 하게 될 것이란 기대도 숨기지 않았다. 빌 게이츠가 언급했듯, 우리의 농업정책 발자취는 가히 혁명적이라 할 만하다. 1970년대에 보급된 다수확 품종 ‘통일벼’는 쌀 자급이란 식량혁명을 일으키며 힘들던 보릿고개를 극복하게 했고, 1980년대의 시설재배는 신선한 채소를 사시사철 공급해 우리의 식탁을 말 그대로 별천지로 만들었다. 이것이 비닐하우스에서 생산된 식량증산을 뜻하는 ‘백색 혁명’이다. 우리는 이런 성과물에 힘입어 지난 2011년 겨울 부산에서 열린 세계개발원조 총회에서 개발도상국 발전에 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하겠다고 약속했다. 전쟁의 상처를 딛고 일어선 우리의 성공 사례는 개도국 지도자들에게 희망을 주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농촌진흥청은 지금까지 15개 개도국에 해외농업기술개발(KOPIA)센터를 설립해 첨단 기술을 전파하고 농업 협력사업들을 진행해 왔다. 최근에는 이 사업의 실질적인 성과가 다양한 곳에서 나타나고 널리 알려져 개도국들로부터 설립 요청이 증가하고 있다. 올해는 5곳을 더 늘릴 예정이다. 감자가 주식인 아프리카의 알제리에는 3년간에 걸쳐 KOPIA센터를 통해 씨감자를 생산하는 조직배양과 수경재배, 병 검정 기술을 전수했다. 그 결과, 사막 기후에서도 병이 없는 씨감자를 생산하게 돼 알제리는 연간 1억 달러 정도의 씨감자 수입 비용을 줄이고 있다. 태국은 우리의 아시아농식품기술협력협의체(AFACI) 사업을 통해 교잡종 옥수수 종자 생산이 가능한 기술을 전수받아 농가의 종자 구입비를 40%까지 줄이고, 생산성은 두 배 이상 향상시켰다. 태국 정부는 더 나아가 국책 사업으로 교잡종 옥수수 단지를 확대 조성하기로 결정했다. 해외 농업기술 협력사업을 탐탁지 않게 보는 시각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개도국과 기술협력을 해야 하는 이유는 자명하다. 농업기술 협력은 단순한 원조를 넘어 세계적인 식량위기를 극복하고 개도국과 상생 발전하기 위한 방안이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의 국격(國格)을 높이는 일이기도 하다. 또한 농업기술 협력을 통해 민간기업의 진출을 촉진할 수 있고, 기술 전수과정에서 일자리를 창출하고 글로벌 인력을 양성할 수도 있다. 다수확 신품종인 밀을 개발, 10억 인구를 기아에서 구해 노벨 평화상을 받은 노먼 볼로그 박사는 “식량은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의 도덕적인 권리”라고 했다. 인간의 기본적인 먹을 권리를 가지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안타까움을 말한 것이리라. 우리는 이제 세계가 부러워하는 농업 선진국이 됐다. 볼로그 박사의 마음처럼 우리의 농업기술 노하우는 앞으로 더 많은 개도국으로 전수돼야 할 것이다.
  • [씨줄날줄] 수능 로또 베트남어/박현갑 논설위원

    1226년 ‘화산 이씨’의 시조가 된 한 외국인이 황해도 옹진군 화산에 도착한다. 베트남 최초의 독립국가를 세운 리(Ly) 왕조의 왕자인 이용상(Ly Long Tuong)이다. 외척 진(Tran)의 쿠데타로 고국을 떠나 중국으로 가던 중 풍랑을 만나 옹진에 도착한 것으로 보인다. 이용상은 당시 몽골의 침입을 받은 고려를 도와 몽골군과 싸워 공을 세운다. 고려왕으로부터 화산군(花山君)에 봉해진 그는 고려 여인과 결혼해 정착한다. 베트남 정부는 리 왕조에 대한 국민의 여망을 감안해 해마다 리 왕조 건국일인 3월 15일 제사를 지내는데 이때 화산 이씨 종친회장이 참석한다고 한다. 베트남은 우리나라와 닮은 점이 많다. 같은 한자문화권으로 유교, 불교 등 문화와 풍습이 비슷하다. 36년간 일제 지배를 받았던 우리처럼 베트남은 87년간(1858~1945) 프랑스 통치 아래 있었다.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던 한국인과 베트남인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를 지칭하는 ‘라이따이한’은 우리가 가해자가 된 경우다. 1964∼1973년 파병된 한국군, 기술자와 현지 베트남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라이따이한 1만여명은 ‘버려진 자식’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았다. 양국은 수교 이후 활발한 경제협력을 하고 있다. 우리 정부가 국제결혼 분야의 전문성을 보유한 국제결혼 이민관을 베트남에 파견할 정도로 우리나라 남성과 결혼하는 베트남 여성들도 적지 않다. 언어 또한 비슷하다. 베트남어는 한자처럼 상형문자가 아니라 우리말처럼 발음원칙에 따라 형성된 문자다. 음의 높낮이와 굴절을 뜻하는 성조가 있어 힘든 점도 있으나 베트남어 어원의 상당수가 중국 한자어에서 유래돼 발음을 들어보면 사전을 뒤지지 않고도 뜻을 알 수 있는 단어가 많다. 베트남어로 중국은 ‘쭝꾸옥’, 미국은 ‘미꾸옥’, 기숙사는 ‘끼뚝싸’, 음악은 ‘엄냑’이라고 한다. 2014학년도 수능 6월 모의평가 제2 외국어·한문 영역에서 베트남어를 택한 수험생이 15.8%로 일본어(22.3%), 중국어(17.3%) 다음으로 많았다. 베트남어를 가르치는 곳은 전국에서 충남외고 한 곳뿐이다. 지난해 아랍어 인기에서 드러났듯 단기간 공부해도 상위등급을 받기가 쉽다는 점을 노린 ‘로또 수험생’이 많기 때문일까. 베트남어를 가르치는 학원도 성황이란다. 교육부가 2011년 베트남어를 교육과정에 포함시킨 것은 늘어나는 베트남 다문화가정 자녀들에 대한 배려에서였다. 베트남어를 선택한 수험생들이 이를 계기로 베트남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서도 더욱 관심을 갖게 된다면 다문화시대에 바람직한 일일 것이다. 박현갑 논설위원 eagleduo@seoul.co.kr
  • [정전협정 60년] 한반도 지형변화(하)

    지난 60년간 전쟁 억제 역할을 해온 정전협정은 북한의 무효화 선언이 아니더라도 이미 한계점에 도달한 상태다. 북한이 정전협정을 지키지 않는 상황이 오히려 더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질 정도로 ‘적대 행위의 사실상 정지’라는 본래 의미를 잃고 사문화된 지 오래됐다. 정전협정이라는 안전장치가 전면전을 막고 있는 게 아니라 달라진 국제 역학관계 등 외교 환경과 ‘최악의 무장 충돌만은 피하자’는 남북의 암묵적 합의에 의해 안전이 위태롭게 유지되고 있다. 정전은 휴전보다 좁은 의미로 ‘서로의 합의에 의해 전쟁 당사국들이 일시적으로 전투를 중단한다’는 뜻이다. 휴전은 전쟁 중 얼마 동안 전투를 멈춘다는 의미로 정전보다는 더 나아간 준 평화상태로 볼 수 있다. 정전협정 한글판에는 ‘한반도 정전협정’으로, 영문판에는 ‘휴전협정’(Armistice Agreement)이란 표현을 혼용해 사용하고 있다. 어떤 것이든 전투를 일시 중단할 뿐 전쟁의 종식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정전협정상 비무장지대는 1000명 이내의 비무장 인원이 들어가 관리하도록 돼 있지만, 한반도 대치 상황이 이어지면서 실제로는 양측의 무장병력과 지뢰, 방벽 등 군사 시설물로 중무장됐다. 군사 인원 및 장비의 반입을 감시하는 중립국감독위 산하 중립국 시찰 소조의 활동은 북한의 소련 무기 반입 논란 끝에 1956년 5월 활동이 중지됐고, 시찰 소조의 활동을 규정한 정전협정 조항도 폐기됐다. 정전 감시의무를 수행하는 군사정전위와 중립국감독위의 기능도 1990년대 들어 공산 측 대표단이 철수하면서 완전히 마비된 상태다. 북한은 1993년 체코, 1995년 폴란드 대표단을 강제 철수시켰는데, 폴란드의 경우 철수를 거부하자 겨울철 막사의 전기와 수도까지 단절했다. 1994년 12월에는 군사정전위 중국 대표단을 철수시켰고, 1996년에는 군사정전위를 대신한다는 명분으로 인민군 판문점대표부를 일방적으로 설치했다. 북한이 군사정전위원회를 거부한 표면상의 이유는 한국군 장성을 군사정전위 수석대표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한국군은 휴전협정 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에 수석대표가 될 수 없다는 논리다. 서명 당사자에 한국대표가 빠진 정전협정의 태생적 한계가 결국 협정문을 형식상의 문서로 만들어 버린 셈이다. 정전협정은 북한의 김일성 주석과 중국 인민지원군 사령관 펑더화이(彭德懷), 유엔군 사령관 클라크 대장 등 3명만이 서명했다. 중국군만 제어할 수 있다면 북진통일을 할 수 있다고 믿었던 이승만 당시 대통령은 정전협상에 반대하며 한국군 대표를 휴전회담에서 철수시켰다. 전문가들은 바로 이 지점에서 정전협정의 불안정성이 시작됐다고 지적하고 있다. 한국군은 6·25전쟁 당시 교전 당사자일 뿐만 아니라 정전협정의 구속을 받는 집행 당사자임에도 불구하고 유엔군 사령관에게 권한을 맡기고 있다. 이를 빌미로 북한은 정전체제의 평화체제 전환 협상에서 한국을 제외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는 등 정치·외교적 공세를 펴왔다. 정전협정을 적용하면 한국은 북한이 도발을 해 와도 직접 책임을 따지지 못하고 유엔군 사령관에게 책임 추궁을 의뢰해야 한다. 군사정전위가 나선다고 문제가 다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군사정전위가 조사 활동을 마치고 유엔군 사령관에게 조사보고서를 제출하면 유엔군 사령관은 이를 유엔 안보리에 보고하는 절차를 밟는데, 이후의 대응 조치에 대해서는 특별한 규정이 없어 북측의 책임을 추궁하기가 현실적으로 어렵다. 2010년 천안함 폭침 사건 당시에도 유엔사 특별조사팀이 조사에 들어갔지만 북한은 자신들의 어뢰공격으로 천안함이 침몰했다는 조사 결과를 부인했다. 꼭 평화체제로의 전환이 아니더라도 정전협정은 60년간 달라진 남북 간 상황에 맞는 새로운 체제로의 변화를 요구받고 있다. 이와 관련해 북한도 1996년 외무성 대변인 담화를 통해 정전협정을 대신하는 ‘잠정협정’을 제안한 바 있다. 평화협정 체결 시까지 정전 상태를 평화적으로 유지하기 위한 잠정협정을 체결하자는 것이었지만, 주체를 북·미로 한정한 게 문제다. 정전협정이 그렇듯, 한국이 배제된 협정은 실효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평화체제로의 전환 과정에 제도상이 아닌, 실질적인 안전관리 방안 마련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현정 기자 hjlee@seoul.co.kr
  • 국방부 ‘남침’ 대신 ‘북한의 남침’ 쓴다

    국방부는 6·25 전쟁의 도발 주체를 분명히 밝히기 위해 ‘남침’ 대신 ‘북한의 남침’을 공식 용어로 사용하기로 했다. 국방부의 한 관계자는 25일 “6·25 전쟁과 관련한 장병 정신교육 때 ‘남침’이라는 용어를 ‘북한의 남침’으로 변경하도록 지난 21일자로 지시했다”고 밝혔다. 국방부는 교육부에도 학생들을 지도할 때 6·25 전쟁의 도발 주체가 명확히 인식되도록 용어를 바꿔 달라고 요청했다. 군 당국의 조치는 최근 서울신문과 진학사의 공동 역사인식 조사에서 고등학생의 69%가 ‘한국전쟁은 북침’이라고 응답한 데서 비롯됐다. ‘북한이 남한을 침략했으니 북침’이란 식으로 오해한 경우가 많았다는 얘기다. 임일영 기자 argus@seoul.co.kr
  • [시론] ‘튀기’에서 ‘코피노’까지/하성란 소설가

    [시론] ‘튀기’에서 ‘코피노’까지/하성란 소설가

    그 애가 지나가면 우리는 ‘튀기’라고 수군댔다. 좁은 양미간과 오똑 솟은 코, 고수머리와 흰 피부 등 그 애는 한눈에 띄었다. 몇몇 어른들은 ‘아이노쿠’라고도 불렀다. 나중에야 일본 홋카이도의 원주민 ‘아이누 족’을 일컫는 말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우리가 별 생각 없이 내뱉던 그 말이 암소와 수탕나귀 사이에서 태어난 잡종을 뜻한다는 것도 알았다. 노새와는 달리 튀기의 모습은 어디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하지만 암소와 수탕나귀의 형질을 반반씩 닮았을, 그 사이에서 예상치 못한 형질이 툭 발현되었을지도 모를 그 모습, 기괴했을 듯하다. 한국 전쟁 직후 서양인들의 외모와 피부를 닮은 채 태어난 아이들의 모습에 놀란 한국인들의 모습도 쉽게 그려진다. 얼마나 신기했으면 ‘튀기’란 이름을 붙여 주었을까. 그 애는 김치볶음을 좋아하고 우리말도 우리만큼 잘하는, 다 같이 웃어야 할 때를 놓치고 한 박자 늦게 웃은 적도 없는 ‘우리나라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그 애는 우리와 섞이지 못하고 주위를 맴돌았다. 전쟁이 끝난 지 한참 지났지만 전쟁의 그림자는 너무도 넓고 깊었다. 어디 살고 있을까. 어쩌면 김치볶음의 붉은 기름이 반지르르 묻은 야무진 입술을 벌려 전상국 선생의 소설 ‘지빠귀 둥지 속의 뻐꾸기’의 수지처럼 한국과 제 어머니를 부정하고 있을는지도 모른다. 지금 필리핀에는 ‘코피노’라고 불리는 아이들이 있다. 한국 남성과 필리핀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을 필리핀 사람들이 부르는 이름이다. ‘튀기’처럼 모욕적인 말이 아니지만 이미 그 말 속에는 돈이면 다 된다는 자본주의의 한 단면과 함께 인간을 인간으로 대하지 않는 야만성이 들어 있다. 그 애들은 축복 받아야 할 탄생의 순간, 이미 아버지로부터 버려졌다. 초창기 그들의 아버지는 물가와 교육비가 싸다는 이유로 어학 연수를 온 학생들이었다. 한순간 일탈에 빠져들었던 그들은 필리핀 애인이 임신했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 한국으로 줄행랑을 쳤다.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 누구도 그 애들에게 책임을 따져 묻지 않았다. 나이 차가 많이 나는 한국 사업가들의 현지처가 된 여성도 있었다. 코피노 수의 증가에는 피임과 낙태를 철저히 금하는 가톨릭 문화의 영향도 있었다. 낮에는 골프 여행, 밤에는 환락가. 필리핀을 찾는 한국의 남성 수가 급증했다. 단순히 쾌락과 욕망만이 남았다. 그들 중에 피임 기구를 착용하지 않으려는 이들이 있고 그 때문에 나이 어린 10대 여성을 찾는 추태가 이어지고 있는 모양이다. 아예 아버지를 알 수 없는 코피노들도 급증했다. 많은 코피노들에게 아버지란 자신을 버린 사람일 뿐이다. 한국은 더 이상 아버지의 나라가 아니다. 한국인들에게 반감을 가지는 필리핀인들이 많아지고 있다고 한다. 그래도 이 다음 돈을 많이 벌어 한국의 아버지를 찾겠다는 꿈을 가진 아이들도 있다. 그 아이들의 꿈이 생각보다 빨리 이뤄질 듯하다. 한 사회단체에서 코피노들의 아버지 찾아주기 운동을 벌이고 있다. 코피노들 대부분이 극빈층이다. 어머니가 돈을 벌러 집을 떠나 있는 동안 학교에도 가지 못한 코피노들이 거리를 떠돈다. 돈을 벌기 위해 제 엄마처럼 윤락가로 흘러드는 아이들도 있다. 악순환이다. 한국의 아버지를 찾아 최소한의 의무를 지도록 하는 것이 취지이다. 상황이 이렇게 될 때까지 정부는 개인의 사생활이란 생각으로 방관하고 있었다. 하룻밤 대가치고 너무도 큰 대가라고 억울해할 남성이 많을는지 모른다. 필리핀 여성들이 돈을 노리고 일부러 접근해 임신했다고 할지도 모른다. 한동안 책임 공방으로 시끄러울 듯하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다. 한국의 아버지를 찾아주기로 했다는 소식에 가슴 한쪽이 내려앉았을 당신. 그렇다. 당신이 진작 느꼈어야 할 죄의식에 관한 이야기이다. 인간으로서의 양심이다. 가장 무서운 것은 지금까지도 일말의 거리낌이 없이 잠잠한, 이미 죽어버린 건지도 모를 당신의 양심이다.
  • [사설] 정전 60년, 北은 핵 내려놓고 평화 택하라

    사흘 앞으로 다가온 한·중 정상회담을 앞두고 동북아 주변국들의 움직임이 빨라지고 있다. 한·미·일 3국은 북핵 6자회담 수석대표 회동 등을 통해 6자회담 재개를 위한 기본 원칙과 다각도의 공조 방안을 논의하고 나섰다. 이에 북한 역시 신선호 유엔 주재 북한대표부 대사가 기자회견을 갖는 등 한·중 정상회담 이후 펼쳐질 대화 모드에서의 입지 확보를 위해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반도 주변국들의 발빠른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한·중 정상회담 이후 북핵 대화, 그리고 남북 간 대화가 본궤도에 오를지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무엇보다 북이 실질적인 대화 의지를 내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제 유엔에서의 기자회견에서도 북은 “미국의 핵 위협이 없어져야 비핵화 대화가 가능하다”며 핵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미국을 향해 평화협정 체결을 주장하면서 예의 주한미군 철수, 한·미연합사 해체 등을 요구하기도 했다. 우리에게는 “남측이 특정인을 회담 조건으로 내세워 남북 대화를 막고 있다”는 등의 궤변으로 책임을 떠넘겼다. 내일 남북은 6·25전쟁 발발 63주년을 맞는다. 한달 뒤면 정전협정을 체결한 지도 60년이 된다. 반세기를 훌쩍 넘기며 제 길을 걸어오는 동안 남과 북은 동족이란 것 말고는 무엇 하나 공유하기 힘든 간극을 사이에 두게 됐다. 교역규모 세계 8위, 국내총생산(GDP) 세계 15위의 경제 강국으로 올라선 우리와 올 유엔보고서에 아시아·태평양 57개국 중 최빈국으로 선정된 북한의 경제력 차이는 더 이상 비교가 무의미할 지경에 이르렀다. 이산가족들이 부모형제의 얼굴 한번 보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하는 동안 남북 양측은 전쟁을 겪지 않은 전후 세대가 어느덧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언어와 문화의 이질감 또한 나날이 심화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60갑자를 반목과 대립으로 보낸 남과 북은 이제 분단사를 새로 쓸 시점에 섰다. 가던 길을 멈추고, 서로를 마주 보고, 간극을 좁혀야 한다. 정전체제를 항구적 평화체제로 전환해야 하며, 이를 위한 실질적 노력을 펼쳐나가야 한다. 한반도 비핵화, 북의 핵 포기가 그 첫걸음일 것이다. 북 지도부는 핵이 자신들의 안위를 보장해주는 방패막이가 아님을 깨달아야 한다. 아니, 핵이야말로 북을 고립시키고 경제를 도탄으로 몰아넣어 자신들의 체제를 무너뜨리는 요소임을 깨달아야 한다. 2005년 북핵 6자회담 참가국들이 마련한 9·19공동성명의 틀로 다시 들어와야 한다. 스스로 약속한 핵 폐기-경제 지원-평화체제 구축의 수순을 이행하는 것이 경제를 살리고 체제 안정을 도모하는 길이다. 정부도 북의 변화를 이끌어 내기 위한 전향적 노력을 이어가기 바란다. 한·중 정상회담을 통해 보다 진전된 메시지를 북에 보내길 기대한다.
  • 잔인한 전쟁 너머 ‘휴머니즘’의 속살

    잔인한 전쟁 너머 ‘휴머니즘’의 속살

    정전 60년을 맞아 한국전쟁을 새로운 각도에서 바라본 두 권의 책을 소개한다. 중국 최고의 전쟁 논픽션 작가로 불리는 왕수쩡의 ‘한국전쟁’과 권헌익 영국 캠브리지대 석좌교수의 ‘또 하나의 냉전’이다. 전자는 적국의 시선으로 본 한국전쟁이란 점에서, 후자는 인류학자의 시각에서 한국전쟁과 그 전후의 고통과 폭력의 역사를 통해 우리에게 냉전이란 무엇인지를 되묻는다는 측면에서 주목된다. [한국전쟁] 왕수쩡 지음/나진희·황선영 옮김/글항아리/1000쪽/4만원 ‘한국전쟁에 대해 중국이 말하지 않았던 것들’이란 부제가 붙은 이 책은 1999년 중국에서 초판이 출간됐고, 2009년 개정판이 나왔다. 국내에선 첫 번역 출간이다. 14년의 시차에 담긴 의미는 꽤 함축적일 터이다. 1970년 이전까지만 해도 중국에서는 한국전쟁을 ‘항미원조전쟁’이라 불렀다. 적군인 미군을 향한 대항적 성격으로 한국전쟁을 규정하는 하나의 관점을 유지해왔다. 그러나 저자는 ‘한국전쟁’이라는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국제정치적 맥락이나 이념적 시각으로 한국전쟁을 분석하는 태도에서 벗어난다. 이는 저자가 정치학자나 군사학자가 아니라 팩트를 추적하는 논픽션 작가라는 지점과 맞닿아있다. 치밀한 자료 수집과 수많은 관련자 인터뷰 등 방대한 취재량이 압도적이다. 저자는 한반도에 진입했던 중국국 소속 15개군이 전후에 정리한 전쟁사, 전쟁 종식 뒤 귀국한 참전 장병이 쓴 수많은 회고록, 전쟁 당시 한반도 전장에 있던 중국군 지휘부와 베이징의 지휘자들 간에 교환한 모든 문서와 전보를 열람했다. 또한 미국 역사학자 모리스 이서먼의 ‘한국전쟁’을 비롯한 서구의 다양한 관련서와 더글러스 맥아더의 회고록 등도 참조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저자는 한국전쟁의 발발부터 정전 협정까지의 긴박하고 참혹했던, 때로는 무기력했던 순간들을 하나하나 복원해낸다. 1950년 10월 8일 중국이 ‘중국인민지원군’을 출병하는 대목에서 출발한 책은 전장에 버려진 서적을 통해 적군의 작전 의도를 파악하려는 치열한 정보전과 피말리는 심리전, 각국이 구사하는 전술·전략의 유래와 전개 양상 등에 대한 꼼꼼한 기술을 거쳐 또 다른 전쟁의 양상을 보였던 정전 협상의 체결에서 끝을 맺는다. “병사란 전쟁 속에서 가장 평범하면서도 가장 중요하고 수적으로 가장 많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내가 ‘한국전쟁’을 집필하는 유일한 동력이 되었다.”는 저자의 말처럼 책을 관통하는 핵심은 휴머니즘이다. 하지만 대령 계급의 국가 1급 작가라는 저자의 또 다른 타이틀은 중국 중심의 서술이란 한계를 피할 수 없게 한다. 그럼에도 우리가 접하기 어려웠던 중국 내부의 자료들을 통해 한국전쟁의 한 축이었던 중국의 당시 상황을 들여다볼 수 있다는 건 이 책만의 장점이다. 이순녀 기자 coral@seoul.co.kr [또 하나의 냉전] 권헌익 지음/이한중 옮김/민음사/256쪽/1만 8000 세계사에서 한국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 두 강대국 간 냉전의 역사선상에 놓인다. 1945년 조지 오웰이 처음 언급한 ‘냉전’은 실제적으로 전쟁은 일어나지 않지만 정치·외교·이념상의 갈등이나 군사적 위협의 잠재적인 권력투쟁을 의미한다. 서구에서는 냉전이 “오랜 평화이자 상상의 전쟁”이었다. 하지만 해방공간이 분단으로 이어지고, 한국전쟁을 전후해 전쟁과 폭력의 시대를 살아낸 우리에게 이 시기는 과연 냉전일 수 있을까. 2010년 컬럼비아대에서 영어로 출간된 이 책은 이 같은 질문의 답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즉 한반도 해방공간의 역사가 세계 냉전사와 틀을 같이하는가 달리하는가, 한국전쟁의 역사는 냉전의 역사안에 있는가 아니면 밖에 있는가에 대한 분석이다. 정확히 얘기하면 이 책은 한국전쟁을 직접적으로 다루지는 않는다. 제주 4·3사건과 베트남 전쟁을 통해 한반도를 포함한 동아시아에서 냉전이 폭력전 내전과 그와 관련된 반공주의 역사라는 형태로 전개되는 양상에 초점을 맞춘다. 인류학자인 저자는 냉전을 내전으로 경험한 사회에서 냉전이 얼마나 큰 고통을 주었는지를 인류학의 핵심 조사방법인 참여관찰법을 이용해 접근한다. 저자는 제주 4·3사건으로 분열된 하귀리 마을 사람들이 최근에서야 학살자들을 기리는 추모제를 자유롭게 열 수 있게 되면서 화해에 이르는 과정에 주목한다. 또한 베트남전쟁 당시 형은 혁명군에, 동생은 미국편에 가담해 총을 겨누고 싸워야 했던 가족이 어느 한 명을 추모할 권리를 박탈당하는 고통의 역사를 들여다본다. 저자는 말한다. “한반도의 해방공간이 그러했듯이 한국전쟁의 역사는 냉전의 역사 안에도 있고 또 밖에도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역사가 세계사의 영역에서는 생경해지는 상황은 불행한 일이며 이제는 이 잘못된 구도가 고쳐져야 한다. 그 첫 걸음은 냉전의 역사에 안과 밖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 즉 또 하나의 냉전이 있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7쪽) 베트남전 양민학살을 종교인류학적으로 접근한 책 ‘학살, 그 이후’와 전쟁의 후유증을 기록한 ‘베트남전쟁의 영혼’으로 세계적 명성을 얻은 저자는 최근 한국전쟁의 새로운 연구 틀을 형성하고자 하는 ‘한국전쟁을 넘어서’국제연구사업단을 이끌고 있다. 이순녀 기자 coral@seoul.co.kr
  • [노주석 선임기자의 서울택리지] ② 세종로 축선(軸線) 전쟁

    [노주석 선임기자의 서울택리지] ② 세종로 축선(軸線) 전쟁

    【제1막】 조선… 북악산을 주산 삼아 경복궁~숭례문 丁자형 길 조선 개국 초 한양도읍의 축선(軸線)을 둘러싸고 정도전과 무학 대사가 충돌했다. ‘주산(主山)을 북악으로 할 것이냐, 인왕으로 할 것이냐’의 다툼이었다. 지리학과 풍수의 대결이었다. 미적거리는 태조에게 정도전은 “어찌 술수자의 말만 믿고 선비의 말은 믿지 않습니까”라면서 밀어붙였다. 태조의 마음은 무학에게 기울었지만, 정도전이 대표하는 개국공신들의 의견에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 초기 유교와 불교 간 세종로 축선 전쟁 제1막이다. 서울은 산과 성곽의 도시이다. 유교와 풍수의 원리가 겹겹이 에워쌌다. 성곽으로 둘러싼 경계에 내사산이 있고, 외곽에 외사산이 있다. 내사산 북쪽의 북악산(백악)은 현무, 동쪽의 낙산(낙타산)은 청룡, 서쪽의 인왕산은 백호, 남쪽의 남산(목멱산)은 주작이 각각 수호신이다. 외사산 북쪽 삼각산은 백두산의 정기를 이어받은 조산(祖山)이요, 지리에서 뻗어오른 관악산은 아침마다 임금을 알현하는 조산(朝山)이다. 정도전의 주장에 따라 조선의 법궁인 경복궁은 북악을 주산으로 자리를 잡았다. 근정전은 도시의 중앙에서 서쪽으로 쏠린 상태에서 남쪽을 바라보고 앉았고, 남북 간 축선인 주작대로는 삼각산과 관악산 축선상에 놓였다. 무학 대사는 인왕을 주산으로 삼고 북악을 좌청룡, 남산을 우백호로 하여 도읍을 동향으로 해야 한다고 맞섰다. 그래야 궁이 도시의 중앙에 들어선다고 했다. 무엇보다 북악과 관악산이 불의 산이고, 목멱산(木覓山)에는 ‘나무 목’자가 들어 있어서 불이 나면 도시가 재앙에 빠진다고 예언했다. 무학 대사는 북악을 주산으로 하면 5대를 잇기 전에 왕위찬탈의 비극이 생기고 200년 안에 큰 변고가 일어날 것이라고 내다봤다. 대사의 예언은 사실로 드러났다. 태조 당대에 왕자의 난이 일어났고, 4대 세종의 둘째 아들인 세조가 조카 단종의 왕위를 찬탈했다. 개국 200년 만인 1592년에는 임진왜란이 일어나 경복궁과 종묘·사직이 초토화됐다. 조선의 정궁(正宮)은 불탄 경복궁 대신 도읍 중앙에 입지한 창덕궁으로 옮겨갔다. 풍수가들은 “그나마 조선이 나라를 유지한 것은 정도전이 무학 대사의 지적을 수용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정도전은 화마를 막기 위한 장치 마련에 심혈을 기울였다. 불을 먹고 산다는 상상 속 동물 해태 두 마리가 광화문 앞을 지켰다. 도시가 서쪽에 치우치는 것을 막고자 도시 중앙에 동서를 가로지르는 도로를 만들었는데 그것이 운종가(종로)이다. 황토마루(黃土峴)라는 나지막한 언덕을 육조거리와 운종가가 만나는 오늘의 세종로사거리에 둬 불길이 대궐로 번지는 것을 막았다. 관청가인 육조거리에서 숭례문에 이르는 주작대로는 직통으로 연결하지 않았다. 현재 지도로 보면 세종로 끝자락 비각에서 코스를 꺾어 종로 보신각까지 간 뒤 지금의 남대문로를 통해 숭례문까지 이르는 정(丁)자형 길이다. 화마가 길을 따라오지 못하도록 설계한 것이다. 숭례문 앞에 남지(南池)라는 큰 연못을 팠으며 숭례문 현판을 세로로 세웠다. 결론적으로 1막의 승자는 정도전이었고, 조선의 주축(主軸)은 북악~경복궁~숭례문~관악이었다. 【제2막】 일제… 총독부~시청~조선신궁 일직선 ‘大日本天’ 대못질 일제는 조선의 축선을 파괴하고 개조했다. 창씨개명이나 신사참배보다 더 악질적인 민족정기 말살정책이었다. 도로의 신설과 확장이라는 미명 아래 5대 궁(경복궁·창덕궁·창경궁·경운궁·경희궁)을 파헤쳤다. 서울의 지명을 경성으로 바꾸더니 경기도의 한 지방으로 격하시켰다. 서울은 더는 도읍이 아니라 식민지의 일개 지방도시가 됐다. 1912년 총독부 훈령에 따라 세종로에서 육조거리를 지워버리고 황토마루(누루재)도 뭉개버린 그들은 새로운 축선을 고안했다. 고종이 정궁으로 삼았던 경운궁을 파괴할 목적으로 세종로와 숭례문을 연결하는 태평로(태평통)를 만들었다. 큰 길을 내면서 경운궁 담장을 텄고 이름도 덕수궁으로 멋대로 바꿨다. 종묘와 창덕궁을 분리하고, 창경궁을 동물원(창경원)으로 오락시설화했다. 남산에 조선 신궁을 만들면서 꼭대기에 있던 국사당을 인왕산 선바위 아래로 옮겨버렸다. 국사당은 태조와 무학 대사, 최영 장군 등을 모신 사당이다. 조선총독부 신축은 축선 말살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다. 1915년 경복궁 안에서 조선물산공진회를 연다면서 광화문과 근정전 사이 홍례문을 헐어낸 7만여평의 부지에 전시관을 짓고 잔디를 깔았다. 초대 총독 데라우치는 무엄하게도 근정전 용상에 앉아서 개회사를 낭독했다. 서울의 지맥과 축선을 영구히 끊고자 1926년 근정전과 광화문 사이에 거대한 총독부 건물을 세웠다. 이때 경복궁 내 전각 19채, 대문·중문 22개, 당 45개 등이 헐려 음식점, 별장 건물로 팔려나갔다. 겨우 철거 신세를 면한 광화문은 1927년 불길한 피난길에 올랐다. 경회루 등 전각 몇 채만 덩그러니 남은 당시 경복궁 사진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일제는 조선의 축선에서 5.6도 각도를 튼 자리에 390칸짜리 조선총독부 청사를 돌로 지었다. 일제가 축선을 튼 것은 의도한 것이 아닐뿐더러 객관적으로 증명된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일부 있다. 그러나 내선일체(內鮮一體)를 지상과제로 삼은 그들의 치밀한 민족정기 말살 시나리오를 간과한 어설픈 학설에 불과하다. 조선총독부가 발간한 ‘신영지’(新營誌)에 “경복궁의 중심선은 서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총독부를 광화문 중심선과 맞추면 중심선과 어긋나 위용을 살리지 못한다. 태평통의 도로 중심선으로 새 청사의 중심을 삼았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들의 의도는 총독부~경성부청(서울시청)~남산 조선 신궁으로 쭉 뻗은 ‘일본의 새 축선’을 서울의 중심에 새기는 것이었다. 축선상에 있던 신축건물인 경성일보사를 헐고 그 자리에 경성부청을 지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1940년 경성시가지 지도를 보면 총독관저(청와대)의 대(大)→총독부의 일(日)→경성부청의 본(本)→조선 신궁의 천(天)이 일직선상에 뚜렷하게 나타나 있다. 4개의 건물은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문자모양으로 건축됐다. 이름하여 ‘대일본천’(大日本天)이라는 일본 축선의 완성이다. 【제3막】 광복 이후… 총독부 헐고 경복궁 복원해 역사 바로잡아 ‘서울의 축선=일본의 하늘’이라는 일제의 오싹한 음모는 청산되지 않았다. 개념 없는 위정자들은 일제가 우리의 기와 맥을 끊고자 지은 총독부 청사에서 제헌 의회와 정부수립 기념식 그리고 초대 대통령 취임식을 거행했다. 1939년 지어진 경복궁 후원 총독관저는 미 군정장관 관저, 경무대, 청와대로 대이어 사용됐다. 최고의 명당자리에 둥지를 튼 탓인지 54년 만인 1993년에야 헐렸다. 총독부는 1995년 헐리기 전까지 미 군정청, 정부 중앙청사로 이름을 바꿔 가며 권부로 군림했다. 1952년 서울도시재건계획이 수립됐지만, 우리의 축선을 원래대로 돌리기보다 일제가 왜곡시킨 축을 확장·심화하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 뼈아팠다. 한국전쟁통에 훼손돼 석대만 남아 있던 광화문을 이전 복원한다면서 1969년 아무 생각 없이 옛 조선총독부 정문 앞에 옮겨다 놓았다. 일제가 5.6도 틀어놓은 방향, 원위치에서 동쪽으로 10.9m, 북쪽으로 14.5m 북쪽으로 물러난 이른바 ‘일본의 축’이다. 뒤늦게 알았지만, 총독부를 철거하거나 ‘콘크리트 모조품’ 광화문을 원상회복할 의지와 능력이 부족했다. 임기응변으로 일제의 기를 누를 수 있는 동상을 세우기로 하고 일본인이 두려워하는 충무공 동상을 남산 신궁 터를 노려보는 자세로 세우게 됐던 것이다. 축선 복원은 1990년 경복궁 복원계획이 세워지고, 5년 뒤 총독부가 철거되면서 닻을 올렸다. 총독부가 일본 축선상에 식재한 은행나무를 양옆으로 도려내고서 중앙분리대 자리에 광화문광장을 조성했다. 세종로라는 이름에 맞게 세종대왕 동상을 중심에 두었다. 2009년 8월의 일이다.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이 제자리로 돌아온 것은 2010년 8월이었다. 두 번이나 불타고 두 번이나 엉뚱한 자리에 놓였던 비운의 광화문이 제자리를 찾았다. 비틀린 축선의 출발점을 바로잡는 데 83년의 세월이 걸렸다. 그 사이 축선의 종착지인 숭례문이 2008년 2월 홀랑 불탔다. 축선 복원을 차일피일 미룬 우리의 업보라고 해석할 수밖에 없는 비극이다. 숭례문은 지난 5월 다시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1912년 일제의 황토마루 제거로 촉발된 한국과 일본 간 축선전쟁 제3막도 끝이 났다. 세종로 축선복원이라는 고단한 여정도 101년 만에 막을 내렸다. 식민잔재의 핵을 걷어내는 데 한 세기가 걸린 셈이다. joo@seoul.co.kr ■축선이란 한 국가, 도시의 주축을 이루는 도로 혹은 건물. 우리나라의 축선은 북악~경복궁~숭례문~관악산이다.
  • 혁신과 투자로 넘버원 포스코

    혁신과 투자로 넘버원 포스코

    “한국인에게 철이란 한 사람이 연간 70㎏씩 소비하는 쌀과 같습니다. 자동차, 조선, 가전, 건설 등 전후 한국경제의 주력 산업을 키우는 데 주식과도 같은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18일(현지시간) 미국 뉴욕의 셰라톤 뉴욕타임스스퀘어 호텔에서 ‘벼랑 끝에 선 철강산업’이라는 주제로 열린 제28회 ‘세계철강성공전략 회의’에 특별강연자로 초청된 정준양 포스코 회장이 차분한 목소리로 포스코의 성공담을 전했다. 국제전문 분석기관인 WSD로부터 4년 연속 최고 경쟁력을 지닌 철강사에 선정되도록 포스코를 이끈 최고경영자(CEO)의 강연이 시작되자 세계 철강업계를 대표한 1000여명의 참석자들이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냈다. 정 회장은 “포스코는 일본의 전쟁배상금으로 터를 닦은 국영기업이었으나, 1994년 한국의 기업으로는 최초로 뉴욕 증시에 상장됐고, 세계 73곳에 생산기반과 코일센터, 원료투자 지역을 갖춘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했다”고 소개했다. 그는 “포스코의 슬로건은 제철소 정문에 걸린 ‘자원은 유한, 창의는 무한’”이라면서 “세계 유수의 대학들이 꼽은 포스코의 성공 요인은 탁월한 제품 및 시장의 선택, 우수한 인력 등 조직문화, 선진화된 지배구조, 지속적인 혁신”이라고 밝혔다. 즉 매출의 1~1.5%를 연구개발(R&D)에 투자하면서 신제품 개발에 적극적이고, 초등학교에서 대학까지 운영하면서 임직원과 지역 주민에 신뢰를 받고 있으며 지난 10년 동안 1600여명의 직원이 해외 연수를 다녀왔을 정도로 인재를 아끼고 있다고 정 회장은 설명했다. 기업 운영에 있어서는 실시간 경영, 파트너사와의 협업, 임직원 소통 등이 중요하다고 했다. 협업사와는 물론 임직원끼리 정보와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교환하면서 통합적 아이디어를 찾고 있다는 것이다. 정 회장은 “세계 철강업계는 수요 감소와 공급 과잉으로 30대 철강사들의 평균 영업이익률이 2.5%에 불과할 만큼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서 “자동차용 고강도 강판, 해양구조용 강재, 마그네슘과 리튬 등 대체소재 개발 등을 통해 극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 회장의 강연에 앞서 WSD는 주요 34개 철강사를 대상으로 각종 지표를 분석, 순위를 매기는 경쟁력 평가에서 포스코가 1위 철강사로 선정됐다고 발표했다. 지난 2010년 이래 6회 연속 1위 자리를 지켰다. WSD는 생산 규모를 비롯해 수익성, 기술혁신, 가격결정력, 원가절감, 재무건전성, 원료 확보 등 23개 항목을 평가한다. 2위는 러시아의 세베르스탈, 3위는 미국 철강사로 저가의 셰일가스를 사용하는 뉴코가 새롭게 이름을 올렸다. 세계 1, 2위 조강생산량을 자랑하는 인도의 아르셀로미탈과 일본의 신일철주금(NSSMC)은 경쟁력에서는 각각 26위, 7위에 그쳤다. 또 조강생산 3, 4위인 중국의 허베이강철과 바오산강철은 발표 대상인 34위권 밖으로 밀려났다. 포스코의 지난해 영업이익률은 7.82%로 세계 경쟁사들보다 2~3배나 높은 편이다. 김경운 기자 kkwoon@seoul.co.kr
  • [사설] 이제 ‘난민 후진국’ 멍에 벗어야 한다

    오늘은 세계 난민의 날이다. 난민이란 인종, 종교 또는 정치적·사상적 신념의 차이 때문에 받을 수 있는 박해를 피해 외국으로 탈출한 사람들을 일컫는다. 우리가 난민 협약에 가입한 지는 21년, 최초로 난민을 인정한 지는 12년이 지났다. 그러나 아직 난민에 대한 인식이 좋은 편은 아니다. 지난달 말까지 우리나라에 난민 신청을 한 사람은 5485명이고 329명만이 인정받았다고 한다. 불과 6%밖에 안 된다. 세계 각국의 난민 인정률이 평균 38%이니 훨씬 뒤떨어진다. 난민을 바라보는 일반 시민의 시선도 곱지 않다. 난민을 우리 영역을 침범한 사람들쯤으로 여긴다. 국내에 들어온 난민들은 매우 고통스러운 삶을 살고 있다. 난민 지위를 인정받기도 어렵고 결과가 나오기까지 몇 년 이상을 기다려야 하는 실정이다. 육체적인 질병이나 정신적인 고통에 시달리는 것은 물론이고 지위를 받고 나서도 생계 수단이 없어 생존에 위협을 받고 있다. 난민에 대한 인식을 바꿔야 한다. 그들을 도와야 하는 첫째 이유는 순수한 인도주의 정신 때문이다. 또 높아진 한국의 국제적 위상에 걸맞게 우리가 짊어져야 할 책임도 있다. 가난한 외국에 원조 물자를 보내는 것과 같다. 물론 난민에 대한 정책적 배려는 조금씩 나아지고 있긴 하다. 특히 다음 달에는 ‘난민법’이 발효된다. 아시아 최초라고 한다. 난민 신청 절차가 간소화되고 난민으로 인정받은 이들의 기초생활을 보장해 주고 정착을 돕는 교육도 실시된다. 그러나 실질적인 지원대책은 보잘것없다. 올해 난민 관련 예산은 겨우 20억원이 책정되었다고 한다. 그조차도 대부분 지원센터 운영비로 쓰이니 난민들의 주거와 생계를 위해 사용되는 예산은 거의 없다. 시민단체에서는 “좋은 난민법이 있어도 예산이 없으면 부도난 어음”이라고 지적한다. 난민 심사는 여전히 엄격해 신청자도 쌓여 가고 있다. 기약 없이 기다리는 신청자가 1442명으로 불었다. 우리도 한때 난민이었다. 6·25전쟁을 거치면서 수많은 난민이 발생했다. 일부 고아들은 외국에 입양되기도 했고 남은 사람들도 외국의 식량과 의료 지원을 받아 삶을 지탱할 수 있었다. 그런 도움이 없었다면 오늘의 우리 또한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제 우리가 받은 만큼 비슷한 처지에 있는 외국인들을 도와줘야 한다. 편견과 부정적 시선부터 버리고 실제적인 지원책을 마련해야 한다. 난민은 반세기 전 우리의 모습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 [서울광장] 대북정책에 대한 마키아벨리의 조언/진경호 논설위원

    [서울광장] 대북정책에 대한 마키아벨리의 조언/진경호 논설위원

    “강한 자가 살아남는다”는 시인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통찰은 흔히 “살아남는 자가 강한 자”로 치환된다. 동물의 세계가 그렇듯 개인과 사회, 나라 또한 환경에 얼마나 잘 적응하고 변화를 슬기롭게 헤쳐 가느냐로 존망과 성쇠가 갈린다. 멀리서 찾을 것 없다. 전쟁의 잿더미 위에서 60년 만에 세계 10위권의 경제 강국과 1인당 국내총생산(GDP) 720달러의 최빈국으로 남북이 갈린 한반도가 살아 있는 증거다. 우리는 변화를 탔고, 그들은 거부했다. 강한 자가 됐고, 멸종위기종이 됐다. 한반도 분단사에서 박근혜 정부가 어떻게 기록될지는 누구도 모른다. 그러나 훗날 분단사의 한 꼭짓점으로 남을 가능성을 담은 몇 가지 흐름이 지금 한반도를 휘감고 있다. 북한과 순망치한(脣亡齒寒)의 관계이던 중국이 변하고 있고, 29세 김정은의 리더십은 여전히 성글다. 고립된 북의 경제는 좀처럼 기력을 찾지 못하고 있다. 언제 터질지 모를 응축된 변혁 에너지가 한반도의 유동성을 한껏 높이고 있다. 하기에 달렸다. 행운이 준비와 기회의 소산이듯, 이런 흐름에 앞으로 어떻게 조응하느냐가 성패를 가를 것이다. 500년 전 약육강식의 격랑에 휩싸인 이탈리아 반도에서 조국 피렌체를 살리려 외교의 최일선에 섰던 마키아벨리가 지금 한반도를 들여다본다면 박 대통령에게 몇 가지를 당부할 듯싶다. 무엇보다 어설픈 승리 말고, 확실한 승리를 추구하라는 말을 할 듯하다. 마키아벨리는 “인간이란 사소한 피해에는 보복하려 들지만 엄청난 피해에는 감히 엄두를 못 낸다. 인간은 다정하게 안아주거나 아니면 짓밟아 뭉개야 한다”고 했다. 거칠기 짝이 없는 언사지만, 섣부른 타협을 경계하고 확고한 원칙을 추구하라는 말이다. 박 대통령의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를 관통하는 정책기조와 궤를 같이하는 만큼 마키아벨리가 중언부언할 까닭은 없어 보인다. 귀담아들을 대목은 다음일 것이다. “공명정대는 분명 칭찬받을 일이나, 위대한 업적을 남긴 군주는 인간을 혼동시키는 데 능숙했다.” 성실과 신뢰에 더해 책략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원칙을 앞세우되 능수능란한 전술로 뒤를 받쳐야 외교가 완성된다는 얘기다. 오는 27일 박 대통령이 시험대에 선다. 시진핑 중국 주석과 마주 앉아 자신의 외교력을 대내외에 펼쳐보이게 된다. 과거와 달라졌다지만 북한만 바라보다 살짝 돌아앉은 데 불과한 중국이다. 박 대통령과의 친분이 두텁다지만 시 주석 홀로 외교정책 방향을 결정할 수 없는 집단지도체제의 중국이다. 몸집만큼이나 한발 한발 움직이는 게 더디다. 회담은 어렵지 않겠으나, 회담 이후 한반도 상황은 그래서 쉽지 않을 것이다. 박 대통령은 남북 대화를 위한 중국의 역할을 당부할 것이고, 시 주석은 조속한 6자회담 재개를 위한 상호 노력을 주문할 것이다. 이 두 목소리는 적어도 회담장에서만큼은 조화와 균형을 이룰 것이다. 그러나 정작 회담 이후의 한반도는 다를 듯하다. 남북대화보다 6자회담 재개를 둘러싼 신경전으로 요동칠 공산이 크다. “대화를 위한 대화는 안 된다”고 선을 그은 박 대통령을 향해 6자회담 참여를 요구하는 중국의 목소리는 점차 커질 것이다. 경제 제재 완화를 바라는 북한이 이에 가세하면서 북한을 향한 지금의 한·미·중 3각 압박 전선이 한·중 정상회담 이후 흐트러지는 역설적 상황이 초래될 수도 있다. 제휴란 자신을 강하게 할 때만 의미가 있다고 마키아벨리는 말했다. 중국의 대북 영향력을 확대하는 회담을 넘어 우리가 한반도의 주도권을 확고히 하는 회담이 돼야 한다. 단호한 북핵 불용(不容) 의지와 함께 한반도 해법에 있어서 남북 대화가 제1과제라는 목소리가 시 주석의 입에서 나오도록 해야 한다. 사자도 되고, 여우도 되라고 했다. 그게 도태 위기의 북을 상대하는 남을 위한 마키아벨리의 처방이다. 열흘 뒤 박 대통령은 자신의 외교력을 입증해야 한다. jade@seoul.co.kr
  • 60년간 오로지 연필로만 그려낸 인고의 나날들

    60년간 오로지 연필로만 그려낸 인고의 나날들

    철권통치로 서슬 퍼렇던 1970년 당시 박정희 대통령 내외가 서울 미도파화랑에서 열린 원석연(1922~2003) 화백의 개인전을 찾았다. 박 전 대통령은 큼지막한 종이에 그린 개미 그림을 바라보다가 새마을 운동의 구호인 ‘근면, 자조, 협동’을 떠올리며 격려했다. 원 화백의 입가에는 쓴웃음이 감돌았다. 그에게 개미는 빈곤하고 고달픈 사회상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고뇌의 흔적이었다. 그림 속 수백 마리의 개미 떼가 아웅다웅 다투는 주변에는 개미들의 몸통에서 떼어진 다리가 처참하게 널브러져 있었다. 원 화백의 이름이 화단에 각인된 것은 ‘개미’ 연작 덕분이다. 실물 크기로 정밀하게 그려진 수백, 수천 마리의 개미 떼가 탄성을 자아낸다. 개미 그림은 6·25전쟁 피란 시절 비롯됐다. 전쟁의 비인간적인 단상을 탱크의 바퀴 자국이 깊게 파인 길에 누군가 벗어 놓은 고무신 한 짝, 그리고 참혹한 개미 떼의 모습으로 그려냈다. 개미 떼뿐만이 아니다. 줄에 엮인 굴비나 마늘 그림은 순수하지만 알 듯 모를 듯 고즈넉한 외로움과 슬픔을 불러온다. 거미줄에 걸린 벌레를 노려보며 나뭇가지 위에 걸터앉은 새 그림에는 ‘외로운 녀석’이란 이름을 붙였고 멍하니 한 곳을 응시하는 귀여운 강아지의 처량한 모습을 담은 그림은 ‘고독한 녀석’이라 불렀다. “내 모습이 꼭 저렇다”며 자화상이라고 했다. 말년에는 호미, 엿가위, 칼 등의 쇠붙이를 즐겨 그렸다. 영원할 것 같은 쇠붙이도 녹슬고 뭉개져 낡은 모습을 띤다는 사실에 착안했다. 역시 자신의 처지를 빗댄 것이다. 이중섭과 교류하며 현실 세계의 아픔을 개미, 새, 닭, 개, 생선 등을 통해 주로 표현했다. 60년 가까이 오로지 연필로만 그림을 그린 원 화백의 10주기 추모전이 20일부터 다음 달 28일까지 서울 종로구 통의동 아트사이드갤러리에서 열린다. ‘이색 작가’ ‘열외적인 작가’로 불린 원 화백은 현실과 타협하지 않은 예술인으로 유명하다. 오광수 미술평론가는 “일정한 소속의 화랑도 없고 주변에 사람도 많지 않았다.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연필과 종이로만 살아온 삶은 인고의 나날로 점철됐다”고 말했다. 원 화백은 황해도 신천에서 태어났으며 15살 때 일본으로 건너가 그림을 배웠다. 22살 때 귀국해 1947년 첫 개인전을 열었다. 그런 그가 박 전 대통령과 닉슨 전 미국 대통령의 초상화를 그렸다는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주한 미국 공보원에서 근무하다 1963년 도미해 닉슨 전 대통령의 초상화를 그렸다. 1960년대 후반에는 정처없이 전국을 누비다가 경북 구미에서 발견한 허름한 초가를 화폭에 옮기려다 건장한 사내들에게 쫓겨 나오기도 했다. 박 전 대통령의 생가였다. 추모전에는 박 전 대통령 생가 그림도 걸려 있다.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 [노주석 선임기자의 서울택리지] ① 프롤로그-변천사

    [노주석 선임기자의 서울택리지] ① 프롤로그-변천사

    우리에게 서울이란 무엇인가. 한강 기슭에 터 잡은 한성백제 이후 2000년의 역사가 어린 한민족의 고향쯤이기도 하고, 북악 아래 도읍을 정한 지 600년을 훌쩍 넘긴 조선의 심장부이기도 하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유린당했지만 정체성을 지켰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일본은 민족정기 말살을 노리는 대못을 구석구석 박았다. 근대화라는 이름 아래 자행된 일제의 식민 경영에 의해 서울은 심각하게 왜곡됐다. 한국전쟁의 포연 속에서 서울시내 건물의 3분의1이 파괴됐다. 사대문 안 문화재는 가까스로 살아남았지만, 전쟁이 끝났을 때 서울은 폐허에 가까웠다. 그런 서울이 ‘한강의 기적’을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걸린 시간은 60년. 전 세계를 통틀어 가장 압축적인 성장과 변화가 휩쓸고 갔다. 어떻게 가능했을까. 얻은 것은 무엇이고 잃은 것은 무엇인가. 장기 개발독재와 불도저식 행정가의 밀어붙이기 도시계획에 따른 엄혹한 고통을 묵묵히 감내한 서울시민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견뎌 내지 못했더라면 인도의 뭄바이, 멕시코의 멕시코시티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서울은 진화 중이다. 진화는 상실을 수반한다. 기억하고 남겨야 할 가치마저 토건의 흙먼지 속에 숱하게 사라졌다. 개발 연대의 기록들을 찬찬히 살펴보면 숨가쁘게 달려온 길이 보인다. 험하고 불편했지만, 기억 속에서는 정겨운 시절이기도 하다. ‘서울 택리지’(擇里志)는 지금 우리 옆에 남아 있는 건물, 도로, 장소, 풍광의 생성과 소멸 그리고 재생 과정을 도시계획적 관점에서 살펴봄으로써 우리가 잊고 지내 온 것들을 되새김하고자 한다. ■서울 2000년사 새로 써야 하나 미국의 도시설계가 케빈 린치는 “도시는 랜드마크(landmark)와 구역(district), 통로(path), 접점(node), 경계(edge)로 인지된다”고 ‘도시의 이미지’를 정의했다. 서울을 도시건축적 시각에서 보면 다섯 가지 키워드는 여전히 유효하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본 서울은 만감이 교차하는 상념의 뿌리 같은 곳이다. 서울의 진짜 나이는 몇 살일까. 우리는 ‘서울은 600년 역사를 지닌 도시’라고 알고 있고, 서울을 소개하는 대부분 책에 그렇게 적혀 있다. 1978년 ‘서울 600년사’가 편찬됐고, 1994년에는 서울 정도 600년 행사를 성대하게 치렀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서울의 기원과 역사에 관한 정설은 흔들리고 있다.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는 2009년 ‘서울 역사 2000년’을 내놓으면서 서울의 공간을 확장했고, 역사도 1400년 늘렸다. ‘온조가 위례에 자리 잡았다’는 삼국사기의 백제 건국설화에 따라 서울의 기원을 기원전(BC) 18년으로 본 것이다. 결과적으로 한성백제시대 493년이 서울의 역사로 편입됐고, 한강 이남까지 영역이 확장됐다. 위례는 서울 송파구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일대다. 백제는 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침공을 받아 수도를 웅진(공주)으로 옮겼으므로 백제 수도로서의 서울 역사는 500년 가까이 늘어난다는 것이다. 석촌동 일대에는 백제 초기 적석총 10여 기가 남아 있는데 이 중 3호분을 13번째 왕 근초고왕(?~375)의 무덤으로 추정하고 있다. 곧 한성백제 493년에,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가 서울을 남경(南京)으로 삼은 기간까지 더하면 수도 서울의 역사는 물경 2000년에 이른다는 것이다. 로마, 아테네, 바빌론, 이스탄불, 다마스쿠스, 테베에 이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의 반열이다. 900년 설도 있다. 조선의 수도 한양은 18㎞ 사대문 안과 사방 십리(城底十里)를 의미하는데 위례는 경기도 지역으로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서울에 속한 곳이므로 역사적으로 전혀 다른 지역이라는 것이다. ‘오래된 서울’을 펴낸 최종현·김창희씨는 “서울의 기원을 위례에서 잡을 것이 아니라 고려 숙종의 남경 천도로 잡는 것이 맞다”고 주장한다. 숙종이 경복궁 근처에 남경행궁을 만들어 행차한 1104년을 서울의 기원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서울의 역사는 919년이 됐다는 얘기다. 묵을수록 좋다고 하지만 서울의 나이를 무한정 늘리는 것에 대한 반론도 만만찮다. 1392년 조선 건국과 한양 천도를 한민족 수도 서울의 주춧돌로 보는 것이 일반의 통설이다. ■고려 286년 동안 5차례 시도된 한양 천도 한양 천도에도 알려지지 않은 얘깃거리가 많다. 고려 건국 후 서울은 양주(楊州)로 불렸으며 지방 호족이 할거했지만, 지정학적 중요성을 고려한 문종은 1067년 남경으로 승격시켰다. 개경(개성), 서경(평양)과 함께 고려의 3대 도시로 삼은 것이다. 한양 천도는 조선 태조 이성계의 역성혁명 성공과 이에 따른 지배층 정리 차원에서 이뤄진 것으로 역사 교과서는 소개하고 있지만, 천도는 고려 중기부터 끊임없이 시도됐음을 알 수 있다. 1308년 충선왕은 남경을 한양부(漢陽府)라고 고쳤다. 1357년 공민왕은 남경 천도를 본격화했다. 수도를 옮김으로써 국내외 혼란을 바로잡고자 했다. 그러나 신하들의 반대에 부딪혀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송도(개경)의 지덕이 다해 나라 안팎의 우환이 끊이지 않는다는 지리도참설이 도읍을 옮기도록 부추겼다. 1382년 우왕은 한양 천도를 단행했지만, 이듬해 개경으로 돌아갔다. 1390년 공양왕은 한양으로 옮기면서 백관들이 양쪽에서 나눠 근무하게 함으로써 6개월짜리 ‘반쪽’ 수도에 그쳤다. 천도는 태조가 조선을 건국한 지 3년 만인 1395년 6월 6일 한양부를 한성부로 바꾸면서 완성됐다. 고려의 한양 천도는 1104년 숙종 때 처음 시도된 이래 충선왕, 공민왕, 우왕, 공양왕 등 5명의 고려왕이 시도했지만, 무위로 돌아갔고, 결국 조선 태조에 의해 291년 만에 실행에 옮겨졌다. 고려왕조 476년의 절반을 넘는 286년 동안 고려의 마음은 개성을 떠나 한양을 기웃거렸다. ■‘서울특별시’의 탄생 비화 서울은 지명이 아니라 도읍을 이르는 용어다. 서울은 고려 때 한양으로 불렸으며 조선시대 공식 지명은 한성부(漢城府)였다. 중국이 지금까지 서울을 한성(漢城)이라고 호칭하는 까닭이다. 일제는 경성부(京城府)로 개칭, 경기도 내 행정구역의 하나로 깔아뭉갰다. ‘서울’이라는 지명은 1946년 8월 14일 미 군정청 특별발표에서 처음 등장한다. 손정목 전 시울시립대 명예교수에 따르면 미 군정장관 아처 러치 소장이 광복 1주년 기념 선물로 서울을 경기도에서 독립시켜 특별시(영문 표기는 독립시)로 승격시켰다고 한다. 서울특별시는 군정 법령의 효력이 발생한 1946년 9월 28일을 기해 공식 지명이 됐다. 서울 사대문 안이 미군의 무차별 공습에서 벗어나 문화재를 비교적 온전하게 보존하게 된 비화도 전해진다. 한국전쟁 당시 주일대표부 전권공사를 지낸 김용주(1905~1985)는 ‘나의 회고록, 풍설시대 80년’에서 도쿄사령부로 맥아더 장군을 찾아가 설득한 경위를 밝혔다. 그는 5대 궁과 사대문을 포함하는 지역을 작전지도에 표시하면서 폭격 대상에서 제외해 달라고 요청했고, 맥아더는 “좋은 조언을 해 줘 대단히 기쁘다.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했다는 것이다. 김용주는 후에 전남방직을 창업했고 경총회장을 지냈다. ■이중환은 ‘서울 택리지’를 어떻게 쓸까 나라에 사(史)가 있으면 고을에는 지(志)가 있다. 이것이 우리의 문화 전통이다. 지리지(地理志)는 지역의 역사, 지리, 인물, 풍속 등을 기록한 책이다. 지리지도 정사의 일부였다. 중국의 경우 반고는 한서(漢書)에 지리지를 포함했고, 삼국사기와 고려사도 각각 지리지를 갖추고 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중환(1690~1756)이 펴낸 택리지(擇里志)는 동국여지승람과 함께 우리나라 지리지를 대표한다. 동국여지승람이 행정중심적 백과사전이라면 택리지는 생활권과 지역권의 시각으로 서술한 근대 지리학의 맹아라고 할 수 있다. 이중환은 30여년간 전국을 떠돌면서 살 만한 곳을 찾아 헤맸다. 공자가 논어에서 ‘군자는 살 만한 곳을 찾아 거한다(可居地)’는 그곳, 동양의 유토피아였다. 특히 사람이 살 만한 곳의 입지 조건으로 지리(地理)와 생리(生利), 인심(人心), 산수(山水) 등 4가지를 꼽았다. 이중환은 살 만한 곳을 찾았을까? 택리지를 현대적으로 해석한 ‘신택리지’의 저자 신정일은 “끝내 살 만한 땅을 찾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서울은 살 만한 곳인가?’ 서울은 ‘연식’은 오래된 도시이지만 ‘마일리지’는 환갑을 넘지 못한다. 지구상에서 가장 다이내믹하게 변화한 도시다. 조선 말 20만명이 살던 도성은 해방 전후 100만명으로 늘어났고, 1990년 1000만명 시대에 접어들었다. 대한민국의 모든 것은 광적으로 서울에 몰렸다. 개발 연대기 서울 행정은 인구 분산과 교통난 해소, 택지개발, 아파트 건설에 맞출 수밖에 없었다. 서울은 늘 만원이고, 늘 공사 중이었다. 개발의 와중에서 역사와 애환이 서린 ‘그때 그곳’은 보호받지 못했고, 달랑 표지석으로 남은 곳이 숱하다. 그런 서울이 사람 위주의 환경도시로 옷을 갈아입고 있다. 개발 연대를 대표하는 청계고가의 철거와 청계천 복원이 터닝포인트였다. 2013년 서울은 수도권 주민 등 3000여만명이 드나들고, 대한민국 5000만 국민이 지향하며, 외국인 관광객 1000만명이 찾는 ‘동방의 메트로폴리스’가 됐다. 불과 반 세기 만에 일어난 경천동지할 변화다. 이중환이 현대 서울을 보았다면 택리지의 후편으로 ‘서울 택리지’를 집필했을 것이다. 그는 무엇이라고 쓸까. jo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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