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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종황제도 야참으로 후루룩~ 시원·쫄깃한 냉면의 모든것

    고종황제도 야참으로 후루룩~ 시원·쫄깃한 냉면의 모든것

    ‘차게 식힌 국물에 만 국수’. 고유의 음식인 냉면은 이렇게 간략하게 정의되곤 한다. 하지만 쉬이 볼 음식은 아니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진찬의궤(進饌儀軌), 부인필지(夫人必知) 등의 기록에 세세하게 냉면에 관한 기록이 남아있다. 학자들은 이를 통해 냉면은 조선시대부터 즐겨 먹던 음식이라 설명한다. 메밀가루에 녹말을 약간 섞어 반죽해 국수를 만든 뒤 큰 대접에 담고, 편육·소고기볶음·오이채·배채·삶은 달걀 등의 고명을 얹어 먹는다. 고기 육수나 동치미국물을 미리 차게 식혀 두었다가 가만히 부은 후, 식초와 겨자를 곁들여 먹기도 한다. 이를 전통적인 ‘평양냉면’이라 부른다. 쌍벽을 이루는 ‘함흥냉면’도 있다. 면이 질기고 오들오들해 싱싱한 가자미나 홍어 같은 생선으로 회를 쳐 고추장으로 양념해 비벼 먹는다. 그런데 정작 함흥에는 함흥냉면이 없다고 한다. 한 새터민은 함흥냉면이란 말은 남한에 와서 처음 들었다고 할 정도다. 함흥냉면이라는 말은 6·25전쟁 이후 남한에서 인기를 끌던 평양냉면에 대응해 만든 남한식 냉면의 이름이라는 것이다. MBC ‘다큐스페셜’은 5일 밤 11시 20분 냉면에 얽힌 이야기를 담은 ‘냉면’을 방송한다. 유난히 까다로운 입맛을 가진 한국인 덕분에 냉면은 특별한 미식가가 아니라도 호불호가 분명하게 갈리는 음식 중 하나가 됐다. 역사 속 숨겨진 재미있는 냉면 이야기와 냉면에 관한 오해와 진실, 숨겨진 맛집까지 두루 살펴본다. 유난히 냉면에 관한 기록이 많은 지도자는 대한제국의 고종 황제이다. 매일 밤 야참으로 냉면을 즐겼는데, 냉면만큼은 ‘후루룩~’ 빨리 먹었다. 황제는 ‘배동치미’로 불면증을 달랬다. 배동치미는 담글 때부터 배를 넣어 달고 시원한 육수에 고명으로 배를 듬뿍 올려 만들었다. 1930년대에는 ‘냉면 배달부’가 있었다. 배달부들은 나무 목판 위에 냉면 열 그릇을 층층히 쌓아 들고 다른 한손엔 육수 주전자를 들고 묘기를 부리듯이 자전거를 타고 배달했다. 모던 보이와 기생들, 밖에서 음식을 사먹는 것을 꺼려했던 양반이나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의 야참이었다.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 ‘보호무역 우산 쓴 기업’ 애플 이미지 추락… 삼성엔 득

    버락 오바마 미국 행정부가 국제무역위원회(ITC)의 애플 특허 침해 결정에 대한 거부권을 행사하면서 향후 시장의 반응과 남은 소송에 대한 영향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미 정부의 거부권 행사로 애플 제품에 대한 미국 내 수입금지 조치는 무산됐지만 이것이 애플이나 삼성전자 영업 실적에 끼치는 영향은 미미할 것으로 보인다. 당초 수입금지 품목이 모두 구형 제품군이라 판매 실적 기여도가 높지 않기 때문이다. 수입금지 품목 중 그나마 최신 제품인 스마트폰 아이폰4만 해도 이미 출시된 지 3년이 넘었다. 대신 시장에서는 이번 조치가 기업 이미지 측면에서는 삼성전자에는 득이, 애플에는 실이 됐다고 보고 있다. 지난 6월 ITC가 “애플이 삼성전자 특허를 침해했다”고 결정하면서 삼성전자는 잘나가는 타사 제품을 모방하는 ‘카피캣’(copy cat) 기업이란 이미지를 어느 정도 벗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미 정부가 자국 기업인 애플의 손을 들어주는 모양새가 되면서 애플은 정부의 보호무역주의 우산 아래 놓인 기업으로 이미지가 추락했다는 것이다. 전자업계 관계자는 “아이폰4 등이 로엔드(저가형) 시장을 일부 형성하고 있다 하더라도 현 시점에서 실적을 따지는 건 의미가 없을 것”이라면서 “삼성-애플 간 소송이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걸 감안하면 미 정부의 선택이 애플 입장에서도 그다지 좋을 것은 없다”고 말했다. 미 정부의 조치가 오는 9일로 예정된 ITC의 또 다른 결정에 미칠 영향에 대해서도 관심이 쏠린다. ITC는 당초 지난 1일로 예정된 애플 특허 4건에 대한 삼성의 침해 여부 최종 결정을 9일로 미뤘다. 업계에서는 이미 갤럭시S, 갤럭시S2 등 삼성전자 구형 제품군이 애플 특허를 침해했다고 판단한 ITC의 예비판정이 이번에 뒤집히지는 않을 것이라 보고 있다. 또 그 경우에 미 정부가 이번처럼 수입금지 조치를 거부하지도 않을 것이란 예측도 나온다. 애플이 침해한 삼성전자의 특허는 서비스 구현에 반드시 필요한 ‘표준특허’로 미 정부의 ‘프랜드’(FRAND) 원칙이 적용되는 반면, 삼성전자가 침해한 애플의 특허는 ‘디자인 특허’라 반드시 같은 결론이 난다고 보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미 정부는 표준특허에 대해서는 특허 보유자가 ‘공정하고 합리적이며 비차별적인’ 방식으로 사용 허가를 내줘야 한다는 프랜드 원칙을 적용하고 있다. 이에 대해 업계 관계자는 “미 정부가 표준특허는 프랜드 원칙을 주장하며 거부권을 행사했는데 디자인특허만 유독 지켜야 한다고 말하는 건 모순일 수 있다”며 “디자인은 보호받고 표준특허는 보호받지 못한다는 원칙은 이현령비현령식”이라고 꼬집었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지금은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지만 모든 수단을 검토하고 실효성을 따져볼 것”이라며 “그러나 이번 소송 문제 때문에 글로벌 시장 전략이 수정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전했다. 한편 오바마 행정부가 거부권을 행사하자 해외 언론들도 앞다퉈 속보를 전하며 비상한 관심을 보였다. 뉴욕타임스는 이날 “백악관의 개입은 매우 드문 일”이라며 “애플의 승리”라고 평가했다. 이어 “오바마 대통령은 유럽, 태평양 국가들과의 무역협상을 공격적으로 추진하고 있지만 미국 기업 보호는 그보다 더 공격적으로 밀어붙이고 있다”고 지적했다. 신화통신은 “이번 거부권 행사는 삼성에 타격이 될 것”이라고 논평했다. 블룸버그통신은 “애플에 대한 삼성의 특허 침해 관련 승리가 오바마 행정부의 거부권으로 공허해졌다”고 지적한 뒤 “궁극적으로 이번 결정은 삼성전자와 애플 간 의미 없는 특허 전쟁을 끝낼 수도 있다”고 평가했다. 강병철 기자 bckang@seoul.co.kr 김미경 기자 chaplin7@seoul.co.kr
  • ‘美 기밀폭로’ 매닝, 간첩죄 등 100년刑 위기

    ‘美 기밀폭로’ 매닝, 간첩죄 등 100년刑 위기

    폭로 전문 사이트 ‘위키리크스’는 2010년 4월 ‘부수적 살인’이란 제목의 39분짜리 동영상을 공개했다. 아파치 헬기 조종석에 설치된 카메라로 촬영된 이 영상은 2007년 7월 12일 바그다드 외곽 알아민 알타냐 지역에서 미군이 민간인을 향해 기관총을 난사해 12명 이상을 사살한 내용으로, 미군이 극비에 부쳐 온 자료였다. 동영상 공개에 발칵 뒤집힌 미군은 곧바로 기밀 유출자 색출에 나섰고 두 달 뒤 이라크에 주둔하던 정보분석병 브래들리 매닝(25) 일병을 체포했다. 미 군 검찰은 지난 3월 매닝을 ‘이적행위’를 포함한 22개 혐의로 기소했다. 바로 그 매닝 일병이 30일(현지시간) 메릴랜드주 포트미드 군사법정에서 열린 재판에서 핵심 항목인 이적 혐의에 대해 무죄 평결을 받았다. 종신형은 피할 가능성이 커졌지만 간첩법 위반 등 다른 20개 혐의는 유죄 평결을 받아 100년이 넘는 중형을 받을 여지도 남아 있다. CNN 등에 따르면 데니스 린드 군사법원 판사(육군 중령)는 간첩법 위반과 반역죄, 컴퓨터 사기, 절도, 군(軍) 규정 위반 등 20개 혐의 대부분에 대해 유죄 평결했다. 매닝은 3월에 열린 사전 심리에서 스스로 인정한 10개의 혐의로도 20년 이상의 징역형을 선고받을 수 있는 상황이다. 린드 판사가 형량을 높여 적용할 경우 매닝은 사실상 종신형이라 할 수 있는 100년 이상의 징역형에 처해질 위기에 놓였다. 앞서 군 검찰은 “매닝은 자신이 유출한 자료가 국제 테러조직 알카에다의 손에 들어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이는 적을 이롭게 할 목적으로 저지른 행위”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변호인 측은 매닝이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전쟁의 비극을 폭로한 것으로, 이적 행위로 볼 수 없다고 반론했다. 1987년에 태어난 매닝은 2007년 10월 육군에 입대해 이듬해 4월 정보분석 특기를 부여받고 제10보병사단에 배속됐다. 2009년 10월 이라크로 파병돼 2여단 소속으로 바그다드 인근 기지에 주둔하던 그는 미 비밀정보망에 접속해 얻은 기밀 70만건을 위키리크스에 넘긴 혐의로 체포됐다. 이날 매닝 일병 지지자 수십명은 포트미드 기지 인근에서 석방 촉구 시위를 벌였다. 위키리크스도 성명을 내고 “오늘 평결은 버락 오바마 행정부의 위험한 국가안보 극단주의를 반영한 것”이라며 언론 자유 측면에서도 매우 위험한 선례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위키리크스 설립자 줄리언 어산지 역시 영국 런던의 에콰도르 대사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매닝의 폭로는 전쟁 범죄를 세상에 알리고 혁명을 촉발시켰으며 민주적 개혁을 유도한 것”이라고 밝혔다.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서울시 ‘쪽박錢鐵’ 전철밟나] ‘애물단지’ 지방 경전철 실태 및 원인

    [서울시 ‘쪽박錢鐵’ 전철밟나] ‘애물단지’ 지방 경전철 실태 및 원인

    경기 김포시는 김포신도시와 김포공항역(서울지하철 9호선)을 잇는 도시철도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경전철과 중전철을 놓고 저울질하면서 여러 번 입장이 바뀌었다. 처음엔 경전철을 건설하려 했으나 중전철을 공약으로 내세운 유영록 시장이 2010년 당선된 이후 뒤집어졌다. 하지만 사업비 1조 7800억원 가운데 1조 2000억원을 지원키로 한 한국토지주택공사(LH)의 요구로 원래대로 돌아갔다. 김포신도시 사업시행자인 LH는 당시 중전철로 건설할 경우 완공 시기가 올해에서 2017년으로 늦어져 올해 입주가 시작되는 김포신도시에 지장을 초래한다며 반대했다. 6000억원가량 늘어나는 사업비 문제도 제기됐다. 논란이 길어지다 보니 아직 착공조차 못했다. 결국 사업비와 사업 기간이 전철 종류를 선택하는 기준이 되고 있다. 경전철은 중전철보다 건설비가 50~60% 적게들고 무인자동운전으로 운영비가 절감된다. 건설기간도 짧은 등의 장점이 있다. 국토교통부 관계자는 “시민들은 상대적으로 안전하고 소음이 적은 중전철을 선호하지만, 사업비(㎞당 사업비 중전철 1300억원, 경전철 700억원) 때문에 경전철을 택하는 지방자치단체들이 많다”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이어 “수도권에는 버스, 지하철로 그물망 같은 대중교통이 형성돼 있는데 굳이 지자체들이 경전철을 시급하게 건설할 필요성이 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문제는 지자체가 선택(?)한 경전철이 개통 뒤엔 ‘세금 먹는 하마’로 전락하는 데 있다. ‘수요예측’이란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졌기 때문이다. 지난해 7월 개통된 의정부경전철은 현재 누적 적자가 200억원에 달한다. 하루 평균 이용객이 1만 6000명으로 예측치의 18%에 그친다. 통합환승할인제가 내년 1월 도입되면 그나마 나아질 것으로 보인다. 부산-김해경전철도 민간 사업자에 대한 최소운영수입보장제도(MRG)로 세금이 적자 보전에 투입돼 말이 많다. 한국교통연구원은 경전철 하루 이용객을 2011년 17만 6358명, 지난해 18만 7266명, 올해 19만 8848명으로 예상했다. 이를 기준으로 MRG 비율이 정해졌다. 수입이 예측치보다 적으면 20년 동안 차액을 부산시와 김해시가 4 대 6의 비율로 보전해주게 돼 있다. 그러나 2011년 9월 개통된 뒤 하루 평균 이용객은 3만 24명으로 예측치의 17%에 그쳤다. 부산시와 김해시는 2011년 손실금으로 147억원을 사업자에게 지급했다. 지난해엔 544억원을 줬다. 한 해 가용예산이 1000억원 정도인 김해시는 파산 위기에 몰렸다. 이에 따라 ‘소송전쟁’이 벌어질 전망이다. 부산-김해경전철 시민대책위원회는 교통연구원을 상대로 지난달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했다. 시민단체 관계자는 “그동안 관행적으로 자행돼 온 민자사업의 뻥튀기 수요예측과 무책임한 행정에 경종을 울리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4월 개통한 용인경전철도 경기도 감사가 마무리됨에 따라 용인시민들은 1조원대 주민소송에 들어간다. 도는 감사 결과 4건의 위법 부당사항을 적발, 용인시에 기관경고와 함께 관련된 직원 9명의 문책을 요구했다. 정부도 뒤늦게 경전철 도입 기준을 강화한다. 국토부는 경전철 도입 인구 기준을 50만명 이상에서 70만명 이상으로 올렸다. 의정부시 관계자는 “단기간에 성과를 내고 싶어하는 민선 단체장들이 경전철을 선호했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라져 광명시처럼 취소하는 경우도 늘고 있다”고 말했다. 김포 김학준 기자 kimhj@seoul.co.kr 부산 김정한 기자 jhkim@seoul.co.kr 의정부 한상봉 기자 hsb@seoul.co.kr
  • [정전협정 60년] 美 국가보다 먼저 연주된 애국가… 심금 울린 미군 ‘아리랑’ 독창

    [정전협정 60년] 美 국가보다 먼저 연주된 애국가… 심금 울린 미군 ‘아리랑’ 독창

    한국전쟁 정전협정 60주년 기념식이 시작된 27일 오전 10시쯤(현지시간) 미국 워싱턴의 한국전 참전 기념공원. 국민의례를 위해 일어난 참석자들 중 한국인들은 마음이 뭉클해졌다. 미국 국가에 앞서 한국 국가(애국가)가 먼저 연주됐기 때문이다. 군악대는 애국가에 이어 미국 국가를 장엄하게 연주했고, 백발이 성성한 참전용사들은 두 국가가 연주되는 내내 거수경례로 답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미 현직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참석한 이날 기념식은 시종일관 한국을 먼저 배려한 인상이었다. 국가 연주에 이어 군악대 병사 한 명이 한국인 못지않은 구슬픈 음색으로 아리랑을 독창해 심금을 울렸다. 오바마 대통령은 연설 모두에 한국말로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했다. 또 현직 대통령으로서는 첫 기념식 연설인 점을 의식한 듯 연설문 곳곳에 한반도 내 지명과 참전용사 사례를 촘촘히 집어넣는 등 신경을 많이 쓴 흔적이 묻어났다. 오바마 대통령은 앞서 기념식 직전 식장 옆에 자리한 참전 기념비에 헌화하러 이동할 때도 한국 측 박근혜 대통령 특사인 김정훈 새누리당 의원, 정승조 합참의장 등과 나란히 걷고 척 헤이글 국방장관 등 미국 측 각료들은 그 뒤를 따르게 했다. 기념식은 샐리 주얼 미 내무장관의 환영사에 이어 에릭 신세키 보훈장관과 한국 측 김정훈 특사, 정승조 합참의장, 미국 측 제임스 윈펠드 합참차장, 헤이글 국방장관의 기념사 순으로 진행됐다. 김정훈 특사는 “한국전은 결코 잊힌 전쟁이 아니다”고 강조했다. 식장 단상에는 오바마 대통령이 한국전을 승리한 전쟁으로 명예회복 선언한 것에 걸맞게 ‘기억되는 영웅들’(Heroes remembered)이란 슬로건이 크게 걸려 있었다. 잊힌 영웅들을 60년 만에 ‘승리한 영웅들’로 되살려 내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한국전쟁 당시 공산군에 잡혀 포로수용소에 수감됐다가 정전 이후 풀려난 참전용사 보니타 스프링스는 “뭐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감격스럽다”며 말을 잇지 못했다. 기념식에는 미국 측에서 행정부 요인들 외에 참전용사인 찰스 랭글(민주), 하워드 코블(공화) 하원의원 등이 참석했다. 한국 측에서는 안호영 주미대사와 박 대통령 특사단 일원인 백선엽 육군협회장, 이경재 방송통신위원장 등이 참석했다. 또 한국과 미국의 참전용사와 가족, 희생자 유가족, 일반시민 등을 포함해 기념식 사상 최다 인원인 7000여명이 자리를 메웠다. 한국전 명예회복 운동은 샌프란시스코에서도 벌어졌다. 한국전쟁기념사업회(회장 피트 맥클로스키)는 금문교 인근 프리시디오 국립공원에 한국전쟁 기념탑을 2015년까지 건립하기 위해 이날 이곳에서 한동만 주샌프란시스코 총영사 등이 참석한 가운데 부지 헌정식을 가졌다. 맥클로스키 회장은 “기념탑을 세워 후대에도 참전용사들의 희생정신을 기억할 수 있도록 해야한다”고 강조했다. 워싱턴 김상연 특파원 carlos@seoul.co.kr
  • [정전협정 60년] 중국, 北·中 혈맹 대신 평화에 방점

    중국은 정전협정 체결 60주년 행사를 맞아 북에 파견한 특사단을 통해 ‘혈맹’ 대신 ‘평화’를 강조했다. 정전협정 체결 60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북한을 방문 중인 리위안차오(李源潮) 중국 국가부주석은 지난 27일 “조선전쟁(한국전쟁) 정전 60주년을 기념하는 취지는 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더욱 잘 수호하고 지역의 번영과 발전을 추구하기 위함”이라고 강조했다고 신화통신이 28일 보도했다. 그는 이날 마오쩌둥(毛澤東) 전 주석의 장남 마오안잉(毛岸英)을 비롯해 한국전쟁에 참전한 중국군 전사자들의 유해가 안장된 평안남도 회창군의 ‘중국인민지원군 열사릉’을 찾아 참배하고 이같이 밝혔다고 통신은 전했다. 리 부주석의 메시지는 피로 맺어진 ‘혈맹’인 북·중 관계의 중요성보다 ‘평화’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중국의 대북 목표가 한반도 평화를 위한 비핵화임을 주지시키기 위한 의도로 풀이된다. 중국 언론들은 “한국과 미국, 북한이 조선(한국)전쟁 정전협정 체결 60주년을 맞아 모두 행사를 개최했다”고 일제히 보도했다. 중국은 정전 기념일에 10년 단위로 민간 차원에서 관련 활동과 행사를 벌였으나 올해는 조용한 분위기다. 2003년 50주년 당시 유력 포털들은 ‘항미원조(抗美援朝·미국에 맞서 북을 돕다)전쟁 정전 50주년’이란 이름을 내걸고 네티즌들로부터 관련 원고를 공모하는 등 다채로운 행사를 개최한 바 있다. 대신 자국이 한반도 평화를 위한 중재자 역할에 나서겠다며 나머지 국가들이 제 역할을 하지 않고 있다는 점을 우회적으로 비판했다. 신화통신은 논평에서 “한반도 불안의 근원은 북한과 미국의 대립에 있다는 점에서 열쇠는 이 두 나라에 있다”며 양국을 비난한 뒤 자신들은 구경꾼이 아닌 적극적인 대화를 위한 중재자 역할을 해 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베이징 주현진 특파원 jhj@seoul.co.kr
  • [동아시안컵] 답답했던 한·일전… 첫골 터졌지만 분통도 터졌다

    13년 만에 열린 잠실 ‘축구 전쟁’에서 한국이 졌다. 고대하던 골은 나왔지만 승리로 이어지진 못했다. 축구대표팀은 28일 잠실 올림픽주경기장에서 열린 2013 동아시안컵 최종전에서 일본에 1-2로 패했다. 전반 32분 윤일록(서울)이 동점골을 넣으며 반격을 꿈꿨지만 종료 직전 결승골을 내주고 무너졌다. 호주·중국전에서 거푸 득점 없이 비겼던 ‘홍명보호’는 ‘영원한 라이벌’을 상대로 골맛은 봤지만 마수걸이 승리는 못 따냈다. 최근 세 번의 맞대결에서 2무 1패로 뒤진 한국은 2011년 ‘삿포로 참사’(0-3패) 이후 1패를 또 추가했다. 상대 전적도 40승 22무 14패가 됐다. 한국은 최근 A매치 4경기 연속 무승(2무2패)으로 부진 탈출에 실패했고, 홍 감독도 사령탑 데뷔 후 3경기째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한국은 안방에서 열린 대회를 일본(승점 7·2승1무), 중국(승점 5·1승2무)에 이은 3위(승점 2·2무1패)로 초라하게 마쳤다. 그라운드 분위기는 비장했다. ‘붉은악마’는 킥오프 휘슬 전 이순신, 안중근이 그려진 대형 통천을 펼쳤고 경기 내내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문구가 적힌 플래카드를 걸고 승리를 염원했다. 일본도 ‘울트라닛폰’ 몇몇이 침략 전쟁과 범죄를 미화하는 의미의 대형 ‘욱일승천기’를 흔들며 승부욕에 기름을 부었다. 두 팀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싸웠다. 2000년 4월 평가전(1-0승·하석주 골) 이후 13년 만에 잠실에서 일본을 만난 홍 감독은 20일 호주전(0-0무)에 냈던 스타팅 그대로 ‘베스트 11’을 꾸렸다. 전반은 우리가 압도했다. 일본에 질 수 없다는 강한 정신력에 브라질월드컵을 노리는 영건들의 ‘생존 본능’까지 보태졌다. 전반 내내 내린 비로 그라운드가 미끄러웠지만 태극전사들은 짧은 패스로 활로를 개척했다. 저돌적이고 거친 몸싸움도 곁들였다. 실점은 한순간이었다. 단 한 번의 패스 미스가 역습으로 연결됐고 전반 24분 가키타니 요이치로(세레소 오사카)에게 골을 내줬다. 전열을 추스른 태극전사들은 8분 뒤 윤일록의 기습 중거리슛으로 균형을 맞췄다. 이어진 공방전. 후반 들어 체력이 떨어진 한국은 수차례 슈팅을 날리고도 고질적인 골 결정력 부재에 허덕였다. 홍 감독은 조영철(오미야), 고무열(포항), 김신욱(울산)을 차례로 투입하며 반전을 꾀했지만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결국 경기 종료 직전 가키타니에게 추가골을 헌납하며 쓰라린 패배를 떠안았다. 홍 감독은 “마무리는 못 했지만 공격을 만들어 가는 과정 자체는 잘됐다”고 평가하면서도 “전체적인 경기 운영 능력과 순간 판단 능력이 떨어지는 게 적나라하게 드러났다”고 아쉬워했다. 젊은 유망주들의 실력 검증을 마친 홍명보호는 약 한 달간 숨 고르기에 들어간다. A매치데이인 새달 14일 수원월드컵경기장에서 페루를 상대하고 9월 6일 이란과 ‘리턴매치’를 치른다. 월드컵 조 추첨이 열리는 12월 전까지 총 6번의 A매치데이에서 브라질, 포르투갈 등을 상대할 것으로 전망되는 가운데 홍 감독은 해외파까지로 점검 폭을 넓힐 전망이다. 조은지 기자 zone4@seoul.co.kr
  • 군이 지어낸 ‘돼지인간’ 전설에 주민들만 수십년 덜덜

    군이 지어낸 ‘돼지인간’ 전설에 주민들만 수십년 덜덜

    잉글랜드 중부에 위치한 마을 케녹 체이스에는 깊은 숲속에 ‘돼지인간’이 살고 있다는 전설이 수십년째 내려왔다.  1940년대에 이 마을의 용감한 몇몇 사람이 숲속에 들어갔을 때 반인-반돼지 형상의 괴물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당시 목격자들은 그 돼지인간이 누더기 옷을 걸치고 끔직하게 생긴 기형의 얼굴을 갖고 있었으며, 틀림없는 돼지 코 형상에 돼지소리를 냈다고 기억했다. 이같은 전설 이야기는 영국의 BBC에 소개되기도 했다.  이같은 이유로 지난 수십년간 마을 사람들은 햇빛도 없고, 동물들도 살지 않는 그 숲속에 들어가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수십년이 지나서 최근 이같은 악몽같은 ‘돼지인간’ 미스테리가 풀렸다고 미국의 허핑턴포스트가 현지 지역매체 버밍햄메일을 인용해 최근 보도했다.    버밍햄메일에 따르면 리 브릭클리라는 한 남성은 이 마을 ‘돼지인간’ 의실체를 밝혀내기 위해 10여년을 쏟아부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 기이한 현상의 실체를 밝혀 ‘UFO와 늑대인간, 그리고 돼지인간’이란 책을 통해 이를 공개했다는 것이다.    책은 그 돼지인간이 끔찍하고 역겨운 인간형체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단지 도시의 신화에 가깝다고 설명했다. 브릭클리가 이같은 확신을 가진 것은 한 병사의 손자라고 밝힌 사람이 그에게 보내온 이메일 때문이었다.    당시 이 숲속에는 중요하고 민감한 군 전쟁 시설물들이 설치돼 있었는데, 군 고위 장교들은 이를 보호하려고 민간인 출입을 막기 위해 ‘돼지인간’ 이야기를 지어내 퍼뜨렸다는 게 이메일의 주요 내용이었다. 이메일의 보낸 사람의 할아버지는 바로 지어낸 ‘돼지인간’ 이야기를 퍼뜨리는 임무를 맡았다고 버밍햄메일은 전했다.       사진=허핑턴포스트 캡쳐 나우뉴스부 nownews@seoul.co.kr
  • 中정부 “막장 범죄 엄벌” 네티즌 “정부가 더 막장”

    중국에서 연일 ‘묻지마’식 테러 범죄가 이어지면서 당국이 ‘테러와의 전쟁’에 나섰다. 그러나 네티즌들 사이에는 법치와 공평 부재가 사태를 키우는 근본 원인이라며 정부의 무능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중국 공안부는 최근 잇따라 발생하고 있는 폭력 테러를 비롯해 개인의 극단적인 폭력 범죄, 총기·화약류 형사 사건을 극악 범죄로 규정하고 강력하게 대처하기로 했다고 당 기관지 인민일보의 포털 인민망이 26일 보도했다. 공안부 황밍(黃明) 부부장(차관급)은 25일 전국 공안기관 회의에서 폭파·협박 행위는 물론 허위 테러 소식 유포자도 엄벌해야 한다며 이같이 지시했다고 통신은 전했다. 이 같은 사정당국의 강력한 지시가 나온 것은 개인의 테러 사건이 잇달아 발생하고 있기 때문이지만 사건의 가해자들이 나름대로 억울한 사연을 가진 것으로 알려지면서 정부에 대한 비판 분위기가 확산되는 것과 무관치 않다. 실제로 지난 20일 베이징 서우두(首都)공항에서 사제 폭발물을 터뜨려 왼쪽 팔이 절단된 장애인 지쭝싱(冀中星)은 오토바이 택시기사로 일하다가 2005년 치안관리원들에게 쇠파이프로 가격을 당해 반신불수 장애인이 됐다. 이번 폭발물 사건을 계기로 보상을 받기 위해 투쟁해 오던 그의 사연이 전해지면서 관련 당국을 향한 네티즌과 언론의 비판 여론이 끊이지 않고 있다. 지난 24일 베이징 광밍러우(光明樓)에서 발생한 빵집 폭파 사건도 단순 사고로 발표된 것을 두고 네티즌 사이에는 억울한 사연이 숨어 있을 것이란 반응이 나오고 있다. 최근 1주일간 하루가 멀다 하고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한 칼부림 사건들이 이어진 데 대해 당국이 범인들의 정신병력을 사건 발생 원인으로 내세우고 있지만 이를 그대로 믿는 사람은 별로 없다. 베이징이공대 법학과 쉬신(徐昕) 교수는 “중국에서는 힘없는 사람이 억울한 사건을 당해도 법원의 중재 등을 통해 보상받는 일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개인들이 극단적인 방법을 통해 문제를 풀려고 한다”면서 “당국이 제대로 역할을 하고 법치가 실현되는 사회 안정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베이징 주현진 특파원 jhj@seoul.co.kr
  • ‘신 친일파’ 오선화 “한글 때문에 노벨상 못타”…한글 비하 망언 쏟아내

    ‘신 친일파’ 오선화 “한글 때문에 노벨상 못타”…한글 비하 망언 쏟아내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문자’를 지켜야 한다는 한글 우월주의자들 때문에 한자 부활이 막혀 있다. 이제 교사들에게 한자를 가르칠 인재마저 없게 돼 버렸다. 그래서 한국에 노벨상(수상자)이 없다” “한글은 표의문자인 한자와 달리 글자만으로 의미를 알기 어렵다. 그래서 알기 쉽게 바꿔 말해야 하는데 그러면 유치한 표현이 된다” 한국인으로 태어나 일본에 귀화한 친일·반한 여성평론가 오선화(일본명 고젠카·57)가 한글우대정책으로 한국이 노벨상을 타지 못한다며 한글을 비하하는 내용의 글을 기고해 파장이 일고 있다. 일본 극우 성향 국제시사잡지 ‘사피오’가 25일 발행한 최신호에서 오선화는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문자를 지킨다 / 한글우월주의에 한자를 잊은 한국인 / ‘대한민국(大韓民國)’조차 쓰지 못한다’는 제목의 글을 실었다. 오선화는 한국의 학력 위주 사회를 비판하면서 글을 시작했다. 오선화는 “한국에서는 대입시험 당일 비행기 이착륙이 금지되고 도로의 통행이 금지될 정도로 수험 전쟁이 심하다”면서 “유년기부터 학원에 돈을 쏟아 붓는데 초등교육 수준은 국제적으로 높지만 나이가 들수록 수준이 떨어진다”고 했다. 오선화는 “한국 서점에서는 참고서를 찾는 학생들만 있을 뿐 사회인은 거의 없다. 한국인은 세계에서 독서량이 가장 적은 국민이다. 한국인 40% 이상이 연간 1권의 책도 읽지 않는다고 한다”고 썼다. 한국인들이 책을 멀리하는 이유로 오선화는 한자 폐지를 들었다. 오선화는 “내가 (한국에서) 중학생이었던 1970년 봄 한국은 학교에서 한자를 가르치는 걸 중단했다”면서 “한국어 어휘의 7할은 한자어인데 그걸 표음문자인 한글로만 쓰니 동음이의어로 인해 헤매는 일이 늘고 있다”고 적었다. 오선화는 이 같은 한글 우대 정책이 세대간 문화 단절을 불러 왔으며 한국인들이 노벨상을 수상하지 못하는 이유라는 황당한 분석을 내놨다. 오선화는 “(한글만 배운 젊은 세대는) 고전과 사료를 읽을 수 없게 되고 대학의 연구자들조차 60년대 자신의 지도교수가 쓴 논문을 읽을 수조차 없게 됐다”면서 “한국인들은 자신들의 대통령인 ‘박근혜’조차 한자로 못 쓴다. 과거 조사에서는 대학생의 25%가 ‘대한민국’을 한자로 못 쓰는 것으로 나왔다”고 주장했다. 오선화는 끝으로 “(한국인들이) 노벨상 수상을 놓칠 때마다 일본이 돈으로 상을 샀다고 욕을 퍼붓는데 그럴 시간에 한자에 대한 의미를 진지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라고 글을 마무리했다. MBC PD수첩이 2006년 광복절 특집으로 방송한 ‘신친일파의 정체를 밝힌다’편에 따르면 오선화는 1956년 제주에서 태어나 83년 일본으로 건너간 뒤 술집 호스티스로 일하다 학력 등을 속이고 일본 극우세력을 따라다니며 한국을 비난하는 선동질을 일삼았다고 밝혔다. 방송에 따르면 오선화는 ‘치맛바람’, ‘한국 병합의 길’ 등의 책을 통해 한국과 한국인을 비하하고 위안부의 존재를 부인하는 망언을 쏟아냈다. 오선화의 이름으로 발행된 이 책들은 사실 일본 극우세력이 오선화를 내세워 대필한 것이 유력하다는 분석이 나온다. 일본 극우세력은 오선화의 엉터리 주장을 근거로 혐한론을 확대재생산하고 있다. 오선화는 한국에서 자신에 대한 비난이 거세지자 일본으로 귀화해 현재 타쿠쇼쿠대 국제개발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오선화는 지난달 26일 도쿄 총리 관저에서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와 저녁 식사를 함께 했다. 아베 총리는 식민 지배와 침략을 사죄한 ‘무라야마 담화’, 위안부 강제 동원을 인정한 ‘고노 담화’를 대체하는 ‘아베 담화’를 2015년에 내겠다고 했다. 오씨는 이를 위한 ‘아베 전문가 그룹’에 포함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노주석 선임기자의 서울택리지] ⑥ 세종로 사거리

    [노주석 선임기자의 서울택리지] ⑥ 세종로 사거리

    황토마루서 바라본 사대문 풍광에 정도전이 칭송詩 읊었다는데… 세종로 사거리는 본디 사거리가 아니라 삼거리였다. 무슨 소리냐며 고개를 갸웃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조선 지도를 펼쳐 보면 오늘의 광화문광장인 육조거리와 남대문을 잇는 남북 간 도로는 없었다. 지금의 태평로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세종로 사거리에서 솟아올랐다가 정동과 청계천광장을 거쳐 무교동 쪽으로 흘러내린 나지막한 고개에 의해 가로막혀 있었다. 이 고개가 황토마루(황토현)였다. 아쉽게도 지명으로만 남아 있을 뿐 사진이나 그림은 전해지지 않는다. 생김새와 위치를 짐작할 뿐이다. 고개 덕분에 사대문 안의 등뼈에 해당하는 남북 간 상징 축선은 육조거리에서 정(丁)자 모양을 그리면서 운종가로 꺾여 종루(보신각)까지 이어지고 나서 청계천 광통교를 건너 남대문까지 뻗었다. 황토마루에서 바라보는 사대문 안의 풍광이 가장 아름다웠다. 삼각산을 병풍처럼 두른 북악과 경복궁, 그리고 육조 관청 담벼락(長廊)이 장관을 이뤘다. 한양천도 직후 정도전은 ‘여러 관아 높은 건물 마주 보며 서 있는 것이/하늘의 별들이 북두칠성을 둘러쌌네/달 밝은 새벽 관청거리 물같이 고요한데/말 구슬 소리 들려오고 티끌 한 점 일지 않누나’라고 육조거리를 칭송하는 시를 지었다. 아마 야밤에 황토마루에 올라 북악 쪽을 바라보면서 읊었을 것이다. 인왕산 지맥인 황토마루는 풍수지리학상 관악산 불길이 경복궁에 미치는 것을 막는 장치였다. 그래서 길을 내지 않았다. 오히려 청계천을 파낸 흙을 보태 언덕을 덧쌓았다. 조선지도에 동령동(東嶺洞)이라는 지명이 나타나는데 세종로와 신문로1가에 걸친 황토마루 동쪽 마을이었다. 무기를 만드는 군기시(軍器寺)가 남쪽에 있었다. 지금의 서울신문(한국프레스센터)과 서울시청쯤이다. 일제는 1912년 ‘황토현 언덕을 없애서 폭 100m, 길이 220m의 광장을 만든다’는 총독부 훈령을 내려 고개를 뭉개 버렸다. 황토현을 없애고 나서 광장은 만들지 않았다. 대신 태평로를 내서 경복궁과 남대문을 연결하는 일본의 상징 축선을 만들었다. 황토현을 없애 버림으로써 육조거리를 파괴하고, 조선의 남북 상징 축선을 말살시키려는 의도였다. 광복후 신생 대한민국, 지명 즉흥 결정 육조거리·운종가 전통 이름 사라져 광복 후 1년여 지난 1946년 10월 초대 서울시장 김형민은 일본식 동명이나 가로명을 바꾸는 작업을 했다. 당시 군정청 문교부장(교육부장관) 유억겸의 제안에 따라 일제강점기 가로명의 뒷말인 통(通)을 로(路), 정목(丁目)을 가(街), 정(町)을 동(洞)으로 바꾸기로 합의했다. 특히 큰 가로명에는 역사상 위인의 시호를 붙이기로 했다. 개정 작업에 참여한 국어학자 황의돈은 회고록에서 “세종로는 우리나라 문치의 위인으로서 민족의 태양과 같은 세종대왕의 이름을, 충무로는 무인으로서 위훈을 추모하는 충무공을, 을지로는 육군의 대표 인물인 을지문덕을, 원효로는 불교의 대표 인물인 원효 대사를, 퇴계로는 유학계의 대표 인물인 이퇴계를, 그리고 충정로는 순국열사 중에서도 맨 처음인 민충정공으로 택정하였다”라고 썼다. 이에 따라 광화문통은 세종로, 황금정통은 을지로, 본정통은 충무로, 소화통은 퇴계로 등으로 변경됐다. 개정 작업은 논란 없이 간단하게 끝났다. 36년이란 식민 통치 기간이 너무 길어선지, 광복의 기쁨에 들떠선지, 일제잔재 지우기에 열중해선지 세종로 사거리가 황토마루였다는 점을 일깨웠다는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다만 광화문통을 육조가로 되돌리자는 의견이 개진됐으나 무시됐다. 일제가 새로 만든 대표적인 길인 태평통도 태평로로 버젓이 살아남았다. 종로도 옛 지명인 운종가를 되찾지 못했다. 지명과 가로명 개정 작업은 이후에도 여러 차례 열렸지만, 지엽말단적인 문제에 매달렸다. 지명이란 자연과 지리, 풍속, 제도의 산물임에도 식민통치를 갓 벗어난 신생 대한민국은 숙고 없이 지명을 즉흥적으로 결정했다. 오늘날 사대문 안을 오가는 숱한 청소년들이 육조거리와 황토현, 운종가 같은 우리 지명을 알지 못하는 까닭이다. 좋은 역사나 전통이라도 계승하지 않으면 잊히게 마련이다. 교보빌딩옆 ‘고종즉위40년 비전(碑殿)’ 도난당하고 헐리고 부실 복원까지 세종로와 종로가 만나는 지점에 고종즉위40년칭경기념비전이 서 있다. 육중한 덩치의 교보빌딩 때문에 일견 왜소해 보일 수도 있지만 날아갈 듯한 추녀가 북악에 겹쳐 보이는 모습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기단을 높이 쌓고 돌난간을 두른 장중한 기품이 주변 고층건물 숲을 압도한다. 1902년 세워진 이 건물은 건축사적으로 대한제국기 전통 양식의 마지막 걸작으로 평가된다. 현대식 건물밖에 없는 삭막한 세종로 사거리에 역사의 향기를 풍기는 존재다. 한때 세종로 사거리를 ‘비각 앞’이라고 불렀다. 이 건물의 가치를 깎아내린 일제의 몹쓸 잔재다. 아직도 관광 안내 책자나 교통 관련 안내문에 비각이라고 잘못 기록한 사례가 많다. 비각(碑閣)이 아니라 ‘비전’(碑殿)이다. 바로잡아야 한다. 궁궐 전(殿)자는 경복궁 근정전처럼 임금이 사용하는 건물에만 붙는 글자다. 전통 건물은 격에 따라 전(殿)-당(堂)-합(閤)-각(閣)-제(齊)-헌(軒)-누(樓)-정(亭) 순으로 이름이 붙는데 비각은 비전의 부속 건물에 불과하므로 이를 바꿔 부르는 것은 무지의 소치다. 당시 황태자이던 순종이 쓴 비문에는 ‘나라 이름을 대한제국이라고 고치고, 황제의 칭호를 썼으며 광무(光武)라는 연호를 세운 일’ 등이 기술돼 있다. 단순히 고종 즉위 40년을 기리는 건물이 아니다. 대한제국 건국 사실과 황제라고 칭하고 연호를 사용했다는 이른바 ‘칭제건원’(稱帝建元)을 대외적으로 알리는 기념비적인 건물이다. 헐릴 뻔한 위기를 넘겼다. 1966년 광화문 지하보도 공사 당시 비전이 공사에 거추장스럽다는 보고를 받은 ‘불도저’ 김현옥 시장은 “60년밖에 안 된 것이니 헐어 버리라”라고 막말을 했다고 한다. 주위의 만류로 간신히 살아났지만 10년 후 종로길 확장 공사와 교보빌딩 신축공사 때도 애물단지 취급을 받았다. 1979년 해체복원 과정을 거쳐 현재 모습으로 자리 잡았지만 부실 복원을 면치 못했다. 지붕 꼭대기 절병통(節甁?) 모양이 달라졌다. 어찌 된 셈인지 회칠을 한 추녀 마루가 기와로 바뀌면서 잡귀를 물리치는 어처구니(雜像)도 간데없다. 또 비를 보호하는 꽃담과 철제 틀도 사라져 옹색해졌다. 출입구였던 만세문(萬歲門)은 일제강점기 일본인이 뜯어다가 자신의 집 대문으로 사용했는데 한국전쟁 통에 일부 파손됐다. 비전이 홀대받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바리케이드 밖에선 비문이 보이지도 않는다. 광화문광장을 오가는 숱한 내외국인들이 대한제국의 당당한 위엄을 엿볼 수 있도록 원형대로 복원돼야 한다. 국제극장·감리회관 부지에 광화문 빌딩 주인 둘, 담당 구청도 둘이 된 사연 세종로 사거리는 광장이 들어설 자리였다. 건물이 들어설 수 없었다. 1952년 3월 25일자 내무부 고시에 의해 확정된 7만 700㎡의 대광장 계획범위 안이기 때문이다. 전후 복구계획에 따라 세종로 사거리 중심에서 반지름 150m 원 넓이의 광장 부지가 잡혀 있었다. 이 반지름 안에는 지금의 교보, 현대해상화재, 동아일보, 광화문우체국, 광화문빌딩 등이 포함된다. 이 계획은 엄청난 로비에 의해 꼬리를 내렸다. 1962년 12월 8일자 건설부 고시에 의해 3만 3228㎡(반지름 102m)로 확 줄었다. 광장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라는 개발지상주의 때문이었다. 도로와 광장계획에 걸려서 정식 건축허가가 나지 않는 땅이지만 가(假)건물을 허용했다. 청계천 쪽 동아일보사와 정동 쪽 국제극장, 감리회관이 대표적 가건물이었다. 동화면세점이 입주한 광화문빌딩의 탄생 비화도 흥미롭다. 1986년 신문로 도심재개발사업에 따라 1950년대 말~60년대 초 장안 최고의 개봉관이었던 국제극장과 감리회관을 헐고 새 건물을 짓게 됐다. 시행 주체는 동아흥행과 감리회유지재단이었다. 건축허가 과정에서 2개의 건물을 따로 짓는 것보다 하나로 묶는 것이 낫다는 아이디어가 서울시와 건축위원회 등에서 제시됐다. 시행 주체를 설득하고 나니 담당 구청이 걸림돌이었다. 두 건물이 속하는 종로구청과 중구청이 막대한 세원 확보를 놓고 한 치도 양보를 하지 않았다. 국제극장은 종로구 세종로동 211번지였고, 감리회관은 중구 태평로 1가 68번지였다. 설득과 타협, 숙고를 거듭한 끝에 수평분할 방식에 합의했다. 지하 5층에서 지상 12층까지는 동아흥행 소유로 종로구에, 지상 13층부터 20층까지는 감리회유지재단 소유로 중구에 속하게 하는 묘안을 짜낸 것이다. 이 건물은 1993년 완공됐다. 서울시 도시계획국장을 지낸 손정목 전 서울시립대 명예교수에 따르면 “광화문빌딩은 몸체는 하나, 주인은 둘, 담당 관청도 둘인 특기할 만한 건물”이라고 말했다. joo@seoul.co.kr
  • 전쟁 멈춰도 끝나지 않는 납북자 가족의 60년 가슴앓이

    전쟁 멈춰도 끝나지 않는 납북자 가족의 60년 가슴앓이

    한반도를 눈물과 피로 물들인 한국전쟁이 휴전으로 일단락된 지 60년이 지났다. 고운 새색시의 손에 검버섯이 피고, 철모르던 아이가 노인이 되는 긴 세월이 지난 후에도 차마 묻을 수 없는 이야기가 있다. 전쟁 당시 북한에서 납치해간 ‘전시 납북자’들의 이야기다. 돌아오지 않는 피붙이를 평생 가슴앓이하며 기다린 전시 납북자들의 가족.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현대사의 비극인 한국전쟁이 남긴 우리 사회의 아픔을 보듬는 시간이 마련된다. KBS 1TV가 27일 오후 7시 10분 정전 60주년 특별기획으로 방영하는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이다. 전쟁 통에 제대로 된 인사 한마디 할 새 없이 북으로 끌려간 납북자들은 지금까지 생사확인조차 되지 않아 남은 가족들의 마음에 깊은 상처가 됐다. 전시 납북자 가족들은 모르쇠로 일관해온 북한과, 전시 납북자에 대한 정부와 국민의 무관심과 냉대, 무엇보다 사무치는 그리움을 이겨내야 했다. 반세기가 지난 뒤에야 가족들의 노력으로 납북자 명부가 발견되고, 이들을 위한 특별법이 제정되면서 전시 납북자가 규명되고 인정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공식 인정된 납북자는 2265명. 10만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는 전시 납북자 수에 비하면 아직도 갈 길이 멀다. 그리고 가족들의 남은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대한민국 최초의 전기 기술자인 황갑성씨의 장남 황용군씨는 아버지의 유골이라도 품에 안아보고 싶다. 그가 13세 되던 해 전쟁이 터졌다. 외할머니 댁으로 피신해서 담배 장사를 하며 소일하던 어느 날, 불쑥 찾아온 아버지는 그에게 “곧 데리러 오마”라는 한 마디를 남기고 사라졌다. 북으로 끌려간 것이었다. 황씨는 아버지 대신 동생들을 부양하기 위해 학업도 중도에 포기하고 살아야 했다. 그는 아버지의 생사라도 확인하기 위해 빈 유골함을 목에 걸고 미국의 유엔 주재 북한대표부까지 찾아갔다. 수년간의 노력 끝에 전시 납북자 인정을 받았지만 여전히 아버지의 생사는 알 길이 없다. 강화금융조합이란 어엿한 직장에 다니던 일등 신랑감 김재봉씨는 전쟁이 터지자 북으로 끌려갔다. 결혼한 지 1년 만에 남편을 잃은 아내 김항태씨는 뱃속에 딸이 있는지도 모른 채 60년이 넘도록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고 있다. 이제 환갑을 넘긴 딸과 함께 남편의 고향이자 신혼살림을 차렸던 강화 교동도를 다시 찾은 김항태씨의 눈에 또다시 눈물과 고통이 번진다. 정서린 기자 rin@seoul.co.kr
  • [종교 플러스]

    26일 만해학회 학술세미나 만해학회는 26일 오전 10시 서울 강남구 신사동 ‘불교평론’ 사무실에서 ‘만해사상의 현대적 지평’이란 주제로 제13회 만해학회 학술세미나를 개최한다. 세미나에서는 김광식 동국대 교수(만해사상과 현대 사조), 이승훈 한양대 명예교수(하이데거와 만해), 이도흠 한양대 교수(탈식민주의로서 만해 한용운 사상 읽기)와 김종주 라캉 분석치료연구소장(라캉의 정신분석으로 본 만해), 전형철 서울여대 초빙교수(들뢰즈와 만해의 ‘님의 침묵’), 백원기 동방대학원대 교수(서구 초현실주의 시와 만해의 시), 김종인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간디와 만해)가 발표한다. (02)739-5781. 25일 영통교회서 ‘힐링연주회’ 하나님의교회는 25일 오후 8시 수원 영통교회에서 ‘어머니의 마음을 담은 힐링 연주회’를 연다. 지난 17일 서울 노원구를 시작으로 강동구, 경기 평택·시흥시에서 상처받고 소외된 이웃을 위해 잇따라 열어온 무료 순회 연주. 연주회는 실내악 앙상블과 브라스 앙상블, 남녀 혼성중창단 협연으로 진행되며 애니메이션·영화 주제음악과 새 노래 성가곡 등을 들려준다. 한편 하나님의 교회는 다음 달 11일 서울 영등포구와 춘천을 시작으로 수도권을 순회하는 무료 ‘힐링 연주회’를 이어갈 예정이다. (031)738-5805. 천주교주교회의 DMZ 순례 천주교주교회의는 26일∼8월 1일 ‘2013 DMZ 평화의 길’ 순례를 실시한다. 이번 순례는 한국전쟁 정전 6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로 경기도 파주시 임진각에서 연천군, 강원도 철원·화천·양구·인제군을 거쳐 고성군 통일전망대까지 DMZ 전 구간을 횡단한다. 참가자들은 초등학생과 청년, 60대까지 다양한 세대로 구성됐으며 이주민 6명, 새터민 12명도 포함됐다. 참가자들은 26일 고양시에 모여 친교의 시간을 갖고 27일 오전 파주 참회와 속죄의 성당에서 평화기원 미사를 한 뒤 임진각 평화의 종 앞에서 출정식을 갖고 행진을 시작한다. (02)460-7681.
  • [정전협정 60년] “남북 신뢰회복 속 평화체제 장기전략 필요”

    북한이 정전협정 체결 60주년인 올해 평화협정 체결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북한은 올 초부터 정전협정 백지화를 공언했고, 노동신문도 최근까지 한반도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바꾸자고 시종일관 주장하고 있다. 한반도 전문가들도 한반도 정세의 핵심 구조에 불안정한 정전체제가 작동하고 있는 만큼 평화협정 논의가 활발해질 필요성이 있다는 의견을 내놓고 있다. 평화협정 담론 자체는 새롭지 않다. 박정희 정부 때 남북 불가침협정 체결이 제안됐고, 북한은 반복적으로 북·미 평화협정 체결을 강조해 왔다. 1996년에는 김영삼 대통령과 빌 클린턴 미 대통령이 정상회담에서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4자회담(남·북·미·중)을 제안해 1997년부터 1999년까지 예비회담과 본회담이 반복됐지만 성과 없이 결렬됐다. 2005년 6자회담국이 합의한 9·19 공동성명에도 한반도 평화체제 논의가 포함됐지만 북한의 핵개발 가속화로 휴지조각이 돼 버렸다. 2006년 노무현 대통령은 조지 부시 대통령과의 한·미 정상회담에서 종전선언을 의제화했고, 2007년 남북 정상회담 합의문에 종전선언 논의가 포함되기도 했다. 닭(북한 비핵화)이 먼저냐, 달걀(평화협정)이 먼저냐는 식의 논의 구조도 되풀이되고 있다. 북한은 정전체제의 평화협정 전환을 비핵화의 선결 조건이라는 논리를 펴고 있고, 한·미는 북한의 선(先)비핵화 조치가 평화 논의의 전제 조건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평화협정 담론이 겉도는 이유이기도 하다. 대체로 남북관계 진전이 향후 평화 논의의 속도와 방향을 결정할 것이란 게 중론이다. 서보혁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교수는 정전체제의 안정적 변화→종전선언 등 과도적 조치→교차 불가침 조약 체결→평화협정 체결이라는 4단계 로드맵을 제시했다. 서 교수는 “남북 모두 상호 불신이 깊고 복잡한 이해관계를 드러내는 등 평화 논의를 위한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다”며 “당사자인 남북 간 신뢰 형성이 일차적 과제이지만 적대적인 분단 체제를 유지하면서 신뢰를 회복하는 것은 불가능한 만큼 장기적으로는 평화체제 전략을 수립하고 추진해야 한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평화체제로 가는 중간 단계로, 전쟁의 완전 중단인 한반도 종전선언을 통해 정전 관리체제를 종전 관리체제로 전환하는 방식을 검토할 필요성도 제기하고 있다. 안동환 기자 ipsofacto@seoul.co.kr
  • [정전협정 60년] 정전협정의 평화체제 전환 과제 (하)평화협정 쟁점

    [정전협정 60년] 정전협정의 평화체제 전환 과제 (하)평화협정 쟁점

    전쟁을 일시 중단한 정전협정 체결 이후 60년이 지났지만 한반도 정세는 여전히 불안한 상태다. 언제 깨질지 모르는 ‘불안한 평화’가 계속되고 있지만 종전을 선언하고 평화체제를 수립하는 길에는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우선 평화체제 구축의 법적 문제라 할 수 있는 평화협정 체결 당사자 문제, 주한미군 철수 또는 위상 변경 문제, 서해 북방한계선(NLL) 문제 등 복잡하고 휘발성 강한 문제들이 맞물려 있다. 남북만 평화협정을 체결한다고 지켜질 수 있는 게 아니어서 미국과 중국 등 주변 강대국들의 이해득실을 조정, 평화체제 전환에 대한 동의도 이끌어 내야 한다. 평화체제 구축이 탄력을 받기 위해서는 북한 핵 문제에 대한 해법과 구체적인 실행계획이 나와야 하기 때문에 남북한과 국제사회는 우선 이 문제부터 해결할 필요가 있다. 평화협정의 이전 단계라고 할 수 있는 종전선언까지 가는 길만 해도 넘어야 할 장애물과 다뤄야 할 쟁점이 곳곳에 산적한 ‘지뢰밭’이다. 평화협정 체결의 첫 번째 걸림돌은 당사국 문제에 대한 남북의 인식 차다. 우리 측은 기본적으로 남북이 함께 평화협정을 체결해야 한다는 ‘남북한 당사자 원칙’을 토대로 미국과 중국이 보증하는 ‘2+2’ 방식 등을 고민해 왔다. 2005년 6자회담에서 채택된 9·19공동성명에도 남북·미·중 네 나라가 별도의 포럼에서 한반도의 영구적인 평화체제를 수립하는 문제를 협의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반면 북한은 여전히 정전협정의 당사국을 북한과 미국, 중국으로 한정하며 한국을 배제하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남한 대신 유엔이 나서 정전협정을 체결했기 때문에 남한은 법적으로 당사국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지난 60여년간 이 문제를 놓고 남북한은 지루한 공방을 이어 왔다. 종전 선언을 위해 4자가 모이는 것은 이보다는 상대적으로 수월하다. 향후 법적 구속력을 갖는 평화협정을 체결하기 전에 한국전이 종료됐음을 확인하는 ‘정치적 선언’이란 점에서다. 다만 여기에도 남북 간 신뢰구축 조치가 취해지고 군비 통제와 감축이 이뤄지는 등 환경이 조성돼야 한다는 문제가 따른다. 하지만 이와 관련해 실질적인 남북 군사회담이 열린 적은 아직 없다. 이전 정부에서 남북 장성급 회담 등이 열렸을 때도 NLL 문제에 막혀 신뢰 구축이나 군비 통제는 제대로 논의되지 못했다. 가뜩이나 민감했던 NLL 문제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NLL포기 발언’ 논란을 계기로 일파만파 커지면서 누구도 건드리지 못할 남북한의 ‘화약고’가 됐다. NLL 문제가 자주 불거지는 이유는 현실적 실효성에도 불구하고 정전협정 자체에 해상 경계선에 관한 명문의 규정이 없기 때문이다. 평화체제를 수립하는 과정에서 북한이 NLL 재획정 문제를 거론할 것은 분명하다. 남한 내부에서는 국가보안법 개폐 문제가 또다시 등장하면서 새로운 남남갈등이 발생할 수 있다. 이러한 갈등을 잘 풀어내지 못한다면 오히려 내부 정세가 더 불안해질 수도 있다. 종전선언과 평화협정 체결 과정에서 북한이 주한미군 철수 또는 적어도 평화유지군으로의 위상 변경을 요구할 가능성도 매우 높다. 주한미군의 주둔 근거는 1953년 8월에 체결된 한·미 상호방위조약이다. 이 조약은 ‘당사국 중 일국의 정치적 독립 또는 안전이 외부의 무력공격에 의하여 위협받고 있는 경우’를 전제로 미군의 대한민국 영토 주둔을 허락하고 있다. 평화협정이 체결될 경우 북한의 요구가 없더라도 주한미군의 위상과 역할 변경이 불가피해진다. 따라서 주한미군 문제는 평화체제 전환 과정의 주요 변수가 될 전망이다. 주한미군 대신 평화협정이 잘 지켜지고 있는지 감시할 유엔 평화감시단을 불러들일지 여부도 관심 대상이다. 이와 함께 유엔사 해체와 한·미동맹 전면 재조정, 미귀환 포로의 송환 문제가 뜨거운 논란 거리로 등장할 가능성이 높다. 이현정 기자 hjlee@seoul.co.kr
  • 세월을 품은 책, 미래를 품은 골목

    세월을 품은 책, 미래를 품은 골목

    두세 명이 나란히 걷기에도 빠듯한 좁은 골목길 양옆으로 빈틈없이 책을 쌓아올린 책방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세월을 품은 책의 향기가 코 끝을 자극하고 ‘헌책 사고팝니다’라는 간판이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거리, 부산 보수동 책방골목이다. 국제시장 입구 대청로 네거리에서 보수동 네거리까지 150m가량의 뒷골목에 50여곳의 책방들이 어깨를 맞대고 있는 이곳은 서울의 청계천과 인사동 헌책방 거리가 사라진 지금, 유일하게 남아 있는 헌책방 거리다. 6·25전쟁 때 이북에서 피란 온 손정린씨 부부가 골목 안 목조건물 처마밑에서 박스를 깔고 미군 부대에서 나온 잡지와 고물상에게서 수집한 헌책들로 노점을 시작하면서 형성된 보수동 책방골목의 60년 역사는 격동의 한국사와 더불어 한국 서점의 흥망성쇠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1970~80년대 70여곳에 달했던 책방은 1990년대 서점 쇠퇴기엔 40여곳까지 줄었다가 2000년대 중반 관광지로 입소문을 타면서 다소 늘어난 상태다. 보수동 책방골목의 터줏대감들은 1950∼70년대 부산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사람치고 이 거리를 기웃거리지 않은 사람은 없다고 입을 모은다. 57년째 학우서림을 운영하고 있는 김여만(80) 대표는 “책이 귀하던 때 보수동 책방골목을 누비며 지적 갈증을 채운 지식인들은 셀 수 없이 많다”면서 “까다롭게 책을 고르던 외솔 최현배 선생이 지금도 기억에 남는다. 찾는 책이 없을 땐 내 속이 타들어갈 정도로 안타까웠다”고 회상했다. 1960년대 초반 부산 상고를 다닌 김언호 한길사 대표도 보수동 책방골목에 빚진 이들 중 한 명이다. 김 대표는 “책이라곤 없던 가난한 농촌에서 중학교를 마친 뒤 부산에 와서 보수동 책방골목을 처음 만났을 때의 감동을 잊을 수 없다. 덜컹거리는 전차를 타고 와서 산처럼 쌓인 책들 속으로 빠져들어 갔던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눈물이 쏟아질 듯하다”고 추억했다. 책 만드는 사람으로 37년을 살아온 김 대표는 틈날 때마다 각국의 책방과 책방마을을 순례했다. 미국 뉴욕 맨해튼의 스트랜드, 영국 웨일스의 헤이온와이, 네덜란드의 브레드부트, 일본 도쿄의 진보초 등을 둘러볼수록 마음은 보수동 책방골목을 향했다. 지난 22일 김 대표는 보수동 책방골목을 다시 찾았다. 김민웅 책읽는사회만들기국민연대 대표, 안찬수 책읽는사회문화재단 사무처장, 여희숙 도서관친구들 대표, 정지영 영화감독 등 지인들이 동행했다. 김 대표가 이달 초부터 오는 9월 20일까지 인문학전문서점 우리글방에서 전시하는 책 사진전 ‘오래된 빛을 찾아서’를 계기로 보수동 책방골목의 문화사적 의미와 발전 방향을 논의하기 위한 자리가 마련됐다. 김 대표와 친분이 깊던 문옥희 우리글방 대표가 적극적으로 일을 추진해 주경업 부산민학회 회장, 남송우 부산문화재단 이사장, 김여만 대표 등 지역 문화예술인들까지 50여명이 참석했다. 헌책의 가치와 미래에 대한 다양한 논의들로 열기는 뜨거웠다. 김민웅 대표는 “헌책은 그 시대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시대의 목소리이자 역사의 얼굴”이라면서 “보수동 책방골목은 ‘책의 피맛골’이다. 광화문 피맛골은 사라졌지만 이곳은 새로운 매력을 창출해 책을 지키는 것뿐 아니라 정겨운 생활공동체로서의 멋진 풍경을 지켜가길 바란다”고 희망했다. 현실적인 어려움을 토로하는 헌책방 주인들의 목소리도 나왔다. 권영규 보수동책방골목번영회 회장은 “문화적 의미도 크지만 서점으로선 생계수단이기도 하다. 문화사적 의의와 매출을 연결시키는 방안이 아쉽다”고 고민을 털어놨다. 동영상 카메라에 책방골목 풍경을 꼼꼼히 기록하던 정 감독은 “이 골목이 틀림없이 사라질 것이란 생각에 카메라를 가져왔는데 오늘 와서 보니 그럴 것 같지 않더라”는 말로 보수동 책방골목에 대한 기대를 나타냈다. 김언호 대표는 “헌책의 풍경은 슬프지만 헌책의 주름살에는 지혜가 깃들어 있다. 그런 점에서 보수동 책방골목은 대한민국 문화의 긍지”라면서 즉석에서 보수동 책방골목 후원회 결성을 제안했다. ‘오래된 책의 미래’가 보수동 책방골목에서 싹을 틔우기 시작했다. 글 사진 부산 이순녀 기자 coral@seoul.co.kr
  • 유럽 배낭여행-유럽에서 보낸 보름의 낮과 밤

    유럽 배낭여행-유럽에서 보낸 보름의 낮과 밤

    유럽에서 보낸 보름의 낮과 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는지 배낭 멘 여행길에선 낯모르는 이와 “안녕” 하고 입만 벙긋하는 인사만으로도 말꼬리가 길어진다. 어디서 왔는지 이름이 뭔지 아주 사소한 호감부터 “너 지금 행복하니?” 선문답 같은 대화에 이르기까지. 나는 꿈꾸듯 거닐며 수많은 이방인들과 옷깃 스치는 인연을 맺었다. 이를테면 옷깃스침 동행이랄까. 유럽 땅에서 보낸 보름의 낮과 밤, 나는 마냥 행복했다가 돌연 쓸쓸해지고 그지없이 황홀했다가 못내 아쉬워 어쩔 줄 모르는 순간순간을 맞이한다. about ‘동행’ 본 기사는 SJR EUROPE에서 론칭한 ‘동행’ 상품을 따라 여행한 기록이다. 3월27일부터 4월12일까지 프랑스 파리를 시작으로 이탈리아 로마에 이르기까지 총 6개국 18개 도시를 탐방했다. tip 1 동행 상품가 외에 옵션투어 비용, 식비, 자유 여행을 하면서 지출한 교통비와 각종 입장료 등 15박 17일의 현지에서 지출한 여행경비는 120만원 남짓. 기념품 구입 또는 개인 쇼핑 품목이 많을 경우에는 더 넉넉하게 준비하는 것이 좋다. tip 2 파리의 라스파일 시장과 몽파르나스 묘지, 뮌헨의 영국정원과 슈바빙, 프라하의 카프카 뮤지엄, 비엔나의 레오폴드 뮤지엄, 베네치아의 리도섬과 부라노섬 등은 기본 투어가 아닌 자유 시간을 활용해 여행했다. 기본 투어에 해당하는 파리, 프라하, 비엔나, 베네치아, 로마 등의 주요 도시 투어 역시 일부 구간 동행 후 자유로이 움직였고, 옵션 투어 가운데 바티칸 시국은 개별적으로 방문했다. France Mont Saint Michel, Paris 파리에서 지도 없이 걷기 기어코 파리. 파리는 독보적이다. 자정 가까이 늦은 밤에 도착한 파리였지만 여행에 앞서 만난 선배의 말이 실감이 됐다. “아마도 네 마음과 부단히 싸우는 여행이 될 거야.” 어디부터 갈까, 뭐부터 할까, 마음은 급한데 결정은 못하고, 그럼에도 파리에서는 어느 한 순간도 놓치고 싶지 않은 마음. 여행은 이튿날 아침부터 시작됐다. 파리 몽파르나스 타워 가까이에 위치한 호텔Campanile Maine Montparnasse 로비에서 15박 17일간의 동행들과 만났다. 며칠 전에 도착해 이미 파리에 푹 빠진 이도, 스페인이며 어디며 이제 막 국경을 넘어온 이도 있었다. 급할수록 돌아가라 했다. 동행을 태운 버스는 파리를 조금 아껴두고 4시간여를 달려 프랑스의 끄트머리 몽생미셸Mont Saint Michel에 닿았다. 성 미카엘 대천사의 신성한 산성, 몽생미셸은 노르망디Normandie 해변에 떠 있는 아주 작은 바위섬이자 중세로부터 오랜 역사를 이어온 수도원이다. 일대는 드넓은 갯벌이다. 바닷일을 하던 사람들은 이 바위섬에서 휴식을 취하곤 했다. 워낙에 조수간만의 차가 크고 밀물썰물의 간격이 짧아 많은 이들이 휩쓸려 버린 탓에 ‘몽통브mont tombe’, ‘무덤 산’이란 고약한 별칭으로 불렸다고 한다. 그러던 8세기 초반의 어느 날, 인근 아브랑쉬Avranches 지역 오베르St. Aubert 대주교의 꿈에 성 미카엘이 나타나 예배당을 세울 것을 명령했고, 그후 서서히 모습을 달리한다. 14세기 백년전쟁 때에는 전투 요새로, 18세기 대혁명 시절에는 감옥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오늘 내가 마주한 몽생미셸은 고되고 혼란스러운 노르망디의 역사가 쓸려가고 다시금 수많은 순례자와 여행자들이 밀려오는 축복의 성지다. 그 물살에 실려 동화 속 풍경처럼 아른거리는 몽생미셸 속으로 들어간다. 바위섬 꼭대기의 수도원으로 이어지는 골목길은 좁고 가파르지만 저마다의 특색을 살린 호텔과 기념품 가게를 눈으로 즐기고, 입으로는 짧은 물때를 맞추기 위해 빠르고 간편하게 요리하고 먹을 수 있는 이곳의 대표음식 오믈렛과 사과 파이, 발효주 시드르Cidre 등을 즐긴다. 그리고 나서야 비로소 들어선 수도원에서 갯벌 뒤로 어디서부터가 바닷물인지 모를 그저 눈부신 노르망디 해안을 실눈으로 조망한다. 드디어 정말, 파리의 아침이다. 알람이 울리기 전 진작에 일어나 부산을 떨었다. 조식 서비스를 마다하고 향한 곳은 ‘카페 드 플로르Cafe de Floer.’ 카페 홀을 등지고 바깥 거리 쪽 테라스 좌석에 앉아 에스프레소와 크루아상으로 파리지엔의 밥상을 받아든다. 그러나 난 이따금씩 꿈꿨다. 저마다의 삶을 일구고 있는 파리지엔들마저 도시의 풍경으로 소비되는 파리에서 보들레르가 말한 ‘플라뇌르flaneur’, 이 도시의 산보객이 되는 순간을. 개인의 삶과 분리하여 도시 자체를 관찰하고 감상하는 한가한 무리가 되는 것이야말로 파리를 가장 파리답게 소비하는 방법이 아닐까. 자리를 털고 일어났지만, 카페 드 플로르에서 몇 발짝 나가지 못하고 바로 옆 서점에서 발길을 멈춘다. 막 문을 여는 참이다. 출근하는 서점 직원들을 따라 들어가 바바리코트 차림의 백발 할아버지들과 책 구경을 한다. 파리를 담은 사진집 몇 권을 골랐다. 그리고 다시 감이 이끄는 대로 걷다 ‘라스파일 시장Marche Biologique Raspail’에 이른다. 화요일과 금요일이면 우리의 오일장처럼, 라스파일 도로변에 장이 선단다. 일요일에는 파리 근교에서 재배하는 유기농 식재료를 사고파는 유기농마켓이 열린다. 운이 좋다. 마침 장날이다. “봉쥬르.” 늘어선 가판 너머에서 들려오는 싱싱한 인사와 한 손에는 애견, 다른 한 손에는 장바구니를 든 동네 할머니와의 연속된 조우. 그리고 갖가지 방식으로 조리한 올리브를 맛보기로 건네는 손길까지 의도치 않게 살가운 일상을 공유한다. 예상치 못했던 진짜 파리지엔의 모습.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 몽파르나스 묘지Montparnasse Cemetery에는 안내지도를 들고 명망가들의 묘를 찾는 이들이 꽤 많다. 시장에서 산 빨간 딸기를 베어 먹으며 보들레르 묘 앞에 마주앉은 나는 잠시 시간여행자로 전환된다. 아, 파리에서의 3일은 턱없이 짧다. 나는 파리를 빠르게 읽기로 했다.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튈르리 정원과 샹젤리제 거리를 지나 개선문까지 쉬지 않고 걸었다. 그 긴긴 길 위엔 셀 수 있을까 싶을 만큼 많은 의자가 줄지어 있고 그 위로 걸음을 멈춘 사람들이 기대어 있었다. 그날 밤, 중세 파리 투어를 했던 동행 몇몇이 해질녘 몽마르트르에서의 낭만을 안주 삼아 조촐한 와인 파티를 열고 있었다. 아무런 이유 없이 가는 것만으로도 이유가 되는 장소가 있다. 지칠 대로 지쳤지만 그 이야기에 귀 기울인다. 다음날, 동행들로부터 귀동냥한 정보를 중얼거리며 뤽상부르 공원Le Jardin du Luxembourg에서 아침 산책을 했다. 오늘 역시 조식 서비스 대신에 공원의 작은 카페테리아에서 크레이프와 커피로 덜 깬 잠을 달랜다. 조깅하는 파리지엔과 이른 아침부터 가이드 뒤를 쫓는 단체여행객들을 번갈아 바라봤다. 까짓것 부지런해져 보지 뭐. 반의반, 그 일부만이라도 보겠다고 오르세 미술관Musee d’Orsay으로 갔다. 역시나 나의 관심사는 미술작품보단 ‘오르세’라는 공간과 그 속에서 움직이는 사람들이므로 두어 시간이면 될 거라는 건방진 생각이 있었다. 말도 안 된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오르세는 물론 파리를 소화해 낼 방법이 없다. 그냥 넋 놓기로 했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난 몽마르트르Montmartre 언덕 한가운데서 본의 아니게 낯선 구경꾼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몽마르트르의 예술가에게 초상을 맡기고 싶었지만 여유가 없었다. 붓 대신 가위를 들고 2~3분 만에 옆모습 실루엣을 종이에 오려 준다는 거리 예술가 앞에 앉았다. 대개 어린 아이들이 재미 삼아 하는 것 같았다. 관심의 대상이 나인지 예술가의 손놀림인지 모르겠더라. 카메라 플래시가 여기저기서 터진다. 민망함을 누르는 동안에 완성된 나의 실루엣. 하나도 안 닮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탐이 나는 파리에서 마지막은 바토 무슈Bateaux Mouches 위에서의 센강 유랑이다. 저마다의 파리를 즐긴 동행들이 하나둘 선착장으로 모여 이야기를 쏟아낸다. 듣는 이는 드물다. 알알이 불씨 오른 에펠탑이 가까워진다. 탄성이나 호들갑 없이 오히려 조용해진다. 파리의 밤이 강물 따라 흘러간다. ▶travie info 동행 프로그램은 여행하는 도시 가운데 주요 도시에서 지식 가이드를 제공한다. 프랑스에서는 몽생미셸과 옹플뢰르 1일 투어를 기본 일정에 포함하고 있고 파리에서는 2가지의 옵션 투어가 준비되어 있다. 옵션 투어는 물론 기본적으로 제공하는 지식 가이드 투어에도 강제사항은 없다. 개인의 여행 기호를 존중하여 얼마든 자유 여행이 가능하다. route 1. 루브르 박물관+중세 파리투어 샹젤리제 거리→개선문→루브르박물관→중식→시테섬→노트르담성당→최고재판소→콩시에르쥬리→시청사→퐁피두센터→사요궁전(에펠탑 조망) route 2. 오르세 미술관+파리 인상파 투어 오르세 미술관→로댕미술관 정원→몽마르트르 언덕(성심성당, 예술인의 광장, 피카소의 작업실, 물랭루즈(조망))→개선문(샹젤리제) Switzerland Interaken,Luzern,Mürren,Mürren 만년설 위로 반짝이던 하루 파리 유랑을 끝낸 동행들이 모두 버스에 올랐다. 꼬박 8~9시간 몸을 구겨 잠을 청해야 한다. 다들 오랜 시간의 쪽잠이 불편하지만 어느 정도 긴장이 풀려서인지 금세 잠에 빠진다. 조금 깊이 잠들었다 깨어났다. 도착할 시간이 다 되었는데 여전히 낯선 도로 위다. 예상치 못한 거센 눈발로 좀더 안전한 길을 찾아 돌아가고 있다고 했다. 다행이다. 이번 여정은 이 야간이동을 시작으로 독일, 오스트리아, 체코 프라하까지 여정의 절반 이상을 이 버스 한 대로 움직인다. 유럽 배낭인데 유레일이 아니고 버스라니 처음엔 갸웃했다. 다시 생각해 보니 도시간 이동에 소비되는 시간과 번거로움을 줄일 수 있어 나로선 반가운 일이다. 예상보다 한두 시간 늦었지만 무사히 인터라켄이다. 도시락으로 요기한 동행 대부분이 ‘Top of Europe’ 융프라우에 오를 채비를 한다. 꼭 1년 만에 다시 찾은 인터라켄에서 나는 과감히 융프라우를 포기했다. 이미 올랐다는 것이 큰 이유였지만 파리 파노라마가 가시기 전 유럽의 지붕 아래서 그 대자연의 경이로움을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지난 여행에서 아쉽게 놓쳤던 청정마을 뮈렌Murren 행 기차에 올랐다. 기착지 라우터브루넨Lauterbrunnen에서 케이블카로 갈아타기 전 마을의 작은 카페에 들러 따뜻한 홈메이드 스프 한 그릇을 먹었다. 얼마나 내렸는지 눈에 파묻힌 것만 같은 집들이 드문드문 보이는 뮈렌에서 단출한 워킹화에 의지하여 곧 미끄러질 듯 뒤뚱거리며 걷는다. 날쌔게 지나가는 스키어들은 물론 눈썰매 힘껏 지치는 어린 아이들도 탄탄한 기운을 뿜어낸다. 변덕스런 날씨로 여행자 애태우기 일쑤인 그날의 융프라우는 다행히 쾌청했다고 동행들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하산했다. 오늘은 다들 세상 모르고 잠이 들겠지. 하얀 솜사탕처럼 멀리 뭉게뭉게 겹쳐 있는 알프스 산맥의 품속에서 그만큼 달달한 꿈을 꾸면서. 이른 아침인데 하늘을 나는 사람들이 보인다. 알프스 높은 곳 어디에선가 발을 뗐을 패러글라이더들이 드문드문. 지천이 눈꽃, 상고대로 뒤덮인 산길을 지나 어느새 루체른Luzern이다. 호반 위로 얌전히 뻗은 카펠교Kapellbrucke를 바라보며 마지막으로 스위스의 고즈넉함을 맛본다. Germany Füssen, Munich 찰나지만 더없이 벅찬 순간 몇 시간 후 국경을 넘어 독일 퓌센Fussen에 도착했다. 오후 4시 전후인데 벌써 어둑하니 날씨가 궂다. 저 멀리 노이슈반슈타인 성Schloss Neuschwanstein이 보인다. 이곳이야말로 진정한 동화 속 모습이다. 디즈니랜드와 디즈니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상당수 장면의 배경이니 말이다. 성의 일부가 보수공사 중인 데다 성을 가장 잘 조망할 수 있다는 마리엔 다리는 기상악화로 출입이 통제된 상황이라 아랫마을에서 성의 초입까지 짧은 산책으로 만족하고 서둘러 뮌헨으로 방향을 틀었다. 늦은 밤에 도착한 뮌헨Munich은 몹시 차분했다. 물론 호프브로이하우스Hofbrauhaus는 달랐다. 동행들과 우르르 몰려간 호프브로이하우스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유명한 맥주홀답게 사람도, 맥주도, 열기도 거품이 일 듯 넘쳐났다. 뮌헨에선 이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동행들이 삼삼오오 빈자리를 찾아 들어갔다. 파리에서의 3박 4일이 짧다 투덜댄 것이 무안할 정도로 뮌헨에선 아주 잠시 머물렀다. 그래도 슈바빙Schwabing과 영국정원Englischer Garten만은 양보할 수 없었다. 감수성 예민하던 시기에 읽었던 책의 잔상 때문이었을 게다. 이젠 어떤 내용이었는지 줄거리조차 생각나지 않는데 책을 읽으며 머릿속으로 그렸던 슈바빙과 영국정원의 모습만은 또렷했다. 오스트리아로 출발하기 전, 자유로운 3시간이 주어졌다. 호텔 리셉션에서 지도 한 장과 함께 효율적인 동선을 추천받아 쏜살같이 튀어 나갔다. 곧 멎을 것처럼 숨이 찼음에도 자전거와 유모차가 차례로 엇갈려 지나가고 오리와 거위가 벤치를 돌며 길동무 해주는 영국정원에서 더 깊이 차가운 공기를 들이킨다. 그리곤 지그재그로 훑어 내려간 슈바빙. 짧아서 아쉬웠냐고 묻는다면 나는 단호하다. 전혀. 그곳에 내가 존재했다는 자체만으로도 벅차기만 한 걸. 찰나일지라도. 다시 올라탄 동행 버스, 차창에 스치는 풍경은 눈 깜빡일 때마다 영화 스틸 컷이 된다. 할슈타트로 가는 길이다. 휴대전화로 알림 메시지가 계속 들어온다. 네트워크 설정을 알리는 메시지. 버스가 조금만 방향을 바꾸어도 네트워크 설정이 달라진다. 독일 통신망을 잡았다가 오스트리아 통신망을 잡았다가. 이윽고 조용해졌다 싶었을 때 나는 세상에서 가장 평온한 그곳, 할슈타트 끄트머리에 있었다. Austria Hallstatt, Salzburg, Vienna 유럽의 작은 마을들을 가다 여전히 하얀빛을 발하는 눈이 마을을 살포시 덮고 있다. 그만치 차가운 공기가 뺨을 스친다. 춥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상쾌하면서 동시에 차분해지는 기분. 깜빡 졸다 깨나니 어느새 할슈타트Hallstatt 호수다. 할슈타트는 오스트리아의 수도 비엔나와 잘츠부르크 사이에 있다. 할슈타트를 포함하여 이 일대를 보통 잘츠카머구트Salzkammergut라고 부른다. 크고 작은 호수를 끼고 있는 이곳의 작은 마을들은 알프스 아래 투명한 빛을 머금고 있다. 모두 자석에 이끌리듯 호숫가로 내달린다. 공기 중엔 감탄만이 존재한다. 떠나오기 전,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부터 모차르트, 클림트에 이르기까지 많은 이들의 훈수가 쏟아졌다. 하지만 그보다 더 궁금했던 것은 그들이 태동한 마을, 도시, 공간 그 자체였다. 할슈타트에서는 점심을 먹을 수 있는 시간과 이후 잠깐의 산책이 허락됐다. 호수 가장자리 꽤 경사진 산자락을 타고 올라가는 할슈타트의 집들. 집 위에 집, 그 위에 다시 집이 층층이 피라미드를 이룬다. 그런 까닭에 골목길을 따라 걷다 보면 비탈 아래 집의 다락방 또는 굴뚝과 눈이 마주친다. 집 앞 정원, 뒤뜰은 물론이고 담장, 벽면, 창틀에 이르기까지 매일매일 부지런히 쓸고 닦고 손질하는 정성이 느껴진다. 골목길에 맞닿은 벽면에 벤치를 놓은 집들이 많다. 허락 없이 잠시 엉덩이를 붙인다. 등허리를 기대고 가만히 마을을 관찰한다. 굴뚝 위로 피어오르는 연기를 보자 허기가 밀려온다. 이미 때는 놓쳤고 아쉬운 대로 가까운 카페에 들어가 투박한 파운드케이크 한 조각과 핫초코 한 잔을 주문한다. 할슈타트의 강렬함을 뒤로하고 동행 버스는 잘츠부르크Salzburg에 도착했다. 재빠르게 캐리어를 호텔 방에 밀어두고 저녁나절 동행의 지식 가이드를 따라 나선다. <사운드 오브 뮤직>의 배경이었던 미라벨 정원Mirabell garten을 지나 모차르트의 생가가 있는 게트라이데 거리Getreidegasse까지 단숨에 잘츠부르크 구시가를 가로지른다. 슈니첼과 비엔나커피를 차례로 맛보며 오스트리아 스타일의 만찬을 가져볼까 잠시 고민. 하지만 생선요리를 판매하는 이곳 프랜차이즈 음식점에서 몇 가지 요리를 포장하고 기차역 안에 있는 대형마트에서 슈니첼과 케이크, 과일 그리고 와인까지 푸짐하게 장을 본다. 호텔 방 안에 차려낸 배낭여행자의 잘츠부르크식 만찬에 흡족해하며 여행 친구들과 꽤 긴 수다를 늘어놓는다. Czech 에곤 실레 그리고 카프카 할슈타트와 마찬가지로 마을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체코 체스키 크룸로프Cesky Krumlov는 좁다란 골목골목으로 이어진다. 이곳에 와서 알게 된 재미난 사실 하나. 모차르트 엄마 그리고 에곤 실레 엄마의 고향이 각각 할슈타트와 체스키 크룸로프라는 것. 처음엔 웃어넘겼는데 그게 아니다. 두 예술가와 그들의 작품을 이해하는데 굉장한 포인트. 특히나 엄마의 고향 체스키를 무척이나 사랑했던 에곤 실레Egon Schiele는 한동안 이곳에 머물며 작품 활동을 했다고 한다. 체스키를 표현한 작품도 상당수. 마을에 들어서면서부터 눈에 익은 에곤 실레의 초상과 작품으로 디자인한 전시 포스터들이 벽을 도배하고 있다. 마을에는 그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는 미술관The Egon Schiele Art Centrum도 있다. 굴라쉬 브런치를 즐긴 다음 그가 걸었을 법한 골목을 따라 크룸로프 성으로 향했다. 성의 가장 높은 곳까지 오르는 동안 자주 걸음을 멈췄다. 가파르기도 했지만 시야가 트이는 성벽길에 접어들자 체스키 크룸로프의 전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성벽 아래로 흐르는 강물은 그 너머의 마을 가장자리를 둥그스름하게 에두르고 그 안쪽에 중세의 시간을 간직한 집들이 소복히 모여 있다. 을씨년스러운 날씨임에도 마을엔 아늑한 기운이 유유히 흘렀다. 그리고 프라하Prague는 역시나 아름다웠다. 바츨라프 광장에서부터 화약탑, 천문시계, 카렐교까지 프라하 구시가를 동행 매니저의 꼼꼼한 가이드를 따라 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카렐교 위에서 기념사진을 찍느라 바쁜 연인들을 뒤로하고 다리 난간에 바싹 붙어 프라하 성을 바라본다. 카렐교 건너의 펍에서 벨벳 맥주 한 잔. 부드러운 벨벳 거품이 입술에 닿자 절로 콧노래가 나온다. 그러나 그 기쁨은 스쳐 지나갈 뿐이었나. 잔이 빌 때쯤 이제 돌아갈 날이 가까워지고 있음을 셈하게 된다. 달게 자고 일어난 프라하의 아침은 지난밤만큼 아름다웠다. 성비투스성당, 황금소로가 이웃하고 있는 프라하 성 일대를 함께 둘러보는 동행 가이드 투어 이후엔 홀로 프라하 시가지를 쏘다녔다. 가능하면 외면하고 싶었음에도 끝내 제 발로 찾아갔다, 카프카Franz Kafka를. 마냥 들뜨고 신나게 보내도 아쉬움 가득할 여행길에서 가슴 철렁할 것이 분명한데도 어느새 나는 카프카 뮤지엄Franz Kafka Museum 속을 헤매고 있었다. “이곳은 도시가 아닙니다. 꺼져 가는 꿈과 열정의 울퉁불퉁한 자갈밭으로 뒤덮인 시간이라는 태양의 갈라진 바닥을-잠수종 속에서처럼-우리는 걸어가는 것입니다. 이곳은 재미있는 곳이긴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사람을 숨 막히게 하는 곳입니다.” -프란츠 카프카, 구스타프 야노우호의 <카프카의 대화> 인용문 中 카프카가 남긴 기록을 보는 사이 낭만적이기만 했던 프라하는 한순간에 반전된다. 숨이 턱 막힌다. 달달한 체코 전통빵 뜨르들로Trdlo를 뜯어먹으며 어지러운 마음을 다스린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곧 프라하를 떠난다. 숨 가쁘게 도착한 다음 여정은 비엔나Vienna.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데 오스트리아에서 꼭 맛보아야 한다는 슈니첼과 비엔나커피를 에곤 실레와 맞바꾸고 나는 다시금 배고픈 여행자가 된다. 레오폴드 미술관Leopold Museum에서 만난 에곤 실레. 체스키 크룸로프의 풍경을 담은 작품 앞에 섰다. 에곤 실레의 체스키는 내 기억 속의 그곳보다 훨씬 어둡고 울적했지만 나로선 참 반가운 장면이다. 오스트리아에서 체코, 다시 오스트리아로. 공간이 다르고 에곤 실레와 나 사이의 시간 또한 다르지만 그 사이를 연결하는 풍경이 있고 그 감흥을 느낄 수 있는 이 여행의 순간에 감사한다. ITALY Vaticano,Rome,Veneziam,Sorrento,Sorrento,Sorrento 냉정해질 수 없는 이탈리아 여행 오늘 나는 생애 첫 야간열차를 경험한다. 비엔나에서 베네치아까지. 꼬박 12시간이 지나면 그토록 원했던 베네치아에 닿는다. 이번 동행길에서 가장 기대한 곳 중 하나가 베네치아다. 6개의 간이침대가 세 개씩 양 벽면을 의지해 층을 이룬 열차 칸은 비좁았다. 부피 큰 캐리어는 침대 아래 보관함에 들어가지 않아 양쪽 침대 사이에 나란히 줄지어 세웠다. 그 위로 다시 작은 짐들을 포갠다. 이제 열차 칸의 여섯 명은 발 디딜 공간 하나 없이 밤을 달린다. 열악했지만 싫지만은 않았다. 누군가 이야기했다. 이 모든 것이 야간열차에서만 느낄 수 있는 매력이라고. 처음으로 부모님이 아닌 친구와 단둘이 감행했던 여행이 떠올랐다. 설렘과 두려움이 뒤섞여 두근두근했던 그 느낌. 한참 줄을 서 겨우 고양이 세수를 했다. 슈니첼 한 덩이를 패티로 넣은 버거와 커피 한 병. 자정 가까이 돼서 맛보는 제대로 된 첫 끼니다. 꿀맛. 푸르렀다. 물이 곧 땅인 베네치아Venezia에서는 모든 것이 맑고 푸르렀다. 동행들과 베네치아 본섬 투어에 나섰다. 떠밀리듯 걸을 수밖에 없을 만큼 본섬엔 여행자들로 가득했다. 그 북적임이 베네치아를 더욱 활기 넘치게, 역동적으로 만들어 준다. 그 물결을 따라 조금 멀리 나가 보자. 배에 올랐다. 리도 섬Lido으로 가는 배다. 매년 가을, 베니스영화제가 열리는 아름다운 섬 리도의 4월은 따사로웠다. 흐드러진 벚꽃과 나뭇가지마다 터져 나온 초록 잎사귀들로 봄기운이 물씬했다. 한편 하늘과 바다가 만나는 세계의 끝은 낮고도 깊어 그 끝을 가늠할 수 없었다. 고요하고 평화롭게 반짝이는 해변에서 태양 빛을 그대로 흡수한다. 허리춤에도 못 미치는 어린 아들의 손을 잡고 바다 가까이 다가간 아빠, 양동이와 집게를 들고 바닷가의 쓰레기를 줍는 할아버지, 파도를 마주하고 앉아 무심한 얼굴로 사과를 베어 문 젊은 연인. 영화와도 같은 삶의 순간들이다. 리도에서 배를 두 번 갈아타고 도착한 부라노 섬Burano은 색색이 선명했다. 바다로 이어지는 좁은 수로에 데칼코마니 풍경을 찍어내는 부라노의 색채는 바다로 나간 이들이 짙은 안개 속에서도 무사히 돌아올 수 있도록 집집마다 알록달록 칠을 한 것이 오늘날로 이어진 것이라고 했다. 예쁘다는 말이 정말 잘 어울리는 곳. 거품이 절반이나 되는 폭신한 카푸치노 한 잔을 들고 본섬으로 돌아가는 배에 오른다. 안녕, 부라노. 안녕, 베네치아. 행복한 비명을 지른다. 베네치아의 축복 속에 헤엄치던 나는 어느새 피렌체Firenze 산타마리오 델 피오레 대성당Cattedrale di Santa Maria del Fiore, 한 마디로 두오모Duomo 꼭대기에 올라 있었다. 두말 할 것 없이 <냉정과 열정 사이>를 곱씹으면서. 찰나에도 시작과 끝은 있다. 조금씩 여행의 끝이 보인다. 동행의 마지막, 종착역은 로마 떼르미니. 악명 높은 떼르미니역 플랫폼에 내리는 순간부터 동행들 사이에 긴장감이 맴돈다. 마지막 여행지니 모두들 조금이라도 좋지 않은 추억을 만들고 싶지 않은 게지. 주변을 살피고 짐 가방 단속도 단단히 한다. 이제 로마Rome의 법을 따를 시간이다. 이튿날 아침, 로마의 여인 오드리 헵번이 아이스크림을 날름날름 맛있게 먹었던 영화 <로마의 휴일>의 촬영지인 스페인 광장Piazza di Spagna을 시작으로 트레비 분수, 베네치아 광장, 판테온, 나보나 광장까지 세상 모든 길이 통한다는 로마의 중심을 통과한다. 촌스럽게 무슨 동전 던지기를 하냐고 피식 비웃었던 나는 어둔 밤 조명 밝힌 트레비 분수Fontana di Trevi 앞에서 슬그머니 동전을 꺼내들었고, 칠칠치 못하게 거리에서 무슨 젤라또를 날름거리냐고 흉봤던 나는 하루에도 몇 번이고 맛있다는 젤라또 가게를 찾아다녔다. 그리고 마침내 로마 시가지에서 조금 떨어진, 테베레강 건너 트라스테베레Trastevere 마을에 이르러서야 느긋한 한때를 보낸다. 중세로부터 이어진, 로마에서 가장 오래된 서민지구라고 했다. 꼭 유명한 집이 아니라도 동네 어귀 작은 카페며 레스토랑 어디엘 들어가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커피와 피자를 맛볼 수 있는 마을이다. 웬만한 부침개보다 훨씬 큰 피자 한 판도 머릿수대로 주문하는 것을, 뜨거운 태양 아래 마시는 와인 또한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그들 틈에서 매끄러운 이탈리아 에스프레소를 훅 들이킨다. 산타 마리아 인 트라스테베레 성당과 노천카페가 테두리를 만들고 있는 광장으로 포근한 햇살이 쏟아진다. 조바심쟁이가 모처럼 너그러워진다. 버스 차창 밖으로 나폴리 항을 곁눈질한 끝에 도착한 폼페이Pompeii에서는 그 폐허 위로 핀 들꽃처럼 가슴 뛰는 생명력을, 아말피 코스트Amalfi Coast를 신나게 달려 도착한 쏘렌토Sorrento에서는 나른해서 더 달콤한 지중해 마을의 여유로움을 삼킨다. 꿈은 아니겠지. 마지막은 아니겠지. 바티칸에서 뜻밖에도 새로이 선출된 교황님의 알현식을 마주하기도 했으니 이번 여행, 정말 제대로다. 떼르미니역에서 레오나르도 익스프레스Leonardo Express 열차를 타고 도착한 로마 피우미치노공항. 비행기 탑승을 기다리며 노트북 전원을 켠다. 사진 폴더 안에 새로이 추가된 이미지 파일만 3,000장. 힘들었던 기억은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순간순간이 애틋하게만 기억되는 동행. 나는 지금 또다시, 더없이, 여행을 안달하고 있다. 에디터 트래비 글·사진 Travie writer 서진영 취재협조 SJR EUROPE www.sjreurope.com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travie info 삽자루의 유럽 ‘동행’ 15박 16일 2013년 SJR EUROPE에서 제안하는 새로운 스타일의 배낭여행. 파리에서 시작하여 로마에서 끝나는 15박 16일의 여행 프로그램으로 항공권은 개인의 기호와 예산에 맞게 선택, 자연스럽게 동행 일정 전후로 자신만의 여행 일정을 추가할 수 있다. 일정 내내 전문 지식 가이드 출신의 인솔자가 동행하여 주요 도시에서는 무료 가이드 투어를 제공하는 한편 여행자 스스로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 수 있도록 다양한 여행 정보와 노하우는 물론 충분한 자유 일정을 지원한다. 함께하는 낭만과 혼자만의 자유로움을 동시에 누릴 수 있다는 것이 동행의 가장 큰 매력. 몽생미셸과 옹플뢰르, 퓌센, 할슈타트, 체스키 등 자유 여행에서는 가기 힘든 유럽의 소도시를 경유하는 것도 동행 상품의 차별화 포인트. 더욱 다양한 경험을 원하는 여행자를 위해 남부지중해 투어, 바티칸 투어 등 다양한 옵션 투어도 마련해 두었다. 유럽 여행이 처음인 여행자 또는 안전과 도시간 이동에 부담을 느끼는 여행자에게 아주 적합한 상품이다.
  • 기생충과 숙주는 서로의 필요에 의해 공존한다

    기생충과 숙주는 서로의 필요에 의해 공존한다

    기생충이란 무엇일까. 어디까지가 기생충인가. 아주 먼 옛날 한 생물이 색다른 삶의 방식을 선택했다. 남의 몸속에 들어가 기생을 시작한 것이다. 기생은 배고픔과 추위, 천적의 위협과 자연재해를 피할 수 있는 혁신적인 생존 방식이었다. 하지만 기생생물이 번성하자 숙주가 되는 생물은 자신의 몸을 지키기 위해 반격을 시작한다. 세상은 기생과 비기생 생물로 나뉘어 눈에 보이지 않는 ‘전쟁’을 시작했다. 기생충과 숙주 간의 끝없는 싸움, 이것을 우리는 ‘진화의 역사’라고 부른다. EBS는 22~25일 밤 9시 50분 다큐프라임 ‘기생’(寄生)를 방영한다. 제작진은 이 다큐를 “과학다큐와 자연다큐 그리고 휴먼다큐의 중간쯤에 있는 비전형적인 프로그램”이라고 소개했다. 기생충이라는 극히 작은 생물체를 다루기 위해선 과학적인 접근이 필요하고, 우리가 몰랐던 지구 생태계의 비밀과 역사를 뒤지는 눈이 요구되며 나아가 사람의 이야기를 다뤄야 한다는 이야기다. 이 프로그램에는 수많은 기생충과 숙주가 등장한다. 역사적 사실과 현재의 이야기가 뒤섞여 나오지만 우리의 결론은 하나다. 기생충과 숙주는 결국 서로를 필요로 하는 진화의 동반자라는 사실이다. 1부 ‘보이지 않는 손’에선 자기보다 수천만 배 거대한 숙주를 조종하는 기생충의 놀라운 모습을 소개한다. 숙주의 몸에서 평생을 사는 기생충도 있지만 숙주를 옮겨 가며 삶을 이어가는 기생충도 많다. 다음 숙주를 찾지 못할 때 기생충의 삶은 끝난다. 그래서 이들은 숙주의 몸과 정신을 조종하는 온갖 기술을 개발했다. 예컨대 기생충 연가시는 사마귀나 귀뚜라미 같은 육상 곤충의 뱃속에서 성장하다 때가 되면 숙주 곤충을 조종해 물가로 가게 만든다. 연가시에 감염된 곤충은 수영을 하지 못하지만 물로 뛰어들고 죽음을 맞는다. 뱃속에 연가시가 가득한 이들은 물속에서 자신의 알을 낳는 대신 기생충 연가시를 낳고 죽어 간다. 2부 ‘끝없는 대결’에선 대부분의 생물이 갖고 있는 ‘성’과 ‘면역’ 시스템이 기생충과의 경쟁 속에서 숙주가 개발해 낸 최고의 전략이란 사실을 공개한다. 얼룩말의 얼룩이 체체파리의 시선을 교란시키기 위한 방법이었다는 일부 학자의 주장도 전한다. 3부 ‘대결에서 공존으로’와 4부 ‘기생, 그리고 사람들’은 돼지편충을 이용한 크론병 치료, 진드기를 퇴치하는 콜레마니 기생벌 등 기생충과 더불어 살아가는 인류의 삶을 다룬다.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 내 체질에 맞는 술은?

    내 체질에 맞는 술은?

    하이트진로 임직원들이 주류상식 사전 ‘알코올딕셔너리-취하는 책’을 펴내 화제다. 하이트진로에서 기업문화 업무를 담당하는 교육문화팀 임직원들(김영태 전무, 이장원 부장, 강유미 주임, 김가림 주임)은 지난 1년간 업무 중 틈틈이 관련 자료를 모아 ‘술 좀 마셔본 사람들’이란 또 다른 이름을 붙여 이 책을 공동 저술했다. 책에는 술과 관련된 흥미로운 정보와 지식이 가득하다. 체질에 맞는 술이나 술을 홀수로 마시는 이유 등 사소한 궁금증을 풀어 주는 것은 물론 술자리 게임, 개성 있는 소맥 레시피(제조법), 애주가를 위한 건강관리법 등에 대한 주류회사 직원들만의 노하우가 담겨 있다. 또한 ‘100년 전쟁은 보르도 와인 때문에 발생했다?’거나 ‘고흐와 김홍도는 그림을 그릴 때 항상 술에 취해 있었다’는 등 술과 얽힌 역사와 숨은 이야기도 들려준다. 박상숙 기자 alex@seoul.co.kr
  • [정전협정 60주년] (8) 한반도 분단을 보는 외국의 시각 (하) 중감위 스웨덴 대표 안데르스 그렌스타드 소장

    [정전협정 60주년] (8) 한반도 분단을 보는 외국의 시각 (하) 중감위 스웨덴 대표 안데르스 그렌스타드 소장

    한반도 정전체제의 ‘감시자’인 중립국감독위원회(이하 중감위)는 지난 60년 동안 부침을 겪었다. 1953년 정전협정 체결 당시 유엔군 측의 스웨덴·스위스, 공산군 측의 체코슬로바키아·폴란드에서 각 100명씩 400명이 한반도에 상주했지만, 현재 스웨덴·스위스 대표단 5명씩만 남았을 뿐이다. 하지만 유명무실한 조직으로 생각하면 오산이다. 연평도 포격도발 등 정전협정 위반 사건을 조사하고, 한·미 연합훈련의 정전체제 위협 여부를 감시하는 것도 이들의 몫이다. 최근 한미연합사령부에서 스웨덴대표단 대표 안데르스 그렌스타드(55) 소장을 만났다. 스웨덴 정부가 해군참모총장 출신인 그를 대표로 보낸 건 연평해전과 천안함 사태 등 서해에서 정전협정 위반이 빈번한 걸 감안했기 때문이다. 그렌스타드 소장은 지난 27개월 동안 김정은 체제의 등장과 맞물려 긴장이 한껏 고조된 한반도를 가까이에서 지켜봤다. 그는 “천안함 침몰과 연평도 포격 이후 한반도는 계속 긴장 국면”이라면서 “특히 지난 2월 3차 핵실험 이후 북한의 ‘레토릭’(정치적 수사)에 익숙하지 않은 서방에서는 핵전쟁 위협을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그때 전쟁이 일어나는 거 아니냐는 전화도 많이 받았다”고 말했다. 이어 “이런 긴장이 자주 발생하면 여러 사람이 개입하게 되고 그런 와중에 무기 체계를 잘못 사용하게 돼 비극적인 상황을 맞을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중감위의 역할과 관련해 그는 ‘치우치지 않은, 공정한’이란 단어를 거듭 강조하면서 “우리는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은 옵서버”라고 밝혔다. 그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정전체제일지라도 한반도 안정과 평화라는 측면에서 남북 모두에 도움이 됐다”면서도 “또 다른 60년을 기다리지 않고 평화협정으로 대체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정전협정의 평화협정 대체 조건으로 남북 간, 북한과 6자회담 당사국 사이의 신뢰를 강조했다. 그는 “남한은 지금껏 북한을 변화시키려고 햇볕정책도 해 봤고, 이전 정부에선 강경노선도 취해 봤지만 지금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있다”면서 “북한이 1950년대처럼 군사적인 위협을 통해 어떤 것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우선 깨달아야 한다. 대화를 하는 것이 앞으로 나아가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강조했다. 임일영 기자 argus@seoul.co.kr [용어 클릭] ■중립국감독위원회 1953년 정전협정 체결 이후 스웨덴·스위스(유엔군), 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공산군) 대표단 1명씩 4명이 소조를 이뤄 남북한 항구·공항에 파견, 외부로부터 증원되는 군사력과 무기 등의 교체·반입을 감시했다. 하지만 공산군 측 중립국 감독소조 요원의 간첩 행위가 이어지고, 유엔사 측 요원의 북한 내 활동이 방해를 받으면서 1956년 감독소조 기능은 잠정 중지됐다. 소련 해체 이후 북한은 1993년 체코에 이어 1995년 폴란드 대표단마저 쫓아냈다. 중감위는 매주 화요일 회의 결과를 판문점 북측 우편함에 넣지만, 북한은 1995년 이후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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